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480화 나는 조금 다를 거다.

[세라진의 몰락 사제]

[신선도 - 최악]

"끄륵...."

명백하게 죽어 가고 있는 녀석.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

이 녀석과 얘기했을 때 느낀 점은.

생각보다 꽤나 정상적인 놈이라는 것이었다.

그 흉악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묘한 부분, 단 한 곳에서만 일그러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종족의 차이인가 했지만....

"아니었던 거군."

애초에.

저 정도로 이성적인 녀석이 종족의 차이로 한 부분만 일그러져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그 일그러짐의 이유가 후천적인 이유였다고 한다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이루어진 일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고통받지 않도록... [진화]한 거였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죽기 직전.

그 죽음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서 선택했던 일.

그리고.

진화는 상처도, 질병도 아니다.

녀석이 아무리 뛰어난 치료사라고 한들.

그 죽음을 피한 뒤에, 다시 저 진화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족을 살리기 위해.

생존을 위한 진화에 집착했던 사제다.

그런 녀석이 남에 대한 공감력만을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지금의 저 의사.

남에 대한 공감력을 잃고.

자신을 배신한 이에 대한 분노만이 남은 채.

이제는 그 목적조차 사라진 연구에만 집착하는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흠.'

그렇다면.

나는 붕괴되어 가고 있는 녀석의 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방법이... 없지는 않겠는데."

* * *

내가 손을 뻗자.

쑤욱! 하고.

내 손이 바닥에 나 있는 그림자를 뚫고 들어간다.

그림자 장막은 아리엘라의 부상으로 인해 잠깐 닫혔었으나.

그녀의 부상이 회복되면서 다시 해방된 상태.

나는 그 안에 보관해 두었던 각종 도구와 재료들을 꺼내 들었다.

'위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사라졌군.'

위에서는 아리엘라와 부대원들이 저 괴물을 막고 있었을 테지만.

그 주인인 이 녀석이 죽기 일보 직전으로 헐떡이는 상태다.

나로 인한 고통 때문에 본체를 조종할 여유도 없는 거겠지.

즉.

"자, 시작하자"

요리를 할 정도의 여유는.

있다는 얘기다.

파아악!

허공에 날아드는 수많은 식칼과 프라이팬 등의 요리 재료들.

[보조 셰프]

내 레벨이 오름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보조 셰프의 효과도 강력해진 참이다.

사사사사삭!

서걱, 서걱.

끼이익... 삑!

전에는 식칼이나 국자 정도를 움직이는 게 한계였다면.

이제는 오븐과 같은 재료들마저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가스버너는 알아서 가스통을 가지고 오더니, 자신의 안에 끼우고 불을 켠다.

그리고.

나 역시 식칼 한 자루를 쥔 채 요리에 들어가자.

{뭘... 하는 거지?}

그런 나를 보며.

죽어 가던 녀석이 흐릿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긴 뭐야. 요리지."

{....}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답하자.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까도 그런 말을 하셨지.}

"응?"

{군단장께서는... 요리사였던 건가.}

그 말에.

한창 요리를 진행하던 내 손이 움찔하고 멈춘다.

저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녀석은 내게 솔직하게 답했으나.

정작.

나는 내가 요리사라는 것조차 녀석에게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정작 나에 대한 것은 기본적인 부분조차 숨기고 있었다.

요리사라는 정체성은 내 비밀이자, 가장 핵심이 되는 무기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세상은 가장 중요한 무기 한두 개쯤은 숨기는 게 좋다 보니.

이런 세상에 적응되어 버린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녀석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게 됐네."

{미안하다 라....}

그러자.

녀석은 죽어 가는 몸으로 힘겹게 내게 그 뜻을 전했다.

{갑자기 군단장이 요리를 시작한 이유는 이해할 수 없네. 아마 내 뇌 기능이 저하돼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죽을 거라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긴 할 텐데... 묻고 싶은 거?"

{아까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한 건가.}

녀석과의 동맹이 결렬되고.

강남을 떠나 복귀하려 했을 때.

나는 그대로 이 땅을 떠난 뒤.

군단의 병력을 추슬러서 복귀할 수도 있었다.

{정말 그럴 계획이라고 한다면 내게는 말하지 않고 군단으로 복귀한 뒤 병력을 데려오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그 사이에 녀석도 힘을 키우겠지만.

적어도 녀석은 내 배신을 염두에 두고 방어를 준비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그편이 녀석을 토벌하는 데에는 좀 더 좋은 방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내게 밝힌 거지?}

하지만.

나는 녀석에게 대놓고, 이대로 돌아가서 병력을 데려올 거라고 밝혔다.

솔직히 말하면 멍청한 짓이었다.

덕분에 소중한 전력을 잃을 뻔하기도 했으니, 뭐 이딴 놈이 있나? 싶을 정도다.

"으음. 뭐랄까."

그럼에도.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너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저 녀석이 내게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솔직했다고 한다면.

나 역시.

저 녀석에게 솔직해야만 한다고.

"단순한 작별 인사라도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거든."

{....}

그런.

확신이 들었으니까.

* * *

{그런, 가.}

그런 내 말에.

{군단장은 내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군.}

녀석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으로 거짓말을 해 온 게 아니라... 정말 중간에 생각이 바뀐 것뿐이었던 거야.}

"뭐, 일단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고.

저 말을 한 직후에 밝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도 나도,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발버둥 치는 처지.'

나는 녀석을 죽여야 했고.

녀석도 살기 위해서는 나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굳이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

{나는 터무니 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게로군....}

...그나저나.

터무니 없는 착각이라.

"그 착각 말인데, 나한테만 한 건 아닐걸."

{...?}

"어쩌다 보니 훔쳐보게 돼서 미안한데 말이야."

나는 작은 그릇에 담은 국물의 맛을 보면서 말했다.

"네가 섬기던 그 아버지니 뭐니 하던 녀석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을걸."

{...뭐?}

내가 가볍게 내뱉은 그 말에.

녀석의 죽어 가는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내뿜어진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자가... 그딴 소리를...!}

녀석은 남에 대한 공감력만이 제거됐을 뿐.

감정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놈은 내 말에 분노하며 외쳤다.

{그자는 나를 속였다!}

죽어 가는 녀석치고는 마력에 여유가 있는 편인지.

그 강렬한 음성에 머릿속이 징징 울릴 정도.

저 정도면 당장 죽을 건 아닌 것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또 한편으로 생각했다.

'녀석의 기억 속에서... 나는 녀석에 신의 모습을 몇 번 봤다.'

그리고.

'그 몇 번에는 차이가 있었어.'

처음 봤을 때.

내 '눈'은 녀석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치유와 회복의 주인]

[세라진]

그런데.

두 번째로 봤을 때는 조금 달랐다.

[이름을 빼앗긴 신]

그 신명과 이름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 배운 게 있지.'

신명이란.

그 존재의 정체성 그 자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저 미리내가 바깥의 존재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보여 준 예시들.

그 예시가 모두 지나칠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것 역시.

애초에 그들이 그 신명에 따라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녀석은 신명을 잃은 상태였다."

신명은 그 존재의 정체성 그 자체라 한다면.

신명을 잃은 신은, 즉.

"그 시점에서 녀석은... 이미 너희가 알던 신이 아니었던 거야."

본래의 그것과 같은 존재가 아닌.

전혀 다른... 육체의 껍데기만 남은 존재라 해야 한다.

내 권속인 마운틴이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 살덩어리는 어디까지나 시체에 불과할 뿐. 너희가 섬겼던 존재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던 거다."

얼마 전에 봤던 모르잔 역시 많은 것을 잃은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그 이름과 정체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세라진은 그 이름과 신명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나중에 거짓말을 한 녀석은 네가 아버지라고 부른 녀석이 아닐 거다."

나중에 거짓말을 한 녀석은.

저들이 섬겼던 아버지라 불리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

그저 남은 육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을 뿐인, 전혀 다른 생명체라 보는 게 맞겠지.

{그분께서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었, 다고....}

그리고.

그 사실은 녀석에게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하, 하하... 그런가. 그래. 정말 그랬다고 생각한다면... 많은 의문이 해결되는군.}

"...."

