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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남아 있는 자들 (2)

마경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

촉각을 다투는 임무인 만큼 마경으로 향하는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필의 군마가 차출되었다.

물론 마경 입구에서 다시 말을 돌려보내야 했지만, 거기까지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이동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쯤부터는 걸어가야겠군."

에드릭이 말에서 내리자, 이를 따라서 다른 특무대원들 역시도 말에서 내렸다.

마경에 정해진 국경선 같은 건 없었으나, 마경 인근에 오게 되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길함이 있다.

그건 아마 마수들의 영토가 자연적으로 풍기는 냄새와 흔적 때문이리라.

"자, 돌아가라."

에드릭이 말 엉덩이를 두드리자 네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마경 반대편으로 달아나듯이 내달렸다.

"저렇게 그냥 보내도 되는 겁니까? 꽤 좋은 말 같던데."

"잘 훈련된 군마들일세. 겨울성까지는 알아서 찾아갈 수 있어."

그에 콘란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러면 왜 예전에는 걸어 다닌 거요? 똑같이 말 타고 왔으면 될 일인데."

"자, 출발하지. 시간이 촉박하네."

"아니...."

콘란이 무어라 항변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릭은 발걸음을 옮겼다.

"고요하군."

에드릭의 시선이 마경 안에 펼쳐진 수해를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본래 영역을 지키던 마수들이 수풀 사이에 숨은 채로 노려봤겠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콘란과 알비노 또한 그 기색을 느꼈는지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음, 확실히."

"마경이 원래 그런 편이지만, 지금은 더욱 심하긴 하군."

에드릭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긴장을 놓지 말게."

"오기 전부터 그러고 있었수다."

"듣던 중 다행이군."

에드릭이 말했다.

"일단 조짐이 불길하긴 하지만 임무는 임무니 계속 가지. 만약 마수 군단의 준동이 확인된다면 즉시 보고해서 겨울성에 그 사실을 알려야 하네."

에드릭이 덧붙였다.

"설사 우리 중 몇이 죽는다고 해도 말이지."

이 중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이견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제4 특무대가 본격적으로 마경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비록 이들이 경계의 길 같은 건 알지 못했으나, 현재 마경 외곽이 사실상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제4 특무대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쉽게 마경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마경 내부로 들어설수록 물씬 음산한 기운이 풍겨 왔다.

특히 분명히 있어야 할 마수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 그 음산함을 더욱더 증폭시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고요한 것 같은데 슬슬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는지?"

알비노의 말에 에드릭이 답했다.

"나 또한 동감하는 바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우리는 적의 규모나 수준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했네. 임무는 완수해야 하지 않겠나?"

"그게 죽고 나면 무슨 소용입니까."

"군인은 때로 위험을 알면서도 임무에 나서야 할 때가 있네. 의미 없는 희생은 피해야겠지만, 지금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일세."

"...젠장.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위험하면 바로 도망칠 겁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살아서 겨울성에 보고를 해야 하니 그 정도는 이해하시겠죠?"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자세가 참으로 훌륭하군. 그렇게 하게."

뼛속까지 군인 같은 에드릭의 답에 알비노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이제껏 보아 온 에드릭이라는 인물이 참군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계속 가지."

모두가 숨을 죽인 채로 조심스럽게 마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은 안 했지만, 본래였다면 이미 특무대가 있는 곳은 안전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던 고요함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들려온 마수의 울음소리가 수해 속을 메아리를 타고서 울려 퍼진다.

그와 함께 마치 이제껏 있었던 고요함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이 작은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웅─

쿵! 쿵!

처음에는 에드릭조차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진동이었으나, 그 진동은 이윽고 가장 감각이 둔한 알비노마저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이봐, 덩치. 들리나?"

"무언가 오고 있군."

"조심해요."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알리시아조차도 곧 일어날 무언가를 경고했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거요?"

"도망쳐야 합니다."

에드릭이 대원들의 부름에 답했다.

"전원 후퇴한다."

에드릭은 빠르게 판단했다.

특무대원들 역시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견 없이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달리게!"

지금까지 해 왔던 고된 달리기 훈련이 마치 오늘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특무대원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뒤떨어져서 달리던 알비노가 불평하듯이 말했다.

"조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도망칠 거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겁니까?"

"이 정도면 적의 수준과 규모는 충분히 파악했네. 들려오는 진동의 크기와 간격으로 보건대 마경 서쪽에서만 최소 일만 이상의 규모에 중형종 다수와 대형종까지도 섞여 있군. 아무래도 황실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수준인 것 같네."

"예?"

"자네가 들은 그대로일세."

내내 같이 있어 놓고 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에드릭이 이상한 거야 늘 있었던 일이었기에 알비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써 봤자 자기만 손해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에휴...."

그 부하에 그 대장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벨 블랙우드도 그렇고 에드릭도 그렇고 제4 특무대에는 여러모로 이상한 놈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알비노 본인도 보편성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인물이었지만, 사람이란 늘 자신에게는 관대한 법이었다.

한창 달리던 에드릭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쯧. 이런."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붙잡힌 것 같군."

그와 함께 수풀 사이에서 아가리를 쫙 벌린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아아아악!]

"조심─"

알리시아의 외침이 채 이어지기 전에 마수의 얼굴에 혈선이 그려졌다.

촤악─!

그리고 마수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피 분수가 솟구쳤다.

에드릭의 솜씨였다.

"괜찮나?"

"어... 예, 뭐."

콘란은 아직도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잠깐 멍하니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마수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검을 뽑는 것도 못 봤는데....

"정신 차리게."

"아."

"서둘러야 하네. 마수들이 계속해서 오고 있어."

콘란은 딱딱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 말마따나 지금은 이곳에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크르르....]

[카학, 카학!]

달리는 내내 수풀 사이에서 마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사방에서 마수들이 조여들고 있는 듯한 기분.

그제야 특무대원들은 상기했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곳은 마경 한복판이었고, 본래였다면 인간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는 금역 중의 금역이었다.

그런 곳에 함부로 발걸음을 디딘 이들에 대한 심판이라도 하듯이 사방에서 느껴진 기척들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 왔다.

[구우우우우우──]

[그릉! 그르릉!]

결국, 퇴로가 완전히 막히고 나서야 에드릭이 검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겠군. 내가 길을 뚫을 테니 어떻게든 빠져나가게."

"괜찮은 겁니까?"

"내 걱정은 말게."

"아뇨, 대장 없이 저희끼리 빠져나가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사방이 마수인데요."

"음. 그냥 시키는 대로 하게."

에드릭이 그렇게 말하면서 퇴로를 막고 있는 마수들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촤악!

에드릭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마수들의 목이 날아갔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용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러한 에드릭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퇴로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에드릭이 베는 마수보다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는 마수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망할 자식들이...!"

마수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우오오!"

콘란이 흉성을 토해 내며 늘 그랬듯이 흉험한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으나, 이곳은 마경이었다.

카앙!

당연히 마수들의 수준 역시도 지금껏 콘란이 상대해 왔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고, 콘란의 도끼가 마수의 비늘에 닿기 무섭게 튕겨 나갔다.

"무슨 비늘이...."

콘란이 질린 기색으로 재차 도끼를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마수의 공격이 더 빨랐다.

마수의 발톱이 콘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핏방울이 허공에 흩날렸다.

"커헉!"

"망할! 덩치!"

알비노가 부랴부랴 손을 뻗어서 강철 같은 비늘을 지닌 마수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케엑? 게에에엑!]

알비노의 마법에 적중된 마수가 잠시 어리둥절해하며 홀로 괴성을 지르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감각이 교란되었다는 증거.

그리고 알비노는 이미 이러한 식의 사냥을 무척이나 자주 해 왔다.

푹!

순식간에 알비노의 장검이 날뛰는 비늘 마수의 눈을 파고들었다.

비록 그 힘이 조금 부족했는지 장검이 뇌까지 닿지 못한 채로 마수가 날뛰며 알비노를 날려 버렸지만, 곧이어서 날아든 콘란의 도끼가 마수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캉!─

카앙!!

제아무리 비늘이 단단하다 하더라도 그 무식한 도끼질로 인한 충격까지 완전히 흡수할 수는 없었는지 마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르륵....]

"좀 뒈져라!"

[크러억!]

