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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EP-32 기사는 강화 중입니다(4)

아이린 윈들러는 눈을 끔뻑거렸다.

 

"가, 갑자기 왜 저래요?"

 

뜬금없이 대련을 준비하는 두 남자였고, 마냥 디저트를 즐기던 그녀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아이린은 혼란스러워했고. 레비의 반응은.

 

"기사니까요. 실력을 겨루는 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여상스럽게 반응하며 그들의 움직임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마치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의 모습.

그녀 또한 이제 당당히 검의 길을 걷는 기사 후보생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음이었다.

 

"그, 그런가?"

 

[아린아, 이해가 안 가면 그냥 그러려니 해. 기사의 대결에 딱히 이유는 없는 거야.]

 

"…으응."

 

마법사가, 아니 현대인이 이해하긴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야만스러운 문화가 아닐 수 없다.

 

뭐….

 

"…나, 나쁘진 않네, 스읍."

 

[아린이 취향은 광배근 쪽이구나? 난 전완근 쪽이 좋은데.]

 

 

눈요기엔 나쁘지 않기에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로 대결을 열심히 눈에 담는 소녀와 유령이었다.

 

 

 

 

"…아이린 영애가 교관에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주는군요."

"가끔 저래. 이제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지만."

"흠, 괜찮으십니까? 그거 희롱당하는 겁니다만."

"희롱은 무슨, 볼 게 뭐 있다고."

"...."

 

…기만도 저런 기만이 어디 있을까?

 

일정한 경지에 이른 전사들은 알 테지만, 육신의 단련도란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성향과 쓰는 무기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었다.

 

자신처럼 단순한 롱소드 형태의 직도를 사용한다면 마른 체형인 이들이 많으며, 창이나 대검을 쓰는 자들은 상체가 크게 발달하여 멧돼지나 곰을 연상케 하는 이들도 간혹 있으니까.

 

이렇듯 육체의 발달은 선택사항이며,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육체를 갖는 것이 정도(正道)라 할 만 했다.

 

그러나.

 

'나조차 감탄이 나오거늘….'

 

이한의 육체는 윤곽만으로도 사람에게 감탄을 나오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성향이나 무기, 상성 등의 이점들을 모조리 다 압도하는 '특별함'이 말이다.

대체 어떠한 단련을 해야 저런 육체가 완성될까?

 

'근육이 아니라, 갑옷과 다름없다.'

 

우지직!

 

꿈틀거리는 근육의 역동적인 움직임.

힘이 얼마나 압축되어 있는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안 가며, 설사 화살을 맞는다고 해도 기어이 튕겨낼 것 같은 바.

 

'숙부와 비슷한, 아니 결이 다른 완성품이군.'

 

숙부, 막시무스의 육체가 하늘이란 장인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면, 저것은 수천, 수억 번의 압력을 견뎌내어 만들어진 주괴(鑄塊)가 아닐까 싶었다.

 

둘 중 누가 더 낫다고 확언하기 어려우며, 둘 모두 위험한 건 매한가지.

 

거기다….

 

'성장이 더 가능했던 건가?'

 

…믿기 힘든 일이지만, 교관의 육체는 과거보다 더욱 성장했음이 느껴진다.

 

안 그래도 고압축되어 있던 주괴였거늘 이젠 그 '질'마저 높아졌다고 할까?

 

"그동안 무슨 훈련을 하셨는지 궁금하군요."

"많이 싸우고, 좋은 것도 먹다 보니 단련되더라."

"…거짓부렁이라고 말하고 싶으나, 교관이 그리 말한다면 거짓이 아닐 테죠."

"부러우면 운동 좀 봐주랴?"

"아닙니다. 저는 저만의 길이 있으니."

 

숙부나 교관과도 다른.

그는 오로지 순수한 검객의 길을 걸을 셈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몸 상태에서 꾸준히 성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려선 안 된다.

 

각자에게 맞는 길이 있는 법이니까.

 

스릉.

 

그리고 자신의 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로엔이 검을 뽑는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후욱!

 

검을 뽑는 순간 뿜어지는 칼바람.

단순히 의성어가 아니라, 그의 검에서 뿜어지는 날카로운 예기가 칼날의 바람을 일으켰고, 주변에 널브러진 나뭇가지 등이 반으로 쪼개지며 그 단면은 칼로 자른 듯 매끈하기 그지없었다.

 

신검합일.

사람이 검이 되고 검이 사람이 된다고 알려진 검술의 경지를 로엔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펼쳤다.

 

말 그대로 검(劍).

 

그는 설령 검을 들고 있지 않을지언정 온몸이 날카로운 칼날로 무장한 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틀림없이 검명보다 높이 위치한 경지임이 분명할 터.

 

"어떻습니까? 제가 걷는 길이 당신께서 걷는 길보다 부족하다 보십니까?"

"아니, 오히려 한 우물만 파는 놈이 무서운 거지, 전혀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지."

"그렇게 평가해주시니 감사하군요, 그럼…."

 

후욱!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로엔의 검이 검기(劍氣)를 형성했다.

 

검기상인, 로엔이 도달한 투기법의 신기원이 펼쳐지며 상대를 위협했다.

보통 상대였다면 검기를 대적하자마자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그대로 몸이 통째로 베이고 말 것이다.

 

그 정도로 로엔이 내뿜는 검기는 날카로웠고, 세상 모든 것을 베어낼 것만 같은 기세가 감돌았다.

 

다만.

 

콰아앙!

 

"처음부터 살벌하네?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뼈가 다 시려."

"…손날로 검기를 막는 교관께서 더 살벌하신 것 같습니다."

"한 번 받아보고 싶었거든. 근데 두 번은 안 하련다. 두 번 했다간 그때부턴 손이 없어지겠네."

"...."

 

그러한 검기가 허무하게 막히는 것을 보며 로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날에도 생각했지만, 이 사람은 정말…!

 

'기막힌 사람이야.'

 

여러 의미로.

 

* * *

 

'첫 수업 때 이후 두 번짼가?'

 

이놈이랑 싸워 본 것이.

 

첫 수업 날, 건방진 생도 녀석들과 대련하였을 때 이후로 검둥이와 싸우는 건 간만이었다.

다른 녀석들과는 제법 대련도 많이 했거늘, 이상하게 그와는 기회가 안 오더라.

 

'이 녀석이 슬금슬금 피했지.'

 

이한으로선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다.

모처럼 보람찬 상대를 만났는데도 대련할 기회가 없었으니.

허나 지금, 검둥이는 검을 들었고 그로선 기껏 집으로 데리고 온 고양이가 처음으로 자신과 놀아주는 듯한 상황에 흐뭇함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사악.

 

"…목검이 아니라 손도끼를 드시는 겁니까?"

"널 높이 평가해서 그러는 거야."

"...사양하고 싶은 평가군요."

 

이한은 이 검둥이 녀석을 인정하기에 타 생도들처럼 목검으로 상대하는 게 아닌 날붙이를 꺼냈다.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생도를 상대로 목검이나 날이 뭉툭한 검을 쓰는 게 아닌, 날이 시퍼렇게 선 날붙이를 쓰는 것이.

 

그러나 이한은 그를 일개 생도로 보지 않고, 한 명의 당당한 검객으로 보기에 손도끼를 쓴다 말하리라.

 

'만만하게 보기엔 이놈이 생도 수준이 아니거든.'

 

전날 붙었을 때는 어리짐작만으로 가늠하는 수준이었다면, 자신이 성장하는 것으로 인해 이제 명확하게 알겠다.

검둥이 녀석을 보고 귀족들이 '어린 사자'라 불렀었나?

하지만 그건 틀린 표현이라 지금 이 순간 단언한다.

 

'저놈은 이미 다 큰 사자야.'

 

또한 태창이 식으로 표현하자면.

 

'Lv.7이려나?'

 

영웅 클래스라 표현되는 놈이 아닐까 싶었고, 웬만한 기사단장보다 강하단 뜻이기에 이한은 그를 조금도 경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후우우우우…!

 

"...."

"…후."

 

그들은 잠시 멈춰 선 채 서로를 노려보며 고요함을 유지했다.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기에 가지는 탐색전.

 

누구 한 명 먼저 빈틈을 보이지 않았고, 먼저 치고 들어갈 틈이란 게 보이지 않았다.

 

하여.

 

후욱!

 

그들은 빈틈을 찾는 게 아닌, 빈틈을 강제로 만들기 위해 동시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미치겠군."

 

존재감이 희미하여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있던 잭은 그들의 대련을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싸우는 장본인도 아니고, 그저 구경할 뿐인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다 저릿저릿할 정도다.

 

그야말로 무서운 격전.

 

'나도 언젠가 저리 될 수 있을지, 원.'

 

잭, 그는 로엔의 수하가 된 이후로 기사를 목표로 살아가는 자였다.

타고난 암살자의 재능이 있으나, 암살자의 길보다 기사의 길을 더 걷고 싶어 재능을 억누르며 살아가곤 있지만….

 

'내가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과연 저들과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는 도통 그려지지 않는다.

하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원래대로....

 

"-먹으면서 구경하세요!"

 

"…아, 가, 감사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만연하려고 할쯤, 잭에게 음료와 과일을 건네는 시녀가 있었고, 잭은 다른 의미로 움찔했다.

 

'기, 기척을 전혀 못 읽었다…!'

 

그의 주군 로엔마저도 그의 기척 탐지능력에선 벗어나지 못하거늘, 이 시녀는 대체…?

 

"저기 있잖아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누가 이기고 있는 건가요?"

"네, 네에!?"

"헤헤, 누가 유리한 건지 모르겠어서요."

"아, 그것이…."

 

허나 생각을 잇기도 전에 잭은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어쩐지 그녀의 부탁에 저항하는 것이 힘들었고, 본인도 이러한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채 잭은 입을 열어갔다.

 

"이, 일단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주군, 아니 로엔 공자입니다. 빠르고도 정확한 연계식으로 상대가 공격할 타이밍을 조금도 주지 않고 있으시군요."

"헤에, 그럼 기사님이 불리하신 건가요?"

"…그건 또 아닙니다. 교관님께선 그 모든 공격을…, 너, 너무나 여유롭게 막아내고 계시는, 군요."

 

잭은 설명하면서도 점차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교관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주군의 연계식을 모조리 다 막아내고 있었다.

 

일격, 일격이 모조리 다 위협스럽고, 자신 같으면 막기는커녕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렇다고 저걸 힘들게 막아내고 있느냐 묻는다면.

 

'너무 쉽게 막아내고 계시는군.'

 

놀라웠다.

 

마치 저건 무어랄까.

 

주군은 벌떼와 같으나, 교관이란 철벽을 뚫어내지 못하여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광경 같지 않은가?

 

'무려 검기를 두른 참격인데….'

 

검기란 단순히 검이 가진 절삭력만 높이는 게 아닌, 위력과 속도, 힘과 관통력마저 높이는 반칙적인 기예와 같다.

 

한데 그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며 잭은 교관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금강이구나!'

 

그는 주군의 수하이기 이전에 교관의 제자 중 한 명이다.

 

정식으로 경을 배웠고, 그 덕분에 교관이 지금 어떠한 기술로 검기를 막아내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 금강이 아니야, 금강을 이용한 응용식이군.'

 

하!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잭의 입장에선 교관의 기술들은 이미 완전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더욱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주군을 보며 느끼는 감탄과는 다르다.

 

주군에게 느끼는 건 저 놀라운 재능에 대한 감탄이라면, 교관에게 느껴지는 건….

 

'길을 가르쳐주는 길라잡이라고 할 수 있겠군.'

 

마치 길을 가르쳐주는 듯했다.

노력하는 것에 따라, 혹은 자신이 어떠한 부류의 기사가 되고 싶어하느냐에 따라 강해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듯.

 

시간은 걸릴 터이지만, 언젠가는...!

 

"꼭 훌륭한 기사가 되면 좋겠네요."

"!!?"

"힘내세요."

"...."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마치 볼일은 끝났다는 것처럼.

 

잭은 마치 요정에게 흘린 기분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분도 보통 예사로운 게 아니야."

 

교관의 주변 인물은 어찌 된 게 평범한 이가 없다.

 

잭은 그러한 깨달음을 얻으며 혀를 내둘렀다.

 

 

…방금 전과 다른 시원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 * *

 

콰아앙!!

 

후우우웅!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지며 땅이 뒤집어졌다.

 

로엔이 날린 검기가 유독 큰 위력을 발휘하며 생긴 충격파였고, 지금껏 자잘한 일격과 다른 제법 강력한 힘이 응축된 일격이었다.

 

한데도.

 

"…조금은 아픈 티라도 내시지 그럽니까?"

"충격이 오래 가긴 하지만 그냥 그런데? 그보다 그건 또 뭐라는 기술이냐?"

"...."

 

그는 멀쩡했다.

 

로엔은 자신이 싸우는 게 사람이 아니라, 거인과 싸우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마저 들었다.

 

'서리 거인도 이 정도는 아닐 터인데.'

 

질려버리는 튼튼함이다.

 

그가 그렇게 쓴웃음이 지어지려 할 때.

 

"…평범이 좀 신경 써야겠다."

"?"

"저 녀석, 시녀님이 위로해줘서 괜찮은 거지, 방금은 좀 위험하더라. 흑화하기 전 단계까지 가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흑화란 것이 무엇입니까."

"삐뚤어진다고."

"…일단, 저와 대결하시면서 다른 이의 대화까지 들을 여유가 있다는 점이 놀랍고도 허망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전체를 보면서 싸우는 거지. 오히려 넌 좀 고쳐야 해. 상대방한테만 너무 집중하는 것도 안 좋은 버릇이야. 항상 집중력을 전체적으로 퍼트려야지."

"...."

"앞만 보고 가는 건 좋은데, 다른 곳에도 시야를 돌리도록 노력해봐. 안 그럼 나중에 가서 후회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로엔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가르침이 지금 그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직감했기에.

 

'난, 또 다시 실수를 하려고 했는가….'

 

주위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고, 전체를 둘러보는 시야가 부족하다.

 

이는 언제고 한번 들은 그의 단점이었다.

 

지금이 아닌, 그가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에 들은....

 

하여 이제는 과거처럼 좁은 시야를 가지지 말겠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아직도 그는 애송이인 듯하다.

 

'잭이, 확실히 삐뚤어질 수도 있겠군.'

 

애초에 잭이 원래 가진 재능을 억누르고 기사가 되기를 권유한 것은 그였다.

원래 예정된 대로라면 '신전의 숨은 비수'가 되어야 했던 인물을 개과천선시키기 위하여.

허나 그가 계속 억누르고 신경 써주지 않는다면 다시금 '그때'처럼 돌아갈 우려가 있다.

 

하여 로엔은 반성했다.

과거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그 노력을 등한시한다면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겠는가.

 

"후우, 사람은 항상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조언해주는 사람을 둬야 하는 거야."

"예, 공감합니다."

 

안 그래도 눈앞에도 있지 않은가.

제 잘못을 지적해주는 스승이….

 

'하, 스승 따윈 평생 없을 줄 알았거늘.'

 

이 또한 오만한 편견이었음을 다시금 깨우친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학술원에 입학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요."

"갑자기?"

"최고의 스승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자식, 안 어울리게 아부는."

 

말은 저리 하지만 칭찬이 싫지는 않은지 그는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네가 조금 전 기술, 그거 검기를 응축시킨 거지? 약간 [벼락 떨구기]랑 비슷하네."

"…숙부께 영향을 받긴 하였지요."

 

역시 숙부랑 대결을 벌였는가, 설마 벼락 떨구기마저 봤을 줄이야.

 

'숙부께서 상당히 진지하게 결투에 임했다는 뜻이군, 결과는 어떻게 됐을지….'

 

그가 아는 한 가장 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사가 다름 아닌 막시무스란 기사였다.

하기에 졌다곤 생각되지 않지만, 벼락 떨구기를 보았는데도 여전히 이 자리에 교관이 멀쩡하게 서 있다는 것은-.

 

'어쩌면 무승부일지도…-.'

 

…이러한 추측을 이으려고 한 로엔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추측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

 

...너무 놀라서,

 

로엔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냉정함이 깨지며 한껏 바보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은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파아앗!

