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25

120화. 연회 준비

버넬을 제국으로 영입하겠다는 목적으로 온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단돌로 상회를 인수했다고도 들었습니다. 이제는 헤스티아 상회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국 내에서는 어떻습니까?"

"비상이죠. 파스칼 상회와 단돌로, 이제는 헤스티아라고 불리죠? 그 두 개가 지금 극동부 쪽에 기울었으니까요."

들었던 대로였다.

"헤스티아 상회의 경우엔 정리하고 극동부에 본부를 세우는 듯하니, 별 무리는 없을 겁니다만, 아무래도 파스칼 상회 쪽이 심하게 걸리겠죠. 극동부와 교류를 제한하도록 시정 명령을 내릴 수도 있어요."

이 점은 스테판이 미리 말해 두었고,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했다.

페르다는 슬쩍 스테판의 전략을 던져 의견을 물어보았다.

"마도공학 물품 외판은 파스칼 상회가 담당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머, 그런 수를 둔다고 한다면...."

올리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렸다.

푸른 눈동자가 웃음을 지을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제국 내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겠네요. 극동부의 눈치를 보게 될 테니까요. 파스칼 회장님의 아이디어인가요?"

"차기 회장님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렇군요."

그녀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꽤 좋은 상황이긴 하지만, 섭정님께서 주의하실 필요가 있어요. 최근 소문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난민을 빼돌리고 있다는 그것 말이군요."

"예,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죠."

올리비아가 고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긴 겨울 동안 보살핀 섭정님께선 뭐가 된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제 말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난민들 돌려보낸다 쳐요. 돌아가면 또 뭘 하겠어요? 당연히 영민들을 착취하고 빼먹고 하겠죠! 가을 배부르게 곳간을 채우고 나면 애완동물처럼 휙 던져 버리고! 봉으로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죠."

남의 일임에도 상당히 격정적인 반응이었다.

서민들 상대로 지지층을 끌어내려는 사람다웠다.

"안 그래도 제국 내에서 힘을 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행정관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제가 직접적인 도움은 될 수가 없겠네요."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올리비아.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페르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헤스티아는 아직 엘리트층이 부족하죠?"

엘리트층은 단순히 귀족뿐만 아니라 학자, 상인, 장인, 그리고 사제들을 일컫는 상위직들을 의미한다.

나름 각지에서 장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오기도 했지만, 그들을 엘리트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잡일꾼들 수준이었다.

"상인 측은 스테판이 조합을 만드는 중이고, 학자는 에스콜레이아 총장인 버나드가 극동부 탐사 프로젝트를 연계하면서 관심 있는 학자들을 추천받는 중입니다."

"학자와 상인이면 7할 정도는 채웠다 해도 무방하네요."

"문제는 사제입니다."

애초에 흑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페르다는 사제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박애와 자비를 강조하면서도 이단에는 가차 없는 알테의 이중성을 혐오했다.

'그런데도 사제는 필요하다.'

이 마을의 대부분은 제국 출신이며, 대부분은 알테 신자들이다.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극동부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이 제대로 필요했다.

"마침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알테교 사람은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땅인 만큼 온건파 쪽으로요."

"그렇게 힘을 써 주신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이건 저희가 향한 공동의 목표를 향하는 길이잖아요?"

올리비아가 싱긋 웃었다.

"알테교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온 만큼 혹시 발드로바 성에서 연회를 여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연회... 말입니까?"

올리비아가 양손을 거치대로 만들더니 머리를 얹었다.

미소가 화사하다.

"알테 신교 사람들은 곧 입춘제를 준비할 거예요. 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그사이에 연회를 하면서 봄의 기쁨을 알릴 때죠."

"그렇습니까?"

"그러니 제국의 청년들을 위한 입춘제를 마련해 보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제국만 국한되지 않고 남부와 북부를 이끌어 갈 자들과 안면을 트는 편도 좋죠. 안 그런가요?"

"취지나 효과는 좋다고 봅니다만...."

페르다는 마음에 걸리는 것을 그녀에게 물었다.

"제 연회에 그들이 참석할 거라 보십니까?"

연회는 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이다.

중요한 만큼 너도나도 입춘제를 열려고 한다.

그걸 주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을 뻗칠 수 있다는 뜻.

즉, 이것 또한 세력 싸움인 셈이었다.

페르다는 당장에 '처참한' 인맥밖에 없었다.

"왜 안 오겠어요?"

올리비아가 눈웃음을 쳤다.

"제가 올 텐데."

스스로 미끼가 되기로 한 것이다.

출신과 품행, 그리고 외모까지 출중한 제국의 꽃이 참여한다고 선언하는 건 각지의 젊은이들이 주시하기에 충분했다.

권력 계층의 남자들이 모인다면, 여자도 자연스럽게 모이는 법.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연회라....'

두근거리고 설렘보다는 귀찮음이 앞섰다.

이 나이 먹고 새파랗게 어린 것들과 어울리라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페르다 자신 또한 육신은 아직 새파랗게 어리다는 것을 자각했다.

"알겠습니다."

"하실 건가요?"

올리비아가 눈을 끔뻑였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문제 있습니까?"

"뭔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서 설득할 각오를 했는데, 조금 김이 빠졌다고 해야 할까요?"

나를 잘 아는군.

이사벨라가 주의를 먼저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동의하셨으니 알겠습니다. 파티 플래너는 따로 없으시죠?"

"예."

"이번은 제국에서 파견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연회같은 건 자주 열릴 텐데, 팀 단위로 미리 고용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올리비아는 제국에서 안주인 몫을 하는 만큼, 해박하고 능수능란했다.

'황녀가 아니라 3황자였다면, 다른 형들을 제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 또한 잔혹한 운명을 지녔구나.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에서 유행하는 춤은 아시나요?"

페르다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문라이트 스텝'이라고 불리는 건데."

"모릅니다."

"모르시면 곤란하죠. 연회 주최자가 유행에 뒤처지면 놀림거리가 된답니다? 발드로바의 섭정이라는 사람은 세간에 관심도 없다면서."

"...그냥 그만두고 싶군요."

"어머, 낙장불입이에요."

올리비아가 호호거리며 웃었다.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연습해 보도록 하죠. 가벼운 왈츠에서 파생된 거니까요. 요령만 알아도 금방 배운답니다. 왈츠 정도는 아시잖아요?"

"...."

"어머, 그것도 모르나요? 귀족 집안이면 당연히 배울 거라 생각했는데...."

때려칠까, 연회.

올리비아가 잠깐 생각하는 시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페르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뭡니까?"

"춤을 추려면 일어나야겠죠? 얼른 일어나시라고요."

연습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당장 하자는 말인 줄은 몰랐다.

"발드로바 공왕님과 멋진 춤을 추고 싶지 않으신가요?"

발드로바.

약혼자와 함께 맞이하는 첫 연회.

그 모습을 상상하니 페르다의 입술은 계산에도 없이 먼저 움직였다.

"추고 싶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일분일초가 아깝지 않겠어요? 춤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그것도 여자를 잘 아는 여자가 가르쳐 준다면 좀 더 완벽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묘한 설득감을 느끼는 페르다.

하지만 덥석 물 수도 없이 반사적으로 루리를 보았다.

어째서인지 잠잠하다.

뇌물을 받았으니, 눈감아 주겠다는 의도인가?

'아무리 먹을 걸로 유혹하기 쉬워도 그렇게 헤픈 짓을 할 녀석은 아닐 텐데.'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페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든 때를 미루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제쳐 두고 춤을 연습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전하의 폴리모프를 한 모습을 못 봤습니다만... 체격이 어느 정도 될까요? 일단 여성은 맞으시죠?"

체격이라.

페르다는 올리비아를 보았다.

당장에 잣대로 쓸 만한 게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황녀님보다 키가 조금 더 작습니다."

"그럼 가르쳐 드려도 문제가 없겠네요."

올리비아의 손이 페르다의 손가락 틈새를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자, 여기에 이렇게 손을 잡으시고... 음악이 나온다 생각하세요. 다라라란 다란. 네, 여기서 발을 살짝 두드리고 왼쪽으로...."

그녀의 지도하에 춤을 익혔다.

페르다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의 말대로 자기 몸을 움직였고, 흥얼거림이 끝날 무렵, 그녀의 평가는 이러했다.

"음... 춤이 많이 서투르시네요."

말을 좋게 해서 그렇지 몸치가 따로 없었다.

올리비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무게감이 있어 엄청난 춤 실력도 그 무게에 감췄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춤은 몸을 쓰는 일이다.

