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20화(수정). 공진석(共振石)

청안의 감각을 완전히 체득하는 동안 다섯 날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거처로 돌아온 나는 우선하여 술을 빚었고. 초진단이 든 자기병을 꺼낸 후 수련을 이어가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샘을 나오며 스쳐보았던 오동의 표정이 뇌리에 남아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심각해 보이던데, 무슨 일이지?"

그의 눈빛은 매서웠고, 분위기도 평소와 달랐다.

눈치껏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돌아왔지만,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서였을까?

부르르-

평소 조용했던 거처의 입구가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반응이었기에 거처 밖으로 이동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전여희를 볼 수 있었다.

"오라비!"

스윽-

전여희는 입구의 진법 결계가 사라진 틈에 재빨리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안으로 들어갈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잠시 움찔했던 나도 거처 안으로 따라 이동했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거처 곳곳을 살피는 전여희.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응? 그게..."

그녀는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손에 낀 반지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일전에 보았던 목걸이가 빠져나왔다.

'공간 반지? 역시 금수저는 다르네.'

공간 저장 법기는 크기가 작을수록, 저장 공간이 클수록 가격이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반지류 공간 법기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물론 신기급 공간 팔찌를 가지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거... 오라비가 일전에 빌려주라고 했잖아. 빌려줄게, 대신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반쯤 농담 삼아 한 말에 사뭇 진지한 전여희의 태도.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우선 목걸이를 받아 챙겼다.

'잠깐만 가지고 있다 돌려줘야겠네.'

만약 대공진이 적힌 공법서를 입수할 수 있다면, 목걸이를 지금 획득한 건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장은 큰 쓰임이 없었다.

'아쉽네. 대공진도 명안이나 청안처럼 간단한 공법이었다면 좋았을걸.'

아무리 오랜 플레이로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복잡한 공법의 내용을 전부 외우고 있는 건 불가능.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고맙다는 말을 전하자, 전여희가 어느 때보다 밝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니 내게 목걸이를 빌려주는 문제로 두 달간 끙끙 고민했을 아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선물이라도 줘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자 여기."

"이게 뭔데?"

"마셔봐."

손에 들린 호리병을 내밀자, 전여희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받아든다.

호리병은 알콜을 제거한 저과주.

유아용 과일주스였다.

호리병을 받아든 후, 냄새를 킁킁 맡던 전여희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냉큼 주둥이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오동과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우와! 오라비! 이거 뭐야!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야!"

'당연히 처음이겠지. 용족들이 먹는 간식이라고 해봐야, 이상한 나무 벌레나 잡아먹으니깐.'

나는 속마음은 감춘 채, 살짝 웃어주었다.

"마음에 들어?"

"응!!"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전여희.

기분이 좋은지 한참을 저과주에 관해 묻던 전여희는 입이 터지며 수다를 시작했다.

"근데 있잖아. 오라비는 그 얘기 알아? 풍광 오라비가..."

그렇게 소중한 수련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나갈 때쯤 무알콜 저과주를 다 마신 그녀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오라비. 다음에 또 이거 만들어 줄 거야?"

"그래. 시간이 된다면."

공진석을 빌려줬는데 그깟 저과주가 문제일까? 얼마든지 가능했다.

나는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처럼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배웅했다.

하지만 거처를 나가려던 전여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해준단 걸 깜빡했네."

귀엽게 자신의 머리를 콩 때린다.

"오라비 이건 비밀이니깐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약속?"

"어 그래. 약속."

인간들처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진 않지만, 거짓 불능을 대가로 용언을 사용하는 용족에게 '약속'은 매우 중요한 맹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평범한 얘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있잖아. 어쩌면 조만간 오라비랑 풍광 오라비랑... 다들, 다시 시련의 탑에 올라갈 수 있대."

"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역시 놀랄 줄 알았어, 헤헤. 원래는 호며? 아! 호명의 석판! 맞아, 호명의 석판이라는 걸 고치기 위해 꽤 오래 기다려야 했데. 근데 이번에 생명의 샘에 일이 생기면서 그걸 앞당기려나 봐."

'아! 금파월이 파괴한 게 그것이었구나!'

호명(護名)의 석판.

용족의 영혼을 기록하는 장치이자 시련의 탑의 핵심 부품.

호명의 석판은 충전용 부품으로 특수한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동작이 가능했다.

특수한 과정을 거치기 위해선 대륙 중심의 연합도시로 석판을 가져간 후, '용의 원천'이란 곳에서 충전을 해야 했다.

'금파월이 30년은 안전하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아무리 빨리 호명의 석판을 수리한다고 해도, 충전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륙에 자리한 수많은 용족마다 순서가 정해져 있었고, 내가 속한 용족의 순서가 돌아오려면 아직 30년이나 남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전여희는 내가 묻지 않아도, 차분히 다음 설명을 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함께했던 친우께 부탁하셨대, 우리가 먼저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헤헤 잘됐지?"

나의 근심을 모르는 전여희는 칭찬을 받고 싶은 아이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니겠는가?

용족에게 시련의 탑은 특별한 의미였다.

당연히 피의 무게를 끝까지 확인하고, 탑에 성인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건 중요했다.

그러니, 멈췄던 그 과정을 끝마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게 뿌듯했을 것이다.

"그래, 고맙다. 네 덕분에... 아니, 아니다."

"응?"

"아니야, 그냥 생각 나는 게 있어서."

나는 전여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정말 고맙다. 알려줘서."

+++

전여희가 떠난 뒤, 

고요한 거처 안.

나는 좌정한 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이었다니. 세상 참.'

그녀는 내 거처를 떠나기 전, 최근에 생명의 샘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주었다.

그것에 대해 듣고,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어느 날 샘의 결계를 뚫고 누군가 침입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침입자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분노한 오동은 즉시 족장 이하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그 얘기는 전여희의 할아버지에게까지 전해졌고,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샘과 시련의 탑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시련의 탑은 마을 전체를 지키는 결계와 연관이 있었다.

해서, 마을의 경비가 약해진 틈에 누군가 샘에 침입하려 했다는 게 오동의 주장이었다.

시련의 탑이 멀쩡했다면 애초에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판단은 혈족으로 이어진 부족 내에서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포함돼 있었다.

'의도치 않게 내가 나를 몰아선 꼴이 돼버렸어.'

나는 전여희의 설명을 듣고 나서 침입자가 나란걸 깨달았다.

아마 청안이 잠깐 발동되는 걸 오동이 오해한 듯 싶었다.

결계의 술식을 직접 해제하진 못하지만, 술식 자체를 분석하는 게 청안의 능력.

그러한 청안의 파동이 샘 내부에서 느껴졌으니, 외부의 누군가가 침입하려 했다는 오해로 이어져도 납득할만 했다.

"흐음..."

이 일로 인해 내 처지는 꽤 곤란하게 변해버렸다.

탑이 정상 가동되는 순간, 내 미래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5년 주기로 이용할 수 있는 '용의 원천'이 최근에 가동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당장 짐을 꾸리고 어떻게든 몰래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을 것이다.

전송진을 이용한다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는 곳이 연합도시.

용의 원천에서 호명의 석판을 충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3개월이니, 그 안에 살길을 찾아야 했을 수도 있었다.

"대략 4년이라..."

시련의 탑이 복구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4년 남짓.

"흐음..."

나는 한동안 고민을 이어갔다. 

그러길 한참.

고민 끝에 결국 마음을 정했다.

"할 수 없다. 다른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다시 폭파할 수밖에."

+++

행동 방향을 정하고 나니, 지금 상황이 참으로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행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시련의 탑을 망가트리는 방법이 몇 가지나 있을까?

찾아보면 수십 가지가 넘을 테지만, 지금 내 수행에, 내 실력에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실행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공진석."

시련의 탑을 다시 멈추게 하려면 공진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내 수행에 공진석을 구할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그랬기에 이 상황이 공교롭다 여겨졌다.

전여희가 잠시 빌려주겠다고 전해준 공진석이 박힌 목걸이.

마치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물건이 나를 유혹했다.

자신을 사용해 위험한 상황을 넘기라고 말이다.

"아니지. 그럼 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시련의 탑을 망가트리는 데 공진석을 사용한다면, 공진석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니, 공진석이 사용됐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선 완전하게 소멸시켜야 했다.

그 말인즉, 전여희의 물건을 사용하면 다시는 되돌려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돌려줄 수 없으니, 내가 임의대로 사용한다면 거짓말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내 목숨과 비교하면 그깟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결같이 나를 생각해주는 아이를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됐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긴 한데...'

나는 고민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없었다.

그러다 밝게 웃는 전여희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을 굳혔다.

"그래, 우선 부탁해보자."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정면승부였다.

+++

며칠 후, 전여희가 또 다른 소식을 전해주겠다며 방문하자, 그녀 앞에 공진석 목걸이를 꺼냈다.

"응? 벌써 다 썼어?"

천진난만하게 웃는 전여희.

나는 어떤 방식으로 얘길 꺼내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꾸밈없이 진심으로 말했다.

"희야."

"응? 왜?"

"이 오라비에게 이 목걸이가 꼭 필요해서 그러는데, 혹시 오랫동안 빌려줄 수 있을까?"

"오래? 얼마나?"

공진석을 구하러 떠나는 건 10단에 오른 후. 하지만 나는 그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러니 시기를 정해야 한다면 그때까지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일.

"내가 다른 공진석을 구할 때까지."

"응? 그럼 엄청 오래 걸릴 텐데..."

"그래, 그러겠지."

밝게 웃던 전여희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겠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여희는 입술을 꽉 깨물다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비한테 중요한 일이야? 이 목걸이가 필요한 게?"

"그래. 중요해."

"그래! 그럼 그때까지 빌려줄게."

"정말?"

두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이는 전여희.

잠깐 빌려주는데도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너무 쉽게 허락하자 어안이 벙벙했다.

만약 그녀가 허락만 해준다면, 약속을 지키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탑이 멈춘다면 30년이었던 제한 시간이 한참은 더 길어질 터.

그때까지라면 그 안에 내가 가진 정보를 이용해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결연하던 전여희가 이번엔 악동처럼 웃었다.

"응! 조건. 대신 소원 부적 써줘!"

"소원 부적?"

"응!"

소원 부적이란 부적 자체에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이 있는 것을 칭하는 게 아니었다.

현대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달래줄 때 소원 티켓이라면서 종이에 적어주는 것.

딱 그것과 같은 기능의 약속의 증표 같은 것이었다.

내 목숨을 연장해주는 일인데, 그것 하나 해주지 못할까?

아이같이 귀여운 생각을 하는 모습에 나는 앉아있는 그녀의 머리는 쓰다듬었다.

"그래. 써줄게. 그렇다고 아무 소원이나 들어줄 순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만. 그래도 괜찮아?"

"응!"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나는 품에서 아무 술식도 적혀있지 않은 부적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부적술을 익히지 않기에, 전음부를 만들려고 구입해둔 재료였다.

그곳에 '소원'이라는 글씨를 새겨넣고, 영력을 불어넣었다.

부르르-

어느새 부적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정말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보였다.

"헤에, 약속했다. 소원?"

전여희는 그것을 건네받더니, 전과같이 해맑게 웃었다. 소중한 걸 얻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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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수정). 다시 탑으로

전여희와의 거래가 끝난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흐르는 시간 동안 내가 하는 일은 일정했다.

먼저 최대한 빠르게 매화주를 만들고, 가매초와 저충 및 몇 가지 재료들을 자급했다.

가매초로는 거미 밥을 만들어 먹이고, 저충으로는 초진단을 만들어 내가 복용했다.

그런 후, 단약이 녹아 내 영력으로 치환되는 동안 호흡법에 집중하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자원을 수집하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생명의 샘을 통과할 수 있는 명패는 일전에 사용하던 명패보다 활동할 수 있는 구역이 넓었다.

그 과정들이 끝나면 다음으로는 전여희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면 항상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주면서, 무알콜 저과주를 제공. 

수다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반나절은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은 풍광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이따금 비밀스러운 얘기를 들었다.

일전에 탑의 소식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남들은 모르는 소식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대략 두 달 가까이 되면 샘에 들어갔다.

물론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청안은 수련하지 않고, 명안만 수련했다.

웃긴 건, 나를 따라 전여희도 명안을 수련하기 시작했단 것이었다.

오동은 그걸 보고 누구보다 좋아했고, 나 역시 그것을 반겼다. 왜냐고? 그녀가 명안을 익히기 시작한 뒤로는 샘에서 수련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내 수행도 상승했다.

생초보이자 아기나 다름없던 내 수행이 1단에서 2단으로 성장하며 단전에 자리한 원단이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동은 나의 수행 상승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전여희는 단번에 알아보며 축하를 해주었다.

빠른 수행 상승의 원인이 공진석 목걸이 때문이라 생각한 건지, 왠지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곁눈질로 내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자꾸 확인하는 걸 보면, 분명 그랬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갔다.

+++

3년 후.

거처 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수련에 몰두하길 수십일.

우우웅-

평소와 마찬가지로 초진단을 먹으며 수련을 이어가던 순간.

원단이 한층 더 단단해지며 확장되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을 말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몸의 변화는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후우... 드디어 3단에 오른 건가."

몸의 변화를 확인하며 천천히 눈을 뜨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주변 환경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세상이 더 선명하고, 촘촘하게 시야로 들어왔고, 피부가 숨을 쉬듯 활력이 넘쳤다.

잠시 후 호흡을 잠재우며 손을 뻗자, 손 위로 붉은 기류가 형성된다.

붉은 기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뒤집자 반대로 푸른 기류가 생겨났다.

또 한 번 손을 뒤집자 이번엔 붉은 기류와 푸른 기류가 한데 어우러지며 작은 회오리처럼 뭉치려 한다.

나는 그것을 살짝 끌어오듯 당겼다가 빠르게 앞으로 내밀었다.

파앙-

차르르륵-

그 순간 손바닥 위로 작은 태극이 그려지더니,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제야 제대로 써먹을 수가 있겠네."

1단일 때는 시간을 들여 만들어야 했던 대적점이 3단에 오른 후엔 손쉽게 손위로 형성해낼 수 있었다.

크기와 위력도 자유자재로 조종 가능해, 법기를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챠르륵-

한동안 태극의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가지고 놀던 나는 영력을 회수하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엔 세 손가락에서 엄지만 한 거미 세 마리가 토동 빠져나왔다.

거미들은 엄청난 양의 가매초 특식을 먹었음에도 수행이 2단에 머물러 있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며 확연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방(防)"

명령을 내리자, 거미 세 마리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나를 품(品)자 형태로 둘러쌌다. 그리고는

촤악-

살짝 푸른색에 가까운 거미줄을 뿜어내더니 내 몸을 완벽히 구 형태로 감싸버렸다.

손가락으로 거미줄을 툭 건드려보면 그 강도가 얼마나 강한지 쉬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한 등급 위의 공격까지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거미줄은 강렬한 영력을 품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가르며 벽면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攻)."

그러자 나를 품자 형태로 감싸고 있던 거미 세 마리가 소리 없이 바닥을 스치며 달려, 내가 가리킨 방향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순간 벽면에 구멍이 생기며 스르륵 녹기 시작했다.

"돌아와."

그대로 둔다면 거처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었기에 서둘러 불렀다. 그러자 거미들은 신이 난 것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 옷 틈으로 들어갔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으니."

나는 그런 거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벽면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았다.

구멍 자체만 본다면 거미들의 공격 능력은 평범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벽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었기에 구멍이 뚫린 것뿐.

