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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마경으로 (8)

"안다고요?"

"네. 유명하잖아요. 어제 익명 게시판에 뜬 추천 글 보고 말씀하시는 것 아니에요?"

설마하니 요한이 추천 글을 언급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낯선 세계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과 같은 걸 공유한다는 감각이 왜인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느껴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은 세계에서 온 나의 이해자 중 한 명이라는 걸.

"맞습니다."

"역시.... 저도 그건 봤는데 확실히 재밌긴 하더라고요. 생각해 볼 구석도 많고."

"뉴비 사냥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조금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로.

"어째서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예전에 한번 본 적 있거든요, 뉴비 사냥꾼."

"뉴비 사냥꾼을 봤다고요?"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요한이 뉴비 사냥꾼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니... 나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왠지 느낌이 오더라고요. 아, 저 사람이 그 뉴비 사냥꾼이구나, 하고요."

"어쩌다가 만난 겁니까?"

"만난 건 아니에요. 제가 일방적으로 봤다고 해야 할지.... 도심 한복판이었거든요."

"도심 한복판? 그러면 직접 살해 현장을 목격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뉴비 사냥꾼이라고 확신을 하신 거죠?"

쏟아지는 질문에 요한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는 걸 전부 말씀드리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은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변종 사냥이 끝난 후에 마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 그렇네요.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뉴비 사냥꾼에 대해서는 꽤 관심이 많았거든요. 궁금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고요."

요한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뉴비 사냥꾼은... 소문처럼 그렇게 흉악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요."

"살인자 아닙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참작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상한 말이군요."

"하하, 그러게요. 머릿속에서는 납득됐었는데 막상 내뱉고 보니까 진짜 이상하네요."

요한이 옅게 웃었다.

"언젠가 루크 님께서 뉴비 사냥꾼을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갈까요? 아무래도 시간을 끌면 꽤 위험할 것 같아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요한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말처럼 이제는 정말로 안전지대를 나서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었다.

"가시죠."

침낭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유사시에 곧장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가 안전지대를 벗어나기 무섭게 마경의 수해에서 범상치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쿵─!

쿵! 쿵쿵!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

한두 마리의 마수가 아닌 무수히 많은 마수가 일제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변종이에요. 분명해요."

요한이 긴장을 감추지 않은 채로 어느새 뽑아 든 창을 다잡았다.

쿵! 쿵!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나 또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으며 곧 들이닥칠 마수들을 대비했다.

그리고.

[키에에에엑!]

[크룩! 크루루룩!!!]

일제히 수풀 사이를 헤치고 나온 마수들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조심해요!"

요한이 다급히 외치면서 전신에서 마기의 뱀을 뿜어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

"...어?"

당장이라도 우리를 덮칠 것 같았던 마수들이 마치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우리를 지나쳤다.

"이게 무슨...."

요한은 잠시 얼이 빠진 듯했으나,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정신 차리세요. 지금부터가 진짜입니다."

"네?"

"옵니다."

지금 보인 마수들의 모습은 명백히 비정상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비정상적인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뒤에 있을 터.

[그우우우우──!!!]

그와 함께 들려온 괴성이 마치 천음의 마법처럼 고막을 때렸다.

"으윽!"

"귀 막아!"

나와 요한이 모두 다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요한은 마기로, 나는 물의 보옥의 권능을 이용해서 고막을 보호한 덕분에 다행히 기습으로 청각을 잃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았던 탓에 나와 요한의 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괜찮습니까?"

"예, 예? 아, 네. 일단은요."

"다행이네요. 옵니다."

"네? 아."

콰드드득!!!

눈앞에 있던 거목이 통째로 뽑히다시피 쓰러지며 우리를 덮쳤다.

"피해요!"

요한이 내 앞을 막아서면서 마기의 뱀을 휘감은 창대를 휘둘렀다.

쿠우웅!!!

마기를 휘감은 창대는 단번에 쓰러지는 거목을 쳐 냈고, 곧이어서 우리는 자욱한 흙먼지 사이에서 드러난 변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Lv.6]

[머리 뜯는 바이랩스]

"저놈입니까? 생긴 것 한번 더럽게 생겼네요."

"맞아요, 제가 상대했던 변종이에요."

"그래 보이는군요."

요한의 말마따나 얼마나 변형이 심한지 나조차도 머리 먹는 바이랩스의 종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가 두 개, 팔이 다섯, 다리가 셋인 마수를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크기와 큰 특징을 보았을 때 스바이쿤 아니면 만드레타 같은데.... 문제는 어느 하나로 단정 짓기에는 변형이 너무 심하다는 점이다.'

종(種)이라는 건 본디 아무리 돌연변이 개체라도 본래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마련이건만, 이번 변종은 그러한 흔적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이 심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꿔 말하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변종이 품고 있는 파편의 힘 역시도 범상치 않다는 뜻이겠지.

이제껏 변종 중에서 강한 변종은 자주 보았지만, 이처럼 변형이 심한 변종은 또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저 정도로 변형이 되었다면 설사 어떤 종인지 알아낸다고 해도 기존에 통하던 방법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지.'

괜히 변종을 상대로 어설프게 기존의 상식과 방법을 대입하려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단언컨대, 나는 공정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최초 사냥 업적을 세운 사람일 것이다.

정보가 전혀 없는 마수를 상대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크오오오오오!!!]

머리 뜯는 바이랩스가 우리를 향해서 꼬리인지 촉수인지 모를 것을 휘둘렀다.

"조심해요!"

파아앙!

마기를 두른 요한의 창이 바이랩스의 신체와 부딪치며 사방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진 격돌.

얼핏 보면 백중세로 보이는 전투였으나 격돌이 이어질 때마다 요한의 마기가 뭉텅뭉텅 깎여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자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설프게 끼어들 수는 없었다.

"으윽...!"

요한이 잠시 변종을 상대하는 사이, 나는 빠르게 변종을 분석했다.

'우선, 변형이 많이 되기는 했어도 발전기관이 있는 것으로 봐서 전기와 관련된 공격을 하거나 높은 내성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낙스의 유산 사용은 자제해야겠어.'

'조금 전 음파 공격을 봤을 때, 단순한 포효 정도가 아니었어. 초음파 공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청각 보호를 게을리하면 안 되겠어.'

'하지만 변형이 심한 만큼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 점을 공략하면 가능하겠어.'

공략법이 정해졌다.

화르륵!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은 나는 요한과 치열하게 격돌 중인 변종의 배후로 돌았다.

[그르르...!]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를 변종의 눈 중에서 네 개의 시선이 나를 좇았다.

변종 또한 내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뜻.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기에 오히려 나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언제라도 사냥할 수 있는 연약한 사냥감이라는 듯이 말이다.

'아무튼, 이 마수 놈들은 겉만 보고 판단한다니까.'

물론 그러한 마수들의 본능은 나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였다.

푹!

업화의 송곳니가 변종의 왼쪽 다리를 찔러 들어갔다.

[그우우!]

변종의 시선 중 다수가 나를 향해서 옮겨진다.

츠츳, 츠츠츳!

그와 함께 변종의 촉수 중 하나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치솟기 시작했다.

발전기관의 발현이었다.

"조심해요!"

요한이 다급히 외쳤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예상했던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는 건, 대응책 역시도 확실하게 가졌기에 부린 여유겠지.

그러나 바이랩스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나는 마수 놈들의 꿍꿍이 정도는 손바닥에 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섬전(閃電)'을 전개합니다.]

한 줄기의 전격이 나를 지나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에 따라서 나를 향해 솟구쳤던 전격이 내가 유도한 전격의 길을 따라서 흙바닥에 처박혔다.

같은 전격 속성의 공격이었기에 그리 거창한 방어도 필요 없이 그저 전류의 흐름을 유도해 주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업화의 송곳니는 여전히 바이랩스의 다리에 꽂혀 있었다.

'가능하다면 약식 계약으로 확실하게 끝내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바이랩스의 다리에 꽂힌 업화의 송곳니가 더욱더 깊게 박히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법은 필요 없었다.

그저 업화의 송곳니가 본래 품고 있는 업화에 더해서, 한 가지만 더하면 될 뿐이었으니.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매우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2,5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마(魔)의 대척점에 선 멸망 유예자의 힘이 업화의 송곳니를 매개로 하여 머리 먹는 바이랩스의 다리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절대적인 상성 우위.

모든 것에 대가가 존재하는 공정의 세계에서 절대라는 단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모순인지 생각한다면 멸망 유예자의 힘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그라아아악!!]

순식간에 다리 한쪽이 업화에 집어 삼켜지기 시작한 바이랩스가 발광하면서 전신의 모든 무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요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욱!

마기를 휘감은 창이 바이랩스의 가슴을 찌르고, 창에 휘감긴 마기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바이랩스의 내부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륵, 그르륵...!]

산 채로 다리가 불타고, 내장이 뜯겨 먹히는 끔찍한 경험 속에서는 제아무리 변종이라 할지라도 그리 길게 버티지 못했다.

쿵!

[네임드 마수, '머리 뜯는 바이랩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마(魔)를 응징하였습니다! 마(魔)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마침내 변종이 쓰러지고, 요한 또한 쓰러지다시피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우... 쉽지 않았네요."

숨을 몰아쉰 요한의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줄줄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은 이윽고 마기가 덮으며 추가적인 출혈을 막아 냈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루크 님이 아니었으면 또 놓칠 뻔했어요. 아니면 누워 있는 게 변종이 아니라 저였거나."

요한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건 그렇고....'

마(魔)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다는 게 그냥은 아니었는지, 나는 본래 내가 지니고 있었던 마기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졌음을 느꼈다.

'요한처럼 형상화해서 다루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만약 마기가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어.'

짧은 생각을 마친 뒤, 나는 요한과 함께 변종의 사체 앞에 섰다.

이제 변종의 사체를 손질해서 파편을 비롯한 부산물을 정리해야 할 때였다.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아, 괜찮으시겠어요?"

"예. 자주 해 봤던 거라서."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 변종의 파편을 요한의 손에 넘기는 게 꺼림칙한 것도 있었다.

아무리 요한이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파편이 목적이라는 건 밝힌 상태였으니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바이랩스의 허벅지에 꽂혀 있던 업화의 송곳니를 뽑아 든 나는 그것으로 마치 사슴의 뿔처럼 돋아나 있는 파편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스걱, 스걱....

업화의 송곳니가 품고 있는 고열은 웬만한 명검으로도 자르기 힘든 것을 자르게 해 준다.

그렇기에 손질은 어렵지 않았고, 나는 변종에 박혀 있던 파편을 뽑아 들었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본 변종의 파편 중에서 제일 크겠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

이 거대한 것을 어떻게 하면 6 대 4로 깔끔하게 나누나 잠시 고민을 하고 있던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휘릭!

무언가가 단번에 내 손에 있는 파편을 낚아챈 것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무슨...."

범인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파편을 낚아챈 범인은 다름 아닌 요한의 가슴에서 솟구쳐 나온 마기의 뱀이었으니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어? 아니, 이게 왜 나한테...! 잠깐, 뭔가...!"

요한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 속에서 요한에게서 자라난 마기의 뱀은 멈추지 않고서 그대로 파편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제가, 제가 아니에요! 이건─"

나는 알고 있다.

저건 플레이어가 온전한 방법으로 파편을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저 광경은 마치 마기가 강제로 파편을 씹어서 그 힘을 섭취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막아야 해.'

본능이 경고했다.

지금 당장 저걸 막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 거라고.

그 사실을 느끼기 무섭게 나는 요한에게로 업화의 송곳니를 내던졌다.

쐐애애액!

