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5

41화 음모 (4)

처음 사 조가 발을 뺀 순간 직감했다.

'저 빌어먹을 년이 기어코 사고를 쳤구나!'

전방에 있던 삼사 녀석들이 당황한 걸 보니, 분명 녀석들에겐 비밀로 진행한 모양이다.

이미 일이 터진 이상 불평만으로는 아무런 해결도 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진다. 하지만!'

이젠 승패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나는 곧바로 전장에서 살짝 뒤로 빠지며 전체적인 전황을 살폈다.

이게 단순한 견제에 그칠지, 아니면 예상대로 극단적인 상황이 찾아올지를 파악해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장의 바깥쪽에서 음울한 인상의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수다!'

내가 저 남자의 존재를 대번에 알아챈 이유는 간단했다.

구칠이 일할 때마다 풍기던 살수 특유의 냄새가, 바로 저 남자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제대로 훈련받은 일류 살수다!'

저런 살수를 고작 주국선 따위가 집어넣었을 리가 없다.

분명 다른 쪽, 어쩌면 그 한무연이라는 놈의 소행일 수도 있다!

쌔애액!

내 감이 맞았는지 놈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백상아를 노리기 시작했다.

백상아는 살수의 존재를 눈치채고 깃발을 버려 가며까지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놈의 경신법은 백상아가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막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살수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내 몸은 착실하게 놈의 궤적에 따라붙고 있었다.

퍼억!

그리고 놈의 단검이 백상아에게 이빨을 드러낸 순간.

내 발차기가 그대로 놈의 옆구리에 꽂혔다.

***

"암살자!"

독절의 존재를 눈치챈 건 천일관주만이 아니었다.

"중지! 모의전을 중지하라!"

"수, 수석교관님?"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몇몇 교관이 수석교관 이규보의 외침에 의아함을 표했다.

하지만 장득수를 비롯해 눈치가 빠른 상급 교관들은 이규보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모의전을 중지하고 물러서라!"

"교관들은 관도들을 보호하라!"

"암살자를 제압해라!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

암살자라는 말이 나오고 나서야 다른 이들은 그제야 상황을 눈치챘다.

주변에 있던 교관들이 막 난입하려던 찰나.

"잠깐."

다른 누구도 아닌, 천일관주가 손을 들어 교관들을 제지했다.

"과, 관주님!?"

"어째서?"

많은 이들이 눈을 부릅뜨며 관주를 바라보던 찰나.

"교관들은 모의전을 중지하고 관도들을 보호하라. 다만."

다만?

"암살자에 대한 처분은, 저 진여명에게 맡겨 보도록 하지."

"네?!"

"그, 그게 무슨 말씀...."

관주가 이규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네도 의심하고 있지 않았나?"

이규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건, 말씀이시군요."

굳이 표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그 사건'이라면 오직 하나를 일컬음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믿지 않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가더군."

지난 시간 진여명을 지켜본 건 장득수만이 아니었다.

"확인해 볼 좋은 기회이지 않나?"

가면을 쓴 천일관주의 눈가에 광망이 일었다.

"정말로 마천진가에 괴물이 탄생했는지 말이야."

이규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저 아이가 죽기라도 했다간 저와 관주님은 사이좋게 수라왕 면전에 불려 가는 겁니다. 물론 목만 남아서요."

아무리 관주가 극마의 고수에 이규보 본인도 초절정에 달했다지만....

마천진가의 힘 앞에선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자네나 나나 살 만큼 살았는데 겁이 많군."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살아야죠. 저 아직 일흔도 안 됐습니다."

관주의 핀잔에도 이규보는 당당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관주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그도 궁금한 것이다.

"정말로 그 청강석 연공실을 파괴했던 게, 저 아이 본인이 한 짓이라면."

"육가의 판도가 뒤바뀌겠지요. 저 살수는 아마 좋은 판단 재료가 될 겁니다."

저건 관도 수준에서 감당할 상대가 아니다.

가속했던 가공할 경신법을 본 순간, 그들은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그 살수의 옆구리를 가격해 날려 버린 방금 전의 일격이, 실력인지 우연인지에 대해서.

***

"크헉!"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살수 놈이 옆쪽으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교관들이 모의전의 중지를 알리며 난입하기 시작했다.

"모의전은 중지다!"

"모두 물러서!"

관도들은 갑자기 난입한 교관들의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일단은 전투를 중지하고 그 명령에 따랐다.

그런데.

'아니, 이 새끼들이?'

어째서인지 관도들이 물러나면서 나와 살수 놈을 안에 두고 원형을 그리고 있다?

그 살수 놈을 제압해야 할 교관들은 그저 관도들을 통솔하며 개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천일관주 조진상!

'허허, 이 망할 영감탱이가?'

그는 가면 밑으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살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의도는 명백했다. 어디 한번 저놈을 제압해 보라는 것.

나는 입술을 비틀며 관주를 노려보았다.

'의심하고 있었다 이거지?'

일이 이렇게 흐른 이상 실력을 어느 정도 내보이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 증명 방법이 기분이 더럽다.

'감히 이런 식으로 나온 이상, 꽤 큰 대가를 내놓아야 할 거야.'

백상아의 앞에는 어느새 장득수가 나타나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즉, 눈앞의 살수를 처리하기만 하면 일이 끝난다는 것.

"후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일어나는 살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가 보냈는지, 알려 달라고 하면 말해 주지 않겠지?"

"...당연한 말을."

스윽!

살수, 독절이 한 손에는 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잡았다.

"특이하군. 무슨 무공이지?"

"딱히. 그저 집히는 대로 잡았을 뿐."

