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소 뒷걸음치다가
땡땡땡땡!
아닌 밤중에 천일관 전체에 비상종이 울렸다.
"뭐야?!"
"누군가의 습격인가?!"
"신입 관도들 연공실 쪽이다! 서둘러!"
당직이던 교관들은 물론이고 천일관을 수호하는 비밀부대까지 모조리 연공실 쪽으로 달려들었다.
방금 전 천일관 전체를 진동하다시피 한 폭발음.
천일관에서 이런 폭발음이 들릴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천일관주까지 교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관주를 뵙습니다!"
현장을 조사하던 수관대(守關隊)의 대주인 백규(栢規)가 관주를 향해 정중하게 부복했다.
"잡설은 빼고, 본론만."
수관대주는 짜증과 살기가 섞인 상관의 모습에 화급히 대답했다.
"누군가가 연공실의 절반을 무너뜨리고 도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해는?"
"당시 연공실에서 수련 중이던 관도 두 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피해는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다만, 경상을 당한 관도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아, 암살 시도가 아니었는지 파악 중입니다."
"암살 시도라고?"
천일관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이 누구길래?"
"마천진가의 진여명 관도와 혈룡마가의 마진성 관도입니다."
꿈틀!
천일관주는 물론이고, 관주를 수행하던 상급교관 장득수의 표정까지 일그러졌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지?"
"혹시 몰라 의약당에서 파견 나온 의원에게 보냈습니다."
"잘했군."
방계인 마진성이야 그렇다 쳐도, 만약 진여명이 심각한 부상이라도 당했다면?
그 뒤는 생각도 하기 싫다.
천일관주는 수라왕 진군악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장남을 아낀다는 걸 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마천진가의 정예들을 끌고 달려오는 수라왕의 악귀 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현장으로 안내하게."
"예!"
신입 관도 전용 연공실은 그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의외로 강력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허! 청강석으로 만든 벽이 두부처럼 박살 났군."
"연공실을 이용 중인 관도의 수가 적어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당시 연공실을 이용한 신입 관도는 고작 세 명.
그마저도 서로가 거리를 꽤 두고 있었기에 피해가 크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근처에서 수련하던 게 진여명이라고?"
"예, 그의 말로는 갑자기 벽이 무너지며 강렬한 기파가 자신을 덮쳤다고 합니다."
"흐음!"
천일관주는 그 말에서 뭔가 묘한 어설픔을 느꼈다.
'암살자가 이렇게 화려하게 날뛰었다고?'
그리고 이렇게 날뛰었는데 고작 경상으로 살아남았다?
'차라리 본인이 수련하다가 부숴 먹었다는 게 더 현실성이 있…진 않겠군.'
청강석은 어지간한 검기로도 흠집을 낼 수 있을지언정 자르기는 힘들다.
이런 식으로 광범위한 파괴 행위를 벌이려면, 적어도 강기를 구현할 수 있는 고수가 와야만 했다.
그 말인즉.
'그 나이에 벌써 절정지경이라고?'
그것도 최소로 잡은 거다.
마천진가의 초상승 마공이라면 절정 수준에서 가능하긴 해도, 일반적으로 이 정도 파괴력을 내려면 초절정에는 무난히 들어야 했으니까.
'그럴 리가 없지.'
천일관주는 불현듯 떠오른 이 가정을 피식 웃으며 털어내었다.
약관에 절정지경에 도달했다면 육마룡을 넘어 중원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릴 수 있을 정도다.
천일관주의 칠십 생애에서 그 나이대에 절정지경에 도달한 것을 목격한 건 오로지 단 두 명.
현 교주이자 천마의 칭호를 얻어 낸 천태종,
그리고 그 딸인 소교주 천유라, 이 둘뿐.
차라리 절정지경에 이른 암살자가 뭔가 사정이 생겨 도망갔다고 보는 게 훨씬 타당할 정도였다.
"추적은?"
"일단 예상되는 침입 경로에 대원들을 투입해 역추적 중입니다. 흔적을 하나 찾긴 찾았사온데...."
수관대주의 표정을 본 천일관주가 혀를 찼다.
"잘 안되었나 보군."
"죄송합니다. 정말 대단한 놈인 듯합니다."
"바깥에서 흘러들어왔다면 그럴 수 있지. 이건 내 실수이기도 하네."
최근 천일관의 모든 관도와 교관을 감시하기 위해 인원을 투입한 만큼, 바깥쪽의 침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힘을 내주게. 본교에 간자가 스며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존명! 제 명예를 걸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수관대주의 눈이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
"별다른 내상도 없고, 상처도 금창약만 잘 바르면 문제는 없을 듯허이."
"감사합니다, 의원님."
"뭘 감사까지야. 어딜 다쳐야 치료를 할 것 아닌가, 허허허!"
눈앞의 노인은 십칠당 중 하나인 의약당에서 파견 나온 의원이었다.
"바로 보내면 내 관주에게 면이 서지 않으니, 푹 쉬었다가 내일 복귀하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의원이 사라지고, 사람 하나 없는 널찍한 환자동은 나 혼자 차지하게 되었다.
'눈치채진 않았겠지?'
환영과의 비무에 취해 연공실을 해 먹은 건 명백한 내 실수였다.
'내가 검강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밖에 알려져선 좋을 게 없다.'
원래라면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바로 발각되겠지만, 다행히 보험을 하나 들어 놓긴 했다.
"도련님."
그 '보험'이 어느새 일을 끝냈는지 나를 찾아왔다.
병상에서 상체를 일으키자 어느새 익숙한 인상의 민머리 청년이 눈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그래, 구칠."
나는 씨익 웃으며 구칠에게 물었다.
"흔적은 좀 남겼냐?"
혼자 개지랄하다 끝났다면 모르되, 외부에 흔적을 남기면 누군가의 암살 시도로 몰아갈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나는 구칠에게 천일관 바깥과 이어지도록 은밀하지만 발견 가능한 부분에 표시 좀 해 놓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어, 그게 말이죠."
구칠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묘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도련님 명령대로 천일관 바깥으로 이어지는 흔적을 남겼긴 했는데 말이죠."
임무를 잘 완수했는데 왜 저런 표정인가?
"그래서?"
"아무래도, 저 말고 다른 놈이 있는 것 같은데요?"
"...뭐?"
구칠이 물어 온 한 정보는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정말로, 외부의 침입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요."
구칠의 말은 이러했다.
자기가 몰래 점찍어 둔 외부 경로 몇 군데에 흔적을 남기러 갔는데.
그중 한 곳에 이미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지나다닌 흔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간자가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죠. 사방팔방에 펼쳐진 진법의 틈을 뚫고 지나가는 건데, 간자가 아니면 귀찮게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구칠은 전직 살수 출신… 그것도 초일류였던 만큼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허탈하게 웃었다.
"허, 소 뒷걸음 치다 쥐가 잡힌 격인데?"
"그냥 쥐도 아니고 왕건이가 잡힌 격이죠."
"추적할 수 있겠냐?"
구칠이 씨익 웃었다.
"제가 누굽니까?"
천가 직속 마황귀살대 제 이 조 조장 구운귀령(九雲鬼令) 벽천운.
그게 구칠의 이전 신분이었다.
***
같은 시각.
천일관의 어딘가.
"이령, 지령이 내려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
"윗선에선 빠른 해결을 원하십니다. 왜 아직도 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계십니까?"
검은 그림자는 이령의 최근 행보에 불만이 많았다.
분명 몇 달 전만 해도 자기가 완벽히 처리할 것처럼 굴더니 아무런 소식도 없지 않은가?
하나 이령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감시가 붙었습니다."
"감시, 라고요?"
그림자가 당황으로 일렁이던 찰나.
"나 하나만이 아닙니다. 지령이 내려지고 얼마 뒤부터 최소 수십에 이르는 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태를 살피고 있어요. 알아보니 내가 있는 기숙사만이 아니라 관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더군요."
"무언가, 꼬리가 잡힌 겁니까?"
"그럴 리가!"
이령이 거칠게 노성을 내질렀다.
"아직 뭔가를 꾸민 적도 없고 무언가를 들킨 정황도 없습니다. 애당초 감시가 붙었으면 굳이 관도 전체를 대상으로 할 필요도 없지요!"
분하다는 듯 이령이 이를 갈았다.
"당신도 조심하십시오. 알아보니 관도들에게만 감시가 붙은 게 아니니까."
"음, 아무래도 저는 내근직이다 보니."
검은 그림자는 교관의 지위에 있었지만 관도들을 직접 가르치는 역할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언가 꼬리가 잡혔다면 내 쪽이 아니라 그쪽 아닙니까?"
이렇게 감시가 붙었음에도 두 사람이 대화할 수 있는 건, 지금 천일관에 발생한 이상한 사건 덕분이었다.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감시 인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탓에 접촉이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천일관에 암살자가 들어왔다고 관도들까지 소문이 퍼졌어요. 그게 가능한 건 당신 쪽이 아닙니까?"
그 말에 검은 그림자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크, 크흠! 저도 그게 의심스러워서 내부 단속을 좀 해 봤는데."
"해 봤는데?"
"독단적으로 움직인 인원은 아무도 없더군요."
"...확실합니까?"
"제가 이끄는 명왕대(冥王隊)의 이름을 걸고 확신합니다."
부대의 이름까지 걸자 그제야 이령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저희도 조사 중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쪽에서 천둥벌거숭이가 하나 튀어나온 것 같군요."
'조직'은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나의 단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이기엔 천마신교의 감시망은 너무나 두텁고 꼼꼼했으니까.
그 이유로, 누가 하나 급발진을 해도 바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하나 이령, 아무리 상황이 이래도 임무에 손을 놓고 있으면 문책이 들어올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놈은 지금 내 파벌로 포섭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중이죠. 설사 실패하더라도."
이령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바깥에서 죽이면 됩니다. 곧 '실습'이니까요."
그 말에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일관의 '실습'은 천일관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
손을 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팔군(八君)께서 이번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부디 대계를 망치는 일이 없기를."
팔군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이령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팔군은 이령이 속한 조직에서도 최고위에 속한 간부. 천마가 버젓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현 천마신교에서 나름 성과를 내어 조직의 인정을 받은 수완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건 그의 성정.
그는 밑에 있는 자들에게 크게 관여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실패자는 가차 없이 폐기 처분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겠소."
"예, 그럼. 저도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입장이라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령의 맞은편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제길...."
이령은 손아귀에 땀이 흘러내린 걸 보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흘렸다.
원래라면 진작에 암살이 끝났어야 했지만, 뜬금없는 천일관의 이상행동으로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다.
"빌어먹을 산도적 놈은 아직인가?"
최대한 몰래 처리하려면 일단 품속에 두고 있어야 했다.
하나 설득하라고 보냈던 그 산도적 놈은 몇 달 전 오히려 암살 대상을 구해 버리는 짓까지 한 것도 모자라 최근엔 되레 친해졌는지 붙어 다니는 짓거리까지 하고 있다.
이령은 절로 골치가 아팠다.
31화 조 편성
천일관에서의 시간도 하루 이틀 흘러갔다.
"후우!"
전신세맥에 뻗어 나간 내공이 안전하게 단전으로 갈무리되었다.
"안정적이군. 이 정도면 고비를 넘겼다고 봐도 되겠어."
두 달 전 절정지경을 뚫어낸 이후, 한동안 나는 더 높은 경지를 향한 갈망과 조급함에 허덕였다.
원래라면 스승이 제자를 다독이며 그 갈망을 갈무리해 줘야 했지만 지금의 내겐 스승이 없었다.
자칫하면 심마(心魔)가 찾아올 정도로 위험한 상황.
그런데, 나는 천운으로 그 심마를 피해 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연공실을 해 먹은 덕에, 수련 시간이 줄어들어 조급함이 강제로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심마가 지나간 다음에야, 나는 내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걸 깨닫고는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것도 나름대로 기연이라면 기연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막 기숙사에 복귀했을 때.
"공자님, 이불을 준비했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고맙군."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구석에 있던 두 인영이 빠르게 날 맞이했다.
내가 천일관에서 거둔 두 수하, 진상과 백구였다.
"공자님, 드디어 내일이면 이 지옥 같은 체력 단련이 끝나는군요!"
콧수염을 기르면 간신의 면모가 생길 법한 진상.
"머리 쓰는 건 자신이 없는데...."
그리고 진여운이 생각날 정도로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는 백구.
이 둘은 천일관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내게 충성을 맹세한 녀석들이었다.
사실 두 녀석은 자질이나 성격을 보고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그저 가장 눈치가 빠르기에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모두 비켜 이 자식들아!"
"공자님께서 휴식을 취하실 시간이니!"
대부분의 관도들은 내 위치를 인정하고 별다른 불만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사실 이 와중에도 나를 향한 열망의 눈빛을 보내는 녀석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 눈빛을 일부러 외면했다.
진상과 백구를 받아들인 뒤, 나는 그 후로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찾아온 녀석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관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와 함께하고 싶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거다.'
거절이 아닌 보류.
정말로 '진여명'이라는 기회를 붙잡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보이라고 선언했다.
두 사람은 그저 무공 단련 외에 잡다한 것에 신경 쓰기 싫어 하인 역할로 받아들인 것뿐.
눈치가 빠른 상으로 어느 정도 신경을 써 주긴 하겠지만, 천일관주가 제시한 반년의 기한 안에 기준점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내칠 생각이었다.
"흥, 골목대장 납셨군!"
이 기숙사에서 나를 향해 이죽거리는 자는 오로지 단 한 명.
첫날에 적의를 보내왔던 혈룡마가의 방계 출신인 마진성뿐이었다.
"원한다면 그 골목대장을 시켜 줄 수도 있다만?"
"흥! 네 밑으로 들어갈 것 같냐?!"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마진성은 혀를 길게 내밀며 나를 조롱했다.
"저, 저놈이 무례하게!"
"방계 따위가 감히!"
"됐어."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두 녀석의 입이 대번에 닫혔다.
"마진성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흥, 그 본류인지 뭐인지 말이냐?"
"그래."
사실상 천일관의 이번 기수는 내가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윗 기수로 가면 파벌 싸움이니 뭐니 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다던데, 이번 기수는 '나'라는 절대강자가 존재하기에 파벌 따위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거침없이 이들에게 알렸다.
생존률 오 푼. 그 지옥으로 함께 들어갈 자가 있다면 함께하자고.
물론 아직까지 그 자살행위에 동참하는 자는 없었다.
'저 녀석이라면 자격은 있지.'
혹독한 체력 단련을 거쳤음에도 입관 첫날부터 수련을 빼먹지 않고 연공실에 틀어박히는 그 근성.
지난 두 달간 면밀하게 살펴본 결과 재능도 나쁘지 않다.
혈룡마가에 좋은 일을 해 주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번 기수 중 그나마 인상적인 녀석은 오로지 마진성뿐이었다.
"솔직히 믿기가 힘든데. 거기다 그 본류라는 걸 선택하면 기존 천일관의 교육과는 완전히 동떨어진다는 거 아니냐?"
"그렇지. 하지만 본류의 훈련을 받는다면 원래보다 배는 강해질 수 있다."
독사 같은 목소리가 마진성의 귓가를 간질거렸다.
"네가 그렇게 동경하는 마철수도 넘어설 수 있지."
"지, 진짜?"
