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EP-39 두 남자는 끝까지 간다(3)
이한의 [거짓말 탐지 기능]은 아이시스도 인정하는 능력이다.
그의 청각은 심장 소리를 잡아내며, 촉각은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을 잡아낸다.
후각과 미각은 땀 냄새뿐만 아니라, 미세한 거짓의 냄새, 그러니까 호르몬의 변화마저 미세하게 캐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시각은 사소한 근육의 이완과 동공의 수축, 그리고 몸의 잔잔한 떨림마저 감지한다.
끝으로 육감은 총체적인 판단력과 결정에 도움을 준다.
이렇듯 이한의 거짓말 탐지 능력은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내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말로 하는 게 쉽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건 극도로 어려웠다.
감각 전부를 동원하여 정보를 읽어내는 행위이다 보니, 쌓이는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상당하였기에.
자칫 남용하면 머리가 핑 하며 도는 경우도 있을 따름이었다.
거대한 힘은 그에 걸맞은 대가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걸지도?
하여….
"첫 번째 질문이다. 마탑에서 쫓겨난 마법사의 생사유무를 안다면 그들의 위치추적도 가능한가?"
"...."
휘적, 하고 누렁이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안 된다는 듯.
찌릿.
…일순 약간의 땀 냄새와 비릿한 느낌이 났다.
"그래, 가능하구나."
"!??!"
"두 번째 질문이다. 그럼 그 위치추적은 지금도 가능한가?"
"...."
"흠…."
누렁이가 묵비권을 행사한다.
처음 거짓말을 표현하며 이한의 탐지 능력을 확인한 것일 터.
역시 주문쟁이답게 영악한 짓을 저지른다.
더는 반응해주지 않겠다는 각오마저 느껴지는 굳건함.
난감한 상황임이 분명하지만 이한은,
"그래? 가능하구나."
"!!!"
놈이 묵묵부답하든 상관이 없었다.
육체의 반응이란 건 단순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사 답변이 없을지언정 체취의 미세한 변화와 심장의 박동, 그리고 근육의 잔잔한 떨림과 동공의 확장, 숨소리를 통해서 얼마든지 많은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그 정보를 조합하여 확신으로 바꾸는 것은 육감이었고, 이 육감을 다른 이름으로 하면 '판단력'이라 이름붙이면 되리라.
3년, 아니 어떻게 보면 그의 인생의 절반 이상은 주문쟁이와 연관되어 있었고, 그들과 싸우는 데 할애했다.
싫은 만큼 잘 안다고 했던가?
전생의 연예인을 까는 안티는 자기가 싫은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까기 위해 유명인 전문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한은 마법사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고 싫어하는 '안티 오브 안티'다.
마법사의 인성을 판별하는 감별사이자 전문가로 불려도 무방한 그이기에.
'-난 틀리지 않았다.'
이한은 자기 암시를 걸듯 자신이 얻은 정보와 판단력을 굳게 믿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내가 이 세상 최고의 마법사 감별사다', -란 확신과 함께.
그렇게.
"마탑은 위법 마법사와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고 있는가?"
"위법 마법사들을 감시하고 추척, 혹은 연락하는 장치가 마탑에는 있는가?"
"네놈이 왕국으로 온 이유는 아이린 윈들러를 만나기 위해서만이 아닌, 위법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도 있는가?"
"아이린 윈들러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나?"
"왕국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려고 하는가?"
"제국과 마탑은 팬드래건을 공격하려는 건가?"
무수한 물음표의 향연.
주륵….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며 머리도 약간 지끈거리는 이한이었지만, 그는 묻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광기에 가까운 집념.
어떻게든 마법사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아니 '모든 걸' 알고 말겠다는 집념이었다.
"…으, 으으…!"
누렁이, 휴이 드 베이런은 공포에 떨었다.
상대가 가진 가공할 만한 집념과 광기, 마법사에 대한 살의가 그를 공포에 젖도록 만든 것이다.
마치 마법사의 근본마저 파멸시키겠다는 각오가 엿보였고, 휴이 드 베이런은 이러한 기세 앞에서 결국,
"끄으으…."
털썩…!
그대로 눈이 뒤집히며 기절하고 말았다.
"…새끼, 엄살은, 내가 더 죽겠구먼."
입에는 거품마저 문 것이 약간 과정스러운 혼절처럼 보였다.
이한은 두통 때문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 머리 아파 죽겠는데, 얌전히 조사나 받는 놈이 왜 갑자기 눈이 뒤집히며 기절하는가 싶었다.
하여튼 주문쟁이답게, 정신력이건 육체건 다 허약한 놈들다웠다.
이한은 그렇게 아이스커피를 비롯하여 밀크 티마저 몽땅 마셨다.
미치도록 갈증이 치솟았기에.
그때, 카페 안에 있던 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방금 전만 해도 평범한 주부나 인부, 아르바이트 하는 아가씨로 보이는 이들이 전원 다 웃거나 대화하는 것을 멈춘 것이다.
그리곤.
"...저 같아도 기절할 것 같군요. 아니 도리어 기절로 끝난 게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남자가 걸어왔다.
피곤에 찌든 것 같은 얼굴의 남성이었으나, 눈만큼은 고요하면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제법 거물 분위기가 나는 남성이었다.
이한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그에게 담담히 감사를 표했다.
"고마웠다."
"아닙니다,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이한 경."
팬드래건 길드 조합장 사이먼.
오늘 이 카페의 손님과 직원까지 전부 고용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값은 나중에 치르지."
"하하, 정말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이제 슬슬 자리를 이동하시길 바라죠. 길드 소속 병사들이 다른 병사들이 이 카페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을 테니."
"…그래."
이한은 그 말을 끝으로 혼절한 마법사를 짊어진 채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갔다.
급할 것 없다는 여유로운 발걸음과 함께.
그리고 사라지는 그를 끝까지 바라보며 사이먼은.
"…정말이지, 무서운 양반이야."
사이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마법사를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았다.
지독하다?
아니, 지독함을 넘은 무언가다.
흡사 뜨거운 불길을 보는 것 같았고, 마법사는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만약 사이먼이 그의 앞에서 저러한 심문을 받았다면 장담하건대 1초도 못 견디고 그대로 혼절하거나 오줌을 지렸으리라.
그 정도로 무서웠다.
차라리 귀신이나 악령이 더 귀엽게 여겨질 따름.
"후우, 저 사람과는 정말 친하게 지내야겠어."
한번 적이 되어봤기에 그 지독함을 알게 됐고, 알면 알수록 더욱 공포스러운 양반.
사이먼은 제 인생에서 최고로 무서운 양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 사람을 꼽을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 * *
우물우물.
카페를 나오며 이한은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시녀님이 전해준 점심 식사였다.
"…맛있네."
역시 시녀님이다.
집안일은 못해도 음식 솜씨는 훌륭했고,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한 끼였다.
후우!
정성이 가득 담긴 식사를 섭취한 덕분일까.
과도한 감각 탐지로 인해 지친 심신이 약간은 회복되며 이한은 몸을 풀어주었다.
느낌상 앞으로.
'반나절, 아니면 최소 3시간만 쉬어주면 회복되겠네.'
어느 정도 회복시간까지 칼같이 염두하며 이한은 가볍게 쉴 수 있는 장소를 찾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검둥이? 아니면 소심이 아지트?'
제자를 잘 둔 덕인지 잠시 휴식을 취할 곳은 제법 많았다.
'아님 둘 다 얼굴이나 좀 보자고 할까?'
몸도 숨겨야 하지만, 두 놈에게 물어볼 것도 있다.
과연 회귀 전이나 게임 스토리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하는 의문….
그 의문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만약 원래는 일어나지 않던 일이었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를 알아보아야 함이 타당하겠지.
그렇게 이한이 선택지를 고르려 할 때.
멈칫.
"...."
…돌연 새로운 선택지가 등장하며 그는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포대기로 감쌌지만, 아무래도 눈에 띄는 물건(?)이 있기에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하는 이한이었다.
한데 정확히 그의 맞은편에서 그를 바라보는 어느 사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얼굴 자주 본다? 전혀 안 반가운데."
"이하동문이다."
라크 드 듀론.
이상하게 기억력이 나쁜 이한이 한 번 듣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름을 가진 갈라하드의 기사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너 상대해줄 시간 없다. 나도 바빠."
그러나 놈이 있건 말건 상관하지 않으며 거침없는 걸음걸이를 보이는 이한이었고, 그를 무시하며 지나치려 하자,
"'갈라하드의 안가(安家)'가 이 근처에 있다."
"...."
"휴식이 필요한 상태로 보이는군, 그렇다면 우리 쪽 안가가 적당할 것이다. 약수(藥水) 온천마저 있는 장소니까."
"크흠…."
답지 않게 수작질을 부리는 녀석이었고, 이한은 침음을 삼켰다.
안 그래도 간절한 휴식이 필요한 그였는데, 온천이 언급되니 크게 흔들린다.
알고 제안한 건지 모르겠으나, 그의 취미 중 하나가 온천이었으니까.
그리고 녀석은 추가타를 가하듯.
"추가로 고품질의 우유와 아이스크림도 있다."
"참 나,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거에 넘어갈까. 어이가 없어서…."
이한은 마지막 혜택을 자랑하는 것 같은 놈의 발언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 세상에서 고품질의 우유나 아이스크림의 가격이 천문학적이고, 천문학적인만큼 그 맛이 엄청나게 풍부하면서도 건강에도 좋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 한들 애도 아니고 저런 제안에 넘어갈 리가 있는가?
이놈도 언변이 수려한 놈은 아니다 싶으며 이한은….
"뭐해, 앞장서야지?"
"...."
"왜?"
…그는 결코 온천이니 고품질 아이스크림에 넘어간 게 아니었다.
