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 *

자욱한 먼지 속에서.

나는 재채기를 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콜록, 콜록...."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수천, 수백 마리의 괴물들의 습격.

수없이 많은 괴물들이 동시에 내게 몸을 던진 거다.

심지어 이 강남을 메우고 있던 괴물들은 약한 놈들도 아니었다.

본래라면.

전투직도 아닌 나 따위는 그대로 먼지가 되어 버려야 정상일 습격.

하지만.

"제대로 못 막냐? 먼지가 무슨... 콜록."

괴물들이 달려들며 생겨난 자욱한 먼지.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쩌저적... 쩌적....

터무니 없이 거대하면서도 단단한.

검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방벽이었다.

-크뤄억....

그 방벽에는 날카로운 고드름 같은 가시들이 나 있었다.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그 고드름에 꽂힌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는 모습.

그리고.

그 방벽 앞에 서 있는 것은.

"...정말이지."

시릴 정도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스르륵....

그리고....

그 얼음의 방벽 뒤로 도열하는.

"괴팍한 주인님이시로군."

수백.

수천에 달하는 권속들이었다.

466화 권속들.

괴물들의 공격이 이루어진 순간.

그 공격을 차단한 거대한 얼음의 장벽.

{...과연.}

그리고.

그 장벽이 공격을 막아 준 사이.

스르륵....

주변의 그림자를 출구로 삼아.

다양한 형태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콰지이이익!

-쿼러어어어어억!!!

{군단장의... 보호자분들이로군.}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괴물들과,

수만에 달하는 의사의 실험체들이 격돌했다

"주인님! 주인님!"

"저 벌레 같은 것이 그래도 맞는 말을 하는데요?"

"후후. 그렇구나."

그 말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존재들이 있었다.

[정예 뱀파이어 기사]

[임나은]

"주인님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들, 귀족의 역할!"

[정예 뱀파이어 기사]

[임나훈]

"꽁무니를 뺀 저 인간들이 아니라 우리 역할이거든!"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쌍둥이 남매가.

기분 좋게 소리를 지르자.

"후후... 뭐, 그리 호들갑 떨지는 말거라."

그들 사이로.

이 권속들의 주인이자 고귀한 밤의 백작.

"당연한 얘기를 하면서, 그리 기뻐할 필요는 없는 일 아니겠느냐."

"앗, 맞네요!"

아리엘라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도 아무런 생각 없이 녀석에게 덤벼든 것은 아니었다.

저 녀석에게 솔직해지고 싶다는 생각과 별개로.

'어느 정도 할 만하다....'

그런 계산 역시.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저 녀석.

[밤의 자작, 아리엘라 비마나로 카르슈타인]

아리엘라와.

녀석이 이끌고 있는 권속들이었다.

'예전에는... 이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

본래.

나는 아리엘라의 권속들의 숫자를 제한했다.

내 권속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의 아리엘라는 자신과 유사한 형태....

즉 인간형의 생명체 밖에 권속으로 삼지 못했었다.

그리고, 인간형의 뱀파이어는 인간형 종족의 피를 섭취함으로써 그 힘을 키우고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존재.

너무 많은 권속들을 만들게 된다면.

그들을 위한 피를 수급하기 위해, 죄 없는 인간들마저 해쳐야 하는 상황이 나오고 만다.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권속은 페널티나 상관없다고 판단했기에, 그 숫자를 제한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저 경기도의 마경에 그녀를 풀어놓고.

그녀가 자유롭게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방치해 둔 결과.

그녀는 생각보다 많은 성장을 이룩했으며....

거기에 내가 약간의 조력을 더하자.

[밤의 자작, 아리엘라 비마나로 카르슈타인]

[칭호]

[카르슈타인 혈족의 자작]

[강철군단의 친위대장]

그녀의 계급은 여전히 자작이었으나.

[혈족의 부백작]

[장막의 성주]

거기에.

몇 가지 칭호가 더해졌다.

[혈족의 부백작]

[유사시의 백작의 대리인으로서 백작령의 모든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섭정이자, 총리입니다.]

[백작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사실상의 백작이나 다름없으며, 백작의 말석에게 허용되는 '성주'의 칭호가 부여됩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직접 한 말에 의하면.

-지금 저는 정당한 계승식을 올리지 못했을 뿐인... 백작이나 다름없답니다.

그녀가 가진 힘은.

백작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는 수준.

그리고, 그 힘으로 인해 생긴 권리가 바로.

[장막의 성주]

[혈족의 대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성주의 칭호입니다.]

[그림자의 장막 속, 한때 그 땅에 자리 잡았던 거대한 성채의 그림자가 그녀의 영토입니다.]

[영토를 지닌 성주로써, 사병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제약이 없어집니다.]

이것.

그녀가 가진 힘에 따라, 그녀가 다룰 수 있는 권속의 숫자에도 제한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숫자의 제약.

지금 그녀는.

그 어떤 종족이라고 한들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인간형 권속의 숫자는 제약 중이지만....'

권속을 들이는데 제약이 없어짐으로써.

녀석이 다루는 권속 대부분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숫자도, 질도.

과거와는 격을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하얀 갈기 로스페로스]

[찢어진 날개 켈렘보르]

[빛나는 비늘 쿠르단]

[검은 발톱 이나론]

그 필두가 바로.

저 마경을 지배하고 있었던 네 마리의 대마수들이었다.

[한때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자신들의 영역에서 군림하던 마수였으나, 죽기 직전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귀족의 피에 굴복해 권속으로 변화했습니다.]

[더 이상 태양 아래를 걷지 못하게 되는 대가로 생전보다도 강력한 마력과 재생력, 이능을 손에 넣었습니다.]

어쩌면.

저 경기도에서 얻은 것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은 전력.

"흰둥아, 저 건물 무너트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사자 같은 모습을 한 괴물이.

건물을 무너트려, 그 일대의 괴물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반짝아! 굴러!"

아름답게 빛나는 비늘을 가진 거대한 뱀이.

괴물들 사이에서 몸부림친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푸른빛 마력을 내뿜는, 보스급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네 마리의 대 마수.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우리 부대의 분대장들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정예 뱀파이어 기사'들.

그들은 강남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괴물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이러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얼마 전.

아리엘라는 정수아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호위대를 자처하자.

자신의 역할을 빼앗아 가는 것에 대해 불만과 불안감을 표출했다.

'지금 아리엘라의 전력은....'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야.

정수아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군단에 속한 모든 각성자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저런 어마어마한 전력을 지닌 녀석이 경계하다니.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아리엘라와 그 병력들뿐만이 아니었다.

"앗! 주인님의 주인님!"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이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사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비대한 융합체]

이 강남을 메우고 있던 온갖 괴물 중에서도 특히 거대하고 강해 보이는 녀석.

갑작스럽게 달려든 괴물들을 밀어내기 위해, 아리엘라의 권속들이 전장 앞으로 나선 사이.

그 틈을 노리고 내게 다가온 괴물이었다.

"신난 것은 좋지만...."

그리고.

그런 녀석을 저지한 것은.

"가장 중요한 임무를 잊으신 것 같군, 자작."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차가워질 듯한 한기를 내뿜는 검은 기사.

[쇠약의 저주]

기사가 괴물을 향해 손을 뻗자.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오던 괴물의 기세가 급격하게 약화되고.

파사삭....

그런 괴물을 향해 기사가 손을 뻗자.

괴물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기사는 그런 괴물에게 다가가더니.

콰직.

그 거대한 몸에 주먹을 휘둘렀다.

차갑게 얼어붙은 괴물의 몸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주변으로 비산한다.

"애초에. 첫 번째 습격에서도 주인님을 보호한 것도 나 아니었나?"

"...쯧."

"왜 자작께서 의기양양하고 계시는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

저 강대한 군세를 다루는 귀족.

아리엘라를 향해 아무렇지 않게 핀잔을 주고 있는 저 녀석 또한.

[각성자 : 마운틴]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로 한 존재입니다.]

저 경기도에서 얻어 온.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였다.

한기를 내뿜는 검은 갑옷을 입고.

거대한 대검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며.

영혼조차 얼려 버릴 듯한 냉기와 저주를 다루는 암흑 기사.

'아리엘라와는 조금 다르지.'

내 그림자 속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저 녀석은 정확히 말하면 내 권속이 아니었다.

'요리의 힘으로 굴복시킨 녀석.'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요리의 힘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행위에 대해서 꽤나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김현석 중장이 대표적.

비록 그는 내 행동을 인정해 주었으나.

그게 엄청난 악행이라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어지간하면 이 힘을 범죄자들에게만 사용하고 있었으나....

'저놈에게 사용하면서는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저놈을 요리의 힘으로 굴복시키고.

자세한 얘기를 들으면서 확신이 들었다.

'인간이냐 쓰레기냐를 따지면 쓰레기에 가까운 녀석.'

과거에 뭔가 슬픈 비화가 있었다든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뚤어졌다든가.

그딴 것도 없다.

애초에 제대로 비뚤어져 있던, 전형적인 악인.

그 강함 때문에 추종자가 생겼고.

그들을 이끌며 거대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그 세력마저 본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다 버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

'애초에 왜 저런 녀석이 한 지역의 수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나, 싶지만....'

사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콰아아앙!

그가 휘두른 칼질에.

강력한 힘을 지닌 의사의 융합체들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쓸려 나간다.

저 녀석은.

굳이 따지자면 인간보다는 쓰레기에 가까운 인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약해 빠진 잡것들이...!"

"...."

그럼에도.

놈이 가진 [폭력의 재능]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었으니까.

'저만한 폭력의 재능을 지닌 녀석은... 광일이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놈의 정신을 철저히 굴복시키고 난 뒤.

나는 녀석을 우리 부대의 무예 교관들에게 데려간 적이 있었다.

"아깝기 그지없구나."

그때.

교관직을 수행하고 있던 서환은 말했다.

"수천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 하필이면 이런 영혼을 가진 인물에게 가다니."

사실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전광일 상병이 강원도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라면.

저 녀석은 경기도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였다.

비록 강원도의 각성자들이 군단의 지원을 받아 평균적인 수준이 높다고는 하나.

경기도는...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던 지역이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독보적으로 빛났던 폭력.'

그 인성과는 별개로.

