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스킬을 사용한 시점에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니까, 그 이유를 깨닫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 그동안 내 머릿속에는 머리가 흐려지게 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김현석 중위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정신이 네 요리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
"...."
멸망의 날 이후.
내가 해 왔던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바로 김 중위와 관련된 일이었다.
과거.
김 중위를 그대로 방치했다간 우리의 생존에 큰 지장이 생길 거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김 중위를 몰아내고 다른 지휘관을 세우고자 했으며.
그 수단으로는... 살인조차 거론되었었다.
하지만.
나는 살인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대신 다른 방법을 제시했었지.
'요리를 통해 김 중위의 정신을 내 지배하에 두는 것.'
그는 나에 의해 강제로 구금당하고.
내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내 요리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으로 개조당해 버렸다.
당시에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힘에 대한 이해력이 충분하지 못한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
명백하게 한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던 김 중위는.
내 요리가 없으면 제대로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중독자나 다름없는 꼴로 추락하고 말았다.
'나는 그런 김 중위를 내 요리를 통해 마음대로 이용해 먹었고.'
대상의 존엄을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
심지어는.
'다른 범죄자들과는 달라.'
대놓고 우리를 적대했던 범죄자들과 달리.
김 중위는 장기적으로 우리 부대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인이기는 했으나.
어떤 죄를 저지른 것조차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저 능력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짓밟히고, 다른 사람의 명령에만 굴복해야 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
"제가 미우셨겠군요."
만약 내가 이런 짓을 당했다면.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저라면... 일단 식칼부터 꺼내 쥔 다음, 바로 배때지를 찔러 버렸을 겁니다."
"하핫."
어떤 보복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끔찍한 범죄.
김 중위가 그런 보복을 원한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선 김 중위를 제거한 뒤.
내가 생각해 둔 다른 방법으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겠지만.
"정말 미안한 얘기입니다만, 중위님."
"그래."
"저는 지금... 중위님을 아군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하나였다.
[미뢰강화]를 통해.
나는 전보다 많은 것들을 맛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맛에 비추어 보면.
"글쎄다."
김 중위에게서.
분노와 같은 매운맛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밉냐고? 그런 감정이 아예 없었냐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로 화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야."
김 중위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그렇게 화났으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을 게 아니라, 처음 스킬을 쓰자마자 너부터 찌르고 봤을걸?"
"아."
확실히.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반복들....'
저 장영웅에 의해 이루어진 반복.
그 반복 속에서, 김 중위가 저 스킬을 사용한 적은 꽤나 많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마다.
김 중위는 내 요리로 인한 정신 지배에서 풀려나고.
자신이 요리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내게 협조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가 여전히 내 요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어째서... 입니까?"
"이유라."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
"영준아. 네가 내게 그런 짓을 한 이유는, 결국 당시의 내가 부대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였겠지."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뭐,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해. 하지만 내 원래 능력을 생각하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김 중위를 감금하고 지배한 것은.
그가 우리의 장으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자리를 빼앗은 셈이다.
"그 짓을 한 게 영준이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많이 화났을 거다."
"...."
"하지만 말이야."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주먹을 쥐며 말했다.
"아까 너도 놀랐지? 이 스킬. [기대부응]은 말도 안 되는 힘이다."
"그런 것 같더군요."
"이 스킬을 사용한 나는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되어 버려. 물론 마력의 소모가 너무 크다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는 그 주먹을 몇 번 접었다 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스킬의 효과는 본래라면 이 정도로 강력한 게 아니었을 거야."
"예?"
"결국은 남들이 생각하는 본인의 수준으로 능력이 올라가는 힘에 불과하니까."
그 말대로.
[기대 부응]은 남들이 평가하는 수준에 맞추어 능력이 올라가는 힘.
반대로 말하자면.
"남들이 생각하는 본인의 수준과 실제 본인의 수준 차이가 커야만 의미가 있는 스킬이지."
"그건, 그렇겠죠."
"그마저도 실제 본인보다 남들이 생각하는 본인의 수준이 압도적으로 높은 게 아니고서야, 이런 마력을 감당하면서 쓸 힘은 아닐 거다. 아마 원래대로라면 터무니없는 쓰레기 스킬이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스킬은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로써 발휘되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 건...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강철군단]이라는 단체의 장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일 거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군단이 보여 준 업적과 그 업적을 이루어 낸 군단의 수장으로서 이 힘을 얻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지."
그는 그 주먹을 꽉 쥐더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의 내가 발휘하는 힘은. 진짜 [강철 군단장]이라면 응당 발휘할 수 있을 힘을 발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그리고 진짜 [강철 군단장]은 따로 있지."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그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말이다."
"...."
"사람들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게 당연할 거라고 평가될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쌓아 올린 당사자. 진짜 [강철 군단장]은 바로 너다, 신영준 병장."
그제서야.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발휘할 수 있는 이 모든 능력은 네가 이룬 업적에서부터 비롯된 거다. 지금 내 능력조차, 네가 이루어 낸 업적의 그림자에 불과하지."
"그건."
"내가 이 능력을 사용하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뭔 줄 아니?"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군단은 큰 단체고.
김 중위는 그 단체의 대외적인 수장이니.
그만큼의 능력자로 기대받고 있을 것이다... 정도만 생각했다만.
"소름이 끼쳤다."
김 중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이 정도의 힘이 남들이 생각하는 군단의 장에 어울리는 힘이라면, 남들에게 이 정도로 대단하게 여겨지는 진짜 군단장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어야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에 소름이 돋더군."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이 대단하기에.
그만큼.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어."
그 힘의 근원이 되는 존재에게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내 정신을 건드린 일은 개인적으로는 유감스럽긴 하지만. 그 덕분에 군단은 이렇게 살아남아 커질 수 있었지."
"...."
"만약 내가 지휘관으로서 행세했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거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정도의 업적을 이룬 군단장 덕분인 셈이고. 그러니."
툭 하고.
내 어깨를 건드리는 김 중위.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밉다든가, 화난다든가 그런 게 아니다. 영준아."
"김 중위님...."
"경외심과 존중 그리고."
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기며 말했다.
"고마움이지."
"...."
내가 말문을 잃은 채 그 얼굴을 바라보자.
김 중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는 나름 눈치가 있는 편이라서 말이야. 네가 평소에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도 대충 예상이 가."
"그건."
"하지만. 확실히 말해 두마. 너는 이 일로 죄책감을 가지거나, 후회할 필요는 없어."
그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된 지휘관.
그가 확신을 가진 채 입을 열었다.
"너는 올바른 선택을 한 거다."
"...그래도."
"그 일을 당한 당사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반박은 안 받아."
그 말에.
나는 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대모]가 보여 준 수많은 후회들.
그중에는 멸망 전의 사건들도 많이 있었으나.
'멸망 후의 일들이 훨씬 더 많았지.'
이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저때 저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과 후회.
"내 말을 믿어라, 영준아. 지금까지의 너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잘 해내 왔다."
나는 끝끝내 그 후회를 털어 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저 대모의 공격조차 편법으로밖에 탈출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스킬을 발동한 상태의 내가 그대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이 정도의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나는 줄곧 후회해 왔던 그 선택들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노라고.
"너야말로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
그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만 생각했던 당사자가.
저리 말해 준 것이다.
'아.'
나는 [대모]가 내게 보여 준 후회들.
그 후회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응어리들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뭘."
그런데.
"게다가...."
"게다가?"
"너는 네 스킬을 통해 만든 요리로 내 정신을 조종하려 한 것 같지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김 중위는 쑥스럽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딴 스킬 없어도 난 원래 네 요리를 좋아했어."
"...."
그 말에.
나는 과거 군부대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맛이 없는 메뉴가 나올 때면.
김 중위는 꼭 나한테 연락하곤 했었다.
맛없는 명태 순살 튀김 같은 거 말고, 자기한테 따로 파스타 좀 해 주면 안 되냐고.
참으로 귀찮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폐급 간부나 할 법한 일이었지만.
"그 스킬의 힘이 아니었어도 말이지. 네 요리를 먹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거든."
"...하핫."
그건.
진심으로 내 요리를 맛있다고 생각했기에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마 앞으로도 나한테 네 요리의 정신 간섭은 먹히지 않을 거다. 하지만... 알지?"
"예, 예. 자주 요리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김 중위님도 아시죠?"
"그래. 네 요리를 대접받으려면...."
거기까지 말한 김 중위는.
완성된 요리 그릇을 들고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나도 내 밥값을 해야겠지."
바닥에 쓰러진 채, 저 대모의 환상에 갇혀 있는 병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441화 조력
쓰러져 있는 병사들.
사실.
저 병사들을 나 혼자 깨우려고 한다면, 그건 무척이나 쉽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특별소스]는 감정을 건드리는 힘.'
무척이나 강력한 힘이긴 하지만.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어디까지나 감정을 건드릴 뿐이야. 행동을 강제하거나 할 힘은 아니지.'
깊은 잠에 빠진 이들.
저렇게 잠들어 있는 상태를 깨울 수 있을 만한 감정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김 중위처럼 스스로 후회를 털어 버리는 방향이어야겠지만.
요리로 인해 얻어진 감정만으로 마음을 정리하기 힘들다.
본래라면.
어떻게든 그런 방향의 요리를 먹인 뒤, 제발 눈 좀 떠 달라고 비는 게 한계였겠지만.
"준비하십시오. 김 중위님."
지금은 좀 달랐다.
"...충성."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간다.'
나는 완성된 요리들 위에 손을 올린 뒤.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오병이어]
그러자.
몸 안의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전력을 다해서 만든 요리.
그걸 백 개가 넘게 복사하는 행위.
당연히 소비되는 마력량 역시 상당했으나.
[Lv.40 전쟁 요리사]
[최고급 요리 숙련]
레벨이 오르고.
요리사로서의 수준 역시 전과는 격이 다른 수준이 되어 버린 나다.
파아아악!
병사들의 몸 위에 완성된 요리들이 올려지고 있음에도.
무리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
그리고.
그 요리를 바라본 김 중위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
"저건, 뭐랄까."
내가 만든 요리는... 사실 꽤나 친숙한 것이었다.
요리 실력이 어느 정도 늘어난 뒤에는 굳이 할 일이 없었던 요리.
하지만.
내게 있어서, 가장 처음으로 배웠던 요리이기도 하며.
지금 같은 때에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효과를 자랑할 식단.
"짬밥 같아 보이는군."
"맞습니다."
짬밥.
그러니까, 군대식 식단이었다.
'저 녀석들은 대모가 만든 환상에 잠겨 있다.'
그렇다면.
그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저 환상에서 벗어날 결심을 해야 한다 했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저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붙어야만 했다.
첫째는, 자신들이 지금 환상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
두 번째는, 그 달콤하기 그지없는 환상에서 빠져나갈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할 것.
김 중위조차 저 [기대 부응]의 효과로 말도 안 되는 철인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혼자서는 결코 저 달콤한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 어디까지나.
혼자서는 말이지만.
'모든 후회를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꿈이라.'
그렇다면.
그 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현실을 깨닫게 해 줘야지."
나는 병사들의 몸 위에 올라가 있는 요리들을 바라보며 스킬을 발동했다.
[강제 급식]
병사들의 몸 위에 놓여 있던 요리들이.
그 몸 안으로 스며든다.
'달콤하면서도 헛된 꿈에 빠진 적은....'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실, 이딴 공격이 아니어도 많았단 말이지?'
예를 들면.
처음 입대했을 때가 그랬다.
어느 정도 짬이 차서 부대에 적응하는 데 성공하기 전까지는...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더랬다.
훈련소 첫날에는 옆자리에서 훌쩍이는 동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으니까.
그래.
그나마 그런 힘든 일들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잠이 들 때였다.
꿈속에서는 군부대에서의 혹독한 일상은 잊고, 사회에서의 기억을 다시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허황되면서도 달콤한 꿈.
그리고.
그 달콤한 꿈에 빠진 이들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전 장병...!"
아침 시간이면 들려오는.
"기상!!!"
시끄럽기 그지없는.
기상나팔 소리였거든.
[영웅급 요리사의 정성이 들어간 짙은 충성심의 군대식 백반 세트]
녀석들이 방금 먹은 짬밥은.
나 역시 체험해 본 적 있는 효과가 검증된 요리.
거기에.
"빨리 안 일어나나!!!"
[기대 부응]의 효과로 더없이 강력한 지휘관이 되어 버린 남자.
김 중위의 명령이 울려 퍼진다.
그러자.
"으... 윽."
"이 맛은...."
"맛있어.... 맛있긴 한데...."
달콤한 꿈에 취해 있던 녀석들의 입가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런 종류의 스킬은 대상의 스탯이 높을수록 저항력이 강해지지만.
부대에서 가장 높은 스탯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저 두 조합을 버티지 못했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신력의 사용법을 일부나마 깨달을 수 있었을 정도였지.