저런 식으로 검이 아닌 도를 쓰는 유파가 저 멀리 동쪽 섬나라에 있다고 듣긴 했는데.

놈의 자세를 보면 확실히 특수한 무공의 기수식은 아니었다.

단지,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까지 칼을 박아 넣으리란 기백만이 느껴졌을 뿐.

'오랜만이군,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전전생… 그러니까 진여명이 아닌 다른 이름을 쓰던 과거에는 저런 살인 기계들과 싸우는 게 일상이었는데 말이야.

'쩝, 아무래도 그런 놈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

고작 이런 살수 하나에 쩔쩔매면 앞으로 튀어나올 반천회란 놈들은 어떻게 때려잡을까?

검에 내기를 몰아넣는다.

충검을 넘어, 검의 재질이 내기를 전부 담아내지 못해 밖으로 빠져나오는 현상.

그리고 그 빠져나오는 기운을 갈무리해 검의 형상을 만들어 덧씌우는 기술.

"헉!"

"거, 검기!"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후기지수 수준에서 검기를 뽑아낼 수 있다는 건, 모든 후기지수를 통틀어 가장 앞자리에 서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

다만 마진성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저 녀석이 어느 기루에서 그 마철수를 꺾었다는...."

교관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흘러나왔다.

당연하지만 검기에도 당연히 그 질의 차이가 있다.

그들이 본 진여명의 검기는 절대 일류에 턱걸이한 수준이 아니었다.

"제가 나름 마룡관에서도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저 수준에 이른 건 불혹에 가까웠을 때입니다."

이규보가 살짝 침음을 흘렸다.

"저런 선명한 검기를 약관 인근에서 누가 뽑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관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한 명 있지."

"그게 누굽니까?"

"소교주님."

"...!"

이규보가 경악했다.

"소교주님이, 저 수준에 이르셨다고요?"

관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 건 한 번뿐이지만."

"거참."

이규보는 자신의 긴 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며 헛웃음을 연발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소교주님과 교류 중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다른 육가 녀석들 대부분이 나가리 되었다던데, 만약 이어진다면 역대 최강의 부부가 탄생할지도 모르겠군요."

"글쎄...."

그 말에 응답한 관주의 말투는 뭔가 미묘했다.

***

내가 검기를 뽑아내자마자 살수의 눈에 살짝 당황이 일었다.

아무리 기습으로 일격을 허용했다지만, 설마하니 내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거다.

하지만 상대 역시 닳고 닳은 녀석인지 그 동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츠츠츠츠!

어느새, 놈의 칼에도 초록색의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

구칠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검기 하나 다루지 못할 리가 없지.

'단도에는 검기가 없지만 표면에 뭐가 반질거리고 있군. 백상아를 노릴 때 굳이 꺼낸 걸 보면… 독을 발랐을 테지?'

그냥 독도 아니고 극독일 가능성이 크다.

팟!

나와 살수의 발이 동시에 대지를 박찼다.

'완벽해야 한다.'

대부분의 승부가 그렇지만, 살수와의 싸움은 더더욱 완벽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놈은 그 심리의 허점을 뚫고 내 몸에 칼을 박을 테니까.

설사 팔 하나를 내주더라도, 혹은 목이나 심장이 뚫리더라도!

'온다!'

놈의 검이 정확하게 내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온다.

살수의 검다운, 잡다한 변화를 배제한 빠르고 깔끔한 일격.

'의도에 당해 줄 순 없지.'

피하거나, 막거나, 흘리거나.

어떤 대응을 해도 놈은 왼손의 단검을 내게 들이댈 거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대응은 오직 하나.

떨쳐낸다.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

제 육록(六錄)

무량경마(無量境魔)

연공실을 해 먹었던 무량경마의 초식이, 이번엔 강기가 아닌 검기를 품고 펼쳐졌다.

내가 휘두른 검에서 시커멓고 날카로운 검기 다발이 터져 나온다.

"읏!"

적의 접근을 거부하는 날카로운 공세.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살수의 입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역시 같은 검기 사용자라는 걸 자랑하듯 필사적으로 내 목을 찌르기 위해 날아오는 검기를 거둬내며 돌진해 왔다.

그러나.

콰앙!

"크으윽!"

정면 대결로는 놈과 나는 승부가 성립되지 않는다.

가장 큰 장점인 은밀함이 드러난 살수에게 내가 검술로 밀릴 리가 없었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그렇게 살수 놈이 멀리 밀려나고.

나는 과거 구칠이 해 준 이야기를 상기하며 놈에게 말했다.

"너, 왜 아직도 싸우고 있지?"

"...무슨 소리냐?"

"아는 사람이 그러더라고. 만약 일류 살수가 암살에 실패해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행동하냐고."

-늬에에? 그런 놈이 일류? 천하에 다시없는 병신이 아니라요? 그냥 독약 깨물고 뒤져야지 뭐 하고 있답니까?

-지인짜 그런 일이 생기면? 정말 자결하든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튀어야 합니다. 네? 그런데도 정면 대결을 고집한다면요?

-아휴! 당연히 딴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죠. 몸에 폭탄 끌어안고 자폭할 생각이라든가, 아니면 목숨을 버리고 빈틈을 노릴 생각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숨어 있는 다른 동료가 있든가."

움찔!

"그녀를 노리는 게 한 놈이 아닌 거야, 그렇지?"

팟!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의 관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망설임 없이 교관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백상아에게로 달려들었다.

"저, 저놈은 육 조 조원인 관상?!"

애초에 저 관상이란 녀석은 슬금슬금 백상아에게 접근해 있었다.

"이런 미친놈이 감히?!"

교관들이 분노하며 칼을 뽑아 들었지만.

아주 잠깐의 틈.