놈의 전투 능력만큼은 결코 까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나와 만났을 당시.

각성자로서의 녀석은 29레벨이었던 전광일 상병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강자였다.

광일이가 광기와 무예라는.

평범한 각성자들이 가지지 못한 힘으로 무장했단 것까지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무위.

심지어는.

'그것조차 각성자로서의 녀석만 고려했을 때의 얘기.'

그나마.

각성자로서의 녀석은 그냥 엄청나게 강한 각성자다... 싶은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종족 - 인간(?), 벨스니켈(?)]

놈은 굳이 따지자면 나와 비슷한 케이스.

아슬아슬한 인간이면서

아슬아슬한 '벨스니켈'인 존재가 되었으니까.

저 녀석의 힘은.

경기도에 나타났던 저 겨울의 거인들에게서 비롯된 것.

그리고 지금.

경기도를 점거하고 있던 그 괴물들은 모조리 사라졌지만....

'그 근원은 아니지.'

그 힘의 근원.

그들이 섬기던 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쯧...."

내 발아래.

"네놈 때문에 귀중한 내 영토가 엉망이 되었거늘... 뭐가 그리 뻔뻔하단 말이냐!"

아리엘라의 영토.

그림자의 장막 속에 있었다.

"맞아, 맞아!"

내가 가까스로 쥐어.

어떻게든 내 발아래로 내던진, '벨스니켈'의 왕.

"기껏 멋있는 성채가 나타났나 기뻐하고 있었는데...!"

"너희 때문에 30%가 못 쓰는 땅이 되어 버렸잖아!"

그놈을 급하게 집어넣은 것으로 인해.

아리엘라의 영토 [그림자 장막]의 3할이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리엘라가 괴성을 내지르며 따지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혹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고민했으나.

{그 차가운 것 말이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미리내의 말에 의하면.

{그건 네게 관심조차 없는 듯하구나.}

그 녀석은 내 발아래에 있는 좁은 땅에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냥 가만히.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녀석은 딱히 다른 악의를 품은 것도 아니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백작에 준하는 힘을 지니게 된 아리엘라의 영토 3할을 얼려 버릴 만한 존재라는 것이었으나.

이게 나쁜 얘기만은 아니었다.

"이 끔찍한 괴물 새끼들이, 감히."

'벨스니켈의 왕'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서.

저 마운틴이 그 흘러넘치고 있던 힘을 탈취해.

"이 유일한 대군주님에게 맞서다니...!"

녀석을 섬기던 20인의 대군주들.

그들과 비견될 정도의 힘을 마음대로 '훔쳐 가고' 있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으니까.

파아아아앙!!!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인데.

'경기도에서 만났던 협회장은... 분명 강했다.'

그때의 놈은 벨스니켈의 군주들에게서 힘을 받아 쓰는 처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아아악!!!

주변 반경 수십 미터가 고작 녀석의 손짓 한 번에 꽁꽁 얼어붙는 모습.

왕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을 혼자서 독차지해 버린 덕분에.

지금 저 녀석의 힘은 놈이 힘을 받아 쓰던 군주들과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아까운 일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사저?"

"비록 타고나길 악하게 태어났다 한들, 올바른 일에 쓰인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각성자로서도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놈은 나와 싸울 때.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움직임은 처음 보는 것이었네! 그 움직임은 대체 뭐지? 자네가 만들어 낸 것인가?"

내가 보이는 움직임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

[무예]

[서리빙백마검 S-]

놈은.

내가 보여 준 것보다도 뛰어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 저 녀석은.

경기도에서 만났던 협회장보다도 강했다.

'...저 녀석과 나는 능력적인 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꽤나 많지.'

[직업 : 저주의 암흑기사 Lv.36]

반쯤 인간으로서 시스템의 보조를 받고.

[종족 – 인간(?), 벨스니켈(?)]

반쯤 괴물로써.

이형의 힘을 빌려서 발휘하며.

[무예 - 서리빙백마검]

뛰어난 스승들로부터.

강력한 기술을 배워서 사용한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나는 요리사다. 전투직이 아니지.'

반면.

'저 녀석은 전투직이거든.'

그리고.

나는 저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영토의 30%를 날려 먹었다고?"

"응?"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나와 비슷한 성장을 지닌 녀석이.

요리가 아닌 전투에 특화되었을 경우에는....

"주인님의 부하라면, 싸움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콰아아아아앙!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우와... 주인님의 주인님! 저 쓰레기 녀석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조, 조금 강하다고 건방지게!"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467화 결함 (1)

콰직, 쾅. 퍼어엉....

폐허가 되어 버린 강남 전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온갖 괴물들을 이리저리 봉합한 것처럼 생긴 흉측한 합성물들과.

그에 맞서는 붉은 눈빛을 한 괴물들.

"후후...."

그 대결에서 승기를 거머쥔 것은.

"이딴 조잡한 장난감들로 귀족의 군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붉은 눈의 괴물....

내 권속들이었다.

'역시.'

지금 내가 그림자 속에서 꺼내 든 병력들.

그 전력은 비마나 등의 전력을 제외하면 군단의 모든 각성자들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저 대모가 만들어 낸 서울에서의 싸움에서.

몰려오는 군인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이 그림자 속의 전력 덕분이었다.

다만.

이 병력에도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태양에는 무력하다.'

산을 제외한 모든 전력은 '밤의 귀족'이다.

그들은 태양에 약하다는 종족 자체의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이 전력은 무척이나 수월하게 군인들을 막아 냈으나,

태양이 뜨는 순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은 하루의 반 정도는 된다.

그 시간 동안 무력하다는 것은 엄청난 단점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갖 괴물들로 가득 들어차 버린 서울.

그 서울에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저 검은 연기....'

새카만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

태양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낮에는 어느 정도 약화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햇볕이 들지 않는 서울에서 그림자 속 전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내가 굳이 저 녀석에게 싸움을 건 것도.

어느 정도는 해 볼 만하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 내 전력은 이 땅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괴물들을 말 그대로 도륙 내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조금 시간은 걸릴지언정, 저 수많은 괴물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그나마 고려해야 할 만한 건, 서울에 있는 다른 괴물들이 이 소음을 듣고 전투에 난입하는 경우 정도....

{하하. 역시 대단하군.}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군단장의 몸 안에 도는 피를 보았을 때도 생각했네만, 참으로 강대한 종족이야. 성향을 보면 마족에게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지만... 아마도 그 잠재력은 어지간한 악마들보다도 뛰어나겠지.}

"...."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잠재력만 뛰어날 뿐, 결함이 존재해.}

"뭐?"

{그 정도로는....}

그도 그럴 게.

자신의 병력들이 엄청난 속도로 갈려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말투에서는.

{많이 모자랄걸세, 군단장.}

어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위험하다.'

나는 머리가 삐쭉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저 녀석은 나를 검진하면서, 내 그림자 속에 있는 병력의 존재도 알았다고 했다.

그때는 그저 보호자가 존재하는 것 정도만 알 뿐, 그 규모는 모를 것으로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놈은 내 그림자 속에 있는 병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나를 고통 없이 죽여 주겠노라고.

그리 선언한 것이다.

{내 비록 싸움에는 자신이 없으나....}

그 순간.

파아아아악! 하고.

이 넓은 강남 땅 전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자신 있는 분야도 있는 걸 알려 주지.}

그리고.

그 마력이 내 권속들에게 사냥당하고 있는 괴물들에게 닿자.

...변화가 일어났다.

-끄... 워어억....

"...어, 어어?"

"주인님의 주인님! 이 녀석들 뭔가 이상한데요!"

녀석의 직업은 전투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냐고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나는 의사일세.}

그리고.

의사가 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처를 치료하는 것.'

권속들에 의해 처참히 찢겨 나갔던 괴물들.

이제는 시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놈들이...

-우워어어어어어억!!!

멀쩡하게 일어나.

전투를 재개했다.

* * *

분명히 시체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던 괴물들.

그 괴물들이 멀쩡히 일어나서 전투를 재개하는 모습.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강남 전체를 가득 에워싼.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이.

저 녀석의 실험체들을 치료한 것이다.

'미친!'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저 괴물들이 멀쩡하게 일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쯧. 제깟 놈들이 회복한다고 해 봐야 열등한 하등종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을."

아리엘라의 군세를 지휘하던 [정예 뱀파이어 기사] 중 하나.

이범재.

그는 괴물들이 몸을 일으켜도 개의치 않고 전투를 이어 갔으나.

"형제들이여 계속 몰아쳐...!"

바로 그 순간.

콰직!

"...!"

그의 등 뒤에서부터.

거대한 실험체의 팔이 뻗어져 나와, 그 배를 찔렀다.

"이... 열등한...."

배를 찔린 이범재는 자신의 몸을 뚫고 나온 거대한 팔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벌레 같은 것이...!"

콰직!

그가 손을 뻗자.

그를 찌른 괴물의 머리통이 터져 버린다.

"쯧, 더러운 하등종에게 공격을 허용하다니."

이범재는 정예 뱀파이어 기사.

최소한 군단의 분대장 정도의 전투력과 더불어, 그 이상의 회복력을 지닌 괴물이다.

아마 평범한 각성자들 사이에 던져 놓으면 거의 보스 몬스터 취급을 받을 만한 강자.

저쪽의 괴물들이 순식간에 치료되어 몸을 일으킨 것처럼.

밤의 귀족 또한 어지간한 상처 정도는 금세 회복하는 압도적인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

배를 찔린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상처였으며.

그를 공격한 괴물 역시 일격에 머리를 터트릴 수 있을 정도였으나....

-끄... 워어억....

"...?"

-끄... 웨엑.

"쯧. 머리를 터트렸는데도 회복한다는 건가."

한 번에 머리가 터져 나간 괴물.

그 살점이 순식간에 회복되더니, 그를 향해 다시금 덤벼든다.

"그래 봤자...!"

그럼에도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는 다시금 공격을 내질러 그 괴물을 처치하려 했으나.

콰직!

"...!"

그런 그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괴물이.

그의 옆구리를 찔러 버렸으니까.

"제기랄, 이놈은 또 어디서!"

그 괴물의 머리통도 터트린 이범재는 그 머리통이 재생되는 것을 뒤로 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그런 강자조차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진형이 이렇게...?"

