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신선으로 살아남기
1화. 중천(中天)
우리 집은 꽤 부유했다.
부모님은 각각 사업체를 운영하셨는데, 두 회사 모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였다.
하지만 부유함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얼굴만 마주하면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셨다.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그러다 언젠가부턴 두 분 모두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직접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너만 없었다면 홀가분하게 갈라섰을 텐데... 라고 눈으로 말했다.
차갑게 내려보는 그 눈빛.
몸서리쳐지는 그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
지독히 차가운 경멸이 담긴...
그런 나는 삶에서 도망칠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게임이었다.
부모님께서 본격적으로 내외하기 시작한 중학교 입학 시점을 기점으로 시작해서 피시방에 살다시피 했다.
돈이야 차고 넘쳤다.
두 분은 가정의 파괴가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지, 관심은 두지 않으면서도, 나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부모님의 영향인지 원래 그런 사람인 건지.
이렇다 할 교우관계도 형성하지 못한 채 게임에 쏟는 시간만 늘어갔다.
하지만 친구가 딱히 필요하다거나 하는 건 못 느꼈다. 게임 속 세상이라고는 하나 그 안에도 동료는 많았으니까.
"더이상 할 것도 없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욕구도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게임이란 건 스토리만 다를뿐, 추구하는 건 대부분 비슷비슷했으니까.
"어? 중천?"
그러다 발견한 것이 싱글 게임인 선협 장르 게임 '중천'이었다.
여러 종족 중 하나를 선택한 후, 가장 낮은 바닥에서 시작해, 신선이라는 지고한 존재까지 성장해야 하는 게임.
"신박한데."
처음엔 별 기대감 없이 시작한 중천은 이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이 그리 맘에 들었냐고?
우선 중천에선 천편일률적으로 권선징악을 다루는 다른 게임들의 스토리와 달리, 선과 악이 없었다.
정확히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다루지 않았다.
오직 개인의 강함. 그 강함이 법이었고 세상의 규칙이었다.
다음으로는 무한한 세계관도 재미에 한몫했고,
각종 도감 채우기.
유적 발굴. 단약 제조, 약초 재배,
펫 시스템 등등
즐길 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더해 내가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한 시스템.
그건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일반적으로 '유저의 동료는 착하고, 악당은 나쁘다'는 획일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중천을 살아가는 모든 인물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
마치 NPC 하나하나가 전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뒤통수치기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다 깬 퀘스트가 동료들의 이기심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일도 허다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걸 즐긴다고? 그 정도면 변태 아님?
인정한다. 변태는 아니지만,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더는 자극을 받지 않는 나의 뇌가 이런 것들로부터 생존 본능을 자극받는데 말이다.
"이번에도 용족 할까."
나는 석 달간 키우던 캐릭터가 뇌전이 흐르는 창 수십 개에 관통당한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화면 중앙에 나타난 하트 표시를 눌렀다.
우우웅-
그러자 화면이 회오리치며 타이틀 화면으로 전환됐다.
'다 좋은데, 제발 세이브 기능 좀 넣어주지.'
중천은 한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키우는 극 하드코어 게임.
그래서 다른 게임에 비해 훨씬 높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지만. 오래 키우던 캐릭터가 죽으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그전까진 손에 넣을 엄두도 내지 못한 극상품의 아이템을 얻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천공의 창... 이런 함정이 숨어있었다니.'
그렇다고 미련을 갖진 않는다.
지난 플레이를 회상하기보다는 새로운 캐릭터에 집중한다.
"인족은 너무 무난하고, 목족은 초반이 너무 지루하고, 흠... 역시 용족만 한 게 없지."
잠시 후, 뚫어지게 타이틀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마우스를 클릭해, 캐릭터 선택 화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종족 선택란을 빠르게 클릭해 원하던 종족을 선택했다.
[종족 : 용족]
[고대 용족의 후예]
종족을 선택한 후엔, 커스터마이징을 시작했다.
머리는 항상 하던 흑발에, 눈을 옅은 금빛이 맴돌고, 피부는 살짝 밝은 톤으로.
눈매와 입매는 반듯하게, 남자답게 조정하고 콧날은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잘생겼네."
커스터마이징이 끝나자 다음 버튼을 눌렀다.
[특성을 선택해 주세요.]
외모 변경이 끝나면 다음으로는 캐릭터가 가진 특성을 고르는 시간.
특성은 중천에서 꽤 중요한 요소였다.
각각의 종족마다 수십 혹은 수백 가지 특성이 있는데, 어떤 특성을 고르느냐에 따라서 성장 테크트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무난하게 갈 것이냐... 모험을 할 것이냐."
외모 변경을 후다닥 해치운 것과 달리, 특성은 바로 선택하지 못했다.
용족은 다른 종족과 달리, 시작부터 꽤 유리한 점이 많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같은 레벨 1 끼리 붙었을 때, 용족 1레벨이 인간 1레벨 다섯은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커뮤니티에 보면 용족을 플레이하는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왜냐고?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단점은 바로 '혈제(血祭)'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다.
혈제는 살아있는 생명을 제물로 바쳐, 반사이익을 얻는 극단적인 성장 시스템.
그 효율이 말도 못 하게 좋았기에, 처음부터 혈제에 유리한 종족과 특성만 고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혈제가 진짜 치트키이긴 하지.'
아쉽게도 용족은 종족 특성상 혈제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까지 밝혀지진 않았는데, 혈제를 이용하는 순간, 존재 자체가 한 줌 피로 변해버린다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용족의 특성을 선택할 때는 다른 종족에 비해 유리한 몇 가지 능력을 극대화할 특성을 골라야 했다.
"영기 민감도, 영기 친화력, 용언. 강체술... 이번엔 뭘 주력으로 갈까."
애초에 살아있는 제물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기에, 혈제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은 나에게 단점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내게 최고의 종족은 항상 용족이었다.
"이번엔 진짜 극단적으로 모험해봐?"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화면 중앙의 세 가지 특성 칸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첫 칸에 빨간불과 함께 자동 입력돼있던 '거짓 불능'이라는 특성을 해제해 버렸다.
[거짓 불능을 해제할시 '용언'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말 해제하시겠습니까?]
거짓 불능 특성.
거짓 불능을 선택할 경우, 캐릭터가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대신 반사이익으로 용언이라는 능력을 얻게 된다.
'용언'은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절대 능력 중 하나.
복잡한 술식이나 진법, 결계 같은 주문을, 머릿속에 이미지화하며 말 한마디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른 종족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능력이자, 고대 용족으로부터 전해 받은 혈맥의 힘중 하나였다.
하지만, 수행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면 용언 없이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기에, 초반 이익을 포기하고 해제해도 무리는 없었다.
"말 한마디로 술법을 사용하는 게 멋있긴 한데."
아쉬움을 뒤로한 채 '거짓 불능'을 제거하고, 대신 '용의 위엄'이라는 특성을 골랐다.
"우선 용의 위엄이 필수고."
용의 위엄은 말 그대로 용으로서 위엄을 지켜야 하는 규칙이 금제처럼 몸에 새겨지는 특성이었다.
뭐야 그럼 페널티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연히 이것에도 반사이익은 있었다.
바로 수행에 비례해 정신 방어력이 상승한다는 것.
저주나 매혹 계열에 면역이 생기는 건 물론, 상대에게 몸을 조종당하게 되는 각종 술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대신 금제를 어길 경우, 지독한 통증이나, 심할 경우 혼절에 가까운 상태 이상을 겪을 수도 있으니. 매우 조심해야 했다.
"그럼 나머지는 랜덤으로."
용의 위엄을 선택한 후, 두 번째, 세 번째 특성 칸은 물음표를 선택했다.
"다 필요 없다. 약자 멸시만 걸려라. 제발."
나머지 특성을 왜 랜덤으로 지정했냐고?
그건 바로 히든 특성 약자 멸시 때문이었다.
약자 멸시(弱者蔑視)
오로지 랜덤을 선택했을 때만 극악의 확률로 나타나는 용족 최강 히든 특성.
"약자멸시 하나만 걸리면 나머지 특성이 똥으로 걸려도, 압살 가능하지."
약자멸시는 용족 한정 최강이 아니라,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도 최상급 특성이었다.
"나오기만 하면, 진짜 이번엔 제대로 키워줄 수 있다."
약자 멸시에서 말하는 '약자'는 무력이 약한 약자가 아니다.
바로 용의 위엄에서 금기시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전부 약자로 인식했다.
용의 위엄에 어긋나는 짓을 한 이들을 상대할 때, 발동하는 일종의 전투력 상승 버프.
그것도 평범한 버프가 아닌, 상대하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버프가 중첩되는 말도 안 되는 효과를 가진 특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약자멸시를 얻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
바로 '용의 위엄' 특성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 그러고 보니 이건 진짜 버그인가?"
잠시 후, 특성 선택까지 마친 나는 시작 버튼을 누르려다가 화면 상단의 도전과제 탭에 눈이 갔다.
[도전 과제] 달성률 99%
싱글 게임인 중천.
중천의 개발사에선 유저를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도전과제였다.
-도전과제를 클리어하시면 특별한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각 도전과제를 처음으로 클리어하시는 분들께는 더욱 많은 혜택이...
물론 나 역시 오랜 플레이로 대부분의 도전과제를 클리어했다.
정확히는 한 가지를 제외하곤 전부 클리어가 끝난 상태.
하지만 도전과제 혜택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왜냐고?
그건 바로 도전과제 클리어 시 나오는 경고 문구 때문.
[도전과제 : '화신기 도달'에 성공했습니다. 혜택을 받으시겠습니까?]
[경고: 종류에 상관없이 혜택은 계정당 단 한 번만 적용됩니다.]
종류에 무관하게 계정당 한 가지만 적용되는 혜택.
그래서 아무도 깨지 않은 도전과제를 클리어하고 최초 혜택을 받기 위해 버티는 중이었다.
이만큼 중천에 진심인데.
최소한 도전과제 최초 클리어 혜택은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
다만 아쉽게도 지금에 와서 남은 최초 도전과제는 한가지 뿐이었다.
[도전과제 : 100번의 삶]
내가 게임을 못 해서 최초 혜택들을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최초 혜택을 놓친 것이다.
절대 변명 하는 건 아니고, 진실이었다.
그럼 마지막 남은 최초 도전과제는 왜 못 깨냐고?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100번째 캐릭터를 만들면 깰 것 같은 도전과제.
하지만 캐릭터 100개를 만든다고 깨지진 않았다.
이걸 두고 커뮤니티에선 갑론을박이 심했지만, 개발사에선 버그가 아니라고 선을 그은 상태였다.
그래서 왜 안 깨지지? 라는 의문을 가질 뿐.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다 보면. 어디선가 힌트를 얻겠지."
잠시 후. 상념을 날려버린 나는 피식 웃고는 시작 버튼을 눌렀다.
사실 도전과제를 클리어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중천을 즐기는 것 자체가 나에겐 즐거움이었으니까.
그렇게 상념을 정리하며 게임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사이.
지지직-
"어? 뭐야?"
화면이 전환되며 게임이 시작해야 하는데, 그래픽이 깨지는 모습과 함께. 화면 중앙에 길게 하얀 금이 생겼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집중하는 사이.
파앗-
하얀 금이 간 화면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시야를 앗아가 버렸다.
"악!"
지지직-
그와 동시에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을 통해 전신으로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직후, 나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혼절해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선협 게임인 중천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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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삑-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안.
하얀 금이 가며 반으로 갈라진 모니터 상단에 깨진 글씨가 유독 눈에 띈다.
삐빅-
[도전과제 '100번의 삶' 최초 클리어.]
[최초 클리어 시 보상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무작위로 101번째 삶이 시작됩니다.]
[인족이 선택되었습니다.]
띠링-
[인족 특성 세 가지가 랜덤 부여됩니다.]
띠링-
[오류.]
[이미 100번째 삶이 존재합니다,]
[100번째 삶에 101번째 삶이 더해집니다.]
띠링-
[강제 혼혈이 진행 중입니다.]
띠링-
[혼혈 특성 세 가지가 랜덤 부여됩니다.]
띠링-
[특별한 경험, '중천에서'가 강제 부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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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시련의 탑
몸이 저릿저릿하고, 시야는 하얗게 물들어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가늠해보려는 사이, 누군가 내 팔뚝을 휘감았다.
"괜찮아?"
천천히 시야가 회복되자, 눈앞 전경이 그려진다.
정면에는 2미터쯤 높이의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눈빛이 매서운 남성이 나를 내려보고 있다.
'저놈은 뭔데 나를 내려봐? 기분 나쁘게.'
어릴 적 기억에 잠시 기분이 나빠졌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빨리 주변을 훑었다.
주변엔 15, 16세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두 눈을 껌뻑거리며,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내 옆엔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아이가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뭐지? 여긴 어디고, 무슨 상황이야?'
나를 부축한 아이의 시선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런걸 신경 쓸 여력 따윈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컴퓨터 앞이었고, 중천에서 새 캐릭터를 키우려던 상황.
'도대체 이게 무슨...'
하지만 생각을 이어가기도 무리가 있었다.
"금파란!! 이 무슨 소란이냐!"
'나? 지금 나를 부른 건가?'
고함에 시선을 올리니, 단상 위에 서 있던 남성이 나를 째려보고 있다.
"금파란!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못 하느냐! 그러고선 시련의 탑에 오를 수나 있겠느냐!"
'금파란? 시련의 탑? 이게 다 무스... 시련의 탑이라고?'
사내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동시에 빠르게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의 단상과 그 앞에 모인 열댓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응원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
아이들의 평범한 단색 옷차림과 달리, 주변을 둘러싼 어른들은 하나같이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사극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장포처럼 보이는 걸 걸쳤는가 하면, 바닥을 질질 끄는 긴 꼬리를 가진 망토를 두른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얼굴 반쪽을 가린 가면에 깃털을 들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부채를 말아쥔 채, 학의 머리처럼 길쭉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이거 전부...'
중천에서 용족을 고르면 경험할 수 있는 튜토리얼 시작 화면과 비슷한 상황.
"금파란!! 뭘 두리번거리느냐! 왜?! 지금이라도 시련의 탑에서 도망가고 싶으냐!"
