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헤어짐
모암대지 상공.
낮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그곳에 네모난 마차 한 대가 떠 있다.
마차를 끄는 말은 없었지만, 마차 주위로 위이잉 소리를 내는 날벌레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위.
그곳엔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황폐해진 갈대밭을 내려다보며 생글생글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대고르, 아직이야?"
"아닙니다. 곧 뚫릴 것 같습니다. 선배님."
여인의 음성에 통통한 사내가 바짝 얼어붙은 채 대답했다.
"그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장비?"
"잔비입니다."
"그래, 잔비. 그자가 이곳에 대해 알려줬다고?"
"알려줬다기보단... 제가 정보를 구매했습니다. 예전에 전송진을 이용할 때 제가 도움을 주기도 했었고 말입니다."
사내의 대답에 여인이 입가에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언급조차 없었다면 시작이 없는 거니까. 나중에 인사라도 전해줘. 내 생각보다 규모가 큰 것 같으니. 이걸로 당분간 재료 걱정은 없겠어."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선배님께도 소개 올리겠습니다."
웬만한 일로는 칭찬을 하지 않는 여인이기에, 대고르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대고르 본인도 두더지들의 심장이 절실했던 차, 여러모로 이번 발걸음은 좋은 일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저것들 수장이 아직 원영도 이루지 못한 놈이라 하지 않았어?"
그런데 거주지를 확보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냐는 물음.
어깨가 으쓱하던 대고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변명했다.
"좁은 통로에 숨어 쥐새끼처럼 방해하는 데만 집중하기에... 아닙니다. 제가 직접 통로를 열겠습니다."
"그래그래.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해.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콩고물 좀 얻자고 달려들면... 알지?"
"물론입니다."
잠시 후, 안색이 변한 사내가 모암대지로 뛰어들더니, 흐릿하게 변하며 진흙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 모습에 여인은 흥흥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품에서 작은 옥간을 꺼내 이마에 가져갔다.
"그나저나 이걸 어째.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이렇게 쉽게 가능하려나."
옥간을 이마에 가져가 한동안 내용을 음미하던 여인이 긴 한숨과 함께 손을 걷었다.
그리고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모암대지를 눈여겨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육을 통해 주기적으로 심장을 공급받는 방법이라... 제법 흥미가 동하기는 하는데 말이지. 과연 탈이 없으려나?"
여인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철퍼덕-
기습은 순조롭다 못해 너무 간단했다.
예상대로 나와 비슷한 수행의 용족은 콩고물에 정신이 팔려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너무 허술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일방적으로 분족을 사냥 중인 상황이라 해도,
본인보다 수행인 높은 이들이 죽은 곳에서 보일만 한 행동은 아니었다.
'욕심이란 항상 빈틈을 만드니까.'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쓰러진 용족 놈의 공간대에서 꼬리가 붙을만한 물건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전부 챙겼다.
그리고는 곧장 분족 무리가 이동한 방향으로 길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자 아주 멀리 이동 중인 무리가 보였다.
명안으로 확인하자, 처음 도주했던 인원 그대로.
혹시나 중간에 다른 용족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였음에 안도했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보이지 않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파앙-
빠르게 나아가던 중,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파장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신호탄이 터지며 주변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신호탄의 위치는 정확히 용족 무리와 조우했던 비밀통로의 입구가 위치한 곳.
내가 떠나온 뒤 또 다른 용족이 방문해 사건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더 머물다 왔어야 했나?"
나는 그 즉시, 가실운이 이동 중인 방향이 아닌, 직각 방향으로 몸을 틀며,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후, 작은 산이 나오자, 공간대에서 기다란 막대기를 꺼내 발동시켰다.
허무하게 죽은 연락책이 사용하려다 만 물건.
바로 신호탄이었다.
'이쪽으로 오기를.'
파앙-
직후, 발동시킨 막대기를 허공 높이 쏘아 올리자, 대지를 울릴 정도의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윽."
나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발을 쉬지 않고 산을 넘었다.
촤아악-
그사이 손가락에서 빠져나온 거미들은 사방으로 거미줄을 분사하다가 다시 손가락 안으로 숨어들었다.
+++
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영력을 끌어올리며 이동에 집중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명안을 상시 발동시킨 상태로, 용족 놈들이 쫓아오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다행이다.'
그러다 아주 멀리 비행법기에 탄 세 명을 발견했고, 그들이 신호탄이 터진 근처까지 도착했음을 확인했다.
얼추 이동 시간을 계산해보니, 세 명 모두 4단 이상의 용족.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는걸 감안하더라도, 꽤 빠른 속도로 신호탄이 터진 위치까지 당도한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그 즉시 거미 세 마리를 불러내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부채꼴로 흩어져서 이동한다. 이동하며 간간이 흔적을 남겨라, 쫓아오는 놈들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부채꼴로 흩어졌다가 마름모꼴로 다시 만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초반엔 이동 경로에 거미줄을 남기다가, 중간부터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이동해야 함을 강조했다.
"할 수 있겠지?"
이해했다는 듯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거미들.
뽈뽈뽈-
잠시 후, 거미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개울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들어가 바닥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하로 파고들었다.
'이렇게 사용할 줄 몰랐네.'
땅을 파고 이동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엉금엉금 기어가던 예전과 비교하면 거의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매초 채집을 위해 모암대지와 늪지를 오고 가길 수십 번.
그사이 가실운을 비롯한 분족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얻은 땅파기 실력이었다.
핵심은 앞으로 나아가며 파낸 흙을 이동에 방해되지 않게 흘려 뒤로 보내는 것.
마치 수영하듯 흙을 자연스럽게 뒤로 넘기는 게 이동 속도를 크게 좌우했다.
'더 깊게.'
나는 부드러운 지면이 이어지는 개울 근처에서 최대한 깊게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깊이에 이르렀다고 여긴 순간부터는 대각선으로 천천히 하향 곡선을 그리며 이동에 치중했다.
'잘 도망가고 있겠지?'
다만, 깊이 그리고 멀리 멀어질수록, 분족과 다시 만나는 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딴 생각 말고,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 신경 쓰자. 이렇게 돕는 것이, 그들을 위한 최선이다.'
나를 쫓는 동안 아무도 가실운 무리를 발견하지 못하길 바랐다.
내가 용족들을 유인한 사이, 그들이 은신처로 피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
"여기 같은 흔적입니다!"
모암대지에서 멀리 떨어진 높지 않은 산의 초입.
그곳에 도착한 세 명의 용족은 주위 곳곳에 남아있는 거미과 영충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곳으로 도망친 게 확실하군."
"멍청한 분족놈들, 대놓고 흔적을 남기는군요."
"확실히 예나 지금이나 그것들은 생각이란 걸 안 합니다. 아니 못한다고 봐야 할까요?"
원래라면 목적지가 달랐을 세 사람.
대기 인원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던 세 사람은 분족을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급히 주변으로 급파되었다.
그러다 한 명이 전투 현장을 발견하고, 이렇듯 모여 흔적을 뒤쫓는 중이었다.
"수사께서 보낸 촉새는 얼마나 빠릅니까? 도망친 두더지 놈들의 규모를 알지 못하니 빨리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녀석이 영수 중에는 빠르기로 이름 높은 종이니. 아마 조만간 우리가 남긴 흔적을 보고 이곳으로 올 겁니다."
"죽은 네 명 모두 5단 수행이었습니다. 전 안전하지 않은 일에는 섣불리 움직이기가 꺼려지는군요."
"걱정 마시라 해도 그러십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그놈들이 좋아하는 습지가 아니라 이렇듯 산으로 향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겨진 인원이야 상관없이 꼭꼭 숨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서로 신호를 보낼 준비만 단단히 한다면, 위험해질 일은 없을겝니다. 게다가 그놈들은 비행을 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무리하게 쫓을 필요도 없이 상공에서 찾으면 그뿐입니다."
그때, 대화에 참여하고 있지 않던 인물이 말을 꺼냈다.
"근데 신호탄을 사용한 건 누굴까요?"
"급파된 다른 연락원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두 분 다 이러실 겁니까? 그러니 오히려 더 빨리 움직여야지요. 그자가 혼자 놈들을 쫓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공을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제 무덤을 파는 거지요."
"수사!"
주도적으로 두더지를 쫓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내의 외침에 나머지 두 명이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만 해댔다.
하지만 거듭된 강요에 결국 수색을 시작해야 했다.
"여기 흔적이 있습니다!"
"여기도!"
얼마 후, 난감해진 세 사람이 다시 모였다.
"흔적이 세 곳으로 갈라지다니... 마치 우릴 유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도 그럽니다. 께름칙하군요."
결국 세 사람은 처음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지원이 더 오면... 그때 움직입시다."
금파란이 유도한 것은 세 사람이 흩어져 추적을 지속하다가 목표를 잃고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상대의 발을 묶게 되었다.
+++
거미 삼 형제가 돌아온 후.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 멈추고, 더 깊이 아래로만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혹시라도 원영기급 수사가 나타날 걸 염려한 준비였다.
그들은 본인의 의식을 사방으로 발산해 주변 사물의 정보를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수행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수 킬로를 넘는 게 대다수.
그러니 그 감각권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더욱더 깊이 파고들어 숨어야 했다.
게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가 성공한 이상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멀리가 아니라 무조건 깊이였다.
바깥이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용족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깊은 땅속에 숨는 게 최선이었다.
'이 정도면 절대 들키지 않겠지.'
그렇게 한참을 더 파고 들어간 나는 2평 남짓한 공간을 확보 한 후, 호흡을 느리게 가져갔다.
그리고는 거미들을 시켜 내 몸을 누에고치처럼 거미줄로 칭칭 감게 만들었다.
2평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두께로 말이다.
+++
영력을 완전히 잠재운 후, 심상으로만 대적점을 수련하길 한 달.
이제는 움직여도 될 거란 생각에 거미줄 밖으로 거미 삼 형제를 불러냈다.
그동안 미세한 파동도 흘리기 싫었기에 거미들의 활동도 금지했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거미들은 손가락 밖으로 나오자 분주하게 몸 위를 기어 다녔다.
나는 그런 거미들을 진정시키며 명령을 내렸다.
"지상으로 올라가, 용족들이 활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오너라. 잠깐, 셋 다 갈 필요는 없다. 2등. 아니. 네 녀석만 다녀오거라."
나는 당장이라도 밖을 활보하고 싶어 하는 거미 중, 2등 거미만 콕 집어 밖으로 보낸 후 나머지는 다시 손가락으로 집어넣었다.
왠지 셋 다 밖으로 보냈다가는 돌발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내 의도를 가장 잘 파악하는 2등 거미만 보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구나.'
2등 거미가 뽈뽈 거리며 사라지는 사이, 나는 내가 무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누군가를 특정해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던 일.
괜스레 거미들에게 미안했다. 더불어 품속에서 꼬물거리다 강제로 잠들기를 반복하는 새끼 갈락취들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좋은 이름을 지어줘야겠네.'
나는 섣불리 아무 이름이나 대충 지어주지 않고 고민을 거듭했다.
'일등 거미니까 일미라고 하...면 안 되겠지.'
뽈뽈뽈-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주변 탐색을 마치고 온 2등 거미가 내 손등 위로 올라왔다.
'벌써?'
손등에 올라온 거미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데 이번엔 예전과 달리 의사 표현이 확실히 느껴지지 않았다.
기쁨, 슬픔같이 확실하게 표현하는 감정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해야 하기에 어려운 듯 보였다.
나는 2등 거미에게 말했다.
"위에 아무도 없어?"
거미가 빙글빙글 돈다.
"아직 용족 놈들이 있어?"
거미가 좀 더 빨리 돈다.
그렇게 거듭되는 내 질문에 거미가 속도로 강약을 조절하며 대답했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니 바깥 상황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흠, 아직인가?'
우선 내가 숨어있는 곳의 지상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높은 상공에 비행법기를 탄 누군가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 누군가가 용족인지 다른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2등 거미는 상황을 살피다가 하늘에 떠 있는 수사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지하로 내려왔다고 했다.
"잘했다. 역시 너다."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해주고는 2등 거미 역시 손가락 안에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호흡을 감추며 다시 한번 존재를 지워갔다.
확실한 안전이 확보되기 전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
────────────────────────────────────
41화. 축기기(築基期) (1)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해? 산의 초입은?"
내 물음에 2등 거미가 긍정의 신호를 보낸다.
"드디어 철수 했구나."
땅속에 숨어든 지도 석 달.
용족이 드디어 근처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전부 사라졌다.
'헌데 정말 이상하네, 왜 여태껏 조사를 멈추질 않은 거지?'
용족들이 전부 사라졌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을 지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사냥을 위해 타 대륙에서 방문한 것.
그렇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바로 물러가는 게 맞았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인위적으로 표식을 해놓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변을 석 달이나 조사한다고?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행태를 굳이 비약해 생각해보자면.
'설마... 이곳 근처에 분족의 은신처가 있다고 여긴 건가? 그래서 수색을 멈추지 않은 건가?'
한가지 이유만이 머릿속에 맴돌다 사라졌다. 그러다 은신처 생각에 가실운을 포함한 몇몇 분족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안전하게 잘 있으려나..."
한편으론 내가 숨은 곳 근처에 오랫동안 용족이 배회했다는 게 안심이었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자면, 가실운 무리가 들키지 않고 멀리 도망쳤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 나도 나가 볼... 아니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거미줄을 제거하다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당장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나에겐 돌아갈 고향도, 함께 지내던 분족의 마을도 이제 없다.
그렇다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족 은신처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데 이제 와서 가실운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 특성 확인이 끝났기에 내면의 사원을 방문할 필요까지 없다.
물론 내면의 바닥을 확인하지 않았기에 언젠가는 확인 작업을 해야 했지만, 급한 일도 아니었고,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재능을 확인하는 절차였으니까.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자."
그래서 내린 결정은 지금 장소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영기의 질이 엄청나게 높은 건 아니지만, 적당한 수준이었고. 땅속에서 활동하는 괴수나 벌레들도 보이지 않는 장소.
꼭 이곳을 거처로 마련해야 할 정도로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떠나야 할 정도로 나쁜 장소도 아니었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안전하고 적당한 장소였다.
그래, 적당한 장소.
"재료들을 정제하고 단약을 만들려면 공간을 어느 정도 넓혀야 할까?"
나는 생각을 굳히며 거미 삼 형제를 불렀다.
그리고는 광선검을 꺼내 사방으로 휘두르며 흙덩이를 분리해냈다.
"너희는 이 흙들을 밖에 버리거라. 단 티가 나지 않게 조금씩 사방에 흩뿌려야 한다. 그런 후에는 주변에 이런 재료가 있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많이 가져오거라."
말을 하는 도중 자기병을 꺼내 액체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거미들은 내 손가락 위에 놓인 액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수액이 이런 식으로 물방울처럼 뭉친 걸 발견할 수 있을 테다."
액체는 중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 수액. 너무 흔하기에 분족 마을에 머물 당시 공간대에 쟁여놓지 않은 자원 중 하나였다.
뽈뽈뽈-
잠시 후, 확인을 끝낸 거미들이 큼지막하게 분리된 흙덩이를 운반하기 시작하자, 나는 손바닥에 영력을 뭉쳐 벽면을 다졌다.
쿵- 쿵-
얼마 지나지 않아 10여 평은 넘을듯한 공간이 생겨나자, 벽에서 떨어져 나온 흙을 이용해 침대와 탁자, 진열대 등도 하나씩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가득 뭉쳐있는 거미줄 뭉치를 가져와 침대 위에 푹신하게 깔았다.
"이 정도면 살기 적당하겠네."
마지막으로 분족 마을에서 캐온 발광석을 천장 곳곳에 박아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함께 캐온 영토도 천장 곳곳에 심어, 거처 내부의 영기의 질이 조금이나마 상승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침대를 비롯한 가구 같은 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있고 없고가 정신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완벽하네."
딱하나, 햇빛이 들어온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
거처 마련이 끝나자 다음은 물건 확인이었다.
다섯 명의 용족에게서 얻은 물건들.
촤르륵-
손을 가볍게 흔들자, 공간 팔찌에 담겨있던 각종 재료가 한쪽에 수북이 쌓였다.
나는 그것들을 식물과 식물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고, 그중에서 자기병이나 목함에 담긴 것들을 따로 골라냈다.
먼저 십여 개의 자기병을 먼저 확인했다.
"이건 황률단(黃栗丹)인가?"
가장 먼저 확인된 건 황률단이었다. 내가 가장 많이 소비했던 초진단보다는 한 단계 위의 수행을 올리는 단약.
하지만 현재 주력으로 먹는 황춘단보다는 한 단계 낮은 등급.
"절반이 황률단이네?"
연달아 여섯 병이 황률단이었고, 그다음으로 호신단(護身丹) 네 병. 강진단이 두 병이었다.
