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요리사의 눈과 정령안의 시야 공유가 이루어집니다.]
순식간에 급변하는 시야.
나는 이것이 정수아가 다루는 정령.
방울이의 것임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시야를 눈에 담았을 때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특별한 건 안 보이는데?'
방울이는 강남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아마도 저 '의사'가 방울이를 감지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겠지.
이 강남이 보이는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그 시야에 보이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전투의 소음을 듣고 주변에서 몰려들고 있는 기괴한 괴물들의 모습 정도.
-집중해 보시길.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뿐인 것 같다.
-정령안이라 함은... 정령의 눈을 빌리는 것. 그리고 정령의 눈은 인간의 눈과는 다르답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지요.
"...."
-저 역시 스승님을 통해 배우기 전까지는 몰랐던 영역... 하지만 그 정령의 시야를 경험하는 순간.
-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시야가 급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 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답니다.
정수아가 그 시야를 인도하고 있는 거다.
'용케도 형체가 남아 있는 물탱크... 물기로 젖어 있는 괴물의 둥지, 지하수, 비가 온 뒤 고여 있는 물, 한강....'
얼마 전에 보았던.
폐허가 된 여의도의 풍경까지.
물리적 시야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인해 느껴지는 존재들.
정령이 보는 풍경이라는.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정보량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들어온다.
'끄륵....'
얼마 전.
그녀가 한 번 가볍게 보여 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그로 인해 뇌가 터질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이를 악문 채 그녀에게 물었다.
"뭘, 보여 주려는 거지?"
-은인께서 저 괴물의 시술을 받으실 때.
그때.
그 시야가 순식간에 어디론가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아아악! 하고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시야.
-그 수술실 근처에는 물기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아마도, 저 괴물은 수술실의 환경에 꽤나 집착이 강한 것이겠죠.
파아아악! 하고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시야.
그 시야가 향하는 방향은....
'지하?'
아래였다.
-하지만....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저는 그때도 은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뭐?"
그런 말을 꺼냈다.
'방울이의 시야는 결국 물기가 있는 곳에서만 발동한다.'
저 의사가 만든 영역에 물기가 없다고 한다면.
그 능력 또한 발동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아직 제게는 허락되지 않은 수준의 영역이지만... 스승님에게 조르고 졸라서 배운 게 있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물기가 없는 곳에서도 내 위치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나에겐 조금 익숙한 것이었다.
-인식을 조금 바꾸는 것이죠.
하워드는 인간을 요리 재료라고 보지 못했기에.
인간에게 [식재료 관리] 스킬을 발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을 상대로도 하워드를 통해 얻어 온 스킬을 발동할 수 있었다.
-물이라는 것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죠.
각성자의 힘은.
그 각성자 본인의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인식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흐르는 물에 한정되어 있던 시야를 고인 물까지 확장하는 것 정도였죠. 하지만 저는 거기에... 정말 큰 무리를 해서, 딱 한 가지를 더 추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딱... 하나?"
그리고.
급격하게 땅으로 파고들던 시야가 어느 곳에서 멈추었다.
-피.
"...?"
그곳에 있는 것은.
하나의 작은 병.
그 병 안에 들어가 있는... 붉은색 액체.
-크게 무리를 한 결과... 단 한 사람의 피를 시야에 두는 데 성공했죠.
얼마나 깊은 곳인지 모를 지하.
어째서 저 의사의 영역인 강남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는 건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저 붉은 액체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진기를 채울 수는 없네. 하지만... 그 페널티를 대체할 만한 방법은 있을지도 몰라.
얼마 전에 있었던 마지막 만남에서.
저 의사가 내게서 채취해 갔던 것.
-군단장의 피. 그 피가 필요하다네.
나의 피였다.
'어...? 잠깐만.'
그렇다는 건.
나로서는 조금 알고 싶지 않은.
꽤나 불편한 진실이 섞여 있는 셈이지만.
'아니, 아니지.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래.
당장 중요한 것은.
-그리고... 보이시나요?
"그래."
내 피가 자리 잡은 지하 깊은 곳.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식재료 감별(강화)]
[요리사의 눈]
[세라진의 몰락사제]
[광기에 물들어 폭주한 끝에 소멸한 옛 신, 세라진을 섬겼던 사제입니다.]
작고 왜소한.
한 생명체의 모습이었다.
473화 호위대 (3)
쿠우웅!!!
"커헉...."
강한 충격에 튕겨 나가는 인간의 형체.
그리고, 그 인간의 형체 위로.
빠지직....
수십 미터는 되는 크기의.
거대한 괴물의 발이 올려진다.
{이제야 그 차가운 힘도 다한 것 같구나.}
"끄륵...!"
{참으로 질긴 소재였어.}
빠직!
"컥...."
거인이 힘을 더 주고 그 몸을 짓밟자.
발밑에 있던 기사의 몸이 산산조각 나고.
데굴....
그 머리통만이 남아 지면을 구른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고생해서 얻어 볼 만한 소재라는 생각은 드는군.}
"놔, 놔... 라...."
거대한 괴물의 수많은 손 중 하나가 그 머리를 집는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의 손에 잡힌 마운틴의 머리를 자신의 몸쪽으로 가져가는 의사.
{자네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은 아닐 테니.}
"머, 멈춰...!"
마치 입처럼 쩌억 벌어지는 의사의 몸.
그 안쪽으로 마운틴의 얼굴이 '수집' 당하려던....
하던 바로 그 순간.
"무례한 기사여!"
서걱-
{...!?}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그 손을 베어 낸다.
그리고.
그 손을 베어 버린 장본인이 땅으로 떨어지는 마운틴을 향해 외쳤다.
"이 땅의 그림자를 장막으로 삼았노라!"
손이 베임으로써, 그 손에 쥐어져 있던 마운틴의 머리도 땅을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머리가 땅에 닿았을 때.
본래라면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이 정상일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르륵....
"그 안에 들어가서, 네 옛 왕의 힘을 보충해 오너라!"
그 얼굴이 지면에 자리 잡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는 벨스니켈들이 섬기던 그들의 왕이 있다.
"알겠소, 자작...!"
자신의 힘을 훔쳐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왕이.
{...살아 계셨나. 회복력만큼은 인정해 주어야겠군.}
"흥. 너 같은 잡종의 인정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음이야. 게다가."
아리엘라가 휘두른 공격으로 인해, 의사의 팔이 떨어져 나가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수십 개나 존재하는 팔 중에 하나에 불과했으며.
그것마저도.
스르륵.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구나."
잘려 나간 지 30초도 되지 않아.
완벽하게 회복되는 모습.
뱀파이어들의 회복력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기이한 회복력이었다.
{용케 살아서 돌아온 것은 대단하지만... 보호자 분.}
그리고.
의사는 그렇게 완벽하게 회복된 주먹을 뒤로 당기더니.
{겨우 살아남은 목숨이라면, 좀 더 소중히 하는 것이 좋을걸세.}
파아앙!!
그 주먹을 엄청난 속도로 내뻗는다.
'...쯧!'
아리엘라는 그 주먹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풍압만으로도 자신의 피부가 뜯겨 나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직접 싸우는 건 내 장기가 아니다마는.'
아리엘라가 가진 힘의 핵심은 그녀가 이끌 수 있는 군세에 있다.
그 군세는 분명 강력하지만, 그녀 본인의 무력은....
아무리 준남작 시절이었고, 신성력에 노출된 상태였다고는 한들.
과거의 신영준과 어느 정도 우격다짐이 성립하는 수준이었다.
백작에 가까워질 정도로 승작을 거친 지금이니.
그녀의 본신의 무력 또한 상당히 강해진 상태이기는 했다.
아마 저 대마수들과 비교해서 크게 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군세를 이끄는 입장인 아리엘라가 쓰러지는 순간, 모든 군세가 힘을 잃는다.
어지간해서는 아리엘라가 전면에서 싸우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그녀가 전면으로 나섰다.
"네놈 때문에 내 권속들이 힘을 잃었으니."
아리엘라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나선 것인 듯했다.
가까스로 피한 융합체의 주먹.
그 거대한 팔 위로 달려들고는.
"네 피로! 내 아이들의 배를 채우리라!"
그곳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뱀파이어들의 회복력은 그 피에서 기인한다.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저 융합체의 피를 아리엘라가 취하기만 한다면.
전투 불능에 빠져 버린 수많은 권속들이 다시금 전투에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그건 좀.}
쩌억!
{곤란할 것 같네.}
아리엘라가 접근하자.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열리며.
그곳에서 과거에 모습을 보였던 벌레가 다시금 나타난다.
[태양충]
뱀파이어들에게 천적인 태양 빛을 내뿜는 벌레.
아무리 강력한 귀족인 아리엘라라고 한들.
그 빛에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일 것이다.
"하하."
그리고.
"전투에 소양이 없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구나."
{...?}
"어쩜 이렇게 예상 그대로 행동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야."
그 위협적인 벌레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
아리엘라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서걱!
{...!?}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던 태양충의 머리.
그 머리가.
한 자루의 단검에 잘려 나가,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아리엘라의 짓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공격당할 위치였다면 저 태양충을 꺼낼 일도 없었으니까.
"그럭저럭 잘 해냈구나! 칭찬해 주도록 하겠노라!"
그리고 지금.
이 전장에서 저 의사의 탐지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태양충을 공격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군단에 소속된 각성자들 중에서도.
괴물을 피해 몸을 숨기는 데 특화되어 있는 이들.
{...토착종들.}
군단장의 호위대였다.
* * *
파아아악!
터져 버린 태양충의 머리.
그 머리로부터 피가 뿜어져 나오고.
스르륵.
아리엘라가 손을 뻗자.
그 피가 스스로 움직이며 그녀의 품으로 다가간다.
"일어나라, 나의 아이들아!"
그러자.
그 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권속들의 몸에 닿았다.
-주인님의 명대로....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던 권속들이 몸을 일으키고.
그들은 주변에 있는 다른 융합체들을 공격하며 그 피를 땅에 흩뿌렸다.
사방에 퍼져 있던 강대한 힘을 가진 권속들이.
하나둘씩 힘을 되찾기 시작한다.
얼마 전이었다면.
저렇게 권속들이 다시 몸을 일으킨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태양충의 빛 한 번이면 그 수많은 권속들은 그대로 무력화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주인님의 명을 따라라!
-피를 흩뿌려서, 형제들을 일으키는 거다!
태양충의 머리는 이미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
전멸 직전에 몰려 있던 뱀파이어들의 군세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리고.
의사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태양충을 잘라 내기 위해, 일부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이 땅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을 지닌 의사로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기척들.
이 희미한 기척은.
얼마 전, 군단장을 따라왔던 보호자들.
