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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밝혀지는 진실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느낌이면서도 어쩐지 한편으론 납득이 가는 느낌이다.

루미너스 은하제국의 11레벨 영능자와, 마도 종문 소속 원영 중기 수선자의 전투였다.

비록 11레벨 영능자가 원영 중기급으로 여겨지긴 한다지만 상대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에테리얼 웨폰의 융합지능이 뛰어나긴 해도 상대의 본명법보 역시 그리 뒤처지진 않았을 것이다.

'합마종의 장로였지.'

그곳은 단편적인 정보들만 놓고 봐도 마냥 얕볼 수 없는 느낌의 세력이었다.

즉, 만만찮은 세력에 속한 원영 중기 수사였던 만큼 당연히 평범한 원영 중기 수사보다 강했으리란 이야기다.

그런 존재와 싸워서 브레나르는 가까스로 이겼다.

필시 후유증 따위를 걱정할 새도 없이 과부하를 일으키는 비술을 사용했을 것이다. 당시의 전투 양상을 되짚어 보자면 확실히 그런 감이 있었다.

'······하나 실은, 그런 비술을 사용하고서도 이기지 못했었지.'

그녀가 쓰러진 후 마도 수사의 원영이 나타나 탈사를 시도했었다. 만약 그 자리에 한유진 자신이 없었더라면 결국 승자는 마도 수사가 되었을 터다.

이제야 모든 것이 좀 더 타당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한유진은 쌍수공법 환화주천공의 법결을 떠올리면서 어떤 특별한 효험을 기대할 수 있을지 가늠해 봤다.

"여태 다른 많은 수단을 써봤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지. 그리고 쌍수공법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베풀려는 게 아닌 한 양쪽 모두 공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하잖아. 그러면서 아무하고나 시도해 보기에도 썩 난감하고."

실로 맞는 말이었다.

'환화주천공은, 음······.'

과연 영혼적인 후유증에 도움이 될지 법결을 더듬어 보던 그는 문득, 이게 최근 붙잡고 궁구하던 음양 조화와 대단히 깊은 연관성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그사이 브레나르의 말이 이어졌다.

"유진, 네 사정과 목표를 알았으니 나와 꼭 결혼하지 않아도 돼. 그냥··· 동료로서 나를 좀 도와줘. 사례는 반드시 할 테니까."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사례는 괜찮습니다. 그때 단장님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저도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 관련하여 제가 도울 점이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때 한유진 자신이 싸움에 힘을 보태지 않고 숨어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하여 그렇게 답한 이후.

둘 사이에 살짝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크흠."

브레나르는 괜히 헛기침하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금세 평소의 기색을 되찾았다.

"그럼 이제, 그 환화주천공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자고. 식혼성도단으로 얻은 기억에 혹시 빈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그게 어떤 원리로 영혼적 후유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브레나르가 판단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음양 조화를 체감하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던 참이다.

둘은 언제 분위기가 무거웠냐는 듯 열띤 대화를 이어갔다.

* * *

첫 쌍수공법 수련은 복귀하는 와중 이뤄졌다.

환화주천공은 한유진이 정보열람소에서 얻은 오행윤환결처럼 수련공법이자 특수공법이었다. 주력으로 삼을 수도 있고 파트너가 있을 때만 연공하는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둘 다 이러한 종류의 수련이 처음이었던 만큼 살짝 헤맸지만, 과연 11레벨 영능자와 결단기 수사답게도 빠르게 익숙해지며 효용을 볼 수 있었다.

감상을 말하자면, 괜히 쌍수공법이 여태 수선계에서 사라지긴커녕 계속 발전해 온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저 혼자 하던 수련을 둘이서 음양의 이치를 담아 수련할 뿐인데, 이토록 대단한 상승효과가 나다니······.'

마치 영육을 단련함과 동시에 좌망수행처럼 혼원계와 감응하면서 정신적 깨달음까지 얻는 듯하다.

단지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열심히 환화주천공을 수련하다가 혼자서 태을오행도경을 수련해 보면, 흡사 이미 거쳐온 길을 다시 지나듯 진도가 쭉쭉 나가면서 순조롭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놀랄 정도의 영감이 번뜩 떠오르기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이득을 얻었고, 특히 음양에 대해 궁구할 때가 그랬다.

원래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을 오묘한 감각적인 차원에서 미리 체득하는 것 같다. 하여 때때로 이미 알던 것을 그저 명쾌하게 정리하기만 하는 느낌마저 받을 수 있었다.

실로 이득이 대단했다. 수선계의 많은 이들이 괜히 도려(道侶)를 찾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많은 종문에서 핵심 제자들에게 반쯤 강제로 도려를 맺어주기도 한다더니.'

이렇게나 이득이 크다면 납득할 수 있다.

하나 왜 무조건 강제가 아닌 반쯤 강제인지도 대략 깨달을 수 있었다.

쌍수공법은 음양 조화의 원리로 영육을 단련하면서 혼원계와 감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조화'에 대한 부분이다.

조화라는 건 어느 한쪽이 덜 협조적이면 그만큼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만약 덜 협조적인 수준을 넘어 비협조적이기까지 하다면 성취는커녕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비협조적인 상대를 강제로 착취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법이라면 모를까.'

하나 그렇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쌍수공법이 아니라 색마공법이다. 음양 조화를 원리로 삼을 이유도 없을 테고.

어쨌든 지금 그가 이 정도 성취를 볼 수 있는 건 애초부터 브레나르와 서로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녀가 한유진 자신보다 실력 뛰어난 11레벨 영능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그래서.

에번라크 가문의 영지에 도착하기까지 하루도 안 남았을 무렵.

자신의 방에서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깊이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무용아."

찍?

"아무래도 내 비밀을 일부 밝혀야 할 것 같다."

여태 그가 얼마나 신경 써서 정체를 감춰왔는지를 생각하면 실로 어리석게까지 느껴지는 말이다.

순진하다지만 엄연히 법혼기급에 다다른 무용이도 바보는 아닌지라 대략 그런 부분에서 의아함을 표했다.

찍? 찌직···!

"그래, 괜한 짓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정체를 속이고 시작했던 관계였기에 이제와 비밀을 밝힌다는 건, 설령 그게 일부에 불과하더라도 자칫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환화주천공으로 어느 정도의 효험을 기대할 수 있을지는 대강 파악이 됐다.

브레나르가 11레벨 영능자이기에 한유진 자신이 상대적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건, 바꿔 말해 그녀의 입장에선 이득 볼 여지가 적다는 뜻이었다.

'다른 많은 수단으로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후유증이야. 이 정도 효험으로 상태가 나아질 리 없어.'

쌍수공법의 오묘함과 특별함을 인정하지만, 애초에 치유와 회복을 위한 공법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 태청현수까지 본격적으로 동원해야 해.'

