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천일관 (2)
사실 천마신교 한복판에서 '마교'라는 단어를 내뱉는 건 날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백상아의 작은 절규를 귀에 담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 제 살기 바빴으니까!
"끄아아아아...."
"헉! 헉!"
주변에서 매미처럼 달라붙은 같은 기수의 관도들은 지금 타인에게 신경을 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진짜, 저주할 거야, 할아버지! 날, 이런 곳에, 던져 놓다니!"
사실 백상아는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귀한 가문의 귀한 자식이었고, 정치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선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 고생할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녀가 생각한 '조금'과 할아버지가 말한 '조금'의 간격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지만.
"반드시, 살아서, 할아버지한테, 한 방 먹여...!"
그녀가 막 백련봉의 정상에 오르려던 찰나였다.
탁!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을 댄 것은 딱 좋게 튀어나온 돌이었다.
망설임 없이 그 돌을 부여잡은 순간.
거짓말같이, 돌이 뽑혀 나왔다.
"아."
돌을 쥔 오른팔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연쇄적으로 다리 역시 지지대를 잃었다.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지며, 그녀의 신형이 절벽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나, 이제 죽는구나.
그렇게 정상을 앞두고 허무하게 인생을 하직할 뻔한 순간.
텁!
저 앞에서 두툼한 손아귀가 튀어나와 추락 직전이던 백상아의 팔을 잡아채었다.
그 손아귀는 아주 가볍게 백상아를 평지로 끌어당겼다.
"괜찮으십니까, 소저?"
손아귀만큼이나 굵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헉! 헉!"
그러나 백상아는 당장 대답할 수 없었다.
한순간 느낀 죽음의 공포가 그녀의 이성과 정신을 마비시킨 것이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한참 뒤였다.
"고, 고맙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 준 거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거한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뭘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전혀 비슷한 연배 같지 않은 중후한 음성, 이번 기수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덩치.
백상아는 살포시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산 대협은 특이한 분이시네요."
산 대협이라 불린 거구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대협이 아닙니다. 대협이라 불릴 만한 위인도 아니고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의협을 실천한 사람을 대협이라 부른다면 뭐라 불러야 하나요?"
"크흠! 소저의 금칠은 참으로 감사합니다만, 이곳에서 대협이란 말은 그다지...."
"아."
그러고 보니, 여긴 마교였지.
사실 이렇게 구원의 손길이 온 것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었다.
이곳은 상당히 삭막한 곳이었고, 사람이 죽는 건 경쟁자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는 정도로 취급되었으니까.
"조심하십시오. 방금 막 올라오려던 소저를 노리던 놈들이 몇 있었습니다."
"헉! 그, 그런가요?"
물론 대놓고 살인은 금지되긴 했지만, 아무도 몰래 밀어 버리는 건 심상치 않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협. 신세를 졌네요."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거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털었지만, 백상아는 그의 입가가 조금씩 씰룩이는 걸 확실히 보았다.
저 산 대협은 겉으로는 사양하고 있지만 의외로 '대협'이란 말을 듣는 걸 은근히 좋아하는 티가 났다.
소문에 따르면 전직 산도적 출신이랬나? 아무튼.
'진짜, 이런 곳에서 천 일을 버틸 수 있을까?'
뭐 두 달 정도 지났으니 정확히는 구백사십 일이지만, 천 일이나 구백사십일이나…는 개뿔.
강제 징집당한 군인에게 육십 일 지났으니 나머지 시간도 힘내요! 라고 해 봐라.
자다가 칼침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갑자기 그런 망상이 들 정도로 백상아는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백상아의 기분을 알아차렸을까.
거한이 그녀를 위로하듯 이런 말을 꺼냈다.
"흠, 앞으로 이런 체력 훈련은 꽤 줄어들 겁니다."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지금 제가 모시는 한 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곧 신규 기수가 들어오면 우리 기수는 이론 교육으로 빠지게 된다고요."
"아아!"
그 말에 백상아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이 빌어먹을 훈련에 학을 뗄 지경이었는데, 거한의 말은 그야말로 한 줄기 구원과도 같았다.
게다가 거한이 말하는 한 선배라는 건, 지금 천일관에서 최대 파벌을 이끌며 상급 무사의 자리가 확정된 인재가 아니던가?
그 신뢰성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앞으로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사실… 다음 기수에 엄청난 거물이 천일관에 들어올 예정이라 합니다."
"거, 거물요?"
"네, 신마육가. 그중에서도 마천진가의 초 직계라는 진여명이라 하더군요."
한순간, 백상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신마육가. 하늘이라는 천가와 함께 현 천마신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집단.
그곳의 직계라면 이런 곳에서는 그야말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귀찮아질 일인가요?"
"그, 글쎄요?"
"...."
그 반문에 거한 역시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가 이런 말을 한 건, 자신이 모시는 그 '한 선배'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귀찮아지는 이유를 헤아릴 정도로 거한의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총명한 두뇌를 지닌 백상아는 얼추 그 말뜻을 이해했다.
'그 한 선배라는 자의 입지를 단번에 몰아낼 수 있는 권력자.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곳에 오는데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아마 그 진여명이란 녀석은 지금 유배나 다름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다.
사실 자신도 지금 그런 느낌이니까.
백상아는 결심했다.
'응, 가능한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마주쳤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
천일관의 입관 신청은 무난하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청 다사다난한 과정 끝에 통과되었다.
마철수라는 선례가 있음에도 이런 잡음이 난 것은, 다름 아닌 현재 내가 소교주와의 교류식을 진행 중인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비연이 직접 진가로 찾아왔을 정도였다.
"소교주님께서 진 공자를 만나면 이렇게 물으라 하시더군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쳤냐고."
어, 음....
그 직설적인 화법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사비연은 상당히 정치적인 인물.
그녀는 무슨 말을 할 때면 직구보단 빙빙 돌려서 해석이 필요한 말을 내뱉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많이, 화났나?'
하긴 양가 상견례 중에 남자가 군대로 도망친 격이니 상대방이 빡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확답을 받아 오라 하셨습니다."
"으음."
"만약 두루뭉술하게 변명할 경우, 천가에서 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을 보낼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공식적'이라는 말에 등줄기에 살짝 소름이 올라왔다.
만약 정말로 천가에서 공식 서한을 보낸다면 천가와 진가의 관계에 금이 갔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다.
당연히 가주인 진군악이 노발대발할 건 뻔하다.
어쩌면 이번 일을 모두 백지로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지.
"일단, 제가 천일관에 들어간다고 해도 교류식이 중지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천일관의 규율이 엄중하다고는 하나, 그건 육가에겐 통하지 않으니까요."
"그것뿐인가요?"
"또 하나는, 저 스스로가 무력함을 절감했기 때문이죠."
흠칫!
그 말뜻이 무언인지, 사비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처연한 말투와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초입이라 해도 내가 절정지경에 올라 있었더라면, 그때 그리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딱히 당한 건 아닌…?"
"그 정도면 당한 거죠 뭐."
나는 진실을 언급하려는 사비연의 말을 칼같이 잘랐다.
절정에 오르면 어설프게나마 강기를 구현할 수 있다.
적운이 보여주었던 완성형의 강기가 아닌 그보다 훨씬 못한 위력이라도, 천유라와 함께 강기를 합기로 펼쳐 낼 수 있었다면 그때의 대결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을 거다.
말문을 잇지 못하는 사비연을 향해, 내가 결정타를 날렸다.
"본교는 어떤 자리든 결국엔 무력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는 곳이죠. 소교주님의 옆에 서려면 결국엔 최소한의 자격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 결의가 전해졌는지 사비연의 표정엔 작은 감탄이 서려 있었다.
뭐, 그 이후로 마룡관이 아니라 왜 천일관을 택했냐는 물음이 당연히 튀어나왔지만.
그 질문은 진군악을 설득했을 때와 비슷한 내용으로 넘길 수 있었다.
"사실, 소교주님께선 진 공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다."
으, 으응?
"공자께서 천일관에 들어가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셨죠."
천유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자존심과 책임감이 상당히 강한 만큼, 그 자리는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그럼, 그 미쳤다는 말씀은?"
사비연이 빙그레 웃었다.
