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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의 부군이 되었다

1화 내총관 진여명 (1)

첫 번째 인생은 제법 괜찮았다.

인류를 구한 영웅. 지구의 수호자.

온갖 찬사와 함께 신들에게 축복을 받았고, 그 대가로 두 번의 삶을 더 약속받았다.

비록 전쟁에서 얻은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두 번의 삶을 더 얻었으므로 후회는 없다.

세 번이나 지속되는 인생이라. 정말 최고이지 않은가?

비록 영웅이라 불린 삶이었지만 첫 번째 생에서는 온갖 개고생을 다 하며 비루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다음 생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나게 놀아 재끼며 화려한 삶을 살리라!

***

아, 망했다.

타오르는 수많은 전각을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막아라!"

"무림맹 놈들이 태마전(太魔殿) 인근까지 접근했다!"

"놈들을 절대 안쪽으로 보내지 마라!"

주위에서 수없이 들리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 소리는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고함 소리. 날붙이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

이 세 가지 소리를 하나로 뭉쳐 요약한다면.

그래, 싸움 소리다.

'두 번째 생은, 진짜 망했군.'

바깥의 참상을 확인한 이후,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바쁘게 팔다리를 움직였다.

물론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밖이 아니다.

물경 수만에 달하는 정사무림맹 놈들이 개미 새끼들처럼 사방팔방에 쌓여 있다.

지금도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내가 칼을 쥐고 나갔다간, 단칼을 휘두르는 순간 저승행일 거다.

전생의 다짐대로 신나게 놀아 재낀 결과였다.

그렇게 한참을 뛰고 있을 때, 묵직한 느낌의 중년인이 내 앞에 튀어나왔다.

"아니, 내총관님! 아직도 탈출하지 않으셨습니까!?"

"헉! 헉! 아, 산도전 대주로군."

본교 외곽 담당 부대 사마대(四魔隊) 중 하나인 풍마대(豊魔隊)의 대주, 무혈풍뢰(無血風雷) 산도전. 별호와는 별개로 주위에서 부르는 별명은 외모에서 비롯된 산도적.

"어찌 호위 하나 없이 이런 곳에 계십니까!?"

호흡을 고른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 호위들은 모두 외곽 방어에 투입했네. 어차피 허울뿐인 내총관직 아닌가? 적당히 허름하게 차려입었으니, 모르는 놈이 보면 평범한 마졸 정도로 보이겠지."

"아, 아무리 그래도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저와 함께하시지요."

산도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대피할 것을 재촉했다.

아, 물론 지금 내가 위험한 곳에 있는 건 안다.

당장 백여 장 밖에서 수백에 달하는 교도들이 수천의 무림맹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치열한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자네나 피하게. 신강으로 대피해 차후를 도모하라는 교주님의 명령을 잊었나? 풍마대도 슬슬 퇴각할 준비를 해야지."

"내총관님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뭐 있겠나? 가서 교주님을 모셔야지."

"교주님께서는…."

"전 교도들에게 대산(大山)을 버리라 지시하신 이후로, 어째서인지 움직이지 않으시더군."

그리고 산도전이 내 앞을 막기 전까지, 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천마전(天魔殿)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산도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난 그분의 의중을 헤아린 뒤 그분과 함께 퇴각할 거니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 빌어먹을 배신자들이 떠나간 이후, 교도들의 사기가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산도전의 표정이 흐려졌다.

천 년의 영화를 누린 천마신교의 입구가 뚫린 이유는, 다름 아닌 내부 고위층'들'의 배신.

교의 근본까지 흔들릴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교도들의 사기가 바닥을 친 것도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중심을 잡고 사기를 끌어올려야 할 교주는 마지막 명령 이후로 여전히 천마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대로라면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이 무너질 겁니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자네도 적당한 때를 봐서 부하들을 수습하게나."

"충! 조심하십시오, 내총관님!"

상황이 정말로 위급하긴 한 건지, 그 말을 끝으로 산도전은 바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번 생은 진짜 꽝이네, X발."

***

내 이름은 진여명.

나이는 37세.

오 년 전 천마신교 최연소 내총관에 임명된 인재로, 신교 불후의 명문가 마천진가(魔天鎭家)의 첫 번째 계승자이기도 하다.

뭐, 현재 마천진가는 동생 놈이 물려받았으니, 지금은 계승자라고 부르기도 뭐하긴 하다만.

어쨌든 동생이 가문을 이어받고.

한량의 삶을 즐기던 나는 전대 가주가 된 아버님의 권고…를 가장한 협박에 굴복해 강제로 공석이 된 내총관직을 맡게 되었다.

"역시 아무도 없군."

나는 천마전 입구를 아무 거리낌 없이 지나쳤다.

"빌어먹을 호법원 놈들."

원래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호법원의 고수들이 나타나 제지해야 한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 호법원을 이끄는 대호법은 정작 이번 사태를 부른 배신자들의 수괴 중 하나였다.

길게 이어진 길의 끝에, 아수라가 조각된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천마전(天魔殿).

여기서도 원래 교주를 모시는 시비들이 나타나 용무를 기록하고 안쪽을 향해 고해야 하지만....

'다 죽었군.'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혈향을 맡고 있노라면,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굳게 닫힌 천마전의 안쪽을 향해 나지막이 목소리를 높였다.

"교주님, 내총관 진여명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

안에선 답변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예의상 한 번 더 목소리를 내었다.

"교주님! 내총관 진여명입니다!"

역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무례한 어조로 목청을 돋웠을 때.

"야! 교주...!"

저 안쪽에서, 여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내총관."

움찔!

'이런 X발! 깜짝이야!'

대답할 거면 아예 첫 부름에 답해 주든가!

'서, 설마, 내 반말을 들었나? 중간에 잘렸으니 괜찮겠지?'

나는 조마조마하며 천마전의 문을 밀었다.

끼기기긱!

대번에 묵직한 저항감이 손끝에서부터 느껴졌다.

'젠장, 빌어먹을 호법원 놈들! 문을 열어 줄 놈은 좀 남아 있을 것이지!'

솔직히 이 문, 더럽게 무겁다. 내공 없는 일반인의 완력으로는 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헥, 헥!"

나는 약 1분여간의 사투 끝에 겨우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목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이 상당히 찝찝했다.

그런데 그때.

후우우욱!

저 안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땀을 식혔다.

이런 밀폐된 실내에선 있을 수 없는 인위적인 바람.

그 바람을 일으킨 존재가, 저 안쪽에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향했다.

천마전 최심부에 마련된 대전(大殿)의 최고 상석.

그곳에 천마신교 제29대 교주이자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 천유라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교, 교주님을 뵙습니다."

이쪽을 바라보는 천유라의 표정엔 한 줄기 미소가 맺혀 있었다.

"여전히 내총관의 무공은 삼류 마인들보다도 못하구나."

입구에서 내가 끙끙거리는 꼬라지를 옥좌에서 지켜본 게 분명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답했다.

"다른 장로들이나 대주들이 이 꼴을 안 봐서 다행이죠."

그렇다고 삼류라고 멸시당할 수준은 아니고, 내공만큼은 일류 언저리는 된다.

교주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감히 본 교주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꼴을 대장로가 봤다면, 자넬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

나는 속으로 기함을 내질렀다.

'망할!'

다 듣고 있었구나!

교주의 평소 성질을 생각하면 칼날이 날아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땀을 흘리는 내게 바람을 내보낸다는 배려도 그렇고, 오늘의 교주는 딱히 내 무례를 책망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좀 단련할 생각은 없나?"

나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이미 다 늦은 마당에 뭔 단련입니까?"

"아쉽군. 재능은 꽤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렇겠죠. 제가 마음만 먹었으면 본교 서열 맨 앞자리 수부터 하나씩 뒤로 밀렸을 테니까요."

"큭큭큭!"

교주는 내 말에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뭐, 교주는 믿지 않겠지만 나름 사실이긴 했다. 실천을 안 해서 문제지.

나는 이번 생에 가문의 위광에 빌붙어 꿀을 빨았다. 그렇게 무공을 소홀히 한 결과로, 내총관직에 낙하산으로 임명된 뒤엔 본교 수뇌부 중 최약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말았다.

"그래, 우리 최약체 내총관. 무슨 일로 본 교주를 찾아왔지?"

교주의 비꼬는 듯한 물음에 나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긴요? 엉덩이 무거운 우리 교주님을 신강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죠."

"후후후, 대장로가 이 말을 듣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군."

"없으니까 하는 소리입니다만."

만약 정상적인 대전회의에서 이런 건방진 말을 내뱉었다간, 분노한 대장로의 검이 내 목을 가르려고 했을 거다.

굳이 대장로가 아니더라도 충성심 넘치는 다른 장로들이 날 조지려 들었을 거고.

'하지만, 지금 이곳엔 그 누구도 없다.'

대장로는 신교의 배신자들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장로들은 대장로를 죽이는 데 가담했거나, 혹은 함께 대장로의 뒤를 따랐거나, 그것도 아니면 교인들을 통솔하는 데 투입되어 있다.

나는 표정을 싹 가라앉히고 교주에게 따졌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나왔다.

다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천살지독(天殺之毒)."

"네?"

"만사혈보독(萬死血潽毒). 무형지독(無形之毒). 극정화골산(極情化骨散), 구마신선폐(驅魔神仙廢)...."

"아, 아니."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대충 이 정도로군."

나는 교주가 읊은 단어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설마, 중독되신 겁니까?"

겉으로 보면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지만, 여기까지 와서 교주가 농담 따먹기를 하진 않을 것 같다.

교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금 교주에게 되물었다.

"누구 짓이죠?"

지금 내 머릿속엔 누군가의 이름 하나가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설마, 마도대공(魔道大公), 그 개자식의 짓입니까?"

이런 식으로 교주에게 하독을 시도할 간 큰 놈들은 많지 않다.

애초에 당해 줄 리도 없을뿐더러, 어지간한 측근이 아닌 이상 시도조차 해 볼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어지간한 측근 중에 이런 짓을 할 가장 유력한 인사를 꼽자면, 단 한 명.

마도대공, 한무백.

전대 교주이자 천마의 위에 있었던 마존(魔尊) 천태종의 사위.

즉, 현 교주 천유라의 부군으로 선택된 남자를 말함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사 무림맹에게 십만대산의 문을 활짝 열어 버린, 배신자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교주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놈이 나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하더군.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것이라고. 내게 접근하고 전대 교주님과 나의 환심을 사기까지 너무도 힘들었다고."

"...."

"내 몸에 하독한 것들은, 자신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알아 달라는 의미라고 하더군."

"그 미친 새끼가…아, 이런."

나는 자신도 모르게 교주 앞에서 욕설을 내뱉었다.

곧바로 내 실수를 자각하며 입을 가리자, 교주는 오히려 유쾌하게 웃었다.

"후후후, 역시 그대는 재밌어."

"아니, 지금 그 소리가 나오십니까!?"

하나만 잘못 먹어도 초절정고수조차 녹아 없어지는 절독들이다.

그걸 최소 대여섯 개 이상 퍼먹었으니, 아무리 교주가 절대 고수라 해도 버틸 수 있을 리가!

"나는 처음엔 한무백이 자넬 보낸 줄 알았네. 내 상세를 확인하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말이야."

내 얼굴이 황당하게 일그러졌다.

"세상에 누가 나 같은 놈을 자객으로 보낸답니까?"

"그래서 나도 곧바로 의심을 풀었지. 문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해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니 허탈함마저 들더군."

"아, 아니."

