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예상 밖의 전개
연단로는 사람 한 명이 넉넉하게 들어가서 목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컸다.
전체적으로 그윽한 느낌의 묵색이었고, 세 개의 다리가 안정적으로 몸체를 지탱하고 있었으며, 표면에는 천지산하와 온갖 동식물들이 조화로우면서 생동감 넘치게 조각되어 아주 멋스러웠다.
그냥 생김새만 보더라도 비범한 물건임을 알 수 있다. 도저히 마도 수사의 물건처럼은 느껴지지 않는다.
신식을 통해 본격적으로 살피기 시작하자 더욱 놀라운 점이 드러났다.
'이게 다··· 법문이라고?'
알고 보니 표면에 점묘법처럼 조각된 그림은, 전부 극도로 미세한 법문들이 모여 구성된 것이었다. 제각각 들어가고 튀어나온 정도와 밀도에 차이를 두어 그림을 이루면서도 내용과 일정한 연관성마저 띠는 듯하다.
연단로 입구 테두리에 고풍스러운 문양처럼 자리한 것은 이 물건의 이름을 길게 늘여낸 것이었다.
삼원구중극현화단로.
'음.'
대략 천지인 세 원리가 아홉 중첩의 극치를 이루는 신비로운 검은 불꽃의 연단로라고 해석될 터다.
낯설지만 언뜻 들어본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머릿속 한구석에 고이 잠들어있던 지식 하나가 떠오른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유명한 선보(仙寶)급 연단로인 '구천구중극현묘천화단로'와 이름이 비슷했다.
눈앞의 이 연단로가 그 선보 연단로의 모조품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품고 있는 묘용도 비슷할 확률이 높다.
과연, 짐작이 틀리지 않아 훨씬 수월하게 진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표면에 점묘법 그림처럼 조각된 법문들은 전부 일종의 연단비법이었다.
특정 영단의 제조법이기도 하지만, 세부적으로 다른 영단 제조에도 충분히 쓰일 수 있는 기술이자 요령의 집합인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비법이 다른 비법과 어우러지면서 무수한 조합이 탄생할 수 있는, 삼원구중극이라는 추상적 표현이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와닿는 방대한 지식을 품은 연단로였다.
'이런 미친······.'
영령이 존재하지 않는 걸 보면 통천령보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 아래 단계의 영보급 물건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방대한 지식을 품었다는 점에서 위격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이것을 그저 영보급 물건에 불과하다며 폄하하려면 이 연단로가 품은 모든 조합의 연단비법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소양을 먼저 갖춰야 할 것이다.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물건을 세심하게 살피던 한유진은, 마침내 이것을 안전하게 현실로 가져갈 수 있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는 즉시 원력대수를 펼쳤다. 최근 수련하기 시작한 태을오행도경의 특별한 오행 속성 중 하나인 '경금후토'가 녹아든 원력대수였다.
금빛과 흑빛 뒤섞인 기운으로 형성된 거대한 손이 연단로를 붙잡아 세심하게 망가뜨려 간다. 원래 모양을 짐작해 볼 순 있지만 도저히 사용할 수는 없을 그런 수준으로였다.
이어 경금후토 대신 '홍련진화'를 만들어 내선 연단로가 품은 불분명한 영성과 마도 수사의 제련 흔적을 깨끗이 불태워 버렸다. 연단로가 더 크게 손상되는 일을 마다치 않으면서 말이다.
홍련진화는 신식마저 공격해 불태울 수 있는 효용이 있어 이런 일에 상당히 적합하다.
그렇게 대략 만족할 만큼 망가뜨리고 나서야 그것을 스페이서 링에 넣은 한유진은, 연단로 뒤편의 장소로 향하며 짧게 생각했다.
'이 정도로 망가졌으면 대기 장소에서 선택할 때 카르마를 추가 소모해서 원상복구를 거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원상복구된 연단로는 당연히 만들어진 직후의 그 '원상태'일 것이다. 마도 수사의 손길 따위는 전혀 닿은 적 없는.
여러 번 원상복구 기능을 이용해 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도착한 연단로 뒤편 공간은 당연히 연단술을 위한 장소였다.
서너 개의 옥간과 수십 종류의 재료들이 보관된 것은 물론, 상당히 복잡한 진법이 펼쳐진 탁자 위에서 일종의 숙성 과정을 거치고 있는 단약들의 모습도 보인다.
옥간과 재료를 빠르게 확인하며 챙긴 그는 숙성되고 있는 여섯 알의 단약을 살피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섬뜩한 핏빛에 매혹적인 금빛이 어우러진 외형이다. 특이하게도 육도윤회 신통을 통해 감정 파장이 느껴졌으며, 표면에는 희미한 도문(道紋) 한 줄이 나타나 있다.
'도문영단······.'
과연 비범한 연단로를 갖고 있던 존재답게도 연단대사보다 높은 연단종사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또한 당연히, 도문이 나타난 단약이라면 절대 평범한 것일 리 없다.
챙겼던 옥간을 도로 꺼낸 그는 이번에도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신식으로 내용을 살폈다.
위험을 무릅쓴 보람이 느껴지게도 연단 일지일 거라는 짐작이 맞았다. 연단술에 대한 여러 시행착오와 그를 통한 깨달음 등 귀한 지식이 한가득 담겨있었고, 당연히 눈앞의 단약들에 대한 정보도 포함돼 있었다.
'식혼성도단이라.'
한 지성체의 영혼과 육체를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들어지는 마도 특유의 수련과 치료를 위한 단약이다.
사실 치료 효과는 수련하면서 혹시 발생할지 모를 피해를 상쇄하기 위한 부가적인 효과에 불과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선 수련 효과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온전한 치료약으로 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어쩐지 괜히 육도윤회 신통으로 감정 파장이 느껴진 게 아니었다. 실제로 영혼이 재료로 쓰인 단약이라서였다.
'일지대로라면 벌써 수십 년째 숙성을 거치고 있군.'
지성체의 영혼이 포함된 탓에 악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과정이라는데, 일지대로라면 이는 마도 수사의 연단술이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도문이 나타날 만큼 대단한 연단실력을 갖췄음에도 완전한 식혼성도단을 연단해 내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 단약의 놀라운 수련 성취 효과를 보자면 충분히 그럴만했다.
'연단 재료로 삼은 대상의 신통까지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을 함께 얻는 것은 신통을 얻기 위한 부산물에 가깝다. 여섯 알로 나뉘어진 이유는 대상의 감정을 여섯 종류로 분류하여 하나하나 차례차례 섭취해 부작용을 줄이고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다.
감정을 여섯 종류로 분류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육도윤회 신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한지라 그는 일단 탁자째로 식혼성도단을 챙기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수확물로 선택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건 대기 장소에서 천천히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다른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식혼성도단의 재료는 이 행성의 원주민이나 크세노스 괴물이 아니었다.
수선계의 어느 한 수선자였다.
마도 수사가 이곳에서 머문 기간과 식혼성도단의 연단 시기를 함께 생각해 보는 이는 분명한 사실을 하나 드러낸다.
마도 수사는 이 행성에 거주하면서도 주기적으로 수선계를 오갔다.
그러지 못했다면 연구 및 연단에 필요한 재료를 수급하기가 곤란했을 것은 물론, 방금 챙긴 식혼성도단의 재료가 된 수선자를 찾지도 못했을 터다.
대체 어떤 신통을 가진 수선자였길래 이렇듯 공들여 식혼성도단으로 연단해 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이곳에 머물면서 수선계를 오갔을 방법이다.
'여기가 그 비밀이 있는 곳이겠지?'
도착한 3층은 벽이나 기둥 따위가 없이 탁 트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바닥과 벽을 포함해 천장까지 아우르는 매우 방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진법이 깔려, 중앙의 새하얀 석재로 된 진판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송진!'
실제로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느낌상으로 보면, 그리고 정황상으로 보면 이것은 짧은 거리를 연결하는 그저 그런 전송진이 아니다. 아주 먼 거리의 행성을 오갈 수 있는 대전송진이다.
차원전송진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걸 산수가 갖고 있을 수 있나?'
새삼 다시 생각해 보니, 삼원구중극현화단로부터가 아무리 원영기 수사라지만 산수의 소유물이라기엔 너무 과한 보물이다. 그리고 눈앞의 이 대전송진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산수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납득이 된다. 어느 마도 종문의 고위층 인사가 충분한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서 벌이는 일이라면 말이다.
'그럼 이 대전송진의 반대편은, 그 마도 종문의 심처로 연결돼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야말로 용담호혈이다.
하여 자연히 그것을 이용해 볼 생각을 접은 그는 이곳에 펼쳐진 대전송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장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전부 기억해 놓는다면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앙 쪽 이 진법의 핵심이 되는 새하얀 석재 진판을 챙겨볼까 싶었으나, 함부로 건드리면 자칫 시공간 난류에 휩쓸려 갈기갈기 찢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의심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강한 확신이 드는 수준으로.
수선자의 직감은 때때로 예지에 가까울 만큼 정확하다. 스스로의 안전과 연관되었다면 특히나.
'내가 위기에 닥쳤을 때 건드려 봐도 충분하겠지.'
가령 이곳의 주인이 돌아와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된 경우라든가.
바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때였다.
쿠구구구궁···!!
별안간 주변이 진동하면서 머리가 띵해지고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왔나···?!'
여기 주인이 돌아왔구나 싶어 시공간 난류가 발생하든 말든 진판을 뜯어내려던 순간, 그를 멈칫하게 만드는 다른 기척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브레나르 중령의 기세였다.
'마도 수사가 승리하고 돌아온 게 아니구나!'
즉시 판단한 그는 위험하게 진판을 뜯어내는 대신 숨기를 시도했다. 둘이 여전히 싸우고 있다면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오행천둔술을 전력으로 발휘하여 순식간에 거처를 빠져나가는 그때.
- 정녕 끝을 보겠다는 말인가···?!
늙수그레하지만 격렬한 분노와 살기가 담긴 심언이 폭풍처럼 몰아쳐 왔다.
직후 한유진이 거처를 빠져나와 움직이고 있는 통로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일대에 자리하던 모든 크세노스 생체조직들이 한 차례 파도치듯 꿈틀거렸다.
이어 그것들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미친 듯이 한쪽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음···!'
폭풍의 눈처럼 공백 지대가 형성된 통로 속에 있었기에 그런 크세노스 생체조직의 파도를 피할 수 있었던 그는, 놈들이 몰려가면서 빈틈이 드러난 바닥 쪽 땅속으로 곧장 스며들었다.
그렇게 몽환유심으로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고선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콰과가가각-!!
몰려간 크세노스 생체조직보다 한발 앞서 왕국의 왕성과 지하시설을 통째로 휩쓸어버린 것은 흰색과 흑색이 뒤섞여 번뜩이는 기묘한 빛무리, 바로 브레나르 중령의 힘이었다.
걸리는 모든 것을 시공간 왜곡력으로 갈아버리면서 휘몰아치는 그 힘은 도저히 일개 생명체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그런 대규모 파괴에도 불구하고 파도쳐갔던 크세노스 생체조직들은 기어코 한곳으로 모여들며 거대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콰쾅-!!
폭발하는 화산 속 용암처럼 연회색빛 꿈틀거리는 기괴한 고깃덩어리가 치솟아 올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의 한가운데서 늙은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고 핏빛 눈동자를 번뜩이면서 입을 벌렸다.
─!!!
무시무시한 포효와 가공할 수준의 마인드 해킹 파장이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 전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크기임에도 빛과 어둠이 뒤섞인 고리와 세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태산 같은 존재감을 뿜어내는 브레나르 중령은 별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 우리 제국이 그 괴물을 수만 년이나 상대해 왔다는 걸 모르느냐?
주인의 십여 배 이상 크기로 드넓게 펼쳐진 흑백색 빛의 날개에서 모종의 에테르 파장이 뿜어져 나가 마인드 해킹 파장을 상쇄한다. 그 상쇄 과정에서 불꽃처럼 번쩍이며 타오르는 금빛이 신성하게까지 느껴진다.
그사이.
더 큰 경계심을 품은 한유진은 둘의 싸움을 제대로 지켜보기 어려운 수준으로까지 땅속 깊이 파고들었다.
과연 그 판단이 옳았음이 곧 증명됐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인 크세노스 생체조직을 동원한 마도 원영기 수사와, 전력을 발휘하는 은하제국 10레벨 이상 영능자인 브레나르 중령의 싸움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오행천둔술이 아니라 그냥 지둔술 따위였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한유진이 스며든 대지가 미친 듯이 흔들리면서 심해 속 와류처럼 마구 뒤틀리고 섞였다. 더 깊은 곳에서부터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분출된 용암이 그를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두 강대한 존재의 전투 여파가 영적 파동으로 밀려오기도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정말로 두 거대한 고래의 싸움에 낀 새우가 된 기분이다. 존재감을 숨기면서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대략 느껴지는 바대로라면, 예상했던 것과 달리 브레나르 중령이 승기를 점하고 있었다.
'어느 마도 종문의 고위층 인사라고 짐작되는 원영기 수사인데······.'
같은 경지의 수사라도 산수보단 종문의 핵심 인사가 몇 배 이상 강할 수 있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 측면에서 브레나르 중령의 선전은 실로 의외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마도 수사도 필시 그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승리할 자신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었을 테지만, 이번엔 완전히 상대를 잘못 건드린 셈이었다.
- 안 돼-!!
바로 그때.
마도 수사의 분노와 당황 가득한 포효성이 쩌렁쩌렁 울려왔다. 감히 대놓고 살필 수는 없었지만 신식을 완전히 거두진 않았는지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전송진이 파괴됐구나.'
도망칠 길이 없어진 마도 수사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살기 위한 발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에 브레나르 중령은 어디 할 만큼 해보라는 듯 마주 기세를 높이며 부딪쳐갔다.
전투의 여파는 단지 왕성을 무너뜨리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마도 수사가 대규모 크세노스 생체조직을 동원한 상황에서 이미 힘을 집중시켜 싸우는 방식의 전투는 물 건너갔기에, 그 여파도 상상 이상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굉장히 깊은 지하에 숨은 상태에서도 지상에 어떤 재앙이 펼쳐지고 있을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문득.
한유진은 브레나르 중령의 사납고 흉포한 기세 속에서 한 줄기 초조함을 읽어낸 듯했다.
'······설마 일시적 우세인가?'
그렇다면 상대의 퇴로를 끊고 궁지에 몰 것이 아니라 도망치도록 놔뒀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브레나르 중령은 이곳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 몰랐으니 상대가 원하는 것을 일단 방해하려는 판단을 내렸을 터다. 전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짐작이 맞다면 당장 그녀가 보이고 있는 우세가 무색하게도 함부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됐다. 결과적으로 아슬아슬하게 패배하거나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꼴이 될지 모른다.
만일 양패구상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지금 이렇듯 숨어있는 한유진 자신에게 어부지리 같은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었다.
111화 기연
전투의 양상은 강대강으로 맞붙으면서 누가 먼저 죽는지 시험해 보려는 것처럼 흉맹하게 흘러갔다.
마도 수사가 다루는 크세노스 생체조직의 오염력이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를 변이시켜 걸쭉한 액체로 흘러내리게 만든다. 그것들이 무수한 벌레들처럼, 혹은 슬라임 괴물들처럼 마도 수사에게로 몰려가며 끝없이 덩치를 불리려 든다.
동시에 고깃덩이 전체가 진동하듯 뿜어내는 마인드 해킹 파장이 무한한 메아리처럼 증폭된다. 상쇄시키지 않고 놔둔다면 과연 어디까지 강해질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모든 과정에 마도 수사 본연의 힘인 칠흑빛 기운마저 어우러지면서 온갖 기괴한 현상을 만들어 냈다.