태을오행의 특별한 원소 중 하나인 태청현수.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법은 대단한 치유력으로 인해 수련자의 수명이 삼백 년가량이나 증가할 정도다.

쌍수공법과 함께 동원한다면 분명 효과를 볼 수 있을 터다. 그러기 위해선 비밀을 드러내야 했고 말이다.

'다른 거짓말을 덧대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찍-! 찌직!

"······."

또한 심적으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이야말로 일부 진실을 밝히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이미 되어있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치료할 수단이 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잠시 들어가 있어."

찍! 찌직-! 찍!

왜인지 녀석은 잘 풀릴 거라며 별로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그런 무용이를 한바탕 쓰다듬어주고 산해주에 들여보낸 그는, 방을 나서 브레나르를 찾아갔다.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와중 마주친 몇 단원들은 전부 공손히 인사하면서도 조금씩 미묘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더 잘 보이려는 듯했고 누군가는 옅은 시기심을 품은 듯했다.

'벌써 소문이라도 퍼졌나.'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거의 보름 내내 붙어있다시피 했으니 함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선 그런 행동이 두드러지지 않을 수 없다. 딱히 조심하면서 감추려 하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타인의 시선을 하나하나 신경 쓰기엔 그도 브레나르도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잠시 후.

단장실에 도착하자 함내 AI가 저절로 문을 개방했다. 따로 방 주인의 허락을 맡은 게 아니라 아예 권한이 부여된 것 같았다.

"음?"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로 모종의 업무를 처리하는 듯하던 그녀가 들어서는 한유진을 보곤 반갑게 웃는다.

"개인 수련을 한다더니, 벌써 끝낸 거야?"

"그건 아니고, 드릴···."

"잠깐만 기다리면··· 아니, 그냥 같이 할까?"

말하면서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선다. 한유진은 불가항력적으로 혹하면서도 분위기가 더 기울기 전에 급히 말을 꺼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겁니다."

"···그래?"

반기며 웃던 그녀는 덩달아 진지해진 태도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브레나르가 증강현실 인터페이스를 치우고 자신을 마주 보는 때 입을 열었다.

"환화주천공으로 그 후유증에 차도가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아직 모르지."

"제 생각엔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깐 침묵하던 그녀는 눈을 감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확신한 그는 곧장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제게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

뭔가에 굉장히 실망하는 듯하던, 심지어 약간이지만 좌절감까지 느끼는 듯하던 그녀가 솔깃하며 시선을 보내온다.

"한데, 이 방법은······."

막상 비밀을 밝히려고 하니 이미 각오했음에도 입이 잘 안 떨어진다.

물론 여기까지 와서 상황을 되돌릴 마음은 없었다.

"이 방법을 쓰러면, 제가 여태 단장님을 속여왔단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속여왔다고?"

"저는 유목민 출신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성역 출신입니다."

담담한 그 말에 브레나르는 속을 알 수 없는 기색으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지금 그걸 밝히는 거지?"

"그러지 않으면 이 힘을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말하면서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손끝에서 한없이 맑고 푸르른 물이 나타나 작게 회오리치기 시작한다.

태청현수였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짙은 회복의 힘을 품은.

꽤 긴 시간 동안 그 태청현수를 가만히 보던 브레나르가 재차 눈을 감았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느릿하게 입을 연 그녀가 말을 잇는다.

"정말로 많은 부분이 거짓말이었다는 거네. 선발시험에서 네가 보여줬던 그 모습부터, 어쩌면 식혼성도단으로 나를 살렸다는 이야기까지도."

"후자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래, 그게 거짓이었다면 지금 이런 식으로 사실을 밝히진 않았겠지. 나를 도우려고 말이야."

이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실, 네게 무언가 다른 비밀이 있으리란 건 살짝 눈치채고 있었어."

함께 지내온 시간이 길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아니, 11레벨 영능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다.

하지만 이런 식의 큰 비밀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한유진은 그녀가 느낄 배신감을 헤아려 보면서 새삼 각오를 다졌다.

정체를 감추고 활동해야겠다는 건 당시로선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많은 위험과 번거로움을 피하면서 은하제국의 정수를 쏙쏙 빼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고, 실제로 그 계획은 성공했다.

이건 그 합리적인 선택의 대가인 셈이었다.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은 없는 법이었으니까.

'이 대가가 무서워서 계속 진실을 감추고 치료를 미룰 수는 없어.'

태청현수를 거두며 그가 말했다.

"다른 변명은 지금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딱 하나, 제가 최선을 다해 단장님을 치료하길 원한다는 점만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득.

브레나르가 눈을 떴다.

"쓸데없는 말을 하네. 너도 알잖아, 환화주천공을 연공하다 보면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

"······."

"네가 특별히 악의를 품지 않았다는 걸 믿어.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어졌지. 그리고······."

의외로.

그녀의 눈동자 속에 드러난 건 각오했던 배신감이나 분노 등의 감정이 아니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나름대로 안목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야. 한데, 네가 선발시험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여태 지켜봐 온 모습에서 전혀 괴리감을 못 느꼈단 말이지."

그에 한유진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스스로 깜작 놀랐다.

바로 그래서인지, 네 속내를 눈치챘다는 듯 그녀는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네가 어렵게 비밀을 하나 밝혔으니, 나도 하나 밝히도록 할게."

이어지는 그 말이 저절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비밀입니까?"

"사실."

잠깐 말을 끊은 그녀는 언뜻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환화주천공으로 내 후유증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 믿은 적이 한 번도 없어."

"···예?"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도 전.

벌떡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가 한유진에게 다가왔다.

이어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의 무릎 위에 마주 보며 앉는다. 한유진은 뭔가 대처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을 띤 그녀의 눈에서 얼핏, 흉포하게까지 느껴지는 흑백색 기운이 번뜩였다.

"하지 않겠다던 그 다른 변명들, 그냥 지금 다 해."

그녀는 조금 더 감정을 드러냈다. 여전히 웃는 건지 아니면 살짝 화난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최선을 다해 나를 치료하면서, 뭐든 다 해 보란 말이야."

직후.

두 팔로 한유진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녀가 입을 맞춰왔다.

131. 이별할 결심

비밀을 고백한 이후.

브레나르와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깊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훨씬 더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어쩌면 그건 쌍수공법 환화주천공의 부작용 아닌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매번 함께 수련할 때마다 서로의 감정까지 공유하게 되니, 안 그래도 혼원계와 감응하며 정신이 활짝 열리는 와중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확실히, 쌍수공법을 통한 수련은 아무하고나 해선 안 되겠구나.'

설령 감정이 깊은 관계더라도 만약 상대에게 주의해야 할 점이 존재한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브레나르도 그런 점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쌍수공법에 심취하는 느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태청현수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니 더욱 그럴 터였다.

