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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7)

천음의 마법은 공정의 세계에 있어서 상당히 메이저 한 마법 중 하나다.

얼핏 보면 업화의 마법처럼 트롤링에 특화된 마법 같으나, 유저들은 그보다는 천음의 마법이 일으키는 몰이 효과에 주목했다.

천음의 마법을 사용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몹 몰이가 가능하다는 소리.

일명 몰이 알바라 불리는 천음의 마법사들이 등장한 계기 역시도 그 때문이었다.

유저들에게 일정 대가를 받고서 마수들을 한곳에 몰거나 유인해 주는 것이다.

물론 간간이 천음의 마법을 트롤링 용도로 사용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극히 일부일뿐더러 있더라도 금방 진압됐다.

애초에 마법의 대가부터가 다른 존재를 불태워야 하는 업화의 마법과는 달리, 천음의 마법은 오롯이 계약자 본인이 그 대가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거고....'

나는 베른하르크의 동쪽에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대충 세 곳 정도인가.'

베른하르크에서 뮐헨 곡창지대를 살필 수 있는 고층 건물 중에서 남은 건물은 이제 셋.

만약 저 중에서 천음의 마법사가 없다면, 이 사태를 되돌릴 수 있는 골든 타임은 놓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내가 천음의 마법사라면 성과를 완벽하게 확인한 후에 몸을 빼려고 할 터.'

그렇기에 바로 저곳 중 하나에 천음의 마법사가 있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콰앙!

건물 내부는 비어 있었다.

묘하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안에서 마치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던 듯한 묘한 생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끼익, 끼이익....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의 소리가 마치 경보처럼 내 존재를 이 건물 안에 알렸다.

은밀하게 침입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빠르게 위층으로 내달렸다.

끽, 끽긱!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나무 계단을 올라서자, 꼭대기 층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있다.'

나는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섰고, 그곳에서 전신을 로브로 감싸고 있는 한 인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척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놈이 바로 천음의 마법사라는 걸.

"발각됐나."

나지막이 들려온 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어떤 파동이 나를 덮쳤다.

천음의 마법이었다.

삐이이이이이────

귀를 울리는 이명.

순간적으로 물의 보옥과 낙스의 유산을 동시에 이용해서 귀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고막이 완전히 터졌을 것이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울려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중심을 잡으면서 손을 뻗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이윽고 내 손에서 B686 더블 배럴 샷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웬만하면 베른하르크에서 총기류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차피 지금 베른하르크는 한창 마수 군대의 등장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울 테니 총성 정도는 울려도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거나 처먹어."

총구를 겨누고.

타아앙!!!──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쏟아진 70mm 12게이지 산탄은 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후둑!

후두둑─

산탄의 알갱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 나간 것이다.

'저건....'

내가 저 마법을 몰라볼 리가 만무했다.

앞서 말했듯이 천음의 마법은 꽤 메이저 한 마법이었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 또한 상당히 알려져 있었으니까.

천음의 마법, 전음적장벽(?音的?壁).

'저 정도의 마법까지 구사한다라.... 귀찮은 상대가 되겠어.'

가능하다면 쉽게 제압해서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지만, 늘 그랬듯이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괴상한 마법을 쓰는군."

이름 모를 천음의 마법사는 아무래도 내가 들고 있는 총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직접 맞아 보면 더 흥미로울걸."

"사양하지. 그런 위협적인 속도의 물체를 정면에서 맞으면 인간의 피륙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겨질 터."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샷건의 위력까지 분석을 마친 건가.

아무래도 내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운 상대가 될 듯했다.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내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도 이미 알고 있겠지. 그러니 이만 자리를 피하는 게 그대에게도 좋은 일일 텐데?"

"글쎄. 별로 그럴 생각은 안 드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내 시선은 온통 상대를 분석하기에 바빴다.

'현재 상대의 수준은 미지수.'

'그러나 전음적장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최소 마정급 이상의 마법사라고 판단하는 게 옳겠지.'

'그렇다면 현재의 내가 마정급 이상의 마법사에게 대적할 수 있나?'

업화의 마법사 때 내가 무려 마화의 마법사를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소지하고 있던 샐러맨더의 송곳니의 존재가 컸다.

샐러맨더의 송곳니는 화염 속성을 품고 있는 물건이고, 그렇기에 나는 그걸 이용해서 업화의 악마와의 계약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멸망 유예자의 힘 또한 큰 영향을 끼쳤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천음과 관련된 그 어떤 매개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준비에 있어서 운이 없었다는 소리.

상황이 그런 만큼 업화의 마법사 때처럼 천음의 악마를 불러내서 새로운 계약을 맺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정당한 계약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나로서는 피하고 싶은 일인 셈.

'아무튼...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른 마법사들과의 전투는 이게 귀찮다니까.'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고,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일단, 정면에서 두드린다.'

나는 다시금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다시금 일어난 음파의 장벽이 70mm 12게이지 산탄을 밀어냈다.

"물러서지 않는 건가. 의미 없는 살생은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겠지."

"더 이상 마법의 대가를 늘리는 게 부담되는 게 아니고?"

"길게 말할 필요 없겠군."

짝!

박수와 함께 일어난 거대한 기파가 나를 향해서 덮쳐 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의 기파가 주변의 모든 걸 파괴하며 쇄도한다.

저런 것에 정면으로 맞았다가는 인간의 육체 따위는 한순간에 고기 파편으로 변할 게 분명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선전수적순패(旋轉水的盾牌)'를 전개합니다.]

회전하는 물의 방패가 내 앞을 막아섰으나, 애석하게도 이것만으로는 저 기파를 막아 내기에 부족하다.

소리는 물속에서도 전해진다.

그렇기에 나는 선전수적순패에 낙스의 유산에서 끌어 올린 전격을 더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섬전(閃電)'을 전개합니다.]

파직, 파지직──!

곧이어서 섬전을 머금은 물의 방패가 기파와 맞부딪치며 사방에 충격파와 물줄기가 비산했다.

콰아아앙!!!──

물의 보옥과 낙스의 유산의 권능을 모두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는지, 마치 야구 방망이에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이 몸 전체가 쩌릿쩌릿했다.

'...역시 까다로워.'

천음의 마법은 마수를 불러오거나 물리칠 때도 유용하지만, 대인전에서도 무척이나 효율적인 마법이다.

소리보다 빠른 건 그리 많지 않았고, 막는 것 역시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에 대한 증거로, 마법을 막아 냈다고 생각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귀에서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 흐르는 감각.

피였다.

"쯧."

이처럼 천음의 마법은 막는 게 막는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정도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했으니, 상당한 대가를 치렀을 터.'

천음의 마법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만큼이나 상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싸움을 소모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걸 버티다니... 생각 이상으로 재주가 많군. 훌륭해. 어떤가, 이만 돌아가는 게. 그대에 대한 경의로 그냥 보내 주지."

"글쎄? 내 귀에는 왜 살려 달라는 소리로 들릴까?"

"저런, 안타깝게도 청각을 잃은 모양이군. 그런데 이번에는 목숨까지 잃게 생겼군."

당당히 승리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괴할 정도로 천음의 마법사 주위가 잠잠하다.

조금 전처럼 큰 마법이 아닌, 다른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

마법사와의 싸움은 수 싸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쐐애애애액!!───

공기를 찢는 듯한 파공음이 울려 퍼지기 직전,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서 피한 덕분에 나는 그것이 내 심장을 관통하는 걸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완전히 피해 내지 못해서, 그것이 스쳐 간 다리 쪽에 작지 않은 상처가 생겼다.

'...무형섬(无形纖).'

무음(無音)은 아니지만, 무형(無形)의 비수.

천음의 마법사가 대인전에서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마법 중 하나였다.

만약 이 마법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쯤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마법은, 지금의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반응할 수 없는 마법이었으니까.

"...호오. 그걸?"

천음의 마법사가 감탄하거나 말거나, 나는 곧장 움직여야 함을 느꼈다.

무형섬은 나로서는 대응의 여지가 없는 위험한 마법이었고, 내가 두 번째 공격 역시도 피해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무형섬까지 꺼냈다는 건 곧 끝을 내겠다는 생각이다. 먼저 공격해야 해.'

이제는 나로서도 가진 패를 아낄 수만은 없게 되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R-74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음? 새로운 마법인가. 하지만 이미 늦었어."

내가 방아쇠를 당길 틈도 없이 내 본능이 위험을 호소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무형의 비수들이 오고 있다.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즉사할 만한 급소들만 피한다.'

천음의 마법사가 대체 몇 개의 무형섬을 날렸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부디 그것이 내 전신을 찢어발길 정도가 아니길 빌 뿐이었다.

촥!

촤아아악!!!

내가 몸을 비틀며 피한 덕분에 무형섬은 내 팔과 배 그리고 다리를 일부 베고 지나가는 것에 그쳤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치명상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적어도 즉사할 정도의 피해는 아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철컥─

AKR-74 돌격 소총의 총구를 조준한 나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두!!!

쏟아진 7.62×39mm 탄들이 위협적인 기세로 날아갔으나, 애석하게도 곧 일어난 음파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지이이잉!!!──

전음적장벽이었다.

"소용이 없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러나 놈은 모르고 있다.

"이거, 연발이거든."

"음?"

전음적장벽이 걷힌 틈.

나는 그 미세한 틈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철컥.

방아쇠가 재차 당겨지고.

투두두두두!!!

그와 함께 시간차로 날아든 7.62×39mm 탄 세례가 단번에 천음의 마법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제아무리 마정급 이상의 마법사라 할지라도, 7.62×39mm 탄 세례를 전신에 맞고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꺽, 꺼허억...!"

순간적으로 방어라도 한 건지 몰라도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게 용했으나, 어차피 싸움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끝이다, 마법사."

마법사와의 싸움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천음의 마법사의 미간에 총구를 겨누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 순간.

두근─

왜인지 모르게 느껴진 기묘한 감각과 함께 천음의 마법사의 신체가 서서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계약의 대가인가. 조금 전에 무슨 짓을 한 거지?"

"해야 할 일은 마쳤다."

천음의 마법사가 피를 토해 내며 웃었다.

"제국의 시대는, 곧 끝나리라."

천음의 마법사의 시선 끝에 닿은 창문 밖에서 어둠이 몰려든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저 멀리에서 보이는 뮐헨 곡창지대를 가득 메운 어둠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천음의 마법사가 자기 자신조차도 대가로 바쳐서 사용한 마법이 무엇인지.

놈은 마지막까지 천음의 마법을 사용해서, 안 그래도 절망적이었던 베른하르크의 운명을 완전히 끝장냈다.

"해는 결국 저문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천음의 마법사의 신체가 완전히 소멸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마법사들의 최후가 으레 그렇듯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로.

61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8)

도대체 얼마 만일까.

오랜 세월을 넘어서 마침내 콘란과 마주하게 된 레일라의 시선이 마치 뱀처럼 콘란을 훑고 지나갔다.

