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30화. 안녕

"허어억!"

갑작스레 숨이 들이켜진다.

챠악-챡-

샛노란 눈동자에 압도당하는 감각과 함께 저절로 눈이 떠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미들을 불러 거미줄로 나를 칭칭 감았다.

그런 후에야 겨우 인식을 되찾고 주변을 확인했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허물이 있던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마치 고대 용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말 내면으로 들어갔던 건가?"

생생한 감각에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감각은 분명 내면에 진입했다고 말해주고 있으나,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는 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면을 확인했다고 하기엔, 거인의 발걸음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설마 꿈인가?"

나는 조금 전 경험했던 것들이 환영은 아닐까? 내가 환영술에 당한 건 아닐까 의심했다.

다행히 이마는 깨끗, 상처를 입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흘러나온다.

'이건?'

좀전의 기억이 환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려는 듯, 생소한 기억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니, 채워진다기보다는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내가 확인하게 될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초월공진력..."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손을 뻗어 천천히 영력을 움직였다.

휘이잉-

그러나 손바닥 위로 하얀 구체가 형성되며 주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구슬에서 전해진 파동에 대기가 물결치듯 움직인다.

"정말 초월공진력을 얻었구나."

호수 위에서 경험한 것처럼 대단한 힘은 아니고, 겨우 진동을 일으킬 수 있는 약하디약한 힘이었지만, 초월공진력이 분명했다.

고대 용족이 혈맥으로 계승하는 타고난 능력.

"그럼 그 섬광이 나를 내면으로 이끈 건가?"

얼떨떨한 마음에 다시 청안을 발동해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벽에 자국처럼 남아있던 파동의 흔적이 씻은 듯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 흔적들이 한점으로 모여 내 머릿속에 전부 들어온 것처럼.

그렇게 한동안 상황 파악에 애쓰던 나는 깨어나기 직전 보았던 눈동자로 생각이 모였다.

초월공진력을 얻었다면 내면을 경험한 것도 환영이 아닌 현실.

초월공진력을 얻게 된 것도 분명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떠올렸다.

"분명 그건 약자멸시였다."

본래 약자멸시가 나타날 때 보이는 현상과는 사뭇 달랐지만, 느낌만은 분명했다.

세상을 멸시하는듯한 샛노란 세로 동공.

'그 눈빛...'

지극한 오만함.

위엄을 갖추지 못한 생명체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시선.

찰나에 불과했고, 인식한 순간 깨어나 버렸지만, 바라고 바라왔던 것을 몰라볼 수 없었다.

다만, 약자멸시는 강제로 발동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고양감을 끌어올려 확인해보고 싶지만, 조건이 부합되지 않으면 발동 자체가 되질 않는다.

"믿자."

그러니, 깨기 전 보았던 그것이 약자멸시를 나타내는 내면의 환영이라 굳게 믿는 것 말고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나는 여전히 진동을 발산하는 문을 향해 움직였다.

"절반?"

밖으로 나오자 허공에 뜬 채, 반쯤 줄어든 공진석이 보인다.

공진석을 이용해 강제로 진동을 일으켰기에 소모가 되는 건 당연한 일.

다만 절반이나 줄어들 줄 생각지도 못했다.

"절반이면... 대략 다섯 날은 지난 건가."

하얀 섬광에 맞아 잠시 기절하고 깨어난 줄 알았더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향했고, 혹시 몰라 탈피 장소의 존재를 다시 은폐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가로질러 마을로 향했다.

+++

"잠깐"

마을 어귀. 경계에 들어서자 처음 보는 인물이 앞을 막아섰다.

수호대의 일원으로 보였다. 통상적으로 하는 통행 검사는 아닌 듯 평소처럼 통행패를 검사하진 않았다.

"자네가 금파란이지?"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설마 기절해 있는 시간 동안 전여풍의 친우가 계획을 변경해 방문한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안도감과 함께 쾌재를 불렀다.

"자학이 자넬 찾더군, 잠시만 기다리게."

수호대원은 품속에서 노란 부적 한 장을 꺼내 입에 대고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허공에 던지자, 부적이 물고기처럼 유영하듯 어디론가 날아갔다.

얼마 후, 멀리서 익숙한 얼굴과 함께 처음 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파란! 여기 자학 선배님이 널 찾으셨어!"

한 명은 수다쟁이 풍광이었고,

"자네가 금파란이군. 소문은 많이 들었네."

다른 한 명은 미끼를 문 자학이었다.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를 향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자학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말한다.

"여기 풍광에게 듣자니, 성령꽃의 냄새를 구분할 줄 안다고?"

"아... 그렇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기다리던 것이 왔나?

"자네의 그 능력을 잠시 빌려줄 수 있겠나? 내 섭섭지 않게 대우하겠네."

"혹, 대륙 밖으로 나가는 임무 때문이십니까?"

"눈치가 빠르군, 그렇네. 결원이 생겨 걱정이 깊었는데, 자네 소식을 듣게 되었지. 수행이 조금 걸리기는 하나, 자네는 내 옆에서 성령꽃만 찾아주면 되니 그리 큰 무리는 아닐걸세."

당장이라도 네! 라고 하고 싶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은 이상하게 비춰질 터.

나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 드리긴 죄송하나, 우선 오동 선, 어르신께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나는 분명 자유의사를 가진 성인이었지만, 생명의 샘을 지키는 기간은 오동의 개인 머슴이나 마찬가지.

급하다고 절차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가 괘씸하다고. '불가!'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물론이고 자학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자학은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당연히 어르신께 허락을 맡아야지. 함께 가세나. 내가 직접 찾아뵙고 부탁드리겠네."

"아닙니다. 오동 어르신이 맡긴 일을 아직 완수하지 못해, 바로 뵙진 못합니다.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 며칠을 못 기다리겠나. 기다림세. 내 거처는 여기 광이에게 물어보면 될걸세."

1차 난관은 통과. 

자학이 나를 임무 인원에 등록하고, 위에서 허락만 떨어지면 계획 성공이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나는 내심 마음이 가벼워졌다.

만에 하나 자학이 나를 찾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선배님. 혹 허락이 떨어지면 언제 떠나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상대에 따라 기분 나빠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다행히 자학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동 어르신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바로 등록 절차를 진행할걸세. 그럼 늦어도 사흘이면 출발할 수 있을 것이야."

"사흘...입니까?"

"왜? 혹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자학과 풍광을 떠나보낸 뒤 거처로 이동, 바로 매화주를 만들었다.

그런 후 오동을 찾아가자, 그는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이제 3단인데 벌써 외부로?"

"그렇습니다."

"성령꽃 채집 임무면 최소한 3개월 이상은 걸리는 일 아니냐?"

최소한 3개월이었고, 운이 나쁘면 3년이 될 수도 있었다.

3개월은 성령꽃이 발견됐다는 최신 정보가 틀리지 않을 경우였다.

나는 오동을 설득해볼까 하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게 옳은 판단이었을까?

한동안 고민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조건을 걸고 허락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참여하고 싶은가 보군, 하긴. 그 나이엔 하루라도 빨리 대륙 밖을 가보고 싶은 게 당연하지. 축도만 가도 세상이 달라 보이니까."

"..."

"좋다. 대신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약속한 기간을 보류해줄 순 없다. 그래도 갈 것이냐?"

지금 내 또래에겐 최고의 수련 장소인 생명의 샘. 그 기회를 포기할 거냐는 물음.

나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대답했다.

"네. 허락해주신다면 넓은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내 대답에 오동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탈출행 열차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너무나 순조롭게.

+++

오동의 허락이 떨어진 지 보름 후.

나는 세 명의 사내, 한 명의 여인과 함께 마을 중심에 도착했다.

"숙지는 확실히 끝났겠지?"

질문을 던지는 선두의 남자는 무리의 대장인 자학, 

그 뒤의 통통한 사내가 고한, 

강퍅한 인상의 사내가 장경사, 

그리고 여인이 화요란이란 이름이었다.

나를 포함한 이들은 성령꽃을 채집하기 위한 인원으로 등록을 마치고 전송진을 이용하기 위한 마지막 점검 중이었다.

"자 받게."

몇 가지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하던 자학은 노란 줄이 새겨진 명패를 건넸다.

노란 명패는 오직 전송진을 이용하는 이들만 발급받는 특별한 명패.

자학의 말을 빌리자면 4단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 중 노란 명패를 받은 사람은 부족 내에서 내가 두 번째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첫 인물은 금파월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허락이 떨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전여풍의 말마따나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 따위나 하면서 말이다.

잠시 후, 점검이 끝나자 자학을 선두로 한 명씩 마을 중심에 세워진 원형 건물 안으로 입장했다.

지잉-

건물을 통과하는 순간, 기분 나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내가 자력으로 연합도시까지 간다고 해도 탈출이 쉽지 않다고 여긴 게 이것 때문이었다.

등록된 인물들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결계 때문.

연합도시에서 대륙을 벗어날 때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때 모두를 속이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가능은 아니었다. 피똥 싸는 노력이 필요했을 뿐.

"호. 네가 소문의 그 아이군."

건물에 들어서자, 수염이 화려한 노인이 우릴 반겼다. 아니 나를 반겼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누군가를 떠올리는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금파월 제사장께서 3단의 수행으로 대륙 밖으로 나갈 때도 부족이 떠들썩했었다고 하던데, 자식마저 그러다니. 역시 피는 못 속이나?"

감탄이 섞인 혼잣말로 나를 눈여겨보던 노인은 자학에게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활동에 대한 숙지는 제대로 된 것이겠지?"

자학이 내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이 오고 간다. 

대부분 용족은 이런 일에서 누군가를 걱정하거나 하진 않지만, 새내기를 밖으로 여러 번 보내본 노인은 다른 것 같았다.

하긴, 첫 임무에서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마음이 쓰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냥 소식으로 전해 듣는 거지만, 노인은 항상 자신이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것이었으니까.

"자학이라고 했지? 네 역할이 중요한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선배님."

"이곳을 처음 이용하는 이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새겨듣겠습니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명심하고 또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진지한 자학에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가장 먼저 판단해야 한다. 구할 것인지, 피할 것인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노인의 말에 자학뿐 아니라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위험에 빠진다고 무리 전체가 휘말리지 말란 소리였다.

'맞는 말이다. 대장의 판단력이 흐려져 만용을 부리면 그걸로 전멸이지.'

채집 임무에 어울리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속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노인은 무리를 맡은 대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럼 전송진을 발동할 테니, 모두 올라라."

잠시 후, 자학을 선두로 하나둘 전송진 위로 올랐다.

다들 얼굴에 기대감이 서린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곳이기 때문에, 감상적이 되며 마음이 뒤숭숭했다.

금파월의 조언대로 무조건 떠나야 하는 곳은 맞았지만, 어느새 인연은 얽히고 정이 쌓여버린 후였다.

'다들 무탈하길.'

파앗-

감상에 젖은 사이 전송진이 무심하게 나를 삼켰다.

+++

용수산맥, 

전여풍의 거처에서 한참 떨어진 봉우리.

"드디어 끝이다!!"

외침과 함께 귀여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비행 법기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인근 공터로 날아와 착지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공터 한쪽에서 고심에 빠진 듯 턱을 괴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빠르게 내달렸다.

"할아버지!"

전여희의 외침에, 나무 덩굴 위에 올려진 상자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전여풍이 그제야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자, 눈앞의 상자가 전여희를 향해 날아갔다.

"이게 뭐예요?"

전여희는 난데없이 날아든 상자를 낚아채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금파란 그 아이가 너에게 전해주라 한 것이다."

"네? 란 오라비가 왔었어요?"

"풍초신이란 아이가 전해주었다."

"아..."

풍초신이란 말에 실망한 전여희는 주저 없이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전여풍이 곁에 나타나 상자 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에 전여희는 몸을 살짝 돌리며 몸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는 상자 안 물건을 확인했다.

"응?"

안에는 두 가지 물건과 한 장의 부적이 들어있었었다.

부적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전음부, 전여희는 바로 그것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금파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주 짤막한.

-희야, 또 보자.

"응?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전여희.

그녀는 곧이어 전음부를 제외한 물품을 확인했다.

하나는 공진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예전에 오라비에게 빌려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목걸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엽을 연상시키는듯한 외형의 장식과 나무줄기를 엮어놓은 것 같은 줄이 하나로 만나 신비로움을 보였다.

장식과 줄 사이에 박힌 공진석은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은은한 빛을 반사했다.

"너무 예뻐..."

그리고 상자 안에 들어있는 다른 하나.

그것은 그냥 평범한 공진석이었다.

하지만 그걸 본 전여풍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희야. 할애비가 그것 좀 확인해봐도 되겠느냐?"

그는 말과 동시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전여희는 이미 상자를 닫은 후.

"안 돼요! 제 꺼에요!"

원래 빌려준 목걸이보다 더 아름다운 목걸이를 받았다고 다른 선물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라비에게 받은 것은 어떤 것도 할아버지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전여풍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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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대륙 밖으로

십여 평 정도의 좁은 석실 안.

시야가 반전되며 처음 맞이한 것은 아무 장식도 없는 벽이었다.

너무 조용하고, 생기가 없었다.

석실 한구석을 차지한 탁자와 중년 남성이 아니었다면 전송진에 이상이 생겨 잘못 이동된 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축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학이라 합니다."

"자학 수사셨군요. 이곳에 수결을 새기시면 됩니다."

중년 남성의 환영에 자학이 대표로 나섰다. 그는 남성의 지시에 따라 손끝에 영력을 뭉쳐, 네모난 석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자 이름이 새겨진 석판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름이 새겨지기 전으로 돌아간다.

"되었습니다. 축도를 방문하신 거면 이곳을 나가 오른쪽으로 가시면 되옵고, 전송진을 이용하시기 위해 방문하신 거라면 건물을 나가 중앙으로 가시면 됩니다."

잠시 후, 입도 절차를 마친 우리는 사내가 가리킨 문으로 나가 건물 밖으로 향했다.

건물 밖은 오동의 말대로 신세계였다.

낮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부족의 정경과 달리, 3층부터 5층까지 다양한 높이의 건물들이 빼곡히 서 있었다.

건물들은 하나같이 특색이 강해, 어떤 것은 송곳처럼 뾰쪽했고, 어떤 것은 현대의 건물처럼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나온 곳은 거대한 원형건물을 중심으로 빙 둘려 있는 작은 건물 중 하나였다.

'이곳이 부족간 전송진, 중앙이 대륙간 전송진.'

전송진은 편리한 이동 장치였지만, 일대일 전송이 원칙이었다.

하나의 전송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지역은 오직 하나.

그랬기에 중앙의 전송진만이 가까운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부족간 전송진이었다.

연합도시, 다른 이름으로는 축도라 불리는 이곳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모든 물류와 통행은 이곳으로 집결했다가 각 부족으로 흩어지니까.

"잠시들 기다리게, 등록만 마치고 올 테니."

자학은 건물을 나서자마자, 중앙의 건물로 향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며 돌아왔다.

"자학 형님. 표정이 좋은 걸 보니 바로 떠날 수 있나 봅니다?"

"하하, 바로 맞췄네. 다행히 대기 인원이 많지 않아 이틀 후 이용할 수 있다고 하네."

통통한 사내, 고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던 자학이 날 보고 말했다.

"금파란 후배."

"예, 선배님."

"원래라면 전송진을 이용하는데 영석을 지불해야하네. 하지만 자네 수행으론 그 정도 재화를 모으지 못했을 것이기에, 절반은 내가 나머지는 십시일반 모으기로 했지. 그러니 당연하다 여기지 말고, 여기 다른 이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게."

나는 자학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를 포함한 곁에 서 있던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겉으로는 덤덤한 모습과 달리, 다들 만족한 눈빛이었다.

특히 고한이라는 자는 은근슬쩍 다가와, 어깨를 툭 치기까지 했다.

"후배님께서 오동 어르신은 물론이고 전여풍 어르신까지 개인적으로 대면한다면서?"

"후배님이라니요. 말 편하게 해주십시오."

"흐흐, 그래그래. 편하게 하지. 아무튼 이렇게 함께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혹 기회가 된다면 전여풍 어르신을 만나 뵐 때 나에게 귀띔 좀 해주고 말이야."

전여풍을 인맥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줄줄 흘러넘친다.

딱히 맞장구쳐주고 싶진 않지만, 당분간은 함께 해야 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음에 뵙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이동함세. 이틀간 머물 거처는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하고. 정확히 여기서 다시 보는걸세. 이틀 후 동이 트기 전까진 늦지 말고 와야 하네. 알겠나?"

고한의 노골적인 질척거림이 계속되려는 찰나, 자학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러면서 축도에 머물 이틀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 몇 가지와 숙소가 모여있는 장소 등을 알려주었다.

"예, 형님."

"네, 그럴게요."

"...예."

자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한, 장경사, 화요란, 세 사람은 발 빠르게 움직여 사라졌다. 마치 한시가 급한 사람처럼.

내가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자, 떠나려던 자학이 말을 건다.

"자네도 어서 움직이시게. 이틀이 길다 생각되겠지만, 아마 내일이 되면 일분일초가 아깝게 느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왜냐고 묻지 않는군?"

평온한 내 모습에 자학이 의문을 드러냈다.

다른 인원들이 허겁지겁 움직인 이유?