관상이라 불린 자는, 그 틈을 파고들어 백상아의 지척까지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십지천록마검(十支天錄魔劍).

제 이록(二錄)

승천마화(昇天魔火)

제 일초인 개천화류가 허초와 진초를 섞은 환검이라면, 바로 이어지는 이초식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올곧은 일격.

퍼억!

놈이 품속에서 독검을 꺼내 든 순간, 내가 쏘아낸 검은 불꽃 같은 검기가 그대로 놈의 손등을 꿰뚫어 버렸다.

42화 검의 흔적 (1)

"끄으윽!"

흑염의 검기에 손등이 꿰뚫린 순간, 살수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나 놈은 넘어지지 않고 필사적으로 백상아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이놈이 어딜?!"

하지만 순식간에 달려든 교관들에 의해, 놈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며 그대로 제압되었다.

"육 조 전체를 포박해라! 다른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

"자, 잠깐! 저는 아니에요!"

"교, 교관님!"

첫 암살자가 육 조의 조장, 그리고 다음 암살자가 육 조의 조원.

당연히 육 조 전체에 혐의가 갈 수밖에 없었다.

"한 놈이 더 있었나!?"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규보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저 아이가 누구이길래? 관주! 관주께서는 뭔가 아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이 사태에 대해 누구보다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관주가, 어째서인지 어딘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관주?"

"저, 저거...."

한참을 붕어처럼 입을 껌뻑하던 관주가, 진여명을 노려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서, 성화(聖火)?"

***

"아무래도, 네 마지막 수단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군."

목숨을 걸고 모두의 이목을 끈 뒤, 다른 동료가 그 틈을 찌른다.

미리 대비한 내가 견제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할래?"

"뭘 말이지?"

"투항할 거냐고 묻는 거다. 얌전히 모든 걸 털어놓는다면 목숨은 살려 줄 수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암살자 놈은 노골적으로 혹하는 기색이었다.

다만, 권한다고 순순히 넘어올 리가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울컥!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놈의 입가에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살수의 존재가치는 무엇보다 목표물의 암살이 우선이지만, 그다음으로는 절대 정보를 남겨선 안 된다는 철칙이 있었다.

그렇기에 온갖 약물과 술법, 혹은 고독을 통한 세뇌 작업이 이루어지고.

살수 본인이 포기하거나 단념한다 싶으면 그대로 목숨을 앗아가 버린다.

이게 신교 최강의 암살대라 칭송받던 마황귀살대가 대원들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주르륵!

손아귀에 힘이 빠지는지, 녀석은 쥐고 있던 칼까지 떨어뜨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저건 확실히 기만이 아니다.

놈의 눈빛이 시시각각 꺼지고 있었으니까.

놈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독절(毒絶)이다."

"기억하지."

그 말을 끝으로, 독절의 목이 완전히 꺾였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살수라.'

살수는 대부분이 소모품이다.

절대다수가 이름조차 없으니, 애초에 긍지를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직종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는 건.

본인의 소속이 긍지를 가질 만한 곳이라는 뜻.

'이놈, 정말 마황귀살대 출신 아니야?'

살수 주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면 놓쳤을 가공할 신법도 그렇고.

차라리 주국선 같은 별다른 수작질 없이 이놈에게 온전히 맡겼다면, 어쩌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암살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건 나중에 구칠에게 물어보지.'

어쨌든, 노골적인 암살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이제 천일관 내에서 놈들이 날뛰려면 판 자체가 뒤집힐 각오를 해야만 한다.

'아직 본교에 제대로 영향력을 쌓지도 못했으니 그렇게 될 리는 없겠지.'

***

천일관의 공식 행사 중에 이루어진 노골적인 암살 시도.

당연히 모의전은 그 즉시 중단되었고, 모든 관도들이 기숙사 바깥으로 나오는 게 금지되었다.

"놔! 이거 놓으라고! 내가 천정주가의 주국선이야!"

일부러 사 조를 빼내 이 상황을 유발한 주국선은 곧바로 교관들에게 포박당했고 그 즉시 어딘가로 끌려 나갔다.

'저 입에서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풀릴 리는 없나.'

물론 현재 주국선에게 걸린 건 아직 혐의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방면될 가능성이 컸다.

일을 꾸민 자가 등신도 아니고, 주국선과 살수를 연결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진여명, 관주님께서 찾으신다."

그리고 이번 암살 사건을 막은 제일 공신인 나는, 곧바로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관주에게 불려갔다.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천일관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게나. 나와 천일관이 이번 일에 큰 신세를 졌군 그려."

"...."

나는 그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떻게, 제 실력은 잘 보셨는지."

내 삐딱한 눈빛에도 노회한 관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잘 봤지. 새로운 마룡이 탄생하는 걸 눈앞에서 보다니 감격이로군, 허허허!"

"그렇군요."

설마 보상 하나 없이 입을 싹 닦으시겠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일을 이대로 넘길 것만 같은 모습인데?

"크흠, 내가 자넬 이리 부른 건 다름이 아닐세."

"제 자퇴서를 받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어? 어허! 그게 무슨 소린가?!"

내 시선이 더더욱 삐딱해졌다.

"전 또, 천일관이 위기에 빠진 관도를 내버려 두길래 다른 뜻이 있나 했죠. 마침 아버님께 전서를 보내려고 했고."

"허, 허허! 뭔가 오해가 있구먼."

관주의 표정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독절과의 대결을 그대로 진행시킨 건 뻬도 박도 못 할 관주의 독단이었다.

이 사실이 내 아버지인 진군악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아들을 자기 권력 강화의 도구로 보는 양반이라고 해도 절대 참지 않을 거다.