'병장인 내가 이런 몸 상태로도 이렇게 개같이 일하고 있는데. 니들이 자고 있을 때냐?'
내가 그 정도였던 거다.
다른 부대원들의 경우야 뻔했다.
"으윽."
저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달콤한 꿈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 아침인가."
결국.
자신들은 군단에 소속된 채 개같이 일해야만 하는 군인이라는 것을.
"...에휴. 그럼 그렇지."
"어째 말도 안 되게 잘 풀린다고 했는데. 꿈이었구나."
잠에서 깬 지금.
깨닫고 있을 것이다.
* * *
"후우...."
정신이 아득한지 머리 붙잡고 있는 병사들.
방금 전까지 달콤한 꿈에 잠겨 있던 녀석들이다.
그 환상에서 갑자기 깨어난 셈이니.
그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함도 상상을 초월하겠지.
"혼란스러운 건 알겠는데, 정신 좀 차려 줘야겠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을 다독여 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말했다.
"저쪽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들리나?"
"이 소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병사들은 군단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들.
"전투음이군요."
"이건, 또 군대입니까?"
"그래."
방금 전까지 잠이나 자고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정신을 차린 뒤의 모습은 군단의 정예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다.
"적들이 우리를 공격하러 오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적은... 대한민국의 최전방 부대들이고."
"...저희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죠. 대충은 이해했습니다."
"당장은 어떻게든 막아 두긴 했지만. 오래 막지는 못할 거야."
그런 내 말에.
병사들은 침착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들의 무기를 주워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저희도 그쪽으로 합류하겠습니다. 최전방 부대들이라 빡세긴 하겠지만, 병장님과 함께라면."
"아니, 아니. 그쪽으로 가지는 말고."
"예?"
저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은.
멸망 전의 최전방 군대 그 자체일 것이다.
"어차피 가도 못 막아."
이곳에 있는 100여 명의 각성자가 합세한다고 한들.
절대 못 막는다.
'일단 우리도 지원군을 불러 두기는 했는데.'
그 지원군은 강원도에서 오고 있을 텐데.
저길 보면 강원도 방향에서 군대가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니.
지금 이 [대모]가 만들어 낸 이능 속에서 지원군이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할 일은 간단하다. 다들 연장 챙겨."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간단하다기보단, 아까부터 계속했던 일이기도 했다.
"하던 대로 이 도시를 파괴한다."
* * *
콰앙!
"신 병장님!"
"왜!"
"명령이니까 따르고는 있습니다만!"
내 명령에 따라.
파괴를 계속해 나가는 병사들.
"이 행동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하지만.
그 병사 중 몇몇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의미라.'
나는 그 질문에 속으로 생각했다.
저 장영웅이 몇 번이나 시간을 되감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이 서울을 파괴해 나갔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은 아니었지.'
처음 이 서울을 제대로 의심하고 조사했을 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들은 서울의 원형을 유지하는 데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병사 중 한 명이 내게 넘겼던 보고.
장영웅이 이 서울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한 것은 알겠다.
그 멸망을 최대한 이겨 내고자 노력한 것도 알겠고.
하지만.
'저들은 어째서인지, 과거의 서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멸망에서 살아남는 데는 극도로 비효율적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몇몇 전투로 인해 그 모습이 많이 파괴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다음번 반복에서는 그 모습이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렇게까지 복원하는 데에는 꽤나 큰 힘이 들 텐데도.
굳이.
'이유가 있을 거야.'
아마도.
장영웅 본인은 그걸 의식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아이가 나이를 먹고 있지 않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저 대모에 의해.
서울의 원형을 유지하는 게 비효율적이란 것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작되어 있었겠지.
그렇다면.
서울의 원형을 강제로 유지시킨 존재는 대모라는 얘기가 된다.
'지금 대모는 저 장영웅을 매개체로 이 세상에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대모가 만들어 낸 이 서울의 풍경 역시 장영웅에 의해 만들어진 거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풍경은 장영웅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결말]을 구현한 모습인 거다.'
그렇기에.
아무리 심각한 파괴가 자행되었다고 한들.
다음번 반복에서는 다시금 완벽한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완벽한 모습이 무너진다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멀쩡했던 서울의 하늘에는 괴물과 군부대의 전투 그리고 부대원들의 파괴로 인한 검은 연기와 불꽃이 가득했다.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모습.
그래서일까.
쩌저적....
'이 풍경도... 더는 유지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저 하늘에는.
언젠가 보았던 일그러짐.
마치 공간이 찢어지기라도 한 듯한... 검은 구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저 균열.'
저 균열을 처음으로 본 것은.
여의도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리고.
'여의도 위에서 저 구멍이 나타났을 때는, 장영웅이 환상에서 벗어나 이 땅에서 몇 번의 반복을 실행한 뒤였지.'
대모의 힘을 발휘하는 매개체인 장영웅이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30레벨대의 각성자다.
대모의 힘을 발휘하는 매개체로써는 완벽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반복하며 그 힘을 소진한 결과... 다음번 반복에서 오류가 생겨났던 거다.'
그 오류의 결과가.
바로 저 구멍이고.
'이곳은 대모가 만들어 낸 환상.'
현실 위에 덮어씌운.
장영웅이 떠올린 이상적인 결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오류로 인해 생겨난 저 구멍.
그 바깥에는 아마도.
'현실.'
장영웅이 꿈꾼 이상적인 결말의 풍경이 점점 무너져 내리자.
현실과 환상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해서 파괴해라!"
이미 몇 번씩 파괴를 자행하고, 그 파괴를 강제로 복구하는 과정에서.
장영웅의 힘은 많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을 때 장영웅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
이미 그 시점에서 장영웅의 힘은 한계에 가까워져 있었겠지.
"조금만 더!"
대모는 이 풍경을 계속해서 복원해 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머지않아.
이 환상을 모조리 깨부순다면.
그 바깥에 있을 현실을 향해 탈출할 수 있을 터....
-...주인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기척이 있었다.
나는 그 기척을 느끼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는 못 버티겠냐?"
-...죄송합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에는 아직은 희미하지만.
-저희의 시간은... 끝나 버렸나이다.
붉은 햇살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태양.'
병사들을 깨울 때 괜히 기상이라는 말을 한 게 아니다.
이 서울에서의 전투가 길어진 결과.
시간은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밤의 귀족은 무척이나 강력한 종족이지만.
햇빛 아래에서는 그 힘을 대부분 잃는다는 강력한 페널티가 존재했다.
"괴물들이 물러납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크윽... 갑자기 왜 물러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호재다!"
"계속해서 전진!"
대모가 만든 환상 속의 인물들.
아마도, 현실에서는 이미 사망해 버렸을 대한민국의 군인들.
"서울을 점거하고 있는 폭도들을 제압하라!"
그들이.
국가를 지킨다는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기랄.'
나는 하늘 위에 생겨난 균열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숫자의 균열들.
"얼마 안 남았는데."
이 환상을 완전히 철거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저 군인들이 우리를 덮쳐 온다면.
저 정도 숫자와 장비를 갖춘 군인들을 상대로는 우리 부대원들조차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전멸하고 말겠지.
우리의 목표는 달성하지도 못한 채.
저 의무감으로 무장한 군인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그 의무감을 이용하고 있는 대모의 휘하에 강제로 무릎 꿇려지고 말 것....
{아하, 과연.}
이라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구멍이 늘어나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흠. 흥미로운 광경이로군.}
하늘에 뚫려 있는 구멍 너머에서.
한 존재가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 * *
장영웅이 꿈꾼 이상적인 풍경을 파괴한 순간.
점점 나타나기 시작한 균열.
그리고.
{흠, 흥미로운 광경이로군.}
그 균열 너머에서 나타난.
한 마리의 괴물.
'저 녀석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 그 박쥐 괴물 녀석...."
{금세 뵙는군, 군단장 나으리. 아니, 군단장님한테는 꽤 오랜만이려나?}
저 여의도 위에 생겨났던 구멍.
그 구멍 너머에서 쏟아져 내려왔던 수많은 괴물.
{이제는 이 장소의 불길함을 눈치채신 듯하군.}
그 괴물들을 통솔했던....
징그럽게 생긴 눈깔 괴물.
{지난번 내 조언이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네.}
내가 이 공간이 대모가 만든 이계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던 역시.
저 녀석이 한 말이 힌트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본의 아니게 자네한테 민폐를 끼쳤지.}
녀석은 이 공간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더니.
이내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사과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저 하늘에 생겨난 수없이 많은 균열.
그 균열에서부터....
{조금은 도움을 주도록 하겠네.}
"뭐?"
-크뤄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수없이 많은 괴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442화 현실로.
크뤄어어어어억!!!
{대충 보니,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군. 병력이 모자란 것이겠지?}
괴성을 내지르며 쏟아져 내리는 괴물들.
너무나도 징그럽고 흉측하게 생긴, 끔찍한 융합체와 같은 괴물들이었지만.
{내 아이들이 도움이 될 거야.}
지금.
그 괴물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뭐냐 저 괴물들은...!"
"제기랄, 서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그 괴물들이 덮친 것은.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던 군인들이었다.
"아, 안돼. 오지 마...!"
-끄뤄어어억...!
저 여의도에서 싸울 때 이미 느꼈지만.
저 괴물들은 단순히 숫자만 높은 게 아니라, 전체적인 수준 또한 상당했다.
우리 부대조차 돌파는 할 수 있을지언정 전원 토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괴물들이 군부대와 격돌하자.
"끄아아아아악!!!"
쩌저적....
저 강력한 괴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말 그대로 찢어 죽이기 시작했다.
군대 또한 강력한 화력으로 그 괴물들을 상대하고는 있었으나.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려오는 괴물들인 거다.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진형 내부에 쏟아져 내려온 괴물들로 인해.
많은 숫자의 군인들이 잔인하게 죽어 나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중 화력 지원 필요합니다!"
"알아! 요청해 놨으니 곧...."
저 하늘을 수놓으며 우리를 향해 포탄을 떨구던 전투기와 헬기들.
그 헬기들을 향해 달려가는 형체들이 있었다.
-끼에에에엑!!!
퍼어어엉....
박쥐 같은 날개를 가진 흉측하게 생긴 괴물들이 전투기에 달라붙자.
제대로 된 제어가 불가능하게 된 전투기들이 도시 곳곳으로 추락한다.
수많은 인간이 괴물들과 싸우며 죽어 나가는 모습.
그리고.
'...저 군인들이 진짜가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저 인간들이 내 적이고.
괴물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큰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네놈은 또 무엇이냐...!}
갑자기 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 곳곳에 생겨난 검은 구멍들.
그 너머에 있는 저 하늘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체가 보였다.
{모든 일이 다 끝나 가는 참이었는데, 감히 방해를 하다니...!}
온통 검게만 이루어진 몸.
그 몸 곳곳에 박혀 비통한 피눈물을 흘리는 눈동자들.
[대모]는 저 밖에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연. 이만한 이계를 발생시키려면 어떤 존재가 간섭해야 하나 했더니.}
그리고.
그 강대한 대모가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바깥에 있는 놈들이었군. 네놈들이 하는 짓은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아.}
{벌레 같은 것이 감히...!}
{벌레라?}
기괴하게 생긴 박쥐 괴물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그 실로 봉합되어 있는 눈을 크게 찡그리며, 역겹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 이 벌레들이 거슬린다면 직접 내려와 짓밟아 보는 건 어떠신가?}
{...뭐라?}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무리하면 못 할 것도 없을 텐데.}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라 저 눈깔 괴물을 바라보았다.
'도발을 하다니!'
나도 대모와 싸우고는 있지만.
그건 대모가 나와 군단을 자신의 휘하에 강제로 끌어들여 이 세상에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만약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저런 존재와 갈등을 빚기보다는 최대한 온건하게 넘어가려고 했겠지.
{역시 못하는군.}
하지만, 저 녀석은 아니었다.
{그토록 자신이 넘쳐 본신을 이 땅에 강림시킨다면 나는 물론 저 군단장 역시 한 번에 짓밟을 수 있을 텐데. 말로는 벌레 벌레 하면서도 막상 그러지는 못하는 거야.}
눈깔 괴물은 자신의 도발에 대모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자.
알 만하다는 듯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를 말해 볼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 아닌가.}
{네놈.}
{혹시라도 이 땅에 본신으로 강림했다가 미약한 상처라도 입을까. 그게 두려워서 그러는 것 아닌가.}
큭큭 하고.
경멸 섞인 웃음을 내보이는 눈깔 괴물.
{그 격만 강제로 높였을 뿐, 실제로는 생채기 하나라도 날까 두려워하는 겁쟁이. 힘이 아무리 세다고 한들, 그 본질은 벌레만도 못한 것이...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은 벌레라 매도하고 가지고 놀려고 하지.}
{....}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것들.}
저 녀석은 아주 노골적으로.
바깥의 존재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바깥의 존재들에게 적대적이다.'
어째서 갑자기 우리를 돕는가 의아했지만.
