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

8화 형과 동생 (1)

본능적으로 이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래도 내 이성은 이 말을 필사적으로 주워 담는 덴 성공했다. 실제로 내뱉었으면 곧바로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

나는 저 물음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솔직히 눈앞에서 강기가 목을 잘라 버릴 판이었는데, 반하긴 뭘 반해? 있던 정도 죄다 떨어지게 생겼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시비, 사비연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그래, 비연아. 유라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언제나 네가 고생이 많구나."

"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그녀는 소교주의 측근인 만큼 교주와도 면식이 있었다.

교주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로 향했다.

"어쨌든 소가주가 아니란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저는 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그래, 의무. 의무라."

어째서인지 흡족하게 웃는 교주님의 모습에서 뭔가 불안함이 느껴진다.

아니, 그 전에.

'응? 웬 살기가?'

어째서인지, 익숙한 살기가 피부를 찔러 왔다.

그 근원지는 다름 아닌 천유라였다.

'아니, 왜 날 째려봐?'

설마, '너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돌려 말한 게 그리 화가 났나?

지도 이 교류식을 파투 내려고 했으면서?

내가 천유라에게 황당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교주가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의무를 다하러 왔다면, 끝까지 그 의무를 다하면 되겠군."

"네, 물론입니… 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던 내 입이 멈칫거렸다.

지금 뭐라고?

"어떠냐? 소교주라는 지위를 떠나 천가의 자제와 육가의 자제 간의 교류는 교를 이끄는 지도부의 입장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물론입니다, 교주님. 까득!"

아니, 왜 대답하면서 이를 가십니까?

저러면서 또 입꼬리는 웃고 있으니, 웃으면서 화낸다는 게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알게 되는구나.

"결정 났군."

짝!

"다음 교류 일정이 정해지면 진가에 통보를 하겠네."

"...."

"그때도 우리 유라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군."

"...."

"왜 대답이 없는가?"

"조, 존명."

천마신교에서 천마의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명령.

그 말인즉.

'망했다.'

오 년 동안 폐관에 들어 무공을 수련하려던 내 계획은, 그렇게 시작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

그렇게 내 목숨을 구해줌과 동시에, 내 계획을 쓰레기통에 처박으신 천마께서는.

'허허, 오랜만에 진가 놈과 술이나 한잔하러 가야겠군.'

…이란 말을 남기며 사라지셨다.

"...."

그리고 어색함만이 남은 이 자리에서, 천유라는 나를 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으, 으음."

난 그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기분은 참 복잡하다.

'교주 천유라'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하고,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렇게 시작부터 박살이 났고, 외면했던 인연은 이상한 형태로나마 이어질 가능성이 생겨났다.

"이봐."

혼란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줄 알았던 천유라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소교주님."

나는 침착하게 그녀의 말에 응대했다.

"개인적인 사과는 하지 않겠다. 네가 날 기만한 건 사실이니까."

확실히 자존심이 강한 그녀다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단 사과는 하지 않겠다는 '말' 자체가 놀라웠다.

'원래라면 이런 말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살짝 입술을 깨문 그녀가, 이윽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건 알겠어. 그렇기에 그런 연극을 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교주님의 명령이 있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그, 잠깐만요?"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뭐?"

"소교주님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나름...."

갑자기, 말이 이어지지 않고 목이 막혔다.

"나름 뭐?"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눈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

"물론, 이성적인 의미가 아닌 친애의 의미에서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친애(親愛)?"

그녀의 표정이 더더욱 요상해지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어, 어쨌든, 오늘의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제 행동에는 소교주님과는 관계없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상황이 좀 이상해지긴 했습니다만."

"그런가."

천유라는 말끝을 흐렸다.

뭔가, 안도하고 있다는 기색이 흐르고 있어 기분이 묘하다.

어쨌든 그녀의 분노가 가라앉은 것 같으니, 나는 재빨리 이 현장에서의 이탈을 시도했다.

"그럼, 소교주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아, 또 왜?

신형을 돌리려던 때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날 소교주라 부르지 마라."

"...?"

"그, 교류의 목적이 뭔지 잊지는 않았겠지? 교류가 지속되는 동안엔 너와 나는 기존의 지위에서 벗어나 동등한 입장이 된다."

"그럼, 뭐라 불러 드려야 할지?"

"그, 글쎄?"

내 반문에 천유라는 딱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 어버버거렸다.

솔직히 조금, 저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내 기억으론 바로 얼마 전에 '교주'를 향해 내뱉었던 호칭을 입에 올렸다.

"그럼, 천유라 소저로."

"...!"

소저란 말이 뭐 그리 부끄러운지 천유라의 얼굴이 대번에 새빨개졌다.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비연이 나지막한 감탄사를 토해 냈다.

"어머."

***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이번 교류식은 끝을 맺었다.

나는 도망치듯 소마각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뒤에 남은 이들이 뭔 생각을 하는지는 이제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굉장하십니다, 도련님! 정말 굉장하십니다요!"

돌아오는 길 내내 구칠이 이런 말을 하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어, 뭐, 그렇지."

나는 영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지금의 난 장대했던 계획이 삑사리가 나면서 일시적으로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가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 마가의 애송이도 살아남은 것 같지만, 도련님께선 무려 천마님의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까!"

구칠은 내 일이 정말로 제 일처럼 느껴지는지 정말로 기뻐했다.

정작 모두의 축하를 받는 내 속마음은 정말 복잡했지만 말이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폐관 수련은 물 건너갔다.

물론 그렇다고 수련을 등한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달성치가 낮아질 것은 자명하다.

무엇보다 앞으로 계속된 교류를 통해, 그녀와는 전생에선 없었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가겠지.

나로선 그게 가장 부담스러웠다.

'천일관이라도 들어가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털었다.

'일단 좀 쉬면서 생각하자.'

그래도 이번 교류식이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한동안 진군악이 날 건드릴 명분은 사라졌다.

소교주와의 만남을 어떻게 잘 해결하면, 앞으로도 집안 눈치 안 보고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진가의 입구를 막 지나던 순간.

의외의 인물이 내 귀환을 맞이했다.

"이제 왔군, 형님."

전신에 근육이 알알이 박혀 있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한.

이게 어딜 봐서 16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보상으로는 내 친동생에 속하는 녀석이었다.

"여운이냐?"

"보면 몰라?"

마천진가의 이공자 진여운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꺾었다.

"폐관 수련 중이라고 들었는데?"

"오늘로 끝났어."

"그렇군. 그런데 웬일로 네가 날 마중 나온 거냐?"

솔직한 말로, 녀석과 내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애초에 녀석과 나는 같은 어머니 배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닮지 않았다.

'좀 슬픈 건, 진가에 어울리는 건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라는 거지.'

첫째와 둘째가 어릴 적에 바꿔치기 당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그런 말들이 녀석의 귀에 들어가면서, 진여운은 자신이 이공자라는 사실에 깊은 열등감을 가지며 자라났다.

거기에 내가 장남으로서 가문을 위해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 무공도 소홀히 했던 만큼, 현재의 녀석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벌레를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소교주에게 다녀오기 전까지 연공실에서 수련했다며?"

"그렇다만?"

"설마, 이제 와서 소가주 자리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아하, 이게 본론이었나?

날 싫어하는 녀석이 어째서 입구까지 나와 있는지 의아하더니 어쩐지.

"네가 율법을 모르진 않을 텐데?"

"흥! 형님은 장남이야. 소교주와의 관계 따위 언제든 정리하면 그만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곰 같은 놈이 의외로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간다.

그러니 아무리 한량이라 해도 장남인 날 제치고 가문을 이어받을 수 있었겠지.

"난 형님이 이 가문을 잇는 걸 인정하지 않아."

녀석이 눈을 부릅뜨며 날 내려다보았다.

"형님은 이 마천진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참았다.

아버지인 수라왕 진군악을 가운데 놓고 양옆에 나와 진여운을 세운 뒤, 누가 후계자인 것 같냐고 묻는다면?

백에 백 전부가 진여운을 지목했을 거다.

'이전 생에선 그걸 인정하고 네게 가주직을 넘기긴 했다만.'

물론 천유라와의 관계가 계속된다면 이번 생에서도 진여운은 마천진가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이 녀석을 가주 자리에 다시 올려도 되려나?'

전생에서야 내총관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아예 가문의 일에서 손을 뗐으니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다지만.

앞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는 이번 생에선, 진여운의 존재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로 작용하는 변수였다.

그때였다.

"이공자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이번 교류식에서 내가 거둔 성과에 흡족해하던 구칠이 진여운에게 따졌다.

"대공자님께선 대(大)진가에 어울리는 공을 세우고 돌아오셨습니다! 다른 육가의 자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셨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구칠의 항의는 진여운의 싸늘한 한마디에 잘려 나갔다.

"어디서 바깥에서 굴러먹던 살수 출신 따위가 진가의 직계 혈족들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끼어들지?"

움찔!

오히려 이 말에 반응한 건 구칠이 아니라 총관인 벽지상이었다.

음, 전생에서부터 확실히 느낀 거긴 하지만 내 동생은 말 꼬랑지가 좀 그렇다. 저게 열여섯 살이 내뱉을 말이긴 한가?

