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화

무결자의 신전 (3)

베니엘과 올리비에는 힘껏 신전의 청동문을 밀었다.

그그극! 구그그그!

하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마법이나 잠금장치 때문이 아니다. 문 자체가 녹슬어서 꼼짝도 안 하는 것이었다.

경첩 부분의 녹이 부풀어 올라 엄청나게 뻣뻣했다. 악을 쓰며 밀자 가루가 부서져 내리며 열릴 듯 말 듯했다.

올리비에는 뒤를 쳐다보더니 비명을 터뜨렸다.

"서둘러야 합니다! 오크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옵니다!"

야만 오크들은 베니엘을 보고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간 상태. 엄청난 속도로 돌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나이트쉐이드의 핏줄을 찢어발겨라! 그것만이 동포들의 원혼을 달래는 길이니!"

"저놈의 목을 잘라서 남작에게 보내겠다!"

멀리서도 오크들의 살기에 목덜미가 찌릿찌릿할 정도였다. 베니엘과 올리비에는 죽을힘을 다해 청동문을 밀었다.

우그그그극!

그때 녹슨 경첩 하나가 박살 났다. 그리고 문이 밀리더니 간신히 사람 하나 들어갈 틈이 벌어졌다.

"좋아! 어서!"

둘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쿠웅!

"후우! 후우!"

긴장감에 올리비에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는 곧 신전 가운데 자리한 제단에 있는 영롱한 보석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녹색으로 황홀한 빛을 뿌리는 기다란 보석의 파편이었다.

"저건…!"

"그래, 내가 찾던 거다. 왜 직접 보니 욕심이 생기나?"

베니엘의 물음에 올리비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를 돕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 미지의 힘에 본능적인 욕심이 피어오르긴 했다. 하지만 올리비에에겐 그런 것보다 약속이 더 중요했다. 그게 르텔 가문의 핏줄이 사는 법이기도 했고.

"좋아. 문을 부탁해. 잠시 시간을 벌어줘. 저걸 받아들여야 하거든."

"이후에는 대책이 있습니까?"

"그래."

베니엘은 제단으로 나아갔다. 제단 근처에는 수십여 명이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상당히 오래전에 죽은 듯 모두 백골과 바스러진 무구만 남긴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저 제단 위의 보물에 도전했던 자들이다. 하지만 자격이 없었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니엘은 제단 위에 있는 길이 30센티미터 정도의 뾰족한 조각을 살펴봤다.

"황홀하군…!"

이것은 '무결자의 에메랄드 샤드'다. 한때 위대한 마신이었던 무결자는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때 그를 구성하던 신성이 파편화돼 지하 곳곳에 뿌려졌다. 눈앞에 있는 샤드가 그 일부인 것이다.

베니엘은 거침없이 샤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미 주변에 널브러진 백골들이 이것을 만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상관없어. 베니엘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특별한 자다. 그리고 선택받은 존재다.

베니엘에겐 이 에메랄드 샤드의 주인이 될 태생적인 자격이 있었다.

정확히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본류, 그의 아버지인 나르다리온 나이트쉐이드가 도망쳤던 본가와 관련된 비밀 때문이다.

본가는 지하에서 가장 위대한 다크 엘프 가문 중 하나로 그들의 조상은 마신 무결자와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 힘은 피를 타고 계속 내려왔고, 본가에서 독립한 나르다리온 나이트쉐이드와 그의 아들인 베니엘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덕분에 베니엘에겐 에메랄드 샤드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그는 마신이 남긴 힘을 두 손으로 쥐었다. 동시에 비명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아!"

처음에는 손바닥을 불러 지지는 것 같더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삽시간에 몸 전체로 퍼져갔다.

그야말로 피부를 산 채로 벗기고, 근육 한 올, 한 올 찢어발기는 느낌이었다.

또한 전신의 뼈마디가 한꺼번에 뒤틀어지는 기분이다.

"아아아악!"

베니엘의 눈과 입과 코에서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샤드에 담긴 신의 힘이 그를 완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베니엘이 어린 시절부터 만들어낸 마나 하트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걸 깨달은 베니엘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희열에 휩싸였다.

'이 힘을 흡수만 하면 대박이다!'

마신(魔神)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그는 마도(魔道)의 정점이고, 마족(魔族)의 신이며, 마(魔)의 주인인 존재다.

지하 세계에 가득 찬 마력(魔力)의 본류란 소리다.

그렇기에 에메랄드 샤드에는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힘인 '마신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력과 성질은 같지만 명백히 상위의 힘이었다. 보통의 마력보다 훨씬 순수하고, 짙은 마력인 것이다.

필멸자가 다루는 마력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크아아아아!"

베니엘은 이 힘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마나 하트를 강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고통을 참아냈다.

마신의 마력을 갖는다는 건 지하 세계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

제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도, 아무리 대단한 검술 가문의 비전이라도 마신의 격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까.

한데 베니엘은 점점 그 힘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우우우웅!

그의 마나 하트의 성질이 필멸자의 것을 넘어서 마신의 마력으로 물들어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온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지만 확실히 그의 혈통이 부여한 자격은 아주 특별했다.

'됐다! 마신의 마력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어!'

베니엘의 심상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무언가, 그간 막혀 있던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는 아버지인 나르다리온 남작이 본 것처럼 반쪽짜리 재능이 아니었다.

'검재'와 '마나 하트'.

검객을 만들어주는 두 개의 기둥이 완전히 서게 된 것이다.

아니, 그 정도의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그는 이제 위대한 검객이 될 모든 조건을 가진, 역대급 재능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만약 남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부러움에 미쳐버릴 정도로 말이다.

문제는 그 안정화를 위한 짧은 시간이었다.

콰아아앙! 콰앙!

신전 밖에서 오크들이 청동문을 박살 내기 위해 날뛰고 있었다.

카아아앙!

급기야 녹슨 문의 일부가 박살 났고, 결국 문이 열리고 말았다.

밀려든 오크들은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녹색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들 중 뼈 마법사인 고럼은 다급히 외쳤다.

"나이트쉐이드의 자식이 뭔가 하고 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숨이 절로 막히는 불길한 예감이 늙은 뼈 마법사의 가슴팍을 조였다.

저 녹색 힘은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빛에 닿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조상들이 물려준 뼈 마법이 약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서둘러라!"

오크들이 일제히 베니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을 올리비에가 막아섰다.

"멈춰라!"

올리비에는 괴력을 발휘해 거대한 돌덩이를 던지고는 오크를 붙잡아 땅바닥에 매쳐 버렸다.

힘으로 유명한 오크들조차 올리비에에게 붙들리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크워어!"

"이 미친 인간이!"

실로 감탄이 나오는 용력이었다.

물론 수에서 밀리니 올리비에에게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오크 쪽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뼈 마법사 고럼은 다급히 외쳤다.

"물러나라! 인간. 우리의 목적은 네게 있지 않다. 물러난다면 해치지 않겠다! 내 뼈 마법에 걸고 맹세하지!"

혹하는 제안이었다.

본인의 마법에 걸고 제안했으니 무조건 지키겠단 소리였다. 올리비에는 멈칫했고, 고럼은 그를 채근했다.

"생명을 보존하라!"

아마 보통 이런 경우 대부분 물러날 터였다.

베니엘은 뭘 하는지 비명만 지르고 있고, 앞에 있는 오크들은 살기등등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에는 잠시 생각한 뒤에 답했다.

"나의 명예는 나의 생명!"

그것은 르텔 백작가의 구닥다리 같은 가훈이었다.

동시에 르텔의 핏줄인 올리비에의 신념이기도 했다. 순둥이인 올리비에였지만 가훈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소리쳤다.

"어림없는 소리! 나는 저자에게 이미 약속했다! 그렇다면 그걸 명예로 지킬 뿐!"

비록 올리비에 자신이 천대받는 처지지만, 가문의 가르침만은 잊지 않았다. 설령 이게 마지막이라고 해도 평생 그가 동경한 르텔로 끝을 맺고 싶었다.

"크아아압!"

올리비에는 괴성을 지르고 근처에 쓰러져 있던 기다란 돌기둥을 붙잡았다. 누구도 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그는 눈에 핏발이 선 채로 기어코 해냈다.

지켜보던 오크들조차 놀라서 주춤거릴 정도.

"무, 무슨!"

"오거의 혈통인가!"

올리비에는 그 돌기둥을 공성추처럼 들고 앞으로 돌격했다.

"크아아압!"

그 위력에 십여 명의 오크들이 한꺼번에 문밖으로 도로 밀려났다.

올리비에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 그들을 계속 밀어냈다. 급기야 오크 넷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기까지 했다.

"받아라!"

올리비에는 돌기둥을 던져버렸다. 다시 오크 둘이 거기 맞아 피범벅이 됐다.

이후 오크들에게 둘러싸인 올리비에는 성난 황소처럼 날뛰어댔다.

"나의 명예는 나의 생명!"

하지만 혼자 모두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오크들은 뼈 마법사가 창조해낸 뼈 칼을 들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됐다.

푸욱! 서걱!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몸은 난자돼 온통 새빨간 선혈을 바닥에 뿌렸다.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우웅!

거목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올리비에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무용에 상대하던 오크들조차 상황을 잊고 숙연해질 정도였다.

"이런 전사라니...!"

여기서 유일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뼈 마법사 고럼이 소리쳤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녀석을 막아!"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오크 전사들이 우르르 신전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렬한 녹색 빛이 작렬했다.

번쩍!

그와 함께 안으로 돌격했던 덩치 큰 오크 전사들이 무슨 포탄에 맞은 것처럼 튕겨 나왔다.

"크아아악!"

"커어억!"

그들은 살점과 피를 뿌리고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른 오크들이 주춤거렸다.

"무슨!"

"동포여!"

그들은 모두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무언가 형언하기 힘든 공포가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전 안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더니, 그 속에서 눈매가 사나운 다크 엘프가 걸어 나왔다.

모든 오크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들 앞에서 베니엘은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말했다.

"기다리게 했군. 마신의 힘을 좀 보여주마."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야만 오크들은 지금까지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마치 뱀을 마주한 개구리 같았다.

***

오크들 앞에 선 베니엘은 이제 자신감이 넘쳤다. 다급하게 문을 밀던 아까와 다르게 해볼 만하단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력을 퍼뜨려 감지 능력을 사용했다.

촤아아아아!

보이지 않는 마력의 물결이 그를 중심으로 레이더처럼 펼쳐졌다.

프로보스트급 검객부터 사용 가능한 능력으로, 게임 속에선 맵 스캔으로 등장한다.

베니엘은 단번에 여러 정보를 알 수 있게 됐다.

'다행히 올리비에 녀석 살아 있군.'

부상 탓에 기절하긴 했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크들을 처리하고 나서 포션을 부어주고 나면 될 터였다. 역시 저 덩치는 쉽게 죽을 놈이 아니다.

그 외도 중요한 정보가 더 있었다. 역시나 오크 중에 마법사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몸 안에 강하게 뭉쳐 있는 마력이 감지됐다. 그리고 그 마력의 실타래는 마법사가 들고 있는 뼛조각과 연결돼 있었다.

베니엘은 바로 한 가지를 알아챘다.

'뼈 마법사였군.'

단 한 번의 감지로 유용한 정보를 여러 개 획득했다. 그러던 중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탐지 범위가?'

본래 프로보스트급 검객의 감지 능력은 건물 몇 개 정도의 범위에 불과했다.

한데 그걸 넘어 이 지하 공동 전체로 능력이 퍼져 나갔던 것이다. 이래선 마치, 마을 하나의 범위를 통째로 스캔할 수 있다는 마스터의 능력과도 같았다.

'신의 마력을 받아들여서 그런가? 경지가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고?'

베니엘은 절로 싱글벙글해졌다.

반면 오크 뼈 마법사 고럼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방금 자신을 훑고 지나간 느낌에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기 때문이다. 이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났을 때의 본능적인 공포감이다.

'이건 분명…!'

언젠가 고럼은 '마법의 종사'라 불리는 지하 세계의 패자, 마족을 만나본 적이 있다.

과연 마족은 그 명성처럼 엄청난 순도의 마력을 뿜어냈다. 그때 고럼은 참을 수 없는 좌절감에 휩싸였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마족의 마법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격의 차이를 절감했으니까.

그 일은 고럼에게 오래간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다크 엘프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그 위대했던 마족 마법사조차 우습게 보일 정도였다.

11화

무결자의 신전 (4)

본콜러 고럼은 이를 악물었다.

공포와 좌절감이 그의 용기를 좀먹고 있었지만 싸워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었으니까.

'나부터 흔들려선 안 된다!'

갑자기 음험한 기세를 뿜어내며 등장한 베니엘의 출현에 이미 오크들이 동요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리의 지도자인 자신이 중심을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동포들이여!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하라! 우리가 전쟁에 패한 후 광산에서 무슨 수모를 겪었는지 떠올리란 말이다!"

고럼의 독려는 효과가 있었다. 마신의 기세에 주춤거리던 야만 오크들의 눈빛이 다시 사나워졌다. 복수심과 증오야말로 이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었다.

고럼은 단순히 말로만 때울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어금니 하나를 붙잡았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 어금니는 애초에 고럼의 것이 아닌 일종의 임플란트였다. 고럼은 잇몸에 쇠를 대 고정한 어금니를 힘껏 잡아 뽑았다.

두득!

잇몸 일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길쭉하게 튀며 큼직한 어금니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이것은 부족의 위대한 선조 중 하나인 '토르가쿠'의 이빨로, 대대로 뼈 마법사였던 고럼의 집안에 귀하게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빨 안에 박아 두고 있었기에 다크 엘프도 그에게서 이 조상의 보물을 빼앗아가지 못했었다.

토르가쿠는 부족의 전설적인 전사다. 그는 트롤의 혼혈이었다. 그래서 다른 오크보다 크고 강했으며 재생력까지 있었다. 그 덕에 토르가쿠는 생전에 수많은 위업을 달성했다.

고럼은 피와 침으로 질척거리는 어금니를 손에 꽉 쥐었다.

'위대한 전사가 남긴 것은 위대한 힘을 불러일으키지.'

그렇기에 도르가쿠의 뼈나 이빨은 다시 없을 마법 재료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강력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야말로 고럼이 아끼고, 아낀 비장의 수단이었다.

"토르가쿠! 트롤의 배에서 태어난 오크여! 여기 그대의 후손을 돌봐주십시오!"

고럼은 익숙하게 자연 속에 있는 마력을 실타래처럼 끌어당겨 어금니를 휘감았다. 그러자 마력과 이빨이 서로 공명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진동하는 어금니에서 빛이 나고 열기가 뿜어졌다.

고럼은 그 힘을 자신을 따르는 오크들에게 부여했다.

"이제 그대들은 토르가쿠의 의지를 이을 것이다! 전사들이여!"

뼈 마법을 뒤집어쓴 오크들은 갑작스러운 신체의 변화를 일으켰다.

우둑! 우두둑!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힘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또한 눈에선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빛을 뿜어냈다.

"크워어어어!"

"조상의 힘이 함께 한다!"

"다크 엘프를 쳐 죽여라!"

모두 마신의 힘에 짓눌렸던 걸 극복하고 사기충천했다.

이들은 근력이 증가하고, 피부가 질겨졌으며, 제한적이나마 재생력까지 획득했다.

힘, 방어력, 재생력이란 삼단 버프가 부여된 것이다.

심지어 고럼을 포함한 열두 명 모두가 버프를 받았다. 그중 두 명은 아까 올리비에가 던진 돌기둥에 맞아 크게 다쳤음에도 다시 떨쳐 일어날 수 있었다.

고작 이빨 하나로 이 정도 효과를 발휘하더니 엄청난 일이다.

과연 고럼이 경애하는 선조의 뼈다웠다.

고럼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가라! 가서 저놈의 머리를 내게 가져오라!"

***

베니엘은 낡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제단 앞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물건 중에 하나 골라잡은 것이다.

한때는 마법검이었던 듯하나 이제는 마력이 흩어진 그냥 철검에 불과했다. 낡았지만 그래도 좋은 강재로 만들었는지 휘두를 만하다.

'검이 있으니 괜찮아.'

검객에게 검만큼 중요한 게 어디에 있겠는가?

아까 도망칠 때와 다르게 이제 베니엘은 자신감이 충천했다.