"징벌 교단에 끌려가서 고초라도 치렀나 했더니... 꽤 얼굴이 좋네? 어디서 좋은 거라도 먹었나 봐?"

가시가 가득 돋친 말이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레일라의 말투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안도감이 느껴졌다.

"많은 일이 있었지."

"흥... 그래? 그래서, 죽은 줄 알았던 전남편이 여기에 다시 얼굴을 들이민 이유가 뭘까? 몹시 궁금해지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레일라."

레일라가 코웃음 쳤다.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내가 당신을 도울 이유가 뭔데?"

"베른하르크가 위험하다."

"그건 나도 보면 알아. 그래서, 같이 도시를 구하기라도 하자고? 의뢰비는 두둑이 준비했고?"

"그건...."

"없겠지, 당연히. 그러니까 당신이 안 되는 거야. 거래를 하러 왔으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준비해야지, 맨손으로 오면 어떻게 해?"

레일라의 입가가 비틀렸다.

"아, 혹시라도 옛정에 기대서 우리가 도울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우린 베른하르크를 떠날 생각이거든."

"...베른하르크를 버린다고?"

"어.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어?"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건 아니겠지?"

"진심이야."

콘란이 눈을 크게 뜨고는 레일라를 응시했다.

"너...! 베른하르크에 무엇이 있는지 잊은 거냐?"

"잊을 리가 있겠어?"

레일라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 깊게 잠겼다.

"잊을 수가 없지, 절대로."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레일라는 다시금 시선을 콘란에게로 옮겼다.

과거에 마냥 잠겨 있기에는, 지금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베른하르크를 버린다고 말하는 거냐?"

"다른 방법이 있겠어? 얌전히 이곳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네가 어떻게 그런...!"

콘란이 이를 악물었다.

"...너, 변했군."

"아아, 미련한 내 전남편아, 어쩜 당신은 그렇게 한결같아? 지금 베른하르크의 의원들도 전부 베른하르크를 포기했어. 아마 지금쯤이면 모두 도망치고 있을걸? 그런데 우리가 누구 좋으라고 목숨을 걸고 이 도시를 지키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서지. 이곳은... 우리의 집이잖아."

"우리? 하하, 다른 건 몰라도 농담은 좀 는 것 같네. 재밌었어."

그 순간.

쿵!

쿠우웅!!!──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점점 더 심해졌다.

베른하르크의 운명이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네. 할 말 전부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줄래? 슬슬 우리도 움직여야 할 것 같거든. 당신이 바라는 그 옛정을 봐서 배신자의 처분은 참아 줄 테니 이만 가 봐."

콘란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곳에 와서는 안 됐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뇌까릴 뿐.

"...난 베른하르크를 지킬 거다."

"마음대로 해. 제멋대로 죽든지 말든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콘란이 뒤돌아서 용병 길드를 나가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하뮬이 말했다.

"그냥 보내 줘도 되는 겁니까? 콘란은 배신자입니다."

"가서 죽겠다잖아. 굳이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어? 그리고, 배신을 했다는 증거도 아직 없잖아."

"하지만...."

"하뮬, 거기까지."

레일라가 단호하게 말하자, 하뮬 역시도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예."

"준비는 전부 끝났겠지?"

"아, 예.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짐을 간추렸습니다."

"잘했어. 그러면 가자, 늦기 전에 베른하르크를 빠져나가야 하니."

"알겠습니다. 다들 움직여!"

하뮬이 길드원들과 함께 먼저 길드를 빠져나가는 동안, 레일라의 시선은 콘란이 있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미련하긴."

하염없이, 계속해서.

* * *

쿵!

쿠웅!!

본래였다면 더없이 잠잠했어야 할 땅이 거칠게 떨린다.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 평화로웠던 대지에 방문한 무수한 불청객들이 대지에 크나큰 상흔을 남기고, 모든 것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 사태를 일으킨 천음의 마법사를 찾고 있었던 알리시아 또한 잠시 넋을 놓고서 그 광경을 보았다.

"...."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베른하르크는, 이제 틀렸다는 걸.

설사 천음의 마법사를 찾는다고 한들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알리시아는 부정적이었다.

마법은 기적 같은 게 아니다.

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며, 이 정도 사태를 일으킨 마법이라면 분명히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이 사태를 되돌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과연 그 대가는 누가 치러야 할까.

알리시아는 감히 그에 대한 결과를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타아아아앙!!───

어디선가 들려온 굉음.

비록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성과 비명에 묻혀서 금세 사라졌으나, 알리시아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벨 블랙우드.'

그가 사용한 마법의 소리가 분명했다.

'마법사를 찾은 게 분명해.'

알리시아의 시선이 곧이어서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가야 해.'

알리시아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벨 블랙우드가 있을 곳을 향해서.

* * *

['천음의 마법사 에더런'을 처치하였습니다!]

[천음의 악마가 당신을 주시할 것입니다.]

[마의 기운이 당신의 주변을 맴돕니다.]

[마기가 상승합니다. (+1)]

[2 → 3]

아프다.

아파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당장은 그럴 힘이 없어서 일단 누워서 끙끙 앓았다.

"으...."

가까스로 천음의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순탄한 승리는 아니었다.

무형섬을 피하는 과정에서 전신에 치명상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처를 몇 개 얻었고, 그 탓에 지금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요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의 보옥'의 힘이 사용자에 스며듭니다.]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치유합니다.]

만약 물의 보옥이 지닌 권능이 아니었더라면 장기 손상 및 과다 출혈로 쓸쓸히 죽어 가고 있었겠지.

'...위험했어.'

일전에 상대했던 마화의 마법사 정도는 아니지만, 본디 천음의 마법사 자체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인 데다가 이번에는 나 혼자였다.

마지막 한 끗 승부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면, 악마의 제물이 되는 건 나였을 거라는 소리다.

"끄윽...."

잠깐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어딜 잘못 베인 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회복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끼이익....

아래층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만약 적이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대항을 할 여력이 없었으나, 굳이 전투를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익었으니까.

"여기 있었군."

"대장님."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이었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소리를 듣고 왔네. 자네가 사용하는 마법의 굉음이 들리더군."

"그렇군요."

이 소란 통이라면 총성 정도는 가볍게 묻힐 거라고 여겼건만, 아무래도 에드릭 정도의 감각을 지닌 자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던 듯했다.

뭐, 애초에 에드릭이 이미 총성을 알고 있기 때문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나는 에드릭에게 내가 겪은 상황을 짧게 요약해서 전달했다.

"천음의 마법사와 마주했습니다. 전투가 있었고, 천음의 마법사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보시다시피 이 꼴입니다."

"그런가.... 천음의 마법사는 이미 죽었다는 거군."

"예."

천음의 마법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곧 이 사태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 역시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에드릭의 시선이 잠시 창밖으로 향했다.

"바깥 상황은 알고 있나?"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만, 많이 심각합니까?"

"아무래도 서둘러서 베른하르크를 떠나야 할 것 같네, 이 이상 지체하다가는 떠날 기회조차 얻지 못할 듯하니."

이미 한차례 개럿 메이슨 의원 앞에서 베른하르크를 바꿀 것을 선언했던 에드릭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현재 상황은 좋지 않은 듯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나?"

"천음의 마법사가 죽기 전,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치러서 마지막 마법을 펼쳤습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진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에드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가.... 그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적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국을 적대하는 마법사가 자신을 희생할 정도의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는 건가.... 여러모로 좋은 일은 아니군. 어쩌면 이게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겠어."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에드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만 움직이지. 걸을 수 있겠나?"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어쩔 수 없나."

에드릭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뭐 하려고요?"

"별것 아니네."

그렇게 말한 에드릭이 나를 번쩍 들더니, 그대로 어깨에 둘러멨다.

"커헉."

단지 그뿐이면 좋았을 텐데, 상처 난 배가 눌려서 피가 배어 나오고,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다.

"끄으윽... 차, 차라리 직접 걷겠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말인가? 얌전히 있게."

"죽을 것, 죽을 것 같은데요...."

"하하, 엄살도 참. 사람은 이 정도로는 죽지 않네."

아니, 진짜로 죽을 것 같다고, 이 망할 양반아.

"서두르지."

"끄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베른하르크를 빠져나갈 걸세. 베른하르크는 이미 틀렸어. 내부 정치 상황은 이제 아무래도 좋은 수준이지."

"...그렇습니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나도 더 이상 에드릭의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인류의 영역이 줄어드는 걸 막아서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서 이곳에서 싸워 줄 의리까지는 없었다.

'애초에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업혀 있는 것조차도 버거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마수 군대에 맞섰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방법은... 없는 겁니까?"

"아쉽게도."

나 또한 에드릭의 말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끝내는 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정말로, 이걸로 충분한 건가?

의문 속에서 건물을 나서자, 이윽고 바깥의 풍경이 드러났다.

-마, 마수다! 마수가 나타났다!

-도망쳐! 빨리!

-꺄아아악!

비명, 괴성, 굉음.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한때 평화로운 도시였던 베른하르크를 살아 있는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베른하르크는 겨울성처럼 마수에 대한 공격에 완전히 대비가 된 곳이 아니었고, 그에 대한 증거로 몇몇 마수들이 성벽을 넘어서 도시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캬오오오오!

-끄루루─

-크르르... 컹! 컹!

베른하르크의 병사들 역시도 악을 쓰면서 어떻게든 마수들을 막아 내려 했으나, 절대적인 수의 열세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황이 점차 절망에 빠져든다.

개럿 메이슨 의원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 의회를 연다 한들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베른하르크의 운명은 이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상황이 좋지 않군. 서두르지."

62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9)

운이 좋았던 걸까.

머지않아서 우리는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던 알리시아와 합류할 수 있었다.

"자네로군. 소리를 듣고 왔나?"

에드릭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알리시아는 곧장 에드릭의 어깨에 들려 있는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다행이네요."

"안 괜찮다고."

아무래도 제4 특무대의 기본 요건에는 사람 말을 안 듣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면 나머지만 찾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겠군. 알비노와 콘란이 어디 있을지 짐작 가는 곳이 있나?"

"글쎄요.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길이 엇갈리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에드릭이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자네 둘은 먼저 서쪽 성문에 가 있게. 내가 알비노와 콘란을 찾아서 데리고 합류하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응? 아아."

에드릭 또한 저 멀리에서 오고 있는 알비노와 콘란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합류였다.

"알아서들 잘 오는군. 이것도 훈련의 성과라고 봐야겠지. 훌륭하군."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 타당하게 생각한다면 총성을 듣고서 이곳으로 향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릭은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고... 왔군."

그 말마따나 알비노와 콘란이 일행에 합류했다.

마침내 제4 특무대원들이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이게 전부 어떻게 된 겁니까?"

알비노의 물음에 에드릭이 답했다.

