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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화 목적 (2)

이 의사.

루카의 육체는 빈말로도 강건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를 따라 걸어가는 것만 해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

그런데, 그런 힘든 와중에 굳이 내게 말을 건 것이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그 사실에 의아해하자.

녀석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곳은 군단장께도 이방의 땅인 듯하군. 나도 내 병력을 잃었고, 군단장의 보호자 분들도 나와의 싸움에서 전력을 꽤나 많이 잃었으니... 지금은 꽤나 위험한 상황 아닌가.}

"뭐, 그렇긴 하지."

그렇기에.

그나마 아리엘라의 병력을 이용할 수 있을 때 이동을 해 두려는 것이기도 하고.

{게다가... 나는 몸이 이러니 말이야.}

녀석은 조금 무섭다는 듯.

떨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잘못 습격당했다가 한 번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태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우리 부대원들이 알아서 잘 지켜 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해서, 미리 말해 두고자 하는 것이야.}

"...?"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 내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라니.

대체 무슨 얘기길래 저렇게까지 하는 건가 싶었는데.

{시스템에 대한 얘기일세.}

"...뭐?"

다음에 나온 말을 듣고 나서는.

녀석의 진지한 태도가 조금 이해되었다.

"뭔가 더 알아낸 게 있는 거냐?"

애초에.

이 녀석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게 될 경우, 나는 녀석과 시스템에 대한 정보 또한 교류하기로 약속했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묻고 싶은 거?"

{정확히는... 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비록 그 협력 관계가 한 번 불발되고.

그 후에는 녀석이 '진화'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시스템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사라지긴 했으나.

녀석은 우리와는 별개로 이 시스템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면에서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는 얘기.

{이 시스템이라는 것은 군단장의 세계에서 즐기는 유희의 형식과 닮아 있다고 들었네. 맞나?}

"어어, 그렇지."

이 시스템은 유희... 라고 해야 하나.

일반적인 게임의 인터페이스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리고 각성자들의 수준은 숫자로 표현된다고 들었네. 레벨이라고 했나... 군단장의 레벨은 얼마지?}

"나는... 지금은 43이군."

{그런가? 그 레벨을 올리는 조건은 그냥 괴물을 사냥하거나, 본인의 직업에 어울리는 일을 하는 게 전부인가?}

"일단은 그렇...."

...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렇다면?}

"40레벨을 넘어갈 때는 조건이 있었거든."

나는 40레벨에 도달할 수 있는 경험치 자체는 비교적 빠르게 도달했으나.

정작 40레벨 돌파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었다.

"업적을 몇 개 이상 달성해야 한다더라고. 나도 운 좋게 통과되기는 했지만, 평범한 각성자들이라면 거기서 아마 꽤나 막힐 거야."

{그건... 격을 채우기 위함이겠군.}

그런 내 말에.

녀석은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네.}

"뭐든지."

{군단장의 세계에서의 유희, 이 시스템과 닮아 있다는 그 유희에서....}

그다음 질문에.

나는 조금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라는 수치는 한계가 없이 오르는 것인가?}

"어?"

유희.

즉, 일반적인 게임에 있어서 레벨의 한계치.

만렙에 대해 묻는 이야기였다.

"보통 한계는 있지."

글쎄.

이건 워낙 다양한 종류의 게임 같은 게 존재하다 보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99, 아니면 100이지."

99레벨 혹은 100레벨.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가장 일반적인 만렙하면 저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일세.}

"응?"

내 말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확신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는 녀석

{군단장. 군단장께서는... 이 시스템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지 의아한 적은 없었나.}

"그야. 없을 리가 있나."

정확히 말하면 각성 첫날.

이 시스템의 존재를 느낀 시점부터 궁금했다.

{처음 시스템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흥미를 가진 부분은 두 가지였네. 하나는, 그 시스템을 나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을까 하는 부분. 그리고 두 번째는... 어째서 이런 것이 이 땅에만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었지.}

그도 그럴 게.

이 시스템이 나타난 지는 아직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단장과 그 동료분들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계시지.}

물론.

이 세상에는 각성자들보다 뛰어난 능력자들도 많다.

전사들보다 뛰어난 천산무관의 무인들이나.

정수아보다 뛰어난 보르진.

치료사들보다 뛰어난 루카 등.

하지만....

{내 짧은 식견으로 말씀드리자면 군단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토착종의 보호자분들이 지닌 힘도... 고작 수백 일 만에 얻을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닐세.}

"...그렇지."

그들이 지닌 힘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이.

상당히 긴 세월 동안, 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파고듦으로써 얻어 낸 것이다.

'우리는 그전까지 어떤 힘도 없던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에 근접하는 수준의 힘을 얻어 냈다.'

그것도.

고작 1년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새삼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

{어째서 다른 그 어떤 세계에도 없는 이 기묘하면서도 강력한 체계가... 이 땅에만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만 놓고 본다면.

저 바깥의 존재인 '대모'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존재.

어째서 시스템이 우리를 이렇게 비호하는 것인가.

{나 역시, 아직 그 원인까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하지만?"

{지난번 군단장의 모습을 보고 나서 깨달았어.}

...?

나를 보고 깨달았다니.

뭘 깨달았다는 건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시스템이 존재하는 목적.}

"...뭐?"

{확신할 수 있네. 이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녀석은.

놀란 나를 그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군단장, 그대와 같은 이를 위해서일세.}

* * *

"나 같은 녀석을 위해서라니."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뭔 개소리야?"

{....}

그런 내 말에.

녀석은 덤덤히 설명을 이어 갔다.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저 시스템을 나의 '진화'에 이용하려고 했네. 나 또한 그 시스템의 수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방법을 모색하려 한 것이었어.}

나는 루카가 가지고 있었던 육체를 떠올렸다.

그 강대한 육체에 시스템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안 그래도 강한 괴물이 레벨 업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 탄생했겠지.

하지만.

"결국, 넌 저 육체조차 자기 걸로 받아들이지 못했잖아?"

{...그건 그렇지.}

이 녀석은 결국 그 강한 육체조차 완벽하게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떻게든 거기에 시스템의 힘이 더해졌다고 한들 그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은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군단장을 이용하려고도 했네.}

"어?"

{협상이 결렬됐을 때 말이야. 협상이 진행 중이라면야 배신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군단장 쪽에서 먼저 협상 결렬을 알려 왔으니, 군단장을 수집해 내 진화의 재료로 삼으려 한 게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때 나를 이용해서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했었지.

{군단장의 뇌를 재료로 삼아서 진화를 이룩할 셈이었네만, 뭐. 실패하고 말았지.}

"...어, 뭐?"

내 뇌를 뭐?

{군단장께서는 시스템의 수혜를 받는 각성자지. 게다가, 다른 무언가를 자신의 몸에 이식해도 그것을 본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사상을 지니고 계셨지 않나.}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 게 인식이 가능한 이는 극히 드물지. 아마 각성자 중에서도 그럴 것이야. 그러니... 군단장의 뇌에서 시스템이 군단장을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부분, 그리고 외부의 것이 섞여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부분만을 잘라 내서 내 뇌에 이식하려고 했었네.}

"...."

그야.

싸울 때 나를 재료로 쓰겠다느니 뭐니 하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나니, 새삼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그때 이 녀석한테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느니 이상한 허세를 부릴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물러났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그만둔 생각이네. 오히려, 그런 끔찍한 일을 내 손으로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있지.}

"그건, 다행이네."

{하지만 만약 그 전투에서 내가 승리했다면 그 계획이 실현됐을 가능성도 꽤나 높았을 걸세. 그러면 난....}

녀석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초월에 도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초월.

그래.

{나는 군단장을 통해... '초월'을 이룰 것이야!}

저 녀석은 나를 재료로 삼겠다 선언했을 때 저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지.'

나는.

초월이라는 단어를 그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초월을 이루기 위해....

저 지하광산 깊은 곳에서 만난 존재.

모르잔.

녀석은 분명 그 단어를 언급했다.

"그 초월이란 건 뭐지?"

그때.

모르잔과의 대화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묻지 못했다.

그 단어를 다시금 듣게 될 줄이야.

{말 그대로일세. 생명의 한계를 벗어나서... 상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지.}

"...?"

상위의 존재....

그 말에 떠오르는 존재들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계속된 진화를 이룩한 끝에 초월에 도달하기를 염원하고 있었네.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군단장의 뇌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해도 초월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냐."

