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39

130화. 위기를 기회로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무엇을 해야만 할까?

9서클의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이런 영지 운영은 초보였다.

초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매뉴얼.'

이런 전시 상황 대처 요령법에 대해서 잘 알려졌을 것이다.

페르다는 이사벨라에게 물었다.

"우선 극동부에 있는 병력들을 모두 집결시켜야겠군. 전시 매뉴얼은 어떻게 되어 있지?"

"콘실러스 백작령에 병력을 집중시키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섭정님이 태어나기 전에 정립해 놓은 것이니 적용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페르다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매뉴얼대로 해야지. 파견 온 병사들은 모두 백작령에 보내도록 하게."

콘실러스 백작의 성은 전시를 고려한 요새로 설계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그 설계에 맞춰 있는 상황이기에 융통성을 발휘하다간 악수가 될 수 있었다.

이사벨라가 한참 전음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푸른 머리에 뭉툭한 끄트머리의 뿔.

푸른 눈의 탑주, 에리카 이오르가였다.

"페르다 섭정, 현 상황은 모두 파악하셨죠?"

"그렇습니다."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셔야 할 것 같아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녀가 자리에 앉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똑똑-.

그때, 또 누군가가 찾아왔다.

루리가 직접 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제국의 황녀, 올리비아 아르켄이었다.

"섭정님과 푸른 눈의 탑주님을 뵙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이야기에 제가 끼여도 되는지요?"

"이 이야기에 말입니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올리비아가 싱긋 웃었다.

에리카는 올리비아의 등장에서부터 그녀도 가면을 뒤집어썼다.

"제국의 황녀를 뵙게 되어서 영광이네요. 소문대로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어머, 과찬이십니다. 아름다움이라면 위대한 물의 위상이신 이오르가 님과 그분의 자손들에 비하면 허울만 좋을 뿐이지요."

"칭찬 고맙습니다. 황녀, 이 사안은 극동부 쪽 책임자들과 해야 하는 일이랍니다. 제국 쪽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완곡하게 나가 달라고 말하는 에리카.

"저 또한 극동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혹여나 제국과 관계가 있는 일이어서 이러시는 건지요?"

올리비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치한 상황에서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니, 에리카는 페르다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페르다 섭정, 이번 일에는 제국 사람과 연관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녀가 눈짓으로 쫓아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페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요?

-저 여자는 제 혈육을 전부 죽이려고 안달이 난 사람이니까요.

-혈육을...?

에리카가 깜짝 놀란 채로 눈을 굴려 다시 올리비아를 보았다.

올리비아는 그 눈빛을 읽고 대꾸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섭정님께서 조금 실례되는 말씀을 하셨을 거 같네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는 올리비아.

말과는 다르게 음험한 살기가 뻗어 왔다.

귀신이 따로 없었다.

페르다가 괜찮다니 에리카도 굳이 더 말리려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사태가 사태인 만큼 황녀님께서도 참여하는 걸 허락하지요."

에리카는 가면을 풀고 현 상황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 사태는 이미 제국도 알아차린 상태입니다. 이건 제국 내 영토의 침범이죠, 그렇죠?"

"예."

"그래서 제국에 마물 제거에 협력이 필요한지 물어보았습니다."

협력이 필요한지 물어보았다는 말에서 페르다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었다.

'블랑카로스가 이 사태를 대륙의 비상사태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

푸른 눈은 수호룡의 피를 이은 만큼 대공의회의 법에 준수하는 입장이다.

경솔하게 판단하여, 푸른 눈이 개입했다가는 자치권 침해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한다.

"제국에서는 이렇게 대답했더군요. 자치권 내에 있으며,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태가 실제로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페르다나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저도 지금 사태에 대해서 연락을 했습니다. 황태자가 받더군요."

"뭐라고 하던가요?"

"두 달 정도 기다리라는 게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에리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도 빠듯한 시점에서 두 달은 늦장 대응이었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오라버니답네요. 이런 위중한 사태에서 극동부를 길들이려는 속셈을 보이다니."

"극동부를 길들이려 한다는 말은 그보다 더 빨리 준비할 수 있단 말이군요?"

"네. 제국 상비군과 예비군을 소집하는 것도 이틀이면 충분하죠. 물자 지급과 행군 속도를 고려하면 늦어도 2주 안에 진군을 시작할 수 있어요."

에리카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조곤조곤 거리는 영애 말투와 다르게 제국의 병력에 대해서 줄줄 읊는 것이 현 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루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시라도 해결해야 하는 이 상황에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역으로 이런 일이기 때문에 좋은 기회인 거죠. 급한 쪽에서 숙이지 않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자신들도 최선을 다했다고 발뺌할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극동부가 망하는 건 생각보다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루리의 속내.

당장이라도 황궁에 쳐들어가 깽판을 쳐 버릴까 싶었다.

페르다는 에리카를 보며 물었다.

"공왕 대리인으로서 푸른 눈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동맹으로서 저희 또한 도울 겁니다."

에리카의 의기양양한 얼굴과 다르게 전음은 침울했다.

-너무 기대하는 건 좋지 않을 거예요. 저희 쪽에서도 화력을 내기엔 역부족이니까요. 제국군을 조력할 수는 있어도 단독으로 움직이기엔 힘이 여의찮아요.

이오르가의 부재는 그들에게 들켜선 안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도 못 해 주냐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페르다는 이해하기로 했다.

페르다도 발드로바가 아프다고 한다면, 그곳에만 집중할 것이니까.

"각지의 드래곤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서 공왕령 쪽을 도울 수 없는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에리카가 푸른 눈 쪽에 전음을 하려던 순간,

"아니요. 오히려 이 일은 인간들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 반발을 한 것은 올리비아였다.

에리카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우아하고 고상한 영애처럼 고까움을 표했다.

"황녀. 그 연유를 여쭤봐도 될는지요?"

올리비아도 만만치 않게 대응했다.

"말씀대로 이 일은 제국 내에 벌어지는 일, 그리고 제국 내의 공왕령을 둘러싸고 있죠."

"그렇죠."

"제국에서 대응하기 전에 공왕령이 이 일을 자력으로 해결해 버린다면, 늦장 대응에 항의할 수 있고,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됩니다."

"자치권이라...."

"그 자치권은 단순히 법률 같은 게 아닙니다. 경제, 군사 문제에서 확장을 진행할 때 발전의 요소들에 제동하는 행위들을 이 사태를 명분으로 삼아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죠."

올리비아는 페르다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한다면, 섭정님께서 마도공학의 소유권 또한 주장하실 수 있을 거예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제국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페르다는 슬쩍 이사벨라를 보았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정말로 위험해진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에리카가 질문했다.

"그때가 된다면, 탑주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지요. 드래곤들의 협력을 고려해 봐야 할지 모릅니다만, 현 상황에서는 제국의 밥이 되는 명분을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물에 대응할 병사들이 적습니다. 헤스티아의 상비군으로는 전력을 낼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정예병들이 많이 모여 있지 않나요?"

입춘제의 젊은 남녀들을 호위하기 위해 최정예들이 많이 모여든 상태였다.

공식적으로 입장한 것만 4천 명에 가까이 되며 병력만 3천 명이었다.

"그분들은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은 좋습니다만, 황녀, 그자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신호가 될 텐데요?"

"글쎄요. 어차피 이들은 도망갈 구멍도 없는 상황에 뭉쳐야만 할 겁니다. 게다가 외세가 아니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사도'와 세르데스 대륙에 발을 디디는 자들로서 지녀야 할 '귀족의 의무'로 기운다면,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무엇보다...."

올리비아가 우아하게 웃었다.

"아르켄 제국의 황녀가 단결을 호소한다면, 누가 나서지 않겠나요?"

무슨 자뻑인가 싶은 소리지만, 누구 하나 개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미모를 무기 삼아 남녀를 가릴 것 없이 홀리며 설득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장점.

심지어 오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에리카조차도 그녀의 설득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제국의 황녀. 제가 여태까지 경솔하게 생각했던 점 사과드리죠. 당신은 그 황태자와 2황자보다 훨씬 낫군요."

"호호, 과찬이라 하기엔 확실히 그 인간 말종들에 비하면 제가 낫긴 하지요."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공왕이 해야 할 일. 공왕이 부재라 한다면 섭정이 마땅히 결정해야 합니다."

둘은 페르다를 슬쩍 보았다.

페르다는 두 명의 주장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판단이 나와 맞다.'

이 일은 속전속결을 봐서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것이 뒤탈이 없다.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그게 공왕령이 안전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 쪽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모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안전인가, 모험인가.

그 기로 속에서 페르다는 선택했다.

"공왕령 안에서 해결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리비아의 손을 들어 주었다.

에리카는 살짝 얼굴을 구기다가 가면을 썼다.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볼 수는 없겠나요?"

"마족을 상대하는 일이라 인간의 힘만으로는 우려가 있긴 하겠지만, 말대로 한번 꺾이게 된다면 기세를 타기 어려울 겁니다."

"흐음...."

에리카는 페르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정치이고, 에리카는 드래곤 스폰이다.

그러나 결정권을 넘긴 건 다름 아닌 에리카였으니 여기서 더 걸고넘어지는 것도 추한 일이었다.

"알겠어요. 이 일은 인간들의 일이라 판단한다면 푸른 눈은 이 일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에리카가 몸을 휙 돌리며 걸어간다.

힘이 실린 발걸음은 은연히 자신이 토라졌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럼 지금 남아 있는 인간들로 어떻게 할 건지 회의를—."

똑똑—.

올리비아가 개회를 시작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노크했다.

루리가 문을 열어 주었고, 문 너머에서 들어온 사람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시 에리카였다.

아니, 에리카이긴 한데 동시에 에리카가 아니었다.

머리에는 뿔이 없고, 꼬리가 없었으며, 옷차림은 이오르가의 마녀답지 않은 복장이었다.

그건 탑주가 아닌 모험가였다.

모두가 어안 벙벙한 상황 속에서 에리카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까닥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올리비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만난 지 불과 1분도 되지 않았는데, 처음 본다니?

"극동부 모험가 지부장, 에리입니다."

"...."

"본래라면 이틀 후에 도착할 예정이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좀 더 빠르게 도착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극동부에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하십니까?"

페르다도 무슨 장난인가 싶어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요? 이건 인간의 일이라고 용들은 참여하지 못하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럼 푸른 눈의 탑주, 에리카가 아니라 플래티넘 모험가, 에리로는 참여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니깐 참여하겠습니다."

에리카가 당당하게 말했다.

"플래티넘 모험가이자 극동부 모험가 길드지부장 에리로서!"

"...."

"...."

올리비아는 이게 무슨 농담 같은 상황인가 싶어 페르다에게 시선을 던졌다.

페르다는 그 시선을 이사벨라에게 넘겼다.

이사벨라는 자기 얼굴을 감출 뿐이었다.

131화. 식수

아침 해가 무심하게 밝아 왔다.

발드로바 성에서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간밤에 세운 대책을 토대로 움직였다.

이사벨라는 헤스티아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경종으로 전시 상황임을 선포했다.

그토록 즐겁게 즐겼던 어제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흩어지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이사벨라도 무작정 그들에게 겁을 심어 주진 않았다.

현 상황을 조심만 해야 할 정도라고 인지시킬 뿐이었다.

마을에 머물고 있는 모험가들의 협조는 에리카의 아래에서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 전설적인 모험가 에리가 이곳에 왔다고?"

"당연히 참여해야지!!"

페르다는 몰랐지만, 에리카, 아니 에리는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세간에는 대현자 에리 혹은 골디 핸드 에리로 통했다.

브론즈급 모험가도 그녀를 거치면 골드급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명성 덕분이었다.

'마왕을 죽인 12인 원정대의 한 명이었으니.'

경험과 지혜, 임기응변 능력에선 확실히 검증된 모험가다.

그런 전설의 인물이 극동부 모험가 길드의 지부장이 되었다는 건 그녀를 동경하는 모험가들로서는 사기가 끓어오를 만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페르다는 한 가지 궁금하여 이사벨라에게 물었다.

"푸른 눈의 탑주라는 직책은 그만둔 건가?"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시국이 안정화된 것도 아니고, 그런 무책임한 짓을 할 수는 없죠."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하긴 했으나, 자신보다 오래 살아온 드래곤 스폰인 만큼 쓸데없는 걱정을 하진 않기로 했다.

에리카가 모험가들을 설득하고 있는 동안, 올리비아는 성내에 있는 귀족들을 모아 설득했다.

그만한 숙취해소제도 없었다.

술에 덜 깬 영애·영식들도 곧 죽을 거란 말에는 정신을 바짝 차렸으니까.

"어, 얼른 도망쳐야 하지 않나?"

"저, 저 이만 가 보는 걸로...."

패닉에 빠져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이들.

아수라장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을 담당하는 것은 올리비아의 몫이었다.

"여러분들!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 주세요!"

그때 올리비아의 고운 음색이 연회장을 울렸다.

제국 황녀의 카리스마가 그들을 사로잡았다.

"현재 극동부는 고립된 상태입니다. 여기서 패닉에 빠져 도망친다면, 그것은 전력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단순히 전력의 손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난관을 벗어날 희망을 잃게 되는 겁니다!"

혼란에 빠지면 더 잃을 것이 많다는 말에 침착해졌다.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야생 늑대들이 소를 쉽게 잡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나요? 소들은 언제나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개개인 힘이 보잘것없더라도 뭉친다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등불이 되고, 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올리비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디... 이 땅이, 세르데스 대륙이...! 마에 빼앗기지 않게... 힘을 보태 주세요...!"

황녀의 눈물.

그 순수는 모두의 감정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같은 세르데스 대륙인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이지요!"

"말씀대로 뭉쳐야 살 수 있습니다!"

동조는 가을 들판에 붙은 불처럼 퍼져 갔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정에 겨워 겨우 부축을 받아 퇴장하는 올리비아.

무대를 벗어나기 무섭게 그녀는 엄지로 눈물을 쓱 훔쳤다.

"후우."

목소리의 습기는 황무지처럼 메말라 있고,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요망하다 싶은 얼굴로 페르다에게 물었다.

"어땠나요? 제 연설?"

"...훌륭합니다."

단순히 제국에 도움을 달라는 게 아니라 세르데스 대륙의 사람으로서 뭉치게끔 유도했다.

제국에 구원군이 아닌, 세르데스 대륙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의무가 되었으니 훗날 보상을 요구해도 그 요구량을 낮출 수 있었다.

그녀는 현 상황을 알고, 군중들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자기 자신 또한 알고 있었다.

'이런 여자가 어째서 스스로 시나리오를 깨 버리고 그런 짓을 했던 걸까?'

추궁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함구했다.

그때의 일은 결과적으로 페르다에겐 좋았던 일이었고, 쓸데없는 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기세를 타야만 한다.

"이다음은 어떻게 할 겁니까?"

"전술 경연 대회를 벌여서 최고 지휘관, 참모장을 뽑으려 할 거예요. 최고 지휘관이 된다면, 출세에 큰 발판이 될 테니까요."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건 우리만이 아니로군요."

"어차피 죽을 거 이러나저러나 뭐든 해 봐야 하잖아요?"

에리카와 올리비아는 각자 역할을 다했다.

페르다 또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버넬을 찾아갔다.

그는 성내의 연구자, 노동자들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력석의 효율을 25%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마력 누수도 개선했고, 실질적인 수치로는 20.32%로 1/5보다 좀 더 높은 수준입니다."

할림에 있었던 일이 자극이 된 만큼 놀라울 만한 발전을 보인 상태였다.

페르다는 결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처음에 비하면 형태가 점점 잡히기 시작했고, 내부 또한 맑아지기 시작했다.

"마력석 하나로 몇 발을 쏠 수 있지?"

"출력을 조정해서 2발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라이플과 마력의 개수는?"

"마도공학 라이플은 현재 150정이 있고, 그에 쓰일 마력석은 총 520개가 있습니다. 출력을 조정하여 하나당 2발씩 쏠 수 있으니 1,040발의 탄환이 있는 셈입니다."