"내자네를이리찾은건다름이아니라보상을위함이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잇는 관주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자네의 실력이 궁금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네!"

"그럼 자퇴서는 여기다가 놓으면 됩니까?"

"어허!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 봐야지! 자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본류가 아니던가?"

우뚝!

정말로 품 안의 자퇴서를 눈앞에 던져 버리려던 손이 드디어 멈췄다.

내가 드디어 동한 모습을 보이자 관주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말하겠네. 천일관에서 자네에게 보상을 주고 싶어도, 자네가 어디 만족할 만한 게 있을 거 같은가? 돈, 무공, 명예 모든 것에서."

"뭐, 그렇긴 하죠."

재수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애초에 난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없는 놈이 이런 말을 하면 허세지만, 있는 놈이 이런 말을 하면 진실이 되는 법.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자네에게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네."

다른 방식이라고?

"따라오게. 말로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

우리는 천일관을 나왔다.

호위는 없었다.

그 누구도 내 감각에 걸리지 않는 걸 보아 관주가 지금부터 보여 주려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정말 보통 비밀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본류 천일관은 사실 교육기관이 아니네."

천일관이 위치한 협곡으로부터 더더욱 안쪽에 위치한 어느 절벽.

나는 관주와 함께 빛이 돌지 않는 서늘한 절벽 어딘가에 와있었다.

"천일관이 온전히 교육기관으로 가동하게 된 건 약 이백여 년 전이지. 그전까진 천일관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통과해야 하는 일종의 관문이었네."

확실히, 생존률 오 푼에 불과한 곳을 교육기관이라고 칭한다면 문제가 좀 있다.

"본류 천일관은 본래 십 단계로 이루어진 시험일세. 자네, 소림의 십절나한관(十節羅漢關)에 대해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그 모든 걸 통과하면 소림의 진정한 최정예, 십팔나한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관문 아닙니까?"

숭산의 어딘가에 철저하게 숨겨져 자격이 되는 이에게만 비밀리에 개방된다는 전설상의 기관진.

"그렇지. 약관에 오문만 통과해도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인정받을 정도로 그 난이도가 어렵다고 소문이 났지."

그 순간,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무언가 대리석이 부딪치는 듯한 소음이, 귀를 찢어발기듯 울려 퍼졌다.

관주가 서서히 변해가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십절나한관 따위는, 본류 천일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

'저, 저건?'

기관진. 그것도 환영진 계열!

산 하나 크기를 통째로 뒤바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관진이다.

그렇게 시야가 완전히 변한 뒤에 나타난 건.

봉우리 하나를 거의 완전히 들어내고 그 안쪽에 안치한 것 같은 거대한 아수라의 석상이었다.

'어, 엄청나다!'

천마신교에 이런 거대한 석상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저 천축 너머 바미안이란 곳에 절벽을 파내 만든 석불이 있다던데, 딱 그것과 같지 않은가?'

그것도 저렇게 정교한 삼두육비의 아수라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놀랐겠지."

내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천일관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걸 알고 있는 건 천일관에선 나와 부관주, 그리고 수석교관뿐이네."

"교 전체로 보면 누가 알고 있죠?"

"지금은 원로원에 있을 전대 관주와 부관주를 제외하면 교주님뿐이시지. 이건 본교 최대의 비밀 중 하나라고 봐도 좋아."

"그 비밀을, 제게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은 본류 천일관이 바로 이곳에서 진행되기 때문이지."

불상의 아래에는 약 육 장 크기의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철문이 존재했다.

관주가 그 철문에 손을 대자 마치 자동문처럼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땅이 갈리는 굉음과 함께 나타난 문 안쪽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자네라면 저 안에서 뭔가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일세."

"...?!"

한순간, 관주의 기세가 변했다.

지금까지 내 앞에서 보이던 어수룩한 노인의 모습은 어디 가고, 극마에 이른 절대 고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천일관의 관주 자리는 교내에서도 유명한 한직이야. 하나 그 관주 자리는 오로지 극마에 이른 자만이 맡을 수 있네. 그 이유를 알겠는가?"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눈치가 빠르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뭔가가 더 있다.

그저 사람을 갈아 넣는 비정한 훈련 관문 이외에, 저 안에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존재하고 있다.

"내 자네에게 질문 하나를 하고 싶군."

"...말하시죠."

지금 이 주변엔 아무도 없다. 살인멸구를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자넨 그 검법을 누구에게 익혔는가?"

"...!"

설마 천일관주가 내 무공에 대해 캐물을지는 몰랐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건 왜 궁금해하십니까?"

"대답해 주게. 내겐 나름 중요한 일이라서."

그냥 순순히 대답해 주는 게 옳을까?

물론 말해 주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곤 입을 열었다.

"가문의 비고에 보관되었던 비급이었습니다. 비고를 뒤지다 제가 우연히 발견했고요."

"가문의 비고? 그게, 마천진가에 있었다고? 혈룡마가가 아니라?"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관주에게서 노골적인 동요가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만. 비급을 가져온 건 총관이니, 원하신다면 총관과 대면시켜 드릴 수는 있습니다."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네."

관주는 손을 내저었다.

"흥미롭군. 그들이 알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불태우려고 들 텐데. 이미 주인을 찾았으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무것도 아니네. 아무리 자네라도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니."

"그래서, 왜 제 검법에 흥미를 가지신 거죠?"

"흥미가 일 수밖에."

이윽고, 관주의 입에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건 천마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법이니까."

43화 검의 흔적 (2)

지금 뭐라고?

"보아하니 모르고 익힌 모양이군."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사부의 추천에 위력도 나쁘지 않아 익히긴 했지만, 십지천록마검에 그런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천록검(天錄劍). 그게 자네가 익힌 검법의 정체 아니던가?"