 

"-난 너처럼 검기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건 못 해. 아무래도 재능 차이고, 너처럼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대충 검기 비스름한 걸 쓸 수 있고, 네 숙부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랑 싸우면서 검기를 조작하는 방식도 알게 됐거든."

 

저걸 보고 어찌 사람이 바보처럼 안 굴 수가 있겠는가?

 

 

─그의 도끼에서 빛이, 자신이 만들어낸 검기보다 더욱 환하고도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기에.

 

 

"검기성강(劍氣成罡). 줄여서 '검강(劍罡)'이라고 하자, 네가 쓴 그거."

 

"...."

 

"나쁘지 않은 이름이지?"

 

"…하."

 

검기의 성강, 검 끝에 별을 담아내었다는 것이 아닌가?

 

로엔은 도끼에서 뿜어지는 힘의 결정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무승부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132 EP-32 기사는 강화 중입니다(5)

'이거, 생각보다 확장성이 괜찮은데?'

 

막스인지 하는 양반이 하는 걸 보고 흉내 낸 힘의 결집.

골조는 검울림에 있으나, 이를 활용하는 방식은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리라.

 

벼락이나 실을 뽑아내거나, 그도 아니면.

 

'-별빛을 담거나.'

 

이한은 그 인간을 보고 흉내 낸 기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 약간 유쾌했다.

 

아무래도….

 

'더 다양한 걸 할 수 있겠는데?'

 

앞으로도 재미난 기술을 실컷 만들 수 있을 것 같기에.

…뭐.

 

...후웅….

 

지금 당장은 안 될 것 같지만.

 

"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유지하는 게 까다롭네, 검둥이 너 이런 어려운 걸 어떻게 그렇게 유지하냐? 이런 것도 재능 차인가?"

"…차라리 욕을 하십시오."

"왜?"

"진심으로 모르겠다고 행동하는 부분이 상당히 열 받는군요."

 

로엔,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검기보다 상위호환 격인 기예를 즉석으로 만든 주제에 재능이 부족하다고 하면 자신이 뭐가 되겠는가?

 

'왜 다른 이들이 날 보고 욕설을 내뱉는지 알겠군….'

 

그의 아군과 적군 등이 그와 싸울 때마다 노려본 이유를 깨우치며 로엔은 자기반성을 하였다.

 

과거의 자신은 지휘관으로도 엉망이었지만, 사람으로서도 실격이 아니었는가 싶어서.

 

 

훌륭한 거울치료가 아닐 수 없었다.

 

* * *

 

여러 일이 있긴 했으나, 대련은 장장 80분을 넘게 지속됐다.

대련치고 너무 긴 게 아닐까 싶었으나, 그들은 마냥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기에 길어진 점도 있었다.

 

흔히 논검(論劍)이라 하였나?

 

이한과 로엔은 몸으로만 겨루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소통을 통해서도 검을 겨루었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이나 단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쾌검으로 덤빈다면 난 이렇게 막고 바로 도끼로 머리를 내려찍을 거다."

"전 흘려내서 바로 목젖을 찌를 겁니다."

"…으음, 일단 실제로 해볼까?"

"...이거 논검 맞습니까?"

"실전 논검이지, 뭐."

"…논검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다 논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격렬한 논검을 나누고, 죽지 않을 만큼 맞대길 반복하니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더라.

 

그리고 대련 후에는 당연히.

 

"검기로 인한 체력소비는 힘을 무차별적으로 낭비하는 탓이 문제라 보입니다. 교관께서 경을 사용할 때처럼 검기 또한 섬세한 조작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지속시간이 길어질 겁니다. 사실 투기법을 익히고 계시다면 요령을 익히기 쉬울 테지만, 교관께선 투기법을 배우지 않으셨지요, 흠,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투기법의 기초를 배워 보시겠습니까? 교관이라면 단기간에 요령을 익히실 수도…."

"아서라. 지금 그런 걸 익히면 이도저도 안 된다."

"…그것도 그렇군요."

 

복기.

 

그들은 대련을 복기하는 동시에 서로에게 필요한 적절한 조언을 나누었다.

 

"넌 단점 같은 건 없어. 검술에 있어선 이미 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움직임이나 판단력도 최상급이니까. 굳이 문제점이 있다면 집중력이 한정적이란 거? 좋게 말하면 상대방에게 집중력이 좋다는 거지만, 한 번 몰입하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다는 뜻도 되겠지. 뭐, 1대1 상황에선 그 단점조차 장점이 될 테지만."

"고치란 말입니까, 아니면 놔두란 겁니까?"

"온-오프를 확실히 하란 뜻이다. 그것만 되도 넌 딱히 단점이란 게 없어. …아, 그래도 있긴 하다. 너무 '완벽해서' 문제라는 문제가."

"…말장난입니까?"

"아니, 진짜야. 넌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해서 문제야."

"완벽하게 하려는 게 말입니까?"

"완벽하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정석적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거든. 이건 즉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걷고 있다는 뜻도 되는데, 그렇게 되면 발상과 의외성이 부족해지거든. 그리고 의외성이 부족한 놈을 공략하는 건 제법 쉬워."

"...."

"네가 언젠가 일검으로 바다마저 가르는 괴물 같은 놈이 되면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닌 이상 언젠가 내가 지적한 문제가 발목을 잡을 때가 있을 거다."

"…기억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는 악담으로 들을 수 있는 얘기겠지만, 녀석은 그의 얘기를 진지하게 귀담아 들었다.

무언가 짚이는 점이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짚이는 점은.

 

"확실히 교관 같은 이들과 싸우게 된다면 저는 당황하다가 오히려 질 가능성이 크겠군요."

"나?"

"교관처럼 의외성과 발상이 특이한 분은 또 없으니 말입니다."

"나는 무난한데?"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시길 바라지요."

"?"

 

이렇듯 제법 뜻깊은 시간을 갖는 그들이었고, 어느새 밤의 장막이 그들을 둘러싸려 할 때 그들은 날붙이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늦었는데 자고 갈래?"

"아닙니다. 눈치 없는 놈이 되고 싶진 않군요."

"어울리지도 않게 눈치는…."

"…절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말해주면 상처 안 받을 자신은 있고?"

"...그냥 듣지 않도록 하지요."

"하하!"

 

역시 다른 의미로 놀리는 맛이 있다.

 

겉보기론 얼음 조각 같은 녀석인데, 묘하게 인간적이라고 할까?

 

'나쁜 녀석은 아니야.'

 

나름 인간적이고, 실수도 하며, 어설픈 구석이 있다.

 

또한.

 

"다음엔 '그것'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네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그놈."

 

"!!!!"

 

쓸데없이 다정한 구석도 있고.

 

그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그냥 직감적으로 안 거야."

"직감만으로 말입니까?"

"최근 직감이 더 예민해졌거든."

 

싸우면서 느낀 건지, 그도 아니면 레벨이 오르며 전날보다 더욱 예민해진 감각에 의해 알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이한은 검둥이의 안에 '아주 큰 짐승'이 잠들어 있음을 감지했다.

 

지난날 학술원에서 본 대공의 짐승보다 조금 작은…,

하지만 그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검은 짐승을 말이다.

 

"…신비 수준의 직감이군요."

"나도 신기하긴 해, 어쨌든 그거 네 감정이 격해지는 거에 따라 반응하는 거지? 착각이 아니라면 말을 더럽게 안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위험한 놈을 키우고 있구먼."

"...지금 순간 약이라도 사라고 말한다면 넘어갈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내가 약팔이가 아니라."

 

이한은 그를 놀리듯 웃었고, 녀석의 표정은 심각해져만 갔다.

아마 비밀이 밝혀진 것이 당혹스러운 듯하다.

 

하지만 자신은.

 

"어디 가서 안 말할 거니까, 안심하고."

 

다행스럽게도 남이 숨기고자 하는 비밀을 떠벌리는 취미가 없었다.

 

"그리고 널 협박해봤자 내가 얻는 게 뭐라고."

"저는 상당히 부자인지라 돈으로 해결하는 법도 있습니다."

"네 입으로 부자라고 말하냐? …됐다, 코 묻은 돈 받아서 뭐하라고."

"이 정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만."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이한은 손가락 다섯 개를 피는 검둥이를 건방지다며 노려보았다.

이놈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돈으로 사려는…!

 

"참고로 금화 5만 개를 의미하는 겁니다."

"...."

"금화 5만 개면 아마 포도밭이 있고, 세수도 나쁘지 않은 자그마한 영지 하나쯤은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진짜 부자였구나."

 

...혹할 만한 금액인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한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막대한 금액을 듣고 욕심이 안 든다면 거짓이겠지만, 저 돈 받았다간 왠지 골 아픈 목줄이 하나 생기는 것 같아서.

 

'안 그래도 한 사람한테 목줄 차여서 힘든데, 다른 목줄까지 차고 싶진 않네.'

 

그러니 이한으로선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리라.

 

'…오백 개만 받을걸 그랬나?'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크릉!]

 

"…사나운 고양이네."

 

그렇게 아쉬움을 곱씹던 중 그를 위협하랴 울부짖는 '짐승'의 울음을 들었다.

 

검둥이 말로는 원래 안 들리는 게 정상이라고 하였지만, 이상하게 그의 귀에는.

'흑왕이라고 했었나?'

 

또렷하게 그 존재감과 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이 간직한 신비.

 

사자왕에게서 비롯된 신비이자, 갈라하드의 마검과, 그리고 왕국의 오러 유저와도 대등하다 전해지는 힘이 바로 저것이었다.

 

'저런 짐승이 북부에 두 마리나 있을 리는 없겠지? 있었다면 진작 독립해서 떠났을 테니까…. 그럼 저게 혹시 [회귀 특전]이란 건가?'

 

이한은 저 흑왕이 북부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현재의 것'이 아니라 판단했다.

저런 힘이 여러 개였었다면 북부가 아직도 독립을 선언하지 않은 게 도리어 더 이상하니 말이다.

 

그러니 저건 현재가 아닌 '미래의 조각'일 가능성을 높게 쳤다.

회귀자물 클리셰 중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을 거슬러 오며 가장 강력한 힘 하나를 보너스처럼 가지고 오는 것인데,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흐음, 약화된 이유는 페널티 같은 거려나?'

 

그러나 미래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힘은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약하네, 대공이 가진 것에 비하면.'

 

얼핏 느낀 것에 불과했지만, 대공과 자연스러운 일체화를 이루던 흑왕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 막시무스조차 꼼짝도 못했고, 존재감만 느낀 이한조차 간담이 서늘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허나 그에 비해 검둥이 안에 짐승은 사납기는 사나운 것 같은데 현저히 약했다.

 

대공과 비교하면 고양이와 사자만큼의 격차가 있다고 할까?

 

…뭐, 약하다고 해도.

 

"그거랑 싸우면 목숨 걸어야 할 것 같네. 으음, 첫 대련에서 왜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그만뒀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 사나운 놈이 폭주할까 그랬구나? 자식, 생긴 거랑 다르게 배려심이 있어."

"…다시금 묻는 거지만, 교관께선 평소에 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흔해빠진 귀족가 공자?"

"...."

 

...이 사람에게 과연 귀족이란 무슨 의미일까?

 

로엔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귀족 혐오에 마냥 황당할 따름이었다.

 

* * *

 

치이이익!!

 

대련이 끝나고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아는 지인에게 얻은 질 좋은 숯불과 무쇠 그릴 위에서 푸짐한 양의 돼지고기가 올라갔다.

 

준비된 고기의 양만 15kg.

 

참고로 이 중 10kg은 이한 혼자 먹을 양이었다.

 

치이익…!

 

돼지기름이 뜨거운 숯불과 만나며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고기의 질이 좋다는 지인의 말대로 잡내가 전혀 나지 않는 좋은 돼지가 아닐 수 없으리라.

 

'의외로 발달할 건 다 발달했단 말이지.'

 

왕국은 의외로 축산업이 발달하였고, 땅덩어리도 넓은지라 고기 또한 저렴한 편이었다.

소 같은 경우엔 키우다 자주 마물화 하는 경우가 있는지라 고급 식재 취급이며, 귀족들 식탁에나 올라가는 메뉴였고. 그래선지 평민들은 비싼 소보단 돼지를 더 자주 소비하는 편이었다.

 

뭐, 대부분 베이컨이나 하몽 종류의 햄이나 소시지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생각했을 때 이한처럼 생으로 구워 먹는 건 왕국에서도 생소한 방식임이 맞았지만.

 

"바바리안식 구이군요. 바바리안은 생고기를 이렇게 구워 먹는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듣기론 체력과 영양의 보충 등을 위해서라고 들은 것 같은데, 타 문화에도 관심이 있으신 것이 뜻밖이군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이한은 얼떨결에 신비종족 문화마저 수용하는 지식인이 된 것이 떨떠름했다.

그냥 잘 아는 고깃집 주인에게 도토리 먹여 키웠다는 질 좋은 고기를 선물 받았고, 추억도 떠올릴 겸 간만에 이렇게 먹는 것인데, 이상한 오해를 산 모양이다.

 

"그, 그렇구나. 나 말고도 이세계에 온 사람이 있는 줄 알았네, 착각이었구나…."

 

"...."

 

…그 이세계에서 온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왜 모르는 걸까?

 

안타깝게도 동향인을 찾을 힌트를 대놓고 줬는데도 마법사 병아리는 자기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었다.

 

'쟤는 진짜 언제 눈치챌까?'

 

이쯤 되면 궁금하다.

과연 언제까지 저럴까 하고.

 

"많이 먹어라. 여기, 야채에다 싸서 먹고."

"와, 여기도 쌈 문화가 있어요?"

"나도 몰라."

"대박! 그럼 교관님이 찾아낸 방식인 거예요?! 천재셨네요…!"

"…그 정도로 극찬 받을 일이냐?"

"네, 엄청나게!"

"...."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걸까 싶은 의구심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큰 힌트를 대놓고 주는데도 모른다고?

 

'이게 로판식 저주냐?'

 

로판 여주들이 가끔 감나무 떨어진 것처럼 굴 때가 많긴 하던데, 그거랑 비슷한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와! 맛있다! 이 무로 만든 것도 대박!"

"…그래, 맛있으면 됐다."

 

그래, 애가 좀 모자라면 어떤가.

착하고 잘 먹으면 그만이지.

 

주문쟁이만 아니었으면 더욱 흐뭇했을 광경이었을 거라며, 이한은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고기를 구웠다.

 

"...."

"왜? 입맛에 안 맞아?"

"…아닙니다. 맛있군요."

"그런데 표정이 좀 이상한데."

"…그저, 낯설어서 그럽니다. 누군가와 이토록 평화롭게 식사를 한다는 행위가…."

"...."

 

이 부분에선 뭐라 반응하기가 애매했고, 이한은 다른 여타의 말없이.

 

"자, 고기나 더 먹어라, 채소랑 피클도 먹고, 맛있을 거다."

"예, 맛있군요."

"평범이 너도."

"남이 절 챙겨줄 줄이야,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왜 내 제자 놈들은 하나같이 서글픈 새끼들밖에 없지?"

 

챙겨줄 때마다 지뢰를 밟는 기분인지라 절로 침음이 다 나왔다.

 

그래도.

 

"사부님, 정말 맛있어요!"

"…그래, 너도 많이 먹어라."

"사, 사부님도 굽지만 말고 좀 드세요, 제, 제가 먹여 드릴까요?"

"아니다, 틈틈이 먹고 있으니 너나 많이 먹어라."

"...네에."

 

애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면 뿌듯하긴 하다.

 

이게 부모의 마음인가?

 

"요리사의 마음이 아닐까요?"

"…시녀님, 독심술 좀 그만 쓰십쇼."

"헤헤, 저 그런 거 못 해요, 그보다 아아."

"...."

"아아."

"…아."

 

왠지 안 받아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레이라의 호의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이상하게 자신이 구운 것보다 두 배는 더 맛있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 무렵.

 

"-교관."

 

"응?"

 

밥 잘 먹던 검둥이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마치 밥값을 건네주듯.

 

"갑작스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오늘 이렇게 방문한 목적은 마냥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

"아마 앞으로 교관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도 좀 휘말리는 중인데?"