교주의 맹공격에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답답해지는 속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교주는 평소엔 절대로 이런 농담 따먹기를 하지 않는다.

여인의 몸으로 교주의 자리에 오른 만큼, 그녀는 평소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렸다.

언제나 근엄하고,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엄격했던 존재.

그게 바로 당대 천마신교주이자 마도대종사, 무정마후(無情魔后) 천유라가 보여 주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인다는 건....

"늦은, 겁니까?"

시무룩한 내 물음에 천유라가 빙긋 웃었다.

"아마도. 천살지독이 단전을 장악한 시점에서 이미 늦었어. 나머진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이것만큼은 안 되더군. 하하, 3년만 빨리 눈치챘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야."

교주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장내에 메아리친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제가 좀 더 잘했더라면."

"뭘, 자네를 탓하진 않네. 천뇌전이 교내의 요직을 전부 차지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해진 내총관 자리로 뭘 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한무백이 외부 세력이 심은 간자임을 알았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게 두진 않았을 겁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모두가 그에게 속았으니까."

나도, 자네도, 아버님까지도.

씁쓸한 기색으로 뇌까리던 교주가, 이쪽을 향해 말했다.

"탈출하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교주님을 두고 가진 않겠습니다."

나름 충심으로 한 말임에도 교주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자네가 이렇게 충성심이 깊은 인물인지는 몰랐는데?"

"저도 자기 목숨이 아까운 인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최소한의 의리는 있습니다."

"의리라."

교주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충성심이 아닌 의리.

눈앞의 존재는 소교주 시절. 정략혼의 대상 중 한 명이었던 명가의 자제.

인연이라면 오직 그것뿐이었다.

…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겠지.

사실 본심은 달랐다.

'솔직히 늦었지. 내가 절정 언저리만 되었어도 그냥 튀어 버리는 건데.'

고작 일류 턱걸이 정도의 경공으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절정고수들의 손아귀에선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음엔 확실하게....'

나는 결심을 하고는 고개를 쳐들어 교주와 눈을 마주했다.

"교주님."

"말해라."

"만약에 말입니다."

"그래."

"정말 만약에."

"그래."

"정말정말 만약에 말이죠."

"...한 번 더 만약이라는 말을 했다간 혀를 뽑아 버릴 테니 본론만 말하도록."

"네."

나는 피부를 짓누르는 진득한 살기에 쫄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내 입에서 큰 결심이 튀어나왔다.

"기회가 한 번 더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회, 라고?"

"네, 기회."

교주는 지금 눈앞의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로서도 나름 큰 각오로 진실을 토해 낸 것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전생에 세상을 구했다."

"내총관 네놈이 세상을 구했다는 건 믿기가 어려운데…."

교주의 삐딱한 눈빛이 참 불경했다.

"그래서, 자네가 전생에 세상을 구했으니 기회를 한 번 더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이해가 빠르시군요."

천유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놈이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조금 풀어 줬다고 이런 상황에서 감히 날 농락하려 드는 건가?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교주의 고민을 읽은 나는, 천천히 그녀의 앞에 절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당신께선 지금의 일을 기억하시진 못하시겠지요."

"...."

"하지만 원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지금을 기억하고 있는 이 진여명이 최대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결심했다.

본교를 배신한 배신자들. 십만대산을 침범한 정파 무림맹의 잡것들. 그리고 이번 사태를 야기한 제삼의 세력들까지.

내 영혼을 걸고서라도.

모조리, 도륙을 내 버릴 것이다.

"...."

교주는 한참을 침묵했다. 나는 교주가 곧 내 목을 칠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기만당했다고 미쳐 날뛰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말에 대한 진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내게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거지?"

교주는 지금 눈앞의 상대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뭐,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고개를 든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첫째로는, 저도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고요."

이번 생에선 나름 조용히 지내 와서 그렇지, 은혜와 원한은 반드시 갚는 성격이다.

"또 하나는, 신세를 진 분에게 빚을 갚을 겸해서죠."

"신세라고?"

"뭐, 그건 그렇게 깊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고. 놈들을 다음 생에선 미리 치워 놔야 제 편안한 삶이 보장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절절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그녀는 내가 처음 말한 신세라는 것에 곧 관심을 거두었다.

"훗!"

교주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전생(轉生)이라."

망언이라고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

그녀는 여전히 황당해할지언정 화는 내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래서 내가 건 장난질에 어울려 줄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내 말을 믿어서였을까.

교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본녀가 네게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나?"

"뭐든 말씀하십시오."

"만약 네가 정말로 전생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된다면?"

"으음...."

그녀는 어째서인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곧이어, 만약 차를 머금고 있었다면 그것을 그대로 내뿜었을 발언이 튀어나왔다.

"자네가, 날, 좀 꼬셔 주겠나?"

"...네?"

나는 멍청하게 그녀의 말을 되물었다.

2화 내총관 진여명 (2)

날 좀 꼬셔 주겠나?

"...."

음.

침묵이 대전 안을 감돌았다.

침묵이 계속해서, 대전 안을 감돌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는 나를 향해 교주가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이봐,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을 좀 하지?"

"아, 예에...."

나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상기하며 천천히 귀밑을 만지작거렸다.

"음, 내 귀가 언제 음공에 당했지?"

"귀를 뽑아 줄까? 내총관 네놈 정도라면 지금 상태로도 가능할 것 같은데."

교주의 몸에서 무지막지한 살기가 터져 나온다.

피부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실언을 했습니다."

살짝 한숨을 내쉰 교주가 말했다.

"방금은 농담이다. 아무리 너와 나의 마지막 자리라도 조금은 가볍게 말한 것 같군."

나는 배시시 웃었다.

"가벼우셔도 상관하지 않습니다만. 아니, 오히려 가벼워서 좋군요. 교주님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니까요."

흠칫!

"그러, 냐?"

"네, 그렇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생명이 경각에 달해 마음이 약해진 탓일까?

그녀는 군신의 예의는 어느 정도 벗어던지기로 했다.

"하아, 좋아. 지금부터 내게 교주란 호칭을 쓸 필요는 없다. 가볍게 말하도록."

무거운 군신관계는 마지막 순간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걸까?

확실히 분위기가 이런 꼬라지로 흘러가기도 했고.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음, 그럼, 천유라 소저?"

"...."

"...."

또다시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말 한마디에, 교주의 얼굴은 물론 몸 전체가 마치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교주가 내 목을 내려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교주의 반응은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가 천천히 양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뭔가, 좀, 부끄럽군."

"...."

순간.

나는 멍하니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위엄과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다.'

그녀를 처음 본 지 이십 년이 흘렀다지만, 그녀는 조금 성숙해졌을 뿐 그때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내가 고개를 털고 있을 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내 나이가 이립(30)을 넘은 지 한참 지났다. 소저라는 말은… 내겐 어울리지 않아."

사실 이립이 아니라 불혹(40)에 가깝긴 하다.

하나 그걸 지적했다간 정말로 죽을 수 있으니, 나는 화급히 떠오른 생각을 억누르고 화제를 돌렸다.

"저도 좀 부끄럽긴 하군요. 그냥, 원래대로 교주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지."

약간 묘하고 어색했던 분위기가 지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말은 즉, 저에게 마도대공의 자리를 노리라고 하신 뜻으로 해석됩니다만,"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그렇다 치지."

어째서인지 그 말을 하는 교주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난 그걸 무시하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굳이?"

"...."

그 말에 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무백이 마도대공의 자리를 얻는 걸 저지할 자신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교주님의 반려로 들어가기엔 좀...."

교주가 상처 입은 눈으로 말했다.

"너는, 내가 싫다고 말하는 거냐?"

동정심을 구하는 그녀의 눈빛에도 나는 단호했다.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본인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에 교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큭!"

"연애라는 건 두 사람이 모두 할 마음이 있어야 성립되는 건데, 솔직히 소교주 시절의 교주님을 생각하면...."

오는 남자들을 거절하다 못해 죄다 박살 내 버리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교주님은 소교주 시절부터 말릴 수 없는 폭군이셨죠."

교주가 되면서 마음을 닫았기에 역으로 그 성향이 줄어들었지만, 소교주 때는 진짜, 어휴!

"솔직히 한무백이 마도대공 자리를 얻은 가장 이유 중 하나가, 교주님의 성깔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잖습니까?"

"...."

대번에 그녀의 입술이 댓바람처럼 튀어나왔다.

뭐, 솔직히 말하면 한무백이 외부에서 가져온 막대한 성과가 결정적이었지만, 딱히 저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가문도 빵빵했던 내가 한무백에게 밀린 이유는 별거 없었다.

가문에 빌붙어 꿀을 빨던 내가 연애에 딱히 관심이 없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굳이 성질 더러운 교주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도 없었던 것이었다.

교주가 고개를 홱 돌렸다.

"흥, 싫으면 말아라. 너 따위에게 애걸복걸할 정도로 본 교주의 자존심이 낮지는 않다."

대놓고 삐졌다고 광고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내질렀다.

어째서인지, 썩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불가능하답니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내 모습에, 옆으로 간 교주의 눈이 살짝 돌아왔다.

"연애란 본디 관심이 있는 자가 관심이 없는 이에게 연애 감정을 심어 주며 시작하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면 빠르게 관계가 진행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상대의 마음을 설득해야 한다.

뭐, 그 과정 중에 구질구질하다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열의 아홉이겠지만.

"교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노력은 어렵지 않죠."

"그, 그러냐?"

교주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설사 정상적인 연애는 불가능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마도대공 자리를 따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해 달라는 건 아닐 것이다.

'솔직히, 나도 아주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신다면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뭐지?"

"과거의 교주님을 조금 험하게 대해도 용서해 주신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약점이 있다면 좀 알려 주시고요."

"...하."

가당찮다는 기색이었다.

"네놈 따위에게 본 교주의 치부를 드러내라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공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뭐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자존심을 세우실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 그래도…."

"싫으면 마십시오. 아쉬운 건 제가 아니니까요."

전생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제로 담론을 나누고 있음에도, 교주는 나름 진지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런 맥락이었을까? 교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말했다.

"만약, 이 말이 밖으로 새 나간다면 내 모든 걸 걸고 진여명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그건 과거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시끄러워!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똑바로 들어라."

이 거대한 대전에서 살아 있는 건 단둘뿐인데도, 그녀는 굳이 전음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

"어."

-....

"으, 으음!"

-....

"크흐흐흠!"

약 반 각 동안의 전음이 끝나자,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인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상당히 떨떠름한 얼굴로 교주에게 말했다.

"왕년에… 상당하셨군요."

"다, 닥쳐!"

교주가 왕년에 벌인 대서사시는 아무리 전생을 겪은 나라고 해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그게 절대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튼,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교주님의 젊은 시절을 들으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군요. 나중에 큰 도움이 될...."

"잠깐."

교주가 이제야 날 살인멸구할 마음이 들었나 싶던 찰나.

딱딱하게 굳어진 그녀의 목소리가, 풀어진 분위기를 원래대로 돌려 버렸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대화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

"불청객들이 천마전 입구까지 들어왔구나."

그 말은 즉.

중원 정사무림맹의 맹공에 모든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교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마지막 가는 순간 정도는 편하게 보내 줄 수 있다만?"

"사양하죠. 가능하면 마지막까지 정보를 눈에 담고 죽으렵니다."

"후후후, 그런가?"

그 말을 끝으로 나와 교주는 조용히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적들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 뒤.

천마전의 두꺼운 입구가 박살 나며 그 안으로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대에 마교가 멸망하는 것을 볼 줄이야. 참으로 영광스럽기 그지없도다."