귀찮지만, 정말로 귀찮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아무래도, 네 싸가지는 고쳐 놓을 필요가 있겠구나."

"뭐?"

"겸사겸사 예절 교육도 다시 시킬 필요도 있고."

앞으로 내가 외부에서 활동하면서 진가에 발목이 잡히지 않으려면, 일단은 녀석에게 '형님'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심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말뜻을 이해한 진여운이 피식거리며 비웃었다.

"형님,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음, 그러고 보니, 우린 지금까지 싸워 본 적이 없지?"

다른 육가의 형제자매들은 사이가 돈독해질 때까지 피 터지도록 싸운다던데.

주먹을 무기로 삼는 우리 진가가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천마신교의 예법 교육은 의례(儀禮) 같은 유교 경전이 아니라 사랑의 회초리로 이루어졌지."

"지금, 형님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자각하고는 있어?"

그 말을 내뱉는 진여운의 전신 근육이 꿈틀거린다.

확실히 진가의 피를 진하게 이은 직계 혈족다운 모습이었으나.

난 오히려 피식 웃으면서 엄지를 뻗어 안쪽을 가리켰다.

"따라와라. 연무장으로 가자꾸나."

"하! 오늘 형님의 겉가죽이 얼마나 질긴지를 볼 수 있겠군."

옛말에 이런 고언이 있었다.

신은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에게 서로를 죽여 버리라는 유전자적 설계를 가했다고 한다.

음, 옛날에는 그저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신빙성이 생기는 느낌이다.

9화 형과 동생 (2)

진여운.

한 살 터울의 친동생이다.

작년 나이 열다섯에 본가의 진신무공인 마천수라신공(魔天修羅神功)에 입문하여, 벌써 3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천재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면 알다시피.

덩치가, 매우 컸다.

대체 저게 어딜 봐서 열여섯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형님,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면 없던 일로 해 줄게."

날 따라 연무장까지 온 진여운이 피식피식 웃음을 내지었다.

"내가 얼마 전에 최연소 육마룡(六魔龍)에 뽑혔다는 건 알고 덤비는 거지?"

"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이 열여섯에 육마룡이라면 자랑할 만하지."

"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녀석은 내 칭찬에 기분이 좋다는 듯 헤프게 웃었다.

진여운의 육마룡 등극은, 사실상 소가주 자리가 녀석에게 기운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정파의 육신룡(六神龍)에 대칭되는 마도 최고의 후기지수 6인.

물론 진가의 위광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만큼 녀석의 자질이 가문을 넘어 본교 전체에서도 인정을 받았단 뜻이었다.

진여운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데도 내게 비무를 청했다라. 실력에 자신 있나 봐, 형님?"

"당연히, 자신이 없진 않지."

"총관에게 들으니 마천수라신공도 아니고 본가의 다른 무공도 아닌, 별 이상한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게 벌써 저놈의 귀에 들어갔나?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벽 총관을 흘겨보았다.

대번에 벽 총관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나중에 두고 보자.'

저놈이 동생에게 줄을 댄 건 둘째치더라도, 입이 싼 건 별개의 문제지, 암.

"형님이 내게 예절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 나도 형님에게 예절을 좀 가르쳐 줘야겠어."

"무슨 예절 말이지?"

"아무리 장남이라 해도, 소가주에게 함부로 굴면 안 된다는 것을."

"벌써 소가주가 된 것처럼 구는구나."

물론 원래대로라면 일 년 후면 녀석은 소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걸 딱히 막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오늘 너에게 비무를 신청한 이유는 세 가지다."

"말해봐, 기꺼이 들어 주지."

녀석은 팔짱을 낀 채로 거만하게 웃었다. 마치 이게 네 마지막 유언이니 어디 마음껏 지껄여 봐라, 라는 모양새였다.

"첫째로, 너는 앞으로 네가 이끌어야 할 진가의 식솔들을 함부로 대했다."

굳이 구칠의 일만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재능에 가려졌을 뿐, 기본적으로 진여운은 성정이 포악하고 자신보다 아래의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성향이 짙었다.

육가 출신인 내가 내총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교주의 지지도 지지였지만 저 녀석의 성향이 가문의 잠재력을 깎아 먹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너는 이 진가의 식솔들이 몇이나 되는지 아느냐?"

"모르지. 아마 몇천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지난 달 장부를 기점으로 4만 2천 650명이다."

"허!"

그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벽 총관이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다.

가문의 직계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정보였지만, 설마 그걸 정말로 알고 있을 거란 건 생각지도 않았겠지.

진여운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꽤, 많네?"

"물론 싸울 수 있는 무인들의 수는, 네 말대로 수천도 되지 않지. 하지만 그런 이들만이 진가는 아니다. 진가의 녹봉을 먹고, 진가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중원 전체에 이만큼이나 된다. 이들이 모두 마천진가다."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너는 앞으로 소가주로서 이들의 아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다지 좋은 결말이 될 것 같진 않구나."

"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대공자인 형님이 그런 소리를 하니 좀 황당하네."

기습적인 놈의 사실 공격에 은은하게 미소 짓던 내 입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다. 나는 지금까지 가문의 일과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았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하, 그래서, 나머지 두 가지 이유는 뭔데?"

"또 하나는 네가 육마룡에 뽑혔다고 해도, 위에는 위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겸손함을 배우지 못하면 나중에 크게 낭패를 볼 것이다."

이건 미래를 경험한 입장에서의 진실된 충고였다.

사실 육마룡이라고 해도, 지금 내겐 '그' 마철수와 동급일 뿐이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진여운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갔다.

분노와 살기가 놈의 눈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마지막 하나는, 그래도 내가 명색이 대공자인데, 동생이랍시고 있는 놈이 끝없이 개겨 대니 기를 좀 꺾어 놓고 싶어서 말이다."

사실상 마지막 말이 세 가지 이유 중에선 가장 진심이었다.

"아, 그래?"

부웅!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주먹이 눈앞의 시야를 가렸다.

***

정직하게 뻗어 오는 일점관통의 주먹.

단순히 주먹을 뻗는다라는 기초적인 행동이지만, 나름 초식명이 붙은 엄연한 진가의 무공이었다.

패황수라신권(霸皇修羅神拳)

극기일관(克己一貫)

직격당한다면 머리통이 터져 나갈 흉흉한 힘이 담긴 일격.

하지만 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녀석의 주먹질을 피해내었다.

"화가 꽤 많이 났구나."

기교는 몰라도 위력만큼은 확실히 육마룡이라 불릴 만했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코뼈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이걸 피해?"

살짝 거리를 벌린 녀석이 눈을 부릅뜨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래, 한 수 재간이 있으니 덤볐다 이 말이지?"

진여운의 몸에 깃든 살기가 점차 진해진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혀를 찼다.

"마천수라신공은 특유의 그 패도적 성향 때문에 마성을 가라앉힐 심공을 함께 연마해야 하지. 지금 그 모습을 보면 심공의 연마는 소홀히 했나 보구나."

"닥쳐!"

묵직한 투기가 올라옴과 동시에, 녀석이 다시금 자리를 박찼다.

"흠."

내가 너무 태연한 탓일까. 구칠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도련님! 검! 검을 뽑으십시오!"

"뭘 이런 녀석 상대하는 데 검씩이야."

아무리 본가의 진신무공을 삼성까지 연마했다 해도, 녀석의 본질은 아직 경험이 일천한 열여섯에 불과했다.

스윽!

나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패황수라신권을 익히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문 무공,

백연마영류(百連魔營流)의 기수식이었다.

"하, 고작해야 마영류? 지금 장난해!?"

백연마영류는 권법, 체술, 보법, 신법 등을 모두 아우르는 기초공의 일종.

그 기초공의 기수식을 보였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나.

"고작이라, 네 눈엔 그렇게 보이는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녀석은 큰 낭패를 볼 것이다.

"반병신으로 만들어주마!"

호쾌한 진여운의 외침에, 순간 내 이마에 핏발이 섰다.

"아니, 이 새끼가 감히 하늘 같은 형님에게 그런 망발을?"

"닥쳐!"

진여운의 주먹에 은은한 묵기(墨氣)가 담겼다.

"삼절포쾌(三絶抛快)!"

마치 돌진하는 황소처럼, 묵직한 세 갈래의 주먹이 내 전신을 뭉개기 위해 달려온다.

분명 녀석의 재능은 진짜배기였고, 기세 또한 나이를 초월하는 강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역시, 그녀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모자라.'

초식의 정교함도, 공세의 날카로움도.

천유라의 검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나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시작부터 너무 괴물을 상대한 부작용인가? 저 녀석이 이리 모자라 보인다니.'

분명 20년 뒤에는 마철수와 더불어 신교가 자랑하는 젊은 쌍두라 불리게 되는 녀석이었지만.

역시, 지금은 너무나도 모자라다.

"웃어!?"

내 웃음이 녀석에겐 비웃음으로 보인 모양이다.

"죽엇!"

"그럴 순 없지."

부드럽게 보법을 밟으며 권격을 모조리 피해 낸 나는, 자연스럽게 그 원심력을 이용해 녀석의 등을 걷어찼다.

퍼억!

"오오!"

"저 공세를 저리 유연하게 피해 내다니!"

"거기다 반격까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 소리.

녀석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새빨개졌다.

"이이익!"