그건 바로 부족 마을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을 이곳에선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축도엔 없는 물건이 없고 상점의 숫자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들었습니다. 상점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일일이 확인하고 비교하다 보면 시간이 부족할 거란 말씀 아니십니까?"

"호오, 잘 알고 있군. 어르신들께 조언을 들은겐가? 아무튼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럼 늦지 말고 봄세."

잠시 후, 만족한 듯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자학이 떠나갔다.

"이틀이 짧은 건 맞지."

축도의 크기는 내가 머물던 부족의 전체 크기보다 넓었고, 곳곳에 상점가들이 모여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이틀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필요한 물건을 특정한 후, 흥정을 통해 가격을 낮추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럼 나도 움직여볼까."

자학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상점가를 향해 서둘렀다.

+++

대륙 간, 혹은 종족 간의 가치 차이는 무역의 시발점이다.

용족의 대륙에선 잡초 취급받는 물건이 인간 혹은 다른 종족에겐 훌륭한 재료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어떤 것들은 보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지금 내가 구하는 물건처럼.

"용각(龍角)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용각? 참 희한한 걸 찾는군. 어디다 쓰려고 그러시우?"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참. 그쪽도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용건만 간단히? 머 그런거우?"

용의 뿔이라는 이름과 달리, 용각은 용족의 몸에 나는 혹 비슷한 것이었다.

몇몇 공법을 익히다 보면 피부가 각질화되며 생기는데, 강체술(剛體術)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는 단약의 재료였다.

물론 용족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인족과 몇몇 영수족에서 유행하는 단약이었다.

나는 이틀간 머물 거처를 마련할 돈도 아끼며 재료를 사 모았다.

자학의 배려와 달리 오동의 임무를 수행하며 모은 영석이 꽤 많은 상태.

용족의 대륙을 떠나기 전, 앞으로 필요한 물건 중 싸게 살 수 있는 물건들 위주로 쓸어 담았다.

물론 말이 쓸어 담는 것이지, 상거래를 주로 하는 이들과 비교하면 소액거래에 불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자, 다들 원하는 건 얻으셨나? 그럼 떠나봄세."

그렇게 이틀은 빠르게 흘렀고, 나를 포함한 전원은 도시 중앙의 원형건물로 입장했다.

"전송진을 발동하겠습니다. 모두 축복이 함께 하시길."

파앗-

그리고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송진을 통해 소리 없이 떠나갔다.

+++

'지금쯤 희에게 전해졌으려나...'

용족의 대륙을 벗어난 지도 한 달.

우리는 소금(小錦)이라 이름 붙은 대륙에 도착한 후, 일곱 날을 체류하고 대금(大錦)에 당도했다.

그 후 그곳에서 다섯 날을 체류하고 다시 전송진을 이용해 고금(古錦)이라 불리는 대륙으로 이동.

그곳에서부터 비행 법기를 타고 이동을 시작해, 끝없이 펼쳐진 숲의 상공을 날아가는 중이었다.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네.'

나는 푸른 숲을 내려다보며, 한 달 전 일을 떠올렸다.

자학과 함께 부족을 떠나기 전,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목걸이. 그리고 공진석.

전여희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오랜 시간 말벗이 되어준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목걸이는 중천의 양식이 아닌, 현대에서 유행하던 형태.

내 딴에는 특별한,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주고 싶어 최선을 다해 제작한 물건이었다. 다만 그 아이의 마음에 들어찰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목걸이와 함께 준 공진석.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 사용하고 남은 공진석이 진짜 선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지. 그 안에 초월공진력이 스며들 줄은.'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공진석의 상태를 확인하며 발견한 사실.

두 번째 선물인 공진석에는 결계를 이루고 있던 초월공진력의 기운이 일부 스며들어있었다.

나는 그것이 전여희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거란 걸 확신하고 그녀에게 주었다.

나처럼 이미 초월공진력을 가진 사람에겐 평범한 공진석과 다를 게 없지만, 대공진을 익혀야 하는 그녀에겐 보물처럼 작용할 터였다.

초월공진력은 대공진의 원류.

그것의 기운을 공진석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면, 아마 대공진의 깊이가 남다르게 변할 거라 확신했다.

'손녀를 끔찍하게 여기니, 빼앗진 않겠지.'

유일한 걱정이라면 전여풍이었다.

그가 만약 초월공진력이 담긴 공진석을 보게 된다면 과연 욕심내지 않을까?

다만, 그의 인품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거의 도착했다. 모두 정신 차리도록!"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숲이 끝나가며 바위로 이루어진 산들이 나타났다.

이곳 산들을 지나면 늪지가 나오고, 늪지와 연결된 모암대지(芼暗垈地)라는 곳에 도착한다.

모암대지는 푸른 갈대밭이라 생각하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곳으로, 다만 갈대의 크기가 십여 미터에 이른다는 점이 살짝 달랐다.

그리고 그곳.

모암대지의 갈대밭 안, 빼곡히 박힌 갈대로 인해 어둠뿐인 그곳에서 성령꽃을 찾아야 했다.

"금파란."

"예, 선배님."

내 앞에서 비행 법기를 조종하고 있던 자학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건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법기 위에 함께하고 있었다.

"준비됐나? 자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지? 더도 덜도 말고 하루에 세 송이만 찾으면 되네."

잠시 후, 바위산을 지나 늪지에 도착한 우리는 늪지 표면을 스쳐 날며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 멀리 아파트 3층 높이의 갈대가 보이자, 천천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에 유일하게 챙겨온 보급 물품인 비행법기를 꺼내 앞으로 나섰다.

자학은 살짝 고도를 높이며 소리쳤다.

"고한! 자네가 금파란을 근접 호위하게! 장경사! 그리고 화요란! 그대들은 나와 함께 다가오는 놈들을 처리한다!"

처음 성령꽃 채집 임무에 나를 포함해 다섯이나 함께한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임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모암지대.

현재 성령꽃이 발견된다고 알려진 이곳엔 꽤 귀찮은 존재가 살았다.

가가충(歌歌蟲)

늪지와 가까운 모암지대에만 사는 매미 형태의 벌레.

놈들은 날개로 기이한 소리를 냈는데 그것을 오래 듣다 보면 정신을 잃고 만다.

다만, 소리를 듣는다고 무조건 정신을 잃는 것은 아니었다.

한두 마리 일 때는 큰 상관이 없었고, 대여섯 마리일 때는 두통이 조금 생기는 정도.

하지만 여덟 마리가 넘어가면 그때부턴 눈앞이 흐려지고 균형감각에 이상이 생겼다.

물론 수행에 따라 적용되는 위험이 제한적이었지만, 이제 3단에 오른 나는 열 마리가 몰려들면 무조건 기절이었다.

정신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청각을 괴롭히는 것이라 용의 위엄도 통하지 않았다.

"장경사! 화요란! 거리를 더 넓혀라! 가가충이 금파란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

자학을 비롯한 세 명의 역할은 바로 몰려드는 가가충을 잡는 것.

그리고 고한은 가가충을 포함한 다른 위험 상황에서 나를 호위하는 것이었다.

"이 벌레 자식이!"

퍽-

고한은 내 곁에 바짝 붙어서, 갈대의 뿌리 근처에서 날아드는 주먹만 한 매미를 가볍게 터트렸다.

기습적으로 나타난 가가충을 처리한 고한이 날 보며 씨익 웃었다.

"후배, 걱정 말게. 내가 몸은 이래 보여도 순발력은 자신 있거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성령꽃을 찾는 데만 집중하면 되네."

곧이어 본격적인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

+++

수색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명안을 발동했다.

그러자 안구에 빛이 맺히며 어두운 갈대 사이로 희미한 빛의 물결이 감지된다.

'확실히 아직 내 명안은 많이 부족하구나.'

특수한 냄새로만 찾을 수 있는 성령꽃.

당연히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것은 냄새와 관련된 특성을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기에, 후천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임무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첫째는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 

내가 성령꽃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소문을 낼 때, 인간들이었다면 사실 확인을 한답시고 나를 시험하거나, 상점가에 가서 사실 여부를 조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족은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에 서슴없이 미끼를 뿌렸다.

두 번째로는 성령꽃을 찾을 또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모양을 가진 성령꽃은 모양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성질을 가졌다.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기도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빛을 받으면 환희에 차오르는 것처럼 고개를 치켜든다.

즉 광합성을 시작하면 점차 몸이 부풀어 오른다는 뜻이었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이 지나면 만개하며 천사의 날개 같은 모양의 꽃을 피웠다.

'그걸 이용하면 찾을 수 있지.'

즉, 빛을 이용하면 죽은 것처럼 아무 낌새도 느낄 수 없는 성령꽃의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단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명안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오동처럼 빛을 레이저처럼 쏘아낼 순 없지만, 미약한 파동을 만들어내는 건 가능했다.

"여기! 하나 찾았습니다!"

물론 냄새로 직접 성령꽃을 찾는 것보단 매우 느릴 테지만, 중요한 건 찾을 수 있단 것이었다.

"오! 역시! 나는 아무 냄새도 맡질 못하겠던데. 정말 특이한 능력이군."

첫 번째 성령꽃을 고한이 건네받아, 자학에게 가져간다. 금세 만족해하는 자학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 또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방법뿐 아니라 요령까지 더해지며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금파란, 오늘도 잘 부탁하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가며, 나는 신뢰를 얻고, 모암지대를 내 앞마당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가진 말게."

처음엔 바로 곁에서 보호하던 고한도 며칠 동안 지켜본 뒤로는 멀리서 나를 엄호했다.

내가 광선검으로 가가충을 간단히 사냥하는 모습을 본 뒤부터였다.

시간이 지나자 몰려드는 가가충의 숫자도 확연히 줄어들었기에 자학을 비롯한 세 명도 넓게 분포한 채, 일정 숫자 이상 늘어나지 않게 관리하는 데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장경사라는 인물은 틈틈이 다른 식물을 채집하기도 했다. 당연히 자학의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 의외로 크게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만큼 우리의 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는 정말 성실히 채집에 전념했고,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금쯤이면 그자가 도착했으려나.'

그렇게 목표인 100송이에 근접했을 때쯤.

나는 자학 무리로부터 탈출할 구상을 마치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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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왕지렁이

자학으로부터 처음 임무 지역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나는 조용한 탈출을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

하지만 같은 모암지대라도 그곳의 서식 환경은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아 쉽사리 정할 순 없었다.

그래서 몇 가지 가정을 세우고, 임무지에 도착한 다음 계획을 확정 짓기로 한 것이다.

'이쯤에서 봤던 거 같은데...'

그랬기에 한동안 채집활동에 전념하며 신용도를 올렸고, 거치적거리는 동행 없이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나는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고한의 시선을 의식하며 모암대지 표면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길 얼마 후.

빼곡히 자라있는 갈대 사이로 녹색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흔적을 찾았다.

"여기였네."

용족의 대륙을 벗어나는 건 탈출의 시작.

성공적인 탈출은 자학을 비롯한 이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모암대지 깊은 곳에서 서식하는 왕지렁이를 깨우는 것이었다.

나는 발끝으로 영력을 뭉치며 녹색으로 물든 지면을 지그시 눌렀다.

"잠깐! 금파란! 어서 이리 오게! 근처에서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네! 자학 형님!"

전혀 이상한 행동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했지만, 고한은 생각보다 예민하게 파동을 읽어냈다.

'예전 도서관에서도 그렇더니, 용족이 거인의 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가?'

쿠웅!

하지만 그 힘의 원천이 나라는 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내 발끝에서 시작한 기운은 물컹한 지면을 물결처럼 파고들면 바닥 끝까지 닿았다.

그러는 사이 고한의 외침에 자학을 비롯한 인물들이 곧바로 반응하며 몰려든다.

"금파란 어서!"

나 역시 고한의 외침에 반응하듯 급하게 비행법기에 올라타며 위로 솟구쳤다.

쿠워워워-

하지만 내 행동은 느렸다.

푸핫-

순식간에 갈대밭이 갈라지며 지표를 뚫고 거대 지렁이가 입을 벌리며 솟구쳤다.

"금파란!!!"

내가 상공으로 치솟는 속도보다 지렁이가 다가오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입의 크기만 해도 3미터가 넘었고 길이는 50여 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 지렁이.

"안돼!!"

결국, 지렁이가 날 덮치며 한입에 삼켜버렸다.

그사이,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본 자학의 눈빛은 고민에 휩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 보였다.

+++

쿠워워워-

갑작스레 지표를 뚫고 뛰쳐나와 금파란을 삼켜버린 거대 왕지렁이.

놈은 축기기 후기급, 용족으로 치면 6단 정도의 괴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자학은 금파란이 잡아먹힌 모습에 넋을 놓고 있다가, 고한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형님!! 어쩌실 겁니까?!"

어쩌냐고?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자학은 당장 거대 왕지렁이를 공격해 금파란을 구해내야 할지, 아니면 대원들을 물려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돌발상황을 수십 수백 번 떠올려봤지만, 막상 닥치니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떠나오기 전 전송진을 담당하던 노인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다들 물러난다! 어서!"

잠시 후, 갈대밭을 휘저으며 요동치는 지렁이를 내려다보며 자학을 포함한 전원은 침울한,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들 사이에 흐르는 것은 침묵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냐며 자학을 다그치던 고한도 무리의 대장이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고 더는 입을 열진 않았다.

평소엔 지푸라기만큼 가벼운 그였지만, 동료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럴 순 없었으니까.

그때, 일행 중 가장 말이 없던 장경사가 입을 열었다.

"이상합니다."

"이상?"

"저 녀석은 온순한 괴수로 분류된 녀석입니다. 누가 자신을 먼저 공격하기 전엔 절대 남을 공격하지 않지요. 심지어 지금처럼 해가 뜬 날에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조차 없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근처에 있던 화요란도 장경사의 말에 동조했다.

"그런데 갑자기 금파란을 잡아먹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설마 우리 중 누가 저 지렁이를 일부러 자극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자학이 날카롭게 되묻자, 장경사가 급히 고개를 젓는다.

"그런 말이 아닙고, 그저... 이상하다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누가 우릴 방해하는 것 아닐까요?"

"방해?"

장경사가 꼬리를 말고 입을 닫자, 이번엔 고한이 의견을 냈다.

"조금 전 이상한 파동을 느꼈습니다."

"이상한 파동?"

"예. 그것이...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이상한 감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금파란에게 경고했지만... 순식간에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고요."

고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로 눈을 맞춘 일행은 곧장 주변을 살폈다.

중요한 자원이나 보물급 취급을 받는 물건을 구할 땐, 견제나 방해가 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설마 겨우 성령꽃 때문에 그런 방해를 받을까 싶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

하지만 아무리 기감을 총동원해 주변을 살펴도,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하필 이런일이..."

쿠워워워워-

여전히 난동을 부리며 갈대밭을 파헤치고 있는 거대 지렁이를 보며 자학은 신음을 삼켰다.

그러길 한참.

자학이 고한을 보며 말했다.

"고한, 자네라면 얼마나 버틸 것 같나?"

"버티다니요? 혹시 금파란을 구하시려는 겁니까?"

구할 거냐고? 

자학도 몰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무리 전체가 위험에 빠지면 안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나약하기 때문인지, 무리를 이끌 대장으로서 자질이 없기 때문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냐니까?"

"흐음... 법기의 도움을 받으면 하루 정도는..."

"장경사 수사, 그대는?"

"소문대로라면 저놈은 먹이를 씹지 않고 천천히 부식시켜 녹여 먹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하루는 버틸 것 같습니다."

"저는 반나절도 힘들 거에요."

자학의 시선이 향하자, 화요란도 냉큼 입을 열었다.

모두의 얘길 듣고 난 자학은 심각한 표정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 지렁이를 노려보았다.

"그럼 금파란 수행엔 서너 시간이 한계겠군. 아니 한 두 시간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짧으면 한 시간이 안 될지도."

한동안 고민하던 자학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넷이라면 저놈을 처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대들이 전부 동의 한다면 나는 한번 금파..."

쿠워워워-

그때 요동치는 거대 왕지렁이 옆으로 땅이 갈라지며 비슷한 크기의 지렁이 한 마리가 또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채찍처럼 휘두르면 땅을 뭉갰다.

콰앙- 쾅-

마치 어디서 한 대 얻어맞고,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자학은 내뱉으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긴장한 채 자신의 입만 바라보는 대원들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돌아가세. 금번 임무는 여기까지네."

+++

칠흑보다 어두운 지렁이 내부.

이곳은 왕지렁이의 영력으로 인해, 시야를 확보할 수도, 제대로 된 술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저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한 뒤, 흙과 함께 밖으로 배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렁이의 연동운동에 녹지 않고 버틸만한 실력이 된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나는?

나는 지렁이에게 잡아먹힌 순간 거미줄로 나를 수십 겹 감쌌다.

촤쟈작-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아마 사건의 결말을 알게 된 용족에서 수배령과 함께 추격이 시작될 게 분명한 일.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나의 죽음.

자연스럽게 죽음을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를 지울 생각이었다.

'명안으로도 가시거리 확보가 안 되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다만 문제라면 왕지렁이의 내부가 얼마나 혹독한 환경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나간다.'

왕 지렁이에겐 다섯 개의 심장이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만 상처를 입어도, 속에든 모든 것을 게워냈다.