"전부 잘 맞히기만 한다면 1,040마리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로군."

희망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생산량을 좀 더 늘릴 수 있겠나?"

"라이플이야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만... 마력석이 문제입니다."

"몇 개를 더 만들 수 있나?"

"물량으로 봐서는 300개가 한계일 것 같습니다."

마력석은 마물로 가공해 내는 물건.

파스칼 상회를 통해서 공급받고 있는데, 그 공급망이 끊어졌으니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상황.

'1,600발이 한계라는 것이군.'

좋은 방법이 없을까?

페르다는 버넬이 만든 마도공학 라이플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궁금해서 그런데...."

"예."

"내가 이 마도공학 라이플에 마력을 보충하여 쏠 수도 있나?"

마나를 사용한다는 것은 똑같으니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것과 다르게 버넬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마력석에만 작동이 되는 원리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마력 수정석에는 마나를 담을 수 있고, 꺼내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력석은 그런 게 안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대체할 수 없는 그런 마나와 원리로 작용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쓰는 마력과 마력석에 쓰이는 마력은 사실상 별개라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하긴.

그 형태가 같거나 비슷하다고 한다면, 정크 마나를 쓸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먼 미래에 관한 생각이 났다.

'어떻게 마도공학의 부흥이 일어났던 거지?'

마력석을 뽑아내는 건 마물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처럼 마물이 넘쳐흐르는 시기도 아니었고, 당연히 뽑아낼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있다.

페르다는 상상력을 굴려보았다.

버넬이 불법적으로 마물을 양산하고 도축하는 형태로?

'버넬도 이 대륙을 전복시키려는 수작을....'

페르다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런 도움 안 되는 억측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제 분야가 아닌 일에 쓸데없는 상상력으로 의심하는 건 실례이다.

'좀 더 심도 있게 파 봤어야 했군.'

쓸데없는 분노에만 집중하여 날려버렸던 지난날들을 원망하며 현실에 눈을 돌렸다.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야만 한다.

"우선은 마력석 쪽을 먼저 가공하도록 하게. 당장에 쓸 데를 만들어야 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도공학 병사들을 운용해야만 한다.

160개의 라이플.

그 말은 즉 마도공학 병사를 160명 운용할 수 있다는 것.

'아니, 160명도 안 되지.'

석궁병의 운영을 참고해 보면, 석궁병은 언제나 예비 부품으로 1개의 석궁을 더 가지고 다닌다.

무리해서 좀 늘린다고 하더라도 100명의 병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병사는 백.

한 발에 한 마리씩 총 1,600마리.

그렇게 순조롭다면 좋을 뿐이지만, 그는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낙관적인 것은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섭정님."

마치 그 증거라도 되는 듯이 이사벨라가 찾아왔다.

"전쟁 물자들을 모두 지급하고 막사 지원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수고했네."

입춘제는 봄의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이다.

봄은 생명의 시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난한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 특성과 입춘제를 위한 물자 준비로 방대한 양의 식량을 준비해 놓았기에, 갑작스레 늘어난 입에 전부 대응할 수는 있었다.

만약 다른 영지가 이런 상황에 놓였더라면, 참으로 난감했을 상황이었으리라.

'단순 환산으로는 한 달도 충분하겠군.'

그런데 그런 결과 보고나 하려고 온 것 같진 않았다.

그 증거로 이사벨라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평소 단정하게 있던 그녀가 흐트러졌다는 건 해결할 수 없는 골칫거리가 있다는 뜻이리라.

이사벨라가 끈적한 입술을 억지로 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역시나. 

"식수가 문제입니다."

"수로에 문제가 생겼나?"

"예."

이사벨라가 가져온 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녀가 행정관이 된 이후로 갖가지 자원들의 흐름을 파악해 놓은 도식이었다.

"여기 보시면, 저희들의 수원은 북부에서 흘러오는 물입니다."

"그렇지."

"마물이 그 경로를 막고 있는 데다가, 식수마저 오염시키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머리가 헝클어진 게 이해가 간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래서 처리는 어떻게 했나?"

"푸른 눈 쪽에서 이미 해 둔 모양입니다. 오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영역 밖의 강을 건드려 우회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2차 피해가 없지만, 그래도 물이 부족하다는 건 여전하다.

"지하수는?"

"저수지에 물이 남아 있어 정수만 제대로 하면 먹을 수는 있습니다만... 끽해야 일주일이 한계입니다."

"통제를 해야겠군."

일주일.

전쟁은 흔히 성을 앞에 두고 포위하는 것이 일상이다.

어느 쪽이 먼저 지쳐서 백기를 드는지의 싸움.

그편이 크게 피해가 없으며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마물에 둘러싸인 상황은 인간들이 흔히 하는 포위진 이상의 효과를 보였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물.

인간에게 필요한 물을 오염시켜 버려 맥을 끊어 버린다니.

'게다가 지급한 건 전부 비축 건조식일 텐데....'

수분을 최대한 빼서 만든 것들이기에 물은 평소보다 더 필요하다.

대책이 필요했다.

"물의 마법을 부려서 채우는 건 어떻겠나?"

"마법사들을 전부 끌어모아서 물 생성 마법을 쓴다 해도 성내의 귀족들도 겨우 먹을 수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게 비구름 마법인데, 극지인 남부가 아닌 이상, 영지 수명을 끌어당기는 것이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를 끌어당기기 때문이지...."

물 생성 마법으로는 보충하기가 어렵다.

기후 마법의 문제는 후폭풍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정작 필요한 여름에 심각한 가뭄이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폭우거나 가뭄이거나 극단적인 날씨를 지닌 남부는 그런 면에서는 자유로웠다.

밥 몇 끼를 굶는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물은 다른 문제다.

페르다의 선택이 너무나도 중요해진 상황.

비구름을 만들면 영지 수명을 당겨야 하고,

그렇다고 속전속결 하자니 준비가 안 됐고,

이 상황을 도와줄 것은 이오르가인데, 개입하게 되면, 자치권 행사력이 떨어진다.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 만에 타파해야 하는가....'

가혹하다.

정말로 이 일을 인간의 선에서 끝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을 하다가 눈을 떴다.

'물을 찾아야만 한다.'

구정물이든, 똥물이든 정수한다면 마실 수 있다.

페르다는 이사벨라가 펼친 지도를 탐색했다.

원래 수로가 있던 자리는 푸른색 마커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비슷하게 푸른색 마커의 줄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 수로가 하나 있군."

"있긴 합니다만...."

떨떠름한 반응.

페르다도 반사적으로 가리켰기에 뒤늦게 알아차렸다.

수원이 마의 대지의 심부였다.

즉, 정크 마나 같은 불순물이 가득한 오염된 물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구정물마저 찾는 페르다조차도 '그래도 수원이지 않은가?' 하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크 마나들이 몸속에 있는 분자들을 뒤틀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인간성을 잃게 되며 멜티드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어 버린다.

단순히 병 걸리는 수준이 아닌, 변이가 일어나는 치명적인 물이었다.

그렇기에 푸른 눈이 별다른 요청이 없어도 강의 흐름을 바꾼 것이었다.

"섭정님."

상황의 심각함에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일은 아무래도 저희끼리 해결할 수 없을 듯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오르가에 정식적으로 구원을 요청하심이 어떻겠습니까?"

"...."

페르다도 그쪽에 마음이 기울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유능한 능력이라도 있으면 몰랐겠지만, 그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땅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오를 수 있으면 좋겠건만....'

그렇게 속 편한 이야기가 될 리는 없을 것이다.

방법이 필요하다.

"저, 섭정님...."

고민하는 가운데, 버넬이 끼어들었다.

"왜 그러나?"

"저희가 마실 물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그게 지금 마의 대지에서 오는 물이라도 필요한 상황이고요."

"그렇게 되는군."

버넬은 그 말을 듣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손가락 3개를 펼쳐 들었다.

"사흘."

"?"

"딱, 사흘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벨라가 짜증이 섞인 눈동자로 버넬을 노려보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무, 물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고, 모험을 해야 할 때라면, 제게 시간을 조금만 주셨으면 합니다!"

물의 위상이라는 이오르가의 스폰이 저토록 불신하는 눈초리니 버넬에게 맡기는 것이 맞나 싶었다.

조급한 마음을 뒤로 하고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면....'

페르다는 문득 버넬이 누구였는지 까먹고 있었다.

그는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서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었던 남자였다.

"맡겨 보지."

이미 이 영지의 미래를 건 상황에서 뒤는 없다.

페르다는 자신이 믿고 영입했던 자들을 믿기로 했다.

버넬은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이사벨라는 그 뒷모습을 보며 페르다에게 물었다.

"저 마도공학자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도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페르다는 먼 미래의 버넬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안다.

그는 마도공학의 선구자이며, 기술의 혁명을 일으킨 남자다.

그가 마력석을 만든 이유는 민생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는 라이플 대신 인간이 하기 힘든 일, 마법사들이 하기엔 하찮은 일들을 대신해 줄 농기구나 기계 따위를 만들었다.

그 민생의 발전이라는 게 오염된 물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는 항상 위기에 강했다.

페르다는 버넬의 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132화. 유레카

발드로바 성내.

영애들은 모두 한 방에서 잠잠해지기를 기다렸고, 영식들은 총사령관을 뽑기 위해 경연 대회를 열었다.

페르다는 참관만 하기로 했다.

전체적인 전략을 짜는 것보다는 전술에서 활약하는 것이 그에게는 성미가 맞았다.

경연 대회에는 페르다와 친분을 쌓기 위해 각지에서 온, 전쟁 영웅 집안의 후손으로서 명성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거구의 사내.

'조나단 시나로군.'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파견된 12인의 원정대 중 철벽의 조나단 시나.

그 선조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는데, 실제로도 그 환생이라 여길 정도로 조나단 시나의 동상과 판박이였다.

원정대에서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후손이 바로 조나단 시나였다.

페르다는 그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 이사벨라에게 물었다.

"내가 알기로 조나단 시나는 머리가 나쁜 거로 아는데 맞나?"

"그렇습니다."

"그 후손은 어떤가?"

"전술에서는 뛰어나지만, 전략에선 판박입니다."

왜 참여한 거냐, 저놈은.

놀랄 요소는 시나의 자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끼어 있었다.

올리비아 아르켄.

제국의 황녀 또한 참여한 것이다.

그녀는 이 경연 대회에서 유일한 여자였다.

평소에 가슴이 드러나는 그 드레스가 아니었다.

가볍고 견고한 알트리움이라는 희귀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인데, 쓸데없는 굴곡은 넣지 않고 오로지 전투와 실용에 중점을 맞춘 갑옷이었다.

그녀는 길게 늘어트린 머리를 말아 올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왔다.

여자의 민얼굴을 보면 깬다는데, 이 여자는 그런 느낌도 없다.

오히려 청초하다는 느낌이 강해 신선하게 다가와,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힐끔거리게 만든다.

그녀는 청초한 자기 모습과 지휘관으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이 경연 대회는 전시에 이루어진 만큼 빠르게 채점하여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는 한 문제당 100점으로 하여 총 열 문제를 제출할 겁니다."

심사는 이사벨라가 진행했다.

그것도 명목상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그녀의 옆에 앉은 모리가 담당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료와 대조하여 점수를 채점하는 데 누구보다 객관적이다.

어린 소녀가 뭔데 자신을 판단하느냐 따지고 들면 귀찮아지기에 드래곤의 위엄을 업는 편이 나았다.

"저, 행정관님. 질문을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일개 마을의 행정관이지만, 드래곤 뿔이 달린 탓에 영식들은 공손하게 나왔다.

"말씀하시지요."

"그 전설의 모험가라는 에리라는 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경연 대회를 하는 것보다 그분이 이번 일에 총지휘를 하는 편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귀족들 사이에서도 에리는 유명한 존재였다.

수많은 귀족 작위들을 내렸지만, 받는 시늉도 하지 않으며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무례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용인될 정도로 출중했다.

친교만 맺을 수 있다면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었다.

"그...분은 독립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이번 사태에서 소수 정예의 특수 작전을 맡으셨으니까요. 전략 공유는 오늘 뽑힐 최고 사령관과 하게 될 겁니다."

전설적인 모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순간이라니.

영식들의 의욕은 한층 더 불타올랐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한정된 물자를 다루는 법입니다."

전쟁 물자를 활용하는 법. 병사의 이탈에 대한 대처법....

기사들이라면 소양이라 해야 할 내용 위주여서 전쟁에 관해 공부했다면 모두 대답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마지막입니다. 여러분들은 마물과 본격적인 전투를 하게 될 겁니다...."

마물과 싸움을 할 때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그들은 전략을 제시했다.

"기사 정신을 보여서 돌격하여 기세를 꺾는 것으로...."

"허리를 찔러 맥을 끊어 버린다면...."

하나같이 처참했다.

마물에 대한 이해가 없이 대인전 혹은 대수전 쪽으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0점도 적지 않게 있었다.

"마물들은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 합니다. 기사들의 용맹함이 아니라 마법 병력에 의존하여 수비적인 형태로 움직여야 합니다."

놀랍게도 올리비아만 압도적인 점수를 받았다.

100점 만점 중에서 98점.

단순히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전에 적용하여 성과가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의 질문이 더 이어지고, 점수가 나왔다.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참모는 올리비아 아르켄입니다."

물론 점수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들이 올리비아에게 처참하게 발려 버렸다는 걸 안다면, 자존심이 구겨질 일이었으니까.

"행정관님의 결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제 어디가 부족한 것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받아들이곘다지, 인정할 수 없다고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었다.

상대는 만상서고가 들어 있는 노예 현자라는 걸 모른다.

이사벨라는 모리를 통해 이미 오답 요소를 알고 있어 날카롭게 지적했고, 그들은 더 이상 억지도 부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는 참모의 견장을 차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취임사를 건넸다.

"제가 참모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의 개개인을 무시하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결된 의지입니다. 그 점에 하나가 되도록 합시다!"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내심 그 모습에 못마땅한 자들도 여전히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평생을 바쳐 왔던 이상향의 자리에 생뚱맞게도 황녀가 올라갔으니까.

아무리 연모하는 황녀라 해도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자존심이 깎여 나갔을 것이다.

오늘 일로 그녀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던 사람 중 일부가 의문을 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나선 것도 이해는 간다.'

저 기준 미달인 것들에게 고삐를 쥐여 주면, 시작하기도 전에 꼬라박아 버렸을 것이다.

올리비아의 판단을 믿고, 그녀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었다.

"참모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아뇨. 이제 시작인 걸요."

페르다는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듯했다.

"섭정님, 저희는 동맹이 맞으시지요?"

"뜻은 같이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말을 다르게 해야겠네요. 절 얼마나 믿으시나요?"

갑작스레 물으니 딱 잘라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춤을 가르쳐 주고 루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때까지만 해도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갑작스레 시나리오를 깼을 때부터 긴가민가해졌다.

내가 이 여자를 정말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고.

"뭘 원하시는 겁니까?"

"마도공학 라이플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운용할 계획이 있으시죠? 이번 마물 토벌 건을 위해 본격적으로 진행할 계획이시고요."

"그렇습니다."

"그 지휘권을 제게 넘겨주세요."

참모장에 이어서 군대의 지휘권인가.

"이유가 뭡니까?"

"의도는 보시는 대로에요. 지금 저는 다른 남자들보다 뛰어나다고 입증해 이 자리에 섰어요. 어중간하게 진행할 게 아니라 박차를 가해야 할 타이밍이죠."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찍었다.

"참모장이며 지휘관으로서 제 능력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요. 이 사태에서 공을 세워 귀환하고 싶어요."

경연 대회에 참가했던 모든 영식이 품었던 야심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냈다.

"우리가 서로 가질 수 있는 게 무엇인 것 같나요? 제가 이번 토벌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면, 제국에서도 감히 무시하진 못할 거예요."

"정계 진출이군요."

"그렇죠."

올리비아가 슬쩍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페르다로서는 탐탁지 않았다.

"당신은 정계 진출을 위해서 성녀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것도 방법이죠.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좋은 기회잖아요? 이 기회에 잡아야죠."

