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4

14화 은루곡 (2)

"너, 오기 전에 따로 데려온 전력이라도 있냐?"

칠호가 내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흑비들이 있긴 한데, 제 말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텐데요?"

"그럼 뭐야? 내 호위도 움직인 놈들이 없는데."

우리는 일단 그 침입자가 누구인지 확인기로 했다. 혹시 모를 오해는 풀어야 했으니까.

***

천유라는 진여명을 몰래 추적했다.

사실 누군가를 추적한다는 건 천유라에게 있어서 상당히 신선하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대로 가면 본교의 영역을 벗어나겠군."

그녀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경공의 속도를 올리던 찰나.

-소교주님,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들킬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

호위는 조마조마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천유라가 드물게 들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차마 돌아가자고는 못 하고 있지만, 가끔 이렇게 가슴이 철렁일 만한 일이 벌어지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때, 호위의 부담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일이 생겼다.

천유라가 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사가의 흑비들이구나."

저 앞에서 은신술을 펼치며 나아가는 흑색의 복면인들.

당장 보이는 수는 약 십여 명. 아마 저 앞에 더 있을 것이다.

호위는 속으로 안도했다.

저 흑비들이라면 최악의 경우 시간 벌이 정도는 되어 줄 것이다.

-사비연 공녀가 진여명 공자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듯합니다.

"그래?"

그녀의 눈에 작은 의혹이 일었다.

"일단은 계속 가 보지."

그녀는 답변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위는 그런 그녀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의 이동 경로가 점차 천마신교의 외곽 쪽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이라면 자신을 비롯한 호법원의 고수 셋이 어떻게든 천유라를 지켜 낼 수 있겠지만, 여기서 더 밖으로 빠졌다간 무슨 변수가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추격은 거대한 골짜기 사이에 있는 촌락을 발견하고야 끝이 났다.

"암영(暗影), 저기가 어디냐?"

호위, 암영이 답했다.

-저곳은… 은루곡이라 합니다.

"은루곡? 처음 듣는데? 뭐 하는 곳이지?"

-소교주님. 저곳은 위험합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난 저기가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싸늘한 그녀의 말에 암영이 식은땀을 흘렸다.

-저곳은....

은루곡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그녀의 귓가에 들어갔다.

대번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처구니가 없군. 본교는 왜 저런 곳을 내버려 두는 거지?"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대표적인 이유로는 본보기입니다.

현명한 그녀는 암영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본보기라,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군."

-또한 은루곡 안쪽엔 환가가 진법에 활용하기 위한 금지 약재들을 비밀리에 재배 중이며, 마지막으로 중원에서 흘러온 간자들을 솎아내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간자?"

-신교의 방비와 보안은 단단합니다. 다만 세상일에 절대란 없어서 언젠간 뚫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일부러 빈틈을 보여 솎아내자는 거죠.

"...."

-즉, 은루곡은 본교의 세력권이면서도 여러 세력이 뒤섞인 진정한 무법지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렇게 판단했다는 건가?"

-소, 소교주님?

"놈을 추격한다."

-소교주님!

"진여명 그놈은 저 은루곡이란 곳이 어떠한 곳인지 알고 들어갔을 거다."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몰랐다면 모르되, 알았다면 놈 혼자 위험에 빠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렇다고 소교주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암영, 아버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유라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적이 많은 만큼, 나를 위해 움직여 주는 자들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

암영은 그 말에 감격했다.

이렇게까지 자기 사람을 챙겨 주는 주인이라니!

이기적이고 자신만 챙기는 놈들이 즐비한 천마신교에서, 이런 상급자는 정말로 드물었다.

"그리고."

하나, 암영의 그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밌어 보이지 않느냐?"

-...네?

"은거기인이란 게 존재한다면 저런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군."

-아, 아니 그....

은거기인이라면 되레 천가의 전대 원로나 육가 쪽 전대 고수들을 찾아가면 쉽게 만나 볼 수 있지 않나?

"가자, 암영."

-소, 소교주님!

그런 생각을 채 내뱉기도 전에, 천유라가 은루곡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감동에 벅찬 암영의 가슴이 다시 가라앉기까진 십여 초도 걸리지 않았다.

***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래서, 바깥에서 저 깽판을 치셨단 말입니까?"

사망자 십여 명에 부상자는 그 배.

이건 아무리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은루곡에서도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

천유라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걸어온 시비는 피하지 않는다."

"그러시겠죠."

대체 왜 이 아가씨가 여기에 있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나를 지켜보던 시선의 주인은 이 아가씨였군.'

대체 뭔 이유로 이쪽을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등장으로 계획이 상당히 어그러졌다.

천유라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짱을 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더군. 진여명 네놈은 아무런 제지 없이 안쪽으로 들어가던데, 왜 나는 앞을 막아서는 놈들이 계속 나타나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느 부분에서 당연한 거지?"

"그야...."

나는 그대로 답하려다가 어딘가에 생각이 미처 입을 다물었다.

천유라는 눈매가 조금 날카롭긴 해도 객관적으로도 엄청난 미인.

여자에 굶주린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면사도 제대로 쓰지 않고 활보하면 시비가 걸리는 건 그냥 필연이다.

'이걸 그대로 말했다간 돌아오는 반응은 뻔하겠군.'

나는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말을 최대한 돌렸다.

"시비를 피하지 않으니 더 큰 시비가 걸리는 겁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알게 모르게 안면이 있죠."

"으음...."

그 말을 납득했는지 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해했다."

명확한 근거를 대면 그나마 설득이 가능한 게 그녀의 장점 중 하나였다.

"나름 기대했는데 은거기인급의 고수는 없더군."

은거기인?

그녀가 왜 갑자기 은거기인을 찾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말에 성실히 답해 주었다.

"그렇겠죠. 정말 고수라면 이런 곳에서 대놓고 자신을 드러낼 리가 없으니까요."

"음, 그런 건가?"

"그런 겁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렇게 깽판을 친 이상, 이미 골짜기 내에 스며든 간자들이 그녀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다.

'면사를 씌워야 하나? 아니, 써도 문제겠어.'

면사를 써도 타고난 귀티를 숨기긴 어려우니, 이곳에 온 순간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칠호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봐, 뭔가 방법은 없나?'

'그, 글쎄요?'

칠호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인지 천유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나보다 저 녀석이 더 당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말은 결국.

'여기서 계속 조사하는 건 글렀군.'

저들에게 원하는 정보만 빠르게 얻고 빠져야 할 것 같다.

내 시선이 뒤로 향했다.

"일노군이라 했나?"

"예, 예! 그렇습니다!"

그곳에는 지긋하지만 간사해 보이는 노인이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인 좌우로 아까 보았던 이노군과 삼노군 역시 엎어져 있었다.

깽판을 친 당사자가 본교의 소교주인데, 그걸 알았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하나뿐이다. 흑점혈에 대한 모든 것."

"흐, 흑점혈, 말씀이십니까?"

"그래. 혹시 그 원재료를 이곳에서 재배하고 있나?"

일단 밭에서 흑점혈의 원료는 보지 못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일부러 표정을 깔며 추궁했다.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워낙 의외의 말씀인지라."

내 신분도 만만찮은 건 아니어서 일노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흑점혈, 흑점혈이라...."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흑점혈은 외부에서 들여오는 품목입니다. 유통의 시작이 이곳 은루곡인 건 맞습니다만, 저희는 그걸 다루지 않습니다."

"너희가 취급하는 게 아니라고?"

"네, 저희 삼노가 이곳에서 우두머리급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환가의 덕입니다. 저희가 만드는 모든 약은 환가로 들어가지, 화류계나 뒷골목으로 들어가진 않습니다."

"일리는 있군."

일노군이라고 해 봤자 무공은 다른 두 명과 큰 차이가 없었다.

확실히 뒷배 없이 고작 일류 언저리 수준으로는 수천 명이 살아가는 이 은루곡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흑점혈이 외부 어디에서 들여오는지 알고 있나?"

일노군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곳을 거치는 물품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

"시, 시간을 주시면 바로 알아 오겠습니다!"

일노군은 내가 분노해서 말이 없어졌다고 여겼는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나는 그걸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 더군다나 신교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물품들인데 저들이 출처를 알지도 못한다라.'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진다.

'본교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지.'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여기서부터 역으로 파고 올라간다면, 그 반천회(反天會)라는 놈들의 꼬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삼노군에게 선수금을 준 게 있지."

그 선수금이란 삼노군이 지금도 소중하게 들고 있는 금화 자루를 말함이었다.

"한 달 내로 출처를 알아 온다면 그만한 금화 자루를 다섯 개 더 주겠다."

"...헉!"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

그것도 전부 금화!

아무리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세 명이라지만, 이 정도 금액은 절대 쉽게 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일을 때려치우더라도 셋의 노후 자금으로는 손색이 없을 수준!

"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동원해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세 명의 눈엔 어느새 충성심이 가득 차 있었다.

"좋아, 그건 그렇고… 흑점혈의 출처는 알 수 없어도 그것들이 어디서 모여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겠지?"

놈들이 병신도 아니고 그냥 약을 뿌리면 알아서 퍼지리라 믿는 건 허황된 생각이었다.

'분명 1차 유통망과 연락책이 있다.'

"아,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어디지?"

"구류성(久留城)에 자리 잡은 하급 유파인 패랑파(狽狼派)입니다. 이곳으로 유입된 흑점혈은 전부 그쪽을 거쳐 음지에 일차적으로 배포됩니다."

"꽤 잘 알고 있군?"

"사실 흑점혈의 공급가가 워낙 저렴하다 보니… 저희가 사업 확장을 위해 유통망을 파 보다가… 헤헤!"

"...."

이렇게까지 자세히 아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단순히 알아본 정도가 아니라 그 패랑파라는 놈들과 접촉해 본 게 확실하다.

'설마 이놈들이?'

일노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삐딱해졌다.

아마 이대로 가만히 놔뒀다면 저놈들이 본격적으로 흑점혈을 다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교의 음지에 흑점혈이 퍼지는 속도는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즉, 전생에 신교가 약으로 신음하던 원인 중 하나가 이놈들이라는 뜻.

"감히."

천유라 역시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히이익!"

"소교주님. 진정하시지요."

내가 다급하게 천유라를 말렸다. 그녀가 눈에 귀화를 내뿜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본교에 약 따위를 퍼트리는 놈들을 앞에 두고 진정하라고?"

"아직 실행한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섣불리 이놈들의 목을 치게 되면 환가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쓰레기들을 벤다고 환가 놈들이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당장 저들의 목을 치고 싶어 눈을 부라리는 그녀를 말리느라 한껏 진을 쏟았다.

"저들이 납품하는 건 어디까지나 환가. 저들은 어디까지나 환가의 하수인들입니다. 목을 쳐야 할 쓰레기들은 따로 있습니다."

"...."

"그리고 저들이 일을 해 줘야 흑점혈의 출처와 다른 쓰레기들의 소재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있고 나서야 천유라의 살기가 천천히 거두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조금만 참으시지요."

나는 다급히 삼노군들에게 지시를 마무리하고 본성에 복귀할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우리가 곧바로 본성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뭐야 이것들은?"

노군들의 거처를 나오자마자 튀어나온 수십 명의 복면인.

그들이 보이는 적의는 절대로 아군이 아니었다.

15화 은루곡 (3)

정도맹 은첩대(隱諜隊)는 대 천마신교 전선에서 활약하는 방첩부대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관상(關商)이 속한 십칠조는 감숙성 전역에 영역을 펼친 은첩대 중에서도, 천마신교의 영역에 가장 가까이 있는 최전선에 선 자들이었다.

'이, 이건 반드시 보고해야 해!'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은루곡이지만, 십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한 번에 목이 달아난 일은 절대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나 그 흉수가 이 은루곡에서 볼 수 없는 아리따운 여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베어 낸 시체들 사이에서 도도하게 서 있는 여인을 본 관상은 확신했다.

'틀림없다. 소교주다! 소교주 천유라!'

천마신교에 검을 든 여고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젊다 못해 어린 티가 나는 인물은 오직 한 명뿐.

'반로환동한 마녀는 아니야. 초상화도 얼추 일치해. 그럼 호위는?'

주변에 있는 호위는 바로 옆에서 그녀를 말리는 검은 복면인 한 명뿐.

물론 관상의 안목으로는 다른 호위가 숨어 있어도 알 수 없었지만 관상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런 대낮에 은잠술을 펼친다 해도 많은 수가 숨어 있을 수는 없다!'

관상은 이 사실을 확신하고는 망설임 없이 상관을 찾아갔다.

"흐아암, 뭐냐 관상. 이 대낮부터."

나무 그늘 안 돗자리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한 뚱보가 관상을 반겼다.

곳곳이 찢겨 나간 더럽고 허름한 옷에, 배를 벅벅 긁고 있는 나태의 극치.

관상의 상관은 거지였다.

관상이 그를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보고를 올렸다.

"소교주가 나타났습니다."

"...너 대낮부터 술 마셨냐?"

상관의 떨떠름한 반응에 관상이 버럭 성을 내었다.

"아니, 조장님! 제가 그럴 인간입니까?!"

"음, 생각해 보니 술 마시고 사고를 친 적은 없군."

개방의 사결개이자 십칠조의 조장인 견명개는 비스듬했던 자세를 고쳐 잡으며 관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소교주가 왜 이런 곳에 나타났지?"

"그건, 저도 모르죠."

"...."

견명개가 슬그머니 타구봉을 향해 손을 내민 순간.

관상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걸 제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본성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본 것만으로도 칭찬해 주셔야 하는 부분 아닙니까, 이거!"

관상의 말이 가히 틀린 부분이 없어 견명개는 뻗은 손을 슬그머니 다시 회수했다.