몸을 쓰는 건 페르다가 가장 못하는 일이었고.

"말씀이 없으시네요?"

"...어쩌겠습니까? 이 폐급 몸뚱이 때문에 쫓겨났는데."

"폐급이라뇨. 이렇게 늠름하신데...."

말을 흐리는 목소리가 요염함을 머금었다.

"가벼운 왈츠에 문라이트 스텝까지 감만 익히도록 하죠. 일단 잡기만 하도록 해요."

"계속 춰야 합니까?"

"당연하죠. 남 가르치는 데는 제가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거든요. 섭정님께서는 제 자존심을 건드렸어요.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 줄 모르시죠? 종일 추셔야 할 거예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멋대로 휘말리게 해 놓고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라니.

"하루 만에 마스터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까, 따라오도록 하세요."

"그 말은 내일까지 있으실 겁니까?"

"네. 문제라도요?"

"황녀이기 전에 처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의 집에 묵으면 소문이 퍼지지 않겠습니까?"

"외간 남자라니요. 섭정님께서는 임자가 있으신 몸이시잖아요?"

"참외밭 앞에서는 신발 끈도 고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걱정도 많으시지. 구실은 충분하답니다."

"어떤 겁니까?"

"버넬 마르퀴스를 제게 넘기세요."

올리비아가 훅 들어왔다.

"안 됩니다."

"네. 그러면 이 건에 대해서 꽤 긴 논의가 오가겠죠? 황녀는 마라톤 회의를 이어 갈 겁니다. 그때 동안 할 것도 없을 테니, 춤이나 배우시도록 하죠. 발드로바 님을 위해서 말이에요."

정말로 그게 되기는 한 걸까?

반신반의하지만, 올리비아는 그런 판단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움직였다.

결국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 춤 연습에 어울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페르다 또한 춤을 잘 추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행과 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올리비아의 시선은 페르다를 향하고 있었다.

춤을 가르쳐 주는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순간이 즐겁다는 듯이 말이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았다.

이런 지긋지긋한 연극을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자신의 유일한 편이라 생각했던 유모마저 황제의 개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그녀는 그때부터 하루 몇 시간씩 거울에 앉아 웃는 연습을 했다.

남들이 더욱 환한 미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올리비아는 그 미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라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쓸데없는 의미 부여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무심결에 던진 눈빛 하나, 미소 하나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되어, 일방적인 애정 공세를 하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렇기에 웃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다와의 만남은 참으로 편안했다.

다른 남자들처럼 웃는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그런 목적으로 웃는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섭정님. 조금 웃어 보는 건 어떠실까요?"

"웃는 건 힘들지 모릅니다."

"웃는 것도 연습하셔야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즐거운 상상이라도 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도 웃기는 어려운지 입술만 꿈틀거리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올리비아는 그마저도 퍽 만족스러웠다.

저 웃음은 틀림없이 약혼자를 위해 열려 있는 것일 테니까.

'얼마나 고결하신지.'

고결한 마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신을 얼마나 믿는가 같은 것이 아니다.

신념을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하면서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 고결함은 올리비아를 고무했다.

알테조차 건드리지 못했던 그녀의 서클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성녀가 되고 싶다는 꿈으로 향하는 바퀴가 되어 움직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다.

똑똑똑—.

좋은 분위기를 깨는 노크 소리.

그 소리에 페르다가 올리비아의 손을 놓았다.

올리비아는 다시 가면을 썼다.

페르다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루리에게 명령했다.

"들여보내라."

기사단장이 들어와 짧게 인사하며 말했다.

"황녀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완전히 초를 칠 생각이었다.

"오늘은 못 돌아갈 것 같습니다. 기술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지금 속히 돌아오라는 전언입니다."

"저물어 가는 날에 출발할 필요가 있나요? 적어도 아침에 귀환하도록 하죠."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실 마법사가 이미 파견 왔습니다. 텔레포트로 귀환할 수 있도록 준비도 마쳤습니다."

"...."

아아.

한창 좋았던 분위기나 기분도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흩어진다.

조금 더 이곳에 있고 싶은데....

더 이상 저항 못하겠다 싶은 그때,

"한창 이야기 중이다."

페르다가 끼어들었다.

"황실의 대표로 이곳으로 와서 진중한 대화를 하는데, 끊을 생각인가?"

"황녀님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공왕령과 교류를 위해서입니다. 영입 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누었던 대화를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건가? 격식이 있는 협의를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걸 바라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페르다가 언짢다는 듯이 대답하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페르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낱, 누군가의 트로피가 되는 인생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받는 인간적인 취급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나오는 걸까?

그 이유는 올리비아가 알고 있다.

페르다는 그녀가 그토록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데에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거드는 것이다.

제국을 무너트리기 위한 공동의 목적을 둔 조력자로서 그녀를 돕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알고 있는데

그런 표정을 짓고 나를 감싼다면,

'나 정말로 착각해 버릴지 몰라요.'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더 이상 안 되겠네요. 섭정님,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야기는 안 하실 겁니까?"

"어쩌겠나요? 다 큰 처녀가 외간 남자의 집에 묵으면 이상한 소문이 돌 텐데요. 떠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페르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올리비아.

페르다도 그 이상은 잡지 않았다.

"조심해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네. 그리고 입춘제를 여신다고 하시니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올리비아는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까지도 페르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 * *

발드로바의 레어.

-한 달 뒤에 연회를 한단 말이냐?

루리에게서 모든 정황을 들은 발드로바가 그녀에게 물었다.

발드로바의 흉악한 눈매 안 속에는 순수한 빛이 반짝였다.

"예. 한 달 뒤에 입춘제를 진행할 것이라 합니다."

-그렇구나.

인간들의 연회를 동경하며, 참석하고 싶었던 그녀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인 장소.

발드로바가 반드시 한 번쯤은 참석하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121화. 스캔들

루리는 들떠 있는 발드로바를 보며 말했다.

"페르다 님이 연회의 호스트인 만큼, 호스티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호스티스면... 짐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예."

-흐음....

발드로바는 고개를 늘어트렸다.

아무리 동경하고 참석하고 싶다고 해도, 자신의 이야기가 되니 겁부터 먹었다.

루리는 당연히 그 성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페르다 님이 춤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춤?

"왈츠라는 것으로 남녀가 함께 합을 맞춰 추는 춤입니다.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지요."

-남녀가 함께....

남은 페르다, 녀는 자신.

한 쌍이 되는 상상을 하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커다란 덩치 탓에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짐이 못 간다고 그런다면...?

"그러면 페르다 님은 다른 파트너와 추겠지요."

-으음....

깊은 고민에 빠진 발드로바.

다른 여자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가슴이 더욱 괴로웠다.

어떻게 하든 참석은 해야만 한다.

-그럼 갑옷 차림으로 가는 건....

"무리입니다."

혹여나 갑옷 사이즈를 줄인다는 발상이라도 할까 봐, 루리는 평소보다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페르다 님이 곤란해하지 않겠습니까? 2m가 넘는 장신을 리드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발이라도 잘못 밟았다간 뼈가 으스러질 겁니다. 불구로 만드실 계획이라면 찬성합니다만, 그럴 리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니라.

드래곤 모양인 상태에서는 갑옷의 무게만 몇백 킬로가 넘는다. 연약한 페르다는 당연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발드로바는 일리가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리가 말했다.

"참석하지 않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렷다?

"예."

루리가 그렇게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불과 힘의 위상이십니다. 인간들에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시니 신비함을 유지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겠지?

좋은 구실을 얻었다는 듯이 흠흠 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면 더욱 숨어 버릴 것이라는 걸 루리는 알고 있다.

루리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그녀를 모셨던 시종이니까.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만."

하지만 발드로바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것.

"오늘 올리비아 아르켄이 온 걸 아십니까?"

발드로바의 몸짓이 굳었다.

제국의 황금 장미라 불리며 동시에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페르다도 남자다.

-대충 알고는 있느니라.

"그럼 들어올 때도 지켜보셨습니까?"

-일하고 있어서 못 봤노라.

"그 여자가 와서 페르다 님을 직접 지도해 줬습니다."

-짐의 약혼자와 춤을 췄다는 말이냐?

"예. 손을 잡고 음악 없이 왈츠를 추고 있었습니다. 무려 4시간 가까이 말입니다."

-4시간....

페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무척이나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데 춤이라니.

그것도 4시간이라니.

남녀가 4시간 동안.

발드로바의 마음속 세계가 우중충해지고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무엇이냐?