마진성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녀석이 이곳 천일관에 들어온 이유도 분명 마철수를 동경해서일 거다.
그런 녀석에게 동경하는 자를 넘어선다는 건 지고의 쾌감이나 다름없을 터.
나는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마철수와 붙어 봐서 알지. 놈의 혈류마령검법이 제법 경지에 이르렀지만, 지금의 네 녀석이라면 천일관 졸업 안에 마철수를 넘어설 수 있어."
꿀꺽!
마철수는 검기를 뽑아낼 줄 아는 일류 수준이었고, 마진성은 충검이나 간신히 펼칠 수 있는 이류 수준이었다.
약을 좀 심하게 팔긴 했는데 사실 놈이 하기에 따라 딱히 거짓말이 될 말도 아니었다.
"천천히 생각하라고. 아직 시간은 있으니."
"...."
그렇게 마진성이 침묵하고, 나는 진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상."
"예, 공자님!"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되었지?"
"확실하게! 조사해 왔습니다!"
진상이 내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요청하신 상위 기수들의 파벌과 현황입니다."
"재주도 좋군."
"헤헤, 공자님의 지원 덕분이죠."
진상은 확실히 눈치가 빠른 만큼 붙임성도 좋았다. 약간의 금전과 술을 지원해 줬을 뿐인데 일개 신입 관도가 고작 이 주일 만에 이런 정보를 물어 온 것이었다.
'진가의 힘을 이용해 명단을 손에 넣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자객의 정체를 유추하기엔 불충분했지.'
구칠이 어느 정도 꼬리를 잡긴 했지만 천일관주가 이곳저곳 날뛴 탓에 그 꼬리가 천일관과 다시 접촉하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상위 기수로 올라갈수록 숫자가 줄어들고 있군.'
현재 천일관에서 살아남은 관도는 약 사백팔십 명. 개중 상자와 연자가 포함된 관도의 수는 무려 서른이 넘는다.
개중에는 아예 이름이 상연이나 연상인 경우도 있었다.
나는 목록을 차례대로 싹 살폈다.
'최상위 기수는 아닐 거다. 육가나 상위 가문 소속도 아니야.'
사실상 졸업반이나 다름없는 최상위 기수의 경우 생존자가 고작 열여덟 명뿐.
그들은 그 자체로 본교에 주목을 받는 인재들이다. 십칠당이나 구마각에서 그들을 영입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주목하고 있을 터.
'아, 그러고 보니 산도전 대주… 아니, 산도전이 내 바로 위의 기수였지?'
연줄 없고 요령 없던 그 우직한 무인이 어디 파벌에 속해 있을 거로 생각하긴 힘들었는데....
속해 있었다.
"...한무연?"
뭔가 미묘하게 익숙한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는데.
"아, 현재 천일관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인재입니다."
의외로 옆에서 눈치를 보던 진상이 그 이름에 반응했다.
"자세히."
"보고서에 적혀 있다시피 저희보다 세 기수 위의 선배입니다.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그 재능이 워낙 출중하여 본교의 상위 가문이나 기관에서 영입을 눈독 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이길래?"
"무려 권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권기를?'
사실 약관 인근에서 권기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 천마신교에서도 특별하게 취급해 주는 재능이다.
당장 신교 최고 후기지수 육마룡이 딱 그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마룡관에서도 충분히 통할 재능이라...."
"예, 최상위 기수도 검기를 뽑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관주님께서도 특별히 아끼고 있다고 하더군요."
'수상한데?'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시기가 묘하다.
무엇보다 이름이 걸렸다. 두 번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위화감.
'한무백, 한무연, 한무백, 한무연....'
마도대공 한무백 역시 한미한 출신으로 인생 역전을 이룬 자다.
"진상."
"네, 공자님!"
"이 한무연이란 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정보를 얻기 위해 교관을 구워삶은 것 같은데, 그게 정말이라면 아마 크게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어떤 무공을 쓰는지, 마공을 익혔다면 무엇을 익혔는지,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알아 와라."
"맡겨만 주십시오!"
사실 한무연은 암살자라고 보기엔 부적합하다. 누군가를 암살하기엔 너무나 주목받고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경험으로 쌓은 촉이 내게 경고했다.
이 녀석에겐, 뭔가가 있다고.
***
"지금부터 너희는 열한 명이 일조로 조를 짜게 될 것이다!"
천일관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체력 단련 기간이 끝나고.
그사이 여덟 명이 탈락하고 살아남은 아흔 명은,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집단전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우리 기수를 전담하는 상급 교관 장득수가 외쳤다.
"단 조장은 너희 중에 뽑는 게 아닌 상위 기수가 맡게 된다."
"상위 기수?"
"이미 집단전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조장 수업을 받게 된 인재들이다."
우리 기수 역시 이번 시험에서 상위 십 인 안에 들 경우 다음 기수에서 조장 수업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조장 수업을 받게 되면 그 자체로 상당한 가산점이 부여된다고 했다.
"이 조 호명하겠다. 진여명, 마진성, 부여준, 명호, 심배...."
나는 마진성과 함께 이 조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이 조 조장으로 임명된 선배 기수와 대면하게 되었는데.
"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 선배의 존재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여, 여자?"
"아니, 그 전에...."
"어, 엄청난 미인!"
뭔가 어리바리한 인상의 여인.
아니, 여인보다는 소녀에 더 가깝다.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뒤로 넘겨, 더더욱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으니까.
조장인 소녀가 우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백상아, 라고 합니다."
***
백상아.
조원들이 보기엔 그녀의 존재는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뭐지?'
흔들리는 눈, 떨리는 팔과 다리.
도저히 조장으로서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다.
처음 그녀의 미모에 넋을 놓던 다른 조원들은, 서서히 그녀를 향해 의혹을 보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지?'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천일관에 들어온 녀석들은 일차인 체력 단련조차 넘기지 못하고 걸러진다.
그 결과 비록 재능의 부족은 있을지언정 독기와 열망만큼은 어마어마한 게 바로 현재 천일관의 관도들이다.
그런데 지금 조장이라고 나타난 여자는 그런 독기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이, 이번에 이 조의 조장이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여자가 윗 기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
별다른 패기도 없고 숫기만 가득한 그 모습에 관도들의 의문이 짙어졌다.
천일관에서 집단전 실습은 단순히 진법 수련 같은 게 아니었다.
기본적인 부분을 배우면 그 이후는 철저한 실전이다.
그리고 지금 조장에 배정되었다는 건, 그 실전에서 살아남다 못해 최상위권의 성적을 찍었다는 소리였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이 조의 조원들이 이런 의혹을 보내고 있을 때.
사실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망했어, 완전히 망했어!'
배정된 조원 중에서도 유독 가벼운 느낌의 남자.
'하필이면 가장 엮여선 안 될 사람이랑 엮이다니!'
마천진가의 장남. '외부인'인 자신에게 있어 신교 고위층이나 다름없는 진여명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기피 대상 일 순위였다.
하나 언제까지 어리바리할 수만은 없는 법.
정신을 차린 백상아는 진여명에겐 필사적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집단전의 교리를 배우고 그 이후 실전에 투입됩니다."
백상아는 차분하게 자신이 교육받았던 내용을 입으로 읊었다.
"천일관은 그 실전을 천일관 내부에서만 겪게 하지 않습니다."
"내부가 아니면 어디란 말입니까?"
한 조원의 물음에 백상아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교 영역 외부의 분쟁 지역입니다."
32화 산도전과 백상아 (1)
천마신교는 감숙을 중심으로 중원 북서부에 세력권을 형성 중이다.
정확히는 감숙 북부와 그에 맞닿은 청해, 섬서, 신강 일부만이 천마신교의 영역권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 천마신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통하는 지역은 십만대산이 위치한 감숙성 북부 일대에 한했다.
당장 감숙성 남부에는 구파 중 하나인 공동파와, 중원 쌍천가(雙天家) 중 하나인 북천가(北天家)가 있었고.
그 밑인 사천에는 아미와 청성, 당문이 공동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뿐이랴.
동부 섬서엔 화산과 종남이 버티고 있고.
서부 청해에는 사파 최대 연합인 사패천이 신교 휘하의 마도 문파들과 끝없이 다투고 있었다.
사실상 세외 취급을 받는 내몽고 지역과 땅덩이만 넓은 신강을 제외하면 사방이 꽉 막힌 상태.
요즘엔 상대적으로 평화롭긴 하지만, 여전히 정, 사파의 분쟁 지역은 수시로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험악하고 치열한 곳이었다
"외, 외부의 분쟁 지역이라면, 어디로?"
"아, 그건 내가 설명하지."
그때, 장득수가 어느새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 안녕하십니까, 교관님!"
"오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명해 주겠다는 건 좋은데, 왜 굳이 여기로 온 거지?
"크흠! 너희들도 알다시피, 사실 마도(魔道)의 길을 걷는 게 본교만 있는 게 아니다."
저 말마따나 천마신교의 세력과 인지도가 워낙 압도적일 뿐, 중원 서쪽 인근에는 무려 전국시대부터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도 문파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대표적인 게… 사련교, 혈마맹, 구월도방 정도던가?'
청해 사막 지역에 자리를 잡은 사련교나 사천 이남의 험지에서 살아남은 혈마맹. 천마신교의 전신이던 일월신교에서 갈라진 구월도방 등.
현재 남아있는 마도 무맥은 대부분이 비밀전승 혹은 일인전승을 취하고 있지만, 저들처럼 양지에서 세력권을 형성한 곳도 꽤 된다.
장득수가 조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는 차후 청해에 인접한 곳으로 지원을 나갈 거다."
"청해라면...."
"알다시피 사파 최대 세력 중 하나인 사패천(邪覇天)의 영역이지."
강남 인근에 세력권을 형성한 사도성과 더불어, 중원 이대 사파 연합이라 불리는 사패천.
폐쇄적인 성향의 곤륜파 대신 사천과 청해 일대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물론 너희가 사패천 본단의 고수들과 부딪칠 일은 없다. 단순히 조직에 이름만 올리고 있는 군소 사파 쓰레기들을 상대하게 되겠지."
물론 아무리 쓰레기라 해도 경험이 아직 일천한 관도들에겐 벅찬 상대임은 틀림없다.
"그래도 정파 샌님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큭큭!"
확실히 거리를 생각하면 사천이나 섬서보다 청해 쪽이 훨씬 더 가깝긴 하다.
아무리 정파를 샌님이니 뭐니 하며 깎아내리지만 뭐가 됐든 본교 최대의 숙적은 사파가 아닌 정파니까.
"너희 선배들도 다 거쳐 간 일이다. 이 정도 일에도 쫄면 마도에 적을 두고 있다는 말은 철회해야겠지?"
그 말마따나 조원 중 긴장감을 드러낸 이는 기껏해야 한두 명뿐.
나머지는 되레 씨익 웃으며 전의를 다지고 있다.
"어쨌든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합격진부터 완벽하게 익히는 거다. 그것도 하지 못한다면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알다마다.
이번 집단전은 두 번의 과정을 거친다.
일차적으로 아홉 개의 조가 일정 시간 동안 지정된 합격진을 익히고, 이후 다른 조를 상대로 모의전을 펼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세 개의 조가 연합하는 이차 합격진이다.
총 서른세 명이 하나가 되어 싸우는 이 합격진은 연합한 세 개 조가 돌아가면서 또다시 두 번의 모의전을 펼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아홉 개 조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세 개의 조는.
'그대로 퇴출이지.'
고작 세 번 싸우고 퇴출당하면 억울하긴 하겠지만, 천마신교에서 그걸로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이곳에선 운도 실력이니까.
'나도 방심은 금물이야.'
나 혼자 활약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집단전.
설사 내가 단신으로 적을 쓰러뜨린다 해도,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한 다른 조원들은 그대로 최하점을 맞아 버릴 거다.
그렇게 되면 그냥 조 전체가 그대로 탈락한다는 뜻.
'그 말인즉, 이번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조원보다는 조장의 역량.'
내 눈이 백상아에게로 향했다.
"흐아아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는 저 모습에 눈빛이 짜게 식는다.
'...저걸, 믿어도 될까?'
그 순간, 나는 진지하게 탈락했을 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사패천이라.'
이번 실전 투입과 관련해 나는 생각이 좀 많아졌다.
'사패천도 언젠간 조사를 해 보긴 해야 했지.'
사패천은 삼십여 년 전 사파의 기린아라 불린 만악왕(萬惡王) 구요명이 세운 곳이다.
이리 역사가 짧은 사패천이 백 년이 넘은 사도성과 함께 사파의 양대 산맥이라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전에 언급했던 대로 엄청난 쪽수.
그리고 중원 오왕(五王) 중 하나인 구요명의 존재였다.
'그 구요명은 앞으로 십 년 뒤에 병사한다.'
사패천을 세울 때 구요명의 나이는 오십.
당연히 현재는 세수가 무려 팔십이 넘었다.
아무리 절대고수라 해도 환골탈태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은퇴를 고려해야 할 나이.
'구요명이 죽고 사패천은 제자들끼리 내전에 돌입했지.'
구요명에게는 네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구요명은 끝까지 후계를 지목하지 않고 죽었고, 결국 사패천은 구요명 사후 곧바로 내전에 빠졌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스물여덟 살의 막내 제자인 암운검(暗雲劍) 청무성이 승리했고 그가 새로운 사패천주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가장 큰 세력을 지녔던 첫째 제자인 귀황군(鬼黃君) 금적산의 승리를 점쳤던지라, 청무성의 승리는 세간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무림의 일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려워 온갖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문제는.
'이후 정파와 사패천과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진 게 진짜 문제지.'
내전을 끝낸 사패천은 곧바로 정파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명분은 아주 그럴듯했다.
내전 동안 잃은 전력의 손실을 보충하고 아직 지나치게 젊은 사패천주가 무공을 쌓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선 정파와 쓸데없이 충돌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
어찌 보면 명분이라기보단 당연한 이유였고.
그렇게 오 년 뒤, 사패천은 정도맹과 연합해 정사연합무림맹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흐름상으론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느낌이 강하게 온다.
이 정사연합무림맹의 창설 배경에는 그 반천회라는 놈과 마도대공 한무백이 크든 작든 관련이 있을 거라고.
'어쨌든, 이건 바깥으로 나간 다음에야 조사할 일이고.'
지금은 저 미덥지 못한 조장과 어떻게든 합격진을 익혀야만 한다.
조장과 조원이 처음 만난 자리.
백상아는 여전히 평정심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그럼 자세한 과정을 설명할게요!"
백상아가 손을 들며 말했다.
"여러분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소(小) 흑성검진을 익히게 될 겁니다."
흑성검진은 열한 명이 하나가 되어 아홉 개의 진법 형태를 구현하는 신교의 가장 기초적인 진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세 개의 조가 연합해 또다시 한 달 동안 흑성대진(黑性大陣)을 연습하게 될 거예요!"
"질문 있습니다, 조장."
그때, 옆쪽에서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그 누군가는 나도 잘 아는 이였다.
'마진성?'
"아, 말씀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마진성이 적의를 풀풀 흘리며 백상아에게 말했다.
"조장을 바꿀 수는 없는 겁니까?"
"...!"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내지었다.
'설마 시작부터 대놓고 반기를 들 줄이야.'
마진성이 나보단 끗발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마가의 혈족이다.
