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미소와 벌
발드로바 공왕령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입춘제.
헤스티아 마을은 신명 나는 음악과 웃음소리, 그리고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봄의 새싹을 예찬했다.
귀족들의 사교는 정오를 지나 해가 서쪽으로 절반 기울쯤에 사전 모임을 진행했다.
대부분은 인맥 넓히기를 위해 미리 도착한 영애·영식들이 서로 어울렸다.
늦으면 늦을수록 그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여 주는 셈이었다.
올리비아는 저녁노을이 지기 직전에 도착하여 사교장으로 들어갔다.
호스트가 아닌데도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주목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참석한 사람들 모두, 심지어 호스트조차도 알고 있다.
이곳의 메인은 사실 올리비아 아르켄이라는 것을.
"오늘도 아름다우세요, 황녀님."
"입춘제에 참석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부를 떨어 대는 골든 로즈 멤버들.
페르다에게 이들은 반드시 모임에 참석시켜 달라고 미리 얘기해 놨기에, 당연히 전원 참석이 가능했다.
제 역할에 충실한 이들인 만큼 보답해 주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물론이죠. 우린 하나로 이어진 우정이 있잖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입춘제에 발을 들이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저 진짜 감동 먹어서 울 것 같아요."
"아, 나도 화장이 무너지려고 하네. 이러다가 유령 신부 꼴이 되는 거 아닌가 몰라요."
"유령 신부라니요.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요."
영애들이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다른 영애들은 몰라도 올리비아에겐 이만큼 가혹한 시간은 없었다.
마음에도 없는 감탄사와 위로를 해야 하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들의 시선도 받아야만 하니까.
'그래도 다른 사교회보다 짜증이 나지는 않네.'
신기했다.
마음속에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탓일까?
평소보다 많이 지치지 않고, 오히려 활발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저녁이 되고, 페르다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위대한 국서,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 납시오!"
음악이 멈추고 모든 사람이 페르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골든 로즈의 영애들은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저분이 페르다 발드로바 섭정님이시군요."
"소문대로 젊고 잘생기셨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같은 또래를 볼 때는 느낄 수 없는 설렘을 느끼는 영애들이 적잖게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힐끔힐끔 올리비아를 흘겨보았다.
그 가십이 진짜인지 아닌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올리비아에게는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에게 짓는 사무적인 미소만을 머금었다.
'이제 연회사를 하겠죠.'
그 연회사는 다름 아닌 자신이 써 준 것.
많은 사교회에 다녀온 만큼 연회 청중의 나이와 신분을 고려하여 최고의 연회사를 만들었다.
이제 그걸 읽는 건 페르다의 몫이었다.
연회사가 시작되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놀라움은 시작되었다.
마법사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과 진중한 분위기가 어우러지자, 어지간한 웅변가들의 뺨을 칠 정도로 장내를 압도했다.
'대공의회에서 그 늙은이들을 감화했다고 했더니, 헛소문은 아니었어.'
연회사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던 자신의 얄팍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올리비아는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저 남자가 아르켄 황제를 제치고 새로운 황제로 군림하는 모습을.
그 모습은 올리비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말 맺음과 함께 박수갈채로 마무리되었다.
올리비아도 따라 손뼉을 치고, 골든 로즈로 돌아갔다.
영애들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페르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섭정님, 정말 멋있지 않으신가요?"
"그러게요. 정말 약혼자만 없으셨다면, 가서 유혹이라도 해 보고 싶을 지경이에요."
멋들어진 분위기에 연회사까지 합쳐지니 여심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올리비아는 그런 이들의 반응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게 의도대로 돌아갔음에도.
"어머, 이리로 오신다."
영애들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점잖은 척 빼면서 자기들끼리 떠드는 척하기 시작했다.
"입춘제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다가 올리비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도울 수 있어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즐겁게 놀다 가시길."
쿨하게 서로 인사만 마치는 두 사람.
영애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못 봤나 싶은 얼굴을 했다.
올리비아는 천연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에게 묻는다.
"왜 그러시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스캔들로 가득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여지가 있었더라면, 씹을 거리가 있어 좋겠구나 했을 테지만, 그런 게 전혀 없었으니까.
의혹을 심었으니, 시간이 알아서 그 흥미를 떨어트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섭정님은 어째 단 한 번도 웃어 주지를 않으시네요."
"친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함께 웃어 주시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당연하지.'
올리비아는 끼지 않고 속으로 대꾸했다.
저 남자의 웃음은 남자들이 혈기에 짓눌려서 뱉어 내는 싸구려 웃음과 다르다.
그 웃음은 올리비아조차도 보지 못했던 것.
순수한 연정으로 빚어진 궁극의 가치를 지니지 않던가?
올리비아는 기뻤다.
그 가치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 우둔하게 남자 꽁무니를 쫓는 것들과는 다르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가 얼마나 고결한지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니까.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벌들이 꽃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건 올리비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고 날아드는 꿀벌들.
"처음 뵙겠습니다. 미천하오나 황녀님께 춤을 신청하고 싶은—."
"어머, 저랑 추시는 건 어떠세요?"
"예?"
"어서 이리 오세요!"
올리비아를 향해 뻗던 손을 다른 영애가 낚아채고, 영식은 멍한 얼굴로 그 손에 끌려 무도장으로 끌려갔다.
황금 장미에 몰려오는 벌들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흡사 파리지옥과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눈 맞아 약혼까지 이어지는 것이 골든 로즈의 방식이었다.
'준비해 놔야겠네요.'
첫 춤이 끝나고 나면, 페르다가 올 예정.
그리고 올리비아는 거절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지켜볼 것이고, 그 자리에서 의혹은 종식된다.
올리비아는 그때 동안 자신이 지을 표정과 모습을 계산하고 있었다.
"어머?"
"어머머."
또 시작이다.
철없는 영애의 호들갑.
속으로 한숨을 내지으려던 찰나.
"섭정님 웃고 계시네요?"
웃고 있다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 올리비아는 무도장에 시선을 던졌다.
공교롭게도 바로 페르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본 순간, 올리비아의 가면에 순간 금이 가고 말았다.
'...정말로 웃고 있어?'
자신이 잘못 보았나 싶었다.
연회의 음악이 흐르고, 호수 위의 고기 떼처럼 움직이는 남녀.
그사이에 보이는 페르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반사적으로 상대를 향했다.
'저 영애는... 누구지?'
주근깨에 검은 머리.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못한 외모에 옷차림도 유행에 뒤처졌다.
발드로바일 리는 없다.
그녀가 알기로 발드로바는 인간의 모습을 하면 붉은 머리에 두 쌍의 뿔이 있는 여인이었으니까.
페르다가 단순히 시나리오를 위해서 접근한 어중이떠중이, 엑스트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거지?'
이상했다.
저 화냥년보다 오랫동안 춤을 춘 건 난데.
4시간 동안 췄음에도 미소 짓지 않았으면서.
내게는.
단 한 번도.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쥘부채를 펼쳐 자기 입을 가렸다.
입 쪽의 가면이 부서져 버렸다.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질투를... 하는 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페르다는 발드로바를 사랑한다.
올리비아는 그 사랑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순애보를 소중히 여기기에 페르다를 동경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으로서 말이다.
'...알겠어.'
화가 난 것은 그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들과 다른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당신 또한 똑같은 남자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웃음이 헤프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은 건.
내가 특별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그런 식으로 나를 손바닥 안에 굴리려고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래.
그런 거였어.
당신도 결국엔 다른 남자와 똑같았던 거지.
음악이 멎었다.
페르다가 그 화냥년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선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올리비아가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이 이후에 일어날 일은 올리비아 스스로가 인정했다.
지금부터 저지를 일은 계획에 없는 즉흥적으로 벌이는 일이란 걸.
감정에 지배되어 벌이는 일이라는 걸.
허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멈출 수 없다는 걸.
그녀의 머릿속에 되풀이되는 문장은 오직 하나뿐.
"그러죠."
당신은 벌을 받아야 마땅해.
* * *
페르다는 모든 게 예정대로 돌아가고 있던 중 갑자기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무슨 짓이지, 이게?'
춤을 신청하면 그녀가 춤을 거절한다.
그런데 그녀가 말했던 시나리오와 다르게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놀란 것은 비단 페르다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했던 영애들도 휘둥그레진 눈을 부채로 가리지 못하고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올리비아는 냉철하다.
이런 것에선 페르다보다 계산적이고 감각이 뛰어났다.
스캔들이 나서 가장 타격이 큰 것은 뭐니 해도 여자 쪽이라는 걸 안다는 뜻이다.
남자는 금세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되지만, 여자는 요녀로 찍히는 순간 수명을 잃게 된다.
올리비아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페르다가 눈치챌 수 없는 이성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에스코트, 해 주시겠나요?"
올리비아가 실크 장갑을 낀 손을 내민다.
