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50

#140 EP-35 교관의 플렉스입니다(2)

개학 보름 전.

 

그러니까 이한이 왜 이단 의심을 받으며 이단 심문관에게 노려진 것인지를 노신부에게 전달받은 시점.

 

이한은….

 

- 날 노리는 추기경이랑 고위 사제 명단 있지? 그거 나한테 줄 수 있겠어?

- 주는 것은 상관없으나, 어찌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지요.

- 직접 가서 조져야지. …대화로 풀 마음도 있어.

- 허허, 뒷말은 거짓말이시군요.

- ....

 

다시금 암살자 노릇을 해볼 참이었다.

 

암살, 그를 노리는 윗대가리만 어떻게든 처단한다면 신전도 더는 그를 노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자신도 있었다.

 

본신의 역량만 잘 발휘한다면 이 세상에서 '무영신투의 재림'마저 노려볼법한 그였으니까.

 

- 트리스탄이야 정면에서 상대할 이유와 가치가 있었지만, 신전은 아니니까.

 

초파리나 모기를 죽인다고 하여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한은 신전의 고위직들 또한 같다고 느꼈다.

그들을 죽인다고 하여 손을 더럽힌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바.

이한은 당당히 그들의 처단을 입에 담았고, 그러한 말에 노신부는.

 

- 나쁜 의견은 아니군요.

- ...?

 

긍정을 내뱉었고, 이한은 도리어 황당해 하고 말았다.

 

- …내가 하겠다고 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거야?

- 허허, 광명의 이름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악종들을 용서할 정도로 제 수양은 깊지 않습니다. 때때로 과격한 수단은 필요한 법이지요. 걱정은 마십시오, 설사 형제님께서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 죄는 제가 모두 끌어안고 지옥에 가갔습니다.

- 그, 그런 걸 원한 건 아닌데….

 

가만 보면 자기보다 한 술 더 뜨는 양반이 아닐 수 없다.

 

- …다만.

- 응?

-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답은 되지 않습니다.

- …계속 말해, 듣고 있으니까.

- 감사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겁니다. 형제님의 말을 예시로 들자면, 해충이란 것은 잡고 또 잡아도 계속 나오는 법이지요. 마치 한 마리 개미가 발견된다면 이미 집안 이곳저곳에 개미들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그놈들을 잡아봤자 다시 새로운 해충이 생겨날 거다, 이 뜻인가?

 

공감 가는 얘기였다.

 

옛말 중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워먹는다는 얘기가 있다.

작은 일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 해충을 모조리 박멸하려면 집 전체를 태울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거지.

 

잡을 거면 뿌리까지 뽑아야 하는 법.

 

자신이 신전의 고위직을 잡는다면 분명 당장은 속도 시원하고 일도 해결되겠지만, 아마 신전 측에선 귀찮게 구는 이들이 계속 나오리라.

이미 신전은 자신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

제2의 해충들이 나와 자신의 귓가를 거슬리게 맴돌 터.

 

짜증나게 말이다….

 

- 또한 이단심문회 소속 심문관은 포기를 모릅니다. 점점 실력자들이 형제님을 덮칠 테지요. 특히 특급 심문관 등으로 불리는 이들이 나타난다면 아무리 형제님이라고 해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 강해?

- 강함보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아마 형제님이 아닌 그 주변을 노릴 우려가 있겠지요.

- ...그땐 신전이랑 나랑은 같은 하늘 아래서 못 사는 거지, 뭐.

 

신전이란 세력이 만만치 않지만, 단독으로 움직인다면 이한은 10년이 걸릴지언정 신전마저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는 교만이 아닌 자신감일지니.

 

그는 당하고도 못 살며, 당한 것의 열 배, 아니 천 배를 되돌려주어야 속이 시원한 속 좁은 놈이었으니까.

 

- 그건 비극이지요. 형제님에게도 신전에게도 말입니다. 하니, 제가 봤을 때 잠시 시간을 들여 일을 진행하는 게 어떠할까 싶군요.

- 시간?

 

…시간을 준다고 하여 해결할 수 있나?

 

이한의 의문이었고, 라파엘은 망설임 없이.

 

- 물론입니다. 저 또한 그냥 놀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저 같은 보잘것없는 늙은이를 도와주는 형제들이 있더군요.

- 호오.

 

저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노신부는 신전에 복귀한 이후 차츰차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나 보다.

 

전직 추기경이자 신전 최고 어른이며, 성인 후보까지 오른 위인.

 

그런 사람이 세력을 형성한다면 아마 협력할 이들의 면면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 저에게 협력하는 이들이 모인다면 그땐 저 또한 제 생애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야겠지요.

- 개혁이라도 하려고?

- 필요하다면 말입니다.

- …쉽지 않을 텐데.

 

망국을 살리는 것보다 신왕조를 세우는 게 더 쉽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한으로선 노신부가 자신보다 더욱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제가 해야겠지요.

 

여상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 …알았어, 일단 암살은 차선으로 놔둬보자고.

- 감사합니다, 형제님.

- 그래도, 슬슬 귀찮아질 것 같다면 그땐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이건 알아둬.

- 허허, 물론입니다. 그래도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이단심문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그들이나 심문관이나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이니.

 

이미 한차례 습격이 실패한 상황인 데다, 노신부가 직접 주시하는 현황에서 움직일 정도로 고위 사제들이 멍청하진 않으리라.

그건 신전이 대놓고 부패했다 광고하는 격이며, 라파엘의 영향력을 올리는 빌미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 원래 권력욕 강한 놈들이 절대 자기 권력 빼앗길 빌미를 안 만드는 거지.

- 허허, 형제님께선 권력자들의 심리를 잘 아시는군요.

- …어쩌다 보니까.

 

아는 사람 중 권력의 화신 같은 누님이 있기에 가능한 추론이었고, 이한과 노신부가 그렇게 합의를 보려고 하니….

 

- 근데 이것들은 어떻게 해?

- ....

 

노신부가 처음으로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한에게 사로잡힌 11명의 이단 심문관.

이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를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잠시 고뇌하는 노신부는….

 

- 흠, 이들 중 저 두 명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 저것들?

 

이한에게 처음 놀 같은 소리를 내뱉은 사제와 심문관들을 지휘하던 것으로 보이던 사제.

 

노신부는 정확히 그 둘을 집었고, 데리고 가는 이유를 물으니.

 

- 고위 신관들의 양자들입니다. 아마 이번 일을 주도한 이들은 이 둘일 테지요. 데리고 있다면 고위 신관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아마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는 그들한테도 치명적인 게 상당수 있을 테니.

 

역시 노신부. 착하긴 하나 정치를 아예 모르진 않는 그였다.

 

그래도.

 

- …신전도 혈연이 최고구나.

- ...부덕일 따름입니다.

 

다시금 나오는 가관인 현장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그였으며, 노신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서도 남은 아홉 명의 처우를 어찌할까 싶던 노신부는….

 

- 흠, 저들은 형제님께서 알아서 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저 형제들은 상관의 명령을 들었을 뿐이란 겁니다, 하니 부디 자비를 베푸시길.

- 이승 하직해도 상관없다 했지 않나?

- 허허, 결국 살았지 않습니까? 그럼 자비를 맛볼 기회는 있어야겠지요.

- ...거 편리한 자비일세.

 

이한은 대충 대꾸하며 잠시 남은 아홉 떨거지를 보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들을 비롯하여 붉은 머리 남장 여자까지.

 

그는.

 

- 으음, 조교야.

- 네, 네에, 교관님!!

- 네 후임 생겼다.

- ...네에?

- 원래는 남은 기간 동안 너만 철저하게 계속 굴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너보다 더한 것들이 왔네. 그러니까….

- ....

- 네가 잘 다뤄봐. 선임이니까.

- …!!!

 

이한은 조교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일 못하면 죽여도 되는 '인턴'을.

 

 

 

그리고 지금.

 

"똑바로 서 이것들아! 보름이나 배웠으면 알 만한 건 알아야 하잖아! 왜 줄 서는 거 하나 똑바로 못 해!"

"...."

"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하…! 이것들 대답하는 꼴 보게? 왜? 한참이나 나이 어린 새끼가 갈구니까 놀 같아?"

"…아닙니다."

"아니긴, 맞잖아? 그치? 어!"

"...."

"대답 안 해!!"

"…진짜 아닙니다."

"아니란 놈들이 목소리가 왜 이러냐고! 꼽냐? 꼬와! 꼬우면 나보다 빨리 조교했으면 됐잖아? 그럼 어린 놈한테 이런 굴욕 안 당해도 됐을 텐데, 참 거지 같다, 그치?"

"...."

"대답 없는 거 보니 맞다는 거네?"

"아, 아닙니다!!"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입을 열어! 그리고 소리 크게 지르지 마. 누가 보면 내가 너희 괴롭히는 줄 알잖아, 엉?"

"…죄송합니다."

"왜 목소리가 작아…!!!"

"...."

 

후임이 생긴 조교는 각성했다.

 

다름 아닌.

 

"…미친놈 같은데."

"데미안 저 인간, 한 맺힌 게 워낙 많아서 저래."

"우와, 내가 저런 꼴이었으면 자살 마렵겠다. 지독하다, 지독해."

 

…정신병자로.

 

정말 제대로 미친개로 각성한 데미안은 지독했다.

사소한 이유로 트집을 잡아댔고, 그 트집으로 벌써 두 시간 넘게 사람들을 털고 있다.

보는 이가 절로 질리는 광경이었고, 계속 보고 있노라면….

 

"…저거 밤길 조심해야겠는데."

 

밤길 걷다 인턴한테 칼침 맞지 않을까 싶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마조마함을 주는 그에게 비록 비극이 예정되어 있을지언정.

 

"어디서 눈을 똑바로 떠…!"

 

다시금 말하지만, 데미안은 행복했다.

 

 

진심으로…!

 

* * *

 

"사람은 누구나 숨겨진 재능이 있다더니, 저놈한테도 저런 재능이 있었구나."

 

이한은 감탄했다.

말 그대로 제대로 턴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닐 텐데, 그냥 본능적으로 후임을 조지는 법을 터득한 것이리라.

 

저건 타고난 거다.

그야말로 막 우화한 재능.

 

"…저런 것도 재능이라 할 수 있을지…."

"쿤타, 쟤들 불쌍해 보인다."

"그러니까, 내 하급 용병 시절이 생각나는구먼."

 

이상이 삼인방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달리….

 

"저 여자…."

 

여성 자체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도 있었다.

 

"뭐야, 소심이 너 설마 지금 바람 피냐?"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보다 왜 제가 바람을 피우는 겁니까? 사귀는 여자도 없는데."

"…보라돌이한테 내가 꼭 그 말 전해주마."

"왜요?"

"...이 새끼도 두들겨 패야 하나…."

"??"

"…됐다, 말하는 내 입만 아프지, 쯧."

 

태창이의 발언을 들으며 이한은 보라돌이가 불쌍하다 싶었다.

어쩌자고 이런 놈을 좋아하게 돼서….

 

투덜거리는 이한이었으나, 그가 투덜거리는 이유도 모른 채 데미안이 말했다.

 

"그, 그보다 교관님, 호, 혹시 저 여자애 이름이 주디아 피에르 아닙니까?"

"주디아는 모르겠고, 피에르는 맞는 것 같긴 한데, 왜? 아는 사이냐?"

"아,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냥 잘 알 수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왜?"

"…그게."

 

 

...이어지는 태창이의 얘기를 들으며 이한은 저도 모르게 검둥이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

 

경악과 증오, 그리고 분노와 같은 다양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그의 얼굴을 보았고, 이한은 살짝 놀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원작 3대 악녀 중 한 사람이에요. '독을 품은 꽃' 아이린과 함께 '피를 뿌리는 꽃'으로 불리는 주디아 피에르. …무려 로엔 공자와 부부까지 되었으나 이혼할 예정인 악녀지요."

 

"...저놈, 이혼남이었어?"

 

검둥이 저거, 장르가 대체 몇 개지?

 

'회귀에다 이혼이라니….'

 

허….

 

이한은 저놈이 왜 원작 주인공인지 알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혼남이 한때 트렌드긴 했지.'

 

...뭐, 그는 겪고 싶지 않은 트렌드긴 했지만.

 

 

이한은 자그마한 동정심을 느꼈다.

#141 EP-35 교관의 플렉스입니다(3)

기사는 목검과 한손 방패를 들었다.

 

"-미리 말하자면 난 제대로 된 검술이나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어. 즉, 근본이 없다는 거지."

 

흐느적거리듯 몸을 푸는 그에게선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낡은 목검과 나무 방패 등이 워낙 볼품없는 것도 있으나, 그가 인위적으로 기세를 억누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나에겐 유파가 없고, 그저 실전에서 어느 정도 완성한 수단밖에 없지. 해서…."

 

후우우웅!!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검술은 '이런 것'밖에 없다."

 

흐느적거리는 목검이 일순 말벌의 독침마냥 순식간에 허수아비에게 쏘아졌다.

일순간 일어난 과정이었고, 눈으로도 쫓지 못할 찌르기였다.

 

콰득!

 

목검은 정확히 허수아비의 눈을 꿰뚫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한 수.

잔혹하고도 과감한, 그리고 정확함이 돋보이는 솜씨였다.

 

"그나마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이런 거야.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법. 그리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비겁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이지. 솔직히 기사의 방식은 아니야."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폄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분해 보이거나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어 보였다.

 

"내가 이런 걸 익힐 때는 기사가 아니었고, 살려면 이런 거라도 잘 해야 했거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파앗!

 

이번엔 방패를 이용한 후려치기였다.

 

방패란 것이 저토록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거구나 싶은 움직임, 거기다 적절히 목검을 사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목검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줬다.

 

손잡이 부분을 사용하는 방식과 칼등으로 두개골을 함몰시키는 법 같은….

 

그야말로 살벌한 방식뿐이었다.

 

"후우."

 

…어느 순간 허수아비는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하게 망가졌고, 만약 저것이 허수아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정말 끔찍한 몰골이지 않을까 싶었다.

 

소름이 다 돋을 따름.

 

"물론, 너희에게 이런 비겁한 방식을 익히라고 하는 게 아니야. 난 그저 이런 식으로 싸우는 놈들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고. 너희가 이런 비겁한 방식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는 거니까."

"…대응?"

"결국 내가 보여준 건 편법이고,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할 뿐이며, 약한 놈들한테 잘 통하는 수법이지. 하지만 이런 방식에 대응조차 못 하는 놈들이 제법 많아. 설사 투기법을 배운 놈이라고 해도 칼침 맞고 안 죽는 게 아니니까. 가능하면 이런 편법을 파훼하는 훈련을 미리미리 해두는 것도 좋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투욱.

 

"지금부터 너희는 허수아비가 된다. 그리고 본 교관이 펼치는 편법을 막으면 된다. 이것이 2학기에 너희가 몸에 익혀야 할 필수 과제가 될 거다. 물론 시험도 이걸로 대체할 거고."

"...."

"안다, 너무 쉽지? 걱정 마라. 쉬운 만큼 다른 특별 훈련도 예정되어 있으니. 실망할 필요 없다. 본 교관은 너희가 성장할 수 있는 무수한 계획을 이미 짜놨으니까, 하하!"

"…차라리 맹수랑 같은 울타리에 가둘 것이지, 이게 뭔-."

"어? 어떻게 알았냐? 그것도 계획에 있긴 한데."

"...."

"역시 젊은 뇌. 본 교관의 시험을 미리 예측하는구나. 훌륭하다!"

"...."

 

...생도들은 그의 칭찬이 도저히 기쁘지 않았다.

 

예측하였다고 한들.

 

'와아, 우리 다 죽이려고 이러시나?'

 

생도들은 다시금 처참하게 분쇄된 허수아비를 보았고, 저 허수아비의 모습이 근시일 내 그들의 모습이 되리란 예지에 가까운 확신을 얻었다.

 

참으로….

 

"지, 진도가 너무 빠른데요?"

 

그들은 살고 싶었다.

 

 

 

 

 

그라고 하여 이 수련의 위험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힘을 억제한다고 한들, 잘못 맞으면 사망이거나 못해도 식물인간이 나올 텐데.

그리고 기사는 제자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걱정 마라, 대비책은 있으니."

 

아무렴, 그가 진짜로 무식하게 이런 훈련 계획을 짰을까?

 

"인턴들 앞으로."

 

"...."