"아, 그 말씀도 하셨습니다. 처음엔 크게 분노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씀을 철회하셨죠."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줬으면 서로가 좋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눈으로도 욕할 수 있다는 걸 사비연에게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내 이런 노력은 사비연에겐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 공자와 소교주님은,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건 또 뭔 개소리….
"소교주님 역시 자신의 모자람을 크게 자책하셨죠. 이번 기회에 폐관에 들어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일로 그녀는 한동안 소마각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세운 공과는 별개로, 정말 죽을 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뭐, 한동안이라도 천유라가 이번 일에서 빠진다면 나로서도 좋....
"그리고 폐관에서 나오면 서로의 성취를 비교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
꿀꺽!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성취를, 비교하자고?
날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약관도 안 된 나이로 강기를 다루는 재능인데, 이번에 얻은 성취로 폐관에 든다면 얼마나 괴물이 되어 나올까?
그때는 정말 청성파의 장로라는 적운조차 일대일로 때려잡을지도 모른다.
"저 역시 이번 일에 큰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저도 진 공자에게 지지 않을 테니 서로 힘내 보도록 하죠."
지금 사비연의 말은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시한부 인생이 되어 버린 내 처지를 저주할 뿐.
25화 천일관 (3)
무옥패(霧獄狽) 조진상은 일선에서 물러나 십 년째 천일관의 관주직을 맡은 노년의 무인이었다.
원리원칙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일 처리에 예외를 두지 않는 성격.
그 성격이 무공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중원에선 철혈마군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유명한 전대의 노고수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이번 일만큼은 절대로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후우!"
팔짱을 낀 채로 긴 한숨을 내쉬는 천일관주.
그의 눈앞엔 어느새 집합한 수많은 교관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관주, 이번 일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부관주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 봤지만 천일관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백지 문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작게 말끝을 흐렸다.
"특혜라."
천일관주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이 각 전만 해도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던 한 거물의 존재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수라왕 놈."
움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교관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유배를 보내도 제 새끼라 이건가? 내게 그런 자리를 권할 정도로?"
"과, 관주."
"그렇다고 거절하면 날 가만히 두지 않겠지."
천일관주는 지난 십 년간 숱한 청탁을 받아 왔다.
개중엔 무시할 수 없는 신교의 고위층들도 즐비했지만, 그들의 청탁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나와 척질 정도로 아끼는 인재가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아끼는 녀석들이면 천일관이 아닌 마룡관으로 보내거나, 그게 아니면 곁에 끼고 가르쳤을 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육가 직계, 그것도 수라왕이 직접 찾아와 특혜를 요청할 정도의 인사라면 천일관주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눈앞에 '마룡관주'라는 자리가 아른거린다면 더더욱.
-언제까지 천일관에서 썩어 있을 생각이오? 당신도 은퇴하기 전에 큰물에서 놀아 봐야 하지 않겠소?
-큰물이라고?
-내후년이면 마룡관주가 은퇴해 자리가 비게 되지. 난 그 자리에 천일관주의 이름을 장로원에 올릴 준비가 되어 있소만.
-...!
한직이나 다름없는 천일관주 자리와는 다르게, 마룡관주의 자리는 그야말로 요직 중의 요직.
차기 신교의 지도층이 될 아이들을 관리하는 자리이니만큼 그 끗발이 어마어마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마룡관주란 자리는 더 나아가 '장로원'에 입성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출셋길 중 하나였다.
'장로원… 장로원이라.'
별다른 욕심 없이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온 천일관주라고 해도 장로원이란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장로원.
사실상 천마신교 권력의 정점.
신마육가가 신교를 쥐고 흔든다고는 하지만, 그 권한은 바로 장로원의 결정에서 나온다.
육가의 가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상위 번호의 장로는 언감생심이라고 해도, 하위 번호 장로만 해도 호법과 함께 평신도가 오를 수 있는 최종 종착지나 다름없다.
고작 아들의 편의 하나를 봐주는 것만으로 그 자리로 도달할 가능성을 얻다니.
사실상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최고의 기회였다.
'수라왕씩이나 되는 자가 내게 기만질을 할 리가 없지. 그런데, 이럴 거면 왜 굳이 아들을 이곳으로 보냈지?'
그것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던 천일관주가 결론을 내렸다.
"예외는 없다. 마가의 차남 때와 같이 똑같이 대하도록."
"과, 관주님!"
"진심이십니까?"
교관들이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천일관주는 단호했다.
"내가 이 나이 되도록 권력을 탐해 봐야 뭔 소용이냐? 내 나이가 이미 고희(古稀)를 넘었거늘."
"수라왕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마철수 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땐 혈룡마가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지 않았습니까?"
"시끄럽다."
쾅!
천일관주가 책상을 내려치자 대번에 주변에 조용해졌다.
"뒷감당은 해도 내가 한다. 너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그, 그래도...."
천일관주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수라왕은 무섭고 나는 무섭지 않나 보지?"
교관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아, 아닙니다!"
천일관주는 군(君)의 칭호를 받은, 신교를 대표하는 극마의 고수.
아무리 수라왕의 권세가 대단하다 해도 천일관주 또한 어느 정도 정치력이 있는 자다.
교관들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낸 천일관주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부관주만 남고 모두 돌아가서 일들 봐. 다음 기수 받을 준비 차질 없이 진행하고."
"예, 예! 관주님!"
그렇게 교관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뒤.
"어떻게 생각하나?"
관주의 물음에 부관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한 건 수라왕의 의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마가와 패가를 넘어서고자 하는 수라왕의 욕망은 신교 내에선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장남이라는 최상의 '패'를 굳이 천일관에 처박을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둘 중 하나겠군."
천일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의 뜻이던가, 아니면 진여명이란 애송이의 뜻이던가."
"수라왕이 이렇게 신경을 쓸 정도면 전자일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렇겠지. 최근 소교주와의 교류식은 꽤나 유명했으니."
장남이라는 신분임에도 일찌감치 도태되어 차기 소가주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긴 얼간이.
하지만 최근 진행된 소교주와의 교류식에서, 마가의 사남과 함께 살아남았다는 건 꽤나 의외이긴 했다.
"얼마 전 소교주와 함께 사고를 친 일 때문일까요? 소교주가 그 일로 근신 처분을 받지 않았습니까?"
"연좌제라면 이해할 수 있어. 문제는, 왜 마룡관이 아니라 천일관이라는 거지."
천일관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벌은 아니야. 수라왕의 요청은… 지금까지 받은 청탁과는 결이 다르다."
"결이라고 하시면?"
"훈련을 빼 달라던가, 성적을 좋게 달라거나, 위험에 노출하지 않게 해 달라 그런 게 아니야."
되레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 놓고 무공을 수련할 수 있게 자잘한 편의를 봐달라는 것에 가까웠다.
"적어도 제대로 배울 생각인 건 확실한데...."
그때, 천일관주의 뇌리에 가능성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본류(本流)를 노리고 있나?'
변형된 현재의 교육과정과는 다른, 강력한 마인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본류의 체계.
아직 천일관에는 그 교육과정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규칙이 남아있긴 했다.
이젠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는, 녹이 슬다 못해 풍화되어버린 규칙이지만 육가의 직계라면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의중을 알아봐야겠군.'
수라왕과의 거래와는 별개로,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들어왔다면 차라리 쫓아내는 게 되레 후환이 적었다.
정말로 무극(武極)을 추구하는 별종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로 자신의 영역에 기어들어온 망종인지는.
한번 확인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
깊은 새벽.
천일관 내부의 어딘가.
소등시간이 철저한 천일관에서 일개 관도가 기숙사를 나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게 가능한 건 오로지 둘 중 하나.
관도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입지를 구축했거나.
교관 중에서 뒤를 봐주는 자가 존재하거나.
지금 기숙사에서 빠져나온 존재는 그 두 가지 모두에 부합한 인물이었다.
그 관도는 저 어둠 너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건 지양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무리 저라도 눈치가 좀 보이는데 말입니다."
곤란하다는 내용과는 정반대로 관도의 말투는 상당히 유쾌했다.
어둠 너머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이령(二令). 상부에서 최우선적으로 내려온 지시 사항인지라."
"최우선이라. 그게 다년간 이어진 내 임무를 방해할 정도입니까?"
검은 그림자는 서늘하게 변한 관도의 태도에 침을 삼켰다.