이런 놈이 시작부터 이렇게 나오면 조원을 통솔하기가 매우 힘들어질 터.
그걸 아는지 백상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답했다.
"미안하지만 안 돼요. 조장의 자리는 교관 분들이 정해 주신 거라 임의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조장이 미덥지 못하더라도 말입니까?"
나는 백상아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주목했다.
'여기서 단순히 그렇다, 라고 말하는 순간 이 조는 끝이다.'
위에서 정해 준 거니 순순히 받아들여라?
정파라면 몰라도 반골이 넘치는 천마신교에서 그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대응했다간 대번에 조는 찢어질 테고 협동성은 박살나겠지.
'내가 나선다면 중재는 가능하겠지만….'
난 그것보다 저 조장의 반응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꼬우신가요?"
그녀는 내 예상을 뒤엎는 화끈한 대응으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뭐, 뭐?!"
스릉!
백상아는 허리춤에 매인 검대를 거칠게 풀었다.
그리고 칼을 뽑아 마진성에게 겨누었다.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셨죠. 말 안 듣는 남정네는 삼 일에 한 번 두들겨 패라고. 그러면 말을 잘 들을 거라고."
"...."
"...."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눈이 당황으로 껌뻑거렸다.
할아버지가 손녀한테 그딴 말을 가르쳤다고?
대체 뭐 하는 양반이기에?
"조장의 역량을 증명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덤비세요. 당신이 절 이긴다면...."
"이긴다면?"
"저는 천일관을 자발적으로 퇴관하고 당신을 조장으로 추천하죠."
무력(武力)의 증명.
천마신교에서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자기증명의 길.
물론 지금은 무력보단 다른 부분이 더 중요하지만 어쨌든.
'아니, 저게 방금까지 어버버하던 애 맞아?'
무슨 이중인격도 아니고 사람이 회까닥 바뀌어 버렸다.
아니면 방금까지 보여 준 모습은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가식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날 바라볼 때의 시선은 정말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는데?
"우오오오오!"
어쨌든, 공짜로 싸움 구경하게 된 조원들은 눈을 반짝이며 마진성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게다가 우리 조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다른 조들도 귀신같이 알아보곤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이익!"
백상아가 이렇게 나선 이상 이건 마진성에겐 외통수다.
여기서 물러났다간 마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의 천일관 생활에서도 쥐 죽은 듯 지내야만 할 거다.
"후회하지 마라, 계집!"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말 좀 예쁘게 하시죠?"
"하압!"
마진성의 검이 우아한 붉은 궤적을 그렸다.
이전 마철수가 펼쳤던 혈류마령검법이다.
물론 아직 그 수준은 마철수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천일관의 후기지수 수준에선 분명 최상위권인 수준이었다.
"오, 오오!"
"저게 바로 혈룡마가의 검법!"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관도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육가, 그중에서도 검법으로는 제일을 자랑하는 혈룡마가의 검법이니만큼, 초식 하나를 견식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겐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마진성이 혈류마령검법 초식 하나를 입에 올렸다.
"비혈탄세(飛血彈勢)!"
어깨를 노리고 들어간 마진성의 일격.
"흥!"
백상아는 가볍게 자세를 잡은 뒤.
그대로 돌진해 오는 마진성의 검면을 후려쳐 버렸다.
카앙!
'오?'
회심의 찌르기가 일격에 파훼되면서 그대로 마진성의 가슴이 열렸다.
그리고 백상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장을 날렸다.
"하압!
퍼억!
"크아아악!"
가슴을 얻어맞은 마진성의 신형이, 그대로 꼴사납게 나가떨어졌다.
33화 산도전과 백상아 (2)
"...!"
"...!!"
설마 저 마진성이 단 일 초에 제압당할 줄은 몰랐는지 주변은 물론 나조차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망할 계집이!"
다만 충격은 크지 않았는지, 마진성은 어떻게든 몸을 틀어 낙법을 구사했다.
"죽여 버리겠다!"
우우우웅!
자존심이 상한 마진성의 검에 경력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충검!'
세간에서 '고수'라고 불리기 위한 최저한의 기준.
마진성은 그 기준을 넘은 고수였다.
'어지간히 열받았나 보군.'
충검은 기운을 유형화하는 체기(締氣) 이전의 단계. 경력을 휘두르면 바위도 자를 수 있는 힘이다.
당장 조원 중에서 충검에 이른 이는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경고하는데."
백상아는 충검을 눈앞에 두고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 칼, 집어넣는 게 좋을 겁니다. 크게 다치고 싶지 않다면요."
"이 쥐방울만 한 게 감히 날 무시해?!"
대노한 마진성이 백상아를 향해 출수하려던 그때.
"거기까지다."
어느새 교관 몇이 나타나 마진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흥분했군, 마진성. 방금 공방까진 봐줄 수 있었지만, 여기서부턴 선을 넘는 짓이다."
"이, 이익!"
아무리 천하의 마진성이라도 천일관에선 교관에게 대놓고 뻗댈 순 없었다.
"본교가 아무리 강자지존이라 해도 엄연히 율법에 의해 통제되는 집단 사회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했겠지?"
교관들의 말은 지엄했다.
그 율법을 만든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마진성의 조상인 마가의 시조다.
지금 네가 그 시조의 이름을 더럽힐 생각이냐, 라고 교관들은 묻고 있었다.
"이해, 했습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던 마진성은 결국 화를 갈무리하며 납검했다.
그렇게.
단 일 초에 마진성을 제압한 백상아는 그 존재감을 조원들에게 알렸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맞으신 데는 괜찮으세요?"
"...."
저건 멕이는 건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지,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방금 그 자세,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마진성의 찌르기를 쳐내기 위해 잡은 자세.
고작 자세 하나로 뭘 알아차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공도 무공 나름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겠지? 그건 칼 하나가 더 필요한 무공이니까.'
혹시.
정말 혹시나, 내 예상이 맞는다면.
신교 전체가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
"사선진(斜線陣) 전개!"
"합!"
"이, 이어서 탕귀진(蕩鬼陣)! 대형으로!"
사선진의 끝에 있던 이들부터 천천히 골짜기 모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름 일사불란한 움직임.
조원들의 움직임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나.
"그, 그리고… 구, 구운진!"
빠릿빠릿하게 명령을 내려야 할 조장이, 여전히 어버버하며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원들이 본격적으로 흑성검진을 배운 지 이 주째.
형태를 익힐 때만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응용 단계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문제가 발생했다.
"끄응!"
조원들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별다른 표출 없이 백상아의 명령을 따랐다.
첫날 개겼던 마진성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충차진!"
충차진은 흑성검진에서 사실상 주공이나 다름없는 진형으로, 엄선된 세 명이 삼재진 형태로 적에게 돌진하는 방법이다.
가상의 적을 상대로 내가 달려들자 그 뒤로 창과 도끼를 든 두 녀석이 나를 따랐다.
"찔러!"
"네, 공자!"
나와 두 놈이 전면에 배치한 허수아비들을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흑성검진은 검진(劍陣)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조원 모두가 검을 써야 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건 일보(一步) 단위로 세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고차원의 합격진이 아니니까.
"조,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어찌저찌 소 흑성검진의 연습이 끝나자, 백상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훈련 종료를 알렸다.
나는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수통의 마개를 따며 생각했다.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아. 하지만 명령을 내려야 할 시기가 한 박자씩 늦고 있다.'
이건 재능의 문제일까?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답을 찾았다.
'뭔가~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데.'
진법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취약한 점을 숨기고 남의 취약한 점을 노리는 방법이다.
일단 전개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하나 남의 약점을 후벼 파야 할 시점에서, 백상아의 판단이 조금씩 늦는다.
'일부러 판단을 늦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저 어벙함이 진짜라는 건 그렇다고 쳐도, 가야 할 길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망설인다는 건 일부러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뺨을 살짝 긁적였다.
'대충 의도는 알 것 같은데 말이야.'
불신이 쌓이고 있다.
지금이야 허수아비를 상대로 연습하고 있지만, 이 불신이 쌓이고 쌓이면 실전에서 어떤 변수로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 말인즉, 탈락이란 소리다.
그때였다.
"이봐."
"마진성?"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마진성이 나한테 다가왔다.
"어쩔 거냐?"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속마음을 숨긴 채 의뭉스럽게 답했다.
"뭐가 말이냐?"
"뭐긴! 이대로 저 멍청이한테 휘둘려서 사이좋게 탈락할 거냔 말이지!"
한 이 주 정도 잘 참았다 싶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모양이다.
"그 멍청이한테 일격에 나가떨어진 놈이?"
내 비웃음에 마진성의 눈에 귀신같은 핏발이 섰다.
"이익! 그 문제가 아니잖아! 너도 알잖아! 저 어설픈 지휘를!"
이 꼬맹이가 이리 나올 정도면 슬슬 조 전체가 위험하다는 신호일 거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그제야 대화가 성립된다고 여겼는지, 마진성의 표정이 한층 진중해졌다.
"실전에 돌입하면, 네가 지시를 내려라. 저 계집 말대로 했다간 우린 모두 망신을 면치 못할 거야."
허어?
아주 본격적인데?
아니, 그 전에 마가인 네가 내 지시를 따르겠다고?
진짜?
"솔직히, 네놈 말에 따르는 건 굴욕이지만 적어도 격에 있어선 너 외의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네 말이라면 기꺼이 따를 거다."
그야 당연히 내가 앞장선다면 전부 따르겠지.
물론 마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마진성이 먼저 굽히고 들어온 건 의외긴 하다.
하지만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 돼."
"어, 어째서?!"
"가장 먼저, 교관들의 눈은 병신이 아니다."
이번 시험에선 조장의 말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조장을 바꿀 수도 없다.
마진성은 이를 악물며 항변했다.
"부조장이란 직책도 있어."
"부조장은 어디까지나 조장에게 권한을 일부 위임받은 것에 불과해."
부조장의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하는지, 아니면 조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는지는 교관들 눈에는 대번에 파악당할 거다.
그리고 그게 걸리는 순간, 교관들은
-허허허, 이 오합지졸 새끼들.
이라면서 전원 탈락시킬 게 분명했다.
"마진성, 조언 하나 하지."
"조언이라고?"
"지금 네가 이렇게 발광하는 상황 자체가, 천일관의 시험이나 다름없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왜 조장을 바꿀 수 없게 제도를 만들어놓고, 정작 그 조장에겐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않는지."
하위 세 개 조가 무조건 탈락하는 이 집단전 시험에서, 탈락하는 건 어디까지나 세 개 조 '서른 명', 즉, 조원뿐이다.
조장들은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고 원래 기수로 복귀한다.
마진성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서, 설마?"
"그래, 하극상을 일부러 조장하고 있는 거다."
일종의 변수다.
아무리 최대한 공평하게 배분했다고 해도, 조장의 능력, 조원의 능력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건 결국 넘을 수 없는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실력 외의 변수 요소를 집어넣는다면?
'어떻게 하냐에 따라 충분히 실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지.'
눈앞의 마진성처럼 미친개처럼 반역을 저지르면 탈락.
그걸 참고 끝까지 조장을 신뢰한다든가, 혹은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도록 조장을 설득한다든가, 그런 식으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면 통과의 가능성이 생기는 거다.
"그...."
마진성이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지랄하지 마!"
타앙!
무언가 금속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려왔다.
방향을 보니 우리 조는 아니다.
이 근방에서 훈련하고 있던 다른 조인 모양이었다.
순간 나와 마진성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조용히 눈빛으로 합의하고 다툼이 일어난 곳으로 다가갔다.
"네놈의 판단은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
그곳에는 한 관도가 조장을 향해 손가락질과 함께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왜 거기서 방열진이 아니라 충차진을 쓴 거지? 조원을 사지로 내몰 생각이었냐?!"
그 관도의 말이 나름 타당했는지 주변의 몇몇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말했을 텐데? 조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조장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네놈이 정확히 명령을 따랐다면 다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조장의 정체를 알아보곤 눈을 부릅떴다.
'저건, 산도전?'
입관식 당시 한 번 봤던 이후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다만, 안타깝게도 산도전의 현재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네놈이야 속 편히 복귀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우린 아니야! 우린 반드시 살아남아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맞아! 당신이 아무리 선배라지만 당신에게 전략적인 안목이 있는지 의심스럽군!"
"양심이 있다면 조장 자리를 내려놔라!"
산도전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마음이 꽤 아프겠군.'
나는 살짝 안쓰러운 마음으로 산도전을 바라보았다.
풍마대의 아버지.
그게 바로 무혈풍뢰 산도전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풍마대가 삼십사마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 임무는 신교 외곽 지대의 경비와 순찰이다.
당연히 삼십사마대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하는 위치.
하지만 산도전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풍마대의 대주로서 활동했고, 그런 그의 당당함은 풍마대원들의 바닥난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전생에 내가 죽었던 마지막 날에도, 풍마대는 산도전의 명령에 따라 아낌없이 목숨을 던질 정도였으니까.
'이 시기의 산도전은 아직 대주로서의 전술적 소양을 익히진 못했을 거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내 예상대로라면 일부러 오판을 했겠지.'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산도전의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산도전은 살기를 풀풀 풍기며 그들의 앞에 섰다.
"명령에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하! 그렇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강제로 제압하겠다."
"제압? 어디 한번 해봐!"
그 관도는 바닥에 내팽개친 칼을 집어 들며 사납게 외쳤다.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적지 않게 감탄했다.
'와, 저 덩치를 봤는데도 쫄지 않고 덤비네.'
깡만은 제법이다. 다만 그게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일지, 그게 아니면 하룻강아지의 오기일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뭐, 내 감각으로는 후자에 압도적으로 가깝지만 말이다.
'흑성검진은 소규모 인원으로 펼치는 기초적인 합격진. 일곱 명이라는 최소 인원만 채우면 나머진 상관없긴 해.'
즉, 조장의 권한으로 무려 네 명을 떨어뜨려도 딱히 상관없단 이야기였다.
'과연, 산도전은 어떻게 대응하려나?'
34화 산도전과 백상아 (3)
산도전이 풍마대 내에선 자애의 상징이라 불리지만, 그는 엄연히 산도적 출신이며 천성이 거친 사내였다.
'상명하복에 철저하며 하극상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무인.'
이미 산도전의 실력은 어느 정도 완성되어있는 만큼, 저 하룻강아지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뻔히 보였다.
다만, 저 조에도 아직 정신이 박힌 녀석들은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그만해!"
"시험도 못 보고 퇴출당하고 싶냐? 아무리 불만이 있더라도 이런 방식은 아니야!"
대번에 몇 명이 반발하자 산도전에게 대든 관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크, 크윽!"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소했다.
'자기가 총대를 메면 알아서 따라올 거라 판단했겠지. 하지만 실수했군.'
절박하기에 반항할 수 있다.
하지만 절박하기에 참을 수도 있다.
저놈은 전자이고, 말린 놈들은 후자일 뿐이었다.
"죄송, 합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 관도는 태도를 바꿔 산도전에게 고개를 숙였다.
산도전 역시 더 이상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는지 그대로 훈련 종료를 선언했다.
그렇게, 산도전에 대한 하극상은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정말, 네 말대로일지도 모르겠군."
상황을 끝까지 지켜본 마진성이 충격을 받은 듯 멍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조도 상황은 비슷하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이대로 두고 보자고?"