그가 나무 막대기조차 검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경지도 아니고, 싸우려면 날붙이는 필수였으니까.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빙의 후 첫 전투라는 것.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미혹을 떨쳐냈다. 이젠 그가 진짜 베니엘이다. 안 될 건 없었다. 그저 지금은 이전 베니엘의 뇌에 새겨진 패턴과 몸의 머슬 메모리를 믿어 보는 수밖에.

"후우…."

베니엘은 짧게 숨을 내쉬고는 검을 들었다. 이미 적들은 마법으로 버프를 받고 기운이 넘쳐났다.

베니엘은 오크 뼈 마법사가 무슨 수작질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그 틈에 올리비에를 신전 안으로 얼른 치워뒀기 때문이다. 올리비에는 드물게 신의가 있는 인간이었고 이런 곳에서 잃기 아까운 자였다.

'그나저나 이놈들 봐라?'

베니엘은 눈이 벌게진 오크 무리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버프 덕에 피통이 훨씬 커져 있었다. 가뜩이나 육체가 강건해 쉽게 쓰러지지 않는 오크들인데 뼈 마법까지 부여된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걱정하지 않았다.

"놈을 붙잡아라!"

"크워어어어!"

야만 오크들이 일제히 베니엘에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베니엘을 향해 성난 파도가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보통 이런 경우, 혼자 여럿을 상대하는 자는 뒤로 저런 힘에 정면으로 부딪치려 하지 않는다. 괜히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악을 써봐도 순식간에 성난 무리의 힘에 밀려서 찌그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노련한 검객이라면 사선이나 뒤로 빠지며 기예로 상대한다.

그것은 마치 화려한 솜씨로 흥분한 황소를 농락하는 투우사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크들에 비해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한 다크 엘프임에도 말이다.

대신 그는 다리를 벌리고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검신에 새하얀 불길로 타올랐다.

화르르륵!

뒤에서 지켜보던 뼈 마법사 고럼이 탄식을 터뜨렸다.

"도깨비불!"

베니엘이 만든 화염은 보통 지하 세계에선 '도깨비불'이라 불렸지만, 정확한 명칭은 펜테즈멀 블레이드(Phantasmal Blade)란 검객의 기술이다.

지상의 검객이 가진 오러 블레이드에 대응하는 지하 검객만의 독특한 경지다.

둘은 외형과 속성에서 차이가 컸다.

보통 오러 블레이드는 빛을 뿜어내는 광선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면 펜테즈멀 블레이드는 검신이 창백한 하얀 불길로 타올랐다. 그 속성에서 차이가 났는데 오러 블레이드는 양 에너지로 가득했고, 펜테즈멀 블레이드는 음 에너지 그 자체였다.

위력도 달랐다.

파괴력 자체는 오러 블레이드가 다소 강했다.

대신 펜테즈멀 블레이드는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 화염이 상대에게 달라붙어 지속적인 피해를 줬다.

게임으로 치면 악랄한 도트뎀이었다. 그렇기에 지하 세계의 전사들은 저 도깨비불의 하얀 화염이 자신의 몸에 옮겨붙는 걸 두려워했다.

마치 백린탄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돌격하는 오크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바로 앞에서 명성 자자한 도깨비불이 있건 말건 뼈 마법으로 만들어낸 칼을 들고 달렸다.

"크워어어어!"

그와 함께 베니엘이 일검을 내리그었다.

쌔애애애액!

오랜 수련으로 경탄이 나올 만한 깔끔한 수직 베기가 가장 앞으로 튀어나와 있던 오크 전사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촤아아아아!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완전히 갈라진 오크가 사방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펜테즈멀 블레이드의 위력 때문에 기껏 버프를 받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다른 오크들은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베니엘이 도깨비불을 일으켰을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도깨비불은 강력하다. 대신 그만큼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프로보스트급 검객부터 도깨비불을 쓸 수 있지만, 그건 제한적이었다. 항시 발동하는 게 아니라 공격을 하는 순간에만 일으키는 것이다.

한 번 그렇게 위력을 발휘한 뒤에 다시 도깨비불을 일으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투 중에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겨우 몇 번 정도.

그야말로 필살기다.

대신 마스터급 검객이 되면 이 강력한 도깨비불을 전투 내내 유지하는 게 가능해진다.

평타가 항시 필살기 상태가 되는 것이니 마스터가 얼마나 사기인지 알 만한 일이다.

아무튼, 오크들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역전의 용사들이고 다크 엘프 검객들과 부딪혀 본 경험이 있었다.

찰나의 순간, 돌진하는 오크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작전을 점검했다.

'다음 일격은 평범한 것일 터. 절대로 이번처럼 일도양단하지 못한다!'

'몸으로 받아낸 뒤에 그대로 뒤엉키라고! 힘 싸움이면 이쪽의 압승이야!'

'레슬링으로 놈을 넘어뜨리고 팔다리를 억눌러! 그 뒤에 물어뜯어 버려!'

물론 실제로 심상으로 대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잠깐 눈빛으로 뜻이 통했던 것이다.

야만 오크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절대로'란 말이다.

세상에 절대는 없다.

특히 잠깐 사이에 목숨이 날아가는 전투에선 절대란 말을 피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지금처럼 험한 꼴을 볼 테니까.

화르르르륵!

도깨비불이 다시 화려하게 타올랐다.

순간 돌격하던 오크들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말도 안 돼! 곧바로?'

'설마 마스터?'

'거짓이다! 이건 사기야!'

놀라긴 베니엘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거 일회용 필살기 아니었나?'

프로보스트급 검객은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쓰는 데 제한이 컸다.

한데 왜 다시 이렇게 불길이 타오르는 걸까?

솔직히 이번에 베니엘은 날쌔게 도망가려 했다.

한 번 필살기를 썼으니 다음 검은 평범한 칼질에 불과하다. 지금 오크 놈들이 피부를 강화했기 때문에 아무리 잘 휘둘러봐야 저 두꺼운 팔근육에 푹 박힌 뒤 꼼짝도 못 하게 될 것 같았다.

만약 찌르기로 했다가는 찔린 오크 놈이 악을 쓰고 검을 껴안듯 붙잡으면 그야말로 낭패.

그래서 다시 도깨비불을 일으킬 때까지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목숨을 건 술래잡기를 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추해도 이기면 그만이라는 게 베니엘의 판단이었다.

한데 도깨비불이 재차 발동했다. 게다가 신기한 건 이 위력적인 기술을 연달아 쓰고도 베니엘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끌 필요도 없었던 거 같은데?'

가장 앞에 있던 오크를 반갈죽 해버린 후 베니엘은 습관적으로 도깨비불을 껐다.

하지만 에메랄드 샤드를 흡수해서 그런지 몸 안에 마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렇다면 도깨비불을 상시로 켜둘 수만 있을 듯했다.

애초에 마스터 아래의 프로보스트급 검객이 이 도깨비불을 짧게 쓰는 건 몸 안에 마력이 부족해서다.

한데 그건 이제 베니엘과 상관없는 문제였다. 베니엘은 차분하게 검의 손잡이를 왼쪽 팔꿈치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오른 다리를 사선으로 굳건하게 딛으며 검을 힘차게 가로로 베었다.

부우우우웅!

어쩐지 레이저로 공기를 지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검이 빛을 뿌렸다.

그리고 이번엔.

가장 앞서서 돌격하던 오크 전사 셋이 한꺼번에 갈라졌다.

***

촤아아아아!

허리가 잘린 오크들의 하반신에서 성대하기 피가 뿜어져 나왔다. 베니엘은 그 피를 뒤집어쓰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전투조차 잊은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잠깐이지만… 다음 경지가 보였다.'

강력한 가로 베기의 순간 베니엘은 자신의 한계가 부서지는 걸 느꼈다. 더는 반쪽짜리 마나 하트를 지녔다는 천형은 자신을 얽맬 수 없었다.

이제는 그 재능에 어울리게 훨훨 날아가면 그만일 터. 그리고 그 천재적인 감각이 벌써 마스터의 문턱이 뭔지 그에게 보여줬던 것이다.

솔직히 아직은 잡힐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 경지에 조만간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얼빠진 얼굴을 한 오크들에게 요구했다.

"고마운 친구들이었군. 또 한 번 부탁하지."

그 모습에 야만 오크들은 진정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아주 기괴한 광경이었다. 저 다크 엘프는 분명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근처에는 몸이 동강 난 동족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절단면에는 아직도 도깨비불이 붙어서 타오르는 중이다.

한데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저 다크 엘프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배움의 열망에 달아올라 있는 것이다.

상대는 자신들을 생명체로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베어 넘기고 혹시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얻을까 궁리하는 기색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야만 오크들이 주춤거리자 베니엘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움직이지 않겠다면 내 쪽에서 가겠다."

이미 그의 눈에는 오크는 위험한 적이 아니라 경험치 덩어리에 불과했다.

단 한 놈도 놓칠 수 없었다.

애초에 민도현은 게임을 할 때 필드에 있는 마지막 몬스터 하나까지 집요하게 찾아내서 죽이는 성격이었으니까.

12화

무결자의 신전 (5)

***

첫 번째 공격에 하나.

두 번째 공격에 셋이 죽었다.

고럼은 이 모든 걸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도깨비불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건!'

게다가 그가 본 바에 의하면 분명 나이트쉐이드의 아들은 마스터급 검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오크 족장과 혈투를 벌일 때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깨비불을 일으키긴 했지만 공격의 순간만 짧게 활용할 뿐이었다.

'힘을 감춰뒀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때 저자는 족장의 공격에 맞아서 반죽음 상태에 다다랐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혼란도 잠시, 고럼은 영민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였다. 즉각, 결정을 내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오크 전사들을 규합했다.

"모두 한 덩어리가 돼 뭉쳐라! 마주 닿은 어깨와 허리에 작은 틈도 없을 정도로!"

오크들은 곧장 반응했다. 고럼이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 건지는 몰랐지만 무조건 따랐다.

그러자 고럼이 외쳤다.

"도깨비불이 아무리 강력해도 절단력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 모두를 한 번에 자를 순 없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니엘이 일검으로 오크 셋을 잘라버리긴 했지만, 그들이 무기를 머리 위로 들고 있을 때 허리를 노린 것이다.

아마 검이 지나가는 진로에 오크들이 들고 있던 뼈 칼 세 개가 차례로 부딪쳤으면 그렇게 깔끔하게 자르지 못했을 터.

고럼이 노리는 건 그거였다. 다닥다닥 붙어서 무기까지 들고 있으면 아무리 베니엘이라도 절대 일도양단하지 못한다.

그 뒤를 노리자는 소리였다.

"우리 중 반은 죽겠지만 용기를 내라! 어떻게든 놈의 칼질이 중간에 멈추게만 하면 돼! 그 뒤에 붙잡고 구르면 우리의 승리다! 다크 엘프란 것들은 약골인 걸 알지 않느냐!"

그제야 희망을 발견한 오크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크워어어어!"

"해보자! 와라!"

반면 베니엘은 경멸감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붙잡고 구르다니. 역시 그런트 돼지 새끼들은 어쩔 수 없군. 쯧!"

그런트란 말에 야만 오크들이 발끈했다.

"육체의 강함이야말로 진실한 것이다!"

"너야말로 삿된 수단에 의존하는 놈이지 않나!"

"닥쳐라! 비열한 다크 엘프 놈!"

왜 저런 반응을 보이냐 하면, '그런트(Grunt)'란 게 지하 세계에선 알아주는 멸칭이라 그랬다.

그런트는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전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마에 번개 흉터가 있는 마법사가 등장하는 영국 소설에서,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을 '머×'이라 부르는 것과 같았다.

그런트는 검객의 경지 6단계에 끼지도 못하는 일종의 등급 외의 부류였다. 당연히 마력에 입문한 검객들에게 멸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검객의 분류를 보면 1단계를 학자란 뜻의 '스콜라(Scholar)'라고 부른다.

검을 다루는 데 왜 학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마력을 공부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칼을 휘두를지언정 한 분야에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능통하다는 자부심을 가진 말이다.

베니엘의 이전 경지인 '프로보스트(Provost)'는 학장이란 의미다.

왜 학장이냐?

그 정도 경지면, 한 지역의 스콜라들을 대표해 학장이라 불릴 만한 실력이란 소리였다.

즉, 검객들은 자신들이 수준 높은 배움의 길을 간다는 자부심이 철철 넘쳤던 것이다.

반면 그런트란 부류는 마력은 쓰지도 못하고 오로지 육체의 힘에만 의지해 싸운다.

당연히 깔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다크 엘프의 검술서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그런트를 본받아 바닥을 뒹굴며 돼지처럼 싸우지 마라. 이는 우리의 기예에 속하지 않은 방법이니….>

아무튼, 이러니 베니엘은 고럼이 붙잡고 구르면 이긴다는 말에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반면 오크들은 그런트란 말에 긁혀서 날뛰었다.

"올 테면 와봐라! 다크 엘프!"

"어차피 시간을 끌면 이긴다! 저놈은 필시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 계속 도깨비불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

반면 베니엘은 느긋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저들이 뭉치는 꼴을 보고도 지켜본 건 그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 자체를 일종의 도전 과제처럼 여겼으니까.

'음, 어떻게 공략할까?'

확실히 놈들이 머리를 잘 쓰긴 했다. 오크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다. 적어도 전투에 있어서만큼 그들의 감각은 탁월했다. 실제로 저렇게 뭉치니 자칫하면 베니엘도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안 달려들면 그만 아닌가?'

마스터급부턴 검기를 쏘아내는 식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

물론 베니엘이 아직 마스터급이 아니긴 해도 얼추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는 상황. 어쩌면 원거리 공격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베니엘은 언젠가 나르다리온 남작이 마력을 쏘아내 원거리 공격을 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걸 떠올렸다.

<칼날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의지의 연장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지.>

곧 베니엘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의지'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의지는 마스터급 검객부터 사용 가능한 특수한 힘이다. 현재 베니엘로선 그게 뭔지 감도 못 잡은 상태. 그는 정석적인 방법으로 검기를 쏘아내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꼭 정석대로 갈 필요는 없어.'

결과만 비슷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베니엘의 이내 천재적인 감각은 검기를 흉내 낼 방법을 찾아냈다.

'힘이 과하면 흘러넘치겠지.'

현재 베니엘의 마력은 가공할 수준이다. 에메랄드 샤드 덕에 몸 안에 마치 원자력 발전소라도 하나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계속 사용 중이었지만 몸에 작은 과부하조차 오지 않았다.

베니엘은 이 힘을 일거에 끌어모으기로 했다.

"그으으읍!"

마력을 쏟아붓자 갑자기 도깨비불이 부풀어 올랐다.

촤아아아아!

갑자기 두 배, 세 배로 도깨비불이 커지자 지켜보던 오크들이 기겁했다.

"저게 무슨!"

"놈이 저걸 휘두르려 한다!"

"한 번에 쓸어버리려는 수작이야!"

하지만 베니엘은 이걸로 오크 무리를 벨 생각이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집어넣은 마력 탓에 검이 엄청나게 진동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웅!

검이 아니라 마치 로터리 해머드릴을 손에 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무식하게 마력을 집어넣은 탓에 제대로 컨트롤이 안 될 것 같았다. 이대로 휘둘렀다가는 공격이 무겁고 둔탁해서 오크들이 피해버릴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장담하는 데 이거 도중에 부러진다!'

도깨비불을 필요 이상으로 키우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통제를 벗어나는 건 물론, 검이 버티질 못해서다.

심지어 이건 낡은 검이다. 일격도 못 버틸 게 뻔했다. 물론 베니엘은 그걸 알고도 시도한 것이다.

"받아봐라!"

그 외침에 오크들은 결연한 각오로 무기를 세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베니엘이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오크들은 순간 다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함께 베니엘이 의도한 상황이 벌어졌다.

까앙―!

결국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참격 도중 검이 분질러졌다.

쇠로 된 검신 자체는 깔끔하게 부러졌지만, 문제는 검신에 깃들어 있던 가공할 도깨비불이었다.

이제 그 도깨비불을 잡아놓고 있을 수단이 없어졌다. 그 때문에 도깨비불은 검신의 파열 때 일어난 수많은 스파크와 함께 앞으로 뿌려졌다.

화르르르!