그렇다면 이 손을 잡아야 한다.
올리비아와 이곳에서 춤을 춰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그러는 한편으로 몹쓸 짓을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 무거움과 의무가 충돌하여 페르다의 손을 혼란케 했다.
여기서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이 맞는 걸까?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려던 그 순간,
"예를 갖추어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그 말을 한 이는 제국에서 파견해 온 직원이 아닌 루리였다.
인간들의 연회에 함부로 끼이지 않던 그녀가 연회장을 압도했다.
그녀가 나서는 순간은 딱 하나뿐이다.
발드로바의 등장.
"공왕 전하 납시오!"
문이 열린다.
페르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건 이 성에 있으면서 숱하게 봐 왔던 드래곤 갑주가 아니었다.
160cm쯤 되어 보이는 키.
붉은 머리카락과 두 쌍의 뿔.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을 가미한 화려한 드레스.
그녀가 우아하게 카펫을 밟으며 걸어왔다.
모든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불멸자에게 존경과 경외를 표한다.
페르다는 넋이 나간 채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미의 여신을 접견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카펫을 따라 앞으로 향하던 발드로바의 발걸음이 페르다 쪽으로 휘었다.
그대로 페르다를 향해 다가온 것이다.
"...."
페르다의 코앞까지 다가온 발드로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페르다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 뿐.
호스티스가 호스트에게 춤을 청하는 것이었다.
페르다의 난감함은 한층 더 했다.
당장에 올리비아가 춤을 청한 상황이었다.
예법대로라면 발드로바를 뒤로 미뤄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말해 버리면, 허공에 떠 있는 그 손이 허무하게 추락할 것만 같았다.
"부디 공왕 전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길."
다행히도 올리비아는 순순히 물러났다.
페르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발드로바가 늘 두려워했던 것을 했다.
적당하게 조절한 힘.
얼마나 고된 훈련을 통해서 조절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무도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에스코트했다.
페르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손을 올렸다.
보드라운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
그리고 떨림.
단지 손만 잡았을 뿐인데도, 페르다는 눈치챘다.
발드로바는 올리비아와 있었던 가십을 알고 있다는 걸.
'그렇구나.'
이렇게 온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낸 용기가 아니다.
그녀는 안식처에서 쫓겨난 것이다.
불안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말이다.
그 불안감의 근원은 분명 페르다가 만든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상처 입힌 것이다.'
죄책감이 페르다를 괴롭혔다.
쉐도우 서클을 돌리는 목소리가 페르다의 귓가에 숨소리를 내뱉는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비웃기만 한다.
분명 가장 바라왔던 순간이 왔는데도, 페르다는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저 가면 너머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만 신경 쓰인다.
'박자를 맞춰야 하는데....'
음악이 귀에 들리지 않아 스텝이 계속 꼬인다.
그건 발드로바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서로의 발을 짓밟는 최악의 호흡을 보였다.
지옥 같은 1분, 1분이 흘러 노래가 끝이 났다.
서로가 손을 놓고 인사를 해야 하지만, 발드로바는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페르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페르다 씨."
페르다의 심장은 저편 아래로 떨어졌다.
음성 변조관이 아닌 그녀의 실제 육성.
파르르 떨리는 그 소리는 새벽녘의 이슬 같은 습기가 묻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이 손... 놓으시면... 안 돼요."
그녀가 가녀리게 애원했다.
"저... 지금 어디로 도망갈지도 몰라요. 분명히 이 손을 놓으면... 제왕답지 않은 모습을 보일 거예요. 페르다 씨에게... 망신을 줄지 몰라요."
확신이 없는 그 목소리는 점차 격하게 떨려 갔다.
페르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페르다는 그 손을 꼬옥 잡은 채로 그녀와 연회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손님에게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예법이니, 체면이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126화. 만년해로
페르다는 발드로바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조용한 장소라는 단어뿐.
페르다는 그 조용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성의 정원이었다.
달밤이 아름답게 빛나는 그 장소는 밀회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한창 무도회에 사람들이 달궈질 때라 그런지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습기 없는 봄바람이 피부에 닿는다.
이마가 차가웠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발드로바는 조심스럽게 페르다의 손을 놓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네 걸음 정도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치 어린 영애가 서럽게 우는 것처럼.
"...쓰읍."
코를 삼키는 소리가 고요를 적셨다.
쉐도우 서클이 그 소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분리되었던 후회가 페르다의 가슴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페르다는 그 슬픈 모습에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보았다.
이 여자가 자신의 상황에 직면했듯이 나 또한 그걸 피해선 안 된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슬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다.
코 삼키는 소리. 목 너머로 넘기는 소리가 그의 목을 조일 뿐이다.
"페르다 씨이...."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발드로바였다.
"말씀하십시오."
"...들었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목소리요."
그녀가 양 손목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저를 보고 수군거리던 목소리."
수군거리는 목소리?
페르다는 듣지 못했다.
"저 보고 살인자라고 욕하고, 수군거리는... 그런 소리 못 들으셨나요?"
페르다는 주먹을 쥐었다.
발드로바의 청력은 인간보다 한참 뛰어나다.
미세한 날파리의 날갯짓마저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그녀에게 그런 웅얼거림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분노가 온몸을 감쌌다.
감히 공왕의 땅에 발을 들인 주제에 소리를 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놈이?
네가 누구 집안인지는 상관없다.
알아낸다면 넌 내 손으로 죽인다.
-망설이지 마.
-그것들은 네 여자를 욕보였어.
페르다의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쉐도우 서클이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페르다의 행동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는 말은 후회로 이어질 일이라는 뜻이다.
'이건 위험한 생각인가?'
페르다는 억지로 머리를 식혔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실수로 이어지고 실수는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렇게 짧게나마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이성을 되찾았다.
'그놈들이 철이 없어도 바보들일 리는 없다.'
호스트의 뒷담이 단순히 목이 잘리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영지의 멸망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똥오줌도 못 가리는 영애·영식이었다면, 모든 귀족이 모인 자리에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드래곤이다.
그들의 일생에서 단 한 번도 볼 기회가 없는 드래곤이며, 흉포함으로 알려진 악룡.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배짱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발드로바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역시 또 헛것을 들었나 봐요."
"역시라는 말은...?"
"그게... 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항상 목소리가 들려요. 저를 살인자, 학살자라고 욕하고... 비명을 질러 대요."
그녀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래도 ... 옛날보단 조금 나아질 거라 생각했어요."
페르다는 알지 못하지만, 발드로바는 마을의 건설을 돕고 있었다.
그때는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그건 발드로바가 아닌 평범한 갑옷을 입고, 괴력을 구사하는 한 명의 갑옷 기사였으니까.
그들은 갑옷 기사를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사처럼 존경하고 선망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갑옷 기사와 발드로바는 똑같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따라붙은 과거의 꼬리표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살인자, 학살자,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꽃.
악룡, 악룡, 악룡....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하를 욕하지 않습니다. 그 일은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오래된 일입니다."
자그마치 150년 전의 일이다.
에르데스같은 고위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 시절에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알아요. 그 사람들이 제 앞에서는 그런 말 못 한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만약에...."
습기와 격정에 흔들리는 목소리.
"정말로 누군가가 제게 그런 말을 해 버린다면 저는...."
울컥함을 삼키며, 말을 끝내 잇지 못하고 주저해 버린다.
목메이는 소리를 삼키고 삼키며 말했다.
"그래서 멀리서 지켜만 보려고 했어요."
페르다는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창밖에서, 그것도 들키지 않게 멀리서 지켜보는 그녀의 모습을.
그녀를 위해 만들고 싶었던 자리에, 그녀는 이방인이 되어 버린 그 모습을.
"페르다 씨가 연회에 서 있는 모습을 보려고만... 했는데... 그러다가 문득 봐 버렸어요. 올리비아라는... 그 사람에게 춤 신청하는 모습을."
역시나.
그걸 기점으로 터진 것이었다.
"아르켄 황녀는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춤을 신청하는 것도 호스트로서 의무였을 뿐이었습니다."
페르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진심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그녀의 슬픔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치만, 페르다 씨랑 너무 잘 어울렸는걸요."
"올리비아 아르켄은 당신에 비하면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에요!"
발드로바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제국의 황녀는 똑똑하기도 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잘 웃고,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그런 여자잖아요!?"
"...."
"보세요! 겨우 용기를 냈다고 하는 이 바보를 봐요! 이렇게 가면이나 쓰고... 사람들에게 얼굴조차도 못 보이고... 제 약혼자에게조차도 안 보이면서... 상스럽게 질투까지 해 버리고.... 또...."
손으로 눈을 가리는 발드로바.
"이렇게 울기나 하고...."
"...."
"춤도 바보같이 춰 버려서 페르다 씨를 몇 번이나 짓밟아 버리고...."
그녀가 이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페르다가 배신했다 같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나오는 자기혐오다.