그들의 선두에 선 선풍도골의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존인가?"

"그렇소, 교주."

정사연합 무림맹주, 검존(劍尊) 관현진인.

하지만, 우리의 눈에 걸린 건 검존만이 아니었다.

교주가 사나운 미소로 검존의 옆에 있는 이를 노려보았다.

"우리 증오스러운 낭군님이 다시 돌아오셨군."

내 시선 역시 교주와 같은 곳을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

마도대공(魔道大公), 한무백이 있었다.

씨익!

나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훤칠한 미남인 한무백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다 못한 내가 검존을 쏘아붙였다.

"무림맹주, 당신 지금 누구를 옆에 끼고 있는지 알고는 있나?"

"물론!"

자신 있게 대답한 검존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창천신룡(蒼天神龍)은 중원무림의 영광을 위해 오욕을 감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소! 중원은 창천신룡의 공과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하."

"창천신룡?"

나와 교주가 동시에 실소했다.

설마하니 마도대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와중에도, 틈틈이 정파 쪽에 연줄을 만들어 놓다 못해 저런 거창한 별호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수완이 대단하군. 감탄스러울 지경이야."

한무백은 그런 교주를 향해 '정의롭게' 외쳤다.

"마도대종사 무정마후! 그대가 벌인 모든 죗값을 치를 때가 왔소!"

그녀의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갔다.

"글쎄, 내게 당가조차 기겁할 독을 먹인 네놈이 할 말은 아니군."

"모든 건 중원무림을 위해서였소."

"반천회(反天會)를 위해서였겠지."

움찔!

교주의 조소에도 당당하던 한무백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그것을 감지한 뒤쪽의 무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천회?"

"그게 뭐지?"

나조차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 하지만 한무백은 무언가 찔린 기색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맹주님, 그리고 여러분! 마녀의 이간계에 놀아나지 마십시오. 마지막까지 우리를 이간질하려는 사악한 술책입니다."

그 말을 검존이 받았다.

"흐흠, 그렇겠지. 마도의 발언 따위는 재고할 일말의 가치도 없으니."

"그, 그렇겠지?"

"맹주님께서도 이리 말씀하시니."

검존까지 합세하고서야 뒤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안타깝게도, 교주가 던진 놈의 정체에 대한 열쇠는 그렇게 무시당했다.

한무백이 계속해서 뱀처럼 혀를 놀렸다.

"교주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했습니다. 굳이 일대일 대결을 해 줄 필요도 없이 전력을 쏟아 잡으시지요."

"흐음...."

검존은 그 말에 살짝 고민했다.

이미 무력화된 거나 마찬가지인 마교의 교주를 단독으로 잡아내면, 중원에 그 명성이 얼마나 치솟을 것인가?

잠깐의 탐욕이 검존을 괴롭혔지만, 그는 수양 높은 무당산의 도인답게 탐욕을 이겨 내었다.

적들이 넓게 포위진을 펼치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쳇.'

만약 일대일을 고집했다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아쉽게 되었다.

"옆에 있는 자는 마교의 내총관으로 추가적인 공적으로는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젠장.

한무백의 포문이 이번엔 이쪽으로 향했다.

나 역시 교주의 곁에 서며 칼을 꺼내 들었다.

가주가 된 동생 놈 대신 이거라도 쓰라며 아버지가 던져 준 보검이었다.

교주 역시 자신의 검이자 신교의 성물인 천마성검을 꺼내 적에게 겨누었다.

"내 비록 독수에 당했다지만, 너희 따위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허세가 과하시구려, 교주."

"글쎄? 허세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화륵!

교주의 손을 떠난 천마성검이 검은 불길과도 같은 마기를 내뿜었다.

그 모습에 검존과 다른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도 저 정도의 역량이 남아 있었는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천마성검은 열두 개의 검영으로 분리되며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천살마검!"

천마신공이 마도 제일의 신공이라면, 마도 제일의 검공은 천살마검이란 말이 있다.

다급해진 검존이 칼을 빼 들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황룡천검대! 마도의 주구를 공격해라!"

"우와아아아!"

검존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백에 달하는 무림맹의 최정예, 황룡천검대의 대원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목숨을 건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

뚝! 뚝!

전신의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에, 잠들어 있던 내 정신이 잠깐이나마 깨어났다.

'아, 젠장.'

나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자각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음에 이른 내 육신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직전의 상태.

'교주, 교주는?'

온갖 절독에 중독되어 원래 힘의 반에 반도 내지 못했을 교주였지만.

그럼에도, 왜 중원이 그녀에게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란 이름을 붙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일전이었다.

천살마검을 펼친 그녀는 물경 이백에 달하는 정사무림맹 최정예를 상대로 무쌍을 펼쳤다.

하지만 나는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볼 순 없었다.

볼썽사납게도, 나는 내게 달려든 한무백의 검을 몇 초도 받아 내지 못하고 꼴사납게 당해 버렸으니까.

쩌적! 쩌저적!

'뭐가 자꾸 타는 소리가 들리는군.'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 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전신에 힘이 빠져 시야조차 흐릿한 상황.

그런 와중 귓가에 지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나, 진여명?"

"교주?"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다행이구나, 그나마 마지막 가는 길에 작별인사를 할 수 있어서."

교주, 천유라는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웃을 수가 없었다.

"교, 교주...."

단전을 포함해 전신에 수십 자루의 칼이 꽂혀 있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는 피떡이 묻어 거칠게 풀어져 있었고, 날카롭지만 고왔던 얼굴은 날붙이에 난자당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나는 숨을 삼켰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가 없다는 말은 이런 때에 쓰는 것일까?

"놈들은 물러갔다. 혹시 몰라 천마전에 설치된 자폭진을 가동시키니 알아서 도망치더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의 앞까지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여명, 아까 했던 너의 말은, 거짓이 아니겠지?"

"네, 네, 그렇습니다. 거짓이 아니에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녀의 곁에 도착한 나는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울고 있느냐?"

천유라가 천천히 팔을 들어 내 눈가를 훔쳤다.

눈 밑으로 잠시나마 눈물이 사라지고, 검붉은 피의 화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슬픈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진심이다.

이전 세계를 구한 특전으로 얻은 '회귀'.

원래라면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사용했을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복수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내 독기를 보고 진심을 느낀 것일까?

천유라는 한결 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안심이야."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 꼬셔 줄 거지?"

"...."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얼핏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뱉는 그녀의 말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네."

"그래."

내 대답에 만족한 그녀는, 힘이 빠지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마지막으로 불타올랐던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꺼져 갔다.

우리의 머리 위로, 검게 탄화된 서까래들이 내려앉았다.

쿠웅!

이것이, 이번 생에서의 내 마지막이었다.

3화 대공자 진여명 (1)

솔직히 그녀는 좋은 상관은 아니었다.

'천마(天魔)'라는 칭호를 얻은 전대 교주의 위광이 너무 대단했던 탓일까.

그년은 전대 교주의 그림자를 벗겨 내기 위해 언제나 오만하고 난폭한 폭군으로 군림했다.

아, 방금 호칭 잘못 말한 거 아니니까 오해 마라.

없는 자리에서라면 나랏님 욕설도 하는 법이니까.

"아, X발."

솔직히 말하면 그년은 소교주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싹수가 좀 많이 노랗긴 했다.

그년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하려 했다.

내가 내총관으로 발탁된 것도, 교주가 직접 손을 썼던 게 큰 이유였다.

그녀는 전대 교주의 흔적이자 본교를 거의 잠식했던 천뇌전 새끼들을 견제하고자 했으니까.

천뇌전이 내총관 자리까지 차지하기 전에, 무공은 X도 없는데 가문이 빵빵한 나를 끼워 넣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겠지.

"...님, ...니임!"

결과적으로 그녀의 개혁은 실패했다.

자기가 유일하게 믿었던 그 개 같은 낭군님으로 인해서.

뭐, 동정할 여지는 딱히 없다.

애초에 이곳은 천마신교.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용담호혈의 장소.

그녀는 어디까지나 살아남고자 발악했을 뿐이었고, 운과 능력이 없어 실패했을 뿐이었다.

"...님! 명…련님!"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헤프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망막에서 떠나질 않는다.

얼마나 자기 인생에 한이 맺혔으면 내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 주었을까.

전생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공상 같은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진지하게?

꼬록! 꼬로록!

아니, 좀 진지하게 과거 회상 중인데 왜 이렇게 숨을 쉬기가 버겁지?

방금 콧구멍에 물이 좀 들어온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무언가 익숙한 고함이 귓가를 찔러 대었다.

"여명 도련니이이임!"

푸아아악!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물세례를 맞으며 정신을 차렸다.

***

"아니, X발."

분명 내 인생 마지막 장면은 불에 탄 서까래가 대가리를 뽀개려고 덮치던 장면이었는데.

그 불을 끄기 위해 물세례를 받아 버린 건가?

"도련님! 정신을 차리셨군요오!"

"크으으!"

킁! 킁!

아직 정신이 혼미하다.

나는 콧구멍을 파고 들어온 물기를 빼내기 위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완전히 정신을 차리자,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젊은 모습의 종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뭐냐, 구칠(九七)이냐?"

"넵! 소생 도련님의 충실한 하인, 구칠입니다요!"

과거나 미래나 여전히 맨들맨들한 인상의 소유자.

구칠은 아버지가 내게 붙여 준 종복이었다.

'얼마 전에 봤을 땐 저 마빡에 주름이 꽤 있었는데....'

아무래도 회귀가 정상적으로 적용된 것 같았다.

'저놈 얼굴을 보니 제법 과거 시점으로 온 것 같은데?'

아니, 그 전에 그 손에 든 건 뭐야?

"구칠."

"넵."

"그 세숫대야는 뭐냐?"

"아! 그, 그것이!"

물귀신이 된 나. 그리고 세숫대야를 든 구칠.

상황은 일목요연했다.

"아니, 깨우려면 그냥 어깨나 흔들 것이지 이놈이...."

하다못해 해혈을 짚으면 되지 않나? 구칠이 그 정도의 실력은 있을 텐데?

"그, 그게 아닙니다! 그것이!"

"뭐야, 왜 그렇게 쫄았어?"

구칠은 뭔가를 두려워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은 머리털이 없는 만큼 세상 두려운 게 없다며 헛소리를 지껄이던 만큼, 어지간해선 당황하지 않던 놈이었는데.

"내가 시켰다."

"흡!"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장년인의 음성.

예나 지금이나,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그런 모순적인 목소리였다.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대번에 파악하자 어깨가 대번에 굳어 버렸다.

'젠장, 이거 설마?'

전생의 기쁨은 잠시 접어 둔다.

나는 다급히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서, 붉은색의 화려한 장삼을 입은 거한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버… 아니, 가주님."

"못난 놈."

지옥의 수라처럼 눈을 부라리는 장발의 거한.

눈만 마주쳐도 절로 오금이 저리고 가랑이가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천가(天家)와 함께 천마신교를 지배하고 있는 신마육가. 그 육가의 일각을 차지한 마천진가(魔天鎭家)의 당대 가주이자, 천마신교의 사장로라는 지위를 차지한 걸물.

수라왕(修羅王) 진군악이었다.

그의 뒤에는 가문의 초절정고수들로 이루어진 마천십비(魔天十碑)까지 보인다.

진군악은 주변에 널려 있는 술병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놈이 기루까지 기어 들어와 술을 마셨다라."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느 시점으로 전생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빠르게 아버지 진군악의 앞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었다.