본래 도깨비불은 검신을 떠나게 되면 자연히 소멸한다. 하지만 압도적인 양은 그것마저 무색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라지기 전에 오크 무리를 덮었다.

도깨비불이 마치 물을 왕창 끼얹는 것처럼 쏟아졌다. 오크들은 비명을 터뜨렸다.

"크워어어어!"

"불이! 불길이!"

이것은 남작의 검기처럼 세련됨이라곤 조금도 없는 공격이었다. 빠른 속도로 길게 날아가지도 못했다. 무식하게 흘러넘치는 힘을 4미터 정도 앞으로 흩뿌렸을 뿐이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쿠워! 이것 좀 어떻게 해봐라!"

"크어어어어!"

불길에 휩싸인 오크들의 무리가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들은 길길이 날뛰며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매개체를 찾은 도깨비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기 중의 마력을 산소처럼 빨아들이며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도깨비불을 끄려면 같은 마력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다들 그런트들이다. 그런 기술이 가능할 리가 없다.

고럼이 다시 외쳤다.

"돌격하라! 조상의 가호가 너희를 버티게 해줄 거다! 마지막 시간을 복수를 위해 써라!"

그 말에 몇몇 오크들이 정신을 차렸다.

현재 그들은 삼단 버프가 들어간 상태. 재생력이야 화염 때문에 소용없었지만, 두꺼워진 피부는 여전했다.

이것은 불길에 어느 정도 견디게 해준다. 이미 죽음이야 피하지 못하겠지만 저 간악한 다크 엘프에게 달려들 시간 정도는 있는 것이었다.

오크들 중 몇몇은 여전히 뒹굴며 도깨비불을 끄려고 부질없는 발버둥을 쳐댔지만, 일부는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전사들 중에서도 훌륭한 이들이었다.

"크워어어어! 공격!"

"복수를 위해!"

어쩌면 마지막 순간 승리를 거머쥘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다크 엘프 놈이 좀 전의 일격으로 자랑으로 삼던 검을 잃었기 때문이다.

도깨비불도 꺼지고 손잡이만 남은 검을 쥔 모습을 보며 오크들은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희망에 사로잡혔다.

오크들은 달렸다.

하지만 그 순간 베니엘은 쏜살같이 뒤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비겁하다!"

"쫓아라! 쫓아!"

하얀 불길에 휩싸인 오크들이 돌진했다. 그들 중에는 뼈 마법사 고럼도 있었다.

이미 그에겐 추가로 시전할 주문이 없다. 대신 다른 오크가 놓친 뼈 칼을 쥐고는 내달렸다.

"나이트쉐이드의 핏줄을 찢어발겨라!"

용기백배해서 외치던 그다음 순간 고럼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두꺼운 피부가 아직은 불길을 견디게 해줘야 하는데, 격통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고럼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곧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경악했다.

'조상의 마법이 타들어가고 있다!'

놀랍게도 도깨비불은 오크들의 몸만 태우는 게 아니었다. 고럼이 조상의 뼈로 시전한 삼단 버프도 같이 불사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럼은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불가능해!'

아무리 도깨비불이 대단해도 이런 능력이 있다곤 들어본 적이 없다.

실제로 고럼의 지식은 틀리지 않았다. 그저 베니엘의 도깨비불이 특별했던 것이다.

그의 도깨비불은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라 '마신의 마력'을 기반으로 한다.

마신의 마력은 보통의 마력보다 훨씬 순수하고, 강력한 상위의 힘. 그렇기에 그것은 자신보다 하위의 힘을 연료로 삼아 타오를 수 있었다.

"크아아아! 이건 말도 안 된...!"

고럼은 끝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거세진 불길 탓에 전신이 도깨비불에 휩싸인 탓이다. 고함을 내지르는 그의 입으로 불길이 타고 들어와 폐를 태워버렸다.

그는 곧 숨을 쉴 수 없게 됐다.

비틀비틀거리며 저 앞에 있는 비열한 다크 엘프를 향해 나아가려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게다가 어느새 자신을 제외하곤 그 어떤 동포도 서 있지 않았다.

'원통하구나!'

그는 생의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들고 있던 뼈 칼을 베니엘에게 집어 던졌다.

툭.

칼을 몇 걸음 앞에 떨어졌고 고럼은 앞으로 쓰러졌다.

쿵!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방에 연기와 재가 가득했다. 그리고 베니엘은 그 속에서 홀로 서 있었다.

***

"씨발. 이 새끼는 대체 왜 이렇게 무거워? 무슨 코끼리야?"

베니엘은 기절한 올리비에를 들쳐 업고는 불평했다. 신전에서 볼일이 끝났으니 돌아가야 하는데 지상인을 옮길 일이 막막하다.

베니엘은 다크 엘프치고는 장신인 172센티미터였지만, 올리비에는 190센티미터가 넘었다. 게다가 전신이 근육으로 탄탄했기에 베니엘의 두 다리는 금세 후들후들 떨렸다.

'오크랑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

다행히 올리비에는 위기를 넘긴 상태다.

베니엘에겐 퀵포우가 혹시나 귀하신 도련님께서 광산 일을 하다 다칠까 챙겨준 힐링 포션이 있었다. 그걸 까서 대충 치덕치덕 발라주니 올리비에의 안색은 금방 좋아졌다.

'퀵포우 녀석, 저질 포션을 줬으면 대가리를 깨버릴라 그랬건만....'

그래도 아부한다고 꽤나 고품질의 힐링 포션을 준 듯했다.

베니엘은 투덜거리며 열심히 걸었다.

야만 오크들을 죽인 일은 퀵포우를 시켜 비밀로 묻어야 할 듯했다.

다행히 광산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으니 매몰됐다고 하면 깔끔하리라. 광산에선 매번 그런 식으로 노예들이 사라지곤 하니까.

...…

...

잠시 뒤.

베니엘이 신전이 있는 공동을 벗어나자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가볍게 떨렸다.

마력이 뭉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윽고 빛이 반짝이더니 허공이 일자로 길게 갈라졌다.

공간 자체가 잘린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놨다.

"이거 일이 재밌게 됐군요. 후후."

나타난 인물은 나이트쉐이드 노예 광산의 관리관인 늙은 다크 엘프였다.

늘 존재감이 없이 잠에 빠져 지내며, 모든 일은 휘하의 감독관들에게 떠넘긴 그자다. 그렇기에 퀵포우 같은 자들이 유세를 부리며 광산에서 패악질을 해댔던 거다.

하지만 관리관은 병약한 노인처럼 꾸벅꾸벅 졸기만 할 뿐 거기에 관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모두 관리관을 오늘내일하는 늙은이 정도로면 여겼었다.

한데 지금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늘 구부정했던 허리는 꼿꼿이 세운 상태였고, 졸음으로 가득한 눈에는 현기마저 흘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신의 마력이 사라지자 신전은 완전히 무너졌고, 무결자의 신상도 가루가 됐다.

"저런 망나니가 위대하신 분의 샤드를 흡수하다니. 인생은 정말 기대를 벗어나는 일로 가득하군요."

관리관의 시선에 무너진 건축물 틈새로 삐져나와 있는 백골이 보였다.

베니엘은 그들에게 자격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제단 앞에서 죽은 이 수십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샤드에 도전할 '자격'이 있었다. 그저 샤드를 품에 안을 '자질'이 부족했을 뿐이다.

만약 자격 자체가 없었다면 신전의 수호자이자 지금은 노예 광산에서 관리관 일을 하는 이 늙은이를 뚫고 들어오지도 못했을 터.

실제로 30여 년 전, 훌륭한 다크 엘프 가문의 쌍둥이 마스터가 자격이 없음에도 신전에 진입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관에게 격살당했었다.

신전은 죽은 신의 파편이 있는 장소다. 그 후락한 모습과 다르게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늙은 관리관은 여상한

몸짓으로 난장판이 된 주변을 거닐었다.

그는 베니엘의 기행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신전의 입구는 베니엘의 생각처럼 아직 폐쇄돼 있지 않았다. 그저 감춰져 있을 뿐, 그 비밀을 푸는 자에겐 언제나처럼 입구를 열어줄 터였다. 여기 신전에 와 죽은 자들은 다 그런 식으로 들어왔다.

한데 베니엘은 광산 지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더니, 갑자기 혼자 굴을 파고 들어왔다.

멀쩡한 입구를 내버려 두고 옆으로 구멍을 뚫고 진입한 것이다.

"하핫!"

어이가 없어서 관리관은 실소가 터졌다. 하지만 그는 곧 진지한 얼굴이 돼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은 지켜봐야겠지.'

관리관은 자신의 마음속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13화

검은 요새 (1)

바라던 마신의 마력을 얻은 베니엘은 그날로 바로 광산 일을 그만뒀다.

애초에 노동교화형 따윈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지라 몸이 아프단 핑계로 퀵포우의 집에서 머물렀다.

쉬는 동안 베니엘은 몸에 자리 잡은 마신의 마력을 안정화시키는 데 보냈다.

마신의 마력은 살피면 살필수록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웅혼하군. 앞으로 어지간해선 마력이 부족한 일은 없겠어.'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만족감과 다르게 게임에선 이 '마신의 마력'은 외면받는 테크트리였다.

왜냐하면 성장의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인 베니엘이 강해지는 루트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다크 엘프답게 아버지인 나르다리온 남작의 마나 하트를 흡수하는 패륜적인 방법이나, 제국 황가에 내려오는 전설적인 힘을 손에 넣는 것도 괜찮다.

참고로 황가 루트로 가면 제국제일미라 칭송받는 마족 황녀와의 연애가 개방되기에 인기 있었다.

아니면 전설적인 드워프 영웅의 유산을 찾거나, 지하 하층부에 살아가는 괴종족들의 끔찍한 힘을 빌리는 방법도 있었다.

아무튼, 그 외에도 다양했는데 지금 베니엘이 택한 '마신의 마력'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이렇게 좋은데 왜 그러느냐?

간단하다.

강한 대신 더럽게 경지가 안 올랐기 때문이다.

각각의 테크트리는 장단점이 확실했는데 마신의 마력이 지난 문제는 정말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게임 끝날 때까지 노력해도 마스터급에 오르는 게 고작이었기에 그랬다.

지하 세계에서 마스터가 무시 받을 만한 위치는 아니지만, 게임 후반부의 미친놈처럼 강한 보스들을 생각해 볼 때 문제가 많았다.

다른 루트를 택하면 그때쯤 하이 마스터나 그랜드 마스터를 찍고, 보스들과 어찌저찌 비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마신의 마력은 마스터가 한계.

아무리 잠재력이 대단하면 뭐 하겠는가?

게임 끝날 때까지 그놈의 잠재력이 안 터지는데….

베니엘은 왜 제작자들이 그런 불합리한 설계를 했는지 이해는 했다.

'밸런스 때문에 그랬겠지.'

가령 드워프 영웅의 유산으로 가면 가장 쉽게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다.

드워프 영웅의 유산이 다른 테크트리에 비해 약한 편이라 대신 높은 경지로 극복하라는 배려다.

그에 비해 훨씬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황가 테크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한 단계 낮은 하이 마스터까지밖에 못 간다.

다 게임 밸런스를 위한 조절이었다.

마신의 마력은 같은 이유로 마스터급이 성장의 한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는 게 주된 평가다.

결국 플레이어들이 꺼렸고, 이후에 제작사가 별다른 패치도 없었기에 완전히 망테크가 됐다.

"하지만 여긴 게임과 다른 현실이지…."

게임에선 밸런스를 위해 얻을 수 있는 자원이나 경험치에 제한이 걸려 있다.

가령 몬스터 같은 것도 한 번 죽이면 이후에 리스폰이 안 된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게다가 마신의 마력을 먹고도 경지를 올리는 법도 이미 알고 있지.'

사실 게임 안에 정보가 있었다. 구현이 제대로 안 된 게 문제였을 뿐.

해결책은 간단하다.

지하 세계 어딘가에 있는 에메랄드 샤드를 추가로 얻어서 힘을 강화하면 그만이었다.

마신 무결자가 죽고 그 힘은 조각나 지하 세계 곳곳에 뿌려졌다.

즉, 에메랄드 샤드가 더 있다는 소리다.

게임에선 딱 한 개만 등장하지만 이곳은 현실. 분명히 찾고자 하면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베니엘은 야망으로 불타올랐다.

'최고의 잠재력을 가진 마신의 마력을 이용해 그랜드 마스터까지 오르겠다.'

분명 그렇게만 한다면 게임에선 밸런스 문제로 구현되지 않은 절대자가 출현하게 될 터였다.

그 뒤에는 뭐든 맘대로 할 수 있으리라.

베니엘은 자신의 목표가 마음에 들었다.

***

"너는 앞으로 어쩔 거냐?"

베니엘은 올리비에에게 물었다. 이 지상인은 건강을 타고난 건지 벌써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상태.

"저 말입니까?"

"그래, 난 곧 광산을 떠날 거다. 여기서 할 일이 끝났거든.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보내주마."

베니엘은 올리비에와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음...."

올리비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어왔다.

"혹시 어디로 가시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베니엘 님."

"나? 괜찮은 검법을 얻으러 갈 건데?"

현재 베니엘은 검술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타고난 검재(劍才)와 마신의 마력까지. 검객으로서의 잠재력만 따지면 제국에서도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조건을 갖췄음에도 익히고 있는 검법이 여기 못 미친다는 것.

그가 익힌 검법의 이름은 '옵시디언 오버츄어(Obsidian Overture)'란 것인데, 게임으로 치면 A등급이었다.

물론 A등급 검법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것이지만, 베니엘의 역대급 자질과 비교해 보면 영 격이 맞지 않았다.

"검법이요? 제가 듣기로 나이트쉐이드 가문은 검의 명가라 들었습니다만?"

올리비에의 의문은 당연했다. 베니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가문에는 대단한 검법이 있긴 하지. 이클립스 녹턴(Eclipse Nocturne)이라 부르는 전투 체계다."

게임에선 S등급 검법으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클립스 녹턴을 익힐 수 있는 건 가주와 후계자뿐이야. 나머지 나이트쉐이드들은 옵시디언 오버츄어를 익혀야 해."

이클립스 녹턴은 검으로 떨쳐 일어난 나르다리온 남작이 평생에 걸쳐 완성한 전투 체계다.

가문에서 오직 둘만 익히고 있다.

창시자인 남작과 가문의 후계자인 아리아나였다. 그나마 아리아나는 아직 다 전수 받지 못했으니, 이클립스 녹턴을 완전히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남작뿐이었다.

베니엘은 이런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내 가능성은 남작조차 뛰어넘는다. 그런데 A등급 검법으로 만족할 순 없지.'

게다가 앞으로 진행에 따라 남작과 적대적 관계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만약의 경우 부자가 칼을 들이밀고 싸워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그날을 대비하기 위해선 남작과 대등한 S등급 검법을 확보해야만 했다.

'마침 딱 좋은 게 있다.'

베니엘은 자신의 풍부한 지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획득 가능한 S등급 검법이 생각난 것이다. 더 좋은 건 그 검법이 남작이 창시한 이클립스 녹턴의 카운터 검법이란 점이었다.

왜냐하면 그 검법은 남작의 원수이자, 숙적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검법을 얻은 걸 알면 남작이 날 갈아 마시려고 하겠지.'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베니엘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검법을 찾아보려고."

여기까지 들은 올리비에게 한 가지를 청해왔다.

"혹시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광산에서처럼 힘쓰는 일에 부리셔도 괜찮습니다."

"음? 돌아가고 싶은 것 아니었나?"

"그렇긴 합니다만, 이대로 돌아가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흐...."

듣자니 올리비에는 가문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라고 한다. 그래서 공을 세우고자 무리해서 땅 밑으로 내려왔는데 원정대를 다 잃고 혼자 돌아가 봐야 고개를 들 수 없다나?

"하긴, 욕이나 바가지로 먹겠지. 부모에게 욕먹는 건 나도 익숙해서 잘 안다."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분간 베니엘 님을 따라다니면서 지하 세계의 견문을 넓히고 싶습니다. 그러다 뭔가 새로운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요."

"빈손으로 가봐야 의미 없으니 뭐 돈 될 거리라도 찾아보겠다는 거냐?"

"하하, 비슷합니다."

베니엘은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끄덕였다.

'올리비에는 믿을 만한 녀석이지.'