진형을 이룬 채 실험체들을 토벌하던 귀족의 군세.

그 사이사이에.

끝없이 회복하는 괴물들이 몸을 일으키고, 형제들의 뒤통수를 찌르고 있었으니까.

'저 녀석...!'

그리고.

저 모습이 내가 식은땀을 흘린 이유 중 하나.

'좀 더 빠르게 병력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의 실험체들이 어느 정도 부상을 입고 나서야 저 힘을 발동시켰다.

무언가 조건이 있다든가.

발동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든가.

그런 이유였다면 좋겠지만....

아니었다.

'진형의 붕괴를 노린 거다.'

놈의 실험체들은 강남 안쪽에 모여 있었으며.

나는 이 강남을 떠나고자, 그 괴물들이 모인 가장 외곽에 서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지상에 나타난 권속들은 한곳에 뭉쳐 강남 안쪽으로 파고들었으며.

의사의 실험체들은 그런 내 군세를 막기 위해 뭉쳐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체라고 생각했던 놈들이 일어났다.'

급박한 전투다.

쓰러트린 괴물들의 시체를 한곳에 모아 둘 여유 따위 없었다.

나의 군세는 시체가 된 실험체들을 짓밟고 앞으로 진군했다.

그러니, 그 시체들이 일어날 곳은....

...자신들의 몸을 짓밟으며 전진하던 자들의 사이.

'내 군세의 발아래.'

진형의 사이사이에.

부활한 실험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흥. 그래봤자 조잡한 장난감들!"

그 모습을 본 아리엘라 역시.

진형에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달은 듯, 살짝 인상을 찡그렸으나.

"조금 귀찮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귀족의 군세가 질 일은 없...."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군세가 패배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저 녀석들이 아무리 강력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밤의 귀족도 회복력에서는 크게 꿀리지 않는 종족이다.

애초에 전투력에 차이가 큰 만큼.

진형에서 불리함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교전을 이어 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닐 거야.'

그도 그럴 게.

저 녀석은... 내 군세를 보고 결함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내 군세의 힘.

그리고 그 결함까지 알고 있는 녀석이....

구구구구구구구....

저런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 * *

서걱....

급박한 전장 속.

가장 큰 활약을 하고 있던 것은 보스급 몬스터의 힘과 무예, 시스템의 지원까지 받는 강자.

마운틴이었다.

촤아아악!

그가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괴물들의 목이 날아가고.

"...회복인가."

괴물들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머리가 터져 나가도 금세 회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불치의 저주]

[이 저주에 당한 대상을 향한 모든 치유 효과가 크게 감소합니다.]

퍼어억!

"그런 괴물을 잡아 본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

그 검에 검은 기운이 맴돌더니.

그 검에 베인 실험체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며.

크뤄어어억!!!

수십.

수백 마리의 괴물이 그 하나만을 노리고 달려들었을 때도.

"쯧."

그가 혀를 차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 순간.

사라라라라락!!!

허공에 엄청난 규모의 얼음 장벽이 자리 잡더니.

달려들던 괴물들은 그 장벽에 꼬챙이처럼 자리 잡은 날카로운 가시에 꿰뚫리고 만다.

'아아... 이거다. 이 힘.'

저 경기도에서.

군주들을 섬길 때 얻었던 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함.

자신이 휘두르는 가공할 힘에 스스로도 도취될 정도였다.

'이 힘이라면...!'

이 정도의 힘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법한 강함이었으나....

'주인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어떤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주인님이 약속하신 것보다 더 많은 은총을 내려 주실지도 모른다!'

그저 최대한 많은 성과를 올림으로써.

그 주인이 된 자에게 잘 보여, 더 많은 은총....

그러니까, 먹을거리를 제공받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서걱.

사라락.

콰직.

쩌저적....

그렇게.

수없이 많은 괴물을 베고, 얼리고, 깨트리고, 부수고, 찢으며.

이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저 이 괴물들을 베기만 하는 것이라면 수십, 수백 시간이라도 가능하지만.'

한참 전투를 이어 가던 마운틴.

그는, 한때 한 전투 집단의 수장이었던 존재답게.

나름대로 전장의 상황을 파악했다.

'저 괴물들을 회복시키는 힘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른다. 자작의 사병들이 그때까지 버텨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

밤의 귀족과 의사의 실험체들.

둘 모두 뛰어난 회복력을 지닌 존재다.

이대로라면 어느 한쪽의 회복력이 끝날 때까지 전투가 강제로 이어지겠지.

'자작의 사병들은 나름 뛰어나지만... 처치 불가능한 괴물들은 아니었으니.'

그리고.

마운틴이 보기에, 그 끝에 서 있는 것이 자작의 병력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지금 해야 할 건 이 잡것들을 처치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이 잡것들을 지배하는 괴물... 병사가 아닌 지휘관을 쳐야 한다.'

그런 생각에.

마운틴이 무기를 쥐고 행동에 들어가려던 순간.

고오오오오....

"...?"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진동.

거대한 지진이 주변을 넘어.

강남 전역을 흔들었다.

"이건 대체?"

그 정체불명의 지진에.

마운틴은 이제는 꽁꽁 얼어 제대로 찡그릴 수도 없는 미간을 찡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쩌저, 적....

그곳에서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땅이 묘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한 모습.

그리고.

쩌적!

부풀어 오른 바닥에서부터.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모습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헉...!"

전장을 압도하던 냉기를 두른 암흑기사.

그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468화 결함 (2)

어디선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던 진동.

강남 전체를 가득 메운 지진으로 변한 그 진동은 이내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던 강남의 도로마저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내.

콰아아아아앙!!!

무너진 지반 아래에서부터.

이 거대한 지진의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냐.'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갑작스럽게 바닥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괴생명체.

녀석은 괴물들을 도륙하고 있던 마운틴을 그대로 들이받으며 날아오르더니.

쿠웅....

그 거대한 팔을 뻗어.

건물들 사이를 붙잡은 채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외형은....

굳이 설명하자면 이곳에 모여 있는 다른 괴물들과 비슷했다.

서로 다른 피부색의 신체 부위들.

그 부위들을 조잡하게 엮은 실밥 자국.

흉측하고 기괴한 외모.

"...저 장난감은."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꽤나... 강해 보이는 모습이기는 하군요."

"...."

다른 괴물들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또 강력해 보였다.

{그럼....}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착각은 아니었던 듯.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네.}

파아앙!!!

거대한 괴물의 육체가.

그 거대한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속도로 아군을 향해 쇄도했다.

* * *

콰아아아아앙!!!

저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서.

내 몸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감각이었다.

아마도 본래의 내가 가져야 했지만, 몸에 쌓인 부상들로 인해 사용하지 못했던 감각.

각성자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척을 느낀다거나 마력을 느낀다거나 하는... 그런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에 의하면.

"방금 일격으로 대체 몇 마리가...!"

나와 한 다리 건너 연결되어 있던 수많은 권속이.

방금의 일격으로 먼지가 되어 돌아가 버렸다.

{죽어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어,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어어어어!!!}

콰지지지지직!!!

-혀, 형제들이여!

-도망쳐라!!!

녀석은 일격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듯.

온몸을 날려 가며 뱀파이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뱀파이어들의 생명력은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입었을 때의 얘기다.'

심장이나 뇌가 바로 뜯겨 나가거나.

재생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는다면, 뱀파이어들도 사망에 이른다.

그나마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안개화]라는 비술이었으나.

-제, 제기랄. 너무 빠...!

콰아아아앙!!!

저 괴물은.

안개화를 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아군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나마 운 좋게 안개화를 통해 목숨을 건진다고 한들, 한 번 안개화를 사용한 뒤에는 재사용까지 시간이 걸린다.

저 무차별적인 공격에서 쉽게 벗어나기란 어려워 보였다.

"...이나론!!!"

그 모습을 본 아리엘라가 웅혼한 마력을 담아 외치자.

그 부름에 응하여 곧바로 달려오는 존재가 있었다.

{예. 여왕이시여. 당신의 충견이 여기 있습니다.}

저 마경에서 검은 발톱으로 이름을 날리던 강자.

흑색 가죽의 늑대처럼 생긴 거대한 짐승이었다.

"너도 방금 느꼈겠지?"

{예...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먼지가 되어 버렸군요.}

"심상치 않은 괴물이다. 아마도...."

아리엘라는 무언가 불길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괴물들을 만든 자... [의사]의 본체겠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지금도 아군을 학살하고 있는 저 괴물을 바라보았다.

[전투력 측정기]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그 색을 확인하기 위해.

'저 정도로 강한 괴물은 본 적이 없다.'

유독 짙은 푸른 빛을 품었던 괴물들조차 저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봉인된 상태로 마주해 본 적이 전부였던 남색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

그런데.

그 색을 확인한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

그도 그럴 게.

마력의 색을 볼 수 있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색이었으니까.

[전투력 측정기]는 괴물의 마력을 측정함으로써 그 힘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마력의 질과 양을 빛의 스펙트럼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그 색은 기본적으로 무지개의 일곱 색을 따른다.

그런데, 검은색이라니.

'설마.'

무지개에는 검은색이 없지만.

내가 이 능력으로 보는 것은 실제 무지개가 아닌, 마력의 빛이다.

그리고, 빛의 스펙트럼에는 검은색이 존재한다.

...가장 외곽.

보라색조차 넘어선 그 너머에.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본 저 색이 정말 그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저 녀석은 내가 본 보랏빛의 존재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던 이들보다도 격이 높은 존재일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저게, 녀석의 본체라고?'

확실히.

녀석은 내게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죽어도 상관없는 괴물들을 매개체로 삼아 우리와 대화를 나누었었지.

녀석의 본체가 따로 있을 것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게 저런 형태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뿐.

"심상치 않은 괴물이다. 로스페로스, 켈렘보르, 쿠르단. 세 아이들과 함께 저 괴물을 막아라."

{예. 저희가 이끌던 각 일족의 정예들도 함께 동원해도 될지.}

"허가하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녀석을 제압하거라."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장의 각 구역에서 활약하고 있던 마경을 지배하던 네 마리의 대마수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이며.

저 거대한 융합체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너도!"

마수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돌려, 한 장소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고작 한 방에 뻗은 건 아니겠지?"