 

"몸만 움직이지 말고 대답도 같이 하도록. 안 하면 그 입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혀를 뽑아버리는 수가 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 하지?"

 

"...."

 

"어휴, 됐다. 말하는 내 입만 아프지. 자, 전날 말했던 거 얼른 펼쳐."

 

"그, 그게…."

 

"안 해? 그래 하지 마. 대신 분근착골 일주일 코스로…."

 

"당장 하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아무리 고문에 대한 훈련을 받은 이단 심문관들이지만, 분근착골의 고통은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기사가 강도를 낮춰서 한 거긴 했지만, 그들에겐 충분히 트라우마로 남을 일이었으니까.

 

고분고분 기사의 말을 따르는 이단 심문관, 아니 인턴들이었고 그들은.

 

[대성법-희생의 결계].

 

성법을 발동했다.

 

썩어도 이단 심문관, 엘리트 중의 엘리트답게 사제 백 명은 모여야 가능한 성법을 소규모로 펼쳐내는 위업을 보이는 인턴들이었고, 성법은 검술학부 훈련장을 감쌌다.

 

점차.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시원해졌지?"

"방금 전만 해도 그렇게 후덥지근했는데…."

"어머? 나 피부가 갑자기 고와졌는데요?"

"세상에-!"

 

이한이 새롭게 데리고 온 인턴들이란 이들이 신성력을 내뿜은 것에도 경악하길 잠시.

신성력이 감싼 공간에서 아늑하고도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며 생도들은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자잘한 상처나 근육통, 혹은 자기도 모르는 새 쌓인 피로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서, 설마, 희, 희생의 결계?!"

 

아르노를 비롯한 몇몇 명문가의 자제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전설적인 성법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아르노? 이게 뭔가?"

"...[희생의 결계]입니다. 결계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다치지도 않습니다. 또한 항상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밥이나 물을 마시지 않더라도 딱히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결계지요."

"쿤타, 다 알아들을 건 아니지만, 엄청 좋다는 건 알겠다!"

"좋다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신전의 결계형 성법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결계 중 하나이니 말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결계로 성기사들은 과거 악마와의 싸움에서 천일 동안 쉬지도 않고 싸웠다고 하니까요."

"와아! 그렇게 좋은 건데 왜 많이 안 쓰나?"

"…결계를 펼친 사제들이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응?"

"이 결계를 펼치는 사제들은 결계 안에 있는 자들의 모든 피로와 상처 등을 대신 감당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란 이름이 붙은 겁니다. 말 그대로 희생을 전제하에 펼치는 성법이니 말입니다."

"…쿤타, 갑자기 이 결계 안 써도 될 것 같다…."

 

착한 바바리안 소년은 그렇게 결계가 좋다는 말을 취소했다.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쓰고 싶지 않아서.

 

다만.

 

"걱정 마라, 덩치야. 쟤가 말한 건 좀 극단적인 예시인 거야. 애초에 하루 정도 펼치는 걸로 문제가 그다지 없을뿐더러, 짊어지는 통증도 사제의 역량에 따라 5%도 채 안 넘는다고 하더라."

 

이한, 그가 다소 소란스러운 걱정을 불식시키듯 설명했다.

 

"그럼…?"

"우리 인턴들은 다행스럽게도 좀 우수하다. 그러니 통증이나 피로도도 얼마 안 받는다는 거지. 그리고 이 결계도 수업 때만 쓸 거니까 큰 문제는 안 일어날 거다."

"오오!"

"어떠냐? 이제 좀 안심했냐?"

"안심했다, 교관! 이 결계가 다시 좋아졌다!"

"그래, 의욕이 나서 다행이다. 그만큼 열심히 훈련해라, 알겠지?"

"응, 알겠다!"

"…응은 반말이고, 자식아!"

"아아악! 교, 교관 오지 마라! 교관 딱밤은 쿤타 두개골도 깬다!"

 

도망치는 쿤타였으나, 유달리 더 빨라진 교관의 몸놀림은 기어이 딱밤을 때리는 데 성공했다.

 

"아악! 아프…, 응? …아, 안 아프다?"

 

희생의 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알려주는 증명을 몸소 보여주는 쿤타였다.

 

"헤에, 이런 효과구나."

"역시 교관님이야, 엄청난 걸 준비하셨군."

"…다행이다, 유서를 써두지 않아도 돼서."

 

생도들 사이에서 안도감이 퍼져나갔으나, 아르노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아무리 5% 데미지라 해도, 80명이나 되는 인원의 데미지가 축적되면 죽을 만큼 아픈 건 똑같지 않나?'

 

으음….

 

"뭐, 내가 알 바는 아니겠지."

 

아르노는 애써 고민을 털어버렸다.

 

저 사제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당장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좋겠지."

 

평소 다칠까 봐 시도도 하지 못한 기술을 수련해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기에.

 

사제들의 후환이 걱정되긴 하지만….

 

"크윽!"

"아파? 아프면 지금이라도 말해. 그만둬도 괜찮아. 다만 당장 아프다고 그만두면 교관님이 가만히 둘지 모르겠지만."

"으으윽!"

"왜 그렇게 노려봐? 혹시 지금 나한테 불만 있는 거야?"

"아, 아닙니다."

"아니긴, 크흐흐, 때려보든가? 때릴 수 있을까 싶지만."

"!!?!"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장의 현재만 살아가며 모든 원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미안 폴렛의 희생정신(?)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교관님 말씀대로 저런 것도 재능일지 모르겠군.'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를 즐기는 재능이.

 

'현재를 즐기는 자가 가장 무섭다고 하더니…. 저 사람은 강해질 거야.'

 

"불만 있으면 때려 보라니까!"

 

...훗날 살아남는다는 가정 하의 얘기지만.

 

 

아르노는 하루살이의 정신력으로 살아가는 데미안 폴렛에게 처음으로 감탄과 존경 비스름한 것을 느꼈다.

 

* * *

 

"…자식들, 완전 신났네."

 

성법이 확실히 이 세상 상류층조차 겪기 힘든 종류의 힘이기 때문일까?

귀족 생도 녀석들조차 흥분을 금치 못하며 성법에 매료된 상태였다.

보고 있노라면 왠지 뿌듯할 따름.

 

"이런 게 플렉스지."

"…어딜 봐서요?"

"원래는 죽일 놈들 갈아 넣어서 훈련시설을 미치도록 좋게 만들었잖아? 이거 왕실도 못 하는 거라면서? 그럼 플렉스 맞지."

"그, 그런가?"

 

묘하게 설득된다며 데릭은 주춤거리며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던 그때.

 

"교관, 잠시 얘기할 것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습니까."

 

"...."

 

로엔, 데릭과는 다른 의미로 미래를 아는 회귀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웬일이래? 학술원 내부에서 아는 척도 하고."

"지금은 나름 마음이 급해서 말입니다. 교관, 저는 지금 부탁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부탁?"

"예에, 부탁입니다."

"흠, 저 빨강이랑 관련 있는 거냐?"

"…역시 눈치채셨군요. 그럼 가감 없이 말하겠습니다. 교관, 부디 그녀를…."

 

 

─저에게 주십시오!

 

 

"...…."

 

…일순 감도는 정적의 시간.

 

이한조차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5초 정도 멍해졌고,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장 되물었다.

 

"…검둥아. 너 지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지금 내뱉은 대사를 되돌아보렴."

"...무엇이 이상했습니까."

"이것도 환장할 물건이네…?"

 

이제 보니 아주 눈이 돌아버렸다.

딱 사고 치기 직전의 눈깔이다.

 

이성을 놓아버렸기 때문일까?

 

로엔은 자신이 한 발언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죽이고 싶다는 걸 스윗하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다만 저 대사에 담긴 한 맺힌 감정을 읽은 이한으로선 난감하기 그지없다.

이대로 줬다간 칼부림 제대로 날판이었으니까.

 

'스읍, 어른들이 부부싸움에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이한은 난감했다.

#142 EP-36 기사는 삼각관계가 싫다(1)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한에겐 어쩌다 보니 회귀자 못지않은 정보통이 한 명이 있었고, 덕분인지 이한은 본의 아니게 검둥이의 연애사…가, 아니라 '이혼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주디아 피에르는 설정상 순례 도중 라파엘 추기경이 구해준 고아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추기경에게 구원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신전에 들어왔지만, 여차저차해서 이단 심문관이 되었고, 또 여차저차해서 남장까지 했다는 설정이 있지요."

"그 '여차저차'가 되게 궁금한데…."

"저, 저도 알려드리고 싶긴 한데…, 안타깝게도 저도 그 여차저차를 잘 몰라요. 설정이랑 기본적인 것만 알아서…."

"...."

"게, 게임 스포일러를 싫어해서 그냥 기획팀이 만들어달란 것만 해줘서 세세한 걸 모르는 것뿐이에요…."

"…넌 가끔 쓸모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다?"

"너, 너무하세요…."

 

허나 핑계는 듣지 않는 이한은 매몰찼고, 그는 울상을 지었다.

 

"…됐고, 그래서 쟤들은 어쩌다 결혼까지 하게 된 건데?"

"아, 그건 알아요."

"...이상한 것만 아네."

"…어, 어쨌든."

 

데릭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입에 담아갔다.

 

"시, 신전의 이단 심문관이 된 주디아 피에르는 혁명군, 그러니까 로엔 공자가 이끄는 군대에 잠입하는 스파이 캐릭터라고 보면 되며, 스파이답게 정보를 빼내어 혁명군에 대한 정보를 신전에 갖다 바치죠. 그러던 중 주디아 피에르가 맡은 새로운 임무는 로엔 공자를 유혹해서 '제거'하는 거였죠."

"제거?"

"신전 입장에선 혁명군의 리더인 로엔 공자가 상당히 거슬렸을 테니까요. 그리고 예로부터 미인계는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가장 잘 먹히는 수법 중 하나잖아요? 그렇게…."

"...유혹 당했다고?"

 

자신이 아는 한 검둥이가 미인계에 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으음, 쉽지는 않았지만, 또 여차저차 하는 걸로…."

"그러니까 그 여차저차가 뭐야?"

"…그러게요?"

"...."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썩을 놈의 여차저차 같으니."

"이, 이후에는…!"

 

태창이는 눈치를 살며시 보며 자신이 아는 한에서 주디아 피에르에 대한 스토리를 언급했고, 이한은 대충 듣는 것 같으면서도 집중을 놓지 않았다.

 

"물론 로엔 공자가 유혹 당한 과정에도 이런 저런 이유가 있어서였고, 나중에는 결혼식 직전에 주디아 피에르의 정체가 스파이인 게 밝혀지면서 허무하게 퇴장하고 말아요. 즉, 극후반에 등장하는 악역 캐릭터인 셈이죠. 그런데도 3대 악녀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전개상 로엔 공자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준 캐릭터이기 때문이고요."

"흐음."

"…원한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녀가 저지른 죄 중에는 이간질부터 정보 교란까지 있었고, 그 때문에 혁명군이 입은 피해는 천문학적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로엔 공자가 아끼는 몇몇 기사들도 주디아 피에르 때문에 죽었다고 하네요."

"정당한 복수심이긴 하네."

"다, 다만 결국 그것도 지금 시간대가 아닌, '미래의 일'인 셈이잖아요? 그것으로 분노를 태운다는 건 좀 불합리한 게…."

"...너, 되게 오만한 발언을 하네?"

"네에?"

 

이한은 제 발언 중 무어가 이상한 줄 모르며 어리둥절 하는 그에게 물었다.

 

만약….

 

"-카린이란 애가 죽었어도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

"네 말대로 딜레마일 수도 있을 거야. 미래의 일일 뿐이고, 현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야, 지금 네 표정이 되게 무서운 것처럼."

"?"

"거울이나 봐, 자식아. 네 얼굴 지금 되게 살벌하니까."

"...."

 

이한의 말대로 뒤늦게 제 얼굴을 매만지는 것으로 확인한 데릭은 제 스스로에게 놀라고 말았다.

 

…놀랍도록 경직된 상태여서.

 

'아, 이런 거구나.'

 

데릭은 자신이 오만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왜 로엔이 아직 한없이 어린 소녀를 저토록 죽여 버릴 듯 살기 어린 시선을 주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용서'란 타인이 함부로 내뱉어선 안 될 경솔한 충고임을 깨닫는 그였다.

 

 

 

 

 

'그래도 잘못한 걸 빠르게 받아들여서 다행이란 말이지.'

 

태창이가 나쁜 놈이라 저런 경솔한 언행을 보인 게 아니다.

단지 세상을 좀 낙천적이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일 뿐.

뭐, 저런 악의 없는 발언이 가끔 큰 싸움으로 번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만.

 

'내 앞에서만 저러지, 다른 놈들한텐 안 저러겠지.'

 

애초에 다른 녀석들이랑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는 태창이다.

그의 앞에서나 말을 제대로 하지, 남이랑 대화할 땐….

 

'진동 마사지기나 다름없고.'

 

아마 타인 앞에서 말실수할 일은 그다지 없으리라.

 

'…생각해 보니 되게 안쓰러운 녀석일세?'

 

아직 대화가 통하는 친구조차 없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건 정말이지….

 

'아, 여자 친구는 있지 참?'

 

그것도 똑똑하고 예쁘기까지 한 여자 친구가 말이다.

 

'...전혀 불쌍할 것 없었네.'

 

이한은 급격히 배가 아팠다.

타인의 행복이 이렇게 꼴 보기 싫었던 것이었구나 싶은 마음과 함께.

 

다만 이런 배알이 꼴리는 심경도 잠시 집어둬야 했는데, 다름 아닌.

 

"신전의 사냥개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웃기는군."

"...."

"아, 그러고 보니 사냥개란 말도 너희에겐 아깝군. 주인을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놈들이니 말이다. 역겨운 쥐새끼 같은 것들."

"...."

"무시로 일관하는가."

"…왜 나에게 갑자기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군, 어린 사자. 난 너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불만이 있다면 덤벼도 좋다. 물론, 기사의 허락이 떨어져야겠지만."

"…언젠가 칼을 맞댈 날이 있을 거다."

"그래? 그날을 기대하지."

"...."

 

뿌득!

 

"...이빨 나가겠다, 저거."

 

저것들을 어찌 하면 좋을꼬?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미간에 핏대마저 세우며 시비를 거는 검둥이와 이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빨강이.

 

이렇게 보니 참.

 

"개판이네."

 

새삼 끝이 좋지 않게 깨진 커플의 형태란 것은 끔찍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 *

 

…결론만 딱 말하자면 이한은 로엔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

 

뭐 별건 아니고.

 

"사람은 물건이 아니야 검둥아. 쟤들이 진짜 노예인 것도 아니고."

"지금 하는 행위만 봤을 땐 노예보다 처지가 안 좋습니다만."

"인턴이잖아?"

"…대체 인턴이란 게 뭡니까?"

"있어, 조교보다 지위가 낮은, 어쨌든 저것들은 지금은 내 밑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소유권이 있는 게 아니야. 나중에 잘 쓰고 돌려줘야 한다고,"

"…정말 사람 취급하는 거 맞습니까?"

"트집 그만 잡고. 정 저게 필요하면 네가 설득해서 데려가. 그것까진 안 말릴 테니까."

"...."

"슥삭하고 싶으면 말하고. 대련은 얼마든지 시켜준다."

"…혹하긴 하나 참겠습니다. …그래도 저 또한 잠시 진정해질 필요가 있겠군요. 한 며칠 동안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당당하게 결석하냐?"

 

다행스럽게도 생존이 잠시 보장된 빨강이, 아니 주디아 피에르였고 이한은 혀를 찼다.

 

복잡하다….

 

'그 영감님은 일단 잘 봐달라고 부탁했고, 태창이는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악녀고, 검둥이는 죽이고 싶어 하는 대상이고….'

 

이한으로선 골이 아픈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휴, 저게 대체 뭐라고….'

 

슬쩍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

 

뒷감당 걱정 따윈 없는 조교에게 갈굼 당하고, 희생의 결계란 가혹한 성법을 펼친 상태에서 모두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도 그저 묵묵히 자기 일만 한다.

다른 심문관들이 고통에 져서 이한의 말을 잘 따르고 있는 거라면, 그녀는 그저 패배하였으니 말을 따르고 있다는 느낌일 뿐.

정작 아무런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형을 연상시키게 했고, 감정이란 게 있는지 약간 의심마저 든다.