그건 우리를 돕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대모]를... 바깥의 존재를 방해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에게는 호재였다.
"계속해라!"
기괴한 생김새의 괴물들이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몰려오는 군인들을 저지하고.
군인이었던 우리는 서울을 무차별로 파괴한다.
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질 정도의 아이러니.
나조차 지금의 내 모습에 회의감이 들 정도였으나.
{...분에 넘치는 욕심을 품은 인간아.}
그런 우리의 행동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나를 거부하는 것이냐?}
저 대모가.
내게 말을 걸어왔으니까.
* * *
{나를 따른다면 네가 지금까지 후회한 모든 일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로잡힐 것이다.}
부대원들의 파괴가 계속 진행되자.
저 하늘 위에 있는 피눈물 흘리는 거인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뿐만이 아니야. 이 땅에 모든 후회를 품은 아이들, 그들의 슬픔은 완벽하게 치유될 것이야.}
"...."
{왜, 이런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냐.}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지랄.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
장영웅에게 보여 준 과거는 결국 환상이었으며.
지금 이 세상 역시 그 환상에서 비롯된 가짜에 불과했다.
{거짓이라.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네가 나의 아이가 되고 이 세계가 나의 것이 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뭐?"
{지금은 이 비좁아 보이는 나의 성역이 이 세계를 모두 뒤덮을 테니까.}
미리내는 말했다.
저 바깥 존재들이 이 땅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결국은 이 세계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라고.
{당장은 허상에 불과한 나의 성역이지만 내 성역이 이 땅을 모두 뒤덮고, 그 위에 덧칠된다면 안쪽의 진실은 허상의 아래에 잠들고 말 것이다.}
"...!"
{그렇게만 된다면 안과 밖은 뒤집히고 현실은 허상이, 허상은 현실이 되겠지.}
아무래도.
저 녀석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버린다면.
{어떤 후회도 없는 이상적인 세상... 나의 모든 아이들은 그 땅에서 행복을 누리겠지.}
이 세상의 법칙이.
조금은 바뀌어 버리는 모양이었다.
{그 전의 아이는 자격이 모자랐지만, 너는 아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스스로 격을 이룬 적법한 영웅이지.}
"...."
{네가 나의 장자가 되어 내 아이들을 이끌고 이 세계를 손에 넣게 해 준다면 나는 이 땅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고, 그 위에 네가 원하는 역사를 덧칠해 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 될 것이야.}
대모의 피눈물로 적셔진 손이.
나를 향해 내려온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손을 잡거라, 아이야.}
내가 저 손을 잡고.
저 녀석과 힘을 합쳐, 이 세계를 손에 넣는다면.
정말로 어떠한 후회도 없는 세상에 도래한다는 얘기.
{나와 함께 과거의 모든 것을 바로잡자꾸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아마 사실이겠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미안한데, 거절이다."
{...왜지?}
그런 내 거절에.
대모는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하니 내가 저 자격 없는 자를 내 아이로 들였기 때문이더냐?}
"응?"
{너는 그걸로 내게 분개한 듯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사실....}
"아니. 알아."
확실히.
자격도 없는 인물인 장영웅을 이용해 이 땅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 것.
꽤나 열 받는 부분이기는 했다.
그래서 아까 저 녀석에게 한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저 녀석의 신명은 [후회하는 자들의 대모]다.'
그 이름대로.
깊은 후회를 품고 있는 이들을 감싸안아 주는 존재.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건 그 녀석이 원했던 일이었겠지?"
깊은 후회를 품고 있는 이를 이용한다거나.
속이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내 비록 그 아이에게 몇 가지 비밀을 숨기기는 했으나, 그건 그 아이를 위한 일이었다.}
대모가 장영웅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자신의 힘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장영웅 본인이 너무나도 큰 후회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들을 모두 밝혔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 말대로.
대모, 자신이 보여 주는 모든 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힘을 받아들인 장영웅은 언젠가 파국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 모든 사실을 미리 알렸다고 한들.
{그 정도로 깊은 후회를 지닌 자들은... 결국 내 아이가 되기를 선택하지. 그것이 후회를 품고 죽어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장영웅은 대모의 힘을 받아들이고.
파국에 도달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알아 봐야 고통받을 뿐인 진실을 숨김으로써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해졌으면 했을 뿐.}
대모는 그저.
자신의 눈에 띌 정도로 깊은 후회를 품고 있는 이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고.
그런 그를 이용해 이 땅에 영향력을 넓히고자 했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영향력을 넓히는 데 성공해 이 땅을 손에 넣는다면.
그 땅에서 장영웅은 모든 후회를 떨쳐 내고 행복을 누릴 수 있었겠지.
"살짝 아니꼬운 건 사실이긴 한데... 제안을 거절할 정도는 아니지."
{그걸 알고 있다면. 어째서?}
"뭐겠냐.}
그럼에도.
내가 대모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좋은 제안이 아니니까 그렇지."
{...?}
내가 후회했던 모든 일들을 없애 준다, 라.
말로만 들으면 좋기는 하다.
하지만.
"후회는 했어도...."
내가 결국 그 후회들을 떨쳐 내지 못한 이유는.
그것들이 쉽게 떨쳐 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일들이 내게 의미 없는 일들은 아니었거든."
이딴 식으로 가볍게 없던 일로 해도 될 만한 일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
미리내가 저 하얀 공간에서 내게 보여 주었던 풍경들을 떠올렸다.
"너는 과거의 얘기만 하는군."
{...?}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저 군인들도 그렇고 지금까지 발휘한 힘도 그렇고."
[죽음]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죽음이 만연했으며.
[초목]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다른 생명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저 녀석은 후회하는 자들의 대모.
저 녀석의 신명에는 과거에 관련된 단어밖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네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과거밖에 없겠지?"
저 장영웅의 자식이 나이를 먹지 못한 것처럼.
저 녀석이 만들어 낸 각성자들은 성장하지 못한 것처럼.
"하루 종일 언제나 과거의 후회에만 집착하느라...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는 세계일 거야. 아닌가?"
{...아마도 그렇겠지.}
대모의 힘은 과거에 머무른 힘이다.
앞으로 나아갈 힘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이야. 많은 후회를 품은 아이들은... 때로는 더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하고서라도,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싶어 한단다.}
"뭐, 그런 놈들도 있겠지."
{그 세계는 나를 따르는 아이들에게는 이상향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될 것이다.}
어느샌가.
처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자상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가 말했다.
{내게는 네 안의 모든 후회가 보인다.}
"...."
{내 다른 아이들만큼은 아닐지언정, 너 역시 속에 많은 후회를 품고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는 그토록 많은 후회를 품고도....}
대모는.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냐.}
"미안하지만, 당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 해도 벅차서."
만약 바깥의 존재가 내게 계약을 제안한다면.
저런 종류의 힘이어서는 안 됐다.
"나한테 필요한 건 이 개같은 세상을 헤쳐 나가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이다."
{....}
"나에게 네 힘은 기준 미달이야."
좀 더 좋은 조건의 계약이라도 받아들일까 말까인데.
저딴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있나.
{...그렇구나.}
그러자.
대모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네가 나의 아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아쉽지만."
{그래.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하늘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여인.
그 형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자는 내 아이가 될 자격이 없지.}
여인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균열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그토록 많은 후회를 안고도 그저 앞만 바라볼 셈이라.}
이내.
그 검은 균열은 서울의 전역을 가득 메꾸었다.
{아이야. 그 길에는 고통만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그 길로 향하고자 하느냐.}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답했다.
"뭐, 군 생활이란 게 원래 좀 그렇지."
원래 군 생활이란 게.
쉬운 건 없고 고통만 가득한 게 당연한 거거든.
{그래.... 스스로 그 고통을 짊어지겠다면 말릴 이유는 없겠지.}
흐릿해진 거대한 여인의 형상이 이 세계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당장은 네 뜻대로 하거라. 아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인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언젠가 네가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바로 그날.}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균열이 온 도시를 메꾼다.
{내 다시 너를 찾아올 것이니.}
바깥의 존재가 만들어 낸.
현실 위에 덮어씌운 허상의 도시가.
쩌저적....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443화 진급식 (1)
어느샌가.
우리를 공격하던 군인들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쩌저적....
검은 균열은 계속해서 늘어나더니.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저건...?"
"건너편에 뭔가 보이는군요."
검기만 했던 그 균열 너머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균열 너머의 세계.
'현실.'
대모가 이 대지를 떠나감으로써.
그녀가 현실 위에 덮어씌웠던 이계가 철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영향일까.
"...으윽...?"
"...! 무슨 일이야!?"
균열을 바라보던 병사들이 갑자기 머리를 쥐며 쓰러진다.
"괘,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괜찮아 보이는 얼굴이 아닌데, 무슨 일이야."
"기억이...."
내가 당황하며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기억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이건.... 맙소사."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대모가 덮어씌워 둔 이 이계가 사라짐으로써.
그녀가 우리에게 덮어씌워 둔 망각 역시 사라졌다.
"우리는... 이 서울에 처음 온 게 아니었군요."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일이.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뱀파이어 전력은 가급적 아껴 놔서 다행이다.'
뭔가 들켜선 안 되는 부분을 들키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이 일의 여파가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맙소사 이 기억대로라면."
"우리 적은...."
"시간을 되돌렸던 건가."
병사들의 눈동자에.
묘한 공포가 자리 잡는다.
"신 병장님이 중간에 해결해 줘서 다행이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우리의 적이라고...?"
저들은 [대모]를 보았다.
[대모]를 직접 직시할 수 없는 이들이기에.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눈만 감고 있었을 테지만.
나와 대모가 나눈 대화.
그리고 대모가 그들에게 한 짓을 눈치챘을 테지.
그 초월적인 힘에 공포를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조만간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겠지.
'후우. 앞으로 할 일이 많아져 버렸네.'
아무튼, 그건 나중의 일.
당장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닌 듯하니.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어.'
자칫 잘못하면.
저 장영웅과 대모의 계획에 그대로 넘어가, 그 아래에서 종군하게 될 뻔했다.
어떻게든 장영웅과 협력해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그 결말은 아마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대모의 세계였겠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 줘서 다행이다.'
저 박쥐 괴물이 말한 것처럼 직접 힘을 쓰기는 두려워서이든.
아니면.
내가 자신의 아이가 될 인재가 아니란 것을 깨달아서든.
그녀는 마지막에는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우리가 무력으로 이 환상을 철거하기까지 그녀가 버티고 있었다면.
어쩌면 패배하는 것은 우리 쪽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
쩌저적....
균열 너머의 현실이 이계를 침범하고.
점점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하는 모습.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아."
저 멀리서부터.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건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두통을 느끼는 듯, 머리를 쥐고 있는 남자.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반투명한 몸 너머로 도시의 풍경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는 점과.
몸 곳곳에 저 검은 균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라는 인물은... 허상에 불과했던 거로군."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본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익숙한 인물이었다.
"김 중장님...."
수도방위사령부의 사령관.
김명환 중장이 우리를 찾아왔다.
* * *
대모가 만든 이계가 사라지며.
그 이계 안에 구현되었던 존재인 주민들 역시 사라지고 있었다.
"하, 하핫. 맙소사. 이제야 알겠네."
그 사라지는 것에는 순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대모가 다급하게 구현한 것으로 보였던 전국의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허상에 불과했던 거군."
본래 서울의 주민으로서 구현되었던 이들.
그들은 아직까지 희미하게 남아 그 형체가 남아 있었다.
'김 중장뿐만이 아니다.'
저 장영웅은 만약에 대비해 우리를 상대할 수 있도록.
이 근처에 서울의 모든 병력을 배치시켜 두었다.
"...."
"...."
서울 전역의 지도자들이.
허망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나네."
그리고.
"나는 멸망이 시작되고 반나절도 못 가 허망하게 죽었던 거야."
나는 저 주민들이 그저 저 대모가 직접 만들어 낸 인형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대모가 이 이계의 주민들을 구현하는 과정은 그런 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 중장님...."
"하핫. 어이가 없군. 나름대로 이 멸망을 잘 이겨 내고 있던 내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네만...."
김명환 중장은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거 아나? 내 최후는 정말 추잡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네."
"예?"
"동네를 산책하다가 괴물의 습격을 당하고, 머리가 굳어서 제대로 된 대처도 못 했지. 아무나 좀 살려 달라며 비명을 내지르면서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똥오줌을 싸지르면서 괴물들에게 뜯어 먹혔지."
대모는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들 그대로 구현했다.
그들은 과거의 모든 인성과 영혼.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듯했다.
"정말. 이렇게 추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어."
"...."
심지어는.
저 장영웅이 새롭게 쓴 것이 아닌 본래의 역사에서.
자신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마저도.
'....'
분한 점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자책할 필요 없다느니 하는 얘기를 한다고 한들.
'저들은 기억을 되찾자마자 소멸할 운명에 처한 이들.'
내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한들.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절망에 빠져 있을 저들의 한탄을 묵묵히 들어주는 것뿐....