부리부리한 사내의 말에 나는 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두 번이나 그런 의욕 없는 태도를 보일 건 아니겠지?!"
"네!"
'설마? 지금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상상해보자면, 내가 게임을 시작하려 할 때 누군가가 나를 마취시키고, 지금의 연극 같은 무대를 만들 수도 있...
'그게 더 말이 안 되잖아.'
나는 단상 위에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는 사내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채, 곁눈질로 재차 주변을 확인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 그대들은 시련의 탑..."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중천의 튜토리얼과 똑같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도 문제였지만 왜? 라는 물음도 함께였다.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 깨어난 거지?
설마 너무 게임을 열심히 해서 미쳐버린 건가?
'아야!'
나는 손등을 꼬집어보다가, 이것이 상상도, 그렇다고 망상도, 환상도 아님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조금 전과 달리,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점차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긴 진짜 중천 안이다. 왜인지? 어떻게 인지는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흐으아아압-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숨 쉬는 공기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중천을 설명할 때, '영기'라는 물질을 빼놓을 수가 없다.
공기 중에도, 바위에도, 나무에도, 심지어 사람 몸속에도 존재하는 것,
세상을 이루는 모든 물질 안에 포함된 영기(靈氣).
그것은 판타지로 치면 '마나', 무협으로 치면 '기' 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초자연적인, 세상을 이루는 기운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상쾌할수 있지? 숨만 쉬어도 기분이 좋네.'
그렇게 내가 현실을 파악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도 마무리 중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그대들의 목표도 단 하나! 그것이 무엇인가?!"
사내의 뜬금없는 질문에 사내아이 한 명이 대답했다.
"진정한 혈맥의 힘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기 위해선 시련의 탑에 올라, 내면을 깨우치고 진정한 용의 후예로 거듭나야 한다!"
거짓 불능을 선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능력 '용언'
다른 종족은 모두 그 힘을 부러워하지만, 모든 용족은 용언을 아쉬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언은 반쪽짜리 힘.
용언은 고대 용족에게 물려받은 혈맥의 힘 중에서, 절반 짜리 힘에 불과했다.
그래서 용족을 플레이할 시 최종목표는 언제나 한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지금 그걸 강조하는 것이고 말이다.
'아, 교장은 아니지. 장로 1 인가?'
지금의 행사를 담당하는 건 언제나 최고 장로 중 한 명이 하는 일.
단상 위의 사내는 보잘것없는 외관과 달리, 족장을 제외한 용족 최고의 전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 그럼! 앞줄부터 차례대로 탑에 오른다!"
+++
단상 뒤에 자리한 첨탑처럼 생긴 탑.
그곳 중앙에 자리한 입구를 통해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며 사라진다.
나 역시 차례가 오자, 남들처럼 탑에 발을 들였고, 어느새 탑 1층에 도착해 있었다.
시련의 탑.
이곳은 용족 튜토리얼 과정 중 무조건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타 종족엔 없는, 용족을 선택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혜택.
총 5층으로 이뤄진 곳이었는데, 1층부터 3층은 간단한 시험을 치르는 곳이었고, 4층에선 영수족의 필수품을 얻었다.
그리고 5층에선 게임 시작 시 선택한 특성 세 가지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이름을 입력하면 본격적인 플레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시련의 탑이라는 이름보다는 성장의 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는 1층 입구를 통과한 후, 제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같은 입구로 들어온 아이들은 제각각 랜덤한 방에 배치된 상황.
더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천에 들어왔고,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르는 상태다?"
시련의 탑이라 명명한 성인식이 끝나고 나면, 그때부턴 한 명의 성인으로 인정받아, 능력에 따라 일을 얻게 된다.
나는 습관적으로 마시던 콜라 생각이 간절해져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재확인했다.
"아까 그곳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진짜 틀림없는 게임 속 세상은 분명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나갈 수 있나?"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니, 나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길 한참.
나는 게임 설정 중 일부를 떠올리고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계면 충돌인가?"
중천 설정에 보면 계면의 충돌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세상은 고유의 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선이 서로 닿는 곳을 경계면.
즉 계면이라 불렀다.
계면 충돌은 안정적으로 닿아있는 경계면 사이에 새로운 계면이 생겨날 때를 의미하는 말로써,
게임 설정에서 보면, 유저들이 새로운 계면 충돌로 인해 중천에 입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말 그 설정처럼 계면 충돌로 게임 속에 들어온 거라면..."
그렇다면 중천에서 나갈 방법이 존재했다.
바로 계면의 압력을 버틸 정도의 실력자가 되는 것.
그렇다면, 정확한 좌표와 위치만 특정할 수 있다면 원래 세상으로, 아니면 다른 세상으로 맘껏 이동할 수 있었다.
정말 게임에서 말한 설정대로라면 말이지.
"하아... 씨.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그것들 모두 게임 설정상의 내용.
지금 내게 일어난 현상이라고 단언하긴 힘들었다.
다만.
계면 설정에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해."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의 감각이 더 강렬해진다.
그 말인즉. 나는 어떤 체험이나 환상이 아니고. 진짜 게임 세상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방증했다.
그리고 이 감각이 말해주는 것 한가지.
절대 죽음으로써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세이브 기능도 없는데, 한번 죽으면 끝이다.'
반대로 내가 강해지고 더 고급 정보와 지식을 얻게 된다면, 지금 일어난 현상이 무언인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이상한 생각도 슬쩍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기라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다 보니 조금씩 싹트는 마음.
"근데 진짜 이곳이 중천 안이라면... 정말로 하늘을 날고, 비바람을 부릴 수 있게 되는 건가? 내가?"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현실 세계로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 한구석엔, 중천 세상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살짝 서렸다.
돌아갈 땐 돌아가더라도,
말 한마디에 폭풍을 부르고, 산을 가르며, 하늘을 무너트리는 최고 수행자.
수천 종족이 머리를 조아리고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이자, 인간의 한계, 생명체의 한계를 벗어난 신선을 경험해보고픈 욕망도 자리했다.
만약, 정말 계면의 압력을 버틸 만큼 강해지는 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이라면?
나는 절대자라 불리는 최고 수행의 반열에 올라야만 현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살며시 피어오르는 욕망과 기대는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목표와도 일맥상통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런 절대자가 된다면... 과연 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그렇게 상반된 마음가짐을 가진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1층에 준비된 시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움직여야 했다.
이곳은 시련의 탑.
시간이 성적이었다.
+++
잠시 후, 긴 통로를 걸어 1층 중앙에 도착하자, 넓은 공동이 나를 반겼다.
공동은 돌을 깎아 만든 원형 공간이었는데, 전체 벽면이 대리석을 다듬어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실제로 보니까 훨씬 웅장하네."
1층은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정보를 강제로 주입받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련의 탑이라는 이름답게 정보를 주입받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강제 정보 주입이 끝나면 그때부터 시험이 시작되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낭패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지능을 검증받지?'
잠시 후, 반짝반짝 빛나던 대리석이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그곳으로 집채만 한 고대용의 모습이 하나씩 재현되기 시작했다.
용들은 지닌 속성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공통으로 긴 수염과 지느러미 비슷한 날개가 인상 깊었다.
"저들에게서 퇴화한 게 지금의 용족,"
누군가는 고대 용족에서 진화한 게 지금의 용족이라 하지만, 퇴화가 분명했다.
왜냐면 영수족 대부분이 가진 '야수화' 능력.
영수 본연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야수화 능력을 오직 용족만이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용족은 야수화 능력을 사용하면, 상체가 비늘로 뒤덮이는 거로 끝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혈맥을 자극해도, 고대용의 '진체(眞體)'로는 변신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공동 곳곳을 수놓던 고대 용족은 점차 자리를 잡아 환영처럼 제자리에서 둥둥 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동시에 눈을 빛내더니.
"으윽!"
그때부터 용족의 과거사부터 시작해 기본적인 용족의 문자와 술법 등이 강제로 머리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게 만약 진짜 게임이었다면.
[용족 언어를 습득했습니다.]
[용족 기본 술법을 습득했습니다.]
[야수화를 습득했습니다.]
....
...
이런 식으로 수많은 창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럼 참 편했을 텐데.'
이미 1층에 들어온 직후, 상태창을 포함해 각종 명령어를 시도해보았다.
결과는 꽝.
이곳이 진짜 현실이라는 듯, 친절한 상태창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눈을 빛내던 용족 환영들이 지식을 주입한 후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자, 공동 중앙에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인자한 노인으로 변하더니. 환영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새로운 아이가 찾아왔구나."
노인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탑에 귀속된 자아.
"그럼 지금부터 시련을 시작하겠다. 술식이 발동하는 시간에 비례해 벌과 상이 내려질 테니. 가진 능력을 전부 보여야 할 테다."
어느새 노인의 얼굴에서 인자한 미소가 지워진다.
그리고 내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노인은 허공을 향해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오망성이 새겨진 후, 그 위로 기이한 문자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자, 이 술식을 해제해 보거라. 늦지 않게."
다짜고짜 시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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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본명 법기
나는 무수히 경험했던 튜토리얼 시련이었기에 긴장감 없이, 곧바로 술식을 해제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장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난 영기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잖아?'
술식을 해제하는 방법은 몸속에 내재된 영력을 손끝에 뭉쳐, 술식이 지닌 불안전한 부위를 반대로 그려내면 끝이었다.
문제는 이제 막 지금의 몸에 빙의한 후였고, 나는 호흡법을 비롯한 영기를 다루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였다.
아니, 알지만 실행해본 적이 없었다.
"느리구나."
노인이 느리다는 말을 한번 할 때마다. 1점이 감소하고, 그 성적은 탑을 관리하는 이에게 보고된다.
성적이 나쁘면 뭐가 안 좋냐고?
탑을 나선 뒤 성인이 되면 각자 적합한 일자리를 부여받는데, 당연히 성적이 좋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반대로 성적이 나쁘면 허드렛일을 해야 한다.
'우선 영기를 느껴야 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게 영기지만, 그걸 몸 안에서 움직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
나는 눈을 감은 채, 사람 몸으로 치면 단전에 해당하는 부위에 정신을 집중했다.
단전에는 원단(原丹)이라는 구슬이 있다. 그것이 수련을 통해 만들어진, 영기를 보관하는 기관.
"느리구나."
'용족의 호흡법은 오직 하나, 흡축폭발이다.'
영기를 받아들이는 흡,
영기를 몸 안에 쌓는 축.
쌓인 영기를 증폭시키는 폭.
증폭된 영기를 외부와 공명시키는 발.
그리고 '발'로써 공명된 외부 영기를 다시 흡으로 받아들이며, 무한의 고리를 그리며 수련하는 방식.
'당장 축폭발은 필요 없다. 원단을 자극하는 데는 흡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수많은 용족 플레이를 경험하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빠르게, 하지만 급하지 않게 숨을 빨아들였다.
'호흡을 최대한 깊게 끌어와 원단에 닿게 만드는 게 우선.'
그런 후, 자극받은 원단이 내 호흡에 반응하면, 그 찰나에 원단에 담긴 기운을 끌어와 사용한다.
"느리구나."
"합!"
결국 나는 노인의 입에서 '느리구나'가 세 번 나온 후에야, 손끝에 영력을 뭉치는 데 성공하고, 곧바로 술식을 해제했다.
"훌륭하다."
그러자 노인은 활짝 웃으며 손을 휙 저었고,
새로운 술식이 나타났다.
"어디 이것도 한번 풀어 보려무나."
+++
두 번째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한번 두번 영기를 사용하다 보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빠르게 적응되어갔다.
마치 이전에도 무수히 이 같은 일을 반복해 본 것처럼.
"합!"
"훌륭하다. 이로써 시험은 끝이다."
결국 7번째 시험이 끝나자, 노인은 나타났을 때처럼 빛으로 화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사라졌던 고대 용들의 환영이 다니 나타났다가 하나둘 다시 모습을 감췄고,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원래의 공동의 모습만 남았을 때,
나는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작은 알약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지식의 영단이구나."
알약은 지식의 영단이라 불리는 것으로, 섭취하면 지능이 크게 향상됐다.
1층 시험 성적에 따라. 효능이 달라졌는데. '느리구나'라는 말을 세 번 들었으니. -3점이 적용된 지능 +7짜리 영단이었다.
문제는 이곳은 게임처럼 지능이 수치화되지 않는다는 것.
"먹으면 어떻게 되려나? 갑자기 똑똑해지는 느낌이려나? 아니면 새로운 술식을 얻나?"
정확한 건 먹어봐야 알겠지만, 몇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갔다.
다만.
찌이익- 쓱-
나는 지식의 영단을 먹지 않고, 소맷자락을 찢어 영단을 감싼 후, 품에 넣었다.
이게 정말 중천의 세계관과 같다면, 영단은 지금이 아닌 4층에서 써야 하는 물건이었다.
"확인해보면 알겠지."
잠시 후, 혹시 게임과 달리 1층에서 더 얻을 게 없나 확인해본 나는, 별다른 소득 없이 2층에 올랐다.
아직까진 모든 게 게임과 같았다.
+++
2층은 좁은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긴 통로를 통과하다 보면 점차 아래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통로 가득 물이 찬 곳을 만날 수 있다.
물로 가득 찬 통로를 걸어서 반대편에 도달하는 게 2층의 시련이었다.
"생각보다 물이 무겁네."
내리막길 끝,
물속에 발을 잠깐 담가본 나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게임에선 이곳을 '중수의 벽'이라 불렀다.
무거운 물로 이뤄진 벽이란 뜻.
실제로 안에 들어가면,
[중수로 인해 영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중수의 압력으로 인해 체력이 저하됩니다.]
[중수로 인해...]
같은 상태 이상 메시지를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고와 무관하게 아무리 오래 있어도 캐릭터가 죽진 않았다.
다만 머문 시간만큼, 시련을 통과한 후 회복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통과 시간은 성적에 반영되는 말이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첨벙-
나는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이를 악물고 천천히 물속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윽. 장난 아니네."
중수가 허리를 넘어올 때부터 몸에 미치는 압박이 강해지다가, 심장을 넘어가자 숨이 턱턱 막혔다.
잠시 후, 머리끝까지 물에 잠기자, 말 그대로 압력에 몸이 찌그러질 것 같았다.
