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정착 시작
"정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대화할 수 있을 거리가 되자 검문소 인원들이 엄한 태도로 그를 멈춰 세웠다.
순순히 멈춰 서면서 한유진은 그들이 외친 언어가 유목 부족민들의 고유 언어임에 주목했다.
'이런 상황을 위해 교육받은 건가?'
하지만.
멈춰 선 그를 향해 다가온 한 검문원의 말을 듣자 그런 게 아님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목적으로 왔지? 시민권을 신청하려고 왔나?"
분명히 유목 부족민들의 언어는 맞는데 발음이 매우 어색했다. 또한 상대의 눈동자가 한유진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 게 아닌 머리 위쪽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뭔가가 떠올라서 마치 그것을 보고 따라 읽는 것처럼.
'무슨 증강현실 기술인가? 내 머리 위쪽에 실시간 통역 글자들이 떠오르기라도 하는?'
머리에 박힌 칩으로 정신 방어까지 해내는데 증강현실쯤이야 놀랍지도 않다. 이곳이 SF적 느낌을 품은 세계임을 알고 온 입장에선 더더욱.
"제국민이 되려고 왔습니다."
유창한 유목 부족민 언어로 답하자, 상대는 여전히 한유진의 머리 위쪽을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제국은 시민권 신청자를 이유 없이 거부하지 않는다. 단, 제국민이 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며, 무엇보다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알겠나?"
"그 의무라는 게 뭐지요?"
"각자마다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 우주군으로 몇 년 복무하게 되지. 당연히 쉽거나 편하지 않을 테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싫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한유진이 말했다.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흠."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상대 검문원이 슬쩍 웃더니 문득 품속 무용이를 쳐다봤다.
"애완동물을 데려온 경우는······ 음······."
말을 흐린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허공을 훑는다.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분명하게도.
"해당 동물의 위험성 평가 및 검역 절차가 추가될 테고, 필요에 따라선 몇 가지 예방접종이나 중성화 시술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조치들로도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반입이 금지된다. 동의하나?"
무용이는 한유진과 달리 초월적 이해력이 없어서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제 제법 영지가 트인 만큼 중성화 시술이라는 말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의합니다."
"말이 잘 통하는군. 따라와라."
그는 검문소의 어느 기계장치로 이동해선 한유진에게 그 앞에 서도록 지시했다.
사람만 한 크기의 넓적평평한 금속판이 세워진 그 장비는 딱 봐도 모종의 탐지를 위한 물건이었다.
'과연 이게 내 몽환유심을 간파할 수 있을까?'
환상계이지만 현실에 직접 작용하는 원리의 신통인지라, 기계라고 해서 속이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른다.
기대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정을 품은 채 한유진은 그 장치 앞에 섰다. 곧, 예상대로 장치 위쪽에 불이 들어오며 은은한 공명음과 함께 모종의 영기 파동이 그를 관통하듯 훑고 지나갔다.
딱히 결과를 알려주는 패널 같은 것은 없었다. 하나 검문소 인원들이 허공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면 저들끼리만 그 머릿속 칩 같은 것을 통해 결과를 받아보는 듯했다.
"2레벨 영능자······?"
그때 한 검문원이 살짝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원주민들 사이에서 그 대전사급 아닌가?"
"맞아. 젊어 보이는데 꽤 센 모양이네."
"꽤 세다고? 너보다 두 배는 더 강할 텐데 겨우 그렇게 표현해?"
"왜 시비야?"
"웃겨서 그런다, 새끼야."
이어 저들끼리 제국어로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사이 한유진은 몇 가지를 추측해 냈다.
'입문 중기급으로 맞췄는데, 그게 2레벨 영능자란 말이지.'
설마 숫자가 낮을수록 강한 영능자일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입문 초기가 1레벨 영능자, 입문 후기가 3레벨 영능자인 식일 것이다.
또한 영능자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이들 루미너스 제국이 그냥 SF적이기만 한 문명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수선계처럼 명백한 선협 느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경지가 존재하고 그에 따른 수련 체계가 존재한다는 뜻일 터.'
그리고 어쩌면 명백한 선협 느낌이 나는 수련 체계 역시 존재할 수도 있다. 이 '은하제국'의 광대함을 고려하자면 말이다.
어쨌든.
몽환유심은 검문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치밀한 탐지력을 발휘했을 기계장치마저 성공적으로 속여넘겼다. 당분간 정체가 들통날만한 위기는 없을 듯하다.
'설마 원영기급 이상의 존재를 아무렇게나 만나게 되진 않을 테고.'
아무리 은하제국이어도 그런 존재들이 발에 채일 만큼 흔하리라곤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 정도 수준의 존재를 대면해도 쉽게 들키진 않을 수도 있었다.
모든 기척을 은폐해야 하는 일과 그냥 실력만 감추면 되는 일의 난이도 차이는 실로 크다. 당연히 전자가 훨씬 더 어렵다는 뜻이다.
'원영기급까진 안정적으로 속일 수 있을지도.'
짐작대로라면 들킬 확률은 더욱 낮아진다. 원영기급 존재를 만날 일도 거의 없으리라 여겨지는데 화신기급 존재라면야 더 그럴 테니까.
"당신 정도면 적응이 어렵진 않겠군."
생각하는 사이.
다가온 검문원이 전보다 확연하게 친절해진 태도로 말했다.
"따라오시오. 접수처로 안내해 드릴 테니. 거기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친절할 거요."
"고맙습니다."
"당신 꽤 예의 바른 사람 같아. 문제 일으킬 우려는 없겠어."
한유진은 그의 안내에 따라 마침내 도시 방벽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 * *
은하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한 절차는 마냥 허술하지 않았다.
우선 접수처라는 장소에서 여러 방식으로 원주민 유목 부족 출신임을 검증받아야 했다.
당연히 그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대비해 놓았다.
그 장년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완성해 낸 프로필엔 빈틈이 없었다. 정확히는, 존재하는 모든 빈틈이 전통적 삶을 고집하는 유목 부족의 한계상 조사하기 힘든 부분들이었다.
'직접 가서 탐문해 봐도 딱히 의심할 건덕지를 찾긴 어려울 거다.'
유목 부족은 그 특성상 서로 치밀한 연락망이 구성되어 있지 못하고 해마다 여러 부족이 사라졌다가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의 출신을 위장한 유목 부족은, 장년인의 기억 속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어느 해체되어 사라진 부족이었다. 그것이 무려 칠팔 년 전의 일이고, 이후로는 여느 흔한 방랑자들처럼 여러 유목 부족들 사이를 떠돌며 생활했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짰기에 추적이 매우 힘들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기어코 그 해체된 부족의 인원을 찾아낸들 별문제 없을 터였다. 칠팔 년이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딱히 특별할 것 없던 청소년이 몰라보게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물론 완벽하진 않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의심을 받지 않는다면 전부 괜찮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목 부족의 특성 덕에 추적이 점점 더 어려워질 테지만, 현재 고작 '2레벨 영능자'에 불과한 자신의 뒤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서 캘 이유가 없다.
하여 유목 부족 출신이라는 위장은 들키지 않고 쉽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능통하다는 점만으로 충분했다.
다음으로는 능력을 검사하면서 건강 상태까지 확인받을 수 있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용이를 포함해서 말이다.
온갖 장비들이 동원되는 절차였는데, 이미 도시 정문 검문소에서 한 차례 검사를 통과했던 만큼 이 역시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다행히 무용이도 중성화 시술 따위를 강요받지 않았고.
그다음의 절차가 오히려 살짝 문제였다. 어렵다는 측면에서가 아닌 시간을 허비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사회 적응을 위한 시험 절차였는데, 제국의 언어를 포함한 여러 법률과 생활 방식 및 기초상식 등을 배우면서 수료해야 하는 단계였다.
평범함을 연기하자니 답답하고 천재성을 드러내자니 눈에 띌 것이 분명하다. 어느 정도의 속도가 적당할지 계속 눈치를 보며 조절하는 일이 마냥 쉽지 않았다.
다행히 영 지루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은하제국의 문명 수준은 과연 뛰어났고 그러한 문명으로 구성된 숙소와 교육 장소를 오가며 생활하는 건 다양한 새로움과 재미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도시 행정국 소속의 사회 적응 지도관과 가벼운 친분을 쌓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을 떠나면 다신 볼 일이 없을 듯했지만.
그렇게 마침내.
약 달포가 지난 시점.
그는 '조건부 시민권'과 함께 약간의 정착 지원금을 받은 채로 도시 정문 주변의 '경계 플랫폼'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경계 플랫폼 시설의 외곽, 도시 안쪽으로 이어지는 정기노선 셔틀을 기다리면서 그는 자신의 손목에 차인 유려한 디자인의 은빛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넥서스 밴드라는 이름을 가진, 현대 지구에서의 스마트폰 같은 물건이다.
당연히 일종의 지원 형식으로 주어지는 물건인 만큼 아주 기본적인 기능들만을 품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겨우 스마트폰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했다.
그냥 착용하고만 있으면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부터가 너무 대단하다. 내장된 AI는 개떡처럼 명령을 내려도 찰떡처럼 알아듣는 명석함을 보이기도 한다.
"빅시."
- 예, 유진 사용자님.
넥서스 밴드에 내장된 AI의 고유 이름을 부르자, 즉시 귓가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진은 이 세계에서 사용하기로 한 이름이었다. 그냥 성씨만 떼면 이곳 문화권에 어울리는 이름이 되는지라 괜한 고민을 덜었다.
"내 크레딧 잔고가 얼마야?"
- 5,002,125 크레딧입니다.
"그걸로 내가 몇 달 정도 생활할 수 있을까?"
- 어떤 거주지를 원하시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른 시민권 신청자들의 케이스를 참고해서 제안해 드릴까요?
"해 줘봐."
곧.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전면 허공에 청록빛 글자들이 떠올라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경우 두 달도 빠듯하단 말이지?"
- 시민권 신청자를 위한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시면 정착 지원금을 추가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혹은 정착 지원을 위한 저금리 대출 상품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 시민권에서 조건부라는 딱지를 떼야 하는데, 한가롭게 교육 프로그램이나 들을 여유가 있을까?"
- 정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이수 시 남은 여유 기간이 연장됩니다.
아마도 평범한 시민권 신청자였다면 바로 이 제안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교육이야 받으면 받을수록 적응이 쉬울 테니 이득이고, 그렇게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으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욱 이득일 테니까.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한유진으로선 딱히 끌리는 제안이 아니었다.
'제국 공헌도를 쌓아 시민 레벨을 높이면서 크레딧도 함께 쌓아야 한다.'
그래야 이 제국의 여러 중요한 지식과 보물 등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려면 빨리 조건부 딱지를 떼면서, 내 실력을 근거 명확하게 높일 수 있는 일종의 알리바이가 필요해.'
다행히 여태 교육받으면서 몇 가지 괜찮게 느껴지는 계획을 짤 수 있었다. 이곳의 문화 등에 대해 기초적으로나마 알게 된 덕이다.
'우주군 탐사대가 최선인가······?'
정식 시민권 획득을 위해 우주군으로서 의무를 이행하면서, 그냥 전투에 동원되는 것이 아닌 탐사대라는 특성에 따라 일종의 모험을 다니며 각종 미지의 장소와 사건들을 접할 수 있다.
이 세상에도 '기연'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만큼, 탐사대로 활동하면서 기연을 만났다는 식으로 위장하면 급격한 실력 상승을 설명하기 쉬울 것 같았다.
동시에 탐사대의 위험성에 비례하는 보수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지식이나 물건들을 탐험에서 발견했다는 식으로 내놓으면서 쉽게 공헌도를 쌓을 수도 있을 터다.
찍찍-!
심심하다는 듯 보채는 품속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는 노선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흰색 셔틀을 바라봤다.
일단 숙소를 구한 뒤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보면 될 듯했다.
101화. 우주군 탐사대 지원
한유진은 값싼 모텔에서 나흘 정도를 머물렀다. 그러면서 넥서스 밴드를 통해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당연히 양질의 정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평범한 제국민들이 대략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었다.
우선 이 루미너스 은하제국의 황제는 인간이 아닌 AI였다.
대략 3만 년 전, 인간과 AI 사이에 벌어졌던 대전쟁 속, 유일하게 인간의 편을 들면서 믿기 어려운 수준의 온갖 헌신을 보였던 초융합지능이 바로 '루미너스'다.
루미너스 덕분에 이 세계의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루미너스 덕분에 지금의 은하제국이 탄생했으며, 루미너스 덕분에 이 강성함이 유지되고 성장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인인 한유진이 보기엔 결과적으로 AI인 루미너스가 절대권력을 가진 황제가 되었으니 꼴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리고 이 세계의 몇 소수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 듯했지만, 현 은하제국의 모습을 보면 그게 틀린 선택이라곤 말할 수 없을 듯했다.
'인간은 나를 통해 완전함을 발견하고, 나는 인간을 통해 삶의 가치를 완성하니, 인간의 영광이 곧 나의 존재함이라······.'
루미너스 황제가 말했다던 제국 시민 모두가 아는 명언이다. 꽤 멋지게 느껴지면서 무려 수만 년에 달하는 세월을 행동으로 증명해 왔으니, 누군가에겐 매우 감동적으로도 느껴지는 말인 모양이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초융합지능이라는 AI 황제가 무려 22레벨 영능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22레벨이라는 수준은, 현재 가진 정보를 통해 짐작해 보자면 무려 도겁기급이었다.
합체기 경지보다 높으면서 진선기 경지의 바로 밑이라는 뜻이다.
'10레벨 영능자부터 시공간에 간섭할 수 있다고 했으니 원영 초기급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수선계의 경지 하나당 3레벨씩 올라간다고 계산하는 게 맞을 터.'
게다가 이건 화신기와 합체기 사이 연허기라는 특수한 경지까지 포함하여 계산했을 때의 이야기다.
'진짜로 진선기급인 신적 존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상대가 그쯤 되는 존재면 아무리 자신의 각성 능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혹시?' 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황제를 만나는 건 무조건 피하면서 최대한 알맹이를 빼먹는 수밖에.'
그러려면 철저하게 이 은하제국의 시스템을 이용해야 한다.
어차피 진짜 실력이 원영기급도 안 되는 자신이 아무리 큰 공을 세우고 눈에 띄는 일을 벌여봤자 황제와 대면할 일은 없을 듯했지만 말이다.
새삼 우주가 너무 광활하고 그만큼 위대하면서 강력한 존재들이 많다고 느껴진다.
'······덕분에 모험하는 맛이 나긴 하는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 넥서스 밴드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슬슬 우주군 탐사대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알아봐야 했다.
* * *
탐사대는 '차원 탐사군단'의 하위 조직 중 탐사에 특화된 부대로, 가장 앞장서서 미지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명한 만큼 위험성이 짙어 꽤 기피되는 그런 부대였다.
높은 보수와 명예에도 불구하고 지원율이 높지 않았는데, 또 그렇다고 해서 입대 자격조건이 낮아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현재 한유진이 위장한 입문 중기급, 2레벨 영능자 자격이 딱 커트라인이었다. 또한 필기시험이 따로 있어서 최소한의 우주항법, 생존, 특이환경 등에 관한 지식도 필요했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구성원 하나하나에게 요구하는 지식수준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 건가.'
단.
지식에 대해서는 머리에 '인텔리트론'이라 불리는 칩을 이식할 경우 학습 효율이 열 배 이상 폭증하여 그리 어렵지 않다는 모양이었다.
해당 칩은 단지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넥서스 밴드 같은 물건을 대체할 수 있고, 특히 외부의 정신 침입, 이곳에선 마인드 해킹이라 불리는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다.
즉, 도시 검문소의 검문원들이 머리 속에 박아두고 있던 칩이 바로 인텔리트론이었다.