콘란이 악을 쓰면서 도끼를 몇 차례 더 휘두르고 나서야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마수가 쓰러졌다.

"후... 망할."

콘란이 이가 잔뜩 나간 도끼를 바라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한 마리.

고작 한 마리를 상대했을 뿐이건만 도끼의 이가 전부 나가서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다른 무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무기일 뿐.

여전히 사방에서 다른 마수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절망적이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쯤 되니 자연스레 드는 생각.

'이런 곳에서... 정말로 인간이 버틸 수 있다고?'

처음 벨 블랙우드가 마경으로 향한다고 했을 때, 녀석이라면 그래도 잘해 낼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콘란이 마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한번 마경 외곽을 가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제아무리 마경이라 불린다고 하더라도 벨 블랙우드쯤 되는 마법사라면 가지 못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직접 와 보니 달랐다.

마경이 어째서 마경으로 불리며 인간들에게 금역으로 여겨지고 있는지 콘란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정신 차리게!"

[크라락!]

촤아악─!

그때 들려온 호통과 함께 어느새 콘란을 덮치려던 마수의 목이 잘려 나갔다.

콘란은 그제야 잠깐의 잡념을 애써 떨쳐 내고서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봐요, 대장. 우리 이곳에서 살아서 갈 수 있는 거요?"

"그래야 하네."

에드릭치고는 오묘한 대답이었으나 콘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근거로는 그 정도 말이면 충분했다.

"꼭 살아서 나갑시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덩치!"

"너나 잘해!"

콘란이 흉성을 토해 내며 알비노와 함께 어떻게든 퇴로를 만들기 위해서 무기를 휘둘렀다.

[쿠루루!]

한편, 알리시아 또한 멈추지 않고서 마수들 사이를 누볐다.

하지만 콘란이 그랬듯이 알리시아 또한 밀려드는 마수를 쉽사리 상대하지 못했다.

이건 상대하는 마수의 수준이 평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원의 공백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러니까 벨 블랙우드가 있었다면 이 정도 마수들의 공격은 능히 뚫고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마수들을 뚫기는커녕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벨 블랙우드라는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였고, 지금까지 제4 특무대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맡아 왔는지.

'여기서는 죽을 수 없어.'

이제 알리시아에게 이뤄야 할 목표 같은 건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약속했다.

언젠가 벨 블랙우드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기로.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카아아악!]

"죽어."

알리시아는 흉흉한 살기를 풍기면서 달려드는 마수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파악!

하지만 가죽이 어찌나 두꺼운지 알리시아의 검이 마수를 베지 못하고 마수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그르르....]

알리시아가 그것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마수의 근육에 박힌 검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캬아아악!]

"이런─"

마수가 흉악한 아가리를 벌린 채로 알리시아를 덮쳐 오며, 그녀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

알리시아의 눈동자에 많은 것이 담기던 그 순간.

쉬이이잉!

어디선가 들이닥친 돌풍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

사방이 숲으로 이루어진 마경의 특성상 마경 한복판에서 바람이 부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건만, 이런 때에 갑자기 이런 돌풍이 몰아치는 건 무슨 의미인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탕─!

어디선가 울려 퍼진 굉음과 함께 알리시아를 덮치려던 마수가 피 분수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그때부터였다.

탕! 탕!

굉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제4 특무대를 포위하고 있던 마수들이 한 마리씩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마법은....'

그녀가 이 마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벨?"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에드릭이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더 빨리 올 수는 없었나?"

그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고 싶었는데, 방해하는 것들이 좀 많아서요."

"정리는 하고 왔겠지?"

이윽고 어둠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전부."

벨 블랙우드.

그가 돌아왔다.

90화 재회

겨울성으로 복귀하던 도중.

내가 한창 마수들에게 쫓기고 있는 제4 특무대를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제4 특무대가 마경 안으로 들어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뿐더러, 설마 그들이 마수들에게 쫓기고 있을 줄도 몰랐으니까.

'설마 나를 찾으러 왔을 리는 없고.... 겨울성에서 조사대를 파견한 거로군.'

과연 겨울성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의 경우 겨울성에서 마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건만, 역시 겨울성은 겨울성이라는 건지 늦지 않게 마경에서의 이변을 감지한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겨울성에서도 대비에 나섰다는 뜻이고, 내가 마경의 왕이 깨어났다는 사실만 전달한다면 그것을 근거로 공식적으로 황실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일단 움직여야겠지.'

마수들이 점차 제4 특무대의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마경을 빠져나가기 전에 전멸을 피할 수 없을 터.

아니, 에드릭 혼자만이라면 어떻게 몸을 뺄 수도 있겠지만, 에드릭이라는 인물을 생각했을 때 에드릭이 부하들을 버려 두고 홀로 저곳을 빠져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퇴로를 만들어 줘야 해.'

하지만 어설프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총성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주변에 있는 마수들의 이목이 나에게로 쏠릴 테고, 그랬다가는 특무대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내가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그렇다면....'

특무대의 이동 경로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나는 그보다 조금은 먼 거리에 있는 나무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위치라면 설령 총성이 들리더라도 특무대를 포위하고 있는 마수들이 내 위치를 특정하기 쉽지 않을 터.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R-74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AKR-74 돌격 소총을 다잡은 나는 나무 위에서 마수들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다.

'한 발에 한 마리씩, 신중하게.'

총알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병기 소환 특성으로 시간만 있으면 총알을 무제한으로 수급할 수 있다고는 하나, 한정된 시간 동안은 총알이 한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현 수준의 마수들은 일반적인 7.62×39mm 탄에 뚫리지 않는 강력한 가죽과 비늘을 지녔다.

놈들을 잡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마탄(魔彈)을 사용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스스스─

손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마기가 탄창에 있는 총알에 깃들었다.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스읍....

호흡을 멈추고, 마수를 조준한다.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격발된 마탄이 단번에 알리시아를 덮치려던 마수의 머리를 꿰뚫었다.

한 마리의 마수를 제거했으나 여전히 마수는 많이 남아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마기를 움직여서 탄에 싣고,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탕! 탕!

연신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마수들이 한 발에 한 마리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기를 두른 탄, 마탄의 위력이었다.

'이제 좀 알 것 같군.'

그렇게 몇 차례 연속으로 마탄을 쏘아 대다 보니, 탄에 마기를 싣는 요령이 점차 늘어났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내 연사 속도 역시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탕! 탕탕!

늘어난 연사 속도와 함께 마수들이 쓰러지는 속도 역시도 늘어났다.

그리고 탄창 한 개를 전부 비우고 나서야 나는 움직일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지금이다.'

일시적으로 마수들의 포위망이 뚫리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서 곧장 제4 특무대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크오오!]

[Lv.5]

[바그돈]

그 와중에 내 존재를 알아차린 마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으나, 이미 내 손에는 한 자루의 더블 배럴 샷건이 들려 있었다.

타앙─!

폭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있던 마수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이제껏 흔히 보아 왔던 그저 그런 마수도 아닌, 꽤 수준이 있는 5레벨 마수가 말이다.

마기가 실린 70mm 12게이지 산탄의 근거리 파괴력은 직접 방아쇠를 당긴 나로서도 조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마탄인가.'

만약 이후에 마탄을 다루는 게 조금 더 익숙해진다면, 모르긴 몰라도 순간적으로 상상 이상의 화력을 뿜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탕!

탕! 탕─!

그렇게 나를 향해서 달려드는 마수들의 머리에 친히 바람구멍을 내 주면서 내달리다 보니, 어느덧 분전 중인 특무대의 모습이 지척에 보였다.

철컥-

더블 배럴 샷건의 방아쇠가 다시금 당겨지며 내 앞을 가로막은 마수의 몸통이 터져 나갔다.

그에 이미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에드릭이 반가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빨리 올 수는 없었나?"

"그러고 싶었는데, 방해하는 것들이 좀 많아서요."

"정리는 하고 왔겠지?"

그야 말할 것도 없지.

"전부."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여전히 훌륭하군. 자네 덕분에 퇴로가 열렸어. 할 말은 많지만, 일단은 바로 움직이지."

"예."

그렇게 슬쩍 시선을 돌리니, 잠시 한숨 돌릴 여유를 얻은 특무대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

"왔군, 벨."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렵군."