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업화의 송곳니는 곧이어서 폭주하듯이 뿜어져 나온 막대한 마기에 의해서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도망, 도망쳐요! 더 이상은, 더는... 끄으윽."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요한의 눈동자가 점차 탁하게 물들었다.

마(魔)의 흔적.

악마를 비롯한 몇몇 마의 종복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을 설마하니 인간에게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주여...!"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마기의 위험성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이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내심 생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한 이유는 일종의 기대심 때문이었다.

나는 기대했다.

혹여나 요한 같은 사람이라면, 요한이라면 마기에 의한 침식 또한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내가 그런 기대를 가지게 된 근거 중 하나는 아마 마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모습을 보였던 요한 때문도 있을 것이다.

결국, 틀린 기대였지만.

"...."

이윽고 완전히 어둠으로 물든 요한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걸 과연 바라본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요한?"

이윽고 요한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이기 시작했다.

"하느님의은혜로나는영원한삶을받았다이세상은쓸모없는유혹으로가득차있지만나는믿음으로강하게서있다세상에시련이와도나는주님과함께하며이기고영원한나라에서평화로운생활을즐기리라주님의사랑은내힘과행복의근원이며나의모든행동은주님의 뜻을따르고자하는순종의표현이다."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광기 속에서 나는 느꼈다.

"세상이어둡고죄악으로물들어가도나는주님의빛을향해전진한다주님의말씀이나의길이요나의힘이다유혹이눈앞에있어도주님의은혜와진리를향해걸어가리라이세상의부유와명예는일시적이지만주님의나라에서는영원한행복이기다리고있다나는세상에속하지않고주님을위해살아가는그리스도의신자로서영광스러운길을걸어가리라."

한때 가장 올곧았던 사람조차.

마(魔)를 이겨 낼 수는 없음을.

81화 마경으로 (9)

승천석 파편은 어째서 마(魔)를 품고 있는가.

이제껏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애초에 승천석 파편이 마(魔)의 응집체와도 같은 멸망룡으로부터 비롯된 물건이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석 파편에 대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승천석 파편은 플레이어가 흡수하게 되면 마치 현실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권한을 누릴 수 있다.

익명 게시판, 경매장, 길드 등....

그 권한은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늘어나며, 플레이어에게 점차 강력한 이점을 가져다준다.

그렇기에 누구의 말마따나 승천석 파편을 모으는 건 마치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강력한 길처럼 보였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플레이어는 마(魔)에 노출된다.

마기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큰 힘을 가져다주지만 본질적으로 맹독과도 같다.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는 맹독.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나는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마치 승천석의 존재 자체가 어떤 함정 같군.'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적이고 치밀하게 만들어진, 그런 함정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더 생각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전신에 마기를 휘감은 요한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주의위대함과사랑에감사드립니다주의은혜는무한하고주의섭리는완벽합니다주의권능과지혜에경배를바치며주의성품에마음을놓습니다주여주의사랑은나의힘과희망입니다주와함께한나의삶은은총에넘치며주를찬양하며주의이름을높이고자합니다주여주의인자함과축복이나와모든이에게가득하게하시옵소서아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런 경우에는 광신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

때로 어떤 말들은 그 어떤 마법적 의미도 품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치명적이게 작용하곤 한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요한이 광기에 취해서 읊조리는 말들이 그러했다.

「오, 카인 형. 오늘도 접속하셨네요. 역시 열심히 하시네 ㅋㅋ」

「어떤 보답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런 게 좋아요, 전.」

「그냥, 그냥이요.」

기억 속 과거의 요한과 현재의 요한이 겹쳐진다.

'완전히 마(魔)에 잠식당한 건가.'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터졌다.

이제껏 괜찮아 보였던 요한은 새로운 파편을 흡수하기 무섭게 완전히 마(魔)에 삼켜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껏 마기가 일부러 잠잠하게 있었던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히 파편을 본 순간 마기가 요한의 통제를 벗어나서 움직였어.'

파편의 마기를 본 순간 마기가 순간적으로 폭주한 건지, 아니면 그것을 위해서 지금껏 마기가 의도적으로 잠들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알아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알아내야 할 건 지금 요한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지 없을지였다.

광기에 물든 요한은 지금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이 검게 물든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으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마기는 결코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마치 모든 존재를 적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스....

요한의 전신에서 마기의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넘실댄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해진 마기는 더 이상 마기의 뱀 따위로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뱀에 비유한다면 적어도 마기의 아나콘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쿠득, 쿠드득!

푸스스....

주변에 마기가 넘실거릴 뿐이었건만 인근에 있는 수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비틀어지며 썩어 들어 갔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마경에서 자라는 동식물 자체가 마(魔)에 대해서 상당한 내성이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 제압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요한이 뿜어내고 있는 마기는 절대 심상치 않았고, 싸울 거라면 선공을 취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이미 병기 소환의 세 가지 총기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모두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총기를 아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곧장 손을 뻗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R-74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아낄 필요 없이 나는 현재 내가 소환할 수 있는 병기 중에서 가장 강력한 병기를 소환했다.

괜히 길게 끌 필요 없이 화력전으로 단번에 끝낼 생각이었다.

철컥-

푸른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AKR-74 돌격 소총을 다잡은 나는 그대로 요한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다.

타타탕─!!!

방아쇠가 당겨지기 무섭게 총구가 불꽃을 토해 내며 7.62×39mm 탄을 쏟아 냈다.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현재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3,0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매캐한 화약 연기 속에서 30발짜리 탄창을 전부 비우는 데는 숨 한 번 몰아쉴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쏟아 낸 총알들은 단 하나도 요한의 몸에 닿지 못했다.

고오오오──

마기의 촉수에 박힌 총알들이 그것에 붙들린 채로 부르르 떨다가 멈췄다.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의 운동에너지가 모두 끝나도록 마기를 뚫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멸망 유예자의 힘이 마(魔)를 상대로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성상 아무리 크게 앞선다고 해도, 절대적인 힘의 차이가 그것을 넘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에 대한 답을 지금 내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스윽─

지금껏 잠잠했던 요한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옮겨졌다.

"사, 탄...."

입술이 연신 달싹거렸다.

"사탄은세상을어둡게만들며진리를왜곡한다그의유혹에빠져들지않고주님의말씀을지키며강하게서야한다사탄의속임수에속지말고오직주님의교훈을따라행함으로써영원한삶을얻을수있다주님은사랑과진리의근원이며사탄의모든속임수는주님의빛앞에서무의미하게녹아없을것이다."

멈추지 않는 광기와 함께 마기의 촉수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건 못 막는다.'

내가 몸을 날리기 무섭게 마기의 촉수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폭음.

쾅─!

콰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마기의 촉수가 박힌 땅이 움푹 파이고, 아름드리나무가 통째로 박살이 났다.

'어처구니없는 위력이군.'

하긴, 저 정도 위력은 되니까 마(魔)의 대척점인 멸망 유예자의 힘이 더해진 총알의 물리력도 견딜 수 있었던 거겠지.

"으...."

워낙 과격하게 몸을 날린 탓에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른 나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전신이 흙먼지로 뒤덮이고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겼으나, 지금은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할 때였다.

'온다.'

사냥감을 놓친 마기의 촉수들이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아나콘다처럼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내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당장이라도 덮칠 것처럼 말이다.

쐐새새색!!!

대치는 길지 않았다.

기회를 포착했다고 여겼는지 마기의 촉수들이 쇄도했다.

쾅!

콰콰쾅!!!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나는 몸을 구르면서 간신히 그것들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터.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었다.

'저 마기들만 뚫어 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실제로 내가 알고 있던 요한의 레벨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대충 4 정도였던가.

예전에 천랑 길드에 호되게 당하면서 레벨 다운까지 겪은 탓이다.

물론 그럼에도 공정의 세계 전체로 보면 나름대로 준수한 중견 유저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내 기준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지금 요한의 레벨은 과연 몇 정도일까?

'요한이 정확히 언제 이 세계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냥하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4 정도거나, 높아 봐야 5 정도일 가능성이 커.'

물론 요한이 지금까지 실력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기는 했으나, 내 눈을 속일 정도로 철저하게 속였다면 뭐... 죽어 줘야겠지.

어쨌거나 중요한 건 지금 요한이 맨몸으로 총알을 받아 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기의 촉수가 쇄도한다.

쐐애애액!!!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오른손에서 모습을 드러낸 B686 더블 배럴 샷건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아앙!!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현재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3,0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멸망 유예자의 힘이 더해진 70mm 12게이지 산탄이 마기의 촉수를 후려치자, 마기의 촉수가 움찔하면서 밀려났다.

기대했던 것처럼 마기의 촉수를 터트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잠시 밀어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조금 아쉽긴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주머니에 있는 70mm 12게이지 산탄을 마저 채워 넣은 뒤에 그대로 요한을 향해서 내달렸다.

쐐새색!!

마기의 촉수가 또다시 나를 향해서 쇄도했으나, 나는 그것을 피하는 대신에 총구를 내밀었다.

타아앙!!!

70mm 12게이지 산탄이 마기의 촉수를 밀어내며 요한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찰나의 틈.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타아앙!!!

요한을 향해 쏘아진 총구에서 재차 불꽃이 솟구쳤다.

그러나 쏘아진 12개의 구슬이 요한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요한의 앞을 막아선 마기가 산탄을 완벽히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지이잉....

허공에 붙들린 12개의 구슬이 부르르 떨면서 운동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요한을 지키고 있던 마기들에 빈틈이 생겼다.

"그래, 막을 줄 알았다."

어차피 고작 이 정도로 요한의 마기를 뚫어 낼 수 있을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허리춤에서 업화의 송곳니를 뽑아 들고는 그것을 그대로 요한을 향해서 내던졌다.

훈련은 실전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드릭의 교육 과정 중에는 당연히 단검 투척술 또한 있었고, 내 적중률은 꽤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올곧은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업화의 송곳니가 그대로 요한의 지척에 다다른 순간.

나는 기다렸던 주언을 읊조렸다.

"약식 계약 선언."

바로 얼마 전에 내 오른손을 홀라당 태워 버릴 뻔한 놈과 또 계약을 맺는 게 탐탁지 않기는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릴 건 없었다.

내가 계약의 대가로 바칠 건 현재 요한에게서 넘실대는 마기, 그 자체.

그것을 모조리 먹어 치우게 해 주겠다.

"탄서적화염(??的火焰)."

마(魔)로 마(魔)를 몰아낸다.

그와 함께 요한에게 날아들던 업화의 송곳니에서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82화 마경으로 (10)

탄서적화염(??的火焰).

집어삼키는 화염이 요한과 마기를 집어삼키면서 연신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단순한 업화가 아니다.

비록 약식 계약이기는 해도 저 마법은 내가 사용한 것이었고, 당연히 내가 지닌 멸망 유예자의 힘 또한 깃들어 있었다.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현재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3,0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마(魔)에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점하는 힘.

그것이 업화의 마법에 더해지자 이제껏 있었던 힘의 격차로 인한 상성 무시는 더 이상 의미 없었다.

콰콰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화마에 휩싸인다.

기긱, 기기긱!

화마 속에서 희끗희끗 보이는 검은 그림자들이 날뛰면서 업화에 맞섰으나, 모든 걸 집어삼키는 화염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시련은나의삶에서피할수없는일이다그러나주님과함께라면모든어려움을이길수...."

전신이 화염에 휩싸이고도 요한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전신이 불타고 있음에도 여전히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면, 더 태워 보면 될 일이었으니.

기긱, 기기긱──!

멈추지 않는 업화 속에서 조금 전까지 맹렬하게 저항하던 마기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황금률의 계약에 따라서 업화의 송곳니에서 발동한 마법이 요한의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이번 약식 계약에서 내가 제시한 대가가 썩 만족스러웠는지, 업화의 악마는 추가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 마무리한다.'