"천음의 마법사를 잡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이 사태를 되돌리지는 못했네. 유감스럽게도 베른하르크를 포기해야 해."

"그렇습니까? 그러면 서두르시죠."

본래도 베른하르크에 별 관심이 없었던 알비노는 순순히 에드릭의 의견에 따랐다.

아니, 애초에 알비노에게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줄 의리 따위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베른하르크를 포기한다니?"

하지만 콘란은 아니었다.

콘란에게 있어서 베른하르크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알비노처럼 순순히 포기할 기색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됐네."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자네도 보면 알지 않나?"

정론에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콘란 역시도 에드릭의 말에 크게 반박하지 못했다.

베른하르크가 끝났다는 건, 굳이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이 확연히 드러난 사실이었으니.

"너."

콘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정확히는 찾을 수 있을 거라 했었지.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변수? 하! 변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에드릭이 끼어들었다.

"그만하게. 벨은 최선을 다했네. 저 모습을 보면 모르겠나?"

"그러면 어쩌라는 겁니까!"

"내가 답을 일러 두지 않았던가? 베른하르크를 포기하면 되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콘란의 시선이 타오르듯이 제4 특무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너희 모두 같은 생각인 거냐?"

"이봐 덩치, 네가 베른하르크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알겠지만, 상황 파악을 해라. 우리가 나선다고 해서 뭐가 변할 것 같아? 개죽음일 뿐이야."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알비노와 알리시아가 그렇게 말하자, 콘란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궜다.

"...그렇다면 저라도 남겠습니다."

"불허하네. 소중한 대원이 사지로 가는 걸 볼 수 없네."

"차라리 죽이십쇼. 절 억지로 데려가지는 못할 겁니다."

콘란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 에드릭조차도 그러한 콘란의 반응을 의외로 여길 정도로.

"진심인가?"

"예."

"지휘관 앞에서 당당히 탈영을 하겠다라.... 아무리 사람 좋은 나라고 해도 군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겠군."

스르릉─

오늘따라 더욱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쇳소리와 함께 에드릭의 검이 뽑혀 나왔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순순히 따라올 생각은 없나?"

"대장, 당신은 비겁자요. 약속을 해 놓고서 상황이 불리해지니 내뺀다고? 그 잘난 제국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나?!"

앞서 말했듯이, 정론에는 힘이 있다.

지금 콘란의 말 역시도 그러했다.

"비난은 감내하겠네. 하지만 이럴 때 쓰라린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도 지휘관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네. 언젠가 불가피하게 자네들을 사지로 몰아야 할 때가 있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세."

"흥, 말은 잘난 듯이 떠드는군. 그래 봤자 당신이 그 잘난 제국과 황실 그리고 겨울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건 변하지 않아."

명예를 들먹인 게 꽤 효과가 있었던 걸까.

지금껏 그 어떤 변화도 없었던 에드릭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호오, 제법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는가?"

"어차피 죽일 것 아니요? 죽이려면 죽이쇼, 어차피 베른하르크와 함께 죽을 생각이었으니."

당장이라도 콘란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던 기세였건만, 콘란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의 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는 듯하군."

"대장과는 다르게 말이요."

"하하, 그렇게 빈정거리니 내가 할 말이 없군."

"나는 준비 다 됐으니, 죽이려면 죽이쇼."

콘란은 진심으로 보였다.

에드릭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였다.

-부우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들려온 우렁찬 나팔 소리.

그와 함께 도시 안의 도로에서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건...."

개럿 메이슨 의원이 의회를 소집했다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베른하르크 측에서 군사를 일으킨 모양.

그 덕분에 절망에 빠져 있었던 베른하르크에 아주 조금이나마 희망이 생겼다.

-각자 위치로!

-베른하르크를 위하여!

선두에 선 지휘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군사들이 성벽을 향해서 진형을 갖춰서 향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베른하르크에는 아직 저 마수들의 군세에 맞서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저들도 맞설 생각인가 보군."

에드릭의 시선이 무겁게 잠겼다.

이미 끝이 보이는 일에 달려드는 이들이 그 시선에 어떻게 비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게 에드릭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에드릭의 시선이 콘란을 향했다.

"가게."

"...보내 주는 겁니까?"

"약속한 대로 힘을 보태 주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지. 이 불명예는 내가 감내하겠네."

"그걸로 충분합니다."

콘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에드릭에게 인사하고는, 특무대원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흥, 누가 할 소릴."

알비노의 비아냥에 가벼운 웃음을 지은 콘란이 덧붙였다.

"그래도... 너희는 살아라."

콘란의 마지막 말에 비아냥거렸던 알비노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콘란이 저 표정을 보았다면 꽤 볼만했겠지만, 이미 콘란은 뒤돌아선 뒤였다.

대체 콘란은 무엇 때문에 사지임이 분명한 저곳으로 향하는가.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안다.

'이대로 베른하르크를 포기해서는 안 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금 베른하르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종의 세력이 베른하르크를 시작으로 그 너머에 있는 제국을 노리고 있다.'

'지금 시점에 제국의 전력이 약화된다면, 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어.'

'아직 베른하르크의 여력이 남아 있는 이 시점에서 베른하르크를 그냥 포기하는 건 더없는 실책이다.'

무수한 생각 끝에 내려지는 결론은 늘 같았다.

'베른하르크를 지킨다.'

다행히도 개럿 메이슨 의원이 늦지 않게 움직인 덕분에 아직 베른하르크에도 희망이 남아 있었다.

남은 건, 그 미약하기 짝이 없는 희망을 제대로 붙잡는 것뿐.

"이제 나 혼자 걷지."

"괜찮아요?"

"어."

나는 알리시아의 부축에서 벗어난 뒤에 에드릭에게 시선을 옮겼다.

"대장님."

"할 말이 있나?"

멸망 유예자의 정신은 나에게 있어서 늘 냉정함을 유지하게 한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내리는 판단 역시도 순간적인 감정이나 어떤 오판에 의한 것이 아닌, 철저한 이성에 의한 것이다.

"저도 가겠습니다."

"음?"

"어이, 진심이야?"

"그게 무슨...."

내 선언에 일행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에드릭조차도 눈을 크게 뜰 정도로.

"진심인가? 자네는 거동도 불편하지 않나?"

"이제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적극적인 전투를 벌이기에는 여전히 상처가 작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가야 할 때였다.

"허어...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군. 이유가 뭔가?"

"생각해 보니, 아직 개럿 메이슨 의원한테 제대로 된 대가를 못 받았더군요."

"...음?"

"그 고생을 했는데, 적어도 한몫 잡을 정도는 받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비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에드릭 또한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윽고 언제나와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건 또 자네답군. 정말로 괜찮겠나?"

"죽을 자리였다면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참...."

에드릭이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어느덧 알리시아가 내 곁에 섰다.

"저도 갈게요."

"자네는 또 왜?"

"벨을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얼씨구, 덩치가 갈 때는 꿈쩍도 안 하더니 이제 와서?"

알비노가 이죽거렸으나, 알리시아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자네들은 날 곤란하게만 만드는군."

에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가겠네."

"대장님도요?"

"부하들이 전부 사지로 가겠다는데, 나 혼자 빠져서야 모양이 영 빠지지 않겠는가?"

이에 옆에 있던 알비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간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강요는 하지 않겠네. 가지 않겠다면 자네는 혼자 겨울성으로 복귀하게."

알비노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에드릭을 필두로 특무대 전원이 움직인다면 모를까, 지금 베른하르크의 입구는 홀로 빠져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 되어 있었다.

알비노 홀로 서쪽 성문을 넘으려 했다가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제기랄. 갑니다, 가요."

"잘 생각했네."

제4 특무대가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해야 할 일을 정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곧장 앞서가던 콘란의 곁으로 합류했다.

"여."

나를 본 콘란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너... 여기는 왜 온 거냐?"

"생각해 보니까 이번에 꽤 고생을 했는데 베른하르크가 망하면 그에 대한 보상을 못 받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왔지."

"허... 진심이냐?"

"내가 언제 농담하는 것 봤어? 베른하르크를 거덜 낼 생각으로 왔으니까 한몫 단단히 챙겨 보자고."

콘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정상이 아니군."

"아, 그리고 참고로 나 혼자 온 건 아니야. 그 정상이 아닌 놈들이 또 있거든."

"뭐?"

이윽고 에드릭을 포함한 제4 특무대원들이 콘란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릭을 본 콘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니 살리니 하더니, 그새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거요?"

"글쎄. 이 나이쯤 되니, 가끔은 기적이라는 걸 품어 보고 싶어지는군. 단지 그뿐일세."

"퍽이나 낭만적인 양반이십니다."

"늘 그랬다네."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곧이어서 콘란의 시선이 알비노에게 향했다.

"너도 왔군. 이렇게 죽을 자리를 찾을 놈은 아니지 않았나?"

"...흥. 알 것 없다."

"아무튼, 와 줘서 고맙다. 만약 이 자리에서 살아서 나간다면 크게 한턱내지."

"그 약속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물론이지. 그리고 너도 와 줘서 고맙다, 알리시아."

알리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벨을 혼자 보낼 수 없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고맙다."

그사이, 어느덧 슬쩍 내 곁에 다가온 에드릭이 은밀하게 말했다.

"자, 벨. 여기까지 왔으니 묻겠네. 무슨 방법이 있는 건가? 아니, 당연히 있겠지?"

"글쎄요."

"그것참 가슴이 차갑게 식는 대답이군. 조금 더 그럴듯한 대답은 없었나?"

"아쉽게도 이게 최선입니다만."

"그것참... 매우 유감이군."

그 말마따나 나에게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시도해 볼 만한 게 한 가지 남아 있었을 뿐.

'어디까지나 도박이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은 하지.'

그래, 어쩌면 이 상황 자체를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그런 도박 말이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한 나는 곧 하나의 게시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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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잡이 : 베른하르크 쪽에서 카인 닮은 사람 본 것 같은데... 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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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10)

미끼는 뿌렸다.

남은 건, 부디 이 도박이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것뿐.

'뭐... 그때까지 베른하르크가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지만.'

-크루루루!

-캬오오──!

-물러서지 마라! 마수들이 성벽을 넘게 둬서는 안 된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마수들이 성벽을 넘어온다.

이제 막 도착한 베른하르크 군사들이 필사적으로 성벽을 막아서고 있기는 하나, 미처 막지 못한 곳에서 마수들이 성벽을 넘어오는 것이었다.

애초에 베른하르크의 성벽 자체가 수성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기에 밀려드는 마수들을 막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할 자식들이!"

콘란이 흉성을 토해 내며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퍽!

퍼어억!

그럴 때마다 마수들의 피와 살점이 사방에 흩뿌려졌으나, 전체적인 전황을 본다면 그야말로 미약한 손짓에 불과했다.

'지금 상황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려면... 역시 그것뿐인가.'

지금처럼 도시에서 마수들을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다.