"...!"

"눈빛을 보니 맞힌 모양이군."

이름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 뜻은 같다고 봐도 좋다.

"하나, 어째서 그 검법이 천마를 죽이기 위한 검법입니까? 아니, 그 전에… 어째서 관주님이 그걸 알고 계십니까?"

이 부분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

천마는 천마신교의 신.

그런 신을 죽이기 위한 검법이라면 익히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된다.

"으음, 그 말을 하기 전에, 본교의 역사부터 말해야 할 듯싶군."

살짝 헛기침을 한 관주가 입을 열었다.

"사실 신마육가라 불리는 여섯 가문은, 원래 일곱 가문이 될 뻔했었네. 알고 있는가?"

"반가(反家)를 말씀하시는군요."

지금은 아는 자도 그리 많지 않고.

또 안다 해도 쉬쉬하고 있지만, 아는 놈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일종의 치부.

"그렇지. 역천반가(逆天反家). 초대 천마조사의 대제자이자 다음 대 교주가 될 수 있었던 무명(無名)이 세운 가문을 일컬음이지."

지금이야 천가가 대대로 교주직을 이어 왔지만, 아직 율법이 정리되지 않았던 초창기의 천마신교는 지금과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지금은 그 존재조차 철저히 지워져 이름조차 내려오지 않는, 천마조사의 대제자 무명(無名).

"천록검은 무명과 그 혈족들이 익히고 있었지."

"혈족이라...."

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지금이야 혈족 중심으로 신교가 돌아간다지만 그때도 그랬을까?

"그래, 눈치챘군. 지금이야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당시 무명은 멋대로 혈족에게 조사의 검술을 전수한 셈이지."

당시에는 육가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당연히 일반적인 문파처럼 사제 관계로 이어졌을 거다.

다만 이것도 추측일 뿐, 천 년 전 그 시대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어떠한 문제가 생겨 무명이 천마조사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 무명과 그 일족이 씨몰살을 당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는 것뿐.

그리고 신마육가라는 여섯 가문의 탄생에, 그 무명이 관련되어 있을 거로 얼추 짐작할 뿐이었다.

"애초에 천록검은 천마조사의 천살마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상극의 검이라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상극의 검이라고?'

저 말대로라면 십지천록마검이 천살마검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검법이라는 뜻인데.

"아니, 정확히는 상극의 검이라 추측할 뿐이지. 내가 그 검법을 직접 본 게 아니니까. 그렇게 알려졌으니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수준이지."

관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수백 년이 넘도록 천록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네."

"그 말인즉 수백 년 전에는 있었다는 뜻이겠군요."

초대 천마조사가 등장한 시기가 서진(西晉)의 말기. 즉 천 년도 전의 일이다.

저 말대로라면 천 년 전에 만들어진 천록검이 그사이에 한 번 더 등장했다는 뜻.

"그렇지. 이대 천마께서 등장하셨을 때, 무명의 후예라고 자처한 자가 나타나 천마께 도전했었지."

"결과는요?"

"당연히 이대 천마의 승리였지."

하긴, 무명의 후예가 승리했다면 천마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도 남았을 거다.

"하나 그 격전에서 천마께선 족히 수년간의 정양에 들 정도로 중상을 입으셨다고 들었네."

호오?

확실히 사부가 이 부분에 대해선 구라를 치진 않은 모양이다.

사부가 그랬지. 십지천록마검은 천살마검에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다고.

다만 꿇리지 않는다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에게 개기면서 증명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사부를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사부의 정체가 대체 뭔지.

이런 비사를 지닌 검법을 왜 굳이 내게 전수했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그렇게 무명의 후예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신 후, 천록검의 비급이 천마께 들어왔다네. 상극의 검이라는 건 당시 천마께서 심복들에게 그 사실을 밝히면서 알려진 사실이고."

아마 그 비급이라는 게, 내가 총관을 시켜 비고에서 빼 온 것과 같은 녀석일 가능성이 크다.

처음 접했던 비급의 상태가 심상치 않게 낡았었으니까.

나는 살짝 혀를 찼다.

"그렇다면, 제가 금지공을 익힌 셈인가요?"

"맞지만 아니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구겨진 내 표정을 본 관주가 작게 웃었다.

"천록검이 비록 반역자의 검법이라고는 하나, 그 뿌리는 천마조사의 천살마검에서 갈라져 나온 검법. 애초에 검법의 창안 역시 천마조사께서 하신 만큼, 조사의 제자와 그 후예들에겐 딱히 익히는 게 금지되지는 않았네."

즉, 일반 교도들에겐 익히는 게 금지되었지만, 육가의 직계 후예인 내겐 금지는 아니다?

"그렇기에 당시 혈룡마가의 가주가 이대 천마께 청해 대가를 치르고 천록검의 비급을 가져갔지. 다만 그 후로 천록검이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었네."

그리고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어떠어떠한 사건을 거쳐 마가에 있을 비급이 진가로 흘러 들어왔다, 이거지?

육가의 직계인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비사가 말이지.

"옛날 역사 강의는 잘 들었습니다."

호기심을 채운 건 좋긴 한데.

"그래서, 지금 절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요?"

"거, 성격 한번 급하군."

천일관주는 엄지를 들어 저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따라오게. 가면서 말해 주지."

순간 나는 갈등에 휩싸였다.

내가 금지공을 익힌 게 아니고, 굳이 살인멸구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순순히 따라가기에는 뭔가 의심쩍은데 말이지.'

아무리 천일관주라지만 이런 옛날의 비사를 알고 있고, 직전에 이렇게까지 털어놓는 건 확실히 의심쩍다.