{하긴, 그렇겠지. 정말 그분께서 돌아가신 상태였다면... 그 껍데기가 한 말은 사후경직이나 다름없는 것.... 거기에 의미를 두는 것은 바보나 할 법한 짓이니....}

녀석은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잠시 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거지?}

약간 울먹이는 듯한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게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아냈어야 했나?}

"...."

{그게 껍데기라는 것을 밝혀 낸 뒤, 형제들을 설득하고... 어떻게든 진화를 이룩하는 방향으로 모두를 이끌었다면... 그렇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

이미 타인에 대한 공감을 잃어버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녀석이 집착했던, 동족을 살린다는 집념.

그것 자체는 아직도 녀석에게 남아 있는 듯.

{그래. 그때 이렇게 했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녀석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후회.'

엄청난 후회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요리를 진행하면서도, 내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강렬한 후회의 감정에 신력이 호응합니다!]

내 가슴 안쪽에서.

저 녀석의 후회에 호응하는 듯, 붉은빛이 반짝거린다.

'[대모]가 남기고 간 힘....'

그녀가 남기고 간.

한 방울의 붉은 눈물.

이 힘은 어째서인지.

내게 저 녀석의 과거를.

저 녀석의 후회를 들여다보라고 강요했다.

'대모의 의지는 저 우주 밖으로 나간 지 오래다.'

이건.

그녀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대모가 남기고 간 힘.

이 눈물 자체가 스스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회는 과거에 집착하는 힘'

그리고.

후회에 담긴 감정은....

'그래선 안 됐다.'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

즉.

"알려 주려고 한 거구나."

나는 저래선 안 된다고.

저런 후회는 겪어선 안 되는 것이라고.

저 후회를 봄으로써.

내가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있도록.

내게 알려 주려고 한 것이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뭐?}

그리고....

"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노력을 다했지. 그럼에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을 뿐."

{그게 무슨....}

내가 보고 배워야 할 반면교사는.

저 녀석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했다는 말인가!}

"응?"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한다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나를 말렸던 형제들? 끝내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던 모든 동족들? 대체 누가!}

"그야... 네 아버지지."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위쪽으로 까딱이며 말했다.

{...뭐?}

"그리고."

당황스러워하는 녀석 앞으로.

나는 완성된 요리를 가져다 들이밀며 말했다.

"나는 네 아버지와는 조금 다를 거다."

481화 배워야 한다.

"네 아버지지."

{뭐...?}

뭔가 몹쓸 말을 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좀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신이란 녀석이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저 세계가 저리될 일도 없었을 거다.'

최선은 애초에 본인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 녀석에게는 차선책도 존재했다.

'본인이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준비를 좀 더 많이 마련해 놨어야 했다.'

신전에 있는 성역이라는 공간은 무균실이었다.

그런 공간이 조금 더 많이 있었다면.

상황이 꽤나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생명들에게도 역시 병균에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쳐 놓는다던가.

그런 식의 조치만 취해 놓았더라도 신이 멸망한다는 것이 즉시 문명의 멸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모르잔이 사라진 모르잔과 옛적에 신이 사라졌을 지구 역시.

어떻게든 생명들이 살아남아 문명을 이루어 냈으니까.

"그리고."

저 세계가 저렇게 가파른 멸망을 겪고 만 것은.

순전히 그 세라진이란 녀석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다를 거다."

나는.

그 녀석의 실패로부터 배울 것이다.

[영웅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이타적 감정의 건강식 백반]

그 말과 함께.

나는 죽어 가는 녀석의 입에 요리를 쑤셔 넣었다.

* * *

이 녀석은 엄청난 실력을 가진 치료사다.

우리 군단에 영입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존재.

문제는 영입하기엔 단점이 있다는 것이었고.

덕분에 그 영입 또한 수포로 돌아갈 뻔했으나....

이제는 그 단점의 원인을 알았다.

그렇다면.

'단점이야 고쳐 주면 되는 거지.'

이 녀석의 머리에 생긴 문제는.

자신이 스스로를 그런 방향으로 '진화'시킨 결과였다.

그렇기에, 녀석은 그 뛰어난 치료술로도 자신을 원상 복귀시키지 못한 것이리라.

녀석에게 일어난 것은 병이 아닌 진화의 결과물.

더 나아진 상태인 진화의 결과물을 병처럼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저 녀석 문제고.'

저 의사에게서도 들었고.

내 경험에서도 알게 된 바로는.

이 세상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은 '인식'에 따라 변화한다.

종족에 대한 개념이나... 자신이 가진 힘의 한계 역시 마찬가지.

저 의사의 경우.

놈에게 일어난 일은 녀석 스스로가 그것을 진화라 인식하면서 행한 일.

그렇기에 녀석은 그걸 치료할 수 없었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병이거든, 그거.'

진화가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과거에는 그게 최선이었을지 몰라도 현대에는 문제로 여겨지는 것들도 많다.

그렇다면, 그것은 병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스킬]

[건강식]

해결할 방법도.

없지는 않았다.

[요리에 특별한 마력을 담아, 건강식의 제조가 가능해집니다.]

저 경기도에서 떠나면서 얻었던 힘.

먹은 이의 건강을 회복한다는....

어떤 면에서는 요리사의 영역을 넘어선 스킬이다.

저 경기도의 일을 해결하고 얻은 스킬이니만큼.

상당히 강력한 힘일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꽤나 오랫동안 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용 시, 요리사의 체력이 소모됩니다!]

이 요리는.

여타 요리들과는 다른 대가를 요구했으니까.

'내 몸 상태는 그동안 최악이었다.'

이전의 몸 상태에서는 이 스킬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다.

스킬을 사용하려고 해 봐도, 애초에 스킬 자체가 발동되지를 않았다.

마력이 부족했을 때 스킬을 발동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겠지.

만약에 진작에 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장영웅과 같은 이는 그리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꽤나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지.'

[영웅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이타적 감정의 건강식 백반]

[맛이나 즐거움이 아닌, 건강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입니다!]

[요리사가 의도한 특별한 마력이 개입되어, 특별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1. 면역력 상승]

[2. 뇌 건강 치료]

[보유하고 있는 업적 - '치료의 요리사'의 힘이 요리에 반영됩니다!]

[요리로 인한 치유 효과가 더욱더 활발하게 촉진됩니다.]

"끄륵...."

요리를 먹은 녀석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파사삭....

나로 인해 이 공간에 생겨난 수많은 병균들.

녀석의 몸은 그 병균으로 인해 썩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의 치유력으로 어떻게든 그 부패를 막아 내고 있었지만.

부패의 진행이 훨씬 더 빠른 만큼 큰 의미는 없었다.

스르륵....

그래.

바로 방금 전까지는.

'면역력.'

애초에.

원래 면역력 문제 같은 건 병원에 간다고 한 번에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의사가 그 문제를 잠깐 틀어막아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적절한 식이요법....

그러니까.

'요리의 영역이다.'

몸에 좋은 식사를.

꾸준히 섭취하는 게 더 중요하거든.

[대상의 면역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단, 해당 면역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인 건강식의 섭취가 필요합니다.]

스르르르륵...!

회복력보다 더 강한 부패로 인해 점차 썩어 들어가던 녀석의 몸.

그 힘의 구도가 역전되고.

바싹 마른 고목처럼 부서져 가던 그 몸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상의 뇌에 생긴 이상을 치료합니다!]

요리에 담겨 있던 마력이.

온몸을 한참 맴돈 뒤에야, 녀석의 머리를 향해 치솟는다.

내 의도대로라면.

녀석이 잃어버린 감정에 대한 영역을 되살려 주어야 하겠지만....

[주의!]

[대상의 상태는 부상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진화를 강제로 역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래도.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불가능이라."

그 말에.

나는 내 앞에서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이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지구에서 저지른 일은 아마 꽤 끔찍한 편에 속할 것이다.

특히 저 장영웅이 마지막에 고독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이 녀석이란 걸 생각하면.

그건, 죽음으로도 갚기 어려운 죄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대로 이 녀석이 죽어 버려도 죗값을 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란 말이지.'