모르긴 몰라도 후유증 치료에 실패할 때마다 불안감과 좌절감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을 텐데, 그걸 해결할 방법이 나타났으니 빠져드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에번라크 가문 탐험단의 일은 확실히 위험하긴 했지만 우주군 탐사대의 임무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로 이전에 암시장을 방문했던 것처럼 치안이 불안정한 행성에 가서 필요한 자원을 구하거나, 혹은 반 정도만 개척이 진행된 행성을 탐사하고 성과를 얻는 임무들을 수행했는데, 가장 위험했던 때조차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가 나서면 무리 없이 해결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매번 충분한 긴장감과 새로움을 선사해 주며 매너리즘을 날려버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가 이런 탐험가적 생활을 좋아할 줄이야.'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한곳에 정착해서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누리는 것만큼이나 괜찮았다.

특히 브레나르와 항상 함께하면서 감정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깊어지는 것을 자각할 때면, 그냥 이 제국에 정착해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현실 지구를 위해서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살짝 타협하여, 수련하면서 실력도 키울 겸 사오백 년 정도만 눌러앉을까 싶은 마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바로 그 조금이지만 타협까지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실로 뿌리치기가 힘든 유혹이었다.

'만약······ 그 마법사와 조우하지 않았더라면······.'

어차피 지금 경지에서도 수명이 천 년 넘게 남았는데, 원영기에 오르면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한데, 브레나르와의 추억을 쌓기 위해서라도 남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을지 모른다.

이젠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으니까.

하나 그 마법사를 만남으로써 천외천이 무엇인지를 깨달아버렸다.

이전엔 그저 막연하게만 여기던 진선기급 존재의 능력은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또한 그런 지고한 경지에 이른 자가 정말로 실존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됐다.

자신도 그런 위대하고 영원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불이 붙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인 만큼 그리 격렬하진 못했지만, 항상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하며 거시적인 계획을 짤 때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한 줄기 불씨 같았으니, 비록 그것이 지금은 작고 약하더라도 확 눈에 띄는 것이 당연했다.

'진선기는, 아무리 수명이 길고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나처럼 아무리 사기적인 각성 능력을 가졌더라도 감히 성취를 장담할 수 없는 그런 경지야.'

그래서 그는 브레나르와 수백 년 이상 살아가며 함께 늙어가고자 하는 욕심을 접었다.

나중에 스스로 진선이 된다면, 필시 지금 당장 수백 년의 행복을 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길고 값진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기 시작했다.

또한 그때의 행복엔 은미령까지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브레나르가 완전히 회복하고 내 성장이 둔화되는 느낌이 들면 떠날 거다.'

실로 어려운 결정이었다.

브레나르가 시시때때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유혹하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결정이기도 했다.

결국.

임무 수행 중이 아닌 에번라크 가문의 영지 별장에서 언제나처럼 성장에 힘쓰던 어느 날.

한창 환화주천공을 연공하다가 침대에 누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던 때였다.

"이 지독하고 매정한 놈 같으니······."

브레나르는 그런 말을 하면서 끝내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냥 내가 다 버리고 따라갈까?"

품에 안겨있던 그녀가 빙글 돌아누워 시선을 마주해 오며 묻는다. 어찌 대답하면 좋을지 잠깐 망설이자니 곧 그녀가 깔깔 웃었다.

"농담이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맞지만, 내 고향과 가문을 준비도 없이 내팽개치고 따라가긴 어려워."

그녀는 괜히 우주군 중령을 단 것이 아니게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매력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 준비는 오래 걸릴 거야. 나 말고도 10레벨 이상의 영능자가 나타나야 하니,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그러니까······ 네가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망설이지 말고 떠나. 나는 여기서 기다리면서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은하제국의 수련법을 통해 11레벨 영능자에 올랐다. 또한 가문 등의 기반도 전부 이곳에 있는 만큼, 오직 여기에서만 가장 빠른 성장을 기대할 수 있었다.

"만족할 만큼 성장하고 나면, 나 보러 돌아올 거지?"

"···당연하지."

사적으로 말을 놓은 지는 이미 몇 년이나 지났다.

한유진은 살짝 늦지만 분명하게 답하면서 그녀를 다시금 품에 안았다.

그렇게 둘은, 지금 이렇듯 더없이 가까이 있음에도 서로 이별을 결심했다.

서글프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진짜 이별의 때가 오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잠시 더 휴식을 취하던 둘은 재차 환화주천공 연공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격정적인 수련이었다.

* * *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더라도 일 초의 낭비도 없이 수련에만 매진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건 성실한 게 아니라 미련하다는 말을 들어야 마땅하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중간중간 휴식이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기계조차도 때때로 쉬면서 점검을 받아야 하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터다.

탐험단 임무는 불규칙적으로 상당한 간격을 두고 정해졌기에 에번라크 가문의 영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꽤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한유진은 브레나르에게서 꽤 빈번히 넥타르 제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 브레나르가 일종의 놀이를 겸해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술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그녀라면 넥타르 제조가 취미인 것도 자연스럽다. 한유진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인 만큼 전혀 피곤하지 않고 진심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필연적일 수 있는 사고가 발생했다.

넥타르 제조실에 몰래 숨어든 무용이가 숙성 나무통 하나를 반쯤 거덜내버린 것이었다.

녀석이 나름대로 사고의 수위를 조절한 건지 뭔지, 다행히 통 중에서 용량이 가장 작은 것이었고 내용물도 비교적 값싼 넥타르였지만, 어쨌든 그래도 넥타르는 넥타르였다.

브레나르는 결국 무용이가 술을 자신 못지않게 좋아하면서 내심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특별한 동물임을 알게 됐다.

"···이 쪼끄만 녀석이 5레벨 영능자랑 맞먹는단 말이지?"

반쯤 괴롭히는 듯한 느낌으로 녀석의 양쪽 볼을 주물거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등, 아직도 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해롱거리는 녀석을 잠깐 응징해 준 브레나르가 한유진을 쳐다본다.

그에 한유진은 여태 숨 쉬듯 당연하게 유지해 오던 몽환유심을 살짝 거둬들여 무용이의 실력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음."

이미 한유진의 환상계 선천영능을 아는 그녀는 새삼 무용이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물었다.

"여태까진 네가 그냥 알아서 다른 장소에 잘 보내두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얘가 5레벨 수준의 영능력을 가졌으면, 다른 곳에 얌전히 두기 어려웠을 텐데?"

함께 쌍수공법으로 수련할 때의 이야기다.

당연히 그런 광경을 무용이에게 보여줄 수 없으니 한유진은 여태 항상 녀석을 산해주에 들여보내 놓고 수련을 해 왔다.

한데 지금 이렇듯 브레나르가 의문을 표했으니 해명할 수밖에 없어졌다.

"동천보물에 대해 알지?"

