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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거석산 모그론 (5)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닥쳐온 결과만이 보일 뿐.

"컥, 컥... 하학...!"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엘드란이 피를 쏟아 내며 숨을 헐떡인다.

이번 임무의 핵심이자, 환영의 마법사라 불리던 엘드란 준남작은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정체불명의 불청객에 의해서.

"대장님!"

"이미 가고 있네!"

에드릭이 엘드란의 가슴을 꿰뚫은 불청객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모든 게 다급한 현 상황에서 일단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를 막기 위해서였다.

"벨! 방법은?"

"없다."

"망할! 너 평소에 잘 쓰던 그것 있잖아! 그건 못 써?!"

물의 보옥을 말하는 거겠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정도 치명상은 불가능해."

"망할! 이보쇼, 남작님! 정신 좀 차려 보쇼!"

그에 대한 증거로 이미 물의 보옥의 권능은 발동 중이었다.

단지, 엘드란이 입은 부상이 너무나도 심각했기에 그리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제아무리 물의 보옥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치명상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치료가 될 때까지 엘드란이 살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을 잃었다는 건 단순한 신체 결손으로 취급할 수 없는 심각한 치명상이었으니까.

'이대로 엘드란 준남작이 죽어서는 안 돼.'

거석산 모그론이 발걸음을 돌린 건 엘드란의 마법이 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석산 모그론이 아직 채 돌아가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 엘드란이 죽는다면, 마법의 효과가 약화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는 수밖에.'

나는 업화의 송곳니까지 꺼내 들고서 물의 보옥에 접촉했다.

물의 보옥에 깃든 한기를 조금이라도 녹이기 위해서였다.

화르륵!

치이이익...!

업화의 송곳니와 물의 보옥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며 서로의 반발 작용으로 인해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물의 보옥'에 강렬한 업화의 온기가 전해집니다.]

['물의 보옥'의 냉기가 일시적으로 크게 완화됩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회복적수역(恢?的水域)'을 전개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그마저도 엘드란 준남작의 텅 빈 가슴을 메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베, 벨, 브, 블랙, 우드...."

"말하지 마십시오. 치료가 더뎌집니다."

말을 해 놓고도 조금 우습다.

과연 이걸 치료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사실은 그저 죽었어야 할 인물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연명 치료일 뿐이지 않을까.

"카하악!"

엘드란 준남작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이미 흘린 피만으로 진작 쇼크사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드란 준남작은 실낱같은 생명을 붙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전하고 싶은 게 있기라도 한 듯이.

"겨, 겨울, 서, 성─"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엘드란 준남작의 호흡이 멎고, 곧이어서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엘드란 준남작이 죽었다.

"이보쇼! 남작님!"

"준남작이다, 덩치."

"망할!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남작이든 준남작이든 지금 엘드란이 죽었다고!"

"나도 보고 있다. 설마하니 환영의 마법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린 건가."

엘드란 준남작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마 대충 겨울성을 부탁한다든가 하는 뻔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 유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엘드란 준남작이라는 인물이 나에게 어떤 걸 남긴 건 분명했다.

"...기분 한번 개 같네."

엘드란 준남작이 좋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된 건 아니었으니.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엘드란 준남작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최악이다.'

엘드란 준남작의 죽음은 단순히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이변은 곧 일어났다.

-그우우우우우우....

마경으로 돌아가던 거석산 모그론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에 콘란은 물론이고 알비노와 알리시아까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야? 왜 저래?"

"이럴 수가...."

"좋지 않아."

"망할, 저게 대체 뭔데? 왜 갑자기 멈춘 거야?!"

콘란의 외침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를 향했다.

답을 구하는 얼굴.

애석하게도 내가 이들에게 전해 줄 답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했다.

"엘드란이 펼친 마법의 효과가 약해지고 있는 거다."

"뭐?"

"그런, 하지만 계약은...!"

알비노의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악마와의 계약이 정말로 공정할 거라고 생각했나?"

"...황금률이, 공정하지 않다고?"

알비노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마따나 악마는 그리 친절한 족속이 아니다.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계약자가 사라진다면 힘을 빌려준 악마로서는 그 마법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제아무리 정당한 대가에 의한 마법이라 해도 말이다.

황금률의 계약은 얼핏 보면 공정한 계약이었으나, 인간과 악마라는 존재의 격의 차이로 인한 불합리함은 어쩔 수 없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실제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무대 또한 악마의 손바닥 위가 아니던가.

"제기랄! 그러면 방법은 있어?"

"글쎄."

이 상황에서 방법이 전혀 없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방법은 분명히 있다.

다만, 문제는 어떤 방법을 실행하든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게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 하나의 절대적 진리였으니까.

'그건 둘째 치고, 지금 가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쾅──!

콰아아앙!!!

철로 만들어진 병장기끼리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폭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엘드란을 죽인 불청객은 현재 에드릭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환영의 마법사라 불리던 엘드란을 일격에 죽였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자라는 건 알았지만, 불청객은 에드릭과의 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우선, 저것부터 배제한다.'

거석산 모그론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라는 건 사실이었으나, 다행히도 아직은 엘드란이 사용한 마법의 효과가 남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은 있다는 소리.

그렇기에 현시점에서 가장 위협적인 변수는 엘드란을 죽인 바로 그 불청객이다.

설사 다른 방법을 실행한다 한들 불청객이 또다시 방해를 해 온다면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바로 움직인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서 변수부터 제거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R-74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내 오른손에서 묵직한 촉감이 느껴졌다.

철컥─

에드릭과 불청객이 한창 어지럽게 서로 얽히고설키며 움직이다 보니 조준이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에드릭이 맞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대장님!"

"기다리고 있었네!"

대답과 함께 에드릭이 불청객으로부터 빠르게 물러났다.

그렇게 생긴 찰나의 틈.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타타타탕──!!!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구에서 뿜어진 7.62×39mm 탄 세례가 불청객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총알이 불청객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과연 에드릭과 맞설 수 있는 강자라고 해야 할까.

불청객에게 쏘아진 총알들은 힘없이 허공을 가르거나, 간신히 닿은 총알조차도 불청객의 방어구에 너무나도 쉽게 튕겨 나갔다.

'역시 이 정도는 안 통하겠지.'

어차피 이 정도는 상정했던 바.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맞아도 전혀 타격이 없다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어느 정도의 충격은 있다 봐야 해.'

불청객이 아무리 강한 육체 능력과 좋은 방어구를 착용했다 하더라도, 총이 내는 파괴력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나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타탕!

다시금 총구에서 불이 뿜어지며 총알들이 쏘아졌다.

불청객은 내가 쏘아 낸 다섯 발의 탄을 너무나도 쉽게 피해 냈다.

예상했던 대로.

'지금.'

불청객이 총알을 피하느라 움직임이 제약된 바로 이 순간.

타앙!

마기를 머금은 탄환, 마탄이 총구에서 쏘아졌다.

불청객은 마탄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방어력을 믿었는지 별다른 방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철저히 내가 의도했던 대로.

콰악!

"커억!"

쏘아진 마탄이 방어구를 뚫어 내며 불청객의 몸이 크게 넘어갔다.

그리고 불청객의 배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가 지금 불청객이 상당한 치명상을 입었음을 말해 주었다.

"훌륭하군!"

그에 슬쩍 뒤로 빠져 있던 에드릭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금 불청객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드릭과 백중세를 이루던 불청객이었지만, 부상을 입은 지금은 아니었다.

하물며 숫자마저도 이쪽이 크게 앞서는 상태.

'반드시 죽인다.'

불청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거야 잡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

적어도 엘드란을 죽인 대가는 확실하게 치르게 해 줄 것이다.

"우오오!"

"망할 자식."

"죽어."

콘란과 알비노, 알리시아까지 합세해서 불청객을 포위했다.

강자끼리의 싸움에 어설프게 끼어들어 봤자 방해만 될 테니, 본능적으로 포위망을 구성한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만 투구를 벗고 정체를 드러내지 그러나? 겨울성에서는 포로를 규약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한다네."

"으음, 더는 안되겠네."

노이즈가 낀 목소리와 함께 불청객의 품에서 피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 막아!"

삐이이이익!!!───

소음을 넘어 귀를 찢는 음파로 변모한 피리 소리가 사방에 뿜어졌다.

"으윽!"

"뭐, 뭐야!"

제4 특무대원들이 귀를 틀어막고서 뿜어진 음파에 저항하려 했으나, 피리 소리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삐이이이이이────

울려 퍼지는 이명 속에서 귀에서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피였다.

자율적으로 착용자를 보호하는 물의 보옥이 고막을 보호하고 있기는 했으나,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귀는 뇌와 곧장 연결된 기관으로서, 매우 취약한 감각기관 중 하나였으니까.

'위험해.'

에드릭을 포함한 다른 특무대원들 역시도 귀를 틀어막은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일단 저 피리부터 없애야 해.'

들려오는 음파의 위력으로 보건대, 최소 준전설급의 아이템일 터.

저 정도 아이템이라면 단순한 총알만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마탄이라면 모를까.

"...후우."

나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쥐었다.

스스스──

그와 함께 남아 있는 마기가 탄창 안으로 깃들기 시작했다.

기회는 단 한 번.

만약 이번에 실패한다면 불청객은 다시는 빈틈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스으읍....

숨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쏘아진 마탄이 일직선을 그렸다.

AKR-74 돌격 소총의 탄속은 약 715m/s.

거기에 더해서 마기를 실은 마탄의 탄속은 그마저도 아득히 뛰어넘었다.

또한, 마기로 인한 적중 보정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끝내 마탄을 목표물로 인도했다.

파각!

마탄에 적중된 피리가 산산이 부서지고.

마침내 지겹도록 우리를 괴롭히던 피리 소리 역시도 멎었다.

96화 거석산 모그론 (6)

"...칫."

나는 곧이어서 방아쇠를 당겼으나, 들려온 건 공허한 기계음뿐이었다.

철컥, 철컥-

총알을 모두 소진한 것이다.

"쯧."

나는 곧장 AKR-74 돌격 소총을 내던지고서 새로운 병기를 소환하려 했으나, 이미 불청객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도망쳤나."

만약 불청객이 결사 항전을 결심했다면 시간이 촉박한 우리로서도 크게 곤란해졌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으음."

에드릭이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자네는?"

"저도 괜찮습니다, 아직 귀가 좀 먹먹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우리 둘 모두 귀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나마 청각을 완전히 잃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에드릭의 시선이 불청객이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흠. 놓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자였는데... 아쉬울 따름이군."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자가 사용하던 피리만 봐도 그렇고."

에드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리라.... 그자의 정체가 황혼 악단이라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 겨울성을 노리는 행보만 보아도 말이죠."

"확실히 가능성이 있군."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더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불청객보다도 더욱더 다급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저겁니다."

구구구구....

한동안 멈춰 서 있던 거석산 모그론이 서서히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드란이 막대한 대가를 바쳐서 실행했던 마법의 효과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석산 모그론이 다시 겨울성으로 향한다.

그것을 바꿔 말하자면 간신히 멈췄던 재앙이 다시금 일어난다는 것과도 같았다.

"...."

그것을 바라보던 에드릭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대원들과 함께 겨울성으로 돌아가게."

"대장님은요?"

"저걸 막아 봐야지."

