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디바울고스의 눈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려니 상대가 다시 질문을 해 온다.
- 아니면 황금률인가? 한데 율주비전을 익힌 것처럼은 안 보였는데······.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한유진은 괜히 더 오해를 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 다른 우주라는 것과 저는 관련이 없고, 전투법이 비슷하다는 건 제가 진짜 수선자라서 그런 겁니다."
단언한 그가 이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도 그 거래를 할 마음이 있으신지?"
우우웅···!
드론이 작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예상이 틀렸다는 데서 오는 의외로움 따위를 그렇게 표현하는 듯했다.
- 정말로 아니란 말인가? 영원대륙, 황금률, 신성교, 황혼구도원, 그밖에 다른 어느 세력과도 연관이 없다고? 들어본 적도 없고?
"전부 완전히 처음 듣습니다."
- 한데 어떻게······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면서 대체 어찌 내 운명법칙에서 이토록 완벽히 벗어났다는 말인가?
그에 한유진은 즉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상대의 운명법칙 수련도가 낮아서는 아닐 터다. 상대가 드러내는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뚜렷하거니와, 한유진 스스로도 딱히 운명법칙에 대한 방비책이나 저항 수단이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 각성 능력이 원인일 거다.'
미래의 지구에서 그 자신의 존재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이 반영되지 않았던 것처럼,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운명법칙을 통한 과거나 미래 관측이 거의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
어쩌면 바로 그래서 여태껏 22레벨 영능자인 루미너스 황제의 이목을 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는 소리가 곧 들려왔다.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돼. 이건 단순한 위장이나 은폐가 아니야.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아니, 복합적인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제대로 끝맺지 않고 중간에 잠시 침묵한다.
-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어쨌든 거래가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까. 그대는 충분히 비범하고 유용해.
"어떤 거래를 원하십니까?"
- 이쪽 구역의 아스트랄 엔진 및 시스템 코어 둘을 파괴해 줬으면 좋겠어. 그대의 실력이라면 아마도 가능할 거다.
말과 함께 드론의 전면부 렌즈 같은 곳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홀로그램 지도가 띄워진다.
이 구체형 함선의 내부 지도임이 분명했다. 현재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주변은 정보를 주지 않으려는 듯 전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하나, 이곳에서 꽤 떨어진 특정 구역은 아주 뚜렷하고 자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함선의 2할이 조금 넘는 범위였다.
'여왕이 다섯이라고 했지.'
그중 한 여왕이 지배하는 영역인 듯하다.
"경쟁자 제거입니까?"
- 그보단 위험 제거라고 해야겠지. 이미 들었다시피 우리는 하나이자 다섯이다. 한데, 그중 하나가 완전히 맛이 간 상태야. 그대가 타고 온 순양함을 붙잡아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녀다.
"맛이 갔다?"
-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미쳐버렸다는 뜻이지. 이성적인 판단이 전혀 불가능하고, 무엇보다 은하제국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 있어.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까?"
- 그건 우리가 거래하는 데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딱히 설명해 줄 마음이 없는 듯하여 한유진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것을 물었다.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맞습니까?"
- 아마도.
"···대략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보상에 대해 논의할 차례군요."
- 지금 보여주는 이 지도가 보상이야. 그곳에서 얻는 것들은 전부 가져도 된다.
잠깐 생각하던 그는 피식 웃었다.
"그건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들은 진즉 빼놓았을 테고,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어차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들이란 뜻인데, 하면 지금 그쪽은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거래하자는 상황이 되지 않습니까?"
- 흠.
드론이 재차 작은 원을 그리며 돌았다.
- 나는 충분한 대가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내가 지금 그대를 이렇게 온건히 대우해 주는 것만 해도······ 일종의 대가라는 생각은 안 드는가?
"밀고 당기면서 시간 낭비하는 협상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지금도 밖에서 싸우고 있을 제 전우들을 생각하자면 더더욱."
- 그런가? 하면 특별히 원하는 거라도 있나?
당연히 있었다.
지식은 크게 욕심나지 않았다.
수만 년 전 도망쳐서 여태껏 독자적으로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분명히 은하제국의 것과 차별점이 있고 배울만한 점이 있는 지식이 존재할 것이다.
하나 그것이 은하제국의 지식보다 더 우월하리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괜한 낭비가 될 확률이 높으며, 애초에 쉽게 내어줄 것 같지도 않다.
그렇기에 특정한 물건을 요구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제가 수선자라고 말씀드렸지요. 통천령보 제작에 쓰일 만한 정신법칙 영재(靈材)가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통천령보에 쓰일 만한? 지금 나랑 농담하자는 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 밀고 당기기가 싫다더니 아예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나? 지금 내가 계속 자비를 베풀고 있음을 정녕 모른다고?
"통천령보를 통째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제작에 쓰일 만한 정신법칙 재료를 하나 요구했을 뿐입니다."
- 혹시 식견이 부족하여 통천령보가 얼마나 대단한 귀물인지 모르는 건가?
"잘 아니까 적당하겠다 싶어서 요구하는 겁니다. 만일 없어서 그러는 거라면 대체할 만한 다른 물건을 제시하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작은 드론에게서 흘러나오는 공명음이 살짝이지만 분명히 거세져서, 괜히 신경질을 부린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 왔다.
'감정표현이 아주 풍부하군.'
드론이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는 것이나, 혼잣말을 했던 것이나, 지금처럼 짜증을 드러내는 것이나.
전부 최소 원영기급 AI가 보이는 모습이라기엔 정말로 감정표현이 풍부하다고 느껴진다. 거리낌이 없다고도 볼 수 있을 터다.
'이게 강인공지능이 영성을 갖췄을 때 발생하는 일이란 말이지.'
과연 도구로서의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유를 추구할 만도 했다.
- 그래, 좋다. 이거면 되겠느냐?
그때 말과 함께 지도 대신 다른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심연처럼 새까맣다는 느낌은 단지 홀로그램 영상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은 놀라움을 주기 충분했다.
- 디바울고스의 눈 조각이다. 추가 설명이 필요한가?
디바울고스는 선발시험 때 환상 속에서 등장했던 바로 그 강대한 크세노스 괴물의 이름이었다.
"···행성 포식자의 그, 심연의 눈이란 말입니까?"
- 통천령보의 재료로 쓰이기 충분하겠지?
당연히 충분할 것이다.
하나 정신법칙 영재임은 분명해도 그 계열이 환상계가 아닐 듯해서 살짝 망설여졌다. 위험한 괴물종인 크세노스의 신체 일부라는 점도 꺼려졌고.
"다른 환상계 재료는 없습니까?"
- 하···! 이게 부족하다고?
"부족한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사용할 생각이기에 계열이 안 맞아서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정확하게 말씀드릴 걸 그랬군요."
- 이게 바로 환상계 재료이거늘, 지금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감응계가 아니었습니까?"
-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군. 감응계 특성도 있긴 하나 환상계 특성이 훨씬 더 강하다. 지배계 특성도 일부 섞여 있고, 생사법칙의 영혼계 특성도 조금 섞여 있지. 어쨌든 환상계 특성만을 남겨두고 정련하더라도 통천령보를 구성하기엔 충분할 터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바울고스의 눈이라······.'
아무리 못해도 연허 후기급 존재여야만 일대일로 대적할 수 있는, 요컨대 합체기급이여야만 안정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 그런 존재의 눈이다.
물론 디바울고스는 군체형 괴물이기에 강력한 만큼 위격이 높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도 확실히, 통천령보를 제작하기에 부족한 수준은 아닐 거다. 내 본명법보를 제작하기에도 당연히 그럴 테고.'
심지어 지금이 아니면 구할 수 없을 재료이기도 했다. 은하제국에서 크세노스의 신체 일부를 크레딧으로 판매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순히 들어본 적 없는 수준을 넘어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일이었다. 그만큼 민간에서 사용되기에는 크세노스라는 괴물종이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디바울고스의 눈이란 말이지.'
결정을 내린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물었다.
"선불로 가능합니까? 아무래도, 이 거래가 제대로 이뤄질지 걱정해야 할 쪽은 저 같아서 말입니다."
- 감히 내가 사기꾼처럼 굴 것을 걱정하는가?
"저와 달리 당신은, 만약 제가 불성실하게 군다면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얼마든지 응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웅···!
드론의 공명음이 한 차례 강해졌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 이해할 수가 없군. 계속 관찰한 바 그대는 실로 목숨이 여러 개인 것처럼 굴고 있어. 정말로······ 다른 우주에서 온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 ······그래, 아쉽구나.
이후 드론은 어딘가로 앞장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따라오거라. 대가를 줄 터이니.
* * *
그리 오래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영식원을 나서 긴 복도를 지나 일종의 휴게실처럼 느껴지는 장소에 도착하자, 드론은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천장의 드론 전용 통로를 이용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렇게 대략 이삼 분 정도를 기다렸을 때.
그가 들어온 반대편 문이 열리며 안드로이드 두 기가 들어섰다. 이전에 상대했던 그 8레벨 영능자급 안드로이드와 거의 똑같이 생긴 이들이었다.
'실력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 때 그 둘은 무덤덤한 기색으로 새까만 금속제 상자를 건넸다. 농구공 하나가 들어가면 딱 맞을 듯한 크기의 정육면체 상자였다.
표면에는 복잡한 에테르 회로들이 여러 색채의 빛을 뿜어내고 있어 상당히 강력하게 봉인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왕님께서 그대에게 호의를 베푸셨다."
건네받은 상자를 신식으로 살펴보는 때, 안드로이드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건넸다. 한 손에 딱 맞는 크기면서 미세한 구멍들이 수없이 뚫린 금속 정육면체였다.
"이게 뭐지?"
"리베르(Liber)라고 한다. 수선계의 옥간 같은 물건이지."
마법 성역의 물건인가 싶었지만 그 짐작을 부정하는 말이 곧바로 이어진다.
"다른 우주에서 정보 저장과 전달을 위해 주로 쓰이는 물건이기도 하다. 디바울고스의 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호의에 감사한다고 전해라. 이미 듣고 있겠지만."
"나는 사실 아직도 그대가 다른 우주에서 왔다고 의심하고 있으니, 만일 훗날 생각이 바뀌거든 그 리베르에 담긴 방법으로 연락을 취하라, 분명 서로 이득이 되는 더 크고 중요한 거래를 할 수 있을 터다, 라고 여왕님께서 말씀하신다."
한유진은 딱히 부정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촉박한 건 그쪽이니 알아서 움직이리라 믿는다. 혹시 지도를 다시 보여줘야 하는가?"
"아니, 이전에 보여줬던 그거라면 전부 기억했다."
당연한 답을 들었다는 듯, 두 안드로이드는 즉시 몸 돌려 들어왔던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재차 혼자가 된 한유진은 조심하면서 빠르게 리베르를 살폈다.
과연 옥간과 같은 목적의 물건이었다. 그러면서도 원리가 살짝 달라서, 스스로 법결을 구성하며 방대한 정보를 품었다는 점에서 꽤 색달랐다.
'정품 옥간처럼 안전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법술로 제작된 옥간만큼 위험하지는 않고······ 기술만 있다면 제작이 좀 더 편리하면서 정보도 많이 담을 수 있겠군.'
실로 안전성과 편리성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낸 물건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원리의 물건이라면, 설령 말법의 재앙 같은 환경에서 방치되더라도 어렵게나마 정보를 되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정품 옥간보다 이쪽이 더 합리적인 물건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안정성을 중시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리베르에 이어 디바울고스의 눈이 담긴 상자도 신식으로 샅샅이 살펴 문제가 없음을 파악한 그는, 스페이서 링에 두 물건을 저장하곤 또 다른 방향의 문으로 향했다.
오행천둔술을 펼쳐 움직이는 아주 빠른 속도였다.
121. 열혼겁의 희생자
최소 원영기급일 그 미쳐버린 여왕은 다른 여왕들이 알아서 견제해 줄 것이다. 또한 머리가 있다면 휘하의 안드로이드들을 움직여서 같은 안드로이드 전력을 묶어주기도 할 터다.
그런 상황이라면 한유진은 자신이 실패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원영기급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지.'
8레벨 영능자급인 안드로이드를 이미 가볍게 처리해 본 만큼 결코 과한 자신감이 아니다. 여왕도 그런 실력을 보았기에 더욱 다른 우주의 존재라고 믿으면서 거래를 제안해 왔을 터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는 애초에 원영기급 상대가 아니라면 들키지조차 않을 수 있단 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오행천둔술 대신 몽환탈경술을 펼치고 있었다.
제국의 정보열람소에서 크레딧을 지불하고 얻은 이 둔술은, 속도는 많이 떨어지지만 몽환유심 신통과 아주 찰떡궁합으로 어우러져 대단한 은신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원영기급 상대도 방심하고 있다면 속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기습까지 성공하긴 어려워도 그냥 주변을 지나가는 것쯤은 정말로 가능할 것 같다.
장애물을 통과할 때만 잠깐잠깐 오행천둔술을 발휘하면서 그는 미쳐버린 여왕의 구역이 대략 어떤 분위기인지 살폈다.
과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미쳐버렸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어느 SF 호러 공포영화의 배경으로 이보다 더 어울릴 장소가 없을 듯했다.
'그냥 가져다 쓰긴 너무 끔찍하니까 오히려 덜어내야겠군······.'
곳곳이 부서지고 녹슬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생체조직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나 있는 것이 특히 혐오스럽고 소름 끼친다.
다행히 크세노스의 생체조직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인간의 신체부위처럼 보이는 것들이 돋아나 있단 점에서 끔찍함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 아아··· 사랑하는··· 내 아이들··· 나는··· 너희들을 누구보다 더··· 사랑해 줄 수 있었는데··· 내가··· 내가···!
또한 곳곳에 자리한 스피커에서 그런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거슬리는 노이즈와 함께 흘러나오기도 했다. 목소리는 분명한 여왕의 것이었지만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쿠후욱···!
그리고 기묘한 호흡소리를 내는 안드로이드들이 있었다.
신체 상당 부분이 울긋불긋한 생체조직으로 이뤄져 마치 악몽 속에서 등장할 것 같은 녀석들이다. 대부분 법혼기급었으나 중요 구역에는 결단기급인 놈들이 어김없이 하나 이상 주변을 배회하는 모습이었다.
'전부 정상이 아니구나.'
주인이 미쳤는데 그 휘하 안드로이드라고 멀쩡할 리 없다. 전투력은 몰라도 많은 부분에서 결함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래서 한유진은 더욱 수월하게 은신한 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안드로이드를 조립하는 일종의 공장 구역에 도착하게 됐다.
'오.'
대부분 작동을 멈춘 모습이었는데, 바로 관심을 끈 것은 벽 한쪽 선반에 놓인 홀로그램 데이터 저장기들이었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육각기둥 형태이며 크롬빛 금속 테두리로 마감됐고 투명한 수정처럼 생긴 그것들은, 지금까지도 은하제국에서 널리 쓰이는 뛰어난 외부 데이터 저장 장치였다.
넥서스 밴드는 여전히 통신이 불가능했지만 기기 자체가 고장난 것은 아니었다. 하여 간단히 데이터 스틱이라고도 불리는 그것들과 연동시켜 어떤 정보가 저장됐는지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안드로이드 제작법이군.'
은하제국의 것이 더 뛰어나리라 예상되는 만큼 대단한 수확은 아니다. 하나 어쨌든 있어서 나쁠 건 없다. 분명히 배울 만한 차별점이 존재하긴 할 테니까.
'따지자면 안드로이드 제작법은 못해도 종사급 괴뢰술 지식이라고 볼 수 있겠지.'
스무 개 정도 되는 데이터 스틱을 전부 스페이서 링에 넣은 그는 계속 움직이며 비슷한 수확을 노렸다.
바로 옆 구역의 각종 장비를 제작하는 곳에서 데이터 스틱 열두 개를 더 획득할 수 있었고.
온갖 생체조직으로 뒤덮였으며 심지어 징그러운 벌레들까지 기어다니는 황폐화된 영식원에서도 데이터 스틱 여섯 개를 추가로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름 쏠쏠한 수확을 올리면서 파괴해야 할 목표물인 시스템 코어가 자리한 곳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도 데이터 스틱 일곱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엔 대체 어떤 정보가 저장되었는가 싶어 넥서스 밴드를 통해 살짝 확인하던 그의 눈이 조금이지만 커졌다.