모두가 그랬듯이 그녀 또한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페르다는 그 말에서 묘하게 초조함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성녀가 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긴 하지.'

다섯 번째 깨달음에 닿는 것은 한평생을 수녀원에 바친 수녀들도 못 이르는 단계.

'그리고 올리비아는 성녀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네 번째 깨달음, 그러니까 4서클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최후의 발악으로 나라를 기울이는 요녀가 되어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녀가 지휘관으로서 정계로 입문하게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실제로 전술에 해박했고, 말발로는 에리카도 감탄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능력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녀는 일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경매장에 올려진 보석 신세라고.

그 보석에 발이 달린다면 좋아하는 이보다는 싫어할 이가 더 많다.

'그래도....'

그녀의 능력은 페르다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어떤 식으로 감화시켜서 능력을 살릴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느낀다.

황녀가 입지를 얻고, 페르다에게도 공적이 생긴다면 좋은 일이고, 얻지 못한다 해도 절대로 손해는 아니었다.

"쉽진 않을 겁니다."

"알아요. 제 운명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어요?"

올리비아는 미소를 지었다.

페르다는 그녀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병력 운용을 연구하고 있는 건 현재 치안대장인 윌리엄입니다. 그자를 부관으로 임명할 테니 이야기해 보십시오."

"유레이 공작가의 기사 생도죠?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유레이 공작의 영식이 안 보이네요? 나름 지휘관 출신 집안이라 당연히 참여할 거라 생각했는데...."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

불편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도망쳤을 수도 있고, 다른 영지로 가 버렸을 수도 있는 일이죠."

불편한 이야기라는 걸 알아 어물쩍 넘겨 버렸다.

올리비아의 능력을 믿지만, 그래도 마르커스 유레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이르다 판단했다.

올리비아는 그렇게 인사하고는 전쟁을 준비하러 움직였다.

"유레이는 어떻게 했나?"

페르다는 옆에 있는 루리에게 물었다.

"묻었습니다. 괜히 인적 소멸을 시켜서 곤란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보존 마법을 걸어두고 매장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군대는?"

"물어보니 콘실러스 백작령에서 함께 수성 준비 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군."

"그나저나...."

루리가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페르다 님은 올리비아 황녀가 예쁜 건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

관심이 없는 거지 눈이 없는 건 아니다.

"모두가 페르다 님처럼 목석인 건 아닙니다."

"그것도 알고 있다."

"올리비아 황녀가 그 병력을 끌고 제국에 귀화시켜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셨단 말씀이지요?"

"그래."

부관인 윌리엄이 그녀의 말재주와 미모에 홀려서 제국의 기사로 편입되는 상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것에 넘어간다면 그것밖에 안 되는 남자라는 뜻이겠지."

페르다는 윌리엄이 자신의 신념을 실망시키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참모장이 만들어진 후, 올리비아를 중심으로 전략과 모의 전투를 통해서 여러 시나리오를 구축하고 있었다.

한창 바쁠 때에 에리카가 페르다를 찾아왔다.

"페르다 섭정님. 괜찮나요?"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쪽은 순조롭습니까?"

"네. 이번에 특수 작전을 하려고 정예병을 편성하던 중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찾아왔어요."

"제가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됩니까?"

"다른 건 아니고, 제가 찾던 사람 한 분이 없어서요. 이사벨라도 모르겠다 그러고... 그래서 섭정님이 알고 계시는가 해서요."

"누굽니까, 그게?"

"갑옷 기사라는 사람이요."

갑옷 기사.

헤스티아 마을의 건설에 일등 공신이었던 그 남자다.

"듣자 하니 그분이 마물 습격 당시에 어마무시한 속도와 힘을 보여 줬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명성이 쓸 만할 거 같아서요. 전위에 세우고 싶어서 협력을 요청해 보려 하거든요."

"흠...."

갑옷 기사라.

조금 멍청해 보이긴 해도 근본은 괜찮은 인간이라 생각했다.

말대로 그가 있다면, 에리카가 벌일 특수 작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쉽게도 저도 이야기를 한 번 나눈 게 끝이었습니다. 그 행방이라면 행정관이 제일 잘 알 겁니다."

"그런가요?"

잘은 모르지만, 입춘제가 준비되는 일주일 전 어디론가 갔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측근인 핸슨에게 물어보니, 고향에 잠깐 들르러 갔다고 하긴 했다.

하지만 말 한마디도 안 하는 놈이니 핸슨의 추측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일단 후순으로 두고 '철벽의 조나단'의 후손에게 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봐야겠네요."

"그러도록 하십시오."

용건이 그걸로 끝났음에도, 에리카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입안에 굴리고 있던 말을 꺼내었다.

"벨라에게 들었어요."

"예."

"지금 식수 공급 문제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정말로 저희들의 도움이 필요 없으시겠어요?"

마을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가는 중이었다.

"버넬이 사흘의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흘이 지났고요."

버넬은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방에 틀어박힌 채로 수정구와 책을 만지작거리는 중이다.

"사기를 고려하신다면, 지금이 마지막이에요.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라 물이 부족해져 간다는 걸 눈치챌 거고요. 자원이 부족해지면 자연스레 사기가 꺾일 거예요."

정론이었다.

터지고 수습하는 것보다 예방하는 편이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초조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곳이 출구가 맞는 건지, 아니면 더욱 깊은 미궁으로 빠지는 건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걷고 있는 중이다.

차라리 안전한 길을 택하고 조금 손해를 보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불쑥불쑥 들었다.

모험에 필요한 것은 희망과 용기.

페르다는 그 두 개를 무용하다 믿는 사람이다.

"기다릴 겁니다."

그런데도 페르다는 앞으로 나아간다.

"버넬이란 그 사람이 성공할 거라 보시나요?"

"모릅니다."

버넬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벌이는지 페르다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버넬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명줄을 잡은 사람이 포기하지 않은 이상 페르다는 그를 믿을 뿐이었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쓸데없는 오기를 부린다면, 피해만 커져요. 지금만 봐도--."

"으하하하!!"

갑자기 미친 듯이 웃는 목소리가 에리카의 말을 끊어버리고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에리카는 열린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떡진 머리에 알몸인 남자가 미치광이처럼 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유레카!!"

133화. 전쟁은 기술을 발전시킨다.

버넬은 흥분에 찬 상태였다.

혈관에 흐르는 것이 카페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커피와 각성제를 섭취한 상태.

알몸으로 미친 듯이 배회하다가 옷을 챙겨 입을 정도로 정신을 차린 후, 페르다의 앞에 섰다.

그의 옆에는 에리카도 있었다.

"제가 옛날에 살아 있는 마물을 해체해서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때 제가 알아낸 것이 있었습니다. 마물의 육체 재생에 쓰이는 신경의 신호를 알아냈었습니다."

그 신경의 신호라는 것은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 종이에 기록되었다.

페르다는 당연히 보는 척도 안 했다.

"설명해 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통에 들어 있는 오염된 물이 아니라 마물의 몸 속이라고 생각을 해 보도록 하죠!"

그가 손짓과 발짓을 하며 설명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물이 다쳤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친 부위를 수복해야겠죠?"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다친 부위에 신호를 보내어서 재생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죠?"

"그래."

"그 신호를 보낸다면, 피에 흐르는 정크 마나들을 환부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렇게 지혈하고 재생을 해 버리는 거죠. 이걸 물통에다가 적용하는 겁니다. 육신을 모방하는 소재에 다쳤다는 신호를 보내게 된다면...."

에리카가 그 말을 이해하고는 요약했다.

"말대로라면 신호에 따라 정크 마나들이 신호를 보낸 곳에 모여들겠군요?"

"그렇습니다!"

버넬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아무래도 자신이 누군가를 이해시켰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쁘게 다가온 듯하다.

"그렇게 정수해 낸다는 말인가?"

"정수? 하하, 겨우 그 정도였다면, 이 버넬이 들뜨는 건 삼류에 불과하지요! 단순히 정수가 아닙니다!"

버넬은 재차 흥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섭정님! 저희가 여태까지 마력석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건 말 그대로 정크 마나 덩어리를 응집해서 생성하는 기술입니다. 단순히 마물들에게서 재료를 뽑아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오염된 물을 단순히 정수하는 게 아니라 마력석까지 만들 재료를 공급받는다는 것이다.

굴 하나에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나흘 걸릴 만한 일이었군."

"사실 이걸 버나드 총장님과 논의를 해서 이틀 차에 알았습니다."

"이틀 만에 말인가요?"

"근데 왜 보고를 하지 않았나?"

"이론이 있다고 해도 그 구조를 적용할 물건을 만들어야 해서... 아무래도 이론이 있다고만 말해 놓으면 믿음이 안 가지 않습니까?"

페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황한 이론은 이미 버넬에게서 많이 들어 봤다.

"그래서 이틀 더 시간을 내서 응용한 물건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게 바로 이겁니다!"

버넬은 칠판 뒤에 놔둔 물건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사슬에 추 따위를 끼워 넣은 형태였다.

사슬은 마나의 통로로 쓰이도록 처리되어 있었고, 추에는 복잡한 마법 수식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니 페르다는 조금 불안해져 그에게 물었다.

"마법진 발현은 저서클 마법사도 가능한가?"

"마법진 발현할 줄 아는 3서클이면 충분합니다. 제가 거뜬하게 해냈으니 마력만 흘릴 줄 알면 될 겁니다."

그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3서클이면 영애·영식들이 대동한 연락 마법사들과 같은 등급이니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작동하나요?"

에리카가 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흥분에 들떠 있던 버넬도 이 순간만큼은 얌전해졌다.

"이제 해 봐야 합니다."

이론이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수식을 적용한 물건을 만들었다 해도, 물건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학자들에게 있어서, 발명가에게 있어서 가장 크게 좌절하는 순간이다.

이제 그걸 확인해야 할 때였다.

* * *

이사벨라는 마의 대지에서 흘러오는 물을 항아리에 담아서 성으로 가져왔다.

페르다는 그날 마의 대지에서 흐르는 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보았다.

묘하게 철 비린내가 풍기며,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철기에서 벗겨 낸 녹이 물에 풀릴 때와 비슷했다.

다만 녹물과는 다르게 이건 손조차 담가서는 안 될 치명적인 물임을 명심해야 했다.

"그, 그럼 시작합니다."

버넬이 물 항아리 안에 추를 집어넣었다.

중간쯤에 닿자, 버넬은 사슬 쪽에 마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진동하는 물결.

마력이 흘러 마법진을 가동시켰다는 뜻이다.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었다.

나흘을 걸쳐서 만들어 낸 이 결과물이 실패하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탁한 색을 띠던 물이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추 쪽에는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결정 덩어리가 응집했다.

버넬은 조심스럽게 추를 집어 올렸다.

붉은색 결정이 추에 살처럼 달라붙어 움직였고,

물은 몰라보게 맑아졌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모른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이는 그대로였다.

"세상에...."

"이런 방법이 있군요."

그 물을 확인한 이사벨라와 에리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습니까?"

"정말 말대로 물에 있는 정크 마나를 제거했네요."

"물론 전부 제거하진 못해서 마나가 미미하게 남아 있긴 합니다만... 체내에 들어가도 괜찮은 수준입니다, 오히려 지하수를 퍼마시는 것보다 위험도가 낮은 수준이죠."

인정받았다는 그 사실은 버넬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단순히 학계에 인정받을 만한 그런 게 아니다.

물의 위상인 이오르가의 스폰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페르다 또한 자신의 결정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정답이었어.'

단순한 식수원을 찾아낸 것을 넘어서 영지의 또 다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전쟁은 기술을 발전을 시킨다더니.'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은 탈출구로 향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

미궁이 품고 있는 거대한 보물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페르다는 이 놀라운 업적에 그를 격려하여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군."

그러자 버넬이 몸을 크게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나흘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연구와 발명에 매달렸던 탓에 생긴 후유증이었다.

에리카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굳이 이렇게 말했다.

"쓸모를 다한 개는 죽여 버린다... 그런 것이로군요?"

"...그런 거 아닙니다."

* * *

이오르가 스폰들의 주도하에 마의 대지에 있는 수원을 임시로 끌어왔다.

수원이 마의 땅인 만큼, 헤스티아 마을에서는 떨어진 곳에 두고 그곳에서 퍼 오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사벨라는 현 식수 문제를 마을에 식수의 대체재로 공표했다.

"마의 땅에서 온 물이면 위험한 거 아닌가?"

"분명 오염된 물을 마시면 마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어쩌겠나? 비는 당분간 내릴 생각도 없는데."

"위대한 물의 지배자들이 인정하는 것이니 먹을 만하지 않겠나?"

거부감이 있긴 해도 선택지가 없다는 반응.

그리고 권위자의 말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역시 귀족들이었다.

그곳에 공표한 것은 페르다와 에리카였다.

"마의 땅에서 끌어온 물을 마시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더러 천천히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고상하게 자란 귀족들답게 펄펄 뛰면서 지하수만 먹겠다고 소리쳤다.

페르다는 시범까지 보여서 그들이 보는 눈앞에 정수된 물을 마셨다.

별 탈이 없다고 보였으나, 그래도 불붙은 분위기를 잠식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페르다 섭정이나 전설적인 모험가라고 해도 이런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마물이 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 책임지시는 겁니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에리카는 전음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냥 죽으라고 할까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동의했다.

지루하고 현학적이며 지적 허영심을 드러내는 듯한 설명보다는 짧고 강렬한 한 마디가 더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기개가 넘치는 저 얼굴도 하루도 못 가 바뀔 게 분명할 텐데, 그런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페르다야말로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올리비아가 페르다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정말 안전한 것 맞겠죠?"

페르다와 에리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에리카가 대답했다.

"이오르가의 수장님께서 직접 인증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믿을 만한 정보죠."

올리비아도 깔끔하게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음, 맛이 깔끔하네요."

화사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신뢰감을 심으며 마무리했다.

그제야 귀족들도 어린애처럼 굴던 것을 멈추고, 정수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묘하군.'

내가 마실 때는 죽는소리를 내더니, 올리비아가 마시니 좋다고 꿀떡꿀떡 마시는 꼴이 거슬린다.

슬쩍 에리카 쪽을 보자,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같은 생각을 하는지 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아무튼, 귀족들 사이에도 식수 문제는 해결되었다.

'마석 문제도 해결이 됐다.'

오히려 마물 시체보다 수월하게 채취할 수 있었다.

공정 과정이 무려 2/3이나 단축되었다고 하니 탄으로 쓰일 마력석 생산은 배로 빨라졌다.

이걸로 다시 한 달은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페르다도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정비하기로 했다.

'레드 서클 4성과 쉐도우 서클 1성.'

마나량만 놓고 본다면 5성이다.

'하지만 5성은 아니다.'

5위계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이니 마나가 다른 4서클보다 월등히 많다고만 알아야 했다.

그건 복병으로 쓸 수 있을 만한 요소.

'게다가 쉐도우 서클은 단순히 보면 음영처럼 보인다.'

푸른색 마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검은색.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그에게 또 다른 서클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무엇보다 페르다는 레드 서클 마법사이기에, 그가 저위계에서 보조 서클을 둘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레드 서클로 번개를, 쉐도우 서클로 그림자 마법을 구사하는 식으로 간다.'

마나 운용에 대해서 미리 정해 두고, 페르다는 다른 요소에 집중했다.

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필요했고, 지금 페르다에겐 그 도구가 있었다.

'지벌.'

루시 필리아즈가 준 선물.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닌 땅에서 솟는 벌이라며 그렇게 지칭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지팡이나 다름없으며, 그 누구도 이것이 루시 필리아즈가 준 보구라 생각하진 않으리라.

'그러고 보니 번개 맞은 가지를 가져다대면 그 힘을 흡수한다고 했던가?'

페르다는 아흐메드 하심에게 우정의 증표로 받았던 나뭇가지를 꺼내었다.

나뭇가지를 지팡이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세계수 가지 쪽에 숨어 있던 입자 따위가 지팡이 쪽으로 흐르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스르륵...