에드릭은 평온하게 말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대장님이라고 해도 마경의 왕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에드릭이 강한 인물이라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지만, 마경의 왕은 인간의 기준에선 규격 외의 존재다.

그런 것을 단신으로 상대하겠다는 건 죽겠다는 말과 그리 다를 것 없었다.

"벨, 나에게는 임무를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네."

"언제부터 참군인이셨다고 그러십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래야 하네."

에드릭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머릿속이 복잡하다.

에드릭을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잃는 건 여러모로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특히 황혼 악단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겨울성과 제국은 건재해야만 한다.

'할 수 없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단지, 그 방법은 그만큼 큰 대가를 필요로 하기에 피해 왔을 뿐.

이제 선택을 할 때가 됐다.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지금 내가 지닌 수단으로는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될 뿐.

생각을 마친 내가 업화의 송곳니를 쥔 순간.

"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날이 잔뜩 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이가 없군."

* * *

"어이가 없네."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그 어떤 존재도 알비노에게는 없었다.

혼자인 게 자연스러웠고,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적어도 알비노가 느끼는 세상은 그러했다.

알비노에게 있어서 세계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했고, 타인이라는 존재 또한 곧 알비노에게 있어서 사기를 쳤던 대상과 곧 사기를 칠 대상으로 나뉠 뿐이었다.

"이번에 남쪽 원정이 취소된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그런데도 이 값을 받겠다고? 병구류가 쓰레기가 된 건 모르나 보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남쪽 원정이 취소된 이유가 동부 연합과의 마찰 때문인 건 모르나 보지?"

"뭐? 잠깐, 그게 사실이야?"

"내가 누구 좋으라고 더 말해 줘? 싫으면 사지 마. 어차피 나야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더 오를 테니 급할 것도 없어, 몰튼에서 병구류를 원하는 자는 많을 테니."

"자, 잠깐! 기다려! 살게!"

"두 배."

"...뭐?"

"네가 시간을 끈 탓에 병구류값이 올라 버렸잖아?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망할 자식. 그런 식으로 장사하면 몰튼에서 오래 못 버틸 거다."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사지, 전부."

뒷골목과 거지 굴, 마약 굴 등을 전전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해 왔던 알비노에게 있어서 사기는 꽤 효율 좋은 행위였다.

말 몇 마디, 행동 몇 가지로 간단히 사람을 속일 수 있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 대가는, 알비노가 세상에서 받은 고통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울 뿐이었으니.

"병신. 동부 연합이 지 같은 등신도 아니고, 제국에 싸움을 걸겠냐? 뭐, 덕분에 꽤 쏠쏠하군."

그런 알비노가 마침 타인을 속이는 데 최적화된 마법을 지닌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뭐야, 이건 은화 아니야? 지금 나랑 장난해?"

"뭔 개소리야? 잘 봐, 금화잖아."

"...으응? 아, 맞군."

고통의 마법은 고통을 포함한 타인의 감각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로 알비노는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무수한 고통을 겪어야 했으나, 아무런 상관 없었다.

어차피 알비노에게 있어서 이 삶 자체가 하나의 고통과도 같았으니.

여기에서 육체적 고통 정도가 추가된다고 한들, 알비노에게는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저자요! 저자가 날 속인 마법사요!"

당연하게도 알비노의 사기 행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는 사기꾼.

이는 징벌 교단이 이단 심문관들을 파견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되어 주었고, 알비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징벌 교단에 붙잡혔다.

"그 자식들이 불었나....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지만."

함께 사기를 치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알비노는 애초에 그들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배신감 따위는 느끼지도 않았다.

알비노가 화형장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알비노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나와라."

"음?"

마차에 오른 알비노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여정에서 점차 날씨가 차가워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뒷골목에서 들었던 소문 중 하나가 사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겨울성으로 가는 마차였나."

뒷골목에 나도는 소문 중에는 겨울성에서 징벌 교단에 끌려간 마법사들이나 흉악범들을 징집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알비노는 겨울성의 병사가 되었다.

제4 특무대원들에 대한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지만 그만큼 괴상한 성격을 가진 마법사부터 시작해서,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무식한 용병 놈부터 왠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상한 여자까지.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었지만, 알비노는 언제부터인가 겨울성에서의 생활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비노는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그게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점차 시간이 흘렀다.

타성에 젖어 가듯이 알비노는 조금씩 자신이 변해 간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변화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기에 알비노는 마음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불편함을 억누른 채로 서서히 변화를 받아들였다.

여전히 알비노는 사람 간의 유대 따위는 가질 줄 모른다.

삶은 고독한 것이고 인생은 홀로 떠나는 기나긴 여행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게 알비노가 지닌 뿌리 깊은 가치관이었으니까.

그러나, 하지만.

가끔은 그 기나긴 여행길에서 잠깐의 동행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알비노는 분명히 그리 여겼다.

그런데 왜일까.

거석산 모그론이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한 순간, 알비노는 타인에게 인생이라는 여행길의 동행을 허락한 것이 자신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이 내심 동료라 여겼던 제4 특무대원들은 알비노를 동료라 여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알비노는 지금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 * *

정신을 차린 알비노를 보며 에드릭이 말했다.

"자네도 일어났군. 무엇이 그리 어이가 없는지는 몰라도, 우선은 벨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게."

"이봐요, 대장님. 지금 대장이 저걸 막을 수 있다는 겁니까?"

"글쎄. 자신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지."

"그게 어이가 없다는 겁니다."

알비노의 목소리에 노기가 깃들었다.

"벨 블랙우드, 저 미련한 대장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한 마디, 한 마디. 알비노는 마치 씹어 삼키듯이 나를 향해 내뱉었다.

"환영의 마법사 엘드란, 그가 사용한 마법이 무엇인지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그래, 알고 있었다."

"너...!"

나는 환영의 마법사 엘드란이 사용하던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각을 통제하는 마법, 고통의 마법은 다름 아닌 알비노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마법이었으니까.

알비노는, 환영의 마법사 엘드란 준남작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마법사였다.

곧, 알비노는 마음만 먹는다면 엘드란과 같은 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없었던 거야. 참... 기분 한번 더럽군."

그 말대로였다.

나는 알비노에게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알비노가 엘드란과 같은 고통의 마법사라는 점을 이용해서 내가 직접 계약을 맺으려고 했을 뿐.

알비노가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마법을 사용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가능성에서 아예 배제한 것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알비노라는 인물은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유분수지... 네놈이 그렇게 잘났나? 네놈은 뭐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 말할 필요도 없겠군."

배제했던 가능성 중 하나가 지금 싹을 트고 있는 건.

"어이가 없군. 제기랄."

대체 무엇이 어이가 없다는 건지는 몰라도, 알비노는 멈추지 않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야말로 머저리가 따로 없어."

알비노가 조소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마, 지금의 나도 그렇겠지."

알비노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거석산 모그론을 향해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봐, 흰머리! 지금 무슨 짓을─"

이제 막 깨어난 콘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어느새 모그론의 지척까지 다다른 알비노가 단검으로 제 손을 그었다.

촤악!

손바닥에서 뿜어진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알비노의 피는 허공에 모이며 하나의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저 광경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알비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피가 완벽한 육망성을 그린다.

마치 무언가를 불러내려는 듯이.

그리고 나는 알비노가 불러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계약 선언."

이윽고 알비노의 입에서 나지막한 주언이 흘러나오며.

"만반통고(萬般痛苦)."

세상이 멈췄다.

97화 거석산 모그론 (7)

침묵이 흐른다.

깊고 무거운, 그런 침묵이.

그러나 세상이 멈췄다고 느낀 게 그저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침묵은 그야말로 찰나와도 같았다.

그럼에도 그것이 단순히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아는 이유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무엇인가 크게 변했다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명료했기 때문이다.

"...으음."

에드릭이 잠시 침음을 흘리며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알비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에드릭 또한 조금 전에 이곳에서 일어난 현상을 대충이나마 느낀 듯했다.

이 자리에 악마가 강림했다.

어처구니없는 건 계약자인 알비노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악마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느끼거나 인지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악마가 강림한 후에 생긴 시간 격차와 남은 잔향만을 어설프게 눈치챘을 뿐.

"...흰머리?"

뒤늦게 콘란이 떨떠름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조심스레 알비노를 불렀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우우우우!

지금껏 멈춰 서 있던 거석산 모그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효과가 약해져 가던 엘드란의 마법의 효과가 완전히 끝난 것이었다.

쿵!

쿠웅──!!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지형을 바꾸는 거대한 진동이 들썩인다.

"이봐요, 대장! 저게 다시 움직이는데요!"

"가만히 있게."

"미쳤수? 지금 여기서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그게 아닐세. 저길 보게."

"그게 무슨...."

에드릭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에드릭 또한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비노가 무언가 할 거라는 걸.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껏 가만히 서 있던 알비노가 거석산 모그론을 향해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돌아가라."

알비노의 입술이 달싹이며 흘러나온 말과 함께, 알비노의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거석산 모그론을 향하기 시작했다.

알비노의 손바닥에서 쏟아진 빛은 마치 바라보는 순간 시력이 멎을 것처럼 찬란했다.

그래, 마치 엘드란의 것처럼.

쏟아진 빛이 거석산 모그론을 휘감기 무섭게 거석산 모그론이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재앙을 선사하던 존재가 멈춰 선 것이다.

-그우우우....

나는 알비노가 펼친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통의 마법.

허가적환영(?假的?迎).

그 이름 그대로 대상의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속여서 거짓된 환영을 보여 주는 마법이었다.

그러한 마법의 효과를 증명하듯이 거석산 모그론은 곧 그 거대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구───!!!

그저 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기파가 몰아치고, 그에 따라 착용자의 위협을 느낀 물의 보옥이 자율 방어를 펼쳤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선전수적순패(旋轉水的盾牌)'를 전개합니다.]

물의 보옥이 펼쳐 낸 파도가 넘실거리며 사방에 물보라가 튀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방울이 걷히고, 이후에 드러난 결과는 무척이나 명료했다.

-그오오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대의 모든 것을 짓밟으려 했었던 거석산 모그론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왔던 곳으로.

마경 깊숙한 곳으로.

그 풍경 속에서 가장 얼이 빠진 건 역시나 평소에 알비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콘란일 것이다.

"해낸 건가? 정말로? 흰머리 놈이 지닌 마법이 저 정도였다고?"

콘란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알비노가 펼친 마법은 평소에 알비노가 사용하던 가벼운 마법과는 아예 수준 자체가 다른 마법이었으니.

"정말로 해냈나."

"...굉장해."

에드릭과 알리시아 또한 작게 입을 벌린 채로 거석산 모그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알비노가 저 정도의 마법을 펼칠 거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큰 마법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내가 괜히 쉬운 일을 내버려 두고서 늘 악마와의 계약을 피해 왔던 게 아니라는 소리다.

"젠장! 흰머리 자식, 하려면 할 수 있었잖아! 점잔 빼고 있기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콘란은 껄껄 웃으면서 가만히 서 있는 알비노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

알비노의 어깨를 붙잡은 콘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이 자식 왜 이래?"

이윽고 드러난 알비노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단지 눈동자뿐만이 아니라 알비노라는 인물 자체가 마치 속이 비어 버린 인형이 된 것처럼 알비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야, 인마! 정신 차려! 제기랄! 벨! 이 자식 상태가 왜 이런 거야?"