원천을 차단해야 한다는 소리다.

"성벽을 지켜야 합니다."

"흠... 그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지만, 우리끼리 될지 모르겠군."

"그래도 해야 합니다."

"끙, 알았네."

에드릭 또한 성벽을 수성하는 게 가장 나은 판단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바로 가지."

"예."

에드릭의 말과 함께 제4 특무대가 베른하르크의 성벽을 지키기 위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캬오오오오오──!!]

성벽에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마수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놈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어딜."

선두에 선 에드릭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우리를 막아선 마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굉장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저 양반이 아직도 뭘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그에 대한 가장 큰 근거는 아무래도 에드릭이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뭐... 지금은 그보다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지만.'

나는 측면에서 달려드는 마수들 향해 업화의 송곳니를 휘둘렀다.

화르륵!

타오르는 업화가 순식간에 마수의 목을 베어 가르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캬악! 캬아악!]

곧이어서 일어난 불길이 주변에 번지면서 다른 마수들이 휩쓸렸다.

"너, 평소에 사용하던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 거냐? 아낄 만한 상황이 아닐 텐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역시... 그렇게 된 거냐."

나를 바라보는 알비노의 표정에서 어딘가 묘한 착각이 느껴졌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으랴아!"

콘란 또한 이에 질세라 힘차게 도끼를 휘두르면서 달려오는 마수들을 무참히 때리고, 부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제대로 갖춰진 진형이 가지는 파괴력이 무엇인지 입증한 우리는 달려오는 모든 마수를 닥치는 대로 베고, 부수면서 나아갔다.

"조금만 더! 곧 성벽일세!"

"으랴라아아아──!"

"다, 죽어."

에드릭, 콘란, 알비노, 알리시아.

각자의 무기가 마수들을 찌르고 베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베른하르크의 성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뒈질 뻔했네."

"엄살 부리기는."

꽤 무리를 해서 강행 돌파를 했기 때문인지, 에드릭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자잘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보다 집중해라."

"아."

애석하게도 상처를 돌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지금도 마수들이 성벽을 아득바득 오르려 하고 있었으니까.

"한숨들 돌리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

에드릭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성벽 너머에 있는 동쪽 대지.

그곳에서 몰려들고 있는 무수한 검은 점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미친...."

한때 뮐헨 곡창지대라 불렸던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인류의 땅이 아니게 되었다.

마수, 마수 그리고 마수.

마치 라크나 대륙에 있는 모든 마수가 모여든 것이 아닌가 싶은 풍경과 함께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군세가 베른하르크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미친...."

조금 전까지 흉성을 토해 내던 콘란조차도 그 광경에는 잠시 넋을 잃고서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괜히 따라왔군."

알비노가 탄식하자, 어느덧 그 옆에 선 에드릭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지금이라도 돌아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네."

"이미 늦은 걸 알 텐데요."

"그러면 뭐, 별수 없겠군, 목숨을 걸고서 발버둥 칠 수밖에."

"제기랄...."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후회할 시간조차도 사치였다.

마수들이 몰려든다.

뮐헨 곡창지대를 가득 메울 정도로 압도적인 군세가, 베른하르크를 짓밟기 위해서 오고 있다.

"온다."

마치 구더기처럼 성벽 아래에서 드글드글 끓고 있는 마수들이 아득바득 베른하르크의 성벽을 오른다.

"막아!"

저대로 둘 수는 없었다.

성벽에 올라온 마수를 상대하는 것보다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마수를 떨어뜨리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었다.

수성의 이점이라 해야 할까.

다행히 이 부분에 있어서 제4 특무대는 스폐셜리스트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성에서 매일같이 하는 일이 바로 성벽 위에서 마수들을 상대로 농성을 벌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딜 기어 올라와!"

"젠장... 잘못 걸려도 된통 잘못 걸렸군.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콘란의 도끼가 마수의 발을 찍고, 알비노의 검이 마수의 눈을 마구잡이로 찔렀다.

"마수, 죽어."

알리시아 또한 가만히 있지 않고서 성벽 위를 마치 춤추듯이 날아다니며 마수들이 성벽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천음의 마법사와 전투할 때와는 달리, 무수한 눈과 귀가 있는 이곳에서 총기류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내가 지닌 아이템 중에서 광역 공격에 특화된 콤보를 발동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발천적랑화(潑?的浪花)'를 전개합니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물보라.

거기에 더해서 낙스의 유산이 거친 스파크를 튀었다.

츳, 츠츠츳──!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비뢰(?雷)'를 전개합니다.]

파지지지직!!!──

흩날린 물보라를 타고서 전격이 마치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크롸라라라!]

[끄레에엑!]

전격에 노출된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몸을 부르르 떨어 댔으나, 워낙 범위 자체가 광범위한 공격이었기에 그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지금!"

단지 그뿐인 외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들은 특무대원들이 일제히 성벽 위에 있던 마수들을 향해서 무기를 내질렀다.

푹!

푸푸푹!!

그에 마수들이 힘없이 성벽 아래로 추락하며 다른 마수들을 휩쓸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지상에는 여전히 마수들이 가득차 있었고, 우리가 채 막지 못한 다른 빈 곳들에서는 이미 마수들이 들이닥쳐서 베른하르크를 누비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는 끝이 없어."

끊임없이 마수를 성벽 밖으로 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수들이 죽지 않고 금세 다시 일어나서 성벽을 기어오른다.

밑에 있는 다른 마수들이 완충제가 된 것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베른하르크의 성벽은 겨울성만큼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욱, 후욱...!"

원래도 한계에 다다른 육체였던 탓에, 마수들과 몇 번의 접전만 치렀을 뿐인데도 내 몸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히 상처 입고 한계에 다다른 육체일 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점차 활기가 돋는 기분이 드는 건.

스스스....

그때, 나는 볼 수 있었다.

어느새 내 주위를 맴돌던 마기가 서서히 내 육체에 깃들어서 찢어지고 상처 난 부분에 자리를 잡는 것을.

'...마기에 이런 힘이 있었나?'

마치 어떤 기생생물처럼 마기는 내 찢어진 부위를 대신해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본래였다면 너덜너덜해진 탓에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할 손목이 똑바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마기의 또 다른 효능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지금 상황을 타개해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전력은 열세였고, 베른하르크는 함락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가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한창 전투에 임하던 에드릭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들과 함께해서 영광이었네."

"무슨 유언 같은 말을 하십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군."

에드릭이 멋쩍게 웃었다.

제4 특무대원 중 한계가 아닌 이가 없었다.

뭐, 에드릭 같은 경우는 여전히 밑천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듯했으나, 제아무리 에드릭에게 숨겨 둔 무언가 있다고 해도 이 상황을 되돌리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조심해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알리시아가 마수를 베어 넘겼다.

"괜찮아요?"

"어."

"하지만 상처가...."

"너나 걱정해라. 상처가 깊다."

그 말마따나, 알리시아의 상태는 나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여러 권능으로 인해서 회복이 되고 있는 나와는 달리, 알리시아는 순전히 전투의 여파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더는, 잃고 싶지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네?"

"네 걱정이나 하라는 소리다."

알리시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표정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기에 나는 다시금 눈앞에서 달려드는 마수를 향해서 업화의 송곳니를 휘둘렀다.

화르륵!!

"쿨럭! 쿨럭!"

"덩치, 죽지 마라!"

"죽기는.... 이런 데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재수 없는 소리 마."

"흥, 입은 잘 살아 있군."

모두가 한계에 다다른 그 순간.

츠츳, 츠츠츳...!

낙스의 유산과 소린의 반지에서 거친 스파크가 튄다.

내가 권능을 발동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부에 의한 간섭이었다.

'이건....'

이것이 무엇의 전조인지 내가 모를 리가 만무했다.

쿠릉!

쿠르르르릉!!!

어디선가 울려 퍼진 우렁찬 천둥과 함께 사방에서 자욱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현상.

뇌운(雷雲)이 오고 있다.

"...음."

"뭐야? 하늘이 왜 저래?"

"저건...."

한창 무아지경으로 마수들과 싸우고 있었던 제4 특무대원들조차도 지금 하늘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떡 벌렸다.

그만큼 지금 일어난 현상은 명백히 이상했고, 이질적이었다.

'드디어 왔나.'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공정의 세계 시절 카인에게는 무척이나 적이 많았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플레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여러 유저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적이 많다고 해서 어떤 위협으로 직결이 되는 건 아니다.

과연 카인에게 직접 복수를 말할 수 있는 세력과 유저가 몇이나 될까?

단언컨대, 공정의 세계 전체를 뒤져 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즉, 그중 하나라도 내 미끼를 문다면 지금 상황은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소리다.

바로 지금처럼.

쿠르르르릉!!!───

뇌운에서 내리친 벼락이 단번에 지상에 있던 수십 마리의 마수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무슨...."

알비노조차도 입을 떡 벌린 채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쾅!

콰르르릉──!!!

벼락이 연신 내리친다.

그와 함께 베른하르크를 집어삼킬 것 같던 마수들이 힘없이 잿더미로 바스러져 갔다.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광경이었으나, 나는 저게 기적 따위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이이이이인─────!!!]

뇌운 사이에서 울려 퍼진 쩌렁쩌렁한 외침이 전장 전체를 강타했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으음."

제4 특무대원들 모두가 경악에 빠져 있는 가운데, 뇌운 사이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거리가 먼 탓에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저 녀석이었군.'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이는 나 또한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놈이 무어라 불리는지 역시도.

'뇌제(雷帝).'

감히 카인을 적이라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법사 중 하나가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

64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11)

뇌운(雷雲)이 번뜩일 때마다 마치 이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섬광이 사방에 비산하며 벼락이 연신 내리친다.

쾅! 콰쾅!!

콰르르릉──!

갑작스레 하늘에서 도래한 재앙에 마수들은 그럴듯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지금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그런 존재였다.

그저 가벼운 손짓 한번.

그뿐인 손짓에 한때 모두의 절망이라 여겨졌던 마수들이 흔적도 없이 잿더미로 변했다.

"무슨...."

"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과 사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모두가 그저 넋을 잃고서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대장! 저자는 누구요? 설마 제국에서 보낸 마법사요?"

"...아니, 제국에 저 정도로 뇌명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네. 애초에 뇌명의 마법사 자체가 극히 드물기도 하고."

"그렇다면 대체 뭔데요?"

"난들 알겠나?"

콘란은 물론 에드릭조차도 얼이 빠진 채로 연신 내리치는 벼락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의 마법사가 존재할 수 있는 거였나."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마법에 대해서 꽤 알고 있는 알비노는 뇌제의 등장에 전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뭐... 당연한 건가.'

뇌제(雷帝).

그 이름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하물며 뇌제는 공정의 세계에서도 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강자 중 한 명.

그런 존재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절망에 빠져 있었던 베른하르크의 운명 역시도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벨, 자네는 무언가 알고 있나?"