요한을 집어삼킬 듯이 타오르는 업화로 인해서 요한을 감싸던 마기의 촉수들이 너덜너덜하게 뜯겨 나갔다.

지금까지처럼 마냥 쉽게 내 공격을 막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7.62×39mm 탄'을 소환합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AKR-74 돌격 소총을 주운 뒤에 탄창을 갈아 끼웠다.

철컥─

총구가 불길에 휩싸여 있는 요한에게 향한다.

분명히 망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방아쇠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쯧.'

요한을 죽이는 건 나에게 있어서 상당한 정신적 외상을 남길 것이다.

아무리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그것을 보호한다고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 상흔이 남고 말겠지.

그럼에도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때로 어떤 일들은 오롯이 감당해야만 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나는 외면하지 않았다.

타아앙!─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들이 불길에 휩싸인 그림자를 향해 쏘아졌다.

처음 몇 발은 여전히 남아 있는 마기의 벽에 가로막히는 듯했으나, 이어진 총격에 마기의 장벽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제아무리 요한이 품은 마기가 강력하다 한들 멸망 유예자의 힘이 더해진 업화의 마법을 견딜 수는 없었다.

푹!

푸푹!

요한의 전신에 차례로 총알이 박혔다.

곧이어서 모든 마기를 불태운 업화의 마법이 서서히 사라지고, 불길에 사라졌던 요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요한은 쓰러져 있었다.

작게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서 여전히 숨은 붙어 있는 듯했지만, 전신에 심각한 화상과 총상을 동시에 입은 상태로는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살아는 있나.'

최대한 급소를 피해서 쏜 보람이 있었다.

혹시나 요한이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나름대로 도박에 성공한 셈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업화의 송곳니를 주워서 요한에게 다가갔다.

'겉으로 드러난 마기는 전부 태웠지만, 요한의 정신을 장악한 마기는 여전히 내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까지 몰아내려면 직접 접촉해야 해.'

앞서 말했듯이 요한을 죽이는 건 나에게 크나큰 정신적 외상을 남기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해 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쓰러져 있는 요한에게 손을 뻗은 그 순간.

꾸득, 꾸드득─

쓰러져 있는 요한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전신에 실이 달린 인형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변을 느끼고서 반사적으로 몸을 뺀 나는 요한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을 보았다.

비록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해져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마기였다.

'저건....'

이미 나는 마기의 효능을 일부 체험해 본 적이 있었다.

마기는 훼손된 신체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

지금 요한이 보이는 비정상적인 움직임 역시도 그것과 같은 맥락일 터.

'역시 모든 마기가 사라진 게 아니었나.'

그러나 꼭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검게 물들어 있던 요한의 눈동자에 약간의 빛이 돌아와 있었다.

"룩, 룩크...."

어눌하기 짝이 없는 발음으로 입을 연 요한에게서 들려온 말은 이전처럼 광기에 가득 찬 광신이 아니었다.

요한은 지금 말을 하고 있었다.

"저를, 저를 죽, 죽여─"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까 아직 머리에 마기가 남아 있나 보군."

이는 상당히 좋은 소식이었다.

마기를 온전히 몰아낼 수만 있다면 요한을 제정신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끅... 더, 더는 못 버티...."

"시끄럽고, 조금만 기다려."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다잡았다.

"그 정신머리, 고쳐 줄 테니."

"그륵...."

요한의 입술이 다시금 닫혔다.

지금으로서는 저 입술에서 듣기 싫은 찬송인지 뭔지 모를 헛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해.'

또다시 업화의 마법 같은 것을 펼칠 여유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필요 없었다.

감히 접근하는 것조차도 버거웠던 조금 전과는 달리, 지금의 요한은 매우 약해져 있었으니까.

요한의 마기가 건재했다면 모를까, 지금 요한이 뿜어내고 있는 마기의 잔재는 기껏해야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부웅! 붕!

요한이 자신의 무기인 창을 어설프게 잡은 채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기가 요한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만.'

그 눈먼 창이 나에게 닿을 리는 없었으나 위력만큼은 확실했기에 나는 집중을 놓지 않았다.

객관적인 스펙을 봤을 때 요한은 마기를 제외하고도 나보다 명백한 강자였다.

비록 심각한 부상과 더불어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기는 했어도, 방심은 죽음을 부르는 법이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찔러 들어오는 창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한의 빈틈이 드러났다.

'지금.'

요한의 창이 아슬하게 내 허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대로 요한의 창대를 붙잡은 나는 몸을 크게 돌렸다.

촤아악!!!

칼날 흑까마귀 망토가 휘둘러지며 무방비가 된 요한을 후려쳤다.

멸망 유예자의 힘이 깃든 수십 개의 칼날 깃털들이 단번에 요한을 후려치자, 요한의 몸이 튕겨 나가며 지금껏 요한을 조종하고 있던 마기의 실이 뚜두둑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그러나 나는 경계의 기색을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요한은 공정의 세계의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비장의 수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콰드드드득!!!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얼음 장벽이 내 앞을 막아섰다.

'역시.'

공정의 세계에서 소수의 마법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마법 사용에 대해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다.

마법은 늘 대가로 필요로 하고, 그 대가는 때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가져가기도 하니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라면 비장의 마법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요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마법일 줄이야.'

내가 이 마법을 몰라볼 리가 만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마법은 내가 카인이었던 시절에 즐겨 썼던 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혹한의 마법.'

실제로 멸망룡과의 전투에서도 큰 활약을 했던 그 마법이었다.

요한이 대체 어떻게 그 까다롭기 그지없는 혹한의 악마와의 계약에 성공했는지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 계약 방법을 알려 준 게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근데 이걸 저한테 알려 주셔도 되는 건가요? 혹한의 악마랑 계약 맺는 걸 아는 사람 거의 없다던데...」

「괜찮아. 어디 가서 떠들지만 마.」

「당연하죠.」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기껏 이런 비장의 수를 숨겨 놓고, 요한이 펼친 혹한의 마법은 내 머리카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아니... 이 마법은 애초에 나를 노린 게 아니다.'

요한이 펼친 혹한의 마법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한의 마법이 펼쳐진 순간부터 얼음의 장벽이 목표로 하고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바로, 요한 자신.

얼음 장벽이 감싸고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이 새끼가...."

요한이 무슨 생각인지야 뻔했다.

자신의 존재가 크나큰 위협과 민폐가 된다고 여겼기에 마지막 남은 의지를 짜내서 혹한의 마법을 발동했겠지.

스스로 생을 끝내기 위해서.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고."

앞서서 나는 요한을 호구가 아닌 호인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그 생각을 바꿔야겠다.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호구도 이런 상호구가 없다.

"그렇게는 안 둬."

나는 곧장 얼음 장벽을 향해서 업화의 송곳니를 휘둘렀다.

카앙─!

칼날이 불꽃을 맺고 얼음 장벽을 후려쳤으나, 솟구친 불꽃과 함께 튕겨 나왔다.

업화의 송곳니가 품고 있는 업화에 얼음 장벽이 조금 녹기는 했으나 이 정도 불길로 저 얼음 장벽을 뚫어 내려면 한참은 걸리리라.

'그 전에 요한이 죽겠지.'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혹한의 마법으로 펼친 장벽을 뚫어 내려면 나 또한 마찬가지로 업화의 마법을 펼치거나 저 장벽을 뚫어 낼 정도의 압도적인 물리력이 필요했다.

'약식 계약은 불가능해. 현재 이곳에 업화의 악마가 바라는 대가는 없어.'

그렇기에 업화의 마법을 성사시키려면 대가로 나 자신 혹은 요한을 바쳐야 한다는 건데,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따로 없었다.

'현재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무기는 업화의 송곳니와 칼날 흑까마귀 망토 그리고 콜트 패리슨 B-09와 마기 정도.'

그 무엇 하나 혹한의 마법으로 펼쳐 낸 장벽을 뚫어 내기에 부족하다.

'이대로면 요한의 숨이 끊어진다.'

전신이 꽁꽁 얼어붙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다.

하물며 그게 멸망룡에게 통용될 정도의 위력을 지닌 혹한의 마법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리 강력한 마법이 아닌 덕분에 뿜어내는 한기가 비교적 견딜 만하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 요한이 혹한의 악마에게 바칠 대가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한의 악마는 업화의 악마와는 다르게 사용자의 목숨 따위를 대가로 받지 않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장기적인 플랜으로 꾸준히 뜯어먹는 걸 선호하는 악덕 사채업자에 가깝다고 할까?

'그렇다면....'

오른손을 통해서 스멀스멀 흘러 나간 마기가 이윽고 업화의 송곳니를 휘감는다.

단순히 내 신체를 보조하는 것을 넘어서 무기에 마기를 두른 것이었다.

'역시 가능하다.'

마기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을 때부터 마냥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될 줄은 몰랐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현재 내가 취할 수 있는 공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이 얼음 장벽을 후려쳤다.

83화 마경으로 (11)

카아앙!!!

맹렬한 굉음과 함께 얼음 파편이 사방에 비산한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확실히 마기를 두르지 않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제시간 안에 혹한의 마법이 펼쳐 낸 장벽을 뚫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캉!

카앙─!

업화의 송곳니가 몇 번이고 얼음 장벽을 후려친다.

하지만 크고 작은 균열들이 생겨나기만 할 뿐, 거대한 얼음 장벽을 뚫어 내지는 못했다.

손아귀가 터지며 흘러나온 피에 미끌거린 탓에 계속해서 업화의 송곳니를 놓쳤다.

손에 감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캉!

카앙─!

무언가 부딪치는 굉음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며 얼음 장벽 안에서 느껴지는 요한의 숨소리도 점차 옅어졌다.

"X발...."

이 세계에 온 뒤로 거의 내뱉지 않았던 욕지거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흥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나에게 평온과 냉정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대상을 분석하고, 답을 찾는 것.

그건 내가 공정의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지닌 화력만으로 얼음 장벽을 뚫어 낼 수 없다면.

'더욱더 강한 화력을 만든다.'

그중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업화의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것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이자 최악의 선택이었다.

만약 이 상태로 업화의 악마와 계약을 맺게 된다면, 대체 어떤 대가를 바쳐야 할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무엇보다도 아직 나에게는 선택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익숙하고 강력한 무기가 말이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콜트 패리슨 B-09을 쥔 나는 그대로 얼음 장벽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얼음 장벽에 적중한 총알은 얼음 장벽에 약간의 균열을 만들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역시 안 되나.'

어차피 이 정도로 부족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요한이 마기를 다루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분명히 마기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었지.'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마기 자체가 나에게 잠시 분리되어도 그 힘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스스스....

내 안에 있는 마기들이 꿈틀거리면서 오른손에 있는 콜트 패리슨 B-09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콜트 패리슨 B-09 안에 있는 탄창 속으로.

'어설프게 콜트 패리슨 B-09에 마기를 불어넣어 봤자 더 튼튼한 둔기가 될 뿐이야. 총의 위력을 강화하려면 결국 마기를 총알에 불어넣어야 한다.'

그게 가능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적어도 공정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실험해 볼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스스스!

콜트 패리슨 B-09에 머물던 마기들이 곧이어서 탄창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방아쇠가 당겨지고도 마기가 총알 안에 잔존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곧 알 수 있을 테니.

타아아앙!!!

나는 보았다.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이 휘감고 있는 검은 기운을.

[기예, '마탄(B)'을 습득하였습니다.]

마기를 휘감은 마탄(魔彈)이 얼음 장벽을 후려침과 동시에.

파차차창!!!