실질적인 타격은 없어도 내게 등짝을 차였다는 사실 자체가 녀석에겐 치욕이었다.

"크아아악!"

분노에 가득 찬 패황수라신권의 절초들이 쏟아진다.

녀석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러 댔다. 당연한 말이지만 단 일격도, 내 몸을 스치지 못했다.

"어, 어째서, 공격이 맞지 않는 거야!"

그러기를 약 1각 정도가 지났을까.

'슬슬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군.'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진기를 퍼부은 탓일까?

녀석의 마성과 분노가 강제로 가라앉는 게 보인다.

진여운이 분통을 터트렸다.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하고! 형님은 자존심도 없어!?"

"애초에 맞히지도 못하는 게 문제 아니냐?"

끄덕끄덕!

이 비무를 관람하던 많은 무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허리춤에 있는 부채를 활짝 펴며 웃었다.

"내가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다, 동생아."

"뭐?"

"이렇게 피하고만 있는데도 공격을 맞히지 못한 네가 문제인 거지. 무엇보다 나는 비무가 시작된 이후 너와 삼 장 이상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아챈 진여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패황수라신권은 본교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울 패도적인 무공. 하나 그렇기에 제대로 익히려면 육체의 유연함은 필수적이지."

한창 육체의 조정이 필요한 성장기에서 마영류의 중요성은 진가 내 어떤 무공보다도 크다.

나조차도 두 가지 무공에 입문하면서도 마영류의 단련은 늦추지 않았으니까.

그에 비해 진여운은 너무 일찍 가문의 신공절학에 입문해 버렸다.

물론 시간이 지나 단련이 계속되면 녀석의 몸은 알아서 단점을 보완할 테지만, 그만큼 시간에서 손해를 보는 건 확실했다.

"열다섯에 가문의 신공에 입문한 너의 자질은 훌륭하다만, 적어도 너는 네가 그렇게 무시한 백연마영류의 단련을 그만두지 말았어야 했다."

"크윽!"

"그렇게 딱딱한 움직임으로는 마영류의 보법만으로도 충분히 피해 낼 수 있다는 소리지."

성격은 폭급해도 무재(武才)는 확실한 녀석이니 내 말을 잘 알아들었을 거다.

"이이익!"

하지만, 녀석에겐 알아들은 것과 수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아는 척하지 마! 무공도 등한시했던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내게 이래라저래라야!"

진여운의 목소리에선, 지금껏 줄곧 쌓여 왔던 한이 맺혀 있었다.

"네놈이 진가의 한량이라 멸시받고 있을 때, 나는 피를 토할 정도로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어. 그 지긋지긋한 이공자 딱지를 떼어 내려고,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나는 그 한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네게 넘어간 소가주 자리를 탐내지 않은 것이지."

"...!"

"말했지 않았느냐, 위에는 위가 있다고. 오늘 모자란 점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이 약점은 꽤 오랜 세월 네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거다."

진여운은 침묵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말에서 뭔가를 깨우쳤는지, 거의 한참을 갈등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홱!

녀석은 이를 악물며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충고는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다음엔 절대로 이렇게 넘어가진 않을 거야."

더럽게 말 안 듣고 날 무시해 왔던 동생 놈이 저런 모습이라니.

가슴 한구석이 참으로 뿌듯해진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이, 동생. 제자리 원위치."

"...?"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통째로 풀며 말했다.

"이 형님이 네게 비무를 신청한 이유는 총 세 가지였지. 방금 전엔 그중 하나를 깨우쳐 준 것에 불과하고."

"뭐, 뭐라고?"

"아직 두 개가 남았다, 동생아."

나는 칼집 채로 뽑아낸 검을 어깨에 걸치며 동생 놈을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넌 아직 진가의 직계 혈족으로서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

"혀, 형님?"

"그리고 이 하늘 같으신 형님을 깍듯하게 모시는 방법 또한 모른다."

고오오오!

방금 전.

진여운이 내뿜었던 기운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흉흉한 투기가 내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 두 가지를 네놈의 몸에 몸소 가르쳐 주겠다."

"자, 잠깐?"

지금껏 미친놈처럼 날뛰었으니, 이번엔 미친놈처럼 맞을 차례다.

어깨에 둘러멘 칼집에 거무스름한 기운이 피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단순히 유형화를 넘어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거, 검기!?"

나이 열일곱에 검기를 뽑아낼 수 있는 고수?

당장 진여운만 해도 아직 권기는커녕 경력을 뿜어내는 게 고작이다. 체기의 단계로 불리는 그 수준만으로도 육마룡이라 인정받았다.

그런데 검기라니, 녀석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일 거다.

"절삭력은 전혀 싣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동생아."

"혀, 형님? 이 소제가 형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진여운이 이리 화려하게 혓바닥을 놀릴 줄 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하나.

"예절은 혓바닥만으로 하는 게 아니란다 동생아!"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사랑하는 동생에게 달려들었다.

"꾸웨에에엑!"

그리고, 수라왕 진군악이 늦은 밤 본가에 귀환할 때까지, 마천진가의 연무장엔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우는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고 한다.

10화 계획 (1)

수십 개의 촛불이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다.

상당히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양면의 거치대에는 수많은 명품들이 숨 막힐 정도로 꽉꽉 들어서 있었다.

중원을 울렸던 명필들의 시와 그림이 담긴 족자들.

저 동방의 나라에서 들여온 청자(靑瓷)와 도자기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수많은 보물까지.

그것들은 전부 이 마천진가의 가주, 진군악의 서재를 장식하는 것들이었다.

"그래, 꽤 재밌는 짓을 저질렀더구나."

내심 거의 소가주로 내정된 진여운을 두들겨 팼다.

막 본가에 귀환했을 때, 진군악의 황당해하는 시선은 보기 드물 정도로 퍽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진군악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상당히 대견해했다.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어떻게 수련했는지 같은 건 일절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로지 결과뿐이니까.

"교주께서 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더군."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게도 말이야."

음?

진군악이 천마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이미 바깥에서 한차례 얼큰하게 마시고 왔을 텐데도, 진군악은 집에서도 술잔을 놓지 않았다.

"자기 딸을 위해 너만 한 인재를 내놓는 나의 배포에 감탄하시더군."

저건 조롱일까 칭찬일까.

"큭큭큭,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진군악은 뭔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서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분명 '탐욕'이었다.

"아들아."

"예, 가주님."

"소가주가 되고 싶으냐?"

나는 그 말에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내가 소가주가 되고 싶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분명 내일 당장이라도 소가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군악이 내심 원하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소가주의 자리는 여운에게 주십시오."

"호오?"

"바깥에 떠돌아다닌 저와는 다르게, 여운은 꾸준히 본가 내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습니다."

나는 상당히 비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최대한 소교주와 가까이 지내면서, 본가의 위명을 높이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

진군악은 내 말에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대답으로 그의 내심엔 상당한 만족감이 깃들어 있을 거라고.

"소가주 자리엔 관심이 없느냐?"

"가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게 더 효율적입니다."

이번 일로 바닥에 처박혀 있던 내 무력과 자질이 재평가받겠지만, 그게 곧바로 본가 무사들의 지지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제대로 하려면 꾸준한 교류와 정치질이 이어져야만 했다.

'근데 그렇게 하기엔 너무 귀찮고 시간도 아깝단 말이지.'

차후 진가의 장악은 진여운 한 명을 틀어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동안 침묵하던 진군악이 입을 열었다.

"네가 가문의 위광을 그리도 생각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구나."

"우리 진가가 언제까지 마가나 패가 다음이라는 평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대번에 진군악의 얼굴에 불쾌감이 드러났다.

"우리는 최강이다. 천가 외에 우리보다 위에 있는 가문은 없다."

"물론 실질적으론 그렇습니다만, 무지한 외부 교도들의 평가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진군악의 역린이었다.

신마육가라 불리는 여섯 가문 중에서, 진가는 언제나 혈룡마가나 극도패가보다 아래로 평가받아 왔다.

실질적인 세력도 그렇고, 교내의 영향력도 위의 두 가문과 비교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진군악은 그것을 바꿔 보고자 평생을 발악했지만, 차이를 좁히는 것에 그쳤을 뿐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것을 제가 바꿔 보겠습니다. 다른 육가들이 후계 경쟁에 잠재력을 까먹고 있을 때, 저와 여운이 안팎에서 내실을 다진다면."

"다진다면?"

"다음 세대, 마천진가는 육가 중 제일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현시대 육가의 직계 후계들은 대부분 나이가 비슷했다.

그런 만큼 서로에 대한 경쟁 심리가 상당히 치열했다.

'하지만 외부의 경쟁 이전에, 후계자 자리를 두고 상당히 치열하게 싸워 댔지.'

혈룡마가의 경우엔 마철수와 마진윤을 포함해 남자 직계만 네 명이 존재했고.

흑금사가나 다른 육가 역시 상황은 비슷비슷했다.

그나마 진가는 내가 소가주 자리를 일찌감치 포기한 덕에 진여운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어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다만 가주가 된 진여운이 그 포악한 성질머리를 못 고친 탓에 천고의 기회를 살리지 못해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흑막들이 본교에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육가 내부의 분란이 길어져서일 수도 있겠네.'

정말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육가 내부 후계 경쟁에 개입했을 가능성도....