{하지만, 착각이었네.}

...착각이라니.

무슨 착각을 말하는 것인가 했으나.

{군단장의 뇌를 내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래서 군단장의 인식과 시스템의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면.}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녀석.

{나는 어쩌면 꽤나 빠르게 초월에 도달했을지도 몰라.}

"그건 무슨... 아니, 애초에 이게 시스템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얘기라고."

{아주 큰 상관이 있지.}

그리고.

녀석은 확신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군단장이 말씀해 주셨지. 이 시스템은 보통 99레벨을 최고로 본다고.}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시스템은 우리를 99레벨까지는 성장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살아남는다고 해도 99레벨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지만.

{생각을 반대로 해 보게나. 군단장.}

하지만.

녀석의 생각은 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는 듯했다.

{시스템은 그대들을 99레벨까지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고.

이어진 녀석의 말에.

{시스템은 99레벨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99레벨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네.}

"...어?"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시스템을 얻으면 생각보다 빠르게 초월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야.}

그제서야.

나는 녀석이 하려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시스템을 만든 이가 누군지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목적만은 확신할 수 있네.}

이 시스템이 우연히 존재하고.

그 우연히 존재한 시스템이.

우연히 우리를 99레벨까지 성장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초월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체계라고.}

애초에 이 시스템은....

99레벨을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487화 구울 (1)

"초월자...."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이 레벨 시스템에는 명확한 단계가 존재한다.

1에서 10레벨은 신입.

11에서 20까지는 하급.

그 후에는 중급, 고급... 그리고.

'영웅'

내가 40레벨에 도달했을 때.

시스템은 내가 격을 이루었으며.

그 격이 영웅에 해당한다고 알려 왔다.

내 요리에는 지금도 '영웅급 요리사의~'라는 접두사가 붙는다.

그리고.

'40레벨에 도달하기 위해 업적을 쌓으라고도 했었지.'

이 시스템은 내가 40레벨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지원해 주고 있었으며.

그 방법 또한 알려 주었다.

내 레벨 업까지의 과정을 인도하고.

나를 단계적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야.

시스템의 모습은 게임 한번 해 봤다 싶은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모습이다.

그렇기에 다들 평범하게 게임을 떠올렸으며.

'레벨 업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시스템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그토록 궁금해하면서도.

설마하니.

그 레벨 업 자체가 시스템의 목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루카의 말이 맞다고 한다면 설명되는 얘기들이 있었다.

'바깥의 존재에게 품은 적대심.'

외부 신의 사도가 된다면.

그 신이 자신의 사도가 자신과 동격이 되게 둘 리가 없다.

초월자가 되는 길이 막히는 일.

시스템에게 있어서는 명백한 배신 행위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초월자를 만들어 내려 한다는 것인가.

{나도 거기까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하나.}

루카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군단장은 내가 아는 그 어떤 토착종보다도 초월에 가깝네.}

"...."

{그리고, 이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초월을 이룩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 녀석은.

자신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초월을 이룩하고자 했다.

즉.

99레벨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 땅에 드리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 *

"...."

루카는 그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하고는.

행군을 따라오느라 많이 지쳤는지, 발걸음을 늦춰 대열의 뒤로 밀려났다.

'인간 중에서 초월자를 만들기 위한 힘... 이라.'

그리고.

나는 녀석이 남긴 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초월이라니.'

너무나도 아득하게만 들리는 단어.

무엇보다.

그 얘기대로라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나로서는 제대로 상상해 보지도 못한 아득한 영역에 걸쳐 있는 일이다.

'가능은 한 건가? 그런 게?'

기껏해야 일개 취사병에 불과한 나한테는.

너무나도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얘기였다.

이 시스템을 만든 게 누구고.

왜 만들었는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이 힘은 땅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지."

루카의 말에 의하면.

시스템이 가진 힘은 인간이 가진 점령지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시스템은 아직 정체를 모르는 존재.

그 힘이 강해진다고 해서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점령전이 진행될수록 각성자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힘이 우리를 초월자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처음에는 그저.

이 시스템이 시켰기에 영문도 모르고 수행했었던 점령전이.

'점령전에 성공할수록 각성자들의 성장이 빨라진다.'

어쩌면.

우리를 빠르게 성장시켜 주기 위한 힘을 비축하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저 장벽에 막혀 있는 한, 우리가 점령할 수 있는 땅은 한국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지금 나는 저 장벽을 넘어.

본래라면 한참 뒤에나 올 수 있었을 땅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으니까.

중국의 땅은.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그렇다면.

'이 땅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아직도 누가, 왜 만든 것인지는 모르는 힘.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이 녀석... 시스템의 정체를 파고들게.

저 장영웅의 말대로.

이 시스템을 파고들다 보면 이 멸망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그 확신이 더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 * *

"...주인님."

그리고.

루카가 남긴 그 말로 인해.

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인님, 주인님!"

"어? 어어?"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을 안 하시길래...."

"아...."

그런 아리엘라의 말에.

나는 속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그제서야.

나는 지금 상황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이곳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땅.'

애초에.

루카가 내게 저 이야기를 건네려고 한 것 역시.

혹시 어떤 위협으로 자신에게 불상사가 생겼을 때 대비한 것이었다.

이곳은 위험한 장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에.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일단 저 초월에 대한 것을 머릿속 깊은 곳으로 담아 두기로 했다.

"아니. 별일은 아니야. 무슨 일이지?"

"그게...."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서야.

나는 아리엘라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불안해하고 있다?'

다른 생각에 몰두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으나.

아리엘라는 묘하게 불안에 잠겨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거냐?"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다만."

"다만?"

"시간을 좀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을 확인해 달라니.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그 말대로.

손목에 걸려 있는 전자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6시쯤이네."

"...."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한 가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저는 이 땅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입니다만...."

그런 위화감을 느낀 것이 나뿐만이 아닌 듯.

아리엘라는 불안감이 가득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원래 이 지역은."

그도 그럴 게.

지금은 새벽 다섯 시 반.

"이 시간에도 태양 빛이 조금도 비치지 않는 곳인지요."

"...."

슬슬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간.

나는 이 시간대에.

아리엘라가 지상을 거니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 *

"...이건."

이곳은 해외인 만큼.

내가 가진 시계와는 시차가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긴 중국에서도 그나마 한국하고 가까운 곳.

시차가 있음을 감안해도 1~2시간 정도라고 봐야 했다.

'다섯 시라고 생각해도... 조금씩은 빛이 보이기 시작해야 정상일 텐데.'

하지만.

지금 이곳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태양은커녕.

달이나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제가 파악한 대로라면, 주인님. 이곳에는...."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목표로 삼았던 것은 군단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로 삼은 것이....

"태양이 뜨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타국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

'뭔가 이상하다.'

불안감을 느낀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군단장님?"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뒤에서 따라오던 부대원들이 그런 내 기척을 느끼고 의아함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예에?"

이곳을 한국의 평범한 도시처럼 생각했기에.

마력을 모으려고 하면 빠르게 모을 수 있을 것이고.

도시 근처에 다가가는 것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거의 다 도착한 상태입니다만."

"나도 알지만, 이 이상 접근하는 건 멈춰야 할 것 같아."

어쩌면.

이곳의 환경은 한국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일단 물러난 뒤, 하루 이틀 정도 상황을 보자."

위험한 땅에서 마력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다급했지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상황을 파악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생각보다 별거 아닐지도 모르지.'

이곳이 우연히 해가 늦게 뜨는 지역이라든가.

아니면 저 간판에 적힌 청도라는 글자가 지역명이 아니라 다른 의도로 적힌 것일 뿐.

이곳이 생각보다 더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라, 시차도 더 크다든가.

뭐 그런 사소한 이유들.

원래 해 뜨는 시간도 계절마다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이유였다고 한다면, 나중에 다시 오면 그만.

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은인이시여."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등을 돌리려고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명령을 거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

"그 명령."

정수아가.

물빛으로 반짝이는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수행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도시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강행군해 온 끝에.

어느덧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 도시의 모습.

그리고.

아직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서부터....

터벅....

상당한 숫자의 기척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 * *

'...쯧.'

도시 근처에는 괴물이 많다.

그리고 괴물들은 근처의 기척에 반응한다.

이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당연한 얘기였다.