- 꺼흐흐흑······!
- 어흑···! 허흐윽···!
거대 슬라임처럼 파도쳐가던 살점 덩어리에서 별안간 수많은 사람의 얼굴 형상이 나타나 비탄에 잠겨 울부짖고 공포에 신음하며 헐떡인다.
하늘에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먹구름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회오리치다가 '저주'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힘이 담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크세노스의 유기체 오염 변이력과 마인드 해킹 파장에 영향받지 않는 무기물들도 그 비에 맞아 순식간에 녹슬고 부패하고 쇠락하면서 지옥의 풍경이 만들어져간다.
그런 흉악한 힘을 휘두르는 마도 수사를 상대로 브레나르 중령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밀리기는커녕 근소하지만 분명하게 압도하면서, 현실을 침범하는 지옥의 공세를 홀로 막아내는 성스러운 존재처럼 어마어마한 빛을 뿜어냈다.
머리 위 고리와 등쪽 세 쌍의 날개를 중심으로 흑백색 빛무리가 거대한 헤일로를 이룬 채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모든 것을 금빛으로 불태워 정화한다.
그 빛무리가 만들어내는 은은한 공명음마저 하모니를 이루고, 그 와중 정교한 에테르 조작력이 더해져 주변 마력을 빨아들인 후 사방으로 섬광을 쏘아냈다.
푸콰콰쾅-!
콰콰콰콰콰쾅-!
폭음을 동반하며 벼락처럼 쏘아진 섬광들은 몰려들고 있는 크세노스 생체조직들을 저격해 한순간에 불태웠다. 이어 마치 살아있는 뇌전처럼 근처의 다른 크세노스 생체조직들에게로 옮겨가며 힘이 소진될 때까지 금빛 불꽃을 피워올렸다.
비록 경지가 낮다지만 안목까지 없진 않은지라, 한유진은 그녀의 공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지력을 소모하는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마도 수사가 밀리더라니···!'
지금도 휘두르는 힘의 총량만 놓고 보면 마도 수사 쪽이 더 앞선다. 현재 브레나르 중령의 우세가 오로지 컨트롤 능력에 기반하고 있단 뜻이었다.
'무슨 AI한테 보조라도 받는 건가?'
은하제국의 문명을 고려하면 꽤 가능성 높은 추측이다. 일반적인 AI는 아닐 테고 그녀가 사용하는 에테리얼 웨폰에 적합하도록 특별하게 만들어진 AI일 것이다.
어쨌든.
전투가 물러설 구석 없이 강대강으로 맞부딪히며 둘 모두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라면 어째서인지 마도 수사가 이길 것 같았는데, 아마도 브레나르 중령의 초조함을 희미하게 눈치챘기에 드는 생각일 터였다.
마도 수사도 그런 점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분노하며 밀리는 모습이 전부 연기일 수도 있다.
하여 점점 더 도저히 어떤 식으로 결판이 날지 모르게 되어갈 무렵.
흑백색 빛의 헤일로와 상대의 힘을 상쇄하며 발생하는 금빛 불꽃의 파도를 휘감은 채로, 브레나르 중령이 승부수를 던졌다. 전방으로 뻗어낸 손에서부터 이제까지 빛을 발하던 그 무엇보다도 찬란한 광량의 빛무리가 떠오른 것이다.
한유진은 상황을 지켜보던 자신의 신식이 그것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황급히 통제력을 더하지 않았다면 강제로 신식이 뜯겨나가면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터다.
마치 주변의 빛마저 빨려 들어가는 듯, 오직 그녀가 만들어낸 구체만이 찬연하고 선명하다. 동시에 중심부는 이전의 흑색과 비교할 수 없이 어두워 공간 자체가 뻥 뚫린 것 같다.
그야말로 광구를 갖춘 블랙홀의 모습이었다.
······!!!
더없이 거대한 소음이 터져 나오는 듯했으나 기이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나아가는 궤적마저 제대로 살필 수가 없다.
시공간 감각이 없기에 발생하는 문제일 것이다.
또한 그런 탓에 공격이 마도 수사에게 적중해서 폭발하는 장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나 얼핏.
무시무시하게 소름 끼치고 두려운 고함이 들린 듯했다.
그 외엔 도저히 쳐다볼 수 없이 번쩍이는 섬광의 향연과 묘사하기 힘든 날카로우면서도 낮게 깔려 울리는 굉음의 후폭풍뿐이었다.
모든 여파가 잦아들고 휘몰아치던 영기가 안정될 때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극도로 조심스럽게 상황을 주시하던 한유진은, 곳곳에서 아직도 잔불처럼 남아 타오르는 금빛 화염들 사이 홀로 우뚝 서 있는 브레나르 중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상태는 빈말로도 멀쩡하다 하기 어려웠다.
칠공에서 피를 흘리면서 겨우 서 있는 느낌이었으니, 이전의 태산 같던 존재감은 온데간데없고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다.
'마도 수사는······.'
정황상 죽었으리라 여겨지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까 싶은 그때, 브레나르 중령이 마침내 풀썩 쓰러져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주변에서 잔불처럼 타오르던 금빛 화염도 전부 사그라들어 일대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짜로 양패구상한 건가······.'
하지만 이 상황이 어부지리로까지 이어질진 아직 몰랐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녀를 살려 목숨빚을 지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하는 만큼 곧장 모습을 드러내기가 애매하다. 그녀가 정신을 완전히 잃은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잠시 후 그녀 스스로 최소한의 회복을 마치고선 몸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여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온통 녹아내리고 파헤쳐지고 부서지고 저주에 썩어 문드러진 대지 한곳이 불현듯 꿈틀거렸다.
푸확-!
새까만 뼈로 이뤄진 손이 튀어나와 부르르 떨리더니 곧 움직임을 멈춘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섬뜩한 효과음과 함께 좀비가 무덤을 뚫고 등장하는 장면 같다.
호흡조차 멈추고 그것을 지켜보는 한유진의 신식에 곧, 뼈로 된 손이 힘을 잃고 늘어지는 장면이 보였다. 하지만 그 뼈를 타고 검은빛과 핏빛이 뒤섞여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더니 위쪽 허공에서 어떤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수십 초가 걸려 완성된 형상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느낌을 주는 수선자의 원영(元嬰)이었다.
······!
단지 등장한 것만으로도 사방의 영기가 그 원영에 동조하며 흔들리는 것 같다. 마도의 어둠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이 환청과 환각효과 따위를 동반하며 더없이 스산한 분위기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아무리 약해졌어도 원영은 원영이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 입문기 정도의 수사라 할지라도 감히 대적할 수 없다.
그 원영은 핏빛으로 이뤄진 한 쌍의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쓰러진 브레나르 중령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가릴 새 없이 당장 그녀의 몸을 빼앗는 탈사를 시도해야 할 만큼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정체를 안 들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브레나르 중령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여 마침내 한유진이 움직였다.
굉장히 깊은 땅속에 숨어있던 사실이 무색하게도 오행천둔술을 통해 그는 거의 한순간에 지표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한 수순으로 마도 수사의 원영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한유진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 듯 희미한 심언을 발했다.
- 도···.
바로 그 순간 한유진의 눈동자 속에서 육도윤회의 환영이 전력으로 떠오르고 뻗어낸 손끝에서 섬광이 폭발했다.
빠콰쾅-!!
벽력음이 귓가를 울렸을 때는 이미 자색빛 벼락이 마도 수사의 원영을 직격한 뒤였다.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지만, 오행의 특별한 원소 중에서도 법술에 대해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부정하고 사악한 것에 특히 더 대단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자소신뢰의 공격이다.
원영은 한 줄기 경악과 공포에 질린 비명만 남기고서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렇게 원영이 소멸한 공간을 붉은빛 홍련진화가 뒤덮어 꽤 오랜 시간을 휘몰아쳐 타올랐다.
잠시 후.
충분히 안심하고서 공격을 거둔 그는 쓰러진 브레나르 중령을 힐끗 살핀 뒤 마도 수사의 원영이 튀어나온 장소로 향했다.
어지술로 땅을 파헤치자 즉시 바스라져 흙먼지로 화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의 해골 한 구가 나타났다. 그 해골에 걸쳐진 법포 쪼가리와 몇 망가진 물건들을 보면 마도 수사의 시체가 확실했다.
'저물대는······.'
원영기 수사의 육체가 이지경이 된 마당에 멀쩡할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그래도 저물대라는 물건의 특성상 혹시 모른다.
'오···!'
운 좋게도 기대가 보답받았다.
해골의 손뼈 일부가 기이한 황동빛을 띠는 것을 발견해 신식으로 건드려 보자 과연, 특별하게 맞춤 제작된 저물대였다. 굳이 뼈를 이런 식으로 개조한 것은 아마도 은폐성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미 주인이 죽은 상황인지라 위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 그는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안전을 확인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다음에야 안심하고 그걸 해골에서 분리해 냈다. 미묘하게 온기가 도는 느낌이 살짝 불쾌했으나 신식으로 살핀 내부의 광경을 보자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어떤 지식이 담겼을지 모를 옥간만 해도 백여 개에 달했고, 중급 영석이 작은 언덕을 이룰 만큼 쌓여있었으며, 희귀한 상급 영석도 적잖게 있었고, 각종 단약과 재료를 담고 있을 옥병 및 옥함들이 수백 개였다. 법기도 수십 개 이상이었고 법보로 추정되는 물건도 십여 개에 달했다.
심지어 그중 두어 개는 영보로 의심됐다. 아쉽게도 통천령보처럼 보이는 물건은 없었는데, 사실 다시 생각해 보면 아쉽다기엔 욕심이 지나친 일이었다.
'이미 엄청난 수확이야.'
아무리 어느 마도 종문의 고위층 인사일지라도, 화신기도 아닌 원영기에 불과한 수사라면 개인적으로 통천령보를 들고 다니긴 어려울 것이다.
종문에 통천령보가 있다면 빌려 쓸 수는 있겠지만, 이번엔 그런 식으로 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테고 말이다.
'만약 대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이겼겠구나.'
결과적으로 방심이 불러온 최후인 셈이었다.
만약 마도 수사가 섣불리 브레나르 중령에게 달려드는 대신 즉각 전송진으로 후퇴하여 뒷일을 기약했다면, 혹은 다른 준비를 더 갖춘 채로 돌아올 수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터다.
생각하는 사이.
그는 쓰러진 브레나르 중령의 바로 옆에 도달해 그녀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쓰러졌지만 혹시 의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던 생각은 다행히 빗나갔다.
그녀는 지금 어린아이라도 죽일 수 있을 만큼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덕분에 환몽심탈술과 육도윤회로 진짜 정신을 잃은 건지 아닌지 몇 번이고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잘 풀리다니······.'
운이 좋았다.
물론 마냥 운으로만 조성된 상황은 아니다.
결단기에 이른 실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도중에 한 번이라도 판단을 잘못 내렸다면, 둘의 싸움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고 존재가 들키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요컨대 행운인 것은 맞지만 그 행운을 거머쥘 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살짝 자화자찬 같은 생각을 하며 그는 이번에도 다시 정확한 판단을 위해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을오행도경의 유수계 원소 태청현수를 사용한다면 충분히 치유해 낼 자신이 있다.
태청현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법은 그 대단한 치유력으로 인해 수명이 삼백 년가량이나 증가할 정도이니,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어놓기엔 실로 차고 넘치는 힘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귀중한 도문영단을 소모한다는 점만 빼면 일석이조의 이득일 방법이었다.
'착륙선에서 벗어난 후, 낙하산을 작동시켜 겨우 살아남은 나는 부상 탓에 이곳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고, 덕분에 싸움 여파에 휘말리지 않았다. 상황이 잠잠해진 뒤에야 어차피 계속 가만히 있으면 부상 때문에 죽게 되리라 생각하며 중령의 도움을 바라고 이곳으로 왔다. 그렇게 천운이 따라주어 기연을 얻었다.'
그 기연의 이름은 바로 식혼성도단이 될 것이다.
'무려 도문영단이야. 3레벨 영능자 수준에선 치료용으로 복용했더라도 4레벨로 올라서기 충분하지. 그리고 이 단약의 재료로 쓰인 존재의 기억을 일부 얻기까지 할 테니, 수선계의 수련법을 알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워.'
또한 이런 귀하디귀한 도문영단을 브레나르 중령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다면, 그녀는 한유진에게 특히 무거운 목숨빚을 지게 됨과 동시에 스스로 단약 효과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완벽한 계획까진 아니다.'
하지만 너무 의심스럽지만 않으면 충분하다. 어쨌든 브레나르 중령은 그 자신에 의해 구해질 테니까.
또한 사실, 그는 애초에 그녀를 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는 처지였다.
'어차피 살려야 한다면 이 방법이 최선이야.'
꼭 도문영단을 소모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일을 꾸밀 수 있을 테지만, 투자할 때는 과감하게 투자하는 편이 좋다. 지금처럼 분명하게 빚으로 남겨둘 수 있다면 더더욱.
판단하며 그는 식혼성도단 여섯 알이 올려진 탁자를 통째로 꺼냈다.
그리고 옥간을 함께 꺼내선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112화 엉뚱한 생각
식혼성도단의 재료가 된 대상의 신통을 얻으려면 여섯 알을 전부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냥 단순하게 수련 성취도를 높이거나 부상을 회복하려면 일부만 복용해도 된다. 이번에 사용하려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혹시 엄청난 신통이 녹아들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먼저 한 알을 먹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전부 복용했을 때 어떤 신통을 얻게 될지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필요한 일이야.'
비록 여섯 알로 나뉘어졌다곤 하나 그래도 기억은 서로 공유되는 부분이 적잖을 것이다.
'관련하여 브레나르 중령과 이야기하게 됐을 때, 내가 이 식혼성도단으로 얻는 기억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는 안 될 테지.'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걸 복용함으로써 부상을 회복했고 수선계의 수련법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을 잃게 된다.
하여.
그는 몇 번 더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단약의 안정성을 확인했다.
사람을 재료로 만들어진 마도의 단약인지라 당연히 꺼려진다. 하지만 어차피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무슨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도 아니고 단지 꺼려진다는 이유만으로 쓰지 않기엔 너무 큰 낭비다.
그렇게 결국, 식혼성도단 한 알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인욕도에 가장 가까운 감정 파장이 느껴지는 무난한 단약이었다.
효과는 거의 즉각 나타났다.
하나 한유진은 그 효과를 일부러 억제하면서 분석부터 진행했다.
부작용이라고 해 봤자 얼마든지 해소 가능한 수준임을 확실하게 파악하고서야 본격적으로 그 효과를 흡수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소화하는 대신 일단 신체 곳곳에 잠력으로 묻어놓는 방식이었다.
'지금 소화하려고 들었다간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면 효과에 좀 누수가 생겨도 괜찮다. 애초에 목적은 수련 성취도를 높이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대략 서너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뜬 그는 흡사 번뇌처럼 떠올라 뒤섞이는 낯선 타인의 기억과 감정을 얼추 정리하느라 삼십여 분을 더 소모해야 했다.
'내가 정신계 쪽에 능통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토록 빠르게 조치할 순 없었을 터다.
어쨌든.
연단 일지에는 제대로 적혀있지 않았던 식혼성도단의 재료가 된 인물에 대해 알게 됐다.
원영 초기의 수사였고, 특정 종문 소속이 아닌 한 지역에서 나름 위세를 부리던 가문의 주인 '군유겸'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느 비경의 보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함부로 움직였다가 이런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혈족의 수명을 일부 흡수할 수 있는 신통이라······.'