"크흠!"

"헉, 헉! 아니, 좀...."

관상은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이 빌어먹을 상관은 개방 출신이라서 그런지 무공이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은첩대를 전전하며 여러 조장들을 만나 왔지만, 저 견명개보다 강한 조장을 본 적은 없었다.

견명개가 진지하게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

"아, 그러니까."

관상은 자신이 본 것들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일단 자신이 본 것을 가감 없이 그대로 설명한 뒤에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에 대한 주관적인 근거를 덧붙였다.

"시비를 거는 장정 열 명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그것도 독와파(毒蛙派) 놈들을?"

"네, 그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일류고수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견명개는 말끝을 흐렸다.

'독와파 놈들이 아무리 삼류 쓰레기들이라고 해도, 하나하나가 일반 성인 장정보단 훨씬 강한 건 사실.'

사실 검에 경력을 담을 수 있는 수준만 올라와도 열 명을 베어 넘기는 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일정 수준 이상의 근력이 받쳐 줘야 가능하지, 상대가 성인도 안 된 여자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 놈들을 일격에 베어 버리려면 이류 정도로는 절대 불가능하지.'

전신에 기를 순환시켜 육체 전체를 강화하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 수준이 바로 일반 세계에서는 공포라 일컬어지는 일류고수의 상징.

"그 말이 맞는다면 소교주가 꼭 아니더라도 육가의 중요 인물은 될 것 같군."

"그렇죠?!"

"짜식, 한 건 했구먼. 잘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정보는 꽤 비싸게 팔릴 것 같은데요?"

은첩대가 정도맹 산하 조직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정보를 팔아 자금을 충당하는 건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건 지금부터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애들 데리고 뒤로 빠져 있어."

"네에에?!"

"네 공을 내가 홀라당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새끼야. 포상금은 두둑이 챙겨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조장."

관상은 시무룩해하며 물러갔다. 그래도 조장인 견명개가 약속을 어기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관상이 완전히 사라진 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등신 같은 놈이."

견명개의 눈이 스산해졌다.

"잡아야지."

그의 눈에서, 방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디 보자. 소교주 년을 제외하고 육가 출신 중에서 그 정도의 무위를 가진 년이 누가 더 있더라?"

겉으로 위장했다고 해도 명색이 천마신교에 잠입한 방첩 조직의 조장이다.

대번에 그의 뇌리에 후보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소가의 소소유, 사가의 사비연, 패가의 쌍둥이 정도던가? 설마 우리가 지금 노리고 있는 '그년'은 아니겠고."

한 명이라 했으니 패가의 쌍둥이는 아니다.

결국엔 소교주를 포함해 세 명 중 하나일 것이다.

"크흐흐, 누가 됐든 상관없겠지. 그들에게 빈틈이 생겨날수록,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지분은 더더욱 늘어날 테니."

결정을 내린 견명개는 주변에서 대기하던 인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자신의 수하들인 은첩 십칠조가 아니었다.

'윗선'에서 흑점혈 공급에 이상이 생겼을 때 해결하라고 직접 내려 준 살귀들.

전원이 초일류의 살수만으로 구성된 살명대(殺命隊)라는 집단이었다.

***

인적이 아예 없는 은루곡의 최심부.

삼노군들의 거처에 가면을 쓴 괴한들이 나타났다.

"이거 대박이군. 녀석의 말이 사실일 줄이야."

씨익!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견명개가 앞으로 나섰다.

"미안하지만 포로가 되어 주셔야겠소, 소교주."

"네놈들은 누구냐?"

"알 것 없소이다. 그냥 순순히 잡혀 주면 되는 일일 뿐."

서로 간의 전력 차는 명확하다. 적어도 견명개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화를 거부한 견명개의 모습에 소교주는 이번엔 이쪽을 쳐다보았다.

"진여명, 어떻게 생각하나?"

"음...."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괴한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설마하니 벌써 꼬리를 잡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요?"

"꼬리라고?"

"설마하니, 저들이 정파의 특작대 같은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훗!"

나름 내 말을 농으로 여겼는지 천유라가 작게 실소했다.

확실히 저렇게 흉흉한 살기를 흘리는 놈들을 정파라 생각하기엔 무리가 꽤 있었다.

"그래도 저놈은 딱 봐도 개방의 거지 같다만."

"그러니 저놈은 살려둬야죠. 캐낼 게 많아 보이는데."

"으, 으윽!"

삼노군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로선 적들 하나하나가 자신들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강자들이었으니까.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으로선 사로잡기는커녕 목숨 걱정을 해야 할 판이로군요."

소교주에게도 호위가 붙어 있을 테고, 흑비들도 몇 있으니 아마 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정면으로 붙는다면 피해가 막심할 터.

'특히 저 거지 옆에 붙어 있는 도끼 든 놈, 확실한 절정고수다. 저놈만큼은 확실히 위험해.'

자신들이 은루곡에 온 지 고작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고작 그사이에 저만한 전력을 모아 왔을 정도라면 신교 내부에 숨어 있는 놈들의 전력은 정말 엄청날 게 분명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스릉!

천유라가 본격적으로 칼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내 옆쪽을 향해 말했다.

"비연, 날 도와라."

"네, 소교주님."

흑비 칠호가 공손히 대답하며 앞으로 나선다.

"...응?"

아니, 잠깐?

"지금, 뭐라고?"

나는 복면을 벗어 던지는 칠호를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푼수처럼 보이던 칠호는 어디로 사라지고, 제 주인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비연이 나타났다.

그녀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자."

"아, 아니. 지금 뭔...."

여자인 건 어떻게 알아차렸는데 그 정체가 사비연이었다고?!

내가 뭐라고 따질 새도 없이 사비연이 뒤쪽을 향해 외쳤다.

"흑비들은 진 공자를 보호하라!"

"네, 아가씨."

스스슥!

십여 명에 달하는 사가의 흑비들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그 모습을 본 천유라가 주변을 향해 외쳤다.

"암영, 호영, 권영. 너희들은 날 보조해라."

"네, 소교주님."

천유라의 주위로 세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아마 저들은 상시 그녀를 호위하는 호법원의 고수들일 것이다.

삽시간에 숫자는 이십 대 오.

네 명이 추가로 합류했지만 견명개는 전혀 쫄지 않았다.

"귀여운 반항이군."

견명개가 천유라를 향해 이죽거렸다.

"호법원 소속이라고 해 봤자 교주가 아닌 소교주의 호위는 고작해야 절정에 못 미치는 수준. 하지만 이쪽에는 무려 절정에 이른 고수가 있지."

천유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본교의 상황에 꽤 잘 알고 있구나."

"흐흐흐, 잘 알 수밖에. 특히 천가의 일은 더더욱."

꿈틀!

'천가의 일'이란 말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아무래도 본가의 밑바닥에 바퀴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구나. 대대적인 박멸이 필요하겠어."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있군, 소교주."

"하, 아하하! 헛된 희망이라고?"

천유라가 웃기 시작했다.

광기가 얼핏 엿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저건 저 나이대의 여인이 보일 표정이 아니었다.

"잘 들어라, 벌레들아."

화악!

그리고, 천유라의 검에 찬란한 검은 빛의 기운이 맺혔다.

"저, 저건?!"

검기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밝고, 검사라고 보기에도 더더욱 강렬하다.

그 순간, 견명개의 옆에 있던 우두머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쳐라!"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살수들이 지체 없이 천유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천유라가 싸늘하게 웃었다.

"너희는 단 한 놈도 살아서 십만대산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

그렇게 약 이 각이 지난 뒤.

'사, 살벌하군.'

나는 주변에 늘어선 적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십 대 오.

그 격돌의 결과는 놀랍게도 천유라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 이럴 수가."

적들의 우두머리 놈이 잘려 나간 팔 한쪽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절규했다.

"소, 소교주의 무위가 이 정도라고는 절대 들어 본 적이 없다!"

"당연하겠지."

그녀가 벌레를 보는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본녀는 천가의 그 누구에게도 제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느니라."

"...!!"

"오로지 아버님과 비연. 그리고… 저 녀석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저 녀석'이란 말에서 아주 잠깐 날 흘겨보았다.

꿀꺽!

'전에 나와 싸웠을 땐 정말 엄청나게 봐준 거였군.'

계속해서 몰아붙이다가 빡쳐서 전력을 다했던 것 같았는데… 솔직히 그때 교주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난 무조건 죽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 대단하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전투의 결과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같은 일류고수라고 해도 다 같은 일류가 아니다.

천유라를 호위하는 이들은 차후 교주가 될 그녀와 호흡을 맞추고 교감하기 위해 특별히 발탁한 차세대의 젊은 재능들.

강력한 마공과 심법을 익히는 건 물론, 선배 호법들에게 단련 받으며 철저하게 자격을 입증한 자들이다.

같은 일류급이라고 해도 그 차이는 절대적.

하지만 더 대단한 건 그런 호법원의 고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활약을 보인 천유라였다.

그녀는 상대 일류고수 다섯과 절정고수인 수장을 제압하고도 털끝만 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투의 천재!

"이, 이대로."

꿈틀!

'어라?'

어째서인지 저 우두머리 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아아!"

팟!

놈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한손 도끼엔 은은한 붉은 빛의 부기(斧氣)가 맺혀 있었다.

"사로잡지 못한다면 적어도 네놈이라도 죽여 버리겠다, 진여명!"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그때 내 이름을 들었구나."

천유라가 대놓고 내 이름을 언급하며 의견을 물었으니 당연히 이름을 알 것이다.

'쯧쯧, 어리석군. 내 주변에 있는 호위가 몇인지 알고 덤비는 거냐?'

나는 저놈이 내게 닿기도 전에 흑비들에게 제지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놈이 내 근처까지 다가올 때까지, 주변에 있던 흑비 중 그 누구도 놈의 돌격을 저지하지 않았다?!

'으응?!'

"죽어라, 진여명!"

그렇게 놈의 도끼가 호쾌한 곡선을 그리면서 내 정수리를 내리쳤다.

16화 단서 (1)

어? 니들 왜 안 막아?

우두머리 놈이 흑비들을 지나친 순간,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0.1초. 내 시선이 흑비들에게 항의했다. 이럴 때 막으라고 니들 데려왔지? 망부석도 아니고 왜 가만히 있냐?

0.5초.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런 썅!'

흑비들이 하나같이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사비연의 성향상 갑자기 이럴 리는 없으니, 이건 분명 소교주의 짓일 거다!

'이 망할 년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1초. 그와는 별개로 내 이성은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경고했다.

'제길, 피하긴 늦었다!'

상대는 썩어도 절정고수. 동귀어진으로 들어오는 만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은 하나.

챙!

콰앙!

빠르게 뽑아낸 칼의 면이 놈의 부기(斧氣)와 충돌했다.

"큭!"

검면에 손바닥까지 대 가며 도끼의 충격을 막아 내려 했지만 중과부적.

내 신형이 도끼의 반탄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퉁! 투웅!

그렇게 꼴사납게 뒤로 구르는 와중,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판에 나려타곤이라니....'

이 상황이 거지 같은 건 둘째치더라도 이건 분명 소교주가 내게 내리는 일종의 시험일 거다.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소교주나 다른 녀석들이 날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이, 이럴, 수가!"

"저걸 막아 내다니!"

그런데, 의외로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날 비웃지 않았다.

되레 도끼를 휘두른 우두머리 놈은 이 결과가 믿어지지 않는지 넋을 놓은 채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왜 안 죽었어?"

꿈틀!

치솟는 노기를 다스리지 못한 나는, 벌떡 일어나 놈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야 이 미친놈아! 감히 사람한테 그따위 망발을 해!"

그 거친 항의에도 우두머리 놈은 되레 울부짖듯 외쳤다.

"네놈은, 방금 머리가 쪼개져서 뒈졌어야 했단 말이다!"

우두머리의 상식으로는 분명 그래야만 했다.

만전의 상태여야 쓸 수 있는 부강(斧强)까진 아니더라도, 남은 모든 진기를 긁어모아 휘두른 일격이다.

저 소교주 같은 이해 불가능의 괴물은 예외라고 쳐도, 저런 약관의 후기지수 따위가 상처도 없이 막아 낼 수 있는 일격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마천진가에 저런 괴물이 자라고 있었나? 이대로 놔두면 절대...."

우두머리 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서걱!

어느새 놈의 목을 날려버린 천유라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그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은 했다만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실력이었군."

그녀를 따라온 사비연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더 놀라운 건, 고작 어기충검만으로 절정고수의 검기를 막은 겁니다."

천유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막은 게 아니야.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궤적을 흘렸다. 아니었다면 정말로 머리가 쪼개졌겠지."

그 말마따나 나는 검기를 분출해 내지 못했다.

아직 일천한 내 경지로는 찰나의 순간에 검기를 뽑아낼 정도는 되지 못했으니까.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만족스러우십니까? 제 실력을 확인하셔서."

"매우."

답하는 그녀의 입가엔 약간의 미소가 맺혀 있었다.

'망할 천마신교!'

강자존. 약육강식.

이 두 가지 개념이 충만한 천마신교에선 이런 식으로 상급자의 시험이 나름 흔한 편이었다. 애초에 시험을 넘어 차도살인까지 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까.

그나마 이번 시험이 불지옥 난이도는 아니었다는 걸 나름 안도해야 하나?

"다음부터는 사전 예고 정도는 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후후, 선처하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신형을 돌려 내게서 멀어졌다.

애초에 이번 일에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객. 주도한 건 나다.

그리고 바통을 주고받듯, 이번엔 신분을 숨기고 따라온 사비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크흠! 진 공자님."

나는 뚱한 기색으로 그 말에 답했다.

"왜 부르십니까, 흑비 칠호님?"