깊어지려던 생각은, 이어진 진군악의 말에 깨어졌다.

탁!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진군악이 비릿하게 웃었다.

"훌륭한 생각이다."

"감사합니다."

"천가를 등에 업을 수만 있다면, 본가의 위상은 다른 다섯 가문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할 터."

신성불가침의 혈족, 천가(天家).

그들의 힘도 힘이지만, 그 상징성은 본교의 교인들에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지금껏 역대 교주의 외가들은 교의 율법과 교주들의 견제로 오히려 힘을 제한당했지. 하지만 다음 시대는 다르다."

현 소교주인 천유라는 여인의 몸이다.

거기다 현 교주는 '천마(天魔)'라 불리는 지고의 절대자.

자연히 다음 대 교주가 될 천유라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다음 대 교주의 권위는 외가에서 얼마나 힘을 실어 주냐에 따라 결정될지도 모릅니다."

"크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그만큼 그 외가의 세력이 커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

진군악이 이쪽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었다.

"할 수 있겠느냐?"

"해 보이겠습니다."

"좋다. 요즘 들어 시원해진 모습이 더더욱 좋구나."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인 그가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

"너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아비로서 지원을 해 줘야 마땅하겠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군.'

진군악이 아비의 도리를 운운하는 것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올 지경이지만.

이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는 건 상당히 아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가주님께 감히 요청을 드립니다."

나는 조심스레 진군악에게 몇 가지를 요구했다.

그 의외의 내용에 진군악은 눈살을 살짝 찡그렸지만, 결국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

다음 날.

나는 구칠과 함께 미옥성의 번화가를 걸었다.

미옥성은 중원에서도 이름 높은 항주의 문화를 그대로 옮겨 왔다고 할 정도로, 본교의 유홍과 경제를 책임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나 역시 인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했다.

"어이쿠, 거기 덩치 큰 도련님! 오늘 좋은 과일이 들어왔는데 하나 잡숴 보셔!"

"흠, 어디 줘 봐."

"질 좋은 복숭아가 들어왔소!"

"난 딱딱한 건 좀 별론데. 물렁한 거 어디 없나?"

"저 먼 강소성에서 들여온 비단이오!"

"때깔이 괜찮군."

아직 낮이라 그런지 유흥보다는 경제활동에 치중해 있다.

나는 복잡한 인파들 사이를 헤치며 생각에 잠겼다.

'진가의 일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가주 진군악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상, 진가 내부에서 나를 방해할 요소는 대부분 사라졌다고 봐도 좋았다.

'날 눈엣가시로 여기는 몇몇 원로들이 있지만, 너무 튀지만 않으면 굳이 움직이진 않을 거다.'

원래라면 이런 바깥나들이는 자제하고 수련에 몰두해야 하지만.

이미 오 년의 폐관 수련은 천유라와의 교류식으로 인해 물 건너갔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그 흑막들의 정체를 캐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천유라는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소통을 단절하는 치세를 펼쳤다.

그 결과 교주와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호법원과 오대전 일부가 배신을 때려 버렸고.

거기에 애초부터 간자였던 마도대공 한무백이 화룡점정을 찍어버렸다.

'시기상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천유라가 교주가 되었을 때겠지. 현 교주의 치세는 압도적으로 굳건하니까.'

천유라를 배신했던 호법원도 지금 시점이면 현 교주에게 변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거다.

'하지만 여전히 천뇌전은 의심스러워. 천뇌전 자체가 현 교주의 주도로 설립된, 가장 최측근이 모인 곳이긴 해도.'

사실 미래의 천뇌전은 사실상 교를 장악했다 싶은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정작 한무백을 중심으로 한 배신자들의 정체가 드러났을 땐 천뇌전은 그들 중에 포함되진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 후 있을 마도대공 선별전에 한무백을 추천한 장본인들이 바로 그 천뇌전이었기에, 난 이 사실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매우 의심스럽긴 해. 그런 권력을 쥔 천뇌전이, 정작 호법원과 육가 중 일부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특히 천뇌전은 신교의 정보를 총괄하는 곳이기도 했다.

'역시 파게 된다면 천뇌전을 중심으로 조사를 하는 게 낫겠지. 지금은 '놈들'이 다른 배신자들에게 접촉했다고 하기엔 시기가 너무 일러. 설사 접촉했다고 해도 증거를 찾긴 힘들 거다.'

지금 이 시기에 굳이 미옥성에 다시 들른 것도, 이것에 대한 일환이었다.

와그작! 와그작!

'뭐, 다 좋은데.'

나는 뒤쪽에서 사과를 분쇄하는 거한에게 짠 시선을 보냈다.

"왜 따라온 거냐, 동생아?"

아까 어떤 아낙네에게 사과를 낼름 받아 든 진여운이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형님이야말로, 또 뭐 하며 놀려고 이런 곳까지 오셨소?"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만."

그 말에 녀석은 살짝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흥, 형님이 평소 뭘 하며 지내기에 이리 강해졌나, 궁금해서 따라와 봤소."

진여운은 승부욕이 짐승 같은 녀석이니만큼 자존심 역시 강했다.

그런 녀석이 날 관찰하기 위해 잠시 자존심을 접었다는 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이놈을 이대로 데리고 가도 되려나?'

지금 내가 가려는 곳은, 이곳 미옥성에서도 가장 음지에 속한 장소.

설사 육가의 직계라 해도, 잘못 얽히면 꽤나 골치 아파지는 곳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관없겠지. 골치 아픈 것과 감당할 수 없는 건 별개의 일이니까.'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라."

"당연한 소릴!"

불끈거리는 근육을 과시한 진여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기심이 도졌는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어딜 가는 거요? 여긴 형님이 좋아하는 번화가가 아닌데?"

"여긴 흑시(黑市)다."

"흑시? 그건 또 뭐 하는 곳이오?"

나이 열여섯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우직하게 무공만 익혀 왔던 몸이라, 진여운은 바깥세상의 지식엔 약한 면이 있었다.

"암시장의 일종이다."

"암시장이라면 불법적인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라 들었는데, 그럼 본교의 율법을 어긴 배교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오?"

나는 녀석의 순진함에 피식 웃었다.

"동생, 이거 하나만 알아 둬."

"뭘 말이오?"

"이 십만대산에서 '불법'이라는 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저 일반 교도들이 알아봐야 좋지 않기에 으슥한 곳에 감춰놓는 것일 뿐, 기본적으로 본교의 모든 행사는 전부 천가와 육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 말인즉, 이곳 흑시도 육가 중 어딘가의 손길이 미친 장소라는 뜻.

걸음을 옮길수록 점차 미옥성의 후문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주변의 분위기 역시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슬슬인가?'

병장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흉흉한 인상의 무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이 뿌리는 음습한 살기가 곳곳에서 피부를 자극했다.

"그리 유쾌한 곳은 아니군."

진여운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감을 밝혔다.

"형님은 이런 곳에 들락날락하면서 실력을 쌓은 거요?"

"아니, 이곳은 나도 두어 번 정도밖에 와 보지 않았다."

애초에 한량 짓을 할 당시엔 이런 곳과 인연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한참 후에 내총관이 되면서 교내 사정을 파악하다 알게 된 곳이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흑시의 가장 안쪽에 있는 나름 으리으리한 전각 앞에서 멈추었다.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화려함이군."

진여운이 나지막하게 감상을 내뱉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오?"

"암금각(暗金閣). 이곳 흑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곳이다."

내총관 시절이나 지금이나 전각의 상태는 놀랍게도 비슷했다.

쩌억!

나는 망설임 없이 전각 입구의 문을 열어젖혔다.

저벅! 저벅!

"으음!"

내 뒤에서 안쪽을 살피던 진여운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한 노인을 필두로, 양열로 검은 의복의 무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나?"

"네 덩치가 덩치다 보니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지 않겠냐?"

"어서 오십시오, 진가의 귀빈분들."

나는 피식 웃으며 인사를 해 온 노인에게 물었다.

"우리가 오는 걸 언제부터 알았지?"

"흑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저희의 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라는 소리군.'

노인은 손을 마주 잡은 채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진가의 귀빈분들께서 이런 밑바닥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당연히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러 온 게 아니겠는가?"

"...."

대놓고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웃음을 가장하던 노인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하지만 자네와 이야기하는 건 급이 맞지 않군. 이곳의 최고 관리자를 불러오게."

"소인이 이곳을 책임지는 자입니다만."

상대는 아주 당당하게 거짓을 고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금오귀(金烏鬼) 오군종."

내가 이름과 별호를 정확하게 언급하자, 노인 금오귀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진가의 대공자인 나와 이야기하려면, 못해도 사가(思家)의 인물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스윽!

천천히 고개를 든 금오귀의 표정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11화 계획 (2)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이렇게 되물었다.

"뭘 말인가? 이곳이 흑금사가(黑金思家)의 정보 조직이라는 것을 말함인가?"

흑금사가라는 이름까지 튀어나오자, 손을 마주 잡던 상대의 소매가 더욱 깊게 들어갔다.

"다시 묻겠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방에서 찌를 듯한 기세가 흘러나온다.

어쭈? 이것들이 건방지게 살기를 흘려?

"건방지군."

내 웃음이 더더욱 진해졌다.