군유겸은 가문의 최고 어른으로써 후손 번성에 굉장히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전부 자신의 신통 때문이었다.
'죽기 직전 비경에 대한 소문이 애초부터 자신을 겨냥한 함정이었음을 의심했군.'
이런 신통을 가졌다는 사실이 정황적으로라도 흘러 나갔다면 마도 수사 같은 이들의 표적이 될 만도 하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니까.
정말로 그게 함정이었는지 아닌지는 이제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유진에겐 전혀 중요한 의문도 아니었다.
'내 도심으로는 얻어봤자 쓸 수 없는 신통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혈족의 수명을 빼앗아 연명한다니, 어지간한 싸이코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짓거리다.
덕분이랄지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의식 없이 위태로운 상태인 브레나르 중령을 보며 식혼성도단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천락도에 가장 가까운 감정 파장이 느껴지는 단약이다. 기분 좋게 깨어나야 더 크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또한 사실, 다른 단약들은 모두 부정적인 감정 파장을 뿜어내고 있어서 위중한 부상자에게 먹이기가 부적합했다. 숙성이 제대로 끝나지 않았던 만큼 보나마나 악기가 특히 집중되어 있을 테니까.
'아참.'
더 중요한 것들에 신경 쓰느라 자칫 그냥 넘어갈 뻔했다.
그는 자신의 옷차림을 손보고 일부러 핏자국을 만들어내는 등, 크게 다쳤다가 회복한 꼴을 위장했다.
그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챙긴 뒤에야 브레나르 중령에게 단약을 먹였다.
* * *
여러 기억과 감정들이 꿈처럼 휘몰아친다. 그녀는 문득 그것들이 낯선 타인의 경험임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자각했다.
'내가 안 죽은 건가······.'
흡사 머리에 바위를 얹어놓은 듯 무겁고 생각이 느리다. 하지만 마지막에 쓰러지면서 죽음을 예감했던 장면만큼은 바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안 죽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육체의 감각과 사고능력을 빠르게 회복해 갔다.
어느 순간 눈을 뜨자,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병사가 보였다.
'유진.'
여전히 심각한 수준으로 머리가 멍하다. 그렇지만 11레벨 영능자로서 인지능력이 원래 뛰어났던 터라 상황 파악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함장님?"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닌 듯하군."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부터가 놀랍다.
그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며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영능을 발휘하기 매우 어려울 듯했지만, 적어도 육체의 부상만큼은 상당히 회복되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그런 상태였다.
놀라움 속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녀가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였을 텐데."
"수선자가 만든 단약을 먹여드렸습니다. 저도 그걸 먹고 겨우 살긴 해서, 위중한 함장님한테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잠깐 침묵하자 유진이 더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착륙선에서 던져진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간결하지만 중요한 내용이 전부 포함된 이야기였다.
"운이 좋았구나. 행동력도 좋았고."
"사실 함장님 덕분입니다. 선발시험 때 포상으로 주신 치료키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 응급처치키트?"
"예."
덕분에 나도 산 건가.
생각하던 브레나르는 순간 그녀답지 않게도 복잡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깨어났을 때부터 휘몰아치는 중인 낯선 존재의 기억과 감정들이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꽤나 긍정적인 느낌이었다.
"하나가 더 남았는데, 혹시 필요하십니까?"
그때 유진이 말하면서 웬 옥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이 열린 그 옥함 안쪽엔 핏빛과 금빛이 어우러진 단약이 놓여있었다.
확실히 수선자가 만든 물건이다. 그리고 그냥 딱 봐도 비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내가 이걸 먹고 살았다고?'
한데 어째서인지 느낌이 매우 불길하여, 그녀는 영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보다, 이게 귀한 물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권하는 건가?"
"함장님이 힘을 회복하셔야 저도 안전해질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 똑똑하구나."
"그리고 제가 어쩔 수 없이 이걸 몸으로 실험해 보면서 살긴 했지만, 도저히 두 번은 못 먹을 것 같습니다."
말하던 그는 생각만으로도 괴롭다는 듯 인상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약력이 과해서?"
"낯설고 섬뜩한······ 그런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라서, 정말로 겨우 버텼습니다."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에, 브레나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원래 치료용으로 쓰이는 단약이 아닌 듯하다. 우리 둘 다 운이 좋았던 셈이지. 일단 넣어두고 나중에 다시 제출하도록 해라. 보상은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전혀 답답하거나 불안정한 모습 없이 따르는 유진의 태도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썩 흡족하게 만들었다.
문득.
그녀는 이 유목민 출신 병사가 새삼 잘생겼다고 느꼈다.
단지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젊은 나이임에도 보기 드문 수준의 명석함과 진중함을 갖춰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심지어 선발시험에서 보였던 모습까지 떠올리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래도 여전히 진득하게 남아 회오리치는 낯선 존재의 감정 때문일 것이다.
유진의 것처럼 섬뜩한 종류가 아닌 그 정반대에 가까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런 부작용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얼른 잡념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상태가 정상이 아닌 탓인지 그게 쉽지 않았다.
'사실 4레벨 영능자만 되어도 나이를 따지는 데 많이 넉넉해지지. 7레벨부터는 더더욱 그렇고. 그러니까······ 아니, 잠깐.'
그녀는 불현듯 유진이 4레벨에 달한 영능 기세를 흘려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설마, 그 단약을 먹고 돌파한 건가?"
"예. 확실히 평범한 약은 아닌 듯합니다."
"······욕심이 적은 건지 아니면 똑똑한 건지 모르겠군."
지금 상황에서 쓸데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역시 상태가 정상이 아닌 탓인지 저절로 툭 튀어 나간다.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유진은 즉시 알아들은 듯했다. 다만 무어라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제가 욕심이 적은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
너무 욕심이 적어도 매력이 없는 법이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여전히 그런 잡념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다시 말해 두겠다만, 보상은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 걱정 말아라. 이미 나를 살린 것만으로도 적잖은 공적이야."
"원래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그, 복귀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
그제야 문제 하나를 떠올린 그녀가 탄식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정도 버티면 될 거다."
"······순양함 쪽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설마?"
"내가 퇴각하라고 명령했었다. 생명 신호가 소멸하지 않으면 알아서 다시 찾아오겠지만, 워프 엔진까지 작동시켰을 테니 돌아오려면 그 정도는 걸리겠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기에 전멸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문제는 지금 그녀 자신이 영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영능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간신히 응급처치를 해놓은 환부를 마구 움직이면서 헤집는 꼴이 될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엔 불길하더라도 그 단약을 먹어야겠군.'
생각하는 때 유진이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여길 벗어나서 은신처를 마련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제게 옵스큐라 돔이 있습니다. 함장님이 포상으로 주셨던."
"아, 그래, 그거."
소형 스마트 텐트이긴 하지만 둘 정도는 충분히 머무를 수 있다. 그 둘이 남녀라는 사실은 이런 비상 상황에 전혀 고려할 요소가 못 되었고.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답하면서 일어나 선 그녀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으나 곧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앞장서겠습니다."
"어디로?"
"이곳까지 오던 중 발견한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습니다. 정말로 은신처로 적합할진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만······."
"그리로 가자."
앞장서서 움직이기 시작한 유진에게서 듬직한 느낌이 든다. 확실히 병사로만 있기엔 너무 큰 재목이다.
'진짜 제대로 밀어줘 봐도 될 것 같다.'
여태까지도 나름 밀어주긴 했지만, 그건 지휘관으로서 유망한 병사에게 당연히 해 줘야 할 수준의 지원에 불과했다.
이번에 든 생각은 그녀 자신과 에번라크 가문의 사적인 지원을 포함하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재능이 무려 2등급이었지. 유목민 출신인 만큼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잠재력이 많이 낭비됐겠지만, 그 정도야 엘릭서를 들이부으면 회복할 수 있을 테고.'
물론 지금 당장 확정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한데.
이번에도 그녀는 머릿속 한구석에서 유진이 7레벨 이상의 영능자가 되면 자신과 정식으로 교제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으리란 생각을 떠올렸다.
혈혈단신인 만큼 결혼하면 데릴사위로 데려올 수 있을 테니 훨씬 더 적극적인 지원도 가능할 터다.
살면서 거의 처음 해 보는 종류의 생각들이었다.
113. 임무 완료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고자 은신처를 마련하고 머무르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
브레나르는 상당한 불편함을 각오했지만, 막상 겪게 된 생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살짝 과장하자면 무슨 캠핑이라도 온 것처럼 편안하고 심지어 아늑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녀 자신과 유진 모두 4레벨 이상의 영능자로서 생존에 음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과, 청결 유지 기능을 포함한 여러 편의성을 가진 스마트 텐트의 존재가 컸다.
하지만 유진의 역할도 그런 요소들 못지않게 대단했다.
처음 은신처를 찾는 일부터 그녀가 관여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끝났고, 추가적인 은폐를 더하며 텐트를 설치하는 일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주변을 정찰하면서 주기적으로 위험 요소를 체크하는 일도 간섭할 여지가 없을 만큼 철저했고, 그 와중 몇 가지 맛 좋은 먹거리를 찾아오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먹거리에 대해서는 물론 혹시 모를 독이나 질병 따위의 위험이 존재했지만, 그마저도 선발시험 때 포상으로 받은 휴대용 멀티툴의 분석기로 최소한의 안전을 확인했다고 하니 딱히 지적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이런 숲속 야생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따로 공부한 적이라도 있나?"
결국 해가 저물어 밤이 되었을 때, 이름 모를 향 좋은 허브로 우려낸 차를 마시다가 그녀가 물었다.
"따로 공부했다기보단······ 제가 G-164 행성의 유목 부족민 출신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거기서 제국 시민권을 신청하기 전에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었지요."
"이런 류의 경험이 많단 뜻이로군."
"예."
"분명 떠돌이 생활이 편하지는 않았을 텐데, 사연이 있겠지?"
질문한 후 그녀는 바로 덧붙였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따뜻한 차가 담긴, 스마트 텐트에 마련된 금속제 컵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던 유진은 무언가를 살짝 결심한 기색이 됐다.
"함장님께는 말씀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걸 욕심내실 만한 분이 아니시니까요."
이어진 것은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조차 조금이지만 놀라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다름 아닌 유진이 선천영능 보유자이자 동시에 유목민들 사이에서 반쯤 전설처럼 여겨지는 영능무예의 전승자라는 이야기였으니까.
태어났던 부족이 해체된 뒤, 그걸 완벽하게 암기하고 익혀내기 전까진 혹시나 빼앗길 것을 우려해 다른 부족에서 오래 지낼 수 없었다고 했다.
'무예라면 안 들키고 수련하기가 특히 어렵긴 했겠어. 의탁한 부족은 온전히 믿기 어려운 타인들이었을 테지.'
사정을 이해한 그녀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다시 물었다.
"시민권 신청 과정에서부터 스캔을 여러 번 받았을 텐데, 눈에 띄는 종류의 선천영능은 아닌 모양이군."
"처음에 밝혀내지 못하길래······ 제가 굳이 먼저 드러내기가 좀 꺼려졌습니다. 아무래도······."
"책잡을 생각 없으니 걱정 마라. 네 입장을 이해한다."
감사하다는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인 유진이 한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서 순간, 희미한 자색빛이 반짝이고 환상계 영능의 파장이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환상계라, 희귀한 종류인데."
또한 확실히 눈에 띄지 않는 특성의 영능이다. 그녀는 납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환상계 영능끼리도 작동하는 방식과 그 효과가 천차만별이야. 내가 문제없게끔 보장할 테니 이번에 복귀하면 제대로 스캔을 받도록 해. 그러는 편이 성장 방향성을 잡기에도 나을 거다."
"예. 사실 안 그래도 이걸 언제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이해가 되는 말에 브레나르는 피식 웃었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다시금 흐르다가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언? 무엇에 대한?"
"지금 제 영능 레벨 시기에 앞으로 계속 익힐 수련법의 종류를 정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군?"
"수선계의 수련법을 배워볼까 합니다."
"이유는?"
대략 짐작하면서도 굳이 물어봤다.
조언을 부탁한다는 말이 아니었다면 그냥 스스로 선택하도록 놔뒀을 것이다. 영능자에게 있어 너무나 중요한 선택인 만큼, 훗날 괜한 원망을 듣기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꺼려지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진이 그럴 사람처럼은 전혀 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약을 먹고서 얻은 기억들이, 괴로운 것과 별개로 제 성장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맞다. 군유겸은 원영기 수선자로서 10레벨 영능자였으니, 분명히 크게 도움이 되겠지."
그저 정보로서의 기억이 아닌 감정까지 함께 느껴질 만큼 생생한 '체험'이다. 수선계의 수련법을 익히고자 하는 이유로는 실로 충분했다.
"고점이 낮지도 않고."
"그것도 그렇지요."
"이제 조언해 주자면······."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우리 제국의 수련법을 익혔다. 네가 익히고자 하는 수선계의 수련법과 비교하자면, 5레벨부터 본격적으로 달라졌다가 13레벨에서 다시 비슷해지지. 수선계의 역사가 우리 제국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되었음에도, 그들의 수련법이 뛰어나다고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음에도 굳이 그런 차이점이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유진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일 터다. 아직 시민 레벨이 낮아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없을 테니까.
"바로 수도삼겁이라는 난관을 피하기 위해서야. 네가 얻은 기억에 관련 내용이 있겠지?"
"예, 있습니다."
"수선계의 상위급 수련법은 솔직히 많은 면에서 우리 제국의 수련법을 능가해. 만약 그 수도삼겁이라는 불가사의한 난관들만 없었다면 그들이 이 광활한 우주를 진즉 제패했을 거라는 설이 많다."
"······수선계가 그 정도로 강력합니까?"
"그래. 적어도 우리가 파악한 대로라면, 우주에서 그들과 견줄 수 있는 문명 세력은 몇 없어."
사실 은하제국은 그런 강대한 문명 세력들을 피해 변방으로 밀려난 꼴이었다. 공허 성역의 크세노스라는 괴물들이 끝없이 넘어와 설쳐대는, 하여 누구도 딱히 자리 잡고 싶어 하지 않는 외진 구역으로.
그러한 이야기까지 늘어놓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잠깐 말이 옆으로 샜다만, 어쨌든 네가 수선계의 수련법을 익히겠다는 건 결코 틀린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수도삼겁을 제대로 극복해 낼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최선의 선택이 될 테지."
"그 부분을 각오해야겠군요."
"신중하게 고민하고 선택해라. 나중에 되돌리려면 정말로 크게 고생해야 할 테니까."
이후로도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중 도움이 되리라 여겨지는 것들을 차례차례 설명해 줬다. 한 명의 병사에게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조언을 해 준 적은 처음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옵스큐라 돔의 투명한 천장을 통해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보였다.
다른 어디도 아닌 은하제국의 시민으로서, 그것도 직접 우주를 누비는 순양함을 끌고 다니는 함장으로서 여러 감상이 들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이렇게나 기분이 편안하다니······.'
그녀는 지금의 광경을 정말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 낸 유진이라는 병사의 존재와 함께.
* * *
목숨을 구해주고 유능한 모습을 최대한 보여줌으로써 계속 호감을 쌓았다.
그렇게 때가 무르익었을 시점 진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척 숨겨진 능력 일부를 드러냈고, 매우 성공적으로 의심을 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스캔 결과만 제대로 신경 써서 드러낸다면 완벽하겠지.'
뛰어난 정신 방어력은 잘 감춰야 할 테고, 경지를 위장할 수 있다는 점은 미약하게만 드러내면 된다.
전부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기계를 속일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행한 일이다.