"가, 가주님. 그것이 말이죠."

"닥쳐라."

"넵."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혀를 잘못 놀렸다간 정말로 머리가 180도로 돌아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다만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그가 화내는 이유가 단순히 미성년자가 술을 처먹었다는 게 아님을 알았다.

"대 진가의 장남이란 놈이, 고작 술 반병에 뻗었다고?"

그래. 진군악이 화내는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것도 다른 육가(六家) 놈들과 함께 대작하는 자리에서?"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

분명 이건 내가 17살 때 일어났던 일일 것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나는 마교의 화화공자를 꿈꾸며 열심히 놀아 재꼈고, 이때도 어김없이 친구들과 기루를 탐사하다 천마신교 최고의 기루에 당당하게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놈들은 다 잡혀간 모양이군.'

정도든 마도든 대저 명문이라고 불리는 가문들은 하나같이 그 규율이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이곳 미옥성(美玉城) 제일 기루인 마천루에 대놓고 들어왔으니, 그 정보가 본가에 전해지는 것도 순식간일 터.

'분명, 술판 벌인 지 2각도 되지 않아서 본가에서 파견 나온 무사들에게 죄다 잡혀갔었지?'

그리고 내 경우는 정말 황송하게도, 하늘 같으신 가문의 가주님께서 직접 날 잡기 위해 출두하셨다.

물론 고작 이런 일로 수라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자식에게 그리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못난 놈. 본좌의 아들이란 놈이 이리 기가 약해서야, 쯧쯧쯧!"

"...."

솔직히 좀 억울했다.

전생, 그러니까 이 중세 무림 시대에 들어오기 전의 나는 상당한 말술이었다.

그걸 믿고 까불었긴 했어도, 아무리 증류주래도 술 반병에 혼과 백이 분리되다니!

이 몸이 술에 이리 약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가 약하면 머리라도 좋아야겠지."

계속되는 진군악의 타박에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있었다.

곧 그가 직접 이곳까지 나온 이유가 튀어나올지를 알았으니까.

"본좌가 왜 네놈을 직접 잡으러 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느냐?"

"무, 물론입니다."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어도, 이건 좀 확실히 인상에 남았던 일이었으니까.

"제게, 가문의 첫째로서의 의무를 다할 때가 온 것입니까?"

"호오?"

진군악의 눈이 재밌다는 듯 휘어졌다.

"흥미롭군, 무슨 이유인지 네 입으로 확실하게 말해 봐라."

나는 목소리를 살짝 다듬었다.

이전엔 이 말을 하지 못해서 개 맞듯이 맞고 본가로 끌려갔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소교주님과의 교류식이 확정된 것이겠죠."

"훗, 그래도 아주 머저리는 아니었군."

소교주 교류식.

작년 열일곱의 나이로 소교주로 임명된 천유라와, 본교 최고의 명문인 육가(六家) 자제들의 만남을 일컬었다.

사실상 소교주의 배필을 뽑는 자리이며, 육가에서 선별한 자제들이 순번을 가려 소교주와 일정 기간 교류를 갖는 형식이었다.

'시기가 참 절묘하군.'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 대면식의 결과를 알고 있다.

육가의 자제 전원이 천유라의 지랄맞은 성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거나, 혹은 나처럼 아예 관심이 없어 만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흐지부지된다는 것을.

그렇게 이 시기에 소교주의 짝을 찾지 못한 교주는, 수년 후 그 범위를 신교 전체로 넓히게 되고.

신교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배신자. 한무백이 우승하게 되는 '마도대공 선발전'이 열리게 되는 미래로 이어지게 된다.

'이번엔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마음을 굳힌 내게 진군악이 말했다.

"재능도 의욕도 없는 네놈을 지금까지 살려 둔 건 다 이때를 위함이었다."

진군악은 절대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기 아들도 기꺼이 도구로 취급하는 비정한 아비였다.

"물론입니다."

"호오, 웬일로 의욕이 넘치는구나."

당연하지.

여기서 의욕을 내지 못하면 신교가 망하니까.

그리고 내 3회 차 인생 역시.

"다른 육가에서도 만만치 않은 직계들을 내놓을 거다. 네놈은 그치들을 제치고 소교주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느냐?"

"다른 육가의 자제들은 결코 소교주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대담한 발언에 진군악이 흡족하게 웃었다.

"좋다. 네놈이 그리 의욕을 낸다면 오늘의 추태 정도는 봐줄 수 있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전(天魔殿)과 일정을 조율한 뒤 통보하겠다. 그때까지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어째서인지 진군악의 한쪽 입 끝이 작게 올라갔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 않다면, 호신술이라도 다듬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제길.

당연한 말이지만, 교내 중진인 진군악이 천유라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

비정한 아비라지만, 그래도 나름의 짓궂은 충고일 터.

"부디 이 아비가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생에선 아비를 실망시킨 대가로 꽤나 혹독한 대가를 치렀긴 했다.

'뭐, 이번엔 실망하시진 않을 겁니다.'

전생에서 실컷 놀아 재낀 만큼, 이번에는 제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거든.

***

그렇게 진군악이 수하들과 마천루를 나섰다.

육가 가주의 의전인 만큼,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거리의 인파가 쫙 갈라졌다.

나는 3층 난간에 앉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후우, 설마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를 만날 줄이야.'

진군악은 내게 있어 꽤나 불편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한량인 시점에서 부모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 거지만 말이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진군악은 나를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 어쩔 수 없는 효자 노릇을 해야 하다니.'

그래도 앞으로 무언가 일을 꾸미기 위해서는 진군악의 협조가 필요할 때가 많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주변이 꽤나 조용하군.'

원래는 가장 활발하게 손님들이 북적여야 할 시간대. 하지만 사전에 3층을 완전히 대실한 탓에, 지금 이곳엔 나와 구칠밖에 없었다.

'전생 시점은 최상. 십 년도 아니고 이십 년 전이라면 기회는 충분해.'

반천회라고 했나?

한무백과 함께 신교를 배신한 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적어도 놈들은 이 시기에도 활동하고 있을 건 분명했다.

'뿌리를 철저하게 뽑아내 주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도련님. 대체 어쩌시려고 가주님께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갑자기 구칠 녀석이 내게 따지듯이 물어 왔다.

"뭐가?"

"뭐, 뭐긴요! 소교주님의 배필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네에?! 아, 아니 분명 아까...."

"난 내가 소교주의 부군이 되겠다고 말한 적은 없어. 그저 다른 육가의 자제들이 소교주에게 까일 거라고 말했을 뿐이지."

"그,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아주 다르지."

이 시기의 천유라는 뭔 짓을 해도 공략이 불가능하다.

현재 본인 자체가 무공의 완성에 미쳐 있는 데다, 그녀는 이번 교류식의 상대를 육가의 버림패, 혹은 권력에 빌붙기 위해 보낸 버러지들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기보다 약한 놈은 눈길도 주지 않으니 지금의 나로선 더더욱 까다롭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이쪽의 의지로 가능한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

구칠이 막 이렇게 반문하려던 찰나.

지금껏 조용하던 3층 입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의외로군. 아직도 이곳에 있었다니."

나와 구칠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나이를 먹어 보이는 훤칠한 인상의 호청년이 있었다.

'어? 저놈은?'

아무리 과거라도 저 청년의 얼굴은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철수?"

"왜, 못 볼 얼굴을 보았나?"

"그건 아닌데...."

천마신교에 수많은 가문이 존재한다지만, 저렇게 화려한 적룡이 새겨진 장포를 걸치는 놈들은 오직 혈룡마가에 속한 떨거지들뿐이다.

'이놈이 왜 갑자기 튀어나와? 아, 아니 그러고 보니....'

분명, 이놈도 이번 모임에 참석한 놈들 중 하나였지.

나는 일단 마철수를 향해 항상 의례로 날리는 인사를 보냈다.

"영희는 어디다 두고 너 혼자 나왔냐?"

"또 그 개소리냐! 난 그런 이름을 가진 여동생 같은 거 없다고!"

뭐, 이 중원 대륙에서 이 개소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지만, 나는 마철수를 만날 때마다 툭툭 이런 말을 던지곤 했다.

"그래서, 내게 무슨 용건이지? 너도 가문으로 붙잡혀 간 줄 알았더니만, 용케 빠져나왔군?"

"흥! 나 역시 용건만 빨리 끝내고 돌아갈 거다."

스릉!

용건만 빨리 끝낸다는 놈이 갑자기 허리춤의 검을 뽑는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 검극을 겨누었다.

"네놈에게 비무를 신청한다."

...이렇게 갑자기?

4화 대공자 진여명 (2)

분명 나와 마철수는 꽤나 질긴 악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청소년기 시절은 물론이고.

내총관 자리에 있을 때도 녀석은 본교의 신진파 장로 중 한 명으로서 사사건건 나와 대립한 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경우 없이 나온 적은 없었다.

'예전엔 이런 상황은 없었는데?'

시작부터 갑자기 틀어진 미래에 나는 조금 황당해졌다.

하지만 조금 고민하고 나니 대번에 답이 나왔다.

'아, 아버님 때문이겠군.'

전생에서 나는 소교주와의 교류식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해 진군악에게 개처맞고 본가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위기를 넘긴 만큼, 원래는 경험하지 못한 다른 분기가 날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 분기고 자시고, 저놈이 왜 갑자기 칼을 겨누는 거지?'

"도련님, 죽일까요?"

대번에 구칠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살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난 구칠의 어깨를 부여잡곤 녀석을 그대로 옆으로 치워 버렸다.

"살기 집어넣고 비켜."

"그치만!"

"네가 나서면 오히려 일이 복잡해진다는 걸 모르냐?"

구칠은 평소엔 모자란 모습을 보이는 내 종복이다.

하지만 녀석의 본질은 백면인살(白面人殺) 혹은 구운귀령(究殞鬼令)이란 별호를 가진 전 특급살수 출신. 즉, 종복 겸 호위였다.

"근처에 마가의 호위들도 있을 텐데, 네가 나서면 놈들도 나서게 돼. 그럼 놈과 내 문제가 아닌 두 가문 사이의 문제가 된다."

"아...."

"알아들었으면 얌전히 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 말이 있고서야 구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녀석의 눈은 언제든 개입할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마철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장 앞으로의 계획을 치밀하게 고민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런 놈에게 시간을 허비하는 건 너무 아까웠다.

"이보게 친구, 좀 놀렸기로서니 이렇게 칼을 내밀 정도로 화가 났나?"

"네놈이 어째서 내 친구지?"

천마신교의 정점에 신마육가라는 이름으로 여섯 가문이 존재한다지만, 당연히 이 가문들이 모두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내가 소속되어 있는 마천진가는 은영소가(隱影昭家)와 사이가 돈독한 반면.

눈앞에 있는 마철수의 혈룡마가와는 못 잡아먹어 안달일 정도로 관계가 최악이었다.

"그리고 네놈에게 비무를 신청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난 그 정도로 속이 좁지 않다."

속이 좁지 않긴. 그런 말을 스스로 내뱉는 놈들 대다수가 밴댕이 소갈딱지다.

"육가 출신들 간에 사사로운 비무는 금지되었다는 걸 잊진 않았겠지?"

"물론.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예외라."

육가 출신들 간에 비무가 허락되는 경우는 세 가지다.

하나는 가문의 존망이 달렸을 때.

또 하나는 신교 주최로 공식적인 비무대회가 열렸을 때.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소교주 때문인가?"

"그렇다."

천가(天家)와 관련된 일일 때.