페르다가 올리비아와 스캔들이 난 것도 못난 자기 탓.
춤을 못 춘 것도 자기 탓.
단절된 세상 속에 고립되면서 바닥을 친 자존감은 실수가 이어질 때마다 더욱 커져 갔다.
페르다는 그녀에게 아픔이 있다는 걸 안다.
그 아픔을 안아야 하는 것은 페르다의 일이었다.
'한 발 내딛는 것조차 힘든 곳에....'
페르다는 그녀를 끌어내 버린 것이다.
쓸데없는 소문을 막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 여자에게 몹쓸 마음의 짐을 얹어 버렸다.
나는 최악의 약혼자다.
"이오르가의 말이 맞았어요. 저는 뭘해도 망쳐 버리는 아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가 뭐든 망쳐 버린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페르다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전하께서 말씀하셨죠. 이 손을 놓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
"저는 놓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전하는 도망치지도 않고, 꼴사납게 비명도 지르지 않았습니다."
"...."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용으로서, 공왕으로서 품위를 지켜 내셨습니다."
그 말이 위로되었던 모양이었다.
훌쩍거림이 점차 멎어 간다.
"그래도 춤은 정말로 바보 같았을지 모릅니다."
"우으...."
"하지만 적어도 전하를 바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왜요?"
페르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가 불난 양계장의 닭처럼 푸드덕거렸으니 말입니다."
"푸흡...!"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숨이 멎은 것처럼 조용해지다가 발드로바가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하얀 가면뿐이지만, 저 안에는 더 이상 슬픔이 없다는 걸 알았다.
"둘 다 바보스러웠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바보와 바보네요."
"예."
울음소리는 사라지고 어느새인가 웃음소리가 흘렀다.
우중충했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발드로바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페르다는 살며시 그녀의 옆에 다가갔다.
"페르다 씨...."
페르다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작은 체구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얼굴... 보고 싶어요?"
무척이나.
"여긴 우리 둘밖에 없고... 페르다 씨는 늘 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니까... 오늘 보여 드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가 수줍은 손짓으로 가면을 벗으려 했다.
저 너머에는 페르다가 그리기만 했던 발드로바의 얼굴이 있다.
상상이 아닌 육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
"안 됩니다."
페르다는 반사적으로 가면을 벗으려는 그 손을 잡아 버렸다.
발드로바는 당황했다.
"왜요?"
왜일까?
페르다도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려 그 연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질문에 페르다도 생각해 보았다.
그 답이 나왔다.
"아직 눈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요?"
"그러니 안 됩니다."
첫 만남은 그녀가 눈물을 짓는 모습이었다.
페르다는 다시 보는 그 얼굴을 우는 모습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역시 제가 우는 모습은 꼴사나워 보이겠죠?"
의기소침해지는 분위기.
그런 게 아니다.
우는 모습이 꼴사납다든가, 그런 이유였다면 자신을 죽도록 패 버렸을 것이다.
페르다는 머리를 굴렸다.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나 싶었는데, 문득 제드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제 기사가 말하길, 첫 모습을 우는 모습으로 봤다면, 두 번째는 웃는 모습을 봐야 한답니다. 저희 첫 만남 때는 울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 네, 그렇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웃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 그렇군요."
그 말을 듣고는 발드로바도 가면을 벗는 걸 그만두었다.
페르다의 모습이 너무나도 필사적이었기에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래도 그 이유는 너무 궁금했다.
"그럼 웃는 얼굴을 보면 어떻게 되나요?"
페르다가 대답했다.
"백년해로한다고 합니다."
기뻐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것은 실망이었다.
"고작 백 년인가요...?"
"예?"
"사랑이 고작 백 년밖에 안 된다면... 너무 슬플 거 같은데...."
뭐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잠깐 발드로바의 시간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백 년이 한평생이나 다름없는 시간이나, 그녀에겐 1년과도 비슷한 시간일 테지.
그래서 발드로바에겐 1년만 함께하자는 말로 들린 듯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싶은 건지, 혼자 심각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말이죠."
"예."
"제가 더 환하게 웃으면, 백 년보다 더 오래 갈 수도 있을까요?"
페르다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발드로바는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계속 묻는다.
"천 년도 가능할까요?"
고개를 휙휙.
"아니, 천 년도 너무 적어요. 만 년 정도는 되어야 할 거 같아요."
"...가능할 겁니다."
페르다는 넋을 잃어버린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발드로바는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정말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준비해 볼게요. 저... 페르다 씨랑 만년해로 하고 싶으니까."
달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만 쳐다볼 여자.
그렇게 우둔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도 페르다는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쉐도우 서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레드 서클이 멋대로 핑핑 돌고 있었다.
페르다는 이 마음이 멋대로 날뛰어 분위기를 망치지 않도록, 최대한 억눌러야만 했다.
괴롭다.
행복해서 너무 괴롭다.
페르다는 이런 기분을 느껴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마음이 닿기라도 했을까, 웃던 그녀가 쓱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아름다워요."
"오늘 달이 가장 큰 날이라고 합니다."
"그, 그런가요?"
괜스레 어색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녀에게서 바보병이 옮아 버린 게 틀림없다.
"문라이트 스텝...."
"예."
"달밤에 추면 가장 아름답다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이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꼼지락거리는 발드로바의 손.
페르다도 옆에 둔 손이 계속 움직였다.
어느 누구든 대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춤을 권하는 건 당연히 페르다의 몫이었다.
그러나 섣부르게 춤을 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페르다는 춤에 서툴렀다.
올리비아는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출 만큼 노련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 달밤 아래에 페르다가 춤을 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음악이 필요했다.
그녀가 또 다른 기회를 바라듯이,
잡은 기회에 실수하고 싶지 않은 건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바이올린의 고운 음색이 밤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페르다는 슬쩍 그 소리의 진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길쭉한 신형이 보였다.
제드였다.
그가 아주 능숙한 솜씨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음을 타기엔 부족했다.
곧 부족함을 채우는 플루트 소리가 끼어들어 듀엣으로 어우러진다.
제드의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 악기를 연주한다.
'가넷이로군.'
그들이 화합을 이루며 만들어 낸 음악은 '월광'이라는 왈츠 음악이었다.
그 곡에서 파생된 춤이 바로 문라이트 스텝.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조금 전까지 문라이트 스텝에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월광을 연주한다니.
'다 듣고 있다는 거군.'
생각해 보니 이곳은 영애·영식들을 협박하려고 숨겨 놓았던 장소지 않던가?
그들이 페르다와 발드로바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당연했다.
'뭐 상관없나?'
기분 나빠 하는 것보단 제드가 메시지를 주는 것에 집중했다.
그가 한 명의 기사로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페르다는 그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발드로바 공왕 전하."
서로가 저질러 버린 실수를 만회할 기회.
"부디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발드로바는 아침의 태양처럼 밝게 대답했다.
"네...!"
두 사람의 손이 다시금 포개어졌다.
설렘이 자리를 잡았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흥겹게 분위기를 돋우고, 손가락은 그녀의 살결을 음미한다.
달밤 아래의 두 남녀가 고운 선율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었다.
비록 입춘제의 사교가 엉망이 되었어도,
그들이 서투른 춤을 만천하에 까발려졌어도,
아무도 모를 장소에 서로에게 완벽했기에,
두 사람은 그걸로 충분했다.
월광의 선율이 맺어짐과 함께 서로에게 인사를 하며 마무리했다.
서로 손을 놓았지만, 시선은 그들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페르다 씨."
"예."
"저는 이만...가 보고 싶은데...."
"그렇습니까?"
모아 떨군 두 손이 꼼지락거렸다.
"페르다 씨가 보기 싫다는 건 아니고...지금 역시 또 주체할 수가 없어서...."
참을 수 없는 건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홀로 숨을 고르며 그 여운을 만끽하고만 싶었다.
그런 마음과 다르게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서로의 손이 어그적어그적 움직이면서 손가락 끝이 완전히 떼질 때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네."
그녀는 정원의 끄트머리, 낭떠러지 쪽으로 갔다.
발드로바가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 같아 페르다는 몸을 돌렸다.
이제 다시 사교장으로 움직이자.
"페르다 씨!"
용기가 실린 발드로바의 목소리가 그를 세웠다.
페르다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난간 위에 서 있으며, 달을 머리 위에 두고 있었다.
언제든지 떨어질 준비를 마친 그녀가 자기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대로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 순간, 검고 푸른빛은 배경에는 순식간에 색으로 채워졌다.
페르다는 그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순간에 압도되었다.
페르다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것에 어울리는 적절한 단어를 고르려 했다.
그래.
그것은 태양이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새싹을 돋게 만드는 따뜻한 빛과 열기.
그 가면 속에 감춰 둔 것은 따뜻한 태양과도 같은 함박웃음이었다.
"이걸로 만년해로...할 수 있을까요?"
"...."