내가 멍하니 저 루카의 말을 되새기는 동안, 생각보다 도시에 가까워졌으며.

그 결과.

우리의 접근을 눈치챈 도시 외곽의 괴물들이 우리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겠지.

"어떤 괴물인지는 보이나."

"아뇨. 기척이나 몇 마리인지는 방울이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만... 이 어둠 속에서 어떤 괴물인지까지는."

"뭐, 그렇겠지."

조금 낭패이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태양이 떠올라야 하는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뜨지 않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건.

'꼭 나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지.'

우리에게는.

그럭저럭 유리한 상황이라는 얘기였으니까.

"아리엘라."

나는 고개를 돌려.

내 권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할 시간이다."

"...."

"최대한 빠르게 처치하고 괴물 중에 쓸 만한 개체들이 있으면 잃어버린 병력도 보충하도록. 너무 소란을 떨면 더 많은 괴물이 몰려들 수 있으니 가급적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

"그 후에는 일단은 물러난 뒤 이곳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리엘라?"

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우리에게 그럭저럭 유리한 상황의 원인이.

"무슨 일이야?"

"...."

내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말없이 저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너...."

"처음에는 기분 탓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안 그래도 창백한 편인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으니까.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다니.'

이 정도로 당황한 아리엘라의 모습은.

나와 싸울 때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뭐?"

"아까부터 진동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어느덧 가까워진 도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그 도시에서부터.

"피 냄새."

수없이 많은 기척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다가오는 형체들의 모습을 본 나는.

아리엘라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주 강렬하면서도... 익숙한 피의 냄새가."

그도 그럴 게.

[식재료 감별(강화)]

[최하급 뱀파이어 구울]

"$$!@^!@#!…!@#!?"

"...."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붉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488화 구울 (2)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운 좋게도 밤이었던 탓에, 아리엘라의 전력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들의 정확한 이름은 밤의 귀족.

그 이름대로

그들은 밤에 활동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운 좋게 이곳이 밤이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땅에는... 아침이 오지 않는 거야.'

저 앞에서.

[뱀파이어 구울]

익숙한 이름을 가진 괴물이.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우리의 목표는 일단 근처의 도시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도시 주변에는 괴물들이 몰리는 게 일반적이니.

그곳에서 높은 마력을 지닌 괴물들을 생포해 오거나, 마력이 담긴 물건들을 주워 와 저 전이문을 재활성화시키는 게 목표였지.

실제로 정수아는 이 도시에서 꽤나 많은 기척이 느껴진다고 했다.

문제는.

'밤이라 괴물들의 모습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

좀 더 확실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게.

"%#$@$@!!!"

우리에게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저 녀석은.

매우 익숙한 피 냄새와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니까.

"신 병장님... 저 말은."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낯선 말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중국어....'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 있는 녀석, 없나!"

"그, 그게."

"정수아? 너는 저 표지판을 읽고 여기가 청도라는 것도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그것도 그냥 한자를 읽은 것뿐, 말까지 아는 건 아니라서...."

그리고.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와중에도.

"%#$@$@!!!"

저 앞의 인물은 계속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우호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태도.

차라리 그냥 괴물이라면 싸우면 그만이겠지만.

인간의 말을 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과 이렇게 부딪혀야만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뭐 하는 녀석들이냐고 하고 있네.}

"...어?"

문득.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타 지역에서 방문자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연락도 없이 다른 영지를 침범하다니 무슨 속셈이냐는 군.}

얼마 전에 우리에게 협력하기로 한 의사.

루카.

{지금 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수상쩍다느니, 그동안 식량을 약탈하고 동족을 사냥한 게 너희냐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화가 있는 듯하군. 흠. 저렇게 흥분해서야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한국말도 못 했지.'

아리엘라는 인간의 피를 먹음으로써 그 지식을 얻어 한국어를 구사했고.

보르진은 노예들을 통해 언어를 배웠다.

천산무관의 무인들은 천산에 내려앉은 축복의 힘으로 우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예 한국어를 모른다.

애초에 그 정도로 한국인을 많이 만나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녀석과 대화가 통했던 이유는.

[식재료 감별(강화)]

[특성]

[정신 언어]

...저 다스무르의 교황도 가지고 있었던.

바로 저 특성 때문.

녀석은 우리와 대화할 때 음성을 듣는 게 아니라

정신을 통해 우리 말을 이해하고, 우리에게도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었다.

애초에 이 녀석에게는 외국어라는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영지?'

번역을 해서 들었음에도.

그 말의 뜻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흠? 군단장이 답하지 않으니 자신을 무시하는 줄 아는 듯하군. 군단장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지. 자존감이 낮은 편인 걸지도... 일단 10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하고 있네.}

"뭐? 아니 잠깐. 그렇다면 일단 대화를 해 보자고 전해...."

{아. 아무래도 자존감이 낮은 게 아니라 성질이 급한 편이었던 모양이야.}

스르릉 하고.

멀리서 보이는 녀석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10초가 지났다는군.}

"...."

파아아악!

하고.

우리를 향해 그 몸을 내던진다.

{10초 안에 대답하라 하고 이제 3초쯤 지난 것 같네만, 어쩌면 생체 리듬이 어긋나 있는 것일 수도 있겠어.}

"...그딴 건 설명 안 해 줘도 돼."

그리고.

덤벼드는 수많은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있던....

"그렇다면 이렇게 전하도록 하거라. 꼬마야."

바로 그 순간.

"너희 같은 천민들의 질문에 내가 일일이 답을 해 줘야 하겠느냐고."

우리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적들.

그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너희 같은 천민들의 질문에 내가 일일이 답을 해 줘야겠느냐?}

아리엘라의 말과 함께.

그 말을 그대로 읊은 루카의 [정신 언어]가 울려 퍼진다.

"...!!!!?!!?"

그러자.

기세등등하게 무기를 꺼내 들고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이들.

그 녀석들이 아리엘라의 얼굴을 보더니.

쿠우우우우웅!!!

달려오던 그 기세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

손에 든 무기조차 어딘가로 내던져 버린 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뭐라고 외치는 녀석들.

"...."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루카를 향해 물었다.

"저건 또 뭐라는 거야?"

{아, 별로 대단한 얘기는 아니네.}

그런 내 질문에.

루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죽을죄를 지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 고 하는군.}

"...."

* * *

"이, 이쪽입니다! 기사님!"

몇 분 뒤.

우리는 우리를 습격하려던 이들의 안내를 받으며 도시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귀족분에게 저희 목숨만은 살려 줘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 좀 해 주셨으면.... 헤, 헤헤...."

이 붉은 눈을 한 인간들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도한 척하며 걷고 있는 아리엘라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꺼낸 것인지도 모를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할 말 없다는 듯 걷고 있는 녀석.

평소의 묘한 허당기 섞인 모습과 달리, 말없이 걷는 모습이 꽤나 위엄 있어 보이긴 했다.

"위, 위대하신 귀족분들의 행렬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뭡니까."

"제발...."

그리고.

"흐음, 글쎄."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놈들이 보여 주는 태도에 따라서 한번 고려는 해 보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감격에 겨워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녀석들.

{어떤가.}

사실.

녀석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전히 한국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외국어라고 해 봐야 인사말 정도나 익힌 게 전부인 나다.

갑자기 떨어진 외국에서 그 외국어를 자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나.

{이제 군단장께서도 대화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네만.}

"어어. 그러네."

자력이 아니라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 특성... 남한테도 공유할 수 있는 거였구나."

{쉬운 일은 아니네만. 뭐, 약간의 노하우만 있으면 가능은 하거든.}

내가 저 녀석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이유는 하나.

루카의 손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마력이.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각성자 : 신영준]

[직업 : 영웅급 전쟁 요리사 Lv.43]

[특성]

[정신 언어(임시)]

지금 내 특성창에는.

한 가지 특성이 임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정신 언어라.... 이런 건 너희 세계에서는 원래 흔한 건가?"

내 기준으로 보자면.

이런 게 가능한 괴물 중에 약한 놈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만큼 고등한 존재들만이 가지고 있던 능력인 셈이다만.

{설마. 이런 게 가능한 건 주교님들 정도밖에 없었을걸세. 나도 이건 고향을 떠난 후에 얻은 기술이지.}

"어? 그래?"

