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재료 수집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수호대 여인.
1초, 아니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의 파동을, 그것도 내 주변에서 일어난 미약한 공명을 느낀 거면, 여인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고위 수사였다.
싸늘하게 식은 여인의 눈빛에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서, 선배님? 갑자기 여긴 왜?"
어리석게 곧바로 맞다 틀리다를 말하면 안 된다.
우선은 평범한 초보들이 보일 반응이 먼저였다.
"흠."
여인은 내가 말을 더듬으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입술을 굳게 닫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말했다.
"다시 묻지. 조금 전의 파동, 네 짓인가?"
"파동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시련의 탑에서 본 피의 무게가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 이곳에서..."
휘익-
내 말이 끝나기도 전.
여인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내가 읽고 있던 서책부터 시작해, 나흘간 내 손길이 닿았던 책과 옥간들이 전부 책장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그러길 잠시.
타다닥-
여인은 또 한 번 눈썹을 찡그렸고, 책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미안하군, 내가 예민했어."
"예?"
"아니다. 뭔가 불길한 파동이 느껴졌었는데, 하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아이가 표출할만한 건 아니었지."
거인의 힘에 반응한 건가?
아니면 인족의 기운에 반응한 건가?
여인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도서관을 휙휙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남은 시간도 정진하도록. 하지만 이런 서책들을 뒤진다고 변하는 건 없다. 피에 담긴 무게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깨닫는 힘. 이론적인 공부보다는 실생활에서 직접 적용해보는 게 더 나은 공부가 될 테다."
내 시간을 방해한 게 미안하기라도 한 건지, 여인은 한동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찝찝함이 남은 얼굴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변해 사라져버렸다.
"족장님을 봬야 하나."
사라지기 전 짧은 한마디로, 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휴...'
혹시나 듣는 귀가 있을까 봐,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는 여인이 떠난 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금 전 특성에 관한 걸 떠올렸다.
특성이 무언인지 알았으니 궁금증이 해결된 게 아니냐고?
절대 그렇지 않았다.
특성이 피의 무게라 불리는 이유.
그건 바로, 태어날 때부터 핏속에 유전자처럼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런 특성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이제야 거인의 발걸음을 인식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현재, 거인의 발걸음을 강제로 멈췄음에도, 발끝으로 미묘한 감각이 느껴진다.
굳이 특성을 발동시키지 않고도,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짓밟아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말인즉,
내가 알고 있던 정보대로, 거인의 발걸음은 패시브적 성격이 강한 능력이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라는 물음이 생긴다.
왜? 이제야 이걸 인식할 수 있게 된 건가?
패시브라면 처음부터 느꼈어야 정상인데?
'조금 전 그자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말대로, 특성이란 건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몸에 내재된 힘이었다.
유저들은 게임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상태창을 열어 자신이 보유한 특성을 확인...
'잠깐? 확인?'
생각을 이어가는 찰나, 확인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확인을 다른 말로 하면 '인지'라 표현할 수 있다.
인지가 우선되어야 인식이 가능하다.
'설마... 패시브든 액티브든 인지한 후에야 몸에서 발현되는 건가?'
하나의 가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유저들은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특성을 인식한다. 그러니 캐릭터도 그 순간부터 자신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어떤가?
시련의 탑에서 환영을 보기 전까진 어떤 특성을 지닌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캐릭터 선택 시 용의 위엄을 골랐다고는 하나, 그 캐릭터와 내가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었으니 말이다.
'정말 그럴까? 내가 어떤 특성을 지닌건지 인지를 거쳐 인식을 마쳐야 하나?'
수호대 여인은 '자연스럽게'라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인지와 인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듯 들리지만, 그녀도 처음엔 내면의 샘에서 특성을 인지한 건 마찬가지 일터.
그 후에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특성을 발휘하게 된 것일 테다.
'내 생각이 맞는 걸까?'
확실한 건 없지만, 정황상 그렇게 추론이 가능했다.
생각은 한번 더 깊게 이어진다.
그렇다면, 네 번째 특성.
만약 내 가정이 맞다면, 네 번째 특성 역시 우연히라도 발현되지 않을 거란 소리였다.
흐릿했던 환영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습득해야 진짜 내 능력이 된단 소리였다.
그리고 그 말은.
'이곳을 벗어나면 가장 먼저 내면의 사원에 들러야겠구나.'
용족의 대륙을 벗어나면 특성을 확인할 방법은 영수족이 운영하는 내면의 사원에 방문하는 길뿐.
내 추측이 맞다는 가정하에. 내 두 번째 목표는 자연스럽게 정해지고 있었다.
탈출에 이어, 사원 방문으로.
'쉽지 않겠지만.'
내면의 사원을 이용하겠다는 말은, 폐쇄적인 영수족에게서 그곳의 사용권한을 획득해야 한다는 뜻.
절로 고난이 예상되는 길이었다.
물론 인족들의 성에서 심령술사를 만나면 더 쉽게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샘, 내면의 사원과 달리, 심령술사는 자아를 가진 수도자.
그런 자가 나의 내면에 들어와 특성을 확인한다?
심령술사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개인정보 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니 절대 선택해선 안 되는 방법.
아니, 애초에 생각할 필요도 없는 수단이었다.
'내면의 사원으로 간다.'
+++
도서관에서 남은 하루를 알차게 보낸 뒤 상점가로 향했다.
상점가는 마을 동쪽에 자리했는데, 게임에서처럼 각종 그림 간판이 그려져 있어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이제 빈털터리네."
각종 재료를 사느라 명패에 충전된 영석을 모두 소진해버린 후.
짧은 시간 쇼핑을 마친 나는 숙소로 돌아왔고, 각종 재료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그럼 알을 부화시켜 볼까?"
인족 제사장이라는 어머니가 전해준 선물.
용족과 마찬가지로, 인족 세상에서도 제사장이라는 직위는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 인물이 아들을 위해 보내준 선물.
작은 기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먼저 보호진부터.'
나는 알을 보호하기 위한 진법을 바닥에 그린 후, 그 위로 알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늪지대에서 채집한 재료와 연단 상점에서 사 온 재료를 기존 지식에 따라 혼합하고 배치했다.
마지막으로 손끝에 상처를 내, 알 위로 피를 충분히 떨어트렸다.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해.'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자, '종속의 인'을 걸기 위한 술식을 허공에 그리기 시작했다.
종속의 인.
그것은 펫을 키우기 전 해야 하는 밑 작업 중 하나였다.
뒤통수 치기가 빈번한 중천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부하를 만드는 방법.
펫의 영혼에 내 존재감을 심어주는 일이 무조건 선행돼야 했다.
물론 종속의 인을 심는다고, 펫들이 감정도 없이 내 말에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종속의 인은 어디까지나, '너와 내가 하나로 연결된 운명 공동체다'라고 영혼에 새기는 작업.
영충이 되었든 영수가 되었든, 그들이 하나의 인격체인 걸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는 필수였다.
그렇지 않다면, 종속은 내면에서부터 썩어가면서 시름시름 앓고, 능력이 퇴화할 수밖에 없었다.
종속된 개체는 종속의 인으로 인해 주인을 해할 수 없으니, 스스로 망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합!"
허공에 그리던 술식이 완성되자, 알 표면에 기이한 문양이 떠오른다.
문양은 잠깐 알 표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알껍데기 안으로 쏙 스며 들어갔다.
이것으로 밑 작업은 마무리.
나는 상점가에서 사 온 세 개의 호리병을 꺼내, 각각의 병 속에 알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호리병 속엔 영천수가 담겨있어서, 알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얼마나 걸리려나?"
일반적으로 영충의 알이 깨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영천수의 등급에 따라 달라졌다.
용족이 알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생명의 샘 같은 곳이라면 매우 짧을 테지만,
지금처럼 평범한 영천수라면 수년은 족히 걸릴 수도 있었다.
나는 대략적인 기한을 떠올리며 호리병 세 개를 공간 팔찌에 넣었다.
그리고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임무를 받기 위해 초가당으로 향했다.
+++
초가당에 도착하자, 겸불이 반갑게 맞이했다.
"좀 더 쉬다 올 줄 알았더니, 일찍 왔군. 그래, 이번에도 가매초 채집 임무를 맡을 텐가? 아니 맡아주게."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겸불은 멋쩍은 웃음으로 내 선택을 종용했다.
나 역시 당분간은 가매초를 채집할 생각이었기에, 반갑게 웃으며 수락했다.
이런 식으로 호감도를 올리고, 상대에게 빚진 느낌을 주는 건 매우 좋은 일.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며칠 후, 늪지대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가매초 채집을 시작했고,
"이번엔 이 정도로 만족하자."
전보다 세 모숨이 더 많은 13모숨을 채집한 후, 가매초 채집을 마무리했다.
늪지대에 도착한 후, 정확히 10일 만의 결과였다.
+++
우거진 나무가 눅눅한 습기와 맑은 영기를 잔뜩 품은 늪지대.
채집을 마친 후 한동안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할당받은 일을 10일 만에 끝냈고, 마을로 돌아가는 데 3일이 걸리니, 남은 시간은 보름.
알을 부화시키기 위한 채집은 끝냈으니, 임무를 완수하고 남은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정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일을 정하는 데는 1초의 고민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턴 단약 재료를 모아볼까?"
수행을 성장시키는 위한 첫걸음.
성장의 동반자나 다름없는 단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 수집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용족의 호흡법은 따로 시간을 내서 수련하는 게 아닌, 일상에서 계속 운용되는 중.
그러니 한 번에 막대한 영기를 몸 안에 쌓을 수 있는 단약을 만드는 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름길이었다.
"가만있어보자, 어떤 게 가장 효율이 좋으려나."
그렇다고 아무 단약이나 만들 순 없는 일.
용족에게 가장 적합하고,
현재 수집 활동에 용이한 늪지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단약을 골라야 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수많은 단약 제조법을 떠올렸고.
"그래, 초진단을 만들자."
자연스럽게 한가지 단약으로 생각이 귀결됐다.
초진단(初進丹).
1단부터 3단까지 두루 효능을 보이는 단약, 인족으로 치면 연기기 후기까지는 수행을 올리는데 적합한 단약이었다.
초진단은 많은 양을 복용해도 내성이 생기지 않기에, 여러모로 초반에 사용하기 좋은 단약이었다.
그리고 초진단을 만들기로 한 가장 큰 이유.
그건 바로 핵심 재료를 늪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충(蛆蟲),
다른 말로는 구더기.
늪지 바닥에 서식하는 저충이 초진단의 주요 재료였다.
물론 쉽게란 말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건 아니었다.
저충은 질퍽한 늪지 바닥에만 서식하기 때문에 나 같은 하위 수사들은 구하기 어려웠다.
최소한 늪지 깊은 바닥까지 충격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수행은 돼야, 저충을 잡을 수 있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말.
"저기군."
다른 곳보다 점도가 높은 늪지로 이동한 나는 그중에서 기포가 올라오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는 발끝에 영력을 모으며 물컹한 흙의 표면을 강하게 내리쳤다.
'거인의 발걸음이라면 늪지 바닥까지 충격파를 보낼 수 있지.'
파학-
잠시 후, 내 발끝에서 퍼져나간 충격파에 질펀한 흙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동시에, 구덩이 안으로 꿈틀대는 무언가가 감지됐다.
"이 정도로는 안 되나?"
하지만, 꿈틀대는 그것들을 포획하기도 전.
구덩이가 생겨난 늪지는, 파헤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메꿔지며 원래 상태로 돌아와 버렸다.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진 나는 비행 법기를 조종해 늪지 상공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주변 일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패시브로 안 되면, 액티브로!'
빠르게 지면으로 내려오며 거인의 발을 떠올렸고, 집중했다.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그러자 발을 중심으로 온몸에 고양감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고,
쾅!!
영력이 모인 발로 질퍽한 지면을 밟자, 주변 대지가 부르르 떨리며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푸하학-
이번엔 구덩이가 아니라,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늪지가 바닥을 드러내며 쫙 갈라졌다.
"저충!"
동시에 수십 마리의 주먹만 한 구더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인의 발걸음이 만들어낸 충격파로 인해 늪지가 바닥을 드러냈지만, 그 시간 역시 좀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짧은 건 당연지사.
나는 지체없이 바닥에 내려서며 과감하게 구더기들을 사냥했다.
그러길 3초 정도 지났을까?
구르르르-
충격파가 사그라들며, 늪지가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려 하자, 잡지 못한 저충은 즉시 포기하고 빠르게 솟구쳐 올라갔다.
괜히 욕심내다 늪지에 말려들면,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될지도 몰랐다.
잠시 후, 늪지가 원상태로 돌아오자 구더기를 담은 보따리를 확인.
"열 한 마리? 괜찮네."
꽤 괜찮은 성적에 절로 입가에 만족이 피어났다.
저충 포획의 임무를 맡는 건, 주로 4단에 오른 선배들.
아마 그들도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의 성과는 이룰 수 없을 터였다.
"크러러렁!"
그때,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소리와 비슷한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원상태로 복구됐던 늪지 위로, 하얀 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저충을 잡으려고 한 건데, 늪지 악어를 건드린 건가?"
알들은 늪지에 서식하는 악어 괴수의 알.
그리고 포효와 함께 다가오는 것들은 늪지에만 서식하는 악어 괴수.
용족으로 치면 3단에 해당하는 3종 괴수라, 최소한 3단 이상은 올라야 사냥할 수 있는 괴수였다.
실제로 겸불에게서 받을 수 있는 임무 중에 3단에 표시된 게 악어알 채집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세 마리의 악어 괴수를 보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을 통해 단검 하나가 빠져나온다.
빠져나온 단검을 움켜쥐었다.
"굳이 따로 찾지 않아도 되니 편하네."
지이잉-
손바닥만 한 칼날 위로 광선 칼날이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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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뜻밖의 거래
초진단의 재료엔 포함되진 않지만, 초진단 다음에 복용하는 강춘단(强春丹).
강춘단 역시 늪지에서 나오는 재료들이 사용됐다.
그중 구하기 까다로운 재료 중 하나가 지금 나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악어 괴수의 피였다.
다만 이건 만호족(萬虎族)이라 불리는 영수족이 주로 복용하는 단약이었기에, 용족은 만들지 않았다.
용족은 악어 괴수를 그저 잡종 괴수로 여겼고, 악어알만 수도 자원으로 취급했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최대한 피를 보존한 채로.'
3단에 올라야 상대할만한 괴수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들의 얘기.
내 본명 법기의 절삭력이면 견고한 악어의 피부를 두부 베듯 잘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푹-
"크어어엉!"
악어들의 공격을 회피만 가능하다면 어렵지 않게 사냥 가능하단 소리였다.
빠르게 다가와 나를 물어뜯으려던 녀석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후, 머리와 몸통이 이어지는 부위에 광검을 박는다.
그리고는 광검을 위로 당기며 머리를 뒤통수부터 갈라버린 후.
휘릭-
이어지는 두 마리 악어의 공격을 회피했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인다.'
악어를 상대하기 직전,
내가 게임 캐릭터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라며 가진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영기를 끌어와 몸을 활성화하니, 술식을 여유롭게 그려냈던 것처럼 몸을 다루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두 마리 악어의 공격을 피해 상공으로 치솟은 나는 손짓으로 비행 법기를 불렀다.
그러자, 내가 착륙할 지점에 비행법기가 날아와 대기했고,
팍-
나는 착륙과 동시에 비행법기를 박차며, 나를 놓친 후 서로 교차하며 지나치는 악어 중 하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이잉-
동시에 1미터 남짓이었던 광검을 3미터 까지 키운 후, 한 놈을 향해 내리쳤다.
샤샥-
그 순간, 내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악어가 순간이동 하듯, 마치 게처럼 옆으로 횡 이동을 시전했다.
'맞다. 이놈들은 늪지에선 행동에 제약이 없었지.'
평지에선 일반 악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늪지에선 사람보다 민첩했다.
광검이 악어 한 마리를 스쳐 지나간다.