 

'악녀에다 심문관이라…. 안 어울리는데?'

 

이한은 떠올린다.

패배하자마자 총구를 제 머리에 들이밀며 가차 없이 쏘려고 했던 모습을.

삶의 의지나 숭고한 대의 따윈 없는 무기질적인 모습을 말이다.

 

'흐음, 악녀 같은 일을 하려고 그래도 어느 정도로 감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안다.

악의를 가지고, 혹은 어떠한 대의를 가진 사람들이 내뿜는 기운 따위를 말이다.

한데 주디아란 여성에겐 딱히 그러한 악의나 대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디아 피에르에 대한 한 줄 평가를 내리자면.

 

"…이질적인 녀석이네."

 

악인이건 선인이건 그 무엇도 될 수 없으며, 마냥 이질적일 뿐인 사람.

 

그게 이한이 내린 그녀에 대한 평가였다.

 

"…네가 봤을 때는 어떤 것 같냐?"

"으음, 확실히 조금 이질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기운이 남다르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신성력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네에!"

"흠…. 근데 말이다, 병아리야."

"네엥?"

"…넌 왜 2학기에도 여기 있니?"

"...."

"왜 굳이?"

"어어, 교, 교관님 수업이 듣고 싶어서요?"

"...."

"뭐, 뭐라고 말이나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헤헤."

"주문쟁이가 이렇게 한가한 직업이었나?"

 

이한은 2학기에도 또다시 검술학부 수업을 수강하는 마법 소녀를, 아니 아이린 윈들러의 볼을 쿡쿡 찔렀다.

그때마다 보드라운 볼이 눌리며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아이린 윈들러였고, 이한은 한숨이 나왔다.

 

다른 수업도 많고, 학점을 채우고 싶으면 다른 것을 수강하면 될 텐데, 굳이 이한의 수업을 다시 재수강하는 이유를 짐작하는 게 어렵지가 않아서.

 

하여.

 

'애한테 받는 애정은 부담스러운데….'

 

왜 껌딱지처럼 병아리 마법 소녀가 검술학부에 붙어 있는지를 심적으로 짐작하는 이한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리 그가 연애가 하고 싶어도 이 귀찮은 설정이 덕지덕지 붙은 애랑은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빙의자인데다 주문쟁이. 거기다 어리고 철이 없으며 주문쟁이다. 무엇보다….'

 

...주문쟁이지.

 

이한으로선 소녀의 애정을 거절할 이유가 너무 넘쳐 무겁게 느껴질 따름.

 

"어휴,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네에?"

"됐고, 빨리 다른 수업 수강해. 아직 정정할 기회 있으니까."

"시, 싫어요! 저, 저도 검술학부 할래요!"

"마법학부 수석이?"

"며, 명예 검술학부 생도면 안 돼요?"

"…되겠냐?"

"히잉…."

 

울상 짓는 병아리는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지려고 한다.

 

비록 1학기일지라도 함께 한 시간이 있는지라 정 아닌 정이 쌓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냥 놔둘까?'

 

약간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있고, 1학기 때보단 몸이 건강해졌지만, 여전히 약하기 그지없는 몸을 보노라면 안쓰럽기도 하다.

하여 받아들일까 싶었으나….

 

"…아, 맞다. 교관님. 이거 느끼한 아저씨가 전해달래요."

"??"

"저, 저도 전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부탁하는 통에 전해드리는 거예요…. …죄송해요."

"...."

"그, 그래도 괜찮으시죠? 헤헤."

"웃지 마, 이것아."

"아야!"

 

감정이 조금 담긴 손가락 누르기에 몸이 날아가는 소녀였으나 신경 쓰지 않는다.

염동력으로 넘어질 일은 없을 테니.

 

그러니 소녀보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역시 저걸 빨리 내쫓아야 했었는데."

 

…자신의 처지가 아닐까 하며 이한은 침음을 내뱉었다.

 

호수의 물결을 표현한 문양.

단순히 편지지일 뿐인데 보석 가루가 쓰여져 묘하게 빛을 발하는 미친 돈지랄까지.

 

이런 문양과 보석을 잉크처럼 쓸 수 있는 가문은 왕국에서도 단 한 곳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엮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네….'

 

갈라하드.

 

당대 공작가의 주인이 보내는 초대장을 보며 이한은 골이 아팠다.

#143 EP-36 기사는 삼각관계가 싫다(2)

이한은 낚시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말이다.

 

'비싼 취미였지.'

 

낚시란 생각보다 비싼 취미였다.

낚싯대는 물론이요 다른 여타의 장비도 상당히 비쌀뿐더러, 배를 빌리는 것도 돈이고, 기름 값도 만만치 않더라.

하여 이한에게 낚시는 고급 취미였고, 이 세상에 와서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낚시는 더욱 비싼 취미가 아닐까 싶었다.

그도 그럴게.

 

"…그러니까, 이게 전용 낚시터…. 아니, 전용 양식장이라고?"

"네에, 일반적인 강이나 호수에서 낚시 같은 걸 하다간 마물화한 물고기한테 공격당하거나 잡아먹히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선지 귀족들은 자신만의 양식장을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웬만한 자산가가 아니면 이런 건 만들지 못한대요, 관리비며 유지비며, 그리고 조성하는 비용까지 하나같이 천문학적이라고 하더라고요."

"...."

"낚시가 그렇게 재밌나? 양식장까지 만들어서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러게."

 

…대답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하다.

 

이게 진정한 돈지랄이 아닐까 싶어서.

 

'이거, 해수(海水) 맞지?'

 

딱히 후각이 예민하지 않더라도 일반인조차 알 수밖에 없는 바다의 내음.

그리고….

 

"…저걸 설마 돔이야?"

 

바다에 살법한 어류들이 보인다.

참돔과 흑돔과 같은 어류들, 거기다 오징어와 문어, 심지어는…!

 

촤아아악!

 

"와, 상어다!"

"...."

 

…상어마저 키우고 있다.

 

이한은 이 거대한 호수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바다'임을 깨달으며 기가 막혔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런 인공 바다는 여기밖에 없을 거야.'

 

아무리 다른 귀족들도 양식장을 만들어놓았다고 한들, 여기와 비견할 수는 없으리라.

인공적인 바다도 바다지만, 살고 있는 어종들도 심상치가 않다.

아마 바다에서 직접 공수한 것을 풀어놓은 것도 제법 많을 터.

 

'금화가 실시간으로 녹는다, 녹아….'

 

이 유사 바다를 구축해 놓은 양식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금화가 초단위로 녹을 것이란 생각에 이한은 벌써부터 질려버렸다.

 

허나 아직 질릴 거리가 더욱 남았다는 것처럼.

 

"오셨습니까, 아가씨."

"어, 엘자 씨다."

 

양식장, 아니 낚시터에는 무수한 숫자의 사용인들이 줄지어 대기하는 중이었다.

 

시녀와 하인들이 못해도 백 명은 넘어 보였으며, 간간이 기사와 병사들도 보였다.

 

전생에 보았던 고급 크루즈 여행을 책임지는 승무원들을 모두 합친 숫자와 맞먹었지만, 저들 모두가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놀랄 일이 맞았다.

 

"흠, 오늘은 사용인 숫자가 좀 적네요?"

"전하께선 쓸데없이 많은 이들이 움직이는 걸 싫어하시니 말입니다."

"하긴, 한번 움직일 때마다 2,3백 명씩 움직이는 건 좀 그렇긴 해요."

"그러나 전하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그 2배는 더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에이, 그건 좀 아니다."

"후후, 그런가요."

 

"...…."

 

…뭘까, 이 미친 대화는?

 

이한은 어쩐지 병아리가 낯설었다.

 

원래는 그냥 평범한 옆집 이웃에 불과했는데, 뜬금 자가용이라며 개인 비행기를 부르는 걸 목도한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새삼 느끼는 건데….'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싶어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사용인 수십 명을 지나치고 나니.

 

"-드디어 왔군."

 

"...."

 

…안면이 있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50대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젊고도 잘생긴 외모를 유지 중인 남성.

허나 겉모습만 저럴 뿐, 속에는 능구렁이 수백 마리는 더 키우고 있을 노회한 정치가이자 왕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권력자가 바로 저 사내였음이다.

 

그런 그가.

 

"반년 만에 보는군, 기사 이한이여."

"…부담스럽게 왜 직접 나와 있습니까?"

"아무렴, 초대한 당사자가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지 않겠는가."

"...그 정성 때문에 쟤들이 절 엄청 노려봅니다만."

"충성이 과하여서 그렇다. 자네가 이해하게."

"...."

 

…이한을 친절히 맞이해주었고, 이한은 드물게 식은땀을 흘렸다.

 

'이해하고 싶어도 전신이 다 따가운데….'

 

공작이 맞이해주는 순간부터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 백 명의 병사들과 기사단을 맞이하며 이한은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튀는 게 현명한 게 아닐까 하고.

 

* * *

 

블레이크 비비안 드 갈라하드 공작.

 

왕국의 단 한 명뿐인 공작, 왕국 제일의 검객, 역대 최고의 마검 계승자, 가장 위대한 갈라하드 등.

 

화려한 수식어가 즐비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귀족들의 귀족이자, 그와 대화를 한 번 섞을 수 있다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소문마저 있을 따름이니….

 

'어떤 놈들은 이 양반이랑 대화 한 번 하려고 가산마저 탕진한다지?'

 

의도치 않게 알게 된 소문 하나를 떠올리며 이한은 볼을 긁적였다.

소문이 진실이건 아니건, 이토록 대단한 거물과 본의 아니게 마주하는 상황이 영 껄끄럽기 짝이 없으니까.

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일지도 몰라도, 그에겐.

 

'하, 집 가서 그냥 밥 먹고 자고 싶다.'

 

영 귀찮은 시간에 불과했다.

 

"흠, 불경한 생각을 하는 중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거짓말은 하지 말게. 자네는 표정 읽기가 단순하다 못해 훤히 드러나는군."

"...."

"또 이상한 헛생각을 하고 있군. 마음을 읽는 능력 따윈 없다네."

"…혹시 독심술 익히셨어요?"

"아하하! 그런 게 있으면 참으로 좋겠군. 다만 안타깝게도 그대의 표정이 무척이나 읽기 쉬울 뿐이다."

"…으음."

 

어째 자신이 만나는 사람마다 저 얘기를 자주 하는 듯했다.

 

표정 읽기가 쉽다고.

 

'…가면이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

 

공작의 말대로 헛생각이 이어지려고 할 즈음, 공작은 그를 손수 안내해주었다.

 

"자, 앉도록 하지."

 

"…?"

 

공작이 왜 직접 안내해주나 하는 의문이 앞서기도 전에 이한은 호화로운 낚시를 목도하며 눈을 끔뻑였다.

 

촤악!

 

해녀, 아니 해남들이 해산물을 낚아주고 있다.

성개나 조개류, 새우와 같은 갑각류 생물들이 올라오는 중이었으며, 낚싯대는….

 

"큰놈이군."

 

금칠을 한, 아니 진짜 금으로 만든 낚싯대가 거대한 참치 한 마리를 잡아들이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연출했다.

 

'…산티아고 노인이 이 광경을 봤다면 억울하지 않을까?'

 

노인과 바다에서 참치를 잡기 위한 노인의 사투를 인상적이게 본 이한은 참치를 양식장 낚시터에서 잡아들이는 것이 마냥 황당했다.

 

아니, 참치가 사는 강이 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튜나(Tuna)로군. 먹어본 적 있나?"

"그, 한 번 정도는?"

"호오? 내륙에서 먹기 힘든 것일 텐데, 경험이 있다라, 다행이군. 그럼 먹는 데 거부감이 없겠어. 집사."

"예."

"해체해서 가지고 오도록."

"말씀하신 대로."

 

300kg은 거뜬히 넘어가는 참치(Tuna)를 한 손으로 든 채 건네니 집사라 불린 노인 또한 한 손으로 잡아든다.

마냥 평범한 집사가 아닌, 투기법을 상당한 수준으로 익힌 기사 출신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집사의 실력은 놀랍지도 않은 것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투기법을 익힌 건가?'

 

…공작가의 사용인들 모두가 만만치 않아서.

 

시녀부터 시종, 그리고 잡다한 일들을 하는 모두에게서 상당한 기세가 느껴졌다.

 

'못해도 준기사.'

 

전투병인 병사들의 경우는 아예 일당백이나 다름없었고, 당장 어느 지방에 가도 기사 서임을 받는 건 어렵지 않을 터.

추가로 기사들의 경우는.

 

'적혈수리에서도 상위권인가?'

 

트리스탄의 독수리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있는 놈들과 맞먹는 놈들밖에 없는 바.

즉, 부기사단장이나 기사단장이 될 인재들이 넘친다는 의미였다.

 

'이야, 백은사자니 하는 것들은 그냥 백색 고양이로 만들어 버리네?'

 

이건 뭐 레벨이 달랐다.

 

태창이 식으로 표현하자면 백은사자를 비롯한 왕실의 평균 전력은 가까스로 Lv.4인데, 갈라하드의 평균 전력은 Lv.6이다.

 

태창이 왈. 레벨 하나의 차이는 참새와 독수리만큼의 차이가 있다 했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발타르 아재가 없었으면 왕실은 진작 먹혔겠는데?'

 

이 나라의 이름은 언제라도 팬드래건에서 갈라하드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한은 왜 그 누님이 갈라하드에 대한 경계심을 그토록 드러냈는지 이해했다.

 

이만한 세력인데, 왕족 입장에선 아무렴 우려스러울 수밖에.

 

그렇게 답지 않게 놀라운 경험이 연이어 이어지던 중.

 

"음식이 나왔군, 들도록 하지."

"...."

"내륙에서 먹기 힘든 미식이라네. 먹어두는 것이 좋을 거야."

"…맛있을 것 같긴 한데, 자리가 상당히 부담스러운데요."

 

먹음직스러운 참치와 여러 해산물로 만든 카르파초와 세비체 등이 한가득 나왔음에도 이한은 입맛이 감돌지 않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해하게. 충성심이 과도해서 그러니."

 

공작이 친절함을 보일 때마다 그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공작가의 사용인들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밥이 퍽이나 잘 넘어가겠다 싶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밥이 넘어가겠습니다. …어, 잘 넘어가네?"

"…여전히 능청스럽군."

 

놀랍게도 공작이 차려준 식사는 아주 맛있었고, 이한은 저들이 적개심을 드러내건 말건 아주 맛있게 회를 먹어치웠다.

 

'와, 참치가 이런 맛이었구나!'

 

참고로 그가 먹어본 참치는 무한 리필 참치밖에 없었고, 이런 생참치를 먹어보는 건 인생에서 처음인지라 그는 정신없이 회를 먹어댔다.

 

공작의 앞에서 이토록 마음 놓고 게걸스럽게 회를 먹는 것이 누군가는 창피하다고 말할 만도 했지만.

 

"우리 교관님, 참 복스럽게 복는다, 그치?"

 

[남자가 깨작깨작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저렇게 잘 먹어야지!]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씐 마법사 병아리와 유령 소녀는 마냥 그가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을 따름이었다.

 

* * *

 

"차입니다. 소화를 돕는 역할을 해드릴 겁니다."

"소화는 이미 다 됐고, 그냥 케이크나 좀 더 주시죠. 그거 맛있네요."

"…원하신다면 가실 때 싸드립니까?"

"그럼 더 좋고요. 고맙습니다, 집사님."

"하하…."

 

뻔뻔스러운 그의 발언에 집사로 보이는 노인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뻔뻔스러운데도 예의는 잘 차려서 그런지 밉상은 아닌지라.

 

"…자네는 어른들한테 예쁨 받겠군."

 

음식에는 거의 입을 대지 않은 블레이크 공작은 감탄하듯 말했다.

 

홀로 20인분 가량의 해산물을 먹어치웠는데도 케이크와 과일마저 챙겨먹는 것이 보통 신기한 게 아니어서.

 

"제가 원래 입맛이 까다로워서 남이 해준 음식은 잘 안 먹는데, 공작가 음식은 입맛에 잘 맞네요. 요리사 솜씨가 훌륭합니다."

"…우리 주방장이 들으면 기뻐하겠군."

 

이한은 숨도 안 쉬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원래 뭐든 잘 먹는다.

노예로도 살고 용병과 병사로도 살았는데 입맛이 까다로울 일이 어디 있을까.

다만 맛있다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내 생애 가장 훌륭한 식사였다.'