그중에서도 토착종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각성자의 힘은 각자의 분야에 극도로 특화되어 있다.
암행에 특화된 군단원들의 기척은 의사로서도 감지하기 힘든 영역에 있었다.
그나마 과거에는 감지하기가 조금 껄끄러울 뿐.
지금 이 육체로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전에 뵈었을 때보다도 기척이 흐릿해지신 듯하군.}
지금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희미했던 그 기척은, 지금.
[영웅급 요리사의 파란의 물방울 젤리]
[섭취 시, 주변 환경에 조금 더 잘 녹아들 수 있게 됩니다.]
의사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흐릿해진 상태였다.
그토록 강대한 괴물인 그조차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어째서 도망치지 않으신 겐가?}
그리고.
저 기척들의 존재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저 피 냄새를 풍기는 이들이야, 생명력에 자신이 있으니 나와의 싸움에 나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네.}
그때.
푸슉! 하고.
어디선가 또 한 자루의 단검이 날아온다.
{하지만....}
그리고.
단검이 날아온 바로 그 순간.
{토착종분들은 그렇지 않을 텐데?}
콰아아아아앙!
의사의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져 나간다.
그 주먹이 향하는 곳은... 방금 단검이 날아온 바로 그 장소.
"커헉...!"
"장 이병님!"
공격을 날린 후 이동하려던 병사는 간발의 차이로 직격은 피할 수 있었으나.
그 공격에 휘말린 여파만으로도 수십 미터를 날아가야만 했다.
{쯧. 그러게 목숨을 소중히 하라고 했잖은가.}
아무리 기척을 찾기 어렵다고 한들.
공격하는 순간, 공격이 날아온 곳만 안다면.
그곳에 주먹을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의사의 육체는 그저 뻗는 것만으로도 그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시킬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걸로 물러나 주시겠....}
이만한 힘을 보였다면.
숨어서 공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을 터.
그렇게 생각한 의사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푸슉!
{...?}
또다시.
어딘가에서부터 날아오는 단검 한 자루.
콰아아앙!!
의사는 이번에도 단검이 날아온 곳을 공격했다.
공격이 날아온 것을 보고 이루어지는 공격인 만큼 어느 정도 피할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빠른 공격이라고 한들 직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토착종들에게 있어서 스쳐서 맞기만 하더라도 한없이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굳이 나를 공격하다니.}
어차피 전투로는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는 이들이다.
저딴 단검 따위, 수백 수천 개가 날아와도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
반면, 저들의 은신술은 분명 뛰어난 것이다.
의사조차 그들을 찾기 힘든 상황이니.
어딘가에 숨어만 있다면, 저들은 충분히 안전하게 전장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그를 공격하다니.
이건 마치.
'일부러 위치를 들키려고 하는 것처럼....'
그 순간.
의사의 머릿속에 강한 위화감이 자리 잡는다.
저들은.
위험을 감수하고서, 자신에게 위치를 들키려고 하고 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그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노리는 것이 있다는 뜻...!'
쿠웅!
의사의 거대한 몸체가 급격하게 움직이며 뒤를 돌아본다.
저 토착종들이 그를 공격하며 유인하던 곳의 정 반대 방향.
그곳에 있는 것은....
{...군단자아아아아아앙!!!}
"...아."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몰래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있던.
"들켰나?"
신영준 병장의 모습이었다.
* * *
{군단자아아아아아앙!!!}
내 모습을 발견한 의사는 크게 소리치더니.
엄청난 속도로 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도망쳤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끝까지 따라가서 죽여 주리라고 다짐했지!}
애초에.
내가 아리엘라와 대화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은 마운틴이 시간을 벌어 준 덕분이었다.
딱히 저 녀석의 나를 향한 분노가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
{그런데, 감히...!}
아마 녀석은 내게 도망쳤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는 마운틴을 제거한 뒤에 나를 추격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뻔뻔하게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하하... 들킬 줄은 몰랐지."
내가 도망조차 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녀석은 꽤나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묻지 않겠네. 어차피 추격해서 죽일 생각이었으니.}
"...."
{군단장께서도 내게 거짓말을 해놓고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겠지.}
"...너 말이야. 자꾸 나보고 거짓말했다느니 뭐니 하고 따져 대는데."
그리고,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예의가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였잖냐."
{무슨....}
"이것도 문화 차이라고 하면 할 말 없긴 한데."
나는 멍하니.
그 거대한 괴물의 몸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칠흑 같은 검은빛을 한 마력.
그리고, 그 눈에 비치는....
[식재료 감별(강화)]
[아우로스의 힘줄]
[태양충의 머리 조각]
[파우로의 혈관]
[그라티아스의 가죽]
[로폴의 털]
[모탈셀의 갑각]
수없이 많은 이름들.
"사람하고 대화하는데... 직접 얼굴도 안 비추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
그중에.
저 의사를 가리키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니까."
나는 저 괴물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긴 뒤.
아래를 바라보았다.
"서로 얼굴 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눠 보자고."
그곳을 바라보며.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말을 건 뒤.
탁.
가볍게 땅을 차고 점프했다.
그러자.
파아아아아악!!!
그 몸이.
까마득한 지하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저 거대한 괴물이 처음 나타났을 때.
놈은 지하에서부터 나타나 마운틴의 발아래를 노렸다.
'놈이 만들어 준 구멍.'
내가 몸을 던진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저 괴물이 직접 뚫고 올라온.
바로 그 구멍이었다.
어지간히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것일까.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그곳을 향해 내 몸이 자유 낙하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지하로 내려가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지.'
저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을 때.
나는 그 강대한 힘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강력한 괴물도 저 정도의 힘을 보여 주지는 못했으니까.
아마도 마력의 색으로 따지자면... 남색.
한 마리 한 마리가 터무니없는 난적이었던 푸른빛 마력의 괴물들보다도 명백하게 한 단계 위에 있을 괴물.
[전투력 측정기]
하지만.
그 괴물을 바라보았을 때 보인 색은 검은색이었다.
'그때는 왜 저런 색이 보이나, 했지.'
이 전투력 측정기에 보이는 마력의 색은 일곱 가지, 무지개의 색이다.
하지만, 그 무지개색에도 가장 변두리에는 흰색과 검은색이 있다던가.
혹시 그렇게, 보라색조차 넘어선 어마어마한 존재인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겹쳐 있던 거야.'
어렸을 적.
미술 시간에 가지고 놀던 물감을 떠올린다.
한두 가지의 색을 섞으면 그럭저럭 이쁜 색이 나오지만.
수없이 많은 색을 계속해서 섞다 보면, 나오는 것은....
'기분 나쁜 검정색.'
저 거대한 괴물은.
하나의 괴물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괴물들의 사체와 재료들로 만들어졌을 뿐.
하나의 개체로 볼 수가 없는 존재.
즉.
'의사의 본체가 아니다.'
애초에.
나는 저 녀석과 진짜로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저 녀석이 사용하는 괴물 중 하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녀석에게는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의문도 있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얘기를 하려면.
전화나 문자가 아닌.
서로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법.
'만나러 가 주마.'
녀석의 본체를 만나러 갈 차례다.
{군단장!!!}
...물론.
저 녀석이 쉽게 보내 준다면 말이지.
474화 지하 (1)
처음 아리엘라의 몸 상태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을 때.
아리엘라는 내게 후퇴를 건의했다.
일단 군단으로 복귀한 뒤, 병력을 데리고 토벌에 나서는 게 옳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의견에는 문제가 많았다.
'내가 가져다준 괴물들만으로도 저 정도로 강해진 놈이야.'
지금 후퇴한다고 한들.
저 녀석을 토벌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갖추는 건 쉽지 않다.
서울 내에 대규모 병력을 침투시켜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하려면 비마나를 띄우는 것 정도밖엔 답이 없지만.
비마나의 재기동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꽤 남은 상황.
'그 사이에 저 녀석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놈은 더 이상 나 같은 녀석에게 괴물 사냥을 의뢰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놈 스스로가 이 서울을 돌아다니며.
서울 내에 산재해 있는 강대한 괴물들을 사냥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강화하겠지.
그렇다면 최선은....
-지금 해치워야만 합니다, 은인이시여.
그나마 녀석이 가장 약할 시기인.
지금 처치하는 것이었다.
-저희가 시간을 끌 테니. 은인께서 작전을 수행해 주십시오.
작전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작전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 방법이라면 통하긴 할 테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것은 물론.
소모해도 되는 전력이라고 애초부터 상정하고 있는 뱀파이어 병력들과 달리.
-너희가 위험할 텐데.
각성자들의 생명력은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못하며.
잃었을 때 쉽게 복구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불합리해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 말씀하신 건 군단장님이잖습니까.
그렇기에.
어지간한 위험한 일이 있을 시, 최대한 부대원들의 피해가 적은 쪽을 선택하려 했던 나다.
하지만.
-그 위험. 군단장님만 감수하려 하지 마십쇼.
-....
-저희도...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호위대의 병사들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부대원들이 몸을 날려 가면서 저 괴물의 시선을 끌어 주는 사이.
나는 [환경동화]로 몸을 숨기고 이동할 수 있었다.
파아아아아아악!!!
저 거대한 괴물이 뚫고 올라온 구멍.
그 구멍으로 몸을 내던지자.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한없이 깊은 구멍으로 내 몸이 낙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구멍에 몸을 내던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군단자아아아아아아앙!!!}
저 위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 * *
쾅쾅쾅쾅쾅!!!
지하로 자유 낙하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무너진 지하의 벽을 엄청난 속도로 박차며 떨어지고 있는 기괴한 형상의 괴물.
"...그냥 보내 주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
이 구멍은 저 녀석이 뚫고 온 구멍이다.
딱 저 녀석의 몸 크기만 한 구멍인 만큼.
놈이 나처럼 자유 낙하하기에는 구멍이 조금 좁았다.
하지만.
'미친 괴물 딱지 같으니...!'
수십 개의 손과 발로 벽을 밀치며 내게로 접근해 오는 녀석.
얼마나 빠른 것인지, 자유 낙하 중인 나보다도 조금 더 빠를 정도였다.
저 정도 속도라면 나를 따라잡는데도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지.
'지하로 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구멍은 여기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구멍으로 들어간다면, 놈에게 들킬 수밖에 없다는 것도.
놈이 나를 쫓아올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알고 있으니까, 부대원들이 최대한 놈을 멀리 유인해 준 거기도 하고.'
그래.
중요한 건 이거다.
'알고 있다면 대처할 수 있다!'
나는 지하로 떨어지면서.
하늘을 향해....
내게 다가오고 있는 저 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몸은 내가 만들어 낸 걸작.... 어지간한 짓은 통하지 않을 거다, 군단장!!!}
"뭐, 그렇겠지."