녀석은 살아서.

자신이 느끼지 못한 그 감정을 다시금 깨닫고.

...그로 인한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속죄해야 한다.

"불가능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불가능이라는 단어 따위에.

멈춰서면 안 되는 일이다.

[사용자가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신력 : 21]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저 서울에서 있었던 경험을 통해.

나는 내 몸 안에 머무르는 이 힘.

[신력]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은 깨달은 상태였다.

파아아아아아악!!!

내뻗은 손에서부터 회백색의 광휘가 튀어나오고.

그 빛이 녀석의 전신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 * *

내 몸에서 튀어나온 회백색의 광채.

그것은 저 의사의 몸을 뒤집고.

시스템이 불가능이라 선언한 일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쩌적...!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라고는 하나.

그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녀석의 뇌에 닿을 때마다, 내 신력은 강한 저항력에 마주한 듯 튕겨 나가고 있었다.

이유는 알 만한 것이었다.

'...진화를 역행한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란 거겠지.'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다 이런 진화를 해 버리고 만 건지.'

아니.

이 의문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저 녀석이 섬기던 신격.

세라진에 의한 일이다.

모르잔의 말에 따르면.

모든 신격은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렇게 되는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세라진 역시.

아마 자신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사랑한 거지.'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저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생명과 치유의 힘을 약속해 주었다.

그리고 그건.

'무책임한 짓이었다.'

녀석이 그 생명과 치유를 약속해 준 덕분에.

그 백성들은....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화란 것은.

애초에 저 의사가 하려고 한 것처럼 한 대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수많은 대에 걸쳐서 이루어진 적자생존.

치열한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그 변화에 성공한 이들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이루어지는 장대한 역사와 시간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저 세계에서는 죽을 일이 없었다.

너무나도 나약한 이들조차 그대로 살아남아, 적응할 필요 없이 그대로 대를 이어 갔으니.

진화라는 것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사랑을 베푼 존재가 사라지자마자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멸망하고 말았다.

기껏 살아남은 저 의사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원치 않은 진화를 강제로 이루어 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거기서 배워야 한다.'

저 눈물은 내게 이 녀석의 과거를 보기를 강요했다.

그건 내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라진의 실패에서부터 배워야만 해.'

나 역시 한 집단의 수장.

내가 무언가를 배운다면.

그건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던 것에 불과한 의사가 아닌, 한 종족의 지배자였던 세라진에게서 비롯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결국.

문제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같았다.

'모든 책임을 한 명이 지고 있던 문제.'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들었던 조언들.

그리고 최근에 부하들에게 들은 말들을 떠올렸다.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목숨을 위협받을 상황이 나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원들은 자신들 역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기를 원했다.

나는 그들의 죽음이 두려웠으나.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혼자 짊어져서는 안 된다.'

...내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만 한다.

['신력'에 방향성이 자리 잡습니다.]

['신력'의 형상이 희미하게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저 의사가 될 것이다.

[방향성을 갖춘 신력이 폭발적으로 솟구칩니다!]

쩌적...!

그전까지는 어떤 형체도 없는 광원에 불과했던 신력에.

약간의 물리력과 형체.

그리고 방향성이 자리 잡는다.

쩌저적...!

약간의 물리력마저 느껴지는 그 힘이 전보다 더 강하게 날뜀으로써.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기 시작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러자, 결국.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 있었다.

[대상이 이룩한 진화를 강제로 부정합니다.]

[대상에게 사용자의 법칙을 강제합니다.]

[대상의 진화를 진화가 아닌 질병으로 규정합니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녀석이 느끼지 못하게 되었던 그 감정이....

[대상의 뇌 질환이 치유됩니다!]

"아아... 아아아...!"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이.

* * *

'아프다.'

분명 한때는 고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이 작은 공간에 그만의 영역을 만들었지만.

그곳에 찾아온 이물질로 인해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파.'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에 분노마저 자리 잡으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 마음에 분노는 쉽게 자리 잡지 못했다.

그저.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죽여 달라는 그런 생각뿐.

하지만.

'...읍!'

한 요리가 그 입안으로 강제로 들어오게 되자.

그 감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건....'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따뜻한 감각.

상처를 보듬는 치유의 힘.

'나와는... 다르다.'

그가 배운 수술이란.

살점을 뜯고 엮으며 강제로 상처를 뜯어고치는 것에 가깝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기에 그의 치료는 마취를 하고 진행된다.

하지만 이 힘은 달랐다.

강제로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녹아드는 힘.

강제로 정상적인 상태로 끌고 가는 수술에 비하면 비록 그 속도는 느릴지언정.

확실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천천히 인도하는....

그런 치유의 힘이었다.

고통이 점점 잦아들고.

오히려 묘한 충족감이 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그는 감기고 있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아아, 살아계셨던 겁니까....'

한때.

그가 그토록 숭배했던 신과 비슷한.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만들 것만 같은 위대한 힘.

'...아니.'

하지만.

그게 그가 섬기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네 아버지니 뭐니 하는 양반처럼 널 따뜻하게 감싸 줄 생각은 없다."

그 몸에서 피어오르는 저 전능한 힘.

처음에는 희끄무레하게만 보였던 그것은.

마치, 저자 내면의 무언가와 호응하는 듯.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그 형체가 변화하고 있었다.

'위대하신 그분과는... 다르다.'

그 형체는.

그가 섬기던 존재와는 분명히 다른 것.

'그래도....'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그 따스함 속에서.

그는 그제서야.

눈앞의 찬란한 광휘에 휩싸인 사내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과연.'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그가 진화를 위해 지식을 쌓아 올리던 중 품었던 의문 중에 하나.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 땅에 자리 잡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힘에 대한.

'바로....'

큰 깨달음이었다.

482화 통성명.

"커헉, 커허억...!"

바닥을 뒹굴기 시작하는 의사.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자체는 아까와 비슷했지만.

그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 몸이 붕괴해 가고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 그 몸은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보였다.

"괴롭냐."

{...그렇네.}

"뭐가 그리 괴롭지?"

그럼에도 녀석이 저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마도.

{구하지 못한 형제들...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정신의 고통.

"그게 전부냐?"

그런 내 말에.

녀석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나는 고향을 떠난 뒤... 여러 땅을 전전하며 실험에 임했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실험에 투입된 이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

"그랬겠지."

{그런 끔찍한 짓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내가 떠올라서... 숨을 쉴 수가 없어.}

이 고통은.

한때 녀석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갔던 바로 그 고통이다.

나는 녀석의 몸 상태는 해결해 주었지만.

그 정신적 고통의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만 만들었다.

결국.

녀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고통의 원인.

짙은 죄책감 자체는 아직 남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난 그것까지 해결해 줄 생각은 없다."

얼마 전이라면.

이 녀석이 내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 시점에서.

그 죄책감 역시 해결해 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마, 너도 그런 건 바라지 않고 있겠지."

{...맞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 문제는 내 선에서 해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게 당장은 깔끔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언정.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그때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일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나는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군단장.}

"...."

{이대로 이 고통에 짓눌려서 죽는 것밖에... 답이라곤 없는 것인가....}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답했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짊어지고 가야지."

{....}

"뭐 대단한 방법이 있겠냐. 과거를 뜯어고칠 수도 없고, 그냥... 짊어지고 사는 거지."

{하지만... 나는 모든 걸 잃어버리고 말았네. 내게 남은 것은 이 고통스러운 기억뿐인데... 이것만 떠안은 채로 어떻게 살아가야....}

확실히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다행히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속죄하면서 살아라."

{속죄?}

"네가 가진 죄책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겠지. 네가 저지른 일은 네 책임이고... 그걸 갚는 것도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냅다 죽어 버리는 건 그 책임을 내팽개치는 일이지."

{그 속죄는... 어떻게 해야....}

탁, 하고.

나는 녀석의 앞에 주저앉아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세상은 네 세상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그 과정은 조금 다를지언정... 멸망을 향해 차근차근 착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지."

{...그 말은.}

"우리를 도와다오."

저 녀석은 내게 솔직했다.

그러니 나도.