그러니 자학을 속일 때까지 지렁이 내부에 숨어있다가, 만약 생각보다 너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심장을 공격해 밖으로 나가면 될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해서 탈출에 실패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면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면 된다.

설마 목숨이 달린 일에 예비책도 마련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지렁이의 연동운동으로 인해 거미줄로 만든 보호막이 어느 정도 속도로 녹아들고 있는지 확인하며, 몇몇 가정들을 다시금 점검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를 삼킨 첫 번째 왕지렁이가 연동운동을 멈추더니 기이한 떨림을 퍼트렸다.

수사들이 신호를 보내는 파동과 비슷했는데, 즉시 반응이 왔다.

쿠워워워-

'한 마리 더?'

어느새 질퍽한 흙을 꿀렁꿀렁 타고 넘어온 또 다른 왕지렁이가 내가 탑승한 왕지렁이의 몸통을 돌돌 감기 시작했다.

'이거?'

처음엔 지렁이들이 애정행각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고 의문을 가졌던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며 연동운동을 역행해 뒤로 물러났다.

꾸우욱-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내가 머물던 자리가 납작하게 변하며 안에 있던 내용물을 가루처럼 만들어버렸다.

뱀이 먹이를 돌돌 말아 압사시키듯, 다른 지렁이가 외부에서 압력으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나를 제외한 생명체가 없었으니, 목표는 내가 맞았다.

'생각지도 못했네.'

잠시 후, 지렁이의 몸이 꿈틀하며 또다시 압력이 전해진다.

나는 계속 피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발끝으로 전력을 담았다.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머무는 공간이 압력으로 짜부라지면서 외부의 지렁이와 최대한 밀착됐을 때.

콰아앙!!

거인의 발걸음으로 지렁이의 피부를 넘어 또 다른 지렁이를 냅다 갈겨버렸다.

쿠우어우어워-

그러자 지랄발광하는 몸짓이 파동으로 느껴진다. 동시에 내가 탑승한 지렁이의 외피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 흐물흐물 변했다.

"어? 이렇게도 나갈 수 있겠는데?"

다행히 한번 혼난 또 다른 지렁이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탑승한 지렁이의 연동운동이 갑작스레 빨라졌다.

마치 이물질을 빨리 배출해 버리겠단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나는 위장 벽으로 생각되는 곳에 달라붙어 거미줄을 더 많이 뿜어냈다.

그리고는 벽 일부가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잠시만 신세 좀 질게. 밖에 저들만 물러나면 나도 바로 나가겠다.'

다만 내 실력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밖의 일행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

시련의 탑, 

폭파 사건으로 폐쇄된 그곳 입구엔 몇몇 인물이 모여있었다.

얼핏 보이는 인물만 하더라도, 전여풍, 전여황 등 범상치 않은 이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그들 앞엔 수염을 발끝까지 기른 도인풍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허탈하게 웃는 중이었다.

전여황은 그런 노인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 정말입니까? 지금 보여주신 그것이..."

"내가 친우의 아드..., 아니 족장께 거짓을 보여줄 리 있소이까?"

"다, 다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전여황의 부탁에 노인이 헛기침과 함께 손을 저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로 녹색 영력이 뭉치더니, 그것이 거울처럼 펴지며 특정 장소를 비추었다.

거울 속 화면은 시련의 탑 3층, 그중에서 뇌전이 가득 찬 통로였다.

"다시 보아도 틀림없다. 금파란 그 녀석이 맞다."

녹색빛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있던 전여풍이 말하자, 전여황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도대체 왜?"

주위에 동참했던 주요 인사들도 전여황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문을 닫았다.

여태껏 외부세력의 공격인 줄 알았던 것이, 내부 소행. 그것도 이제 막 성인이 된 꼬마의 소행이란 걸 알고 다들 할 말을 잃은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전여풍이 말했다.

"너무 공교롭다."

"공교롭다니요?"

"지금까지는 전혀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지만, 마치 이 친구가 방문할 시기에 맞춰 부족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

"아!!"

전여풍의 말이 끝난 순간,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아닌 게 아니라, 기가 막힌 시점에 취조대상인 금파란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때, 흑포를 입은 사내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족장님! 지금 금파란의 거처를 확인했사온데!"

사내는 전여황 앞에 당도하자마자 잡다한 물건을 꺼냈다.

"이건?"

"그 아이의 거처에 있던 물건들입니다. 성인식을 마치고 보급받은 물건들을 포함해 많은 물건을 버려두고 임무에 나선 것 같습니다. 마치..."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예, 이곳에서 얻은 물건은 다 버려두고 떠난 것 같습니다."

"내 말하지 않았나. 영악한 아이라고. 만약 도망치려고 작정한 거였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 것이겠지. 혹은 추적을 염려한 것이거나."

어느새 나타나 한소리 덧붙이는 오동.

그의 등장에 족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전부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오동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후, 전여풍에게 고갤 숙였다. 그리고는 친숙한 듯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헌데...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분명 나쁜 아이는 아니었는데.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우?"

오동의 질문에 전여풍도 동조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지금 일어난 이일과 그놈의 행동을 비교하면 앞뒤가 안 맞아.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나?"

말을 하던 전여풍이 투명한 빛을 내는 돌멩이 하나를 꺼내자 주변의 인사들이 전부 입을 떡 벌리며 쳐다본다.

특히, 오동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혀, 형님!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공진석이 분명한데... 이기운은 대체!"

모두의 시선을 받은 전여풍이 무겁게 말했다.

"이건 금파란 그 녀석이 희에게 주고 간 물건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래, 초월공진석이라 부르면 되겠지."

"초월공진!!"

"태초의 힘!!"

초월공진석이란 말에 다들 더는 놀랄 일이 없을 정도로 두 눈이 커졌다.

전여풍은 그런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녀석은 희와의 사소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귀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 갔다. 너희들이라면 도망가기 전 그런 행동을 취하겠나? 그런 녀석이 탑을 폭파한 장본인이라... 뭔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단 말이지."

모두가 짐작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을 거란 말.

"황아."

"예, 아버님."

평소엔 족장이라 부르던 아버지가 친숙하게 이름을 부르자, 전여황은 더 자세를 낮추었다.

전여풍이 이름을 부를 땐 그만큼 중요한 얘길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장 그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

탑 문제보다 초월공진석에 무게를 두는 것 같은 전여풍의 말투.

전여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금파란이 초월공진석을 구할 방도를 알고 있다면, 대륙의 세력 판도가 바뀔만한 일이었다.

전여풍이 시키지 않았어도 대화가 끝나는 즉시 추격조를 보내려고 했던 전여황은 황급히 대답했다.

"예, 당장 사람을 보... 아버님?"

휙-

그때, 근엄하게 무게를 잡던 전여풍이 황급히 공진석을 숨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전여희가 공터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어딨어요!! 잠깐만 본다고 하더니! 어디로 갔어!! 잡히기만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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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잔비

전여희가 떠나고 난 뒤, 공터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보아하니 전여희의 물건을 전여풍이 허락 없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아버님도... 참..."

전여황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저었지만, 초월공진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아마 그 자체의 욕심보다, 연구를 위해서였을 테니.

그러면서 금파란의 신변을 확보하는 게 얼마만큼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들, 오늘 일을 함구하시오. 탑에 관한 건 금파란을 조사한 뒤 판단할 것이고, 초월공진석에 관한 건... 만에하나 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있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까."

눈을 부라리며 한명 한명 시선을 맞추던 전여황은 오동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해해달란 듯 고개를 숙였다.

오동은 그 모습에 두려움을 일으킬만한 파동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만약 오늘 일을 소문 내는 자가 있다면, 족장의 응징이 있기 전 내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다들 입단속 하여라. 그리고 족장."

"예, 어르신."

"내 밑에 있는 아이 중 발 빠른 녀석이 있으니. 그놈에게 일을 맡기는 게 어떤가?"

"혹, 잔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녀석이 다른 건 몰라도 가장 빨리 금파란을 데려올 수 있을 테다. 인맥도 상당한 녀석이라 전송진을 이용하는데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고."

사실 금파란을 가장 빨리 데려올 방법은 초고위 수사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 내 실무를 위해 활동하는 건 족장 이하의 하위, 중위 수사들의 몫.

불감청고소원이라 했던가? 

오동이 말하지 않았다면 전여황이 먼저 부탁할만한 일이었기에 그는 황급히 수락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럼 그 친구를 불러 일을 맡기겠습니다."

"그래, 그럼, 일이 진행되는 대로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군."

"아무렴 말입니까."

잠시 후, 오동이 바람처럼 사라지자, 공터에 모여있던 인원들도 전여황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 흩어 움직였다.

이때가 자학 일행이 고금 대륙에 막 발을 디뎠을 무렵.

예정보다 빠른 전여풍 친우의 방문으로 금파란의 행적이 드러난 시기였다.

+++

금파란이 왕지렁이에게 잡아먹힌 지, 반나절 남짓 흘렀을 때.

고금 대륙의 전송진을 이용하기 위해 복귀 중이던 자학 일행은 뜻밖의 인물을 만나 이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 잔비 선배님? 여긴 어쩐 일로?"

반대편에서 맹렬히 날아온 인물은 8단에 오는지 얼마 안 된 잔비. 둔술(遁術) 하나만큼은 일절이라 알려진 사람이었다.

오동에게 술 만드는 재주가 없다고 타박을 받고, 금파란을 몰래 찾아갔었던 사내이기도 했다.

탄탄하며 균형 잡힌 몸매로 인해 가만히 있어도 강인한 기운을 풍기지만 가느다란 눈썹이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

"이름이 자학이었던가?"

어느새 다가온 잔비는 자학 일행을 하나씩 눈에 담으며 말했다.

"예,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설마 선배님께서도 성령꽃을?"

"성령꽃은 무슨. 난 하루빨리 금파란을 데려오란 족장님의 명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그놈이 보이지 않는군. 어디 갔지?"

잔비의 질문에 자학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이어진 설명에 잔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라!! 당장 안내해!"

잠시 후, 일련의 사정을 들은 잔비는 자학의 멱살을 끌어오다시피 해 자신의 비행법기에 태우더니, 남은 일행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른 이들과 합류한 후 와라."

그리고는 순식간에 하늘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비행 법기를 움직였다.

잔비는 비행법기를 보호막으로 감쌀 생각도 없는지, 맞바람을 맞으며 자학을 다그쳤다.

"자학,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아니, 너는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온 거지?"

"그게... 제 판단에는..."

자학의 변명에 잔비가 한숨쉰다.

"하아.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면상 좀 일찍 보려고 혼자 움직인 게 천만다행이네. 조금만 늦었어도 시체도 찾지 못할뻔했어."

족장의 명령으로 금파란을 데려가기 위해 움직이던 그는, 왜 그를 데려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족장의 서슬 퍼런 명령을 생각하면, 빈손으로 돌아갔을 때 뒷감당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재수 없는 녀석이라 죽는 건 상관없었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걸 보여야 했다.

그러려면 최소한 시체라도 챙겨가야 면이 섰다. 물론 살아있는 상태로 데려가는 게 우선이긴 하지만 말이다.

'삼켜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 아니라도 시체는 건져야지.'

얼마 후, 모암지대에 도착한 잔비는 곳곳이 뭉개지고 폐허처럼 변한 갈대밭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왕지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젠장, 벌써 소화를 끝내고 바닥으로 숨은 건가?"

금파란이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썼다면, 내부에 어떤 충격이라도 줄 수 있었을 터.

그렇다면 왕지렁이가 편히 쉴 수 없으니 아직까지 활동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전혀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건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단 말이었다.

"자학, 너도 돕거라. 일대의 지렁이들을 전부 깨울 것이야."

"예에? 전부요?"

잔비는 자학의 반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비행법기에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손을 크게 젓자, 10여 미터에 이르는 갈대 수백 개가 하늘로 치솟는다.

"가라!!"

직후, 일정 높이까지 떠오르던 갈대가 잔비의 명령에 차갑게 굳기 시작하더니.

얼음 칼날 비로 변해, 물컹한 지면을 뚫고 깊숙이 박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파파바밧-

그러길 잠시,

쩌저정-

얼을 칼날로 변한 갈대가 땅속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지 위로 살얼음이 끼며 곳곳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합!"

그때, 잔비가 손을 뻗으며 기합을 내지르자,

쿠어워워워-

왕지렁이 한 마리가 분노에 찬 괴성과 함께 지표 위로 솟구쳤다.

곧이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도 또 다른 왕지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렁이들은 일전에 자학이 마주 했을 때와 달리 온몸이 하얗게 서리가 껴있었고, 행동도 매우 느린 상태였다.

그리고, 잔비의 다음 행동으로.

스악-

쿠워워어어-

그 무엇보다 질길 것 같던 왕지렁이의 가죽이 찢겨 나가며, 학살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찢겨 나갔다고 하기보단, 얼어붙은 채 뜯겨 나간 것이었다.

"이 질 떨어지는 것들아! 당장 그놈을 뱉어내라!"

+++

왕지렁이 내부.

"조용하네, 이제 휴식을 취하려는 건가?"

평소보다 빠른 연동운동으로 나를 배출하려 했던 왕지렁이는 점점 움직임을 멈췄다.

지표밖에서 몸무림치며 전해지던 충격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왕지렁이 내부의 영력도 안정적으로 변하며 거미줄을 부식시키는 속도도 줄어들었다.

위 사실들을 종합하자면, 왕지렁이는 다시 모암대지 바닥으로 내려와 평소처럼 잠을 자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학은 떠났으려나?'

하지만 당장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내 공격으로 왕지렁이들이 아직 예민해 있을 시기, 그들이 더는 외부 반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상태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했다.

아무리 선공을 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아직은 자신이 공격당한 사실을 잊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위장 벽에 달라붙은 채 얼마나 지났을까?

꾸이- 꾸-

앞섬이 벌어지며 새끼 갈락취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녀석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충낭까지 구매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 안에 들어가면 괴로움에 발버둥을 쳤다.

그래서 계속해서 품에 품고 다니는 중이었다.

"또 배고파서 깼구나."

나는 잠에서 깬 갈락취의 입에 손가락을 물리고 나의 피를 소량 먹이며 영력을 불어넣었다.

영충들과 다르게 어미의 젖이 필요한 갈락취들은 다른 먹이를 먹일 수 없는 상태.

해서 임시방편으로 피를 먹이는 중이었다.

핏속에는 내 수행의 일부가 스며들어있기에 영약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다만 절대 무리하게 피를 내줘서도 안 되는 것이었고, 오래 지속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새끼 갈락취들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 뿐, 피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했다.

'피를 함부로 소비하다가 내 성장이 퇴보한다면... 그보다 멍청한 짓은 없지.'

하지만 새끼 갈락취들에게 피를 먹임으로써 장점도 존재했다.

종속의 인으로 인해 영혼의 연결고리가 생겼음에도 갈락취들과 나의 기질은 너무 달랐었다.

그러던것이 서서히 닮아가며, 갈락취들에게서 은은한 뇌전 속성의 파동까지 느껴진 것이다.

물론 너무 미약해 있으나 마나 한 정도였지만, 이런 식으로 변해갈 수 있다는 걸 몰랐기에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잠시 후, 나머지 새끼마저 잠에서 깨 밥을 달라고 울었고, 두 마리다 배를 채우더니 다시금 잠이 들었다.

끼이- 끼이-

"얘네들이 단체로..."

곧이어 거미 삼 형제도 신호를 보내왔다.

밥 달라고.

하지만 가매초로 만든 특식이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난 상태.

더는 거미들에게 먹일 밥이 없었다. 심지어 연합도시에서 재료들을 구매하며 영석까지 바닥난 상태.

"알았으니, 조금만 참거라. 이곳만 탈출하면 배 터지게 해줄 테니. 이해해 주려무나."

나는 손가락 끝에서 힘없이 대롱대롱 몸을 흔드는 거미들을 달래주었다.

거미들은 내 말보다는 내가 가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는 듯이, 손가락을 간지럽히다 모습을 감췄다.

쿠워워워워!

"어?"

그때 가만히 잠을 자는 듯 보였던 왕지렁이가 심하게 요동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곳곳에서 비슷한 괴성과 파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졌다.

"뭐지? 갑자기?"

잠시 후, 왕지렁이의 몸이 급격히 수축하는가 싶더니 강력한 기운과 함께 직선으로 힘을 뻗었다.

쿠우우-

'이동한다!'

그 현상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빠르게 생각했다.

'분명 공격을 받고 반응한 거다. 헌데 누가? 설마?'

설마 자학 일행이 나를 구하려고 왕지렁이를 도발했나 싶었지만, 아닐 거라 여겼다.

그랬을 거면 왕지렁이가 지표 아래로 숨어들기 전에 진작 행동하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었을 테니까.

생각도 잠시. 이동하는 왕지렁이의 내부가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얼어간다?'

두꺼운 외피에서 시작해, 손발을 얼려버릴 정도의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지렁이의 몸이 점점 느려지며 고통에 찬 괴성을 연신 내뱉는다.

쿠워어어워워-

'이러다 나까지 얼어붙겠는데?'