지하 세계에서 이런 동행은 귀했다. 일단 밤에 잘 때 칼로 찌르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사람 됨됨이가 착한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허락하지."

***

한 달 뒤.

베니엘의 둘째 고모 아니엘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노예 광산으로 향했다.

"호호호, 기다리렴. 우리 귀여운 조카야~."

거대 거미에 올라탄 그녀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지난 한 달 동안 친오빠인 나르다리온 남작을 들들 볶아서 마침내 베니엘의 복귀 허락을 받아냈던 것이다.

사실 아니엘이 나선 건 한 달 전쯤에 몰래 전달된 베니엘의 편지 때문이다.

편지에는 조카의 구구절절한 부탁이 적혀 있었다.

광산에서 그간 성실히 일했다, 이젠 너무 힘들다, 제발 고모가 날 좀 빼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에 아니엘은 반색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신을 요리조리 피하던 조카가 드디어 직접 부탁을 해온 것이다. 아니엘은 조카에게 빚을 지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바로 남작에게 달려갔다.

"오라버니, 이쯤이면 되었어요. 베니엘을 불러주세요."

당연히 남작은 어이없어했다.

"그 녀석이 간 지 한 달 반 정도 됐을 뿐이다. 한데 벌써 부르라고? 너 제정신이냐?"

이에 아니엘은 발끈했다.

"귀하게 자란 아이가 한 달 반이나 고초를 겪고 있잖아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라버니의 자식이라고요. 어쩌면 말을 그렇게 하시죠?"

남작은 바로 거절하고 아니엘을 쫓아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날 거라 생각했던 건 실수였다.

머릿속에 조카밖에 없는 아니엘은 그날부터 매일 찾아와서 자기 오빠를 들들 볶아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것! 가문의 일은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감정을 앞세우는 건 오라버니죠! 그 아이가 미운 거잖아요!"

아니엘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의 반항에 남작은 골치가 아파졌다.

뭣보다 더 중요한 건 '머리 수집가'라 불리는 탁월한 암살자 아니엘의 솜씨였다.

신흥 귀족인 남작은 정적이 많았다. 즉, 탈 없이 죽여버리고 싶은 자들이 여럿이란 소리.

아니엘은 누구보다도 그런 일을 탁월하게 처리해줄 수 있는 인재였다. 가족인지라 그래도 남보단 약간 더 믿을 수 있었고.

게다나 남작도 여동생의 오랜 정신병을 잘 알고 있었다. 매일매일 찾아올 때마다 점점 눈깔이 돌아버리고 있는 걸 보게 되자 남작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뒀다가 진짜 무슨 사고를 칠 게 뻔했다.

"알겠다…. 녀석을 불러들이지."

남작은 한탄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하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제국의 귀족이 됐건만, 집안일은 맘대로 되는 게 없었던 것이다.

'저것이 시집이라도 가야 좀 나아지려나?'

하지만 누가 머리 수집가를 아내로 맞이할까? 남작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아니엘은 기뻐하며 직접 베니엘을 데리러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여러 짐을 거대 거미에 잔뜩 싣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노예 광산으로 출발했다.

아니엘은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헤헤... 인형 놀이. 인형 놀이 해야겠네...?"

그녀의 가방에는 화장 도구와 가발, 여성용 옷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건 평소부터 베니엘을 질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하리라. 이쪽에서 노력해서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말이다.

"아아...."

아니엘은 어쩐지 맛이 간 눈빛으로 허벅지를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에 부하들은 애써 모른 척했다.

"...."

"...."

아니엘의 정신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겉모습만 보면 더없이 아름다워서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 만했지만, 그녀의 곁에 있는 자들은 그 껍질 아래 썩어 문드러진 본질을 알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 평판 나쁜 망나니 도련님에게조차 동정심이 일 정도였다.

한동안 아니엘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겠지.

"도착했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혼자 망상에 빠져 있던 아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거대 거미에서 뛰어내렸다.

"내 귀여운 조카는?"

"입구에서 듣자니, 저 건물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엘은 대답도 하지 않고 퀵포우의 집으로 뛰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대신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니엘은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가늘게 손을 떨며 그것을 펴 보았다.

<존경하는 둘째 고모에게.

이 쪽지를 보고 계신다면 제가 부탁한 일이 잘 처리된 거겠지요. 늘 고모껜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저는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짧은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부디 남작님께는 잘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카 베니엘 올림.>

그 순간 성녀처럼 고귀해 보이는 아니엘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 조카…? 교육이 필요하겠네? 단호하고 고통스러운…!"

그녀가 뿜어내는 분노에 주변에 있던 부하들까지 바짝 굳을 정도의 긴장감이 형성됐다.

하지만 잠시 뒤, 아니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흐흐핫! 역시 내 조카야.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먼저 뒤통수를 친 거겠지? 벌써 이렇게 성장하다니!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아니엘은 손부채로 연신 눈물을 말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데 다시 잠깐 뒤 감정이 급변했다.

"아니, 그래도 너무 괘씸한걸?"

그녀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었다. 계속 찡그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아,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다!"

결국 아니엘은 베니엘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벌과 상을 함께 주기로 했다.

그 두 가지 방법 모두 조카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터였다.

14화

검은 요새 (2)

***

"지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군요."

베니엘과 나란히 걷고 있던 올리비에는 주변의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길게 이어진 동굴의 좌우로 온갖 색깔의 발광 버섯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한 라벤더 색으로 빛나는 버섯부터, 촛불을 켜 놓은 듯 노랗게 일렁이는 버섯, 피처럼 칙칙하고 어두운 빛을 뿌리는 버섯까지.

그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이따금씩 버섯이 포자를 뿜어냈는데, 그때마다 별 가루 같은 빛무리가 지하 동굴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은 지하의 어둠과 어우러져 마치 작은 우주를 연상케 했다.

지상인인 올리비에가 이 생경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지저인인 베니엘은 심드렁한 감상만 내뱉을 뿐이었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라. 저 포자는 피부 아래로 파고들어."

"정말입니까?"

"그래, 피부병을 유발하지. 피부가 돌처럼 굳어서 긁을 때마다 살가죽이 돌가루같이 부스러진다고. 지독하게 가렵다니까?"

"세상에…."

"나중에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생기면 같이 산책하다가 저 버섯이 있는 데로 밀어버리라고."

"...."

지하는 확실히 아름답지만 잔혹한 세계였다.

뭣보다 가장 큰 문제는 어둠이었다.

"여길 계속 여행하고 싶으면 마법 의안이라도 박아 넣는 게 좋을 거다. 올리비에."

"마법 의안이요?"

"그래, 원래 있는 눈알을 파낸 뒤에 비싼 놈으로 하나 박으라고. 좀 아프긴 하겠지만."

"으윽…."

"너 같이 어둠 속에서 장님이 되는 녀석들에겐 필수품이야. 암흑 속을 꿰뚫어 보게 해주거든."

"아하."

"지금이야 내가 일부러 발광 버섯이 잔뜩 핀 동굴 길로 걷고 있지만, 지하에는 이런 희미한 빛마저 없는 장소가 훨씬 많거든."

"저..., 혹시 횃불이나 랜턴 같은 걸 쓰면 안 되나요?"

그 물음에 베니엘은 올리비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멍청아, 너희 지상인이 가장 실수하는 게 그 횃불이나 랜턴이야."

어두움 지하 세계에서 조명을 켜고 다니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불빛은 멀리에서부터 관찰됐고, 지저의 강도나 몬스터의 주의를 끌기 좋았다.

"당장 앞이 안 보이니까 빛을 밝히는 건 이해가 돼. 하지만 네놈 탐사대가 전멸한 건 그 때문이다. 전에 퀵포우가 어슬렁거리던 지상인들을 얼마나 쉽게 찾아냈는지 자랑하더라니까?"

"아...."

올리비에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지 깨닫고는 이마를 짚었다. 이처럼 지상인 탐사대는 아직 노하우가 부족했다.

"한데 베니엘 님. 로나는 의안을 박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자신의 사냥개를 가리키며 올리비에가 물었다.

"아마 괜찮을 거야. 개는 사람보다 어둠 속에서 더 잘 보니까. 대신 잘 통제해. 아까처럼 짖어대면 처분해 버릴 수밖에 없어."

현재 사냥개 로나는 세상 얌전한 태도였다. 사실 성질 더러운 이 녀석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베니엘과 올리비에게 노예 광산을 떠날 때부터 괜히 지가 기세등등해서 으르렁댔다. 그리고 한창 야생의 동굴을 가로지를 때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마구 짖어댔던 것이다.

이 때문에 어그로가 제대로 끌렸고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갑옷 두더지'란 괴물이 튀어나왔다.

뭐, 그 정도 괴물이야 베니엘이 가뿐하게 썰어버렸지만 그 어마어마한 덩치를 보고 로나가 완전히 질겁해 버린 것.

녀석은 꼬리를 엉덩이 사이로 말더니 오줌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걷질 못해서 올리비에가 한동안 안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지하 세계를 체감했던 금쪽이 사냥개 로나는 그 뒤로 영리하게도 침묵했다.

거기에 더해 베니엘이 거대한 괴물을 칼로 썰어버리는 걸 보더니, 이 작은 그룹의 힘의 역학 관계를 완벽히 파악한 모양이다.

"끼잉. 낑낑."

이후로 틈만 나면 괜히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베니엘에게 아부하기 바빴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사납게 짖어대던 녀석이 놀랍도록 빠르게 비굴해져 있었다.

"지하에선 이런 녀석이 살아남는 법이지."

베니엘은 로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한데 어디로 가십니까?"

올리비에는 생각해 보니 자신이 목적지도 묻지 않고 무작정 베니엘을 따라나섰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거 말이지."

둘째 고모 아니엘에게 보낸 쪽지에는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에서 보름 정도 떨어져 있는 자유 도시 에란 샤라드로 가겠다고 적어놨다.

'사실 속임수지만….'

베니엘은 에란 샤라드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을 쫓아올 게 틀림없는 집착의 화신 아니엘을 떼어놓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베니엘은 자신의 속임수가 꽤나 잘 먹힐 거라 여겼다.

'게임 초반부에 보면 머리 수집가 아니엘이 에란 샤라드로 갈 일이 있지. 겸사겸사 에란 샤라드로 향할 게 틀림없다.'

가는 데 보름, 일 보는 데 보름, 오는 데 보름. 도합 한 달 반 정도는 둘째 고모를 떼어낼 수 있을 터. 베니엘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우리의 행선지는 검은 요새다."

"검은 요새요?"

"우리 남작령에 있는 요새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시설이지."

베니엘은 둘째 고모에게 얘기한 것과 다르게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거기 대단한 검객이 있나 보죠?"

올리비에가 그리 묻는 건 당연했다. 애초에 훌륭한 검법을 얻겠다고 나선 길이니까.

베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뛰어난 검법이 항상 그럴싸한 장소에 있으리란 법은 없지. 가서 군사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뒤질 거야."

"창고요?"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창고라기보단 쓰레기를 대강 박아 둔 곳에 가깝지만."

"음…?"

올리비에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베니엘은 가보면 안다고 단언했다.

이건 중요한 일이었다.

검법도 얻고, 늘 자신을 고깝게 보는 남작에게 점수도 따고, 쓸만한 인재도 등용하는, 그야말로 일타삼피의 꿀 퀘스트였으니까.

***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검은 요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다.

검은 요새가 자리 잡은 공동(空洞)에서 몇 개의 자연적인 동굴이 뻗어나가는데, 이것은 이웃 영지들과 연결돼 있었다.

지하 세계에선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위적인 갱도가 도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검은 요새는 적이 침범할 수 있는 중요한 도로를 막아서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저기다. 저기가 요새야."

길게 이어진 동굴 길을 걸어온 베니엘과 올리비에는 폭이 250미터에 이르는 공동에 도착했다. 공동의 높이는 35미터 정도였다.

지하 세계의 기준으로 큰 공동은 아니지만 작은 요새 하나가 자리 잡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거대한 종유석이 가득했고, 일부는 지상까지 그대로 이어져 자연적인 기둥인 석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석주에는 군대의 초소가 여러 개 붙어서 요새 밖을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이게 다크 엘프의 요새군요."

처음 보는 요새의 모습에 올리비에는 입이 벌어졌다.

사실 지하의 다크 엘프 요새는 나름대로 장관이긴 하다.

특유의 뾰족뾰족한 양식도 그렇고,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성벽에 사용한 '다크 스톤'의 검은 빛깔도 장엄해 보였으니까.

또한 성벽은 다크 엘프에게 친숙한 거미나 뱀 장식이 붙어 있었고, 오래전에 처형된 걸로 보이는 시체가 여러 구 대롱대롱 매달려서 흔들렸다.

그 살벌한 광경에 올리비에가 머뭇거리자 베니엘에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가자. 따라와."

베니엘은 태연하게 요새로 걸어갔다. 이미 요새 위의 궁수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부산스러워진 상태.

다크 엘프의 요새는 인간인 올리비에가 보기엔 모든 게 특이했다. 특히 해자를 채우고 있는 녹색 액체가 뭔가 싶었다.

"저게 뭡니까?"

"그린 슬라임이지. 강렬한 산성을 품고 있어서 저기 떨어지면 뼈도 못 추려."

"허...."

"뭐, 그래도 자기가 빠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녀석이야. 방어에도 좋고, 녹슨 갑옷 같은 걸 깨끗하게 만들 수 있거든. 어떤 때는 쓸모가 다한 포로를 던져넣기도 하지. 다크 엘프도 키우는 녀석들에겐 밥은 주니까."

좀 더 요새에 다가가자 베니엘의 정체를 알아보는 자들이 나왔다.

"도련님이다!"

"베니엘 도련님께서 오셨다!"

다만, 거기 담긴 감정은 반갑다는 것보다 적이 쳐들어올 때와 비슷했다. 올리비에도 그걸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환영받지 못하시는군요?"

"괜찮아. 그래도 막 화살을 쏘고 그러진 않을 테니까."

잠시 뒤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요새의 경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련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은 먼저 마법 도구로 베니엘을 검사했다. 변신 능력을 쓴 도플갱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플갱어가 사방에서 암약하는 지하에선 흔한 절차다.

"이상 없습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베니엘 도련님!"

장교 하나가 군례를 올려왔다. 하지만 그를 비롯해 주변의 병사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거북함이 가득했다.

베니엘은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리지널 녀석 때문이군.'

요새 경비병들에게 망나니 베니엘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보다 좀 더 어린 시절의 베니엘은 모험가 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는 지하의 위대한 탐험가가 되겠다고 설쳐댔고, 요새로 와서는 병사와 물자를 맘대로 징발했다. 그리고 사방의 위험천만한 지역으로 무리를 이끌고 싸돌아다녔다. 당연히 그 난리 동안 벌어질 일은 모두 부하들이 수습해야 했다.

당시에는 후계자에서 나가리된 것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귀하신 도련님 그 자체였던 베니엘이다.

도련님이 죽거나 다치면 안 됐기에 병사들은 온몸으로 위험을 막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죽거나, 실종되고, 괴물의 먹잇감으로 사라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거기에 더해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매질을 해대는 망나니 도련님은 덤이었다. 요새의 병사들이 베니엘의 방문에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했다.

'아니, 그 빌어먹을 모험가 놀이는 그만둔 거 아니었나?'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야?'

'아놔… 가뜩이나 복무도 빡센데. 이제 이 새끼까지?'

사실 모험가 놀이는 베니엘도 어느 정도 크고 나선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한동안 요새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한데 그 망나니가 다시 나타났으니 병사들의 마음속에서 비명이 터지는 게 당연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였다.

'이번엔 대체 무슨 쓰레기 짓을 하려고?'

하지만 베니엘은 새로운 모험 아이디어를 설파하는 대신 덤덤하게 요새 안으로 향했다.

질척질척한 진흙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저 앞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

"아이구! 도련님!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요새 사령관이었다. 그는 남작령에선 제법 알아주는 강자로 이름은 '드랄두'였다.

급하게 튀어나온 듯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는 데다가 얼굴이 상기된 모습이다.

그는 반푼이긴 해도 마스터 경지에 턱걸이한 검객이었다. 처세술도 뛰어나 영민하고 싹싹한 태도로 남작의 마음을 사로잡아 중요한 요새의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영지 외곽의 요새 지휘관이 무슨 요직이냐고 할 수 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다르다.