녀석에게 부탁할 때는, 솔직하게 부탁해야만 하겠지.

"나도 너와 같아."

{....}

"이 땅에 다가오는 멸망에 대해서 나름대로 저항해 보려고는 하고 있지만... 결과는 요지경이지. 멸망을 이겨 내기는커녕 하루하루 살아남느라 바쁜 처지에다가, 너 하나 못 이기고 죽을 뻔한... 그런 정도."

이 녀석은 나와 닮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하지만."

이 녀석은 끝내 실패했으며.

내게는... 아직.

"기회는 남아 있거든."

{....}

"우리가 헛된 멸망을 겪지 않도록 도와다오."

물론.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해 주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딴 부탁을 할 정도로 나도 양아치는 아니다.

"내 밑에서는 저런 의미 없는 죽음을 겪을 일은 없을 거다."

{...!}

"설령 우리가 실패한다고 한들... 그 끝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일은 없도록 해 주마."

그런 내 말에.

녀석은 겁먹은 듯 움츠러든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그 말과 함께.

나는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그러자....

{나는 한때 모시던 나의 주인님을 배교하고... 그대를 섬기도록 하겠나이다.}

녀석은.

내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나의 새로운 신앙이시여.}

* * *

'...신앙?

뭔가 마지막에 이상한 단어가 들린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럼 우린 이제 동료로군."

녀석은.

우리를 도와주겠다 선언한 것이다.

{예. 미욱한 힘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건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이 녀석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의술은 우리 부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 여러 세계를 전전하면서 실험을 진행했다고 했지."

{예.}

"...그 얘기도 나중에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녀석이 가진 지식 또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제 몸은 나약합니다. 저는 이 장소를 떠날 수 없는 처지.}

"아, 그건 내가 해결해 주마."

{예?}

그 말과 함께.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녀석을 붙잡아 일으키고는 그 몸을 부축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뭐긴. 밖으로 나가려는 거지."

{무슨...!}

그런 내 말에 경악하는 녀석.

{무슨 방법으로 제 몸의 부패를 일시적으로 막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계속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응? 그래?"

{의술을 전문으로 하는 저조차도 그런 건...!}

"이제 와서 무슨."

그 말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네가 내 몸에 닿고도 멀쩡할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그건.}

"뭐,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 같은 사례도 처음은 아니니까."

확신이 있었다.

지금 이 녀석은 내가 먹인 건강식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질병에 대한 내성이 강해진 상태.

반대로 말하면, 내 요리의 효과가 끝나는 순간 그 내성도 사라질 테지만.

-생각해 봐. 각성자로서의 요리가 아닌, 기존의 요리. 원래 요리는 단기간의 효과보다는 장기적인 건강에 더 영향을 많이 미쳤거든.

얼마 전.

경기도에서 하워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갑자기 건강식을 시작한다고 하루 만에 건강해지는 경우는 없었어. 몸에 안 좋은 요리를 먹었다고 다음 날 갑자기 쓰러지는 일도 드물고. 우리가 알던 요리의 본질은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장기적인 변화에 있다는 거야.

요리의 본질은.

단기적인 회복이 아닌 장기적인 변화에 있다.

"확실히 단순한 치료라면 네 전공일지도 몰라. 내가 그걸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하지만 말이야...."

당장은 내 요리를 주기적으로 섭취하지 못한다면, 다시금 저번 같은 죽음의 위기에 놓이고 말겠지만.

내 건강식을 장기적으로 먹고.

그 건강한 음식이 이 녀석의 몸을 구성하게 된다면.

"장기적인 건강 관리는 요리사의 전공이거든."

{요리....}

서수혁이 겪고 있던 정신의 문제 역시 내 요리를 장기적으로 복용함으로써 나아진 것처럼.

이 녀석도 언젠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의 더러움을 이겨 낼 수 있는 몸이 될 것이다.

진화니 뭐니 하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식이요법이라는.

지극히 건강한 방법으로.

"그것보단 다른 걱정이나 해.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다."

이 녀석을 비마나에 데려간 뒤.

그곳에서 소개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이미 뱀파이어들에 대한 것도 알게 된 부대원들이 생겼다.'

지금.

나는 부대원들에게 숨기고 나만 알고 있는 정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부대원들에게 공개해 나갈 예정이었다.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은 만큼.

그들이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속도는 조절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정보를 풀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부대원들이 스스로 판단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이 녀석에 대한 일 역시 마찬가지.'

나는 이 녀석이 저지른 과오를 부대원들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

녀석이 저지른 그 과오를 부대원들에게 밝히고.

그럼에도 속죄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 봐야겠지.

{...제가 저지른 죄악은 상상 이상으로 많습니다. 당신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죄책감에 짓눌려 죽어 버릴 정도로.}

"뭐... 그럴 것 같긴 했지."

사실 뭐.

나한테 이 서울의 마지막 생존자를 끝장낸 게 자기라는 사실을 덤덤히 읊을 때부터 예상했다.

{그 모든 죄악을 밝히고, 그럼에도 받아들여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듯합니다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어려운 과정을 넘기고 난 후에는 진정으로 우리 부대의 일원이 될 수 있을 테니까."

{....}

"뭐, 같이 열심히 해 보자고."

{...예.}

...그나저나.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하던 대로 말하지."

{예...?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아.

일단은 내 부하가 된 거니까 예의를 차려야 된다, 그런 건가.

"그래도 난 원래 말투가 더 익숙하니까. 그쪽이 나을 것 같은데."

{그,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리하겠네.}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참 뜬금없지만.

"...생각해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한 것 같네. 내 이름은 신영준이다. 네 이름은?"

{...루카, 라고 하네.}

루카라.

"그래. 루카, 잘 부탁한다."

그래.

우리는 이제야 통성명을 마친 관계다.

저 군단에서.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알아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녀석과 잡다한 대화를 나누며 지상으로 올라갔다.

* * *

지상으로 올라오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내 옆에 있는 이 녀석은 육체적으로는 약골을 넘어서 해골보다 못한 수준.

아무리 작은 체형이라고 한들 아이 한 명을 데리고 구멍을 기어올라야 하는 것이다.

본래라면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보조 셰프]

다행히도.

직접 저 구멍을 기어오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루카를 업은 채 커다란 철판요리용 철판 위에 올라타자.

철판이 스스로 떠오르며 구멍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력이 간당간당하겠는데, 이거.'

보조 셰프에 올라탄 채 이동하는 일은 꽤 많은 마력을 소모한다.

나 혼자도 아니고 2명이나 올라탔으니, 그 소모량도 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나마 얼마 전에 받은 치료 덕에 마력의 효율 자체가 늘어난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힘들게 저 구멍을 기어올라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지상으로 향하던 중

띠링.

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문구들이 있었다.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 진화의 요리사.]

'아.'

[요리를 통해 어긋난 방향성으로 이루어진 진화를 수정하고,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대상에게 확정적으로 부여되어 있던 죽음의 운명이 수정되고, 점차 치유되어 나갈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신화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업적입니다.]

[위대한 업적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483화 여긴 또 어디야 (1)

[업적 - 진화의 요리사.]

[신화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업적입니다.]

[위대한 업적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이라.'

눈앞에 떠오르는 문구.

평소에는 그냥 기분 좋게 바라봤을 문구였지만.

지금은 기분이 좀 묘했다.

'이걸 주는 건 대체 누구지?'

이 보상은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된 것.

그 시스템의 정체에 대해 파고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

이걸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

그게 누군지 고민한다고 바로 답이 나올 것도 아니고.

'...그냥 기분 좋게 받지 뭐!'

당장 중요한 것은.

이 보상이 내게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이었다.

[보상으로 능력치 상승의 물약 - 힘, 민첩, 마력이 각각 5개씩 주어집니다!]

첫 번째로 주어진 보상은 능력치 상승의 물약.

하지만.

이미 능력치는 차고 넘치는 나다.

이걸로는 보상이 조금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신력이 '3' 증가합니다.]

[신력 : 25]

두 번째로 주어진 보상은.

신력이었다.

'오...!'

레벨 업으로도, 물약으로도 올릴 수 없는 스탯이 신력이다.