나는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가는 왕지렁이를 얼려버리는 냉기에 똑같이 당할 수 있겠단 생각에 계획을 변경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리고 판단을 내린 순간.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나를 감싸고 있던 거미줄을 제거하며, 발끝에 영력을 뭉쳐 전력을 다해 지렁이의 내부를 공격했다.

콰앙!!

쿠어워워어-

그 순간, 빠르게 위로 솟구치던 왕지렁이가 움찔하며 몸을 비트는 게 느껴졌다.

'지금!'

그리고 거인의 발걸음에 적중당한 외피가 다른 곳과 달리 흐물거리는 게 보이자.

촤아아악-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광선검을 꺼내 최대 출력으로 갈라버렸다.

+++

쿠워워어워-

고통에 찬 괴성이 대지를 흔든다.

냉기의 침식으로 인해 광선검에 당한 왕지렁이의 피부가 터져나갔다.

잘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깨져나가듯 터져버렸다.

나는 광선검을 재빨리 삼키고 벌어진 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지렁이에게서 탈출과 동시에 호흡을 멈춘 채로 질퍽한 흙으로 이루어진 땅속을 두더지처럼 파기 시작했다.

'지둔술이라도 있었다면...'

땅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지둔술(地遁術).

아쉽게도 그것을 익히지 못해, 손으로 흙을 파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 거미들을 불러낼까 생각했지만, 거미들이 아무리 땅을 잘 파도 크기의 한계 때문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생각을 접었다.

그나마 왕지렁이들이 요동치며 이곳저곳에 통로와 공간이 생겨나 있어서, 이동 자체가 크게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냉기를 피해 얼마나 전진했을까?

'이런!'

무시무시한 냉기를 품은 기운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흙의 방해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쾌속하게 떨어져 내리며 일직선상에 놓인 모든 것을 관통과 동시에 얼려버렸다.

'저게 왕지렁이를 그렇게 만든 거구나!'

나는 그것을 막으려 하다간, 지렁이 꼴이 된다는 걸 직감했다.

아니, 지렁이는 냉기에 저항하기라도 했지. 아마 나는 그대로 얼어버릴 게 분명했다.

피하려 해도 냉기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나는 즉시 양손에 각각 음과 양의 기운을 모아 태극을 만들었다.

'지금 내가 만들 대적점으론 대항이 불가하다. 비껴가게 해야 해.'

그리고는 감각을 극도로 곤두세우며 냉기가 근접 하길 기다렸다가.

챙-

태극을 최대한 몸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회전력을 거는 것과 동시에 냉기의 각도를 꺾기 위해 태극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냉기의 측면을 때렸다.

파사삿- 펑-

그러자 대극점으로 만들어낸 태극 원형이 한순간에 얼어붙으며 조각으로 터져나갔다.

동시에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던 냉기가 방향을 크게 틀며, 나를 피해 바닥 깊숙이 쏘아져 들어갔다.

'뭔가 했더니 갈대였어?'

내가 머무는 자리의 바로 앞까지 얼어붙은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위협적이던 게 법기가 아닌 겨우 갈대였다니.

'도대체 누가 여길 공격하는 거지?'

당장이라도 지표 밖으로 나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진 않았다.

아직 나를 잡으러 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만약 자학 일행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힘겹게 연출한 상황이 말짱 도루묵이 돼버리는 것이니까.

나는 혹시라도 대적점을 사용한 흔적이 드러날까 봐 몸을 사리며, 땅속 깊이 숨어 들어가기 위해 움직였다.

다행이라면, 사방에서 왕지렁이들이 요동치며 파동을 남발했기에, 내 존재가 드러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보였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사방천지에 천둥처럼 울렸다.

-금파란! 살아있다면 작은 신호라도 보내라!! 너를 구하러 왔다!! 나 잔비가 너를 구하러 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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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남이분족(南理鼢族)

영력을 실은 목소리는 마치 옆에서 외친 것처럼 귀에 와서 박혔다.

'잔비?'

잔비라는 이름에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명.

전여풍을 만나러 가던 중 용수산맥 근처 호수에서 만난 사내였다.

기습공격 후 장난인 척 얼버무렸던 사내.

'그자가 왜? 설마? 벌써 나를 잡으러?'

시간상으로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상황상 나를 잡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예상이 틀렸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학이 됐든 잔비가 됐든,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조금이라도 지체하다간 탈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판단에 곧장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쩌저정-

곳곳이 얼어붙으며 왕지렁이들은 더욱 사납게 날뛰었고, 위험한 냉기가 죽음의 덫처럼 다가왔지만, 빠른 판단으로 회피해 나갔다.

쿠우어워워-

그러다 왕지렁이가 너무 가깝게 다가오면, 황급히 기운을 갈무리한 채, 죽은 생물처럼 그저 지나가 주기만을 기다렸다.

스르륵-

다행히 직접적인 공격은 지표 위에서만 이뤄져서인지, 몇몇 지렁이들이 스쳐 지나가며 살기(殺氣)를 내비쳤지만 나를 잡아먹으려고 시도하진 않았다.

그들은 존재감이 없는 나보다는 위에서 냉기 갈대를 쏘아 보내는 상대를 우선하여 인식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그렇게 꽤 깊게 이동한 나는 어느 정도 바닥에 닿았다고 여길 때쯤 방향을 틀어, 자학 일행과 헤어진 장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움직였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했던가?

콰앙!!

콰광!!

냉기 갈대뿐 아니라 또 다른 공격들이 추가로 모암대지 곳곳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잠에서 깨어난 왕지렁이의 수가 급증하면서, 더는 움직이는 게 위험해질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무식한...'

좀 전처럼 죽은 듯 지렁이의 관심을 벗어날 순 있겠으나, 너무 많은 지렁이가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자, 압사의 위험이 늘어나고 만 것이다.

나는 훨씬 느리게, 하지만 안전에 힘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실종된 나를 찾으려는 행위보다는, 마치 죽이려는 행동에 가까운 짓을 하는 잔비 때문에 헛웃음을 흘리면서 말이다.

'누가 있다!'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황급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명안을 발동하자, 거무스레한 생물이 왕지렁이가 지나가고 남은 공간 한쪽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나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즉시 광선검을 꺼내 손에 쥔 채 칼날은 만들지 않고, 시선만 주었다.

상대가 괴수이든 무엇이든, 이곳에서의 전투는 너무 불리한 상황.

무작정 칼부터 휘두르는 건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었으니까.

'누구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자신에게 시선을 준 채 가만히 대기하자, 상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두더지? 아!'

가까이 다가온 생명체는 1미터가량 크기의 두더지였다.

다만 사람처럼 날렵한 몸을 지녔고, 생김새도 인간과 흡사해, 두더지보다는 두더지 인간에 가까웠다.

지하에서 생활하는 수많은 땅의 일족 중 하나인 남이분족(南理鼢族).

고대에 땅의 일족이 모여 살던 곳에서 남쪽을 다스리던 종족이라 알려진 이들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들은...'

놈은 내 근처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위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가, 말을 걸었다.

"용족 놈들에게 쫓기고 있나?"

말과 동시에 두더지의 눈이 빨갛게 변한다.

그것은 생명체의 호흡과 피부온도의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으로, 전투를 비롯한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거짓말을 판단할 때도.

나 역시, 폭음이 끊이지 않는 위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두더지를 보며 말했다.

"그래. 쫓기고 있다."

"왜인지 물어도 될까?"

"그들의 소중한 것을 파괴해, 나를 잡으려는 거다."

두더지는 나를 위아래로 몇 번이나 훑다가 질문을 이었다.

"소중한 것? 그게 뭔지 물어도 될까?"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쩌저정-

반문으로 상대의 대답을 피하려던 나는 서 있던 장소가 냉기에 침식당하려 하자, 급히 몸을 피했다.

내가 계속 이동하듯, 잔비 역시 활동 범위를 넓히며, 다른 이들과 함께 쉬지 않고 모암지대를 헤집고 있었다.

"흐음. 왜 말해줘야 하지?"

나는 당장이라도 빠르게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빨간 눈으로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두더지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는 최소한 나보다 윗줄.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위쪽에서 이상을 눈치챌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어떻게든 말로 풀고 넘어가야 했다.

"아차, 오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군. 난 널 방해할 생각이 없다. 용족은 우리의 숙적. 찢어 죽일 놈들이지. 그런 것들을 피해 달아나는 널 보고 관심이 생겼을 뿐이다."

'역시. 용족을 저주하는구나.'

남이분족, 그러니까 두더지들은 태생적으로 용족을 싫어했다. 

역사를 풀어놓기엔 너무 긴 얘기였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학살의 역사였다.

두더지의 심장.

그것이 10단에 이르기 전 7단 이상의 용족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약의 재료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두더지는 바들바들 떨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얘기해줄 순 없나? 그대가 파괴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고심하는 척하는 시간도 아까웠기에, 바로 대답했다.

"그들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건물을 파괴했다."

"시... 심장?"

"그래. 대답이 됐나?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믿겠다. 그럼 이만."

심장이라는 단어를 반복해 중얼거리는 두더지.

나는 그런 그를 지나치며 냉기의 침식을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두더지의 한마디 때문에.

"우리 마을로 안내하겠다. 그곳이라면 안전하다. 내가 도와줘도 괜찮겠나?"

+++

'이런 곳에 통로가 있다니.'

모암대지 바닥으로 나를 안내한 두더지는 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질퍽한 흙이 아닌 단단한 바위 같은 곳이었는데, 놀랍게도 두더지의 체액이 닿자 순두부처럼 물컹하게 변했다.

그곳을 통과한 두더지는 꼬불꼬불한 통로를 통과했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공동으로 나를 이끌었다.

공동은 말이 공동이지, 거대한 지하세계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하늘대신 종유석이 박힌 천장이 아니었다면 정말 땅속이라는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종유석 사이사이 박힌 발광성 때문에, 어둡지만 사물을 분리하는데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이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다. 용족 놈들은 절대 올 수 없는 곳이다. 머물다가 떠나면 된다."

"왜 날 돕는 거지? 내가 용족 놈들의 소중한 걸 파괴했기에?"

"그래. 적의 적은 친구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했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면 좋겠다."

두더지는 마을을 안내해주겠다며 앞장섰고, 나는 그를 뒤따르면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두더지를 따라온 이유?

당연히 잔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잔비를 포함한 다른 용족 수사들.

그들은 내가 실종된 장소뿐 아니라 모암대지 전역을 들쑤시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점점 도망이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 두더지가 손을 내밀어 줬기에 냉큼 잡은 것이었다.

물론 용족을 증오하는 두더지의 마을로 가는 게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세상에 위험 없는 이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이미 은연중에 인족 공법인 대적점을 운용하며 공법의 기운을 일부러 흘리고 있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게 거미를 소환한 후, 옷 속에서 피부위로 거미줄을 뒤덮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내가 가진 용족으로서의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야수화만 사용하지 않으면 들킬 일은 없다.'

두더지의 태도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그런데 어쩌다 인족이 그놈들에게 잡혀간 거지? 그놈들은 개똥 같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서 인족 따위를 자신들의 땅에 들이지 않을 텐데?"

멀리 독특한 향기를 내뿜는 나무들 사이로, 굴처럼 생긴 집들이 곳곳에 보인다.

두더지는 곧장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나는 태연하게 주변의 집과 나무들을 구경하며 입을 열었다.

"모른다. 깨어나 보니 그들이 사는 곳이었으니까."

여전히 빨간 눈으로 나를 보는 두더지.

"짐작 가는 것도 없나?"

"짐작이라, 하나 있긴 있군."

나는 가매초를 비롯한 몇 가지 지식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들도.'

"나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 중 구하기 어려운 몇 가지를 쉽게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가매초 같은 것."

"가매초?"

고개를 갸웃하는 두더지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답했다. 

"가매초를 모르는가? 흠. 다른 이름으로, 그래 늪지의 새벽꽃이라 불리기도 하지."

"늪지의 새벽꽃!!"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두더지가 놀라며 나를 쳐다본다.

늪지의 새벽꽃, 다른 이름은 가매초.

용족에겐 초반에 잠깐 사용하는 재료에 지나지 않지만, 남이분족을 포함한 땅의 일족들에겐 매우 중요한 자원.

"정말 늪지의 새벽꽃을 구하는 방법을 안단 말인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는가?"

그 빨간 눈으로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으면서?

내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자, 두더지가 급히 옆으로 붙었다.

"정말인가?!"

아주 오래전, 

땅의 일족이 원래의 땅에 살던 때엔 가매초를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새벽에 잠깐 모습을 확인하는 건 다른 종족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고, 땅의 일족은 언제나 그것을 발견하고 채취할 수 있었다.

가매초는 땅의 일족이 주식으로 삼으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 꾸준히 섭취해야 하는 식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땅에서 쫓겨 뿔뿔이 흩어지면서 가매초를 식별하는 능력을 포함해 몇몇 능력이 퇴화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주식이 아닌, 특식.

그것도 귀하게 얻어내는 수도자원이 되고 만 것이다.

대부분의 남이분족이 늪지 근처에 살아가는 이유가 여전히 가매초를 귀히 여기고 조금이라도 더 구하려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와 당장 족장님을 뵈러 가자!"

"그대 거처에서 잠시 쉬다가는 게 아니었나?"

"아니다! 아니야! 만약 정말 늪지의 새벽꽃을 쉽게 채취할 방법을 그대가 안다면!"

"안다면?"

두더지는 호흡이 약간 상기된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을 살 것이다!"

+++

나는 흥분한 두더지를 진정시키고, 족장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정말 대가 없이 우리에게 알려주겠다고?"

"물론. 그대도 대가 없이 나를 구해주지 않았는가? 상부상조한다고 생각하지."

대가?

과연 대가를 받아낼 수 있을까? 두더지들이 용족을 증오한다고 해서, 인족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인족의 욕심은 모든 종족 중 으뜸이라 평가받는 곳이 중천.

실제로 '혈제'를 치른다고 죄 없는 생명을 수만 명씩 몰살하는 행위를 가장 많이 하는 종족이 인족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평가는 '인족은 탐욕적이다' 였다.

그래서 영수족 중에서 인족을 좋게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내가 종족 전체가 욕심낼만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보나 마나 쓱싹이지.'

내가 가매초에 대한 정보를 꺼낸 건. 두더지들이 나에 대해 호의를 가지길 바라서였고, 나를 건들지 않을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쓸모가 있는 자는 죽는 법이 없으니까.

게다가 두더지를 따라오기 전,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 종족은 수많은 남이분족 중에서 매우 소규모 생활을 하는 이들이었다.

족장이 겨우 9단에 오른, 아직 원영기에도 오르지 못한 수준이었고, 대부분이 어린 두더지들이 주축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겐 가매초의 정보가 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나를 강제해 내 머릿속의 정보를 빼낼 실력도 없었고 말이다.

'상황은 내가 주도해야 한다.'

잔비를 보내 본격적으로 나를 찾기 시작했다면, 그 상황이 얼마만큼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일.

나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무기가 필요했다.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계획에 없었지만, 오게 된 이상 누군가에 의해 끌려다닐 순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만약, 아니. 우선 족장님을 뵙고 말하지. 가자."

잠시 후, 마을 중심에 위치한 굴집에 도착하자, 함께 온 두더지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두더지가 나를 반겼다.

짧은 인사와 소개가 오고 간 후, 족장 역시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인가! 늪지의 새벽꽃을 쉽게 구하는 방법을 안다고?!"

"그렇습니다. 족장님. 원하신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친구가 용족 놈들로부터 저를 구해줬으니, 저 역시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경사가 있다니!! 가슴에 실은 운명! 네가 이자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족인들 모두에게 소개하거라!"

족장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소릴 질렀다.

"나! 바람에 실린 하늘이 말한다! 앞으로 우리는 이자, 금파란을 분족의 형제로 여기겠다!"

+++

"정식으로 소개하겠다. 가슴에 실은 운명이다. 가실운이라 부르면 된다."

가실운은 나에게 족인들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준 후, 족장의 거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처로 안내했다.

그곳은 다섯 개의 거처가 빙 둘러있는 곳의 중심이었는데, 딱히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아도 도망가지 못하게 둘러싼 형태였다.

내가 주변 굴집들을 둘러보자, 가실운이 급하게 말했다.

"이상한 생각할 필요 없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니까."

"지키기 위해서?"

"족인들 중 인족을 처음 보는 이들도 많다. 그들이 호기심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보호하려는 거다."

거짓처럼 느껴지진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거처 내부를 구경했다.

그곳은 5평 정도의 좁은 굴집으로 인간들이 사용할만한 집기류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 한쪽에 푹신한 나뭇잎이 쌓여있었는데, 그것을 제외하곤 정말 텅 빈 곳이었다.

두더지에 대해선 알지만, 그들의 생활상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터라,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게 있는데..."

가실운은 족장의 명령 때문인지, 사소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대화가 끝나갈 무렵.

가실운이 더 묻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을 때, 나는 거처 밖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별나무."

"별나무? 아! 총총나무를 말하나 보군."

"그래, 총총나무. 혹시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저것을 사용해도 될까?"

내 질문에 이해할 수 없단 듯 고개를 갸웃하던 가실운이 말했다.

"물론이다. 마을 근처 어딜 가나 있는 것이 총총나무다. 허락을 구할 필요 없다. 전부 사용해도 상관없다."

"전부? 정말인가?"

"형제에게 빈말할 이유가 없다."

