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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어그로 (2)

-용잡이 :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을 종결하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은 모두가 그저 그렇게 여길 만한 시시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실제로 베른하르크에 카인이 등장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 시시한 진실은 곧 익명 게시판 유저들에게 이번 사건과 어그로 글의 당사자인 용잡이가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터.

'일단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이것으로 용잡이는 익명 게시판 내에서 쓸데없이 어그로나 끄는 별 실속 없는 유저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익명 게시판 내에서 용잡이의 신용도가 내려가는 건 나로서는 피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최악을 피해서 차악을 고른 셈.

그러나....

차악 또한 악이듯이 상황은 마냥 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익명64 : 아, 역시.

-돈좀주세요 : 싱겁네.

-익명575 : 착각이었음?

-JUN : 하긴, 카인이 있었으면 이미 소문 다 퍼졌겠지.

처음에는 여론이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단순 어그로.

그러나 의도하지는 않은 어그로.

그렇게 용잡이가 남긴 게시 글은 한때 인기 글에 올랐으나, 언제나 있는 평범한 어그로 글 중 하나로 남는 듯했다.

익명 게시판 유저 중 한 명이 뇌제의 존재를 언급하기 전까지는.

-마법사114 : 근데 단순 어그로였으면 뇌제가 굳이 베른하르크에 나타날 이유가 있나?

-응애나애기뉴비 : 그러네. 뇌제까지 나타났으면 카인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난 잘 모르겠네.

-기사단장임 : 흠... 뇌제가 카인만 보면 발작하는 건 유명하긴 해.

-익명55 : 뇌제햄이 나타났으면 이유가 있겠지 ㅋㅋ 지금 용잡이 다급히 수습하는 거 나만 보임? 응 이미 카인 님한테 찍혔구요 ㅋㅋ

뇌제가 베른하르크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절대적인 진실.

그것이 발목을 붙잡기 시작했다.

비록 뇌제의 등장이 내가 의도한 것은 맞았으나, 사람들은 뇌제쯤 되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겪는 권위의 오류.

뇌제 또한 엄밀히 따지면 그저 레벨이 높을 뿐인 유저 중 한 명에 불과했건만, 지금까지 뇌제가 쌓아 온 명성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다.

설마 뇌제가 게시판 어그로 따위에 휘둘려서 친히 움직였을까.

설마 뇌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의 상징인 뇌운을 이끌고서 직접 움직였을까.

설마 뇌제가....

-익명33 : 설마 뇌제가 괜히 움직였겠어? 뭔가 확실한 정보가 있으니까 직접 움직였겠지.

만약 저들이 뇌제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으로 궁금했으나, 애석하게도 그걸 내가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뇌제의 등장 자체를 내가 함부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 이미 베른하르크에서 뇌제를 목격한 다른 유저들의 증언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어설프게 부정하려 해 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은데.'

물론 이 자체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리스크를 가져다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단지, 지금껏 내가 지켜 왔던 익명 게시판 내의 익명성에 조금 영향을 받는다고 할까?

'이 이상 괜한 글을 써 봐야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고....'

나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괜히 몇 마디 보태서 쓸데없는 화제성을 키우느니, 시간에 맡겨 보기로 한 것이다.

때로 어떤 것들은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곤 했으니.

"조심해요."

그때, 내 옆에서 말을 몰던 알리시아가 내 정신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아."

하마터면 말이 진창에 빠질 뻔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니. 아무것도."

"그래요?"

알리시아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줘요."

"그래."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알리시아에게 상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계속됐다.

* * *

"조금 날씨가 추워진 것 같지 않아요?"

그 말처럼 주변의 풍경이 조금 변해 있다.

현실의 봄에 가까운 기후였던 베른하르크와는 달리, 이제 가을 정도의 기후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겨울성에서 베른하르크로 향했을 때, 우리는 주변의 계절이 실시간으로 겨울에서 가을 그리고 가을에서 봄으로 바뀌는 광경을 보았다.

당연히 베른하르크에서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와 반대로 따스한 기후에서 추운 기후로 바뀔 수밖에.

"슬슬 으슬으슬한데."

"이봐 벨, 잠깐 멈춰서 옷 좀 갈아입는 게 어때? 날씨가 좀 달라졌는데."

에드릭이 부재중인 지금, 제4 특무대는 은연중에 내가 대장 비스름한 역할을 맡게 되었기에 나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러지."

비록 내가 정식 대장은 아니지만, 타당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우리는 말을 멈춰 세웠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다.

곧 있으면 어둠이 찾아올 터.

"날도 어두워졌고, 그냥 오늘은 아예 이쯤에서 야영을 하는 게 낫겠어."

내 결정에 콘란이 반문했다.

"벌써?"

"당분간은 야영도 쉽지 않을 것 같거든. 엄동설한 속에서 오래 있고 싶지는 않을 것 아냐?"

"아, 하긴."

이곳을 경계로 조금 더 가면 북부 지대가 나온다.

북부 지대에 들어서고 난다면, 최대한 빠르게 그곳을 돌파해서 겨울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겨울성 바깥의 북부 지대는 그만큼 인간이 버티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준비하자고."

그렇게 평소보다 이르게 야영 준비를 한 우리는 곧장 쉴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주변에 마수들의 흔적이 없나 확인한 후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리 준비한 마수 분비물 가루를 주변에 뿌리고, 그 이후 모닥불을 피운 뒤 임시 천막을 쳤다.

야영 준비는 베른하르크로 가는 동안 내내 했던 일이었기에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언제나처럼 불침번은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섰는데, 오늘은 내가 초번을 설 차례였다.

"그러면 고생해요."

"어, 이만 들어가서 자라."

"네."

알리시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뒤, 모닥불에 몸을 녹이던 콘란이 말했다.

"오늘은 네가 초번이었나? 내가 두 번째니까 시간 맞게 깨워 달라고."

"그래."

"그러면 나도 이만 자야겠어."

이제 모닥불 앞에는 나와 알비노만 남게 되었다.

"안 자나?"

내 물음에 알비노가 살며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 대장이 갑자기 어디로 간 건지 알고 있는 것 있나?"

"글쎄. 그건 나도 정말로 모르겠는데."

"그래? 흠... 알았다."

"네가 그렇게 대장을 생각하는지는 몰랐는걸."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시끄럽다고 툴툴댔을 알비노였건만, 그러기는커녕 더욱더 표정을 굳혔다.

"...그 작자, 이곳을 떠날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알비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넘길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도 떠나기 전의 에드릭에게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래도 믿어야겠지.'

에드릭은 돌아올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홀로 불침번을 서게 된 나는 모닥불 앞에 놓은 통나무에 앉은 채로 곧장 익명 게시판을 켰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불침번을 서는 동안 달리 할 것도 없었을뿐더러 지금 익명 게시판 내의 분위기가 어떤지 살펴볼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군 시절에 했던 불침번 동안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대충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뉴들박77 : 저번에 오셨던 뉴비분 어디 계신가요? 댓글 한 번만 달아 주세요.

-익명55 : 요를레히 요를레히~

-섭종기원n일차 : 집에 가고 싶다...

일단 대략적인 분위기 자체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늘 있는 뻘글들 속에서 특정 유저를 언급하는 게시 글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일까.

바로 카인에 대한 언급이었다.

-헤슨 : 근데 진짜 카인이 온 거면 피바람 한번 부는 거 아님?

-구사다 : 카인 혹시 익명 게시판 보고 있으면 필독.

-익명55 : 지금 싱글벙글한 루나면 개추 ㅋㅋ

-익명7454 : 근데 카인이 진짜 있다고 쳐도 아직 베른하르크에 있으려나?

내가 어그로 글을 작성한 이후, 익명 게시판 내에서는 지금껏 잠잠했던 카인에 대한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작 첫 번째 목격자인 내가 카인의 존재를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굳이 카인과 관련된 게시 글에 내가 반응할 필요는 없겠지.'

저러한 흐름도 어차피 카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면 서서히 잠잠해질 터.

그렇게 가만히 익명 게시판을 살피던 나는 이윽고 한 가지 게시 글을 발견했다.

-홍숭이 : 혹시 6레벨 장비 세팅 고민 중인데 조언해 주실 수 있는 분? (사례 있음)

평소에도 자주 볼 수 있었던 장비 세팅 문의 글.

달리 할 것도 없었기에 이럴 때 용돈벌이나 할 겸 나는 게시 글에 댓글을 작성했다.

-용잡이 : 자세한 세팅 말씀해 주시면 답변해 드릴게요.

머지않아서 답변이 달렸다.

그것도 작성자의 답뿐만 아닌, 여러 개의 댓글들이.

-홍숭이 : 와, 용잡이 님이네 ㄷㄷ 세팅 바로 말씀드릴게요.

-익명2524 : 오, 드래곤 슬레이어좌 등장 ㄷ

-쿠쿠 : 용잡이 님, 카인 님하고 무슨 관계세요?