{쓸 만한 진화를 위한 소재를 모으던 중, 어떤 괴물이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거는 경우가 있었거든. 그때 이 소통법이 흉내 내려면 낼 수 있는 기술이라는 걸 깨달았네. 뭐... 그 과정에서 그 괴물한테는 조금 많이 미안한 짓을 해 버리기는 했네만....}

"...."

저 방랑광대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구멍을 다루게 된 원리와 비슷한 거겠지.

직접 구멍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구멍을 이용하는 지식은 있었기에 구멍이 닫히는 걸 막을 수 있었던 것처럼.

괴물을 연구한 결과, 이 정신 언어의 메커니즘을 이해했다는 얘기.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중에 '귀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저 녀석들은 곧바로 머리를 박고 사과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있으실 분들이 아니니... 최대한 빨리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나저나....'

나는 녀석들을 따라 도시 안을 걸어 다니며 생각했다.

어두운 도시 안.

그나마 보이는 광원은 붉게 빛나는 눈동자들뿐이었다.

'저 괴물, 중국에도 나타났었구나.'

'저 괴물은... 처음 보는 놈인데. 나중에 군단과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손질법을 파악해 두는 게 좋을지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녀석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우연에 불과했던 듯.

도시 안쪽으로 들어오자,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다양한 형체의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

그 붉은 눈동자와....

[뱀파이어 구울]

내 [식재료 감별]로 봤을 때 나타나는.

저 종족명뿐이었다.

* * *

저들의 종족명은 '뱀파이어 구울'이었다.

그리고 내 시스템으로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아리엘라의 종족명은 '뱀파이어 자작'이다.

즉.

저들이 평범한 백성 1쯤이라면.

아리엘라는 귀족.

그것도 귀족 중에서도 나름대로 높은 작위인 자작이라는 얘기.

'처음 공격당할 뻔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그 지위의 차이는 꽤나 큰 것인지.

아리엘라가 한 번 마력을 드러낸 뒤로.

우리를 습격하려던, 딱 봐도 흉악하게 생긴 저 인간들은 그 태도를 순식간에 전환해.

이렇게 우리에게 고개를 푹 숙인 채 굴종하고 있었다.

-크륵...!

-인...간?

-냄새... 신선한 피 냄새가 난다....

그렇게 녀석들의 안내를 받으며 도시 안을 걷던 중.

부대원들을 모습을 본 몇몇 [뱀파이어 구울]들이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윽."

그 소리에.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던 부대원들이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차.'

반쯤 뱀파이어의 피가 흐르고 있다 보니.

어둠 속에서도 앞을 보는 데 크게 문제가 없는 나와 달리.

부대원들은 몇몇 특별한 특성을 지닌 이들을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

이 어둠 속에서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내 기척을 따라오는 게 한계였다.

"...자매님!"

"이 괴물 새...."

그런 와중에 몇몇 괴물들이 그들에게 접근하니.

부대원들이 놀라며 그 무기를 쥐려 했으나....

"이 새끼들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무기를 휘두를 일은 없었다.

"꺼져, 이 더러운 새끼들아!"

-너희는... 독사파....

-비겁하게... 신선한 피를 독차지할 셈이냐....

"뭐? 이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처음 우리를 습격하려고 했던 붉은 눈의 인간들.

그들이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구울들을 밀어내며 말했다.

"이 인간들은 우리 중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럼... 누구의 것이란 말이냐....

"이 인간들의 누구의 것이냐고? 당연한 얘기를...!"

처음에는.

사람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든가.

자기들 것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인가 했으나.

"여기 이 귀족과 그 기사분의 것이지!"

'....'

아무래도.

그런 얘기를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489화 발라라크 공

"이 인간들의 누구의 것이냐고? 당연한 얘기를...! 여기 이 귀족과 그 기사분의 것이지!"

'....'

인권은 개나 줘 버린 듯한 말.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고 있을 따름이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나뿐이었던 모양이다.

-귀족... 이라고?

-거짓말이다. 위대한 귀족의 행렬이 어찌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이런 외진 곳에....

의심 섞인 태도로 바라보는 괴물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의심뿐만이 아니었다.

'공포.'

실제로.

그전까지 입맛을 다시던 녀석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고.

"너희 같은 잡것들한테 그런 이유까지 밝혀야겠느냐...?"

"...!"

행렬의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던 아리엘라가 입을 열자

몇 마디 안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

쿠웅!!!

하고.

자신들의 두개골이 으깨질 정도의 기세로 바닥을 향해 머리를 박는 녀석들.

-위, 위대하신 귀족을 알아뵙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나이다...!

-저희는 최대한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그리고.

그런 녀석들의 목소리는.

-제발 목숨만은....

극심한 공포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아... 너희를 벌하기도 귀찮구나. 가거라."

-아아. 감사, 감사합니다...!

전에 부대원들을 습격하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겁에 질린 채 물러나는 괴물들.

'....'

저 괴물들에게 있어서.

아리엘라... 아니.

귀족이라는 존재는 꽤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 * *

"이, 이곳입니다요!"

"이 근처에서는 가장 호화로운 저택입니다! 귀족분들이 머물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아니 많이. 아니 어마어마하게 누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편히 지내 주셨으면...!"

그렇게 우리를 습격하려던 녀석들을 따라 이동한 결과.

우리는 도시 안쪽에 있는 한 호화로운 대저택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 집의 주인은 어떻게 됐지?"

"아. 몇몇 괴물 놈들이 자리를 트고 있었지만, 저희 동료가 미리 달려가서 내쫓아 버렸습죠."

"그 괴물 말고.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을... 인간 말이다."

"인간... 말입니까?"

그런 내 말에.

녀석들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저기 있는 저거 중에 하나... 아닐까 싶은데요."

대저택 바깥.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핏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래 뭐.

그럴 확률이 높기는 하겠지.

"아리엘라."

나는 녀석들을 뒤로한 채.

아리엘라에게 다가가며 [정신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저 녀석들도 한국어로 말하면 못 알아들을 테니.

자연스럽게 비밀스러운 얘기도 나눌 수 있게 되겠지.

"여긴 그나마 안전해 보이니까 아까 못 물었던 걸 묻고 싶은데."

"못 물었던 거요?"

"저 녀석들 [뱀파이어 구울] 말이야."

"아아."

지금.

이 도시 내부는 저 붉은 눈빛을 한 괴물들.

[뱀파이어 구울]이라는 종족으로만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 녀석들은 네 동족이 맞는 거겠지?"

일단 뱀파이어가 붙어 있는 만큼.

당연히 아리엘라의 동족이라고 여겼으나.

"...음. 같은 종족이라는 말은 조금 불쾌한 말일 수도 있답니다?"

"응?"

아무래도.

그녀의 입장은 꽤 차이가 있는 개념인 것 같았다.

"주인님은 제 권속들의 이름도 엿볼 수 있으시잖아요? 그러면 종족명의 차이가 뭔지도 아실 수 있겠죠."

그 말대로.

아리엘라는 그 힘으로 권속들을 만들었으나.

그 권속들의 이름은 구울이 아니었다.

"네 권속들의 종족명은 [뱀파이어 기사]였지."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 구울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 역시 기사였다.

구울과 기사.

뱀파이어라는 점은 비슷할 텐데, 그 차이가 무엇인가 의아했으나.

생각보다 꽤 간단한 차이인 듯했다.

"기사란 귀족만이 서임할 수 있는 존재들이랍니다. 귀족이 자신의 피에 마력을 섞어 힘을 나눠 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공도 많이 들어가고 그만큼 더 강하죠."

"그런 거냐?"

"네. 그렇게 힘을 들여야만 만들 수 있는 만큼... 본격적인 밤의 귀족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귀족 사회에 속한 채 귀족들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이들이죠."

그러고 보니.

지금은 그 숫자가 워낙 늘어나서 잘 티도 나지 않지만.

이 녀석은 하루에 만들 수 있는 '기사'의 숫자에 제한이 있었다.

'그 기사를 만드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반증이겠지.'

그리고.

"구울은 그 기사들보다 못한 존재... 귀족조차 아닌 잡것들이에요."

...잡것들이라.

"저희의 말을 번역해서 설명하자면 저들은 밤의 귀족이 아니라 주민, 혹은 천민?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답니다. 피를 주식으로 삼고, 태양에 약하단 점 등은 저희와 같지만, 귀족과 같은 힘은 없어요."