모든 것을 남김없이 흡수했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계수 가지가 남겨 둔 마력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흔한 나뭇가지가 되어 버린 것.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흔적을 모두 흡수했음에도 이 지팡이에서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혹시나 싶어서 마력을 전처럼 흘려 위력을 확인해 보았다.

파지직!

확실하다.

전보다 위력이 높아지고, 안정적으로 변했다.

'원래도 다크 볼트보다 위력이 뛰어난데....'

역천의 라이트닝 볼트가 기존 4위계인 라이트닝 스피어와 비슷한 화력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 위력이 한 위계 높게 나오면서 부작용이 없는 물건은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보구이다.

'이걸로 내게 가지고 있는 수단이 하나 더 늘었다.'

파괴에 있어서 가장 강한 어둠을 제칠 수 있는 역천의 번개.

상대를 속여 허를 찌르는 그림자술.

"흐음...."

이 도구를 어떻게 쓸지가 고민이었다.

페르다의 싸움은 언제나 과시로 시작해 과시로 끝이 난다.

그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 주는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은 마법사다운 전략이 필요했다.

적어도 곡마, 그 남자와 대적했을 때 최후의 한 방을 먹일 수 있도록 말이다.

페르다는 연구를 시작했다.

* * *

사건 발생으로부터 한 달 후.

자그마치 어미 마물을 중심으로 총 2만 마리라는 어마어마한 군세를 모았다.

물론 모든 것이 치명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개중에 절반은 멜티드처럼 느리며, 형태가 불완전했고, 절반은 몬스터나 위협적인 짐승의 형태를 했다.

그중 짐승의 형태를 한 것들도 곰 같은 대형 마물은 200마리 수준으로 그쳤다.

그래도 저것들이 한 번에 몰려들면 속수무책이다.

에리카는 충분히 모인 군세들이 움직일 거라 판단했다.

올리비아는 총력전을 대비하기 위해 모든 참모진들을 모아서 마지막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페르다 또한 참여하여 수성전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듣고, 콘실러스 백작에게 안부를 물었다.

"백작, 그쪽 상황은 어떤가?"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이 순간만큼을 기다려 온 사람입니다.

"그쪽 식수 문제는 없나?"

-예. 푸른 눈 측에서 가져온 물건으로 일주일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외부의 지원을 받는 것이지만, 그걸 받을 수 있는 명목은 충분했다.

버넬이 기술을 공유했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몇 개의 샘플을 테스트한다고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마의 대지 정벌에 쓰이는 물자였으니, 동맹으로서 소임을 한 것뿐이었다.

-섭정님.

"왜 그런가?"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짧게나마 당신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페르다는 감성적인 말에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었다.

전장에 죽으러 가는 기사의 유언 같아 짜증이 올라왔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도록 하지. 밀리게 된다면, 무조건 헤스티아로 퇴각하게."

-소인은 이 성이 함락되면 이곳에서 뼈를 묻겠습니다. 백 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것이 기사의 소양. 저는 백 마리를 더 잡고, 만 명을 살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공왕령의 사람들을 수호하여 주시옵소서.

"...알겠네."

죽으리라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그의 말은 똑똑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때 이사벨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마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나?

페르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사벨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방향이 예상과 다릅니다!"

주춤하는 몸.

"그게 무슨 말인가?"

"있던 수천의 병력들이 우리 쪽으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중입니다!"

"반대쪽이라는 건...."

"놈들이 제국의 수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두의 예상과 정반대의 상황.

그게 사실이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페르다의 통신 수정구가 웅웅 울렸다.

기름기 끼인 목소리가 그리 반가울 줄은 몰랐다.

-서, 섭정! 큰일일세!

황태자, 알렉산더 아르켄이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134화. 엇갈림

사실 아르켄 제국 측에서 당황할 일은 없었다.

올리비아가 말하길 정확한 숫자와 타입도 전부 파악해서 기록해 놓았을 거라고 말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초대형 마물이 또 다른 마물들을 낳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숫자가 불어나면 불리하게 될 것도 당연히 알고 있는 상태.

2만 마리나 불어 버린 숫자들을 기록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도록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발드로바 공왕령의 연합도 한 가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누가 공왕령을 포위한 상태에서 제국을 먼저 치러 가리라 생각하겠는가?

-말해 보시오! 저것들이 왜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지!

페르다는 이 상황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도 모릅니다."

-모르긴 뭘 몰라!? 상식적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그쪽을 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잖소!!

왁왁거리는 꼴이 장난감 안 사 준다는 꼬맹이처럼 보인다.

상황은 둘째 치고 희비가 뒤바뀐 이 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페르다는 자신들의 현 상황을 말했다.

"무책임하게 보이는 말처럼 들리지만,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수성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수성 시나리오만 20개 정도가 넘어가는 데다, 콘실러스 백작은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우리랑!!

"어째서 그쪽으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모르는 이유를 대답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책임이 없다는 거야?!

여기서 도대체 뭘 더해 달라는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

대가리라도 시원하게 박아 버리고 비위에 맞추라는 뜻인가?

페르다는 내 대가리를 박는 것보다 남 대가리를 박는 걸 더 잘한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 버릴까 싶었지만, 엿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슬쩍 페르다의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눈웃음을 치다가 슬쩍 수정구를 만졌다.

수정구의 소리가 참모실 전체에 들리도록 음량을 키운 것이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출격하세요.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으로 원군을 보내기로 했으니 준비하고 있을 터. 그 준비 병력으로 수성전을 벌이거나 토벌전을 하면 될 텐데, 왜 제게 화를 내십니까?"

-극동부가 마의 대지에 있는 마물들을 막지 못하면, 그건 경계 실패 아닌가?! 실패한 주제에 감히 난 잘못이 없다고 목에 힘을 주고 있어!?

갑자기 높아진 음량에 깜짝 놀란 참모진들이 고개를 돌리며 이곳을 보았다.

"갑작스레 소환된 초대형 마물을 어떻게 즉각적으로 대응합니까? 그렇기에 제국 내에서 원군을 요청했고, 두 달이 걸린다고 하셨지 않았습니까?"

-그건 우리 쪽 사정인 거고! 지금 나는 극동부의 의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극동부의 의무는 마의 땅에서 몰려오는 마물들을 해치우는 일.

하지만 그것도 물리적으로 왔을 때지 마법이면 속수무책이다.

-그렇게 커다란 마물들을 처리하는 일은 공왕 전하의 일이지 않은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그걸 방치한 건 우리가 아니라 공왕령 측이지!

"그럼 이곳이 죄다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움직여야만 했다는 겁니까?"

-그 쓸데없는 마을을 지킨다고 자신의 의무를 저버린단 게 나는 이해가 안 된단 말일세!

쓸데없는 마을.

무심코 아랫입술을 깨문다.

이 입이 떼지면 어떤 욕이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페르다의 손에 비단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올리비아의 손이다.

그녀가 탁자 아래에서 페르다의 손을 슬쩍 건드린 것이다.

마치 진정하라는 듯이 말이다.

놀랍게도 그녀의 접촉 덕분에 페르다는 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차피 여기 있는 모두가 듣고 있다.

그들의 표정을 읽어 보았다.

적어도 저 장난감 사 달라고 조르는 애새끼의 편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공왕 전하께 의무를 해 달라고 전하게!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페르다의 물음에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턱하고 막혔다.

전음 너머에서 살의를 느꼈다.

-이 상황에서 책임을 묻게 될 걸세! 단순히 책임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자네가 마족과 유착이 있다고 의심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야!

마족과 유착.

진짜 갈 데까지 가는 논리구나.

어디 한번 해 보란 식으로 말하려던 순간, 올리비아가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말씀 좀 곱게 하세요~."

-뭐, 뭐야? 누구야?!

"누구긴요? 황태자님을 오라버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올리비아? 네가 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는 알렉산더.

그녀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죠. 여기에 얼마나 많은 새들이 황태자님의 말을 듣는지 모르시죠?"

-뭐, 뭣?!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알렉산더.

황태자와 하는 대화를 전부 들었던 참모진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족이랑 손을 잡았다는 발언을 듣고 나서는 적개심이 솟구쳤다.

알렉산더는 말을 더듬으며 페르다에게 물었다.

-서, 섭정! 나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오!?

"전 대화를 했을 뿐입니다. 혼자 흥분해서 날뛴 것은 황태자님이시죠."

-너, 너....

"만약 저희 둘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해 주셨다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겁니다만, 흥분부터 하셔서 저도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악을 쓰던 어린애는 어디 가고 교수대에 매달린 돼지처럼 목이 막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올리비아는 얄밉게 부스럼 만들기를 시작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모두 자신의 명예를 믿고 저희를 따라와 주시는 분이에요. 그런 이들을 마족의 찌꺼기들로 취급하시다니 너무하시네요?"

-아니, 내 말은 페르다 섭정이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한 게 아니고....

"어머, 아니긴 뭐가 아닌가요? 지금 전부 이야기를 들었는데? 명예가 없는 이들이라며 싸잡아 비난하고, 대응도 늦장으로 했고. 이거 전부 정식으로 항의해도 될 문제라 생각하는데요?"

올리비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국의 황태자가 극동부를 길들이려고 쓸데없는 싸움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수정구 너머로는 소리만 들리고 표정을 보지 못할 터인데, 그 표정이라도 본 것처럼 흥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제국의 황녀라는 자가 어딜 이런 판에 끼어들고 있어!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당장 방에 돌아가서 네 신변이나 지키도록 해! 섭정, 얼른 저 애를 돌려보내시오!!

불리하니 나가라 선언이라니.

"황녀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나?

"이 극동부 임시 연합의 참모장으로 계십니다."

-뭐, 뭣?! 어째서?

"어째서긴요, 모두의 인정을 받고 여기에 서 있는 거죠?"

수정구 쪽에서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이리라.

네년이 왜 유능한데? 라고 말해 버리면 다른 영식들이 무능하다는 소리냐고 받아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알렉산더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뚝—.

그대로 끊어 버렸다.

수정구가 빛을 잃었고,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쪽 마법사가 실수했나 보네요."

호호 웃어 버리고는 그대로 넘겨 버렸다.

하지만 참모진들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황태자가 자기 과시나 좋아하는 글러 먹은 인간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급할 때는 두 달 기다리라 해 놓고, 자기는 당장 보내라니, 말이 됩니까?"

참모진들은 황태자를 욕하기 바빴다.

올리비아는 적당히 사기와 결속력을 올릴 만큼만 두다가 말을 끊었다.

"오라버니의 잘못은 잘못이고, 어찌 됐든 저희도 새로운 활로를 찾도록 하죠. 이 공왕령도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영토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제국 내의 위협에 대응할 필요가 있어요."

"예."

테이블에 올려진 대륙 지도.

그 지도에 올려진 마물 말들을 전부 반대편으로 돌렸다.

"보시다시피 마물들은 제국에 향하는 중입니다. 그 말은 수성을 해야 하는 저희가 역으로 먼저 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어요."

"저희가 쳐야만 합니까?"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역으로 치자니.

하지만 다른 참모들은 그 말을 한 사람을 한심하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뭐 이런 한심한 소리를 하나 싶은 얼굴을 할 때, 올리비아는 빙긋 웃었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입니다. 말씀하길 모든 병력이 제국을 향해 이동하고 있죠.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 말은 적의 본진이 가장 취약한 상태라는 겁니다."

파악해 놓은 초대형 마물들은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는 번식 능력밖에 없었고, 그걸로 마물들을 양산했다.

그 마물들을 양산하고 떠나보내기까지 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번식이란 자기 몸에 있는 기력을 나누어 주는 행위.

마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터무니없이 취약한 상태가 되는 셈이다.

적이 가장 취약할 때 노리는 것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그 의문을 제기했던 남자는 무안한 표정으로 말을 거두었다.

올리비아는 이어서 설명했다.

"제국에서나 저희나 마물들이 우리를 노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였죠?"

"포위 라인을 형성했을 때, 저희가 더 근접하기 때문입니다."

"네. 본래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정석이죠."

지도에 놓여 있는 말의 위치만 봐도 확실했다.

제국으로 가는 거리가 헤스티아 마을로 오는 것보다 무려 3배는 더 길었다.

"우리 쪽에 오는 데 이틀은 걸리리라 판단했으니, 제국으로 향할 때는 6~7일 사이로 예상됩니다. 그러니 이틀 정도 기다린 후에 저희들이 진군을 시작합니다."

진군하는 시간도 이틀.

상대가 계속 진군하고 있다면, 사흘 치 이동한 상태가 된다.

시간상으로는 중간보다 조금 더 넘는 수준.

그렇게 되면 상대는 회군이 어려워진다.

"그러면 중간 지점에 도달하겠지요? 회군이 어려운 상태에서 빈 본진을 칠 겁니다."

"그럼 제국은 이미 공격을 당하겠군요."

"제국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고작 그 공세를 막지도 못한다면, 제국이라 할 수도 없으니까요."

아르켄 제국은 모든 것을 수도에 집중시킨 상태이다.

극동부 최후의 보루로 쓰일 콘실러스 백작 성보다 몇십 배는 강력한 마법과 군대를 보유한 상태이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마물에 접근한다 가정하고, 죽이는 건 어떻게 합니까? 소형 마물과 초대형 마물은 몸 구조가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찾아보니 피부가 더욱 견고하고 근육이 강하다고 했으니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을 드리죠."

플래티넘 모험가, 에리가 나섰다.

"우리가 심장을 잃으면 죽듯이 마물 또한 심장을 잃으면 죽습니다. 정크 마나의 극상성은 순수한 마나. 즉, 순수한 마나로 심장이 부서질 정도의 폭발을 안에서 일으킨다면, 죽일 수 있습니다."

"그 폭발에 필요한 마나량은 어느 정도입니까?"

"5위계 마법인 슈퍼노바면 될 거예요. 이건 옛날에 해 봐...아니, 문헌을 좀 읽어 봤죠."

4서클에 매직 블라스트가 있다면, 5서클에는 슈퍼노바가 있다.

순수 파괴력에 강하며, 무엇보다 속성이 없는 마나 본연이라는 것.

순수 마나가 독이나 다름없는 마물에게는 더없이 완벽한 기술이었다.

"피부가 바위처럼 단단하다고 들었는데, 그 슈퍼노바 한 방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정예 기사님들의 활약이 필요합니다. 정예 기사들이 오러를 발현하여 마물의 살을 파고 안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내장이 보일 정도로 뚫어 낸다면 그 안은 인간의 몸처럼 한없이 취약해집니다. 그곳에 슈퍼노바 주문을 외우면 그대로 사망할 겁니다."

"방법은 그렇다 치고... 슈퍼노바를 알고 있는지가 또 문제지 않습니까?"

"모른다면 제가 알려 드릴 수도 있죠. 배우기 싫다고 하면, 그냥 마법진을 하나 그려서 마력만 주입하셔도 되고요."

당연히 마법사들은 배우려고 할 것이다.

명성 높은 모험가이자 고위 마법사가 고위계 마법을 알려 주겠다는데 그걸 거절하는 멍청한 짓을 할 사람은 없다.

"5서클 마법사는 얼마나 있죠?"

"콘실러스 백작령까지 해서 파악한 바로는 총 5명이로군."

"이사벨라 행정관도 5서클일 거예요. 그러면 6명이겠군요."

수상하리만치 남의 집안을 잘 아는 플래티넘 모험가, 에리.

초대형 마물 숫자는 12마리이며, 한 번에 부술 수 있는 숫자는 6마리.

"이틀 안에 모든 것을 부순다...라는 건 안일한 발상이겠죠?"

"네. 행군 속도와 모든 면을 고려하면 빡빡하게 잡아도 나흘은 걸리겠네요."

나흘이라.

획기적으로 줄일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페르다는 그 상황을 듣고 나서 루리를 슬쩍 보았다.

그녀가 시선을 의식했는지, 페르다 쪽을 보았다.

루리가 싸늘한 시선으로 강하게 주장했다.

난 당신의 셔틀이 아니에요.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쪽에서도 가만히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제거할 기회가 있다면, 제거해야만 한다.