총총나무.

인족들이 부르는 이름은 별나무.

인족의 축기기 수사들이 결단기에 오르기 전까지 사용하는 단약 중 가장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단약. 성축단(星築丹).

그런 성축단의 핵심 재료가 별나무였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다. 가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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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늪지의 새벽꽃

가실운이 잠시 후 보자는 말과 함께 떠난 뒤, 

나는 굴집 입구에 진법을 설치했다.

대단한 건 아니었고, 겨우 시야만 가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가림막 수준의 보호장막 이었다.

두더지들은 사회화가 덜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습성을 타고난 건지, 거처에 문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상관없다고 했으니 이건 됐고, 그다음은?'

문을 만든 후, 굴집 밖으로 나가 별나무를 베어왔다.

그것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침대를 만들고, 탁자도 하나 제작했다.

인족으로 보이기 위한 눈가림용이자, 실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별나무로 침대를 만들다니... 참나.'

인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별나무가 이곳에선 흔한 잡초 취급을 받았다.

아마 별나무의 가치를 알았다면 그것을 이용해 무역이라도 했을 텐데, 그 정도의 지식조차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일 수도 있었다.

'하긴, 인족들이 이걸 알았다면... 이들은 이미 멸족했겠지.'

잠시 후, 간단한 가구를 만든 나는 가실운을 찾아가 마을 곳곳을 구경했다.

"정리가 끝나고 부른다길래 오래 걸릴 줄 알았다."

"가진 게 없으니, 정리할 게 없더군. 그럼 자세히 설명 좀 해주겠나?"

두더지들이 살아가는 지하세계는 그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장소가 존재했다.

마을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다양한 나무들의 군락지가 숲처럼 조성돼있었고, 남쪽으로는 바닥이 비치는 투명한 호수가 존재했다.

동쪽은 질퍽한 흙과 암석들로 이루어진 끝없는 통로들이 미로처럼 엮여있었고, 서쪽은 특색 없는 공간이 계속되다가 늪지나 모암대지로 향하는 통로로 이어졌다.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존재하다니, 정말 신기하네."

기둥 하나 없는 공간이 무너지지 않는 것에 신기함을 느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가실운은 그것이 질문이라 오해했는지,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영토(靈土) 때문이다."

"영토? 설마 이곳이 영토로 이루어져 있다고?"

영토는 순수한 영기를 품은 흙.

영석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곳에 사용되는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수도 자원이었다.

영석(靈石).

영토(靈土).

영천수(靈泉水).

위 세 가지는 수도 자원의 시발점이자, 근간이 되는 물건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지하 공간이 영토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곳에 들어선 순간 느꼈을 터.

생명의 샘에 들어갔을 때처럼 진한 영기를 느꼈어야 정상이다.

가실운은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는 듯, 뭉툭한 손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반짝이는 돌이 보이나? 저것들 주위로 작은 알갱이들이 있다. 그것이 영토가 뭉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분족은 그것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자리 잡았다."

나는 가실운의 설명에 명안을 발동했다.

최대한 안력을 끌어올리자 천장 곳곳에 박힌 자갈 같은 알갱이가 보였다.

'영토가 강한 압력에 돌처럼 뭉친 것이구나.'

혹자는 영토가 극도로 압축된 게 영석이란 말을 하는데,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영석은 순수한 영기가 인력에 의해 뭉치며 수정체로 변한 것을 가리켰다.

영토는 그것과는 전혀 별개로, 흙 자체에 영기가 농축되며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흙이 아무리 압축되고 뭉쳐도, 절대 영석이 될 수는 없었다.

"저 돌이 어떻게 생기는지 아나?"

"설명해주면 고맙겠군."

"우리가 지나온 모암대지의 토룡족. 그들의 몸에서 나온 분변토가 저렇게 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렁이 똥이 영토가 된다는 말.

나는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지렁이의 습성을 떠올려보다가, 납득하고 말았다.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수도자가 영기를 받아들여 원단에 저장하듯. 지렁이는 영기를 흙에 저장하는 듯했다.

흙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자, 이것으로 끝이다. 동쪽의 미로는 가지 않길 바란다. 그곳은 각종 벌레들의 영역 다툼이 심하다. 마을에서 가끔 보이는 것들도 전부 그곳에서 도망쳐 온 것들이다."

두더지들은 영충이든 괴충이든 구분하지 않고 그냥 살아갔다. 

직접적인 피해를 주면 그때서야 박멸하거나 내쫓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어느 곳에 자리를 잡든 내버려 두었다.

가실운의 말로는 몇몇 벌레들이 피로회복과 영력을 보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생활의 지혜인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지하세계에 살면서 그들 나름대로 지혜를 터득한 것이었다.

가실운의 설명에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손가락 위로 거미 한 마리를 불러낸 후 말했다.

"알겠다. 조심하지. 그렇다면 내 영충도 마을에서 활동하게 해도 되겠나?"

"물론.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배고픔에 지쳐 힘이 없는 거미를 대수롭지 않게 보던 가실운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주 어릴 적 들은 적이 있다. 인족들은 스스로에 자신이 없어, 종속의 수를 늘리길 좋아한다고. 너도 그런 경우인가?"

스스로에 자신이 없다는 표현보다는, 여러 가지 수단을 준비하려는 자세가 더 알맞은 표현.

하지만 가실운의 말대로 인족을 제외한 다른 영수족은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더 주력하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땐, 인족의 행태가 나약하게 비칠 수도 있었다.

발톱이나 가죽같이, 타고난 것이 다르기에 생기는 오해였지만, 굳이 대신 변명해주진 않았다.

나는 대답을 듣고 싶다는 듯 눈을 빤히 바라보는 가실운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다. 이들은 내 가족이다. 가족을 도구 취급하는 말은 불편하군."

"아! 미안하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좋다. 그 작은 영충도 가족이라고 여기다니... 네가 진실하였으면 좋겠다."

가실운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처음으로 눈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딱딱한 말투가, 조금은 정감있게 변한 듯싶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마주 웃으며 말했다.

손가락 세 개를 펴며, 그 위로 거미들을 소환한 채로.

"아 참,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다."

"..."

+++

두더지 마을의 생활은 금세 적응되었다.

가슴에 실은 운명, 가실운이 적극적으로 도와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족에게 내가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큰 부족에서 떨어져나온 이곳의 분족은 지식이 너무 얕았다.

도서관은커녕, 각종 옥간이나 기억 저장 장치를 이용해 전해지는 종족 특유의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나중에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뜨끔거렸다.

-왜냐고? 우린 원래 이곳 고금 대륙이 아닌, 대향(大香) 대륙에 모여 살았다. 어느 날 용족들의 대대적인 습격으로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고대에 땅의 일족이 모여 살던 곳에서 쫓겨난 남이분족은 수많은 대륙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흩어짐이 신호라도 된 듯 수많은 용족의 사냥이 시작되었고, 도망에 도망을 거듭했다.

그렇게 점점 규모가 작아지며 더 작게 소규모로 흩어진 분족.

그런 분족 중에서 소수가 자리 잡아 발전한 게, 지금 이곳의 분족이란 설명이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과 도망 그리고 도망.

그 와중에 무엇을 챙길 수 있었겠는가?

특히나 고위 수사가 전혀 없는 상태였기에 머릿속에 든 지식도 부족했다.

또한 부족 전체의 힘이 너무 약하다 보니, 쉽사리 무역을 할 수도 없었고, 가진 게 너무 없다 보니 발전을 이룰 수도 없었다.

그렇게 퇴보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상황을 이겨내며 조금씩 규모를 키워가던 분족에 내가 온 것이다.

그들의 염원이나 다름없는 새벽꽃 채집 방법을 들고서 말이다.

"자, 당장은 용족 놈들 때문에 늪지에 갈 수 없으니, 이론을 알려주겠다. 다들 저번 시간에 설명해준 명충을 기억하겠지?"

나는 족장의 부탁으로, 발이 빠른 이들을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매초 관련 수업이 끝나면, 나름 똑똑하다는 녀석들을 따로 모아 늪지에서 구할 수 있는 각종 약초에 대해 알려주었다.

용족 시련의 탑처럼 지식을 주입할 수단도 없었고, 영력을 이용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저장 장치도 없는 상황.

일일이 습성과 특성을 알려주며 교육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만 지식이 세대를 이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분족의 고유 특성인지.

대부분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행동은 빠르고 우직했는데,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은 매우 떨어졌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할당한 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수업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거처로 돌아와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내다가.

뽈뽈뽈-

채집활동을 끝내고 거미들이 돌아오면 그들에게 밥을 주었다.

"미안하지만 오늘도 가매초는 없다. 대신 별나무로 맛있게 만들었으니까... 한번 먹어봐."

뽈- 뽈-

가매초 특식 제조 방법을 응용해 만든 별나무 특식.

거미 세 마리는 냄새를 킁킁 맡는 것처럼 특식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발랑 뒤집히더니 발을 흔들었다.

'또 시작이네.'

적극적으로 싫다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모암지대를 비롯한 늪지 근처는 여전히 용족들이 수색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매초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방도가 없었고, 영석도 구할 방법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자고있는 이 녀석들에게나 먹여야지."

나는 발랑 뒤집힌 채 시위하는 거미들에게 보란 듯이, 별나무 특식을 집어 품속에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거미 세 마리가 동시에 발딱 일어서더니, 번개처럼 몸을 타고 올라와 특식을 삼켜버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볼이 빵빵해진 거미들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그들도 오래 머물지는 않을 테니. 빠른 시간 안에 너희들이 좋아하는걸 잔뜩 만들어주마."

잠시 후, 거미들이 식곤증을 이기지 못해 손가락으로 들어가자, 광선검을 꺼내며 마을 어귀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서걱-스걱-

눈에 보이는 족족 별나무를 베어 공간대에 담았다.

일반 나무와 비교한다면 그 강도가 바위보다 단단하다 표현할 수 있는 별나무.

하지만 광선검 앞에선 두부처럼 썰려 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자원을 수집하고, 두더지들을 교육하며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렀다.

+++

고금 대륙에서도 척박한 환경이란 인식이 강한 모암대지.

그런 모암대지에 발붙이고 살던 남이분족의 족장 바람에 실린 하늘은 최근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가 소수의 부족 사람들과 함께 아등바등 버티며 모암대지 지하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모암대지와 연결된 늪지에서 늪지의 새벽꽃을 얻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 수량이라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부족인들이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족.

보물보다 빛나는 보물 같은 사내.

그로 인해 수급할 수 있는 늪지의 새벽꽃이 몇 배나 늘어나며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번에 채집을 나간 녀석들이 세 송이나 가져왔다고?"

"그렇습니다. 족장님."

"아아! 하늘이 우리 분족을 져버리지 않으신 거야. 한 달에 세 송이도 아닌, 하루 만에 세 송이라니."

바람에 실린 하늘, 바실하가 감격한 얼굴로 환희에 젖자, 보고를 위해 방문했던 두더지가 설명을 이었다.

"그것도 용족 놈들만 아니면 더 늘어날 듯싶습니다."

"용족? 하긴 그 찢어 죽일 것들이 아직도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보물 인족의 교육으로 최근 들어 새벽꽃의 채집률이 급상승하는 중.

하지만 부족인들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쉽사리 채집활동에 전념할 수 없었다.

보물 인족을 잡기 위해 나타난 용족 놈들.

그놈들이 아직까지 모암대지 곳곳을 들쑤시며 수색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그들의 이동 경로에 늪지가 있었기에, 눈치를 보아가며 발 빠른 몇 명만 활동하는 중이었다.

주위에 배회하는 용족 중, 족장의 수행과 비슷한 자만 세 명.

새벽꽃을 욕심내다가 심장을 적출당할 가능성이 너무 컸기에 극도로 조심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족장이 우겨서 가능한 것이었다.

-족장님! 안 됩니다! 그러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까?!

-안 걸린다니까. 늪지 안에 숨어있으면 절대 들킬 일 없다. 날 믿어. 우리 분족을 믿어.

보물 인족은 용족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채집에 나서는 건 위험하다 말렸다.

하지만 당장 새벽꽃을 구할 지식을 얻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망할 용족놈들!"

으드득-

바실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두고 보자..."

용족 놈들이 미치게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로 인해 보물 인족이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지금이야 그들이 두려워 숨는 거지만, 훗날 언젠가는 설욕을 할 수 있을 거라 여기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 보물은 어딨지?"

"아이들에게 약초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성령꽃이라는걸 가르쳤다던데, 이번엔 다른 걸 알려주나 보군."

"그렇습니다. 성령꽃과 마찬가지로 용족 놈들이 귀히 여기는 것이라 합니다. 해서, 그놈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본격적으로 채집을 시작할 것입니다. 놈들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라도 내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보물 인족이 교육을 하고 있을 건물로 향하던 바실하.

그는 문득 마을이 예전과 다르게 휑함을 느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군. 원래 이곳이 이렇게 훤했나? 무언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족장의 의문에 보고를 하던 두더지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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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태공(太蚣)?

보고를 하는 수하의 말에 바실하는 다시금 마을 전경을 눈에 담았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보물이 마을의 총총나무를 전부 베어버렸다?"

"마을뿐 아니라... 최근엔 북쪽 숲 터의 나무들까지 베어내고 있다고..."

듣고 보니 정말 마을이 휑해 보였다.

허리까지 자란 각종 수풀과 한데 어울려 생동감을 전해주던 나무들.

그런 나무가 없으니 왠지 마을이 을씨년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만 베라고 할까요?"

"아니다. 오히려 잘된 거지."

"??"

수하가 이해할 수 없단 듯 바라보자, 바실하는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많은걸 알진 못하지만.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 있다. 받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지."

"아..."

"그가 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을 것 같나? 아마 용족 놈들이 떠나가면 그도 이곳에서 떠나려 하겠지. 그때 그를 잡아둘 구실이 필요하다. 그러니 내버려 두도록."

보물 인족이 떠나지 못하게 강제하는 방법도 있었다.

무력을 앞세운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지식이란 것이, 혹은 지혜라는 것이 강요로 받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오히려 해가 되는 지식을 전할지도 몰랐다.

바실하는 부족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7단을 넘어 심장에 단(丹)을 만든 인물. 하지만 도망치기 전 살던 곳에서는 시키는 일만 하던 평범한 부족인 중 하나였다.

그랬기에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보물 인족을 대함에 진심을 보인다면, 그 역시 진심으로 보답하리라 여겼다.

"그래, 다르지만 다르지 않지."

"예? 그게 무슨?"

"아니다. 가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여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식의 부족함은 마음으로 채우면 될 뿐이었다.

+++

다른 굴집과 달리 10여 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이의 장소.

교육이 진행되는 도중 도착한 족장은 부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한쪽에 서서 수업을 참관했다.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란 느낌보다는 마을 이장 같은 분위기였다.

'오늘도 왔네.'

다만 분위기는 이장이었지만, 자신의 부족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건 대화를 몇 마디만 나눠도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부르시면 될 것을, 어쩐 일로 이곳까지?"

나는 수업을 끝내고 족장에게 다가갔다.

그는 흐뭇한 미소로 날보다가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요즘 그댈 보는 낙으로 살지. 불편한 건 없나?"

"딱히 없습니다."

"그래. 혹여나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주면 좋겠군."

"아, 용족 놈들은 여전히 위에 상주하고 있습니까?"

용족이란 단어에 바실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렇네. 찢어 죽일 놈들."

"혹 그들이 물러가면 저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이번엔 바실하의 표정에 당혹이 비친다.

으레 지도자라 함은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게 좋았다. 감정적으로 판단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하지만 바실하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의 표정에 왜? 라는 질문이 담겨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들이 떠나면 저도 가매초를 채집하려고 말입니다."

"아! 그 말이었나? 난 또... 그대가 떠나려고 그런 줄 알았다."

'떠나긴 떠나야지. 이곳은 바깥보다 영기의 밀도가 떨어지니까.'

영토로 인해 평균 수준의 영기를 품은 지하세계.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련을 하기 위해선 영기 밀도가 짙은 산맥으로 가는 게 좋았다.

고위 수사들이 괜히 산맥 깊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게 아니었다.

"떠나다니요. 아직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떠난다고 하더라도 분족에게 필요한 지식을 다 전하고 갈 겁니다. 분족은 제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하하, 그런가? 그럼 그럼. 가슴에 실은 운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간 건 맞지."

바실하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용족이 떠나면 바로 알려줄 것을 약속했다.

처음엔 이들이 가매초를 채집하러 간다길래 극구 말렸었다. 만에 하나 용족에게 들킨다면 한두 명 죽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모르는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들은 흙에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마치 카멜레온처럼 스스로를 보호했다.

게다가 익히지도 않은 지둔술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처럼 땅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것을 직접 목도한 뒤로는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대신 그 능력을 배워보려 애썼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그러고 보니 가슴에 실은 운명이 안 보이는군. 항상 그대와 함께 있던데?"

"동쪽 미로에 찾을 것이 있다고 갔습니다."

"아! 로로충(露露蟲)을 잡으러 갔나? 그럼 나중에 다시 봄세."

잠시 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기분 좋은 얼굴로 떠나가는 족장을 배웅했다.

'도대체 왜 온 거지?'

이런 식으로 툭 하면 방문해 쓸데없는 얘길 늘어놓다가 가는 족장.