"페르다 님이 주인님과 춤을 추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싱숭생숭하던 기분이 단숨에 들떴다.

헛날갯짓을 파닥거리며, 콧김을 색색 뿜어내는 발드로바.

그러자 발드로바의 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비늘이 매끈한 피부 안쪽으로 들어가며, 형상은 마침내 아리따운 여인으로 탈바꿈한다.

불과 힘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순한 눈매를 지닌 여자.

그 여자는 큰 결심을 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 와, 왈가닥이라는 거 해 볼래!"

"왈츠입니다."

하시는 일을 생각하면 왈가닥이나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의도대로 돌아온 루리는 내심 만족했다.

"춤은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응? 춤출 줄 알았어?"

"원래는 몰랐습니다만, 알게 되더군요."

무려 4시간 동안 춤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사이에 춤 동작과 디테일을 전부 숙달했다.

정작 가르침을 받은 페르다는 발도 못 떼는데, 루리가 전부 외워 버린 것.

확실한 것은 올리비아 아르켄이 가르치는 건 잘한다는 것이고, 페르다는 답도 없는 몸치라는 것이었다.

"제가 페르다 님이라 생각하시고, 한번 손을 잡아 보시죠."

"페르다 씨는 이렇게 작지 않은데...."

"그러니깐 그렇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주인님."

"으, 응, 미안...."

의도치 않게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버렸다.

발드로바가 루리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내려다보았다.

'이건 페르다 씨의 손....'

그렇게 의식하니,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는 그 손.

보기만 해도 설레고 긴장하게 만드는 그 손.

페르다 씨의 손.

우드득—!

이었던 것.

"꺄아아아!"

"...."

"페, 페르다 씨! 아니 루루루리!! 손 괜찮아? 어떻게, 어떻게 하지?"

정작 부서진 놈은 가만히 있는데 부순 놈이 난리가 났다.

루리는 가만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너덜너덜해졌다.

루리는 그걸 보고 깨달았다.

지금 당장 왈츠를 연습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우선은 힘 조절하는 연습부터 해 보도록 하죠."

발드로바가 저지를 살인부터 막아야만 한다.

* * *

올리비아가 제국에서 보내기로 한 플래너가 입성했다.

그들은 호화로운 마차를 몇 대씩 끌고 들어와 연회와 행사를 준비했다.

단순히 성내의 행사뿐만 아니라 성외, 헤스티아 마을에도 신경 쓰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페르다가 마음을 쓸 곳은 오직 입춘제에 얼마 정도 쓰이는가 뿐이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세르데스 대륙 전역에서 날아온 안부 편지입니다."

그녀가 박스에 담긴 편지를 책상 위에 부었다.

안부 편지에 익사해도 될 양이다.

"엄청 많군."

"거르고 걸러서 추린 게 이 정도입니다. 지역 영향도와 성장 가능성 쪽을 고려해서 대략 400명까지 줄여 냈습니다."

"혼자 다 했나?"

"그랬다면 제때 보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모리 양과 '함께'했습니다." 

묘하게 피부가 반들반들하다 싶더니.

입춘제에 참석할 수 있는 건 오직 250명. 나머지 걸러 내는 150명은 페르다가 해야 할 일이었다.

페르다는 그들의 편지를 읽어 갔다.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의 헤스티아 마을의 건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저는....

관심도 없던 헤스티아 마을을 칭찬하는 내용과 어떤 귀족인지 어필해 보이는 내용.

그리고 은연히 입춘제의 성공을 바란다는 문장을 집어넣어 참석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이런 식이었다.

"편지 한 통이 더 있긴 합니다만, 이건 좀 번외에 가깝습니다."

번외라는 말에 의아했지만, 발신인을 보고 페르다는 이해할 수 있었다.

"유레이 공작가에서 보냈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공작령.

그 빚에 착취당하는 농민들이 자유와 생존을 위해 헤스티아 마을로 왔다.

유레이 공작의 입장에서는 페르다는 납치꾼이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참석시키는 게 나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만...."

유레이 공작이 가장 큰 피해자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불편하다고 초대장을 보내지 않으면, 피해자가 될 빌미를 만들어 주는 꼴이 된다.

"어차피 상대한다고 해도 유레이 공작의 영식이 될 테니 말이죠."

"그렇긴 하지."

입춘제는 봄이 오는 것을 기념하는 자리.

미혼에 나이가 어린 이들만 참여하는 것이 원칙인 젊은이들의 사교이다.

그런 자리인 만큼 올리비아 아르켄은 참으로 좋은 미끼였다.

제국 사람들이라면 다과회나 행사로 몇 번이고 보겠지만, 제국 이외의 사람들에겐 영접조차 힘든 인물이니까.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다행이군.'

이대로 태클이 걸리지 않고만 이어진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렇듯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쾅!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등장하는 인물.

박력 넘치는 소리와는 다르게 아담한 체구의 소녀가 걸어 들어왔다.

평소의 메이드 같은 몸가짐 없이 성큼 걸음을 짓더니, 페르다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입을 잘못 놀리고 다니십니까?"

얘가 왜 이러나 싶었다.

"공격적으로 말을 하는구나."

"죄송하면서도 동시에 죄송하지 않은 정보가 제게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전보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어째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페르다도 그걸 보고 어이가 없으면서 분노가 끓어올랐으니까.

"발드로바 섭정과 아르켄 황녀가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온 제국에 퍼졌답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 * *

올리비아가 발드로바 성으로 온다고 했을 때, 페르다는 나쁜 상황들을 여러 가지 생각했었다.

수많은 시나리오가 있지만, 그중 가장 우려되었던 건 역시 하나였다.

'스캔들.'

영애가 불가피하게 남자의 집에 묵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가신들과 기사들이 철저하게 막기 때문에 생각처럼 크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보석일수록 작은 흠집이 커 보이는 법.

지위가 높아질수록 작은 풍문에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다.

'올리비아에겐 특히 더 심한 일이지.'

정절을 지키며, 어떤 의심도 사지 않도록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 황녀로서 의무.

그녀를 사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페르다 발드로바는 적이다.

이 일로 사이가 틀어지면 페르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정치적인 계산보다는 한 명의 얼굴이 페르다의 마음 앞에 섰다.

"그분은... 이 사실을 아나?"

분노를 머금은 목소리에 루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겁니다."

"...."

발드로바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

불안감 때문에 쿵쾅거리는 이 심장을 뜯어 버리고만 싶었다.

"후우...."

페르다는 심호흡했다.

화를 낸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으니 해야만 한다.

"대화를 좀 해 봐야겠군."

어쩔 수 없이 황실에 연결하여 올리비아와 대화해 보기로 했다.

제국의 심부에 있는 그녀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고 있을 테니까.

-가벼운 가십 수준이네요.

초조한 페르다와 다르게 올리비아는 여유로웠다.

체면의 중요성은 그녀가 더 잘 알 테니, 바보스러운 소리를 한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페르다는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가벼운 가십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저희가 거기서 오해받을 만한 짓을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숙박을 한 것도 아니고, 응접실에만 있었죠. 기사단장이 밖에 나가긴 했습니다만, 그 안에는 시종이 있었죠, 안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루리 실버윈드 님은 발드로바 님에게 충성을 맹세했고요. 물론 그 충성이 외도를 묵인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헛짓거리를 했다면 목을 뽑아 버렸을 겁니다."

루리가 살벌하게 끼어들었다.

누구의 목이라는 얘기가 없었지만, 눈빛을 보자면 일단 페르다는 확실했다.

그런 것치고 올리비아는 흐트러짐 없이 받아쳤다.

-역시 충직한 분답게 박력 있는 답변이십니다. 증인도 있고 충분하죠.

그런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은 불안감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역시 소문이 퍼졌다는 것 자체는 골치 아픈 일이긴 하네요. 섭정님을 향한 적개심의 연료가 될 수도 있고요.

"제 말이 그겁니다. 그래서 연락한 것이고요."

-어머, 제 조언이 필요한가요?

"어찌 됐든 이런 분야에서는 그쪽이 더 잘 알 테니, 조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죠."

-흐음~ 제가 필요하단 말씀이군요.

올리비아가 즐겁다는 듯이 숨을 흘렸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연회장에서 제게 춤을 신청하도록 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정중하게 거절할 거예요.

"그럼 제가 차인 게 되는 거 아닙니까?"

올리비아에게 어느 정도 연심을 품고 있다고 해석되는 셈이다.