"중심을 잡아야겠지."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나서야지. 그걸 원해서 날 찾아온 거 아니었나?"
이 상황을 가장 간단히 해결하려면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다만 처음 마진성이 제시한 하극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가야 할 뿐.
"일단은 조장과 얘기를 해 보겠다. 다음 일은 그때 정하도록 하지."
***
"하아."
들이쉬는 건 고민뿐이요, 나오는 건 한숨뿐이라.
"하아아아!"
시선이 바닥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뭐가 그리 고민이십니까?"
이 각 동안 이어진 백상아의 궁상은 귓가에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끝을 맺었다.
"아, 산도전 대협."
"일이 잘 풀리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러는 대협도요."
산도전은 조용히 백상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짓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후우!"
"어떠셨나요? 조원들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나요?"
"아뇨, 가끔 싫은 말을 할 뿐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단지...."
"단지?"
산도전은 자신의 흑역사가 떠올랐는지, 두툼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들은 저리 잘 참는데 나이도 많은 어느 놈은 그걸 참지도 못하고 사고를 쳤으니."
"아...."
백상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퇴관하실 뻔… 하셨죠."
"한(韓) 선배님의 중재가 없었다면 정말로 쫓겨났을 겁니다."
사실 산도전은 운이 좋았다.
조장을 두들겨 팼는데도 퇴출은커녕 상위 성적 십 위 안에 이름을 올렸으니까.
"그분의 은혜는 백 번 감사드려도 모자랄 정도죠."
"아아, 확실히 인덕은 있어 보이더군요."
백상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위 기수 중 하나이자, 현 천일관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 한무연.
하지만 백상아가 보기엔 속을 알 수 없고 묘한 자격지심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산도전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또 영입 제안인가요?"
"죄송합니다. 선배님께서 꼭 소저를 영입하고 싶어 하십니다."
"죄송할 게 있나요? 군주가 인재를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백상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몇 번이나 말씀드렸듯이 제 개인적인 사정상 어딘가에 속해 있을 수는 없어요. 한 선배님껜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주세요."
이미 몇 번이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구애해 오고 있었지만, 백상아는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산도전 역시 그걸 아는 만큼,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
"소저가 죄송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선배님께서 또 그러신다면 다음엔 제 선에서 말려보겠습니다."
"후후,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원래라면 이대로 자리를 파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지만, 산도전은 이대로 자리를 뜨면 앞으로 백상아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화제를 돌려서라도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 소저."
"네?"
사실 그녀와는 그저 동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산도전에게 백상아는 뭔가 딸 같은 느낌이 있었다.
왠지 돌봐주고 싶고, 챙겨 주고 싶은 그런 아비의 마음이랄까.
...사실, 실제로 나이 차이를 고려하면 정말 딸뻘은 될 테지만 어쨌든.
"그러고 보니, 소저의 조에 거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아아, 그, 그렇…죠."
'거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그녀가 대번에 울상을 지었다.
"진짜 개 망했어. 할아버지가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야."
"소, 소저?"
지금까지 풋풋한 모습만을 보여 왔던 백상아가, 갑자기 입에 육두문자까지 달며 망가지기 시작했다.
"말은 잘 듣고 눈빛도 별로 반항적이진 않긴 한데, 그래도 그놈이 마음만 먹으면 날 조지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평소엔 그냥 실실 웃고 다니는 한량 같긴 한데, 그 면상으로 언제 사고 칠지 몰라 그게 또 무섭기도 하고!"
"소, 소저. 조금 진정하시지요."
산도전은 느닷없이 폭주하기 시작하는 백상아를 다독였다.
산도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두 사람의 귓가에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소저. 아무리 장본인이 있다고 해도 앞담이라니요."
"응?"
"으응?"
순간 산도전과 백상아는 서로 시선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기숙사와 약간 떨어진 정원.
정원이라 해도 평소 추위가 추위인지라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누구냐?!"
산도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는 평소 이상으로 적의를 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이 내가 상대의 기척을 놓치다니?!'
백상아와 산도전이 동시에 한 생각이었다.
그녀 역시 허리에 메인 검대로 서서히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두 사람이 노려보는 어둠 너머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랜만에… 아니, 처음 뵙겠습니다, 산도전 대… 아니, 선배."
'아, 입에 붙은 게 좀처럼 안 떨어지네'라는 푸념과 함께 나타난 한 남자.
"지, 진여명!"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챈 백상아가 경악했다.
***
백상아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쏘아보았다.
"진여명 공자. 이곳은 당신 기수가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찾아왔단 말인가요? 천일관의 법도가 그리 우스워 보이시나요?"
"제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백상아의 눈에 살짝 경멸이 스치려던 찰나.
"다 관주님의 허락하에 드나드는 거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 그, 그래요?"
관주의 허락을 받았다는데 지가 뭐 어쩔 건가?
백상아의 뺨에 순식간에 붉은 빛이 돌았다.
순식간에 설전에서 발린 백상아를 뒤로하고, 산도전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소저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이런 오밤중에 찾아온 건가 후배?"
"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산도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기억보다 훨씬 젊긴 하지만 역시 전체적인 인상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본판이 워낙 삭아서 이십 년 뒤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게 정답일까?
"차라리 잘됐군요. 두 분 모두에게 용건이 있었는데."
"뭐? 내게도?"
산도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산도전에게 손을 내밀었다.
"산도전 선배, 저와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설마하니 첫 대면에 영입을 제안할 줄은 몰랐는지, 산도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 내가 누군지는 아는가?"
"알죠."
적어도 이 천일관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전 대웅채(大熊寨) 채주, 도살도(屠殺刀) 산도전 아닙니까?"
"...!"
"도, 도살도오오오?!"
백상아는 너무 놀라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마하니 가깝게 지내던 동기가 정말로 별호까지 가진 이름 있는 산도적이었을 줄이야!
그것도 별호에 도살(屠殺)이라는 말까지 붙었다니!
"지, 진짜?"
"...."
소심한 백상아의 물음에 산도전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 조용히 날 노려보는 산도전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놀랍군. 내 과거를 아는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육가의 인물이라니."
"선배에게 관심이 좀 있어서요."
"딱히 후배에게 관심을 끌 일은 벌이지 않은 것 같은데?"
"칠장로께서 십만대산 어딘가에서 산채 채로 뽑아 온 일은 나름 인상적이었으니까요."
그 말 그대로다.
산도전은 녹림 소속은 아니었지만 무려 천마신교의 영역 내에서 산적질을 벌인, 간이 비대하다 못해 배 밖으로 내놓은 인사였다.
십만대산이라고는 해도 워낙 후미진 곳에 있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가, 현 칠장로인 음양권마(陰陽拳魔)가 심심풀이랍시고 토벌을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음양권마는 처음 만난 산도전의 자질에 반했고, 그를 영입하기 위해 대웅채를 통째로 본교에 편입시켰다.
나름 당시 고위층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였다.
"그렇다고 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영입 제안을 하나?"
"저는 당신의 자질에 대해선 확신을 가지고 있거든요."
전생에선 풍마대주 정도로 끝났지만, 확실하게 지원을 해 준다면 그 이상도 충분히 노려 볼 수 있다.
"산도전 선배. 저는 당신의 약점이 뭔지 알고 있습니다."
움찔!
"약점, 이라고?"
산도전의 눈이 살짝 꿈틀거리던 찰나.
"네. 바로 그건 내공. 그리고 상승의 무공이죠."
"...."
일그러졌던 산도전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걸 내게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건가?"
"물론이죠. 뒤늦은 나이에 이류 무공을 익혀 일류에 오른 게 바로 선배 아닙니까?"
그냥 일류도 아니다. 거의 절정에 근접한 일류다.
"저와 마천진가는 선배에게 최선의 지원을 드리겠다고 장담하겠습니다. 저 진여명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내 어딜 보고...."
"장담컨대, 선배님을 십 년 안에 초절정고수로 만들어 드리죠."
"초, 초절정!"
옆에 있던 백상아가 탄식을 터트렸다.
초절정이라고 한다면 저 거대한 중원에서도 한 성에 수십을 넘지 못하는 절대자의 상징.
나는 산도전이 무조건 수락할 거라 확신했다.
그와는 미래에서 술자리까지 가질 정도로 꽤 안면이 있었다.
자주 갖던 그 술자리에서 산도전은 내게 상승의 무공과 영약의 존재를 줄곧 원해 왔다고 불평했었으니까.
아무런 지원 없이 이십 년 뒤에 초절정을 돌파한 산도전이다.
그런데 마천진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면?
초절정까지 십 년이면 떡을 치지.
어쩌면, 육가에서도 한두 명밖에 없는 극마지경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자, 받아들여라!'
난 자신만만하게 산도전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하네."
"물론 수락할 줄 알았…네?"
지금 뭐라고?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거절하겠네."
아니, X발?
35화 산도전과 백상아 (4)
이걸, 거절한다고?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산도전을 바라보았다.
상승의 무공과 영약, 그리고 고수의 지도.
천일관이 아니라 마룡관의 관도에게 이런 제안을 해도 백이면 백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일 텐데?
"제안은, 정말, 고맙지마안...."
산도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미련이 철철 넘치는 얼굴을 하면서 왜 거절해?
"정말, 고맙지만!"
"...그냥 승낙하시죠?"
옆에서 지켜보던 백상아가 한마디 거들 정도로 산도전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래도! 모시는 분을, 배신할 수는 없네."
"모시는 분이라면, 칠장로입니까?"
"그렇네."
'산도전이 칠장로에게 바치는 충성심이 이리 강했나?'
물론 길을 열어 준 은사라는 시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산도전과 칠장로의 관계는 그다지 두텁지 않았다.
'애초에 보낸 곳이 천일관이니까.'
정말 측근으로 삼을 거였으면 마룡관에 보냈겠지.
다만, 산도전이 일방적으로 칠장로에게 보내는 충성심이라면 조금 골치가 아파진다.
'그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저렇게 미련이 넘칠 수는 없으니까.'
무언가 다른 관계가 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다른 관계가.
나는 일단 설득을 계속했다.
"칠장로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겁니다. 외지에서 거둔 수하가 더 큰물에서 날개를 펼 기회를 얻었는데, 보내 주시지 않으실 리가 없잖습니까?"
한마디로 네가 칠장로의 심복도 아닌데 뭘 굳이 매달리냐는 우회적인 설득이었다.
하지만 산도전은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안 되네. 내겐 장로님의 명령으로 선배님을 보필할 의무가 있어."
선배?
"선배라고 하시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한무연 선배님일세."
뭐?
지금 누구라고?
"한무연, 이라고 하셨습니까?"
산도전이 한무연의 파벌에 속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운 관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산도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분이야말로 칠장로님의 뒤를 이으실 진정한 후계자지. 난 그런 그분을 지킨다는 임무를 가지고 천일관에 들어왔다네."
나이가 많은 산도전이 천일관에 들어온 또 하나의 이유.
그걸 안 나는 살짝 당황했다.
'뭐지? 전생에선 이런 말이 없었는데?'
전생에서 칠장로의 뒤를 이은 건 절뢰마검(絶雷魔劍) 흑구명이란 인물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교 수뇌부 중에 한무연이란 이름은 없었다.
'아, 아니면 이십 년 뒤에도 아직 장로 자리를 달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그게 아니면 이미 축출당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름을 바꿨거나.
한무연이란 놈의 정체가 내 짐작이 맞는다면, 어떤 짐작을 해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미안하네. 나는 자네와 함께할 수 없어."
"아...."
이러면 나가린데.
산도전의 뜻이 이렇게 확고하다면 당장은 설득할 방법이 없다.
그의 충성심을 모조리 들어내는 대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아니, 아직 가능성은 있다. 단지 오늘이 아닐 뿐.'
무엇보다, 그가 현재 섬기는 칠장로와 '한무연'이라는 존재의 연관성을 알아낸 건 예상치 못한 큰 소득이다.
'칠장로!'
나는 매년 초마다 진가에 방문해 진군악에게 인사를 올리던 칠장로의 모습을 상기했다.
하위 장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 중에선 첫 번째 서열을 달고 있는 이.
그런 자가, 하필이면 내가 의심하는 인물을 후계자로 삼고 있다?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산도전 선배에게 건넨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건 알아주십시오."
나는 일단 감정을 갈무리하며 산도전에게 고개를 숙였다.
"말만이라도 고맙군."
산도전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말고도 소저께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자리를 비워 주지."
산도전은 '쩝' 소리를 내며 끝까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자리에는 바람맞은 나와 놀란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던 백상아만이 남았다.
"조, 좋은 구경 했어요."
"끄응!"
부끄러움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못난 꼴을 보였군요."
"아, 아니에요. 그런 제안을 하고도 거절당하는 게 이상한 거죠."
"뭐, 그렇긴 합니다."
바람맞은 건 맞은 거고, 할 일은 해야겠지.
"그래서, 제게도 용건이 있으신 것 같은데."
백상아가 살짝 기대하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혹시 제게도 그런 제안을?"
"꿈 깨십시오."
그녀의 표정이 어느 청개구리처럼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그, 그럼 뭐 때문에?"
"당연히 조에 관련된 일 아니겠습니까?"
"아...."
산도전과의 대화가 워낙 인상적이었는지, 잠시 이런 쪽으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슬슬 제대로 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흠칫!
"조원들의 불만은 제가 억누르겠습니다. 그러니 슬슬 판단을 일부러 실수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눈치, 채셨나요?"
"진짜 판단 실수도 다수 섞여 있어서 알아차리는 게 좀 늦었습니다."
"...."
백상아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뭐, 중간중간 숨기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어?
평소라면 돌려서 말해 줄 수 있겠지만, 거절당한 나는 지금 빈정이 조금 상했다.
백상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그럴 수는 없어요."
"천일관의 방침 때문인가요?"
"그것까지 아시는군요. 네, 맞아요. 모의전이 시작할 때까지 가능한 조원들의 반발을 끌어내라는 교관님들의 지시가 있었어요."
"하지만 조원이 그 사실을 눈치챈 시점에서 굳이 필요한 일일까요?"
"음, 그건...."
내 말이 타당하다 여겼는지 백상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이 맞네요. 어찌 보면 진 공자는 이번 훈련의 의도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리셨으니."
"그렇다면?"
"네, 내일 훈련부터는 일부러 틀린 지시를 내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백상아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실수는 좀 봐주세요오."
"...."
중요한 순간 적의 약점을 냉혹하게 도려내지 못하는 부족한 결단력.
적의 약점을 공략하지 못하면 되레 아군이 다친다는 걸, 그녀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딱 아무 고생 없이 자란 명문가 아가씨 같군.'
분명 그녀도 이전 조원으로서 모의전을 거치며 깨달은 게 있을 텐데 말이지.
아니면 누군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이게 처음이어서일까?
"걱정 마시길, 조장의 실수는 제가 얼마든지 보완해 드릴 테니까요."
"그 말씀은?"
"제가 부조장이 되죠. 그러면 어지간하면 조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놈은 없을 겁니다."
조장에게 대들기 전에 나부터 넘어야 할 테니까 말이지.
"가, 감사합니다, 공자."
백상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뭘요. 조장으로서 망설이지 말고 결단을 내려 주시길. 마진성을 날려 버릴 때처럼 말이죠."
화악!