알리시아와 콘란, 알비노까지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들이었으나, 지금은 일단 에드릭의 말마따나 움직여야 할 때였다.

"가면서 말하자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견은 없었다.

제아무리 당장 퇴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확보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우리가 퇴로를 빠져나가기 무섭게 사방에서 마수들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게 느껴졌다.

"좀 더 속도를 내게!"

"제기랄! 이미 죽어라 뛰고 있는 겁니다!"

"말할 힘까지 아끼면서 뛰라는 이야기일세!"

"그럼 말이나 걸지 말든가!"

콘란의 원망 섞인 비명에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수풀 너머에서 느껴지는 무수한 기척들을 슬쩍 흘겨보았다.

'이대로면 따라잡힌다.'

물론 에드릭이 있으니 따라잡히는 것 자체가 큰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점차 이동속도가 느려지다가 결국에는 다시금 마수 무리에 포위될 것이다.

'그렇다면.'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7.62×39mm 탄'을 소환합니다.]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AKR-74 돌격 소총의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러고는 여전히 달리는 자세를 유지한 채로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쏘아진 마탄이 단번에 마수에게 적중했다.

[케헤헥...!]

비록 즉사까지는 시키지 못한 듯했으나, 마수의 움직임이 멈춘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제압을 하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마수 사냥이 아니라 우리가 마경을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감각을 최대한 깨운 채로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오는 마수들을 향해서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한 발. 쏘아지는 모든 탄환에 마기를 담아서.

탕!

타앙!─

전신에 휘감겨 있던 마기들이 뭉텅뭉텅 빠져나가자 육체 보조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며 조금의 탈력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멈췄다가는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죽을 테니까.

그러한 모습을 알아보았는지 옆에서 다가오는 마수의 목을 벤 에드릭이 말했다.

"자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니 별말은 안 하겠지만... 무리하지는 말게."

그렇게 마경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는 마수들을 하나둘씩 저격했던 게 효과가 있었는지, 점차 포위망이 헐거워졌다.

그제야 조금의 여유를 되찾은 특무대원들이 전력 질주에서 경보로 속도를 늦추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으... 두 번은 못 할 짓이군. 마경이 왜 마경이라는지 알겠어."

콘란은 마경의 혹독함에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고.

"벨, 괜찮아요?"

"괜찮다."

알리시아는 언제나처럼 날 걱정했으며.

"너...."

알비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떨떠름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마경에 갔던 거냐?"

"그런다고 했잖아."

"어이가 없군. 그걸 누가 믿어?"

"너 빼고는 다 믿은 것 같은데?"

"...."

알비노는 슬쩍 주변을 흘겨보더니 이내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진실이라는 건 생각보다 믿기 어려울 때가 많은 법이다.

"...그렇다면 마경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지? 마법의 위력이 예전과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것 같은데."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이렇게 가면서 말하기에는 너무 길고."

"흥... 어차피 말해 줄 생각도 없지 않나."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이야기하는 도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네만, 슬슬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에드릭이 끼어들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에서 생긴 이변에 대한 이야기 말이군요."

"그렇다네. 마경에 직접 갔던 자네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에드릭의 표정이 굳었다.

"알고 있다라.... 혹시 내가 우려하는 게 맞나?"

"대장님이 무엇을 우려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마경의 왕이 깨어났습니다."

* * *

마경의 왕이라도 깨어난 걸까.

얼마 전부터 마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요한은 바쁘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이건...."

경계의 길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길 자체가 사라졌다.

물론 이제 마경을 벗어나기까지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으니 경계의 길을 무시하고서 강행 돌파를 해도 되겠지만, 문제는 현재 마경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었다.

요한은 알고 있었다.

이런 때에 함부로 움직인다는 건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도 같다는 걸.

하물며 지금 요한의 몸에는 한 줌의 마기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마경에 들어오던 당시에 비해서 눈에 띄게 약해진 상태였다.

'길을 찾아야 해.'

비록 그 탓에 다소 돌아가게 될지언정 요한은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괜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확실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에도 마경 내의 묘한 분위기는 이어졌으나, 다행히 마수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쿵!

쿠웅─!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

그리고 그 진동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마기의 소실로 감각이 둔해진 탓에 감지하는 게 한차례 늦은 것이다.

그우우우우우───!!

그와 함께 메아리를 타고서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소리.

타고난 포식자에 의한,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는 울음소리였다.

"...맙소사."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요한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다소 위험하더라도 강행 돌파든 뭐든 해야 한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미 지금 요한이 처한 상황 자체가 충분히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허억, 헉...!"

그렇게 전력으로 달린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마기의 소실로 인한 신체 능력 약화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이렇게까지 약했던가.

절대로 의지해서는 안 될 힘에 지금껏 편히 기대어 왔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크르르....]

[쿠루! 쿠루룩!]

요한이 마수들에게 따라잡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마수들이 다가온다.

더는 싸움을 피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난... 여기서 안 죽어."

아직 요한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덤벼 봐, 이 자식들아!"

요한이 악을 쓰면서 마수들을 향해서 창을 휘두르고, 또 찔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기를 잃은 그의 창끝은 예전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아니, 설령 마기가 온전히 있었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카아아악──!]

순식간에 요한의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다리는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끝인가.'

요한이 끝을 직감한 그 순간.

촤악─!

요한을 향해 덮쳐 오던 마수의 전신이 말 그대로 터져 나갔다.

"무슨...."

사방에 비산하는 피.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변 속에서 요한은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새 자신과 마수들 사이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누구지?'

비록 뒷모습인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길게 내려선 흑발은 마치 달빛처럼 반짝였다.

그 뒷모습은 마치 달의 여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어떤 신성함마저도 품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음, 이상하다...."

대체 무엇이 이상하다는 건지 요한으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당장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캬오오오──!]

사방에서 마수들이 그녀를 향해서 덮쳐 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 조심해요!"

"귀찮게."

나지막이 울려 퍼진 읊조림과 함께 그녀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졌다.

촤아아악!

가볍게 휘둘러진 손짓과 함께 마수들의 전신이 모조리 터져 나가며 사방에 피가 흩뿌려졌다.

현실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요한은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붉은 피가 요한의 전신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요한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됐고.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녀, 루나가 뒤돌아서서 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이 근처에서... 응?"

이윽고 요한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도저히 믿기 어려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김요한?"

"...저를 아세요?"

"나야 나. 모르겠어?"

그제야 요한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아무래도 현실과 모니터 화면의 괴리감 때문인지 쉽사리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저런 얼굴이....

"어?"

이윽고 요한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리 그래도, 아니, 이게 맞아?

"어어어?!"

요한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91화 거석산 모그론

"직접 확인한 건가?"

"예."

에드릭의 표정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굳었다.

"우려했던 것 중에서 최악의 사태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겠군."

"이제 어쩌실 겁니까?"

"우선 겨울성에 복귀해야겠지. 그리고 황실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영지에도 지원을 요청해야 할 테고."

"아무리 그래도 귀족들이 순순히 병사를 내어 주겠습니까?"

"내어 주지 않으면 별수 있겠나? 다 함께 죽을 생각이 아니고서야. 그리고 만일 그런 불충한 자가 있다면 내가 직접 국법으로 다스릴 걸세."

당연히 일개 특무대장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지금껏 내가 보아 온 에드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에게서 직접 그럴 권한을 받아 오거나, 혹은 권한 따위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사적 제재를 나설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에드릭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 마경의 왕을 마주하고도 용케도 살아왔군."

"한 백 번 정도는 죽을 뻔했죠."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

"운이 좋았습니다."

"마경의 왕을 상대로 어디 운 같은 게 통하겠나? 그 또한 실력이겠지. 뭐...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고, 일단 지금은 서두르지."

"예."

아무리 당장 마수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우리는 여전히 마경 안에 있었다.

적어도 마경을 벗어날 때까지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금 속도를 올렸다.

우우우우──

쿵! 쿵!

달리기를 이어 나가는 내내 마수의 울음소리와 진동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지금 마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잊지 않게 각인이라도 시키듯이.

때문에 조금 쉬엄쉬엄 달리려고 하던 콘란은 물론이고 알비노와 알리시아까지도 다시금 전력으로 달리기를 이어 갔다.

물론 아무리 의지가 있다고 해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기에 가장 먼저 상대적으로 육체 능력이 떨어지는 알비노가 한계에 부딪혔다.