질문과 함께 그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산해주를 꺼내 보였다.

"···설마 그게 동천보물이라고?"

"크흠."

한유진이 괜한 헛기침을 하는 사이, 아니나 다를까, 예의 그 웃는 건지 화난 건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띤 브레나르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주 양파 같은 남자야. 이런 걸 또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딱히 숨기려던 게 아니라···."

"말을 안 했으면 그게 숨긴 거지. 무려 동천보물을 가졌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따지듯이 말한 그녀는 순간 표정을 풀며 웃더니 한유진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엄살은··· 구경 좀 시켜줘."

이렇게 더 깊이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는 모습이 정말로 고마웠다.

이전에 몇 번 자신의 비밀에 대해 전부 밝히기 어렵다는 진지한 대화를 나눴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런 대화를 나눴더라도 이런 수준의 배려를 보여주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 각성 능력을 설명할 수가 없어······.'

지금 이 세계가 현실인지 시뮬레이션 비슷한 건지 스스로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니 모든 비밀을 밝히고 설명할 수도 없다.

재차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산해주를 개방했다.

금속제 구체가 빛을 발하며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지더니 하나의 출입구로 변한다. 안쪽으로 쾌청한 하늘과 푸르른 산봉우리와 맑은 호수의 경관 등이 비쳐 보였다.

'원영기 수사라도, 어쩌면 화신기 이상의 수사라도 충분히 욕심낼만한 보물이지.'

초창기 수선계에서 저물대가 굉장한 보물로 여겨졌듯 현재는 동천보물이 바로 그런 포지션이었다.

수선계가 존재하는 선도 성역에서뿐만이 아니라 마법 성역과 신마 성역에서도 비슷했다. 물론 거기선 동천 대신 아차원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공간의 상위 개념인 셈이다.

선뜻 동천으로 들어선 그녀는, 처음 한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내부를 천천히 돌아보며 연신 감탄했다. 그리고 완공된 수련실과 연단실과 연기실 등을 보면서 여러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다 거처 건물에 다다랐다.

"여긴··· 혹시 네 고향집이야?"

고향의 건축 양식에 따른 집이냐는 물음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이야기였으나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수선계 양식과는 좀 다르네. 뭐랄까······."

"세속적이지?"

"아, 그래, 맞아. 살짝 과시적이면서 영능학 이론대로 만들어진 부분이 전혀 없어."

강호무림에 대해 뭔가를 더 설명하려던 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그녀에게 뭔가를 감추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각성 능력에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느낀 브레나르가 말했다.

"약속했지, 언젠가는 내게 꼭 말해주겠다고."

"반드시."

"나는 오로지 너를 믿고 기다리는 거야."

말과 함께 그녀가 한유진의 한쪽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반대편 손은 품에서 아직도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무용이를 지탱하는 중이었다.

이후로 그녀는 꽤 긴 시간을 들여 한유진의 '고향집'을 감상했다. 중간에 뭔가를 질문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기도 했으나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

'사별한 아내에 대해 물어보려던 거겠지.'

집의 구조를 보면 그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좋아."

집을 나선 직후 불현듯.

그녀가 선언했다.

"내가 직접 여기에 집을 하나 지어야겠어. 그래도 되지?"

"어디에?"

"저쪽에."

적당하게 떨어진, 현재 거처가 지어진 곳과 비슷한 입지의 장소였다.

"그러면, 네가 여기 올 때마다 나를 떠올리면서 더 보고 싶어지겠지."

브레나르는 웃으면서 한 걸음 움직여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지라 살짝 발꿈치를 드는 움직임이 새삼 사랑스러웠다.

품속 무용이 때문인지 더 이상의 애정 표현은 없었다.

어쩌면 바로 그래서인지, 갑자기 수련이 너무나 하고 싶어졌다.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잡고 있던 손을 살며시 꼼지락거린다.

"···이만 나갈까?"

"가자."

"얘는 어디에 둬?"

당연히 무용이를 여기에 두고 나갈 생각을 하는 그녀를 보며, 한유진은 웃으면서 고향집을 가리켰다.

132. 갑작스러운 이변

보람차고 충실한 나날이 흘러간다.

언제나 그렇듯 해야 할 일들은 굉장히 많았다.

꾸준한 수련, 음양 조화 궁구, 제조술 및 제작술 체득, 신통과 법술 조율, 마도 수사의 전리품 소화, 혈령적화주병의 개조 방안 탐색, 산해주 동천 관리 등.

꼭 그렇게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일들이 아니더라도 할 일이 다양하게 있었다. 특히 브레나르와 시간을 보내는 일은 심정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산해주 동천에 그녀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영전이 관심을 받기도 했다.

"여길 백능이 관리한단 말이지?"

연단실 근처 적당한 크기로 일궈진 영전을 보며 브레나르는 신기해했다. 한유진은 무용이가 어떤 법술을 펼칠 수 있는지 직접 시연해 보였다.

바로, 예전 오행종 유적에서 환몽심탈술과 함께 얻었던 백운윤식술과 흑운심토술이었다.

백운윤식술은 하얀 구름 같은 기운을 만들어내 영식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술이었고, 흑운심토술은 검은빛에 가까운 진한 갈색빛 구름 같은 기운을 땅에 흡수시켜 비옥한 영토(靈土)를 조성하는 법술이었다.

한두 번 사용하는 것으로는 특별히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없고 며칠 간격으로 꾸준히 사용해 줘야 했는데, 평소 그리 바쁘지 않은 무용이에게 임무로 맡기기 딱 좋았다.

그녀는 영전에 심어진 각종 은하제국산 영식들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균형적으로 잘 골라서 심었네. 그런데, 수확을 얻으려면 최소 백 년은 걸리겠는데?"

"장기적으로 보고 하는 일이니까 괜찮아. 꼭 내가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을 테고."

동의한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더니 바깥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한유진이 처음 보는 종류의 영식이었다.

"이것도 저쪽에 심자."

"뭔데?"

"그냥 일단 심어."

계속 물어봐도 좀처럼 답해 주지 않으면서 그녀는 영전 한쪽에 작은 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에번라크 가문이 좀처럼 밖으로 유출하지 않는 핵심 영식 '칸브로시아드'였다.

칸브로시아드의 열매는 10레벨 이상 영능자에게도 큰 효험을 발휘하는 상급 넥타르를 제조하려면 거의 필수로 들어가는 재료였다.

"키우기는 쉬워. 자라는 데 오래 걸리고 넥타르로 제조할 때 다루기가 까다롭긴 하지만."

영식의 정체를 알아낸 한유진이 받아도 괜찮은 거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너한테 주는 거니까 아무한테나 유출하지만 마."

결국 그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브레나르가 만들겠노라 선언했던 새로운 거처 건설은 아주 순조롭고 빠르게 이뤄져 갔다.