그 스탯에 담긴 엄청난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신력이 3이나 늘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보상이었다.

그런데.

'...응? 잠깐만.'

그 숫자를 본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저 루카를 치료하기 전의 내 신력이 21이었을 텐데?'

늘어난 신력은 3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신력은 25였다.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게 아닌 이상.

이건 아마도....

'업적의 보상 외에도 내 신력이 1 올랐다는 건가.'

이 신력이 자기 혼자서 늘어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긴 했다.

시스템이 부여해 준 것 외에도 신력이 올라간 상태... 라고 봐야겠지.

대체 어떤 요인이 관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건 나쁘지 않아.'

그 가공할 위력을 생각하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스탯이다.

이유를 모르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좋은 일이니, 일단 좋게 좋게 넘어가야겠지.

아무튼.

지금까지 이룬 다른 업적들과 마찬가지로, 꽤나 훌륭한 보상.

그 내용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띠링.

[신력의 방향성을 잡고, 그 형체를 구체화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응?"

그 뒤에 이어지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 * *

[이는 모든 각성자들 중 최초로 이루어 낸 일입니다.]

[초월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앞서가는 이를 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스킬 - 달면 삼키고, 쓰면 뱉기]

업적의 보상을 모두 받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어져서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그 문구를 본 나는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업적이랑 별개의 보상인 거지, 이거?'

저 루카의 잘못된 진화를 수정하고.

녀석에게 올바른 방향으로의 성장을 제시한 것.

그 업적을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게 신력과 능력치의 물약이었다.

물약은 물론, 신력이라는 스탯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한다면.

업적의 보상으로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업적과는 별개의 보상이 주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신력의 형체를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딴 이유로 보상을 준 적이... 있었나?'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시스템이 내게 보상을 주는 경우는 꽤나 한정되어 있었다.

레벨 업으로 인해 주어지는 특성이나 스킬들이 레벨 업 그 자체로 인한 것이지, 딱히 보상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보상을 주는 경우는 대체로 업적을 달성하는 경우뿐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건 딱히 업적이 아니잖아?'

신력의 형체를 구체화한 것.

나도 잘은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내 몸에 담긴 신력을 사용하는 그 효율이 증가한 느낌이 있기는 했다.

나로서는 꽤나 고무적인 현상이기는 하지.

하지만.

이건 내 개인의 능력이 올라갔을 뿐, 딱히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업적을 달성했다는 문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런 이유로 보상을 준다고?'

막말로.

시스템은 내 스탯이 100을 넘어갔다고 해서 보상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아마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스탯 100을 찍었을 테니.

그것도 업적이라면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만.

'귀신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당시에는 꽤나 기대하기도 했지만.

시스템은 그 정도는 별 대단한 업적도 아니라는 듯 쿨하게 무시했던 거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걸 이유로 내게 보상이 주어진 것이다.

시스템이 보여 준 일들치고는 꽤나 보기 드문 예외.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신력의 형상이 구체화된 게....'

시스템으로써는.

꽤나 중요한 일이라던가.

어쩌면.

이 부분을 잘 파고들면.

시스템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콰아아아아아앙!!!!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

갑자기.

머리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커다란 소음이 있었다.

* * *

콰아아아아앙!!!

"이게 무슨?"

이미 지상에 거의 다 도착한 참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큰 소음과 진동이 울려 퍼지자.

나는 당황스러워하며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님!"

"은인이시여!"

저 구멍 위쪽.

지상에서부터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너희들... 괜찮냐!?"

아리엘라와 부대원들.

부대원들 중에 사망자는 없어 보였지만.

그들 대부분이 엄청난 부상을 입고 있었다.

"...미안하다. 역시 저 괴물을 막으라는 건 너무 힘든 부탁이었던 것 같군."

"아뇨! 저희는 괜찮습니다. 다만...."

"다만?"

그 모습이 신경 쓰인 내가 고개를 숙이며 그리 말하자.

부대원들은 그 극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실, 위에서 저희가 싸우던 저 의사의 본체 말입니다만.... 그 녀석은 군단장님께서 지하로 들어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녀석은 활동을 멈췄습니다."

"아, 그래?"

"예. 그러나 워낙 강한 괴물이었던지라, 짧은 시간에 이렇게 부상을 입어 버린 거죠. 사실 그 짧은 전투로 이 정도로 다친 게 부끄러울 수준입니다만... 아무튼 저희도 덕분에 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내게 업혀 있었던 진짜 의사의 본체.

루카가 말했다.

{...중간부터는 고통으로 인해 그 몸을 조종할 여유도 없었으니, 그 때문이겠지.}

"...주인님? 그 꼬맹이는 또 누구인지?"

"얘기하자면 좀 복잡해. 나중에 설명해 주마. 그래서?"

그 모습을 본 이들이 의아해했으나.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녀석이 갑자기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역시, 지상에서의 진동은 저 괴물이 일으킨 것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저 몸의 주인... 루카는 지금 내 등에 업혀 있는데?'

이 녀석이 나를 배신했을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음?"

"저 녀석, 저희와 싸울 때와는 행동 양식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달라졌다니, 어떻게?"

"직전의 녀석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저희를 죽이려고 했고, 그다음에는 군단장님을 쫓아 지하로 들어가려고 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설명을 하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는 부대원들.

"지금 저 녀석은... 어떤 목적도 없어 보여요."

"...!"

"그냥 미쳐 날뛰는 것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희도 어떻게든 도망쳐서, 이렇게 군단장님을 찾아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긴 합니다만...."

미쳐 날뛰는 것 같다니.

내가 그 얘기에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이건.}

그게 신경 쓰인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내 등에 업혀 있던 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안하네. 아무래도 군단장께는 사과를 드려야만 할 것 같군.}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무언가를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장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네. 그리고... 나는 저 몸을 온전한 내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지.}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녀석은 저 강력한 몸으로 갈아타지도 못한 채.

이 나약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전까지는 저걸 내 몸으로 인식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래도 내 몸의 연장선정도로는 이해할 수 있었네. 팔과 다리 한 짝 정도로 말이야. 덕분에 난 내가 만들어 낸 창조물들을 통해 말을 전하고,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네만....}

녀석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나는 아니야.}

"뭐?"

{나는... 저것이 탄생하기까지의 추악한 과정을 알고 있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의사가 하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전까지의 녀석은 자신이 행한 실험이나 연구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진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군단장 덕분에 바뀐 지금의 나는... 저걸 내 몸의 연장선으로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군.}

지금은 아니었다.

녀석이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내가 그 진화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지금 지상에 있는 저 실험체들은... 비유하자면,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름을 잃어버리고 만 내 옛 신앙과 같을 것일세.}

"영혼이 떠나고, 육체만 남아 있는 상태라는 거군."

{맞네. 그리고 지금은... 그 텅 빈 육체에 새로운 정신이 자리 잡은 것 같네. 텅 빈 육체에서 새로 태어난... 아주 어린 영혼이.}

거기까지 말한 녀석은.

불안하기 그지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영혼은 육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법. 내가 저 육체에 사용한 재료들을 생각하면... 그 영혼이 썩 선하지는 않을 테지.}

"...."

{게다가, 지금 저것의 상태는 갓난아이와도 같네. 그리고, 갑자기 세상에 내던져진 갓난아이는....}

그리고.

다음에 나올 말은 나도 예상할 수 있었다.

"당황해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그 말대로.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던 괴물.

그 수많은 괴물들이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폭주의 여파가 지상과 멀지 않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제기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도망쳐야 하네.}

"뭐?"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녀석에게 물었다.

"저 녀석이 우리를 죽이려 들 거라던가, 뭐 그런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닐세. 저것은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한 상태가 아닐 테니, 아마 저대로 제멋대로 폭주하겠지. 내가 떠난 만큼 다른 괴물들을 이용해 더한 진화를 이루지도 못할 테니... 아마 그대로 두면 이 땅의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다가 공멸할 것이야.}

"그러면 왜 도망쳐야 한다는 거지."