 

전생 시절을 합하여서 말한 것이다.

 

'역시 돈과 권력만 있으면 시대가 어떻든 간에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거야.'

 

아마 그의 지갑사정으론 다신 먹지 못할 고급스러운 런치 식사가 아닐까 싶었고, 이한은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았기에….

 

"그래서, 뭘 요구하시려고 저한테 이토록 잘 대해주십니까, 공작님?"

"무슨 의미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였다.

 

"의미고 자시고 간에, 공작님이 아무 이유 없이 저한테 호의를 베푸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부담스럽게 왜 이런 고급 식사를 대접해주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흐음, 그대가 마음에 들어 내가 식사를 대접할 수도 있지 않나?"

"에이, 그건 아니죠. 단순히 그런 이유로 공작님이 저를 부를 리가 절대 없을 테니까."

"호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으음, 내가 잘 아는 권력자들이랑 공작님이 비슷한 부류라서…?"

"...건방지게 날 평가하느냐."

"과대해석입니다."

 

이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맛있는 식사를 대접한 사람에게 무례를 저지를 정도로 그가 막돼먹은 놈은 아니지만, 지금은 좀 무례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권력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게 있으면 친절하게 나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공작님은 지금 저한테 원하시는 게 있는 것 같네요."

"...."

"아니면 말고요."

 

아무래도 오늘은 그가 '을'이 아니라 '갑'이 된 것 같았기에.

 

"…자네, 생긴 거랑 다르게 눈치가 좋군."

"...제가 생긴 게 어때서요."

"하하."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내가 확실히 급하긴 했어."

 

블레이크 공작은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 같았다.

 

티가 날 정도로 본인의 몸이 달아올랐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며.

 

"맞네, 요구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다네. 다만 나머지 두 개는 그다지 들어주지 않아도 좋지만, 한 가지 요구만은 반드시 들어주었으면 좋겠군."

"…?"

"…피에르라고 했었나, 자네가 데리고 있는 그 어린 이단 심문관 계집 말일세."

"...."

"그 계집아이를, 나에게 넘겼으면 좋겠군."

"...."

"…왜 그런 눈으로 보나?"

"…공작님, 자기 발언을 좀 되새겨 보시죠."

"음?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

"...."

 

발언만 보면 범죄자 발언임을 모르는 걸까?

 

이한은 황당했으나, 순간 그의 눈을 마주했고 그제야 알게 된다.

 

이제 보니….

 

'이 양반도 눈이 좀 돌았는데?'

 

검둥이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어째.

 

'왜 죽여 버리겠다는 발언을 다 스윗하게 하는 걸까?'

 

스으읍….

 

'빨강이 그것도 팔자 한번 사납구먼.'

 

...이런 것도 인기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참으로.

 

 

 

살인 날법한 삼각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144 EP-36 기사는 삼각관계가 싫다(3)

"흐으으응…."

 

금발 머리의 소녀가 머리를 꾸벅거리며 몸이 기울어졌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눈이 반쯤 감기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만 같은 얼굴.

 

푸짐한 식사 탓에 식곤증이 찾아온 건지, 그도 아니면 원래 낮잠을 잘 자는 체질인가 싶기도 했지만, 소녀의 몽롱한 눈을 보고 있자면 딱히 언급한 두 가지 모두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털썩.

 

기어이 소녀가 옆으로 쓰러지기 직전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그녀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들며 옮겨갔다.

 

"음냐…."

 

[아린아, 나 네가 너무 창피해….]

 

침을 흘리며 꿀잠을 때리는 소녀였고, 유령 소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소녀는 퇴장했고, 이한은 침마저 흘리며 잠자는 안쓰러운 미소녀를 향해 눈을 끔뻑거렸다.

 

쟤가 갑자기 왜 기면증이 있는 것처럼 구나 싶어서.

 

그리고 곧.

 

"…뭘 했습니까?"

 

자신이 먹은 것을 의심했다.

 

그러자 공작은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약간의 약을 먹였을 뿐이다. 아무렴 걱정은 필요 없다. 먹고 수면을 푹 취하면 오히려 몸에 활력이 감도는 약초와 같은 것이니."

"…으음, 약을 먹였다는 대목에서 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다. 저 애는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으니 말이다."

"참고로 물어보건대, 저 약초 저도 먹은 겁니까?"

"자네는 오히려 과하게 섭취했지. 케이크를 한 판이나 먹을 줄은 몰랐네, 한데도 멀쩡하더군."

"…어쩐지 입에도 안 대던 이유가 있으셨네."

 

참고로 이한은 디저트도 10인분가량을 먹어치웠다.

당뇨가 오지 않을까 싶지만, 비약을 먹은 이후로 이한의 심장과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비정상적으로 튼튼해진 상태였다.

설탕을 아무리 먹어도 당뇨가 올 일은 없을 터였고, 이만한 해독능력이 있는 이상 약초든 독초든 그에겐 이제 나물과 다를 바 없었다.

 

…비만은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진 마라. 딱히 그대를 해할 의도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생명력이 강맹한 기사에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비싼 겁니까?"

"별거 아니다. 술탄이 즐겨 먹는다는 불로장생의 열 가지 약초 중 하나에 불과할 뿐."

"…돈이 있어도 못 산다는 말을 길게 돌려서 말하십니다."

"그렇게 들렸나."

 

안 그래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자각이 있었는데, 더 부담스럽다.

 

다만 지금은 부담을 내려놓는다.

왜냐하면.

 

'내가 갑이니까!'

 

이한은 당당하게 굴기로 했다.

상대는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고, 그걸 얻기 위해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다.

하니 기죽을 필요는 없다.

 

...없는 게 맞을 텐데.

 

"내 수양딸 아이에겐 차마 하지 못할 얘기를 할 예정이네. 일부러 재운 이유도 그 때문이고, 하니 비밀은 꼭 지켜주길 바라지."

"…그럴 거면 듣고 싶지 않은데요."

"아니, 자네는 들어야 하네. 그래야지 자네가 그 심문관 계집아이를 넘길 터이니."

"...."

 

음….

 

'이게 을?'

 

아무리 봐도 자신이 갑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이한은 땀방울을 삐질거렸다.

 

* * *

 

"-내 아내가 '고인'이 된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테지."

 

"...."

 

"알고 있다면 대화는 쉽겠군."

 

"크흠…."

 

초반부터 대화의 수위가 상당히 셌다.

뭐지? 아까 먹은 걸 더 체하게 하려고 이러나?

 

소화력이 좋아서 망정이지, 그런 게 아니었으면 속이 쓰렸을 주제가 나왔고, 더는 듣고 싶지 않은 이한이었으나 블레이크 공작은.

 

"그럼 이 또한 알고 있나? 내 아내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는 것을."

"…그것까진 잘…."

"그럼 지금 알아두면 되겠군, 내 아내는 요정이었다. 그것도 흔한 요정이 아닌, 자연계의 요정이 인간화한 요정이었지."

"대, 대단한 겁니까?"

"흔치 않은 경우지."

 

이한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자연계의 요정은 정령과도 비슷하며, 토지신과도 맞먹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자연계의 요정들은 한때 신으로 숭배받기도 했었고, 종교가 성행하는 현 시대에서도 몇몇 지방에선 여전히 신으로 모시는 중이기도 했다.

특히 팬드래건의 건국에는 요정이 깊이 관계되어 있는지라 남부 대륙에서 요정이 가진 권위는 상당한 것이었다.

 

하니 그런 요정과 혼인한 블레이크 공작은 틀림없이 대단한 것이었고, 그런 요정이 죽은 것 또한 크나큰 역사적 비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정은 예로부터 노려지기 쉬운 대상이었다. 요정이 가진 신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투성이며, 요정의 신비를 밝히고 불로장생이나 그 신비를 얻고 싶어하는 왕과 권력자들도 여전히 넘쳐나지. 당장 어떤 마법사는 요정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내 아내를 노리기까지 했었으니까."

"…그 주문쟁이, 아니 마법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공작가의 고문실에서 살고 있다. 생명력이 제법 끈질기더군."

"...."

"말을 잇자면, 그런 만큼 내 아내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사고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지, 하지만 말일세. 공작가의 안주인이 '사고'로 죽는다는 게 말이나 될 것 같은가?"

"...."

"지키는 사람이 몇이며, 그녀를 호위하는 인력도 내가 직접 뽑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한데도…."

"...."

 

…이한은 이어질 그의 뒷말이 어쩐지 예측됐다.

 

'한데도 죽었다는 건, 타살이 의심된다는 거지.'

 

아무래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뒷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예상했을 테지만, 내 아내는 어느 수상한 이들에게 해를 입었다. 공작가의 호위들을 모두 무력화시키고 그녀를, …죽였지."

 

콰앙!

 

"...."

 

일순 그가 내뿜는 분노가 폭발을 일으키는 듯했다.

 

쿠구구궁!

 

유형화된 기세.

일정 수준에 도달한 기사들만이 보일 수 있는 살기나 투기와 같은 기운을 실체화하는 고난도의 경지였다.

저 기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검울림보다 활용성이 좋으며, 파괴력 또한 으뜸인 바.

허나 지금, 공작이 내뿜는 기세는….

 

'기세를 내뿜었을 뿐인데 대리석이 부숴진다고?'

 

하….

 

타 기사들이 도달한 것과 격이 다른 수준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내뿜는 것이 기껏해야 화약이라면 저 양반이 내뿜는 것은 니트로글리세린이다.

기세가 닿기만 해도 따끔거리며 화상마저 입을 지경.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다.

 

'안 그래도 짐작은 했는데….'

 

이 사람은 말도 안 되게 강했다.

왕국 제일의 검객이 괜한 허명이 아니었고, 어쩌면 오러 유저와도 맞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강자는 여전히 기세를 풀지 않은 채.

 

"그녀의 죽음에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담했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녀를 죽인 이들을 추려내는 것은 가능했지."

 

- 갈라하드의 힘을 총동원하여!

 

오싹한 뒷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왕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 총동원됐다는 뜻이니.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죽인 자들을 좁혀낼 수 있었지."

 

타악.

 

"...."

"자칭 [천사]를 따른다는 집단이었다."

"…흐음."

 

공작이 내놓은 것은 피가 잔뜩 묻은 십자가였다.

그냥 십자가도 아닌 불온하기 짝이 없는 역십자가였고, 이한은 이미 역십자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땅굴을 무너트린 기사라면 이 광신도들에 대해 당연히 알 테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차라리 모르는 게 뭔지 묻는 게 더 빠를 걸세."

"...."

 

혈십자군.

전날 귀왕을 소환한 것으로 추정되며, 땅굴을 점령하고 어린 시절 자신을 납치했던 암살 조직 검은 달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

 

한데 이 집단은 무려 공작의 아내마저 해하였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며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로판은 로판이란 건가.'

 

로맨스 판타지의 약속과 같은 내용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공작이나 대공, 혹은 황제가 사랑하는 부인을 직접적으로 노려 암살하는 조직이 있는 것.

그리고 그 조직 대부분은.

 

'교회 세력이나 황실의 어른들이 흑막인 경우가 많긴 하지.'

 

정해진 클리셰와 같았고, 이한은 하필 그 클리셰가 이 세상에도 작용했나 싶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 클리셰 수순대로라면, 혹시….'

 

로맨스 판타지의 답답한 클리셰 중 하나이자, 일명 [고구마]라고도 불리는 내용이 공작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기 무섭게.

 

"내 수양녀 아이린 윈들러와 신전의 이단 심문관인 주디아 피에르의 공통점이 뭔지를 아나."

"…뭡니까."

"다름 아닌 '요정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

 

…친딸에 대한 의심암귀.

 

최악의 로맨스 클리세 중 하나가 튀어나왔고, 이한은 음식물은 소화가 진작 다 됐음에도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허나 이한이 사이다를 원하건 말건 공작은 여전히 제 주장을 펼쳤다.

"아이린 윈들러는 '자연의 친화력'이 엿보이며, 주디아 피에르에겐 '신의 사랑'이 느껴지지. 모두 다 요정이 가지는 체질이기도 하다."

"…마법과 신성력을 말하는 겁니까?"

"눈치가 좋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연의 친화력은 2중 속성을 가진 것을 뜻할 것이며, 신의 사랑은 신성력을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과대망상이나 과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아이린 윈들러의 재능이 특별하긴 하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재능이고. 신성력의 경우는 아예 신만 믿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힘이니까.

 

하여 이한으로선 망상이 심하다 싶을 따름이지만, 공작은.

 

"하지만 한 시대의 이만한 재능을 가진 '동년배'가, 그것도 '여인'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지."

 

"...."

 

끝없는 의구심을 내뱉었다.

 

"그뿐인가? 아이린 윈들러는 고아원에 있을 십대 무렵 갑자기 성격이 달라졌다고 한다. 원래는 오만방자한 성격이 갑자기 유순해졌을뿐더러, 고아원의 아이들을 잘 챙겨주는 아이로 바뀌었다고 하지."

"…늦게 철이 들었겠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건 어떤가? 주디아 피에르는 그저 평범한 부랑아였으나,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라파엘 추기경에게 구원 받아 신전에 들어오고, 이후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며 곧장 이단 심문관마저 됐다고 하지. 한데 이런 업적을 쌓았는데도 자신의 나이와 성별마저 속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우연으로 보이나?"

"흠…."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고 급급해하는 것 같지."

"...."

 

…공작의 의심은 언뜻 타당한 것 같았다.

 

아내가 죽은 후 갑자기 나타난 동년배의 여자들.

나이는 아내가 죽은 햇수와 똑같은 19세.

추가적으로 요정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범한 재능과 출중한 미모까지…!

 

도리의 의심하지 않으면 멍청한 것이리라.

 

"하여 그녀를 원하는 것이다. 주디아 피에르. 그 여자는 수상하기 이를 데 없었고, 조사해본 결과 그녀가 이 광신도 집단과의 관계성이 있음을 알아낸 바. 남은 건 직접 물어보는 것뿐이다. 아무렴, 답변만 잘해준다면 험하게 다룰 생각은 없다. 하니 그녀를 넘기길 원한다."

"...."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원한다면…."

 

 

"-이제 보니 눈만 돌아간 게 아니었네."

 

 

"...?"

 

…일순 주변 전체가 다 경직됐다.

 

공기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

 

백이 넘는 인원의 강렬한 눈동자가 본인에게 집중되는 경험이 있는가?

없다면 다행이다.

 

…트라우마로 남을 수준이니까.

 

허나 이한은.

 

"아, 생각만 한다는 게 입으로 나와버렸구나…."

 

멋쩍게, 또는 뻔뻔스레 나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기왕 상황이 주옥 된 김에.

 

"이봐요, 아저씨. 찬물 마시고 정신이나 차려요. 그 나이 드시고 괜한 이상한 짓 하지 마시고."

"...."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네."

"...허?"

 

더욱 막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 답답한 아저씨에게 팩트 폭력이란 게 뭔지 알려주기 위하여.

#145 EP-36 기사는 삼각관계가 싫다(4)

공작은, 아니 블레이크는 50년을 넘는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막말'이란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는 팬드래건의 건국왕인 기사왕을 제외하곤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이자 현왕, 군신 등으로 불린 선왕의 적자였다.

 

거기다 용의 사랑을 받듯이 무수한 재능을 타고나며, 어떤 가정교사조차 그를 보름 이상 가르칠 수 없었다.

 

보름이 넘어가면 그의 지식은 이미 가정교사조차 뛰어넘기 일쑤였기에.

 

이후 그가 마검의 선택을 받아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자, 군신이 처음으로 참담함을 보였다고 할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군주의 재목이었는지도 알려준다.

 

허나, 왕이 되지 못했음에도 '갈라하드의 군주'가 된 그는 여전히 훌륭했다.

완전무결함이 뭔지 보여주듯, 갈라하드란 가문을 무려 서른 배가량 성장시킨 위업을 선보였으니까.

 

정치면 정치.

검술이면 검술.

상업이면 상업.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그였고, 작금에 이르러 갈라하드는 블레이크와 동일시됐으며, 왕국의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권세가가 되었다.

 

아마 왕조차 블레이크 공작에게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으리라.

 

그 정도로 블레이크란 개인이 가진 존재감과 능력은 비범한 것이었고, 감히 그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렇기에.