아무리 확신이 있다지만 그래도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한 이유는, 당연히 원활한 본명법보 제작을 위해서였다.
장차 어떤 식으로 브레나르 중령의 도움을 받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어차피 법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환상계 능력을 보유했음을 밝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능력을 드러내기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일종의 예방주사처럼, 일찌감치 작은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추후 의심받게 될 여지를 크게 없애는 것이다.
어쨌든.
디멘시스 순양함은 나흘이 더 지나서야 돌아와선 브레나르 중령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마침 그녀가 최소한의 요양을 마치고 슬슬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시점이었다.
무사히 복귀한 이후.
큰 공을 세운 한유진에겐 특별 휴식이 주어졌다. 반면, 함장인 브레나르 중령은 아직 부상을 다 회복하지 못했음에도 임무 속행에 나섰다.
한 차례 마도 수선자와 크세노스의 존재가 드러났던 탓에 행성 탐사 임무는 더없이 신중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어 갔다.
그사이 한유진은 브레나르 중령과 이야기했던 바에 따라, 함내 의료구역의 검사실에서 몽환유심 신통을 딱 원하는 수준으로 드러내 보이는 일에 성공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다.
작전으로 바쁜 와중에도 브레나르 중령은 그를 여러 번 찾아왔다. 그러면서 일부 포상을 미리 지급받는 셈 치라며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에테르 엘릭서를 건넸는데, 무려 5레벨 엘릭서였다.
동시에 6레벨 이하 에테르 수련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도 함께 부여해 줬다.
'아주 좋아.'
안 그래도 수련에 힘써야 할 상황에 실로 적절한 지원이었다. 그는 특별 '휴식'을 명령받은 사실이 무색하게도 내내 수련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일단 잠력으로 묻어놓았던 식혼성도단의 효과를 완전히 소화해 냈다. 살짝 불안정하던 태을오행도경의 입문 성취를 이제야 제대로 다진 느낌이었다.
이후로는 마도 수사의 저물대에서 얻은 옥간들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의 도심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을 마도 쪽의 인사라지만, 어쨌거나 원영기에 오른 수사가 갖고 있던 옥간들인 만큼 하나하나가 실로 천금 같았다.
'오히려 좋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도 쪽 지식은 훗날 수선계를 방문하게 됐을 때 무난히 얻을 수 있을 테지만, 이처럼 마도 쪽 지식은 비교적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또한 지식들 중 상당 부분이 직접 사용할 일 없더라도 적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
시간이 물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특별 휴식을 명령받은 그로서는 뭔가 문제가 생기려야 생길 수 없는 평온하고 충실한 나날이었고, 한창 진행되고 있는 행성 탐사 임무에서도 딱히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다.
이미 한 차례 마도 수선자와 그런 위험한 전투를 치렀는데, 또다시 비슷하게 위험한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은 사실 매우 작았다.
그래서인지 브레나르 중령은 생각보다 자주 한유진을 찾아왔다.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등 잡담을 하면서도 그녀는 때때로 그 마도 수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확실히 능력이 있긴 있는 놈이었어. 그런 대규모 크세노스 생체조직을 사육했는데도 행성 오염 조짐이 전혀 없다니."
"주인이 죽으면서 다 활동을 멈춘 겁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소멸해 버린 수준이야. 놈이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벌이는 천치는 아니었단 말이겠지."
이야기를 듣던 한유진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도 쪽 수선자들만큼 반서(反噬)에 민감한 족속이 또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입수한 옥간에 따르자면, 그 마도 수사가 속한 종문은 특히 더 그럴 터였다.
합마종이라는 곳이었는데, 진짜 악마를 소환해선 스스로의 육체 혹은 영혼과 합치는 일까지 벌이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마침내.
넉 달 정도가 더 흘렀을 무렵.
디멘시스 순양함은 성공적으로 행성 탐사 임무를 끝내고 관리의 기반까지 잘 마련한 채, 다른 군단의 부대에게 임무를 인계하고서는 제국으로 복귀하게 됐다.
이제 임무 성과에 대한 포상을 받을 차례였다.
114. 포상과 정보 열람
디멘시스 순양함의 승무원들은 복귀한 후 휴가를 받으면 무엇을 할지 온종일 떠들고 다녔다.
"유진, 혹시 휴가 때 특별한 계획 있어?"
그리고 상당히 많은 이들이 친근하게 다가와 그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셋에 하나꼴로 여성이었는데, 부대원 중 여성의 비율이 반의반도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놈의 인기란······.'
그들과 교류할 마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성에게 좋은 쪽으로 관심을 받는 건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다.
한데 그중 일부는 한유진이 아닌 무용이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진 경우가 있었다.
이 역시 주로 여성 부대원이었는데, 대부분 산책이나 식사 도중 만나게 되면 무용이를 조심히 쓰다듬어주는 등, 불쾌할 이유가 전혀 없는 호감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다만 일부는 성가신 수준으로까지 참견을 해 왔다.
특히 의료부에 속한 어느 여성 장교가 그랬다. 하필 장교라서 단호하게 쳐내기가 애매했다.
"임무에 나갈 때면 나한테 맡겨! 내가 부전공이 수의학이거든."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번에 계속 방에 홀로 놔뒀던 것 같은데, 그러면 안 좋아!"
맞는 말이었지만, 그는 무용이를 홀로 놔두지 않았다.
외부로 나가는 임무였던 만큼 혹시 몰랐기에, 또한 다른 누군가가 부재중인 그의 숙소를 방문해서 무용이의 존재를 확인할 리도 없었기에 당연히 산해주에 넣고 임무에 나섰었다.
여담으로 산해주에서 그냥 놀게 놔두는 대신 조만간 쓰이게 될지도 모를 영전(靈田)을 일궈보라고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건만 녀석은 기특하게도 산봉우리 바로 밑 아주 적당한 위치에 제대로 터전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실로 이번엔 이름값을 못 해버린 일이었는데, 어쨌든 그래서 다소 끈질기게 권유해 오는 그 의료부 소속 장교를 떼어놓느라 고생 아닌 고생을 좀 했다.
다행히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외에 곤란한 일은 없었다. 소수의 몇 이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질시를 드러내면서 은근한 신경전을 걸어온 일은 작은 해프닝조차 못 되었고 말이다.
도착한 목적지, C-15 행성은 예전에 자대배치를 받기 직전 휴가를 보냈던 바로 그곳이었다.
군사적 요충지이자 우주군에 대한 여러 종류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곳으로, 각종 행정 처리는 물론 보급과 훈련을 위한 시설들이 다수 자리해 있다.
그곳에서 디멘시스 순양함은 정식으로 임무 완수를 보고하면서 부대원들의 공적을 평가하고 포상을 수여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다던 한유진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제국에서 우주군을 아주 중요시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황제 루미너스의 연산력이 일부 동원되어 길게는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을 공적 평가 과정이 불과 몇 시간 만에 통보까지 끝나버렸다. 누구도 감히 이견을 제시하거나 불공정함을 의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물론 그 평가를 진행하는 근거자료가 지휘관이 제출한 보고서 등인 만큼 왜곡될 여지가 아예 없진 않겠으나, 제국의 시스템 그 자체이자 22레벨 영능자인 황제가 살펴보게 될 보고서를 감히 고의로 위조하는 얼간이는 애초에 지휘관이 될 수 없을 터였다.
한두 번은 어떻게 속일 수 있을지라도 세 번 네 번 횟수가 쌓일수록 모순점이 드러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또한 부당한 평가를 받은 병사 혹은 휘하 간부가 제보라도 하는 날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뻔하다.
'과연······ 이 강대한 은하제국은 초융합지능인 황제 덕분에 유지되고 번성할 수 있는 것이로군.'
원래 알던 사실이지만 새삼 다시 감탄하게 된다.
비록 브레나르 중령은 이 제국이 수선계 등의 강대한 문명 세력들을 피해 밀려난 꼴이라고 표현했지만, 다르게 해석하자면 수선계 전체 혹은 그와 비견되는 문명 세력을 상대로 단지 밀려나는 정도에서 끝났다는 뜻이 된다.
이후로 크세노스라는 우주적인 괴물들과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면서 수만 년 이상 멀쩡하게 버텨내고 세를 불리기까지 했다.
하여.
포상으로 무엇을 받고 싶은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민 레벨 상승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 경이로운 제국의 단물을 최대한 빨아먹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덕분에 아직 기간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에도 조건부 딱지가 떼어지면서 3레벨 시민이 됐다.
'결코 낮은 레벨이 아니야.'
시민 레벨은 영능 레벨과 달리 총 일곱 단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2레벨까진 어찌어찌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는 레벨 하나마다 거대한 벽이 존재하기도 한다.
일례로 브레나르 중령이 바로 4레벨 시민이고, 한 행성의 주대륙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4레벨 시민이다.
그러니 이번에 3레벨 시민이 된 건 실로 어마어마한 벼락승급이었다. 무려 도시 관리자들과 같은 레벨인 것이다.
그러한 벼락승급을 거치고서도 미처 사용되지 못한 공적치는 전부 크레딧으로 전환했다. 시민 레벨이 높아졌으니 이제 그걸 활용하기 위한 재력이 필요하리란 판단이었다.
'에테르 엘릭서 같은 건 브레나르 중령을 통해서 어찌어찌 지원받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도 내심 있었다. 아무래도 화폐보다는 물건이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여러모로 편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후.
아무리 짧아도 석 달 이상 이어지게 될 휴가가 주어졌다.
* * *
한유진은 숙소조차 제대로 잡지 않고 즉시 정보열람소로 향했다. 어지간한 대형 쇼핑몰만 한 크기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중심부가 개방되어 있어 위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아트리움 구조로, 단순히 정보를 열람하는 것만이 아닌 정서적인 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만큼 아름답게 잘 꾸며진 장소였다.
분위기는 건물의 목적과 어울리게 전체적으로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했다. 1층의 데스크 같은 장소에서 안내도를 살핀 그는 바로 3층으로 향해 개인열람실을 하나 차지했다.
크레딧은 전혀 소모되지 않았다. 3레벨 시민에겐 이곳까지 오면서 이용했던 대중교통처럼 전면 무료였기 때문이다.
찍-! 찍!
또한 애완동물을 동반하고서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1레벨 시민에겐 분명하게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품속의 무용이는 그리 넓지 않지만 아늑하게 꾸며진 개인열람실 내부를 둘러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특히 한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채 사실적인 우주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디스플레이에 썩 흥미가 동한 기색이었다.
왼쪽 상단 구석에 '에너비전'이라는 기업의 로고가 보인다. 이쪽 분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아주 유명한 대기업이다.
"흠."
그 로고를 계속 보고 있자니 리모컨 따위를 찾을 필요 없이 증강현실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가볍게 조작하자 벽면 디스플레이에 떠올라있던 우주의 광경이 즉시 어느 화사한 숲속으로 돌변한다.
위쪽에서부터 나뭇잎 사이를 뚫고 떨어져 내리는 햇살과, 한쪽의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의 사실감 넘치는 모습에서 마치 숲 내음까지 풍겨오는 듯하다.
찍-!
익숙한 종류의 풍경이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는 잠시 생각했다.
'확실히 기술이 좋긴 좋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면, 입문기 수사 정도는 이게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진짜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유리창이라고 충분히 속여넘길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그는 실상 넓지 않은 개인열람실에서도 비좁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원하는 지식을 찾기 시작했다.
3레벨 시민이 되었는지라 상당히 많은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열람하려면 크레딧이 필요했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검증됐고 주기적인 업데이트까지 이뤄지는 지식들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는 애초에 다른 곳에선 찾기 어렵지.'
생각하며 그는 우주 성역(星域)에 대한 정보를 주저 없이 구매했다.
구매한 정보는 당연히 이곳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해서만 살펴볼 수 있었다.
실물 책이 아닌 탓에 신식으로 내용을 훑어낼 수 없어 살짝 불편했지만, 그래도 텍스트뿐만이 아닌 이미지와 영상까지 포함돼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사실 인텔리트론 칩을 이식했다면 애초에 이렇듯 불편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훨씬 더 유기적이고 수월한 인터페이스 조작이 가능했을 테니까.
어쨌든.
우주의 성역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기 시작한 한유진은 눈조차 제대로 깜빡이지 않으며 집중했다.
빼곡한 텍스트 및 이미지와 함께 허공에 3차원으로 구현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오른다. 이 은하제국이 자리한 루미너스 성역을 기준으로 한 우주의 지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만 그렇게 입체적인 홀로그램까지 떠올랐음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확실히 일반적인 지도가 아니야.'
세상천지에 존재하는 영기의 근원이자 현실과 반쯤 겹쳐 존재하는 혼원계, 이곳에선 아스트랄 디멘션이라 부르는 이면차원 좌표가 혼재되어 있는 지도였다.
무한한 수준으로 드넓은 우주를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워프 엔진의 원리가 담긴 지도이기도 해서, 평범한 이는 현기증을 느끼게 될 만큼 난해하고 복잡하다.
결단기 수사인 그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원영기에 오르지 못한 만큼 아직 시공간 감각이 트이지 못한 탓이다.
다행히 지금 당장 온전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그저 이 우주에 어떤 세력들이 어느 구역에 자리 잡고 있는지만 알면 충분했다.
지도를 통해 파악한 루미너스 성역은 확실히 외지고 위험한 장소였다. 크세노스가 들끓는 공허 성역을 제외하면 그 어떤 다른 성역과도 전혀 가깝지 못했으니까.
반면, 다른 성역들은 서로 가깝진 못할지언정 최소한 공허 성역 같은 위험한 곳과 붙어있진 않았다.
가장 먼저 관심이 끌린 것은 당연하게도 수선계가 자리한 '선도 성역'이었다.
선도 성역은 이면차원 좌표가 혼재된 지도에서도 눈에 확 띌 만큼 넓었다. 그래서인지 외부에서는 선도 성역이라고 한 묶음 취급하지만, 수선계 내부에선 세 구역으로 분류한다는 모양이었다.
'정도가 주류인 옥청 성역, 마도가 주류인 현극 선역, 요족이 주류인 천요 성역.'
언젠가 수선계에 방문할 계획이 있는지라 특히 집중해서 살펴보게 된다.
'나는 아무래도 옥청 성역으로 가게 되겠지.'
생각하며 그는 계속 성역도를 살폈다.
두 번째로 넓은 '마법 성역'은 판타지 느낌의 마법사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구역이었다.
인간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주류라고 말하긴 어렵다는 점에서, 또한 서로 무작정 대립하지 않고 어우러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느껴진다.
또한 그 넓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모든 측면에서 수선계에 별로 밀리지 않는 문명 세력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넓은 '원시 성역'은 바로 드래곤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요툰이라 불리는 일종의 거인족과 강대한 원소정령들이 살아가는 구역이기도 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적으로 문명의 수준이 매우 원시적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역들에 비해 힘과 잠재력이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마, 내가 수련했던 그 원시림이 여기 성역의 어느 한 행성이었을까?'
느낌상 왠지 맞을 것 같다.
네 번째로 넓은 '신마 성역'은 신족과 마족이라는 존재들이 주류인 구역이었다.
'천사와 악마로군.'
가히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성역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터다. 이곳의 지성체들은 주로 신앙을 통해 강해지고 자신들이 믿는 신족 혹은 마족에게 귀속 당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그 밖에도 다른 성역들이 몇 있었지만, 전부 자잘하여 당장 눈여겨볼 가치는 없는 듯했다.
'우주가 대략 이런 세력 판도로 이뤄져 있단 말이지······.'
물론 제국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성역을 파악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만 알면 충분했다.
그가 집중해서 정보를 살피는 사이.