"그건 어떤 힘을 말하는 거지?"

"제 권속들이 가진 안개화나 재생력 같은 것 말이죠."

뭐?

아니, 잠깐만.

그 모든 힘이 없다는 얘기는 즉.

"뱀파이어가 되기 전이랑 똑같다는 거 아니냐?"

"딱 하나. 완력만큼은 전에 비해 더 강해지긴 할 거예요. 인간 출신의 구울이라면 어지간한 인간 정도는 가볍게 찢어 죽일 수 있겠죠."

아, 하긴.

처음 만났을 때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이들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또...."

밤의 귀족은 강한 힘을 가진 종족이다.

루카의 말에 따르면 이 정도의 잠재력을 지닌 종족은 극히 드물다고 할 정도.

하지만.

녀석들은 그 강함의 대가로 뚜렷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태양에 극도로 약하단 점이나, 신성력.

그리고 피를 마시지 못하면 약해지는 것까지.

"그 약점도 저희와 같죠."

"...."

저 구울들은.

귀족의 힘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주제에.

약점만이 부여된 이들이라는 뜻.

'완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 치명적인 약점을 고려하면.'

구울이라는 괴물들은.

그리 격이 높은 괴물은 아니라는 얘기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의아한 점이 있었다.

"네가 기사들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병력으로 삼기 위해서였지."

반면.

저 구울이란 녀석들은 아마 그렇게까지 강하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저런 녀석들을 만드는 것인가 했으나.

"힘이 없다고 해도 저희 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니. 저들은 결코 귀족의 말을 어길 수 없답니다."

"아."

"굳이 힘을 나눠 줘서 병력으로 삼을 가치는 없지만, 죽이기에는 또 아까운 이들. 그런 애매한 녀석들을 구울로 만드는 겁니다. 점령지의 반란도 예방할 수 있고, 잡다한 일들을 맡길 수도 있으니까요."

"...."

"아마 저도 저만의 세력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면, 일정 이상의 기사를 만들어 전력에 충분하다고 판단된 후에는 구울도 만들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라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구울이란 건 충분한 기사 전력이 갖춰진 뒤.

더 이상의 기사를 만들기 부담스러울 때나 만드는 존재들.

즉.

아리엘라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근처는...."

"네."

아리엘라 역시.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귀족]들의 영토인 것 같네요."

"...."

아리엘라의 종족.

밤의 귀족은 세력을 일구는 데 특화되어 있는 종족이다.

아리엘라도 지금은 내 밑에서 개처럼 일하고 있지만.

나를 너무 일찍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엄청난 군세를 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강원도를 독차지했을 수도 있을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괴물.

그리고.

"이 땅에도 나타난 거군."

아리엘라의 동족이.

이 중국에도 나타났다.

그 동족은 아리엘라와 달리.

우리 같은 누군가에게 저지당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기에.

'이 일대를 점령,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근처의 괴물들은 네 말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얘기군."

아리엘라 역시 밤의 귀족이다.

이 일대가 이런 녀석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네가 있다면, 적어도 이 일대에서 우리 안전은 확보된다... 그 얘기 아닌가?"

중국의 상황이 안 좋은 건 아쉬운 얘기지만.

어쩌면, 저 구울들을 이용해.

생각보다 빠르게 군단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쎄요."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한 듯.

"그건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아리엘라는 긴장감이 서린 낯빛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처음 익숙한 피 냄새를 맡았다고 했을 때도.

묘하게 긴장하고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

"마음 같아서는 바로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버리고 싶다마는."

"히익...!"

"내 기사가 말하길, 너희가 꽤나 성의를 보이는 듯하니 관대함을 보이는 것은 어떠냐고 묻는구나."

그 말에.

"기사님...!"

감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흉악해 보이는 아저씨들.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웠다.

"너희는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나는 관대함을 아는 귀족이거든. 기사가 한 말도 있고 하니 내 말에 솔직하게 답하기만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마"

"뭐, 뭐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요란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녀석들.

"우선은...."

아리엘라는 긴장감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이곳의 혈주는 누구더냐."

"혈주...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무엇이든 답하겠다는 듯했던 그 태도와는 달리.

"그... 혈주라는 게 무슨 말인지."

"...."

녀석들의 대답은.

꽤나 시원찮은 것이었다.

"너희를 구울로 만든 귀족이나 기사 말이다. 그자의 이름을 모르느냐?"

"그, 그게... 그분들은 이곳에 나타나서 저희를 구울로 만든 뒤 곧바로 사라져 버려서...."

그 말에.

"...설마하니. 혈주의 이름조차 가르치지 않았다고?"

아리엘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이 땅은 완전히 방치해 둔 땅이라는 건가...?"

"...?"

"아무리 구울이라고 해도 그렇지, 최소한의 교육조차 하지 않고 이런 넓은 영지를 버려 두다니... 대체 어떤 귀족이기에."

여전히 긴장 놓지 못하는 표정.

그리고, 그때.

"아...! 저, 저는 아는 게 있습니다."

"응?"

구울들 중 누군가가.

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 주신 기사님들이나, 그 기사님들이 섬기는 귀족분들의 존엄하신 성함까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분들이 이 땅에 나타나셨을 때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제게 은총을 내려 주신 기사님과 그 동료로 보이는 분들이 말씀하신 내용은... 분명."

그리고.

그 대답을 듣자.

"발라라크 공에게서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으니, 이곳은 대충 정리하고 뜬다... 던가."

"...."

아리엘라의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 들어갔다.

* * *

...발라라크 공?

뭐랄까.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

나는 그 이름이 무엇인지 잠깐 생각하려 했으나.

"...그래. 그렇구나"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리엘라?'

발라라크 공이라는 이름을 듣자.

안 그래도 긴장한 것처럼 보였던 아리엘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으니까.

"흐음... 그런가. 공께서... 잘 알겠노라."

"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아리엘라는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을 말에는 담지 않으려 노력한 채.

최대한 덤덤한 척 애쓰며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뭐, 좋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명령을 내리도록 하마."

"예...! 예...! 뭐든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구울들은 그녀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그저 아리엘라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듯 필사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당장 저 도시로 돌아가서, 너와 네 동료들을 모두 동원해 마력이 담긴 물건을 찾아오도록 하거라."

"마력이 담긴 물건 말씀이십니까? 그런 건 왜...."

"내가 물건을 찾아오라 했지, 질문을 하라 했느냐?"

"죄, 죄송합니다!!!"

"아. 한 놈은 이곳에 남거라. 이 땅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을 것이니. 아까 내 질문에 답해 준 네가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바쁜 발걸음으로 도시 안으로 돌아가는 구울들.

그리고.

"...주인님. 잘 들으세요."

구울들이 떠나가자.

아리엘라는 남은 한 마리 구울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정신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원래도 그랬겠지만...."

그녀의 안색은 원래도 그랬지만.

"최대한 빠르게 이 땅을 떠야 합니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창백해져 있었다.

490화 귀족의 기사 (1)

"이 땅을 떠야 한다니...."

그 말에.

나는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직 우린 이 나라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어. 위험한 곳인 만큼 빠르게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건 좋지만 다른 목적도 있을 텐데."

적어도 저 도시에는 살아 있는 인간이 없어 보였지만.

애초에 도시 근처는 워낙 괴물이 많다 보니 인간들이 거점으로 삼는 경우가 적다.

교외 어딘가에는 살아 있는 인간들이 세력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이 나라는 넓고 많은 인구를 자랑하던 곳.

개중에는 좀비가 나타나지 못할 정도의 고도를 가진 도시들도 존재할 테니.

어딘가에는 분명 생존자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나라의 상황이 그들이 버티기 힘들 정도라 한다면.

저곳에 열려 있는 전이문의 크기는 상당한 만큼, 그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피난시킬 수도 있는 일.

그걸 포기하고 최대한 빠르게 복귀해야 한다니.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제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알지. 아리엘라잖아."

"그거 말고. 풀 네임이요."

풀 네임이라.

"아리엘라... 뭐시기 슈타인인가, 그렇지 않았나?"

"...카르슈타인입니다."

"그래, 그거."

내 농담 섞인 말에도 불구하고.

아리엘라는 어지간히 초조한 것인지.