호신단은 4단 이상 수사들이 신체를 단련할 때 자주 먹는 단약, 강진단은 6단까지 효과를 발휘하는 좋은 물건이었다.
오래전 오동이 강진단을 대가로 선주의 주조법을 요구했을 만큼, 가장 보편적이고 많이 사용되는 단약이었다.
단약은 생기는 족족 먹어 치우는 게 일반적이기에 꽤 운이 좋은 전리품이라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단약이든 자기병을 공간팔찌에 수납한 후, 남은 두 개의 자기병엔 표시만 해두고 정리했다.
하나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있었는데, 시큼한 냄새와 진한 영기가 느껴지는 독특한 액체였고, 나머지 한 병은 용족의 피가 담겨있었다.
가끔 단약을 제조할 때,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 본인의 피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런 이유로 따로 모아둔 피 같았다.
'좋은 선택은 아니지. 흡수율은 올라가는 대신 제조율이 떨어지니까.'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진 이들이 자주 하는 실수였기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목함을 집어 들었다.
"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금수저였구나."
목함은 총 세 개였는데, 첫 번째 목함에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 영석이 담겨있었다.
팔찌 안에 천 개가 넘는 영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영석을 보고 놀란 이유?
목함 안의 영석은 내가 가진 하급품이 아니라, 중급 영석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일곱 개.
"이 귀한 걸 일곱 개나 들고 있다니?"
기본적으로 중급 영석 하나는 하급 영석 100개의 가치를 지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급을 하급으로 바꿀 때의 계산.
하급 영석 100개로 중급 영석을 살 수는 없었다.
최소한 150개 이상의 하급 영석을 지불해야 중급 영석을 구할 수 있었고, 품귀 현상이 일어날 땐 200개, 혹은 300개도 넘게 가격이 오를 때도 더러 있었다.
중급 영석이 하급과 달리 드물게 발견되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쓰임처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보통 하급 영석의 주 사용처는 수련용이다.
용족이 수행을 올리기 위해 호흡을 할 때나, 다른 종족이 공법을 익힐 때.
그때 몸에 지닌 채 수련하게 되면 영석에 담긴 영기로 인해, 영기 밀도가 높은 곳에서 수련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수련 시간에 비례해 영석에 담긴 영기는 소멸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 하급 영석의 쓰임과 달리 중급은 상위 진법이나 제작에 필수적인 물건이었다.
그랬기에 화폐의 의미보다는 재료로 취급되었다.
물론 수련에 사용한다면 하급보다 10배 정도 높은 효율을 보이지만, 과연 그럴 사람이 있을까?
차라리 영석 100개를 사용해 수련하는 게 훨씬 가성비 있는 행위였다.
당연히 100개의 중급 영석의 가치를 지닌 상급 영석은 또 다른 의미였고 말이다.
"목함도 평범한 게 아니었네."
나는 중급 영석 하나를 집어 유심히 살피다가 목함의 특별함을 눈치챘다.
목함은 7개가 내뿜는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내가 놀란 이유는 목함이 열린 상태라는 것.
특수한 재질로 만든 목함은 대부분 기운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었지만, 문이 열린 상태로 그런 기능을 가진 건 정말 귀한 물건이었다.
"설마 꼬리가 붙은 건 아니겠지?"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으로 모든 영력을 모으며 청안을 발동.
목함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오랫동안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재빨리 공간팔찌 안에 넣어버렸다.
당장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내 실력을 확신할 수 없으니, 조심해야겠단 생각을 가졌다.
'나중에 거미줄로 감아버려야겠네.'
나머지 두 개의 목함은 평범했다.
하지만 내용물까지 평범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연 목함 안엔 푸른 비늘이, 세 번째엔 붉은 비늘이 담겨있었다.
푸른 비늘은 야수화를 사용하던 용족의 비늘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고, 붉은 비늘은 마지막에 죽였던 놈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본명 법기를 강화하려고 준비 중이었던가?"
나는 그놈들이 사용하던 본명 법기를 떠올려보다가, 두 개의 목함을 정리했다.
용족의 비늘, 그것도 강제로 뜯어낸 게 아닌 스스로 탈피한 비늘은 적당한 사용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탈피체도 연구해야 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과 함께 재료 분류를 시작했다.
+++
재료 분류가 끝나자 본격적인 단약 제조를 준비했다.
하지만 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고, 품에서 꼬물거리는 두 강아지, 아니 갈락취를 꺼내는 게 먼저였다.
녀석들은 병아리 같은 모습에서 어엿한 네발 달린 짐승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호랑이와 흡사한 성체와 달리, 삵과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아직 날개는 자라지 않았는데, 어깨 위쪽에 2㎝ 정도 뾰족하게 올라온 부위가 아마도 날개로 변하는 듯싶었다.
"그동안 답답했지. 좁겠지만 당분간은 이 안에서만 생활할 거다."
거미들과 마찬가지로 갈락취들 역시 아직은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성체가 된다면 어미처럼 말을 하겠지만, 지금은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끈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게 전부였다.
다만 소리를 낼 줄 알다 보니 거미들보다는 표현이 다채로웠다.
"여기 이쪽 안으로 오지 말고, 나를 건들면 안 된다. 필요한 게 있으면 가까이와 소리를 내거라. 알겠지?"
"그릉."
갈락취들은 나를 힐끔 올려보며 그르렁 소리를 낸 후, 넓지 않은 공간을 천천히 거닐었다.
마치 자신의 구역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본격적인 단약 제조를 시작했다.
우선은 재료가 가장 많은 황춘단을 제작해야 했지만, 수액의 부족으로 초진단을 만들어야 했다.
가매초를 구하기 위해 늪지를 오가는 도중 꽤 많은 양이 모인 저충. 게다가 용족들의 전리품에서도 한 무더기가 나온 상태.
물론 3단 끝자락에 도달하기 직전인 내게 초진단은 효율이 많이 떨어지는 단약이었다.
그렇다고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굳이 가성비를 따지며 단약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 배부른 소리는 금수저들이나 하는 것이었으니까.
잠시 후, 구름 이끼를 이용해 만든 도구들을 꺼내 영력을 주입하자 십여 평의 공간에 열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그릉?"
멀리서 깜짝 놀라 벽에 붙는 갈락취들이 느껴졌다.
밀림의 왕자처럼 위풍당당하게 주변을 거닐던 두 녀석의 행동 변화에 피식 웃고는 솥의 온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휘리릭-
손을 가볍게 흔들자, 공간팔찌에서 재료들이 정연하게 빠져나와 솥 안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
세상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흙.
신선한 공기.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
3등 거미는 오랜만의 외출에 기분이 좋았다.
누구보다 빨리, 하지만 다른 두 녀석보다는 느리게 지상에 도착한 3등 거미는 입을 벌려 거대한 흙덩이를 뱉어냈다.
툭-
그리고는 보금자리의 명령이 떠올라 흙을 잘게 부숴 사방에 흩뿌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1등 거미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2등 거미는 흩뿌린 흙 위를 빠르게 이동하면서, 흙을 꾹꾹 밟고 있었다.
'?'
보금자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았을 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3등 거미는 보금자리처럼 되고 싶었기에 그를 따라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다 보니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
기분이 좋아진 3등 거미는 그 상태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햇살을 즐기며 청명한 하늘을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2등 거미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후였다.
'!!'
문득 보금자리가 말했던 수액이 떠올랐다.
손가락 위에 올려져 있던 물방울.
주위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재료라는 것도 기억이 났다.
3등 거미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1등 거미는 왜 그렇게 빠른 거지?
아무리 노력해도, 아니 노력은 안 했지만, 그 녀석처럼 빨라질 수가 없었다.
2등 거미는 왜 항상 칭찬을 받는 거지?
1등 거미보다 느리고 가져오는 물건의 양도 적었지만, 이상하게 보금자리는 2등을 가장 좋아했다.
몇 달 동안 2등 거미만 외출시켜준 걸 보면 분명했다.
다만 3등 거미는 불만은 없었다.
보금자리는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채찍질하지만, 특식의 크기는 항상 비슷했다.
오늘도 보금자리가 원하는 재료를 찾아 가져다준다면 맛있는 특식을 나눠줄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뽈뽈뽈-
잠시 후, 3등 거미는 수액을 찾기 위해 주변을 뒤졌다.
물방울,
보금자리가 말한 자원은 분명 물방울이다.
물로 된 방울.
그럼 물을 찾는 게 먼저였다.
'!'
그러다 문득 가장 중요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깜빡깜빡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것.
보금자리는 영기라는 기운이 가득 담긴 물건을 좋아했다.
그렇다면 그냥 물이 아니라 영기가 가득 담긴 물을 찾아야 한다.
뽈뽈뽈-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3등 거미는 물을 찾아냈다, 그것도 영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물을.
'??'
그런데... 양이 너무 많다?
이걸 어떻게 가져가지?
아니, 그전에 그 물방울이 맞나?
보금자리가 보여준 물방울은 조그맣고 작았는데.
그러다 문득 하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최대한 많이 가져오라고 했다.
물방울은 예시였고, 실제는 이렇게 많은 거였다.
'!'
역시 물건 찾는 건 간단한 일이라고 오늘도 3등 거미는 생각했다.
남은 건 특식을 맛있게 먹는 일뿐이었다.
────────────────────────────────────
────────────────────────────────────
42화. 축기기(築基期) (2)
좁은 토굴 안.
솥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진한 향기를 남긴다.
단약을 제조하는 도중에 흘러나온 증기, 연기, 냄새 등은 연단술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증거.
치이익-
그럼에도 고품질로 보이는 단약 여덟 알이 솥에서 빠져나와 손위에 모였다.
"나쁘지 않다."
한번 제조에 열두 알을 만드는 게 최고였지만, 여덟 알도 충분히 좋았다.
나는 초진단 여덟 알을 빈 자기병에 옮겨 담고, 쉬지 않고 바로 다음 제조를 이어갔다.
아니 이어가려고 했다.
뽈뽈뽈-
기척과 함께 가까이 다가오는 거미.
이어가려던 제조를 멈추고 확인해보니, 당연하게도 1등 거미가 가장 먼저 채집을 마치고 당도한 상태였다.
1등 거미는 내 시선을 받자마자 거미줄로 만든 물주머니를 툭 하고 뱉었다.
물주머니 안을 확인하니 각종 수액이 뒤섞여 한가득 모여있었다.
"잘했다."
잠시 후, 2등 거미도 나타나 물주머니를 뱉어냈다.
"역시."
2등 거미가 뱉어낸 물주머니 안에는 내가 보여준 동동 나무 수액이 한가득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한 3등 거미.
툭-
나는 별생각 없이 3등 거미가 가져온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영천수잖아?"
거미줄로 만든 물주머니 안에는 진한 영기를 품고 있는 영천수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천수는 샘물 단위로만 존재한다.
+++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세 거미에게 특식을 제공했다.
세 마리 모두 즐거움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나는 그런 거미들을 보다,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지만, 오늘 일로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모두 먹기 전에 내 말을 들어보거라."
빙글 돌던 거미들이 뚝 멈추며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거미들을 손바닥에 올린 후 하나씩 눈을 마주했다.
"너희와 함께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거늘,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이름을 부여할 것이야."
이름이라는 말에 세 마리가 동시에 몸통을 갸웃 옆으로 기울인다.
마치 이름이 있으면 좋은 건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희들 각자의 특징을 고려해 오랫동안 고심한 것이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먼저 너."
나는 1등 거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씽씽이다. 누구보다 빠르기에, 앞으로도 지금처럼 속도를 잃지 말라고 지어보았다. 마음에 드느냐?"
내 말에 씽씽이가 몸통을 반대 방향으로 기울인다.
여전히 '좋은 건가?'라는 의문을 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끈을 통해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행복감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준 건지 그 감정을 전해 받은 것이다.
그 모습에 나머지 두 마리도 관심을 보이며 빨리 이름을 말해달라고 빤히 바라본다.
나는 두 번째로 2등 거미를 보며 말했다.
"너는 흡쪽이다. 너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걸 완벽하게 만족시킨다. 해서 흡쪽이라 이름을 지었다. 너는 만족하느냐?"
흡쪽이는 내 물음에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더니 손목 다리를 건너 어깨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기쁘다는 표현을 몸소 전해주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흡쪽이 역시 씽씽이처럼 내 감정을 전해 받았으니 이름에 담긴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 모습에 3등 거미가 두 눈을 빛낸다.
나는 마지막으로 3등 거미를 보며 말했다.
"너는 엉뚱이다. 항상 엉뚱하게 다른 물건을 찾아오니 엉뚱이라 지었다. 하지만 너의 생각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나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러니 앞으로도 그 마음 잃지 않고 지금처럼 해주라는 의미에서 엉뚱이라 지었다. 어떠하냐?"
내 말에 엉뚱이가 몸통을 좌우로 흔들흔들 거렸다.
'설명이 긴 걸 보니 좋은 게 아닌 건가?'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다시 한번 설명 부탁해요.'라는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1등 거미는 누구보다 신속했고, 2등 거미는 누구보다 정확했다.
하지만 고대 용족의 탈피체를 찾아낸 것부터 영석 광맥을 발견한 일. 그리고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이번엔 영천수 샘까지.
하나같이 나를 크게 발전시킬 보물들은 3등 거미가 찾아다 주었다. 그랬기에 내 감정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전해졌고, 엉뚱이는 그것을 느끼고 반응을 보인 것이다.
나는 기뻐하는 세 거미를 보며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기분이었다.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
잠시 후, 행복을 만끽하던 거미들이 특식을 소화하기 위해 손가락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급하게 엉뚱이를 멈춰 세웠다.
"엉뚱이 너는 쉬기 전에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거라. 샘물을 가져온 곳으로."
+++
도대체 어떻게 이곳을 찾았을까 싶은 장소.
엉뚱이가 데려온 장소는 지상이 아니었다.
내가 거처를 마련한 곳에서 한참을 이동해야 나오는 지하의 천연동굴.
천연동굴은 대략 30여 평 정도의 크기. 깊이는 2미터 정도, 맑은 영천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라고까진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흔하게 볼 수 있는 규모도 아니었다.
"정말 잘 찾았다."
나는 엉뚱이를 한 번 더 칭찬해주고 손가락 안에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샘물에 뛰어들어 내부를 확인했다.
'밀도가 높다?'
샘물에 들어온 후 또 한 번 놀랐다.
생명의 샘 수준은 아니지만, 꽤 높은 영기 밀도를 지닌 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샘물에 머물며 명안과 청안을 수련해보던 나는 물 밖으로 나왔고, 곧장 한쪽 벽면을 파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거처는 이곳이었다.
+++
거미 삼 형제와 갈락취 두 마리를 영천샘에 풀어놓은 뒤, 나의 생활은 본격적인 수련의 시작이었다.
우선 효율이 떨어지는 초진단은 거미들에게 일정 기간을 두면서 배급하고, 나는 황춘단을 만들어 복용했다.
남은 재료를 전부 단약으로 제조한 뒤 수련에만 매진하면 훨씬 효율적일 테지만, 단약류를 보관할 집기가 부족하기에 제조 섭취 제조 섭취를 반복했다.
단약을 섭취한 후, 용족의 호흡법으로 수행을 쌓았고, 그 뒤엔 대적점을 운용해 실질적인 영기 흐름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는 샘물에 들어가 눈치 보지 않고 명안과 청안을 극대화해 수련을 이어갔다.
생명의 샘을 이용할 때와 달리, 본격적으로 대놓고 청안을 수련하자, 성취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그렇게 모든 일을 잊고 수련에만 매진하길 석 달쯤 되자 신체에 변화가 찾아왔다.
"때가 되었구나."
비로소 3단 끝자락에 이르러, 단약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만 것이다.
나는 하던 일을 전부 중단하고, 좌정 한 채 명상을 시작했다.
보통 인족들은 3단 끝자락, 그러니까 연기기 후기 끝자락에 도달하면 축기단(築基丹)을 복용해 다음 등급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용족은 그런 것이 없었다.
왜냐고?
인족은 잠력을 폭발시키는 축기단을 이용해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지만, 용족은 10단에 이를 때까지 그런 벽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용족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인족만큼은 아니었지만, 매 등급을 넘을 때마다 나름의 벽은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꼬박 일주일간의 명상을 통해 지난 일들을 전부 되짚어 보았다.
과거의 추억을 되살린다기보다는, 기억을 음미한 후 흘려보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됐을 무렵.
상의를 벗고 상체를 드러나게 했다.
스르륵-
그리고는 공간팔찌에서 자기병 하나를 빼낸 뒤 마개를 열어 강진단을 꺼냈다.
"좀 더 수월하게 가능하려나?"
단을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그건 최대 용적량을 단숨에 늘리는 일이었다.