그저 어린 제자들에게 모양 빠지게 손을 벌리는 것보다, 돈 많은 부자를 털어먹는 게 양심에 덜 찔리기 때문일 뿐.
그러니 찔릴 건 어디에도 없-.
"침이나 닦아라, 무뢰배."
"...."
…거, 이런 건 못 본 척해줘야 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이거늘.
#161 EP-39 두 남자는 끝까지 간다(4)
…금발 머리 마법사, 휴이가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심장이 덜컥거리는 흉흉한 안광이었다.
"…흐읍!"
안 그래도 이름 모를 기사에게 숨이 조여지듯 강렬한 고통과 압박에 시달린 그였거늘,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렇게 다시금 살벌한 흉안을 마주하니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질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썩어도 마탑의 대제자.
상황 판단력과 머리 회전이 빠를 수밖에 없는 위치였고, 그는 이 적적한 공간에 흉안(凶眼)의 사내밖에 없음을 확인하며 눈을 부릅떴다.
'어, 없다! 그, 그 괴물이 없다!'
귀빈실에 머물던 자신을 눈 깜짝할 새 납치한 괴인.
험난하게 그를 다루며 기어이 마탑의 중요 기밀을 미지의 수단으로 모두 털어가고, 급기야 끔찍한 기운을 발산하던 그 괴인이 말이다.
움찔!
거기다 약간이지만 몸도 움직인다.
'기, 기회다!'
밧줄이 그를 묶고 있고, 바로 앞에는 그를 감시하는 듯한 사내가 있으나, 그 공포스러운 괴인만 없다면!
"사, 살…려…주십…시오…."
…탈출을 시도해도 되지 않을까?
17시간 동안 수분을 섭취하지 않은 탓인지 입과 목이 녹슨 하모니카처럼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봉인되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바.
그는 발악하듯 흉안의 사내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마탑의 대제자 신분으로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도 없으며, 부탁 따윈 내뱉은 역사는 없다고 해도 무방한 그가 비굴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마탑의 누군가가 이를 봤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테지만, 휴이는 그 끔찍한 괴물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지옥의 악마에게라도 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는 한계에 몰려 있었다.
"도, 도와만 준다면, 뭐든 다 줄 수 있소. 마탑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소…."
"...."
"그, 그러니 제발…."
…상식적으로 흉안의 사내에 무얼 믿고 이런 부탁을 건네는가 싶기도 하지만, 지금 휴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까?
그리고,
"재밌는 제안을 하는군."
"!!"
상대방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휴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런 반응을 원하였다.
휴이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당장 물과 먹을 것을 좀 준비해 주십시오…! 축난 몸을 회복할 필요가 있으니…."
불안정한 몸의 균형을 회복시킬 필요성이 있다.
힘과 체력, 심력 등이 전부 바닥을 기고 있으니 마력마저 정상이 아니었다.
기초 마법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상태.
그러니 음식을, 아니 물만이라도 섭취해도 좋다.
그러기만 한다면!
"...."
"무, 무얼 하고 있나! 얼른 물을…!"
자신은 급한데 정작 움직일 기미조차 없는 사내였고, 저도 모르게 성질을 부리고 만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평소 아랫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만한 말버릇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래, 이게 얕보인다는 거군."
사내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을 감히 건방진 마법사는 예측하지 못했다.
푸화아아악!
"끄아아아악…!"
…순간 창날이 휴이의 가슴팍을 찔렀다.
"으으…으윽…!"
휴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살갗이 찢어지며 가슴뼈가 분쇄되었기에.
주르륵!!
자신의 피가 낭자하며 바닥을 적셨고, 휴이는 그렇게….
"-깨어나라. 가벼운 장난에 불과한데, 과민하게 반응하는군."
"허억!"
…죽어가고 있다 느꼈지만, 그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어? ...어…?"
여전히 멍청하게 반응하며 그는 제 가슴팍을 보았다.
분명 꿰뚫렸다고 생각한 가슴팍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이 여전히 생생했고, 휴이는 진동하듯 몸을 덜덜 떨며 공포와 두려움, 아픔에 마냥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벌써 오늘로만 두 번째로 겪는 '미지의 공포'.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이 도리어 더 힘든 일이리라.
그렇게..
"…끄으으윽…!"
휴이는 다시금 혼절했다.
…눈을 까뒤집으며.
털썩…!
"…웃기는 녀석이군."
다시금 기절하는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사내였다.
말하는 문장과 달리 전혀 웃겨 보이지 않는 사내였고, 그런 사내에게.
"사람 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
"손님 대우가 형편없네."
"…흠."
사내, 라크는 이 대목에서 그저 미간만 좁히며 눈을 감고는 무대응했다.
"무시냐…."
이한은 투덜거렸으나 사실 별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여상스러운 태도와 함께 우유를 들이켰다.
너한테 기대도 안 했다는 것처럼.
"…와, 씨."
다만 인정할 건 인정한다.
이놈 거짓말은 안 했는 것 같다.
우유 맛이 무슨…!
'험한 말이 나올 정도로 맛있네? 내가 지금껏 마신 우유는 뭐였지…?'
현생과 전생을 통틀어 단언컨대 으뜸인 맛 앞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이한이었다.
* * *
달그락.
"드시죠, 경."
"아, 고마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가 초대한 것인데 당연한 예의죠."
"...진짜 저 석고상 같은 녀석이랑 같은 핏줄 맞아? 뭐 이렇게 달라."
"후후, 자주 듣는 얘기네요."
눈처럼 곱게 갈린 우유 빙수와 아이스크림을 갖다 준 여기사.
생김새가 저기서 뚱한 표정을 지은 창잡이와 언뜻 닮았다.
다만 훨씬 더 눈매가 순하고 말투에서부터 예의가 담겨 있는 미인이었다.
안면이 있는 얼굴이다.
전날 마물 테러가 있던 당시 기절한 아이린 윈들러를 챙긴 갈라하드의 여기사.
설마 이곳에서 다시 볼 줄 몰랐고, 그녀가 주는 우유 빙수와 아이스크림을 먹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뭐….
'먹을 거지만.'
이한은 여기사가 준 것을 의심 없이 먹었다.
방금 전 온천욕을 마치고 우유를 먹고도 감탄했는바.
그 우유로 만들었으니 분명….
"…젠장, 이것도 끝내주게 맛있네."
다시금 감탄의 의미로 험한 말이 나온다.
"요정의 축복을 받은 젖소에게서만 나오는 귀한 거니까요. 뼈를 튼튼하게 해주고 3일 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만족감을 주지요."
"…그런 귀한 우유를 어째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요. 키우기가 까다로운 데다, 갈라하드에만 있는 품종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갈라하드만의 특산물인 셈이죠."
"흠, 다시 이런 걸 맛보려면 갈라하드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엄청 매력적이네, 이거? 어쩐지 갈라하드에 인재가 많다 싶더니…."
"우, 우유에 유혹되는 경우는 없지 않을까요?"
"있을지도 모르지."
달그락.
이한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접시를 순식간에 텅텅 비워낸 그였고, 폭식을 한 것 같지만 나름 음미하면서 먹어서 그런지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더 드실래요?"
"아니,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맛있는 것도 적당히 먹어줘야지. 맛있다고 계속 먹으면 쉽게 물리는 법이니까."
"후후, 그럼 따뜻한 홍차를 한잔 가져다 드리지요."
그렇게 여기사는 나갔고, 이한은 애가 참하다 싶었다.
"네 동생이라고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착하고 부지런한 애네."
"…."
"왜 그렇게 보냐?"
"…내가 저 악독한 것에게 대접받은 역사가 없거늘, 쯧."
"??"
어딘지 여기사의 행동이 못마땅해 보이는 창잡이였고, 이한은 저 참한 애한테 왜 저러는가 싶어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저런 여동생이 어디 있다고 투덜거리는지, 원.
'배가 불렀네, 자식.'
참 삐딱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저만한 살기를 품고 있는 녀석인데, 삐딱해질 수밖에 없으려나?'
슬쩍, 그의 시선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누렁이에게 향했다.
공포에 질린 얼굴.
마치 임사체험이라도 한 것처럼 괴롭고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이다.
뭐, 주문쟁이가 임사체험을 하건 사지가 절단이 나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한이지만, 창잡이가 보인 '기술'에는 관심이 가는 바였다.
'살기(殺氣)를 상대방에게 날려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게 한 것 같은데? 그것도 실제에 가까운….'
살기를 이용해 마치 '자신이 죽는 듯한 환각'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저런 게 가능한가?'
아무리 살기가 강하다고 해도 그걸 공격의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믿기 힘들다.
흔히 무협지에서 나오는 '심즉살(心卽殺)의 경지'도 아니고….
'흠, 저건 그냥 타고난 거려나?'
가공할 만한 살의와 기백.
저런 건 아무리 전쟁터를 전전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선천적인, 그러니까 신비와 같은 힘이 아닐까 싶다.
이른바.
'이 자식 혹시 천살성 아니야?'
천강성이라고 불리는 불길한 흉성(凶星) 아래에서 태어난 삼십육천강 중 하나.
이한은 약간의 의심을….
'…내가 아직 피곤한가?'
허나 곧 그는 헛생각이라며 피식거렸다.
로판에서 무협이 웬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한은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헛생각을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일축하는 그였다.
* * *
"혼자 노는 것은 이제 끝났나."
"어, 끝났어."
"...."
"왜?"
"…너와는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하면 안 되겠군."
"시비 걸지 말고. 그래서 내 수첩은 잘 읽었냐?"
"...."
"몰래 읽었다고 해서 안 들킬 것 같냐?"
"흠…."
이한은 약간 곤혹스러움을 보이는 창잡이의 반응에도 여상스러웠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창잡이가 그를 갈라하드의 안가로 데리고 온 이유가 뭐겠는가?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럴 일은 절대 없다.
그러니.
'내가 얻은 정보를 얻고 싶었겠지.'