심술이 잔뜩 묻은 목소리. 애써 미소를 짓던 사비연의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렸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 죄송합니다. 진 공자님의 일처리가 어떤지 너무나 궁금하여 부득이하게 신분을 숨겼습니다."

확실히 사비연이 처음부터 동행을 제의했다면 굳이 이런 곳에 직접 오진 않았을 거다. 괜히 그녀를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으니 다른 방법을 썼겠지.

"괜찮습니다. 궁금하면 그럴 수 있죠. 딱히 원망이나 불만 같은 건 없습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와 마주 웃었다.

"아, 그렇다면 다행...."

"다만, 흑비들의 일처리에 대해선 조금 불만이 있군요."

"...!"

사비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흑비들이 소교주의 명에 따라 손을 놨다지만, 엄밀히 따지면 호위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

여기서 내가 이걸 사가에 걸고넘어지면 작전에 투입된 흑비들의 목은 모조리 날아갈 터.

그리고 그 책임의 정점에 사비연이 있겠지.

"그, 그것이!"

대번에 얼음 같던 그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정말로 내가 일을 그렇게 키우리라 본 걸까?

허둥지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말을 이었다.

"특히, 흑비 칠호라고 했나요? 그 녀석은 좀 문제가 많더군요."

"...네?"

사비연의 표정이 무너진 채로 정지했다.

"소저의 명령을 받고 나온 주제 현장 경험은 전혀 없는 것 같고,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며 명령보단 호기심을 충족하는 모습을 보면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아요."

나는 당황하는 그녀에게 또박또박 발음하며 요청했다.

"다른 흑비들은 몰라도, 그 친구만큼은 반드시 철저한 재교육을 요청드립니다. 특히 얼마나 머리가 꽃밭이길래 겁도 없이 앵속에 손을 대는 모습은 정말...."

"그, 아, 네, 네에...."

어느새 사비연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부끄러움과 분노. 상반된 두 감정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그 표정은, 제법 볼만한 모습이었다.

억지로 만들어 낸 미소를 제외하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그녀는 상당히 신선했다.

"주먹은 왜 꽉 쥐고 계시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 버린 그녀가 홱 신형을 돌렸다.

그 차가워진 모습에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음, 너무 놀렸나? 아니, 아니지.'

뒈질 뻔한 건 사실이니까.

흑비들의 차도살인미수(?)에 비하면 이 정도 놀림은 대가도 아니다. 그걸 아니까 사비연 역시 별다른 항의도 못 하고 그냥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상황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갑자기 이런 고수들에게 습격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번 습격자 중 유일한 생존자에게 다가갔다.

자결도 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개방의 거지, 견명개.

'이놈이 정말 거지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되겠지.'

구석진 곳으로 놈을 끌고 간 나는, 놈의 눈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리 봐도 저 우두머리 놈보다 네놈이 더 알고 있는 게 많을 것 같거든?"

"제, 제길. 주, 죽여라!"

"죽이긴 왜 죽여? 귀중한 증언을 하실 분에게."

나는 상큼한 미소로 손가락을 들었다.

"네가 끌고 온 놈들, 확실히 정파라기엔 지나치게 살기가 짙었지. 개방은커녕 정도맹 쪽도 절대 아니야."

견명개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입에서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흑점혈."

움찔!

아주 찰나의 순간, 견명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난 그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너희들은 그것과 관련이 있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냐? 흑점혈이라니?"

개방의 인간치고는 더럽게 연기를 못하는 놈이다. 아니, 애초에 전문적인 첩보원조차 아닐 가능성도?

나는 슬쩍 미소를 만들며 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에이, 왜 그래? 네놈의 진짜 신분과는 별개로 여기서 몇 년은 굴렀을 거 아니냐? 그런 놈이 흑점혈을 몰라?"

웃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내 눈은 싸늘했다.

"헙!"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은 놈이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손가락 끝에 내공을 집중시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무공은 좀 등한시했어도 흥미가 있어 적극적으로 익힌 잔재주가 몇 개 있거든?"

"...?"

"그중 하나가 바로 고문이야. 특히 분근착골은 아주 성실하고 착실하게 익혔지."

견명개의 눈이 크게 떠지는 순간.

"네놈이 정말로 정도맹의 특작대라면 이런 고문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믿어.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실전에서 써 보는 건 처음이니 조금 즐기고 싶거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도 마교 출신이 맞는 것 같다.

"자, 잠깐!"

견명개가 다급하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내 손가락이 먼저 녀석의 마혈을 짚어 버렸다.

"읍! 읍읍읍!"

나는 조금 즐거운 기분으로 놈의 혈도 몇 군데를 추가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가볍게 시작해 볼까?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뭐가 목적인지는 그 후에 천천히 듣자고."

"우웁! 웁! 쿠우우우웁!!"

그렇게, 은루곡의 최심부에서 한 거지의 절규가 작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소교주 천유라는 드물게 상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괜찮으냐, 비연?"

사비연의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그… 아니, 괜찮습니다, 소교주님. 염려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애써 감정을 털어내며 표정을 관리했다.

천유라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시비의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본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여러 입장상 어지간해선 절대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진여명과 마주한 지 몇 번이나 되었다고, 저렇게 감정이 흔들리다니?

'후후.'

천유라는 현재 그녀의 모습이 나름 재밌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걸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미안하군. 괜히 네게 폐를 끼쳤구나."

"정말 괜찮습니다. 진 공자도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까요."

"으음!"

사실 폐를 끼쳤다는 건 방금 전의 명령도 그렇지만 다른 쪽에도 있었다.

그걸 말할지 말지 잠깐 고민하던 차, 사비연이 질문했다.

"다만 좀 궁금하군요.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건가요?"

진여명의 실력은 일찍이 소마각에서 있었던 교류전에서 확인이 끝났다.

마도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육마룡.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충분히 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임을 이미 입증하지 않았던가?

천유라는 선선히 그 물음에 답해 주었다.

"녀석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반응, 이요?"

"녀석이 정말로 나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가문의 장기말로 날 이용하려고 했던 건지."

"아."

"구질구질해 보여도, 내겐 필요한 일이었어."

이전 진여명은 '친애'라는 말까지 쓰며 천유라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리고 타인의 그런 표현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그 말이 정말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세상에.'

사비연은 순간 이마를 짚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아 내었다.

그야말로 있던 정도 다 떨어질 법한 파격적인 확인 방법이 아닌가?

그녀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지만, 목청이 살짝 떨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그, 그래서, 결과는 어떠신가요?"

사비연의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유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글쎄, 놈이 정말 기녀의 부탁으로 저러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진여명이 부상을 입은 절정고수의 기습을 막아 내리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이후.

그가 정말로 가문만을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면, 그 시점에서 보였어야 할 모습은....

'모든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긍정적인 모습만을 연기했겠지.'

천유라의 타고난 재능 중엔 상대의 감정 변화를 면밀하게 짚어 내는 것도 존재했다.

그 날카로움은 진여명이 전생의 힘을 동원해 깨운 '감각'에 필적할 정도였다.

'녀석이 그때 내게 보였던 건, 약간의 원망과 불만. 그 외엔 딱히 다른 변화는 없었어.'

그리고.

'내 배경만을 노리고 접근했다면 그런 원망조차 숨겼어야 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 자신에게 접근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러했다.

자신이 뭔 짓을 해도 웃고 맞장구치며 비위를 맞추다가, 함정에 걸려든 순간 하나둘씩 본색을 드러내며 사라져 갔다.

'정말로, 놈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그러면 이렇게까지 움직여야 할 이유는 뭐지?

혼란스러워하는 천유라를 향해, 사비연이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

"왜 그러지?"

사비연은 그런 천유라의 속마음을 이해했다.

천유라를 몇 년 동안 곁에서 지켜봤던 만큼 그녀가 겪었던 일 역시 함께 보아 왔으니까.

하나 그와는 별개로.

"그러다, 미움받으면 어쩌시려고요?"

정말 진여명이 천유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아까의 방법은 정말 큰 실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천유라는 실소를 내지었다.

"난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인걸."

정말 많은 뜻이 함축된 대답이었다.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의심해야 하는 위치. 그러다 잘될 수도 있었던 인연이 틀어지게 된다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런 위치.

만인지상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사비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만약...."

17화 단서 (2)

"만약."

살짝 침을 삼킨 그녀는 끝까지 담아 두었던 의문을 내뱉었다.

"만약에 진 공자가, 소교주님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

사실 이 말은 수하로선 조금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씁쓸함이 감도는 그 미소를 본 순간, 그녀는 이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기회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글쎄."

천유라는 모호한 표정으로 살짝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은 포기한 어릴 적의 작은 꿈 하나가 이루어지는 거겠지."

"...꿈?"

"그래, 꿈."

척!

여기까지 답한 천유라는 갑자기 사비연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여기까지다, 비연."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냉정 침착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에 대한 부채는 여기까지다. 더 이상 나를 헤아리려 들지 마라."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그제야 사비연 역시 표정을 관리하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지금의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이번 일이, 나와 관련되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네."

그녀가 굳이 진여명을 미행한 것엔 이런 이유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

내면의 감정을 갈무리한 천유라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의 핵심이라는 흑점혈. 그게 천가의 누군가와 연결된 건 확실한가?"

"아직 정확한 물증은 잡지 못했습니다. 다만,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추측하자면 그렇습니다."

"단서라면?"

"흑점혈이 최초로 유통된 시기는 이 년 전입니다. 당시 아주 조심스럽게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유통되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 흑의대(黑蟻隊)가 움직인 정황이 있습니다."

천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의(黑蟻)… 검은 개미? 처음 들어 보는데?"

"삼십사대(三十四隊)에는 속하지 않는 천가 직속의 하부 단체 중 하나입니다. 주로 천가 방계 쪽 인사들의 지저분한 뒤처리를 도맡은 자들이죠."

"흠, 그래?"

천마신교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무력 단체는 총 서른네 개. 하지만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잡다한 집단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말을 들어 보면 그야말로 심부름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놈들.

그녀가 아무리 소교주라지만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흉물을 들여놓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개방 놈이 엮여있다 이거지?"

"엄밀히 말하면 개방도의 탈을 쓴 제삼세력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그거지. 정파든 사파든, 다른 누구든, 천가에 바깥과 손을 잡은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니까."

천유라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설사 신교 내부에 약을 유통시킨다 해도 그게 내부에서 끝난다면 경고 정도 받는 선에서 용서될 수 있었다.

그게 천가가 누리는 현재의 지위다.

하지만 그것을 내부가 아닌 외부의 누군가에게 받았다면?

그건 잠깐의 일탈이 아닌 신교 전체를 넘어 교주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꼬리라도 잡혔으면 좋겠군. 감히 누구보다 앞서 교인을 지켜야 할 존재가 되레 교인들을 병들게 하다니. 절대로, 그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사비연은 생각했다.

아마도 그런 자가 존재한다면 그건 천가 내부에서만 얽힌 문제는 아닐 것이다.

천가는 물론 육가 전체에 피바람이 불겠지.

다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뭔가, 진 공자는 천가 내부의 배신자보다 외부에서 흘러온 세력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우선순위로 보자면 당연히 천가 쪽이 훨씬 위에 있을 텐데도 그의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굳이 저들에게 거금을 줘 가면서 조사를 시킨 것도 그렇고.'

그때였다.

"소리가 잦아들고 있군요."

"그렇군. 심문이 끝난 건가?"

진여명이 견명개를 심문하겠다고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간 지 약 이 각.

천유라는 조금 미덥지 못한 듯 눈을 찡그렸다.

"일을 주도한 자로서 맡겨 놓긴 했다만, 그놈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 올 수는 있는 건가?"

무공에 대한 자질은 쓸만하다지만 심문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아까부터 고수들의 귀엔 견명개의 비통한 신음이 들려오고 있긴 했지만, 그게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진 공자는 행실이 경박해 보이지만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이는 아닙니다. 한번 믿어 보시지요."

"흥!"

천유라는 코웃음을 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사비연이 진여명을 두둔하는 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결과는?"

천유라의 짧은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꽝입니다. 개방의 사결개이기에 기대를 좀 했는데, 완전히 말단 중의 말단이더군요."

"실망이군."

천유라의 표정엔 작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다만 그녀의 그런 표정엔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 아무리 외곽 지대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교의 영역이다. 말단에 불과한 자가 그만한 고수들을 여럿이나 끌고 올 수는 없다."

"예, 물론 그렇지요."

"그걸 알면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 내가 그대를 너무 높게 본 건가?"

이 아가씨는 또 왜 갑자기 새침해?

나는 살짝 눈을 껌뻑였다.

"꽝이라고 했지 소득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말이 그 말이지. 네놈이 날 우롱하는 거냐?"

천유라가 화를 폭발시키려던 찰나.

"제가 꽝이라고 한 부분은, 놈의 배후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부분입니다."

"배후라고?"

"일단 견명개란 놈은 진짜 개방 출신이 맞더군요."

놈이 들고 다니던 타구봉은 폼은 아니었다.

고문에 못 이겨 불은 개방 비전 타구봉법의 구결은, 내가 내총관 시절 심심풀이로 천마비고에서 읽어 봤던 것과 거의 일치했으니까.

"정확히는 개방에 존재하는 놈의 상관이 천가의 누군가와 손을 잡았는데, 정작 견명개는 그 상대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더군요."

결국 이번 사태의 진짜 배후는 개방의 상관이란 놈을 족쳐야만 알 수 있었다.

사비연이 살짝 탄식했다.

"사실상 배후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겠군요."

"뭐, 이건 나중에 개방 쪽을 압박할 유용한 패 정도로 써야겠죠."

"그러면 아예 단서가 끊긴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배후는 배후, 이번 일은 이번 일이죠."