그제야 마철수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유를 알겠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나와의 비무에서 패배한다면 소교주님과의 교류식을 포기해라."

나는 대답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놈,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술자리에 나온 거였군.'

되레 전생에선 일이 틀어진 셈이었다.

'확실히, 저놈 동생이 이번 교류식의 대상자 중 하나였지?'

분명 이름이 마진윤이었을 거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마가도 분위기가 참 좋지 않아. 아니, 어쩌면 우리 이상인가?'

그리고 저놈도, 마가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참 정이 많은 놈이다.

모두가 퇴짜맞을 걸 아는 나와는 달리, 그걸 모르는 저 녀석은 어떻게든 동생을 천유라와 이어주고 싶었을 터.

하나 놈의 사정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내가 왜 네 어거지를 들어줘야 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마철수가 인위적인 미소를 내지었다.

"훗, 꼬리를 마는 건가?"

"저자가 감히!"

뒤에서 구칠이 또 살기를 내뿜었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고작 저런 도발에 욱하기엔 내 인생 짬밥이 적지는 않다.

나 역시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만들며 놈을 도발했다.

"꼬리를 말기 이전에 쫄리는 게 없다면 당당하게 경쟁하면 될 텐데? 이렇게 뒤에서 수작을 부려야 할 정도로 네 동생의 실력과 인품은 고작 그 정도인가?"

"뭐? 이 개자식이!"

역시 약간의 도발만으로도 어린 마철수는 분노했다.

하긴, 육가의 직계라 해도 아직은 청소년.

가문도 빵빵한 만큼 되레 질풍노도의 시기가 길다.

이런 도발을 참을 수가 없을 거다.

'뭐, 저러는 이유가 짐작은 가.'

미래에 마가의 가주가 된 마철수와는 다르게, 동생 마진윤은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마진윤의 자질 자체는 마가의 직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고 들었다.

결정적으로, 마가는 가주의 묵인 아래 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육가에서 가장 극심한 곳 중 하나.

지금 이 시비는, 아끼는 동생에게 어떻게든 미래를 열어 주고 싶다는 마철수의 어린 치기였다.

그렇다고 내가 응해 줘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헛짓거리하지 말고 가라. 괜히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이익! 날 무시하지 마라, 진여명!"

진심으로 분노했는지 마철수는 원래의 목적을 잊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두야.'

여기서 둘 중 하나라도 상처를 입었다간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서로가 육가의 직계이니만큼 정말로 가문 간의 전쟁이 터질 수도 있었다.

'젠장. 이득도 없는 싸움을 굳이 해야 하다니.'

나는 구칠을 향해 저리 가라는 손짓을 날렸다.

"절대 나서지 마라."

"도, 도련님? 무공도 모르시는 분이 뭘 하시려고!"

"뭘 하긴, 제압해야지."

"제, 제압이요!?"

"마찬가지로, 숨어 있는 네놈들도 나서지 마라."

나는 마철수의 뒤를 향해 일갈하고는 그대로 녀석의 공세에 뛰어들었다.

'어디, 간만에 감각 좀 깨워 볼까?'

감정이 가라앉고, 감각이 올라온다.

무림의 세계에 전생했지만 나는 일부러 몸의 잠재력을 깨우지 않았다.

낭중지추라고, 재능이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괜히 한량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놈!"

마철수의 검에 은은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잘 단련된 혈류마령검법(血流魔靈劍法)이군.'

마가가 자랑하는 저 검법은 일곱 개의 초식과 사십이 개의 변초를 포함한 초일류의 검법.

깊이로 따지면 중원의 무당이나 화산의 검법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정도다.

'마가주 마철수의 검법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청소년 마철수의 검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지금은 전생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현재의 마철수가 펼치는 검법 따위는, 감각을 깨운 내겐 제대로 된 위협도 되지 못했다.

샤샤샥!

화려한 붉은 궤적이 눈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보인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마철수가 휘두르는 검의 궤도가 대번에 읽혔다.

텁!

나는 그대로, 손가락 두 개를 뻗어 흉흉한 궤적을 그리던 놈의 칼날을 잡아 버렸다.

"헉!"

"이, 이런 미친놈이!"

마철수는 경악했다.

상대가 겁도 없이 검격에 손을 뻗을 때만 해도 손목이 날아갈 거란 상상을 했었지만, 설마하니 칼날이 잡혀 버릴 줄이야!

"고, 공수입백인!"

뒤에서 누군가가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마철수의 숨은 호위 중 한 명이겠지.

나는 놈들이 개입하려 들기 전에 재빨리 마철수의 품으로 쇄도해 놈의 마혈을 때려 버렸다.

"컥!"

단 일격에 마혈이 제압당한 마철수는,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검을 놓아 버렸다.

"커헉! 컥!"

놈의 표정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숨이 막히는 고통은 둘째치더라도, 또래의 소년에게. 그것도 경쟁 가문의 후계에게 공수입백인을 당한 건 그야말로 굴욕 중의 대굴욕!

하지만 난 그런 마철수의 마음을 헤아려줄 생각이 없었다.

"에라이, 귀찮게 하기는."

내 오른발이, 그대로 마철수의 아래쪽(!)을 향해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퍽!

"꺼-ㄱ!"

아주 찰나의 순간, 나는 마철수의 눈에 실핏줄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털썩!

그 고통이 위로 올라오려던 찰나, 다행히도(?) 호위가 개입하며 마철수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기절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뭐시여?"

구칠은 순간 자신이 본 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무공과는 담을 쌓고 놀러 다니던 대공자가 갑자기 이런 무위를 보이다니?

"흥."

구칠이 경악하든 말든, 나는 마철수를 부축한 호위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데려가라. 목격자가 없다는 게 다행이군."

그러자 천장에서 핏빛 무복을 두른 복면인 두 명이 추가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기절한 마철수를 수습했다.

그중 한 놈이 내게 포권했다.

"원활한 해결에 감사드리오, 공자."

"고마울 거 없다. 놈이 깨어나면 발작할 텐데 그거나 잘 막아라."

"...숙지하겠소."

"정말 잘 막아야 할 거야. 내 입이 싸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

"아, 정말 마지막으로. 깨지진 않았을 거다. 나름 힘 조절은 했거든."

복면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상대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는 걸 느꼈다.

진가가 마가의 후사를 막으면 정말로 큰일 아니겠나?

아무래도 그건 막아야지, 암!

***

감숙성 이남 십만대산에 자리를 잡은 천마신교는, 다섯 개의 전과 아홉 개의 각, 열일곱 개의 당, 서른네 개의 무력 부대로 구성된 중원 최강의 단일세력이다.

본산에 거주하는 총인원만 무려 이십만. 그중 전투 가능 인원은 무려 칠만. 중원 전역에 설치된 분타와 비지(秘地)의 신도 수까지 합치면 물경 오십만에 달하는 초거대 세력이 바로 천마신교라는 집단이었다.

그런 천마신교를 지배하는 지배층은 총 일곱 개의 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신(神)으로 추앙받으며 모든 교도의 숭배 대상이 되는 초대 천마의 혈통인 천가(天家)와.

그 천마의 제자 여섯 명이 세운 신마육가(神魔六家)가 바로 그 구성원들이었다.

특히 천가의 경우 십만대산 내에서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며, 대산 내에서 일어난 일은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그 말뜻은 즉.

본성 기루에서 일어난 이런 작은 사건 정도는, 대번에 천가의 귀에 들어간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

"후, 후우!"

그 천가의 영역 중 하나이자 소교주의 거주지인 소마각(小魔閣).

거대한 내성(內城)과도 같은 이곳에서,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한 소녀가 있었다.

이제 막 어린 떼가 벗겨지며 성숙함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기.

그런 소녀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흑색 검기가 일렁거리는 것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말도 안 된다며 경악했으리라.

"소교주님."

소교주라 불린 그녀, 천유라는 갑자기 허공에서 수하가 튀어나오자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뭐지?"

"그것이...."

수하는 자신의 작은 주군에게 방금 입수된 정보 하나를 입에 올렸다.

"진가의 진여명이 마가의 마철수를 일격에 제압했다? 그것도 맨손으로?"

"예, 신귀대(神鬼隊)의 보고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비단으로 땀을 훔친 천유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걸 왜 내게 보고하는 거지?"

상관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수하의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렸다.

"진가의 진여명은 이번 교류식의 대상입니다. 대상자들에 대한 최근 정보는 빠짐없이 소교주께 고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일었다.

"교주님의 신경이 지나치시군. 어차피 이번에 나오는 놈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들 아니더냐?"

생각보다 훨씬 냉소적인 반응에, 수하는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육가의 이름에 어울리는 공자들이옵니다."

저 말이 단순한 띄워 주기에 불과하다는 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됐다. 그건 그렇고, 진여명이라고?"

"네, 수라왕의 장남입니다."

"흥, 일찌감치 내놓은 자식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꼭 아닌 모양이지?"

"마철수는 일찌감치 천일관(千日關)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육마룡에 이름을 올린 신진고수입니다. 비록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겠지만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 자체가...."

"아, 그만. 됐어."

천유라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누가 오든 난 부군 따위를 맞이할 생각은 없으니까."

"소교주님, 그건 교주님의 의사에 반하는 것입니다."

"난 육가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다."

촤악!

한차례 횡으로 휘두른 검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 무공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내 옆엔 누구도 둘 생각이 없어."

자세를 잡은 소녀가 초식 하나를 펼쳤다.

이 천마신교에서 유일하게 천살(天殺)의 이름을 허락받은 마검.

촤자자좍!

약관도 안 된 소녀가 펼쳤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여섯 개의 궤적이 수련장의 벽면을 찢어발겼다.

그 모습을 본 수하가 눈을 부릅떴다.

'소교주의 검공이 벌써 육성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이 정도면 강호에서 충분히 절정의 고수라 자처할 수 있었고, 후기지수로는 능히 천하제일이란 수식어가 붙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훗, 혹시 모르지."

자신이 갈라 버린 벽을 바라보며, 천유라가 이렇게 말했다.

"이 초식을 제대로 받아 낼 수 있을 정도의 인재라면, 이야기 정도는 나누어 봐도 좋을지도."

"...."

그게 가능할까?

장담컨대, 이번 교류식에 나오는 자들은 물론이고, 천마신교 전체를 통틀어서 약관 이하의 그 누구도 이 검을 받아 낼 순 없을 것이다.

'으으음!'

수하는 뻔한 미래가 보이는 육가의 여섯 공자에게 살며시 명복을 빌었다.

5화 대공자 진여명 (3)

십만대산에서 가장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는 여덟 개의 봉우리, 팔대마봉(八大魔峰).

그 봉우리 중 하나에 똬리를 튼 마천진가의 본가는, 본가가 아니라 본성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님!"

나와 구칠이 본가 입구에 도달하자, 약 5장에 이르는 거대한 문이 열리며 수백에 달하는 무사와 하인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냐."

나는 그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며 성의 입구를 통과했다.

그러자 염소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 하나가 내게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님, 친우분들과의 외유는 잘 끝나셨는지요?"

"벽 총관."

총관 벽지상.

그는 아버지 진군악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총관으로, 진가 내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나는 그에게 일부러 썩은 미소를 내보였다.

"잘 끝나긴. 벽 총관도 짓궂은 면이 있군."

애비가 아들 잡으러 여기서 십여 리나 떨어진 미옥성 마천루까지 갔는데 잘 끝났을 리가?

"소신은 그저 대공자님이 걱정이 되어...."

"됐고."

나는 벽 총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연공실 하나만 내줘."

"네? 연공실, 말입니까!?"