결국 그렇게 됐나.

계약과 대가에 대해서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오랜 준비를 해 두었던 엘드란과는 달리, 알비노는 그 무엇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억지로 고위 마법을 펼쳤다.

그렇기에 알비노는 엘드란과는 다르게 마법으로 인한 대가를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엘드란이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전신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고통스러워했으나, 지금의 알비노에게서는 겉으로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면 알비노가 치르는 대가가 훨씬 적어 보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고통의 악마와 계약을 맺었는데, 그 대가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대가라면....'

지금 알비노는 엘드란이 치렀던 대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는 걸.

"콘란! 우선 알비노를 눕히게. 일단 호흡은 어떻지?"

에드릭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숨은... 아, 쉬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다행이라니요! 제기랄, 대장.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자식이 왜 이렇게 된 거요?"

"마법의 대가일세. 조금 전에 알비노가 사용한 마법을 보지 않았나?"

콘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무리 마법이라고 해도 사람이 이렇게 된단 말입니까?"

"그게 계약자가 치러야 할 대가일세. 계약한 대상이 악마든 아니면 다른 존재든지 관계없이 말이지."

콘란이 그렇듯이 이 세계에서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은 마법을 어떤 기적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마법은 기적 따위가 아니다.

강력한 마법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하다.

이는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 하나의 절대적 진리였다.

"망할. 그러면 이제 흰머리 녀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겠지,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에드릭의 말에 콘란과 알리시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나로서는 없네. 애초에 마법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이라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방법이 있겠나?"

"글쎄요."

"모호한 대답이군. 그나마 이 상황에서는 희망적으로 들린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군."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음, 그건 곤란하군. 난 자네에게 늘 기대하고 있거든."

"어휴."

에드릭이 내 어깨에 잔뜩 짐을 얹어 주었으나, 알비노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알비노의 상태를 보건대, 아마 다수의 감각 자체를 고통의 악마에게 대가로 빼앗겼을 터.'

그렇기에 지금 알비노는 그 무엇도 느낄 수도, 반응할 수도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감옥인 셈.

알비노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알비노는 절대로 스스로 희생 같은 걸 선택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변했다는 건가.'

알비노에게 겨울성 크로이츠의 군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생겨난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알비노가 이런 선택을 한 건.

'모르겠군.'

여전히 나는 알비노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겨울성으로 돌아간 뒤면 늦겠지.'

지금도 알비노의 생명 활동은 서서히 멈춰 가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단지 숨만 쉰다고 해서 살아 있을 수 있는 튼튼한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알비노가 어떤 것을 대가로 바쳤는지 알 수 없는 작금의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알비노를 구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알비노는 현재 고통의 악마에게 대가로 대부분의 감각을 빼앗긴 상태.'

'고통의 악마의 특성상, 나라면 큰 대가 없이 알비노를 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비노를 영원히 잃는 것과 내가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저울질한다면....'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쯧."

어쩌면, 변한 게 알비노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멍청한 선택을 하려는 걸 보면.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꺼내 들고는 그것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촥!

손바닥에서 느껴진 뜨끈한 열기와 함께 하이마의 저주로 인해서 피가 줄줄 새다시피 흘러나왔다.

평소였다면 물의 보옥이 자율적으로 내 신체를 회복했겠지만, 지금은 내가 의도적으로 물의 보옥의 권능을 막아 두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음. 자네...."

그 모습을 본 에드릭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아채고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괜찮겠나?"

"그래야죠."

"무리는 하지 말게, 자네에게 기대한다고는 했지만, 어려운 일이라는 건 나도 잘 아니."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콘란 또한 나를 보며 말했다.

"이봐, 벨. 하얀 머리 녀석이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거냐?"

"그렇게 만들어야지."

"부탁한다. 글러 먹은 녀석이기는 해도, 한때 한솥밥 먹은 사이잖냐."

"네가 안 그래도 할 거다."

흘러내린 핏줄기를 따라서 바닥에서 육망성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악마를 불러낼 준비가 된 것이다.

"벨."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냈을 때, 알리시아가 나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알리시아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때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몰라서."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내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로서도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도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내뺄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알비노 녀석, 동료는 몰라도 지금까지 함께 싸운 전우 정도는 되잖아? 조금 전에 녀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부 죽었을 거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전에 알비노 대신 내가 고통의 악마와의 계약을 선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비노가 치렀던 대가를 대신해서 치렀겠지.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지금의 각오는 순서만 바뀌었을 뿐, 어차피 행했을 일이었다.

"...말릴 수 없겠네요."

알리시아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아니, 이곳의 시간으로는 한순간이면 끝나겠지.

'알비노 녀석, 대체 뭔지....'

혼자라고 여겼던 이 세상에서 타인이 나와 다른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알비노는 말했다.

더 이상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이제는 내가 알비노의 말에 대한 대답을 전해 줘야 할 때.

지금 내가 움직일 이유는 아마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뚝, 뚝....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린다.

그 끝에 있는 것은 피로 그려진 육망성.

알비노의 숨이 아직 붙어 있는 이상, 악마는 여전히 이곳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악마는 늘 계약자가 있는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피로 그려진 육망성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선언했다.

"계약 선언."

바로, 악마와의 계약을.

"만반통고(萬般痛苦)."

98화 거석산 모그론 (8)

문득 정신을 차리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빙하 위를 걷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발아래는 차가운 얼음이 얼어붙어 있고, 내 주위는 어둠이 감싸고 있다.

얼굴을 희푸르게 찌푸리는 바람이 불어와, 서늘함에 몸이 절로 떨린다.

그 고요한 얼음 위에서는 나 자신의 고통만이 나의 유일한 동반자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길을 잃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각각의 걸음마다 고통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이 어둠 속에서 고독함이란 칼날이 내 마음을 찌르고, 얼음 같은 침묵이 내 목을 메운다.

내가 여기에 어떻게 도달했는지, 이 고통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이 어둠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욕망만이 나를 이끌고, 그렇기에 나는 그 어둠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끼익, 끽....

어둠 너머에서 들려온 건 스산한 쇳소리였다.

어둠 속을 더 나아가자, 허공에 걸려 있는 철제의 고리와 사슬이 보인다.

날카로운 칼과 이빨 모양의 도구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어떤 고문 도구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무수한 고문 도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서운 침묵이 흡사 나를 질식시키려는 듯이 조여 온다.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눈앞에서 고통과 공포에 대한 생생한 상상이 떠오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풍겨 온 썩은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아파, 아파아아아──!

-끼아아아아악...!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마치 환청처럼 들려오는 정체 모를 비명이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나에게 속삭였다.

[태고의 본질 중 하나를 마주하였습니다!]

[태고의 마(魔)가 당신의 본질에 스며듭니다.]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마(魔)에게 대항합니다!]

멸망 유예자의 힘이 악마의 존재감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통의 굴레가 서서히 끝을 보였다.

"...아."

마치 고통이라는 개념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풍경.

이곳이야말로 고통의 악마라는 존재를 말해 주는 공간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종류의 고통으로 가득 찬 이 공간이야말로 고통의 악마 그 자체일 테니.

'망할 자식.'

일전에 마주했던 업화의 악마 같은 경우는 계약에 있어서 상당히 적극적인 편이었지만, 고통의 악마 같은 경우는 다르다.

계약자가 계약을 갈구하며 고통을 받는 것 또한 고통의 악마에게 있어서 큰 유희였기에, 고통의 악마는 계약 과정마저도 이처럼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천칭 앞에 섰다.

비록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크기도, 모양도, 재질도, 모든 게 달랐지만, 저게 무엇인지 내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공정의 천칭.

이 세계의 진리를 품고 있는 그것 앞에서, 나는 선언했다.

"계약을 원한다, 악마."

끼익, 끼이이익....

쇠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만들어진 천칭이 부르르 떨린다.

[황금률의 계약을 시작합니다.]

[계약의 대가를 제시하십시오.]

본격적인 계약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칭은 여전히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성질 급한 업화의 악마와는 달리, 고통의 악마는 아직 그 어느 것도 천칭에 올려놓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보고 먼저 계약의 대가를 천칭에 올려놓으라는 거겠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고통의 악마는 그러한 고뇌의 과정마저도 즐기는 변태 중의 상변태 악마였으니.

그러나 내가 이번 자리에 온 이유는 고통의 악마와 계약을 맺고서 마법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고통의 악마가 가져간 알비노의 대가를 돌려받는 것.

그렇기에 천칭에 먼저 대가를 올려놓을 건 내가 아니었다.

"선언한다. 내가 원하는 계약의 조건은 고통의 계약자 알비노가 고통의 악마에게 치른 대가에 대한 모든 권리다."

끼긱, 끼기기긱───!!

그와 함께 공정의 천칭이 기괴한 쇳소리를 내면서 한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천칭에 올라간 대가의 무게가 상당히 무겁다는 뜻이었다.

[계약의 대가가 부족합니다.]

[계약의 균형을 맞추십시오.]

자,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애석하게도 지금 나는 고통의 악마와의 계약에서 대가를 줄일 만한 조건이나 제약을 제시할 수 없었다.

업화의 악마와 계약을 했을 때처럼 온갖 매개체와 제약과 조건을 이용해서 대가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

지금 나는 고통의 악마와의 계약에서 온전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물론 정말로 내가 그 어떤 대비도 없었다면 애초에 나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선언한다. 알비노가 치른 모든 계약의 대가, 그걸 내가 대신 감당하겠다."

천칭 위에 내가 치를 대가를 올려놓자, 본격적으로 천칭이 균형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긱, 끼기긱───!!

소름이 끼치는 소음과 함께 천칭이 기울어졌으나, 완벽한 균형을 이루지는 못했다.

공정의 천칭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내가 아닌, 고통의 악마 쪽으로.

[계약의 대가가 부족합니다.]

[계약의 균형을 맞추십시오.]

고통의 악마는 말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알비노 대신 대가를 짊어지는 것만으로는, 알비노를 되찾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망할 자식.'

마음 같아서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계약 자체를 파투 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건 역시나 황금률로 이루어진 공정의 천칭 또한 그것을 인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황금률로 이루어진 공정의 천칭을 통한 모든 계약은 공정하나, 어떤 계약은 특히나 더 공정하다는 것을.

'아무튼,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어쨌거나 대가가 부족하니, 나는 천칭 위에 또 다른 대가를 올려놓아야만 했다.

무엇을 올려놓아야 균형이 맞을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고통의 악마가 원하는 대가야 뻔하디뻔했으니까.

"선언한다. 계약의 대가로 내가 직접 이곳에서 1초간 더 머물겠다."

사고를 무수히 확장시켜서 마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얻은 악마의 의식 속에서의 1초는 단순히 1초가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1초를 더 머물겠다는 건,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자아가 붕괴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행위였다.

'그렇기에, 이 대가는 무겁다.'

끼기기긱!!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공정의 천칭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던 천칭이 서서히 균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끼익, 끼이익....

천칭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춰 섰다.

천칭은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공정의 천칭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공정한 계약이 집행됩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

자연스레 계약의 집행 역시도 빠르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공정한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공정한 계약에 따라서, 고통의 계약자 '알비노'가 지불한 대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습득합니다.]