-필링s : 캬, 네임드 등장.

평소에 달던 댓글과 별 차이도 없는 댓글이었건만, 이전과는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어째서 갑작스레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전의 용잡이와 지금의 용잡이 사이에서 변화는 단 하나뿐이었으니.

'유명세라도 생긴 건가.'

지금으로서는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건만 결국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대체 인기 글 한번 오른 게 뭐 대단하다고 벌써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이번 질문 글의 작성자가 나에게 꽤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니까.

평소처럼 하던 용돈벌이의 과정이 조금 쉬워졌다고 할까?

나는 곧 홍숭이의 질문에 대한 답을 비밀 댓글로 작성했고, 곧이어서 홍숭이의 댓글이 달렸다.

-홍숭이 : 와... 그렇게 세팅하면 되겠네요. 진짜 감사합니다. 사례는 바로 경매장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분명히 지금껏 내가 익명 게시판에서 해 오던 일과 그리 다른 것도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답변 또한 확연히 달랐다.

예전에는 의심, 의심 그리고 의심이었다면 지금은 믿음과 신뢰가 동시에 느껴졌다.

다른 유저들의 댓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필링s : 아, 비댓이네. 용잡이 님 정도 되는 유저면 어떻게 세팅하는지 보고 싶었는데

-익명2524 : 6레벨 장비 세팅도 쉽게 하시는 것 보면 용잡이 님 진짜 고렙 맞으신가 보네 ㄷㄷ

-익명55 : 팬이에요, 사인 좀.

예전에 나를 향해 있던 날 선 반응과 의심은 어디 갔냐는 듯이, 익명 게시판 유저들은 나를 향해서 마음껏 호의를 쏟아 내고 있었다.

'으음.'

그래서일까.

어째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이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매슬로의 욕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단계별로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진다.

곧, 명예욕 자체가 4단계인 존경의 욕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니,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는 이야기였다.

인정받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존경받고 싶다.

그러한 감정들 말이다.

카인 시절의 나는 인 게임 게시판을 포함한 별도의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명예욕 같은 게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로는 명예욕에 미쳐 있었기에 멸망룡 솔로 레이드라는 미친 짓도 과감히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내가 그런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 않은 건, 그런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더 명예욕을 충족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내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해진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외롭기 짝이 없는 세계에서, 오직 익명 게시판에 있는 이들만이 나의 진정한 이해자가 되어 줄 수 있을 테니.

그러니까....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어둑시니가 내려앉은 깊은 밤.

나는 한참 동안 익명 게시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69화 우연 혹은 필연

결국, 나는 불침번이 끝난 이후에도 뜬눈으로 밤새 익명 게시판을 살폈다.

지금껏 나름대로 자기 통제에 충실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낯설고 낯선 세계에서 인터넷 중독이라니....'

누가 듣는다면 웃지도 못할 이야기였다.

"괜찮아요?"

"응? 왜?"

"피곤해 보여서요."

과연 알리시아라고 해야 할지, 아침이 밝자 그녀는 귀신같이 내 상태를 알아보았다.

아닌 척하고 있었으나 얼굴에서 드러나는 초췌함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조금 잠을 설친 것뿐이야."

어차피 지금의 내 육신은 하루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

하이마의 펜던트, 물의 보옥 그리고 마기가 주는 육체 보조 효과가 육체에 강제로 활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괜찮아요? 차라리 조금 더 쉬고 가는 게...."

"시간 없어. 당장 출발해야 한다."

"...힘들면 말해요."

"걱정 마라."

에드릭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여정이 계속됐다.

* * *

계속되는 여정 속에서 주변의 풍경이 점차 푸른빛에서 백색으로 물들어 갔다.

북부 지대의 상징과도 같은 동토 지대에 들어섰다는 뜻이었다.

"여기부터는 좀 풍경이 익숙한데."

"동감이다."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졌으나, 애석하게도 여정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북부의 대지 자체가 워낙 험했기 때문이다.

"으으... 더럽게 춥군. 북부가 원래 이렇게 추웠나?"

"이 정도면 따뜻한 거지. 겨울성 날씨가 어땠는지 벌써 까먹은 거냐?"

"망할."

콘란과 알비노가 투덜거렸다.

"괜찮아요?"

"괜찮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늘 지니고 있는 덕분에 북부의 한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북부 지대에 들어선 이후 모기 같은 벌레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더 좋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벨 주위가 유독 따뜻한 것 같네요?"

"그런 편이긴 하지."

"으음...."

알리시아는 무언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한 기분 탓으로 여긴 듯했다.

마침내 이 길고 길었던 여정이 끝을 보이는 걸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비로소 익숙한 성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겨울성 크로이츠.

어찌 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집이라 부를 만한 곳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겨울성이군."

"으... 드디어 집인가."

"하하, 이제 너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겨울성 병사가 다 됐는데?"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알비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시끄럽다."

"부끄러워하기는. 이제는 슬슬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알비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콘란의 말마따나 정말로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크로이츠의 남쪽 성문에 다다르기 무섭게 경비조장이 나를 아는 체했다.

"벨! 자네로군. 이게 얼마 만인가?"

"오랜만입니다, 경비조장님."

"응? 에드릭 경은?"

"따로 볼일이 있다고 해서 일단 저희만 복귀했습니다."

"그런가? 하긴, 에드릭 경이 자주 그러시는 편이긴 하지."

에드릭의 기행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는지, 경비조장은 에드릭의 미복귀에 대해서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할지....

"그러면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아, 내가 피곤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어서 들어가게. 정말 고생 많았어."

그렇게 성문을 통과한 뒤, 우리는 오랜만에 막사로 향했다.

"오랜만에 좀 씻겠군. 몸이 가려워 죽을 것 같아."

"동감이다."

콘란과 알비노가 앞다투어서 막사로 들어가고, 알리시아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 씻어요?"

"나는 조금 있다가."

"그러면 먼저 갈게요."

말은 안 했지만, 알리시아 역시도 빨리 씻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듯했다.

베른하르크에서 크로이츠까지의 여정은 그만큼 고되고 긴 여정이었다.

'그나저나... 에드릭의 미복귀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굳이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4 특무대는 기존 다른 부대와는 다르게 운용되고 있으며, 그렇기에 제4 특무대는 특정 부대에 소속되지 않고서 독립적으로 기능한다.

곧, 소속된 부대가 없는 만큼 에드릭의 직속상관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니 보고를 하려고 해도 누구에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소리다.

'특무대라는 부대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성주 직속의 무력 부대일 가능성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에드릭의 미복귀에 대해서 보고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특무대 소속이라 한들 일개 병사가 성주를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에드릭의 미복귀 사실 자체는 경비조장에게 말해 두었으니, 혹여 누군가 에드릭을 찾는다면 경비조장을 통해서 알 수 있을 터.

그러니... 지금은 일단 좀 쉬고 싶다.

* * *

겨울성에 돌아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건만,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편하다면 편한 일상을 보냈지만, 일주일이 넘게 아무런 소식이 없자 슬슬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 양반 진짜 죽은 것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마. 그 괴물 같은 양반이 죽기는 왜 죽어?"

나 또한 에드릭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믿음일 뿐.

계속해서 에드릭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제4 특무대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4 특무대 내에 별도의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걸 보니, 상부에서도 에드릭이 돌아올 거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과연 그 기한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만약 이대로 대장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다른 대장이 오는 건가?"

"제4 특무대 내에서 자체적으로 새로운 대장을 선별할 수도 있겠지."

"응? 그럴 만한 사람이...."

자연스레 콘란과 알비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왜? 죄수 출신이라서? 너 정도의 마법사라면 충분하지 않나?"

"아니. 그것과 관계없이 대장은 돌아올 거다."

알비노가 말했다.

"어떻게 확신하지?"

"확신이 아니야, 믿는 거지."

알비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정도의 마법사가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다고?"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 의외로군."

"그리고 근거가 없는 건 아니야."

에드릭이 어째서 갑작스레 일행을 이탈한 건지는 모른다.

지금 에드릭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역시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안다.

"그 양반이 그렇게 쉽게 죽을 인간으로 보여?"

악운(惡運)도 운(運)이다.

그리고 에드릭은 내가 알기에 어마어마한 악운을 품고 있는 사내다.

지금껏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로.

그 말에 알비노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윽고 옅게 웃었다.

"그건... 그것도 그렇군."

알비노가 덧붙였다.

"쉽게 죽을 양반은 아니지."

* * *

"쉽게 죽을 생각이 없군."

데미안은 눈앞의 사내가 진심으로 질기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금 사내의 주변에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거미줄부터가 그러했다.

스슷, 스스스───

사방에 거미줄이 번진다.

도대체 저 지긋지긋한 거미줄을 베고 불태우는 게 몇 번째던가.

수십, 수백 번?

아니, 어쩌면....

'모르겠군.'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싸움이 시작된 지 어느덧 수일이 지났건만, 거미줄은 끝없이 데미안을 향해서 조여들었다.