배후와는 별개로 나는 견명개에게서 꽤나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견명개가 끌고 온 놈들, 신교 바깥에서 온 놈들이 아닙니다."

"뭐? 그게 사실이냐?"

천유라는 물론 다른 이들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그만한 고수들이 바깥에서 대거 유입되었다면 신교 외곽 지역을 담당하는 사마대(四魔隊)에서 놓쳤을 리가 없었다.

"어디지?"

"구류성의 적은장(跡隱莊)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적은장이라고?"

천유라의 시선이 사비연에게 향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머지않아 기계처럼 답을 내놓았다.

"식솔 수는 약 백오십. 역사는 오십 년 정도가 지난 중견 규모의 세가입니다. 과거 귀살대 출신으로 은퇴한 소장도(笑藏刀) 은구명이 세운 세가로, 구류성주의 보고서대로라면 딱히 내세울 만한 특징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순간 천유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귀살대라고?"

"네, 지금은 해체된 천가 직속 암살단, 마황귀살대가 맞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천가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집단이 언급된 건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러면, 날 노리고 온 놈들은 설마...."

하지만 잠깐 멈칫거렸을 뿐, 이윽고 천유라의 표정은 더욱 사나워졌다.

"놈들을 족치면 이번 일에 대한 배후를 확실히 알 수 있겠구나."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또 뭔데?"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절정급이 포함된 일류고수를 스물이나 파견할 정도로 저력이 있는 곳입니다. 분명 이곳에 온 놈들이 다가 아닐 겁니다."

아무리 천유라와 호위들이 대단해도 그곳에 뭐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소마각의 호법사자들을 추가로 부르면 된다. 여차하면 우호법도 동원하면 돼. 그러면 어지간한 놈들은 충분히 족칠 수 있다."

확실히 본교 최상위 고수 중 하나인 우호법이 나선다면 어지간한 놈들은 짓밟아 버릴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래선 늦습니다."

이번엔 사비연 대신 내가 그 말에 제동을 걸었다.

"수면 아래에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놈들입니다. 적은장조차 임시 거처에 불과하겠죠. 파견한 놈들이 저녁까지 돌아오지만 않아도, 놈들은 바로 흔적을 지우고 잠적할 겁니다."

이곳이 신교의 중심지라면 모를까. 외곽 지역인 여기서 소마각에 있을 우호법과 호법원의 고수들을 호출하고 모으는 데만 최소 반나절은 걸린다.

즉, 전력을 갖추고 쳐들어갈 때면 너무 늦는다.

"소교주님, 안타깝지만 진 공자의 말이 옳습니다."

사비연까지 거들고 나서자 천유라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뭘 어쩌긴? 이미 늦었다.

"소교주님께선 이만 돌아가십시오."

"...."

"습격을 받은 시점에서 우리만으로 뭘 해 볼 수 있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게다가 소교주님 같은 분이 계속 움직였다간 되레 교인들의 시선이 끌리기도 쉽습니다."

그나마 외곽 지대이기에 망정이지, 여기서 계속 움직였다간 본교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모일지도 모른다.

천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을 뿐.

그런 그녀를 대신해 사비연이 물었다.

"그 말은 옳습니다만, 진 공자께선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원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무력이 필요했던 건 아닙니다."

원래라면 그 패랑파라는 하부 조직부터 조금씩 파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다만 중간에 천유라를 납치하기 위해 난입한 놈들 때문에 강제로 몇 단계를 건너뛰어서 그렇지.

"일이 조금 흐트러졌지만, 놈들이 모든 흔적을 지우지는 못하겠지요. 그쪽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입니다."

"아...."

"약속은 약속이니, 가문의 힘을 좀 빌려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이 일의 말끔한 해결을 약속했고, 수틀리면 가문의 힘까지 끌어다가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걸 약속한 만큼 어느 정도 성의는 보여야겠지.

"자, 잠깐."

그때, 천유라가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방법이 있다."

방법? 무슨 방법?

"요는 지금 호법원이든 뭐든 전력을 투입할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 아니냐?"

"뭐, 그렇죠."

"그럼 내가 직접 놈들을 찾아가면 된다."

흠칫!

그 말을 곱씹기도 전에 그녀가 자기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 소교주 천유라가, 과거 천가의 휘하에 있던 적은장에 정식으로 방문하는 거다."

제정신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천유라의 표정은 진지했다.

"공식 석상을 천명하고 방문한다면 적어도 대놓고 수작을 부리진 못하겠지."

일견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지만.

"소교주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사비연의 말마따나 이건 그냥 날 죽여 달라고 목을 들이미는 꼴이었다.

나 역시 한숨을 쉬며 거들었다.

"맞습니다. 고작 이런 일에 소교주이신 당신의 목을 걸 수는 없습니다."

"고작? 이만한 일을 고작이라고 말하는가?"

"네, 소교주님 당신의 목숨이 가진 무게에 비하면 고작입니다. 본인도 알고 계실 텐데요?"

18화 단서 (3)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지금 천유라는 떼를 쓰고 있다.

"당신은 단순한 천가의 직계를 넘어 소교주이십니다. 그런 존재에게 살신성인은 미덕이지만 생존은 의무입니다."

옆에서 사비연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신은 그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이 말까지 하지 않아도 그녀라면 충분히 이해할 거다.

"그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이윽고 그녀가 날 쏘아붙였지만, 한층 기세가 죽은 눈이었다.

"네놈 역시 마천진가의 대공자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있지 않은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죠. 무엇보다 전 대공자이지만 소가주는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뭔가 시무룩해진 고양이 같아서 귀엽긴 하다…가 아니지.

어쨌든, 지금 천유라는 장기로 치면 궁이다. 먹히는 순간 그대로 모든 게 끝.

졸 하나를 잡자고 그 뒤에 벼르고 있을 차, 포, 마 등에게 위험을 노출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동안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문득 이런 말을 해 왔다.

"내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

실수?

"진여명, 네가 계획했던 일이 나 때문에 어그러졌다. 그걸 내 손으로 직접 수습하고 싶다."

확실히, 천유라가 섣불리 그 존재를 노출함으로써 습격자가 찾아왔다.

그 때문에 물밑에서 천천히 움직여야 할 내 계획이 시작부터 꼬여 버렸다.

천유라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천유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평소엔 읽기 힘들었던 그녀의 얼굴에, 지금은 선명한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죄책감, 이라고 봐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도 더 크게 보이는 감정은....

'자존심.'

자신이 민폐를 끼쳤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 손으로 만회하고 싶다는 감정.

오만에 가까운 자존심이 아닌 책임감에 가까운 자존심.

그 감정을 눈에 가득 담고, 그녀가 진심을 담아 내게 간청했다.

"내가 지금 어거지를 부리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내게 기회를 다오."

"흐음."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내 모습을 주변의 모두가 숨을 삼키며 지켜보았다.

주변의 시선 속에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제법인데?'

그녀는 굳이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제로 수습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자기 잘못을 부정하거나, 잘못했다는 책임감 자체를 느끼지 못했을 거라 판단했다.

그녀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이니까.

나는 내심 이십 년 후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다른 인물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무정마후 천유라는 이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온갖 풍파에 깎이고 의무에 짓눌리며 완성된 하나의 인격체였다.

아직 교주의 자리도 경험하지 못한 덜 여문 지금과는 생각도, 가치관도, 그 모든 게 다른 인물일 터.

'하하!'

그럼에도 지금 그녀가 보이는 모습은, 마지막 순간에 내게 보여 주었던 모습과 어느 정도 겹쳐 보이고 있었다.

'이러니까 내가 반했지.'

나는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

소장도 은구명은 당시 살수 업계에선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살수가 갖는 운명은 보통 셋 중 하나다.

임무 중 객사하거나.

혹은 태생을 극복하고 높은 자리로 영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은퇴하거나.

은구명은 그중 백에 두셋 정도에 속하는 세 번째 유형이었다.

그것도 팔다리가 아니라 눈 하나를 잃은 정도에서 은퇴에 성공했으니, 업계에선 전설이라 불려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그가 적은장을 처음 세웠을 때만 해도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찾아와 은구명을 축하했다.

그리고 그 '많은 이들'이라 불린 대부분이 살수나 살수 출신이라는 점은 당연지사.

하지만 적은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길어야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은퇴한 살수가 뭔가 거창한 무공을 지녔을 리도 없고, 적은장 정도 되는 식솔 수를 갖춘 곳은 수백 수천 곳이 널려 있었으니까.

다만 장(莊)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적은장의 크기 자체는 구류성을 넘어 천마신교 전체에서도 꽤나 큰 편에 속했다.

담의 크기만 일 장에 달했고, 내부엔 못해도 수백은 가볍게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적은장이 세간에 집중을 받지 못한 건, 구류성 자체가 십만대산에서도 상당히 외지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토지만 넓고 인구는 적은 깡촌.

그게 구류성의 인식이었고, 그 구류성 안에 있는 적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적은장은 세간의 시선에서 완전히 잊혀 갔다.

장원의 주인이 은구명에서 그 손자인 은철중으로 바뀌고, 그 내부가 완전히 변해 갈 때도 말이다.

***

콰앙!

무언가가 호쾌하게 박살 나는 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아직 어린 티를 모두 벗지 않은 한 여인.

"소, 소교주?!"

적은장의 당대 장주인 은철중은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문을 박살 내듯이 들이닥친 천유라는 주변 돌아가는 꼴을 감지하곤 피식 웃었다.

"바쁜가 보군. 이사를 준비 중이던가?"

곳곳에서 하인들은 물론 여러 인기척이 바쁘게 이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어,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은철중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모른체하고 소교주를 향한 예의를 다해야 했다.

"어찌하여 본 장을 찾아주셨는지?"

"아아, 다름이 아니네."

장원 안으로 들이닥친 천유라는 거침없이 은철중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은철중과 주변 가신들의 손이 천천히 허리춤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천유라는 그걸 무시하며 밝게 미소 지었다.

"본 소교주가 요즘 천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걸 느껴서 말일세."

"헌신, 말입니까?"

은철중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을 때.

"귀 장주의 조부가 마황귀살대 출신으로 알고 있네만."

움찔!

"수십 년 동안 천가에 그렇게 공헌하고도 고작 장원 하나를 간신히 지을 정도의 대가밖에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렇, 습니까?"

그 간신히 세운 장원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안다.

하지만 천유라는 그 사실을 철저히 무시했다.

"객에게 차 한 잔 내주지 않을 셈인가?"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은철중이 안쪽으로 정중히 손짓했다.

"이 십만대산에서 소교주님이 객이 되는 경우는 없지요. 안으로 드시지요. 모시겠습니다."

"하하, 그러지."

천유라는 아무런 의심 없이 냉큼 은철중의 안내를 따랐다.

앞서나가던 은철중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의도지?'

은루곡에 파견했던 자들에게 연결이 끊겼다.

조직의 정책상 파견자들은 두 시진마다 철저하게 연락을 넣게 되어 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낸 연락은 은루곡에 나타난 소교주 천유라를 생포하겠다는 것.

그 연락 이후로 후속 보고가 끊겼고, 은철중은 고민할 것 없이 적은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을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그 흔적을 채 지우기도 전에 납치 대상이었던 소교주가 멀쩡한 채로 이곳에 쳐들어온 게 아닌가?

'이곳을 정확히 노리고 왔다는 건, 살명대(殺命隊)와 부딪친 게 확실할 텐데?'

어째서 차 타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레 잘되었다.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주변에 목격자를 남길 여지를 줘서는 안 되었다.

은철중은 장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전각으로 천유라를 안내했다.

"흠, 손을 꽤 탄 것 같으면서도 관리가 잘되어 있군. 평소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리나 보지?"

"하, 하하하...."

대놓고 비꼬는 그녀의 말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하나 일단 완전히 안으로 들이기 전까진 장단을 맞춰줘야 했다.

-살주(殺主),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하의 전음이었다.

-금선탈각의 계는 계속 진행한다.

은철중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자'가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진을 가동해라. 기회가 한 번 더 왔으니 이번엔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존명!

수하의 기척이 사라지고, 곧이어 은철중과 천유라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은철중은 그녀가 이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 확신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내었다.

"자, 그럼 소교주."

"님 자를 붙여라, 건방진 놈."

천유라의 눈썹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하나 여기까지 온 이상 은철중은 더 이상 예의를 갖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순식간에 은철중의 뒤로 십여 명에 달하는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크흐흐, 피차 다 알고 온 마당에 예의 차릴 게 있겠소? 얌전히 사로잡힌다면 내 거칠게 대하진 않으리라."

"하."

천유라는 작게 실소했다.

"하다못해 약간의 문답이라도 나눈 뒤에야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건만...."

시간을 끌어야 하는 천유라의 입장에선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스릉!

천유라가 칼을 뽑았다.

그러자 그에 응하듯 적들이 대번에 주변을 포위했다.

그녀는 잠깐 훑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에워싼 이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잘 알겠다, 너희들의 수준."

"뭐라?"

"시시해서 죽고 싶어질 지경이구나."

대번에 은철중과 무사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살명대를 잡았다고 해서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이는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지금 네놈들은 날 습격했던 자들과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군. 게다가 숫자 또한 절반에 불과하지 않으냐?"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츠츠츠츠!

순식간에 천유라를 둘러싼 환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널찍한 내부가 갑자기 미로처럼 변하는 것은 물론, 마치 공간을 무시하듯 흉흉한 기관장치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관진법?"

"미로추살진(迷路追殺陣)이라 하지.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네년들을 여기까지 들인 줄 아느냐?"

진법은 합격진과 기관진으로 나뉜다.