올리비아만 좋은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어머, 그렇게 생각하시다니, 섭정님께서는 제 이미지가 마녀와 비슷한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마녀를 전부 보고 온 처지로서 그녀는 선녀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섭정님은 파티 호스트는 춤 상대가 없는 영애들과 어울려야 하는 의무가 있답니다.

"제국의 꽃께서는 남아나지 않으실 텐데, 그런 의무가 적용됩니까?"

-뭘 모르시는군요. 저는 어떤 남자와도 춤을 추지 않아요.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이해했다.

올리비아는 정보를 종합해 다시 말해 주었다.

-섭정님은 호스트로서 다른 영애들과 춤을 추고, 제게 접근하도록 하세요. 제게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게 아니라 호스트로서 의무를 한다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그 춤을 거절할 거예요.

"그거면 충분한 겁니까?"

페르다가 생각하기엔 근원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고작 그 상황만으로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네, 딱히 의견을 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입에 담아서 화를 부를 수 있죠. 시간이 자연스럽게 헛소리라고 알려 줄 거예요.

"확신하는 근거가 뭡니까?"

-섭정님 눈만 보면 아니까요.

"제 눈...?"

-맨날 무게만 잡으시는데, 연기를 정말 못하시는 거 아시죠? 그대로만 하시면 된답니다.

갑작스레 욕을 해 버리는 올리비아.

-아무튼, 이번 일은 가벼운 가십이니깐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것 가지고 또 가십이 생기겠어요.

"예. 조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페르다는 전음을 끊고,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루리."

"예."

"눈만 보면 안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넌 아나?"

루리가 그 말을 듣고 페르다와 눈을 마주쳤다.

그걸 질문이냐는 듯한 묘한 눈빛이었다.

"압니다."

"그게 뭐지?"

"비밀입니다. 하지만 황녀의 말대로 충분할 겁니다."

"흠...."

그렇구나.

한시름 놓은 페르다는 등받이에 몸을 던졌다.

"기분은 그래서 풀렸습니까?"

"...아니."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

페르다는 이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시험하게 만드는 그 개자식이 누구일까?

'시발점은 기사단장이겠지.'

그는 올리비아의 사람이 아닌 황제의 사람이다.

하지만 주동자는 아닐 것이다.

그가 황제에게 보고를 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퍼진 것이 틀림없다.

'찾아야 한다.'

그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아니, 목적은 사실 필요 없다.

그냥 파멸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서랍 속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검은색 두건이었다.

122화. 사교 입문자가 아군을 만드는 법

페르다는 성의 가장 높은 곳에 검은 두건을 달아 놓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육안으로 보기 힘든 곳이고, 신경 쓰지 않을 만한 요소.

그러나 그건 누군가에게는 명확한 신호였다.

그 증거로 블랙 반다나가 찾아왔다.

달아 놓은 지 고작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섭정님을 뵙습니다. 단돌로 상회 이후로 처음 만나시는군요."

대표라 소개했던 가넷 스왈로우가 또 직접 온 것이다.

"한 조직의 수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말이 수장이지, 다른 간부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게다가 당분간은 제가 발드로바 성 쪽을 주시하는 중이기에... 그런 의미로 헤스티아 마을의 1차 완공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페르다와 가넷은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가넷은 페르다의 현 상황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면 뻔한 가십에 불과합니다만.... 굳이 잡으셔야 합니까?"

"해야만 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황실을 쑤실 수도 있어서 비용이 좀 많이 들 겁니다."

"상관없다."

"흠...."

가넷이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그 소문의 출처는 저희가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선수금은 얼마면 되겠나?"

그러자 가넷이 손바닥을 보였다.

"선수금은 필요 없습니다. 이런 잡범들은 외려 잡는 데 쉽지 않아서 성공하고 난다면, 그때 주셔도 됩니다."

잡범 하나 잡는 데는 확신이 없다니.

그만큼 가십이 무섭다는 말로 듣기로 했다.

누구든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

"보수금은 끝나는 대로 주는 걸로 하지.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나?"

"정보는 선수금이 있습니다."

철저하군.

페르다는 돈을 건네주었다.

적절한 금액인 것을 확인한 가넷이 확인 사인을 보냈다.

"황녀와 스캔들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했는데 어떤지 확인해줄 수 있나?"

올리비아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가넷에게 들려주었다.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서 검증이 필요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가넷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민중은 생업으로 돌아가면서 금세 잊어버리고, 귀족들은 새로운 유행에 휩쓸리기 마련이죠. 작게나마 흐름에 의문점을 남겨서 흐지부지하는 것은 귀족다운 처세입니다."

"그런가?"

"거기다가 보이지 않지만, 함정으로 활용할 수도 있지요. 섭정님과 황녀님, 둘을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나온다면, 거기서 좀 더 살이 붙여서 나올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희도 잡는 게 훨씬 쉬워질 테니. 어느 쪽이든 좋은 방법이죠."

그런 디테일이 있었구나.

큰 흐름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올리비아는 이 모든 것을 계산했던 것일까?

"확인해 줘서 고맙군."

"괜찮습니다. 또 다른 부탁이나 의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부탁은 따로 없고 받도록 하게."

페르다는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입춘제 초대장일세."

"요즘 귀족들에게 떠들썩한 연회 말이로군요. 제가 참석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잠입할 거 가짜 초대장으로 괜히 의심 살 일을 만들지 말고 진짜를 제출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가넷은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을 했다.

"연회에서는 눈에 띄지 않도록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가넷은 그 초대장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모든 귀족이 주목하는 곳의 입장권을 받았으니, 저도 서비스를 해 드려야겠지요."

"서비스?"

"보니 섭정님은 사교 사회에서 입문자인 듯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페르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넷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사교 입문자가 아군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정보를 팔아먹고 사는 세르데스 대륙의 최고 비밀 조직.

그만큼 흥미로운 정보를 꺼내었다.

* * *

페르다는 평소 일과를 마치고 난 후 한 남자를 불렀다.

"자네는 춤을 잘 추지?"

갈색 꽁지 머리를 한 미남, 제드 스왈로우였다.

"당연하죠. 춤을 못 추면 제비족 짓도 못 해 먹습니다."

"그렇다면 춤을 가르칠 수도 있나?"

"그건 좀 다른 영역이죠. 잘한다고 잘 가르치냐는 건...."

"물론 수업료는 지불할 거다."

"제가 섭정님을 플로어의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는 제드.

페르다는 그 모습에 믿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춤을 추시려고 그럽니까? 입춘제 때 추시려고?"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스트는 어지간해서 춤출 일이 없을 텐데요. 자리에 조금 앉았다가 떠나는 게 대부분이라서. 게다가 호스티스도 참석하지 않으실 텐데...."

"공왕 전하와 춤을 출 때 대한 대비다."

"오~. 오신다고 합니까?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 궁금하긴 했는데...."

"그건 아직 모른다."

그러면 김칫국이 아닌가?

제드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 것이 훤히 보였으니까.

페르다는 발드로바를 위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발드로바가 입춘제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있다고 루리에게 전해 들었다.

다만, 참석 여부는 루리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

상관없었다.

제드가 돈을 받고 일을 하듯이, 발드로바가 올 때를 대비하는 것이 페르다의 의무였다.

제드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페르다에게 물었다.

"공왕 전하 얼굴 보신 적은 있습니까?"

"딱 한 번."

"어땠습니까? 예쁜 건 당연할 테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까?"

표정이라.

썩 유쾌한 이야기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울고 있었다."

"오~."

페르다는 고개를 들어, 제드를 쏘아보았다.

제드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해명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이건 좋은 겁니다."

"뭐가?"

"우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지 않습니까? 반려자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울고 있다면, 복이 들어온다는 미신이 있거든요. 다음으로 본 얼굴이 웃는 얼굴이면 백년해로한답니다."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짓말을 줄줄 내뱉는군."

"진짠데...."

무안한 표정으로 그리 중얼거리다가 책상 위에 얹어진 편지를 슬쩍 펼쳐 보며 내용을 읽었다.

"신생 귀족의 입춘제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황녀님의 도움이 크긴 큰가 봅니다?"

"역시 놀라운 상황이긴 한 모양이로군."

"경이롭죠. 이런 안부 편지가 한 장이라도 오면 다행일 텐데, 아예 초대장 좀 보내 달라고 엉엉 울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숱하게 지켜본 제드로서는 이 이례적인 상황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디 누가 오는지... 켁."

"아는 사람이 있나?"

"있네요. 무도회 때 슬쩍 버리고 간 영애들이...."

"들이?"