'역시 불쾌하군. 한데... 여왕의 마법이 이 정도였던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여왕의 마법을 상대하는 건 역시나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인식의 사각에서 끊임없이 조여드는 거미줄은 데미안에게 있어서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방심하는 순간이 바로 죽음.

만약 데미안이 여왕의 마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면 이미 승부가 났을 테지만, 데미안은 오래전 이 마법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비록 데미안의 기억 속에 있는 여왕의 마법과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여왕의 마법 간에 차이는 존재했으나, 어쨌거나 그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마법사 간의 싸움은 치밀한 수 싸움과 정보전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이미 한발 앞서 나간 데미안은 비록 조금씩이지만 서서히 에드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후욱, 후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은 포기하지 않고서 검을 다잡았다.

'...늪에 빠진 기분이군.'

예상했던 대로 데미안은 난적이었다.

에드릭이 시작부터 숨기고 숨겨 왔던 마법을 꺼내 들고서도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과연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솔직한 심정으로 에드릭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말이다.

"계속하지."

숨을 몰아쉬는 에드릭의 모습을 보며 데미안은 이제 슬슬 끝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아무리 에드릭이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초인이라 할지언정 결국에는 인간.

인간이 며칠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로 이런 격렬한 싸움을 이어 나갔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지.'

에드릭의 손끝이 잠시 흐려진 찰나, 데미안은 자신을 조여드는 거미줄을 한차례 무시한 채로 에드릭에게 파고들었다.

에드릭이 거미줄에 의지한 채로 잠시 방어하지 못하는 틈을 노린 것이었다.

'잡았다.'

데미안의 손이 휘둘러지고, 에드릭의 가슴팍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려졌다.

푸슉!

곧이어서 에드릭의 가슴에서 혈선을 따라 피가 솟구쳤다.

"큭!"

에드릭이 다급히 상처를 지혈하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출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마치 조금 전의 공격 자체에 어떤 저주라도 깃들어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며 데미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끝이군. 예상했던 대로 불쾌한 싸움이었다."

"...쿨럭! 그걸 알았다면 슬슬 물러나 주는 건 어떻겠나?"

"그 또한 꽤 매력적인 선택지이나... 이대로 너를 살려 두는 건 꽤 부담일 것 같군."

데미안이 손을 들었다.

에드릭 또한 가슴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눈동자의 빛을 잃지 않았다.

"이것으로 결착이겠군. 훌륭했다, 여왕의 종복이여."

"종복이라.... 하하, 그렇게 보인 건가. 하긴, 그리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데미안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내게서 무언가를 듣고 싶다면 자기소개부터 제대로 하는 게 예의 아니겠나?"

"과연."

데미안이 낮게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은 없었으나, 데미안은 눈앞의 사내를 인정하기로 했다.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악단의 퍼커션(Percussion), 데미안이다."

"퍼커션이라.... 과연, 그런가."

에드릭 또한 낮게 웃으며 말했다.

"겨울성 크로이츠,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일세."

"군인으로서 죽겠다는 건가?"

"은인과 약속했거든."

"그 또한 훌륭하군."

비록 데미안이 듣고자 했던 답이 아니었으나, 데미안은 그 또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면 결착을 내지."

"얼마든지 오게."

데미안과 에드릭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두 사람이 일으킨 기파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70화 우연 혹은 필연 (2)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에드릭과 데미안이 동시에 사라지기 무섭게 충격파가 사방에 비산했다.

콰아아아앙!!!

한 번이 아니었다.

인지의 속도를 넘어선 돌격이 연이어서 이어지며 대지의 거죽이 뒤집히고, 아름드리나무들이 통째로 뽑혀 나갔다.

쾅!

콰콰쾅!!!──

찰나의 순간 동안 이어진 수십 번의 공방은 팽팽했으나, 곧 데미안은 느낄 수 있었다.

에드릭이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조금 전에 입혔던 치명상이 서서히 에드릭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한차례의 격돌이 있을 때마다 에드릭의 몸이 눈에 띄게 무너져 갔다.

'굳이 길게 끌 필요 없겠지.'

비록 이번 마법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적지는 않겠지만, 데미안은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지금 데미안은 에드릭이라는 사내를 인정했다.

"벽렬적풍(劈裂的?)."

나지막이 울려 퍼진 주언(呪言).

그와 함께 데미안의 왼손에 있는 다섯 손가락이 모두 부러졌다.

영구적인 신체 결손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대가를 바치는 고위 마법.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데미안을 중심으로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휩쓸리는 모든 걸 파괴하고 찢어발기는 마법이 완성되고, 그것이 에드릭을 향해 쏘아지려던 순간.

'음?'

본능적으로 느껴진 불길함과 함께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쿠우우우우웅!!!───

그러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데미안이 있던 자리가 통째로 뒤집혀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피하는 게 늦어졌다면 전신의 가죽이 벗겨졌을 터.

그러나 다급히 피한 탓에 기껏 데미안이 손가락 다섯 개를 희생해서 완성한 마법의 발동이 취소되어 버렸다.

만약 다급히 마법을 취소하지 않았다면 데미안의 주변을 감싼 광풍에 의해서 오히려 사용자인 데미안이 찢어발겨졌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의 마법을 아직까지 숨기고 있었다고?'

그것도 데미안이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니, 아니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맞은편에서 여전히 긴장한 상태로 자신을 마주한 에드릭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싸움에 있어서 있어서는 안 될 제삼자의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각, 또각─

흙바닥일 텐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굽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있는 이 중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이 광경 자체가 현실감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흐음... 소란이 있길래 와 봤더니 이게 무슨 일일까?"

흑단 같은 어둠 속에서 유려하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별빛처럼 반짝인다.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마치 달의 여신처럼 보였다.

마치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착각 속.

이윽고 드러난 반달 같은 눈웃음을 본 순간, 데미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너, 악단 놈이었구나?"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서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본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데미안은 그보다 중요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여자, 위험하다.

인지하는 것보다 몸을 빼는 것이 한발 더 빨랐다.

콰카카카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마법이 데미안이 있던 대지를 긁고 지나가며 자욱한 상흔을 남겼다.

데미안으로서도 처음 보는 마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위력이라니... 예상했던 대로 저 여자는 함부로 볼 여자가 아니었다.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대가 끼어들 일이 아니오."

데미안은 최대한 정중한 대화로 이 사태를 해결해 보려 했다.

에드릭 하나만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여기에서 저 불길한 여자까지 상대할 수는 없었다.

"글쎄? 네가 악단 놈이라는 것만으로도 끼어들 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

"우리는 그대를 모르오."

"이 악단 놈이 뭐라는 거야? 그게 중요한가? 내가 너희를 아는 게 중요하지."

참으로 제멋대로인 여자군.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다고 느낀 데미안은 마법을 준비했다.

비록 조금 전의 사고로 대가로 사용할 손가락 다섯 개를 이미 잃었지만, 사용할 대가라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로 인해서 데미안 또한 작지 않은 부담을 감수해야겠으나,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까지의 마법으로는 부족해. 더 강력한 마법이 필요해.'

새로운 마법, 새로운 계약.

데미안은 그걸 위해서 은밀히 육막성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악마와의 계약을 위해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육망성이 완성되고, 데미안이 선언했다.

"계약 선─"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여인의 이죽거림과 함께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데미안이 인지했을 때 이미 그의 왼쪽 어깻죽지 아래는 사라져 있었다.

계약을 위해서 그렸던 육망성이 흩어졌음은 당연했다.

'...어느새?'

인지의 속도를 넘어서 왼팔을 통째로 날려 버리다니...?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였다.

더 이상 저 여자와 싸우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닐 정도로.

'피해야 한다.'

순식간에 외팔이가 되어 버린 데미안은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러한 데미안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여인이 키득 웃었다.

"도망쳐야지? 너희가 잘하는 게 그거잖아. 바퀴벌레 새끼들처럼 도망치고, 숨어다니는 거."

도망치겠다는 생각조차도 읽혀 버린 건가....

상대가 자신을 도망칠 거라 여겼다는 점에서 데미안은 더없는 치욕을 느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저 말로 비춰 보건대 상대에게 자신을 쫓을 의지는 없어 보였다.

도주를 추격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틈을 주지 않고서 공격해 왔을 테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쫓을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고 있는 건가.'

생애에서 몇 번 맛보지 못한 치욕에 데미안의 입가가 비틀렸다.

"...이 수모는 잊지 않지."

"그러길 바랄게. 그래야 일일이 찾아다니는 수고를 조금 덜지. 너희 악단 놈들이 좀 바퀴벌레 같니?"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제멋대로인 저 여자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몸을 피할 뿐.

'...저 여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봐야겠어.'

도대체 누구이기에 황혼 악단의 존재를 알고 있고, 도대체 누구이기에 저런 비정상적인 강함을 소유했는지.

데미안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의 치욕을 뼈에 새기면서.