무공으로 따지면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저 이령은 '조직' 내에서도 최상위 간부의 총애를 받는 차기 간부 후보.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의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송구합니다. 원래라면 적은장 내 살귀들에게 명령이 내려갔지만...."
"갔지만?"
"그들이 소교주와 엮이면서 전멸한 탓에, 목표 대상과 가장 가까운 이령에게로 명이 옮겨졌습니다."
"아아, 그 얼간이들 말이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령이라 불린 관도의 기세가 대번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암살 대상이 누구길래 바쁜 나날을 보내는 내게까지 온 것이죠?"
"그자는...."
암살 대상에 대한 정체가 이령에게 전음으로 전달되었다.
"하!"
그리고 그 정체를 듣는 순간.
"하하! 하하하하!"
이령은 미친 듯이 웃어재꼈다.
"이, 이령."
이령의 광소에 괴인은 누군가가 이 밀담을 알아차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령의 유쾌한 웃음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후후,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자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 둘째치더라도...."
이령의 눈이 즐겁게 일그러졌다.
"그자는 아주 오래전에 일령(一令)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들어온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선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 다만, 상부는 회유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좋아요, 좋아. 일령의 실수를 내가 수습한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령은 이 상황이 진심으로 유쾌했다.
만약 이 일을 자신이 깔끔하게 해결한다면?
어쩌면 일령과 이령의 위치가 뒤바뀔 수도 있다.
욕망을 불태우는 이령을 향해, 검은 그림자가 다급히 말했다.
"다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마천진가의 장남이 이번에 천일관에 입관한다는 소문이 퍼진 만큼, 시간을 끌면 어떤 변수가 생겨날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아아, 알고 있어요."
이령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 소식은 오히려 호재인데요? 모두의 관심과 시선이 그놈에게 쏠릴 테니, 오히려 움직이기엔 더 낫겠죠."
"그렇, 긴 합니다만."
"뭐, 그 진여명이란 놈이 암살 대상과 붙어먹는 게 아닌 이상 딱히 변수랄 건 없잖아요? 기수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데 말이죠."
이번에 암살 대상으로 지정된 자는 적어도 그가 알기론 신교에선 별다른 연줄이 없었다.
그러니 천일관 같은 곳에 박힌 것이겠지.
"걱정 마십시오. 교관인 당신도 알다시피, 이곳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누구 하나 묻어 버리기엔 최적의 장소잖아요?"
천일관은 본교의 일반적인 환경과는 동떨어진 폐쇄된 사회였다.
"상부에 전해 주세요. 깔끔하게, 그리고 뒤탈 없이 처리하겠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검은 그림자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후후후, 좋은 기회가 왔군."
이령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일령. 언제까지 내가 네 뒤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일령과 이령은 어렸을 적, 조직의 손에 거두어져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길러졌다.
같은 무공을 익히고 동등한 성과를 내었음에도 일령은 자신보다 언제나 앞에 있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일령을 거둔 존재가 자신을 거둔 존재보다 더 서열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이 이령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26화 천일관 (4)
천일관에 입관 신청을 하고 약 한 달이 지났다.
몇몇 잡음이 있었지만 입관 신청은 무난히 통과되었고, 결국 올해 두 번째 기수로서 천일관의 입관이 결정되었다.
"흐허허헝! 도련님, 꼭 가셔야만 합니까?!"
"이미 결정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질질 짜고 있냐?"
"그야 저와 도련님은 한 몸이니 그렇죠!"
"소름 끼치는 개소리는 그만하고. 내가 시킨 거나 잘해, 안에 들어가서도 만날 일이 많을 테니까."
"그래도오!"
떨어지기 싫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구칠의 머리를 쥐어박고, 나는 다른 신입 관도들과 함께 천일관의 입구를 통과했다.
'말은 들었지만, 정말 더럽게 외진 곳에 있군.'
천일관은 엄밀히 말하면 십만대산의 영역 바깥에 존재했다.
거대한 봉우리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땅덩어리에 위치해 있으며, 그마저도 진법으로 가려져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천일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둘씩 입구를 통과하는 동기들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흠, 수준은 몰라도 눈빛은 다들 나쁘지 않은데?'
마룡관과 비교해 처진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신교의 정식 교육기관.
추천서라도 없는 이상 평신도는 이곳에 발을 내딛지도 못한다.
저들 모두가 누군가의 기대를, 질시를, 혹은 의무를 어깨에 지고 들어왔을 터.
'눈에 차는 놈이 있다면 좋겠군.'
나는 입관식이 열리는 장소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
"천일관에 입관한 걸 환영한다, 제군들."
백여 명에 달하는 신입 관도들과, 또 백여 명에 달하는 교관들.
이 많은 인원이 모인 자리의 가장 상석에서, 가면을 쓴 천일관주가 당당하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옥패 조진상! 신교에 스무 명도 안 되는 극마의 고수 중 하나라지?'
내가 내총관직에서 활동할 땐 이미 은퇴하다 못해 노환으로 땅에 묻힌 자였다.
"흐흐흐, 눈빛이 다들 똘망똘망하군. 아주 보기 좋아."
백여 명의 인원을 눈앞에 두고, 천일관주는 갑자기 음침한 웃음을 흘려 댔다.
'...뭐지?'
신교를 대표하는 절대고수라기엔 상당히 가벼운 언행.
신입 관도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잘 들어라, 애송이들아."
화악!
한순간, 분위기가 백팔십도 뒤바뀌었다.
찌릿! 찌릿!
천일관주에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살기와 투기가 단번에 신입 관도들을 휘어잡았다.
'엄청난 살기로군!'
내 수준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목각인형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을 거다.
"너희들은 모두가 무언가 야심을 품고 이 천일관에 들어왔겠지."
당연한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졸업률 이 할에 불과한 이곳에 굳이 발을 내밀지 않았을 테니까.
"하나 이곳 천일관은 교육기관이기도 하지만, 신교의 철칙인 약육강식이 무엇보다 강하게 적용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척!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무복을 입은 수십의 인원이 천일관주의 아래에 일렬로 정렬했다.
"너희의 선배들이다. 적게는 한 기수에서, 많게는 네 기수 정도 위에 있는 녀석들이지."
그 수는 약 오십.
천일관주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길어야 일 년 먼저 들어온 녀석들이지만, 뭔가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차이?
바짝 오른 날카로운 감각이 저 선배들을 훑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차이점을 입에 내뱉었다.
"상처."
또 하나.
"눈빛."
"호오오?"
작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천일관주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정답이다. 어디 출신인지는 몰라도 꽤 쓸 만한 눈을 가진 녀석이 있었군."
천일관주는 내가 진여명이라는 걸 모르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날 칭찬했다.
"그래, 고작 반년에서 일 년 사이지만, 이 녀석들은 벌써 두 번 이상 목숨을 건 실전을 겪은 녀석들이다."
그 실전은 천일관 내부가 아닌 엄연한 무림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살아남아 큰 성취를 이루었지."
마치 이들이 너희의 미래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성취를 바탕으로, 이들 중 일부는 최소 십칠당 이상에 들어가는 게 보장되었다."
"...!"
십칠당이라면 내당과 외당을 포함한 신교의 실무를 처리하는 핵심적인 조직을 일컬었다.
그 말인즉, 눈앞에 저들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그 이상도 노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살아남아라.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너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천일관주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몇 마디의 말만으로 아주 간단하게 끝난 입관식.
나는 천일관주의 뒤를 따르는 선배 기수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사지를 뛰어넘어 한 꺼풀 벗은 느낌은 나긴 하는데.'
다만 저 정도라도 육가라는 문턱을 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
'뭔가 더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놈 어디 없나?'
그렇게 선배들의 면면을 살피던 그때.
'어?'
저들 중, 유독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장한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장한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저, 저자, 설마?'
평균 연령이 약관 전후인 천일관에서 딱 봐도 이립은 넘어 보이는 삭은 외모.
그리고 연인 장비가 생각나는 산도적 같은 턱수염.
기억보단 조금 젊긴 하지만, 그래도 저 전체적인 인상은 그대로다!
'산도전 대주! 저자가 왜 여기에?!'
신교 외곽지역 담당 부대인 사마대(四魔隊) 중 하나.
풍마대(豊魔隊)의 대주, 무혈풍뢰(無血風雷), 도살도(屠殺刀) 산도전!