산산이 부서져 나간 얼음 파편이 사방에 비산했다.

쐑!

쐐새색!!!

비산한 얼음 파편이 마치 수십 개의 칼날처럼 날아든다.

가만히 서서 얼음 꼬챙이가 되는 취미는 없었기에 나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칼날 흑까마귀 망토에 부딪힌 얼음 파편들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제아무리 혹한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얼음 방벽이라 한들 부서지고 나면 그저 평범한 얼음 파편과 다를 것 없었다.

"후우...."

살며시 뒤를 돌아보자, 얼음 잔해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더없이 옅은 것으로 보아서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총상과 화상, 거기에 더해서 동상까지 더해진 상태가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다.

'대충 끝난 건가.'

여전히 요한의 전신에서 옅은 마기가 감돌기는 했지만, 요한의 육신을 지배하기에는 더없이 부족한 마기였다.

요한 또한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

그렇기에 이 기회에 완전히 저 마기를 뿌리 뽑아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테니.

저벅, 저벅.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요한에게 향했다.

요한의 몸을 뒤덮고 있는 부서진 얼음 파편을 치워 내자, 비로소 요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요한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있는 마기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기깃, 기기깃!

요한의 전신에서 일어난 마기의 뱀이 나를 보고는 흉성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내가 손을 뻗는 걸 멈추지 않은 이유는 요한에게서 뿜어지는 마기가 이제 뱀보다는 지렁이에 가까운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볍게 휘두른 손짓 한 번에 마기의 지렁이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마기는 위험한 힘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소용없었다.

나에게는 바로 그 마기를 찍어 누르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으니까.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5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현재 요한이 뿜어내는 마기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멸망 유예자의 힘 또한 그리 강하게 발동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것으로도 충분했기에 나는 그대로 요한에게 다가가서 요한의 머리를 짚었다.

"끄륵, 끄르륵...!"

그와 함께 요한의 전신이 부르르 떨리면서 발작이 일어났다.

요한의 육체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마기들이 날뛰는 것이었다.

기기긱!

마(魔)를 배제하는 멸망 유예자의 위협을 느꼈는지 요한의 마기가 일제히 일어나며 나에게로 쇄도했다.

하지만 그건 느리고, 약했다.

나는 뻗어 나온 마기의 줄기를 가볍게 손으로 낚아챘다.

멸망 유예자의 힘이 본래였다면 잡을 수 없는 것을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만든 덕분이었다.

그기기긱!!

가볍게 손에 힘을 주기 무섭게 멸망 유예자의 힘에 짓눌린 요한의 마기가 비명을 내지른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손에 잡힌 요한의 마기를 그대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리 나와."

뚜둑, 뚜두둑!

마치 질긴 섬유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요한의 몸에서 마기가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끄르륵!"

그에 따라서 요한의 발작도 더욱더 심해졌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어설프게 멈췄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

뚜두둑!!

기괴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요한의 몸에서 뽑혀 나온 마기가 불길하게 울었다.

우우우우──

마(魔)가 똘똘 뭉친 기운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하게 떨었다.

당장 이것들을 멸망 유예자의 힘으로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거... 가능할지도.'

스멀스멀 내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마기가 손아귀에 잡힌 요한의 마기를 마중했다.

끼기기기긱!!!

그 이후는 포식 시간이었다.

멸망 유예자의 힘을 휘감은 마기가 요한의 마기를 감싸고, 마치 칠판을 긁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음은 길지 않았다.

어느덧 요한의 마기가 잠잠해지더니 내 마기와 동화되었고, 자연스럽게 몸에 흡수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마기를 흡수하였습니다!]

[마(魔)에 대한 이해도와 통제력이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마기가 상승합니다. (+2)]

[3 → 5]

'호오....'

왠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쉽게 성공했다.

타인의 마기를 내 것으로 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느껴진다.

이제껏 내가 품고 있었던 마기와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힘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것이.

스스스....

살며시 손끝에서 마기를 일으키자 끄물거리는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 마기는 내 의지에 따라서 모양을 바꾸기도 하고, 그 크기를 키우기도 했다.

마기에 대한 통제력이 이전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승했다는 뜻이었다.

만약 요한이 아까 보였던 마기를 온전히 흡수했다면 이것조차도 우습게 보였겠지만, 그건 제아무리 멸망 유예자의 힘이 있다고 한들 아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 정도의 마기를 내가 온전히 제압할 수 있었을 리도 없고.

'그것보다는 타인의 마기를 내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게 중요해.'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만약 이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그러면....'

나는 요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물의 보옥의 권능이 발휘되며 작은 물방울들이 요한에게로 스며들었다.

아무래도 화상, 동상, 총상을 골고루 입은 탓에 회복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테지만, 지금은 요한이 죽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일단은 다시 안전지대로 가는 게 낫겠지.'

안 그래도 나와 요한이 소란을 하도 떨어 댄 탓에 마경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나마 변종이 흩뿌린 냄새와 흔적 덕분에 아직 다른 마수들이 들이닥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얼마 버티지 못할 터.

나는 요한을 어깨에 둘러멘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요한이 정신을 차린 건 안전지대에 도착한 지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하기는 했어도 물의 보옥의 권능을 최대한 집중한 덕분에 가까스로 의식을 찾은 것이었다.

"여긴...? 끅!"

"더 누워 있어. 괜히 무리하다가는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기억은 없나?"

"으윽!"

요한이 머리를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난 건지, 나를 보는 요한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멀쩡해."

"...죄송합니다,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요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대로 요한에게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지 말씀드릴게요."

"현재 마기를 일으킬 수 있나?"

"그건...."

요한이 말끝을 흐렸다.

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린 모양이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안다. 그냥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니까."

"...알겠습니다."

요한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네 몸속에 있는 마기를 제거했다."

요한이 뜨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마기를 제거하는 게 가능한 거였어요? 어떻게요? 그 방법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을─"

"그만."

"...네?"

"뭘 묻고 싶은지 안다. 하지만 내가 마기를 제거한 방법은 오직 나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방법 같은 걸 알아도 소용없을 거다."

"그런...."

요한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안다.

호구 중의 상호구답게 마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많은 플레이어를 구할 수 있다고 여겼겠지.

그 과정이 절대로 쉬울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요한의 모습을 보고서 나는 이제껏 해 왔던 추측 중 하나가 맞아떨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파편을 흡수하고서 마기에 의해서 이지를 상실한 플레이어는 요한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저번에 뉴비 사냥꾼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지."

"아... 맞아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그렇다면 뉴비 사냥꾼도 마기에 의해서 이성을 잃은 자였나?"

84화 마경으로 (12)

요한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걸 어떻게...."

"역시 그랬나."

크게 어려운 추측은 아니었다.

파편이 플레이어의 육신과 정신을 모두 오염시킨다면, 익명 게시판에 있는 오랜 괴담의 주인공이 파편에 오염된 자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론이었으니까.

요한이 씁쓸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본 뉴비 사냥꾼은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많이 괴로워하고 있었거든요."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뉴비 사냥꾼이 어떤 사정이나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별로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이대로 파편에 대해서 방치한다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뉴비 사냥꾼은 얼마든지 나타날 거라는 점이었다.

'아니...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또 다른 가설이 떠오른다.

뉴비 사냥꾼은 실제로 존재하고, 또한 익명 게시판 내에 있는 불특정 다수가 뉴비 사냥꾼으로 활동하는 것 역시도 맞다는 가설이다.

익명 게시판에 있는 유저들이 암묵적으로 뉴비 사냥꾼을 앞세워서 다른 유저를 살해하고 다녔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

'승천석 파편.'

그게 플레이어 개인의 목적 때문인지, 아니면 마기에 의해서 정신이 오염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공정의 세계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모두 승천석 파편이라는 것에 얽매여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우리는 승천석 파편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폭풍 속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슬슬 움직일 생각인데 이제 어쩔 셈이지? 이제 몸도 대충은 움직일 수는 있을 텐데?"

"어? 아아...?"

그 말마따나 물의 보옥의 권능을 요한에게 집중시킨 덕분에 요한의 몸 상태는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격렬한 전투를 치를 정도는 아니지만, 경계의 길을 이용해서 마경을 빠져나갈 정도는 된달까.

"설마 회복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신 건가요? 저 때문에 그런...!"

"마법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말인가요?"

"그래."

그제야 요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마법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혹여 내가 자신을 위해서 필요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아무튼....'

내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 요한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우선,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가 가진 건 없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요한은 나에게 전 재산으로 보이는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척 봐도 크기나 무게가 범상치 않은 것이, 상당한 액수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보통 플레이어들이 쓸데없이 동화나 은화로 배낭의 부피를 채우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감안했을 때, 최소 오십 골드는 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을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요한의 성격상 내가 대가를 거절한다면 큰 빚을 느끼고서 거기에 얽매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고맙게 받지."

"...조금 의외네요, 솔직히 안 받으실 줄 알았는데."

"준다는 걸 사양할 필요는 없으니까. 실제로 꽤 고생을 하기도 했고. 위험수당이라고 생각하면 못 받을 것도 없지 않나?"

"그렇군요."

"아깝나?"

"그럴 리가요."

요한이 옅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걸 전부 드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돌아갈 여비도 없을 것 같아서요. 갈 길이 꽤 멀어서."

"충분해."

"그러면... 루크 님께서는 마경에 더 계실 생각이신가요?"

"그래야겠지.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요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그런데요...."

"할 말이 있나?"

"아까부터 신경이 쓰여서 그런데요. 말투가 좀 변하신 것 같은데 원래 그런 말투셨나요?"

"불편한가?"

"아뇨, 뭐.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 정도야. 편하게 말씀하세요. 예."

요한이 가볍게 웃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볼 생각이에요. 더 이상 마경에 있을 이유도 없고,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아서요."

"변종 사냥은 포기하는 건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또 그럴 수는 없죠. 아무래도 제가 한참은 잘못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가."

사람이라는 동물에게 본질적으로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는 건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그렇기에 나는 쓸데없이 요한에게 재차 파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 따위를 주워섬기지는 않았다.

이미 승천석 파편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요한 본인이 겪어 본 만큼 잘 알고 있는 듯한 데다가, 내가 우려 속에서 건넨 그 말이 오히려 요한을 다시 승천석 파편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면 이쯤에서 헤어지겠군요. 조금 아쉬운데요."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

"어디서 자주 듣던 말이네요."

이런 곳에서 과거의 인연을 만나게 된 건 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지만, 단지 그뿐.

요한과의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전부 답해 드릴게요."

그것참 믿음직스러운 대답이군.

"마기가 전부 사라진 지금도 게시판에 접근할 수 있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잠시만요. 확인해 볼게요."

곧이어서 허공에 몇 번인가 손을 휘적거린 요한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되네요."

"된다고?"

"네. 익명 게시판은 물론이고... 다른 기능들도 멀쩡히 작동하는 것 같아요."

본래 요한이 지니고 있었던 마기가 모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익명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게시판 권한과 마기는 별도로 작동을 하는 듯했다.

마기 자체가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

"혹시 괜찮으면 익명 게시판에 게시 글 하나만 남겨 줄 수 있나?"

"아, 예예. 뭐라고 쓸까요?"

"아무거나."

요한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게 여러모로 좋았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요한의 익명 게시판 닉네임도 파악해 두고.

"올렸어요."

요한이 게시 글을 올렸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곧장 익명 게시판에 접속했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언제나처럼 온갖 게시 글이 있는 익명 게시판의 풍경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향수를 느끼게 하지만, 오늘 나는 그런 향수가 아닌 특정 게시 글을 찾기 위해서 익명 게시판을 켰다.

요한의 게시 글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요한 : 안녕하세요.