그래서인지 족장 같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얼핏 보면 수다쟁이 풍광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생긴 것도 좀 비슷한 거 같긴 한데...'

스스로 잘생겼다고 말하는 풍광이 떠올랐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희는 잘 있으려나.'

문득 떠오르는 상념에 고개를 털어냈다.

+++

족장의 방문 이후.

거처로 돌아온 나는 미리 베어놓은 별나무를 꺼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별나무를 정제하는 일도 미룰 수 없었다.

"합!"

꺼낸 별나무를 허공에 띄우며 한 손을 가만히 가져간다.

그리고는 영력을 주입해 수분을 날림과 동시에 불순물을 제거했다.

슈르르-

그러자 1미터 남짓 크기로 잘려있던 별나무가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윽고 절반 이하까지 줄어들더니, 더는 불순물이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손가락을 튕겨, 두 손가락에 작은 불씨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하며 줄어든 별나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화르륵-

그 순간 손가락에서 시작한 불씨가 회오리치듯 별나무를 삼키더니 한순간에 나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합!"

그러길 잠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별나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불씨를 강하게 자극하자, 나무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며 크기가 더 줄어들었다.

"점점 속도가 붙네."

어느새 한 뼘 크기로 줄어든 별나무.

정제 과정을 거친 별나무는 당장 성축단을 만드는 데 사용해도 될 정도로 순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머지 재료를 구할 길이 없어, 지금은 그림에 떡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슈르르-

나는 쉬지 않고 별나무를 정제한 후, 완료된 재료는 공간팔찌 한쪽에 착실히 모아갔다.

그러길 한참.

뽈뽈뽈-

거처 안으로 거미 한 마리가 들어오더니 내 발끝에 올라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벌써 찾았구나."

그 모습에 정제 중이던 별나무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빠르게 이동하는 거미의 뒤를 쫓아 동쪽의 벌레들의 서식지로 이동했다.

가실운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족장의 말대로, 내가 분족의 마을에 함께한 뒤로 가실운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처음엔 다른 분족들의 호기심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였고, 그 뒤로는 내게서 지식을 하나라도 더 배워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가실운이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았던 건 바로 내 부탁 때문.

-가실운, 혹시 이렇게 생긴 벌레를 본 적 있나?

-안다. 태공(太蚣)이다.

-혹시 서식지를 알 수 있을까?

-알았다. 찾아주겠다.

태공.

팔뚝만 한 지네.

성체가 되어도 크게 위험하지 않은 생물 중 하나로 황춘단(黃春丹)이라는 단약의 핵심 재료였다.

용족 마을에서 만든 초진단이 다 떨어진 현재 내 상황에 가장 필요한 물건이자 크게 도움이 되는 단약.

쉽게 말해 3단을 넘어 4단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단약이었다.

그런 단약의 재료인 태공이 인근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가실운에게 그것을 찾아달라 부탁했었다.

"이곳은 정말 복잡하군."

뽈뽈뽈-

지금은 가실운과 함께 미로 동굴로 떠났던 거미의 뒤를 따르는 중이고 말이다.

이곳에선 전음부를 만들 재료조차 구할 수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거미를 활용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실타래처럼 복잡한 동굴 미로 속을 한참 동안 이동하자, 가실운을 만날 수 있었다.

"왔군. 저곳부터 안쪽으로 태공의 서식지다."

"고마워."

"잡는 것도 도와주면 되나?"

"아니, 그건 이놈들에게 시킬 거야."

가실운의 수행은 축기기 중기. 용족으로 치면 5단 수련성취를 달성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도와준다면 발이 빠른 태공을 잡는 건 정말 일도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거미들의 전투 경험을 쌓아주고 있던 나에겐 불필요한 도움이었다.

"이리 오거라."

고개를 끄덕인 후 한쪽으로 물러나 대기하는 가실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나는 거미 세 마리를 손바닥 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몇 가지 당부와 함께 손을 흩뿌려 거미들을 날려 보냈다.

"녹이는 건 금지다. 거미줄로 포획한 후 온전한 상태로 잡아 와야 한다. 이제 곧 가매초를 구할 수 있을 테니, 가장 성과가 좋은 녀석에겐 특식을 주겠다. 가라!"

슈슈슉-

사냥이 시작되었다.

+++

거미들이 사냥을 시작한 직후.

나는 가실운과 함께 미로 동굴을 빠져나온 뒤, 마을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남쪽에 자리한 청정 호수.

정확히는 호수 바닥을 조사하러 가는 중이었다.

"역시 말도 안 되게 깨끗해."

한참을 달려 호수에 도착한 나는 호수에 발은 담근 채 주변을 살펴보았다.

물고기는커녕 작은 물벌레도 없는 깨끗한 호수. 심지어 흔한 이끼나 물풀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생명의 샘처럼 말도 안 되는 영기 밀도를 지닌 영천수라면 설명되는 현상이었지만. 이곳은 영천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나는 무엇이 이상한지 모르겠다. 그곳은 원래 그랬다."

"가실운. 세상에 원래라는 것은 없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

호수가 깨끗하게 유지될만한 원인이 있다는 뜻.

나는 그 이유를 정화 능력을 갖춘 '어떤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찾았다!"

바로 '구름 이끼'라는 이명이 붙은 자갈이었다.

한참 동안 호수의 바닥을 조사하던 내 손엔 하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자갈이 들려있었다.

"역시 구름 이끼가 있었구나."

처음 청정 호수를 보았을 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가, 별나무를 쌓아가고 거미들이 재료들을 조금씩 모아오면서부터 관심을 가졌다.

이제 슬슬 단약을 제조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시기.

하지만 현재 나는 단약이나 선주를 만들 도구들을 전부 용족 거처에 놓고 온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도구를 직접 만들어야 했고, 구름 이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랬다.

구름 이끼는 연단 도구를 만들기 위한 재료.

그것도 흔하디흔한 재료가 아니라, 꽤 고급 재료에 속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자갈에 대해 궁금해하는 가실운에게 자갈의 사용처를 설명해준 후,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했다.

별나무와 마찬가지로 구름 이끼도 정제 과정을 거치면 콩알만 한 수준의 재료로 변하고 만다.

그렇다면 일반 냄비 수준의 그릇만 만들어도 어마어마한 양의 자갈이 필요하단 뜻.

"가실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좀 도와주지?"

"그러겠다."

잠시 후, 가실운이 합류하며 호수 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넓은 호수였기에, 며칠에 걸쳐 작업이 진행됐고, 이틀이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약초에 대해 배우던 학생들까지 합류해 도와주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온 것처럼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만! 이제 충분합니다! 다들 돌아가세요."

결국 내 목표치를 한참 넘어선 양을 모으고서야, 종료를 선언하고 자갈 채취를 멈출 수 있었다.

+++

나는 도움을 준 이들을 돌려보낸 후, 거처로 돌아와 자갈 정제작업을 바로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직전.

뽈뽈뽈-

거미 세 마리가 당당한 모습으로 거처 안으로 들어왔다.

"응?"

거처 안으로 들어온 거미들이 내 발등에 올라타 동시에 빙글빙글 돈다.

태공 사냥이 마무리됐단 신호.

"벌써?"

나는 기쁜 마음에 거미들을 낚아챈 후, 꺼내 놓았던 자갈을 공간대에 담고 미로 동굴로 빠르게 내달렸다.

한참 후, 도착한 곳엔 봉분처럼 볼록하게 쌓인 세 개의 태공 무더기가 있었다.

공격력 자체는 별로지만, 엄청난 이동속도로 잡기 까다로운 태공.

서식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사냥이 시작되면 사방으로 도망치고 흩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태공을 이토록 많이 잡았단 사실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들 수고했다."

거미들은 내 칭찬에 내게서 떨어져 나가더니, 자신들이 모아놓은 태공 무더기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어서 빨리 결과를 발표하란 듯 나를 향해 감정을 내비친다.

"알았다. 알았어."

역시, 경쟁 구도는 성장을 촉진시킨다.

나는 기분 좋게 걸어가 무더기를 하나씩 검사했다.

첫 번째 거미가 쌓은 무더기의 태공은 대체적으로 크기가 작았다. 하지만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양으로 치면 가장 많았다.

"잘했다."

내 칭찬에 항상 1등을 차지하는 거미가 제자리에서 휘리릭 회전한다.

1등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지, 기뻐하는 감정이 여실히 전해졌다.

"그럼 다음으로..."

두 번째 거미가 잡은 것들은 하나하나의 크기가 평균 이상으로 굵직하고 튼튼했다. 숫자가 적어 양으로 치면 첫 번째보다 성적이 떨어졌지만, 만약 상점에 판다면 훨씬 고가를 받을 수 있는 고품질만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마치 내 의도를 파악하고 선별해서 골라놓은 것처럼.

"정말 훌륭하다."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2등 거미가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거미는.

"..."

세 번째 거미가 어서 빨리 자신이 모은 태공을 평가해 달라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돈다.

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태공 무더기를 뒤적거리며 그것들의 상태를 파악했다.

그러다 믿기지 않아, 숨을 크게 내뱉었다.

"너... 도대체 이걸 어디서 잡은 거야?"

멀리서 볼 땐 태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대 지네 모습.

하지만 발이 짧고, 배에는 푸른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푸른 십자가 주위로는 푸른 반점이 유난히 눈에 띈다.

맹독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기를 알처럼 품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태공이 아닌, 청공(靑蚣).

"이게 왜 여기에..."

청공은 매우 특이한 습성이 하나 있었다.

이것들은 오직 영석만 먹고, 영석 광맥 근처에서만 살아가는 녀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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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도약을 위한 준비

빙글빙글-

빨리 결과를 발표하라며 채근대는 거미로 인해, 놀란 마음이 돌아왔다.

"그래, 우선 이게 먼저지. 좋다. 1등은 너다. 당장은 어렵지만, 가매초를 채집할 수 있게 되면 가장 먼저 특식을 주겠다. 그리고 2등은 너. 비록 양은 적지만 상태로 보나 품질로 보나 1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으니 너 역시 특식을 주마."

1등에 이어 2등 거미도 기쁨에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곧이어 3등 거미와 눈을 맞춘 나는 그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리며 말했다.

"양은 가장 적지만, 너는 특별한 걸 찾았으니, 그에 맞는 선물을 주겠다. 이것들을 어디서 잡았는지 기억하겠지?"

빙그르-

내 질문에 거미는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듯 회전하며 기쁨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당장 달려갈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세 무더기의 태공을 전부 공간팔찌에 담고 명령했다.

"안내하거라!"

잠시 후, 3등 거미를 필두로 두 마리의 거미가 뽈뽈뽈 달려가며,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쇄애액-

거미들은 달려가는 와중 벌레들이 나타나면 거미줄을 쏘아 동굴 벽에 고정시켜버렸다.

어떨 땐 벌레 무리를 피해 미로 동굴을 교묘히 돌아 이동했고, 어떤 것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설마 스스로 학습한 건가?'

그건 마치 동굴에 서식하는 벌레들의 습성을 미리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놀라는 사이, 이동은 쉬지 않고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공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흩어진 청공들이 머물던 장소.

"진짜 있구나!"

그곳에 푸른빛을 띠는 수정체. 영석으로 의심되는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매장량이 불분명한,

영석 광맥을 발견한 것이었다.

+++

금파란이 영석 광맥을 찾은 시점.

드넓은 모암대지 위에는 신경질적으로 표정을 구기는 한 사내가 떠 있었다.

더는 갈대밭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파헤쳐지고 훼손된 대지.

사내는 한동안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뒤에 나열해 있던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우린 최선을 다했다. 아니,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사내의 말에 금파란을 모암대지에 데려왔던 사내, 자학이 급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선배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는 저희가 직접 보았습니다. 첫날 이곳에 왔을 때부터 말입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그를 구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했다면..."

"아니. 얘길 들어보니 임무 대장으로서 현명한 선택을 한 거다. 너희들 수행으론 섣불리 나서지 않은 게 옳은 거지."

인상을 구기고 있던 사내, 잔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만약 자학이 한두 시간만 금파란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바뀌었을 테니 말이다.

"잔비. 돌아감세."

"그래, 진작 돌아갔어야 하는데, 잔비 그대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 족장님도 우릴 탓하진 않을걸세."

"경류 수사의 말이 맞네. 자네나 우리나 그동안 아끼던 단약까지 먹어가며 저 망할 지렁이들을 도륙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우린 할 일을 다 한걸세."

잔비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수사가 귀환을 재촉했다.

잔비도 알고 있었다.

사실 첫날 금파란의 흔적을 찾지 못한 순간, 임무는 종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동 어르신의 체면에 먹칠을 할까 봐, 어떻게든 사소한 흔적이라도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망할 놈. 이렇게 뒈질 거였으면서 그렇게 기고만장 콧대를 세운 건가."

잔비는 호수에서 만났던 금파란을 떠올리며 신나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후배들과 동급 수사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평소의 고상한 태도를 유지했다.

사실 잔비에겐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사정이 있었다.

바로 금파란의 공간대.

토룡이라 불리는 왕지렁이는 생명체를 천천히 녹여 먹는 습성을 가졌다. 하지만 공간대는 공간 법칙이 적용된 물건이라 의외로 부식과 충격에 강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지렁이를 잡았던 것이었다.

공간대 안에 있을, 선주를 만드는 비법을 꼭 얻고 싶었기 때문에.

'오동 어르신께서는 재능이라 말씀하시지만 절대 재능 하나로 그럴 순 없지. 분명 제사장인 아비에게 무언가 전해 받은 거였을 텐데.'

비법서든 아니면 법기이든 분명 선주를 만드는데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란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잔비, 돌아감세."

하지만 이젠 다 소용없는 의심이었다.

나중에 다시 찾는다면 모를까? 더는 모암대지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선주를 만드는 비법을 구하는 게 오동의 환심을 살 수 있는다고는 하나, 이 넓은 곳을 혼자 수색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

'아깝긴 하지만, 할 수 없지.'

이대로 잊어버리는 게 맞았다.

"그래 돌아가지. 다들 내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돌아가면 저과주라는 특별한 선주를 맛보여주겠네. 실망하지 않을 거야."

잔비의 말에 그와 마찬가지로 7단의 벽을 넘은 두 사내가 입가를 끌어올렸다.

"선주? 좋지. 그렇지 않아도 오동 어르신께 특별한걸 배우고 있다고 하더니. 이번 기회에 견문을 넓힐 수 있겠어."

잠시 후, 잔비를 선두로 두 명의 수사가 뒤를 따랐고, 지친 표정의 자학 일행도 말없이 그들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렇게 이동하길 한참.

모암대지를 벗어나 늪지를 지나칠 무렵, 경류라 불리던 사내가 앞서가던 잔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때 그것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때? 아! 그 분족?"

모암대지를 오가는 사이 발견한 두더지.

딱 두 번 발견됐지만, 기억이 안 날 리 없었다.

남이분족과 용족은 아주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먹이사슬 관계였으니 말이다.

잔비가 비행법기 아래 펼쳐진 늪지를 보며 반문하자, 경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몇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단 뜻일 텐데. 생각 있으면 정식으로 임무 등록하고 다시 오는 건 어떤가?"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데. 겨우 몇 마리 잡자고 움직이기엔... 별 소득이 없지." 

잔비가 고개를 젓자, 경류는 생각에 잠기다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예전 대향대륙 토벌로 인해, 아직 비축된 양이 많을 걸세. 상점가에서 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귀찮은 임무에 따라오려는 자가 있을까? 그것들을 잡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한번 숨으면 꽤 골치 아플 텐데?"

"하긴. 그 생각을 못 했네."

"웃기긴 하더군. 이제 막 4단에 오른 것들이 마치 우리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활동하는 게."

"그리 멍청하니 종족 전체가 대대적인 토벌을 당한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 하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수사의 참견으로 세 사람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신나게 웃었다.

다만 잔비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귀찮은 게 아니라 못 잡을 가능성도 크지.'

이들은 아주 쉽게 분족을 발견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건 정말 우연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족을 발견한 게 아니라, 새벽에 잠깐 모습을 드러낸 가매초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분족을 찾은 것이었다.

잡으려고 다가갔을 땐 이미 늪지 안으로 사라져버려 잘못 본 건가 하는 마음으로 지나쳤다.

그러던 것이 한 번 더 반복됐고, 그제야 늪지에 분족이 활동한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사방이 트인 늪지에서 분족을 잡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기에, 다들 본체만체 넘어간 것이었다.

제대로 분족을 잡기 위해선 거주지를 찾아야 하는데, 그건 정말 지난한 일이었다.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말이다.

뻔히 시간만 낭비하고 돈이 안 될 걸 아는데, 잔비는 그 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두르지, 시간을 낭비한 만큼, 하루라도 빨리 족장님을 뵈야겠으니."

대화가 사그라들 무렵, 용족 무리는 점점 속도를 내며 빠르게 늪지에서 멀어져갔다.

+++

좁은 미로 동굴 안.

동굴 입구에서 꽤 떨어져 있기에, 미로의 끝부분이라 예상되는 그곳에 거미들과 나는 중요한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거미들에게 주입 교육을 하고 있었다.

"너희들, 영석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그냥 먹어버리면 안 된다. 그걸 더 맛있게 만들어줄 테니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이곳에 모아야 한다. 알았지?"