'산도전이 이 시기에 천일관에 있었나!'
산도전이 천일관 출신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몰랐을 뿐.
'대박이다!'
산도전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룡관이 아닌 천일관 출신이면서, 그 한계를 깨고 신교 주력부대, 삽심사마대 중 하나인 풍마대의 대주 자리까지 올라간 기린아!
천일관이 아무리 빠른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준다고는 하나, 마룡관 출신들과 비교하면 태생에서 비롯된 고점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하나 산도전은 그 몇 안 되는 천장을 부수고 대주 자리까지 출세한 인물.
즉, 당첨이 보장된 복권이나 마찬가지다!
산도전을 바라보는 내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다른 놈은 몰라도 당신만은 반드시 데리고 돌아간다!'
오싹!
한 신입 관도 하나가 자신을 탐욕스럽게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산도전은 갑자기 올라온 한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오한인가?"
***
그렇게 천일관 입관식이 끝난 뒤.
다른 이들이 기숙사를 배정받을 때,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대로 천일관주의 앞으로 불려 나갔다.
"호오? 자네가 진여명이었나?"
"천일관주를 뵙습니다."
천일관주는 아까 자신이 칭찬했던 꼬맹이의 정체가 나였다는 것에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눈썰미가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네가 정말 그 진여명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그는 '아무래도 진가 출신들은 덩치가 좀…'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 이곳 천일관에 대한 느낌은 좀 어떤가?"
"웅장하더군요. 천혜의 험지 안에 지은 요새와도 같았습니다."
천일관은 애초에 천마신교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팔대마봉에서도 수백 리 이상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위치상으로는 감숙성 최북단. 거의 신강과 외몽골에 인접한 지역에 꼭꼭 숨겨져 있었으니까.
"그렇지. 이곳은 신교의 핵심적인 인재들을 육성하는 곳이니만큼 보안은 오대전 못지않다네."
천일관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런 만큼 이곳에선 예외란 존재하지 않지. 한번 입관한 관도는 무조건 셋 중 하나야. 천일을 완전히 채우거나, 그것도 아니면 낙오자가 되어 퇴출당하거나."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씨익 웃었다.
"죽어서 나가거나."
나는 천일관주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전 훈련에 있어선 딱히 특혜 따위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그대의 부친이 꽤 섭섭해하겠군."
"좀, 화가 많이 나셨긴 했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군악이 마룡관주의 자리를 제시하면서까지 내 특혜를 요청한 건 나로서도 의외의 일이었다.
사실 힘을 써 준다고 해도, 가볍게 서신 하나 보내는 정도로만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눈앞의 천일관주가 그 제안을 걷어차 버린 건 더더욱 의외였다.
"부친의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당사자인 제가 가만히 있으면 그분께서도 딱히 움직일 명분이 없으니까요."
"진심인가?"
"네, 관주님께 해가 되지 않도록 잘 처신하겠습니다."
그 말이 의외인지 천일관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군. 그 마가의 차남 놈은 꽤 건방졌는데 말이야."
"천하의 철혈마군께 무례를 범할 정도로 제 간이 비대하진 않습니다."
천일관주의 공식적인 별호는 무옥패(霧獄狽)였지만, 그는 정파에서 지어 준 철혈마군이라는 별호를 더 좋아했다.
그 아부 한마디에 천일관주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재밌는 놈이군. 입을 놀리는 것도 마음에 들고."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제법 놀랐다.
"원하는 게 있느냐?"
"...!"
"당연한 말이지만 천일관 바깥으로 무단외출 같은 건 안 된다. 다만 그 외에 있어선 어느 정도 편의를 봐줄 순 있지."
나는 씨익 웃었다. 준다는 걸 사양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편의를 봐주신다면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만?"
"교류식에 관련된 것만큼은 예외로 둬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천가의 행사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으음!"
천일관주가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라도 천가의 행사를 거스를 순 없었다. 그건 즉 반역을 의미하는 거니까.
"그건, 어쩔 수 없군. 그래서, 그 외에는?"
천일관주가 이렇게 계속 묻는 이유는 하나일 거다.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
나는 과감하게 그 목적을 꺼냈다.
"본류(本流)를 개방시켜 주십시오."
"허!"
"초대 천마조사께서 측근을 단련시키기 위해 만드셨다던 그 본류의 위대함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천일관주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맹랑하군.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떠드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천일관주가 내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현재 천일관의 졸업률은 약 이 할 정도다. 사망률은 약 이 할. 나머지 육 할은 기준에 미치지 못해 퇴출당하고 있지."
"...."
"하나 이백여 년 전까지 시행되었던 본류 천일관의 졸업률은 고작 오 푼이다. 그리고, 사망률이 몇인지는 아나?"
나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구 할 오 푼 전체. 본가의 정보력으로 확인한 사항이죠."
당시의 천일관에는 퇴출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끝까지 살아남아 졸업하든가, 아니면 시체가 되어 나가든가.
"그걸 알면서도 도전하겠다고?"
"네, 저는 반드시 강해져야만 합니다. 본류는 그걸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죠."
"...너는 마천진가의 가주가 목적이더냐?"
노골적인 질문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괜히 두루뭉술하게 말해 오해를 사는 건 좋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목표하는 게 있을 뿐."
"흠!"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천일관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뭔지는 몰라도 꽤 절박해 보이는군."
나 역시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나름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다음에 있을 소교주와의 교류식에서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농담으로 들리겠지만 정말 농담이 아니다.
적어도 무(武)에 있어서, 소교주 천유라는 절대 타협이라는 걸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거기다 수틀리면 강기를 날려 대는 년인데 봐줄 리가 없지.'
급사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이건 이유 중 하나일 뿐이고.'
생각보다 일찍 반천회라는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
그런데, 고작 꼬리를 잡는 데 초절정 고수가 출몰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무력의 향상이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천일관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굳이 도전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감사합니...."
"단."
천일관주가 내 말을 잘랐다.
"혼자서는 안 된다."
27화 천일관 (5)
혼자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본류라는 건 다수를 위해 설계된 곳이다."
천일관주가 오른쪽 손가락을 모두 폈다.
"다섯. 정확히는 너까지 여섯 명을 모아 와라."
여섯 명이라, 무슨 의미인지 알겠군.
"본류의 훈련은 기본적으로 육인 일조로 이루어진다. 왜 육 인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마육가(神魔六家)."
"그래, 천일관은 본래 천마조사께서 자신의 측근이자 육가의 초대 가주들인 육대마신의 훈련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 전통이 본류 천일관의 전통으로 내려왔지."
다만, 안타깝게도 육대마신을 훈련시켰던 당시의 기관진식이나 훈련 방법들은 현재로선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본류라는 건 그 당시의 것들을 조금이나마 흉내 낸 것일 뿐.
그러면서도 통과율이 일 할 미만이라는 건, 그만큼 위험하고 힘든 일일 것이다.
"기한은 반년이다. 반년 안에 다섯 명을 모아와라. 뭐, 육의 배수라면 그 이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이상.
이것이 말하는 뜻은 명확했다.
"그 이상이라면, 제가 천일관의 인재들을 빼 가도 상관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천일관주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어차피 그 목적도 있지 않았더냐?"
"대놓고 허락하실 줄은 몰랐죠."
"마가의 차남이라는 선례가 있는데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역시 마철수는 졸업 이후 이곳에서 대량의 인재들을 빼낸 것 같았다.
"게다가 어중간한 곳도 아니고 육가라면 딱히 상관하지 않지. 출셋길이 열린 셈이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다.
시작부터 육가에 배속된다는 건 설사 문지기라 해도 경쟁자보다 최소 몇 단계는 위로 건너뛴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하나, 이것들은 모두 자네가 천일관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성립이 된다."
천일관주의 눈은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것 같았다.
"천일관의 수련은 혹독해. 그 마가의 아이도 첫 일 년은 그냥 죽은 듯이 지냈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을 해 놓고 고작 반년의 시간을 준다는 건 그냥 놀리는 말과도 같지 않은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와 천일관주의 눈이 마주쳤다.
"제게 인재를 빼 갈 재량권을 주신 것. 반드시 후회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신교 곳곳에서 왜 사람이 없냐고 천일관주를 향해 아우성칠 것이다.
"크하하하! 기대하지!"
천일관주는 유쾌하게 웃어 재꼈다.