이 중 기관진법의 경우 이치에 맞게 돌 몇 개, 나무토막 몇 개 놓으면 알아서 만들어지는 줄 아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제대로 된 기관진법이란 건 돈과 인력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대공사가 필요한 놈이었다.

이건 그 자체로 적은장이 단순히 은퇴한 살수의 힘만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네놈들에게 물어볼 게 많겠구나."

"순순히 대답해 줄 거로 생각하나?"

"당연히 본녀의 손아귀에 잡히기 전까진 그러지 않겠지."

미로추살진이라 불린 진법을 바라보던 천유라가, 싹 가라앉은 눈빛으로 은철중에게 말했다.

"싸우기 전에 이것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

"너희는 여전히 천가의 개인가?"

한순간, 은철중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게 아니면 외부와 손을 잡은 반역도인가?"

"죽여."

은철중의 지시가 대번에 생포에서 추살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주변의 복면인들은 망설임 없이 천유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그게 대답이로군."

천유라의 검에 날카로운 검기가 맺혔다.

강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천재 중의 천재인 그녀에게도 강기는 아직 부담감이 큰 기술이었으니까.

"흐흐흐, 검기? 확실히 대단하다만 그 정도는 예상했다!"

살수로 보이는 복면인들의 날붙이에 일제히 기파가 터져 나왔다.

그들 역시 고수라 불릴 수 있는 검기발현이 가능한 자들.

암살로는 중원제일이라는 살막에서도 초특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향해 천유라의 검이 날카롭게 춤을 췄다.

여섯 가닥의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살마검의 육성.

마치 검은 무희와도 같은 천유라의 춤사위가 한차례 공간을 휩쓸었다.

19화 단서 (4)

"이, 이럴 수가!"

은철중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천유라에게 당한 우두머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기를 다루는 고수들을 이리 쉽게?!"

지금 당한 이들은 전원이 검기를 뿜을 수 있는 고수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사실 은철중은 소교주 생포 작전의 실패 원인이 호법원의 개입 때문이라 믿었다.

신교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육마룡. 그중 최강이라 칭송받는 패가의 쌍둥이조차 절정에 간신히 턱걸이한 정도이지 않은가?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 저건 절정에 간신히 이른 정도가 아니야.'

절정의 네 단계 중 적어도 승(昇)의 단계. 어쩌면 전(展)의 단계까지 올랐을 수도 있다.

탁!

천유라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었다.

"아직 많이 멀었군. 이런 놈들을 상대로 몸에 피를 묻히다니."

"으으, 괴물!"

미소를 머금은 그 모습은, 요염하면서도 약간의 귀기가 서려 있었다.

은철중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패기 없는 그 모습에 천유라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 같은 놈을 잡으려고 놈에게 그리 구박받아야 했던가? 괜히 자괴감만 드는구나."

"그, 놈이라고? 누굴 말하는 거냐?"

"훗, 그냥 가벼운 넋두리였다. 네놈 따위가 알 건 없다."

천유라의 검 끝에 가벼운 기운이 맺혔다.

검기점혈. 어지간한 고수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최상승의 기술.

"천가의 개가 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네놈의 입으로 충의를 다하라."

"헛소리 마라! 천가에 충성을 다했던 귀살대를 살성령으로 몰살시킨 게 누구인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은철중은 그녀가 생포의 의지를 가졌다는 걸 알자 그대로 도주를 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그의 눈이 천유라의 뒤쪽으로 향하면서 대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호위들이 경고를 보내온 건 그와 동시였다.

퍽!

"크아악!"

"소, 소교주님, 조심하십시오!"

"...!"

그 천유라의 감각조차 속이며 누군가가 개입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호위 중 하나는 팔을 잃었고, 나머지는 피를 뿌리며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고수!'

아무리 덜 여물었다 해도 호법사자들을 뚫을 정도면 보통 고수가 아니다.

천유라는 달려드는 괴한을 향해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기가 선을 그리며 공간을 그었고.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은 그 검기를 아주 부드럽게 흘리고는 그대로 천유라를 지나쳤다.

'뭐?'

상대의 황당한 행동에 잠깐 당황했지만, 어쨌든 호위들을 수습할 시간은 벌었다.

"오오! 오셨구려, 대인!"

은철중은 두 팔을 벌리며 복면인을 맞이했다.

"소교주, 다른 누구도 아닌 소교주입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도망칠 기색이었던 은철중은 눈에 핏줄이 나타날 정도로 복면인을 반겼다.

그만큼 복면인의 실력을 신용한다는 뜻.

그런데.

"저년이 살진에 갇힌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아야…컥!"

은철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렴,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인간이 정상적으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투웅!

밀폐된 공간 안에서 은철중의 머리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정신을 수습한 천유라가 복면인을 쏘아보았다.

"본녀를 내버려 두고 증거인멸부터 하다니. 꽤나 급했나 보구나."

"사냥에 실패한 개는 폐기 처분하는 게 옳지."

"실패했다고 보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다만? 물론 주인을 문 개는 팽하는 게 옳긴 하겠지."

후우!

가볍게 심호흡한 천유라가 기수식을 펼쳤다.

"호오?"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도망가지 않을 셈인가?"

"내가 왜 정파 놈을 앞에 두고 도망가야 하지?"

"저, 정파?!"

내상을 다스리던 호위들은 청천벽력 같은 천유라의 말에 대경실색했다.

복면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흥미롭군. 날 왜 정파라고 생각한 거지?"

"내 검기를 흘릴 때 보였던 그 수법. 그건 적어도 본교의 검법은 아니야."

"후후, 그냥 네년의 수준이 낮아 쉽게 흘렸다고 한다면?"

복면인의 비웃음에도 천유라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특색. 그러면서도 네놈 정도의 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곳은 흔하지 않지. 청성, 종남? 어쩌면 무당일 수도 있겠군. 어느 쪽이지?"

정곡을 찔렸는지 복면인의 입이 다물어졌다.

천유라는 쉬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광명정대하다고 소문난 구파 놈들이 본교에 약을 뿌리고 있다라. 네놈이 어디 소속인지 너무나 궁금해지는구나."

"...."

"지금이라도 소속을 밝힌다면 내 특별히 사재를 털어 전 중원에 네놈의 정체를 알리도록 하지. 개방에 의뢰를 넣으면 되겠군."

그 말에 호위들이 부상도 잊은 채 눈을 껌뻑였다.

'그렇게 말하는데 퍽이나 밝힐까요?'

라고 호위들이 생각하던 찰나.

까득!

"내 소속은, 지옥에 가서 염라에게나 물어보거라!"

분노한 복면인에게서 찌를 듯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 기세는, 분명 이 자리의 모두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교주님, 위험합니다! 저자는 분명!"

"알고 있다."

천유라가 호위들의 말을 잘랐다.

"저자는 분명, 검강지경에 오른 자일 테니까."

검강지경.

초식과 내공심법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경지.

흔히 초절정이라 부르는 이 경지는 초입이라 해도 신교 서열 오백 위 안에 들 수 있을 정도이며, 중원에 나가도 한 성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궁금하군."

천유라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내가 검강지경의 고수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허허!"

천유라의 모습을 바라본 복면인의 심정은, 황당함을 넘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설사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도 자신에게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년이 저러는 걸 보면 가소로움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했다.

"마교의 소교주가 간을 배 밖으로 내놨다는 정보는 꽤나 비싸게 팔리겠군."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그런 걸 오만이라고 부른다, 이 철없는 애송이 년아!"

참지 못한 복면인이 먼저 천유라에게 달려들었다.

복면인의 검에서 흘러나온 푸른 검기가 거칠게 천유라를 덮쳤다.

"소교주님!"

"너희는 물러나 있거라."

호위들은 복면인의 첫 기습 당시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전력은커녕 이대로는 짐만 될 뿐.

천유라의 검이 날아오는 복면인의 검과 그대로 맞부딪쳤다.

쾅!

이윽고 나타난 결과에 복면인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허? 이걸 버텨?"

같은 검기라고는 하지만 수준 차이는 명백. 출력과 절삭력에서 상대는 절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설사 그걸 모두 극복했다고 해도 얄팍한 팔다리를 지닌 상대는 기초적인 완력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마치 태산처럼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놀랐겠지."

천유라는 그런 상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반응했다.

"천마신공은 천상천하의 그 어떤 기공을 상대로도, 적어도 '힘'에서 밀리진 않는다. 설사 경지의 차이가 나더라도 말이지."

"그래 보이는군. 확실히 조금 놀랐다."

스스슥!

"하나 승부를 가져갔다고 착각하진 말거라."

복면인의 검이 마치 뱀처럼 휘며 그대로 천유라의 심장을 노렸다.

상대는 백전연마의 고수.

잠깐의 감정 동요는 빠르게 수습하고 곧바로 상대의 빈틈을 노린다.

대치 상태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일격.

화급히 검을 휘둘러 흘리려 했지만, 어깨가 살짝 베여 나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큭!"

"재능과는 별개로 경험이 미숙하면 이렇게 되지."

복면인은 자세가 허물어진 천유라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몰아쳤다.

천살마검의 강렬한 초식이 펼쳐지며 천유라가 반격에 나섰다.

하나 검신과 검신이 부딪치는 곳곳의 공방에서, 천유라는 복면인에 비해 지속적으로 손해를 쌓아 갔다.

그 원인은 오직 하나.

"역시, 기본기를 뒤집을 수 없는 이상 네년이 날 어찌할 방법은 없다."

힘, 속도, 기교, 거리 조절 등등.

복면인의 말마따나 무예의 기초적인 부분에서 천유라는 복면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공세가 길어질수록 천유라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그 수를 더해 갔다.

그렇게 삼십 초.

카가가각!

결국 복면인의 검에서 나온 충격파를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그녀의 신형이 길게 밀려 나갔다.

"헉, 헉!"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 한 자루로 신형을 지탱하는 모습.

그걸 보는 복면인의 눈엔 어느새 강렬한 경계심이 피어나 있었다.

"천마신교에 소마귀(小魔鬼)가 자라나고 있었군."

이건 복면인에게 있어선 최고의 극찬이었다.

"나이 이립에 이른 본산의 일대제자 중에서 내 삼십 초를 받아내고 멀쩡한 녀석은 없었다. 하지만 약관에 불과한 네년은 내 삼십 초를 온전히 받아냈구나."

물론 약간의 손대중은 했다.

소교주를 잡아갈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전공을 세우는 셈이니까.

하지만 그 손대중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는 진즉에 제압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분께서는 널 반드시 잡아 오라 명하셨지만, 네년의 실력을 보아하니 오늘 후환을 제거하지 않으면 정말 큰 화로 돌아오겠구나."

호법원의 호위들이 천유라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승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분이라고?'

호흡을 고르던 천유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저놈보다 윗선이 본교에 있단 소리인가?

"앞으로 십 년만 지나도 중원 무림에 널 감당할 고수는 열을 넘지 않겠군. 이십 년이 지나면 극독이라도 먹이지 않는 이상 방도가 없겠어."

"후후후, 그래도, 눈은 제대로 달려 있군."

"내 눈이 제대로 달려 있기에, 오늘 네년은 죽는 것이다."

복면인은 마무리를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도망치지 않고 맞선 용기는 칭찬해 주지. 어차피 도망치려 해도 불가능했겠지만."

"...알고 있었다."

"뭐?"

크게 숨을 내쉬며 대답한 그녀의 말에, 복면인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고수가 있을 거란 것도, 이곳에 기관진식이 설치되었을 거란 것도. 다 예상한 일이었느니라."

"거짓말을 하는군."

복면인의 목소리가 사납게 변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사지에 기어들어 왔다? 자기가 병신이라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더 되는가?"

"한 가지 틀린 게 있다면, 놈과의 의견 차일까?"

"놈?"

"안 그러냐, 진여명?"

흠칫!

복면인의 목이 그대로 뒤로 돌아갔다.

이윽고 저 멀리서 전각의 정문을 열며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구나."

천유라의 타박에도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제가 그랬잖습니까. 저들은 소교주로서의 가치보다, 당신 자체의 가치를 더 경계할 거라고요."

"난 아직 죽지 않았다만."

"제가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면 확실히 죽었겠죠."

"아무튼 살았으니 내 승리다."

천유라의 우격다짐에 내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힘도 달리고 지위도 달리니 상대가 저렇게 어거지로 나오면 답이 없었다.

살짝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복면인이 이쪽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사신."

20화 적운 (1)

"나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

작전이 시작하기 전, 천유라가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거, 자존광대도 정도껏이지."

"비연, 저놈의 배 좀 갈라 보거라."

"알겠습니다, 소교주님."

사비연은 정말로 단도를 빼 들며 다가왔다.

"농담도 못 합니까?"

"농담이라기엔 그대의 눈빛은 참으로 진심이었다."

이대로 천유라를 설득하지 못했다간 정말로 사비연의 단도가 배때지를 쑤실 판이었다.

"전 언제나 소교주님에겐 진심이죠. 이건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들이대면 천유라는 예상외로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뭔가 반응이 달랐다.

그녀가 뚱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진심이라고 하기엔, 그대는 자신이 한 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한 말?

내가 답하지 못한 채 잠깐 어버버하자, 천유라의 표정이 더더욱 샐쭉해졌다.

"흥, 기억도 못 하고 있군. 됐다. 그럼 방금 본녀가 한 말뜻이나 한번 헤아려 봐라."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소교주님이 가진 인질로서의 가치가 너무 뛰어나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 그 말은 바로 나오는구나."

정답을 맞힌 것 같긴 한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더더욱 화가 난 느낌이다.

대체 왜?

"본녀는 천가의 유일한 직계혈족이다. 죽이는 것보다도 사로잡는 편이 압도적으로 이득이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만약 교주의 자리를 노리는 자가 이 길의 끝에 있다면 당신은 끝장입니다."