"그거랑은 결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도 그럴게-."

"...."

 

…이어지는 얘기를 통해 이한은 왜 녀석이 굳이 '골치 아픈 일'이란 문장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신전이, '이단 심문관'이 교관을 주목하고 있을 겁니다."

…종교 권유가 곤혹스럽긴 하지.

#133 EP-33 기사는 단속 당합니다(1)

...그는 쉬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할까?'

 

잠을 잔 게 언젠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으며, 피로는 풀릴 틈이 없었다.

매일 야밤을 지새우며 일을 해야 했고, 일이 끝난 뒤에도 쉴 시간 따윈 없다.

항상 다음 일이 준비되어 있거나, 갑작스레 생겨버리니 말이다.

 

"…하하."

 

기어이 그의 입에선 실성한 사람의 웃음이 터졌다.

 

십 대 시절 중등부 아카데미에 다닐 적만 해도 여름 휴교일은 가문이 소유한 별장에서 여름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하녀들의 보살핌 등을 받으며 귀찮은 일은 할 필요도 없었고, 가문의 요리사가 영양 가득한 삼시세끼를 골고루 챙겨줬다.

 

한데 지금은.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을까...."

 

…데미안 폴렛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살피며 서글픈 넋두리를 내뱉었다.

 

"조교님."

"...."

"여기 밥이요! 식사는 챙기고 하셔야죠!"

"저, 저기 레이라 님. 그, 식사를 챙겨주신 건 감사한데, 그릇이…."

"아, 이거요? 기사님이 무조건 이 그릇으로 주라고 해서요! 조교님 전용 그릇이라면서 기사님이 무조건 이 그릇에만 음식을 담아서 드리래요!"

"…미친 인간."

"네에?"

"…레이라 님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썩을-!"

"으응?"

 

그녀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며 눈을 끔뻑거렸고, 데미안은 새삼스레 이 시녀님 또한 그 양반과 같은 과란 것을 되새겼다.

 

하여튼 이 집구석에는 정상이 없다!!

 

'개 밥그릇이라니!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하란 말이다!!!'

 

0.5평짜리 개집, 아니, [Made in 이한]이란 각인이 정성스럽게 각인된 하숙집에서 거주 중인 조교 데미안 폴렛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게도 하늘은 왜 이리 맑은지, 원.

 

'벼락이나 맞아라!'

 

...다만 벼락에 맞는다고 해서 저 괴물이 죽지 않으리란 사실이 그가 반항하지 못하는 원흉이 아닐까 싶었다.

 

데미안은 서글펐다.

 

* * *

 

데미안 폴렛.

마당에 마련된 0.5평 좀 안 되는 개집, 아니 약간(?) 소박한 하숙집의 입주자.

원래 그는 휴교일을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보낼 예정이었지만 그는 빌어먹게도 기숙사가 아닌 강제적 하숙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유?

 

…제 입으로 말하려고 하니 화병이 도져서 말을 못 할 것 같다.

 

모처럼 망할 교관이 자리를 비워 쉬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복귀한 교관이 제 뒷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넌 방학에도 일해야지, 어딜 쉬려고 하냐?'고 그를 데리러 왔을 때-.

 

…단언컨대,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인생 중 가장 공포의 순간이라 생각했던 것이 달라졌다.

 

'지금이 지옥이다.'

 

데미안 폴렛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그의 교관은 양심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제기랄! 내가 왜 이 개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데!'

 

눈물을 머금고 마당의 마련된 아늑한 개집, 아니 하숙집의 유일한 거주인인 데미안 폴렛은 서류작성에 열을 올렸다.

 

원래는 교관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교관이건 강사이건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휴교일에도 바쁘다.

바쁜 이유에는 다음 학기 강의 준비도 준비지만, 제출해야 할 서류가 기본적으로 열 장 이상 되었으며, 그밖에도 학과마다 요청해야 하는 것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수건 강사건, 교관이건 정신없이 학술원을 들락거리며 요청해야 하는 것이 한가득이었다.

 

데미안은 이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서류 작성에 달인이 되어 갔고, 가면 갈수록 더욱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나 그는.

 

'전혀 안 기쁘다, 썩을!'

 

욕지기만이 치밀어 오를 따름이었다.

한때 욕설이라곤 모르고, 우아한 품격으로 무장한 귀족의 자제는 사라지고, 어엿한 일꾼이 되어가는 데미안이었다.

 

그렇게 불만이 가득한 데미안은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안타깝게도.

 

"조교야."

 

움찔!!

 

"예, 예에! 교관님…!"

 

그는 자동반사적으로 빠릿하게 일어서며 곧장 불만을 집어넣었다.

감히 저 인간 앞에서 불만이 있다는 티를 낼 수 없었기에.

 

남자, 이한은 땀을 구슬프게 흘리며 서서히 다가왔고, 곧 데미안이 처리하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보더니.

 

"일 제법 잘하고 있구나. 역시 바깥 공기 좋은 곳에서 일하니까 효율이 좋지?"

"...."

"농담이고, 그것만 빨리 끝내. 그래야 너도 쉴 시간이 생기지."

"…원래 교관님이 하실 일입니다만."

"그런데?"

"...."

"눈이 불순하다, 조교야."

"…깔겠습니다."

"응, 역시 눈치가 좋아. 현명해."

"...."

"속으로 욕하지 말고."

"…제 마음까진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시험해볼까?"

"...빌어먹을."

"허허, 고놈 참. 건방지긴 더럽게 건방져. 귀족이라 그런가?"

"제발 그놈의 귀족 차별 좀 그만하십시오!"

 

교관의 밑에서 구르게 된 지 어느새 반년.

그동안 데미안이 들은 가장 많은 문장은 대개 이러했다.

 

'귀족이라 그런가? 영 일처리가….' '귀족이라 그런가? 싸가지가 없어.' '귀족이라 그런가? 눈매가 더럽네.'

-등등!

 

창창한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화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혈압이 자꾸만 오르는 데미안이었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아카데미 회복실 단골이었다.

한데 더 충격적인 게 무엇인지 아는가?

 

아직 이 짓을 2년 반이나 더 해야 한다는 거….

 

그것이 진정으로 끔찍했고,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몸서리가 날 악몽이었음이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일까?

회복실 사제가 일컫길.

 

- 으음, 혹시 요새 스트레스가 많으신가요?

- 무, 무슨 문제라도….

- 스트레스성 탈모 증세가 보여서요. 젊은 나이에 어쩌다 이렇게….

- ....

- 괘, 괜찮으신가요?

- …흑.

- 우, 우세요?

 

그는 20세 나이에 스트레스성 탈모를 얻게 되었다.

 

…최악이었다.

 

'서러워서 진짜.'

 

데미안은 모든 게 더럽고 추잡했다.

 

콰앙! 쾅-!

 

'젠장 할, 나한테 일 몰아주고 자긴 훈련만 하네.'

 

불만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데미안이었지만, 차마 반항할 엄두가 안 났다.

그가 제 생명줄은 쥔 장본인이라는 이유도 이유지만….

 

'저런 괴물한테 반항해서 어쩌라고?'

 

콰앙! 콰지직-!!

 

샌드백, 무거운 철봉 수십 개를 쇠사슬로 묶어 만든 철봉 샌드백이 두들겨질 떄마다 형태가 바뀌고 반으로 접혀갔다.

기어이 딱 열 번을 쳤을 때 쇠사슬이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는 광경….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스읍, 이거 내구도가 왜 이따위야? 이 아저씨 품질 믿고 물건 사는데, 안 되겠네."

"품질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가 문제냐?"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교관을 보며 할 말을 잃고 만다.

 

또한 한편으로는 오싹하다.

 

그도 그럴게.

 

'덩치가 더 커진 건가? 아닌데,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더 발전한 건가?'

 

안 그래도 폴렛 가의 부단장을 가지고 놀던 양반이, 반년 만에 더 무지막지하게 변해 버린 것은 데미안의 착각이 아니리라.

 

강했다.

 

가늠조차 안 되게.

 

'…우리 가문 기사들이 떼로 덤벼들어도 이제 안 될 것 같네.'

 

나름 명문 기사 가문인 폴렛 가의 후손인지라, 가문의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이 있지만. 데미안은 객관적이었으며 본의 아니게 여러 일을 겪으며 눈이 높아진 상태였다.

 

그런 뜻에서 교관의 실력은 감히 폴렛 가의 기사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못해도….

 

'대귀족 가문 기사단이 나서야 할지도…?'

 

이미 그 대귀족 가문의 기사단과 붙어봤음을 모르는 데미안은 조심스레 교관의 실력을 예측했다.

 

하며 후회한다.

 

왜 자신은 입학식 날 괜히 입을 놀려서 저런 괴물과 엮이고, 이런 꼴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객기였지, 기사 가문의 말예란 놈이 상대방 실력이 심상치 않은 것도 한눈에 못 알아봐?! 하여튼 등신…!'

 

그리고 가장 등신은 실력자를 못 알아보고 나댔다가, 지금은 개집에서 거주 중인 자신이었지만.

 

스스로를 욕하며 다시금 욕지기를 내뱉는 데미안이었다.

"...빌어먹을."

"다 들린다, 조교야."

"...."

"울지 좀 마라. 하숙집까지 직접 만들어줬잖아? 집세도 안 받고 밥마저 꼬박꼬박 나오는 집이라니! 이득도 이런 이득이 없다?"

"전 그 이득 싫습니다."

"쯧쯧, 귀족이라 그런가? 배가 불렀어, 아주."

"제발 좀…!"

 

차별을 멈춰주길 바라는 귀족이었다.

 

* * *

 

'이놈은 굴려야 해, 쓸데없이 시간 주면 잔머리만 굴릴 놈이야.'

 

그가 저 떨거지 귀족 애송이를 개집 같은 곳에 던져두고 일을 시키는 건 마냥 자신이 편하자고 그러는 게 아니었다.

 

…물론 서류 작업을 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 이용한다는 자각은 있다.

 

그러나 이토록 모질게 대하는 이유 중에는 저놈이 어떠한 녀석인지를 알기에 더 굴리는 점도 있었다.

 

반년 동안 밑에서 굴리며 안 것이지만, 데미안이란 인간은 천성적으로 못난 놈 타입이었다.

 

하기에 결코 봐주거나 풀어줘선 안 된다. 저놈은 아마 약간이라도 풀어주면 기고만장해져서 옛날 버릇 도질 놈이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냐고?

 

'내가 저런 타입을 못해도 백 명은 넘게 봤을 거다.'

 

전생 부사관 시절 무수한 폐급을 본 그로선 당연한 확신이었다.

허나 모난 유형임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에게 특출 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눈치가 좋다는 점과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심이 있다는 점….

 

즉, 개과천선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마물 사태 때 활약상을 들어만 봐도 천성이 마냥 악질은 아닌 것 같더라.

 

'흔히 폐급에는 두 종류가 있지.'

 

타이르면 사람이 되는 놈과, 타일러도 결국 짐승인 놈.

 

그런 뜻에서.

 

'이 새끼는 사람이 될 수 있어.'

 

전자인 것이 중요한 바.

 

비록 첫 만남은 더러웠고, 이후 관계 또한 지저분하기 그지없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했으며, 그가 가르치는 생도 중 한 명인 이상 이한은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계속 굴리자.'

 

미칠 듯이 굴린다면 언젠가 사람이 될 테지.

 

곰도 100일 만에 사람이 됐다고 하던데, 3년이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흐음, 서류 일 끝나면 배수로도 파게 할까?'

 

그리고 말하는 거다.

 

'아, 거기 파면 안 된다더라, 다시 메꿔라.'

-라고.

 

이미 한 사람을 불합리하게 굴리기 위한 커리큘럼을 완벽하게 짠 이한이었다.

 

그때.

 

똑똑.

 

"실례합니다, 형제님."

 

이한의 귀한 시간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었다.

 

"…또 왔네."

 

이한은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즘 이 시간만 되면 찾아오는 그를 보고 있자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그렇게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짓는 이한이었으나, 상대는 이를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부디 오늘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

"그래도 꼭 좀 대화를…."

"…제발 좀 가."

 

이한은 자꾸만 자신을 종교의 길로 이끌려고 하는 사제를 보며 말했다.

 

"'추기경'이란 사람이 한가한 것도 아닐 거면서."

"허허, 그런 과분한 자리를 내려놓은 것이 언제인데 그러십니까? 지금은 그저 일반 신도 중 한 명일 뿐이니 편히 대해주시지요."

"...."

 

…퍽이나 편하게 대하겠다.

 

차라리 적의부터 내비치는 인간이 편하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상대하는 게 훨씬 더 상대하기 힘든 기사였다.

 

'…이게 이단 심문관?'

 

전직 추기경 출신 이단 심문관이 더할 나위 없는 강적이었다.

 

그것도 그럴게.

 

'툭 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겠다.'

 

 

보기만 해도 유교의 혼을, 노인공경을 치솟게 하는 '정상적인 어른'이 아닐 수 없기에.

#134 EP-33 기사는 단속 당합니다(2)

"쿤타, 궁금한 거 있다. 답변 좀 해줘라, 아르노."

"…흠, 질문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음식은 다 드시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식당에서 크게 떠들면 안 됩니다, 쿤타."

"응! 알겠다!"

 

후루루룩!!

 

"…스테이크는 마시는 게 아니라, 씹어서 먹어야 하는 겁니다."

 

두툼한 안심 스테이크 다섯 덩이를 쿤타는 스프를 먹듯 마셔버렸다.

아무리 부드럽게 익혀졌어도 저렇게 먹으면 탈이 날 텐데.

 

'아니, 그에겐 별다른 문제가 아니려나?'

 

역시 신비종족 바바리안.

호쾌한 스테이크 마시기를 성공하며 그는 환히 웃었다.

 

"이거 맛있다. 물 많이 나온다."

"물이 아니라 육즙입니다."

"공용어, 무척 어렵다."

"…잘만 하면서."

 

아르노는 쿤타가 공용어가 어눌해서 약간 모자라 보이지, 실상은 전혀 모자란 인간이 아님을 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배움이 빠르면 빨랐지.

 

'누군가는 바바리안을 보고 야만전사라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그건 틀린 말이야.'

 

바바리안을 폄훼하려 지어낸 질 나쁜 정보.

오히려 자연과 어우러지며 살기 위해 쓸데없는 정보를 다 배제한 느낌이 들면 들었지.

 

'나도 쿤타를 겪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편견 속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

 

지금은 안다.

바바리안은 용맹한 전사이자, 타고난 책략가임을.

동시에 자상함과 성실함도 갖춘 존경할 만한 이들임을.

쿤타 말고 다른 바바리안을 만나진 못했으나, 쿤타가 가문에서 하숙한 지난날 동안 하는 말만 들어도 바바리안이 얼마나 대단한 종족인지 알 수 있는 바.

 

'정말 같이 기사가 됐으면 좋겠군.'

 

이토록 든든한 동료도 드물 테니.

 

"후, 다 먹었다!"

"…충분히 드셨습니까."

"좀 부족하다. 그래도 참는다. 쿤타 소식해야 한다."

"...그렇군요."

 

무려 혼자서 거대한 스테이크 열 덩어리를 먹어 치운 쿤타였다.

총 7kg을 먹어 치운 것인데도 소식이란다.

 

…든든한 동료긴 한데, 같이 다니다 식량을 다 거덜 낼지도?

 

"이제 질문해도, 된다?"

"네에, 질문하십시오."

"으응, 신전은, 뭐다?"

"…신전, 말입니까?"

 

뜬금없이 나오는 물음에 아르노는 잠시 눈을 끔뻑거렸으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응, 쿤타 부족에서 가장 유명한, 지혜 많은 노인이 그랬다. 유학 가면 '신전'을, 주의?"

"...."

 

…아르노는 왜 궁금증을 표했는지 납득했다.

 

확실히 신비종족 등이 가장 주의해야 할 세력이긴 했으니까.

 

"근데, 내가 본 신전 사람들 다 착하고 좋았다. 회복실 사제 누나 예쁘고 착하다. 색시로 맞이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신전의 사제들은 50대까지 신앙생활 후에야 혼인이 허락되는 것으로 압니다."