뭐, 안타깝게도.
"…알아듣지 못할 내용도 많더군."
"뻔뻔스러운 녀석."
"...매주 네놈의 집으로 우유를 배달해주지."
"…왜 솔깃하지?"
아마 자신의 수첩을 봤다고 해서 이해하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내용 중에는 남이 읽지 못하도록 휘갈긴 게 많으니까.
전생의 문자를 쓴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런 걸 쓰면 언어 천재라고 오해받을 우려가 있으니까.
다만 군대 때 배운 간단한 암호 체계와 모스부호를 섞은 것뿐이다.
참고로 이 세상에도 모스부호는 있다. 그럼에도 녀석이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가 대체 무슨 뜻이지?"
"노래야, 노래."
"노래?"
"그런 게 있어."
"…'살어리, 살어리랏다'는 뭐지?"
"시야, 시."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노는군."
"내가 생긴 게 어때서?"
"...."
"야, 대답 안 해!"
…이래봬도 전생 시절의 그는 집안만 풍족했다면 군인이 아니라 문인(文人)이 되었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청소년이었다.
#162 EP-39 두 남자는 끝까지 간다(5)
…라크 드 듀론은 이놈이 생긴 것과 달리 정말 철저한 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중요한 건 흐르는 강물도, 연어도 아니야. 거기 뒤에 써진 숫자와 모스부호에 주목해야지. 그리고 연어의 은유적 표현이 뭔지 해석해야 하는 게 핵심인 거고."
"…네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무식한 놈. 칼이랑 창만 잘 쓴다고 기사냐? 기사란 놈이 책 좀 읽어라."
"!?"
울컥, 하고 가슴 언저리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다른 녀석이 저리 말하면 모르겠는데, 무뢰배한테 무식한 놈이란 말을 들으니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솟았다.
허나 아쉬운 건 현재 그쪽이었고, 그는 이를 갈면서도 그의 말을 최대한 들었다.
다만 분하고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고.
'군사적 암호와 문학적 견해 등이 없으면 해석하기 어려운 암호였군.'
설마 생긴 건 오거나 트롤조차 한 수 접어야 하는 놈이 이러한 암호를 쓸 줄이야….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군."
"계속 시비 걸면 그냥 가는 수가 있다."
"아쉽게 됐군, 저녁으로 '파에야'를 준비했건만."
"...."
"그래, 가겠다고?"
"…제법인데? 생긴 건 재수 없는 놈이 거래도 할 줄 알고?"
"…네놈한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군."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런데 말이다. 궁금한 게 있거든."
"무엇이지."
"아니, 그냥 나한테 해독해 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귀찮게 네가 해독하고 자빠졌냐?"
"...."
"사서 고생하는 취미도 다 있냐?"
"…무, 물으면 가르쳐 주는 거였나?"
얼마나 당황했는지 라크는 처음으로 말을 주춤거렸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상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차피 목적은 비슷한 거 아니었냐?"
협력할 의사가 보이는 발언이었고, 라크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먹을 것을 준다고 하여 따라온 것이 아니었나?"
"어느 미친놈이 먹을 거 준다고 졸졸 따라오냐? 협력할 의지가 있으니까 따라오지."
"...."
"요것도 황당한 놈일세…."
"크흠-!"
그의 황당하다는 발언이 이어졌고, 이를 들으며 라크는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민망함을 느끼는 그였다.
* * *
솔직히 갈라하드든 트리스탄이든 어느 세력이 되건 접근한다면 협력할 생각은 처음부터 있었다.
'생각보다 더 유능해.'
뒤처리가 깔끔한 것도 있지만, 여타의 기량도 우수하다.
이런 이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물론 혼자서 처리하는 게 속이 편하긴 할 테지만, 이한은 술탄과 마탑을 홀로 감당하는 게 '까다롭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아예….
후루룩.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게 당연한 거지."
"지극히 냉정한 판단이네요."
"그렇지? 근데 네 오라비는 왜 그걸 모르냐?"
"어쩔 수 없지요. 부단장님은 무식, 아니 조금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시끄럽다, 루나."
"공적인 자리에서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브리지트 경이라고 부르세요, 부단장님."
"...."
이한은 따스한 홍차를 마시며 남매의 다정한 대화를 얌전히 들을 뿐이었다.
허나 표정만 얌전할 뿐, 그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기도 했다.
'약수 온천이라고 했나? 불칸의 온천만큼 효과가 좋네.'
확실히 귀한 약재와 포션이 아낌없이 들어간 온천에 몸을 맡기고 나니 피로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쌓인 부상이 회복되었고, 독소와 노폐물 같은 여타의 것도 빠져나간 이한의 몸은 더할 나위 없는 쾌적함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추가적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몸 상태는 최상을 유지했고, 이 정도면 당장 몸을 움직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역시 돈 많은 시설이 대박이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역설이 왜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납득하고 있자니.
"-왕실에는 왜 협력을 구하지 않지?"
"응?"
"일이 까다로우니 타인의 협력을 구하는 것은 이해했다. 한데 왜 팬드래건이 아닌 갈라하드나 트리스탄으로 한정하는지 모르겠군."
"...."
의문이라는 창잡이의 물음이었고, 이한은 이러한 질문에 마냥 황당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묻고 있다며.
"…진짜 몰라서 묻냐?"
"?"
"너 같으면 백색 고양이들을 믿을 수 있겠냐? 걔들이랑 팀플 할 바에야 차라리 혼자 하고 말지."
충분히 알만한 녀석이 왜 이런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지, 원.
불난 집에 기름 뿌리는 것도 아니고.
"으음…. 백은사자가 네놈이 속한 기사단이 아니었나?"
"그러니까 잘 아는 거야. 그놈들이 절대 도움이 될 리 없다는 걸. 뭐, 내 친구랑 후배 녀석은 도움이 좀 될 것 같긴 한데, 걔들도 지금 철없는 왕자 돌본다고 바빠."
"...백은사자는 대체 어떤 곳인 거지?"
"네 상상 이상이 펼쳐진 곳이지."
"...."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마, 이 자식아."
"…밥을 얻어먹고 싶다면 안가에 언제든 들르도록."
"동정하지 말라고!"
이한은 약간 울컥했다.
자신의 직장은 어떻게 된 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하나같이 엉망인 사실을 재확인했기에.
…팔자가 사나운 그였다.
* * *
"갈라하드의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다. 광신도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불태운다. 그것이 전하께서 우리에게 내린 명령이다."
갈라하드는 딱히 이한처럼 위법 마법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게 아닌, 광신도 집단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혈십자군.
그 비겁하고 더러운 것들을 말이다.
"네놈의 조사 내용이 맞다면, 그렉 빈은 광신도 집단 소속 마법사인 것이 맞을 테지?"
"으음 대략 80% 확률로 그렇지 않을까?"
"…나머지 20%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 정도면 그 마법사를 잡을 이유로는 충분하군."
"딱히 그 주문쟁이만 잡는다고 해서 끝이 아닐걸?"
"무슨 뜻이지?"
"...."
이한은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아꼈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고민하는 것이었고, 뜸을 들이는 그에게….
"경?"
"…음."
루나란 기사의 추임새가 더해지니 숨기는 건 그다지 현명한 방법이 아닌 것 같았고, 이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느 정도 내 수첩을 읽어서 알겠지만, 마탑과 주문쟁이들은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고 하더군. 특히 최근 들어 그렉 빈과 마탑은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렉 빈의 실험이 어느 정도 물이 올랐고, 마탑 또한 그 실험 자료를 토대로 어떠한 준비에 들어가는 중이라더라."
"준비?"
"팬드래건에서도 손꼽히는 [신비]를 손에 넣을 계획이라던데, 말이 계획이지 그냥 갈취이고 도둑질인 거지, 뭐."
술탄이나 마탑이나, 비겁한 것들이 하는 생각이란 건 비슷하다는 뜻이리라.
"한데?"
"으음, 그놈들의 표적 중…."
─갈라하드의 마검도 있더라.
…이한이 기껏 숨기고 있던 정보를 푸는 순간, 창잡이는.
화아아아악-!
"...살벌한 새끼, 진짜 천살성인가?"
일순 가공할 만한 살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콰지직!
정녕 '저런 기운'이 일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살기의 총량인가 의심마저 들 정도였고, 살기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콰직!
앉은 의자와 주변의 책상, 찻잔마저 모조리 부숴졌고, 여기사는 어느새 그를 피해 도망갔으나 이한만은 그러한 붉은 살기의 파도 앞에서도 초연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겨, 경, 괜찮으신가요?"
"난 괜찮은데, 저놈 저거 위험한 녀석이네, 기운을 통제하지 않으면 기운만으로도 사람 열은 죽이겠다."
"…라크의 흉성은 칼집 없는 칼과 같으니까요."
"용케 기사가 됐군."
이한은 저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살기임을 확신했고. 이토록 가공할 만한 살기를 가진 녀석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에 감탄했다.
이만한 기운을 품은 채로 일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으니까.
예시로 들자면 숨만 쉬어도 사람을 죽일 독을 품은 녀석인 것인데, 그러한 독을 지금껏 계속해서 통제했다는 얘기였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전하의 은혜시죠."
"공작님?"
"네에, 저희 남매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그리고 라크가 일상생활이 가능한 이유도 전부 전하 덕분이죠. 그분이 없었으면 아마 라크는 진작 죽었을 거예요. 그런 뜻에서 전하를 건드린다는 건 라크에게 있어 역린과 같은 거죠. 인생의 은인이자, …부모와 같은 분을 건드린다는 거니까."
"…그렇군."
확실히 인생을 구해준 은인을 노리고 있다는 놈이 있다는 걸 알면 화가 나긴 할 것이다.
다만, 저놈은….
'화만 내도 여럿 조지겠군.'
파스스슥….