"바, 바보 같은 걸 물었네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부끄러움을 안은 채로 그대로 저 아래로 몸을 던졌다.
페르다의 나가 버린 넋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떠나가 버린 자리를 가만히 보더니 그대로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페르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열사병인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보면 확실하다.
페르다는 픽 하고 웃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멍하니 별을 올려다보았다.
"...보았느냐?"
허공에 던지는 질문.
그 대상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무시했던 그 목소리.
처음으로 페르다가 그 목소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상관없었다.
그 침묵이 페르다에겐 달콤한 승리나 다름없었다.
승자는 패자에게 조롱을 던졌다.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저 여자를 절대로 이길 수는 없을 거다."
127화. 의문점
페르다와 발드로바가 연회장을 나가자, 다시 활기를 찾았다.
웃고 떠드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나, 그들은 모두 발드로바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드래곤을 오늘 보게 될 줄이야...."
"생각보다 무섭지도 않았지."
"악룡이라길래, 보자마자 긴장될 거라 생각했는데...."
"긴장은 엄청나게 했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
붉은 머리카락에 평범한 여성에 가까운 체구.
그러나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명확하게 주장하는 두 쌍의 뿔.
실제로 평생을 걸쳐도 한 번 보기 힘든 드래곤을 보았다는 것을 인지시키고 압도했다.
웃고 풀어져야 할 사교장이 딱딱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춤이 엄청 서투르셨지."
"그러게. 섭정님도 그렇고."
서로의 발을 밟으며 최악의 호흡을 보였던 두 사람의 모습이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불멸자로서 남겨선 안 되는 오점을 보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올리비아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의문점을 남겨 버렸다.'
그 서투른 춤 하나로 오히려 그녀가 떨친 악명에 의문점을 남겨 버렸다.
저토록 인간적인 실수를 만드는 드래곤이 정말로 고드윈보다 사악한 존재가 맞는지 말이다.
'이걸 계산했다... 라는 건 말이 안 되지.'
모든 것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졌다.
발드로바가 갑작스럽게 등장했을 때부터 올리비아는 느낄 수 있었다.
불멸자가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는 걸.
영애들로부터 자신을 향한 질투를 숱하게 느껴 온 올리비아였다.
그러나 발드로바의 질투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동경.'
마치 어린 시골 소녀가 동화 속의 공주님이 되고 싶어 하듯이.
발드로바에게는 올리비아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순수한 의도였다.
-좋아합니다. 순수한 사람.
문득, 페르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말한 순수가 바로 저런 것일까?
고작 인간 황녀를 질투해서 억지로 나와, 제대로 추지도 못하는 춤을 억지로 추는 바보스러운 여자.
그 모든 상황이 스스로 계산했다고 여기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순수함.
'내가 틀렸어.'
그의 웃음으로 여타 다른 남자들과 다를 것 없는 싸구려라고 의심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페르다와 자신을 동시에 공멸시키려고 해 버렸다.
마치 독실한 자가 신앙을 잃어버리고 악질 이교도가 되어 버린 것처럼.
"흐음...."
올리비아는 입을 가린 부채를 내려놓지 못했다.
판단이 틀린 지금으로서 그녀는 엉망이 되어 버린 현재를 수습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페르다는 안전할지 몰라도 올리비아는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그 춤 권유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이 있다고 공표한 꼴이니까.
올리비아는 머리를 굴렸다.
'...좋아.'
그녀는 단숨에 시나리오를 짰다.
그 시나리오에는 만만하고, 쉽게 버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제 분수를 잘 알고, 멍청한 남자.
무슨 짓을 해도 뒤탈이 없을 법한 그런 남자.
그렇게 물색하다가 한 남자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화, 황녀님?"
골든 로즈의 화원 속에서 벗어나는 올리비아.
그녀가 연회장을 가로질러 시선을 둔 장소로 몸을 움직였다.
그 남자는 베스트를 입은 기사로, 기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특이했다.
그것도 좋은 쪽은 아니었다.
옷은 세련되었는데 몸에서 풍기는 촌티는 감히 가릴 수가 없었다.
"기사님?"
"예, 옛!?"
"이름."
"이름?"
"소개해 달라구요. 이미 당신이 누군진 알고 있지만, 알려 주세요."
그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어, 저저 피치힐의 말콤이라고 합니다."
말콤이 사레들린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호, 혹시 제가 황녀님께 무, 무 무슨 잘못을...?"
"아무 잘못도 없답니다. 부디 저와 춤을 춰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려 온 거라서요."
"추추추추춤?! 말입니까?"
호들갑을 떨어 버린 탓에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황녀님께서 춤을 신청한 모양인데?"
"무슨 일이야?"
"황녀님이 저 기사한테 춤을...."
영애·영식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황하고 어리바리한 짓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올리비아는 입을 부채로 가리며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기사죠?"
"그, 그렇습니다."
"그 기사의 의무로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제가 해야 할 일...."
여전히 당황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야기는 통할 기미가 보였다.
올리비아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섭정님과 했던 이야기가 꼬였어요.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가 욕받이를 해 줄 필요가 있어요. 그걸 당신이 해야 해요."
"저저, 요, 욕받이...를 말입니까? 제가?"
"섭정님을 위해서요. 기사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신가요?"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부탁하는 올리비아.
말콤은 섭정님을 위해서라는 말에서부터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피, 피치힐의 말콤! 물론 섭정님을 위해서는 뭐든지 합니다만... 소인은 춤을 잘 못 춥니다. 그건 괜찮으십니까?"
오히려 좋은 상황이다.
"괜찮아요. 그냥 제가 말하는 대로만 움직이도록 하세요."
"어엇, 아, 알겠습니다!"
"그럼 에스코트를."
그렇게 말콤이 올리비아를 에스코트했다.
그녀가 손을 잡는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웅성거렸다.
"세상에...."
"올리비아 님께서 춤을 추시다니...."
추던 춤조차도 잊어버리고 떠들어대는 관중들.
모든 남자가 연모하는 우상이 자신의 규칙을 깼다.
그래도 언젠가 그녀 또한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춤을 출 것이라고는 은연히 알고들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그 상대가 납득이 가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대체 왜 저딴 놈이랑...."
"내가 춰도 저것보다 몇십 배는 더 잘 출 수 있는데...."
올리비아와 말콤에 이목이 쏠렸고 놓지를 못했다.
모든 건 올리비아의 계산대로 이루어졌다.
'것보다 정말 춤을 못 추네.'
말콤은 여자와 연이 없는 숙맥답게 춤은 더럽게 못 췄다.
박자도 반 정도 느리거나 앞서기만 한다.
올리비아가 억지로 움직이고 움직여서 그나마 춤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섭정님도 이러셨지.'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추억.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니 올리비아는 갑자기 즐거웠다.
그녀는 가면을 벗고 즐겁게 웃었다.
어차피 이 순간만큼은 어떤 일을 해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환상경이나 다름없을 테니.
이 웃음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로 방황하리라.
황녀, 올리비아는 누구와 첫 춤을 추게 될 것이냐는 질문은 발드로바 성의 기사인 말콤이 되었다.
그렇게 페르다와 올리비아의 스캔들은 흐지부지 넘어갈 것이다.
다만, 말콤은 발신지 모를 무수한 협박 편지 공세를 받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에 불과했다.
* * *
한편 입춘제로 들썩이는 발드로바 성.
드래곤을 위해 지은 성답게 넓은 성안에는 무수히 많은 사각지대가 있었다.
그런 곳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아아, 이러시면 아니 되어요. 소녀는 이미 임자가....
-그런 늙다리는 잊어버리도록 해요. 지금만이라도.
-이러면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알테 님을 뵐 명목이 없어져요.
-내가 당신의 죄를 안을게요. 그러니 부디 제게 몸을 맡겨 주십시오.
-아아, 후작님!!
아무도 듣지 않을 장소에 부끄러움이 없는 두 사람의 대화.
누군가가 감히 엿듣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러는 것이었다.
"죄는 지랄, 모가지가 날아갈 건데."
제드 스왈로우.
그는 여러 수정구에 둘러싸인 채로 땅콩을 까먹고 있었다.
그것은 페넬로페와 제드가 선정한 밀회를 즐길 장소에 설치된 통신 수정구.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전부 제드의 귀에 들리고 녹음되는 방식이다.
"재밌을 거라 생각했는데 금방 질리네."
밀회를 즐기는 이들의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가문 사이에 맞지 않은 이해관계나 격차, 또는 어떻게든 한번 자 보려고 환장한 남녀들의 허세뿐이었다.
제드에겐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촌극에 불과했다.
그냥 촌극도 아니고 삼류 연극.
마을 아낙네들이 아침에 모여서 잠깐 구경하다가 빨랫방망이를 두들길 때 씹을 만한 그런 싸구려 촌극의 대사였다.
자기 합리화의 현장을 제삼자로서 구경하고 있으니, 제드는 역한 감정이 올라왔다.