대체 몇 명이나 버리고 온 걸까?

페르다가 그를 쏘아보자, 제드는 눈에 힘을 부릅 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전문가랑 협업하는 중이니 마주치더라도 원만하게 해결할 겁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그 협업하는 전문가가 들이닥쳤다.

"파뤼이이이!!"

경박한 소리를 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페넬로페.

뭐가 신났는지 혼자서 들썩이며 걸어왔다.

"파티를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 황녀도 오고요?"

"온다."

"으흐흐흐...."

페르다는 말을 덧붙였다.

"건드렸다간 사지를 분지를 건데, 자신 있나?"

"으아아...! 아무리 제가 여자를 밝힌다 해도 그 정도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하는 년은 아니거든요? 그치, 제제?"

친근하게 엉기는 페넬로페.

제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윽한 눈으로 말했다.

"너 그런 년 맞아."

"하하, 우리 제제는 역시 짓궂다니깐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처해 대고."

"널 믿느니 말콤을 믿을 거다."

"이 기생오라비가! 차라리 쌍욕을 해!"

말콤이 언급되자 불같이 화를 내며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얼른, 나가 이년아.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기어들어 오고 있어?! 어우, 재수 없어. 소금 어딨어, 소금!"

"무슨 소리래?! 저도 불려 온 거거든요?"

"섭정님이 널 불렀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게 진짜면 내 성을 간다."

"내가 부른 게 맞다."

쓸데없는 실랑이가 이어지지 않게 못을 박아 버렸다.

"네놈들이 뭘 하는지는 상관없지만, 파티를 즐길 일은 없을 거다."

"네? 그러면 여자도 못 꼬시나요?"

우울증 걸린 개처럼 축 늘어지는 페넬로페.

제드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페르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가넷 스왈로우가 알려 준 사교 입문자의 아군 만들기.

"발드로바 성에 방문하는 영애·영식들의 약점을 잡아라."

"약점 말인가요?"

"어떤 약점 말인가요?"

페르다는 키워드를 간단하게 던졌다.

"불륜."

입춘제는 남녀가 모여든다.

혈기가 넘치는 꽃은 꿀벌을 유혹하고 꿀벌은 그에 홀릴 것.

그러다가 하룻밤의 불장난을 하는 것도 부지기수이다.

젊은 혈기의 한때라 하며 불문율로 잡기도 한다.

그렇기에 가넷은 이렇게 제안했다.

-그런 스캔들이 있으면, 페르다 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듯 인식하겠죠. 떳떳하지 못한 자가 이런 불문율 정도는 눈감아 주겠지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페르다에게 그 불문율이란 건 비겁하고 추악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가넷은 그런 페르다의 순애보를 알기에 다소 지저분한 방식을 그에게 제안한 것이다.

-아군이 되지 않으려는 자에겐 아군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귀족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체면.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페르다의 뜻에 어울릴 것이다.

그렇게 얽혀야 한다.

가넷은 일단 얽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입춘제를 진행한다고 가정하여, 밀회를 즐길 만한 장소들을 물색해라.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불륜들을 전부 녹음 수정구를 통해서 기록한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의뢰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 복병으로 쓰일 사람이 바로 제드와 페넬로페였다.

남들과 다르게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고, 사람을 홀려본 적이 있으니 적합한 인재였다.

"하라면 하긴 하겠는데요."

페넬로페가 그렇게 말했다.

말대꾸인가 싶어서 반사적으로 짜증이 났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협박할 거리가 없으면, 제가 직접 만들어도 되나요?"

페넬로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페르다는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색욕의 악마인 시트리의 딸.

트러블 메이커니 빡통이니 해도 그녀의 몸에 흐르는 것은 악마의 피다.

"해라. 내가 허락하지."

페르다는 지독한 귀족들의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니 더 지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 * *

차가운 봄바람이 따뜻한 햇볕에 녹아내려 선선하게 불어온다.

늦겨울에 피어난 꽃들은 열매를 맺혀 숲 곳곳에 수를 놓았다.

위협이라고는 마물밖에 없는 이 땅에는 굶주린 포식자도 없어 아낙네들의 채집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봄....'

죽음 끝에 찾아오는 새로운 탄생의 계절.

발드로바에게 있어선 감상에 젖게 만드는 계절이었다.

그녀는 감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끝은 언제나 울적함으로 끝이 났으니까.

그렇기에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영애들이 나들이하기 좋은 그 계절의 날에 그녀는 성벽에 쓰일 돌들을 나르고 쌓는 노동 작업에 몰두했다.

감상보다는 노동의 보람이 더 좋은 그녀였다.

평소와 같은 일과 중 점심시간.

인부들이 오손도손 둘러싸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있었다.

"요번에 우리가 짓다가 만 건물 있잖나? 알테 성당으로 쓰인다고 하더군."

페르다는 서민들의 결속을 위해서 알테교에 사제들을 파견해 달라 부탁했고,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신부가 도착했다.

"요번에 오신 그 신부님이 차지하는 건가?"

"그렇겠지."

"난 그 신부님이 좀 마음에 안 들던데...."

"누군들 안 그러겠나? 우리가 그 사막 잡신 욕 좀 하겠다는데, 굳이 와서는 설교나 해 대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지 않던가? 세트! 세트라 해야지!"

"세트는 니미럴. 아주 신부의 개가 되셨구먼!"

그들은 현재 실권을 잡은 과격파에 밀린 온건파들이었다.

즉, 남부에 있는 사막 잡신이라 얕잡아보지 않으며 어울리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발드로바로서는 그들의 반발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화는 좋은 걸 텐데, 왜 그리 싸우려는 걸까?'

서로가 갈등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는 것일까.

발드로바는 늘 그렇듯이 묵묵하게 그들의 이야기만 들었다.

"거 좀 믿어봅시다. 이번 입춘제도 남부랑 같이한다고 하지 않던가? 남부 쪽도 교류에 적극적이니깐 쓸데없이 자극하지 말라고."

"어떤 개판이 날지 안 봐도 뻔하군."

비꼬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교류와 화합을 위해 만들어질 자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서민들의 삶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입춘제에 어떤 행사를 할까?

단순히 술 마시고 웃고 떠드는 것 말고도 뭔가 더 있을까?

'궁금하지만....'

볼 수는 없었다.

그날은 서민이 아닌 귀족의 입춘제에 참여해야 하니까.

준비만 아침부터 해야 한다고 들었기에 구경 할 시간도 없다고 했다.

'일주일 뒤인가....'

시간이 참으로 빠르다 느껴졌다.

입춘제를 위해서 힘 조절을 하고 춤 연습을 시작했는데, 이제 일주일이라니.

'화려한 방에서 페르다 씨와 춤을 춘다.'

설렘에 무의식적으로 또 힘이 빡 들어간다.

하지만 훈련을 거친 탓인지 범인의 영역에 가까워질 만큼 줄었다.

'돌멩이도 그대로야.'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연약한 돌멩이.

페르다의 손을 조금 아프게 할 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부숴 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제국 쪽에는 떠들썩 하더구만! 우리 영주님이랑 황녀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누군가가 꺼낸 화두에 인부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발드로바는 귀를 활짝 열고 그 대화를 엿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제국에 있는 여편네가 그렇다더라고. 첫 방문에 대공의회에서도 뜨거웠다고. 아르켄 제국의 황녀가 이번에 방문한 것까지 하면 총 3번이야. 어디 황녀가 비슷한 또래를 3번 이상 만난 적이 있던가? 게다가 이번 행렬에서 완전 부부가 따로 없-."

보다 못한 인부 하나가 그 입을 막아 버렸다.

"어허! 자넨 참 제 명을 재촉해서 탈이야! 어디 가서 그런 거 함부로 얘기하지 말게."

"왜? 헤스티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더만."

"이 사람아! 누군 그걸 모르겠나? 괜히 헤스티아에서 쉬쉬하고 있겠나? 그 이야기를 그 섭정 마누라가 들으면 어떻게 되겠어? 우리 섭정님은 시체가 되어 있을걸?"

발드로바의 동공이 지진이 일어나듯 흔들렸다.

그녀의 손에는 들린 돌멩이는 사라졌다.

대신 고운 입자로 갈려 있는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123화. 늘상 있는 일.

페르다와 올리비아의 스캔들.

발드로바는 오늘 처음에야 알았다.

'루리가 왜 말해 주지 않았지?'

발드로바가 그걸 여태까지 몰랐던 이유는 소식통인 루리가 그 내용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말은 잘 안 하니까....'