그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모래처럼 무너지는 책상이 보였고, 어느 순간 찻잔마저 완전히 가루처럼 산산조각 나버렸다.
겨우 살기만으로 이런 재주가 가능한가 싶었고, 이한은 혀를 내둘렀다.
'어쩐지, 주먹이 맵더라.'
자신에 비하면 덩치가 훨씬 작은 녀석이다.
한데도 첫 격돌에서 놈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헤비급한테 밀리지 않은 라이트급이라니….
어디 가서 말하면 믿어주지도 않을 얘기였으나, 저토록 강력한 살기를 상시로 몸에 두르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항상 살기란 이름의 갑옷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나로 따지면 경 같은 기술이 저놈에겐 저 살기란 거겠지.'
이한에게 있어 [경]이란 기술이 패시브와 같다면, 창잡이에게 있어서도 살기 또한 똑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살기를 두른 힘.
이른바 [살경(殺勁)].
그렇게 이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었다.
'세상 참 재밌어.'
전날 만난 북부의 챔피언은 타고나기를 헤라클레스나 항우 같은 녀석이었다면, 이 녀석은 인간의 형상을 한 '불꽃'이자 '칼'이었다.
언제든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하며, 모든 것을 베어낼.
이한으로선 막시무스 말고도 다시금 모든 기사를 뛰어넘는 재능을 발견한 격이었고, 질투나 열등감을 느끼기보단 흥미로움이 들끓었다.
'한번 제대로 겪고 싶은데….'
창잡이 녀석이 가진 살경을 좀 더 살피고 싶은 기분.
저걸 본격적으로 파고든다면 재밌는 기술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건 훗날을 기약해도 될 얘기일 터.
지금은-.
"화는 그만 내고, 일부터 하자고.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으니까."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
"뭐긴 뭐야. 싹 다 조져야지."
"??"
"너희는 광신도 흔적만 어떻게 쫓을 생각인 것 같은데, 난 다르거든."
"무슨 뜻이지?"
"무슨 말이긴, 난…."
-끝까지 갈 거거든….
나지막한 이한은 중얼거림에는 무의식적으로 펼쳐내는 사자후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각오와 투지, 기백이 담긴 사자후가 말이다.
"...."
"...."
그리고 일순 두 남매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흉성이라 자자한 '갈라하드의 흉랑'이 내뿜는 살기를 일순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기백이었다.
이를 보며 루나 브리지트의 눈에는 약간의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철갑을 두른 산군?'
산군이라 불리는 대형 마물을 연상케 하는 마물이 일순 보이는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한쪽은 강대한 살의를 기름 삼아 불타는 늑대라면, 한쪽은 대형 마물을 연상케 하는 강대한 기백을 머금은 괴수였으니까….
'이런 인간들, 아니 마물들이 뭉치는 게 참….'
이들에게 노려지는 자들이 왠지 모르게 불쌍해지는 그녀였다.
뼛조각이나 남을까 싶어.
#163 EP-39 두 남자는 끝까지 간다(6)
팬드래건 귀족 의회.
왕실과 길드조합, 상인연합과 함께 대두되는 왕국의 중추기관.
늘상 왕도의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의회는 항상 크고 작은 고성이 울리기로 유명하였는데, 같은 의회의 귀족일지라도 파벌이 갈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랏일 하라고 만든 기관이지만, 지들끼리 다투는 것을 보노라면 어느 세상이건 권력자들의 행동방식은 비슷한 게 맞으리라.
콰앙!
"그러니까 말했지 않소! 술탄의 호위는 우리 측에서 맡는다고!"
"호위는 무슨! 그치들이 호위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그치들을 지켜!"
"애초에 그들을 받아들이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달이 일어나지."
"이런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 지금 그게 할 말이냐!?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자고? 제정신인가! 제발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과 고민이란 걸 해보게! 머리가 장식품이 아니지 않나."
"뭐? 이 양반이 말이면 단 줄 아나!"
"장갑을 벗어!? 이놈이 어디서 건방지게 주제도 모르고…!"
매분매초마다 장갑이 날아다니며 결투가 성립되고, 고성과 함께 귀족들이 주먹을 휘두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곳이 지성인들이 모인 의회인지, 아니면 투기장인지 모를 상황.
전날 술탄의 테러 사건으로 인한 다툼이었고, 당장 그럴듯한 제안이 나오지 않으니 마냥 헛소리와 고성방가만이 가득한 의회였다.
"하아, 답답하군. 달튼 경, 자네는 무슨 의견이 없나? 좋은 의견이 있다면 고견을 들려주게."
"…저라고 무슨 뾰족한 묘수가 있겠습니까."
"하, 평소와 달리 겸손하군. 자네답지 않아.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겐가?"
"아, 아닙니다. 그저 생각이 복잡해서 그런 것 같군요, 에드리 경."
"흐음, 무슨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선후배 사이가 아닌가."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뜻 따스하게 보이는 선후배 귀족 의원들의 대화.
학연의 중요성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한데 언뜻 달튼이라 불린 귀족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멍청한 술탄 같으니, 왜 혼자서 일을 크게 벌이다 당하는지, 원!'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현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한없이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채.
달튼, 아니 달튼의 거죽을 뒤집어쓴 노회한 마법사는 모든 상황이 같잖을 따름이었다.
* * *
위법 마법사 그렉은 올해 여든이 넘어가는 노마법사였다.
기사나 전사와 같은 이들이 나이가 들면 육체의 젊음과 정기를 잃고 영락하는 것과 달리, 마법사란 인종은 나이가 들수록 마력이 심유해지는 인종이었다.
덕분인지 그렉은 여든의 나이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강성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쯧, 숨을 인물을 잘못 골랐나? 설마 이토록 가난하고 볼품없는 놈일 줄이야…."
그렉은 자신이 뒤집어쓴 거죽의 원주인이 평생 책만 읽고 돈도 없는 공부만 한 학자 타입의 명예 귀족이란 걸 늦게 알았다.
적당히 귀족 의회 소속이라기에 고른 것인데, 이토록 가난할 줄이야.
그 흔한 시종조차 없으며 의회에서 나오는 생활비가 전부다.
명예직이라 해도 귀족이란 놈이 어찌 이리도 소박하다 못해 가난한 삶을 산단 말인가?
"후우, 간만에 귀족이거늘, 꽝을 뽑을 줄이야."
그렉은 실망감에 투덜거리며 혀를 찼으나, 포악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의 원칙 중 하나이지만, 타인의 행세를 할 때는 비교적 연기에 집중하는 편인 그였으니까.
이러한 연기 덕분에 그렉은 오랜 세월 동안 도망 다닐 수 있던 것이기도 했다.
'도망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 여겼거늘.'
허나 그렉이라고 하여 언제까지고 타인의 삶을 살 수는 없는바.
한 자리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래 예를 들자면.
"…술탄국은 좋은 둥지가 되어주겠지."
비록 술탄 살라흐가 습격을 받아 숙소에 첩거 중이지만, 그렉은 술탄이 신비를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욕심 많은 자가 어찌 이만한 기회를 포기하랴.
또르륵.
그렉은 술탄에게 받은 최상급 마석을 굴렸다.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머금은 마석.
조약돌처럼 작으나 이것 하나의 값어치는 감히 값으로 매길 수 없다.
'필요하다 해서 구해 달라 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쉽게 구해줄 줄이야.'
새삼 술탄의 힘이 대단하다 싶었고, 그렉은 탐욕이 들끓었다.
-갖고 싶다!
그자의 인생이…!
한평생 타인의 인생과 재능을 갈취하기 위해 노력한 마법사가 다름 아닌 그였다.
그렉은 솔직히 신비도 탐나지만 술탄의 인생도 탐이 났다.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연구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이며 잘만 하면..
'마탑 또한 이제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니까!'
마탑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렉의 눈에서 무수한 감정이 교차했다.
애증과 증오, 질시와 탐욕.
그의, 아니 마법사의 고향이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그리운 상아탑.
인정받고 싶으며, 마탑이 그를 우러러 보게 하고 싶다.
평생의 연구가 마탑 최상층에 보관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꿈!
그렉은 욕망에 타올랐다.
'신비를 갈취하고, 이 연구 성과가 상아탑의 늙은이들에게 들어간다면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만 할 테지.'
그렉은 자신을 쫓아낸 그치들이 후회하며 그를 다시금 부를 날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달그락.
타악.
"...."
…그렉은 습관처럼 마석을 굴리며 문득 어떠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80년 인생을 산 마법사는 자신을 덮쳐오는 이질감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살아남았다는 건 생존감각이 극도로 발달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는.
번뜩!
'주변이 조용하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는 데 성공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나지 않으며 어색할 정도로 적막하다.
이를 눈치챈 그렉은 다급히 마석만을 챙기고 그렇게….
"-주문쟁이 주제에 감이 좋네."
콰직!!
"!!"
벽을 모래처럼 가볍게 뚫으며 그를 향해 덮쳐오는 손.
그렉은 기겁했다.
자칫 심장이 약한 사람은 놀라다 못해 마비가 올 광경이었으나, 그렉은 놀라는 대신.
화아악!
콰아앙!
"크으윽!"
마력 장벽을 펼쳐내어 막아낼 따름이었다.
적의 기습을 받는 것이 반평생의 업과 같았던 그다.
기습적으로 공격받는 일이야 익숙한 것이 아닐 수 없….
파지지지직!!
"!?!!!"
미친!!
그렉은 육성으로 욕지기를 내뱄었으나 마력장벽이 갈리면서 그의 음성은 묻혀버렸다.
습격자의 팔이 마력장벽을 거침없이 파쇄하고 있다.
무려 80년을 산 노마법사의 마력장벽이다.
재능이 떨어질지언정, 염력의 단련만큼은 잊지 않고 꾸준히 단련한 삶.