그러자.

무너져 버린 건물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걸어 나오는 검은 갑옷의 기사.

"...자작께선 농담도 잘하시는군."

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킨 마운틴은 그 상반신의 30% 가까이가 소실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저 녀석의 육체는 이미 인간을 벗어난 상태.

사아아아아....

그 자리에 서린 한기가.

손실된 육체를 복구하고 있었다.

"내 아이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심상치 않은 존재다. 그러니."

"잔소리를 나눌 여유도 없겠지. 나도 가세하겠네."

그런 말과 함께.

저 거대한 의사를 향해 몸을 내던지는 마운틴.

그리고, 잠시 뒤.

{여왕님의 적!}

{죽어라, 추악한 하등종이여!}

아리엘라의 권속들과 마운틴.

내 권속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을 지닌 존재들이 저 거대한 괴수와 교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식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주인님은!"

그런 내 앞을 막아서는 손이 있었다.

"여기서 지켜보고 계시지요."

"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리엘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주인님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랍니다. 다만...."

"다만?"

"주인님께서는 전투에 걸맞은 능력자는 아니시잖아요?"

내 손을 붙잡는 팔.

가녀린 팔이었지만.

그 팔에 담겨 있는 힘은 나보다도 확연히 강한 것이었다.

"너도 알 텐데. 나도 싸우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는 거."

"알지만요."

그런 내 말에.

쓴웃음을 짓는 그녀.

"그 힘에는 대가가 필요하잖습니까."

"...."

"이제야 그 대가를 다 청산해 내셨는데 다시금 무리하실 필요는 없지요. 게다가... 그 대가를 지불하신다고 한들, 제 아이들이나 저 무례한 기사보다 강해지기는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대로.

나는 전투직이 아닌 요리사다.

나름의 수단으로 강한 힘을 얻을 수는 있으나, 대가는 확실했다.

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 대가를 모두 해결하고 난 지금에 와서야 더 크게 체감하고 있었지.

"그림자 속의 [물방울]들에게 호위를 맡기시고 일단 물러나 계시길."

"하지만!"

"제 아이들과 저 무례한 기사가 쓰러트리지 못할 정도의 적이라면, 주인님이 가세해도 별 차이는 없을 거예요. 주인님이 가세해서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적이라면, 가세하지 않아도 쓰러트릴 수 있을 적일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 흑기사도 성격이 별로일 뿐 능력 자체는 인정할 만합니다. 아마 제가 자랑하는 네 아이들보다도 더 강하겠지요.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고 한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아니야."

"...네?"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내 권속들이나.

저 마운틴이 가지고 있는 힘.

그건 다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이만큼 자신만만하게 저 녀석에게 싸움을 건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력을 다할 수 있을 때의 얘기.'

내가 전투직이 아닌 요리사인 것처럼.

저 녀석도 전투직이 아닌 의사다.

내가 죽음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것처럼.

저 녀석 역시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저 녀석은 나와 굉장히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를... 안 해 놨을 리가 없다!"

"...네?"

그런 내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차가운 것이여. 나와 형제들이 저것의 움직임을 막을 테니, 네 불길한 기운을 저것에게 이용하거라.}

"그러지."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괴물.

빛나는 비늘 쿠르단과 마운틴이 작전을 나누고.

저 괴물을 공략하려 들려던... 바로 그 순간.

쩌어어억...!

"...!?"

괴물의 가죽이... '열렸'다.

실밥으로 엉성하게 봉합되어 있던 가지각색의 피부 가죽들.

그 가죽들이 갈라지고, 그 안의 선홍빛 살점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쩌저적, 저어어억....

그 살점이 길게 늘어나며.

원형의 구멍이 있는 관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관 끝에서.

푸욱!

작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묘하게 누런빛을 가진 형체.

[식재료 감별(강화)]

그리고.

그것을 본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태양충의 머리]

[태양 빛을 몸속에 보관한 뒤 터트릴 수 있는 힘을 품은 벌레.]

[태양충의 머리입니다.]

파아아아아앙!!!

그도 그럴 게.

그것에서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빛.

그 빛을 맞는 순간.

'...따갑다!'

내 피부가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뚜렷하게 느껴졌으니까!

"흥... 무슨 빛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작전대로 간...?"

그 빛을 보고 인상을 찡그린 마운틴이.

직전에 나눈 작전대로 전투에 돌입하려던 순간.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

그 빛을 정면에서 맞은 네 마리의 대마수들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내질렀다.

* * *

{여왕님!}

그 빛이 갑작스럽게 전장에 나타났을 때.

권속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몸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몸을 숨기십시오!}

자신들의 주인.

아리엘라를 향해서.

치지지직....

그 빛에 닿고 만 뱀파이어들의 몸이.

뜨겁게 불타오른다.

{여... 왕님을...!}

{지켜야만 한다...!}

괴물들은 자신들의 몸이 불타오르는 와중에도.

아리엘라를 향한 빛을 막기 위해, 단 한 발걸음도 도망치지 않은 채.

그녀를 그림자가 있는 곳까지 끌고 달려갔다.

"아아... 저 빛은."

그리고 아리엘라는.

권속들이 그 몸을 감싸 주기 직전.

자신의 몸에 잠깐 닿았던 그 빛의 흔적.

타다닥, 탁....

"증오스러운...."

흉측하게 타오른 채.

검게 불타 뜯겨 나가는 자신의 팔 가죽을 바라보며.

"천적 같으니...!"

전에 느껴 본 적 없는.

강렬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와 표정으로 저 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

권속들이 이끄는 손에 끌려가는 와중에.

아리엘라는 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괜찮으니까, 네 걱정이나 해라!"

다행히도.

나는 반은 저들의 피가 흐르고 있기는 하나.

내 피부는 뱀파이어의 것도 아니었으며, 반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진 느낌은 들었지만, 저 빛이 내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반면....

사아악....

한 번 전장을 강하게 꿰뚫었던 빛은.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금방 사그라들었다.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

{아, 아아... 여왕님... 여왕님께서는... 안전하신가....}

{...쿨럭.}

빛이 유지된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그 짧은 순간 동안 뱀파이어들이 입은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태양.'

밤의 귀족은 분명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종족이지만.

그 천적의 빛 아래에서는 힘을 잃는다.

내가 아리엘라를 공략할 당시에 사용한 힘은 신성력이었으며.

아리엘라 역시 그 힘을 껄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시인했으나.

그럼에도, 아리엘라가 자신의 천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언제나 저 태양이었다.

{말했지 않은가, 군단장.}

그리고.

그 빛에 가장 가까이서 직격당한 것은 다름 아닌.

아리엘라가 가장 자신 있게 여기던 네 마리의 대마수들.

{잠재력은 뛰어나나, 결함이 많은 종족이라고.}

"...."

{이 정도로는... 모자란다고.}

거대한 융합체가.

그 여럿 달린 손을 뻗더니.

콰직....

{나는.}

힘겹게 비틀거리는 대마수.

'빛비늘'의 몸을 붙잡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그 수 없이 많은 팔과 다리로.

일방적인 구타를 시작했다.

469화 결함 (3)

아리엘라가 자랑하는 네 마리의 마수들.

그들은 본래도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경기도에서 싸움 끝에 죽음에 이르기 직전.

아리엘라에 의해 뱀파이어가 되었고, 더 강한 힘을 얻었다.

{케, 케륵....}

콰과과과과과광....

하지만.

지금.

{그, 그만....}

그 네 마리의 대마수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퍼버버버버버벙....

{사... 살려... 다오....}

'의사'에 의한 일방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아리엘라에 의한 권속화는 분명 여러 가지 힘을 선사해 주지만.

이는 동시에 그 강한 힘에 상응하는 약점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작 수십 초.'

1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지상에 내리쬐어진 강렬한 태양 빛.

그 태양 빛으로 입은 피해가 너무나도 큰 나머지.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도 저 괴물에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었을 괴물들이 어떤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 버린 것.

저 네 마리뿐만이 아니었다.

-끄, 끄어어어....

태양 빛은 뱀파이어의 몸을 태우고, 모든 능력을 약화시킨다.

잠시 비친 태양 빛에 몸이 불타오른 뱀파이어들.

비록 그 열기로 인해 즉사하지는 않았다고 한들, 저 태양 빛은 그들의 회복력과 전투력마저 앗아 갔다.

이 피해가 회복되려면 못 해도 수 시간의 여유가 필요했다.

'아.'

...저 괴물들이 그 정도의 여유를 줄 리는 없는 일.

'느껴진다....'

나는.

전에 비해 예민해진 감각 속에서.

'나와 이어져 있던 이들이 소멸해 가는 게.'

수많은 권속이.

먼지가 되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어딜!"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저 태양 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가 아군에도 하나 있기는 했다는 점이었다.

콰아아아앙!!!

[마운틴]

[Lv.36 저주의 암흑기사]

그가 몸을 날리며 저 거대한 융합체를 타격하자.

마수들을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던 융합체 역시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마운틴은... 분명 강하다.'

저 경기도에서 봤을 때와 비교해도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강자.

저 네 마리의 대마수보다도 한 단계는 더 강한 존재가 지금의 마운틴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에 비하면 아니야.'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쩌저적....

저 거구의 괴물이 내지른.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보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공격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운틴의 육체에 금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덩치로 저 정도 속도에... 말도 안 되는 완력.'

마운틴 역시 나름대로 전력을 다해 녀석에게 맞서고는 있었지만.

다른 네 마리의 마수들과 함께 공략하려 했던 적이다.

"아, 안 돼...."

쩌적, 적....

전황은 일방적.

거대한 괴물의 전신에 돋아난 수십 개의 거대한 팔이 마운틴의 몸을 가격할 때마다.

그 갑옷에 금이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거짓말을 안 한다고?"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깨문 채 말했다.

"헛소리."

저 녀석이 내게 괴물들의 사냥과 포획을 의뢰했을 때.

놈은 분명 전투에는 자신이 없으며.

내게 부탁한 괴물들을 자신이 포획하는 것은 힘들거나, 가능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저딴 힘으로 자신이 없다고?"

지금 눈앞에서 날뛰는 저 거대한 융합체.

그 힘은 우리가 사냥해 왔던 괴물들과 비교했을 때 꿀리기는커녕.