"혹여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의견도 듣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페르다는 콘실러스에게도 연락했고 작전 내용을 설명했다.

콘실러스의 대답은 뻔했고 실로 간단했다.

-섭정님의 뜻대로.

그렇게 출정이 결정되었다.

참모진들이 회의 내용을 전달하려 움직일 때,

페르다는 에리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에리 대장."

에리카가 고개를 돌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 * *

성의 공터로 쓰이는 곳이었다.

그곳은 루리가 결계를 쳐서 단절된 공간으로 만든 상태.

"놀랍네요."

완전히 차단된 것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설마 섭정님께서 대련을 요구하실 줄이야."

"세간에 골디 핸드로 통하시는 분인데, 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문은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죠."

말은 그렇게 해도 어깨와 콧대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말씀해 보세요. 이 대련의 목적이 뭐죠? 그에 맞춰 드릴게요."

"시험해 볼 게 있습니다. 실전이라는 가정하에 저와 붙어 주시면 됩니다."

"흐음, 실전이라 한다면...."

에리카가 슬쩍 웃었다.

"역시 도발부터 시작해야겠죠? 우룡의 약혼자 씨?"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물도마뱀보단 훨씬 낫습니다."

"...호오."

잽을 날리다가 카운터를 제대로 맞았다.

"그만두죠. 잘못하다간 명예를 걸고 생사결을 해야겠는데요?"

"그 정도는 해야 실전이지 않겠습니까?"

"후후... 후회하지 마시죠!"

에리카가 마법진을 펼치며 선공을 가했다.

서로 제자리를 지키며 싸우는 클래식한 전투와 다르게, 둘은 정신없이 자리를 바꿔 가며 싸웠다.

그것이 실전적인 마법사의 전투.

마법진 생성, 간파, 파훼, 허수, 유도수....

1분이라는 짧은 사이에 무려 40수가 오갔고, 에리카는 속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한걸?'

체급에서부터 이미 밀린 페르다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패배를 예상했다.

에리카는 그걸 고려하여, 그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위력을 높여 갔다.

처음에는 비등한 수준으로 겨루다가 점차 버겁게 하여 압도해 버리는 식으로 페르다가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닌 인물인지 테스트하려 했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하려고?'

에리카는 그 의도를 파헤치는 것을 염두에 둔 채로 대련을 진행했다.

"졌습니다."

끝내 한계까지 몰아치고 난 후, 페르다가 백기를 들었다.

승리했지만, 에리카는 진심으로 그를 칭찬했다.

"대단한걸요? 과장이 아니라 제가 여태 싸워 본 마법사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예요."

"과찬입니다."

"군더더기도 없고, 저한테 피드백을 요구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말그대로 실험해 볼 게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실험을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답은 얻으셨나요?"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고 알았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숨기는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걸.

"예. 덕분에 얻었습니다."

그래, 이거면 먹힐지도 모르겠다.

* * *

출정 전날 밤.

페르다는 평소처럼 잠들려 몸을 누이려 했다.

그러나 비장한 날인 만큼, 평소와 같지 않았다.

루리가 찾아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페르다 님을 레어로 호출하셨습니다."

페르다는 눈을 끔뻑였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딱 그 정도였다.

135화. 안아 줘요

"나를 말이냐?"

"...페르다 님 말고 누굴 호출하겠습니까? 그분이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루리.

짜증을 내는 것도 이해가 갈 만큼 바보 같은 질문이긴 했다.

"알겠다."

페르다는 평소보다 빠르게 환복을 마치고 레어로 향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너무나도 커다란 철문.

그녀가 처음으로 혈기에 괴로워했을 때 이후로 처음 오는 장소였다.

페르다는 철문에 대고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페르다 씨."

문을 열고 마중나온 발드로바는 갑옷이 아닌 드레스 차림이었다.

페르다는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말을 잃을 뻔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네었다.

"공왕 전하를 뵙습니다. 위대한 용의 둥지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페르다 씨가 한 번쯤은 여기에 와 주셨으면 했으니까...."

가녀린 목소리에는 수줍음이 묻어 나온다.

그 여린 목소리는 페르다의 심장을 울렸다.

페르다는 눈을 돌려 장소를 관찰했다.

이 장소는 크고, 어둡고 메말라 있는 장소.

하지만 발드로바의 방이다.

약혼자의 방.

즉, 여자의 방.

평범한 아녀자가 사는 방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긴장이 되었다.

"무, 무슨 연유로 부르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발드로바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게... 출정 나가신다고 들었어요. 커다란 마물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그렇습니다."

페르다는 어째 그녀가 불안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숫자가 많이 줄어서 인간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네, 페르다 씨를 믿어요. 그래서 불렀어요."

발드로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페르다 씨께... 힘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도움이라니, 어떻게 말인가?

페르다가 그 질문을 표정으로 던지니 발드로바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그러고는 마치 연극하듯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페르다여!"

그녀가 외쳤다.

"그대가 무사히 정벌을 마치고 귀환하게 된다면, 짐의 재보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을 주겠노라...!"

페르다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발드로바가 주춤거리다가 다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노, 노라아아...."

무슨 반응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페르다는 고개를 숙였다.

"공로를 높이 사서 포상을 주신다 하시니 감복스럽습니다."

그제야 무안한 분위기가 풀렸다.

"허나, 굳이 재보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치만 다른 드래곤들은 이렇게 한다고 해서요. 자기 일을 대신해 주면 좋은 물건을 준다고...."

"그건 남의 이야기고, 저는 전하의 약혼자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세상 무너지는 듯한 몸짓을 했다.

말을 잘못한 건가?

"약혼자면 제 보물 같은 건 필요가 없는 걸까요?"

"주지 않아도 할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아."

발드로바는 그제야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말을 착각했다는 수치심과, 헌신해 준다는 말에 대한 부끄러움이 섞여 얼굴을 뜨겁게 했다.

"그래도 주고 싶어요. 페르다 씨는 제가 없을 때도 많이 노력하셨으니까.... 그래도 되나요?"

"예,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약혼자를 대하는 도리가 아니겠지요."

"네, 네...."

말이 끊어졌다.

무슨 말을 골라야 할지 서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주인님."

루리가 끼어들었다.

"페르다 님에게 드릴 선물을 정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응? 아, 응! 그렇지!"

고개를 휙휙 끄덕이고는 목청을 가다듬는다.

"제, 제 창고... 한번 보실래요?"

음란 마귀라도 쓰인 걸까?

그 말이 다른 쪽으로 해석되려 하고 있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네, 그렇다면 저랑 같이 가요."

발드로바가 앞장서서 보물 창고로 향했다.

그 입구에 다다르자, 루리는 따라오는 것을 멈추고 꾸벅 인사를 했다.

"두 분이서 느긋하게 즐기시고 오시길."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건 두 사람.

레어에서 이어지는 보물 창고는 동굴 같았던 레어와 다르게 제대로 꾸며져 있었다.

"와아...."

정작 처음 오는 페르다보다 발드로바가 더욱 들떠 있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니깐 정말 많네요. 맨날 드래곤으로만 봐서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습니까?"

"네네, 엄청 많죠?"

"예."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인가 싶었다.

인간치고는 많은 편에 속하겠지만, 드래곤치고는 아주 적은 편이었다.

보통 용들이 보유한 재보는 여기에 쌓여 있는 재보들보다 수십 배는 더 많다.

악룡들은 대놓고 강탈하는 것이 일상.

수호룡이란 작자들도 보호나 발전을 위한 기금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이나 유물을 받아간다.

그러나 악명 높은 발드로바는 그런 양아치 짓거리를 하지 않고 은둔만 했으니 재보가 모였을 리가 없다.

발드로바가 금화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페르다 씨 마을을 짓는 데 이 돈을 쓴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전하께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네? 왜요?"

"그야 전하의 물건을 쓰고 있으니...."

"그게 왜요? 난 좋기만 한데."

아침의 햇살처럼 방실방실거리는 아우라.

흐뭇하게 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 여자는 자신의 물건을 써 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쁠 뿐이었다.

페르다는 그런 순수한 모습이 마냥 좋기만 했다.

"부디 그런 말은 제게만 해 주십시오."

"왜요?"

"그 자그마한 시종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도끼눈을 뜨고 달려올 게 뻔하니 말입니다."

"앗, 그, 그럴게요!"

발드로바는 두려움을 표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재보 창고 탐방을 이어 갔다.

페르다는 발드로바의 뒤를 따라가면서 살펴보았다.

'쓸 만한 건 하나도 없군.'

드래곤들은 수집욕이 있는데, 대부분은 자신의 위상과 관련된 것들을 수집한다.

이오르가는 물에 관련된 물건과 마도구를 수집하고, 실버윈드는 바람에 관련된 물건과 강철 제품들을 수집한다. 

그런 패턴에 따라야 한다면, 발드로바는 불에 관련된 물건이나 무기를 수집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발드로바는 힘의 위상다운 물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소실되었거나, 봉인된 마검이 하나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정말 하나도 없는 건가 싶은 마음에 둘러보다가 마침내 무기를 하나 발견했다.

"저건...."

아니, 무기는 맞는데, 그걸 정말로 무기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그것은 평범하고 낡디낡은 창이었다.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방과는 상반되는 회색에 그 재질도 불분명하다.

"가지고 싶으세요?"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발드로바가 묻는다.

"저게 뭔지 여쭤도 괜찮을는지요?"

"제가 아주 옛날에 썼던 물건이에요."

"얼마나 옛날입니까?"

"음... 그게... 한 태초쯤?"

단위가 다른 고대 유물이었다.

"세상을 덮고 있는 혼돈과 싸웠을 때에 썼던 무기니까요. 제 평생을 함께한 물건이죠."

말 그대로 그녀의 탄생의 역사를 함께한 물건이다.

무기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기울었던 만큼, 페르다는 흐름을 타 그녀에게 물었다.

"저 창 말고 다른 무기는 없습니까?"

"아마 없을...걸요? 저것 이후로는 평생 무기라는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설령 쓴다고 해도 전부 한 번 휘두르면 부서졌던지라 손에도 안 댔고요."

"그렇군요."

그 말은 무기가 쓸모가 없다기보다는 무기가 부서지는 게 두렵다는 듯이 들렸다.

"가지고 싶으면 드릴게요."

"아뇨. 전하의 평생을 함께한 물건이니 어떻게 받겠습니까?"

사연이 많은 물건이었으니, 이런 물건을 달라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쓸모가 없었다.

"페르다 씨는 무기 같은 걸 받고 싶으세요?"

"조금 기대는 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는 없을 텐데... 음, 그러면 그 소재라도 드릴까요?"

"소재 말입니까?"

"그러면... 제가 역린이라도 떼서 드릴까요?"

드래곤의 비늘은 당연하지만, 엄청난 소재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물품이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역사적인 유물을 만들 수 있다.

일부 드래곤 스폰들은 비늘을 하사받아 그걸로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기도 한다.

드래곤의 비늘 효능은 크기에 비례하는데 그것이 바로 역린.

귀 뒤쪽에 약점을 가리는 그 역린이 가장 크다.

그걸 주겠다는 말은 즉, 네게 목숨을 내놓을 만큼 믿고 있다는 뜻.

"페르다 씨가 원한다면 드릴 수 있어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부디 전하의 몸을 소중히 해 주십시오."

페르다는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다시 탐방이 시작되었다.

발드로바는 안내를 하는 둥 마는 둥 뭔가 재밌어 보이는 게 있다면 금세 호기심을 느끼고 쪼르르 달려갔다.

페르다는 보기만 좋은 황금들을 거치면서 마법 아티팩트를 찾으려 했다.

"...응?"

이 방에서 창만큼이나 처음 보는 형태의 물건이 보였다.

그것은 커다란 액자였다.

성의 입구에 들어와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올려질 그런 사이즈의 그림.

'미술품을 수집하는 취미는 없을 것 같은데....'

대체 무슨 그림인가 싶어 페르다는 그림을 뒤집어 보았다.

"아, 그건...!"

발드로바가 뒤늦게 저지하려고 했으나, 페르다는 이미 액자를 뒤집어 버린 뒤.

"아."

어째서 그녀가 과민 반응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액자에 그려진 것은 바로 발드로바였으니까.

드레스를 입고,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화가를 향해 웃고 있는 그림.

틀림없이 입은 웃고 있었다.

눈은 크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찢어 버려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 절반이 날아가 버린 그 그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발드로바가 말했다.

"그거... 옛날에 받은 건데... 실수로 그어...버렸어요."

"...."

"그림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고요. 그래서 그, 그냥 창고에 내버려둔 거고."

쩔쩔매는 목소리로 해명하면서 웃음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페르다는 알고 있다.

그녀의 거짓말이 너무나도 서툴다는 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버리지 못하고 뒀을 리가 없다.

"보기도 흉하고, 귀신 나올 거 같은 그런 무서운 그림이니까 그만 보고 다른 걸 찾아봐요."

발드로바는 페르다의 옷깃을 잡아 슬쩍 잡아당기면서 재촉했다.

페르다는 대답하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 그림이 페르다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의 살아온 생애와 욕망.

그리고 끊이지 않는 모순 속에서 갇혀 있는 그녀의 감정까지.

그 그림을 계속 보고 있자니, 가슴 아래 단전이 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후회인가, 아니면 연심인가.

"...생겼습니다."

"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페르다는 발드로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이걸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네?"

당황하는 발드로바.

"왜, 왜요? 그림도 찢어졌고, 이렇게 흉측한 걸 놓아 봐야 페르다 씨가...."

발드로바의 말이 점점 흐려졌다.

페르다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시만 할 뿐인데도, 그에 점점 밀려 나가듯 머뭇거린다.

"알겠어요."

끝내 수락하는 발드로바.

"페르다 씨가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이 그림을 드릴게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하다고, 수락을 듣고 나니 묘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 찢어진 그림을 가지고 싶다는 건 그녀에게 치부를 보여 달라는 소리로 들렸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페르다가 한발 물러서 보았다.

"전하가 원하지 않는다면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아뇨. 페르다 씨가 원하는 거잖아요? 원하지 않는 걸 선물로 줄 수는 없으니까요."

페르다는 그 말에서 그녀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물었다.

"제가 떠나는 게 두려우십니까?"

"...."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발드로바.

무언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녀는 두려운 것이다.

늦은 밤에 불러온 것은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것.

재보를 주겠다는 것도, 그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것.

그 모든 건 페르다의 죽음이 두렵다는 마음에서 기인된 것.

페르다는 그 안타까움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는 전하의 약혼자입니다."

그녀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기 위해 위로했다.

"제 목숨의 절반은 이미 전하의 것입니다. 전하의 약혼자로 살아가는 한, 오직 전하만을 생각하며, 전하를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

"그러니 당신을 위해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습니다."

발드로바의 손이 페르다의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댔다.

하얀 가면 속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페르다의 상상력으로는 가늠되지 않았다.

"페르다 씨.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페르다는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가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안아...주실래요?"

"...예?"

페르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하지만 발드로바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게 나, 남녀가 포옹을 하면 좋은 기운이 나온대요. 나쁜 생각도 사라지고, 페르다 씨에게 좋은 기운을 주고 싶어요."

"좋은 기운... 말이군요."

페르다는 무심결에 자신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에 닿는 피부의 온도는 벽난로의 불꽃처럼 뜨거웠다.

뭘 이런 일로 부끄러워하고 자빠진 걸까?

춤을 췄을 때도 그녀의 몸을 한 번 잡은 적이 있건만.

"알겠습니다."

"넵...!"

발드로바 또한 마음을 가다듬고 비장하게 팔을 벌렸다.

페르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 사이로 집어넣었다.

페르다가 먼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가까이 밀착하자, 그제야 발드로바의 손도 움직여 페르다를 감싼다.

손이 허리를 지나 등으로.

'따뜻하다.'

얇은 천 하나로 느껴지는 감각은 아기처럼 보드랍고 따뜻하다는 것이다.

붉은 머리에서 햇살처럼 포근하고 은은한 냄새가 풍겨 와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이토록 따뜻해서, 자신이 너무나도 차가워 그녀가 싫어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따뜻해.'