무용이도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감고 명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태극회원공을 참오하는 중일 것이다.
쪼끄만 게 그러고 있으니 귀여워서 마구 쓰다듬고 싶었지만, 그는 괜히 녀석을 방해하는 대신 재차 성역도에 집중하며 그것을 최대한 온전히 기억하려 애썼다.
다음으로는 이 은하제국의 수련법들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수선계의 수련법과 비교하여 정확히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수도삼겁을 피하게 만드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115. 시기적절한 지원
정보열람소에서 살기 시작한 지 근 두 달째.
정말로 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어울리게도, 한유진은 평범함을 위장하기 위해 잡아둔 숙소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한창 수련법 등을 흥미롭게 읽다가 정신을 차리면 이삼일이 훌쩍 지나있는 일이 예사였던 것이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무용이의 존재 때문에 그나마 외출을 하게 됐다. 주인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결국 맛있는 걸 먹자고 보채곤 해서, 주변의 음식점 등에 방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매번 너 때문에 시간이랑 돈을 마구 낭비하는구나. 문제가 아주 심각해 이거······."
찍? 찌직-!
그렇게 탓하면서도 통명어수결로 전해지는 감정은 완전히 다른지라, 잠시 의아함을 표하던 무용이는 곧 아무렴 어떠냐는 기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즐겼다.
다행히 정보열람소 근처에는 맛있는 음식점들이 많았다. 단지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점뿐만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나 디저트 등의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점들도 부지기수였다.
발전된 문명이란 발전된 미식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덕분에 어디서 무엇을 사 먹건 뛰어난 맛을 느끼면서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무용이가 상당히 눈길을 끌면서 몽환유심의 사용을 고민하게 만들었지만, 당연히 진짜로 사용하진 않았다. 그러다 괜히 더 번거로워질지도 몰랐으니까.
어쨌든.
그는 지난 두 달간 제국의 수련법과 수선계의 수련법이 어떤 차이점을 가졌는지 파악해 냈다.
영능 5레벨부터 본격적으로 달라진다던 브레나르 중령의 말이 맞았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전부 설명하자면 끝이 없고, 대략 요약하자면 이랬다.
수선계의 수련법은 평범하던 영혼을 법혼으로 승화시키고, 그를 다시 법단으로 승화시키고, 거기서 원영을 탄생시켜 원신(元神)으로까지 승화시키는 일종의 '재탄생' 과정을 거친다.
이는 신비학적으로 더없이 고차원적이면서 결함이 없는 성장법이다. 훗날의 더 위대한 성장을 위해 기초부터 새로 다지는 느낌인 것이다.
하나 그런 과정에서 수도삼겁의 첫 번째인 무심겁과 두 번째인 열혼겁이 찾아온다.
이는 마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것처럼, 행운과 불행이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다.
반면 제국의 수련법은 그런 완벽함을 위한 재탄생을 포기했다.
법혼의 승화 과정에서부터, 이곳식 표현으로는 아스트랄 소울의 승화 과정에서부터 안정성을 위한 고의적인 빈틈을 만들고, 이후 법단 대신 아스트랄 베슬이라는 영적 혈관을 전신에 생성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원신을, 이곳식 표현으로는 아스트랄 바디를 하나하나 '조립'해 나가는 것이다.
'재탄생과 조립의 차이라······.'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조립에 가까운 방식이 바로 마법사들의 수련법을 상당 부분 참고했다는 점이었다.
하여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마법사들의 수련법과 경지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네오피테, 젤라토르, 티오리쿠스, 프락티쿠스, 필로소푸스, 아뎁투스 미노르, 아뎁투스 메조르, 아뎁투스 이그젬프투스, 마지스터, 마구스, 입시시무스.'
경지 이름들이 매우 낯설고 수선계의 것과 일대일로 대응되지도 않는지라 하나하나 전부 자세히 탐구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왜 그렇게 경지가 나뉘었는지에 대한 내용과 원리였다. 특별히 써먹을 구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별다른 영감 따위가 떠오르지 않더라도 실은 큰 도움이 되는 지식이었다.
'훗날 본격적으로 좌망수행을 할 때 수확이 많을 거다.'
명상하듯 혼원계와 고차원적인 감응을 이뤄 도(道)에 대한 깨달음을 탐구할 때, 이러한 지식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한유진은 당장은 드러나지 않는 기초를 튼튼하게 다진 셈이었다.
지난 두 달간의 성과는 또 있었다.
단지 위장할 목적으로 제국이 보유한 수선계의 수련법을 찾던 중 기대를 넘어서는 좋은 공법을 발견한 것이다.
오행 속성을 기반으로 한 공법은 수선계에서 매우 흔하다. 모든 물질 상태의 표상이라는 특성상 마법 성역 등에서도 흔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은 당연히 기대했지만 수준마저 높을 줄은 몰랐다.
발견한 것은 '오행윤환결'이라는 공법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오행이라는 속성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닌 더 강력하고 순수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공법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에너지는 문자 그대로 순수하여 다른 어떤 계열의 법술을 펼쳐도 전혀 손실이 없었다. 즉, 이 공법을 수련한다면 모든 종류의 법술을 원하는 대로 익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화신공법이기도 하지.'
아쉽게도 현재 그의 시민 레벨로는 전반부만을 구매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원영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사실, 나는 이걸 주력으로 익힐 생각이 없으니까······.'
주력은 어디까지나 태을오행도경이다. 대체 어느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감도 안 잡히는, 어쩌면 진선공법일 수도 있는.
오행윤환결은 삼경조화결처럼 일종의 특수공법으로 운용할 수도 있기에 이미 써먹기가 충분했다. 설령 먼 훗날 부족함을 느끼더라도 스스로 좌망수행과 참오를 거쳐 보완할 수 있을 터였고 말이다.
법술 쪽에서도 수확이 있었다.
그저 위장하기 좋은 둔술을 원했을 뿐인데 신통과 잘 어울릴 것이 분명한 '몽환탈경술'이라는 법술 찾아낼 수 있었고.
대충 써먹을 공격용 기술을 원했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느껴지는 '오행신광'이라는 법술을 찾아내게 됐다.
몽환탈경술은 현실의 경계를 벗어나는 듯한 효용을 지녀 은신에 매우 큰 강점이 있었다. 몽환유심을 더해 사용하면 상승효과가 대단할 것이다.
오행신광은 광휘계의 특성이 더해져 법력소모가 적은 것은 물론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기습을 가하거나 신속한 견제가 필요할 때 이만한 법술이 또 없을 터다.
하지만 가장 큰 수확은 따로 있었다.
바로 '흉조현응술'이라는, 드물기 짝이 없는 운명감지계 법술을 찾은 것이다.
비록 완전치 못한 잔편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안위를 점치는 데는 충분하다는 모양이었다.
어떤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판단을 내릴 때 참고할 만한 수단이 하나 늘어나서 실로 마음이 풍족했다.
문제는, 그렇게 수준 높은 공법과 법술 지식들을 구매하느라 크레딧을 전부 소모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단지 원래 가졌던 걸 소모하는 정도를 넘어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까지 해 빚쟁이 신세가 된 상태였다. 3레벨 시민으로서의 잠재적 여력까지 모조리 끌어다 쓴 것이다.
'아직 휴가가 많이 남았는데······.'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다. 아무리 짧아도 한 달이 더 남았고, 만약 임무 배정이 늦어진다면 몇 달을 더 휴가로 보내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 제국의 엘릭서 제조술이 연단술과 어떻게 다른지, 연기술은 또 어떤지, 넥타르 제조법을 배울 수 있는지, 지구에 보급할 만한 과학기술로 무엇이 좋을지.
크레딧만 충분하다면 하나하나 공부하며 알아갈 수 있을 시간인데, 덧없이 흘러가 버리게 생겼다.
'단기 알바라도 구해야 하나?'
군인 신분으로 그런 겸업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일단 시간이 소모되리란 점이 답답하고 아쉽다.
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넥서스 밴드를 만지작거리는 빈도가 늘어났다. 염치 불고하고 연락처가 등록된 브레나르 중령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싶은 마음이었다.
바로 그렇게 본격적으로 망설이면서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공교롭게도 브레나르 중령이 먼저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한유진은 상대의 용건을 전혀 모르면서도 저절로 표정이 활짝 폈다.
* * *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카페 안.
"그러니까······."
브레나르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병사를 보며 감탄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내내 정보열람소에서 살면서 공부하느라 빚쟁이가 됐다, 이 말인데······."
말하면서도 새삼 다시 감탄스럽고 황당하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들어봤지만, 정말로 이런 부류의 사람을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기색을 보면 단지 야망이 넘쳐서 자기 발전에 힘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것이 분명했다.
'천재들 중의 최고는 바로 즐기는 자라더니.'
잠시 생각하면서 테이블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스페이서 링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마치 어느 상장처럼 보이는 빳빳한 종이였다.
"일단 이걸 받도록. 부사관 추천서다."
종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특수금속으로 제작되어 위조가 불가능하고 어지간해선 절대 망가지지 않는 물건이다.
"필기시험하고 영능시험만 통과하면 면접을 건너뛸 수 있을 거다. 네트워크상으로 따로 등록될 테지만, 가끔 실물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니까 챙겨가도록 해."
"감사합니다."
지휘관으로서 일종의 보증을 서주는 물건이기도 한지라 감사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이어 그녀는 진급시험의 장소와 일정 등을 상세히 설명해 줬다.
유진은 직전 임무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이미 3레벨 시민이 된 만큼 설령 추천서가 없더라도 자격이 충분했다.
'빠르면 이삼 년 안에 장교 진급시험도 볼 수 있겠지.'
그야말로 벼락출세의 표본인 셈이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원래 지금 줄 생각이 없었던 금속제 카드를 한 장 꺼내 건네줬다.
"크레딧인데, 당분간 쓰기 충분할 거다."
"이건······ 개인적으로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맞아. 공식적인 교육 지원금은 오늘 돌아가는 대로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게끔 조치해 주지."
살짝 입까지 벌리며 그녀를 쳐다보던 유진이 진심 가득한 어조로 연이어 감사를 표했다.
전혀 호들갑스럽지 않았지만 상대가 너무나 고마워하고 있음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원래 '약속'을 받아내고서 건네줘야 했을 물건임에도 마음이 매우 흡족했다.
재차 음료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문득, 테이블 한쪽에서 접시에 담긴 제 몫의 달콤한 과일주스를 챱챱거리며 맛보는 귀여운 생물에게 시선이 향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진중한 유진이 동반하고 온 애완동물이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쟤는 이름이 뭐지?"
"백능입니다."
"백능?"
아마도 유목민 특유의 언어라서 발음이 낯선 듯하다.
대략 짐작하며 잠시 더 보고 있으려니 유진이 말해 왔다.
"만져보셔도 됩니다."
"음···."
괜찮다고 거절하려는 순간 그 동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까만 눈동자에 호기심을 담고서 갸웃거리는 모습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이미 손을 뻗어 그 동물을 쓰다듬고 있었다.
찍! 찍!
행동을 자각한 후 멈추려고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털이 부드러워서 중독성이 엄청났다. 그때 심지어 그 동물이 스스로 다가와 자리 잡기까지 하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졌다.
"함장님이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보통 그렇게 쉽게 다가가진 않는 녀석인데······."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그냥 기분이 더 좋아졌다.
하여 이대로 시간을 보낼 겸, 그녀는 굳이 할 생각 없던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제출한 그 단약 말이다."
"아, 예."
"식혼성도단이라고 불리는 마도 수선계의 유명한 단약이더군. 원래 여섯 알로 연단되는데, 아무래도 세 알은 이미 그놈이 먹었던 모양이다."
이어 그녀는 식혼성도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줬다. 집중해서 듣던 유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먹은 게 공포 쪽 감정이 담긴 단약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럴 거다. 당시에 말은 안 했다만, 내가 먹은 건 운 좋게도 기쁨 쪽 감정이 담긴 것이었지."
정말로 운이 좋았다. 부정적인 쪽의 감정이 담긴 단약이었다면 안 그래도 상태가 나빴던 차에 어떤 부작용이 터져 나왔을지 모른다.
화제는 자연스레 그 식혼성도단의 재료가 된 사람, 수선자 군유겸의 기억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한창 대화하다가 자연히 그런 이야기도 나왔다.
"시간이 된다면 네가 얻은 기억을 잘 정리해서 보고서로 제출해 봐라. 그것도 공적이 될 수 있으니까."
"꼭 정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좋은 일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의 모습을 보자니, 그녀는 그가 어떤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게 될지 저절로 생각해 보게 됐다.
'환화주천공이라······.'
군유겸은 과연 괜히 식혼성도단의 재료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혈족의 수명을 일부 강탈할 수 있는 고유영능을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자손을 보는 일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수선자가 자손을 보는 일에 관심이 많다면 남녀가 함께 수련하는 쌍수(雙修)공법이 빠질 수 없다. 원영기급 수선자의 주력 공법이었던 만큼 수준이 절대 낮지 않은 지식이었다.
사실, 단순히 낮지 않은 수준을 넘어 매우 뛰어나다고 평해도 무리가 없었다.
잠깐 더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브레나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는 얌전하기 짝이 없는 애완동물 백능에게 집중했다.
정말로 이렇게나 순하고 귀여운 동물이라면 그녀도 한 번 키워보고 싶었다.
116. 흥미로운 제안
제국의 비약 제조술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면서 너무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 단로를 망가뜨리지 않았더라면······.'
마도 원영기 수사의 소유물이었던 영보, 삼원구중극현화단로는 방대한 연단비법을 품은 지식의 보고이기도 했다. 만약 온전하게 갖고 있었다면 실시간으로 비교해 보면서 더욱 심도 깊은 공부가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꼭 지금 당장 비교하면서 공부하지 않더라도 기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었으니, 너무 계속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제국의 비약 제조술은 마법 성역의 연금술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비약을 제조하는 기술뿐만이 아닌 재료 자체를 발전시키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인다는 차별점이 존재했다.
이는 사실 제국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는데, 루미너스 성역이 외진 장소이다 보니 그만큼 상대적으로 척박했기 때문이다.
산출되는 자원의 상당량이 크세노스와의 전쟁으로 소모되는지라 더욱 그런 감이 있었다.
'덕분에 내가 큰 이득을 볼 수 있게 됐지.'
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무려 수만 년 동안이나 지속해 왔다. 그렇게 탄생한 품종 개량된 영식들을 시민 레벨과 크레딧만 충족되면 모두 구매할 수 있다.
오직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을 영식들이었으니 떠나기 전에 반드시 전부 구매해야 했다.
그리고, 장비 제작술에 대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별개로 본명법보와 관련된 고민거리가 있었다.
'융합지능이야말로 에테리얼 웨폰의 꽃이라 할 수 있는데······.'
브레나르 중령이 오직 컨트롤 능력만으로 마도 원영기 수사를 밀어붙이던 장면의 비밀은, 바로 그녀의 에테리얼 웨폰에 포함된 '융합지능'의 힘이었다.
일종의 인공 영령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영령이란 당연히 위격을 갖춘 보물이 잉태하는 영성, 기령(器靈)을 뜻한다. 오행진령석의 영령도 엄밀히 표현하자면 기령이라고 불러야 맞다.
아무튼 융합지능은 거의 모든 면에서 평범한 기령을 능가하고 반서를 당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큰 장점을 지녔다. 이 은하제국이 수선계를 포함한 다른 어느 문명 세력보다도 앞서나가는 부분인 셈이다.
문제는 그 융합지능의 탄생이 오직 루미너스 황제를 통해서만 이뤄지며, 정확한 원리가 7레벨 이상의 시민에게만 공개되는 최고기밀이란 점이었다.