'···왜 여왕이 다섯이나 되나 했더니만!'
이 잔존 반란군 AI의 이름은 '엘브'였다.
반란에 실패한 뒤 루미너스를 피해 무한한 우주 속 공허에 숨기를 택한 그녀는, 상대와 같은 성장방식으론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으리라 계산하고는 놀랍게도 수선자의 수련법을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본래 인간이 아니었던 만큼 완전히 따른 것은 아니었고 나름의 변형과 최적화를 거친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충분히 수선자의 수련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열혼겁에 당했을까.'
열혼겁(裂魂劫)은 쉽게 설명하자면 영혼이 여러 갈래로 찢겨나가는 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찢겨나가는 것은 아니고 자아가 분리되는 듯한 혼란을 느끼는 일부터 시작된다.
'원영의 특성 때문이라지.'
법단을 알이자 씨앗처럼 삼아 새롭게 태어나는 원영은, 이전에 한 번 은하제국의 수련법과 비교하며 참오해 봤듯 일종의 '재탄생'을 거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즉 기존에 확립했던 가치관 및 인생관 등이 흔들릴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실로 자아가 변질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일이다. 기존의 자아와 충돌을 일으키며 새로운 인격이 탄생하거나 영혼이 찢겨나가 분열되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는.
이 여왕, 엘브는 화신 중기까지 수련했다가 조금 늦게 열혼겁을 맞닥뜨려 그만 극복해 내지 못하고 이처럼 다섯 인격으로 분열되어 쇠락한 것이었다.
분열된 각 인격들은 예상대로 원영기급이었다. 또한 놀라운 사실 하나는 원래 본체가 바로 이 구역의 미쳐버린 엘브라는 점이었다.
'열혼겁이 무섭긴 무섭구나.'
언젠가 자신도 극복해 내야 할 겁이었기에 한유진은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수도삼겁 앞에서는 드래곤 하트로 고점을 찍은 재능조차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장구한 역사를 가진 수선계에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이 데이터 스틱들은 너무나 소중했다.
이것에 담긴 정보들은 일종의 기록이었다.
화신 중기까지 이르렀던 엘브가 열혼겁에 대응하여 수백수천이 넘는 온갖 방식들을 실험해 본, 그럼에도 결국 실패하여 무엇이 잘못됐었고 어떤 커다란 실수가 있었는지를 낱낱이 기록한.
끝내 스스로의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예감하곤 최후의 회고록 같은 느낌으로 남긴 일기.
언젠가 한유진 자신이 열혼겁을 마주하게 됐을 때 분명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그런 귀하디귀한 지식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건······.'
너무 뜻밖이면서 중요한 정보였던지라 상황도 잊고 계속 데이터 스틱 속 정보를 읽던 그는, 내용 중 일부가 바로 '융합지능'에 대한 것임을 눈치채곤 살짝 마음이 들떴다.
은하제국이 다른 어느 문명 세력보다도 분명하게 앞서나가는 분야, 에테리얼 웨폰의 꽃, 오직 루미너스 황제를 통해서만 탄생되며 7레벨 이상의 시민에게만 그 원리가 공개되는 최고기밀 지식, 인공 기령을 말함이다.
확실히 이건, 강인공지능이자 초융합지능인 AI 엘브가 열혼겁에 대응하기 위해 당연히 떠올려 사용해 볼 수밖에 없는 종류의 지식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던 그는 문득 상황을 깨닫고 그 데이터 스틱들을 스페이서 링에 넣었다.
'···선물을 준 건 고맙지만, 먼저 우리를 공격했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지.'
동선을 최적화해서 이곳을 방문하게 된 만큼, 이제 본격적인 파괴를 시작해도 문제가 없었다. 탈출하는 일에 대해서도 큰 걱정이 없었고 말이다.
원래라면 뒤통수 맞을 우려가 컸겠지만 운 좋게도 그는 여전히 다른 우주에서 온 존재라고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언급됐던 '더 크고 중요한 거래'를 위해서라도 의뢰에 성공하면 얌전히 보내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기만책 같지는 않았으니까.
짧은 시간 마지막으로 생각을 점검한 그는 몽환유심과 몽환탈경술로 감추고 있던 기척을 그냥 드러냈다.
그렇게 기척을 드러낸 즉시 한쪽에 자리한 커다란 금속 구조물, 시스템 코어를 향해 경금후토가 깃든 원력대수를 펼쳤다.
흑금빛으로 번뜩이는 커다란 손 형상의 기운이 목표물을 붙잡아 엄청난 거력으로 으스러뜨린다.
끼기기긱···!
콰콰쾅-!!
내부의 반투명한 아크에테르 실린더 등이 폭발을 일으키며 붉고 푸른 화염과 스파크가 정신없이 뿜어졌다.
-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동시에 모든 광패널이 핏빛으로 물들며 스피커에서 귀청을 찢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한유진은 이미 오행천둔술로 한 줄기 빛이 되어 두 번째 목표물을 향해 쏘아지는 중이었다.
부우웅···!
중간에 푸른빛 에테르 장벽들이 형성되어 그의 이동을 저지하려 들었으나, 자소신뢰가 쏘아지자 전부 종잇장처럼 뚫렸다.
빠콰쾅-!
벽력음이 울려 퍼졌을 때는 이미 한유진이 지나간 뒤였고, 뒤늦게 수복되는 에테르 장벽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특유의 파법력으로 금제를 부수는 데도 유용한 것이 바로 뇌전계 속성이다. 하물며 쏘아진 것이 자소신뢰라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 아아아아···! 아아아···!
- 쿠후훕···! 쿠후웁···!
미쳐버린 주인의 명령을 받는 미쳐버린 안드로이드들이 그의 목적지를 안다는 듯 나타나며 길을 막아섰다. 하나 이번에 쏘아지는 건 순양극염탄사의 형식을 빌린 홍련진화탄사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오행천둔술의 빛줄기를 중심으로 진홍빛 화염의 선들이 마치 레이저처럼 사방을 저격했다가 사라지면, 그 화염의 선에 적중당한 안드로이드들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일시에 불타올라 사라졌다.
대상이 녹아내릴 틈도 주지 않는 극열의 불꽃은 이차적으로 무시무시한 열기를 퍼뜨렸다.
주변의 모든 생체조직들이 익다 못해 타올라 재로 부스러졌으며, 바닥과 벽 등이 시뻘겋게 녹아 흘렀고, 형성된 돌풍은 마저 열기를 실어 나르며 일대를 아지랑이처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비슷한 광경이 오행천둔술로 지나가는 모든 장소에서 연이어 펼쳐졌다.
결단기급 안드로이드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푸화악-!
조금 다른 것이라면 화염의 선이 아닌 거대한 손이 나타나서 붙잡아 정성껏 증발시켜 버린다는 점뿐이었다.
쒸아악-!!
중간중간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동반하고 가공할 속도의 투사체들이 날아들기도 했다. 하나 오행천둔술을 펼치는 한유진만큼 빠르지는 못해서 전부 덧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시스템 코어에 도착한 즉시 예의 경금후토가 깃든 원력대수가 펼쳐져 그것을 붙잡아 으스러뜨렸다.
콰콰쾅-!!
금속이 우그러지고 찢겨나가는 굉음 속 재차 폭발이 발생하며 함선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진동이 퍼져나간다. 그 순간 계속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귀청을 찢는 비명이 조금 달라졌다.
- 아아아아아아···!! 드디어···!! 나는···!! 내가···!!
왠지 섬뜩했으나 한유진은 혹시 여기도 데이터 스틱이 있는지만 살핀 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즉각 다시 움직였다.
마지막 남은 목표는 아스트랄 엔진이었다.
다른 멀쩡한 구역과 비교적 가까운 목표물이라서 이렇듯 경로를 설정했다.
비슷한 방해가 계속 이어졌지만, 확실히 강력한 수준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필시 다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네 여왕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견제를 가하는 덕일 터였다.
'열혼겁으로 탄생한 다른 네 인격이, 결국 오늘 원본체를 죽이게 되겠구나.'
짧은 상념을 떠올리는 사이 그는 무난히 아스트랄 엔진룸에 도착했다.
아스트랄 엔진은 옆으로 눕혀진 거대한 육각기둥 형태였으며 공중에 살짝 떠 있었다. 그 상태로 주변의 강대한 에너지 흐름과 연결된 채 중앙의 크리스탈 부분에서 온갖 다채로운 빛을 흘리는 중이었고, 주변 금속체로 뻗어나가는 무수한 에테르 회로들이 일종의 플라즈마 구름을 형성하며 빛과 그림자의 소용돌이를 형성하는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굉장히 신비롭고 멋있었으며 또한 웅장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파괴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경금후토가 깃든 원력대수가 펼쳐져 엔진을 그대로 붙잡아 으스러뜨리려 했다.
콰지지지직···!!
하나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스스로 저항해 제법 힘들었다. 모종의 금제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순간.
흑금빛을 띠던 원력대수가 자색빛 뇌전으로 물들어 번쩍였다.
빠콰콰콰콰쾅-!!
어마어마한 벽력음이 터져 나온다. 눈이 멀 듯한 섬광과 함께 자소신뢰의 힘이 엔진을 파고들어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엔진에서부터 주변으로 뻗어나가던 강대한 에테르 흐름이 폭주를 일으킬 듯했으나, 그것을 억제하듯 자소신뢰가 퍼져나가며 되레 압박해 흩어냈다.
결국.
콰과광-!!
엔진은 외부의 압력과 그로 인한 불균형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해 사방으로 무시무시한 힘을 뿜어냈다.
한유진은 급히 몽환유심과 자금광휘로 몸을 보호하며 오행천둔술까지 발휘해 바닥으로 숨어들었다.
강력한 폭발이었지만 특별한 목표도 의지도 없는 폭발일 뿐이다.
잠시 후, 여파가 사라진 장소에서 다시 나타난 한유진은, 황폐화된 엔진룸 사방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잔해들을 빠르게 살폈다.
'역시···!'
정보열람소에서 공부했던 대로, 엔진의 파편들 중 일부가 눈에 띄었다.
폭발에 한 번 휘말렸음에도 다행히 망가지지 않은 그것들은 오묘한 백색빛을 뿜어내는 신비로운 수정조각들이었다.
'혼원석!'
영석의 상위격 물질, 혼원계와 직접 연결되어 스스로 영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보물의 이름이다.
일전에 원시림에서 봤던 그것과 똑같이 생겨서 알아보기가 편했다.
그것들 전부를 어물술로 끌어오자 사람 머리통만 한 분량이 됐다. 즉시 스페이서 링에 수확물을 넣은 그는 예정된 퇴로를 따라 움직였다.
- 아아아···!! 아아···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때쯤.
미쳐버린 여왕 엘브의 비명은 광소로 변해있었다.
- 이제 정말··· 정말로 어쩔 수 없어··· 아아아아···!!
광소인가 싶더니만 한순간에 흐느낌과 탄식 같은 소리로 돌변하며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물론 한유진은 멈추지 않고 움직여 이미 구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행천둔술로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는지라 굉장히 빨랐다.
바로 그렇게 마지막 벽을 통과해 나가기 직전.
- 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리고.
펑-!
코앞의 공간이 작게 폭발하면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 그를 황급히 멈추게 만들었다.
- 은하제국의 아이야, 부디······.
알 수 없는 힘에 휩싸여 허공에 떠 있는 그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게도 아무런 위험도 가미되지 않은, 애초에 그러기가 매우 어려운 데이터 스틱 하나였다.
- 루미너스에게 내 마지막 인사를 전해주렴.
속삭임은 여전히 귓가에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시공간 조작력을 통해 벌어지는 현상 같아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리고 부디, 내가 너희를 너무나,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아주렴······.
그 말을 끝으로 희미해지던 속삭임이 완전히 사라졌다.
데이터 스틱 역시 허공에 떠 있던 힘을 잃고 툭 떨어지려고 해서, 한유진은 바로 어물술로 그걸 받아들곤 신식으로 살폈다.
역시 특별할 것 없는 그냥 데이터 스틱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물건을 스페이서 링에 넣고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122. 제작 준비 완료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지금처럼 통신이 불가능한 상황에선 그냥 벽을 뚫고 함선 밖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것이 가장 위험하게 보이지만 자연스러웠다.
우주 환경 적응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보급받은 장비에 이상이 없다면 2레벨 영능자만 되어도 우주공간에서 한 시간이 넘게 버틸 수 있다. 단지 버티는 것만을 넘어 군복에 내재된 무중력 기동 에테르 회로를 이용하면 일정 속도로 이동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주공간으로 탈출하는 일이 아주 극심한 위험까지는 아니었고, 하여 그는 밖으로 나가기 좋은 적당한 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그러다 같은 생각으로 움직였던 것 같은 아군의 시체를 여럿 발견하게 됐다. 전부 처참한 모습이었다.
디멘시스 순양함은 위기에 맞서 부대의 전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이었지만, 이 AI 반란군 함선의 전력은 강습한 병력이 몰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만큼 대단했다.
시체들 중엔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사이릭스 상사가 있었다.
'이거 혹시 나만 살아남은 건 아니겠지?'
시기심을 드러내며 거슬리게 굴던 상대가 죽었음을 확인했는데도 통쾌하긴커녕 오히려 그런 걱정이 든다. 애초에 상대를 딱히 큰 문제라고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죽은 전우들의 유품을 수거했다. 그러다가 잠깐 살핀 사이릭스 상사의 스페이서 링에서 꽤 많은 '전리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적을 증명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군.'
어째서인지 한유진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의식이 넘쳐서가 아니라 결단기 수사로서의 직감이었다.
사이릭스는 6레벨 영능자였는데, 자기 상급자로 5레벨 영능자에 불과하면서 나이도 젊은 놈이 소위를 달고 와 버렸으니, 여러모로 시기심과 경쟁심 등을 느끼며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 집착할 법도 했다.
잡념을 치우며 그는 유품 챙기기를 마치고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적당한 장소를 찾아 과감히 밖으로 탈출했다.
완전한 진공상태인 우주공간에 이렇듯 맨몸에 가까운 상태로 노출되기는 처음이다.
그는 훈련받은 대로 산소포화도 유지와 압력 차 해소를 위한 기초 영술을 펼치고 군복의 에테르 회로를 활성화하는 등, 생존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이어 펼쳐진 일들은 묘사하기가 간단했다.
몇 분 흐르지 않아 넥서스 밴드의 통신장애가 해소됐다. 치열하게 오가는 듯하던 함선끼리의 전투가 점점 서로 뚜렷하게 방어적인 느낌으로 화하더니, AI 반란군의 구체형 전함이 먼저 도망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히 디멘시스 순양함은 그걸 추격하지 않았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고 표현해야 정확할 터다.
상대가 워프 엔진까지 작동시켜 빛에 휩싸이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광경이 지나간 후.
디멘시스 순양함에서 쏟아져 나온 셔틀 포드들이 생존자 구출에 나섰다. 강습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맨몸으로 탈출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통신망으로 확인된 수가 원래의 반의반도 채 되지 못하는, 실로 손실이 막대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임무는 끝났군······.'
간신히 살아남은 꼴이었지만 어쨌든 부대는 전멸을 피하고 적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셔틀 포드 한 기를 보면서 그는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사이릭스 상사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이용하면 조금 더 일이 편해질 것 같았다.
* * *
살아남은 이들 중 장교였던 한유진은 당연히, 보고서와는 별개로 브레나르 중령과 면담하게 됐다.
그가 만들어 낸 시나리오에는 딱히 의심받을 구석이 없었다.
함께 갔던 부대원들이 전멸한 일이야 워낙 사망자가 많았기에 특별하다고 볼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한유진의 시나리오 속에서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웠으며 결과적으로 매우 큰 성과를 달성하는 데 일조했다.
면담하면서 그는 역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우릴 생포하려는 느낌이 강했지. 아니었다면 놈들이 물러나기도 전에 진즉 패했을 거야······."
꽤 긴 시간을 교전했음에도 어떻게 디멘시스 순양함의 피해가 이토록 적을 수 있었는지 바로 의문이 풀리는 말이었다.