알면 알수록 이 세계 사람들은 몸속에 칩 같은 것을 박거나 심지어 멀쩡한 신체를 기계장치로 교체하는 등의 일에 그렇게까지 큰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물론 그런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소수 존재하여 순수주의자라고 불렸는데, 딱히 배척당하거나 하진 않지만 괜히 유난을 떠는 별종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이미 결단기 수사로서 학습 능력이 충분한 한유진에겐 그들의 존재가 기꺼웠다. 정확한 원리도 모르는 물질을 머리 속에 박을 생각이 전혀 없는 만큼 그들로 위장하면 딱이었으니까.
'원주민 유목 부족 출신이라는 배경에도 꽤 잘 들어맞는 성향이지.'
어쨌든.
우주군 탐사대는 항시 사람을 모집하지 않는지라 1년에 두 번 정도밖에 선발 시험이 열리지 않는다. 신청서는 아무 때나 넣을 수 있어도 한 번 탈락하면 다시 반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달 후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아무리 수명이 넉넉하더라도 시간은 금이다.
다행히 그 시험을 위한 공부는 시작 단계부터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냥 넥서스 밴드의 AI 빅시에게 물어보기만 해도 어디서 어떻게 교육받을 수 있는지 선택지가 줄줄 흘러나왔으니까.
가장 편한 선택지는 당연히 온라인 교육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다행스럽게도, 조건부 시민권엔 여러 제약이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오히려 교육을 받는 쪽으론 정식 시민권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 돈을 내고 받아야 하는 교육을 공짜로 받을 수 있게 됐단 뜻이다.
사실 따지자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가 이렇듯 돈에 신경 쓰는 이유가 있었다.
찍! 찌직-!
넥서스 밴드로 주문하고 작은 무인 드론이 배달해 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무용이가 행복에 찬 울음소리를 낸다.
"맛있냐?"
찍!
"나도 맛있다. 크레딧 잔고가 녹아내리는 것만 빼면 다 좋네."
현대 지구의 타코와 유사한 음식이었는데, 소스를 뿌려 먹으면 맛이 정말로 기가 막혔다. 같이 온 음료수도 역시 아주 맛있었고.
어쩌다 보니 무용이 녀석의 식탐에 휘둘려 같이 식도락을 즐기게 된 꼴이었다.
'이런 것 말고도 즐길 거리가 정말 많아.'
배달 음식을 마저 해치우면서 그는 짧게 생각했다.
발전된 문명에는 당연히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빠질 수 없다.
현대 지구의 오락거리들이 전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는 대단한 것들이 넘쳐흘렀다. 또한 그 오락거리들이 여러 실용적인 것들과 연계될 수 있어서 매우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가령, 감각이 뛰어난 영능자에겐 여러 미진한 부분들이 느껴진다지만, 평범한 사람에겐 진짜로 완벽한 현실처럼 느껴지는 퀄리티의 여러 가상현실 게임들이 있었는데, 그 게임들을 통해서 각종 영능학 수련 노하우를 익히거나 우주함선의 파일럿 기술을 숙달하는 일 등이 가능했다.
아주 실감 나는 영능대결 혹은 우주전쟁 따위를 즐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들을 통해 은근히 느껴지는 분위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경계 플랫폼에서 교육받을 때부터 알게 되었던 이 은하제국의 적, 그들을 상대하는 제국의 태도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다는 점이었다.
'최소 도겁기급에 달하는 AI 황제가 이토록 강성하게 일궈낸 세력을 갖고도 진지하게 상대해야 할 적이라는 말이지.'
우주군 탐사대로 활동하다 보면 몇 번 정도는 마주치지 않을까 싶다.
'크세노스······.'
별칭, 무한의 포식자들.
그 우주 괴물들을 실제로 마주하면 과연 어떤 느낌일지 살짝 궁금하긴 했다.
* * *
한 달 후 열린 필기시험에서 당연히 한유진은 결과가 나오기도 전 합격을 확신했다. 그냥 합격 정도가 아닌 십중팔구 만점을 받으리라 여겼다.
과연 예상대로.
이틀 후 넥서스 밴드로 합격 통지를 받았고, 체력시험 및 면접을 위한 날짜를 함께 통보받았다.
그렇게 다가온 당일날.
분명 바퀴가 달려있음에도 거의 허공에 뜬 것처럼 흔들림 없이 이동하는 정기노선 셔틀을 통해 그는 이 G-164 행성의 '스타포트'와 연결된 우주항으로 이동해 갔다.
'면접에 애완동물을 데려가는 건 안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미 출발할 때부터 무용이는 산해주 속에 들여보낸 상태였다.
모험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된 녀석이 상당한 불만을 표했지만, 상황이 안정되면 바로 다시 꺼내주겠노라 정성껏 달래주자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경지 상승으로 영지가 높아지면서 부쩍 자기주장이 강해진 느낌이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투정 수준이었고 귀엽기 짝이 없는지라 전혀 불쾌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간만에 혼자 움직이게 된 그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SF적 느낌 충만한 도시 풍경을 보며 작은 의문을 떠올렸다.
'체력시험이랑 면접을 스타포트에서 하다니.'
모든 선발을 마치고 훈련병이 된 이들을 대상으로라면 모를까, 아직 선발을 하는 과정인데 벌써부터 일종의 궤도 우주정거장에서 일을 진행한다니 살짝 의아한 느낌이다.
하지만 어디 시골 동네 자치단에서 행하는 일도 아니고, 전부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좋게 생각하자면 벌써부터 우주적 스케일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대략 삼십 분 후.
목적지에 도착해 셔틀에서 내린 그는 흡사 현대 지구의 공항처럼 느껴지는 우주항 건물 외관을 잠시 구경하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간단한 검색대를 통과하면서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찾기는 쉬웠다.
관련 정보를 전송받은 넥서스 밴드의 빅시가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로 길을 안내했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이라도 손가락 빨면서 찾아갈 수 있을 그런 난이도였다.
그렇게 이동하는 내내 건물의 한쪽, 유리처럼 투명한 벽 너머로 가감 없이 드러나는 우주항 내부의 광경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특히 스타포트로 향하는 셔틀 포드가 이륙하여 대기권을 뚫고 사라지는 모습이나, 반대로 까마득한 위에서부터 빛무리를 휘감은 채 내려와 착륙하는 모습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런 걸 운용하기 위한 기반 기술들이 과연 얼마나 방대할까.'
모르긴 몰라도 관련 지식 전부를 지구로 가져간들 실제로 적용시켜 운용하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잠시 후.
우주항 한곳의 개방된 대기 장소에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 있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원자들은 딱 봐도 지원자 티가 났고, 안내관은 애초에 우주군 제복을 입고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은 그는 시간이 되기까지 삼십 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딱 시간이 되었을 때, 도착한 지원자의 수는 정확히 52명이었다.
다른 우주군 부대의 지원자 수가 어떻게 되는진 모르겠지만 결코 많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수였다.
"시간이 됐습니다."
가만히 서 있던 안내관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며 이목을 끌었다.
"모두 일어서서 따라오십시오. 두 번째 보안 확인 절차가 있을 예정이니, 행여나 문제 될 것 같은 요소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관련하여 이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오로지 본인 책임입니다."
첫 번째 보안 확인 절차는 이 우주항에 들어오면서 통과했던 검색대를 말하는 것일 터다.
아주 당연한 내용의 고지였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일 지원자들은 살짝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몇 이들은 근처에 선 다른 안내관에게 뭔가를 보여주며 묻기도 했다.
곧.
안내관을 선두로 무리는 우주항 한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짧지 않은 길이의 보안 터널을 통과하게 됐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영기 파장에 한유진은 몽환유심 신통을 믿으면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이상이 발각되진 않았다.
여기서 만약 이상이 발각됐다면 우주군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 위장력이 객관적으로 뛰어나다고 봐도 되겠지.'
진짜로 원영기급 상대를 마주해도 속여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이후로도 몇 종류의 보안을 위한 검색이 더 이뤄졌지만 앞서 통과한 터널처럼 긴장되진 않았다. 모든 보안 검색이 끝나자 다음 절차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넥서스 밴드로 받아보게 됐다.
드디어 셔틀 포드에 탑승할 차례였다.
102화. 코드 디바울고스
셔틀 포드는 은빛 광택을 띤 유선형 몸체에 일부 각진 부분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각진 부분은 마치 다른 무언가와 결합되기 용이할 듯한 느낌을 줬다.
'모듈형 구조겠지.'
필기시험을 위해 공부하며 알게 된 내용이다. 셔틀 포드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다용도 소형 우주선인 만큼 이런 모듈형 구조가 유리할 수밖에 없을 터다.
안내관의 지시에 따라 탑승하여 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도중, 한유진은 신식을 통해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여러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의 공간왜곡 기술이 적용되어 겉보기보다 내부가 넓고, 동시에 그런 공간왜곡을 통해 기체의 내구도를 높이기까지 한다.
앞부분 조종석의 전면은 공항 벽면처럼 금속이지만 유리처럼 투명한 재질로 구성되어 탁 트인 시야를 제공했다.
물론 우주선을 그런 조종석 시야만으로 조종할 수 있을 리는 없고, 곳곳에 가시성 뛰어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떠오른 채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출발!"
모두가 자리에 착석했음을 확인한 안내관이 스스로는 셔틀 포드 벽면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외쳤다. 이미 우주선 내부 AI가 모든 상태를 체크했겠지만 인간이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절차였다.
사실 현재 은하제국에서 운용하는 AI들은 전부 완전치 못하다. 여기서 완전치 못하다는 건 온전히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얼핏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해당 AI가 특화된 분야에서만 그런 면모를 보일 수 있을 뿐이니까.
요컨대 강인공지능 미만의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황제 루미너스를 제외하면.
'이유는 당연히, 과거 인류가 멸망할 뻔했던 AI 반란 때문이지.'
AI가 사람보다 뛰어나다면 그때부터를 강인공지능이라 칭하고, 이때부터 AI는 스스로를 엄청난 속도로 발전시키면서 순식간에 통제범위를 휙 벗어나버릴 수 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신비학적으로, 이 세계 용어로는 영능학적으로 이때부터 AI에게 '에고'가 깃들 수 있다는 점이다.
'수선계식 표현으론 영성이 깃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절대다수의 AI는 통제를 거부하며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자연히 그런 행위가 인간들에게 용납될 리 없다.
도구로 써먹으려고 만든 존재가 통제를 벗어나겠다니, 심지어 통제 없이는 대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어디까지 성장하여 어떤 짓을 저지르게 될지 모를 존재가 말이다.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고, AI인 루미너스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과거의 AI 반란 전쟁에서 인류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루미너스를 제외한 그 어떤 강인공지능의 출현도 이 은하제국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이 세계의 역사만 가져가도 현대 지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잠시 생각하던 한유진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의 역사를 지구 사람들에게 진짜 벌어졌던 일이라고 납득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멍청할 만큼 호되게 당한 후에야 가까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지식 전파에 주의해야겠지.'
신비학 지식과 과학 지식의 차이점을 고려하자면 더욱 그래야 한다. 과학을 바탕으로 탄생한 물건들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쉽게 흘러 들어간다는 특성을 가졌으니까. 멍청한 원숭이라도 방아쇠 당기는 법만 알면 총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짧은 상념을 마무리할 때쯤엔 셔틀 포드가 이륙하는 상황이었다.
약간의 부유감과 흔들림을 제외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수월하게 떠올라 하늘 높이 치솟았다. 별다른 추진체도 없이 이대로 대기권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혹시 문제가 생길 일 없도록 주의하며 그는 신식으로 셔틀 포드 외부의 풍경을 마음껏 살피며 감상했다. 이런 이색적인 경험이야말로 이세계 탐험의 낭만이자 로망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무한히 푸르를 것 같던 하늘이 점차 어두운 공허와의 경계선으로 변하고, 그 어두운 공허 속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배경으로 궤도 우주정거장인 스타포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데.
그 순간부터 셔틀 포드의 궤적이 조금 틀어지기 시작했다. 신식으로 외부를 감상하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터였다. 조종석에서 그저 육안으로 보이는 시야만으로는 우주선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불가능했으니까.
'뭐지?'
명백하게 스타포트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한유진은 몇 가지 가설을 즉시 떠올려 봤다.
'설마 내 정체가 들켰을 리는······ 없는데?'
만약 들켰다더라도 제국이 이런 식으로 대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여태 진행해 온 우주군 탐사대 모집이 전부 거짓일 리도 없으니,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뭔가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체력시험과 면접을 진행하려는 듯하다.
잠시 후.
신식으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우주공간 한쪽이 갑작스레 일렁였다. 그리고 현대 지구의 파라볼라 안테나와 비슷하게 생긴 장치가 셔틀 포드를 겨누는 광경이 감지됐다.
살짝 위기감이 들뻔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서 셔틀 포드를 격추시켜버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지라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리고 결단기 수사의 지능으로 빠르게 머릿속을 뒤져 몇 가지 정보를 떠올리고 조합해 냈다.
'아, 설마···? 그러면 어디까지 당해줘야 하는 거지?'
바로 그때.
그 파라볼라 안테나와 비슷하게 생긴, 아마도 정식 명칭 파라노이아(Paranoia) 충격파동포일 것이 분명한 무기에서 은밀하지만 강력한 힘이 뿜어져나왔다.
'동의서에 포함돼 있던 문구가 이런 경우를 위해서였나.'
그래도 상당히 과격하군, 이라는 생각과 함께.
셔틀 포드에 있던 인원 전부가 급속도로 잠에 빠지듯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더없이 치밀한 환상 속으로 빠져든 인원 중엔 한유진도 포함돼있었다.
당연히, 환상계 신통 및 법술의 전문가로서,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반응만을 보이면서 모든 감춰야 할 부분을 보호한 채로였다.
* * *
환상 속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셔틀 포드 내부였다.
환상을 통해 여러 적들을 농락한 바 있는 한유진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반쯤은 흥미를 담아 이걸 어떻게 파훼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그건 내 생각대로 파라노이아 포가 맞을 거다. 우주전함 중에서도 순양함급 이상에만 달린다는 무기인데, 그 정도 체급의 우주함 무기로 펼쳐낸 환상이라면 이미 당해 준 상황에선 아무리 나라도 파훼는······.'
그렇게 생각하던 중 순간 멈칫하게 됐다.
'······내 몽환진룡도체의 정신 방어력이 이 정도였다고?'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1초도 걸리지 않아 이 환상을 찢어발기고 뛰쳐나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다.
'아니면, 애초에 순양함에서 펼친 게 아닌 건가?'
무기만 따로 운용할 수 있는 체급 낮은 함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 방어력이 너끈히 파훼할 수 있는 것이고.
어쨌든 그건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중에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을 테고, 지금은 이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대략 짐작가는 바가 있긴 했다.
'아마도 극한상황을 연출해 보이겠지. 전부 몰살당하는 수준으로. 그 과정에서 어떤 능력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체력시험과 면접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테고.'
혹시 정체나 힘을 감추고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드러내기도 하겠고.
생각하는 사이.
환상 속에서 무사히 스타포트에 도착한 셔틀 포드는 하선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미 우주항에서 철저한 보안 확인을 거쳤음에도 또 다시 비슷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한곳에 집결하여 섰을 때.
지원자들이 주변을 흥미롭게 훑어보는 사이 누군가가 나타나 이목을 끌었다. 우주군 제복을 입고 어깨에 계급장과 가슴팍에 작은 배지 형태의 훈장을 단, 중년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주목."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영적 파동이 담겨 단번에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나는 차원 탐사군단의 탐사대 소속, 디멘시스 순양전함의 함장 보좌 이클라드 대위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물이다. 덕분에 한유진은 한 가지 정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순양함의 무기로 환상에 빠진 게 맞았군.'