특히 이게 살인멸구의 전 단계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의심이 많군."

나는 살짝 침을 삼켰다.

"당연하죠. 관주님이 절 어찌하려고 하면 반항도 못 하고 당할 판인데."

"절정에 이른 친구가 이리 겁이 많아서야."

역시, 눈치챘나?

아무래도 독절과의 싸움 때 남김없이 간파당한 모양이었다.

"극마의 고수 앞에서 재롱 피우는 격이죠."

신교 서열 이십 위 안쪽의 초극고수.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나 하나 죽이거나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긴 하다.

"흠, 그럼 나도 자네의 의심병을 고치기 위해 밑천 하나를 까볼까."

어깨를 으쓱한 천일관주가, 충격적인 진실 하나를 입에 담았다.

"내 본래 이름은 천진상일세."

"뭐라고요?"

"자네 부친도 이건 모르는 사실이지. 천가에서도 교주님을 제외하면 아는 이가 다섯을 넘지 못할 거야."

모든 의혹을 한 방에 잠재우는 한마디였다.

***

"어째서, 천가의 인물이 성까지 바꾸고?"

"사람마다, 가문마다 다 사정이란 게 있지 않나? 자네가 이해하게."

나는 그 말대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면은 멋으로 쓰고 다니는 게 아니었군요."

"...."

순간 관주의 입가가 작게 씰룩거렸는데 착각이겠지?

그나저나, 상당히 놀랐다.

설마 그가 천가의 인물이었을 줄이야.

그가 직계든 방계든 아무런 상관없다. 극마에 이른 고수는 그 자체로 가문의 최고 전력 취급을 받으니까.

그건 천가나 육가나 마찬가지였다.

'개천에서 난 용이 아니라 애초에 바다에서 난 용이었군.'

어쨌든 천가의 인물이라면 확실히 이런 비사를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관주의 뒤를 따라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슬슬 어둠 속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야명주군요."

"이런 곳을 횃불로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확실히."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인 만큼 야명주를 쓸 수밖에 없다.

"이쪽일세."

어느 순간 길이 갈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길은 일직선 그대로인데, 아주 자그마한 샛길이 따로 존재했다.

"이대로 직진하면 본류 천일관의 일관이 나오지. 자살이 취미가 아니라면야 그쪽으로 가지 않는 걸 추천하네."

"절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본류조차 천여 년 전에 있었던 천마조사의 진짜 훈련기관이 아니라고."

"그랬죠."

그리고 그 훈련기관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천마조사께서 육대마신을 훈련시켰던 그때의 그 장소가 맞네. 뭐, 정확히는 칠대마신이었겠지만...."

"...!"

"그리고 이 비동의 가장 안쪽에는, 그 일곱 명이 남긴 흔적들이 잠들어 있지."

순간 직감했다.

그 흔적이, 관주가 내게 건네는 '보상'일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별거 없네. 무려 천 년이야. 절세의 비급이나 보물 같은 게 있었다면 전부 쓸려 나가고도 남았지."

거, 분위기를 짜게 식히는 데 재주가 있으시군.

"다만 딱 한 곳. 이 비동 안에서 별개로 봉인되어 있는 또 다른 '비고'가 있네."

"비고, 라고 하시면?"

"나조차도 정면으로는 뚫을 수 없는 비고지. 정확히는 뚫을 수는 있는데, 시도했다간 매몰될 게 뻔해서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확하달까."

극마고수로서의 자존심을 챙기는 관주의 행위는 둘째치더라도.

"천록검을 익혀야 그 비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군요."

"척하면 착이군."

"그런데, 그 안에 뭐가 있을지 알고요?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아무도 그 비고를 뚫어 보려는 시도를 안 했다는 겁니까?"

인력 앞에 장사 없다.

매몰이 걱정된다고? 그냥 산을 파 버리면 된다.

산을 없애고 매몰이란 단어가 성립이 불가능할 때까지 지하까지 파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논조의 말을 듣자마자, 관주가 황당한 어조로 눈을 깜빡였다.

"자네, 애초에 이 위에 뭐가 있는지 까먹은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삼두육비의 거대한 아수라 석상이 있었지.

그만한 석상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해도 그 자체로 종교적인 신물로 취급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여기서 지하를 파려면 그 아수라 석상부터 없애야 한다.

"겉모습은 안 그런데 속은 진가 그 자체군."

"...."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저게 무식하단 말을 돌려 말했다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뭐, 그 외에도 사정이 있긴 한데, 보면 알 걸세."

나는 관주를 따라 그 후로도 비동 안쪽을 엄청 깊숙하게 들어갔다.

체감상 거의 몇 리는 들어간 것 같다.

들어가는 와중 곳곳에 거대한 공간들이 있었는데, 관주의 말로는 그 공간 하나하나가 과거 마신들이 수련했던 개인 수련 장소라고 했다.

역사가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힐 장소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렇게 그 장소까지 지나.

"여기가, 이 비동의 가장 최심부일세."

거대한 철문이 나를 맞이했다.

수많은 자상이 새겨져 있는 철문에선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단순히 지하라서가 아닌 철 자체에서 나오는 한기.

이걸 내가 착각할 리가 없다.

"마, 만년한철?"

"그러하네."

"그것도 통짜로?"

나는 왜 관주가 매몰을 입에 담았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저건 극마의 고수가 와도 못 뚫는다.

아니, 끝없이 두들기면 언젠간 뚫겠지만 그 전에 흙더미에 파묻혀 뒈지겠지.

"문을 잘 살펴보게."

관주의 말에 따라 나는 살며시 문으로 다가갔다.