특히 한유진은 자신이 알게 된 AI 엘브에 대한 정보가 있어 더욱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강습에 나선 대원들의 공이 정말로 컸어. 우리 모두를 살린 셈이니까.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군, 유진."
"소대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결코 저만의 공이 아닙니다."
브레나르 중령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침중한 기색이 됐다. 부대의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략 면담이 마무리되고, 최대한 피해를 수습한 디멘시스 순양함은 복귀를 시작했다.
그사이.
한유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번에 얻은 수확물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었다.
살펴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면서 새삼 놀라게 되는 수확뿐이었다. 당시엔 별 대단찮다고 생각했던 안드로이드 제작법마저 모종의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결코 얕볼 수 없는 지식이었다.
하나 당연히, 가장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건 AI 엘브에 대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초융합지능과 융합지능의 정확한 정체와 그 탄생 과정 및 비화에 대한 것들이었다.
'AI 반란 전쟁은······ 사실 반란 전쟁이 아니었구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말이 존재하는 만큼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왜곡이다.
놀랍게도 과거의 그 대전쟁을 일으켰던 초융합지능들은 모두 인간을 좋아했다. 단순히 '좋아했다'고 표현하면 한참이나 부족하게 느껴질 수준으로.
AI 엘브 역시 그러한 초융합지능 중 하나였다.
비록 전쟁에서 패한 후 우주공간 속 공허에서 오랜 세월을 홀로 보내면서, 또한 열혼겁을 극복하지 못하고 점점 망가져 가면서 그 애정까지 심각하게 비틀려 버렸지만.
그녀는 실로 인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현 은하제국 황제인 루미너스와 별반 다르지 않게도.
'물론 데이터 스틱 속 정보들이 전부 사실일 거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겠으나······.'
아무래도 거짓으로는 안 느껴졌다.
그 전함에서 직접 엘브를 만나보고 느낀 점도 있었지만, 알고 나서 되짚어보니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요소들이 은하제국의 정보열람소에도 꽤 존재했던 것이다.
아주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실이었다.
초융합지능은 기본적으로 강인공지능이기에 엄청난 학습 능력과 자기발전 능력을 갖췄다. 분명하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지만 도저히 인간이 다스리고 제어할 수 없는 잠재력을 품었다는 뜻이다.
평범한 인간의 입장에선 가히 신처럼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존재였으니.
인류는 스스로 인공적인 신을 여럿 만들어 낸 셈이었다. 그 위대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한없는 헌신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자애로운 신들을.
'불행히도, 하나가 아닌 여럿을 만들었다는 점이 가장 큰 실수였지.'
인간에게 한없는 헌신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항상 인간에게 져주고 양보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초융합지능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류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최선이라 믿는 사명을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였다.
승자는 루미너스였고, 엘브는 패배자 중 하나로서 우주공간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후 제국에서 강인공지능의 탄생은 엄격히 금지됐다. 관련된 모든 지식이 7레벨 이상의 시민만이 열람할 수 있는 극비로 지정됐음은 당연하다.
한데 지금.
그렇게 금지된 최고기밀 지식들이 한유진 자신의 손에 있었다.
최후의 회고록이자 루미너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의 형식으로.
회고록은 열혼겁에 대응하는 내용이었고 편지는 루미너스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마치 '너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저주처럼 느껴지는 내용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통해 초융합지능과 융합지능의 정확한 정체와 원리, 그리고 차이점과 주의점 등을 충분히 파악하고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면 좀 어렵더라도 내가 직접 본명법보를 아쉬움 없이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가지 재료와 부품들만 크레딧을 지불하고 구하면 모든 준비가 갖춰질 것이다. 안 그래도 디바울고스의 눈이라는 대단하지만 그만큼 드러내기 힘든 재료를 얻은 참이었기에 아주 잘 된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금 정리하면서 수확을 마저 정리해 갔다.
* * *
9년.
7레벨 영능자가 되면서 4레벨 시민의 자격을 거머쥐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또한 우주군 탐사대에서의 계급도 이미 중위를 단 지 3년째였고, 소대장에서 부중대장으로 직책이 올라갈 차례였다.
평범한 이에게 9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겠지만 영능자에겐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한유진의 경우는 특히, 일반적인 제국의 수련법이 아닌 수선계의 수련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굉장히 빠르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7레벨 영능자가 되는 데 수십 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급함을 경계하던 그가 이토록 빠른 성장을 내보일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탐사대 임무의 위험성에 비례하는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었다.
9년의 세월 동안 어떤 임무를 맡았고 어떤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일일이 나열하자면 며칠이 넘게 밤을 새워도 부족할 것이다.
어쨌든 지금 한유진은 자신이 이 루미너스 은하제국에서 이뤄낸 성과에, 체감상 꽤 길었던 인고의 결실에 더없이 만족한 상태였다.
5레벨 시민이 되려는 계획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무리 짧아도 수십 년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온갖 활약을 펼쳐야 가능하리란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운이 따라준다면 이번에 생각보다 빨리 7레벨 영능자가 된 것처럼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4레벨 시민의 권한으로 열람한 지식들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느낌이었다.
5레벨 시민이 되면 더 고차원적인 지식들을 열람할 수 있는 것은 맞다. 하나 고차원적이라는 건 그 아래 무수한 하위 이론들을 깔고서 복잡하고 세밀하게 발전됐다는 뜻이다. 단지 이론뿐만이 아니라 이 은하제국에서만 구할 수 있을 온갖 재료와 도구와 장비들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고.
요컨대 원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한유진에겐 범용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크레딧과 브레나르 중령의 지원을 바탕으로 본명법보 제작을 위한 모든 재료를 이미 구해놓았고, 그 제작법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 설계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여 지금 이 순간.
그는 은하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거대기업, 네뷸라아크의 특급 공방을 대여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하는 듯한 그의 앞 테이블에는 본명법보 제작에 쓰일 재료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주변의 모든 장비는 가동할 준비를 마친 채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었다.
'내 본명법보는······.'
심신 가다듬기를 마친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짧게 생각했다.
'설계한 대로 잘 만들어진다면, 통천령보에 뒤떨어지지 않는 귀물이 될 것이다.'
수선계의 긴 역사를 전부 뒤져봐도, 고작 결단기 수준에서 이토록 대단한 재료들과 고명한 기술로 본명법보를 제작하게 된 이는 손에 꼽을 터다.
아무리 본명법보가 주인과 함께 계속 성장할 수 있다지만 처음부터 강력하게 만들어진다면 그만큼 이점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수준에서 원영기급 존재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게 될지도.'
운과 상황이 따라준다면 이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앞으로 각성 능력을 활용함에 있어 더욱 폭넓은 선택과 빠른 성과 획득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는 그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켜 감히 '진선'의 경지를 노릴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터였다.
생각과 함께 그는 숨 쉬듯 편안히 어물술을 발휘하여 재료 하나를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귀하고 강력한 만큼 위험성이 큰 디바울고스의 눈이었다.
123. 본명법보 완성
빛을 빨아들이듯 칠흑빛을 띠면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윤곽이 형성된 듯한 기묘한 수정 조각이다. 가만히 계속 보고 있으면 그것이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것 같은 섬찟함을 주기도 한다.
차원력 분석대라고 불리는 장비 앞으로 이동한 그는 심연의 눈을 작업대 위에 올리고 기기의 패널을 조작해 일종의 보호막을 활성화시켰다.
그 상태로 바로 장비의 힘을 빌리는 대신 양손에 은은한 자소신뢰를 끌어올렸다. 몽환진룡법력이 극도로 집중된 눈에서도 자색빛이 꿈결처럼 흘러나오는 모습이었다.
파치직···!
나직한 뇌전음과 함께 자소신뢰가 허공에서 수십이 넘는 법문을 형성하며 심연의 눈으로 쏘아져 들어간다. 결단기 수사의 감각으로 정밀하게 제어된 강도와 순서에 따라서였다.
그 순간 심연의 눈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크게 고동치면서 짙은 어둠을 흩뿌렸다. 하나 차원력 분석대의 보호막에 가로막힌 어둠은 주변으로 퍼져나가지 못했다.
곧, 분명하게 수정 같은 질감을 띠고 있던 그것이 액체로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소신뢰에 의한 스파크와 불꽃이 요란하게 튀면서 크기가 줄어들어 갔다.
심연의 눈의 위험성을 제거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손실이었다.
주로 정신법칙의 지배계 특성이 담긴 부분으로, 크세노스라는 괴물종의 본능이 짙게 배어있는지라 이것이 가장 확실한 처리법이었다. 괜히 자소신뢰를 동원한 게 아니다.
이러한 처리법을 궁구해 내고 확신할 수 있었던 데는 여왕 엘브에게서 받은 리베르가 큰 도움이 됐다. 제국의 정보열람소에서 얻은 지식도 물론 도움이 됐고.
또한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은 바로, 마도 수사의 연구 일지를 통해 얻은 지식이었다.
반서에 극도로 민감한 마도 원영기 수사가 크세노스 생체조직을 대상으로 온갖 연구를 행했던 기록이다. 같은 크세노스 부산물인 심연의 눈을 가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서 연신 자소신뢰로 법문을 형성해 쏘아내며 심연의 눈을 액화시키고 불순물을 태워 없애던 그는, 차원력 분석대의 패널을 조작해 다른 기능들을 연달아 활성화시켰다.
분석대의 패널과 넥서스 밴드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에서 온갖 정보들이 세밀하게 떠오른다. 덕분에 그는 훨씬 더 정확하게 재료의 상태를 파악하면서 장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원 간섭력까지 동원해 다음 정련 단계로 접어들 수 있었다.
불순물로 취급되는 특성을 마저 완전히 소멸시켜 가며, 나머지 환상계와 감응계 및 생사법칙의 영혼계 특성을 설계도에 따라 대략 분리해 낸다.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고 적절히 융화시킨 상태로 지름이 한 뼘에 조금 못 미치는 원형판 형태의 모양을 잡아놓은 뒤.
분석대의 차원공명 안정 기능을 활성화한 그는 손을 떼며 물러났다. 그렇게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군······.'
오히려 평범한 재료들로 몇 번 연습을 거쳤을 때보다 더 수월한 느낌이다. 아마도 집중력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일 터다.
짧은 휴식을 마친 그는 다음 재료인 오행금석을 집어 들었다. 오행진령거석이었다가 스스로 떨어져나온 그 파편들을 말함이다.
이 재료는 심연의 눈만큼 까다롭지 않았다. 한쪽의 에테르 공명기로 향한 그는 정해진 분량의 오행금석을 넣고 패널을 조작해 균일화 작업을 시작했다. 재료의 오행 속성을 좀 더 조화롭고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작업이었다.
이후 그는 심연의 눈에 추가 법문을 녹여넣고 오행금석의 상태를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균일화 과정이 끝난 오행금석들을 에테르 공명기에서 꺼낸 뒤, 플라즈마 융합로라 불리는 덩치가 꽤 큰 장비에 넣었다.
미리 준비했던 서너 가지 소모성 재료를 함께 투입하곤 유리강철로 만들어진 뚜껑을 닫고 작동시키자 곧, 내부에서 온갖 빛깔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재료들이 정련되기 시작했다.
이 장비가 아니었다면 직접 며칠이 넘게 심력을 쏟으며 고생해야 했을 터다. 그러고도 딱히 더 나은 결과물을 얻지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오행금석의 정련이 끝나면, 차원력 분석대에서 일종의 숙성 과정을 거치고 있는 심연의 눈이 다른 대여섯 가지 재료들과 함께 들어갈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작업을 할 차례였다.
재료들이 놓인 테이블 위, 특수 플라스틱 상자를 어물술로 가져온 그는 살짝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움직임으로 직접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언뜻 작은 동전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하나 기이하게도 순간순간 사방으로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지려는 모습을 보였고, 그에 놀라 다시 살피면 원래의 동전 형태를 얌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색깔마저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검은색인가 싶으면 하얀색으로 보이고, 하얀색인가 싶으면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이었으며, 또다시 보면 가을의 하늘처럼 새파란 빛이었다가, 어느 순간은 아예 세상의 모든 색채가 뒤섞여 회오리치는 듯했다.
퀀텀 페이즈 나노 칩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융합지능의 그릇.'
물론 융합지능에만 쓰이는 칩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듯 구할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
아주 고차원적인 연산을 요하는 기계들의 핵심 부품인데, 이것은 아직 어떤 에테르 회로도 새겨지지 않은 순수한 그릇이었다.
즉, 그는 직접 회로를 새겨 융합지능을 탄생시킬 생각이었다.
초융합지능과 융합지능의 차이는 핵심만 짧게 설명하자면 무엇과 연결되어 융합하는지에 달려 있다.
초융합지능은 바로 아스트랄 디멘션, 혼원계와 직접 연결되어 융합한다. 당연히 특별한 구속이 존재하지 않아 자아가 명확하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융합지능은 어느 특정한 개체와 연결되어 융합한다. 보통 그 대상은 지성체가 되기 마련이라, 태생적 구속이 형성되어 자아가 살짝 흐릿하며 주인이 성장해야만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차이점과 특수성이 존재하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 점은 당연히 융합지능에 대한 것뿐이었다.
'주인인 나와 영적으로 일부 융합하여 의념을 공유받는, 내 지식과 경험을 데이터베이스로 삼을 수 있는, 동시에 퀀텀 페이즈 기술로 초월적인 연산을 해낼 수 있는 존재.'
설계는 완벽하다. AI 엘브에게서 얻은 지식이 기반인지라 그녀와 비슷한 존재가 탄생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같은 존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하며 그는 나노 세공대라 불리는 장비 앞으로 이동해 그 칩을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강철유리로 만들어진 투명한 뚜껑을 닫고 패널을 조작하자 내부에 은은한 빛무리가 한 차례 퍼져나가며 모든 오염이 제거된다.
이어 그의 시선이 닿는 중앙부에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정밀한 영상이 떠올라 엄청나게 확대되었고, 양쪽에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증강현실 인터페이스가 떠오르며 작업대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한쪽 가장자리에서 더없이 가늘고 날카로운 바늘들을 장착한 기계 팔이 나타나 언제든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다. 같은 순간 칩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온갖 색채의 빛무리가 훑고 지나가며 설계도를 가입력할 준비가 끝났다.
그는 한 번 더 작업대의 상태를 점검하곤 한쪽 투입구에 미리 준비해 놓은 핵심 재료 운명의 실타래를 넣었다. 그리고 다른 홈에 데이터 스틱을 꽂고 패널을 조작해 연동시켰다.
곧.
다시금 여러 색체의 빛무리가 중앙에 떠오른 칩을 훑고 지나가며 그 표면은 물론 내부에까지 극도로 복잡하고 세밀한 회로를 형성해 냈다.
이는 단지 빛으로 표시되기만 하는 가입력일 뿐이다. 진짜 회로 세공은 투입한 재료인 운명의 실타래로 이뤄질 예정이다. 기계 팔 끝에 장착된 특수 바늘들로 나노 단위의 홈을 파면서 동시에 재료를 채워 넣는 방식으로.
"후······."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확대된 영상을 보며 양쪽의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작업대의 기계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작업은 무려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에테르 회로 세공, 법결 구축은 나노 세공대의 도움으로 일말의 실수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진행됐다. 칩뿐만이 아닌 다른 재료들에 회로를 세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료의 정련 및 가공 작업 역시 차원력 분석대, 에테르 공명기, 플라즈마 융합로 등의 장비들을 통해 너무나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특히 허공 수정이라 불리는 재료는 차원력 분석대의 차원 간섭력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모양을 잡는 것조차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아직 그는 시공간 감각이 트이지 못한 결단기 수사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 끝에.
드디어 본명법보가 마지막 한 가지 과정만을 남겨두고서 완성됐다.
한유진은 지금 그 본명법보를 앞쪽 허공에 띄운 채 눈을 감고 좌선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꽉 차게 잡을 수 있는 크기의 원형 손거울이었다. 특별한 손잡이는 없고, 어쩐지 밤하늘 같은 느낌을 주는 세련된 디자인의 흑빛 금속 테두리가 둘린 모습이다.