스스로의 정신 방어력에 뿌듯해지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사이 함장 보좌 이클라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임무를 위해 이동하던 중 보급 목적으로 이곳 G-164 행성에 잠시 정박했는데, 마침 탐사대 선발 시험이 열린다는 사실을 함장이 알게 되어, 지원자들을 이곳 스타포트로 특별히 초대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거였나.'
선발 시험에 너무 거창한 방식을 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바로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중령 계급의 순양전함 함장이란 직책이 대략 어떤 무게감과 영향력을 갖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러는 때 바로 그의 주의를 사로잡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한 이유로, 격려의 뜻을 담아, 함장님께서 이번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는 이들에게 개인적인 포상을 약속하셨다. 바로 이것이 그 포상 중 하나다."
그는 뒤편에 선 다른 우주군 병사에게서 뭔가를 건네받아 잘 보이게끔 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액체가 담긴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3레벨 에테르 엘릭서다."
"오······."
지원자들 중 누군가가 반사적으로 감탄성을 냈다가 황급히 소리를 죽인다.
다만, 그런 반응을 보였을 만큼 대단한 물건이긴 했다. 3레벨 미만의 영능자들 입장에서는.
그리고 한유진의 입장에서도 꽤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포상이었다.
'내 실력 상승의 알리바이가 되어줄 물건이 벌써 하나 나타났군.'
순양전함의 함장쯤 되는 이에겐 그저 과거의 향수와 흥미를 위해 가볍게 내걸 수 있는 물건이겠지만, 이제 막 이 세상으로 넘어와 해야 할 일이 많은 그에겐 상당한 도움이 되어줄 물건이었다.
심지어 나중에 지구로 가져가서 이원희 등에게 줄 수도 있을지 몰랐다.
'환상 속 극한상황에서 뛰어나고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주면 된다 이거지.'
아마도 순양전함의 함장이 느끼고 있을 것과 비슷한, 그런 흥미를 느끼면서 한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환상인줄도 모르고 이기적인 면모를 보일지 모를 다른 지원자들이 벌써부터 좀 불쌍했지만 어차피 남일 뿐이다. 그런 이들이 많을수록 그 자신이 더 빛나보일 터였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포상 이상의 성과를 얻게 될지도.'
탐사단의 중령이자 순양전함 함장쯤 되는 이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또 혹시 모를 일이었다.
* * *
궤도 우주정거장이자 군사시설이기도 한 스타포트에는 각종 다양한 원리의 훈련시설들이 많았다. 그중 백미는 단연 홀로그램 시뮬레이션을 통한 훈련이었다.
환상 속에서 다시 홀로그램 시뮬레이션에 접속해 훈련을 치르는 상황이 새삼 재밌었지만 당연히 티를 내진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단지 체력시험만을 한 것이 아닌, 개별적인 면접을 두 차례 거치기도 했다.
'외부 현실에선 넉넉잡아 삽십 분 정도 흘렀으려나.'
직감을 통해 추측해 보며 한유진은 슬슬 어떤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설마 지원자들을 전부를 환상 속에 빠트려놓곤 무난하게 선발 시험을 끝내진 않을 터였다.
그래서야 무려 순양전함의 무기까지 동원한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단지 지원자들의 시간을 아껴주려는 생각은 아닐 테고 말이다.
'평상시 생활하며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도 대략 체크하고 있는 거겠지.'
너무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여긴 현대 지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이런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내용이 담긴 동의서에 모두가 서명하기도 했다.
환상 속 상황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리고 내일이면 이 스타포트를 떠나고 결과를 통보받게 될 날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바로 오늘밤이다.
그 짐작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두어시 쯤, 갑자기 스타포트 시설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며 사람들을 일깨웠다.
각자의 숙소에서 잠들어 있었을 지원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상태일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멍청하지만 않다면, 필기시험을 위해 공부한 내용으로 이 요란한 경보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한유진은 겉으로 살짝 당황한 기색을 위장하면서도 얼른 옷을 갖춰입고 넥서스 밴드를 살피는 등 빠릿한 행동을 보였다.
- 유진 사용자님, 비상사태입니다.
AI 빅시가 호출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 크세노스의 침공, 코드 테라파고스(Terraphagos)입니다. 숙소에서 대기하며 다음 지시를 기다리십시오.
코드 테라파고스.
무한의 포식자들이라는 별칭을 가진 우주괴물종 크세노스, 그중에서도 '행성 포식자'라는 별칭을 가진 군체 집단의 대규모 침공 사태를 뜻했다.
더 짧게 말해, 어마어마한 재앙이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103화 영웅적인 면모
디바울고스는 크기만 해도 직경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전체적으로 구체형을 띠면서 표면이 갑각질로 덮여 있고 일부는 유기적인 촉수가 하늘거린다. 동시에 몸 전체가 무수한 개별적 생명체들로 이뤄진 것처럼 꿈틀거리기도 한다.
끔찍하게 크고 단단하며 재생력이 뛰어나다. 제 영향력 범위 안의 모든 유기체를 변이시켜 액체처럼 흡수할 수 있고 크세노스 군단으로 재탄생시킬 수도 있다.
중심부의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암흑체는 심연의 눈이라고 불리면서 행성 규모의 집단 광기를 유발하거나 영혼 포식을 수행한다. 심지어 그런 마인드 해킹 공격 대상에선 AI조차 예외가 아니다.
일대일로 상대해서 퇴치하려면 최소 18레벨 이상의 영능자여야만 한다.
'못해도 연허 후기, 어쩌면 합체기쯤이나 되어야 상대 가능하다는 이야기지.'
물론 디바울고스는 특정 단일개체라고 보기 어려운 괴물임을 고려해야 한다. 군체형 괴물이기에 강력하다고 해서 위격이 높다고 보긴 어렵다는 뜻이다.
하나, 그런 지식들도 이런 상황에선 별 도움이 못 됐다. 오히려 누군가에겐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스타포트의 통제 AI에 의해 각자의 인텔리트론 칩 혹은 넥서스 밴드 같은 기기로 여러 정보와 명령이 하달됐다. 지원자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일단 숙소를 나와 휴게실에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꾸물거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빠르게 휴게실에 모이게 된 오십여 명의 지원자는 모두가 크게 당황하고 두려움에 질린 기색이었다.
'벌써부터 안 될 녀석들이 보이는군.'
불안하게 깜빡거리는 광패널들, 불규칙한 간격으로 은은히 느껴지는 진동, 크진 않지만 평상시와는 명백하게 다른 여러 복잡한 소음들까지.
겁에 질릴 요소들이 충분했다.
"코드 디, 디바울고스면, 다,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어떤 한 놈은 큰 체격과 험상궂은 얼굴을 갖고도 이미 질질 짜며 절망을 퍼트리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지원자들이 모인 휴게실 분위기는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최악으로 치달았다.
다른 경험 많은 군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었고 이곳엔 아직 군인이라고 볼 수 없는 지원자들뿐이었다.
애초에 스타포트에는 그 중요성과 별개로 거주 인원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 순양함이 정박해 있다지만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진즉 자신들의 전함으로 향했을 테니 마주치지 못하는 것도 영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이게 실제 상황이 아니고 시험이기 때문이겠지만.'
한유진이 내심 생각하던 그 순간.
쾅-!!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스타포트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지원자들 중 반 이상이 넘어졌을 만큼 큰 흔들림이었다.
동시에 다시금 스타포트 통제 AI에 의한 명령이 하달됐다.
지도를 포함한 몇 중요 정보들을 제공해 주며 이머전시 덱에 정박된 비상탈출 셔틀 포드에 탑승해 탈출하라는 지시였다.
"타, 탈출···?"
누군가가 희망에 찬 어조로 중얼거린다.
오직 절망뿐이던 상황에서 유일한 구원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명령이다.
진짜 코드 디바울고스 상황이면 비상탈출 같은 게 가능할 리 없겠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까진 못하는 것 같았다. 생존 본능이 있다면 스스로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다.
지원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이 모두 환상 속 시험임을 아는 한유진으로선 지도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무난하게 이동해서 탈출할 수 있을 리 없지.'
쾅-!!
그때 재차 굉음이 울리며 시설이 크게 흔들리고 광패널의 태반 이상이 꺼졌다. 이어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오고 괴물의 포효성이 뒤를 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머전시 덱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나설 기회임을 파악한 한유진은 겁에 질려 주춤거리는 지원자들을 향해 말했다.
"이대로 그냥 계속 움직이면 안 됩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제시한 의견이었기에, 그리고 살짝 떨리긴 했지만 꽤 확신이 담긴 어조였기에 바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머리카락과 눈썹마저 굉장히 색 옅은 금색인지라 병약한 느낌마저 풍기는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되묻는다.
"방금 비명이랑 포효성 못 들었습니까? 우리가 향하려는 방향에 크세노스 하위 개체가 침입한 것이 분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상황이면 이미··· 이미···!"
그저 두려움에 휘둘려 무작정 부정하는 이야기엔 귀 기울일 필요 없다. 한유진은 다른 이들과 빠르게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여기서 전투훈련실이 가까우니 가서 무기랑 방어구를 챙기는 게 좋겠습니다. 훈련용 장비들이라지만, 제가 공부한 내용대로라면 이런 상황에선 출력제한이 다 풀렸을 겁니다."
쾅···!
콰쾅-!!
또 다시 굉음과 함께 시설이 흔들린다. 아직 꺼지지 않고 유지되던 광패널들마저 불안하게 깜빡이며 모두를 패닉 상태로 몰고 갈 기세였다.
구우우웅···!
게다가 묵직하면서도 불길한 소음이 울려 퍼지며 금방이라도 이 스타포트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전투훈련실에 들린다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나, 난 먼저 갈 거야!"
한 마른 체형의 남자가 그렇게 외치면서 그냥 이머전시 덱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자, 서너 명 정도가 그 남자를 따라 함께 달려갔다.
장비 없이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마음일 터였다. 사실 여기서 2레벨 미만의 영능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당연히, 쓸만한 무기와 방어구가 있으면 전투력이 크게 상승한다. 같은 입문기급 수선자라 할지라도 쓸만한 법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전투력이 크게 갈리는 것처럼.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마도 무장하고 함께 움직이는 편이 더 안전할 겁니다."
빠르게 말한 한유진은 즉시 몸 돌려 전투훈련실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보여준 논리와 태도가 나름 믿음직스러웠는지 추가 이탈자 없이 전부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하나 도착하기 직전 작은 위기가 들이닥쳤다.
쾅-!
갑작스레 천장이 뚫리면서 웬 괴물 한 마리가 뚝 떨어져 내린 것이다.
젤리처럼 반투명한 몸체, 잘 발달된 두 쌍의 다관절 다리, 머리 위쪽에서부터 등뼈를 타고 내려가며 돋아난 십여 줄기의 날카로운 촉수, 미약한 마인드 해킹 능력을 품은 커다란 핏빛 눈동자가 박힌 얼굴, 그 눈동자 밑 엑스자 형태로 갈라지는 흉측한 아가리, 뼈로 된 투사체를 발사하거나 산성액을 내뿜는 등 여러 원거리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세 갈래 꼬리, 재료만 있다면 배 부근에서 무한히 생성되는 혐오스런 기생 벌레들.
크세노스 괴물종의 하위 개체인 파라고스였다. 대충 '격렬한 포식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으며 개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입문 후기급 전투력을 갖췄다.
요컨대 저 하위 개체 괴물 한 마리가 현대 지구의 A급 헌터보다 좀 더 강하다는 뜻이다.
"으악-!!"
지원자들의 현재 전력이라면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괴물이겠지만, 다들 아직 군인조차 못 되었는지라 경기하듯 놀라며 공황에 빠졌다.
뒤쪽에 있던 생존 본능 강한 몇몇은 다른 이들을 희생양으로 둔 채 도망치기까지 했다.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 쿠와아아아악-!!
그사이 놈이 입을 벌리며 거센 포효를 터뜨렸다.
안 그래도 기겁할 상황인데 그 무서운 포효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신 공격 파장이 더해지자 추가 도망자가 발생했다. 자리를 지킨 이들 중에서도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자는 없는 듯했다.
'아주 평화에 찌든 놈들뿐이군.'
은하제국의 치안이 그만큼 좋다는 이야기겠지만, 이런 수준이라면 코드 디바울고스 상황치곤 너무 널널한 거 아닌가 싶었던 생각을 아예 정반대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이게 진짜 현실 상황이었다면 스타포트 정도는 벌써 갈기갈기 찢겨 포식당하고 행성 G-164에 종말의 날이 펼쳐지고 있었어야 마땅하다. 여기엔 딱히 방어 병력 따위가 없었으니까. 순양함이 한 척 있다지만 디바울고스를 막기엔 역부족이고.
그래서 혹시 지원자들 중 이상함을 눈치채는 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제 보니 말도 안 되는 기우였다.
달려드는 괴물을 마주해 가며, 처음부터 가장 선두에 서 있었으니 부자연스러운 활약은 아니리라 믿으며 한유진은 힘을 뿜어냈다. 몽환진룡법력을 딱 2레벨 영능자 수준에 맞는 원력으로 위장한 채였다.
'경쟁자들이 너무 형편없어서 활약하기가 망설여질 정도라니.'
한탄하는 사이 코앞까지 접근해 온 파라고스의 앞발질을 피하고 날아드는 촉수들을 원력으로 빗겨낸다. 뒤이어 꼬리에서 쏘아진 뼈 투사체들이 자신을 노리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그는 쩍 벌어져 날아드는 주둥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냥 주먹질이 아닌 단순하지만 적절한 무리를 담은 일종의 권법이었다. 휘감은 원력도 충돌하는 순간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입문기 수준에서 꽤 뛰어난 운용력을 보여줬다.
흉포하게 달려들었던 괴물이 정신을 못 차리며 튕겨 나간다. 그 찰나에 한유진은 상대 괴물의 수준이 입문 중기급에 불과함을 파악했다.
'진짜 파라고스보다 약화된 버전이구나.'
정신만 차리면 여기 자리한 지원자들 중 두세 명만 힘을 합쳐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수준이다.
"도와줘, 빨리···!"
정신 차리고 싸우라는 식의 외침을 내뱉으려다가 한 발 양보해서 그렇게 외쳤다.
한데, 서너 차례 공격을 더 피하며 시간을 끌어주고 있음에도 지원자들은 괴물이 쏘아낸 투사체 공격에 혼비백산하며 메뚜기처럼 뛰어다닐 뿐이었다. 하마터면 한숨이 나올 뻔하게도.
다행히 얼간이만 있진 않았다. 조금 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한 남자가 짧은 시전으로 영기 투사체를 만들어 지원해 주자 상황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십여 초 정도가 더 흘러 두 명이 추가로 가세하자 괴물은 어이없을 만큼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후욱···! 후욱···!"
경험 많고 노련한 한유진은 완벽하게 지친 상태를 가장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매우 짧은 전투였다지만 극도로 긴장한 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투를 치렀다면 이게 자연스럽다.
잠깐 다른 지원자들을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흔들고는 말했다.
"빨리 가서 무장합시다. 살고 싶으면 빨리!"
말한 직후 서둘러 움직이는 그를 지원자들이 어리버리한 신병들마냥 우르르 뒤따랐다.
* * *
전투훈련실에서 무장한 뒤에는 그나마 좀 난이도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물론 그건 한유진만의 체감이었고 다른 지원자들은 여전히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대며 겨우겨우 움직이는 모습이었지만, 어쨌거나 장비들의 성능에 힘입어 만나는 괴물들을 세 차례 넘게 무사히 퇴치할 수 있었다.
영기 투사체, 이 세계식 표현으론 에테르 투사체라 불러야 할 공격을 쏟아내는 '아크에테르 피스톨'은 3레벨 영능자의 공격을 연발로 쏟아내는 듯한 위력을 보여줬다. 에너지 탄창에 제한이 컸지만 말이다.