거미들의 진짜 능력은 살아있는 생물을 대상으로 할 때 발휘됐다.

거미들을 불러들인 후, 3단에 오르며 변화한 것이 무엇이 더 있는지 하나씩 점검을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을까.

부르르-

거처 입구의 결계가 손님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나는 그 즉시 정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 밖으로 향했다.

거처 밖에는 오랜만에 보는 풍초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파란! 다들 모였어. 너만 오면 시작이야."

용족답지 않은 친화력으로 최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풍초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비행 법기를 꺼냈다.

"그래, 가자. 탑으로."

이제 탑에 오를 시간이 왔다.

3년간 이날을 준비했으니, 계획이 어긋나는 일은 없을 터였다.

+++

나는 시련의 탑이 복구된다는 소식을 듣고, 오동에게 허락을 구했다.

다행히 그는 나의 사정을 고려해 3개월간 휴가를 주었고, 그사이 수련에만 매진해 3단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라면 허락 따윈 필요 없이 임무를 할당받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그와 나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었기에 허락이 필수였다.

그런 오동이 공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중천에서 눈을 뜬 후 시련의 탑에 올라가려 했을 때보다 족히 서너 배는 많은 이들이 모여있는 공터. 

그런 곳에서 오동이 나를 반기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쟤는 누군데 저분이 직접 격려차 방문한 거야?'라는 물음이 담긴 눈빛.

전여희가 방문한 후, 오동의 수행에 대해 알게 되었기에 그들의 관심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다.

"오호, 괜히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줄 알았더니. 벌써 3단에 올랐구나."

오동은 내 수행을 단번에 파악했다.

"선배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알면 됐다. 그나저나 몇 달째 매화주를 마시지 못하니, 입안에 가시가 돋을 것 같다."

"기록을 마치면, 곧바로 주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씀 하시러 오신 겁니까?"

내 질문에 피식 웃은 오동이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러겠느냐? 내 미리 알려주려 했는데, 깜박한 것이 있어서 말이다."

곧이어 목소리가 뇌리로 전달됐다.

-탑에 오른 후, 풍형이 한번 보자고 하더구나. 끝나고 바로 찾아가면 될 것이다.

풍형?

"혹시, 희..."

"그래. 맞다."

전여희의 할아버지인 전여풍.

부족의 대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한참 가면 나오는 용수산맥(龍手山脈). 그곳에 자리 잡은 후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고 수련에만 매달리던 초고위 수사.

그가 다시 부족과 소통하기 시작한 건, 전여희가 태어난 다음부터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수도자원을 공급받을 때를 제외하곤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자가 나를 부르다니?

'공진석 때문인가?'

나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흘렀는데, 공진석 때문이 아닌가?'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알아들은 게냐?"

"물론입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가던 중 오동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풍형에게 다녀온 후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봤으면 좋겠구나."

잠시 후, 입맛을 다신 오동은 마치 바람이 흩어지듯이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에 '역시'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단상 위에 서 있던 장로가 입을 열었다.

"자! 기다렸을 것이다! 긴 설명은 하지 않겠다. 이번엔 불미스러운 일이 없을 테니, 모두 안심하고 탑에 오르면 된다. 그럼 선두부터 오르거라!"

오동의 눈치를 보고 있던 장로가 시련의 시작을 알렸다.

장로는 오동이 응원차 나를 방문한 것에 기꺼워하며, 마치 나를 먹이보듯 쳐다보았다.

초가당이 아닌 다른 곳엔 절대 뺏길 수 없다는 눈빛으로.

+++

"또 왔군."

탑에 들어온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기간으로 치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땐 얼떨떨한 정신으로 입장했기에 지금의 감정과 사뭇 달랐었다.

아주 잠깐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빠르게 1층 통로를 통과해 중앙 공동에 도착.

용족의 지식을 한 번 더 습득했다.

그리고는 탑의 자아인 노인이 만든 시험을 순식간에 해결하고 2층으로 향했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1층의 보상인 지식의 영단을 또 주지는 않았다.

"합!"

잠시 후, 2층의 시련인 중수의 벽이 나타나자 전신의 영력을 활성화하며 몸을 보호했다.

그 상태로 물속을 거침없이 걸어 예전과 비교해 절반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곳을 통과했다.

2층을 통과한 후엔 쉬지 않고 3층으로 돌입.

뇌전이 가득 찬 통로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지지직-

'으윽, 이쯤 어디였던가?'

하지만 3층의 시련은 무작정 통과하지 않고, 중간쯤 도착했을 때부터 천천히 걸으며 한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저벅저벅-

지지직-

"으으윽."

걸을수록 뇌전이 강해지며 나를 태워버릴 것 같았지만,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 참고 참았다.

뇌전이 강해질수록 목표로 한 장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1층을 빠르게 통과한 시간만큼을 잡아먹고 나서야 간신히 원하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3층 시련 중심부의 어디쯤.

바로, 시련의 탑의 중추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하는 장소였다.

'편하게 1층에 만들어 놓을 것이지.'

이곳은 외부로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두 가지 장치가 되어있었다.

첫째는 3층 시련의 강도가 통로에 다가갈수록 강해져, 도전자들이 다가올 수 없게 했고,

둘째, 탑이 가동될 때마다 위치가 주기적으로 변하도록 만들었다.

즉, 중추의 통로를 열려고 하는 자는 뇌전을 몸으로 버티며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을 직접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뇌전 속성의 통로인 이곳뿐 아니라, 다른 속성의 통로도 마찬가지였다.

중추로 향할 수 있는 3층 시련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에 어느 곳으로 입장하든 고통은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시련의 탑이 중요하다는 말이긴 하지.'

나는 통로 전체에서 뇌전이 가장 강한 장소에 우뚝 선 채로 벽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겉으로 봤을 땐 다른 곳과 아무 차이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벽.

스슥- 슥- 슥슥-

잠시 후, 영력을 주입한 손으로 벽면에 일정한 패턴을 그리자, 

화아악-

내가 그린 패턴 그대로 빛이 올라온다.

그리고는 빛과 함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나를 덮쳤다.

슈우욱-

어느새 고요한 석실에 도착해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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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시비

칠흑처럼 어두운 석실 내부.

수도자는 기본적으로 어두운 곳에서도 활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리 영력을 움직여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혹시 모를 침입자를 위해 설치된 진법 때문이었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진법에 간섭해 이곳에서의 활동 권한을 획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진법을 설치한 이에게 신호가 전달된다.

감각만으로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진법이 그런 감각마저 차단하고 있으니까.

한마디로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활동하지 말란 소리였다.

하지만 나에겐 상관없는 제한이었다

파앗-

영력을 눈으로 가져가며 청안을 발동하자,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변하며 주변으로 빛이 번졌다.

동시에 진법이 만들어낸 가짜 어둠과 진짜 시야가 잔상처럼 겹치며 보인다. 진법이 만들어낸 어둠의 술식이 짜여진 실타래처럼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완벽하진 않네.'

하지만 청안의 수련 정도가 낮았기에, 진법이 형성한 허상을 완전히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했다.

마치 격자 먹지를 눈앞에 대고 세상을 바라보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통로를 통과해 걸어 나갔다.

'시간이 없다. 일전보다 빠르게 5층에 도달해야 한다.'

잠시 후 통로가 꺾어지는 길이 나오자, 통로가 뚫려있는 방향이 아닌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그렸던 패턴을 한 번 더 입력해 또 한 번 벽면을 통과했다.

슈우욱-

통로 끝까지 간다면, 그때도 진법의 관리자에게 신호가 가게 설계돼있었기 때문이었다.

+++

또 한 번 이동한 나는 거침없이 움직여 원형 공동에 도착했다.

그곳은 어둠도, 그렇다고 진법이나 결계도 없었다.

오로지 푸른빛이 가득한 수많은 부품이 현란하게 맞물리며 섬광을 터트리고 제각각의 파동을 퍼트릴 뿐이었다.

"저깄구나, 호명의 석판."

잠시 후, 고대 용이 음각된 1미터 남짓한 석판 앞에 다가간 나는 공간 팔찌에서 붉은 돌을 꺼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진을 그리고 그 위에 몇 가지 재료를 추가로 올렸다. 마지막으로 영석 가루를 붉은 선을 따라 부은 후.

가장 중요한 재료인 공진석을 꺼내 진법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다른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면,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는 시간을 계산한 후, 진법을 활성화 시켰고, 한참을 물러나 그려진 진법 위로 또 다른 진법을 그려 넣었다.

처음 그린 게 호명의 석판을 파괴할 진법이라면 두 번째는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 진법이었다.

혹시라도 남을지 모르는 폭발의 원인과 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보험이었다.

"부디 아무도 다치는 일 없기를."

짧은 기도 후, 두 진법을 동시에 활성화하고는 왔던 길을 빠르게 치달렸다.

한참 후, 내가 5층에 도착해 샘물에 몸을 던진 순간.

콰아아앙!!

일전보다 더 강력한 진동이 탑을 울렸다.

+++

쾅!!

주먹이 돌로 만들어진 탁자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탁자가 산산조각이 나며 굉음을 울렸다.

하지만 굉음 다음에 울린 목소리는 그보다 더 날카롭게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오!!"

"..."

"다들 입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어찌 두 번이나 같은 사고가 날 수 있냐 이 말이오!"

전여희의 아버지이자 부족의 족장인 전여황.

그의 목소리에 주변에 모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입을 열지 못했다.

전여황은 주변 인물들을 날카롭게 한 명씩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막오. 확인 작업은 끝났나?"

입을 열기가 무섭게 석실 밖에서 사내가 들어오며 대답했다.

"예, 일전과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침입 흔적은 찾지 못했고... 이번에도 호명의 석판만 망가트렸습니다."

쾅!!

"그게 말이 되느냐! 일족에서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인물은 다섯뿐이다! 허락되지 않은 자는 활동조차 할 수 없는 그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고?!! 그걸 지금 조사라고 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지금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자 너를 부른지 아느냐! 후우..."

전여황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참 후,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이번에도 어떤 방식을 사용한 건지 파악조차 못한 것이냐?"

"그게..."

"빨리 말하라."

"침입자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내부를 심각하게 훼손해서 명확하진 않지만... 진동 계수를 무한히 늘려 석판이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가게 만든 것 같습니다."

막오의 말에 주변이 웅성웅성 변했다.

"진동 계수를 무한히 늘렸다고?"

진동 계수를 무한히 늘릴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상식 안에선 한가지 뿐이었다.

"설마... 대공진을 익힌 자가 일을 벌였단 말이냐?"

"지금까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감히 누가!!!"

파앙-

그 순간, 전여황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파동이 퍼져 나왔고, 석실에 준비돼있던 집기들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다행히 참석했던 인물들은 그의 파동에 힘들어할 정도의 실력자들은 아닌지, 움찔하며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동안 타 종족이 몰래 침입해 일을 벌였을 거라 생각했던 전여황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찾아내라! 무조건 찾아내! 어느 부족이든, 이 일을 벌인 자를 무조건 찾아내!"

대공진을 익힐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

10단에 올라, 세상을 공부하려 대륙을 떠나는 용족뿐이었다.

그 말을 돌려 하자면, 세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고위 수사 중에 범인이 있단 뜻이었다.

'누가 이곳을 견제하는가. 설마?'

대공진을 사용해 일을 벌인 거라면, 타 종족이 아닌 다른 용족이 손을 썼다는 말.

전여황은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한 부족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의심이 가자마자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었다.

'전여강. 만약 네놈이 이 일을 벌인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이번엔 동생이라 해도 용서치 않아.'

으드득-

아주 오래전 부족을 떠난.

자신이 관리하는 부족의 행태가 답답하다며 다른 부족으로 소속을 옮긴 동생을 떠올리는 그였다.

'그때도 생명의 샘물을 이용해 제(祭)를 지내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따위를 했었지?'

혈제를 치를 수 없는 용족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고 들떠있던 동생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심증이 가니 의심이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 생명의 샘에 침입하려 한 놈도?!'

으드득-

전여황의 몸에서 피어나는 살기로, 회의에 참석했던 인물들이 한두명씩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자, 하얀 벽지가 나를 반긴다.

'성공 한 건가?'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연습했기에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변수가 생겼을지는 알 수 없는 일.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의료용 침상엔 나 혼자뿐이었다.

"일어났어?"

그때,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풍초신이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게 말이야,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내 물음에 풍초신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부상을 당한 건 너뿐이래. 장로님이 많이 안타까워하셨어. 어떤 나쁜 놈이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

"이 말도 전해주라셨어. 네가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피해를 본 거라고. 그러니 이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탑을 주파하는 속도는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들의 실력의 척도.

그러니, 폭파로 인해 부상을 당한 것을 너무 안타까워 말고,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두라는 말이었다.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풍초신을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

지금 위로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풍초신을 포함한 아이들이었으니까.

"고맙다. 풍초신."

"응? 고맙긴. 그냥 장로님 말을 전한 것뿐인데."

"그리고 미안해."

"어? 갑자기 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냥, 나 때문에 네 시간을 낭비했잖아."

"에이. 낭비라니. 우린 친구잖아. 이 정도 시간을 못 낼까 봐?"

예전엔 풍초신의 이런 성향이 정말 용족답지 않다고 여겼는데, 이젠 익숙해졌다.

'친구'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친구지."

"와, 금파란 너한테 그 말을 들을 줄 몰랐는걸?"

"요즘은 어때? 아직도 가매초 일을 담당하고 있어?"

잠시 후, 평소의 나답지 않게, 풍초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조언을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수다로 흘려보내다가 풍초신이 돌아간 후, 거처로 자릴 옮겼다.

풍초신의 설명대로라면 큰 위험은 지나간 상황.

이젠 또 다른 상황을 직면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그가 나를 왜 불렀을까..."

이제 전여풍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전여풍의 구역으로 지정된 용수산맥.

그곳은 마을에서 남쪽으로 한 달은 날아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마을과 용수산맥 사이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 용수산맥이었다.

나는 비행법기에 앉은 채, 호수를 내려다보며 빠르게 상공을 가르고 있었다.

전여풍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몰랐기에, 머릿속으론 오만가지 가정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공진석 때문은 아니란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문제였다면 지금이 아닌 과거에 나를 소환했을 테니까.

"흐음... 가봐야 알 수 있는 건가."

결국 직접 부딪쳐보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때,

핑-

날카로운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하는 감각에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위로 생겨난 두 가지 기류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전면을 막아냈다.

탕-

'나뭇가지?'

나는 대적점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을 더욱 키워 사방을 막으며, 나뭇가지가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촤아악-

그러자 물보라와 함께 호수면 위로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사내는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호수표면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본다면 반투명한 무언가가 발밑에서 받침 역할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신데 저를 공격하신 겁니까?"

마을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일대가 전부 내가 속한 용족의 지역.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고, 대화로 시작했다.

물론 당장이라도 반응할 수 있게 전투태세를 유지하면서.

"공격이라니, 오해야 오해."

사내는 두 손을 저으며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밝히고, 호수표면을 걸어 근처로 접근했다.

"더 가까이 오시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야, 이거 살벌하네. 선배가 장난 좀 했기로서니, 너무한 거 아냐?"

"정체를 밝히십시오."

상대는 정색하는 내 태도에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입꼬리가 비틀린 걸 보면 좋은 의도로 접근한 건 분명 아니었다.

"어르신께 이쁨받는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말했잖아? 선배라고."

사내의 비틀린 입가가 악다물어진 순간.

화아악-

파동과 함께 그의 수행이 드러났다.

그를 중심으로 호수표면에 거대한 돌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물결이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6단 이상이다.'