그 괴물들 몇 마리가 와서 덤벼도 쉽게 찢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녀석이 저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놈은 내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닐세.}

녀석은 뱀파이어들을 학살하고, 마운틴을 박살 내면서도.

덤덤한 말투로 답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이 없었거든.}

"...뭐?"

{이만한 힘을 얻은 건 최근 일이니까.}

내가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히...."

먼저 움직이는 녀석이 있었다.

"전투 중에... 한눈을 팔다니...!"

"!"

저 융합체의 공격에 튕겨 나갔던 마운틴.

그가 어느새 융합체 근처까지 튀어 오르더니.

어두운 기운이 서려 있는 손을 내뻗었다.

[쇠락의 저주]

아무리 강력한 괴물이라고 한들.

시스템에, 무예, 벨스니켈의 힘을 모두 얻은 마운틴이다.

그가 발휘하는 저주의 힘 역시 전에 비해 더욱더 강력해져 있었다.

'나와 대화하느라 반응이 늦어졌다.'

저 녀석은 전투에는 자신이 없다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 듯.

엄청난 힘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이런 전투 상황에는 능숙하지 않은 것일까.

나와 대화를 나누느라 저 저주에 대한 반응이 늦고 말았다.

저 융합체에게 굳이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저 어마어마한 덩치.

마운틴이 강해지면서, 저주의 투사체의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맞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공격은 빗나갈 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쩌저적!

"...!?"

융합체의 앞에.

그 거대한 몸을 한 번에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검은 구멍이 나타난다.

"...뭐?"

그러자.

"갑자기... 어디로...."

어디 숨는 것도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던 괴물이.

단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마운틴이 당황하고 있을 때.

쿠우우웅!

"커헉...!?"

융합체는 갑자기 마운틴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더니.

그 엄청난 몸체에서 오는 무게와 그 무게에 파괴력을 더해 주는 중력의 힘을 받아.

마운틴의 몸을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파사사삭....

"이게 대체... 무, 슨...."

주변 일대의 지반이 뒤집어질 정도로 강력한 공격.

마운틴은 그 공격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듯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으나.

'맙소사.'

그런 마운틴과 달리.

나는.

방금 일어난 현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방금 저 거대한 괴물이 몸을 숨긴.

검게 일렁이는 구멍.

"저 구멍은."

그 구멍은.

바로 며칠 전.

"방랑광대의...."

내가 사냥했던 괴물이 사용한.

바로 그 이능이었으니까.

* * *

저만한 힘을 얻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저 의사는 분명 그리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으나.

방금 전 보였던 검은 구멍.

'방랑광대가 사용하던 구멍이다.'

어째서 저 구멍이 여기서 나타나는가.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으나.

저 괴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없이 거대하고 여러 괴물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융합체.

그 몸에 달려 있는 수 없이 많은 가죽 중.

[식재료 감별(강화)]

[방랑광대, 텔 로폴의 피부 가죽]

익숙한 색과 무늬로 이루어진 가죽이.

[공간을 아우르는 신비한 힘을 가진 종족, 로폴의 피부 가죽입니다.]

[로폴의 가죽에는 공간을 아우르는 신비한 이능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이능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녀석의 피부 중 한곳에.

거친 박음질로 마감되어 있었으니까.

그 가죽을 본 순간.

나는 녀석이 하려던 말을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퍼어어어어엉!!!

"큭...!"

말도 안 되게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누비는 불합리할 정도의 탄성.

저 움직임.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아바로스다.'

바로 얼마 전.

내가 사냥했던 괴물이 보여 주었던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전에는 다른 괴물들을 사냥할 자신이 없었고.

지금 저 녀석이 보이는 힘은 최근에 얻은 것이라는 말.

그건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사냥해서 녀석에게 바친 괴물들.'

그 괴물들이.

지금 저 융합체가 보여 주는... 말도 안 되게 강대한 힘의 원인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마운틴!!!"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챈 즉시.

녀석과 싸우던 마운틴을 향해 소리쳤다.

"힘줄을 잘라 내라!"

저 녀석은.

내가 사냥해 준 괴물들의 신체 부위를 이용해, 저 강대한 육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건 반대로 말하자면.

'공략법도 같다는 뜻.'

저 말도 안 되는 운동 능력이 아바로스의 힘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 힘줄을 잘라 내면 그만이다.

"주인님의 명대로...!"

다른 무엇보다도 내 명령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개조된 마운틴이다.

녀석은 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힘줄이 있을 곳을 향해 그 대검을 휘둘렀으나.

카앙!

"이건!?"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녀석의 대검이 튕겨 나왔다.

힘줄이 있어야 할 그 피부 위에는.

[모탈셀의 갑각]

두껍고도 단단한 갑각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저것도... 내가 잡은 괴물이다.'

단단한 갑각으로 인해 공략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갑각으로 전신을 보호하지는 못했기에, 몸을 뒤집은 뒤 약점 부위를 찌르는 것으로 공략할 수 있었던 괴물이었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갑각으로 전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같지만.

그 갑각이 약점 부위에만 있다는 점일까.

{감상이 어떠신가, 군단장.}

그리고.

약점을 노리던 마운틴은 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대로 허점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군단장이 그토록 믿고 신뢰하던 보호자 분들은.}

콰아아아아앙!!!

{이렇게도 나약하다네.}

마운틴은 녀석이 휘두른 주먹에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가더니.

멀리 있는 한 건물에 처박히고 말았다.

"음. 조금 충격적이긴 하네."

{하하,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는가. 그 종족은 분명 뛰어나지만, 결함이 있다고.}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녀석의 거대한 발걸음이.

{나는 달라.}

쿠웅 하고.

나를 향해 다가온다.

{보이시는가, 군단장!}

녀석은 자신이 가진 수십 개의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두들겼다.

콰직, 콰직, 콰직!!!

그 엄청난 힘에 파여 들어가는 육체.

하지만.

{이것이 내가 이루어 낸 진화!}

그렇게 파여 들어간 상처마저.

순식간에 회복되어 버리는 모습.

{내 긴 연구가 만들어 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생명이다!}

쿠웅, 쿠웅 하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녀석.

{그리고 나는! 이 연구를, 이 진화를....}

그리고.

그 거대한 괴수는 그토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군단장과 공유할 생각이었다!!!}

무엇이 서러운 것일까.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 위대한 진화에는 군단장의 성과도 컸으니 그 진화에 동참시켜 줄 의향이었어! 아니, 오히려... 군단장이야말로 나보다 더 뛰어난 진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고까지 생각했다!}

"...."

{또 누군가를 믿고, 배신당할까 두려웠지만... 군단장에게서는 나와 닮은 점이 많았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 보기로 결심했었어!}

"그건 뭐. 좋게 봐줘서 고맙네."

{하지만... 군단장께서는.}

그 흉물스러운 거인으로부터.

분노와 울분이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게 거짓말을 했지.}

"...."

{나는 더 이상 속고 싶지는 않아.}

그 거대한 수십 개의 주먹이.

뛰쳐나갈 준비를 하며, 뒤로 당겨지고.

{군단장께서는 내 진화를 위한 소재가 될 것이네.}

"...."

{도무지 해결할 수 없어 보이던 영역이 있었으나 군단장을 이용한다면 내 연구는 다음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

그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져 나온다.

{나는 군단장을 통해... '초월'을 이룰 것이야!}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압도적인 질량과 속도.

그리고.

내가 그 공격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때.

콰아아아아아앙!!!

그 주먹에 맞고 튕겨 나가는 형체.

"...아리엘라!"

내 권속의 몸이.

내 옆을 스치며, 저 멀리 튕겨 나갔다.

* * *

저 의사가 휘두른 공격.

내가 나로서는 피할 수도 없는 그 공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나선 것은 아리엘라였다.

"아리엘라!"

저 태양 빛이 쏟아진 후,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그녀는.

내가 공격을 받을 상황이 되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내 몸을 밀치고.

목표를 잃은 의사의 주먹은 갑자기 나타난 아리엘라를 향했다.

"하아...."

"...! 괜찮은 거냐!?"

나는 황급히 달려 그녀가 처박힌 건물의 잔해로 향했다.

건물의 잔해를 들어 올리던 중.

안에서 아리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입을 열 수 있을 정도의 상태라는 뜻.

나는 조금은 희망을 품은 채, 그녀에게로 다가갔으나.

"이거 참...."

"...."

"민망하게 됐네요."

그곳에 있는 것은.

하반신은 아예 보이지도 않으며.

상반신 역시 반 가까이가 소실된.

"기세 좋게 나섰는데 이 꼴이라니."

한쪽 팔과 가슴, 어깨.

그리고 머리만 남아 있는 아리엘라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민망한 꼴 보이는 게 한두 번이냐. 살아 있으면 된 거지."

"...."

"이 꼴이 되긴 했어도, 너는 죽지 않잖아? 그토록 대단하신... 귀족 출생이시니까."

그런 내 말에.

아리엘라는 뭐가 웃겼던 것일까.

나와 마찬가지로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귀족 출생이라...."

"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회복은...."

그녀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힘들게 그 입술을 벌렸다.

"조금 힘들 것 같아요."

"...뭐?"

470화 결함 (4)

밤의 귀족 생명력은 엄청나다.

심장이나 뇌와 같은 부위가 회복될 여지도 없이 순식간에 터져 나가거나.

혹은 신성력과 같은 힘으로 회복력을 저하시키는 게 아니라면.

그들을 소멸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반 조금 안 되게 뱀파이어화된 내 회복력만 봐도.

저들이 종으로서 가진 힘이 얼마나 강대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회복은... 조금 힘들 것 같아요."

그 귀족 중에서도 강한 힘을 얻었다고 했던 아리엘라는.

저리 말하고 있었다.

"너희는... 이런 거로는 잘 죽지 않는 거 아니었나?"

"원래는 그렇죠. 하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적이 괜히 천적은 아니란 거죠, 뭐...."

내가 아리엘라를 사냥할 때 사용했던 신성력조차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성을 두른 공격에 당한 상처의 회복이 늦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태양은 이들의 진짜 천적.

아리엘라는 권속들이 그 빛의 대부분을 막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양에 직접 닿은 그 짧은 시간.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 피를 가져다주면 되는 것 아닌가?"