그 말이 부끄러웠는지 숙인 백상아의 고개가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그, 그건 할아버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기분 좀 내다가...."
"기분만 낸 게 다행이로군요."
나는 넌지시 추측으로 생각하던 걸 입에 담았다.
"확실히, 칼 한 자루가 더 있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네?"
"아닌가요? 장법 대신 칼을 잡고 내려치기엔 최적의 초식이었다고 봤는데."
그 순간.
수줍다는 듯 얼굴을 붉혀댔던 백상아의 표정이 귀신같이 굳어졌다.
"당신, 누구야?"
"누구냐니요?"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이쪽을 노려보는 백상아의 눈빛엔 숫제 적의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백상아는, 적어도 신교의 인물이 아니라고.
고작 이런 지적 하나로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녀가 어딘가의 간자일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물론 그것마저 기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 감을 믿기로 했다.
"크흠!"
살짝 헛기침을 한번 해 주고.
"제가 쌍검술의 기본도 모르는 바보라고 보십니까?"
짐짓 화가 난 얼굴을 연기하며 그녀를 쏘아본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껏 하시죠."
"아? 아니, 그...."
"여류 무인이 쌍검술을 익히는 게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쌍검을 쓰던 이가 칼 한 자루만 썼을 때, 나타나는 빈틈은 어지간한 고수라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긴 하다.
다만.
"공자가, 그 어지간한 고수라는 말씀인가요?"
역시, 이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당연하죠."
"그 말을, 증명하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투는 다시 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에 비치는 의심은 전보다 더더욱 진해졌다.
"원하신다면, 소저를 제압하는 걸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만."
"재밌군요. 공자가 저를 말입니까?"
"안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로 정원의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에서 검은 흑광의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검기? 그, 그것도, 나뭇가지로?"
백상아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놀랐겠지.
나뭇가지로 검기를 뽑아내는 건, 무림인들 사이에선 검강을 뽑아내는 것만큼이나 고난이도의 수법이니까.
내기 주입에 조금만 실수해도 나뭇가지가 그대로 터져 나가는 만큼, 엄청난 수준의 집중력과 제어 능력을 필요로 했다.
"어떻게, 한번 붙어 보시겠습니까?"
꿀꺽!
백상아가 침을 살짝 삼켰다.
예상되는 그녀의 경지는 분명 나와도 해볼 만하겠지만, 이런 묘기를 보여 준 이상 각이 보이지 않을 거다.
그녀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께서, 그 유명한 육마룡의 일좌셨군요."
"...?"
"마도 최고의 후기지수. 역시 그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군요. 그런 분이 왜 이런 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위급 집안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육마룡의 구성원도 제대로 몰라?
어째 가면 갈수록 확신으로 만들어 주는군, 이 허당 아가씨.
"아뇨, 그건 제 동생입니다만."
"네?"
"육마룡의 일인, 권패룡(拳覇龍) 진여운은 제 동생입니다. 전 육마룡이 아니죠."
"뭐, 뭐라고요? 그 무위로 육마룡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육마룡들은 얼마나...."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착각하기 전에 정정해 주었다.
"그들은 전원, 저보다 밑입니다."
"네?"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이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신교 내에서도 몇 되지 않거든요."
"...."
"소저께서도 쌍검을 쓰는 걸 비밀로 하시고 싶은 모양이신데, 이렇게 서로 비밀 하나씩 생겼으니 무승부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싱긋!
나는 은근한 미소로 그녀에게 제안했다.
"서로 입을 다물자는 거지요."
"아...."
이 제안이 의외였는지 그녀는 멍한 얼굴로 내 얼굴을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그렇게, 해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백상아는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숙사로 도망가 버렸다.
"그, 그럼 이만!"
나는 그런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 나름 이름값이 있으니 약속은 어기지 않겠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약속이라기보단.
"구칠."
"네, 도련님."
어느새 눈앞에 구칠이 나타났다.
"한동안 백상아를 집중 감시해. 기한은 내가 외부 실전에 나갈 때까지. 할 수 있겠지?"
그 명령이 의외였는지 구칠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의심된다면 차라리 죽일깝쇼? 증거를 남기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만."
"뭔 미친 소리야? 죽이긴 왜 죽여?"
나는 인상을 구기며 구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얏!"
"오히려 살려야지."
"살린, 다면?"
"혹시나 누군가가 그녀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을 거야."
내 예상대로라면, 그녀는 곧 죽을 운명이다.
36화 모의전 (1)
구칠의 표정이 굳었다.
"확신하시는군요, 도련님."
껄렁거리던 구칠의 목소리가 냉철하게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이게 구칠의 원래 성격이다.
"단순히 넘겨짚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무엇보다, 한무연이란 놈이 백상아에게 자기 파벌로 들어오라고 여러 차례 구애했다지?
이게 만약 전력 보강이 아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부탁한다."
구칠이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물론입니다, 저 구칠. 도련님의 충실한 종복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제가 없을 때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나 마십쇼."
"헛소리 말고 가기나 해."
"예입!"
그렇게 구칠이 사라졌다.
구칠이라면 천일관주급의 존재가 근처에 있지 않은 이상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일방일반(一防一反) 특유의 쌍검 기수식. 신교가 아닌 외부 출신. 그러면서 최소 일류급의 무인을 키워 낼 수 있는 명문.'
그러면서도 간자가 아닌, 인질 혹은 피난처로 천마신교를 선택할 수 있는 가문.
'쌍검술로 이름이 높은 명문가는 찾아보면 적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한 열 군데 정도는 될 거다.
'하지만 본교와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은 곳은 고작 두 군데뿐이지.'
그 두 곳 중 하나인 무쌍검문(武雙劍門)은 방어를 도외시한 일격필살의 검술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백상아의 초식은 반격을 전제로 한 동작이다.
즉, 소거법으로 결론은 단 한 곳.
'중원 최대의 검술 명가 중 하나.'
무당파, 남궁세가와 더불어 검술로는 삼강에 꼽히는 명문.
중원 칠대세가 중 북천건가(北天乾家)와 함께 남북쌍천가라 불리는 남천백가(南天百家).
그 남천백가가 자랑하는 쌍검술, 천랑이성검결(天浪二聖劍訣)이 바로 백상아가 펼친 쌍검술의 정체였다.
'그리고 그 천랑이성검결로 이름이 높은 이가 바로....'
현 정도맹 맹주이자 중원 오왕 중 하나.
남천검왕(南天劍王), 백도경이다.
이십 년 뒤 정사무림맹의 맹주는 무당파 출신의 검존 관현진인이었지만, 적어도 현재 시점에선 남천검왕이 정파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왜 남천검왕이 자기 손녀뻘 아이를 천마신교로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복잡한 뒷사정이 얽혀 있을 거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면 교주도 저 꼬맹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소린데?'
몰래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좀 좋아?
내가 명색이 사위 후보인데 말이야!
'에휴, 어쨌든.'
남천백가는 저 중원 남동쪽의 강서, 복건, 광동을 아우르는 광대한 세력권을 자랑했다.
'그리고 천마신교는 그와 완벽하게 대칭되는 중원 북서부에 위치해 있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파 보면 뭔가 큰 게 나올 것 같은데....'
적은장과 적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어마어마한 왕건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아냐, 지금은 이게 아니지.'
나는 욕망을 제어하며 고개를 털었다.
'괜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일을 벌였다간 될 일도 안 돼. 지금 중요한 건 백상아를 살리는 거다.'
굳이 구칠까지 보내면서 백상아를 지켜야 할 이유는 하나다.
'내가 아는 미래에서 백상아란 존재는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신교의 기록에서 백상아와 관련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아무런 탈 없이 돌아갔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겠지.'
조용히 돌아갔다기보단, 이곳에서 조용히 묻혔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사연합무림맹이 창설한 직접적인 원인인.
'남천백가와 남궁세가가 동반 멸문한 남창지화(南昌之禍)!'
앞으로 약 십 사오 년 뒤, 남창에 세력권을 둔 정파 세력들이 떼몰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천뇌전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남창에 본가를 두었던 남궁세가와 남천백가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져 서로가 공멸했다고.
그 사건으로 실각한 남천검왕 대신 신임 맹주로 임명된 검존은 배후로 본교가 있다며 천명했고.
얼마 있지 않아, 사패천의 적극적인 협조로 정사연합무림맹이 창설되었다.
'명분도 좋으니 아주 그럴듯했지, 아 생각하니 빡치네.'
내가 빡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바로 내가 내총관에 임명되었을 때였기 때문.
나는 아련한 기분으로 과거를 상기했다.
'그때 진짜 X빠지게 고생했지.'
아무리 실권이 없다고는 해도 명색이 교의 수뇌부다.
그 사건 때문에 외총관을 돕느냐고 두어 달은 야근을 밥 먹듯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남들보다 모르는 정보를 좀 더 알았지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 쩝.'
결과적으로, 교주 천유라는 해당 사건에 대해 묵비권을 선택했다.
'본교가 개입했다는 건 완벽한 개소리. 두 세가 사이에 공멸이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분명 뭔가가 더 있었어.'
당시에는 그 '뭔가'의 실체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덮어 버렸다.
그러나 '반천회'라는 조각이 맞춰지자 과거 누군가가 그렸던 전체적인 틀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백상아는 원래 이곳에서 암살당했을 거다. 그리고 그 암살 사실을 검존이 남창지화와 연결시켜 써먹었을 가능성이 커. 그게 교주가 굳이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고 침묵한 이유 중 하나겠지.'
남천검왕의 급격한 실각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거다.
'하, 생각해 보니 이거, 나비효과의 가장 첫 시작점 아니야?'
애초에 이십 년이란 긴 시간을 거슬러 온 만큼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 시작 중 하나를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아, 네놈들의 계획이 뭔지는 몰라도, 아주 완벽하게 일그러뜨려 주마.'
꾸욱!
특히나.
한무연, 그리고 칠장로.
이 둘의 연결점을 알아낸 건 근래 최고의 수확이었다.
***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 흑성검진을 배우는 한 달의 시간이 끝났다.
내가 속한 이 조는 사 조와 모의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나는 사 조의 상황을 지켜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만만치 않겠는데?'
내 예상대로 대부분의 조가 오합지졸이 되어 알아서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두어 개 조는 되레 똘똘 뭉치며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하게 될 사 조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한 조였다.
"정렬!"
이 조와 사 조의 인원들이 일렬로 정렬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와중.
'응? 뭐지?'
나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세 명의 시선을 느꼈다.
'저놈들인가? 사 조가 뭉칠 수 있었던 중심이.'
진상을 닮은 약간 얍삽하게 생긴 놈과, 그나마 조금 반반하게 생긴 놈. 그리고 뭔가 우직해 보이는 놈.
생긴 건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건 절대 아닌데, 어째 분위기는 꽤 비슷해 보인다.
의형제, 뭐 이런 건가?
"오십 보 뒤로! 모의전 준비!"
교관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서로 오십 보 뒤로 물러나며 최초의 진형을 갖추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조 조장 백상아와, 사 조 조장 주국선이 각자 목소리를 높였다.
"사선진, 전개!"
"사선진, 전개!"
서로가 사선진을 전개하면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부터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그 말인즉.
"오!"
"시작부터 힘 싸움인가?!"
"이거, 볼만하겠군!"
상황을 지켜보던 교관들이 재밌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누가 이길 것 같나?"
한 교관의 물음에 조용히 있던 장득수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변수 없이 정면으로 싸운다면 이 조겠지."
그 말에 다른 상급교관이 대번에 반박했다.
"사 조를 무시하지 마. 저 세 놈, 연계가 장난 아니야."
"아, 저 세 놈? 그러고 보니 저것들, 가장 먼저 이번 모의전의 숨겨진 의도를 깨달은 놈들이지?"
"맞아. 조장이 아무리 무리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어떻게든 수행하려고 애쓰는 게 보이더군."
"내가 보기엔 조장한테 그냥 알아서 긴 것 같은데. 주가(住家)라면 나름 만만치 않은 가문이니까."
"그렇게 따지면 이 조도 마찬가지지. 누가 저 진가의 대공자에게 덤벼들겠어?"
"하긴, 삼 주 차에 저 녀석이 나서고 이 조도 완전히 물이 올랐더군."
"즉, 결말은."
"붙어 보기 전엔 모른다, 이거지?"
교관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한 행사.
그것이 시작되었다.
땅!
청량한 금속음과 함께, 두툼한 은자 하나가 하늘을 갈랐다.
그 은자를 다시 낚아챈 교관이 입을 열었다.
"사 조의 승리에 은 한 냥."
"오? 전 교관, 세게 나오는데?"
"균형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겠군. 이 조의 승리에 나도 은 한 냥 걸지."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주변에 있던 교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승패에 돈을 걸기 시작했다.
약 예닐곱 정도가 돈을 걸었을 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장득수가 입을 열었다.
"이 조의 승리에 은 열 냥."
"뭐!?"
"월봉의 절반을 건다고?"
지금까지 걸었던 것 중에선 가장 큰 액수.
장득수는 씨익 웃으며 동료 교관들에게 이죽거렸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그 말에 아직 걸지 않은 남은 교관들의 가슴에 되레 불이 붙었다.
"이거, 순식간에 이 조가 정배가 되어 버렸는데?"
"역배는 참을 수 없지."
심장이 야수인지 두뇌가 야수인지 모를 교관들을 마지막으로 모금이 끝났다.
이제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뿐.
"돌진!"
"박살 내 버려!"
"우와아아아아!"
이 조와 사 조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백상아는 사선진으로 맞대응한 사 조의 행동에도 진을 바꾸지 않았다.
물론 내가 일정 이상의 힘을 쓰지 않을 거라 미리 말해 뒀지만, 그녀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사실 단순히 조직력 측면에 있어도, 이 조는 다른 조에 비교해 절대로 밀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 조의 주공과 사 조의 주공이 맞부딪치기 직전.
"안녕하십니까?!"
으응?
사 조의 주공 삼인방이 갑자기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아직 어린 티를 다 벗지 못한 청소년들이지만, 목소리만큼은 어지간한 성인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우렁찼다.
"제 이름은 백사!"
"흑사!"
"적사입니다!"
"...아니 뭔?"
개중 백사라 자신을 소개한 녀석이 나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저희의 이름은 마도삼사(魔道三蛇)! 진여명 공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렁찬 자기소개와 함께, 상대 세 명이 곧바로 나에게 돌진하며 공격해 들어왔다.
'이런!'
나와 함께 주공으로 뽑힌 녀석들은 흑사와 적사의 간섭에 순식간에 막혀 버렸다.
저 의외의 자가홍보와는 별개로, 삼사라 자칭한 녀석들은 아주 간단하게 삼재진을 무력화시켰다.
"오?"
'딱히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연계가 아주 절묘하다!'
"앞으로 우리를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사의 단검이 내 어깨를 노리며 날아왔다.
고작 하루 이틀 연습해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절묘한 연계.
"어처구니없는 녀석들이군."
만약 상대가 내가 아닌 다른 조원이었다면, 빈틈을 찔려 순식간에 당했을 정도였다.
'제 칠록, 천망회회(天網恢恢)'
십지천록마검에서도 회피에 중점을 둔 방어 초식 중 하나.
백사의 단검은 분명 날카로웠지만, 고작 그 정도 속도로는 이쪽을 공략할 수 없었다.