느껴진다.

본래 고통의 악마가 쥐고 있었던 알비노라는 인간에 대한 감각 통제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것이.

문제는, 이제부터 내가 치러야 할 계약의 대가라고 볼 수 있었다.

[공정한 계약에 따라서, 계약 집행을 개시합니다.]

[현재 남은 시간 : 0.995초]

가장 먼저 치른 대가는 고통 그 자체를 형상화한 이 공간에서 1초를 머무는 것.

당연하게도 인간 세계에서의 1초와 의식을 극도로 가속화한 이곳에서의 1초는 그 단위가 매우 차이가 났기에 쉬운 대가는 아니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고통 그 자체를 형상화한 공간이 나를 향해서 끊임없는 고통을 선사하려 했으나, 마(魔)에 있어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멸망 유예자의 힘이 그걸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태고의 마(魔)가 당신의 본질에 스며듭니다.]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마(魔)에게 대항합니다!]

이 공간이 주는 가장 큰 위협은 피했지만, 여전히 계약의 대가는 아직 남아 있었다.

아니, 사실상 두 번째 대가가 이번 계약의 진정한 대가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제껏 알비노가 고통의 악마에게 치러 왔던 모든 대가를 내가 대신 지불한다는 대가.

알비노는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 그 무엇을 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바로 그것을 내가 대신 감당하겠다고 했으니, 절대로 가벼운 대가가 아닌 것이다.

'뭐, 이미 준비는 됐지만.'

고통의 악마를 통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대부분 직접적인 육체적 손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대가로 인해서 엘드란처럼 간접적으로 다량의 출혈이 발생하거나 상처가 생길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어떤 육체적 손상을 대가로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고통은 무엇인가.

육체적 고통이 발생하는 원리는 주로 신경 체계와 관련이 있다.

부상, 염증, 질병 혹은 다른 신체적인 이유로 인한 자극은 특정한 신경세포들을 활성화하고, 이 신경세포들은 특정한 종류의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하여 통증 신호를 전달한다.

또한 이 신호는 경막을 통해 척수로 전달되고, 거기서 다시 뇌로 전달된다.

결과적으로 뇌는 이런 신호를 해석하여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뇌는 통증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종류인지, 얼마나 심각한지를 평가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적절한 반응을 취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아무리 끔찍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것이 실질적인 손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일종의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소리.

즉, 고통이라는 개념은 실질적인 실체가 없다면 정신 공격의 일종으로 해석해 볼 여지가 충분했다.

바로 지금처럼.

[공정한 계약에 따라서, 계약을 집행합니다.]

[멸망 유예자의 정신이 마(魔)의 침입에 대항합니다!]

[멸망 유예자의 힘이 정신에 행해지는 모든 공격을 차단합니다!]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형상화된 고통은 멸망 유예자의 힘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혔다.

마(魔)에 대한 절대적 상성 우위.

모든 정신 공격에 대한 면역.

멸망 유예자가 지닌 그 두 가지의 사기적인 특성 효과가 발휘되어서, 고통의 악마와의 계약에서 치러야 할 대가가 완전히 무효화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쉽게 정신 공격을 막아 낼 줄이야.'

솔직히 나로서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끼긱, 끼기기긱!!!

쾅! 콰아아앙!!

그와 함께 고통의 악마가 분노라도 한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알아차렸나.'

가능하다면 고통의 악마가 이 사실을 모르기를 바랐으나, 역시 악마를 상대로 그런 요행은 바라기 어려웠다.

이 공간은 고통의 악마의 본질인 고통 그 자체를 형상화한 공간.

고통의 악마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사기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저토록 분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식으로 두고두고 고통의 악마를 등쳐 먹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이러한 사기 행각이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악마들에게 있어서 계약의 대가란 늘 유동적인 것이었으니.

실제로 업화의 악마 또한 내가 몇 차례 약식 계약으로 재미를 보는 것처럼 보이니 곧장 계약의 대가를 바꾸지 않았던가.

'한 번밖에 없는 공짜 찬스지만, 그래도 아까워할 필요는 없겠지.'

이 정도면 멸망 유예자의 힘을 꽤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알비노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알비노라는 꽤 쓸모 있는 인물의 목줄 역시도 내가 쥐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알비노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알비노가 나중에 가서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으니 이 안전장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이런 위험을 짊어지게 했으니, 아주 두고두고 부려 먹어 주지.'

내가 앞으로 알비노의 처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현재 남은 시간 : 0초]

[공정한 계약에 따라, 모든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주변의 공간이 서서히 깨져 나가기 시작하며, 멈춰 있는 것과도 같았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돌아갈 때가 됐다.

본래 내가 있었던 곳으로.

그리고, 있어야 할 곳으로.

99화 거석산 모그론 (9)

가장 끔찍한 고통은 무엇인가.

그에 대해서 물었을 때 사람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누군가는 통각이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는 작열통에 대해서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숨이 조여 오는 질식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그 외에도 무수한 고통이 있었으나,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통의 본질과도 같은 악마가 내놓은 답은 간결했다.

무감각(無感覺).

끝과 끝은 통한다는 말처럼 고통의 악마가 내놓은 답변은 어찌 보면 고통이라는 개념과는 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통의 악마는 쪼개지고 쪼개진 찰나의 의식을 가속화한다면 그 무엇도 느낄 게 없다는 게 어떤 지옥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알비노는 고통의 악마가 만들어 낸 지옥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 무엇을 느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지옥 속에서 쪼개지고 쪼개진 영겁의 시간을 그저 깨어 있었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고요 속에서 알비노의 의식은 미쳐 갔지만, 미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후회, 후회 그리고 또 후회.

살아 있는 지옥 속에서 알비노는 자신의 모든 선택을 후회했다.

내가왜그런선택을했지나는그저잘살고싶었을뿐인데겨울성같은곳은왜가서이런말도안되는일을겪는거야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아니야내가뭘잘못했는데이건전부다세상이잘못된거야나는잘못한게없어....

.

.

.

마법같은건사용하는게아니었어대체내가왜이런대가를치러야하는건데겨울성자식들죽든지말든지내가무슨상관이야제발돌려줘내가잘못했어잘못했습니다잘못했습니다....

.

.

.

이제그만하고싶어대체언제까지이렇게있어야하는건데내가왜이런꼴을당해야해엘드란에드릭벨블랙우드콘란알리시아잭험멜제시줄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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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죽여줘.

그저 존재하는 것만이 가능한 영겁의 무아 속에서 알비노의 정신은 서서히 광기에 젖어 갔다.

알비노는 이제 간절히 자신의 죽음을 바랐다.

그러나 고통의 악마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알비노는 아예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알비노가 느끼는 시간은 본래의 시간 개념과도 틀어져 있을 테니, 그리 의미 없었다.

알비노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서 무아 속으로 의식을 던지고 있을 때.

"...봐!"

절대로 느껴져서는 안 될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봐! 흰머리! 정신 차려!"

짝!

청각에 이어서 느껴진 건 너무나도 강렬한 촉각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통각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뺨에서 느껴졌다.

"...."

알비노는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분명히 그 무엇을 느낄 수도, 할 수도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강렬한 감각이 알비노의 신경을 타고서 찌릿찌릿하게 전해졌다.

"아, 으아...."

"흰머리!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냐?! 눈 좀 떠 봐!"

말을 하는 감각조차도 너무나도 낯선 알비노에게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는 행위는 맨몸으로 바위를 드는 것과 그리 다를 것 없었다.

그렇게 알비노가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만.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게 내버려 두게."

"망할.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게 훨씬 나을 걸세. 악마와의 거래로 무얼 대가로 바쳤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상상 이상일 테니."

이어서 이런 저런 소리가 들려왔으나, 알비노는 더 이상 밀려드는 감각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체감상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감의 감옥 속에 있었건만, 갑작스레 밀려든 감각들은 너무나도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끄륵...."

"뭐, 뭐야? 이봐, 흰머리! 이 자식 갑자기 왜 이래?"

알비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인간의 뇌는 끊임없는 자극을 받아야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괜히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방에 인간을 가둬 두면 미치는 게 아니라는 소리.

하물며 모든 감각이 차단된 채로,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방치되어 있던 알비노의 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본래였다면 알비노의 뇌가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비노에게는 참으로 운이 좋게도, 지금 알비노의 주변에는 물의 보옥의 주인인 벨 블랙우드가 있었다.

스스스....

흩뿌려지는 물의 보옥의 권능이 알비노의 육체에 스며들며, 사실상 마비되어 있던 알비노의 뇌와 신경 그리고 전신을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서서히 회복되어 가는 뇌 기능과 함께 알비노의 의식이 꿈속을 거닐었다.

알비노는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기억하는 것 말고는,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억겁의 어둠 속에서 알비노는 무수한 후회를 쌓고 또 쌓았다.

처음에는 그저 만용을 부려 마법을 사용한 것부터 시작해서, 징벌 교단에 붙잡힌 것, 고통의 악마와 계약한 것,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애초에 사기나 치고 다니던 한심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로 이어졌다.

뒤돌아보니, 알비노의 삶은 온통 후회밖에 남지 않은 삶이었다.

알비노는 그 모든 것을 후회했고, 그렇기에 무너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는 같은 후회를 쌓지 않으리라고.

조금은, 더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살겠노라고.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레 눈이 떠진 알비노는 누군가에게 업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음? 어이! 일어난 거냐?!"

그에 자신을 업고 있는 자가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라는 걸 눈치챘다.

콘란.

같은 제4 특무대 소속이자, 머리까지 근육으로 찬 것 같은 머저리.

그러나 알비노는 그 머저리를 다시 보게 된 것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흥. 시끄럽다. 머리가 울리니까 적당히 말해."

여전히 알비노는 말하는 게 어색했지만, 일단 한번 말문이 트이자 마치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말이 나갔다.

"하하! 이 자식 입은 여전하군. 그래도 깨어났으니 다행이야."

"다행은 무슨."

의식의 감옥 속에서 그토록 변하기로 마음을 먹었건만, 아무래도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건 아닌 듯했다.

알비노는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답했으나, 콘란은 오히려 그 점에 더 안심했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그래도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흰머리. 듣자 하니 대단한 각오를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던데."

"...무슨."

콘란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비노가 모를 리 없었다.

엘드란이 의문의 습격자에 의해서 죽고, 거석산 모그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알비노는 그 누구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알비노에게 있어서 굉장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켰고,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자기희생(自己犧牲).

종교적으로는 가장 숭고하다 여겨지지만, 알비노 입장에서는 스스로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 행위 끝에 남은 건 분명히 끝없는 후회뿐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그렇게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알비노는 어느덧 자신의 옆에 선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벨 블랙우드."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건만, 여전히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는 불가해의 마법사.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역시 너였나."

많은 것을 생략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벨 블랙우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수긍하는 대답에 알비노는 말문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

"...어떻게?"

벨 블랙우드는 대체 어떻게 악마에게 모든 걸 빼앗긴 알비노를 원래대로 되돌렸는가.

그건 알비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거래를 했지."

분명히 그럴 텐데... 너무나도 덤덤한 벨 블랙우드의 대답에 알비노는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네가 나 때문에?"

"그래."

알비노는 악마와의 거래가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알비노 본인이 그 계약의 대가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지옥을 맛보았으니까.