그런 생각에.
그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래도 다행이야."
"예?"
김명환 중장은 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건 내 착각일 뿐.
"이런 꼴이 되어서라도. 자네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저들은.
내 생각보다도 더 강한 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 * *
'다행이라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들은 죽음이 확정되어 버린 상황.
내가 가진 어떤 힘을 동원한다고 한들 그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꽤나 볼품없는 최후를 맞이한 몸이라서 말이야."
여기서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해야 할 일을 못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후회됐었거든."
"해야 할 일...?"
나와 병사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김명환 중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수인계를 못 했네."
...인수인계라니?
우리가 그런 생각에 벙쪄 있을 때.
그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진환 씨!"
"...나는 또 왜 불러?"
그가 부른 것은.
분명 무슨 무슨 부 차관이었던 사내.
지금 이 나라의 적법한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진환 씨가 해 줘야지. 그래도 계급 차이란 게 있는데."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이 자리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니 권한대행...."
그들은 대통령과 장군이라는 지위는 의미가 없다는 듯.
오랜 세월 함께한 동료로서 대화를 나누었다.
"전권은 명환 씨한테 임명하도록 하지."
"뭐야, 그래도 되는 건가?"
"국가 비상사태인데 뭐 어때. 이런 거 이상하게 한다고 지적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명환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으음... 그리 말한다면 알겠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고.
김명환 중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 내에 있는 모든 국군 통수권자는 이미 사망했네."
"...예.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고로, 나야말로 지금은 국군 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인 셈이지. 정확히 말하면 내 위에 한 명 더 있긴 한데... 그 사람이 방금 내게 전권을 위임했고."
그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어느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나오도록 하게."
그리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다름 아닌.
"예."
우리 부대의 최고 계급자.
김현석 중위였다.
"자네가 군단의 최고 지휘자인가?"
"정확히는 조금 틀립니다."
"음?"
나로서는 아직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으나.
그런 나와 달리.
김 중위는 지금 저들이 하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저기 있는 저 병사, 보이십니까."
"아. 그때 회의실에서 봤던."
"저 친구가 '강철군단'의 진짜 수장이자... 저의 상사입니다."
"...!"
그런 그의 말에.
서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힌다.
"저 친구가...."
"과연. 우리도 영웅이 그 친구를 수장으로 받들었으니."
"김 중위만 해도 상당한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김 중위가 따르는 인물이라."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상황이 뭔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면 얘기가 조금 복잡해지는데. 저쪽에다가 하는 게 맞으려나?"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서, 군단의 대외적인 수장 역할은 제가 대신 맡고 있어서요."
"아, 그럼 다행이군. 원래 생각했던 대로 진행해도 되겠어."
아직 [기대부응]의 효과가 남아 있는 것일까.
김 중위는 김명환 중장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그와 자연스럽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현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명령한다. 김현석 중위?"
"예. 중위 김현석."
그리고.
내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간의 전투에서 있었던 공로와 고위 장교들의 사망 등의 사유를 고려하여 김현석 중위의 계급을 7계급 특진시킨다."
김명환 중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특진 후의 계급은... 중장."
나는 물론.
저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던 병사들 역시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이건, 설마.'
이제서야.
나도 김명환 중장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바."
멸망의 날 이후.
나름대로 군대에서 비롯된 단체로 활동을 해 왔던 우리였다.
그 이름으로 이득을 본 적도 있었고.
손해를 본 적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김현석 중위에게 계엄사령관의 지위를 부여한다."
사실.
그 정체성에는 문제가 있었다.
"시기는 대한민국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김현석 중위는 대한민국 국군 전체의 통솔권을 지닌다."
우리 부대.
423대대에 주어졌던 임무는 산 정상에 위치한 레이더의 관리다.
"김현석 중위가 지휘하던 423대대 및 그 대대의 생존자와 민간 협력자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지위를 변경한다."
그 임무를 내팽개치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 시점에서.
우리는 적법한 군인 세력이라 할 만한 명분을 잃어버린 셈이다.
다른 이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탈영병들과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게 없는 세력이 되어 버린 셈.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변경 후의 편제는 군단급."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
이 나라의 최후의 권력자들이.
"임무는...."
우리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니까.
"기존의 1, 2, 3, 4, 5, 6, 7, 8, 9, 10, 11, 12군단이 담당하던 대한민국의 영토, 영해, 영공... 전 국가의 방위."
우리가 잃어버린 그 정체성을.
다시금 부여해 주고 있었으니까.
"상징 명칭은...."
김명환 중장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김현석 중위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강철군단이라 한다."
그곳에는.
강철 같은 가죽을 지닌 도마뱀의 무늬.
우리 부대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444화 진급식 (2)
"임무는 기존의 1, 2, 3, 4, 5, 6, 7, 8, 9, 10, 11, 12군단이 담당하던 대한민국의 영토, 영해, 영공. 전 국가의 방위. 상징 명칭은... 강철군단이라 한다."
"...충성."
[기대부응]의 효과를 받고 있는 김 중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지휘관이다.
"김현석 중위, 명 받들겠습니다."
"자네도 얼타는 일이 있구만. 이제는 중위가 아닐세."
"실례했습니다. 김현석 중장.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에도.
저 명령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온 것일까.
그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경례하며,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흠, 김 장군님 생각이 그러시다면야."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 경찰특공대장이오. 그때 그 회의실에서 한 번... 이 아니라, 몇 번 봤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명환 중장을 필두로.
서울의 각 세력을 담당하고 있던 이들이 앞으로 나선다.
"특공대장 자리. 당신이 하시오."
경찰특공대를 시작으로.
"자치방범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그러니... 넓게 보면 당신들도 방범대에 가입할 자격이 있다는 의미죠."
"예, 이해했습니다."
"방범대장.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치방범대.
"우리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싸웁니다. 그것만 기억해 주십쇼."
대테러부대.
"형님. 암만 그래도 쟤는 육군 아니여?"
"...뭐. 가장 중요한 건 해병대 정신 아니겠냐. 저놈들 정도면 충분허지."
해병대 향우회.
그 외에도.
우리가 만났던 온갖 높으신 분들과 단체.
"권한은 없고 의무뿐만이 되어 버린 자리지만. 잘 좀 부탁드리겠소."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김현석 중위에게 양도한다.
"아. 미안하지만 국가 원수 자리는 못 주네."
"뭐야. 진환 씨는 그 자리 맘에 안 든다면서?"
"그래도 그렇지. 대행의 대행이 다음 사람 임명까지 마음대로 하는 건 좀 그렇잖아?"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유진환 차관이었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국가 원수 자리는... 나중에 이 세상이 정상으로 된 뒤에."
그는.
자신이 국가 원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던 인물이다.
"적법한 절차로 다시 정하도록 하시게나."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무래도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모든 임명이 끝났을 때.
김현석 중장은 김명환 중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 일개 군단이 맡기에는 업무가 너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김 중장님."
"뭐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군대란 게 원래 그런 곳이란 거 모르고 들어온 것도 아니잖나? 김 중장."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김명환 중장은 고개를 돌리더니, 병사들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신영준 병장, 맞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서 있던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충성. 병장 신영준."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 부름에 답했다.
그러자.
김명환 중장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고맙네."
그런 말을 꺼냈다.
꽤나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였으나.
나는 말없이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으니까.
"우리는 버텨 내는 것조차 실패했던 멸망이었네. 아마, 자네들도 이 멸망을 이겨 내기란 쉽지 않았겠지."
"...."
"그 과정에는... 자신들의 의무를 내팽개치는 게 이득인 상황도 많았을 거야."
그 말대로.
유혹이 없지는 않았다.
우리는 분명 인간 중에는 강했지만.
이 멸망을 이겨 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던 순간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다.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끌어안는다면.
지금보다도 강해질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시는군요.
과거.
서수혁 상병은 내게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녀석을 대표로 한 몇몇 병사들은.
이미 멸망해 버린 국가에서 부여한 의무 따위 내팽개쳐 버리자고.
그편이 생존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몇 번이나 내게 제안을 해 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저 라디오를 들었네."
군인의 의무란.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
"자네들은 이런 시대에서도... 그 의무를 잊지 않아 주었던 거야."
우리는.
그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조차도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몇 번인가 있었다.
병사들이 목숨을 잃을 때면.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거였다는 후회를 품었을 때도 많았으나.
"고맙네."
그 모든 후회가.
지금 이 순간,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존경할 만한 군인이자.
우리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한 상사.
"그 의무를 놓지 않아 주어서 정말 고마워."
그가.
지금까지의 우리의 선택을 지지해 주었으니까.
"신영준 병장."
"예."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 은 아니고. 부탁이나 하나 해도 되겠나."
그 말에.
나는 차렷 자세를 한 채 굳건한 목소리로 답했다.
"충성. 얼마든지 명령해 주십시오."
"하하. 아마 꽤나 힘든 부탁이 되겠네만."
그의 마지막 부탁은.
그 말대로, 쉽지만은 않지만.
"앞으로도. 그 의무를 잊지 말아 줬으면 해."
동시에.
굳이 부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충성."
"그래, 그래. 충성."
내가 가볍게 경례를 올리자.
김 중장 역시 그 경례를 부드럽게 받았다.
"전원!!!"
그 모습을 본 김현석 중장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스러져 간 호국 영령 여러분에게, 경례!"
전 부대원들이.
서울의 마지막 주민들을 향해 경례를 올린다.
"충- 성!"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파사사삭.
가까스로 형체나마 유지하고 있던 서울 주민들의 모습이.
먼지가 되어 흩날리고.
쩌저저적.
온 세상에 나타난 균열은.
점점 더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이윽고.
쩍...!
마치 유리가 깨지기라도 하는 듯.
모든 균열이 크게 폭발하며, 온 세상에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
저 장영웅에 의한 반복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나를 노려보는 존재를 느끼고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과는 달리.
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우주.
'아름답다.'
그 밤하늘에는.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야 사이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 * *
[이계의 존재가 만들어 낸 성역을 철거해 내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이는 전 우주를 통틀어도 보기 드문 기적.]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이적입니다!]
[업적 : 신성을 밀어낸 자]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업적 보상으로 능력치 상승의 물약이 주어집니다.]
[능력치 상승의 물약(힘) - 5]
[능력치 상승의 물약(민첩) - 5]
[능력치 상승의 물약(마력) - 5]
[능력치 상승의 물약(행운) - 5]
말도 안 되는 숫자의 물약.
[업적 보상으로 '최상급 식재료 - 옛 운석의 파편'이 지급됩니다.]
저 물약을 제조하기 위한 재료 중 하나인 최상급 식재료.
거기에.
[업적 보상으로 '특성 강화권'이 지급됩니다.]
'...!'
한동안 얻지 못했던 물건.
특성 강화권까지.
'미친.'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칭호 - 신성의 대적자]
[인간의 몸으로 바깥의 존재와 대적하고 그를 물러나게 한 당신!]
[이는 분명 위대한 업적이지만, 이계의 존재들은 탐욕스럽고 교활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이 땅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계의 존재를 경계하고, 분쇄하세요!]
[그들의 간섭을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효과]
['신격'을 보유하고 있는 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모든 능력 행사에 300%의 보너스가 부여됩니다.]
"...이건."
무척이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지닌 칭호.
하지만, 아쉽게도.
그 내용을 모두 읽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파아아아악!
어느새.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우주가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 * *
그리고 잠시 뒤.
다시금 눈을 뜨자....
"아."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방금 전까지 자행했던 파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할 정도로 처참하게 붕괴된.
"...과연."
이제는.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몰락해 버린.
"여기가... [진짜] 서울인가."
옛 수도의 모습이었다.
* * *
대모가 물러나자,
그녀가 만든, 현실을 덮어쓰고 있던 이계 또한 사라졌다.
그 말인즉.
눈앞의 도시가 바로 서울이라는 얘긴데.
"...맙소사."
"신 병장님, 이건. 이건."
그 모습을 바라본 병사들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
그 말대로.
지금, 서울의 풍경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된 건물들.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들 곳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파충류의 알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쿠웅, 쿠웅....
땅 곳곳에는 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도 모를 마그마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절대 얕볼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지닌 괴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운다.
새까매진 하늘에는 흉측하게 생긴 괴조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곳곳에서는 괴물들의 괴성이 울려 퍼지고.
마물들 간의 영역 싸움으로 인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이건.
현실이라기보단, 뭐랄까.
'지옥에 가깝다.'
꽈악....
'강원도에서 본 파괴된 도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저 경기도에서 봤던 마경은 그나마 외곽에 치중되어 있었으나.
이 좁은 서울 땅에 나타난 괴물들은... 도시 전체를 마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 병장님."
그 모습을 본 서수혁 상병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괴물이 너무 많고, 상황도 최악으로 보이는군요. 그전에는 이곳에 우호적인 세력이 있다는 생각에 소규모 병력으로 왔습니다만... 지금은."