'절대 안 죽는다. 겁먹지 말고. 앞으로 걸어간다. 걸어가.'
나는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중수로 가득 찬 통로는 일정 구간마다, 고대용의 조각상이 비치돼 있었는데, 그것으로 얼마나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수룡족이야? 정말 이 안에서 안 죽는 거 맞아?'
기억이 맞다면 수룡족은 3분의 1 지점의 조각상.
이미 턱 끝까지 호흡이 막히고, 심장은 콩알만 하게 짜부라진 것 같은 느낌.
'안 죽는다. 안 죽는다.'
나는 마치 주문처럼 게임 설정에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며, 묵묵히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푸하!"
정말 이젠 끝이구나. 저승사자와 조만간 조우하겠구나 싶을 때쯤.
반대편 통로로 나올 수 있었다.
그 순간, 내 몸에서 흘러내리던 중수들이 피부 안으로 스며들며, 피부가 조금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철퍼덕.
나는 살았다는 느낌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얼마나 쉬었을까?
게임상에서는 물속에 머문 시간에 비례해 강제 휴식이 진행됐지만, 굳이 그만큼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 호흡이 돌아오고, 체력이 회복된 것 같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3층을 향해 움직였다.
+++
3층.
통로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거대한 문 여러 개가 나를 반겼다.
각각의 문에는 특정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화 속성을 뜻하는 불꽃부터 시작해, 물 속성을 나타내는 파도, 뇌전을 비롯한 구름과 땅, 나무 등등의 문양이었다.
성인식을 위해 탑에 오르는 이는 여러 가지 속성의 문 중에서 하나를 열고 지나가면 되었다.
문제라면, 내가 나의 속성을 모른다는 것.
"어디로 가야 하지?"
보통은 부모의 형질을 그대로 이어받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부모가 어떤 속성인 줄 모르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1층에서 주입받은 야수화 능력을 이용했다.
부르르-
그러자 집중한 시간에 비해 초라한 비늘 하나가 쑤욱 피부위로 올라왔다.
손가락보다 작은 반투명한 금색 비늘은 너무 초라하고 나약해, 손으로 툭 치면 떨어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이 비늘은 엄청난 방어력을 가진 능력이었다.
수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강해지는 용족만의 특수 능력.
"금색?"
잠시 후, 야수화를 취소한 후, 뇌전이 그려진 문을 향해 움직였다.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닌 경우, 비늘은 자신의 속성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리고 금색은 뇌전을 뜻했다.
물론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흔히 돌연변이라 불리며, 화 속성의 상징인 붉은 비늘을 가진 채로, 수 속성을 지닌 이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기에, 내가 뇌전 속성일 확률은 매우 높았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 텐가?
당장 이것 말고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지지직- 번쩍.
잠시 후, 문을 열고 걸어가자, 내부의 폭풍 치는 뇌전이 나를 반겼다.
따끔-
벽면을 통과해 다른 벽면을 향해 정전기처럼 움직이는 뇌전.
피부에 닿자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전율이 일어난다.
"여길 걸어서 통과해야 한단 말이지?"
3층의 시련은 2층과 마찬가지였다.
뇌전이 가득한 통로를 그냥 걸어서 반대편에 도달하면 끝이었다.
"그냥 다른 거 선택할까..."
지금은 통로 초입이라 따끔 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뇌전은 강력해진다.
그 말인즉.
통구이가 될 수도 있단 뜻이었다.
+++
"으으..."
3층을 통과한 나는 4층 입구를 앞에 두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해당 속성을 강화해주고, 면역력을 올려주는 보상이 따르지만, 두 번 다시는 경험 하고 싶지 않은 3층의 시련.
조금만 더 오래 버텼다면, 정말 전기구이가 될뻔했다.
"수치로 좀 보여주면 안 되나? 답답하네."
게다가. 게임에선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해당 속성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게 없었으니. 보상을 얻은 기분도 없었다.
어쩌면 게임과 달리 실제 세상에선 시련만 존재하고 보상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지. 1층도 분명 보상이 나왔으니까. 2층이나 3층도 얻었을 거야."
꽤 오랜 시간 휴식을 취한 후, 4층을 향해 움직였다.
"드디어 4층이네..."
4층에 도착하자 10여 미터 정도 공간에 모루와 망치 하나만 덜렁 놓여 있었다.
무언가를 제작하는 곳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맞았다.
4층은 시련의 탑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
"이곳이 본명 법기를 제작하는 곳."
용족을 포함한 모든 영수족은 평생 몸속에 품고, 같이 성장해 나가는 법기가 있었다.
법기란 세상의 법칙을 담은 그릇으로써, 무기가 될 수도 방어구가 될 수도 있는 무구의 일종.
그런 법기 중에서 자신의 일부를 담아 만드는 물건을 본명 법기라 불렀다.
사용자와 함께 성장하며, 신체 일부나 다름없는 물건.
4층은 그런 본명 법기를 탑의 힘을 빌려 제작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개인의 능력이 아닌 탑의 힘을 빌리기에 다른 종족에 비해 본명 법기가 월등히 우수했다.
다만, 용족은 할 수 없는 혈제를 치르면, 그 정도 우월함은 금세 따라잡히기에, 오히려 유저들에게 외면당하지만 말이다.
"어떤 물건이 나올까? 공격형 무기면 좋겠는데."
한동안 모루와 망치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길고 긴 심호흡으로 몸을 단정히 하고, 용족이 본명 법기를 만드는 순서를 간단히 떠올렸다.
"우선은 야수화부터."
잠시 후,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의 준비를 끝낸 나는 몸속 영력을 움직여 야수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 상체로 반투명한 비늘들이 조금씩 만들어졌고,
뚝-
나는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금색 비늘을 뜯어내 모루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1층에서 얻은 영단을 꺼내, 비늘 위에 살며시 포개놓았다.
용족을 많이 플레이해본 극소수의 유저만이 아는 정보.
1층에서 얻은 지식의 영단을 본명 법기 제작에 이용하면, 높은 확률로 원래 얻어야 할 법기보다 등급이 높은 물건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진 못했지만, 탑이 만든 영단이기에, 탑의 힘을 이용해 만드는 법기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리고 본명 법기의 등급이 올라간다는 뜻은, 지능이 살짝 오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혜택이었다.
"후우."
심호흡 후,
나는 망치를 들며 내가 가진 모든 기운을 망치 안에 집어넣었다.
시련의 탑 4층.
본명 법기를 제작하는 것이 시련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1~3층보다 더한 시련이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일평생 함께해야 할 본명 법기가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좌우된다.
당연히 이 일을 실행하는 용족들은 엄청난 부담감을 지닌 채 실행에 나서게 되고, 어떤 이는 몇 날 며칠을 이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약한 자들은 그 부담 때문에 탑을 이용 가능한 시간 동안 끝끝내 제작을 마무리하지 못하기도 했고 말이다.
"오래 끌어봐야 좋을건 없지."
하지만, 그전의 시련들도 빨리 통과할수록 점수가 높았다.
그리고 4층 역시 마찬가지.
1층부터 5층까지 통틀어, 시련의 탑은 자질보다는 용기와 의지를 시험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빠를수록 좋다.
머뭇거림이 없을수록 좋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제작하는 게, 좋은 법기를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한방에!"
휘익-
그랬기에 상념을 날려버린 나는, 주저 없이 망치를 내리쳤고,
콰아아앙!!
내 모든 힘이 집약된 망치는 정확히 모루 위에 놓인 지식의 영단을 짓누르며 내 비늘을 강타했다.
그 순간, 망치와 모루가 부딪치는 반발력과 함께,
"윽!"
부르르르-
탑이 진동하는 느낌과 동시에 눈 부신 빛이 모루 위로 몰려들었다.
"이게 전부 영기였구나!"
모니터로 볼 땐, 그냥 제작 이펙트인줄 알았던 눈 부신 빛.
그것은 영기가 극도로 농축된 탑의 기운이었다.
화아아악-
잠시 후, 빛이 밀려나자 나는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천천히 모루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곳에 놓인 손바닥만 한 칼날을 가진 단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게 내 본명 법기?"
단검의 손잡이는 내 비늘과 같은 금색이었고, 그 위 칼날은 반투명한 옅은 금색이었다.
단검을 손에 쥐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단검에 실시간으로 회복 중인 영기를 쥐어짜듯 불어넣었고,
부르르-
단검은 내 신호에 활짝 웃듯이 1미터 가까운 광선 칼날을 만들어냈다.
우우웅-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래전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광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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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특성 확인
고전 영화, 별들의 전쟁에서 자주 사용하던 광선검.
지금 내 손에서 휘둘러지고 있는 광선검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처음엔 망치를 휘두르느라 영력이 부족했기에 겨우 1미터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3미터까지 키울 수 있었다.
게다가.
스걱-
광선검에 의해 탑의 벽면이 두부처럼 갈라진다.
"대박."
칼날이 생성되는 속도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빠른데, 절삭력은 더 대단했다.
탑을 이루는 주요 석재가 웬만한 공격에도 버티게 만들어져 있음에도,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한동안 본명 법기를 휘두르던 나는, 그것에 광검이라는 이름을 붙인 후 손바닥에 올리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될까?"
일반적인 법기와는 다르게 본명 법기는 체내에 보관할 수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법기도 '체화'라는 과정을 거치면 몸속에 저장하는 게 가능했지만, 체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손바닥만 한 단검이 진짜 몸속에 보관 가능한 건가 하는 의심과 함께 한동안 끙끙거렸다.
솔직히 뇌전 통로를 지나칠 때보다, 더 망설여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는 일.
나는 단검에 영력을 불어넣으며 의지를 담았다.
작아져서 내 몸속에 쏙 들어가라고.
동시에 단검을 입으로 가져가자.
스르륵-
손바닥만 하던 단검이 엄지손가락만 하게 줄어들더니, 입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식도를 통과하는 느낌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조금 지나 단전 근처에서 느껴지는 단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이런 식이었구나."
체내 보관이 식도를 통과해 위장을 지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칠 거라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입속에 들어간 후엔, 영력이 뭉쳐있는 단전 근처의 원단으로 바로 이동되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휴..."
일말의 안도감과 함께, 영기의 신비로움을 느꼈다.
지금 단검을 몸 안에 저장할 수 있는 건, 특정 종족의 타고난 능력이라기보다는, 특정 종족이 영기를 이용해 진화한 결과.
영기는 불과 바람을 만들어내고, 초능력을 갖게 해주는 것뿐 아니라, 말 그대로 만물의 창조와 연결돼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한동안 영기란 과연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스스로 해답을 찾다가, 5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시련의 탑의 마지막 관문이자, 게임 시작 시 고른 특성을 확인할 시간.
특히 나는 용의 위엄을 제외한 두 가지를 랜덤으로 했기에, 5층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제발 약자 멸시가 걸려라."
직후, 나는 5층에 발을 디뎠다.
+++
5층은 다른 곳과 달리, 입구를 지나치자마자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 중앙엔 직경 5미터 정도 되는 잔잔한 호수가 존재했다.
그곳이 바로 특성을 확인하는 '내면의 샘'이었다.
5층 공동 곳곳을 살펴본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설정과 다름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주저 없이 샘에 몸을 담갔다.
풍덩-
잠시 후, 샘물의 차가움이 정신을 깨우듯 나를 자극했다.
스르륵-
하지만 자극과 반대로 졸음이 몰려오듯 자연스럽게 두 눈이 감기며 샘물 아래로 점차 침잠해 내려갔다.
그렇게 어머니에 품에 안긴 듯, 포근함 감각에 심취할 때쯤.
번쩍-
무언가 거대한 것이 나타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뇌전을 두른 용 한 마리가, 거대한 산을 휘감은 채 고고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이게 용의 위엄...'
게임상에서는 애니메이션처럼 지금의 광경이 살짝 스쳐 지나간다.
당연히 처음 게임을 접할 때를 제외하곤 스킵으로 넘겨버리기 일쑤.
그런 것을 실제로 경험하니. 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면, 저 용이 나를 물어 뜯어버릴 것 같은데...'
거대한 뇌전을 두른 용은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후 한순간도 흔들림이 없었다.
말 그대로 용으로서 위엄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
그렇게 한동안 용과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몸이 다시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고,
용의 모습은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용의 위엄이 나왔으니. 다음은. 제발!'
다른 것 다 필요 없다.
제발 용족 최강의 특성.
'약자 멸시 하나만 걸려라.'
그렇게 용의 위엄이 지나친지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더 깊은 나의 내면으로 빠져가기에 저항 없이 가만히 있다 보니. 주변이 파도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멀리서 거대한 바위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푸학-
물속에 있음에도, 물살을 헤치며 나를 짓누를 것 같은 거대한 발이 두각을 드러냈다.
'발?'
발은 아무런 치장도 없이 깔끔했다. 거대하기가 직전에 보았던 용보다 커 보였다.
'이게 뭐지? 용족의 특성 중에 이런 게 있었던가?'
거대한 발.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되질 않았다.
비슷한 외형을 가진 특성이라면 '거인의 발걸음'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건 인족이 가진 특성 중 극악의 확률로 나타난다는 거인 특성.
절대 용족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도대체 뭐지? 비슷한 것도 안 떠오르는데?'
거대한 발을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의문에 휩싸였다.
'설마? 내가 모르는 용족 히든 특성인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하긴 내가 용족 특성을 전부 아는 건 아니니까.'
처음 본다는 건, 무작위 선택 시에만 나타나는 희귀한 특성일 가능성이 컸기에,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진채 보내줬다.
여기서 확인한 환영을 기억했다가, 종족 도서관에서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확인하면 됐으니까.
그리고 거대한 발을 보내준 후.
'마지막은 제발 떠라. 약자 멸시!'
나는 여전히 남은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멀리서 나타날 환영을 주시했다.
'제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주변이 한없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발밑이 허전해지는 감각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호수가 발아래 나타났다.
'설마 이건?'
호수는 미세한 파동도 없을 만큼 고요했는데, 표면이 마치 유리처럼 맑고 깨끗했다.
마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신뢰를 보여주듯이.
'거짓 불능?'
용족의 용언과 관련된 환영은 너무 자주 접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게 정말 거짓 불능?'