그렇기에 알비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대체 무얼 대가로 바친 거냐."

벨 블랙우드를 바라보는 알비노의 눈동자가 더없이 떨렸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벨 블랙우드는 대체 무엇을 대가로 바쳤는가.

알비노는 그걸 알기 두려워졌다.

"글쎄. 작진 않았지."

"그런...!"

알비노는 벨 블랙우드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알비노를 구해 내고도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거겠지.

그러나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알비노가 치러야 했던 대가를 생각한다면, 벨 블랙우드가 치렀을 대가가 무엇일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대체 왜 그랬던 거냐. 내가 어찌 되든 너한테는 별로 상관없지 않나?"

알비노는 벨 블랙우드가 자신을 위해서 그런 위험과 부담을 감수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벨 블랙우드는 대체 왜 그랬는가.

고작 같은 특무대 소속 정도에 불과한 인연에 그 정도 대가를 감당할 이유가 있나?

'...그러지는 않겠지.'

알비노는 부정적이었다.

"그 점이 나도 궁금하더라고. 그런데 여전히 모르겠네."

하지만 이윽고 들려온 벨 블랙우드의 대답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사람 행동이라는 게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너도 그랬잖아?"

그제야 알비노는 벨 블랙우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비노가 행했던 비이성의 영역.

벨 블랙우드 또한 그 영역에 발을 디딘 채로 자기 자신도 모를 이유로 희생을 감내했다는 소리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머저리 같은 대답.

그러나,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네가 이렇게 머저리 같은 놈인 줄은 몰랐군."

"피차일반이야."

가볍게 웃는 벨 블랙우드의 모습을 보며, 알비노 또한 가볍게 웃었다.

어쩐지 혼자서 고민했던 게 멍청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맙다."

"네가 감사를 표할 줄은 몰랐는데."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 그리고...."

알비노가 벨 블랙우드를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이 빚은 반드시 갚을 거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저 말뿐인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의식의 감옥 속에서 알비노가 스스로 수십, 수백만 번은 더 되뇌었을 다짐이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이 감옥 속에서 꺼내 준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반드시 그 빚을 갚겠다는 다짐.

"그래 주면 나야 좋지."

"흥. 얄미운 놈."

알비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문득 알고 싶어졌다.

벨 블랙우드라는 저 대단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마법사가 겨울성에 남으면서까지 추구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벨 블랙우드가 향하는 길의 끝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지.

알비노는 알고 싶어졌다.

100화 기사단

에드릭이 말했다.

"일단 서둘러서 복귀하지, 여전히 상황이 좋다고 볼 수는 없으니."

그 말대로였다.

마경의 왕 거석산 모그론을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그 와중에 겨울성의 주요 전력 중 하나였던 엘드란 준남작이 의문의 암살자에 의해서 암살당했으며 알비노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거기에 더해서 이곳은 마수들의 고향과도 같은 마경 한복판이었다.

말로라도 좋은 상황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상황인 셈.

"으음."

"쉽지 않겠군."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 그런 표정들 짓지 말게, 일단 가장 큰 고비는 넘긴 것도 사실이니."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겨울성 복귀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거석산 모그론의 등장 때문인지 우리가 빠져나가는 동안에는 마수들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크르릉!

-꾸룩! 꾸루루!

물론 그럼에도 장소가 장소인 터라 사방에서 마수들이 달려드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중요한 건 그 빈도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이었다.

"으으... 이 망할 놈들은 정말 끝도 없군!"

"징징거리지 마라, 덩치. 그나마 이 정도니까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거다."

"나도 알아! 제기랄!"

콘란과 알비노가 악을 쓰면서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알비노는 마법의 사용을 자제하는 듯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였다면 쉽게 상대했을 마수에게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한 고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멈추지 않고서 나아갔다.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다들 힘내게! 곧 마경을 벗어날 수 있을 걸세!"

"똑같은 말을 삼십 분 전쯤에 들었던 것 같은데요!"

콘란의 힘없는 항변에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러면 삼십 분만 더 버티게!"

"망할 대장이!"

어째 마경의 외곽에 가까워질수록 마수들의 숫자가 더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단순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마수들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기면서 마경의 끝을 향해서 내달렸다.

"조심해요!"

타앙!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걸까.

입에서 단내가 나고, 피와 땀 그리고 마수들의 체액이 뒤섞인 액체가 시야를 가렸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걸음을 멈추지 못한 건, 그 순간이 바로 내 마지막 순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힘내게! 곧이야!"

그렇게 에드릭을 선두로 마수들의 사체를 헤치고 나가다 보니, 어느덧 기나긴 수해의 끝이 보였다.

마경의 끝이었다.

"허억, 헉...!"

"우웁... 드디어 벗어난 건가?"

마침내 마경을 벗어났으나, 특무대원 중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경을 벗어나기 무섭게 보인 건 끝도 없이 펼쳐진 마수들의 군세였으니까.

"제기랄... 저게 다 마수야? 징그럽게도 많군."

"망할."

"너무 많아."

콘란과 알비노, 알리시아까지 끝없이 펼쳐진 마수들의 군세를 보며 경악과 절망을 감추지 못했다.

펼쳐진 마수들의 군세는 겨울성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마경부터 겨울성까지의 설원을 마수들의 군세가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망할. 이제 어떻게 합니까?"

"십만은 가볍게 넘겠군. 어마어마한 숫자야."

"으음."

나는 에드릭을 보며 말했다.

"대장님, 저 정도의 마수들을 겨울성이 감당할 수 있는 겁니까?"

"겨울성은 마수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최적화되어 있네. 실제로 기나긴 세월 동안 함락된 적이 몇 번 없기도 하고."

"있기는 있다는 소리군요."

"유감스럽게도 그렇다네."

물론 마경의 왕을 배제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니, 겨울성이 완전히 무너지는 최악의 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 겨울성이 큰 피해를 입는다면 다음에 있을 공격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일단 겨울성까지 가지."

"예."

당장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설원을 돌파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야만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설원을 피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마경에서 뛰쳐나온 마수들이 사방에 득실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마수들을 베고 쏘고 악을 쓰면서 우리는 겨울성이 보이는 동쪽의 평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으음."

예상했던 대로라고 해야 할까.

머지않아 드러난 겨울성의 주위는 마수들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군. 겨울성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겠어."

"그렇다면?"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제4 특무대가 전시에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변종 혹은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마수 암살이로군요."

"정확하네. 역시 훌륭하군."

제4 특무대가 해야 할 일은 알겠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부 한계입니다. 또다시 임무에 나섰다가는 큰 피해가 생길 겁니다."

지금 나를 포함한 제4 특무대원들의 상태는 말로라도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쉴 틈 없이 강행군을 이어 온 데다가, 그 와중에 마수들과 계속해서 전투를 벌여 댄 탓에 전신이 상처투성이에 탈진 상태였다.

그나마 이들이 당장 죽지 않은 건 가장 앞서서 싸운 에드릭과 물의 보옥 덕분이었다.

"동의하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임무는 나랑 자네만 따로 움직이지."

"저희 둘만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게 나와 자네뿐인 듯해서 말이야."

내 상태 또한 그리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다른 이들에 비하면 조금 나은 게 사실이었다.

"그런...! 안 돼요. 저도 함께 갈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리시아가 끼어들자, 에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이미 한계네. 우리보고 자네를 지키면서 싸우라는 건가?"

"...짐이 된다면 중간에 버리고 가셔도 돼요."

"불허하네. 싸우지도 못할 병사를 전장에 데려가는 건 장의사나 할 짓이지, 지휘관이 할 일이 아닐세."

에드릭의 말에 알리시아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입술을 꾹 닫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해 봤자 에드릭이 지닌 명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자네들에게도 따로 임무가 있으니."

"...임무요?"

"그렇다네. 아주 막중하고, 또 어려운 임무지."

콘란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망할, 이럴 줄 알았어. 가만히 쉬지를 못한다니까."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의 시선이 에드릭에게 집중됐다.

"살아남게, 어떻게든."

그 말을 들은 특무대원들의 얼굴이 잠시 벙쪘다.

그러거나 말거나 껄껄 웃은 에드릭이 나를 보며 말했다.

"출발하지. 시간이 없네."

"쉴 시간도 안 주시는 겁니까?"

"쉬는 건 죽어서도 실컷 쉴 수 있다네."

아무래도 에드릭은 휴식과 업무 효율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불평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겨울성은 지금도 무너져 가고 있었으니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만약 이곳에서 베른하르크에서 썼던 방법을 그대로 쓴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적은 피해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내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다는 점과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즉시 겨울성을 떠나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뇌제가 두 번을 당하지는 않을 테고.'

물론 카인에게 원한을 지닌 이가 뇌제뿐인 건 아니었지만, 뇌제만큼 이용해 먹기 좋은 이는 매우 드물었다.

출중한 무력과 순진한 지력의 조화를 이룬 이가 그리 보기 쉬운 건 아니었으니.

'뭐, 그건 그렇고....'

나는 현 상황의 해결책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제국의 지원을 기다려서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게 옳아.'

다른 방법은 그게 여의치 않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먼저 고려할 방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겨울성이 제국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장님, 지금부터 저곳에 있는 동산 위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저기 위를?"

"예. 저 자리에서 변종과 우두머리 마수들을 요격할 겁니다."

"으음, 자네 마법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저 정도 거리에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마탄과 더불어서 새롭게 갈고닦은 저격이라는 기예가 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허어, 놀랍군. 알겠네. 그러면 바로 출발하지."

"예."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저격 포인트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하는 것뿐.

"동산 위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굉음 때문에 사방에서 마수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형 덕분에 마수들이 오르는 건 쉽지 않겠지만, 제 주위에서 오는 마수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나도 알고 있네."

물론 그렇게 되면 나와 에드릭은 물론이고 특무대원들 역시도 위험에 빠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유인책으로라도 겨울성의 부담을 줄여야 했다.

"그러면 이제 출발─"

그렇게 나와 에드릭이 암살 임무를 나서려던 순간.

부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들려온 뿔피리 소리.

"이건...."

"음,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너무나도 웅장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서 이윽고 드러나는 높게 치솟아 오른 제국의 깃발.

그것은 이 기나긴 전쟁에 마침내 변환점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 * *

지평선 너머에서 수십 개의 깃발이 이어서 올라오며, 얼핏 봐도 수천은 넘는 기병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지 깃발만 앞세운 기수들만 온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지원이 도착한 것이다.

부우우우우웅────

그리고 다시 울려 퍼진 뿔피리.

순백의 설원 위를 가로지르며 제국의 기병대가 본격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음 조각을 날리고, 마수들은 기괴한 괴성과 울음을 터트리며 기병대를 향해서 흉성을 토해 냈다.

-카아아아악!

-크오오오오오──!

첫 번째 돌격과 함께 기병대의 돌진이 그대로 마수들의 저지선을 뚫어 버리며 손끝에 닿는 모든 걸 짓밟았다.

마수를 보고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군마들만 봐도, 제국의 기병대가 어째서 대륙 최강의 기병대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가만히 숨을 죽인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드릭이 입술을 열었다.

"허... 제국의 지원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군. 아직 전령이 당도할 시간도 되지 않았을 텐데."

에드릭의 말대로였다.