자신의 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저는 카르슈타인 혈족의 준남작이었답니다. 그리고, 저희 귀족들의 세계에는 카르슈타인 혈족 말고도 다른 거대한 가문들이 존재하죠."

"...가문?"

"카르슈타인, 하르콘, 네페라트, 멜키오른.... 위대하신 시조님의 피로부터 직접 이어져 내려온 가장 위대한 네 가문이랍니다."

그 말에.

뜬금없이 반응하는 인물이 있었다.

{4개의 가문이라. 흠. 그런 거였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

나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뭔가 아는 게 있는 거냐?"

{저번에 군단장의 몸을 검진했을 때 말씀드렸지 않나. 군단장의 몸 안에 흐르는 피에는... 피, 그림자, 짐승, 괴력, 안개 등의 힘이 담겨 있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기도 했던 것 같기는 하다.

당시에는 뱀파이어의 존재를 모르던 부대원들이 뒤에 있었기에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넘어갔었지만.

{안 그래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던 참이네. 군단장의 피에서 느껴지는 잠재력은 그렇게 다양한데도 불구하고... 그 보호자분들께는 그중 두 가지인 피와 그림자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거든.}

"...그런 거냐?"

{다른 힘도 다룰 수는 있는 듯했지만 미약했지. 그나마 가능한 게 안개 정도고, 괴력과 짐승에 관련된 인자는 아예 발현조차 되지 않은 듯했어. 이제 보니 그게....}

그런 루카의 말에.

아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케도 알아챘구나. 그 말대로다."

"그 말대로라는 건?"

"위대하신 시조님께서는 저 꼬맹이가 말한 모든 힘을 완벽하게 다루셨지만... 아쉽게도. 그 후예들마저 그 위대한 힘을 온전히 이어받지는 못했다는 얘기죠."

아리엘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4개의 혈족들이 공유하는 힘은 단 하나. 피에 관한 부분뿐이에요.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기는 하지만 극히 미약하고... 대부분은 각각 하나의 분야에만 특화되어 있죠."

"예를 들면?"

"제 경우... 카르슈타인 혈족의 경우에는 그림자랍니다."

그림자라.

그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림자 장막] 얘기로군."

"네. 지금은 뭐... 주인님의 간이 냉장고처럼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장막은 본래 저희 혈족의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는 공간이에요. 위대하신 시조님의 힘을 엿볼 수 있는 편린 정도라고 할까요."

생각해 보면.

내가 만난 그 어떤 괴물 중에서도.

이런 아공간을 지닌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공할 힘을 지닌 괴물들조차, 아공간을 만들기보다는 이 세계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던전을 만드는 데에 그쳤으며.

그렇게 강력했던 저 루카조차 아공간이 아닌 강남의 지하에 자신의 몸을 숨겼다.

저 아공간은 아리엘라가 준남작이던 시절에도 Lv. Max의 비마나가 자리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 공간에서 추방당할 때 본 피의 바다....

그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엄청난 권능이야.'

그녀가 가진 안개화나 무력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 그림자 장막만큼은 아니다.

"혈족과 떨어진 채 따로 성장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만약 제가 다른 혈족의 어른들 사이에서 성장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능력을 배울 수 있었겠죠."

그녀가 그림자에 특화된 이였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얘기.

"그 외에도 하르콘 혈족은 짐승의 힘을 다루고, 네페라트 혈족은 안개를 다룬답니다. 그리고...."

"그리고?"

"멜키오른 혈족은 괴력을 지니고 태어나죠. 모든 혈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그 말을 하는 아리엘라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른 혈족끼리의 사이는 좋지 않은 거냐?"

"나쁘다고 할 정도가 아닌 수준... 이라고 해야 맞겠죠."

"...."

"공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어느 정도 존중하지만, 사적으로는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많답니다."

아무래도.

저 밤의 귀족은 동족이라 해서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모양.

생각해 보면 인간도 그러니 어쩔 수 없다만은.

'그래도 지금의 아리엘라 정도면 상당히 강한 수준 아닌가?'

녀석의 직위는 자작.

이게 녀석이 적당히 번역해서 들려주는 직위임을 감안해도.

귀족으로서 꽤나 높은 자리인 것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아까 들은 이름... 발라라크 공이라는 녀석은 아는 놈이냐?"

"...알다마다요."

아리엘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발라라크... 정확히 말하면 발라라크 멜키오른 자카르디오스 대공."

"...어?"

"귀족 중에서도 단 네 명뿐인, 대공의 작위를 지닌 자이자...."

대공이라는 건.

즉.

"멜키오른의 가주... 혈족의 수장인걸요."

* * *

멜키오른 혈족의 수장.

그 말에.

나는 아리엘라의 정보를 읽을 때를 떠올렸다.

'이 녀석은 분명 이자벨라 대공이라는 녀석이 귀족으로 만들었다고 했지.'

이자벨라라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 칭호가 대공.

그리고, 그 녀석이 카르슈타인 혈족의 수장이라고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리고.

저 발라라크라는 녀석 또한 대공으로 불린다.

즉.

"혈족의 가주들은 차원이 다른 괴물들이에요."

아리엘라를 귀족으로 만든 녀석과 동급.

귀족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존재라는 얘기.

"...얼마나 강하길래."

"제가 본 가주들이 가진 힘이라면... 얼마 전 저 꼬맹이의 다른 몸도... 비교가 안 될 거예요."

그 말에는.

아무리 나라도 인상이 창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라고?'

루카의 다른 몸은 내가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도 발목을 붙잡는 정도가 한계였다.

심지어는 그 발목을 붙잡는 시간도 그리 길지 못했다.

'어쩌면 저 정도 괴물쯤은 되어야, 마력의 색이 남색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지.'

어쩌면 남색급의 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보다도 강하다고?'

심지어는.

밤의 귀족 힘은 개인의 강함보다는 그 군세를 키우는 데에 치중되어 있다.

"가주가 이곳에 있다면 가문의 다른 귀족들도 많을 거예요."

"...."

그리고.

그들은 나로 인해 세력 확장에 제약이 있는 아리엘라와 다르게.

아무런 제약도 없이 힘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저 구울들.'

'뱀파이어 기사'가 넘쳐날 때 만들기 시작한다는 생명체들이.

이 도시에 가득 들어차 있다는 점이었다.

"저 구울들은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방치되어 있었어요.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죠."

"뭐지?"

"굳이 교육을 할 만큼 쓸모 있는 병력조차 아니라는 것."

구울들은 그럭저럭 강한 괴물처럼 보였다.

비록 귀족의 다른 권능은 쓰지 못한다고 한들.

그 완력만큼은 쓸 만한 수준.

"이 땅의 귀족들은 이미... 저 구울 정도는 굳이 병력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을 겁니다."

"...."

"저도 귀족으로서의 군세가 모자란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 전의 전투로 인해 꽤 많은 병력을 잃었으니까요. 어쩌면...."

"너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가진 귀족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거로군."

"꽤나 높은 확률로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내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저나 주인님, 둘만 있었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일단은 동족이기는 하니, 죽이지는 않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

내 뒤에 있던 이들....

"저희들은 그렇지도 않겠군요."

부대원들의 한가운데에 있던 정수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은 저 괴물들이 다가올 때 이미 느끼긴 했습니다."

"군단장님이나, 저 여왕을 대하는 태도와... 저희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르긴 하더군요."

나는 도시 안에서 본 풍경을 떠올렸다.

수없이 많은 괴물이 '구울'화되어 돌아다니는 모습.

그리고 제대로 된 힘은 없이 약점만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구울들 역시.

그 식성 자체는 다른 뱀파이어들과 같다고 했다.

즉.

'부대원들은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락 정도로 보일 확률이 높다는 얘기.'

그 다른 혈족이라는 녀석들과 우호적인 관계라면 모를까.

아리엘라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아리엘라마저 적대할 가능성이 높다.

정말 상황이 잘 돌아가는 경우에만 그래도 동족이니 목숨은 붙여 주는 수준.

"저 구울들을 상대로야 제 말이 어느 정도는 통하겠지만 다른 귀족들을 상대로는 아니에요."

아리엘라가 부대원들을 비호한다고 한들.

적대적인 혈족이 가지고 있던 도시락에 대한 소유권까지 인정해 줄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저 뱀파이어들의 세력이 중국을 어느 정도로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일대를 겨우 지배하고 있는 수준이라면 다행이지만.