곧이어 광검을 피한 악어가 표독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튀어 올랐다.
쇄액-
'어딜? 어림없다.'
그 순간, 몸을 회전하며, 가까이 다가온 악어의 머리를 발로 내리찍었다.
"터져라!!"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신체의 강도에서 내가 한참이나 밀리는 상황.
영력을 담았다 한들, 내 발은 악어에게 어떤 충격도 주지 못하고, 반격의 기회만 제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쾅!!
늪지를 폭격했던 거인의 발이, 이번엔 악어의 머리를 정통으로 직격했다.
푸하학-
그러자, 발끝에서 시작한 충격파가 악어를 산산조각 냈고, 악어는 살점 덩어리들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내 피!"
생각보다 강력한 한방에 나는 재빨리 빈 호리병을 꺼내, 비산하는 악어를 향해 던졌다.
동시에 손가락에 영력을 담아. 흩어지던 피를 그물로 그려내듯,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슈르륵-
그러자 내 손짓에 따라, 악어의 붉은 피가 방울방울 뭉치더니 호리병을 향해 움직였다.
어느새 다가온 비행 법기에 안착한 나는 여전히 한 손은 호리병을 향한 채, 재빨리 마지막 남은 악어를 확인했다.
"어? 어디 갔지?"
한 마리를 상대하는 사이 기습을 가할 거라 생각됐던 다른 한 마리.
하지만 놈은 이미 늪지 안으로 사라져 모습을 감춘 후였다.
"이상하네."
그 모습에 살짝 의문이 생겼다.
괴수들은 기가 막히게 상대의 수준을 알아보았다. 몸에서 미약하게 발산되는 파동을 감각적으로 판단했다.
그랬기에,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를 보고 도망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거인의 발걸음 때문인가?"
혹시나 거인 특성의 파동 때문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랬다면 처음 늪을 파헤쳤을 때 도망갔어야 정상이니까.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긴. 괴수들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니까."
인간과 마찬가지로, 괴수든 영수든 영충이든, 성격은 제각각.
그냥 특이한 놈이구나 생각하면 별일 아니긴 했다.
"그럼 저충이나 계속 모아볼까?"
잠시 후, 호리병에 악어의 피를 가득 채운 후, 반쯤 늪에 잠겨가던 악어를 꺼내, 그놈의 피도 뽑아냈다.
그리고는 악어알을 줍고, 서둘러 다른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혹시나 1단에 불과한 내가 악어 괴수를 잡았단 게 들키게 되면, 꽤 귀찮아질 게 분명했으니까.
+++
거인의 발걸음을 이용해 저충을 잡는 건 예상보다 속도가 나진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거인의 발걸음이 발산하는 파장 때문에 조심조심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액티브로 발동하는 거인의 발걸음은 영력 소비가 꽤 심하다는 거였다.
상태창이 없으니 정확히 확인할 순 없지만, 대략 세 번 연달아 사용하면 영기 고갈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남들이 봤을 땐 두 눈이 뒤집힐만한 성과였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마을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계산부터.'
마을에 진입하자마자 임무 완료를 위해 초가당으로 향했다.
초가당에 도착하자, 겸불이 두 눈을 반짝인다.
이번에도 목표치의 두 배인 가매초 한 모숨을 건네자,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하였다.
미소 가득한 얼굴로 계산을 마친 겸불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자네 다음에도 가매초 채집을 해줄 수 있겠나?"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
다만, 이번엔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요구를 받아주다 보면, 수행이 올라도 계속 가매초 채집만 하고 있어야 할지 모르니까.
살짝 꺼리는 기색을 보여야 했다.
"흠... 이번엔 다른 임무를 할당받아볼까 했는데... 선배님께서 부탁하신다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고맙네! 고마워. 자네도 알다시피, 가매초를 제대로 채집하는 이들이 너무 적어서 말이야."
겸불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거린다.
그 나름대로 친근함을 표하는 행동.
"선배님의 고충, 충분히 이해합니다. 일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있는데, 적절하게 일을 분배하는 게 쉽진 않겠지요."
"역시! 자넨 말이 통하는구먼."
"다만..."
"다만?"
내가 말끝을 흐리자, 겸불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닙니다. 그럼 정비를 마치고 바로 다시 늪지로 향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말을 하다 말자, 겸불이 찝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짐작할 테다. 하지만 당장 가매초 채집이 중요하니, 모르는 척 넘어가는 거겠지.
일전엔 한 달 내내 늪지에 있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와 비슷한 말조차 없는 걸 보면, 가매초가 많이 필요하거나 본인이 어떤 이득을 취한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혹은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든지.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푹 쉬게."
나는 겸불에게 인사한 후, 거처로 이동.
하루를 푹 잔 후, 상점가로 향했다.
이동 후, 저충을 담기 위한 주머니를 여러 개 사들인 후 거처로 돌아왔고,
며칠간 거인의 발걸음을 응용할 방법들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초가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았다.
+++
"네? 이들과 함께 말입니까?"
초가당에는 겸불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시련에 탑에 올랐던 아이들 중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셋 다 본명 법기를 만들지 못해, 왼쪽 줄에 서 있던 아이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네가 두 번 연속 목표치의 두 배를 구해왔다는 건, 어떤 비법을 찾았단 소리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준비했네. 이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면 좋겠어."
나는 겸불에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비법을 다른 이들에게 전수해 주라고?
내가 목표치를 상회한 채집을 해온 건, 더 좋은 일을 받기 위함이지,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진짜 비법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행동은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지식 재산.
현실 세계에서도 지식 재산권은 꽤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런 지식 재산이 중천에서는 더 귀하게 취급됐다.
이곳에선 단약 레시피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했고, 특수한 재료의 수급처를 아는 것만으로 일확천금을 벌 수 있었다.
어떤 재료를 구할 수 있냐 없느냐로 상대에 대한 가치 평가 자체가 달라지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겸불의 말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어선 발언.
아무리 장로의 눈치를 보고,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럴 때 수긍하고 넘어가면 호구 중에 상호구가 될 수 있는 일.
나는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하지만 내가 말을 잇기도 전.
겸불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자네가 어떤 방법으로 가매초를 채집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을 그냥 알려달라 하겠는가? 나, 그렇게 염치없지 않네."
"..."
"이들이 자네만큼 목표치를 상회할 필요도 없네. 그저 한 사람 몫만 할 수 있으면 돼. 그리고 그렇게 해준다면..."
"해준다면?"
겸불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흘기자,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겸불은 내가 관심이 동한 걸 알았는지. 씨익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옆에선 세 명의 아이들이 궁금증 가득하단 눈으로 겸불의 입만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입이 아닌, 나의 귓가로 직접 전해졌다.
-자네가 이 아이들을 잘 가르쳐만 준다면, 정말 군침이 돌 만한 일을 할당해 주겠네.
머릿속에 전해지는 말에 깜짝 놀랐다.
내용보다 전음을 사용했단 것에 더 놀랐다.
'결단기였어?'
전음.
흔히 입이 아닌 귀나 뇌리로 직접 소리를 전달하는 능력은 결단기, 그러니까 용족으로 치면 7단 이상부터 사용 가능한 능력이었다.
나는 지금껏 겸불이 4~5단 사이의 수행인 줄 알았다.
은근히 풍기는 기운도 그랬고, 원래 일을 나눠주는 자리는 그 정도 수행을 지닌 자들이 역임했으니까.
놀란 마음을 감추며 겸불을 바라보았다.
겸불과 달리 전음을 사용할 수 없으니, 눈빛으로 말을 전했다.
다행히 그는 내 뜻을 알아보고,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뭔지 궁금하겠지? 다름 아닌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이라네. 자네가 알지 모르지만,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보수도 넉넉하지만 그것보단...
그것보단 콩고물이 더 크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족장에게 선택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종족의 미래나 다름없는 '알'들과 관련된 임무라서 검증된 이들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자네가 가매초 채집 방법만 잘 가르친다면, 일 장로님께서 자네를 그곳에 넣어준다 했네. 어떤가?
어떠냐니?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은 가매초 따위완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돈으로 치자면 가매초 채집이 훨씬 좋은 수단이었지만, 다른 게 비교도 되질 않았다.
나는 비밀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것 하나만으로 말입니까?"
"물론이네. 장로님께서 실언하실 분인가?"
대화가 이어지자 세 명의 아이들이 나와 겸불을 번갈아 바라본다.
우리가 전음으로 대화한 걸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나는 의미심장한 겸불의 눈빛을 덤덤한 척 받아내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
그리고 거기서 떨어질 콩고물?
남들에겐 콩고물에 불과하지만, 내겐 아니었다.
나에겐 가매초 수백 모숨보다 값어치 있는 콩고물이었다.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겸불이 크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자네는 시원시원해!"
잠시 후, 호탕하게 웃던 겸불이 정식으로 우리를 가매초 채집 임무에 등록했다.
"너희 셋은 금파란에게 잘 배우도록. 본명 법기가 마음에 들지 않게 제작되었다고는 하나, 앞으로 발전시킬 방법은 무궁무진하니 지금처럼 너무 주눅 들어 있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잠시 후, 환한 웃음과 함께 배웅하는 겸불을 뒤로하고, 우리는 늪지대를 향해 움직였다.
세 명의 아이는 특별한 비법을 전수한단 말에 벌써 살짝 흥분한 모습이었다.
"금파란, 정말 네 말만 따르면 가매초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야?"
"반 모숨에 영석 두 개인데, 넌 한 달에 다섯 개나 받았다면서?"
나 스스로 비법이 있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거래를 받아들인 순간 겸불의 말에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이들의 기대도 이해됐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이들이 밥벌이를 제대로 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능숙 능란하게 평균 이상의 영석을 벌어들이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몇 달간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 명 모두, 제대로 된 본명 법기도 만들지 못했고, 피의 무게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니 앞날이 얼마나 깜깜했을까?
그런 그들에게 나는 희망의 불꽃처럼 보였을 테다.
다만, 그런 기대감에 가득 찬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매초에 내가 모르는 효능이 있나?'
그렇지 않다면 장로가 나서서 신경 쓸 일이 절대 아니었다.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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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생명의 샘 (1)
"정식으로 인사하지. 난 금파란."
"난 풍초신이야..."
"평강."
"나는 가라한이다. 근데 왜?"
세명은 십여 년 넘게 함께한 사이끼리 왜 통성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같이 생활하던 곳을 벗어나 우리도 성인이 됐잖아. 그러니 새로움 마음가짐을 갖자는 의미다."
사실은 너희들 이름을 몰라.
속마음을 말할 수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늪지대에 들어섰다.
어차피 비법을 전수하기로 약속했으니, 시간을 끌어봐야 내 시간만 낭비하는 일.
나는 세명을 데리고 늪지대 안쪽까지 이동한 후 곧바로 비법 일부를 공개했다.
푹-
"꽤애애액"
우선 피를 지닌 짐승을 포획한 후.
"잘 봐. 이렇게 피를 전부 빼낸 후. 주위 나무에..."
이어진 설명과 시전에 세 명의 아이 중 하나가 질문했다.
"그냥 이렇게 나무에 피를 묻힌 다음 가만히 기다리라고?"
"그래."
잠시 후, 피로 벌레들이 모이자, 그중 명충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빛을 내는 벌레 보이지? 이게 명충이다."
"알고 있어. 흡혈 파리잖아? 수행이 낮을 땐 피하라고 들었어."
"맞아. 저놈한테 물리면 꽤 고생한다고."
교과서 위주로 공부한 티를 내는 놈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맞는 말이지. 하지만 가매초를 채집할 거면 명충에 관심을 가져. 잘 봐."
명충이 피를 잔뜩 머금고 사라지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나는 제각각 떠드는 세명을 말린 후, 명충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들의 서식지를 발견한 후, 그 후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한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말한다.
"뭐? 명충 서식지 근처에서 대기하면 손쉽게 가매초를 구할 수 있다고?"
"그래."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되는데?"
"그거야..."
"그렇게 쉬운 거면 이미 알려졌겠지."
한 놈이 우물쭈물 대답을 피하자, 다른 놈이 곧바로 말을 대신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물론 모든 이들이 같은 조건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매초는 특수한 파동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동이 트자 세 명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용족 특성, 용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모든 정신적 약화가 해소됩니다.]
명충 서식지 근처에 있던 가매초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 나는 용의 위엄을 발동했다.
"어! 진짜 가매초다! 도감에서 보던 것과 똑같아!"
"어디 어디? 난 안 보이는데?"
"진짜? 어디? 나도 안 보여!"
세 명 중 한 명만 가매초를 발견하고, 두 명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이상한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 명 중 가매초를 정확히 응시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제법이네.'
셋 중 누구도 환영 관련한 디버프를 해소할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가매초를 발견했다는 말은, 타고난 정신력이 월등히 우월하단 뜻.
'저놈 이름이 풍초신이었나?'
잠시 후, 가매초를 빠르게 채집한 나는 세 사람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봐. 여기 있지?"
천천히 사라져가던 가매초는 뿌리째 뽑히자, 보랏빛 자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 모습에 한 명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명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금파란. 진짜 네 말이 맞구나?"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전혀 못 봤다고."
"나도 못 봤어."
가매초의 특수한 파동은 빛을 발하는 순간 발휘된다.
그 말은 정신력이 따라주지 않아도, 초집중한 상태로 대기했다면 아주 잠시라도 볼 수 있었다는 소리.
달리 말하면, 두 명은 정신력이 낮을 뿐 아니라, 집중력도 떨어졌단 뜻이었다.
나는 채집한 가매초를 공간대에 담으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자 시범을 보였으니. 직접 해봐. 피를 뿌리고, 명충의 서식지를 찾은 후, 아침까지 대기한다. 쉽지?"
"응, 해볼게."
"...어."
"어?"
풍초신은 당찬 표정으로 조금 떨어진 늪지로 이동하더니 짐승 한 마리를 바로 포획했다.
하지만 두 명은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안가? 계속 나만 보고 있을 거야?"
"어? 아니. 아니. 갈게."
"해, 해볼게."
밥상을 차려 줬으면, 떠먹는 건 스스로 해야지.
두 번 가르쳐줄 생각은 없었다.
+++
용족이 가매초를 발견할 확률?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정신력이 높아야 하고, 흡혈 파리를 무서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거기다, 가매초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항시 집중을 유지해야 하고, 운 좋게 근처에 있어야 했다.
과연 이제 막 성인식을 마친 꼬마들 중 그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원래는 2단 임무이니, 성인식을 마친 후 몇 년 지난 아이들이 임무를 할당받을 터.
몇 년이라 해봐야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풍초신은 인재였다.
왜 본명 법기를 제작하지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금파란! 나 해냈어!"
가르친 지 하루 만에 바로 가매초를 채집해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밀어내며 말했다.
"네가 채집한 거야. 왜 나를 줘?"
"어? 그래도. 우리는 배우는 입장이잖아."
"나도 겸불 선배께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야. 그러니 그럴 필요 없어."
"정말? 그럼 내가 가져도 돼?"
"당연히."
풍초신이 기뻐하는 얼굴로 공간대에 채집물을 넣는 걸 보며 아주 잠시 고민을 가졌다.
무엇을?
채집의 진짜 비법을 알려줄 건지 아닌지를.
하지만 여기까진 우연히 발견한 정보라 둘러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처음의 계획대로 진짜 비법은 숨기기로 했다.
"지금처럼 하면 하루에 하나, 한 달이면 두 모숨은 채집할 수 있을 거야."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기간 내 스물네 개! 두 모숨 반이나 되네!"
'하루도 실패하지 않아야 그 정도지.'
설레발치며 흥분한 풍초신의 모습에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굳이 아이의 기를 꺾을 필욘 없으니까.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지.'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르겠지만, 풍초신 정도면 한 달에 두 모숨은 충분했다.
두 모숨이면 영석 10개.
절대 평범한 숫자는 아니었다.
"그래.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마."
"왜?"