루리는 발드로바가 마음을 쓸 만한 것이다 싶으면 자체적으로 걸러 버렸다.

발드로바도 은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헛소문에 불과할 테고.'

페르다는 언제나 자신에게 헌신적인 사람이다.

발드로바는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는 불안감이 자꾸만 엄습해 왔다.

'올리비아 아르켄.'

그 존재에 대한 명성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재색과 미모를 겸비하며, 사교와 격식까지 어우러져 일등 신붓감으로 칭송받는 여자.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나, 그 기회가 한 번은 있었다.

그녀가 발드로바 성에 한 번 방문한단 말은 들었었다.

하지만 발드로바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관심이 있어도 당장 마을을 짓는 데 몰두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땀 냄새 나는 현장에서 보람을 느끼는 게 더 중요했다.

'역시 그때 한번 봤어야 했을까?'

다른 사람들이 일을 내팽개치고 갈 만한 일이었는데, 그때 가서 확인했어야 했을까?

얼마나 예쁜 사람이면, 그렇게 칭송하는지.

그리고 정말로 페르다와 어울리는지.

'페르다 씨는... 내게 과분한 사람이긴 해.'

페르다는 이곳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과 교류했다.

때로는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어도 그가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성군이라는 이야기를 더욱 많이 들었다.

반면 나는 무엇인가?

레어 속에 처박힌 레드 드래곤.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이 무서워 갑옷을 뒤집어쓴 드래곤.

약혼자에게 얼굴 한번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는 못난 드래곤.

'내겐... 과분한 사람이야.'

누가 봐도 자기보다는 미모를 칭송받는 올리비아라는 사람과 더욱 어울려 보였다.

울적해지는 마음에 괜스레 손가락으로 땅만 후벼 팠다.

이런 울적한 생각을 끊어 줄 것이 필요했다.

땡! 땡! 땡!

그때, 경종이 격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물 출현 예측 장비와 연결되어 있는 경종이니, 마물이 온다는 신호이다.

인부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물이 오는가 본데?"

"요새 잠잠하다 싶더니 이럴 때 기습을 확 들어오는구만."

마물.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발드로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인부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아아! 기사님!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

"이번 건 저희가 처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앉아주십시오!"

그들의 얼굴에는 확신이 찬 미소가 보였다.

평범한 인간들일 뿐인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일까?

인부들은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지팡이.

아니 지팡이라고 하기엔 부두술사처럼 뭔가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군인처럼 제식이 잡힌 자세로 움직였다. 짓고 있는 성벽 위로 올라가더니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지팡이로 바닥 쪽을 겨눈다.

석궁병과 비슷한 자세였다.

추측건대, 저 지팡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이다.

그런데 뭐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때였다.

그녀의 불안감이 무색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그 지팡이 안쪽에서 느껴졌다.

'마력을 쓰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마법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녀로선 의문을 풀 방법이 없었다.

잠시 후, 숲에서 채집하던 아낙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하긴 했지만, 허둥지둥거리는 기색은 없었다.

"꽁지 빠지게 안 뛰고 뭣들 해!? 잡아먹히고 싶어?"

"마물 같은 것이 어기적거리면서 와서 저희도 천천히 왔죠."

"어기적거려? 어떻게 생겼는데?"

"모르겠어요. 하나같이 덩어리처럼 생겼고, 움직임도 느릿느릿하던걸요?"

"알았으니까 빨리 들어와!"

그 말을 듣자, 한 사내가 아는 체했다.

"멜티드네."

잠시 후,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워어어어....

짐승 형태를 했던 여타 마물들과 달리 그것은 덩어리에 가까웠다.

정크 마나에 너무 노출되어 몸의 변이가 너무 과도하게 일어나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 된 것.

그렇기에 힘은 모르더라도 속도는 흑마법사가 일으킨 좀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마물은 마물인 법.

멜티드 한 마리도 창병 한 부대가 수백 번은 찔러야 죽는 것들이다.

죽이는 과정에서도 한두 명은 반드시 죽는다.

그런 놈들이 총 6마리였다.

반장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조준!"

인부들이 지팡이를 견착하며 가늠쇠에 시야를 얹었다.

반장이 들어 올린 손을 단두대의 칼날처럼 힘껏 내리찍는다.

"발사!"

파파파팡!

천지를 울리는 소리와 섬광.

발드로바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그 파이프 안쪽에서 빛처럼 빠른 속도로 마물의 몸통을 꿰뚫은 것을.

구워어어어....

멜티드 무리의 몸이 꿰뚫리더니 그대로 형체가 무너져 버렸다.

"우와아아아!"

"우리가 마물을 잡았다!"

대전투에서 쾌거를 이뤄 낸 병사들처럼 포효했다.

비록 느리고 둔한 마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물이다.

아무것도 없는 그들은 마물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생겼다는 걸 확인하자 쾌감을 느꼈다.

발드로바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마물을 죽일 수 있다니....'

그녀가 머리가 나쁘다고 해도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보고 싸운 것을 지켜보았다.

발드로바는 이런 상황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니, 그 누가 생각하기라도 했을까?

마족이라는 것들이 만들어졌을 때도 고드윈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적인 지혜라 여겼던 불멸자들의 추측을 뒤집어 버렸다.

인간은 이토록 경이로운 존재이다.

힘이 닿지 않는 곳은 지혜와 용기로 짜내어 그 누구보다 강인한 힘을 낸다.

발드로바는 그 힘을 만들어 낸 페르다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그녀가 마음에 품었던 질문은 커져 갔다.

그녀는 가슴에 모은 손을 꼬옥 쥐었다.

* * *

입춘제 전날 밤, 발드로바가 페르다를 찾아왔다.

늘상 그렇듯이 갑옷을 입고 말이다.

페르다는 오늘 그녀가 출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핑계가 없으면,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마나가 필요하십니까?"

평소라면 그녀가 네라고 대답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뇨."

"그럼...?"

"그냥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페르다는 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핑계를 찾지 않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본격적으로 밀회를 즐기는 남녀가 된 것만 같았다.

페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발드로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역시 폐를 끼치는 걸까요?"

"아닙니다. 부디 들어오시지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건틀릿을 쏙 빼더니 테이블에 얹었다.

"손... 잡고 싶어요."

"...예."

무언가가 적극적이었다.

갑자기 달라지는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 불안했다.

발드로바의 원동력 대부분은 불안감에서 시작되었으니까.

페르다는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평소보다 더욱 경직된 게 느껴졌다.

"그, 그게...!"

힘겹게 대화 주제를 꺼내는 발드로바.

"오늘... 성벽 쪽에서 마물이 다가오고 있었...더라고요."

"예. 정상에서 지켜보셨군요."

"네? 아, 네! 맞아요!"

발드로바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거기서 말이죠. 범한 사람들이 마물을 죽였더라고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보고서에는 멜티드 6마리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비록 멜티드이긴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은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이지요. 전하께는 생소했을 풍경이었을 텐데, 어땠습니까?"

"정말... 대단했어요. 거기서 페르다 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껴지게 되었어요."

저 투구 너머로 동경의 눈빛이 느껴졌다.

페르다는 그에 대꾸했다.

"그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버넬이라는 자가 열심히 해서 만든 것이죠."

"그래도 페르다 씨가 없었더라면... 그 사람들은 마물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저도 그렇게 기여하긴 했군요."

페르다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긴 했었다.

아직 이맘때는 마물은 여전히 잡기 어려운 존재로 인식이 되어 있을 테니까

"페르다 씨는... 이곳에서 많은 걸 바꾸고 있어요."

마을이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을 지킬 힘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녀는 거기서 느낀 바가 있었다.

그걸 말하기 위해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그, 왈가닥 연습하고 있어요."

"...왈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거... 또 이상하게 말을...."

상관없었다.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비록 무서운 드래곤 머리 투구를 쓰고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어린 여인이 페르다의 눈에 선했다.

"내일...이죠? 저희가 춤을 추는 그날이."

저희가 춤을 추는 그날.

저희는 우리와 같은 말.

우리는 너와 나.

페르다와 발드로바.

"그렇습니다."

"저... 예쁜 드레스 입고, 페르다 씨의 옆에 당당히 서 보도록 할게요. 호, 호...호구로서?"

"호스티스...."

"네, 호스티스로서!"

무언가 의식한 듯이 기합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페르다는 알고 있었다.

그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말에서 얼마나 많은 용기가 들었는지.

그런 용기를 가장 먼저 자신이 들을 수 있어 기뻤다.