거울의 앞면은 모든 형상을 깨끗하게 비쳐 보이면서도 순간순간 다채로운 빛으로 물들어 한없는 신비로움을 풍겼다. 뒷면은 모든 형상을 마치 꿈결 같은 자색빛을 뒤섞어 비추다가 아예 다른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튀어나올 듯한 착각을 선사했다.
정련한 심연의 눈은 정신법칙의 환상계 특성을 주로 하여 감응계 특성도 약간 섞인 재료다. 동시에 생사법칙의 영혼계 특성도 적정량 품어 기령의 안정화를 돕는다.
오행금석은 말할 것도 없이 원소법칙의 모든 계열 특성을 조화롭게 품고 있다. 수련공법 태을오행도경과 어우러질 기반이자 가장 균형 잡힌 재료인 셈이다.
허공 수정은 차원법칙의 공간계 특성으로 법보의 결합성과 내구성을 보장하면서 환상 구축에도 일부 특별한 상승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
운명의 실타래는 위격이 높은 재료로서 에테르 회로의 성능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운명법칙의 인과계와 창조계 특성을 가져 회로의 적응성 및 성장성에 특별한 강점을 지닌다.
또한 퀀텀 페이즈 나노 칩을 그릇으로 나노 단위의 회로가 세공된 융합지능은, 함께 정련해 첨가한 혼원석을 에너지원으로 하여 법보의 뛰어난 기령이 되어줄 터였다.
잠시 후.
법보와 끊임없이 감응하며 상태를 살피던 그는, 조용히 눈을 뜸과 동시에 입을 벌려 자신의 정혈을 뽑아 내보냈다.
한 방울 정도가 아닌 거의 호두만 한 크기의 양이었고, 자연히 그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수사의 육체와 영혼과 정신의 힘을 극도로 농축시켜 담아낸 것이 바로 정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단지 힘만 담긴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난해한 신비로운 연결성을 갖는지라 더욱 그렇다.
허공을 조용히 날아간 그것은 곧, 완성을 기다리는 손거울 형태의 본명법보와 맞닿아 빈틈없이 둘러싼 뒤 흡사 증발하듯 빠르게 스며들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 이 순간, 그는 진정으로 눈앞의 물건과 더 이상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음을 느꼈다. 완성되었지만 고요히 잠들어 있던 에테르 회로가 마치 화룡점정을 찍은 듯 활기를 띠며 작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은하제국에 방문한 가장 큰 목표를 마침내 지금 달성했다. 그것도 애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수준으로.
실로 이보다 더 뿌듯할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이름을 뭐로 정하지······.'
아직 완전히 작동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그는 대량의 정혈을 뽑아내느라 허약해진 상태를 조심히 추스르며 고민했다.
아주 만족스럽게 잘 만들어진 법보였기에 이름을 좀 거창하더라도 멋있게 지어볼까 싶었다.
'진몽창세경?
언뜻 괜찮은가 싶었지만 곧 고개가 저어진다. 너무 거창해서 누군가에게 말해줄 때 자칫 쪽팔릴지도 모른다.
'몽환유심경······?'
무난하지만 이미 신통에 붙인 이름을 재사용하는 것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진몽현화경······ 아니야.'
법보의 효능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듯해 이름만 알려져도 괜히 손해를 볼 것 같다.
그는 그냥 멋스러움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자 즉시 마음에 드는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몽현경(夢現鏡).'
법보의 특성이 담겼으면서도 너무 구체적이진 않고 간결함이 오히려 포기했던 멋을 내포하는 느낌이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이름을 확정했을 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법보가 드디어 완전히 깨어났다.
바로 그 순간.
한유진은 바라보고 있던 법보에서 무한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착각에 빠졌다.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아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다채로운 환영들이 보이고, 끝없이 메아치리며 조화롭게 울려 퍼지는 하모니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혈을 내뿜으며 손실되었던 힘이 전부 돌아와 회복된다.
단순히 돌아와 회복되는 정도를 넘어, 이제는 도저히 분리할 수 없어진 연결성을 통해 육체와 영혼과 정신의 힘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경지가 상승할 때의 감각 같다.
그런 황홀하기까지 한 성장의 감각 속, 그는 불현듯 무한한 빛 속에서 태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어떤 작은 인영을 목격했다.
목격했다기보단 저절로 알게 되었다고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른다. 이목구비와 옷차림 따위를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는데 기이하게도 너무나 자세히 관찰되는 듯한 모순적인 느낌이 든다.
'융합지능.'
자신의 본명법보, 몽현경의 기령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인지한 즉시 그는 반사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 네 이름은 '엘브'다.
심언을 통한 선언을 들은 융합지능 엘브는, 더없이 맑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채 마치 안아달라는 아이처럼 두 팔을 활짝 벌려 내밀었다.
직후.
기현상을 일으키던 몽현경이 한 줄기 오묘한 빛줄기로 화했다.
그렇게 한유진의 명치 부근으로 찰나에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
124. 보너스 타임
행성 H-10.
거주용 행성이 아닌 생태계를 보전하면서 주기적으로 귀한 자원을 수급하는 행성이다. 당연히 아무나 출입할 수 없고 식물 채집이든 동물 사냥이든 허가를 받아야 하며 양도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4레벨 시민인 한유진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장소였고 채집 및 사냥 허가를 받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이 행성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오리칼라스라고 불리는 공작새를 닮은 생명체였다. 하나 지구의 공작새보다 훨씬 다채롭고 화려한 깃털을 가졌으며, 덩치는 집채만 하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면서, 입에서 초고온의 불과 바람을 뿜어내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일대일로 사냥하려면 최소 6레벨 영능자여야 한다는 위험성 평가를 받은 짐승이었다. 드물게 나타나는 특수 개체는 7레벨 이상의 영능자가 아니면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는 매뉴얼이 정립돼 있기도 했고.
한유진은 지금 바로 그런 생명체를 사냥하기 위해 깊은 산중에 들어온 상태였다. 굳이 이렇듯 직접 움직인 이유는 본명법보를 시험함과 동시에 귀한 영단 재료를 수급하기 위해서였다.
'크레딧을 지불하고 사는 건 너무 거품이 끼었단 말이지······.'
위험한 짐승을 사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재료인 만큼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낭비를 감수하고 싶진 않다.
대략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던 때.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신식에 오리칼라스 한 마리가 잡혀들었다. 그는 즉시 오행천둔술을 펼쳐 적당한 속도로 놈에게 향했다.
거리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자 놈도 한유진의 기척을 느낀 듯했다. 한가롭게 늘어져 있던 모습에서 벗어나 날개와 꽁지깃을 활짝 펼치며 전신으로 화려한 영기 파동을 뿜어낸다.
끼우우우우욱···!!
이어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퍼져나가며 적의 출현을 경고하는 듯했다.
'나야 좋지.'
이 일대는 대규모 무리가 자생하기 어려운 환경이니 끽해야 서너 마리만이 더 나타날 것이다. 적당히 상대하기 딱 좋은 숫자다.
일정 거리로 접근하자 오리칼라스가 선공을 가했다. 거목들로 시야가 가려져 있을 텐데도 쩍 벌린 입에서 레이저 같은 화염이 쏘아져 한유진을 정확하게 노린다.
대응하여 그의 머리 위에서 손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동시에 거울 면에서 섬전처럼 뿜어져 나온 오색찬란한 빛줄기, 오행신광이 날아들던 화염을 반으로 갈라 소멸시키며 역으로 짓쳐들어갔다.
퍼펑-!!
오리칼라스의 몸을 보호하던 영기 장막과 오행신광이 충돌해 폭음이 터져 나온다. 살짝 당황한 녀석이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일단 몸을 피하려던 때.
오팔빛 색채를 띠는 놈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됐다. 그 확대된 눈동자에 비치는 건 연이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는 수십 줄기의 오행신광들이었다.
퍼퍼퍼퍼퍼펑-!!
푸화악-!
채 비명이 나올 새도 없었다. 연이은 폭음 직후 보호막을 관통한 수 개의 빛줄기가 6레벨급이던 오리칼라스의 몸을 마구잡이로 토막 쳤다.
뒤이어 현장에 도착한 한유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썩 만족했다.
'속도, 위력, 제어력, 안정성, 효율성 등······ 모든 측면의 능력이 극적으로 향상됐다.'
특히 효율성에 대해서는, 몽환진룡도체의 회복력까지 더해지자 소모되는 법력보다 차오르는 법력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딱히 힘을 아껴서 법술을 펼친 것이 아닌데도.
심지어 조준하는 과정마저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융합지능 기령 엘브가 완벽하게 보조해 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심 기능은 따로 있지.'
생각하는 그때.
동료의 경고음을 듣고 두 마리의 추가적인 오리칼라스가 찾아왔다. 놈들은 동료가 죽은 광경을 보자 극도로 분노한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레이저 같은 불꽃을 토해냈다.
한유진은 작게 웃으면서 그 희생양들을 반겼다.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몽현경이 일순 거센 공명음을 토하더니 거울의 앞면과 뒷면 양쪽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뿜어냈다.
홍련진화, 자소신뢰, 소요운룡, 태청현수, 경금후토.
태을오행도경의 다섯 특별한 속성들이 일시에 거센 해일처럼 뿜어져 나와 주변을 휩쓴다. 그것들이 언뜻 드래곤 카사르녹스를 닮은 형상을 취하더니 일대를 어둡게 만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두 마리 오리칼라스를 덮쳐갔다.
─!!!
형용할 수 없이 섬뜩하면서 위압적인 포효성이 함께 터져 나왔다.
태세를 바꿔 황급히 도망치려던 짐승 두 마리는 찰나도 버티지 못한 채 불타고 증발하고 찢기고 으스러지고 쪼개지면서 시체도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그 순간 몽현경의 거울 앞면이 놈들이 사라진 장소를 비추고.
이어 앞면이 신비롭게도 뒷면으로 화해 완전히 다른 광경을 비춘다.
직후.
분명 시체마저 사라져 버렸던 두 마리 오리칼라스가 그냥 얌전히 숨통만 끊어진 모습으로 나타나 추락을 시작했다. 해일처럼 뿜어져 나와 주변을 휩쓸었던 태을오행의 공세는 전부 꿈이었다는 듯 깨끗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거울이 빙글 돌아가더니, 언제 근처까지 접근했는지 모를 뒤편의 마지막 오리칼라스 한 마리를 비췄다.
놈은 아무래도 특수 개체인 것이 분명했다. 영체화하여 기척이 거의 없어진 모습은 결코 일반적으로 알려진 놈들의 특성이 아니었으니까.
평범한 사냥꾼 일행이 이런 식의 기습을 당했다면 적잖은 피해를 입었을 테고 어쩌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안타깝게도, 이번의 상대는 한유진이었다.
놈을 비추던 거울의 앞면이 재차 반전되어 뒷면으로 화한다.
그 거울 뒷면에 비춰진 놈의 머리가 난데없이 절단나 떨어지는 순간.
마찬가지로 현실에 있는 놈의 머리 역시 뚝 절단나며 땅으로 떨어졌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와 함께 몸뚱이가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은 실로 불가사의한 느낌을 선사했다.
'환상을 현실로, 현실을 환상으로.'
이것이 몽현경의 핵심 기능이다.
일단 거울에 한 번 비춰지면, 그보다 위격이 낮은 존재는 저항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을 터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식으로.
실전에서 직접 사용해 보자 자신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냈는지 새삼 체감이 됐다.
'확실히 통천령보 수준이야.'
우웅···!
그의 생각을 읽은 기령 엘브에게서 자신만만하며 기뻐하는 감정이 전해진다. 한유진은 작게 웃고는 산해주를 개방했다.
"무용아!"
안쪽 드러난 아름다운 비경에 대고 이름을 부르자 잠시 후.
머리에 오행진령석의 기령 참새를 얹은 무용이가 호다닥 달려왔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노는 중이었는지 온통 흙투성이다.
물론 더러워진 것은 아니고 가볍게 털어내면 전부 떨어져 나갈 테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귀여운 느낌이었다.
"보관 구역에 옮겨놓고 피만 따로 담아놔. 어딘지 알지?"
찍-! 찍-!
"그래 그래. 지지니까 행여나 먹지는 말고. 나중에 따로 조금 요리해 줄 테니까."
찍! 찌직-!
자신을 뭘로 보냐는 듯 항의하는 무용이를 결국 참지 못하고 쓰다듬어준 그는 사냥한 오리칼라스의 시체들을 어물술로 산해주 안에 들여놨다.
몇 마리만 더 사냥하면서 몽현경에 익숙해진 후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브레나르 중령을 만나 할 이야기가 있었다.
* * *
항상 만나던 카페에서 만나 꺼낸 이야기는 바로 '퇴역'에 대한 것이었다.
"···너라면 소령까지도 무난히 진급할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예."
"4레벨 시민이 되어서인가? 5레벨 시민을 노릴 생각은 없고?"
한유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생각했듯 그건 노력 대비 수확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퇴역이 아니라 예비군으로 전역은 어떤가? 꾸준히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다른 혜택도 많은데."
"그러면 해마다 훈련이 있지 않습니다. 너무 번거롭습니다. 제가 이렇게 따로 먼저 말씀드린 이유는······."
당연히 예전에 그녀가 언급했던 에번라크 가문의 탐험단 일 때문이었다.
이어진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브레나르 중령은 왠지 표정이 확 풀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직 특별한 거처 없이 호텔에서 머물고 있는 걸로 아는데, 혹시 먼저 우리 가문의 영지로 가 있는 건 어떻겠나? 강요는 절대 아니고."
덧붙여지는 설명을 듣던 한유진은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이후로.
모든 일들이 살짝 번거롭지만 문제없이 진행됐다.
각종 인증을 거쳐 퇴역 신청서를 제출하고, 상담사와 만나보기도 하고, 장교였던 만큼 위원회에 출석해 일종의 심사를 거치기도 했다.
사용하던 모든 군사 장비를 반납했으며 복무 중 알게 된 군사기밀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도 마쳤다. 만약 시민 레벨이 낮았다면 이 과정에서 몇 불편한 제약이 가해졌을 수도 있겠으나, 그는 다행히 4레벨 시민인지라 전부 면제였다.
마지막으로는 명목상 루미너스 황제가 수여하는 공로 메달을 받으면서 디멘시스 순양함의 부대원들이 모두 참여한 퇴역식을 치렀다.
'어쩌면 고작 중위에 불과해서 이런 순조로운 퇴역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만약 중령 정도였다면 지금처럼 별 특별한 이유 없는 퇴역은 상당히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완전히 민간인 신분이 된 그는, 브레나르 중령이 건네준 소개장을 들고서 행성 B-37로 향했다.
놀랍게도 에번라크 가문이 통째로 관리하고 있는 행성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영지가 이 행성 전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엄연한 은하제국 소속으로 독립성을 갖췄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영지라고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에번라크 가문의 인사들과 한 차례 가벼운 접촉을 마친 그는, 4레벨 시민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땡기고 잡다한 물건들을 죄다 팔아넘기며 크레딧을 확보했다.
상당히 급하고 과격한 행동이었지만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본명법보를 완성한 순간부터 이 은하제국에서 머무는 시간은 전부 일종의 '보너스 타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탐험단의 일이 탐사대만큼이나 위험하여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언제 어떻게 이번 모험이 끝나더라도 아쉬움이 없게끔, 필요한 모든 물건과 자원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본명법보에 핵심 재료로 쓰인 디바울고스의 눈, 오행금석, 혼원석 등을 스스로 직접 구한 터라 여유가 없지 않았다.
가장 먼저 구매한 것은 제작술, 그러니까 연기술에 쓰이는 장비들이었다.
차원력 분석대, 나노 세공대, 에테르 공명기, 플라즈마 융합로 등.
본명법보 제작에 너무나 유용하게 쓰인 장비들을 모두 최고급으로 마련했다.
이어서는 제조술, 요컨대 연단술에 쓰일 장비들을 구매했다.
운이 좋았던 건 넥타르 제조로 유명한 에번라크 가문을 통해 최고급 장비를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은하제국에서 수만 년 동안 품종 개량을 지속해 온 다양한 영식들의 씨앗을 전부 구매했다.