겨울성에서 마경에서의 이변을 감지한 직후 전령을 보냈다고 한들, 제국에서도 병력을 일으켜서 지원을 오려면 해야 하는 절차와 과정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제국의 지원이 벌써 겨울성에 도착했다?

제국이 마경의 왕이 깨어날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서 대비하고 있던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됐든 잘된 일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어딘가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군."

에드릭이 느끼는 이질감은 크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사실 나 또한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으니.

'정보 전달이 과할 정도로 빨라. 제국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 마경의 왕이 깨어날 거라는 건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정보 전달이 즉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건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계에 그런 정보 전달 수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령은 물론, 봉화나 다른 방법보다도 훨씬 더 빠른 정보 전달 수단이.

'익명 게시판.'

나도 그 방법을 전혀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겨울성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는 것 자체가 내 위치를 노출하는 것과 같았기에 일부러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설령 내가 신분 노출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익명 게시판을 통해 그 사실을 알린다 한들 그게 제국까지 닿는다는 확신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익명 게시판에 그 사실을 알렸고, 또 누군가가 그 사실을 제국에 전달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첫 번째 인물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익명 게시판에서 남기는 게시 글은 대부분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으니.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나는 곧장 익명 게시판에 접속해서 이와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

[제목 검색 : 마경]

'...응?'

그렇게 나온 범인의 닉네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기분 좋은 황당함을 느꼈다.

황당하면서도 반가운, 그런 기분.

생각해 보면 현재 마경의 상황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를 나는 이미 한 명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요한 : 지금 북부 마경에서 대규모 웨이브 발생했습니다. 조심하세요.

101화 기사단 (2)

솔직히 말해서 요한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염려해서 마경에서 일어난 일을 익명 게시판에 쓰지 못했지만, 요한에게 그런 건 전혀 신경을 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설사 요한이 겨울성 출신이었다 한들 요한이 그런 걸 신경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요한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설령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오더라도, 그게 옳은 일이라면 행하는 이.

'여전하다니까.'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는 걸 망설이지 않는 녀석의 경고 덕분에, 어두운 장막이 드리우고 있던 겨울성에 한 줄기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설마하니 요한을 구했던 일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게 될 줄이야....

'역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착하게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인을 구한 것이 보답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부우우우우웅────

전쟁 뿔피리가 연신 울리면서 기병대가 마치 한 몸처럼 현란하게 진형을 바꾸며 마수 군단을 유린한다.

제아무리 마경의 마수들이 강하다 한들, 탁 트인 평원 지대에서 제국이 자랑하는 기병대의 돌격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건 사냥이 아닌 전쟁.

마경의 마수들이 한 마리 한 마리는 강할지 몰라도, 숫자 단위가 전쟁 정도가 되면 인간이 만들어 낸 진형과 대열, 전술과 전략이 기존의 상성을 완전히 압도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끼에에에엑!

-컹! 커헝!

상황은 빠르게 변해 갔다.

지금 겨울성을 공격한 마수들은 거석산 모그론의 존재감에 의해서 억지로 등이 떠밀린 마수들이다.

그렇기에 또 다른 공포가 생겨나자, 본능적으로 마수들이 등을 돌려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꾸우! 꾸우우!

-크루루루... 크루루!

도망치는 마수들과 여전히 겨울성을 향해서 달려들던 마수들이 뒤엉켜서 마수들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안 그래도 마수들의 상황 자체가 겨울성과 기병대에 의해서 포위된 상태였는데, 저들끼리 엉기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만무.

그 이후로는 말 그대로 무자비한 학살극과 다를 바 없었다.

-마수들이 도망친다! 침착하게 진형을 유지하고 진격한다!

천음의 마법이라도 쓴 건지,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의 외침이 한참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들려왔다.

'음?'

그때, 마수들을 도륙하는 기병대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기병대의 모습이 보였다.

단지 걸치고 있는 갑옷이 다른 기병대와 다른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마수들을 돌파하는 파괴력 또한 다른 기병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단순한 기병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명료했다.

제국이 자랑하는 기병대보다 뛰어난 무력 집단이라면,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기사단.'

이윽고 멀찍이서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깃발의 문양이 살며시 드러났다.

비록 거리가 있는 탓에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문양이 그리폰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폰을 상징으로 삼고 있는 기사단이라면, 내가 알기에 하나뿐이었다.

'그리폰 기사단.'

멸망룡의 등장 이후 기존 라크나 대륙에 존재했던 무력 집단은 대부분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그 와중에 새롭게 떠오른 세 기사단이 바로 각각 유니콘, 그리폰, 크라켄을 상징으로 삼고 있는 기사단들이다.

통칭 삼신수 기사단.

지금 모습을 드러낸 그리폰 기사단은 바로 그 삼신수 기사단 중 하나였다.

'그리폰 기사단까지 왔다라....'

익명 게시판에서 듣기로, 그리폰 기사단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력한 기사단이다.

제국 측에서 그런 기사단을 제도에서 머나먼 북부까지 차출했다는 건, 황실에서도 이번 사태를 매우 무겁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익명 게시판에서 요한의 글을 본 이의 영향력이 그 정도라는 거겠지.'

대체 요한의 게시 글을 보고서 제국 측에 이 사실을 보고한 이가 누구이기에 황실이 이토록 기민하고 진중하게 대처하는가.

여기에는 여러 조건이 붙는다.

우선 제국 측에 직접적으로 이 사실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니 상당한 인맥이 있어야 할 테고, 그 말에 신뢰성이 있어야 할 테니 상당한 지위를 지닌 자일 것이다.

'어쩌면 귀족일 수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로부터 귀족 작위를 얻은 이도 적지 않았기에, 만약 그 사실을 알린 이가 제국 귀족이라면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흠....'

제국 측에 겨울성의 지원을 요청한 이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애석하게도 당장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설령 알더라도 당장은 별 쓸데없는 정보이기도 했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내가 멍하니 겨울성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보고 있을 때, 에드릭이 다가왔다.

"아뇨, 아무것도."

"그러면 슬슬 움직이지. 지원이 온 건 좋은 일이지만,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이미 전세가 기울었건만, 에드릭은 처음 펼쳤던 작전을 중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좀 쉬면 안 됩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자네가 세운 작전이 너무 훌륭하더군, 그냥 썩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그냥 해 본 소리인데요."

"하하, 농담도."

가볍게 말했지만, 사실 지금 내 상황에서 정말로 작전을 이행하는 건 곤란했다.

제국으로부터 지원이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당당히 총질을 해 대는 건 여러모로 꽤 리스크 있는 행위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제국에서 온 지원군에 플레이어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기병대 중에서 눈에 띄는 몇몇은 플레이어로 강하게 의심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없을 거라 판단하는 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겠지.'

아니, 저 정도 규모의 기병대라면 플레이어가 무조건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작전 거절의 명분은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에게는 늘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으니.

"정말로 안 됩니다."

"어째서인가?"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마법을 못 쓸 것 같습니다. 임무 속행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아, 이런. 그런가."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건가?"

"더 이상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으음, 미안하네. 자네가 워낙 뛰어난 탓에 가끔 자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게 된단 말이지."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큰 대가 없이 마법을 사용해 온 모습을 보여 왔기에, 갑작스레 이런 모습을 보인다 한들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평범하게 생각하면 진작 마법의 대가로 인해서 골골대고 있어야 정상이었으니.

"다른 대원들한테 말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요."

"음, 알겠네. 주의하지."

에드릭이 그렇게 말하고는 특무대원들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으실 겁니까?"

"응? 뭘 말인가?"

"아니... 왠지 혼자라도 임무를 속행하겠다고 할 줄 알아서요."

"하하,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 무모하지는 않네. 무엇보다도 지금은 자네들을 지키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이 양반, 사실 그렇게 말하면서 은연중에 슬쩍 쉬고 싶었던 것 아닐까?

물론 그 생각은 생각으로 그쳤지만 의심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뭐... 아무렴 어때.'

에드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였으니.

"...."

나는 여전히 설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계속해서.

* * *

사방에서 마수들의 비명과 괴성이 울려 퍼진다.

길고 길었던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

이제 겨울성 인근에 남아 있는 마수들은 크게 두 종류였다.

이미 사체가 된 마수와.

곧 사체가 될 예정인 마수.

제국의 기병대가 한차례 마수들을 몰아낸 뒤, 본격적으로 겨울성이 합세해서 대반격이 시작됐다.

-카아아악!

-진격하라! 몰아붙여!

앞에는 겨울성.

뒤에는 기병대.

사방에서 퍼부어지는 공격 속에서 그럴듯한 진형조차 갖추지 못한 마수 군단이 할 수 있는 건 발악을 하거나,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만약 마경의 왕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거석산 모그론은 이미 알비노의 마법에 의해서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간 뒤였다.

물론 일단 잠에서 깨어나 버렸으니 여전히 겨울성의 위협으로 남아 있기는 하겠으나, 일단 지금은 당장의 위기를 넘겼음에 기뻐해야 할 때였다.

"도착했군. 다들 고생했네."

그렇게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고, 우리는 마침내 지친 몸을 이끌고서 겨울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으... 얼마 만의 집인지."

"그러게나 말이다."

얼마 전 같았으면 겨울성을 집으로 여기는 자신의 모습에 몸서리를 쳤을 콘란과 알비노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막사에 도착하기 무섭게 말 그대로 뻗었다.

"...먼저 잘게요."

알리시아 또한 얼마 버티지 못하고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만큼 강행군이었고, 쉽지 않은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사이, 나는 나자빠지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른 채로 익명 게시판을 켰다.

요한이 남겼던 게시 글에 어떤 정보가 있나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

지금 북부 마경에서 대규모 웨이브 발생했습니다. 조심하세요.

──────────────

──────────────

제목 그대로입니다.

북부 지대에 있는 마경에서 대규모 웨이브가 발생했고, 그대로 겨울성을 향해서 진군하고 있습니다.

만약 겨울성이 함락될 시, 그 피해가 그대로 다른 곳으로 번질 가능성이 큽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

-익명12 : ?? 미친, 웨이브 일어남?

-개꿀딱 : 초비상!! 빨리 튀어야 할듯 ㅌㅌ

-기사단장임 : 허... 일단 확인. 귀중한 정보 감사요.

└익명55 : 캬 존멋.

└사이버렉카9 : 포스 봐라 ㅋㅋ

└김박사 : 진짜 멋있긴 하네.

-지하 : 북부면 멀어서 여기는 괜찮겠네.

나는 요한의 게시 글에 달려 있는 댓글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는 걸 느꼈다.

바로 기사단장임이 작성한 댓글이었다.

'음.'

제국 측에 마경의 왕에 대한 소식을 전한 게 기사단장임이었던 건가?

'확실히, 가능해.'

평소에 기사단장임이 은연중에 흘리던 신분이나 지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앞서서 말했듯이, 제국 측에 요한의 정보를 전달하려면 상당한 지위와 신용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제국 측에서 지원이 시작된 시기를 보면, 제국 내에서 실제로 상당한 권한까지도 지닌 자일 가능성이 크다.

지위, 신뢰, 권한.

'무엇보다도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을 생각한다면....'

왜일까.

지금 그리폰 기사단이 떠오르는 건.