동시에 그 한심한 꼴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그래도 저것들보단 낫지."
"네놈도 똑같은데 뭔 개소리냐?"
"켁!"
들려선 안 되는 익숙한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여자가 서 있었고, 제드는 반사적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핀드티쓰...."
빠악!
"악! 왜?"
"쓰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썼으면 때려 달라는 신호 아닌가?"
"그야, 좋은 울림이잖아? 너와 나, 둘만의 관계가 얼마나 잘 드러나는지 보이는 그런 것이랄까?"
"능글거리는 꼴을 보니 반성이 없군. 정신 차릴 때까지 때려되 되겠나?"
"얼굴 빼고 어디든."
얄밉게 구는 모습이 놀리는 것 같아 외려 김이 빠졌다.
가넷은 그의 옆에 앉았다.
놀란 기미도 없으며, 태연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에 제드는 확신했다.
"너였구만?"
"뭐가."
"우리 섭정 양반이 갑자기 밀회하는 놈들을 잡아내라고 하길래, 누구 아이디언가 싶었거든. 네가 하라고 한 거지?"
"그래."
"어휴, 공왕쯤 되는 신분이면, 이런 쓰레기 같은 약점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게 많은데 왜 굳이 이런 짓을 하게 만들어?"
"자식을 담보로 잡는 것만큼 균형이 좋은 게 없으니까. 정치 수명을 늘리고 싶다면 이런 게 필요해."
"어휴, 너 때문에 이 무슨 개고생이냐? 원래 같으면 다른 여자들이랑 재밌게 놀 텐데, 무슨 이런 일을 시켜서...."
푸념을 술술 내뱉는 그 모습에 정색하며 두 음절을 내뱉었다.
"떫어?"
"어휴, 그럴 리가 있나요. 하하. 내근직이 이래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개꿀이나 쪽쪽 빨아대고."
가넷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니, 제드는 꼬리를 말았다.
"네 계약자는? 다른 곳에서 일하나?"
"그 녀석은 연회장 안에 있을 거야."
"너처럼 남의 이야기나 엿듣고 있어?"
"걔는 좀 역할이 다르지. 지금쯤 '제드 스왈로우 피해자 모임'이라는 형태로 영애들이랑 떠들고 있을걸?"
가넷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로 무슨 짓을 하는데?"
"술에 취하고 난 다음에 '정원' 만든다고 하더라."
그 단어의 의미를 따로 묻지는 않았다.
가넷은 페넬로페가 시트리의 딸이라는 걸 파악한 상태였다.
정원이라는 말이 추잡한 은어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뭔 짓을 했는데 피해자 모임이 만들어져?"
"별것 아냐. 그냥 연회장에 버리고 왔을 뿐이라고."
빠악!
"악! 왜!?"
"세르데스 모든 여자를 대표해서 네 대가리를 쳤다, 꼽니?"
"아뇨. 다음부터는 그래도 좀 얘기를 하고 때려 주십시오, 대표님."
철저하게 을의 태도를 보이며 제드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정원에 연결되어 있는 수정구에 빛이 들어왔다.
"미친."
"음?"
"밀회 장소에 섭정님이랑 코빼기도 안 보이던 그 공왕님이 등장했나 본데?"
공왕님은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정보 조직의 수장답게 가넷의 눈은 반짝하고 빛이 났다.
"끄지 마. 녹음하고 들어 보자고."
"당연하지. 이런 좋은 상황을 놓치는 바보 병신 호구가 어디 있어?"
둘은 수정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눈물을 훌쩍이는 발드로바와 어쩔 줄 모르는 페르다의 대화가 여과 없이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군."
"뭐가 예상대로야?"
"레드 드래곤은 자존감이 아주 낮아."
그 말을 들은 제드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말 제발 우리 섭정님 앞에서도 해 줬으면 좋겠네."
"그렇지 않을걸? 내가 파악한 성격으로는 그런 정보를 좋아할 거다."
"아무튼, 목 떨어지기 전에 내 이름 부를 생각하지나 마라."
제드가 짓궃게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가넷은 유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놈아. 내가 이런 정보를 누구한테 팔기라도 할 거 같아?"
"그럼 아니냐?"
"돌았어?"
가넷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그 정보를 풀었다간 모든 드래곤들이 블랙 반다나를 없애 버리려 혈안이 될걸?"
"왜?"
"대륙에 재앙을 불러올 방법과 수단을 파는 거니까."
"엥? 그냥 조롱거리 좀 되는 그런 느낌 아닌가?"
"드래곤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여자라고 생각해 봐. 사람이랑 비슷하다고 말이야. 만약 까이고 까이고 까인 끝에 몰린 사람이 끝내 돌아 버린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많은 여자를 만나 본 제드였기에 그 말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재앙이 따로 없겠네."
자존감이 박살이 나 그대로 돌아 버린다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고드윈이 몇 년을 걸쳐서 입힌 피해의 절반을 불과 몇 시간 만에 달성했으며, 그것도 실버 윈드의 죽음으로 정신을 차려서 멈춘 것이었다.
제드는 그녀의 판단에 잊지 않고 칭찬했다.
"역시 우리 블랙 반다나의 수장님이셔. 옛날부터 분석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야."
"정보상이니까. 정보가 들어온다면 그 정보를 가공하는 게 내 일이지."
가넷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서 말인데."
끝났으리라 생각했던 대화에 가넷이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나와 일해 볼 생각 없어?"
"뭐, 무슨 농담을 하려고...."
가넷의 제안에 제드는 픽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을 본 제드는 깨달았다.
그건 농담 하나 섞이지 않은 제안이라는 걸.
"기사 작위를 버리고 너한테 가라고?"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기사 작위가 아니라 정말 귀족으로도 만들어 줄 수도 있지."
"거기 다 나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
"내가 그것들 입 막을 수 있어. 호들갑 떨 때부터 짜증이 났으니까 쉬울 거야."
제드가 은연히 거절 의사를 던지지만, 가넷의 눈은 한결같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하다.
"스왈로우즈에 있었을 때처럼 하는 거야. 너와 나. 콤비로 말이야."
가넷이 슬쩍 제드의 손에 손가락을 걸쳤다.
"너만이 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그리고 너도 오직 나만이 목숨을 맡길 수 있을 테고."
용병단, 스왈로우즈.
가넷이 그렇듯이, 제드 또한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가 그립긴 하지만. 그러진 못해."
"어째서?"
"이미 기사로서 맹세했으니까."
"그런 걸 언제부터 믿었다고 그래?"
"안 믿었지."
제드도 스스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근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데, 그렇더라."
제드는 늘 귀족이 될 수 있는 발판만을 바랐다.
귀족을 많이 만나봤으니 얼마든지 그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사가 되면서 제비 짓이나 하고 다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의무감을 느꼈다.
제드는 그 의무를 가벼이 여기고 싶지 않았다.
제드의 그 모습을 본 가넷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정신 차려. 제드 스왈로우."
가넷은 생각했다.
이 남자는 지금 페르다라는 인간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이 이야기는 너한테만 하는 거야. 그 남자는 곁에 있기엔 너무 위험한 사람이야."
128화. 위험한 사람
블랙 반다나의 수장인 가넷은 한 가지를 명심하며 살아왔다.
이 땅에 발을 디디는 이상, 성인들조차도 오물이 묻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인간의 추악한 이면을 접해 왔다.
그녀는 블랙 반다나를 이끌어 갈 차기 수장이었으므로 어린애에게는 다소 가혹할 수 있는 이야기도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그녀가 어렸을 때는 인간 혐오와 불신에 빠져 살아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가혹한 조건들을 이겼기에 그녀에게는 냉정한 판단력이 생겼다.
모든 걸 객관적으로 판단하며 앞날을 예측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고, 정보상으로서 최고가 되었다.
그런 가넷이 페르다에게 내린 결론이 이러했다.
그는 위험하다.
발드로바의 약혼자.
헤스티아 마을의 영주.
악룡을 품을 만큼 위대한 성군의 자질.
그런 것들을 떠들어 대고 있어도 그녀는 보아 왔던 것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네가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굴리고 난 다음에 널 버릴 거야."
마치 토끼 사냥을 마친 개처럼.
"필히 네 여동생을 찾는데 도와준다는 걸로 널 꼬셨겠지?"
"...."
여동생이 언급되기 무섭게 제드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건 틀림없이 거짓말일 거야. 너만이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네 목걸이로 만들어 널 조종하고 있을 뿐이야."
"...."
"에밀리아.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 것 같아? 관여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평생을 걸쳐도 너랑 연관을 짓지 못할 이름일 텐데 말이야."
에밀리아.
제드는 생사가 불분명한 여동생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그가 여자를 홀리고 다니는 것은 돈이 필요해서.
돈이 필요한 이유는 귀족이 되기 위해서.