최소한 축기기 후기 이상의 수행을 지닌 사내.

그는 마치 수행의 우월함으로 나를 위협하듯, 고의로 연달아 파동을 퍼트리며 말했다.

"오동 어르신께서 칭찬이 자자하길래 한번 보러 온 건데, 너무 까칠한데? 나근나근하고 말이 잘 통하는 아이라고 하시더니. 그분 앞에서만 그런가 봐?"

"선배님께서 보내신 겁니까?"

"뭐? 선배님? 어린놈이 아주 위아래도 몰라보고, 감히 네까짓 게 어르신을 선배라 불러?!"

상대의 지적대로, 원래대로라면 오동을 선배라 불러선 안 된다. 그의 수행은 족장보다 높았으니, 어르신이라 칭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처음 그의 수행을 오해해 선배란 말이 입에 붙었고, 오동 역시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전여희에게 오동의 수행에 대해 듣고 난 후, 한차례 호칭을 바꿨다가 편하게 하라는 소리도 들은 상태였다. 

사내의 말은 내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용건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전여풍 어르신이 기다리고 계시기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만."

나는 상대가 괜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라 판단해 전여풍을 방패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얼굴색이 변하며 말을 더듬는다.

"저, 전여풍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네놈 따위가?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족장님도 허락이 없으면 만나실 수 없는 분인데."

"그걸 지금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원하신다면 어르신께 물어보겠습니다."

"이익!"

태연한 대답에 상대는 이를 악물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를 자신의 입맛대로 손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분에 찬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데.

나보다 높은 수행으로 내게 무언가를 해보려 한 것 같은데, 그런 수작에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표정이 변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에게 말했다.

"용건이 끝나신 거면 가봐도 되겠습니까?"

"자, 잠깐!"

결국 의도와는 다른 상황이 연출되자, 상대는 강압이 아닌 부탁을 해왔다.

"저과주!"

"??"

"저과주 말이다!"

"저과주라면 제가 오동 선배께 주조법을 드린 그 저과주 말입니까?"

"그래. 어르신께서 내가 만든 건 무언가 부족하다며 너에게... 흠. 도, 도움을 요청하라 하셨다."

'저과주 때문이었어? 도움이 아니라 배움을 요청하라고 했겠지.'

사내의 말에 예전에 오동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그는 몇 놈을 보낼 테니, 내가 저과주 만드는 걸 직접 보고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안한 게 삼지안에 대한 정보였다.

당연히 나는 고려해보겠다고 결정을 미뤘고 말이다.

당장 시련의 탑을 폭파할 재료들을 수급하고 진법을 공부하는 문제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었었다.

'저과주를 만드는 요령이라.'

이제 시련의 탑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으니, 오동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건 없었다.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건 곤란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 문제라면 어르신을 만난 후, 오동 선배님을 찾아뵙고 상의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하군요."

"그, 그래?"

"그럼 시간이 급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상대의 의도를 알았으니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떠나려는 나를 사내가 붙잡았다.

"자, 잠깐!"

"왜 그러시는지?"

사내는 우물쭈물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오동 어르신께는 오늘 일을 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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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갈락취

내 예상과 달리, 사내는 오동의 허락을 맡고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방문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가 저자세로 나온 이상 더는 도발적인 언행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가보면 되겠습니까?"

"그, 그래, 가봐."

잠시 후,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사내를 뒤로하고 비행 법기를 출발시켰다.

'처음부터 부탁으로 다가왔어야지.'

나는 다시 혼자가 되자, 지나쳐온 사내의 행태를 돌아보게 되었다.

약육강식이 법과 같은 중천에선 사내 같은 인물이 차고 넘쳤다. 

그 무엇보다 수행을 우선시했기에,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면 왕처럼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을까?

힘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순리대로 풀어가는 게 맞았다.

물론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기준이 나라면 분명 그랬다.

사내를 상대하고 난 후, 풍초신을 떠올려보고, 전여희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가야 할 중천에서의 내 기준이 확실히 정해지는 기분이었다.

'강강약약.'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하게.

그 마음가짐은 용의 위엄과도 완벽히 부합했다. 한편으론 용의 위엄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가 싶었지만.

'아무렴 어때.'

크게 상관없었다.

특성이란 건 결국 피로 인해 전해지는 유전적 성질.

나와 분리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

드넓은 호수를 건너 용수산맥으로 향하는 길.

한 달이 걸리는 그 길은 순탄하기만 하진 않았다.

괴수들의 눈엔 내가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인 건지, 잊을 만하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그 현상은 심해졌다.

다행이라면 내가 이동 중인 일대는 수도자들이 재료 수급을 위해 활동하는 지역이라 위험할 만한 괴수는 없단 것이었다.

차아악-

금빛이 선명한 광선검을 휘두르자, 성인 남성보다 큰 두꺼비가 반으로 갈라진다.

나는 대적점의 기류를 이용해 피가 튀지 않게 막으며 여유롭게 상황을 정리했다.

"징그럽게도 몰려드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두꺼비.

두꺼비들은 2종 괴수인 두말라(頭沫裸)라 불렸다.

입에서 뿜어대는 부식성 거품만 조심한다면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괴수였다.

나는 혹시라도 살아있는 놈이 있는지 확인 작업을 마치고, 두꺼비 입천장에 달려있는 구슬을 모았다.

구슬은 부식성 거품을 만들어내는 생체 기관이자, 두꺼비의 원단 같은 것.

사체의 다른 부위는 돈이 안 되지만, 구슬은 제법 짭짤했다.

"이제 이걸로 끝인가?"

잠시 후, 전리품 정리가 끝나자, 멀리 보이는 웅장한 산맥으로 시선이 간다.

산맥이 시작되는 부근부터는 전여풍의 지역.

그의 영향력 덕분에 더는 괴수들이 귀찮게 달라붙는걸 피할 수 있었다.

'응?'

그때, 감각 안으로 미세한 기척이 감지됐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노리는듯한 기분.

'설마 그때 그놈이 또?'

나는 섣부르게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기척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길 잠시.

'저긴가?'

3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수풀이 기척의 시발점이란 걸 알아냈다.

그 순간, 영력을 눈으로 끌어올리며 청안을 발동했다.

그러자 수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가 두 눈에 들어온다.

'저건?!'

정확히는 환혹계열의 능력으로 몸을 숨긴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괴수가.

'갈락취?'

그것은 갈락취였다.

풍초신이 말한, 겸불이 무섭다며 그와 닮은 존재로 거론했던 무지막지한 괴수.

호랑이의 몸에 청 푸른 날개를 가졌고, 수도자를 생으로 씹어먹길 즐기는 괴수였다.

놈은 내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 태세 변환 없이 나와 내 뒤에 수북이 쌓인 두꺼비들의 사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갈락취가?'

갈락취는 어느 곳에 있어도 이상한 괴수는 아니었다. 다만, 한 달 거리라고는 하나 마을 주변인 이곳에서 발견되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수도자들을 잡아먹고 살기에 수도자들이 모여 사는 곳 인근에 자리를 잡을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었다.

갈락취는 영수만큼이나 똑똑한 괴수였다.

아마 수도자를 생으로 먹는 습성이 아니었다면 괴수가 아닌 영수라 불렸을 정도로 영특했다.

그런 놈이 고위 수사가 득실대는 마을 주변에 머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기는 걸 느꼈다.

'아니지, 괜한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하지만 청안의 도움으로 갈락취의 가장 강력한 능력을 봉인한다 해도, 상대는 엄연한 상급 괴수.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좌우로 살피다가 바닥을 박차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만에 하나 갈락취가 공격해온다면 곧바로 응수할 준비를 하면서, 가던 길을 살짝 우회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현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갈락취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고의로 이곳에 풀어 노... 설마?!"

그때,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수라 많은 것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유저들에게 연락취라 불리며 회자되었던 내용.

"설마, 죽을 때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건가?"

갈락취는 태어난 곳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랬기에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와 죽는다고 했다.

휙-

그렇다면 아까완 다른 상황. 확인이 필요했다.

나는 빠르게 날아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두꺼비 사체가 쌓여있는 현장으로 움직였다.

'아!'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해 본 것은 갈락취의 식사 모습이었다.

놈은 내가 죽인 두꺼비들의 심장만 골라 하나씩 꺼내 먹고 있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구나.'

수도자를 날것 그대로 먹기 좋아하는 갈락취가 죽은 괴수의 심장을?

소문대로 죽음을 앞에 두고 사냥 능력을 상실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식사를 마친 갈락취는 흐릿하게 변하며 모습을 감추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그 즉시 청안을 발동하며 기척을 죽이고, 그 뒤를 따랐다.

+++

두꺼비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터.

갈락취는 그곳에 도착하더니 모습을 드러내며 구멍 난 나무둥치로 파고들었다.

나무 둥치 입구는 끈적끈적한 아교 같은 물질이 뒤덮여 있었고, 그 위로 나뭇잎들이 수북이 쌓여, 눈으로는 쉽게 발견되기 어려워 보였다.

갈락취가 지나가자 마치 결계라도 되는 듯 스스로 열리고 닫히는 입구를 보며 나는 멀리서 그곳을 살폈다.

나무 자체를 투시할 순 없었지만, 입구의 보호장치가 읽히며, 내부를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죽기 직전인데도 음식을 찾아 나선 거구나...'

나무 둥치 안쪽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갈락취.

그런 갈락취의 품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 갈락취 두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청안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 갈락취의 입을 통해 두 새끼에게 영력이 전해지는 흐름이 보였다.

'저게 새끼 갈락취?'

갈락취의 새끼는 어미와 다르게 뽀송뽀송한 노란 털을 가진 병아리와 비슷했다.

아니, 발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병아리 같은 모습이었다.

'저게 갈락취의 새끼라니. 사람들이 놀라겠네.'

성체인 갈락취와는 매우 다른 모습.

너무 귀여운 모습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어쩌지?'

내가 죽어가는 갈락취를 따라온 이유?

갈락취는 수많은 수도자를 잡아먹고 원단을 형성한다. 그런 갈락취의 원단은 수행을 폭발적으로 올릴 수 있는 단약의 재료중 하나였다.

갈락취의 원단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워, 일반적인 수행 상승용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원영기 이하의 수도자가 수련 중 벽을 마주할 때 벽을 깨는 도구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새끼를 품고 죽어가는 갈락취를 보니 차마 바로 손이 가지 않았다.

'어쩔수 없지.'

결국 나는 그곳에 망부석처럼 앉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정확히는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나, 갈락취의 상태로 볼 때 오래 살 수는 없어 보였으니.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안쓰러운 감정이 전부는 아니었고, 안전을 고려한 선택이기도 했다.

'흐음... 더는 안 되겠네.'

그렇게 보름이 지난날.

나는 무작정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 전여풍을 만나고, 다시 이곳을 방문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지금도 갈락취의 호흡은 실낱처럼 옅어졌지만, 그 상태가 벌써 열흘이 넘었다.

'다시 오자'

하지만 내가 떠나려고 했던 그때.

떠나려는 내 기척을 느낀 것인지, 나무둥치에서 반응이 왔다.

곧이어 입구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갈락취가 모습을 감추지도 않은 채 아주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떠나려는 나를 한동안 응시했다.

마치 내 영혼을 꿰뚫어 보듯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혹시나 전투로 이어질까 하는 생각에 준비를 하던 나는, 이어지는 갈락취의 행동에 말을 잃고 말았다.

투툭-

나를 앞에 둔 갈락취가 힘겹게 몸을 돌리자, 나무둥치의 결계가 터져나간다.

갈락취는 둥치 안으로 들어가더니 새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툭 던지더니, 다시 돌아가 나머지 한 마리 새끼도 물고 돌아왔다.

툭-

두 마리 새끼를 나란히 놓고, 나를 직시한다.

성인의 서너 배는 될만한 크기였지만, 이상하게 압도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안쓰럽다는 느낌만 가득했다.

왠지 갈락취의 감정이 읽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런 갈락취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설마. 나에게 네 아이들을 맡기려고?"

내 물음에 갈락취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새끼들을 내 쪽으로 더 밀어냈다.

-지켜봤다. 다르다. 부탁한다.

갈락취가 대화가 가능한 존재였다니?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영수급이 아니라, 정말 영수란 말이었다.

뇌리로 전해지는 묵직한 음성에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이번엔 상대가 불편할법한 말로.

"혹시 내가 따라온걸 알고 있었나?"

갈락취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가 너를 지키기 위해서 따라온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네 원단을 챙기려고 왔단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번에도 갈락취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없다. 가져라. 대신.

마치 내가 무얼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 듯 갈락취는 바닥에서 꿈틀대는 새끼들을 응시하다가 내게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용, 약속.

'용족에 대해 알고 있구나!'

갈락취는 '약속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듯, 시선이 내 입으로 고정됐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전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투 없이 상급 괴수의 전리품을 챙길 기회 아닌가?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병아리처럼 생긴 두 마리의 새끼가 눈에 밟혔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약속한다. 네 아이들의 안전을."

-고맙다, 약속. 선물.

"크릉..."

툭-

내게서 확답을 들은 갈락취는 새끼손가락만 한 구슬 세 개를 툭 뱉어냈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몸을 뉘었고, 이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누워있던 갈락취의 호흡이 점점 옅어지더니, 영기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졌다.

녀석은 새끼들을 위해 최대한 죽음을 유보하려다가, 결국 타인에게 맡기는 선택을 하고 하늘로 떠난 것이었다.

내가 정말 믿음직해 보여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좋은 곳으로 가라. 아이들 걱정은 말고."

나는 그런 갈락취를 위해 아주 잠시 기도했다.

+++

기도는 기도고, 약속은 약속.

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갈락취의 심장 바로 아래에 상처를 낸 후, 주먹만 한 구슬을 꺼내 챙겼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구슬 세 개를 공간 팔찌에 담고, 여전히 눈도 뜨지 못한 채 꿈틀거리고 있는 두 마리의 새끼를 품에 집어넣었다.

새끼들은 내 손에 잡히자 꼬물꼬물거리며 반항했다. 하지만 품 안으로 영력을 움직이자,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마치 내 품을 엄마 품으로 착각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동안 잠이든 두 마리의 갈락취 새끼를 내려보다가, 공간대에서 보따리를 꺼냈다.

그런 후 보따리에 담겨있던 저충을 전부 꺼내 다른 곳에 옮겨 담고, 그것으로 죽은 갈락취를 덮었다.

보따리는 저충의 신선도를 위해 구매한 하급 법기. 쉽게 말하면 저온 냉장고 같은 기능을 가진 법기였다.

'신선한 술을 빚기 위해 준비한 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잠시 후, 갈락취의 사체를 향해 공간팔찌를 가져다 대자, 거대한 사체가 보따리에 쌓인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흔적은 남겨줘야지.'

갈락취가 죽기 전 선물이라고 말한 게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무슨 용도일지 모를 구슬 세 개를 내게 준다는 말인 줄 알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았다.

그동안 겪은 영수의 습성을 떠올리면 답이 보였다.

무리를 이뤄 종족으로 발전한 영수들 같은 경우와 다르게, 갈락취처럼 개인 생활만 하는 영수는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매우 강했다.

그래서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평생 단련한 것들을 후인에게 전해주려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발톱이 될 수도, 혹은 이빨이 될 수도 있었고, 뼈나, 눈알 같은 신체 일부의 어떤 것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후인은 그것을 품고 체화시키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영수가 그러한 것은 아니기에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

심지어 좀 전까지만 해도 갈락취가 괴수인 줄 알고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감이 말해주었다.