플레이어는 평균적으로 이 세계의 원주민들보다 더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고, 당연히 익명 게시판 유저 중 네임드로 꼽히는 기사단장임이라면 그리폰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꽤 귀찮아질 수도 있겠어.'

부디 이 불길함이 그저 기우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불길함이라는 예감은 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다.

아마 인간이라는 동물이 기나긴 세월을 살아남으면서 생긴 강력한 생존 본능의 일종이 아닐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그 불길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겨울성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고, 간신히 평화를 맞이하려던 때.

이변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쿵!

거친 소리와 함께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기색의 에드릭이 막사 내로 들이닥쳤다.

"벨."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닐세. 자네를 찾는 사람이 있네."

"저를요? 누가요?"

그리고, 이윽고 들려온 에드릭의 말에 나는 설마 했던 추측이 단지 추측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폰 기사단일세."

102화 기사단 (3)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우연이 겹쳐서인지는 몰라도 그리폰 기사단이 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리폰 기사단의 단장이 기사단장임이라는 의혹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사단장임이 갑작스레 나를 콕 집어서 찾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설마 나에 대해서 알아차렸나? 하지만 어떻게?'

가장 떠오르는 건 역시나 겨울성에 퍼져 있는 우레의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었다.

실제로 예전에 익명999의 전례가 있듯이, 겨울성에 퍼져 있는 우레의 마법사에 대한 소문은 우레의 마법사를 플레이어라 의심하기에 충분한 근거였다.

'망할 대장 같으니라고.'

물론 에드릭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나에 대한 이야기가 겨울성에 알음알음 퍼졌겠지만, 그래도 시기는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에드릭에 대한 원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어쨌거나 그건 그거고....'

일단은 나를 찾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설령 나를 플레이어라고 판단했다고 한들, 그게 나를 찾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리폰 기사단에서 왜 저를 찾는 겁니까?"

"아, 내가 설명이 부족했군. 이번에 마경에 대해서 조사를 나갔던 인원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네."

아무래도 이번에 겨울성 측에 마경의 왕 출현 소식을 알린 게 나였다 보니, 그에 대해서 조사할 게 있다는 모양.

뭐, 진짜 의도는 직접 가 봐야 알 수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 바로 가면 됩니까?"

"그렇다네. 그리핀 기사단은 지금 아마 본성 안에서 머물고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과연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사단답게 겨울성 내에서도 극빈으로 대우받고 있었는지, 그리폰 기사단은 무려 본성 안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전에 겨울성을 방문했었던 페가수스 상단 역시도 귀빈의 대우를 받았음에도 별도의 캠프를 설치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폰 기사단이 받는 대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뭐, 페가수스 상단 같은 경우에는 장사를 위해서 캠프를 꾸린 거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 또한 본성에 직접 가 본 건 몇 번 되지 않았을 정도로 겨울성 내에서 본성은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본성에는 성주인 변경백이 직접 기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겨울성의 심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본성에 다다르자, 본성 경비병이 나를 보고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우레의 마법사시군요. 본성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리폰 기사단에서 저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조사할 게 있다더니 그거였나 보군요. 들어가십시오. 그리폰 기사단은 현재 2층에 머물고 있습니다."

겨울성에 퍼진 명성 덕분인지 출입 자체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쩐지 에드릭이 별도의 출입장이나 허가서 같은 걸 주지 않기에 뭔가 싶었는데, 애초에 출입이 가능한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무려 성주가 머무는 곳 출입이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건가 싶긴 했지만, 애초에 본성까지 오려면 겨울성 내에 있는 무수한 외성들을 넘어와야 했기에 오히려 보안이 허술해진 듯했다.

외적이 오지 못할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

본성 2층에 올라서 길게 늘어선 복도를 지나자, 기사로 보이는 사내가 나를 가로막았다.

얼핏 풍기는 분위기만 보아도 최소 5레벨 이상의 강자.

그리폰 기사단원이 분명했다.

"거기 병사,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나? 현재 이곳은 그리폰 기사단이 머무는 곳이다. 길을 잘못 찾았다면 돌아가도록."

제대로 온 것 맞아, 인마.

"제4 특무대 소속 벨 블랙우드라고 합니다. 그리폰 기사단에서 저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제4 특무대? 아아, 그거였군. 이쪽으로 따라와라."

기사를 따라서 복도 끝에 다다르자, 굳게 닫힌 문 하나가 나왔다.

겨울성의 귀빈답게 숙소뿐만 아니라 별도의 집무실 또한 마련해 준 듯했다.

똑똑-

"단장님, 찾으셨던 특무대 병사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와요."

그렇게 문을 열고서 들어서자, 예상치 못했던 풍경에 나는 조금이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창가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비치는 백금발의 웨이브 머리.

수려하게 놓여 있는 이목구비 속에서 어딘가 피곤함이 느껴지는 표정.

정복에 새겨진 그리폰 문양.

그 모든 정보가 말하는 바는 명료했다.

'여자?'

그리폰 기사단의 단장이 여자인 게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내심 그리폰 기사단장을 기사단장임으로 의심하고 있던 나로서는 굉장히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익명 게시판 내에서 기사단장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다면 기사단장임이 여자일 거라는 생각은 못 할 테니까.

애초에 게시판 유저들이 기사단장임을 부르는 호칭부터가 형님이 아니었던가.

물론 아직 그리폰 기사단장이 기사단장임이라고 확인된 건 아니었기에 일단은 대화를 나눠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폰 기사단장이 나를 부른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그 이후에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제4 특무대 소속 벨 블랙우드입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여기 앉아요.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괜히 부담 가지지는 말고요."

그리폰 기사단장이 살피고 있던 서류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율리아나예요. 그리폰 기사단에서 단장직을 맡고 있어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마경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시간 괜찮죠?"

"예. 괜찮습니다. 제가 아는 거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기사단이었다면 차라도 대접했겠지만, 아쉽게도 저희도 객의 신분인 터라. 이해해 주세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폰 기사단장, 율리아나.

이 여자가 기사단장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부터의 대화에서는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내가 플레이어라는 단서를 함부로 노출했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으니.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들킨다고 해서 꼭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았다.

"이번에 마경으로 파견을 나가셨다고 들었어요."

"예 뭐,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휴가를 내서 마경에 있는 임시 창고로 향한 거지만, 묻지 않은 사실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겨울성 병사가 휴가까지 내서 홀로 마경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이상했으니까.

그 이상함은 내가 플레이어라는 의혹을 한층 더해 줄 테고 말이다.

"마경의 왕이 깨어난 과정에 대해서 알고 계시다고 했는데, 정확히 그 과정이 어떻게 된 거죠?"

그에 대해서는 이미 에드릭에게도 말했던 바가 있었으니, 굳이 감출 필요 없었다.

아마 율리아나가 나에게 그 사실을 묻는 것 또한 정보의 교차 검증 때문일 터.

"마경을 헤매던 도중 우연히 잠들어 있는 마경의 왕을 발견했습니다. 조심하면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경의 왕을 깨웠습니다."

율리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의도적으로, 말인가요?"

"예."

"아무래도 그 부분은 자세히 들어야 할 것 같네요. 혹시 그자가 누구인지 단서 같은 게 있을까요?"

여기부터는 내가 에드릭에게 전달했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면 될 뿐이었다.

"얼굴이나 모습을 전체적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음의 마법을 사용하더군요."

"천음의 마법사라. 그리고요?"

"마경의 왕을 깨울 때 악기를 사용했습니다. 아마 천음의 마법을 증폭시키는 일종의 매개체로 활용한 게 아닐까 싶더군요."

율리아나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악기로, 깨웠다고요?"

"예. 맞습니다."

그리고 그 반응으로 나는 적어도 율리아나가 황혼 악단에 대해서 알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악기라는 단어에 저렇게 격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여전히 율리아나가 기사단장임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플레이어일 가능성은 매우 컸다.

그렇게 내가 율리아나에 대해서 살피고 있을 때, 율리아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에 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귀하가 보셨던 이는 황혼 악단의 일원이 아닐까 싶군요."

설마하니 율리아나가 직접 황혼 악단의 이름을 꺼낼 줄은 몰랐다.

아마 나를 시험하려거나, 혹은 다른 의도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최대한 주의했다.

어설픈 거짓을 섞지 않고, 오히려 진실 속에 거짓을 감추는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사실 저희 특무대에서도 이번 사건의 배후에 황혼 악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는 중이었습니다."

"어? 혹시 황혼 악단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신가요?"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희 특무대장에게 몇 가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최근 겨울성을 노리는 괴뢰 집단이 있다고."

"그렇군요...."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어딘가 조금 묘해졌다.

"조사에 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만 돌아가셔도 좋아요. 아, 혹시 더 물을 게 생기면 그때 다시 호출해도 괜찮겠죠?"

율리아나는 묻듯이 말했지만, 당연히 거부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입니다."

"조심히 가세요."

다행히도 우려했던 것처럼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그래, 아직까지는.

'일단 지켜봐야겠지.'

만약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나 또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테니.

* * *

손님이 떠난 뒤, 임시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이에르가 집무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오는 로이에르의 뺀질거리는 모습을 보며 율리아나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어올 때 노크, 몰라?"

"문 열려 있던데?"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예의를 지키라는 소리야. 내가 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해야 해?"

"까다롭기는."

"넌 다음 달 감봉이야."

징계 사유는 하극상이고.

"아니 잠깐, 고작 이걸로 감봉이라니!"

"두 달."

"죄송합니다, 단장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성의를 봐서 한 달로 줄여 줄게."

"아니, 그건!"

"두 달?"

"...."

잠깐의 시답잖은 대화가 지나가고, 로이에르가 말했다.

"그래서, 마경의 왕이 깨어난 게 정말로 황혼 악단의 짓이 맞아?"

율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악기를 다루는 미친놈들이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까."

"쯧. 귀찮게 됐네.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데 황혼 악단 같은 것들까지...."

로이에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본래 황혼 악단은 극소수로 활동하던 집단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서 급속도로 그 세력과 영향력을 불려 가고 있었다.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본래 황혼 악단의 기조가 소수 정예로 은밀히 움직이면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어중이떠중이까지 전부 단원으로 받아들여서 세력을 늘리고 있다.

"하던 대로 이상한 짓이나 할 것이지, 제국은 또 왜 노리는 건지...."

어쨌거나 그리폰 기사단이 처리해야 할 일이 그뿐만은 아니었기에 율리아나는 곧장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헤카르에서 있었던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돼 가?"

제국 남부 지방에 있는 헤카르의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던 사건.

처음에는 마수의 습격을 받았나 했는데, 그 어떤 전투의 흔적이나 시체도 발견되지 않은 괴상한 사건이었기에 이 사건은 그리폰 기사단이 직접 맡게 되었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그런데 인근에 있었던 목격자의 말로는 한밤중에 마을에서 악기 소리가 들렸다고 하더군."

"악기 소리?"

"어, 최근 황혼 악단 놈들의 움직임만 봐도 그렇고, 굉장히 구린 냄새가 나지 않아? 무엇보다도 단장도 잘 알잖아?"

로이에르가 덧붙였다.

"계약과 마법의 대가로 인간만큼 싸게 먹히는 게 없다는 걸."

103화 기사단 (4)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굳었다.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마. 알겠어?"

"알았다고. 내가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인간으로 보여?"