"흥, 그럴 리가 없지. 알면서 괜히 떠보는 거냐?"

천유라는 내 생각보다 훨씬 현명했다.

"분명 천가 내부에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은 놈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계라도 천가는 이곳 십만대산에서 정점에 있는 일족. 아랫놈들이나 다루는 물건을 직접 취급할 리가 없겠지."

그 말이 옳다.

"이 사건의 끝에 있는 건 하부의 하부. 언제든 잘라 낼 수 있는 꼬리에 불과할 거다. 하지만 여기에 외부에서 기어들어온 '어느 세력'이 연관되어 있다면 의외로 꽤 거물을 만날 가능성이 있지."

그리고 그 세력의 입장에선, 천유라는 발견한다면 무조건 사로잡아야 하는 상대다.

"지금 하는 짓거리를 보면 놈들이 장기적으로 본교의 세력 감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세력 감소라면 더더욱 좋지 않죠. 소교주님이 죽으면 천가는 그대로 방계들끼리 내전에 들어가니까요."

"교주님께서 건재한 이상, 그럴 일은 없다."

천유라는 딱 잘라 말했다.

"교주님께선 시간이 좀 더 들더라도 조용하고 확실하게 나를 대체할 인물을 세우실 거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정정하실 분이시니까."

확실히.

현 교주가 오늘내일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이십 년은 너끈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있다.

전생에서도 그는 노화로 죽은 게 아니라 천유라에게 교주직을 넘기고 어딘가로 그냥 훌렁 사라졌으니까.

무엇보다 현 교주는 천마(天魔)의 이름을 짊어진 존재이자, 중원에선 절대자인 삼존(三尊)의 일인으로 꼽히는 존재.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날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포획하는 게 훨씬 이득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딱 하나 간과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천유라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지? 여기까지 말했으면 내 의견에 좀 따라 주는 게 어떤가?"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싶군요."

나는 살짝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소교주님, 당신은 당신 본연의 가치를 너무 낮게 보고 있습니다."

"본연의 가치라고?"

"재능."

그것도 압도적인 재능.

"그들이 당신의 재능을 보고 후환을 두려워한다면? 인질로서의 가치보다 뒷일을 더 중요시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무정마후 천유라는 여성 출신 교주라는 편견과 내정에 집중하는 모습 때문에, 본신의 무력은 신교 내외로 저평가가 만연한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절독에 당해 실력의 반에 반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대 무림맹주인 검존과 그 직하 최정예 무력 부대인 황룡천검대를 정면으로 감당했다.

그 결과 치명상을 입히긴 했어도 그녀는 수십에 달하는 황룡천검대를 죽였으며, 무림맹주 검존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목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장담하건대.

이십 년 뒤 그녀의 본신 무력은 현 교주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거다.

만약 그 가능성을 현재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알아차리게 된다면?

천유라는 정말로 죽은 목숨이다.

"크, 크흠! 크흐흠!"

그런데, 왜인지 그녀는 대답은커녕 내 시선을 피하며 크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사비연이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진 공자는, 아부도 꽤 하는 분이시군요."

"아부요? 저는 진심입니다만."

"그, 그만하거라!"

천유라가 손을 내저으며 나를 말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계속해서 꼼지락거렸다.

'뭐지? 내 말이 그렇게 부끄러운 말이었나?'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어, 어쨌든, 그대의 고견(高見)은 잘 들었느니라."

"...."

"하지만 그대 말대로 상대가 내 가능성을 인정해 죽이려 들 때면 꽤나 시간이 흐른 후일 것이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한눈에 소교주의 위험성을 간파할 안목이라면, 적어도 정도맹주급의 고수는 와야 한다.

상대의 재능도 손속을 좀 섞어 봐야 아는 법.

문제는 그 재능이 탄로 나는 게 호법원이 오기 전에 이루어질 게 무조건이라는 거다.

천유라는 그걸 알면서도, 신뢰의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대는 날 죽게 두지 않을 거다. 그렇지?"

아,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는데.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정말로 그녀의 억지를 들어줘야만 하지 않은가?

"작전을 짤 시간 정도는 주십시오."

***

그렇게 현재.

"상대해보니 어떻습니까?"

천유라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확실히 까다롭군. 괜히 구파가 명문대파라 불리는 게 아니었어."

"저자가 구파 출신이라 확신하시는군요."

"천마비고에 보관된 신교의 상승검법은 모두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검법은 비고의 검법과는 정반대의 묘리를 담고 있다."

신교의 검법은 대다수가 패도적이고 극한의 파괴력을 추구한다.

하지만 정파의 검술은 유(流), 쾌(快), 변(變), 강(强)의 묘리를 모두 다루는 정석을 추구한다.

그 정석을 쌓아 초절정에 이른 검수.

사실상 현시점 그녀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였다.

"뭐, 제가 왔으니 걱정 마시지요."

"걱정 말라고?"

복면인이 내게 삐딱한 눈빛을 보냈다.

"감히 사신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어리숙하군."

"그렇게 보이나?"

"소교주의 역량을 잘못 보았다는 건 인정하지. 하나 네놈은 달라. 고작해야 절정에도 오르지 못한 후기지수 수준이군."

역시, 초절정의 고수를 상대로는 속일 수가 없나?

"이름을 대 보거라, 꼬맹아. 적어도 내게 사신이라 칭한 자신감만큼은 인정하마."

"마천진가의 진여명이다."

"진여명… 진… 마천진가라고!?"

복면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대어를 잡은 낚시꾼 같이 변했다.

복면 안쪽의 미소가 보일 정도로 기뻐하는 게 보인다.

"이거, 예상도 못 한 소득이군. 소교주는 죽일 수밖에 없지만, 네놈은 입장이 다르지."

한마디로 인질로 잡겠다는 소리였다.

"얌전히 있으면 불필요한 고통은 가하지 않으마."

복면인의 기세가 내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서 뭔가 득의양양한 콧소리가 들려왔다.

"훗!"

그 소리의 진원지는 천유라였다.

그녀는 마치 나와 너는 격이 다르다, 라고 표정으로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러고 있자니 복장이 조금 뒤틀린다.

"뭔가 기분이 나쁘군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게 타고난 격의 차이인 것을."

"뭐, 무공의 재능이 좀 떨어진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겁니다."

"그래서, 혼자 왔다는 건 나름의 방도가 있다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거 참 궁금하군. 무슨 방법으로 날 상대할 생각인지."

복면인이 막 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그 소리가 마치 방아쇠와도 같이, 벽 쪽에서 활시위가 튕기는 소리가 났다.

"뭣?!"

복면인은 초인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향한 암기를 피해 냈다.

하지만 이 느닷없는 기습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설마, 네놈."

지금 이 상황이 뜻하는 건 단 하나.

"미로추살진이라고 했나? 이제 이건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

"왜 내가 혼자 왔겠어?"

내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당연히 다른 전력은 모두 다른 곳에 투자했으니까지."

장원 내부에 있는 거대한 전각을 본 순간, 나는 저 안에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기관진식을 무력화 혹은 제어권을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고, 흑비들의 도움 끝에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이런 식의 진법은 지하 아니면 최상층에 제어실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 다행히 최상층이 아니라 지하에 있더군."

"비연이 그곳에 있겠구나."

"네, 사 소저의 눈이라면 충분한 보조가 될 겁니다."

기존에 기관을 제어하던 놈들은 사비연의 손에 모조리 죽었다.

그렇게, 천유라를 가두기 위한 살진은 이젠 복면인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창으로 돌변했다.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내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우리나 저자나, 시간을 길게 끌 수는 없다는 점일까요?"

"그건 무슨 소리지?"

천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자신들은 호법원이 지원을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시간을 끌 수 없다고?

"놈들의 꼬리 자르기가 거의 끝나 갑니다. 여기가 진법 안이라서 느끼지 못하신 것 같지만, 지금 바깥은 불바다예요."

"...이런."

"이대로 시간을 끌면 사이좋게 타 죽는 거죠."

흑비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지만 생각보다 놈들의 준비가 철저했다.

복면인은 전의를 다지는 우리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도망가지 않을 생각이군?"

"이대로 물러가면 얻는 게 없으니까."

말마따나 눈앞에 있는 저놈조차 놓치면 그야말로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는 셈이다.

"좋아, 그렇게까지 죽고 싶다면, 나도 더 이상 정체를 감추는 건 포기하지."

복면인은 거칠게 복면을 뜯어냈다.

그 안쪽엔 나름 수염이 정돈된 수려한 중년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도복만 입으면 그야말로 풍채 좋은 도사라고 믿어도 좋을 정도였다.

하나 그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천유라를 반드시 죽일 생각이군.'

그는 검을 앞으로 내밀면서 슴베 부분에 반대쪽 두 손가락을 올렸다.

강호에 수많은 검술이 있다지만 이런 식으로 묘한 기수식을 가진 유명한 검술이 하나 있었다.

천유라가 나직이 탄식을 내뱉었다.

"청운적하검!"

바로 구파일방 중 청성파를 대표하는 검술 중 하나.

"청성의 적운(跡雲)이다."

적자 배.

그 말인즉, 그는 청성의 장로라는 소리였다.

21화 적운 (2)

"적운이라."

정체를 드러낸 상대의 지위는 상당히 놀라웠다.

청성의 장로.

완숙한 초절정에 이른 실력을 고려하면, 장로 중에서도 특히나 강한 축에 드는 자일 터.

'이곳의 이름이 적은장이라더니 이름 한번 더럽게 잘 지었군.'

적(跡)이 숨은(隱) 장원이라더니 진짜 적운이란 놈이 있다.

천유라가 작게 신음했다.

"그렇군, 청성이 이 일의 배후인가?"

"후후, 그 말에 대한 답은 하지 않도록 하지."

그 질문에 긍정하진 않았지만, 적운은 사실상 자신의 모든 패를 까발린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실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이면을 알고 있다.

난 비릿하게 웃으면서 적운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살아 나갈 확률까지 고려해서 잘도 포석을 던지시는군."

"뭐라고?"

"나나 소교주가 만약 살아나간다면 우린 청성을 향해 칼을 겨눌 수밖에 없지. 아무렴, 사실상의 정마대전이지."

천유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진여명?"

"저자는 정파인답게 정정당당하게 정체를 까발리고 생사결을 하려는 모습입니다만, 저건 어디까지나 위장한 모습에 불과하다는 거죠."

"위장? 저자의 검술은 정파의 것이다. 대체 뭘 위장했다는 거냐?"

"당연히 청성파 소속임을 위장한 거죠."

그 말을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적운이 인상을 썼다.

"날 모욕할 셈이냐? 나는 청성장로령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장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렇겠지. 당신이 청성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건 분명할 거야."

하지만 청성에 적을 두었다고 본질조차 청성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나 네놈이, 그 청성조차 속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

사실 확신하고 던진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설사 틀리더라도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교주 천유라조차 그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단체.

"너희는 하늘을 뒤집을(反天) 생각인 건가?"

"...!!!"

적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적운의 청운적하검이 그대로 내 목을 향해 날아왔다.

'미친!'

살기가 넘실거리는 적운의 검은 절대 제압을 고려한 공격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숨줄을 끊고자 하는 살초!

쎄새새색!

대번에 주변에서 기관이 터지며 수많은 암기들이 적운을 덮쳤다.

하지만 적운은 그 모든 공격을 무시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어지간한 건 호신강기로 때우고, 치명적인 건 급소를 피해 가며 어떻게든 검초를 내 심장에 박아 넣으려 했다.

'어떻게 반응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극적일 줄이야!'

추살진이라 불릴 만큼 흉흉한 기관진식이었지만, 초절정의 고수를 어쩌기엔 모자란 모양이었다.

적운의 검이 내 심장에 들어오기 직전, 천유라가 내 뒷덜미를 잡아채 그대로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큭!"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적운의 공격을 받아쳤다.

콰아아아앙!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천유라가 내가 있는 쪽으로 쭉 밀려났다.

그녀는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겨누며 말했다.

"위험했다."

"괜찮으십니까?"

"흥,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그녀의 입가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명백한 내상의 증거.

'이거, 조금 위험할지도.'

미로추살진의 모든 힘을 가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모든 걸 쏟아부었다간 우리도 무사하지 못한다.

나는 감각을 날카롭게 끌어올리며 칼을 뽑았다.

일대일에선 당연히 저자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지만, 천유라의 보조를 맞추는 것 정도라면 가능했다.

"그나저나, 방금 네가 뭘 말했길래 저자의 태도가 바뀐 거지?"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흠, 글쎄요?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인 것 같은데요?"

"...흥, 그래. 지금은 그게 우선이겠지."

천유라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지만 내 조악한 말 돌리기를 넘어가 주었다.

"합을 맞출 수 있겠나?"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좋아."

내가 익힌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은 천유라의 천살마검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결이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뒤를 따라가는 정도는 가능할 터.

"긴장해라, 저자는 더 이상 장난칠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적운은 더 이상 우리를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청운적하검의 기수식을 다시 한번 보이며, 한 자루의 검과도 같이 기세를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온다!"

막대한 경력을 담은 적운의 검이 우리를 덮쳤다.

힘, 속도, 변화. 적운의 청운적하검은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압도했다.

하지만 힘과 변화에서만큼은 둘의 힘이 합쳐지면서 극복이 가능했다.

"오른쪽!"

천유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오른쪽으로 튀어나온 검초를 받아 내기 위해 뛰쳐나갔다.

검은 검기를 두른 내 검이 곡선을 그리는 푸른 궤적을 받아내며 그 힘을 감소시켰다.

정면으로 막을 필요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움직이기만 해도 천유라에게 가해지는 부담감은 어마어마하게 낮아졌으니까.