"글쎄요. 제가 저런 자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흠... 그런 것치고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군."

이제 상황은 완전히 우리의 손을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베른하르크에 있는 그 누구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이제 베른하르크의 운명은 하늘에서 강림한 뇌명의 지배자에게 달린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카인──! 어디 있느냐!!!]

뇌운 속에서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진다.

놈이 누구를 찾고 있는지는 명백했지만, 당연히 순순히 나가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쾅!

콰콰쾅!!!

뇌운에서 내려치는 벼락이 뮐헨 곡창지대를 마구잡이로 후려치며, 그 밑에 있는 존재들에게 영면을 선사했다.

저 정도의 마법을 이토록 난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제가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지금 베른하르크의 하늘에 있는 뇌운 덕분이었다.

뇌제는 전격 속성과 관련된 무수한 아이템과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서 뇌운을 일으켜 뇌명의 마법에 대한 대가를 비약적으로 축소한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샐러맨더의 송곳니를 업화의 송곳니로 만든 방식과 유사하다 할 수 있었다.

[안 나오는 건가.... 그렇다면 싫어도 나오게 해 주지.]

쿠릉, 쿠르르릉───!!!

뇌운이 거칠게 들썩인다.

이제까지의 평범한 벼락이 아닌, 큰 게 온다는 강력한 전조.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혹시 모르니 피해 있지."

에드릭은 무언가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느꼈는지 대피를 명령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제4 특무대원들 또한 군말 없이 그 명령에 따랐다.

모두가 성벽 아래에 몸을 숨긴 채로 숨을 죽인 그 순간.

[사라져라.]

나지막이 울려 퍼진 선언과 함께.

쿠구구구구구구───!!!

하늘이 열렸다.

'이건... 위험해.'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전부 귀 막아!"

"무슨─"

"끅!"

삐이이이이이────

시야 전체를 뒤덮은 백광과 함께 귀에서 이명이 들려온다.

흡사 세상에 종말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 정도의 풍경.

이 정도 위력을 지닌 마법이라면, 내가 알기에 하나뿐이다.

'고유 마법이군.'

오직 뇌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뇌제만을 위한 마법.

무수한 대가를 쌓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조건을 충족시키고서야 간신히 발동할 수 있는 그 마법을 가리켜, 고유 마법 혹은 시그니처라고 부른다.

이 정도 위력을 지닌 뇌제의 고유 마법이라면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마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법을 가장 많이 맞아 본 사람이 바로 나일 테니까.

'파천뢰(破天雷).'

천지를 부수는 벼락이 동쪽 대지를 휩쓸고 지나가며, 이윽고 사방에 번졌던 빛무리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으...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길 보게."

에드릭의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뮐헨 곡창지대로 향했다.

"저게... 가능한 건가?"

"...허어."

"무슨...."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의 표정이 일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른하르크의 운명을 결정지으려던 존재들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잿더미가 되어 화했으니까.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적지 않은 마수들이 전장에 남아 있기는 했으나, 이 이상 마수들에게 싸울 의지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생존 의지라는 생물체의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 조금 전까지 마수들을 지배했던 살의를 넘어섰을 테니 말이다.

-우, 우우우우!!!

-캭! 캬아악!

-끄루루루!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공포에 질린 마수들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이 만들어 낸 풍경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광경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던 '자유도시 베른하르크'를 수호하였습니다!]

[베른하르크 시민들의 우호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살았... 다?

-우리... 산 거야? 정말로?

처음에는 의심이었던 목소리들이 하나둘씩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거대한 환희로 바뀌었다.

-마, 마수들이 돌아간다! 마수들이 돌아간다고!

-와, 와아아아!!!

-살았어! 살았다고!

조금 전까지 성벽 위에서 목숨을 걸고서 마수들과 싸웠던 베른하르크의 병사들이 지금 일어난 기적에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뇌제에 대한 찬양은 덤이었다.

-저길 봐! 뇌명의 마법사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오, 오오오!

-마법사! 마법사!

제4 특무대원들 또한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두 번은 못 해 먹을 짓이군."

"운이 좋았어. 저 정도의 마법사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뭐, 운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알비노의 시선이 슬쩍 나를 흘겼다.

"왠지 네놈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

"그럴 리가."

"흥,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이게 그 마법사 특유의 직관이라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눈치 하나는 귀신같다.

"다들 무사한가?"

에드릭의 물음에 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일단 살아는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콘란이 무엇을 말하는지야 뻔했다.

뇌제.

갑작스레 뇌운과 함께 베른하르크의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그자의 변덕에 따라서 지금 일어난 기적은 얼마든지 절망으로 다시 바뀔 수 있었다.

"글쎄.... 하지만 저 정도의 마법사가 굳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을 죽일 이유는 없을 것 같군. 만약 그런 일이 필요했다면 진즉 하지 않았겠나?"

"그것도 그렇군요."

에드릭의 말대로였다.

뇌제가 이 자리에 온 건 어디까지나 내가 익명 게시판에 작성한 어그로 글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물론 자기가 낚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베른하르크에 화풀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 뇌제의 성격상 그러지는 않겠지.'

거기에 더해서 아무리 뇌운으로 대가를 비약적으로 축소했다고는 하나, 강력한 마법에는 강력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

단순히 화풀이 용도로 쓸데없이 치러도 되지 않을 대가를 치르는 건 마법사들의 성격상 맞지 않는다. 그건 그 자체로 낭비였으니.

'남은 건 저놈이 순순히 돌아갈지 말지에 대한 건데....'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뇌제가 어떤 변덕을 부린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나 또한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 순간.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라.... 역시 이 몸을 보고서 도망을 친 게로구나! 꼴이 우습구나, 카인! 하하하!]

뇌운 속에서 쩌렁쩌렁한 광소가 울려 퍼지자, 이를 듣고 있던 제4 특무대원들의 얼굴이 벙쪘다.

아마 베른하르크의 다른 병사들의 표정 역시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뇌제와 카인의 관계를 모르는 제삼의 인물이 듣기에, 저런 소리는 딱 미친놈이 하기 좋은 소리였으니까.

"...저거, 뭐라는 거냐?"

"글쎄."

"저 정도의 마법사가 광증에 사로잡힌 건가.... 아니, 오히려 그것이 대가였을지도 모르겠군."

왜일까.

분명히 떠드는 건 저놈인데, 부끄러움은 내 몫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그래, 이 몸이 두려울 법도 하지. 그렇게 계속 얌전히 숨어 있거라! 카인, 너에게는 그런 쥐새끼 같은 모습이 더 어울리니! 하하하!]

네가 속았다는 생각까지는 못 하는 거냐?

[아아, 슬프구나, 카인! 너 정도 되는 사내가 언제 그렇게 비굴하고 추해진 건지!]

...그만해, 제발.

[하하하하!!!!]

광소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뇌명의 마법사를 찬양하던 베른하르크 병사들의 환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끊긴 것 또한 저것 때문일 것이다.

지금 뇌제는 누가 봐도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으니까.

[쯧, 더 이상 있을 필요는 없겠어.]

그렇게 뇌제는 몇 분 정도를 더 홀로 떠들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뇌운과 함께 사라졌다.

말 그대로 폭풍처럼 나타났다가 폭풍처럼 사라진 셈이었다.

"대체 뭐였는지...."

"저 정도의 마법사조차도 마법의 대가로 광증을 얻을 수도 있다는 건가.... 역시 만만하게 볼 게 아니군."

"역시 마법사는 다 미친놈이네요."

마지막 말에 콘란과 알비노가 끔뻑거리는 눈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뭐요."

"아니, 뭐... 아무것도."

"역시 사람은 환경이 만드는군."

그제야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에드릭이 입을 열었다.

"...흠흠, 어쨌든 다들 고생했네. 위험한 싸움이었는데 잘 이겨 내 주었어."

"이제 복귀하는 겁니까?"

"그래야겠지만, 그 전에 베른하르크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네."

에드릭이 말하는 마무리가 무엇인지야 뻔했다.

일찍이 에드릭은 개럿 메이슨 의원과 거래를 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베른하르크의 썩은 부분을 완전히 도려낼 생각일 테니까.

"그러면 이만 자네들은 숙소로 돌아가 있게. 나는 할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합류하지."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의 역할은 지금까지만으로도 차고 넘치네.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이네."

에드릭은 어떤 결연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평소답지 않게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제4 특무대의 태도는 여전했지만.

"그렇수? 그러면 우린 갑니다. 어서 가자고. 지금 상처가 쑤셔서 죽을 것 같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덩치."

"같이 가요."

"...."

에드릭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가볍게 웃었다.

"나중에 보지. 다들... 정말로 고생했네. 정말로."

"예. 대장도 조심하십쇼."

콘란 역시도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것으로 저 둘 사이에 쌓였던 앙금 아닌 앙금이 풀렸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이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적어도 살아남았으니까.

"벨, 그 팔...."

알리시아가 내 팔을 보면서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다. 오히려 네가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저는 괜찮아요."

그러는 것치고는 다리를 절뚝이고 전신에 성한 곳 한 곳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콘란, 알비노, 알리시아 모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안 그래도 혼란한 베른하르크에서 외부인인 우리가 따로 치료를 받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늘 체계화된 의료 인력이 대기하고 있는 겨울성과는 달리, 베른하르크는 평화로웠던 도시였던 데다가 지금은 엄청난 사상자로 인해서 의료 인력이 포화된 상태일 테니 말이다.

이대로 이들을 내버려 두면 작지 않은 후유증을 겪을 터.

아무리 얄미운 놈들도 있다지만, 결국 이들은 나와 함께 겨울성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들이다.

괜히 부상을 입거나 전투 불능이 된다면 그 손해는 나에게로 올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이곳은 겨울성과 달리 상대적으로 매우 따뜻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즉, 이곳에서 업화의 송곳니가 지닌 열기까지 이용한다면, 지금껏 냉기에 의해서 억압되어 있었던 물의 보옥의 진정한 권능 중 하나를 발동할 수 있을 터.

'그러면....'

물의 보옥에서 이제껏 감춰져 있던 권능이 발하기 시작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회복적수역(恢?的水域)'을 전개합니다.]

물의 보옥의 권능이 발동하며 나를 중심으로 작은 물안개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65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12)

사방으로 번진 물안개가 주변에 있는 이들의 상처로 스며든다.

물의 보옥이 발한 회복의 권역이 발휘된 것이었다.

"음? 왠지 기분이...."

"몸이... 조금 편해졌군. 아니, 상처도 조금씩 낫고 있나."

"이건...."

일전에 물의 보옥의 권능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알리시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고, 자연스레 콘란과 알비노의 시선 또한 나에게로 향했다.

"네 짓인가?"

"맞다."

"과연... 이런 것도 가능했나. 지금까지의 비정상적인 육체 능력 향상이 조금 납득이 되는군. 여전히 괴물 같은 놈이야."