"김요한?"

"네, 맞아요."

이것으로 검증이 완료되었다.

설사 플레이어에게 깃든 마기를 제거하더라도, 한번 승천석 파편에 의해서 부여된 권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정보는 꽤 의미 있었다.

'그렇다면 마기가 제거된 플레이어가 추가적으로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쩌면 승천석 파편에 접촉해도 그것을 흡수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한번 마기가 제거되었다 한들 다시 승천석 파편에 노출되면 재차 마기에 잠식될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건 그저 추측에 불과했기에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제대로 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았다.

요한이 말했다.

"아, 그리고 저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총기의 존재였다.

이번에 나는 마기에 잠식된 요한을 구하기 위해서 총기를 사용했고, 요한 또한 그것을 기억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러한 염려는 기분 좋게 빗나갔다.

"혹시 저를 알고 계시는 분인가요?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이성으로만 되지 않듯이 요한은 은연중에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이대로 요한과의 인연을 이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한은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올곧은 사람이었고, 모든 유저를 적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아군이 있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 그런가요? 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실례했습니다."

요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냥, 지금은 서로 모르는 사이로 있는 것이 서로에게 있어서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아직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되찾기에는 힘이 부족했으니까.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인연이 닿으면 그렇겠지. 아, 나중에 혹시 익명 게시판에 글 올리면 댓글 정도는 달아 주지."

요한이 언제나 같은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이상하게 제가 글만 쓰면 거의 댓글이 안 달리더라고요."

그야, 요한 같은 사람이 작성하는 게시 글은 대개 재미없을 테니 그럴 수밖에.

"그러면... 정말로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을 겪으신 것도,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것도, 전부요."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하하, 왠지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어요."

요한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배낭과 짐을 챙기고는 말했다.

다리를 절뚝이는 것이, 아직 움직임이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보호자처럼 요한이 무사히 돌아가는 걸 지켜 줄 필요는 없었다.

비록 지닌 마기를 잃었다고는 하나 요한은 여전히 중견 수준의 플레이어였으니.

경계의 길을 이용한다면 제 한 몸 정도는 지키면서 마경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언젠가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익명 게시판에서 저를 찾으면 될 거예요."

"사양하지 않지."

"그래 주시니 제 마음이 조금은 편하네요. 솔직히 거절하실 줄 알았거든요."

"도와주겠다는데 굳이 싫어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렇긴 하네요."

요한이 힘없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 * *

요한이 떠났다.

인연이라는 것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라, 나 또한 쓸데없이 미련 두지 않고서 곧장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바로 얼마 전까지 상당한 소란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경 내의 분위기가 상당히 심상치 않았다.

그우우우우──

우우우....

멀찍이서 들려오는 음울한 괴성.

마경 내에서는 비단 마수들뿐만 아니라 조심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저러한 징조 하나하나를 그냥 넘기면 안 된다.

그럼에도 돌파를 하려면 못 할 건 없지만,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나는 본래 이용하려고 했던 경계의 길 대신에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수들의 영역과 영역 간의 경계.

그 길은 절대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마경 내의 상황이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뀐다.

그렇기에 마경 내에서 길을 안다는 건 정확히 말해서 그 길을 읽어 내는 법을 아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지금 발걸음을 멈춘 이유 역시도 그 때문이었다.

'영역 간의 경계가 희미해. 마수들끼리 부딪치기라도 한 건가?'

서로 영역이 겹치는 마수들끼리 싸우는 건 마경 내에서 매우 흔한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무리 전체가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과격하게 싸우는 일은 드물다.

영역이 겹친다는 건 곧 마수 무리 간의 힘이 비등하다는 건데, 그런 마수 무리끼리 싸워 봐야 공멸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런 경우에는 기존 마수들 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마경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본래였다면 그냥 지나갔을 경계의 길마저도 쉽게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요한은 그게 자신 때문이라 말했었으나, 고작 6레벨 변종 하나와 플레이어 한 명이 날뛴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이곳은 위치상 요한이 있었던 장소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가 아닌가.

'남은 가능성은 마경에 있는 마수들의 세력도에 큰 변화가 생겼거나, 혹은....'

그다음 추론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마경의 왕 중 하나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거나.'

85화 마경으로 (13)

영원의 수해(樹海).

마수들의 낙원.

죽음의 대지.

이곳을 부르는 이름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가 부르는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

마경(魔境).

규칙과 법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땅에도 오랜 세월 동안 군림하며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하는 존재들이 있다.

유저들은 하나하나가 네임드를 넘어서 보스급에 다다른 강함을 소유한 그 존재들을 가리켜서 마수들의 왕이라 칭했다.

마경을 지배하는 일곱 왕.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듯이 멸망룡의 등장과 함께 마경에서 군림하던 일곱 왕 중에서 무려 넷이 죽었다.

원인은 다양했다.

둘은 멸망룡에 의해서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하나는 마경의 왕조차도 먹어 치우며 더욱더 강해지는 멸망룡의 행보에 위협을 느낀 플레이어 연합에 의해서 사냥당했으며, 마지막 하나는 나에게 죽었다.

현재 마경의 세력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왕이라 불릴 정도의 마수가 쉽게 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고작 일곱 정도만이 마경에서 오롯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며 군림할 수 있었으니.

'그 셋 중 하나가 깨어난 건가.'

내가 알기로 살아남은 셋의 왕은 모두 기나긴 동면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한 마리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왜냐면, 놈은 나에게 사냥을 당하던 도중에 제 무리를 모조리 바치고서 간신히 도망쳤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머지 두 마리가 어째서 동면에 들어갔는지는 굳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 플레이어 연합과의 전투에서 상처를 크게 입었거나 멸망룡으로부터 도망치다가 큰 피해를 입고서 잠에 빠졌겠지.

'흠.'

옛날이었다면 마경의 왕이 깨어나든 말든 그저 사냥감이 늘어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던 마경의 왕이 깨어난다면 이제껏 잠잠했던 마경 내의 세력도에도 크나큰 변화가 생길 터.

그리고 그 변화는 고스란히 마경과의 인접 지역이자 제국을 지키는 방패인 겨울성이 감당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도 당장 내가 하려는 일에 큰 방해가 되겠지.'

나는 지금 내가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임시 창고를 향해 가고 있다.

만약 왕 중 하나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게 사실이라면, 본래였다면 안전지대에 속해 있어야 할 내 임시 창고에도 어떤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안전지대의 조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되어서 마수들에 의해서 쑥대밭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쯧.'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경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서두른다면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마경인데도 변종의 모습이 거의 안 보이는군.'

내가 마경에 들어와서 발견한 변종의 숫자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적다.

요한과 함께 사냥한 변종을 제외한다면 그중에서 대다수가 내가 감히 사냥할 수 없는 강력한 마수이거나, 함부로 사냥할 수 없는 환경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탓에 현재 내가 마경에 들어와서 얻은 승천석 파편은 전혀 없었다.

요한과 함께 사냥한 변종이 가지고 있었던 승천석 파편은 모두 요한이 먹어 치워 버렸으니 말이다.

마경에 들어오면 변종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변종의 절대적인 숫자가 상당히 적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요한한테 4레벨 이후의 권한이 무엇인지 안 물어봤네.'

현재 내가 획득한 게시판 권한은 3레벨까지.

일전에 보았던 마기의 수준만 보아도 적어도 요한이 나보다 상위 등급의 권한을 획득한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길드 게시판 이후의 4레벨 이상의 권한 또한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이 중요한 걸 묻는 걸 잊어버렸다.

'뭐... 정 궁금해지면 나중에 익명 게시판으로 따로 호출해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경계의 길을 가로지르다 보니, 어느덧 수풀 사이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바로 저 절벽 아래에 내가 예전에 만들어 놓은 임시 창고가 있었다.

분명히 그럴 텐데....

모든 최악의 가정이 으레 그렇듯이, 인간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정답에 근접하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귀찮게 됐군.'

깎아지른 절벽의 까마득한 아래.

본래였다면 안전지대였어야 할 장소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바위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멸망룡의 등장은 라크나 대륙에 있어서도 무수히 많은 지각변동을 일으켰지만, 적어도 저 바위산이 그로 인해서 갑작스레 솟아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산은, 살아 있었으니까.

비록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다르긴 해도 산을 떠올리게 하는 저 거대한 몸집과 특징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확실해, 놈이다.'

마경에 군림했던 일곱 왕 중 하나.

거동하는 암석.

한 걸음에 천지를 흔드는 자.

괴암거석(怪巖巨石).

거석산(巨石山) 모그론.

그것이 내 임시 창고가 있는 안전지대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임시 창고의 아이템을 챙기려고 했던 내 계획에 지장이 생긴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그론이 아직 동면 중이라는 점인가.'

거석산 모그론은 한번 잠들면 어지간해서는 깨어나지 않는다.

크기가 크기인 데다가 모그론의 외피 전체가 바위와 같은 괴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어지간한 것으로는 모그론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그론이 자리를 잡고 있는 범위가 정확히 내 임시 창고의 입구를 뒤덮고 있다는 점이었다.

'포기해야 하나?'

내가 마경에 들어온 이유는 임시 창고에 있는 아이템을 챙기는 것과 변종 사냥 두 가지다.

비록 최우선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남은 시간 동안 변종 사냥에 전념한다면 변종 한두 마리는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포기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소리다.

'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단 내려가서 임시 창고의 입구 상태를 확인한 뒤에 포기해도 늦지 않겠지.'

포기라는 건 늘 쉬운 선택지다.

그러나 그 쉬운 선택지를 계속해서 골라 나가다 보면, 어느덧 그것이 내 목을 죄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그런 세계였다.

한 번, 두 번의 비겁한 선택들이 결국 훗날의 후회로 남는 곳.

'그러면....'

결심을 마친 나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바라보며 칼날 흑까마귀 망토 안감의 띠를 허리에 연결했다.

추락, 아니 비행을 하는 동안 망토가 펄럭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대충 됐나.'

준비를 마친 나는 절벽에 섰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까마득한 높이.

머나먼 과거의 제국인들은 이 절벽을 가리켜서 세상의 끝이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정말로 이 절벽이 세상의 끝인 건 아니지만, 그만큼 절벽의 높이가 엄청났다.

이곳에서 뛰어내리려는 내가 자살희망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음."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익스트림 스포츠 중 하나인 윙슈트는 의외로 부상률이 매우 낮은 스포츠라고 한다.

윙슈트가 안전한 스포츠라서가 아니라, 일단 한번 사고가 나면 사고자는 대부분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말한 적 있듯이 칼날 흑까마귀 망토의 비행 기능은 윙슈트와 거의 유사하다.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 추락하는 것에 가까운 비행.

다름 아닌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미친 짓이었다.

"후."

잠깐의 심호흡 뒤 나는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처음에는 마치 추락하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지상으로 내려꽂히다가, 이윽고 칼날 흑까마귀 망토에 부력이 걸리고서야 본격적인 비행이 시작됐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칼바람처럼 느껴진다.

이런 속도로 나뭇잎에라도 스쳤다가는 얼굴에 그럴듯한 흉터가 생겨나겠지만, 다행히도 이 고도에 나뭇잎 같은 건 없었다.

그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며 지상의 모습이 보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나무들의 미로가 어째서 영원의 수해라고 부르는지 느끼게 했다.

[크루루!]

[크룩! 크루룩!]

지상에서 적지 않은 마수들이 내 존재를 인지한 듯, 요란을 떨어 댔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창공을 가르고 있는 나는 지금 마수들에게 있어서 하늘 산맥의 지배자인 칼날 흑까마귀 혹은 그와 비슷한 비행형 마수로 보일 테니 말이다.