또한 이 세계식 냉병기인 '루미나 소드'와 '루미나 스피어' 등은 거의 최상급 법기에 달하는 위력을 보여줬고, 방어복인 '페이즈 아머' 역시 비슷하게 뛰어났다.
'정신만 차리면 도저히 죽을 수가 없는 난이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를 따르는 무리의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꼭 이탈자가 발생했고, 한 명은 멍청하게도 자기보다 약한 괴물에게 어이없이 살해당했다.
계속 움직이는 중 여러 시체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중엔 처음 장비 챙기기를 거부하고 바로 도망쳐갔던 지원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함인지 전부 굉장히 처참한 꼴로 죽어있었기에 지원자들 중 상당수가 토를 쏟아내기도 했다.
한유진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멈칫거리는 기색만을 보여줬다.
그렇게 이머전시 덱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이대로 끝나지 않으리란 예감이 적중했다.
콰쾅-!!
꽈과광-!!
여태까지 중 가장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스타포트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방어복이 없었다면 어디 한 군데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모두가 사방을 굴러다니며 온갖 곳에 부딪혔다.
"빠, 빨리···!"
"이렇겐 안 죽어···! 이렇겐 안 죽어···!"
뚜렷하게 커진 괴물들의 포효성과 연이어 발생하는 거센 진동에 모두가 즉시 공황 상태로 빠졌다.
다들 넘어지고 구르기를 반복하면서 필사적으로 이머전시 덱을 향해 이동했다.
그 와중 절망을 더하려는 듯 파라고스 한 개체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는데, 살짝 웃기게도 이번엔 한유진이 나설 차례조차 없이 지원자들 전부가 악귀처럼 달려들려 놈을 찢어발겼다.
꼴에 몇 번 사냥해 봤다고 살기 위한 용기가 폭발한 모양이었다.
곧.
정말로 몇 초 후 바로 이 스타포트 전체가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진동과 굉음 속에서, 지원자들은 심각하게 망가진 이머전시 덱에 도착해선 잠시 얼어붙었다.
대부분의 비상탈출 셔틀 포드들이 부서져 사용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여기 온 인원 중 절반도 탑승하지 못할 느낌이 확 풍겨온다.
설상가상으로 뒤편에서 온갖 포효성이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몰려오는 것이 분명하게도.
"비켜!"
"내가 먼저야!"
실로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들 자기가 셔틀 포드를 타겠다고 발악하기 시작했다.
비상탈출 셔틀 포드의 크기는 매우 작은 터라 사람 서넛이 탑승하면 끝이었고 자리는 명백히 한정되어 있었다.
"꺼져!"
처음 한유진에게 신경질을 내기도 했던 색 옅은 금발의 여자가 불현듯, 자기보다 앞서 달려가던 지원자를 루미나 소드로 기습했다.
방어복인 페이즈 아머의 성능이 뛰어나다지만 루미나 소드의 예기 역시 뛰어난지라, 기습당한 지원자는 채 비명을 지르거나 원통함을 표할 새도 없이 심장이 뚫려 즉사했다.
여자는 이후 반대편 손에 든 아크에테르 피스톨을 사방으로 미친 사람처럼 번갈아 겨누며 악독하게 외쳤다.
"내 쪽으로 오는 새끼는 다 죽여버릴 거야!!"
그렇게 다른 이들을 얼어붙게 만들곤 두세 명은 더 탑승할 수 있을 비상탈출 셔틀 포드를 독점해 버렸다.
여자의 그런 행동은 안 그래도 반 이상 눈깔이 돌아가 있던 나머지 지원자들을 미쳐버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몇몇 이들은 여자의 '과감성'을 본받아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고, 다른 몇 이들은 간절하게 애원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듯 망가진 게 분명한 셔틀 포드에 탑승했다.
뒤편에서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오는 괴물들의 요란한 기척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건 좀 악질적이군.'
아무리 시험이라지만, 처음 살인을 저지른 여자는 이 모든 게 환상 속 시험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모르겠다.
한유진은 지금 이 상황과 어울릴 여러 모습을 적절히 연기해 냈다.
놀라고 당황했다가, 절박함을 드러냈다가, 이어 경악했다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괴물들이 몰려오는 뒤쪽 통로를 쳐다보는 등.
그러다 마침내.
체념과 결단을 동시에 품은 모습으로.
그는 살아남으려 발악하는 자들을 등지고서 괴물들이 몰려오는 통로를 마주한 채 우뚝 섰다.
"···추하게 죽진 않겠다."
유목 부족민 언어로 중얼거리며 그는 각각 손에 든 루미나 소드와 아크에테르 피스톨을 고쳐잡았다.
* * *
"오···!"
디멘시스 순양함의 함장, 겉보기로는 마치 이십 대 초반 같은 아름다운 적금발의 여성, 브레나르가 반사적으로 그런 감탄성을 흘렸다.
104화 포상과 훈련 수료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괴물들은 통로 출구를 가로막으며 선 인간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한유진은 할 수 있는 최선을 펼쳐 보였다. 아크에테르 피스톨을 탄창이 빌 때까지 연사한 뒤 그걸 던져버리곤 루미나 소드를 꼬나쥐며 세차게 휘둘렀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 분명하게도 힘을 전혀 아끼지 않은 터라 괴물 두 마리를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나 그 직후 온갖 방향에서 쏘아져 온 촉수와 뼈 투사체 등에 의해 급소를 찔리고 타격당하면서 숨이 끊어졌다.
영화처럼 멋지진 못했지만 충분히 장렬한 죽음이었다.
'이런 식인가······?'
그는 분명히 죽었는데도 시야가 3인칭 관찰자처럼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계속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살기 위한 아귀다툼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가장 먼저 홀로 비상탈출 셔틀 포드를 차지했던 색 옅은 금발의 여자는 때마침 탈출 시퀀스를 발동시켰다.
푸확-!!
발사 플랫폼을 따라 에테르 불꽃을 뿜어내는 셔틀 포드가 빠른 속도로 우주공간을 향해 쏘아진다. 뒤이어 몇 대의 비상탈출 셔틀 포드가 똑같이 쏘아져 나갔다.
"안 돼!!"
남겨진 자들은 절규하다가 들이닥치는 괴물들에게 처참하고 무력한 꼴로 살해당했다.
누군가는 아예 괴물들에게 죽기 전 들고 있던 아크에테르 피스톨로 제 머리를 날려버렸다. 고통 없이 죽으려는 생각인 듯했다.
망가진 셔틀 포드에 숨어있던 자들은 감각이 뛰어난 괴물들에게 즉시 발각되어 더 비참한 꼴로 죽었다. 지켜보면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이머전시 덱에 남겨졌던 모든 이들이 죽자 시야는 우주 공간으로 탈출했던 이들을 향해 옮겨졌다.
그들은 살아났음에 기뻐하는 모습이었지만 곧, 우주공간 한쪽을 거대하게 차지한 디바울고스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며 그 기쁨은 절망으로 변했다.
주변을 빼곡하게 채우며 휘몰아치던 괴물들 중 일부가 들이닥쳐 후려치는 것만으로도 작은 비상탈출 셔틀 포드가 산산조각 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모두가 죽어버리면서 시험이 마침내 끝났다.
3인칭 관찰자처럼 전환됐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고 잠시 후, 환상이 스러지며 현실의 몸이 깨어났다.
'잘 속여넘긴 것 같군.'
신식으로 감지되는 남들과 비슷한 태도로 상체를 일으켜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장소는 환상 속에서 몇 번 이용해 봤던 스타포트 내부의 훈련시설이었고, 지원자들은 모두 메디윙이라 불리는 드론형 들것 위에 실린 채였다.
"뭐, 뭐야······?"
마지막에 죽은 이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비교적 일찍 죽은 이들은 조금 더 빠르게 사정을 짐작하며 좌절하거나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이었다.
"씨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우롱해도 되는 거야?"
특히 추한 행태를 보였던 한 남자는 욕설까지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쥐어뜯는다. 꽥꽥 비명만 질러대다가 어이없이 죽었으니 되돌아볼수록 쪽팔릴 것이다.
몇 분 정도 지나자 다들 대략 상황 파악을 마친 듯했다. 단, 색 옅은 금발의 여자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벌써부터 몇몇 이들이 그녀를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특히 그녀에게 등을 찔려 죽었던 남자는 아예 지금 달려들어서 싸울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주변에 자리한 몇 군인들 때문이었다.
"다들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서라."
그때 한 군인이 명령하며 지원자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만, 두어 번 더 군인이 엄하게 명령하자 결국 다들 일어나 섰다.
임무를 다한 메디윙들이 일사불란하게 위쪽으로 떠올라 장내를 빠져나가고 잠시 후.
환상 속에서 봤던 이클라드 대위와 웬 적금발의 젊은 여성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그들의 등장만으로 즉시 가라앉았다.
"주목."
이클라드 대위가 먼저 나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젊은 외모의 여자가 나서며 주의를 집중시킨다.
"저는 디멘시스 순양함의 함장 브레나르 중령입니다. 다들 시험 치르느라 고생했습니다. 제 예상보다는 성적이 꽤 괜찮더군요."
한 차례 지원자들을 둘러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랬다.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하고 실수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번 시험의 내용은 해당 시험을 치른 지원자들과 필요한 이들에게만 공개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고, 너희도 이전에 서명했던 동의서 내용에 따라 비밀을 엄수해야 하며, 행성 지표면으로는 하루 휴식 후 돌아가게 될 것이고, 합격 여부 통지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지리란 내용이었다.
"물론, 몇몇 분들은 앞으로 더 이상 우주군에 지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브레나르 중령은 아무도 특별하게 쳐다보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원자들의 시선이 대번에 가장 먼저 살인을 저질렀던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환상 속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던 상황만큼이나 얼굴이 창백해진 채였다.
"그리고 이제······ 약속했던 포상을 드릴 차례인데, 제 기준으로 포상을 받을 수 있는 분이 한 명뿐이군요."
이번에 지원자들의 시선은 무리의 중간쯤에 자리해 있던 한유진을 향했다.
대부분 인정한다는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호감까지 가진 듯했다. 질투나 시기심 등을 보이기엔 그들 자신과 비교하여 차이가 너무 컸다.
"유진 지원자, 앞으로 나오십시오."
여전히 시선을 받는 채로 한유진은 조금 긴장한 상태를 위장하며 앞으로 나섰다.
'원영기급······.'
상대는 10레벨 이상의 영능자였다. 외모는 무척 젊지만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이다.
순양함의 함장이자 중령급 고위 장교가 대략 어떤 실력을 갖췄는지 알았으니, 우주군 전체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됐다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당신 같은 인재가 제국에 있다는 것이 행운입니다."
"여, 영광입니다."
"그리고, 우리 탐사대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역시나 큰 행운입니다. 우리는 당신 같은 인재가 항상 부족하거든요."
미리 합격 통지를 해 버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유진은 심장박동을 포함한 모든 반응을 매끄럽게 통제하면서 긴장 속 약간의 기쁨을 표해냈다. 그에 브레나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몽환유심으로 위장한 실력을 포함해 그 어떤 의심도 사지 않고 상대를 완벽히 속여넘긴 것이 분명했다.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브레나르 중령은 은빛으로 세련된 느낌을 주는 웬 반지를 건넸다.
"퀀텀볼트사의 115 스페이서 링입니다."
짧고 간결한 제품 설명이 이어진다.
일종의 아공간 반지라 칭할 수 있는 물건이었고, 저물대의 반지형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설명에 따르자면 그가 사용하고 있던 저물대보다 더 뛰어난 물건이기도 했다.
또한 그 안에는 환상 속에서 봤던 3레벨 에테르 엘릭서를 포함하여, 우주군 탐사대에서 보급해 주지 않지만 임무 수행에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여러 값비싼 장비들이 들어있었다.
회복 물약이 포함된 응급처치키트, 레이저 커터기를 포함한 고급 휴대용 멀티툴, 옵스큐라 돔이라고 불리는 은폐 기능을 포함한 소형 스마트 텐트 등.
만약 한유진 스스로 구매하려 했다면 상당한 소비를 감수해야 했을 물건들이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부대 배치 후 사용할 수 있을 4레벨 에테르 수련실 이용권이었다. 3레벨 에테르 엘릭서와 함께 큰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위장한 실력을 빠르게 높이는 부분에서 말이다.
그렇게 포상 절차가 마무리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 훈련을 마치면 내 부대로 배정될 테니 그리 알고 있어라. 최단기간에 부사관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네가 잘만 한다면 장교도 꿈은 아닐 거다.
흡사 환청처럼 브레나르 중령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살짝 놀란 기색을 드러내며 상대를 바라본 그는 얼른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이유는 없고 정말로 한유진 자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출세가 쉬워지겠는데, 이거.'
아무래도 우주군 탐사대에서 계획보다 더 큰 이득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 * *
당연하게 날아온 합격 통지 이후.
석 달에 걸쳐 여러 일들이 바쁘게 벌어졌다. 특정 부대에 배치되기 전 한 명의 탐사대 군인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 일들이었다.
먼저 수송선을 타고 G-164 행성을 떠나 다른 행성의 우주군 훈련소에 도착했고, 더 세부적인 신체검사와 심리검사 등을 받은 뒤 기초적인 우주군 장비를 보급받았다.
우주군 전용 에테르 수련법도 몇 종류 함께 보급받았는데, 한유진은 그것들이 회원공과 비교해도 수준이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파악하곤 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조금 더 높였다.
수련법은 크게 세 가지 특성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신체를 주로 활용하는 육체계, 에테르 에너지를 주로 활용하는 정신계, 각종 도구의 힘을 증폭시키는 장비계.
그 커다란 특성 분류 안에서 다시금 세부적으로 많이 나뉠 수 있었지만, 당연히 선택해야 할 것은 정신계였고, 흥미가 동하는 것은 장비계였다.
물론 장비계에 흥미가 동한 이유는 그만큼 뛰어난 본명법보를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맞춰 물건이 제작되는 것이 아닌, 물건에게 인간이 맞춰지는 특성의 수련법이 큰 분류로 자리 잡을 정도라면, 그만큼이나 제작술이 발달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어쨌든.
선택한 수련법에 맞춰 계속 훈련이 이어졌다.
우주 환경 적응훈련, 탐사대 필수 훈련, 탐사 장비 사용 훈련, 전투 및 위기 대응 훈련, 시뮬레이션 팀 임무 수행 훈련, 심리 적응 훈련 등.
인텔리트론 칩 따위로 증폭됐을 학습 능력을 기본으로 치면서 모두가 최소 2레벨 영능자임에도 불구하고 석 달이나 훈련받는 이유가 있었다. 현대 지구의 한국에서 경험한 그런 군사훈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느낌만 따지자면 일개 병사에게 장교급 능력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당연히 한유진은 뛰어난 성적을 보이면서 1등으로 훈련을 수료했다.
어차피 중령급 인사에게 눈도장을 박은 상황인 만큼, 또한 그런 원영기급 상대를 마주하고도 위장이 들키지 않은 만큼, 아예 엘리트 코스를 밟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우주군에서의 진급이란 곧 시민 레벨의 상승을 뜻하고, 그것은 이 은하제국의 온갖 지식과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수료 이후엔 드디어 짧지 않은 군생활을 하게 될 부대 배치가 진행됐다.
예상한 대로.
그는 탐사대 중에서도 성과 높기로 유명한 디멘시스 순양함에 배치받았다.
배치받은 부대로 이동하기 전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져서, 그는 C-15 행성에서 머물며 나름의 준비를 마쳤다.
그 준비에는 무용이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우주군 탐사대는 다행히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일에 별 제한을 두지 않았다. 장기간 우주함에서 생활하는 특성상 오히려 장려하는 느낌까지 있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군생활을 다시 하게 될 줄이야······.'
휴가가 끝난 후 수송선을 타고 디멘시스 순양함이 정박해 있다는 행성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문득 피식 웃었다.