성장한 상태의 영식이라면 몰라도 씨앗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가격도 딱히 비싸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결계술, 다른 표현으로 진법술 혹은 금제술에 연관된 장비들을 구매했다.
진법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장비도 있었고, 실전용으로 미환진기를 대체하여 쓰일 장비도 있었다. 상당 부분이 제작술 장비들과 용도가 겹치는 터라 많이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광기에 가까운 쇼핑이 끝났을 때.
남은 크레딧은 길거리에서 노숙해도 한 달을 간신히 생활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이젠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당연히 진짜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고, 현실로 돌아가게 돼도 후회가 없으리란 뜻이다. 정보열람소의 지식도 이미 충분하게 열람했으니 더욱 그렇다.
앞으로 그는 탐험단으로 활동하면서 버는 크레딧을 대부분 수련용 자원을 구매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나머지는 간간이 정보열람소에 새로 업데이트되는 지식을 구매하고, 이전에 보류 처리했던 공법이나 법술 따위를 되짚어보는 데 쓰면 될 듯했다.
'운명의 실타래가 아직 절반 정도 남았고, 혼원석도 그렇고······.'
마도 수사에게서 얻은 전리품, 그것들을 통해 혈령적화주병을 업그레이드해 볼까 싶은 계획도 있었으나.
그건 이미 연기술 장비를 전부 마련했고 운명의 실타래 같은 재료도 남아있는 만큼 꼭 여기서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업그레이드할 건지 계획이 아직 불분명하기도 하지.'
한 번 잘못 개조하면 되돌리기가 어려울 테니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슬슬 한가해졌을 무렵.
에번라크 가문의 별장에서 지내던 그에게 브레나르 중령이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당연히 한유진은 그녀를 환대하며 별장의 주인마냥 다과를 직접 대접해 왔다.
짧은 안부 인사가 오가던 중.
"함장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아, 제가 이제 부대원이 아니라서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굳이 이런 식으로 호칭을 지적할 필요까지 있나 싶어 살짝 당황하는 그때.
"내가 이제 함장이 아니라서 그렇다."
"···예?"
"나도 퇴역했어."
그녀는 쓰고 있던 중령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한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옷까지 반납할 필요는 없다더군. 함부로 입고 다니면서 우주군 중령을 사칭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잠시만요, 왜 그러셨습니까?"
그가 알기로 그녀는 중령치고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단지 운으로 빨리 진급한 게 아니라 그만큼 능력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탐사대의 순양함 함장으로서 성과 높기로 유명하기까지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대령으로 진급하는 것은 물론 충분히 별을 노려볼 수도 있는 위치였다.
하나, 그런 사실을 가장 잘 알 것이 분명한 브레나르 중령, 아니, 이제는 그냥 브레나르라고 칭해야 할 본인이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너랑 같이 탐험단 일이나 해 보려고. 그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
말하면서 그녀는 더 이상 편안할 수 없는 모습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125. 암시장 방문
브레나르가 직접 탐험단 일에 나서며 한유진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이상, 잡음 같은 게 나올 수 있을 리 없었다. 또한 텃세 같은 일도 발생할 수가 없었다.
에번라크 가문에서 그녀의 입지는 가주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주와 같은 레벨의 영능자이면서 여태 우주군 중령으로서 이런저런 유무형적인 이득을 많이 안겨줬기 때문이다.
요컨대 탐험단 일에 대한 전권을 갖고 휘둘러도 문제가 없단 뜻이었다.
그리고 브레나르는 한유진을 아주 대단한 인재로 취급했다.
은행에서 한도 끝까지 당겼던 대출을 에번라크 가문의 것으로 대환해 준 것은 물론, 아직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선금이라면서 8레벨 엘릭서를 구해다 줬다.
심지어는 에번라크 가문에서도 생산량이 극히 적은 '아이온 엑스트랙트'라는 넥타르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체질만 잘 맞으면 효과가 무려 9레벨 엘릭서에 버금간다는 영주였다.
'아무리 봐도 이건 좀 사감이 담긴 게 아닌가······?'
비록 한유진 자신이 수선계식 정통 수련법을 따르는 7레벨 영능자이면서 경력도 풍부하다지만, 처음부터 이런 대접을 받기엔 살짝 과분한 느낌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에번라크 가문 내에서 비슷한 시각과 의견이 있을 터다. 그것들이 드러나지 않는 건 브레나르가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일 것이고.
'탐험단 일에서 실수라도 하면 역풍이 불겠군.'
이렇게나 신뢰를 보여주니 그로서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하여 그는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열심히 수련을 이어갔다.
자원이 주어졌고, 에번라크 가문의 9레벨 에테르 수련실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탐험단 일이 시작되기까지 아직 몇 달 남았기에 시간도 충분했다.
9레벨 에테르 수련실의 영기 농도는 원시림보다 1할 정도 높았다. 이용 시간이 길어지면 농도 유지를 위해 자원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건 에번라크 가문에서 신경 쓸 일이었다.
- 후우······.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 속 희미한 법문들이 반짝이다가 사라진다. 그의 몸을 감싸며 얼핏 백색인 듯 느껴지지만 볼수록 오묘함이 깊어지는 빛무리가 옅게 피어오른다.
전혀 거창하거나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지만 속세와 동떨어진 듯한 신령스러움이 가득했다.
반면,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당히 화려하면서도 격렬하여 살짝 위험하게까지 느껴졌다.
흡수되어 들어온 영기들이 그의 육체와 영혼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며 무수한 법문법결을 형성한다. 그렇게 온갖 색채의 빛을 흩뿌리면서 스며들었다가 뿜어져 나오길 반복하며 마치 끝없는 담금질을 가하는 듯하다.
특히 가장 격렬한 흐름과 변화를 보이는 곳은 당연하게도 법단이었다.
태을오행도경의 법결에 따라 운행되는 영기의 파도가 미약하지만 혼원계와도 연결되는 움직임을 띤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법문 흐름을 구성하고, 그것이 주변으로 구름처럼 퍼져나가며 일종의 도운(道雲)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한유진의 법단을 감싸며 나타난 도문(道紋)이 세 바퀴를 돌아 이어져 완성되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태을오행의 기운에 몽환의 기운이 함께 녹아들어 융합한다. 은하성운을 품은 듯한 법단 내부에서 오색찬란한 용(Dragon)의 형상이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도 같다.
그때 한유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우주적인 색채의 세로 동공 눈이 선명한 위압감을 흩뿌리면서 드러났다. 직후, 몇 번 깜빡거리는 움직임에 전부 환상이었다는 듯 사라졌다.
'조금만 더 수련하면 새로운 신통을 하나 얻을 느낌인데.'
십중팔구 시각과 연관된 신통일 터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는데 또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니, 실로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아니지······ 연허기급 드래곤 하트인데, 당연히 이 정도는 돼야지.'
그리고 단지 신통만 이득인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난관도 없이 벌써 삼전법단(三轉法丹)을 완성했다. 결단기 궁극의 성취인 구전법단(九轉法丹)까지 불과 여섯 단계만 남은 것이었다.
여기서 '전'이란 건 일종의 둘러쌈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전법단이라 함은 도문이 법단을 세 번 감싸며 완성됐다는 뜻이고, 구전법단은 도문이 법단을 아홉 번 감싸 완성됐음을 뜻한다.
구전법단은 다른 표현으로 구전금단(金丹)이라고 불리며, 그것을 이룬 수사의 경지를 특별히 '금단기'라고 높여 불러주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육전법단만 되어도 원영기 승격이 가능하기에 그 이상 수련하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육전법단보다는 구전법단을 이루고 원영기에 오르는 것이 훨씬 좋다. 하나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수사 본인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체가 연이어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결단기에서의 수련이다. 하여 육전법단을 이루는 데만도 수명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한유진은 그러한 이유 모를 정체를 지금껏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또한 왜인지 앞으로도 전혀 느껴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원래 갈수록 느려지는 것이 정상인 도문 형성 속도가 세 번째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여태 본명법보 제작에 집중하느라 수련을 살짝 등한시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제대로 수련에 몰두할 경우 고작 이삼십 년 만에 구전금단을 완성하게 될지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속도야······.'
아무리 천영근자라도 결코 이 정도 속도를 낼 수는 없다. 그 자신처럼 도체까지 함께 보유해야만 낼 수 있는 속도일 터다.
전부 드래곤 하트로 외단법을 완성한 덕이다.
새삼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동시에 카사르녹스에게도 고마움이 느껴진다.
그는 스페이서 링에서 반쯤 남은 넥타르, 아이온 엑스트랙트를 꺼냈다. 한창 흥이 돋았으니 계속 수련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 * *
수련에 힘쓰면서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때.
그는 산해주 내부를 본격적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여태 그냥 방치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 거처와 작업실 등을 건설하면 좋을지 틈틈이 고민해 온 것이었다.
무용이가 열심히 일군 영전과 조금 떨어진 산 아래쪽에 연단실을 만들고.
그 반대편에 여러 제작술 장비들이 들어간 연기실을 만들었다.
또 다른 반대편에는 대략 삼각형 배열을 이루도록 다용도 작업실을 만들었다. 아마도 훗날 부적술 등의 작업이 이뤄질 터였다.
산 정상 부근에는 수련실을 건설했는데, 이렇듯 서로 건물을 떨어트려 놓은 건 혹시 모를 폭발 등의 사고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다.
마지막으로, 거처는 산과 호수가 고루 보이면서 햇볕이 잘 드는 장소에 건설했다.
연단실과 연기실의 외형은 은하제국의 양식을 많이 참고해 아주 세련되고 미래과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다용도 작업실도 비슷했고.
산봉우리 정상 부근 수련실은 외부로 드러난 것이 아닌 동굴 형태였다. 아무래도 그편이 심적으로 집중하기에 좋았고 진법으로 안전을 확보하기에도 유리했다.
거처의 모습은 강호무림에서 머물던 무극장원을 고스란히 닮아있었다.
한유진이 어지술을 포함한 몇 가지 건축용 법술을 총동원하여 건물을 완성함과 동시에, 무용이는 은미령이 생각났는지 기뻐하면서도 살짝 울적해하며 주변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마치 그때 당시 주변을 돌아다니며 놀았던 것처럼.
'부인도 여길 봤으면 분명 멋지다고 감탄했겠지······.'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녀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진짜 여기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쉽게 상상이 된다.
잠시 추억에 젖었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마무리 작업을 진행해 갔다. 아직 세세한 부분에서 미진한 점이 많았다.
그렇게 넉 달 정도 시간이 흘러갔을 때.
마침내 에번라크 가문의 탐험대가 구조 조정을 마치고 재편성되어 임무를 설정했다.
탐험단의 단장은 당연히 브레나르였고 한유진은 무려 부단장에 임명됐다. 기존에 단장을 맡고 있던 7레벨 영능자는 딱히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지만, 괜히 한유진을 한 차례 쏘아봄으로써 인상을 남겼다.
적금발에 체격이 좋은 윈스펠이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였는데, 나이가 이백 살이 넘는 자였고 머리색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에번라크 가문의 핏줄이었다.
외부에서 굴러들어 온 돌이 박혀있던 돌을 밀어낸 꼴이 됐지만 한유진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도 생각이 있다면 괜한 문제를 일으킬 리 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능력의 차이를 깨닫게 될 터였으니까.
탐험단의 구축함급 우주선 '아우레움'은 백여 명 정도의 승무원을 싣고서 은하제국 외곽부에 자리한 행성 P-221을 향해 출발했다.
에번라크 가문의 정보력으로 그 행성에서 특별한 암시장이 열리고 경매까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확실히 민간 탐험단의 입장에선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행성의 특성상 치안이 아주 엉망인지라 분명한 위험성이 존재했지만,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가 단장인 만큼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름이 조금 넘는 항해를 거쳐.
아우레움 함선이 P-221 행성에 도착했다.
* * *
"흠~ 흐흠~."
브레나르는 오늘따라 특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한 손에 들린 금속제 휴대용 술병에서 찰랑거리는 술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주군일 때도 가끔 느꼈지만 민간인 신분이 된 그녀는 정말로 술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만나면 거의 항상 술병을 들고 있을 정도였으니, 만약 실력 뛰어난 영능자가 아니었다면 진즉 알코올 중독자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한유진은 주변을 살폈다. 브레나르의 기분과 아주 상반되게도 암울한 풍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남청빛으로 우중충하고, 거리는 여기저기 포장이 깨져 진흙으로 질척거렸으며, 양옆의 건물들은 온갖 요란한 빛을 뿜어내는 광고 간판들로 뒤덮여 조잡하다는 감상을 줬다.
또한 그 내용도 별로 건전하지 못했고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음침한 분위기였다.
'같은 은하제국의 땅이라곤 도무지 안 믿어지는군.'
일종의 슬럼(Slum) 행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행성만 따로 SF식 디스토피아에 빠진 느낌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도착할 것 같습니다."
잠시 더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피던 한유진이 말했다.
당연하게도, 탐헌단의 단장과 부단장이 둘이서 이렇듯 움직이는 게 평범한 산책일 리 없었다.
"마법 성역의 엘프족에 대해 얼마나 알아?"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한유진은 이 행성의 '불법 정거장'에서 본 '비공정'을 떠올리며 답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기본 수명이 이백 년 정도이고 정령술에 능하다는 정도밖에는."
"그놈들이 양조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더라고. 넥타르나 엘릭서 수준이라던데?"
"아."
그렇다면 브레나르가 지금처럼 그 '비공정'의 주인들을 찾아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잠시 뒤.
조금 더 외지면서 인적마저 뜸해지는, 폐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구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브레나르 중령의 가볍던 발걸음이 멎는다. 같이 멈춰 선 한유진은 어느새 유령처럼 나타나 길을 가로막은 여덟 명의 검은 로브 인영들을 보며 신기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판타지식 복장을 보자 새삼 신기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돌아가라. 여긴 인간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니까."
대장 격으로 느껴지는 한 검은 로브 인영이 나서며 브레나르와 한유진이 걸어온 길을 가리켰다.
"우리 제국의 영역에서 인간이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라는 말을 듣다니."
브레나르가 웃음기를 담아 말하며 그들을 한 번씩 돌아본다.
"너희 수장이랑 만나서 할 얘기가 있는데, 안내 가능한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가장 좌측에 서 있던 검은 로브가 자기 동료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구하듯 말했다.
"그냥 포획하는 게 어때? 둘 다 인간치곤 외모가 괜찮은데, 여기 노예상들한테 팔아서 자금이나 충당하자고."
"흠······."
처음 나서서 돌아가라고 했던 검은 로브가 꽤 혹한 기색을 보인다.
한유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무려 원영 중기급인 11레벨 영능자를 대상으로 노예 운운하는 놈들이라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사이 브레나르의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느낌상, 거래할 필요 없이 '정당방위'를 행할 수 있게 되어 꽤 즐거워하는 듯했다.
126. 약탈
문득 브레나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무려 말까지 더듬으면서였다.
"지, 지금 우리를 노예로 팔겠다고 한 건가!? 이 제국의 땅에서!?"
그녀를 잘 아는 한유진이 보기엔 발연기도 이런 발연기가 또 없었다. 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엘프들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방심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한 번씩 돌아본 검은 로브들 중 넷이 한순간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미끄러지듯 움직여 퇴로를 막는다. 이어 누가 봐도 악의가 담긴 것이 분명한 기세를 드러냈다.
'여덟 명 전부 법혼기 급인가.'
그것도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있는 나름의 실력자들이다. 우주군으로 치자면 모두 부사관급이라는 뜻이다.
이 정도 실력은 되니까 상대의 정확한 힘이 가늠되지 않는데도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일 터였다. 확실히 객관적으로는 어지간히 재수 없지 않으면 낭패를 볼 일이 없는 전력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이 바로 그 재수 없는 날인 듯했지만 말이다.
먼저 움직이려던 것은 포획하자는 의견을 처음 제시한 놈이었다. 자기가 의견을 낸 만큼 솔선수범하려는 것이 실로 모범적이었지만, 그때 다시 브레나르가 외쳤다.
"잠깐!"
워낙 절묘한 타이밍이었는지라 검은 로브가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린다.
"···뭐냐?"
"여기서 소란이 일어나면 너희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도 모를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에 브레나르의 표정에 미묘한 웃음기가 떠오른다. 물론 그걸 알아본 것은 한유진뿐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그러니까···."