나를 두려워하면 두려워했지, 역으로 나를 공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소리였다.

'거의 도착했군.'

본래였다면 윙슈트는 마지막에 낙하산을 펼쳐서 착륙을 한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낙하산 같은 물건이 있을 리는 없었기에 나는 다른 방법으로 착륙해야 했다.

촤악!

지금껏 내 허리에 고정되어 있던 칼날 흑까마귀 망토가 활짝 펼쳐지며 막대한 부력이 발생해 잠시 몸이 떠올랐다.

마치 낙하산을 펼쳤을 때와 유사한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게 칼날 흑까마귀 망토를 낙하산으로 삼아서 마침내 무사히 지상으로 착지를 하고 나서야 나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뒈질 뻔했네."

물론 설령 어떤 사고가 발생했다 한들 내 육체 자체가 일반인의 것은 아니었으니 즉사는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아찔한 경험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걸어서는 하루는 꼬박 걸었어야 할 거리를 단번에 날아서 왔으니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흠."

일대는 고요했다.

이 근방 자체가 거석산 모그론의 영역이 되어 버렸으니 웬만한 마수들은 근처에도 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가는 길은 편하겠어.'

본래였다면 경계의 길을 이용하느라 가까운 거리도 빙 돌아가야 했겠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서 곧장 임시 창고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방심은 있을 수 없었기에 나는 경계의 기색을 늦추지 않은 채로 마경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비로소 거석산 모그론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는 걸 알려 주듯이 멀찍이서 풍겨 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피부가 따가웠다.

'도착했군.'

새삼스레 가까이서 보게 되니 거석산 모그론이 어째서 한 걸음에 천지를 흔드는 자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거대했고, 또 웅장했다.

만약 모그론이 날뛰기 시작한다면 나조차도 살아남을 자신이 없을 정도로.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미 알고 있었던 대로 모그론은 현재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면 한번 해 볼 만하겠어.'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임시 창고가 있는 입구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틈이 있다.'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할까.

모그론의 거체가 임시 창고를 뒤덮고 있는 건 맞았으나, 다행히 입구 중 일부가 겉으로 드러나 있었다.

저 정도라면 주변의 땅만 조금 파면 충분히 임시 창고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안쪽으로 보이는 입구가 거의 훼손되지 않은 걸 보아서, 안에 있는 물건들도 무사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곧장 움직였다.

짐을 간추리느라 따로 삽 같은 건 챙겨 오지 않았기에 나는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에 넓은 돌 하나를 끈으로 엮어서 임시 곡괭이를 만들었다.

임시로 만든 것치고는 썩 쓸 만해 보였다.

'그러면 해 볼까.'

본격적으로 땅을 파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침없이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내심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발 깨지 마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모그론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나는 산 채로 깔려 죽을 것이다.

아니, 설사 운 좋게 압사를 피한다고 한들 사인이 생매장으로 인한 질식사로 바뀔 뿐 죽는다는 결과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땅을 파는 걸 멈추지 않는 건, 별다른 외부의 영향 없이 모그론이 깰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모그론을 깨우려고 미친 듯이 꽹과리라도 치지 않는 이상 별일 없을 거라는 소리다.

그렇게 곡괭이질을 얼마나 했을까.

'됐다.'

마침내 임시 창고의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비좁기는 해도 사람 하나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가 볼까.'

임시 창고의 문에 걸려 있는 자물쇠는 내 기억 속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게 잠겨 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자물쇠를 파손한 흔적은 없다는 이야기.

자물쇠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지만, 사실 이 열쇠 구멍은 속임수다.

이 자물쇠는 열쇠로 여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법으로 자물쇠 자체를 조작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철컥─

자물쇠의 잠금이 풀리고, 마침내 이번 여정의 최우선 목표였던 임시 창고의 문이 열렸다.

86화 마경으로 (14)

임시 창고.

솔직히 말해서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진 임시 창고가 한두 개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제껏 수거한 아이템을 전부 기억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쓸 만한 게 몇 개 정도는 있었던 것 같은데.'

설사 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경매장에 처분하면 될 테니 그걸로 새로운 장비를 마련할 수 있을 터.

내가 기억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마경까지 온 이유였다.

끼이익....

마침내 임시 창고의 문이 열리고 창고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와 함께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흩날리고 있는 먼지였다.

"콜록! 콜록!"

내가 임시 창고를 비워 두었던 기간이 짧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창고 곳곳에는 엄청난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애초에 제대로 관리하는 곳도 아니었고, 대충 가지고 있는 아이템과 장비들을 던져 두다시피 한 장소였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물의 보옥으로 간단하게 주변에 물의 장막을 펼쳐서 먼지들을 떨쳐 낸 나는 임시 창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본래 장비들이 진열되어 있던 진열대는 마구잡이로 엎어져 있었고,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장비나 아이템들은 모두 진열대 밑에 깔리거나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꽤 고가의 장비와 아이템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아서 따로 침입자가 있었던 건 아닌 듯했다.

그것보다는 모그론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지진 탓에 내부가 엉망이 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마경의 왕은 존재 자체로도 능히 재해가 될 만한 힘이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도움이 안 된다니까.'

예전에 기회가 있었을 때 싹 처죽여 놨어야 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발끝에 온갖 아이템들이 치였다.

도대체 이것들을 언제 정리해서 찾나 싶을 때, 잡동사니 사이로 한 가지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나는 곧장 잡동사니 사이를 헤쳐 나가서 그것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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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학살자의 봉인된 건틀릿]

분류 : 장갑

등급 : 영웅

잊혀진 영웅의 건틀릿.

현재 본래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

무척이나 튼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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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는 순간 기억났다.

오래전 내가 임시 창고에 보관한 아이템 중에서도 꽤 쓸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잊혀진 학살자의 봉인된 건틀릿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이걸 가지고 있던 녀석은 기껏 운 좋게 이걸 손에 넣어 놓고 봉인 해제법도 몰라서 봉인된 상태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답게 주제도 모르고 나에게 덤볐고, 그렇게 잊혀진 학살자의 봉인된 건틀릿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봉인을 해제한다면 내 기준에서도 꽤 쓸 만한 아이템이었지만, 그 과정이 꽤 귀찮아서 그냥 임시 창고에 박아 두었던 기억이 난다.

'뭐... 지금도 못 쓸 건 없지만.'

봉인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경매장에서 보았던 오리할콘 징 건틀릿보다도 상위의 장비였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좋은 물건도 드물다는 소리.

'잠깐, 그렇다면 그것도 있나?'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장을 여는 것과도 같다.

일단 서랍을 한번 열었다면, 적어도 그 칸에 있는 기억들은 어느 정도 꺼내 볼 수 있기 마련이었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별로. 아, 이건 꽤 쓸 만해 보이긴 한데... 일단 나중에 다시 보고.'

그렇게 온갖 아이템으로 이루어진 잡동사니 더미를 헤집으면서 나는 쓸 만해 보이는 아이템 몇 가지를 챙겼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장비 하나를 찾는 것이었다.

'찾았다.'

나는 잡동사니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보물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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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질풍 부츠]

분류 : 신발

등급 : 영웅

하늘을 거니는 자여.

폭풍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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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의 세계에는 본래 지닌 등급보다도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아이템들이 있다.

그 말마따나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는 비록 표기된 등급은 영웅 등급이었으나, 실제 장비의 성능이나 가치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이른바 준전설로 취급되는 아이템인 셈.

'무엇보다도 현재 나에게 있어서 매우 부족한 기동성을 단번에 끌어올려 줄 수 있는 물건이지.'

실제로 이제껏 나는 전투를 할 때 물의 보옥으로 인한 방어와 총기를 통한 화력전에 모든 걸 맡긴 채로 하는 무식한 전투를 이어 왔다.

가성비로 보면 영 좋지 않은 짓거리를 반복했다는 소리.

그러나 기동성을 크게 향상해 주는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가 있다면 이제 그러한 전투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터였다.

'좋아, 그러면 몇 가지만 더 챙기고 나가면 되겠어.'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있는 아이템과 장비 전부를 챙겨 나가고 싶었지만, 언제 모그론이 출구를 닫아 버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내 신경줄은 굵지 못했다.

적당히, 적당히만 챙기자.

그렇게 홀로 되뇌면서 욕망과의 싸움을 각오하려던 순간.

부우우우웅!!!───

갑작스레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가 고막을 거칠게 때렸다.

"무슨...."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몸이 단번에 출구를 향해서 쏘아졌고, 나는 임시 창고를 박차고 나갔다.

부우우우웅!!!───

내가 임시 창고를 벗어나는 중에도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모그론이 잠들어 있는 영역에서 이런 소음을 내는지는 몰라도, 당장 막아야만 했다.

만약 모그론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게 파멸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어디지?'

소리로 근원지를 추적하기에는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정신을 집중한 채로 최대한 감각을 일깨웠다.

'찾았다.'

곧이어서 나는 이 정체불명의 소음의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뭐야?'

그도 그럴 것이, 웬 미친놈이 곤히 잠들어 있는 모그론의 면전에 대고서 나팔을 불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모그론이 깨어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 짓거리가 계속된다면 모그론이 언제 깨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마경의 왕 앞에서 소음 공해라니....

'뭔지는 몰라도 막아야 해.'

지금 나에게는 대충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저 미친놈을 공격해서 저 짓거리를 못 하게 막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단 저 미친놈에게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최대한 분란을 피하는 두 번째의 선택지가 보편적으로 타당할 테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런데, 저런 미친 짓을 할 만한 놈들이 흔한가?'

지극히 타당한 의문.

마경이라는 특수한 환경.

마경의 왕 중 하나인 모그론을 눈앞에 두고도 두려움을 가지긴커녕 오히려 정신 나간 짓거리를 벌이는 광기.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손에 들린 익숙한 악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곧이어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황혼 악단.'

에드릭의 말마따나 황혼 악단이 여전히 건재하다면, 마경까지 와서 마경의 왕 앞에서 저런 미친 짓을 할 만한 놈들은 그놈들뿐이었다.

대체 놈들이 왜 곤히 잠들어 있는 모그론을 깨우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들이 하는 짓이 으레 그렇듯이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R-74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AKR-74 돌격 소총이 내 손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가늠자 위의 조준선이 나팔을 불어 대고 있는 미친놈을 조준한다.

놈과의 거리는 약 300m.

가깝다고 할 수는 없는 거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격 소총으로 맞히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도 아니었다.

스읍....

조용히 숨을 참고, 몸에서 힘을 뺀다.

거기에 더해서 내 손끝을 타고서 움직인 마기가 AKR-74 돌격 소총에 스며들었다.

만약 놈이 황혼 악단이라면 일반적인 총알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현재 내 통제력으로 마기를 부여할 수 있는 건 초탄 하나뿐.'

마음 같아서는 마탄(魔彈)을 마음껏 흩뿌리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현재 마기에 대한 내 통제력이 여러 발을 동시에 감당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마탄을 쓸 수 있는 게 초탄뿐이라면, 초탄에 끝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마침내 손끝에 있는 떨림이 멎고.

철컥-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아아아앙───!!!

총구에서 뿜어진 불꽃과 함께 날아간 마탄(魔彈)이 일직선으로 악단 놈에게 쇄도했다.

"...!"

악단 놈 또한 나름대로 마탄에 반응한 듯했으나, 일반적인 총알도 아닌 마탄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콰아앙!!!

마탄에 적중된 악단 놈의 머리 부근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스으으....

빠르게 흩어지는 폭연 속에서 악단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호오.'

애석하게도 마탄이 악단 놈의 머리를 완전히 날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악단 놈이 불고 있던 나팔과 얼굴 반쪽은 날려 버렸다.