{...그 폭주가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녀석이 불길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만들어 놓고 이런 말은 뭐하지만, 저 몸에는 여러 괴물들의 이능이 집합되어 있네. 저 녀석은 지금 그 이능을 앞뒤 생각 없이 퍼붓는 중이고.}

"그 말은...."

{지금 이 근처에 있다가는 자칫 저 녀석이 발동하는 능력에 휘말릴 가능성이....}

그리고.

그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엄청난 외침과 함께.

파바바바바바바박!!!

멀쩡하던 강남의 땅 주변에.

수십 개의 검은 구멍이 자리 잡는다.

'방랑광대의....'

쓸데없이 거대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 저 녀석과 싸울 때 보았던 바로 그 검은 구멍.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강대한 이능.

그전에는 자신을 이동시키는 데 썼었지만.

지금 저 녀석은 그런 의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다.

그렇기에.

놈은 어떤 의미도 없이 폭주하며 그 능력을 흩뿌렸으며.

{...아무래도 늦은 것 같군.}

"아."

그 수많은 검은 구멍 중 하나가.

우리의 발아래에 열렸다.

* * *

눈이 감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나와 부대원들의 모습.

"여긴 또...."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타난 것은.

"...어디야?"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풍경의 모습이었다.

484화 여긴 또 어디야 (2)

[재봉사 : 말씀하신 괴물은 지금도 계속 날뛰고 있어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에.

나는 혹시나 하는 우려를 담아 답했다.

[셰프 : 사람들은 별문제 없나? 특히 경기도는 서울에서 가까울 텐데.]

[재봉사 : 사실, 그 괴물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서울 내에 있는 다른 괴물들이 밖으로 나오려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어요.]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봉사 : 다행히, 얼마 전에 부대에 들어왔던 건축가분이 이미 서울 외곽에 방어 시설을 어느 정도 설치해 둔 상태였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안건이 올라온 걸 본 기억이 있다.

경기도 출신인 건축가가 혹시라도 경기도 사람들이 서울의 괴물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해 방어 시설을 설치한 것.

[재봉사 : 그 방어 시설을 이용해서 막아 낸 덕분에, 피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저희도 지원 병력을 파견해서 협회의 병력과 함께 경비를 서고 있으니. 큰 문제를 없을 것 같아요.]

그런가.

"후우...!"

다행히도.

서울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가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광전사 : 사실, 저희 입장에선 오히려 이득입니다.]

게다가.

[광전사 : 서울 내에 있던 괴물들은 잠재적인 위험이었죠. 언제 영역을 떠나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사수조장 : 그런데 서울 내에 넘쳐 나던 그 강력한 괴물들이 서로 상잔을 벌이고 있는 셈이니... 저희로서는 손 안 대고 서울 내의 괴물들을 토벌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는 이게 오히려 호재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 괴물이 서울에서 날뛰어 줌으로써.

그 안에 넘쳐 나던 괴물들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

정벌이 너무 힘들 것이라 예상되어 미루어 두었을 뿐.

서울 내에는 지금도 쓸 만한 설비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 서울 점령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니.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희소식에 가까웠다.

[마법소년 : 우리 상황은 이렇다만.]

다만.

문제는....

[마법소년 : 그런 너는 괜찮은 거냐?]

[셰프 : 음, 그게.]

[마법소년 :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저쪽보단.

내 쪽이라고 해야 하나.

[광전사 : 신 병장님.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면 바로 말씀해 주십쇼.]

[사수조장 : 곧 비마나를 기동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 갖춰질 겁니다. 그사이에 설비의 레벨도 올린 만큼 이번엔 더 오랫동안 구동 가능할 테니. 위치를 알려 주는 즉시....]

[셰프 : 아니, 아니아니.]

부대원들의 걱정 섞인 메시지가 우르르 화면을 가리지만.

나는 그 걱정을 정중히 사양했다.

[셰프 :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그쪽 문제에 집중해.]

[재봉사 : 네? 하지만...!]

[셰프 : 우선 다른 지역을 정벌하고 사람들을 합류시키는 게 가장 급하다. 그런 와중에 비마나 같은 귀중한 전력을 낭비할 수는 없지.]

부대원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집단의 수장으로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셰프 :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

[광전사 : 신 병장님....]

[셰프 : 김현석 중장이나 조준 대위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없어도 지역 정벌에는 문제가 없을 거야. 무슨 문제가 있다면 김 중장님에게 맡기고. 그래도 뭔가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면... 충청도 쪽에 거점을 두고 있는 이들. 교단과 협력해라. 그쪽은 내게 호의를 보였으니, 큰 문제가 없다면 협력해 줄 거야.]

다행히.

오랜 시간 동안 공들인 결과, 군단은 상당히 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꽤나 걱정되기도 할 것이고.

부대원들을 위해서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한다고 다급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김 중장의 '기대 부응'이라는 카드까지 존재하는 한.

[바깥의 존재]와 같은 이상한 존재가 개입하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군단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킬을 사용한 김 중장은 솔직히 나보다도 뛰어난 지휘관이니까.

[마법소년 : 너... 정말 괜찮은 거냐?]

민재 형의 우려 섞인 질문에.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셰프 : 당연하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돌아갈 테니까.]

[마법소년 : 그 말은.]

[셰프 : 내가 돌발 상황에 놓인 게 한두 번이야? 다 방법이 있지.]

그러자.

[광전사 : 역시 신 병장님...! 이미 해결법을 찾아 놓으신 게 있으신 거군요!]

[사수조장 : 뭐, 신 병장님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이왕이면 빨리 복귀하십시오.]

[마법소년 : ...그럼 믿고 기다리마.]

[재봉사 : 하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셔야 해요.]

다행히도.

나를 신뢰해 주는 부대원들의 답변이 돌아온다.

'저 녀석들에게 맡기면 부대는 큰 문제 없겠지.'

그렇게.

나는 안도의 미소를 띠며 길드 메시지를 닫았다.

'다 방법이 있다, 라....'

그리고....

"...자, 일단 말은 이렇게 질러 놨는데."

나는 멍하니.

길드 메시지에 가려져 있던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냐, 제기랄."

한국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국적인 건물들의 모습이었다.

* * *

저 길드 메시지를 나누기 수십 분 전.

"여긴 또 뭔데...!"

갑자기 눈을 떴을 때 나타난 것은.

작은 간판의 모습이었다.

간판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한국어가 아니다.'

그 언어였다.

'한자....'

한국어가 아닌 한자.

어디 차이나타운 같은 곳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을.

눈앞에 보이는 간판들의 숫자는 차이나타운이라고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숫자가 아니었다.

'다른 나라.'

그리고.

내가 그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잠시 몸을 숙여 주게, 군단장!}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급하게 몸을 숙였다.

그러자.

"*$^%^!@#!@$#*&...!"

내 등에 업혀 있던 루카는 앞으로 손을 뻗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이 녀석이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구멍...!'

우리를 이곳으로 날려 버린 정체불명의 구멍.

녀석이 뻗은 손으로부터 새어 나온 기운이 그 구멍에 닿더니.

콰아아아아악...!

그대로 닫혀 사라질 뻔한 그 구멍을.

가까스로 틀어막는다.

그러자.

사르륵....

검은색으로 일렁이던 구멍이 마치 색이 빠지는 듯.

회백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응급조치는 취했네만.}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루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썩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버린 것 같네. 군단장.}

* * *

그 후의 상황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

'그나마 길드 메시지는 가능해서 다행이다.'

장벽을 넘고 경기도를 향할 때는 길드 메시지도 비활성화되었다.

당시에는 내가 의도를 가지고 장벽을 넘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원치 않은 이동을 해 버린 셈이니까.

'시스템'도 그 차이를 반영해 준 것이겠지.

"...그래서."

그리고.

내가 부대원들과의 통신을 마치자.

아리엘라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꼬맹이는 누군가요, 주인님?"

"아."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왜소해 보이는 작은 아이의 모습.

그러고 보니.

아직 저 녀석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지.

"너희도 아는 녀석이야. 그 의사."

"...네?"

"이게 녀석의 본체라더군."

그 말에.

아리엘라는 물론 몇몇 부대원들조차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

"...그 정도 괴물의 본체가 저렇게 연약해 보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리엘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희랑 그렇게 싸운 녀석을 이리 가볍게 데려와도 되는 건가요?"