"이놈이!"

적운은 날 노려보면서도 천유라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1순위가 나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천유라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후읍, 흐으!"

공세를 일부만 받아냈을 뿐인데도 손아귀가 저려 온다.

하지만 괜찮다. 조력자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파파파팟!

적운이 내 방해를 떨쳐내고 천유라에게 검을 날리는 순간, 사방팔방에서 날카로운 쇳조각이 적운을 노리며 날아왔다.

"귀찮군!"

아까는 모든 걸 무시하고 일격을 날렸지만, 그 때문에 적운은 자잘한 부상을 입은 상태.

"망할 은철중 놈!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를 하다니!"

적운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날리면서 다급히 몸을 뺐다.

나는 그 탄식에 속으로 헛웃음을 내지었다.

정작 그 은철중을 죽여 버린 자가 내뱉을 말은 아니었으니까.

적운은 계속해서 우리를 몰아쳤다.

하지만 나와 사비연의 적절하게 보조하고, 무엇보다 그녀가 적운의 검에 빠르게 적응해 가면서 상황은 점차 소강상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호흡을 고른 천유라가 나를 살짝 곁눈질하며 씨익 웃었다.

"썩 괜찮군, 진여명. 여기까지 합을 맞출 수 있을 줄이야."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힘없이 답했다.

"다행이군요, 생각대로 돼서."

거의 이 각이 넘도록 적운은 우리를 어찌하지 못했다.

일대일이라면 나는 십초지적, 천유라라도 백초지적을 버티지 못했을 터.

하지만 이 특수한 환경은 우리의 목숨을 지금까지 붙여 놓았다.

"네가 쓰는 검술, 어쩐지 천살마검과 결이 비슷한 느낌인데? 교류식이 다시 열리면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당신에게 교류식은 무슨 비무대회입니까?"

나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아직 안 끝났습니다. 집중하시죠."

그 말마따나 여전히 적운은 건재한 채로 우리의 앞을 막아서고 있다.

다만, 그의 표정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이런 미친 괴물년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적운의 욕설에 공감했다.

적운의 공세 대부분을 받아내면서도, 천유라는 치명상을 피한 채 피륙에 자잘한 상처만을 허용했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허용하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조금씩 보이는군. 저자의 검."

천유라의 재능은 청성의 비전 절기의 흐름을 읽어 냈다.

흐름을 읽어 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빠른 속도라도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는 법.

적운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너희를 죽이려면 나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군."

속도와 기교가 통하지 않으면, 남은 건 하나뿐.

파칭!

적운의 검에 이전과는 격이 다른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검강(劍强)!'

이전 천유라가 내게 강기를 날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힘의 제어가 미숙한 탓에 기운이 다른 곳으로 줄기줄기 뻗어 나가던 미완성의 검강이었고.

지금 적운이 보이는 건 일체의 낭비되는 힘이 없는 완벽한 일자형의 검강이었다.

위력과 정교함은 그 차원이 다를 터.

"기관진식 때문에 가능한 큰 기술은 지양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군. 무리를 해서라도 네놈들을 죽일 수밖에."

천유라가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말로 위기로군, 진여명."

"그러게 말입니다."

보조고 나발이고 저건 힘으로 들어오는 거라 답이 없다.

흘리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대로 몸이 두 동강 난다.

천유라도 그걸 아는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도망쳐라."

"...?!"

"여기까지 온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차라리 몸을 피하는 게 낫겠지. 이 정도 시간을 끌었으면 호법원이 충분히 도착했을 텐데, 아쉽군."

확실히.

천유라가 막무가내로 돌입한 시간부터 지금까지 최소 한 시진의 시간은 벌었다.

원래라면 연락을 받은 호법원 놈들이 한참 전에 들이닥쳤어야 정상이다.

"놈을 생포하는 건 포기한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도망칠 테니 너 먼저 나가도록."

"그럴 순 없죠."

"뭐?"

"애초에 도망칠 생각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천유라를 너무 잘 안다.

그녀는 강한 자존심만큼 절대로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자를 눈앞에 두고 후퇴라는 선택지를 택할 수 없는 성격이다.

"괜히 혼자 목숨 버릴 생각 마십시오. 살아도 같이 삽니다."

"...."

천유라는 뭔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걸까?

잠깐 말문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적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합기(合氣)를 쓸 거다. 무조건 맞춰라."

"그러죠."

합기란 검기를 쓸 수 있는 자들이 서로의 검기를 융합시켜 쏘아내는 일종의 합격진이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합기는 합격진이라 부를 수는 없는 기술인데.

진법은 그 정의상 면(面)이 성립해야만 진법이라 부를 수 있지만, 합기는 면이 만들어질 수 없는, 오로지 선(線)으로만 이어지는 단순한 융합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융합이기에 힘의 충돌이 필요할 때 적합하며.

단순한 융합이기에 이종진기에 대한 위험성이 무엇보다 큰 기술이었다.

천유라가 앞으로 검을 뻗자, 나 역시 그에 맞춰 검을 뻗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적운이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합기라, 너희가 무슨 부부라도 되는 것이냐?"

움찔!

그 말에 한순간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내공을 익힌 쌍둥이. 오래 합을 맞춘 부부. 합기를 사용하려면 그런 사이는 되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진여명, 저자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물론이죠."

애초에 저걸 도발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죽어라!"

"하아아아압!"

청운의 푸른 검강이 쏘아짐과 동시에, 나와 천유라의 검은색 합기가 뻗어 나왔다.

콰과과광!

그렇게 강기와 강기급의 공격이 충돌하였고, 그 여파로 주변을 둘러싼 미로추살진의 기관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22화. 적운 (3)

"쿨럭!"

천유라의 무릎이 그대로 바닥에 닿았다.

나와 기의 흐름을 정확히 맞추는 덴 성공했지만, 초절정고수의 검강을 맞상대한 대가는 컸다.

"흐흐, 흐흐흐!"

적운의 신형은 피투성이였다.

충격파로 인한 파괴 직전에 기관진식에서 튀어나온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 낸 탓에 거의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듯했다.

하나.

"안타깝겠구나."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적운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마무리할 여력이 남아있었다.

마치 발악을 하듯 잔여 기관진이 작동하며 적운을 노렸지만, 대부분이 파괴된 기관진으론 적운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적운은 날아오는 암기들을 쳐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제 움직이지 못하나 보군."

"...."

천유라는 완전히 탈진한 듯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감싸며 적운을 노려보았다.

'끝인가?'

합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만큼 내 상태도 천유라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너희는 정말로 날 놀라게 했다. 아마 다음에 다시 붙는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지."

적운이 내 목에 검을 겨누며 비릿하게 웃었다.

"내 목숨 하나가 대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니, 감격스럽군."

적운이 눈을 부릅뜨며 그대로 나와 천유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아니, 휘두르려 했다.

콰앙!

"네이노오오오옴! 감히 누구를 건드리는 것이냐?!"

적운의 뒤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림과 함께, 그대로 전각의 입구가 박살났다.

그리고 바깥에서 거구의 중년인이 튀어나와 적운의 머리를 후려쳤다.

"컥!"

그야말로 번개 같은 기습. 원래 적운의 실력이라면 대처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바닥에 가까운 체력과 부상은 그럴 가능성을 완벽히 봉인했다.

그리고, 설사 대처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소교주님! 괜찮으십니까?!"

적운을 일격에 날려 버린 장본인은 무려 팔 척에 가까운 장신의 중년인이었다.

스스스슥!

그와 동시에 호법원의 진짜 최정예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나며 우리를 둘러쌌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천유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우…호법."

"네! 소교주님의 충신, 이 우호법이 왔나이다!"

우호법, 적면투마(赤面鬪魔) 왕천걸.

수염만 길게 기른다면 삼국지의 관운장과 닮았을 거라는 평을 듣는 신교 최상위의 초극고수.

"늦었군."

"소, 송구합니다! 자,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연락을 받았는지라!"

쿵! 쿵! 쿵!

우호법은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듯 그대로 엎드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그런 우호법을 의심쩍은 듯 흘겨보았다.

'자리를 비워? 그것도 우호법이?'

호법원의 존재 의의는 어디까지나 교주와 그 일가의 호위.

이런 상황에서 호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건 호법의 자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됐다. 애초에 우호법의 호위를 거절한 건 내 쪽이 먼저였으니."

천유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털었다. 그녀는 저 멀리 나가떨어진 적운에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자는 청성파의 장로다. 본인의 입으로 말했으니 틀림없겠지. 반드시 목숨을 붙여 모든 걸 털어놓게 해라."

"소, 소교주님. 그것이...."

"뭐지?"

"저자. 아무래도...."

"...."

우호법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극마에 가까운 그가 이렇게까지 몸 상태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천유라는 그런 우호법의 반응을 보곤 확신했다.

"이런, 제길."

문을 박살 내는 동시에 호쾌하게 내지른 일격.

그 일격에 그대로 적운의 숨줄이 끊어진 것이다.

"소, 송구. 송구합니다!"

쾅쾅쾅쾅!

우호법은 계속해서 머리를 박았다.

나 역시 우호법에게 황당한 시선을 던졌다.

'일부러 저런 건가?'

이십 년 뒤에 호법원이 통째로 배신하긴 하지만 그때의 우호법은 왕천걸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이미 은퇴하고 원로원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외총관 시절 그에 대한 평가는, 천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신 중의 충신.

하물며 지금의 그가 배신자라는 건 시기도, 상황도 맞지 않는다.

천유라는 허탈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생한 보람이 없군."

"소, 소교주님!"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에 있던 사비연과 흑비들까지 합류했다.

불타는 장원을 바라보던 천유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살짝 흠칫거렸다.

"진여명, 오늘 신세 진 건 반드시 갚겠다. 그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그녀는 마치 울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이번 작전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시작한 것.

하나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없었고, 되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면목이, 없구나."

억울함과 분함, 그리고 자괴감으로 얼룩진 눈.

옆에서 사비연이 안절부절못하며 뭐라 말하고자 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는 못했다.

어설픈 위로 한마디가 그녀의 자존심에 더한 상처를 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결국 그녀는 치료 명목으로 소마각으로 돌아갔다.

뒷수습을 위해 남은 사비연은 크게 탄식을 내질렀다.

"하아, 우리가 원한 건, 이런 결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어쩔 수 없죠.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

그 말이 사비연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진 공자는 생각보다 침착하시군요."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지는 성향은 아닌지라."

사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지나간 일에 정말 미련이 없다면 전생 같은 짓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한동안 움직이긴 힘들겠죠. 우리나 상대나."

본교 내부에 청성의 간자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한동안 광풍이 불 것이다.

적은 더더욱 몸을 사릴 테고, 본교는 정파 쪽에 눈을 돌릴 테니 그만큼 놈들의 꼬리를 잡기엔 쉽지 않아지겠지.

"특히나 소교주님은 한동안 감금이나 다름없어질 겁니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으니까요."

"그렇, 겠죠."

교주는 물론이고 이 일에 연루된 천가의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소교주의 움직임을 제한하려고 들 것이다.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한 전말을 교주님께서 아시게 될 테니, 적어도 흑점혈이 본교에서 기승을 부리는 일은 없어질 겁니다."

애초에 사비연과 약속한 표면적인 목적은 흑점혈에 대한 해결.

그 일이 곧 해결될 테니 이제 사비연이 나설 수 있는 명분은 사라졌다.

그런데 사비연은 뭔가 납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 공자는, 혹시 이런 결말을 예상하셨나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지금 당신의 말씀은, 마치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 같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결말이죠. 설마 제가 이 일을 모두 계획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건가요?"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만."

이렇게까지 나오자 사비연은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결국 소기의 목적만을 달성한 그녀 역시 별다른 소득 없이 이곳을 떠났다.

앞으로 흑점혈에 관련해서 신교의 음지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이걸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사가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달라지겠지.

즉, 사비연 역시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후우, 댁들이 앞으로도 계속 들러붙으면 내가 피곤해져서 말이야."

사실 사비연의 말에 부정은 했지만, 어느 정도 상황이 이렇게 흐르리라 예상한 부분은 있었다.

"구칠."

"예, 도련님."

마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듯, 부복한 구칠의 모습이 내 등 뒤에서 나타났다.

지금까지 내 호위인 구칠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뭐 찾은 거 있냐?"

구칠과 나를 따라온 마천진가의 호위들은 흑비들과는 별개로 적은장 내부에서 증거자료를 찾고 있었다.

"이미 자료 대부분이 소각된 상황이라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만, 죽은 적은장주의 품속에서 이런 걸 찾았습니다."

첫 합에 적운에게 목이 날아간 적은장주 은철중.

그의 시체는 호법원이 회수해 갔지만, 용케 그 전에 무언가를 빼돌리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나는 구칠에게서 쪽지 하나를 받아 들며 피식 웃었다.

"결과적으로 우호법의 트롤링이 내겐 도움이 되었다, 이거지."

"네? 트… 뭐라고요?"

"아, 그냥 혼잣말이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의아해하는 구칠에게 손을 내저으며 쪽지로 눈을 돌렸다.

[천일관(千一關) 상(相) 필살(必殺) 연(煙) 전달 요망]

'뭐지, 이건?'

은철중의 품속에서 나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란 소리다.

이 쪽지에 적혀 있는 천일관은 다름 아닌 신교의 양대 교육기관 중 하나를 일컬었다.

상(相)이나 연(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천일관에 있는 누군가를 암살해야 한다는 소리군.'

적은장이 살명대라는 암살단을 비밀리에 운용하고 있는 만큼, 은철중에게 암살 지령이 떨어져도 이상할 건 없다.

"뭐라고 써 있습니까?"

"아무래도, 놈들이 날 돕는 것 같다."