원래 이 몸이 수용할 수 있는 영기 총량의 한계를 깨부수고 그보다 많은 영기를 강제로 욱여넣은 다음, 그다음에 늘어난 총량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게 압축시키며 견고하게 다지는 과정.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최대 허용량이 늘어나면서 단의 크기가 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3단에서 4단으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용족 마을에 있었다면 이런 방식을 택하진 않았을 테다.
아마 몇 가지 임무 후에 받는 승급용 단약을 이용해 수월하게 등급을 올렸을 터였다.
'아쉬울 게 없다. 강진단을 손에 넣었으니.'
하지만 내 처지가 처지인 만큼 혼자 힘으로 극복하면 그만이었다.
원래라면 내 원단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 다량의 황춘단을 한꺼번에 먹었겠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춘단으로 인해 신체가 매우 튼튼해진 상태.
6단까지 사용 가능할 정도로 농축된 영기를 품은 강진단을 이용해 단숨에 원단의 크기를 늘릴 셈이었다.
꿀꺽-
잠시 후, 강진단을 삼키자, 신호가 온다.
두근-
가장 먼저 심장이 이상을 알리고, 다음으로 원단에 통증이 시작된다.
강진단은 3단에 이른 내가 소화하기엔 아직은 시기상조의 단약.
원단에 통증이 시작된다는 뜻은 허용치 한계 이상의 영기가 주입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고통이란 감각은 배제한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에만 집중했다.
후으으으으읍-
동시에 의식을 집중해 밀고 들어갈 틈이 없는 원단의 용량한계로 인해 외부로 빠져나가려는 강진단의 기운을 붙잡았다.
'부족한가?'
하지만 원단은 쉽게 깨지지 않고, 확장하려는 생각도 없는 듯.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버텼다.
마치 감히 그따위 힘으로 나를 깰 수 있을 것 같냐고 말을 거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강진단 한 알을 더 삼켰다.
콰앙!
그러자 심장의 박동이 두 배로 빨라지며, 원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쩌저적-
파앙-
마치 단전에서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강한 충격과 함께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들썩이는 몸을 내버려 둔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이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면 확장을 시도하려 하던 원단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차고 넘치는 강진단의 기운은 외부로 빠져나가 버릴 터.
'합!!'
입을 열지 않은 상태로 기합과 동시에 원단으로 모든 기운을 끌어모으기 위해 애썼다.
'모여라!'
그렇게 얼마나 애를 썼을까?
원단이 자리했던 중심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며 생각지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슈르륵-
원단이 자리한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인력이 생겨나더니, 내 몸에 존재하는 모든 영기를 청소기가 빨아들이듯 집어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그것도 모자라 외부의 충만하던 영기가 피부를 통해 빨려 들어가며 원단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꽃?'
그사이 나는 이상 현상이 무엇 때문인지 파악하기 위해 의식을 집중하고 또 집중했고, 원단이 자리한 곳에 하얀 꽃과 비슷한 것이 활짝 피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쾅!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
뽈뽈뽈-
깨어나 보니, 눈앞이 온통 하얗다.
순간적으로 내면의 세계에 끌려들어 온 건가 싶었지만, 거미줄인 것을 파악했다.
거미줄을 제거하고 일어나보자, 내 몸이 온통 하얗게 뒤덮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보호하려고 한 거구나?"
내가 정신을 잃자마자 거미 삼 형제가 자체적인 판단으로 내 몸을 거미줄로 감아버린 것이었다.
무언가로부터 몸을 보호할 때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시키지 않아도 시행한 것 같았다.
"잘했다."
나는 몸 위로 기어 올라와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거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달라붙어 있던 거미줄을 전부 떼어냈다.
"아!"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변화한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절하기 전과 달리 세상이 보다 선명해졌다.
마치 수십 배 광학렌즈를 끼운 것처럼, 명안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동굴의 벽이 알갱이 단위로 눈에 들어왔다.
힘은 또 어떤가?
이전과 달리 손끝에, 발끝에 머물다 사라지는 기운의 수준이 달랐다.
그전엔 손바닥에 영력을 뭉친 후에야 벽을 다질 수 있을 정도였다면.
팡- 팡-
지금은 딱히 영력을 움직이지 않아도, 벽에 구멍을 낼 정도로 신체의 강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마치 강체술만은 전문적으로 익히는 몇몇 영수족처럼 말이다.
또한 호흡 호흡마다 몸속으로 들어차는 영기의 양이 달랐다.
굳이 예전과 비교하자면 한 호흡에 들이마시는 영기 양이 족히 다섯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설명하는 건, 단 한 가지.
"4단에 올랐구나."
용족 4단, 인족으로 치면 축기기 초기.
초보를 벗어나 실무를 담당하는 어엿한 수사.
그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차자장-
그리고 한 가지 더.
의도하지 않아도 어깨를 중심으로 팔뚝과 가슴께까지 금빛 비늘이 반짝이는 걸 보니,
본격적으로 야수화를 수련해야 할 때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더불어 금파월이 남긴 선물.
뇌전 정령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야수화 술법.
금정령을 익힐 때가 도래했다.
────────────────────────────────────
────────────────────────────────────
43화. 금정령의 위력
나는 상체에 돋아난 비늘을 피부 안으로 가라앉히며, 변화한 신체 확인을 끝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고 놀란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천연 동굴에 가득 차 있던 영천수 샘이 3할가량 줄어든 상태였던 것이다.
"설마 나 때문에?"
그것이 말하는 바는 한가지.
원단을 확장하는 도중 피부로 영기를 빨아들이던 감각이, 그저 감각이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위의 기운을 가져왔단 뜻.
내가 놀란 이유는 현상 그 자체였다.
외부의 영기를 끌어와 수행을 올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원영기, 그러니까 10단에 오른 수도자부터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하 수도자들은 외부 영기를 자극해 체내로 끌어들일 만한 수준 자체가 안되기 때문이다.
"허..."
줄어든 샘물을 보며 이유를 찾던 나는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원단 중심에 자리한 하얀 꽃.
이유가 있다면 그것뿐이란 생각에 즉시 좌정한 채 의식을 집중했다.
하지만 원단 안은 충만한 영기만 가득할 뿐,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것은 환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꼬물꼬물-
그때 몸을 타올라 품 안에 들어오려는 갈락취 두 마리 때문에 집중이 풀렸다.
나는 기회가 될 때 환상처럼 보았던 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갈락취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품을 파고드는 갈락취 둘에게서 감정이 느껴진다.
"너희들도 내 걱정을 한 것이구나."
종속이 늘어난다는 건 먹여 살려야 하는 부양가족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
한편으론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부담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얻는 기분이었다.
"가족..."
아주 잠시 나를 짐짝 취급하던 부모의 눈빛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그래서였을까?
거미 삼 형제를 포함해 갈락취들을 그저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수하가 아닌, 진짜 가족처럼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가슴 한곳에 아로새겨졌다.
그렇게 갈락취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도 이름을 지어주어야겠구나. 흠... 뭐가 좋을까."
거미 삼 형제에 이름을 주었으니, 갈락취들도 차별해선 안 되는 일.
나는 진지하게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아직 특징이 도드라지지 않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지만, 분명 좋은 이름이...
"어? 얘들아?"
하지만 이름을 생각해 내기도 전.
품에서 꼬물거리던 두 마리 갈락취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살펴보니, 동굴 끝에 모여 영천 샘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쑥스러운가?"
알 수 없는 행동에 잠깐 의문이 생겼지만, 이름을 부여하는 게 급한 건 아닌 일.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고, 하나씩 점검을 시작했다.
+++
4단에 오른 후, 한동안 내면을 살피고 영기 흐름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만들어 두었던 단약을 먹으며 원단을 충만하게 만들었고, 한껏 부풀어 올라 성장을 마친 원단을 호흡을 통해 다듬는 작업도 동행했다.
흔히 '수행 안정화'라고 표현하는 행위.
수도자의 수행은 등급이 상승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만약 수행 상승 후 제대로 안정화 작업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 다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수행이 하락한다?
그 후엔 다시 상승시키기가 곱절은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그러니 원단이 단단하게 자리 잡을 때까진 외적인 힘이 아닌 내적인 안정에 치중해야 한다.
"후우우..."
나는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수행 안정화에만 몰두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외부로 나가 달빛을 감상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다가 다시 거처로 돌아왔다.
"가끔 이렇게 달빛을 보는 것도 좋네."
그 후론 수행을 올리기 전과 똑같은 일상이 계속됐다.
단약을 만들고, 호흡을 가다듬고, 대적점을 수련했다.
거기에 더해, 금파월이 남긴 금정령의 술식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초월공진력을 운용해 진동계수를 늘리는 작업을 이어갔다.
다만 한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존재했다.
'금천'이라 이름 붙인 공간팔찌,
아니, 공간 신기.
신기에 내재된 술식에 접근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이 4단이었기에, 바로 술식을 익히려 도전했다.
하지만 완전 실패였다.
흔히 법기술이라 부르는 법기를 다루는 술식이 마치 암호처럼 내용 곳곳이 손실된 상태로 뇌리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보가 띄엄띄엄 전해지는 건 두 가지 이유.
하나는 아직 신기 안에 내재된 술식에 접근할 실력이 안 되거나, 혹은 사용자 등록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당연히 사용자 등록을 마친 진짜 주인이었기에, 내재된 술식에 접근할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이고 말이다.
'7단에는 올라야 가능하겠구나.'
얼마나 대단한 신기이기에 4단에 오르고도 법기술의 술식조차 얻지 못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 후로 공간팔찌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오로지 공법과 호흡에만 집중했다.
탈피체나 갈락취 성체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싶긴 했지만, 관련 지식이 너무 적어 묻어두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공간팔찌 안에 넣어둔 갈락취의 시체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
법기가 아닌 신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매일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는 나날이 지속되었고,
3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
수련을 시작하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단약을 만들 재료가 동이나 버렸다.
그 후론 오직 영천수 샘에 몸을 담가 명, 청안을 수련하는 것과 공법, 술법을 익히는 데 모든 시간을 보냈다.
단약을 아무리 많이 먹고 몸속 영기 총량을 늘리더라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고, 순서였다.
특히나 금파월이 전해준 금정령.
뇌전의 정령술.
그것을 제대로 익히는 데만 1년이 녹아 사라졌다.
아니, 그것을 제대로 익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우욱-"
나는 지상으로 나와 멀리 보이는 산의 봉우리를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산꼭대기에 홀로 서 있는 참나무. 그것을 눈에 담았다.
투두둑-
그 순간 어깨부터 팔목과 가슴께까지 금빛 비늘이 돋아난다. 동시에 비늘 위로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뇌전이 살며시 맺히다 사라진다.
뇌전이 사라지기 직전.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발끝을 터트리며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파지직-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백여 미터를 뛰어넘어 산봉우리를 한참 지나쳐 모습을 드러냈다.
"또 실패구나. 허억- 허억-"
금정령을 사용한 직후,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금정령은 선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정령술법이었다.
이제 4단에 오른 내가 7단 이상은 돼야 보일 수 있는 능력을 해냈으니까.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대단한 상위 술법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너무 빠른 이동 속도로 인해, 완벽한 조절이 불가능했다.
분명 참나무를 목표로 움직였는데, 도착했을 땐 그보다 한참을 지나친 상태.
이것도 일 년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기에 이 정도이지, 처음엔 아예 다른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허억- 후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술법을 통틀어 최고의 조루 술법이라는 것.
내가 가진 영력으로는 금정령을 사용 가능한 시간이 겨우 1초 정도에 불과했다.
나에게 신이 내린 컨트롤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1초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어느 한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성장할수록 술법을 유지할 시간이 늘어나고, 점점 숙달될 테니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1년 동안 발전한 정도를 보면, 앞으로 금정령을 제대로 사용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감이 안 올 뿐이었다.
잠시 후, 금빛 비늘을 가라앉히고, 손을 가볍게 저었다.
휘리릭-
그러자 공간팔찌에서 빠져나온 옷이 자연스럽게 몸에 촥 감겼다.
"법의 한 벌만 구하면 좋겠는데."
이것도 문제였다.
수련을 할 때마다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
일반 옷은 금정령의 기운을, 야수화 된 비늘의 경도를 견디지 못했다.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전여풍이 입고 있던 '법의' 같은 걸 구해야 했는데, 그것도 지금 수행엔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천천히 가자."
그렇게 금정령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내가 너무 급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겨우 4단인 내가 7단 이상이 보일법한 능력을 사용하는데, 그것에 불만을 느끼다니?
1초뿐이라지만, 그 1초가 그냥 1초인가?
나는 내 머리를 툭툭 치며 반성의 시간을 가진 후, 거처로 돌아왔다.
거처로 돌아온 후, 아이들이 뭘 하는지 확인하고, 샘물로 들어갔다.
풍덩-
3년간 엉뚱이가 찾은 영천샘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영천샘은 오랜 기간 아주 천천히 영기가 농축되며 생성되는 것.
하지만 영기가 모이는 속도보다, 내가 명안과 청안을 수련하며 소비하는 영기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밀도가 많이 낮아져, 평범한 수준의 영천샘으로 변해버렸다.
아니, 평범 이하.
'1년 정도일까?'
예상컨대, 앞으로 1년 정도만 더 명안과 청안을 수련하면 일반 지하수처럼 더는 영천수가 아니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곳은 진한 영천수가 모일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영천샘이 생긴 이유가, 지역적인 특수성 때문이니까.
파앗-
샘물에 몸을 담근 후, 청안을 수련하자 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으로 인해 샘물 전체가 푸른색 물결을 품었다.
그 상태로 나는 한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련을 이어나갔다.
거미 삼 형제는 외출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두 갈락취만이 실내 수영장을 방문한 꼬마들처럼 물장구를 치며 물놀이를 즐길 뿐이었다.
+++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위.
두 명의 사내가 산봉우리들을 스치듯 날며 구름을 가르고 있었다.
한 명은 푸른 장삼을 입은 더벅머리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금포를 입은 통통한 사내였다.
두 사람은 무게를 고려해 비행법기를 고른 것처럼, 한 명은 길쭉한 장검 비행법기 위에, 다른 이는 넓적한 원형 법기를 이용해 날아가고 있었다.
말이 없이 한참을 날아가던 두 사람은 산맥의 끝이 보이자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통통한 사내였다.
"장장만(長長萬), 이제 말했던 곳이 나오나?"
"그만 좀 보채게. 벌써 몇 번을 묻는 건지 아는가?"
"자네 말만 믿고 벌써 석 달을 날아왔네. 처음엔 한 달이면 도착한다 했었으니 내 이러지 않겠나?"
"아이고, 그건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석 달이라 말하면 안 따라올까 봐 그랬다고 이미 설명했잖은가?"
"크흠. 그러니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지 말았어야지."
통통한 사내의 트집에 장장만은 괜히 그를 데려왔나 심각하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없으면 계획이 무산된다. 그러니 참기 싫어도 참아야 했다.
'망할 놈. 저놈이 지닌 수량법기(水輛法器)만 아니었다면...'
속에서 천불이 나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잠시 후, 산맥이 끝나고 평원이 이어지다가, 다시 조그만 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제 그만 불평하게. 다 왔네. 진실로."
작은 산에 도착한 장장만은 특이하게 생긴 나무 세 그루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통통한 사내를 이끌었다.
그리고는 한 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네, 아주 오래전 내가 찾은 영천샘이 위치한 자리."
"호오, 정말 깊은 곳에서 영천수가 느껴지는군."
"설마 내가 거짓을 말했을 거라 여긴 건가?"
"흐흐, 그러겠는가? 거참 예민하기는."
장장만의 말에 바닥에 손을 대고 한참을 꿇어 앉아있던 사내가 실실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빨리 수량법기나 꺼내라 이 돼지 같은 놈아. 네놈이 수신일족(水神一族)의 유적에서 그걸 얻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니.'
몸을 일으킨 통통한 사내는 장장만의 시선에 입을 쩝쩝 다시더니, 공간대에서 법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욕조를 축소해놓은 것 같은 네모난 형태였다.
'저것이 소문의 수량법기!'
통통한 사내는 법기를 발동시키려다가, 멈칫하고는 말했다.
"약속대로 반반 맞겠지? 기억해야 할걸세. 이 법기는 내가 익힌 공법이 아니면 발동할 수 없다는걸?"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겐가? 설마 내가 뒤통수라도 치려한다 그 말인가?"
"흐흐, 내가 그리 말했나? 그냥 서로 조심하자 그 말일세. 워낙 흉흉한 세상 아닌가?"
"기분 나쁜 소리 말고, 어서 법기나 발동하시게."
장장만이 싸늘하게 노려보자 통통한 사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수량천!"
외침과 함께 네모난 법기를 허공에 던졌고, 법기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무섭게 추락하며 바닥을 파고 들어갔다.
푹-
덜덜덜-
그렇게 법기가 땅을 파고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일대가 진동하며 흔들렸다.