"내가 노인을 공격할 줄은 알아도 공경할 줄은 모르거든."

"네? 그게 무슨...."

짝!

놈의 면상이 시원하게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

"감히 진가의 후예에게 사가의 대리인 따위가 살기를 풍겨? 그것도 모자라 소매 안쪽에 숨겨 둔 무기를 집어 들기까지?"

"죄송합니다."

금오귀는 재빨리 머리를 원위치하며 고개를 숙였다.

달아오른 오른뺨이 꽤 욱신거릴 텐데도 금오귀는 능숙하게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감정이 격해진 건 어쩔 수 없는지, 놈의 입에서 건방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나, 설사 진가의 후예분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다른 육가에겐 실체가 공개되지 않은 장소입니다."

그 말에 발끈한 건 내가 아니라 진여운이었다.

"하! 그래서? 살인멸구라도 하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금오귀의 목울대가 살짝 꿀렁거렸다.

정말 나와 진여운이 여기서 죽는다면?

진가와 사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없어지는 전쟁이 일어난다.

"본가의 방침이 내려올 때까지 두 분을 잠시 억류할 뿐이지요."

"그게 가능할까?"

"두 분을 제압하는 건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금오귀의 눈엔 절대적인 자신감이 보였다.

비록 내게 따귀를 얻어맞았다 해도, 확실히 금오귀 정도면 한 성에 이름을 날릴 절정의 고수다.

나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한번 해보시지."

울컥!

도발에 넘어간 금오귀가 막 팔짱을 풀려고 할 때.

"거기까지 하세요."

이 층 부근에서, 한 번 들어 본 낮은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서책에 유려하게 글씨를 적어 가던 '사비연(思飛燕)'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는 아래쪽에서 일어난 소란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옮겼다가, 익숙한 남성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진여명?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상황이 어찌 됐든 아래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인다.

그녀가 다급히 개입했다.

"거기까지 하세요."

그러자, 진여명과 진여운,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사비연을 향했다.

"오, 다시 뵙소이다 사 소저."

"진 공자시군요."

사비연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엔 무슨 일이죠?"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소교주의 측근인 당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겁니까?"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는데도, 사비연은 냉정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공자의 입으로 이곳이 흑금사가의 영역이라 하지 않았나요? 제가 여기 있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아아, 확실히 그렇구려."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이 남자?'

표정을 드러내 놓고 있진 않았지만, 사비연은 속으로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이곳이 사가의 소유라는 건 가문 내에서도 아는 이가 몇 되지 않을 텐데?'

물론 지배 구조를 역행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육가 중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가를 언급한다는 건 그만한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진가의 정보력이 생각 이상인가?'

사비연은 다시금 표정을 관리했다.

"다시 묻죠. 이곳엔 무슨 일이죠?"

관리자의 정체가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만난 이상 본론을 꺼내야 했다.

나는 목청을 살짝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최근 흑시를 비롯한 각 성의 홍등가와 뒷골목에 묘한 게 돌아다닌다고 들었소이다만."

"으응? 묘한 거?"

옆에 있던 진여운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사비연과 금오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분명 이름이… 흑점혈(黑粘血)이라고 했던가?"

"그걸, 어떻게 알았죠?"

"어떻게 알긴? 내가 이곳저곳 쏘다니며 쓰고 다닌 돈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까?"

"...."

"칠성루의 월향이가 요즘 질 나쁜 약이 돌아다닌다며 워낙 앵앵거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왔소이다."

순간 사비연의 얼굴에 약간의 혐오감이 생겨났다. 하지만 표정 관리에 능숙한 그녀답게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네, 맞아요. 최근 흑시와 뒷골목 등에 정체불명의 약이 돌아다니고 있죠."

"내가 알아보기론 그건 몽환약의 일종이라더군. 문제는 그 출처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하던데."

몽환약은 일반적으로 마취 및 환각작용을 일으키기 위해 만든 약이다.

보통 의약품으로 쓰이거나 기관진법을 제조하는 데 투입되는데, 당연하게도 악용하면 한도 끝도 없어지는 종류였다.

"…잘 아시는군요."

사실 아직까진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일부 하층민이나 가난한 의원들 사이로 조금씩 돌고 있는 수준이었고, 내가 갈 만한 기루나 술집 같은 곳에 퍼지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여야 했다.

다만.

'놈들이 먼 과거에서부터 본교에 수작을 부렸다고 가정했을 때, 이것저것 시도했던 것들 중 하나는 분명하다.'

분명 처음 기록을 접했을 땐 단순한 진통제나 마취용으로 들어온 물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신교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막대한 폐단을 낳았고.

전대 교주… 즉, 현 교주가 결단을 내려 완전히 도려낼 때까지, 신교는 안팎으로 꽤나 심한 홍역을 앓았다.

"적어도 교 바깥에서 들어온 물건은 확실해요. 본가의 힘을 빌려 수색했음에도, 원재료의 출처를 찾진 못했으니까요."

"흑시의 주인인 당신도 출처를 모른다?"

그 말이 아픈 곳을 찔렀는지,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른 육가의 하부 조직이 일을 벌이고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에요. 흑시라고는 해도 대산(大山)의 모든 흑시를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흠, 확실히 그렇지."

"다만 아직 세간에 유통되는 양이 많지 않아 본격적으로 파고들진 않고 있어요. 사실 그것 말고도 뒷골목에는 이 이상으로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당연하겠지.

그 물건이 문제가 되는 건 앞으로 몇 년 뒤니까.

"그나저나, 왜 진가의 대공자인 당신이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죠?"

"말했잖소? 월향이가 자꾸 징징대서 해결해 주러 왔다니까?"

사비연의 눈에 작은 의혹이 일었다.

"정말 그것뿐인가요?"

"그럼 내가 굳이 이런 뒷골목을 전전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껏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로선 그저 의심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쩝, 여기 오면 뭐라도 정보를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쉽군."

나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자, 동생아."

"뭐야, 벌써 가는 거요?"

"얻을 정보도 없는 것 같은데 더 있을 이유도 없지. 사가의 정보력을 내심 기대했는데 별거 없군."

내가 신형을 홱 돌렸을 때였다.

"잠깐만요!"

사비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씨익!

"왜?"

"...."

계획대로, 라는 표정을 짓는 내 모습에 그녀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딱히 손해를 보는 건 아니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느껴졌다.

사비연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정확한 출처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조사했던 정보 정도는 넘겨드릴 수 있어요."

"좋군. 진작 그럴 것이지."

"하지만 아무리 진 공자 당신이라고 해도 공짜로는 안 돼요."

"뭐, 사가의 인물이라면 당연한 말이겠지."

"거래를 하죠."

'거래', 사비연이 자주 내뱉는 말버릇 중 하나였다.

"대가는?"

"일의 완벽한 해결. 진가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죠. 어설프게 찔러보는 건 용납하지 못해요."

뒷골목의 일에 어설프게 개입한 대가는 진가가 아닌 사가, 그것도 흑시를 책임지는 사비연 본인이 받게 된다.

"좋아, 상처가 회복이 안 되면 도려내서라도 해결해 주지."

"...!"

너무나 쾌활한 승낙에 되레 사비연이 놀랐다.

'가문의 힘'이라는 건 칼집 속의 칼과도 같아서, 휘두르지 않을 때 가장 큰 힘을 지닌다.

거기에 막상 휘두르려 하면 오히려 휘두르기가 힘들었다.

"...해당 건을 맡은 자를 진가로 보내죠. 그가 도움을 줄 겁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 줘도 적어도 맨땅에서 발품 팔아 가며 시작할 필요는 없다.

"고맙군. 이 문제는 내게 맡기시오."

내 말투가 대번에 다시 존대로 바뀌었다.

"어디까지나 거래일 뿐입니다. 다만, 다른 육가가 얽힐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요?"

나는 과장되게 팔을 벌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상관없소. 설사 다른 육가가 얽혔다 해도 고작해야 하부 조직일 텐데, 진가의 대공자인 나와 상대하려 들까?"

"딴엔 그렇겠군요."

확실히 내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이 튀어나온 격이니까.

"그럼 수고하시오. 다음 교류회가 벌어지기 전에 만나도록 하지."

"저도 그러길 빌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진여운을 데리고 암금각의 문을 나왔다.

그리고.

"갔군요."

저 멀리 사라지는 진가의 두 형제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비연이, 각의 이 층 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소교주님."

"...."

사비연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금까지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있던 소교주 천유라가 있었다.

"흥!"

그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왜 또 그리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요?"

"비연,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느냐?"

천유라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 소교주의 부군 자격을 지닌 남자가, 여전히 기루에 들락거리며 기녀와 연을 맺고 있지 않느냐?"

"아, 음...."

그녀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에, 사비연은 그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가히 쓰레기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교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조금은 다시 봤거늘!"

사실 천유라는 교류식이 끝난 뒤 교주와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어쩌면, 진가의 아이는 중간에 생각을 바꾼 모양인 것 같더구나.

-그게 무슨 뜻이온지....

-분명 처음엔 일부러 질 생각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 그 뜻을 바꾸고 전력으로 너와 싸웠다.

-그게, 사실입니까?

-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도 자기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던 것 같더군. 그 아이의 눈은, 승부가 아니라 오로지 널 보고 있었으니까.