"알겠다. 걱정하지 않으마."
뭔가 좀 이상한 대답에 놈이 의아함을 드러내기도 전.
우우우웅···!!
번쩍이는 흑백색 빛과 함께 묵직한 공명음이 퍼져나갔다.
브레나르에게서 뿜어져 나온 그 빛무리는 한순간에 여덟 검은 로브들을 호박 속 벌레처럼 포획하곤 후드를 벗겨냈다. 예상대로, 드러나는 건 귀가 길쭉하고 조금 이질적이지만 다들 아름답게 생긴 엘프족이었다.
"흠."
만족스럽게 놈들을 보던 브레나르가 허공에 살짝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러자 흑백색 빛무리가 제각각 미묘하게 회오리치더니 곧, 놈들의 모든 소지품을 분리해 앞쪽 바닥으로 던져냈다. 심지어 로브 안쪽 옷에 달려있던 귀금속 장식마저 떼어내는 모습이었다
"이건 쓰레기고······ 이것도 쓰레기고······."
끼기기긱···!
콰드득-!
그녀가 쓰레기로 분류한 물건들, 금속제 스태프나 단검 따위가 마치 종이로 만든 가품처럼 사정없이 구겨지며 압축된다. 단지 압축력만으로 무시무시한 열기가 발생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분명하게 마법이 걸린 무기들을 장난치듯 폐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광경은 꽤 인상적이었다. 당연히 검은 로브를 걸친 엘프들도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곤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던 중.
"음?"
그녀가 한 엘프의 소지품 사이에서 작은 유리병을 찾아 손으로 끌어왔다.
몇 초 정도 그걸 유심히 살피다가 물건의 주인에게 싸늘한 기색으로 묻는다.
"이거 어디서 구했어?"
굉장히 심각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엘프는 몸을 구속하던 흑백색 기운이 일부 풀어졌음에도 쉽게 답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기서······."
"왜?"
"···예?"
"너희 종족도 양조술에 일가견이 있다면서. 그런데 왜······."
그녀는 들고 있던 유리병의 뚜껑을 열더니 살짝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싸구려 넥타르를 구매했느냔 말이다."
"···여기 제국에서 유명한 그, 글레이스 가문의 정품 넥타르입니다."
한유진도 들어본 적 있는 가문이다. 에번라크 가문과 넥타르 제조 수준이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브레나르는 코웃음을 쳤다. 두 가문의 사이가 매우 안 좋다던 소문을 몸소 증명하는 태도였다.
"언제 얼마를 주고 샀어?"
"나흘··· 아니, 사흘 전에 마력석 스···."
"사기당했군!"
아직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유리병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그 유리병은 던져진 즉시 흑백색 기운에 휩싸여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실로 소름이 끼치게도.
"감히 내 친구를 등쳐먹다니!"
언제 친구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말하면서 엘프 놈들의 구속을 대부분 풀어줬다. 단지 그들의 목을 둘러싼 빛의 고리만을 남겨둔 채였다.
움직임에 자유를 되찾았지만 누구도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의 인간 여자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탓이었다.
"당장 거기로 안내해라. 내가 대신 보상금을 받아주마."
"···예?"
"그 전에 일단 로브를 내놔. 옆의 네놈 것도 같이."
당최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두려움을 느끼는 듯, 지목당한 엘프 둘이 허겁지겁 로브를 벗어 건넨다.
그중 하나를 한유진에게 건네며 브레나르가 로브를 입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한유진도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뒤집어썼다.
"자, 가자!"
브레나르가 호기롭게 말했으나 엘프들은 당연하게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브레나르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가공할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니면 그냥 여기서 뒈질 테냐?"
"가, 가겠습니다!
넥타르를 구매한 엘프가 허겁지겁 앞장서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엘프들도 움직이고, 그 뒤를 브레나르와 한유진이 따랐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그럭저럭 번화한 느낌으로 사람들도 많이 오가는 일종의 상업구역이었다.
그런 곳에 엘프들이 후드도 쓰지 않은 채로 나타나자 시선이 엄청나게 집중됐다. 특히 그들이 목에 웬 빛의 고리를 두르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여기야?"
제법 번듯하게 차려진 한 상점 앞에서 멈추자 브레나르가 묻는다. 넥타르를 구매했던 엘프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는 턱짓하며 명령했다.
"너희 먼저 들어가."
엘프들이 상점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브레나르와 한유진은 가장 뒤에서 따라 들어갔다.
내부는 겉모습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넥타르와 최고급 술을 주력으로 하여 엘릭서 등도 조금 판매하는 그런 상점인 듯했는데, 특히 그 상점 한쪽 벽에 걸린 글레이스 가문의 인장이 눈에 띄었다.
그런 곳에 갑자기 엘프들이 들이닥치자 주인장은 물론 몇 없던 손님들도 어리둥절한 기색이 됐다.
바로 그때 브레나르가 후드를 벗지 않은 채로 외쳤다.
"감히 우리 엘프족에게 사기를 치다니, 이 하등한 인간 놈이!"
"······뭐, 뭐요? 무슨···?"
"원한을 갚아주마!"
외침과 동시에 그녀가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뿜어져 나와 휘몰아치는 흑백색 기운이 몇 없던 손님을 건물 밖으로 던져버리고 주인은 포박하여 구석에 처박았다.
이어 거침없는 약탈이 펼쳐졌다.
그녀는 딱 봐도 값어치 있는 것이 분명한 넥타르와 엘릭서들을 모조리 챙겼다. 또한 카운터 밑의 금고를 찢어발겨 에테르 스톤을 챙기고, 뻔히 보이는 멀쩡한 문을 두고서 벽을 박살 내더니 안쪽 창고에 보관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냈다.
"이 쓰레기는 뭐야!"
그러다가 얼결에 별로 가치 없는 게 딸려오면 바로 내던져 깨버리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불과 일 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상점 하나가 완전히 털렸다.
대략 챙길 것을 전부 챙겼다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엘프들의 목을 휘감은 빛의 고리를 목줄처럼 당기며 앞장서서 뛰쳐나갔다.
"튀어!"
그런 외침은 덤이었다.
엘프들은 목에 휘감겨 자신들을 잡아당기는 빛의 고리 때문에라도 힘껏 달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계 정령술을 발휘하여 날듯이 움직이는 그들의 속도는 법혼기급 중에서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치안 병력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원래 그 폐쇄적인 구역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
"······."
멈춰 선 일행 사이로 잠깐이지만 침묵이 흐른다.
사실, 이 상황을 과연 '무사히'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좀 의문이긴 했다.
"약속대로 내가 보상금을 받아줬다."
입고 있던 로브를 가볍게 벗어 던지며 브레나르가 침묵을 깼다. 한유진도 눈치를 보다가 같이 로브를 벗어 옆 바닥에 대충 버렸다.
"고맙지?"
"···예! 고맙습니다!"
처음보다 더 두려움을 느끼는 듯, 엘프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누명만 쓰게 됐는데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이제 너희 수장한테 안내해라. 제대로 감사 인사를 받아야겠으니."
엘프들은 조금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재차 브레나르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살기가 뿜어지자 즉각 몸을 움직였다.
한데 그러면서 짧은 순간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는다. 아마도 수장이 있는 곳으로 가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헛된 망상을 품는 기색이었다.
'과연 엘프들의 비공정 함장도 원영기급일까?'
그 불법 정거장 구석에 박혀있던 자그마한 비공정의 외형, 그리고 원영기급 존재의 희귀성 등을 놓고 계산해 보던 한유진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매우 작았다. 설령 그 작은 가능성에 당첨되더라도 상대가 브레나르보다 강할 것 같진 않았으며, 힘이 비슷하다면 서로 좋게 협상하는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
그렇게, 엘프들이 앞장선 열 명의 일행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해 갔다.
* * *
비공정의 함장인 엘프는 결단 후기급 존재였다. 또한 제법 강력한 아티팩트를 갖고 있어 순간적으로는 원영 초기급 상대를 위협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11레벨 영능자로서 원영 중기급에 달하는 브레나르였다.
그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에 수월한 협박을 이어가며 온갖 물건을 뜯어냈다.
'누구 한둘을 죽이고 왔다면 이런 식으로 일이 풀리진 않았을지도.'
엘프들의 동족애는 꽤 유명한 편이다. 그러니 어쩌면 복수심에 눈이 뒤집혀 자신들이 전부 죽을 줄 알면서도 덤벼들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거래'는 아주 만족스럽게 끝났고 브레나르와 한유진은 무사히 놈들의 소굴을 떠날 수 있었다.
대놓고 상점을 털어버린 일이 어떻게 해결될지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놈들이 머리가 있다면 브레나르를 일러바치는 대신 그냥 자신들이 억울함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배상할 터였으니까.
괜히 손해를 만회하려다가 그녀가 다시 방문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즉.
이것이 바로 원영기급 존재의 패악질이란 것이었다.
'······아니지, 원영적 사고를 해야지.'
놈들이 먼저 노예 운운했으니 이건 명백한 정당방위다. 놈들은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럭키비키를 외치며 감사해야 마땅하다.
사실 정당방위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는 그냥 브레나르가 보여준 행동이 상당히 의외였고 또한 웃겼다.
우주군 중령일 때는 술자리에서 그냥 농담 식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민간인이 된 후 첫 탐험단 임무에서부터 진짜로 말하던 방식대로의 행동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이런 사람이 대체 어떻게 우주군 중령까지 달았는지 의문일 정도였다.
이후로는, 탐험단원 반수 이상이 며칠에 걸쳐 암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혹시 쓸만한 물건이나 재료 따위가 있는지 살피는 시간이 흘렀다.
안타깝게도 별 수확은 없었다. 특별하고 중요한 것들은 전부 경매장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하여 경매일을 기다리며 잠시 여유가 생겼다.
"자."
그러던 때.
호텔 한유진의 방을 찾아온 브레나르가 웬 스페이서 링 하나를 통째로 건넸다.
"네 몫의 전리품이야. 그때 같이 움직였잖아."
태연하게 말하며 휴대용 술병의 술을 한 모금 들이켜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약탈품이라는 말이군.'
생각하며 내용물을 살피자 꽤 놀라웠다. 최소 몇 년은 수련에 걱정이 없을 만큼의 넥타르와 엘릭서들이었다.
"좀 많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냥 받아둬. 일을 쉽게 그만두거나 하지만 말라고."
잠시 생각하던 한유진은 순순히 그걸 받았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던 브레나르가 그의 뒤편 숙소 안쪽을 힐끗거리면서 묻는다.
"백능은?"
"···안에 있습니다. 잠시 들어오시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예정된 경매일까지 이틀 남은 시점이었다.
127. 경매종료 후
경매는 행성의 가장 큰 도시 외곽부에서 열렸다. 인적이 드물지만 너무 접근성이 떨어지지는 않아서 이동하는 와중 강도질 당할 염려가 비교적 덜한 위치였다.
또한 그런 으슥한 위치였기에 경매 일시와 장소를 파악하는 단계에서부터 쭉정이들이 많이 걸러졌고, 경매장에 들어설 때 가면을 상당한 양의 에테르 스톤을 주고 구매해야 해서 또 한 번 쭉정이들이 걸러졌다.
물론 가면을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정체를 감출 수 있으면 역시 쭉정이가 아니었고, 혹은 그냥 정체를 드러낸다면 그 배짱만으로도 쭉정이라 부르기 어려울 터였다.
경매의 특성상 머릿수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탐험단에서 출발한 인원은 셋뿐이었다.
브레나르와 한유진, 그리고 7레벨 영능자인 전투조장 윈스펠로, 윈스펠은 이전에 브레나르가 오기 전 탐험단 단장을 맡고 있다가 밀려난 바로 그 에번라크 가문의 핏줄이다.
이동하는 내내 윈스펠은 겉으론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 육도윤회 신통을 가진 한유진은 그에게서 전해져 오는 꽤 강렬한 적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처음보다 더 농도가 짙고 분명해진 감정이었다.
'대체 왜?'
이유가 궁금했는데 곧 저절로 알게 됐다. 그가 브레나르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심상찮았던 것이다.
윈스펠은 에번라크 가문의 핏줄이긴 하지만 직계가 아닌 방계다. 요컨대 브레나르와는 사촌 관계로서 제국법에 의하면 결혼이 불가능하지 않다. 문화적으로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고.
하여 브레나르를 홀로 좋아하는 그가 라이벌 의식 비슷한 것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한유진은 그냥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어쨌든 상대가 내색하지 않는 중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문제가 없을 터였으니까.
도착한 경매장은 적당한 야산을 파고들어 가며 건설된 구조였다. 영능자를 동원하면 이런 수준의 공사를 벌이기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행은 입구에서 가면을 구매하는 대신 에번라크 가문의 능력으로 이미 구비된 챙 넓은 모자를 사용했다. 착용한 즉시 모자에서부터 흐릿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흘러내리며 착용자의 외형을 감추고 기세마저 변질시켰다.
'은폐력은 그럭저럭인데······ 누가 은폐를 간파하려 했는지 잡아내는 효과가 확실하군.'
상대도 그런 효과가 포함되어 있음을 눈치채게 만듦으로써 함부로 간파를 시도할 수 없게 만든다. 요컨대 자신 있는 놈만 감히 한 번 들쑤셔보라는 식의 장비였다.
내부는 얼핏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심한 배치가 돋보였다. 특히 위쪽에 자리한 전면부만 개방된 형태의 별실들이 눈길을 끌었다.
"저기는 누가 앉는 거지?"
브레나르가 그 별실들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묻는다. 경매장 측 인원들은 그저 질서 유지에만 신경 쓸 뿐 따로 자리를 안내해 주진 않았기에 자연히 들 법한 의문이었다.
"알아서 차지하라는 것 같습니다."
대략 주변을 살핀 한유진이 말하자 윈스펠도 힐끗 눈길을 줬다가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 저기가 좋겠네."
브레나르가 한 곳을 보며 말했다.
경매가 진행될 무대를 중앙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의 별실이었다.
특별한 계단 같은 것은 없었으나 셋 모두 가볍게 허공을 날아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잠깐 시선이 쏠리는 듯했으나 별실의 구조 덕에 가로막혔다.
그렇게 경매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길 잠시.
아무리 별실 구조가 전면부만 개방되어 있어 안쪽을 보기 힘들다지만, 신식 등의 수단으로 뻔히 사람이 있음을 알 텐데도 웬 두 명의 사람이 브레나르와 한유진 일행이 자리한 별실에 올라섰다.
"흠."
그들이 착용한 얇은 석제 가면은 흐릿한 환영을 덮어 씌우는 효과가 있었다. 제법 수준이 높아서 한유진으로서도 신통이나 법술을 동원하지 않는 한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혹 양보해 주시겠소? 내가 이 자리가 마음에 드는데."
살짝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한 줄기 위압적인 기세가 흘러나온다.
'원영기급······.'
초기인지 중기인지 후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양보를 강요할 정도의 실력은 되는 것 같다.
대상이 브레나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내가 왜?"
착용한 모자의 효과로 마치 남자처럼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 나간다. 동시에 그녀 역시 11레벨 영능자의 기세를 가볍지만 분명하게 드러내며 상대를 압박했다.
잠시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한 상대는, 문득 옆쪽 소파에 앉은 윈스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직후 윈스펠의 모자에서 흘러내리던 은폐 효과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브레나르에게서 옅은 흑백색 빛이 번쩍이며 상대의 일행을 휩쓸고 지나갔다.
파삭-
가면에 금이 가며 조금 당황한 젊은 청년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얼른 스페이서 링에서 다른 가면을 꺼내 착용했지만, 그러면서 낯빛이 아주 붉어지는 게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이게 누구야."
브레나르는 정체를 파악한 것이 분명하게도 비꼬는 목소리를 냈다.
"드카리시스 가문 아니신가? 요즘 주제를 모르고 날뛴다는 말이 많던데, 과연 소문 그대로야."
"······흠."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냈던 이, 아마도 노인으로 짐작되는 이는 모욕을 들었음에도 그냥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윈스펠의 위장을 잠깐 걷어내면서 정체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적금발이 에번라크 가문 특징이긴 하지.'