그러한 염력으로 이루어진 마력 장벽은 성벽과 맞먹는 튼튼함을 가졌을 터인데, 저러한 장벽이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보며 기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렉은 습격자가 심상치 않은 자임을 즉각 깨달았다.
'심상치 않은 놈이다!'
이를 깨닫자마자 그렉은 도망가는 대신 주문을 외웠다.
"[구름아 뭉쳐라], [폭풍의 바람이여 구름에 깃들어라]. [벼락은 춤을 추고 바람은 날카롭게 춤추어라], [내 적을 격멸하라]!"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주문 영창에 의해 벼락 구름이 형성되었다.
작지만 강력한 힘을 품은 작은 구체의 뇌운(雷雲)이 형성된 것이었다.
콰르르릉!
"죽어라, 이놈!"
가공할 위력을 품은 뇌운을 날리며 그렉은 당장 다른 마법을 영창하며 도망가려 했다.
뇌운의 폭발에 휩쓸리면 그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기에.
실상 이 공격은 상대를 죽이기보단 상대를 피하기 위한 한 수였다.
어지간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서야 뇌운을 피할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따끔하네."
콰드드득!!
-뇌운이 분쇄되었다.
"이런 괴물 놈!"
대체 무엇인가!
그가 전력으로 펼친 뇌운의 마법이 산산조각 난 것을 목도하며 그렉은 제정신을 유지할 정신이 없었다.
저건 저토록 쉽게 사라질 마법이 아닌데….
'서, 설마!'
"오, 오러 유저인가! 오러 유저가 날-!"
오러 유저.
마법사들의 공포라 불리며, 홀로서도 일국을 섬멸할 초인.
그 괴물이 등장한 게 아닐까 하며 그렉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너 따위 주문쟁이한테 오러 유저가 움직이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닐까?"
습격자는 우습다는 듯 비웃음을 머금었다.
초인이 너 따위를 잡는 데 찾아오겠냐는 듯.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양반들이 움직였으면 진작 상황 종료였어, 이렇게 어렵게 갈 게 아니라."
습격자는 나지막한 조소와 함께 어느새 그렉의 정면까지 다가왔다.
"[바, 바람이여 나의 다리에 깃들어라]!"
그렉은 다급히 주문을 외우며 몸을 공중으로 훌쩍 뛰었다.
화아악!
염력과 주문의 도움으로 마치 새처럼 빠르게 공중으로 활강하는 그렉이었고, 습격자의 습격으로 집이 무너진 덕분에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식간에 치솟는 그는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구름마저 뚫을 정도로 빠르게 하늘로 도망쳤다.
'제, 제깟 놈이 하늘까지 어찌 쫓아올까!'
공중전은 예로부터 마법사의 영역.
기사와 전사 따위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드디어 한숨 돌리겠군.'
처음부터 끝까지 기겁하기만 했던 그렉은 드디어 살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그래, 도망은 다 갔고?"
"…크흡!?"
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자신처럼, 아니 자신보다 더욱 자연스럽게 하늘을 걷는 습격자가 보였기에.
"어, 어떻게…!?"
"-허공답보."
"???"
"그래, 주문쟁이 따위가 어떻게 알까."
습격자는 그렇게 가만히 검을 뽑았다.
그러며.
"하아, 죽이지 않고 잡으려니 어렵네."
"??"
…의미 불명의 말을 들으며 그는 검이 자신의 마력역장을 깨고 그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검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이었고, 그렉은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죽이지 않고 잡으려는 거냐, 고.
* * *
이한은 작게 감탄했다.
"우리 애들보다 튼튼한데?"
저 늙은 주문쟁이는 제법 대단했다.
나름 힘껏 때린 건데, 겨우 갈비뼈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났다.
마력역장 자체도 나름 단단한 것을 보니, 여타의 주문쟁이와 수준이 달랐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정확한 말이다.
하지만.
"주문쟁이가 주문쟁이지 뭐."
이한은 주문쟁이에게 감탄하는 것을 멈추었다.
주문쟁이가 얼마나 강하건, 나이를 먹건 상관없다.
노인일지언정 주문쟁이는 패야 하는 게 맞다.
특히 남의 거죽 뒤집어쓰고 다니는 오물 같은 놈은 더더욱.
"이한 경. 달튼 공은 무사합니다. 상처가 심하시지만, 신전에 가신다면 얼마 안 가 회복하실 겁니다."
"다행이네, 그거."
그가 주문쟁이를 제압할 동안 갈라하드의 기사들은 저택에서 주문쟁이에게 거죽을 빼앗긴 피해자를 찾는 데 성공했고, 이한은 다행이다 싶었다.
원래 주문쟁이에게 납치당한 사람은 열 명 중 아홉이 모두 죽어 있으니까.
"…생각해 보니 빡치네."
콰직!
"끄으으으윽!"
이한은 그렉 빈의 어깨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다시금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이한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그대로 놈의 뒤통수를 짓밟았다.
꾸드득, 꾸득!
"…이한 경, 그러다 죽겠습니다."
"죽지 않아. 주문쟁이가 얼마나 튼튼한 마물인데."
"그, 주문쟁이는 마물이 아닙니다만?"
"그럼 곤충?"
"...."
"농담이야."
"음…."
갈라하드의 기사는 왠지 저 말이 농담이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저 눈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무서운 분이군.'
그의 무력은 대단하여 감탄이 나올 뿐이지만, 그가 마법사를 대하는 철저함과 잔혹함은 과감하다 못해 단호했다.
마법사를 사람이 아닌 멸절해야 하는 마물로 보는 눈빛.
…꿈에 나올까 두려운 눈빛이다.
"너희 쪽은 어떻게 됐냐?"
"…걱정 마십시오. 피해 없이 빠르게 끝냈으니."
"역시 갈라하드. 너희가 왕국 제일이다."
"…가, 감사한 말씀이긴 하지만, 백은사자들이 들으면 섭섭해하지 않을지…."
"걔들이 섭섭해할 자격은 있고?"
"...."
…기사는 푸대접 받는 백은사자들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
*
*
"훌륭하군.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왕도에서 어떻게 마법사를 찾은 것이지?"
"마탑의 대제자를 통해 귀족 의회에 마법사가 침입한 것을 찾아냈다고 하니, 그리 대단한 것은…."
"그 누구도 마법사가 의회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만은 알았지."
"...."
"하하, 그 기사만 칭찬하니 질투가 나나 보군."
"…전하."
"아하하!"
블레이크 공작은 즐거워 보였다.
모처럼 제자와 산책을 나와서 그런지 더욱 그러한가 보다.
"실력이 늘었구나, 라크. 이제 슬슬 기사단장 자리를 줘도 되겠어."
"아직 한없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이런 자들을 잡는 데 전하의 힘을 빌렸으니 말입니다."
"…녀석."
블레이크는 제자의 겸손에 웃었다.
"으으윽…."
"주, 죽여줘…."
"무, 물을, 물을 제발…!"
블레이크 공작과 갈라하드의 기사들 발아래에서 나뒹구는 이들이 보였다.
국경선 산기슭에 숨어 있던 5만의 병력들.
술탄의 깃발을 짊어진 이들이었고, 그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태워진 것처럼 뜨거움과 고통을 호소하는 중이었다.
이 중 4만의 병력을 홀로 '무력화'한 블레이크 공작은 허허롭게 웃었다.
"간만의 운동이라 기분은 좋군."
"으음…."
기사단과 같이 가까스로 1만의 병력을 무력화한 라크는 침음을 삼켰다.
초인과 비견되는 마검의 주인.
그 힘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못해 수만의 병력마저 무용지물로 만든다.
참으로….
'닿고자 하는 벽이 너무 크고 두껍군.'
문득 그 건방진 무뢰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지 생각해 본다.
아마.
- 저 양반, 아직 정정하시네. 새장가 가도 되겠는데?
…라는, 불경한 소리나 지껄이지 않을까?
"하…."
'무뢰배한테 물들고 있나 보군.'
괜한 헛생각이나 한다며 고개를 젓는 그였다.
#164 EP-39 두 남자는 끝까지 간다(7)
현재 술탄 살라흐가 머무는 궁전은 타국의 왕족급 귀빈이 머무는 궁전이었다.
타국의 귀빈에게 선보이는 만큼 수백 명의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방대한 시설을 비롯하여 각종 편의시설이 구비된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허나, 지금, 그 누구도 이러한 시설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다름 아닌.
"끄으으윽…!"
"술탄, 조금만 참으십시오. 지혈이 조금만 있으면 끝납니다. 아, 아니면 지금이라도 포션을…."
"아, 안 된다. 포션으론 잃어버린 내 귀를 되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주인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이런 화려함을 즐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도리어 언제라도 목이 달아날까 두려워하면 두려워해야지.
"그, 그러나 술탄…."
"되, 되었다! 그걸 치워라!"
"…명하신 대로."
감히 누구 명령이라고 어길 수 있으랴.
참담함을 감추지 못한 채 치유사는 물러났다.
"…빌어먹을!"
평소 상스러운 욕설은 내뱉지도 않는 살라흐지만, 지금은 상스러운 욕설이라도 내뱉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다.
여전히 상처는 욱신거렸으며,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귀 한쪽이 찢어지듯 잘렸음에도 꿰매지도, 그렇다고 약이나 포션을 사용하지도 않았기에 고통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출혈이 없는 건 서부의 의술이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지연해주는 덕분일 터.
허나 이 또한 임시방편일 뿐, 그의 안색은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버러지 같은 태양신전 같으니…."
꽈득!
귀를 치유하고 싶다면 광명의 빛을 따르는 사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될 테지만, 술탄은 결코 타 종교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될 위치에 선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게 서부는 광명의 빛과도 맞먹는다는 [태양신 종교]가 만연한 대륙이었고, 술탄은 '태양신의 자손'이자 '대리인'으로까지 칭송받는바.