"...네?"

"천일관, 천일관이라."

어느새 내 입가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마침 잘됐군. 폐관을 대신하기엔 딱 좋은 장소야."

내 혼잣말이 이어지자 구칠이 쀼루퉁한 불만을 내뱉었다.

"도련님, 저도 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뭐, 구칠이라면 내 계획을 알 자격이 있지.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의 미소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우리, 아무래도 한동안 헤어지게 생겼다."

"늬에에?!"

***

내 예상대로 신교 하부에 흑점혈이 돌고 있고, 그것에 청성파의 인물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에 신교는 뒤집어졌다.

"감히 정파 놈들이 사파 나부랭이들이나 할 법한 짓을 본교에 저질러?!"

"천마시여, 지금 당장 청성파를 멸문시키셔야 합니다!"

장로원과 육가의 호전적인 일부는 정마대전을 주장하며 전쟁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교주 천태종은 현명했다.

"놈들이 정말로 정파인지, 아니면 정파를 가장한 다른 놈들인지는 확실하게 밝혀내야 한다."

"처, 천마시여!"

"엄한 곳에 창칼을 휘둘렀다간 큰 역풍을 맞기 마련이지. 신교의 분노는 철저하지만 정확한 곳에 쏟아져야만 한다."

교주는 일단 모든 불만을 강제로 잠재웠다.

그리고 무림맹과 청성파에 정식으로 항의서를 보냈고 사태의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사실 천태종 역시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켜 이번 일에 관련된 모든 적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돌린 건 이번에 사고를 친 소교주인 천유라의 보고 때문이었다.

자신의 딸은 이번 일에 천가 내부의 반역자와 혹시 모를 제삼세력이 엮였을 가능성을 보고하며 신중하게 움직일 것을 청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생전 처음으로 딸이 제 나이에 맞는 사춘기 소녀 같은 상담을 청했는데, 이 내용은 사적인 것이니 뒤로 넘기고....

'청성, 청성파라.'

청성파.

구파 중에서도 호방하고 남자다운 성향이 두드러지는 편이며, 소림과 함께 사마척결의 기치를 들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문파.

하나 기본적으로 도문(道門)에 명문이라는 이름 덕분에, 그 활동 자체는 상당히 신사적인 편이었다.

'유라는 그 적운이라는 자가 도저히 정파의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

구파일방이 아무리 뒷구멍으로 제 잇속을 철저히 챙긴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명분과 체면을 극도로 따지는 샌님들의 집단이다.

그런 자들이 본교에 이런 식으로 수작질을 부린다?

"좌호법."

"네, 교주님."

천태종의 부름에 좌호법, 일일천살(一日千殺) 무정(無情)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사의의 팔걸이를 살짝 두들기던 그가,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네가 알아볼 게 있다."

"명을 받듭니다."

좌호법의 대답은 언제나 짧고 확실했다.

23화 천일관 (1)

세간에 이번 사태를 밝혀낸 주인공은 소교주 천유라.

그녀는 천가의 일족이자 소교주로서 솔선수범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신교의 많은 교도들에게 칭송받았다.

그리고 나 진여명 또한 그녀를 도운 공헌자로서 당당히 이름을 알렸는데....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마천진가의 가주 진군악은, 지금 험악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천일관에 입관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쾅!

진군악은 눈앞에 있는 책상을 때려 부술 정도로 분노했다.

"네놈이 정녕 미쳤느냐? 천일관이 어디인 줄은 알고 말하는 것이야?!"

나는 진군악의 분노에도 당당하게 답했다.

"신교의 교육기관 아닙니까? 약 삼 년 동안 신교의 무사가 되기 위해 온갖 교육을 받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그런 장소죠."

"네놈은 마룡관(魔龍館)으로 들어가야지!"

진군악이 화를 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 하찮은 놈들이나 가는 곳에 왜 진가의 장남인 네놈이 들어가?!"

"...."

천일관(千日館).

문자 그대로 천 일 동안 교육을 받게 되는 신교의 인재 양성기관이다.

하지만 신교의 양대 교육기관이라 평가받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현실은 시궁창.

다른 하나의 교육기관인 마룡관에 비해 천일관의 인식은 진군악의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 녀석이 이번에 세운 공은 엄청나다. 그 하나만으로도 육마룡이 칠마룡으로 변할 수 있어!"

진군악은 마천진가의 가주이니만큼 적은장에서 일어난 진실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천유라를 보조해 초절정의 고수와 잠깐이나마 맞붙었다는 것.

아마 다른 육가의 높으신 분들도 알고 있을 거다.

"네가 마룡관으로 들어가면 대번에 모든 이목을 끌어안은 중심이 될 거다. 그리고 너 하기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널 따르겠지!"

진군악의 본심은 이거였다.

마룡관은 신교 상층부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진정한' 교육기관. 즉, 차세대 신교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그런 그들과 교류를 나눠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차후에 큰 도움이 될 터.

반대로 천일관은 마룡관을 졸업하는 그런 인재들을 뒷받침할 '현장직'과 '실무진'들을 교육하는 장소.

사실상 속된 말로 시다바리들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자존심적인 측면에서도 진군악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난 천일관으로 마음을 굳힌 지 오래였다.

"가주님, 마룡관의 기재들과 소통하는 건 여운이면 충분합니다. 굳이 저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동생인 진여운은 이미 마룡관에 입관한 상태였다.

녀석이 육마룡에 이름을 올린 것도, 마룡관 당대 기수 중에선 압도적인 일인자임을 알렸기 때문.

그 정도 입지면 굳이 내가 들어가지 않아도 인재 영입에는 큰 무리가 없을 거다.

"그게 천일관에 들어갈 이유가 되진 않는다."

진군악이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네놈은 지금 소교주와의 교류식 도중이다. 천일관은 그 특성상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곳. 천가에서 이 부분을 문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음, 만만치 않은데?

진군악을 설득하는 일이 의외로 고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 정도야 가주님이 조금만 힘을 써 주시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가주님께서 도와주셔야 제가 천일관의 인재들을 쉽게 빼 올 수 있으니까요."

"고작 그놈들을 빼 오려고 천일관에 들어간다고?"

"고작이 아닙니다."

아무리 겉으론 단순무식해 보여도 그는 육가의 가주.

진심으로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거다.

"마천진가의 위상이라면 천일관에서도 수준급의 인재들을 데려올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진국들을 데려오려면 아무리 육가라도 직접 발품을 팔 필요성이 있습니다."

"흐음."

진군악은 그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나는 은근한 어조로 진군악을 설득했다.

"마가와 패가에 흘러 들어갈 자들을 모조리 끌어오겠습니다. 절 믿어 주시지요."

진군악에게 혈룡마가와 극도패가는 역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잘 먹히는 패이기도 하다.

"진가가 당대 육가제일의 자리에 오르려면 인재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솔직히, 마룡관의 관도가 우리 진가에 올 건 아니지 않습니까?"

"크흐흠! 그건 그렇지."

마룡관에 입관하는 녀석들은 죄다 자기 가문이 있는 놈들이다. 설사 기반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검증된 최고의 인재들은 대부분이 천가로 가지 굳이 진가로 오진 않는다.

"말씀드렸듯이 마룡관에서의 인맥은 여운이 녀석만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천일관에서 차세대 진가를 이끌어 갈 놈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자신 있느냐?"

서서히 진군악의 표정이 풀어졌다.

"분명, 작년에 마가의 마철수가 천일관을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저와는 결이 다르지만 녀석도 목적 자체는 같았겠죠."

마철수는 마가의 차남이지만 진지하게 마가의 패권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장남의 견제에 막혀 마가 내부에서 세력 확장이 어려워 외부 자원 수혈을 위해 천일관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름 성공이라고 들었다.

"제가 마철수보다 못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크하하하! 그렇지!"

그제야 진군악은 유쾌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하나 정말 괜찮겠느냐? 마룡관은 단순한 사교의 장이 아니다. 분명 교육의 질은 차이가 있을 것이야."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진군악이 이런 말을 꺼낸 건 '난 마지막까지 말렸는데 네가 끝까지 우긴 거다'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그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정치적인 인간이었다.

설사 그게 부자 사이라고 해도 말이다.

"마룡관이 본가의 마공보다 더 좋은 마공을 가르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당연하지."

"결국 남은 건 실전적인 부분인데, 천일관은 마룡관과는 다르게 실전 임무에도 투입되는 만큼 실력을 늘리기엔 되레 천일관의 환경이 더 좋다 봅니다."

물론 그 '실전'에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 진군악이 그런 걸 진심으로 걱정할 리는 없지.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

"관대한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가주님."

나 역시, 진심은 어떻든 겉치레라도 감사를 표했다.

***

진군악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곧바로 천일관에 입관 신청서를 냈다.

천일관은 일반적으로 분기별 기수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분기별 정원은 약 백여 명.

이전 1분기 기수를 받아들인 지 두어 달 정도 지났으니, 이제 곧 2분기 기수들에 대한 공고가 올라올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천일관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천일관이라니, 제정신이야 형님?"

"...너도냐?"

"너도라니?"

나는 피곤한 기색으로 답했다.

"오늘 하루 나보고 미쳤냐거나 그에 준하는 말을 건넨 사람이 열이 넘는다."

"당연하지. 육가 직계가 미쳤다고 거길 가? 방계도 거길 가면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말을 듣는 마당에?"

가문의 중진들부터 일면식이 있는 다른 가문의 동년배들까지.

진가와 크고 작게 연관된 가문들의 경우 그게 정말인지 사람을 보내올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형님이 귀양을 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도 가주님에게 얘기를 듣지 못했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고."

진여운은 뭐가 불만인지 팔짱을 낀 채로 날 노려보았다.

"솔직히 형님이 알아서 가주 자리에서 멀어지겠다는 건 나로선 나쁘지 않지만, 솔직히 천일관은 아니야. 격이 낮아도 너무 낮다고."

진여운의 불만은 타당했다.

진가의 차기 소가주나 다름없는 녀석의 시선에선, 그나마 경쟁자라고 부를 수 있는 내가 겉으로나마 영락하는 모습을 보는 건 썩 보기 좋진 않겠지.

하나 진여운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었다.

"동생아, 잘 들어라."

"...?"

"천일관은 본래 이렇게까지 무시당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천일관의 창립자가 바로 천마조사님이시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 지."

사실 역사로 따지면 천일관은 마룡관보다 최소 수백 년은 앞서 있다.

"애초에 마룡관이 설립된 것도, 과거 천일관의 혹독한 실전으로 인해 상류층 자제들이 대거 죽어 나가자 그 대안으로 설립한 것이지."

그리고 천일관 역시 대규모 사망자가 일어난 이후로는 훈련의 강도를 줄여 나갔다.

그 대신 무공 이외에 실무적인 교육과정을 삽입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들을 육성해 냈지.

"내가 노리는 건, 과거의 천일관이다."

"과거라고?"

"진심으로 무공에 미친, 백전연마의 전사들을 육성해 내던 과거의 천일관. 그 교육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내 무공은 일진보할 거다. 적어도 마룡관에서 어설프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낫겠지."

솔직히 마룡관은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위 가문의 자제들이 다니는 만큼,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

내가 마룡관에 들어가는 순간, 자의든 타의든 그 거미줄 속에 얽힐 수밖에 없다.

진여운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무공에 목을 매는 거지? 가주 자리를 노리는 것도 아니라면서?"

"목적을 위해."

"그 목적이 뭐길래?"

"적어도 마천진가의 가주는 아니다."

툭!

나는 진여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동생아."

"불안하게 왜 그딴 눈깔로 날 보고 그래?"

진여운은 질식하는 표정이었다.

"강해져야 한다."

"그건 당연한 거고."

"앞으로, 큰 폭풍이 올 거야. 내가 가르쳐 준 것들 무시하지 말고 꼭 실천해라."

진여운은 그 재능에 걸맞은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마영류의 수련을 게을리해 신체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건 큰 문제점이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진여운에게 고칠 점을 여럿 가르쳤다.

녀석은 의외로 나를 고평가하는지 생각보다 순순히 내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적어도 이론적인 측면에선 난 초절정고수와 논검을 해도 이길 자신이 있거든.

내 가르침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진여운이 이렇게 물어왔다.

"형님은, 어딜 보고 있는 거지?"

"지금 그걸 네가 알 필요는 없다."

"...."

"단지, 끊임없이 정진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최대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을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미래를 알아도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던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나비효과와 변수들은 언젠간 내 발목을 잡을 거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때를 대비해 그 변수들을 막아 낼 최대한의 준비를 하는 것일 뿐.

***

천일관, 백련봉(百鍊峰).

"끄윽! 끄으으윽!"

천일관의 천팔십 번째 기수이자 이번 연도의 첫 번째 기수인 백상아(白相娥)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느려! 이 굼벵이들아!"

저 밑에서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척안의 교관이 절벽을 오르는 수련 관도들에게 일갈을 내지르고 있다.

"허벅지와 허리에 힘을 풀지 마라! 너희는 봉우리를 정복하거나, 아니면 떨어져 뒈지든가, 둘 중 하나의 미래만을 맞이할 것이다!"

천일관의 이번 기수들은 하나같이 저 밑에 있는 교관을 욕했다.

사실 이류의 무인이라도 어느 정도 체력이 있는 만큼 이런 봉우리 하나 기어 올라가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떨어지는 순간 그대로 끝이라는 점이었다.

저 지상, 관도들이 있던 자리에는 수많은 철질려와 칼날들이 바닥에 빼곡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맨바닥이었다면 어떻게든 내공으로 보호해 전신 뼈마디가 부러지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저건 떨어지면 그냥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녀는 아주 작은 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 미친 마교 놈드으으을!"

24화 천일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