"평생 가매초만 채집할 거야? 한 모숨이면 영석 다섯 개를 받을 수 있으니, 그 정도만 챙기고, 다른 것들도 채집해."
"어?"
"도서관에 가면 늪지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미리 공부한다 생각하고, 하나씩 연구해 보란 말이야."
내 말에 풍초신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래서 너도 한 모숨만 채집한 거야?"
물론 내 공간 팔찌 안엔 가매초 스무 덩이가 넘게 쌓여있지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가매초는 성장의 과정이지, 목표는 아니니까."
"고마워! 덕분에 많이 배웠어."
잠시 후, 풍초신을 제외한 두 명이 각각 다른 표정으로 다가왔다.
"금파란! 나도 봤다! 가매초 말이야! 근데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려서... 채집은 못 했다."
가라한이라 소개한 친구는 살짝 들뜬, 하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고,
"젠장! 왜 나만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정말 가매초가 있긴 해?"
평강이란 친구는 씩씩거리며 숨을 토해냈다.
도서관에 가매초에 관한 내용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에, 파동과 정신력에 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새벽부터 동이 틀 때까지. 명충 서식지 근처에서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기다렸어?"
"응?"
내가 눈을 부릅뜨자. 평강은 시선을 피했다.
"그게... 자꾸 흡혈 파리들이 달라붙는 것 같길래... 멀리 떨어져서 확인했어. 근데 정말 그 근처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 정말이야!"
그럼 그렇지.
늪지의 습기는 빛의 파장을 왜곡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나도 명충 서식지 바로 위에서 대기하는 것이고 말이다.
"다시 해. 여기 두 사람은 본 걸 너만 못 봤어. 겸불 선배가 뭐라고 할까?"
같이 자란 친구의 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겸불을 팔았다.
아니나 다를까. 겸불이란 소리에 평강이 흠칫 놀라더니, 급하게 짐승을 잡으러 떠났다.
곁에 서 있던 가라한마저.
예상은 했지만 조금 과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풍초신이 살며시 웃으며 말한다.
"다들 겸불 선배를 많이 무서워해. 갈락취 같은 분이시잖아."
'갈락취? 그 사근사근한 사람이?'
나는 나를 대하던 겸불을 떠올리다가, 갈락취의 모습을 그 위로 겹쳐보았다.
갈락취는 호랑이의 몸에 거대한 날개가 달린 괴수.
원단을 가진 수도자를 생으로 씹어먹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알려진 괴수였다.
그것도 다 먹기 전까지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빨로 영력을 주입하며 뜯어 먹는다고 했다.
그래도 겨우 괴수인데?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갈락취의 진짜 무서운 점은 몸을 투명하게 할 수 있단 거였다.
그래서 기습에 특화돼있어서, 수많은 하위 수사들에게 공포로 인식되어 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젓자, 풍초신은 오해한 듯 말했다.
"그래. 정말 무서운 분이지. 그럼 나도 다시 가볼게."
"그래, 화, 수고해."
잠시 후, 모두 떠나자, 나 역시 움직였다.
가만히 기다린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나도 채집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이번엔 저충은 포기하자.'
세명에게서 벗어나, 깊은 곳에서 가매초만 채집할 생각이었다.
+++
기간을 꽉 채워 가매초 채집에만 열중하다 돌아오자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자, 여기 받아."
"정말? 내가 이걸 받아도 돼?"
두 모숨을 채집한 풍초신이 평강에게 가매초 두 줄기를 건네고 있었다.
"이거면 너도 반 모숨을 채울 수 있잖아. 그럼 겸불 선배한테 혼날 일은 없을 거야."
스무날이 넘는 기간 동안,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채집한 풍초신이 동기를 돕는 중이었다.
'용족에게 저런 품성을 가진 이가 있다니. 신기하네.'
용족은 부모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만큼 독립적이란 뜻.
그리고 독립적이란 말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단 말이었다.
지금의 풍초신처럼 순수하게 남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는 건 정말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옆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가라한의 눈빛만 봐도 이 상황이 얼마나 특이한지 알 수 있었다.
"고마워. 이 빚은 꼭 갚을게."
"빚이라니. 함께 자란 정이 있는데."
'정이라니? 저놈 진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인족들이나 할만한 소리에,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이 모습을 장로나 선배 중 누가 봤다면, 풍초신의 머리를 열어보자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많은 군상이 모인 곳이 중천 아닌가?
저런 특이한 놈이 용족에서 나오는 게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확률이 매우 낮은 것뿐.
나는 의구심을 지운 채, 그들 사이로 내려섰다.
"다들 목표치는? 어때?"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셋이 흠칫 놀랐다.
마치, 밀거래하다 들킨 사람처럼.
"어? 왔어? 나는 두 모숨 정도 채집했어."
"나는 반 모숨은 채웠고, 두 개 더..."
나쁘지 않은 성적인데도, 가라한은 풍초신 때문인지 눈치를 봤다.
"나는... 겨우..."
평강은 끝내 뒷말을 잇지 않았다.
겨우 세 개밖에 채집하지 못했단 말인지, 아니면 겨우 반 모숨을 채웠다는 거짓말인지.
'아마 거짓말을 하려 한 건 아닐 테지.'
나야 인간 사회를 경험했기에,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사용하지만.
용족은 애초에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그럴 필요성도 아예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
평강의 뒷말이 내심 궁금했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나는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세명을 인도했다.
"그럼 가자.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시간이 빠듯해. 목표치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한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깐."
"응."
풍초신만 밝게 대답했다.
+++
"대단해!"
아이들과 함께 복귀한 후, 우리의 성과를 확인한 겸불이 가장 먼저 뱉은 말이었다.
겸불은 내가 발견한 방법을 듣고, 과하게 반응하며 좋아했다.
"명충이 가매초 근처에만 머물렀다니. 그런 하찮은 벌레 따위가 실마리가 될 줄이야. 정말 좋은 걸 알아냈다. 장로님이 크게 기뻐하시겠어."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정말 중요한 걸 알아냈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나를 칭찬하던 겸불은 세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당분간 가매초 채집에만 매진하거라. 그리고, 금파란에게 배운 비법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네!"
"그럼 며칠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오면 된다."
세명은 겸불이 영석을 충전해주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진심으로 겸불을 무서워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나 역시 한 모숨을 계산해 영석 다섯 개를 받은 후, 초가당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건물을 채 나서기 전.
"잠깐. 할 얘기가 남았네."
겸불이 불러 세웠다.
"말씀하시지요."
나는 언제나처럼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아마 오늘 이 소식을 전하면, 장로님께서 자넬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에 추천하실걸세. 틀림없이."
진짜 비법을 알려줬다면 꽃가마라도 태워줬겠네.
"해서 미리 알려주겠네. 현재 그곳을 지키는 이는 오동이라는 분이네. 그분께선 술을 매우 좋아하시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갑자기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이의 이름과 좋아하는 걸 알려준다?
역시, 겸불은 좋은 사람이다.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바로 알아먹었나? 하하, 역시 마음에 들어. 그럼 돌아가 잠시만 기다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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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생명의 샘 (2)
거처로 돌아와 하루를 푹 자며, 한 달간 쌓인 정신적 피로를 털어냈다.
그런 후, 상점가로 이동.
"달각, 모경초, 태낭잎, 각각 이 정도씩 주시겠습니까?"
재료를 한가득 사 들고, 다시 거처로 돌아왔다.
상점가에서 영석 다섯 개를 들여 구입한 재료는 전부 술을 빚을 때 첨가하는 재료들.
나는 재료를 바닥에 늘어트려 놓은 후, 공간대에서 저충이 담긴 보따리를 꺼냈다.
그리고는 죽은 저충의 입을 열어, 그 안에 각종 과일을 욱여넣었다.
겸불이 말한 술.
일반적으로 중천에서 술이라는 단어는 '알콜'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선인들이 마시는 선주(仙酒).
흔히 '신선의 술'이라 불리는 액체형 단약을 선주라 불렀다.
물론 알콜 성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취하기 위한 용도보다는 수련 상승에 도움이 되는 술이었다.
그런 선주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했는데, 내가 하려는 건 가장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먼저, 영천수의 질이 가장 중요하긴 한데... 좋은걸 구할 순 없으니 제외하고.'
우선 영기가 가득한 영천수에 영기의 순환을 돕는 약초들 몇 가지를 첨가한다.
그 후에 술맛의 메인이 되는 재료를 넣은 후, 영력으로 천천히 빚어내면 된다.
술을 빚기 위한 술법은 너무 다양해, 종족마다 천차만별.
그중에서 내가 아는 영수족의 비술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제조 과정을 한 번 더 머릿속에 그려본 후, 상점에서 구한 최하급 영천수에 달각, 모경초를 넣고 영력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나무로 만든 호리병 안에서 수증기가 올라왔다.
수증기가 올라오자, 태낭잎을 넣고 한 번 더 영력을 주입했다.
그런 후, 정신을 집중하며 호리병 내부의 영기가 회오리치게 만들며 속도를 조종하다가.
"지금인가?"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입안 가득 과일을 쑤셔 넣었던 저충을 영기로 감싸며 호리병 안에 집어넣었다.
"진짜는 이제부터."
회오리치던 호리병 내부로 저충이 완전히 잠기자, 손에서 호리병을 놓았다.
그러자 호리병은 영력에 의해 혼자 둥둥 뜨며 허공에 고정된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 양손을 들어 호리병을 감싸듯 움직였다.
후우웅-
잠시 후, 손에서 뻗어 나온 영력에 호리병이 영향을 받아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영기를 이용해 술의 숙성 시간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것.
나는 호리병이 영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터지지 않게, 하지만 최대한 많은 영력이 응결하게 하기 위해 초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파악-
호리병이 터져나가며 달큼시큼한 향을 가진 술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랬다.
미세한 차이로, 첫 선주를 만드는 건 실패였다.
+++
첫 실패의 원인?
그건 나에게 있기보단, 호리병 문제였다.
보통 전문적으로 술을 빚거나 단약을 만들 땐 그에 걸맞은 도구를 사용하는 게 원칙.
하지만 나는 가진 게 없었다.
해서 약하디약한 박나무 열매로 만든 호리병 안에서 바로 주조를 도전한 것이었다.
당연히 겸불은 직접 술을 빚으라고 정보를 준 게 아니었다.
상점가에 파는 싸디싼 선주를 뇌물로 사가라는 말이었을 테다.
'그럴 순 없지.'
허나, 그건 아니 될 말.
싸디싼 선주를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한다는 건, 누가 보아도 성의가 없는 모습.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나는 첫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따져보고, 다시 영천수가 담긴 새로운 호리병을 꺼내 두 번째 주조를 시작했다.
호리병 안에 영력이 많이 응결될수록, 술이 빚어지는 속도가, 숙성되는 시기가 짧아진다.
'이번엔 욕심내지 말고, 며칠 더 걸리더라도 천천히.'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다시 한번 온 신경을 주조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나흘 뒤.
"이 정도면 쓸만한 거 같은데?"
무사히 한 병을 만들 수 있었고,
"숙달되니 조금은 빨라졌네."
사흘 뒤, 다시 한 병.
또다시 사흘 뒤 한 병.
총 세 병을 만들어 냈다.
내가 만든 술에 품평이 어떻게 달릴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상대가 실망하지 않을 수준은 된 거 같았다.
"살짝 준벅이랑 맛이 비슷한 거 같긴 한데."
구더기인 저충이 주재료여서 그런지, 내가 빚은 술은 '6월의 벌레'라는 이름의 준벅(June Bug)과 비슷한 맛이 났다.
물론 진짜 준벅엔 벌레가 들어가지 않지만 말이다.
+++
겸불이 말한 '잠시만'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
무턱대고 찾아가 언제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주조를 마친 나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언제 연락이 올지 알 수 없었기에, 다른 곳에서 일을 할당 받을 수도 없는 상황.
기다리는 시간은 수련으로 이어졌다.
우선하여 행한 일은, 공방(攻防) 능력을 두루 갖춘 대적점 공법을 실행해 보는 것이었다.
대적점은 몸속 가득한 영기를 계절에 비유해 운용하는 게 특징이었다.
'먼저 봄을 얻고,'
봄처럼 따뜻한 기운을 불러와, 내부를 충만하게 만든다.
그런 후, 여름처럼 달구며 기운을 끌어올린다.
여름이 끝나가며 달궈진 기운이 극에 다다를 때,
'가을.'
달궈진 기운을 한쪽으로 압축하며 텅 빈 반대쪽에 강제로 상반된 기운을 형성한다.
그리고는 그곳에 겨울처럼 차가운 폭풍을 만들어 내.
'내부에서 양극의 온도 차를 이용해 회전력을 얻는다.'
한쪽에 몰린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듯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만들며 회전을 가한다.
우우웅-
그 순간.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 사이에 나선이 만들어졌다.
'다음은 나선을 외부로 확장해야 하는데?'
하지만 나선을 외부로 확장하려는 순간. 그다음이 진행되지 않았다.
공법에 수록되기로 나선을 이용해 외부의 기운을 움직인다고만 나와 있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 하란 내용은 전혀 없었다.
마치, 사용자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란 듯이.
나는 내부에서 점점 커져가는 나선을 느끼며, 짧은 시간 고심에 빠졌다.
'이대로 외부로 표출하면... 나선이 깨질 텐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위력을 만들긴 부족하다.'
그러다, 번개처럼 번뜩이는 생각에 나선의 양극에서 냉기와 열기를 더해가는 두 가지 기운을 양손으로 각각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기운이 담긴 손을 하늘로, 차가운 기운이 담긴 손을 땅으로 향하며.
"합!"
두 손을 원을 그리듯 힘차게 돌렸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해 보는 것이었다.
휘이잉-
그러자 손과 손 사이, 내 정면으로 원(圓)이 그려지며, 위로는 붉은 기운이, 아래로는 푸른 기운이 맴돌았다. 이내 힘차게 서로를 잡아먹을 듯 휘몰아쳤다.
"태극?"
그 모습은 얼핏 보면 태극이라 표현하는 문양과 비슷해 보였다.
태극이 만들어지자 주변으로 돌풍이 몰아치며 기압이 요동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대적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깨닫고, 한 손을 태극 문양에 가져다 대며 심상을 떠올렸다.
'커져라'
내가 떠올린 심상은 태극이 나를 보호하는 형상.
파바바바밧-
그 순간, 내가 휘두른 원 크기였던 태극 문양이 삽시간에 커지며 내 거처 한 면을 가득 메워버렸다.
동시에 회전력으로 인해 태극 문양과 닿은 거처의 벽면이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카르르륵-
'이런 식이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태극 문양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던 영력을 끊어냈다.
그러자, 요동치던 기압이 잠잠해지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태극이 사라진 후 남은 건,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새겨진 대적점의 자국뿐이었다.
며칠 후.
계속되는 반복 속에 발전이 더해졌다.
여러 번 반복하며 숙달되자, 태극의 문양이 짙어지며 선명한 대적점이 만들어졌다.
각각의 손에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을 담아 대기 흐름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걸 이용해 공격과 방어 양쪽으로 응용할 수 있었다.
내부에서 나선을 만들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단 단점만 빼면, 꽤 유용하고 위력적인 공법이었다.
그렇게 애쓰는 사이 여러 날이 더 지났고,
"금파란, 겸불 선배님께서 찾으셔."
풍초신이 거처로 찾아와 소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지체없이 초가당으로 향했다.
"금파란. 장로님께 연락이 왔네. 나를 따라오게."
드디어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에 발탁되어, 그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
생명의 샘은 초가당에서 멀지 않은 마을 남쪽에 있었다.
겉으로 보았을 땐 전혀 중요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결계 때문.
쓱-
건물을 보호하는 결계를 지나자 본모습이 드러난다.
마치 알껍데기를 덮어놓은 것처럼 거대한 원형 건물.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짙은 영기 때문에 몸이 움찔거린다.
"명패 없이 이곳을 통과하려 하다간 즉살이니 명심하게."