그러나 발드로바도 똑같았다.

누군가를 끌어안으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나를 받았을 때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마나를 받을 때는 무언가를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포옹은 발드로바의 가슴 속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좀 더...'

소심한 소녀 같은 발드로바에게 욕심이라는 싹이 튼다.

'좀 더 따뜻함이 깊은 곳에 스며들었으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기울이고 꼬옥 잡아당겼다.

푸욱.

'...푸욱?'

좋은 분위기가 무색해지는 소리와 감각.

뿔 쪽에 말려들어 가는 감각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뗐다.

"어?"

발드로바는 눈을 끔뻑였다.

발드로바의 시야에 잡히는 건 페르다의 가슴에 난 두 개의 구멍.

그 구멍은 정확히 그녀가 기대고 싶었던 가슴 쪽이었다.

저 구멍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거지?

"어어??"

아무리 바보라 해도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정리되어 문장으로 완성되었고,

"어어어?!??"

발드로바는 패닉에 빠져 소스라쳤다.

"어어어어어어!?!??!?"

"주인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시길래 호들갑을...?"

보나 마나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이겠구나 싶었던 루리의 눈이 휘둥그레 떴다.

페르다의 가슴에 구멍 두 개가 나 있는 것이 아닌가?

루리도 따라 기겁하며 소리쳤다.

"뭡니까!? 이건?? 대체 무슨...?!"

"모, 모르겠어!"

혹시라도 저주받은 무구가 섞여서 잘못 건드렸나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다.

페르다의 가슴에는 정확하게 구멍이 두 개.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폭을 지닌 흉기 두 개가 발드로바의 머리에 달려 있었다.

루리의 안면에서 힘줄이 솟았다.

"주인님!!"

루리가 빼액 소리쳤다.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인님 뿔은 날카로우니까 조심하셔야 한다고요! 그 상태로 어떻게 껴안을 생각을 하셨습니까!?"

"미, 미안...."

"저한테 미안해하지 마시고 페르다 님에게 미안해하십시오! 정말 이게 뭡니까!? 지금 페르다 님이 맛이 간 거 안 보이십니까?"

"으아아아앙! 바보라서 미안해요! 페르다 씨이!"

"아뇨, 저는...."

"가만히 계십시오! 입 다물고! 아, 정말!! 제가 주인님을 모셔 오면서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봐 왔는데, 왜 항상 매번 이런 식으로 저를...!!"

루리는 씩씩거리며 발드로바를 나무랐고,

발드로바는 바보라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해 댔다.

그리고 피해자인 페르다는 정말로 괜찮았다.

비록 두 개의 뿔에 찔리고 조금 깊긴 했으나, 혈관을 피한 덕에 출혈량도 적었고 고통도 없었다.

다만 루리가 말한 맛이 간 상태라는 건 스스로도 인정했다.

지금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136화. 빈집털이

"와...."

"와...."

페르다의 가슴 쪽 상처를 보고 있는 제드와 페넬로페.

두 사람은 똑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떻게 살았어요?"

"치명상이 아니니 살았을 뿐이다."

"그래도 심장은 빗겨 나갔으니 다행이네요."

"출혈도 크지 않았으니 호들갑 떨 일이 아니지."

박힌 건 깊은 편인데, 손상이나 출혈도 적었기에 결과적으로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다.

아이러니하게 페르다처럼 몸이 약한 사람이었기에 가볍게 그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페넬로페가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건방지게 웃었다.

"포옹을 하셨고, 그 포옹에서 자기 머리에 달린 뿔을 자각 못 했다?"

"그래...."

"혹시 그 공왕이라는 사람, 바보예요?"

"...."

페르다는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페넬로페를 죽일 듯이 노려볼 뿐.

페넬로페는 그 시선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페르다의 가슴만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야, 진짜 감탄사만 나온다. 말 그대로 가슴으로 가 버리실 뻔했네요? 저 먼 곳으로?"

"...."

"내 가슴에 구멍을 남기고 간 그대. 당신은 나의 동반자~. 우우우~. 영원한 나의 동 푸허흡!"

페르다가 손을 쓰기도 전에 제드가 먼저 페넬로페의 뒤통수를 후려 기절시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제를 바꿔 버렸다.

"출정은 그대로 가실 생각입니까?"

"딱히 문제는 없었으니 가야지.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액땜 아니겠나?"

"뭐 그렇긴 하죠. 그리고 저희는 정말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고요?"

윌리엄을 제외한 기사들은 본진을 지키는 것이 주 명령이었다.

사실상 편하게 있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이번 작전 자체에서 네가 활약할 곳이 없다. 성을 지키면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고나 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 테지. 그리고...."

"그리고?"

"가넷이 이 성에 있는 이상, 방심할 수는 없지."

이번 출정에는 루리와 페르다 전부 나간다.

주요 인원들이 나간 상황에 가넷이 잔류하면, 이 빈집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컸다.

"가넷을 감시하도록 해라. 믿어도 되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랜 친구라고 해도 지금은 이 성의 기사니까."

"그래, 믿도록 하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드는 기절한 페넬로페를 짐짝처럼 끌고 갔다.

그러다가 문턱 앞에서 발걸음을 주춤거리더니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

제드는 근질근질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첫 거사... 축하드립니다."

"...?"

엄지를 치켜들고는 그대로 사라지는 제드.

페르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은연히 페넬로페랑 비슷한 생각에서 나왔다는 걸 눈치챘다.

똑같은 연놈들이란 걸 잊었군.

화를 낼 기력이 없어 페르다는 그대로 눈을 감고 내일을 기약했다.

...하려고 했는데.

잠이 들려고 할 때마다 페넬로페가 내뱉었던 멜로디가 귀에 맴돌았다.

페르다는 일어나자마자 그 악마 년을 조지기로 결심했다.

* * *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준비를 마친 병사들이 행군을 시작하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력은 총 3개로 나뉘었다.

하나는 올리비아가 총지휘관으로 있는 1연대

하나는 작전참모인 루테니아 공작의 영식이 지휘하는 2연대.

다른 하나는 성에 잔류하는 시민과 영애들을 지키는 본대였다.

그들의 전략은 동시에 두 군데에서 마물들을 끌어와 마물들을 처리한 후, 두 마리를 확보하는 것.

총 네 마리를 임시 연합 측에서 해내야만 한다.

콘실러스 백작령에 응집해 놓은 극동부 연합 또한 움직이지만, 마도공학이 적용되지 않은 만큼, 초대형 마물 하나만을 상대하기로 했다.

특수 작전을 수행하는 에리카는 모험가 12명을 선별하여 에리 모험단이라는 이름으로 초대형 마물 하나를 공략해 총 6마리를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이동 시간까지 합쳐 사흘 내로 라인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표정은 누구 할 것 없이 좋지 않았다.

마물 전 병력이 제국을 향해, 사실상 빈집털이를 하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사지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뭐라고 해도 이건 전쟁이니까.

전쟁이란 단어만으로도 사람은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제국의 수도는 방패가 되며, 저희들은 검이 되어, 근원을 제거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조국과 명예를 위하여...."

황녀의 능숙한 연설이 모두를 고무시킨다.

사기를 북돋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기울이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실제로 올리비아도 큰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녀의 작전은 따로 있었다.

-강행군을 진행하여 최대한 빠르게 마물들에게 접근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를 얻으실 생각이십니까?

-마도공학 라이플병, 전술보병이라 불리는 이들을 운용해서 사기를 북돋아야죠.

전술보병의 효율은 이미 몇 차례 효율을 증명해 보인 상태.

그들이 돌격해 오는 마물들을 큰 희생 없이 해치울 수 있다면, 틀림없이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럼 첫 포인트에 도착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행운을 빌어 드릴게요."

그녀가 페르다를 보며 알테교의 아뮬렛을 만지작댔다.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뜻이었다.

3천 명이 넘는 병력과 물자를 나르는 마차들이 난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만전 상태의 두 개의 병력이 갈려서 움직였다.

1연대는 황녀인 올리비아와 그 황제군을 필두로,

2연대는 작전참모인 루테니아 공작가의 영식과 그 군대를 앞에 세웠다.

페르다는 루테니아 영식이 있는 2연대와 나란히 움직였다.

페르다의 병력은 50명의 전술보병과 지휘관 겸, 핵심 전력인 이사벨라, 그리고 루리와 함께 움직이는 중이었다.

난 길을 따라 움직이니, 우거진 삼림이 그들을 반겼다.

"괜스레 걱정이 되는군요. 레비아탄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작전참모, 루테니아가 어두컴컴한 안속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느끼는 건 그 남자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안은 채로 이곳으로 발을 디딜 것이다.

페르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돌풍이 불어오며, 순간 거대한 음영이 태양을 가렸다.

"뭐, 뭐야?"

"마, 마물인가?! 벌써?"

모든 사람들이 그 이변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행군이 시작되자마자 전투가 일어나는가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

"저건...!"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누구 할 것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심지어 페르다조차도 그 모습을 보며 그랬으니까.

태양보다 낮으나 그보다 더욱 붉게 타오르는 비늘.

두 쌍의 뿔과 천지를 가릴 듯이 커다란 날개.

"레드 드래곤!"

"바, 발드로바 님이시다!"

"공왕 전하께서 모습을 보이셨다!"

발드로바는 하늘을 크게 한 바퀴 돌더니, 그대로 외로운 산 정상에 섰다.

그 모습은 흡사 산 하나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듯한 자태.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레드 드래곤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밖으로 나오신 거지?'

마물의 낌새는 레어 속에 들어가서도 충분히 알 터.

굳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다가 가만히 그곳을 올려다보자, 발드로바와 시선이 마주쳤다.

멀리 있었으나, 페르다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페르다를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듯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 볼게요.

페르다는 그렇게 들리는 듯했다.

그러고는 동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꿈보다는 해몽이라 하였듯이 그 모습을 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공왕 전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

"헤스티아 만세! 발드로바 공왕 전하 만세!"

딱히 시킨 사람도 없는데, 우레 같은 함성을 쏟아 내며 사기를 북돋는다.

이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을 벌레처럼 죽인다는 악명이 깊은 악룡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만약 저것이 악룡이라 한다면, 이토록 열렬하게 이름을 열창하며 소리칠 수 있겠는가?

벅차오르는 감정에 페르다는 무심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나의 심장이시여....'

페르다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용기,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싸늘한 아침의 추위는 더 이상 이들을 떨게 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승리를 새겨 둔 병사들의 진군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공왕령의 국경지는 아무것도 개발되지 않은 평야였다.

잔돌이 많아 쟁기를 깨 먹기 일쑤기에 농지로는 쓸 수가 없었다.

간혹 어린 잎을 뜯어 먹기 위해 오는 동물들을 잡으려 사냥꾼들이 만든 은신처 몇 개가 인간의 흔적이었다.

그런 인간의 흔적도 더 이상은 없었다.

공왕령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초대형 마물.

그것은 흡사 애벌레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움직이지는 못하고 수축 운동만 반복하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것들은 땅의 생기를 빨아먹으며 알을 빚었고, 그 알로 마물을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한 달을 방치한 결과 지금 2km 반경 내의 모든 땅이 검게 물들었다.

그것은 평소의 일상처럼 번식하며 군대를 모으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그 기류를 감지한 짐승형 마물이 꿈틀 움직이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보이는 것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

그 해를 업고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깃발과 인간의 능선.

-키에에에엑!!!

위험을 알리는 신호로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모든 마물들이 그 소리에 따라 머리를 돌렸다.

그들이 살아 숨 쉬는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엑!

동물형의 날카로운 비명을 전쟁 함성으로 삼으며 움직이는 마물들.

정해진 진법도 없이 본능에 따라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금발 머리의 지휘관이 검을 높게 쳐들었다.

"전군 전투 준비!"

확성 마법으로 쩌렁쩌렁 울리는 올리비아의 목소리.

가녀린 제국의 황녀가 아니라 전쟁 영웅의 지휘라 해도 믿을 만큼 카리스마가 넘쳤다.

"전술보병 익진 형성! 마법사들은 공중형에 초점을 두고, 전술보병은 지상에 집중한다!"

이때를 위해서만 병력 운용 계획에 몰두했던 올리비아였다.

마도공학 라이플을 들고 있는 보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앞에 일렬로 섰다.

50명 전체가 일렬로 늘어진 채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시동 개시!"

버튼을 누르자 라이플 내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탄은 파이프 안쪽에서 빛을 뿜어내었다.

네발로 달려오는 짐승형 마물들.

저 몸통 박치기를 들이받는 순간, 제 죽음조차 깨닫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격발!"

퍼퍼퍼펑!

지상에서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

뒤에 서 있던 병사들마저 움찔거리며 놀랐다.

놀라운 것은 그 소리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깨달을 새도 없이 전열 짐승형 마물들이 픽픽 쓰러진 것이다.

즉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방금 공격에서 얼마나 탁월한 저지력을 보였는지 증명한다.

전열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으나, 마물에는 기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뒤에서 따라 달려오는 마물들은 여전히 달려들었다.

전술보병은 다음 공격을 준비해야 했다.

"전열 교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전술보병들이 뒤로 빠졌다.

동시에 묵직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기세 좋게 앞으로 나와 방진을 형성했다.

모두가 호위를 목적으로 왔으며, 영지의 명성을 등에 업은 이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마물과 지켜 내려는 자가 그대로 격돌한다.

기사들은 훌륭하게 버텨 내었다.

격돌이 끝나고 대치 상태로 들어가자, 기사가 소리쳤다.

"창병!! 공격!"

"라인을 지켜야 한다!"

"눈을 찔러라! 눈이 안 되면 입속! 안되면 고간이라도 찔러! 비열하다는 생각이 드는 곳은 전부 찔러버려라!!"

기사들이 버티고 창병들이 틈새와 머리 너머로 찔러 버리며 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 목적은 시간을 버는 것.

"2차 공격 준비되었습니다!"

부관인 윌리엄이 그렇게 말했다.

정신없이 지휘하던 올리비아가 다시 검을 위로 들었다.

"전술보병 밀집대형! 방진 기사 사로 형성!"

부우우우!

목소리로만은 불가능해 뿔 나팔을 불어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지휘관의 오더를 들은 중앙의 기사들이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마치 그 인벽이 문이 된 것처럼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길을 뚫은 마물들이 그곳으로 쏟아져 나왔다.

길이 뚫릴 때까지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퍼퍼퍼펑!!

밀집된 마물들을 향해 날아가는 50발의 마나탄.

굳이 심장을 노릴 것도 없이 픽픽 쓰러졌다.

마물 시체는 문턱이 되었으며, 진로를 방해하는 돌부리가 되었다.

마물들은 사로에 고립되었다.

"죽어라! 죽어!"

"알테의 빛으로 정화되어라, 이 사악한 것아!!"

가장 위협이 되었던 짐승형 마물들이 사로에 갇혀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오러를 실은 기사들의 검이 그들의 몸을 난도질한다.

-깨갱!

-케에엑!

짐승이 죽는소리마저 모방하며 단말마를 지르는 마물들.

백 마리가 넘던 짐승형 마물은 순식간에 소수가 되었다.

"잔당 소탕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지휘관, 명령을!"

부관의 표정에는 빛이 어렸다.

그것은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휘 검을 하늘 위로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2개 대대로 분할 전진합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마세요!!"

든든했던 인간의 벽이 빠르게 움직였다.

짐승형 마물들을 뒤따르던 멜티드는 순식간에 제압되었으며, 초대형 마물의 근처까지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1대대 초대형 마물 확보!"

"2대대도 확보 완료! 작전 성공입니다!"

새로운 마물이 만들어져도 곧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산란 기능 외의 능력이 있지 않은 한, 사실상 무력화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겼다!!"

"칼리 백작님 만세!"

"알테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

각자 자신의 영주 이름을 외치거나, 신의 이름을 외치는 등 사기 증진에 힘을 썼다.

뒤에 선 올리비아는 그들의 함성을 들었다.

'이걸로 내 계획에 한 발을 내디뎠어.'

희열이 차오른다.