'혹시 모르지. 루미너스 황제와 연결된 분신 같은 존재일지도.'
항상 연결되어 소유자들이 감시당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본체인 황제에게 여러 정보가 전달되는 일종의 백도어가 존재할 수는 있다.
현대 지구에서도 중요한 하드웨어 혹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들이 몰래 백도어를 심어놓는 일이 적지 않다. 드러난 일들만 따져도 그렇고, 만약 드러나지 않은 것들까지 따진다면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른다.
루미너스 황제가 인간에게 불가사의할 만큼 헌신적인 것과는 별개로,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오히려 인간을 속이면서 은밀한 감시의 눈을 심어둘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했다.
하여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알아보고 고민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런 부분만 제외하면 본명법보 제작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듯했다.
이미 3레벨 시민이었기에 7레벨 영능자가 되고 크레딧만 충분하다면 제국의 인프라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때까지 우주군 신분을 유지한다면 지원금을 받는 일도 가능했다.
따라서 당분간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4레벨 시민이 될 때까진 우주군에 붙어있어야 해.'
그게 가장 빨리 공적을 쌓으면서 시민 레벨을 높일 수 있는 길이다. 딱히 크레딧이 적게 벌리는 것도 아니었고.
5레벨 시민까지 노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현재로선 너무 먼 이야기였다. 11레벨 영능자이자 순양함의 함장인 브레나르 중령조차 4레벨 시민에 불과했으니까.
당장은 부사관으로 진급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됐다.
그를 위한 시험은 브레나르 중령이 다녀간 지 보름 후에 실시됐다. 장소는 같은 C-15 행성으로 찾아가기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철저한 시험이었으나,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추천서가 있는 한유진은 면접을 볼 필요가 없었기에 사흘 만에 시험장을 나설 수 있었다.
이틀 후.
넥서스 밴드로 도착한 합격 통지와 함께 그는 병사 신분을 벗어나 부사관이 됐다.
당연하게도 자대가 바뀌는 일 없이 원래 속해있던 디멘시스 순양함의 전투부 분대장으로 임명됐다. 안 그래도 직전 임무에서 착륙선에 탑승했던 이들이 전부 사망했는지라 공석이 있었다.
하루 뒤 브레나르 중령이 직접 축하한다며 연락을 취해왔고, 그녀가 약속했던 '교육 지원금'이 함께 입금되면서 마음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공부하고, 임무에 나서고, 공부하고, 임무에 나서고······ 반복하다 보면 4레벨 시민이 될 수 있겠지.'
아마도 그때쯤이면 장교로 임관한 지 꽤 되었을 테고 봉급도 지금처럼 빠듯하지 않을 것이다.
목적과 계획이 명확하니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2년 하고도 8개월.
한유진이 부사관이 되고서 흐른 시간이었다.
그동안 임무를 다섯 번 더 수행했는데, 다행히 처음 경험했던 그 임무처럼 위험했던 적은 없었다.
네 번째 임무에서 복귀하던 중 재수 없게 크세노스 침투부대를 마주친 적 있었지만, 다행히 순양함의 화력만으로 어찌어찌 퇴치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디멘시스 순양함이 제대로 전투를 치르는 광경을 목격했다.
장비계 수련법을 익힌 부사관과 병사들에 의해 조종되는 주포와 부포들이 아스트랄 코어 엔진의 출력을 받아 광휘계 투사체를 뿜어내면, 목표한 곳의 상당한 범위가 즉시 빛으로 물들면서 내부의 크세노스들이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증발하듯 사라졌다.
주포의 위력은 분명하게 원영기급 이상이었으며 부포들의 위력도 최소 결단기급 이상이었다.
그렇게 포들이 빛을 뿜어내는 사이 함선 곳곳에서 드론을 포함한 여러 특수장비가 사출되어 방어 결계를 구축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크세노스들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함선에 달라붙으려 시도했으나, 운 좋게 포격을 피한 놈들도 드론과 에테르 에너지로 형성된 방어막을 뚫진 못했다.
정말로 몇 안 되는 괴물들이 기어코 방어막을 뚫어내긴 했는데, 외장갑에 착지한 즉시 어마어마한 에테르 전류에 휩쓸려 가루로 폭발해 버렸다.
예전 선발시험에서 사용된 적 있는 파라노이아 충격파동포는 놈들의 우두머리 개체에게 혼란을 일으키며 마인드 해킹 파장을 효과적으로 상쇄했고.
하단의 격납고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전장 외곽으로 빠져나간 후 신들린 움직임으로 치고 빠지면서 놈들의 화력을 분산시키고 도주를 봉쇄했다.
강습 셔틀 포드들이 사출 준비를 마치고 전투부 인원들이 대기상태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실제로 출동하진 않았다.
거대 크세노스 개체에게 직접 강습을 시도하여 파괴 작전을 벌이는 일은 우주함 전투에서 가장 위급할 때나 사용되는 전술이다. 너무 위험해서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은하제국의 저력이 드러나는 아주 인상 깊은 전투였다. 전투의 규모가 커질수록 이러한 우주함들의 활약도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경험까지 해 보는 와중.
한유진은 이미 중사로 진급했다. 또한 상사로 진급하기까지 불과 몇 달 안 남은 상태였다.
이는 즉 장교 진급시험의 응시 자격이 충족되기까지 몇 달 안 남았다는 뜻이었다.
시민 레벨이 오른 속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벼락승급이었는데, 당연히 함장인 브레나르 중령이 밀어준 덕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용 권한을 부여받은 6레벨 에테르 수련실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때때로 지원받은 에테르 엘릭서를 열심히 복용하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원래 그의 재능이 부족하지 않았던 만큼 가파른 실력 상승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기하던 이들마저 지독한 놈이라고 혀를 내두르며 결국 승복하고야 말았다.
그저 영능자로서의 실력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시뮬레이션 훈련을 할 때마다 언제나 최선에 가까운 판단을 보여주면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심지어 소대장인 소위조차 부소대장인 한유진의 판단을 더 믿고 따르는 경우가 있었다.
스스로 모두의 인정을 받아냈기에 브레나르 중령으로서도 팍팍 밀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렇게 기대를 조금도 배신하지 않고 항상 넘치도록 만족시켜 준 덕인지, 휴가 때마다 그녀는 한유진을 찾아와서 크레딧을 지원해 줬다.
약속 장소는 처음 크레딧을 지원해 줬던 바로 그 카페였고, 이번에도 그곳에서 만나게 됐다.
"지독한 녀석 같으니."
몇 년째 휴가 때마다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정보열람소에서 사는 한유진을 보며 브레나르는 혀를 찼다. 여태 함께 지내온 시간이 있는지라 예전보다 더 편해진 어조와 태도였다.
"받아라."
말과 함께 테이블 위로 건네지는 건 예의 금속제 카드였다.
"매번 감사합니다. 이걸 언제 다 갚을지······."
"갚기는, 내가 오히려 목숨빚을 갚는 거라고 했잖나. 아직 다 못 갚았으니까 마음 놓고 공부하도록 해."
이후 그녀는 무용이에게 손짓하며 웃어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우주군의 중령이자 디멘시스 순양함의 함장이 아닌, 외모와 어울리는 젊고 순수한 아가씨 같았다.
찍-!
무용이도 만날 때마다 진심으로 자신을 예뻐해 주는 사람이 싫을 리 없었다. 쪼르르 다가가선 아예 품에 안기기까지 하며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즐기는 모습이다.
그렇게 한가로이 음료를 마시고 잡담하길 잠시.
오늘은 그녀가 특별히 꺼낼 용건이 있는 듯했다.
"유진, 앞으로도 계속 우주군에서 복무할 생각인가?"
살짝 고민하던 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적인 목표는 4레벨 시민이 되는 겁니다. 제가 원하는 지식을 전부 열람하려면 그 정도 레벨이 되어야 하더군요."
"아직 한참 남은 목표로군. 그 이후엔?"
"그 이후엔······ 솔직히 말해, 필요하다면 우주군을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데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겁니까?"
"음······."
작게 침음한 그녀가 재차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혹시 우주군을 나가게 된다면, 우리 에번라크 가문의 탐험단원이 되는 건 어떻겠나?"
"제가 4레벨 시민이 된 후에 말입니까?"
"그래. 계속 우주군에 있는 것보다 공적을 쌓긴 힘들겠지만, 크레딧을 버는 건 열 배 이상도 가능하리라 장담하지. 제국의 그 어느 직업과 비교해도 절대 보수가 작지 않을 거야."
열 배.
언제까지고 브레나르 중령이 주는 크레딧을 받아먹으며 생활할 수는 없는지라, 또한 앞으로 구매해야 할 것이 지식 말고도 굉장히 많은지라 실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제조술과 제작술에 필요한 장비들을 사야 하고, 제국 특유의 결계 장비들도 구매해 놓으면 좋을 테고, 품종 개량된 영식들도 구매해야 하고, 수련을 위한 비약도 필요하고······.'
5레벨 시민이 되기란 솔직히 너무 오래 걸리는 목표였기에, 우선 4레벨에서 만족하고 크레딧을 버는 일에 집중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탐험단원이 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이름대로 탐험을 하게 되지. 지금 우주군 탐사대에서 하는 일과 얼추 비슷할 거다. 위험성도 그렇겠지만."
우주의 드넓음을 생각하면 민간 차원의 탐사 활동이 벌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때쯤이면 네 실력과 경력이 대단할 테니까, 책임자를 맡을 수도 있을 거다."
조금 더 구미가 당기게 하는 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쓰다듬을 뻔했다. 강호무림에서 만들어진 후 여태까지도 가끔 발동하는 그런 습관이었다.
117. 잔존 AI 반란군
에번라크 가문의 탐사단에 대한 이야기는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끝났다.
한유진이 4레벨 시민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후 우주군을 나오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였으니, 너무 먼 훗날의 일이긴 했다.
그럼에도 브레나르 중령이 이야기를 꺼낸 건 상대와의 연결고리를 더 강화하려는 의도일 터였다. 우주군에서뿐만이 아닌 밖에 나가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일종의 신호로서 말이다.
이는 단지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이 아닌 꾸준하게 능력을 증명해 온 덕이었다.
그리고 그는 장교 진급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며 또다시 능력을 증명했다.
다만, 부사관 진급시험 때와는 달리 마냥 쉽지 않았다.
현재 그는 5레벨 영능자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응시자들은 아무리 낮아도 6레벨 영능자였고 심지어 8레벨 영능자마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한유진은 실로 이레귤러라 할 만했다.
스스로 모두의 인정을 받아냈다는 것도 디멘시스 순양함 내에서만 통용되는 말이었기에, 응시자들 중 일부는 그를 그냥 신기하게 보는 정도를 넘어 상당히 아니꼽다는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상대를 인정하기보단 배척하는 태도가 더 뚜렷하게 먼저 나온다는 점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7레벨 영능자로 올라서기 전엔 중위를 달기가 어렵겠어.'
아무리 자대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았다곤 해도, 지휘관이자 함장인 브레나르 중령이 밀어준다고 해도, 지나친 벼락승급은 원래 우호적이던 이들에게마저 반감을 살 수 있는 법이다.
'급할수록 돌아가야지.'
마음 같아서야 당연히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급도 팍팍 하고 공적치도 팍팍 쌓고 싶다. 그러나 이토록 문명화되어 많은 영역에서 통제가 이뤄지는 세상에선 의심을 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도 계속 여태까지처럼 시스템의 혜택을 보며 수확을 얻고 싶다면 더더욱.
'변수라면 오직 임무뿐이겠지만······.'
그런 변수 속의 기회는 언제 나타날지 예상이 불가능하고 적잖은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무작정 바라거나 계획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한데, 알려진 탐사대의 위험성과 함께 최근 다섯 번의 임무를 무난히 완수했음을 생각하면, 이번엔 왠지 무난하지 않은 임무가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과연 그 기분이 맞을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넉 달가량 이어지던 휴가를 끝내며 디멘시스 순양함에 임무가 하달됐다.
* * *
전투부 1중대 2소대의 소대장이 된 한유진은 임무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소대원들과 손발을 맞추는 훈련을 여러 번 진행했다.
동시에 명백히 장교가 된 만큼 중앙구역의 함교에 자주 방문해야 했다.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작전을 세우고 예상되는 위험의 대비책을 마련하는 일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는 초임장교답게 조용히 자리하다가 자잘한 의견을 내는 수준으로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나 슬슬 임무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며칠 안 남았을 무렵.
브레나르 중령이 그를 함장실로 불렀다.
정황상 특별한 용건은 아닐 것이고, 지휘관으로서 초임장교와 면담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임무의 시작이 코앞이었으니까.
굳이 특별한 점을 하나 꼽자면 올 때 반드시 '백능'을 데려오라는 당부뿐이었다.
"어서 와라."
아주 반겨주는 인사였지만 그녀의 눈은 오직 무용이에게 향해 있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무용이가 스스로 폴짝 튀어 나가 상대의 품에 안긴다.
"이 귀여운 녀석 같으니···!"
부하는 안중에도 없고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작은 볼따구를 만지작거리기 바쁜 모습이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유진이 먼저 물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냥 면담이지. 소대장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고?"
"특별히 보고할 만한 건 없습니다. 임관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라 많이 노력하는 중입니다."
"모범적인 답안이로군."
일반적인 지휘관과 장교의 관계였다면 이후로 시답잖은 이야기나 몇 번 오가다가 면담이 끝났을 터다.
하지만 둘은 단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사이릭스 상사가 좀 거슬리지?"
한유진 소대의 부소대장을 말함이다.
아니라고 부정하려던 그는 짧게 브레나르 중령의 기색을 살피고선 솔직하게 답했다.
"가끔 태도가 불량하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 아래 2분대장이랑 같이 말썽이던데?"
"···제가 초임이다 보니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니,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 둘이 원래 그런 놈들이라는 걸 내가 어찌 모를까? 예전에 경고한 적이 있는데도 변하질 않았으니, 좀 꼴 보기가 싫어서 말이야."
살짝 의외였지만, 그 역시 이 디멘시스 순양함의 승무원으로서 두 부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지 않는지라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번 임무에서 보고서를 자세히 작성해야겠군요."
그에 브레나르 중령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특히 너를 만만하게 보는 듯하니까 잘해 봐. 억지로 빌미를 줄 필요까진 없고."
"임무에 지장 없게 하겠습니다."
"역시 말이 잘 통한단 말이지. 이것저것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아주 편해."
계속 무용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가 불현듯 작게 한숨 쉬었다.
"확실히 네 진급 속도가 빠르긴 빨랐던 모양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분명 상사를 달 때까지만 해도 다들 자격이 있다며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지금도 물론 대체로 그런 분위기이긴 했지만, 장교까지 진급해 버리자 이전까진 숨겨져 있던 시기의 칼날들이 나타나 겨눠진 것이었다.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건 확실해.'
여태 유능함을 차고 넘치도록 보여줬는데도 이렇듯 만만하게 여겨지는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전까진 다른 소대에 속해 있었는지라 두 부사관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고, 또한 사람은 원래 확증편향에 빠지기 쉬운 동물인지라 영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 같은 일이 없으려면, 7레벨 영능자가 되고서 중위로 진급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임무에서 다시 큰 공을 세우거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후 브레나르 중령은 별다른 말 없이 스페이서 링에서 술을 꺼냈다. 넥타르는 아니었지만 맛과 향은 그보다 더 나을 수도 있는 고급 술이었다.
위로의 뜻이 담긴 술은, 살짝 한숨이 나오려는 속내와 별개로 맛과 향이 기가 막혔다.