이 녀석들의 회복력은 그 피에서 기인한다.

양질의 피를 가져다준다면, 잃어버린 힘을 회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저를 만족시키려면... 어지간한 피로는 불가능할 거예요."

"...."

아리엘라의 수준이 너무나도 올라갔다는 게 문제였다.

과거 나와 싸웠을 때 그녀의 회복에 필요한 피의 질이 1 정도였다면, 지금은 수백은 되겠지.

그리고.

반이나마 뱀파이어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밖에 돌아다니는 저 괴물들의 피는... 질이 높지는 않다.'

애초에 저 의사가 실험용으로 만들었던 놈들이다.

아리엘라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질이 높은 피가 들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권속들 역시 저 태양에 직격당해 그 힘을 대폭 잃은 상태.

권속들의 피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식칼을 들고는.

내 손목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내 피라면 어때."

"...."

"이만한 양질의 피는 어디 가서 못 구할 텐데."

그런 내 말에.

창백하게 식어 가던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열기가 띈다.

"그건...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하네요...."

그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칼을 움직여, 손목의 혈관을 베어 내고자 했으나.

"하지만."

팍.

"역시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식욕을 억제하며 말했다.

"주인님도 아실 테지만 권속의 맹약으로 묶인 저는 다른 무엇보다 주인님의 안전과 명령을 우선시하도록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주인님의 피로 회복을 하려면... 아마 꽤 많은 양을 마시게 될 거예요. 그러면 주인님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질 것이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저 밖에서 싸우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바라보았다.

"주인님이 저 흉측한 잡종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확률도 줄어들겠죠. 저는... 그런 선택은 하지 못한답니다."

"내가 강제로 먹인다면?"

스르륵 하고.

그녀의 몸통 일부분이 안개로 변하더니.

그 안쪽의 장기가 드러난다.

두근, 두근....

맥박을 치고 있는 장기.

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심장.

"저를 살리느라 주인님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녀는.

그 심장 위에 자신의 손톱을 가져다 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주인님을 살리는 길이다... 그런 판단을 하게 되겠죠, 아마?"

"...."

그 말을 들은 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후퇴한다.'

여기서 아리엘라를 잃을 수는 없는 일.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 발아래의 그림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를 [그림자 장막] 안에 집어넣은 뒤.

이곳에서 이탈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어?"

손끝에 느껴진 것은.

저 장막 안에 손을 집어넣을 때 느껴지는 그 이상한 연기에 닿는 듯한 감촉이 아닌.

딱딱한 땅의 감촉.

'장막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그림자 장막은 내가 아닌 아리엘라의 능력이다.

본래 그녀의 그림자에 있던 이계를 내 그림자 밑으로 옮겨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과거.

아리엘라와 처음 교전했을 때.

나와 그녀는 그림자 장막 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 전투가 끝난 것은.

[그림자 장막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마력이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그림자 장막이 취소됩니다.]

아리엘라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장막을 유지할 수조차 없을 때였다.

"...."

바로 지금처럼.

'침착하자. 침착하게 생각해.'

아리엘라가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를 먹여서 회복하려고 해도.

저곳에 모여 있는 괴물들 그만한 양질의 피를 구하기는 힘들다.

내 피를 대량으로 먹인다면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선택을 하면 내 목숨이 위험해지기에, 아리엘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그 선택을 회피할 것이다.

전장에서 이탈하려고 해도.

장막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저 사실들이 가리키는 바는... 단 하나.

"...잠깐, 잠깐만 기다려."

나는 그 단 하나의 결론을 분명히 깨닫고 있음에도.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피가 아니라도 널 회복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어."

"...."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지금까지 시도도 못 해 봤고, 아마 시간도 꽤 걸리겠지만 이거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주인님."

하지만.

그런 아리엘라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가세요."

"...."

내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그 하나의 결론을 내뱉었다.

* * *

"밖에서 싸우고 있는 저 무례한 기사라면... 어떻게든 주인님이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저자가 시간을 끌어 주는 동안에... 최대한 멀리 도망가셔야 해요."

"그럼 너는."

"저는... 뭐, 어떻게든 살려고 노력해 봐야지 않겠어요?"

노력이라.

밖에서는 지금도 아리엘라의 권속들이 의사의 실험체들에게 속속들이 사냥당하고 있었고.

의사는 그나마 마운틴이 붙잡고는 있으나, 그 전황도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한들.

그녀가 맞이할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안일했다.'

이 지옥도가 펼쳐진 서울에 이렇게 가볍게 와서는 안 됐고.

저 의사를 이렇게 쉽게 믿어서도 안 됐다.

사실.

어지간해선 이 서울에서 안일한 생각을 품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저 의사를 쉽게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실수를 한 이유는.

'저 의사는...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녀석과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고.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도 내게 솔직했지.'

심지어는.

지금 이렇게 적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녀석은 내게 언제나 솔직했다.

'하.'

그렇기에 믿었으나.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대모한테 자신만만하게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저 [대모]는 내가 크게 후회하는 순간이 오면 다시 나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이렇게 후회할 만한 일이 생기다니.

'내가 가는 길이 후회와 고통만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했던가.'

괜히 후회라는 이름을 단 신격이 아니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후."

그리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면 일단 여기서 좀 기다려라."

"...예?"

내가 식칼을 쥐고 몸을 옮기자.

아리엘라는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기다리라니. 그게 무슨...?"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다 알겠는데. 되는 방법이 하나 있잖아."

나는 부서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결국, 양질의 피만 있으면 회복할 수 있다는 거 아냐?"

대부분 융합체의 피는 저질이다.

내 피를 먹일 수도 없다.

"그럼 뭐, 답은 정해져 있네."

나는 씨익 웃으며.

지금도 울려 퍼지는 지진의 원인을 바라보았다.

마운틴을 향한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존재.

이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괴수.

"저놈의 피를 구해다 주마."

"...주인님!"

의사의 피라면.

이 녀석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가셔야만 합니다!"

발목을 붙잡는 손길.

아리엘라는 하나 남은 손으로 내 발목을 붙잡으며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개소리."

나는 힘없는 그 손길을 뿌리치며.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부대원 두고 안 간다."

대모의 경고대로.

벌써부터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저는 부대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 무슨 소리를."

여기서.

더 이상 후회할 만한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저번에 말했을 텐데, 너와 네 권속들이야말로...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내 친위대다."

"...."

"너 없으면 날 누가 지키라고?"

그런 내 말에.

아리엘라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그 여자와 추종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뭐?"

"주인님을 따르는 그 추종자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와 추종자들.

즉.

내 친위대가 되기를 자청했던 정수아와 부대원들.

"그들을 새로운 친위대로 삼으세요."

그들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는 말이었으니까.

* * *

정수아와 부대원들을 새 친위대로 삼으라니.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그 녀석들이 친위대 자리를 탐낼 때는 그렇게 경계하더니?"

"경계한 이유를...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전에는 경계한 적 없다느니 뭐니 둘러대기라도 했으나.

지금의 그녀는 그딴 여유도 없다는 듯.

"저 잡종이 한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

"확실히 저는 결함이 있답니다."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저와 제 아이들은... 결국은 밤의 주민이니까요."

나는 그 말이.

저 녀석들이 밤에만 활동 가능하다는 약점을 얘기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낮이든, 밤이든 간에... 결코 양지로는 갈 수 없는 입장이죠."

하지만.

녀석이 하려던 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주인님과 그 동족들에게 있어서 저는 결국 한 마리의 괴물에 불과하니까."

그 말에.

나는 그제야 그녀가 하려는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귀족의 영토가 아니고... 저희는 주인님의 종족에게 괴물이라 불리는 이들이랍니다."

그녀는 괴물이다.

그냥 괴물이라면 그나마 타협점이라도 있으나.

수없이 많은 인간.

심지어 부대원들마저 학살한 전적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땅에서만의 얘기도 아니에요."

그렇기에.

그녀를 수용하는 데에는 많은 거부 반응이 있었다.

"제 고향에서도...."

그 후로도.

소수의 간부를 제외한 부대원들에게 뱀파이어들의 존재는 기밀로 다뤄졌다.

"귀족들은 음지의 존재로 여겨졌거든요."

나 역시.

군단의 전력과 권속의 전력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간들은 다르잖아요?"

"...."

"아주 착실하게 양지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주인님에 대한 충성도 확실해 보이더군요."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은 강하다.

그만한 힘을 가진 그녀가 어째서 정수아와 그 일행들을 경계했는가.

처음에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친위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군단장을 보필하는 이들."

하지만, 이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무력 하나만을 내밀며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결국.

밤의 귀족은 밤... 음지에 속하는 존재.

"그 외의 부분에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양지에 속하는 우리 부대와는.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지금이야 제 무력이 커 보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게 저희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뿐. 지금같이 태양에 노출되고 만다면... 저는 그 무력마저 하찮아지고 말죠."

"...."

"모자란 무력도... 저 무례한 기사가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을 테니... 무력은 저 기사에게, 보필은 그 여자에게 맡기세요."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그녀의 말을 덤덤히 들었다.

"괴물의 힘을 다룬다는 건... 군단 같은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단체의 장에게는... 위험한 약점이잖아요? 지금 주인님께서는... 그 약점을 위해, 다른 자격 있는 이들을 멀리하고 계시죠."

내가 친위대 안건을 거절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부대원들을 곁에 둔다면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의 힘을 사용하는데 제약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제 욕심 때문에 이 역할을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뻔한 일이잖아요?"

"...."

"이런 위험한 요소는 떨쳐 내고... 더 어울리는 이들을 곁에 두도록 하세요."

그 말에.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그녀의 말에 반박하고자 했으나....

"개소리...!"

"더 어울리는 이들이라."

그 순간.

내 말보다 먼저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 점은 고맙네요."

"...?"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해요. 오히려 백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지만... 더 나은 게 있다고 해서, 굳이 덜 나은 걸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곳에 있는 것은.

"은인을 곁에서 보필하기 위한 인력은."

"너희들...."

이미 진작에 전장을 이탈했다고 생각했던.

"많으면 많을수록 좋답니다."

"왜, 여기에...?"

정수아와 부대원들이었다.