퍽!
나는 순식간에 찌르기를 흘려내곤, 그대로 발로 백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큭!"
회심의 기습이 무위로 돌아가자 백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님!"
"괜찮아?!"
"미안하군. 제법 좋은 연계였는데 말이야."
나는 다시 진열을 정비한 세 명을 향해 말했다.
"마도삼사라. 차라리 마도삼룡(三龍)이나, 하다못해 마도삼망(三蟒)이라고 하지 그러냐?"
세 마리의 뱀이라니. 사실 자칭이라기엔 좀 조약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백사가 쓰게 웃었다.
"저희가 아직 그럴 깜냥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
"하나 공자님의 밑에서라면 언젠가 삼룡이라 불릴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어떻게, 저흴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만한 깡과 담력, 그리고 주제를 파악하는 겸손함. 이 정도면 진작에 눈에 들었을 텐데 왜 처음 보는 것 같지?
'아, 그렇군.'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지 않더니, 다른 기숙사 녀석들이었구나.
같은 기수라도 인원이 인원이니만큼 기숙사는 세 개의 건물로 나뉘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삼사 녀석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너희 하는 거 봐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오늘 쓸 만한 인재를 영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37화 모의전 (2)
'이거, 쓸 만할지도 모르겠는데?'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기분이다.
삼사의 실력은 솔직히 말하면 쓰레기에 가까웠다.
순수한 실력으로 따지면 우리 조의 다른 주공인 두 명보다도 모자란 정도.
'타고난 살기와 독기로 승부를 보는 유형이로군.'
이대로 일, 이십 년 정도 살아남으면… 그래, 딱 전형적인 사파 고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감각은 상당히 좋아. 아직 가능성이 있어.'
딱히 상승의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녀석들은 절묘한 연계와 동물적인 감각으로 모자란 무공의 성취를 메우고 있었다.
'저런 녀석들은 모자란 부분만 채워주면 급격히 성장하는 법이지.'
어디, 놈들의 실력 좀 볼까?
***
'반드시 저분의 눈에 들고 만다!'
백사, 흑사, 적사의 눈이 불타올랐다.
마도삼사(魔道三蛇).
그들은 사실 미옥성의 뒷골목 출신이었다. 출신 성분으로만 따지면 천일관조차 들어오는 게 불가능한 밑바닥 하류 계층.
사실 마도삼사라는 거창한(?) 호칭으로 자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천일관에 들어가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에겐 삼인(三蚓, 세 마리 지렁이)이라고 불렸다.
그런 그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대모인 마천루주의 힘 덕분.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루주는 이 셋을 상당히 아꼈다.
무공을 열망하는 그들에게 삼류에 불과하지만 마천루 호위들의 무공을 전수해 주었고.
마천루에 드나드는 신교의 고위층에게 베갯머리송사를 벌여 그들을 천일관으로 입관시키기까지 했다.
'반드시, 반드시 성공한다!'
삼사는 자신들에게 길을 열어 준 대모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 했다.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천일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성공하는 것.
그런데, 그들은 운이 좋았다.
누구는 평생 한 번 찾아오기 힘들다는 '기회'가, 지금 눈앞에 찾아왔으니까.
맏이인 백사가 칼을 든 채로 시커멓게 웃었다.
"공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까 뭔가 소름 끼치는데."
표정과 구도가 딱 단검으로 무장한 흑사회 인간 같다.
"그, 그 뜻이 아닙니다!"
백사는 화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고, 공자께서 혈룡마가의 마철수 공자를 제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뭐? 그걸 봤다고?"
한 층 전체를 대실한 데다 거기엔 마가와 진가의 호위들도 있었는데 어떻게?
적사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 저흰 그 일이 벌어진 마천루 출신입니다. 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아, 그런가?"
삼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표정에서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비천한 출신이라고 외면하면, 저들은 그대로 끝장이니까.
하지만 저들에겐 다행히도 나는 딱히 출신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저희에게 주군이 생긴다면 공자 같은 분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직 많이 모자란 건 알고 있지만...."
"그만."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열정은 잘 알겠지만, 아직 모의전 중이거든?"
그 말마따나,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저 새끼들 지금 뭐 하냐는 시선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삼사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부끄러움을 느끼기엔, 그들은 너무 바닥을 겪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사정은 알겠고, 그럼 계속해 볼까? 평가는 모의전이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지."
"예, 공자!"
삼사의 눈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
첫 번째 힘 싸움에서 승리한 이 조가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일시 후퇴!"
사 조의 조장, 주국선이 앙칼진 표정으로 후퇴를 명령했다.
"방첩진으로 변경!"
흑성검진의 방어 형태인 방첩진은 수세에 몰렸을 때 사용하는 진법이었다.
초반부터 이걸 사용한다는 건 그 자체로 자체가 감점 요인.
"젠장!"
주국선이 전방을 향해 욕지거리를 날렸다.
"저 빌어먹을 놈들! 뭐 하는 짓거리야?!"
전력을 다해 상대를 쓰러뜨려도 모자랄 판에 저딴 짓거리를 하다니?
미천한 출신 주제 지금까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더니만 실전에서 대형 사고를 쳐!?
'저 망할 천민들, 나중에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지금은 삼사의 힘이 없으면 승부에서 이길 수 없었다.
주국선의 시선이 저 멀리서 깃발을 흔드는 백상아에게 향했다.
'이대로라면 저년에게 밀린다.'
그녀는 백상아에게 깊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쥐방울만 한 년이 감히 신교의 명문, 주가의 여식인 자신보다도 더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게다가 어린 외모와 어리숙한 행동으로 남자들의 관심과 시선을 한눈에 모으고 있으니, 거슬리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네년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어!'
다른 조원들에겐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조장들은 이번 모의전 결과에 따라 상당한 추가 점수를 얻어 갈 수 있었다.
다른 동기보다 두 달이나 다른 곳에 신경 써야 하는 만큼 이 정도 특혜는 당연했다.
'진가의 공자가 생각보다 제법이야. 빌어먹을 년, 저런 남자를 조원으로 가져가다니. 내 옆에 있으면 정말 어울릴 텐데!'
게다가 이 조에는 마가의 방계라는 마진성까지 있었다.
단순 전력으로 따지면 모든 조 중에서도 최강.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주국선이 깃발을 들었다.
"승류진으로 변경!"
그 말에 삼사는 살짝 혀를 차며 상대에게서 물러났다.
절대복종. 그게 삼사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니까.
승류진으로 변경을 명령하자마자, 뒤엉켰던 진형이 조금씩 복구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격돌로 조원들의 체력은 뭉텅이로 빠져 있었다.
'상관없어! 이 시험은 어디까지나 적장을 잡는 거니까!'
설사 전멸을 면치 못하더라도 상대 적장을 먼저 잡아낼 수 있다면 승부에선 이긴 거다.
"적사, 흑사는 승류진의 맨 끝으로 들어가!"
"네, 조장!"
주국선의 명령에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진여명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백사, 네놈이 핵심이야. 때를 기다리다 신호하면 반드시 저년의 깃발을 꺾어 버려!"
"명심하겠습니다."
"잘해야 할 거야. 만약 이번 모의전에서 진다면 주가의 힘으로 마천루를 밀어 버릴 거니까."
"...!"
백사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주국선의 가문인 천정주가(千霆住家)는 나름 천 명 이상의 식솔을 거느린 상위권에 속한 가문이었다.
마천루가 아무리 신교 제일의 기루라고 해도 주가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대답은?"
"아, 알겠…습니다."
마천루는 삼사가 돌아가야 할 집.
그 집을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렇게 사 조의 진행을 지켜보던 백상아는 나지막이 결론을 내렸다.
'날 잡을 생각이구나!'
승류진은 일점 돌파로 상대 진형을 헤집기 위한 진형이다.
주로 승부처에 충차진을 사용하기 전 적의 빈틈을 만드는 용도였다.
'하지만 그대로 들어오진 않겠지.'
백상아는 동기인 주국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질척거릴 정도로 승부에 집착하는 성향. 그걸 위해 상대의 빈틈을 철저하게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승류진으로 이쪽을 향해 돌진하던 중.
격돌 직전 주국선이 변칙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초호진!"
"초, 초호진이다! 움직여!"
사 조의 조원들은 충돌 직전 내려진 느닷없는 명령에도 어떻게든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숙달이 되지 않은 만큼 어설픈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이, 백상아의 눈에 보였다.
'비, 빈틈!'
한순간, 백상아는 주국선의 전략을 그대로 받아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건 아군의 희생 역시 담보하는 방법이었다.
한순간, 그녀의 뇌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망설여선 안 돼!'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순간, 이 승부는 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걱정 마시길, 조장의 실수는 제가 얼마든지 보완해 드릴 테니까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함께, 백상아는 결단을 내렸다.
"격류진! 우(右)!"
그와 동시에 전방에서 호응하듯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격류진, 오른쪽이다!"
"놈들을 끌어 버려!"
"어? 어어?!"
사 조의 조원들은 이 조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당황했다.
이 조의 조원들이 마치 나선처럼 사 조를 안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뚫리는 게 아닌, 명백히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 주는 거다!
'개싸움!'
주국선은 당황했다.
피해가 얼마나 되든 무조건 혼전으로 몰고 가는 수법.
설마하니 유리한 측이 먼저 격류진으로 승부를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크아악!"
"팔이, 팔이!"
본격적으로 혼전이 벌어지자 이곳저곳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희생은 주국선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뇌리를 지배하는 건 단 하나.
'의도가 읽혔어!'
이래선 백사를 쓸 수 없다. 어설프게 진형을 정비하려 했다간 그대로 기세를 내주며 쓸려 버릴 것이다.
'잘하고 있군.'
격류진을 외치며 조원들을 격려한 건 내가 한 짓이었다.
애초에 무력의 우위는 이쪽에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상황.
'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군.'
그때, 백사를 비롯한 삼사 녀석들이 백상아를 노리며 어떻게든 혼전을 뚫으려고 하고 있었다.
'잘하면 뚫겠는데?'
그렇다면 확실하게 막타를 날려 줘야지.
내가 백상아 쪽으로 살며시 손을 들었다.
혹시나 이런 상대를 만날 경우 미리 맞춰 두었던 전략 중 하나.
내 손을 본 그녀가 나지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차진! 개(開)!"
"충차진이다! 난전을 풀어라!"
조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난전에서 몸을 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사 조의 상태는 거의 너덜너덜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되레 발을 빼 주는 이 조의 행동에 고마워할 정도로 말이다.
"막아! 막으라고!"
주국선이 악을 쓰며 외쳤다. 현재 사 조의 상태로는 일점 돌파를 시도하는 이 조의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막아, 이 멍청이들아!"
그렇다고 뭔가를 지시하기엔 사 조의 상태가 너무 굼떴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독기로 무장한 삼사뿐.
앞으로 나서는 내 앞을 삼사가 막아섰다.
"이번엔 상황이 반대로 되었군."
"보내지 않을 겁니다!"
"지친 것 같은데?"
"여기서 뚫리면 수하를 자처할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결사의 각오로 나를 막아섰지만.
세상은 의기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뭐, 안 보내 줘도 돼."
"...네?"
"사실 주공은 내가 아니거든."
"서, 설마?!"
백사의 고개가 뒤쪽으로 확 돌아갔다.
"이, 이런 미친!"
백사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모든 전력과 이목이 내게 집중된 사이, 지금까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았던 마진성이 주국선에게 튀어 나간 것이었다.
"뚜, 뚫렸다!"
"막아라아아아!"
기본적으로 조장은 깃발로 지휘만 할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이 뚫리거나 빈틈이 드러나면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백사가 욕지거리를 하며 뒤로 빠지려 했지만.
"어딜 가시나? 내 부하가 되고 싶다면 끝까지 내게 집중해야지?"
나는 그런 백사의 앞을 가로막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런 시답잖은 짓을 하다니!"
"그래, 이건 어지간해선 걸리지 않은 시답잖은 짓이지. 하나 뒷골목 출신인 네놈이 더 잘 알잖느냐?"
백사의 눈이 흔들렸다.
"그 시답잖은 짓에 걸린 순간 모든 걸 잃는다는 걸."
주국선이 아무리 선배 기수라고는 하나,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마진성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콰직!
그렇게, 주국선의 손에 들린 깃발이 마진성에 의해 부러지면서, 모의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38화 음모 (1)
"우와아아아!"
"이겼다! 이겼어!"
이 조의 조원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며 뛸 듯이 기뻐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제 할 일을 충실히 수행했으면서도 승리를 따냈으니까.
"이 정도면 살아남은 거나 다름없어!"
"그렇지!"
아직 단체전이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이번 집단전 시험에서 살아남기 위한 팔부능선을 넘었다고 봐도 좋았다.
그에 반해.
사 조의 분위기는 완벽한 초상집이었다.
"비, 빌어먹을...."
백사가 비통함을 드러내며 바닥을 내리쳤다.
호기롭게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며 존재감을 각인하려 했지만,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져 버렸다.
쪽팔림 이전에 천일관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마천루를 밀어 버리겠다는 주국선의 협박. 그게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얼굴이 왜 이리 죽상이야?"
"고, 공자님?!"
백사가 눈을 크게 껌뻑였다.
"누가 꼴 받게 했냐?"
"아, 아니, 그게...."
마천진가의 대공자가 이런 저렴한 단어를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활약을 못해서 억울한 거냐?"
"...."
"그게 아니면, 협박이라도 당했냐?"
"그, 그것이...."
백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그런 백사의 흐린 표정을 보고는 혀를 찼다.
'쯧! 딱 봐도 견적 나오는구만.'
사람의 처절함과 독기에는 무조건 근원이 되는 동기가 있다.
백사가 기루 출신이라는 것을 듣자마자 나는 사 조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다.
저 삼사가 뭉쳐 조장의 권력을 받쳐 준 게 아니다.
되레 조장이 삼사를 겁박해 그들을 중심으로 조의 단결력을 끌어모은 것이다.
"왜? 지면 마천루를 밀어 버리기라도 한데?"
"그, 그걸 어떻게?"
백사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뭘? 척하면 착이지."
내가 지위에 비해 순하게 살아와서 그렇지, 사실 육가의 혈족 정도 되면 그 패악질이 장난이 아니다.
당장 내 동생인 진여운만 해도 수틀리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계급 사회인 신교에선 당연한 말이지만 상위 가문이 격하의 가문 및 세력을 향한, 소위 '갑질'은 이미 전통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그건 내가 막아 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백사는 물론 적사와 흑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날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천진가가 천정주가 정도는 가볍게 누르는 세력이라지만, 고작 밑바닥 인생인 자신 때문에 힘을 써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자신은 아직 그의 부하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
"단골이 될 술집이 망하는 건 보기 싫으니까."
"...."
누가 미옥성 마천루를 일개 술집 취급하냐고 묻겠지만, 나는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쿵! 쿵!
삼사는 나를 향해 연신 이마를 박으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 인사는 됐고."
나는 엎드린 삼사 앞에 쭈그려 앉으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너희, 내 부하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절박한 그들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난 말뿐인 충성 맹세는 싫어해."
"아...."
"너희도 귀가 있다면, 내가 무엇을 선언했는지 알 텐데?"
그 말에 옆에 있던 적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류, 라는 특별한 시험에 함께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그 본류의 통과율이 얼마인지도 들었지?"