일단은 저 시끄러운 나팔 소리를 멈추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죽이는 데는 실패했나.'

단번에 숨통을 끊을 작정으로 머리를 노렸건만 명줄 하나는 질긴 악단 놈답게 얼굴 반쪽이 날아가고도 꾸역꾸역 살아 있었다.

'시간을 주지 않는다.'

황혼 악단의 구성원 대부분은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다.

즉, 괜히 시간을 주면 어떤 개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중요했다.

탕─!

타타탕!!!

연달아서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구에서 불꽃이 연신 뿜어지며 7.62×39mm 탄이 쇄도했다.

그러나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다는 듯이 놈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며 총알이 허공을 갈랐다.

'어디로 갔지?'

그 순간.

본능이 울린 적신호와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파박!

파바박!!

그와 함께 내가 있던 자리에 꽂히는 수십 개의 비수.

끝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전부 독이 묻어 있는 듯했다.

'누가 악단 놈 아니랄까 봐....'

참 구질구질하게도 논다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에 대한 감상을 더 늘어놓을 시간은 없었다.

독이 묻은 비수가 멈추지 않고서 연달아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쐐새색!!

나는 날아드는 비수를 몸을 굴려서 피하는 와중에도 비수가 날아오는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찾았다.'

마침내 비수가 날아드는 방향을 포착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서 총구를 돌렸다.

타타탕!!

그러나 쏘아진 총알들은 목표물에 채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섰다.

내가 그 마법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천음의 마법.'

내가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황혼 악단원에게서 또 다른 천음의 마법의 전조가 느껴졌다.

'이건 못 피해.'

천음의 마법은 이전에도 겪었듯이 대인전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발휘하는 마법이었고, 당연히 대처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나는 물의 보옥과 낙스의 유산의 힘을 동시에 끌어 올렸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선전수적순패(旋轉水的盾牌)'를 전개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수뢰(守雷)'를 전개합니다.]

이러한 대비가 무색하게도 당장이라도 나를 덮칠 기세로 쏘아졌던 음파는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이건 빗나간 게 아니었다.

궤적을 보건대 저건 애초에 나를 노리고 쏜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음의 마법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면, 이곳에서 놈이 노릴 만한 건 오직 하나뿐.

콰아아아앙!!!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일어난 거친 폭음과 함께 내 뒤에 있던 거산이 들썩였다.

"...."

이상할 정도의 고요가 흐른다.

찰나의 순간 속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이변은 일어났다.

구구구구구구───!!!

이제껏 잠들어 있었던 거석산이 거친 굉음을 내면서 들썩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거석산(巨石山) 모그론.

그것이 깨어났다.

87화 마경으로 (15)

거석산(巨石山) 모그론.

한때 마경을 지배했던 일곱의 왕 중 하나로, 멸망룡의 등장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지만 지금은 건방지게도 내 임시 창고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

지금껏 잠들어 있었던 그것이 깨어난다는 건 여러 가지로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을 초래한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닥칠 일은 역시나 내 안전에 대한 위협일 것이다.

쿠구구구구!!!

보기만 해도 까마득한 크기를 지닌 거석산이 본격적으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주변의 대지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멍하니 있다가는 이 거대한 흐름에 휩쓸릴 게 분명했기에 나는 다급히 몸을 날렸다.

마침내 몸을 완전히 일으킨 거석산 모그론이 기괴한 소리로 울었다.

고오오오오오───!!!

단지 소리 내어 울었을 뿐인데도 마치 천음의 마법이 작렬한 것 같은 기파가 일어났다.

가만히 기파에 휩쓸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물의 보옥과 낙스의 유산을 동시에 펼쳐 냈다.

콰콰콰!!!

모그론이 일으킨 기파가 벼락을 머금은 물의 장막에 부딪히며 물방울이 사방에 비산했다.

나름대로 막는다고 막았건만 채 막아 내지 못한 파동 탓에 귀가 먹먹해지고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으...."

살아 있는 재해(災害).

그것 말고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놈은?'

재빨리 황혼 악단원을 찾았지만 어느새 완전히 모습을 감췄는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습을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나 했으나, 감각을 깨우고 집중했음에도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도망쳤나.'

일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게 참으로 황혼 악단다웠다.

다만, 문제는 놈이 싸고 간 똥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해.'

현재 내 수준으로는 모그론을 잡기는커녕 그럴듯한 피해조차 입힐 수 없다.

거석산 모그론의 외피는 일반적인 바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도와 경도를 지니고 있었고, 아무리 마탄(魔彈)이 있다고 한들 총 몇 자루를 들고서 모그론에게 맞서는 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가 모그론은 업화의 마법에 대한 내성이 매우 뛰어나다. 업화의 마법 또한 통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아.'

물론 마법에 따라서 바위조차도 녹여 버릴 수 있는 업화의 마법 또한 존재했지만, 그런 마법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런 대가를 감당하면서 모그론을 불태우려면 내가 백 번은 산 채로 불타도 부족할 것이다.

즉, 현재 내가 지닌 수단으로는 모그론에게 그럴듯한 피해는커녕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일단 이것부터 갈아 신는 게 낫겠지.'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서 이번에 임시 창고에서 챙겨 온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로 갈아 신었다.

조금 전까지는 상황이 상황인 터라 갈아 신을 시간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가 지닌 기동성이 필요했다.

왜냐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야 할 테니까.

그 순간.

쿠우우웅!!!

모그론이 살짝 움직이기 무섭게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거칠게 흔들리며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아래에 있었던 내 임시 창고 역시도 조금 전의 발돋움으로 완전히 매몰되지 않았을까.

'쯧.'

좀 아깝기는 했지만, 어차피 챙겨야 할 건 다 챙겼으니 크게 아쉬울 건 없었다.

'그것보다는 다른 게 문제야.'

모그론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제부터 마경 내의 생태계도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마수들이 움직일 것이다.

한두 마리도 아닌, 감히 셀 수조차 없는 막대한 수의 마수들이.

그리고 그 여파는 필연적으로 겨울성까지 미칠 터.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해.'

마경의 일곱 왕.

이제는 셋밖에 남지 않은 왕 중 하나가 움직였다는 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그러는 사이에도 모그론의 움직임과 함께 땅거죽이 뒤집히며 지반이 흔들렸다.

'...음?'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마치 피가 식는 듯한 싸늘한 감각을 느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오오오오오!!!]

거석산 모그론.

놈이 나를 보고 있다.

쿠구구구구──

지반이 떨리면서 모그론의 몸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삽시간에 나를 뒤덮어 버린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모그론은, 지금 나를 깔아뭉개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깔린다.'

현재 내가 지닌 기동성으로는 모그론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기동성을 손에 넣으면 될 뿐.

마침 나에게는 그런 기동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친구가 있었다.

"해보자고."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에서 바람이 휘감겨 나왔다.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가 축복을 발동합니다.]

['질풍보(疾風步)'가 발동합니다.]

발걸음이 가볍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휘감겨 오는 질풍이 나를 앞으로 인도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는 현재 나에게 있어서 가장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 기동력을 충실하게 채워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하이마의 펜던트에 깃든 저주가 더욱 강하게 발휘되면서 전신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체 능력이 30% 향상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출혈'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합니다.]

혈류량이 폭발적으로 증대하며 전신의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올랐다.

스스스─

얼마 전 요한의 마기를 흡수하며 더욱더 강해진 마기 또한 일어나면서 내 신체 능력을 보조했다.

'이 정도면 모그론의 영향권에서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터.'

그러한 생각이 채 이어지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쿠구구궁!

아슬아슬하게 그림자를 벗어나기 무섭게 모그론의 걸음이 대지를 짓밟으며 일어난 기파가 등 뒤에서 덮쳐 왔다.

콰콰콰콰콰!!!

그와 함께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장막이 모그론이 일으킨 기파를 막아섰으나, 미처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내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며 굴렀다.

대체 몇 번을 굴렀을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간신히 몸을 멈춰 세웠다.

"으... 망할 자식."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낸 뒤에 나는 곧장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마냥 누워서 쉬고 있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쿠르르릉!!

앞으로 몸을 날리기 무섭게 등 뒤에서 아찔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일어난 기파가 다시금 나를 덮쳤으나, 이번에는 거리가 제법 멀어진 덕분인지 그 위력이 조금보다는 덜했다.

"무식한 자식."

쉽게 죽어 줄 생각은 없다.

덩치에 맞지 않게 민첩한 몸놀림을 가진 모그론에게 당장이라도 깔려 죽을 것 같은 위기가 수차례.

그런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 나니 어느덧 모그론과의 거리가 점차 벌어졌다.

"후욱, 후욱...!"

머리 위에서 날아드는 바위들을 간신히 피해 내고, 대지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질풍을 발판 삼아서 가로질렀다.

쾅!

콰아앙!!─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바람에 몸을 맡긴 채로 내달리다 보니 어느새 등 뒤에서 들려오던 굉음이 점차 멀어졌다.

'빠져나왔나?'

살며시 뒤를 돌아보니, 그저 아득하게만 보였던 거석산의 거대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거체가 한 번에 보일 정도로 거리가 멀어졌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저 무식한 자식의 발돋움으로 인한 기파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겠지.

"후아...."

마침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를 신지 않았다면 정말로 위험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업화의 악마와의 정식 계약을 고려해야 했을 정도로.

'그나마 이 정도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다행인가.'

비록 잃은 건 많았지만 일단은 살아남은 걸 위안으로 삼았다.

그래도 한 가지 더 아쉬운 게 있다면, 만약 조금 전에 황혼 악단원과 부딪칠 때 이걸 신고 있었더라면 조금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비록 그 상황에서 신발을 갈아 신을 여유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놓치고 말았지만, 만약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다음에는 안 놓친다.'

황혼 악단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 겨울성이 관련되어 있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지금껏 잠들어 있었던 마경의 왕을 자극하게 되면 필시 겨울성에 그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겨울성을 노리는 거겠지.'

겨울성은 제국의 핵심 전선이다.

당연히 겨울성이 무너지면 제국의 방위가 연쇄적으로 무너질 테고, 제국은 곧 마경에 존재하는 마수들의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과연 겨울성이 없는 상태로 마수 군단을 마주하게 된 제국은 어떻게 될까.

뻔한 이야기였다.

'서둘러야 해.'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 * *

이름 없는 신전.

이제는 세상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곳에서 평화롭게 십자수를 하고 있던 베아트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교적 쉬운 임무를 나섰던 황혼 악단의 단원, 피어스가 거의 초주검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뭐야, 돌산에 깔리기라도 한 거야? 얼굴이 왜 그래?"

꼬락서니만 본다면 죽었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

황혼 악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리고 단원들에게 있어서 분신과도 같은 악기를 잃은 건 둘째 치고서, 피어스의 얼굴 반이 사실상 뜯겨 나가다시피 한 중상을 입고 있었다.

"...불청객이 있었다."

"불청객?"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이번에 피어스가 맡은 임무의 장소는 불청객이라는 단어와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어스의 임무는 마경 한가운데에 잠들어 있는 왕 중 하나를 깨우는 일이었으니까.

본래였다면 마경의 왕과 직접 부딪치는 미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부상을 입으려야 입을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런데 마경에서의 불청객이라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놈인데?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네 얼굴을 그 꼴을 만들어?"

베아트리체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숙적으로 인해서 황혼 악단이 괴멸 위기에 처한 이후 이제 단원들은 몇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소중한 단원들을 최근에 잃은 것도 모자라서, 또 이런 얼굴로 돌아오다니?

특히 얼마 전 죽었던 아그니 같은 경우는 업화의 계약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놈이었지만, 피어스는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마법을 사용하는 자였다. 소리는 천둥이 치는 것 같았고, 위력은... 보시다시피."