샘을 지키는 일을 정식으로 부여받은 후, 명패가 한번 교체되었다.
그전엔 이름만 새겨진 평범한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명패 중심에 붉은 테가 입혀져 있었다.
이걸 소지하지 않고, 결계 안으로 들어오면. 이유 불문 사망.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내 모습에 겸불이 피식 웃는다.
"그렇다고 그렇게 바짝 얼 필요는 없네. 샘을 지키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자네가 이 안에 머물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까."
다음 세대가 되어줄 용족의 알.
그런 알을 품고 있는 생명의 샘.
그리고 생명의 샘을 지키는 숭고한 임무.
이런 중요한 일에 이제 막 성인식을 마친 초보를 고용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생명의 샘을 지키는 사람의 심부름꾼 역할이었다.
진짜 샘을 지키는 이는 건물 안에 상주하는 고위 수사.
그에겐 몇몇 조수들이 고용되고, 나는 그런 조수 중 한 명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자, 여기 까지네. 이제 혼자 들어가 보게."
"예, 감사합니다."
원형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겸불이 손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나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전율이 일 정도의 진한 영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왔다.
'정말 대단하네. 숨만 쉬어도 이 정도인데, 샘물 안에서 수련할 수만 있다면... 30년이 뭐야, 10년도 걸리지 않겠어.'
몇 번의 심호흡으로 천상을 느끼며 감상에 젖은 사이, 멀리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저자인가?'
나는 재빨리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짙은 눈썹에 인상이 강렬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상대는 분명 생명의 샘을 지키는 고위 수사.
나는 예를 갖추며 최대한 공경의 자세를 취했다.
"오동 선배님을 뵙습니다. 금파란이라 하옵니다."
동시에 공간대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오호?"
호리병을 보고 상대가 반응을 보이자, 급히 말을 이었다.
"선배님께서 선주를 즐긴다고 하여 준비했사온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툭-
말을 끝맺기도 전.
손에 있던 호리병이 눈치챌 틈도 없이 상대의 손으로 옮겨져 있었다.
상대는 호리병의 마개를 뽕- 따더니, 코를 대고 큼큼거리다가,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단번에 호리병에든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쳐다보았다.
"캬아!! 이게 무엇인고? 자네 이거 어디서 난 건가? 이렇게 달콤한 술이라니!"
준벅이 달달하긴 하지.
내가 만든 선주의 이름은 저과주(蛆果酒)
과일의 달달함을 저충의 몸 안에서 응축시킨 후, 그것의 향미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선주였다.
다만, 재료가 가진 영기 밀도가 그리 높지 않아, 수련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순전히 선주 특유의 상쾌함을 빌려, 과일의 달콤함을 미치도록 끌어올린 술에 불과했다.
플레이했던 기억을 돌이켜보면, 저과주가 인족에게 전해져, 엄청난 유행이 돌기도 한 걸 보면, 종족 불문 인기가 있는 건 분명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공손히 되묻자, 상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좋다 좋아! 매우 마음에 들어! 이곳에 오기 전에 설명은 충분히 들었겠지?"
"무슨..."
오동은 다짜고짜 대화를 건너뛰고 알아듣지 못 할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콩고물에 대한 얘길 시작한다.
"원래는 심부름을 하나 끝마칠 때마다, 샘에 사흘간 몸을 담글 수 있게 해준다."
그랬다.
겸불이 음흉하게 웃으며 이 일을 제안한 이유. 그건 바로 샘에 몸을 담글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모두가 이것 때문에 이 일을 원하는 것이었다.
3일이라는 짧은 기간이기에, 어마어마한 수련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성장을 위한 수련은 연속성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생명의 샘에 몸을 담그며, 초고밀도의 영기를 체험한다는 건, 성장 이상의 의미 있는 효과가 있었다.
바로, 영기 민감도가 급격하게 오른다는 것.
'나는 그것뿐이 아니지.'
내가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오동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안 하나 할까 하는데?"
"어떤 제안을 말씀하시는지..."
선주를 좋아한다는 말에 최선을 다해 만든 물건이 효과를 발휘했다.
"이 선주를 주기적으로 가져온다면, 샘을 이용할 시간을 하루씩 늘려주지!"
술 생각이 나는지, 침을 꿀꺽 삼킨 오동.
"아니면 말이지. 혹 주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건 어떤가? 그럼 그에 맞는 보답을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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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알의 보금자리
오동이 음흉하게 눈초리를 길게 늘이며 나를 바라본다.
이유 불문하고 레시피를 내놓으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꽤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최대한의 이익을 안겨줄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드리는 게 도리겠지요. 다만, 이 주조비법은 저에게도 꽤 소중한 것이기에..."
레시피의 대가로 어떤 보답을 해줄지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건 하수. 그렇다고 묻지 않고 넘어가는 건 절대 안 될 말.
나는 저과주 주조법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말끝을 흐리며 은근슬쩍 대답을 피했다.
그러자, 오동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고, 어느새 그의 손위로 새하얀 자기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오동은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수행을 고려하면 초진단이나 강춘단 같은 걸 주는 게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아쉽게 그런 저급 단약은 나에게 없다. 하지만 강진단이라면 충분하지. 어떤가? 주조법과 바꾸는 게?"
강진단(强進丹)은 초진단과 강춘단 다음으로 복용하는 단약.
6단까지 무리 없이 사용 가능한 단약이었다.
게다가 순수한 체력 향상에도 도움이 됐기에, 7단 이상의 고위 수사들도 챙겨 다니는 물건이었다.
다만 약성이 강해, 내 수행에 바로 복용할 수는 없고, 원단에 영기를 압축하는 축기기 이상부터 먹을 수 있는 단약이었다.
용족으로 치면 4단부터.
'강진단이 필요하긴 한데.'
분명 강진단은 좋은 단약이었고, 찍어대듯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련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저과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물건의 가치는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법.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음... 그것이... 그러니까..."
"뜸 들이지 말고 말해보게."
"강진단이 매우 귀한 것이기는 하나, 언젠간 제가 구할 수 있는 물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조법은..."
주조법은 절대 구하지 못할걸? 이란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저과주의 주조법은 만호족이라 불리는 영수족에서 유래한 것.
장담컨대, 용족 중에는 나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애초에 선주라는 게 단약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지는 물건이라서, 수련을 위한 용도로 잘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대엔 무궁무진했던 제조법이 대부분 유실되어가는 실정.
어쩌면 만호족을 방문한다 해도 얻을 수 없는 제조법일지 몰랐다.
나 역시 만호족이 아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정보였으니까.
오동은 내 말에 턱을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흠, 틀린 말은 아니군. 나도 제법 세상을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맛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럼 뭘 원하나? 시원하게 말해보게."
오동의 말에 또 한 번 심사숙고하는 척 시간을 끌던 나는, 살짝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영광이 겨우 3년뿐이라 들었습니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생명의 샘을 지키는 일.
용족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내내 할 수 있다면 최고였지만, 이일은 기간 한정 계약직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기한을 늘려주신다면... 아무 대가 없이 제조법을 드리겠습니다."
"음..."
기한을 늘리는 게 대가지만 살짝 말장난도 섞었다. 오동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거래는 타이밍이지.'
그 모습에 나는 재빨리 남은 저과주 두 명을 꺼내 앞으로 내밀며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오동이 다 들리는 혼잣말로 나를 나무란다.
"이거 보니 이번에 온 아이가 꽤 영악하구나."
하지만 목소리에 괘씸한 감정이 보이진 않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오동은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더니, 저과주 두 병을 소리 없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좋아. 그리하지. 10년간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지."
"감사합니다."
좋은 거래가 성사되었다.
+++
영기 밀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 안개처럼 뿌옇게 모여있는 샘물의 어느 한 장소.
저벅저벅-
방문객의 기척이 주변을 깨웠다.
잠시 후, 안개가 갈라지며, 투명한 샘물과 그곳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내는 금파란과 거래를 통해 주조법을 손에 넣은 이.
바로 오동이었다.
오동은 천천히 눈을 뜨며,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보낸 아이는 제법이던데? 나와 거래를 하려 하더군?"
오동이 바라본 곳에서 일 장로가 나타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하긴 제법 영특한 아이지요. 아마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시련의 탑이 세워진 후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호, 그 정도라고? 헌데. 그 아이 아비가 누구인가?"
오동의 질문에 일 장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금파월 제사장입니다만... 그건 왜?"
"제사장? 아! 어쩐지."
"혹,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일 장로의 질문에 오동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있나 궁금했거든. 이제 궁금증은 풀렸네. 제사장의 아이라면 그럴 수 있지."
제사장은 외부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물. 고대용의 흔적을 찾아 평생을 대륙 바깥에서 보내는 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주조법을 알고 있던 연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인식이 끝나고 지식을 전해준 모양이군. 알았네. 이만 가보게."
잠시 후, 일 장로가 사라지자, 투명한 샘물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며 오동 역시 모습을 감췄다.
안개 사이로 작은 목소리만이 들릴 듯 말 듯 울려 퍼졌다.
"영악한 놈이니, 저과주보다 더 좋은 걸 숨기고 있을 수도 있겠어..."
길고 지난한 수행의 삶.
유일한 낙을 술이라 생각하는 오동의 목소리였다.
+++
적막이 흐르는 거처 안.
오동에게 첫 심부름을 하달받은 나는 곧바로 거처로 돌아왔다.
웃기게도 내가 받은 첫 심부름은 저과주 제조였다.
'다른 아이를 뽑아서 심부름을 시킨다고?'
원래라면 심부름을 위해 여러 지역을 돌며 물건을 배달하는 게 나의 임무였다.
하지만 원래 인원보다 한 명 더 뽑아서 심부름 인원을 늘리고, 나에겐 술 만드는 일만 시킬 거라고 했다.
한마디로, 온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쓰임으로만 쓰겠다는 뜻.
'이런 걸 운이 좋다고 하는 건가?'
그리고 그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기도 했다.
3년이라는 짧은 기한.
그동안 몇 번이나 샘물을 이용할 수 있을까?
어떤 심부름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재수 없으면 3년간 서너 번 이용하는 게 고작일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술을 빚는 건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다.
'10병이면 한 달이면 충분하지.'
게다가 재료비로 일정 금액이 주어지고, 재료 수급을 위해 마을 인근 대부분 지역의 출입 권한까지 얻었다.
그러니 절로 콧노래가 나올 상황.
나는 휴식도 없이 심혈을 기울여 술을 빚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한 달 후.
첫 심부름의 목표인 저과주 10병 만들기에 성공하자 곧바로 생명의 샘으로 복귀했다.
오동이 꽤 놀란 얼굴로 맞이했다.
"벌써? 제법 손재주가 좋은가 보구나."
한 달 만에 만난 오동은 짧은 칭찬과 함께 임무 완료 비로 영석 다섯 개를 내밀었다.
말없이 영석을 챙기는 사이.
"그럼 이제 보상을 내려야겠지. 약속대로 샘물에 사흘간 머물 수 있게 해주겠다. 따라오거라."
고대하던 콩고물이 떨어졌고, 나는 한 번 더 감사함을 표하고 오동의 뒤를 따랐다.
생명의 샘은 거대한 원형의 샘.
넓은 원형 샘엔 용족의 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장소에 알들이 자리한 건 아니다.
알들은 영기 밀도가 가장 높은 중심부에 모여있었고, 외곽지역은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장소가, 나같이 심부름을 마친 이들이 몸을 담글 수 있는 장소였다.
"자, 이 정도면 설명은 된 것 같고. 정확히 사흘 뒤 나오면 된다."
이동하는 동안 샘을 이용하는 방법과 지켜야 할 규칙 등을 설명해준 오동은 눈짓으로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해줬다.
알들이 모여있는 중심부는 표식이 되어있기에, 그쪽 가까이만 가지 않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럼, 사흘 뒤 뵙겠습니다."
나는 오동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굳이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으로 이동.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속에 몸을 담갔다.
풍덩-
'아아아!'
그 순간,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머리끝까지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왜 이곳에 들어오면 영기민감도가 오른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아.'
게임처럼 수치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오히려 더 체감할 수 있었다.
몸을 둘러싼 샘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샘물은 닥터피쉬라도 되는 것처럼 피부를 자극했고, 간지럽혔다.
그러면서 피부에 닿는 영기의 실체가 더 온전하게 느껴졌다.
분명 일반 영천수와 다름없는 액체 상태인 건 마찬가지인데, 마치 젤리라도 되는 것처럼 저항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훗, 좋을 만하지."
희열에 찬 사이, 오동이 웃음과 함께 멀어져갔다.
나는 그런 그의 존재를 금세 잊을 만큼 샘물을 느끼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놨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영기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렸다.
샘물을 통해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곳을 탐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잠시 후, 주변 눈치를 살피던 나는 조심스럽게 공간대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동시에 발끝으로 영력을 흘려보내 샘물의 바닥에 미세한 구멍을 만들었다.
'알이 안정적으로 머물면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이 파야 한다.'
그랬다.
내가 생명의 샘을 욕심냈던 이유 중 하나.
그건 바로 호리병 안에든 영충의 알 때문이었다.
평범하게 성장시킨다면 알이 부화하는 데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상황.
생명의 샘의 힘을 빌려 단기간에 알을 부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거기다 더해, 샘의 영기를 흡수해 성장한다면, 기본능력치도 월등히 우월해질 수 있는 일.
마당 쓸고 동전 줍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멀리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 바로 입수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곳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용족은 오동의 눈치를 보고 멀리 자리할 게 분명했으니까.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 혹시라도 숨겨둔 알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마개를 열자, 호리병에서 알 하나가 흘러나왔다.
나는 구멍을 낸 바닥에 알을 집어넣고, 다시 흙을 덮어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을 극도로 조심하며 천천히 이행했다.
그렇게 3개의 알을 전부 옮기는 데 성공한 후, 호리병을 공간대에 넣으려는 사이.
"잠깐, 지금 뭐 하는 것이지?"
어느새 곁에 다가온 오동이 나를 내려보며 물었다.
움찔-
나는 놀라긴 했으나, 예상했던 일 중 하나였기에, 준비한 말을 꺼냈다.
"술을 담그는데 질 좋은 영천수를 사용할수록 좋지 않습니까? 해서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그래?"
눈초리가 올라갔던 오동의 표정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소용없다."
"네?"
"샘물은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맹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소용없단 말이다."
"아..."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동이 피식 웃고 말한다.
"이 같은 행동이 너뿐이었겠느냐? 원한다면 가지고 가도 상관없다. 다만, 이번 한 번 뿐이다. 샘물이 자연적으로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그 양이 매우 미미하니 앞으로 이러한 일은 자제하도록."
마지막 어조가 강한 걸 보면, 두 번 시도하다 걸리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럼... 한번 이것으로 저과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호리병 세 개에 샘물을 가득 담아,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그러는 편이 초보의 태도에 적합했으니까.
그 모습에 오동이 다시 한번 입가를 올리며 사라졌다.
'다행이다. 구멍을 낸 건 들키지 않아서.'
만약 바닥에 구멍을 낸 걸 들켰다면, 샘 바닥의 영토(靈土)를 채집하려 했다고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동의 태도를 보건대, 그런 상황이 연출됐다면 꽤나 귀찮아졌을 게 분명했다.
'하긴 그렇게 됐어도, 오동이 좋아할 만한 핑계가 있었으니까.'
오동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영토를 이용해 빚는 '토주(土酒)'를 떠올리다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오동이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 싶을 때쯤, 손끝에 영력을 뭉쳐 바닥에 숨긴 알들이 느껴지나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렇게 한참을 확인한 후에야, 절대 들키지 않겠다는 확신을 얻고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다음?
영기 민감도 상승과 알의 성장.
둘 다 중요하지만, 내가 샘에 들어오려 한 가장 큰 이유.
그건 바로, 생명의 샘처럼 초고밀도의 영천수를 이용해야 얻을 수 있는 능력.
명안(明眼)과 청안(淸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강진단을 포기하고 기한을 늘린 것이었다.