"그래. 우리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겠군."
군단을 총출동시킨다고 한들.
저 비마나를 끌고 오는 게 아니고서야, 이 도시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저 박태준 병장의 예언 역시 약해진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복귀하시겠습니까?"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기도 쪽을 거쳐서 이동한다. 목표는 서울 남부."
"예? 그쪽은 왜."
"그쪽에 가면 찾아온 이들이 있을 테니까."
다행히도.
괴물들은 영역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인지, 서울 경계 밖까지 나온 괴물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 외곽, 경기도 영역을 이동하며 서울로 향했다.
그러자.
"당신들은 누구요...?"
서울의 남부 경계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정정해 보이는 할머니가 의심 섞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에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잔뜩 섞여 있었으나....
사실, 내게는 꽤나 익숙한 인물들이었다.
"당신들도 정부의 초대를 받고 온 이들인가?"
타 지역의 생존자들.
저 장영웅이 보낸 초대 메시지를 받아.
이곳을 찾아온 이들이었다.
445화 협력 제의.
"...자네들은?"
"안녕하십니까. 협회장님."
"자네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먼저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은 경기도 측의 인물들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경기도의 영역.
아직 저들이 경기도 전역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근처에는 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자네들은 북쪽 근처로 진입하는 게 더 빠를 테니, 만나게 되더라도 저 서울 내부에서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네만."
그리고.
나는 우리를 보고 의아해하는 조범석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은... 저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 건가?'
나는 물론 다른 부대원들까지.
저 서울 안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을 되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서울 안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유는, 아마도.
'저들은 우리보다 조금 늦게 서울로 진입했었지.'
분명.
우리가 서울로 진입한 다음 날에야 저들이 왔던 거로 기억한다.
그리고, 몇 번의 반복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대모와 싸운 것은 서울에 온 첫날이었다.
대모의 이계가 철거되는 시점에서는 저들은 서울로 진입하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이건 내 예상이긴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저 서울에 진입한 적이 없던 것으로 처리된 거다.'
애초에 진입한 적이 없었던 만큼.
안쪽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도 없는 것이다.
아마 내가 저 안에서 강원도의 군단과 나누었던 길드 메시지도 없던 것으로 처리되어 버렸을 것이다.
'바깥의 존재'의 이능으로 인해 만들어졌던 이계다.
비록 물러났다고는 하나, 엄청난 격을 지녔던 존재.
그런 존재가 간섭해서 생긴 일이니만큼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은 거겠지.
그리고.
그렇게 아예 서울에 진입한 적이 없던 것으로 처리된 이들은....
"우리는 여기서 상황을 보고 있었네. 안쪽이 저런 꼴이니 쉽게 진입할 수가 없더군."
"저분들은."
"우리와 사정이 같아. 서울의 초대를 받아서 오기는 했지만, 저 안에 진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니... 일단 여기서 합류한 걸세."
지옥도가 펼쳐져 있는 서울.
그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결과.
서울의 남쪽에서 올라오던 모든 생존자 세력이 이곳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됐군요."
"잘 됐다니?"
"함정입니다."
김현석 중장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함정... 이라니?"
"저희는 저 초대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덕분에 이미 서울 안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죠."
"그렇게 빨리?"
"정부의 부름이니까요. 군인들이 즉각 대응하는 건 당연한 얘기겠죠."
안 당연하다.
저게 제대로 된 부름인지도 엄청나게 의심했고, 혹시 모를 위기에 대비해 준비도 엄청나게 했다.
우리도 저들보다 살짝 빨리 도착한 수준에 불과했다만.
"아무튼, 그 초대 메시지에 있던 위치로 가 보았습니다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 말은."
"아무래도 그 메시지는 저 서울의 괴물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인간들을 유인하기 위해 보낸 함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은 몰랐군."
조범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 함정이라니...!"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노인.
저 경북에서 온 생존자들의 대표였다던, 유정숙이라는 할머니였다.
"그, 그러면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상 소멸한 상태라고 봐야겠죠."
"그럴 수가...!"
절망감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노인.
그녀의 세력은 저 경북 땅에서 최소한의 생존만을 추구했다.
언젠가 정부와 합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것조차 포기한 이들.
"그러면 나는... 다른 길드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길드장님!"
그런데 그 정부가 사라졌으며.
희망이라 여겼던 메시지조차 함정이었다는 얘기에, 그녀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잠깐. 한 가지 질문이 있소."
그런데 그때.
덤덤히 얘기를 듣고 있던 한 사내가 우리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 그 옷. 내가 알던 것과는 디자인이 꽤 다르긴 한데... 군복 맞나?"
"예, 맞습니다."
"그 뭐냐. 지금 이 개같은 세상에서 굳이 그렇게 군복을 맞춰 입고 다닐 만한 단체는 하나밖에 없을 거로 아는데... 당신들, 내가 생각하는 그 양반들이 맞소?"
저 대전에서 왔다고 했던 사내.
강신철의 질문에.
김현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의 장을 맡고 있는 김현석 중장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강신철과 유정숙,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
"구, 군단이라면. 그...."
"흐하하! 역시 맞구만."
강신철은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대충 바닥에 던져 버리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사실 말이야. 나는 서울 쪽에 정부니 뭐니가 살아 있다는 얘기는 사실 별 관심도 없었어. 지금 저 메시지가 함정이었다는 얘기를 들어도 별다른 감흥도 없지."
"그렇습니까."
"내가 이 먼 곳까지 굳이 굳이 찾아온 이유는 하나야. 그게 뭔지 아나?"
"알 것 같습니다."
"당신들한테 감사를... 엉? 알 것 같다고?"
강신철이 움찔하며 말을 멈추자.
김현석 중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감사 인사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저희는 저희의 의무를 수행한 것뿐입니다. 오히려 더 빨리 다른 지역의 주민분들을 구하지 못했다 질책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겠죠.. 그 라디오 역시... 저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김 중장의 말에.
강신철은 잠깐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더니.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하지 말라는 건 아니겠지?"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 그 개같은 의무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잘 알고 있소. 나와 내 동료들은 그 덕을 보았고. 그러니... 고맙소."
"...예. 감사합니다."
"다음에 뭔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부르시오. 받은 은혜만큼은 도와드리도록 하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사내.
김 중장은 그 인사를 받고는 모여 있는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저 서울은 멸망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상 없어졌죠."
"...."
"하지만!"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불구하고.
지금의 그는 누가 봐도 카리스마 있는 군단의 장처럼 보였다.
"저 메시지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건 아닐 겁니다. 결국, 이곳에 이렇게 살아남은 국민이 모였으니까요."
"...그 말은?"
내가 굳이 이 서울 남부로 온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정부가 사라졌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들 간의 협력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
그런 김 중장의 말에.
유정숙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흐음. 정부는 없어졌어도 이곳에 모인 생존자 세력끼리라도 협력하자, 이거로군... 경기도 협회는 찬성이오. 물론 어떤 식의 협력일지는 대화를 나눠 봐야겠지만."
"겨, 경북도 찬성하겠네! 그 협력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좀...."
다급하게 찬성하는 유정숙.
비록 그녀가 가장 먼저 찾았던 정부는 사라졌다고 하나.
그 대체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군단은 어떤 식의 협력을 생각하고 있는가...?"
강원도의 군부대를 흡수한 군단은.
그녀가 원했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겠지.
* * *
강신철과 유정숙.
두 세력의 대표들은 우리의 정체에 놀라면서도.
그 사실을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김현석... 중장, 이라니?"
우리의 말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경기도의 각성자들은 우리 말... 정확히는 한 단어에 의구심을 품은 듯했다.
"자네, 잠시 나랑 얘기를...."
그 대표인 조범석 협회장이 앞으로 나와.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협회장님. 잠시."
그때.
그런 조범석의 손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진실이에요."
"이서 양? 그게 무슨."
"김현석 중... 아니."
한이서.
그녀는 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그 눈으로.
"김현석 중장님은 중장님이 맞으십니다."
"...!"
조범석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조범석에게 조언했다.
"자네 말이라면 사실이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어요."
"으음. 저 자들이 규칙을 무시해 가며 일을 벌일 친구들은 아닐 텐데."
"아마도...."
그녀는 약간의 의구심.
그리고.
"저분들 사이에는 저희가 모르는 일들이 있었던 거겠죠."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그렇다면."
"저희가 미리 정해 둔 방침. 잊지 않으셨죠?"
그 말에.
조범석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잘 모르는 상황일 때는 일단 군단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네. 아마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을 들을 수 있겠죠."
거기까지 대화를 마친 조범석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 * *
"크흠."
"아, 협회장님? 저한테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
"아, 그 뭐냐. 협력도 좋지만, 여기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이 근처에 협회의 거점이 있소.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경기도의 영역 내에서 한 차례 협력에 관한 회의를 나누는 흐름이 되었다.
'서울행은 취소됐지만... 우리 목표마저 없어진 건 아니야.'
우리의 목표는 저 서울에 모일 생존자들을 통해 각지의 상황을 확인하고
가능하면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서울이 멸망했다고 한들.
대한민국에 남은 각 지역 간의 협력은 여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회의는 우리에게 유리하겠지.'
우리는 저 서울 내에서 몇 번의 회의를 거쳤고,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
김 중장은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테니.
회의를 꽤나 유연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겠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대화를 조용히 관망하고 있는 한 세력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대는 누구신지?"
김 중장이 경기도, 경북 쪽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그 세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사...!? 사십...!?"
"자매님? 갑자기 무슨."
한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고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충남에서 왔다던... 교단.'
다른 세력들과의 협력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
그나마 강신철이 이끄는 대전의 생존자들이 협력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 조금 거슬리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조금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 부대에서 나 다음으로 레벨이 높은 인물은 이민재 병장이다.
하지만.
저 교단이라는 곳의 수장은 그런 이민재 병장은 물론.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각성자들 중에서도 나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레벨을 보유하고 있었다.
'같이 온 이들도 상당한 고레벨들....'
어쩌면.
이 서울의 모집에 응한 이들 중, 우리 군단과 비등한 세력을 이룩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단체.
"나를 봤으니. 너희 목적은 달성됐겠지."
"아, 아아...."
이들은 너무나도 변수가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일단은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돌아간 뒤...."
저 서울에서.
나는 몇 번인가 이들과 만난 적이 있으며.
그때마다 이들이 한 말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힘을 기르며 기다리고 있도록."
"아, 아아... 그 말씀은...!"
내가 그리 말하자.
그녀는 감동에 벅찬 눈빛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강대하신 분...."
몸을 크게 숙이더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여성.
그녀가 저 교단의 사람들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당장 협력하기에는 저희는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군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저희 영역이 닿았을 때. 그때 다시 논의함이 옳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그쪽의 뜻이 그러시다면."
교단 측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이곳에 모인 이들 간의 협력에는 변수가 사라졌다.
"그럼 일단 우리 거점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자세한 얘기는 그쪽에서...."
잠시 뒤.
이곳에 남아 있던 각 세력은 회의를 위해 경기도의 거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 신 병장님?"
"병장님은 같이 가시지 않는 겁니까?"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저쪽은 김 중위... 가 아니라, 중장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지. 내가 가 봤자 할 일도 없을걸."
"그건 그렇습니다만."
"나는 다른 볼일이 있거든."
"다른 볼일이요?"
그런 병사들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찾아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병사들과 떨어진 나는 따로 행동을 개시했다.
[환경동화]
투명해진 몸을 이끌고.
지옥도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서울 내부로 진입한다.
목표는 한 곳.
'여의도.'
지금은 없어진 시간대 속에서.
이 서울의 지도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바로 그 땅이었다.
446화 장영웅.
너무나도 황폐해진 도시 속에서.
옛 여의도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한강 유역을 계속해서 이동하다 보니, 겨우겨우 여의도'였던'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 흔적을 보면 여기가 맞기는 할 텐데.'
정말 내가 얼마 전에 봤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황폐해진 모습.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크륵...!
넘쳐나는 괴물들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피한 뒤.
한 건물의 잔해 앞에 도착한다.
그 잔해들을 어떻게든 치우다 보니.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곳곳이 붕괴되어 있는 것은 물론.
너무나도 어두워,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할 만한 공간.
하지만, 지금 내 몸속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둠 속은 귀족의 영역.
나는 짙은 어둠이 드리운 지하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 들어가자.
무척이나 두꺼워 보이는 철문이 나타났으나....
[최고급 단도 숙련]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핵폭발에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철문이 조각조각 나 흩어진다.
그 안쪽에 있는 것은.
한때 인간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피하고자 만든 방공호.
나는 묵묵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길이 복잡했지만.
몇 번인가 와 본 기억이 있었던 덕분에, 그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곳은.
"여긴가."
한 거대한 문이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다수의 병력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적은 서울의 각성자들까지 그 경비에 차출되었었지.
끼이익....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은 과거에 본 것과 같은 풍경이었다.
땅은 제대로 공사도 되지 않은 흙바닥이었으며.