이 때문인지 서부인은 태양신을 제외하고 타 종교를 믿는 것은 '금기'와도 마찬가지였다.
태양신을 욕보이는 것도 욕보이는 거지만, 감히 술탄에 대한 '역심'을 품고 있다고 오해를 받아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무척이나 엄격한 규율이 아닐 수 없으나, 왕이 자신들의 정통성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선 종교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이른바 '왕권신수설'이 당연한 국가라 할 수 있을 터.
하여 광명의 빛을 비롯한 타 대륙의 종교가 서부에 가면 기를 못 펴는 건 당연했고, 서부인에게 광명의 빛은 이단종교에 불과하며 결코 용납해선 안 될 이교도의 무리일 따름이었다.
특히….
"크으윽!"
"술탄, 이럴 게 아니라 신전을 찾아가는 것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내가 이교도에게 치유를 받는 순간 내 권위가 무너진다!"
"…술탄."
"으읍!"
술탄은 절대 광명의 빛에게 치료받아선 안 되었다.
술탄은 태양신의 대리자이자 핏줄.
이러한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서 이교도에게 치료를 받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적 중 한 명이 만약 자신이 이교도의 신관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 들켰다간 그가 가진 왕권이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당장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그가 신의 자손이 아니라며 반역부터 일으킬 터.
"그 빌어먹을 태양신전의 사제들은 언제 온다고 하지?"
"…이제 막 국경선을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건방진 버러지들 같으니! 진작 올 수 있으면서 늦장을 부리고 있구나!"
"...."
"건방진 놈들! 역겨운 놈들 같으니…!!"
태양신전.
태양신을 모시는 자들이며, 실상 태양신의 대리인인 술탄의 몸을 보살펴야 할 자들이지만, 현재 태앙 신전과 살라흐는 반목하는 상태였다.
태양신전의 사제들은 옛날부터 술탄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고 싶어 했고, 반대로 술탄은 태양의 사제들은 모조리 자신이 아래에 깔아뭉갤 마음이 그득했다.
이렇다 보니 서로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하며, 술탄이 타국으로 갈 때도 동행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지금, 극심한 부상을 입은 술탄은 여전히 큰 부상을 입은 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치유사에게 말해 찢어진 귀와 상처 등을 봉합하면 될 테지만, 그랬다간 신성력이 있다 해도 재생하기가 힘들다.
술탄에게 중요한 요소에는 '신체적 결함'이나 '정신적 장애'가 없어야 한다는 규율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가 입은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술탄의 자리에서 내려올 만한 사유인 셈.
'일이 더럽게 꼬였군!'
…까드득!
설마 팬드래건에서 이런 타격을 입을 줄이야.
'대체 누구냐…!'
살라흐는 자신을 공격한 이들이 아사신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잔혹할지언정, 의뢰를 함부로 포기하거나 배신하는 자들은 아니었으니까.
배신을 밥 먹듯이 했다면 진작 서부에서 전멸했을 터.
반대로 다른 술탄이 그를 공격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건 술탄들도 모두 잘 아니까.
하니….
'팬드래건의 누군가가 나를 공격했다는 뜻이 될 테지….'
…감히 그를 말이다.
먼저 공격한 것은 틀림없이 살라흐였으나,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감히 술탄의 옥체에, 태양신의 대리인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것은 유황불에 튀겨져도 부족하지 않을 대역죄이니까.
살라흐는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용서할 마음이 절대로 없었다.
"…살만, 국경선 인근에 대기시켜놓은 자랑스러운 나의 병사들이 출진한다면 언제까지 팬드래건에 당도할 것 같은가."
"수, 술탄? 설마…!?"
"알려줘야지. 감히 술탄을, 태양신의 핏줄인 나를 건드린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
약간 이성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술탄 살라흐의 모습에 살만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그 이성적이고 총명한 군주와 동일인물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살만은 휑한 주인의 한쪽 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감히 우리를 공격한 자들 때문이다!'
자신의 휑한 한쪽 팔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지만, 감히 고귀한 옥체에 결함을 남기다니….
용서할 수 없는 대죄가 아닐 수 없었고, 살만은 주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주인의 그 수하라고, 똑 닮은 주종이 아닐 수 없었다.
인면수심.
만약 어느 기사가 이 두 주종을 보았다면 이리 평가했으리라.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이라고….
자고로 짐승이란 본능대로 사는 법이며, 특히 광견병과 같은 병증을 앓는 짐승과는 소통이란 것이 되지 않는 바였다.
그렇기에….
"-주제도 모르는 것. 봐주자고 해도 한도란 것이 있거늘, 끝도 모르고 기어오르려고 하는구나."
"!!?"
"누, 누구냐!"
살만은 다급히 검을 뽑았다.
팔 한쪽이 없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실력자였고,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갑작스럽게 등장한 제3자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또각, 또각.
…허나 칼을 겨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달을 조명삼아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연한 발걸음.
달빛이 그녀를 비출 때마다 안 그래도 빛나는 백은의 머리칼이 휘광을 머금었고, 그 오연한 눈 또한 찬란하게 빛나는 듯했다.
"다, 당신은...?!"
드러나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살만은 기겁해야 했다.
아는 얼굴이다.
처음 왕국에 입국했을 때 가장 먼저 본 여성이기도 했으며,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이기도 했음이다.
"…이게 무슨 무례이지? 팬드래건의 후계자는 국빈에 대한 예우조차 없는 것인가? 아이시스 왕녀."
아이시스 이레인 드 팬드래건.
현 왕위 서열 1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왕국의 후계자.
여신이나 천사와도 비견된다는 아름다움을 머금은 그녀가 등장하자 일순 주변이 환해지며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만약 이토록 갑작스러운 등장만 아니었다면 살라흐도 그녀를 환영했을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타이밍이 나빴다.
얼마나 나빴느냐면….
"흐음, 여의 얼굴을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그 날붙이를 꺼내고 있는 것이냐."
"…실례인 줄은 알지만, 침입자를 향한 당연한 조치라고 여겨주시죠, 왕녀."
살인멸구를 생각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살의가 감도는 칼날.
보통의 아녀자라면 칼날 앞에서 몸을 벌벌 떨며 안색이 창백해지겠지만, 그녀는 보통의 아녀자가 아니었다.
도리어 칼날 앞에서도 덤덤할 뿐.
그리로 한층 더 나아가.
"건방지구나. 왕녀가 아닌 왕태녀 왕세녀 전하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궁중의 예의이거늘. 이래서 서부의 촌것들은…."
"...네년, 감히 술탄을 모욕하는 것이냐!"
그녀는 그들을 도발했다.
촌것들.
저 호칭의 의미에는 술탄을 얕잡아보는 발언이기도 했다.
발끈하는 살만이 더욱 높게 검을 겨누며….
[나는 네놈이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푸화아아악!
"!!?"
털썩, 하고 살만은 무릎을 꿇었다.
"…살만?"
"...."
술탄의 부름에도 그는 미처 답변하지 못하였다.
…시야가 새빨갛다.
"…어?"
살만은 자신의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음을 자각했다.
허나 이상하게 감각은 없다.
피가 분수처럼 계속 쏟아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었다.
"내게 칼을 겨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야지. 기품도, 명예와 예절조차 모르는 네놈 따위가 감히 내게 건방을 떤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주제도 모르는 것."
아이시스는 쓰러진 살만을 매도하였다.
그녀의 사전에 자신에게 적의를 겨누는 자를 살려두는 역사는 없으니까.
있다면 그럴 만한 자격과 명예를 갖춘 자여야 하며, 그런 뜻에서 저 천것에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전사로 존중받을 자격조차.
"사, 살만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아이시스 왕녀!"
살라흐가 다급히 소리쳤다.
충성스러운 그의 무사장이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급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허나 그녀는.
"어리석다 여기긴 했지만, 이토록 어리석을 줄이야. 네놈이 정녕 일국을 다스리는 군주가 맞는지 의심마저 드는구나."
그를 경멸하듯 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을 수 있을까 싶었고, 어찌 저토록 시야가 좁은 것일까 의문이다.
"네놈이 물어야 한 것은 그 건방진 것이 왜 그렇게 됐는지 묻는 것이 아닌, 왜 내가 이 궁전에 들어왔는데도 '아무도' 네놈을 구하러 오지 않는지 물었어야 했다. 이 어리석은 종자야."
"뭐…?"
"주변이 너무 적막하다 생각하지 않느냐?"
"...."
"이제야 깨달았나 보구나. 우매한 것."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런 건 처음에 물었어야지. 덜떨어졌구나, 덜떨어졌어."
한없이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이다 보니 이제는 불쾌감보단 동정심마저 든다.
물론 저 짐승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게 아니다.
저런 짐승에게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불쌍한 것이지….
따악.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무어라 떠드는 살라흐였지만,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일순.
"커허억…?!"
살라흐는 몸부림치며 헛구역질을 했다.
방금 전 그의 호위무사가 쓰러진 것처럼 똑같이.
주르륵!
피를 쏟아내는 살라흐였지만, 아이시스는 오연한 자세로 의자에 천천히 앉을 따름이었다.
"발칙한 것. 감히 팬드래건의 신비를 탐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버러지 같은 마법사와 손을 잡고, 아사신마저 고용하여 생도들을 공격하려 하다니…."
"끄으윽...!"
"듣자하니 국경선 인근에 병사들마저 숨겨 놓았다지? 어이가 없더구나. 대체 무슨 배짱으로 팬드래건을 공격하려 한 것인지, 아, 혹시 팬드래건이 우습게 보였더냐?"
"...!!"
"억울한 눈빛이로구나. 혹,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죽으면 술탄국과 팬드래건은 전쟁을 벌일 텐데, 이를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같잖은 생각 말이다."
"!!"
"괜한 걱정이다. 나의 의동생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위법 마법사를 생포해오더구나. 덕분에 네놈의 거죽을 타인에게 씌우는 건 어렵지 않을 테지."