귀족이 되려는 것은 에밀리아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긴 하지.'
페르다는 그 이름을 알고 언급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의문은 새로운 도화선에 불을 붙이듯이 퍼져 갔다.
정말로 그가 여동생에 관한 실마리가 제국 창고에 있다는 걸 알면서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을까?
근원적으로 돌아가 어떻게 에밀리아와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설마....'
그가 적안족 학살에 관여되어 있는 사람인 건 아닐까?
가넷이 위험하다는 말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가?
그가 여태까지 가면을 쓰고 자신을 조종해 온 건가?
-푸훗.
동시에 들려오는 발드로바의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제드는 진득한 의심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런 인간 아냐."
"그거, 사기당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알아. 사기당하는 것들이 항상 그렇게 망하는걸."
가넷은 블랙 반다나의 수장이다.
블랙 반다나의 정보는 가히 미래를 예지한다고 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러나 제드는 그의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녀가 파악한 페르다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도.
틀림없이 자기가 알고 있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달이 아름다워요.
-오늘 달이 가장 큰 날이라고 합니다.
제드는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어휴, 이 어린놈을 내가 어떻게 해야 되냐...."
"뭐?"
"잠깐만. 나 어디 좀 갔다 올게. 기다리고 있어 봐."
제드는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대화는 이어졌다.
가넷은 페르다와 발드로바가 서로 춤을 추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잠시 후, 어디론가 달려갔던 제드가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바이올린?"
"악단한테 물어보니깐 예비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고. 자."
가넷에게 무언가를 넘겼다.
그것은 플루트였다.
"이건 뭐냐?"
"플루트. 너 플루트 불 줄 알잖아. 같이 연주도 했었고."
"그런데?"
"정원에 가서 같이 연주 좀 하자고."
"...나까지 어울리란 말이냐?"
"월광 이거 혼자서 연주하면 느낌이 안 살아. 듀엣은 해야 해."
"...."
가넷은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드는 중간에 나가서 모르겠지만, 발드로바가 직접 문라이트 스텝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달이 아름답다는 저 이야기만으로 이 모든 걸 파악했단 말인가?
"스왈로우즈처럼 해 보자면서? 연주로 그때의 화합을 확인해 보는 걸로 해 보자고, 어때?"
"...하아."
이럴 때 그 말을 써먹다니.
가넷은 원망스레 쏘아보지만, 제드는 능글맞게 웃으며 넘겨 버렸다.
제드의 웃음에 못 이겨 가넷은 플루트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제드의 의도에 어울려 함께 정원으로 움직였다.
월광 듀엣을 하며, 그 분위기를 이끌어 냈다.
페르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이 발드로바에게 그대로 춤을 청했다.
그들이 춤을 춘다.
달밤 아래의 아름다운 한 쌍으로 은은히 빛났다.
이성적으로 정보를 찾는 가넷조차도 그 모습에는 아름다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건가?'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제드가 무엇을 보고 확신한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차갑고, 살인에는 주저하지 않는 남자.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한 명의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한 명의 소년이었다.
연주가 끝이 났다.
페르다와 발드로바는 떨어지고 제 갈 길을 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제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면 저 어린놈 등을 누가 밀어주겠냐? 안 그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제드.
가넷은 그들을 내려다본 채로 입을 열었다.
"제드."
"왜?"
"넌 여자를 참 잘 아는군."
"뭐, 까딱하다간 목이 잘릴 수 있는 일이라서 필사적이었지."
"그런 네가 모르는 것도 있다."
"뭔데 그게?"
제드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 한 방 먹고 말았다.
달밤 아래의 가넷이 그윽한 눈동자를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제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대답을 건네는 듯하다가도 고개를 휙 돌렸다.
제드는 그 눈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 * *
여운을 만끽한 페르다는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방으로 돌아가더라도 조금은 얼굴을 비추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복도에서 의도치 않게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
"엇! 충성!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말콤이었다.
"잠깐 정원에 다녀왔네, 자네는?"
"화장실을 좀 다녀왔습니다. 여성분이랑 같이 가신 것 같은데 어떻게 되셨습니까?"
"돌아가셨네."
"예? 이렇게 늦은 밤인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말콤이 걱정하는 모습에 페르다는 눈을 끔뻑였다.
"몰랐나? 그분은 발드로바 공왕, 자네가 충성해야 할 분이라네."
"예? 그, 그분이 레드 드래곤, 발드로바 님이시란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머리에 뿔이...!"
남들 다 눈치를 챘는데, 혼자서 뒷북을 치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 이놈은 절대로 부르지 말자.
"임무는 잘 수행했나?"
"섭정님께서 주신 임무니 열과 성을 다해서 했습니다만 끝까지는 못했습니다."
"어째서?"
"저 아르켄 황녀랑 춤춰야 해서...."
그 말을 들은 페르다가 진심으로 걱정했다.
"뭐 잘못 먹었나?"
"아뇨. 먹은 것들은 전부 맛있었습니다만...."
뒤통수를 긁적이는 말콤의 말.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무턱대고 믿기엔 힘든 일이었다.
페르다는 그런 말콤을 처량하다는 듯이 보았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로군.'
과로를 하면 때로는 환청과 환각을 보게 되는 법.
당사자인 말콤도 스스로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어물쩡 넘겨 버렸다.
"아, 아무튼,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흐음...."
말콤에게는 딱히 기대를 안 한 입장으로 이렇게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었다.
"있다."
하지만 말콤은 자기가 필요하길 바랄 테니, 그에게 또 다른 미션을 건네주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공왕 전하가 춤췄을 때 누가 살인자, 학살자라고 욕을 했던 모양이더군."
페르다는 발드로바와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려 그에게 물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감이 잡히는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 말입니까...?"
사실상 대답을 듣기 힘든 질문이었다.
자신도 환청일 수 있다고 했던 문제이기에, 페르다는 유령의 꽁무니만 쫓을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그래도 혹여나 미련하게 붙잡아서 네가 욕했냐고 추궁하고 다닐까 봐, 페르다는 그냥 농담이었다고 말하려 했다.
"그 사람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사람이... 뭐?"
페르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저 놈이 알고 있다고 말을 했나?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어... 그러니깐 섭정님께서 말씀하시는 발드로바 전하를 욕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누가 정말로 그렇게 말을 했단 말이냐?"
페르다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말콤은 겁에 먹었으나 일단 대답했다.
"예. 안 그래도 섭정님께서 임무를 주셔서 여러 사람을 주시하고만 있었습죠. 아주 작지만 제가 쓱 지나갈 때 말했습니다. 살인자가 왜 여기 있냐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
"그냥 혼잣말이기도 했고, 어디 높으신 분이시구나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발드로바 공왕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페르다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발드로바는 사람들에 둘러싸면 환청을 듣는다고 했다.
단순히 심리적 압박에서 오는 것이라 여겼고, 그녀 또한 그렇게 여기고 극복하려 애를 썼다.
'그렇다면 그건 환청이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
가상과 진실의 경계선이 모호한 그녀에게 엿 먹이려는 자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저는....
"말콤."
두 음절의 이름을 내뱉는 페르다.
바보인 말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예, 옙!"
"네가 워낙 우둔한 놈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네 충성심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높이 사고 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니 묻겠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나?"
"제가 어찌 섭정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래,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네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페르다의 이성의 끈은 새끼손가락 끄트머리에 걸쳐져 있었다.
그녀와 나누었던 춤의 여운을 느끼고 싶었고, 이 밤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 불경한 것의 이름을 묻고, 머리를 따 버리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네 여부에 따라 그 남자의 목숨이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물으마."
페르다가 더욱 깊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네 귀로 그 말을 똑똑히 들었느냐?"
그 음산한 목소리는 있는 사실마저 부정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말콤은 그러지 않았다.
비록 그가 어벙할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기사이다.
기사라면 받은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말콤은 자신에게 있는 최선을 다했다.
"화, 확실합니다! 소인이 똑똑히 들었습죠!!"
"그렇다면 말해라. 그게 누구인지."
"그게 누구였냐면... 말입니다."
말콤은 정확하게 그 이름을 언급했다.
* * *
입춘제는 자정이 되기 전에 끝이 나지만, 음악과 웃음소리는 자정 너머까지 울렸다.
젊은 청춘의 혈기는 달이 기우는 줄 모르고 샹들리에의 불꽃 아래에서 불태우고 있었다.
제 주량도 모르고 깝죽거리는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인사불성이 되어 성 곳곳에 뻗었다.
그럴 때면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하인들이 재빠르게 그들을 업고 밖에서 기다리는 하인들에게 인수인계해 가는 식이었다.
물론 그 늦은 밤의 연회를 즐기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즐거운 연회가 한창인 한밤중에 떠나는 마차들의 행렬이 깊은 숲에 드문드문 보였다.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영주의 업무를 맡아서 하여 일정이 빠듯하거나 보수적이어서 남의 성에서 머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집안이 그러했다.