"흠, 갔나."

여인이 굳이 데미안을 더 쫓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데미안은 미처 모르고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는 언제라도 잡아 죽일 수 있는 데미안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누군가를 찾는다는 목적이.

아이러니하게도 데미안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그녀의 목적을 더욱더 상기시켜 주었다.

'이 시기에 하필 악단 녀석이 베른하르크 주변에 있었다는 건... 역시 그뿐이겠지.'

여인의 얼굴이 이내 환희로 물들었다.

여인은 황혼 악단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멸망룡이 사라지기 전, 황혼 악단이 이전에 누구와 가장 맹렬하게 부딪쳤는지 역시도.

'분명해.'

여인, 루나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익명 게시판 속 용잡이의 게시 글, 베른하르크, 황혼 악단, 카인.

단서들이 퍼즐처럼 딱 맞춰졌기 때문이다.

'카인 님이 베른하르크에 있었어!'

카인은 베른하르크에 있다.

아니, 설사 지금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베른하르크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익명 게시판에서 카인을 봤다는 목격담이 나오기 무섭게 베른하르크 인근에서 카인의 숙적인 황혼 악단이 모습을 드러낼 리가 있겠는가?

이쯤 되면 우연이라 치부하는 게 더 억지였다.

그렇게 루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슬쩍 눈치를 살피던 에드릭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대처를 잘못했다가는 루나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껴서였다.

"...고맙네. 덕분에 살았네."

에드릭이 입술을 달싹이자, 그제야 루나의 시선이 에드릭에게로 향했다.

"응? 아아. 신경 쓸 것 없어. 벌레 퇴치 좀 한 것 가지고."

벌레 퇴치라니....

에드릭은 루나의 무신경함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잠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이 근처에서 카인 님 본 적 있어?"

"...카인? 미안하지만 그런 이는 모르네만...."

"뭐어? 어떻게 라크나 대륙에서 카인 님을 모를 수가 있어? 간첩 아니야?!"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루나의 반응에 가만히 있던 에드릭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가, 간자라니! 이래 보여도 제국에 충성하는 몸일세!"

"간첩도 아닌데 어떻게 카인 님을 모르지? 수상한데...."

에드릭은 진심으로 황당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이 자신을 구해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카인이라니?

"미, 미안하네만 나는 정말로 그런 이는 모르네. 하지만 카인이라는 자를 찾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돕겠네."

"돕는다고? 흠... 아, 그러고 보니 베른하르크에 간 적 있어?"

"그곳에서 오는 길이었네."

"마침 잘됐네. 그러면 그곳에서 엄청나게 강하고, 엄청나게 멋진 분 본 적 없어?"

그 말에 에드릭은 곧장 하늘에서 나타났던 뇌명의 마법사의 존재를 떠올렸다.

마수 군세를 손가락 몇 번 휘두르는 것으로 일소해 버렸던 그 위용은 가히 신화적이었다.

"...있네."

"역시!"

루나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마침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카인의 존재를 직접 확인한 것이다.

물론 루나 또한 베른하르크에 뇌제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적어도 루나가 생각하는 '멋지고 강한 분'에 뇌제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루나에게 있어서 '멋지고 강한 분'은 이 세계에서 오직 한 명뿐이었으니까.

"고마워. 큰 도움이 됐어."

이로써 카인이 베른하르크에 있었다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한시라도 빨리 베른하르크로 향하는 것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그러면 난 이만 가 볼게. 갈 길이 바빠서."

그렇게 루나가 베른하르크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아, 잠깐."

"왜?"

"언제 시간이 된다면 겨울성에 한번 들르게. 이번 일에 대한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생명의 은인이라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본래였다면 저런 수상한 자를 겨울성에 초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에드릭은 어째서인지 그렇게 했다.

"겨울성?"

루나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그러고 보니....'

만약 카인이 이미 베른하르크를 떠났다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루나와 길이 엇갈릴 수도 있는 상황.

만약 베른하르크에서 카인을 찾지 못한다면 원래의 계획대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들을 찾아봐야 한다.

예를 들면... 마경이라든지.

"알았어. 시간 되면 언제 한번 들를게."

"기다리겠네."

그렇게 루나는 사라졌다.

처음 왔을 때 그랬듯이.

마치 신기루처럼.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릭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 속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년 한번 더럽게 꼬였군.

에드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71화 쇼핑

베른하르크 임무에서 복귀한 후.

에드릭이 여전히 부재중인 탓에 한동안 우리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겨울성에 불청객이 찾아온 지도 어느덧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일전에 데니스로부터 얻었던 물건들이 하나둘씩 팔려 나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소리다.

'한번 확인해 볼까.'

그동안 베른하르크에서의 임무로 워낙 바빴던 터라 채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지금쯤이면 경매장에 올려 두었던 물건들이 하나둘씩 팔렸을 터.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상당한 금액이었으니 기대를 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경매장에 접속합니다.]

경매장에 접속하기 무섭게 완료된 경매 목록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바쿰바라 가죽 갑옷'을 판매하였습니다.]

[입찰된 금액, '71골드(제국 금화 71개)'가 전송됩니다.]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바쿰바라 가죽 망토'을 판매하였습니다.]

[입찰된 금액, '60골드(제국 금화 60개)'가 전송됩니다.]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바쿰바라 가죽 갑옷'을 판매하였습니다.]

[입찰된 금액, '68골드(제국 금화 68개)'가 전송됩니다.]

.

.

.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스바이쿤 힘줄 장갑'을 판매하였습니다.]

[입찰된 금액, '38골드(제국 금화 38개)'가 전송됩니다.]

순식간에 쌓여 가는 금화들.

'호오....'

예상했던 대로라고 해야 할까.

객관적으로 꽤 괜찮은 가격에 올려 둔 덕분인지 대부분의 물건들이 팔려 나갔고, 순식간에 나는 900골드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미처 팔리지 않은 나머지 아이템들이 전부 팔린다면 1,000골드까지도 넘볼 수 있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 정도면 경매장에서 꽤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겠는데?'

카인의 기준에서 봐도 900골드는 절대로 작은 액수가 아니다.

이전에 누군가 말했듯이, 공정의 세계에서 1골드가 약 백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친다면 무려 9억에 달하는 금액인 셈.

물론 그렇다고 해서 900골드로 카인 수준에 맞는 장비를 구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차고도 넘치는 금액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

900골드를 한 번에 사용해서 최상급의 장비 하나를 마련하느냐, 아니면 전체적인 아이템 세팅을 조금씩 손보느냐.

효율 면에서 본다면 당연히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좋다.

아이템의 금액 대비 효율이라는 건 결국 스펙이 오르면 오를수록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지금 내 수준에서는 900골드로 전체적인 장비를 조금씩 바꾸는 게 단기적으로는 훨씬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장비를 세팅해도, 결국에는 그 장비들은 본질적으로 '임시 장비'라는 점이다.

언젠가 바꿔야만 하는 장비.

반면, 한 번에 900골드를 투자해서 장비 하나를 마련한다면 그 장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주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될 것이다.

두 가지 선택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다는 이야기.

'일단 매물부터 볼까.'

나는 당장의 선택을 미뤄 두었다.

아이템 세팅 선택은 경매장에 있는 매물 상태에 따라서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만약 900골드 정도에 괜찮은 매물이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그걸 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디 보자....'

나는 빠르게 경매장에 있는 장비들을 훑었다.

'이건 괜찮군. 오... 이것도 꽤 괜찮은데? 이것들로 세팅하면 생각보다 예산이 적게 들 수도 있겠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 아이템들을 간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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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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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154

[경매 품목]

◆칼날 흑까마귀 망토

[최저 입찰 가능 금액]

◆700골드

[현재 입찰 목록]

◆855골드(제국 금화 855개)

◆831골드(제국 금화 831개)

◆799골드(제국 금화 7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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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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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975

[경매 품목]

◆오리할콘 징 건틀릿

[최저 입찰 가능 금액]

◆200골드

[현재 입찰 목록]

◆205골드(제국 금화 201개)

◆203골드(제국 금화 20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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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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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976

[경매 품목]

◆오리할콘 징 부츠

[최저 입찰 가능 금액]

◆210골드

[현재 입찰 목록]

◆211골드(제국 금화 21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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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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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977

[경매 품목]

◆오리할콘 징 메일

[최저 입찰 가능 금액]

◆400골드

[현재 입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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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찾아보면 이것 외에도 있겠으나, 일단 지금까지 찾아본 바로는 이 정도가 괜찮아 보였다.

'칼날 흑까마귀 망토와 오리할콘 장비라.... 생각보다 괜찮은 매물들이 올라와 있어.'

이 정도면 굳이 더 찾아보지 않고서 이 중에서 바로 골라도 될 정도.

'문제는 칼날 흑까마귀 망토와 오리할콘 장비 중에서 뭘 고르느냐인데....'