"…이게 실연인가? 쿤타, 마음 아프다."

"또한 50대가 넘은 순간 10대로 회춘한다고 하더군요. 마치 그동안 고생한 것을 신이 보답해주듯이."

"기다려, 본다?"

"…그냥 포기하십시오."

 

후우….

 

아르노는 친우의 어처구니없는 행각에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곧.

 

"…신전은 기본적으로 선한 세력이 맞습니다. 아무렴, 왕국에 모든 병자들을 무료를 치유해 줄 뿐만 아니라 열성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조직이니 말입니다."

"그럼 왜 주의, 해야 하는 건가?"

"그건…."

 

이 순간 아르노는 주의를 둘러보았다.

오펜 가의 사람밖에 없는 시설이긴 하지만, 신전의 눈은 어디에나 있는 법.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그는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꼼꼼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신전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악질적이기로 유명한 그 세력의 이름을 말이다.

 

"신전에는 '이단심문소(異端審問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마 쿤타가 말한 지혜 많은 노인이 주의하란 것도 신전 자체가 아닌 그들일 테지요."

 

…왕국 사람조차 그들과 척을 지면 간담이 서늘한 곳이기도 했고.

 

아르노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왜 위험한가?"

"…이단심문소 소속 심문관 중엔 신비종족 등을 '혐오'하고 모조리 다 격멸해야 한다 주장하는 자들이 제법 많아서 그렇습니다."

"…쿤타, 갑자기 입맛 사라졌다."

"...."

 

이미 스테이크 말고도 디저트로 나온 치즈 케이크마저 한 판을 먹어 치운 사람이 할 발언은 아니었지만, 아르노는 그의 심경을 이해했다.

확실히 불쾌한 얘기임은 맞으니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쿤타는 정식으로 학술원에 유학을 온 생도이고, 이단심문소 또한 과거처럼 무차별적으로 미친 짓을 저지르진 않습니다. ...다만, 조심은 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니 필히 왕도를 돌아다닐 땐 혼자 다니지 않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아르노 말 들을수록, 쿤타 조심해란 건지, 안심해도 된다는 건지 헷갈린다…."

"그냥 가능하면 신전과 엮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이해하면 될 겁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이었고, 쿤타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실수로라도 엮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그때는…."

"그때는?"

"…불운한 거겠지요."

"...."

"그래도 정말 엮일 일은 잘 없습니다. 요즘엔 심문관들도 그다지 한가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불운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아마 괜찮을 겁니다."

"넘어진 거로 다치는 경우도 있나?"

"...당신을 보면 바바리안이 왜 소수 종족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진작 왕국 하나 세워도 되는 튼튼함인데."

"?"

 

쿤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르노는 혀를 내둘렀다.

 

두 생도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면.

 

"형제님, 오늘도 안녕하셨는지요?"

"…당신이 오기 전까진 안녕했지."

"허허, 농담도, 원."

"농담 아닌데…."

 

전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한, 재수가 없다 못해 뒤로 넘어지면 불바다가 있을 것만 같은 사내는 그렇게 침음을 흘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며.

 

"…차나 마시고 가."

"오늘도 잠시 신세를 지고 가지요."

"...."

 

…이놈의 도덕심이 원수다.

 

'왜 난 쓰레기처럼 굴 수 없는 걸까?'

 

이한은 차마 선량한 노인에게 나쁘게 굴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

*

*

 

…노인, 그러니까 라파엘 신부와의 만남은 정말 생뚱맞은 것이었다.

 

여느 날처럼 훈련에 열의를 쏟던 중, 지팡이를 든 노신부가 천천히 이한의 집 앞으로 걸어오는 게 아니겠는가?

 

- 산책 코스치곤 험한 곳인데….

 

이한으로선 황당할 만도 한 것이, 이한의 집은 험지도 이런 험지일 수가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도심 속 자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길도 관리한 적이 전혀 없어 엉망진창이었으며 오는 길에 야생 짐승을 만나 위협을 당할 우려도 있다.

또한 밤만 오면 그토록 어두울 수가 없어 횃불이 있을지라도 앞이 제대로 안 보인다.

 

하여 가능하면 안 찾아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곳이 이한의 집이었다.

 

뭐, 덕분에 싸게 구매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렇다 보니 이한으로선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노인이 처음 그의 집까지 찾아왔을 때 당혹스럽기만 했다.

차려 입은 것만 봐도 성식자인 건 알겠고, 아무런 무력도 없는 마냥 무해한 노인으로만 보이는 바.

 

하여 처음만 해도.

 

- 저기, 길을 잘못 드셨어요?

 

그는 나름 친절하게 성직자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으면 되돌아갈 수 있도록 길 안내나 해 줄 셈이었고, 아니면 원하는 곳까지 업어 줄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 허허, 아닙니다, 똑바로 찾아온 게 맞는 것 같군요.

 

노인은 '거물'이었다.

 

- 라파엘이라고 합니다. 광명의 빛에게 삶을 구원받은 종자 한 명이지요.

 

…나중에 길드를 통해 알게 된 거지만, 라파엘이란 이름을 가진 저 노신부는 무려 광명의 빛에서도 단 다섯 명밖에 없는 추기경 중 한 명이었으며, 비록 추기경직을 사임했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이 엄청난 노인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라파엘 추기경께선 올해 116세시며, 당대 교왕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입니다. 성법으로 회춘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광명의 빛의 말씀만을 따르는 신실함과 자기희생적인 모습 때문에 '성인(聖人)' 후보까지 오르셨지만, 이 또한 자신에겐 과분하다면 사임하셨고, 이런 모범적인 모습 때문인지 신전의 사제들 중 따르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한데 또 충격적이게도 현재는 이단심문소를 직접 관리하는 총책임자 역할에 있으신데, 왜 그런 역할을 자처해서 맡았는지는 신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뭐, 어쨌든 대단한 분인 건 분명하고, 혹시라도 다치게 하면 신전에서 어떻게 나올지 감히 예상이 안 갑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이상이 왕국 길드조합장 사이먼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 중 일부였다.

 

그리고 이한으로선 환장할 사실이기도 했고.

 

왜 그런 대단한 양반이 이 험한 길을 홀로 걸어왔고, 왜 굳이 자신을 만나러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으니까.

하여 처음엔 경계하며 어떻게 할까 싶었으나 라파엘은.

 

- 오늘은 얼굴이나 보고 싶었습니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하지요.

- ....

 

…첫날에는 진짜 그냥 얼굴만 보고 가더라.

 

허나 이후에도 라파엘은 계속 그를 찾아왔다.

 

바람이 강한 날에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에도, 비가 내리는 날에도 말이다.

 

하여 이한은.

 

- …조교야, 삽 들고 와라.

- 네에?

- 땅 정비 좀 하자.

- …누가요?

- 우리가.

- ....

 

일단 정비되지 않은 엉망진창인 길부터 정비했다.

삽 한 자루만 가지고 인부 스무 명은 달라붙어야 정비할 수 있을 길을 쓸모없는 조교 하나를 데리고 무려 반나절 만에 뚝딱 정상적인 길로 만든 것이다.

 

이후에는.

 

- 허허, 오는 길이 정말 아늑하더군요.

- …환장하겠네.

 

이한으로선 이만한 강적이 없다.

 

차라리 적의를 내비치는 인간이 편하지, 적의 한 점 안 보이며 그저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가는 라파엘에게 뭐라고 할 명분이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또 그가 마냥 그를 훔쳐보고 가는 이상한 노인은 아닌 것이….

 

- 그냥 오는 건 실례인 것 같아 부족하지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혹시 우유를 드시는지…?

 

직접 짠 염소 우유나 버터 등을 선물로 가지고 오더라.

 

확실히 개념도 있는 신부임을 증명하는 행위였고, 이렇다 보니 차츰.

 

- …나 괴롭히려고 계속 찾아오는 게 아니라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말이나 좀 해 봐.

- 허허, 그저 형제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왕도를 구한 영웅의 풍모를 말입니다.

- ....

- 직접 보니 기대 이상이군요. 젊을 적 만난 영웅들의 기백을 뛰어넘는 것이, 소문 이상입니다. …혹시 광명의 빛을 따르고 싶지 않으십니까?

- ...염병.

 

…어느 날부턴 스카우트도 같이 진행되었다.

 

이한은 인정했다.

 

- 천적이야, 천적….

 

진짜 인생 최대의 천적을 만나게 된 것 같다고.

 

적의가 없는 상냥한 시선만을 던지며, 묘하게 그를 좋게 본다.

또한 집에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지 않는 개념까지…!

 

이한으로선 지금껏 왕국에서 본 그 어떤 노인들보다 '정상적인 어른'인지라 대하기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다.

 

저런 양반이 어떻게 이단 심문 같은 과격한 일을 하는가부터 시작하여, 왜 자신을 찾아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까지.

 

- 검둥이 말로는 내가 신전에게 위험 대상으로 찍혔다고 들었는데….

 

회귀자의 말대로라면 그는 너무 설친 나머지 신전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찍힌 상태라 한다.

 

이유?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짐작 가는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명확한 것이 생각나는 것은 모르니까.

 

- 후우, 돌겠네….

 

그런지라 이한은 골이 아팠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뭔가를 말해주면 좋겠는데, 이토록 자꾸만 간만 보는 느낌이니 말이다.

 

그렇게 현재에 와선.

 

후루룩.

 

"으음, 맛이 좋군요. 이건 뭐라고 하는 차입니까?"

"…그냥 산에서 나는 허브를 말린 거야."

"허허, 자연의 은혜를 마신다는 뜻이군요. 귀한 대접을 받고 갑니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건데."

"형제님께서 이 허브를 따서 말리고 차로 우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있었겠습니까."

"...."

"겸손과 성실함, 그야말로 신실한 교인의 자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다 그쪽으로 연결되는 걸까?"

 

...이러한 열성적인 스카우트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중이었다.

 

'거, 백 살은 거뜬히 넘은 양반이 아직 정정하네.'

 

아직 30년은 더 사시겠어.

 

호로록.

 

이한은 차를 마셨다.

 

* * *

 

"오늘도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형제님."

"내일은 오지 마, 제발."

"허허, 모처럼 형제님과 가까워지고 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음."

 

돌아가는 노신부의 발걸음이 불안하다.

지팡이도 허약해 보이고, 다리는 지팡이보다 더 허약하기 그지없다.

 

"조교야."

"네에?"

"업어드리고 와. 그리고 적당한 마차 하나 빌려서 집까지 모셔."

"제, 제가요?"

"그럼 내가 하리?"

"…아니요, 제가 해야죠. 빌어먹을…."

"한마디가 많다, 조교야."

 

데미안은 투덜거리며 라파엘에게 다가갔고, 라파엘은 거절을 표시하려 했으나.

 

"난 이 한여름 더위에 초상 치르고 싶지 않고, 괜한 죄책감 가지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여. 당신에게 선택지는 없어."

"강제적 호의라는 겁니까?"

"아니지, 필요한 호의인 거지."

"허어…."

"…왜 그렇게 봐?"

"생긴 것과 달리 형제님께선 상냥하신 분이군요."

"...내가 생긴 게 어때서."

"더욱 형제님을 신전으로 데리고 오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이, 대답."

"호의는 받아들이지요. 감사합니다, 부디 광명의 축복이 있기를."

"…뭐지? 나 지금 나무랑 대화하냐?"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라파엘은 데미안에게 업혔고,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그를 업은 채 걸었다.

 

멀어지는 노신부의 등이었고, 이한은 이를 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친절이라."

 

으음….

 

'우리 영감님이 생각나서 그런가?'

 

전생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를 키워주었던 할아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분이 있었기에 그는 10대 시절에 삐뚤어지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라파엘과 그의 할아버지가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성격도 말투도, 생김새조차 모두 다르니까.

 

다만.

 

'좋은 사람이야….'

 

인품(人品). 고집스럽지 않고 세상을 유연하게 대하며 올곧게 살아가는 저 인품만큼은 참 닮았다 싶었다.

 

얼마 만나지 않았지만, 라파엘이란 양반이 그를 우롱하려고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그의 감각이 알려주니까.

 

'농락하는 거였으면 진작 하늘나라로 보내줬지.'

 

쩝….

 

어렵다, 어려워.

 

근본이 나쁘지 않은 인간에게 모나게 굴 정도로 그는 못돼먹을 수가 없었다.

 

약간 어둑해지는 하늘.

그는 내려앉은 그림자들과 멀어지는 두 개의 인영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그림자조차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확인하곤….

 

 

"-그래서,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가까이 왔냐? 이 음흉한 새끼야."

 

 

...이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입을 떼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안 나와도 상관은 없는데, 다음에 올 때는 목숨 걸어라. 불쾌해지기 직전 단계니까."

 

화락.

 

일순 마치 커튼콜을 하듯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간의 장막, 신비롭기까지 한 광경이었고 눈을 의심할 법한 상황 속에서 '그'는 걸어 나왔다.

 

"…실례했소. 감히 기사를 시험한 것 같은 행위가 됐구려. 그저 추기경을 호위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러니까 봐준 거야. 아니었으면 진작 죽였어."

"그렇군. 진작 알고 있었던 건가."

 

사내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고, 이한은 뒤돌아서며 그를 마주보았다.

 

생긴 것부터가….

 

'진짜 이단 심문 잘 할 것처럼 생겼군.'

 

한 손에는 성경을, 또 한 손에는 종을 든 신부가 거기 있었다.

 

눈가의 음영이 짙고, 머리칼에는 새치가 가득한 것이 인상적인 칙칙한 낡은 신부복을 입은 남성.

원래 나이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동태같이 죽은 눈과 낡은 신부복보다 더욱 어두컴컴한 분위기까지.

 

보고 있노라면 사람을 위축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허나 이한에게 있어선.

 

"그래서, 안 꺼지냐?"

 

"...."

 

대가리를 깰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놈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135 EP-33 기사는 단속 당합니다(3)

"이 부러운 새끼…!"

"…뭐가?"

"라파엘 추기경이라니…! 그분과 대화하고 싶은 신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분과 식사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돈을 쏟아부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종교에는 관심도 없는 녀석이 그런 귀한 시간을…!!"

"그래…?"

 

땅굴의 소식을 전하러 방문한 제이크가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얘기를 해주니, 갑작스럽게 격한 반응이 나왔고, 이한은 마냥 눈을 끔뻑거릴 따름이었다.

 

라파엘 영감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듣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그 권위가 얼마나 높은지는 몰랐으니까.

 

하여 이한으로선 그가 과한 호들갑을 떤다 싶었다.

 

"근데 왜 추기경이라고 불러? 물러난 지 오래잖아?"

 

이미 은퇴 직전인 양반인데 이토록 난리를 부릴 일인가 하는 순수한 의문.

 

"…다른 신도들이 들으면 뒤집어질 발언이군."

 

다만 제이크로선 이 발언이 미치고 환장할 발언인지 미간을 꾹꾹 누르길 반복했다.

 

"그분이 거절해서 추기경직에 물러난 것뿐이지, 여전히 그분의 잠재적 지위는 추기경 이상이야. 원래 교왕이 되도 이상하지 않을 분이라고, 그리고 그분이 마음만 먹고 교왕이 되고자 한다면 신전의 사제들 중 4할 이상이 그분을 지지하겠지."

"…보통 양반이 아니었구나."

"...왕국 사람이면서 그분을 모른다는 게 참."

 

제이크의 황당하다는 반응.

 

마치 이 나라의 위인을 모른다는 발언을 들은 사람 같았다.

 

"내가 너 같은 신전 덕후인 줄 아냐."

"…덕후는 또 뭐야?"

"너 같은 놈을 말하는 거다."

"...왜 이렇게 욕 같지?"

"욕은 아니니까 빨리 땅이나 파. 날 세겠다."

"으음…."

 

그는 마당 주변에 밭을 만드는 중이었다.

 

대충 잡초를 모조리 뽑고, 돌멩이와 자갈을 다 없애고, 흙을 뒤집으며 비료 등을 섞은 후 물을 주며 밭이 밭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원래 며칠은 걸리는 과정이었지만, 이한은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홀로 80평이 좀 넘는 땅을 개간하는 데 성공했다.