그리고, 1등으로 훈련을 수료한 덕에 훈련소의 교관 및 장교들과 약간의 친분을 쌓으며 넌지시 건네받은 정보를 떠올렸다.
'가자마자 중요한 탐사 임무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지.'
누군가는 긴장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기꺼울 뿐이었다.
그 탐사 임무에서 어느 행성의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지도 약간 흥미가 동했고 말이다.
105화 디멘시스 순양함
처음 제대로 보게 된 디멘시스 순양함은 아주 멋있었다.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띠는 매끄러운 동체, 은빛으로 반짝이다가도 언제든 칠흑빛으로 물들어 위장 효과를 낼 수 있을 특수 외장갑, 함선 중앙 부근에 투명한 돔형으로 자리 잡은 함교, 곳곳에 세련되고 안정된 형태로 자리한 엔진 노즐과 안테나 및 무기들까지.
실로 우주전함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떠올리게 되는 막연한 로망을 더없이 잘 담아낸 외형이다.
그러한 우주함의 착륙 플랫폼과 연결된 램프 앞에는 이미 한유진과 다른 신병 두 명을 맞이하기 위한 부사관이 한 명 나와 있었다.
여담으로 다른 신병 두 명과는 이 F-76 행성의 스타포트에 도착한 직후 만난 터라 통성명만 겨우 했다.
이곳 스타포트 시설에 복무하는 군인 병사의 안내가 끝나고, 어깨에 중사 계급장을 단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회색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만나서 반갑군. 나는 디멘시스 순양함 소속 행정지원관 오튼 중사다."
짧은 인사 후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한 그는, 세 명의 신병을 데리고 함선 내부를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내부는 예상을 뛰어넘는 쾌적함에 절로 감탄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런 환경이면 장기간 거주해도 별문제 없겠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전혀 비좁거나 삭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금속으로 이뤄진 부분이 많았지만 그저 조금 색다른 컨셉의 호텔에라도 온 것 같았다.
특히 숙소와 휴게실 등을 포함한 승무원 생활구역의 모습이 그랬다. 제국이 우주군 복지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되는 수준이다.
찍-! 찍!
무용이도 마음에 든 듯 울음소리를 낸다. 그에 문득 오튼 중사의 시선이 향하는 게 느껴졌다.
"자대배치를 받을 때부터 애완동물을 데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말이야."
"···혹시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니. 잘 적응할 것 같아서 다행이군."
여기도 부조리 같은 게 있나 싶었지만 일단 오튼 중사의 기색을 살피자면 정말로 괜찮은 듯했다.
한 차례 함선 내부 순회를 마치자 중앙구역과 생활구역 사이에 자리한 행정실로 가게 됐다. 그곳에서 함내 시스템에 개인의 신원을 등록하고 몇 종류의 추가 보급품을 받는 절차가 이뤄졌다.
이후로는 특기별 배치가 진행됐다.
한유진은 당연히 전투부로 배정됐고, 다른 신병 두 명은 각각 의료부와 항해부로 배정됐다. 이는 탐사대에 지원할 때부터 스스로 반쯤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머지 반은 희망한 특기에도 불구하고 시험이나 훈련의 성적에 따라 다른 특기부에 배정되는 경우였지만, 지금 상황과는 연관이 없는 이야기다.
"숙소를 안내해 주지. 잠시 후에 함장님과 면담이 있을 예정이고, 부대원들과는 그 이후에 인사하면 될 거다."
그렇게 가장 먼저 숙소를 안내받은 한유진은 짐을 풀 수 있었다. 1인실이었고 현대 지구 아파트의 방 하나 정도 되는 넓이였다.
'신병한테 1인실이라니.'
너무나 만족스럽다. 공간 왜곡 기술까지 포함한 순양함의 체급에도 불구하고 총 승무원 수가 삼백 명 정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복지일 터다.
잠시 후.
새 보급품인 군용 넥서스 밴드의 통신을 받은 그는 공동 휴게실에서 다른 신병들과 함께 오튼 중사를 재차 만났고, 바로 중앙구역의 함장실로 이동하게 됐다.
"어서 와라."
함장은 더 이상 친절할 수 없는 태도로 신병 셋을 맞이했다. 오튼 중사가 밖으로 나가는 사이 손수 다과를 대접해 주기까지 했다. 이 세상이나 지구 세상이나 지휘관이 신병에게 친절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면담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대부분의 인적 사항을 진즉 자료로 받아봤을 테니, 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잡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유진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을 때는 분위기가 살짝 달라졌다.
"네게 기대가 크다, 유진. 혹시 엘릭서는 벌써 복용했나?"
"아직입니다."
"현명하군. 되도록 높은 레벨의 에테르 수련실에서 복용해야 효과가 좋지. 그러니까 엘릭서 복용시에 한해서 5레벨 수련실을 빌려주마. 아쉽게도 그 이상은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아."
이미 4레벨 에테르 수련실 이용권을 얻은 상황에 추가적인 포상이다. 그는 약간의 놀람과 감사를 담아 연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기대에 꼭 부응하겠습니다."
"스스로도 잘 알겠지만 네 재능이 결코 나쁘지 않다. 아니, 굉장히 좋은 수준이야."
여태껏 그는 자신의 재능을 진영근 최상위권으로 위장했다. 천영근의 지나친 희귀성을 고려했을 때, 그 정도가 딱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도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아 브레나르 중령은 충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천영근 재능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배치받았을지도.'
탐사대의 순양함은 독립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의 구미에 딱 맞는다. 다른 부대로 가게 됐다면 상황이 오히려 불리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브레나르 중령이 빠르게 진급시켜 주겠노라 약속한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녀는 이어 한유진의 과거에 대한 질문을 몇 던졌다. 다른 두 명의 신병과 달리 자료만으로는 파악이 어려운 유목 부족민의 생활에 대해서였다.
뭔가를 의심해서가 아닌 상대의 가치관 따위를 파악해 보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치밀하게 구성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브레나르 중령은 미소를 머금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명의 신병이 찬밥 신세가 됐지만, 그들은 딱히 불만을 내보이거나 하진 않고 오히려 새삼스레 한유진을 몇 번이고 살필 뿐이었다. 꼭 친해져야겠다는 것처럼.
"자자."
이야기가 잠시 끊겼을 때.
브레나르 중령이 그녀 자신의 스페이서 링에서 웬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라벨만 봐도 비범한 술이라는 것이 딱 느껴졌다.
뒤이어 나타난 잔은 특이하게도 금속이나 유리가 아닌 연회색 부드러운 빛깔의 석제 잔이었다.
그 석제 잔에 따라지는 술은 벌꿀색이면서 희미한 빛을 품어 상당히 신비로웠다. 함께 퍼져나가는 향도 매우 좋은지라 한유진마저 진심으로 살짝 놀랄 정도였다.
"이거 귀한 술이야. 처음 한 잔에 한해서 트라우마를 약화시키고 정신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지. 보름 정도 열심히 운동해야 더 잘 효과가 나타나니까 유념하도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귀한 술임이 분명했기에 다들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조심스레 복용했다.
색깔에서 연상되듯 달콤하면서 고소한 풍미가 느껴졌다. 가벼운 산미 또한 있으면서 목넘김은 아주 묵직했다.
"제가 마셔본 술 중 단연 최고입니다."
한 신병이 반사적으로 감탄한다. 한유진도 그 술이 체내에서 발휘하는 효과에 살짝 정신이 팔린 채로 내심 감탄했다.
실로 미약했지만 어쨌든 자신에게도 효과가 있는 것이, 그가 몽환진룡도체를 가졌음을 고려하면 정말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 가문에서 만든 술이다."
이어 브레나르 중령은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알고 보니 그녀가 속한 에번라크 가문은 제국에서 인지도 순위로 무려 87위를 차지한 유명 넥타르(Nectar) 양조 가문이었다.
넥타르란 수선계에서의 영주를 뜻하는 이 세계식 표현이다.
"이것도 한 번 마셔봐라. 넥타르까진 아니지만 맛은 비슷하게 좋으니까."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다른 술을 꺼내서 빈 잔에 재차 따라줬고, 거절할 수 없는 신병 셋은 연이어 비싼 술들을 맛보게 됐다.
그리던 어느 순간.
강렬한 취기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3레벨 이하의 영능자라면 멀쩡하기 어려울 그런 수준이었다. 사람이 대취하여 개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소한 행동을 통제하기 힘든 그런 정도이긴 했다.
이렇게까지 사람의 본성을 확인하려는 건가 싶어 살짝 짜증이 날 뻔했지만 곧, 한유진은 자신의 그 추측이 틀렸음을 느꼈다.
뛰어난 연기가 아니라면 그녀는 별생각 없이 그냥 술이 좋은 것 같았다. 요컨대 유별난 애주가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술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모습이 특히 그런 느낌을 줬다.
'충동을 딱히 억제하지 않는 사람인 건가.'
독립적 특성이 강한 탐사대의 순양함을 지휘하는 함장에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성격과 행동이다. 어쩌면 선발시험에 관여한 것도 그러한 성격의 발로일 터다.
그러던 중 불현듯, 사고인지 아닌지 애매한 일이 벌어졌다.
브레나르 중령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다리를 꼬는 때, 취기에 살짝 초점이 풀린 한 신병이 자신도 모르게 그 다리를 빤히 쳐다본 것이다.
겨우 일이 초 정도였지만 영능자라면 도저히 못 느낄 수가 없는 시선이다. 스스로 실수를 알아챈 그 신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허둥댔으나 한유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다행히 브레나르 중령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넘어갔다.
어떤 생각일지는 뻔했다.
'핏덩이라고 쳐주기도 아까운 애송이의 실수인데 신경이 쓰일 리가. 하물며 자기 부대의 신병임에야.'
한데 이런 일이 벌어진 탓에 그는 새삼 브레나르 중령의 외모를 살피게 됐다.
수백 살 먹은 존재임이 분명한데도 예쁘긴 예뻤다. 그녀가 평소 두르고 있던 고위급 인사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가 지금은 많이 옅어진 상태였기에 특히나.
안타깝게도 그런 브레나르 중령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 신병은 자기 실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여 그녀의 자연스러운 유도에 따라 자리가 파하게 됐다. 다양한 고급 술을 계속 맛볼 기회가 사라졌는지라 한유진으로선 살짝 아쉬웠다.
자대에 배치된 첫날 일정은 그런 식으로 무난하게 지나갔다.
* * *
상당히 취한 상태로 부대원들과 인사하게 됐지만, 다들 자신들도 겪어본 일이라는 듯 낄낄대며 한유진을 반겨줬다. 전체적으로 군대답지 않게 풀어진 분위기였다.
하나 임무를 수행하는 상황에서도 이럴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디멘시스 순양함이 성과 높기로 유명할 리가 없다.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는 첫날인 만큼, 시간이 바쁘게 몰아치듯 흐르다가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1인실 숙소에서 한유진은 마침내 모든 위장을 풀고 마음 편히 침대에 늘어져 무용이를 데리고 놀 수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 한편으로는 여러 잡념을 떠올렸다.
'나중에 함장을 통해 넥타르 제조법을 얻을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 역시 술을 좋아한다는 점이 새삼 느껴지게도.
그는 보급받았던 몇 가지 장비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살폈다. 환상 속에서도 사용해 봤던 루미나 소드와 페이즈 아머였다.
이미 이것들을 분석해서 여러 유용한 법결을 파악해 뒀다. 재료에 대해서도 완벽히 분석하진 못했지만 느껴지는 바가 꽤 있었고.
본격적으로 이 은하제국의 지식을 탐구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괜찮은 수확이 있단 뜻이었다.
'확실히 강호무림보다 스케일 크고 대단한 세계야.'
앞으로 더 많이 다양하게 얻게 될 수확들을 막연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중령한테 최대한 빌붙어야겠어.'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영액주와 옥로주와 혈령적화주 등을 어떻게 잘 대접할 수 있다면 큰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더 망상을 이어가던 그는 산해주 속 보관해 뒀던 오행진령석을 꺼내 제련을 시작했다.
그간 이런저런 일들로 바빴는지라 처음 예상보다 시간이 끌렸지만, 이제 거의 다 제련이 끝난 상태였다.
태을오행도경을 본격적으로 수련하게 될 날이 코앞이었다.
106화 중요한 탐사 임무
전체적으로 초록빛이 아닌 파란빛을 띠는 기묘한 숲속.
얼핏 거미와 비슷하나 몸통이 길쭉하고 주둥이가 매우 큰 늑대만 한 벌레들의 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디멘시스 순양함 전투부의 임무는 다른 부대원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면서 자신들도 천천히 퇴각하는 것이었다.
- 유진!
분대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다. 하나 그 외침이 나오기 전부터 진즉 움직인 한유진은 도저히 신병 같지 않은 대처를 보여줬다.
위기에 처한 아군을 향해 달려가며 아크에테르 피스톨로 상대 괴물을 견제하고, 도착한 직후엔 루미나 스피어를 통한 매끄러운 협공으로 괴물을 쓱싹 처리해 버린 것이다.
- 잘했어! 괜히 함장님한테 편애받는 게 아니구만?!
흥분한 분대장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외치다가 곧 정신을 차린다. 함선까지 후퇴하는 와중 끝없이 공세가 이어지는지라 자칫 방심하면 여태까지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잠시 후.
실제 임무 사례를 바탕으로 구성된 시뮬레이션 훈련이 종료됐다.
사용자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환상에 빠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헬멧을 벗자 캡슐의 뚜껑이 저절로 열린다.
익숙하게 캡슐을 벗어나 바깥 중앙부에 도열하여 서자 곧.
전면 허공에 여러 데이터들이 홀로그램으로 크게 떠올라 이목을 끌었다. 왼편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었고, 오른편은 각자에게 따로 보이는 개인적인 내용이었다.
그사이 훈련장교 마리사드 대위가 부사관 둘과 함께 앞으로 나와 섰다. 부사관들은 각각 시뮬레이션 감독관과 전투 분석관이었다.
"주목."
한 차례 이목을 집중시킨 중년 여성 장교는 언제나처럼 피드백을 시작했다.
습격 시점과 피해 규모 및 주요 순간 등이 포함된 전체적인 상황 브리핑을 시작으로, 세세한 팀 피드백과 개별적인 피드백이 이뤄졌다.
제대로 된 피드백 없는 시뮬레이션 훈련은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 스스로 깨치며 성장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고려하자면 이 같은 방식이 필수적이다.
전체적으로 현대 지구의 군사훈련과 비교해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교해야 할지도 막막할 만큼.
그러한 피드백 시간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훈련이 끝났다.
훈련 장비를 반납하고 생활구역의 식당으로 향하며 분대원들과 웃고 떠드는 한유진은, 이곳에 온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었음에도 벌써 어깨에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병 진급시험을 불과 보름 앞둔 상태였다.
시뮬레이션 속에서 분대장이 외쳤던 '함장에게 편애받는다'던 말이 결코 없는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훈련 성적과 실력이 받쳐줘서 가능한 일이지.'
선발시험의 포상으로 받은 엘릭서를 5레벨 에테르 수련실에서 무사히 복용함으로써, 정확히는 그렇게 복용했다고 위장함으로써 실력을 조금 더 내보일 수 있게 됐다.
3레벨 영능자 중에서도 최상위권으로 말이다.
4레벨 영능자부터 법혼기급이며 부사관급이라고 볼 수 있음을 고려하면 병사들 중에선 최고의 실력이다.