습기로 인해 곳곳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이건 내 예상이지만.
아마 여기는 애초에 제대로 된 설비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추가적인 공사를 하려다가, 그 공사가 멈춰 버린 장소...쯤 되겠지.
'그때랑 같다.'
하지만.
과거에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의 맛이 나.'
지독할 정도로 짙은 죽음의 맛을 느꼈으나.
그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뿐.
그때는 그 원인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내가 맡은 맛은.
저 이계에서 난 냄새가 아니었다.
[대모]의 능력은 현실 위에 이계를 덮어씌우는 형태로 발현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덮어씌우는 것일 뿐.
그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리고.
"왔나...."
이토록 짙은 죽음의 향기는.
가볍게 덮는다고 덮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다.
"조금... 늦었군."
"할 일이 좀 있었거든요."
내가 가장 짙은 죽음의 맛을 느낀 곳.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
미묘하게 움푹 파여 있던, 바로 그 자리에는.
"장영웅 씨."
"하핫... 그래도 존칭은 붙여 주는군...."
장영웅이.
죽어 가고 있었다.
* * *
저 [대모]가 이 땅에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며.
그것이 장영웅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서울은 비록 이렇게 처참하게 멸망해 버렸다고 한들.
'장영웅은 일단 살아 있다는 뜻.'
아무리 그래도.
죽어 있는 인간을 매개체로 그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가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떠오른 곳이 바로 여기였다.
'굳이 지킬 만한 물건이 아예 없음에도 병력까지 동원해 가며 지키려고 했던 장소.'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저 장영웅 본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의 원인을 몰랐으니.
'자신이 실제로 있었던 곳.'
이곳이 파괴된다면.
그 힘을 잃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사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 생각했던 것이리라.
"용케도 찾아와 줘서... 고맙네."
그리고.
나는 미약한 숨소리를 내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몸이 좋지는 않아 보이시는군요."
"하핫... 뭐, 그렇게 됐네."
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꽤나... 추해 보이지?"
"조금 외로워 보이시긴 합니다만, 추하지는 않습니다."
"말이라도 고맙군.... 사실, 원래부터 이렇게 외롭게 혼자 있던 것은 아닐세."
"그 말은."
장영웅은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려는 듯.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체감으로는... 만 년도 넘은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만... 아마 현실 시간으로는 지금부터 한 달 전쯤이었을 거야...."
"한 달 전이라는 말씀은."
"내 마지막 동료들을 잃은 날 말일세."
"...."
내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자.
그는 숨조차 쉬기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음에도, 땀을 흘려 가며 말을 이었다.
"저 대전에서 왔다는 남자... 강신철이라 했던가?"
"예."
"사실 말이야."
대전광역시와 서울특별시.
좁은 땅 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자의 얘기를 듣고... 나는 동질감을 많이 느꼈네."
"...."
"내 상황도 딱 그랬었거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황의 흐름은 비슷했으리라.
저 강신철과 마찬가지로.
장영웅 역시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것이겠지.
"그래도 어느 시점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만했네. 하지만... 중간에 사고가 있어서, 유일한 치료사였던 동료를 잃었지."
"그렇습니까."
"회복 수단을 잃어버리고 나니, 괴물이 넘쳐 나는 저 도시에서의 끝없는 전투를 감당할 수 없게 됐어.... 우리는 괴물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 벙커로 향했네."
그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좋은 거점인 것 같습니다. 정보 계열의 각성자셨으니, 그 능력으로 알아낸 건가 보군요."
"...그건 아니야."
"예?"
나는 원래 이 벙커의 위치를 알고 있었거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보통 수단으로 숨겨 놓은 것도 아닌 것 같던데."
"내 직업이 뭔지 아나...?"
직업이라.
[식재료 감별(강화)]에 나타나는 대로라면, 분명.
"[정보의 요원]이시군요."
"뭐야... 거기까지 아나?"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서."
"큭... 그러면 말하기 쉽겠어."
거기서 이어진 말에.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내는 죽을 때까지 나를 회사원으로 알고 있었네."
자신을 회사원이라고 소개하는 요원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한 곳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국가정보원.'
그곳의 요원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벙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정보 수집에 특화된 각성자로서 거듭나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
"문제는 이 벙커로 들어온 뒤였지.... 저 괴물들은 이 벙커 안에서도 자연 발생한 것 같았어."
그 말에.
나는 내가 아리엘라와 조우했던 방공호를 떠올렸다.
이곳 역시 군사 시설.
이곳을 지키는 괴물이 있었으리라.
"그놈들과 싸우다가 다치신 겁니까?"
"어떻게든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 놈들은 어째서인지 이 방공호를 떠나지 않으려 했네. 그러면서도 살고자 하는 욕심은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일까...."
그 말에.
나는 그가 말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식량."
"하핫. 남기지도 않고, 깨끗이 털어먹었더군."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배를 매만지는 그.
"포인트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느라 이미 다 쓰고 만 상태였지. 결국, 밖에서 식량을 구해 와야만 했네. 하지만... 나는 그 탐색에서 제외됐지."
"어째서입니까?"
"그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쥐고 있던 그 손을 치워, 허리춤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딴 상처를 입은 상태로는 돌아다닐 수가 없었으니까."
"...."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네. 식량을 구하겠다고 나선 희선 양과 배만 씨, 강일환 교수님까지... 그때 이후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지."
그 후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전투할 수도.
이 황량한 지하 방공호에서 무언가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
마지막 동료조차 잃어버린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서서히 죽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후회를 곱씹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
"잃어버린 가족, 죽어 버린 사람, 보내지 말았어야 했던 동료들... 지키지 못한 국가. 전부를."
국가정보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들었다.
...장영웅의 꿈을 구현한 저 이계에서.
어째서 이 나라의 모습이 저토록 철저하게 재현되어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저 [대모] 말이야."
"예."
"처음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나도 미웠지만... 조금 차분해지고 나니 생각이 바뀌더군."
그는 큭큭, 하고 메마른 웃음을 토했다.
"아마도... 그 [대모]는 정말로 나를 위하려던 셈이었을 거야."
나 역시 그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모]는 진심으로 짙은 후회를 품은 장영웅의 후회를 해결해 주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수만 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식으로 그의 체감을 조정하기도 한 것이겠지.
심지어는.
"나를 이용해 이 땅을 차지하려 한 것도... 아마."
"예."
[대모]가 이 땅의 지배자가 된다면.
그 땅의 주민들... 대모의 아이들은 모든 후회가 해결된 이상향에 도착하게 된다.
비록 과거에 매몰된 이들을 위한 땅인 만큼.
앞으로 시간이 흐르지는 않는 나에게 있어서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땅이겠지만.
'후회에 잠식되어 죽어 가던 장영웅에게는 행복한 결말이었겠지.'
장영웅을 매개체로 혹사시켜 가면서 이 땅을 지배하려 한 것은.
결국, 그 후회를 이겨 내고 싶어 하던 장영웅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한 행위였던 셈이다.
"단지... 내 소원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었을 뿐이지."
"...."
아마도.
대모가 그를 위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대모는 더 싸울 수 있었는데도 물러났다.'
처음에는 그저.
더 싸워 봐야 의미가 없기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그래도, 속이 후련하군. 이 어둠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갈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가능한 희망이라도 품어 볼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대모와 장영웅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장영웅은 대모의 힘을 구현하기 위한 매개체로 혹사되었다.
"게다가."
만약 마지막까지 싸웠다면....
한계에 도달한 그는 소멸을 맞이하고 말았겠지만.
'대모가 일찍 포기하고 떠남으로써....'
지금.
이렇게.
"마지막에는 이렇게, 누군가한테 내 얘기도 전하고 갈 수 있게 되었지 않나."
"...."
"참, 고마운 일이야...."
마지막으로.
나에게 자신의 삶을 전할 기회라도 생긴 셈이니까.
'후회하는 자들을 끌어안아 주는 대모.'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바깥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이름은... 단순한 이름 정도가 아닌 거다.'
대모가, 그 이름대로 진심으로 장영웅을 위했던 것처럼.
미리내가 내게 예시로 보여 주었던 세계의 모습이 그 신명에 따라 극단적으로 변화했던 것처럼.
저들의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 * *
"내 얘기는 여기까지일세. 그럼... 자네가 왜 나를 찾아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임종을 지켜드리고 싶어서... 라고 하면 믿으실 겁니까?"
"큭큭. 그냥 시체를 보고 싶어서 이런 곳까지 찾아왔다고? 그 말을 믿을 리가."
조금은 부럽다는 표정을 한 채.
내 얼굴을 바라보는 장영웅.
"자네는 나랑 다르게 앞을 지향하고 있잖나."
"...."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말해 보게. 마지막 얘기를 들어 주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주도록 하지."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서울에서 당신이 겪었던 일을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나는 장영웅을 내려다보았다.
처참한 상처.
아마 [대모]의 매개체로 이용당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살려 낼 수 없는 몸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심하게 다친 지금은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이자는... 30레벨 중반대의 각성자다.'
상당한 고레벨이다.
애초에.
이 벙커에는 군부대를 지키기 위해 소환된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괴물들을 고작 4명이서 뚫고 이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장영웅은 본래도 상당한 강자였으리라.
이 서울에서의 험난한 생존이 그를 강자로 단련해 냈겠지.
"저희는 아직 이 세계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살아남으면서 꽤나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알아낸 게 있다면 그 정보를 공유해 줬으면 합니다."
이자가 이 레벨까지 살아남으면서 얻게 된 정보 역시 존재할 것이다.
특히....
"당신은 정보계의 각성자였잖습니까."
"...."
이자는 정보 수집에 특화된 '요원.'
마지막에 실패해 이런 꼴이 되어 버리기는 했으나.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447화 아군.
"자네가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아마도 이 괴물들의 정체 정도는 알고 있겠지."
"제가 알기로는 난민...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큭... 그리 말하면 너무 불쌍해 보이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 내 질문에.
그는 덤덤히 자신의 과거를 읊조렸다.
"한 괴물을 만난 적이 있네. 그리 강한 괴물은 아니었는데... 머리가 참 좋았어. 인간의 말도 배워서 쓸 줄 알더군. 자신은 학자들로만 이루어진 종족이라고 했지."
"...."
"그 괴물이 말했네. 지금 전 우주에는 멸망한 세계의 주민이 다른 세계로 흘러가... 그 세계를 멸망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노라고."
여기까지는.
나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아낸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악순환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라고."
"...!"
이 남자는.
나조차도 모르는 정보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만난 괴물에게서 들은 정보에 불과하지만...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어."
"두 번... 이요?"
이건.
미리내조차도 말해 주지 않았던 정보다.
"첫 번째 사건으로 인해... 전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계가 순식간에 멸망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사건에서 파생된 두 번째 사건으로 인해... 전 우주에 멸망을 원하는... [악의]가 퍼져 나갔다고 했지."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악의]라는 건."
"정체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 [악의]가 이 악순환을 시작한 것만은 분명해."
[악의]에 대해서는.
나도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 [악의]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이 멸망의 악순환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지."
"...."
확실히 그 말대로.
이 악순환에 명확한 원인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고 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 말을 해 준 것은.
내게 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는 실마리를 건네주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너무 까마득하군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오히려 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악의]는 아마도 저 [대모]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무언가일 확률이 높겠지.'
저 [대모]조차.
그 본체도 아니고 장영웅을 매개체로 발동하는 힘만으로 이 서울 전역에 자신의 이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지구를 포함한 온갖 세계에 멸망이 퍼지도록 만든 존재라니.
"그딴 존재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하면.
전혀 자신이 없었다.
"약한 소리를... 하는군. 저 대모한테도 아득바득 대들더니.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잖습니까."
평소라면.
이런 약한 소리를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군단]이라는 단체의 장이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건 아니건 간에.
내가 보이는 태도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아무리 힘들고, 막막해도.
최대한 당당한 태도를 보여야만 했지.
하지만....
눈앞의 인물은 달랐다.
내 부대원도 아니고.
앞으로를 살아갈 인물도 아니다.
"차라리 이 멸망의 원인이 어떤 실험의 잘못된 결과물이라든가, 생물을 괴물로 만드는 전염병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이 멸망의 원인은 너무나도 크고 강대하게만 보여요."
내가 가진 나름의 수단을 동원한다고 한들.
결코 살릴 수 없는... 그 죽음이 확정되어 버리고 만 인물.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하루하루 이 악물고 버티고는 있지만... 이 끝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정말 가능하긴 한 일일지...."
"...."
"매일 살아남으면서 새로운 걸 알게 될수록 점점 더 확신이 사라져 갑니다."
이렇게.
조금은 푸념을 늘어놔도 되는 것 아니겠냐.
"이 멸망의 규모는 저 우주에까지 뻗쳐 있는데 그 넓은 우주에 비해... 인간들의 힘은 너무나도 나약해요. 우리 힘만으로 이 멸망을 이겨 내는 건... 불가능한 일로만 보입니다."