 

"-설마 왕족이 노망이 왔을 리는 없고,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

 

…자신이 초대한 기사에게 이런 '망언'을 들을 줄 몰랐다며 블레이크는 놀랐고, 도리어 신선하기까지 한 망언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호기심이 있다면.

 

"…그대는, 왜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지?"

 

저 기사가 왜 갑자기 그에게 화를 내고 있는가.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을 따름이었다.

 

기사는….

 

"난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진짜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망상 좀 그만하고."

 

어딘지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이건 '공작 전하'에게 하는 말이 아닌, 댁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원으로서 하는 '충고'라고 생각하십쇼."

"…충고라, 감히 나에게?"

"해도 됩니다. 아버지로서 못난 인간한테는."

"...."

"아, 아니구나? 정정하죠. 지금의 당신은 못난 인간도 아닙니다. 부모로서 실격인 거죠. 제가 봤을 때 당신은 사모님이랑 애가 있었어도 그다지 좋은 아버지는 못 됐을 겁니다. 아이를 믿어주지 못했을 테니까."

"…지금, 명백히 선을 넘고 있다."

 

죽은 아내를 언급한 순간부터는 가만히 들어줄 수는 없었다.

충분히 화를 내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당장 기사를 처단해도 할 말이-.

 

 

"─그럼 당신은 왜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주디아인지 뭔지 하는 녀석뿐만 아니라, 아이린 윈들러까지 의심하는 겁니까?"

 

 

"...…."

 

...블레이크의 손이 움찔거렸다.

 

처음으로 보인 블레이크의 당혹스러움이었고, 그는 말문이 막혔다.

 

기사는 말을 이었다.

 

"방금 전부터 당신의 수양녀를 부를 때 '아이린 윈들러'라고 부르더군요. 마치 완전히 남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당신은 지금 빨강 머리만이 아니라, 당신 수양녀마저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이 틀립니까."

"…그것이 어찌 잘못된 건가."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저 말대로 그는 아이린조차 의심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과 판박이인 아이가 사실은 주디아처럼 신전에서 만들어낸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그때부터 공작은 수양녀조차 의심스러웠다.

 

"논리적으로 해야 할 의심이다."

"그런 걸 보고 개떡 같은 논리라고 합니다."

"...."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반박.

 

"걔가 은발이 아니라서? 그것도 아니면 마법사라서? 그거 다 요정의 핏줄이니까 설명이 된다면서요. 그리고 핏줄 확인하는 방법? 그거 왕족이면 어떻게든 확인하는 수법이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당신은 끝까지 확인하지 않습니까? 아, 혹시 아이린 윈들러가 사모님의 복제인간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까? 흐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참 궁금해서 그러는데…."

 

- 그렇게 의심스러운데도 왜 계속 곁에 두고 계십니까?

 

"...."

 

…이번만큼은 답변하지 못했다.

 

현명하기 짝이 없으며, 그 어떤 순간에도 막힌 적이 없는 그가 말이다.

 

"왜 곁에 두는지 모르겠습니까? 그걸 모르기에 부모 실격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게 낙제점이라."

"…내가 답을 안다?"

"되묻는 것도 그만하시죠. 아는데도 계속 모르는 척하니까 슬슬 화나려고 그럽니다."

"...진정으로 몰라서 그런다,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거지?"

 

이 순간 블레이큰 인생 처음으로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으며, 기사가 말할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으니.

 

마치 그동안 놓치고 있던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 같았고, 블레이크는 기사를 재촉했다.

 

얼른 답변을 내놓으란 듯이.

 

그러한 그의 다급한 물음에.

 

"-당신은 단순히 그 애가 사모님을 닮아서 곁에 두는 겁니까? 아니면 '가슴이 시켜서' 곁에 두는 겁니까? 제가 봤을 땐 후자 같은데 말입니다."

 

"-------."

 

…무척이나 단순한 답변이 돌아왔으나, 블레이크는 그 단순한 답변에서 뒤통수가 지끈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그동안 부정하던…,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어리석은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듯.

 

"공작 전하, 당신도 알 겁니다. 사람은 가끔 머리가 아닌 본능의 이끌림과 충동으로 살아가기도 한다는 걸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만, 당신의 본능은, 아니 심장은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

"이렇게 말해줬는데도 모른다면 전 당신에게 실망감이 들 것 같습니다. 나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한 사람이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실망감이."

"…허허."

 

…이 순간.

 

블레이크는 알 것 같았다.

 

저 기사가 왜 화를 내었고, 이토록 과감한 언사를 내뱉었는지.

 

그도 그럴게.

 

'…난, 내 자신에게마저 거짓말을 하고 있었구나.'

 

기사는 거짓만 내뱉는 자신이 한심했던 것이다.

 

블레이크는 제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다.

하염없이 의심하고, 마음속 이끌림마저 모두 부정할 뿐.

 

…제 감정조차 그저 그리움에 의한 환상에 불과하다 단정 지었기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저 애를 의심했다면 약을 먹여 재우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냥 대놓고 대화했을 테죠. 한데도 당신이 약을 먹인 이유는 간단할 겁니다."

"...."

"'미움 받기 싫다' -그러한 심리 때문에 재웠겠지요. 당신의 의심을 들었다면 당사자는 상처 입었을 테니까."

"...."

"물론 당신이 저 애의 친부인지 아닌지는 저조차 확신할 수 없을 테지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압니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본능적으로 제 자식에게 미움 받기 싫어 한다는 거. 그리고 당신이 미움 받기 싫어하는 것만 보아도 이미 당신은 저 애를 소중하게 여기는 겁니다."

"…난."

"소중한 걸 잃고 뒤늦게 후회하기 싫으면 그러지 마십시오. …근데 사람은 꼭 잃고 후회하긴 하지만."

"...뒷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 같네."

 

…블레이크는 어쩐지 이 기사가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같이 느껴졌다.

 

하는 조언도,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힘이 빠지는 게 꼭, 돌아가신 형님 같군.'

 

그보다 한참이나 연상이었던, 이미 죽은 형이 한낱 기사의 얼굴에서 연상된다면 그건….

 

 

그가 특이한 거려나?

 

* * *

 

...와, 저질렀다.

 

이한이 가장 먼저 느낀 감상이었고, 뒤이어 사고를 저지른 대가가 따라오듯.

 

저릿저릿-!

 

그를 향해 살기의 물결이 쏟아졌다.

 

'심약한 사람은 1초도 못 버티겠네, 이거.'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보내는 살의가 섞인 강렬한 기세였고, 공작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려 들 듯했다.

 

위험한 상황이었고, 이한으로선 사서 위험한 길을 걸었음을 되새겨주는 증거였다.

 

허나.

 

'그럼에도 속은 시원하다.'

 

후회는 없었다.

 

이 모든 놈들이 덮쳐도 도망갈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단순히….

 

'지금 안 말하면 내 속병만 나지.'

 

저 양반한테 한 소리 하지 않으면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는 입을 쉬지 않기로 했다.

후회는 나중에 가서 후회해도 늦지 않으니까.

 

어처구니가 없다.

너무 똑똑해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누가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까?

 

'왜 당연한 걸 모르는 걸까?'

 

사실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말고도 눈썰미가 좋거나 '기운' 같은 걸 읽을 수 있는 감각이나 눈이 있다면 대번에 알 수 있을 테지만….

 

'붕어빵인데…?'

 

전날에는 아티팩트를 통해 대화를 하여 자세히 못 봤지만, 지금은 보인다.

 

블레이크란 남자가 내뿜는 기운, 파장?

그라는 남자를 이루는 총체적인 [색깔]이 말이다.

아마 저러한 색깔은 사람 고유의 색일 것 같은데, 이유는….

 

'사람마다 그 색이 천차만별이었으니까.'

 

특히 기사나 마법사처럼 생명력 등이 왕성한 이들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고, 이한은 그런 블레이크 공작의 선명한 색깔과 마법사 병아리의 색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DNA의 일치를 증명하지 않을까 싶은 색이었고, 저들이 부녀 관계임을 명확히 알려준다.

 

…한데도 답답하게 그걸 저 인간은 부정하고 자빠졌다.

 

솔직히 빨강이를 넘기는 건 그다지 상관은 없긴 한데, 말투나 행동하는 게 고구마를 수십 개 먹이는 것만큼 답답하고 속이 타더라.

 

'이게 로판의 저주야?'

 

아무리 봐도 똑 닮았는데, 아비란 인간은 제 딸을 못 알아보는 저주.

 

흔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더욱 답답한 것은.

 

"그런가, 이미 난 그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한데도 의심하고 있었어. 친딸임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그 아이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있었군…."

 

"...."

 

…환장하겠다.

 

'본능적으로 이끌린다는 걸, 아니 저렇게 꿀이 떨어지는데도 자기 딸인 걸 인정 안 해?'

 

이러니 로판이 중후반 전개가 막장 드라마랑 비슷하다고 하나 보다.

 

풀릴 것 같은데 절대 안 풀린다.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하지만 더는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월권을 행사하는 걸 넘어, 목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은 막말을 내뱉었는데 더 입을 열었다간 이번에야말로 저 양반에게 목이 썰리지 않겠는가.

 

"그럼 전 이만 도망가겠습니다."

"…무례한 말은 다 내뱉고 가는 건가."

"원래 강경하게, 또 싸가지 없게 말해야 사람들은 말을 알아먹덥니다."

"하하!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겠군,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하니."

"...사과는 안 할 겁니다."

"아하하!"

 

다시금 유쾌하게 웃는 공작이었고, 그와 달리 더욱 살벌한 시선을 던지는 사용인들의 시선에 이한은 당당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화나냐, 내가 너희들의 주군을 모욕한 것 같아서?"

 

[[....]]

 

"그럼 주소 잘못 찾았다고 말하지. 오히려 너희들 스스로를 탓해야지."

 

[[??]]

 

…순간 저 뻔뻔스러운 놈이 뭐라 말하는 건가 싶은 눈빛들이다.

 

하긴,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짓을 하고 있으니 저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만, 이한은 진심이다.

진심으로 저들에게도 잘잘못이 있다 싶었다.

 

그도 그럴게.

 

"-충직한 신하란 건 자신의 군주가 잘못된 길을 걸으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조언과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라고 했다. 한데 너희들은 너희의 주군이 폭주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게 옳은 거다, 이 한심한 놈들아."

 

[[...….]]

 

"몇백 명이나 있으면 뭐하나, 눈과 귀가 있어도 올바른 게 뭔지 판별을 못 하는데."

 

그건 없느니만 못하다.

 

 

이한이 마지막으로 일갈하는 팩트였다.

 

* * *

 

"...."

 

공작은 멀어지는 기사의 등을 보았다.

이미 한없이 멀어지고 있어 작아지고 있는데도 어쩐지 든든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등처럼 보인다.

멀리 있다 하여도 굳건해 보이는 태산마냥.

 

"성장했군.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냥 힘이 강해진 수준의 성장이 아닌,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성장했다.

 

목숨을 건, 아니, 긍지와 신념을 전력으로 부딪치며 강해졌기에 저토록 괄목상대한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인간적으로 성장한 기사는 전날 그를 마주했을 때와 달리 그를 향해 '잔소리'를 할 만큼 담대해졌다.

 

분명 굴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이상하게 밉지가 않군."

 

그토록 막말을 들었음에도 공작은 불쾌감이 남긴커녕 유쾌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자신의 공을 숨긴 영웅.

그로 인해 호감을 느꼈고, 제법 괜찮은 기사란 느낌이 들었었고 지금은.

 

"...제니미아 공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구나."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를 가까이 하라 했고, 감언이설을 내뱉는 이를 주의하라 하였나?

 

왜 트리스탄 후작이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목이었다.

 

[[...]]

 

여전히 침묵에 잠긴 채, 자신들의 행동을 뒤돌아보는 사용인들만 보아도 그는 확실히 큰 자극제이자 올바름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왕도를 걷는 기사도.

 

'단순히 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관찰할 줄 알고 주위를 보는 시선이 있다. 걸물이로다.'

 

기사가 정계를 서성거리고, 금욕을 탐하는 이런 시대에도 아직 저런 기사가 남아 있는 것인가.

 

탐이 난다.

군주로써 저토록 믿음직하면서도 흥미로운 자는 없다.

 

그렇게 불쑥.

 

"흐음, ...아들도 하나 더 들일까?"

 

-데리고 있으면 재밌을 것 같은데?

 

공작은 수양아들도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린 윈들러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발언이었지만....

 

 

트리스탄에 이어 갈라하드의 러브 콜.

 

어떤 의미에선.

 

 

'한 명의 기사'를 둘러싼 '고위 귀족들'의 '삼각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뭐지? 갑자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당사자가 알면 소름이 끼치다 못해 끔찍한 얘기일 테지만.

#146 EP-37 기사는 무도회가 싫어졌다(1)

그가 생도들을 향해 기운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본 교관이 학술원을 그만두게 된다면 도피 생활 중이라고 알아두면 된다."

 

"도피?"

"어디 아프세요?"

"교관님-?"

 

"그냥 그렇게 알아두도록."

 

"???"

 

"...."

 

갈라하드에서 그 난리를 떤 지 이틀이 지났고, 슬슬 약간의 위기감도 든다.

사람이란 후회하는 동물이라 하였었나?

과거의 자신이 친 사고를 되새기며 현재의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순환 구조.

이한은 이틀 내내 갈라하드의 병사들에게 쫓기고 공작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이미는 악몽 비스름한 것을 꾸는 중이었다.

 

'어디로 도망칠까…?'

 

최근 들어 망명도 선택지로 둘 따름.

 

술탄이 다스린다는 사막과 초원의 왕국이 덥기는 하지만, 살기는 그렇게 좋다던데….

 

'아니다, 더운 건 좀 별로지.'

 

그럼 그냥 계곡과 바다가 있는 시골 동네로 가서 은거생활을 할까?

 

'그건 또 별로고.'

 

살아도 시골 생활은 좀 아니다 싶었다.

가능하면 인프라 갖춰진 도시에서 살면 살았지.

 

생긴 건 어디서든 생존할 것처럼 생겼어도, 나름 도시인인 그였다.

 

"어휴."

"교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기운 내라. 쿤타가 위로한다."

"생긴 거랑 다르게 나름 섬세한 면이 있구나, 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관한테 그런 말 듣기 싫다."

"내가 어때서?"

"교관은 바바리안보다 더 바바리안처럼 생겼지 않나."

"욕이냐 칭찬이냐?"

"???"

"…네가 말한 걸 왜 본인이 이해를 못 하냐?"

 

이놈 때문이라도 수업에 독서시간이라도 끼워 넣어야 하나 싶다.

아무리 검 쓰는 놈들이 근육뇌라고 불릴지언정, 어느 정도 지식은 필요한 게 맞으니까.

 

어쩌다 보니 덩치 녀석 덕분에 공작가에 대한 걱정은 잊고 앞으로 수업 방향성을 고심하게 되는 이한이었다.

맡은 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버릇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그러고 보니 좀 있으면 무도회 시즌이겠네요."

"아, 잊고 있었네요."

"어, 어쩌죠, 아직 파트너를 못 구했는데…."

 

최근 가르쳐준 유도 기술을 연습 중인 병아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무도회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였다.

 

"무도회?"

"네에,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무도회 시즌이거든요. 특히 학술원을 다니는 이들은 모두 참여하는 학술원 무도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려서요."

"그런 것도 있구나."

"왕립 학술원에 다니는 이들은 모두 좋건 싫건 사교계에 모습을 비춰야 하니까요. 사교계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는 건 상류 사회에서 배제된다는 걸 뜻하니, 필수적인 행사라 할 수 있죠."

"흠."

"후후, 교관님, 지금 무도회나 사교계 같은 건 쓸데없다 생각했죠?"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병아리 녀석들 생각보다 날카롭다.

 

이런 걸 보고 소위 여자의 감이라고 하는 것일까?

 

'내 표정이 그렇게 읽기 쉽나?'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표정이 다 읽히는 것 같다.

 

"으음, 일단 미안하다. 그래도 쓸데없다고 여긴 건 아니야. 그냥 나랑은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행사라 그런 거야. 너희를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어."

"우후후, 저도 알아요. 교관님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병아리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발언이었고, 뒤이어 다른 병아리들도 동의하는 기색을 보였다.

 

"교관님은 그런 점이 좋아요. 저희가 어리고 지위가 낮아도 사과해주는 거."