마음 같아서는 전부 구매하면 좋겠지만, 지금 내가 가진 돈으로는 칼날 흑까마귀 망토와 오리할콘 장비 3종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를 수 있다.

'칼날 흑까마귀 망토는 비싸지만, 지금 사 두면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야.'

비록 카인이 사용하던 장비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그 밑밑 단계 정도는 된다고 해야 할까?

경매장에서 이 정도 수준이라면 사실상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마지노선의 장비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오리할콘 징 장비들도 꽤 괜찮은 수준이야.'

비록 객관적인 장비의 수준 자체는 칼날 흑까마귀 망토보다 떨어지지만, 부분적으로나마 무려 오리할콘이 징으로 박혀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강점이었다.

오리할콘이 무엇인가?

파괴가 거의 불가능한 물질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이용해서 만든 무기는 전설 속 무구 취급을 받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초금속이다.

그런 오리할콘이 일부나마 박혀 있다는 것 자체로 장비의 가치나 강도가 어마어마하게 상승한다.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도 꽤 괜찮은 것들이지만, 오리할콘 징 장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당장 장비 세팅을 바꾼다고 했을 때, 효율 면에서 앞서는 건 역시 오리할콘 장비겠지.'

같은 돈으로 장비 하나를 바꾸는 것과 세 개를 바꾸는 것.

아무리 장비의 수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장비 개수에서 앞서는 오리할콘 장비들 쪽이 효율 면에서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관점에서일 뿐이야. 장기적으로 보면 더 오래 사용할 칼날 흑까마귀 망토를 구매하는 게 이득이다.'

무엇보다도 저 정도의 매물이 저 정도의 합리적인 가격에 언제 다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때로 어떤 물건들은 매물이 워낙 적어서 시세에 비해서 월등히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는 하니까.

'현재 입찰이 된 가격을 보면 내가 구매하지 않으면 곧 팔리겠지.'

그만큼 공급에 비해서 수요가 많은 매력적인 매물이었다.

'흐음....'

고민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두 가지 선택지 모두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장기적인 선택이냐.

단기적인 결단이냐.

마침내 답이 정해졌다.

[입찰을 완료하였습니다.]

[입찰 품목 ? 칼날 흑까마귀 망토]

[입찰 금액 - 860골드(제국 금화 860개)]

내 선택은 칼날 흑까마귀 망토였다.

지금 당장은 오리할콘 징 장비를 구매하는 게 더 효율이 좋겠지만, 결국 그것들은 임시 장비라는 게 중요했다.

'물론 어떤 의미로는 칼날 흑까마귀 망토도 임시 장비라 볼 수도 있겠지만... 이것 이상의 장비를 구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칼날 흑까마귀 망토는 좋은 매물이었고, 내 기준에 조금 못 미칠 뿐이지 어지간한 유저들은 바로 종결 장비로 사용해도 될 정도였다.

'이제 남은 건 입찰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나보다 먼저 입찰해 있던 이들이 과연 순순히 입찰을 포기할지 여부였다.

'그러지는 않겠지.'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경매장에 올라와 있는 칼날 흑까마귀 망토는 꽤 합리적인 입찰 가격을 유지 중이다.

즉,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합리적인 가격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

거기다가 칼날 흑까마귀 망토 자체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 매물이 나올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여러모로 가격 경쟁이 붙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다른 입찰자들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고서 입찰 경쟁에 끼어들었다.

나 또한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기에 곧장 레이스를 따라붙었다.

[입찰을 완료하였습니다.]

[입찰 품목 ? 칼날 흑까마귀 망토]

[입찰 금액 - 870골드(제국 금화 87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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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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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을 완료하였습니다.]

[입찰 품목 ? 칼날 흑까마귀 망토]

[입찰 금액 - 880골드(제국 금화 88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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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을 완료하였습니다.]

[입찰 품목 ? 칼날 흑까마귀 망토]

[입찰 금액 - 890골드(제국 금화 890개)]

그렇게 치열한 입찰 경쟁을 이어 나가다 보니, 어느덧 경매 종료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나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마지막 입찰가에 얼마를 써 놓을지.

'지금까지 상대는 입찰 금액에서 5골드씩만 올려 왔다.'

'만약 다른 경쟁자를 따돌릴 생각이었다면 한 번에 가격을 올리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어. 자본에 여유가 없거나, 이 아이템에 그 정도로 돈을 쓸 생각이 없는 거다.'

'그렇다면....'

이윽고 내려진 결론.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지금 내가 상대에게 보여 주어야 할 스탠스는 한 번에 크게 금액을 올리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스탠스를 계속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함부로 읽을 수 없도록.

또한, 상대로 하여금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도록.

[입찰을 완료하였습니다.]

[입찰 품목 ? 칼날 흑까마귀 망토]

[입찰 금액 - 915골드(제국 금화 915개)]

그렇게 최종적으로 내가 입찰한 금액은 915골드.

그리고, 입찰이 끝나기 무섭게 경매가 종료됐다.

[경매가 종료되었습니다.]

['칼날 흑까마귀 망토'를 낙찰 받으셨습니다.]

[입찰된 물품, '칼날 흑까마귀 망토'가 전송됩니다.]

결과는 내 승리.

만약 상대가 조금만 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면 나로서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이 정도의 금액은 상대에게도 부담이 됐던 모양이었다.

915골드라는 금액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예산을 초과해 버린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돈이라는 건 모름지기 제때 사용해야 그 가치를 다하는 것이다.

비록 그 탓에 이번에 익명999에게서 얻은 물건들을 모두 판 돈과 더불어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모두 탕진했지만, 돈이야 또 벌면 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면... 한번 확인해 볼까.'

나는 칼날 흑까마귀 망토의 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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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흑까마귀 망토]

분류 : 망토

등급 : 영웅

말라카스 산맥의 천공에 군림하는 지배자, 칼날 흑까마귀의 깃털을 엮어서 만든 망토.

칼날 흑까마귀 깃털의 특수한 성질로 인해서 보온성과 통풍성이 매우 뛰어나다.

칼날 깃털에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하는 날카로움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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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앞으로

'역시 훌륭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칼날 흑까마귀 망토는 방어구로서 기본적인 방어력뿐만 아니라, 의류로서 보온성과 통풍성 등 모든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기능성이 있다.

또한, 칼날 흑까마귀의 깃털이 지닌 특유의 강도와 날카로움은 상황에 따라서 공격용으로도 사용이 가능할 정도.

'거기다가 칼날 흑까마귀 망토에는 숨겨진 기능이 하나 더 있지.'

칼날 흑까마귀는 말라카스 산맥의 천공에 군림하는 지배자답게 그 깃털을 그러모아 만든 망토에도 하늘을 누빌 수 있는 자유가 일부 허락된다.

일시적인 비행 효과 말이다.

물론 정말로 자유자재로 하늘을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일종의 윙슈트처럼 낙하 속도와 방향을 일부 조절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었다.

비록 그 사용법과 조건이 은근히 까다로워서 비행 기능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내가 칼날 흑까마귀 망토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괜히 비싼 게 아니라는 소리.

여러모로 이번 쇼핑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험해 보고 싶지만... 이런 눈에 띄는 능력을 아무 곳에서나 쓸 수는 없겠지.'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절벽 위에서 떨어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건 그렇고....'

전 재산을 털어서 칼날 흑까마귀 망토까지 마련하고 나니, 나는 슬슬 때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성으로 복귀한 뒤로부터 쭉 해 왔던 생각을 마침내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할까?

멸망룡이 사라진 이후, 라크나 대륙은 혼란스러운 정세를 거치고 있다.

얼마 전에 나타났던 업화의 마법사부터 제국과 베른하르크를 향해서 흉계를 꾸미고 있는 하노버와 연합, 그 외 유저들과 관련된 여러 분란까지.

다만, 그것들은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는 일의 규모나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했을 때, 대비보다는 대응이 어울리는 일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서 말했듯이 강해지는 것이었다.

'이 정도까지 준비가 되었으면 슬슬 마경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어.'

내가 무수한 기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겨울성에 남아 있는 건 탈영으로 인한 불필요한 수배자 신세를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겨울성에 아직 볼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성은 기본적으로 공정의 세계 시절에서도 상당한 고레벨 지역으로 분류되고,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마경은 그조차도 넘어선 지역으로 분류된다.

특히 모두가 알고 있듯이 겨울성 북쪽의 마경 안에는 온갖 종류의 마수들이 살고 있다.

그중에는 지금 나에게 있어서 최우선 목표라고 볼 수 있는 변종과 더불어서 칼날 흑까마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재를 지닌 마수들도 얼마든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 중 최우선 과제가 승천석 파편을 찾는 것과 강해지는 것임을 감안했을 때, 마경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져다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이야기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가치가 있지.'

마경으로 향해야 할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관점에 따라서 이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경에는 예전에 내가 만들어 놓은 임시 창고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공정의 세계 시절 나는 상당한 재력가였다.