호수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해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호수가 크다는 건 그만큼 용언이 강력하다는 말인가?'
대신 페널티도 그만큼 확실하게 적용된다는 뜻.
약자 멸시가 쉽게 걸리진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기껏 초기 입력값인 거짓 불능을 해제했는데, 다시 거짓 불능이 걸리다니.
나는 실망감에 물속이지만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또르륵- 똑-
그때 머리 위, 어디선가 붉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토통-
물방울은 호수의 중앙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투명하고 맑은 호수를 붉게 물들였다.
'이건 뭐지?'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생각이 멈춰버렸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반응이기 때문.
'두 번째도 그러더니... 세 번째도?'
순간적으로 게임과 현실은 종족 특성부터 다른가?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사이 내 몸은 다시 바닥을 향해 침잠하기 시작했고, 나는 끝내 의문을 풀지 못하고, 붉게 물들어버린 호수를 보내줘야 했다.
'이렇게 끝인 건가?'
용의 위엄,
거대한 발,
그리고 붉은 거짓 불능?
평소 플레이와는 너무 다른 현상들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미 끝난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버리려 노력했다.
'거짓 불능이 걸릴 가능성이 크긴 했지.'
사실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느 정도 납득하긴 했다.
기본적으로 용족에게 거짓 불능은 디폴트 값.
랜덤으로 했을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선택될 가능성이 큰 특성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두 가지를 랜덤으로 했던 건, 약자 멸시가 걸릴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했던 것.
'성인식이 끝나면, 두 가지 특성이 어떤 현상인지 정확히 알아보고, 성장 플랜을 짜자.'
나는 조금씩 마음을 다잡고, 미래 일을 계획했다.
동시에, 이제 곧 나타날 호수의 바닥이 어떤 모습일지 또 다른 기대를 품었다.
'그래, 약자 멸시는 못 얻었지만, 바닥이 남았다.'
내면의 샘은 세 가지 특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절차 중 하나였지만, 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세 가지 특성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샘 바닥의 색깔.
샘의 바닥은 내면에 샘에 들어온 사용자의 내면의 강도를 보여주는데, 색깔의 진하기가 의지력의 높낮음을 결정했다.
즉 나를 예로 들자면, 비늘 색과 같은 금색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내 의지력이 높다는 뜻.
'바닥의 색깔이 성장의 척도지.'
중천에서 의지력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성장의 척도였다.
수행 수준이 낮은 지금이야 크게 상관없지만, 성장할수록 점점 중요해졌다.
-의지가 법칙을 움직인다.
중천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로, 고위 수행자가 되면 모두가 인정하는 말.
즉, 의지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란 뜻.
흔히 신선이 되면 비바람을 조종할 수 있다고들 하는데, 그것 역시 의지의 힘이었다.
그렇기에 샘의 바닥을 확인하는 건 매우 중요한...
'어? 뭐지?'
그때, 조만간 바닥이 보일 거라는 생각과 달리, 멀리서 어떤 환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환영은 너무 흐릿해 자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아무리 봐도 샘의 바닥은 아니었다.
'설마? 네 번째 특성?'
그 순간 나는 속으로 환호성이라도 지를뻔했다.
캐릭터를 만들다 보면 극악의 확률로 나타난다는 네 번째 특성.
네 번째 특성을 가진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환호성을 지르는 건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남아있다. 제발 약자 멸시! 제발!'
끝나버린 줄 알았던 기대감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쿠웅-
하지만 기대도 잠시.
갑자기 거대한 충격에 주변이 흔들렸고,
쿠웅- 파아아앗-
눈에 띌 정도로 내면의 샘이 만든 공간이 출렁거리더니, 급기야 세상이 반전하듯 위아래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우욱-'
그 순간, 오장 육부가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눈앞이 번쩍거렸다.
동시에 온 세상이 캄캄하게 변하며 몸이 급부상하는 느낌을 받았다.
"푸하앗-"
그리고 샘물 밖으로 튕겨 나간다는 느낌과 함께.
"컥-"
나는 기절했다.
+++
"오라비 정신이 들어?"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걸까?
눈을 뜨니 하얀 벽지가 나를 반겼다.
나는 돌로 만든 침상에 거친 천을 두른 채 누워있었고, 주변은 온통 하얗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리고 내 바로 옆에는 튜토리얼 안내 꼬마처럼 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두 눈을 껌뻑거리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라비? 내 말 들리냐구?"
"...어...어."
잘 들리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 거지?
내면의 샘에 들어갔고, 네 번째 특성을 발견하고 좋아하던 틈에...
'강렬한 충격에 샘 밖으로 튕겨 나가고 기절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오라비가 이대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잖아. 휴."
"여긴 어디... 어떻게..."
나는 타들어 갈 것 같은 목을 침으로 적시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소녀는 단어뿐인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하나도 기억 안 나? 하긴. 시련에 탑에 오른 사람 중에서 이런 일을 당한 게 오라비랑 풍광 오라비 두 명뿐이래. 나머지는 4층도 채 통과하지 못해서 아무 피해도 없었대."
이어지는 소녀의 말은 전혀 의외의 상황이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공격당한 적 없던 시련의 탑이 외부의 폭발로 인해, 내부의 영기가 폭발했다는 것.
참가인원 중 나와 다른 한명은 내면의 샘에 몸을 담그고 있던 터라, 영기 폭풍에 휘말려 내상을 입었고, 나머지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는 설명까지.
웃긴 건, 풍광은 내면의 샘에 몸을 담그려던 순간에 폭발에 휘말려 그나마 상태가 괜찮았고,
유일하게 나만 내부가 만신창이가 돼서 열흘이나 누워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1층부터 4층까지 너무 빠르게 돌파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 돼버린 거였다.
그때, 밖에서 소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소녀가 한쪽에 놓여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오라비 꺼. 그럼 난 간다!"
잠시 후, 소녀가 사라지자, 휑한 방안에 혼자 남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시련의 탑이 공격당하다니. 하필 내가 그 안에 있을 때.'
수많은 플레이 중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움의 연속인가?'
심지어, 용족은 그들만의 대륙에 모여 살았는데, 여태껏 한 번도 외부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하면.
나는 기가 막힌 우연에 허탈하게 웃다가. 네 번째 특성이 뭐였는지 애써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흐릿한 기억만 남았을 뿐, 그것이 어떤 건지는 감도 오지 않았다.
'다시 올라가 보면 알겠지.'
시련의 탑 5층에서 바닥을 확인하고 와야지만, 기록이 남는다.
그 말은 그때부터 정식 성인으로 인정받는다는 말.
그랬기에 당장은 폭발로 인해 멈춰진 행사가 다시 진행될 거란 뜻이었다.
나는 그때가 언제쯤일까 생각해보며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건...'
상자는 성인식을 마친 용족에게 전해지는 부모의 선물.
성인식이 끝나면 부모가 직접 전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금처럼 비대면으로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상자 안에는 부모가 익힌 특별한 비술, 혹은 급성장을 위한 단약, 압도적 성능의 법기 등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컸다.
기본적으로 독자생존을 원칙으로 하는 용족의 생활상에서 유일하게 부모가 성인식을 핑계로 자녀에게 선물을 건네는 풍습이었다.
그리고 이 선물이 전해졌다는 뜻은.
'한 명의 성인으로 인정하고, 일을 시키겠단 뜻이지.'
물론 선물 대신 달랑 편지 한 장 들어있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물보다는 부모가 누구인지, 용족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가 더 궁금했기에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색 부적 한 장과 팔찌 하나, 메추리알처럼 생긴 알 세 개, 그리고 두 개의 옥간이 전부였다.
'부적은 전음부, 팔찌는 법기, 알은 영충의 알, 옥간은... 술법서인가?'
전음부란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부적.
우선하여 붉은색 부적을 집어 든 후, 손가락에 영력을 모았다.
부르르-
그러자 부적이 빳빳하게 서며 한차례 진동했고,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 이렇게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구나. 반갑다. 나는 족내에서 제사장을 맡고 있는 금파월이라 한다.
이어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봐야했다.
팔뚝엔 소름이 돋았다.
-아마 시련의 탑을 오르는 과정 중간에 작은 폭발로 인해 모든 과정이 취소됐겠지? 너무 놀랄 필요 없다. 그 모든 건 너를 위해 내가 준비한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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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선물
"나를 위해?"
나는 순간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부적을 이마에 붙였다.
그러자 웅웅 울리던 소리가, 내 귓가에만 전해졌다.
-흠,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래, 하나부터 전부 설명해주마.
이어지는 금파월의 설명은 정말 놀랄 노 자 그대로였다.
-너는 스스로 용족이라 믿고 살아왔겠지만, 사실 넌 용족이 아니다. 정확히는 절반만 용족이지.
-그래서 시련의 탑의 끝에 도달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랬다간 족장을 포함한 모두가 너의 정체를 알게 될 테니까.
영수족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문화를 가졌다.
그중에서 용족은 특히 그 경우가 심했는데, 용족을 제외한 타 종족은 대륙 중심의 연합도시를 제외하곤 그 어떤 곳도 갈 수 없었다.
만약 타 종족이 규칙을 어기고, 용족의 대륙에서 연합도시를 벗어났다?
그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살이었다.
그게 이곳의 불문율이었고, 타인을 배척하는 용족의 태도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걸리는 즉시 참살이다.'
절반이 용족이니깐 괜찮다고?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수많은 플레이로 느낀 게 있다면, 용족은 순수혈통을 엄청나게 강조한다는 것.
애초에 용족의 목표 자체가, 완벽한 순혈인 고대 용족의 피를 다시금 되찾는 것이니 더는 말해 뭐 하랴.
-네가 생각한 것보다 우리가 가진 피의 집착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부모인 금파월도, 자신을 우리라는 표현으로 명백하게 구분했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내가 떠나오기 전 정확한 시기를 계산하고 시련의 탑을 폭파했으니, 아마 삼십여 년은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다. 조심만 한다면.
'삼십 년? 기간을 특정한 걸 보면... 중요한 기관을 파괴했나?'
혹은 시련의 탑을 이루는 핵심 부품을 파괴했을 가능성이 컸다. 한동안 고칠 수 없는.
떠났다는 금파월의 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용족은 애초에 부모와 자식의 끈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에, 주변에서 머물지 않았다.
평생 얼굴을 보지 못하는 예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차라리 잘됐지. 진짜 부모도 아닌데, 괜히 얼굴 마주쳐봐야 어색하기만 하고.'
이상하게 금파월의 목소리를 듣는데, 현실 세상의 부모님 얼굴이 잠시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하지만 상념을 이어가기도 전.
부적에서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러니 너는 삼십 년 안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잘 안다.
삼십 년 후에 시련의 탑이 복구되면, 나이와 상관없이, 기록을 위해 탑 5층에 올라야 할 테니까.
그러다 문득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절반만 용족이라면, 당연히 아버지의 피가 용족이란 뜻.
그렇다면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금파월의 설명이 이어졌다.
-혹,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내가 왜 너를 이곳에 데려온 건지 궁금할까 봐 알려주겠다. 사실...
이어지는 설명에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제천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임무를 맡아 용족의 대륙을 떠났던 금파월.
그는 고대 유적에서 고대 용족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길을 추적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인족 제사장과 사랑에 빠졌고, 생각지도 못한 나를 낳고 말았다.
'애초에 혼혈이 가능한 거였어? 내가 알기론 절대 불가능한데?'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내용에 고개를 젓는 사이, 설명은 이어졌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를 가졌을 때보다 당황하고 말았다. 왜냐면 너는 우리 용족의 특징대로 알 형태로 태어났기 때문이지.
모든 용족은 알로 태어난다.
그 후엔 생명의 샘이라 불리는 영기 가득한 물에 몇 년간 담겨있다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다.
그리고는 아주 잠시 부모 곁에 맡겨졌다가, 부모를 인식할 때쯤 종족 내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성인이 되면 시련의 탑을 통과한 후,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너를 이곳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무 중이었기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다시 떠나야만 했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찾아와, 내가 혼혈임을 인지하고 일을 꾸몄다고 한다.
원래 계획은 탑을 파괴한 후, 탑이 복구되기 전에 적당한 핑계로 나를 밖으로 빼돌리려던 계획.
하지만, 그 사이 어머니께 일이 생겼단 신호가 왔고, 급하게 떠나며 지금의 준비를 해놓은 것이란 말로, 부적은 사르르 불타 사라졌다.
부적이 사그라지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참나.'
그 이유는 전음부 말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는데.
-사실 나는 너 스스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길 바랐다. 내 피를 이었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그랬다간 뒷감당이 불가능할 것 같기에. 이렇게 준비를 남긴다.
-부디 스스로 우뚝 서길 바란다.
뒷감당?
아마 인족인 어머니의 등쌀을 표현한 말일 테다.
현실에서처럼 중천의 인족도 자식 사랑이 굉장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란 자는 만약 어머니 눈치를 보지 않았다면 시련의 탑도 폭파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그랬다면 과연 내가 살아남았을까?
스스로 우뚝 서라고?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확언할 수 있었다.
절대 아니다.
만약 탑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죽었을 테다.
나는 보지도 못한 어머니란 인물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신 덕에 살았습니다.'
+++
'이렇게 첫 번째 목표가 생기는구나.'
의도하지 않았던 중천의 삶.
당연히 최종 목표는 이곳을 벗어날 방법과, 그에 어울리는 자립을 갖추는 일.
하지만 단기적으로 생긴 목표는 생존이었다.
정확히는 탑이 복구되기 전에 용족의 대륙에서 빠져나가는 일.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며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삼십 년이면 무조건 탈출 가능하지.'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그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정했다.
잠시 후, 생각 정리를 끝낸 나는 상자 안에서 팔찌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란 인물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팔찌는 자신의 선물이고, 영충의 알은 어머니의 선물이라 했다.
만약 인족의 피가 절반 섞인 걸 알았다면, 그녀가 익힌 공법을 전해줬겠지, 하며 툴툴거리던 목소리가 떠나지 않는다.
공법이란 중천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익히는 호흡법의 일종으로, 영기를 다루는 모든 학문을 통틀어 지칭하는 단어였다.