471화 호위대 (1)

"더 어울리는 이들이라. 그렇게 생각해 주신 점은 고맙네요."

아리엘라의 상처는 심각했으며.

그 힘의 손실이 너무 큰 나머지, 회복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해요. 오히려 백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시간이 모자라거나, 애초에 불가능한 방법들뿐.

"하지만... 더 나은 게 있다고 해서, 굳이 덜 나은 걸 떨쳐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저 의사를 향해 덤벼들기라도 함으로써.

그 피를 취해 올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만.

"은인을 곁에서 보필하기 위한 인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답니다."

지금.

그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너희들, 왜 여기에...?"

나와 함께 이곳에 온.

백 명이 조금 안 되는 군단의 각성자들.

그들이.

내 명령을 어기고, 전장으로 복귀했으니까.

* * *

'분명 떠난 기척도 느꼈는데.... 언제.'

분명 전장을 이탈했다 생각했던 이들.

그들이 이 전장에 다시금 복귀했다.

"내가 분명히 명령했을 텐데."

하지만.

그들을 보는 내 표정은 결코 밝지만은 못했다.

"이 전장을 떠나라고!"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손을 뻗어 내 뒤에 있는 인물의 몸을 가렸다.

내가 저들의 복귀를 명령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든가, 뭐 그딴 이유는 당연히 아니고.

'아리엘라를 들켜선 안 됐으니까.'

그녀의 존재는 부대원들에게 기밀이다.

그렇기에.

뱀파이어들의 전력을 활용하기 위해 그들을 물린 것이었다.

"은인께서 내린 복귀하란 명령을 어긴 점,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내게 충성을 보이던 이들이 내 명령을 거부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하지만, 나중에 영창을 보내든 뭘 하시든."

정수아와 그를 따르는 부대원들은 앞으로 나서더니.

내가 가리고 있던 여자.

아리엘라의 앞에 섰다.

"은인을 두고 그냥 가라는 명령은."

그리고.

내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막아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

스윽.

"암만 생각해도 못 들어주겠더라고요."

그들은 군단원들에게 보급된 군용 대검을 손에 쥐더니.

그 대검으로 자신들의 손목을 살짝 그었다.

"무슨...?"

주륵....

짙은 마력을 품은 강자들.

그들의 그림자를 향해 흘러내렸다.

* * *

아리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양질의 피, 그것도 대량으로 필요했다.

나 한 사람의 피로는 그녀를 회복시킬 정도의 양이 나오지 않고.

설령 살릴 수 있다고 한들, 내가 빈사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기에.

아리엘라는 그 선택지를 거부했다.

하지만, 지금.

주르륵....

복귀한 부대원들.

그들의 손목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별거 아닌 양일지도 모르지만.

거의 백 명에 가까운 부대원들이 동시에 뿌리는 피의 양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수아는 29레벨에 달하는 강자.'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호위대의 인원들도... 그런 정수아가 고르고 골라서 엄선한 정예들이지.'

피의 질도.

그 양도 충분했다.

"커... 헉...."

그 피가 쏟아지자.

죽은 듯 굳어 있던 아리엘라가 급격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

"예. 군단장님."

"이 녀석이 누군지 모르는 거냐?"

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덤덤히 피를 흘리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압니다."

"안다고?"

"예. 그때 그 뱀파이어 여왕 아닙니까."

그 말을 꺼낸 부대원의 얼굴은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423대대부터 함께했던 이 군단의 창립 멤버들 중 하나.

애초에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손꼽히는 정예인 만큼.

군단에 소속된 시절도 긴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성철 아저씨를 직접 찢어 죽였던 그 여왕."

"...."

"그 외에도. 지환이 형님이나, 혜선 누님... 많은 사람들이 이 녀석과 이 녀석이 이끄는 괴물들에 의해 죽었었죠."

뱀파이어 토벌전.

그 벙커의 공략전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우리 부대가 군단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군단을 하나로 묶어 준 키워드는 전우애였다.'

같은 부대 소속이 아닌 이들에게는 조금 차가워질지언정.

부대원들 간에는 그 무엇보다도 끈끈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

'아리엘라는 그런 부대원들을 죽인 적이야.'

아리엘라에 대한 부대원들의 증오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괜히 이 녀석들 수하로 들일 때 민재 형이 반발한 것이 아니고.

괜히 이 녀석의 존재를 부대원들에게 숨긴 게 아니다.

만약 들킨다면.

내가 가진 군단장의 지위마저 위태로울 수 있을 정도의 큰 리스크.

하지만, 그럼에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이 녀석들은 몰라서도 아니고.

아리엘라의 정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그녀에게 자신들의 피를 주고 있었다.

"은인이시여."

내가 그 사실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정수아가 나를 부르더니, 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 기억하십니까?"

"그야. 우리 부대원이니까. 다들 얼굴이나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지."

"그렇다면 그녀가 언제 우리 부대에 합류했는지도 아십니까?"

"그건."

그 말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억을 파고들었다.

"...어?"

그리고 나서야.

한 가지.

믿기지 않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괴물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간 목장'을 만들 예정이라고.

과거.

아리엘라와 뱀파이어들을 토벌했을 때.

그 아리엘라가 붙잡아 두고 있던 인간들이 있었다.

-거기에 쓰기 위해 따로 빼놓은 이들이니 죽지 않게 잘 관리하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나중에 정수아의 인도로 부대에 합류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정수아가 가리킨 저 여자가 바로.

"그때, 인간 목장이 어쩌고를 설명해 줬던 그...!"

"아아... 기억해 주셨군요."

당시에.

벌벌 떨면서 내게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저를 잊지 않아 주신 점, 정말 큰 영광입니다. 군단장님. 신아영이라 합니다."

아리엘라가 만들고 있었던 인간 목장 출신의 부대원.

아리엘라는 사람들을 속여서 유인하고.

"하지만, 그렇다는 건."

쓸모없는 이들은 죽여 가면서 그들을 가축으로 키웠다.

장기적으로 피를 수급할 수 있는 먹잇감으로써 목장을 만들었다.

"네게 아리엘라는 원수일 텐데."

"아, 음. 그거야... 네. 맞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동료들도 많이 죽었을 것이고.

그녀는 우리의 구출이 없었다면 저 인간 목장의 가축으로써 평생을 살게 되었겠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보기만 해도 손발이 떨리네요. 하하...."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대로.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리엘라에게 전우를 잃은 부대원들과.

아리엘라에게 직접 피해를 입은 저 여자까지.

왜 아리엘라를 살리려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자매님... 이 아니라, 정찰조장님이 이미 말씀해 주셨잖아요."

"뭐?"

"군단장님을 보필할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그 이유는.

꽤나 간단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군단장님이 저희더러 복귀하라 명하셨을 때...."

그녀는.

몇 분 전의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열었다.

"일단은 물러나긴 했지만. 차마 그대로 복귀할 수는 없었거든요."

"...."

"저희 임무는 군단장님의 호위. 그런데 호위 대상을 두고 떠난다니... 아무리 호위 대상자 본인의 명령이라고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주변에 머무르길 선택했죠."

그 말에.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애초에... 이 근처에서 이곳을 관찰하고 있었던 건가."

"네. 명령을 어긴 점은 정말 죄송한 말입니다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이곳을 관찰하는... 그런 기척은 못 느꼈는데."

나도 바보는 아니다.

저 의사의 치료로 인해 내 감각은 전보다도 예민해진 상황.

나는 분명 저들이 전장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뱀파이어들을 꺼냈다.

저들이 근처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척 또한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하, 그야. 군단장님의 위대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요."

그녀가 나머지 한 손을 스륵 하고 흔들자.

나는 순간적으로 그 손이 완전히 사라진 듯한 감각을 받았다.

"그래도, 저희 본업은 '정찰조'랍니다."

괴물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정찰을 해내야만 하는 이들.

즉, 암행에 특화된 각성자들.

"기척을 숨기고 몰래 무언가를 관찰하는 게... 저희 전공이거든요."

아무리 감각이 예민해진 나라고 한들.

탐색에 특화된 스킬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맘먹고 숨은 저들을 찾아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뱀파이어들도 그때 다 봐 버렸겠군."

"네."

"아무렇지도 않았나? 특히 너는...."

"그야, 충격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뱀파이어를 사용하는 나를 보고 놀란 듯했지만.

그 놀람에 빠져 있을 틈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강한 빛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하더군요."

뱀파이어들의 교전이 이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저 태양충의 빛이 전장을 감쌌으니까.

"전황이 이상해졌으니, 더 이상 숨어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급하게 이곳으로 달려왔죠. 하지만...."

"하지만."

"달려오기 직전에, 군단장님의 명령대로 물러나야 하나 아니냐를 두고 망설이느라 대처가 조금 늦어졌답니다."

그리고.

말을 잇던 그녀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던 중에, 저 거대한 괴물이 군단장님을 공격하는 걸 보았죠."

"...."

"저희는 대처할 수도 없는 먼 거리였어요."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군단장님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호위대인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절망하며...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피를 받아먹고 있는 괴물을 향했다.

"이 괴물... 아니. 이자가 하는 행동을 봤답니다."

"...."

"호위대인 저희가 군단장님의 곁을 떠나 있을 때, 이 괴물은... 몸을 던져서 군단장님을 구출하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무서운 얼굴이지만, 뭐 어쩌겠어요."

"...."

"그런 걸 봐 버렸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설명이 끝났지만.

나로서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나를 지키려 했다고 해도... 아리엘라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저 손 떨림이나.

다른 부대원들의 표정만 봐도.

아리엘라에 대한 증오나 분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확실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 내 의문에.

정수아는 덤덤히 답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은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도, 어떤 비밀을 알게 되더라도 그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을... 그런 믿을 만한 인물들로만 호위대를 구성하겠노라고."

"...."

저들은.

상대가 아무리 큰 원수라고 한들.

어떤 큰일이 생긴다고 한들.

'나를 믿어 주는 이들....'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얼마 전에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 네 부하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

- ....

- 그 아이들은 너만 믿고 네 밑에 모인 아이들이야. 그리고 그 아이들도 네가 자신들을 좀 더 믿어 주길 바라고 있을 거다.

내가 부대원들에게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미리내는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대로.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거. 이제 믿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내가 혼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 부대원들은 내 생각보다도 좀 더 강한 인물들이었던 모양이다.