알비노는 홀로 납득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콘란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굉장하군!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좀 쓰지 그랬어? 아주 좋은데."

"자주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겨울성에서는 특히 더 그렇고."

"그래? 아쉽군."

콘란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던 때, 알리시아가 왠지 모를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은 거예요? 혹시 어떤 부담이 되는 건...."

"그런 건 아니니까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마라."

"정말요?"

"그래."

"그래도...."

"괜찮다니까."

이쯤 되면 과보호가 아닐까 싶을 정도.

'그러고 보니 업화의 마법사 토벌 이후로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나눴었지.'

지금까지는 미뤄 왔지만, 돌아가는 길에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알리시아가 나에게 지닌,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건 그렇고...."

그때, 콘란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다들 베른하르크를 위해 나서 줘서 고맙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다들 용케도 나서 줬어."

"흥, 어울리지도 않게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평소대로 하지 그래?"

언제나와 같은 알비노의 이죽거림에 콘란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고맙다."

설마하니 콘란이 저렇게 순순히 말할 줄은 몰랐는지, 알비노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 알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알리시아가 한마디 했다.

"부끄러워하네요."

"부끄러워하는군."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시끄러워."

의외로 알비노는 놀리는 맛이 꽤 있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얼핏 보면 뱀 같은 인상과 성정에 꺼려지지만, 알면 알수록 무언가 허술하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 나선 것도 그렇고... 아무튼 의외야.'

아무리 홀로 베른하르크를 빠져나가는 게 위험해도, 베른하르크에 남아서 마수들에 맞서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정말로 알비노 정도 되는 마법사가 에드릭이 떠들던 궤변에 넘어갔을까?

'글쎄....'

여전히 제4 특무대원들을 동료나 전우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낯부끄러운 게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목적지가 같으니, 일행이라고는 불러도 되지 않을까?

"자자, 그만들 떠들고 이만들 돌아가서 자자고. 죽을 것 같아."

"엄살은, 덩치가 아깝군."

"어서 가요."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풍경.

마침내, 길고 길었던 이번 임무가 끝을 맺었다.

* * *

뮐헨 곡창지대를 가득 메운 압도적인 수의 군세를 보는 순간, 개럿 메이슨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베른하르크의 병력으로는 저 군세를 막을 수 없었고, 설사 겨울성의 특무대가 돕는다 한들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개럿 메이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의회를 소집하고, 무수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군사를 일으켰다.

물론 개럿 메이슨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베른하르크의 병력만으로는 지금 몰려오고 있는 재앙을 이겨 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럿 메이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절망이 점차 전선에 번져 나가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뇌운과 함께 등장한 마법사는 가벼운 손짓 몇 번으로 베른하르크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기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기적이 찾아왔건만, 개럿 메이슨은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그 기적 뒤에 베른하르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익....

굳게 닫혀 있던 의회의 문이 열리고, 이윽고 들어선 이를 바라보며 개럿 메이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렸습니까."

"말로라도 그렇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만...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저도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거든요."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이 더없이 사납게 웃었다.

"그러면 가실까요."

"...예. 이쪽으로."

개럿 메이슨은 에드릭과 함께 안쪽으로 향했다.

친하노버파 의원들은 이미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서 소집해 놓은 상태였으니, 남은 건 거사를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서 마침내 중앙 회의장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의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럴 때 그 정도의 마법사가 나타나다니... 여신께서도 우리의 손을 들어 주시는 구려.

-하하하! 맞습니다. 이제 남은 건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더 하노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래야지요. 하노버와의 외교 문제로 뮐헨 곡창지대에서 변이 생겼으니, 이는 응당 수습해야 할 일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개럿 메이슨 의원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안에서 처분해야 할 이를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까?"

"...예. 친하노버파 의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은 현재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모인 건친 하노버파 의원들뿐이죠."

"참으로 우습군요. 하노버에 의해서 죽을 뻔하고도 아직도 그 태도를 버리지 못했으니."

"저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병들과 병사들이 하는 것일 뿐, 조금의 위기의식도 없었을 겁니다. 미련하게도 말이죠."

에드릭이 가볍게 웃었다.

"어찌 위정자들은 이리도 똑같은지."

곧이어서 에드릭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렇게 개럿 메이슨과 에드릭이 중앙 회의장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던 의원들이 개럿 메이슨 의원을 아는 체했다.

"개럿 메이슨 의원, 늦으셨구려."

"예. 상황을 수습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회의를 소집한 이가 그래서야 쓰겠나? 일단 앉으시구려, 곧 의회를 시작할 참이었으니."

"다른 의원들은 기다리지 않는 겁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개럿 메이슨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 없는 의원들은 친하노버파가 아닌 인물들이었으니.

"...그렇습니까."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개럿 메이슨의 시선이 이윽고 뒤에 있는 에드릭에게로 향했다.

"음? 그런데 그 뒤에 있는 자는 누군가? 신성한 회의장에는 호위를 대동하지 않는 게 방침이라는 걸 잊은 건가?"

"그건 내가 대신 답해 주겠네."

에드릭의 입가가 비틀리기 무섭게 섬광이 번뜩였다.

툭.

허무하게 떨어져 내리는 머리.

"이게 내 대답이라네."

곧이어서 뿜어진 선혈이 사방에 낭자하기 시작하자, 회의장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개, 개럿 메이슨 의원!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뿐입니다."

"설마... 제국과 손을 잡은 건가! 개럿 자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제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럿 메이슨의 시선이 차갑게 의원을 내려보았다.

"그것이 권리를 누리는 자들이 응당 가져야 할 책임이니까요."

"훌륭하군."

에드릭이 껄껄 웃으면서 연신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회의장 안에 있는 베른하르크 의원들의 머리가 마치 낙엽처럼 떨어졌다.

"으아아아!"

"도, 도망쳐!"

"뭐, 뭣들 해! 어서 경비를 불러!"

무자비한 살육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드릭 정도 되는 이에게 있어서 무저항의 인간을 죽이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에드릭에게 있어서 이러한 행위는 더없이 익숙했다.

"사, 살려...."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런가?"

"잘못, 잘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미 늦었네."

애원을 하던 의원이 목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를 지켜보던 개럿 메이슨 의원이 입을 열었다.

"저자가 마지막이로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맡겨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베른하르크는 결코 제국과 겨울성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고생을 한 보람이 있군요."

시산혈해(屍山血海) 속에서 껄껄 웃는 에드릭의 모습을 보며, 개럿 메이슨은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런 이가 있는 겨울성에 대적해서는 안 된다.

그 사실만이 개럿 메이슨의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자아, 그러면 마지막 계산을 끝내 보시죠."

"예?"

"이번 전쟁에서 저희 대원들의 노고가 참으로 컸습니다. 대장이 된 자로서 그럴듯한 포상 정도는 안겨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무, 물론입니다! 절대로 섭섭하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하하, 기대하겠습니다. 마침 베른하르크의 국고도 두둑이 채워질 것 같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에드릭의 시선이 회의장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개럿 메이슨 또한 그 말을 못 알아들 리가 없었다.

저들은 모두 베른하르크의 골수를 빨아먹고서 제 배를 불리는 돼지들이었고, 당연히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 또한 어마어마했다.

"베른하르크를 구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절대로 작지 않을 것입니다."

"의원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거든요."

"예. 다시 한번, 베른하르크를 위해 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개럿 메이슨은 진심을 담아서 에드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릭은 조금 멋쩍은 듯이 얼굴을 긁적였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에드릭의 시선이 뮐헨 곡창지대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는 하노버와 연합을.

"피바람이 불겠군."

코끝을 찌르는 피의 비린내.

에드릭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익숙한 냄새였다.

* * *

푸르른 잔디밭과 작은 나무들이 묘지를 둘러싼 곳.

흰 돌로 만든 묘비들이 일렬로 놓여 있고, 각 묘비마다 가족들이 남긴 꽃다발이나 향초가 놓여 있다.

묘비 사이로 조용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때로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기도 한다.

도대체 얼마 만일까.

벨 블랙우드의 도움 덕분에 한발 빠르게 몸을 회복한 콘란은 묘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벨 블랙우드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침대에서 환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몰라도 웬만한 상처는 전부 나았다.

'아무튼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그렇게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쯤, 콘란은 묘비 앞에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콘란에게 있어서 더없이 익숙한 얼굴의 여인.

"...레일라?"

이윽고 레일라의 모습을 확인한 콘란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전신에 칭칭 감긴 붕대와 그 아래에서 지금도 배어 나오고 있는 피.

명백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안 죽었네? 당신이나 나나 악운은 참 강하단 말이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콘란을 마주한 레일라가 키득 웃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베른하르크를 떠난 것 아니었나?"

"떠났었지. 그리고 돌아왔고. 단지 그뿐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콘란, 나는 길드를 책임져야 해. 나를 따르는 이들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개죽음으로 내몰지 말아야 할 의무가, 나에게는 있어."

"그런데 왜 돌아왔지?"

레일라가 가볍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내가 책임져야 할 목숨, 그중에서 내 목숨은 없거든. 그래서 돌아왔어."

"...어째서?"

"멍청하네. 자기 입으로 한 말도 벌써 까먹은 거야? 이곳이 우리 고향이잖아. 그리고... 메리가 있는 곳이고."

레일라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면서, 그녀의 손이 앞에 있는 묘비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 아이의 어미로서 해 준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곁은 지켜야지."

"...."

처음 이곳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레일라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일라에게는 단지 책임을 져야 할 게 생겼을 뿐이었다.

콘란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당신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건 알아.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나를 믿어 주는 거냐?"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어."

레일라가 조심스레 메리의 묘비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야 하지?"

그 질문에 콘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록 지금은 임무로 인해서 베른하르크에 잠시 들르기는 했어도,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콘란의 신분은 죄인이다.

겨울성에서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복무로 치르기 전까지, 콘란은 겨울성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탈영을 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래서야 다시 수배자가 될 뿐. 콘란이 원하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래, 뭐. 어서 가 버려. 어디 가서 마음대로 죽든지 말든지."

"한 가지는 약속하겠다."

콘란이 굳은 결의를 마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나에게 씌워진 모든 굴레를 벗는다면... 그때 반드시 돌아오겠다."

"기다리지는 않을 거야. 그런 건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레일라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네."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콘란에게도, 레일라에게도.

"메리를 부탁한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이 아이의 엄마니까."

레일라가 조심스레 메리의 묘비를 쓰다듬었다.

마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그러니까 당신도 잊지 마. 당신은 메리의 아버지야."

"물론이지."

이 순간, 콘란은 다시금 다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66화 겨울성 복귀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돌아오는 콘란의 모습을 보며, 1층 탁상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알비노가 말했다.

"덩치, 어디 갔나 오나?"

"볼일이 있었다."

"그래? 하긴, 여긴 네놈 고향이었지. 어디 꽃구경이라도 갔다 왔나 보군."