사체를 그냥 버리고 가면 후회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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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전여풍

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처럼 끝없이 펼쳐진 산맥.

구름이 흐르는 상공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며 빠르게 목적지를 찾아 움직였다.

용수산맥은 전여풍의 영향력 덕분에 더 이상 상공에서 출현하는 괴수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

고도를 마음껏 높여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물론 너무 높게 올라가면 몸을 짓누르는 압력과 영기 폭풍으로 인해 언제 위험에 빠질지 모르니 적당한 높이를 유지해야 했지만 말이다.

"저긴가?"

갈락취와의 만남 이후 사흘을 더 날고 나서야 멀리 전여풍의 거처가 보였다.

대지에 박힌 칼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 수많은 절벽 산.

그런 절벽 산 중턱에 각종 나무와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신비감을 조성하는 장소.

나는 그곳에 가까워지자 점점 속도를 줄여나갔고,

투웅-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지나쳐 작은 초가집이 자리한 공터에 내려섰다.

'방금 지나친 건 결계인가?'

몸을 스치는 기묘한 감각에 당장이라도 청안을 발동해 지나온 길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허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순 없었기에 마음을 누르며 초가집으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말했다.

"어르신. 부름 받고 왔습니다."

하지만, 내 목소리만 공허하게 맴돌고 아무런 인기척도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어르신. 금파란이라 하옵니다."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초가집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전여풍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어디 있나 찾아보고 싶었지만, 오다 만난 사내의 말처럼 이곳은 족장도 어려워하는 곳.

불러주기 전까진 하루고 열흘이고 이렇게 대기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꼬박 사흘이 지나자 조그만 초가집의 문이 열리며, 하얀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의는 벗고, 하의만 입은 상태였는데. 구릿빛 피부위로 푸른 비늘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노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작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큼, 기다리게 했구나. 그래, 네 녀석이 금파란이렷다?"

스르륵-

말과 동시에 노인의 몸 주위로 새하얀 천 조각들이 생겨나더니 어느새 옷으로 변해 그의 몸을 가렸다.

'법의(法衣)?'

나는 노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대답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금파란이라 하옵니다."

"금파월의 자식이라지?"

"그렇습니다."

"그 또... 크흠. 아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우선 저기 앉거라."

노인은 아주 잠깐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하다가, 공터 한쪽을 가리키며 걸었다.

쑤숙- 쑥-

그러자 노인의 걸음에 맞춰, 아무것도 없던 공터에 나무들이 자라나더니 의자 형태를 갖춘다.

나는 그 모습에 어쩌면 상대가 소문보다 더 고위 수사일 수 있단 생각을 하며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의자에 앉자, 노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이야기는 오동에게 많이 들었다."

'오동? 희가 아니라?'

당연히 전여희와 관련된 일로 불렀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여풍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아니었다.

"술을 빚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재능이라니요. 아닙니다. 그저 주조법에 적힌 대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다. 내 이미 네가 만든 매화주와 오동이 만든 것을 마셔보았으니."

"..."

"네 수행을 고려했을 때, 아니 수행을 제외하고라도 그 정도면 재능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말을 하던 전여풍이 가볍게 손을 젓자, 그의 손에 얇은 옥간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사담을 나누는 걸 즐기지 않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확인해 보거라. 그런 후 대화를 이어가지."

옥간을 내밀고 가만히 바라보는 전여풍.

나는 그런 그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옥간을 받았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영기를 주입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며 이마로 가져갔다.

옥간에 이마를 대자, 내용이 빠르게 뇌리로 주입된다.

'이건? 명혼주(命魂酒)?'

옥간에 담긴 내용은 다름 아닌 명혼주라는 선주의 주조 비법이었다.

명혼주는 다른 선주와 다르게 수련용도 아니고, 기분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가용도 아니었다.

오로지 한가지 목적으로 만드는 선주.

신체를 잃은 고위 수사가 다른 몸으로 옮겨갈 때, 새로운 몸에 영혼이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게 돕는 역할뿐이었다.

명혼주가 없다고 다른 몸으로 옮겨갈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명혼주가 있다면 신체 강도를 제외한 원래의 실력을 전부 회복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고위 수사에겐 천금보다 값어치 있는 물건이란 말이었다.

'설마 내게 이걸 만들라는 건가?'

한동안 명혼주 비법을 살피다가, 옥간을 이마에서 떼자, 전여풍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명혼주라는 것이다. 한번 만들어 보겠느냐?"

아니나 다를까. 전여풍은 내게 명혼주 주조에 관한 얘길 꺼냈다. 동시에 손을 저어 공간대 하나를 가져오더니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0번 주조할 수 있는 재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병만 만들면 되는데. 어떠하느냐? 할 수 있겠느냐?"

'10번이면 불가능한 건 아닌데...'

다른 주조와 달리 명혼주의 주조 성공 확률은 정말 바닥에서 헤엄치다 구름을 잡는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극도로 낮은 확률.

게다가 수행이 아무리 높아지고, 좋은 도구를 사용한다 해도 성공 확률은 올라가지 않는 기이한 특징도 있었다.

오로지 운에 매달려야 하는 특이한, 특별한 선주였다.

'진짜 비법이 따로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대부분이 착각하는 사실, 진실은 아니었다.

'천마루(天魔樓)의 후손들에게만 전해지던 비법.'

당연히 명혼주도 주조 확률을 올리는 방법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미 여러 차례 성공해본 적이 있었기에 10번 중 한 번이면 아슬아슬하게 성공 가능한 수준이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전여풍이 말을 잇는다.

"솔직히 말하마. 내가 그것을 만들기 위해 벌써 스무 번을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니 네가 10번 안에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나무랄 생각은 없다. 오동이 여러 번 널 추천했기에 부탁하는 것이지, 크게 기대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내 고민의 시간을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인 전여풍은 은근한 말투로 날 유혹했다.

그러다 내가 혹할만한 제안을 꺼냈다.

"만약 주조에 성공한다면, 이것을 주마."

어느새 그의 손 위에 올려진 작은 돌.

작은 돌은 투명에 가까운 모습으로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며 내 눈을 어지럽혔다.

"공진석이면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느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듯한 그의 옅은 미소가 유난히 밟혔다.

+++

'역시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전여풍에게 공진석이 있는 건 전혀 놀랄 게 아니었다.

원영을 이루고 대공진을 익혀야 하는 이들에게는 천금의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지만, 전여풍에겐 공간대에서 굴러다니는 조금 비싼 돌멩이에 불과할 수 있었다.

길고 긴 시간을 살아온 그가 공진석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문제라면 지금 이 시점에 공진석을 대가로 내밀었다는 뜻이었다.

마치, "예전 일 기억하지? 이거 알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전여풍.

전여희가 할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전했을지 몰랐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여풍의 말투가 일종의 협박, 혹은 강한 권고라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다만, 실패해도 실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허, 너는 내 말을 어찌들은 것이야. 내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나무랄 생각이 없다고."

전여풍의 확답에 공간대를 건네받아 허리에 둘렀다.

내가 재료를 챙기자, 그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온 김에 희를 보고 가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신 지, 자꾸 외출을 시도하던데, 네가 얼굴 좀 비추고 달래주면 좋겠구나."

'그러고 보니 희를 본지도 꽤 되었구나.'

내가 3단에 오르기 위해 본격적인 수련을 준비할 때쯤, 전여희는 할아버지에 의해 강제 수련을 시작했다.

그랬기에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나 역시 그녀에게 전해줄 것이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전여풍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올린다.

그러더니 손을 가볍게 휙 흔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가집이 위치한 곳에서 한참 떨어진 봉우리에서 익숙한 기운과 함께 꼬마 아이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젠 가슴께까지 자라, 아이보다는 소녀에 가까웠지만, 해맑음은 여전한 전여희였다.

"오라비!!"

그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내게 다가와 품에 안기려고 했다.

그 순간, 전여풍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 모습에 나는 손끝에 바람을 형성해 부딪치기 직전 그녀를 멈춰 세우며, 웃음으로만 반겼다.

"잘 지냈어?"

전여희는 내가 자신의 행동을 막아서자 새침하게 쳐다보다가, 할아버지를 힐끔 확인하고 아이답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휴, 조금 답답하긴 해도, 참아야지."

그 모습에 전여풍이 고개를 저었고, 나는 피식 웃었다.

잠시 후, 담소를 나누라며 전여풍이 자리를 피하자, 전여희의 수다가 시작됐다.

수련은 지겹다느니, 풍광 오라비는 요즘 뭐하냐느니,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대답하다 보니 금세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그러다 탑에 대한 소식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슬픈 일을 당한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히잉, 오라비는 괜찮아?"

그렇게 이어지던 수다는 결국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찾아온 다음에야 끝이 났다.

이제는 떠날 시간.

나는 아쉬워하는 전여희를 뒤로한 채, 전여풍에게 인사를 올렸다.

"인근에서 이곳보다 영기가 충만한 곳은 없다. 그런데 굳이 거처로 돌아가겠다고?"

전여풍은 내가 자신의 거처에 머물기를 바랬지만, 나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제가 주조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나, 가장 좋은 술맛이 나왔을 때는 마음이 안정됐을 때였던 거 같습니다. 해서 제가 오랫동안 생활했던 곳에서 주조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 옆에선 떨려서 일을 못 하겠다는 말을 돌려 표현하자, 전여풍도 알아먹었는지 피식 웃으며 허락했다.

"그래, 그게 더 나은 선택이라면."

하지만 전여희는 달랐다.

"오라비, 나랑 같이 여기서 수련하면 안 돼?"

"금방 다시 돌아올 테니 수련 잘하고 있어. 그리고 이거."

나는 아쉬워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준비해 왔던 유아용 저과주를 다섯 병을 꺼냈다.

그러자 그녀는 게눈감추듯 그것을 낚아채 반지 안에 담았다.

"헤에. 역시 오라비밖에 없어."

유아용 저과주를 받고 조금은 마음이 너그러워졌는지, 그녀는 금세 태도를 전환했다.

끼이-

"그럼 빨리 마치고 와야...어? 이게 무슨 소리야?"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 품에서 잠들어 있던 새끼 갈락취가 깨어나며 울음소리를 낸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공간대에 넣을 수도 없었고, 거미들이 손가락에 들어가 버려 충낭을 구매하지 않아 벌어진 일.

'이렇게 깰 줄 생각지도 못했는데.'

은은하게 몸을 감싸고 있는 영력으로 인해 계속 잠이 들어 있을 줄 알았건만, 스스로 영력을 거부하며 깨버린 것이었다.

끼이-

"응? 무슨 소리냐니까?"

전여희에 목소리에 대답하듯 또 한 번 소릴 내는 새끼 갈락취.

'어쩌지? 이걸 보여줘도 되는 건가?'

나는 전여희가 아닌 옆에서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전여풍의 눈치를 살폈다.

오랜 플레이에서, 그리고 그 시간만큼의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게 새끼 갈락취였다.

그 말은 내가 새끼들을 발견한 건 그만큼 희귀하고 드문 경우란 뜻이었다.

수도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수행에 도움이 되는지 연구부터 하는 자들 아닌가?

전여희에겐 보여줘도 상관없었지만, 전여풍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빠르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말한 약속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무엇인데 그러느냐? 보여 보거라."

그러자 여태껏 관심 없던 전여풍이 슬그머니 턱을 올리며 말한다.

옆에선 전여희가 기대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휴우... 어쩔 수 없다.'

나는 결국 두 사람의 눈빛을 거부할 수 없어, 품속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바로 새끼를 꺼내지 않고, 말을 먼저 꺼냈다.

"어르신. 이 아이들은 제게 소중한 아이들입니다. 해서..."

차마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전여풍이 헛웃음을 흘린다.

"무엇인데 그리 뜸을 들이느냐? 내가 설마 네 녀석이 가진 것에 욕심을 부릴까 봐 그러는 것이냐? 허 참, 누가 월이 그 녀석의 아들이 아니랄까 봐. 생각이 어쩜 이리."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전여풍은 내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러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수행 차이를 고려하면 나에겐 보물이 그에겐 돌멩이보다 하찮을 수 있었으니까.

"오라비, 빨리!"

대화에 끼고 싶은지 계속 울음소리를 내는 녀석 덕분에 전여희가 발을 동동 굴린다.

'딴소리하진 않겠지.'

나는 전여풍의 말에 속으로 안도하며 두 마리 새끼 중 소리를 내던 놈만 꺼냈다.

그리고는 전여희가 잘 볼 수 있게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내 손위에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며 '끼이- 끼이-' 소리를 내는 병아리 한 마리, 아니 갈락취가 꿈틀거렸다.

"꺄아! 너무 귀여워!!"

그러자 전여희의 발 동동거림이 더욱 거세졌다. 

그녀는 마치 환계면(幻界面)에 서식하는 환상종(幻想種)을 본 것처럼 두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았다.

무알콜 저과주를 처음 마셨을 때도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다.

귀엽긴 하지만 이게 그 정도인가?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전여희는 동동거리던 발을 멈추며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사람처럼 내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오라비! 이 아이 내가 키우면 안 돼? 나 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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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선착순

적막이 감도는 공터.

전여희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전여풍은 놀란 표정으로 새끼 갈락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여희의 부탁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요구가 무리한 부탁인 걸 알지만, 나 역시 비슷한 일을 저질렀지 않은가?

지은 죄가 있으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라비?! 응?"

하지만, 빚이 있다고 새끼 갈락취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끼들을 사냥 중에 포획한 거라면 모를까, 어미와 약속을 하고 입양한 것과 마찬가지.

물론 새끼 갈락취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종속의 인을 걸테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안전하게 키워야 하는 의무가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어미도 그건 예상했을 테니까.'

부탁에 응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 거 같은 전여희를 보며, 나는 자세를 낮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희야. 내가 가진 게 무엇이든 네가 원하면 줄 수 있다. 내 무리한 부탁을 네가 들어준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말이다. 이 아이는 물건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영수다.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지."

경매장이나 노예상을 이용하면 영수 역시 사고파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구한 생명체들과 진심으로 교감하며 종속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종속을 맺는다는 건 절대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특히나 전여희처럼 어린 나이에 평범한 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더더욱.

갈락취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수도자를 잡아 올 것 같은 표정 아닌가?

새끼를 건네주는 건, 그녀를 위해서도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물건이라 생각한 적 없어! 진짜 잘해줄 수 있단 말이야..."

내 말에 거절의 의사가 포함된 걸 알고 그녀의 표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닌듯했다.

"물론 알아. 당연히 그러겠지. 하지만 내가 이 아이를 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야."

'저건?'

어느새 반지에서 꺼낸 부적 한 장을 손에 쥔 전여희.

그 모습에 그녀의 손을 움켜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의 부모에게 약속했다. 안전하게 잘 지켜주겠다고."

"나도 잘 지켜줄 수 있어. 소중하게."

당연히 나보다 전여희 곁에 머무르는 게 더 안전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건 전혀 다른 문제.

아이를 입양한 후, 옆집에 맡겨놓고 잘 키우고 있다고, 지켜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어가던 갈락취가 내게 바란 건 그런 식의 안전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전여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존재했다.

'아직은 내게서 떨어트릴 수 없어.'

여전히 내 감은 죽은 갈락취의 사체에서 '선물'이라 지칭한 어떤 걸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한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죽기 전 뱉어낸 구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

처음엔 수련에 도움이 되는 '영단' 인줄 알았으나, 오면서 확인해본 결과 어떤 곳에 쓰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어쩌면 구슬조차 내게 준 것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남긴 것일 수 있단 뜻이었다.