그 희열이 얼굴을 자꾸 건드려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2연대만 성공한다면, 계획은 더없이 완벽해.'

올리비아는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곳에는 페르다가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끝내 웃음이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그녀는 검을 높게 쳐들며 첫 전투의 승리를 자축했다.

* * *

1연대의 점령 사실은 사실상 2연대의 승리와도 마찬가지였다.

위치만을 제외하면 동일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기에, 전력의 균형까지 모두 고려하여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전참모이자, 2연대 최고 지휘관인 루테니아 영식은 생각했다.

'이게 정말로 내가 알던 전쟁이 맞는 건가?'

137화. 버림패

루테니아 영식은 지휘관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만큼 한 가지를 명심하고 살아왔다.

전쟁은 숫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해도, 일당백의 용사라 하더라도 전쟁 앞에서는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다.

지휘관으로서 공부를 했던 루테니아 영식이었고, 자신의 경험에서도 그것은 충분히 경험하고 체득했다.

마물에 대한 지식만 제대로 갖췄더라면 가까스로 올리비아를 제치고 참모장이 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 전장에 나서면서 놀란 요소는 세 가지였다.

'드래곤 스폰.'

첫 번째 요소는 드래곤 스폰이었다.

발드로바의 시종인 루리와 행정관 이사벨라.

오랜 평화와 대부분 일생을 제국 성내에만 있었던지라 그 힘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

루리는 혜성처럼 날아와 제국 마법진을 뚫고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무력은 물론 드래곤과 비슷하게 드래곤 피어를 발산할 수도 있으며, 붙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으리라는 평이 있었다.

그 일로 얼마나 많은 제국 마법사들과 책임자가 처형당했던가?

'실버윈드의 자손답게 무척이나 빠르고 강하다.'

실제로 그녀 혼자서 마물들을 상대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인간들에 비해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데도 그게 눈에 보였다.

그는 또 다른 드래곤 스폰인 이사벨라에게 눈을 돌렸다.

'이오르가의 자손답게 정교하고 능란하다.'

물의 마법을 부리며, 진영이 무너지지 않게 약한 부분을 케어하고 있었다.

루리와 이사벨라.

이 둘만 있어도 어쩌면 이 마물들은 금세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이것은 인간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마도공학 전술보병이었다.

인간의 전쟁에서 마도공학 라이플을 든 병사, 전술보병의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도공학 라이플... 확실히 위력이 좋아.'

그것이 두 번째 요소였다.

처음 봤을 때도 나름대로 고평가를 했다지만, 그것마저 저평가로 만드는 수준이었다.

기사나 마법사 같은 고급 인력이 없더라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그 역할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었다.

'조금만 더 개조하고, 간소화한다면....'

단순히 마물을 죽이는 용도가 아닌, 인간들의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휘관의 집안답게 정복욕부터 차올랐다.

'이 모든 것을 이끄는 게 바로 이 남자.'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세 번째 요소를 보았다.

그곳에는 회색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남자가 말에 올라탄 채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페르다 발드로바....'

드래곤 스폰도, 전술보병의 가치도 놀랍지만, 역시 페르다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중이니까.

'고작 19살짜리가 말이야....'

발드로바 공왕의 약혼자.

그 말은 폐급 중에서도 폐급이어야 할 터.

그러나 드래곤 스폰들이 그를 따르고, 마족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까지 만들어 냈다.

그뿐이겠는가?

페르다 본인 자체도 마법사로서 훌륭했다.

고작 1년 사이에 4서클이 된 것은 물론, 마법사로 취급받지 못하는 1, 2서클들을 동원해서 그들에게서 가치를 끌어내었다.

'단순히 폐급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잖아?'

로스노바가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곳이길래 이런 사내를 내치게 된 것일까?

괜히 궁금해져서 사담까지 꺼내게 만든다.

"루테니아 지휘관."

페르다가 그를 불러 무산되었다.

허를 찔려 버린 루테니아가 그만 얼빠진 소리를 해 버리고 말았다.

"예, 예?"

"이제 전진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정리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정중하게 묻는 페르다.

말대로 마물 숫자도 많이 줄어들었고, 어미들은 노출된 상태.

진군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루테니아 영식은 검을 위로 들며 소리쳤다.

"2개 대대 분할 전진! 어미들을 확보한다!"

그렇게 하여 2마리의 초대형 마물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사벨라가 이 소식을 전음으로 보내었고, 페르다와 작전참모에게 말했다.

"마침 1연대도 수월하게 점령한 모양입니다."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극동부 연합도, 그리고 에리 모험단 쪽에서도 전부 점령 중이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는 갖춰진 상태.

루테니아 영식이 명령했다.

"시작하자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초대형 마물을 무너트리기 위해 소수의 병력들이 차출되었다.

슈퍼노바를 먹이는 데 필요한 5서클 마법사.

그리고 마법사를 호위하며, 두꺼운 외피를 벗기는 역할을 할 5명의 기사가 배치되었다.

2연대의 5서클 마법사는 음침한 마녀인 에키드나와 행정관 이사벨라였다.

드래곤 스폰인 이사벨라는 특유의 친화적인 분위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에키드나는 달랐다.

"으헤헤, 제국 사람들이라 그런지, 미남들이 많네요오...."

음침하고 사악한 마녀의 웃음은 감히 남자를 목전에 둔 수줍은 처녀라 할 수가 없었다.

기사들은 기겁했다.

'살다 살다 마녀를 호위하게 될 줄이야.'

'정화의 빛이여, 저 사악한 마녀의 저주로부터 보호하소서.'

그래도 프로라고 질색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보호했다.

그들은 모두 푸른 눈에서 받은 항마 애뮬릿을 착용하고 준비를 마쳤다.

"이제부터 제군들의 역할에 모든 것이 달렸다! 무운을 비마!"

미리 지정해 둔 마법사와 기사가 각자 초대형 마물에 접근했다.

포위망을 형성한 후, 기사와 마법사들이 초대형 마물에 접근했다.

정예 기사들의 날카로운 오러는 외피를 순조롭게 벗겨 내었고,

공왕령 국경지에서는 6개의 별이 폭발했다.

* * *

병사들이 첫 전투에서 승리에 젖어 있을 무렵, 참모들은 회의를 진행했다.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지급한 수정구를 통해서 목소리를 들었다.

올리비아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 1단계는 순조롭게 마쳤네요.

압도적인 화력을 통해서 사기를 끌어올리는 계획이 바로 1단계였다.

-그쪽도 축제 분위기인가요?

"제2의 입춘제가 따로 없습니다. 이 기세로 몰아붙이면 크게 사상자를 내지 않고 전부 제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올리비아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였다.

루테니아가 눈치껏 그녀에게 물었다.

"참모장께서 좋은 작전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작전참모와 의논을 해 볼 만한 사안이니 말씀드릴게요. 지금 느낀 바로는 병력이 과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과를 보면 실제로 과한 게 맞긴 합니다."

루테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있는 병력은 정예 기사들이고, 서로 다른 전법과 무예를 익혔다 해도 기초적인 것들에 통달한 이들.

지휘가 시작되면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 그들의 기본이다.

-그래서 말인데, 작전을 좀 더 과감히 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려했던 대로 초대형 마물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는 중입니다.

예견된 일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6마리를 치는 것도 혹여나 마물이 이상 행동을 보일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마물들이 확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국으로 향했던 것과 다르게 말 그대로 널리 퍼지는 느낌이더군요.

"밀집하려던 것과는 반대로 퍼진다... 역병이나 다름없네요."

"역병이 맞습니다. 대륙을 좀 먹는 것들이니."

올리비아는 목소리에 분노를 담았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제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어요.

어미를 지켜 낼 것이라고 주장했던 이들과 다르게 퍼지리라 주장했던 이는 올리비아였다.

한 달간, 마물의 습성과 관련 기록들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예측한 시나리오였다.

-그러니 대응도 할 수 있죠.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욕심을 부려도 될 타이밍이에요.

욕심이라.

군대 지휘권에 전술보병까지 얻었으면서 또 무슨 욕심을 부리려고 하는 걸까?

"어떤 욕심 말입니까?"

-마물들이 밀집하지 않는다면, 병력을 한 번 더 나눌 생각입니다. 초대형 마물들을 제거하는 토벌대대와 소마을들로 퍼지려는 마물들을 추격하여 격퇴하는 추격대대로 말입니다.

1천 명 정도로 나뉘었는데 여기서 또 더 나눈다니.

-확인해 본 바로는 전술보병의 가치가 뛰어나, 400명까지는 출전해도 안전하게 마물들과 대적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는...."

-그 최악의 상황도 물론 상정하고 뽑은 숫자입니다. 본대는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습니다.

올리비아가 본대가 안전하다고 장담한다면, 루테니아도 안전한 건 마찬가지.

"물론 저야 좋긴 합니다만...."

루테니아는 눈을 돌려 각 소대장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루테니아의 시선을 피하며 참여하길 꺼렸다.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시점이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소마을의 사람들 몇십 명을 더 살리는 것보다 초대형 마물을 잡는 편이 더 안전하고 공로가 클 게 뻔하지 않은가?

당장 소마을은 버리는 패이며, 그렇게 몇백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2연대 측에서 반대하겠다면, 저도 더 이상 말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올리비아가 그 말만 했다면 당장에 그만두자 했을지 모른다.

-저는 황녀로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지휘관으로서, 단 하나의 목숨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목소리와 다르게 그 내용은 그들에게 귀족과 기사의 의무를 강요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1연대는 자기 손으로 설득해 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가 나섰다.

"2연대도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처한 사람은 페르다였다.

-페르다 섭정님이 가실 건가요? 전력이 좀 빠질 듯한데....

"어차피 지휘는 작전참모가 하고 있고, 루리와 제가 빠진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걸 상정하고 소극적으로 움직였던 만큼, 전술보병만 남겨 둬도 충분히 해결되리라 판단했다.

"말씀대로 한 공왕국의 섭정이기 전, 제국의 신민으로서 같은 신민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고맙습니다, 섭정님. 그럼 2연대에서도 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마물을 격퇴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이후로 더 이야기가 더 오갔으나, 쓸모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회의가 일단락되고 내일 또 다른 행군을 위해서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페르다가 자신의 텐트로 돌아오자, 그의 개인 수정구에서 발신 신호가 울렸다.

-들리나요?

올리비아였다.

한동안 참모장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들었던 탓일까?

그녀가 아녀자 같은 톤으로 말하니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잘 들립니다."

-예상했던 대로지만, 죄다 겁쟁이들뿐이네요.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 무슨 제 환심을 사겠다고 난리를 치는 건지.

입만 산 남정네들.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는 올리비아.

"뒷담이나 하자고 연락하신 겁니까?"

-공통적인 관심사로 아이스 브레이킹하는 거죠. 저희끼리 뒷회의를 진행해 보도록 하죠.

뒷회의라.

마침 그녀에게 궁금한 내용이 있었다.

"소마을을 지키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본 의도가 맞습니까?"

손익을 따지기로는 누구보다 빠른 올리비아다.

소마을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터. 

굳이 이 작전을 제안한 것은 뭔가가 따로 노리는 게 있다는 뜻이다.

-물론 아니죠.

역시나.

-제가 노리는 건 따로 있습니다.

"뭘 노리는 겁니까?"

"요컨대, 난세가 도래하면 초인이 나타나는 법이라 했죠. 그 은둔하고 있는 초인을 끌어들일 생각이에요."

소마을에 그런 초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누굽니까, 그게?"

"물의 현자, 헬루스 포비다스입니다."

"아."

그 이름을 듣자마자 페르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혜성처럼 나타난 현자, 헬루스.

그런 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던가?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왕위 계승권을 다투던 제국의 황자들 또한 그를 데려오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올리비아는 이 틈을 타서 가로챌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동부 쪽에 살고 있긴 했군요."

-역시 페르다 섭정님도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그렇습니다."

-물의 현자의 이름을 들으면 그래도 들뜨거나 긴장하기 마련일 텐데, 섭정님은 뭔가 떨떠름한 느낌이네요. 크게 의미가 없는 인물인가 봐요?

뭐. 그 알맹이를 쏙 빼 온 지 오래니까.

올리비아의 말을 들으니 아직 그가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니 질문을 뭉개버렸다.

"그 현자라는 인간을 영입하려면 제가 아니라 황녀님이 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분석한 바로는 좀 음흉한 면은 있던 거 같더라고요.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가슴 큰 여자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던데.... 묘사만 했는데, 누구 닮지 않았나요? 후훗.

"...."

-농담이에요, 농담. 웃어넘기시면 될 일을 침묵하시니 무안해지네요. 공왕 전하와 이야기할 때도 그러시나요?

"가끔 말을 잃을 때가 많긴 합니다."

그건 페르다 쪽의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말을 고르다 보면 침묵이 돌게 되니까.

-현자가 있다 보니, 페르다 섭정님께서 가 주시길 바랐어요. 섭정님께서 받아들이시기에 계산이라도 하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섭정님은 그 현자를 노리신 것 같진 않네요?

"예."

본체가 있는데 그 욕심 많은 뚱보를 들여 봐야 식비만 더 나갈 뿐이다.

-그렇다면 섭정님이 나서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대로입니다. 그저 소마을을 지키러 나갈 뿐이죠."

숨겨둔 의도는 없었다.

아니 의도는 있지만, 올리비아에게 떠벌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과연 헤스티아 마을의 성군이란 이미지를 단단히 박아 두실 생각인가 보네요.

올리비아는 만족스럽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거 아시나요?

"뭡니까?"

-저 누워 있어요. 침대에.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저는 앉아 있습니다."

-누워서 페르다 씨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요.

"예법에 너무 어긋나는 행동을 하시는군요."

-후후. 이대로 자고 싶어서요. 그런데 좀처럼 잠에 못 들고 있네요.

한숨을 길게 내쉬는 올리비아.

사부작거리는 실크 이불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아직 긴장이 안 풀렸다는 소립니다."

-그렇죠, 네. 이런 전쟁은 아무래도 저 같은 사람에게는 가혹한 곳이니까요.

이보다 더욱 가혹한 정치 세계에서 살면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저는 참모장이죠.

"그렇습니다."

-제가 지휘를 제대로 못 하면 차질이 생길 거고요.

"그렇습니다."

-엉뚱하게 명령해서 혼란이 일어나 전멸되어 버리는 그런 사태가 되길 바라진 않으시죠?

"...그렇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 여자.

-그러니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잘 자라고 말해 주지 않을래요?

"...굳이 말입니까?"

페르다가 떨떠름하게 묻는다.

-네. 굳이요.

페르다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고민이 필요 없는 일이다.

마법의 주문을 읊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여덟 음절이면 충분한 말이지 않던가?

"안녕히 주무십시오."

-네. 섭정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만족스러운 듯한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수정구에서 빛이 사라졌다.

페르다도 몸을 뉘었다.

바쁜 것은 페르다도 마찬가지였다.

마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움직이는 중.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내일을 준비해야만 했다.

* * *

황궁의 작전실.

"이게 무슨 소리야!!"

알렉산더의 절규 같은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내 군단이 마물들한테 전멸을 당했다고!?"

138화. 자랑거리

대노하고 있는 황태자, 알렉산더 아르켄.

보고했던 부관이 쩔쩔매며 다시 한번 더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기사단 쪽에서 기세를 꺾는다고 옆구리를 치다가 외려 고립이 되어 버려서...."

"뭐, 그런...."

어떻게 그리 멍청하게 당할 수가 있던가?

알렉산더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참모들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가장 용맹하다는 북부의 야만 전사들한테도 먹혔던 전술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니...."

"틀림없이 승률이 9할은 넘어갔을 작전이었을진대...."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참모들.

알렉산더는 짜증 나는 얼굴로 말했다.

"상대 손실은?"

"3천으로... 추정됩니다. 그마저도 멜티드가 2천 500입니다."

"그래도 성과가 있는 거지? 그렇지?"

"...."

"왜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지 말고 대답해!"