그녀는 나름 최고의 재료들만을 골라 직접 건축설계도를 작성하면서까지 몰두했는데, 목표는 해당 건물에서 머무는 동안 은하제국에서 생활하는 느낌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만히 지켜보자면 마치 신혼집을 건설하듯, 미래에 이곳에서 함께 살게 될 것을 당연한 전제처럼 여기며 건설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이별의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한편.

그렇게 브레나르가 건설에 집중하는 일 등으로 바쁠 무렵.

한유진은 홀로 수련하면서 태을오행도경의 성취를 높이고 법단의 도문을 완성하는 일에 주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에테르 수련실에서 오묘한 빛무리에 휩싸여 연공하던 그가 어느 순간 눈을 떴다.

드러나는 것은 예의 우주적인 색채를 품은 세로 동공의 눈이었다.

그 반쯤 개화한 신통을 유지하며 그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보이는 세상의 풍경을 이해하려 애썼다.

현실이 혼원계와 어떤 모습으로 겹쳐있는지가 보였고, 중력이 어떤 형상으로 작용하는지가 보였으며, 그 중력에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영향받으면서 시간이 펼쳐지는지가 보였다.

현대 지구의 과학 이론에 따르자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펼쳐져 있는 일종의 좌표다. 이론상의 4차원적 존재에겐 공간좌표와 비슷하게 느껴지리란 이야기다. 앞으로도 갈 수 있고 뒤로도 갈 수 있는.

'하지만 나는 그런 4차원적 존재가 아니지······.'

하여 그가 '눈으로 보는' 시간의 모습은 마치 무수히 겹쳐 있는 일종의 흐름 같았다.

약간의 과거와 미래가 그 시작과 끝 부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하게 갈라져 나가는, 하여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제한된 불가사의한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제 겨우 오전법단을 완성했을 뿐인 그가 반쯤 개화한 신통의 힘을 빌려 시공간을 인지하고 있단 점이었다.

"음······."

잠시 더 신통을 유지하던 그는 슬슬 정신에 부하가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 짧은 움직임에 신비로움과 위압감을 흩뿌리던 세로 동공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래 유지하긴 어려워도······ 원영기급 존재에게 대항할 수단을 하나 더 얻은 셈이군.'

벌써 이 정도 효능을 보인다면 진짜 원영기에 도달했을 때는 더욱 대단할 것이다.

'시공간 감각도 중요하지만, 현실과 혼원계의 연결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대단하지.'

아주 많은 종류의 왜곡과 은엄폐 등을 쉽게 간파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그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최근 나름의 결실을 맺은 '음양오행력'을 끌어올렸다.

맑은 백색과 그윽한 어둠이 어우러져 회전한다 싶더니 한순간 다섯 찬란한 빛무리로 분열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하나 자세히 보면 시간차를 두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 모든 현상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실로 훌륭하게 잘 조화된 음양오행력이었다.

'문제라면 지금 이대로는 딱히 유용하지 않다는 거야.'

너무 이론적인 조화에만 치중했는지 들인 노력에 비해 효과가 저조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성이 없어서 법술이라 부르기도 좀 애매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쓸데없는 성과라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어디에 어떻게 응용하면 좋을지 고민될 정도로 가능성이 풍부했다.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건 당연히 처음 마음먹었던 오행신광 법술의 업그레이드다. 그다음으로 고려하는 건 원력대수와 근본적으로 합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잘만 하면 원력대수 신통 자체를 새롭게 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더 음양오행력을 갖고 놀며 연구하던 그는 힘을 거둬들였다.

이어 눈을 감고 집중하다가 오행윤환결을 통한 순수한 법력으로 흉조현응술을 펼쳤다.

- 후우······.

긴 탄식처럼 새어 나온 숨결이 빠르게 허공에서 무수한 색채로 엉켜들어 형상을 이룬다. 여타 법술과는 다르게 혼탁하고 어두운 느낌을 풍기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각의 법술이었다.

그 어둡고 혼탁한 색채로 빚어진 형상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흡사 뱀의 몸통에 닭의 다리를 달고 독수리의 날개를 붙여준 듯한 모습이다. 전신이 촛농처럼 끝없이 녹아내리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얼굴이 섬뜩하게도 인간의 것이었다.

묘하게 한유진 자신이 늙었을 때를 닮아 불쾌하기까지 했다.

어린아이만 한 크기로 형성된 그것은 약간이지만 주위를 어둡게 만드는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며 혼탁한 몸의 색채를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동시에 늙은 인간의 얼굴이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입이 쩍 벌어지며 붉은빛 기운이 피처럼 흘러내린다.

그러면서 해석하기 어려운 온갖 희미한 형상과 소리 따위를 한유진의 머릿속으로 흘려보내다가, 이내 힘을 다하고 녹아 사라졌다.

"······."

꽤 긴 시간 동안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석이 안 되는군.'

미래에 별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는 건 알겠는데, 그 정확한 시기와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내 각성 능력 때문이라기엔 일단 반응이 나타나긴 했고······.'

딱히 그가 운명감지계 법술에 서툴러서도 아니었다. 흉조현응술이 완전치 못한 잔편에 불과해서도 아니었고.

원래 앞날을 예측하는 법술들은 전부 이런 애매모호함을 띤다고 들었다. 그래서 운명감지계 법술에 능숙한 자조차 스스로의 법술 결과를 그렇게까지 신뢰하진 않는다고 했다.

또한 그가 아는 지식대로라면, 운명감지계 법술을 더 유용하고 신뢰성 있게 써먹는 방법은 대상을 생명체가 아닌 물체로 삼는 것이다.

그는 마침 떠오른 김에 해치우자는 듯 여러 물건들을 꺼내 흉조현응술로 위험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주로 마도 수사의 물건들이 대상이었다.

다행히 모든 물건을 꼼꼼히 확인했음에도 위험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타난 흉조는 그냥 멍하니 고개를 흔들어대거나 잠깐 주변을 방황하곤 사라질 뿐이었다.

'뭐······ 내가 탐험단 소속인 이상 위험할 일이 많긴 하니까.'

그것이라면 스스로를 대상으로 흉조현응술을 펼쳤을 때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저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그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속 한구석에 넣어두었다.

평화로운 때에 작은 경각심을 일깨우는,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식의 태도였다.

* * *

정말로 세월의 흐름이 빨랐다.

십여 년 전, 마침내 브레나르가 태청현수의 치유력에 힘입어 모든 후유증을 말끔히 회복했다. 중간에 두어 번 장기 임무를 나가지 않았더라면 더 빠른 시간 만에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회복을 마친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여러 방식으로 보답해 왔다.

단지 장소와 복장 등이 바뀔 뿐인데도 쌍수공법 수련에 그토록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아마 브레나르 본인도 정확히 예상하진 못했을 터다.