-...!?!?

-그래서 더욱 이상하더구나. 너에게 뭔가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 이상 그런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교주와 나누었던 대담이 천유라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더 볼 것도 없지. 난 이만 돌아가겠다!"

한껏 성을 낸 천유라는 더 이상 이곳에 있기 싫다며 밖으로 나섰다.

"소, 소교주님?!"

일 중인 자기에게 찾아와서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걸까?'라고 물었던 건 벌써 잊어버리셨나?!

하나 현명한 사비연은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천유라가 호법원의 호위 속에 사라지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자리에 머문 사비연은 아까의 대화를 상기하며 책상을 검지로 톡톡 두들겼다.

'진 공자는 정말로 기루에서 그 정보를 얻은 건가?'

흑시의 지배자인 사비연은 당연히 여러 밀거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일개 기루에까지 퍼질 정도로 아직 유통이 원활하진 않을 텐데?'

지금도 조사와 추적은 이루어지곤 있지만, 신교의 뒷골목에 도진 문제점은 그것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더 치명적이고 더 활발하게 퍼진 것들이 널려 있는데, 진 공자는 왜 그것을 콕 집어서 날 찾아온 거지?'

사비연은 직감했다.

기녀를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

아무리 대외적으로 한량이라 불린다고 해도 그는 명색이 육가의 대공자다.

특히 교류식 당시 소교주의 검을 끝까지 받아 내던 그 실력은, 절대 무공을 소홀히 한 이가 보일 수 있는 무위가 아니었다.

'대단한 심계를 가진 자다. 대체 무슨 목적인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아.'

진가의 대공자인 자가 직접 움직여서까지 알아내야 할 사실이 무엇일까?

톡, 톡, 톡.

책상 끝을 살짝 두드리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오귀."

"네, 소주(小主)."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금오귀가 재빨리 다가왔다.

"칠호를 불러 주세요.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칠호라면… 아, 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이럴 때 쓰려고 있는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금오귀는 사비연의 의도를 이해하곤 고개를 숙였다.

***

"형님, 왜 거짓말을 한 거지?"

"뭐가 말이냐?"

흑시를 빠져나간 뒤, 진여운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기루니 뭐니 하며 그 여자 앞에서 온갖 핑계를 댄 것 말이야."

"뭐야, 눈치챘냐?"

역시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다니까.

"내가 병신도 아니고. 최근 형님이 기루에 들락거렸다면 대번에 내게 보고가 올라왔겠지."

나는 떨떠름하게 진여운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까지 보고를 받고 있냐?"

"형님에 관한 건 가만히 있어도 다른 놈들이 알아서 정보를 가져다주니까."

확실히 후계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인 만큼, 유력 후보인 진여운에게 과잉 충성하려는 녀석들은 차고 넘칠 거다.

"그래서, 왜 그런 건데?"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위험하니까."

"위험하다고?"

"저래 보여도 신교 내에서 흑금사가의 정보력은 천가 다음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정확히는 꼬리는 잡아도 몸통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것들이 사가의 직속은 아니잖아?"

"직속은 아니지만 직계가 운영하는 곳이잖냐. 적어도 어느 정도 본가의 역량을 따라갈 수준은 되겠지."

"뭐야, 그럼 사가의 그 계집애가 위험하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거란 말이야?"

"정확히는 소교주를 위해서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사비연은 소교주의 유일한 측근이자 정보통이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소교주는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어지지."

진여운이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천가의 후예인 소교주가 믿을 사람이 없다고? 천가엔 나 이상으로 충성을 바치려는 놈들이 우글거릴 텐데?"

"이번 일은 바로 그 천가가 관련된 일이니까."

"...뭐?"

12화 계획 (3)

"천가가 관련되었다고?"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형님, 지금 나랑 장난해?"

진여운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현 교주님의 권위가 얼마나 두터운데, 천가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이가 나올 수 있다고 봐?"

"그러니까 수면 밑에서 활동해야 하는 거지. 걸리면 끝장이니까."

나는 진여운과 눈을 마주쳤다.

아직은 수면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나는 이 이후에 천가에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다.

"현 소교주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아직은 어리지만 진여운은 나름 신교 내의 권력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성별. 역사상 여교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교주들은 대대로 권위가 약했다고 들었어."

"잘 아는구나. 그다음은?"

"현 교주님의 존재. 대대로 여교주의 권위는 약한데, 설상가상으로 현 교주님은 천마의 칭호를 받은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시지!"

진여운의 목소리엔 현 교주에 대한 존경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래, 어지간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면 소교주는 시작부터 큰 약점을 가지고 제위에 오를 거다."

그리고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별호에 무정(無情)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철권통치를 행했다.

"더 알고 있는 건 없냐?"

"크흠! 그, 글쎄? 내가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지금으로선 훌륭하지."

"날 놀리는 거야? 그럼 형님이 이어서 말해 봐. 소교주의 약점이 뭔지."

"간단해. 소교주는 자신을 받쳐 줄 천가 쪽 세력이 적다."

"응?"

"정확히는, 천가에서 그녀의 힘이 되어 줘야 할 원로와 방계들이 전부 찢겨 있다는 점이겠지."

현 교주이자 적통인 천태종의 자식은 오로지 천유라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대에 천씨 성을 사용하는 젊은이가 천유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천가의 방계 중에는 소교주와 동시대의 청년들이 많아. 개중엔 재능이 검증된 인재가 많지."

"아, 그놈들?"

진여운도 그들이 누군지 아는지 미묘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능이 검증되었다고 보기엔, 하나같이 미묘한 놈들뿐이던데?"

"미묘하다는 게 중요하지.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뜻이니까."

나는 살짝 말을 아꼈다.

사실 그들이 애매한 평가를 받는다는 건 맞지만, 이후의 일을 아는 나는 그 평가가 기만임을 알았다.

"그리고 정말 미묘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았다."

"흠, 그런가?"

"결과적으로 모두 힘을 합쳐 소교주를 뒷받침해야 할 천가의 웃어른들이, 그놈들을 교주로 올려 후대의 권력을 탐하고자 한다는 거지."

이제 와서 돌이켜보는 거지만, 당시의 상황은 꽤나 미심쩍은 정황들이 많았다.

'아무리 천가의 내부 사정이 복잡하더라도, 그리 길게 끌릴 일은 아니었으니까.'

천가 내전.

소교주 천유라가 교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 겪었던 최대의 위기이자.

여러 내환으로 흔들리던 천마신교에 본격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천가의 방계 쪽과 연관이 있다?"

"그래. 아마도 천천히 작업해 소교주를 압박할 패들 중 하나로 쓸 생각일 거다."

"흐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뭐 그렇다 치지."

진여운은 여전히 무언가 의혹이 풀리지 않았는지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내가 진짜 궁금한 건 천가니 뭐니 하는 게 아니야."

"그럼?"

"형님이 왜 이런 하찮은 일에 그렇게까지 움직이냐는 거지."

움찔!

사실 앞으로 일이 커진다는 걸 아는 건 미래를 봤으니 알고 있을 뿐이지, 진여운의 입장에선 고작 '뒷골목'의 일일 뿐이었다.

아니, 설사 나중에 일이 커지더라도 진여운은 하등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진가의 후계가 신경 쓰기엔 녀석의 말마따나 너무나 하찮은 일이었으니까.

나는 살짝 헛기침하며 변명했다.

"내가 그래도 소교주와 좋은 인연을 맺기 위해 가문을 대표하는 건데, 그 소교주가 잘못되면 안 되잖냐?"

"그렇긴 한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 줄 이유는 없지 않나?"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여운이,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형님."

"왜?"

"혹시 소교주한테 반했어?"

"...."

한순간, 말문이 꽉 막혔다.

곧바로 부정해야 정상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거의 십여 초를 침묵한 이후에야, 나는 비웃음을 가장하며 입을 열 수 있었다.

"헛소리. 그저 좀 공을 들이는 것뿐이지 별다른 뜻은 없다."

"그래?"

"난 잠시 더 둘러볼 곳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라. 더 이상 흥미도 없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

그 말마따나 진여운은 이젠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따라온 계기 자체가 내가 어떻게 강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으니까.

진여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런 무공에 미쳐 조신한 맛도 없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꾸욱!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진여운이 움찔하며 내 눈치를 봤다.

"왜, 왜 그래?"

"응? 뭐가 말이냐?"

"뭔가 한 대 때릴 기세였는데...."

"형이 동생을 이유 없이 때릴 리가 없지 않겠느냐? 어서 돌아가기나 해라."

"뭐, 알았어."

진여운은 투덜거리며 진가로 돌아갔다.

귀찮은 진드기를 떼어낸 나는 살짝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털었다.

"자, 그럼 어디 본격적으로 파 볼까? 파인 구덩이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긴 하군."

***

하루가 지난 뒤, 사비연이 보낸 수하가 날 찾아왔다.

"진가의 도련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흑비(黑秘) 칠호라 불러 주십시오."

눈가 부분을 제외한 전신을 검은 천으로 도배하고, 등에는 칠(七)자가 새겨져 있는 녀석이었다.

'목소리가 가늘군.'

두툼한 외투에 목소리도 살짝 변조한 듯했지만, 내 안목을 피해 갈 순 없었다.