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뭘 못 들은 척을 해? 내가 못 할 말 했나?

하지만 벽 총관은 정말 못 할 말을 들은 듯 눈을 껌뻑이며 혼란스럽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 가주님 전용 연공실이라면 현재 이공자님께서 폐관 수련용으로 사용 중이십니다만."

"일반 연공실이라도 상관없어. 아, 그리고 가문 서고에서 내가 말하는 무공 몇 개만 가져다줘."

"네에!? 무공을 익히시려고요!?"

그 말에 벽 총관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아니, 이것들이 진짜.

"그럼 내가 괜히 연공실을 찾을 거 같나? 빡치기 전에 내 성질 그만 돋우지?"

"시, 실례했습니다, 대공자님."

벽 총관은 다급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리 그가 가문의 실세라고 해도, 나는 아직까지 대공자다.

특히 소가주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지금은, 그는 섣불리 나와 척을 질 수도 없다.

내가 아무리 한량처럼 지냈다고 해도 망나니짓을 한 건 아니라서, 가문 내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직 무난한 편이거든.

나는 전음으로 내가 익혀야 할 몇 가지 무공들을 벽 총관에게 말했다.

"으음, 이것들은…."

"왜, 불가능한가?"

"그럴 리가요. 가주님께서 금서로 지정한 것이 아닌 이상, 이 마천진가에 보존된 무공 중에 대공자님이 익히실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벽 총관은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위력이 약한 것들이 아닐지? 진무비고에 보관된 것들은 설사 대성한다 해도 파괴적인 마기를 내뿜을 순 없을 겁니다."

약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이 말을 쏘아 주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니, 이 정도가 딱 좋아."

"그러시다면야,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벽 총관이 총총총 사라지고.

지금껏 줄곧 불안한 표정으로 있던 구칠이 내게 물어왔다.

"도, 도련님. 대체 어쩌시려고요?"

"뭘 어째? 지금까지 뭘 들었냐?"

"도련님의 나이가 열일곱이신데, 이제야 무공을 익히신다고 뭐가 달라지는...."

"아니, 이 새끼가?"

나는 분노의 힘을 담아 구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억!"

나는 허리가 접힌 구칠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무공 익힌다고 널 귀살대(鬼殺隊)로 돌려보낼 일은 없으니까 그딴 말은 지껄이지 마라."

"추, 충성!"

제법 아픈 일격이었을 텐데, 그 말에 구칠은 눈을 반짝이며 경례의 자세를 취했다.

"내가 마철수 조진 걸 봤을 텐데도 그따위 말을 하는 걸 보면, 네가 벽 총관의 아들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구나."

부자가 쌍으로 안팎이 다르다.

구칠은 헤픈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 전 어디까지나 도련님을 충심으로 뫼시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시끄럽고. 연공실 문이나 잘 지키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연공실로 향하려고 했다.

"저, 도련님."

"왜, 또?"

"정말로, 왜 다시 무공을 익히려고 하십니까?"

"...."

방금과는 다르게, 구칠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내가 열 살 때부터 맺어 온 관계다. 사실상 구칠은 내게 친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난 구칠에겐 진실만을 말하려고 했다. 미래나, 지금이나.

나는 뒷짐을 진 채,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적당히 버티는 척을 하려면 좀 노력해야 할 것 같거든."

"네?"

"그리고 솔직히… 꼬시는 건 조금 자신이 없어서, 그 대신 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해 주려고."

내가 뭔 연애를 얼마나 해 봤다고.

"...??"

구칠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저게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불경한 표정이다.

"훗!"

뭐,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딱히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고 완전히 신형을 돌렸다.

***

마천진가의 무공은 권법과 장법. 그리고 그걸 이용한 체술을 중점으로 둔다.

파괴적이고 패도적. 압도적인 출력으로 적을 찍어 누르는, 마공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진가의 무공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내겐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거지.'

일류 언저리에 불과한 전생에서도 나는 권(拳) 대신 검(劍)을 들었을 정도로 본가의 무공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천무량신공(飛天無量神功)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

그 외에 경신법이나 보조할 무공이 몇 개 더 있었지만, 내가 중점적으로 익혀야 할 무공은 이 두 가지였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비급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로 될까?'

이 두 개의 무공은, 다름 아닌 전생에서 내가 익힌 무공들이었다.

'사부는 내가 이것들을 제대로 익힌다면 천하무적을 이룰 거라 장담했지.'

내게 이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가 말했다.

십지천록마검은, 천가의 천살마검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신교 최고의 검공 중 하나고.

비천무량신공은 어지간한 마공보다 빠른 속도로 축기가 가능하지만, 그 안정성은 정파 도문의 심법들과 능히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이 무공들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건, 어디까지나 무식하기 그지없는 마천진가의 손에 들어간 탓이라고 했다.

뭐, 무식하다는 말은 나름 동의한다. 애초에 다른 육가 놈들이 진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추 그러하니까.

내가 전생에 익힌 무공의 비급을 굳이 다시 가져온 이유는 간단했다.

'사부는 원본이 소실되어 일부밖에 내게 전해 주지 못했다고 말했지.'

즉, 내가 전생에 익혔던 이 무공들은 어디까지나 미완성.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미완성 무공들의 원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앞으로 사 년 후였나? 가문의 보관소가 불타오른 그 사고가 일어났던 시기가.'

아마 내가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거다.

그 시기, 본가에 거대한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어느 시종의 부주의로 일어났다는 그 화재는, 초기 진압을 놓쳐 본가의 삼분지 일을 태워 버리는 초대형 화재로 거듭났고.

기어코 이 책자들이 보관되어 있던 무공서고까지 일소해 버리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분노한 진군악의 손에 그 시종과 일가족이 처형당하고, 관계자 전원이 물갈이되는 것으로 끝났다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 많은 이들이 인위적인 사고라고 추측했었지.'

뭐, 아직 일이 벌어지지 않은 만큼, 지금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사부가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이 무공서들의 원본이, 지금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것.

'이거라면, 나는 전생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덕에 나는 뛰어난 자질과 오성, 그리고 충분한 양의 내공을 지녔다.

하지만 정작 가문의 무공은 나 자신과는 맞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의욕이 바닥을 기던 탓에 대성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부가 늘 안타까워하던 게 이거였지.'

전생의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연공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부, 이번 생에 만날지 못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사부가 그리 원하던 대종사(大宗師), 이번 생에 되어 드리리다.'

오 년.

적어도 오 년은 이곳에 박혀 무공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물론 천유라와의 교류식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공에만 몰두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번 교류식을, 일부러 파투 낼 생각이었으니까.

'교류식에서 실패한 날, 아버지는 나를 일 년 동안 감금시켰지.'

그 감금이 풀리던 날, 나는 대공자 직위를 박탈당했고 소가주의 지위는 동생인 진여운에게 돌아갔다.

뭐,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미래를 최대한 더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번엔 한 오 년 정도 갇혀 있으면 되겠군.'

갇힌다 해도 딱히 의식주의 자유가 뺏긴 것도 아니니, 이번엔 아예 작정하고 기간을 늘려 버릴 생각이다.

대공자나 소가주 지위야, 뭐 동생 놈 하라고 해라.

반천회? 놈들이 지금 본교에 기생충처럼 존재한다고 해도, 내 무력이 모자라면 어떤 수를 써도 언젠가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지금은 본신의 무력을 높이는 게 정답이었다.

'교주, 미안하지만 당신을 꼬셔 주겠다는 약속은 좀 힘들 것 같군요.'

인간 대 인간으로 과거 내가 천유라라는 여인에게 끌렸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연애는 별개의 일.

나는 도저히 그녀의 성질머리와 현 상황을 뚫고 그녀를 공략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무공을 익혀서 '회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훨씬 편하지.'

내 회귀의 목적은 간단했다.

오 년 동안 죽어라 무공을 익혀 초인의 경지에 이른 뒤.

중원으로 나가 마도대공 한무백이 본교로 가져온 성과를 모조리 강탈.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교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반천회(反天會)'라는 놈들의 실체를 찾아 박멸할 것이다.

'그렇게 천마신교를 위협하는 흑막을 모조리 없애 버리면, 그녀가 교주가 되어도 그 치세가 흔들릴 일은 없겠지.'

그때였다.

-다행이다.

움찔!

어째서인지, 그녀가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었던 말과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털었다.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어. 아예 본교를 등지지 않는 이상, 소교주로 태어난 운명은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결국,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렇게 자위하며, 나는 천천히 무공서의 첫 장을 펼쳤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아프다.

***

보름의 시간이 지나고.

"크아아악!"

작은 소검을 든 청년이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그런 청년을 향해, 인상이 약간 날카로운 여인이 차갑게 일갈했다.

"차라리 전 차례였던 패가(覇家)의 도법이 더 나았어. 손맛도 느낄 수가 없군."

고작 십 초도 되지 않아 제압당한 청년이 경악을 내질렀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본가의 비혼잠영술을 어찌 이리 쉽게?!"

"당연히 네놈의 성취가 그만큼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더냐?"

홱!

번개처럼 날아오는 여인의 발길질.

은영소가(隱影昭家)의 직계 후손 중 하나인 소정방이 그날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뻐억!

단 일격으로 소정방을 기절시킨 그녀는 옆에서 대기하던 시비에게 물었다.

"비연, 다음은 누구지?"

시비가 공손하게 읍하며 대답했다.

"다음은 혈룡마가의 마진윤 소협이십니다."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놈이 마지막이야?"

"아뇨, 마천진가의 진여명 소협이 남아있습니다."

"아, 마가의 둘째를 꺾었다는 그놈?"

여인, 천유라가 살짝 혀를 찼다.

"역시 예상대로야. 가문의 이름값만 높지, 실속이 있는 놈은 하나도 없어. 그 진여명이란 놈은 다르려나?"

"글쎄요."

비연이라 불린 여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실 천유라에게 악담을 들은 '놈들' 중에는 자신의 사촌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만날 테니 딱히 상관없겠지. 다음 놈이나 들여보내. 빨리 정리하고 다시 수련에 들어갈 거니까."

"예, 소교주님."

비연은 허리를 숙였다.

6화 소교주 교류식 (1)

보름.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돌아보고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은 되었다.

그렇게 보름간의 연공이 끝나고.

"잘하리라 믿는다."

"절 믿어 주십시오, 가주님."

말끔하게 차려입은 나는, 황송하게도 가주인 진군악의 배웅을 받으며 마천진가를 나섰다.

소교주 교류식이 바로 오늘 오(午)시 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가는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대놓고 교류식을 파투 낼 생각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반쯤 꺾이고 있다.

그런 살벌한 협박을 뒤로하고, 나는 천마전이 위치한 십만대산 제일봉, 천마봉으로 향했다.

다만 그 걸음에 워낙 여유가 넘쳤던 것일까. 구칠이 불안해하며 이쪽을 재촉했다.

"도, 도련님. 너무 발걸음이 느리신 거 아닙니까?"

"왜 네가 쫄아? 소교주 만나는 건 난데."

"거,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요!"

굳이 구칠만이 아니라, 진가의 위엄을 위해 동원된 수십에 달하는 본가 호위무사들 역시 비슷한 기색이었다.

"가주님께 듣기론 내가 마지막 순서라고 하니까 천천히 가도 늦진 않아."

"아, 아무리 그래도 천가의 행사를 그렇게 가볍게 보시면 큰일 납니다."

"됐어. 감당을 해도 내가 한다."

그렇게 엄포를 놓은 나는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이렇게 미적거리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남자를 좋게 볼 리가 없지.'