장장만은 그 모습에 일전에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정말 소문처럼 영천샘을 통째로 담을 수 있을까?'
땅 전체가 진동하는 걸 보면 법기의 위력이 과장된 것만은 아닌 게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푸악-
땅속으로 사라졌던 네모난 법기가 상공으로 치솟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으잉?"
"어어?"
그 모습에 기대하던 장장만은 넋을 잃고 법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건 통통한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사라지기 직전과 동일하게 허공에 둥둥 뜬 채 부유하는 법기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리고 물방울과 함께 사람 하나와 강아지 두 마리도 법기에 딸려 나온 상태였다.
────────────────────────────────────
────────────────────────────────────
44화. 수량법기(水輛法器)
장장만은 아주 오래전 종문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영기밀도가 우수한 영천샘을 우연히 발견했다.
원래라면 종문에 보고하고 일정 보상을 받는 게 순리.
하지만 욕심에 모든 걸 비밀에 부쳤다.
당장 보고한다면 겨우 영석 몇 개 정도의 보상이 끝일 테지만, 훗날 직접 사용한다면 그 이익이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몇 년 안에 영천샘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며 다시 종문의 임무에 집중했다.
하지만 종문의 임무는 쉴 새 없이 계속됐고, 오히려 점점 바빠져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 버렸다.
대략 5년 정도 지났을까?
그때부터 장장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이 영천샘을 발견했듯이, 다른 누군가 영천샘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일.
척박한 모암대지 근처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지만, 그렇다고 왕래가 일절 없는 금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은.
영천샘 걱정에 임무에도 집중하지 못했고, 언젠가부터 실수를 연발했다.
그렇다고 영천샘을 들고 올 수도 없는 일. 점점 근심은 깊어져만 갔다.
그때 들려온 소식이 눈앞에서 히죽대고 있는 금포를 입은 사내의 소문이었다.
암암리에 퍼진 소문이지만, 사내가 수량법기를 지녔다고 소문이 나면서 몇몇 인물들의 표적이 되어있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장장만은 '옳다구나!' 했다.
그 즉시, 기간이 가장 긴 임무를 부여받고, 금포 사내를 설득해 이곳으로 향한 것이다.
물론 임무는 실패할 테고, 종문에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영천샘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임무를 수행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재화를 얻을 수도 있는데?
푸학-
그런 기대감에 차 있던 장장만은 수량법기가 지표를 뚫고 올라오자, 기대감에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영천샘을 옮겨와야 할 수량법기가 사람과 영수 두 마리를 끌고 올라와 버린 것이었다.
"어어?"
금포 사내도 이런 일은 처음인지, 뒷걸음치며 허둥지둥거렸다.
한편, 금파란 역시 당황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영천샘물을 가져가려고 방문한 두 사람보다 더 당황한 사람이 금파란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영천샘에 머리끝까지 몸을 담근 후, 청안을 수련 중이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근처에서 물장구치는 갈락취들의 행동마저 인식 범위에서 점점 지워져 가던 찰나였다.
그때, 강렬한 느낌과 함께 동굴 천장에서 네모난 법기가 떨어졌고, 순식간에 영천샘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 순간 금파란은 법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반항하며, 놀라 허둥대는 두 갈락취를 챙기려 했다.
하지만 법기의 흡인력은 생각보다 강력했고, 손쓸 새도 없이 지상으로 끌려 나와 버렸다.
"..."
지상 위는 묘한 적막감이 맴돌았다.
두 명의 수사, 정확히는 축기기 중기와 후기의 두 사람이 경계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금파란은 자신을 빨아들인 법기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영기 흐름을 읽어냈다.
그리고는 수련 때문에 활성화돼 있던 청안을 지우며 금포를 입은 사내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매달아 두실 생각이십니까?"
여전히 수량법기의 흡인력이 금파란을 잡아당기는 중.
거름망에 걸린 것처럼 법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원인을 알았으니, 법기의 흡인력에서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금파란은 상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금포를 입은 통통한 사내가 여전히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한다.
"너, 너는 누구십니까?"
+++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황당한 일을 겪지만, 이번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드물었다.
수량법기를 이용해 영천샘을 통으로 들고 가기 위해 나타난 이들 때문에, 강제로 거처에서 끌려 나오다니.
부르르-
상대가 끝까지 법기의 흡인력을 풀지 않자, 나는 초월공진력을 일으켜 흡인력을 끊어버렸다.
툭-
그리고는 바닥에 내려서면서 갈락취들을 끌어와 품속에 넣었다. 동시에 영막으로 둘을 감싸 보호했다.
내 행동에 두 사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그들 상식에선 한번 발동한 법기의 구속력에서 너무 쉽게 벗어난 내가 신기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동을 이용해 무영기 장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내겐 대단한 게 아니었다.
지금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법기의 구속력에서 벗어난 게 아닌, 차단한 거였으니 말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놀란 그들에게 말했다.
"무례하시군요. 거처에서 수련 중인 저를 이리 멋대로 끌어와 놓고 오히려 누구냐고 묻다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린 영천샘을..."
금포 사내의 말에 허공에 떠 있는 수량법기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수량법기라, 대단한 걸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발견하고 사용 중이던 샘물을 훔쳐 가시다니요?"
"훔치다니! 여긴 내가 먼저 발견한 곳이다!"
금포 사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더벅머리 사내가 버럭 소릴 질렀다.
나는 이번엔 그를 향해 말했다.
"제가 이곳에 왔을 땐, 아무도 점유한 자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건... 나중에! 나중에 사용하려고 그랬던 거다!"
"나중이라, 참 편한 말이군요. 뭐 그렇다 치고, 제 영천수를 돌려주시죠?"
더벅머리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는 금포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더벅머리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 순간, 더벅머리는 대답 대신, 동그란 원형 법기를 꺼내 발동시키며 손가락을 현란하게 교차했다.
인족들이 술법을 사용할 때 하는 '수결'이라는 행위.
수결은 순식간에 끝났고, 수결이 끝나자 더벅머리를 중심으로 자라난 넝쿨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원형 법기는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은은한 보호막을 만든 후였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나.'
쾅!
나는 순식간에 자란 넝쿨이 나를 향하려는 시점에 이미 땅을 박차고 위로 뛰어오르며 두 사람을 시선에 담았다.
뒤늦게 금포를 입은 사내도 기다란 장검을 꺼내며 수량법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동시에 당황하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맴돌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행태를 이미 예상했기에 나는 놀라지도 당황할 일도 없었다.
중천에서 보물을 두고 갈등이 생길 때, 일상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일이 지금과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영천샘이 아니라, 이동 중에 우연히 만났다고 해도 일은 이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말하듯이,
도적질을 통해 쉽게 쉽게 살아가는 놈들은 그 습성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동호명 수사! 생각지도 못 한 일이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저놈을 죽이고 전리품을 나눠 가집시다! 먼 길을 달려온 덤이라 생각하고 말입니다."
"흐흐, 그럽시다.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이제 막 축기기에 오른 녀석 같은데, 대신 뭐가 나오든 내가 먼저 고르는 겁니다?"
금포 사내는 조금 전까지 말을 더듬는 것이 장난이라 여겨질 만큼 분위기가 삽시간에 변했다.
'내가 방심하길 바라며 연기를 한 건가?'
나는 두 사람이 확실하게 적대감을 내비치자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광선검을 꺼내 손에 쥐며, 발끝으로 영력을 모으며 허공을 박찼다.
파앗-
그러자 순식간에 상대와 가까워진다.
나는 두 사람 중 수행이 더 낮은 5단 수사. 금포를 입고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이를 향해 광선검을 휘둘렀다.
적을 앞에 두고 망설일 필요는 없다.
+++
"흐흐, 역시 내가 만만해 보였나 보구만."
내가 먼저 움직이자, 금포 사내가 허공으로 검을 집어 던졌다.
장검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다가 내가 다가오자 회전속도가 빨라지며 전면을 막아섰다.
차자장- 쾅!
회전하는 검과 광선칼날이 부딪치자 폭음과 함께 내가 뒤로 밀려난다.
수행 차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현상.
나는 밀려난 만큼 광선검의 칼날을 키우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쾅!
그사이, 더벅머리 사내가 붉은 부적 석 장을 허공에 띄우며 수결을 맺었다.
수결이 끝나자 부적이 화르륵 타오르더니 1미터 남짓한 새로 변하며 나를 향해 날기 시작했다.
더벅머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넝쿨도 언제라도 나를 잡아챌 준비를 하는 듯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속전속결.'
그 순간 내 주위의 영기의 질이 살짝 변한다.
애초에 시간을 길게 가져가며 전투를 이어갈 생각이 없던 나는, 금포 사내와의 두 번째 공방으로 밀려난 힘을 이용해 더벅머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피부위로 비늘을 돋아나게 하며 뇌전의 정령을 불러온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수행이 더 높은 더벅머리.
금포 사내를 먼저 공격했던 이유는 금정령을 사용하기 위한 각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스아악-
금정령이 발동된 순간,
파지직-
내 몸은 번개처럼 움직이며 날아오는 세 마리 붉은 새를 지나쳐 더벅머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뇌! 뇌둔술!!"
"마, 말도 안 된다! 뇌둔술이라니!"
그러자 더벅머리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며 나를 바라본다. 금포 사내는 순간적으로 집중이 풀어져 버렸는지, 세차게 회전하던 장검이 멈춰버리기까지 했다.
뇌둔술(雷遁術).
수많은 둔술 중 순간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둔술.
초고위 수사의 뇌둔술은 진짜 번개와 같아, 순간적으로 빛의 속도를 재현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뇌둔술을 내가 사용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놀라는 걸까?
두 사람이 놀라는 이유는 뇌둔술 자체가 아니라, 내 수행 때문이었다.
평범한 둔술은 술법을 익히는데 제한이 없었지만, 뇌둔술은 달랐다.
최소한 결단기는 넘어야 했고,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원영기 수준에 이르러야 했다.
그것도 체질과 속성을 타고났을 때 가능했으니, 실제로 뇌둔술을 익힌 자들은 매우 찾기 힘든 게 현실이었다.
만약 체질과 속성을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뇌둔술을 억지로 익힌다?
화둔술을 익히다 불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잘못하면 이동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몸이 괴사해버릴지도 몰랐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뇌둔술의 이야기.
나는 뇌둔술이 아닌 뇌전의 정령술이었지만 말이다.
어느새 찢겨진 상의 위로 돋아난 비늘로 인해, 두 사람은 또 한 번 괴함을 질렀다.
"요, 용족!!"
"요...!"
퍼벙-
그사이 부적이 변한 붉은 새가 주인을 향해 선회하다가 터져나간다.
그리고 붉은 새가 허무하게 소멸해버린 사이.
스르륵-
더벅머리 사내는 놀란 얼굴 그대로,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툭-
그는 하체만 단단히 서 있고, 상체는 점차 기울어 바닥에 처박혔다.
"장장만 수사!"
이번에도 금정령을 사용함에 있어서 거리 조절에는 실패했지만, 높이와 방향은 정확히 맞췄다.
그로 인해 늘어난 광선검이 상대의 몸을 반 토막 내버린 것이었다.
"이, 이... 무슨..."
장장만의 죽음으로 아주 잠시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적막도 잠시뿐.
"이익!"
금포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행 법기를 꺼내 올라타며 상공으로 치솟아 오른다.
다만 그의 행동은 부질없었다.
내가 그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잡아라!"
그가 반응을 보인 찰나의 순간.
챠아악-
어디선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다가 내 기운에 반응해 나타난 거미들이 거미줄을 분사했다.
거미줄은 삽시간의 그를 뒤덮었고, 위로 솟구치지 못하게 막아냈다.
물론 수행 차이가 너무 크기에 거미줄이 그를 잡아놓은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슈아악-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내가 금포 사내에게 돌아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금정령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영력이 바닥을 보였지만, 금포 사내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겁을 집어먹고, 전투 의지를 상실한 상대는 독기를 품은 어린아이만도 못했으니까.
결국 거미들과 나의 합공에 순식간에 쓰러진 사내는 차가운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의 공간대를 수거했다.
그리고는 널브러져 있는 법기들을 가져온 후, 거미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씽씽이와 흡쪽이가 시체를 하나씩 집어삼키더니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어차피 그대로 두면 괴수들이 먹어 치울 테니 상관없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찾아올지 몰라 취한 조치였다.
잠시 후, 거미들이 돌아오자,
나는 자리를 옮겨 적당한 응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엔 작은 산들이 도토리 키재기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멀리로는 높은 산들이 쉼 없이 이어져 있다.
원래라면 영천샘물의 기운을 전부 소비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이젠 단약 재료도 모아야 했으니, 떠날 시기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다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모암대지를 넘어 서쪽으로 가면 전송진을 이용해 이곳을 떠날 수 있지만, 그곳은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동쪽 끝에 있다는 인족의 성. 아니면 남쪽에 자리한 영수족 들의 마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다만 어딜가나 장단점이 있기에 어디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나는 한참 동안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떠올라 영천샘을 방문한 두 사내의 물건들을 전부 꺼냈다.
이젠 청안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은 파악할 수 있는 상태.
이동도 이동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나 수량법기의 성능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자 그럼 얼마나 대단한 걸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 어?"
하지만, 수량법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
내 시선을 빼앗는 물품이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상자로, 상자 위에는 검은 벚꽃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벚꽃?'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으로 상자를 청안으로 검사한 뒤, 조심스럽게 열었다.
────────────────────────────────────
────────────────────────────────────
45화. 검은 벚꽃
상자를 열자, 익숙한 물건들이 보였다.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 가면.
작은 옥패.
그리고 은색 주화.
"역시, 생각한 게 맞구나."
나는 상자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꺼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비밀 경매회인 흑화도에 갈 수 있는 물품이었다.
흑화도(黑華島).
어느 대륙에 붙어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검은 벚꽃이 가득한 섬이라는 소문만 무성한 곳.
하지만 내가 말한 흑화도는 실존하는 섬을 말하는 게 아닌 '흑화도'라고 불리는 경매회를 뜻했다.
손에 쥔 작은 옥패는 그런 흑화도 경매에 출입할 수 있는 명패.
자격이 된다면 진짜 흑화도에서 열리는 경매에도 참석할 수 있지만, 그건 과거 모든 플레이를 통틀어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진짜 흑화도가 있는지도 확실하진 않지.'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다가 옥패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옥패가 빛을 발하며 주변으로 고동색 띠가 어린다.
고동색은 '흑화도'란 이름으로 불리는 비밀 경매 중에서 가장 하급 경매에 출입할 수 있는 명패란 의미.
고동색 다음이 은색, 은색 다음이 금색, 금색 다음은 투명한 빛이 나오고, 그다음은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상위 등급 경매에 참석하는 방법?
간단했다.
해당 등급 경매에서 일정 금액 이상을 사용하면 끝이었다.
그렇게 되면 옥패에 기록이 남고, 자연적으로 변화가 찾아온다.
즉, 손에 쥔 옥패 자체가 흑화도에서 발급한 법기란 뜻.
한동안 옥패의 고동색 빛을 바라보던 나는 다음으로 가면을 집어 들었다.
가면은 경매장 안에서 신분을 감출 때 사용하는 법기.
다만 가면 법기는 경매장 내부에 설치된 진법과 반응해야만 의미가 있었다. 그 외엔 그냥 평범한 얼굴 가리개와 다를 바 없었다.
마지막으로 은색 주화는 경매장에 참석할 수 있는 참가비 같은 것.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영석 수십 개를 지불해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상자 속 내용물 확인이 끝난 직후, 나는 금포 사내의 물건 중에서 검은 옥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이것도 있구나."
비밀 경매회는 참석자의 신분을 비밀로 하는 것이지 경매회 물품까지 비밀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돈을 준다면 해당 경매의 품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참지 않고 옥간을 이마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 즉시 다음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목적지는 경매가 열리는 묵령산맥(墨靈山脈) 근처의 인족성. 명동성(明東城)이었다.
+++
확인이 끝난 흑화도 관련 물품은 전부 공간팔찌에 담고, 나머지 물건들 분류를 시작했다.
당연히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수량법기였다.
욕조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네모난 법기.
청안으로 확인 후, 영기를 주입하자 법기 안에 가득 차 있는 영천수가 느껴진다.
수량법기를 제외하고도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법기는 많았다.
물주머니 같은걸 이용하면 공간대에도 충분히 수납할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수량법기를 특별 취급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사용 방식과 보존 기한 때문.
다른 보관 법기와 달리, 수량법기는 법기 자체에서 보관한 액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욕조 모양의 법기를 거대화 시킨 후, 그 안에서 수련을 하든 뭘 하든 환경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단 뜻이었다.
말 그대로 영천샘을 그대로 옮겨 담을 수 있다는 의미.
게다가 보존기한.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이 지나도 처음 법기에 담았을 때의 영기 밀도가 영원히 보존된다.