"응."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율리아나의 모습에 로이에르는 잠시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기사단에 와서...."

"시끄럽고, 일단 그 건에 대해서는 조사가 더 되면 다시 알려 줘."

"예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마님."

"비꼬지 말고."

"대체 어쩌라는 건데."

로이에르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일단 황혼 악단에 대한 건은 계속 조사하는 것으로 하고...."

황혼 악단인지 모를 녀석들이 인신 공양을 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계약과 마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현재 그리폰 기사단이 처리해야 할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협도 위험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그리폰 기사단이 해야 할 건 명확히 드러난 위협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연합 쪽은 어때?"

"베른하르크 사건 이후로 좀 잠잠해.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로이에르의 말에 율리아나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베른하르크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둘째 치고, 베른하르크가 이미 동부 연합의 손아귀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은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뇌제가 나섰을 때는 좀 놀라긴 했지. 하필 그때 카인이 그곳에 있었다니... 정말일까?"

로이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정황만 보면 용잡이가 뇌제를 이용해서 장난을 친 것 같던데. 만약 정말로 카인이 있었다면 뇌제가 나설 필요도 없지 않았겠어?"

"확실히 그렇긴 한데... 카인이 마법의 대가로 폐인이 됐다는 소문도 있잖아? 그래서 못 나섰을 수도 있지. 아니면 그냥 귀찮았다거나."

"이거 왜 이래. 단장도 알잖아, 카인이 어떤 놈인지. 그놈이 마법 좀 남발했다고 대가를 감당 못 할 것 같아?"

공정의 세계에 있어서 카인의 이름은 마치 어떤 괴담처럼 퍼져 있었기에 자칫 헛소문 취급을 받지만, 카인을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던 이들은 그 괴담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님을 안다.

아니, 오히려 괴담이 카인이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었다.

카인은 모든 마법을 알고 있다.

카인은 모든 마법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또한 일부는 직접 실행했다.

카인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단지 소문만이 아님을 알고 있는 로이에르는 카인이 대가를 감당하지 못해서 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애초에 카인이 없었다는 쪽 가설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인이 이 세계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카인 같은 거물이 정말로 이 세계에 있었다면 이 세상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

율리아나 역시도 동의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는 용잡이가 뇌제를 베른하르크에 부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 내 느낌인데, 용잡이라는 작자 꽤 냄새가 구리거든. 분명히 고레벨 같은데 도통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복마전 쪽 인물일 수도 있지."

"일단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복마전 측 인물이라면 일반적인 유저들이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공정의 세계에서 복마전은 공공의 적과도 같은 세력이었고, 당연히 몇몇 경우를 제외한다면 소속 구성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 제국과 징벌 교단 그리고 온갖 대형 길드들에게 말 그대로 사냥당할 테니까.

"연합 쪽은 이제 됐고...."

로이에르가 말했다.

"어떤 것 같아, 아까 왔던 겨울성 병사. 이야기 좀 나누어 봤으니 뭐 좀 알아냈을 것 아니야."

"글쎄. 모르겠네, 아직은."

"그래? 내가 보기에는 좀 의심스러운데."

율리아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은 그럴 가능성이 꽤 높은 게 사실이겠지. 겨울성에 죄인 신분으로 끌려와서 저렇게 단기간에 명성을 쌓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으니까. 거기다가... 들리는 소문 중 몇 가지는 심상치 않기도 하고. 아, 마경에 혼자 다녀왔다고도 하던가."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라. 단장이 썩 좋아하는 추론 방식은 아니네?"

율리아나의 시선이 날카롭게 로이에르를 노려보았으나, 로이에르는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피했다.

늘 느끼지만 사람의 신경을 긁는 데 묘한 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면 내가 직접 확인해 볼까? 살짝 겁주면 바로 뭐라도 토해 내지 않겠어?"

"됐어. 이곳이 어디인지 잊었어? 괜한 소란 피우지 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단장은 가끔 보면 플레이어가 아니라 NPC 같다니까. 여기서 소란 좀 피우면 어떻다는 건지...."

"겨울성과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야. 쓸데없이 움직이면 괜히 놈들의 시선을 끌 수도 있어."

"놈들? 아아. 그렇지."

로이에르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그러면 더욱더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야? 만약 벨 블랙우드가 놈들과 같은 편이면 어떻게 해?"

"통찰안에도 마인 특유의 광기나 다른 큰 증상은 보이지 않았어."

마인(魔人).

한때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마에 잠식당한 채로 인간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되어 버린 존재.

동부 연합과 더불어서 현재 이 세계의 평화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그거야 모르지. 날이 갈수록 놈들의 의태가 교묘해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네 통찰안이라고 해도 완전한 건 아니잖아?"

"동의해. 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신중해야 하는 거야, 성질 급한 단원님아."

"그래서 어쩌자고?"

"지켜봐야지. 만약 마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날 거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거나, 아니면 파편에 광적으로 집착하겠지."

"지켜본다고? 언제까지? 우리는 곧 이곳을 떠나야 해. 알잖아?"

"떠나기 전까지는 충분할 거야."

"흠... 뭐, 단장이 그렇다면야."

괜히 여기에서 더 말꼬리를 붙잡아 봤자 감봉만 당할 게 뻔했기에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그 병사가 마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어? 당연히 영입해야지."

율리아나가 덧붙였다.

"우리, 벨레로폰에."

* * *

설원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어야 할 평화로운 장소지만, 적어도 오늘과 오늘이었던 날들 동안은 그 평화가 깨어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들이 마치 세상의 슬픔을 달래려는 듯 부드럽게 내려앉지만, 그 아래 숨겨진 광경은 참혹하기만 했다.

이제 이곳은 마수와 병사들의 사체로 가득 찬 지옥이 되어 버렸으니까.

눈 위에 펼쳐진 마수의 사체들은 그 크기와 형태가 다양했다.

사체가 짓이겨지고 찢어진 탓에 정확히 마수가 어떤 마수였는지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어떤 마수는 도저히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고, 또 다른 것은 평범한 짐승을 닮기도 했다.

그것들의 피는 눈을 녹이며 붉은색으로 얼룩져, 설원의 색깔을 본래의 것이 아닌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설원을 가득 메운 사체 중에는 비단 마수의 사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수성전이라 할지라도, 성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비행형 마수에 의해서 납치당한 병사들과 지원군 측 기병대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진 모습으로, 여전히 무기를 꽉 쥔 채로 얼어붙어 있다.

방패와 갑옷은 부서지고 찌그러졌으며, 뭉개진 얼굴 너머 고통과 저항의 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으으... 추워. 한동안 좀 따뜻해졌나 했더니 이 지랄맞은 날씨는 여전하네."

"그 덩치로 엄살 부리기는."

"덩치가 크니까 더 추운 거야. 찬 바람에 노출되는 면적이 크잖아."

마수 군단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울성이 완전한 평화를 찾은 건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본다면 전쟁보다 더욱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원에 널려 있는 마수들의 사체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저대로 내버려 둬 봐야 북부의 기후 탓에 제대로 썩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마수의 사체는 겨울성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연히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챙겨서 손질을 해 둬야 다음에 있을 정기 교역 때 필요한 보급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빨리빨리들 움직여!"

대대적인 마수 사체 수거 및 손질 작업이 시작됐다.

겨울성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일반 농민들까지 동원이 될 정도로 대규모 작업이었다.

일종의 인근 환경 미화 겸 경제 활동이라고 해야 할까?

병사들이 마수 사체를 손질하고 나르는 과정이 한창이었다.

"이것부터 옮겨서 손질해!"

"으으, 허리 나가겠네! 거기 힘 좀 더 줘 봐!"

"이미 젖 먹던 힘까지 쓰고 있어!"

"너 고아잖아."

"이 새끼가?"

어쨌거나 그렇게 대대적으로 겨울성의 모든 인원이 동원되는 작업이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차출되지 않는 제4 특무대 역시도 동원되었다.

역시 무슨 일만 있다 하면 군인부터 부려 먹는 건 여기나 저기나 똑같은 듯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엄청나군. 이 정도면 겨울성이 끝장날 뻔한 것 아니야?"

콘란이 질렸다는 듯이 설원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마경의 왕이 멈추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됐겠지."

은근슬쩍 자신의 공을 과시하는 알비노의 모습에 콘란이 껄껄 웃었다.

"안 그래도 대장이 그에 대해서 충분한 포상이 있을 거라고 했지 않냐. 기다리자고."

"흥, 누가 포상 따위를 기다린다고 했나?"

"필요 없으면 나 주고."

"준다는 걸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여전히 한결같은 놈들이었다.

"그나저나 대장 그 양반은 꼭 이런 걸 할 때만 귀신같이 빠진단 말이지?"

"동감이다. 이럴 때일수록 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야 하는 건데."

"흰머리, 웬일로 너랑 내가 말이 통하는군."

"너랑 말이 통하는 게 조금 유감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부정하지 않지."

"삐딱하기는."

그 말마따나 에드릭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이번 소거 작전에서 쏙 빠졌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한테 임시 분대장이라는 감투까지 씌워 놓고 말이다.

나라면 잘해 낼 수 있을 거라나 뭐라나.

'뭐, 나로서는 잘됐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특무대의 머저리 놈들을 뒤로한 채로 마수 사체 사이를 누비면서 눈밭을 계속해서 걸었다.

성실히 마수 사체 손질 작업에 참여하기 위함은 아니었고, 찾는 게 있어서였다.

'분명히 한두 마리쯤은 있을 법도한데... 도통 보이질 않는단 말이지.'

내가 찾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변종의 사체.

이 정도 규모의 군세라면 필시 변종이 적지 않게 끼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변종으로 보이는 사체는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워낙 훼손이 심한 터라 내가 도통 변종의 사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쯧."

간만에 좀 날로 먹을 수 있나 싶었는데, 역시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뭐 해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알리시아의 물음에 나는 대충 둘러댔다.

"어디 비싼 놈이 있나 해서."

"그런 거면 마침 잘됐네요. 꽤 특이한 마수를 발견했어요."

"특이한 마수?"

"네, 이쪽으로."

알리시아를 따라서 몇 분 정도 사체들로 이루어진 붉은 길을 가다 보니, 알리시아의 말마따나 꽤 생김새가 특이한 마수의 사체가 나왔다.

"이거라면 꽤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저는 잘 몰라서."

"확실히 그렇긴 하네."

알리시아가 찾은 개체는 7레벨 마수인 가르도롬.

거대 늑대와 비슷한 외형에 목에 기괴한 촉수를 두르고 있는 마수로, 애석하게도 본래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거지, 변종은 아니었다.

'아쉽지만 이거라도 챙겨야 하나.'

원칙적으로 마수의 사체를 손질한 부속물은 전부 겨울성의 소유지만, 일부를 슬쩍 챙기는 것 정도는 눈감아 주는 편이다.

그래야 다음에 있을 정기 교역 때 병사들이나 영지민들이 상단과 거래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겨울성 내의 경제를 순환시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랄까.

'음?'

가르도롬의 사체를 손질하기 위해서 다가섰는데, 그것의 사체 밑에 무언가 깔려 있었다.

'사체?'

나로서도 처음 보는 마수의 사체.

그리고 내가 모르는 마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곳에 있는 마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것 참....'

찾았다.

변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