"!!!?!"
살라흐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며 그저 온몸을 비틀거렸다.
허나 고통보다 더욱 힘겨운 건 그의 거죽을 벗긴다는 대목이었다.
설마…!!
눈을 부릅뜨며 그는 아이시스를 노려보았고, 아이시스는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냉소를 말이다.
"네놈의 어리석음 덕분이다. 덕분에 술탄국 하나가 내 손에 떨어지는구나. 아무렴 걱정 마려무나. 최선을 다해 돌봐줄 테니. 네놈의 백성들 또한 행복해질 것이다. 적어도 네놈 따위가 다스릴 때보단 훨씬 나을 것을 약속하마."
"아, 안…돼…, 저…절…대…로…!"
…살라흐는 발악하듯 손을 휘저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위대한 태양신의 자손이, 용의 핏줄 따위에게 국가를 빼앗길 수 없다며.
하지만,
"네놈의 허락 따윈 필요 없다."
그녀는 단호했다.
"잘 있거라, 어리석은 술탄이여."
나지막한 통보와 함께 그녀는 궁전을 빠져나갔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한없이 여유롭게.
"──!"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살라흐였지만, 살라흐의 손은 끝내 그녀에게 닿지 못하며 허무하게 떨구어졌다.
'나, 나는…. 대체 누굴 적으로 삼은 것이지…?'
살라흐는 처음으로 '후회'란 것을 했다.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 될, 그래 건드려선 안 될….
─용의 분노가 어떠한 것인지를 뒤늦게야 깨닫고 만 것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 * *
또각, 또각.
"...."
아이시스는 달빛을 벗 삼아 걸었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가면 될 터이지만, 그녀는 오늘만큼은 약간 걷고 싶었다.
손의 피를 묻혀서 감성적이게 변한 건 아니었다.
이미 그녀가 손에 묻힌 피는 셀 수도 없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감성적으로 변할 이유는 없다.
하니 그녀가 이렇게 걷는 이유는 단순히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이유.
후욱.
그때, 집사 복을 입은 노인이 느긋하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죽이셨습니까?"
"…내 안전은 묻지 않고, 그것부터 묻는 건가."
"허허, 공주님 안전이야 어련히 잘 챙기시겠지요."
"...뻔뻔한고."
"하하."
알버트.
그녀의 사람이지만, 그녀가 부려먹을 수 없는 사람.
아이시스는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늦장을 부리듯 등장하는 그가 얄미웠다.
"후우, 아직은 죽이지 않았다. 뽑아내야 할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아깝게 왜 죽일까."
"하하, 역시 공주님이십니다. 천하의 악당이 아니실 수 없군요."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는 없군."
"허허."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똑같이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 또한 악인일 따름이다.
그러니 악당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허나 악당이라 해도 삼류가 될 바에야 일류가 되어야 하는 법.
적어도 그녀는.
"나는 훌륭한 '대악당'이 될 것이다."
"하하, 그거 기대되는군요."
"흥!"
집사의 건방진 발언에 그녀는 코웃음 쳤다.
자신보다 더욱 속을 알 수 없는 집사였기에 저 웃음조차 가식으로 느껴지는 그녀였다.
그때.
"한데, 왜 공주님 혼자 있으십니까? 이런 일이라면 이한 경도 빠지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
"공주님…?"
"…하아…."
"?"
언뜻 가벼운 물음이었으나, 일순 의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시스는 조금 전의 차가움과 도도함은 어디 가고 한숨부터 내뱉었다.
그녀의 의동생.
일도 잘 처리해주고, 생긴 거랑 다르게 성실한데, 어떻게 된 게….
"마법사에 대한 혐오도만 줄어도 좋으련만."
"…허허, 알 만하군요, 어딜 갔는지."
"하아...."
아이시스는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음?"
…급격히 귀가 간지러웠다.
기사는 귀를 후비적거렸고, 먼지가 쌓였나 미간을 찌푸렸다.
"지저분하게 무슨 짓이지."
"더러운 건 똑같으면서 뭔 헛소리야."
"…네놈이랑 같은 취급을 받으니 성질이 나는군."
"넌 항상 화나 있는 미친놈 같은데?"
"...칼을 뽑아라."
"싸울 시간에 뛰어야지, 뭘 또 귀찮게 뽑아."
"…!!"
기사는 적당히 동행인을 놀리며 찝찝함을 잠시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욕할 사람은 한정적이었고, 아마….
'누님이겠지.'
자신의 통보에 한없이 어처구니없어 했던 그녀였으니까, 욕을 해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잔소리야 나중에 들으면 되는 거고.'
이한은 당장의 목표만이 중요했다.
"…근데 우리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네놈은 정말 대책이 없군. 길도 모르는 주제에 '마탑'까지 가려고 하다니."
"제국까지만 가면 된다며? 그럼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동행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게.
"'6000마일 거리'를 나흘 만에 주파하겠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갈라하드가 붙여준 길 안내자 라크의 발언이었고, 이한은 발끈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이 어디서-.
"마일 말고 km로 말해, 썩을…!"
파운드와 야드가 나올까 무섭다.
#165 EP-39 두 남자는 끝까지 간다(8)
전생 시절 이한이 부러운 부류 중 하나가 다름 아닌 해외여행을 거침없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인종과 언어도 다른 국가로 여행가는 '여유'가 괜히 부러운 것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국내여행조차 갈 시간이나 꿈도 꾸지 못하는 그로선 해외란 별세계와 마찬가지였으니까.
20대 초반에는 그런 이들이 괜스레 부럽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했다.
철이 없던 거고, 아직 어렸다는 증거겠지.
허나 약간 나이를 먹고 나서 해외는 아니지만, 국내 여행을 통해 알게 되더라.
'아, 여행이란 건 마냥 놀러 가는 것이 아닌 시야와 생각을 넓혀주는 공부기도 하구나', 싶은.
그러며 목표를 세웠다.
전역하면 나도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자고.
경험을 쌓고 싶었고, 새로운 나라의 문화와 환경을 겪어보고 싶었다.
모험 정신인지 아니면 나에게도 탐구심이란 것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이었다,
…순간이었으나,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전역하고 유럽 횡단이나 해보는 건데, 어휴, 돈을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아득바득 아낀 건지, 원…."
"…"
"너희도 그렇게 생각 안 하냐?"
"자, 잘 모르겠습니다…, 기, 기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왜?"
"?"
"왜 못 알아먹는데?"
"…."
"왜 못 알아 먹냐고 이 산적 새끼들아!"
퍼어억!
"아아악!"
"제, 제발 용서를!"
"어, 어무니…."
이한은 도적들을 두들겨 팼다.
마을 사람들 약탈하다 그에게 걸린 놈들이었고, 이한은 놈들의 팔이나 어깨, 다리 등을 하나씩 불구로 만들어 놨다.
이제 이 도적놈들은 도적질은커녕 일상생활부터 걱정해야 하리라.
"새끼들, 기껏 친절하게 말하는데도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네."
"…누가 과연 알아들을까 싶군. 혼자 멍하니 있다가 뜬금 공감을 원하면 누가 동의해줄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미친놈."
"하, 누가 누구보고 미친놈이래."
이한은 그래도 놈들을 불구로 만들어놨을 뿐이지, 아예 팔다리를 잘라놓지는 않았다.
한데 저놈은.
"거 다진 고기로 만들어놨네."
"…."
"내가 미친놈이면 넌 망나니냐?"
"…직업 차별 발언이다."
"얼씨구?"
다른 놈이면 모르겠는데, 저놈이 저런 발언을 하니 익숙하지가 않다.
계속 말다툼을 하다 보니 말솜씨가 는 것이려나.
그때.
"기사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일을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화전민 마을의 촌장이 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려 다가왔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비교적 젊은 촌장이었는데, 은퇴한 용병으로 보였다.
근육이 조금 쳐졌긴 하지만, 나름 한가닥 하지 않을까?
"감사는, 우리가 없었어도 당신 정도면 혼자서 해결했을 것 같은데."
"가능은 했을지라도 아마 마을 사람들은 피해가 컸을 테지요. 저 또한 크게 부상을 입었을 테고."
촌장은 백 명이 넘는 산적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기사들의 활약을 이미 보았다.
그렇기에 안다.
저들은 강하다.
젊은 시절 용병으로 일할 때도 저만한 수준의 기사는 본 적이 없다.
자연스럽게 내뿜어지는 기백 또한 한때 전쟁터에서 본 대장군 못지않은바.
촌장은 그들의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저런 자들이 왜 이런 깊은 산기슭까지 온 건가 의문일 따름이었다.
"그럼 이제 나머진 알아서 해, 저것들을 노동력으로 부려먹건 죽이건 신경은 안 쓸 테니까."
"감사합니다, 한데 주무시고 가시지 그냥 이렇게 가시는 건…."
"갈 길이 바빠서."
"호의는 고맙군."
두 기사는 고개를 저었고 가벼운 인사와 함께 쏜살같이 달려갔다.
말과 같은 주파력이었고, 어찌나 빠른지 순간 돌풍이 일어날 따름.
"…허허, 요정에게 홀린 기분이군."
분명 산으로 뛰어갔는데, 벌써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야생동물조차 저토록 빠르게 올라가는 건 어려울 터인데.
…한데.
"대체 저 산을 왜 오르는 거지?"
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붉은 산맥.
남부와 중앙을 가르는 가장 거대한 산맥이며, 다른 이름으로 [절망의 산맥]이라고도 불리는 산등성만이 가득한 산을 오르는 기사들을 보며 촌장은 의문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저 앞으로 가봤자….
"낭떠러지만 가득한 곳인데 말이지…. 설마 중앙 대륙으로 건너갈 생각인가?"
...…그럴 리가!