***
내가 기숙사를 배정받은 건 이미 다른 인원의 배정이 끝난 뒤였다.
교관의 안내를 따라 기숙사 건물들을 가로지르는 사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여성 무인들이 많군.'
강함에 남녀를 따지지 않는 천마신교는 특성상 여고수들의 비율이 상당한 편이었다.
육가에 준하는 최상위 가문 중에서는 아예 모계 사회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존재할 정도.
나는 뜬금없이 떠오른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며 피식 웃었다.
'여고수에게 껄떡대다가 신체 하나 날아간 놈들이 수두룩했지?'
내총관 시절, 심심하다 싶으면 이런 사고들이 끊이질 않고 보고서에 섞여 들어왔다.
한 마인이 거시기에 소수마공을 적중당해 씨앗은 물론 아랫배의 단전이 깨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 무인은 이후 동자공을 수련해 무공을 되찾았다나? 뭐 어쨌든.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군.'
천뇌전에게 실권을 빼앗긴 탓에 이런 사소한 것만 처리하던 나날.
'한번 살펴보고 괜찮은 자질이 있으면 포섭해 볼까?'
이번 이 분기 기수의 총인원은 아흔여덟 명. 그중 남성 관도가 예순여섯 명에 여성 관도가 서른두 명이라고 들었다.
'그 패가의 쌍둥이나 사비연 정도의 자질은 바라지 않아. 정말로 확실한 물건들로만 두어 명 건질 수 있다면 성공이다.'
다만 천일관 관도들 중에서도 진가가 아닌 다른 육가의 지원을 받고 들어온 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아무리 진가의 위세를 빌린다 해도 그런 걸 고려하면 제대로 건질 수 있는 건 몇 되지 않을 거다.
덜컥!
배정된 제 일 기숙사 문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 시선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그리고 그나마 들려오던 소리가 확 사그라들었다.
"지, 진여명."
"마천진가...."
그나마 내 정체를 아는 몇몇만이 수군거릴 뿐,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지정된 자리에 가자마자 근처에 있던 녀석들이 알아서 거리를 벌려준다.
'뭐, 앞으로 편하긴 하겠는데.'
마치 동물원에서 관찰당하는 동물과도 같아 기분이 썩 편치는 않았다.
그때,
"마천진가의 진여명."
침구에 걸터앉아 있던 내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
누군가가 내 앞에 서서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 적의에 비해 상대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작았다.
'뭐지, 이 녀석은?'
나이는 열다섯 남짓일까? 딱 봐도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은 소년이다.
이렇게 선명한 적의를 보일 정도라면 육가에 원한이 있거나, 혹은 육가의 관계자라는 뜻.
"내 이름은 마진성이다."
"혈룡마가?"
마가 특유의 장포가 아닌 일반 무복이기에 파악하는 게 늦었다.
"그렇다! 네놈이 비겁하게 수를 써서 부상을 입힌 마철수 형님이, 내 육촌 형님이시다!"
"호오?"
나는 마진성이라 소개한 소년을 유심히 살폈다.
직계인 마철수의 육촌 사이라면 그래도 방계로선 어느 정도 입지가 있을 터다.
그런데도 천일관에 들어왔다?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혹은 나처럼 자진해서 들어왔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지?"
"딱히, 그저 내 존재를 네놈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마진성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내게 선전포고를 해왔다.
진여운처럼 덩치가 큰 녀석이 저러면 좀 위협적이겠지만 저렇게 쪼끄마한 놈이 저러면 그냥 귀여워 보일 뿐이다.
"뭐, 기대하지."
"뭐, 뭣?! 할 말은 그게 다냐?"
"단데?"
"...."
내 김빠진 태도에 녀석은 이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아직 치기만 있는 어린 녀석인 탓에 아직 대화를 길게 끌고 갈 기술은 없는 녀석이었다.
'저놈을 통해 마가의 상황을 좀 알 수 있으려나?'
***
천마전(天魔殿), 소마각(小魔閣).
신교 구마각 중 하나인 이곳 소마각에는 이른 아침부터 검은 돌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검 한 자루로 일으켰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칠고 사나운 힘.
그 힘을 발현한 당사자인 소교주 천유라는, 마지막 초식을 거두며 기수식으로 돌아왔다.
"후우!"
한차례 검무를 끝낸 천유라가 심호흡을 내뱉었다.
연무장 바닥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 오로지 여파만으로 이런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건, 천유라의 실력이 원숙한 절정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던 교주 천태종은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직 멀었다."
천태종의 평가는 냉혹했다.
"초식의 연계는 물론 내기의 순환도 매끄럽지 않아. 특히나 중천혈에서 성회혈로 이어지는 부근에서 기의 제어가 원활하지 못하구나."
그 말을 곁에서 지켜보던 사비연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수라면 움직임의 허점 정도는 충분히 잡아낼 수 있다.
하지만 내부 기의 흐름까지 관조하면서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재주가 아니었다.
침묵하는 천유라를 향한 천태종의 말이 이어졌다.
"천마신공의 패도적인 기운을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네 몸이 소화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나, 적어도 천살강기(天殺强氣)를 온전히 사용했더라면 고작 청성파 장로 따위에 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그게...."
"아직도 마성(魔性)에 빠지는 게 두려우더냐?"
"...."
"네 손으로 비연이나 그 진가의 아이를 죽일 것 같아서?"
천유라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사실 마성에 빠진다는 건 일반적으로 주화입마를 일컬음이지만, 천마신공의 소유자들에겐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유라야."
"네, 교주님."
"천마조사께서 본교를 세우시고 벌써 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천태종은 뒷짐을 진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조사를 받들던 육대마신들이 육가를 세우고 천 년, 그들은 지금 이 신교를 쥐락펴락하는 위치가 되었지."
"그게 왜 가능했겠느냐?"
천유라가 곧장 대답했다.
"천여 년 동안 배출해 온 수많은 혈족의 힘입니다."
"맞다. 정확히 봤구나."
천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시대에 와서 육가에서 직계라 부를 수 있는 이는 한 가문에 못 해도 백여 명은 존재한다. 물론 계승권은 별개겠지만 직계로 취급되는 이들의 수는 그렇지."
그들 대다수가 가문 안팎으로 활약하며 신교의 중책을 역임하고 있다.
"하나 천가에서 직계라고 한다면 오로지 너와 나만을 뜻한다. 천가의 인원수가 다른 육가에 크게 뒤지지 않음에도 그렇지. 그게 왜 그런지 아느냐?"
천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천태종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교주님과 저만이, 천마신공의 적합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하다."
천가라고 해서 무조건 천마신공을 익힐 수 없다.
천가의 혈족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그 적합성을 인정받은 자만이 천마신공을 익힐 수 있다.
그리고 그 천마신공을 익힌다는 건 곧.
"유라야, 너는 천마(天魔)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천마.
한 세대에 한 명이 아닌, 여러 세대를 거쳐야 간신히 한 명을 배출할 수 있는 절대자의 이름.
초대 천마 조사 이후 천여 년이 흐른 지금에서도, 그를 제외하면 고작 세 명만을 간신히 배출해 냈을 뿐이었다.
하나 지금 이번 세대에서.
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대를 이어 천마가 탄생할 가능성이 피어났다.
"그러니 네 자질을 의심하지 말거라."
천유라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부드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질책이라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마성에 휘둘리는 건 범인들이나 있는 일. 우리 같은 이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성을 휘어잡아야 한다. 설사 그 결과, 소중한 걸 잃게 될지라도."
그것은 천마는 물론, 천마가 되지 못한 천마신공 연성자들 모두에게 씌워진 굴레였다.
"명심, 하겠습니다."
"그래,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질책이 끝난 천태종은 분위기를 환기할 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비연아. 진가의 그 소형제가 정말로 천일관에 들어갔다지?"
"네, 교주님."
질문의 형식이지만 사실상 확인이나 다름없었다.
십만대산 내에서 교주인 그가 모르는 비밀은 거의 없으니까.
"쯧쯧, 대충 무슨 생각인진 알 것 같구나."
"...."
"유라 널 피하는 거겠지."
천유라의 얼굴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무룩했던 게 거짓말같이, 어느새 그녀의 표정엔 일말의 살기까지 일렁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사비연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소교주님이 타인의 일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다니?'