어떤 것들은 진짜 호흡법만 담긴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무기술을 포함한 영력을 이용한 모든 것이 담겨있기도 했다.
심지어 제조술이나 주조술까지 공법의 범위에 포함됐으니, 그 깊이와 범위는 말로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만 공법을 주로 익히는 건 인족이었다.
용족은 흡축폭발로 이뤄진 호흡법이 공법을 대신했고, 영수족은 '숨결'이라는 호흡법이 따로 존재했다.
그리고 목족은 흡기법, 영충족은 '식'이라 표현하는 종족 특유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래서 내겐 아쉬움이 없었다.
애초에 거의 용족만 플레이했기에, 용족의 호흡법 하나면 충분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럼 팔찌가 뭔지 확인해... 대박!"
잠시 후, 팔찌에 영력을 불어넣으며 정신을 집중하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영기가 주입된 팔찌는 살아있는 것처럼 내 팔목에 감겼는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리고는 손목에 팔찌에 새겨진 문양만이 문신처럼 남았다.
"설마? 신기?"
나는 재빨리 한 번 더 영력을 움직였다.
그러자 문신으로 변한 팔찌가 스르륵 피부위로 올라오며 모습을 나타냈다.
"진짜 신기야?"
신기(神器).
법기가 법칙을 담는 그릇이라면.
신기는 신(神)의 일부를 담은 그릇.
한마디로 법기의 상위호환이었다.
여기서 상위호환이란 말은 그냥 한 등급 높은 아이템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법기와 다르게, 등록된 사용자만 사용할 수 있는 신기는 여러 가지 특장점이 있었다.
먼저, 체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몸속에 저장 가능했고,
일반 법기와 비교해 매우 낮은 영력만 있어도 사용 가능했다.
게다가 본명 법기처럼 성장도 가능했기에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물론 사용자 등록을 마치지 않은 신기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신기가 신의 그릇이라 불리는 이유.
그건 바로 제작자의 영혼과 생명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신기와의 공명을 완벽히 끌어내면 제작자의 능력을 일부 사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제작자가 신기에 담아놓은 능력 일부를.
"내가 오해했네. 혼자 잘해보라고 하더니. 이런 걸 준비하다니."
팔목에 감겨있는 팔찌가 금파월이 제작한 신기인지, 아니면 유적에서 발굴한 물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신기의 가치만을 놓고 봤을 때, 그가 준 선물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나 이제 막 수도계에 발을 들인 나 같은 초보에게 신기가?
이 정도면 커뮤니티에 자랑글 수백 개로 도배해도, 사람들이 이해할 정도였다.
"후우... 너무 흥분하지 말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팔찌가 가진 기능을 파악했다.
'우선은 공간팔찌 역할인 거 같은데...'
팔찌의 순기능은 보관 기능을 가진 저장용 법기였다.
하지만 그 외 것들은 바로 파악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팔찌 안에 내재된 술식을 완벽히 익혀야만 숨은 기능을 알 수 있는 구조였다.
'이제부터 너는 금천(金釧)이다.'
체화한 법기는 이미지화해야 사용이 수월했기에, 나는 팔찌에 이름을 부여하는 거로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선물인 알을 확인하려 했다.
삐그덕-
그때, 머물고 있던 곳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함께 탑에 올랐던 아이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파란. 장로님이 전원 모이래. 거동이 불편하면...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알이 무언지 확인하는 건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탑에 오르기 전 모였던 단상 앞 공터로 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
아직 통증이 남아있는 몸을 이끌고 공터로 나오자, 단상 위에 자리하고 있던 장로가 나를 반겼다.
"금파란. 본명 법기를 성공적으로 제작했나?"
내려다보는 상대의 눈빛이 거슬렸지만,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다. 그럼 너는 저쪽에 대기하라."
공터에 모인 아이들은 탑에 입장하기 전과 달리 두 부류로 분류돼 있었다.
왼쪽에 모인 이들은 4층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이었고,
오른쪽 아이들은 4층에서 본명 법기를 제작한 이들이었다.
나는 장로가 가리킨 오른쪽으로 이동해 대기했다.
"금파란. 내면의 샘에 들어갔다면서?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시련을 통과한 거야?"
가장 뒷줄에 서자, 통통하게 생긴 아이가 질문을 던졌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첫날 나를 부축했던 아이였다.
"그냥, 별 생각 없이 하니깐 되던데?"
"그래? 하긴 나도 고민하지 않고 움직이긴 했어."
통통한 아이는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샘에 발을 담근 아이.
'이름이 풍광이었나? 광풍이었나?'
자신보다 더 나은 성적을 기록할 뻔했던 나에게 관심이 지대한 것 같았다.
"풍광! 잡설은 나중에 하고 집중해라."
"네! 장로님!"
나에게 말을 건네던 아이는, 장로의 질책에 군인처럼 자세를 바로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
'풍광이었구나.'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풋 웃고는 나 역시 장로를 바라보았다.
장로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 맘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시작했다.
"다들 소식을 들었을 테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아마 당분간은 탑을 가동하기 어려울 듯하다."
곳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조용!"
장로는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기합이 가득한 소리를 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하염없이 탑이 가동되길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지금부터 본명 법기를 제작하지 못한 아이들은 저기 이 장로를 따라 움직여라. 탑의 기운을 빌릴 순 없지만, 본명 법기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의 말에 왼쪽에 서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용족의 본명 법기가 다른 종족보다 우월한 이유는 순전히 탑의 기운으로 제작하기 때문.
만약 본인의 역량만으로 만든다면, 형편없는 물건이 만들어질지 몰랐다.
'빨리 만들길 잘했네.'
잠시 후, 어두운 표정의 아이들이 다른 장로를 따라 이동하자, 공터엔 본명 법기를 제작한 아이들만 남았다.
단상 위 장로는 그런 우리를 훑어보고는 나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본명 법기를 제작했다고는 하나, 피의 무게가 기록되진 않았다."
피의 무게란 특성을 뜻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의 무게를 확인하기 위해 대기할 수만은 없는 일.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위해 숙소를 비워줘야 하니, 오늘부터 오롯이 성인으로 대우하겠다."
'일손을 놀리지 않겠단 말이군.'
성인식이 끝나면 성적에 따라 각종 업무에 배치된다.
한마디로 용족의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저임금 고노동력 신입사원이 된다는 뜻.
"탑이 수리되면 각자 연락이 갈 테니, 그때까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알겠나?"
"네!"
아이들의 힘찬 대답에 장로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그럼 이만 해산한다. 며칠간 휴식 시간을 보내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도록."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나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숙소에 도착해 개인 짐을 챙기면, 기본 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와 새로운 독립 숙소가 제공된다.
그럼 그때부터 진짜 한 명의 어른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
"금파란. 너는 잠시 머물도록."
장로가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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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금정령, 대적점
장로의 부름에 금파월의 경고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금파월은 내가 그토록 빨리 내면의 샘에 들어갈지 모르고 폭파 시기를 정했다.
'설마. 혼혈인 게 들킨 건가?'
샘의 바닥에 닿지는 못했지만, 세 번째 특성 확인까지 끝난 상황.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 뒤로 오싹한 한기가 머물다 사라졌다.
하지만 내 우려는 한참 앞서나간 상태였다.
"금파란. 그대는 내면의 샘 깊이 들어갔었지?"
어느새 다가온 장로가 따뜻한 얼굴로 묻는다.
"그렇습니다."
"그럼 어떤 것들을 보았는지 말해주겠나?"
어차피 샘의 바닥을 찍고 올라오면, 개인의 특성은 전부 탑에 기록된다.
그러니 장로의 물음은 실례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대뜸 용의 위엄, 거짓 불능 같은 게임 용어를 말할 순 없었기에, 나는 내가 본 환영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다.
"오호! 고대용이 산을 휘감아? 그건 용족이 가진 위엄을 나타내는 현상이지. 좋구나! 아주 좋아!"
약자 멸시를 얻기 위해 중간 다리 역할로 획득한 용의 위엄이지만, 용의 위엄 자체만으로 꽤 훌륭한 특성이었다.
특히, 용족들 입장에서 보면 더더욱.
"그다음으로는..."
두 번째 설명은 거짓 불능에 대한 호수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히 피처럼 붉게 변한 현상은 거론하지 않은 채.
"그럼 그럼. 당연하지. 용족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지. 그럼 혹시 마지막도 확인했나?"
세 번째 특성을 확인하면 공식적인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될까?'
나는 거짓 불능이 분명한 환영을 떠올리며,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쉽게도 흐릿한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 아쉽구나."
'된다!'
장로는 아쉬운 듯 혀를 찼지만, 나는 반대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분명 거짓 불능을 타고났지만, 거짓말이 가능했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붉은 물방울이 호수를 물들인 것과 관련이 있을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혹시 어떤 이유로 물으시는지..."
"아! 그것 말인가? 탑이 폭발할 시점에 그 정도 성적을 보인 건 아주 오랜만일세. 비록 탑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드문 일이지."
장로는 굳이 뒷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로 말을 꺼낸 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즉, 뛰어난 인재이니, 미리 점찍어 두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로가 은근한 웃음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가는군. 혹시 생각이 있다면 초가당에 들르지 않겠나?"
"초가당(初加黨) 말씀이십니까?"
초가당은 단약을 제조하고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하는 단체였다.
수도계의 시작은 단약부터라는 구호 아래 처음을 뜻하는 의미가 포함돼있지만, 풀을 가공하는 초가(草加)의 중의적인 뜻이 담기기도 한곳이다.
"자네 정도의 인재라면 훗날 천단(天丹)도 이루지 않겠나?"
천단이라니?
그것은 단약의 최후 완성품으로, 한 알만 먹어도 신선이 된다는 영약이었다.
천단을 만든 이들을 천단사(天丹士)라 불렀는데, 당연히 단 한 번도 실존한 직위는 아니었다.
"과찬이십니다. 천단이라니요. 다만 저를 이렇게 불러주시는데, 응하는 게 도리겠지요."
"그래, 잘 생각했네. 그럼 조만간 봄세."
"예, 살펴가세, 가십시오."
나는 최대한 이곳 사람들의 말투를 따라 하기 위해 애쓰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장로는 내 어깨를 두 번 토닥거리더니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눈에 띈 게 화일지, 복일지.'
장로 눈에 띄어 남들이 받지 못한 일들을 하게 된다면, 분명 대륙을 탈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만큼 관심을 받게 되니, 내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도 컸다.
다만 이번 같은 경우는 선택의 도리가 없었다.
장로가 나를 특정해 권유했는데, 그것을 면전에서 거절하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텅 빈 터를 한번 둘러보고는 원래 있던 숙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중년 남성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내는 연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남자였는데, 푸른 눈동자가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사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벌써 일 장로와 면담이라니. 혹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있나?"
"일을 할당받을 때, 초가당에 방문하는 게 어떤지 물어보셨습니다."
"역시 그렇군, 우리 집법당(執法黨)에서도 그댈 눈여겨보았는데. 한발 늦었어. 어떤가? 우리 집법당은?"
집법당은 용족 내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곳 중 하나.
쉽게 설명하자면 경찰과 동사무소를 겸업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잡무를 처리하는 곳.
"약속의 무게를 알기에, 우선 초가당에 들러볼까 합니다."
장로 무서우니까 되묻지 말아라.
내 뜻을 단번에 파악한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런가? 하긴. 나라도 그렇겠지."
웃음도 잠시. 사내는 손을 가볍게 저었고, 그의 손위에 몇 가지 물품이 나타났다.
사내는 그것들을 내게 건넸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기본 보급품을 나눠주려고 왔네. 공간대 하나, 비행 법기 하나, 그리고 이것."
나는 공손한 자세로 물건들을 받은 뒤, 하나씩 확인했다.
공간대는 허리에 차는 저장 법기로, 흔히 5배수 공간대라 불리는 하급 법기였다.
비행 법기 역시 하급품으로 최고 속력이 50킬로 이하인 물건이었고, 마지막으로 받은 건.
[금파란]
내 이름이 새겨진 옥패였다.
옥패의 용도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용족 내의 화폐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이었다.
"처음 지급되는 명패에는 영석 스무 개의 값어치가 기록돼있네. 사용하는 방법은 알겠지?"
"물론입니다."
사내는 내 확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성인이 된 후 조심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설명하고는 몇 가지 물품을 추가로 주면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생각이 바뀌면 집법당에 찾아오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
사내가 사라진 뒤 혼자가 된 나는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하나, 둘, 셋...'
주변에 인기척이 너무 많아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눈치를 보던 이들은 한 명씩 나타나 다른 일자리를 제안했고,
"약속의 무게를 알기에..."
비슷한 핑계로 돌려보내는 과정을 몇 차례나 넘기고서야 진짜 혼자가 됐다.
'평소 플레이하던 것보다 느렸는데, 이 정도 반응인가?'
1층에서 3차례 감점을 받았음에도, 이 정도 관심이라니?
확실히 게임과 현실은 다른 점이 있었다.
잠시 후, 혼자가 된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알을 먼저 꺼냈다.
'분명 영충 알인데... 정확히 어떤 종류의 영충인지는 부화해 봐야 알겠네.'
인족 제사장인 어머니가 무슨 의도로 알을 선물했는지는 뻔했다.
바로 펫으로 부리란 뜻.
일반적으로 영수나 영충을 종으로 부리기 위해선 '종속의 인'이라는 술법을 펼쳐야 했다.
절대 충성하는 종속은 당연히 큰 도움이 되는 수하였다.
하지만 종속을 늘릴 때마다 의지력이 영구적으로 소비되기에, 아무렇게나 늘릴 수 없었다.
'배려가 보이네.'
그런데 알이 깨어나기 전에 선물로 줬다는 건 나를 위한 배려의 일종.
왜냐면 알을 깨고 막 태어난 영충은 처음 보는 인물을 어미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경우 종속으로 만드는 의지력이 훨씬 적게 소비되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알을 관찰하던 나는, 알을 깨우기 위한 재료들을 떠올려보고는 공간 팔찌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옥간 두 개를 확인했다.
"이건..."
옥간 두 개는 금파월과 어머니 두 사람이 각각 익힌 술법과 공법이 담겨있었다.