"우윽...!"

"이봐, 흰머리! 벌써 나자빠질 생각은 아니겠지?"

"...시끄러워."

이대로 알비노가 뒤처지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물의 보옥의 권능을 발휘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회복적수역(恢?的水域)'를 전개합니다.]

옅게 뿌려지는 물안개들.

물의 보옥의 권능이 발휘되며 나를 중심으로 특무대원들의 상처와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물의 보옥의 힘을 이렇게 낭비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낄 수는 없었다.

"음? 왠지 몸이 가벼운걸."

"이건...."

알비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다."

"누가 뭐래?"

"흥."

아무튼 솔직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쨌거나 그 덕분에 조금은 여유를 찾았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헐떡이던 특무대원들의 얼굴에 점차 화색이 돌았다.

콘란 또한 여유를 되찾고는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말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벨 저 녀석은 예전보다도 훨씬 더 쌩쌩해 보이는군. 그사이에 뭐 좋은 거라도 먹었나?"

"후... 머저리 같긴. 놈의 몸에 휘감겨 있는 돌풍을 봐라. 저게 놈의 움직임을 보조하고 있는 거다. 대체 또 언제 저런 걸 구한 건지.... 알면 알수록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으응?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확실히 뭔가 있어."

과연 이런저런 잡지식이 많은 알비노라고 해야 할지, 알비노는 내 전신에서 맴돌고 있는 헤르메스의 질풍 부츠의 권능을 알아본 듯했다.

뭐, 별 상관 없었지만.

그렇게 쓸데없는 주제로 콘란과 알비노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저 멀리에서 마경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교적 하급 마수들이 분포하는 지역인 마경 외곽 지역에 들어선 것이다.

'슬슬 도착했나.'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간신히 마경 외곽까지 다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짜 고비는 지금부터라고 보는 게 옳았으니까.

'최악의 경우 겨울성이 무너질 수도 있어.'

물론 겨울성에서 현 상황에 대해서 인지하고 대비에 나섰으니 그럴 가능성은 꽤 낮긴 했지만, 원래 뭐든지 최악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야만 혹시라도 정말로 최악의 사태가 닥쳤을 때 절망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하물며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마경의 왕과 더불어서 황혼 악단이 있지 않은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아예 겨울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지.'

여전히 겨울성은 나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꽤 유용한 장소였지만, 꼭 겨울성에 있어야 할 이유 몇 가지는 이미 해결했다.

마경에 봉인되어 있었던 물의 보옥도 얻었고, 임시 창고에 있는 몇몇 장비와 아이템들도 챙겼다.

비록 변종 사냥을 통한 승천석 파편 수급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그거야 겨울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충족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조금 귀찮기는 해도 수배자 신세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이번 사태를 잘 넘어간 뒤에 합법적으로 겨울성에서 제대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탈영 후 수배자 신세를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 또한 상당히 귀찮을뿐더러 에드릭 같은 인물을 적으로 돌리는 건 그리 석연치 않았으니까.

"으... 이제야 끝이 보이는군."

"다들 고생했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달리다 보니, 어느덧 길고 길었던 숲의 끝이 보였다.

마경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후욱... 드디어 빠져나왔나."

"으으, 죽는 줄 알았네."

"그 덩치로 엄살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도 숨넘어갈 정도로 헐떡이던 주제에."

"그거랑 그거랑 같나."

"뭐가 달라?"

알비노와 콘란이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는 언제나처럼 투닥거렸다.

한편, 그제야 침묵을 깬 알리시아가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지금껏 말하고 싶었던 것을 애써 참고 있었던 듯한 기색이었다.

"벨, 괜찮아요?"

"어. 너는?"

"저도 괜찮아요. 하지만...."

알리시아가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 마경을 빠져나오긴 했다지만 여전히 마경 쪽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곧 전란이 겨울성을 덮칠 터.

알리시아가 우려하는 건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괜찮을까요?"

"그렇지는 않겠지."

그때, 에드릭이 끼어들었다.

"이야기하는 중에 미안하지만, 나는 먼저 겨울성으로 가 보겠네. 자네들도 늦지 않게 복귀하게."

"알겠습니다."

"대장 된 자로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긴박한 상황이니."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러면 겨울성에서 보지."

마경을 벗어나기 무섭게 에드릭은 그 말만을 남겨 두고는 먼저 겨울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리와 함께 이동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콘란이 입을 떡 벌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괴물 같은 인간이라니까."

"동감이다."

에드릭이 복귀 대열에서 이탈하는 건 흔히 있었던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게감이 사뭇 달랐다.

알비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 그리고... 마경의 왕이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래."

"...최악이군. 그게 겨울성으로 오면 모든 게 끝이겠어."

알비노가 덧붙였다.

"그래도 네놈은 여전히 겨울성에 남을 생각이겠지?"

"일단은."

"흠... 네놈치고는 묘한 대답이군. 겨울성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남은 것 아니었나?"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흠,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 오히려 당황스럽군."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끔 느끼는 거지만 알비노는 나에 대해서 무척이나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도 그 오해를 풀지 않는 게 편했기에 내버려 두었지만, 가끔은 지적하고 싶어진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럴 생각은 없지만.'

어느덧 저 멀리서 겨울성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걸 보니 부지런히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겨울성이다."

"드디어 도착했나."

콘란이 지겹다는 듯이 목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바로 쉬고 싶지만... 아무래도 어렵겠지?"

"글쎄. 운이 좋으면 쪽잠 정도는 잘 수 있을지도."

"제기랄. 그게 어디야? 부디 그러기를 바라지."

"너무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으으."

알비노가 말했다.

"저길 봐라."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들.

마치 겨울 그 자체를 그려 놓은 것 같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온갖 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지금 겨울성의 상황을 말해 주었다.

지금 겨울성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북부의 기후와도 같은, 아주 혹독한 전쟁을.

* * *

마침내 길고 길었던 여정을 끝내고서 겨울성으로 돌아가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정체되어 있던 육체의 성장이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고된 여정을 견뎌 냈습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1)]

[4 → 5]

[찢어진 근육이 회복되며 근육이 성장합니다.]

[근력이 상승합니다. (+1)]

[4 → 5]

[한계를 돌파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1)]

[3 → 4]

'호오....'

그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는지 무척이나 오랜만에 능력치가 상승했다.

본래 공정의 세계에서 능력치를 올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한다면 지금의 내 성장세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도 불만족스럽지만.'

아무리 지금 내 성장 속도가 일반적인 수준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해도, 지금 이 세계에 닥쳐오고 있는 일들을 생각한다면 한참이나 부족했다.

'더 강해져야 해.'

더 빨리, 더 많이.

그래야만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남고,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서도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겨울성 안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 위에는 작은 얼음 조각들이 반짝거리며 떨어져 있었고, 얼어붙은 나무들은 찬바람에 흔들리며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침묵에 잠겨 있는 듯했지만, 그 안에서는 긴장과 준비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하!"

"하압!"

끊임없이 이어지는 훈련 소리가 귀를 찌르고, 훈련 중인 군인들의 모습은 얼음과 같이 단단해 보였다.

전쟁이 코앞인 데도 훈련을 진행한다는 건, 현재 겨울성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선언과도 다름없었다.

"먼저들 가 있어. 나는 대장을 만나고 오지."

겨울성에 복귀한 뒤, 제4 특무대원들이 모두 막사로 복귀하고 나는 에드릭을 찾았다.

이런 시기에 굳이 따로 보고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단 에드릭과 나눠야 할 대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들어오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부재중일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에드릭은 집무실에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생각보다 빨리 왔군."

"콘란이 하도 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다고 난리를 쳐서요."

"하하, 콘란 그 친구라면 그럴 법도 하지. 다들 무사히 복귀했나?"

"예. 별일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자네들을 그렇게 두고서 혼자 복귀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렸거든."

"괜한 걱정이십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그 웃음이 어딘가 무겁게 들려오는 건 비단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으음, 자네라면 말해도 되겠지. 마경의 왕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변경백께 전했고, 이를 매우 중대히 받아들이신 변경백께서 직접 황실과 귀족들에게 사자를 보냈네. 하지만 황실이라면 몰라도 정식으로 황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귀족들은 군사들을 보내지 않겠지. 겨울성이 무너지면 저들이 무사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괜찮은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게 군인의 의무 아니겠나? 허울뿐인 지원일지언정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니 말일세."