"맞아요, 다른 영식들이나 기사들 중엔 자존심만 세서 사과는커녕 오히려 성질부터 내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뿐이면 다행이게요? 폭력도 쓰는 사람도 있죠, 글쎄 저번에 보니까 프랑드 경이…."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역시 생긴 대로 논다고, 곱상하기만 하지 못돼먹었네요."

"아쉬운 일이네요. 제 앞에 그자가 있었다면 교관님에게 배운 기술을 시험해 볼 찬스일 텐데."

"그러니까요!"

 

"...나 이제 가도 될까?"

 

역시 소녀들의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까.

어느 순간 그 존재감이 잊힌 느낌이 들었으며, 이한은 도망가고 싶어졌다.

 

"후후, 단순히 요약하자면 사부님이 상냥한 분이란 거죠."

"…난 무도회에 대해 물어봤는데 결론은 왜 그렇게 될까?"

 

어느새 다가온 푸른 곰순이의 상냥함이 들려왔고, 이한은 교훈을 얻었다.

 

'여자 애들 대화하는 데는 가급적 끼어들지 말자.'

 

앞으로 이한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쓰일 교훈이었다.

 

 

 

 

 

 

"...."

 

…붉은 머리의 여성, 주비아 피에르는 여성 생도들과 기사가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으나, 만약 어느 상냥하고도 지혜로운 노신부가 있었다면 그녀의 표정을 어느 정도 읽어냈을 터였다.

 

그 표정은 다름 아닌.

 

"…광명이시여, 저는 어찌 살아가야 하는 겁니까-."

 

 

'부러움'이었다.

 

* * *

 

이한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어느 협력자에게 말해주었고, 협력자는 얘기를 듣자마자.

 

"고, 공작님에게 불려갔다고요?!"

 

대경실색하며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

 

가끔씩 대범할 때가 있긴 한데, 천성이 소심해서 그런지 별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태창이었다.

 

허나 정작 놀란 이가 반박하길.

 

"아니, 어떻게 이걸 안 놀랄 수가 있어요?! 그보다 교관님 블레이크 공작님이랑 안면이 있었어요? 그 <마검의 블레이크>와-?"

"…그건 또 무슨 설정이냐?"

"마검의 블레이크 공작. 오러 유저와 맞먹는 힘을 가진 사람 중 하나지요. 본신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마검을 들었을 때 무력은 그야말로 천재지변급, …국가 하나를 없애는 것도 가능한 인물인 거죠."

"혹시…. 그 양반도 중요한 캐릭터냐?"

"이벤트성 보스 같은 거긴 해요. 다만 라이오넬 대공과 마찬가지로 잡으라고 만든 보스캐가 아니긴 하죠."

"…그럼 왜 만든 건데?"

"원래 기획팀이 일하다가 가끔 미쳐가지고 말도 안 되는 이스터 에그를 넣을 때가 있거든요. 솔직히 원작에선 거의 활약이 없는데, 기획팀이 이거다 싶었는지 넣었더라고요."

"그 양반이 활약이 없다고…?"

 

이한이 본 공작은 세상에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리어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하고 우수한 양반이었지.

한데 아무런 활약도 없는 인물이란 말에 의아하였고, 그러한 반응에 태창이는 동의하며 공작이 왜 아무것도 안 하는 캐릭터인지를 말해주었다.

 

"방관자 캐릭터이기 때문이에요. 알다시피 움직이는 순간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는 인간 같은 게 있으면 스토리 진행이 잘 안되잖아요. 뭐, 너무 방관해서 정작 비중은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그럼 활약할 때가 있긴 하냐?"

"있긴 하죠."

"언제?"

"아이린 윈들러가 몰락할 때죠."

"…아."

 

이한은 새삼스러운 내용 하나를 기억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린 윈들러가 원래는 3대 악녀 캐릭터라고 했나?"

 

이한의 되물음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추가적인 설정을 말해주었다.

 

"아이린 윈들러가 악녀 캐릭터가 된 이유는 일단 아카데미 한정으로 최종 보스 같은 거라서 그래요. 원작에서도 갈라하드 공작의 수양딸이 되거든요. 그리고 권력자 집안에 들어간 사람의 행동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혹시 아시나요?"

"찾아온 행운에게 감사하며 노력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고마워할 줄 모르고 삐뚤어지거나."

"잘 아시네요."

"내가 본 만화가 몇 갠데. …그런데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병아리는."

"네에, 원작에선 엄청나게 삐뚤어져요."

 

그것도 엄청난 수준으로.

 

패악질은 기본이요, 자신 또한 평민 고아로 살았으면서 하층민들을 경멸하고, 기어이 갈라하드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더 나아가 왕립 학술원에 들어온 이후론 자기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노력을 기울일 뿐, 본연의 재능인 마법을 등한시하며 그 재능을 썩히기까지 한다.

이후에는….

 

"2학년 시기에 등장할 '여주인공'과 대척점에 서게 되고, 여주인공을 돋보이는 역할을 맡게 되죠. 나중엔 말로 하기도 참담한 패악질을 해서 여주인공을 위협하다가 결국 학술원에서 퇴출당하고, 공작에게도 버림 받게 되는 게 본래의 스토리 라인이에요."

"...버림 받을 만하네."

 

듣고만 있어도 짜증이 팍 난다.

흔해빠진 악녀 캐릭터가 아닐 수 없었고, 그 답답이 공작이 충분히 버릴 만도 했다.

 

'그 양반은 자기 아내를 닮았다고 해서 애정을 주진 않거든.'

 

아마 그 원작이란 것에선 아내를 닮은 아이린 윈들러를 발견하고 수양녀로 삼았겠지만, 악녀가 저지른 패악이 도를 넘자 공작은 그녀를 단칼에 끊어냈으리라.

 

한데도 무려 학술원에서 2학년이 될 때까지 놔두었던 이유를 예측하자면 아마도….

 

'의심이 돼서 데리고 있었겠지.'

 

이번에 들은 것처럼, 아마 원작의 아이린 윈들러 또한 신전에서 만든 무언가로 의심하고 데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한데 그냥 쓸모도 없고, 패악만 심한 것이라 확신하자마자 가치가 없어진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원작 기준으로 '금발 머리 여성이 묻힌 이름 없는 무덤이 있다'는 내용이 있긴 해요. 아마 그 무덤이…."

"…쯧."

 

비록 원작의 그 악녀와 현재의 병아리가 별개의 인물임을 알지만, 이한은 어쩐지 씁쓸했다.

 

주문쟁이일지라도 그가 가르친 회원, 아니 생도지 않겠는가.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군."

"괘, 괜한 얘기를 드린 걸까요?"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마음이 좀 쓰일 뿐이지. 얘기해줘서 고맙다."

"하하…. 그럼 다행이네요."

"…흠, 근데 소심아."

"네에?"

"...너 목에 그거 뭐냐?"

"예? 아아, 이거요…!"

 

벌레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일까, 목에는 발갛게 올라온 물집처럼 보이는 게 있었고, 녀석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별건 아니고, 엊그제 같은 학부의 어느 여생도 분이 저한테 초대장 같은 걸 줬는데, 그걸 보고 카린 영애님이 화를 내시더라고요. 그리곤 갑자기 목을 무시더라고요. 이게 참…."

"...."

"아파 죽는 줄 알았어요.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나셨지?"

"…그거 영역 표시야, 인마."

"네에? 무슨 표시요?"

"...넌 그냥 나가 죽어라, 새꺄."

"???"

"…시부럴."

 

이한은 이 자식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 * *

 

이한의 앞마당에는 개집, -하숙방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집주인이 손수 만든 핸드 메이드 작품이며, 부실 공사 하나 없이 만들어 아마 폭풍우조차 견디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귀한 집인 만큼 살고 있는 거주자인 조교1호는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고개를 숙였었다.

 

- 인생 놀 같네 진짜…!

 

아마 이런 좋은 집에 자기가 사는 것이 과분하다 느낀 것이겠지.

어쨌든 그런 귀한 하숙 시설은 최근 아홉 개가 더 늘어난 실정이었다.

 

새롭게 하숙을 희망한 인턴들이 생겼기에.

 

이렇다 보니 코고는 숨소리가 많아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집주인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수준은 아닌 바.

그렇게 앞마당이긴 해도 나름 집주인과는 독립적인 개별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한데.

 

스윽.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흐느적거리며 걸었고, 대놓고 자신의 인기척을 뿌리고 다니는데도 다른 거주자들은 정신없이 잠들기 바빴다.

 

아무리 피곤할지언정 인턴들이 타인의 인기척 하나 느끼지 못할 리 없을 터이지만, 그들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도 한 것이….

 

사아아아….

 

그것은, 아니 그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탓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누군가 이 광경을 봤다면 눈을 의심하며 소리부터 질렀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급기야.

 

파앗!

 

그녀의 몸은 문이 아닌 벽을 통과했다.

 

정녕 귀신이라도 되는 걸까?

 

"──하아."

 

오싹하기 짝이 없는 음험함을 내뿜으며 벽을 통과한 그녀의 눈은 곧장 해먹 위에서 잠이 든 이한을 볼 수 있었다.

 

깊게 잠든 그였고, 그녀는 점차 이한의 몸에 손을 대었다.

 

위협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이려고 이러는 것일까?

 

쏴아아아!

 

일순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음산한 기운은 이한을 향해 퍼부어졌다.

 

안개와 같은 기운.

 

그 기운은 농염하고도 찐득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리는 어떠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

 

"눈을 떴나요."

 

"...."

 

"떴다면 날 봐요. 내가 바로 당신의 주인이니까요."

 

"...."

 

그녀는, 주디아 피에르는 평소와 완전히 다른 표정과 목소리에 물들어 있었다.

 

촤악!

 

변한 것은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분위기도 그러며, 짧은 머리칼도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자랑했고, 몸 이곳저곳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건강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여성답지 않은 몸이 좀 더 여성스럽고 농염하게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음귀(陰鬼)."

 

음귀, 혹은 서큐버스라고도 불리는 신비종족의 종족명이 연상되게 했고, 주디아 피에르는 유혹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몽마(夢魔)예요. 그런 저급한 생명체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절 받아들여요. 당신에게 행복을 선사할 테니."

"...."

"어서요. 당신이 저의 하인이 된다면 얼마든지 행복감을…."

"다 떠들었냐?"

"...왜 안 통하지?"

"야, 묻잖아."

"아, 아니 토, 통해야 하는데? 왜…. 혹시 남성성에 문제라도…?"

"...이 싸가지 없는 년이!"

 

빠아아악!!

 

"아아아악!!"

 

주디아 피에르의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실제론 깨지지 않았으나, 그 정도로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몽마의 육체로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온다.

 

그러나 그녀가 아파하건 말건.

 

"이년이! 사람 가슴에 대못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상태창 새끼가 염장질 하고 갔는데…!!!"

 

이한은 '극대노'했다.

 

감히 그의 역린을 건드린 계집애가 있고, 싸가지조차 없으며 불법 침입까지 했다.

 

이건 이제 정당방위였다.

 

"넌 오늘 잘 생각하지 마라!"

"…네에?"

 

이한은 방 한 구석에 새워진 거대한 도끼를 들었다.

 

그러며.

 

"도끼로도 사람 팰 수 있는 거 아냐?"

"아, 아니요?"

"그럼 보여줄게. 날 새도록 맞다 보면 알겠지."

"!!!"

 

 

그날 밤, 이한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도끼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패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줬고, 정말 날이 새도록 때린 것이었다.

 

장장 7시간.

 

 

주디아 피에르가 맞은 시간이었다. 

#147 EP-37 기사는 무도회가 싫어졌다(2)

신비종족.

그들은 한때 고대의 신들이 땅을 걷던 시절 특별한 힘을 부여받은 영웅의 후예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요정의 축복에서 태어난 종족이란 설도 많다.

 

신과 요정, 용.

 

거룩하고도 신비한 존재들에게서 비롯된 그들이기에 신비종족은 강하면서도 특별했다.

 

당장 드워프가 신비한 손재주를 타고난 장인이거나, 바다의 신비종족인 머메이드는 바다 속에서도 살 수 있는 체질이듯.

 

이렇듯 신비종족이란 이름 그대로 신비하면서도 만나기 어려운 이들임이 맞았으나, 이들을 만나기 어려운 데에는 신비종족이 소수 종족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문명사회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도 있지 않을까 추측되었다.

 

자칫 문명사회로 나왔다가 노예로 팔려갈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신비종족들은 문명사회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신비]가 친숙한 남부 대륙에 유학하는 형식으로 가끔 나타날 뿐, 다른 대륙에선 그 존재조차 동화 속 존재 취급받으며 실존여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남부 대륙에도 가끔 나타날 뿐이지, 보기 쉽다는 뜻은 아니었다.

설사 신비종족을 만난다고 한들 신비종족을 알아볼 확률도 낮다.

 

바바리안만 해도 덩치와 완력이 좋을 뿐, 보통 사람과 똑같이 생겼듯이 다른 신비종족 또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리라.

 

그러나….

 

"…지, 진짜다! 지, 진짜 신비종족이 나타났다…!"

 

데미안 폴렛은 경악했다.

 

허공을 유영하며, 등에는 박쥐의 날개 같은 것이 있다.

눈은 붉고 머리칼 또한 의지를 가진 듯이 움직인다.

 

거기다.

 

'저토록 매혹적인 분위기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몽롱해지는 아찔한 향기가 맴돌아 당장에라도 굴복하고 싶다.

사내라면 저항 못할 '마성(魔性)'이 아닐 수 없었고, 누구라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당연한 수순일 터인데….

 

"와, 이렇게 팼는데도 안 죽네? 신기하다, 너."

"사, 살려주세요, 아, 아니 그, 그만 때려주세요…."

"목을 자르면 죽냐? 아니면 불로 태우면 되나? 그것도 아니면…."

"히이이익!"

"…겁먹긴, 안 죽여, 인마. 그냥 예시를 들어본 거야."

"...."

"흠, 그래도 태우면 죽긴 하는 거 맞지?"

"사, 살려주세요...!"

"그렇구나, 불로 태우면 죽는 거구나. 좋은 거 알았네."

"허어엉!!"

 

서럽게 우는 몽마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장장 7시간을 팼으면서도 분이 안 풀리는 기색이 역력한 기사는 짜증 어린 기색을 보이며.

 

"뚝 그쳐. 진짜 횃불이랑 기름 가지고 오기 전에."

 

"...."

 

'진심을 담아' 협박했고, 몽마는 울음을 뚝 그쳤다.

 

여전히 몸은 부들부들 떨렸으나.

 

'…살고 싶긴 한가 보네.'

 

데미안 폴렛은 그 신기하면서도 잔혹한 광경에서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괜히 저기 끼어들었다간.

 

'내 명줄만 줄어들지.'

 

대체 몽마는 어디서 튀어나왔고, 왜 팼는지 심히 궁금하지만 데미안은 그 모든 궁금증을 가슴 속에 묻었다.

 

괴물의 밑에서 조교로 생활하기 반년.

 

눈치를 기르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기르게 될 수밖에.

 

조교는 교관의 밭에 난 잡초나 뽑으러 가기 위해 곡괭이를 챙겼다.

 

 

파란만장한 어느 일요일 주말 아침의 일이었다.

 

* * *

 

'이 녀석 정체가 신비종족이었군.'

 

그것도 몽마.

꿈을 조작하며, 남자의 정기를 먹고 산다는 종족.

흔히 서큐버스를 연상케 하는 종족이 아닐 수 없었고, 신비종족 중에서도 흡혈귀나 마녀처럼 배척받기 일쑤인 종족 중 하나였다.

 

'라파엘 영감이 이래서 불쌍한 애라고 했었나?'

 

왠지 노신부가 다른 사제들에겐 '형제'라고 부르는데, 주디아 피에르에겐 '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공식적이지만, 신전은 아직 신비종족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으니까.

한데 다른 종족도 아니고 몽마?

 

이건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며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농담이 아니라, 이놈이 심문 당하겠지.'

 

이단 심문을 당할 대상은 이놈이 되리라.

 

또한.

 

"…그래서, 너 누구냐?"

"…네에?"

"내가 아는 빨강이는 네가 아닌 것 같아서 묻는 거다."

"...."

"그럴 줄 알았다."

 

…심문 당한다 할지라도 억울할 게 없다는 것이 문제일 테지.

 

특성 초감각.

상태창에 의하면 신비에 가까운 감각을 갖게 해주는 이한의 특성이며, 이러한 초감각은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이한에게 전해주었다.