"오 푼...."
그래, 오 할도 아니고 오 푼이다.
무슨 고독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백 명이 도전하면 고작 다섯이 살아남는, 사실상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
"내 수하가 되려면 나와 함께 지옥까지 함께하겠다는 패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손발을 자처하는 진상과 백구, 두 놈조차 본류에 함께하자는 말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을 회피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 놈은 어떨까?
"도전하기만 하면, 수하로 삼아 주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지. 살아남아야지. 망자를 수하로 삼을 수는 없잖아?"
"살아남는다면...."
"네놈들 출셋길은 내가 보장해 주지. 기대해도 좋아. 단, 정말로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
삼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쿵!
"지옥이 아니라 더한 곳도 따라가겠습니다. 부디 공자님을 주군으로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오?"
셋의 화끈한 선언에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설마 이렇게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릴 줄이야.
"좋아, 오늘부터 너희는 내 부하 이호 삼호 사호다."
"네? 일호는 누구...."
"따로 있다. 나중에 만나게 해 주지."
냉정한 말이지만, 솔직히 삼사 녀석들에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깡과 독기는 쓸 만하지만, 상승 무공을 익힐 시기를 살짝 놓쳤고 무엇보다 특출난 재능이 없다.
하지만 본류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그 본류가 내가 기대한 만큼의 성취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땐 삼사 녀석들을 진심으로 수하 취급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집단전 시험에서 조장을 맡은 이들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기숙사에서도 각방을 배정받는다.
그리고 그 각방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들!"
쾅! 콰직!
의자와 탁자 등, 가구들이 거침없이 날아다니며 원래의 모습을 잃는다.
천일관에선 한 번 지급된 물품이 부서지면 본인의 힘으로 수급해야 하지만, 지금 화를 토해 내는 당사자는 전혀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천한 것들! 감히 진 공자를 이용해서 나를 협박해?!"
지금 방에서 날뛰는 이는 다름 아닌 사 조 조장인 주국선.
그녀는 가주 동생의 막내딸로 본가인 천정주가에선 나름 귀여움을 받는 직계 혈족이었다.
"절대,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그 지렁이 세 마리만이 아니라, 날 엿 먹인 그 망할 년까지!"
그녀가 이렇게 대노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번 모의전이 패배로 돌아간 뒤, 그녀의 기숙사로 찾아온 진여명의 경고 때문이었다.
-마천루는 제가 한량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주 들르는 곳이죠. 그곳이 없어진다면 제가 많이 슬플 것 같군요.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녀가 그 속뜻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사실 진여명이 마천루에 들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버지 진군악에게 발각되어 개판이 났던 그 전생 첫날.
다만 주국선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고, 그녀에겐 삼사 놈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진여명에게 쪼르르 붙어 버렸다는 결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 사실 여기까진 그리 화가 나진 않았다.
마천진가의 위세가 워낙 대단하기도 하거니와, 진여명의 빛나는 외모와 뛰어난 무공 실력은 주국선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이분의 옆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망상을 하며 진여명을 배웅하려고 나왔을 때.
그녀가 진짜 화가 난 이유가 바로 그 직후에 벌어졌다.
-앗! 진여명, 공자!
-백 소저?
하필이면 기숙사 복도에서 '그년'이랑 마주친 것이다.
주국선은 보았다.
백상아를 본 순간, 부드럽게 풀리는 진여명의 얼굴을.
-아직 집단전 시험이 끝난 건 아니니 편하게 부조장으로 부르시죠, 조장님.'
-헤헤, 그럴까요? 부조장님!
-이번 지휘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뭘요! 부조장님이 일선에서 조율해 주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아주, 아주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 순간, 주국선의 가슴 속에 불이 일었다.
그리고 내 남자에게 꼬리치는 저 여우년과 배신을 때린 삼사에 대한 증오가 극도로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주국선의 시커먼 마음속이 더더욱 시커멓게 타오를 때.
"이거, 찾아올 시기를 잘못 찾아온 건가요?"
"...당신은?"
내 남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나마 봐줄 만한 얼굴을 지닌 남자가 주국선의 앞에 나타났다.
"백상아 관도에 대한 증오심이 장난이 아니시더군요."
"당신이 무슨 상관이죠?"
이 시점까진 분명 그녀에게 이성이 있었다.
하지만 직후 이어진 상대의 말에 그녀의 이성은 날아갔다.
"그 증오가,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인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사실 당연하지 않다. 아무리 막 나가는 마도라도 같은 교도에 대한 노골적인 살인은 중죄였으니까.
"그렇다면, 그 기회를 제가 드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회, 라고요?"
"분명, 한 달 뒤에 두 번째 모의전이 있다지요? 서른셋씩 모여 붙는 흑성대진에 대한 모의전이."
"그래서요?"
"이해하지 못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모른 척하시는 걸까요?"
남자가 주국선에게 살짝 다가왔다.
"그런 인원이 붙는 전장(戰場)인데,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지 않겠습니까?"
"...!"
"싸움이 격렬해지면 사고도 일어나는 법이지요. 당장 이전 기수에서도 실제로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고요."
주국선의 표정이 그제야 혹하게 변했다.
"그 말씀은?"
"제가 힘을 써서 당신의 조와 그녀의 조를 같은 조로 통합시킬 겁니다. 즉, 한 부대가 되어 싸우는 거죠."
주국선은 슬슬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거기에서 상대 부대의 누군가가 그녀의 조를 향해 격렬하게 돌격을 하겠죠?"
"저는 그들이 무사히 통과하도록 내 조의 움직임을 잘 제어하면 되겠군요?"
주국선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말이 아주 잘 통하는군요."
"그래서, 그 대가로 내게 원하는 게 있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자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럼… '한(漢) 공자'는 무엇 때문에 그년의 죽음을 원하시는 거죠?"
"소저와 같은 이유죠.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가 사라지길 바라는 건, 마도에 몸을 담고 있는 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 아닙니까?"
"후, 후후후… 그렇죠!"
사실 전혀 당연하지 않았지만, 마도의 상류층에서 자라 온 주국선의 상식에선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하가 일을 더럽게 못하니 직접 나설 수밖에요. 아아, 덩치만 크지 정말 쓸모없는 놈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몰라도, 부하가 쓸모없다는 건 동감하겠네요, 깔깔깔!"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사람의 죽음을 기원하며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
그 이후 다른 조의 모의전도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바로 어제, 은 두 냥을 걸었다가 패가망신한 상급 교관 이한명이, 휘파람을 부는 장득수를 쏘아보았다.
"끄응! 장 교관,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인다?"
"당연하지. 월봉 한 달 치를 한 번에 땄는데."
"빌어먹을! 내 촉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고 봤는데."
"도박은 한 끗발 차이지."
사실 장득수가 이 조의 승리에 걸은 건 다름이 아니었다.
'진여명 그놈, 아무리 봐도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거든.'
당연한 말이지만, 장득수는 작년에 천일관을 수석으로 졸업한 마철수를 직접 겪어 본 사람이다.
마철수는 졸업 시점에서 검기를 무난하게 뽑아낼 수 있는 일류에 이른 고수였다.
그 성취를 바탕으로 마룡관 출신이 아님에도 육마룡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가?
거기다 끝까지 살아남아 졸업한 천일관의 인재들이 구마각이나 십칠당으로 가지 않고 기꺼이 마철수를 따라갔다.
마철수가 혈룡마가의 아무리 직계라지만, 혈룡마가는 이미 마철수의 형인 대공자를 중심으로 후계 작업이 거의 끝났다는 평을 듣고 있지 않던가?
그야말로 무력에 인망까지 겸비한, 근래에 보기 드문 최고의 인재!
그런데 진가의 한량이라 불린 진여명이 그 마철수를 꺾었단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실체가 돌아다니지 않아 그저 뜬소문으로 여겼고, 진여명을 처음 봤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고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번 기수가 입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 관도들 전용의 지하 연공실이 폭발했던 사건이었다.
39화 음모 (2)
뭐, 지하라고는 하지만 깊이로 따지면 그냥 반지하 수준의 연공실이었다.
하지만 그 연공실은 어디까지나 청강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어지간한 검기에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미심쩍긴 했지. 정황이 밝혀진 지금도.'
만약 진여명의 목숨을 노리고 온 암살자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진여명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고, 애꿎은 연공실만 날아가 버렸다.
'그게 정말 암살자의 짓이었을까?'
그 모든 감시를 뚫고 잠입한 암살자가 그렇게 요란하게 강기를 날려 댄다고?
물론 외부에서 침입해 온 정황이 확실하게 발견되었고, 그에 대한 조사가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장득수는 미묘한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녀석이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리고 지금은 그 경지를 감추고 있는 거라면?'
말이 되긴 하다. 가능성이 지극히 낮아서 문제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장득수는 지금까지 진여명에 대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물론 단 한 번도 진여명은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훈련 중에는 항상 겸손했고, 굳이 무리의 중심이 되지 않고 제 역할만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 자신과 마주했을 때 드러냈던 오만함과는 전혀 다른 태도.
하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장득수의 의심을 부추겼다.
왜냐하면 진여명이 관도들을 향해 천명한 것.
'본류 천일관.'
그 실체를 아는 이는 이 천일관에서도 관주와 부관주, 그리고 관주와 비슷한 연배의 수석교관뿐.
그가 아는 건 그냥 절벽에 몸을 던지는 행위나 다름없다고만 알고 있었다.
'마치 나와 함께할 놈들을 살펴보는 것 같기도 했지.'
분명 감추고 있는 게 있다.
만약, 정말 만약 진여명이 정말로 실력을 감추고 있다면?
그 본류 천일관에 도전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득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털었다.
'뭐 어쩌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거지.'
육가의 판도가 뒤바뀔 천재가 나오는 셈이었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뒤에는 그놈으로 인해 신교가 뒤흔들리겠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자신 같은 소시민은 그저 떨어지는 콩고물만 주워 먹으면 된다.
장득수는 피식 웃으며 동료 교관들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통합 일 부대에 은 열 냥!"
통합 일 부대는 진여명이 속한 이 조가 속한 부대였다.
***
내가 속한 조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몇 주 전만 해도 입을 꾹 다물며 불평을 몸으로 내뿜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사 조와의 격전에서 얻어 낸 일 승. 그리고 다른 조들이 보인 오합지졸과도 같은 모습을 보고 확신한 것이다.
조장인 백상아 정도면 그야말로 천사라는 것을.
"이 정도면 부대 모의전에서도 상위권을 노려 볼 수도 있겠어!"
"그렇지! 잘 부탁드립니다, 조장님!"
"무, 물론이죠!"
조원들의 그윽한(?) 눈빛에 백상아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분위기가 좋은 건 좋은 거고.
'생각보다 조용한데?'
나는 저 멀리 있는 사 조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며칠 전 주국선에게 한차례 경고를 날리고 온 뒤.
뒤에서 이것저것 흉계를 꾸밀 것만 같던 주국선은 의외로 그 이후로 별사건 없이 조용했다.
그렇다고 삼사 녀석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들어오는 백사의 보고로는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불이익을 주진 않았다고 하니까.
'그럴 상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 표독스러운 인상을 고려하면 뒤끝이 구렁이의 몸통만큼 길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긴 한데.'
그 생각에 금이 갈 일이 일어난 건 바로 한 시간 이후의 일이었다.
일차적인 조별 모의전이 모두 끝나고, 세 개의 조가 한 개의 부대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부대로 지정된 이상 부대를 이끌 대장의 존재는 필수로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각 조의 조장들이 만난 자리에서.
"패장이 굳이 대장직에 입회할 수는 없겠지요. 이 조 조장님께서 대장 자리에 오르는 게 순리에 맞을 것 같군요."
"아, 네?"
"그렇지 않나요? 오 조 조장님도 딱히 의견은 없을 것 같은데요."
"크, 크흠!"
주국선에게 지명받은 오 조 조장 종회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실 여기서 가장 사정이 좋지 않은 게 바로 오 조였다.
사 조는 그래도 비등한 대결이라도 벌였지, 오 조는 실전에 들어와서도 조원들의 불복종과 반항으로 꼴사납게 패배했던 것이었다.
"부, 불만은 없소."
"결정되었군요."
주국선은 손뼉을 짝 치며 멋대로 결론을 내버렸다.
그 결론이 이 조에겐 그리 나쁘지 않아 백상아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수상한데?'
부조장 자격으로 회의에 참여한 나는 주국선의 태도에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분명 저 여자는 백상아에게 악감정이 있어.'
그건 며칠 전 기숙사에서 그녀가 백상아에게 보냈던 살기에 가까운 시선을 상기하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생살조차 씹어 먹을 것만 같았던 그 독기는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싱긋!
내 시선을 눈치챈 주국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백상아에게 보낸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꺼림칙했다.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한이 있음에도 와신상담을 하는 이유는 하나.
더 큰 보복을 위해 인내하는 것이다.
'고작 망신을 주려고 저러는 건 절대 아닐 테고.'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암살?'
누구 하나 크게 다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단체전이다.
당장 이번 조별 모의전만 해도 사망자는 없었을 뿐 기수 전체를 통틀어 크고 작은 부상자가 스무 명가량 나왔으니까.
육십 명이 넘게 날뛰는 단체전이라면 더 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리 주가의 인물이라 해도 암살자를 심어 놓는 건 불가능하다.
'크게 다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소 흑성검진 때와 마찬가지로 대장은 깃발만 들 뿐 직접적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만약 주국선이 그걸 노린 거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지.'
두 눈에 귀화가 흐른다.
내 경고를 무시하고 일을 벌이려고 한다면, 그건 주국선만이 아니라 주가 전체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한 달의 시간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서른셋이 하나가 되는 흑성대진은 소 흑성검진과는 다르게 진법의 난이도가 꽤 되는 편이었다.
단순히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릴 정도였다.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으음, 솔직히 말하면."
내 물음에 백상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했다.
"개판이네요!"
"...그렇죠?"
열한 명이 세 배가 되었을 뿐인데 진법의 운용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게 상승했다.
"이대로라면 진법의 묘리를 살리긴 힘들어요. 흑성검진은 말이 검진이지 군의 진과 큰 차이가 없는데 비해...."
"흑성대진은 명실상부한 진짜 진법이니까요."
기운을 합쳐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
그게 무림의 진법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지금 상태라면 일 년은 꼬박 연습해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올 거예요."
"으음!"
사실 일 년도 적게 잡은 것이다.
수십 명 단위로 펼치는 진법은 거의 삼사 년은 진득하게 호흡을 맞춰야만 제 위력이 나오는 법이니까.
당장 저 소림의 백팔나한진만 해도 십 년의 수련이 없으면 펼치는 걸 금지하기로 유명했다.
고민하는 백상아를 향해,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그 말씀은?"
"통일성. 그것 하나만 보고 가죠."
솔직히 초반부터 백상아를 중심으로 뭉친 일 부대가 이 정도인데, 다른 부대의 사정은 안 봐도 뻔하다.
당장 이 부대와 삼 부대의 경우, 서로 대장직을 먹겠다고 싸움까지 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부대의 경우 결국 참다못한 산도전이 대장 후보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자신이 대장이 되었다는데....
'우리야 좋지.'