"벼락? 설마 뇌명의 계약자를 말하는 거야?"

"아니... 그것과는 달랐다. 그것만은 확실해."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굳었다.

벼락을 다루지만, 뇌명의 계약자는 아니다라.... 어디선가 들어 본 얘기 같았기 때문이었다.

"음... 일단은 알았어. 그 마법사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볼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해. 잘생긴 얼굴이 그게 뭐야?"

"...알았다."

피어스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신전 안으로 들어가고, 베아트리체는 무거운 표정으로 피어스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벼락을 다루지만, 뇌명의 마법사는 아닌 자라...."

마침 베아트리체는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겨울성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우레의 마법사라고 하던가.

얼마 전에 데미안이 중상으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겨울성에 대해서는 한번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방치하기에는 겨울성의 존재가 계속해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이번에 움직인 건데, 그조차 보기 좋게 방해를 받았다라...."

혹시나 악단의 계획이 겨울성에 노출되기라도 한 걸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런 우연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십자수 안에 그려진 겨울성의 모습을 담았다.

88화 남아 있는 자들

알리시아의 퀭한 시선이 눈보라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겨울성을 담았다.

"...."

벌써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마수들을 베고 있었다.

슬슬 이곳에 있는 마수들도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서 자고 싶었다.

그러한 마음은 다른 특무대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는지, 알비노가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마수의 피를 닦아 내며 투덜거렸다.

"으으, 이 짓도 정말 못 할 짓이군. 벨 녀석은 지금쯤 따뜻한 곳에서 술이나 먹고 있겠지?"

콘란이 가볍게 웃었다.

"마경 간다고 하지 않았나?"

"이봐, 그 말을 믿어? 그냥 휴가 가는 김에 허세 한번 부려 본 거겠지. 마경은 무슨. 아무리 녀석이 대단한 마법사라도 마경에 혼자 가는 건 미친 짓이야. 너도 알지 않나?"

"그런가? 들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비록 한 명이 결원이긴 해도 제4 특무대는 여느 때와 같이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이번 임무는 겨울성 인근에 출몰하는 마수 무리를 추격 및 토벌하는 임무였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들은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지. 다들 고생했네."

에드릭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으나, 전신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마수들의 피가 지금껏 그가 얼마나 많은 마수를 베었는지 말해 주었다.

콘란이 도끼에 묻은 피를 떨쳐 내며 말했다.

"이보쇼, 대장. 궁금한 게 있수."

"말하게."

"요즘 들어서 마수들의 공격이 잦아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요?"

"자네답지 않게 예리한 질문이군. 실제로 최근 들어서 마수들의 공격이 잦아진 건 사실일세."

"흠, 그건 괜찮은 거요?"

"글쎄. 좋은 징조인가 나쁜 징조인가를 묻는 거라면 단언컨대 후자겠지."

콘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면 그건 꽤 심각한 얘기 아니요?"

"심각한 얘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해 봐야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지 않나? 그리고 겨울성에서 마경에 조사대를 파견했으니 곧 성과가 있을 걸세."

"조사대가 복귀하지 못하면요?"

"그 또한 조사의 성과지."

"허어."

콘란이 고개를 내저었다.

에드릭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제4 특무대의 대장이었지만, 그와의 대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두통을 일으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고."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거, 알 만한 사람이 참...."

"부끄러워하기는."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괜찮을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단언하지. 자네들이 내 부하로 있는 이상 의미 없이 죽는 일은 없을 걸세."

"그냥 안 죽으면 안 됩니까?"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네."

"끙."

그렇게 여느 때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던 순간.

갑작스레 에드릭의 시선이 북쪽을 향해 옮겨지자, 자연스레 콘란의 시선도 함께 옮겨졌다.

"지금 뭘 보는─"

콘란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저 너머, 북쪽 멀찍이서 피어오르고 있는 한 줄기의 봉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콘란은 물론이고 제4 특무대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 같군."

북쪽의 봉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거... 설마 마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아마 그렇겠지. 한동안 또 피곤하겠어."

에드릭의 시선이 북쪽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담았다.

하염없이, 계속해서.

* * *

쨍쨍쨍!

겨울성에 있는 비상종이 울리며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둘러!"

"어서들 움직여!"

북쪽에서 피어오른 봉화는 겨울성에 있어서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겨울성에는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다.

"쇠뇌 점검 끝났나? 끝났으면 바로 배치해!"

"옮기는 중입니다!"

"여기 나무 방패 어디 갔어? 당장 더 가져와!"

"현재 제작 중입니다!"

그렇게 분주한 겨울성의 풍경을 뒤로한 채로 제4 특무대는 임무를 마치고서 막사로 복귀했다.

"오늘은 이만들 쉬게."

에드릭의 말에 콘란이 말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걱정할 필요 없네, 어차피 내일부터는 쉬고 싶어도 못 쉴 테니."

그 말에 콘란과 알비노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벨 녀석이 부럽군. 하필 이럴 때 휴가라니, 누가 보면 미리 알고서 나간 줄 알겠어."

"흠, 그런데 만약 정말로 마경으로 간 거라면 벨 녀석 꽤 위험한 것 아닌가? 마경 쪽에서 봉화가 피어오른 거라면 마경 안에 있는 사람이 제일 위험한 거잖아."

"위험? 누가? 녀석이?"

알비노가 코웃음 쳤다.

"아서라, 덩치. 벨 블랙우드가 어떤 마법사인지 잊은 거냐? 설사 녀석이 마경으로 진짜 갔다고 한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오히려 우리를 걱정해야지."

"끙. 그런가?"

"에드릭 저 양반이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어. 내일부터 상상 이상으로 고된 나날이 우리를 기다릴 거다."

"확 탈영해 버릴까?"

"그러게 내가 진즉 하자고 하지 않았나. 뭐, 이미 늦었지만."

"어휴."

콘란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어차피 탈영을 할 마음도 없었지만, 요즘 들어서 가끔 예전에 알비노와 함께 겨울성을 빠져나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그만큼 요즘 겨울성에서의 나날은 웬만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콘란조차 우는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고됐다.

"그것보다는 저 녀석이 걱정이군."

"누구? 아."

그제야 콘란은 알비노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벨 블랙우드가 휴가를 떠난 후, 알리시아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임무를 이어 갔다.

그 모습이 조금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어도, 알비노나 콘란이 굳이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봉화가 피어오른 후부터 알리시아는 눈에 띌 정도로 불안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북쪽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당장이라도 마경으로 달려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알비노 또한 그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혀를 쯧쯧 찼다.

"저러다가 탈영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언제는 탈영 탈영 하더니 이제는 남이 먼저 할까 봐 겁나나 보지?"

"흥, 미련하긴. 그게 아니라 만약 저대로 저 여자가 탈영한다면 죽을 자리를 찾아갈 것 같아서 하는 소리다. 벨 블랙우드야 그렇다 쳐도 마경에서 살아남는 게 어디 쉽겠나?"

"으음, 그것도 그렇군. 혹시 이상한 짓 하는지 잘 살펴봐야겠어."

알비노와 콘란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알리시아는 가만히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

알비노의 말마따나 알리시아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마경으로 향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마경의 위험성을 비롯한 현실적인 문제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벨 블랙우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알리시아는 약속했다.

언젠가 벨 블랙우드의 발목을 붙잡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겠다고.

그렇기에 이곳에 남았다.

벨 블랙우드와의 약속대로 강해지고, 또한 벨 블랙우드가 돌아올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부우우우우웅───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기에 더해서 온갖 고함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지금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 주었다.

에드릭이 편히 쉬라고 말은 했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정말로 편히 잠들 수 있는 신경줄을 지닌 이는 이 중에서 없었다.

콘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정말로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는 것 맞아?"

"대장이 말했잖나, 어차피 내일부터는 쉴 시간도 없을 거라고. 잔말 말고 잠이나 자."

"끙."

콘란과 알비노가 어설프게 몸을 누이기는 했으나, 잠들기는커녕 계속해서 몸을 뒤척거렸다.

오늘 하루가 그토록 고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겨울성이 처한 상황이 편안한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 못 자겠으면 억지로 눈이라도 붙여. 그게 아예 안 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알았다고."

알비노와 콘란이 억지로 잠을 청하고, 알리시아 또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한다면 체력 보충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리고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콰앙!

거친 소리와 함께 막사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이닥쳤다.

"뭐, 뭐야!"

"웬 놈이냐!"

"...."

모두가 각자의 병장기를 쥔 채로 발작하다시피 일어났으나, 곧이어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허탈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잘 쉬었나? 이제 슬슬 일하러 갈 시간이네."

"대장님이셨습니까? 난 또."

콘란의 말에 불청객으로 막사에 난입한 주인공인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하하, 내가 만약 암살자였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오지는 않았을 걸세. 그리고 자네들은 이미 시체가 되었겠지."

"불길한 농담은 그쯤 하시고, 일하러 갈 시간이라니요? 누운 지 별로 안 된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푹 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쉬었지. 자자, 다들 일어나게."

"...망할.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오늘 편히 쉬라고 할 때부터 불길하다 싶더라니, 막사에 들어와서 쉬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 에드릭이 난입했다.

"상황이 안 좋은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될 예정이라고 봐야겠지. 아직 본격적으로 마수들이 들이닥친 건 아니지만 조짐이 심상치 않네."

에드릭이 덧붙였다.

"북쪽에 있는 봉화대 세 곳에서 봉화가 더 피어올랐어. 네 곳 이상의 봉화가 한 번에 피어오르는 건 최근 3년 동안 없었던 일이지."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 수준의 위기인지 콘란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게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합니까?"

"대비를 해야겠지. 그걸 위해서 우리가 움직이는 거고. 으음...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일단 출발하지. 나머지는 가면서 말해 주겠네."

애초에 특무대원들이 막사로 돌아왔을 때 장비를 벗지 않은 상태였기에 챙길 건 간단한 식량과 물 정도뿐이었다.

준비를 마친 특무대원들이 에드릭을 따라서 막사를 나섰다.

한창 마수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겨울성의 혼잡한 풍경을 가로지르며 에드릭이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간단하네. 현재 마경의 서쪽 부근에서 크로이츠를 향해 오고 있는 마수들의 대략적인 규모와 수준, 그것을 파악해 오는 것일세."

"마경으로 조사대가 파견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미복귀라는 성과를 남기기도 했고. 그래서 우리가 직접 척후대 역할을 맡게 된 것일세."

"아...."

알비노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서쪽 부근이라면, 다른 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곳에는 다른 특무대가 파견될 걸세. 솔직히 말해서 별로 미덥지 못한 친구들이긴 하지만 말이지."

콘란이 슬쩍 끼어들었다.

"혹시 제3 특무대입니까?"

"아는 친구들인가?"

"뭐...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이라는 건 잘 압니다."

"안목이 뛰어나군. 역시 내 부하다워."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농담이 오갔으나 그것으로도 은연중에 감도는 긴장감을 완전히 날리지는 못했다.

에드릭에게는 아직 대원들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이번 임무의 목적에 앞서 말했듯이 마수들의 대략적인 규모와 수준을 파악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경의 왕이 등장했는지 확인하는 것.

'만약 마경의 왕 중 하나가 정말로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때는 아마, 많은 걸 잃을 것이다.

"대장,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표정이 심각한데."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흠, 그런가? 아닌데. 분명히 뭔가 있는데.... 우리한테 숨기는 것 있지 않수?"

"없대도."

"뭐, 대장이 그렇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수다."

껄껄 웃는 콘란과 다른 특무대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릭은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부디.

89화 남아 있는 자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