 

전날 공작과 수양녀를 보고 부녀관계임을 알게 됐듯, 이한의 감각은 주디아 피에르의 정보를 접하며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외형이나 말투, 성격도 물론이지만. 사소한 습관이나 떨림, 목소리의 어조와 손을 쓰는 법까지. 거의 대부분 달라.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그, 그걸 다 알 수 있다고요?"

"딱 봐도 보이니까."

"…혹시, 평소 저한테 호감이라도 있으셨나요?"

"끔찍한 소리 하는군. 더 처맞고 싶나 보지."

"아, 아니요! 저, 절대로 아니에요…!"

 

비명처럼 부정하는 그녀는 곧.

 

"너,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 서, 설마 '피에르'와 '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거든요."

"…흠."

"다, 다시금 소개할게요. 저, 저는 '주디아'에요. …피에르와 영혼과 몸을 공유한 또다른 '인격'이기도 하고요."

"…거 복잡하게도 말하네."

 

이중인격이란 간편한 설명을 놔두고.

 

* * *

 

주디아 피에르.

아니 '주디아'란 이름을 가진 '인격'은 입을 열었다.

 

"몽마란 종족은 신비종족 중에서도 악마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종족 중 하나예요. 저로선 억울한 노릇이지만, 몽마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정기를 뽑아 먹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는 종족이죠. 그러니 배척 받는 것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맞는 말이군."

"이, 이럴 때는 불쌍하다면서 위로해줘야 하는 게 정석이 아닐까요?"

"정기 빨아 먹힐 뻔한 당사자한테 위로가 나올 것 같냐?"

"…해, 해를 끼치진 않아요. 먹는다고 해도 약간 피로를 느끼는 게 다인데…."

"네 말은 부자한테 돈이 많으니까 조금 가져가도 손해는 아니라고 말하는 도둑이랑 같은 원리인 거다, 이 망나니 계집아."

"어, 어쨌든요!"

"…뻔뻔한 계집일세."

 

주디아는 뻔뻔하게 제 설명을 이었다.

 

"모, 몽마는 말이죠, 마녀처럼 우연스럽게 인간의 배를 빌어 태어나는 종족이에요. 마녀랑 다른 점이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선대 마녀들의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마녀들과 달리 몽마는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어느 날을 시점으로 자기가 몽마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원래…."

"인간 사회에 섞여 있다가 사고라도 쳤나 보지?"

"아니요, 납치당했어요."

"...."

"신비 종족만을 납치하는 세력이 있었거든요. 그 세력에게 납치당해 세뇌도 당하고 피도 뽑혔죠. 그러다 너무 아파서 저라는 인격체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태어난 게…. '피에르'였어요."

 

- 아마 제가 몽마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

 

나지막한 그녀의 뒷말에 이한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사연에 동정심을 품어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갈라하드 그 양반이 말한 게 영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겠는데?'

 

'신비종족을 납치하는 세력'이란 것이 심기를 강하게 건드려서 그러는 것이지.

 

이한의 직감은 그 세력이란 놈들이 혈교 짝퉁과 무조건 관련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 * *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네가 너무 아파서 대리로 아파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인격을 만들었다 이거군."

"…그럼 제가 너무 쓰레기 같지 않을까요?"

"...맞지 않나?"

"...."

 

…부정하고 싶은 얼굴이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표정.

 

누군가는 저 요염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홀딱 넘어가 주디아를 위로해주려 할 테지만, 이한에겐 통하지 않을 신비함에 불과했다.

 

도리어 그의 관심사는.

 

'피에르라고 했나, 그래서였군.'

 

이한은 자신과 싸우고, 질 것 같으니 바로 총구를 미간에 겨눈 미친놈을 떠올렸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 그를 말이다.

 

'만들어진 인격이라….'

 

확실히 삶의 허무함이 깃들 법도 했다.

하지만 불쌍하긴 해도 주디아의 비겁함을 욕하진 않으리라.

 

그도 그럴게.

 

'…나라도 할 수만 있었다면 만들었을 테니까.'

 

- 아파, 너무 아파….

 

- 엄마….

 

- 사, 살려주세요! 살려줘요!!

 

이한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세 살 밖에 되지 않았을 시절, 부모가 그를 노예로 팔아 마법사에게 팔린 시절의 일을.

 

또래의 아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칭얼거리고 죽는 이들이 즐비했다.

 

옆에서 대화한 아이가 하루아침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참으로 어두웠었다.

 

얼마나 더 이런 고통 속에서 발버둥 쳐야 하냐며 이한은 분노마저 했었다.

 

-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런 말을 되풀이했었지.

 

- 이럴 거면,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세상 모든 게 다 원망스럽고 싫었다.

 

그러며.

 

'차라리 나 대신 고통을 받아줄 분신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상상은 해봤었지.'

 

막상 쓰레기라 욕했지만, 이해 못 할 의견은 아니었고, 이한은 남몰래 쓴웃음을 감추었다.

 

타인의 앞에서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기에.

 

"…저도 정말 생길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새로운 인격이 생겨서, 그 인격이 제 몸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고요…."

"인격을 만드는 것도 몽마의 힘인가?"

"그, 그렇지 않을까요?"

"…네가 모르면 어떻게?"

"…저 말고 다른 몽마를 본 적이 없어서요."

"...."

"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주디아 피에르…. 아니 주디아의 인격은 솔직히 경박했고, 자신보다 약자에겐 한없이 오만하지만 강자에겐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여 이한은 확신했다.

 

'저거군, 저게 그 녀석이 말한 [악녀]인 거야.'

 

3대 악녀 주디아 피에르.

원작이니 게임이니 하는 것에 나오는 인물이자, 검둥이 녀석을 그토록 분노케 한 본체가 다름 아닌 저것임을 이한은 내심 확신했다.

 

어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야, 이제 와서 좀 뒷북이긴 한데, 너 왜 나 덮치려고 했냐?"

"네에? 그, 그게…."

"화 안 낼 테니까 말해."

"…그냥, 정기가 필요한데, 기왕이면 정기가 왕성한 남자의 정기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개년일세."

"너, 너무해요…."

 

봐라, 양심 따윈 뒈진 계집이 아닌가.

 

 

이한은 이 어둠의 빨강이가 이단 심문당해도 할 말이 없을 거라 장담했다.

#148 EP-37 기사는 무도회가 싫어졌다(3)

신내림이 내리듯 그는 확신했다.

 

이 몽마가 미래의 검둥이를 엿 먹였을 장본인이라고.

 

논리적인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보고 있노라면 왠지 알 것 같다.

 

'이런 게 악녀의 새싹이지.'

 

양심이 뒈진 행동력이나, 뻔뻔스러움.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인격마저 만드는 이기적임.

그리고 저기 산이 있어서 오른다는 명언처럼, 정기가 있으니 먹는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당당함까지.

 

이기적이고 뻔뻔하며 자기가 하는 일을 모두 합리화시키는 자세.

 

그야말로 흔히 로맨스 속에 등장하는 악녀의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야 그냥 악녀의 자질이 있을 뿐이지만, 저기서 더 싸가지가 없어지면….'

 

지금은 솔직히 말해 그냥 약간 악질적인 수준에 불과하여 '장난 수준'으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저러한 악질적인 부분이 숙성되어 한 5년만 지나도.

 

'짐승 한 마리 탄생하는 거지.'

 

이는 단순히 직감이 아니라, 교관이 되어 생도들을 가르치니 알게 된 부분이다.

 

예시로 들자면 조교1호.

태창이 녀석이 그러길 원래 조교1호 녀석은 악녀 버전 마법사 병아리를 도와 악질적인 행각을 벌인 놈이라 들었다.

저놈이 만약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원작과 마찬가지로 양아치나 됐겠지.

 

이처럼 싸가지 없는 부분을 엄하게 꾸짖을 교육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생도들에게 큰 기로가 된다는 뜻이었고, [사랑의 매]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나 어릴 적처럼 촌지 안 주고, 부모 없다고 때리는 교사 새끼처럼 되면 안 되겠지만.'

 

가르치는 제자가 삐뚤어지고 안 좋은 길로 빠지거나, 예의를 빌어 처먹을 때 드는 게 사랑의 매이지,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매는 그냥 폭력이고 분풀이일 뿐이다.

자신들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한 저열함의 상징이기도 했고.

 

하여 이한은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사명감을 느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짐승이면 안 되지.'

 

지금밖에 없으리라.

이런 막돼먹은 것을 사람으로 만들 기회는.

 

어릴 때 개과천선시켜야지, 머리 다 굳은 어른들은 절대 개과천선이 안 되더라.

 

그가 인생에서 얻은 교훈이 아닐 수 없는 바.

 

"주디아라고 했나."

"…네."

"오늘부터 넌 학술원 편입생이다."

"네에?"

"또한 오늘부로 너의 지위는 영구적으로 인턴을 유지할 것이며, 내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 너에 대한 교육은 계속될 것을 알아둬라."

"…네에?"

"알아들었으면서 왜 계속 네네 거려! 대답은 한 번만 하는 거다, 알았나!"

"네, 네에!"

"…어휴, 가르칠 게 많을 것 같군."

"???"

 

주디아는 여전히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는 얼떨결에 [영구 결번]을 받은 최초의 인턴이 되었다.

 

...몽마인 주제에 앞으로 평생토록 두고두고 악몽에 설치게 될 고난과 역경의 서막이었다.

 

*

*

*

 

정확히 오후, 그러니까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주디아가, 아니 '피에르'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왜 죽이지 않은 거지?"

 

"?"

 

"그 짐승은 당신에게 무례를 범했다. 죽여도 되었다 이 말이다."

 

"너…. 수치심이란 게 있긴 했구나?"

 

"!!"

 

피에르의 인격은 기본적으로 무감각한 사내놈과 같았다.

무뚝뚝하고,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차갑다.

세상 뻔뻔하고 제 감정에 솔직한 주디아완 전혀 다른 인격체.

아무리 이중인격이라도 저토록 극명하게 갈리는 걸 보면, 몽마란 존재가 확실히 특이한 종족인 건 분명하리라.

 

"어둠이를 진짜 싫어하는구나."

"혐오스럽도록 증오한다."

"어쩐지, 죽을 명분만 있으면 자결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었네."

"...."

"됐고,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그 어둠이도 깨어 있는 거냐?"

"…그건 아니다. 몽마란 일족은 흡혈귀처럼 야행성이지. 낮에는 거의 잠에 들며, 나라는 인격이 정신만 잃지 않는다면 절대 일어날 일은 없다."

"그럼 지금은 잠들어 있는 상태란 거네?"

"그렇다. 다만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에 나와 무슨 대화를 하든, 그 짐승은 다 알 것이다."

"으음, 그래서 수치스러워하는 거군. 기껏 숨긴 비밀이 다 탄로 나서."

"...."

 

이 목석과 이토록 대화를 길게 한 건 처음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피에르는 말이 많았다.

그만큼 흥분해 있다는 것이겠지.

 

'그럴 만도 하고.'

 

들어보니 피에르란 인격은 그녀 대신 고문과 실험을 받기 위해 태어난 인격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통과 함께 했을 터이니, 성격이 저런 것도 당연한 노릇일 터.

 

증오심이 타르 덩어리마냥 꽉 막혀 있으리라.

 

약간 안타까운 녀석이다.

 

다만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근데 넌 어떻게 신성력을 쓰냐? 신비종족 대부분은 신성력을 못 쓰는 걸로 아는데?"

 

한 사람 안에 어떻게 두 개의 신비가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들어보지 못한 케이스였기에.

 

"...나라는 인격은 몽마의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답변을 늘어놓으리라 여기진 않았는데, 뜻밖에도 놈은 순순히 진실을 털어놓았다.

제 처지를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어둠이를 두들겨 패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일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짐승은 신성력을 쓰지 못하지. 나와 짐승은 별개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신의 은혜이자 자비로움이 아닐 수 없는 바."

"흠."

 

…아니면 자랑하는 건가?

 

난 짐승이랑 완전히 별개의 인물임을?

 

'…그런 거면 좀 유치한 녀석, …아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애써 녀석의 자랑을 넘긴 이한은 그의 얘기를 들으며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 것들이 있었다.

 

왜 저 목석 놈이 사제가 되었고, 광적이게 신을 따르는 이단심문소에 들어갔는지 말이다.

 

'신성력이야말로 자신이 몽마가 아닌, 별개의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수단이니까.'

 

몽마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만큼, 자신이 신실한 자임을 끊임없이 알리고 싶은 몸부림….

그러한 치열함이 약간은 느껴진다.

 

…복잡한 가치관이지만, 그래도 이해는 간다.

 

그렇기에.

 

"그 증명을 위해 넌 어떠한 추잡한 일이라도 하겠군. 넌 결코 신전에서 나갈 수 없을 테니까. 설사 은인을 배신해도 말이야."

"...."

 

이놈은 무슨 일이든 하리라.

신전에 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자신이 설령 만들어진 인격일지언정, 신전에 있는 한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길 테니까.

 

해서 이 녀석은 비호감이다.

 

그도 그럴게.

 

"널 구해준 게 라파엘 영감이라지?"

"…그렇다. 추기경께는 감사한 것이 많다. 날 신전에 데리고 와주신 분이니까."

"근데 그 은인은 놀처럼 무시하고 날 공격한 거네? 고맙다, 널 두들겨 팬 게 전혀 후회스럽지 않게 해줘서."

"변명은…, 하지 않겠다."

 

웃긴 발언이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변명할 말이 없는 거겠지. 그래도 충고 하나 하마. 네가 자결을 하든, 아니면 광신도를 믿건, 라파엘 영감을 배신하건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어차피 네가 짐승이라 부르는 그 녀석이나 너나 내 눈에는 똑같이 개념 없는 종자들이니까."

"-!"

 

드디어 표정이 일그러진다.

몽마와 본인이 똑같은 종자란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한 모욕으로 다가온 것일 터.

제3자의 눈에는 몽마나 배신자나 다 끔찍한 놈에 불과한데.

 

저런 게 범죄자 마인드겠지.

 

'한 놈은 양심 없는 악녀의 새싹이고, 또 한 놈은 검은 머리, 아니 빨간 머리 짐승이네.'

 

이쯤 되니 노신부가 불쌍하다.

어쩌자고 이런 은혜도 모르는 이중인격자를 받아들여서 사서 고생 중일까?

 

"똑같은 취급 받으니까 울컥하네? 긁혔냐?"

"...."

"그런 거면 다행이고, 긁히라고 한 말 맞으니까. 어쨌든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야. 내가 궁금한 게 있어."

"…내 호칭은 그렇게 되는 건가?"

"말 끊지 말고, 널 비롯해 신비종족을 납치했다는 세력 말이다. 그것들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아냐? 그놈들한테 약간 관심이 생겨서."

"...."

 

이한은 이놈이 앞으로 어떻게 살건 관심은 없었다.

어찌 됐건 제 주위에 있을 때 잘못하면 그때는 매를 들면 되는 것이니까.

 

독립하고 나서 사고를 친다면 그때는.

 

'매 대신 검을 드는 거지.'

 

간단하게 가면 되는 거다.

 

그러니 그의 현 관심사는 신비 종족을 납치했다는 놈들이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 이미 10년 전 일이며, 그 당시 난 많이 어렸으니까."

"됐고, 기억을 좀 떠올려봐. 너를 실험한 놈들의 얼굴이나 특징, 아니면 시설의 구조든 뭐든."

"…보통 그런 걸 피해자에게 물어보나?"

"다른 놈들한텐 안 하지. 그런데 너흰 이단 심문하는 놈들이잖아? 사람 고문하는 걸 숨 쉬듯 하는 놈들한텐 이런 질문해도 돼."

"우린 이단 심문관은 배교자를 처벌하는 자들이지, 미친 자들이 아니다."

 

이단 심문관을 변호하는 피에르였고, 자신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려고 그러는 것 같았으나….

 

"원래 미친놈들은 자기가 미친 걸 모른다고 하지."

"...."

"빨리 기억나는 거나 말해봐."

"…이제 보니 그대는 기사가 아니라 이단 심문관을 해야 했다."

"난 마음이 약해서 그딴 거 못 해."

"...."

 

...피에르는 처음으로 서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 * *

 

'기억 안 나긴.'

 

녀석은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는 것치곤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주었다.

타고나길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몽마의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기억력이 상당히 좋다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10년 전 기억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도 용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스읍, 이번에도 주문쟁이가 끼어 있네.'