그 자세한 모든 걸 전여희에게 알려줄 수도 없었고, 알려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다 알아. 너는 착한 아이니까 어쩌면 나보다 더 이 아이를 소중하게 잘 키워주겠지. 하지만 내가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내가, 바로 내가."

"..."

"우리에게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내 질문에 전여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내 손에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당장이라도 '소원 부적 쓸래!'를 외칠 것처럼 보였다.

그때 말없이 새끼를 바라보고만 있던 전여풍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고 싶구나. 설마. 갈락취의 새끼인 것이냐?"

'역시, 알아보는구나.'

사전 정보가 있어야만 판단할 수 있는 나와는 달리 전여풍은 기운과 감각만으로 더 많은걸 알 수 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갈락취를 마주해봤다면, 특유의 파동으로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일.

거짓은 무의미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앞둔 갈락취에게 직접 부탁받았습니다. 아이들의 안전을."

전여풍은 내 답변에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만났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죽은 어미를 말입니까?"

"그래."

그게 왜 궁금할까 싶었지만, 숨길 필요가 없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전여풍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 오묘하게 변했다. 마치 과거를 떠올리며 슬픈 회상을 떠올리는 듯이.

"하아. 조심히 가거라."

그러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거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지? 슬퍼하는 것 같았는데?'

갈락취를 욕심낼 수도 있을 거란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비켜 갔다. 전여풍의 모습은 궁금증만 남겼다.

전여희도 할아버지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때, 이때다 싶은 느낌에 새끼 갈락취를 재빨리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시선이 원래대로 돌아와 새끼 갈락취를 찾을 때, 눈을 보며 말했다.

"내가 죽은 어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지 않을래? 대신 수련이 끝나고 오면, 언제든 만나게 해줄 테니."

내 설득이 통한 것일까?

결국 전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 쥐어졌던 부적도 모습을 감춘 후였다.

+++

거처로 돌아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다.

갈 때와는 다른 의미로.

'잘한 결정이 맞다.'

실망한 전여희의 표정이 자꾸 아른거렸다.

하지만 새끼 갈락취를 주지 않은 건, 그녀를 위해서도 옳은 선택은 분명했다.

'할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으니 그럴 리는 없지만. 절대 안 되지.'

밧줄에 꽁꽁 묶여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도자를 갈락취에게 던져주는 전여희의 모습이 상상돼 잠시 몸서리가 쳐진다.

게다가 손녀를 끔찍하게 여기는 전여풍이 훈수를 두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것은 내 선택이 옳았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새끼 갈락취가 전여희에게 가는 걸 반기지 않은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 더는 그것에 대해 생각 말자.'

나는 모든 상념이 날아갈 정도로 세차게 고갤 흔들었고, 그 후엔 이동에만 집중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한 달을 비행한 끝에 거처에 도착. 즉시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청정매화주를 만들어 오동에게 전해주고 나를 배려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저과주도 몇 병 상납했다.

"역시, 마음에 드는군. 마음에 들어!"

술의 향기에 행복해하는 오동을 보며, 저과주와 관련된 상의를 해볼까 싶었지만, 우선을 명혼주에 집중하자는 생각에 입을 닫았다.

그 후 샘물에서 명안과 청안을 수련하고, 곧장 풍초신을 찾아갔다.

"어? 웬일이야? 나를 먼저 찾아오고?"

내 방문에 의문을 표하는 그를 보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본론을 꺼냈다.

"겸불 선배와 함께한 네가 마을 소식에 밝잖아. 한가지 궁금한 게 생겨서."

"뭔데?"

"혹시 마을 주변에 폐쇄된 영석 광산이 있을까?"

풍초신은 사람과 친해지길 좋아했고, 그로 인해 반쯤은 소식통이나 다름없었다.

폐쇄된 영석 광산이란 말에 풍초신이 턱을 괴며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한 군데 알고 있어."

"어디?"

잠시 후, 폐쇄된 영석 광산의 위치 정보를 얻은 나는 비행법기를 조종해 늪지대로 향했다.

3일을 날아 늪지에 도착한 후, 다시 반나절을 날아 늪지를 벗어났다. 그런 후 다시 3일을 날아 평범해 보이는 산을 앞두고 비행 법기를 멈춰 세웠다.

"이곳이구나."

내가 폐쇄된 영석 광산을 찾은 이유?

그건 바로 명혼주 주조를 위해서였다.

나는 산의 초입으로 나아가 거미 삼형제를 불러냈다.

뽈뽈뽈-

녀석들은 나오자마자 음식 냄새를 맡은 강아지들처럼 내 품 안으로 뛰어든다.

그러곤 얇은 영기 막에 쌓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새끼 갈락취들에게 다가가 탐색하듯 살피기 시작했다.

흡사, 적인지 아군인지 파악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손가락을 퉁 튀기자, 거미들이 품에서 튕겨 나오며 바닥에 안착했다.

나는 그런 거미들을 보며 손안에 영력을 뭉쳐 그들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은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내 손안에 느껴지는 기운. 이 기운이 완벽하게 제거된 장소를 찾는 것이다. 산 아래 갱도가 파여 있으니 그 길을 따라 찾아보는 것이 빠를 것이다. 대략 이 정도 넓이를 가진 곳이어야 한다. 가장 먼저 알아 오는 녀석에겐..."

공간대에서 주먹만 한 가매초 특식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걸 줄 테니, 자! 출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미 세 마리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거미들에게 찾으라 명령 내린 장소는 '무영지(無靈地)'라 불리는 곳.

말 그대로 영기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다.

사실, 온 세상에 만연하게 퍼진 영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없었다. 공기 속에도 있는 것이 영기인데, 없는 곳을 찾는다는 게 애초에 모순이었다.

다만 영석 광산이 위치한 곳엔 무영지라는 장소가 드물지 않게 발견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영지는 장소가 아닌, 흙 자체.

영석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주변으로 영기를 빼앗겨버린 후, 회복하지 못한 특수한 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영지가 넓게 형성된 곳만 찾는다면?

그곳에서 명혼주를 높은 확률로 주조할 수 있었다. 물론 높다는 게 원래 확률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이긴 했지만 말이다.

+++

'그럼 시작해 볼까?'

거미들이 흩어진 후,

나는 바위로 막힌 장소로 자리를 옮기고 품에서 두 마리 새끼 갈락취를 꺼냈다.

그리고는 거미들에게 했던 것처럼 동일한 방법으로 종속의 인을 걸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영충이나 영수나 모든 과정은 같으니까.'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알 위로 피를 떨어트려 자연스럽게 흡수되게 했던 것과 달리, 손가락에 상처를 낸 후 새끼들의 입으로 흘려보내는 과정이었다.

종속의 인을 거는 작업이 끝나자, 제대로 걸린 건지 확인한 후, 새끼들이 깨지 않게 다시 품속에 옮겼다.

그리고는 영력을 방출해 편안히 잘 수 있게 도왔다.

'이 작은 것들이 그렇게 큰 성체가 되다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새끼들을 보면 도저히 성체인 갈락취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노란 병아리 같은 모습이 푸른 날개를 가진 호랑이 같은 모습으로 변하다니.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도 쉽사리 예상할 수 없는 변화였다.

"하긴 이 세상에 신기한 게 한둘인가."

그렇게 한동안 새끼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던 나는 어미가 남긴 구슬을 꺼냈다.

새끼손가락을 웅크린 것만 한 크기의 구슬.

구슬은 별다른 특색도 없었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단처럼 보이긴 했으나, 그렇다면 절대 기운을 감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수련에 사용하는 단약 종류도 절대 아니었다.

"아쉽네. 시간만 더 있었다면 좋았을걸."

내 시간이 아닌, 죽은 갈락취의 시간.

그 녀석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선택이 옳은가? 아닌가? 고민했을 것이다.

만약 조금만 일찍 선택했다면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갔을 테지만, 그렇다고 탓하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부모로서 그런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면, 누구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순 없었을 테니까.

"부모라..."

나는 위엄을 지키며 죽어가던 갈락취의 모습을 회상하다가, 중천에 들어오기 전 나의 부모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아니다. 생각해서 뭐 해."

그리고는 억지로 딴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갈 무렵.

뽈뽈-

거미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내 앞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마치 빨리 상을 주라는 듯, 뱅글뱅글 도는 속도가 평소보다 빠르다.

"기다려. 다른 녀석들이 오면 확인하고 상을 줄 테니."

뽈뽈-

곧이어 두 마리 거미가 도착했고, 나는 확인을 위해 거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내가 거미들에게 요구한 넓이는 대략 양손을 쫙 편 정도의 공간.

거기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은 녀석 중에 가장 먼저 도착한 녀석에게 상을 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1등 거미가 이끄는 곳에 도착.

"흠... 살짝 좁긴 하지만. 내가 요구한 수준은 된다. 약속대로 이걸 받아라."

1등 거미가 찾은 곳은 무영지였다.

그것도 정확히 내가 두 팔을 벌린 정도의 넓이를 가진 장소.

나는 보상으로 주먹만 한 가매초 특식을 꺼내 건넸다. 그러자 상을 받은 거미는 그것을 거미줄로 감싸더니 홀랑 삼켜버렸다.

그 모습에 나머지 두 마리 거미의 움직이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진다.

나는 그것이 그들의 감정표현임을 알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만약 이곳보다 넓은 장소를 찾은 거면, 너희들도 챙겨줄 테니."

물론 약속은 약속이니 첫 보상과 같은걸 줄 순 없지만 말이다.

뽈뽈-

2등으로 도착한 거미를 따라 지하로 깊게 들어가자, 그곳은 처음보다 두 배는 넓은 무영지가 존재했다.

어느새 머리 위에 올라와 뱅글뱅글 도는 거미를 보면, 자신이 찾은 게 1등보다 좋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고는 처음 꺼낸 것보다 조금 작은 특식을 건넸다.

"원래라면 더 작은 걸 줄 생각이었다만, 마음에 들어 큰 걸 준다."

잠시 후, 2등 거미도 거미줄로 가매초 특식을 감싸더니 홀랑 삼켰다.

그걸 보며 나는 세 번째 거미에게 눈길을 주었다.

3등 거미는 빨리 자신이 발견한 장소를 알려주고 보상을 받고 싶은 것처럼 조급해 보였다.

다만 두 번째 장소가 명혼주를 만들기엔 딱 알맞은 곳이라, 굳이 가야하나? 하는 생각에 주춤했다.

'그래, 그래도 가자. 고생했는데, 확인은 해야지.'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아무리 선착순 경쟁을 시키긴 했지만, 그건 딴짓을 좋아하는 거미들을 훈련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일.

영혼으로 이어진 종속에게 차별을 가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뽈뽈-

3등 거미는 내 신호에 신이나 튀어 나갔고, 나는 한참을 뒤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린 건지 막다른 벽을 마주하고서야. 폐광 갱도의 끝에 도달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거미는 멈추지 않았다.

갱도 끝에 도착한 3등 거미는 벽을 파고들더니 계속 이동했고, 나는 광선검을 꺼내 벽에 구멍을 내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파고든 후에야 3등 거미가 멈췄고, 나 역시 멈출 수 있었다.

"너... 도대체 뭘 찾은 거야?"

3등 거미를 따라 도착한 곳.

그곳엔 무영지가 없었다.

대신 손이 베일 것처럼 선명한 푸른 결계에 뒤덮인 문이 있었다.

문은 정확히 내가 두 팔을 뻗은 크기였고, 이상하리만큼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유적인가?"

그러고 보니 3등 거미는 혼자 황고구마를 찾아온 그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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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유적

3등 거미가 폴짝 뛰어 손목에 올라서더니, 머리 위로 잽싸게 이동한다.

그리고는 2등 거미처럼 빨리 보상을 달라며 머리 위에서 뱅글뱅글 돈다.

하지만 내 신경은 온통 푸른 결계에 뒤덮인 문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왜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지?"

이런 곳에 미발견 유적이 존재하는 거? 

그럴 수 있다.

갱도만 해도 말도 안 되게 깊은데, 그 안으로 한참을 더 이동했다.

아무도 이곳을 찾지 못한 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계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에, 여태껏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걸어 푸른 결계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팡- 부르르-

일정한 공간 안에 닿자, 내 몸이 격렬한 진동에 휩쓸리며 내부가 진탕한다.

"윽!"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결계가 어떤 식으로 발동하는지 깨달았다.

푸른 결계는 마치 무영지처럼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는 어마어마한 영력이 뭉쳐있었다.

하지만 결계의 영력이 미치는 범위는 정확히 문으로부터 3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문을 중심으로 일정한 공터가 형성된 것도 누가 일부러 파놓은 것이 아니라, 결계가 만들어낸 진동으로 인해 소멸한 것이었다.

처음엔 문 근처뿐이었겠지만, 아마 흙이 소멸하며 지반 일부가 무너져 공간이 확장된 것일 터였다.

"이런 비슷한걸 본 거 같은데?"

나는 그 모습에 예전에 플레이했던 특정 장소를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뽈뽈뽈-

점점 속도를 빨리하며 머리 위를 돌아다니는 거미 때문에 집중이 깨졌고, 웃음이 나와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잊은 게 아니라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잠시 후, 3등 거미에게 2등 거미가 받아 간 것만 한 크기의 특식을 건네자, 거미는 특식을 거미줄로 홀라당 감싸며 만족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3등 거미를 시작으로 하나둘 손가락으로 이동해 사라져버렸다.

마치, 구경은 끝났으니 각자 볼일을 보겠다는 듯이.

+++

결계에서 은은하게 퍼져나온 푸른 빛으로 인해,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토굴 안.

나는 자리를 깔고 앉아 본격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뒤졌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아!!"

다양한 고대용의 유적 중, 어느 장소가 떠올랐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아무런 보물도 재화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기인한 힘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힘의 이름은,

'그래, 초월공진력!'

초월공진력(超越共振力).

그것은 대공진의 시발점이었다.

자신의 영력을 진동으로 다룰 수 있는 대공진 공법은 초월공진력이라는 고대용의 능력에서 출발했다.

원래는 공법이 아니라 용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 즉 혈맥으로 전해지는 피의 무게, 특성이었다.

공격적인 성격이 강한 대공진과 달리, 공방을 두루 갖추고, 진법과 결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만능 능력.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익힌 대적점보다 활용 용도가 뛰어난 힘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초월공진력에는 대공진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한 가지 신비가 존재했다.

바로, 진공(眞空).

시전자의 의지력을 소모하는 대신 힘을 사용하는 동안 일정 공간을 진공 상태로 만들 수가 있었다.

진공 능력은 여러 곳에 적용할 수 있었는데, 지금 눈앞의 결계처럼 아무런 기운이 새어 나오지 않게 차단하는 것도 가능했다.

만약, 이곳이 고대용의 유적이고, 눈앞의 결계가 초월공진력으로 만들어진 게 맞다면,

결계 위로 일정 부분이 진공 상태로 변해, 무영기(無靈氣) 상태란 뜻이다.

나는 한동안 결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진짜 고대용의 유적이면 대박이긴 한데..."

유적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든, 그 가치는 재화로 환산할 수 없었다.

특히나 용족에게는 더더욱.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푸른 결계가 고대용의 유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생각은 금파월에게 이어졌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곳일진대, 엄한 타 대륙을 뒤지고 다니는 게 공교롭다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내며 앉아있었을까?

나는 아쉬움을 남긴 상태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적 탐사?

물론 당장이라도 들어갈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정확히는 유적에 진입할 방법을 실현할 수 있는 재료가 없었다.