거미들은 몇 번이고 반복된 교육에 지쳤는지, 듣는 체 마는 체하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뽈뽈뽈-

3등 거미를 따라와 영석 광맥을 발견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광맥의 규모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광맥은 그리 크지 않은 소규모였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광맥의 규모가 컸다면 외부로 흔적이 드러났을 테고,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 없었을 테니까.

그다음으로는 거미들의 교육이었다.

가매초 특식만큼은 아니지만, 별나무 특식에 비하면 훨씬 맛있는 것이 영석.

그런 영석을 체내에 보관한 채 옮기다 보면 그냥 소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거미들에게 신신당부하며 주입식 교육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럼 나도 움직여 볼까?"

그다음으로 거미들에게 영석 채굴을 명령한 나는 청공 사냥을 시작했다.

청공은 본능적으로 영석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찾아낸다. 현재 광맥에 닿아있는 동굴 일부분도 청공이 길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 상태.

만약 그대로 둔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영석의 양이 많아지고, 냄새를 맡은 더 많은 영충들이 몰려들지 몰랐다.

3등 거미가 영석 광맥을 발견한 건 정말 천운이라 말할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그렇게 낭비할 순 없었다. 절대로.

+++

족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청공 사냥에만 치중하길 사흘.

영석 광맥을 발견한 지 오 일이 지난 시점에 나는 다시 약초 교육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교육은 하루 만에 종료돼 버렸다.

"정말? 용족 놈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그렇다. 해서 족장님 명령 아래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전부 새벽꽃을 채취하러 움직인다."

"드디어 갔구나..."

"내가 이곳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나. 용족 놈들은 절대 이곳을 찾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애초에 토벌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남이분족이 정확히 어떻게 토벌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몇 번이나 옮긴 거주지가 발각됐다는 게 역사적 사실.

굳은 얼굴로 자신감에 찬 가실운의 말은 크게 신빙성이 있진 않았다.

"족장님이 그대에게 알리라더군. 나도 밖으로 가려 한다. 같이 가겠나?"

나는 용족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1차 채집 비법만 전수한 상태였다. 진짜 핵심 비법은 현재 나만 아는 상태.

처음엔 두더지들을 경계하는 마음에서 제한적인 정보만 알려준 것이고, 시간이 지나고는 그들이 무리할까 봐 알려주지 않았다.

용족이 뻔히 두 눈 뜨고 있는데, 가매초 가루를 뿌리면서 강제로 반응을 일으킨다는 건 '나 잡아 줍쇼~'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제한을 풀고, 핵심 비법을 알려줘야 할까?

아니면 당분간은 이대로 지낼까?

생각은 길어졌고, 판단은 어려웠다.

'보류하자.'

그리고 찾아온 고민의 결과는 잠시 보류였다.

현재 용족이 사라지면서 두더지들은 대놓고 가매초 채집에만 매달릴 터.

나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이곳의 분족에겐 변혁의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분족들이 인간들 같지는 않겠지만, 재화가 늘어나면 욕심이 가속화 될 수도 있는 일.

만약 지금 가매초 채집의 핵심 비법을 알려준다면 그 가속화에 불을 지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태도를 지켜보고 천천히 판단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직은 나갈 생각이 없나?"

내가 말이 없자, 가실운이 거듭 물었다.

나는 급히 상념을 지워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같이 가지. 안 그래도 조만간 폭발할 거 같았거든."

"무엇이 말인가?"

"있어 그런 게."

분족에게 가매초가 필요한 만큼 나도 절실했다.

요즘 거미들의 태도를 보면 점점 쌀쌀맞아지는 것이, 나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바로 가매초 특식 때문.

제때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 조만간 파업이라도 할 기세였다.

아니면 당장 영석을 횡령할지도 몰랐다.

물론 영혼으로 연결된 종속의 인으로 인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아직은 본능에 충실한 새끼들이라 어떻게 될지는 알수 없었다.

'빨리 특식을 만들어야지.'

폭발하기 전에 수습해야만 했다.

잠시 후, 가실운을 쫓아 밖으로 나온 나는 모암대지 전역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에 절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심하군."

"용족 놈들이 이렇다. 그놈들은 지독히 잔인하다."

모암대지에 살아가던 수많은 지렁이가 갈라지고 잘린 채 대지 곳곳에 누워있었다.

아직 땅속에서 활동하는 개체도 꽤 많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죽은 지렁이의 숫자만 해도 족히 수십은 넘은 것 같았다.

갈라지고 잘라졌기에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저쪽에 많이들 보이는군. 우리는 이쪽으로 갈까?"

나는 가실운을 따라 모암대지를 벗어난 후 늪지에 도착하자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아침 해가 뜨길 기다렸다가 첫 번째 가매초를 구하고, 본격적으로 채집을 시작했다.

"벌써 돌아가려는 건가?"

그렇게 꼬박 이틀을 채집에 전념하고는 마을로 돌아와 가매초 특식을 만들었고,

"여기 있다. 다들 노력한 대가다."

거미들에게 주먹만 한 특식 하나씩과 영석 가루를 첨가해 풍미를 엄청나게 끌어올린 또 다른 특식을 제공했다.

그런 후 거처로 복귀했고, 수북이 쌓여있는 태공을 정제하며 황춘단을 만들 준비에 전념했다.

화르륵-

거미들이 영석을 전부 채굴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최소한 3단 수행을 꽉꽉 채워, 4단에 오를 준비를 마칠 작정이었다.

"집중하자. 연단 도구도 만들고 다른 재료들도 정제하려면 할 일이 태산이다."

정제된 재료를 살 수 없다는 건 귀찮음을 떠나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화르륵-

어느새 조용해진 마을의 분위기와 달리 내 거처엔 열기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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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발동

이름과 달리 거무튀튀한 빛깔의 황춘단.

입안에 들어오자 솜사탕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가던 황춘단의 기운이 위장에 도착하기 전 사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황춘단에 농축돼있던 영기는 온몸에 퍼지기가 무섭게 십이경맥에 모였다가 기경팔맥으로 흩어져, 다시 단전에 자리한 원단으로 뭉쳤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순간.

투툭-

내 몸을 인위적으로 감싸고 있던 거미줄로 만든 장막이 터져나가며 그 위로 황금색 빛깔을 띤 비늘이 돋아났다.

스르륵-

하지만 돋아나기가 무섭게 내 의지에 따라 피부 안으로 잠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우... 아직은 멀었구나."

영석 광맥을 발견하고, 가매초 채집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영단 제작에 몰입하길 석 달.

나는 수많은 연단 실패를 이겨내며 황춘단을 본격적으로 만들었고, 만드는 족족 섭취해 수련성취를 올렸다.

구름 이끼를 이용해 연단 도구를 만드는 과정도 녹록지 않았지만. 황춘단 제작은 그것보다 더 쉽지 않았다.

초진단과 마찬가지로 기억하고 있는 레시피대로만 한다면 크게 문제없을 거란 예상과 달리, 초반엔 만드는 족족 전부 실패였다.

덕분에 거미들만 배를 채웠다.

"설마, 습기 때문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수많은 단약 제조 실패 후,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거듭했고, 그 원인이 습도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바깥과 달리 유난히 습도가 높은 지하세계.

그것이 원인이 되어 단약 제조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제조율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걸 알게 됐기에, 큰 공부라고 치면 실패한 재료가 아깝지는 않았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황춘단의 효과에 오히려 놀라는 중이었다.

플레이 당시, 초반에 즐겨 사용했던 단약에 내가 모르는 효과가 있었다니?

황춘단은 수행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신체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야수화 능력을 발달시켰다.

그 효과가 놀랄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현재 내가 머무는 곳이 절대 용족의 기운을 들켜선 안 되는 곳이라는 것.

그랬기에 황춘단을 복용할 때면 거미들이 영석을 채굴 중인 미로 동굴로 이동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수행을 올리는 중이었다.

"다들 날 찾지 않으니 이건 편하네."

현재 두더지들은 매일이 축제나 다름없었다.

용족이 떠나간 뒤 하루에 서너 개 채집하던 가매초가, 투입되는 마을 사람의 숫자만큼 증가하는 중.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채집 시대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나에 관한 관심은 예전과 비교해 없다시피 하는 수준.

미로 동굴에 간다고 하면 영양식으로 알려진 '로로충을 잡으러 가는구나!'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덕분에 수행은 빠르게 오르며, 더불어 공간대도 두둑해지고 있었다.

뽈뽈뽈-

황춘단의 기운을 갈무리하고 호흡을 다듬는 사이.

거미들이 발치 앞까지 다가와 영석을 뱉어냈다.

툭-

거미들은 경쟁을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할 때도 본인들의 성향을 확실히 보였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1등 거미는 항상 가장 많은 영석을 캐왔고, 2등 거미는 크기가 균일한 것들을 가져왔다.

3등 거미는 가끔가다 영석이 아닌 다른 원석을 가져와 웃음 짓게 만들었고 말이다.

"자 여기 있다."

나는 거미들에게 가매초 특식을 제공하고, 그들이 채굴해온 영석을 공간팔찌에 담았다.

벌써 천여 개가 넘어가는 상황.

아직 광맥의 10분지 1도 채굴하지 못한 상태란 걸 감안하면, '대박'이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단언컨대 지금 수행에 이 정도 부를 직접 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 확신할 수 있었다.

뽈뽈뽈-

잠시 후, 손가락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거미들에게 영석 가루를 뿌린 특식을 제공하고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북쪽 숲 터로 이동해 별나무를 베다가 거처로 돌아왔다.

거처로 돌아와서도 휴식은 없었다.

곧바로 별나무를 정제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끝난 후엔 또다시 황춘단 제조를 시작했다.

화르륵-

황춘단을 만들기에 앞서 손가락 끝에 불을 만들어내 거처 곳곳으로 튕겨 보낸다.

그리고는 입구에 설치한 간단한 장막을 거처 안에 또 만들어 외부의 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 후, 구름 이끼를 이용해 만든 삼발이를 꺼내 온도를 올리고는, 그 위에 같은 재질의 솥을 올렸다.

딱-

동시에 손가락을 튕기며 팔찌를 스치자, 준비해둔 재료들이 순서대로 빠져나와 솥으로 빨려 들어갔다.

치이익-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재료를 밖에 내놓지 않고도. 이렇게 조종할 수 있었다.

타다다닥-

그때, 거처 밖으로 갑작스레 어수선함이 전해졌다.

'이 시간에?'

이제 곧 동이 틀 때라 마을에 아무도 없어야 하거늘. 사방에서 둔탁한 걸음이 대지를 울렸다.

한두 명이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아닌, 수십이 동시에 뛰다 보니 발생한 소음.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터졌다는 걸 깨닫고, 급히 솥 안의 내용물을 밖으로 꺼냈다.

푸시시식-

그러자 솥에서 빠져나온 뒤 외부에 노출된 재료들이 순식간에 타버리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런 식으로 재료를 날려버리면 아깝지 않냐고?

어차피 집중이 흐트러진 순간 제조율은 처참하게 떨어진다. 당연히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타버린 재료들을 한데 뭉쳐 공간대에 집어넣고, 거처 밖으로 향했다.

그 순간, 거처로 다가오던 가실운과 눈이 마주쳤다.

가실운은 평소답지 않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 용족 놈들이 쳐들어왔다!"

+++

나는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나를 잡으러 다시 왔다고?'

수색을 포기하고 떠난 용족이 다시 오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았다.

그러다 가실운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그에게 되물었다.

"용족 놈들이 설마... 심장을 노리고 온 것인가?"

"그래, 그놈들이 새벽꽃을 채집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우리를 습격했다."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 안에 처절함이 담겨있다.

습격이라 표현했지만, 사냥이란 말이 어울리는 상황.

"갑자기 어떻게?"

"모른다. 마치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급하니 당장 피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삼삼오오 모여 북쪽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자주 보던 몇몇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족장님을 비롯해 다들 입구를 막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다. 어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북쪽으로 간다."

성인들, 그중에서 수행이 높은 이들은 족장을 도와 용족이 마을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막고, 그사이 일차적으로 아이들 먼저 피신시킨다는 가실운의 말.

그 후, 남은 인원들이 빠져나가며 출구를 파괴해 퇴로를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가실운. 나는 내 거미들을 데려와야 한다! 북쪽 숲길로 가면 되는 것이지? 그쪽으로 합류하겠다."

"그래, 숲 동쪽 끝, 동동 나무 군락지로 오면 된다."

나는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걸 깨닫고, 바로 미로 동굴로 치달렸다.

그리고는 광맥의 초입에 도착해, 종속의 인을 강하게 자극하며 내 기운을 여실히 드러냈다.

파아앙-

뽈뽈뽈-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를 받은 거미들이 빠르게 나타나 내 몸을 올라탔다.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나는 그 즉시 발끝에 온 힘을 모아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앙!!

그러자 진동파가 전방으로 퍼져나가며 동굴이 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발끝으로 기운을 또다시 방출하며 바닥을 연달아 박찼다.

쾅! 쾅!

무너지는 동굴을 빠르게 탈출함과 동시에 광맥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려는 의도였다.

"우선 들어가 있거라."

잠시 후, 동굴을 빠져나온 나는 거미들을 손가락에 집어넣은 후, 북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한때는 빽빽한 나무로 인해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별나무가 베어져 휑해진 숲 터.

나는 북쪽 숲에 도착해, 가실운이 말한 동동 나무 군락지로 움직였다. 한참을 이동하자 약속 장소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은.

비밀 통로로 몸을 집어넣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벌벌 떨고 있는 새끼 두더지들이었다.

"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나는 그 모습에 이동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함께한 시간이 있다 보니, 벌벌 떨며 도망치는 두더지들의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았다.

"죄가 있다면, 우리가 약한 것이 죄다."

안타까운 장면에 혼잣말을 내뱉는 사이, 가실운이 다가와 말을 이었다.

나는 가실운이 어떤 표정일지 알 것 같기에,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가실운, 아깐 너무 급해서 묻지 못했다. 지금 상황을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

"그대는 우리의 형제. 당연하다. 지금 우리는..."

이어지는 가실운의 설명.

현재 족장 이하 5단 이상의 수사는 가실운을 제외하고 전원이 외부에서 용족을 막고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분족의 체액을 발라야지만 통과할 수 있는 통로 안에 숨어,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다고 한다.

가실운을 제외하고 이곳엔 두 명의 4단 수사. 그리고 그 외에 2단과 3단 수사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가실운과 4단 수사들의 역할은 3단 이하의 수사들과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것.

그리고 거기엔 3단 수사인 나도 포함이었다.

족장과 동족을 걱정하며 설명하는 가실운의 목소리는 마음을 시리게 했다.

"그러니 우리라도... 아니다. 우리는 움직인다."

잠시 후, 아이들이 통로 안으로 전부 진입하자, 가실운이 나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중천... 힘이없는 자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건가...'

문득 떠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가실운의 뒤를 따랐다.

구불구불한 통로는 길고 길었다.

철벅 철벅-

그 긴 통로를 얼마나 이동했을까?

우리는 축축한 동굴로 나올 수 있었고, 동굴을 따라 이동하자, 깊은 호수를 통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호수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를 기다린 건 동이 튼 후 비추는 따스한 햇살이 아니었다.

"이야, 우리 쪽으로 와주다니. 이거 고마운걸?"

호수 근처에는 처음 보는 용족 네 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

'벌써 퇴로를 파악했구나.'

죽음이 어서 오란 듯 손짓했다.

+++

용족을 발견한 순간, 가실운을 포함한 전원이 움찔거리며 움츠러든다.

이것이 아픔의 역사이자 먹이사슬로 인한 위압 효과.

남이분족은 태생적으로 용족을 보면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반복된 토벌의 역사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상성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다들 도망갈 생각도 못 한 채 얼어붙었다는 것이었다.

네 명의 용족은 우릴 천천히 둘러싸며 히죽거렸다.

마치 손안에든 벌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교교랑, 이놈들이 이쪽으로 탈출했으니, 대장께 보고하고 와야 하겠지?"

"미쳤어? 저번에도 그렇게 우리 성과를 홀라당 가져갔잖아? 이번엔 우리끼리 잡자, 딱 보니 5단 한 놈뿐이고 나머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토기 말이 맞다. 대장에게 알리면 또 본인이 모든 걸 가져갈 거다. 나도 구해야 할 재료가 산더미야. 이번에도 시답잖은 보상으로 끝난다면 참을 수 없다."

네 명의 용족은 우리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저들끼리 조잘댔다.

'넷 다 5단 이상이다.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보란 듯이 기운을 내뿜고 있었기에, 수행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다.

그때 한 놈이 나를 발견하고, 손가락질과 함께 소릴 질렀다.

"어? 저놈은 뭐야? 인족이 왜 분족과 함께... 가만? 저놈 좀 이상한데?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게 설마 저놈 요..."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 존재에 대해 유추할 것 같은 상황.

어떤 식으로든 내가 용족인게 들통난다면 결국 내가 살던 곳에 소식이 전해지고 말 터.

"가슴에 실은 운명!!!"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나는 가실운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흉포한 기운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장 내 발끝으로는 모든 걸 파괴할 것만 같은 괴력이 모여든다.

가실운은 네 명의 용족들에 겁을 먹고, 꼼짝도 하지 못하다가 움찔하며 나를 본다.