확실히 그 말대로.
저 녀석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수작질은 통하지 않겠지.
'엄청난 속도의 괴물이다. 내가 하려는 대부분의 공격은 터무니없이 쉽게 피해지겠지.'
게다가.
어떻게든 피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낸다고 한들.
'저 방랑광대의 힘으로 그 장소에서 멀어진다면, 피하지 못하는 공격조차 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지상에서는 녀석을 대상으로 한 전투에 참전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고 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
{뭐라?}
녀석을 향해 뻗은 내 손에는.
한 자루의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분명 재빠른 괴물이지만... 단점은 있다.'
지상에서와 달리.
내가 떨어지고 있는 이 지하는 무척이나 비좁은 공간이었다.
'저 덩치.'
저 거대한 괴물이 직접 뚫고 올라온 장소.
이 구멍의 크기는 딱 저놈의 몸 크기만 했다.
'여기서 내가 공격을 날린다면 놈이 피할 만한 공간은 없다.'
물론.
지상에서의 전투였다면 별 의미 없는 얘기다.
저 방랑광대의 힘으로 피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방랑광대의 힘은 저 공간을 넘나드는 구멍을 만들고 그곳으로 숨어드는 것.'
지금 저 녀석이 이동할 구멍은.
저 지상에 있는 것들뿐이다.
내 공격을 피하려면, 녀석은 저 지상으로 복귀하게 된다.
씨익.
"지금부터 너를 공격할 건데."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상으로 피할 거면, 어디 피해 보시든가."
{...!}
저 녀석은.
이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타아아아앙!!!
내가 쏜 한 자루의 총알이 녀석에 몸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
바로 지금 성립됐다.
* * *
나는 내게 점점 다가오던.
저 거대한 괴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터무니없이 강한 데다가, 엄청난 이동 속도에... 공간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괴물이라.'
참나.
진짜 말도 안 되는 생명체가 다 있나 싶다.
저걸 만드는 데 내가 꽤나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이 지하로 내려오기 전... 나름대로 지상에서 싸우고 있는 마운틴이나 뱀파이어들을 위한 요리도 만들어 줬고, 하워드를 통해서 얻은 [식재료 관리]의 버프도 뿌려 뒀지만.'
아무리 그렇게 난리를 친다고 한들.
저 괴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겠지.
'그렇다면.'
뭐....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냐.
'저 정도로 강한 괴물을 이기려면... 버프로는 모자라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디버프지.'
타아아앙!
푸직.
녀석을 향해 발사된 한 자루의 총알.
기세 좋게 날아간 것은 좋았지만... 그 총알은 어이없게도.
[모탈셀의 갑각]
녀석의 몸에 돋아난 갑각에 닿아.
그 몸을 뚫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파사삭 부서지고 말았다.
부서진 총알의 파편과 내용물만이 그 갑각을 뚫지 못하고 달라붙을 뿐.
{하, 가소로운 발악을...!}
녀석은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는 그 총알이 가소롭게 느껴지는 듯.
내게 비웃음이 담긴 사념을 날렸다.
"가소로운 발악이라...."
하지만.
나는 어느덧 나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녀석을 바라보며.
"가소로운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조금 이른 편 같은데."
{...?}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건.}
그리고, 그런 내 말대로.
녀석이 보여 준 여유로워 보이던 모습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이 육체에 일어나는 이 이상 현상들은... 대체...?}
머릿속에 울리는 녀석의 목소리에서.
큰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군단장... 아니, 네놈...!}
그도 그럴 게.
조금만 더 있으면 나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던 녀석의 몸이.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급속도로 느려지기 시작했으니까.
"뭐긴 뭐야."
그리고.
나는 점차 멀어져 가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웅급 요리사의 전력을 다한 무력감과 당혹, 혼란의 팡폴로.]
"요리지."
[최고의 식재료로 만들어진 요리입니다! 요리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최고 수준의 요리사가 최고의 컨디션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담아 만든 요리입니다! 요리의 효과가 극도로 크게 상승합니다.]
내 눈앞에는.
저 녀석이 맞은 총알의 내용물에 대한 설명이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 * *
저 총알에 담겨 있는 것은.
과거, 천산무관의 무인들을 빠르게 깨우는 과정에서 이용했던 팡폴로.
[최고의 식재료로 만들어진 요리입니다! 요리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최고 수준의 요리사가 최고의 컨디션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담아 만든 요리입니다! 요리의 효과가 극도로 크게 상승합니다.]
사실은 불량 식품이 아니지만.
내 경우에는 전력을 다해 불량하게 만든 요리다.
[섭취 시, 모든 능력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섭취 시, 일시적으로 상태 이상 - '식중독'을 획득합니다.]
[섭취 시, 일시적으로 상태 이상 - '식도염'을 획득합니다.]
[섭취 시....]
[칭호, 희망의 요리사 효과가 발동합니다!]
[랜덤으로 한 줄의 효과가 추가됩니다.]
[마력 장애]
[대상의 마력 운용에 큰 이상이 발생합니다.]
순식간에 눈앞을 가득 채우는 디버프 문구들.
그 압도적인 디버프 양에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말도 안 돼. 만들어 두지도 않은 식도의 이상과... 먹지도 않은 요리로 인한 독성이라니. 게다가… 이 마력 장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때도, 저 천산무관의 무인들에게도 유효했던 요리다.
그 효과는 녀석에게도 통하는 듯.
미친 듯이 벽을 타고 내려오던 녀석의 움직임이 움찔 하고 멈춘다.
그 거대한 몸체가 묘하게 퍼렇게 달아오르는 것이 딱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독성과 병세는....}
하지만.
저 녀석은 의사다.
{내 전공이지.}
녀석의 몸이 몇 번 크게 출렁이더니.
그 출렁임 한 번에 녀석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푸른 혈색이 점차 사라져 간다.
[대상의 상태 이상 - 식중독이 해제됩니다!]
[대상의 상태 이상 – 식도염이....]
'미친.'
녀석은 의사답게.
내 요리가 자신의 몸에 끼친 병과 독성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그것들을 순식간에 스스로 치료해 낸 것이다.
'어지간한 디버프는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는 건가.'
분명 대단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어째서!}
녀석의 몸은 분명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당황을 억누르지 못한 채 소리쳤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도 그럴 게.
녀석의 몸이 아무리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들.
{이 몸을 지배하는 감정이 치료되지 않는 것이냐...!}
녀석은 여전히.
느릿하게 내려오며, 그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으니까.
"네 전공이 의술이라고 했지?"
그리고.
나는 점차 멀어져 가는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전공은... 요리거든."
나는 요리사다.
독술사나 암살자 같은 게 아니라.
요리사.
{요리...?}
요리로 인한 다른 상태 이상들이야.
결국은 식중독의 연장선에 있는 것.
저 녀석이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인식되겠지.
하지만.
'[특별 소스]는... 그 맛으로 대상의 감정을 감화시키는 힘.'
[특별 소스]는 아니다.
저 녀석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극도로 강력한 무력감과 당혹과 혼란.
그것은 어디까지나 요리를 먹은 뒤.
그 맛에 놀라고, 감화되며 생겨나는 감정이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고 한들... 맛있는 요리를 먹고 생겨나는 감정의 파도란 애초에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거든.'
의술이 저 녀석의 영역이라면.
요리는 나의 영역이다.
저 괴물이 아무리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들.
일단 내 요리를 먹일 수만 있다면!
'아무리 강대한 괴물이라고 한들.'
내 요리로.
그 감정을 뒤흔들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줬다!"
그리고.
나는 지하로 떨어지면서 지상을 향해 소리쳤다.
"어떻게든 붙잡아!"
그러자.
그 말에 호응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주인님의 주인님의 명대로!!!"
{...!}
어느 정도 회복을 완료한 마운틴과 뱀파이어들.
그들이 혼란으로 느려진 괴수와의 전투에 돌입하는 것이 보이고....
그때쯤.
콰직!
"커허...!"
내 몸은.
이 한없이 깊어 보이던 지하의 바닥에 도달했다.
* * *
"끄륵...."
못해도 천 미터 이상은 이루어진 낙하.
그런 낙하로 인한 충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형체조차 제대로 남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이 상황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예상 못 했는데...."
지하로 들어올 생각으로 뛰어든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내가 본 지하의 풍경은 저 정령의 감각으로 본 것이었다.
얼마 경험해 보지도 못한 그 감각으로 저 지하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는 없었다.
깊어 봐야 한 500미터쯤 되겠거니 했는데.
떨어지는 찰나에 저렇게 쫓아오는 놈과 교전까지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스르륵....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얼마 전의 치료로 인해 내 몸도 나름대로 튼튼해진 상황이라는 것.
용케도 즉사는 하지 않은 결과.
뱀파이어의 피가 내 몸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속도로는... 모자라.'
아무리 강력한 재생력이라고 한들.
반쪽짜리에 불과한 내 재생력은 다른 뱀파이어들에 비해 느리다.
저 위에서는 뱀파이어들과 마운틴이 괴물의 추격을 막아 주고 있겠지만.
그래 봐야 전력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막는다고 해 봐야 오래 막지는 못하겠지.
최대한 빠르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 모자랄 판인데.
여기서 회복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
"제기랄... 미리 좀 만들어 둘걸."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시도하지 못했던 방법 하나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으나.
지금 내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수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사르르륵....
"...어?"
나도 내 부대원도 내 권속도 아닌.
"이 마력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따뜻한 마력이었다.
475화 지하 (2)
엄청난 높이에서부터 이루어진 자유 낙하.
아무리 저 의사의 치료로 제 컨디션을 되찾았다고 한들, 내 몸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것이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뱀파이어의 피로 회복될 것을 염두에 두고 뛰어내린 것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깊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탓에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하지만....
"...."
나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직 고통이 남아 있었지만, 그 고통을 억누르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빛 한 점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무척이나 밝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빛의 원인....
빛나는 마력이 지면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따스한 마력이 내 몸에 조금씩 와서 닿을 때마다.
뱀파이어의 피로도 빠르게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던 몸이 순식간에 회복되어 간다.
"...이건."
그리고.
나는 이 마력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저 괴물들을 치료할 때 나왔던... 그 마력이잖아."
지상에서 저 의사가 만들어 낸 융합체들과 격돌했을 때.
놈들을 순식간에 회복시켰던 바로 그 마력.
즉.
'저 의사의 힘.'
그것이 어째서인지.
내 몸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마력 덕분에 빠르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어찌어찌 다리의 형태가 복구될 때쯤.
나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킨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위쪽.