그 말에 나는 에드릭의 진심 하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불편하고, 무거운 진실.

"지원이 제때 오지 않는다면 겨울성이 무너진다고 보고 계시는군요."

"마음 같아서는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마경의 왕이 깨어났다면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도 현실일세."

에드릭이 덧붙였다.

"그리고 제4 특무대는 가장 위험한 임무 중 하나를 맡게 될 걸세."

"어떤 임무입니까?"

그 질문에 에드릭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진중해졌다.

"혹시라도 마경의 왕이 겨울성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것을 배제하는 임무일세."

92화 거석산 모그론 (2)

에드릭이 덧붙였다.

"아, 오해하지는 말게. 우리가 마경의 왕을 사냥하는 게 아니야. 단지 그것이 겨울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유인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역할을 맡았다는 뜻일세."

"뭐가 됐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만."

"그건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만큼 겨울성에서 우리에게 보내는 신뢰가 높다는 걸 말하고 싶군."

죽고 나면 그 신뢰가 대체 무슨 소용이겠냐 싶었지만, 늘 충직한 군인을 자처하는 에드릭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너무 염려하지 말게. 마경의 왕이 깨어났다 한들, 그것이 겨울성까지 들이닥친 전례는 그리 많지 않으니."

"있기는 있다는 소리군요."

"이런, 내가 전례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임무 내용은 둘째 치고, 저희만으로는 마경의 왕을 유인하기 어려울 텐데요. 최악의 경우에는 임무도 실패하고 전멸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겨울성에서 별도의 지원이 있을 걸세."

"지원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따로 설명해 주지."

에드릭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아무래도 슬슬 시작된 듯하니."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창밖에서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웅───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준비하지."

겨울성에 전쟁의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 * *

구구구구....

쿵! 쿵!

대지의 고동이 점차 커진다.

비단 감각이 예민한 이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병사들마저도 그 진동을 느꼈는지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선 긴장의 기색이 역력했다.

"...망할, 오는군."

"뭐, 뭐 저리 많아?"

겨울성 크로이츠의 병사들은 한 명 한 명이 온갖 전쟁을 치러 온 역전의 용사들이지만, 그러한 이들조차도 지금 지평선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에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성 바깥, 북부의 혹한 지대.

그 어떤 티끌도 용납하지 않았던 순백의 설원이 점차 검은 점들로 물들어 갔다.

마수, 마수 그리고 마수.

마치 이 세상 전체가 마수들로 뒤덮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군세가 겨울성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부신 하얀 눈 위에 마수들의 어두운 형상들이 투명하게 드러나며, 그것들의 강렬한 존재감이 설원을 가득 채웠다.

크르르....

우우우우!

설원을 가득 채운 마수들의 호흡 소리가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과 어우러져 공허한 공간에 울렸다.

"으... 들어가서 자고 싶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그만 징징거려라, 덩치. 그 정도면 충분히 쉬었지."

"쉬어? 어이가 없군. 그 난리를 치고 돌아와서 한 시간 잔 게 충분히 쉰 거냐?"

"이런 상황에서 잠 타령이나 하고 있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알비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알비노 또한 눈 밑까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듯 제4 특무대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로 곧장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겨울성의 명운이 걸린 전쟁에서 여력을 둘 수는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혹시라도 등장할 수 있는 마경의 왕에 대한 포착 및 대응.

그걸 위해서 전선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마경의 왕을 감시하는 게 우리 임무라고 해도 이곳에 있으면 결국 싸워야 한다는 것 아닌가?"

콘란의 말대로였다.

제아무리 우리의 임무가 성벽을 지키는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는 성벽 위다.

겨울성의 최전선.

마수들이 이 위로 들이닥친다면 좋든 싫든 우리는 싸워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라고 여기에 배치해 둔 거겠지."

"...망할. 그럴 줄 알았어. 대장 이 작자는 가만 보면 치사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그 순간.

"음, 내 욕이라면 내가 없는 곳에서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자네들에게도, 나에게도."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에드릭이 불쑥 끼어들자, 조금 전까지 에드릭 욕을 하고 있던 콘란이 짐짓 딴청을 부렸다.

"...듣고 있었수?"

"내가 귀가 밝은 편이라서 말이야.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끄응."

콘란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설원 너머에 있는 검은 점들은 점차 빠르게 겨울성을 향해서 다가왔다.

사람을 절로 질리게 하는 광경 속에서 나는 에드릭을 보며 입을 열었다.

"대장님."

"말하게."

"겨울성에서 전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드릭의 표정이 묘해졌다.

"입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역 얘기를 하고 있나, 나도 못 하고 있는데."

"대장님이랑은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 다를 것도 없네.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에드릭이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죄수로 끌려온 겨울성 병사들의 의무 복무 기한은 이십 년일세. 원래 십오 년이었는데 병력 부족으로 인해서 최근에 늘어났지."

"그것참 안타까운 얘기로군요."

어차피 착실하게 복무 기한을 채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십 년이라는 까마득한 숫자를 직접 듣게 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저런 살인적인 복무 기한을 지녔으니 겨울성으로 끌려간 죄수 중에서 살아 나온 자가 몇 없는 거겠지.

"그러니, 전역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네. 부지런히 복무 기한을 채우거나, 죽어서 시체로 나가거나."

"둘 다 별로 끌리지는 않는데요."

"모두가 같은 심정일 걸세.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쉬운 게 없는 법 아니겠는가?"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아마 오늘만큼 저 웃음소리가 듣기 싫은 적은 없었을 거다.

"뭐,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그게 뭡니까?"

"공을 세우면 되네, 이십 년의 복무 기한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공을."

"마경의 왕이라도 잡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긴 하죠."

그 말마따나 지금으로서는 마경의 왕을 잡을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지금으로서는.

"뭐... 자네라면 언젠가 그런 공을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군. 나야 유능한 부하를 제대시키니 안타깝겠지만 말이지."

"그러면 좋겠군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걸세. 오늘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

에드릭의 시선이 전선을 향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무수한 검은 점들이 겨울성을 향해서 밀려들었다.

부우우우우───!!!

전쟁 뿔피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며 곧 일어날 격돌을 경고했다.

어느새 내 곁에 선 알리시아가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조심해요."

"걱정 마라."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 아니다.

-그우우우우우──

-캬오! 캬아아악!

마수들이 뿜어내는 흉포함이 성벽 위까지 찌릿하게 전해진다.

마수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더욱 가까워지며 어둠 속에서 그들의 형상이 뚜렷해졌다.

얼음과 눈은 그것들의 털을 가리지 못했고, 드러난 마수들의 눈동자는 사나운 분노와 흉성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 흉성에 맞서는 겨울성의 병사들 역시도 만만치 않았다.

인간의 의지가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이 겨울성 지휘관들이 검을 빼 들었다.

"1열 장전!"

지휘관의 외침과 함께 성벽 위에 있는 궁병들의 활시위가 일제히 팽팽히 당겨졌다.

혹한의 기후를 지닌 북부에 자리를 잡은 겨울성은 모든 게 부족하지만, 그나마 덜 부족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살이다.

마경의 영향 탓인지 겨울성 주변에는 숲이 꽤 많았고, 화살촉은 마수들의 이빨과 발톱을 가공해서 쓰면 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마수의 뼈를 갈아서 아예 뼈화살을 만들기도 하고, 화살 자체가 일부는 회수도 가능했기에 겨울성에서 화살은 꽤 여유분이 있는 편이었다.

물자가 부족한 겨울성에서 비교적 부족하지 않게 화살을 쓸 수 있는 이유였다.

"발사!"

팽팽히 당겨져 있던 수백 개의 활시위가 일제히 풀리며 하늘로 화살 비가 치솟았다.

쐐새새새색!!

쐐새색──!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화살 비가 일제히 마수들을 덮쳤다.

-카악!

-크에엑!

앞서 달려오던 마수들이 화살에 꿰뚫려서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2열 앞으로! 장전!"

화살 공격이 계속됐다.

가장 먼저 겨울성에 다다른 마수들은 위치상 마경 외곽 지역에 서식하던 마수들일 수밖에 없다.

즉, 상대적으로 약한 마수들이다.