페르다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

헤스티아 마을 입구는 바쁘기 짝이 없었다.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각지의 영애·영식들을 싣고 온 마차 행렬이 이어졌다.

초대받은 귀족들은 총 250명.

단순히 250명만 오는 것이 아니다.

마부와 하인 몇, 그리고 호위로 쓰는 정예 기사들과 병사가 못해도 열 명은 더 있었다.

250명의 영애·영식들이 참여했으니, 그 하인들은 최소 2,500명 이상.

아직 수백 규모에 불과했던 마을이 순식간에 수천이 넘어가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오면 많은 돈이 오가는 법.

스테판은 상인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파스칼 상회와 헤스티아 상회의 주관하에 여러 행사와 자선 활동을 진행했다.

아직 건물이 없는 공터를 활용해서 무예 대회와 운동회를 열어서 지역 이미지 끌어올리기와 상인 유치에 힘을 썼다.

극동부 연합에서 군대를 파견받아 치안까지 힘 써서 별 탈 없이 저녁까지 흘러갔다.

입춘제의 저녁은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길 시간이었다.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운 분위기.

드래곤의 거처로 쓰이는 만큼, 제국 황실에 꿀리지 않는 내부를 자랑했고, 방문한 귀족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여자들끼리 사교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페르다도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와중에 이사벨라가 몇 가지 사항들을 보고했다.

"국방 성과를 확인하고 이제 라이플에 본격적으로 넘버링을 한다고 합니다."

"넘버링?"

"들어 보니 양산형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번호가 붙는 것이라 합니다. 하루에 수십 정을 찍어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국방 부분에서는 큰 성과를 이루어 냈다.

멜티드 6마리를 서민 여러 명이 함께 잡아냈으니, 서민들이 마법사와 비슷한 힘을 쓸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라이플을 의식하고 영애·영식들이 대화 주제를 돌릴 수 있습니다. 되도록 정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심하지."

힘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방해는 되어서는 안 되는 법.

이사벨라가 잡아 놓은 균형을 무너트릴 여지를 주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준비는 마쳤습니까?"

"그래."

루리의 등장에 페르다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공왕 전하는?"

"...."

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그녀는 오늘 밤 오지 않는다.

페르다는 남은 단추를 여몄다.

"그래. 다 이유가 있겠지."

"실망하게 해 죄송합니다."

루리의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만큼 루리도 이 연회에 발드로바가 참석하기를 바랐다는 의미였다.

"아니다. 늘상 있던 일이 아니냐?"

"늘상 바람맞히는 주인님이라 죄송합니다."

아니, 그냥 화가 난 걸 수도.

늘상 있는 일이니 실망하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어젯밤, 그녀가 찾아와서 했던 말이 페르다의 귓가에 생생히 들려온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페르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발드로바의 손이었다.

그의 빈손은 그녀의 오른손이 얹어지는 감촉만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손이 다른 여자의 손과 겹친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페르다는 허공을 움켜잡는다.

오늘 없다고 내일이 없는 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내일을 위해 헛되이 보내선 안 된다.

페르다는 그렇게 연회장으로 발을 옮겼다.

* * *

"위대한 불의 국서,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 납시오!"

제국에서 파견온 플래너가 힘차게 소리쳤다.

연회의 주인인 페르다가 등장하면서 음악이 멈췄다.

영애·영식들이 차례대로 페르다를 향해 가볍게 예를 차렸고, 페르다는 레드 카펫을 따라 자리에 올랐다.

"발드로바 성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또렷한 목소리.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혹독한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 헤스티아 마을은 작년 늦가을을 기점으로 건설되고 있는 소마을입니다. 영주로서의 책무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들보다 더욱 짧을 겁니다."

페르다는 자신을 낮추는 발언으로 분위기를 풀어낸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이 초보 영주의 초대에 응해 주시어 이 자리에 와 주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올리비아 아르켄.

제국의 황녀와 얼굴을 트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약간은 가슴을 졸이며 페르다의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페르다는 그렇게 말했다.

"용마전쟁이 끝나 150년이 지난 지금 극동부의 영토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마의 대지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흉룡이었던 고드윈이 죽고, 마왕까지 죽었으나 그 의지는 죽지 않고 야욕을 드러내는 중입니다."

페르다는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한 명씩 눈을 모두 맞추었다.

"세르데스의 인간으로서, 불의를 용인하지 않는 귀족으로서, 여러분들이 이 극동부의 발전과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걸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봄을 맞이하여 누더기 같은 갑옷을 제련할 새로울 불씨가 되었습니다."

페르다는 잔을 집어 들어 올려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그러니 부디 그 불꽃을 위해 오늘 밤은 웃고, 떠들고, 춤을 추시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우정이 있는 한, 우리의 의지는 굳건하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페르다가 꾸벅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오며, 동시에 악단들이 능숙하게 경쾌한 음악을 깔았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124화. 입춘제

페르다의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몇 귀족들이 그에게 접근했다.

"발드로바 섭정님을 뵙습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말이 서툴러서 제대로 전해졌을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하신 말씀에 많이 감동했습니다! 그 위대한 꿈에 꼬옥! 동참하고 싶습니다! 섭정님!"

대부분은 그저 좋은 훈화였다며 호감을 보였고, 일부는 정말로 감화되었다는 듯이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년들은 머리로 생각하지만, 청년은 가슴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용사가 모험을 떠나는 중이며, 성안에 갇힌 공주를 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다는 본인이 한 연설을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글거려 죽겠군.'

희망이라느니, 우정이라느니.

페르다에게는 맞지 않은 겉치레들이었다.

그런 건 생각조차 하기 힘들고, 페르다가 짤 수도 없었다.

정치에 있어서 노련한 자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야심가를 향해 슬쩍 시선을 던져 보았다.

올리비아 아르켄.

그녀는 연회 주인과 가까운 자리 원형 테이블에 서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고위 귀족 영애들과 어울리는 중이었다.

'골든 로즈라고 했던가.'

올리비아 아르켄을 구심점으로 삼은 사교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떨쳐 내기 위한 장치라 하였다.

황금 장미꽃인 올리비아는 가시와 이파리들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중이다.

페르다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가식이 넘쳐 났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을 봤을 때는 그런 가식을 못 느꼈었는데.

'그사이에 연기가 많이 줄어든 것일 수도.'

몰려든 귀족들의 인사를 모두 받고 이번에는 페르다는 올리비아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짠 시나리오에 맞춰 주기 위해서였다.

"입춘제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도울 수 있어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즐겁게 놀다 가시길."

올리비아는 슬쩍 웃고는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페르다도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움직였다.

스캔들이 도는 남녀라 생각이 들지 않게 깔끔한 모습이었다.

'잘해 주는군.'

그녀의 조력에 내심 만족하며 페르다는 그렇게 연회장을 가볍게 돌며 인사를 했다.

모두를 위한 연회라고 하지만, 기사와 귀족은 나누는 것이 불문율.

그걸 옷차림을 통해서 구분한다.

귀족들은 화려한 옷을 입지만, 기사들은 조끼를 입어 상대적으로 수수하다.

페르다는 기사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 둘을 보았다.

제드와 말콤이었다.

"섭정님의 연설 정말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저, 정말 멋있었습니다! 완전!"

같은 옷차림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뭘 입어도 깔끔하고 멋을 살리는 제드와 뭘 입어도 촌놈 같은 말콤.

'이 자리에는 윌리엄이 있는 게 딱 맞을 텐데.'

윌리엄은 페르다조차도 귀감이라 여길 만큼 철저한 사내였다.

실제로 페르다는 그가 참여하길 바랐지만, 윌리엄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치안대장으로서 사명감에 투철하여 입춘제 동안 철야를 하겠다는 것이 그의 의지.

아쉽긴 하지만,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섭정님, 잠시 귀 좀 빌리겠습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과 다르게 입에서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언제까지 이놈이 절 마킹하게 두실 겁니까?"

"무슨 마킹?"

"이 자식이 제가 어디로 가려고 할 때마다 '제드 경, 어디 갑니까?' 이러고 졸졸 따라오려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가?"

"제가 이놈 떨쳐 내려면 비밀 임무를 해야 한다고 말해야겠죠? 그러면 저 자식이 다 떠벌리고 다닐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그죠? 그럼 비밀 임무가 아니겠죠?"

스트레스로 충혈된 눈동자로 페르다를 노려보았다.

극심한 스트레스 따위는 페르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제드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가라. 내가 처리할 테니."