대놓고 까이려는데 굳이 시간 따박따박 맞춰서 갈 필요가 있나?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천마봉의 입구를 넘어 소교주가 위치한 소마각에 도착했다.

"들어가시오."

당연히 소마각을 지키던 호법사자들이 지각생을 향해 보내는 시선은 절대로 곱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소마각에 도착함과 함께.

콰앙!

눈앞에 멀쩡하게 있던 소마각의 입구가 박살 나는 모습과 문의 파편과 함께 무언가가 내 옆을 지나가는 걸 보았다.

"거, 환영 인사치곤 꽤나 과격하군."

구칠이 떨떠름하게 내 말을 받았다.

"환영 인사가 아니라 사람이 튕겨 나왔는뎁쇼."

"알고 있어. 농담으로 말이야."

내 눈은 문이 박살 나면서 함께 박살 난 한 소년을 놓치지 않았다.

'혈룡마가.'

복장이 피투성이가 된 게 아니라면 방금 소년의 핏빛 무복은 분명 혈룡마가의 것이다.

그렇다는 건.

'마진윤, 정말 오랜만이군.'

청년이라기보단 소년에 가까운 외모.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다. 사실 오늘 이후로 내가 마진윤을 다시 볼 일은 없었으니 기억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헉, 헉!"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마진윤은 땀에 절인 채로 가문의 상징인 혈룡검을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문 안쪽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도 이번엔 좀 쓸만한데?"

저 안에서 여인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리가 멈칫거렸다.

시기상으로는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리움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가 저 안에서 들려왔다.

"지금까지 봤던 쓰레기들보다 백배는 나아. 더 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소교주님!"

눈을 부릅뜬 마진윤이 문 안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표정을 관리했다.

"쩝, 안타깝게 늦진 않았나 보군."

"지금 이 상황에 그 소리가 나오십니까?"

구칠의 타박에도 나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됐고 싸움 구경이나 하자."

나는 천천히 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

천유라와의 재회로 인한 그리움과는 별개로, 눈앞의 상황이 좀 이상했다.

마진윤은 필사적으로 천유라에게 덤비고 있다. 물론 꼴을 보면 천유라의 옷깃을 스치지도 못한 듯 보였지만, 내 기억으로 마진윤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도록 그녀에게 덤비지 않았다.

더군다나.

'뭐지? 마진윤이 이 정도였나?'

내가 기억하는 마진윤은 천유라에게 일격에 나가떨어져 꼴사납게 기절하던 낙오자의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마진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이 모습은 대체 무엇인가?

"하아압!"

이전 마철수가 내게 보였던 혈류마령검법이 부드럽게 펼쳐지며 천유라를 노린다.

그 수준은 마철수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하핫! 제법이구나!"

천유라는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마진윤의 공세를 받아냈다.

그렇게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났고.

반격하는 천유라의 검이 점점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헉, 헉!"

하지만 이미 상처투성이였던 마진윤의 체력은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뭐야, 설마 이게 끝이냐?"

"이이익!"

천유라의 가벼운 도발에, 마진윤이 이를 악물며 절초를 펼쳤다.

혈류마령검법, 비혈탄세(飛血彈勢)의 초식이 날카롭게 쏘아졌지만.

홱!

이미 체력이 다한 마진윤의 찌르기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천유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진윤의 손목을 칼등으로 후려쳤고.

그대로 칼을 놓친 마진윤의 복부를 발로 후려 차 날려 버렸다.

"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귓가를 자극했다.

"도련님!"

"괘, 괜찮으십니까!?"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가의 식솔들이 널브러진 마진윤에게 달려들었다.

"괘, 괜찮아."

마진윤은 필사적으로 인상을 펴며 식솔들에게 미소를 내보였다.

나는 멀리서 그런 마진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상당한 무재(武才)로군.'

아니, 나이대를 고려하면 천재라고 봐도 좋았다.

'체력이 다했음에도 끝까지 그 날카로움은 바래지지 않았어.'

속도는 느려졌어도 검의 예리함은 그대로였다.

그 말인즉, 마진윤의 집중력이 범인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뜻.

'왜 저런 놈이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

아니, 애초에 전생에선 반항도 못 하고 꼴사납게 당했지?

그때였다.

"진여명!"

나를 발견한 마진윤이, 어째서인지 적의를 가득 담은 채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마진윤은 대놓고 적의를 피우며 내게 다가왔다.

'뭐지?'

녀석과 현생에서는 일면식도 없을 텐데?

마진윤이 황당해하는 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당신에겐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

"으응?"

날 노려보며 그 한마디를 날린 마진윤은 다시금 신형을 홱 돌리며 천유라에게 돌아갔다.

"...??"

내가 황당해하든 말든, 놈은 자신의 검을 역수로 잡고 천유라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소교주님의 실력을 견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진윤의 인사에 천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검을 나눌 땐 좀 더 발전해 있기를 바라지."

"아! 가,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의 마진윤은 그녀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원래라면 단 한 명도 두 번째 만남을 가지지 못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내상은 없겠지만 외상은 좀 있는 것 같으니 의약당에 가서 치료를 받거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소교주님!"

마진윤은 정중하게 포권한 뒤, 식솔들과 소마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소마각을 나가면서도 끝까지 나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진짜 뭐지?'

저 순딩이 같은 녀석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있었나?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잠기려 했다.

"네놈이 마지막이로군."

뒤통수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마천진가의 진여명. 네놈을 오매불망 기다렸노라."

'날 기다렸다고?'

순간.

이유 모를 불안감이 내 몸을 엄습했다.

천유라는 뭔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방금 전 마가의 꼬맹이는 꽤 괜찮았다."

천유라가 뭔가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놈의 형이라는 마철수를 일격에 제압했다는 네 실력은, 더더욱 괜찮을 것 같구나."

아.

망할.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마진윤이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낸 것도.

왜 여기서 답지 않게 분전을 벌였던 것도.

그리고 천유라가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것 역시.

내가 전생하자마자 마주했던 마철수와의 사건이, 나비효과가 되어 제대로 터져 버린 것이었다!

"만약 내 기대에 어긋난다면."

스릉!

"나는 네게 많이 슬퍼할 것 같구나."

'아니, 좀!'

***

전방에서 느껴지는 투기에 표정이 구겨졌다.

'이런 젠장.'

원래 내 계획은 적당히 발악하는 '척'하다가 패배하는 것이었다.

그래, 딱 방금 전의 마진윤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가 마철수를 제압한 게 천유라의 귓가에 들어가 버렸고.

그 때문에 나를 향한 그녀의 기대치가 몇 배는 증폭되어 버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어쭙잖게 져 주는 척을 했다간 대번에 들켜 버릴지도.'

그렇다고 어느 정도 합이 맞는 모습을 보이면 대번에 그녀의 관심을 끌어 버릴 것이다.

어느 쪽도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마철수 그 새끼는 진짜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군.'

나는 얼마 전의 나를 저주했다.

사실 내총관 시절의 나라면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어야 했다.

전생하자마자 아버지를 맞이한 위기를 쉽게 넘겼더니, 아무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긴장감의 고삐가 조금 느슨하게 풀려 버린 모양이었다.

"더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자세를 잡아라."

"아, 자, 잠시."

나는 필사적으로 현재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았다.

'뭐가 됐든 필사적으로 패배를 연기할 수밖에 없다. 방금 전의 마진윤처럼!'

그나마 다행인 건, 역사가 바뀌어 그녀가 마진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점이다.

내가 마진윤보다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물을 좀 먹는다고 해도 나를 향한 관심이 마진윤에게 향하겠지.

'...마진윤에게?'

순간, 사고가 살짝 멈칫거렸다.

이후 무언가 한 차례 생각이 돈 나는 일부러 웃음을 만들면서 옆의 시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사 소저. 검을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

내게 사 소저라 불린 시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시비의 복장이긴 하나, 그녀는 육가 중 일익을 담당하는 흑금사가(黑金思家)의 인물. 당연히 검 정도는 휴대하고 다닐 거다.

내 요청을 받은 그녀는 말없이 천유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천유라가 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진가의 인물이 검을 쓰나?"

"네, 주먹질은 제게 좀 맞지 않아서."

"그런데도 이 자리에 나오면서 검을 가지고 나오질 않았다고?"

그녀의 표정에 분노가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어디까지나 교류의 장이 아닙니까? 대화가 아닌 검을 나누는 자리라고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

천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논리적으로 이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교류 대상의 성향 정도는 미리 파악해 둬야 하지 않았을까?

"비연, 저놈에게 검을 빌려줘."

"네, 소교주님."

공손히 읍한 그녀는 자신의 허리춤에 메인 검대를 풀어 이쪽을 향해 던졌다.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내 마음에 들 정도의 실력을 보이리라 믿는다."

"...최선을 다하죠."

나는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꺼내며 기수식을 잡았다.

'참, 이럴 때면 정파에서 태어나면 좋았을 거라 생각된단 말이야.'

마교는 이게 문제다.

대화 대신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게 무슨 교류(交流)냐? 교전(交戰)이지!

번쩍!

그때, 마치 내 잡생각을 없애 주려는 듯, 천유라의 날카로운 발검이 순식간에 이마를 쪼갤 기세로 다가왔다.

'이런 미친!'

어깨나 팔뚝 같은 곳도 아니고 시작부터 대가리라니!

천유라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감각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일격에 머리가 뚫렸다!'

나는 천유라를 향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시작부터 살초(殺招)입니까!?"

마진윤하고 할 땐 적당히 하더만!

천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답했다.

"잘 피하는군. 기대한 게 있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이 미친 아가씨가!"

우득!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기함하며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했지만, 이미 천유라의 이마에는 한 줄기 굵은 핏대가 돋아나 있었다.

"미친 아가씨?"

"아, 아니. 그것이!"

"그래. 그럼 그 미친 아가씨의 검을 받아봐라!"

천유라는 진심으로 화났다는 듯, 매섭게 검을 몰아쳤다.

카가가강!

순식간에 주변이 철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마철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정교한 솜씨.

검기만 들리지 않았을 뿐, 그녀는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살초를 퍼부으며 날 몰아세웠다.

'망할! 이래서야 져 줄 타이밍을 잡을 수 없잖아!'

하나하나가 살초인 만큼 힘을 잘못 뺐다가는 칼침 맞고 저세상행 확정이다!

그렇게 약 삼십 초 동안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갑자기 검을 빼며 뒤로 물러났다.

"헉헉헉!"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가, 간신히 막았네.'

그런데 왜 갑자기 물러난 거지?

"역시."

북해의 만년한설보다도 싸늘한 한기.

"내 감이 틀리지 않았어."

그런데, 방금 전의 공세보다 더 무서운 일격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실력을 숨기고 있구나, 네놈."

7화 소교주 교류식 (2)

"실력을 숨기고 있구나, 네놈."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기껏 정상으로 돌아오려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전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전력을 다하고 있는 놈이, 내 살초를 그렇게 받아내고도 상처 하나 없느냐? 그것도 역공 한번 없이?"

아.

나는 그제야 내가 뭘 실수했는지를 알아차렸다.

살초에 정신이 팔려 필사적으로 막아 내다보니, 그녀의 검을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방어한 것이다.

천유라의 분노는 점차 살기로 변해갔다.

"감히, 전력을 다하지 않고 날 기만해?"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건, 아닙니다. 소교주님의 공세가 너무 매서운 탓에 공세를 펼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헛소리 마라!"

천유라가 다시금 검을 들어 이쪽을 향해 돌진해 왔다.