왜냐하면 각종 콩고물이 많기 때문에 다들 부러워하는 자리였다.

적당히 물자를 빼돌리거나, 이웃 영지와 다양한 밀수를 할 수 있다. 또한 군병을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동원하는 건 예사였다.

"드랄두. 오랜만이군."

고개를 끄덕이는 베니엘을 보며 드랄두는 밝게 웃어 보였다. 옆에서 보던 올리비에가 성격 고약하기로 유명한 다크 엘프가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였다.

"아니, 왜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이 드랄두야말로 도련님의 진정한 친구임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이 남자는 아부와 아첨을 타고난 자였다.

실제로 망나니 도련님에게 무조건 잘해줬는데, 그가 틈나는 대로 찾아와서 군병을 빼내고 각종 깽판을 칠 때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맞춰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오리지널 베니엘은 드랄두를 몹시 좋아했다.

때때로 베니엘은 자신이 남작령을 갖게 되면 드랄두에게 열 배, 스무 배로 보답하겠다고 호탕하게 외쳐대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교활한 요새 사령관 속으로 비웃어댔지만 말이다.

드랄두는 그저 베니엘의 핏줄이 쓸모 있었을 뿐이다. 그는 영리했기에 아리아나 같이 뛰어난 인물이 남작령을 이어받으면 자신 같은 인물에게 진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반면 베니엘이 후계자가 된다면 자신의 세상이 열릴 거라 여겼다. 오리지널 베니엘 같은 멍청이면 이리저리 속이고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해서 자신이 실세가 되는 건 일도 아니라 여겼기 때문.

그렇기에 드랄두는 베니엘이 후계 자리에서 밀린 이후에도 한결같이 잘해줬다.

그는 나름대로 통찰력을 가졌기에 얄팍하게나마 미래를 헤아려 볼 수 있었다.

'남작의 여동생 우시드라는 야심만만한 존재다. 게다가 외부에서 굴러온 아리아나 아가씨를 좋게 보고 있지 않지. 언젠가 남작령이 분란에 휩싸이는 건 기정사실. 그때 이 망나니를 주구로 삼아 뜻을 펼치겠다.'

그런 계획이 있었기에 드랄두는 늘 베니엘이 반가웠다. 호구 새끼가 매번 찾아와줬으니 말이다.

"베니엘 님, 또 어딘가 전설적인 발견을 하러 가십니까? 원하시면 병사들을 차출하겠습니다."

드랄두의 말에 베니엘은 괜히 머쓱해졌다. 질풍노도의 시기, 오리지널 베니엘이 벌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드래곤의 혈통이다! 위대한 선조의 보물을 찾겠다!

당시 베니엘은 진짜로 자신이 드래곤의 핏줄이라고 믿었다. 근거는 없다. 그냥 그런 설정이 마음에 들었던 거다.

"크으...."

따지고 보면 자기가 벌인 짓도 아니지만 밀려오는 수치심에 베니엘은 침음성을 흘렸다.

"전설적인 발견 따윈 이젠 괜찮다. 요새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다."

베니엘은 작게 '더는 애새끼도 아니고 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아닌 척 긴 귀를 쫑긋거리며 듣고 있던 다크 엘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베니엘 님."

"군영의 창고에서 좀 찾고 싶은 게 있군. 확인해 볼 수 있겠나?"

그 말에 생글생글 웃던 드랄두의 안색이 싹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게, 원래 창고에 있어야 할 비축 물자가 현재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드랄두가 모두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뭔가 알고 온 건가?'

드랄두는 급격하게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 그라면 이 정도의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다. 물론 비축 물자에 손을 안 댄다는 선택지는 없었지만, 적당히 해 먹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최근에 엄청난 도박 빚을 졌고 완전히 선을 넘어서 요새의 비축 물자를 거의 다 팔아먹어 버렸다. 심지어 이에 항의하는 간부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지하 감옥에 가둬두기까지 한 상태.

한데 이 시점에 갑자기 망나니가 나타나 창고를 보자고 한다?

드랄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정말 알고 온 게 맞다면 어떤 개새끼가 저 망나니에게 찌른 거지? 이런 빌어 처먹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랄두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래, 침착하자. 생각해 보니 당황할 거 없어.'

저놈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향응을 제공하면 분명 잘 넘길 수 있을 터였다.

드랄두의 안색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창고야 못 보여드릴 것도 없지요. 하하하. 그것보다 제가 최근에 귀한 보물을 구했습니다. 한번 보시지 않겠습니까? 도련님께서도 분명 마음에 드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15화

검은 요새 (3)

드랄두의 태도에 베니엘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뻔한 수작질이다 싶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베니엘과 다르게, 옆에서 지켜보던 올리비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이거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거 아닌가?'

올리비에가 대강 듣기로 베니엘이 원하는 건 요새 창고의 쓰레기 더미 안에 있다고 했다. 아마 그건 일종의 검술서인 것 같았다. 책 한 권을 가지고만 나오면 끝이란 소리.

'더 쉬운 방법이 있을 텐데?'

올리비에가 보기에 베니엘의 행동은 공연히 창고 운운하며 이곳 사령관의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러 벌집을 쑤시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마 상식적인 시선으로 보면 이런 올리비에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베니엘이 원하는 건 단순히 검법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최대의 성과를 얻길 원했다.

그는 전생에서부터 뭐든 한 번 하면 뽕을 제대로 뽑아야 직성이 풀리는 극한의 효율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많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드랄두를 베어버리고 창고로 직행해도 되고, 애초에 정문으로 오질 않고 밤에 몰래 잠입해도 된다.

직접 하는 게 싫으면 전문적인 도적을 고용해서 해결을 보는 수도 있다. 뭐, 지하 세계의 도적놈을 믿을 수 있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론 베니엘이 노리는 바를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요새 사령관을 흔들어야, 더 쉬운 방법에선 볼 수 없는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마법 물품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능청스러운 연기를 이어갔다.

"보물? 관심이 가긴 하는군. 하지만 지금은 창고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드랄두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짜냈다.

"물론 도련님께서 원하시면 개방해야지요. 하지만 현재는 좀 어렵습니다."

"뭐라?"

베니엘은 망나니 연기에 충실하기 위해 눈꼬리를 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사정이 있습니다. 제 얘기 좀 들어주십시오. 도련님. 최근에 폭발성 버섯들이 창고 안에 다량으로 피어났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죄송합니다. 제 관리 소홀입니다. 아무래도 짐을 옮길 때 손바닥만 한 '버섯 인간'이 섞여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놈들이 의도적으로 분탕질을 쳐놓은 거지요. 이걸 잘못 건드리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킬 겁니다. 처리하는 데 며칠이 걸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흐음...."

"서두르겠습니다. 대신 그간 도련님께서 무료하지 않으시게 이 드랄두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그 사이에 인근 요새에서 물자를 가져와 채워 넣으려는 수작이었다. 다른 요새의 지휘관들도 드랄두와 비슷하게 온갖 횡령을 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비리를 알고 있기에 청을 거절할 수 없을 터. 물자가 일부 부족하긴 하겠지만 그 정도야 망나니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무마할 수 있겠다는 게 드랄두의 판단이었다.

물론 베니엘에겐 이런 꿍꿍이가 훤히 읽히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군.'

하지만 베니엘은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지금 하려는 건 상대를 흔드는 거지, 궁지로 끝까지 몰아세우려는 게 아니니까. 그랬다가는 새로운 인물이나 마법 물품의 출현도 없이,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놈을 최대한 뜯어먹으려면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지.'

베니엘은 창고보다 다른 곳에 관심이 간다는 듯 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귀한 보물 구경이나 해볼까? 기왕이면 술도 마시면서 말이야."

그 결정에 드랄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망나니의 관심을 돌릴 수 있을 듯했다.

"아이고,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도련님."

***

드랄두는 베니엘을 자신의 관저로 안내했다. 그리고 아껴놨던 값비싼 위스키를 아낌없이 꺼내놨다.

망나니 베니엘은 술 좋아하는 거로 유명했으니까.

"도련님께 특별히 대접하고 싶은 이것은 스톤클리버 50년산입니다."

"아니, 이건 돈을 쏟아부어도 못 구한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근처에서 밀수를 하던 지하 드워프 무리를 때려죽이고 얻었지요. 하하하!"

술 얘기를 하자 망나니 베니엘은 흥이 오른 듯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드랄두는 보여주겠다는 보물을 꺼내놨다.

"말씀드린 보물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단단한 목재함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검이었다.

검의 이름은 '프로스트바이트(Frostbite)'. 얼음 속성을 가진 마법검으로 초반에 얻으면 중반부까지 사골국물처럼 우려먹을 수 있는 무기다.

이 프로스트바이트 역시 검은 요새로 온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베니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가지고 나왔군. 후후.'

이 프로스트바이트는 드랄두를 흔듦으로써 출현하게 되는 마법 물품이다.

사실 다른 방법을 써도 얻을 수는 있지만, 보통은 드랄두가 금고에 이 검을 꿍쳐놓고 안 꺼내기 때문에 문제였다.

귀한 검이라 그런지 아주 비싼 마법 금고를 썼고, 여는 데 개고생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꺼내놓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이것만 손에 넣으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겠어.'

현재 베니엘은 노예 광산의 병사들이 쓰는 철검을 하나 달랑달랑 찬 게 다였으니까.

앞으로 벌어질 강자들과의 싸움을 고려해 볼 때 명검이 필요했다. 베니엘은 홀린 듯 마법을 쓰다듬어봤다. 손끝이 냉기로 저릿저릿하다.

"5등급 마법검이군."

베니엘의 말에 드랄두는 감탄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역시 망나니가 다른 건 몰라도 칼 사랑만큼은 진짜다 싶었다.

지하 세계의 마법검은 1등급에서 10등급으로 나눈다. 등급이 올라갈수록 강한 마법검이다.

최대 10등급이니 5등급이면 뭐가 대단한 거냐 할 수 있지만, 7~8등급이 전설적인 마법검이고, 9~10등급이 신화적인 마법검임을 고려해 볼 때 틀린 소린 아니다.

하이 마스터인 나르다리온 남작이 애지중지하는 마법검 '쉐도우팽'도 6등급이었으니까.

하니, 5등급 마법검이라 하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명검이다. 마스터급 검객이라고 해도 그것보다 못한 2~3등급 마법검을 쓰는 일도 흔했으니까.

"내 오늘 좋은 구경을 하는군."

베니엘이 프로스트바이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자 드랄두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리 탐내봐라. 줄 생각은 없으니까.'

막 나가는 도련님이라고 해도 이런 물건을 다짜고짜 달라곤 못 한다. 기회를 봐서 팔 수 있냐고 물어볼 게 뻔한데 드랄두는 팔지, 말지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도련님, 저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습니다. 일단 칼 구경을 하고 계시지요."

"그래, 그래. 알겠어."

칼에 홀린 듯 건성으로 대답하는 베니엘을 보며 드랄두는 방을 빠져나왔다.

***

드랄두가 서둘러 향한 곳은 자신의 침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라의 다크 엘프 여인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그를 맞아줬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셨던 건가요? 내 사랑. 후훗."

평소라면 드랄두를 기쁘게 해줬을 고혹적인 웃음 소리도 지금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그저 급하게 자신의 용건을 꺼내놓을 뿐이었다.

"이, 이럴 때가 아니오. 망나니 녀석이 갑자기 나타났다오!"

드랄두는 요새로 찾아온 손님이 누군지 설명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 유명한 망나니가요?"

"그렇다오. 다짜고짜 들어와서 창고를 열겠다고 해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오. 실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여인의 이름은 '실라'로, 검은 요새 인근에 자리 잡은 소도시 '졸첸'의 매춘부 겸 포주였다.

얼마 전 졸첸의 도박장과 유곽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드랄두의 눈에 띄어 애인이 됐다.

"진정하세요. 내 사랑."

실라는 드랄두의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다정하게 닦아줬다.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

망나니 베니엘이 좋아하는 건 세 가지다.

바로 술과 검과 여자.

이 삼신기로 홀려야 다른 요새에서 물자를 가져올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앞에 두 개는 재빨리 채워 넣었다. 이제 매혹적인 여자만 있으면 될 터.

드랄두는 실라에게 망나니의 접대를 부탁했다.

"당신의 매력이면 망나니 녀석의 혼을 빼놓기 충분할 거요."

솔직히 속이 쓰리긴 해도 드랄두는 애인의 직업이 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제 완숙한 사내로, 여자에게 빠져 모든 걸 망쳐버리는 치기 어린 자는 아니었다. 그에겐 당장 위기에 대처하는 게 훨씬 급했다.

이런 요구에 실라는 원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당신! 어떻게 절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나요!"

"미안하오. 내 사과하지."

"이제 제겐 당신밖에 없는데!"

실라는 자신의 직업과 관계없이, 애인이 된 후 그만 바라보고 있다고 말해왔다. 듣기 좋은 말이었으나 드랄두는 그런 달콤한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다만 때론 거짓이라 할지라도 모른 척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는 법.

그렇기에 드랄두는 애인의 이런 태도에 맞춰줬다.

"앞으로 이런 부탁할 일은 없을 거요. 내 어려운 상황이라 그러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어느새 기막히게 눈물까지 방울방울 흘리던 실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고맙소. 잘 부탁하겠소."

"걱정 마세요. 그런 천둥벌거숭이 하나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

얼마 뒤, 드랄두가 베니엘에게 잘 차려입은 미희를 하나 보냈다.

그녀는 류트를 든 채로 망나니 도련님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신지요. 소녀는 실라라고 하옵니다. 미욱하게나마 류트를 다룰 줄 알아 사령관께서 절 보내셨답니다. 허락하신다면 소녀가 도련님의 흥취를 돋우고자 합니다."

베니엘은 다리를 꼰 채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디 해보도록. 일단 들어는 주지."

하지만 상대를 업신여기는 듯한 그런 겉모습과 다르게 베니엘은 속으로 반색하고 있었다.

'좋아. 프로스트바이트에 이어 테스티아까지 등장했군.'

'테스티아'라고 하면 눈앞에 있는 자칭 실라라는 매춘부의 본명이었다.

이것으로 베니엘이 처음에 의도했던 새로운 마법 물품과 새로운 인물의 출현이 모두 성공한 것이다.

베니엘은 흡족해졌다. 동시에 이 험난한 세계에서 자신의 지식이 아주 쓸만하다는 데 큰 자신감을 얻게 됐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승승장구하겠군.'

더 훌륭한 마법 물품, 더 대단한 인재, 더 높은 경지. 그 모든 게 꿈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베니엘이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실라가 류트를 뜯으며 노래에 들어갔다.

"이야기 속의 달빛이 없는,

돌로 덮인 천장의 세계 아래,

차갑고 신비로운 동굴의 강물이 흐르는 땅에서,

나 그대를 위해 노래하니...."

노래는 지하 세계 특유의 서정적인 노래였다. 시작은 저렇지만 금세 노골적이고 끈적끈적한 가사로 이어지는 다크 엘프 특유의 것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딴 건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눈앞의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길에 실라는 자연스러운 교태를 부리며 미소 지었지만, 베니엘이 그녀를 보는 건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눈앞의 여자가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드랄두 녀석도 자기 애인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다.'

본명이 테스티아인 이 여자는 사실 제국의 수도에서 권력 다툼 끝에 도망쳐 온 존재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제국정보국의 유력한 간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하 제국이 하루가 다르게 몰락해 가고 있는 가운데 정보국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었다.

정치적 이유로 수많은 숙청의 바람이 불었고, 그녀가 속한 황녀 파벌은 결국 완전히 내쳐지게 됐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테스티아는 자신을 따르는 몇몇 측근만을 간신히 챙겨서 도주했다. 그리고 도착한 게 시골 영지인 나이트쉐이드 남작령.

그중에서도 소도시 졸첸 같은 곳에 박혀 있으니 어지간해선 그녀의 적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었다.

한때 잘나가던 정보국의 간부가 시골 소도시의 암흑가에서 포주 행세나 하고 있을지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현재 그녀는 졸첸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본래 날리던 인물이었던 만큼 수완이 좋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마스터급 검객인 드랄두를 꼬셔 애인으로 삼고, 그의 힘을 빌려 졸첸 암흑가의 건달들을 줄줄이 처리해 버렸다.