"그, 그게... 멜티드는 사실상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생물입니다. 핵심 전력은 짐승형 마물들이고...."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놈을 죽여 봐야 소용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짐승 형태를 한 마물들인데, 그들이 500마리 죽을 동안 8만이 희생된다니.

미칠 지경이었다.

비전투 인력까지 총 8만. 하나의 군단을 보냈는데, 그들 전부가 헛발질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제국 심부의 내로라하는 브레인들이 모여서 토의한 전술이며, 각부에서 승인까지 내린 결과였다.

하지만 이 결과는 그들이 마물이라는 종족들을 단순히 좀 더 강한 몬스터에 대입해서 작전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생겼다.

무엇보다 4배가 넘는 인원, 순수 병력으로는 2.5배씩이나 보냈기에 당연히 압승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이를 꽉 깨물며 부관에게 말했다.

"후속대를 보내. 물량으로 밀어붙여! 2군단과 3군단에게 대마물 전술을 다시 정립하고, 후속대를 보내란 말이야!"

"말씀대로 후속대를 준비해야 합니다만...."

미적지근한 소리에 알렉산더의 꼭지가 돌아 버렸다.

결국 그의 손에 들린 장기말을 부관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뭐가 문제야!? 어!? 제국 수도에 3천만 명이 있는데, 그 수를 충당하지 못한다고!?"

"그게... 후속대로 보낼 지휘관들이 전부...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휘관들이 죄다 누워 있다고!? 그게 말이 돼!?"

"전멸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했습니다만.... 전부 집에서 요양 중이라 합니다. 돌림병인 듯하여 현재 자택에 출입을 금하고 있는 상태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웃던 이들이 갑자기 돌림병이라도 얻었다고?

뻔하다.

8만 대군으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먼저 접하고 자택에 숨은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8만이 죽었는데, 자기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이... 이...."

무능한 새끼들 같으니!

용맹한 척 허세는 잔뜩 부려 놓고 정작 필요할 때는 이런 식으로 나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최대한 분을 식혔다.

열을 내 봐야 지금은 내 손해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황은 알렉산더에게 잔혹하게 굴러갔다.

"극동부 부대 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거긴 뭐 하는데?"

"마물을 번식하는 초대형 마물 6마리를 제거했다고 합니다."

그걸 한 번에 여섯 마리씩이나?

알렉산더가 멍한 표정을 짓지만, 연락병은 눈치 없이 들뜬 채로 말을 이어 갔다.

"예상 외로 고전하지 않아서 병력을 또 나누어 소마을 쪽에 퍼지는 마물들을 추격하겠다고도 합니다."

"추격까지 한다고...?"

"그리고 사흘 안에 남은 6마리도 모두 제거를 하겠다고 전해 달라고 합니다."

"사흘 안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정예 군단도 쩔쩔매는 상황 속에서 오합지졸 군대가 활약을 한다는 건 알렉산더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거, 거기 희생은 얼마나 있는데?"

알렉산더는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대략 2천 명의 병사가 움직였고, 수백 규모의 마물들과 대치했으니 적어도 50%, 천 명은 죽었어야 한다.

아니더라도 20% 400명은 죽었을 것이다.

연락병이 대답했다.

"50입니다."

그러나 예상은 화려하게 빗나갔다.

뒤에 백이나 천 같은 단위를 빼먹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50? 고작 50이라고?"

"사상자가 50인데 그중에서도 사망자는 10명뿐입니다. 전체적으로 무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창!

말은 더 잇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크리스탈 잔을 던져 연락병의 머리를 깨 버린 것이다.

"저 망할 새끼 끌고 나가!"

초대형 마물을 잡아냈다는 건 마물 물량 공급을 끊어 냈다는 뜻이다.

그런데 8만 명이 전사했다는 소식보다 더욱 짜증이 나는 소식이었다.

"이대로 가면... 이대로 가면...."

모든 것이 알렉산더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단순히 책임으로 돌려지는 게 아니라 무능하다는 여론이 들끓는다.

그게 문제였다.

실패할 수는 있어도 무능한 건 안 된다.

이미 무능한 황태자라는 낙인이 찍혔던 알렉산더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알렉산더는 없는 지혜를 모두 짜내 보려 했다.

군단은 대패.

수습을 보내야 할 다른 군대의 대장들은 전부 나 몰라라 하는 중.

그렇게 되면 이 작전 자체가 2황자에게 넘어간다.

가뜩이나 용병들과 손을 잡고, 자신만의 군대를 모으고 있던 2황자의 계승권이 명분을 지니게 된다.

사건이 종식되고 결산이 시작되는 순간, 자신의 황실 수명도 끝이 난다.

'올리비아.'

누구보다 아름다운 나의 빌어먹을 여동생아.

네년이 이렇게 나를 또 엿 먹이려 드는구나.

'제국은....'

알렉산더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새빨간 피가 뚝뚝 흘렀다.

무엇이 됐든,

어떻게 됐든,

'제국은 내 것이 되어야만 해!'

그렇기에 알렉산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만 한다면, 기꺼이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화, 황태자님, 어디 가십니까?"

그 얼빠진 참모진들의 소리를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옮기는 알렉산더.

그렇게 알렉산더는 황궁의 가장 안쪽에 있는 화려한 문의 앞에 섰다.

그곳의 문은 무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마치 악마가 봉인된 곳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안에 있는 것은 악마가 아니다.

악마보다 더욱 경외스러운 이것은 황태자의 신분으로도 어찌 못 하는 존재.

모두가 만만하게 보지만, 그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게 된 알렉산더였기에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에 대고 불렀다.

"아버지."

그가 아버지라 부를 만한 사람은 황제, 고드프리 아르켄뿐이었다.

문 너머로는 대답이 없었다.

"접니다. 아버지의 아들, 알렉산더입니다."

그는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어 갔다.

"마물들이 오고 있습니다. 제가 군대를 보냈는데, 그 군대들이 전멸당하고 제국으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

"그리고 지금 그 누구도 제 말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레아스와 올리비아가 모든 걸 가져갈 겁니다."

"...."

돌아오는 침묵에 울컥하는 알렉산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올리비아는 아버지가 지닌 가장 좋은 카드라고 말입니다. 그게 지금 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틀림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정계를 꿰차려는 속셈입니다. 그 녀석이 자기 멋대로 활개를 치게 둘 겁니까?"

몇 번이고 호소해 보지만, 돌아오는 침묵에 결국 알렉산더는 이성의 끈을 놓았다.

"당신이 그러고도 애비야!?"

그가 폭발하여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게 관심이 없었지. 늙었고, 아들이 나이가 다 찼으면 조용히 왕위나 물려줄 것이지, 몇십 년을 처해 먹을 속셈이야!?"

"...."

"내가 당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건 이제 옛날 일이잖아! 그 벌로 이 정도로 괴롭혔으면 된 거 아냐? 얼마나 아들 새끼를 엿 먹여야 속이 풀리는데!? 당신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이런 개썩을...!"

더 소리를 지를까 생각하기 무섭게, 문 아래쪽에서 쪽지 하나가 튀어나왔다.

종이 면적만큼 짧게 적혀 있는 문서.

알렉산더는 그 종이의 내용을 보고 전율했다.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역시 이 망할 놈을 고르는 게 정답이었어.'

세간에는 무능이니 뭐니 열심히 지껄이지만, 중요한 때에는 빛이 나는 인간이다.

알렉산더는 그 종이를 들고 얼른 뛰어갔다.

황태자는 그 지혜에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으며, 황제, 고드프리 아르켄의 침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 * *

새벽녘 무렵, 페르다는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2개의 대대로 나뉘어 퍼져서 진군하는 마물들의 경로에 미리 들어가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 주된 작전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북처럼 두들겼다.

말이 쉬지 않고 움직여야 아슬아슬하게 첫 번째 포인트로 도착한다.

박차를 가한 결과, 첫 번째 포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나와 밭의 상태를 지켜보던 농부들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페르다 일행의 옷차림을 보고 그들이 높은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고 밀짚모자를 벗으며 다가왔다.

"높으신 분이신 거 같은데 여긴 무슨 일이신지...?"

"이곳에 아무 일도 없었나?"

"일이라 한다면, 딱히 없습니다만...?"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 같다.

"괴물! 괴물이 몰려온다!"

정정, 예정 시간에 도착했군.

페르다는 확성 마법으로 지휘했다.

"전군! 방진 형성!"

착착!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갑옷 소리는 가슴을 울린다.

컹컹!

소스라치게 놀라는 농부와 그곳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

늑대 마물이 한참 전에 발견하고 그를 추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범한 농부의 속도로 늑대의 속도를 따돌릴 수는 없다.

페르다의 대대에 형성된 방진에 들어오기도 전에 희생이 생긴다.

"루리."

그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루리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녀는 하늘 높이 뛰어 올라간 상태였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커다란 도끼를 잡고 머리 뒤로 넘겼고,

"흡!"

그대로 집어 던졌다.

쿠웅!

"으악!"

바닥의 진동에 농부가 앞으로 넘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일대가 완전히 뒤집히고, 그 중심에는 보라색 피를 흘리는 마물의 사체가 있었다.

바닥에 꽂힌 도끼에 자그마한 체구가 내리앉는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 무거운 도끼를 집어 들고는 슬쩍 농부 쪽으로 시선을 흘겼다.

섬뜩한 은색 눈동자가 마주치자 전율이 일었다.

"빨리 뛰십시오. 인간."

"예, 옙!"

농부는 다시 뛰었다.

늑대 마물들이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그것들이 처음으로 강자 앞에 섰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녀가 도끼를 휘두른다면, 그들은 가을의 밀밭처럼 덧없이 베일 존재들이다.

하지만 루리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늑대들은 루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성이 있는 것도 잠시, 금세 본성으로 돌아온다.

-컹! 컹!

늑대들은 방진을 형성하는 기사들에게 돌격하여 육탄전으로 이어졌다.

"버텨라! 형제들이여! 우리가 뒤에 있다!"

"뒤에만 있지 말고 좀 도우라고!"

버럭 소리치면서도 든든하게 버티는 기사들.

마법사의 역할을 하는 것은 페르다뿐.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데려온 3서클의 마법사 3명을 마나통으로 삼아 그들에게 마나 볼트를 수급받았다.

페르다는 공격하려는 찰나를 노려 늑대 마물의 행동을 저지하고, 기회를 만들었다.

단지 그것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서포트였다.

모든 늑대 마물들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어 마무리했다.

끝내 마법사의 역할에 의존하지 않고, 기사들만이 모든 마물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우아아아!"

"승리했도다!"

플레이트 아머를 팡팡 치면서 승리의 함성을 내지른다.

페르다가 있는 추격 1대대는 총 108명.

5명의 영식과 그 휘하의 부하, 그리고 영애 측의 병력들이 함께 움직이는 중이었다.

2대대는 250명으로 편성되어 무려 142명이라는 압도적인 숫자 차이를 보였다.

숫자만 보면 눈에 띄게 불균형하나 1대대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들은 루리의 저력을 안다.

메이드복을 입고, 작은 체구만 보면 영락없는 소녀였으나 몸의 면적보다 한참 넓은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세상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후방에 빠져 위험해졌지만, 그래도 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페르다의 지휘와 지원은 적재적소로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단 하나의 피해도 없이 마물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전장에 나서 싸웠던 영식들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우쭐거렸다.

"제국군들이 전멸당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토록 쉬운 것들인데."

"물론 페르다 섭정님의 지휘와 지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실제로 불가능했다.

페르다처럼 적은 마나로 마물을 주춤거리게 만들어 틈을 여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교가 아니었다.

'생포하려고 홀로 싸운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어떤 면에서 허점을 보이는지 체득했고, 그 체득한 것은 시간을 넘어서도 불변하다.

어찌 됐든 드래곤 스폰에 의존하지 않고 마을을 지켜 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마물들의 밥 신세가 될 뻔했던 소마을의 주민들이 손을 모으며 기도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사 나으리!"

"부디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물론이다! 이 몸은 훗날 나자로프 백작가의 계승자가 될 드미트리 나자로프다!"

이때를 노려서 자신의 이름을 떠벌리고 다니는 영식들.

소마을이라고 해도 한번 이름이 퍼진다면, 출세에 큰 도움이 되는 법이다.

루리가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묻는다.

"페르다 님은 저 바보스러운 것들 사이에 끼여서 이름 자랑 안 하실 겁니까?"

"굳이 할 필요가 있겠나?"

"저런 짓도 안 할 거면, 왜 이런 궂은일을 마다하신 겁니까?"

루리가 투덜거리듯이 물었다.

"자랑거리가 필요하다."

"자랑거리 말입니까?"

페르다는 두 개로 또 나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생각했었다.

작은 마을들을 희생하는 것 정도는 당연히 있는 일이라고.

다른 영식들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욱 희생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은연히 발드로바의 자태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라면 이 사태에서 손익을 따져 가며 할까?

설령 악룡이라고 오해를 받을지라도 모두를 지켜 내는 것이, 그럼에도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페르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라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페르다는 발드로바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하여 이곳으로 왔다.

그렇기에 페르다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녀와 다시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내 손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 냈노라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감정을 선물로 받고 싶었다.

그런 순수한 욕망이 페르다를 움직인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게 주인님에게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군요."

"그래."

"개 같습니다."

페르다는 루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욕이냐?"

"맨날 저보고는 개 같다, 개돼지 같다 그러시면서 욕한 건 아니라 해 놓고 제가 하면 왜 욕입니까?"

"나를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런 거지 않나?"

"페르다 님을 마조히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럼 마조 변태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그건 안 되지."

"왜 저는 안 됩니까?"

사실이 아닌 단순한 비방일뿐더러, 더욱 심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약혼자고, 너는 시종이다."

"...주인님 뿔에 찔린 곳 제가 한 번만 더 쑤셔도 되겠습니까?"

얼굴에 핏줄이 솟아올라 흉악해진 표정.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페르다의 가슴을 노리려 들었다.

그때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마나통으로 쓰던 연락병 하나가 급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러나?"

"퍼지던 마물들의 속도에 변화가 있다고 합니다. 전력으로 달려서 세 번째 포인트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페르다의 다음 목적지는 주목표라 할 수 있는 헬루스 포비다스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뚫고 지나가 거쳐 가야 하는 것은 물론, 말의 속도를 고려하면 도착하는 순간, 이미 늦어 버릴 것이다.

그럴 때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포인트를 수정해서 그 뒤에 있는 마을을 구하는 수밖에 없겠군."

구할 수 없는 것은 버린다.

냉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끼어든 것은 루리였다.

루리가 도끼를 어깨에 메며 말했다.

"그쪽은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어차피 그곳에 한 번에 갈 수 있는 건 저뿐인데다,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문제없습니다."

루리가 나서준다면, 작전 진행은 다시 순조로워진다.

"고맙구나."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저를 위한 일이니까요."

"너를 위한?"

"페르다 님은 주인님께 폼 잡고 싶다지 않았습니까?"

콧김을 내뿜는 루리.

"저도 주인님 앞에서 폼 좀 잡을 겁니다."

그렇게 말은 해도 루리에게는 사실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건 페르다를 위한 일.

그가 읊을 이야기 속에서 소마을 하나를 버려야만 했다는 것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

그녀의 세심함에 감사했다.

"무사히 돌아오거라."

"페르다 님 몸이나 잘 간수하십시오. 생채기라도 났다 간 때를 빡빡 미셔야 할 거니까요."

생채기가 났는데 때를 민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건 루리 또한 페르다가 무사하기만을 바란다는 뜻이었으니까.

루리가 숨겨 놓았던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한번 움직이기 무섭게 그녀의 신형은 혜성이 되어 날아갔다.

"우와...."

"저게 실버 드래곤 스폰...!"

뿔이나 꼬리를 과시한 적이 없던 루리였기에 부대원들은 그 모습에 넋이 나가 지나간 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시라도 지체해선 안 된다. 페르다는 그들을 보며 외쳤다.

"우리도 움직인다!"

백 마리가 넘는 말이 다시 평원을 달렸다.

약 2시간을 걸쳐 달린 덕분에 마물이 들어오기 전에 접근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상치도 못한 존재가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