"많은 부대원들을 죽이고, 그보다도 많은 인간들을 학살한... 뱀파이어들의 수장."

어느덧.

부대원들의 피가 멎어 들기 시작하고.

"본래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적이겠지만."

정수아와 부대원들은.

헝겊을 꺼내, 자신들의 손목 상처를 닦아 내며 말했다.

"군단장님을 구한다는 큰 공을 달성하였으니. 이번 한 번만은 봐주도록 하겠습니다, 여왕."

"...흥."

그리고.

그런 그들의 중심에서.

"이렇게 해 주면 좋아할 거라든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큰 착각이란다, 아이야."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지레짐작하지 마시길."

전신의 70% 이상이 소실되어 있던 내 권속.

아리엘라가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472화 호위대 (2)

"...."

"...."

피 속에서 몸을 일으킨 아리엘라.

그리고 그녀를 위해 피를 흘린 정수아와 부대원들.

그들의 시선이 교차한다.

"...흥. 약해 빠진 것들치고는 좋은 공을 세운 건 인정해 주마."

나로서는 어떻게 저 병사들이 아리엘라를 살리는 선택을 한 건지 아직도 의아할 지경이다.

아리엘라가 이번에 나를 살린 것은 사실이지만.

나와 아리엘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까지 알기는 힘들 것이다.

"흥, 그건 우리가 할 말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아리엘라를 살렸다.

"자매님의 언질이 없었다면 죽게 내버려 뒀을 테지만... 군단장님을 구한 공이 있으니 넘어가겠다."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자매님의 언질이라는 건 즉.

'정수아.'

아무래도.

그녀가 이곳에 오는 과정에서 저들을 설득했기에.

대원들이 아리엘라를 살린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것.

'아리엘라가 내 부하라는 걸 눈치챈 건가? 하지만... 어떻게?'

여러모로 의아한 점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당장은 거기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건방지구나. 맘 같아서는 조금 예절을 지적해 주고 싶지만...."

아리엘라는 병사들을 잠시 노려보더니.

이내 등을 돌리며 행동에 들어갔다.

"나의 기사들이여!"

아직도 완벽해 보이지는 않지만.

컨디션을 상당 부분 회복한 것으로 보이는 아리엘라.

사아아악!

그녀가 손을 뻗자.

그곳에서부터 핏방울이 뻗어 나가고.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니, 일어나라!"

아비규환의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전장.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정예 뱀파이어 기사]

[임나은]

[임나훈]

[이범재]

"주인님의 부름에 응합니다!"

전장의 어딘가에서 불탄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이들.

정예 뱀파이어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마리의 대마수들은 그 덩치만큼 회복에 필요한 피도 많다.'

하지만.

인간형의 뱀파이어들은 아리엘라의 힘으로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어떤 종류의 생명체라도 권속으로 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아리엘라의 힘은... 아리엘라와 유사한 형태를 한 이들에게 더 크게 적용되니까.'

그렇기에 [정예 뱀파이어 기사]는 인간형만 만들 수 있었으며.

지금 이렇게.

적은 피로도 그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완전히 소멸한 고위 기사는 없구나."

{예. 태양 빛에 직격당했을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떻게든 기어서 괴물들의 공격을 피했나이다.'}

"잘했다."

아리엘라는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정예 뱀파이어들을 향해 명령했다.

"알다시피, 전황은 우리 군세에게 좋지 않다. 그러니!"

뱀파이어들의 생명력은 그 피에서부터 비롯된다.

비록 아리엘라 정도의 괴물을 살리려면 그 질 또한 중요하다고 한들.

"저 잡것들의 피를 이 땅에 흩뿌려라!"

저 수많은 권속들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쓰러져 있는 나의 군세들, 너희의 형제들을 다시금 일으키는 것이다!"

"충성!"

파악!

정예 뱀파이어들이 전장을 향해 이동한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엄청난 강자.

저들이 싸우면서 흘리는 피가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들을 일으킬 것이다.

아예 소멸한 뱀파이어들의 숫자도 상당할 것이고, 복구 가능한 전력도 많지는 않겠지만.

전멸했다 생각했던 병력들의 복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거기!"

그리고.

아리엘라는 그 손톱으로 정수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있는 재수 없는 아이야!"

"...저 말인가요?"

"그래. 너 말고 재수 없다 부를 만한 이가 누가 있단 말이냐."

정수아가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아리엘라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는 최대한 빠르게 주인님을 모시고 이 땅을 탈출하거라."

"탈출... 이라고요?"

"네가 비록 재수 없는 아이인 건 사실이지만, 주인님을 향한 충성만은 사실인 듯하더구나. 비록 능력이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상황이 마땅치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주인님의 호위는 네게 맡기도록 하마."

그런 아리엘라의 말에.

정수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려는 거죠?"

"흥. 잃어버린 병력이 상당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군세를 추스른 뒤, 주인님께서 완벽히 안전해질 때까지 저들을 붙잡고 있어야겠지."

아리엘라는 여전히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된 일이야. 무례한 기사가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는 있으나, 사실 주인님이 혼자서 탈출하기에는 이 땅이 너무나도 위험했다. 하지만...."

"저희가 왔으니, 이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다... 그건가요?"

"그래."

아리엘라는 그리 말하더니.

낮잡아 보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 전장에서 너희는 큰 도움도 되지 못하지 않느냐."

"...."

그 말대로.

정수아와 그 부대원들은 상당한 고레벨이긴 하지만.

그들의 전공은 암행과 정찰이다.

'저 밖에서 펼쳐지고 있는... 저런 전면전이 특기는 아니지.'

저들을 복귀시키고 아리엘라의 병력을 꺼내 든 게 괜히 한 일은 아니란 거다.

아리엘라의 전력이 온전했을 때도 저 의사를 막기란 힘든 일이었다.

지금은 그 전력 대부분을 잃은 상황.

부대원들이 합류해 봤자, 정말 잘해 봐야 도망가는 시간을 조금 늘리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저 흉물스러운 것은 주인님에게 분노를 품은 듯하니, 누군가는 저것을 막고 있어야만 한다. 그건 내가 담당하도록 하마. 그러니 너희는 주인님을 데리고 가거라."

"...."

"무엇 하느냐? 빨리 행동하지 않고!"

아리엘라가 정수아를 노려보며 소리쳤으나.

그 말에.

"흐음... 도망이라."

"...?"

"그건 조금...."

정수아는.

아리엘라의 명령을 듣기는커녕.

"마음에 들지 않는걸요...?"

"뭐라?"

그리 말했다.

"여왕님, 당신이 어쩌다가 은인을 섬기게 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수아는 그저 덤덤하게.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은인의 심중을 파악하는 능력은... 조금 모자라신 듯하네요."

옅은 미소가 섞인 얼굴로.

그리 말했다.

* * *

내 심증을 파악하는 능력이라니.

나조차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이대로 도주하는 것도, 확실히 나쁜 선택지는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수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은인께서 원하시는 건, 그런 일이 아닐 거예요."

"...."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이대로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다.

저 의사가 가진 위협은 물론.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의문들 역시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상황.

이렇게 찜찜한 상태로 도망가고 싶을 리가 있나.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이 전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은 주인님께서 그걸 바라셔서가 아니라, 그게 최선이기 때문이야."

참 분한 얘기긴 하지만.

당장 저 거대한 의사의 본체를 상대할 방법은 없다.

아리엘라의 권속들이 힘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겠지.

아리엘라의 말대로, 당장은 이 전장에서 도주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아니면. 주인님께서 더 싸우기를 원하는 이상 승산 없는 싸움이라도 목숨을 내던져야 한다. 그리 말할 셈이냐?"

"설마요. 그런 건 은인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겠죠."

"그러면? 나는커녕 내 권속들보다도 약할 너희들이 저 괴물을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아리엘라가 날카로운 눈으로 정수아를 바라보자.

정수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 말을 인정했다.

"뭐, 저기서 싸우고 있는 괴물들... 여왕님의 아이들이 꽤나 강한 건 인정해요. 확실히 저희들보다는 잘 싸우는 편이겠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지만."

그녀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왕님의 강함은 저희하고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강함인 것 같네요."

"...?"

"그냥. 강하기만 할 뿐인 괴물... 강함을 가진 괴물이 수십, 수백 마리씩 모여서 만들어지는 힘. 분명 강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한 적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밀리고 말 뿐인."

푸훗.

"단순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힘."

"네놈...!"

정수아는 비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일까.

대놓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100의 힘을 가진 괴물이 1,000마리가 모여서 10만이 되는 그런 강함. 확실히 강하긴 하지만요."

아리엘라는 강력한 괴물이다.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그녀가 분노를 표출한다면.

일반적인 이들은 그 마력에 담긴 흉흉함만으로도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더 강한 적이 나오면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이나 치자고 말할 수밖에 없는, 딱 그 정도 강함이랄까...?"

"감히...! 한 번 공을 세웠다고 기어오르는 것이냐...!"

"그러니, 보여 드릴게요."

정수아는 그런 아리엘라의 기세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각성자들의 강함이 어떤 식인지."

그녀는 그리 말하더니.

아리엘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은인께서 제게 직접 전해 주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저와 은인의 힘은... 궁합이 좋다고."

다름 아닌.

내 앞이었다.

"정말 영광스러운 말이었습니다."

"...정수아?"

"그리고 은인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파악! 하고.

뻗어 나온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붙잡는다.

"제힘은 은인에게 도움이 될 거랍니다."

물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분명 나를 향하고는 있었지만.

묘하게,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

어긋나 있는 초점.

그 눈은 분명 아름답지만.

묘한 광기가 느껴져 두려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아, 과연.'

그리고.

나는 그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그녀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엘라의 강함은.

100의 힘을 가진 괴물이 1,000마리가 모여서, 10만의 강함을 만드는 단순한 강함.

하지만.

각성자의 강함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

[스킬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스킬 - 정령안이 발동합니다.]

하나하나의 힘은 10에 불과할지언정.

그런 각성자들이 10명이 모이면.

[요리사의 눈과 정령안의 시야 공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가진 다양한 능력이 시너지를 일으킴으로써 수십, 수백만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각성자의 강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