네 명의 용족도 순간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나며 놀란 얼굴로 나를 본다.

"이, 이게 뭐지?"

"이것이 무엇이야?"

"난 알 것 같다! 이건 극소수의 인족 놈들이 지닌 힘이다! 본적은 없지만, 이 느낌은 내가 들은 것과 같다!"

나는 가실운과 마주 보며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가실운!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이들을 구하려면 정신 차려라!"

"그, 그래. 알았다. 내 실수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솔직히 옹기종기 모여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새끼 두더지들과 1, 2단 두더지들을 보호하며 싸워선 승산이 없었다.

아니, 싸우지 않고 도망을 선택해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대는 우릴 얕보고, 보다 상위 수사에게 상황을 알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

내가 거인의 힘을 드러냈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의문이 섞인 얼굴로 한껏 경계심을 피우고 있지만, 결국 내 수행을 알아보고 '에이 뭐야? 놀랬잖아?'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

나는 가실운에게 바짝 붙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반항하는 건 필패다. 가실운 너와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끈다. 그사이 아이들을 최대한 멀리 도망가게 해야 해.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것?

만약 내가 두더지 마을에 합류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시점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아이들 중엔 나를 보며 선생님이라 부르는 아이도 있었고, 자갈 줍기를 할 때 오돌오돌 떨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도왔던 아이도 있었다.

인연의 시간은 짧다지만, 여기서 아이들이 죽는 걸 무시하고 혼자 살아남는다면, 평생 그 기억이 나를 괴롭힐 터였다.

물론 무시하고 져버리는 것이 생각보다 괴롭지 않을 수도 있었다.

둘 다 아직 경험하지 않았으니, 확정 지어 답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선택은 이미 정해졌다.

잠시 후, 가실운이 내 의견에 동의하고, 뒤에 서 있던 4단 수행의 두더지에게 명령을 전했다.

내 의견에 또 다른 4단 두 명이 같이할 것을 전해왔다.

결국 아이들을 인솔하는 건 3단 수행의 두더지 중 하나가 맡기로 했다.

그사이, 우리가 어떻게 행동 알지 아는 것인지, 네 용족은 이죽거리며 서서히 우릴 향해 다가온다.

쾅-

나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시점에 땅을 박차며 빠르게 한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지금!"

쏘아져 나가며 내가 맡기로 한 녀석을 향해 손에서 만들어낸 원형 대적점을 칼날처럼 회전시키며 날려 보냈다.

휘리릭-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건가?"

내 정면에 있던 사내는 내 공격에 피식 웃더니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파앙-

그러자 대적점이 만들어낸 원형 태극이 너무 자연스럽게 터져나간다.

하지만 그건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

쾅!!

가까이 접근하자,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에게 발뒤꿈치를 꽂아 넣었다.

"커헉!"

그러자 놈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십여 미터를 그대로 날아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큰 타격을 입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와 나의 수행 차이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반응.

'역시 불가능한 거였나?'

나는 그 모습에 어쩌면 이곳이 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십여 미터 날아간 상대는 비행 법기에 뜬 채로 고개를 꺾으며 인상을 구겼다.

한참 밑 수행의 나에게 밀린 것이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주 여유롭게 몸을 푸는 것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다른 이들과 달리 여유가 넘쳐흘렀다.

"이 거지 같은, 아주 박살을 내주..."

"꺄악!"

그때, 바닥에 착지한 뒤 방어 자세를 취하는 등 뒤로 비명이 들렸다.

빠르게 상황을 확인하자, 네 명을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던 우리 중 가실운을 제외한 두 명이 이미 절명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얼마 도망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길목이 막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그중 아이 한 명이 용족에게 가슴이 관통당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딜 나서긴 나서, 이 벌레 같은 것이. 기다리면 알아서 다 죽여줄 텐데 말이야."

"!!!"

그 아이는 다른 분족들과 달리 나에게 처음 약초에 대해 배운 날부터, 선생님이라며 인사하던 아이였다.

1미터 남짓한 가실운의 절반 크기, 겨우 1단에 오른 꼬마 아이.

"들판의 웃는 채꽃!!"

순간, 아이의 모습이 전여희와 겹쳐 보였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정신을 잠식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놈을 향해 땅을 박찼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용족 특성. 약자멸시가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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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약자멸시

발끝에 모인 기운이.

원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력이.

전신에 차오르는 고양감이.

그 모든 것이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게 나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딴 건 지금 아무 상관 없었다.

쾅! 

땅을 박차자 그곳이 터져나가며 내 몸이 축기를 이룬 수사인 것처럼 쏘아져 나간다.

나는 순식간에 사내 앞에 당도했다. 놈은 꼬마 아이의 가슴을 관통한 채 나를 멀뚱히 보다가, 내가 근접한 후에야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하지만 늦었다.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땅을 밟은 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반대 발에 전력을 담아 찍어 눌렀다.

콰앙!!

그러자 놈이 황급히 두 팔로 내 발을 막아냈다.

"커억!"

그 순간 놈의 두 팔 위로 생성된 보호막이 터져나가며, 동시에 놈의 두 팔도 작살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곧바로 제자리 허공 돌기를 하며 또 한 번 발을 내리찍었다.

콰앙!

"커억!"

두 팔이 부러진 후, 급하게 옆으로 몸을 회피하던 놈은 내 두 번째 공격에 등이 박살 나며 바닥에 처박혔다.

내 순간 속도는 이미 축기기 중기를 넘어선 상태였다.

"후우...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얘야, 괜..."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은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느새 굳어가는 입을 천천히 움직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선ㅅ...니임, 너ㅁ... 아파... ㅇ"

툭-

하지만 끝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축 늘어지며 눈을 감았다.

"안돼!"

"수사,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그때,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급히 다가오며 축 처진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입속에서 누런 알갱이 같은 것을 꺼내더니, 축 늘어진 아이의 입속에 넣고, 관통당한 가슴 상처에 손을 댔다.

후우웅-

그러자 눈에 띄게 상처가 아물어 들며 기절한 아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나는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닌, 심각한 통증으로 기절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용족 놈은 소중한 재료인 심장이 다치지 않게, 신선한 심장을 가져가기 위해 치명상을 피해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나저나 지금...'

아이가 살았다는 안도감에, 흥분이 줄어들며, 내 몸에 대한 인식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들웃채!"

그 순간, 상대와 평수를 이루며 대치하고 있던 가실운이 급히 다가오며 바닥에 처박혀있던 놈의 목을 밟아버리려고 했다.

탁-

하지만 가실운의 행동은 끝을 보지 못했다.

"왜? 왜 말리나?"

가실운의 행동은 나로 인해 멈춰진 상태.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가실운에게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다시 불태우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다."

왜냐고?

지금 몸속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고양감.

전신이 터져버릴 것처럼 차오르는 힘.

이것이 말하는 건, 바로 기대하고 기다렸던 '약자멸시'가 발동했다는 신호였다.

그런 약자멸시의 특징을 생각하면, 저항 불가 상태의 적을 죽이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이놈은 아직 목숨이 붙어있어야 한다. 이유는 나중에 알려주겠다. 우선은 나머지를 처리하고."

상대하는 적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약자멸시의 힘은 중첩된다.

그 말인즉. 한 놈이 죽는 순간. 지금의 고양감은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뜻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가실운을 직시했다.

"나를 믿어라. 가실운."

좀 전까지 했던 생각은 취소다.

5단 용족 세 명?

그중 한 명은 가실운이 맡는다 치면, 

5단 두 명?

이제 결과는 알 수 없다.

+++

한 놈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놈들은 성급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내가 등을 돌리자, 뒤따르며 공격하려 했던 놈도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수행을 숨기고 있었구나!"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이, 누구 하나가 나서서 나를 상대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런 태도를 보여준다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

나는 가실운에게 눈짓을 보낸 후, 가장 가까운 놈을 향해 땅을 박찼다.

쾅!

굳이 고양감을 끌어올려 거인의 발걸음을 발동하지 않아도, 상시로 발끝에 머물러 있는 거인의 힘만으로 땅이 터져나갔다.

"교교랑! 네가 저놈을 맡아라! 이 녀석은 나와 토기가 함께. 이익!"

휘익-!

놈들이 상대할 사람을 정하는 동안, 나는 이미 한 놈에게 바짝 붙어 회전각을 선물했다.

콰앙!

하지만 좀 전처럼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다.

조금 전에는 기습의 묘가 발휘된 것, 

어쩌면 이것이 정상이었다.

약자멸시로 인한 버프가 네 번 중첩된 상황이지만, 애초에 5단과 3단의 벽은 높고 높은 것이었다.

인족으로 치면 초보나 다름없는 연기기와 실무를 담당하는 축기기의 차이 아닌가.

부족함 없이 맞상대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건방진 인족놈, 그래 어디 잘난 그 실력 좀 봐보자꾸나!"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용족 놈은 이미 상체에 비늘을 드러낸 채, 반투명한 보호막으로 자신을 감싼 후였다.

비늘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상의가 찢어지며 푸른 비늘이 뾰족뾰족 올라와 있었다.

'수속성.'

솟아오른 비늘만큼 상대의 얼굴엔 자신감이 보였다.

쇄액-

그때, 섬뜩한 느낌에 급하게 몸을 기울이자, 새카만 단검이 내 옷자락을 찢으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 피했는데도, 닿지 않는 일정 범위 안의 것들을 갈라버렸다.

주르륵-

단검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피가 터져 나온다.

나는 단검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균형을 잃은 척 바닥을 짚다가, 황급히 몸을 날렸다.

뽈뽈뽈-

재빨리 거리를 벌리자, 스쳐 지나갔던 단검이 다시 돌아오며 나를 공격했다.

동시에 푸른 비늘을 드러낸 놈도 나를 향해 움직인다.

"어디 이것도 피해 보아라!"

앞뒤로 이어지는 합공.

약자멸시 버프를 받고 있지만,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는 건 명약관화했다.

나는 재빨리 대적점으로 태극을 만들어 푸른 비늘 용족 방향을 막았다. 그리고는 광선검을 뱉어 한 손에 쥐었다.

그 즉시, 날아오는 단검이 아닌, 그 너머에 법기를 조종하는 놈을 향해 광선검을 휘둘렀다.

슈아악-

그 순간 광선검 위로 십여 미터에 이르는 광선 칼날이 생성되며 상대를 채찍처럼 베어갔다.

"요즘도 광검류를 사용하는 놈이 있다니. 영력 대비 비효, 윽! 이게 무슨!"

서걱-

늘어난 광선 칼날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던 상대는 가볍게 몸을 틀어 칼날을 피하려다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칼날에 어깻죽지부터 가슴 한쪽이 날아가며 두려운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 순간.

촤아악-

놈의 양옆과 등 뒤에서 거미줄이 그물처럼 뿜어져 나와 상대를 수십 겹 덮어 구속해버렸다.

그랬다.

광선 칼날을 우습게 생각하던 사내가 그것을 피하지 못했던 이유.

내가 바닥을 짚으며 땅속으로 보냈던 거미 세 마리가, 원거리에서 단검을 조종하던 상대에게 달라붙어 일순간 충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동굴의 벽도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거미의 공격을 무방비 상태에서 버틸 수 있을까?

푸른 비늘 용족처럼 야수화라도 사용했다면 모를까,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던 놈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혼의 이어짐으로 종속들 역시 약자멸시의 영향을 받는다.

물론 나처럼 무한히 중첩되는 괴랄한 버프는 아니었지만, 나와 연결된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도 강해졌다.

그러니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잘했다!"

나는 칭칭 감긴 거미줄 그물 안으로 파고드는 세 거미를 보며, 그곳에서 시선을 거둔 채 곧바로 푸른 비늘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거미들은 공격의 강도를 세심하게 조절하지 못한다.

그러니 녹이는 공격이 시작된 이상, 거미줄에 감긴 놈은 반드시 죽는단 소리.

그놈이 죽기 전에. 약자멸시의 효과가 감소하기 전에 남은 놈들도 처리해야 했다.

+++

"너... 요ㅇ...조...ㄱ, 어째,ㅅㅓ...분족..."

해석하자면 '넌 용족인데 어째서 분족이랑 함께 있냐?' 정도 될까?

나는 마지막 남은 놈의 목에 박혀있던 광선검을 옆으로 그으며, 심장을 짓누르던 발을 치웠다.

툭-

어느새 생기를 잃고 쓰러진 녀석의 심장엔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놈은 전투 도중 우연히 내 피 맛을 보았고, 내 정체를 단번에 알아냈다.

하지만 그땐 이미 거인의 발걸음이 놈의 심장에 적중한 후.

놈은 죽어가면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기분 더럽네."

괴수를 사냥하면서 충분히 피에 익숙해져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동족을 죽이는 것과 괴수를 사냥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물론 살인에 대한 혐오로 헛구역질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죽어가면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눈빛이 잔상처럼 남아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잖아. 언젠간 겪게 될 일이었다.'

중천을 살아가면서 동족 살해라고 피해갈 수 있을까?

앞으론 인간을 포함해 수많은 인간형 영수족을 상대할 터, 나약한 마음은 하루라도 빨리 정리해야 했다.

'쉽진 않겠지만. 익숙해지자.'

나는 처음에 무력화시켰던 놈마저 처리한 후, 가실운에게 다가갔다.

그는 가슴에 긴 자상과 함께 숨을 헐떡이는 상태였다.

"가실운, 괜찮나? 움직일 수 있겠어?"

"물론이다. 금파란, 그대가 우릴 살렸다."

"아니, 우리가 살아남은 거다."

"...그래."

잠시 후, 3단 수행의 분족들이 가실운을 부축하며 떠날 준비를 하는 사이, 나는 널브러져 있는 용족들의 공간대를 수거해왔다.

본명 법기는 표식을 지우기 힘들 테니 가져갈 수 없고, 공간대 안의 물건만 챙길 생각이었다.

네 개의 공간대의 물건을 전부 꺼낸 나는, 그중에서 법기류나 제작 도구, 명패 등을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을 몽땅 공간팔찌 안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가져가고 싶지만, 그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

어떤 법기에 추적 가능한 꼬리가 달려있을지 모르니,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청안의 수준이 올라가, 최소한 내가 그것을 판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기 전엔 가급적 피해야 했다.

물론 아무리 추적 기능이 있다고 해도, 공간대 안의 있는 물건까지 추적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위험도 배제해야 할 때.

항상 생각지도 못한 문제는 작은 욕심에서 출발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들 가자."

뽈뽈뽈-

물건 정리가 끝난 나는 이동을 준비하는 무리의 선두로 움직여 가실운과 나란히 섰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피난처가 있다. 당장은 그곳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좋아 앞장서라, 나는 후미에서... 아니다. 먼저 가라. 곧 따라가겠다."

갑작스러운 내 발언에 가실운이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에게 저 멀리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놈이 또 오고 있다.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면 처리해야지."

저 멀리 점처럼 다가오는 무언가.

명안을 극대화해 바라보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날아오는 사내가 보였다.

비행 속도로 보면 나와 비슷하거나 살짝 높은 수행을 지닌 것으로 예측되는 사내.

약자멸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실력으로 보였다.

"같이 처리하고 간다."

"아니, 아이들 때문에 우리 이동속도는 현저히 느리다. 지금 오는 놈은 딱 보아도 연락책. 나 혼자 충분하다. 먼저 가고, 내가 따라가는 게 맞다."

"...금파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마주하자, 가실운이 진지하게 말한다.

"고맙다. 그대가 있음이 축복이다."

"... 아니다. 그럼 먼저 떠나라. 곧 따라갈 테니."

잠시 후, 가실운을 필두로 전원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나는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축복이라고?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대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죽어있는 용족들 사이로 이동해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나를 포함해 전투의 흔적이 남은 곳곳에 거미줄을 덮었다.

"되었다. 이제 돌아오거라."

일을 마친 거미들을 품에 안으며 호흡을 느리게 가져갔다.

불이 꺼진 쇳덩이처럼, 

약자멸시로 인한 힘이 천천히 소멸하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

금파란이 호흡을 지우며 숨죽이길 얼마나 지났을까?

탁-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사내가 누워있는 그의 근처에 착지하며 기척을 흘렸다.

동시에 비명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선배님들이 전부 당하신 건가? 겨우 분족 놈들에게?"

사내는 비명과 함께 공간대에서 기다란 막대를 꺼냈다.

"빨리 연락..."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잠시 동작을 멈췄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에 거미줄로 보이는 것들이 덮여있었고, 그 사이로 분족의 시체와 용족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침을 꼴깍 삼킨 사내는 막대기를 품에 넣더니, 아무도 없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시체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시체의 허리춤을 뒤지다가, 땅에 떨어져 있는 법기를 주워들었다.

"공간대는 가져가고. 본명 법기만 버리고 간 건가?"

그는 누가 볼까 봐 연신 눈동자를 굴리다가 법기를 공간대에 넣고, 다음 시체를 향해 움직였다.

그곳에도 공간대는 없고 본명 법기만 떨어져 있었다.

사내는 법기를 주우며 혼잣말로 명복을 빌었다.

"선배님들, 제가 꼭 분족 놈들을 전부 잡아 복수할 테니, 편안히 가십시오."

그때, 아무도 없어야 할 공간에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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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헤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