의사가 거점으로 삼은 강남은 지금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건물의 형체나마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좋게 말해도 깨끗하다거나... 깔끔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그 반대.
이 녀석이 만든, 도무지 맨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추악한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녀석들이 흘린 정체불명의 타액과 점액이 곳곳에 뿌려져 있어, 기분 좋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상과는 전혀 달랐다.
'...깨끗하다.'
정말.
그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장소.
'지나칠 정도로.'
깊은 지하 속에 만들어진 이 공간은.
단 하나의 이물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깨끗했다.
어떤 강박마저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게 아무것도 없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공간.
이 공간 내에 가득 들어찬, 저 빛을 내는 마력 덕분일까.
묘하게 신성한 느낌도 들었다.
'마지막에 내 수술이 이루어진 곳에는 물 한 방울 없었다고 했지.'
정수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말대로.
이곳에는 물은커녕 먼지 한 점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깨끗한 이곳에서 내가 이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돌아가 달라... 고 말하기에는.}
그리고.
그 공간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미 늦었겠지.}
내 정신 속으로 직접 꽂혀 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가깝다.'
내 생각보다도.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보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의사]의 본체가 가깝다는 생각에.
나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 저 위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이어지고 있겠지.'
나는 내 부하들이 패배하기 전에.
저 의사의 본체를 찾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알기도 어렵진 않았다.
'이 마력.'
저 깊은 곳 어디선 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
지금도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내 몸을 치료해 주고 있는....
바로 그 마력을 따라가면 될 테니까.
'짙다. 엄청난 양이야.'
너무나도 짙고 많은 양의 마력.
응집된 마력은 약간의 물리력마저 지니는 건지.
쉽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여긴... 저 지하광산하고 비슷한 환경인 건가.'
저 지하광산은 모르잔의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 곳 없이 막힌 공간에서 모르잔의 마력이 계속해서 새어 나와 엄청난 밀도를 이루고 있었지.
이곳도 그 환경과 비슷한 듯했다.
저 지하광산에 비하면 규모는 훨씬 더 작지만.
작은 공간에, 누군가가 내뿜는 마력이 계속해서 응집된 결과.
높은 밀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어리석었네, 군단장.}
그리고.
내가 그 마력의 출처를 찾아 걸어가기 시작하자.
놈은 내게 그리 말을 걸어왔다.
"어리석었다, 라."
나는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녀석의 말에 답했다.
"어리석었다는 건, 나를 공격한 걸 후회한다는 건가? 어리석은 짓이었으니 한 번만 봐 달라든가. 그런 말이라도 하려고?"
{아니, 설마.}
갑자기 꺼낸 어리석었다는 후회 섞인 말.
나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의아했으나.
{누군가를 믿었다는 게 어리석었다는 말이네.}
쓴웃음이 담긴 목소리.
그 어리석음이란 건, 내가 생각한 것과는 꽤나 다른 이유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한 번 크게 속아 놓고서, 또 누군가를 믿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
분노와 울분.
서운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목소리.
{그 선택을 후회하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짙은 사념이 맴도는 마력입니다.]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가 있었다.
'이건...?'
이곳의 환경은 지하광산과 비슷하다.
지하광산에서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을 때.
그 짙은 마력에 섞인 사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던 것처럼.
그 사념이.
내 정신과 감응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마력은... 분명 강하지만, 모르잔 정도는 아니야.'
반면, 나는 그때보다 강해졌다.
이 마력이 내 정신에 영향을 줄 수는 없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마력과... 그 안에 담긴 사념들.
그리고 나는 잠시 뒤에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파아악! 하고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붉은색 빛.
그 빛이 나오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내 품속.
[마력 속에 섞인 짙은 후회의 감정이 머릿속으로 스며듭니다!]
내 가슴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물방울의 형태를 한, 붉은색 보석이었다.
* * *
{나도 더 이상 쉽게 속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있었네만... 참으로 대단했네, 군단장.}
녀석의 말이 이어지고.
그 말에 담긴 사념이 주변의 마력에 영향을 주자.
'이건....'
눈앞에.
처음 보는 세계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대에게는 나도 깜빡 속고 말았어.}
평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
그 세계를 거닐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
{신들에 대해서 잘 모르니 한 번만 도와 달라느니... 동정심에 호소했고.}
그리고, 그 세계의 가장 높은 곳.
그곳에 세워진 신전 안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인상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본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치유와 회복의 주인]
[세라진]
저 녀석이 바로.
이 세계의 주인.
'저 의사에게 거짓말을 했다던....'
바로 그 신격이었다.
{군단에 합류하지 않겠냐느니, 친근함을 과시했지.}
그 신격은 자애롭게 자신의 세계를 굽어보고 있었다.
모르잔과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은 느껴지진 않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따스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존재.
그러던 중.
쿠당탕!
그 신전을 뛰어다니던 이들 중.
한 작은 아이가 앞으로 굴러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니던 것은 물론.
운이 나쁘게도, 뛰던 곳이 신전의 계단이 있던 부분이라.
넘어진 아이는 계단을 심하게 구르고 말았다.
'상처가 심각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온몸 곳곳이 심하게 긁힌 것은 물론.
심각하게 다친 다리는 기괴하게 꺾여 있는 모습.
지구였다면, 급하게 119를 불러야만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
그렇게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완치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으나.
하지만.
-조금은 몸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헤헤... 죄송합니다.
그 아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 몸에 나 있던 수많은 상처와 골절, 출혈은.
스르륵....
아이가 고통을 느낄 틈조차 없이.
이미 회복되어 있는 상태였다.
'엄청나다.'
저 신격이 특별히 무슨 짓을 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치료되는 상처들.
{나는 깜빡... 드디어 믿을 만한 협력자를 얻었다고 생각했지 뭔가.}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인 것은 그 아이가 전부가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상처 입고, 다치는 이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 상처로 인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회복이 끝나 있는 모습.
현대의 사람들이 보면 누구라도 신앙을 품어 버릴 듯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 이어지던 중.
어느 순간....
{돌아오는 건, 언제나 배신이었지.}
그 풍경이.
급격하게 변화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곳곳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평화로워 보이던 주민들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고 있다.
어떤 주민은 그 몸이 붉게 달아올랐고, 어떤 주민은 반대로 시퍼렇게 물들었으며.
기괴한 종양이 부풀어 오른 이부터, 누런 고름이 전신에 차오른 이들까지.
직전까지의 평화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모든 주민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본래 그들을 다스렸던 신격이 있던 장소.
가장 높은 산이 있던 그 땅은.
'....'
커다란 운석이라도 맞은 듯.
산 자체가 없어졌다.
그곳에는 신전이 자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자세히 보니.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호의를 베푼다고 한들....}
폐허가 되어 버린 자리.
그 한가운데에는 무언가 꾸물거리는 형상.
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오는 건 결국, 언제나 배신뿐이었어.}
그리고.
그다음 풍경이 계속해서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상하군.'
나는.
그 풍경 외에도 신경 쓰이는 점이 생겼다.
'저 녀석이 하는 말.'
저 녀석은 나와 닮아 있었다.
놈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했던 생각이다.
그 방향성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 놈과 나는 많은 부분이 겹쳐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네가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
놈이 해야 할 일은.
저렇게 울분과 분노를 토해 내는 일이 아니다.
놈이 나와 닮았다면.
나처럼...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맞다면.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살려 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정말 잘못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개같이 추하게 발버둥 치고 저항하는 것.
"나라면 그렇게 하고 있었을 거다."
내가 파악한 녀석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하하... 끝까지 나를 조롱하시는군, 군단장.}
그리고.
그 이유는 생각보다 금방 알 수 있었다.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한다고? 웃기는 소리.}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을 따라 이동한 결과.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식재료 감별(강화)]
[세라진의 몰락사제]
겉보기로는 인간과 별 차이가 없는.
초등학생쯤 되지 않을까 싶은 어린 남자아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선도 - 최하]
{그것도... 살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 아닌가.}
명백하게 죽어 가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476화 지하 (3)
내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
이 강남을 지배하고 있던... [의사].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얼마 전까지 상상했던 것과는 꽤나 다른 것이었다.
'아이.'
그것도.
명백하게 죽어 가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하지만.
이 부분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정수아가 보여 준 정령의 시야.
그 속에서 나는 이 녀석의 모습을 보았다.
육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기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이 녀석의 본체가 어떤 사이즈인지 정도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너...."
문제가 있다면.
"왜 이렇게 된 거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정령안으로 본 것과도 다른 모습이었다는 점이었다.
'붕괴되고 있다.'
아이의 몸은 곳곳이 마치 오래된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있었으며.
그 피부 곳곳이 먼지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의 혈색은 시체처럼 어둡고.
메마르지 않은 쪽의 피부는 극독에 담갔다가 빼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한 색으로 녹거나,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 마력.'
그렇게 붕괴되고 있는 몸에서부터.
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마력이 계속해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저 녀석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원래는 이 정도 아니었어.'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저 의사의 본체를 처치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꼴이라면 내가 굳이 처리할 이유도 없다.
금방이라도 사망할 게 뻔한 산 송장을 굳이 처치하기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하... 군단장께서 그 말을 할 줄이야.}
그런 내 의문에.
녀석은 썩어 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군단장 덕분인데 말이야.}
* * *
{말씀드린 적이 있지. 내 고향에서는 치유를 담당하는 존재가 있었노라고.}
내가 가진 의문을 입 밖에 내자.
녀석은 누가 봐도 죽어 가는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덤덤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어째서 저런 몸 상태에서도 내 질문에 답을 해 주는 것인가 의아했으나.
머지않아 그 의문이 의미 없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내가 물어봤으니까.'
묻지 않은 것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성실히 대답해 주던 놈이었으니까.
{덕분에 그 은총을 받는 이들은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죽음에 이르러 마땅한 부상을 입더라도, 죽음에 도달하기 직전에 모든 것이 치유되었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 와서도.
그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그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네.}
그리고.
녀석이 말을 꺼내고, 그 말에 감정이 담기자.
주변에 흘러내리고 있던 마력에 변화가 생긴다.
{치유와 회복은 결국 부상을 입는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단어였거든. 그 은총이 딱히 몸을 질병이나 상처에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네.}
"애초에 다쳐도 금방 회복이 된다고 한다면 큰 의미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 어디까지나.}
그리고.
그 감정이 담긴 마력이 내게로 다가오자.
{그 치유의 힘이 유지된다면 말이지.}
그 마력이 또 다시.
내 몸을 향해 다가온다.
[짙은 사념이 맴도는 마력입니다!]
그러자.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
'...또다.'
이 마력은 지금의 내게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사념과 감정.
그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내 쪽이... 끌어들이고 있는 거야.'
정확히는.