어쩌면 중국 전역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즉.

"이 나라에서 최대한 빠르게 도망쳐야 합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아리엘라.

"대충 상황은 알겠어."

그래.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부대원들의 목숨을 고려하면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떠야 한다는 것도.

'중국 내의 상황을 최대한 파악하고 싶긴 했지만....'

그것도 나와 내 부대원들의 목숨이 안전한 상황에서나 할 수 있는 일.

이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다른 목표는 내팽개치고 도주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애초에 탈출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점이지."

결국.

저 열기의 장막을 맨몸으로 뚫고 바다를 헤엄쳐서 탈출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우리가 한국으로 귀환할 방법은 저 전이문을 재활성화시키는 것밖엔 없다.

그러기 위한 마력을 모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만 들이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다른 귀족들과 조우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즉.

이 땅을 최대한 빠르게 탈출하기 위해선.

최대한 빠르게 마력을 모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주인님?"

그럴 만한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게 문제....

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응?"

"실은...."

아리엘라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 없지만은 않답니다."

"뭐?"

"대신."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이 방법을 쓰려면 주인님께서도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셔야 한답니다."

나는.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 * *

중국 청도.

그 어딘가에 있는 한 도시.

몇 개월 전.

이 도시는 혈족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습격으로 인해.

그나마 살아서 숨어 있던 인간들은 물론.

도시 대부분을 점거하고 있던 괴물들마저.

혈족이라 하는 이들에게 그 피를 빨리고 말았다.

그들은 그렇게 이 도시의 모든 생명을 '구울'로 만들어 버린 뒤.

홀연히 이 땅을 떠나갔다.

남은 것은.

수십, 수백만에 달하는 숫자의 구울들뿐.

구울이란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긴 시간 동안.

그들로만 가득 찬 도시에 활기란 존재하지 않았으나.

{마력을 모아라!}

지금.

그 도시에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우리 땅을 다스리기 위해, 위대하신 귀족께서 직접 행차하셨다!}

구울들의 피에는 노예로서의 습성이 각인되어 있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를 원해 왔다.

그리고 지금.

{위대하신 혈족의 일원...!}

괴물들의 시선이 저 하늘을 향한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그곳에 권태롭게 앉아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여인.

{자작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특별히 교육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속에 있는 피가.

저 귀족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족의 곁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꿀꺽....

귀족을 바라볼 때는 경외감으로 가득 찼던 구울들.

그들의 눈에 공포가 깃든다.

'저것이 귀족의 기사...!'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

귀족들이 그들을 이끌 영도자라면.

기사는 구울들이 귀족의 기대를 벗어났을 때.

그 목을 베러 오는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구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예리하게 베이는 듯한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영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순간....

자신들을 먹잇감처럼 바라보고 있는 저 기사가.

자신들의 목을 베러 올 것이라는 걸 알기에.

{여, 영주님의 명을 따라라!}

{마력을, 최대한 많은 마력을 모아야 한다!}

기사의 눈빛에 공포를 느끼며.

구울들은 영주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아.'

수많은 구울을 공포에 떨게 한 장본인.

귀족의 곁을 지키고 있던 공포의 기사는.

'...어쩌다 이런 일이.'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491화 귀족의 기사 (2)

지금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뱀파이어 구울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엘라와 같은....

밤의 귀족들이 만들어 낸다는 종족.

사실 말이 구울이라는 하나의 종족이지.

원래는 다양한 종족의 괴물들에, 인간까지 포함되어 있던 이들이다.

'기사'로 선별되지 못한 이들인 만큼, 그 힘이 그리 강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 숫자는 상당했다.

막말로.

만약 저들이 갑자기 우리를 적대하게 된다면.

아무리 지금의 우리라고 한들, 잘 쳐줘 봐야 도망치는 것 정도가 한계겠지.

단.

"숫자가 얼마나 많든, 녀석들은 결국 구울이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혈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교육받지 못한 구울들이죠."

아리엘라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구울들이 격이 낮다고 한들.

보통 자신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도는 가르친다고 들었다.

"그 피에 귀족에 대한 충성심이 각인되어 있다고 한들, 그들이 정말로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는 것은 그들을 구울로 만든 귀족 한 명뿐이에요."

그리고.

귀족 안에는 여러 '혈족'들이 존재한다.

"그 혈족들 간의 사이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죠."

만약 자신이 어느 혈족인지 구울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자리를 비운다면.

다른 혈족이 그 구울들을 이용하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느 혈족을 따라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리기 위해 혈주의 이름 정도는 알려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이 땅의 구울들은 아예 쓸모가 없다고 판단해, 이곳에 방치해 버린 것.'

그리고 지금.

주인의 이름도 모르는 저 수많은 구울들은.

귀족을 따라야 한다는 강한 인식만 지니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마침.

우리는 빠르게 마력을 모아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 전력만으로 그만한 마력을 단기간에 모으기는 힘들다.

그러니....

"...우리가 그 주인이 될 수도 있겠군."

"바로 그거랍니다."

그렇게 해서.

{자작님의 명령을 따라라!!!}

우리는 저렇게.

이 도시에 넘쳐나는 구울들의 전력을 활용해.

최대한 빠르게 마력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다른 귀족과 조우하게 된다면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아리엘라의 말에 의하면.

구울에게 혈주의 이름조차 안 말하는 건 정말 극도로 이례적인 경우라던가.

이 정도면 다른 귀족들이 올 일도 없을 정도로 버려졌을 가능성이 컸다.

최대한 빠르게 저들을 이용한 뒤 사라진다면 조우하게 될 가능성은 적겠지.

{말씀하신 대로 미약한 마력이 느껴지는 물건들을 가져와 봤습니다!}

그래.

여기까진 좋았다.

{기사님!}

"...여기까진 좋았는데 말이지."

{예?}

딱 봐도 흉측하게 생긴 괴물.

녀석은 두 손 가득 잡다한 돌덩이들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저 돌들에 담긴 마력이 많지는 않아 보였지만, 지금은 약간의 마력도 아쉬운 상황.

"...그래, 두고 가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했다.

그러자.

{호, 혹시 제가 기사님의 심경을 거슬리게 한 것인지요...!}

쿠웅! 하고.

생긴 것만 보면 인간을 10명 단위로 삼킬 것 같이 생긴 괴물이 무릎을 꿇는다.

{제가 무언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혹시 물건이 모자란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구해 오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공포에 질린 채.

울먹이는 듯한 말투로 용서를 구하는 괴물.

"...한 번만 봐줄 테니까, 가라."

{아아... 감사, 감사합니다…!}

내가 보내 준다고 말하자.

녀석은 진심으로 감격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정신 언어]로 알아듣고 있는 게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흉측한 괴물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하.'

나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떠나가는 괴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내가....'

이런 꼴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유는 간단했다.

* * *

"귀족은 그 권세로 유명한 이들이에요. 아무리 혈주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들, 저 구울들도 그런 기본적인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겠죠."

"어어. 그런 말을 하긴 했지."

우리에게 덤벼든 괴물들.

그중 일부는 '귀족의 군세가 호위도 없이'라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이건 그들의 피에 새겨진 정보니까요."

혈주라는 것의 이름도 모르는 놈들이지만.

그 피에 새겨진 역사로부터 귀족들의 문화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던가 뭐라던가.

"말씀드렸다시피, 저들은 제게 절대로 복종하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 같은 걸 내릴 경우, 혈주의 명령이라면 가차 없이 자신의 목을 내놓겠지만 그 외 귀족의 명령에는 망설이겠죠."

실제로.

나와 마주한 괴물들은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몇 번이고 빌었다.

구울이 된 상태라고 한들.

삶에 대한 갈망 역시 없어진 상태는 아니라는 얘기.

"그래도 일단 귀족의 명령이니만큼 따르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혈주도 아닌 자의 명령. 보통은 마지못해 따르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런가?"

"특히... 아무리 귀족이라고 한들 그 권세가 약해 보인다면 겉으로는 말을 듣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대단치 않은 귀족이라 생각하고 제대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겠죠. 예를 들면...."

아리엘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대로 된 기사도 대동하지 않은 채 돌아다니는 귀족이라든가."

"흐음."

아무래도.

귀족이라면 많은 기사들을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게 정상이라는 모양.

하지만 그렇다면.

"네 경우에는 권속들이 있잖아? 그 녀석들도 상당히 강한 편일 텐데."