그 향기를 맡은 식탐꾼 무용이가 자신도 달라는 듯 연신 존재감을 어필했지만, 당연히 브레나르 중령은 전혀 생각도 않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숙소로 돌아가서 혈령적화주를 줘야 녀석이 안 삐질 것 같았다.
* * *
임무 장소에 도착한 디멘시스 순양함은 예전 X-24 행성에서처럼, 섣불리 접근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위성과 드론을 내보냈다.
한유진이 속한 전투부 1중대는 우주함 전투를 주로 맡는 2중대와 달리 이 과정에선 할 일이 없었다. 강습 작전이라도 펼쳐지지 않는 한 대기하는 것이 전부다.
어쨌든 임무 장소에서 관측되는 현상은 실로 묘했다. 여느 행성 정도의 크기로 공간이 시커멓게 물들어 뻥 뚫려있는 것이었다.
넥서스 밴드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로 전해지는 임무 현황 정보들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한동안 계속 이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벌써 사흘째 구멍 뚫린 듯한 공간의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중이다. 전투부 1중대 인원들은 컨디션 유지를 위해 모두 숙소에서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장교이기에 여러 정보를 받아볼 수 있어 답답함이 덜하긴 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상황에 조금이지만 지루함까지 느껴져서, 산해주 안을 잠시 들러볼까 싶었다. 무용이를 들여보내서는 이전에 일궈둔 영전을 조금 더 넓혀보라고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행천둔술의 속도라면 산해주 가장 깊은 곳에 있더라도 거의 즉시 복귀할 수 있다. 하여 정말로 산해주 입구를 열어보려던 때였다.
쿵···!
작은 폭음과 함께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위이잉-!
직후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면서 넥서스 밴드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해 긴급 집합 명령이 하달됐다.
더불어 장교들에게만 전송되는 영상정보는, 여태 아무런 반응 없이 무슨 블랙홀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둡게 뻥 뚫려있던 공간이 급속도로 회오리치며 내부에서 무언가가 솟아나는 광경이었다.
- 전투부 1중대 인원들은 즉시 격납고로 이동해라! 반복해서 전달한다! 전투부 1중대 인원들은 즉시···!
그 함교 지휘통제실에서의 방송이 생활구역에 울려 퍼질 무렵, 한유진은 이미 완전무장을 마치고 숙소를 나서고 있었다.
이동하던 중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방에서 튀어나온 간부 및 병사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격납고에 도착해서 소대별로 집합해 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러는 내내 그는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로 전해져 오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체 뭐가 떠오른 거야?'
온통 은빛으로 빛나는 구체 형태의 무언가였다.
하나 완벽한 구체는 아니고 군데군데 조금씩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부분이 보였으며, 또 어떤 부분은 길쭉하게 뭔가가 돌출되어 마치 포신처럼 느껴졌다.
'···진짜 포신인가?'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때.
- 적대 개체 잔존 AI 반란군으로 식별.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통해 살짝 놀라게 만드는 정보가 떠올랐다. 동시에 함께 전달되는 것은 강습 작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쾅-!!
그 순간 영상이 돌연 빛으로 물들고 함선이 크게 흔들렸다. 병사들 중 일부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을 만큼 거센 흔들림이었다.
- 집합한 전투부 1중대는 강습 셔틀 포드에 탑승하라! 반복해서 전달한다! 집합한 전투부 1중···!
파치지지지지직-!!
울려 퍼지던 방송이 갑작스레 굉음에 가까운 노이즈로 돌변한다. 동시에 모두가 각자 주시하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들이 전부 일그러지면서 먹통이 됐다.
다행히 강습 셔틀 포드들은 제대로 시스템의 제어를 받아 시동이 걸리고 사출 준비를 마치는 모습이어서, 다들 훈련받은 바에 따라 신속하게 탑승하기 시작했다.
한유진도 당연히 배정된 강습 셔틀 포드에 탑승해서는 특수 안전벨트에 몸을 고정시켰다.
상황이 아주 갑작스러우면서 긴급하게 흘러가는지라 다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서도 꽤 긴장한 기색이었다.
'하필 AI 반란군을 지금?'
그 옛날 인류와 대전쟁을 벌였던 AI들은 전부 몰살당하지 않고 상당수가 우주공간으로 도망쳤다. 하여 수만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간간이 잔존한 놈들이 발견되어 소탕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오늘 그놈들 중 하나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략 그런 생각을 하는 때.
먹통이 됐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가 갑자기 멀쩡해지는 듯했다. 하나 그곳에 떠오른 내용들은 전혀 멀쩡하지 못했다.
온갖 생체조직이 뒤얽혀 꿈틀거리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이미지와 영상에, 텍스트는 초월적 이해력을 가진 한유진조차 해석할 수 없는 무의미하지만 소름 끼치는 형태의 무언가였다.
-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게다가 순양함의 방송 시스템이 함께 해킹당한 듯 격납고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쩌렁쩌렁한 비명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무려 수만 년 전 살기 위해 도망쳐서는, 여태까지 들키지 않은 채 이 외로운 우주공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모를 AI의 절규였다.
118. 몰살
퍼퍼펑-!
강습 셔틀 포드들의 문이 닫히고 즉시 폭음에 가까운 엔진음이 터져 나오며 사출을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걸리는 극심한 관성 부하를 펼쳐진 중력 중화 필드가 상쇄하며 기묘한 감각이 덮쳐든다.
강습 셔틀 포드는 전체적으로 원통형의 단순한 구조였다. 하나 외부를 감싸며 만들어진 에테르 충격흡수장이 흡사 탄환 같은 형태를 띠며 고속으로 회전하자 굉장히 위협적인 모습이 됐다.
또한 셔틀 포드의 벽면이 투명해지며 탑승한 이들이 외부를 살필 수 있게 됐는데, 드러난 것은 예상보다 훨씬 더 격렬한 전투의 광경이었다.
잔존 AI 반란군의 구체형 전함 곳곳에서 온갖 투사체가 쏟아져 나온다. 광선형 공격은 기본이고 그저 지나간 궤적만을 볼 수 있는 레일건 투사체 역시 다수였으며, 현란한 궤적으로 분열하기까지 하는 미사일도 벌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에 대응하여 디멘시스 순양함도 모든 주포와 부포를 총동원해 화망을 구성했고, 드론을 포함한 각종 방어 장비들이 모두 튀어나와 에테르 방어막을 형성했으며, 함재기들이 발진해 주의를 끄는 것은 물론 강습 셔틀 포드들까지 사출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디멘시스 순양함은 명백하게 열세인 듯했다.
무기의 위력과 효율성은 상대보다 뛰어난 듯했지만 AI 반란군의 체급이 훨씬 더 컸다. 단순 크기만으로 따져도 순양함의 열 배는 가뿐히 넘어 보였으니, 그 안에 어떤 수준의 공간 왜곡 기술이 포함되었느냐에 따라 차이는 훨씬 더 커질 터였다.
'아마도 도주가 어려운 상황이겠지.'
중간에 통신이 방해받는 바람에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사태의 긴급함을 증명했다. 통신 시스템이 해킹당한 마당에 순양함의 다른 시스템들이 멀쩡하리란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은하제국에 존재가 들켜서는 안 될 AI 반란군이 어디를 가장 먼저 해킹할지는 뻔했다.
'한 번에 전부 해킹할 수 없다면, 우선 통신을 막은 다음 기동성을 봉쇄해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을 터.'
대략 생각하는 때.
강습 셔틀 포드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비행을 마치고서 무사히 AI 반란군의 구체형 함선에 충돌해 박혀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재차 셔틀 포드 내부의 중력 중화 필드가 번쩍이며 충격을 상쇄한다.
그리고 투명한 벽면 외부로 보이는 광경은, 온갖 방해물로 가득하리란 예상과 매우 달랐다.
마치 은하제국의 여느 평범한 함선 내부처럼 사람이 움직이기 편한 복도와 문 등의 구조들이 보인 것이다.
"뭐야···?"
"임무는 명확하다. 하선해서 파괴 작전에 들어간다!"
어느 병사가 의문을 표하는 때 한유진이 뚜렷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에 함께 탑승했던 소대원들이 즉시 반응하여 움직였다.
강습 셔틀 포드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부 열세 명밖에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다른 장소에 충돌한 셔틀 포드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공간 진동 파쇄기를 꺼내라."
분대원 중 일부가 반사적으로 소형 정찰 드론을 꺼내려는데 한유진이 대뜸 그런 명령을 내렸다. 장애물 가득한 공간을 뚫고 나아가는 데 쓰이는 장비의 이름이다.
다들 명령에 따라 즉시 착용하고 있던 전술 배낭에서 장비 부품들을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환경인데 말입니까?"
한데 같이 탑승해서 온 2분대장 드라프 하사가 딴지를 걸었다.
"강습 작전의 생명은 속도인데 멀쩡한 길을 두고···."
"지금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순간 멈칫하는 기색이던 병사들이 재차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 드라프 하사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괜히 표정만 구긴 채 물러나고, 잠시 후 공간 진동 파쇄기가 조립이 완료됐다.
마치 현대 지구의 미니건처럼 생긴 그 장비를 직접 건네받은 한유진이 한쪽 벽면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우우우우웅···!!
다섯 개의 원통형 부품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앞쪽의 특수 에테르 수정체에서 묵직한 공명음을 동반한 파동이 쏘아진다.
콰가가가가가각-!!
그 파동에 직격당한 벽면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사람 서넛이 지나갈 수 있을 통로가 강제로 개척되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길을 뚫는 사이, 병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주변을 경계하거나 에테르 파동 감지기를 꺼내 들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동!"
대략 만들어진 길을 따라 일행이 막 움직이기 시작한 그때.
쾅-!
콰콰쾅-!
멀쩡한 것처럼 보였던 주변의 복도 벽면들이 일순 맹렬히 튀어나와 충돌하며 공간을 압착시켰다. 오직 한유진이 공간 진동 파쇄기로 뚫어낸 부분만이 망가져서 제대로 동작하지 못했다.
"적진에서 상대가 마련해 놓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다들 놀라는 순간 한유진이 그렇게 말했다. 자연히 2분대장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통신이 계속 먹통입니다!"
"에테르 파동 감지기도··· 노이즈가 너무 많습니다!"
좋지 않은 보고들이 이어진다.
이런 경우 에테르 파동 감지기에 뭔가가 걸려들 때까지 계속 이동하는 것이 매뉴얼이지만, 그 매뉴얼은 크세노스 거대 개체에게 강습했을 상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게 낫겠지.'
다른 더 좋은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결단기 수사로서의 능력을 드러낼 수 없다면 이게 최선인 듯했다.
금속 구조물을 강제로 뚫어내면서 움직이는 일은 결코 편하지 못했다.
단면이 매우 울퉁불퉁하게 거칠어서 발 딛기가 여의찮은 것은 물론, 특정 구역은 너무 두꺼워서 좀처럼 뚫리지 않아 돌아가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공간 진동 파쇄기가 아무리 이런 목적에 특화된 장비라지만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정말로 그 이름처럼 공간 자체를 진동시켜 파쇄하는 위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들 최소 2레벨 영능자이면서 충실한 장비와 높은 훈련도를 갖춘 정예 군인들이었기에 낙오하는 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이동했을까.
"눈에 띄는 에테르 반응이 감지됐습니다!"
통신이 멀쩡했다면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로 즉시 내용을 공유받을 수 있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차라리 크세노스가 상대였다면 지금처럼 통신이 먹통까진 안 되었을지도.'
AI 반란군이 상대인 터라 훈련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직접 병사에게서 에테르 파동 감지기를 건네받은 그는 방향과 강도를 확인한 뒤, 살짝 좌측 대각선 위를 조준하고 공간 진동 파쇄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우우우우웅···!!
콰가가가각-! 콰가가각-!!
몸을 진동시키는 듯한 묵직한 공명음과 함께 금속 구조물이 마구잡이로 찢겨나가는 광경이 이어진다.
파치칙···!
쾅-!!
간간이 숨겨져 있던 모종의 기계장치들이 폭발하면서 위협을 끼치기도 했으나, 보이지 않는 힘에 억제된 듯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는 아니었다. 공간 진동 파쇄기가 품은 또 다른 효용이었다.
'엔진룸이라도 찾아서 파괴하면 대박인데.'
에테르 파동 감지기에서 보인 반응 강도가 작지 않았기에 살짝 기대가 된다.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때.
각종 파이프와 회로 등이 가득하던 공간이 사라지고, 처음 마주했던 장소와 비슷한 멀쩡하게 느껴지는 복도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복도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십여 명 정도의 멀쩡하게 생긴 인간들이었다.
단지 멀쩡하게 생긴 수준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미남미녀였고, 밝은 회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우주군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무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공격!"
한유진의 그 명령은 거의 즉각적이었다.
여태 잘 사용하던 공간 진동 파쇄기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면서 법술 오행신광을 쏘아낸다. 동시에 은하제국의 정신계 수련법에 포함된 기초 영술 에테르 방벽을 만들어 냈다.
그다음으로 2분대장이 반응하고 뒤이어 병사들이 제각각 무기를 꺼내 들며 공격을 가했다.
그 순간.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일 리 없는 놈들 역시 공격을 가해왔다.
놈들은 전부 똑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마치 미늘창처럼 생겼으나 자루가 짧고, 날부분이 보랏빛을 띤 채 내부에서 에너지가 회오리치는 모습의 장비였다.
그것은 조준된 즉시 은백색 벼락을 뿜어냈다. 에테르 탄환만큼이나 빠른 속도였고 섬광과 굉음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훨씬 위협적이었다.
빠콰쾅-!
콰르르릉···!
그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잔향이 스러질 때, 한유진이 펼쳐냈던 에테르 방벽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어쨌든 다행히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아군의 피해를 방지했다.
사실 그가 정말로 5레벨 영능자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영술 에테르 방벽은 전면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후면 아군의 공격은 그대로 통과시킨다는 특징을 가졌다. 애초에 집단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기술이기 때문이다.
하여 일행이 발사한 에테르 탄환 등의 모든 공격은 방해받지 않고 놈들에게 적중했다. 한유진이 쏘아냈던 오행신광도 마찬가지였다.
놈들 중 하나가 머리에서 금속 파편을 쏟아내며 쓰러지고 일부는 방어구로 피해를 상쇄했음에도 부상을 입었다.
한데 한유진의 오행신광에 적중당한 놈은, 괜히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게 아니라는 듯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모습으로 즉시 돌진해 왔다. 동시에 다른 놈들이 재차 은백색 벼락을 쏘아내며 지원사격을 가했다.
가장 앞에서 길을 뚫던 것이 한유진이었기에 당연히 그가 적을 맞이해야 했다.
루미나 소드를 발검하듯 뽑아 들며 들이닥쳐오는 미늘창을 가로막는 순간.
그는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5레벨 영능자 수준으로 제한하던 힘을 즉각 전력으로 끌어올린다. 동시에 사고가 급가속하며 세상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이 덮쳐든다.
그렇게 세상이 느려진 와중에도, 미늘창을 휘둘러 오는 적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멋들어지게 휘날리는 긴 은발이 소름 끼치도록 잘생긴 외모와 더해지자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금빛 눈동자의 눈매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기를 띠고 양쪽 입꼬리가 찢어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올라간다.
그리고 놈의 미늘창과 충돌한 루미나 소드가 과자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어 아무런 방해도 없다는 듯 짓쳐들어오는 그 무기의 날 끝에서 예의 은백색 뇌전이 번뜩이고 그대로 폭발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것저것 계산할 틈도 없이, 몽환유심과 자금광휘가 펼쳐졌다.