오로지 무(武) 하나만을 바라보며 일념으로 전진하던 분이었다.
그나마 교류식 역시 교주의 권고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일 뿐.
진가와 마가가 살아남았다는 점에선 의외의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곧 흥미를 잃을 거라 생각했다.
"농담이란다."
그 사실을 천태종 역시 눈치챘는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여명, 진여명이라. 그 아이가 그리 마음에 들더냐?"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네 말과 태도는 사뭇 다르구나."
말문을 잃은 천유라를 향한 천태종의 표정이, 어느새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물론 언젠가 너는 부군을 들여 천가의 후사를 이어야 하겠지. 하나 적어도 지금은,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말고 경지의 완성만을 머릿속에 집어넣거라."
그 표정은, 지금까지 천유라나 사비연이 봐 왔던 어떤 표정보다도 이질적이었다.
"네가 천마신공을 완성하는 날, 그 누구도 너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교주님."
천유라와 사비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뭐지? 교주님은, 진 공자를 마음에 들어 하던 게 아니었던가?'
사비연은 천태종이 보여주는 모습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것보단 오히려....'
그 어떤 가치보다 소교주가 무공을 완성하는 데 중점을 두는 느낌이다.
'교주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사비연은 물론 천유라까지 혼란에 잠겨 있을 때.
"[그들]은, 절대로 만만치 않단다."
"...!!"
천태종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폭탄을 떨어뜨렸다.
28화 천일관 (6)
천일관 입관 이후, 첫날이 밝았다.
"모두 이것을 받아라."
자신을 천일관의 상급교관 장득수라 소개한 민머리의 중년인이 연무장에 나타났다.
그를 통해 나를 포함한 아흔여덟 명의 관도들은 빠짐없이 책자 하나를 지급받았다.
그 표지에 적혀 있는 제목은 '인온마공(氤氳魔功)'.
'이건?'
모두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
장득수가 씨익 웃으며 쳤다.
"양강 계열의 기초적인 마공이다. 모두 빠짐없이 익히도록."
"이걸, 익히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대번에 반발이 튀어나왔다.
"교관님. 이곳에 입관한 관도들은 전부 각 가문이나 유파에서 따로 익히고 있는 마공이 있습니다만."
"그래? 그러면 익히지 않아도 된다."
"네?"
장득수의 표정에 비웃음이 걸렸다.
"몇 달 뒤에 얼어 뒤지고 싶으면 익히지 않아도 상관없지. 그래, 익히든 말든 그건 자유다."
"...."
반론을 펼친 관도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장득수는 반항적인 눈빛을 보이던 관도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금이야 날씨가 훈훈하니 버틸 만하겠지. 하지만 이곳이 어딘지 까먹고 있는 건 아니냐 애송이들아?"
그 말에 그나마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천일관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너희에게 지급되는 의복은 지금 너희가 입고 있는 그 무복 하나뿐. 겨울이 되면 너희는 의복에 대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한다!"
"...!"
많은 관도들의 눈에 경악이 일었다.
십만대산은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음기(陰氣)가 진하게 모여 있는 대지.
봉우리 곳곳에 아직도 녹지 않은 설산들이 즐비한 곳이 바로 이곳 십만대산이었다.
"그 말씀인즉."
많은 이들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내가 손을 들었다.
"겨울에 모피로 짠 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상관없단 말입니까?"
"물론, 능력이 된다면."
장득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 그 능력에 가문의 힘은 포함되지 않는다, 진여명."
장득수가 경고했다.
"천일관 인근을 조금만 나가도 어지간한 일류고수조차 버거워하는 야생동물들이 즐비하지. 몇 년 전에는 영물도 나왔다."
"여, 영물?!"
영물이 무림인들 사이에선 일종의 보양식 취급받지만, 사실 새끼가 아닌 이상 어지간한 영물은 고수들이 떼로 덤벼도 사냥이 쉽지 않다.
신체 능력도 신체 능력이지만 거주지 일대가 자기 집 안마당인 데다, 인근의 짐승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어 도주나 무리 사냥에도 능숙하다.
'아, 들은 적이 있어. 거대한 은호라고 했나? 지마대(漬魔隊)에서 포획을 시도했다가 무려 십여 명이나 죽고 실패했다지?'
그러고도 결국 그 은호를 사살하지 못해 그 책임으로 당시 지마대주가 교체당할 정도로 제법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그게 이 인근이었나?
"당연한 말이지만, 훈련에 관련된 일로 가문의 힘을 끌어왔다는 게 발각되면 그 즉시 퇴출이다. 이해했나?"
"물론, 이해했습니다."
나는 장득수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마주 웃었다.
"좋아, 오후가 되면 연공실이 개방된다. 연공실을 원하는 관도는 일과 후 본 교관에게 따로 신청하도록."
"이 마공을 익히는 게 오늘 일과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한 관도의 물음에 장득수가 표정을 구겼다.
"당연하지.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고위 마공도 아니고 기본공 따위를 익히는 데 시간을 내줄 거로 생각했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서 십여 명에 달하는 교관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교관들의 등에는 원형으로 깎인 거대한 바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꿀꺽!
몇몇 관도들이 그 바위의 용도를 알아차리곤 침을 삼키고 있을 때.
"이번 기수엔 비실비실한 놈들이 많군."
쿵! 쿵!
교관들이 바윗덩어리를 연무장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직후 관도들에게 밧줄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일단 모두 하나씩 들어라."
뭐, 뭐를?
관도들이 눈앞에 닥친 현실에서 도피하려던 찰나.
"앞으로 두 달 동안, 너희는 오로지 기초체력만을 단련하게 될 거다."
그리고 기초체력 단련을 위한 도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천일관에 온 걸 환영한다, 애송이들아."
관도들의 표정이 샛노랗게 질렸다.
***
"끄으응윽!"
"크흑! 사, 살려...."
"고작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 엄살 피지 마라."
천일관의 첫날부터 시작한 체력 단련은 정오가 되어서야 끝났다.
단련 시간은 약 두 시진 정도였지만, 그 두 시진이 모두 지난 뒤에 자리에 서 있는 관도는 아무도 없었다.
"쯧쯧, 무인이라는 놈들이 이리 허약해서는."
교관들 몇몇이 대놓고 살짝 혀를 찼지만 항의하는 인간은 없었다.
성인 몸통만 한 바위를 들고 반나절 가깝게 움직여댔는데 기운이 남아돌면 그게 이상한 거지!
'뒤, 뒤지겠네.'
나 역시 간만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헐떡였다.
이번 생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체력을 기르긴 했지만, 고작 몇 달 정도의 단련으로는 턱도 없었다.
'이런 건 여운이 놈이라면 되레 웃으면서 소화했겠지.'
그 근육 돼지 진여운이라면 더 안 하냐고 교관들에게 웃으면서 들이댔을 거다.
그런 상상이 들자마자 눈가가 자연스레 구겨졌다.
'빌어먹을, 형이 되어서 동생 놈한테 밀리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
그나마 썩어도 진가 출신인지, 소모된 체력이 빠른 속도로 돌아오고 있다.
'확실히 축복받은 육체이긴 하단 말이지.'
이대로 3분 정도면 다시 바위를 들 체력이 돌아올 거다.
"쉬면서 들어라."
그때, 장득수가 관도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사전에 알고 있는 놈들도 있겠지만, 천일관의 교육과정은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뉜다."
장득수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가장 첫 번째가 지금 너희가 받는 체력 단련 및 기초 마공 연공이지."
이건 천일관과 인근의 혹독한 환경을 견뎌 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두어 달 뒤엔 열한 명이 한 조로 묶여 집단전의 기초를 배울 거다."
천마신교에서 무인이라 함은 무조건 단체에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전투가 집단전을 전제로 하며, 이것을 익히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삼 단계에 진입하기 전에 선택지가 생기지."
그 선택지는 바로 앞으로의 평생을 좌우하는 진로 선택이었다.
"신교의 중급무사 시험을 받게 될 것이냐, 아니면 무공에서 손을 놓고 실무자로 갈 것이냐."
중급무사.
내게는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었지만, 중급무사 시험을 통과하면 교에서 기본적인 녹봉이 나온다.