심지어 영천수를 만들어내는 원천을 구할 수만 있다면, 법기 내에서 무한히 영천수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그런 수량법기는 오로지 크기로 상, 중, 하 품질이 결정됐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수량법기를 이마에 가져갔다.
가장 빠르게 법기의 능력을 파악하는 방법이었으니까.
"어?"
하지만 법기 안에 영천수가 가득 담겨있다는 것만 읽힐 뿐, 법기 자체의 성능이 하나도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말하는 바는 한가지.
"법기술이 필요하구나."
손목의 팔찌 '금천'처럼 법기에 내재된 술식을 익혀야 사용할 수 있단 뜻이었다.
나는 영력을 움직이며 법기로 의식을 집중했다.
하지만 뿌연 물안개가 차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법기술을 익히기 전 다른 조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한참 동안 끙끙대다가 수량법기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결국 나중을 기약하며 법기를 수납한 나는 본격적으로 빠르게 물품 확인을 마쳤다.
수량법기와 흑화도 상자를 제외하고 나온 물품은,
비행 법기 두 개.
일반 법기 다섯 개.
자기병 일곱 병.
목함 일곱 개.
공법서 두 권.
그리고 각종 재료와 전음부 같은 편의성 부적,
부적을 제작하는 데 사용하는 괴황지 등의 물품.
마지막으로 영석은 290개가 확인되었다.
우선 공법서는 평범한, 축기기 수사가 가지고 있을법한 수준의 공법서였다.
재료는 너무 잡다하고 종류가 많아 일일이 나열할 순 없지만, 고급 재료로는 인족 축기기 수사들이 애용하는 고율단(高栗丹)과 축이단(築理丹)의 재료가 전부였다.
비행 법기는 둘 다 중급 법기였지만, 기다란 장검 형태의 법기는 속도에 치중된 물건이었고, 원형 방패처럼 생긴 비행법기는 조금 느리지만 영력 소비가 적은 고효율 법기였다.
일반 법기는 보호형 원형 방패를 비롯한 장검, 삼각형 형태의 방패, 온기가 느껴지는 목걸이 등이 나왔다,
하지만 하나같이 나에겐 쓸모없는 것들.
시간이 될 때 팔아버리기 위해 공간팔찌가 아닌 허리의 공간대에 따로 담아두었다.
그중에서 목걸이엔 꼬리가 달려있어 영력을 실어 땅속 깊이 묻어버렸다.
다음으로 일곱 병의 자기병.
네 병엔 강진단과 마찬가지로 6단 이하 모든 수사에게 도움이 되는 축이단이 들어있었고, 나머지 세 병엔 축이단보다는 효능이 떨어지는 고율단이 들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목함.
총 일곱 개의 목함엔 전부 부적이 들어있었는데, 화조부(火鳥符)를 비롯한 공격형 부적 6종류와 호신부(護身符)였다.
중요한 물건들은 공간팔찌에,
팔아버려야 하거나 쓸모없는 것들, 그리고 빈 공간대는 허리 공간대에 나눠 담았다.
전리품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목적지로 향해야 할 때.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떠나려던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거밖에 없지?'
금포 사내의 공간대에서 나온 흑화도 이용권.
비밀 경매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의 공간대치고는 너무 볼품없다는 게 냉정한 평가였다.
비밀 경매회는 당연히 일반 경매보다 고가의 물품이 주로 나온다. 허나 금포 사내의 공간대에서 나온 영석은 겨우 50개.
나머지 240개는 전부 더벅머리 사내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비밀 경매회와 영석 50개.
그 괴리감이 이해되질 않았다.
다른 보관장소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럴 확률은 거의 없었다.
작은 공간대 안에 전 재산을 담고 다닐 수 있는데, 누가 보관장소를 따로 마련하겠는가?
전여풍처럼 고위수사가 된 후, 쓰지 않는 물건들을 따로 보관하는 게 아니라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허나 고민한다고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금세 상념을 털어내 버렸다.
그리고는 장검형 비행법기를 꺼내 동쪽으로 허공을 갈랐다.
+++
명동성에 도착하면 비밀 경매회의 날짜를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그곳으로 가는 이유가 비밀 경매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다만 시기가 지나버릴까 걱정하진 않았다.
만약 경매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면, 입장권을 가진 사내가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위를 이동하는 도중, 적은 영력으로도 운용 가능한 원형 비행법기로 갈아탔다.
그리고는 비행 법기를 조종하는 한편, 금정령과 대적점의 술식을 복습하고 또 복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늘을 가른지 석 달.
산맥을 넘어 평야 지대를 지나친 후, 용이 헤엄이라도 친 듯한 구불구불한 강을 지나고서야 명동성을 볼 수 있었다.
"도착했구나."
명안으로 멀리서 바라본 명동성은 가히 장관이었다.
십여 미터에 이르는 성벽이 천리장성이라도 되는 듯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청안까지 동원하자, 기다란 성벽 위로 희미한 결계의 흔적도 보인다.
대충 눈에 보이는 크기만 해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는데, 그 넓은 지역이 전부 결계에 뒤덮여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랄 업적이었다.
그렇다고 명동성이 중천에서 가장 큰 성은 아니었다.
대륙의 규모로 보자면, 어쩌면 작은 성에 속할지도 몰랐다.
다만 플레이 화면이 아닌, 실제로 접하게 되니 그 규모가 체감되어 압도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비행 속도를 점점 늦추며 성문으로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착지해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합류한 후, 자연스럽게 성문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잠깐, 거기 수사님. 이곳엔 처음 방문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3미터 정도의 폭을 지닌 성문을 통과하기도 전, 두 명의 수사가 다가와 이동을 제지했다.
그들을 따라 한쪽으로 이동하자,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축기기급 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사람처럼, 의욕 없는 얼굴로 옥패 하나를 내밀었다.
"이곳에서 활동하시려면 출입패를 등록해야 합니다. 한 달에 영석 두 개, 일 년이면 영석 스무 개입니다. 어쩌시렵니까?"
영혼 없는 힘없는 목소리에 나마저 기운이 빠지는 기분.
나는 옥패를 건네받고 영석 스무 개를 지급했다.
그리고는 성에 대한 간단한 지리적 소개를 들은 후, 성문을 지나 안으로 입장했다.
'이게 출입패였구나.'
공간대에 넣어둔 쓸모없는 물건으로 분류한 것 중에 똑같은 모양의 옥패가 7개나 있었다. 영기가 살짝 함유된 옥패로 어디에 쓰는가 했더니 출입패였던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 더벅머리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7개의 출입패 중 6개는 더벅머리에게서 나왔다. 그 말인즉 6개 중 5개는 다른 이들을 죽이고 빼앗았다는 소리.
마치 자신의 실적을 보여주려는 듯 출입패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나는 새로 산 출입패를 허리춤에 차고 입구에서 소개받은 상점가로 향했다.
한참 후, 상점가에 도착한 나는 고서점으로 직행.
고금 대륙에 대한 지리서와 역사서, 그리고 문화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사들였다.
"기초 진법서는 없습니까?"
"찾는 게 기초진법총서라면 없습니다. 개별적인 것들은 있지만."
하지만 정작 꼭 필요한 건 구할 수가 없었다.
수련 중 수량법기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온 후 많은 생각을 가졌다. 그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안전에 대한 방비였다.
그동안 혼자 지낼 일 없이 마을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거처를 보호하는데 소홀한 게 사실이었다.
만약 수량법기가 아니라, 폭파 법기나 살상용 무언가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면?
아마도 나는 야수화로 어찌 목숨은 건졌을 테지만, 갈락취 두 마리는 반항도 못 하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진법 총서를 꼭 사야 했다.
책값을 지불하고 고서점에서 나온 나는, 다른 곳들을 차례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넘어갈 무렵.
"기초진법총서요? 수사님께선 진법을 본격적으로 익히시려나 보다아~? 당연히 있죠. 여기."
드디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내가 기초진법총서를 굳이 고집한 이유?
다른 개별 진법서들은 해당 진법의 술식에 대한 해석과 발동 방법, 재료 등만 기재되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기초진법총서에는 진법이 발동하는 원리를 비롯해, 중천의 존재하는 속성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이 일어나는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것도 큰 틀에서 지식을 알려주는 게 아닌, 하나하나 예시를 통해 아주 상세하게.
내가 아무리 플레이를 통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기억에 의존한 지식은 결국 언젠가는 밑바닥이 드러나기 마련.
그러니 기초부터 완벽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영석 200개만 주시면 돼요."
화사하게 웃는 아름다운 상점 주인. 순간적으로 그녀가 돈벌레처럼 보였다.
"너무 과하군요. 기초 총서에 영석 200개라니. 50개만 받으시죠."
"에이, 그건 아니죠. 다른 곳 안 들리고 여기로 바로 오신 거예요? 아니죠? 요즘 누가 진법을 직접 익혀요. 진법 깃발을 사든 원반을 구매하지. 아마 다른 곳에선 못 구하실 걸요?"
진법 깃발은 수사가 직접 진법을 발동해야 하지만 술식과 재료가 이미 새겨진 진법 도구.
원반은 진법 깃발보다 간편한, 영력만 주입하면 발동하는 진법 도구였다.
쉽게 말해 진법 깃발은 밀키트, 원반은 배달이었다.
둘 다 진법을 전문으로 하는 종문이나 상단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아주 싼 가격에.
그녀의 말대로 기초 진법을 직접 익히려는 이가 없는 게 현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정말 1차원적인 생각.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추후엔 반드시 성장하는데 발목이 잡힐 것이다.
"그래도 그건 과해 보이는군요. 60개만 받으시죠."
"좋아요. 그럼 150개. 더는 안 돼요."
"소저께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요즘 누가 진법을 직접 익히냐고. 그 말을 달리하면 기초 총서를 살 사람 역시 찾기 힘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 60개에 넘기시죠."
"말로 상인을 이겨 먹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좋아요. 그럼 100개만 주세요."
"60개."
"70!"
"그럼 65개로 하시죠."
"하아. 정말... 혹시 상가 출신인가요?"
"그럴 리가요."
잠시 후, 여인에게 데스크탑 본체 크기의 서책을 건네받고, 영석 65개를 지불했다.
거래를 끝낸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상점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수사님? 혹시 그럼 이건 안 필요하세요? 호홍, 기초 공부가 끝나면 꼭 필요할 텐데?"
그녀가 내민 또 다른 서책들.
나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서책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 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제목부터 시작해,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불의 원류, 물의 원류, 뇌전의 원류...'
그녀의 말대로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특히 뇌전의 원류.
최근 금정령을 무수히 반복하며 의문점들이 생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꼭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공부였다.
기초진법총서보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로, 당연히 소규모 경매회나 교환회에 참석해 수사들에게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걸 이렇게 구하게 되다니'
나는 관심 없는 척,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맙니까? 이번에도 바가지를 씌우겠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호홍, 바가지라뇨, 섭섭하게 말씀하신다."
────────────────────────────────────
────────────────────────────────────
46화. 원조 갈락취
'원류 시리즈' 책들을 전부 구매한 후, 북쪽에 모여있는 거주지로 이동했다.
성 북쪽에 위치한 수많은 산이 바로 수사들의 거처.
낮은 산들은 대체로 수행이 낮은 수도자들이 머무는 곳이었고, 높은 곳들은 고위 수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산 하나를 온전히 사용할 순 없었고, 작은 산 하나에 수십에서 수백 명이 바글바글 모여 지냈다.
"가장 저렴한 곳으로 원한다 하셨습니까?"
나는 한 달에 영석 하나로 지낼 수 있는 거처를 임대해 그곳으로 이동했다.
영기 밀도가 최악인 장소,
가장 인기 없는 거주지.
하지만 가장 인기 없는 덕분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적었고, 그 덕에 매우 조용한 곳이기도 했다.
호흡을 통해 영기를 축적하는 수도자들에겐 최악의 거처지만, 나처럼 단약으로 속성 성장을 추구하는 자들에겐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이 정도면 쓸만하지."
거처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 간단한 가림막을 설치한 후, 바깥으로 나왔다.
그런 후, 원류 시리즈를 구매했던 여인에게서 들은 정보대로, 성 외곽에 위치한 3층 건물을 방문했다.
방문하기 전 챙이 넓은 삿갓을 만들어 착용하고 얼굴 가리개를 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어떤 정보를 사시렵니까?"
"비밀 경매회의 날짜를 알고 싶군."
그랬다.
내가 방문한 곳은 정보 상점.
명동성에 방문한 이유이자 목적인 비밀 경매회에 대한 정보를 구매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이곳을 이용할 땐 절대 규칙이 있었다.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말 것.
이들은 정보를 팔기도 하지만, 수집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내가 경매회의 정보를 구매했다는 것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누군가에게 팔릴 수도 있단 소리였다.
잠시 후, 손바닥만 한 옥간 하나를 사들인 나는 건물을 빠져나와 상점가로 향했다.
그런 후, 따라붙은 이가 없는지 한동안 살피다가 거처로 돌아왔다.
+++
"2년 후라."
옥간 속에는 등급별 경매 날짜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가장 가까운 하급 경매는 2년 후, 중급 경매는 10년 후였다.
고금 대륙에서 흑화도 경매가 열리는 곳이 한 곳 뿐이라는걸 감안하면, 날짜는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날짜와 정확한 장소 확인을 마친 나는 옥간을 팔찌 안에 집어넣고, 기초진법총서를 꺼냈다.
보기에도 무식해 보이는 거대한 서책을 꺼내 모서리 부분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내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정말 방대하긴 하구나.'
일반적으로 손바닥만 한 옥간 하나에도 책 수십 권 분량의 많은 정보가 들어간다.
기초진법총서의 크기가 데스크탑 본체만 하다는 걸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내용이 담겨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서 하위 수사들이 진법을 공부하지 않는지도 쉽게 유추할 수 있고 말이다.
'이걸 익히는 시간에 공법 수련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지.'
나는 필요한 내용 먼저 완벽하게 이해하고 외운 후, 정보 습득을 멈췄다.
그러고는 공간대에서 검은 천과 나무막대기, 영석 가루와 주사(朱沙)를 꺼내 준비하고 진법 깃발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 후,
방시진(防視陳), 방음진(防音陳), 방폭진(防爆陳)이 새겨진 각각의 진법 깃발을 제작해, 거처 입구에 설치했다.
외부의 시선을 막는 방시진,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방음진.
그리고 허락되지 않은 이의 접근에 충격을 가하는 방폭진.
아마 기초진법총서를 판매한 여인이 이 광경을 봤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진법 깃발이나 원반을 만드는 건 수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야 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이제 만들어 볼까?'
나는 기초 방비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진법 깃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방시진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방비를 위해서라면 진법을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는 일.
내가 기초진법총서를 구매한 이유는 그보다 더 복잡하고 여러 진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진을 구성하고 싶었기 때문.
그래야, 예전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할 일이 없을 터였다.
+++
조용한 거처 안.
내가 손을 뻗자, 검은 깃발 두 개가 나란히 날아가 거처 입구에 박혔다.
푹-푹-
그 순간, 거처 입구에 미리 박혀있던 깃발들끼리 공명하듯 파동이 일어났다.
"된 건가?"
나는 파동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읽고, 진법 깃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파악했다.
확인이 끝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출입패를 이용해 거처의 입구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작업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거처를 오갈 때마다 일일이 깃발을 조종해야 했기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기본적인 건 끝낸 것 같고."
출입패 등록을 마친 나는 더벅머리가 모아둔 출입패들을 전부 가루로 만들어 버린 후, 상점가로 향했다.
그런 후, 축이단과 고율단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중 부족한 것들을 구매해 돌아왔다.
중요한 핵심 재료는 대부분 구비된 상태였기에, 나머지 재료를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단약 제조를 시작하고 두 달이 흐른 뒤.
나는 총 7병의 축이단과 12병의 고율단을 만들 수 있었다.
"쉽지 않구나."
제조율은 평균 이하였다.
축이단과 고율단 모두 인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약.
그러다 보니 제조 경험이 많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초반엔 몇 번의 실패가 반복됐다.
반복 숙달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다.
'만약 강진단이었다면 3할 이상은 더 많이 만들었을 텐데.'
단약 제조를 마친 나는 며칠간 휴식을 가졌다.
굳이 잠을 자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단약을 제조하는 데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고, 잠은 최고의 정신피로 회복제였으니까.
이틀 뒤.
하루가 넘게 거미줄 침구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개운하게 일어나 바깥바람을 쐰 후 돌아왔다.
그런 후, 축이단과 고율단중 어떤 걸 먼저 사용할까 고민하다가 고율단이 든 자기병을 꺼냈다.
수행이 올라갈수록 낮은 등급 단약의 효율이 떨어지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
"흠..."
하지만 단약을 섭취하려던 나는 거처에서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는 거미들에게 시선이 갔다가, 그들을 불렀다.