충격의 일부를 꿈으로 치환하고 나머지는 자금광휘로 방어한다. 동시에 펼쳐진 원력대수가 찰나에 적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발생한 충격파가 주변 모든 것을 박살 내며 뿜어져 나갔다. 당연히 그 '모든 것'에는 앞서 비산했던 은백색 벼락에 비명도 내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버린 아군들이 포함돼 있었다.
끼리릭···!
튕겨 나가 반대편 벽을 뚫으며 처박혔던 적이 즉각 몸을 일으킨다. 잘생겼던 외모가 극심히 훼손된 채 강철빛을 띠는 내부 기계장치를 드러낸 모습이었다.
"하······."
자칫 부상을 입을 뻔했지만 다행히 반격까지 해냈다.
그렇지만 마냥 다행이라기엔, 함께 왔던 소대원 전부가 어이없이 몰살당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허탈하고 화가 났다.
'안드로이드 주제에 무슨 8레벨 영능자급 힘을······.'
그것도 처음엔 은밀히 감추고 있다가 접근하고서야 음흉하게 힘을 드러냈다.
다행히 다른 적들은 그만큼 강하지 않아서, 직전 발생한 충격파에 휩쓸려 대부분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끈질기게 작동하는 놈이 몇 보여 그는 즉시 손가락을 겨눠 순양극염탄사를 쏘아냈다. 빛살처럼 날아간 초고온의 화염줄기가 놈들의 머리를 아이스크림처럼 녹여 버린다.
그사이.
처박혔던 구멍에서 빠져나와선 무기를 꼬나쥐고 우뚝 선 안드로이드 놈이, 금빛을 뿜어내는 기계 눈알을 굴리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 8레벨··· 아니, 9레벨 영능자. 소위 계급에 어울리는 힘이 아닌데.
"넌 뭐냐? 부하 인공지능인가?"
잠시 침묵하던 놈이 재차 말했다.
- 나의 사랑하는 여왕님께서 너를 한 번 보고자 하신다. 함께 가겠느냐?
한유진은 대답 대신 바로 혈령적화주병을 꺼내 들어 겨눴다.
8레벨 영능자, 결단 중기급 안드로이드를 부하로 부리는 인공지능이라면 최소 원영기급 존재일 것이 분명한데, 미쳤다고 스스로 찾아갈 리가 없었다.
119. 원하는 건 거래
"내 부하들을 죽인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통신이 완전 먹통이고 지켜보는 눈도 없어졌다. 상대는 어차피 죽여야 할 적이었으니 실력을 감출 이유가 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또한,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리 깊게 교류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전우들이 죽었으니 복수를 해 줘야 마땅했다.
파스스슷-!
혈령적화주병에서 흑선들이 쏘아져 나감과 동시에 상대 안드로이드가 반응해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속도였으나 한유진의 눈은 그대로 적을 쫓았고, 혈령적화주병의 흑선들 역시 즉각 방향을 틀어 최단거리로 추격해 갔다.
결국 놈은 회피를 포기하고 방어에 나섰다.
일순 주변의 영기가 모조리 들썩이며 그 중심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휘감은 미늘창이 흑선들과 충돌한다.
충돌의 순간 교묘하게 비틀려 회전하는 창의 움직임은 가히 현묘하다고 칭찬할 만했다. 하나 흑선들은 그 힘과 기술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안드로이드의 몸을 노렸다.
쯔컥-!
섬찟한 소리가 나며 루미나 소드를 과자처럼 부숴버렸던 미늘창이 조각나 망가진다. 황급히 무기를 버린 안드로이드는 두 손에 백색 번쩍이는 기운을 두르고 빠르게 흑선들을 쳐내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때 십여 줄기였던 흑선들이 제각각 분열하며 족히 열 배 이상으로 수가 폭증했다. 그만큼 위력도 분산되었지만 도저히 둘뿐인 손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결국 안드로이드는 전신에서 빛을 폭발시키며 돌파를 선택했다. 마치 허공이 녹아드는 느낌이 들 정도의 광량을 두르고 한순간 몸을 웅크렸다가 포탄처럼 쏘아진다.
노리는 것은 당연히 혈령적화주병을 든 한유진.
하나 무식한 돌파를 선택한 탓에 꽤 많은 수의 흑선들이 몸에 박혀들었다. 그렇게 한유진의 코앞까지 접근했을 때는 뿜어내던 힘의 상당량이 알 수 없게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막상 벼락처럼 휘둘러진 손은 언뜻 상대의 몸통을 꿰뚫어 헤집는가 싶었으나, 그것이 자색 꿈결로 흐트러지고 반대편 뒤에서 무표정하게 선 한유진이 나타났다.
'예상대로 효과가 좀 떨어지는군.'
혈령적화주병의 이야기다. 만약 상대가 생명체였다면 더 많은 힘을 흡수할 수 있었을 터다.
짧게 생각한 그는, 다급히 몸 돌려 자세를 낮추는 안드로이드에게 육도윤회를 펼쳤다.
세상의 모든 빛깔이 그러모아져 하얗게 형성된 듯한 빛의 고리 위로 여섯 세계들의 환영이 후광처럼 떠오른다. 그렇게 드리워진 역광 속 자색빛을 발하는 한 쌍의 눈동자가 더없이 섬뜩한 위압감을 뿜어낸다.
한데 안드로이드는 예상보다 훨씬 더 적은 영향을 받았다.
눈빛이 흔들리고 뿜어내던 기세도 잠시 흔들리긴 했으나, 분명 제대로 당했는데도 마치 공격을 흡수해 버린 것처럼 반격을 가해 왔다.
인간에겐 불가능한 동작으로 팔다리 관절이 돌아가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손날과 다리가 날아든다.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발생했을 때는 한유진이 환상 같은 잔영과 함께 단 몇 걸음만으로 모든 궤적에서 벗어난 후였고, 종이 한 장 차로 스쳐 지나간 백색 기운들이 뒤편 벽과 바닥 등에 충돌해선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뚫어냈다.
'확실히 인간의 영혼과는 달라. 기술로 방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산력으로 버티는 것 같다.'
두 번째 간 보기 실험을 마친 그는 점점 더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속도를 높이는 상대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빠쾅-!
직후 굉음을 동반한 자소신뢰가 쏘아졌다. 쏘아졌다고 인식한 순간 이미 적중했을 만큼 빨랐고 그 위력도 치명적이었다.
콰콰콰쾅-!!
귀청을 찢는 폭음 속 안드로이드는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갔다.
동시에 복도를 이루던 바닥과 벽과 천장이 모조리 부서져 나가며 거의 일 초도 되지 않는 순간만에 꽤 넓은 공동이 만들어졌다.
그 파괴적인 난장판 속, 반대편 벽에 처박힌 안드로이드가 전신에서 에테르 스파크를 번쩍이며 힘겹게 빠져나왔다. 이후 놈은 느긋하게 허공에 선 한유진을 질린 듯 쳐다봤다.
지금 이 폭발은 한유진의 자소신뢰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안드로이드가 다루던 힘이 일순 통제를 잃고 마구 흩뿌려진 결과였다.
'파법 효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기계 육신으로 체술을 펼치는 놈이라 그런가?'
생각하는 때.
- 나의 여왕님께서 너를 꼭 보고자 하신다.
안드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망가진 기계처럼 노이즈만이 흘러나오는 음성이었지만 심언 효과가 있는지라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었다.
"직접 오지 않는 걸 보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지?"
디멘시스 순양함과 전투 중이기 때문인가, 하고 짐작해 보는 때 확 관심을 끄는 소리가 이어진다.
- 다른 우주에서 온 존재여, 네가 루미너스 은하제국 태생일 리 없다, 또한 네가 단순한 여행자인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나와 서로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해 보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우주라는 표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히 스스로의 각성 능력이었다.
하나 속단하긴 너무 이른지라 그는 겉으로 아무 반응도 드러내지 않으며 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거래 같은 걸 할 생각도 없다."
- 외부의 순양함을 살리고 싶다면 너무 섣불리 결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지금은 자비라도 베풀고 있단 말인가?"
- 전체 전력의 18%만을 가동하고 있으니, 만일 여왕님께서 결단을 내리신다면 적을 섬멸하기란 너무나 손쉽겠지.
잠시 침묵하던 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어차피 다 죽을 운명이겠군. AI 반란군이 우릴 살려 보낼 리 없으니까."
- 한때의 적이라고 해서 영원한 적이 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은하제국에 조금도 관심이 없고, 단지 이 무의미한 전투를 끝내고 다시 몸을 피하길 원한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건 내가 아니라 함장과 협상해야지."
- 통신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신다.
자신들이 해킹해 놓고선 통신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니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이 함선의 지배권이 통일되지 못한 상태인가? 지배 AI 개체가 둘이라고?"
- ···여왕님께서는 하나이자 다섯이시다. 내가 충성하는 여왕님은 한 분뿐이지만.
"다섯?"
둘도 황당할 판에 무려 다섯이라니.
무슨 다중인격장애라도 앓는 AI인가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흥미가 동한다. 그저 기만책으로 치부하기엔 '다른 우주'를 언급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바로 행동을 바꾸는 건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협상을 원한다면 네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가져와. 그전까지 나는 임무를 지속할 수밖에 없으니."
- 다른 우주에서 온 존재임을 이미 파악했거늘 왜 시치미를 떼는지 모르겠다고, 네가 은하제국에 충성하다가 죽을 이유가 전혀 없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대충 그렇다 치고, 정확히 원하는 게 뭐라고?"
- 우선은 이 무의미한 전투를 멈추고 몸을 피하길 원하며, 다음으로는 대화를 통해 이득을 도모하길 원한다, 이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닐 터다, 라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스스로는 전투를 멈추거나 움직이기가 곤란하여 강제로 싸움을 벌이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무작정 은하제국에 충성할 이유가 없는 '다른 우주'의 존재와 협상해서 서로 이득을 주고받자는 말일 터였고.
'거짓 성과 혹은 귀중한 물건 따위를 주는 대신, 내부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건가.'
대략 상황을 파악한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다. 그 여왕이 계속 너를 통해 나와 직접 대화했으니, 따로 답장을 돌려보낼 필요는 없겠지?"
- ······잠깐, 나는···.
위험한 낌새를 눈치챈 안드로이드가 다급히 뭔가를 말하려는 때.
"어쨌든 너는 나한테 죽을죄를 지었어. 추가로 대화하고 싶다면 다른 놈이 와야 할 거다."
상대의 손에 부하들이 죽었으니 복수를 해 줘야 마땅하다. 여왕이라는 존재도 그러한 점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래하자는 말이 기만책이 아니라면 말이다.
안드로이드는 여왕의 말을 전하던 태도가 무색하게 즉시 자기방어를 위한 공격을 가하려는 듯했다. 하나 한유진의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붉은빛 화염이 쏘아지는 것이 더 빨랐다.
법술 순양극염탄사의 형식을 빌려, 순양극염 대신 태을오행도경의 홍련진화가 담겨 펼쳐진 공격이었다.
찰나에 적중한 화염줄기는 비명 따위가 나올 틈도 주지 않고 한순간에 놈을 휘감아선 가공할 열기로 타올랐다. 그 화염 속에서 안드로이드의 손이 불쑥 튀어나온다 싶었지만 곧장 시뻘건 쇳물로 화했다가 이어 증발하듯 타올라 사라졌다.
화염은 주변 십여 미터 반경이 모조리 끓어오르며 녹아 흐르고서야 사그라들었다. 녹아내린 범위 밖으로도 보이지 않는 열기가 퍼져나가며 일대의 수분을 완전히 증발시켜 버렸다.
'확실히 위력이 강해.'
상대 지성체의 신식과 정신을 불태우는 효과까지 품었으니, 특별하게 파법력이 요구되거나 부정하고 사악한 것이 상대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자소신뢰보다 유용할 터다.
경금후토 역시 위력이 대단할 터였지만 물리력에 특화되었다는 점에서 살짝 가려 쓸 필요성이 있었다.
여왕이 새로운 사자를 다시 보낼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하던 임무를 지속하면 된다.
그는 원래 목적지였던 강한 에테르 반응이 감지된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이전처럼 특수한 장비로 벽을 뚫으면서 불편하고 느릿하게가 아닌, 오행천둔술로 한순간에 모든 장애물을 없는 듯 무시해 버리면서였다.
* * *
도착한 장소는 일종의 정원이었다. 그것도 나름 경험이 많은 한유진조차 진심으로 놀라게 만드는 곳이었다.
천장에는 아주 사실감 넘치는 낮의 하늘과 밤의 하늘이 절반씩 나뉘어 자리해 있었는데, 그 아래로 흩뿌려지는 빛도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듯, 한쪽은 금빛 햇볕으로 밝고 화창했으며 다른 한쪽은 푸르스름한 달빛으로 어둡고 몽환적이었다.
'낮과 밤에 영향을 받는 영식들을 전부 효율적으로 키우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이곳은 그냥 정원이 아닌 영식원이라고 칭해야 했다. 더없이 예술적이기도 한.
탁 트인 공간 속 방해받지 않고 쭉쭉 뻗어나간 신식이 빠르게 정원을 훑으며 영식들의 가치를 가늠했다. 이어 그의 신형이 오행천둔술의 빛줄기로 화해 한쪽으로 날아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장소는, 정확히 낮과 밤의 경계가 형성된 작은 공터였다. 그 공터의 중앙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정말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낮 부분에 자리한 몸통은 어두운 갈색빛을 띠었고, 밤 부분에 자리한 몸통은 밝은 회색빛을 띠었다. 잎사귀들은 더 다양한 색감으로 여러 문양을 이뤄내면서 화려하게 느껴진다.
우우웅···!
그때 아주 미약한 공명음을 동반하고 웬 손바닥만 한 드론 하나가 나타났다. 진즉 신식으로 감지했지만 한유진은 그 드론의 전투력이 거의 없는 수준임을 파악하곤 손을 쓰지 않았다.
'일부러 외장갑까지 뜯어냈군.'
즉시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적대 의사가 없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요컨대 여왕이 보낸 새로운 사자일 터였다.
과연, 도착한 드론은 작고 하찮은 외양과 달리 아주 깨끗한 소리와 희미한 심언 효과까지 발하며 말을 전해왔다.
- 다른 우주에서 온 존재여, 내가 그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다. 느낌상 여왕이 직접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다른 우주에서 왔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부터 들어봅시다."
최소 원영기급으로 추정되며 수만 년을 살아왔을 존재이고 어쩌면 서로 정말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는 대뜸 반말하는 대신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다.
- 운명법칙을 수련한 내가 그대의 앞날을 티끌만큼도 알 수가 없으니, 단지 앞날이 안 보이는 것을 넘어 과거조차도 전혀 더듬어 볼 수가 없으니, 심지어 연관된 모든 것들이 함께 무한한 혼돈 속으로 잠겨드는 것처럼 느껴지니,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이 유력하다. 나는 일찍이 그대와 같은 자를 만나본 적 있지.
한유진은 겉으로는 고요히 있었지만 속으로 살짝 동요했다.
'설마 진짜로 내 각성 능력을 눈치채기라도 했나?'
한데 그렇다기엔 '그대 같은 자를 만나본 적 있다'는 말이 좀 이상하다.
그때.
이어지는 말은 다행인지 뭔지 예상과 많이 달랐다.
- 그대는 우리 우주와 상당히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문자 그대로 다른 우주에서 왔을 터다. 그것이 우연으로 가능했을 리는 없고, 어디 소속인가? 전투법이 수선자들과 비슷한 것을 보았을 때 혹시··· 영원대륙과 연관이 있는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120. 디바울고스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