그렇기에 아직은 화살 공격도 통하고 있었지만, 일정 수준의 마수부터는 화살 공격도 통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슬슬 준비하게."

에드릭 또한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의 화살 세례로 적지 않은 마수가 설원의 일부가 되었건만, 여전히 설원 너머에서는 무수한 검은 점들이 겨울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 또한 미리 소환해 두었던 AKR-74 돌격 소총을 다잡았다.

'이 거리라면... 저격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리볼버인 콜트 패리슨 B-09이었다면 모를까, AKR-74 돌격 소총이라면 생각보다 먼 거리도 저격이 가능하다.

AKR-74 돌격 소총의 통상적인 유효사거리는 400m 이내라고 보는 게 옳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중의 문제지 살상력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면 AKR-74 돌격 소총의 살상 가능 거리는 1,500m에 달하고, 비거리는 그 이상이다.

'물론 화살조차 튕겨 내는 마수라면 쉽지 않겠지만, 만일 여기에 마탄을 싣는다면?'

나는 기억한다.

요한이 마기의 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수들을 도륙하던 모습을.

'탄에 실은 마기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명중과 위력을 보정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나는 쏟아지는 화살 비 속에서도 유독 건재한 마수 몇 마리를 바라보았다.

'아울베어인가.'

아울베어는 대부분의 개체가 5레벨 이상의 강력한 마수다.

본격적으로 마경의 심층부에 서식하는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현재 위치에서 그것들과의 거리는 못해도 1,000m 이상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스스스....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AKR-74 돌격 소총에 있는 탄창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철컥-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방아쇠를 당길 뿐.

타앙!──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운 탓인지 총성이 내는 굉음은 금세 묻혔다.

쏘아진 마탄은 곧장 올곧게 뻗어 나갔고, 그대로 아울베어의 머리를 꿰뚫었다.

[장거리 저격에 성공하였습니다!]

[기예, '저격(D)'을 습득하였습니다.]

[마기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기예, '마탄(B)'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UP)]

[B → B+]

'호오.'

마탄을 기예로 습득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설마하니 저격 같은 것이 기예로 인정될 줄이야....

'뭐, 잘된 거겠지.'

내가 몇 번의 방아쇠를 더 당기며 마수들을 저격하자, 내 옆에 있던 알비노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마법이군. 지금 저 멀리 있는 마수들을 마법으로 요격하는 건가?"

"역시 벨이군."

"대단한 마법사예요."

갑작스레 끼어든 알리시아를 향해 알비노와 콘란이 묘한 시선을 보냈으나, 알리시아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고 할까.

그때, 지금껏 침묵하던 에드릭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으음. 아무래도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에드릭의 말과 함께 거대한 진동이 겨울성을 덮쳤다.

쿵!

쿠웅──!

성벽 위에 있는 모두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 속에서 그것은 설원 너머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동하는 암석.

한 걸음에 천지를 흔드는 자.

괴암거석(怪巖巨石).

그러나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역시나 마경의 왕이라는 수식어일 것이다.

거석산(巨石山) 모그론.

그것이 설원 너머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93화 거석산 모그론 (3)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

잠에서 깨어난 거석산 모그론은 단순히 마수들을 겨울성까지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그 무거운 발걸음을 겨울성 지척까지 직접 옮기기까지 했다.

"미, 미친...!"

"마경의 왕이다! 왕이 나타났어!"

거석산 모그론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겨울성에서도 단번에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병사들 또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우린 전부 죽을 거야...."

"난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된다고! 제기랄!"

아직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순식간에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쳤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온 겨울성의 병사들마저도 절망에 빠지게 하는 존재.

그만큼 마경의 왕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엄청난 상징성이 있었다.

"다들 준비됐나?"

그러거나 말거나 너무나도 평온한 어조로 말을 걸어온 에드릭의 모습에 콘란과 알비노가 기겁했다.

"이봐요, 대장! 정말로 저런 것의 발걸음을 돌리게 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제가 봐도 미친 소립니다."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알비노와 콘란조차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제4 특무대가 맡은 임무는 터무니없었다.

이 전장에서 무려 마경의 왕을 배제하는 임무.

사냥은 당연히 불가능한 이야기고, 마경의 왕을 유인하는 것조차도 목숨을 백 번 정도는 걸어야 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이번 임무는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겨울성과 에드릭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임무를 내릴 리가 없을 터.'

지금껏 제4 특무대에 내려졌던 임무들은 모두 능력 이상으로 난해한 임무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무 도중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발생했기에 생긴 일이다.

무엇보다도 결과적으로 그 임무들은 모두 완수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나는 이번 임무 또한 어떤 근거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에드릭이 말했던 겨울성의 지원이라든지.

"너무 걱정들 마시게. 아, 마침 오셨군."

에드릭의 말과 함께 에드릭의 뒤에서 고풍스러운 푸른 로브를 입고 있는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금발 머리와 푸른 눈동자. 거기에 더해서 고풍스러운 외견은 척 봐도 귀족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엘드란 준남작님."

"이번 임무를 에드릭 경과 함께해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준남작께서 또 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에드릭의 시선이 특무대원들을 향했다.

"엘드란 준남작님이시네. 이번 임무에 함께해 주실 걸세."

"...엘드란 준남작? 잠깐, 설마!"

알비노의 눈이 커졌다.

난 알비노의 눈이 저렇게 커질 수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겨울성의 엘드란이라면, 설마 환영의 마법사?!"

"자네는 아는 모양이군. 맞네. 엘드란 준남작께서는 세간에서 그런 이름으로도 불리시지."

"허... 겨울성 소속인 건 알았지만 정말로 환영의 마법사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콘란이 슬쩍 알비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이봐, 저 엘드란 준남작님이 누군데 네가 그렇게 놀라나?"

"정말로 모르나? 남부까지 명성이 자자한 환영의 마법사를?"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야."

나도 환영의 마법사가 누구인지는 몰랐기에 가만히 알비노의 말을 경청했다.

"환영의 마법사가 남쪽 전선에서 무려 일만에 달하는 마수들의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그리고 그 외에도...."

알비노의 말이 많아지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콘란이 끼어들었다.

"아무튼 대단한 마법사라는 거군."

"그래. 마경의 왕을 배제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임무가 조금은 이해가 갈 정도야."

"그 정도냐?"

"환영의 마법사에 대해서 아는 이라면 모두 나와 같이 생각할 거다."

알비노의 말을 들어 보니 제법 명성이 있는 마법사인 듯했다.

겨울성에서 내려진 임무가 마냥 자살 임무만은 아닌 셈.

그때, 엘드란 준남작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대가 우레의 마법사로군요."

"저를 아십니까?"

"겨울성에서 우레의 마법사를 모른다면 간자이지요. 그대의 활약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유명한 줄은 몰랐지만, 예전에 에드릭이 내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던 걸 생각하면 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큽니다. 부디 이번 임무에서도 겨울성을 위해서 그대의 힘을 빌려주었으면 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훌륭합니다. 겨울성은 그대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겁니다."

대충 엘드란 준남작과의 인사가 끝나자 에드릭이 말했다.

"자, 그러면 나머지 얘기는 가면서 하고, 이만 출발하지."

성벽 아래에는 총 다섯 마리의 군마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임무는 설사 군마를 모두 잃더라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임무였기에 임무 지원에 인색한 겨울성으로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남쪽 성문.

아무래도 북쪽 성문에서 마수 군단을 정면으로 뚫고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말을 타고서 남쪽 성문으로 향해 가는 도중, 내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엘드란 준남작이 입을 열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저 또한 본래는 죄수로 끌려온 병사였습니다."

"예?"

이건 또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인데....

"어떻게 죄수가 귀족이 될 수 있습니까?"

"하하, 이상하게 생각하실 법도 합니다. 저 또한 본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죄수 출신의 병사였으나, 이후에 무수한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성주이신 변경백께 준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았지요."

공을 많이 세웠다라....

그것으로 귀족이 될 수 있다면, 다른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뭐,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그 정도 공이라면 겨울성에서 제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충분히 가능했습니다만,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제게는 갈 곳도 없었거든요. 이곳, 겨울성을 제외한다면요."