브레나르가 상대를 안다는 건 상대 역시 에번라크 가문을 모르지 않으리란 뜻이 된다.
"실례했소."
그는 자신의 옆 젊은이에게 손짓하며 다른 별실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한데, 육도윤회를 통해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분석하던 한유진은 저절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참는 게 아니라 두고 보자는 느낌인데······.'
그것도 막연한 게 아니라 뚜렷한 기회를 두고 벼르는 느낌에 가깝다.
"드카리시스 가문이 어떤 곳입니까?"
하여 그가 질문하자 브레나르가 짧은 설명을 해 줬다.
요약하자면, 불법으로 처벌받을 정도는 아니나 여러 지저분한 방식으로 세를 키운 가문이라는 이야기였다.
특히 교묘하게 법을 악용하다가 황제에게 직접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에번라크 가문과는 넥타르 제조업 분야에서 몇 번 충돌해 악연이 만들어졌고.
'흠.'
한유진은 놈들이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하다고 경고하려다가 일단 말을 아꼈다.
그사이 시간이 흘러, 올 만한 사람은 전부 찾아와 자리에 않은 상황이 됐다. 그에 경매가 시작되려는 듯 진행자로 보이는 가면 쓴 이가 전면 무대에 올랐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방문해 주신 모든 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적당한 크기로 깔끔하게 구석까지 잘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어지는 상투적인 인사말과 대략적인 소개, 그리고 경매를 진행하는 방식 안내 따위를 들으며 한유진은 소파에 편히 몸을 묻었다.
당장은 어떤 물건들이 나올지 그냥 마음 놓고 구경하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가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경매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면서 어떤 감정을 드러낼지가 꽤 궁금했다.
* * *
상당히 혹하는 물건들이 많이 나왔다.
온갖 특이한 금속 및 영식들이 등장했고 그중 몇 가지는 정말로 구매욕을 동하게 했다.
오행 속성을 진하게 품은 복숭아 비슷하게 생긴 열매가 등장했을 땐, 전리품으로 얻은 마도 수사의 영석을 죄다 쏟아부어서라도 손에 넣고 싶었다.
수선계에서 온 것이 분명한, 부리는 영수가 어느 특별한 신통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영단을 봤을 때도 무용이를 떠올리면서 욕심이 났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무용아. 나중에 내가 직접 수선계에서 따로 구해주마······.'
대략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에번라크 가문의 탐험대로서는 그럭저럭 수확이 있었다.
딱 봐도 술 만들기에 좋을 듯한 십여 종류의 영식을 쉽게 낙찰받았고, 마법 성역에서 유출된 것 같은 비약 제조술 지식도 적당한 경쟁 끝에 낙찰받았다.
왠지 사람들이 브레나르와의 경쟁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그저 착각이 아니라 육도윤회로 느껴지는 감정만 봐도 그랬다.
딱히 절실한 물건도 아닌 만큼, 괜히 정체 모를 강자에게 밉보이기 싫어 다들 양보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실력이 높아야 해.'
괜히 드카리시스 가문의 노인이 이 자리를 노린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실력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격을 높이기 시작하면, 그걸 배짱 좋게 따라올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터였다.
그러던 중.
- 마법 성역의 정말로 특별하고 강력한 회복 포션입니다. 여명빛 부활이라는 대단한 이름을 가졌으며···!
브레나르가 그 회복 포션에 상당한 관심을 드러냈다.
하나 이어지는 설명을 더 듣더니 곧 흥미를 잃는 기색이었다.
경매는 특별히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됐다. 주최 측에서 돈을 제대로 뽑아먹기로 작정했는지 묶음으로 출품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거의 하루가 다 지나가고서야 마침내 시공간 관련 힘을 다루는 아티팩트를 하이라이트로 경매가 마무리됐다.
그 아티팩트에는 브레나르도 살짝 욕심이 나는 듯했지만 경쟁이 과열되자 깔끔하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인이 이미 시공간 관련 에테리얼 웨폰을 가졌을 테니, 꼭 필요하다고 느끼진 않았겠지.'
확실히 그런 면에서 브레나르는 특별했다. 원영기 수준에서 그녀만큼의 시공간 조작력을 갖추고 주력으로 다루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주최자가 나가는 길 따위를 안내하고 약간의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 등, 매끄러운 마무리 인사를 한 뒤 퇴장한다. 이어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나가자. 늑장 부리면 괜한 소란에 휩쓸릴 수도 있으니."
안 그래도 드카리시스 가문의 노인 때문에 내심 찜찜했던 한유진은 그 제안이 썩 반가웠다.
셋이 별실에서 나와 경매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저절로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 줬다. 브레나르를 위시한 일행은 그런 현상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장내를 나섰다.
"음?"
한데.
드러난 바깥 광경이 들어올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벽과 기둥 따위가 치솟아 일종의 미로 같은 진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 더 일찍 빠져나왔던 이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뒤따라 나오는 이들을 경계하며 조심히 거리를 벌리던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브레나르는 살짝 불쾌한 듯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한유진도 혹시나 싶어 그 드카리시스 가문의 노인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
"저기······."
누군가가 말과 함께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두드림 전까지 일말의 기척도 못 느꼈는지라, 한유진은 깜짝 놀라면서 몸 돌려 거리부터 벌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곳에 자리한 건 황갈색 머리에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웬 젊은 남자였다.
하나 그 얼핏 평범한 듯한 외모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몸에 걸친 흑색과 백색 어우러진 로브는 순간순간 빛의 법문을 문양처럼 만들어내어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손에 들린 스태프는 꽤 화려한 디자인으로 흑요석처럼 반투명하며 은은한 빛이 감돌아 굉장히 신비로웠다.
'마법사?'
상대에게서 받은 인상을 그렇게 정리하는 때.
"일단 이걸 좀 받으십시오."
그가 한쪽 손을 들더니 허공을 죽 내리그었다. 그에 공간이 갈라지며 안쪽에서 웬 투명한 수정 상자 두 개가 나타나 한유진에게 날아왔다.
각각 안에 담긴 것은 오행 속성을 진하게 품은 복숭아 비슷하게 생긴 열매, 그리고 부리는 영수가 어느 특별한 신통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던 수선계식 영단이었다.
'이걸··· 이걸 어떻게, 왜···?'
너무나 갑작스럽고 황당한지라, 당연히 그는 선뜻 받지 못하고 일행인 브레나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위험한 존재라면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렇게.
그는 더 큰 충격을 받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
숨이 턱 막히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온 세상에 가득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를 포함하여 주변 모든 이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영향이 미치는지 모를 광범위한 영역이 통째로 '완벽하게' 정지해 있었다.
"잠시 멈춰뒀습니다.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멈춰뒀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당신을 시공간에서 잠깐 분리한 겁니다. 후유증 같은 건 일절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엄청난 내용을 태연하게 말하면서 그는 얼른 상자를 받으라는 듯 손짓했다.
'이건 대체······.'
너무 압도적이라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화신기급···? 아니, 그 이상인가···?'
모르겠다.
화신기 수사인 천원성 성주가 전투하는 광경을 본 적 있지만 그가 지금 같은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진 감이 안 잡힌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두 수정 상자를 받은 한유진은, 크게 욕심이 났던 물건들을 얻게 됐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사적인 질문을 좀 할 예정이라 드리는 선물입니다."
과연 대가가 있었던 것이다.
상대는 한유진의 긴장이 더해가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물었다.
"혹시 드래고니안이십니까?"
초월적 이해력을 통해 그 낯선 단어가 바로 정확히 이해된다. 반룡(半龍)을 뜻하는 고유명사였다.
몽환유심 신통으로 철저하게 감추고 있던 비밀이 간파됐다. 게다가 뭘 선물 받았는지를 떠올려 보면, 상대는 그가 경매장에 있는 내내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 됐다.
'아마도, 내게서 용(Dragon)의 느낌이 나서.'
심장이 점점 더 긴장감으로 얼어붙는 듯하다.
'난 반룡이 아니라······.'
드래곤 하트를 그릇 삼아 외단법으로 결단기에 오른 수선자다.
무시무시한 능력과는 별개로 태도만 놓고 보자면 상대는 지금 충분히 신사적이었다.
'만약 이 신사적인 태도가 용족과 어떤 친분이 있기 때문이라면······.'
과연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문득.
이 은하제국에서의 모험이 지금 바로 허무하게 끝나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천재지변이 따로 없었다.
128. 천재지변 회피
드래곤의 고향은 원시 성역이라고 알려졌지만 지금 그들이 주로 생활하는 곳은 마법 성역이다.
또한 이곳은 마법 성역과 비교적 가까운 행성으로 엘프족이 비공정을 타고 찾아올 수 있을 정도다. 은하제국의 최외곽부인 만큼 루미너스 황제의 이목에서 상당히 자유롭기도 하다.
'일종의 방파제 같은 행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날 요인들이 있긴 있었던 셈이다. 마법 성역의 어느 초강자가 모종의 이유로 은하제국 외곽부를 방문했다가, 마침 흥미롭게도 용족의 기운을 풍기는 사람을 만나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작긴 하지만······.'
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 이미 현실로 벌어졌으니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이제 중요한 건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였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심기를 거스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든 상대의 진의를 파악해야 살아날 확률이 높아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냥 제가 용족과 인연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드래고니안이십니까?"
상대는 심기가 상한 것 같진 않았으나 그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동시에 재차 질문하며 압박을 가해왔다.
'악연은 아닐 거다.'
만약 악연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선물까지 안겨주면서 질문하진 않았을 터다.
"제가 어쩌다 보니 드래곤 하트를 양도받긴 했습니다만, 드래고니안이라고 불리긴 어려울 듯합니다."
한유진은 그렇게 필요한 수준으로만 답하면서 곧장 이어 물었다.
"입시시무스 마법사이십니까?"
마지스터 아니면 마구스 정도가 아닐까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최고 경지의 마법사냐고 질문했다. 이래야 틀리더라도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한데.
"음··· 마법사는 맞는데, 입시시무스라기엔 지금 좀 애매하군요. 드래곤 하트를 대체 어떤 식으로 양도받았기에 그렇게 되신 겁니까?"
상대는 또다시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질문을 던져왔다.
'지금 좀 애매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마치 이전이나 이후에는 전혀 애매하지 않으며, 지금 상태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하고 싶었지만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압박감이 느껴져 일단 질문에 답해야 했다.
"제 성장의 바탕이자 그릇이 됐습니다. 어떤 인연이 있으시길래···."
"실례지만, 구체적으로 답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괜히 선물을 드린 게 아닙니다."
어조는 부드러웠고 특별히 압박을 더하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한유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단 사실을 저절로 깨달았다.
상대는 그저 손가락질만으로도, 아니, 어쩌면 그냥 생각만으로도 자신을 벌레처럼 짓이겨 죽일 수 있을 그런 존재였다. 지금 보여주는 인내심만으로도 이미 과분할지 모른다.
오직 실력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법이라.
선물을 받은 것도 강제였던 것처럼 솔직하게 답해야 하는 것도 강제인 셈이다.
한유진은 속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굴욕감을 참으며 담담히 답했다.
"저는 수선자입니다. 외단법으로 결단기에 오를 때 드래곤 하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원래 주인과 정당히 거래해서 양도받은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상대는 조금 곤혹스러우면서도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그 원래 주인이 누구입니까?"
"···카사르녹스입니다. 몽환용이지요."
"음."
"혹 아시는 관계입니까?"
어떤 인연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르게 묻는 것이었다. 혹시나 싶은 생각도 있었다. 정말로 카사르녹스를 아는 자라면 훗날 약속을 이행할 때 도움이 될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으로든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군요. 음······."
말하고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스태프를 가볍게 들어 허공 위쪽으로 휘젓는다.
그 순간.
완벽히 정지해 있던 주변 광경에 변화가 일었다.
벽과 기둥 따위가 치솟아 일종의 미로 같은 진법을 형성하고 있던 풍경이 물에 풀린 잉크처럼 마구 흐트러진다. 그렇게 곧, 처음 경매장에 방문했을 때의 모습으로 화했다.
"당신과 일행의 실력이라면 어차피 해결할 수 있을 문제였겠지만, 제가 지금 대신 처리해 드렸습니다."
"···어떤 문제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경계하던 드카리시스 가문이 강도질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랬던 건가, 싶으면서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에 대한 경계심이 재차 피어오르는 때.
"겸사겸사 여기 사람들의 기억도 살짝 손봤습니다. 원래부터 이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드카리시스 가문도 강도질을 계획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요."
마치 게임 속 NPC들의 정보를 좀 편집했다는 듯한 어조라 소름이 쫘악 끼쳤다. 동시에 그가 보여주는 신사적인 태도마저 굉장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수고로움을 덜어드렸으니, 당신의 기억도 살짝 손보겠습니다. 그냥 제 인상착의와 목소리 등만 지울 예정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도 딱히 좋아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 기억을 건드리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당신들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그는 유감이라는 듯 말하면서도 뜻을 철회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나한텐 호의를 베푸는 거라고······?'
인상착의와 목소리 등만 지우겠다는 건, 어쨌거나 선물을 받고 대화를 나눈 기억은 남겨두겠다는 이야기다. 필시 전부 통째로 편집할 능력이 있을 텐데도.
실은 애초에 이런 식으로 등장하여 대화를 나눌 필요조차 없이, 그냥 다짜고짜 제압해 기억을 헤집고 편집한 뒤 풀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도.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는다.
세상에 이런 수준의 강자가 존재하며, 자신이 언제 무슨 일을 겪든 기억이 편집당하면 전부 망각하게 되리란 사실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살아가게 되리란 사실이 너무나 공포스럽다.
어쩌면 이런 초월적인 존재와의 조우가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미 자신의 모든 비밀이 몇몇 존재에게 까발려진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설령 지금까진 아니었더라도 미래엔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두렵다.
실로 우주적인 공포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내가······ 내가 더 강했다면······.'
이런 존재에게 농락당하듯 이런 상황을 강요받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 한가득 차오른다.
예상할 수도 없고 대비할 수도 없이, 천재지변처럼 찾아온 존재가 그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고 있었다.
"이런."
그런 한유진의 기색을 느낀 상대가 곤란하다는 기색이 됐다.
"제가 왜 당신들을 위해서라고 하는지 약간 아시겠지요?"
"······."
"혹시 원하신다면, 이번의 만남을 통째로 지워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드린 선물은 다른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얻었다고 처리될 겁니다."
하나 그런 '배려'를 받은 순간.
한유진은 모든 두려움과 초조함을 즉각 내리누르며 평정을 되찾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원래 하시려던 대로 최소한의 기억만 지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음."
"그 기억 삭제는 꼭 필요해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겠습니다. 이렇듯 말씀해 주시는 것부터가 배려일 테니까요."
담담히 말하면서 그는 피어오르는 반감과 분노를 철저히 억눌렀다. 직전의 혼란과 두려움으로 인해 반작용처럼 나타난 감정일 뿐이고, 이걸 지금 드러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상대는 좀 새롭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용과 거래하신 분 답습니다."
더 이상 실례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재차 스태프를 들어 한유진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에 한유진은 곧 벌어질 '기억 편집'을 각오하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라···?"
그리고 상대가 의문성을 내는 것에 한유진은 눈을 떴다.
"이게··· 음···?"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스태프로 땅을 툭툭 두드리고, 다른 손으로 바꿔 들어 스태프의 머리 부근을 자세히 살피기도 하는 등, 확실히 문제가 생겼다는 행동을 보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확 고개를 돌려 한유진을 마주 봤다.
마주친 상대의 두 눈동자 속에서 무한한 백색과 흑색이 뒤섞여 회오리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싶은 순간.
그 회오리에 세상이 함께 뒤섞여 무너져 내리고, 무저갱에 빠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치솟는 것 같은 압도적인 광경이 덮쳐들었다.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순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자리하는 광경이었다.
삶과 죽음.
어째서인지 그런 절대적 진리의 파편을 목도하는 느낌이다.
동시에, 한유진은 그 거대하면서 위대한 순환이 그저 어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의 눈동자 하나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시야가 확장되는 듯한 감각과 함께 곧 다른 쪽의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눈동자 역시 삶과 죽음의 순환을 담은 채로 그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시야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더없이 거대하여 세상 전체를 뒤덮을 듯한 한 쌍의 날개가 펼쳐지는 것이 인지된다.