현재 그녀와 몇몇 수하들은 졸첸의 암흑가를 완전히 먹어버린 상태. 유곽과 도박장, 대부업자까지 그녀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요새 사령관 드랄두가 도박에 빠진 것도 이 여자의 수작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만으로 요새 사령관을 완전히 통제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닫고 도박질을 권한 것이다.

애초에 도박판의 인물들이 모두 그녀의 수하였기에 드랄두를 농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실라는 그 도박빚으로 드랄두의 목줄을 잡으려 시도 중이었다.

현재까지 이런 그녀의 행보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됐을 거다.

망나니 베니엘을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당신과 나의 진득한 숨결,

열락의 숨결,

동굴의 그림자 아래서 마주하는 연인의 뒤엉킴 속으로."

얼마 뒤 그녀의 달콤한 노랫소리가 끝났다.

베니엘은 미소 지으며 박수를 쳤다.

짝. 짝짝.

"훌륭하군. 더는 못 참겠구나."

베니엘은 인내심이 짧은 젊은이처럼 실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고 더듬기 시작했다.

실라는 야릇한 소리를 냈다.

"아, 도련님! 좀 더 순서를… 아직 밤은 길답니다. 호호홋."

실라는 내심 조소를 머금었다.

'소문대로 호색하기 짝이 없는 놈이네. 이거 생각보다 쉽겠는걸?'

그녀도 망나니 베니엘과의 만남에서 나름대로 기대감을 안고 왔다.

아무리 후계자에서 밀렸어도 남작의 아들이니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터. 앞으로 자신의 음모를 좀 더 확실하게 성공시킬 주구로 써먹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 꼬드겨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벌써부터 정욕을 참지 못하고 달라붙는 걸 보니 비웃음이 나왔다.

소문대로 성질이 급하고 쉬운 녀석이었다.

"호호호, 도련님. 거긴 좀 더 부드럽게요."

간드러진 웃음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렇게 실라가 기대에 부풀던 그때, 그녀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아! 도련님? 잠깐!"

몸을 더듬는 척하던 베니엘이 순식간에 그녀의 목걸이, 귀걸이, 발찌를 해체해서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갑자기 달라붙었던 건 이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들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금제 장신구가 아니다. 실제로 도청, 암살, 도둑질에 도움을 주는 위험천만한 마법 물품이었다.

한데 베니엘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장신구들만 노려서 빼앗은 것이다.

상대를 얕보고 있던 실라는 뭔가 대응도 할 수 없는 사이 당해버렸다.

"도, 도련님? 여자에게 장신구는 소중한 것이랍니다. 그렇게 빼앗으시면...."

그 말에 베니엘은 대답 대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올리비에가 기다렸다는 듯 실라를 밧줄로 포박했다.

실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꺄앗! 도련님, 아파요! 아무리 저라도 이런 폭력적인 건…."

벌써 실라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런 빼어난 연기력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빼앗은 장신구들을 하나씩 주워 보이며 말했다.

"이 목걸이는 '암살자의 키스'라 불리는 물건이지. 필요할 때 맹독을 뿜어낸단 말이야."

"이 발찌는 '도둑의 친구'라는 것으로 투명화 주문이 내장된 물건이다."

"마지막으로 이 귀걸이는 '엿듣는 귀'. 특정한 소리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베니엘은 그것들을 차례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물었다.

"평범한 매춘부가 가지고 있기에는 이상한 물건이지. 안 그런가?"

16화

검은 요새 (4)

말문이 막힐 법한 추궁이었다. 하나 실라는 노련했다. 표정이 흔들리던 것도 잠시, 능청스럽게 대꾸해왔다.

"어머, 참. 호신용이랍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별일을 다 겪거든요."

하지만 베니엘이 듣는 척도 안 하자 실라가 몸을 비틀어댔다.

"그것보다 도련님, 이 밧줄이 아파서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답니다. 요새 사령관이 지금 상황을 보면 난처하지 않겠어요?"

은근히 압박해 오는 그 말에도 베니엘은 여유만만했다.

"해보던가? 망나니 놈이 좀 가학적으로 놀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반면 너는 이게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는 걸 어찌 변명할 건데?"

베니엘은 손가락 사이에 쥔 귀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짤랑짤랑 경쾌한 소리가 났다.

"...제게 뭘 바라시는 건가요? 도련님."

"협조적인 태도로 이성적인 대화를 하자는 거지. 네가 막 소리를 지르면 피가 튀고 내장이 바닥에 쏟아지는 상황이 벌어질 텐데, 좀 그렇잖아? 뭐, 정 원한다면 그런 방식으로 가고."

역으로 몇 배나 강하게 압박을 가해오는 베니엘의 태도에 실라는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예감이 들었다.

"알겠어요. 대화로 하지요. 도련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그것보다 이성적인 대화라고 하셨잖아요? 협조할 테니 이 밧줄부터 풀어주실래요? 저 같은 아녀자를 이렇게 묶고 겁박하시다니요...."

살짝 울먹이며 겁에 질린 듯 파르르 떠는 연기가 아주 일품이었다.

베니엘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원한다면 이딴 밧줄은 직접 풀 수 있을 텐데 어이가 없네.'

사실 그녀는 야리야리한 겉모습과 다르게 상당한 실력자였으니까. 정보국의 간부란 게 날로 먹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녀는 이런 밧줄은 물론이고, 노예 마법 스크롤 같은 것도 안 먹히는 존재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협조적으로 나오면 풀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일단 얘기를 좀 하자고."

"…말씀하세요."

베니엘은 실라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았다.

"최근에 꽤나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주더군. 실라."

"무슨 말씀이신지, 소녀는 잘…?"

"확인해 보니 작년에 졸첸으로 온 외지인이더군. 네 패거리는."

"...."

"네년을 포함해 총 여섯이 왔지. 참 머리를 잘 썼더라? 보통 시골 소도시에 외지인이 오면 금방 티가 나기 마련인데… 졸첸이라면 다르지.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잡한 장소니까."

졸첸은 남작령의 제2도시로, 노예 상인, 변경의 병사, 고용주를 찾는 용병, 흘러들어온 부랑자 등으로 새로운 얼굴이 매일 나타나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실라의 무리도 졸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한두 달 숨죽이고 지내더니 바로 움직이더군. 모종의 방법으로 유곽을 몇 개를 인수하더니 이후에는 졸첸에 자리 잡은 기존 조직과 다툼을 시작했지."

실라는 자신의 행보를 마치 연대기처럼 나열하는 베니엘의 모습에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숙련된 요원. 겉으론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기존 녀석들이 만만치는 않았지. 토박이란 게 다 그렇지만 자기 땅에선 여러 이점을 가지니까. 도시 의회랑 연줄이 있는 녀석이 제일 골치였잖아?"

설마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줄이야. 실라는 눈앞의 망나니의 정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대한 은밀히 진행하며 별다른 실수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실라와 요원들은 최고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제국 정보국 소속이다. 가뜩이나 제도의 숙적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던 터라 이 작은 도시로 와서 벌인 공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프로 중의 프로인 그들이 족적을 지우며 움직였는데 저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실라는 살짝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망나니라고 생각했는데 평가를 바꿔야 하는 건가?'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은 새로 자리 잡게 된 터전인 만큼 다양한 조사를 했다. 그중에 남작가의 구성원에 관한 건 중대 사항이었다.

열심히 알아본 결과 실라는 차후에 후계자인 아리아나에게 연줄을 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야말로 남작가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 인재였다.

반면 망나니 베니엘은 검술 외에는 볼 것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한데 막상 만나보니 정보와는 딴판이었다.

'포악하고 급하다기보단, 빈틈없고 교활한 자 같은데? 대체 왜 이렇게 소문과 다른 거지?'

실라는 혼란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베니엘이 실라가 이곳에 와서 벌인 가장 과감한 공작을 지적했다.

"그래서 벌인 방법이 아주, 아주 인상적이더군. 설마 요새 사령관이자 마스터급 검객인 드랄두를 애인으로 만들 줄이야. 이후에 드랄두의 힘을 빌려 폭력 조직의 주요 간부들을 참살하고 졸첸의 암흑가를 거의 평정한 상태지. 대단하군. 대단해."

베니엘은 과장된 태도로 박수를 쳐줬다.

짝, 짝, 짝.

조용한 방 안에서 공허한 박수 소리만 울렸다.

실라는 이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제국 정보부에 관한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부분이 제일 실라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기에 대화 중 이것저것 떠봐야 할 듯했다.

"놀랍군요. 도련님께선 모든 걸 알고 계시는군요…?"

베니엘도 그녀의 물음에 담긴 미묘한 긴장감을 읽어냈다.

'정보국에 관한 게 켕기는 모양이군.'

베니엘은 다짜고짜 제국 정보국 건을 쑤셔서 실라를 격동케 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녀에게 역린과도 같은 정보인 데다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컸기 때문이다.

현재 실라와 요원들은 정치적 다툼을 피해서 졸첸에 은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들을 알아보는 자가 나타난다면 극도로 경계하며, 무슨 제안을 하든 다시 도주할 확률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남작령의 후계자도 되지 못하는 떨거지 따위가 정보국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할 수도 있다.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어쩌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이트쉐이드 남작이 정적인 황자 파벌 소속이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성을 지녔다고 하겠다.

안정 지향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베니엘로서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모든 걸 알 리가 있겠나. 그냥 우리 영지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거지. 그걸 바탕으로 네년이 쓸모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거고."

당장 베니엘에게 필요한 건 제국 정보국 부장 테스티아가 아니다.

졸첸 암흑가의 실라가 필요할 뿐.

아마 그녀 역시 이런 요구가 기꺼울 터. 왜냐하면 실라는 제국의 정치 상황이 다시 자신에게 유리해질 때까지 관망하며 한동안 숨을 죽이고 지내려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때가 되면 베니엘은 그녀의 비밀을 잘 이용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제국 정보부 부장 테스티아는 마족 황녀에게 접근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으니까.

"실라, 암흑가에서 세력을 일구기 위해 드랄두를 뒷배로 둔 건 탁월한 결정이었어. 하지만 녀석이 곧 몰락할 거란 사실은 몰랐겠지. 아마 새로운 뒷배를 구해야 할걸?"

"당신의 손을 잡으라는 건가요? 도련님."

"그래, 내가 그 도박빚에 시달리는 반푼이 마스터보단 훨씬 낫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면 도련님께선 저희에게 어떤 걸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설득하려고 하니까 벌써부터 자기 이득에 관심을 보인다. 베니엘은 사납게 웃으며 선을 그었다.

"주제 파악 좀 하도록. 아직은 그걸 얘기할 때가 아니지 않을까? 영지의 변경을 지켜야 할 요새 사령관에게 수작을 부린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아. 당장 널 비롯해 네 패거리를 모조리 여기 성벽에 효수해 버릴 수 있다. 안 그런가?"

베니엘은 좀 더 구체적으로 협박했다.

"수하들이 하나 같이 유능하더군. 과묵한 다크 엘프 하나에 폭발물을 늘 품고 다니는 동굴 고블린 하나,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데 도가 터 보이는 노움 하나랑 전신에 흉터가 가득한 오크, 그리고 꽤나 발랄하고 아름다운 인간 아가씨까지. 녀석들의 진짜 이름은 모르겠지만 각자 졸첸에서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뭐라 불리는지는 아주 잘 알지. 후후."

그들 다섯은 모두 실라를 따라 여기까지 온 정보국 요원들이었다.

아주 은밀하게 행동해 왔기에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아니, 드러나지 않았다기보다 그 다섯이 서로 연관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는 자가 아예 없었다.

한데 놀랍게도 이 망나니는 정보국 요원 다섯을 특정해서 지목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백전노장인 실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감정을 밖으로 드러냈다. 기다란 귀가 잠깐이지만 파르르 떨렸던 것이다.

'설마 이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동요하는 실라를 보며 베니엘은 한 방 더 날렸다.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거다. 이번 일은 아버님께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니까."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남작 나르다리온은 하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 만약 남작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면 도망도 못 간다고 봐도 됐다.

아무리 정보국 요원들이 대단해도, 잠깐 마력을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도시 하나 범위를 통째로 스캔해 버리는 하이 마스터를 속이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역시 남작이 관여해 있는 건가? 그래서 먼저 자기 아들을 보낸 거구나.'

완전히 내팽개친 아들이라 들었는데 이런 일을 맡기는 걸 보면 소문이 틀린 모양이다. 하긴, 그 악명 자자한 망나니도 실제로 보니까 듣던 것과 딴판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네.'

당연히 착각이었다.

베니엘은 소문대로 남작의 눈 밖에 난 존재가 맞으니까. 그는 영지의 중요한 일이라면 의붓딸인 아리아나에게 맡기지, 결코 친아들인 베니엘은 쓰지 않았다.

"무조건 내 졸개가 되라는 건 아니다. 좋은 거래를 트자는 거지."

상대가 혹하는 모습을 보이자 베니엘은 이제 슬슬 구슬리기 시작했다.

설득과 협박, 회유로 이어지는 단계가 아주 매끄러웠다. 이미 죽은 오리지널 베니엘이라면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절대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너희가 어디서 온 건지 묻지 않겠다. 졸첸에는 늘 유랑자가 들어오니까. 다만, 확실한 건 우리가 서로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단 거겠지."

이 정도 상황이 되자 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상대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설령 후일을 도모하더라도 일단은 숙여야 하는 게 현명했다.

어쩌면 저 망나니 말대로 좋은 거래 관계가 구축될지도 모르고.

그리고 기왕 잡을 거면 뜸 들이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실라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말씀하신 대로 도련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현명하군."

"하면 뭘 하시려는 겁니까? 이 요새에서."

"드랄두를 쳐낼 거다."

"역시…."

"뭐, 애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하다면 가서 알려줘도 괜찮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전까지만 해도 드랄두의 품에서 아양을 떨던 여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어왔다.

"뭐, 그렇다면 됐고. 그럼 거래를 트게 된 기념으로 두 가지를 좀 부탁하지."

***

두 가지 부탁 중 첫 번째를 수행하게 된 실라는 표정이 묘했다.

"도련님 정말 이걸로 되나요? 이게 맞나요…?"

"물론이다."

베니엘은 확신에 찬 어조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시커먼 색의 허름한 복장이다. 마치 요새에서 일하는 고용인처럼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올리비에에게 손짓했다.

"시작해."

신호가 떨어지자 올리비에가 침대 한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밀었다가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삐걱.

침대가 요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 실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냈다.

"하앙~ 아아앙~ 하응?"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이 섞인 교성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혼자 야릇한 소리를 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태 다양한 작전을 해온 실라지만 이건 손에 꼽을 정도로 이상한 짓이었다.

옆에서 침대를 손으로 흔들고 있는 덩치 큰 인간 사내의 박자에 맞춰 멀뚱히 앉아서 간드러진 소리를 내는 짓이라니.

하지만 지켜보던 베니엘이 눈을 부라리자 실라는 좀 더 열심히 했다.

"흐으응! 하아앙. 아으으읏!"

하다 보니 방향이 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베니엘이 웃겨 죽겠다는 듯 낄낄거리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연기를 계속했다.

"도련님! 아아! 도련님! 더! 더!"

아마 이 정도면 베니엘이 원하는 대로, 밖에서 호위 목적으로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이 안에서 남녀 간의 일이 시작됐다고 여길 터였다.

이후 보고를 받은 드랄두는 자신의 수작질이 잘 먹혔다고 확신하고 일을 진행할 것이다. 그는 망나니 도련님이 한 번 정욕에 빠지면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는 타입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그 틈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럼, 나갔다 올 테니 잘 부탁한다. 그리고 이 몸의 체면도 있으니 한번 시작하면 충분한 시간 동안 진행하도록."

베니엘은 창문으로 밖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치 거미처럼 성채의 벽면을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이런 암벽타기는 다크 엘프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였다. 석재의 작은 틈새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했다.

'먼지 지하 감옥으로 가자.'

오늘 밤 그는 드랄두의 눈을 피해 중요한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17화

검은 요새 (5)

***

현재 베니엘은 기분이 좋았다.

검은 요새에서의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랄두가 애지중지하는 5등급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를 금고에서 꺼내게 만든 데다가, 정보국 출신인 실라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들은 요새 사령관 드랄두를 처리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다만 드랄두가 만만치 않은 사냥감인지라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몇 가지 빌드업이 더 필요했다.