아리엘라의 권속들은 꽤 강하다.

어디 가서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권세]로써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녀석들은 저번 전투에서 상당히 큰 부상을 입고 말았으니까요."

"아."

"저희의 상처는 평범한 것과는 달라서 저 꼬맹이도 치유할 수 없어요. 그나마 정예 뱀파이어 몇 마리는 그때 급하게 피를 수혈해서 살려 둔 상태기는 했는데...."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옆을 슬쩍 바라보는 아리엘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 저희가 있잖아요!"

"맞습니다. 저희가 다른 형제들보다 더 열심히 할 테니, 저희만 믿어 주세요!"

"...."

이제 중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두 아이.

임나은, 임나훈 남매.

원래는 상당한 고레벨 각성자였다고 들었다.

쾌락 살인을 즐겨 하던 범죄자를 아리엘라가 붙잡은 뒤.

그 재능을 눈여겨보고 권속으로 삼은 것.

원래도 잘생겼던 아이들이었는데.

뱀파이어가 되면서 묘한 분위기가 섞인 탓에.

평범한 인간들이 보기에는 꽤나 신비로워 보이는 두 사람이기는 했으나....

"...이런 꼬맹이들로는 귀족의 위엄이 서질 않죠."

"...네?"

"그, 그런...!"

결국은 아직 어린아이들이다.

위엄이라는 단어와는... 영 단어가 멀어 보이는 외형.

본래는 그 자리를 채우던 정예 뱀파이어로 이범재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그럭저럭 키도 크고 그럴싸해 보이는 기사였으나.

"제가 이런 꼴이 되어 버린 탓에... 정말 죄송합니다...."

막상 녀석은 또 엄청나게 다쳐 있는 상황이었다.

얘기를 듣자 하니, 저 태양 빛에 직격당할 당시.

아리엘라가 그 빛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내던진 당사자라던가.

다른 뱀파이어들은 태양 빛을 인지하고 급하게 어디론가 숨기라도 했지.

이 녀석을 비롯한 몇몇 권속들은 아리엘라를 보호하느라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했다.

원래는 소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것을 급한 수혈로 그나마 목숨만 붙여 놓은 상태라는 것.

"이 도시의 구울들을 시켜서 신선한 피를 수급한다면 다른 기사들을 회복시켜서 권세로써 다룰 수 있게 되겠죠. 그러니...."

지금 아리엘라가 가용 가능한 권속들은.

귀족의 위엄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볼품이 없었다.

이 도시의 구울들을 이용하려는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

그리고.

이걸 해결할 방법이 바로....

"그때까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주인님."

"...."

나라는 거다.

* * *

나는 멍하니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평상시에 내가 걸치고 있는 것은 정수아가 만들어 준 군복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 군복을 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 화려하구만...."

지금.

그 모습은 조금 다르게 변화되어 있었다.

'귀족의 양식이라던가?'

아리엘라의 그림자가 군복의 위를 덮더니.

그 위에 덮어씌운 묘한 의상.

굳이 따지면 중세 기사들의 복장과 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꽤 화려하고 멋들어진 모습.

입대한 후로 군복만 입고 다니던 나로서는 꽤 부담스러운 화려함이었다.

...이것도 기사들의 복장이라고 한 만큼, 군복이라면 군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몸에는 뱀파이어의 피가 흐른다.'

정확히는 49% 정도?

그리고 이건 아리엘라에게서 직접 빼앗은, 그녀의 마력이 제대로 들어 있는 피다.

물론.

본래라면 이런 반쪽짜리 뱀파이어가 기사로 활동하기는 힘들겠지만.

이곳에 있는 건 제대로 된 귀족들이 아니라, 귀족들의 모습도 몇 번 못 본 구울들뿐.

{이 강렬한 피 냄새는....}

{기, 기사님이시다...!}

저들 입장에서는.

내 피에 담긴 마력은 기사의 것과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뜻.

'이건 제 예상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내가 기사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아리엘라가 내게 이 역할을 부탁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는 것 같았다.

'주인님의 얼굴이라면... 기사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잘 수행하실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딱히 착각은 아니었던 듯.

{여기. 부탁하신 마력석들입니다...!}

"흐음... 이게 단가?"

{히익...! 죄송합니다! 최대한 더 많이 찾아올 테니, 목숨만은 제발!!!}

"...."

별거 아닌 내 한마디 한마디에 묘하게 공포에 떠는 구울들의 모습.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지나칠 정도로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상처를 입을 지경이었다.

뭐... 아무튼.

결국엔 구울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일할 필요가 있다는 뜻.

그렇게 해서.

나는 잠시만이라도 그녀의 기사를 연기해 주기로 했다는 거다.

"여기, 저 구울들이 가져온 마력석들입니다."

뭐, 살아남는 데 필요한 일인 거다.

단순한 연기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그런 생각에.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만....

"쯧."

도시 가장 높은 곳

그곳에 마련된 화려한 의자에 반쯤 눕듯이 앉은 아리엘라.

"그렇게 시간을 주었는데, 가져온 게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냐."

그녀가 권태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목표한 양을 채우려면 한참 걸리겠구나. 좀 더 분발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의 기사여."

"...."

"멍하니 뭘 하는 것이냐? 명령을 수행하려면 조금이라도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텐데?"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말투.

그래.

처음에는 어느 정도 연기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새끼가....'

저 꼴을 보니.

속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내가 주인인데 태도가 그게 뭐냐고 물었었지.'

하지만.

돌아온 답변에는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어요. 제가 본 다른 귀족들의 태도도 다들 이랬는걸요. 오히려 다른 모습을 보이면 저들이 의아해할걸요?'

'다른 귀족이란 녀석들이 다 그런 느낌이라고...?'

'정확히는, 그걸 할 수 있는 최대한 따라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실제로는 훨씬 더 심하고 포악한 이들이 대부분이랍니다. 그래도 주인님한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은 귀족 중에서도 특별히 자비로운 이들보다도 조금 더 자비로운 수준이에요.'

여기서 더 자비로워지는 순간.

다른 구울들이 저거 귀족 맞냐고 의심할 수준이라는 것.

귀족이란 녀석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 면상 좀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참자, 참아....'

그래도.

아리엘라가 저렇게 말한 것과는 달리, 마력이 담긴 물건들이 모이는 속도는 꽤나 빠른 편이었다.

만약 아리엘라가 혈주였다면 저 구울들을 그대로 '갈아서' 마력을 보충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괴물들이 지닌 마력을 직접 뽑아내면 목숨의 위기에 놓일 가능성도 있다 보니, 구울들도 꺼린다는 모양.

반대로.

내가 저 녀석의 기사를 연기한 덕분일까.

-여기,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품고 있던 물건입니다...!

-뭘 그 정도로! 이것 좀 봐주십시오. 기사님! 이 도시 정도가 아니라, 이 일대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품고 있던....

마력이 담긴 물건을 가져다가 바치는 것은 꽤나 열성적인 모습이었다.

'갈수록 속도가 늦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속도면.

길어도 일주일 내로는 필요한 마력을 모두 채울 수 있겠지.

그리고.

'...어차피 떠나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반대로 말하면, 이곳을 떠나기까지 아직 일주일 정도는 남은 거다.

"확실히. 네 말대로 그럭저럭 훌륭하군."

-아아... 감사합니다, 기사님...!

"이게 이 일대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품은 물건이라 했지? 이런 건 어떻게 구했지?"

-사, 사실. 제가 열등종이었던 시절... 제 동족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편이었습니다. 상위종으로 거듭난 지금도 그 열등종이었던 시절의 본능이 남아 있어서... 우연히 이 물건의 위치를 알게 된 거였지요.

"흠. 그렇다면 이 물건 외에도 주변에 대한 정보를 꽤 알고 있다는 것이로구나."

-예, 예에...! 기사님께 자랑할 정도는 되지 못하겠지만! 이 도시의 구울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고 한들.

이곳은 언젠가 오려고 했던 먼 타국의 땅.

"그렇다면 몇 가지 더 묻도록 하지."

-뭐든지, 뭐든지...!

그렇다면.

"이 근처에... 살아 있는 인간은 없나?"

이곳을 떠나기까지 남은 약 일주일.

그동안.

나는 이 나라의 정보를 최대한 파악할 셈이었다.

492화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