얼마 전에 내가 새롭게 얻었던 힘.
아직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 힘이 저 사념을.
[짙은 후회의 감정이 머릿속으로 스며듭니다!]
'후회'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언가 커다란 재앙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것은 이 '의사'의 기억.
녀석은 그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여기저기 도망치느라 바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재앙이 사그라들었을 때.
-아아, 신이시여...!
그가 섬기던 신이 자리 잡고 있던 드높은 산맥.
그 산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며.
그 한가운데에는.
-그 모습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반쯤 썩어 문드러진 살덩어리 하나.
...그 얼굴만큼은 무척이나 익숙한 살덩어리가.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그 치유의 힘을 잃었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지. 그 치유의 힘 아래에서 지내는 것이... 마냥 축복만은 아니었노라고.}
그 뒤로 펼쳐진 풍경은... 직전에 본 그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며 죽어 가는 모습.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저 모습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도 나중에야 안 사실이네만, 생명은 필요에 따라 진화한다네.}
단단한 갑각.
질긴 피부.
병에 대한 면역력.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지구력 등.
현대의 많은 생물이 하나씩 타고나고 있는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경쟁 끝에 만들어진 진화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한 진화를 할 필요가 없었지.}
죽음에 이를 상처마저도 죽기 전에 회복이 되고.
그 어떤 질병도 걸리는 순간 회복되니.
'저들은 '살아남기 위한' 방향성으로의 진화를 이루지 못했다.'
나는 다시금 의사의 몸을 바라보았다.
작고 왜소한 어린아이의 모습.
싸움이 의미 없는 세계였을 테니 투쟁을 위한 진화도 없었을 것이다.
저 작은 모습은 저게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는 최적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물이겠지.
{나는... 상처에 대항할 만한 질긴 피부도, 질병에 저항할 만한 면역력도 없다네.}
그리고.
지금 저렇게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은.
아마도.
{외부의 병균에 노출되는 순간, 어떤 저항도 못 해 보고 몸을 침식당할 정도로.}
"나 때문인 거냐."
나.
바깥의 온갖 먼지와 그 먼지들 사이사이에 섞여 있을 온갖 병균과 박테리아.
나는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준에 불과하지만.
'저 녀석이 살던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저항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요인들.'
그것들이.
저 녀석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어이가 없군.'
나는 이곳에 저 녀석을 죽이러 왔다.
이제 보니.
그 의도는 이곳에 내가 도착한 시점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너는 의사잖아, 직접 치료하는 건 불가능한 건가?"
{하고 있네. 덕분에 이렇게 군단장과 대화도 가능한 것 아니겠나.}
저 녀석의 치료술은 엄청난 것이었으나.
그런 대단한 치료술을 가진 녀석조차.
본래 타고난 면역력이 너무나도 처참했기에.
상태의 악화를 늦추는 정도가 한계라는 거다.
"그래서... 연구를 했던 거냐."
{그렇네. 어찌하지 않을 수 있겠나.}
녀석은.
공포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몸을 매만지며 말했다.
{길을 걷다가 잘못 발이 삐기라도 하면,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몸일세.}
"...."
{저 바깥에 흔히 보이는 돌, 나뭇가지, 길을 돌아다니는 작은 벌레들 하나하나가... 내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인이지.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그 말에.
나는 의문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갈아 끼우면 되는 거 아닌가?"
{음?}
"나한테 한 것처럼 말이야."
녀석은 내 몸 상태를 보고 평범한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은.
강력한 괴물들의 신체 부위를 내 몸에 갈아 끼움으로써, 나를 치료해 냈다.
아직까지는 [진기]를 채우지 못해 그 성과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그것이 엄청난 이적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했지 않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얘기.
{침대의 부품이 바뀌었을 때, 그 침대가 원래의 침대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침대 본인이 할 일이라고.}
나를 치료했을 때.
녀석이 내게 저 치료를 실행한 이유는 내가 그 치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군단장과 같은 답을 내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노라고.}
내가 어떻게 그런 답을 낼 수 있었던 것인지.
무척이나 흥미롭다고도 말했다.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군단장과는 다르다네.}
나와 같은 이는 많지 않고.
저 의사 또한.
나와 같은 이는 아니라는 것.
{지상에서 날뛰는 저 육체는 어지간한 극독조차 아무렇지 않게 소화해 내고, 치명적인 상처도 잘 입지 않으며 설령 입는다고 해도 자연적인 회복력만으로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지고의 육체지.}
"...."
{이 빌어먹을 몸을 버리고 새롭게 갈아타기 위해 만든... 내 모든 것이 들어간 최선의 작품이네.}
내가 내린 결론과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방법에 흥미를 품은 것은.
자신은 그 결론을 내지 못했기에.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육체를 내 몸으로 인식할 수 없더군.}
"그러냐."
어떻게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다른 것으로 대체된 육체를 자신의 몸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저 지상에 나타났던 괴물이 왜 한 마리의 괴물로 인식되지 않았는지.
수십 마리 괴물들의 융합체로 인식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육체의 주인인 이 녀석이, 그걸 자기 자신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제 육체의 주인이 그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했기에.
그것은 완성된 하나의 존재가 아닌, 수많은 재료의 융합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괴물의 육체를 내 몸에 이식하고도.
'신영준'이라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재한 나와 다르게.
{그 결과가 이 꼴이지.}
"...."
{참 추하지 않나. 그토록 강한 척을 하고, 건강이니 뭐니 조언을 해 놓고서... 사실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건강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는 게.}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의 몸은 지금도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내가 이제 와서 이 장소를 떠난다고 한들.
내 몸에서부터 비롯된 병균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이렇게 죽는 거냐, 너."
{아마도.}
저 녀석은 아마 이대로 천천히 죽어 갈 수밖에 없겠지.
"...그러냐."
하지만 뭐.
어차피 내가 직접 죽이려고 온 놈이다.
녀석이 죽는다고 내가 슬퍼하는 것도 웃기는 얘기겠지.
"원한다면 고통 없이 끝내 줄 수 있는데."
{그건... 거절하도록 하지.}
내가 [독고구식]에 손을 올리고 그리 말하자.
녀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아직도 죽는 게 무섭다네, 군단장.}
"...."
{죽음까지의 고통이 무서운 게 아니야. 내가... 나라는 존재가 살아온 종적이 어느 한순간 영원히 끊어진다는 게 무서운 거지.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몇 초라도 더 살고 싶다네.}
그 말에.
나는 이 녀석을 죽이러 온 입장이면서도.
"나도 그래."
녀석의 말에 공감하는....
웃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위에 있던 저 육체는 멈춰 두었네. 정확히는, 내 몸을 치료하느라 바빠서 그쪽에는 신경도 못 쓴다고 하는 게 옳겠지만.}
"그러냐."
{나는 아마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야. 그러니... 군단장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떠나셔도 좋아.}
녀석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여전히 진실.
나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여전히 내게 솔직했다.
이토록 순수한 존재는 살면서 만나 본 적이 없다.
그 능력 또한 출중했다.
...함께 할 수만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 간다."
결국.
녀석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그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 녀석과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나는 몸을 일으키고 뒤로 돌았다.
깊은 지하다.
지상에 올라가는 것도 꽤 힘든 노동이 될 테지.
{아, 가기 전에.}
그런데, 그렇게 이 공간을 나서기 직전.
내 발을 붙잡는 목소리.
{거기...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작은 테이블 같은 게 있을걸세.}
나는 녀석이 말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녀석이 말한 대로 작은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챙겨 가게나.}
작은 약병 하나였다.
"이건...."
{약속드렸지 않는가. 진기를 채우지는 못해도, 대체할 수는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마지막 만남에서.
내 피를 뽑아 가면서 만들어 주겠다고 한, 그 약.
{부작용이 꽤 크긴 하겠지만, 군단장이 잃어버린 진기로 인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걸세. 한 병뿐인 약이고, 한 번뿐인 기회일 테니... 신중하게 복용하도록 하시게나.}
녀석은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나로 인해 죽어 가는 와중에도.
나를 위해 만든 약을 베풀었다.
'이런 녀석이 어째서.'
그렇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결여되어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그냥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 가지만 묻자."
{뭔가, 군단장.}
내가 저 구멍에서 이곳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꽤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너...."
하지만.
"왜 나를 살린 거냐?"
땅에서부터 올라온 마력이 내 몸을 치유해 줌으로써.
나는 생각보다도 빠르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싸웠을 때... 녀석의 힘은 괴물들에게만 작용했다.'
저 녀석이 지닌 치유의 마력은.
그 대상을 확실히 지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녀석은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나를 살렸다.
{...그야.}
그리고.
녀석이 나를 살린 이유는.
생각보다도 간단한 것이었다.
{환자가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나.}
477화 삶과 생명.
{환자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나.}
그 말에.
나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내 권속들은 그렇게 죽여 놓고?'
이 녀석은 내 권속들을 죽이는 데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내게 분노를 표했고.
결국에는 나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녀석에게 있어서 나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죽어 가는 이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나를 치유했다.'
그래.
바로 이런 부분이다.
저 녀석의 영혼은 내가 본 어떤 존재보다 순수했다.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아주 가끔 어떤 한 부분만이 결여된 것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녀석에 대한 내 예상이 틀린 것이다.
'이런 건.'
그리고.
내 상식으로는.
'말이 안 돼.'
저토록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생명체가 딱 한 부분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아, 과연.'
나는 그제야.
내 몸속 안에서 지금도 빛나고 있는 붉은 빛.
"너."
그 주인 잃은 힘이 어째서 저 녀석의 후회를 보여 주려 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게 있군."
{말하지 않은 거라니... 군단장께서 물어본 것에는 모두 답했네만.}
"그러니까."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어보지 않은 것 중에 말하지 않은 게 있어."
"...!?"
콰직 하고.
그 몸에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끄륵...!?"
안 그래도 반쯤 부서져 있던 몸.
그 몸을 강하게 쥐고 으스러트리자.
메말라 있던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몸이 일그러진다.
"…@….@%%@*&%…!"
겉보기에는 어린 꼬마 아이처럼 보이는 녀석.
그런 녀석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내 정신에 말을 걸 여유조차 없는 것인지.
정체 모를 외계어를 육성으로 내뱉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녀석.
쩌저적.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콰직.
그렇게.
녀석의 몸이 뜯겨 나가자.
파아아아악...!
붕괴되어 가던 그 몸에서부터 새어 나오던 마력이.
더욱더 폭발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마력 속에 섞인 짙은 후회의 감정이 머릿속으로 스며듭니다!]
그 사념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 * *
갑작스러운 재해가 세계를 덮쳤다.
그 재해로 인해 많은 건물이 무너졌고, 하늘은 우중충하게 뒤바뀌고 말았다.