"그래 칠호, 만나서 반갑군."

"흑점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조사한 내용입니다. 여기."

칠호는 품속에서 두툼한 서류 더미를 내게 건넸다.

나는 그걸 받아 들며 이렇게 말했다.

"조사가 은루곡(隱褸谷)에서 막혔나?"

"헛!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긴, 척하면 착이지."

천마신교는 천가와 육가를 정점으로, 수백 수천에 달하는 중, 소규모의 가문과 유파가 존재했다.

뒷골목 역시 마찬가지. 흑시 같은 특수한 장소 정도나 육가가 직접 관리하지, 보통은 가신 가문이나 세력 간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해당 구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런 가문들조차 손을 뗀 진정한 무법지대가 있었으니.

그 이름을 은루곡이라 했다.

은밀하고 비루한 계곡.

"사 소저가 고개를 내저을 정도면 당연히 신교의 모든 성에 존재하는 뒷골목은 모두 뒤져 봤겠지."

"그, 그렇습니다."

"그러다 결국엔 돌고 돌아 은루곡으로 시선을 보낼 수밖에. 하지만 은루곡은 그 특성상 조사가 너무 힘들고 말이야."

은루곡은 뒷골목에서도 거부당한 인생의 밑바닥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은루곡의 구성원 대부분이 인생 2회 차만을 바라보는 쓰레기들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가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경쟁에서 패배해 정말 뒤가 없이 살아가는 자들.

죄를 짓고 가문이나 유파에서 추방당한 마인.

정파나 사파 측에서 보낸 첩자들까지.

"가지."

"...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호, 호랑이 굴에 들어가 봐야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뿐입니다만."

"...."

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는 놈에게,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차분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말을 사 소저께 빠짐없이 전해 주랴?"

"죄송합니다! 앞장서겠습니다!"

정보만 건네주러 왔다가 대번에 길잡이 노릇까지 하게 된 흑비 칠호는 울상을 지었다.

항의하고 싶어도 신분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해 봤자 택도 없다는 걸 자기도 알고 있으리라.

"분명 일반인이라면 되레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지. 하지만 우린 무인이다. 마공을 익힌 천마신교의 무사라면 호랑이 정도는 쉽게 때려잡아야지."

"저, 저는 전투원이 아닌데…."

"시끄럽고."

나는 흑비 칠호를 억지로 끌고나왔다.

'음, 근데 뭐지?'

뭔가, 피부가 간질거린다.

그렇다고 피부병이라는 건 아니고, 엄청나게 예리해진 감각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날 지켜보고 있나?'

지금 이곳은 진가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

'지금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건 가문 쪽인데?'

가주가 별도로 감시인을 파견했다고 생각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뭔가 기척이 익숙하단 말이야?'

아직 내 수준은 이류에 불과했지만, 전전생의 수준을 끌어온 만큼 감각만큼은 절대고수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이 판단이 틀린 건 아닐 거다.

'뭐, 적의는 없으니 상관없겠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의문을 털어냈다.

"가지."

"넵!"

나와 흑비 칠호는 그대로 은루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나타났다.

애초에 날카로운 얼굴이 찌푸려지자 숫제 살기마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소교주 천유라는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본녀가 대체 왜…."

그녀의 한숨에 주변에 있던 호위가 전음을 보내 왔다.

-소교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쫓아간다."

그녀의 단호한 선택에 호위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건 소교주님께서 굳이 신경 쓰실 일은….

"비연은 이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나중에 큰일로 번질 것이라 조언했지."

-....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났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남자는 그걸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진여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량으로 이름이 높은 자였습니다.

"하! 술과 향락에 빠진 자가 내 검을 막아 낼 수 있다고 보느냐?"

호위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소교주의 그 검을 막아 낼 수 있는 건 이립 근처의 무인 중에서도 찾기가 힘들었다.

"단순한 흥미다. 아버님께서도 요즘 수련이 너무 과하다고 휴식을 취하라 하셨으니, 그 녀석이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하는지 한번 지켜보자꾸나."

-하나 은루곡은 너무 위험합니다. 증원을 요청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위의 말에 천유라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증원? 그런 쓰레기들이 감히 본녀를 어찌하리라 보느냐?"

-하오나!

"시끄럽다. 닥치고 따라와라."

호위는 당황했다.

최고의 재능과 최고의 노력이 합쳐져 지금까지 적수가 없었던 그녀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슷한 항렬에서였을 뿐.

소마각이란 요람에서 수련에만 열중했던 그녀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철부지였다.

자존심이 강하고 제멋대로인 그녀에게 여기서 증원을 요청한다고 밀어붙이면, 되레 칼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제길,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야겠군.'

***

은루곡.

천마신교 남쪽 최외곽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본성에서 수십 리나 떨어져 있음에도 나름 2천여 명이 넘는 숫자를 자랑하는 인구 밀집 지대였다.

문제는 이 인구 대부분이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젠장, 벌써부터 냄새가 진동하는군."

나는 은루곡의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지린내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곳곳에 깔린 더러운 돗자리 위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들 대부분이 여러 사정으로 팔다리 중 어느 한쪽이 결여된 자들뿐이었다.

문자 그대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낙오자들.

그들을 흘겨본 흑비 칠호가 내게 물었다.

"정말로 이런 곳에서 정보를 얻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살짝 혀를 찼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넌 현장에서 직접 뛰는 정보원이 아니군."

정곡이 찔렸는지 흑비 칠호가 입을 다물었다.

"잘 지켜보라고. 이런 곳에서도… 아니 이런 곳이니까 더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13화 은루곡 (1)

나는 거침없이 은루곡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워낙 자신 있는 발걸음이라 뒤따르던 칠호는 내게 뭔가 계획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세상사 살면서 느낀 불멸의 진리 하나가 있지."

"불멸의 진리? 그게 무엇입니까?"

"사람이 이렇게나 모여 있으면, 상황이 어떻든 무조건 계급이 생긴다는 거."

일반적인 사회에서 귀족, 평민, 천민이 갈리듯, 그 계급 사이에서도 또 귀족, 평민, 천민이 갈린다.

"얼핏 보면 평등하게 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도 엄연히 강자존을 원칙으로 하는 천마신교의 일부야."

안쪽으로 향하자 서서히 집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놈들은 입구 쪽 판자촌에 있던 것들과는 때깔부터 다른 티가 났다.

"저들은…."

"이 지옥 같은 생존 경쟁에서 나름 승리한 것들이지. 하지만 저놈들도 '귀족'은 아니야."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산에 올라가 사냥이나 채집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름 무공을 익혔거나.

뭔가 살아남을 재주가 있어 살아남은 자들이었지만, 내가 보고자 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더 들어가 보자고."

은루곡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주변에 저런 집촌이 여러 개 존재하고 있으며, 저 안쪽으로 가야 내가 원하는 '정보원'들이 등장한다.

칠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괘, 괜찮겠습니까, 공자? 아무래도 여기서 더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나는 그런 녀석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명색이 사가의 정보원이라는 녀석이 말이야."

"크, 크흠!"

"오히려 우리 같은 놈들에겐 이런 곳에서 서성거리는 것보단 안으로 들어갈수록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지지."

녀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째서입니까?"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은 잃을 게 없는 것들뿐이지만, 저 안쪽에 있는 놈들은 잃을 게 많은 놈들이거든."

"아!"

흑비 칠호는 내 말뜻을 알아듣곤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니 가자고. 시간 아까우니."

나는 휘적휘적 걸으며 계곡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내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건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대체 누구야, 이거?'

아까부터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뒤에서 칠호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가 경계하고 있는 건 녀석이 아니다.

악의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선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호기심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젠장, 어떤 관음증 환자인지는 몰라도 안쪽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면 가만두지 않겠다.'

나는 입술을 뒤틀며 속으로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욕했다.

***

은루곡의 안쪽으로 갈수록 주변에서 느껴지는 급격히 인기척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명백하게 '기(氣)'를 품은 무인들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뭔가 식물들이 많군요. 누군가가 재배 중인 걸까요?"

계곡 안쪽엔 사람이 거의 없는 대신 사람의 손이 가 있는 논이나 밭들이 많이 보였다.

"그렇겠지."

"후후, 나름 운치가 있군요."

칠호는 이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비록 본성에서 밀려났지만 이런 식으로 식물을 재배하면서 마음의 양식을 얻는 것이겠죠."

나는 그런 칠호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칠호가 막 논밭의 식물들을 만져 보려는 찰나.

"그거, 환살초(幻殺草)인데...."

내가 그녀를 제지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움찔!

환살초는 영초의 일종이지만 맹독을 머금은 독초로 절대 맨손으로 집어선 안 되는 놈이었다.

"자세히 보니 독수화(毒輸花)도 있군."

칠호의 발이 대번에 밭에서 멀어졌다.

방금은 맨손으로 붉은사슴뿔버섯을 집으려는 짓과 대충 유사했다.

"대, 대체 이곳은!?"

"비밀 재배지겠지. 이게 흑점혈의 원재료는 아니겠지만."

칠호는 뭔가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확실히 저 녀석은 겉모습과는 달리 현장직이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어릴지도 모르겠군. 사비연 그 여자는 왜 저런 녀석을 내게 보냈지?'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그녀의 역할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 그녀를 이곳까지 끌고 온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젠장, 실수했군. 저런 정보원이면 무공도 별 볼 일 없을 텐데.'