지금 그가 요새의 지하 감옥으로 가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더불어 유능한 인재를 추가로 얻을 기회기도 하지.'

이미 실라와 거래를 텄지만, 앞으로 가문에서 벌어질 암투를 생각해 볼 때 인재는 많을수록 좋다. 그렇기에 그는 다소 들뜬 발걸음으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저기 보이는군.'

허름한 옷을 입은 그는 영락없이 요새에서 일하는 고용인 가운데 하나로 보였다.

머리를 숙인 채 근처에서 주워온 나무 구르마를 밀며 가자, 중간에 마주친 병사 중 누구도 베니엘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곧 지하 감옥에 도착한 그는 구르마를 내던지고는 재빨리 안으로 숨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통로를 지키는 병사들이 있지만 별로 걱정할 건 없었다. 놈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갈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실라에게 빌려온 '도둑의 친구'라는 발찌 때문이다(빌렸다는 말과 다르게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착용자에게 투명화 능력을 부여해 줬다.

다만 처음부터 이걸 쓰지 않고 굳이 고용인으로 분장한 건, 투명화의 지속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이 몰려 있는 구간에서만 투명화를 쓰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좋아, 가볼까.'

베니엘은 축축하고 차가운 돌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다크 엘프답게 작은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래로 향할수록 점점 곰팡이와 썩은 내가 심해졌다. 그리고 떠들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이, 쫄리나? 쫄리면 뒈져야지. 안 그래?"

"아, 가만 좀 있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 같은데?"

슬쩍 보니 간수 일을 하는 병사들이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도박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들 도박에 정신이 빠져서 지나가기 무척 쉬울 것 같았다. 그래도 만전을 기하기 위해 베니엘은 투명화까지 사용한 채 움직였다.

"이번에 나면 대박이야."

"아, 이 새끼 패. 어떻게 망치지?"

"맞아. 패 모양이 예쁜 게 맘에 안 들어. 네가 방해 좀 해봐."

옆에서 살금살금 걷는 중에도 다들 도박 삼매경이다. 베니엘은 근처에 있는 감옥의 열쇠 꾸러미까지 하나 슬쩍해서는 안으로 진입했다.

지하 감옥의 내부는 비좁았다.

사방이 고요했는데, 가끔씩 심하게 앓는 듯한 신음이 들릴 뿐이었다.

뭐랄까, 이곳은 절망이 가득한 장소였다.

조명은 없었고, 습기에 자라난 약간의 발광 이끼가 뿜어내는 희미한 빛이 전부였다. 그 아래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죄수들을 비쩍 마른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물 좀… 제발… 물을...."

고열로 헐떡이는 죄수 하나가 허공에 손을 뻗은 채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딱 봐도 이미 틀린 상태. 저 죄수는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듯했다. 그리고 저런 죽음은 지하 감옥에서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베니엘이 찾는 자는 여기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계단이 나왔고 앞은 쇠창살 문이 막고 있었다. 아까 간수들을 지나치며 챙겨온 열쇠를 꺼내서 이리저리 쑤셔보고는 문을 열었다.

철컥.

열린 문 앞으론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베니엘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도착한 곳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있는 장소였다. 앓는 소리도 없었고, 오로지 고요뿐이었다. 발광 이끼조차 자라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이다.

이곳에 있는 죄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베니엘이 찾고 있는 '구른크'라는 미노타우르스다.

그는 검은 요새의 보급담당관으로 드물게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당연히 온갖 횡령과 비리를 일삼는 요새 사령관 드랄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드랄두는 구른크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워 여기 가둬버렸다.

지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직함의 비참한 말로라고 할 수 있다.

'드랄두를 쳐내기 위해선 구른크의 도움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구른크가 베니엘과도 악연이라는 점.

"후우…."

오리지널 베니엘이 벌여두고 간 패악질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젠 그가 수습해야 할 문제였다.

게다가 이 일은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꼬인 관계를 잘 해결하면 이후에 유능한 군인인 구른크를 휘하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드랄두를 성공적으로 쳐낸 뒤 구른크를 요새 사령관으로 밀어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온갖 투쟁이 벌어질 텐데, 요새 사령관 같이 군병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자기 사람을 박아 넣으면 더없이 든든한 일이었다.

"거기… 누구시오?"

옥 앞에 서자,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니엘의 눈에는 다크 엘프의 암흑 시야 덕분에 비쩍 곯아서 앙상해진 늙은 미노타우르스가 선명하게 보였다.

다만 암흑 시야는 모든 게 회색으로 보이는지라 평상시 다크 엘프들은 조명을 켜는 걸 선호했다.

"감각은 여전하군. 구른크."

베니엘은 나직이 감탄했다. 아직 투명화를 풀지 않았는데 미세한 기척만으로 그를 감지한 것이다.

베니엘은 투명화를 풀었다. 그러자 옥 안에서 사슬이 거칠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생각지도 못한 출현에 진중한 구른크조차 놀란 듯했다.

"아니, 망나니 도련님이 아니시오…? 여길 왜?"

사실 미노타우르스 전사 구른크는 남작성의 성의 수문장 역할을 하던 훌륭한 전사다.

하지만 과거 망나니 베니엘과 시비가 붙었고 검은 요새로 밀려나게 됐다.

오리지널 베니엘은 뻣뻣한 데다가 원리원칙을 준수하는 수문장 구른크를 마음에 안 들어 했다. 그러다 시비 끝에 싸움이 벌어졌다.

망나니 놈은 칼까지 빼고 덤벼들었는데 구른크는 맨주먹으로 그를 상대했다.

결과는 구른크의 압승. 당시 베니엘은 프로보스트급에 못 미쳤던지라 노련한 전사인 구른크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결국 팔이 하나 부러졌고, 그게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베니엘이 지금처럼 남작에게 버려진 존재는 아닌지라 가문 내에서 수문장을 징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던 것.

전후 관계를 보면 무조건 베니엘의 잘못이었지만, 결국 구른크는 수문장에서 물러나게 됐다. 구른크의 입장에선 규정대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천방지축 망나니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오랜만이군. 구른크."

"여긴 대체 왜 온 것이오? 이 몸은 도련님 덕분에 충분히 몰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소만…."

과거가 그러니 베니엘을 보는 눈빛이 고울 리가 없다.

탁월한 자제심으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의 숨결 사이, 사이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구른크는 자신의 튼튼한 뿔로 저 망나니를 있는 힘껏 들이박고 싶을 것이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구른크."

거두절미하고 말하자 구른쿠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어림없는 소리. 나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을 위해 봉사하오. 하지만 당신은 가문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지. 하니 어떤 협력도 하지 않을 것이오이다."

그리고 구른크는 마지막으로 가문의 망나니에게 충고했다.

"당신은 자신의 특권에 눈이 먼 자요. 남작의 아들이여, 하지만 나는 아직 당신이 실수로부터 배우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고 믿소이다. 부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그건 구른크가 베니엘 때문에 겪은 일을 생각해 볼 때 놀랍도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해주는 조언이었다. 충성스러운 구른크에겐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적자에 대한 염려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저 망나니에게 가 닿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오히려 날 비웃겠지. 비참한 처지에 빠져서 누가 누구에게 조언하냐며….'

한데 구른크의 그런 예상과 다르게 베니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고맙다. 새겨듣도록 하지."

"크릉…? 무어라...?"

"구른크. 가문을 위해 봉사한다고 했지? 그래, 그 가문을 위해 네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부패한 사령관 드랄두를 쳐낼 생각이다. 관련된 비리에 관해 네 증언이 필요하다."

"그게 정말이시오?"

구른크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는 부패한 사령관을 척결하고 요새를 정상화시키는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망나니가 하겠다고 하다니?

"정말이다. 그러니 과거의 원한은 잠시 잊고 협조해 주길 부탁하겠다."

하지만 구른크는 곧장 의심을 드러냈다.

"대체 도련님, 당신에게 무슨 힘과 권한이 있어서? 아무리 남작의 아들이라도 멋대로 요새 사령관을 징치할 수는 없소이다."

마치 너 따위에게 아버지 믿고 패악질 부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잖나,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베니엘은 이 부분에 대해 솔직히 인정했다.

"그건 그래. 그러니 권한을 가진 자를 불러오면 될 거 아니냐."

"뭐라…?"

"어쩔 건가. 기회가 오면 나서겠나?"

"크르릉... 믿음이 가진 않소만 만약 그렇다면 기꺼이 검은 요새의 정상화를 위해 증언하지."

구른크가 허락하자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러났다.

"좋아. 때가 되면 데리러 오겠다."

그 말과 함께 베니엘은 투명화를 써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구른크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괴이하구나. 원래 저 망나니라면 자길 무시했다고 화부터 벌컥 내야 맞을 텐데.'

그게 아니라도 모든 게 예전과 달랐다.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만 봐도 정말 저자가 자기가 기억하는 베니엘이 맞나 싶었다.

"대체 내가 요새에 있던 동안… 저 망나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구른크를 포섭하고 돌아오자 올리비에와 실라가 아직도 시킨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삐걱. 삐걱. 삐걱.

"으읏! 하아앙!"

베니엘은 둘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됐다. 그 정도면."

"아, 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베니엘은 책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마법 스크롤 하나를 꺼내서 펼쳤다.

실라에 이어 구른크까지 포섭했으니 이제 마지막 조치를 취할 때였다.

구른크에게 말했던 권한을 가진 자를 불러오는 일 말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권한을 가진 자를 불러오고 일이 틀어지면 오히려 역으로 크게 당할 테니 말이다. 아무리 남작의 아들이라고 해도 요새 사령관 같이 중책을 맡은 자를 모함한 일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을 거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좀 더 꼼꼼한 증거 수집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가령 드랄두가 숨겨 놓은 비밀 장부나, 다른 요새의 협력자 확보 등 말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거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구상하는 이번 무대의 클라이맥스는 사령관의 비리를 완벽히 입증하고 그를 체포하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결말은 따로 있었고 지금의 조치들은 다 그 밑작업일 뿐이었다.

일단 베니엘은 권한을 가진 자로 누굴 택할지 고민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에서 요새 사령관을 징치할 수 있는 자는 딱 넷이 있다.

가주인 남작과 그의 여동생 셋이다.

일단 남작은 평소에 검을 수련하느라 바쁘니 제외다. 게다가 망나니 아들놈의 말이라면 일단 선입견부터 품고 믿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다음은 큰고모 우시드라인데, 이쪽은 베니엘과 사이가 안 좋으니 제외다. 대놓고 적대하는 건 아니지만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가장 적당한 게 둘째 고모 아니엘인데 이쪽은 베니엘이 자유 도시로 따돌려 버린 상황.

집착이 깊고 무거워서 그렇지, 베니엘의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해주는 둘째 고모의 부재가 지금은 뼈아팠다.

'남은 건 막내 고모인가….'

막내 고모 리리나. 미치광이 마법사인 그녀는 베니엘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마법 외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망나니 놈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뭔가 새로운 생체 실험이 하고 싶을 때만 베니엘에게 와서 찝쩍거렸고, 보통은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 사는 존재였다.

'그러니 불러도 안 올 확률이 높지.'

검은 요새의 비리를 해결해 달라고 하면 듣자마자 귀찮음을 느끼고 잠적할 확률이 백 퍼센트였다.

막내 고모 리리나의 관심은 오로지 사령술과 생체 실험 같은 것으로 쏠려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관심을 갖게 해주면 그만이니까.'

베니엘은 펜을 들어 펼쳐진 마법 스크롤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이 마법 스크롤은 영지 안에서 나이트쉐이드의 혈족들이 서로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다.

지하 세계에선 통신 마법이 극히 제한되는지라 이런 수단 자체는 매우 귀하고 쓸만했다.

끄적끄적.

베니엘이 쓴 내용은 간단했다.

[고모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마스터급 검객의 실험체로 쓰기 적당한 인물이 있습니다. 제가 알려드린 시간에 와주시면....]

얼마간 더 써 내려간 베니엘은 마법 스크롤의 힘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글자가 빛에 둘러싸이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다.

메시지가 전송된 것이다.

이걸로 이번 무대를 위한 배우들이 모두 포섭됐다.

베니엘은 이번에 드랄두를 단순히 끝장내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명예와 평판을 한껏 드높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제 터뜨릴 일만 남았군. 흐흐흐."

18화

요새 사령관(1)

필요한 준비가 끝나자 베니엘은 드랄두를 불러서 요청했다.

"병력들 모아서 회식이나 한번 하자고. 드랄두."

"회식이요?"

"그래, 사기 진작 차원이야. 특별히 장한 병사들에겐 금일봉을 하사해 주지."

이상한 제안은 아니었다. 원래 가문의 윗선에서 나오면 이런 식으로 병사들을 치하하곤 하니까.

하지만 설마 망나니 베니엘이 할 줄은 몰랐기에 드랄두는 잠시 당황했다. 저 망나니라면 금일봉은커녕 병사들 물자도 빼앗아 갈 놈이 아니던가.

"어, 음…, 알겠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드랄두는 일단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회식을 할 때가 됐긴 하지.'

돈이 아깝고 내키진 않았지만 병사들에게 쓸 때는 써야 한다. 드랄두는 자신의 힘이 그들의 지지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알았다.

이건 지속 가능한 비리를 위한 필수적인 지출이었다.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도련님."

"그래, 가보도록."

다음 날 저녁이 되자 경계를 서는 병력을 제외한 모두가 식당에 모여들었다. 드랄두는 그들 앞에서 베니엘을 추켜세웠다.

"도련님께서 베푸시는 고기와 술이다.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도록."

"와아아아아!"

박수가 쏟아지자 베니엘은 손을 한 번 들어줬다.

베니엘의 옆에는 실라가 앉아 있었다. 병사들은 저 미모의 여인이 사령관의 애인임을 알고 있었다.

한데 왜 사령관이 아닌 망나니 곁에 있을까? 심지어 단순히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요염하게 웃으며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혀를 찼다.

'뺏겼구나!'

'사령관이 자기 여자를 뺏겼다.'

'망나니 놈 대단하군. 요새 사령관의 여자도 자기 맘대로!'

병사들은 마스터급 검객의 애인조차 농락하는 망나니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아마 오늘 회식비도 도련님이 베풀었다는 말과 다르게 사령관이 부담했을 터. 이쯤 되자 병사들은 저 망나니의 늘 한결같은 패악질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새 사령관조차 자기 용돈 주머니 정도로 여기는 건가!'

'과연 망나니 놈에 관한 소문 중 틀린 게 없다. 허명이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병사들은 사령관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사령관 드랄두가 평소에 얼마나 횡령을 해대는지 알기 때문이다.

물자를 빼돌리고, 병사들은 사적인 일에 동원하며, 보급담당관 구른크 같이 바른말을 하는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놈이다.

좋게 보일 리 없다.

군법과 마스터급 검객의 위세가 무서워 말을 못 할 뿐 다들 불만이 많았다. 이렇게 회식이랍시고 베푸는 것도 어쩌다 한 번 마지못해서 하는데, 이후에는 생색이란 생색은 엄청 냈다. 심지어 회식용으로 제공된 고기는 싸구려라 구린내가 심했다.

하지만 병력들은 사령관의 부식비 횡령으로 평소에 잘 못 먹었기에 이거라도 감지덕지였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니 병사들은 사령관을 엿 먹이고 있는 망나니의 방약무인한 행보에 묘한 희열을 느끼는 중이었다.

내심 응원까지 하게 된다고 할까?

"자, 도련님~, 아~."

실라가 아양을 떨수록 사령관 드랄두의 표정이 썩어들어갔기에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들 깨소금 맛이라며 몰래 키득거렸다.

반면 베니엘은 드랄두의 안색이 굳든 말든 식당의 문 쪽을 계속 힐끔거리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때 마침 베니엘에게 호응이라도 하듯 문이 벌컥 열렸다.

쾅!

그 요란한 소리에 시끄럽던 회식장이 음소거를 한 것처럼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베니엘은 곧 표정이 환해졌다.