 

"후우, 드디어 끝났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자급자족인 셈이지. 저긴 무 심고, 저기는 감자랑 고구마, 양파랑 땅콩 심고, 저긴 상추랑 배추 심어야지."

"…본격적이네. 응? 그럼 저긴 뭘 심으려고 저렇게 많이 비워 놓은 거야?"

"고추 심으려고."

"고추? 혹시 서부에서 최근 들여 온 그 맵고 특이한 식물을 말하는 거야? 고문할 때나 쓴다는…?"

"…일단 매운 건 맞는데, 고문은 또 무슨 말이야?"

 

생전 처음 듣는 소리, 그냥 동네 씨를 팔기에 가져온 것뿐인데 이건 또 무슨 소릴까?

 

허나 이미 오해는 샀는지.

 

"잔인한 놈, 누굴 고문하려고 그런 걸 키우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이 중세 놈아."

 

이한은 억울한 누명을 썼다.

 

하여튼 좀 매운 것 가지고 호들갑이 심하다.

이것들이 캡사이신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나라의 사람들을 봐야 저런 말을 안 할 텐데.

 

그러나 매운 걸 먹으면 그대로 죽는 줄 아는 중세 기사는….

 

"그걸 먹는다고? …고통 내성이라도 키우려고 그러는 거야? 흠, 확실히 괜찮은 수련법 같기도 하고…."

"...."

 

…약간 이상한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걸로 하자…."

 

허나 차라리 이렇게 오해를 당하는 편이 낫겠다며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떠드는 제 입만 아프니, 원.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밭을 개간하고, 작물을 심었다.

 

검과 명예로운 일 외엔 여타의 직업에 귀천이 있다 여기는 기사가 농부의 일을 하다니, 이토록 진귀한 광경도 또 없을 터.

 

아마 몇몇 기사는 이런 광경을 보고 실신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두 기사 중 한 명은 천민 출신이요, 또 한 명은 가난한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이렇다 보니 딱히 두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열심히 흙을 파며 하루를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행위에 기분이 상쾌할 뿐.

 

어느 정도 일이 끝나고 슬슬 샌드위치를 새참으로 가지고 오는 조교가 다가올 즈음.

 

"…성법을 상대하는 건 까다로울 거야."

"응?"

"이단심문소 소속 심문관들은 전부 [성법]을 사용할 줄 안다고 보면 돼. 너는 신전과 연이 없으니 잘 모를 테지만, 성법은 투기법과 완전히 다른 힘이야. 광명의 빛께서 내려주신 신성력을 통해 [신비]를 일으키는 거니까. 마치 마법과 투기법을 섞어 놓은 것 같지. 하지만 이러한 강력함이 있는 만큼 성법에 익숙해지는 건 엄청나게 까다로운 과정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그런 까다로운 과정을 모두 이겨내고, 기어이 성법을 실전 단계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인간 병기들이 다름 아닌 이단 심문관인 셈이지."

"흐음, 그래?"

"…네 일이면서 왜 이렇게 태평해?"

"그런 너는 꼭 내가 싸울 것처럼 말한다?"

"것처럼이 아니라, 넌 반드시 싸울 테니까, 그러니까 주의하란 거지."

"...."

 

이한으로선 억울한 오해였다.

 

자신 같은 평화주의자가 어디 있다고 저런 음해를 다 한단 말인-.

 

'…내가 양심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전적이 상당해서 뭐라고 반박은 못 하겠다.'

 

이한은 인정했다.

 

확실히….

 

"보는 순간 기분이 좀 더럽긴 하더라."

 

안 그래도 최근 광신도 무리와 엮이면서 불쾌감이 절정으로 달한 그였다.

이런 상황에서 뜬금 이단심문소와도 엮이게 되니 이한은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이는 중이었다.

 

더욱 억울한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난 아직 그놈들이 날 감시하는 이유도 몰라.'

 

그래, 이유를 모른다.

그나마 라파엘 영감은 인자하여 그를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대화만 하고 가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해할 생각도 보이지 않았고.

 

하여 그냥 놔두었으나, 만약.

 

'엊그제 본 녀석 같은 놈이 다시 나오면 그땐….'

 

참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해, 신전과 척을 지면 사는 게 힘들어져. 특히 왕국에서 신전과 척을 진다는 건 팬드래건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니까. 여러모로 주의해."

"그땐 망명해야지."

"…적당히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는 뜻이구나."

 

그는 고개를 저었고, 이한은 당당했다.

 

 

...허나 이러한 생각이 불필요했음을 알려주는 것일까?

 

 

-짹짹!

 

"제가 돌아간 이후 그 아이가 실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형제님에게 사과를 건네고 싶군요."

 

"…사과하는 건 좋은데 그걸 꼭 해도 안 뜬 꼭두새벽부터 와서 말해야 해?"

 

그가 찾아왔다.

 

참새들이 한참 시끄러울 새벽의 아침.

이른 새벽의 방문이었고, 이한은 까치집이 생긴 머리를 헤집으며 노신부에게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오는 건 좀 아니지 않으냐고.

 

"앞으로 나흘간 기도회가 예정되어 있는지라 지금밖에 시간이 없겠더군요. 형제님을 만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허허."

"…참 성실히도 사십니다 그려."

"당연한 소양일 뿐입니다. 아, 혹시라도 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오시지요. 저희 신전은 새로운 형제님을 언제든 환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중히, 진심으로 사양할게."

"이런, 아쉽군요."

"…조교야!"

"젠장…. 더 자고 싶은데…."

 

그렇게 아침부터 열성적인 신앙 전파에 열을 내는 노신부를 빠르게 돌려보내려는 이한이었고, 라파엘은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했다.

 

"아, 그러고 보니."

"?"

 

허나 돌연 그는.

 

"제가 기도회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 아이를 비롯해 다른 형제들이 형제님을 귀찮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

 

불길한 예언을 내뱉기 시작했다.

 

"신실하지만 조금 과한 형제들인지라 귀찮을 우려가 걱정되는군요."

"…알면 당신이 좀 말려."

"그러고 싶으나 다 늙은 노인의 말 따윈 흘려듣는 이들도 많지요."

"…추기경인데도?"

"허허, 전능하신 광명의 빛을 제외하고 신전에 어찌 계급이란 게 있겠습니까? 다들 같은 위치에 있을 뿐이지요."

"…못 말린다는 말을 되게 길게도 말하네."

"허허, 죄송합니다. 그러니 부디…."

 

스윽.

 

"만약 그 형제들이 너무 귀찮게 하신다면 형제님께서 타이르셔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을 테니."

"…그거, 마음에 드는 허락이네."

 

라파엘이 건네주는 최상급 성수와 의미심장한 발언에 일순 눈웃음이 지어졌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영감은 참된 어른 같아."

"그거 기쁜 말이군요."

 

비공식적 신전 최고의 어른에게서 혼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었고, 이한은 기뻤다.

 

그러며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이 영감님, 참 호감이야.'

 

 

상식적인 어른이란 건 참 좋은 것임을 깨닫는다.

 

*

*

*

 

"유쾌한 형제님이야."

 

라파엘은 자신을 데려다 주겠다는 호의를 끝끝내 거절하며 흙길을 제 스스로 걸었다.

 

비록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는 것조차 힘겹기 그지없었으나, 그는 아직 광명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제힘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허허, 어제만 해도 없던 것이 있구나."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사귄 형제님의 배려는 유쾌한 것이었다.

 

잘 닦인 길은 걷기가 무척이나 편했다.

발이 걸릴 돌 따위도 없었고, 걷는 곳곳마다 우거진 나무의 그늘 밑으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힘들면 쉬고 가라는 듯.

 

라파엘은 그 기사가 생각보다 더욱 배려심이 있는 사람임을 깨달으며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며.

 

"선배님 말씀대로, 훌륭한 자극제 같은 분이야."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형제님을 소개시켜준 어느 선배 사제를 떠올렸다.

 

과거엔 그 못지않은 신실한 분이셨으나, 이제는 은퇴하신 선배를 말이다.

 

"…좀 주책인 분이긴 하지만."

 

성법을 통해 젊어지신 이후로 [집사]란 새로운 직업을 얻은 선배.

 

그래도 빈말은 하지 않는다.

 

"다른 형제님들도 조금 매를 맞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겠지."

 

과거….

 

- 엎드려, 이 싸가지 없는 어린놈의 새끼야.

 

젊은 시절의 그가 선배에게 그토록 폭행, 아니 야단맞으며 잘못된 신앙심을 고쳤던 것처럼.

 

"허허, 지금 생각하면 그리운 추억이군."

 

부디 다른 형제들에게도 훗날 그리운 추억이 되길 원하며 라파엘은 열심히 걸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136 EP-34 기사는 회초리를 들었다(1)

사각사각.

 

한 남성이 낡은 양피지 위로 글을 적어갔다.

최근엔 만년필을 비롯한 다양한 볼펜 등이 잘 나왔는데도, 그는 여전히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깃펜으로 글을 적었다.

한데도 수려한 글씨와 잉크가 번지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남성의 손이 깃펜과 제법 친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광명을 따르는 10번째 천사가 이 세상의 모든 죄업을 자신이 짊어지겠다 말하니, 지옥의 입구에서 한 명이라도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전히 천사는-.]

 

푸욱!

 

"...."

 

성경의 내용을 적던 손이 일순 멈칫거리자 잉크가 번져갔고, 남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드문 일이었다.

만약 평소 남성을 잘 아는 이들이 본다면 고개를 갸웃거리리라.

그가 감정 변화가 희미한 사람임을 알 테니까.

 

하여.

 

"…이것이 몽크들이 말하는 '번뇌'인가."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같지 않음을 인지하게 된다.

 

가슴이 술렁이며 요동친다.

처음이었다. 이토록 기분이 싱숭생숭한 것이….

그는 이러한 번뇌가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고심했다.

여전히 깃펜을 붙잡은 채.

 

아마 이러고 있노라면 답이 나올지도….

 

"-피에르, 준비해라."

 

"...무례하게 뭐하는 짓이지."

 

한참 가슴 속 답답함을 가라앉히던 그는 자신의 사색을 방해하는 동료를 보며 안광을 서늘하게 빛냈다.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불쾌했고 말이다.

허나 상대는 자신의 불쾌감 따윈 가볍게 무시했다.

 

"무례고 뭐고 준비해라. 단숨에 몰아붙일 것이니."

"...."

"그 기사의 정보 중 절반이라도 사실이라면 그 기사의 무력은 최소 기사단장급에 맞먹는다. 그러니 단숨에 몰아붙일 필요가 있겠지."

"…추기경께서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 말씀하셨을 텐데."

"그랬지, 하니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빠르게 끝내면 된다."

"…추기경께서 자리를 비우길 기다리고 있었나."

"우연에 불과하지."

"...."

 

…저 말이 거짓말이란 걸 모를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피에르는 과연 이런 이들과 함께 하면서까지 라파엘 추기경의 말씀을 어길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기억해라, 이단이다. 광명에게 반항하는 이단을 심문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을 알아라."

"...."

 

…피에르는 여전히 망설임을 가졌다.

 

이게 옳은가?

저자의 말을 따라는 것이 과연 광명의 뜻에 따르는 것이 맞는지 말이다.

 

그렇게 무수한 의문을 삼키던 중.

 

"추기경께서 언제까지 너를 감싸주실까? [비밀]은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해라."

"...."

"알았다면 당장 움직이도록."

"…알겠다."

 

그는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였다.

여전히 번뇌는 그를 망설이게 하였으나….

 

'광명을 섬길 수 없게 되는 것은 안 될 일이니.'

 

그의 비밀이 드러난다면 더 이상 신전에 있을 수 없게 될 터.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비겁한 것을 알고 있으나 자신은─.

 

 

 

 

 

"-비겁하거나 자기합리화가 나쁜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용맹하거나 똑똑할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지."

 

"…그건 편견인 것이…."

 

자그마한 반발.

허나 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아직 세상을 덜 겪어봐서 그래, 나중에 기회 되면 도박장이나 뒷골목을 가 봐. 인간의 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

"어쨌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거다. 조교야, 사람이 좀 비겁할 수 있고 덜 용맹한 건 어쩔 수가 없는 게 맞아. 근데…."

"...."

"'건방진' '귀족 자제' '조교'가 게으름 피우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건 죄가 맞아."

"…썅, 수식어 한번 빌어먹게 많네!"

"어허, 고운 말."

 

데미안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게 맞아?'

 

겨우 낮잠 좀 자고, 밭에 잡초 좀 덜 뽑았다고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 그 전에-!

 

"저도 쉴 권리가 있단 말입니다! 조교도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과 불합리한 처사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듯 소리쳤고, 그런 데미안을 묵묵히 바라본 이한은.

 

"조교'는' 사람이 맞지. 하지만 넌 그냥 조교가 아니라 '건방진 귀족 자제'란 수식어가 붙은 조교잖아? 그럼 사람 아니지, 뭐."

"!!!?"

"넌 쉬면 안 돼. 아직 2년하고도 5개월은 더 굴러야지. 그런데 사람 취급받을 생각이면 네 양심이 문제인 거야."

"그놈의 귀족 혐오 좀 제발 멈추란 말입니다! 이 미친 인간아!"

 

뻐억!

 

"아악!!"

"어디서 노비가, 아니 조교가 교관 말에 토를 달아!"

"…쌰앙."

"이놈이 갈수록 입이 걸쭉해지네."

"...."

"우냐?"

"...."

"우네, 그래 울어라. 울고 나면 좀 개운할 거다. 개운하면 일도 더 열심히 할 수 있겠지."

"...끄으윽!"

"이 새끼 보게…?"

 

…하다하다 혼절해서 쉬려는 독한 놈은 처음 본다며 혀를 차는 이한이었다.

 

* * *

 

조교는 기절하고, 시녀님은 잠시 누님을 만나러 간지라 아마 저녁이 돼서야 오지 않을까 싶은 혼자만의 시간.

 

모처럼 홀로 유유자적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게 됐지만, 이한은 딱히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똑같이 일과를 보낸 뒤 훈련을 하고, 이후에는 밥을 먹고.

 

지극히 똑같은 일상을 보낼 뿐.

 

"흠, 다음 학기부터는 어떻게 할까?"

 

그나마 추가된 것이 있다면 학술원 일정에 대한 것 정도?

다음 학기 수업 내용을 떠올리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조교 놈에게 적당히 의견을 물어가며 내용을 정할 셈이었는데, 이놈이 벌써 30분째 자고 있다.

 

강렬한 정신적 충격과 피로가 겹친 탓에 저리된 것 같으나.

 

"망할 놈. 하여튼 요즘 것들은 곱게 커서 이러는 거지, 원."

 

이한은 마음에 안 든다며 미간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부르르….

 

한차례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떠는 데미안이었지만, 이한은 관심을 거두며 칠판에다 자신이 적어 둔 다음 학기 수업 내용을 보았다.

 

「병아리-줄넘기 덕분에 약간의 체력이 생김. 슬슬 근력 훈련과 가벼운 호신술을 가르쳐주면 좋을 것 같음 유도와 눈 찌르기, 낭심 터트리기 등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면 될 것 같음(졸업 전까진 양아치 한두 명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도록 만들면 좋을 것).」

 

「곰돌이-슬슬 전체적인 체력이 붙었을 테니 실전 경험이 중요한 것으로 보임. '기생나락'에서 범죄자들과 싸우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음(범죄와의 전쟁 느낌으로?). 실전을 쌓게 하면서 절벽 훈련과 맨몸으로 숲에서 일주일 정도 서바이벌을 시켜도 좋을 것 같으며, 추가적으로 무박5일 훈련도 생각해봄직하다」

 

「도련님-체력과 근력만 적당히 붙었다면 곰돌이들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가도 될 것 같음. 다만 투기법을 익혔으니 식량 없이 무박10일까지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 봐도 될 것 같다(적당히 도망가지 못하도록 바다 한가운데 있을 '돌섬'에 떨궈놓으면 되지 않을까?).」

 

"…흠."

 

이한은 개인적인 사견이 적힌 내용을 세세히 읽어봤다.

그러며 자신이 좀 너무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범죄자랑 싸우게 하는 건 아니려나?"