"사... 사제님...."
그리고.
그 재해에 휘말리고도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위기일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신전을 찾아 이동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가 신전에서 나오자.
밖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 아픕니다...."
"...아프다니?"
"너무... 아파요."
그들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다치고, 병들어 버리고 만 주민들.
"갑자기 이게 무슨...?"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파사삭....
'이 고통은 대체...!'
신전 밖으로 나선 순간.
'나'의 몸 역시 가장 끝부분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
"끄허, 억...."
"아파, 아파...."
"살려...."
평생 제대로 된 고통 한 번.
아니, 고통 자체를 느껴 본 적이 없었던 이들이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아픔에 신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단 이쪽으로!"
'나'는 자신 역시 병으로 인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고통을 억누르며 사람들을 신전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떤 것 같습니까, 사제님들."
생각 없이 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역시."
"병균으로 인한 감염이 맞는 것 같소."
신전에는 세르잔을 섬기던 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세계가 치유술이 필요 없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치유와 회복'을 신명으로 삼은 신의 사제였다.
"다행히 우리 힘으로 어느 정도 회복은 가능할 것 같소."
"당장 병을 치료해도 병균 때문에 금세 다른 병에 감염될 테니, 각 신전 내에 있는 신역으로 환자들을 이송하지. 신역은 완벽한 무균 공간이니. 그쪽에서 치료받으면 될 거야."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수도의 일환으로 의술을 단련했다.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었다고는 하나.
그 지식과 기술은 실전 경험이 없다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들이 발 빠르게 대처함으로써.
그나마 사태가 악화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악화되는 걸 막는 게 한계에요."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얼굴은 결코 밝지 못했다.
"어떻게든 더 이상의 감염원이 없는 장소로 환자들을 격리한다고 한들, 신전은 마을마다 1개 정도씩밖에 없어요. 그마저도 작은 마을에는 하나도 없는 경우가 많으니... 격리 가능한 인원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환자들의 병이야 어떻게든 치료하는 데 성공한다고 한들, 식량 문제도 있소. 병이야 치료하면 된다지만, 굶음은 해결할 수 없으니."
"...결국엔 누군가는 밖에 나가서 생산 활동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밖에 나가는 순간 병에 감염되고 말겠지. 굶어 죽기 싫어서 병에 걸려 죽는다?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어떻게든 사태의 악화를 늦췄다고는 하나, 거기까지.
갑작스럽게 온 세상의 주민들이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이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제들은 병균에 감염돼도 어느 정도는 자가 치료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농사라도 짓는 건."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도 밖을 오래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닐세. 애초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된 사제의 숫자는 적어. 우리들만으로 충분한 식량을 만들어 낼 수는 없네."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 짜내는 사제들이었으나.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주교님."
그러자.
사제들의 시선이 신관회의 상석에 앉아 있는 인물을 향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뭔가 아시는 건 없으십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겉보기에는 다른 이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어린아이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아이야, 너도 알면서 묻고 있는 것 아니더냐?"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상당한 연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대주교님... 그 말씀은 역시."
"신의 보호가 더 이상 우리에게 임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지."
겉보기에는 다른 이들과 같은 어린아이처럼 생겼지만.
그는 묘하게 노인 같은 말투로 말했다.
"지금부터 약 3만여 년 전이었나...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단다."
"3만여 년 전이라니... 저희 대부분이 태어나기도 전 아닙니까."
"오만해진 백성들이 그분의 필요성을 의심하자, 그분께서 벌을 내리신 적이 있었지. 그때도 참 많은 이들이 죽었어. 그전까지는 지금의 나보다 수십 배는 더 산 어르신분들이 훨씬 더 많았지...."
"하지만 저희는 그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에 범죄자도 없고요."
"그분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느냐. 그저 지금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태는 최악.
당장 사망자가 늘어나는 일을 막아 놨다고는 하나, 이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정 그분의 뜻을 알고 싶다면...."
그러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분께 직접 여쭈어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들에게서 사라져 버린 신의 은총.
그 은총을 되찾아 오는 것.
노인이 먼저 몸을 일으키고.
사제들이 그를 뒤따라 나섰다.
* * *
사제들은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 둔 채.
그들의 신이 거주하던 땅으로 향했다.
그 행렬에는 '의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털썩....
행렬은 길었고.
바깥세상은 온갖 병균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뛰어난 치료술을 지니고 있는 사제들이라고 한들.
병을 치유해 가면서 나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꽤나 많은 사제들.
주로 나이가 많거나, 사제로서의 수련이 부족한 이들이 먼저 쓰러졌다.
그리고....
"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대주교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래 산 노인이 좀 더 병에 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 행렬에서 가장 나이 많던 대주교 역시.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그나마 사제로서의 수련이 깊었던 그였기에 오래 버틴 편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야."
"예. 대주교님."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쓰러진 대주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어째서 그분이 우리에게 진노하셨는지는 모르겠구나. 그저 좀 오래 살았단 이유로 이 자리를 꿰차고는 있었지만... 결국은 그분의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종에 불과했던 게지."
"아닙니다. 주교님의 신앙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아는 것이 하나 있단다."
노인의 힘 없는 손이.
'나'의 얼굴에 닿는다.
"너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너를 유독 아끼셨단다.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우리 세계에서, 온 우주를 통틀어도 보기 드문 순수한 영혼이 태어났노라고...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
"...."
"아이야. 비록 나는 여기까지지만 너는 아직 젊고, 수행 또한 뛰어나니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겠지."
그 얼굴을 매만질 힘마저 없어진 듯.
툭 하고 떨어지는 손.
"그분께서 가장 아끼셨던 네가 그분께 다가가 빈다면... 우리를 용서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야."
"...."
"그러니... 잘 부탁하마. 너야말로... 우리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셈이니."
그렇게.
많은 사제들의 존경을 받던 대주교마저, 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예. 반드시."
'나'는 대주교의 말을 곱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이 거주하던 땅은 저 갑작스러운 재해가 일어난 중심지였다.
땅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으며.
아주 살짝 발을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치명상이었다.
재해의 후폭풍은 여전히 남아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흩날렸으며.
그 먼지 속에 섞여 있는 병균들은 어떤 저항도 없이 그들의 몸속으로 침투해 왔다.
털썩....
투욱.
많은 이들이.
그 고된 여정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형제여... 나는 끝까지 가지 못하겠지만, 부디 자네만이라도...."
몇몇은 자신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짜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 대가로 더욱더 빠른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죽음....'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생명의 끝.'
본래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었으니까.
그 약속을 먼저 깬 이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정말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불합리하다.'
하지만.
막상 수없이 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자.
'나'는 죽은 생명의 모습이란... 생각보다도 추하고 끔찍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생명에는 끝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이는 없다.
시작이 그렇다면 그 끝을 스스로 정할 권리 정도는 주어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그 권리를 약속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왜, 그 약속이 어겨졌는가.'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미약한 분노를 느끼며 여정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아, 신이시여...."
그들은.
옛 드높은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던 바로 그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한 것은.
"그 모습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꾸물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한 살덩어리의 모습이었다.
* * *
'저 모습은 대체.'
바닥을 기어 다니는 살덩이.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 원형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치유....
바닥을 기고 있던 살덩이의 한쪽에 붙어 있는 얼굴.
그 얼굴은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그 얼굴이었으니까.
'마치... 누가 한참을 씹다가 뱉기라도 한 것처럼....'
저 살덩어리는.
분명 그들이 섬기던 신이 맞았다.
하지만.
어째서 저런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하, 하하... 끝이로군."
그 모습을 본 사제들.
그들은 이 힘겨운 여정을 끝까지 이겨 낼 정도로 깊은 수행과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으나.
"우리 신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던 게 아니야."
"...."
"우리를 챙길 수도 없는 꼴이 되어 버리셨던 거지."
그들의 눈에.
깊은 절망이 자리 잡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꼴이 되어 버린 신.
그가 다시 은총을 내려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마찬가지.
은총이 없는 한, 그들은 너무나도 나약한 생명체들.
어떻게든 사제들의 치료술로 연명한다고 해 봤자 1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죽음....'
모든 이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
그리고, 그때.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나'는 절망에 빠져 있던 사제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신이시여!"
이곳에 오는 동안.
많은 이들이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맡겼다.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라면 이 땅의 생명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그 어깨에 놓여 있었다.
"왜 저희를 버리신 겁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저희가 무엇을 바쳐야, 저희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살덩어리가 되어 버린 자신의 신앙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그러자.
-...생명....
그 살덩어리에게.
답이 돌아왔다.
"...예?"
'나'는 물론.
살아남아 이 땅에 도착한 많은 사제들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삶과... 생명....
그들의 신께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그 말을.
478화 진화.
삶과 생명을 바쳐라
그 말을 들은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바치라니... 설마.'
그리고.
'나'가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삶과 생명이라 하셨습니까!"
그와 같이.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있었다.
"그걸 바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땅까지 도착한 사제들은 그 말고도 많았다.
각 지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전들.
그 각각의 신전들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던 위대한 사제들.
그들이 앞다투어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회복....}
그들의 신이 답했다.
"삶과 생명을 바친다면...."
"당신께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으시다... 이겁니까?"
이대로 그들이 돌아간다고 한들.
사람들의 수명을 약간 늘릴 수 있을 뿐, 결국에는 모든 이들이 점차 죽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은, 총....}
"저희에게 은총을 돌려주신다는 겁니까...!"
신의 축복이 돌아온다면.
설령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한들.
결국엔 누군가는 살아남을 수 있다.
"하, 하지만 삶과 생명을 바치라니."
"정말 그래도 되는 걸지...."
그들의 신이 남긴 말에.
많은 사제들이 망설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 될 리는 없겠지."
그것도 잠시였다.
애초에.
그들은 수많은 신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신앙심으로 뭉쳐 있는 이들.
"우리의 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 아니오."
그 신앙의 대상이 입에 담은 말이다.
그 말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많은 사제들이 결심을 내린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바치는 수밖에."
누군가가 뱉은 그 말과 함께.
그들이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사제들의 눈빛에는... 절망으로 인해 꺼져 버렸던 불씨가 다시금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군가는 희망.
그리고 누군가는....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바치도록 하지요.
광기라고 부를 만한.
그런 불씨가.
"무슨 소리를...!"
그리고.
그 말에 반발하는 이는 단 한 명.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생명을 바치다니요...!"
'나' 였다.
* * *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생명을 바치다니요...!"
"...."
"이건, 이건 아닙니다. 좀 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그들의 아버지가 한 말을 듣고 고심에 빠져 있었으나.
그 고심의 결론을 내기도 전에, 그의 형제들이 결심을 내리자.