초월공진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통과하려면 나 역시 진동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대공진을 익히든, 공진석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물론 초월공진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라는 가정이 맞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당장은 욕심을 버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나는 토굴 밖으로 향했다.

+++

토굴에서 빠져나온 나는 거미를 따라 길게 파놓았던 굴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공들여 다듬은 후, 근처를 훼손해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진법 같은 걸 설치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건 신호나 다름없지.'

대신 포식 후 잠자고 있을 거미들을 불렀다.

뽈뽈뽈-

아직 가매초 특식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건지, 걸음이 무거워 보이는 거미들. 

하지만 일할 시간엔 일해야 하는 법.

나는 거미들에게 지시해, 갱도 끝부터 시작해 수십 미터를 거미줄로 뒤덮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누가 이곳을 발견한다면 거미 괴수가 터를 잡은 거라 오해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쓸모없는 폐광이니 오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만사 불여튼튼이라 하지 않던가?

혹시나 누군가 이곳을 발견한다면 귀찮음에 피해가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만에 하나 거미줄을 제거하며 안으로 들어와도, 그 과정에서 벽면이 훼손되니 내가 다듬은 토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말이다.

"돌아와."

한참 후, 수십 미터의 거미줄 통로가 완성되자, 나는 거미들을 불러들인 후, 2등 거미가 발견한 장소로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간단한 진법으로 먼지가 유입되지 않게 공간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무영지 대지에 앉아, 전여풍이 준 주조법이 적힌 옥간을 이마로 가져갔다.

"이걸 완벽하게 익히는 게 먼전가?"

명혼주 주조는 저과주를 비롯한 다른 선주와 달랐다.

레시피와 주조 과정을 훤히 꿰고 있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조 방식이 음률을 타듯 일정한 공식으로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해야만 했다.

게임 안에선 리듬 게임 형식의 미니게임으로 그 음률을 익혔지만, 그것을 이곳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괜히 만용을 부리다가 재료만 날릴 수 있지.'

대신 제대로 된 주조법을 익히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에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뇌리로 직접 전해진다. 현실 세계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확실히 한번 익힌 거라 더 쉬운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은 불필요한 과한 설정이라고 스킵해버렸던 과정들.

나는 제조나 주조를 할 때는 물론이고, 공법을 익힐 때도, 모든 과정을 공략하듯 파고들었었다.

술식을 그려내는 미니게임도 대충 보아 넘기지 않고, 일일이 스캔해서 저장했다.

게임에 몰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플레이에 도움이 되는 여러 공략을 얻을 수 있어서였다.

실제로 마지막 플레이에서 죽기 전 얻었던 '천공의 창' 역시 공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던 것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함정이었지만 말이다.

'딴생각 말고 집중하자.'

잠시 후, 명혼주 주조 방식을 완벽히 체득했다고 여긴 나는 재료를 꺼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오동에게 빌린 도구를 꺼내 전면에 놓아둔 후, 긴 호흡의 시간을 가졌다.

'가자.'

호흡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천공의 창을 생각하느라 살짝 들끓었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모든 욕심을 지워냈다.

명혼주를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는 생각도 가져선 안 된다.

무영지를 찾아 성공확률을 높인 걸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 것이나 마찬가지.

지금은 요령과 실력보다 운에 모든 걸 맡기는 시간이었다.

"합!"

그렇다고 대충하진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정성을 들인다.

화르륵-

어느새 주탕기를 비롯한 수십 가지 재료들이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듯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내 손짓에 박자를 맞추듯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것은 주조라기보다는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노래였고, 그들을 달래는 장송곡이었다.

"합!!"

초집중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사방이 막힌 석실 안.

칠흑처럼 어두운 그곳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고 싶어!!"

결국 전여희는 수련을 중단하고, 석실을 몰래 빠져나왔다.

한 번만 더 외출을 시도하다 걸리면 크게 혼날 거라는 소릴 들었지만,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작고 귀여운 꼬물거리는 그것을 보고 만지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귀여운 생명체의 사연까지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근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없는 지금이 기회야!"

며칠 전 중요한 일로 자리를 비운 전여풍.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전여희는 예사롭지 않게 생긴 조각배를 꺼내더니, 바람처럼 하늘을 갈랐다.

십여 일 후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금파란의 거처를 방문했다.

"없어?"

하지만 그곳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

어디에서도 목표로 한 꼬물꼬물 생명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1차 예상지에서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하자, 풍광을 찾아갔다.

풍광은 풍초신과 함께 있었는데, 전여희를 보자마자 두 팔을 펼쳐 보이며 반겼다.

"희야! 정말 오랜만이다. 너와 수다를 안 하니 입안에 가시..."

"오라비! 혹시 란 오라비가 어디 있는 줄 알아?"

"란? 금파란?"

"응!"

전여희의 질문에 풍광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렸다.

"금파란은 왜? 몇 달 전에 만났는데."

풍초신의 말에 전여희의 고개가 번개처럼 돌아간다.

"언제?! 어디서! 초신 아저씨는 란 오라비가 어디 있는 줄 알아?"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전여희의 말에 풍초신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어? 정확히는 모르는데, 나를 찾아와서 폐광 위치를 물어보긴 했어."

"폐광?"

"늪지대 너머에 영석 광산 있잖아. 오래전에 버려진."

"아!"

"왜? 무슨 일..."

무언가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풍초신은 걱정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여희는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인데...거참. 빠르네. 부럽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가는 전여희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말도 안 되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사용하는 비행 법기만 봐도, 직접 돈을 벌어 사려면 수백 년이 걸릴지 모를 그런 물건이었다.

부러움에 떠나간 전여희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풍초신은 조금 전 느꼈던 이상함의 이유를 깨닫고,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하아... 근데 왜 나만 아저씨야..."

+++

정확히 몇 날이 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조를 시작하고 꽤 시간이 흘렀다.

대략 석달은 넘은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워낙 주조에 집중하기도 했고, 무영지로 인해 내부의 생체시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재능이 있는 건가?"

주조를 마친 나는 손에 들린 두 병의 자기병을 내려다보며, 전여풍의 말을 떠올렸다.

-수행을 제외하고라도 그 정도면 재능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만 해도, 그저 인사치레 느낌의 칭찬이라 여겼는데, 두 병의 명혼주를 주조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변했다.

"그러고 보니, 단약 제조율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었는데..."

그 순간 떠오른 것은 혹시나 네 번째 특성이 제조, 제작에 관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 말자! 생각 말아. 말이 씨가 되는 법이지. 네 번째 특성은 약자멸시다. 무조건 약자멸시!"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 약자멸시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잠시 후, 손에 들린 연푸른 기운에 감싸여 요사스러운 빛을 띠는 자기병을, 한 병은 공간대에 나머지 한 병은 공간팔찌에 넣었다.

그런 후, 주변을 완벽히 정리하고 갱도 밖으로 향했다.

"어? 저건?"

밖으로 나온 후 눈 부신 햇살 사이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다가오는 비행법기에서 도저히 모를 수 없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라비!!"

비행법기는 순식간에 폐광 입구까지 도착했고, 도착과 동시에 소녀를 뱉어냈다.

"여긴 웬일이야? 수련은?"

새끼 갈락취를 보러 오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기에 살짝 놀랐다.

하지만 평소 전여희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당연히 도망쳤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보여줘 빨리 보여줘!"

전여희의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애를 키우다 보면 어느 날부터 강아지를 사달라고 조른다더니, 딱 그 상황을 직면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알았어."

나는 발을 동동굴리는 전여희의 반응에 품속에서 자고있는 새끼 갈락취를 꺼내줬다.

처음과 다르게 살짝 성장해, 네발 달린 동물의 형태를 갖춰가는 새끼.

외형이 살짝 변했음에도 새끼 갈락취를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받아 간 전여희는, 새끼가 솜사탕이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녀석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뚫어지게 살폈다.

"귀여워..."

'성체가 된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하긴 도감을 통해 갈락취가 무엇인지 알 테니, 성체의 모습 따위는 지금의 감정에 아무 영향이 없는듯했다.

그렇게 감상의 시간이 이어지던 순간.

나는 그녀가 걱정돼 질문을 던졌다.

"헌데, 이렇게 여길 오면 어르신께 혼나지 않겠어? 그것보다 도대체 어떻게 도망쳐 나온 거야?"

걱정도 걱정이지만, 진심으로 궁금했다.

일전에 본 그는 전여희를 절대 밖으로 보내지 않을 기세였다.

내 질문에 전여희가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헤헤, 할아버지는 몰라."

모를 수가 있다고? 어떻게?

이어지는 전여희의 말에 답이 있었다.

"지금 아버, 족장님 부탁으로 축도에 가셨거든."

"축도?"

축도(築島)는 대륙 중앙에 위치한 연합도시의 다른 이름이었다.

"응! 친우분 만난다고 가셨어. 일전에 얘기한 그분."

그분이라면 전여풍의 부탁으로 호명의 석판 충전 순서를 양보한 사람.

"아! 그때 양보받은 걸 보답하러 가신 건가?"

나는 예전 대화를 떠올리며 반쯤은 혼잣말로 되물었다.

하지만, 다음에 들린 말에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응? 아닌데? 아! 맞다! 오라비가 들으면 좋아할 소식인데, 깜빡했네."

"??"

내가 좋아할 소식?

"그 나쁜 사람 있잖아? 오라비들이 탑에 오르지 못하게 만든 사람. 그 사람을 잡기 위해 할아버지가 움직이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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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보상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전여풍이 직접 움직이다니?

세상일과 담쌓은 이가 움직인다는 건 나를 찾기 위한 일이 급 물살을 타고 있단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응? 아! 어떻게 그 사람을 찾냐고?"

곧이어 이어진 전여희의 설명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나는 금파월과 달리 아무런 흔적도 없이 호명의 석판만 파괴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주변을 훼손시켜서 나의 흔적을 강제로 지워버렸었다.

다만 그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내 수법의 일부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 결과 족장은 범인이 같은 동족이라 유추했고, 분노했다. 그리고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범인을 빠르게 특정할 수 없자, 전여풍까지 나서게 된 것이었다.

전여풍의 오래된 친우.

핵심은 그였다.

그에겐 대지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고, 그가 시련의 탑을 방문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땅과 연결된 모든 것의 기억을 읽으실 수 있으시대."

중추 시설 내부는 공진석의 폭발로 인해, 많은 정보를 획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3층 통로의 기억을 온전히 읽어낸다면, 내가 중추 시설 안으로 들어간 걸 들킬 수밖에 없는 상황.

나는 머리가 복잡해져, 말을 잇지 못했다.

전여풍의 친우란 자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줄은 모르나, 오늘 당장 방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전여희가 고개를 들어, 내 가슴 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애도 보여줘."

"응?"

"할아버지가 말해줬어.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라고."

"...어. 그래. 보여줄게."

'역시 눈치채고 있었구나.'

당장 내놔! 라는 눈빛을 받으며 품속에서 나머지 새끼 갈락취도 꺼냈다.

그것을 보고, 전여희의 얼굴은 좀 전보다 더 행복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무 귀여워..."

하지만 좀 전과 달리,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 편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때, 내 심란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전여희가 엉뚱한 얘기를 꺼낸다.

"오라비는 이 애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줄 알아?"

내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닌지. 혼자 질문하고 답한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주 오래전엔 나도 할머니가 있었대."

'그랬겠지.'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할머니와 오랫동안 함께했던 영수가 이 애들의 부모일 수도 있대."

전여희의 할머니가 갈락취를 종속으로 만들어 함께했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그녀는 성체가 돼버린 갈락취를 힘겹게 종속으로 만들었지만 완벽하지 않았다고 한다.

갈락취의 영성이 너무 뛰어나, 절반 짜리 종속을 맺는 거로 그쳤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녀의 죽음 이후 갈락취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전여풍은 그 이유를 종속의 인이 풀려 자유를 찾아 떠났기 때문이라 여기고 찾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의 죽음으로 여력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전여풍의 아내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이, 내가 새끼 갈락취를 얻은 그곳이란 설명도 이어졌다.

'설마... 그래서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 건가?'

어쩌면 고향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절반 짜리 종속의 인이 여전히 남아 돌아온 걸 수도 있었다.

전여희의 설명이 끝나자, 갈락취를 만나며 느꼈던 몇 가지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용족에 대해 알고 있던 것, 그곳을 찾은 이유. 그리고 유난히 힘이 없는 모습도.

'그래서 그때 그런 표정을 지은 거구나.'

새끼 갈락취를 본 전여풍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장소를 듣자마자, 추억을 떠올린 것이다. 잊지 못한 반려에 대한 추억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만 전여희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나는 어떤 공감도 해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귀로는 그녀의 얘길 들으며,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라비? 표정이 왜 그래?"

결국 수없이 이어지던 고민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며 수단을 강구하다가. 입을 열었다.

"희야. 그럼 어르신께서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

"응? 한번 가시면 열다섯 날은 지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열다섯 날이라..."

"그건 왜?"

그녀에게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별일 아니란 듯 억지웃음을 보였다.

"왜긴, 어르신께서 부탁하신 일 때문에 그러지"

그때였다.

팟-

하늘에서 섬광이 떨어지듯 무언가 번쩍이는 느낌과 함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설마, 주조에 성공한 것이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건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전여풍이 가까운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어르신을 뵙습니다."

전여풍의 등장에 나는 급히 예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허례허식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휙 저어 내가 몸을 수그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내 앞으로 바짝 날아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조에 성공했느냔 말이다."

얼굴에 홍조가 보이는 걸 보면 기대하지 않은 일에서 뜻밖의 행운을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전여풍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당장이라도 나타나, '저놈이다!'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에 심장이 쿵쾅댔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운이 좋아 주조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다만?"

"어르신께서 만족할만한 수준인지는 확답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보여라."

내 공간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전여풍의 모습에, 재빨리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공간대를 스치며 연푸른 기운에 감싸인 자기병을 꺼내 내밀었다.

"명혼주!"

전여풍은 내게서 자기병을 건네받더니 마개를 열지도 않고 입구에 코를 가져다 댔다.

그러면서 깊은 호흡으로 명혼주의 기운을 느끼더니, 말을 잃었다.

그러길 잠시.

얼굴에 대만족의 미소가 떠오르며,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오동의 말을 듣길 잘했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칭찬을 늘어놨다.

"아닙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마음에 들다마다! 이 정도면 상품 이상이다. 아주 오래전 가까이서 사용하던 걸 본 적이 있다. 그것보다 뛰어나다.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

"금파란."

"예,"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하거라. 내가 가진 물건, 아니다. 그럴 게 아니지. 나를 따라오거라. 이미 주기로 한 것이 있으니 그 계산부터 끝내고 다시 얘길 나누는 게 순리지. 그리고 희!"

딸국-

환한 미소로 나를 보던 전여풍이 순간 정색하며 전여희를 노려본다.

그녀는 두 마리 새끼를 품에 안은 자세 그대로 바짝 얼어붙어 눈치만 보았다.

"하, 할아버지...그게요..."

"분명 내가 말했던걸 기억하겠지? 한 번만 더 걸리면 처소에서도 나오지 못 하게 하겠다고 한 말을!"

"히잉... 할아버지..."

"너도 따라오너라."

잠시 후, 전여풍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카약처럼 생긴 길쭉한 배가 나타났다.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한 형태였는데, 길이가 십여 미터 정도. 멀리서 본다면 이쑤시개처럼 보였다. 

평범한 비행 법기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타거라."

길쭉한 배 위로 올라탄 전여풍의 손짓에 나와 전여희는 그 뒤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푸른 기운이 우릴 감싸는 게 느껴졌고,

콰아앙!!