 

그냥 곰이나 호랑이 몇 마리 잡아 와서 맨몸으로 싸우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고심하는 그였다.

 

아무리 그래도 인생 막장인 더러운 범죄자 놈들로 손을 더럽히기엔 아직 어린 것들이 아니겠는가.

 

"어휴, 나도 마음이 약해졌어."

 

첫 제자들이라고, 은근히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차오로는 이한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나에게 묻는 것인가."

 

"그럼 누구에게 물을까."

 

"...일단 그 무박5일인지 10일인지 하는 것부터 그만두는 것을 추천하지.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

 

"?"

 

"…생도들이 불쌍하군."

 

사내, 이단심문소 소속 전투 사제는 기겁했다.

 

 

 

 

주륵….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기사가 칠판 등에 써놓은 살벌한 내용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간담이 서늘한 이유는.

 

'…내 기척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듣긴 들었다.

 

<은닉의 성법>이 통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허나 거짓말이나 우연으로 치부했다.

 

그 정도로 [성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주변 환경과 완전히 동화하여 그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정상적이거늘….'

 

허나 진정으로 꿰뚫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성법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만 보아도 저 기사의 감각은 야생 동물과 비견된다는 뜻일 터.

 

전투 사제가 더더욱 경계심을 높일 때.

 

"많이도 왔네, 아홉 명…. 아니 저격하려는 놈까지 합치면 열한 명인가?"

 

"!?!!"

 

"너희, 진짜 막 나가네? 라파엘 영감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런다고?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 야."

 

"...."

 

…역시 이 기사는 위험하다.

 

전투사제는 입을 악물었고,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자세를 잡았다.

 

"백은사자 기사단 소속 이한 터틀. 네놈에겐 이단 의혹이 있다."

"내가 왜?"

"…네놈은 너무 갑자기 나타나 활약을 펼쳤으니까."

"??"

"후우…!"

 

전투사제는 숨을 골랐다.

조금이라도 기사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하여.

 

"…백은사자에 입단한 이후 이렇다 할 실적 하나 없던 한낱 평기사가 학술원의 교관으로 임명된 이후 갑작스럽게 여러 공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쌓은 공적의 내용 대부분 [이교도]와 관련되어 있는 바. 또한 전날 땅굴이 무너지는 일에 네놈이 끼어 있다는 정황이 있다."

 

아무런 공도 없는 평기사가 갑작스레 무수한 공을 세운 것도 세운 거지만, 그 정황이 무척이나 절묘하여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신전으로선 당연히 의심할 사항임이 분명했고, 혹시라도 이한이란 기사가 이교도 세력과 관련되어 있고, 그러한 세력과 합을 맞춰 공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야말로 합당한 추론이자 의구심.

 

"이러한 의심을 풀고 싶다면 투항하고 순순히 밧줄에 묶여라. 순순히 협조만 한다면 과하게 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놀 같은 소리도 이 정도 들었으면 많이 들어 준 거다, 그치?"

 

"!!!"

 

콰드드득!!

 

…언제 다가온 것일까?

 

전투사제는 일순 그의 앞까지 다가온 이한의 몸놀림에 대응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주먹을 맞았다.

아니, 맞았다는 표현은 틀리리라.

그저 툭, 하고 가슴 정중앙을 친 것에 불과했는데….

 

"끄, 끄…으으윽…!…으...?!"

 

전투사제는 호흡 곤란이 찾아오며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덮쳐오며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뿌드득!

꽈득…!

 

실제로 찢어지는 중이었다.

 

"분근착골이라고 한다. 잠시 그 상태로 있어. …금방 올 테니."

 

"…!…!!"

 

기사의 덤덤한 선고였고, 전투사제는 눈가에 핏줄이 터지며 피눈물을 흘렸다.

이빨에 금이 가며 그대로 실신할 지경이었으나, 고통 때문에 전투사제는 정신조차 잃지 못하며 그저 몸을 떨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를 따름이었다.

 

 

그리고….

 

 

"…와, 나는 나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게 맞았구나."

 

얼떨결에 정신을 차린 어느 귀족 조교는 여전히 바닥에 납작 누운 채 쓰러진 사제의 몰골을 구경했고, 자신이 나름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며 슬쩍 산책하듯 여유로운 걸음을 옮기는 교관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단심문소 새끼들, 제정신인가?"

 

올 거면 성기사단 전부를 이끌고 왔어야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적게 온 걸까 싶어서.

 

으음, 아….

 

'아발론에 일찍 가고 싶었나?'

 

하긴, 요즘 현생이 좀 더럽긴 해서 이해는 간다.

 

그래도.

 

'우리 교관은 쉽게 사람 안 죽이는데….'

 

 

─현생이 지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 보여줬지.

 

 

"…내가 저런 짓하다 이 꼴 났지…. 쯧쯧."

 

그렇게 기사에게 먼저 대든 적이 있는 선배로서 데미안은 동정심을 표하며 혀를 찼다.

 

 

저들이 어떤 꼴이 될지 훤하여서.

#137 EP-34 기사는 회초리를 들었다(2)

신성력.

그것은 신이 내려 준 '최초의 신비' 중 하나였다.

 

고대 문명부터 존재하며 여전히 서부와 동부 대륙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태양신과 달의 신, 이제는 비교적 골방 늙은이 처지가 되었으나 여전히 믿는 이들은 소수로나마 존재하는 바다와 대지의 신, 천공의 신 등등.

 

이러한 고대 신들이 최초로 인류에게 전해준 것이 바로 신성력이란 이름의 불꽃이었으며, 신도들이 믿음이 경건할 때마다 이러한 신성력이란 신비는 더더욱 강대해졌다.

 

하여 고대 국가들 대부분은 종교 국가인 경우가 많았다.

신성력이란 힘을 토대로 영토를 늘리며, 농경 사회를 일구었고 더욱이 국가를 이루는 기반을 세웠으니까.

하지만 이 신성력이란 힘을 남용하며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하며 종교 국가들은 타락했다.

 

그리고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신의 위광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자들을 처단한 이들을 보고 사람들은 최초의 심문관, [이단 심문관]이라 하였다.

 

최초의 이단 심문관들은 신성력을 마치 자신의 손과 발처럼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수법이 나중에 가서야 마법이나 투기법의 원리와 비슷하단 걸 깨달았다.

 

허나 앞서 언급한 것들보다 훨씬 더 사용하기 용이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 수법은 현 시대에서도 압도적인 우월함을 자랑했다.

 

성법(聖法).

어느 이름 모를 떠돌이 몽크가 창시하였다고 전해지는 신성력을 이용한 전투법.

허나 아무리 편리하다고 해도 그 한계는 있는 법.

 

- 성법은 결국 편법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강해지고자 하자면 성법이 아닌, 신성력을 몸에 깃들게 하여 꾸준히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또한 떠돌이 몽크의 발언이었다.

 

편리하긴 하지만, 결국 신성력을 이용한 편법에 불과하며 그 힘으론 결코 '진짜'를 이길 수 없다는.

 

허나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법은 여전히 신전의 강대한 힘 중 하나였으며, 이단 심문관들을 상징하는 전투법이었으며, 지난 수천 년이란 시간 동안 발전하고 또 발전하길 멈추지 않았는 바.

만약 성법의 창시자가 이런 성법을 본다면 자신이 했던 발언을 부정해야 하리라.

 

그 정도로 심문관들은 자신들의 성법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당했군, 바로 대성법을 펼칠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동료인 전투 사제가 기사에게 허무하게 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이단 심문관들은 빠르게 전열을 다듬었다.

저토록 허무하게 당할 동료가 아니었는데, 순식간이었다.

이는 즉, 그들이 예측한 것보다 기사가 더욱 수준이 높다는 의미.

 

그러니.

 

"실력에 맞는 대접을 해주면 될 일이지."

 

대성법. 성법을 펼칠 수 있는 인원이 서른 명 이상은 모여야 하는 것이지만, 이단 심문관들 개개인이 사제 열 명 분을 해내는 바.

단 아홉 명으로도 충분히 대성법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이단에게 철퇴를 내리소서>."

 

철퇴의 가호.

 

원래는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같은 난폭하고도 거대한 마물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대성법.

 

[대지의 덫]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쿠구구궁!

 

성법을 발동하자 어마어마한 압박이 대지를 향해 쏟아졌다.

 

바위는 모래처럼 분쇄되고, 나무가 잡초처럼 으깨진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철퇴가 주변 전체를 압도하는 성법이었다.

설령 기사단장급 실력자라 하여도 절대로 여기선 벗어날 수 없는 게 상식이었고, 절대로 파훼할 수 없는....

 

"-이야, 이거 운동 좀 된다?"

 

"...."

 

"근육에 자극오는 거 보게? 흠, 이거 혹시 언제까지 유지되냐? 두 시간은 사용 가능하지?"

 

"무…무슨…?!"

 

"대답을 해, 이 싸가지 없는 놈아."

 

퍼억!

 

"!!!"

 

일순 대성법을 펼치던 사제 한 명이 그대로 턱이 돌아가며 바닥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찰나의 순간 일어난 과정이었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제는 경악했다.

대체 이게….

 

퍼억!

콰직!

쿠웅!!

 

허나 이러한 기막힌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이어 성법을 펼치던 중인 사제들이 이유 모를 타격에 맞으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네, 네놈! 무, 무얼 한 것이냐!!"

"격산타우."

"…뭐?"

"모르면 맞아야지?"

 

콰직!!

 

아까부터 시끄럽게 꿱꿱 거리는 게 심히 거슬렸다는 듯 기사는 사제에게 특별한 일권을 선사했고, 사제의 안면 정중앙에는 정확히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며 함몰됐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권격.

 

"백보신권이다."

 

털썩….

 

사제는 그렇게 제대로 대응 한 번 하지 못하며 픽하고 쓰러졌다.

 

* * *

 

파앗!

 

앞에서 거슬리는 놈들을 쓰러트렸으나, 아직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 있었음일까.

 

이한은 엄청난 가속도와 함께 양옆에서 그를 덮치려는 두 명의 사제를 보았다.

 

서늘한 송곳을 그대로 휘두르며 찌르려는 모양새.

 

짙은 살기가 느껴졌고, 이한은 그대로.

 

…푸욱.

 

"?"

"??"

 

송곳을 맞아주었다.

허나 송곳은 그의 살갗을 전혀 꿰뚫지 못했다.

마치 벽에 막힌 듯이.

 

"과, 관통의 가호가 걸려 있는데, 어떻게…?"

"물으면 내가 대답은 해 줄 것 같고?"

 

콰득!

 

이한은 그대로 놈들의 손목을 가볍게 꺾어 주었다.

손목이 돌아가선 안 될 방향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눈을 부릅떴다.

 

"이야, 너희가 쟤들보다 낫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제법 독한 놈들인 듯하다.

그렇기에.

 

푸욱!

 

"고통 참는 데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까, 이것도 참아보든가."

 

콰드드드득!!

 

"!!!!?!!!!"

 

분근착골.

 

원래는 고문의 수단에 불과하며, 무협지에선 공격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한은 이걸 공격의 수단으로서 잘 이용하는 중이었다.

 

근육과 뼈에 대한 이해도, 남다른 감각 등이 합쳐지며 이를 실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했다는 것이 정확하려나?

 

고통의 강도 등은 진지하게 고문할 때보단 약하지만, 그래도 그 반절쯤 효과는 내는 바.

 

아마 참는 것이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닐 거다.

 

후우우욱!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는 도중, 이한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행체를 보았다.

 

화살.

 

1.5km 거리에서 살의를 날려 보내던 저격수가 보내는 선물은 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마치 화살이 제 의지를 가진 듯했고, 이한은 신기하다는 듯 화살을 관찰하더니 곧이어.

 

투욱!

 

돌멩이 하나를 축구공처럼 다루며 뻥하고 차버렸다.

무척이나 가볍게 던진 수법이 마치 장난스러워 보였으나 돌멩이 안에 담긴 힘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무겁고….

 

푸화아악!

 

더할 나위 없이 파괴적이었지.

 

관일창, 아니 돌멩이를 썼으니 '관일 투석'이라고 해야 할까?

 

허공에서 그대로 분쇄되는 화살이었고, 이한은 이번에는 나무 한 그루에 손을 대었다.

 

콰직!

 

이한의 손에 잡힌 나무는 그대로 뽑혔다.

 

꽃을 뽑는 것도 아닐 텐데, 저토록 가볍게 뽑혀 나오는 게 말이나 되나 싶지만, 이한의 완력은 이제 범상치 않은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를 힘으로 압도하고 싶다면 적어도 천 년 묵은 트롤이나 오우거를 데리고 와야 할 것이다.

 

타악.

 

이한은 자세를 잡았다.

 

투창 자세.

 

후우우우욱!

 

온몸을 활대 삼아 몸을 가뿐히 튕기며 도움닫기 후 전신의 모든 힘을 모아 그대로 나무에 전달한다.

 

적중률은 장담할 수 없으나, 아마 이것이 땅에 꽂힌다면 그 주변 일대는 초토화될 테니, 아무리 도망가려고 해도 무사하긴 힘들 터.

 

푸화아악!!

 

관일창이고 뭣도 아닌 단순한 나무 멀리 던지기.

 

허나 그 위력과 속도는 방금 전 날아온 화살과 비교조차 못 하는 것이었고, 어느 순간.

 

 

─쾅!!

 

 

저 멀리까지 던져지며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명중이려나?"

 

허나 과연 맞았을지는 모르겠다.

 

그냥 감으로 던진 것인지라.

 

그러한 상황에서.

 

"…필중의 가호조차 무시하는가. 그야말로 불합리한 강함이다. 설사 당신이 이교도가 아니더라도, 이교도의 사술로 보이는 강함이 아닐 수 없군."

 

"마지막은 너구나. 어쩐지 익숙한 기척이라더니."

 

"...."

 

"한 번은 봐줬는데, 두 번 봐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다."

 

"알면 다행이네."

 

"..."

 

"아, 그거 꺼내도 된다."

 

"이미 알고 있었나?"

 

"화약 냄새를 그렇게 풀풀 풍기는데, 내가 모를까."

 

"…그런가."

 

철컥.

 

전날 밤 보았던 성경과 작은 종 하나를 가지고 있던 신부.

그 신부는 자신의 성경 안에서 리볼버 하나를 꺼냈고, 그대로.

 

타앙!

 

탄알을 쏘았다.

 

* * *

 

이 세상에서 총이란 건 귀족들의 사냥을 위해 발명된 머스킷 등이 다이며, 그다지 보편적인 전투 수단은 아니다.

애초에 총이란 것 자체가 마물에게 먹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자칫 총이 지능을 가진 마물에게 넘어 간다 가정한다면 그토록 암담한 일도 없을 테니까.

또한 총이 발전한다면 훗날 평민들이 반란 등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총의 발전과 보급은 이 세상에서 느리기 그지없었다.

 

탕!

 

하지만 보급이 느리다고 하여 그 연구를 대충 하느냐고 한다면.

 

콰아앙!!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단순히 리볼버에 불과한 총인데도 그 위력이 상당하다.

 

대물 저격용 총이 아닐까 싶은 파괴력.

 

맞는다면 금강을 사용하는 자신이라고 해서 무사하지 못하리라.

 

리볼버로 낼 위력이 아닌 물리법칙을 초월한 위력.

 

아마 성법을 이용한 것이거나 특별히 제작된 총일 터.

 

후욱!

 

허나 이한은 탄알의 궤적을 읽어내며 즉각적으로 피했다.

 

단련된 기사의 눈은 탄알의 움직임에도 반응하는 법이기에.

 

그저 이대로 상대에게 다가가 제압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싶었으나.

 

퍼억!!

 

"?"

"역시 맨몸으로 안 되나."

"…아니, 더 해 봐."

"...."

"안 죽일 테니까 계속해."

"…음."

 

상대의 주먹은, 아니 격투술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관절기와 타격기가 적절히 섞인 격투기, 이거 비슷한 게 아마.

 

'시스테마?'

 

호오!

 

이 또한 신기하여 절로 감탄이 나왔다.

 

설마 이 세상에서 이런 걸 보리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이런 걸 보고 아마.