수많은 상흔이 남겨진 만년한철 문.

강기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아니 설사 강기를 써도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상흔을 남기려면, 도대체 얼마나 드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할까?

"이건...."

한동안 문을 살피던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틀림없다.

이 상흔은 단순히 강기를 휘둘러 낸 흔적이 아니다.

선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무언가 익숙함이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이건 분명.

십지천록마검의 흔적이다.

44화 외출 (1)

틀림없다.

이건 십지천록마검을 일초에서 마지막 십초까지 모두 펼친 흔적이다.

'괴, 굉장하군.'

나는 흔적을 계속해서 더듬었다.

사실 아직도 관주가 한 말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그 오묘함과 난해함은 본교에서도 손꼽힐 최상승의 검법임은 맞으나, 본격적인 경지에 들지 못한 현재로선 그 정도까지의 대단함을 느끼진 못했으니까.

하나 지금, 이 한철문에 주변에 아무런 피해 없이 검로를 새긴 걸 보니 이제야 그 대단함이 피부에 스며든다.

'이게 혈룡마가의 가주가 와도 가능할 일인가?'

현 마도제일검이라 불리는 혈룡마가의 가주라 해도 이건 불가능하다.

"이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곳에 새겨진 검로를 정확히 구현한다면 문이 열리는 방식이겠군요."

"그렇지!"

한철문의 검로를 보면 결론이 나온다.

'일초부터 십초까지 끊기지 않고 펼쳐야 한다.'

단순히 검로를 구현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가능하다.

하나.

나는 관주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안 되겠습니다."

"응? 왜?"

관주의 입가에서 당황이 묻어나왔다.

"제 실력으로는 이곳의 문을 그대로 구현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나는 그대로 검기를 발현했다.

그리고 그대로 일초식인 개천화류를 펼쳐 그대로 한철문에 새겨진 검로를 따라 그렸다.

촤좌좌좍!

날카로운 검은 검기가 그 검로와 똑같은 궤적을 그린 순간.

"흠!"

검로가 지나간 길에 아주 작은 빛이 점멸했다.

그 시간은 대략 2초?

"다시 보시죠."

나는 이번엔 조금 더 강하게 검기를 내뿜었다. 강기를 보여 줄 필요는 없지만 거의 검사에 가까운 막대한 내력이 다시금 한철문을 때렸다.

그리고 다시 그 검로를 따라 빛이 점멸했다.

아까보단 아주~ 조금 더 오래가긴 했지만, 그래 봐야 한 2.5초?

관주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차렸다.

"이해했네."

낙담하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나는 한철문을 톡톡 두들겼다.

"이 문을 열려면 천록검을 강기로 온전히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검기나 검사로는 불가능해요."

"으으음!"

일반적으로 십초식까지 검무를 펼치는 데 대략 이십여 초가 걸린다.

그 말인즉, 최초로 펼친 일초식의 검로가 20초는 빛나 줘야 한다는 뜻.

검기로도 2초가량에 불과했는데, 20초나 빛나려면 정말 강기를 가져와야만 한다.

"게다가 주변에 피해가 없이 깔끔하게 검무를 추려면, 정말로 제가 극마에는 도달해야 합니다."

"...."

"향후 수십 년은 이른 셈이죠."

"그렇, 군. 아쉽구먼."

관주가 살짝 탄식했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

관주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길래 나를 데려왔을 거다.

"관주님."

"말하게."

"한 가지 확실하게 약속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약속?"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제게 보상을 하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관주의 기색이 살짝 멈칫거렸다.

"그렇지."

"그렇다면, 언젠가 제가 이 문을 열었을 때, 저 안에서 무엇이 나오든 저와 마천진가에 우선권을 주시겠다 약속해 주시죠."

"자네,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하는 소린가?"

"저야 모르죠. 하지만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제게 보상이랍시고 데려오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관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부를 줄 수는 없네."

"천가에서 반드시 거둬야 할 건은 거두시고, 나머진 진가에 넘겨주시죠."

관주가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자네 정말 저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가?"

"네, 모릅니다."

"능구렁이가 백여 마리는 속에 든 것 같군.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저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나 딱 하나만은 알겠다.

천가의 치부.

비급이 들어 있든, 보물이 들어 있든. 저 안에는 천가, 혹은 과거의 천마신교가 감추고자 하는 무언가가 함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건 열 수 있어도 지금 열어선 안 되는 거다.'

어쩌면, 이 문을 여는 순간 천일관주는 정말로 날 살인멸구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 문을 여는 건 오로지 나 혼자,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을 때여야만 한다.

'그런데 저건 뭐지?'

지금까지 검로에만 정신이 팔려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철문의 중앙에 뭔가 구슬 같은 게 작게 박혀 있다.

자세히 보니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이긴 했지만, 문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정말 쥐똥만큼 작게 보인다.

"그건 흡기옥일세."

"흡기옥?"

그런 게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내공을 빨아들여 특정한 조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기물이지. 주로 고차원적인 기관진법을 만드는 데 쓴다네."

"어? 그렇다는 건...."

여기다가 내공을 주입하면 문을 열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관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온갖 시도는 다 해 봤지. 하지만 그 누구도 흡기옥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어."

관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흡기옥을 매만졌다.

"이런 종류의 경우엔 특정한 성질의 내공을 불어넣어야만 작동하도록 만들어진다네."

"잘 안되었군요."

"그렇지. 미리 말해 두지만, 육가와 천가를 포함한 본교 상위 가문의 내공을 대부분 불어넣어 봤고, 현 교주님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네. 심지어는 정파의 내공도 시험해 봤어."

관주의 목소리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저 정도의 무인이 저런 반응이라는 건,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는 다 해 봤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될 것 같다.