명안과 청안.
두 가지 능력을 얻기 위해선 한두 번 샘물을 이용해서는 어림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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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명안(明眼)과 청안(淸眼)
명안(明眼)은 안력 자체를 높여주는 비술이다.
명안이 생기면 기본적인 시력이 상승할 뿐 아니라, 동체 시력도 탁월하게 좋아졌다.
명안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번개의 움직임도 잡아낼 수 있었고, 수십 킬로 떨어진 곳의 상황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안을 익힌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수행이 상승하면 저절로 좋아지는 게 안력이었기 때문.
대부분의 수도자는 명안을 익히는 것이 초반에만 좋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초반에만 차이가 날 뿐, 후반부 플레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익히는 것도 쉽지 않지.'
두 번째 이유로는 명안을 익히기 위한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것.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밀도의 영천수를 주기적으로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익히려고 할까? 아니 익힐 수 있을까?
애초에 금수저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게 명안 비술이었다.
그래서 외면당하고 찬밥신세가 돼버리기도 했고 말이다.
'명안의 진짜 능력은 그런 게 아니지.'
그런 비술을 내가 왜 익히려 하냐고?
그건 바로 대부분 사람이 모르는 능력. 명안을 익히며 생기는 효과 때문이었다.
명안과 반대로 청안(淸眼)은 누구나 익히고 싶어 하는 비술이었다.
제대로 익히기만 한다면, 진법과 결계를 보는 순간 그것들의 구성요소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고, 술식의 허점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청안을 익힌 사람 앞에선 진법과 결계가 무용지물이란 소리.
물론 진법과 결계를 해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과 알지도 못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간극이 존재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지.'
뿐만 아니라 환영술과 분신술 같은 현혹 계열 술법도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청안을 익히고 있다면, 어디서든 대우 받을 수 있었고, 몸값이 천정부지 치솟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안은 하늘이 허락한 이들만 익힐 수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혈맥의 힘이 강해도, 한번 익히지 못하면 영원히 익히지 못하는 비술이었다.
그 이유까진 밝혀지진 않았지만, 한번 익히는 데 실패하면 영혼에 그 기록이 남는다고 적힌 서책이 발견되긴 했었다.
'나는 다르지.'
단, 명안과 같이 익히기 시작한다면 누구든 익힐 수 있는 게 청안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극소수만이 아는 명안의 효과였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다만 명안을 익혔다고 무조건 청안을 익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시작 시점.
명안을 익힌 직후, 처음으로 명안이 활성화됨과 동시에 청안 비술을 익혀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여러 번 성공했었으니까, 어려울 건 없다.'
생각을 마친 나는 명안과 청안을 동시에 익힐 시점을 계산하면서 얼굴을 샘물에 담갔다.
그리고는 안구로 영천수가 직접 스며들 수 있게 눈을 뜬 채로 영기 흐름을 유도했다.
샘물은 반듯이 앉아있으면 어깨까지 오는 깊이였기에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남은 시간 그렇게 샘물에 얼굴을 처박은 채, 호흡법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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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 샘물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자 두 번째 심부름이 시작됐다.
당연히 이번에도 저과주 제조였다.
"이번엔 스무 병이다. 재료비는 여기 담았다."
'스무 병? 열 병이 아니라?'
영석 60개가 담긴 보따리를 건네받아 공간대에 넣는 사이, 오동의 말이 이어졌다.
"혹여나 다른 주조 비법을 알고 있는 게 있나?"
"다른 주조 비법 말입니까?"
"그래, 있다면 한 번 더 거래할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오동이 나를 떠봤다.
'여기서 한 발 빼면 안 된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샘물의 이용 시간이나 기한을 늘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거래를 제안하려 했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더는 아는 게 없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알아 왔다고 말하기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지금이야 상대가 내 지식에 의문을 가진다 해도, 제사장인 금파월을 핑계로 댈 수 있지만, 한번 없다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배울 기회가 없으니까.
"조건이 어찌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뭐? 하하하."
오동은 이번에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표정이 싹 바뀌며 말했다.
"조건. 그래 조건이 중요하지. 이번에도 먼저 제안해 보거라."
'선제시라... '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일전에 저과주를 제조해오면 샘을 이용할 시간을 하루씩 늘려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해서 제안드립니다. 혹 제가 가져올 새로운 선주가 마음에 드신다면... 샘을 이용할 시간을 이틀씩 늘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제안에 오동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틀? 일전의 제안도 나름 신경을 써준 것이다. 이틀이면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은 안 드느냐?"
"무조건 그리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
"제가 새롭게 가져올 선주를 드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이번엔 눈썹을 찡그렸던 오동이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오호? 먹어보고 결정하라?"
"그렇습니다. 대신..."
"대신?"
말끝을 흐리자, 오동이 궁금증에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인다.
"대신, 선배님께서 소유하신 주탕기가 있다면... 저에게 사용할 기회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탕기(注湯器)는 액체 형태의 단약을 제조할 때 쓰는 기구. 당연하게도 술을 주조할 때도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새롭게 주조할 술은 호리병에서 직접 제조해도 될만한 것이 아니라서, 주탕기가 필수였다.
직접 구매할 여력이 안 되니, 염치 불고하고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주탕기라... 그거면 내 마음에 쏙 들만한 선주를 만들 수 있단 듯 들리는구나?"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아, 내주지."
오동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위로 공처럼 둥근 형태의 그릇이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나는 조심히, 영광이라는 듯 주탕기를 건네받아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니 더는 눈치 보고 앉아있을 필요는 없었다.
+++
생명의 샘에서 나온 후, 상점가로 향했다.
달각, 모경초, 태낭잎 등. 저충을 제외한 저과주 재료를 구입하고, 새로운 술의 재료도 구매했다.
"딱총나무 벌레, 자영초, 흰수염 개미 날개, 각각 이 정도씩 주십시오."
"큰손 손님이었구먼, 다해서 영석 60개만 주시면 되겠소."
저과주 재료비로 오동에게 받은 영석 60개 중 최소 절반 이상은 남겨야 정상이었는데, 나머지 재료로 딱 맞게 떨어졌다.
심지어 저충은 가격에서 제외했는데도 말이다.
'딱 세 번 도전할 수 있는 양이다.'
하지만 이것도 새로운 술의 재료를 다 채운 건 아니었다.
나는 곧장 서쪽의 숲으로 향했다.
"매화나무가 이쯤에 있다고 들었는데... 저깄다!"
한동안 숲을 돌아다니자, 둘레가 수십 미터는 돼 보이는 매화나무가 보였다.
이번 술의 핵심은 향기.
특히, 사람을 홀리는 매화향이 제조 비법의 핵심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매화나무 둥치를 가격했다.
발길질에 거인의 힘이 실린다.
쾅!
그러자, 하늘에서 꽃비라도 내리듯, 매화 꽃잎이 사방을 수놓았다.
팔랑-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아차."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영력을 그물처럼 그리며 시야가 닿는 모든 곳으로 퍼트렸다.
그러자 꽃비처럼 흩날리던 매화 꽃잎이 내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팔랑거리더니,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쾅! 쾅!
얼마 후, 연달아 세 번을 가격해 꽃잎을 모으자, 틈 없이 압축했음에도 한 아름 챙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목표한 바를 이루자,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 법기를 꺼냈다.
"오라비!"
그때, 멀리서부터 의도적인 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역시! 오라비였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건, 작은 꼬마 아이였다.
'이 아이는...'
시련의 탑에서 기절한 후 깨어났을 때 처음 보았던 꼬마.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을 가진, 영락없이 튜토리얼 안내 요정처럼 생긴 아이였다.
아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라비, 소식은 들었어. 샘지기 오동 아저씨 일을 돕는다며?"
'오동 아저씨?'
그러고 보니 꼬마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꼬마의 나이면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할 시기였다. 절대 혼자 돌아다닐 수 없었다.
고위 수사인 오동을 아저씨라 부르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에도.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 말인즉 꼬마 아이의 수행이 나보다 높다는 뜻.
'설마... 점지받은 아이?'
이상한 점을 세어보니, 중천의 설정 중 한 가지가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 꼬마가 재차 나를 다그쳤다.
"오라비?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그래. 듣고 있어."
"피이. 안 듣고 있었으면서. 오라비는 예전부터 항상 그러더라? 항상 멍하니, 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어? 그랬나?"
"아무튼 오동 아저씨 밑에 있으면 이제 가끔 볼 수 있겠네. 나도 내일부터 샘에 머무르게 되었거든."
"샘에 머무른다고?"
"응! 오라비 얘길 듣고 할아버지를 졸랐지. 헤헤. 잘했지?"
"어..."
샘에 머무른다니?
'일한다'가 아니라 '머문다'였다.
'정말 점지받은 아이인가?'
"그럼 난 가볼게. 근처에 할아버지가 기다리거든. 또 봐!"
잠시 후, 꼬마 아이는 나타났을 때처럼 의도적인 기척을 날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점지받은 아이.
특정 종족은 몇 세대를 건너뛰며 특별한 존재가 태어났다.
태어날 때 하늘이 신호를 준다고 하여 붙여진 호칭이 점지받은 아이.
보통은 해당 종족의 부흥을 이끄는 존재라 여겨지며, 추앙 속에 떠받들며 키워진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보다 강한 혈맥을 타고나고, 유저들이 히든 특성이라 불리는 피의 무게를 높은 확률로 지니고 있었다.
평범하게 자란다 해도 일반 수도자들은 가뿐히 뛰어넘을 재능을 타고났고, 요절하지 않는 한 반드시 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들이었다.
'보통은 종족 최고 수행자가 되거나, 족장이 되지.'
하지만 몇몇 사례로 볼 때, 점지받은 아이로 인해 멸족한 종족도 꽤 많았다.
종족이 점지받은 아이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을 때, 점지받은 아이가 종족을 먹어 치우며 성장할 때도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저 아이가 점지받은 아이일까?"
나는 멀어지는 꼬마를 보며 호기심이 생기는 걸 느꼈다.
만약 정말 점지받은 아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속한 용족은 부흥의 시기를 겪거나, 참혹의 시기를 거쳐야 할지 몰랐다.
'하긴 나완 상관없지.'
하지만 부흥이든 참혹이든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
30년이 지나기 전에 이곳을 떠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번 가볍게 웃고 생각을 털어버린 나는 비행법기에 영력을 주입해,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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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하고도 보름이 지난 후.
20병의 저과주와 새로운 선주를 주조한 나는 오동을 찾아갔다.
오동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자 어디 보여보거라. 반드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웃으며 하는 반협박에 나는 조심스럽게 공간대에서 하얀 자기병 하나를 꺼냈다.
자기병을 보자마자 오동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번처럼 박에 담지 않고 자기병에 보관한 걸 보면 독주로구나?"
애주가답게, 오동은 단번에 술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랬다.
내가 이번에 만든 술은 알콜 도수로 치자면 80도에 가까운 선주.
청정매화주(淸精梅花酒)라는 이름의 인족의 비법 중 하나였다.
"자 어디."
뽕-
청정매화주를 건네받은 오동은 참지 않고 자기병의 입구를 꽉 막고 있던 마개를 빼냈다.
그리고는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가져다 대려는데.
화아아악-
그 순간, 자기병을 중심으로 아찔한 매화 향기가 퍼지며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 향이 얼마나 깊고 짙었는지, 고위 수사인 오동마저 잠시 말을 잊고 벙찐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게... 대체..."
오동은 그 후로도 술을 마시지 않고, 한동안 코로 숨만 들이마셨다.
그러길 한참.
겨우 정신을 차린 오동이 예전과 달리 조심스럽게 자기병 입구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한 모금 한 모금이 아깝다는 듯 움찔거리며 술을 넘겼다.
'어때? 정신이 확 깨지?'
나는 그런 오동을 보며 속으로 웃음 지었다.
청정매화주는 향수에 버금가는 고농축 매화 향기로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하지만 술 자체는 전혀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무색, 무미.
오로지 선주의 청량함을 극대화해, 싸한 기운과 함께 시원한 감각만을 전신에 전해주었다.
대신 술을 마실수록 코로 들이마셨던 매화향이 점점 진해진다.
마치 구름 위 매화 꽃밭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나는 말없이 계속해서 술을 음미하는 오동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떠신지요? 마음에 드십니까?"
오동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자기병을 내려놓으며 나를 직시했다.
눈에선 광선이라도 뿜을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냐?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니! 이것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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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청정매화주(淸精梅花酒)
인족 최대 세력이라는 육대 종문.
그중 환영술로 으뜸이라 불리는 조화종(造化宗)의 숨겨진 주조비법.
조화종은 청정매화주를 중요한 손님에게만 가끔 선보였는데, 그로 인해 조화(造化)가 아닌 조화(造華)종이라는 말을 듣곤했다.
청정매화주는 영천수의 질에 따라 품질이 한없이 좋아지는 변화가 무쌍한 선주였다.
"청정매화주라 합니다."
"청정매화주?"
내가 수많은 레시피중 청정매화주를 고른 건, 지금 수행에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선주이기 때문.
그만큼 나는 오동과의 거래에서 반드시 이득을 취할 요량이었다.
반문하는 오동의 눈을 피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결정'이란 말에 오동은 이제야 두달전 대화가 떠오른 건지 헛기침을 해댔다.
그리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거래를 받아주지. 앞으로 샘을 이용할 때마다 이틀씩 늘려주기로 하겠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동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거래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오동은 내가 자세를 바로 하자 본론을 꺼냈다.
"그럼 어서 주조법을 내게 넘기거라. 당장 어떤 식으로 주조했는지 알아야 하겠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구나."
예상대로의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주조법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무슨 소리냐니?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앞으로 이틀씩 늘려준다고, 그럼 네가 가진 청정매화주의 주조법을 넘겨야지? 그래야 거래가 성립하는 것 아니겠느냐?"
당당한 오동.
나 역시 최대한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일전에 저와 대화를 나눌 땐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더냐?"
"분명 주기적으로 술을 가져오면 하루를 늘려주신다 하셨습니다. 주조법에 대한 건 그 후에 기한을 늘리는 조건으로 거래를 한 것이지요."
내 말에는 일절 거짓이 없었다. 오동은 잠시 당황한 듯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그러니 약속대로라면 앞으로 임무를 마치고 방문 때마다 청정매화주를 선배님께 드리고, 샘을 이용할 시간을 이틀씩 연장받는 게 맞는 셈법이지요."
말을 끝낸 후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듯 얌전히 대기하자, 오동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아.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거래라는 말이 나왔다면 당연지사 일전 거래의 연장선이라 생각해야지. 그전의 일을 들먹거리다니?"
오동의 말도 틀린 것은 없었지만,
나는 억울하단 듯 말했다.
"그렇다면 거래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청정매화주는 저과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선주이옵니다. 제가 가진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을 겨우 샘을 이틀 더 이용하는 데 사용하다니요?"
"겨우 이틀이라니? 이틀이 쌓이고 쌓이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모르느냐? 한 번이라도 몸을 담그기 위해 안달 나 있는 것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왜 모르겠습니까?'
그걸 아니깐 지금 선을 넘을 듯 말 듯 이 거래를 하는 건데.
오동의 말대로 한번 사용할 때마다 이틀을 늘려주는 건 대단한 혜택이었다.
문제는 '임무가 끝날 때마다'라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심부름이 저과주 10병이었고, 두 번째는 20병이었다. 그 말인즉 앞으로 50병 100병... 계속해서 늘려서 심부름을 시킬 수 있단 뜻.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처음엔 주조만 담당하게 된 게 운이 좋다 여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함정이었지.'
생명의 샘은 유한했다.
생명의 샘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한했다면, 어째서 넓은 샘물에 몇 명만 선별해서, 그것도 가끔씩만 이용할 수 있게 해주겠는가?