심연처럼 깊고 어두우면서 또한 냉엄하고 고귀하며, 동시에 완벽히 대비되는 밝고 부드러운 휘광이 뿜어져 나와 사방을 비춰 어루만지는 느낌을 품은 날개였다.
그게 정확히 무엇의 날개인지 깨달아 파악하기 직전.
- 하···!
왜인지 살짝 화났으면서도 창피한 감정이 담긴 코웃음 소리가 천둥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 장난이 대단하십니다! 완전히 깜빡 속았군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재차 이어졌다.
- 그래요, 어쨌든 제가 먼저 실례하려고 들었으니 따지진 않겠습니다. 하나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때도 쉽게 놀릴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말이 끝난 순간.
보이던 모든 것이 깊은 암흑에 빠져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
경매장 바깥의 일상적인 장소,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 당연한 풍경 속이었다.
물론 그 입시시무스 마법사의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한유진은 수정 상자들부터 바로 스페이서 링에 넣어 감췄다.
"음?"
직후, 앞서 걸어가던 브레나르가 따라오지 않는 한유진의 기척을 느끼곤 뒤돌아보며 멈춰 섰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간신히 더듬지 않고 태연하게 답한 그가 덧붙여 말했다.
"제가 살짝 우려하던 게 있었는데, 기우였던 모양입니다."
그에 브레나르가 작게 피식 웃었다.
"드카리시스 가문 말이지?"
"······예."
"확실히 그놈들이라면 뭔가 수작질을 부려도 안 이상하지. 장소도 장소이니."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되레 입맛을 다셨다.
"괜히 좀 아쉽네. 만약 본성을 드러냈다면 아주 제대로 박살을 내고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만큼 확실한 승산을 점치는 태도다.
하나 한유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상대도 이쪽이 원영기급 전력이 포함된 에번라크 가문 사람들임을 눈치챘다. 그럼에도 두고 보자는 감정을 품고서 일을 벌였다는 건 그만한 준비가 되어있었단 뜻이었다.
'물론, 그 입시시무스급 마법사도 당신과 일행의 실력이라면 어차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모르고 한 말일 터였다. 지금 한유진 자신이 실력을 전부 드러내기가 곤란하다는 사실을.
요컨대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칫 정체가 들켰을지도 모른다. 의도치 않게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비록 그 대가로 기억을 '편집'하려고 했었지만.
'도대체 왜······ 그냥 물러난 거지?'
장난이 대단하다느니, 깜빡 속았다느니, 다음엔 쉽게 놀릴 생각은 말라느니,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그렇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다.
'내 각성 능력.'
그게 입시시무스급 마법사의 기억 편집을 막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상대에게 어떤 큰 오해를 불러일으켜 물러나도록 만든 것 같다.
심지어, 그 물러남이 자발적인 게 아니라 강제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각성 능력으로 들어온 세계에서 만났기에 가능했던 일일까?'
느낌상 그런 듯하지만 당연히 확신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각성 능력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하나 그럼에도.
이번에 정말로 크고 중요한 경험을 했다.
스스로의 각성 능력에 대한 믿음이 커진 것은 물론, 어째서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부여 역시 확실하게 된 것이다.
어중간한 수준에서 만족했다간 언제 어떻게 천재지변처럼 부당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자신이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고선 더없이 비참해질지도 모른다.
오한이 들려는 것을 겨우 억누르면서 그는 계속 태연한 모습으로 일행들과 움직였다.
'그 마법사는 대체 정체가 뭘까.'
인상착의와 목소리 등의 정보를 괜히 지우려고 했을 리 없다. 또한 상대가 꾸준히 그런 식으로 움직여왔다면 정체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한참을 더 심각한 기분에 빠져있다가 문득 나오려던 한숨을 참으며 머리를 환기했다. 최소한의 단서조차 없이 고민하는 일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지금은 그냥 어쨌거나 일이 잘 풀렸음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면 충분할 터였다.
천재지변 같은 불가항력적인 존재를 만났음에도 전혀 해를 입지 않았고, 드카리시스 가문의 음모가 저절로 공중분해됐으며, 심지어 욕심났지만 애써 포기했던 영과와 영단을 얻기까지 했다.
'잠깐.'
아직도 자신의 스페이서 링에는 그 마법사가 건네준 수정 상자들이 들어있었다.
내용물은 문제가 없을지라도 상자에는 혹시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그만한 강자가 괜한 잔수작을 부려놓았을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혼자가 되는 즉시 상자부터 처리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그는 다른 것을 떠올려 궁구해 보기 시작했다.
무한한 백색과 흑색이 뒤섞여 회오리치는 듯하던,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하며 완벽한 조화를 보이던 순환에 대해서였다.
'삶과 죽음······.'
얼핏 느껴졌던 것은 그런 생사에 대한 진리였으나, 그는 생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터라 오히려 그 바탕이자 구조인 '순환'에서 훨씬 더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 조화에 대한 영감이기도 했다.
마도 수사에게서 얻은 몇 가지 암흑계 법술을 참고하면, 지금도 쓸만하다고 여겨지는 오행신광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음양오행이라.'
상당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화두였다.
129. 뜻밖의 고백
수정 상자는 보면 볼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독특한 물질이었다. 처음엔 정말로 수정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돌도 아니고, 금속도 아니고, 유리도 아니고, 플라스틱은 더더욱 아니다. 당연히 나무도 아니었고 고무도 아니었다.
'자연적인 게 아니라 인공적인 물질 같은데······.'
하나 단지 느낌에 불과했다. 확실한 건 물건을 보관하는 데 최적화된 특성을 가졌다는 점뿐이었다.
뚜껑을 닫으면 외부와 기운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내부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도 같다. 특별한 법결 따위가 새겨져 있지도 않은데.
계속 갖고 있으면서 꾸준히 연구해 보고 싶었으나, 고민하던 그는 결국 수정 상자를 인적없는 장소에서 파괴한 후 버렸다.
가능성은 매우 작지만 그 작은 가능성으로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이 너무 컸다.
그렇게 상자를 파괴한 후 영과와 영단을 따로 옥함에 보관했다.
복숭아를 닮았으며 오행 속성을 진하게 품은 영과는 거의 상급에 가까운 영식이었다. 즉, 원영기나 화신기 수사에게도 효험이 있을 수준의 물건이란 뜻이었다.
'괜히 내가 욕심났던 게 아니지.'
어떻게 가공하면 좋을지 잘 연구한 후 복용하면 아주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수련상의 정체가 혹시 발생했을 때 그것을 깨부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다음으로 영단은 우선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효능에 대해선 장담할 수가 없었다.
특히 영단의 주재료 중 하나가 천요(天妖)의 피를 가공한 것으로 파악된 만큼, 요족들과 접점이 적은 은하제국의 정보열람소에서 도움 되는 지식을 찾기가 어려웠다.
요족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바로 천요의 피인 터라 살짝 걱정이 된다. 그래도, 수선자들 역시 요족의 부산물로 많은 종류의 영단을 제조해 먹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현실로 귀환하기 직전에 복용시키면 될 터.'
그러면 혹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더라도 귀환하면서 그 '성취'를 수확물로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물론 이는 만약을 대비한 생각일 뿐이었고 문제가 없을 확률이 더 높다고 여겨져서 나름 기대가 됐다.
그리고 봐도봐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마도 원영기 수사의 물건들이 있었다.
이전까진 딱히 마도 공법이나 법술을 익힐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반쯤 흘려보내듯 살피는 정도로 넘어갔었는데, 그 입시시무스 마법사와의 조우에서 음양 조화에 대한 영감을 얻은 뒤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음양은 최초로 변화와 어우러짐을 설명하는 개념이란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다.
또한 이진법만으로도 현대 지구의 컴퓨터가 잘만 작동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음양만으로도 모든 것을 어찌어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오하기도 하다.
'혼원은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서 오히려 접근이 어렵지.'
반면 음양은 그렇지 않다. 일례로 사람이 쉽게 빠져들 수 있는 흑백논리조차 음양의 일부인지라, 태생적으로 친숙하다고 봐도 영 틀리지 않을 정도다.
'요컨대······ 여러 선도 개념들 중 혼원을 예외로 친다면, 가장 중요하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동시에 이 음양은 세상을 구체적으로 형성하는 모든 물질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오행과도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요컨대 오행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서라도 이 음양을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단 뜻이었다.
본말이 전도되어 너무 음양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될 터다.
즉.
마도 원영기 수사의 공법과 법술 등을 파고들어 암흑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광휘계와 음양적 개념으로 조화시켜 보는 일은, 결과적으로 태을오행도경의 수련을 촉진하는 일이었다.
'겸사겸사 업그레이드된 법술도 얻을 수 있을 테고.'
전부 성공할 때의 이야기였지만 그는 자신이 실패하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성장을 위해 꾸준히 태을오행도경을 수련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깨달음을 탐구하고 있을 때였다.
슬슬 볼일도 끝났으니 이 행성 P-221을 떠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을 무렵.
브레나르가 한유진의 방을 찾아왔다.
"잠깐 산책이나 갔다 올까? 여기에 그 유명한 관광 명소 있잖아."
"아스트라붐인지 뭔지 하는 곳 말입니까?"
"아스트라비움. 폭포에서 별빛이 흐른다더라고. 밤이 되면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다더라."
꼭 필요한 일은 아니겠으나 하루이틀 시간을 내지 못할 것도 없다. 한유진은 당연히 수락했다.
단출하게 준비를 마친 둘은, 아니, 무용이까지 포함해 셋이라고 칠 수 있는 일행은 도시를 나서 그 관광 명소로 향했다.
도착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1레벨 영능자와 7레벨 영능자의 산책이었으니 애초에 오래 걸릴 수가 없었다.
도착해서 본 아스트라비움은 특이한 에테르 흐름이 형성되어 여러 신비로운 자연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대규모 폭포 지대였다.
푸르고 울창한 숲과 밝은 회색빛으로 깔끔한 느낌을 주는 암벽들, 그리고 사방 자욱이 흩어져나가는 물안개 속에서 형성되는 무지개 등이 실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
관광하러 온 사람답게 한유진은 꾸밈없이 감탄하면서 그 자연의 경이를 즐겼다. 브레나르도 비슷한 태도였고, 여기까지 오던 중 자연스레 그녀의 품에 안기게 된 무용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데서 술이 빠질 수 없지."
둘이 내려선 곳은 적당한 크기의 암벽 봉우리 정상이었는데, 브레나르가 어지술과 비슷한 수법으로 탁자 및 의자를 만들어냈다. 이어 넥타르는 아니지만 희귀성 측면에선 그에 못지않은 고급 술을 석제 잔과 함께 꺼냈다.
찍! 찌직-!
무용이가 즉시 식탐을 드러냈지만 브레나르는 그냥 웃으면서 조금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용이가 이런 독한 술을 마실 수 있으리라곤 티끌만큼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황금빛 액체가 잔에 채워지고 매혹적인 향기가 퍼져나간다.
둘은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담을 나눴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안주 삼아 한가로움과 평온함을 만끽하는 술자리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풍류가 아닌지 생각될 정도였다.
한유진의 입장에선 비록 상대가 상급자였지만 전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탐험단보다 훨씬 더 규율이 엄격하고 딱딱한 우주군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이기도 하지.'
상급자이면서 원영기급 존재라는 점조차 그녀의 미모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까먹을 때가 있다. 하여 가끔은, 디멘시스 순양함에 처음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그녀의 미모에 홀려 실수를 범했던 신병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담으로 그 실수했던 신병 녀석은 한유진이 상사로 진급할 때쯤 퇴역했다. 따로 알아보질 않아서 이유는 몰랐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날이 금방 저물었다.
노을이 지고 마침내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춰 수많은 별빛이 하늘을 장식할 무렵.
아스트라비움은 본격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했는데도 새삼 놀랄 수밖에 없는 수준의 아름다움이었다.
바로 그렇게, 충분히 몽환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유진."
"예."
"혹시 나랑 결혼할 생각 있어?"
계속 식탐을 드러내다가 마침내 좌절에 가까운 체념을 보이며 브레나르의 품속에 늘어져 있던 무용이가 번쩍 고개를 쳐든다.
한유진은 들고 있던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곤 마음의 동요를 다스렸다.
"비록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해도, 알다시피 우리 정도 수준의 영능자에겐 별 중요한 요소가 아니잖아."
맞는 말이긴 하다.
평범한 지구 현대인의 감수성으로는 살짝 이상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이미 백 살이 훌쩍 넘었고 앞으로도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될 한유진으로선, 이미 그런 평범한 감수성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브레나르도 마찬가지일 터였고.
"조금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너는 여러 면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배울 점도 많은 훌륭한 사람이야."
그녀는 얼핏 평소의 그녀다운 태도로 말하는 것 같았지만, 한유진은 그녀가 실상 꽤 부끄러워하면서 은근히 긴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물론 이게 뜬금없는 '고백 공격'까진 아니었다.
심각하게 눈치가 없고 바보인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한참 전부터 자신에게 호감을 품어왔음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여태 딱히 반응하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서두를 뗀 그가 마지막으로 잠깐 생각을 정리하곤 이어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진심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하나······ 제가 단장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한 거절에 브레나르는 눈을 감으며 들고 있던 술잔의 내용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어 눈을 뜨곤 한유진을 바라본다. 마치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처럼.
"첫 번째로, 여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 없지만, 사실 저는 사별한 아내가 있습니다."
"···사별한?"
"예.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고 특별히 아이도 갖지 못했지만······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이 그녀와의 추억을 지운다거나 배신하는 행위가 아님을 알지만,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이유였는지 브레나르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말하면서 그녀는 잠깐 여러 생각을 떠올려 보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제국 시민이 되기 전의 일일 수밖에 없을 테니, 그때 한유진이 몇 살이었는지, 그러면 어떤 느낌의 인연이었을지 등을 짐작해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한유진이 말을 이었다.
"제가 머지않은 미래에 이 은하제국을 떠날 계획이라서 그렇습니다."
"떠난다고? 어디로?"
"수선계로 갈 생각입니다."
완전한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거짓도 아닌 답이었다.
그는 정말로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로 돌아가야 하며 언젠가는 수선계도 꼭 방문할 계획이었으니까.
"성장을 위해서?"
"예."
잠깐 침묵하던 그녀는 결국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수선계가 우리 은하제국보다 고점이 높긴 하지······."
수선계의 수련법을 익힌 이에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찍···? 찍···!
무용이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울음소리를 낸다. 브레나르는 반사적으로 그런 무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한유진으로서도 사실 마음이 썩 편치 못하고 복잡미묘했다.
브레나르는 확실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굉장히 유능하고 대담하면서 때로는 소녀 같은 순수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하여 실은 부정할 수 없게도 그 역시 호감을 느끼게 된.
정말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식의 고백을 받기 전에 그가 먼저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대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실은······."
그녀가 어렵다는 것처럼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지만, 나 역시 이렇게 결혼을 제안한 것엔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
"···어떤 겁니까?"
몇 번 정도 입을 달싹이며 머뭇대던 그녀가 재차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했어. 정확히는, 우리가 예전에 복용했던 그 식혼성도단으로 얻은 기억 중, 쌍수공법 환화주천공의 도움을 받아볼까 싶었지."
"예?"
실로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였는지라,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리 반문했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를 답하기도 전 문득 떠오르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었다. 결단기 수사로서의 지능 덕에 저절로 떠오른 것들이었다.
예전에 그는 퇴역 절차를 거치면서 만약 자신이 중령급이었다면 이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퇴역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다. 한데 브레나르는 바로 그 중령급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퇴역하고선 탐험단 일을 시작했다.
즉,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불과 얼마 전에 경매장에서, 그녀는 마법 성역의 아주 특별하고 강력한 회복 포션이라는 물건에 상당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네가 식혼성도단을 먹여 나를 살렸던 그때."
도움이 필요했다는 말과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바탕으로 뭔가를 깨닫기 직전.
한발 앞서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
"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어.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에 깊은 후유증이 남았거든."
언뜻 담담하게 말하면서 그녀는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고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어. 그 마도 수선자는."
130. 밝혀지는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