"하하, 아무렴 그럴 리는 없지. 어떤 미친놈이 붉은 산맥을 넘어서 중앙 대륙으로 건너갈 생각을 할까, 아하하!"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자살하려는 사람도 피한다는 곳이 붉은 산맥인데 말이다.
붉은 산맥을 넘어서 중앙 대륙으로 건너가다니, 자신이 생각했지만 참….
"바보 같은 생각이지."
"-진짜 이 산맥만 건너가면 중앙 대륙까지 쉽게 갈 수 있는 거지?"
"비록 산세가 험악하고 절벽이 많으며 독물과 마물, 그리고 미로와 같은 자연의 신비가 있긴 하지만, 나흘 안에 도착하고 싶다면 이 길이 지름길이다."
"…으음, 앞의 설명이 좀 신경 쓰이긴 한데, 뭐 지름길이라면야."
절벽이 많고 독물과 마물이 있다?
음, 그럴 수 있다.
자연의 [신비]로 인해 미로가 형성되어 있다?
뭐, 불칸이랑 비슷하다.
즉.
"지름길 맞네."
이한은 빠르게 납득했다.
* * *
- 꼭 가야겠느냐?
전날 새벽.
그러니까 그가 아이시스에게 주문쟁이를 넘기고 곧장 떠나겠다고 하자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 제국이라니, 중앙 대륙이 얼마나 먼 줄은 아느냐?
- 정확히는 마탑으로 가는 거죠.
- 그거나 그거지. 사람이 아무리 성실히 걸어도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거리니라.
- 걷지 말고 달리면 되지 않을까요?
- …언제부터 입으로 짖는 법을 배운 게냐?
- …말 한 번 험하게 하십니다.
그녀는 못마땅해 보였다.
하긴, 제국으로 건너가겠다는 발언을 듣고 누가 긍정적인 반응을 할까.
허나 그로선 어쩔 수 없다.
- 거기 주문쟁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죽이러, 아니 족치러 가야지.
- …죽이는 거나 족치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더냐?
- 됐고, 나 이제 가볼게요. 술탄은 누님이 알아서 처리해줘요. 믿고 맡길 테니.
- 누구한테 하는 말이더냐.
- 됐고, 갑니다.
- 하아….
차마 잘 다녀오란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잠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 …빠르게 다녀오거라.
- 알고 있어요. 어차피 휴가도 8일밖에 못 받아서 빨리 와야 하는데, 뭐.
- 쓸데없이 성실한 녀석 같으니….
그런 응원과 격려(?)를 들으며 이한은 왕도를 빠져나왔고, 그를 기다리는 길잡이를 찾을 수 있었다.
- …네가 왜 여기 있어?
- 전하의 명령이다.
- 스읍, 잘못된 인선인 것 같은데-.
- …감사한 줄 모르는 무뢰배 같으니!
갈라하드 쪽에서 제대로 도와줄 생각인 건지, 아니면 마탑이 마검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모르겠으나, 갈라하드는 창잡이를 붙여주었다.
그와 견원지간과 같은 관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기사.
- 못 따라오면 내버려두고 갈 것이니 잘 따라오도록.
- …불친절한 길잡이 같으니.
약간의 말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달렸다.
거추장스러운 갑옷은 모두 벗고, 칼과 도끼만을 챙긴 그와 창 한 자루만 쥔 채 달리는 창잡이였고, 그들은 일절 대화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렸다.
녀석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따라오지 못한다면 두고 갈 생각인지 속도는 조금 늦추지 않았다.
들판과 산속을 달릴 때도, 그리고 절벽을 오를 때도 말이다.
녀석은 건방질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듯 절벽을 마치 땅처럼 달렸고, 이한도 비슷하게 절벽을 타고 달렸다.
어떻게 물리법칙을 벗어나듯 달릴 수 있냐고?
- 떨어지기 전에 달리면 되는 것이지.
- 발가락 힘으로 짚으면 가능하지.
- ??
- ?
서로의 의견은 달랐지만 절벽을 요령껏 달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반나절은 전력으로 달리며 산과 절벽을 넘나들고 나니 어느 순간 그들은 붉은 산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제국이 있는 중앙 대륙으로 가기 위해선 빙빙 둘러서 길을 더욱 걸어야 하고, 배를 타고 드넓은 강도 건너야 하는 것을 생각했을 때, 붉은 산맥은 유일하게 중앙 대륙까지 가는 직선 코스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붉은 산맥을 가로지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3백 년 전 제국의 10만 병력이 붉은 산맥을 넘다가 모조리 다 죽은 이후에는 더더욱.
즉, 그들은 10만의 병력을 죽인 산맥을 자처해서 들어온 것이었고, 지도에도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름길이니까 상관없지!'
빠르니까 상관없다.
그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
"...."
붉은 산맥을 오르고 나서부터 그들은 대화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Krr!]
[Kaaa!!]
[kieee!!]
붉은 산맥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마물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기에.
고블린과 놀은 기본적이고, 목귀(木鬼)라고도 불리는 식물형 마물과도 대적해야 했다.
산속에서 많이 자생하는 마물이긴 하지만, 붉은 산맥에는 이런 식물 형태 마물이 널려 있었다.
콰직! 푸욱!!
허나 그들은 어떤 마물이 나오건 베고 찢으며, 부숴버리며 직진했다.
멈추지 않으며 마물을 모조리 다 도륙해버린 것이다.
또한 마물은 붉은 산맥에서 상대하기 편했다.
그냥 죽이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도리어 힘든 건.
콰르르르릉!
"또 지진인가."
"돌풍이 불고 있군. …낙석이 시작되려는 것 같군."
산의 분노, 또는 산의 장난이라 불리는 현상이 시작됐다.
붉은 산맥은 불칸처럼 신비가 깃든 산맥이다.
불칸처럼 신성한 종류까진 아니다. 약간 어린 느낌이 든다고 보면 되리라.
그리고 어리다는 건….
쿠르릉!!
제멋대로란 것이며, 도저히 읽을 수 없다는 것과 동일했다.
지진이 일어나고 낙석이 일어나며, 돌풍이 모든 것을 휩쓴다.
쏴아아아아!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 앞이 안 보이는 건 우습고,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며 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화아아악!
끈적한 느낌이 드는 자욱한 안개가 기어이 시야를 방해했고, 급기야.
파바박!
우박이 쏟아졌다.
웬만한 어른의 주먹보다 큰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이다.
한데도….
파바밧!
"길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믿지 못하겠다면 따로 가라."
"질문하는 건데, 왜 이리 날카로워."
"내 집중을 방해하지 말란 거다."
"거 예민하네."
"!!?"
"앞을 봐, 앞을."
그들은 산의 방해에도 달릴 뿐이었다.
벌써 이틀 밤을 지새우며 쉬지도 않고 달리는데도 그들은 지치는 것을 모르고 달렸다.
배가 고프면 말린 육포와 과일로 때웠고, 물조차 달리면서 마신다.
오로지 직진.
가끔 낭떠러지나 강이 등장해도 낭떠러지는 훌쩍 점프해서 뛰어넘고, 강은 헤엄쳐서 뛰어넘었다.
그들의 질주에는 그 어떠한 자연의 방해도 통하지 않았다.
지진은 극복하는 것이었고.
돌풍은 견디는 것이었으며.
낙석은 그냥 방해물이었다.
안개와 폭포수와 같은 비는 조금 방해가 됐지만, 그조차 그들의 질주를 막을 수는 없는 바였다.
…이런 그들이 거슬려서일까?
화아아악!
어느 순간 산의 온도가 급격이 높아졌다.
미칠 듯한 열기가 감돌았으며, 급기야….
화르륵!
"…아무래도 이 산은 우리가 싫은가 보구먼."
"정확히는 인간을 싫어하는 거다."
"그게 그거지 뭐."
거대한 산불이 났다.
마치 그들을 태워 죽이려는 듯한 거대한 산불이.
정말 뜬금없이 일어난 대화재(大火災).
인과간계가 조금 부족한 갑작스러운 화재였고, 감히 이 화재를 뚫고 가는 건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뚫는다."
"...."
그들에게 이런 건 장애물조차 되지 못하였다.
콰지지직!
이한은 두 손으로 나무를 뽑았다.
대략 5천 키로가 나갈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였지만, 이한은 이제 이 정도 나무는 거뜬히 뽑을 '근력'이 있었다.
과거에는 어느 노안의 주문쟁이를 이용해야만 가능했던 기술이었으나, 한층 성장한 이한은 이러한 기술을 홀로 해내는 게 가능했다.
- 관일창.
콰아앙!
마치 주포와 같은 소리가 나며 한 그루의 나무가 곡사포마냥 하늘을 날았다.
이한의 [힘]을 담은 채.
그리고….
"…이게 되네?"
"무식한 무뢰배 같으니, 이런 게 가능했으면 처음부터 했어야지."
"아니, 진짜 될 줄은 몰랐지, 나도."
이한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게.
'와, 내가 찬 나무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게 가능하긴 했구나….'
옛날 어느 만화에서 본 것을 흉내 낸 것이긴 한 건데,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
약간의 힘과 요령, 그리고 타이밍만 맞추면 가능하긴 했구나, 하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마치 비행기를 타듯이 하늘을 유영하는 그들이었고,
콰지지지직!
그들은 절벽과 충돌했다.
"…으음, 하늘을 나는 시간이 너무 짧네."
"...."
1분의 비행.
그래도….
'라이트 형제 첫 비행보다 길지 않나?'
절벽 밑 강물에 휩쓸려가면서도 그 사실 하나만은 뿌듯한 이한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난 후.
"예정보다 반나절이 좀 더 걸렸네."
"…이게 되는군."
"...너도 진짜 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냐?"
"...."
"야!"
나흘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나고, 그들은 중앙 대륙으로 건너오는 데 성공했다.
#166 EP-40 기사들의 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