그 이유는 사용하는 인원이 늘어날 때마다 샘물의 영기 밀도가 점점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동은 심부름하는 아이들의 임무 기한을 조정하면서, 각각이 샘을 이용할 기회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들보다 3배 이상의 기간을 사용하는 나의 사용을 가장 많이 제한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선별하고 선별해 선택한 게 조화종의 비법인 청정매화주였다.
내가 무리하게 우기고 거래를 제안해도, 오동이 절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걸 골라야 했으니까.
또한 오동이 술을 욕심내 나의 임무 기간을 최소한으로 해주길 원했으니까.
그래야 이 거래가 내가 의도한 대로 제대로 성사될 수 있었고, 나는 임무를 마칠 때마다 이틀씩 연장된 샘 이용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게임처럼 몇 가지 선택지 안에서, 내가 유리한 선택만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귓불이 붉어지며 실시간으로 눈꼬리가 올라가는 오동을 보며, 그가 종족의 후배에게 보일 수 있는 인내의 한계에 봉착했음을 나는 깨달았다.
'안 되는 건가?'
여기서 괜히 더 몰아붙이다 간, 거래는 고사하고 샘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커졌다.
이른바 괘씸죄.
당장이라도 '꼴 보기 싫으니 나가라!'라는 말이 오동의 입에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긴. 이제야 성인식을 마친 아이에게 이 정도 양보를 해준 것도 감지덕지해야 하긴 하지.'
거래란 건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행위. 내가 나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오동의 배려였다.
결국 그가 폭발하기 직전,
아직은 어설픈 꼬마를 연기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선배님 말씀대로 이틀이 쌓이고 쌓이면 대단하단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 그게"
살짝 어리숙하게, 일부러 욕심을 내비친다.
그가 내 욕심을 귀엽게 봐주면 이득이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주조비법을 싼값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말해보거라. 뭘 뜸 들이느냐."
당당하던 내가 조금은 움츠러들자, 오동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는 척,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제가 매달 임무를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엔 한 달이었지만, 이번엔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엔 석 달 넉 달이 될지... 혹 일년 이년이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뭐라?"
오동은 내 대답에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정말 재밌는 아이가 들어왔구나. 그래. 그것이 걱정되어 주조비법을 바로 넘기지 못하고 거래를 하려 한 것이냐?"
"그게..."
"하하하. 너는 나를 그렇게 보았느냐? 설마 너에게 받은 게 있는데, 너를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이곳에 오지 못 하게 할 거라 여겼느냐?"
크게 웃는 걸 보니, 다행히 귀엽게 봐주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웃던 오동은 신색을 바로 하고 어른처럼 어깨를 과시하며 입을 열었다.
"금파란."
"예. 선배님."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꾸나. 원래의 거래대로 청정매화주의 주조법을 나에게 넘기거라."
"그러면..."
"그렇게 한다면 약속하겠다. 매번 매화주 네 병. 앞으로는 그 일을 제외하곤 다른 일을 시키진 않겠다. 어떠하느냐?"
어떠하긴?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동안 술을 바치는 대가로 이득을 얻다가, 적정 시기에 주조법을 대가로 한 번 더 거래를 하려 했다.
그랬기에 또 한 번의 거래를 할 기회는 사라져 버린 결과였다.
하지만 당장 주어진 것만 보자면 내가 원하던 최상의 결과에 가까웠다.
나는 크게 감동한 목소리도 외쳤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실제로 감동하기도 했다.
+++
"이런 식으로 선주를 만들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방식을 생각했단 말인가!"
'당신이 무시하는 인족이요.'
오동은 거래가 마무리되자마자, 내가 빈 옥간에 새긴 주조비법을 받아들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한동안 헤어나오질 못할 거 같았기에,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는 알을 묻어두었던 위치로 이동해 몸을 담갔다.
풍덩-
"아으..."
두 번째지만, 처음처럼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집중하다 보니, 처음보다 더 선명하게 샘물의 기운이 느껴진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영기 민감도가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현상.
나는 그 감각을 보다 더 느끼기 위해, 머리끝까지 샘물에 담그며 호흡법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두 눈을 부릅뜬 채, 안구로 샘물을 직접 흡수시키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 다섯 날이 되려던 시점.
따닥-
엉덩이 밑으로 미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궁둥이를 붙이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
'벌써?'
그것이 알이 부화하려는 신호인 걸 감지하고, 샘물 밖으로 얼굴을 꺼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파헤쳐 알 세 개를 꺼냈고, 꺼냄과 동시에 곧바로 삼켜버렸다.
저번처럼 부주의하게 호리병을 꺼내거나 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직후, 아무 일 없었던 듯. 바닥을 쓱쓱 문질러 바닥의 흔적을 지웠다.
그렇게 하루를 더 샘물에서 보낸 뒤 다음날.
오동에게 매화주 제조에 필요한 재료비를 받은 후, 상점가가 아닌 거처로 곧장 움직였다.
'어떤 녀석들일까?'
잠시 후 거처에 도착한 나는 입을 벌려 몸속에 영력으로 보호하고 있던 알 세 개를 뱉어냈다.
톡-
알들은 미세하게 금이 가 있는 상태.
당장 부화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의 힘만 주어도 깨질 것 같은 약하디약한 상태였다.
나는 한동안 알을 지켜보다가 손끝에 상처를 낸 후, 알의 깨진 부위에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알 속의 영충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자 영양분 주입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없는 사이 부화할까 봐서 해놓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략 아흐레가 정도가 지난 시점.
투툭-
세 개의 알 중 하나에서 작은 구멍과 함께 뽀송뽀송 솜털이 달린 곤충의 다리 하나가 빠져나왔다.
곧이어 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하나였던 다리는 두 개, 세 개로 늘어났고,
쩌쩍-
결국 알이 반으로 갈라지며, 엄지손가락만 한 거미 한 마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명옥거미?"
거미는 솜털이 뽀송한 가는 다리 여덟 개가 달려있었고, 등에는 푸른 껍질이, 배에는 붉은 줄무늬를 지니고 있었다.
거미과 영충 중에서 나름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는 명옥거미라는 개체와 흡사해 보였다.
알에서 빠져나온 거미는 비틀거리며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길 반복했다.
그 사이.
쩌적-
나머지 두 개의 알에서도 작은 구멍과 함께 곤충의 다리가 삐져나왔고, 곧이어 처음과 동일한 거미가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란 인물이 보내준 선물은 거미 세 마리였다.
+++
한동안 몸을 푸는 듯 제자리에서 비틀대던 거미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움직이려 낑낑대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종속의 인 때문인가?'
사실 그냥 보았다면 징그러운 곤충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이미 종속의 인으로 인해 영혼에 존재감이 심어진 상태.
그랬기에 거부감도 없는 것 같았고, 내 아기들처럼 귀여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거미들이 빨리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손바닥 위로 천천히 영력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거미들은 몸을 뒤집더니 손바닥에 등을 비비대며 뱅글뱅글 돌았다.
마치 따뜻한 이불속에 들어와 기분이 좋은 아이처럼 행복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순간,
번쩍-
세 마리의 거미가 동시에 눈을 뜨며 나를 직시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몸을 원래대로 뒤집더니, 팔을 타고 얼굴로 기어 오려 움직였다.
'어미로 인식했구나!'
그 모습에 나는 즉시 반대편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며 핏방울을 모아 거미 앞에 가져갔다.
그러자 거미들은 달려오던 걸음을 멈추더니, 내피가 어미의 젖이라도 되는 것처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검지, 중지, 약지에 하나씩 달라붙은 모습이 앙증맞았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그 순간 서로의 영혼에 새겨진 종속의 인이 활성화되며 거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끈끈하게 이어졌음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얘네들이 머물 집을 안 사 왔네?'
그러다 문득, 급히 거처로 오느라 거미들이 머물 수 있는 충낭(蟲囊)을 사 오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충낭은 영충들의 '이동식 집' 같은 개념으로, 허리에 차는 작은 복주머니였다.
공간대와 달리, 내부에서 숨 쉬거나 활동도 가능했고, 신기(神器) 급 충낭은 내부에서 수련도 가능하다 알려져 있었다.
그때,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까득-
조용히 내피를 빨아먹고 있던 거미들이 돌연히 손가락 끝을 일제히 문 것이다.
"어?"
종속의 인이 걸린 영충은 절대 주인을 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내 손가락을 물었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현상.
나는 너무 놀라 혹시나 종속의 인이 제대로 걸리지 않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손끝에 영력을 집중하며 확인 작업을 하려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다음.
슈륵-
내가 어떤 행동도 하기 직전,
내 손가락 끝을 물었던 거미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손가락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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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거미 삼형제
"어디 갔어?"
내 손가락을 문 것보다 모습을 감춘 게 더 놀라운 현상이었다.
나는 급히 손을 들어 확인했다.
"정말 없네?"
혹시나 잘못 본 건지. 손바닥에 매달린 건지 확인했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찾다 보니,
"어?"
처음 보는 문신이 내 손톱에 새겨져 있는걸 볼 수 있었다.
마치 금파월이 준 팔찌가 문신만 남기고 팔목에 스며든 것처럼.
검지, 중지, 약지. 세 손가락 손톱엔 콩알만 한 거미 모양의 문신이 남아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혹시나 하고 손끝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만 모습을 보이라고.
슈륵-
그러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단 듯이 손끝에서 거미 세 마리가 빠져나와 대롱대롱 매달렸다.
"허..."
처음 보는 괴사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수많은 플레이를 통해 꽤 많은 영충을 접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단언컨대 커뮤니티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영충이 신기처럼 몸 안에 숨다니..."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지만, 눈앞에서 보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능력.
"이런 게 가능했다니."
종속의 인을 맺은 영충이나 영수가 법기처럼 입을 통해 몸 안에 들어가는 건, 술법을 익히면 가능했다.
수행이 올라가면 술법을 익히지 않아도 가능했다.
하지만 피부를 통해 몸 안에 들어가는 영충에 대해선 비슷한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게 있었다면, 아마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었을 것이다.
누가 보아도 영충 자체가 신기(神器)급 능력을 갖춘 채 태어난 것 아닌가?
나는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거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거미들은 또다시 손끝으로 슈륵 하고 빨려 들어갔고, 신호를 주자 다시 슈륵하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반복하다 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스스슥- 스스슥-
내 몸이 놀이터라도 된 마냥, 거미 세 마리가 온몸을 기어 다닌다.
코끝에 매달렸다가 머리카락을 타고 대롱대롱 그네를 타기도 했고, 어깨부터 미끄럼을 타며 옷 안으로 들어가 곳곳을 탐험하기도 했다.
"가만히 좀 있어라. 어?"
나는 거미들 때문에 분산되는 신경을 애써 다잡으며 주조에 집중하려다,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거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미 밥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염소똥처럼 생긴 거미 밥은 가매초에 몇 가지 재료를 첨가해 만든 영충의 특식.
아니나 다를까, 거미들은 밥 냄새를 맡더니 쪼르르 달려와 허겁지겁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잘 먹고 잘 커라."
그 모습에 나는 살며시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들었다.
세 번의 채집 활동으로 비축해둔 가매초가 40모숨이 넘었다.
하지만 거미들의 식성을 보니, 얼마 버티질 못할 거 같았다.
내 상식 안에선 가매초 한 모숨이면 영충 한 마리가 한 달 동안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었는데, 거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속도면 길어야 석 달, 짧으면 두 달을 겨우 넘길 것 같았다.
잠시 후, 밥을 전부 먹어 치운 거미들은 좀 전과 달리 활발히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한결같네."
그게 어떤 신호인지 알았기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자.
슈륵-
거미들이 기다렸단 듯이 손가락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밥 먹고 졸리니, 자러 간 것이다.
거미들이 깨어난 후로 매일 겪는 일상이었기에, 금세 관심을 지우고 오동에게 받은 주탕기에 집중했다.
거미들의 방해가 없을 때, 조금이라도 일을 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술이나 빚자."
+++
매화주 네 병을 만드는데 예상되는 소요 시간은 대략 두 달.
거미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긴 했지만, 그만큼 숙달되다 보니 시간은 점차 줄어갔다.
또한 첫 제조 땐 3번의 도전 끝에 한 번 성공했지만, 몇 번의 성공 이후 실패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랬기에 반년이 지난 지금은 네 병을 주조하는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조 시간이 줄었다고는 하나, 바로바로 술을 상납하진 않았다.
주기적으로 가매초를 채집해 거미 밥을 만들어야 했고, 대적점을 수련하고, 거미들을 훈련하는 일도 병행해야 했으니까.
한 가지 더.
오동은 내 주조 실력을 고려해 매화주 네 병이라는 약속을 정했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 달리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술을 주조한다면 과연 약속을 계속해 지켜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말로 당장 본인의 주탕기만 뺏어가도, 내 주조 능력은 처참하게 떨어질 게 분명한 일.
그러니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망칠 순 없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샘에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해야 했다.
"하아... 이번에도 좋구나. 좋아. 어쩐지 갈수록 향이 짙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매화주 주조에 들어가는 재료는 동일했지만, 내 실력이 향상되니 당연한 소리.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면, 저는 이만..."
나는 오동의 칭찬에 겸손한 척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물러나 샘물로 향했다.
그리고는 예전과 달리, 오동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담갔다.
첨벙-
몸을 담근 후, 신호를 보내자, 거미들이 손가락에서 빠져나와 물속을 유영한다.
생명의 샘은 용족뿐만 아니라 거미들에게도 최고의 수련 장소였다.
그저 물속에 몸은 담근 후 물장구를 치며 놀뿐인데도, 거미들이 내뿜는 기운은 날로 강해져 갔다.
'그만 돌아와.'
하지만 아쉽게도 거미들을 계속 꺼내놓을 순 없었다.
오동은 술을 받으면 한동안 향기에 취해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딱 그 시간 동안만 거미들이 활동할 수 있었고, 그 외엔 꺼내기가 무섭게 알아차렸다.
-이상하군. 분명 다른 기척이 느껴졌는데?
한번은 거미들을 샘물에서 수련시키다 들킨 뻔한 적도 있었다.
만약 그걸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예상컨대 그냥 혼나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샘은 용족에게 신성한 장소.
그런 곳에 벌레 따위를 들여왔다며 생명의 샘을 지키는 임무에서 완전 배제시킬수도 있었다.
심하면 거미들을 죽여버릴지도 모르는 일. 절대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오라비! 저번엔 저쪽에 있더니. 왜 이번엔 여기로 옮긴 거야?"
그리고 오동 보다 골치 아픈 한 가지.
바로, 점지받은 아이라고 의심되는 꼬마 때문이었다.
꼬마의 이름은 전여희.
족장의 직계 혈통이자, 열 살을 겨우 넘긴 나이에 5단에 오른 수도자였다.
처음엔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하길래, 족장의 손녀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족장의 딸.
할아버지라 부르는 인물은 나 같은 일반 부족인들은 절대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초고위 수사였다.
너무나 까마득한 존재라서 감히 그 앞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전여풍이라 했던가?'
수도자들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자신만의 구역을 지정하고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족의 후인들에게 수도 자원만 공급받으며 오로지 수행 상승에만 모든 걸 쏟아붓기 때문.
그리고 전여희의 할아버지는 그런 인물들 중에서도 수행 수준이 높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풍덩-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몸을 담그는 전여희를 보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저리 가, 수련해야 하니까."
"오라비는 수련이 지겹지도 않아? 나랑 놀자. 응?"
"내가 너와 처지가 같아? 너는 며칠이고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지만, 난 두 달에 한 번이라고. 그러니 방해하지 마."
"치이.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는 단약 먹는 게 훨씬 좋은데."
"..."
'그럼 좀 주든가.'
속마음은 꺼내지 않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멀리 떨어트렸다.
'하긴 그림의 떡이지.'
전여희가 할아버지가 만든 단약을 몰래 가져다준다고 해도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꼬맹이에 불과한 전여희를 단번에 한 단계씩 성장시킨 단약을 내가 먹는다고 과연 도움이 될까?
예상컨대 할아버지란 인물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단약을 먹는 순간 몸이 과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나 역시 고급 단약을 많이 만들어 봤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라비? 오라비?"