"다들 이리 오거라."
잠시 후, 거미들이 일렬로 정렬하자, 그 앞에 고율단 하나씩을 내려놓았다.
초진단과 달리 고율단은 4단 이상 수사에게도 꽤 도움이 되는 단약이었다.
그러니 원래라면 먹어서 수행을 올리는 게 맞는 행동.
하지만 현재 거미들의 수행은 겨우 2단 언저리.
수많은 초진단과 가매초 특식, 그리고 영석을 먹였음에도 수행이 더디게 성장하고 있었다.
만약 내 수행만 급상승하고 종속의 수행이 한참 뒤처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는 종속이 동료가 아닌 정말 먹여 살려야 하는 짐이 될 수도 있는 일.
그랬기에 고율단을 섭취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거미들에게 양보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다만 거미들은 단약을 주는 족족 먹어 치우려 하기에 일정 기한을 정해놓고 배급해야 했다.
나는 거미들이 단약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데 걸릴 시간을 계산해보며 축이단을 꺼냈다.
꿀꺽-
그리고는 나 역시 수련을 시작했다.
+++
반년 후.
한동안 수련에 매진하던 나는 한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건 바로 갈락취들.
정확히는 갈락취들의 수행과 먹이에 관한 문제였다.
단약과 가매초 특식, 그리고 영석 가루를 뿌린 별미를 통해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는 거미들과 달리.
갈락취들은 내 피를 통해서 성장과 활동에 필요한 영기를 보급받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체내에 단이 형성되고 본격적으로 수행을 쌓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동안 극소량의 피로도 충분했던 것이, 요구하는 양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것.
당장은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갈락취들의 수행이 조금만 더 높아진다면?
그때가 되면 내 수행에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나는 문제를 인식하고, 상점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영수 관련 상점들.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갈락취와 관련된 정보를 깡그리 쓸어올 생각이었다.
"갈락취요? 그 무시무시한 것들을 누가 키운단 말입니까? 에이,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십쇼."
하지만 어느 상점을 방문해도, 관련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소한 생태에 관련된 것들도.
"수사님, 그런 소리 하시면 다른 이들에게 비웃음을 살수도 있습니다요. 갈락취에게 먹이를 먹인다니요? 그것들은 살아있는 수사들을 잡아먹고 사는 괴수들입니다요."
심지어 몇몇 사람들의 분노만 자극했다.
"어딥니까?! 어디서 그놈들을 본 겁니까? 사람들을 모아 토벌해야 합니다! 제 당숙께서도 크흑, 갈락취에게 산채로 잡아먹히셨습니다!"
결국 정보획득에 실패한 나는 일반 영수 관련 상점에 들러 네발 달린 영수들의 먹이와 단약에 관한 약방문을 구입해 거처로 돌아왔다.
거처에 돌아온 후, 약방문에 적힌대로 먹이와 영수 전용 단약을 만들었다.
"그릉, 그릉."
하지만 갈락취들은 내가 만들 것을 끔찍한 벌레라도 보듯 기피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의미는 명백하다.
-이건 먹는 게 아니에요!
"할 수 없군."
영수 전용 단약에 기겁하는 갈락취들로 인해 고민은 깊어졌고, 결국 내 선택은 정보 상인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럴 거면 왜 시간을 낭비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정보 상점은 최대한 자제하는 게 현명한 행동.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을수록, 희귀한 정보일수록 가격이 천정부지 치솟으니 말이다.
웃긴 건 많이 찾아도 가격은 치솟는다.
+++
정보 상점이 위치한 거리 초입.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의 틈 속에서 자연스럽게 삿갓을 쓴 후, 얼굴 가리개를 하기 위해 손목을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직전.
"어? 수사님! 여기서 다시 보네요?"
원류 시리즈와 기초진법총서를 판매했던 여인이 앞을 가로막으며 인사했다.
하얀 피부에 맑은 눈, 도톰한 입술과 균형 잡힌 몸매. 틈이 날 때마다 바가지를 씌우려 하던 행태만 아니었다면 아름답다고 느꼈을지도 모를 모습의 여인.
나는 그녀의 알은체에 가볍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왜 그 뒤로 안 들르셨어요? 자주 오시라고 싸게 드린 건데."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진법 관련 물품이면 저도 재고가 제법 있거든요."
겨우 한번 만난 사이지만 여인은 단골을 대하듯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결국 조용한 거리로 옮겨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제가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진 않았어도, 모르는 게 없어요.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녀는 몇 번이고 진법 재료와 도구들을 팔려고 하다가, 내 표정을 살피며 주제를 바꿔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 모습에 나도 결국 입을 열었다.
"딱히 찾는 게 있는 건 아닙니다만, 최근 들어 영수에 관심이 가서 말입니다. 갈락취를 영수로 키워보고 싶은데, 관련 자료가 하나도 없군요."
"예에에? 갈락취요? 고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괴수인지 모르시나요? 생사람을 산채로 아그작 아그작!"
여인은 두 눈을 치켜뜨고 마치 고기를 뜯는 모습을 흉내 내며 억지로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습게 말이다.
"다들 그러더군요.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 어찌 함부로 판단하겠습니까. 우선 알아보는 데까진 알아볼 생각입니다."
갈락취가 있다고 말할 순 없었기에,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자 여인의 눈초리가 묘하게 변했다.
곧이어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친 여인이 멀리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럼 저랑 저기 가실래요?"
"??"
"영수라고 하니깐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저도 만나러 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요.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래요. 진짜예요."
급기야 여인은 먼저 이동을 시작하며 나를 향해 어서 오라고 계속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나는 정보 상점이 위치한 건물에 잠깐 시선을 두다가, 결국 걸음을 옮겼다.
성내에서 위험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지극히 낮은 상황.
영수에 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봐서 굳이 손해 볼 건 없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목표로 한 건물에 들어서자, 여인은 훈풍이 도는 사내에게 나를 데려갔다.
그는 쌍꺼풀 없는 실눈이 매우 매력적이었는데, 웃을 때마다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처럼 나약하고 허약해 보였지만, 그로 인해 상당히 지적으로 보이긴 했다.
사내는 여인을 따라 등장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요? 이분은 누구신지?"
"아, 이분은 우연히 알게 되신 분인데, 갈락취를 영수로 키워보고 싶으시다며 관련 지식을 찾고 있으시더라고요. 선배님께서 영수라고 하면 모르는 게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한번 모셔왔어요."
여인은 속사포처럼 나를 소개하더니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아 참, 혹시 원하시는걸 얻게 되시면 소개료 주실 거죠?
"..."
여인의 귓속말에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딨단 말인가?
만약 원하는 지식을 손에 넣는다면 정보료를 제공할 의사가 있었다. 최소한 정보 상점에 가는 것보단 수십 배 돈을 아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때, 우리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갈락취라... 정말 취향 한번 독특하시군요. 하지만 이걸 어쩌지요? 저 역시 갈락취를 영수로 키워봤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러시군요. 크게 기대한 건 아니니 맘 쓰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기대라..."
사내는 내 말에 발끈했는지, 공간대에서 두꺼운 옥간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만, 갈락취가 사실은 고대종이 퇴화한 생물이란 얘긴 들어보았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아! 정말입니까?"
사내는 말과 함께 두꺼운 옥간을 이마에 대더니, 잠시 후 그것을 공간대에 넣으면서 얇디얇은 옥간을 또 꺼내 이마 위로 가져다 댔다.
그런 후 그것을 나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한번 봐보시겠습니까? 해태라는 고대종입니다. 갈락취가 그것의 퇴화종이란 소문이 있지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갈락취 역시 해태의 습성을 답습하지 않겠습니까?"
'해태?'
이름 자체는 들어본 적 있지만, 고대종 답게 현재는 멸종된 지 오래된 영수.
나는 사내가 건네준 얇은 옥간에 이상한 점이 없나 확인한 후, 그것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무시무시하게 생긴 해태의 모습과 그들의 습성에 관한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다만 빠르게 복사했기 때문인지, 내용은 빈틈이 너무 많아 보였다.
'일부러 누락시킨 건가.'
사내의 말대로 해태는 갈락취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날개가 없다는 게 완전 다른 종임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옥간을 이마에서 떼려 했다.
'어?'
하지만 빠르게 읽어 내려간 내용의 말미에 그려진 구슬 세 개의 그림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의식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 개의 구슬.
그건 분명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공간 팔찌 안에 고이 보관하고 있는.
────────────────────────────────────
────────────────────────────────────
47화. 해태라고?
'정말 해태가 갈락취의 시조란 말인가?'
나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옥간 속 내용을 자세히 살폈다.
세 개의 구슬.
그건 분명 성체 갈락취가 죽기 직전 뱉어낸 구슬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손실이 너무 컸기에, 구슬이 어디에 쓰이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건 알 수 없었다.
내가 아쉬움에 옥간을 떼어내자, 내 표정을 살피고 있던 실눈 사내가 말을 잇는다.
"보시니깐 어떠십니까? 해태와 갈락취가 정말 비슷하지 않습니까?"
여인의 말대로 사내는 영수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지식을 뽐내는데 더 열정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다만 정보 손실이 많아, 깊이 알아보지 못한 게 매우 아쉽군요.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혹 이것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해태뿐만 아니라?"
"그렇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이것뿐 아니라 고대종들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고대종의 지식을 나에게 팔라는 소리.
거래를 하기도 전에 물건에 대한 욕심을 보이는 건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었다.
하지만 상대처럼 지식을 뽐내길 좋아하는 사람에겐 저자세를 보이며 상대의 우월감을 채워주는 게 상책.
내가 유독 '허락'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한 것이,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말에 실눈 사내가 즐겁게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이거 참, 저처럼 영수에 관심이 많은 분인 거 같군요. 아직 통성명도 하지 못했는데, 우선 이쪽으로 오셔서 얘길 나누시지요."
사내는 창가 쪽에 놓인 탁자로 나를 안내하더니, 자릴 잡고 차를 대접했다.
매요라 불린 여인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옆으로 앉더니 익숙한 듯 차를 홀짝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꽤 부유한가 보네, 선차라니.'
찻물에서 연한 영기가 풍기는 걸 보면, 선주와 마찬가지로 수련에 도움이 되는 선차(仙茶).
오히려 선주보다 귀하게 취급되는 음료였다.
나는 사내가 따라준 차의 향기를 음미하다가,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자,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 탁무라 합니다. 보시다시피 영수에 관해 공부하고 수집하며, 거래를 하는 사람이죠. 수사께선?"
"저는 가실운이라 합니다. 이곳에 온 지는 반년 정도 되었고, 그동안은 산수로 인근에서 수련에만 힘쓰다 이제야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사내가 이름을 밝히자 나도 따라 이름을 밝혔다. 다만 고금 대륙 역시 용족의 활동 범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헤어진 가실운의 이름을 빌렸다.
사실 '란'이라는 이름은 매우 흔한 이름이었기에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만일에 사태를 대비한 준비였다.
"오, 산수셨습니까? 가실운 수사라... 기억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상당히 어려 보이는 나이에 벌써 축기를 이룬 듯한데, 산수라니?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산수란 어느 한 곳에 소속되지 않고 혼자서 수련하는 수도자.
상대는 내가 산수라는 말에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원래의 웃는 실눈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런 그에게 살포시 웃음 지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보다 선배님으로 보이는데,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하하, 그럴까?"
수행이 한참 앞서거나, 의도적으로 상대와의 차이를 보일 때가 아니라면 보통은 상호존중이 기본.
그런 의미에서 실눈 사내는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상대는 내 권유에 곧바로 말을 편하게 했다.
"산수라면 어디 지역에 머물렀던가?"
"성에서 멀리 떨어진..."
나는 미리 읽어둔 지리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대충 대답했고,
'의도치 않게 도움이 되는군.'
그때부터 편하게 말이 오가며,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여인도 합류해 입을 열었다.
"여기 수사님도 저처럼 진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시는 거 같아요. 저와 어떻게 인연이 시작됐냐면..."
그렇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잡다한 얘기와 명동성 인근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얘기가 한동안 오고 갔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을 즈음.
나는 실눈 사내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 아까 보여주신 고대종의 지식. 저에게 팔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팔아달라?"
"오래전부터 영수에 관심이 갔었는데, 멸종한 고대종에 대한 지식은 이번에 처음 접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공부해 보고 싶습니다."
"하핫, 이거 참. 정말 나와 잘 통하는 것 같아. 아무렴. 영수만큼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것이 없지. 헌데 내가 가진 지식이 워낙 방대해서 말이야. 그것을 알려주려 한다 해도 한세월 걸릴걸세. 고대종에 대해 적힌 옥간의 내용만 복사해도 몇 달은 족히 걸릴 테고."
사내의 말대로 옥간의 정보를 복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초진법총서가 심오한 고등급 수사용 내용이 아님에도 제법 가격이 나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옥간 속 내용을 복사하려면 수사가 직접 내용을 옮겨 담아야 하는데, 우리 같은 하위수사는 그 작업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이 소요될 수도 있었다.
사내의 뜻은 명확했다.
원본을 나에게 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복사하는데 몇 달을 허비할 수도 없단 뜻.
팔 생각이 없단 말이었다.
나는 함께 온 여인에게 도와달란 듯 눈짓을 보내며, 사내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때, 실눈 사내가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이렇게 나와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났는데, 도움을 주는 게 도리지. 대신 후배님도 나를 좀 도와주는 게?"
"어떤 도움을 말하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상대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혹시 푸른잎 다람쥐를 아는가?"
"물론입니다."
"오호, 그래? 잘됐군. 잘됐어. 마침 그놈을 잡으려고 하는데, 몰이꾼이 필요하던 참일세. 그 일을 도와준다면 내 지식을 나눠주겠네. 그 녀석을 잡으러 가는 길이 두 달 정도 소요될 테니. 오가는 사이 아까 보여준 옥간을 복사해 줌세. 어떤가?"
"그럼 가격은..."
"서로 돕고 도움을 주는데 가격이라니! 나 그런 사람 아닐세!"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선배로서 위엄을 보여주려는 듯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두말없이 동의했다.
"언제 출발하는 겁니까?"
다람쥐를 잡으러 가는 날은 나흘 뒤였다.
+++
"정말 이거면 되겠습니까?"
"별로 한 것도 없는걸요."
실눈 사내가 머물던 건물에서 나온 뒤.
여인에게 영석 다섯 개를 건넸다.
일전에 바가지를 씌우던 걸 보면 꽤 많은 영석을 요구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정직하게 대가를 받아 갔다.
"대신, 앞으로 진법 관련 물품은 저에게 사러 오시는 거예요?"
잠시 후, 사소한 약속을 받아낸 여인이 군중 사이로 사라지자, 나 역시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처로 돌아온 후, 한쪽에서 뒤엉킨 채 장난을 치고 있는 강아지 두 마리, 아니 갈락취 두 마리를 바라보다가, 공간 팔찌에서 구슬을 꺼낸다.
새끼손가락만 한 구슬.
'해태의 심장이라...'
구슬의 이름은 해태의 심장.
그렇다고 진짜 심장은 아니었고, 명칭이 그러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제외하곤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다.
실눈 사내가 복사본을 만들어준다고 한 상황에서, 원본을 잠깐만 확인해봐도 되냐고 요구할 순 없었다.
'분명 외형은 완벽하게 똑같다.'
나는 한동안 구슬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전보다 수행이 올랐음에도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도 파악할 수도 없었다.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구슬을 넣어두고, 나흘 후 떠날 여정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나흘 후.
약속장소인 남쪽 성문으로 가자, 나를 제외한 전원이 모여있었다.
기초진법총서를 판매한 여인.
무리의 대장인 실눈 사내.
그리고 처음 보는 덩치가 커다란 사내까지.
"인사하셔요. 이분은 장구이 수사에요. 제 이름은 잊지 않으셨죠?"
"물론입니다. 매요 수사. 다만 수사께서도 함께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총 세 명의 몰이꾼이 필요하다는 얘긴 들었지만, 그중 진법 상점 여인이 포함돼 있는 줄은 몰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를 엮어낼 심산으로 데려갔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사이. 여인과 덩치 큰 사내가 동시에 말한다.
"아 그 말 안 드렸던가요?"
"안녕하시우, 장구이오. 보아하니 나보다 수행이 낮은 거 같은데, 편하게 형씨라 부르겠수다. 괜찮수?"
장구이는 내 몸을 위아래로 훑다가 손을 내밀었다.
인사치레로는 보이지 않았고, 실력행사를 통한 무리 내 서열을 확실히 하고 싶은 듯 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잡자마자 손끝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슬며시 밀려들어 온다.
'축기기 중기?'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의 수행을 뽐내는 사내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을 털었다.
그러자 사내가 픽 웃으며 말한다.
"딱히 위험할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부르시우."
"그러겠습니다."