의외로 그녀는 이번엔 살초가 아닌 정상적인 검식을 응용하며 검격을 뿌렸다.

'아까보단 공세가 느슨하다. 이 정도라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공세로 전환하며 그녀의 검에 대항해 나갔다.

'이대로 공방을 이어 나간다면 무난히 패배를 연출할 수 있겠어!'

방금은 상대가 너무 몰아친 탓에 방어에만 집중해 버렸지만, 이렇게 공격 초식을 전개하다 보면 상대는 분명 공세의 미숙한 점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허점을 그녀가 놓칠 리가 없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 패배로 이어지겠지!

"하압!"

나는 정직하게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의 일록(一錄), 개천화류(開天火流)를 펼쳤다.

일렁이는 불의 흐름을 모방한, 허초(虛招)와 진초(眞招)가 결합된 일초.

'하수라면 그 흐름에 어버버하다 먹히겠지만, 고수에겐 오히려 탐스러운 먹잇감이나 다름없는 초식이다!'

자, 받아쳐라!

아니나 다를까, 천유라는 부드럽게 유검을 펼치며 내 일초를 빗겨내었다.

그리고 아까 전 마진윤을 상대했던 것처럼 그대로 내 손목을 향해 반격을 하는데....

화륵!

어?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멈칫했다.

내 손목을 향해 다가오는 천유라의 검에, 시커먼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다!

저, 저거 설마.

검기(劍氣)!?

'아니, 이런 미친년이!?'

이대로 가면 손목이 잘린다!

마진윤에겐 검등을 날리고, 내겐 검기를 날리다니!

나는 필사적으로 초식을 틀었다.

이 미친년은 진심으로 내 손목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카아앙!

거친 금속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튕겨 나갔다.

아무렴, 검기에 직격으로 맞았는데 방어를 했어도 몸이 날아가는 건 당연지사.

"크헉!"

내장이 진탕되는 느낌과 함께 배 속에서 위액이 역류한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침에 먹은 걸 모조리 게워 낼 뻔했다.

"콜록! 콜록! 케헥!"

뒤집힌 속을 다스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때.

"역시."

천유라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실력을 숨기고, 패배를 연출하려고 했구나."

아?

싸늘한 한기가 피부를 짓누른다.

"감히."

스윽!

"네놈이 날 기만해?"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천유라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경험으로 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분노가 최고치에 이르렀음을.

'젠장.'

계획이 전부 뽀록나 버렸다. 방금 전의 검기는 내 진심을 시험하려는 그녀의 계략이었고, 나는 아주 멋지게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려 버린 셈.

이 상태의 천유라라면, 정말로 날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도련님!"

바깥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구칠이 난입하려 했다.

"멈추시지요."

하지만 어느샌가 사비연이 구칠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이 교류식에 초대된 자 이외에는 난입할 수 없습니다."

분노한 구칠이 그녀를 향해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가의 여식이라 해도. 소교주급이 아닌 이상 귀살대 출신의 특급살수가 달려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은 소마각.

대번에 호법원의 고수들이 구칠을 둘러싸며 그 살기를 짓눌러 버렸다.

"크, 크윽!"

구칠의 목이 달아나려는 찰나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멈춰, 구칠!"

"도련님."

"내가 해결할 일이다. 넌 절대 나서지 마."

나는 검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일어났다.

"호오?"

그 모습에 천유라가 냉랭한 웃음을 내지었다.

"이제야 진심으로 해 볼 생각이 든 거냐?"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전 지금까지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천유라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기세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난 정말로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절대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 단지, 그 진심이 승리에 향하지 않았을 뿐.

"그렇게 본녀를 기만하고 싶다면, 소원대로 죽여 주마."

화악!

천유라의 검에 다시금 검기가 맺힌다.

나 역시 그녀의 자세에 대응해 기수식을 잡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천유라의 검에 집중했다.

'저걸 막지 못하면 정말 죽는다.'

스스슥!

그녀가 천천히 횡으로 검을 긋자, 놀랍게도 그 궤적에서 잔상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그녀가 진심으로 분노했다는 의미이며, 반드시 상대를 죽이겠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천살마검(天殺魔劍)!'

저 검법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검을 쥔 손아귀의 힘이 꽉 들어간다.

물론 열두 개의 이기어검을 다루는 전성기의 그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건 마도 최강의 검식이라 칭송받는 녀석이다.

천유라가 나지막하게 초식의 이름을 외쳤다.

"육령마도(六靈魔道)."

'온다!'

천유라의 검이 여섯 개의 궤적을 그렸다.

아직 그녀의 경지가 대성(大成)은커녕 소성(小成)에 미치지도 않았다는 증거.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정면으로 맞설 만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무조건 피하거나 흘린다!'

여섯 가닥의 검기가 회피 방향을 모조리 틀어막으며 날아왔다.

여력을 남기면 죽는다.

그 생각과 동시에 나 역시 그에 대항하여 검기를 일으켰다.

전생의 일류 언저리인 깨달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전생이 첫 번째 생이 아니었다.

화악!

"도, 도련님!"

"헤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칠과 사비연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탄성을 들을 새도 없이, 내 팔과 다리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흐아아압!"

캉! 캉! 캉! 캉! 카앙! 카가가강!

필사적으로 막고 피하고 몸을 틀어 흘린다.

어떤 흉악한 초식이든 정면으로 받아 낼 수 있다면 생로(生路)가 열리는 법.

미처 흘리지 못한 검기가 몸을 스치며 핏물을 자아냈지만.

나는 기어코 팔다리가 멀쩡한 채로 천유라가 날린 공격을 파훼하는 데 성공했다.

"막았다!"

여섯 가닥의 검기를 모조리 걷어 낸 내가 환희에 찬 탄성을 터트릴 때.

"뭘 막았다는 것이냐?"

촤악!

이전의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검은 기둥'이 내 목을 노리며 직접적으로 날아왔다.

'아니.'

나는 그 검은 기둥, 즉 강기(强氣)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과거의 감각을 깨웠다곤 해도, 이건 못 피한다.

진짜 시발.

나이 열여덟에 강기라니.

이 시기의 천유라가 절정을 넘어서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나는 두 번째 전생의 끝장을 직감하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내 목이 댕겅 소리를 내며 날아가…지 않았다.

"허허허."

환청을 듣고 있는 걸까?

웬 중년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박히는 느낌이다.

"너무 열을 냈구나, 유라야. 본교를 망하게 할 셈이었더냐?"

'환청이, 아니야?'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자신도 모르게 목에 힘을 꽉 주었다.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는 걸 보니 목이 날아간 건 아니었다.

목이 제대로 붙어 있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큰일 날 뻔했군, 소형제."

그렇게 눈을 뜬 내 시야에 보인 것은.

손가락 하나로 천유라의 강기를 막아 낸 한 중년인의 옆모습이었다.

***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목숨은 건진 모양이다.

'사, 살았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에 나타난 존재를 보았다.

화려한 구름 문양과 그 사이로 승천하는 흑룡이 새겨진 검은 장포.

마치 중원 황제의 용포(龍袍)와도 같은 그 옷은, 이 천마신교에서 단 한 명만이 걸치는 게 허락된 특별품이었다.

"...!!"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나는, 다급히 자세를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신교의 진정한 지존을 배알하옵니다!"

천유라의 강기에서 날 구해 준 존재는 어마어마한 거물이었다.

아니, 당연히 거물일 수밖에 없다.

이곳 천마신교의 28대 교주이자, 현 마도대종사.

천 년이 넘는 신교의 역사를 통틀어 세 번째로 지존의 칭호를 얻은 이.

천마(天魔) 천태종.

그가 내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가의 소형제.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그, 그렇습니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 이렇게 가까이서 천마와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다만 소형제란 말은 감히 받들기 어렵습니다. 부디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후후, 딱딱한 친구로구먼."

교주가 천유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강기는 언제까지 유지할 셈이더냐?"

"아."

그제야 천유라 역시 정신을 차리며 기운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천상천하 최강의 힘이라는 천마신공의 강기를 손가락 하나로 가로막다니.

역시 천마의 칭호를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어쨌든, 상황이 진정되는 국면으로 향하자 교주는 천유라를 향해 엄하게 호통을 쳤다.

"네가 오늘 신교에 내전을 일으킬 뻔했구나."

"그, 그것이!"

당황해하는 천유라였지만, 교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천가와 진가가 내전을 벌이면 두 가문을 지지하는 이들이 합류할 테고, 결국 본교는 전력의 사분지 일이 날아가겠지. 그렇게 되면 정도맹이 옳다구나 하고 십만대산으로 몰려들지 않겠느냐?"

뭐, 좀 과장이 붙은 말이긴 했다.

그 수라왕 진군악이 내놓은 자식 모가지 하나 날아갔다고 내전을 벌일 위인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을 받아들이는 천유라의 입장에선 전혀 그렇게 들리진 않겠지만 말이다.

"결국, 오늘 네가 한 행동은 신교를 멸망의 길로 이끌 뻔한 행동이었다."

"...!"

천유라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과하거라. 적어도, 수습할 수 있는 사고인 만큼 네 손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가문의 격이 비슷하다 해도 명색이 소교주다.

이 강자지존의 천마신교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천마'만큼은 그 있을 수 없는 일을 실현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존재였다.

"그, 그!"

굴욕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천유라의 눈빛이 이쪽을 향했다.

"미,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소교주님."

와.

살다 살다 그 무정마후 천유라의 사과도 다 받아보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저 사과가 진심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저 굴욕의 눈빛 너머에 당장에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흠, 반성하는 자세. 아주 좋구나."

교주가 그 분노를 알아챘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천유라의 사과에 나름 흡족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형제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도 사실. 당연히 사과 한마디로 끝날 일은 아니지."

"교, 교주님!?"

"이번 교류식에서 네가 보인 추태를 만회하기 위해선, 계속된 만남을 이어 가야 하지 않겠느냐?"

"...!?"

이,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물론 천유라까지 할 말을 잊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교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진가 놈이 후계를 제대로 키웠군. 소형제의 이름이 뭐라고?"

나는 다급하게 다시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천진가의 적남, 진여명이라고 합니다, 교주님!"

"그래, 그래."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교주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교주가 나를 향해 물었다.

"이거,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자네 정도의 자질을 가진 이가 왜 이런 자리에 나왔는가?"

자동반사적으로 대답하려는 내 혀가 잠깐 멈칫거렸다.

'자질? 설마 저 인간, 나와 천유라의 대결을 처음부터 관람하고 있었다는 거?'

아니, 이 망할 아저씨가!

"교주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진가의 적남으로서 가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응했을 뿐입니다."

"적남이라면 소가주가 아닌가? 설마 교의 율법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신교의 율법상 육가의 가주 및 소가주, 혹은 그 내정자는 소교주나 교주의 반려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한 세력에 힘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제 자질이 미천하여 소가주의 자리는 동생에게 넘어가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자질이 미천하다?"

교주의 눈이 살짝 껌뻑였다.

하긴, 나이 스물도 안 되어 검기를 뽑아내는 모습을 봐 놓고 자질이 미천하다 타령을 듣는 건 내가 봐도 좀 어이가 없긴 할 거다.

"허허, 그래. 자질이 미천하다. 그렇군. 잘 알겠네."

하지만 어째서인지, 교주는 이 말에 깊게 파고들거나 되묻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짓궂은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질문했을 뿐.

"설마 가주의 자리를 버릴 정도로, 우리 유라에게 반한 건 아니겠지?"

...미쳤습니까?

8화 형과 동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