밤은 몬스터들의 시간이지만, 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호위는 각 가문에서 대표하는 최정예들이니까.
지상은 어떻게든 지켜 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쿠궁!
하지만 모든 것을 막아 낼 수는 없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콜록, 콜록...!"
"기, 기습이다!"
"도련님!"
매섭게 날아든 것과 다르게 마차는 반파되었다.
그 정도의 속도를 낸다면, 마차는 물론 그 안에 있는 사람마저 곤죽이 되어야 할 터.
나무 바퀴는 멀쩡했으며, 지붕만 날아간 상태.
절묘한 솜씨에 감탄할 틈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만 되새길 뿐이었다.
어찌 됐든 그건 영식을 태운 마차를 노리고 쏜 공격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날아온 것은 포탄이 아닌 살아숨쉬는 생물이라는 것
"석궁병! 일제 사격!"
언제든지 쏠 준비를 마쳤던 정예 석궁병들이 석궁을 일제히 침입자를 겨누었다.
푸슈슈슝!
한 명이 양손으로 겨우 끌어야 당길 만큼 힘 좋은 시위에서 화살이 소리만을 남긴다.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였으나, 빛보다는 느렸다.
달밤의 새파란 섬광 한 줄기에 두 동강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상대는 보통이 아니다.
호위장이 검을 뽑고 오러를 뿜어내었다.
"이 더러운 몬스터 자식아! 내 검을 네 피로... 읏!"
검을 뽑았으나 그것뿐.
호위장은 움직이지 못했다.
호위장은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는 무려 공작가의 기사이며, 기사 사관학교에서 백 명이 넘는 인재들을 제치고 올라온 수석이었다.
또한 수많은 전장을 누벼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도 해, 섬전호라는 별호가 있었다.
그는 의기는 충만하였으며, 무예 또한 출중하다.
그러나 곧 이해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신의 앞에 선 이 존재에 비하면 부질없던 것이었다.
날고 기어도 어디까지나 범인에 뛰어날 뿐이며, 인간의 한계 안에 머무를 뿐이다.
인간은 아무리 용기를 낸다고 하더라도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지금 자기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이 존재가 그러했다.
숲은 어두웠으며, 나뭇잎 아래에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그 속에 보이는 것은 소녀의 신형.
그리고 그 신형에 몇 배는 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날개의 실루엣.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
세로로 찢어진 이질적인 눈동자.
"아아...!"
오감이 확실치 않은 밤중임에도 그들은 선명하게 존재를 자각하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드, 드래곤!"
용맹하게 진형을 갖추려던 기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실금했다.
호위장도 겨우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검을 휘두르면, 아니 살의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저 소녀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 목을 앗아 갈 것이다.
소녀의 신형은 긴말하지 않았다.
부숴 버린 마차 안에 있는 무언가를 짐짝처럼 들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영식이었다.
후웅!
그리고 날아들었을 때처럼 빠른 속도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호위는 실패했으며, 공자는 납치되었다.
129화. 지독한 세계
한밤중에 떠났던 공자는 마차가 부서졌을 때 기절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일어났다.
"으음...."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충격에 몸이 욱신거려 신음을 내뱉었다.
"으으... 뭐야?"
그의 양손은 팔걸이에 묶였고, 목도 등받이에 묶여 정면을 또렷하게 응시하게 만들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촛불 하나.
그리고 반대편에는 음산한 분위기를 한 회색 머리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 깊은 호수와도 같은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빛을 내는 듯하다.
사내는 이 남자가 누군지 안다.
페르다 발드로바였다.
사내는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다.
아니 이해한 것인지 헷갈렸다.
그는 픽 웃으며 반대편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소? 사람을 납치하고도 아무 말이 없군."
그제야 페르다도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겁이 났네."
"겁?"
"조금은 실수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 생사람을 납치해 와 죽여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말이야."
페르다는 양손을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정답이었군."
발드로바를 살인자라 칭한 범인의 이름을 내뱉었다.
"마르커스 유레이."
유레이 공작가의 장남이며 후계자.
그가 바로 발드로바의 환청이었다.
"네가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 스스로 알리라 믿는다."
"그래, 알지."
마르커스 유레이는 공허한 눈동자로 페르다를 올려다보며 조소했다.
"그 잘나신 공왕 전하께서는 그 말을 아주 잘 들은 모양이로군? 민중의 소리 따윈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이런 주제도 모르는 하등한 인간이...."
루리가 발끈하며 나서려 했다.
페르다는 그런 루리를 가만히 세웠다.
루리는 순순히 페르다의 말을 따랐다.
화가 나는 건 페르다도 못지않았다.
"...왜 그랬지?"
"왜 그랬냐니?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아비라는 사람은 이제 전쟁 범죄자고, 우리 공작가도 뜯어먹으려고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 중이지. 네놈도 난민으로 우리 영지를 빨아먹는 중이지 않더냐?"
"그건 너희가 멍청한 탓이지 않나?"
페르다는 공격적으로 받아쳤다.
"네 아비가 어설프게 중재 요청을 하여서 그 사달을 일으켰는데, 우리라고 어쩌란 말이냐?"
"난민들을 반환하면 되지 않더냐?"
"겨울에는 잠잠하다가 봄이 되어서? 염치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맞아. 염치도 없긴 하지. 무료 급식소 취급을 해 버렸으니 말이야."
씨익 웃었다.
마치 잘 걸렸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염치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
"용마전쟁이 발발한 지 150년. 공왕이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자숙하고, 살아가기로 한 것이 아니었나?"
그가 낮게 말을 덧붙였다.
"살인자면 살인자답게 안에서 기어들어 가 있을 것이지."
그러자 온몸이 묶여 있는 마르커스가 뒤로 쓰러진다.
그를 덮친 것은 루리가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것은 페르다였다.
마법을 쓰는 대신 주먹을 꽉 말아 쥐어 마르커스의 안면을 구타했다.
퍽! 퍽! 퍽!
무자비하게 터지는 구타.
페르다가 온 힘을 다해 마르커스의 안면을 쳐 댔다.
빠악!
심하게 부서지는 소리.
부서진 건 마르커스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 증거처럼 페르다의 손목이 힘을 잃고 너덜너덜해졌다.
마르커스의 얼굴은 조금 부었을 뿐이었다.
"크크크... 섭정님의 주먹은 코피 한 방 터트리지도 못할 만큼 참으로 가녀리시군."
"닥쳐."
페르다는 이렇게 되리라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마법이 아니라 이 손으로 저놈의 면상을 갈기고 싶었으니까.
"오른손은 부서졌으니, 이제 왼손으로 갈길 텐가? 해 보는 게 어떻겠나?"
마르커스는 끊임없이 페르다를 조소했다.
페르다가 그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성급해하지 마라. 이게 시작일 뿐이니까."
페르다는 죽지도 살지 못하는 사람을 만드는 법을 안다.
그 지식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남자에게 잔혹한 삶을 선사할 것이다.
마르커스는 큭큭 거리며 광소했다.
"시작? 누가 멋대로 시작하게 둘 것 같나?"
"왜? 그 잘난 귀족들의 룰에 내가 따를 거 같나? 아니면 내가 괴롭히기도 전에 죽기라도 할 셈인가? 자신이 있으면 죽어 보거라. 하지만 그럴 순 없을 거다. 내 손에 잡힌 이상 널 죽일지 살릴지 정하는 건 나다."
페르다가 그를 눈빛으로 압도하려 했다.
그런데도 전혀 겁을 먹는 기색이 없었다.
페르다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수가 있다는 것을.
"페르다 섭정, 지독한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그 말 맺음과 동시에 목에서 잔상 따위가 보이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우둑! 우두둑!
마르커스의 목이 지그재그로 꺾이고 그대로 비틀렸다.
놈은 그대로 즉사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은 당혹스러운 기류로 바뀌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루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페르다 님?"
"...내가 한 게 아니다."
페르다가 대답하자, 루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설마 이성을 잃고 제어를 잃으신 건...?"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화가 나긴 했지만, 에렘발트 때에 느꼈던 그 압도적인 분노는 없었다.
페르다는 침착하게 마르커스의 목 부분을 살펴보았다.
"봐라."
그곳에는 흑마법 계열 마법진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시동어를 읊으면 자동으로 목이 비틀리도록 했겠지."
"그럼 그 인사가 시동어라는 말이군요."
그가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루리는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얄팍하게 페르다 님을 의심해서...."
"아니, 사과할 일이 아니다."
그러자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로 페르다를 보았다.
"네가 나를 의심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뜻이지 않겠느냐?"
페르다는 지금 이 상황을 한 발짝 떨어진 채로 보았다.
확실한 것은 자기 모습이 어떤 늪에 빠져 있는 형태라는 것이었다.
"루리."
"예."
"마차를 습격해서 데려왔다고 했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몰살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고 이 망할 것만 가져왔습니다."