"시원시원하니 좋구만."
"자, 서로 안면을 텄으면 이제 떠나지. 오고 가는데 넉 달이면 충분하나, 약삭빠른 다람쥐 녀석을 찾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서둘러봅세."
그때, 실눈 사내가 끼어들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고, 우리는 각자의 비행법기에 올라 하늘을 갈랐다.
목적지는 남서쪽에 위치한 자단나무 숲.
영수족이 모여 사는 남쪽 거주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분쟁 지역 중 한 곳이었다.
축기기 후기를 꽉 채운 실눈 사내가 동급 영수인 푸른잎 다람쥐를 잡기 위해 세 명을 고용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다람쥐를 찾아낸 후, 신속하게 사냥해 돌아올 계획이었다.
+++
비행은 평탄했다.
가장 속도가 느린 내 비행 속도에 맞춰 날아갔고, 불필요한 대화도 없었다.
누구 하나 느린 내 속도에 대해 불만을 품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비행 속도를 높여 무리의 이동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굳이 수행 이상의 실력을 보일 필요는 없는 일.
나는 속도가 느린 원형 비행법기에 앉아, 딱 축기기 초기 수사 수준의 속도만 발휘했다.
그렇게 비행을 이어가길 두 달.
실눈 사내의 말대로 정확히 두 달 만에 목적지인 자단나무 숲에 도착했다.
"자 이거 하나씩 받으시게."
멀리 보이는 자단나무 숲을 앞에 두고, 실눈 사내가 검은 깃발을 나눠주며 행동강령을 설명한다.
"우선 녀석이 마지막으로 발견됐다는 장소로 이동할걸세, 그놈이 영기에 민감하니, 세 사람은 한참 뒤에서 따라오면 되네. 그러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나를 중심으로 이백 보까지 다가와 깃발을 발동하게."
실눈 사내는 바닥을 쓱쓱 문지르더니 그곳에 반월형 그림을 그리며, 우리가 위치해야 할 곳을 알려주었다.
사내를 중심으로 뒤로 치우치고 벌어진 품(品)자 형태였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설명을 마친 사내가 수맥 탐지기처럼 생긴 법기를 꺼내더니 앞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발끝으로 땅을 퉁퉁 칠 때마다 수십 미터씩 뻗어나갔는데, 어떤 파동이나 기운도 느껴지질 않았다.
둔술이라고까지 부르긴 힘들었지만, 꽤 고난도 발재간.
나는 그 정도로 기운을 감추긴 힘들었기에 조용히 비행 법기를 꺼내 올라탔다.
아마 거리를 두라 명령을 내린 것도, 비행법기의 파동을 염두에 둔 것일 테니 말이다.
"크흠."
그러자 곁에 있던 두 사람도 머쓱하게 비행 법기를 꺼냈다. 특히 장구이란 자는 민망한지 헛기침도 동반했다.
스르륵-
그러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거리를 벌리며 실눈 사내를 뒤쫓았다.
+++
이동이 불편할 정도로 빽빽한 자단나무 숲속.
멀리서 실눈 사내를 따라가며 행적을 놓치지 않으려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을 곁눈질로 살피다가 명안을 발동해 실눈 사내를 찾았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으니, 오직 시력에만 의지해야 하는 일.
매요와 장구이가 난처해하는 게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축기기 후기치고는 지나치게 훌륭하구나.'
명안으로 살펴보니 실눈 사내는 정말 보기 드문 실력자였다.
기운 자체를 읽어내기가 힘든 건 물론이었고, 마치 자단나무에 동화라도 된 듯, 나무토막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흡사 목둔술을 자유자재로 펼치는듯한 느낌.
물론 진짜 목둔술은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는 술법이기에 실눈 사내와 달리 모습을 보이지조차 않는다.
'특성인가?'
다만 발재간만 유난히 뛰어난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기에,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인족의 특성 중에 발재간과 관련된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며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피잉-
그때, 날 선 감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벌써?'
날 선 감각에 장구이와 매요를 바라보자,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빠르게 실눈 사내에게서 이백 보 떨어진 곳으로 이동.
깃발에 영력을 주입하며 땅에 꽂아 넣었다.
파앙-
그 순간, 나와 나머지 두 사람의 깃발이 공명하며 거대한 파동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아! 저런 식으로!"
그러자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푸른색 다람쥐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반대 방향으로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길목을 막고 있던 실눈 사내의 손에 허무하게 잡혀버렸다.
"약삭빠르기로 소문난 녀석인데, 이리도 쉽게 잡다니, 이번엔 운이 좋구나! 좋아!"
잠시 후,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다가오자 실눈 사내는 우리의 고생을 치하했다.
"다들 수고 많았네. 덕분에 쉽게 이 녀석을 잡았어."
솔직히 한 것이라곤 깃발에 영력을 불어넣은 것뿐인데 칭찬을 받으니 영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다음 일에 착수하기 위해 선금을 지급받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희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요, 탁무 수사께서 능력이 출중하신거지우."
"맞아요. 그렇게 아무 기척도 안 내시는데, 저 녀석이 안 잡히고 배겨요?"
장구이와 매요가 아부를 하는 사이.
우리 세 사람을 향해 슬며시 웃음 지은 실눈 사내가 입을 열었다.
"치켜세우니 머쓱하군. 그나저나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마무리돼버렸는데. 혹시 나와 일 하나만 더 하겠는가? 다들 사례는 충분히 치러주겠네."
"무슨 일이요?"
대표로 매요가 묻자, 실눈 사내가 숲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쪽에 흑진사(黑眞蛇)가 있네. 자네들이 도와준다면 한번 잡아보고 싶은데 말이야."
흑진사는 밤이 되면 갈락취만큼이나 위험한 뱀 괴수.
제안을 듣고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자,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온 거구나.'
영석으로 환산한다면 기초진법총서보다 가치가 높을 고대종의 관한 지식.
그런 지식을 도움을 주고받는 거로 끝낸다고 했을 때 상대의 꿍꿍이를 계산했었다.
오고 가는데 넉 달이면, 임무를 수행하는데 최소한 반년.
축기기 수사의 몸값치고는 약간 비싼 감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인맥을 늘리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인연이 맺어진다면, 한두 번 함께 하는 게 아닌, 주기적으로 부탁을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하니까.
하지만 흑진사를 잡는다고?
그렇다면 계산이 달라진다.
위험수당을 생각하면 나는 헐값에 고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나뿐이 아닌지,
장구이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탁무 수사, 그것은 힘들겠수이다. 흑진사라니?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우?"
────────────────────────────────────
────────────────────────────────────
48화. 흑진사(黑眞蛇)
흑진사.
묵처럼 검은 비늘을 가진 뱀 괴수.
일반적으로 돈이 되는 성체는 축기기 후기 정도의 수행을 지녔고, 가끔가다 특이한 개체들은 결단기를 넘기도 했다.
괴수의 전투력이 동급 수사보다 약한 걸 고려하면 네 명의 축기기급 수사들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햇빛이 쨍쨍한 낮일 경우에만 해당했다.
밤과 함께 어둠이 찾아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흑진사의 검은 비늘은 영기파동을 완전히 막아주어 은신 능력을 배가시킨다. 그렇게 되면 동급 수사 서너 명이 달라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 낮에 잡으면 될 거 아냐? 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게 또 그렇지 않았다.
흑진사를 잡으려는 이유가 영기파동을 막아주는 검은 비늘을 얻기 위함인데, 그것은 밤에 사냥했을 때만 얻을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즉, 낮에 사냥하면 그냥 색깔만 검은, 흔하디흔한 비늘이란 소리였다.
장구이의 단호한 거절에 탁무가 웃으며 답한다.
"장구이 수사, 그러니 내가 사례를 따로 한다고 하지 않았나? 위험한 만큼 충분히 만족할만한 보답을 하겠네."
"아무리 좋은 걸 주면 뭘 하우? 죽으면 그만인데. 다들 안 그렇수?"
장구이가 나와 매요를 보며 동의를 구한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선배님껜 죄송한 말이나, 이 밤에 저희 능력으로 흑진사를 잡는 데 도움을 드리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매요? 그대도 그리 생각하나?"
나마저 반대하자, 탁무는 매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
그녀가 아무 말 없자, 탁무가 씨익 웃으며 품에서 부적과 깃발을 꺼낸다. 그러고는 모두가 움찔하는 사이, 깃발을 바닥 깊숙이 박으며 말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 꼭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파앙-
그 순간, 등 뒤로 강인한 흡인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무슨 짓이오! 뭘 꾸민 게요!!"
"어? 어?"
장구이와 매요 역시 흡인력을 느낀 것인지, 황급히 방어 법기를 꺼냄과 동시에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흡인력은 몸에 묶인 사슬처럼 우릴 놓아주지 않았다.
흡인력은 우리가 깃발을 꽂았던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탁무 수사!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장구이는 고함을 지르며 분노하고 있지만,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탁무가 처음부터 함정으로 우릴 끌어들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실수다.'
그 모습에 나는 자책했다.
나는 분명 내가 얻을 이익과 상대방의 이득을 비교해보고 이번 동행을 결정했다.
내가 조금 이득을 보긴 했지만, 상대에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방심하고 말았다.
그건 분명 실책이었다.
내 이익과 상대의 이익만이 아니라, 상대의 욕심까지도 계산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조금의 이익이라도 있다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거늘.
갈락취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일하게 상황을 예측했다.
중천이 어떤 곳인지, 특히나 이곳의 인족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실수를 하고 말았다.
반항하려 하지만, 강인한 흡인력에 자꾸 뒤로 밀려나는 장구이.
놀란 얼굴로 어버버 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매요.
'깃발을 꽂을 때, 술식이 몸에 새겨져 버린 건가?'
나는 두 사람과 달리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지며 눈앞의 탁무를 직시했다.
'고맙다.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줘서.'
전여희, 풍초신을 비롯한 용족의 인연들.
가실운과 족장을 비롯한 분족인들.
그들과 오래 함께하다 보니 안일해진 게 사실이었다.
영천수를 가져가기 위해 방문한 놈들은 그런 안일한 마음을 깨부수기에는 너무 부족했던 것 같다.
나는 이번 일로 확실히 다짐했다.
'선의엔 선의로 보답하지만, 언제나 마음엔 준비를 담겠다. 그게 누구든 간에.'
영원히 살아갈지 모를 중천의 삶.
강강약약이란 자세에 함께, 또 하나의 기준이 아로새겨졌다.
[용족 특성, 약자멸시가 발동합니다.]
+++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내가 계속해서 좋은 사람만 만나며 마음의 그물이 점점 약해졌다면?
지금이야 눈앞의 상대가 동급의 축기기 수사였지만, 만약 몇 단계를 건너뛴 상대였다면?
아마 나는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다.
내가 힘없이 뒤로 끌려가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주하고 있던 탁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비열한 얼굴로 콧소리를 내며, 부적을 손가락에 끼워 높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나머지 손으로 수결을 맺어, 자신이 땅에 박은 깃발을 가리키자.
화르륵-
부적이 타오르며 핏빛 기운이 깃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몸속에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끼며, 탁무의 행동에 본격적으로 반응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흡인력이 발동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 몇 초 지나지도 않은 상황.
우선적으로 한 일은 당연하게도 청안을 발동하는 것이었다.
화악-
순간 두 눈에 푸른빛이 맴돌며 주변 사물이 하나하나 분석되어 읽히기 시작한다.
탁무의 발밑에 꽂힌 깃발과 우리 세 사람이 사용한 깃발이 하나의 거대한 진으로 연결돼있는 게 보인다.
나는 각각의 깃발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내 몸을 확인했다.
그러자 내가 꽂은 깃발과 내 몸통이 긴 선으로 연결돼있는 게 확인됐다.
'역시 처음부터 준비한 것이구나.'
내가 아무리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해도, 깃발을 받은 순간 확인 작업을 마쳤었다.
그땐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술식이 지금에 와서 발현되었다는 뜻은, 처음부터 깃발뿐 아니라 인근 지역 자체에 술식을 심어놨다는 뜻이었다.
어느새 흡인력이 잦아들며, 나는 내가 깃발을 꽂았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장구이와 매요도 마찬가지,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들 기다리게, 준비는 이것뿐이 아니니."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벌어진 품자 형태로 꼼짝달싹하지 못하자, 탁무가 비웃음과 함께 주먹만 한 종을 꺼냈다.
그런 후, 그것을 흔들자, 기이한 파동이 주변을 흔든다.
뎅-
'저건?!'
청안을 발동하고 있었기에, 파동이 뻗어 나오는 게 실시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했더라도 종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나는 즉시 고양감을 끌어올리며 정신을 방어했다.
[용족 특성, 용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두웅-
그 순간 파동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고,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동공이 풀려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반응에 맞춰.
키에에엑-
어디선가 괴수의 울부짖음과 함께, 멀리서부터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종이 퍼트린 파동과 동시에 탁무는 모습을 감춰버린 후였다.
'어딜!'
청안으로 확인하자, 나무 위로 올라간 탁무가 은신부를 사용한 채 숨죽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탁무는 우리를 미끼로 흑진사를 불러와, 흑진사가 우릴 먹어 치우는 동안 모종의 술법으로 사냥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걸 위해 미리 방문해 숲속에 진법을 설치하고, 우리가 사용할 깃발에 반응하도록 만든 것이다.
'아!'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다 보니 푸른잎 다람쥐를 어떻게 그리 빨리 잡을 수 있었는지도 예상이 갔다.
아마 처음부터 다람쥐를 가지고 있었을 테다. 우릴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일 뿐.
나는 다가오는 흑진사의 기운을 느끼며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계산했다.
지금 바로 흡인력으로 인한 구속을 깨부수고 혼자 움직인다?
그렇게 되면 흑진사는 무조건 나를 노리고 달려들 터.
우선은 상황을 보고 움직이는 게 현명했다.
"으아아악! 탁무!!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괴성과 함께 분노를 표출하는 장구이.
그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검은 뱀이 장구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나무 위에 은신하고 있던 탁무가 움직인다.
나는 청안과 동시에 명안을 발동하며 은신한 채 움직이는 탁무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으아악! 사, 살려줘! 탁무 수사!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소! 제발!"
그사이 장구이는 검은 뱀의 습격에 방어 법기를 사용해보지만, 힘없이 당하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 정신 공격이 영력을 움직이는 데 지장을 주는 것 같았다. 매요 역시 방어 법기를 허공에 띄운 채 비틀거리는 걸 보면 분명했다.
잠시 후,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탁무가 처음 자리로 돌아가 깃발 주위로 무언가를 새기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우리가 잡아먹히는 동안 무언갈 준비할 속셈이었구나.'
나는 그 모습에 반쯤 잡아먹힌 장구이를 힐끔 보고는 피부위로 진동을 만들었다.
그러자 진동이 뭉치고 뭉치며 흡인력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차르륵-
곧이어 피부위로 금빛 비늘을 만들며 뇌전을 불러왔고, 그에 맞춰 광선검을 꺼내 길게 늘어트린다.
그 순간,
파지직-
한 줌 번개가 되어 탁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어?"
어느샌가 몸속에 차오른 고양감 때문일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이동해, 두 걸음 떨어진 탁무의 등 뒤에 도착했다.
그러자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탁무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려 나를 확인한다.
동시에 공간대를 스치며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딱 거기까지.
스륵-
몸통이 절반으로 잘린 그는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렇게 모로 기울어졌다.
쿵-
바닥에 넘어지며 상·하체가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까지, 두 눈빛만은 생생하게 살아 해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가실운 수사! 저 좀 살려주세요!"
멀리서 들리는 여인의 비명에 광선 칼날을 늘이며 상·하체가 분리된 탁무의 심장을 찌르자,
푹-
"..."
그제야 탁무의 두눈이 탁하게 변하며 생명이 소실되었다.
힘들게 함정을 준비하고, 우릴 속이려 노력한 것에 비해, 초라하고 단순한 죽음이었다.
+++
탁무가 죽은 후,
나는 청안을 이용해, 그가 발동하려던 진법이 무언지 파악했다.
하지만 이미 발동을 시작한 진법의 술식은 읽혔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어? 저건?'
그때 시선을 옮기는 시야 속으로 아주 멀리서 몸을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잡혔다.
무언가는 나무에 동화된 듯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청안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동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아주 잠깐, 탁무에게 숨겨둔 조력자가 있는가 싶었지만, 요지부동 가만히 숨어있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듯싶었다.
그때, 이곳이 영수족과의 분쟁지역이란 게 떠올랐다.
'빨리 떠나야겠구나.'
아마도 진법으로 인한 파동을 읽고 인근에서 활동 중인 영수족이 다가온 것이라 판단됐다.
나는 죽어버린 탁무의 공간대를 챙기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물품들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반쯤 사라진 장구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흑진사를 향해 움직였다.