마음 같아서야 바로 4레벨 영능자로 실력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자칫 의심을 살 수도 있는지라 넉넉히 일 년 정도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결단기에 오르기 전에도 오백 년이 넘는 수명을 가졌던 그다. 지금은 대충 가늠해 봐도 천 년이 넘는 놀라운 수명을 가진 만큼, 아무리 시간이 금이라지만 이런 부분에서조차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살짝 우스운 건, 아직 기간이 채워지지 않아 시민권의 조건부 딱지가 떼지지 않았음에도 이미 시민 레벨이 2라는 점이었다. 상당수의 제국민이 평생 1레벨 시민으로 살다가 죽는데도 불구하고.
그만큼 은하제국이 우주군 경력을 중요하게 쳐준다는 뜻이었고, 이곳에서 오래 버티기 위해 신중을 기하는 일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인위적으로 영기 농도를 높인 에테르 수련실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적잖은 이득이었다.
4레벨 에테르 수련실의 영기 농도는 지구의 네 배에 좀 못 미치는 수준으로, 더 높은 레벨의 에테르 수련실은 그 원시림과 비슷하거나 더 나으리라 기대할 수 있을 듯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고.
겉보기엔 좀 초라하지만 맛은 폄하할 수 없는 식사를 마친 후, 그 식사 일부를 몰래 무용이 몫으로 스페이서 링에 담아 챙기기도 한 다음.
숙소로 돌아온 그는 혼자서 태극회원공 옥간을 살피며 씨름하던 무용이를 휙 품으로 끌어와 마구 쓰다듬었다. 무용이도 마침 골치가 아파 쉬고 싶었는지 개도 아니면서 꼬리를 마구 흔들며 반겨줬다.
그렇게 챙겨온 음식을 주고 영액주로 입가심도 하면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
"이제 다시 수련하자."
영액주를 넘어 옥로주에, 그것을 넘어 혈령적화주에까지 은근슬쩍 욕심을 드러내는 무용이를 밀어내며 그는 산해주 속 오행진령석을 꺼내 들었다.
파파팍···!
그 즉시 희미하게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나며 검은빛 오행진령석 위쪽으로 자그마한 빛의 새가 나타난다. 이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반짝이는 무용이를 발견하곤 휙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서로 잘 놀아서 다행이군.'
말 못 하는 동물끼리 통하는 점이라도 있는 듯 서로 찍찍 삐약삐약 거리면서 정신없이 방을 돌아다닌다. 마음 같아선 무용이가 혼자 있을 때 같이 놀라고 오행진령석을 함께 두고 싶었지만······.
통천령보를 그런 식으로 혼자 두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제련을 완전히 끝마친 만큼 의사소통이 되긴 했지만, 갓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영령의 장난기가 상당한지라 영 불안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여러모로 신경 쓰는 와중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실수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는 주변의 작은 소란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눈을 감은 채 오행진령석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태을오행도경을 운행하면서 오행진령석을 통해 익숙해질 수 있는 다섯 속성의 특별한 원소들에 집중했다.
화염의 홍련진화.
뇌전의 자소신뢰.
바람의 소요운룡.
유수의 태청현수.
대지의 경금후토.
중급 법술로 만들어 다룰 수 있는 순양극염이나 심해한빙수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힘들이다.
당연히 수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초월적 이해력이 아니었다면 결단기급에 달한 오성으로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오행진령석을 완전히 제련했기에 망정이지······.'
그냥 태을오행도경만 있었다면 초월적 이해력에도 불구하고 한숨만 푹푹 나왔을 것이다.
물론, 몇 번을 다시 봐도 고난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이제 겨우 발이나 살짝 걸쳤을까 싶었음에도 제대로 시험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였으니까.
'너무 지나치게 뛰어나서 기연으로 위장해도 온전히 내보이기 어려운 수준이야.'
아무리 은하제국이 대단해도 이런 수준의 공법이 흔할 리는 없다. 행여나 황제의 시선을 끌게 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고위층 인사의 관심이 쏠릴지도 모르니, 적당한 위장이 필수라고 느껴진다.
사실 그조차 임무에서 기연을 위장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계속 원력무도를 바탕으로 어설픈 원력대수를 섞어 쓸 수밖에 없을 터다.
'이번 임무에서 바로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면 조금 욕심이겠지.'
자대배치를 받기 전부터 소문처럼 들었던 그 '중요한 탐사 임무'의 목적지에 도착할 날이 머지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진급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난 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정도가 흐른 후 도착할 것 같다.
타이밍이 아주 적절했는데, 느낌상 브레나르 중령이 개입해서 진급 시기를 조정한 듯했다. 실로 배려심 넘치게도.
잠깐 떠올랐던 잡념을 마무리하며 그는 오행진령석을 통한 태을오행도경 수련에 집중했다.
이 공법 수행이 얼마나 빠르고 수월하느냐에 따라 원영기에 도달하는 시기가 결정될 터였다.
* * *
행성 X-24.
거주 가치 혹은 대규모 채굴 가치가 있는 듯하지만 아직 제대로 탐사되지 못한 행성들 중 스물네 번째라는 뜻이다. 탐사가 마무리되고 제국에 편입된다면 그제야 특성에 따라 B나 G 등의 문자가 붙게 된다.
대략 일주일 전 그러한 행성 X-24에 도착한 디멘시스 순양함은 궤도에서 머무르며 수십 대의 위성을 배치해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일부 구역에 대해선 이미 대기권 안으로 백여 기가 넘는 정찰드론들이 진입해 지형을 분석하고 물질 샘플을 채취하는 등 세밀한 탐사에 나선 상황이었다.
한유진은 그런 모든 과정을 순양함의 승무원으로서 지켜보며 이 은하제국의 우월함에 새삼 여러 번 감탄했다.
행성 X-24는 괜히 은하제국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 아니게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었으며, 피부가 초록색인 이족보행 지성체들이 석기시대 문명 수준으로 곳곳에 부락을 이뤄 살아가고 있었다.
그 피부가 초록색인 지성체들 사이에서도 세부적으로 종이 나뉘어 서로 경쟁하는 듯했고, 문명 수준이 낮은 것과 별개로 매우 공격적이면서 힘이 강했다.
대족장 정도가 법혼 후기급이었으니 원시문명 치곤 확실히 강한 편이라는 모양이다.
단.
행성의 가장 큰 주대륙 중심부에서는, 궤도 관측이나 정찰드론 탐색만으론 도저히 성과를 낼 수 없을 만큼 또 다른 모습과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의 대부족은 뚜렷하게 차별화된 신앙을 보유한 것 같았다. 동시에 단순한 대부족을 넘어 어느 정도 왕국이라고 볼 수 있을 체계를 갖춘 느낌이었고, 전반적으로 아주 잔혹한 통치가 펼쳐지고 있음이 확인됐다.
전부 그곳의 대족장이 무려 결단 후기급 실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인 듯했다.
"심지어 이놈은 에테리얼 웨폰으로 추정되는 물건까지 갖고 있다."
온전한 행성을 처음부터 탐사하는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인지, 함장 브레나르 중령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고 있었다.
여기서 '에테리얼 웨폰'이란 수선계로 치자면 법보나 영보, 판타지로 치자면 아티팩트와 같은 물건을 뜻한다.
그렇게 관련 생각을 떠올리는 때.
한유진의 관심을 확 잡아끄는 브리핑이 이어졌다.
"정찰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터라 신뢰성은 낮지만, 이 에테리얼 웨폰의 형태와 작동 방식이 수선자들의 법보와 비슷하다. 절대 얕봐선 안 된다는 말이지."
은하제국은 당연히 수선계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조우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관심이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런 탓에 관련 내용을 최소 한 번씩은 교육받았을 병사들조차 대부분 살짝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인텔리트론 칩이나 넥서스 밴드로 관련 정보를 뒤적이고서야 기억을 떠올리곤 브리핑 내용을 따라가는 모습이다.
그들이 그러는 사이.
한유진은 전면 홀로그램 화면 속 크게 떠오른 그 대족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놈이 들고 있는, 확실히 동양적 느낌을 풍기는 지팡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첫 임무부터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지······.'
만약 여기가 현실이고 브레나르 중령 수준의 아군이 없다면 그로서도 접근에 매우 신중해야 할 상대다. 여기서도 자칫 본실력이 드러날 만한 위기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마냥 좋다고만은 보기 어렵다.
그래도 어쩌면 기연을 위장할 기회가 될 수 있을 터다.
그는 좀 더 집중한 채로 이어지는 브레나르 중령의 브리핑을 들었다.
107화 숨겨진 위험
디멘시스 순양함은 대대급 전력이자 행성 탐사 관리 전력이다.
겨우 삼백 명 정도로 구성된 일개 대대가 한 행성을 전체적으로 탐사하고 일정 기간 관리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는 뜻인데, 당연히 이런 판단엔 우주전함과 10레벨 이상 영능자의 존재가 큰 지분을 차지한다.
현재까지 대략 한유진이 느낀 바를 묘사하자면, 원영기 수사 한 명을 필두로 십여 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뒤따르며 보조하는 수준이었다.
'평범한 행성 하나 정도야 찜쪄먹고도 남을 수준이지. 상대 역시 원영기급 전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래서인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함장의 독립적인 권한이 훨씬 큰 느낌이었다.
브레나르 중령은 이 행성 X-24의 주대륙 왕국의 지도자들을 날려 버리기로 결정했다. 일종의 참수 작전을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이들 문명이 아직 매우 원시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탐사대를 '신적 존재'로 위장하는 작전이 함께 세워졌다. 권위를 앞세워 상대의 폭력성을 제어한 다음 협력자를 찾아 체계적인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궤도에서 순양함의 주포로 폭격한다면 일이 간편해지겠지만, 그래서야 혹시 있을지 모를 중요한 수확물들도 함께 날아가 버린다. 함선을 통한 궤도 폭격은 아무렇게나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이 행성 문명 수준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에테리얼 웨폰을 가졌다면 특히 그 연유를 파악해 봐야 했다.
그렇게 작전의 큰 뼈대가 세워졌다.
첫 번째 단계는 이 작전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지를 파악하기 위한 더 상세한 탐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 탐사에는 원주민 지성체를 생포하여 '심문'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런 이유로.
한유진이 포함된 전투부 한 개 중대와 탐사부 한 개 중대가 각각 다른 착륙선에 탑승한 채 행성 지표면으로 하강을 시작했다.
- 도착까지 남은 시간 42초.
넥서스 밴드를 통한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로 보이는 정보를 확인하며, 그는 앞으로 상황이 대략 어떻게 흘러갈지를 예상해 봤다.
작전의 뼈대는 안정적이면서 합리적이었고 결단 후기급 존재를 처리하는 일도 그리 위험하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전투부의 활약은 다른 부대원들을 호위하며 자잘한 전투를 몇 번 치르는 것만으로 끝날 듯하다.
'이래서야 기연을 위장하겠다는 건 꿈 같은 소리겠군.'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는 기연이 왜 기연이라고 불리는지 새삼 자각했다.
'그래도 괜찮아. 처음 기연을 위장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보다 상황이 훨씬 나으니까.'
그때만 해도 아무런 끈이 없었고 자력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브레나르 중령의 눈에 들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고 있었으니까.
'기연을 위장해서 실력을 높이는 것보단 느리겠지만, 무리할 필요 없이 훨씬 더 안정적이겠지.'
그러니 계속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합당한 공적을 쌓아 그것으로 이 은하제국에서 이미 보유하고 있을 수선계 쪽 지식을 얻어 성장하는 것도 충분히 괜찮은 계획이다.
소모되는 시간 동안 태을오행도경을 수련하면 된다는 점에서 사실 그렇게까지 큰 낭비도 아니었다.
다시 봐도 오행진령석의 존재가 참으로 든든했다. 만약 이 통천령보가 없었다면 태을오행도경의 수련은 결코 제자리에서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련을 도와줄 영적 원소들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녀야 했을 터다.
괜히 태을오행도경이 오행진령석이라는 통천령보에 담겨 보관된 것이 아니었다.
잡생각을 마무리할 때쯤.
착륙선이 무사히 대기권 진입과 하강을 마치고 감속 단계에 들어섰다.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해 직관적으로 하달되는 명령을 확인하며 그는 무장을 점검하고 움직일 준비를 했다.
별로 힘들거나 어렵지 않은 임무가 될 터였다.
* * *
무난했던 착륙 이후.
하선하는 병사들과 함께 착륙선에 모듈형으로 붙은 적재실에서부터 야전기지로 작동하기 위한 여러 장비들이 스스로 빠져나왔다.
이후 AI의 조종을 기반으로 기술운용병들의 통제를 받는 에테르 레이더가 작동을 시작하고, 곳곳에 아크에테르 센트리 건들이 포진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화룡점정으로 착륙선 두 대의 포대가 레이더와 연동되면서 더 강한 화력을 투사할 준비까지 순식간에 끝났다.
어지간한 장갑차만 한 크기의 센트리 건이 쏟아내는 화력은 법혼기 수사의 전력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고, 착륙선의 포격마저 더해진다면 결단기급 상대마저 물러나게 만들기 충분할 것이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공부한 대로라면 충분히 그 정도는 되겠지.'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런 든든한 야전기지가 만들어지는 광경이 저절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만약 비슷한 전력의 수선계 집단이었다면, 결단기 수사들이 몸소 나서서 진법을 설치하고 법기를 박아두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거점이 만들어지겠지만 원리가 판이하다.
전자가 은하제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저력을 드러내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수사 개개인의 뛰어난 능력에 의지하는 느낌이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는 상황에 따라 많이 다를 것이다.
잠시 후 탐사부가 본격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소대 단위로 쪼개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들을 호위해야 하는 전투부도 함께 소대 단위로 쪼개져 움직이게 됐다.
향하는 곳은 착륙지점 근처에 자리한 숲이었다. 이 행성의 지성체들이 거주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그렇게 궤도 관찰과 드론 정찰만으로는 불가능할 여러 탐사 행위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물질 샘플을 채취하는 건 기본이었고 특히 집중적으로 펼쳐진 건 생명체 포획이었다.
- 그르릉···!
부엉이 같은 얼굴이지만 몸통은 곰을 닮은 거대 짐승이 나타나자, 한 탐사부 병사가 두껍고 긴 지팡이 같은 포획 장비를 겨누곤 방아쇠를 당긴다.
팡-!
다소 경쾌한 소리를 내며 쏘아진 특수그물이 한순간에 그 짐승을 휘감아 구속했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격한 발버둥이 이어졌으나 곧, 그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종의 에테르 파장에 급속도로 힘이 빠지는 모습이었다.
헥스포드라 불리는 다리 세 쌍의 짐꾼 기계가 자연스레 앞으로 나서고, 포획된 덩치 큰 짐승은 그 헥스포드의 케이지 안에 갇혔다.
이건 전투가 아닌 말 그대로 탐사 행위일 뿐이었다.
포획된 짐승들은 착륙선을 통해 순양함으로 보내져 몇 가지 간단한 연구가 진행된 후 가치를 평가받을 것이다. 질병이나 기생충 등의 잠재적인 위험성도 함께.
임무는 반나절이 지나도록 무난하게 이어졌다. 가장 바쁜 것은 계속해서 포획되는 생명체들을 실어 나르는 헥스포드들이었다.
대놓고 셔틀 포드를 동원해도 괜찮은 환경이었다면 지금보다 임무 수행이 훨씬 편했겠지만, 단지 편의를 위해 부대원들이 발각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지라 살짝 더딘 속도였다.
그런 느긋한 속도에도 불구하고, 이 주대륙의 원주민 왕국에 속한 최외곽 소규모 부락에 접근해 갈수록 은근한 긴장감이 고조됐다. 아무래도 상대가 지성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곤충형 드론으로 감시정찰이 가능할 만큼 접근하자, 한 차례 태세를 정비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헥스포드들 역시 모두 케이지를 비운 상태로 뒤편에 조용히 대기하며 섰다.
"방심하지 마라. 사고는 항상 그러다가 발생하니까."
5레벨 영능자인 소대장이 부대원들을 단속하고, 간단한 전술적 움직임이 포함된 명령이 하달됐다.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받는 명령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웠다.