"...."

남 말할 처지냐....

라는 말이 목까지 나오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아리엘라는 저 녀석이 쏘아 낸 태양 빛에 권속을 많이 잃었다.

화나는 것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녀석은 내가 하는 일에는 반발하지 않으니.'

저런 건 사소한 투정 정도라고 볼 수 있겠지.

반면.

조금 의외인 것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엉?"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인물들.

정수아를 비롯한 몇몇 부대원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대들을 다치게 만든 장본인이네만.}

그들이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놀라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루카 역시 조심스럽게 그 얘기를 꺼내 들었으나.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전투 정도야 자주 겪는 일이고 부상은 일상이죠. 그런 건 작은 일에 불과해요.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말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 정수아.

"은인께서 무엇을 바라시는가... 하는 점이죠."

"...?"

그러고 보니.

정수아는 지난번, 저 아리엘라 앞에서 말했다.

저 의사를 두고 도망가는 게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저희 입장에서는 당신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는 했습니다. 마음에 드냐 아니냐 하면 마음에 드는 편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은인의 생각은 저희와 다를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다 보니 싸움으로 번지긴 했지만, 그런 식의 마무리는 은인께서 바라는 게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 '결여된 부분'의 문제로 인해 저 녀석과 한 번 관계가 무너졌다고 한들.

"은인의 성향을 생각하면... 좋은 인재를 버려 두고 가는 건, 아깝다고 여기실 것 같았거든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네."

그럼에도, 저 녀석을 부대로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는 사실.

그걸 눈치채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대들은 그걸로 납득할 수 있는 건가?}

"글쎄요. 저로서는 그리 마음에 드는 자는 아닌 게 사실이긴 하지만 은인께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따라야죠."

그렇기에.

저렇게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나를 저 지하로 들여보내 준 거겠지.

"게다가... 은인께서 받아들이기로 한 이들은 결국 대부분은 부대에 잘 녹아들기도 했으니까요. 제 스승님도 그렇고, 무예 교관분들도 그렇고... 저 여왕님만 빼고?"

"...건방진 것. 꼭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더 하는구나."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지만.

부대원들의 생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경우도 많다.

저 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상황도 크게 달라졌겠지.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의사라고 하셨죠?"

{일단은 그렇네.}

"그러면, 저희 부대원들 치료나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보다시피 다들 많이 다친 상태라서."

{...물론이지. 나로 인한 일이니 내가 책임지고 어떤 후유증도 남지 않도록 잘 보살펴 드리겠네.}

그 말과 함께.

치료에 들어가는 루카.

'상처가 심해서 걱정이었는데.'

[건강식]을 먹이려면 내 건강을 소모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고민이었지만

저 녀석이 치료를 해 준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

그리고.

'...생각보다 잘 이해해 줘서 다행이야.'

아마 정수아와 그 친위대가 유독 나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이들이라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저 녀석을 군단에 데려가도 녹아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래.

부대원들의 상처도 곧 해결될 것 같고.

저 의사의 영입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지금 여기가 어디고, 어떻게 돌아가느냐... 인데.'

지금.

우리가 놓인 이 지역에 대한 것이었다.

"주변에서 이런 걸 주워 왔느니라."

잠시 뒤.

주변을 둘러보러 떠났던 아리엘라가 간판 하나를 들고 오며 말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걸로는 읽을 수가 없구나.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아이는 없느냐."

그러자.

루카를 통해 부상을 치료받고 있던 부대원들.

그들 중 한 명인 정수아가 고개를 들더니, 그 간판을 보며 말했다.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대충은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호? 그래? 이건 어느 나라의 말이더냐."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자... 아니, 정확히는."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내가 있던 강원도나, 서울은커녕.

"중국어 같네요."

...내가 있던 나라.

대한민국조차 아니라는 사실이었으니까.

485화 목적 (1)

"한자... 아니, 정확히는 중국어 같네요."

...중국어라.

"흠. 그건 분명 주인님의 국가와 가까운 이국의 땅이렷다?"

"네. 저도 제대로 배운 건 아니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청도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아요."

청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도시였다.

"어디 보자."

그 말에.

나는 들고 다니던 지도를 꺼내 보며 인상을 찡그린 채.

"...한반도에서 서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군."

결과적으로 알아낸 것은.

이곳이 내가 있던 강원도나 서울이 아니라는 사실.

...그걸 넘어서.

내가 있던 나라조차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공간 이동이라는 거, 이렇게까지 멀리 이동할 수도 있는 거였냐?"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명백했다.

저 의사가 만들었던 예비 육체.

그 육체에 깃들어 있던... 공간이동.

[방랑광대]라는 괴물이 쓰던 공간을 넘나드는 힘.

녀석의 예비 육체가 폭주를 시작한 결과.

우리는 그 힘에 말려들고 말았다는 거다.

{...내가 저 육체를 다루던 시절에는 불가능했을걸세.}

"그러면 지금 상황은 뭐지?"

공간을 넘나드는 힘 자체는 대단한 것이지만.

방랑광대는 그 힘으로 기껏해야 수십 미터를 넘나드는 게 한계였다.

저 의사 역시 훨씬 더 넓은 구멍을 만들 수 있었지만, 거리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못 해도 수백 킬로미터는 되는 거리를 날아온 셈이다.

{지금 저 육체를 다루는 건 내가 아니니까.}

"...?"

{말했지 않나. 나는 그 육체를 어디까지나 도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노라고. 하지만 지금 저 몸에서 새롭게 태어난 정신은 그 육체를 스스로의 육체로 인식하고 있을걸세. 몸의 활용도에서 더 뛰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육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아마 그 몸에 깃들어 있던 강대한 마력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것은 물론, 마력 회로에도 영구적인 큰 손상이 있었을 것이네. 이건 정말... 이론상 가능하다고만 할 정도의 거리를 이동시킨 셈이니까.}

그러고 보니.

부대원들과의 통신에 의하면.

그 괴물은 서울 내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지만.

서울 곳곳의 괴물들과 싸움에서 조금씩 밀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그 녀석이 보여 준 힘을 생각하면, 밀리는 건 상상이 안 가.'

이 녀석의 말대로.

저 일에 마력을 많이 소모한 탓일 것이다.

하필 우리를 이 먼 곳에 날려 버리는데 그 마력을 소모해 버린 게 어이가 없을 따름.

'...생각해 보면, 지역 경계를 가로막고 있던 저 장벽도 결국 열기만 참아 낼 수 있으면 통과할 수 있었지.'

이런 식으로 공간 자체를 뛰어넘는 방식이라면.

장벽이 열리기도 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거다.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이능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인 만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돌아갈 방법은 없는 건가?"

{없지는 않네.}

내 질문에.

의사는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히도 저 구멍을 다루는 감각 자체는 내게도 남아 있었거든.}

그곳에 있는 것은.

기존에 보던 검은색 구멍이 아닌, 힘이 빠진 듯 회백색으로 변해 버린 채 일렁거리는 구멍.

{구멍을 만드는 권능 자체는 로폴의 가죽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세. 가죽을 잃은 지금 내가 그 구멍을 만들 수는 없지,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구멍을 조작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더군.}

"그게 지금 저 모습이란 건가."

{다른 건 불가능하겠지만 저 구멍을 타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는 가능하도록 해 놓았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문제?"

{마력이지.}

못해도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거리를 온 것이다.

저 루카가 만든 육체와 싸울 때.

나는 그 힘이 최소한 '남색'급의 괴물과 버금간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괴물보다도 강한 힘은 물론.

규격 외의 마력까지 느껴졌던 존재.

그런 존재가 영구적인 마력 회로의 큰 손상을 입어 가면서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쓰고 나서야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즉.

{구멍 자체는 남겨 두었네만 돌아가는 데에는 온 것과 비슷한 양의 마력이 필요할 게야.}

"흐음."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네만, 저 육체는 무식할 정도로 큰 마력홀이 수십 개가 있었네.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지. 최소한 그 육체가 가지고 있던 것과 동등한 양의 마력이 필요한 셈이야.}

즉.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존재는 하지만.