당황하면서도 그들을 말리고자 시도했다.
"당장 상황이 절망적인 건 맞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의 생명을 바친다니... 이건 옳지 못한 일이잖습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네."
"당장은 방법이 없어 보이겠지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닐 겁니다."
그는 사제들을 둘러보더니.
이를 악물고 외쳤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거기서 끝입니다. 하지만!"
"...."
"그렇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그 설득에.
사제들은 망설임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치료와 회복을 상징하는 사제들이지 않습니까. 당장 이 땅을 덮친 재앙이 아무리 흉험하다고 한들, 그 재앙이 질병과 상처라고 한다면... 그걸 해결하는 것 역시 저희의 전공입니다."
"...."
"아직 신전에는 제대로 된 해석이 끝나지 않은 아버지의 가르침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가르침들을 연구하고, 저희의 의술을 갈고 닦는다면...!"
그는 열성적으로 다른 사제들을 설득했다.
"죄 없는 이의 목숨을 바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무언가 다르다.'
이 '나'는.
내가 알던 '나'와... 조금 다르다고.
그리고, 내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아아, 알아주시는 겁니까...!"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나. 우리도 이런 일이 좋아서 하려는 게 아닌데.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제들과 뜻을 정한 듯.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벌리는 사제.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잖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나'가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말대로, 우리가 노력한다면 정말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가능성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나는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
거기에 담긴 감정은 망설임이 아니었다.
"그래도 못 찾는다면?"
"...."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망설임이 아닌.
두려움.
"그건...."
'나'가 뭐라고 답하지 못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멸망하고 말겠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
"그럴 수는 없는 일이네."
그 말에.
'나'는 이 악물고 말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다니요. 죄를 지은 자들은 이미 병들어 죽었을 테니. 그 말은...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제물로 바치자는 얘기잖습니까."
"어느 정도는 자원자가 나올지도 모르네. 우리도 각오는 되어 있고."
"자원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면요!"
"그러면... 강제하는 수밖에 없겠지. 가능한 수명이 적게 남은 이들부터."
"그건... 저 옛날 기록에서 가끔 등장하던 악신, 악마들이나 할법한 짓 아닙니까."
"아니. 큰 차이가 있지 않나."
그가 손을 내밀더니.
경외감이 담긴 시선으로 어느 곳을 가리킨다.
"악마의 짓과 비교할 일이 아닐세. 이번 일은 악마가 아닌...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께서 약조해 주신 일이니까!"
그곳에 있는 것은.
추잡하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살덩어리 하나.
"자네의 염려도 이해는 가네. 하지만, 어쩌면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을지도 몰라."
"...."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하셨지. 얼마나 많은 생명을 바쳐야 할지 얘기해 주지는 않으셨으나, 어쩌면 그리 많은 생명이 필요하지도 않을지도 모르네. "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희가 포기하지 않고 연구한다면, 단 하나의 생명도 바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말했다시피, 그건 불확실하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일이지."
"시작도 전에 실패부터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 하나 살자고 하는 일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걸세. 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 이 세계의 명운이 걸린 일이야. 아쉽지만, 그런 중요한 일에 '만약에'를 들먹일 수는 없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그 추잡한 살덩어리를 향한다.
"여기에 '확실한' 방법이 있지."
"...."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미 결정을 내리신 듯하군요."
아무도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모습.
"하지만...."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가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
"제가 여러분들을 막으려고 한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자네의 심경도 이해는 하네만, 자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뇨."
그 말과 동시에.
'나'의 몸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일어났다.
"막을 수 있으니까, 한 말입니다."
* * *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찬란한 광채.
내 입장에서도 바로 얼마 전에 보았던 바로 그 빛.
"저토록 찬란한 빛이라니...!?"
그 빛을 본 사제들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 이건, 타계하신 대주교님보다도 더한 수준 아닌가."
"아무리 젊은 사제들 중에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아이라고 한들. 저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힘을 숨기고 있었나 보구나. 역시 그분께서 가장 총애했던 아이...."
그들의 육체는 너무나도 나약하다.
서로의 주먹질 한 방 한 방이 치명상이겠지.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치명상을 얼마나 회복하며 버틸 수 있느냐.'
그리고.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있었다.
"제가 막고자 한다면, 여러분들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
"이래도 굳이 진행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막겠다면 그리하게."
"...예?"
"하지만... 한 가지만 떠올려 줬으면 좋겠군."
그 강대한 힘에 놀라면서도.
그들은 뜻을 꺾지 않은 채 말했다.
"대주교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 역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네. 그분이 자네에게 한 말도 들었지."
"그게 무슨...."
"그분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형제들이... 이곳에 오는 길에서 스러져 가면서도 자네의 손을 붙잡고 말했지."
그들이 한 말은.
단 하나.
"희망."
"...."
"자네라면 우리 아버지의 뜻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해 달라고 말일세."
그 말에.
'나'의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들은 자네를 믿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자네에게 넘겼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네에게 모든 희망을 맡기고자,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 것이야. 누군가의 목숨으로 버틴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다릅니다! 그 형제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그래. 자신들의 의지로, 자네를 믿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넘겼지. 그런데 자네는...."
형제들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나'를 향해 꽂힌다.
"그 의지와 희망을... 확실하지도 않은 가능성에 걸 생각인가."
"그, 그런."
"확실하지 않은 일에 모든 걸 걸고, 자네에게 희망을 건 이들까지 배신할 셈인가!"
'나'는.
그 말에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 * *
그 머릿속에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의 손을 붙잡고.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용기 내며 부탁하고 죽어간 이들.
'그들의 부탁을 확실하게 이룰 수 있는 방법과...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한 방법.'
그 혼자만의 결정이었다면.
그는 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
하지만.
그에게 부탁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해서 실패했을 때, 책임은 누가 지지?"
"나, 나는."
"자네도, 우리도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못할 걸세. 책임을 질 이도 죽어 있을 테니까!"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자.
그 모습을 본 사제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기 싫다면, 자네는 빠져도 좋네."
"그래, 차라리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그분께서 가장 총애하신 순수한 영혼이니... 자네만큼은 더러워지지 않는 게 그분께서도 바라는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들은 이미 자신들끼리 얘기가 끝났다는 듯.
곳곳으로 퍼지더니, 무언가를 주워 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워 든 것은.
작은 돌덩이들.
그리고 그들은 그 돌덩이를 쥐더니.
타악!
돌끼리 부딪히며.
그 돌을 깨트리기 시작한다.
"영혼을 더럽히는 일은 우리가 하겠네."
돌을 쥔 손.
그 돌에 섞여 있던 먼지와 그 안에 있던 균들이 그들의 몸을 오염시켜 나가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작업을 이어갔다.
"자네는 자네가 말하는... 그 확실하지도 않은 연구에 매진하도록 하게."
"...."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자네의 연구가 우리의 공양보다 빠르게 끝난다면."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은.
그들의 세계에서 제대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물건.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낼 수도 있겠지."
칼.
살해를 위한 도구였다.
* * *
"이 축복이라면 3시간은 버틸 겁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사제님."
"감사하긴요. 형제님들이 일해 주신 덕에 저희도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의 시대라고 하나... 다들 하나 된 마음으로 버티다 보면, 그분께서 다시금 저희에게 은총을 돌려주실 테지요. 그때까지 같이 노력해 봅시다."
당장 급한 환자들의 치료가 끝난 뒤.
몇몇 이들에게 축복을 걸어 오염을 최대한 막아 줄 수 있도록 한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식량을 생산했다.
능력 있는 사제가 걸어도 3시간 정도가 유지되는 게 한계인 축복.
애초에 사제가 적은 만큼 충분한 노동력이 나올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멸망에 대해 유예는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제물로 바쳐야 할 생명이 바쳐지기도 전에 죽을 확률도 줄일 수 있다는 거겠지.'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뒤.
이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사제들과 헤어진 뒤.
혼자서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며 연구를 시작했다.
'곳곳에 퍼져 있는 신전에는 아버지가 남긴 말씀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 하나하나가 치료와 회복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이 담긴 말들이다.
'그 말씀들을 한곳에 모은다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나올지도 몰라.'
그는 세계 곳곳을 방황하며.
각 신전에 있는 그들 아버지의 가르침이 담긴 서적들을 주워 담았다.
식사는 풀뿌리로 대체했으며.
그 풀뿌리에 담긴 질병들이 그 몸을 괴롭혀도, 이를 악물고 스스로 치료해 내며 버텼다.
'신화에 나오는 악마나 악신들... 그들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구나.'
여러 마을이나, 도시는 물론.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에 남겨진 옛 신전마저 모조리 뒤져 가면서, 아버지의 말씀들을 배우기 시작한 '나'.
'나는 이곳에서는 사제지만 다른 곳에서는 치유사, 혹은 의사로 불리는 것인가.'
'...다른 세계는 우리 같은 축복이 없는 게 보통이라니.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지?'
그 결과, 그는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육체가 강인하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와 그들의 차이.
그들이 어째서 지금 멸망을 겪고 있는가에 대한 그 이유까지.
'처음부터 축복이 없었기에 이 세상을 버텨 낼 수 있을 만한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진 거야.'
그리고.
'그 진화를 단기간에 이루어 낼 수 있다면...!'
그 해결법까지.
'이 또한 아버지께서 내린 시련일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어려운 길이야말로 올바른 길이라는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위한 시련.'
약간의 면역력만 갖춰져도 된다.
이 세상을 버틸 수 있을 만한 성과가 나오기만 한다면.
그 성과를 바탕으로 많은 이들의 생명의 연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형제들 역시.
굳이 누군가를 제물로 바칠 필요도 없다고 느끼게 되겠지.
'해내야 한다.'
단순한 치료가 아닌, 생명을 매만지고 변화시키는 일.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진화를....'
이 방법만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육체를 이루어 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479화 실패.
"저기, 사제님...?"
한창 연구가 진행되던 중.
'나'가 연구를 하던 오두막을 두드리는 한 아이가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사실."
그 아이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용기를 내서 그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가 신전에 가셨다가 돌아오지 않고 계셔서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의 몸이 움찔 하고 멈춰 선다.
"...그건."
"분명 오염을 막아 주는 축복만 받고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대로 돌아오질 않으셔서... 신전에 가서 다른 사제님들에게 물어봐도 이렇다 할 말도 없으시고.... 사제님은 예전에 유명하신 분이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사제님이라면 뭔가 아실까 해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혹시나,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다른 사제들이 그 마음을 고쳐먹고, 제물을 바치기를 멈췄을지도 모른다든가.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저희 아버지뿐만 아니라, 최근에 유독 마을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이 많아서요."
"...."