"그럼 가 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걸음인 건지, 들키지 않으려 도망치는 것인지 모르게 재빠르게 움직였다.

"어라? 제드 경은 어디로...."

"잠깐 잊은 게 있어서 심부름 보냈네."

"아아, 그렇습니까?"

"굳이 찾으려 하지 말게. 다른 기사들과 어울려보는 건 어떻겠나?"

"엇... 그게...."

말콤이 무안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역시 제드 경에게 방해가 됐던 걸까요? 이런 자리는 서툴러서 제드 경에게 도움을 좀 받으려 했습니다만...."

마킹했던 것이 그런 이유였나?

"제국 황실의 기사까지 됐었는데, 이런 자리를 한 번도 못 서 봤다는 건가?"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시는 건 섭정님밖에 없는지라.... 기사 서임식에도 참여받지 못하고 임명장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입춘제에는 숙소에서 남은 음식들이나 좀 먹고 잠이나 자겠구나 했는데, 불러 주시지 않았습니까? 체면을 세워 드리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제드 경을 귀찮게 했던 모양입니다."

평생 기사의 자리에 근접할 수는 없지만, 근성은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를 방으로 돌려보낼까 하던 마음도 어쩔 수 없이 바꾸기로 했다.

"너는 이런 곳에서 사교하는 것보단 명령을 수행하는 게 마음에는 더 편하다는 거겠군."

"넵!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하나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말콤이 아침의 시골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곳에서 사고가 터지는지 지켜보도록 해라. 알겠나?"

"그리고 제가 수습하면 되는 겁니까?"

"나설 필요는 없다.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음식도 먹고, 음료수도 마시면서. 알겠나?"

"넵! 알겠습니다."

명령은 받아들였으나, 말콤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명령만 수행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 의심은 곧 접어 버렸다.

사실상 명령받기 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말콤을 감싸던 방황기가 없어졌다.

그걸로 말콤에 관해서는 일단락되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을 거치고 거치다가 페르다가 알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르웬이었다.

딱히 명단에도 없었지만, 페르다가 일부러 끼워 넣었다.

"콘실러스 백작령의 기사, 아르웬 울프하트가 섭정님을 뵙습니다. 입춘제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콘실러스 백작께서 자네를 총애하는데, 내가 도와야 하지 않겠나?"

"총애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딱히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페르다는 콘실러스가 아르웬을 부쩍이나 아낀다는 걸 안다.

그는 지긋한 노인이고, 그의 영지를 물려받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는 아르웬이 기사가 아닌 울베라 콘실러스의 양아들로 인정받아 백작령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르웬은 페르다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챙겨 줘야만 한다.

"제드가 말하더군.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크, 크흠... 아직 그렇다 할 발전은 없는지라...."

검과 명예밖에 모르던 숫총각다운 반응.

그러다가 슬쩍 어디론가 눈길을 던졌다.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시선을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철없어 보이는 저 영애는 틀림없이 대공의회에서 본 적이 있었던 여자였다.

"퓨리티 공작 가의 사람이로군."

"예. 그쪽의 삼녀입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 같았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맹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날카로운 장녀나 차녀들처럼 전략적으로 만든 병기가 아닌 온실에서 방치해 키운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 말은 즉, 이용할 가치는 없다는 뜻.

아르웬이 마음고생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페르다는 아르웬에게 귀띔했다.

"여기서 이상한 짓은 하지 말게."

"물론입니다. 제가 여기서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다고, 그러겠습니까?"

"하더라도 백작령에 돌아가서 하도록."

"예? 아, 알겠습니다."

아르웬은 페르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를 마치고 아르웬이 그 공녀에게 걸어갔다.

아르웬은 멋쩍게 웃고, 공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니 괜스레 속이 아팠다.

누구는 약혼자와 손도 못 잡는데, 누구는 즐거워하고....

'괜히 이런 분위기라 더 그렇군.'

회귀하기 전에도 이런 파티에 왔을 때 어땠었는가?

손님으로 왔던 페르다에게 접근해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명목상 초대장만 던졌는데, 진짜로 온 것이 불편한 상황.

'말콤이랑 똑같았군.'

그래서 은연히 측은한 감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랬기에,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페르다는 이 순간에도 외로움을 느꼈다.

아니, 그때보다 더욱 외로웠다.

자신의 반쪽을 어딘가에 두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후, 악단 쪽에서는 신호음이 울렸다.

웃고 떠드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니, 분위기를 본격적으로 띄우는 시간.

연회를 달굴 무도회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차려입은 꿀벌들이 마음에 드는 꽃들에게 집적거리며 움직였다.

'호스트의 의무.'

페르다는 꿀벌들이 무시하는 꽃들 중에서 조용한 이를 물색했다.

주근깨가 빼빼 마른 검은 머리의 영애.

예쁘지도 않지만, 그렇게 추하지도 않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 강한 여인이었다.

어느 집 영애인지는 당연히 모른다.

페르다는 그곳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호스트로서 춤을 권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신지요?"

주근깨 영애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머, 정말 저 같은 것과 추실 건가요?"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즐기지 못하는 건 안 되지요."

"섭정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주근깨 영애가 수줍게 손을 잡았다.

어느 정도 짝이 지어질 무렵, 악단은 전주에서 본 곡으로 넘어갔다.

격정적인 춤이 아닌 가벼운 왈츠.

음량도 남녀가 서로 대화를 나누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절했다.

한 쌍이 된 남녀는 서로의 호구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페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스트의 의무만 하면 된다 생각했기에 굳이 수다 떨려 들지 않았다.

"섭정님께서는 발드로바 님과 약혼을 하신 거죠?"

주근깨 영애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그렇습니다."

"공왕님을 직접 보기도 하셨나요?"

"예."

"그... 무섭진 않으셨나요? 좀 바보 같은 질문 같긴 한데...."

"무섭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가능한가요? 상대가 드래곤인데?"

"...."

"어머, 자꾸 결례를 저지르게 되네요. 그래도 저희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겐 위대한 위상과 결혼을 한다는 게 신기해서 말이죠...."

"괜찮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발드로바와 약혼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페르다만이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그분은 어떤 인간들보다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고, 저는 그걸 보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니 그런 겁니다."

"그런가요?"

"게다가 많은 것에 관심을 두시고, 이해와 공감을 하려 노력하십니다."

오직 페르다만이 알고 있는 이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이면.

그렇기에 페르다는 그 주근깨 영애에게 하나씩 말해 주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주근깨 영애가 이렇게 말했다.

"가만 보니 섭정님께서도 참으로 따뜻한 사람 같아요."

"예?"

무슨 소린가 싶었다.

"뼛속까지 사랑한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공왕님 이야기를 하니까 얼굴에 미소가 보이는걸요?"

미소를 지어?

페르다는 그 사실에 놀라고 말았고, 그 탓에 집중하고 있던 스텝이 꼬여 버렸다.

하지만 대참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주근깨 영애가 능숙하게 몸을 돌리면서 엇박자 나던 것을 원래대로 돌렸다.

페르다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미소를 짓고 있습니까?"

"네. 모르셨나요?"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웃는 상황은 극히 드물었던 페르다에게는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아.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해요."

영애가 페르다의 주의를 끌었다.

"그렇게 웃어 주세요. 공왕님과 약혼한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는 거예요."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까?"

"물론이죠. 계속 말씀해 주세요. 발드로바 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이에요."

주근깨 영애의 말을 들으니 페르다는 자연스레 표정에 힘이 풀렸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발드로바의 이야기를 했다.

잠시 후, 곡이 끝났다.

"미천한 영애에게 섭정님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주근깨 영애는 눈을 마주치며 슬며시 미소를 짓고는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페르다는 한 가지를 잊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물어봤군.'

말 그대로 편안한 시간을 보낸 탓에 그녀의 호구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뜸 다가가 이름을 묻는 것도 실례일 터.

한창 무도회 중이었으니 그 이후에 해도 무방하리라.

페르다는 최우선 사항인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이제 올리비아에게 춤을 신청한다.'

스캔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나리오.

그리고 차이고, 관계가 이성적으로는 깊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페르다는 골든 로즈가 있는 테이블로 몸을 옮겼다.

예정했던 대로 남남처럼.

당신과는 친분이 있으나 애정이 없다는 것을 보이며,

한 떨기의 꽃에게 손을 뻗는다.

"호스트로서 춤을 권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신지요?"

부채로 입을 가린 올리비아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네."

"예, 그럼... 예?"

아니,

"좋아요."

그녀가 짰던 시나리오를 스스로 깨 버렸다.

"추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