하나는 용족의 야수화 된 비늘을 이용한 '금정령(金精靈)'이라는 술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펼치는 '대적점(大赤點)'이라는 공법이었다.
'금정령과 대적점이라...'
중천 세상에도 정령은 있었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작고 귀여운 정령이 아닌, 자연의 속성만을 형체화 시킨 무자비한 존재였다.
존재 자체가 불덩이이고, 폭풍이며, 뇌전인 것들.
그런 무자비한 존재를 불러들여 전투에 활용하는 방법이 바로 정령술.
그리고 금정령은 정령술을 바탕으로 하는 술법이었다.
한동안 금정령의 내용을 파악하던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역시, 지금 익힐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우선 야수화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신체가 정령의 난폭함을 견뎌낼 정도로 단련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인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대단한 건 분명하지만, 다음에.'
그랬기에 금정령은 익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공간 팔찌 안에 수납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옥간을 이마에 가져갔다.
"흠..."
대적점은 확실히 인족의 공법이었다.
인족의 피가 섞인 걸 알았다면, 어머니의 공법을 전해줄 걸 그랬다며 툴툴거리던 금파월의 말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아마 이 공법은 어머니가 익힌 기본이 되는 호흡 공법이 아니라, 전투에 도움이 되는 술법에 가까운 공법일터였다.
'특이하네.'
공법의 기본 원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몸에 새겨, 내부의 온도를 무한히 순환시키는 데서 시작이었다.
전신의 온도가 네 가지 계절을 겪으며 순환하면 몸 중심에 나선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외부로 끌고 오면 전투에 활용할 수 있었다.
'제대로 익히면 크게 도움이 되겠어.'
내부에서 온도 차로 인해 생성된 나선이 외부와 공명하면 거대한 폭풍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대적점이라 불렀다.
'목성의 대적점인가?'
나는 대적점 공법의 설명이 목성에서 나타나는 특정 현상과 비슷함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금파월의 술법과 달리, 대적점은 당장 익힐 수 있었기에,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주입했다.
그렇게 한동안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다, 피곤함을 느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기 전에 새로운 거처로 이동하라는 집법당 사내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
혼자만의 독립된 공간인 새 거처.
그곳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 산맥에 있었다.
그곳엔 내 거처뿐 아니라 수백 개의 거처가 마련돼 있었다. 각각 수백 미터씩 경계를 두고 있어서, 사생활이 침해받을 일은 없어 보였다.
나는 산맥 중턱에 자리한 내 거처, 정확히는 동굴로 들어섰다.
일반적으로 거처가 위치한 높이로 그 사람의 신분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내 거처는 당연히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깔끔하네."
처음 본 거처는 대략 십여 평 정도의 넓이의 직사각형 형태의 동굴이었다.
내부에는 돌을 깎아 만든 침상 하나가 전부였고, 다른 집기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동굴 입구를 가릴만한 것도 없었기에, 이제부터 전부 스스로 만들거나 구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당장 입구를 만들기 위해 뛰어다닐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집법당 사내가 준 기초 살림살이 중에 거처의 입구가 되어줄 진법 깃발이 있었다.
휘릭- 푹-
잠시 후, 입구 양쪽에 깃발을 꽂자, 우윳빛 막이 생겨나며 입구를 완벽히 막았다.
나는 진법 깃발에 영력을 주입해, 막을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스윽- 쓱-
입구의 우윳빛 막은 내가 지나가자 자동문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생성됐다.
반대로 움직여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렇게 입구 설치가 끝나자, 돌 침상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영기를 수련하는 수도자는 기본적으로 잠을 자지 않았고, 먹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정신적 피로와 생명체 본연의 식욕은 전혀 다른 것.
해서,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콜라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다가 집법당 사내가 전해준 호리병이 생각나, 공간대에서 꺼내 뚜껑을 땄다.
뽕-
안에는 찰랑거리는 액체가 들어있었는데, 코를 가져다 대니 청량함이 느껴졌다.
'이게 영천수인가?'
영기를 머금은 물, 영천수.
살짝 입술을 적셔보자, 탄산수 같은 느낌의 청량한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아... 이래서 게임에서도 피로회복에 사용했구나."
마시는 순간 온몸에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영천수 한 병이 영석 두 개의 가치란 걸 떠올린 나는, 삼분지 일쯤을 꿀꺽꿀꺽 삼키다, 입술을 닦았다.
'이제 정말 중천의 삶이 시작되는 건가...'
그리고는 그대로 침상에 누워 동굴 천장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고요함 속에 잠에서 깬 나는 더 이상 휴식은 의미 없음을 깨닫고, 동굴 밖으로 나섰다.
놀면 뭐 하겠는가?
일해서 돈 벌어야지.
삼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다고는 하나, 사람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탈출에 필요한 준비를 끝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쉬지 않고 정진해야 했다.
"가자, 초가당으로."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란 듯.
나는 혼잣말과 함께 비행 법기를 꺼냈다.
그런 후, 그 위에 올라타 균형을 잡으며 발끝으로 영력을 집중했다.
그 순간.
스으으-
비행 법기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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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첫 임무
일 장로가 설명해준 대로 마을 남쪽에 들어서니, 초가당 건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거침없이 그곳으로 이동했고,
"어서 오시게, 형제여. 그렇지 않아도 장로님께 말 전해 들었네. 다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어."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청년의 모습에 나도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동시에 가까이 다가가 오른손을 왼쪽 어깨에 올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일 장로께서 부르시는 데 지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바로 와야지요."
"뭐? 하하. 어린 친구가 제법 어른스럽게 말하는군. 보기 좋아. 좋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는 단약 제조에 관심이 있으신가?"
단약은 모든 수도자가 일평생 동안 접하는 애증의 물품이었다.
평생 모은 재산을 단약 제조에 쏟아부었다가 망하기 일쑤였고, 반대로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안겨주는 물건이기도 했다.
"수도의 길을 걷는 이라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연단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렇게 시원하게 말이 잘 통하는 친구라니. 장로님께서 미리 언질 주신 이유가 있구만."
나는 청년의 칭찬에 대꾸 없이 가만히 웃음을 보였다.
그 모습마저 마음에 든 건지, 청년이 다가와 내 팔뚝에 손을 올렸다.
"나는 겸불이라 하네. 그대는?"
"금파란이라 합니다. 선배님."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팔뚝에 손을 올렸다.
이것은 영수족의 인사법 중 하나로, 손만 뻗어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믿는다는 것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금파란이라. 좋은 이름이군. 자 그럼 바로 일 얘기를 해보는 게 좋겠지? 설마 여기까지 와서 다른 일을 할당받을 건 아닐 테니 말이야."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내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잃지 않고, 거대한 비석을 꺼냈다.
비석은 3미터 가까운 크기였는데. 그 위에는 문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아랫부분의 '1단'이라 적힌 임무뿐이네. 하지만 장로께서 자네 칭찬을 하며 상위 등급의 임무를 배정해도 된다고 하셨네. 어떤가? 원하는 일이 있는가?"
나는 겸불의 말에 비석에 손을 가져다 대고 영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비석 표면에 적힌 임무명과 난이도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 자세한 설명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1단이면 너무 허드렛일이야. 돈도 안 되지.'
인간 종족은 수도자의 경지를 각각의 이름으로 구분했다.
영기를 받아들이는 연기기.
영기를 원단에 압축하기 시작하는 축기기.
압축한 원단을 완성된 단(丹)으로 빚어내는 결단기.
그리고 완성된 단을 형상화해 자아를 가진 원영을 만들어 내는 원영기.
원영기를 넘어서면 진정한 수도계의 1인으로 인정하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수사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물론 연기기나 축기기에 불과해도 수사라는 호칭이 붙기는 했지만, 그것은 서로 상대방을 띄워주기 위하다 보니 생긴 허례허식.
막상 원영기 이상의 고위 수사 앞에서 자신을 수사라 칭하는 하위 수도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인족과 달리 용족은 어떨까?
용족을 포함한 영수족은 각 등급을 단순한 숫자로 표현했다.
연기기 초기에 해당하는 가장 아래 등급을 '1단'이라 칭했으며. 원영기에 막 발을 내디딘 자를 '10단'이라 말했다.
즉, 겸불이 말한 1단의 임무는 정말 수도계에 막 입문한 초보 중의 초보들만 배정받은 임무란 뜻.
나는 1단 임무는 모두 배제한 채, 2단 임무부터 살폈다.
"내 역량으로 3단까지는 허락해 줄 수 있네만, 납기일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영석을 지급할 수 없네. 그리고 당연한 소리겠지만, 한번 임무에 실패하면 그 임무를 재배정 받을 순 없고 말이야. 그러니 신중하게 고르게."
용족은 성인이 되면 제각각 임무를 맡는다.
임무는 수입과 직결된 일종의 직업.
대부분은 한 달을 주기로 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그에 합당한 영석을 월급으로 지급하는 형식이었다.
영석(靈石)은 영기가 농축된 돌로써, 화폐이자, 수련 도구.
그렇기에 임무를 완수해 영석을 많이 받을수록, 수련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겸불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신중했다.
왜냐고?
그건 바로, 6단부터의 임무 때문.
축기기 후기에 속하는 6단이 되면, 그때부턴 용족의 대륙을 벗어날 수 있는 임무를 맡을 수 있다.
그 말인즉, 임무를 받고, 자연스럽게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뜻.
임무 중 사망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으니,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가장 자연스러운 탈출 계획.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삼십 년 안에 축기기 후기에 속하는 6단에 올라야 한단 말이었고,
당연히 영석을 꾸준하게 모으고, 재료를 사들여, 성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단 소리였다.
그러니 아무 임무나 선택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잦은 임무 실패 시. 6단이 돼도 외부 임무에서 배제될 수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신중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첫 임무 성적에 따라 다음 임무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
잠시 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나는, 2단 임무 중 하나를 선택했다.
"선배님. 여기 2단 임무 중. 가매초(歌昧草) 채집을 선택하겠습니다."
가매초란 말에 겸불이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가매초라고? 흐음... 사실 여기서 참견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만, 후배가 마음에 들어 한 소리하겠네.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크흠. 사실 가매초는 2단 임무이긴 하지만... 3단에 버금가는 난이도일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네가 알고 선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매초는 새벽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야광초지."
물론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른 채집물들이야 한 달에 한 모숨에서 세 모숨까지 구해야 하는 데 반해, 가매초는 반 모숨이면 충분하지. 그래서 처음엔 많이들 선택하지만... 사실 정말 쉽지 않은 일일세. 다들 번번이 실패하고 후회하지. 어떤가? 다른걸 선택해보는 건?"
겸불의 말은 고마웠지만, 그건 가매초의 습성에 대해 모르는 초보들의 실수.
"조언 감사합니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한번 도전해보고 싶군요. 임무 목표치가 한 달에 반 모숨이니 꼭 채워서 돌아오겠습니다."
한 모숨은 기다란 약초 따위를 손에 쥐었을 때 한 움큼 잡히는 정도를 말했다.
중천에선 그 수치가 정확했는데, 정확히 10줄기를 한 모숨이라 칭했다.
당연히 반 모숨은 5줄기. 즉 가매초 5개만 채집하면 된단 소리.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알았네. 그럼 여기에 명패를 올려놓으시게."
내 확답에 겸불은 오묘한 표정과 함께 기이한 문자가 적힌 옥판을 내밀었다.
잠시 후. 내가 옥판 위에 명패를 올리자.
화아악-
옥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임무 목록이 적힌 비석에서 가매초 채집 뒤에 적힌 숫자 10이 9로 바뀌었다.
다른 임무들은 숫자가 1~5 사이인걸 고려하면, 가매초 채집이 얼마나 인기 없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자 이걸로 완료네. 혹시 궁금한 게 있는가?"
"예, 채집 장소와..."
내가 용족 플레이를 많이 했다고 해서, 지금 장소에 익숙한 건 아니었다.
세상엔 수많은 용족이 존재했고, 게임을 재시작할 때마다, 위치나 지형이 조금씩은 변경됐으니까.
그래서 이제 막 성인식을 마친 이가 할만한 질문들을 쏟아냈고, 겸불은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그 정도면 됐는가?"
"네, 선배님.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 자네가 꼭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으면 좋겠군."
대화가 끝난 후, 겸불에게 인사를 건넨 나는 곧장 마을 서쪽의 늪지대를 향해 움직였다.
그곳이 바로 첫 임무지, 가매초 서식지였다.
+++
내가 가매초 채집을 첫 임무로 받은 건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가매초는 획득 방법만 알면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말인즉, 한 달 내내 일하지 않고, 자유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단 뜻.
두 번째,
가매초의 서식지는 대부분 늪지 전체였다. 그래서 활동반경이 넓어질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채집물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
성인식이 막 끝난 초보 용족은 매우 작은 활동반경만 허락됐기에, 그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유,
바로 어머니란 인물에게서 받은 알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알에서 태어난 영충들은 영석을 비롯한 영기가 함축된 원석을 식량으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 내 처지에 영석은 쓰기도 부족한 재화.
아무리 대단한 영충이 태어난다고 해도 영석을 밥으로 줄 순 없었다.
해서 생각한 것이 가매초였다.
가매초를 몇 가지 재료와 함께 단약으로 만들면, 영충들이 좋아하는 간식이 되는데, 초반에는 영석보다 좋은 먹이였다.
그러니 다른 임무를 고를 리가 있겠는가?
쉽게 말해 가매초 채집은 개꿀...
"잠깐 정지!"
생각을 정리하며 이동하는데, 누군가 길을 막아섰다.
가슴부위에 '수호'라는 문자가 새겨진 이들.
마을과 외곽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호대였다.
"이곳부터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명패를 보이도록."
나는 짧게 목례를 하고선 명패를 내밀었다.
"흠. 이제 막 성인식을 끝낸 친구인가? 얼굴이 익숙지 않군."
"그렇습니다. 첫 임무를 배정받고 늪지로 향하는 길입니다."
"오호... 첫 임무부터 늪지라. 제법이군. 좋다. 이동하도록. 무사히 임무를 마치길 기원하지."
수호대는 허리에 찬 네모난 석판에 내 명패를 가져다 댔고, 삐빅- 소리가 나자 다시 내게 내밀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수호대가 찬 석판과 임무가 적혀있는 비석은 연결돼 있었다.