그리고 신교의 정식 무력 단체, 삼십사마대에 신청서를 넣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이 신청 자격 자체가 신교에서는 사실상 신분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급 가문이나 유파의 후계자들은 기를 쓰고 이 중급무사가 되기 위해 악을 쓰며 노력한다.
물론 정말로 삼십사마대에 통과하려면 중급무사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만 어쨌든.
장득수가 관도들에게 살짝 부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희는 운이 좋은 편이야. 특히 실무 쪽으로 가는 녀석들은 더더욱."
"어째서입니까?"
"너희들, 최근에 사대전(四大殿)이 오대전(五大殿)이 되었다는 건 알고 있지?"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모른다면 그냥 자신을 첩자라고 밝히는 꼴이었다.
"천뇌전(天腦殿)에서 지속적으로 실무자 인원을 모집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천일관에선 내년까지 각 기수별로 세 명까지 추천할 수 있지."
"...!!"
"그 말인즉, 여기 있는 너희 중 세 명은 천뇌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오, 오오오!"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천뇌전이라고 한다면 오대전(五大殿), 구마각(九魔閣), 십칠당(十七黨)으로 이루어진 천마신교의 조직 구성도에서도 최상위에 이름을 올린 오대전 중 하나.
비록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지간한 각보다도 위세가 떨어지긴 하지만, 이들에겐 엄연히 오대전 중 하나이며 최고의 출셋길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출발선이 다른 나조차도 구미가 당길 정도였으니까.
'솔깃한데?'
다만 내가 느낀 구미는 다른 녀석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천뇌전에 아주 안전하게 잠입할 수 있는 기회 아니야?'
천뇌전은 현 교주 사후 신교를 말아먹은 주범 중 하나다.
신교의 배신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물증만 없었을 뿐이었다.
'아니, 설사 놈들이 배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천뇌전은 없어져야 할 곳이긴 하지.'
실제로 천유라의 집권 후기, 천뇌전의 권한은 장로전마저도 넘어설 정도였다.
그 육가조차 천뇌전의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균형이 무너졌으니 신교는 속에서부터 썩어 가고 있었고, 결국 마도대공 한무백이 막타를 치며 신교는 무너졌다.
'뭐, 이건 좀 시간을 두고 고민해 봐야겠군.'
이제 막 천일관에 입관한 시점이니 진로를 결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어디까지나 두 가지.
하나는 나 자신의 무력 상승, 그리고 또 하나는 곧 천일관 내에서 벌어질 암살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
'상(相), 연(煙) 이 두 글자가 분명 단서일 텐데.'
이 글자에서 무언가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사람 이름.
상자와 연자를 가진 인물을 이 천일관 내에서 찾아야만 한다.
"진로가 결정된 이후에는 간단하다. 삼 단계 이후부턴 끝없는 실전과 실무가 이어질 것이다. 이 단계부터 너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장득수의 말이 이어졌다.
"천뇌전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최종적으로 상급무사 시험과 외당 입당 시험을 치르게 될 거다. 이게 마지막 단계다. 여기까지 통과해야만 진정으로 천일관을 졸업했다고 볼 수 있지."
그렇게 거르고 걸러져 약 이 할의 인원만이 신교의 중추가 될 수 있다.
"뭐, 너희가 운이 좋은 이유는 천뇌전 때문만은 아니지."
스윽!
"천뇌전 못지않은 최고의 출셋길이 너희 눈앞에 있는데 말이야. 안 그래?"
장득수의 손가락이 어느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손가락을 따라 수많은 시선이 내게 꽂혔다.
'이 새끼가?'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대체 뭔 깡으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게 명백한 시비라는 건 알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내 눈이 장득수를 직시했다.
"교관님께서도 원하신다면 정문 문지기 자리 정도는 비워 둘 수 있습니다만."
"뭐?"
장득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에게서 대번에 막대한 살기가 흘러나와 내 전신을 짓눌렀다.
하지만 천일관주의 살기도 버텨 낸 마당에 고작해야 장득수 따위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꽤 하는군. 이 정도면 거의 초절정을 목전에 둔 수준이라고 봐도 되겠어.'
절정의 전(展), 혹은 결(結).
충분히 천일관의 상급교관이라 불릴 자격은 있다.
물론 그게 진가의 직계인 내게 시비를 걸 정도냐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너 인마, 지금 뭐라고 했어?"
장득수가 코앞까지 다가와 눈을 부라렸다.
하나 나는 되레 그를 비웃었다.
"마천진가의 문지기가 우스워 보이십니까? 적어도 당신 월봉의 세 배는 받는 자리입니다만."
흠칫!
월봉의 세 배라는 말에 장득수는 물론 다른 교관들까지 눈을 부릅떴다.
"우리가 얼마나 받는 줄 알고...."
"일반교관은 은 열다섯 냥, 상급교관은 스무 냥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어떻게긴?
교관 중에 진가와 연결된 자가 없을 리가 있나?
꿀꺽!
장득수 주변에 있던 교관 몇몇이 침을 삼켰다.
"기회라는 건 관도들에게만 허락되는 게 아니죠. 교관님들에게도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나는 최대한 활짝 웃으며 이죽거렸다.
29화 도발
장득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인다.
"이, 이 새끼."
천일관 같은 곳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아무리 교관이 먼저 도발했다 해도 일개 관도가 이리 들이박으면 철저한 체벌로 대응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거의 얼굴을 맞댄 거리에서 장득수가 작게 속삭였다.
"진심이냐?"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절 도발하실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외면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라서."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돈이 최고지.
은 육십 냥이면 어지간한 중급무사라면 월봉을 넘어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아무리 상급교관인 장득수라도 귀가 솔깃할 정도인 거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건 제가 천일관을 나간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죠."
"크, 크흠! 그러지."
주변에 있던 교관들과 관도들이 떫은 눈으로 장득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득수는 '뭐? 왜?'라고 눈을 부라리며 그 시선을 일축했다.
그런 장득수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쓸데없는 기 싸움은 사절인데.'
장득수의 뒤에서 이 사태를 초래했을 천일관주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좀 궁금하긴 하다.
***
연무장에서의 일이 일어난 지 얼마 후.
"그래서, 반응은 어떻답니까?"
"대담한 놈이더군요. 그 자리에서 저에게 역제안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천일관주는 장득수의 보고를 전부 듣고는 쓴웃음을 흘렸다.
"결국 녀석의 목적은 마가의 차남과 똑같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가문 내의 판도를 바꾸기 위한 인재 영입.
하나 장득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라고요?"
"녀석은 제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대응하면 되레 주변의 반발만 살 뿐이라는 걸 놈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정말 인재를 찾고자 한다면 좀 더 신중하게 주변의 반응을 살폈을 겁니다."
"흐음!"
단순히 자신의 수발을 들 어중이떠중이를 모으는 거면 몰라도, 진짜배기들을 얻으려면 그런 식으로 반응해서는 안 되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별개로?"
"물건은 물건이더군요. 왜 육가가 신교의 정점에 있는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지도한 장득수였다.
그런 그의 안목에 의하면 진여명은 지금까지 봐 온 이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재능을 지녔다.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자기 과시가 목적이라면 훈련 중에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썼을 겁니다."
"그러면 결국 알 수 있는 건 하나로군요."
천일관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음모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네? 으, 음모라고요?"
"모르죠.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건 교주님과 수라왕이 모두 엮인 일이라는 겁니다."
장득수는 당황했다.
장득수의 시선에서 보기엔 천일관주는 너무 지나치게 넘겨짚고 있었다.
'고작 애송이의 반응 하나에 이렇게까지 확대해석을 할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걸 지적하기엔 관주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바로 얼마 전, 마천진가로 천일관의 인명부가 유출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인명부가 말입니까?!"
"정확히는 모든 교관과 현재 재학 중인 관도들. 특이하게 졸업생은 포함되지 않았더군요."
천마신교에 육가의 손길이 스며들지 않는 곳은 없다.
당장 교관 중 몇몇이 마천진가에 줄을 잡고 있는 만큼, 인명부 정도야 원하기만 하면 무리 없이 손에 넣을 수 있다.
다만.
"왜 굳이?"
마천진가 정도 되는 곳이 인명부를 얻어 봤자 큰 쓸모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 이유는 차차 알아 가야죠."
적어도 이 사건이 천일관에 피해 없이 진행되리라는 건 너무나 희망찬 판단이다.
천일관주가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 교관."