내가 녀석을 향해 뭐라 말을 하려 했을 때.

"어이, 거기 애새끼들?"

저 안쪽에서 껄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칼이나 몽둥이를 든 다섯 명의 장한이 나타났다.

얼굴에 긴 자상이 인상적인 장한이 이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잘 차려입은 어린놈이 나타났다고 보고를 들었는데,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게 우연은 아닐 테고."

"그렇지."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나는 말없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운데 저놈을 빼면 나머진 그냥 파락호들이군.'

아무래도 이 은루곡의 지배자들을 대신해 이 밭을 일구는 일꾼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건 안 되겠는데? 난 너희들 윗대가리를 만나러 온 거거든."

"허!"

장한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본성의 귀족 나리인 것 같아 얌전히 돌려보내려고 했더니,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그리고는 똘마니 네 명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적당히 팔 한쪽 부러뜨려!"

"네, 큰형님!"

놈들이 매끈한 몽둥이를 들이대며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에 칠호가 대번에 뒷걸음질을 쳤다.

"전 경공 특화인지라."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다가오던 놈들의 발이 빨라졌다.

"조져!"

"뒈져!"

"내가 정말 뒈지면 니들이 곤란해질 텐데?"

생각 없이 욕을 내뱉는 놈들에게 한번 일갈해 주곤, 나도 자리를 박차며 응수했다.

솔직히 무공만으로 보면 저놈들은 삼류조차 들지 못한 쓰레기들이다.

그저 팔다리가 잘 붙어 있고 체격이 건장하니 일꾼으로 쓰는 것일 뿐.

단순 무공으로 보면 저놈들보다 강한 자는 입구 쪽에 널브러진 마약 중독자 중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흐아아압!"

가장 먼저 달려든 놈이 양손으로 쥔 몽둥이를 어깨 쪽으로 거칠게 휘둘렀다.

명색이 성인 장정이 휘두르는 만큼, 직격당하면 팔이나 어깨뼈에 금이 좀 가겠지만....

'한숨이 나올 정도군.'

나는 가볍게 보법을 밟으며 놈의 공격을 피하곤 대번에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아아악!"

"이런 병신 같은 놈이!"

순식간에 무력화된 녀석을 향해 욕을 내뱉은 세 명이, 이번엔 한 번에 달려들었다.

"너흰 다를 줄 아나 보지?"

내공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감각과 함께 깨어난 안력은 마치 미래시처럼 상대의 궤적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었다.

세 방향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상체를 흔드는 것만으로 피한 뒤.

그대로 놈들의 정강이를 한 번씩 가볍게 건드려 주면 끝.

"아이코!"

"아악!"

"끄어억!"

그대로 나자빠진 네 명의 모습을 보며, 중앙에 있던 장한이 침음을 흘렸다.

"...고수였군."

"그래서? 이제 안내해 줄 마음이 좀 생겼나?"

"후우!"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강자라 여겼는지 장한은 빠르게 포기하며 두 손을 들었다.

"따라오시오. 노군(老君) 분들께 안내해 드리겠소."

피식!

'노군이라, 칭호 한번 거창하군.'

그렇게 나와 칠호는 장한의 안내를 따라 은루곡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

은루곡의 가장 안쪽. 빛이 잘 들지 않는 음지.

그곳에는 나름 괜찮게 지어진 장원 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나는 그 장원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나름 괜찮군. 이곳에서 이 정도면 사실상 황제급의 사치인걸?'

하긴 그렇게 비싼 금지품들을 팔아 재끼니 은루곡에 있다 하더라도 금전적인 부분에서 곤란을 느끼긴 힘들 거다.

그 장원의 안쪽에서 외팔이 노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별일이구나, 마강아. 네가 손님을 데려오다니."

왜 쫓아내지 않고 데려왔냐는 은근한 질책이었다.

마강이라 불린 장한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삼노군(三老君)."

"됐다. 네가 감당하지 못했으니 데려왔겠지."

그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지랄도 풍년이군.'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꼽을 주고 자기 체면을 세운 뒤에 위로하는 꼴이라니.

'그래도 나름 수준은 있군. 거의 일류 턱걸이는 되겠는데?'

팔 하나를 잃지만 않았어도 본성에서 나름 대접받으며 노후를 보낼 수 있을 수준이었다.

삼노군이라 불린 노인이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육가의 귀인을 뵙소."

"헉!"

마강이 헛숨을 삼켰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육가라고?"

"그렇소."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게 아니라면 약관도 안 된 애송이가 이렇게 자살하러 올 리가 없으니까."

"자신만만하군. 그럴 실력은 되나?"

살짝 비아냥거렸을 뿐인데, 대번에 상대의 표정에 노기가 솟아올랐다.

"내 비록 한 팔을 잃고 이곳까지 굴러떨어진 몸이지만, 후기지수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몰락하진 않았다네."

"몰락하지 않긴. 장법을 수련한 자가 팔 한 짝을 잃었는데 그 정도면 완벽히 몰락한 거지."

내공이야 일류 언저리쯤 되겠지만, 저러면 어지간한 이류와 정면으로 붙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하다못해 무기술을 수련했다면 모를까.

"그, 그걸 어떻게?!"

"그냥 보이는 데 그렇게 놀라면 쓰나?"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날 육가 소속이라고 했으니 정확히 육가 어디인지 맞혀 보시지? 정답을 맞힌다면 나름 당신을 인정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후사하도록 하지."

"...크흠!"

후사라는 말에 삼노군의 표정이 일변했다.

정말 내가 육가 출신이라면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고, 맞출 수 있다면 그 보상은 절대로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한참을 고민하던 삼노군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은영소가가 아니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냐니… 우리의 납품처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최종적으론 환가(幻家)가 있소. 환가와 소가는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저놈들의 뒤에 환가가 있었다고?'

이건 내총관 시절에도 몰랐던 내용이라 나름 기분이 흐뭇했다.

경천환가(驚天幻家).

신마육가 중 하나로 환술과 진법에 특화된 가문으로 그 특성상 여러 금지품이 사용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가문이었다.

물론 대놓고 수급하면 아무래도 눈치가 많이 보일 테니 이렇게 뒤꽁무니로 야금야금 모으고 있었나?

"나름 추리력은 있군."

"그렇다면?"

"아쉽지만 틀렸어."

"트, 틀렸다고?"

소가를 지목한 것에서 보면 어느 정도 안목은 있다. 마가의 직계들은 무조건 그 복장이 고정되어 있고, 패가는 거대한 도를 들고 다닌다.

진가는 진여운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일가 하나하나가 덩치가 무지막지하니 후보에서 제외했겠지.

남은 건 사가, 소가, 환가일 텐데 환가는 자기들 상사니까 제외. 사가와 소가 중 소가를 택한 건 사가의 자제들은 기본적으로 복장이 수수하지 않고 화려해서 일 것이다.

"내 이름은 진여명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는지, 삼노군이 눈을 부릅뜨며 날 향해 손가락질했다.

"마, 마천진가? 그것도 대공자!?"

저들에게 있어선 황족이 빈민가에 놀러 온 꼴이었다.

내게 몽둥이를 들이대었던 놈들의 표정이 대번에 샛노래지며 그대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칠호가 다급하게 전음을 보내왔다.

-자, 잠깐만요! 이렇게 정체를 밝혀도 되는 겁니까?

-뭐 어때? 저놈들을 이용할 생각인데 정체 정도야.

-만약 저들이 흑점혈의 공급책이라면요?

-상관없어. 그냥 가문의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야.

수년 뒤 흑점혈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만연했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충분히 눌러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애당초 내 생각엔 저들은 범인이 아니었다.

"지, 진가의 귀공자께서 이런 곳엔 어인 일이신지."

삼노군의 말투와 표정이 대번에 공손하게 뒤바뀌었다.

"흑점혈."

움찔!

"그 약의 출처가 이곳인 것 같은데, 알고 있는 거 있지?"

"그, 그것이...."

"입이 무거운 것 같은데 내가 조금 가볍게 해 줄까?"

"자, 잠깐!"

삼노군이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 삼노군을 고문하고자 해도, 그는 절대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천마신교에서 육가의 직계란 그 정도의 위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고문 대신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삼노군에게 던졌다.

"받아라."

"이, 이것은?"

삼노군은 주머니를 받는 순간, 묵직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번쩍번쩍한 금자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꿀꺽!

삼노군이 침을 삼켰다.

아무리 일류고수니 뭐니 하지만 이런 곳에 박혀 있는 이상 이런 거액을 만져 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저기...."

삼노군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크, 큰일 났다, 삼노군! 침입자다!"

저 바깥에서, 이번엔 한 다리가 없는 외다리 노인이 장원 내로 들이닥쳤다.

"이, 이노군?"

이(二)노군이라 불린 외다리 노인이 금화 주머니를 든 삼노군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보통 고수가 아니야! 너도 당장 합류하러 와라!"

장내에 있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걸 보니, 정말로 다급한 상황인 듯 보였다.

그런데.

"응?"

"침입자?"

나와 칠호는 물론, 삼노군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호가 눈을 깜빡하며 말했다.

"침입자는 우린데?"

14화 은루곡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