"우리 힘만... 이라."
그러자.
내 푸념을 듣고 있던 장영웅은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이들도 군단의 품 안으로 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그들도 알고 보면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런 얘기가 아니라면, 설마."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처럼 바깥 존재의 힘을 빌리라는 겁니까?"
이 멸망에 대응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멸망조차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바깥의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의 힘을 빌려 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결국 이 땅을 다른 식으로 바꿔 버릴 겁니다. 그렇게 살아남아 봐야, 이 지구는 온전한 지구가 아니겠죠."
"...."
"그런 선택은... 저는 못 합니다."
그런 내 말에.
장영웅은 고개를 미약하게 내저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닐세."
"예?"
"내가 힘을 빌린 존재... [대모]를 보았겠지? 그녀가 발휘하던 힘도."
쿨럭 하고.
얕은 재채기를 하면서도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장영웅.
"나는 그녀의 힘으로 많은 시간을 반복했네."
"예."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유일하게 반복되지 않던 것이 있었지."
반복되지 않던 것이라니.
그건.
"각성자."
그는 손가락을 뻗어.
내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모는 내게 저 이계의 시간을 계속해서 되돌릴 수 있는 힘을 주었지만... 그 안에서도 각성자의 레벨만큼은... 올라가지 않았어."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대모의 힘이 과거에 머무르는 힘이었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장영웅의 자식이 성장하지 못한 것처럼.
대모의 힘은 과거에 치중된 것이다.
그 안에서 미래를 향한 개선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모의 힘으로 재현된 각성자들 역시 그 이유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겠지.
"아니... 아니야."
"예?"
하지만.
장영웅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가 재현해 준 다른 이들은... 그 이유 때문에 성장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
그 말에.
나는 내가 놓치고 있던 맹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말대로.
다른 이들이야 대모가 재현한 존재인 만큼.
성장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네. 그녀가 재현한 존재가 아니지...."
애초에 살아있는 각성자였던 그의 성장이 멈췄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대모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장영웅이 겪은 시간은 생각보다 짧겠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수십 년 단위.
그 시간 동안.
장영웅의 레벨은 오르지 않았다.
"저 대모의 힘을 받아들이고 얼마 안 가서 깨달았네. 내 각성자로서의 성장은... 저 반복을 시작한 시점에서 멈춰 버렸노라고."
"...!"
"심지어...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지."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성장이 막힌 이유는 따로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각성자]를 만들어 내는 힘... [시스템]은 말이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모]의 힘에 반발하고 있었네."
"...!"
"마치, 이딴 힘에 협력해 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 명백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어."
"의지를 표출했다고요?"
"내 [상태창]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메시지가 있었네."
그리고.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는 명백한 배신행위이니, 지금 당장 철회할 것.] 이라고."
그리고.
그 예상이 적중했을 때.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그때 처음 알았지."
장영웅은 그때 처음 보았다는 것 같지만.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인가 그런 문구를 보았다.
[이는 명백한 침략행위입니다.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던전]에 입장할 때마다 눈앞에 나타났던 문구.
그리고 얼마 전.
[그들의 간섭을 결코 용납하지 마십시오.]
대모의 환상을 깨부순 대가를 받았을 때.
그 보상 문구까지.
이 시스템은.
이 땅을 침식하려는 이계의 힘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대모의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시스템은 내게 협력을 멈춘 거야."
"...!"
"이 시스템은... 의지가 없는 듯 보여도, 무언가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그 방향성은...."
나는 장영웅이 하려는 말을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계의 존재들에게 적대적이군요."
지구를 이계의 환경으로 만드는 던전과.
지구에 간섭하려고 드는 바깥의 존재.
시스템은 그 둘에게 적대감을 표출했다.
"아마도... [대모]와 같은 존재는 하나뿐만이 아니겠지?"
"그럴 겁니다."
"그녀는 그나마 온순한 편이었지만... 개중에는 좀 더 적극적인 존재들도 있을 거야. 만약 그들의 힘을 단순히 받아 쓰는 정도가 아니라, 나처럼 그들의 대행자가 된다고 한다면."
바깥 존재들의 힘은 분명 강력하다.
하지만, 그 힘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순간.
"시스템은 자네에게 협력하지 않을걸세."
지금까지의 가장 강력했던 우군.
시스템을 잃는다는 것.
그리고,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시스템]은 저 바깥의 존재와의 싸움에 있어서는... 확실한 아군이야."
바깥의 존재들에게 대항하는 데 있어서.
시스템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를 지원해 주는 존재라는 것.
"문제가 있다면, 그 정체를 모르는 아군이라는 점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아무리 우호적이라도 신뢰할 수 없는 법. 그러니...."
그는 있는 힘껏 손을 들어 올리더니.
톡 하고.
허공을 건드렸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건드린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이 녀석... 시스템의 정체를 파고들게."
"...."
"이 세상을 이겨 내고, 저 [악의]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니."
그가 건드린 것은.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었다.
* * *
거기까지 말한 장영웅.
그 손에 힘이 빠진 듯, 들어 올렸던 손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지치는군."
어느새.
안 그래도 창백해 보였던 그의 얼굴은 마치 해골처럼 변해 있었다.
충분한 격을 이루지 못한 존재가 바깥 존재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매개체로 이용된 결과가....
바로 저것이겠지.
"내가... 많이 민폐를 끼쳤지?"
"아닙니다. 서로 살려고 그런 건데요 뭐."
"그래도... 조금 후회되는군. 다른 후회야 안고 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의 몸속에서.
미약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 후회는 해소하고 가고 싶어."
그리 말하자.
그의 몸 안에 뭉쳐 있던 마력이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그 가슴에서부터 새어 나온 것은.
-꾹?
한 마리의 파란 새.
나는 과거 저 아파트 옥상에서 이 파란 새를 본 적이 있었다.
[소문의 파란 새]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물어 와 주는 소문의 파란 새입니다.]
[어디까지나 소문을 물어 오는 새이니만큼, 정확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니 주의하시길!]
장영웅이 소환수로 다루던.
바로 그 새였다.
"저 남자를... 따라가거라."
그 말과 함께.
-꾹꾹!
내 어깨 위에 착지하는 파란 새.
"소문을 물어다 주는 아이야. 소문이니만큼 헛소문도 물어 오는 경우가 많지만... 개중에는 쓸 만한 소문도 있지."
"...그렇습니까."
"내 마력으로 만들어진 아이이니. 오래 남아 있지는 못할 거야. 아마 소문 하나 정도를 물어 오는 게 한계겠지... 그 아이에게 궁금한 정보를 물어 오도록 하게. 아마도... 도움이 될 거야."
거기까지 말한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여보... 수영아...."
"...."
"아빠가 간...."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툭.
하고.
마지막으로 그 몸에 남아 있던 힘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꾹꾹....
한 마리의 파란 새는.
슬픈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여러모로 복잡한 인물이었다.
나와는 적대 관계라고 봐야겠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쓰러진 그 모습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힘들게 살다 간 이한테, 인사 한 번 못 해 줄 이유는 없을 테니까.
"...시스템이라."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서려던....
바로 그 순간.
[20의 신력이 외부 존재의 힘을 파악합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상태창의 메시지.
"!?"
그 메시지를 본 나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 [대모]가.
혹은, 다른 바깥의 존재들 중 누군가가 힘을 써 온 것인가.
그리 생각했으나.
"저건...!"
뒤돌아본 내 눈앞에 보인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둠뿐이었던 공간 안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의 붉은 보석.
나는 그걸 보고 생각했다.
'대모는 분명 떠나긴 했지만....'
그녀는 장영웅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를 멈췄을 뿐.
여력은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여력이란 그녀가 장영웅에게 건네고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그녀는.
장영웅에게 건네주었던 힘을 회수해 가지는 않았다.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죽음을 선택한 장영웅.
그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저것은.
[후회하는 자의 피눈물]
[바깥의 존재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벼려 낸 한 방울의 눈물입니다.]
[대모]가 장영웅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그 힘.
그녀가 남겨두고 간 힘의 잔재가.
내 눈앞에 있었다.
448화 조언.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이라고 해야 할까.
{꽤나 고생한 것 같구나.}
"...아."
새하얀 공간.
그 한가운데 세워진 정자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
"보고 계셨습니까?"
{일단은.}
"그러면... 좀 도와주실 수는 없었던 겁니까?"
그런 내 말에.
묘하게 침착한 태도의 꼬맹이... 미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라는 것도 많구나. 널 숨겨 준 것만 해도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알 텐데.}
"...."
열 받는 점은.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미리내의 보호가 없었다면....'
저 [대모]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내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미리내가 바깥 존재들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숨겨 준 덕분이었지.
만약 그 보호가 없었더라면.
나는 저 서울에 입장하는 즉시, [대모]의 시선에 발각당했을 것이다.
'이번에 대모에게 들켰을 때는 대모의 능력이나 장영웅의 한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여서 저항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 상황 파악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저 [대모]가 나를 자식으로 들이고자 날뛰었다면.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속셈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리내의 보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그래도. 고생한 것 치고는 얻은 게 많은 것 같더구나.}
"그야 뭐... 그렇긴 하죠."
얻어 낸 정보도 꽤 많고.
얻은 힘도 있다.
분명 앞으로의 생존에 유용하게 쓰일 힘들이겠지.
"저는 오히려 고생한 것에 비하면 좀 작다는 생각은 들지만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뿐만이 아닐 게야.}
"예?"
{역시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구나.}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미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이번에 너를 부른 것은 몇 가지 조언을 해 주기 위함이었다.}
조언?
{잊은 건 아니겠지? 저 옛 수도의 땅에서 '리그레토'와 마주한 것은... 너뿐만이 아니었음을.}
"리그레토?"
{저 수도의 땅에서 본 존재 말이다.}
수도의 땅에서 본 존재라면.
'[대모]의 본명이 저거였나.'
다스무르나 모르잔 등과는 달리 환상으로만 마주했던 존재.
그렇기에 [식재료 감별(강화)]로도 그 진명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본래는 이름을 말해 줘서는 안 될 존재지만, 너는 이미 그 녀석과 만나고 왔으니 상관없겠지.}
미리내는 그런 존재의 진명까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대모]와 마주했던 존재들이라면.
나는 미리내가 하려는 조언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 얘기로군요."
{그래.}
확실히.
이건 나로서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바깥의 존재'니, '신격'이니 하는 존재들과 마주한 것은 나밖에 없었다.'
[다스무르]는 [다스무르 요리사의 정수]를 요리해 먹었을 때 목격했고.
[모르잔]과 마주했을 때는 저 [지하광산]의 최심부에 혼자서 도달한 상태였다.
미리내 역시 나에게만 말을 걸어 왔지.
즉.
"저 말고 다른 병사들이 이런 일을 겪는 건... 아마 처음일 겁니다."
그나마 저 [악마]의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 악마는 자신의 하수인을 이 땅에 보냈을 뿐.
그 존재를 감지한 것도 나뿐이었다.
"많이들 당황하고 있을 겁니다. 겁먹고 떠는 이들도 있겠죠."
{흠.}
"저 [대모]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 솔직히 감이 잘 안 오기는 합니다."
미리내가 이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지금 당황하고 있을 병사들을 어떻게든 안정시킬 만한 방법이 있다던가, 그런 것일 거라고.
그리 생각했으나.
{뭔가를 착각하고 있구나.}
"예?"
{말하지 않았느냐. 저 옛 수도에서 얻어 낸 게 많다고.}
그건 즉.
{네 휘하의 전사들이 리그레토와 마주한 것은 오히려 호재라고 봐야 한다.}
"어째서입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어째서 너는 이것을 불운으로 여기느냐.}
나는 이를 까득 깨문 채 입을 열었다.
"...알아봐야 좋을 게 없는 일들이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는?}
"너무 까마득하잖습니까."
저 장영웅을 상대로 늘어놓았던 넋두리는 모두 진심이었다.
"이 멸망의 원인이 사실은 전 우주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느니, 바깥에 신적인 존재들이 있고, 그 존재들이 이 땅에 간섭할 거라느니...."
{흠.}
"지금 우리는 그런 먼 얘기까지 알기에는 너무 약해요. 이 땅에서는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까마득하죠."
그리고.
그런 까마득한 사실을 알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절망이었습니다."
도무지 이 멸망을 이겨 낼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이었다.
"그런 절망적인 사실을 알아봐야 좋을 게 없으니...."
{혼자서만 알아 두기로 했다?}
"...완전 혼자서는 아닙니다. 몇몇 조장들과는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해 뒀어요. 하지만, 많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하."
그러자.
미리내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부터 생각한 것이다마는.}
"예?"
{너. 참 재수 없는 놈이로구나.}
"...."
그 말에.
나는 욱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은 강하니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흐음?}
"이 멸망이 단순히 괴물만 죽여 댄다고 이겨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더 절망적인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들의 문제까지 해결해야만 한다... 이딴 개같은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할지 알기는 하십니까?"