 

위법 마법사.

이한이 극도로 혐오하는 부류이자, 만났을 경우 가차 없이 머리부터 깨버리는 인종들.

신비종족을 납치하여 실험을 벌인 놈들이 그러한 인종들임을 확인하며 이한의 머리는 평소보다 빠르게 회전했고, 피에르가 준 정보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라파엘이 위법 마법사의 시설을 덮쳤으나, 살아남은 건 오로지 빨강이 한 명뿐이고, 나머진 사망. 위법 마법사는 도망갔다, …라.'

 

여기서 중요한 건 주문쟁이가 도망갔다는 사실이며, 이놈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주문쟁이란 놈들은 다른 건 몰라도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게 끈질기기에.

 

'생김새는 대략 이렇단 거고?'

 

이한은 배신자 빨강이 녀석이 언급한 정보를 토대로 직접 '몽타주'를 그렸다.

어설프지만 그래도 특징적인 부분은 다 들어간 그림.

유일한 증거였고, 이걸로 뭘 할 수 있나 싶겠지만.

 

끼익.

 

이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방에 덩그러니 있는 옷장을 열었다.

서랍장에는 옷이 거의 없었다, 대신 서랍장을 차지하는 건.

 

촤아아악!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 더미였다.

 

"…이것도 간만이네."

 

교관으로 발탁된 이후 반년 동안 열어보지 않은 것 같다.

 

'수배서'를 비롯한 '신문 기사'뿐이었는데, 대부분 [위법 마법사]나 [노예 상인]과 같은 이들에 대한 인상착의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그가 손수 모은 것이며, 지금은 쓸모없어진 것도 많았는데, 그 이유는,

 

"아, 이놈은 죽었지, 참? 이놈들도 죽었고…. 이놈은…. 아, 고블린 동굴에 던졌었지? 이놈은 어떻게 처리했더라…."

 

신문과 수배서의 내용 중 '1/3가량'이 그의 손에 의해 쓸모없어진 상태였기에….

 

어쩌다 보니 폐기할 것이 많았고, 이한은 대략 폐기할 내용은 폐기해가면서 서류를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평소 귀찮다고 청소를 등한시한 벌이 아닐까?

 

촤악, 촤악.

 

허나 이한은 진지하게 자료를 뒤졌다.

지금만큼은 눈이 날카롭기 그지없는 그였고, 대략 한 시간을 넘게 진득하게 자료들을 살피고 나니.

 

멈칫!

 

"-이거다."

 

이한은 15년 전 배포된 수배서 한 장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이미 사건은 종결되었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알려진 위법 마법사의 수배서였으나, 이한은 자신이 '직접' 죽은 걸 보지 않은 이상 소문이나 신문 내용 따위를 믿지 않았다.

 

주문쟁이란 것들은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어떻게든 되살아나는 바퀴벌레와 같으니 말이다.

 

그러니.

 

"조교야!"

 

이한은 찾아낼 따름이었다.

 

"부, 부르셨습니까?"

"당장 길드조합 가서 사이먼이란 놈한테 가서 이놈 좀 찾아내라고 말해."

"…예에? 사, 사이먼이요? 호, 혹시 길드조합장이신 그 사이먼 조합장님을 말씀을 전하라는 것인지…?"

"그렇다만?"

"...돌겠네."

"뭐가 문젠데."

"…저 따위가 어떻게 길드조합장님에게 정보를 요구합니까!"

"내가 시켰다고 그래."

"그럼 교관님이 직접 가셔야죠!"

"내가 지금은 좀 바빠. 뭐, 정 길드조합이 힘들면 다른 곳도 있다."

"지, 진작 말씀하…."

"갈라하드랑 팬드래건 중 어디로 갈래?"

"...."

"어디가 좋냐?"

"...그냥 길드조합 가겠습니다. 젠장 할…!"

"스읍! 주둥이!"

 

요즘 따라 입이 갈수록 걸걸해지는 조교1호를 보며 이한은 엄중히 꾸짖었다.

 

이놈은 어째.

 

'왜 갈수록 불량해지지?'

 

이래서 인성 교육이 어렵다고 하나 보다.

 

 

이한은 못난 조교를 향해 혀를 찼다.

#149 EP-37 기사는 무도회가 싫어졌다(4)

"벌써 점심을 드셨을까?"

 

따르릉.

 

하찮은 벨 소리를 울리는 자전거가 열심히 내달린다.

 

레비, 그녀는 오늘도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최근 매일 자전거를 이끌고 가는 익숙한 길.

어떻게 된 건지 원래는 울퉁불퉁한 길도 정비가 되어 있어 자전거 바퀴 또한 아주 잘 나아갔다.

 

덜컥.

 

그녀가 모는 자전거 바구니에는 제법 큰 도시락 통이 담겨 있었다.

직접 싼 음식이 한가득 담겨 있었으며, 트리스탄의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에게 요리도 약간 배운지라 맛도 나쁘지 않으리라.

 

"좋아해주셔야 할 텐데…."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정성.

 

허나 이 정성을 받고 기뻐만 해준다면 고생한 것이 보답 받고도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아는 그는 이런 정성을 받고 맛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었지.

 

"흠…."

 

이를 생각하자 약간의 홍조가 피어오르는 레비였고, 레비는 페달을 밟는 속도를 좀 더 높였다.

여려 보이는 외견과 달리 하루도 훈련을 빼먹지 않은 그녀의 신체는 겨우 30키로 속도를 한 시간 동안 유지한다고 해서 지치지 않았다.

 

연심을 품은 소녀는 강한 법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페달을 밟았을까, 슬슬 익숙한 오두막이 저 멀리서 보였다.

 

오두막이 보이자마자 한껏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레비는 그대로 속도를 높였다.

지금껏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건 지금 힘을 쓰기 위한 거였다는 것처럼.

 

한데.

 

"…응?"

 

레비는 눈을 끔뻑였다.

 

오두막 도착을 앞둔 3미터 부근에서 쓰러진 한 남성을 보고.

 

익숙한 윤곽이었고, 레비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쓰러져 있는 남성을 향해 다가갔다.

 

"데, 데미안 폴렛 조교님?"

"…."

"여, 여기서 뭐하세요?"

"…끄윽."

"…우, 우시는 거예요?"

"…나, 나만 인생 고달파, 나만 왜 이렇게 구르는 거야, 크흑…."

"…으음."

 

…아, 평소랑 똑같으시구나.

 

이미 익숙한 광경이라며 레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부님이 또 조교님을 [교육]하시는 중이구나.'

 

그녀의 교관과 데미안 폴렛의 관계는 이미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했다.

하루에도 매일 쉬지도 못하고 뛰거나 서류 작업만 하는 그의 행각은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도 소문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부럽다.'

 

레비는 그가 부러웠다.

 

저토록 사부님에게 '개인과외'를 받는 그가 말이다.

 

데미안이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면 미치고 팔짝 뛸 생각이 아닐 수 없지만, 그녀는 단순히 데미안이 그를 독차치하기에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냥 불합리하게 구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데미안 폴렛은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성장하셨네.'

 

데미안 폴렛은 안 그래도 검술학부 생도들 중에서도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생도였다.

 

원래도 명문 기사 가문의 후예일뿐더러, 명성에 걸맞은 수련을 통해 다른 생도들보다 확실히 수준이 높았으니 말이다.

 

이번 해에야 유독 천재 소리 듣는 비정상적인 생도들이 많아서 그렇지, 원래는 검술학부 수석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데미안이었다.

 

한데 그런 데미안이 사부님의 밑에서 굴려지는 것으로 인해 그의 성장 속도는 확실히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음이었다.

 

아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검은 머리 공자는 따라잡지 못할지언정, 그 삼인방 중 한 명을 따라잡을 날이 올지도 몰랐다.

 

'사람은 위기 속에서 강해진다고 하던데, 데미안 조교님도 그런 게 아닐까?'

 

사부님이란 위험을 감당하기 위해 강해지는 사람.

 

하루라도 빠르게 강해지고 싶은 레비에게 있어 데미안의 성장은 부러운 것이었다.

 

…본인은 지옥일 테지만.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아, 사부님!"

"곰순이 넌 또 뭐해?"

"아, 저, 점심이나 같이 먹으려고요, 호, 혹시 안 드셨다면요…."

"…그렇게 한가득 싸왔는데 내가 이미 먹었다고 하면 나만 역적 되겠지?"

"헤헤."

"웃기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안 먹었다. 화덕에서 피자나 좀 구우려고 했는데, 네가 싸온 거랑 같이 먹자."

"네에! 아, 근데 데미안 조교님은…."

"그 녀석은 놔둬. 엄살 부리는 거야. 요즘 따라 말을 안 들어."

 

사부님이 '점심 안 먹을 거면 네 건 없다'고 말하자 '너무하십니다, 정말….' 투덜거리며 일어서는 데미안이었고, 한편의 희극과 같은 상황에 레비는 저도 모르게.

 

"후후."

 

해맑게 웃고 말았다.

 

* * *

 

조교1호가 열심히 왕복하며 얻어낸 서류가 이한의 식탁 위를 차지했으나, 이한은 대충 종이를 펄럭거리며 읽을 뿐, 점심식사에 더 열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치즈가 쭉 늘어나는 화덕 피자와 레비가 만들어 온 쌀알 모양 파스타를 묵묵히 먹는 것이었다.

 

"너무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가지고 온 건데…."

"됐고, 이게 다냐?"

"…일단 거기서 가진 정보는 그게 다랍니다. 그리고 사이먼 조합장님이 '이 정도면 이제 좀 길드를 좋게 봐주시는 거겠죠?'라고 전해달라고 하시던데요."

"웃기는 놈이네."

"…사이먼 조합장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건 교관님밖에 없을 겁니다."

 

왕도의 길드를 이끄는 총수와 같은 사람을 저토록 부려먹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다.

 

그리고 교관의 명령을 순순히 따라주는 조합장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고.

 

'거물은 거물끼리 통한다는 건가?'

 

"그놈은 건방진 거랑 다르게 능력은 그저 그러네. 겨우 이것밖에 없다고? 이래 놓고 잘 봐달라니, 양심 없는 놈."

 

"음…."

 

…혹은 그냥 맞는 게 두려워서 강제로 따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데미안의 작은 예측이었고, 길드조합장에게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던 중, 데미안은 얼핏 그가 밥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도 그가 서류를 전체적으로 꼼꼼히 읽는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 교관이 직접 확인해야 할 서류를 주면, 놀랍도록 꼼꼼히 읽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에 알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엄청난 집중력이군.'

 

종이와 친하지 않은 양반인데, 드물게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마치 서류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듯한 살벌한 눈빛이 아닐 수 없는 바.

 

'집중하면 무조건 전투를 치르듯이 하네, 이 양반은.'

 

저래서 강한 것이려나?

 

문득 드는 의문이 떠올릴 때.

 

타악.

 

"역시 안 죽었네."

"?"

"아, 너한테 하는 말 아니야. 넌 밥이나 얼른 먹고 오늘 중으로 바질이랑 과일 나무도 심어야 하는 건 알지?"

"…교관님, 전 일꾼이 아니라 조교입니다만? 그리고 오늘 중으로 그걸 다 어떻게 합니까!"

"너 혼자 하라고 했냐? 인턴이 있잖아, 팍팍 굴려."

"아!"

 

…이 사람은 천재일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이성이 마비된 건지, 아니면 인턴을 합법적으로 굴릴 명분이 생겼다는 것이 그냥 기쁜 것인지 교관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큰 가르침을 얻은 데미안이었다.

 

 

 

 

 

조교 한 놈이 안 좋은 것을 배우건 말건, 이한은 상관없이 받은 자료를 토대로 머리를 굴렸다.

 

'이름 그렉 빈. 제국 마법 소속 마법사였으나 마탑에서 불법적인 실험을 한 이후 남부 대륙으로 도주. 원래는 브리튼에서 활동했으나 전쟁 시절 붙잡혀 처형된 것으로 확인.'

 

허나….

 

'처형된 시체는 같은 감방 죄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발견됨. 주특기 마법은 얼굴의 가죽을 교환하는 마법이었기에 죄수와 자신의 얼굴을 바꾸어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음.'

 

얼굴의 거죽을 뒤바꿀 수 있다.

인피면구의 달인이란 대목에서 이한은 이놈이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별했다.

하며 점차 놈이 저지른 불법적인 실험 내용 또한 확인해 보자….

 

'[신비]를 이식(移植)하는 방법.'

 

타인의 신비를 '적출'하여 본인에게 옮긴다.

신비를 적출당한 대상은 죽으나, 신비를 보존하고 영구히 존속시킬 수 있으니 군사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되며, 왕가의 권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는 것이 그렉 빈이란 주문쟁이의 주장이었다.

 

"…놀보다 못한 새끼네."

 

이한은 이놈의 논리를 읽으며 비웃었다.

 

역시 주문쟁이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결국.

 

'남이 가진 재능이 부럽고 아니꼬우니 그 재능을 빼앗을 방법을 연구해서 갈취하겠다는 거잖아, 결국. 이 새낀 확실히 흑도나 혈교 새끼 맞다.'

 

흔히 무협지에서 구음절맥이나 오행지체 같은 거 나타나면 납치해서 그 힘을 흡수하는 내용이 가끔 있는데, 주문쟁이의 말도 이와 비슷했다.

 

남을 죽여 힘을 얻겠다는 논리가 아닌가?

 

'남의 고혈이나 빨아먹는 짐승보다 못한 새끼가─.'

 

이한은 만약 그렉이란 놈이 제 눈앞에 있었다면 반드시 죽였을 것이라며 안광을 빛내었다.

 

"제국 놈이라…."

 

이한은 녀석이 과거 [제국 마탑] 소속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마탑.

듣기론 중앙 대륙에만 존재하는 마법사들의 상아탑이라지?

 

'지랄하고 자빠진 거지.'

 

상아탑이란 고상한 용어를 쓰지만, 결국 주문쟁이들의 모임이다.

이한으로선 몹시도 불쾌한 흰개미굴을 발견한 거슬림밖에 못 느끼겠다.

 

또한 마탑이란 놈들도 몹시 수상했다.

 

'결국 마탑도 이런 실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런데도 이놈을 놓쳤다고? …그 정도로 무능한 집단이 어떻게 존속할 수가 있지?'

 

...아.

 

'백색 고양이들이 있지, 참.'

 

백은사자랑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어 잠시 마탑의 무능함을 납득할 뻔했지만, 이한은 의심을 놓치지 않았다.

 

의심이 드는 거 당장 마탑이라도 조사하고 싶었으나, 중앙 대륙까지 갈 시간이 있을까….

 

"잠깐, 내가 안 가도 되지 않나?"

 

분명 언뜻 들은 내용이지만, 분명 마탑에서 누가 온다고 들은 것 같다.

 

…분명 그 이유가-.

 

"교관님~!!"

 

"...."

 

"헤헤."

 

"…이웃 병아리 녀석, 생각보다 쓸 만하네."

 

'저걸' 만나러 오는 거라고 했었나?

 

오후를 넘겨서야 기상한 것으로 보이는 이웃집 병아리가 해맑게 날아오고 있었고, 이한은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다름 아닌.

 

"곰순아."

"네, 사부님."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마탑 주문쟁이를 납치하는 건 범죄인가?"

"...네에?"

 

정의로운 도둑질, 아니 여기선 정의로운 납치려나?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어어…, 그, 그럼 그냥 물어보면 되지 않나요? 납치를 할 게 아니라…."

"그건 아니지."

"?"

"주문쟁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답해 줄 리가 없잖아?"

"...."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내뱉었는데도 불신에 차오른 제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미어진다.

 

이 순진한 것.

아직 세상을 덜 겪어서 저런다.

 

"네가 확실히 아직 사회경험이 부족하긴 하네. 이런 당연한 것도 모르는 걸 보니."

"…으음, 제가 이상한 걸까요?"

"그건 아니고,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런 거야."

 

주문쟁이를 다루는 법을 말이다.

 

"이번 기회에 가르쳐주마."

"…??"

 

그는 제자에게 새롭게 가르칠 것이 생긴 것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도.

 

'실전이 최고의 사회경험이긴 하지.'

 

 

설명이 아닌, 몸으로 경험시켜줄 기회인 것이 마음에 드는 이한이었다.

#150 EP-37 기사는 무도회가 싫어졌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