바람이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이쑤시개가 허공을 갈랐다.

속도로 보아 폐광에서 용수산맥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큰일이라 해야 하나.'

용수산맥으로 향하는 도중.

좁은 곳에 함께 있는 게 어색했는지, 전여풍이 연합도시를 방문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자세히 본다면, 손녀를 한번 혼낸 다음에 관계를 풀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다.

'석 달이라고?'

친우를 방문한 전여풍은 그를 만났지만 함께 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때마침 오매불망 구하던 물건의 소식을 듣게 된 전여풍의 친우가 대륙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물건만 구하면 바로 이곳에 방문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기간이 석 달 정도 걸릴 거라 말했다고 한다.

"그사이에 도망가면 어떡해요?"

정색하며 화를 내는 전여풍의 모습에 쫄아있던 전여희는 대화가 이어지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마 화를 내는 전여풍이나 애교로 무마하는 전여희나, 한두 번 겪은 상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도망을 가든 말든 그게 무어 중요할까. 황 그 녀석이 내게까지 부탁한 걸 보면, 범인 색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유와 목적을 밝히려는 것이겠지."

"이유와 목적이요?"

"네가 알기엔 아직 어려운 얘기니 알 필요 없다."

'저들은 폭파에 배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구나.'

어차피 정체가 밝혀지면 범인을 잡는 건 수배를 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유.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자 친우를 초청한 것이었다.

전여풍의 얘기를 들어보니, 친우가 오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내 정체가 드러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족장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무리해서 앞당긴 것이고 말이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기에, 나는 묵묵히 두 조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전여풍은 원래 그런 것인지, 자신이 겪은 사소한 얘깃거리도 전여희에게 전해주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거처에서 수련만 하는 전여희가 어떻게 소식에 밝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우리는 전여풍의 거처에 도착했다.

+++

"희, 너는 다시 돌아가거라"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전여풍은 전여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거처가 위치한 봉우리를 위해 움직이려 했다. 내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서.

하지만.

"희야, 그 아이들은 주고 가야지."

내 부름에, 빠르게 움직이던 그녀가 움찔하며, 장난스럽게 돌아 웃는다.

"헤에. 들켰네?"

그리고는 헤어지는 이산가족처럼 슬픈 눈으로 두 새끼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내게 넘겼다.

곧이어 이른 시일 내에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비행법기에 올라타 사라졌다.

잠시 후, 둘만 남게 되자 전여풍이 내게 말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면서.

"따라오거라. 우선 이걸 받고."

휙-

어느새 그의 손에 나타난 공진석이 내게 날아온다. 나는 그것을 공간대에 넣고, 전여풍의 뒤를 따랐다.

몇 걸음 걸어 전여풍이 향한 곳은 초가집 옆, 작은 건물이었다.

일반 가정집이었다면 부엌 역할을 할 것같이 생긴 그곳은 가까이 다가가니 매우 희미한 빛을 띠는 동아줄이 건물 전체에 둘려 있었다.

'구속용 법기.'

동아줄의 정체는 법기였다.

모르는 사람이 건물 가까이 접근하면, 동아줄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상대를 구속해버린다.

살상력은 없지만, 전여풍보다 수행이 낮은 자는 절대 스스로 동아줄을 풀 수 없을 터였다.

잠시 후, 전여풍이 가볍게 손을 젓자, 동아줄이 상공으로 올라가며 문을 열 수 있게 해주었다.

끼익-

직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보물 창고였구나.'

겉에서 보았을 땐 6평도 돼 보이지 않던 건물이, 안의 넓이는 백 평도 됨직해 보였다.

공간대처럼 공간 진법이 적용돼 지어진 건물.

전여풍은 입구에서 조금 더 걸어 안쪽으로 가더니, 한 손을 펼치며 말했다.

"아까 말했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라고. 생각해보니, 너 자신도 뭘 원하고 있을지 모를 것 같더구나. 그래서 데려왔다. 자.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거라. 무엇이든 하나를 줄 테니."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는 예상외의 소득에 감격한 사람처럼 감사함을 표했다. 실제로 놀라기도 했고 말이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말고."

내 행동에 전여풍은 입가를 올린 채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건물 밖으로 향했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

전여풍이 사라지고 혼자가 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빛은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였지만, 시야가 방해되진 않았다.

'역시, 고위수사는 고위수사.'

눈짐작으론 정확히 몇 개의 보물들이 있는 것인지 가늠되지 않는다.

벽면에 빙 둘러 진열장이 있었고, 가장 위쪽엔 법기들이, 아래로는 각종 재료가 즐비했다.

법기들은 하나같이 최소한 상급 이상의 물건들이었고, 최상급 법기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벽이 아닌 중앙에도 탁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돼 있었고, 그 위에도 각종 재료와 도구가 한가득하였다.

'하지만 진짜는 아니란 건가?'

다만 아쉬운 건 어딜 둘러봐도 옥간이나 서책 종류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전여풍은 대단한 인심을 쓴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중요한 것들은 공간대에 담아두고, 이곳은 쓰지 않는 것들만 진열해 놓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전여풍의 기준으로 눈에 차지 않은 것이지, 내 입장에선 전부 보물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동아줄로 침입자를 대비한 것만 봐도, 안의 물건들이 제법 가치가 있단 뜻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 설마 희 때문에 설치해 놓은 건가?'

나는 진열장을 쭉 둘러보면서, 기억 속의 물건들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하나씩 확인했다.

법기들은 한 번씩 영기를 불어넣어 보고, 재료들은 촉감과 질감을 파악했다.

그러길 한참.

'이게 여기에도 있었네. 잘됐다.'

물건 대부분을 한 차례씩 확인해본 나는 중앙 탁자에 올려진 주먹보다 큰 원석을 집어 들었다.

'이 정도 시간을 끌었으면 적당하겠지.'

물건을 선택한 나는 곧장 입구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보상에 넋 놓고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는 일.

당장 나를 옥죄는 수사망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은 오직 탈출에 모든 역량을 모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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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유적으로

밖으로 나오자, 전여풍이 의외란 듯 쳐다본다.

"벌써? 원하는 걸 빨리도 찾았나 보구... 그건 공진석이 아니냐?"

전여풍은 내 손에 쥐어진, 내가 선택한 원석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랬다.

내가 고른 건 공진석.

그것도 전여희에게 빌린 것이나, 전여풍에게 받은 것보다 월등히 크기가 큰 공진석이었다.

내가 공진석을 고른 이유?

그건 당장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곳에 진열된 최상급 법기들은 공진석보다 월등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당연히 그것들을 고르는 게 현명한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가치만 판단했을 때의 일.

여기서 법기를 고르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전여풍이 어떻게 전여희가 있는 곳을 알고 정확히 찾아올 수 있었을까? 그것도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그걸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본인 소유의 법기를 추적할 수 있는 전여풍만의 표식이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재료 중에서 보상을 골라야 했고, 나는 다음 행보를 고려해 공진석을 골랐다.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내가 준 것이 있거늘. 어째서 그걸 고른 것이냐?"

나는 그의 질문에 준비했던 답변을 꺼냈다.

"하나는 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훗날 제 수련을 위해 준비해두려는 것입니다."

"희와의 약속?"

처음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의 전여풍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잠시 후, 그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주먹만 한 공진석을 공간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할 일을 마치고 처소로 들어서려는 전여풍을 불러세웠다.

"어르신. 무례한 줄은 아오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

고개를 돌린 전여풍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몇 번을 고민했지만, 이 부탁은 하는 게 맞았다.

나는 말했다.

"마을까지 데려다주실 순 없으십니까?"

"..."

+++

전여풍의 친우가 당도하기까지 빠르면 석 달.

내가 용수산맥에서 마을까지 이동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한 달.

만약 한 달을 날린다면, 탈출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중간에 돌발 변수라도 생겨 이동시간이 더 길어진다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잡혀갈 수도 있는 일.

그래서 무리인 줄 알지만, 부탁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뭐라? 지금 나에게 너를 모셔다주란 말이더냐?"

"모시다니요. 아닙니다. 일을 보던 중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희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황이 없어 중요한 물건을 놓고 왔습니다. 혹, 잃어버릴까 봐..."

"어허... 황 그 녀석이 이 얘길 들었어야 하는데."

전여풍은 족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더니 비행 법기를 꺼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타거라. 그래. 내가 네 사정도 고려하지 않고 데려왔으니, 다시 데려다주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잠시 후, 비행 법기가 하늘을 갈랐다.

이번엔 더 빠른 속도였다.

+++

거처로 돌아온 나는 먼저 공간대에 넣어둔 물건들을 꺼냈다.

오동에게 받은 것들과 성인식이 끝나고 받은 물건들이었다.

바닥에 꺼낸 물건들에 추적이 가능한 기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만에 하나의 상황을 고려해 아까워도 버리는게 옳았다.

잠시 후, 물건을 정리한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내가 속한 부족의 영역 중에 찾고자 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너무 방대해... 이러단 끝이 없겠어."

하지만 지역에 관한 자료가 너무 많아, 아무리 찾아도 제한된 시간 안엔 원하는 정보를 얻긴 힘들 것 같았다.

임무를 받아 정식으로 전송진을 이용해 대륙을 떠나려던 게 원래 계획.

하지만 지금 수행에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고, 그중 가장 실현 가능성이 큰 것이 부족 간 경계 지점에 불특정하게 생기는 구멍을 이용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곳을 통해 빠져나간 후, 연합도시에 도착하면, 숨어 살며 대륙 탈출을 노리면 된다.

물론 대륙 간 전송진을 이용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기에, 연합도시에 도착한다고 다는 아니었다.

그 후로도 정말 쉽지 않은 일.

게다가 본격적인 수배령이 떨어지면, 얼굴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몸에서 풍기는 파동까지 억제해야 했다.

한 끗만 어긋나도, 나락이 펼쳐질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최선이었다.

"역시 이 방법으론 안 돼."

결국 도서관을 빠져나온 나는 풍초신에게 향했다.

그는 가매초 채집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풍초신."

"어? 금파란, 여긴 어쩐,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 아이가 널 찾던데. 만났어?"

'어떻게 나를 찾았나 했더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착석했다.

"그래, 희는 만났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또?"

항상 나에게 각종 요령을 배워가던 풍초신은 내 방문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뭔데?"

"혹시 이런 곳에 대해 알고 있어?"

나는 의기양양해진 풍초신에게 몇 가지 자연현상을 설명했다. 그러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입은 연다.

"네가 말한 곳이면... 서쪽 끝 개령산맥(開領山脈)을 말하는 거 같은데?"

"개령산맥?"

처음 듣는 정보를 재빨리 머릿속에 입력했다.

"응. 겸불 선배에게 들었으니 확실할 거야. 그런데 그곳은 왜? 개령산맥을 넘으면 다른 부족의 영역이라 허락 없이는 출입이 금지돼있을걸? 아마도?"

'찾았다.'

풍초신의 대답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만 그곳까지 가는 시간이 일년은 넘을 거라는 설명에 암담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겸불 선배가 그 정도니, 아마 우리 속도면 훨씬 더 걸릴걸?"

그곳에 도착한 후 구멍을 통해 부족 간의 경계 틈을 따라 이동하면 발각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일년이면 도착도 하기 전에 붙잡힐 가능성이 훨씬 컸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하나.'

풍초신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경계의 틈을 따라 도망치는 건 실현 확률이 낮음을 깨달아갔다.

"혼자 있는 게 아니었네? 어? 금파란이잖아?"

그때. 여전히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풍광이 다가왔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의미 없는 신변잡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의 말에 몇 번 맞장구를 쳐주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엉덩이를 떼려는 순간.

"근데 그 얘기 들었어? 자학 선배 얘기?"

"아! 겸불 선배님께 전해 들었지. 참 안되셨어. 이번에 처음으로 외부 임무를 맡으셨다는데. 그런 일이 생기셔서."

외부 임무라는 말에 떼려던 엉덩이를 꾹 눌렀다.

"무슨 일인데?"

수다에 관심 없어 보이던 내가 질문하자, 풍광의 얼굴이 밝아지며 입을 연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지..."

자학은 6단에 올라 처음으로 대륙 외부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외부 임무를 맡는다는 건 성인식 이후 또 한 번의 도약이었기에 모두에게 축하받을 만한 일.

하지만 그가 이끄는 무리 중 한 명이 심각한 부상으로 동행할 수 없게 되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돼버렸단 이야기였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자학이 딱히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평소였다면, 그냥 그런 일이 있구나 하고 넘어갔을 터.

하지만 나는 풍광의 설명에 이거다 싶었다.

'될 거 같은데?'

경계의 틈으로 어렵게 도망가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길이 보였다.

그랬기에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부상당한 사람이 성령꽃의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그래. 그래서 자학 선배가 실망이 크셔. 성령꽃의 특유한 냄새를 판별할 수 있는 자가 몇 없으니까."

성령꽃.

그것은 마치 사람이 기도하는 것처럼 오므린 채 평생을 보내다가, 딱 하루 꽃을 피우고 져버리는 꽃이었다.

사용하는 곳이 적어 수요가 많진 않았지만, 그만큼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기도 했다.

성령꽃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생지가 일정치 않다는 것.

한번 발견되면 한동안 그 주위에서 여러 개체가 발견되지만, 꽃이 지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식물이었다.

게다가 꽃이 피기 전까진 아무런 낌새도 찾을 수 없어, 숨은꽃이란 이명까지 존재했다.

몇몇 특별한 감각을 지닌 이들만 꽃이 피기 전 성령꽃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게 부상당한 사람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다, 별것 아니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어 그래? 나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정말?!"

풍초신과 풍광이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예전에 한 번 맡아본 적 있어. 상점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길래 선배님께 여쭤보니, 나보고 어떻게 알았냐고 하시더라고, 얼마 전에 입수한 성령초를 분류하고 있었다 하시면서."

"와... 부럽다."

"맞아. 부러워. 그럼 4단에만 올라도 대륙밖에 나갈 수 있는 것 아니야?"

6단에 오른 임무 할당자는 혼자 임무를 수행하는 게 기본이다.

내가 계획했던 것도 그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없는 특정 임무는 대원들을 모집해 단체로 행동할 수 있었다.

보통 4단부터 6단 사이에서 대원을 고르는데, 당연히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대부분 5단 6단인 자들을 골랐다.

나는 신기해하는 두 사람에게 냄새로 약초를 구분했던 몇 가지 사례를 더 들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가게?"

"금파란, 네가 이렇게 얘기를 재밌게 하는 줄 몰랐네. 앞으로 자주 만날래?"

아쉬워하는 풍초신과 이상한 얘길 하는 풍광.

나는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

6단에 오른 뒤 처음 외부 임무를 맡은 자는 그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는 게 중요하다.

만약 실패한다면, 한동안 외부 임무를 맡지 못하고, 한다고 하더라도 남을 돕는 임무에만 참가해야 하기 때문.

그러니 자학은 현재 애가 타는 중일 테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원들의 관리 역시 대장의 덕목 중 하나였으니까.

'미끼는 뿌렸으니까. 제발 물어주면 좋겠네.'

풍광은 4단에 올라야만 외부 임무에 배정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런 규칙은 없었다.

다만 부상을 비롯한 모든 책임이 대장에게 전가되기에 수행이 낮은 이를 데려가지 않는 것일 뿐.

'3단이니 쉽게 선택하진 못하겠지만. 아마 고민 하겠지. 최소한 한 번은 날 보러 올 테다.'