"네, 관주님."
"저는 말입니다. 우연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습니다."
진여명이 본류를 언급하며 천일관에 들어온 이유. 인명부가 마천진가로 유출된 이유.
천일관주는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 모든 연결 고리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관도와 교관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세요. 수관대(守關隊)의 운용을 허락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암부가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주인 내게도 비밀로 할 정도이니 확실하게 움직이세요."
"수관대주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장득수는 관주의 앞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포권했다.
비록 틀린 부분도 있었지만, 천일관주의 직감은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했다.
"믿겠습니다, 장 교관."
천일관주는 흐뭇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명령을 받은 장득수가 집무실 밖을 나서려고 할 때.
"아, 그런데 말입니다."
"네?"
턱을 괸 천일관주가 뚱한 표정으로 장득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진가로 적을 옮기실 겁니까?"
"아, 아니 그건...."
"진가 문지기의 월봉이 상급교관의 세 배라고 들었을 때, 장 교관이 꽤나 솔깃한 기색이었다던데."
"...."
"아닌가요?"
장득수는 식은땀을 흘리는 것 외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일과가 전부 끝난 뒤, 나는 따로 연공실을 빌려 자리를 잡았다.
표면상으로는 천일관에서 지급한 인온마공을 익히기 위함이었지만, 실제로는 천일관의 일과와는 별개로 무공을 단련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인온마공을 익힐 필요는 없겠군.'
천일관에서 익히기를 권한 인온마공은 비천무량신공으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
'사부 말로는 비천무량신공이 경지에 오르면 수화불침에 이른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지.'
전생에야 워낙 저열한 경지이다 보니 그 효과를 볼 수 없었지만, 이번 생에까지 그럴 생각은 당연히 없다.
거기다 굳이 비천무량신공이 아니라고 해도 마천진가의 무공들은 대부분이 양강 계열에 근본을 두고 있는 초상승의 마공들뿐이라 굳이 인온마공에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
'천일관의 교육과정은 나무랄 게 없다. 내게 부족한 것들을 충분히 채워 줄 거야.'
하지만 굳이 그것만을 따라갈 이유는 없다.
범인이라면 이 과정을 따라가기에도 허덕이겠지만, 마천진가의 핏줄을 이은 나는 여전히 채워 넣을 게 많았다.
스윽!
나는 칼을 들고 기수식을 펼쳤다.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
변(變), 환(幻), 쾌(快)에 중점을 둔 이 검법은, 사실 마도의 검공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마도의 검공은 대다수가 쾌와 강(强)의 일변도. 마가의 혈류마령검법이 그나마 변초에 중점을 두지만, 그마저도 상위 검법으로 갈수록 강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마가의 진짜 비전이라 할 수 있는 혈룡천강검법이 대표적인 강검에 속했다.
'내 검법은 단순히 초식의 특징만 보면 정파… 그것도 화산이나 공동의 것과 비슷해.'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정파의 검법보다 더 비슷한 게 하나 있지 않았나?
접한 건 몇 번에 불과했지만, 얼마 전만 해도 합까지 맞춰 보았던 한 검법.
'천살마검.'
극강, 극쾌, 극변.
막대한 내공 소모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완벽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압도적인 천마신교 최강의 검공.
대성하면 열두 개의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천살마검은, 아무리 봐도 십지천록마검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었다.
'어라?'
초식을 전개하면 전개할수록 무언가 위화감이 전신을 습격한다.
'생각해보면 합기는 물론 협공에도 막힘이 없었지.'
협공의 경우 서로 다른 성질의 검법을 전개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서로의 흐름을 맞추지 못하면 되레 위력이 죽어버리니까.
그런데도 나와 천유라는 마치 같은 검법을 전개하듯이 물 흐르듯 공세를 펼쳤고, 그 덕분에 초절정 고수인 적운과 대적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천살마검 초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고 있다.
전생에서 교주 천유라가 제사장으로서 의식을 지낼 때, 제단 위에서 여러 번 초식을 펼치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합을 맞추면서 흐름을 얼추 읽었던 것이었다.
한동안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던 나는,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십지천록마검은, 천살마검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천살마검은 천마신공과 한 쌍으로 천마조사 때부터 내려온 천가 직계의 비전 검식이다.
초식의 흐름 자체야 베낄 수 있다 쳐도, 그 안에 담긴 오의만큼은 검법의 구결을 알지 못하면 절대 재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십지천록마검은 그 오의 자체로도 천살마검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드는 의문이 하나.
'사부, 대체 당신 정체가 뭐요?'
내가 알아차린 사실을 사부가 모를 리가 없다.
사부는 자신이 은퇴한 전대의 원로라고 소개했다.
다만 자신이 어디에 적을 두었는지, 별호가 무엇이었는지는 단 한 번도 내게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마저도 그저 '한노(韓老)'라고 알고 있으라고 했을 뿐.
그런 사부는 어떻게 십지천록마검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이 검법이 마천진가의 비고 안에 잠들어 있었을까.
삶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전생에선 가볍게 보내 버렸지만, 나는 이 순간 이 검법에 얽힌 '업'이 매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니! 지금은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후욱!
나는 잡념을 날려 버리기 위해 심호흡과 함께 검을 아래로 베었다.
'뭐가 됐든, 현재로선 이 검법으로 끝장을 봐야 한다.'
애초에 사부에게 무공을 배운 이유는 마천진가의 무공이 내게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 십지천록마검은 사부의 장담대로 내 손에 무척이나 감긴다.
'불완전한 구결, 불완전한 초식. 그리고 어설픈 마음가짐. 과거의 그때와는 달라. 모든 것이 완전하다.'
검무가 시작되었다.
완전한 구결, 완전한 초식, 높은 곳을 갈망하는 마음가짐.
이 요소들이 마천진가의 핏줄을 이은 진여명이란 존재와 만나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
거기에 더해.
전생의 경지를 끌어와 깨운 '감각'이, 이 상승 작용을 보조하며 벽을 사정없이 부숴 버리기 시작했다.
이 감각은 단순히 인간의 기본적인 오감을 넘어, 무인의 감각인 육감(六感)과 감각을 융합시키는 공감각(共感覺)의 영역까지 뻗어 있었다.
어느새, 내 눈앞에는 천유라의 환영이 있었다.
교류식 당시 그녀가 거칠게 펼쳤던 천살마검의 초식들.
그 초식들이 다시 한번 환상으로 펼쳐지며 나를 압박해 왔다.
'이번엔 받아 낼 수 있다!'
상처를 입어 가며 간신히 걷어 냈던 이전과는 다르다.
비록 환영에 불과했지만 내가 펼치는 검로는 아주 가볍게 천유라의 천살마검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뚫린다.'
방어가 뚫리는 게 아니다.
체내의 기혈들이 조금씩 열리면서 지금껏 막혀 있던 전신의 기혈들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전에서부터 힘이 넘쳐흐른다.
츠츠츠츠!
힘이 넘쳐 난다는 건 검에 실리는 경력이 점차 커진다는 뜻.
'이제 밀리지 않는다.'
원래라면 천유라의 강검에 밀려 나갔을 테지만, 내 검은 이제 당시의 천유라에 비해서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
화륵!
검세가 계속해서 막힌 탓일까.
천유라의 환영이 마치 짜증을 내듯 힘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날 궁지로 내몰았던 육령마도라는 여섯 줄기의 검기.
이전엔 초식이고 나발이고 간신히 발악하며 쳐냈던 초식이었지만, 움직임이 절정에 이른 내 검은 아주 부드럽게 그 검기를 흘렸다.
'온다.'
그리고.
그때는 전혀 대응하지 못했던 천유라의 연계기.
강기(强氣)가, 내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보인다!'
나는 목을 가르기 위해 날아오는 천유라의 강기를 두 눈에 똑바로 담았다.
그리고 모든 내공을 검에 불어넣으며.
필사적으로 하나의 초식을 구현해 그 강기를 받아쳤다.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
제 육록(六錄)
무량경마(無量境魔)
충검을 넘어, 검기를 넘어.
검사(劍絲)의 영역에 도달해.
일시적으로나마, 벽 너머의 길을 엿본다.
콰과과과광!
"으아아악!"
"무, 무슨 일이야?!"
내 검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의 폭풍으로 인해, 연공실 일부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30화 소 뒷걸음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