 

'[건법(Gun-法)]이라고 했지, 아마?'

 

총과 무예를 적절히 섞은 무예.

 

흔히 총을 다루는 영화 등에서 자주 본 무예였고, 총을 자유롭게 다루면서도 상당한 수준의 격투술을 익힌 실력자가 쓴다면 더할 나위 위력적인 무예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여기선 총이 무서운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탕! 타앙! 타아앙!!

 

신부는 무술만 수준급이 아니라, 사격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리볼버의 반동 또한 성법으로 잡았는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정확도도 괜찮다.

 

"총알은 왜 계속 나와?"

"이 또한 성법이다."

"와, 사기네, 진짜."

"...."

"뭐야, 그 표정은?"

"…그대가 할 말은 아니다 싶어서."

"?"

 

뭔 헛소리를 내뱉나 싶은 심정이 들었으나, 이 또한 잠시뿐.

이한은 좀 더 상대와 어우러졌다.

 

힘을 적당히 조절한 채 오로지 맨손 격투기만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끝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끝낼 수 있겠지만.

 

'이놈, 수준이 나쁘지 않아.'

 

신선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총을 적절히 곁들여 사용하는 격투술은 이한으로 하여금 흥미를 자극했고 좀 더 손을 섞게 하려는 욕심이 들게 했다.

 

그렇기에.

 

"한 시간이다."

"?"

"한 시간만 버티면 넌 봐준다."

"??"

 

이한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그는 잠시 이해를 하지 못하였으나 30분이 지났을 즈음….

 

"…그게 이런 뜻이었군…."

 

후두둑!

 

땀을 비처럼 쏟아 내며 신부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한 시간.

 

그 말이 정녕 한 시간 동안 상대해준다면 봐준다는 뜻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 신부는 온몸이 떨렸다.

체력이 이미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허나 그는.

 

"넌 할 수 있어. 일어나 이 근성 없는 자식아."

"...사람인가?"

 

땀 한 방울 하나 흘리지 않았고, 숨소리조차 평화롭다.

 

"힘내, 넌 할 수 있어!"

"…적을 응원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

"너희가 적이었냐?"

"...."

"난 그냥 재롱부리려고 온 줄 알았는데, 흐음…."

"...버러지 취급받는 것보다 굴욕스럽군."

 

신부, 피에르는 깨달았다.

 

애초에 그들은 이 기사에게 처음부터 적으로도 취급받지 못한 장난감이었다는 사실을.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며.

 

철컥.

 

"차라리 죽겠노라."

 

피에르는 제 미간에 총구를 겨누며 그대로 격발했다.

 

죽음으로 모든 걸 갚겠다는 듯.

 

...다만.

 

"안 되지."

"...."

"어딜 도망가냐?"

"...."

 

…쏘아진 총알이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회전하는 것을 보며 이번에야말로 피에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한은.

 

"이 새끼는 실력이랑 재능은 괜찮은데 정신머리가 썩어빠졌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역린이 노려진 용처럼 분노를 토해내며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막대기 하나를 주웠다.

 

볼품없는 나무막대기에 불과했으나 그가 드는 순간 그것은 왠지 모를 생기를 머금으며 철과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정신머리 썩어빠진 새끼! 넌 딱 천 대만 맞자-!"

 

"...."

 

"엎드려."

 

"뭐?"

 

"엎드려뻗치라고 이 정신 썩은 새끼야!!"

 

이후 이한은 그의 의견과 상관없이 매를 끊임없이 휘둘렀고….

 

퍼어어억!

 

…피에르의 정신은 날아갔다.

 

 

...이후 그가 정신을 잃으면 그는 물을 부어 깨웠고, 죽을 것 같으며 포션을 부었으며, 체력이 지치면 밥을 먹이며 그는 회초리를 끝없이 휘둘렀다.

 

끝없이….

 

피에르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강렬한 고통에 계속해서 기절했고, 일어날 때마다 회초리가 그를 때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마치 고통이 끝없이 반복되는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그리고 나흘 동안 피에르는 맞아가며 생각했다.

 

...이 기사는 쓸데없이 자기가 한 말을 잘 지킨다고.

 

천 대.

 

기사가 호언장담한 대로 나흘 동안 기어이 그는 천 대를 맞았다.

 

그걸 어찌 알 수 있었느냐고?

 

"조교야, 이 새끼 몇 번 남았냐?"

"으음, 사백팔십 대까지 때리셨는데요?"

"숫자 확실하지?"

"칠판에 적어두고 때리셨잖아요."

"때릴 놈들이 워낙 많아서 좀 헷갈리네."

"그, 그럴 수도 있죠."

"아, 일어났네. 자 오백이십 대만 더 맞으면 된다. 조교야, 정확히 세려라."

"네에...."

 

 

...친절하게도 기절하고 일어날 때마다 남은 횟수를 말해주었기에.

#138 EP-34 기사는 회초리를 들었다(3)

"-사죄부터 드리겠습니다. 마냥 죄송스러울 따름이군요."

 

"으음, 일단 고개는 숙이지 말지? 내가 나쁜 놈이 된 느낌인데…."

 

이한은 자신을 향해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는 노신부의 정중한 태도가 마냥 떨떠름했다.

나이 지긋하신, 아니 지긋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116세 어르신한테 사과를 받고 있으려니 도리어 죄책감이 들 따름.

하여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이 영감님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나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도리어 잘못을 연장자가 모범이 되어 사과를 하는 것이 올바른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거 참된 어른이시네."

 

예의범절이 정말 투철하신 어르신이었다.

 

이한은 다시금 이 사람이 지금껏 이 세상에서 봤던 어떠한 어른보다 개념 충만한 정상적인 어른임을 새삼 인지했고, 약간의 호감도가 오르는 것을 내면에서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착수금을 받았으니까 그만큼 열심히 한 것뿐이야. 알아보니까 당신이 준 성수, 그중 최상급 성수는 3년은 공들여야 만들 수 있는 거라면서? 가격도 엄청나던데."

 

무협식으로 설명하자면 최상급 성수란 것은 '소림 대환단'이나 '공청석유' 같은 것이었다.

 

돈이 있더라도 살 수 없는 귀물 중의 귀물.

각종 병마(病魔)를 없애줄뿐더러, 평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보물.

또한 구하는 것 자체가 별을 딸 확률과 맞먹는다는 99.99%를 자랑하는 트롤의 생혈과도 유일하게 맞먹는 놈이기도 했다.

 

검을 업으로 삼은 기사에게 있어 목숨 하나가 더 생긴 것과 마찬가지인 원리.

 

하여 착수금치곤 과한 감이 있을 정도였고, 이한으로선 만족스러운 거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내가 봤을 때 저런 애송이들 상대하는 것치곤 너무 과한 착수금이야. 차라리 금화 몇 개만 줘도 해줬을걸?"

"나름 신전에서도 귀중한 전투 인력입니다, 허허."

"…저것들이?"

 

전혀 공감 가지 않는 발언이었다.

 

그도 그럴게.

 

"머저리들도 저런 머저리들이 없을 것 같던데…."

 

한 명 빼곤 허접.

 

이한의 촌철살인과 같은 평가였고, 그 허접들은….

 

"끄으윽…."

"주, 죽여줘…!"

"으…으으…."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마냥 괴로움에 몸을 뒤틀고 있을 따름이었다.

 

"...."

 

유일하게 쓸 만하다 평가 받은 붉은 머리칼의 사제만이 고통을 견뎌내며 눈을 감고 있긴 했지만.

 

"...."

 

…라파엘은 서글픈 시선으로 그런 붉은 머리의 사제, 피에르를 직시하였다.

 

* * *

 

"형제님께서 이단 혐의를 받고 계시다는 것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 놀 같은 소리?"

"부끄러운 일일 따름입니다."

"참 무서워. 활약해도 의심받고, 오히려 살해당할 뻔하고, 무서워서 세상 살 수 있나."

"…신전의 부덕일 따름입니다."

"으음…."

 

이한은 사흘 전 자신이 이단이라며 말했던 사제의 말을 떠올렸다.

 

분명.

 

"내가 너무 갑자기 활약해서 의심스럽다고 했던가?"

"그건 표면상 이유에 불과합니다."

"?"

"이단 심문소가 갑작스레 형제님을 이단으로 지정한 것은 신전에 있는 몇몇 고위 신관들과 추기경들이 형제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과대망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뭔…."

 

할 말을 잃게 하는 헛소리.

이한은 두 눈을 끔뻑거렸고. 라파엘은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항상 여유를 잃지 않던 그치곤 드물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변명 같겠지만, 저도 형제님께서 왜 이단으로 규정된 건지를 명확히 안 것은 이틀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까진 그저 심문소의 형제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며 형제님을 노리려는 기미가 보였기에 제가 움직였을 뿐이지요."

"그럼, 날 지켜줬던 거라고?"

 

이한으로선 의아하다 못해 놀랍기까지 한 얘기였다.

저 말이 거짓이 아니라 가정한다면.

 

'자처해서 방패막이가 된 셈이잖아?'

 

라파엘은 이유도 모른 채 신전에게 노려지는 이한을 지켜주고 있던 셈이다.

그가 매일같이 방문한 이유가 밝혀진 것이었고, 이한으로선 생판 남이 자신을 보호해준 것이 생경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생경함이나 고마움보다 앞서 드는 감정은….

 

"아니, 왜?"

 

왜 자신을 지켜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앞선다.

생면부지인 그들인데, 왜 그는 신전의 뜻을 거슬러가며 방패막이 노릇을 한 것일까?

그것도 신전 최고의 어른이 불리는 인물이 말이다.

 

이러한 의문에 라파엘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자를 위해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하찮은 몸이라도 움직여야겠지요."

"...."

"다만 큰 도움은 드리지 못하였고, 빈약한 몸으론 형제들을 막지 못한 것이 마냥 죄송스럽습니다. 하여 괜히 형제님의 손을 고생시켰지요. 비록 성수를 드렸다고 하나, 그것이 형제님의 몸보다 건강하겠습니까? 도리어 이유 없는 해를 당할 뻔한 형제님께서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이조차 그저 값싼 위로금에 불과하겠지요."

"…아닌데, 난 만족스러운데."

"이런 저를 신경 써주시는 겁니까?"

"아니, 진짜 아니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거지만.

 

'이 양반, 진짜 좋은 어른 맞구나?'

 

이한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평생 존경할 만한 어른을 만난 것 같다며 감탄했다.

 

이유를 찾지 않고 남을 돕는 살신성인의 자세.

알고는 있을지언정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으며, 절로 경외감을 들게 한다.

 

'저런 사람을 보고 아마….'

 

 

위인(偉人)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 * *

 

라파엘은 본의 아니게 신전 이곳저곳에 눈과 귀가 되어줄 이들이 많았다.

그를 존경하고 여전히 추기경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 덕일 터.

그야말로 인덕이었고, 덕분에 라파엘이 작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의 치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치부의 내용은 다름 아닌-.

 

"-즉, 요약하자면 신전의 고위 사제들이란 놈들이…."

 

'땅굴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 건가…?

 

"그리고 그 지분이 이번 땅굴 붕괴 사태로 휴지 조각이 되면서 땅굴을 붕괴시킨 나한테 분노했고, 그것 때문에 날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거지?"

 

땅굴은 범죄자들을 가두는 소굴인 동시에 남부 대륙 최대의 비료생산지였다.

망할 일이 없는, 이른바 금과 같은 '안전 자산' 비스름한 취급을 받으며 왕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여러 검은 돈을 숨길 장소로 적절하단 뜻도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안전성을 이용하랴 신전의 고위 사제들도 땅굴에 대한 지분을 사뒀는데, 그게 하필.

 

'…내가 가루로 만들었지.'

 

절대 붕괴할 리 없다 여겼을 테지만, 어찌 알았겠는가.

일개 기사에게, 아니 기사 두 명이 백 년의 역사를 지닌 땅굴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고.

아마 땅굴에 투자한 이들은 못해도 [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에 맞먹는 손해가 생겼을 터.

 

누구도 예상 못 했을 사태였고, 억울함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종교인이 뒷돈 챙긴 거 잃었다고 암살 의뢰를 해? 그것도 이단 심문하는 애들한테?"

"...."

"그 땅굴이 '진짜배기 이단 소굴'인 건 아무리 신전이라도 알 텐데…도?"

"…알 테지요."

"그런데도 나한테 책임을 묻는다고?"

"...."

"이, 이게 맞아…?"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와…. 진짜?"

"...."

"돌겠네. …나 지금 진심 당황스러워."

 

침묵은 긍정이었고, 이한은 이번만큼은 정말 당황하여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 일반적으로 재산을 잃으면 화나는 게 당연하고, 그 원흉이 되는 자에게 분노하며 분풀이를 하는 것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전이 이딴 짓을 저지른다고?'

 

신이 실존하는 세상에서 신을 믿는다 자부하는 종교인이?

 

'이거 혹시 몰카야?'

 

그러한 의구심이 들었고, 이한은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아팠다.

 

 

 

 

 

역사 교육을 통해 종교가 부패하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배우긴 했다.

허나 배우기만 한 거지, 그것을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다.

그저 얘기로나 접했을 뿐이지.

 

한데 이렇게 직접 종교의 '부패'와 '타락' 등을 경험하니 그 저열함과 불쾌감이 상상 이상임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이야, 아니, 와아…."

 

감탄이 나오기까지 한다.

 

'걔들이 괜히 신전을 조심하라고 한 게 아니었구나?'

 

회귀자 검둥이와 소심한 상태창.

 

이 두 놈이 공통적으로 말한 신전 주의 경고.

 

- 신전과 엮이지 말아야 합니다.

- 신전은 조심해야 해요.

 

두 놈이 항상 했던 말이었고, 이한은 이제야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상상 이상으로 놀, 아니 '오물보다 냄새나는 지독한 찌꺼기'들이 아닌가?

 

"개탄할 일이지요…. 설마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당신 책임은 아니지 않나?"

 

그가 길드에서 받은 정보에 의하며 라파엘은 추기경에서 내려온 뒤 순례 중이었다고 들었다.

한낱 야인이 되어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여 7년 정도 신전에서 떠났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복귀했다고 했었지?'

 

실상 누구도 언급하진 않았으나, 은퇴하겠다고 말한 정치계의 거물이 복귀한 셈.

 

"당신이 신전으로 복귀해서 이단 심문관이 된 것도 현 신전의 꼬락서니와도 연관이 있나 보지?"

"그런 셈입니다. 설마 7년 만에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흠, 아닌 것 같은데."

"예에?"

"그냥 당신이 몰랐을 뿐이지, 아마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을걸? 이런 거대한 단체가 단 7년 만에 부패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아마 당신이 모르는 동안에도 차근차근 부패는 진행됐을 거야. 다만 당신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진행됐을 테지. 사람 한 명 바보 만드는 건 딱 다섯 명만 모여도 쉽게 할 수 있으니까."

"...."

"아닐 수도 있고."

"…허허, 아닙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인 것 같군요."

 

이한의 말을 들은 라파엘은 어딘지 뒤통수가 얼얼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깨우침을 얻은 사람처럼.

 

"정말, 저는 나태했고 우매했군요. 차라리 순례를 떠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신전에 남아 노력했어야 했거늘."

"사람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단체를 바꿀 수 있을까, 한번 썩은 곰팡이가 피면 그건 걷잡을 수가 없는 거야."

"...형제님은 역시 생긴 것과 달리 상냥하시군요."

"내가 생긴 게 어때서?"

"허허."

"웃어?"

 

노신부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자신과의 대화로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이.

 

그렇게 기사와 노신부는 그렇게 투덕거리듯 대화를 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 * *

 

어느 정도 얘기가 정리되며 이한은 자신이 이단으로 몰린 까닭이나 그를 노리는 이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알았다.

 

라파엘은 그런 이한에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하여 막아볼 터이니."

 

비록 지위는 그다지 없지만, 신전의 최고 어른이 가진 위엄은 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방패막이는 될 수 있으리라.

 

언뜻 각오가 느껴지는 발언이었고, 마음 한편으론 감사하긴 했으나.

 

"아니, 놔 둬."

"…형제님?"

"안 그래도 괜찮은 샌드백이 필요했거든. 계속 와도 될 것 같아."