산도전을 중심으로 한다면야 조직력이야 늘겠지만, 산도전은 대장보단 전면에 나서 적을 분쇄하는 행동대장이 가장 적합하다.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면 되레 환영해야 할 일.
"어차피 천일관에서도 신입 관도들에게 고차원적인 움직임을 기대하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집단전에서 오합지졸 같은 모습을 탈피하는 것, 그게 바로 그들의 의도가 아닐까요?"
"확실히!"
백상아가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사실 이 조와 사 조가 특출나게 잘 싸웠을 뿐, 다른 조의 개판 같은 상황을 보면 그게 평균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지나치게 세분화하지 말고 각 조별로만 움직임을 통일시키죠. 사용하는 세부 진법도 다섯 개 정도로만 줄이는 겁니다."
"좋은 말씀이에요! 확실히, 승리하기만 한다면 굳이 화려한 무언가를 보여 줄 필요는 없죠!"
백상아 역시 머리가 돌아가는 만큼, 내 제안이 얼마나 타당한지 대번에 이해했다.
단지, 내가 이런 제안을 한 건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어서였다.
'분명 사고가 난다.'
삼사를 시켜 주국선의 움직임을 몰래 감시하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그 후로 주국선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되레 삼사를 모아 지금까지 미안했다며 사과하고, 너희를 주공으로 중용하겠다며 다짐했다고까지 했다.
'굳이 삼사를 주공으로?'
그 말인 즉, 삼사가 주공으로 나서면 그들은 백상아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백상아에 대한 방비가 떨어진다는 것.
정말로, 정말로 수상쩍었다.
***
그날 밤.
"독절(毒絶)."
"예, 이령. 하문하시지요."
독절이라 불린 관도가 이령을 향해 엎드렸다.
"네가 지금 육 조의 조장이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일 부대와 싸우겠군?"
"그렇습니다."
독절은 묵묵히 물음에만 대답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이령의 명령이 떨어졌다.
"백상아를 죽여라."
독절이 고개를 들었다.
"산도전 조장에겐 따로 언질을 주셨는지요?"
일단 소속이 다르긴 해도 산도전은 자신과 같은 주군을 모시는 자였다.
"그 무능한 놈은 신경 쓰지 마라."
산도전의 이름이 나오자 이령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리고 그놈 성격상 반발할 게 뻔하니까."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독절이, 의외로 잠시 뜸을 들였다.
"한 가지 불안한 부분이 있습니다."
"뭐지?"
"천일관의 수색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이면 제 정체가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
그 말에 이령의 표정 역시 살짝 곤란하게 변했다.
독절은 자신을 이곳에 보낸 팔군(八君)이 붙여 준 특급 암살자 중 하나였다.
그 능력은 신교 직속 최강의 암살 부대라는 마황귀살대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흔적을 노출해서는...."
이전 연공실 폭파사건 당시 천일관과 조직의 외부를 이어 주는 비밀 통로 하나가 노출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천일관은 그곳에서 나온 단서를 놓치지 않고 지금까지 끈질기게 파고드는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이령의 머리에 일타쌍피를 얻어 낼 계책이 생각났다.
"백상아를 죽이면 뭐가 됐든 네게 조사가 들어올 수밖에 없지."
독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령의 말뜻은 명확했다.
"네가 독박을 써 줘야겠다. 탈출로는 내가 알아봐 줄 테니, 너는 백상아를 죽이는 데에만 모든 힘을 다해라."
탈출로? 정말 그래 줄까?
독절의 마음속에, 아주 잠깐 의구심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어차피 자신은 도구였다.
설사 주인이 버린다고 해도, 얌전히 폐기 처분을 당해야 할 도구.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조직'에 얽매인 독절의 인생은 그러한 것이었다.
"명(命)."
독절은 고개를 숙였다.
40화 음모 (3)
그렇게 시간이 지나, 모의전의 날짜가 밝았다.
"이번 모의전의 결과에 따라, 너희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장내에 싸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승리한 곳이나 패배한 곳이나,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긴장감이 유지되는 중이다.
그런 관도들의 모습을 본 교관 중 일부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흠, 꼴을 보니 아직도 멀었군."
"승리 조와 패배 조가 뒤섞었으니, 제대로 된 협력이 일어날 리가 있나."
패배한 조는 이번 단체전에서 그 이상의 활약을 보여야만 한다.
승리한 조는 그 정도까진 아니어서 약간의 여유가 있다.
그 어긋난 톱니바퀴가 현재의 얼음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일 부대겠지. 거긴 그나마 봐줄 만하더군."
거의 대부분의 교관이 백상아를 중심으로 뭉친 일 부대를 가장 유력한 상위권 후보로 봤다.
"아, 역시 집안이 좋고 볼 일이야. 말 안 해도 알아서 딱딱 숙여 주는데 대장 입장에선 정말 편하기 그지없지."
"솔직히 개판 날 가능성이 가장 큰 게 이 조였는데."
"어찌 알았겠나? 저 진가 놈이 조장 말에 순순히 따를 거라는 걸."
"결과적으로 일 부대는 조직력 하나는 제대로 챙겼어."
고차원적인 전술은 힘들더라도, 적어도 지시를 어길 일은 없다.
현재 상황에선 그것만으로도 큰 위력이 나올 것이다.
"반대로, 이 부대는 안 됐군. 대장을 잘못 뽑았어."
이 말은 대장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었다.
"선봉으로 내세워야 할 놈이 대장이 되었으니, 그나마 있던 승산도 없어진 셈이군."
"아서라, 그 덩치가 아니었으면 이 부대는 삼 부대 꼴이 났을 거다."
"쩝, 그건 그렇지."
그들이 보기엔 가장 개판인 건 바로 삼 부대였다.
어이없게도 삼 부대는 끝까지 대장을 정하지 못했다.
그럼 대장기를 누가 드냐고?
깃발 하나를 본진에 꽂아 넣고 조장 세 명이 무기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꼬락서니에 교관들 몇몇이 얼굴을 감쌌다.
"저긴 망했군."
"일선에서 가장 큰 무력을 담당해야 할 조장급 인원 두 명이 줄었으니, 안 봐도 뻔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일 부대와 이 부대의 충돌에서 사상자가 대량으로 나올 경우이긴 한데...."
"그래도 꼴이 저래서야."
"빌어먹을, 내 돈이 삼 부대로 갔는데!"
한 교관의 탄식에 다른 교관들의 얼굴에도 희비가 갈렸다.
이번 돈내기는 워낙 변수가 많아 전투 직전이 아니라 조별 모의전이 끝난 한 달 전에 미리 배당이 끝나 있었다.
상황을 예견하지 못하고 돈을 건 교관들은 죽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자, 돈 얘기는 그만하고. 관주님 오신다."
천일관주가 온다는 얘기에 교관들의 태도가 대번에 각이 잡혔다.
이런 단체전 행사엔 관주가 직접 참관하곤 했으니까.
천일관주, 무옥패 조진상이 수석교관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이끌고 자리에 나타났다.
상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천일관주가 손을 들었다.
"그래, 시작하게나."
그 말이 있자마자 장득수가 장내를 향해 크게 외쳤다.
"일 부대, 이 부대! 삼열 종대로 정렬!"
척! 척!
지시에 따라 일 부대와 이 부대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살벌했다.
'누구일까, 저격수가?'
나는 너머에 있는 상대를 훑어보며 혹시 모를 암살자의 존재를 탐색했다.
'삼 부대에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한데....'
일 부대와 삼 부대는 가장 마지막에 모의전을 벌인다. 가장 지치고 가장 부상자가 많을 시기라 일을 도모하긴 적당하긴 하다.
하지만.
'그 역을 칠 수도 있으니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다.'
그렇다고 지금 정신줄을 놓을 이유는 없다.
"오십 보 밖으로!"
교관의 지시에 두 부대가 천천히 서로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지정된 거리까지 벌어진 순간.
각 부대의 대장들이 깃발을 들며 첫 명령을 내렸다.
"승류진 전개!"
"방첩진 전개!"
일 부대는 겹겹이 방어벽을 쌓는 방첩진을.
이 부대는 초장부터 대놓고 돌파를 노리는 승류진을 전개했다.
"호오?"
그 모습을 지켜본 천일관주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대놓고 의도가 느껴지는군."
그의 옆에서 가면을 쓴 수석교관 이규보가 그 말을 받았다.
"안정된 조직력으로 방어에 집중하는 일 부대와, 단기 결전으로 승부를 노리는 이 부대의 싸움이군요."
"이 부대의 대장이 머리를 썼군. 정상적으로 싸운다면 승부가 안 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모양이야."
전장을 살펴본 이규보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일 부대의 좌측이 좀 어수선하군요."
여기서 보는 좌측은 사 조를 일컬음이었다.
천일관주 역시 그것을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통제가 덜 되는 느낌이야. 아니면 공을 위해 독단적으로 행동하려는 건가?"
"사 조는 이 조와의 모의전에서 졌으니까요. 게다가 방어 위주로 전략을 짰으니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후후후!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우위가 있을지언정 서로의 약점은 명확하다.
전장을 지켜보면서 천일관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조사는 어떻게 되었나?"
"거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신입 관도들 중에 있는 건 확실합니다."
"본교의 다른 가문이 아니라 외부 세력인 건 확실한가?"
"구할 정도는요. 흔적의 방식이 본교인의 소행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빨리 잡아냈으면 좋겠군. 무슨 의도로 이 먼 천일관까지 기어들어 왔는지."
"수관대주가 직접 쫓고 있으니 곧 그리될 겁니다."
천일관주와 수석교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그들이 추적하던 그 '꼬리'가 사고를 터트렸으니까.
***
'산도전 대협, 초장에 승부를 볼 생각이구나!'
시작부터 승류진으로 나오는 상대의 모습에 백상아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산도적 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산도전은 무공만이 아니라 전술적 안목 역시 상당했다.
그 전술적 안목의 첫 단계는 적과 아군의 전력 차이를 가늠하는 것.
그리고 대번에 결과를 짐작한 산도전은, 단기 결전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막으면 이기겠지만, 쉽지는 않겠구나.'
이전처럼 격류진을 쓸 수는 없다.
탄탄한 조직력이 자신들의 장점인데 격류진은 그 조직력을 자체적으로 와해하는 진.
사실상 자해나 마찬가지다.
"돌진해라!"
"우와아아아!"
이 부대의 대원들이 귀신같은 기세로 일 부대의 중앙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일 부대의 중앙에는.
사 조에서 특별히 끌어온 삼사가 선봉을 지키고 있었다.
"저 새끼들 전부 조져!"
"주군께 우리의 활약을 보여 주자!"
아직 본류에 대한 도전이라는 조건이 남아 있지만, 삼사는 진여명이라는 줄을 잡은 이후 사기가 크게 충천해 있었다.
이번 배치 역시 진여명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선봉을 자처한 결과였다.
그렇게 삼사를 비롯한 충차진의 첫 껍질이 이 조의 선봉과 부딪쳤다.
'나쁘지 않아.'
아무리 밀고 들어온다 해도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면 뚫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번 부대 간의 모의전에서는 방패의 사용도 허용된 만큼 더더욱.
자기 몸통만한 방패를 든 삼사가 필사적으로 적들의 돌진에 버티고 있다.
하지만 승류진은 모든 대원이 일점으로 돌파하는 진.
아무리 삼사라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사 조, 오 조는 그대로 중앙으로! 힘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됩니다!"
백상아의 외침에 오 조의 조장은 순순히 조원들을 이끌고 중앙의 힘 싸움에 참가했다.
그런데.
"사 조! 사 조 조장은 뭐 하고 있습니까?!"
사 조 조장인 주국선이, 어째서인지 꾸물거리며 지시에 불이행하고 있다!
그렇게 사 조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을 때.
그 빈틈을 산도전이 놓칠 리가 없었다.
"격류진을 펼쳐라!"
"격류진이다! 모두 원을 그리며 돌파해!"
이전 백상아가 개싸움으로 몰아가기 위해 사용했던 격류진.
이번엔 그걸 산도전이 역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백상아는 서서히 균열이 벌어지는 진형을 보며 경악했다.
"아, 안 돼!"
이대로라면 난전이다!
끝까지 승패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최악의 사건이 일어났다.
"뭐, 뭐 하는 거야, 지금?!"
부대의 좌측을 담당하던 사 조가, 난전에 참여하기는커녕 되레 옆쪽으로 쭉 빠지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
'배신이다!'
백상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사 조 조장 주국선이, 탈락을 감수하고서라도 백상아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판을 깨 버린 것이다.
"아, 안 돼!"
그리고 사 조가 빠진 빈틈으로, 이 부대의 관도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이 미친 배신자들이!"
"사 조 놈들, 이게 지금 무슨 짓거리냐?!"
"...."
삼사를 제외한 사 조의 조원들은 아군의 욕지거리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사전에 주국선에게 전원 매수되어 뜻을 함께하기로 했던 것이다.
"막아! 뚫리면 끝장이다!"
오 조의 조장 종회가 남은 조원들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사 조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돌입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뒤엉키며 난전이 벌어졌고, 백상아는 더 이상의 지시는 무용이 되었음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 조가 빠진 이상 이대로라면 진다!
그녀의 시선은 난장판이 된 전장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렇기에, 좁아진 시야 탓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살기를 갈무리하고 자신의 목을 노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걸.
***
'쉽군.'
육 조의 조장인 독절은 조원들을 돌입시킨 후 곧바로 은잠술을 펼쳤다.
한낮에 은잠술을 펼쳐 봤자 밖에서 보면 전부 보일 수밖엔 없지만, 중요한 건 바로 눈앞에서 싸우고 있는 관도들의 이목을 속이는 거였다.
'돌입한다.'
독절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상대의 대장, 백상아의 목을 따는 것!
어차피 이곳에선 은잠술을 쓰든 뭘 하든 전략이라는 이름하에 용인될 수 있었다.
상대의 목에 칼날을 꽂기 전까진 말이다.
'암살 시기로는 더없이 최악이지만 어쩔 수 없지. 난 도구이니.'
사 조가 빠져 버린 덕에 상대의 진형에 거대한 틈이 벌어졌다.
하나 굳이 그 틈으로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더한 틈이 벌어졌으니까.
'죽어라.'
백상아를 향해 돌진하던 독절이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천당가가 자랑하는 절독 중 하나, 칠보추혼독이 발린 암기였다.
"잠깐, 저건?!"
그제야 독절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낀 관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관주의 날카로운 눈은 품속의 검에 발린 독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큭큭, 늦었어."
독절의 신형이 순식간에 가속하기 시작했다.
일개 관도의 신분이라고 하지만, 독절은 본래 특급 살수 출신.
본격적으로 신법을 펼친다면 설사 교관이라도 그를 잡을 수는 없었다.
"...!"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독절을 인식하는 순간, 백상아는 망설임 없이 깃발을 버렸다.
암살자와 일개 관도를 헷갈릴 정도로 그녀의 안목은 낮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무기 없이 특급 살수의 손에서 살아남기란 요원했다.
'빠, 빨라!'
최대한 신법을 펼쳐 자리를 달아나려고 했지만 중과부적.
무표정한 독절의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백상아의 시야가 새하얗게 일그러졌다.
'주, 죽는…!'
그렇게 독절이 순식간에 그녀의 목에 독검을 박아 넣으려던 찰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퍼억!
독절의 옆구리에, 누군가의 발이 호쾌하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