"너라는 걸 모르는 걸 확신하나?"
"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적습니다만... 알아내려 한다면 어떻게든 알아낼 겁니다."
쓸데없는 살육을 막으려 드래곤 피어까지 발산했으니 틀림없다.
'문제는 이걸 보고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성으로 돌아올 것인가인데....'
당장에는 알 수가 없지만, 어느 쪽이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자라면 유레이 공작이 추궁하며 더욱 큰일로 번질 것이요,
후자라면 목이 끊어진 마르커스 유레이의 사체를 수습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페르다가 욕보인 유레이 공작의 아들을 홧김에 죽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왕 전하를 욕보였다는 건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공개적으로 한 게 아니니 그렇지."
청력이 좋은 발드로바만 듣도록 그렇게 중얼거린 건 의도된 것이다.
페르다는 알고 있다.
그걸 입증하려고 시도해도 문제가 될 거라는 걸.
'분명 흑마법이 언급될 것이다.'
마르커스 유레이가 죽은 이유는 흑마법 때문이다.
흑마법 이야기가 나오면 그곳에 꽂히게 될 것이고, 페르다가 흑마법을 쓴다는 흐름으로 갈 것이다.
이걸 알고 있는 이유는 과거의 페르다가 그러했다.
흑마법이라는 것은 낙인이고, 그걸로 페르다를 죽이려 안달이 났었다.
마르커스 공자의 죽음은 페르다를 이미 진득한 늪에 빠트린 것.
'이 죽음에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지?'
페르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유레이 공작이었다.
유레이 공작은 제 기사에게 난민들을 역적 무리라 칭하며 본보기로 내세우는 인간이다.
제 아들을 발판으로 삼는 것도 충분히 있는 이야기다.
"시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페르다는 목이 비틀린 유레이 공작의 영식을 내려다보았다.
처리 방법이야 다양하다.
어딘가에 묻어 버릴 수도 있고, 몬스터들의 먹이로 줄 수도 있으며, 불로 태워 완전히 없애 버릴 수도 있다.
옛날의 페르다라면 그 선택지들을 쉽게 고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공왕령을 이끌어 가는 섭정이며,
헤스티아 마을의 영주 대리이며,
발드로바의 약혼자이다.
"...지독하군."
페르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심문실의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페르다 섭정님. 탑주님께서 연락을...."
이사벨라가 목이 비틀린 시체를 보더니 말을 멈췄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제대로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일단 공왕을 모독한 죄를 치렀다고만 알아 두게."
"음."
이사벨라는 드래곤 스폰으로서 불경한 자의 죽음을 금세 납득했다.
동시에 행정관으로서 귀족의 죽음에 복잡한 얼굴을 했다.
루리는 그녀의 난입을 질책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실례를 범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이사벨라는 들고 있던 수정구를 페르다에게 보여 주었다.
"탑주님께서 급하게 연락하셨습니다. 지금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다."
페르다는 이사벨라가 가져온 수정구에 자신의 정신을 연결했다.
-섭정. 지금 바쁜 만큼 여러 인사치레는 하지 않을게요.
에리카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한창 입춘제를 즐기는 중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입춘제는 끝났나요?
"명목상으로 끝은 났습니다만, 아직 성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영애·영식들은 떠나지 않은 상태죠?
"밤중에 출발한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멀리 떠났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일단 최대한 모으도록 하세요!
에리카가 이토록 당황하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지금 공왕령은 마물에 점령당했습니다! 지금 움직이면 꼼짝없이 전부 죽을 거예요!
* * *
평화롭던 발드로바 공왕령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단순히 마의 땅에 걸친 헤스티아 마을이 아닌 자신의 치하에 있는 귀족들 전체에 말이다.
페르다는 이사벨라와 루리의 협력으로 현재 상황을 지도로 만들었다.
완성된 지도를 본 페르다가 이렇게 말했다.
"...섬이 되어 버렸군."
마물의 라인은 정확하게 극동부를 고립하고 있었다.
"단순한 마물들이 아니라 초대형 마물입니다. 평소 발드로바 님께서 처리하는 마물들과 비슷한 크기의 초대형 마물들을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총 몇 마리인가?"
"12마리입니다."
12마리는 곧 12개의 군단이 된다는 소리이며, 12개의 군단이 고립하고 있는 상황.
움직이면 성 하나는 우습게 부숴 버리는 초대형 마물들.
페르다는 발드로바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것들의 위력을 확인했다.
'그것들이 움직인다면....'
영지가 초토화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초대형들은 기동력이 없다는 겁니다."
"동시에 몰려들 위험은 없단 말이군."
"문제는 그 초대형 마물의 능력입니다."
"무슨 능력인가?"
"번식입니다. 마물을 낳으며 군단을 만들고 있더군요."
역할은 마물들의 부화장.
곡마가 따로 움직여 마물을 쏟아 내지 않아도 꾸준히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어미의 중심에는 이미 수십이 넘는 마물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마물들을 낳는 중입니다. 산란을 멈추지 않으면 순식간에 수천이 넘는 군단이 되어 버릴 겁니다."
"수천이 넘는다면, 그건 재앙이 될 것이고요."
"흐음...."
꾸준한 병력 양성을 막는 방법은 기동 타격.
재빠르게 치는 것밖에 없었다.
"발드로바 전하가 나서는 건... 어떻겠나?"
"물론 그게 최선이겠습니다만...."
루리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마의 대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대규모의 병력들이 대기하는 중입니다. 전부 주인님이 들어올 수 없는 전선에 걸친 상태죠."
의도는 투명했다.
"부재가 되는 순간 덮쳐 버리겠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지능적이다.
헤스티아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발드로바가 외로운 산에 묶이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이토록 지능적이고 전략적인 수를 던졌다는 건 의도가 보였다.
'곡마, 그 남자겠군.'
그가 손가락 한 번 긋자 그 안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 남자가 저 초대형 마물을 곳곳에 배치하였을 것이다.
페르다는 최선의 수를 던졌다.
"제국 쪽에 구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겠군."
공왕령은 제국 내의 일이었으니, 제국에서 관여해 줘야만 하는 일.
페르다는 곧바로 연락을 넣었다.
-발드로바 공왕령의 섭정, 페르다 발드로바 님을 뵙습니다! 위대한 아르켄 제국의 통신마법사, 한스라고 합니다!
"현재 제국 내 영토에 일어나는 일에서 책임자가 누구지?"
-책임자 말씀이십니까?
"최고 책임자를 불러라. 현재 제국의 영토에 마물들이 침략했다."
-아, 넵!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스라는 마법사의 반응을 보아하니, 제국에서는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는 노이즈를 듣고 목소리가 바뀌었다.
목을 가다듬으려 내뱉는 기침조차도 기름기가 줄줄 흘렀다.
-황태자, 알렉산더 아르켄일세.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들었네. 안 그래도 지금 제국에도 발칵 뒤집힌 상태야.
말이 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군이 필요합니다. 제국 내의 병력을 파견하여 최대한 빠르게 쳐야 합니다.
-물론이지, 물론이야. 최대한 원군을 보내 주겠네.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얼마나 걸립니까?"
-두 달일세.
두 달.
페르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돼지 새끼가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그때 동안 저 덩치를 방치하란 말입니까?"
-그렇게 섭섭한 소리 하지 말게. 우리들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야. 최선을 다해서 그 정도의 시간이 나오는데, 어쩌겠는가?
최선을 다한다라.
알렉산더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페르다는 바보가 아니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멸망의 위기를 지금 이용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제가 고개를 조아리고 뭐라도 해 주길 바라십니까?"
-어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전쟁이라는 건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일이고, 제국의 법도에 따라 처리를 하다 보면! 쉽지도 않은 일이고, 그렇다는 말이지.
요컨대, 군대 파견을 원한다면 이득이 될 수 있는 걸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이 가증스러운 돼지 새끼가.
당장이라도 욕을 박아 버릴까 싶었지만, 현 상황이 페르다에게 녹록지 않았다.
그 무게가 페르다의 성질을 억눌렀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페르다는 그대로 수정구를 끊어 버렸다.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두 달 동안 저 마물들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마물을 일정한 숫자로 계속 낳는다면, 수천의 군대가 될 겁니다."
루리의 말에 이사벨라가 첨언했다.
"군대도 군대지만, 토양도 문제입니다."
마물이 머무르는 자리는 생명이 죽어 간다.
땅이 죽어 버리면, 그 일대를 통째로 파 버려 어디론가 버려야 한다.
공왕령을 둘러싼 형태로 토양이 죽는다면, 사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섬의 형태로 유지될 것이다.
'그게 문제다.'
재빠르게 제거는 해야 하는데, 제국은 빠른 대처를 할 의지가 없다.
결국 페르다가 직접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해낼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루리가 자신의 불안감을 드러내었다.
"해낼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