나는 꼬마의 관심을 무시하고, 샘물에 머리끝까지 담아,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안구에 열감이 생기며 맑디맑은 샘물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땐가?'
샘물이 뿌옇게 보이는 증상은 명안의 기초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는 뜻.
시기를 정해 술법을 최초 시동하면서 청안을 익히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정말 안 놀아 줄 거야? 치이, 이거 자랑하려고 했는데."
한껏 삐진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리 가서 오동 선배님이랑 노... 어? 그건?"
"봐봐? 이쁘지?"
수련에 집중하기 위해 전여희를 쫓아내려 했던 나는 숨죽여 그녀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오라비 이게 뭔 줄 알아?"
'당연히.'
정확히는 목걸이에 박힌 투명한 돌을.
"처음 보지? 이건 공명석이란 거야.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졸라서 선물 받았어."
전여희가 가리키는 투명한 돌은 용족에게 꽤 의미 있는 물건 중 하나였다.
공명석(共鳴石) 혹은 공진석(共振石)이라 불리는 투명한 돌.
쓰이는 곳은 무궁무진했지만, 가장 중요한 쓰임은 두 곳이었다.
대공진(大共振)이라는 공격형 공법을 수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고, 용족의 야수화 능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재료였다.
대공진은 10단에 오르고 난 용족이 세상을 공부하기 위해 부족을 떠날 때 익힐 수 있는 공법.
한마디로 10단에 오른 용족의 첫 목표가 공진석을 구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10단에 오른 후, '수련에 필요한 공진석을 구하시오'라는 퀘스트가 생성됐다.
'금수저는 다르구나. 벌써 공진석을 손에 넣다니.'
나는 그녀의 손에든 목걸이를 한동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깐 빌릴 수 있을까?"
+++
'친한척하더니, 쩨쩨하긴.'
전여희는 다른 건 모르지만, 공명석은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 쳤다.
그리고는 미안한지, 평소처럼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덕분에 전심전력을 다해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볼 때마다 빌려주라 해야겠어.'
그녀를 퇴치할 수 있는 비법을 알아낸 것에 기뻐하며 상점가로 향했다.
상점가에 도착해 평소처럼 청정매화주의 재료를 산 후, 몇 가지 재료들을 더 구했다.
"오늘도 없습니까?"
"미안하구먼, 이토록 오랫동안 강황이 수급이 안 되다니. 이상할 노릇이긴 하네.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강황은 노란색의 뿌리 열매로 현대의 강황과 비슷한 종류였다.
다만 음식이나 약초로 사용하는 게 아닌, 단약의 재료.
초보 수사들에게 어울리는 양기를 품은 재료로써, 초진단의 재료중 하나였다.
저충을 잡기 시작한 후로, 초진단을 만들어 복용하려 했으나, 강황의 부재로 번번이 무산되고 있었다.
설마 다른 것도 아닌, 흔하디흔한 저가 재료중 하나인 강황 때문에 단약 제조가 막힐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비싼 재료인 저충은 한가득한데, 싸구려 재료인 강황을 못 구해 안달이라니?
세상일은 참 쉽지 않았다.
"혹, 물건이 구해지면 바로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그러겠네."
잠시 후, 상점가를 벗어나 매화 꽃잎을 채집하고 거처로 복귀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청정매화주 제조에 돌입.
스무날이 지나기 전에 주조를 마쳤다.
주조를 빠르게 마친 나는 쉬지 않고 대적점을 익히기 위해 내부에서 나선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다.
"아쉽네, 초진단을 먹어야 능률이 오를 텐데."
하지만 바로 집중하지 못하고, 고민이 이어졌다.
성인식이 지난 지도 1년이 넘은 시점.
이제 슬슬 수행 상승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초진단이 아닌 다른 단약으로 방향을 틀어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상념이 이어졌다.
현대와 달리 중천은 물품이 바로바로 수송되지 않는다. 그랬기에, 재수 없으면 몇 년 동안 상점에 강황이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
그때, 허벅지 위에서 술래잡기하던 거미들을 보며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너희들이 있었구나!"
초진단을 먹지 못하는 아쉬움에 강황에 대해 떠올리다 보니 생각이 확장됐다.
강황이 대량으로 싸게 판매하는 이유는 재배지에서 공급되기 때문. 그렇다고 재배지를 제외한 곳에서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시간 대비 너무나 비효율적이라 직접 채집하지 않는 것이지, 하려고 한다면 못 할 건 아니었다.
나는 급하게 거미들을 불러들인 후, 거처 밖으로 향했다.
빠르게 이동해 마을 서쪽의 숲 지대에 도착했고, 거미들을 불러냈다.
'마을 근처이니 안전하겠지.'
잠시 후, 산책 나온 줄 착각하며 행복해하는 거미들을 보며 종속의 인을 자극했다. 동시에 신호를 보냈다.
"지금부터 내가 떠올리는 식물을 찾는 것이다. 양기를 띈 노란 뿌리식물로 강황이라 부르는 것이다. 가까이 가면 특유의 쌉쌀한 쓴맛이 나고, 은근한 온기가 느껴질 거다. 자! 찾아보거라! 찾으면 내게 알려주면 된다."
명령을 내린 나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거미들을 바라보다 제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거미가 채집을?
수련하며 기다려보면 결과는 금세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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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초진단
강황을 채집하는 건 간단한 일.
하지만 찾는 건 일일이 수작업이 필요했다.
그토록 비효율적인 일은 거미들에게 시키고 나는 이곳에서 수련을 이어가면 그만이었다.
특히나 거미과 영충은 채집, 수렵에 특화돼 있기로 유명했다.
물론 내 영충들은 아직 너무 작고 힘이 없어 땅속 깊이 박힌 강황을 뽑아오진 못할 테지만, 위치를 알려주는 것만으로 일은 다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위치만 특정할 수 있다면 채집하는 건 정말 일도 아니었으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당분간 쓸 정도만.'
많은 양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상점에 강황의 재고가 채워질 때까지, 초진단을 만들 분량만 자급자족할 수 있으면 충분했다.
결과는 지켜봐야 할 테지만, 기대를 저버리진 않을 거라 여겼다.
일반 거미도 아니고, 신기급 능력을 갖춘 거미들 아닌가?
나는 거미들을 믿고, 수련을 이어가기 위해 집중했다.
우우웅-
곧이어 대적점의 시작인 나선을 내부에서 만들어 키워나갔다.
하지만 외부로 표출하진 않고, 내부에서만 크기를 줄였다 키웠다 하며 숙달되게 반복했다.
'혹시 모르니깐 조심해야지.'
그렇게 대여섯 번 나선을 생성했다가 소멸시키길 반복했을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거미 중 한 마리가 빨빨빨 다가와 내 앞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벌써?'
그 모습에 나는 자리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위치를 알아 왔으니 확인 작업을 해야 할 차례.
"그럼 앞장 서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쿠엑-
엄지손가락만 한 거미가 입을 쩍 벌리자, 그 안에서 샛노란 강황이 뿌리부터 줄기까지 통째로 툭 하고 빠져나왔다. 그것도 한두 뿌리가 아닌 무려 일곱 개가.
"허..."
나는 너무 놀라 확인을 위해 손을 뻗자, 거미가 땅을 박차며 가뿐히 손위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티눈만큼 작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 모습에 조심스럽게 나머지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강황을 끌어와 거미 입에 가져다 대자.
쇽-
거미보다 수십 배나 큰 강황이 흔적도 없이 거미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수도자들이 법기를 축소해 입안에 보관하는 것처럼.
"허..."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을 잃는다고 했던가?
지금 내가 딱 그랬다.
지금 거미가 보인 능력?
대부분 영충들이 일정 수행이 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 내 거미들은 아기와 같은 수준이라서, 수행이라 할만한 실력 자체가 없다는 것.
그러니 지금 보인 능력은 피부 안으로 숨어드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가진 능력이란 소리였다.
'도대체 종(種)이 뭐지?'
시간이 지나자 두 번째 거미가 빨빨빨 기어 오더니, 강황 다섯 뿌리를 뱉어냈고,
빨빨빨-
곧이어 세 번째 거미마저 노란 뿌리 열매를 여섯 뿌리나 뱉어내 나를 놀라게 했다.
'정말 대단한 아이들을 내게 보내주셨구나.'
나는 본 적도 없는 어머니란 존재에게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보냈다.
잠시 후,
사사삭-
두 마리 거미가 강황 채집을 위해 다시 모습을 감춘 사이.
나는 세 번째로 도착했던 거미를 손바닥 위에 올린 채, 눈앞에 가져와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가져온 건 강황이 아니라 황고구마라는 뿌리 열매야. 강황은 달달한 맛이 아니라 쌉쌀한 쓴맛이 난다. 그리고 초록 줄기가 이렇게 잔뜩 붙어있고. 알겠지?"
거미 눈앞에 친구들이 채집해온 강황을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했다.
세 번째 거미는 이번엔 제대로 이해한 건지, 손바닥 위에서 두 번을 뱅뱅 돌다가, 바닥으로 툭 하고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마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듯 잽싸게 숲 사이로 모습을 감쳤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황고구마를 공간대에 넣고 다시 수련을 이어갔다.
껍질부터 속까지 샛노란 색의 황고구마.
쉽게 찾을 수 없는 꽤 비싼 뿌리식물이었다.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
거미들의 도움으로 재료 수급을 해결한 나는 곧장 상점가로 향했다.
상점가에 도착 후, 단약 제조에 필요한 약탕기와 삼발이, 그리고 솥을 구매했고, 곧장 거처로 돌아왔다.
"이런 싸구려가..."
사들인 세 가지 물건은 싸구려 중에서도 싸구려인 최하품 연단 도구들.
그럼에도 1년간 모아둔 영석을 전부 털어야 했다. 그것도 부족해 가매초 다섯 모숨을 추가로 지불하기까지 해야 했다.
"할 수 없지. 지금은 이게 최선이니까."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연단 도구들의 수준에 따라 단약의 품질이 달라진다.
품질뿐만 아니라, 단약 제조의 성공률도 크게 좌우됐다.
그랬기에 아쉬움은 남았지만, 딱히 더 좋은 걸 구할 환경은 아니었기에 과감히 머릿속에서 지웠다.
"도구는 최하품일지 몰라도,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자부한다."
잠시 후, 고생한 거미들에게 평소보다 많은 가매초 특식을 배급하고, 거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 잡은 후, 게임 플레이 당시 수천 번씩 만들었던 단약 제조 과정을 떠올리며, 심상으로 예행 연습을 시작했다.
"저충을 마지막에 넣지만, 미리 준비해놔야 하고, 강황의 열기를 증폭시키기 위해 배롱초와 대취를..."
그렇게 꼬박 하루가 넘게 머릿속으로만 연습을 끝내고 본격적인 단약 제조에 돌입했다.
"들어오거라."
그전에 거미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강제로 손가락 안으로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합!"
먼저 삼발이를 꺼내 허공으로 던지자, 허공에 고정되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한참 동안 점점 뜨거워지는 삼발이의 온도를 느끼다가, 적당한 온도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약탕기를 그 위에 올렸다.
드드득-
그러자 달궈진 삼발이의 온도가 빈 약탕기를 달구며, 두 도구 사이에 마찰이 일어났다.
잠시 후, 급속도로 오르던 약탕기의 온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지금'
나는 지휘하듯 손을 휘저었고, 내 손짓에 따라 주변에 준비해두었던 재료들이 순서대로 휘리릭 날아가 약탕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치이이익-
그 순간, 고열로 인해 재료들의 수분이 날아가며 증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수많은 약 성분이 포함된 증기를 날려 보낼 수는 없는 일.
"합!"
재빨리 양손에 영력을 뭉쳐 약탕기를 감싸자, 증발하던 것들이 벽에 부딪힌 것 마냥 약탕기 안으로 돌아간다.
직후, 마찰로 인해 미세하게 들썩거리던 약탕기가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되고 있다.'
나는 요동치는 약탕기를 예의 주시하며 초집중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약탕기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재빨리 천장을 향해 손짓했고, 내 손짓에 따라 약탕기가 삼발이에서 떨어져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이제 가장 중요한 연단이다.'
지금까지 약탕기로 각종 재료의 약 성분을 뽑아내 혼합하고 약효를 폭발시켰다면, 지금부터는 그것을 하나로 뭉치는 작업을 해야 했다.
제각각 효과를 가진 수많은 약 성분들이 완벽한 비율로 조화를 이뤄, 하나의 알약으로 뭉치게 하는 과정.
'빠르게!'
마지막 순서는 시간이 생명.
나는 재빨리 삼발이 위에 솥을 올리며 양손으로 영력을 쥐어짜듯 방출했다.
화르르륵-
그러자 지금껏 시뻘겋게 달궈지기만 했던 삼발이가 불을 내뿜으며 빠르게 솥을 달궜다.
그 모습에 양손을 교차하자, 공중에 떠 있던 약탕기가 스스로 기울어지며 내용물을 흘려보냈고,
동시에 솥의 뚜껑이 반쯤 열리며 내용물을 한 방울도 빠짐없이 빨아들였다.
"합!"
솥 안으로 약탕기의 내용물이 전부 옮겨지자, 재빨리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는 솥 내부로 영력을 불어넣어 연단을 이어갔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부르르-
솥 내부에서 일어난 융합 과정으로 인해, 강렬한 진동이 퍼져나갔다.
'성공인가? 실패?'
진한 약 내음이 거처를 가득 채웠다.
평범한 단약 제조일 경우, 숙련된 연단사(鍊丹士) 들의 제조 성공확률은 3할.
하지만 내가 사용한 도구들의 상태를 감안한다면 제조 성공확률은 그보다 훨씬 떨어졌다.
게다가 현실에서 직접 해보는 제조는 이번이 처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잠시 후, 솥의 열기가 사그라들며 단약을 확인할 시간이 오자, 긴 호흡과 함께 손을 움직였다.
삼발이를 한쪽으로 치우고, 솥을 가까이 가져와 천천히 기울였다.
그러자 뚜껑이 스르륵 열리며, 안에서 구슬처럼 동그랗게 뭉친 단약이 투두둑 떨어진다.
나는 가볍게 손을 저어 그것들을 손바닥 위로 가져오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에 성공하다니!"
손바닥 위 구슬처럼 생긴 단약들.
영롱한 빛이 검은 구슬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제조에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첫 제조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섯 알의 단약을 얻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실패, 세 번째도 실패였다.
"역시... 쉽지 않구나."
돌이켜보면 첫 제조에 단번에 성공했다는 게 운이 좋았던 일.
나는 천천히 세 번의 제조 과정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동안 숙고의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제조에 돌입.
재료를 전부 소진하는 동안 총 4병의 초진단을 얻었고, 그보다 많은 양의 실패물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제조가 끝난 후의 결과는 만족이었다.
일반적인 제조확률과 도구들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꽤 성공적인 연단이었다.
잠시 후, 새까맣게 타버린, 하지만 약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실패한 단약은 거미들의 특식으로 제공했다.
그 후엔 완성된 초진단을 공간 팔찌에 수납하고, 다시 한번 단약 제조 과정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제조가 끝나고 샘에 방문하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
무리하게 단약을 섭취하기보다는 단약 제조 방법에 관한 이론적인 완성에 시간을 할애할 요량이었다.
+++
두 달이라는 기한에 맞춰 생명의 샘으로 향하는 길.
나의 머릿속은 여전히 연단에 관한 고심으로 가득했다.
'제조확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제조량은 늘려야 해. 아직 너무 부족해,'
1차 과정을 끝낸 재료를 솥에 넣어 구슬처럼 만드는 연단 과정.
숙련된 연단사라면 한 번의 연단에 몇 개의 단약을 만들어낼까?
바로 12개였다.
그래서 자기병 하나에 12개의 단약을 담고, 그것을 한 병으로 계산해 거래하는 것이었다.
물론 숙련된 자라 할지라도 매번 12개를 만드는 건 아니었다.