덕분이랄지 성장 속도에 탄력이 붙어서, 기대했던 것보다 빠르게 팔전법단을 완성할 수 있었다.

되돌아보니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고서 겨우 삼십여 년 만에 이룬 성취였다.

아무리 충분한 지원이 있었다지만 실로 경악할 수밖에 없는 미친 속도다. 지금 이대로라면 법혼기에서 결단기에 오를 때보다 더 짧은 기간 만에 원영기로 승격할 판이었다.

'내가 원영기 수사가 된단 말이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와 오랜 세월 함께하며 여러 임무를 수행해 온 만큼, 그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위험은 전부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리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슬슬 성장 속도가 조금씩 둔화되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여, 이별의 때가 다가옴을 자각하면 그 흥분도 갑자기 식어버리곤 했다.

브레나르도 얼핏 그런 기색을 눈치챈 듯 종종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며 이미 결심한 바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렇게나 빨리 성장했는데, 백 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자연히 그런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그는 자신의 결심을 철회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들르는 정보열람소에서 진선기와 입시시무스 경지에 대한 지식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되레 마음을 다잡았다.

알면 알수록 그 지고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원하는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으리란 믿음이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정기적인 이벤트처럼, 이번에도 아우레움 함선을 타고 임무에 나서게 됐다.

목적지는 X-31 행성이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제대로 탐사가 완료되지 못한 곳이었다.

물론 우주군 탐사대마냥 처음부터 전부 새롭게 탐사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민간 탐험단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질 리 없다.

우주군 탐사대와 그 후속부대를 거쳐 7할 정도 개척이 완료된 행성이었고, 그래서 민간에 기회가 주어졌다. 그냥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라 무려 경매를 통해 얻은 기회였으니 꽤 중요한 임무이기도 했다.

목표는 다름 아닌 혼원석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생명체의 부산물을 가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제법 스릴 넘치는 사냥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됐다.

도착하고선 행성을 관리하는 중인 우주군에게 여러 검사와 인증을 거치고 이런저런 장비를 대여받았다. 브레나르가 한때 우주군 중령이었던 만큼 다른 민간 탐험단보다 일이 더 수월하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이후로는 대여받은 장비를 동원한 본격적인 탐사가 진행됐다.

아스트랄 스톤으로 가공할 수 있는 부산물을 품은 생명체의 이름은 임시로 '아스트렉스'라고 명명됐다. 깃털 풍성한 랩터류 공룡을 닮았는데 은신 능력이 대단하고 지능이 뛰어나서 조심할 필요성이 컸다.

무엇보다 가장 약한 개체조차 7레벨에 가까운 6레벨 영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라, 탐험단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소수정예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탐사에 나선 인원의 수는 딱 다섯이었다.

브레나르와 한유진과 윈스펠을 주력으로 하고, 장비를 운용하는 보조적인 역할의 6레벨 영능자 전투원 둘이 따라붙는 구성이다.

다섯으로 구성된 일행은 현재 우거진 정글을 헤치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찌르르르륵······!

이름 모를 벌레 우는 소리가 이색적인 감흥을 자아낸다.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별다른 수확이 없었지만 분위기는 딱히 무겁거나 심각하지 않았다. 겨우 하루일 뿐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놈들의 서식지에 진입하는 만큼, 곧 사냥이 벌어질 터였다.

바로 그렇게 십여 분을 더 조심하며 나아갔을 때였다.

"음···?"

문득 의문성을 낸 브레나르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일행을 멈추게 만든다.

신식을 최대로 펼치고 있었음에도 한유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왜인지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묘한 불편함을 느끼면서 전투를 대비했다.

"무슨 일입니까?"

후방을 경계하던 윈스펠이 슬쩍 다가와 질문한다.

그에 브레나르가 뭔가를 답하려던 순간.

핑-!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동시에, 윈스펠의 손에서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를 새까만 구형 금속체가 일행 사이로 날아들었다.

갑작스레 증폭되는 위기감과 함께 사고가 급격히 가속한다. 느려진 듯한 세상 속 던져진 물건의 정체를 파악한 그는 곧바로 신식을 거둬들이며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하지만 대처가 살짝 늦었다.

몇 년 전 8레벨 영능자로 승급한 윈스펠이 작정하고 기회를 노려 등에 칼을 꽂은 상황이었으니, 배신을 당한 입장에서 완벽히 대처하기란 어려웠다.

노바스팅(Nova Sting).

크세노스를 상대하기 위해 개발되었고 무수한 실전에서 효용성이 입증된, 그만큼 엄청나게 강력한 섬광탄이 일행 한가운데서 폭발했다.

133. 힘겨운 승리

거세게 터져 나온 빛과 폭음이 에테르적 성질을 띤 채 영능자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동시에 뿜어져 나온 마인드 해킹 파장이 영능 구조를 붕괴시키면서 정신을 뒤흔든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대비할 틈도 없이 당하면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8레벨 영능자에 불과한 한유진이라면 길게는 몇 초 이상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정말로 그가 평범한 8레벨 영능자였다면 말이다.

대처가 살짝 늦었음에도 그는 일부 감각을 유지해 냈다. 몽환진룡도체의 정신 방어력과 팔전법단의 성취 덕이었다.

그사이 윈스펠의 대검이 일행이던 두 6레벨 영능자 전투원을 가차 없이 베어 가르며 날아들었다.

본인이 던진 섬광탄에 본인이 당할 리 없었으므로 아주 빠르고 매서운 공격이었으나, 한유진의 대처 또한 충분히 빠르고 매끄러웠다.

뿜어진 자금광휘가 일차적으로 대검의 속도를 늦추는 사이 오행천둔술로 공격 범위에서 몸을 빼낸다. 그 회피와 함께 시전된 원력대수가 원력무도의 내가중수법 묘리를 담아 윈스펠을 강타했다.

상대에 대해 잘 알기에 맞춤형으로 펼친 반격이었다. 그의 대검 형상 에테리얼 웨폰은 공격 일변도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사용자에게 두터운 보호막을 씌웠으니까.

떠엉-!!

섬광탄의 폭음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 거대한 종을 후려친 듯한 굉음이 발생하고 윈스펠이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꼴에 8레벨 영능자라고 큰 부상을 입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직후.

빠르게 섬광탄의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는 한유진의 머리 위에서 원형 거울이 하나 떠올랐다. 대인전에서 처음 사용해 보는 본명법보 몽현경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전력을 다하는 태도로, 브레나르가 낯선 이들에게 공격받고 있는 탓이었다.

'계획된 배신이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건 앞뒤 사정을 캐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전력이 이쪽을 압도할 가능성이 높으니 최선을 다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하여, 나타난 몽현경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은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 법술 공격이었다.

운룡조(雲龍爪).