나는 자학이 나를 방문할 거라 여겼다.

풍광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반드시 그에게 얘길 전할 테니까.

전여희가 항상 풍광을 찾는 이유가, 그의 수다스러움 때문인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

미끼를 뿌리긴 했지만, 풍광이 미친놈도 아니고 바로 자학에게 달려갈 일은 없었다.

그러니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

그사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늪지대 쪽으로 비행 법기를 몰았다.

'유적 먼저 해결하자.'

내가 창고에서 공진석을 고른 이유는 혹시나 모를 전여풍의 추적을 염려해서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유적 때문.

만약 그곳이 정말 고대용의 유적이라면, 당장 보따리 싸 들고 도망쳐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조건 확인하는 게 옳았다.

앞으로 수도 생활을 이어가며 평생 만날 수 없는 행운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대 유적엔 아주 가끔 전송진이 발견되기도 한다.

만에 하나 그곳에 전송진이 있다?

그렇다면 자학을 따라갈 필요도 없는 일.

그러니 반드시 확인을 해야 했다.

+++

풍초신을 떠나온 나는 6일을 날아 폐광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갱도 끝으로 이동.

나에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는 거미줄을 통과해, 벽을 뚫고 다시 유적 앞에 당도했다.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으며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부디 초월공진력으로 만들어진 결계가 맞기를.'

나는 붉은 돌을 꺼내, 주변에 진법을 상세히 그렸다. 아기들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진법으로, 힘을 집약시키는 효과를 가진 진이었다.

그런 후, 영석 가루를 뿌려 진을 활성화하며,

휙-

창고에서 가져온 주먹만 한 공진석을 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투웅-

허공에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공진석은 일정 거리에 이르자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그 신호에 맞춰 활성화된 진법의 효과를 공진석에 집중하자.

부르르-

진동이 점점 거세지며 일대가 미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우우웅-

문 위로 덮여있던 푸른 결계가 점점 옅어지며 힘을 잃었다.

'된다! 역시 초월공진력으로 만들어진 거였구나!'

나는 그 모습에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예전엔 진동으로 나를 부수려 했던 기운이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더 다가가 문 앞에 서자.

슈욱-

마치 문이 나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강인한 인력을 느꼈고, 반항하지 않자 문으로 점점 끌려갔다.

그리고 한순간.

파앗-

시야가 반전되는 느낌과 함께, 처음 보는 장소로 이동 되어졌다.

"여긴?"

이동된 곳은 축구장만 한 넓이를 가진 거대한 공동 안.

어마어마한 크기의 원형 공동은 천장에서 새어 나오는 빛으로 인해 신비함을 조성했다.

나는 그 거대함에 놀라며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빛이 비치는 장소에 눈을 가져간 난 그 즉시 얼어붙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압도되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저, 저게...'

유적 안에 전송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적 안에 고대용이 남긴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그것은 상상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

'설마...?'

공동 중앙엔 수십 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생명체가 몸을 돌돌 말아 웅크린 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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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고대 용족의 흔적

'설마... 고대 용족?'

한동안 얼어붙은 채 공동 중앙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나는 금세 이상함을 눈치챘다.

'죽은 건가?'

만약 고대 용족이 맞다면 엄청난 영기 파동이 숨 쉬듯 느껴져야 정상. 하지만 공동 중앙에 웅크린 존재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 내 존재가 너무 미약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눈앞의 존재는 매우 이상했다. 생동감이 없다고나 할까.

기운은 둘째치고, 아무런 박동도 없었다.

'확인해보자.'

언제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조심스럽게 중앙으로 다가가며 고대 용족으로 의심되는 생명체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길 잠시.

"아!!"

가까이 다가가 거대한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고대 용족이 맞았다.

하지만 고대 용족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대 용족이 벗어 던진 허물, 즉 탈피하고 남은 껍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 용족은 야수화를 통해 거인족만큼 거대하게 변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수행을 올리며 여러 번 탈피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남아있는 흔적이 바로 그것, 수행을 올리고 난 후 남겨놓은 껍데기였다.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탈피의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허물에 불과할 뿐인데도 이정도 강도라니. 대단하다.'

고대 용족의 허물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했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잠시 후, 탈피체를 제외한 다른 것들이 있는지 공동 전체를 확인했다.

그리고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유적이 아니었구나."

허물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공동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송진도 없고,

다른 보물도 없었다.

심지어 흔하디흔한 진법의 흔적조차 없었다.

'어쩐지...'

다른 결계는 존재하지 않고, 초월공진력으로 만든 문 하나만 있길래, 소규모 유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소규모 유적조차 되지 못했고, 그저 탈피를 위해 마련한 장소일 뿐이었다.

'그래, 이것만 해도 행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이 대단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고대 용족의 탈피체, 

그것만으로도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보물인 건 맞았다.

특히나 용족에게는 정말 그 어떤 것보다 값어치 있는 물건이었다.

다른 종족이 고대 용족의 허물을 가져간다면, 뛰어난 법기나 신기를 만드는 재료로 소모하는데 그칠 뿐이다.

하지만 용족은 허물을 이용해 야수화를 수련할 수 있었다.

플레이를 통해 수련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 그 효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의 허물로도 신체 강도가 수십 년 정련해야 할 수준이 상승했다.

'이정도 크기면...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내 신체가 얼마나 강해질지.'

다만 이해되지 않는 건, 탈피체가 왜 이곳에 남아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탈피체의 강도를 보자면 고대 용족도 이것을 이용해 무구를 제작할 수 있었을 터였다.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수련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이곳에 남겨두었다?

그것도 흠결조차 없는 완벽한 상태 그대로?

의문이 들자 생각이 이어진다.

'설마? 이곳에 이것을 남겨둔 의도가 있는 건가?'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 플레이를 통해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헛소리로 치부될 정도로 가벼운 소문으로조차 듣지 못한 상황.

처음 탈피체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든 생각은 야수화 수련에 이용해, 신체 강도를 한없이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점점 변해갔다.

왠지 다른 쓰임이 있을 것만 같았다.

+++

이곳이 그저 탈피를 위한 장소였음을 안 이상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는 일.

나는 허물만 챙겨 나갈 생각에 고대 용족의 얼굴 근처로 다가갔다.

처음엔 공간팔찌에 담기 전에 조각조각 분리하려고 했다.

옮기려면 그것이 당연했고,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게눈감추듯 사라진 지 오래.

만약 고대 용족이 이것을 남긴 의도가 있다면,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채로 연구하는 게 옳았다.

다만 탈피체는 공간 저장 법기에 담기엔 너무나 거대해,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되려나?"

나는 문신을 팔찌 원형으로 변환하며, 고대 용족의 얼굴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우선 시도는 해봐야지.'

혹시나 돌발변수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나는 손목으로 영력을 움직였다.

'과연 이 거대한 걸 한 번에 담... 아지네.'

쇽-

그러자 내 걱정이 무색하게 거대한 고대 용족의 탈피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팔찌 안을 확인해보니, 한쪽에 고고한 모습 그대로 자리한 허물이 느껴진다.

"..."

나는 새삼 신기의 위대함에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어?"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조금 떨어진 곳에 무언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찢어진 가오리연처럼 생겼는데, 뼈가 앙상한 것이 무언가의 날개를 떠올리게 했다.

빠르게 다가가 확인하자, 정말 날개가 맞았다.

그것도 보통 물건이 아니란 듯, 앙상한 모습과 달리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허물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떨어진 법기?

"아! 설마!"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한번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지만, 어느 종족 도서관에서 읽었던 내용. 탈피 과정을 거치는 종족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탈피를 거듭할수록 수행이 올라가는데,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린다.

불필요한 것 중에는 오랜 세월 체화를 거치며 손발이나 다름없던 법기도 포함이었다.

"그 이유가 영성 때문이었던가?"

일정 수행 이상 올라가면 장비도 영성이 생긴다.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는 그런 수준의 영성은 아니지만, 사용자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 최적화되는 수준을 일컬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 체화 과정을 거친다 해도, 모든 물건이 영성을 가지는 건 아니었고, 그렇게 영성을 가지지 못한 장비들이 탈락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즉, 사용자에게 버려진단 뜻이었다.

그렇게 탈락시켜버리는 것이 손해는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종족의 관점.

탈피를 거치는 종족은 그것을 부산물이 아닌 불순물이라 여겼다.

즉, 성장 과정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단 뜻이었다.

그것의 성능의 고하를 따지기 전에, 다만 그렇게 여길 뿐이었다.

'성장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지느냐의 차이지, 옳고 그르냐를 판단할 순 없지.'

나는 손을 뻗어 앙상한 날개를 가져왔다.

고대 용족에겐 배설물이지만, 나에겐 찬란한 보물.

날개는 내 손에 들어오자마자 손바닥만 하게 변하며 은은하게 과시하던 기운이 전부 사라졌다.

"최소한 최상급 이상이다."

아니, 어쩌면 신기급일수도 있었다.

제대로 된 성능은 체화를 통해 그 능력을 사용해봐야 할 테지만, 안에 죽은 듯 깃들어있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낱 영성이 부족하다고 버려지기엔 너무 대단해 보였다.

"어어?"

그 순간 날개가 스스로 움직이려 꿈틀거렸다.

퍼덕-

나는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놓아버릴 뻔했지만, 재빨리 콱 움켜쥐며 날개가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주었다.

그러자, 몇 번 몸부림치던 날개가 다시 얌전히 대기한다.

이런 현상은 분명.

"영성? 설마, 탈피 후에 뒤늦게 영성을 가지게 된 건가?"

사람의 성장 속도가 다르듯, 법기도 마찬가지였다. 흔하지 않은 경우긴 했지만, 탈피 후 허물에 남은 영력을 흡수하며 뒤늦게 영성이 생길 수도 있는 일.

나는 깨달았다.

금파월이 전해준 공간팔찌만큼이나 대단한 물건을 얻게 되었단 걸.

허물뿐 아니라 그에 준하는 혹은 그보다 가치 있을지 모를 물건을 손에 넣게 되었단 것을 말이다.

+++

허물과 날개를 챙긴 후, 혹시나 놓친 게 있나, 다시 한번 공동 전체를 뒤졌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 저게 남았네?"

그러다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비행법기에 올라,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고가의 발광석.

발광석 역시 사용처가 많았기에 깔끔히 채굴했다.

잠시 후,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동을 한차례 둘러본 나는 공진석으로 인해 여전히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채 열 걸음도 걷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뭐지?"

공동을 떠나려고 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수도자에게 감이라는 건 때론 천기와 맞닿는 것.

나는 그저 감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한번 공동을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조금 전 느꼈던 그 이상한 감각도 씻은 듯이 사라진 후였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두 가지 보물을 얻은 마음에 혹시나 무언가가 더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 때문인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욕심을 털어버리고 입구를 향해 걸었다.

핑-

하지만 또 한 번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같은 장소에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는걸.

그 즉시 나는 청안을 발동했다.

화아악-

그러자,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희미한 흔적들이 공동 전체에 새겨져 있는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새김이 아니었고, 파동이 남긴 흔적.

흔히 수련 공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국 같은 것이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그런 이상한 느낌을 받은 거라고?'

파동의 흔적이 이곳에 있는 건 당연했다.

'저것 때문은 아닐 텐데. 도대체 뭐지?'

나는 지금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 있는지 찾기 위해, 파동의 흔적을 살피며 천천히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던 찰나.

"!!"

고대 용족이 누워 있던 머리 부분에 도달한 순간.

등줄기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전율에 움찔하고 말았다.

동시에 고대 용족의 얼굴이 향하고 있던 벽면을 바라본 순간.

화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섬광이 이마를 뚫고 박혀 들었다.

털썩-

곧이어 차가운 공동의 바닥을 느껴야만 했다.

+++

하얀 섬광으로 인해 암전되었던 시야가 회복되자, 나는 이상한 호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호수는 너무 넓어 그 끝을 알 수가 없었고, 물은 너무 투명하고 맑았다.

물속을 바라보니 물고기 한 마리 없는 순결함만이 전해졌다.

꿈인가 싶었지만, 내 감정을 느낀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순결함이라고? 호수를 보고 그런 느낌이 든다고? 이건 호수가 아니다.'

그랬다.

발아래 펼쳐진 호수는 진짜 호수가 아니었다.

'거짓 불능.'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자세히 보니 확실히 체감된다.

발아래 펼쳐진 호수는 내면의 샘에서 보았던 거짓불능 특성을 나타내는 환영이었다.

다만 그 크기가 예전과 비교해 너무 거대해,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쿠우웅-

그리고 거짓불능을 인식한 순간, 등 뒤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훽-

뒤돌아보니 거대한 산과 함께 뇌전을 두른 거대한 용이 보인다.

용의 모습은 너무 희미했지만, 그것에서 전해지는 고양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의 위엄.

'역시, 내면으로 들어온 거구나!'

나는 시련의 탑에서 겪었던 체험을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때 멀리서 하얀 섬광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저건, 조금 전!'

나는 피할 수도 피하지도 못한단 걸 직감하고 가만히 그것을 응시했다.

찰나가 흐르고,

퍽-

속도를 줄이지 않은 하얀 섬광이 이마를 파고들었다.

'윽!'

그것은 분명 공동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마주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섬광에 적중된 후, 내 몸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이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끓어오르듯 달아오르는 힘은 고통과 함께 지독한 열감을 전달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강해져 가는 기운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결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크아아악!'

파앙-

그 순간, 나를 중심으로 파동이 퍼져나가며 호수표면 위로 집채만 한 너울이 생겨난다.

하지만 집채만 하게 일어난 너울은 순식간에 부서지며 물방울로 터져나갔고, 물방울은 더욱 잘게 쪼개져 안개처럼 흩어졌다.

한차례 힘을 터트려서인가?

나는 몸을 짓누르던 고통이 줄어듦과 동시에 안개처럼 흩어진 물방울을 보며 한 가지를 감각적으로 느꼈다.

'진동!'

아니나 다를까, 

또 한 번 영력을 퍼트리자, 호수의 물방울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격렬히 흔들려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진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초월공진력이다!'

혈맥을 통해 전해지는 고대 용족 고유의 능력을 방금 직접 펼쳐 보였다는 걸 말이다.

그때, 

하늘 위에서 어마어마한 압력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으으...'

당장 호떡처럼 납작하게 눌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압력.

나는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위에 무엇이 있길래.'

초월공진력을 체험한 기쁨에 젖어있을 틈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압력이 나를 압사하려 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고, 그런 하늘 중심엔 기다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계속되는 압력은 내 고개를 짓누르며, 마치 나에게 굴복을 명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저항하며 간신히 신체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버텨내기에만 집중했다.

동시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내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 하지만 실제론 몇 초에 불과한 그때.

스르르르-

내 시선에 닿은 하늘은 마치 그 의지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 중심에 새겨진 기다란 자국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노란 무언가가 비친다.

!!!

나는 그 현상에 온몸에 비늘이 돋아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처음엔 고대 용족의 공동이고, 그곳에서 이상한 섬광에 직격 되며 지금에 이르렀기에, 그들의 의식이 나를 짓누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겼다.

하지만 이곳이 내면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만에 하나 지금 내가 특성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하늘에 드리운 압력과 공간이 점차 벌어지는 그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약자멸시?'

그 순간,

내가 그것을 인식한 순간.

번쩍- 

하늘의 갈라짐이 급격하게 벌어지며 그곳에 샛노란 눈동자가 나타났다.

눈동자는 마치 세상의 모든 걸 벌레 보듯, 오만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발밑의 호수는 피처럼 붉게 변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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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