'사부가 굳이 콕 집어 비천무량신공을 익히라고 한 이유가 있을 거다.'

비천무량신공은 이름은 도가(道家)의 심법과도 같지만, 그 실체는 어디까지나 마공이다.

아니, 정확히는 도가의 법칙을 따르는 마공이라 할 수 있겠지.

'해 볼까?'

여기에 내공을 불어넣어 문이 열린다면 되레 낭패를 보게 되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렇게 되진 않을 거로 생각했다.

'굳이 십지천록마검의 검로를 새겨 넣고, 또 이차적으로 흡기옥까지 박아넣었다고?'

이렇게 되면 추론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다.

함정이던가, 혹은 또 다른 안배던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불어넣어 보자.'

만약 정말로 문이 열릴 것 같으면 바로 손을 떼면 된다.

내 '감각'이라면 문이 열리려는 조짐이 보이기 전에 바로 내공을 회수할 수 있으니까.

나는 살며시 문 앞으로 다가가 흡기옥에 손을 뻗었다.

관주는 말리지 않았다. 되레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츠츠츠츠!

시냇물 같은 진기가 장심을 타고 흡기옥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사부!

'헉?!'

피투성이가 된 한 여인을 품에 안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제가, 제가 그렇게 큰 욕심을 부렸나이까? 사랑하는 이 하나 품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할 정도로, 이것이 큰 욕심이옵니까!

아.

아아....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흡기옥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누군가의 기억.

'제, 단?'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거대한 제단과.

그 제단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표출하는, '사부'라고 지칭된 누군가.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사부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날려대는 한 남자가 있었다.

-절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설사 사부라도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외다!

사부의 바로 밑자리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여섯 명의 인영.

그중 하나가 사내를 향해 화를 내었다.

햇빛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거한이었다.

-전(戰) 사형! 사부님께 무슨 망발입니까?!

손에 거대한 도를 든 누군가가 거한을 제지했다.

-내버려 두게, 진 사제. 감히 사부께 대들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면 뭔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미쳤군. 가장 드높은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가졌으면서 여인 하나에 모든 걸 내던지다니.

-듣자 하니, 사형이 그자들이 내민 손까지 붙잡았다지?

-그럼 사형이 아니라 반역자라 불러야겠군.

-....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전(戰)이라 불린 남자에게 한마디씩을 날렸다.

진 사제라 불린 자를 제외하면 입을 연 네 명이 '전'에게 보내는 시선은 한결같았다.

지독한 경멸.

한때, 가장 위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자가, 누구보다 추악하게 추락한 것에 대한 경멸이었다.

-똑똑히 기억하시오, 사부! 날 먼저 배신한 건 다름 아닌 당신이라는 걸!

그렇게 여섯 명의 위에서 '전'의 증오를 마주한 '사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자네, 왜 그리 멍하니 있는가?"

"아?"

"뭔가 소득이 있었는가?"

관주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내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 그 환영은 뭐였지?'

나는 살짝 멍하게 방금 전의 상황을 상기했다.

'과거의, 누군가의 기억?'

현재 상황을 꿰맞춘다면 제단의 밑에서 사부를 노려보던 이는 다름이 아닌.

무명?

"자네! 정신 차리게!"

"으어어어!"

보다 못한 천일관주가 내 어깨를 부여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머리가 몇 차례 앞뒤로 흔들리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였는가?"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은 변명이 우선이다.

"아, 아뇨. 생각보다 내공 빨려 나가는 속도가 빨라…서."

응?

내공?

화급히 변명이랍시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는데.

'뭐, 뭐야?!'

휘청!

나는 한순간 전신에 몰아치는 탈력감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 이보게!?"

천일관주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끌었지만 나는 여전히 제대로 신형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지, 진짜로 단전이 완전히 비어 버렸다고?!'

원래 이 정도로 단전이 비면 그릇 자체에 균열이 가거나 육체에 이상이 생겨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런 영향 없이, 워낙 깔끔하게 비어서 더더욱 당황이 이는 지경이다.

"너무 무리했군. 아무리 그래도 절제를 못 하고 내공을 불어넣다니."

"아, 아니."

"쯧쯧, 일어설 수 있겠나?"

졸지에 내공 관리도 못 한 푼수 취급을 받자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감사합니다, 관주님."

괜히 관주에게 의심을 살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방금 내가 본 광경은 가능하면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지금 본 것도 어쩐지 다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공을 더 불어넣으면 다음 장면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고작 십여 초 남짓한 광경을 보기 위해 내 모든 내공이 빨려 들어갔다는 거다.

'정말로 극마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엄두도 못 내겠군.'

그나마 입구의 진법만 어떻게 하면 이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길은 다 외웠으니까.

그런데, 그때.

"본류 천일관과는 별개로, 자네에겐 이곳에 대한 출입 권한을 주겠네. 원한다면 언제든 와서 도전해도 상관하지 않겠네."

설마 내가 먼저 요청하지 않아도 이곳에 대한 자유이용권을 줄 줄이야!

'안달이 났군.'

그래, 마음 같아선 내게서 십지천록마검의 구결을 빼앗고 싶겠지.

하지만 내가 평신도도 아니고, 마천진가란 든든한 뒷배가 있는 만큼 아무리 관주가 천가라 해도 강압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진가와 척을 지면서까지 일을 진행시킬 순 있겠지만 관주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직 없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서로에 대한 빚은 없는 거로 알겠습니다."

"호쾌해서 좋군."

관주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다음 이야기를 나눠 볼까?"

"다음 이야기라면?"

설마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내보일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이번에 나타난 암살자에 대한 이야기네."

45화 외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