"뭐라도 좋으니, 아시는 게 있으시면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결국에는 지나친 낙관.
현실은 참혹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네 아버지는 사제들이 죽였다.'
이 소년에게 저 신전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들에 대해 밝힌다면.
어쩌면 일이 바뀔지도 모른다.
분노한 사람들이 신전으로 쳐들어가, 이 참혹한 제물 의식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일에 모든 걸 걸고, 자네에게 희망을 건 이들까지 배신할 셈인가!
그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그의 입을 붙잡고.
"...축복이 사라져서 그렇겠죠."
"예? "
"일하다가 어디 굴러떨어져 버려 회복도 못 해 버린 게 아닐까 싶군요."
결국.
그 입에서 나온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저희의 몸은 강인하지 못한 편이니...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아마."
"아, 아아. 그렇군요."
"그래도 기다리면 돌아올지도 모르니...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보시길."
그 말을 듣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문을 닫고 나서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우욱...!"
'나'는.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내뱉었다.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누구보다 그가 잘 안다.
스스로가 한 거짓말이 너무나도 역하고 역해서,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의 연구가 성공한다면 모를까.
실패할 경우에 남는 방법은 다른 형제들의 말대로.
아버지께 생명을 바치는 것뿐이었으니까.
"...흐윽."
눈물이 새어 나오고.
두통이 느껴진다.
이 땅에서 죽음이란 개념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에서는 또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고통과 두려움.
'나'는 직접 그 고통을 느낀 것도 아닌데도 그 고통이 상상이 가고.
그들이 느끼고 있을 두려움을 떠올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아니.... 의식하지 말자. 그냥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고통에 공감하다 보면.
결국은 연구에 방해가 되고, 진척이 늦어질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그쪽에 대한 신경을 끊고.
자신의 최선을 다해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까마득하다.'
그의 연구가 언제 끝날지는 확신이 없었다.
이대로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았기에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연구에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 * *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굶어 죽을 때쯤에 밖에 나가 풀뿌리를 주워 먹은 뒤.
다시금 신전으로 돌아와 연구에만 매진하는 나날.
조금이라도 그 연구를 빠르게 달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몰두하다 보니.
그는 어느샌가 시간의 흐름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이 방법이라면...!'
여전히 성과는 요원했으나.
이제야 실마리 몇 개를 붙잡았다 싶을 때쯤.
똑똑.
누군가가.
그가 자리 잡은 신전의 문을 두들겼다.
처음에는 몰두하느라 두들기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지만.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두들김에.
그는 뒤늦게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눈치챌 수 있었다.
'시끄럽게....'
몰입하고 있던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신전 밖으로 향했다.
매일 똑같이 연구만을 진행했던 나날.
이렇게 다른 사건이 끼어든 게 얼마 만인지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방문자?'
그리고, 그래서일까.
한 가지 사실을 조금 늦게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여긴 예전에 폐기된 신전인데...?'
그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머나먼 고대의 신전이다.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에 있었다.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과.
이곳의 성역에 있으면 병의 걱정이 준다는 점.
아버지의 옛 가르침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선택했지만.
다른 이를 만날 일은 없는 곳이다.
그 의아함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그 손은 이미 신전의 문을 열고 있었다.
"아, 아아... 살아 있었구나."
"...당신은?"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것은.
"...그때 그 형제분이시로군요."
저 과거.
그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사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영혼을 더럽히는 일은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설마... 아버지께서 회복에 성공하셨다든가...!"
방금까지 느낀 의아함은 뒤로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것이었다.
만약 그들의 아버지가 회복에 성공했다면.
비록 그 과정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들.
자신의 그동안 노력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들.
'나'는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정말, 있었어."
"...예?"
하지만.
그게 아니란 것을 눈치채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말고도 살아 있는 이가 있었어...!"
'나'의 기억 속에서.
눈앞의 사내는 엄청난 치유력을 지닌 고위 사제였다.
"미안, 정말 미안하네...."
"그게 무슨."
"그때, 자네의 말을 따랐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몸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였다.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의 모습처럼.
"나중 가서 후회하며 형제들과 자네를 찾아 나섰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네.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신전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모두다...."
파사삭....
"그래도, 자네라면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게 대체."
"그렇다면 꼭 알려 줘야만 한다고... 그게 최대한의 속죄일 것이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네."
마지막까지 이 악물고 버텨 왔던 것일까.
그 다리가 마치 다 타 버린 재처럼 먼지가 되어 흩어지더니.
"아아, 이제야... 쉴 수 있겠어."
그 몸이.
철푸덕 하고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불안감에 잠긴 '나'가 소리치자.
바닥에 쓰러진 그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거짓말... 이었어."
"뭐...?"
"많은 생명을 바쳤네. 정말 많은 생명을... 너무나도 많이 바친 끝에, 더 이상 바칠 생명도 없어질 정도로...."
'나'가 그 말뜻을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그 몸이 녹색의 물컹한 액체로 녹아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
"그분께서는 회복되지 못했네."
너무나도 큰 오염으로 인해.
한 줌의 독물로 변해 가는 사내.
"처음부터...."
그 몸이 모조리 녹아내렸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 *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닥에는 지독한 독성을 띠는 액체 하나만이 남았다.
그리고.
"거짓말... 이라니."
그 액체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그는 진행하던 연구조차 내팽개친 채.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분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가...."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머나먼 곳.
한때 그의 신이 기거했던 바로 그 장소.
'확인해야 한다...!'
멀고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그동안의 연구로 인해, 그의 치유력은 한층 더 강대해진 상태였다.
그는 시시각각 썩어 가는 자신의 몸을 치유해 가며 나아갔다.
파시식....
치유는 가능하지만.
몸이 생으로 썩어 나가는 그 고통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긴 여정 끝에.
그는 옛 성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 아아... 왔느냐....}
그곳에 덩그러니 기어 다니고 있는.
작은 살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아, 아아... 역시... 너로구나.}
"...."
{다, 다른 아이들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역시. 역시 너는 나를 버리지 않은 게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이....}
그 살덩어리는.
전에 봤을 때보다 한참 작아진 상태였다.
말은 전보다 잘하게 되었고, 그 얼굴도 어느 정도 보이지만.
여전히 추악하게만 보이는 살덩어리.
{아아, 아이야. 잘 왔다. 그러니 이제....}
그리고.
그 살덩어리는.
{제발, 살려... 살려다오....}
"...."
{아프다, 너무 아파.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식재료 감별(강화)]
[이름을 빼앗긴 신]
본인의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바닥을 기는 존재.
그 모습에서.
한때 그들의 아버지가 보여 주었던 따스한 모습은 없었다.
"...우리의 위대하신 아버지시여."
그래서일까.
'나'는 망설임 없이 질문을 내던질 수 있었다.
"아버지께 생명을 바치면, 은총을 돌려준다고 하셨지요."
{아아, 맞다. 맞아. 내가 그랬지.}
"그건 진짜입니까?"
그 살덩어리는 추하게 걸어오더니.
그의 발을 붙잡고 외쳤다.
{맞다고 했지 않느냐. 그러니... 제발...!}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치챘다.
이것은 분명 그의 아버지였으나.
'우리와 같다.'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저 은총 덕에 면역력이 필요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역시 갑자기 은총을 잃고, 그로 인해 썩어 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나마 그 생명을 연정하는 방법이....
{생명을, 다오...!}
다른 생명을 취하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거짓말."
...자신의 죽음조차 막지 못하는 이에게.
남을 되살릴 힘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
"끔찍한, 거짓말...!"
그는 발을 치켜들었다.
아무리 그 육체가 나약하다고 한들.
오랜 여정에 지쳐 있다고 한들.
"네 거짓말 때문에... 우리는...!"
콰직!
이 작고 허접한 살덩어리 하나를 짓밟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콰직, 콰직, 콰직!!!
그는 계속해서 그 살덩어리를 짓밟았다.
그로 인해 자신의 다리뼈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그 발길질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하아... 하아...!"
어느덧.
발아래에 있는 살덩어리에게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욱...!"
살면서 처음으로 저지른 살행.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면서 물러났으나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이 아니야.'
이 땅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저 존재의 거짓말에 속아,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말렸어야 했다."
시도는 했고, 그럼에도 실패한 것이기는 했으나.
더 열심히 설득하려고 노력했다면.
어떻게든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좀 더 빨리 찾았어야 했다...!"
그 연구에 진척이 없지는 않았다.
연구 해결을 위한 실마리도 많았다.
몇 명의 사제만 더 그를 도와주었다면.
그의 연구가 더 빠르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었겠지.
"뒤늦게라도...!"
한 아이가 그를 찾아왔을 때.
사제들이 하고 있는 일을 많은 이들에게 알려서라도, 말렸어야만 했다.
'내가 죽인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무언가를 폭력으로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아, 아아아...!"
병균으로 인한 오염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극심한 두통이 머리를 괴롭힌다.
"끄륵...."
그는 고통에 바닥을 뒹굴었다.
식어 가는 살덩어리 위를 뒹굴면서.
그는 고통에 신음했다.
'죽음.'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다름 아닌 그 때문에.
그리고....
'이대로 가면 죽는다.'
그 역시.
그 죽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 지독한 오염이나, 방금 저 살덩어리를 짓밟으며 부러진 상처.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나, 나 때문에....'
동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
그 죽음이 자신에 의한 것이라는 죄책감.
스스로에 대한 실망.
그가 만들어 냈고, 그에게도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 나는.'
그는.
'죽고 싶지 않아...!'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스윽....
그는 고통으로 바닥을 뒹구는 와중에.
어디론가로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 닿은 것은,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물건.
...한때 그의 형제들이 그 아버지를 위해 만들어 낸.
날카로운 돌칼.
콰직.
그는 그 돌칼을 자신의 머리에 쑤셔 박았다.
그 나약한 가죽과 살점, 두개골을 꿰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는.
찌걱...!
"그륵...!"
그는 자신의 머리에 난 구멍 속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었다.
찌걱, 쩍...!
"께, 께헥...!"
강제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손으로.
자신의 뇌를 붙잡고, 헤집는다.
강제로 뇌가 만져지자, 그 눈동자와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수많은 연구 끝에.
그는 생명의 구조를 만지는 방법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없애야... 한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감정.
슬픔과 죄책감은.
그를 확실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없애야 하는 것은 하나.
'이 감정을 없애야 해...!'
남의 고통과 죽음에 공감하고.
그로 인해 슬퍼할 수 있도록 하는... 뇌의 기능.
쩌저쩍!!!
"아."
그 기능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는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것은....
"무섭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만.
"아, 그래. 맞아. 그게 있었지."
껍데기만 남아 버린.
"...진화를 이뤄야만 해."
한 목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