물론 그 재력의 대부분은 멸망룡과의 일전에서 소진하기는 했으나,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모든 재산을 소진한 건 아니었다.

임시 창고가 그중 하나였다.

일전에 말했듯이 공정의 세계 시절 나는 플레이 스타일상 적이 꽤 많았다.

실제로 나를 죽이려고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당연히 내가 순순히 죽어 줄 리는 없었으니 나는 불청객들이 찾아오는 족족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나 소지하고 있던 아이템들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는데, 그 탓에 내 창고는 늘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꽉 차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들을 일일이 경매장에 올려서 팔거나 했지만, 그것도 물량이 점점 늘어나게 되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 바로 임시 창고였다.

말하자면 임시 창고는 버리기에는 조금 아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쓰기에는 애매한 것들을 대충 모아 놓은 창고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안정성이 보장되는 정식 창고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유저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장소를 엄선해서 보안에 신경을 써 만든 덕분에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임시 창고가 털린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예전 이야기지만.'

세상에 절대로 뚫리지 않는 금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 또한 임시 창고 중 하나의 위치를 마경으로 정한 거지만, 그 임시 창고가 지금도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멸망룡이 사라진 뒤, 마냥 낙관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으니까.

'뭐, 설사 임시 창고가 무사하다고 하더라도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다름 아닌 바로 내 휴가를 허락해 줄 지휘관이 현재 부재중이라는 점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제4 특무대는 여러 가지로 지휘 체계가 이상한 점이 있어서, 에드릭의 직속상관이 누구인지 아는 이가 없었다.

막연히 특무대 자체가 크로이츠의 성주인 변경백의 직속부대가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

그렇다고 해서 일개 병사인 내가 성주에게 직접 가서 휴가 허락을 받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이대로 에드릭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제4 특무대에 새로운 지휘관이 오거나, 편제가 바뀌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지휘관이 바뀐다면 에드릭처럼 자율성을 보장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에드릭이 약속했던 휴가를 순순히 보내 줄지도 알 수 없었고.

나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그 순간.

"음?"

"아."

너무나도 익숙한 인기척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여어, 잘들 지냈나?"

에드릭이 돌아왔다.

* * *

에드릭이라는 인물은 여러모로 의문점이 많은 인물이다.

일단은 겨울성의 군인으로서 속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막상 평소의 행실이나 생활을 보면 그것에 얽매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성에 있어 주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더해서 나조차도 아직 에드릭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에드릭은 감추는 게 많았다.

여러모로 수상쩍은 인물.

그게 바로 에드릭이라는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에드릭이 죽었을 거라는 추측은 나에게 있어서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막상 에드릭이 살아서 그 뻔뻔한 얼굴을 들이미니, 왜인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로 전우나 동료가 살아 돌아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함께 지낸 시간이 조금 길긴 했던 모양이었다.

"하하! 대장! 역시 안 죽었군!"

"흥, 역시 살아 있었나."

"돌아오셨군요."

제4 특무대원들이 에드릭을 반겼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내심 에드릭의 귀환을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다들 잘 지냈나? 내가 없는 동안 훈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군."

"쓸데없는 걱정은.... 가끔 보면 우리 대장은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안달이라니, 누가 보면 오해를 할 소리를 하는군. 나는 지휘관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뿐이네."

"예이예이."

콘란과 에드릭이 서로를 보면서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에드릭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잘 지냈나?"

"살아 계셨군요."

"하하, 말하는 싸가지는 여전하군. 돌아와서 기쁘다는 말로 알아듣겠네."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으나, 그 목소리는 어딘가 조금 힘이 빠져 있었다.

한때 철인(鐵人)이 아닐까 생각했던 에드릭은 지금 누가 봐도 지쳐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응? 아아, 그리 신경 쓸 것 없네. 잘 마무리되었거든, 일단은."

"그런 것치고는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웃으며 말하고 있기는 했으나, 에드릭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외투로 꽁꽁 감춰 놓은 옷 안에서 살며시 풍겨 오는 피 냄새는 필시 에드릭의 것이겠지.

만약 남의 것이었다면 진작 피 냄새를 지우고 왔을 테니 말이다.

"눈치챘나?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 쓴 건데... 역시 티가 나긴 했나 보군."

"다친 겁니까?"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웃으면서 자네들을 찾아오지도 못했겠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평소였다면 나도 이쯤에서 적당히 넘어갔을 것이다.

어차피 묻는다고 해서 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괜히 수상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알아야겠다.

에드릭이 감추고 있는 게 뭔지.

그리고 지금 겨울성을 비롯한 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잘 마무리되었다고."

"그 과정을 묻는 겁니다."

에드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벨, 나는 자네 같은 유능한 인재를 부하로 두게 된 걸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자네의 손을 빌릴 수는 없네."

"정말로 대장님 개인의 일입니까? 겨울성과 제국의 일이 아니라요?"

겨울성을 언급한 게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에드릭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동요.

도대체 에드릭에게 있어서 겨울성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꽤 효과가 있었던 듯했다.

"자네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 자네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건 아직 자네가 감당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네."

"저 또한 겨울성의 병사 아닙니까?"

"어설픈 각오로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짐이 될 걸세. 나는 자네들에게 그런 짐을 짊어지게 할 생각은 없어."

"각오한 바입니다."

"그건 자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닐세."

에드릭의 시선이 제4 특무대원들을 향했다.

콘란, 알비노, 알리시아.

모두가 숨을 죽인 채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우리는 같은 전우 아니요? 그렇다면 우리를 빼놓으면 안 되지."

"동감이다."

"벨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갈 거예요."

한마디씩 보태는 제4 특무대원들의 모습에 에드릭은 잠시 허허 웃었다.

"이것 참... 곤란한 부하들이군."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었수?"

"그것도 그렇군."

에드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들은 혹시 황혼 악단이라는 자들을 알고 있나?"

처음 에드릭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살짝 흔들릴 뻔한 것을 느꼈다.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황혼 악단? 그게 뭡니까?"

"나도 그런 건 처음 듣는군."

"저도 들어 본 적 없어요."

특무대원들의 말에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 또한 최근에서야 들은 이름이니. 최근 그 작자들이 겨울성을 노리고 있네. 일전에 토벌했던 업화의 마법사 기억하나? 그 마법사 또한 황혼 악단의 일원이었지."

업화의 마법사의 정체가 복마전 소속이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황혼 악단이었다니....

"그렇다면 블레이크 남작을 죽인 것도 황혼 악단입니까?"

"아니, 남작은 내가 죽였네."

너무나도 덤덤한 그 선언에 주변에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73화 마경으로

"허어...."

"제국 귀족을 죽였다라.... 역시 보통 양반은 아니었군."

설마하니 귀족 살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줄지는 몰랐다.

저게 우리를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그 사실을 에드릭이 순순히 말해 주었다는 건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에드릭을 보며 물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감히 겨울성을 상대로 잔재주를 부렸으니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평소와 같은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렇기에 알 것 같았다.

에드릭이 어째서 우리에게 귀족 살해라는 대사건을 순순히 말해 주었는지.

'고작 이 정도도 각오하지 못할 거라면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거겠지.'

아마 이는 에드릭의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그 이상 알려고 한다면 귀족 살해 따위는 가볍게 느껴지는 일을 감당해야 할 거라는.

"그렇다면 이번에 대장님이 갑자기 자리를 비운 이유도 황혼 악단 때문입니까?"

"정녕 대답을 듣기로 정한 건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특히, 황혼 악단과 관련이 된 것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런가."

내 말에서 어떤 진심을 느낀 건지 에드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도 같은 생각이겠지?"

"더 말해서 뭐 합니까?"

"하긴."

언제나 같은 콘란의 당당한 말에 에드릭이 옅게 웃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베른하르크에서부터 우리 주위를 맴도는 자가 있었네."

"베른하르크에서부터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때부터 눈치를 챘다고 보는 게 옳겠군. 원래였다면 나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뇌명의 마법사가 나타났을 때 방심했는지 존재를 드러내더군."

그렇다면 에드릭은 그때부터 불청객의 존재를 알고서 따로 유인했다는 뜻이었다.

"그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도망쳤네. 운이 좋았지."

죽이지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황혼 악단을 마주하고서 에드릭이 생환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에드릭의 숨겨 둔 한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아는 황혼 악단은 절대로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황혼 악단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유감스럽게도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네. 하지만 제국과 겨울성을 노리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이더군."

"그건 아쉽군요."

"혹시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마주했던 황혼 악단의 목적은 잠들어 있었던 멸망룡을 깨우고 멸망룡과 함께 라크나 대륙을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멸망룡이 사라진 데다가 사실상 궤멸 수준이었던 황혼 악단의 목적이 무엇인가?

지금 나는 알 수 없었다.

"역시 그런가...."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아, 한 가지 있네."

에드릭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베른하르크에서 우리를 미행하던 이를 마주했을 때, 그가 자신을 황혼 악단의 퍼커션을 맡고 있는 데미안이라고 소개하더군."