12개는 최고 수치이지, 평균 수치는 아니었으니까.
'평균으로 치자면 대략 아홉, 열 개 정도 될까?'
참고로 현재 내 평균은 여섯 개였다.
첫 제조에 다섯 알.
두 번째에 일곱 알.
세 번째에 여섯 알...
그리고 그말인즉,
나는 재료의 절반 가까이를 제조 과정에서 손실 본다는 소리였다.
물론 첫 제조 치고는 평균 여섯 개도 뛰어난 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왜냐고?
예전 플레이 당시, 뛰어난 연단사를 키워본 입장에선 지금의 내 성적에 절대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평균치가 열 개까지는 올라야 했다.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고민을 이어가던 사이, 생명의 샘에 도착하자 붉은 줄무늬가 새겨진 명패를 꺼내, 결계를 통과한다.
그리고는 술을 상납하고, 보상과 재료비를 받은 후에 샘물에 몸을 담갔다.
'고민은 나중에 다시 하고 수련에 집중하자.'
샘물에 들어온 후엔, 단약 제조에 관한 상념들을 전부 날려버리고, 명안을 수련하며 호흡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평소와 다름을 느꼈고, 그것이 전여희의 부재 때문인 걸 깨달았다.
'웬일로 방해를 안 하지? 설마 공진석 때문인가?'
공진석을 빌려달라고 말한 후, 어색하게 도망친 전여희의 뒷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내면으로 침잠해가며 호흡을 이어갔고, 외부의 일이나 고민 따위는 일절 떠올리지 않고 수련을 이어나갔다.
피부에 닿는 샘물로 인해 영기민감도는 꾸준히 올랐고, 눈을 통해 직접 스며드는 샘물로 인해 안구에도 점차 변화가 진행됐다.
그렇게 다섯 날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푸하-
물속에 담그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자, 두 눈이 하얗게 빛나며 불투명한 백안으로 변해가다, 빠르게 원래의 은은한 금빛 눈동자로 바뀌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그랬다.
이번 수련으로 인해, 명안 비술을 발동시킬 준비가 마무리됐다.
다음 방문은 고대하던 청안을 익힐 시간이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과 함께 오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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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삼지안(三只眼)
오동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오호. 무얼 익히는가 했더니, 명안을 익히고 있었구나. 금파월 제사장이 알려주더냐?"
"예, 성인식이 끝나고 전해 받았습니다. 헌데 어찌..."
어째서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나타난 건지 나 역시 물었다.
오동은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기이한 파동이 느껴지길래 와본 것이다. 설마 명안을 익히고 있을 줄은 몰랐지."
"혹, 익히면 안 되는 것이옵니까?"
"그럴 리가. 다만 최근 들어 명안을 익히는 이들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알고 있느냐? 수행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명안으로 얻을 이득을 습득할 수 있다는걸?"
"전해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럼 왜 굳이 익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나에 대한 관심인 건지, 아니면 명안을 익힌 것 자체에 대한 관심인 건지.
오동이 빨리 대답하란 듯 빤히 바라보자, 나는 샘물에서 나오며 입을 열었다.
"별 이유는 아닙니다."
"별 이유가 아니다?"
"나중에 쓸모없다 하여, 지금의 혜택을 포기할 필욘 없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채집과 사냥, 더 나아가 수련에 도움이 될 텐데, 오히려 안 익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그래?"
명안을 완성하기 위해선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 내 상태는 말 그대로 이제 비술을 익힐 준비가 끝났을 뿐. 앞으로 수많은 시간을 고농도 영천수를 이용해 안구를 수련해야 했고, 비술도 꾸준히 익혀야 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가 동일하기에, 명안을 익힌다면 그만큼 다른 비술을 익힐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
오동의 질문은 명안에 그럴 가치가 있냐는 질문이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동이 질문한 이유를 몰랐기에, 최대한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음에 든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하하하. 그래. 됐다. 사실은 말이다..."
그때, 말을 하던 오동이 말을 멈추며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화아악-
그 순간. 그의 눈이 백안(白眼)으로 변하며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자도 명안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하얀빛은 명안을 극성까지 익혔단 증거.
"서, 선배님께서도 명안을 익히셨구, 군요."
잠시 후, 숨까지 턱턱 막혀왔다.
"그래."
하지만 오동의 입에서 대답이 나온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얀빛이 사라졌고, 그의 눈동자도 원래로 돌아왔다.
당연히 피부의 따끔거림이나 숨막힘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력으로 외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정도라니... 어느 정도 수련을 해야 저 정도가 가능하지?'
수많은 플레이를 반복하며, 대부분 명안을 익혔었다.
하지만 그건 청안을 익히기 위한 밑거름.
본격적으로 명안을 파고, 그것을 극에 다다를 정도로 익혀 본 적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가 놀란 사이, 오동이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처음엔 너와 같은 이유였다. 선배들이 말렸지만, 명안이 내 수도의 삶에 도움이 된다 판단했었지."
추억 소환인가?
오동은 뜬금없이 자신의 과거를 꺼냈다.
"허나 꾸준히 익히며 수행이 오르다 보니... 정말 필요가 없어지더구나."
추억 소환이었구나.
나는 오동이 감상에 젖었다고 판단해, 그의 말에 적절한 반응을 내보이며 기분을 맞추려 했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
어느새 오동의 얼굴엔 희열이 엿보였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이렇게 쓸모없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다만 명안 비술은 그 어떤 것보다 오래된 비술 중 하나다. 나는 그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 여기고 일평생을 수련에 매진했다. 명안에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지식이라도 전부 습득해 나갔지."
말을 잇던 오동이 씩 웃는다. 마치 처음 청정매화주를 맛보았던 그때처럼.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는줄 아느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미심장한 오동의 말에 자연스럽게 반문이 나온다.
오동은 내 반응에 또 한 번 씨익 웃더니. 말했다.
"청정매화주보다 더 좋은 걸 가져오면 자세히 알려주마. 하하하."
그리고는 작은 서책 하나를 툭 던져주고는 천천히 등을 보이며 멀어져갔다.
멀어지며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같은 길을 걸으려 하니 마음에 들어 알려주는 것이다. 영광인 줄 알거라."
오동이 떠난 뒤.
나는 서책에 이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한 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서책의 내용이 뇌리로 쏟아졌다.
'평범한 내용 같은데...'
서책엔 명안을 익히면 얻게 되는 다양한 효과들이 나열돼 있었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방안이 적혀있었다.
특이한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내용들.
굳이 끝까지 확인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의 내용이었지만, 오동이 마지막에 한 말이 자꾸 맴돌아, 천천히 끝까지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책의 끝 내용에 이르러서야 오동이 왜 그리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삼지안?'
책의 마지막 내용은 명안을 극성으로 익히면 나타나는 세 번째 눈에 대한 설명이었다.
[삼지안(三只眼)은 고대에 멸족한 삼지안족의 능력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능력이다. 그들로부터 유래한 능력이니 당연한 소리일 것이다. 전해지기로는 삼지안에는 삼지안족의 회한과 원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인식이 모두 담겨있다고 전해진다.]
'삼지안족의 눈이라고?'
짧은 설명과 함께 명안이 삼지안으로 발전하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적혀있었다.
삼지안을 완성하면 이마 중심에 세 번째 눈이 나타나는데, 세 번째 눈을 뜨는 순간 세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거론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삼지안의 능력에 대한 찬양이 거인들의 힘과 비교하며 서술해놓을 걸 보면, 보통 것은 아니라 판단되었다.
'거인들이 품은 중력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고?'
책 전체의 내용 중에서 삼지안에 대한 건 극히 적었다.
나는 그 내용만을 몇 번을 되풀이해 읽고 또 읽어보았다.
잠시 후, 서책을 이마에서 떼어내며 자연스럽게 오동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설마. 오동은 삼지안을 얻은 건가?'
거인족의 핵심 능력인 중력과 비견되는 삼지안.
오동의 태도를 보건대, 삼지안을 익혔거나, 혹은 익힐 방법을 아는 것이 분명했다.
또 다른 술을 가져오면 자세히 알려준다는 내용이 그것에 관한 것일 테니까.
'삼지안이라...'
나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고민을 이어갔다.
청안의 밑거름이라고만 여겼던 명안.
그것을 제대로 익히는 게 좋을지, 아니면 원래의 계획대로 청안만 익히는 게 좋을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민을 길지 않았다.
명안을 삼지안까지 발전시키는 건 나에겐 아주 먼 미래의 일.
당장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거처로 돌아가자.'
지금은 초진단으로 수행을 쌓을 시간이었다.
+++
두 달 뒤.
다시 만난 오동은 거래를 제안했던 걸 잊었다는 듯, 그에 관한 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번에도 향이 너무 좋구나. 내가 빚은 것은 왜 이렇지 않은지 원."
오동은 청정매화주를 받고서, 그것에 대한 칭찬과 질문만 던졌다.
"혹,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느냐?"
"주조법에 적힌 재료를 전부 넣으신 게 맞다면... 잘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재료를 넣는 시기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영기를 응결시키는 정도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재료를 넣는 게 중요하다 사료됩니다."
어째서 오동이 만든 술이 내 것보다 형편없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경험의 차이였다
흔히 말하는 손맛 때문.
요리를 할 때도 미세한 불 조절, 재료를 넣는 순서와 넣을 타이밍으로 음식의 맛이 천차만별 갈렸다.
선주를 빚는 것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음식보다 훨씬 까다롭고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게 주조였다.
하지만 그런 걸 상세히 알려줄 수는 없었다.
내 나이가 얼마나 된다고 여기서 경험을 논하겠는가?
'알려줘 봐야 의심만 사겠지.'
의심을 사지 않더라도, 오동이 더 이상 내 술을 원하지 않게 되면 그것도 문제였다.
그러니 평생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오동이 의문을 품기 전 먼저 말했다.
"이때다 싶은 감이 올 때, 적절한 재료를 넣으시면 될 것입니다."
"감? 본인이 타고났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이냐?"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됐다. 네가 이렇게 좋은걸 가져다주는데, 굳이 욕심낼 필요는 없겠지."
결국 오동은 손사래를 치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 모습에 나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샘물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전여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명안과 청안 비술을 익히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잘됐네. 있으면 어떻게 쫓아버리나 고민했는데.'
잠시 후, 준비를 마치고 샘물에 머리끝까지 밀어 넣는다.
이번엔 구부정한 자세가 아닌 샘물 바닥을 바라보는 형태로 최대한 깊숙이 잠수해 몸을 바짝 누였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안구로 샘물을 흡수했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난 시점.
'지금이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앞이 흐릿하게 변했다. 이것은 시력이 나빠지는 게 아닌, 영기로 인해 생긴 변화.
나는 즉시 술식을 활성화하며 두 눈으로 영력을 집중했다.
화아악-
그러자 옅은 황금색이었던 눈동자가 점점 하얗게 변하더니, 급기야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결에 빛이 반사되는 걸 보며 명안 비술을 발동하자, 어느새 두 눈이 완벽한 백안으로 변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마주 보고 있던 샘 바닥의 흙이 알갱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수십 배 확대해 관찰하는 것처럼.
'이게 명안이구나.'
게임에선 눈동자가 하얘지는 이펙트를 제외하곤 체감할 수 있는 게 그리 크지 않았지만, 현실은 완전 달랐다.
'딴생각 할 때가 아니지. 바로 간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윈 없었다.
청안을 익히기 위해선 명안이 처음 발동될 때, 단 한 번의 기회뿐.
나는 곧바로 청안 비술의 술식을 떠올리며 원단에서부터 영력을 끌어와 전신으로 순환시켰다.
그리고는 술식이 완성됨과 동시에 두 눈으로 모든 힘을 집중했다.
파아아앗-
그 순간, 투명했던 샘물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짙푸른 색으로 변한 내 눈동자에서 번진 빛이, 내 주위를 물들인 것이다.
'아!!'
청안이 생기자, 명안 때와는 또 달랐다.
그냥 영기 밀도가 높은 물이었던 샘물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유기적으로 흘러가는 게 눈에 보였다.
세상 만물이 영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
눈을 뜬 채로 샘물 곳곳을 구경하고 싶다는 간절함까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청안은 명안과 엄연히 달랐다.
청안의 파장이 명안과 비슷하기에 오동이 당장은 눈치채지 못할 테지만, 이상함을 느끼고 언제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아쉬움을 남긴 채 두 눈을 감고, 파동이 퍼져나가지 않게 위력을 조종했다.
그리곤 수련에 필요한 최소한의 청안을 유지하며 한동안 수련을 이어갔다.
+++
"응? 또 명안을 수련 중이나 보군."
청정매화주가 아까워, 자신이 직접 만든 저과주를 마시고 있던 오동은 생명의 샘 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파동에 피식 웃었다.
자신이 처음 명안을 익히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많은 무시를 받았던가?
비효율적이라느니, 한물간 비술이라느니.
가끔씩 만나 수련을 지도해주던 선배도 명안을 익힐 시간에 다른 술법을 익히라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은 자신이 정하는 법.
한번 결정한 것은 끝을 봐야 하는 성품이었기에, 오동은 두 귀를 닫고 묵묵히 명안을 익혔다.
조언을 구할 상대도, 자료도 부족했기에, 대륙을 떠나 수많은 지역을 탐방하며 지식을 쌓았다.
"참 고생 많았지."
그러다 명안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희열에 감싸이게 되었다.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으니 그때 그 감정이 얼마나 격했는지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였다.
명안의 진짜 이름은 삼지안 비술.
삼지안족이 멸족의 길을 걷기 전 자신들의 능력을 비술로 만들어 세상에 남긴 술법이었다.
삼지안이라니?
거인족, 고대 용족과 마찬가지로 고대에 세상을 지배했던 일곱 종족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 후로 오동은 자신의 길을 정했고, 오로지 한길만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그것에 대한 후회는 단 한 점도 없었다.
아직 삼지안을 완성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삼지안의 능력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고위 수사 중에서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까.
홀짝-
"아, 이 저과주도 금파란이 만든 것만은 못하구나. 어쩌지..."
그런 오동에겐 최근 한가지 고민이 생겼다.
선배로서, 종족의 어른으로써 한가지 약속을 하였는데, 그것을 어겨야 하나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저과주는 청정매화주와 달리 고전적인 주조법으로 만들어졌기에, 재능이 출중한 몇몇 아이에게 따로 제작을 맡겼다.
하지만, 아무리 잘 빚어도, 미묘하게 무언가가 모자랐다.
분명 금파란이 만들어 바친 술과 맛은 같았는데,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게 있었다.
금파란의 말대로 감이라는 것.
흔히 말하는 타고난 손맛의 차이가 메꿀 수 없는 공허함을 가져왔다.
그래서 매번 청정매화주 4병을 만들어 오라는 약속에 저과주도 몇 병 추가시켜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삼지안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러한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금파란에게 호감을 느꼈기에 행한 행동이지만, 계산이 없을 순 없었다.
진짜 새로운 술을 가져온다면 그것대로 좋았고, 만약 가져올 게 없다면 저과주를 대가로 정보를 조금씩 풀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당장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건 걱정하지 않았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삼지안 종족에 대해 몰라서 그런 것일 테니. 궁금증에 그들에 대해 알아보면 분명 입질이 올 거라 판단했다.
"응?"
그때, 오동의 감각에 기이한 것이 걸려들었다.
그것은 매우 낯설고 차가운 것으로, 마치 생명의 샘에 쳐진 그물에 구멍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짧고 미약했지만, 결계를 파괴하기 전 내부 흐름을 훔쳐보는 느낌과 유사했다.
"감히 누가!!"
오동은 마시던 술병을 사라지게 만들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생명의 샘에서 유일하게 수련 중인 금파란이 머물던 장소를 유심히 보다가, 바람처럼 변하며 건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저 어린 것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할 이유도 없고."
잠시 후, 오동이 사라지자 생명의 샘엔 적막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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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수정). 공진석(共振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