해서, 이렇게 간단하게 신원이 확인되는 것.
언뜻 보면 최첨단 과학기술 같지만, 이 모든 건 술법으로 만들어진 장치였다.
다만 이 정도 수준의 장치는 제작을 전문으로 꽤 깊게 공부해야 했기에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물건들은 대부분 제사장의 손을 거친다. 그럼?'
수호대가 손으로 늪지대 방향을 가리키며 인사하는 사이, 나는 금파월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몸의 아버지이며 내가 머무는 용족의 제사장직을 맡은 인물.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게임에서 배우지 못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나는 잠깐 떠오른 상념을 가슴속에 묻은 채, 수호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마을 한쪽에 연결된 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고, 울창한 숲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럼 다시 날아볼까?'
숲을 마주하자 비행법기를 꺼내 하늘로 올랐고,
곧장 늪지대가 자리한 곳을 향해 쉬지 않고 날아갔다.
그렇게 장장 3일을 날아가자, 나무들 사이로 질퍽한 녹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바로 늪지대로구나."
다른 대륙에서 시작하는 타 종족 유저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초반 자원의 금광이라 불리는 용족의 늪지대에 도착했다.
+++
수십 미터는 될듯한 푸른 나무들이 울창한 숲. 그리고 그 숲을 메우고 있는 질퍽한 흙.
용족의 늪지대는 물보다는 점도가 낮은 흙들이 주를 이뤘다.
중간중간 물만큼이 점도가 낮아, 발을 디디는 순간 빠져버리는 곳도 다수였고, 어떤 곳은 너무 높은 점도 탓에 한번 잘못 디디면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 늪지대 곳곳엔 악어과에 속하는 괴수들이 간혹 나타나 수도자를 기습했고, 날다람쥐처럼 생긴 괴수도 수도자를 괴롭혔다.
게다가 가매초가 자라는 곳엔 명충(明蟲)이라 불리는 벌레가 살았는데, 수도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파리였다.
흡혈 파리 주제에 이름에 '밝다'라는 뜻이 붙은 이유는, 피를 빨아먹을 땐 머리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서였다.
"명충만 찾으면 가매초는 쉽게 구할 수 있지."
이곳의 원주민들은 명충이 늪지대에 서식하는 종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명충은 오직 가매초 근처에서만 서식했다.
즉 명충만 찾으면 인근에서 가매초를 구할 수 있단 뜻.
그럼 왜 이곳 원주민들은 그걸 모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필요성을 못 느껴서이다.
유저는 수십 번이고 초보 시절을 반복하기 때문에, 공략이란 걸 만든다.
하지만 이곳 원주민들은 초보 시절을 한번 겪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수행이 오르면,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니, 더 깊이 알아볼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특출난 자가 나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겸불이 이 사실을 모르는 걸 보면, 이곳 용족들은 이문제를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가매초가 새벽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니, 연구하기 애매하기도 했겠지."
덕분에 내가 꿀 빨 수 있게 된 것이고 말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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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성과
가매초를 찾기 위해선 우선 명충을 찾아야 한다.
그럼 명충을 찾기 위해선?
일반 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명충을 눈으로 식별하기란 매우 고난한 일.
하지만 흡혈하는 특성을 이용하면 아주 쉽게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푹-
"꽤애액"
우선 늪지대에 살아가는 짐승 중 피를 가진 생명을 생포하고,
주르륵-
피만 따로 분리한 다음.
주변 나무에 일정하게 뿌리면 된다.
그러면 피를 흡수한 명충이 빛을 내고, 그것을 따라 그들의 서식지를 찾아내면 된다.
"합!"
잠시후, 내 손짓에 따라, 주먹만 하게 모인 짐승의 핏방울이 방울방울 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핏방울들은 일정량으로 나뉘어 주변 모든 나무에 달라붙었고,
위이잉-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 각종 벌레떼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피를 묻힌 나무들을 주시하며, 비행 법기 위에서 차분히 다음 과정을 기다렸다.
위이잉-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나무에서 작은 불빛이 잠시 서리다가 금세 사라졌다.
"거기구나!"
나는 지체없이 그쪽으로 비행 법기를 조종했다.
"음?"
하지만 불빛이 머물다 사라진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수많은 날벌레 사이에서 명충을 식별하긴 쉽지 않았다.
"역시 게임처럼 쉽진 않군."
게임에선 발견된 명충을 클릭하면, 서식지까지 자동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아쉽게도 현실은 노가다를 강요했다.
"합!"
잠시 후, 또 한 마리의 짐승을 잡아 와 피를 모은 후, 주변에 집중적으로 뿌렸다.
위이잉-
그러자 눈앞의 나무에서부터 시작해 몇몇 날벌레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큰 벌레 한 마리를 잽싸게 잡아, 영력을 묻혀 몸통에 표식을 남겼다.
그런 후, 피를 빨아먹게 내버려 두자, 영력이 묻은 명충은 식사를 끝내고 어디론가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서식지로 날아가라.'
잠시 후, 피가 묻어있던 나무를 벗어난 명충은 근처의 나무로 날아가더니, 뿌리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곳을 살펴보니, 똑같이 생긴 날벌레 대여섯 마리가 집을 짓고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확해온 피를 나눠 먹는군.'
명충의 습성을 떠올린 나는 해당 나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하루를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동이 트기 직전.
화아악-
명충의 서식지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야광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즉시 나는 거대한 산과 산을 휘감은 용을 이미지화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용족 특성, 용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모든 정신적 약화가 해소됩니다.]
그러자 전신에 고양감이 차오르며 눈앞이 맑게 변했다.
사람들이 가매초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그건 바로, 가매초가 모습을 드러낼 때 보이는 빛이 사람을 현혹하는 파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 수사들은 이 파장이 식물이 노래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바로 노래하는 새벽 풀, 가매초 인 것이다.
"제대로 작동한 것 맞겠지?"
상태창이나 알림창이 보이지 않으니 순전히 오감에 따라 특성이 발동했는지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매초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걸 보면, 정신적 약화를 해소하는 용의 위엄이 제대로 발동한 건 분명해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가매초에서 보이던 빛이 빠르게 희미해져 가자,
"아차!"
나는 재빨리 다가가 뿌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가매초를 채집했다.
가매초는 어느새 빛을 잃었지만, 완전히 뿌리째 뽑히자 더는 모습을 감추진 않았다.
보랏빛 줄기가 매우 위험해 보이는 풀.
나는 한참 동안 가매초를 관찰하다가, 손에 영력을 모았다.
그러자 가매초가 수분이 사라지며 점점 말라갔고,
파스르-
급기야 완전히 바싹 마르더니, 가루로 변해 손안에 수북히 쌓였다.
"그럼 이제 제대로 움직여 볼까?"
내가 가매초를 가루로 만든 이유?
그건 바로 사람들이 모르는 가매초의 또 다른 습성 때문이었다.
새벽 동이 트기 전 아주 잠깐 모습을 보이는 가매초.
그런 가매초에겐 이상한 습성이 있었는데, 바로 가매초끼리 닿았을 때, 빛을 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습성은 가루를 낸 가매초로도 효과를 볼 수 있었고 말이다.
잠시 후, 또 한 마리의 짐승을 잡아 온 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했고,
"여기 있네."
명충의 서식지를 찾은 후, 근처에 가매초 가루를 매우 소량 흩뿌렸다.
화아악-
그러자 가까운 곳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보랏빛 야광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바로 가매초를 채집했고, 직후 드넓은 늪지대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한 달에 다섯 뿌리?
이 속도면 하루에 다섯 뿌리도 넘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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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시간을 제외하면, 늪지대에 머물 수 있는 날은 확연히 줄어든다.
그렇기에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채집에 열중해야, 목표를 간신히 채울 수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초보 수사라면 말이다.
"이걸로 열 모숨인가?"
나는 늪지대에 들어선 후 아홉 번째 새벽을 맞이하며 가매초 열 모숨. 임무 목표치로 보자면 반 모숨의 스무 배를 채집하는 데 성공했다.
첫날 첫 가매초를 구하기 위해 하루를 그냥 보냈단 걸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채집 속도를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채집한 가매초를 전부 가져다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런 행동은 상대에게 위화감을 조성시킬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니까.
"가매초 반 모숨에 영석 두 개... 도둑놈들."
가매초를 인간들의 성에 납품하면, 한 모숨에 영석 30개는 거뜬히 받을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50개도 가능했다.
가매초는 용족뿐 아니라 다른 종족도 꽤 귀찮아하는 품목 중 하나.
그나마 초반 성장을 지나면 사용하지 않기에, 그 정도 가격이 유지되는 거지. 만약 고위 수사들도 꾸준히 사용하는 품목이었다면 가격은 천정부지 치솟아 올랐을 물건이었다.
나는 임무 보상용으로 가매초 한 모숨을 허리의 공간대에 수납하고, 나머지는 전부 팔찌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기억을 뒤적거리다가, 또 다른 채집활동에 나섰다.
"가매초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이제 다른 걸 수확해볼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면 가매초만 꾸준히 채집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당장 가매초를 화폐인 영석으로 교환할 수 없는 처지이니, 다른 필요한 것들을 직접 채집해야 했다.
알을 부화하는 데 필요한 것들부터 시작해, 성장에 필요한 기초 채집물까지.
한시라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마냥 긴 것만은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용족의 대륙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경지는 6단.
인간으로 치자면 축기기 후기.
그 정도 수준은 중천에서는 초보라 불릴만한 경지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랜 플레이를 통해 고위 수사까지 올라본 내 기준이지, 결코 아무렇게나 오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축기기라 하면, 각종 호흡법과 공법을 통해 몸속에 쌓고 쌓은 영기를 원단에 고밀도로 압축하는 경지.
일반적으로 수십 년은 정련해야 닿을 수 있는 경지였다.
재능이 떨어지는 이들은 50년 가까이 수련에 매달리고도 축기기에 오르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결코 쉽게 볼 경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용족은 영기 친화력과, 영기 민감도가 타 종족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뛰어나지만, 그만큼 몸속에 채워야 하는 영기 총량도 비례해 커졌다.
그랬기에, 삼십 년은 결코 룰루랄라 노래 부르며 6단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물론 각종 성장 방법을 꿰뚫고 있는 나는 다르지만 말이다.
"좋았어. 월령초는 이 정도면 됐고, 다음은 파라마 잎을 찾아볼까?"
그렇게 채집활동에 매진하길 한 달.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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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꼬박 채우고 돌아오자, 겸불이 놀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자네... 설마 한 달 내 늪지에서 머문 건가?"
"그렇습니다."
"세상에... 가매초 채집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한두 번은 휴식을 취해야지."
내 출입 기록은 전부 명패에 남는다.
'이동하는 데만 왕복 6일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가볍게 웃으며 넘겼다.
"쉽지 않은 일인데, 허투루 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목표치를 달성할 때까진 쉼 없이 움직여야지요."
"그건 그렇지만... 대단하네. 대단해. 다만 한가지 조언하자면, 너무 무리하지 말게. 영기의 도움으로 피로를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하나, 우리 몸도 자연적인 회복이 필요한 법일세."
맞는 말이다. 그래서 틈틈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 두 번 말하진 않을 테니. 앞으론 적당히. 알겠지?"
"네, 선배님."
내가 깍듯한 태도를 보이자, 겸불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렸다.
그리고는 석판과 비석을 꺼내며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계산을 할 차례군, 자 목표치는 달성했는가?"
겸불이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허리에 찬 공간대에서 가매초 한 모숨을 꺼냈다.
그러자 겸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허어, 반 모숨이 아니라 한 모숨이라고? 자네, 무슨 가매초 밭이라도 발견한 건가?"
겸불은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라... 어떻게 채집한 건지 알려줄 수 있겠나?"
겸불은 가매초를 잽싸게 채가더니, 한뿌리 한뿌리를 조심히 다뤘다. 그리고는 총 10개의 가매초인 걸 확인하고 얼굴에 빛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횡령을 저지르기 직전의 사람이 지을법한 기대감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
나는 내색 없이 말했다.
"늪지 깊은 곳에서 우연히 인근에 모여있는 가매초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만 네 뿌리라, 지금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말인가? 대단하군. 대단해. 능력도 출중한데 운도 좋다니."
겸불은 내 말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석판을 내밀었다.
"원래라면 반 모숨에 영석 두 개일세. 하지만 가매초를 채집하려는 인원들이 너무 적어서 일정량을 충족하면 보상을 올리란 지시가 있었지. 자 여기에 명패를 올리게, 보상으로 영석 다섯 개를 충전해 줌세."
보상이 영석 네 개가 아닌, 다섯 개란 말에 기분이 좋아져야 할 테지만, 진짜 가치를 알고 있는 나는 속으로 그저 웃을뿐이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표현할 순 없는 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척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혹 현물로 받을 순 없는지요? 당장은 수련에 사용할까 해서 말입니다."
"안될 게 뭐 있겠나? 현물로 원한다면 현물로 주지. 다만 물건을 살 땐 명패에 충전해 사용하는 게 더 이득인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또 한 번 미소 지은 겸불은 공간대에서 영석 다섯 개를 꺼내 내밀었다.
푸른 빛이 맴도는 주먹만 한 돌.
중천의 화폐이자, 수련 도구, 혹은 제작 재료로 사용되는 하급 영석.
나는 초보 수도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영석을 가져와 공간대에 담았다.
앞으로도 나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영석은 현물로만 받을 생각이다.
왜냐고?
용족의 명패에 담긴 충전용 영석은 영기를 이용해 기록한 가상 영석.
용족의 대륙을 떠나는 순간,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니 그런 것을 보유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럼 다음 임무를 바로 받겠나?"
'역시 성과가 좋으니 이렇게 나오는구나.'
빤히 바라보는 겸불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우선 며칠간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다시 들러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소릴. 그럼 충분히 쉬고 들르게. 이제 자네에겐 3단 임무를 맡겨도 전혀 불안하지 않겠어. 하하."
그 말은 이전엔 명령이 내려와 3단 임무까지 줄 순 있었으나, 속으로는 불안했다는 소리.
나는 상대의 말에서 조금은 신뢰를 쌓았다는 생각에 마주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어깨에 손을 올려 예를 표하고는 초가당을 벗어났다.