위험에서 벗어났고, 나를 이용하려던 탁무를 죽였으니,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식사를 끝낸 흑진사가 날 쫓지 않을까?
벌써부터 눈앞의 장구이가 아닌 날 곁눈질로 힐끔거린다.
원래부터 날뛰는 생물을 사냥하길 좋아하는 놈의 본성을 생각해보면, 당장 나를 향해 덤비지 않은 것만도 신기할 정도였다.
'설마 진법 때문?'
빠르게 움직이며 넓은 지역에 사슬처럼 연결된 진법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지금은 어떤 진법인지 파악하기 힘들지만, 만약 정말 이 진법이 흑진사의 어그로를 방해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훗날 공부를 통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식 오류를 일으키는 진법이라...'
잠시 후, 대놓고 흑진사의 등 뒤로 쇄도한 나는 공격력을 배가시키기 위해, 몸을 앞으로 회전했다.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동시에 발끝으로 영력을 옮기며, 내 발이 채찍이라도 된 것처럼 내리쳤다.
그 순간, 장구이를 먹고 있던 흑진사가 꼬리를 들어 나를 막았다.
쾅!!
동시에 검은 비늘이 물결처럼 출렁이더니, 흐릿하게 변하며 흑진사가 모습을 감춰버렸다.
'나에겐 안 통한다.'
내가 탁무를 처리한 후 도망가지 않은 두 번째 이유.
파앗-
내 눈에 푸른빛에 더해갈수록 흐릿하게 변해가던 흑진사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흑진사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는 갈락취와 비슷한 은신 능력 때문.
당연히 나에게는 크게 위험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인족 특성, 거인의 발걸음이 발동합니다.]
콰아앙!!
끼에에에엑-
나에게 흑진사란 낮이나 밤이나 크게 상관없이 한낱 뱀 괴수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쾅!
몇 번의 공방이 오고 갔고,
끼에엑-
연달아 얻어터지던 흑진사가 불리함을 깨닫고 도망가려는 사이.
서걱-
나는 지체없이 다가가 머리를 잘라버렸다.
+++
흑진사를 처리한 후,
놈의 사체를 공간대에 집어넣는 사이,
여전히 진법의 구속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매요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가실운 수사님.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살았다는 생각에 방어 법기를 수거하며 크게 숨을 내쉬고 안도했다.
나는 상황이 정리되자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가실운 수사님. 어떻게 여기서 벗어난 거죠?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 진법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나는 그 모습에 무심하게 말했다.
"도와드릴 수는 있으나,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요?"
"처음부터 저를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탁무 수사에게 소개한 것입니까?"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 그래요. 흑진사를 잡는다는 말에 모두가 동행을 거부하자 탁무 수사가 부탁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럴 줄 몰랐어요! 저도 피해자예요!"
"피해자라..."
"그런 표정 하지 마요. 가실운 수사님이 그 뱀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저도 저기 장구이 수사처럼... "
그녀는 절반밖에 남지 않은 장구이의 흔적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우선 여기서 풀려나게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본다.
"매요 수사께서도 진법을 공부하시는 분이니 아실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
"갑자기 무슨?"
"왜 탁무 수사가 서 있던 곳이 아닌, 이곳이 진법의 중심인 겁니까?"
스아악-
그 순간, 매요의 발밑에서 푸른 실들이 매섭게 솟구쳤다.
하지만 솟구치던 실은 무릎에도 닿지 못하고 힘을 잃고 흐트러졌고,
툭- 데구르르-
동시에 매요의 머리도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
────────────────────────────────────
49화. 전리품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
상황을 정리한 후, 매요와 장구이의 물품까지 챙긴 나는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오직 속도에만 치중한 채 비행 법기를 조종하길 한참.
더 이상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에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정말 영수족 인물이었나?"
흑진사를 처리하기 전부터 느껴졌던 시선은 상황을 마무리 할 때쯤부터 노골적으로 내게 접근했다.
하지만 접근한 이가 누구든 간에 분쟁 지역에서 괜히 마주쳐봐야 좋은 것이 없다는 판단에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이제야 꼬리를 떨쳐버리게 된 것이다.
아니, 내가 떨쳐버렸다기보다는 상대가 놓아주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청안이 아니었다면 아예 발견도 하지 못했을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느린 원형 법기로 갈아탄 나는, 공간팔찌에 넣어둔 여러 전리품 중 실눈 사내의 공간대를 꺼냈다.
그러고는 일전에 보았던 두꺼운 옥간을 빼내, 이마에 가져갔다.
'여깄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태에 대한 정보를 찾아냈고, 내용을 머릿속에 주입하려 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려고 하니, 비행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할 수 없이 다시 장검형 법기로 갈아탄 나는 올 때와 반대로 최고속력으로 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탁무가 알아챌까 봐 갈락취들을 거처에 놓고 온 상황.
빨리 돌아가 아이들을 챙기고, 그 후에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아직은 분쟁 지역의 범위 안.
괜히 이런 곳에서 여유롭게 천천히 비행하다가는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올 때와 다르게 혼자인 나는 좋은 먹잇감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
평원 위,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 속.
뿔이 달린 고깔 형태의 비행법기 위에 두 사내가 앞뒤로 앉아있었다.
법기의 앞에 앉아있는 사내는 얼굴은 험악한 산적처럼 생겼으나, 머리 위로 쫑긋 솟아오른 세모 귀가 귀여워 보였고,
뒤에 앉은 사내는 푸른 얼굴에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이동하는 법기 위에서 구름 너머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길 한참.
앞에 앉아있던 사내가 등 뒤를 향해 말했다.
"형님, 저놈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뎁쇼? 설마 우리가 몰래 따라붙은 걸 눈치챈 걸까요?"
"그럴 수도 있다. 분명 나무 안에 완벽히 숨었다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발견했으니까"
"더 쫓을깝쇼? 자꾸 속력을 내길래 몰래 쫓으려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따라갈걸 그랬구만유."
사내의 물음에, 뒤에 앉아있던 푸른 얼굴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흑진사를 어떻게 잡은 건지 물어보려 한 것뿐인데... 굳이 더 쫓아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정말 그 교활한 뱀을 손쉽게 잡았다굽쇼? 우리보다 수행이 낮은 것 같았는데?"
"그래서 궁금증이 생긴 것이었다. 놈에게는 흑진사의 은신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 같아서. 특히, 그 푸른 눈... 그건 마치..."
푸른 얼굴 사내가 말을 하다 멈추자, 산적 같은 사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푸른 눈? 설마 고대 전사들만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청안을 말씀하시는 건갑쇼?"
"모른다. 허나 만일 그 푸른 눈이 흑진사의 은신 능력을 무력화한 게 맞다면... 고서에 전해지던 청안이 맞겠지."
"에엑! 그렇다면 더 쫓아야 하지 않겠수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쑴다."
서서히 속력이 줄어들던 비행 법기의 속도가 다시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푸른 얼굴의 사내가 앞에 앉은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니다. 저 산맥을 넘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우선은 돌아가자."
"하, 하지만!"
"그리고 쫓지 않아도 다시 만날 거란 생각이 든다."
"에에?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산적 사내가 의문을 표하자, 푸른 얼굴 사내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느냐? 왠지 인연이 이어져 있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
"없는뎁쇼?"
"... 가자."
잠시 후, 푸른 얼굴 사내의 명령에 비행법기가 크게 선회하더니, 자단나무 숲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름 위로 길게 남은 선만이 누군가 머물다 갔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
한 달이 조금 넘은 시간.
나는 전속력으로 비행에만 집중했고, 많은 시간을 단축해 명동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성에 도착했다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성 외곽을 크게 돌아 떠났던 성문의 반대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삿갓과 얼굴 가리개를 한 후, 성문을 지키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처음 방문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성을 떠날 때 네 명이었던 인원이 돌아올 때 혼자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그림은 아니었다.
게다가 성에 정착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은 나와 달리 매요와 탁무는 수십 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당연히 친분이 있거나, 그들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일.
나는 새로운 출입패로 신분 세탁을 한 후, 처음 방문한 사람티를 팍팍 내며, 상점가로 향했다.
그렇게 한동안 상점가를 배회하다가 몇몇 잡다한 물품을 사 들고, 거주지로 향했다.
한참 후, 거처에 도착한 나는 갈락취들을 챙기고 그곳을 빠져나왔고, 행색을 바꾼 후 새로운 거처를 임대받아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전과 동일하게 거처를 기초 진법으로 방비하고 본격적인 전리품 확인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내 손엔 이미 고대종의 지식이 담겨있는 옥간이 들려있었다.
비행 법기에서 아주 잠깐 확인한 후,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던 내용.
그것들에 대한 것을 해갈한 후에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세 내용 속에 빠져들었다.
+++
오래전에 사라진 고대의 7대 종족이 자리 잡기 전부터 중천에서 살아가던 생명체.
그 이름하여 해태.
해태는 호랑이처럼 생긴 몸에 목 뒤로 기다란 두 개의 뿔을 가진 영수였다.
각각의 뿔은 불과 물을 다룬다 알려져 있었는데, 옥간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보자면, 수둔술과 화둔술까지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것 같다.
해태는 험악한 생김새와 달리, 충직하고 정의로운 영수였는데, 악한 것을 보면 참지 않고 물어뜯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태가 가진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일반적이지가 않아, 수많은 이들에게 배척받았고, 그렇게 멸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살업을 보는 눈이라니... 신기하구나.'
살업(殺業)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쌓여가는 업.
도전과제의 업적 중에도 해당 항목이 있을 만큼, 중천에서의 살업은 하나의 공식화된 수치였다.
실제로 '혈제' 같은 피의 제사를 지내 수천수만의 목숨을 해치면, 살업이 올라가 특수한 변화를 가져왔다.
단어의 어원에서 보듯 당연히 좋은 기운은 아니었지만, 몇몇 공법은 살업을 이용해 수련하기도 하니 무조건 나쁘다고 만도 볼 순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살업을 수치화해볼 수 있는 해태는 살업 수치가 일정 이상 올라간 자를 보면 죽이려 들었다고 한다.
'설마 그 과정에서 퇴화한 건가?'
옥간 속 내용 어디에도 해태와 갈락취를 연관 지어 생각할만한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라면 죽이는 거로 끝났을 행위가 시식으로 이어진 거라면?
죽이는 과정에서 영력으로 충만한 수사의 맛을 알게 된 거라면?
그렇다면 혈맥의 힘이 퇴색되고 옅어지면서 변화가 찾아왔다는 게 충분히 납득이 갔다.
'가능성이 있다.'
날개도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다.
성체가 된 갈락취와 해태의 모습은 날개 유무로 인해 판이하게 갈린다.
하지만 아직 완벽히 자라지 않은 갈락취의 날개는 언뜻 보면 목 뒤에 올라온 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원래는 뿔이었어야 할 것이 날개로 진화한 것일 수 있었다. 혹은 날개로 퇴화한 것이거나.
'고대종의 습성은 정말 특이하구나.'
나는 한동안 해태의 습성에 대한 정보에 푹 빠져있다가, 구슬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옮겨 담았다.
세 개의 구슬.
해태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전해주는 지식과 영력의 보고였다.
'이래서 선물이란 말을 한 거였어.'
성체 갈락취가 죽기 직전 나에게 말했던 선물의 의미.
구슬에 대한 걸 완벽히 알게 되자, 그 의미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해태와 갈락취를 동일시한다는 전제하에,
세 개의 구슬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영력을 품은 영단이자 평생동안 살아오며 쌓은 지식의 총집합이었다.
오직 암컷 갈락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것은 수컷 갈락취가 취한 뒤, 선별과정을 통해 자식에게 전해지는 구조였다.
그 과정에서 수컷 갈락취는 자식보다 더 많은 영력과 지식을 전해 받을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나에게 선물이란 말을 건넨 것이었다.
즉 아이들을 위해 남긴 선물이자, 그것을 전해줄 나에게 남긴 선물.
수컷 갈락취 대신 구슬에 농축된 힘을 아이들에게 전해줄 사람으로 나를 택한 것이었다.
물론 수컷 갈락취와 나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암컷의 힘을 전해 받은 수컷 갈락취는 그 후에 아이들을 방목하고, 새로운 암컷을 찾아 떠난다. 그런 식으로 세대가 거듭하며 점점 강해지면서 종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암컷 갈락취를 찾아 떠날 생각이 없고, 아이들을 떠나보낼 생각도 없었다. 정말 보모의 역할로 선물을 받은 것이란 말이었다.
"이 내용대로라면... 세 개의 구슬을 전부 소화하기만 해도 엄청난 수행 상승이 있겠구나."
다만 아쉬운 것도 있었다.
탁무에게서 얻은 옥간에는 해태의 습성에 대한 지식은 가득했지만, 정작 중요한 구슬을 소화하는 방법에 대한 건 없었다.
해당 방법을 찾을 때까진, 구슬은 여전히 그림의 떡에 불과하단 뜻이기도 했다.
"아쉬울 필요 없다. 이것에 대해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실마리가 생긴 이상, 해당 정보를 얻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아쉬워할 시간에 방법을 찾는 게 더 생산적인 사고방식이었다.
+++
한동안 옥간을 떼지 못했던 나는 며칠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공간 팔찌에 집어넣었다.
해태에 대해 알게 되자 다른 고대종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었지만, 급한 건 아니었기에 참아 넘겼다.
잠시 후, 세 명의 수사에게서 얻은 공간대와 물품들을 전부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얻은 전리품과 가장 차이가 보이는 건 옥간과 서책의 양.
진법 관련 기초부터 해서 중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한 무더기나 있었다.
전부 매요의 공간대에서 나온 물건.
심지어 기초진법총서처럼 고가에 팔 수 있는 것들은 몇 권이나 중복으로 가지고 있었다.
나는 중복된 것들은 공간대에 담고, 나머지는 공간 팔찌에 옮기고는 분류를 계속했다.
서책의 양만으로 따지면 탁무의 전리품도 그에 못지않았다.
각종 영수에 대한 정보와 영수를 다루는 방법, 또한 괴수와 영수를 활용하는 여러 가지 지식들.
그것들은 빠짐없이 확인이 필요했기에 공간팔찌로 직행했다.
"이건 목둔술법서?"
특히 목둔술에 관련된 서책 몇 권은 꽤 귀한 것이라 따로 목함에 보관돼 있을 정도였다.
"어쩐지. 이것 때문이었구나."
목둔술법서를 가볍게 확인한 나는 그것이 탁무의 뛰어난 발재간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귀한 물건일수록 더 꼼꼼히 청안으로 살피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공간대에 따로 담았다.
물건들을 법기와 단약류, 재료들로 선별하고 하나씩 확인 작업을 이어나갔다.
+++
전리품 확인 작업이 끝난 후.
필요 없는 하급 법기들은 시간을 쪼개서 하나 두 개씩 판매했고, 그것만으로도 영석 750개가 모였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세 사람에게서 나온 영석이 900개가 조금 넘었으니, 전리품으로 인해 순식간에 자산이 곱절 이상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팔지 않은 서책류나 한가득한 각종 재료를 다하면, 정확히 얼마의 가치인지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했다.
단약도 9병이나 나왔다.
전부 6단까지 사용 가능한 축이단.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진 단약 걱정 없이 수련에만 힘쓸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그걸 제외하고도 탁무의 주법기로 보이는 부채,
매요가 사용한 푸른실과 두 개의 깃발,
그리고 장구이가 죽어가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던 손바닥만 한 보호법기.
그것들은 최소한 중급 이상의 물건이었기에 성능을 살필 필요가 있어, 먼저 분류해둔 상황이었다.
다만, 딱 두 가지 물건 때문에 바로 수련을 시작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하나는 매요의 공간대에서 나온 지도.
다른 하나는 탁무에게서 나온 노란 옥패.
매요에게서 나온 지도는 법기 형태의 지도로, 영력을 불어넣으면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미로가 나타났다.
흔히 유적 안의 미궁이라 불리는 곳을 표현한 지도.
지도 한쪽에 '공지(孔知)'라고 적힌 걸 보면, 지도가 나타내는 유적의 주인이 공지라는 인물이거나 혹은 지역명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 왜 고민을 이어가느냐?
그건 바로 거미들 때문이었다.
분류작업을 위해 공간대에서 물건을 전부 쏟아낸 후부터, 거처에서 장난치며 돌아다니던 거미 세 마리가 지도 법기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마치 이곳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행동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 중 하나였는데, 하나는 법기를 만든 사람의 기운에 거미들이 반응한 것이거나,
다른 이유는 법기를 만드는 재료에 거미들이 반응한 것이었다.
'어디인지 찾아봐야 할 것 같긴 한데...'
그리고 탁무에게서 나온 노란 옥패.
그것 역시 지도 법기만큼이나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왜냐고?
파지직-
노란 옥패에 영기를 불어넣으면, 그것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내 비늘이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50화. 경매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