결코 쉬운 방법은 아니라는 것.

"뭐, 그건 어떻게든 해 볼 수밖에."

{미안하네. 저 구멍이 가진 마력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미안하긴 무슨. 덕분에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셈인데. 고맙다 야."

그런 내 말에.

녀석은 조금 망설이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고맙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응?"

{결국, 이곳에 날아온 건 내가 저 육체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네. 군단장과 일행분들은 내 실수에 말려든 셈이지. 내가 한 건 그 실수를 가까스로 수습한 정도에 불과할 텐데....}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이해가 가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답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지금 그 육체에는 너 말고 다른 영혼이 탄생한 상태라고."

{그렇긴 하네만.}

"그럼 저건 네가 한 짓이 아닌 거야. ...네게 거짓말을 한 게, 네가 섬기던 신이 아닌 것처럼."

{...그런가.}

"너는 자칫하면 영원히 여기 갇힐 뻔한 우리한테 탈출 방법을 마련해 준 거다. 잘한 거야."

내가 솔직하게 칭찬을 하자.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녀석.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주인님?"

그러자.

아리엘라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그래.

이미 이곳에 와 버린 이상, 지나간 이유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 * *

우리가 놓인 이곳은 한국이 아닌 다른 땅.

중국이라는 것까지는 확인이 되었다.

우리 군단의 거점인 강원도와는 한참 떨어져 있는, 심지어 국가조차도 다른 땅.

'언젠가 타국에도 진출할 예정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어.'

언젠가 진출할 가능성도 높다고 여겨지기는 했으나.

군단의 본대와 동떨어진 채 이렇게 떨어지는 것은 예상에 없었다.

'너무 위험하다.'

나도 이제는 평범한 괴물들 정도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무력은 갖췄고.

부대원들도 있으며, 아리엘라의 권속들도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거점이 없는 이곳에선 어떤 상황에 놓일지 모른다.'

막말로.

아무리 아리엘라의 전력이 강하다고 한들.

그녀의 권속에게는 확실한 한계가 존재한다.

지금은 다행히 밤이라 아리엘라가 돌아다닐 수 있는 듯하지만, 낮이 되면 그녀의 전력은 없는 것으로 쳐야 한다.

부대원들 역시 전면전이 아닌 암습에 특화된 이들.

만약 낮 시간대에 우리 예상보다 더 강한 괴물 집단과 격돌이 일어나게 된다면....

우리도 쉽게 지지는 않겠지만.

큰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도 무척이나 높았다.

그렇다면.

"일단 돌아갈 방법을 확보하는 게 먼저겠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돌아갈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저 꼬맹이가 말한 대로라면, 복귀에 필요한 마력은 어마어마할 거예요."

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너하고 권속들의 마력을 모아도 힘들려나?"

"맘 같아선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음. 아마도 힘들 거예요. 원래도 저는 그 정도로 많은 마력은 없었어요. 게다가 이번 전투로 권속을 많이 잃어서... 더 약화된 상태죠."

아리엘라와 그 권속들은 분명 강하지만.

딱히 마력량에 특화된 괴물들은 아니다.

'마운틴도... 힘들겠지.'

마운틴은 저 루카와의 싸움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지금은 그로 인해 잃어버린 냉기의 힘을 그림자 장막 속에서 보충 중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훔쳐 오는 그 힘은 순수한 냉기.

마력과는 거리가 있는 힘이었다.

'호위대원들 역시 암행에 특화되어 있는 이들뿐.'

마력을 숨기는 일에는 어떤 마법사들과도 비교되지 않겠지만.

마력의 절대량은 오히려 각성자치고 적은 편이었다.

"...쯧. 이곳이 강원도였다면 걱정할 문제도 아니었을 텐데."

그냥 비마나 지하에 열린 게이트에 들어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아무리 저 육체에 담겨 있던 마력이 강대하다고 한들.

저 지하광산에 오랜 세월 축적된 마력에 비하면 사막의 모래알 수준에 불과할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마법사로 이루어진 부대원들을 총집합시켜서 내 요리로 그 마력을 최대한 뻥튀기한다면.

어떻게든 아슬아슬하게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존재하기는 했다.

[모르잔]

녀석이 내게 건네준 힘의 파편들.

그걸 사용한다면, 저 전이문을 활성화시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르잔은 아껴야 한다.'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한정되어 있는 힘.

이곳에서 탈출할 방안이 아예 없다고 밝혀진 후라면 고려해 볼 만하겠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게 우선이었다.

"귀환에 필요할 정도의 마력을 확보해야 한다, 라...."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루카를 바라보았다.

"그 마력이란 건 어떤 방식으로 확보해야 하는 거지?"

{강대한 마력이 담긴 물건도 괜찮고, 강한 마력을 지닌 생명체를 생포해 오는 것도 좋겠지.}

그 말에.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건빵 주머니에 든 물건을 하나 꺼냈다.

[매우 순도 높은 마력석]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이렇게 높은 순도의 마력석이라니...? 귀한 물건을 가지고 계셨군.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그럭저럭 도움이 될걸세.}

지하광산에서 채굴되는 마력석.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모든 부대원들에게 하나씩 보급되어 있는 물건이다.

문제는....

"...좀 많이 들고 다닐 걸 그랬나."

마력석은 부대원들에게 하나씩 보급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부대원들을 다 합쳐도 100개.

그마저도 나는 군단장이라 최고 순도의 마력석을 지니고 있는 거지, 부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순도는 내 것보다 낮았다.

"아무튼, 이 마력석 같이 마력이 담긴 물건이나 마력이 있는 괴물들을 최대한 많이 구하면 된다, 이거로군."

그리고.

그렇다면.

"정수아!"

"네."

"근처에 큰 도시 지역을 찾아라."

괴물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저런 마력석 역시 그런 걸 지니고 있는 괴물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할 테니.

"그 후에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최대한 빠르게 마력을 모은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일단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

'갑자기 날아와 버린 건 분명 당황스럽긴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이곳은 중국.

우리가 먼 훗날 방문하고자 했던 타국이다.

조금 빠르게 방문해 버린 셈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타국의 상황을 확인한다.'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있었던.

한국 외의 다른 나라가 어떤 꼴이 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 * *

"비교적 가까운 곳에 나름대로 규모 있는 도시가 보여요."

물빛으로 빛나는 눈.

[정령안]을 발동시킨 정수아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밤이라 어두워서 도시 안쪽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근처에 돌아다니는 기척들도 상당해요. 아마도."

"도시에 자리 잡은 괴물들이겠지."

아쉽게도.

지금 시간은 꽤나 깊은 밤이었다.

정령안을 통해 정령의 시야로 주변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광원이 없는 이상, 육안으로 그 내부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괴물이 있는지 등을 알아볼 수는 없다는 뜻이니,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밤이란 건 우리한테도 나쁘지 않지.'

밤이라는 얘기는 즉.

아리엘라와 권속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일단 그 도시 근처로 이동한 뒤,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임시 거점을 만든다."

"예."

"그 후에는 괴물들을 사냥해서 생포하거나, 마력이 될 만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 올 것. 이 나라의 상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조사하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 조금은 후 순위로 미룰 것."

본래라면 괴물이 많은 도시 근처에 자리를 잡는 것은 자살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 이곳에 있는 부대원들은 암행과 정찰에 특화되어 있었다.

적의 침입도 금방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도시 안으로 침투해 마력이 느껴지는 물건들을 몰래 훔쳐 오거나, 괴물들을 암습해 생포해 오는 등의 작업이야말로 이들의 특기.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조금씩 마력원을 확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

그렇게.

상처 입었던 부대원들에 대한 치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우리는 곧바로 이동을 개시했다.

'어딘가로 이동한 뒤에 임시 거점을 만든다고 한다면 일단 아리엘라의 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밤에 이동하는 게 그나마 안전해.'

권속들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에 거점을 확보해 놔야.

그들을 활용할 수 없을 때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까운 도시를 향해 이동하던 중....

{군단장.}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우리 부대에 합류하기로 한 의사.

{할 말이 있네.}

루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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