휴식?
물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공간 팔찌 안에 고이 잠들어있는 알을 떠올렸다.
"필수 재료들은 준비됐으니, 몇 가지 물건만 구하면 부화시킬 수 있겠지?"
이제 상점가에 들러, 알을 깨우기 위한 남은 재료를 사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도서관부터 들러야지."
용의 위엄을 제외한 두 가지 특성.
그것들이 정확히 뭔지 알아봐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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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거인의 발걸음
도서관은 마을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네모난 정사각형 건물이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3층 정도 높이의 원형 건물이었다.
멀리서 보던 모습은 결계 때문에 주변이 왜곡되었기 때문,
나는 명패를 손에든 채 결계를 통과해, 도서관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처음 보는 친구군. 이곳엔 무슨 일이지?"
입구에 도착하자, 듬직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생긴 여인이 나를 반겼다.
그녀 역시 가슴에 '수호'라는 표식이 있는 걸 보면, 수호대의 일원.
게다가 꽤 중요한 도서관을 지키고 있다면 제법 직위가 높은 사람인 걸 의미했다.
나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첫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이제 도서관을 이용할 조건이 된다 알고 있는데..."
성인식이 끝난 후, 첫 임무, 그러니까 한 명의 용족으로 인정받는 일을 해내야 상점가를 비롯한 수많은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겁이 많은 친구들이 성인식 이후 마을에 틀어박혀 사냥을 나가지 않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었다.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바로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는데. 도서관을 이용하는데 영석을 내야 하는 건 알고 있을까?"
"물론입니다."
내가 알기로 첫 이용에는 영석 1개, 두 번째부터는 입장료가 3개로 고정이었다.
"그래? 그럼, 여기."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서 석판을 꺼내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명패를 그 위에 올렸고,
삐빅-
"이제 들어가 봐. 다섯 날까지 머물 수 있으니 최대한 시간을 채우고 나와. 두 번째 방문부터는 영석 10개를 내야 하는 걸 잊지 말고."
영석을 지불하고 명패를 공간대에 집어넣으려다, 여인의 말에 움찔 행동을 멈췄다.
"10개 말입니까?"
"응? 왜?"
"그럼 첫 이용에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가격도 모르고 온 건가? 당연히 첫 이용 시에는 영석 다섯 개를 내야지."
여인은 말을 끝내며 '이런 초보를 봤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흘겼다.
'뭐?'
내가 알던 기억과 달라, 재빨리 명패에 영기를 불어넣었다.
'진짜네.'
하긴, 제대로 된 용족이라면 이런 식의 거짓말은 하지 않을 테니.
"왜? 문제 있나?"
그렇다고 특성을 확인하지 않고 지나갈 순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헌데 혹시. 더 조언해주실 게 있으실까요?"
"조언이라..."
여인은 한동안 입술을 쭉 내밀고 허공을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없는데?"
"...알겠습니다."
왠지 약이 올랐지만, 그러려니 하고 여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지나쳐 입구로 들어가려는 찰나.
"아, 지하는 타 종족에 관한 자료들만 모아놨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 없어. 시간 낭비하지 마."
여인은 조언 비슷한 말을 던졌다.
'알고 있거든?'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고 입구로 움직였다.
+++
도서관 내부는 매우 간단한 구조였다.
중앙이 뻥 뚫려있었고, 벽면으로 책장이 한가득 나열돼 있었다.
책장에는 기다란 옥을 엮어 만든 옥간과 재질이 제각각인 서책이 빈틈없이 정렬돼 있었다.
1층부터 시작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방대한 자료에 눈에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게임에선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게임 안에선 도서관 내부가 대부분 하나의 배경일 뿐이었다. 몇몇 책장만 이용 가능했고, 그곳에서 대량의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대학교 중앙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자료의 보고였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어디에서 찾아야 하지?'
게임과 달리 원하는 정보의 위치를 알 수가 없으니, 순간적으로 난감해졌다.
'아! 혹시?'
그러다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하며 전신에 고양감을 끌어올렸다.
[용족 특성, 용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패시브 특성이자 액티브 특성인 용의 위엄은 고유의 파장을 가지고 있다.
중천에서는 영기의 파장이 의미하는 게 단순하지 않았으니.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몸에서 퍼지는 미묘한 파장에 특정 위치가 반응한다.
도서관 내부는 계단이란게 없었기에, 뻥 뚫린 중앙에서 위로 솟구치며 해당 지점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3층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
그곳에 도착하니, 용족이 가진 피의 무게에 대한 과거의 역사와 함께 방대한 양의 정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긴, 일일이 이 많은 걸 전부 확인하게 할 리는 없지."
용족도 고 지능을 지닌 생명체.
당연히 편의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고,
"자, 그럼."
'피의 무게'에 대한 정보로 가득한 책장의 끝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휘리릭-
그러자, 내가 흘려보낸 영력에 반응해 서책 하나가 내 손으로 날아왔다.
나는 책의 표면을 한번 손끝으로 느끼며,
'숙명을 받아들인 후인들'
제목을 빠르게 읽었고, 곧장 그것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책 속에 담긴 내용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음...'
책 속에 담긴 내용이 눈이 아닌 뇌리로 직접 전달되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뇌 속에 직접 새겨넣듯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당연히 지식의 잔상도 일반 암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오래 지속됐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했을까.
"이 안에는 없네."
서책 한 권의 내용을 전부 습득했고, 곧이어 다음 책을 끌어와 이마에 가져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갔다.
+++
책 속의 내용을 뇌 속에 직접 주입하는 건, 일견 편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두 권 세 권 연달아 정보를 주입받다 보면, 어마어마한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바다와 같은 정신력과 의지력을 지닌 고위 수행자라면 모를까. 지금의 수행으로는 세 권을 읽을 때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다.
"이래선 찾을 수 있을까?"
도서관에 입장한 지도 벌써 나흘째.
거짓 불능이 분명한 호수에 붉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현상과,
거대한 발이 전신을 짓누르는 환영에 대한 정보를 전혀 찾지 못했다.
다음 방문부터는 영석 10개를 지불해야 하니, 왠지 모르게 초조함이 밀려왔다.
제대로 된 활동만 시작한다면, 그깟 영석 10개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괜히 눈에 띄어봐야 좋은 것 없는 내 처지에선, 눈치 보지 않고 재화를 벌어들이는 건 지양해야 했다.
그렇게 또 다른 서책을 불러와 확인 작업을 이어가는데.
"피의 무게의 이전에 관하여?"
지금까지와 다르게, 어떤 특정한 정보가 아닌, 필자의 의견을 적어놓은 내용이 눈에 띄었다.
피의 무게란 게임 용어로 '특성'.
관심이 동한 나는 재빨리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길 한참.
"아!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책 속의 내용은 피의 무게. 그러니까 특성을 다른 이의 몸에 주입하는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혈에 가까운 피를 절반 이상 상대에게 주입하고, 특수한 재료와 술법을 이용해야 한단 내용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너무 심해, 열에 아홉은 죽는 게 당연했고, 나머지 하나는 광증에 걸려 미쳐버린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책 말미에 보면, 딱 한 번 성공한 사례가 나오는데, 그자는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 광증이 도져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는 걸 제외하곤 매우 건강하게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 특성에 주입된 특성이 결합해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가만? 혈맥에 순혈을 덮어쓰기 한다고?'
그리고 책 속의 내용을 전부 받아들이고 나자, 내 머릿속에선 생각의 고리가 다른 곳에 철컥하고 걸렸다.
마치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던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나도 어찌 보면 이 책 속의 실험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용족이긴 하지만, 내 절반은 인족. 즉 또 다른 순혈이 주입된 혼혈이나 마찬가지야.'
처음부터 혼혈로 태어난 것과 피를 주입받는 건 의학적으로 보면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순혈은 '빨간 피'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핏속에 담긴 혈맥의 힘, 피의 무게 등 초자연적인 것들을 뜻했다.
생각이 확장되자, 그동안 외면했던 정보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거대한 발... 용족의 특성에서 찾으려니깐 찾을 수 없던 거지. 인족에서 찾는다면... 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용족에게 히든 특성이 있듯이, 인족에게도 히든 특성은 있었다.
그것도 용족과 비교해 전혀 꿀리지 않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특성이.
극악의 확률 탓에, 커뮤니티에서 해당 특성을 얻은 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엔피씨와 고서를 통해 항상 유저들의 관심에서 빠지지 않는 그것.
'거인족의 혈맥.'
고대용의 후예가 지금의 용족이듯.
고대 거인족의 후예가 지금의 인족.
평균신장이 팔 미터가 넘고, 야수화를 통해 수십 미터까지 거대해지는 거인족.
타고날 때부터 중력을 몸 안에 품고 태어나, 한때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포악한 존재였던 종족.
'내 특성이 인족의 히든 특성일까?'
나는 내가 아는 거인족 관련 특성을 떠올렸다.
게임에서처럼 특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용의 위엄을 사용했을 때처럼 의지를 움직여야 한다.
'한번 해보자.'
패시브 특성이라면 상관없지만, 몸에서 어떤 거인족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말인즉 액티브 특성이란 뜻.
우선은 내면의 샘에서 본 환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거대한 발이 나를 짓밟으려 했었지.'
그것을 이미지화하며 특성을 발동하기 위해 고양감을 끌어올린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알고 있는 특성의 이미지와 내면의 샘에서 본 환영이 일치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인족의 히든 특성, 거인족의 특성은 세 가지뿐.
만약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내가 가진 특성과 일치한다면 힘이 발휘될 것이고, 아니라면 다시 정보를 뒤져야 한다.
잠시 후. 기억의 단편을 불러들여 특성을 깨워본다.
'가장 유명한 건 히든 특성 거인족의 후예'
피부가 강철보다 단단해지고, 몸집이 수십 배 커진다. 대신 특성을 발동하는 시간 동안 영력을 외부로 발출할 수 없다.
한마디로 완전한 근접기.
'이건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특성을 이미지화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두 번째는 중력 거인!'
중력 거인은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특성.
오직 커뮤니티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그것도 딱 한 명이 언급했을 뿐이다.
강호강.
내가 용족만 주구장창 파고들었듯이.
오직 인족만 플레이하며 진심으로 연구를 거듭했던 유저. 강호강.
어느 날부턴가 게임을 접었는지 작성 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지만, 그 사람에게 배운 것들이 참 많았다.
중력 거인은 그 사람이 언급한 인족 히든 특성 중 최고이자, 최상의 특성.
바로 거인족의 핵심 능력인 중력을 어설프게나마 몸 안에 보유하고 조종할 수 있는 특성이었다.
그 위력은 본 적이 없었기에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다만 고서에 따르면 그 어떤 능력도 비교 불가라 했다.
애초에 중력이 무엇인가?
행성을 끌어당기고, 시공간을 휘게 하는 우주 법칙 중 하나였다.
그런 것을 일개 생명체가 조종한다면?
게임이니까 가능한 설정이었지. 그런 존재는 존재만으로 밸런스 붕괴였다.
그래서 게임 설정의 일부분일 뿐이지 캐릭터가 절대 얻을 수 없는 능력이라는 말에 대부분의 유저가 동의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중력 거인을 이미지화하며 거대한 발을 떠올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특성을 떠올렸다.
'거인의 발걸음. 이것도 아니라면... 다음 방문엔 지하라도 가봐야 하나?'
거인의 발걸음.
언뜻 보면 거대한 발과 가장 관련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세 번째 도전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왜냐고?
거인의 발걸음은 그나마 접할 수 있는 히든 특성이었고,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였다.
가장 큰 특징은 패시브적 성격이 강한 특성이란 것.
즉. 내가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항상 발동된 상태란 뜻.
평소엔 저강도로 발동하고, 액티브로 사용할 때는 고강도로 발동된다.
그러한 특징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껏 이곳에서 눈을 뜬 후, 한 번도 저강도 상태의 거인의 발로 추측되는 특성을 느껴보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해봐야지.'
하지만, 알고 있는 특성이 세 개뿐이었으니. 시도조차 안 하는 건 어리석었다.
그래서 내면의 샘에서 보았던 거대한 발을 떠올리며, 내가 알고 있는 거인의 발걸음의 특징을 이미지화했다.
동시에 고양감을 끌어올리자.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부르르-
내 주변의 영기가 내 영력에 공명하며 위험한 파동이 주변을 물들인다.
'이건!'
파동이 말하는 바는 하나.
바로 내가 찾으려 했던 두 번째 특성이, 인족의 히든 특성인 거인의 발걸음이란 뜻.
그리고 거인의 발걸음이 건물 내부에서 발동한다면?
'안돼!!'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나는 그 즉시 영력을 강제 해제하며 집중을 풀어버렸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조금씩 모여드는 기운을 강제로 날려버리며 동시에 몸속 가득 차오르는 고양감을 억지로 꾹꾹 눌렀다.
그러자 주변과 공명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아무 일 없듯 주변은 평온을 되찾았다.
'큰일 날 뻔했다. 그나저나 내 특성 중 하나가... 거인의 발걸음이었다니.'
특성을 찾기 위해 환영을 떠올리며 이미지화를 할 때도,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중천에서 혼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기도 했거니와, 종족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특성이 교차하며 나타날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특성, 그러니까 피의 무게라 부르며 혈맥의 힘이라 칭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피를 통해 전해지는 종족 고유의 능력이었다.
그런 고유의 능력이 양쪽 종족 모두에서 발현되다니?
게시판에 글이라도 올리면, 조롱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설마?'
그 순간, 거짓 불능에 붉은 물방울이 떨어져 기능을 상실하게 만든 게 떠올랐다.
'설마? 붉은 물방울이 피? 인족 혈맥의 힘?'
그래서 거짓 불능 특성을 타고났음에도, 거짓말이 가능한 건가?
인족이 가진 혈맥의 힘 때문에? 아니면 피가 희석돼서?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편으론 실마리를 찾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고를 이어가기도 전.
휘릭-
훈풍이 내 뺨을 스쳐 지나간단 느낌과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여인이 나를 빤히 내려보고 있었다.
"너, 혹시 방금 뭘 한 거야? 아니, 질문을 정정하지. 조금 전의 파동, 네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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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재료 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