살짝 초라할 정도로 직관적이고 단순한 이름이다.

불완전한 법술에 임시로 붙여준 이름이기 때문인데, 본래 이름은 운룡소환이며 원영기부터 제대로 시전하는 것이 가능한 상급 법술이었다.

기본적으로 시공간 감각을 요하는 고차원적인 법술인지라, 반쯤 개화한 용안 신통과 융합지능 엘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방식으로도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불완전함에도 임시 이름을 붙여줬고 지금 이렇듯 사용했다는 건 당연히 그만한 효용이 있단 뜻이었다.

크르르릉···!!

순간, 주위 사방을 진동시키는 으르렁거림이 발생했다.

그 소리를 인식했을 땐 이미 공격이 적중해서 윈스펠이 수 조각으로 찢어발겨진 상태였다. 발악은커녕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서.

흡사 몽현경에서 빛이 터져 나오기 전부터 이미 결과가 정해진 듯한 광경으로, 8레벨 영능자인 적수를 일개 잡졸마냥 처리해 버린 것이었다.

시공간 간섭력을 품은 새하얀 구름의 용 발톱이 뒤늦게 흩어져 사라지는 때.

한유진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두 명의 원영기급 적을 상대로 수세에 몰린 브레나를 돕기 위해 재차 몽현경을 조작했다. 두 눈이 우주적인 색채를 발하며 세로 동공으로 변한 채였다.

불현듯, 브레나르를 몰아붙이던 원영기급 적 중 하나가 그를 향해 급속도로 달려들어왔다.

칠흑색 페이즈 나노 슈트를 입은 상대의 무기는 불꽃처럼 빛을 토해내는 쌍수검이었다. 딱 보기에 장비계 수련법을 익힌 영능자였고 헬멧까지 쓰고 있는 터라 얼굴을 식별하기가 불가능했다.

시공간을 왜곡하며 달려드는 움직임인지라 기세와 흉포함이 실로 엄청났다. 여느 10레벨 미만의 영능자라면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하나 한유진은 개안한 신통을 바탕으로 늦지 않게 오행천둔술을 펼쳐 위쪽으로 몸을 피했다. 동시에 적을 포착한 몽현경의 앞면이 뒷면으로 반전하며 현실을 비틀었다.

"음···!"

뒷면에 비친 형상이 수천 갈래로 찢겨나감과 함께 적이 낮은 침음성을 내며 찰나지간 비틀거린다.

그를 둘러싸고 발생한 온갖 빛깔의 신비학적 왜곡이 강제로 진압당하는 사이.

자색빛을 발하며 현실을 왜곡하던 거울에서 재차 섬광이 폭발했다.

두 번째로 펼쳐진 운룡조가 예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동반한 채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파콰콰콰콰콰쾅-!!

귀청을 찢는 충돌음이 무수히 겹쳐 울린다.

집채만 한 운룡의 발톱이 두 자루 검날에 믹서기처럼 갈려 나가는 광경이었는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검술을 선보이며 공격을 막아낸 적은 의외로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10레벨 영능자는 시공간 감각이 트인다는 점에서 9레벨 이하의 영능자를 상대할 때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다. 숫자로는 단지 1 차이에 불과하지만 사실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하는 셈이다.

즉, 정말로 한유진이 8레벨 영능자에 불과했다면, 설령 그보다 높은 9레벨 영능자였다 하더라도 이런 공방이 성립될 수는 없단 뜻이었다.

물론 상대는 얼간이가 아니었기에 당황한 기색을 얼핏 드러내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진 않았다.

스스슷···!

아주 희미한 소리만을 내며 가공할 속도로 돌진해 와 한순간에 검을 십여 번 넘도록 휘두른다. 그저 빠르다고만 표현하기 어려운 시공간적 왜곡을 동반했기에 형상이 겹치고 사라지고 일렁이는 등 온갖 변화를 일으키는 채였다.

그를 상대하는 한유진으로선 오행천둔술이 있음에도 아슬아슬한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사이.

두 명의 10레벨 이상 영능자를 상대하다가 이제 한 명만 상대할 수 있게 된 브레나르는, 예의 흑백색으로 번뜩이는 빛의 고리와 세 쌍의 날개를 펼쳐낸 상태로 전면에 힘을 집중시키며 레이저 같은 광선과 힘겨루기를 하는 중이었다.

부우우우우웅···!!

묵직한 공명음이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짙은 남청빛을 띠면서도 마치 허공을 지워내고 그 공백에 색을 채워 넣은 듯한 기묘한 느낌을 풍기는 광선이다.

그 광선을 쏘아내는 무기는 창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생김새의 스태프였고, 그 스태프를 든 자는 정장을 입고 십여 개 이상의 보석 장신구를 착용했으며 백금빛 가면을 쓴 기이한 차림새였다.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 발생하는 여파가 주변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대신 둘의 조작력에 의해 재차 끌려들어가 공방의 위력을 더하는 양상을 띤다.

과연 둘 다 은하제국산 에테리얼 웨폰을 가진 자들답게 경이롭기 짝이 없는 컨트롤 능력이었다.

- 아드모엘!

헤일로처럼 뿜어져 나오는 흑백색 빛을 더욱 집중시켜 힘을 가하며 브레나르가 사납게 외쳤다.

-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서 무사할 줄 아느냐?!

- 허허허···! 너희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한창 쌍수검을 쓰는 적을 상대로 미친 듯이 자리를 바꾸며 움직여 다니던 한유진으로서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바로 그 P-221 행성의 암시장 경매장에서 한 차례 음모를 꾸민 바 있는 그 드카리시스 가문의 노인이다.

그때는 입시시무스 마법사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음모가 공중분해됐었는데, 어쨌든 당시에 드러났던 과감성이 이번에도 발휘된 모양이었다.

아슬아슬한 공방의 와중에도 한유진의 머릿속에서 찰나지간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곳 X-31 행성의 탐사권을 낙찰받은 집단 중엔 당연히 드카리시스 가문이 존재했다. 하나 각 가문은 우주군의 관리하에 적절히 떨어져 배치되고 어떤 가문이 어디를 맡는지도 서로 알 수 없다.

즉, 지금 이건 윈스펠이 내부 배신자로서 정보를 유출했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일행의 구성과 위치 등의 정보를 모두 실시간으로 공유했을 것이기에 바로 이런 함정이 마련되었을 터다.

여태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지만, 그냥 곁눈질로만 봐도 섬광탄의 폭발과 함께 이곳 일대의 소란을 은폐하는 결계가 펼쳐졌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높은 확률로 11레벨 영능자인 브레나르마저 잠깐은 가로막을 수 있는 저지력까지 갖춘 결계일 터였다.

직계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에번라크 가문의 핏줄인 윈스펠이 왜 배신을 결심했는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그는 한유진 자신과 브레나르의 관계가 발전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부터 적의를 품고 있었다.