{안다.}
"당신은 알지도 못하면... 예?"
내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자.
미리내는 덤덤하게 답했다.
{안다고 했다.}
그러자.
미리내는... 더없이 노쇠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메마른 노인의 모습으로 답했다.
{네 말대로야. 이 멸망을 이겨 내기란 결코 쉽지 않으며... 이겨 내려고 발악하면 할수록, 더 깊은 절망에 빠질 뿐이겠지.}
"...."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걸.
미리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내 의문에는 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미리내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이겨 내기 힘든 멸망이다.}
그리고.
그 말투와 표정.
그리고 '맛'에서.
{너 혼자서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은 버리거라.}
나는....
미리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내게 건네는 이 조언 역시 진심이라는 것도.
{네 딴에는 남들을 위해서 그러는 모양이다만, 너 혼자서 짊어지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게야. 지금은 몇몇 이들에게 그 짐을 분산하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도 무겁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더 나눠야지 어쩌겠느냐.}
어느새 다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온 미리내가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짐을 나누려고 한다면, 네가 말한 대로 그 무게에 짓눌릴 수도 있겠지. 그러니... 조금씩 조금씩 짐을 나눠 주는 게야.}
"...."
{본래라면 이 시점에서 그 짐을 나누어 주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계기가 있지 않았느냐.}
그 말에.
나는 미리내가 말한 호재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대모]와 마주했으니...."
{적어도 그 녀석들은 [바깥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일들을 혼자 숨겨 온 것은.
그것을 밝혀 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컸지만.
그와 동시에 어떻게 밝혀야 할지 모르겠다는 부분도 컸다.
'냅다 병사들을 강당에 불러서 저 바깥에 대단한 존재들이 있다느니 뭐니 해도, 무슨 개소리인가 싶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병사들도... 저 [바깥의 존재]를 직접 보았다.'
아니.
보았다 뿐일까.
'그 대모가 일으킨 시간의 반복 역시 그대로 겪었지.'
내가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의 인지를 초월하는 강대한 존재가 이 땅에 관여하고 있음을 병사들은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마침 그자들은 네가 이끄는 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이들이더구나.}
나만이 알고 있으려 했던 이 우주의 절망적인 정보들.
저 100여 명의 정예병들은 그 절망의 일부를 직접 접했으며.
그렇기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공유할 만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부터 시작하거라.}
"...."
{너 혼자만이 아니라. 너를 따르는 모든 이들이... 모든 걸 알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로 이 멸망에 저항할 수 있도록 그리 만들어야만 한다.}
미리내가 말한 호재란 바로 이것이었다.
나만이 알고 있던 절망적인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그들을 시작으로 군단에 이 정보들을 서서히 퍼트려 나감으로써.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알면서도 그 절망적인 사실들에 저항하는 군대를 양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쉽게 될지 모르겠군요."
{쉽게 될 일이었으면 조언도 안 했다. 어려울 것이 뻔하지 않으냐?}
"...."
{그래도....}
"해야만 하는 거겠죠, 제기랄."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리내는 큭큭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첫 번째 조언은 여기까지고.}
"...?"
첫 번째라니.
그 말은.
"두 번째도 있다는 겁니까?"
{그래. 두 번째 조언은 시간이 없으니 짧게 하마.}
그 말대로.
주변을 둘러보자,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하얀 공간이 서서히 붕괴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름 간접적으로나마 너를 도와주려고 했다마는 지금의 네 몸 상태로는 그것조차 힘들구나. 그러니....}
"그러니?"
{일단은 그 몸 상태부터 어떻게 좀 해 보거라.}
몸 상태를 어떻게 해 보라니.
말은 쉽지만.
"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건 네가 고민할 일이고.}
그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대꾸했다.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그리고.
그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했을 때.
파지지직....
새하얀 공간이 붕괴되었다.
* * *
"...거였으면 진작에."
눈을 뜨니.
강원도로 복귀하는 중인 부대의 초소였다.
'아침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밖에는 이동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
나와 눈을 마주친 병사들이.
움찔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 병장님."
그리고.
그 병사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때 본 그 괴물에 대해서...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그 말에.
나는 어째서 미리내가 이 타이밍에 내게 말을 걸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그 괴물... 아니. 그 존재는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다른 괴물들과는 확실히 달랐어요."
"저희도 바보는 아닙니다. 신 병장님."
"그때 고개를 숙이라 명령하신 것도 그렇고, 혼자서만 저 반복을 깨달으신 것도 그렇고."
"신 병장님은 뭔가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지금이야말로.
저 조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을 테니까.
"저희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는 정보인 겁니까?"
"저희들에겐... 그 일에 대해 알 만한 자격이 없는 겁니까?"
평소의 나였다면.
여기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겠지만.
"...적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적... 이라고요?"
"당장은 거기까지만 알아 둬라."
병사들도 바보는 아니다.
나만이 아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테고.
내심 그것을 숨긴다는 사실에 서운함도 느끼고 있었을 터.
"하지만, 신 병장님!"
"너무 급하게 굴지 않아도 돼. 나머지는...."
그러니.
이번에는 확답을 주어야겠지.
"차근차근 알려 주도록 하마."
"...!"
더 이상은.
나만의 비밀로 하지 않겠노라고.
저런 일을 겪은 너희들 역시.
비밀을 알게 될 자격이 생겼노라고.
"신 병장님...!"
"감사합니다!"
기쁘게 고개를 숙이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비밀들을 점차 알리는 것이.
이 멸망을 이겨 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란 점에 대해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지만.
'저 녀석들이 기뻐해야 할 일일지 아닐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며칠 뒤.
우리 부대는 서울을 탈출해 강원도로 복귀했다.
서울에서는 여러모로 일이 많았던 만큼.
개인적으로는 꽤나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쾅!
내 눈앞에 떨어지는.
수없이 많은 서류 뭉치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처리해 줘야겠다."
"...."
아쉽게도.
쉴 만한 여유는 없는 것 같다.
449화 의사를 찾아. (1)
대외적인 군단장 역할은 김 중위가.
내부에서의 대부분 일 처리는 민재 형이 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이 길드의 진짜 장은 나다 보니.
"그리 싫은 표정 하지 말고. 이 정도는 얼마 되지도 않잖아."
"...예이."
나만이 결제할 수 있는 안건들이 몇 개 있었다.
나는 민재 형이 가져온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군단은 이제는 꽤나 대규모 단체다.
그런 만큼, 부대원들로부터도 다양한 의견이나 작전이 제안되는 편.
"일단 첫 번째, 김종두... 건축가 아저씨가 올린 제안이다."
"서울과 경기도의 접경지에 방어 설비를 만들어 주고 싶다... 라."
"지금은 우리 부대원이지만, 그 사람은 경기도 출신이니까. 서울 내부에 위험한 괴물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 만큼, 그쪽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거겠지."
"흠. 이건 오케이."
사소한 것들은 민재 형 선에서 처리를 해 주지만.
그중에서도 굵직한 일들은 내가 결재를 해야만 했다.
"다음은 해안 지역을 확보해 거리가 먼 남쪽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는 상륙 작전은 어떻냐는 제안인데...."
"바다에 어떤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이건 너무 위험하니 일단은 보류하는 거로 하자고."
"다음은 군단장을 위한 친위부대 창설 제안이다."
"...그 안건은 몇 번을 거절했는데 또 올라온 거야?"
"전과 똑같은 내용이라면 무시했겠지만, 매번 내용과 근거가 보충되고 있거든. 슬슬 어지간한 논문 급에다가, 설득력도 뛰어나서 무작정 내 선에서 자를 수 없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쯤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읽으면 설득당할 수도 있으니, 이번에도 거절이야."
"뭐, 그럴 것 같았지. 다음은."
대충 이런 식이다.
부대에 머무르고 있을 때는 그때그때 올라온 안건들을 결재하다 보니 바쁠 일도 없지만.
이번처럼 부대를 비웠다가 복귀할 때면 이렇게 일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다."
평소처럼 일 처리를 진행하고.
어느덧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단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나쁘지 않네."
나는 그 서류를 유심히 읽은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상북도 지역 탈환 및 생존자 구출 작전]
"이렇게 가는 거로 하자고."
[군단]의 다음 행보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러면, 작전 내용을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비마나 내부에 지어진 거대한 회의실.
[군단]의 전 분대장들과 조장.
심지어 군단장인 나와 대외적인 군단장인 김현석 중장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작전 목표는 간단합니다."
단상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말을 꺼냈다.
"경북 지역의 탈환과 경북 지역 곳곳에 퍼진 채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든 생존자들의 구출!"
그리고.
그 말을 꺼내고 있는 인물은 꽤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본래는 강원도가 아닌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으나.
얼마 전 눈을 뜨고, 우리 부대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인 인물.
[조준]
[중급 책략가]
현재 우리 부대의 전술 담당관을 맡고 있는 그가.
첫 번째 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는 후자입니다. 생존자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경북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 저희 이번 원정의 목표가 되겠습니다."
그 후로도.
작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경북 지역까지 병력을 보내기 위한 루트나.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차지해야 하는 거점.
각 병력들이 어디를 점령하고, 어떻게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진격해야 하는지 등.
"본래라면 이렇게 먼 지역에 병력을 보내는 공략전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먼 거리로 병력을 보내는 것부터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경기도 때야 [비마나]를 띄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다행히 저희는 상황이 좋습니다."
하지만.
[비마나]를 가동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들.
우리의 경북 탈환 작전이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경북에서 생존 투쟁을 계속해 오신 생존자분들이 협력을 약속해 주셨으니까요. 협력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일이지...."
병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린다.
그곳에는 꽤나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파와 그녀를 따라온 각성자들이 서 있었다.
"저희는 경북을 탈환하면서 가장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바로 이 생존자분들과의 협력입니다."
우리야 정보가 모자라지만.
경북 내의 생존자들은 오랜 생존 투쟁을 통해 각 지역의 위험 정보를 파악해 두었을 것이다.
그들의 협력을 받는다면, 경북 지역의 탈환은 시간은 오래 걸릴지언정 큰 위험 없이 마무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를 도와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러자.
한창 우리의 작전 설명을 듣던 유정복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을 키우길 포기했어. 힘을 키우다가 죽느니, 오래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냐는 논지였지만... 솔직히 말하겠네. 그냥... 힘을 키우기 위해 싸우는 게 무서웠던 게야."
"...길드장님."
"힘을 키우다가 스러져 간 이들이 많았지만. 사실은 우리도 그들이 옳았을 것이란 걸 알고 있네. 저 장벽이 열리고, 그 너머에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살아서 버티기만 한다니...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운에 치중하는 전략이었으니까. 운이 좋아서 장벽이 열릴 때까지 버틴다고 한들, 다른 이들이 도와줄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지....
저 서울에서 회의할 때는 자신의 선택에 꽤나 당당해 보였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저 서울이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니...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네."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려 했던 지역이 몰락해 버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저 '정부'라는 이들한테 연락이 왔을 때도 우리를 구해 달라는 대가로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네. 하지만 자네들은... 그런 것도 바라지 않는군."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말하자.
김 중장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저희는 의무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그런가. 고마우이."
뭐, 물론 정말 의무 때문만은 아니긴 하지.
인류의 생존자가 많아질수록 이 멸망에 저항할 병력이 늘어나는 셈이다.
그러니 가급적 많은 인류를 살려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차피 그 대가란 것도 대단한 대가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군단이 은혜를 입혀 둠으로써.
살아남은 이들에게 부채를 안겨 두는 편이 나았다.
저 '북쪽'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생존자들의 협력이 필요할 테니.
그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빚을 지워 두는 것.
아무튼, 그렇게.
지금 군단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저 경상북도의 탈환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 생존자들의 말에 의하면, 경북에는 생존자 숫자가 은근히 많은 편이야.'
유정숙을 중심으로 한 몇몇 각성자들이 분위기를 주도한 탓이라고 한다.
싸워서 힘을 길러 봐야 이 멸망을 이겨 낼 수는 없으니.
최대한 안전하게, 물자를 아껴 가면서 저 장벽이 열릴 때까지 버티자는 분위기.
어떻게 운이 좋아 버티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연히 단점도 있었다.
'전부 생존에만 치중한 나머지, 성장은 그다지 하지 못한 이들이라는 것.'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 장벽을 빨리 열지 못했다면 조만간 전멸했을 이들이다.
그건 장벽을 지금 빨리 연 지금도 마찬가지.
우리의 구조가 조금만 늦어진다면.
언제 더 많은 이들이 사라질지 모르는 일.
"그러면, 곧바로 원정군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경기도로 돌아가 병력을 준비하도록 하겠소."
강원, 경기, 경북.
세 지역의 각성자들이 협력해서 이루어지는 대작전.
많은 물자와 병력이 소모되고, 시간도 많이 들겠지만.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고....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일이니.
"다들 고생들 해."
"예?"
나는.
따로 내 일을 할 생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