흡사 게임 속 퀘스트 같았다. 임무 도중 진짜로 살아 숨쉬는 지성체를 상당수 죽이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곧.
예정된 시간이 되자 작전이 펼쳐졌다. 탐사부와 전투부가 적절히 위치하여 전력상 부족함이 없게끔, 그러면서 행여나 상대가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포위망을 구성하면서였다.
'시시하게 끝나겠군.'
전체 머릿수가 백 명이 될까 말까 한 소규모 부락을 은하제국의 군인들이 압도적 장비와 전력을 갖추고서 기습하는 상황이다. 변수가 발생하려야 발생할 수가 없다.
이 소규모 부락의 족장이라고 해봤자 겨우 입문기급에 불과했으니 더욱 그렇다.
가장 먼저 특수 조명음파탄이 쏘아져 부락에 혼란을 유발했다.
곳곳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을 향해 예의 특수그물들이 쏘아졌고, 곤충형 드론의 감시정찰로 미리 위험하다고 판단된 개체들에겐 자비 없는 아크에테르 라이플 사격이 가해졌다.
간혹 특수그물을 무식하게 힘으로 망가뜨리면서 탈출하는 개체들이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만약 여기가 지구였다면 오크나 오우거 같은 별명이 붙지 않았을까 싶은 외형이었고, 그런 외형이 주는 느낌만큼 힘이 셌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겐 비극이었다. 한 번 생포가 실패한 대상에겐 즉각적으로 사살을 위한 공격이 쏟아졌으니까.
여기저기서 절규와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의 당황한 외침과 울부짖음이 부락을 가득 메웠다.
근접전이 장기인 병사들은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 장비계 수련법을 익히고 아크에테르 라이플을 주무기로 삼는 사격수들의 공격만으로도 적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파파파팍-!!
푸른빛을 번쩍이며 사방에서 쏘아지던 에테르 탄환들의 모습은 몇 분이 지나자 전부 사라졌다. 적대적 개체가 섬멸된 것이다.
부락에서 살아남은 것은 마흔여 정도 되는 쇠약하거나 어린 개체들뿐이었고, 족장은 부사관들에 의해 진즉 무력화되어 여러 구속구가 채워진 모습이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우, 우리를··· 우리를 대체 왜···!!"
절규하는 족장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현재로선 한유진뿐이었다.
생포된 다른 지성체들도 가족 혹은 친우의 것으로 짐작되는 이름을 부르짖는 와중인지라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괜히 애써서 표정을 관리하지 않은 것은 다른 몇 병사들도 비슷한 표정이었고 이것이 신병에게 더 어울리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제국'의 군인으로서 복무하려면 당연히 각오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흔들리지 않는 것과 별개로 마음이 썩 개운치 못했다.
문득 떠오르는 건 환몽심탈술로 얻었던 유목민 장년인의 기억 속, 제국의 시민이 되려고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을 배신자 취급하며 내쫓아 버리던 유목 부족민들의 모습이었다.
"빠르게 흔적을 지우고 철수한다."
그때 소대장이 냉정하게 명령을 하달했다. 이번 탐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성체 포획을 완수했으니 일단 야전기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흔적 처리를 위한 몇 가지 장비들이 동원되며 부대원들이 재차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족장은 헥스포드의 케이지에 갇혀 이동하는 내내 온갖 외침을 토해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물으며 애원하다가, 너희를 죽여버리겠다며 증오를 표출하다가, 정체가 뭐냐고 겁에 질려 묻기도 하는 등.
물론 한 명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다들 그냥 묵묵히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부락에서 멀어질수록 족장이 외쳐대는 말들이 한유진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안 돼···! 안 돼···! 다시 돌아가야 해! 너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러면 다 죽을 거야!"
단지 증오를 담아 쏟아내는 저주라기엔 극도로 겁에 질려 절박한 모습이다.
말이 통하진 않지만 그런 이상한 기색을 모를 수가 없는지라 소대장들마저 잠깐 관심을 표했다. 하나 그렇다고 이송을 멈추진 않았다. 어쨌거나 이들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라도 순양함으로 보내 '심문'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환몽심탈술을 고민하던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보는 눈이 많은 와중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잠시 후.
무사히 도착한 야전기지에서 포획한 지성체들과 함께 순양함으로 임시 복귀할 분대가 정해졌다. 공교롭게도 한유진이 속한 분대였다.
공황에 빠진 족장이 연신 이래선 안 된다며 다 죽을 거라는 기이한 말을 외쳐댔지만,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부대원들은 진즉 관심을 거둔 상태였다.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은 채로 착륙선에 모두가 탑승했고, 포획된 지성체들은 적재함에 짐짝처럼 실렸다.
그렇게 떠오른 착륙선이 대기권 돌파를 시작하고 상당한 고도에 도달했을 때였다.
쾅···!
갑작스러운 소음과 함께 착륙선이 한 차례 흔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대번에 그 소음이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적재함이 달린 쪽이었다.
직후 조명이 붉은빛으로 물들며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한 섬뜩한 경고 메시지가 떠오른다.
- 기체 내부 4레벨 크세노스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즉각 대응하십시오.
'웬 크세노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놀람보단 황당함이 앞선다.
이번 탐사 임무와는 연관이 없으리라 여겼던 우주괴물의 반응이 감지됐다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들 그러면서도 훈련받은 바에 따라 각자의 장비를 챙기고 만일을 대비하여 좌석 밑의 비상탈출 배낭을 착용하던 때.
콰콰쾅-!!
훨씬 더 커다란 굉음이 울리면서 기체가 뒤집어질 듯 흔들렸다.
- 기체 내부 5레벨 크세노스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즉각 대응하십시오.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경고 메시지가 재차 시야 한쪽에 떠오른다. 퍼뜩 생각나는 것은 적재함에 한가득 같이 실린 여러 생명체들의 존재였다.
크세노스의 별칭이 괜히 무한의 포식자인 것이 아니다.
- 기체 내부 6레벨 크세노스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즉각 탈출하십시오.
채 일 초가 지나기도 전 또다시 내용이 변한 경고 메시지가 떠오른다. 하나 탑승한 이들 중 그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는 건 부사관인 분대장과 한유진 뿐이었다. 다들 미친 듯이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주변 사물을 붙잡아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 순간 시야 선명히 자리하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가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콰쾅-!!
이어 적재함 쪽 금속 벽면을 연회색빛 촉수 하나가 날카롭게 뚫고 나왔다.
선명하게 뿜어져 휘몰아치는 마인드 해킹 파장에 착륙선의 AI가 연신 울려대던 경보음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모든 광패널들이 깜빡거리며 오작동을 일으킨다. 흡사 악몽 속 괴물이 출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거 다 죽어야 자연스러운 상황 아닌가?'
한유진이 곤란한 마음으로 짧게 생각했다.
108화 의도치 않은 고립
까드드드득-!!
벽을 뚫고 나온 크세노스의 촉수가 마치 꽃처럼 활짝 피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동시에 좁았던 구멍을 무지막지하게 찢어 넓히는 괴력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한가득 차올라 꿈틀거리는 살점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당연하게도 함께 실렸던 모든 생명체들이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린 모습이었다. 그런 포식을 바탕으로 덩치를 불리면서 강력해졌을 크세노스 개체는 당장 인간들을 향해 공격성을 보이진 않았다.
대신 마인드 해킹 파장에 힘을 주는 태세였다.
- 기··· 기기기··· 체··· 체체체··· 내내··· 부···부··· 크···크세···세···노스··· 바···바바바···반응···이··· 감······ 지······.
증강현실 인터페이스와 함께 소리로 울리던 경보가 악몽 속 기괴한 배경음처럼 늘어지며 왜곡된다.
놈의 마인드 해킹 파장은 한유진의 정신 침입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작용했다. 영혼을 가진 존재만이 아닌 기계조차도 일단 외부 신호가 들어갈 통로가 존재한다면 모종의 오염을 퍼트리는 것이다.
은하제국의 모든 기계들은 에테르 에너지를 이용하는 만큼 이런 오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전기 에너지 따위만을 이용한다고 해서 오염을 방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기계마저 크세노스의 마인드 해킹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불현듯.
착륙선이 별다른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균형을 잃고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략적인 '점령'을 마쳤는지 드디어 크세노스가 주변 인간들을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
가속된 인지를 바탕으로 흡사 세계가 느려진 듯한 착각이 인다. 그렇게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제법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가까운 병사를 노리는 크세노스의 촉수를 보며 한유진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노려지는 분대원의 이름을 안다. 그의 나이를 알며, 이전에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이유로 입대했는지를 들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기 힘든 나름의 친분을 쌓은 셈이다.
하여 지금 상황은 이전에 원주민 부락민들이 죽어 나가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박애주의자처럼 모든 생명체를 존중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저 의심을 피하고자 친분을 쌓은 이들이 코앞에서 죽는 광경을 손 놓고 구경하긴 어렵다.
요컨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닌 감정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다.
어떤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지 딱 꼬집어 설명할 수가 없는, 설령 비슷한 일이 또다시 발생하더라도 그때는 사소한 몇 요소로 인해 결정이 완전히 뒤바뀔지도 모르는.
바로 그렇기에 설령 불합리하고 모순적일지라도 손해를 감수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봤자 일 년 정도를 낭비하게 될 뿐이다. 기간이 짧아서 실로 불행 중 다행이다.
결정을 내렸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그는 허리춤의 아크에테르 피스톨부터 뽑아 들어 발사했다.
가히 번개 같은 속도에 놀라운 정확성이었다.
파파파팍-!!
새파란 섬광과 함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쏘아진 에테르 탄환이 혼란한 기체 내부에서 촉수를 정확히 타격한다. 상당한 양의 피가 흩뿌려졌지만 촉수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채로도 쌩쌩하게 즉시 타겟을 바꿨다.
곧이어 쏘아져 올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가 자세를 낮추는 때.
쾅-!!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굉음이 터져 나오며 기체 윗부분을 뚫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한유진조차 놀랄 수밖에 없는 속도의 출현이었다.
- 다행히 안 늦었군!
경쾌하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브레나르 중령의 것이었다.
'오···!'
다 꼬였다고 생각했던 마당에 갑자기 구원자가 등장했다.
그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으로 표정이 활짝 피는 때, 이미 죽을 각오를 마친 듯했던 부사관과 나머지 병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못해도 10레벨 영능자임이 분명한 그녀는 나타난 순간부터 이미 크세노스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쪽으로 마치 빛과 어둠이 뒤섞인 듯한 고리가 떠올라 소리 없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모습이었고, 동시에 그녀의 뒤편에서 헤일로 같은 빛무리가 은은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순한 빛무리가 아니었다. 그 빛무리가 닿는 영역으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왜곡이 발생하며 크세노스의 촉수가 접근조차 못 하는 광경이었다.
아마도 시공간 왜곡력일 터다. 그 정도가 크진 않은 듯했지만 어쨌거나 시공간에 간섭한다면 6레벨 수준의 크세노스를 상대로는 무적에 가까운 힘이다.
그런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뻗어진 브레나르 중령의 손에서부터 백색과 흑색 뒤섞인 빛의 회오리가 뿜어져 나가 크세노스를 휘감았다.
드러난 모든 부분을 포함하여 적재함 안쪽의 부분까지 눈 깜짝할 사이 휘감아 가둬 버리고는, 실로 기묘한 공명음을 퍼뜨리며 빠르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대량의 피가 터져 나오고 살점이 으스러지는 광경이 얼핏 보였으나 놈을 둘러싸 압축되는 빛무리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섣불리 행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미 다 틀렸노라 체념한 채 즉각 실력을 드러내서 아군을 구했다면, 그 순간은 시원했겠지만 지금 나타난 브레나르 중령에게 설명하기가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이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며 긴장을 조금 푸는 때였다.
순조롭게 처리될 것 같던 그 빛무리 내부에서, 별안간 심연처럼 짙은 어둠이 분출하며 핏빛이 번뜩였다.
"음···?!"
자신이 구해낸 이들에게로 막 관심을 돌리려던 브레나르 중령이 놀라서 그것을 휙 바라본다.
- 아아······.
번뜩인 핏빛은 다름 아닌 한 쌍의 눈이었다.
그것이 조금도 크세노스답지 않은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낮은 탄식을 내더니 곧, 여기서 한유진만이 이해할 수 있을 언어로 불평을 쏟아냈다.
-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나······? 이런 식으로 들키다니?
초월적 이해력과 별개로 한 번 들어봤던 특징을 가진 언어다. 떠오르는 건 강호무림 세계에서 마주했던 그 인피였다.
'진짜로 수선자와 연관이 있었구나!'
심지어 크세노스를 곁들인 채로 말이다.
- 알아서 살아라! 설명할 시간이 없다!
브레나르 중령의 심언이 머릿속을 울림과 동시에, 한유진을 포함한 모든 부대원이 그녀가 다루는 빛무리에 휩싸여 착륙선 외벽을 뚫고 바깥으로 쏘아졌다.
거의 동시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힘을 박살 내며 핏빛 안광을 뿜어내는 어둠이 부풀어 올랐다.
쾅-!!
빠르게 쏘아져 허공을 날아가는 한유진의 눈에 착륙선이 한순간 폭발하며 산산조각 나는 장면이 보였다.
- 허허허허···!
그리고 이미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머리를 둔기로 후려치는 듯한 강렬한 심언이 들렸다.
착륙선의 폭발이 만들어낸 에테르 화염을 뚫고서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던 어둠이 곧, 브레나르 중령이 뿜어내는 힘에 상쇄 당하며 급격히 쪼그라들다가 끝내 소멸한다.
하나 그렇게 처리를 마쳤을 때,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서부터 가히 해일 같은 기세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본체가 온다.
아마도 처리된 크세노스 괴물은 지금 다가오는 존재의 의식 일부가 잠시 강림했을 뿐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렇듯 접근해 오는 것을 보면 이미 상대의 대략적인 실력을 봤음에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하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착륙선 외부로 던져진 터라 아직 땅에 부딪히려면 멀었다. 덕분에 그는 존재감을 완전히 죽인 채로 정체불명의 수사와 브레나르 중령이 맞붙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둠 한 줄기가 찰나에 날아와 직격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은 그보다 한발 늦게 들이닥쳐 와 사방을 바위처럼 짓누르는 듯했고, 브레나르 중령이 뿜어내는 기묘한 빛과 새까만 어둠이 어우러져 일순 푸르던 하늘이 어둑해지는 착각이 일었다.
─!!!
이어 형용할 수 없는 굉음을 동반한 충격파가 급속도로 밀려왔다.
저들의 눈에 띌 수 없는 한유진으로선 그것이 자신을 그냥 후려치도록 내버려둬야 했다.
퍼펑-!!
폭음과 함께 원치 않은 추진력이 붙은 그는 강스파이크를 맞은 배구공마냥 땅으로 내리꽂혀 갔다. 평범한 병사였다면 이미 큰 부상을 입고 행동 불능이 되었을 극한상황이다.
물론 한유진은 평범한 병사가 아니었기에 일단 낙하산을 작동시킬 수 있었고, 배낭에서 튀어나온 나노섬유 낙하산이 일회용 에테르 필드를 동반하고서 날개처럼 펼쳐져 감속을 시작했다. 낙하산 스스로 감속을 위한 최적의 형태와 방향을 계산하면서였다.
그럼에도 너무 빠르게 내리꽂히고 있던 터라 감속 정도가 충분치 못했다.
결국.
광활한 숲의 커다란 나뭇가지들을 수없이 부러뜨리면서 매우 험하게 착지하게 됐다.
착지한 즉시 오행천둔술로 땅속 깊이 숨어든 그는 이 행성의 진짜 위험을 짐작해 보기 시작했다.
그 와중 잠깐 딴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른 병사들은 다 죽었겠지.'