"그러는 너도 바깥 좀 구경하지 그래?"

"됐어. 폐허밖에 볼 게 없는데 뭘 구경해? 빨리 여길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야."

"언제는 겨울성을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아무리 그래도 거기가 여기보다는 나아."

그 말에 콘란이 가볍게 웃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콘란 또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개소리 취급을 했겠으나, 이번에 베른하르크에서 겪은 일을 생각한다면 알비노가 저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수들을 보는 거야 겨울성이나 이곳에서나 비슷했지만, 그럴 준비가 된 장소에서 마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말 그대로 천지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긴 콘란의 시선이 이윽고 나에게로 향했다.

"몸은 괜찮나?"

"누굴 걱정하는 거야?"

"하긴, 그것도 그렇군."

콘란이 멋쩍게 웃었다.

"베른하르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대장이 결정하겠지. 아니, 지금쯤이면 이미 결정했겠군.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왔든지 말이야."

"...그런가."

"마침 저기 오니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응? 아아."

그와 함께 여관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이었다.

"다들 잘 쉬었나? 안 본 사이에 얼굴들이 많이 좋아졌군."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정리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말이야."

그 할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

당장 에드릭에게서 진한 혈향이 묻어나고 있었으니까.

마수가 아닌, 인간의 피 냄새가.

"일은 잘 끝났습니까?"

"일단은 잘 마무리되었네. 베른하르크는 앞으로 감히 제국에 대한 은혜를 잊거나 하지 않겠지."

그것을 달리 말하자면, 베른하르크에 남아 있는 친하노버파를 모조리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잘됐군요."

"아, 물론 자네들의 노고에 대한 대가 역시도 확실하게 받아 냈으니 염려할 것 없네."

에드릭이 덧붙였다.

"당장은 베른하르크의 상황이 어수선하니, 나중에 따로 겨울성에 직접 보내겠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잘됐군요."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개럿 메이슨의 멱살을 붙잡고 돈을 내놓으라고 해 봤자, 몇 푼 받지도 못할 터.

에드릭의 말마따나 차라리 조금 기다리면서 베른하르크의 상황이 진정이 된 후에 제대로 보상을 받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 액수는 절대로 적지 않겠지.'

무려 베른하르크 같은 거대 도시 하나를 멸망에서 구해 낸 일이다.

그에 대한 대가가 작다면, 아마 내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에드릭이 다시 나서지 않을까.

일단 보상 액수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겨울성으로의 복귀는 언제 할 생각이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쉬어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베른하르크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한 터라 그럴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것 같네. 지금 같은 정세에 겨울성을 너무 오래 비우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고작 특무대 하나가 겨울성을 비운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냐마는, 에드릭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바로 떠나는 겁니까?"

"그럴 생각이네. 자네들의 몸 상태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것 같고."

"아직 아픈데요."

"어디가?"

"여기, 피 나는 곳이요."

"그 정도는 침 바르면 낫네."

"...."

아무래도 에드릭은 정한 사안을 바꿀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들 채비하게, 오늘 밤이 되기 전에 떠날 테니."

더 이상의 이견은 없었다.

마수들의 습격이 있은 지도 어느덧 일주일가량이 지났고, 다들 내심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떠나는군. 이곳도 슬슬 지긋지긋하긴 했어. 아, 덩치 넌 좀 아쉽겠어."

"그렇긴 하지. 다시 돌아올 거지만, 반드시."

그 어떤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 콘란의 말이 조금 의외였는지, 알비노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흠... 뭐, 그거야 네놈 사정이지."

"넌 돌아갈 곳이 없나?"

갑작스러운 콘란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알비노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없지, 이제는."

"그래?"

"됐고, 올라가서 준비나 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그렇게 콘란과 알비노가 먼저 올라가고, 곧이어서 나와 알리시아도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정리해야 할 짐은 대부분 미리 정리해 둔 터라, 모든 짐을 챙겨서 1층으로 다시 내려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1층에 제4 특무대원들이 모두 모이자, 에드릭이 말했다.

"전부 모였군. 출발하지."

"개럿 메이슨 의원은 따로 만나지 않아도 됩니까?"

"그쪽도 여러 사정이 있어서 따로 우리를 만날 여유는 없을 것 같군. 이미 떠난다고 말을 해 두기도 했고."

"그렇군요."

"그러면 바로 출발하지."

여관 입구에는 이미 우리가 겨울성에서 타고 왔던 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베른하르크에 막 도착했을 때야 초주검 상태였지만, 그동안 충분할 정도로 휴식을 취한 덕분에 말들의 상태는 매우 좋았다.

"안 본 사이에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제대로 달릴 수나 있는 거야, 이거?"

"네가 할 소리는 아니다, 덩치."

"시끄러워."

그렇게 준비된 말을 타고서 내달린 우리는 단번에 한창 복구 작업이 이어지고 있는 서쪽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통행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여기 있네."

에드릭에게서 통행증을 받아 든 경비병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겨울성분들이셨군요!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베른하르크를 위해서 함께 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른하르크는 제국과 겨울성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통과하십시오."

아무래도 베른하르크를 위해서 싸운 우리의 이야기가 베른하르크 내에 제법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베른하르크를 구한 건 뇌제였지만, 우리도 꽤 활약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베른하르크의 서쪽 성문을 통과한 우리는 비로소 베른하르크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껏 베른하르크에 머물렀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음을 생각하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또 지긋지긋한 야영의 시작인가."

콘란이 한탄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 또한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였기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모기, 짜증 나."

웬만한 일에는 입을 열지 않는 알리시아 역시도 한마디 하자, 모두의 시선이 잠시 알리시아를 향했다.

"뭐요."

"...아니, 뭐."

"모기가 짜증 나긴 하지."

콘란과 알비노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쓱한 듯 콧잔등을 긁었다.

언제나 같은 평화로운 풍경.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으음."

갑작스럽게 말을 멈춰 세운 에드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껏 몇 번 본 적이 없었던 심각한 얼굴이었다.

"자네들은 먼저 출발하게."

"예? 대장은요?"

"나는 잠시 남은 볼일이 생각나서 말이야. 먼저 가고 있게, 늦지 않게 합류하지."

에드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

그에 가장 먼저 콘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우리끼리 그냥 가라고?"

"흥, 잘됐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기회에 겨울성을 떠나서 도망치는 것도...."

"어, 그래. 잘 가라. 나는 그 망할 교단 놈들한테 쫓기는 건 지긋지긋해서. 당당히 돌아와야 할 이유도 생겼고."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이쯤 되면 알비노는 탈영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는 수준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지?'

베른하르크를 나서기 무섭게 갑자기 다른 볼일이 생각났다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한번 훑었으나, 현재 내 수준으로는 에드릭과 같은 걸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온갖 아이템으로 치장을 했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강함에는 명백한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에드릭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탈했는지 알 수 없다는 소리.

물론 정말로 잊고 있었던 용무가 갑자기 생각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일전에 에드릭이 갑작스레 일행에서 이탈했을 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블레이크 남작이 죽었지.'

제국 귀족 살해라는 대형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범인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업화의 마법사 토벌은 블레이크 남작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겨울성에서 해당 요청에 응해서 특무대를 파견하기 무섭게 특무대가 토벌 대상인 업화의 마법사에게 공격받았다.

마치 특무대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가까스로 업화의 마법사를 토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사건의 배경에 무언가 찝찝한 것이 있다는 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블레이크 남작이 죽은 건 그 이후였다.

업화의 마법사 토벌 이후, 무언가 볼일이 있다던 에드릭이 잠시 이탈했던 때.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단순 우연이라 치부하는 게 더 억측이겠지.'

블레이크 남작의 죽음과 에드릭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어쩌면, 블레이크 남작을 죽인 범인이 에드릭일 수도 있고.

그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고, 그렇기에 지금 에드릭이 갑작스레 일행에서 이탈한 일 역시도 심상치 않은 일로 느껴졌다.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대체 에드릭이 어째서 갑작스레 복귀 도중 이탈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 건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 * *

우거진 숲속에서 에드릭은 말을 멈춰 세우고는 내렸다.

숲속에서 감도는 적막감이 이 자리에 있는 게 오직 에드릭 하나뿐이라 말해 주었으나, 에드릭의 민감한 기감은 그중 하나의 이질감을 놓치지 않았다.

"이만 나오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 에드릭이 가볍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나오지 않는 건가? 멀쩡한 숲을 불태우는 취미는 없네만. 부디 자네도 같은 생각이었으면 좋겠군."

점잖은 말이었으나, 나오지 않는다면 숲을 모조리 태워 버리겠다는 소리였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고 느낀 건지, 곧이어서 수풀 사이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의 모습을 본 에드릭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에드릭으로서도 낯선 이였으나, 그자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절대로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를 맴도는 쥐새끼가 한 마리 있더니... 이제야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들었는가?"

"눈치채고 있었나?"

"내내 그렇게 흉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호오."

데미안은 짐짓 놀랐다.

아니, 최근에 있었던 일은 데미안에게 있어서 온통 놀라운 일투성이였다.

가장 놀라운 일은 역시나 베른하르크에서 마주했던 뇌명의 마법사의 존재일 것이다.

마화, 아니 그 너머의 고고한 경지를 이룩한 뇌명의 마법사를 본 순간, 데미안은 전율을 느꼈다.

아그니를 처치한 뇌명의 마법사를 시험하기 위해서 겨울성 일행을 추적하던 도중에 저 정도의 뇌명의 마법사를 마주하게 되다니....

'우연인가?'

데미안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혹시 뇌명의 마법사끼리 별도의 연락망이라도 존재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이번 일을 단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뇌명의 마법사를 쫓던 중 또 다른 뇌명의 마법사를 마주하는 건, 단순 확률로 생각해도 천문학적인 확률이었으니까.

그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설마하니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인물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라....

정말이지 이변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눈치챘다면 모르는 척하는 게 좋았을 텐데. 운이 나빴군."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글쎄...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테고,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뒤쫓고 있었지?"

"내가 대답할 의무는 없다."

"자네들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네, 꼬리가 붙은 시점이 그때쯤이었으니."

에드릭이 사납게 웃었다.

"황혼 악단, 자네들의 목적은 대체 뭔가? 무슨 목적으로 블레이크 남작에게 헛바람을 집어넣었지? 지금 우리를 쫓은 이유는 뭐고?"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얼마 전 블레이크 남작이 죽었다더니, 그 사건의 흉수가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 이름을 안다면 살려 둘 수 없겠군."

"하하, 원래도 그럴 생각 아니었나? 어떤가, 순순히 대답해 줄 생각은 없나?"

"질문은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다."

"순순히 답해 줄 생각은 없나 보군. 어쩔 수 없나."

데미안은 눈앞의 사내가 지닌 정체 모를 여유가 거슬렸다.

저건 약자가 강자에게 가져도 될 태도가 아니었다.