"데미안... 말입니까?"

"그렇다네."

황혼 악단에 대해서라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물론 에드릭에게 밝힌 이름이 가명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지만, 앞서서 에드릭이 운이 좋았다고 말한 것을 비추었을 때 가명일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혹시 아는 이인가?"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가.... 하긴, 그렇겠지."

물론 단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데미안이라는 이름은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데미안이 내세운 섹션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퍼커션(Percussion)이라....'

퍼커션은 악단에서 팀파니, 드럼, 탬버린, 심벌즈 같은 타악기 섹션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포지션은 황혼 악단 내에서 어떤 직책과 역할을 맡았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황혼 악단.

멸망이라는 곡을 황혼이 찾아올 때까지 연주하는 자들.

'악단 내에서 퍼커션은 연주하는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들이다. 즉, 이전에는 활동하지 않았다가 최근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했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내가 데미안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황혼 악단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이전에 궤멸시킨 줄 알았던 황혼 악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서 모종의 목적을 지니고서 움직이고 있다니....

한때 멸망룡을 비롯한 황혼 악단과 모든 걸 걸고서 부딪쳤던 나로서는 잊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황혼 악단의 존재는 나로서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문제였다.

특히 놈들이 이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말이다.

"일단 내가 말해야 할 건 전부 말한 것 같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나는 황혼 악단의 존재에 대해서 변경백께 직접 말씀드릴 생각이네."

"변경백님께요?"

"이상한 놈들이 겨울성을 노리고 있는데 눈 뜨고 당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에드릭 또한 황혼 악단의 위험성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벌써 황혼 악단의 일원과 두 번이나 마주쳤으니.'

비록 데미안이라는 자는 아직 내가 본 적이 없으나, 에드릭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정도인 것을 보면 일전에 상대했던 업화의 마법사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황혼 악단원들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고.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아무래도 할 일이 많을 것 같군."

"아, 그 전에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일전에 받았던 휴가, 지금 사용하고 싶습니다."

"이런 시기에 말인가?"

"이런 시기이기에 더욱더 말씀드리는 겁니다."

에드릭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진심이군. 하지만 괜찮겠나? 지금 겨울성 밖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할 수도 있어. 나로서는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휴가를 미루는 걸 권하고 싶네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끙...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나도 더 말할 수는 없겠군. 휴가 행선지는 정해졌나?"

"마경으로 갈 생각입니다."

"...뭐?"

에드릭이 뜨악했다.

"따뜻한 휴가를 보내기에 그리 적절하지 않은 장소로 보이네만...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허어."

에드릭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유는 묻지 않겠네. 자네니까 다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무사히 돌아오게. 그것만은 약속해 주었으면 하네."

"살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하하, 대답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 휴가증은 바로 발급해 주지. 언제 출발할 건가?"

"내일 새벽에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렇군. 알겠네."

에드릭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 말했듯이 할 일이 제법 많았는지 바쁜 발걸음이었다.

그렇게 에드릭과의 대화가 끝난 뒤 살며시 뒤를 돌아보자 다른 특무대원들이 마찬가지로 뜨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휴가를 간다는 것도 놀라운데, 마경이라.... 역시 너로군. 죽어서 시체로 돌아올 생각은 아니겠지?"

"갑자기 마경에는 무슨 볼일로 가는 거지? 그냥 갈 만한 곳이 아닐 텐데?"

콘란과 알비노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만큼 내 휴가지 선택은 일반적인 선택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었다.

"시체로 돌아올 생각은 없으니 염려 마라. 그리고 마경에 가는 이유는... 얻어야 할 게 있다고 해 두지."

"얻어야 할 것?"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갔다 오면 말해 주지."

"...그런가. 알았다. 네놈 정도의 마법사가 하는 일이라면 의미가 있겠지."

알비노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 저도 같이 갈게요."

나와 마찬가지로 휴가를 받은 알리시아는 곧장 나를 따라오겠다 말했다.

얼핏 보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동료가 있다면 마경에서 상당히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전력상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야전에서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수면에 대한 문제 역시도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이번에는 나 혼자 간다."

"...어째서요?"

앞서 말했듯이, 마경 같은 극한의 장소에서 동료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동료의 존재로 인해서 내가 마경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면 주객전도나 다름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에 내가 마경으로 향하는 목적을 생각했을 때, 동료의 존재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컸다.

'마경은 위험하니 남으라는 적당한 말로는 포기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알리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은 냉정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마경은 위험한 곳이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도 너를 챙겨 주지 못해."

"챙겨 줄 필요 없어요.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하지만 마경에서는 달라."

알리시아는 마경을 모른다.

아무리 우리가 마경을 가 본 적이 있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외곽 지역을 살짝 들렀다 나온 것에 불과하다.

진짜 마경은 그것과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끈적한 곳이다.

보통 사람은 들어가는 순간 공포로 인해서 미쳐 버릴 정도로.

"지금 네 수준으로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거다."

"방해... 요?"

"그래."

알리시아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내지었다.

"중간에 방해가 된다면 버리고 가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알리시아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호의를 품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소모품 버리듯이 버리고 갈 수가 있겠는가?

"억지로 따라와 봤자 괜히 우리 둘만 위험해질 거다. 그러니 이번에는 겨울성에 남아 있어. 다음에 적당한 기회가 있을 거다."

"그런, 하지만...!"

알리시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알리시아."

나는 이런 때에 따뜻한 위로 같은 것을 건네는 법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겨울성에 남은 알리시아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말해 줄 수 있었다.

"강해져라. 언젠가 방해가 아닌 도움이 되도록."

"정말로, 혼자 갈 건가요?"

"그래."

"저를 데려가지 않는 건... 제가 도움이 되지 않아서고요?"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알리시아의 가느다란 숨결이 떨렸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 말들을 토해 내고 있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알았어요."

알리시아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 대신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강해질게요, 언젠가 벨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래, 기다리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알리시아는 마치 악마와의 계약을 선언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한 결연한 분위기 속,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콘란이 슬쩍 한마디 했다.

"아주 지랄들을 하는군."

"동감이다."

그와 함께 알리시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콘란과 알비노를 향했으나, 그들은 짐짓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식사 메뉴가 뭐였더라...."

"스튜잖나, 그 고기 몇 점 들어 있지도 않은 희멀건 스튜."

"아아, 그랬지."

그렇게 콘란과 알비노가 도망치듯이 숙소를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리시아 또한 훈련복을 가지고서 숙소를 나섰다.

알리시아가 무얼 하러 숙소를 나섰는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홀로 남은 숙소에서 나 또한 곧장 움직였다.

마경에 가기 위해서 해야 할 준비가 무척이나 많았다.

74화 마경으로 (2)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衣食住)부터 시작해서 유사시에 쓸 약이나 붕대 같은 의료 물품과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 등, 필요한 것만 나열해도 양피지 몇 장은 꽉꽉 채울 수 있을 정도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만 해도 그 정도인데, 하물며 장소가 마경이라 한다면 자연스레 필요한 물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지금 내가 준비를 해도 해도 모자란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역시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필요한 건 많지만, 오히려 짐이 너무 늘어나면 은밀하게 이동해야 할 때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어. 식량과 물 또한 최대한 간소화해서 마경 내에서 자급자족하는 걸 전제로 한다면....'

그렇게 짐 몇 가지를 풀었다가 쌌다를 반복하기를 몇 시간째.

나는 마침내 마경 내에서 생존하기에 최적화된 짐을 꾸릴 수 있었다.

배낭 한 개에 전부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간소화한 짐이었다.

마경의 특성상, 괜히 짐을 많이 꾸려 가 봤자 기동성과 은밀성에 제약이 생겨서 버려야 할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컸기에 처음부터 최대한 간추린 것이었다.

"음음, 훌륭해."

그야말로 완벽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잘 꾸린 배낭을 보니 오늘만큼은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드릭이 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들린 휴가증을 보니, 저걸 건네주러 직접 온 모양이었다.

"준비는 다 됐나?"

"예. 완벽히요."

"마경을 앞에 두고서 자네가 그렇게 자신할 정도라니 궁금하지만, 굳이 잘 싼 배낭을 풀어 보지는 않겠네."

"그것참 감사하네요."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다면 곧장 돌아오게. 휴가 일자는 보존해 줄 테니 혹여라도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럴 겁니다. 저도 제 목숨은 귀하게 여기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러면 오늘은 이만 쉬게. 휴가증은 여기 있네."

나는 에드릭의 인장이 찍힌 휴가증을 받아 들었다.

[휴가증]

[휴가자 : 제4 특무대원 벨 블랙우드]

[휴가 기한 : 출타한 날짜로부터 한 달]

[지휘관 : 제4 특무대장 에드릭]

휴가 기한이 무려 한 달이라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무식한 휴가 기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이 세계 자체가 이동 수단이 그리 많이 발전한 세계가 아님을 생각한다면, 만약 병사가 고향이라도 한번 간다고 치면 며칠 정도의 휴가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인 휴가의 단위가 이렇게 길 수밖에.