 

만약 신전의 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면 그도 라파엘의 발언이 반가웠을 테지만, 이한은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첨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계속 오게 놔둬도 아무런 피해도 못 줄 것 같네.'

 

심심풀이로 나쁘지 않은 상대들이다.

안 그래도 혼자서만 훈련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성법]이란 특이한 힘을 쓰는 상대들은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는 바였다.

거기다 추가적으로….

 

'이단 심문관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이면 내가 당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네.'

 

허접하다.

라파엘 영감에겐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저들은 진정으로 허접했다.

 

'도련님 녀석들, 아니 백은사자랑 비슷하던데?'

 

성법만 믿고 설쳐대는 놈들.

자기보다 약한 놈들한텐 일진이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겐 맥을 못 추릴 놈들.

즉, 말 그대로 성법만 믿고 날뛰는 양아치들이 아닐 수 없더라.

 

'그나마 저 피에르인지 하는 놈은 제법이긴 했지.'

 

다른 놈들이 그냥 성법만 믿고 사는 놈들이라면, 저놈은 성법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놔두며 기술과 육체를 잘 단련했다는 느낌이었다.

꽤나 인상적이었고, 이한으로선 좀 더 붙고 싶은 신선한 스타일.

 

…다만.

 

'정신력은 썩었지만.'

 

이한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기량은 훌륭하나 정신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놈이다.

조금 불리해졌다고 해서, 아니 패배가 확실해졌다고 해서 그대로 자결하려고 들다니….

 

이한이 가장 혐오하며 치를 떠는 인종이다.

 

'누구는 인생이 그렇게 빌어먹게 더러워도 살려고 아등바등 거렸는데….'

 

저놈은 비록 자질과 재능은 훌륭할지 모르나, 인간성만큼은 저열하다며 이한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허허, 저 아이에게 여러모로 실망감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런 편이지."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여러모로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그건 변명거리가 안 돼. 설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때리면서 골격을 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래도 독한 놈이야. 끝까지 겉껍데기를 지키는 걸 보면."

"…형제님과 함께 있으면 놀랄 일투성인 것 같습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이한이 피식거리며 웃고 있던 중.

 

털썩….

 

일순 붉은 머리 신부가 분근착골의 고통 앞에서 다시금 기절했다.

 

그러며.

 

파앗!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신부의 허물이 벗겨지며 붉은 머리 신부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원래의 체구보다 조금 더 작아진, 그리고 피부도 좀 더 좋아진 그, 아니….

 

"으음, 혹시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쟤는 성정체성 때문에 남자 모습으로 있는 거야? 그런 거면 이해는 하겠다만…."

"그게 궁금하신 겁니까?"

"그럼 뭘 더 궁금해야 해?"

"...."

 

원래 취향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며, 이한은 타인의 정체성 또한 존중해주는 바였다.

 

 

...뭐, 취향은 존중하지만 개념 없으면 공평하게 주먹을 들긴 하지만.

#139 EP-35 교관의 플렉스입니다(1)

팬드래건 왕립 학술원이 다시금 정문을 개방했다.

 

여전히 영산 불칸이 내뿜는 열기는 뜨거웠고, 덥기도 더웠지만 조금 있으면 이 더위도 한순간에 사라지리라.

 

겨울과 얼음의 요정들이 찾아올 시기가 머지않았으니까.

 

그때쯤 되면 이 더위도 중화될 것이요, 머지않아 초록색 잎사귀도 붉게 물들 테지.

 

2학기.

아카데미의 2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쏴아아아!

"어머니, 여기가 바로 왕립 학술원 명물인 중앙 분수대예요. 엄청 크죠?"

"대, 대단하구나, 그, 근데 정말 내가 이런 곳에 들어와도 되는 거니?"

"오빠, 화려한 사람들이 엄청 많아…!"

"형아야?"

"…한 명씩 물어줄래?"

 

배리 콥스.

11번 곰돌이 등으로 불리는 배리 콥스의 가족들은 학술원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가족들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도 저랬었지.'

 

처음 입학하여 학술원의 문턱을 넘었을 때 얼마나 가슴 떨리고 위축이 되었는가?

 

시골에만 살던 배리 콥스에게 있어 학술원은, 아니 왕도는 별세계로만 보였다.

 

하기에 한평생 농사만 지은 어머니나 바느질로 가족 생계를 돕느라 일찍 철이 든 여동생, 그리고 말문이 이제야 막 튼 남동생의 심정 등도 공감이 갈 따름.

 

아마 가족들도 잠시 위축되고 눈치를 이곳저곳 살피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리 콥스는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공부하며 가르침을 얻는 장소가 다름 아닌 이런 곳임을.

 

'아버지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집에서 아직 옹알거리는 쌍둥이 동생들을 돌보는 이가 필요하여 집에 남기로 한 아버지.

본인은 젊을 적 왕도 구경을 질리도록 해보았다며 오지 않았지만, 배리 콥스는 안다.

기대에 부푼 어머니와 자식들을 위해 오고 싶은 마음을 접었음을.

 

'다음에는 꼭 데리고 오자! 2학년이 되어도 난 이곳에 다닐 거니까!'

 

여름 휴학기가 끝난 첫날에는 특별히 생도 가족에 한해선 아카데미 출입이 가능한 바.

뭐라더라, 참관 수업도 하며 학술원이 당신들의 아이를 잘 맡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개방이라 하였었나?

 

'뭐, 이유가 어쨌건 간에 데리고 올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여전히 웅장한 학술원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족들이었고, 배리 콥스는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

 

"배리, 그런데 너희 검술학부 교관님은 어디 계시니?"

"네에!? 가, 갑자기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배리 콥스는 당황했다.

허나 그런 아들에게 콥스 부인은.

 

"갑자기는 무슨, 널 맡아주실 뿐만 아니라, 키워주신 분이잖니. 듣자하니 네가 학술원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게 그분이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기에 가능한 거라며? 아무리 무지한 나라도 그게 얼마나 귀한 가르침이고 큰 기회인지를 안단다. 그러니 그분은 너만이 아니라 콥스가의 은인이기도 하지 않겠니?"

"그, 그거야 뭐…."

"한 번은 직접 찾아뵈어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다행이 아닌가 싶구나. 가자, 교관님 만나러."

"어어…."

 

배리 콥스는 땀을 삐질거렸으나, 강경한 어머니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검술학부로 옮겼다.

어머니의 고집은 누구도 꺾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나, 난감하네….'

 

배리 콥스는 어머니와 교관님이 만나는 상황이 영 꺼려졌다.

 

물론 그는 교관님을 그 누구보다 존경한다.

어느 정도로 존경하느냐면 아버지 다음으로, 혹은 동급으로 존경한다.

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고, 그를 비롯한 일반 생도들에게 투기법과 맞먹는 기예를 가르쳐준 인물이었으니까.

 

배리 콥스가 아는 한 가장 이상적인 기사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했고.

 

허나.

 

'존경스러운 분이긴 한데, 남들한테 보이기가 영….'

 

슬쩍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리고 오금이 저리는 강렬한 존재감과 위압감.

검술이라곤 배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면하면 심장 마비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치솟는다.

그 정도로 교관의 인상은 살벌했기에.

 

'어머니의 심장이 부디 튼튼하시길.'

 

배리 콥스는 불안했다.

 

"오빠? 땀을 왜 그렇게 많이 흘려?"

"형아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애써 불안감을 삼킬 때, 배리 콥스는 검술학부로 다가가는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님, 진짜로 가셔야겠습니까?"

 

"아빠,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 하, 할머님? 꼭 가셔야겠어요?"

 

…자신 말고도 가족들을 데리고 검술학부로 향하는 동기들을 말이다.

 

어쩌다 보니 개학 첫날부터 도련님과 병아리들, 그리고 곰돌이 시리즈 등이 모두 집결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일순 눈이 마주쳤고, 각자의 신분마저 잊으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신분 관계없이 부모들의 생각이란 모두 비슷한가 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웅! 쿠우웅!

 

그들은 불길한 파공음을 울리는 검술학부 훈련장에 도착했고, 볼 수 있었다.

 

"와 형아야! 저거 황소보다 커!"

"그러네."

 

아직은 순진무구한 어린 동생은 자신이 본 걸 있는 그대로 말할 따름이었고, 생도를 비롯한 생도의 가족들은 그저 입을 벌리며 말도 안 되는 광경을 관람했다.

 

황소만한….

아니, 황소보다 거대해 보이는 모래 포대 수백 개를 홀로 옮기고 있는 그를 말이다.

 

한데도 땀조차 흘리지 않는 그가….

 

"응? 너희는 왜 여기 있냐?"

 

평온한 모습으로 물었고, 그들은 되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볼 때마다 인간 같지 않은 모습으로 있냐고.

 

* * *

 

"잠시 일을 하는 중이라 안 좋은 꼴을 보였군요. 그래서, 11번, 아니 배리 콥스의 어머님이십니까?"

"네, 네에…."

"환영합니다. 늠름한 아들을 키운 훌륭한 어머니를 드디어 뵙는군요."

"…어머나."

"엄마?"

 

교관은 학부모들을 능숙하게 대했다.

 

"그는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죠."

 

겉모습과 달리 친절할뿐더러, 학부모를 안심시키는 말도 망설임 없이 하는 바.

첫 대면이 좀 충격적이라 그렇지, 다른 부분은 그다지 문제가 보이지 않는 교관이었다.

 

허나.

 

"그, 우리 애는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기절할 뻔했어요. 우리 아이가 갑자기 줄넘기인지 뭔지를 하지 뭐예요? 얼마나 기가 막히고 손이 떨리던지…. 우리 아이가 보기 흉한 근육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저런 걸 시키는 거지요?"

 

"크흠, 백은사자라고 들었다만, 어찌 하여 이런 곳까지 추락하였는지, 원."

 

극성맞은 부모란 것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고, 생도들은 큰일 났다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훌륭한 기사가 될 재목입니다. 아마 졸업할 때가 되면 재밌을 겁니다. 그러니 믿고 맡겨 보시죠, 어머님."

 

"괜한 걱정입니다. 근육이란 게 겨우 줄넘기 좀 한다고 생기는 줄 압니까? 무엇보다 당신 몸이나 걱정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몸이 망가진 게 딱 봐도 보이는데? 요즘 허리도 아프고 피로도 빨리 쌓이죠? 그게 운동부족이란 겁니다, 운동 부족! 애를 걱정할 게 아니라, 당신 몸부터 걱정하는 게 어때?"

 

"으음, 너 지금 나한테 지금 시비 거는 거냐-?"

 

그는 참지 않았다.

 

선한 사람에겐 선하게, 개념 없는 놈에겐 똑같이 개념 없이 대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송장 치를 뻔하긴 했지만.

 

"고, 고정하십시오, 교관님! 제가 대신 사죄하겠습니다!"

"아버지 빨리 사과하십시오! 가문이 통째로 무너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 미, 미안하네…."

 

생도들이 말리는 것으로 사달은 다행스럽게 일어나지 않았다.

 

교관은 역시 화를 낼 때와 친절할 때 기세가 180도 범위로 격변하는 사람다웠다.

 

일순 교관의 심기를 건드린 어느 귀족은 그가 내뿜는 강렬한 기세 앞에 등골이 싸늘해지다 못해 다리의 힘이 풀릴 지경이었으니까.

 

'여전하시군.'

 

그런 교관을 보며 그들은 어쩐지 안심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초지일관한 그를 보고 있자니, 드디어 개학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지라.

 

다만.

 

"그런데 교관님, 그 모래 포대는 뭐예요?"

"이거? 너희 다음 훈련을 위한 교보재."

"네에?"

"이거 들고 절벽 오르기를 해볼 생각이야. 뭐, 하나당 30kg밖에 안 하니까 걱정은 말고."

"...."

"아, 50kg랑 100kg도 있다. 서서히 적응해 가면서 늘릴 거니까 안심하고."

"저, 전혀 안심할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한편으론 너무 바뀌지 않아서 기가 막힌다며 그들은 아찔했다.

 

이번 학기도 어쩐지 평범하지 않을 것 같아서.

 

* * *

 

개학식이 끝나고, 학부모들도 얼추 다 돌아가며 검술학부 생도들은 모여 들었다.

 

전체 80명.

 

1학년 중 그 누구도 퇴학당하거나 자퇴한 이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숫자였다.

다른 학부 등에선 시험에서 떨어져 퇴학당하거나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실감하며 자퇴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것을 봤을 때, 검술학부는 그러한 이들이 전무했다.

하나같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자신들이 학술원에 남을지라도 충분히 통하리란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수치라 할 수 있을 터.

 

귀족 중에서도 퇴학은 없어도 자퇴가 있는 걸 보았을 때, 이번 검술학부 1학년 기수들은 대단히 우수하단 뜻이었으나….

정작 1학년 생도들은 말할 것이다.

자신들의 성과가 아니라고.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저분의 실력이겠지.'

 

"-너흰 왜 남아 있어? 어차피 일주일 동안 수강 신청 기간 아니었냐? 그동안 안 나와도 될 텐데."

 

80명의 인원을 모조리 강제로 살아남게 한 교관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들을 구박하였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인사나 드리러 왔는데, 우연치 않게 다 모인 것 같습니다, 하하…."

 

몇몇 이들의 능청스러운 대꾸였고, 80명의 생도를 모조리 강제로 살아남게 만든 업적을 세운 교관은.

 

"이것들, 진짜 쓸데없이 성실하네."

 

어처구니없다며 혀를 찰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구박이 왠지 모르게 반갑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들도 확실히 이 사람에게 적응하긴 하였나 보다.

 

"뭐, 기왕 온 거 칼질이나 하고 가든가 해라. 본 교관과 검을 겨루고 싶다면 그것도 환영하겠다."

 

"아니요, 그건 진심으로 사양하겠습니다."

 

"...."

 

말 그대로 인사만 하러 온 거지, 저 위험한 양반이랑 싸우는 건 사양이었다.

 

사람은 사람이랑 겨뤄야지, 괴물이랑 싸우는 건 안 될 말이니까.

 

그들은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각자 기숙사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사부님, 말씀하신 대로 저분들한테 인수인계 끝냈어요."

"그래 잘했다. 그런데 곰순아."

"네에?"

"저분들이라니? 호칭이 잘못됐잖아."

"어, 저, 정말 사람을 그렇게 부르나요?"

"아니지.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야? 본 교관이 말했을 텐데?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

 

...생도들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목줄은 물론이요 발목에는 쇠사슬이 달린 철구를 질질 끌며 오는 아홉 인원을 보며 현실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마치 노예처럼 보이는 것이 꼭….

 

"아, 모두 오해는 하지 마라. 얘들은 노예가 아니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인력이며, '조교 인턴'이라고 부르면 된다."

"...."

"안 그러냐, 인턴1호?"

"...."

"대답 안 하냐?"

"그, 그렇습니다-!!"

"대답이 늦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스읍, 애들 앞에서 개기지 마라."

"네엡!"

"쯧, 하여튼 죄수 새끼들, 이거 언제 사람 만들는지. …조교야."

"네에, 교관님!"

"네가 선임이니까 잘 관리해. 알아서 조져, 가 아니라. 적당히 굴려라. 알겠냐?"

"맡겨만 주십시오! 일주일 도합 수면시간이 1시간이 넘지 않도록 할 테니!!"

"자식, 뭘 좀 아네."

"헤헤, 감사합니다."

 

…뇌가 따라가지 못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데미안 저놈, 진짜 행복해 보이는군.'

 

그가 정말 감격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똑바로 서 이것들아! 교관님이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 오늘부터 잠들 생각을 하지 마! 너희 평가 점수가 나한테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다! 이 인턴 새끼들아!"

 

데미안, 검술학부 최하계층이었던 조교는 자신보다 밑바닥인 놈들이 생겼다는 대목에서 마냥 기쁘고 감동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밑바닥이 이단 심문관인 것이 아이러니할 일이었고, 데미안이 뒷감당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시벌, 다 필요 없어! 지금을 즐긴다!'

 

 

조교는 모든 뒷감당을 미래의 자신에게 떠넘겼다.

#140 EP-35 교관의 플렉스입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