엘드란 준남작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겨울성에서 정식으로 전역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현 겨울성 크로이츠의 성주인 변경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공치사를 아끼는 인물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공을 세우면 정식으로 겨울성에서 제대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음?'

그때, 슬쩍 나를 보고 있던 에드릭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무언가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띤 것으로 보아서, 마찬가지로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된 건가.'

엘드란 준남작이 어째서 갑작스레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뻔했다.

에드릭을 통해서 내가 전역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을 세워도 전역이 아닌 다른 길이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게 에드릭이 의도한 바인지 아니면 엘드란이 의도한 바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둘의 목적은 같아 보였다.

'내가 전역하는 걸 바라지 않는군.'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이 전문 하사를 권하는 행정보급관의 시선을 본 기분이라고 할까?

당연히 말뚝을 박을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겨울성에 붙들리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아차 하는 순간 겨울성에 묶이는 건 순식간일 테니.'

실제로 군 생활을 했을 때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행정보급관에게 낚여서 전문 하사에 지원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에드릭이 말했다.

"남쪽 성문일세. 이제부터는 다들 긴장을 놓지 말게."

그 말대로, 마경에서 뛰쳐나온 마수들의 대다수는 북쪽 성문을 비롯한 서쪽과 동쪽 성문에 몰려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남쪽 성문에 마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저 마수들로 가득 찬 설원을 돌파해서 마경의 왕에 다다라야 한다.

설원에 가득 찬 마수들을 보며 콘란이 혀를 내둘렀다.

"...자살하러 가는 기분이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비관주의라면 웬만해서는 밀리지 않는 알비노가 웬일로 희망적인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지원으로 온 엘드란 준남작이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긴 한 모양이었다.

'지켜보면 알겠지.'

에드릭이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마수의 토벌이 아닌 마경의 왕을 배제하는 것일세. 최대한 교전을 피하면서 이동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두도록."

"알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임무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임무는 마경의 왕을 이 전장에서 배제하는 것.

그걸 위해서라도 설원에 있는 마수들을 뚫고서 마경의 왕에 다다라야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마수들이 몰려 있는 구역을 피해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마수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크르릉...!]

[캬악! 캬아악!]

마수들이 흉성을 토해 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옵니다!"

"대비하게!"

제4 특무대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서 전투를 준비하던 그 순간.

"보아라."

엘드란의 선언과 함께 그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빛무리가 번뜩였다.

[크륵?]

[그우우!]

[크륵!]

환영의 마법사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는지, 우리를 향해서 달려들던 마수들이 빛무리에 노출되기 무섭게 우리를 슬금슬금 피해 가기 시작했다.

마치 어떤 장애물이라도 본 듯이.

그 광경을 본 콘란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저것들이 왜 우리를 피해 가는 거지?"

"역시 보통이 아니군. 환영의 마법사라는 이명을 얻을 법해."

알비노의 감탄 속에서 나는 엘드란 준남작의 마법을 읽어 냈다.

'환영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예상하기는 했지만... 역시 그 마법이었나.'

비록 한 번뿐이기는 했으나 엘드란이 사용한 마법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캬아아악!]

[크오오!]

설원을 달리는 내내 마수들이 달려들며 전투가 일어나려 할 때마다 엘드란의 마법이 발동했다.

[크우?]

[크우우.]

이것 봐라....

꽤 부담 없이 연달아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엘드란 준남작은 황금률의 계약에 대해서 상당한 이해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명성을 괜히 얻은 게 아니라는 소리.

'혹시나 하고 걱정했는데, 이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어.'

처음에 에드릭으로부터 임무의 내용을 들었을 때, 거의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껏 제4 특무대가 해 왔던 임무 중에서 미친 짓이 아닌 게 드물기는 했지만, 이번 임무는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미친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드란의 마법을 보니 이번 임무에 대한 가능성이 보였다.

'특무대에 주어진 역할은 엘드란을 마경의 왕까지 호위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멈추지 않고서 달려온 덕분인지 어느덧 우리는 마경 외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경과의 거리가 줄어든 만큼 마수들의 숫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지만, 엘드란의 마법 덕분에 우리는 마수 군단 사이에 마치 투명 인간처럼 있을 수 있었다.

비교적 쉽게 마경 내부까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웃는 이는 없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마경의 왕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쿵!

쿠웅──!

점차 가까워지는 거석산 모그론의 존재감에 제4 특무대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어 온 이들이라 한들 마경의 왕이 내뿜는 존재감은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가."

"긴장할 것 없네, 계획대로만 된다면 크게 어려울 것 없을 테니."

"대장이 그렇게 말하니 꼭 계획이 어그러질 것 같은데요."

"불길한 소리 말게."

거석산 모그론이 뿜어내는 존재감에 아직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갑시다, 저것이 겨울성에 접근하게 둬서는 안 되니."

엘드란의 의견에 이견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마경의 왕.

그것을 배제하러 갈 때다.

94화 거석산 모그론 (4)

마경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크르르!]

[끄룩! 끄루룩....]

마경의 깊숙한 곳으로 향할 때마다 마수들이 흉성을 토해 내며 우리의 앞을 막아섰으나, 그때마다 엘드란의 손이 번뜩이며 일어난 빛무리가 마수들을 밀어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콘란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마법사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마법이라는 게 원래 저렇게 막 사용할 수 있는 거였나?"

"뭘 새삼스럽게 놀라나, 그것보다 더 이상한 놈이 여기도 한 명 있는데."

알비노의 대답에 콘란이 나를 살짝 흘겨보았다.

"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 마법은 저렇게 막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닌 걸로 아는데... 준남작이 꽤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군."

그 말대로였다.

아무리 계약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대가 상쇄를 위한 준비를 많이 했더라도, 저런 마법을 이렇게 난사하려면 적지 않은 대가를 감내해야 한다.

즉, 그만큼 엘드란이 이번 임무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내 물음에 의외라는 듯이 엘드란의 눈이 작은 놀람으로 물들었다.

"...하하, 이번 임무가 끝나기 전에 죽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드란이 힘없이 웃었다.

크게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법의 대가가 서서히 그를 좀먹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 건 에드릭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에드릭이 다가왔다.

"지금부터는 마법 사용을 자제하시지요. 마수들은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으윽."

"마경의 왕에게 마법을 사용할 여력은 남겨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 부하들은 유능하니."

에드릭이 호언했다.

물론 에드릭의 의견이 모두의 의견을 대표하지는 못했지만.

"유능? 저희가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동감."

"...."

에드릭의 날 선 시선이 특무대원들을 노려보았으나, 특무대원들이 끄떡할 리가 만무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게."

결국 에드릭은 권위를 내세웠다.

단언컨대 부하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좋지 않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흠. 적어도 헛된 죽음은 안 시킨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야말로 폭군이 따로 없군."

"나쁜 사람."

"...."

이어지는 반발 속에서 엘드란은 어딘가 동정심이 느껴지는 눈길로 에드릭을 바라보았고, 에드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크르륵....]

[칵, 카학.]

수풀 너머에서 마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전 같았다면 엘드란의 마법으로 간단하게 내쫓았을 놈들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엘드란의 마법에 의존할 수는 없는 상황.

"흠, 왔나."

"가 보자고."

앞서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특무대원 중에서 누구도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았다.

[캬아아악!]

본격적으로 마경 안의 마수들이 우리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 선 마수를 베어 넘긴 에드릭이 외쳤다.

"벨! 준남작을 지키게!"

"가장 어려운 걸 시키시는군요!"

물론 그만큼 에드릭이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겠지만, 원래 이런 난전 속에서는 호위 임무가 가장 어려운 법이었다.

"짐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엘드란이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러셔야 할 겁니다."

"허, 역시 듣던 대로 특이하신 분이군요. 그래서 더욱더 마음에 듭니다, 벨 블랙우드."

엘드란 준남작이 사납게 웃으면서 내 곁에 섰다.

마냥 보호받는 존재로 있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뭐, 어차피 마수가 접근하게 둘 생각도 없지만.'

이번 임무의 핵심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엘드란 준남작이다.

에드릭이 나에게 엘드란 준남작의 호위를 맡기기는 했으나, 굳이 시키지 않았더라도 엘드란 준남작은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인원이었다.

[캬아아악!]

마수가 달려들었다.

"옵니다!"

"보고 있습니다."

[Lv.4]

[붉은 턱 전사 개미]

상대는 4레벨 곤충종.