특별히 그 적의가 강해지거나 위험할 만큼 비틀리는 것은 못 느꼈지만, 예전부터 7레벨 영능자였고 8레벨로 승급까지 한 존재가 너무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들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겉으로 전혀 티를 내지 않아 스스로를 잘 감독한다고 여기면서 내심 감탄까지 했었는데, 이제 보니 실은 다른 방식으로 그 적의가 표출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그냥 악감정 때문만은 아니겠지···!'

감정은 그저 배신의 단초였을 뿐 따로 약속받은 이득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간단하게는 특정한 물건이거나 잘 세탁된 대량의 크레딧일 수 있다. 혹은 브레나르가 죽어 흔들리게 될 에번라크 가문을 상대로 드카리시스 가문이 이득을 취하면, 그 떡고물 중 일부를 약속받았을지도 모른다.

파스슥···!

잠깐 생각하는 사이.

땅속 깊이 숨어든 그를 노리고 상대의 두 검에서 십여 줄기의 빛줄기가 쏘아졌다. 대지를 빛살처럼 베어 가르며 날아드는 그것들은 오행천둔술을 펼치는 한유진보다 결코 느리지 않았다.

비록 그 공격을 뺀다면 상대의 공격수단이 제한된 상황이었지만, 반격하기 어려워진 것은 한유진 자신도 마찬가지였는지라 딱히 처지가 나아졌다고 보긴 힘들었다.

꿈처럼 화한 상태로 곁에 있던 몽현경에서 섬광과 함께 오행신광들이 뿜어져 나가 상대의 공격과 충돌한다.

오행신광들은 충돌한 즉시 쪼개져 스러지는 무력한 모습이었지만, 몽현경이 발하는 섬광은 끊어지지 않고 가히 소나기 같은 기세로 오행신광을 퍼부었다.

결국 상대의 공격이 추격하던 기세를 잃고 끝내 덧없는 폭발을 일으키며 소멸한다. 그러자 상대는 한유진을 포기하곤 노인과 힘겨루기를 하는 브레나르를 노리며 돌진해 갔다.

당연히 기겁한 한유진은 땅 위로 다시 튀어나와 어그로를 끌 수밖에 없었다.

몽현경을 통해 세 번째로 시전된 운룡조가 벼락같은 기세로 쌍수검을 든 적을 덮쳐 가는 바로 그때.

마치 이걸 노렸다는 듯, 상대가 즉각 반전하여 여태까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들이닥쳤다. 반쯤 개화한 용안 신통으로도 미처 그 움직임을 완전히 따라잡지 못했을 만큼 가공할 빠르기였다.

심지어 휘둘리는 검의 끝부분이 일순 지워진 것처럼 사라지더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각도와 타이밍에서 나타나 한유진의 목덜미를 가차 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푸확-!

절단나 떨어지는 머리와 함께 몸뚱아리에서 피가 뿜어져 치솟는다.

그렇게 뿜어져 나온 피가 땅에 닿았을 시점엔 연이어 날아든 쌍수검이 한유진의 몸을 무자비하게 베고 찌르고 쪼개고 찢어발겨 수십 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상태였다.

- 안 돼-!!

만만찮은 상대에게 붙잡혀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브레나르가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쌍수검을 든 자는 예상 밖으로 크게 성가셨던 상대를 마침내 처리했음에 만족하며 몸을 돌렸다. 이제 브레나르를 합공해서 처리할 차례였다.

그렇게 몸을 돌린 순간.

그는 코앞에서 우주를 품은 듯한 세로 동공의 눈 한 쌍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두 눈동자 속에서 세상의 모든 색채를 끌어모아 빚어낸 듯한 빛의 고리가 만들어지고, 그 고리 위로 여섯 세상들의 불분명한 환영이 떠올라 윤회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머리 위 몽현경이 상대를 비춘 즉시 뒷면으로 반전하여 호박 속 벌레처럼 굳어 멈춘 광경을 연출한다.

또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한쪽 손의 혈령적화주병에서 수십 줄기의 흑선들이 쏘아져 페이즈 나노 슈트의 방어막을 관통해 파고든다.

끝으로.

그 모든 신통과 본명법보의 구속과 아티팩트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반격을 펼친 상대의 검이 각각 심장을 찔러 헤집고 목을 쳐 반 이상 갈라버리는 와중에도.

온 노력을 다해 강제로 상대의 시선을 고정한 채, 반쪽짜리 용안과 육도윤회가 펼쳐지던 두 눈동자 속에서 불현듯, 붉디붉은 화염이 폭발했다.

분천시(焚天視).

비록 이 역시 지금 한유진의 능력으론 불완전하게만 펼칠 수 있는 상급 법술이었으나, 운룡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불완전하여 위력에는 손실이 없어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펼칠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한데 지금 둘의 거리는 더없이 가까워서 그러한 제한사항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컨대 온전한 상급 법술과 다름이 없었고, 그 상급 법술에 포함된 것은 평범한 화염이 아니라 태을오행의 홍련진화이기까지 했다.

하여 한유진의 목이 마침내 완전히 잘려 나가고 심장이 주변 폐와 함께 걸레짝처럼 찢겨나가는 때.

푸화아악-!!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진홍빛 화염이 쌍수검을 든 10레벨 영능자의 머리를 휘감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타올랐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머리에서 시작됐던 불꽃이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져 그를 온통 휘감는다.

육체를 태움과 동시에 영혼을 녹이고 정신까지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홍련진화의 위력은, 아무리 10레벨 영능자라 해도 이미 적중당한 상황에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절규하며 땅을 구르는 상대의 앞쪽에서, 분명 목이 잘리고 가슴팍이 찢어발겨진 상태인 한유진이 불사신처럼 일어나 섰다.

정통 수선계식 수련법을 따르는 그는 법단이 파괴되지 않는 한 쉽게 죽지 않는다.

또한 몽환진룡도체의 회복력은 가히 현실을 꿈처럼 뒤바꾸듯 가공스러웠고, 태을오행의 태청현수까지 있는지라 회복이 미친 듯이 빨랐다.

잘려 나갔던 머리가 저절로 날아와 달라붙고 가슴팍의 부상이 시간을 되돌리듯 매워진다.

그렇게 안색이 매우 창백하지만 어쨌거나 전력을 되찾은 한유진은 불타오르며 나뒹구는 상대를 몽현경으로 조준했다.

크르르릉···!!

거울의 눈부신 섬광 속 거대한 으르렁거림을 동반하며 네 번째로 시전된 운룡조가 자비 없이 상대를 덮친다.

푸콰콰콱-!

새하얀 구름의 휘몰아치는 와중, 새빨간 피와 살점 등이 함께 흩날리며 마침내 비명이 뚝 끊겼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