'뭐... 기한이 그러니 겨울성에서 휴가 한 번 받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겠지만.'

당장 내가 휴가를 받은 계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내일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 * *

새벽이 밝았다.

따로 알람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도 자연스레 눈을 뜬 나는 미리 챙겨 두었던 배낭을 멨다.

그렇게 내가 출발할 준비를 마치자, 침상 한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는 건가요?"

알리시아였다.

"깨웠나. 미안한데."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알리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하나만 약속해 줘요, 반드시 돌아온다고."

"뭐 그 정도야."

그런 당연한 걸 굳이 약속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알리시아는 단호했다.

"약속해 줘요."

"약속하지."

그제야 알리시아는 만족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요."

왜일까.

막사를 나서는 내내 잘 다녀오라는 알리시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 * *

이른 새벽이라서 그런지 남쪽 성문에는 평소에 보던 경비조장 대신 다른 경비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휴가증 확인되었습니다. 통과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빠르게 남쪽 성문을 통과한 나는 곧장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경과의 거리는 당연히 북쪽 성문을 통해서 가는 게 가까웠지만, 북쪽 성문은 늘 마수들과의 크고 작은 교전이 일어나고 있는 터라 사실상 성문 본래의 기능인 입구나 출구로서의 기능으로 보기보다는 전장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오늘 안에 마경 안까지 들어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당연한 이야기지만 따로 말은 가져오지 않았다.

제아무리 잘 훈련된 군마라 할지라도 마수를 향한 두려움을 극복한 군마는 흔치 않을뿐더러, 설사 두려움을 극복했다 한들 마경 안부터는 철저하게 혼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마경까지 가는 동안 믿을 수 있는 건 튼튼한 내 두 다리뿐이었다.

북부의 풍경은 언제나처럼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워낙 챙겨 입고 있는 방한 장비들이 든든한 데다가 업화의 송곳니까지 있으니 딱히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원 위에 발 디딜 때마다 소리가 눈 속으로 파묻혔다. 그에 질세라 나무들도 눈에 파묻힌 채로 푸드득거리며 가끔씩 삐걱거리기도 했다.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눈이 삑삑거리며 발소리가 퍼져 나갔다. 작은 눈덩이가 발바닥 아래에서 구르며 얼음결에 부딪혔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풍경 속에서 나는 설원을 나아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 * *

많은 이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실 마경의 경계는 마수들의 영역이 시작되는 장소부터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이제 막 마경의 초입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었다.

마수 영역 특유의 악취와 분위기를 내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나절 넘게 부지런히 걸은 보람이 있었다.

'굳이 벌써 마수들과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겠지.'

내가 이번에 마경을 찾은 이유는 변종 사냥과 더불어서 임시 창고 찾기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괜히 마경 초입부터 영양가 없는 마수들과 전투를 치러 봤자 그 부산물들을 내가 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곳에서의 전투는 나에게 있어서 손해뿐이었다.

'물론 전투 기술이나 능력치 향상 같은 걸 노려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마경 안에 들어가서 하면 돼. 마경 초입에 있는 저급한 마수들은 시간만 낭비할 뿐이야.'

그렇기에 나는 마수들의 영역 간의 경계를 따라서 나아갔다.

마수들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수 영역 간의 경계는 마경 내에서도 비교적 안전한 장소로 꼽힌다.

공정의 세계에서 마경을 제집 안방처럼 누비는 이들은 바로 그 마수 영역 간의 경계를 길로 삼아서 마경을 누비곤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

그토록 익숙한 마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경에 진입함에 있어서 함부로 긴장을 놓지 않았다.

'마수들의 영역은 일정하지 않아. 마경 내의 생태계에 변화가 생겼거나 새로운 포식자가 등장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물론 얼마 전에 특무대원들과 함께 마경을 찾았을 때는 내가 알고 있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경의 극히 일부일 뿐.

이 넓고 넓은 마경 전체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같을 거라는 생각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나는 최대한 감각을 곤두세운 채로 경계를 나아갔다.

북부 지대가 사방이 눈으로 물든 설원이었다면, 마경은 끝도 없이 펼쳐진 수해(樹海)라고 볼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그 어떤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자라난 채로 마경 안을 천혜의 미로로 만들었다.

마경의 특수한 파장으로 인해서 나침반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곳에서 길을 찾는 방법은 이곳의 주인인 마수들의 흔적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수들이 남긴 발자국.

마수들이 남긴 분비물.

마수들이 남긴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마경 내에서 길을 찾게 해 주는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그 흔적들을 따라서 걷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새로운 마수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슬슬 라듄의 영역이군.'

라듄은 거대 파충류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무리형 마수로, 개체 간 차이는 있어도 평균적으로 4레벨에서 5레벨 사이의 마수다.

일전에 아이추웡과의 전투에서 콜트 패리슨이 라듄의 가죽을 가공한 방어구를 뚫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바가 있었으니 괜히 라듄의 영역 내에서 전투를 벌여 봤자 나에게 좋을 건 없었다.

'후각이 예민한 놈들이니 미리 라듄의 배설물을 몸에 발라 두는 게 좋겠어.'

그렇게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라듄의 배설물을 몸에 바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알리시아가 고집을 부려서 이곳까지 따라와서 이렇게 마수 똥을 몸에 덕지덕지 바르게 했다면 어땠을까?

일단은 군말 없이 따르긴 하지만 표정에서 경멸과 후회가 드러나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쓸데없는 생각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지금 내가 조금 풀어져 있긴 한 모양이었다.

꾸루루루!

멀찍이서 들려오는 라듄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새삼스레 이곳이 누구의 영역인지 말해 주는 듯하다.

또한 이는 비로소 마경의 외곽 지역을 넘어서 진정한 마경이라 볼 수 있는 내부까지 들어섰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했다.

'여기부터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해.'

이제까지는 마수 사냥꾼 및 제국 토벌대들도 충분히 헤집어 놓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진정한 의미로 인간이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곳이었다.

진정한 마경.

이제부터는 아주 사소한 실수라 할지라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꾸룩!

꾸루루....

멀찍이서 들려오는 라듄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라듄들이 주로 서식하는 영역 중심부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흠.'

어느덧 사방에 어둠이 내리깔린 걸 보니 슬슬 쉴 만한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낮에도 마찬가지지만, 밤의 마경은 방문자에게 있어서 특히나 불친절했으니까.

'가장 가까운 안전지대는... 대충 한 시간 정도 더 걸으면 도착하겠어.'

기본적으로 마경 내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는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는 몇 군데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안전지대라 불리는 곳으로, 마경 내에 흐르는 특수한 파장과 더불어서 마수들의 영역이 네 곳 이상 겹치는 곳을 가리킨다.

마수 영역이 두 곳만 겹쳐도 경계라 불리며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로 분류될 정도인데, 마경 내에 흐르는 특수한 파장과 네 곳 이상의 마수들의 영역 경계가 합쳐진 안전지대는 마경 내에서 인간이 한숨 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실제로 내 임시 창고도 나만 알고 있는 안전지대 중 하나에 있었고.

물론 제아무리 안전지대라 불린다 한들 마경 내에서 안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생각한다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 순간.

'음?'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라듄의 영역 내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끄루루! 끄루루루!!!]

[끼룩! 끼루룩─!]

지금껏 잠잠하게 제 영역을 지키고 있던 라듄들이 갑작스레 발광하면서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명백한 이상 현상.

'다른 마수가 영역에 침범하기라도 한 건가?'

마수들간의 영역 싸움은 마경 내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할 터.

그렇게 내가 행동 방침을 정하고서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끄루루루!!]

날뛰던 라듄 몇 마리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곧장 달려오기 시작했다.

'쯧.'

아무리 내가 전신에 라듄의 배설물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다 하더라도 라듄은 후각 외에 시각 역시도 뛰어난 마수다.

이미 라듄들이 내가 있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점에서 도주라는 선택지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싸울 수밖에.'

가능하다면 마경 내에서의 전투는 피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전투를 할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마경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마경 내에서 모든 전투를 피할 수는 없다.

마경에 들어온 순간부터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았다.

총기를 사용한다면 소음으로 인해서 영역 내에 있는 라듄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마수들까지 끌어들일 테니, 나로서도 그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비장의 수단을 사용할 셈이었다.

'조금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겠지.'

마(魔)를 가까이하는 자는 언젠가 그 마에 집어삼켜진다.

이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격언과도 같은 말이지만, 지금은 잠시 잊어야 할 때였다.

"약식 계약 선언."

주언이 읊조려지기 무섭게 잠잠하던 업화의 송곳니에서 업화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계약에서 내가 치를 대가는 눈앞에 있는 라듄들의 피륙.

"석권주변적화염(席卷周?的火焰)."

그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게 해 주겠다.

75화 마경으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