무척이나 단단한 외갑을 지닌 놈들이었기에 일반적인 사격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스스스...!

내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탄창을 타고서 총알에 스며든다.

이 일련의 과정은 이제 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익숙했기에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면 충분했다.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콜트 패리슨 B-09에서 쏘아진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이 단번에 붉은 턱 전사 개미의 머리를 터트렸다.

촤악!

사방에 흩뿌려지는 붉은 턱 전사 개미의 체액 속에서 다른 붉은 턱 전사 개미들이 달려들었다.

[기기깃!]

[기긱!]

제 동포를 잃은 것에 대해서 분노한 건지 아니면 그저 눈앞의 먹이를 잡아 죽이려는 건지는 몰라도, 적의는 명확했다.

'탄창에 남은 탄은 다섯 발.'

놈들을 모조리 죽이는 데는 충분한 총알이었다.

탕─!

타타탕!!

방아쇠가 당겨지며 총구에서 불이 뿜어질 때마다 4레벨 개체인 붉은 턱 전사 개미들의 머리가 너무나도 쉽게 터져 나갔다.

"저게, 우레의 마법...!"

엘드란 준남작의 경악성이 귓가에 들려온 것도 그쯤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테지만, 문제는 엘드란 준남작의 말이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믿기지 않는 위력이야. 하지만 위력에 비해 피해 범위는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보아서, 마법의 효과 범위를 축소하는 대신에 위력을 높인 건가? 아니, 대가를 줄였을 수도 있겠군."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악마 중에서 저런 마법을 지닌 악마는 없는데... 혹시 정령과 계약을 한 건가? 드물지만 그런 사례가 없는 건 아니라고 하던데."

"그나저나 벌써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을 수차례는 사용했는데 대가는 어떻게 감당하는 거지? 아니... 저 경우에는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기보다는 다른 제약과 상쇄를 이용해서 대가를 감소시키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어. 특이한 매개체는 그걸 위함인가? 그렇다면...."

뒤에서 따라오는 엘드란이 무어라 계속해서 중얼거렸으나,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저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나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듯했으니까.

'아무튼, 마법사 놈들 중에서 정상은 없다니까.'

라크나 대륙의 오랜 격언을 되새긴 나는 손에 들려 있던 콜트 패리슨 B-09을 허리띠에 꽂았다.

탄창에 있는 총알을 모두 소진한 데다가, 지금 오고 있는 녀석은 특별히 강한 화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키에에에──!]

[Lv.5]

[뾰족 턱 대장 개미]

눈앞에서 다른 개미들보다 월등히 큰 개체가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우두머리 개체인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놈을 처리한다면 다른 개미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을 터.

나는 그대로 오른손을 뻗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오른손에 잡히는 묵직한 감각.

내가 참 좋아하는 감각이다.

[키에에에에──!]

어느덧 뾰족 턱 대장 개미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드리웠다.

"아가리 닫아."

방아쇠가 당겨지며 더블 배럴 샷건이 불꽃을 토해 냈다.

퍼엉!

마기를 머금은 70mm 12게이지 산탄의 근거리 파괴력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단번에 5레벨 우두머리 마수의 머리를 터트렸다.

"어떻게 저 정도 마수의 우두머리 개체를 단 한 번에...!"

엘드란 준남작의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닫히지 못했다.

"그러다 파리 들어가겠습니다."

"파리? 마경에 파리는 없습니다. 일반적인 생물이 살지 못하는 영역이기 때문이죠. 벨 당신 정도의 마법사가 이런 상식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

대충 알겠다.

엘드란 준남작이 어떤 인물인지.

어쨌거나 우두머리 마수를 처치하자, 우리를 덮쳤던 개미 마수들은 금세 우왕좌왕하다가 흩어졌다.

"다들 다친 곳은 없나?"

에드릭의 말에 알비노가 콘란을 가리켰다.

"이 머저리가 좀 다친 것 같습니다만."

"뭘 그런 걸 말하고 그래? 괜찮으니까 계속 갑시다."

"음, 일단 이동하면서 임시 조치를 취하고, 제대로 된 치료는 겨울성에 돌아가서 하지. 지금은 한시가 급하네."

이제, 마경의 왕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비록 모두가 자잘한 상처들은 입고 있었으나 다행히 이동을 지체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이는 없었다.

마경의 왕을 향해 가는 여정이 계속됐다.

마수를 쏘고, 베고, 태우고.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마수를 죽이고 또 죽이면서 우리는 나아갔다.

"하악, 하악...!"

"정말로, 죽을 것, 같군."

"벨, 괜찮아요?"

"...아직은."

물의 보옥의 치유 권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쯤.

우리는 마침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마경의 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동하는 암석.

한 걸음에 천지를 흔드는 자.

괴암거석(怪巖巨石).

마경의 왕.

거석산(巨石山) 모그론.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까지 저 존재를 보고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피하게!"

에드릭의 외침이 들려오기 무섭게 거대한 기파가 우리를 덮쳤다.

쿠우우웅!!!

"콜록! 콜록!"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경의 왕이 행하는 단순한 발걸음마저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움직이게!"

웬만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에드릭 또한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몸을 날려서 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일단은 피하게!"

"이미 그러고 있다고!"

다급한 상황 속에서 특무대원들이 악을 쓰면서 몸을 날렸다.

"으윽... 대체 저런 걸 어떻게 배제하라는 거야?"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임무였다. 아무리 환영의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특무대원들 사이에서 절망이 퍼지던 그 순간.

우우우웅──

갑작스레 엘드란의 양손에서 뿜어진 압도적인 빛무리가 순식간에 모그론을 뒤덮었다.

사방에 말도 안 되는 기파를 흩뿌리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던 거석산 모그론의 움직임이 멈춘 것도 그와 함께였다.

"이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엘드란의 선언과 함께 그의 양손에서 뿜어지는 빛무리가 더욱더 강해졌다.

"머, 멈춘 건가?"

"정말로 저걸 멈췄다고?"

콘란은 물론이고 알비노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마법은 대가가 있다.

"끅, 끄으윽...!"

빛무리를 흩뿌리고 있는 엘드란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단순히 눈뿐만이 아니었다.

엘드란 준남작의 귀와 코 그리고 입에서까지 선혈이 흘러내렸다.

"무슨 피가...!"

"대장님, 저건 괜찮은 겁니까?"

"지금으로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네. 엘드란 준남작을 믿어야지."

무려 마경의 왕을 상대로 한 마법인 만큼 계약에 대해서 높은 이해도를 지닌 엘드란마저도 상당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뜻.

만약 엘드란이 대가를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이번 임무는 실패였다.

그리고 실패는 곧 겨울성의 몰락을 의미하겠지.

"끄으아아!"

엘드란은 귀족이다.

책임에 의무가 있는 귀족.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엘드란은 비명을 내지르며 마법의 출력을 더욱더 높였다.

자신의 안위보다 임무를 더 우선하기라도 하듯이.

그와 함께 빛무리가 거세지며 모그론을 더욱더 강하게 조여들었다.

"으아아아!"

그러한 엘드란의 대가가 빛을 발한 걸까.

-고오오오오오오...!

발걸음을 멈췄던 모그론의 몸이 서서히 돌아서기 시작했다.

마치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겨울성이 아닌 마경 내부 쪽으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지금 일어난 광경은 곧장 반응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맙소사...."

"정말로 마경의 왕의 발걸음을 돌린 건가! 어처구니가 없는 마법이군! 환영의 마법사라 칭송받을 만해!"

"대단해."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까지 감탄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엘드란이 만들어 낸 광경은 기적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우우우우우....

그리고, 마경의 왕이 비로소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쿵!

쿠웅!

그 걸음 하나하나에 땅이 떨렸으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임무가 마침내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끝난, 건가?"

"...그런 것 같군, 아직 방심할 수는 없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드릭을 포함한 모두가 긴장을 놓았다는 건 분명했다.

나조차도.

"음, 귀찮은 게 끼어들었네?"

그러한 우리의 의식의 빈틈을 찌르고서 들어온 낯선 목소리.

"피해!"

그리고 이어진 에드릭의 외침.

쐐액!

날아든 한 줄기의 섬광.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갔을 때.

"...아."

엘드란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조차도.

95화 거석산 모그론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