"여유롭군. 넌 내 상대가 되지 못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뭐든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라네."

"드넓은 대양과 연못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하하, 그것참 광오하군."

에드릭이 검을 뽑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군. 그러니 나도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겠네."

"싸울 생각인가. 그렇다면 부하들과 함께 오는 게 현명했을 텐데?"

에드릭이 웃었다.

더없이 사나운 미소였다.

"그럴 수는 없지. 내가 해야 할 일을 부하들에게 맡겨서야 쓰겠나?"

"훌륭한 지휘관이군. 그러나, 현명하지는 못해."

"글쎄... 그건 봐야 알지 않겠나?"

스스, 스스스─

마치 공간이 깨지듯이 에드릭을 중심으로 거미줄이 번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데미안은 어느덧 자신의 전신에 감겨 있는 거미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단순히 은밀한 수준이 아니다.

에드릭이 거미줄을 드러내기 전까지 데미안은 이 거미줄들이 자신에게 감겨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거미줄을 드러내서 나에게 거미줄의 존재를 자각시킨다는 건....'

...조건 충족형 마법인가!

데미안이 거미줄을 인식하기 무섭게 거미줄이 더욱더 데미안의 몸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꾸득, 꾸드득...!

데미안은 그 불쾌한 거미줄이 무엇인지 곧 알아보았다.

'여왕의 마법!'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법 중에서도 특히나 이질적인 마법 중 하나.

'...불쾌한 싸움이 되겠군.'

데미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67화 어그로

돌아가는 길.

자유도시 베른하르크에서의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에드릭이 갑작스레 일행에서 이탈한 것과 더불어서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게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고.'

다름이 아니라, 내가 베른하르크를 지키기 위해서 썼던 어그로 글이 생각보다도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이 그러했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카인을 언급했다 한들, 웬만한 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뇌제마저도 내가 쓴 게시 글을 보고서 직접 뇌운을 이끌고 베른하르크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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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잡이 : 베른하르크 쪽에서 카인 닮은 사람 본 것 같은데... 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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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옆의 별 표시는 내가 쓴 어그로 글이 단번에 인기 글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올라간 인기 글이 어그로 글이라니... 뭔가 자괴감이 조금 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뉴들박77 : 헐... 진짜인가요?

-기사단장임 : 거물이 왔네

-헤슨 : 뭐야, 진짠가? 나도 베른하르크에 있었는데 난 왜 못 봤지?

-응애나애기뉴비 : 엥? 나 베른하르크에서 지낸 지 꽤 됐는데 카인처럼 생긴 사람 못 봤는데. 착각한 거 아님?

-익명6784 : 흠... 근데 카인 정도 되는 유저가 있으면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았으려나?

.

.

.

-익명55 : 전능하신 카인 님께서 오셨구나. 오오 그를 영접하라.

└익명12 : ? 얘 왜 이럼?

└회사짤린듯 : 평소에 카인 욕하고 다녔잖아. 카인한테 걸리면 제일 먼저 얘가 죽을걸?

└익명12 : 아아 ㅋㅋㅋ

└익명55 : 꾸짖을 갈! 어찌하여 나를 모함하는가! 카인 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회사짤린듯 : 나보다 니가 먼저 죽을듯?

└익명55 : ...

.

.

.

-개미핥Gi : 근데 만약 진짜 카인이라 쳐도 숨어다니는 거 보면 예전 카인은 아닐 수도?

-김박사 : 가능성 있음. 그, 예전에 카인이 멸망룡 솔로 레이드 한다는 소문도 있었잖아. 오기로 마법 난사하다가 능력치 전부 대가로 바쳤을 수도 있음. 어쩌면 레벨 다운까지 당했을 수도 있고. 어차피 서비스 종료 얘기도 있었으니.

-개미핥Gi : 그럴 수도 있겠네

.

.

.

- 마법사114 : 실시간) 베른하르크에 뇌제 강림!!!

익명 게시판에 있는 굵직굵직한 네임드들은 물론이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들까지도 내 게시 글에 반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닉네임이 있다면, 역시나 카인과 관련된 주제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닉네임일 것이다.

-루나 : 베른하르크. 고마워.

평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소름이 끼치는 반응이었다.

왜냐면... 나에게는 그 말이 앞뒤 가리지 않고서 당장 베른하르크로 달려가겠다는 소리로 보였으니까.

'물론 가더라도 나와 마주칠 가능성은 낮겠지만....'

이미 우리 일행은 베른하르크에서 제법 멀어진 상태다.

루나가 어디서 베른하르크를 향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마주칠 확률은 극히 낮다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찝찝한 부분이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금껏 내 위치와 관련된 정보를 전혀 풀지 않다가 이번에 간접적으로나마 누설하게 되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또한 게시 글의 여파는 단순히 내가 작성한 글의 댓글로만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

-마법사114 : 시발 ㅋㅋ 베른하르크에 뇌제 떴다

──────────────

-익명64 : 찌릿햄 강림 ㄷㄷ

-익명111 : 뭐야, 뇌제까지 온 거 보면 진짜 카인 있나 본데?

-마법사114 : 뇌제 진짜 개 미쳤다. 그냥 혼자 군대를 쓸어버리는데?

-응애나애기뉴비 : 근데 뇌제 아직도 카인 꽁무니 쫓아다니고 있었음? 예전에 한번 개발리고 포기한 거 아니었나.

└익명64 : 찌릿햄이 원래 집요한 거로 유명함.

└응애나애기뉴비 : ㅇㅎ

└응애나애기뉴비 : 근데 왜 뇌제를 찌릿햄이라고 부르는 거임?

└익명64 : 뇌제 닉이 찌릿찌릿해요임.

└응애나애기뉴비 : 아 ㅋㅋ

그저 휘발성 어그로 글에 불과했을 카인을 보았다는 게시 글은 뇌제의 등장과 함께 단번에 익명 게시판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베른하르크를 구했으니 다행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익명 게시판 내에서 나에 대한 집중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지하 : 근데 용잡이는 누군데 카인을 알아봄? 카인이 유명하긴 한데 실제로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얼굴다탔어 : 그러고 보니 용잡이 꽤 고레벨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DoDo : 용잡이 님 고레벨 맞아요. 예전에 저도 도움받은 적 있어요.

-익명7454 : 그럼 혹시 카인 본인 아님?

└익명99 : 그건 좀...

└익명651 : 그랬으면 카인 봤다고 말할 이유가 없지. 그냥 당당히 밝히지.

-꺄르르 : 카인 지인인가?

-하인베르 : 근데 용잡이 닉네임이 뭐였음? 이 정도면 꽤 유명했겠는데, 네임드인가?

갑작스레 쏟아지는 관심.

이제껏 익명 게시판 내에서 가급적이면 눈팅족을 유지했던 나로서는 꽤 부담이 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저것만으로 내 정체가 탄로 날 리는 없지만, 일단 베른하르크라는 지역에 대한 힌트를 준 이상 누군가 꼬리를 잡을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 순간.

"벨."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익명 게시판 너머에 있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괜찮아요?"

알리시아였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조금 이상해서...."

아무래도 익명 게시판을 보는 내 표정이 바깥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또... 말해 주지 않는 건가요?"

"별것 아니라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 알잖아요."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물러섰을 알리시아였건만, 오늘따라 왜인지 모르게 조금 끈질겼다.

그리고 알리시아를 마주한 순간.

"...."

나는 왜인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을 한 알리시아를 보았다.

대체 어째서 날 저렇게 보는 걸까.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저 시선을 더는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알리시아와도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긴 했지.'

알리시아가 나에게 품은 정체 모를 호의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껏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미루고 미뤄 왔지만, 이제는 그에 대한 답을 들어야겠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뭔가요?"

"얼마 전부터 네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는 건 안다. 어째서지?"

정확히 말하자면, 업화의 마법사를 토벌한 이후부터.

그 질문 자체가 의외였는지 알리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건...."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안 해도 상관없다."

만약 이 질문에 알리시아가 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해서 알리시아의 호의를 경계할 것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많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만약 알리시아가 지금껏 감추고 감춰 왔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다면....

그때는 비로소 이 세계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다.

"...아뇨. 말씀드릴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리시아가 굳은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족이 있었어요.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었던 가족."

알리시아가 말하는 가족이 누구인지야 뻔했다.

"징벌 교단의 시스터들을 말하는 건가."

그와 함께 알리시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걸 어떻게...?"

"눈이 있다면 네가 징벌 교단 출신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뭐, 에드릭은 몰라도 알비노나 콘란 같은 경우는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전부 알고 계셨군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왜 말씀하시지 않은 거죠?"

"네가 말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할 때고. 아닌가?"

"그건...."

알리시아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맞아요. 부정할 필요는 없겠죠. 시스터들은 저에게 있어서 친구이자 자매 그리고 가족이자 모든 것이었어요."

알리시아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업화의 마법사, 그 저주받을 자가 모든 걸 불태우기 전에는."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업화가 비치는 것 같다.

"가족, 친구, 동료... 제 모든 것이었던 시스터들을 업화의 마법사는 전부 앗아 갔어요,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알리시아가 기억 속에 넘실대는 불꽃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한 채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결심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업화의 마법사를 죽이겠다고."

대충 짐작했던 것과 크게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역시나 업화의 마법사는 알리시아와 큰 연관이 있었고, 그런 업화의 마법사를 죽이는 데 크게 일조한 나에 대해서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거겠지.

불구대천지원수를 갚아 준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가. 알았다."

"...네?"

"그걸로 충분하다는 소리다."

알리시아가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답이 필요한 얼굴.

여기서는 나도 적당히 말을 해 둘 필요가 있겠지.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다, 네게도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닐 테니."

"그건...."

어차피 알리시아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그 사실을 알리시아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꽤 중요했다.

앞으로 알리시아의 호의에 신뢰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걸로 알리시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믿어도 된다는 거겠지.'

적어도 내가 먼저 배신을 하기 전에는 알리시아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나에게 내린 판단력이 감히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알리시아 또한 어떤 생각을 마쳤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어려운 얘기였을 텐데 해 줘서 고맙다."

"아뇨, 아니에요. 벨 당신한테는 언젠가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이기도 했고. 그리고...."

말을 이어 가던 알리시아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할게요."

"그래? 뭐, 그래라."

알리시아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는 몰라도, 어차피 들어야 할 말은 모두 들었다.

그러니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들어도 되겠지.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문제가 훨씬 더 크기도 하고.'

이번에 베른하르크에서 있었던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익명 게시판에 뿌린 어그로 글의 여파가 생각 이상으로 커졌다.

본래였다면 어그로 글을 써 놓고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게시 글의 여파가 커졌다면 나 또한 어떤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익명 게시판 내에서 용잡이에 대한 주목이 이어져서 좋을 건 없겠지.'

물론 유명세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아 보였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유명세를 이용해서 무얼 하기는커녕 그에 휩쓸릴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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