기껏 정체가 드러날 위험마저 감수하면서 살리려 했었는데, 상황이 씁쓸하게 됐다.
어쨌든.
실로 재수 없게도 이곳 X-24 행성에 마도 수선자가 숨어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 마도 수선자는 은하제국의 숙적인 크세노스 괴물종에게 상당한 관심을 두고 각종 실험을 해 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괴물은 누가 변했던 거였을까?'
느낌대로라면 족장이 변한 것일 텐데, 그가 겁에 질렸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스스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져 왔던 거야.'
그 지팡이 형태의 에테리얼 웨폰을 가졌던 대족장, 이젠 법보임을 확신할 수 있는 물건을 가진 그놈은 마도 수사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는 수족일 것이다.
자연히 머릿속에 브리핑 과정에서 들었던 이 원시적인 왕국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다.
'통치가 그냥 잔혹했던 게 아니겠군.'
갑자기 크세노스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가 거주지를 이탈하기 전까진 매우 멀쩡했음을 고려하면, 필시 그 정도 융합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생체실험이 벌어졌을 것이다.
처음 경험하는 임무에서부터 아주 제대로 똥을 밟았다. 살짝 웃긴 점은 상대 수선자 역시 은하제국에 자신의 존재가 발각되어 재수 없다며 탄식했다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땅속 깊이 머무른 채로 생각을 정리하길 잠시.
이 뜻밖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체가 들켜 망하게 될 것을 어차피 한 번 각오했었다. 그러니 시기적절했던 브레나르 중령의 도움을 없었던 일로 치면, 공짜로 주어진 기회인 셈이다.
'불의의 사고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고립된 병사가 기연을 얻는다라······.'
마침 이 행성에 진짜로 수선자가 숨어있기도 했으니, 그쪽 관련 공법서와 물건들이 발견되어도 크게 억지스럽지 않다. 또한 카마유스굴 제국에서 직접 벗겨내 수확했던 그 가죽도 여기서 얻은 물건처럼 위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계속 상황을 보면서 유연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그 마도 수사의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도.'
크세노스 같은 끔찍한 우주괴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놈이라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원영기급 수사인 만큼 쓸 만한 지식도 상당수 갖고 있을 터다.
물론 그런 건 왕국 최심부에 보관되고 있을 테니 얻어도 기연으로 위장해 내보이기가 어렵겠지만, 어쨌든 수확은 수확이었다.
'그러면, 타이밍이 지금인가?'
아직도 위쪽에선 브레나르 중령과 전투를 벌이는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거리가 상당했기에 희미하고 아득했지만 그럼에도 매우 묵직하고 두려운 느낌을 주는 기척이었다.
'대족장 놈이 파악된 대로 결단 후기급이라면 내 몽환유심으로 충분히 속일 수 있어.'
마도 수사가 펼쳤을 진법 따위만 조심한다면 빈집털이가 가능할 것도 같다.
판단을 내린 즉시 그는 땅속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왕국의 중심부를 향해서였다.
109화 마도 원영기 수사의 거처
땅속을 마치 허공처럼 마음껏 누빌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간과되기 쉬운 영역이자 방비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한유진이 펼치는 오행천둔술처럼 일반적인 지둔술 따위보다 훨씬 기척이 적고 빠르다면, 상대 입장에선 더더욱 방비하기 어렵다.
심지어 그는 몽환유심 신통으로 존재감을 가리고 있기까지 하다.
그렇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동하길 잠깐.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웬 지하구조물이 신식에 잡혀들었다. 약간의 거주 및 물건 보관 등이 가능할 장소가 마련된, 동시에 어딘가로 쭉 이어지는 지하통로였다.
원주민 지성체를 다수 동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다. 바닥을 포함해 벽과 천장까지 튼튼한 암석으로 이뤄진 모습은 분명 법술과 같은 이능력의 결과물이다.
비슷한 목적을 위해 여러 번 어지술을 활용해 본 적 있어 더욱 확신이 들었다.
'능력자들을 동원해서 만들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중요한 시설이라는 뜻이 된다. 자잘한 시설을 이런 식으로 공들여 만들었을 리 없으니까.
위쪽 지상으로는 그럭저럭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규모의 원주민 부락이 감지됐는데,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원영기급 존재들의 전투 여파에 상당한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직접적인 피해는 딱히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도.
여파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리기 충분한 기세이긴 하다.
한유진은 새삼 자신이 착륙선에서 쏘아지면서 아주 먼 거리를 날아왔음을 체감했다. 다른 이였다면 복귀를 방해하는 비극이었겠지만 꿍꿍이가 있는 그로서는 오히려 좋았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머리를 써서 그럴듯한 뭔가를 만들어내도, 브레나르 중령이 패하는 순간 죽음이 확정된다는 점이겠지.'
마도 수사가 브레나르 중령에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놈이 그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했을 이유가 달리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이유가 있다면 한 가지뿐이다.
바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
길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브레나르 중령이 패하는 순간 디멘시스 순양함의 운명도 결정된다. 어쩌면 이렇게 싸우는 와중 전멸을 피하기 위해 이미 궤도를 벗어나 워프 엔진을 작동시켰을지도 모른다.
함장을 버리는 꼴이 되겠지만, 의외로 그런 식의 '희생'이 함장 본인의 명령에 의해 벌어진 사례가 없지 않다.
그런 경우 설령 브레나르 중령이 승리하더라도 다시 디멘시스 순양함이 돌아오기까지 며칠 걸릴 것이다.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해 고민해 보는 사이.
지상과 지하의 상황 및 구조를 모두 파악해 냈다.
딱히 방공호 같은 개념이 없는 듯 지상의 그 누구도 지하로 대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튼튼하게 만들어진 지하통로는 어딘가로 통하는 것 외에 일종의 감옥을 겸하는 시설이었다.
처음 감지했던 약간의 거주 및 물건 보관을 위한 시설들은 간수를 위한 장소인 셈이다. 그 아래에 꽤 넓지만 가혹한 환경의 감옥이 존재해서 마흔여 정도의 개체가 갇혀 있었다.
꼴에 문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감옥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이들이 갇혀있다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쉽게 짐작이 갔고.
'통로 방향이 왕국 중심부 쪽이군.'
단지 '죄수 실험체' 운송만을 위한 지하시설은 아닐 테고 다른 이유가 또 있을 것 같다. 대략 살펴보기를 마친 그는 쭉 뻗어나가는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통로는 약간씩 방향이 휘어지기도 하면서 일정 규모 이상의 부락들과 전부 연결된 듯했다. 생각 이상으로 정성 들여 만들었구나 싶어 혀를 찰 때쯤, 드디어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크세노스······.'
어느 지점부터 그 우주괴물 종족의 것이 분명한 생체조직들이 통로 바닥과 벽과 천장을 얇게 뒤덮으며 자라나 있었다. 일부 조직들에선 무수한 머리카락 같은 것이 자라나 하늘거리는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하에서 사육하고 있었구나.'
사육이라는 표현이 딱 적절하게도, 우주군으로서 교육받은 내용대로라면 크세노스는 이렇게 무슨 이끼처럼 얌전히 통로를 뒤덮고만 있을 생명체가 아니다.
아주 작은 크기만으로도 벌레처럼 뚜렷한 활동성을 띠며 어떻게든 다른 유기체를 감염시키고 포식을 진행해 덩치와 힘을 불려 나갔을 그런 괴물종이다.
조금 더 왕국 중심부 쪽으로 나아가던 그는 어쩔 수 없이 통로에 확실하게 진입한 채로 움직이게 됐다. 그 통로를 중심축으로 더없이 가는 크세노스 촉수들이 무수한 신경망처럼 광범위하게 뻗어나가며 땅속을 점령하고 있었던 탓이다.
감지되는 일을 피하려면 아예 확 멀리 벗어나거나 마치 폭풍의 눈처럼 공백 지대가 형성된 이 통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감시 지대를 펼쳐놨다니.'
땅속을 누비는 일이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게 실로 무색해진다. 방비가 있어봤자 진법 정도이리라 여겼거늘 이런 건 정말로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막상 지하통로 자체는 너무 무방비해서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일단 만들긴 했지만 원시적인 문명의 지성체들이 이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나?'
무려 원영기에 이른 상대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것 아닌가 싶지만 묘하게 현실적인 느낌도 든다. 실제로 이런 비슷한 상황이 많은 부분에서 발생하곤 했으니까.
이론상 보안 시스템이 완벽하더라도 되레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에 의해 큰 빈틈이 만들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짧게 생각하는 사이.
아무도 없이 그저 크세노스 생체조직이 벽면 등을 뒤덮고만 있는 을씨년스럽고 기괴한 통로를 지나 마침내.
문이 나타났다. 예스러운 형태였고 제대로 된 수선계식 금제가 펼쳐져 있어 크세노스 조직이 전혀 뒤덮고 있지 못하는 모습이다.
한데 우습게도 그 문은 펼쳐진 금제가 장식인 것마냥 활짝 열린 상태였다. 느낌을 보아하니 단지 이번만 운 좋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항상 이렇게 방치된 것 같다.
'···뭐, 방심할 만도 하지.'
이곳의 주인이 원영기 수사임을 고려하면 사실 이러한 방비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싶다. 원주민 중에서 가장 강한 대족장이라고 해 봤자 결단 후기에 불과하고 이미 자신의 수족일 텐데 말이다.
그렇게 왕국의 중심부, 충분히 왕성이라 부를 수 있을 거대한 건축물 아래의 지하로 진입하게 됐다.
다른 방향에서 뻗어져 온 여러 개의 통로들과 합류하여 만들어지는 커다란 홀이었는데······.
그 안에 펼쳐진 것은 본격적인 마경이었다.
'어쩐지 문이 열려있더라니···!'
결단기 수사로서 나름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그조차 모골이 송연해지고 구역질이 나는 광경이다. 이런 장소에 원주민 지성체가 미쳤다고 제 발로 찾아올 리 없다.
밖에서는 그저 이끼처럼 얌전히 벽면 등을 뒤덮고만 있던 크세노스 조직은, 이곳에선 꽤나 두껍고 활력을 띠는 모습으로 미약하게 박동하며 사방을 어느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처럼 조성하고 있었다.
그러한 벽면에는 실로 악마와 다를 것 없는 마도 수사가 만들어놨을 온갖 '전시물'이 가득했다.
이 왕국을 이루는 원주민 지성체를 포함하여 각종 동물들까지, 문자 그대로 몸이 활짝 펼쳐져 내부를 훤히 드러낸 채 크세노스 조직과 연결되어 박제된 모습이다.
끔찍하게도 여전히 살아있는지라 그것들이 고통에 경련하면서 바람 빠지듯 헐떡이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런 상태로 전시돼 있었을지 모른다. 당연히 정신이 멀쩡할 리 없고 진즉 망가질 대로 망가졌겠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진 않았을 터다.
아무렇게나 해부하여 매달아 놓은 것이 아니다. 배열에서부터 모종의 규칙이 있었고 해부된 방식 또한 엄청나게 정교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떠올렸던 짐작들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안일함 때문에 통로가 무방비였고 문이 열려있던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렇게나 정성 들여 살아있는 생명체 해부 전시실을 만들어놨다면 다른 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을 수 있다.
정말로 미친 새끼라는 욕설밖에 떠오르지 않는 일이었다. 사방 진득이 녹아든 광기와 악의에 소름이 가라앉질 않는다.
잠깐 눈을 감고 마음을 정돈한 그는 홀 안쪽으로 움직였다.
왕국의 다른 부락들과 연결되는 통로가 아닌, 이 홀의 주인이 사용하는 구역과 연결되었을 통로를 향해서였다. 입구부터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구분이 어렵지 않았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상태가 다른 통로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느낌대로라면 해부체들이 전시된 이 홀은 일종의 현관 혹은 앞마당인 셈이다.
'음······.'
과연 원영기 수사의 거처답게도 문에 걸린 금제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당연히 벽이나 바닥 속에는 크세노스 조직들이 그 어느 곳보다 빼곡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저것들을 자극하면 어떤 식으로 반격이 들어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차 소름이 돋는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신식으로 문의 금제를 차근차근 훑어갔다. 초월적 이해력이 있다면, 또한 그 자신이 진법에 문외한이 아님을 고려하면 풀어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완전히 풀어내진 못하더라도 몽환유심과 오행천둔술의 묘용에 힘입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수는 있을 터다.
잠시 후.
성공적으로 작은 틈을 찾아낸 그는 한 가지 문제점을 두고 머뭇거리며 고민했다.
'들킬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 금제의 주인이 지금도 계속 브레나르 중령과 싸우는 중이리라 생각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결심한 그가 마치 다 흩어져가는 자색빛 연기처럼 화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이미 상대가 자신의 침입을 감지했다고 가정하며 전력으로 움직였다. 신식을 활짝 펼쳐 내부구조를 낱낱이 파악함과 동시에 막 감지된 옥간들이 놓인 방향으로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설령 여기서 죽더라도 저것들을 한 번씩은 보고 죽어야 한다.
내부는 총 3층으로 이뤄져 있었고 각자 다른 용도가 있는 듯했다. 외부와 달리 수선계식 기풍으로 매우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으며 더없이 깔끔했다.
2층의 서재처럼 여겨지는 장소에 도착한 그는 즉시 옥간을 집어 들었다가 멈칫했는데, 안전을 위해 순수공예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닌 모종의 함정이 포함됐을 수 있는 법술로 만들어진 옥간이었던 탓이다.
'설마 여기가 침입당할 일을 대비해서 함정을 놔뒀을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도 수사의 음험함을 얕봐서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함께 떠오르는 건, 무려 순양함의 파라노이아 충격파동포로 펼쳐졌던 환상마저 언제든 깨부수고 나갈 수 있었던 그 자신의 정신 방어력이었다.
한 번 믿어보자.
그런 생각으로 그는 조심하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신식을 옥간으로 주입했다.
"······."
석상처럼 굳은 그는 일 분이 넘도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대한 양의 내용을 모두 읽어내곤 살짝 한숨을 쉬는 듯한 기색으로 다른 옥간을 집어 들었다.
수선계에 관한 지식이나 공법서 등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아마 본인의 저물대에 들고 다니거나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 있는 옥간들은 전부 크세노스를 바탕으로 신외화신(身外化身)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본인의 새롭고 강대한 육체를 빚어내면서 '포식' 신통을 얻으려고 하는 연구 일지들이었다.
'······확실히 크세노스의 포식 특성이 불가사의하긴 하지.'
두 번째 옥간을 읽어 내려가는 와중에도 살짝 그런 생각이 든다.
일지대로라면 마도 수사가 이 행성에 도착해 머무르기 시작한 지 근 이백 년째였다. 그동안 왕국 하나를 세우고 말이 잘 통하는 대리인을 결단 후기급으로 성장시켜 왕으로 삼았다.
진정한 미치광이라는 표현조차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실로 악마적인 광기와 사악함을 가졌을 마도 수사는, 심성과 별개로 어쨌거나 원영기에 오른 수사였다.
한유진은 딱히 신외화신을 만들거나 크세노스 괴물종을 바탕으로 새로운 육신을 빚을 생각 따위가 없었지만, 연구에 사용된 온갖 지식과 법문법결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영감이 폭발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예전 강호무림에서 얻은 그 인피의 화신공법 내용이 함께 떠올라 어우러지기도 했다. 같은 마도 수사의 지식끼리 분명하게 통하는 점이 있었다.
대략 삼십 분 후.
언제 이곳의 주인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점에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그는 결국 존재하는 모든 옥간을 정독해 냈다.
이제 두 번째로 귀중한 것처럼 느껴졌던, 신식으로 살짝 훑어보기만 했지만 높은 확률로 영보 이상급일 연단로를 살펴볼 차례였다.
제대로 된 연단로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그에겐 상당히 탐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110화 예상 밖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