막내 고모 리리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오연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든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가죽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 여기저기에 수많은 주머니와 리본이 달린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사슬로 묶인 마법서가 허리춤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막내 고모 리리나는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마도 제일 초절정 미소녀'로, 과연 그 말에 어울리게 대단히 빼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엄연히 성년이지만 마법 실험의 부작용에 의해 소녀로만 보이는 그녀는 일반적인 다크 엘프에게선 볼 수 없는 화려한 금발을 흩날렸다.

그 매력적인 모습에 병사 일부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 홀린 듯 바라봤다.

재밌게도 그들 대부분은 신병이었다. 생체 실험에 열광하는 리리나의 악명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미래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반면 그녀에 대해 익히 듣거나 겪어본 고참병들은 먹던 걸 뿜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멍청아! 눈 마주치지 마. 경을 친다."

"네…?"

"지난번에 잡혀간 녀석 소식 들었어? 잘린 팔을 고쳐주겠다고 데려가더니 뇌를 뽑아서 골렘에게 박아 버렸다잖냐."

"히이익!"

"쉿! 저 마녀의 흥미를 끌면 장난감으로 전락한다!"

리리나의 외모에 홀렸던 신병들은 고참들의 경고에 식겁해서는 서둘러 머리를 수그렸다.

그녀의 출현에 놀라고 당황한 건 요새 사령관 드랄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저 걸어 다니는 재앙이 대체 여길 왜!'

드랄두는 긴장감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설마 뭔가 냄새를 맡고 온 것인가?

하도 해먹은 게 많아서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그는 애써 여유를 되찾았다.

'의연하게 나가자. 창고도 거의 다 채워놨으니 문제 될 건 없어.'

게다가 리리나는 마법 실험에 골몰해 가문의 일에 신경 쓰는 자가 아니었다.

'그래, 뭔가 마법에 관한 용건이겠지.'

과연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드랄두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어서 그렇지.

뚜벅뚜벅 걸어온 리리나는 요새 사령관 드랄두를 보고는 대뜸 내뱉었다.

"마스터급 검객의 실험체가 있다고 했는데, 혹시 너야?"

듣자마자 드랄두는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뭐? 천신만고 끝에 마스터가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뭐라고? 내가 실험체?'

드랄두는 애써 웃어 보였다.

"수석 마법사님. 재밌는 농담이시군요. 하하하...."

리리나의 직책은 남작령의 '수석 마법사'다. 하지만 남작의 여동생들이 그렇듯, 가문의 일과 영지의 일에 관해 광범위한 재량권을 갖고 있었다.

검술 외에는 관심이 없는 남작이 자기 여동생들에게 일처리를 떠넘겨 버린 것이다.

리리나는 드랄두를 무시하고 근처에 있는 베니엘을 노려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돌대가리 조카야? 지금 상황을 설명해 보렴. 널 위해 하는 말인데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쳐다보는 눈빛에 벌써 짜증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저 성격 고약한 마법사의 분노는 누구라도 몸을 떨 만한 일이었지만 베니엘은 여유로웠다.

그는 태연한 태도로 옆을 가리켰다.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고모. 사령관 드랄두가 비리 혐의로 자리를 잃어버릴 예정이거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드랄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니, 이게 무슨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베니엘이 남작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쌍욕과 함께 물건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리리나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믿을 수가 없네! 지금 우리 돌대가리 조카가 날 이용해먹은 거야? 하아?"

리리나는 마법사인 만큼 똑똑했다. 그렇기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순식간에 파악했다.

분명 요새 사령관의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안의 어른인 자신을 부른 것이리라.

그냥 불러선 안 올 게 뻔하니 실험체 운운한 거고. 이런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핫! 지난번에 만든 좀비가 갑자기 나한테 청혼하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네! 내가 돌대가리한테 낚이다니!"

"고모를 감탄하게 할 수 있어서 영광이군요."

베니엘의 말에 실소를 흘리던 리리나를 삽시간에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요새 사령관을 경질하는 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벌써부터 장부 더미를 뒤엎을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고! 난 낄 생각 없으니 알아서 해.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하란 거야. 이 작고 교활한 악마야!"

날이 바짝 선 리리나의 태도에도 베니엘은 유들유들했다.

"어찌 이게 제 문제만이겠습니까? 가문의 문제지요. 설마, 고모. 여기까지 와서 모른 척하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베니엘의 지적에 리리나는 바로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아 젠장."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귀 막고 모른 척했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와서 의혹에 대해 눈을 감는다?

남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격분할 게 틀림없다. 비록 남작이 자기 여동생들에게 유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지만, 진짜로 화가 나면 세 자매 모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리리나라도 그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리리나를 분노를 터뜨리며 일갈했다.

"좋아! 대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이번 일에 아무런 수확이 없다면 날 속인 대가까지 치르게 해주지. 마침 성가신 둘째 언니도 없으니 우리 둘이 아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네. 호호호."

자신의 일인데 소외돼있는 드랄두가 나섰다.

"아니, 두 분.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제가 따라갈 수 없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베니엘도 그를 무시했다. 대신 회식장 가운데,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자리로 가서 섰다.

"검은 요새의 전사들이여! 여기 나르다리온의 아들 베니엘이 모두에게 드랄두의 추악한 범죄를 고발하고자 한다! 우리 요새의 썩은 고름과도 같은 저자의 행실을 낱낱이 밝히겠다는 것이다!"

요새의 병력들은 이미 흥미가 폭발한 상태.

그냥 밥이나 먹으러 왔는데 이런 개꿀잼 이벤트가 펼쳐질 줄이야.

분명 이번 사건의 여파로 누군가는 나락으로 떨어질 터였다.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을 위험만 없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재밌는 일은 없었다.

병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베니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다만 한 사람은 발끈했다.

"도련님! 정신이 나가셨습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여태 저 망나니에게 기름칠하고 알랑방귀 뀐 게 얼마인가?

한데 갑자기 뒤통수를 쳐? 아무리 망나니라지만 이렇게 경우 없는 일이 다 있다니, 드랄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항의는 바로 제지를 받았다.

쿠웅―!

자리를 잡고 앉은 리리나가 마법 지팡이로 바닥을 찍은 것이다.

"사령관은 조용히 해."

"아니, 수석 마법사님!"

"조용히 하라고 했어? 사령관. 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잖아!"

리리나는 눈을 부라렸다.

"나는 지금 가문의 책임자 중 하나로서 고발을 접수한 거라고. 그러니 고발인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어. 네놈이 그걸 방해하겠다는 거야?"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리리나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서열 4위다. 동시에 집안의 어르신 중 하나기도 했다.

사실 나이만 따지고 보면 베니엘의 누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엄연히 항렬상 어른이 맞았다.

게다가 드랄두는 리리나에게 힘으로도 안 됐다. 리리나는 7레벨 주문 사용자다. 지하 세계에서 7레벨 주문 사용자부터 대마법사로 분류하는 강자기에, 반푼이 마스터로선 당해낼 수 없는 상대다.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나이트쉐이드 놈들!'

드랄두는 자신의 경지로도 끽소리 못 하는 처지가 한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은 조그마한 주제에 이상할 정도로 강자가 바글바글거렸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런 집안인지라 신흥 귀족의 반열에 오른 건지도 모른다.

항명은 불가능했다.

위세 좋은 마스터급 검객께선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리리나가 한 가지를 약속했다.

"대신 이번 일이 무고라면 저 돌대가리 놈의 인생에 비명과 고통만 가득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할게."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드랄두는 내키지 않았지만 상황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겠습니다."

"흥,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리리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베니엘. 이렇게까지 판을 벌여서 뭘 하고 싶은 건지 어디 한번 떠들어 보라고."

"감사합니다. 고모."

베니엘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허리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바로 증인을 부르겠다고 했다.

"첫 번째 증인은 드랄두의 애인이자 그의 횡령을 곁에서 지켜본 실라입니다."

이미 베니엘에게 매수된 실라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사령관의 애인이 배신한 건가?"

"이거, 이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설마 이거 치정 싸움인 건가?"

"어?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저 망나니가 비리 척결 같은 걸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 사령관을 묻어버리고 애인을 완전히 차지하겠다는 거지."

앞으로 나선 실라는 자기가 알고 있는 건 말했다. 그녀는 드랄두가 어떤 수법으로 요새의 자금을 빼돌리고 자신의 금고를 채웠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이상입니다. 제 증언으로 이 타락한 사령관이 죗값을 치를 수 있길 바랍니다."

이에 드랄두는 격분했다.

"이 빌어먹을 창녀가! 그간 네년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밤마다 사랑한다고 속삭여 놓고 이런 짓을 해!"

드랄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 재판의 판관 역할을 맡고 있는 리리나는 깔깔 웃어댔다.

"세상에! 사랑이라니! 꺄하하핫! 역시 그딴 건 술에 탄 독을 마시는 것과 같다니까."

그건 지저의 격언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결국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었다.

"실라만이 아닙니다. 제 이야기를 증명해줄 자가 더 있습니다."

베니엘은 새로운 증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던 늙은 미노타우르스 보급담당관 구른크가 불려왔다.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구른크는 드랄두를 향해 맹비난을 쏟아부었다.

"드랄두! 결국 정의가 널 찾아올 날이 오고 말았다! 네놈은 이 늙은이를 사슬로 휘감으면 진실을 감출 수 있다고 믿었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왜냐하면 구른크는 평소에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 사령관이 끝장나겠는데?"

"내기할까? 나가리에 걸래? 아니면 자리를 지킨다에 걸래?"

다크 엘프 병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들의 사령관을 비웃어댔다.

그 비열한 입꼬리에서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금세 후벼 파려는 다크 엘프 특유의 성미가 잘 보였다.

드랄두는 이런 분위기를 민감하게 느끼곤 벌떡 일어나 자신을 변호했다.

"이것은 전부 모함이다! 저들의 이야기로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이야. 어디에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가? 모두 일방적인 진술에 불과하다."

실제로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비밀 장부 같은 구체적인 물증은 없었다.

드랄두는 그 점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이것은 단순한 모의만으로 나 같이 자기 직책에 충실한 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 비열한 수작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의 결백함과 무결함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바이다!"

듣는 이들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드랄두의 말대로 될 확률이 높았다.

어느새 내기도 드랄두가 자기 자리를 지킨다에 거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사령관 명줄이 드래곤 심줄처럼 질기구만."

"역시 난 양반이야."

"아까 건 거 취소되나?"

"어림없지. 노름패와 내기는 되돌릴 수 없다고."

조소를 머금던 병사 일부는 다시 충성심 넘치는 표정으로 자기 사령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크 엘프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빠른 태도 변화는 필수였다.

이에 리리나가 베니엘에 물었다.

"구체적인 물증이나 추가 증인이 있어?"

베니엘은 바로 답했다.

"없습니다. 고모."

리리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면 너는 내 실험실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를 운명이겠네? 하핫! 마침내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 돌대가리 안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열어볼 날 말이야. 난 항상 궁금했다고. 무엇이 널 그렇게 충동적이고 멍청하게 만드는지 말이지."

"고모, 증인들의 말은 틀림없습니다. 자세한 조사를 해보면 사실임이 증명될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요새의 장부를 모조리 꺼내놓고 검토하면 반드시 구린 구석이 나오기 시작할 터였다.

하지만 리리나는 딱 선을 그었다.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리리나는 이미 자신이 충분한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복잡한 일을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해줬으면 충분하다.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건 다 멍청한 조카의 잘못이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충실한 봉사를 해온 요새 사령관을 신뢰해. 그러니 그의 마음을 어지럽혀 가며 요새를 뒤집어엎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귀찮아서 안 하겠다는 소리였다.

듣고 있던 드랄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수석 마법사님!"

하지만 리리나는 이미 드랄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내 실험을 방해한 사랑스러운 조카와 함께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고 싶은 기분인걸? 아마 실험실에서 네 비명이 노랫소리처럼 울리겠지."

"고모."

"조카야. 너는 운이 좋은 거란다. 사람들은 너 같은 돌대가리를 고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이거든? 한데 이 고모가 공짜로 해결해주겠다는 거야. 그 과정에서 네 눈물이 좀 많이 흐르겠지만, 결과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지. 마스터급 육체를 얻지 못한 건 아쉽지만 너로 만족해야겠구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요새의 병사들조차 망나니 베니엘에게 일순간 동정심이 피어날 정도였다.

"이런, 망나니 놈 끝장났군."

"저 여자의 실험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의 반절이 키메라로 변하는 건 예사라고."

"다음에 망나니를 만나면 머리가 두 개에 팔이 네 개쯤 될걸?"

쏟아지는 우려에도 정작 베니엘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태연히 말했다.

"아직 다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모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19화

요새 사령관(2)

리리나는 탄식했다.

"성미가 포악하고 급한 데다가, 이제는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거니? 아아, 사랑하는 조카야. 네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정말 궁금하구나."

말투에 경멸이 잔뜩 묻어났다.

막내 고모 리리나가 베니엘에게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감정적으론 멸시에 가까웠다.

중립적이라는 건, 실험을 빌미로 이상한 약을 먹이는 것 외에는 따로 괴롭히거나 큰고모처럼 음습한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는 소리다.

단순히 감정만 놓고 보면 베니엘을 구제불능 쓰레기로 여겼다. 볼 때마다 항시 돌대가리라고 하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베니엘은 이런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말로 설득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럴 때는 말보다 행동이지.'

아무래도 마나 하트 안으로 잘 갈무리해 둔 마신의 마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베니엘은 주저 없이 그 힘을 개방했다.

그우우우웅―!

일순간 베니엘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그 힘은 잠시나마 일대의 공간을 일그러뜨린 채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베니엘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컥!"

"크윽!"

병사들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두려움과 충격에 일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들은 숨이 턱 막히는 무형의 기운을 느꼈다. 일부는 어질어질한 듯 휘청였고 결국 풀썩 쓰러지는 자들까지 나왔다.

가장 단련된 고참병들조차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지금 이건…?"

"맞아. 틀림없어."

분명 이건 마스터급 검객의 힘이었다. 모두 경악했다.

"도련님이 마스터였다고?"

"그럴리가!"

"틀림없어. 도련님을 중심으로 힘이 뻗어 나왔다. 둔감해서 느끼지 못한 건가!"

"아니, 이게 대체!"

놀라긴 요새 사령관 드랄두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그가 알기로 저 망나니는 분명 마스터에 못 미치는 프로보스트였다. 한데 이 힘은 뭐란 말인가?

드랄두는 자신의 경지 때문에 베니엘이 일으킨 힘을 훨씬 정확하고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느끼기에 그 힘은 마치 높은 둑이 무너지며 엄청난 양의 강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저 망나니가 마스터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드랄두는 현실을 부정했다.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가장 놀란 건 드랄두가 아니었다.

리리나는 얼이 빠진 채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마력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이건…, 이건…? 이건…!"

그녀는 실성한 것처럼 그 마력의 잔향을 어떻게든 느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리리나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고, 방금 자신이 느낀 것에 경탄했다.

"이토록 순수한 마력이라니!"

방금 감지했던 마력은 평생 마도의 길을 추구했던 리리나조차 닿지 못했던 완벽하고 수준 높은 마력이었다.

아니,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토록 깨끗한 마력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대체 이 힘은 뭐지?"

리리나는 마신의 마력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지하 세계는 오래전부터 신들이 떠난 세계다. 그러니 마신의 마력에 대해 경험하거나 들어볼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리리나는 참지 못하고 베니엘에게 달려가 두 손으로 매달렸다.

"지, 지금! 그 힘은 네가 일으킨 게 맞아? 정말이야?"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모."

그러자 여태 경멸로 가득 차 있던 리리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베니엘을 향해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지었다.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돌 속에 있는 법이지. 너 같은 돌대가리 안에 이런 마력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여태 리리나는 베니엘을 가문의 수치로만 여겨왔다. 이상할 정도로 빼어난 인물이 넘쳐나는 나이트쉐이드 혈족 중에서 태어난 보기 싫은 오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얘기였다.

역시 조카는 나이트쉐이드가 맞았다! 이런 보석을 몸 안에 품고 있을 줄이야.

흥분한 리리나는 베니엘의 옷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감동적이야! 조카야! 너는 내 평생 봤던 그 어떤 실험체보다 더 큰 놀라움을 품고 있다고!"

흥분이 지나쳤을까?

이 미친 여자는 이제는 감격에 겨워 울기 시작했다.

"끄어엉! 끄윽! 삶은… 기적과도 같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걸 눈앞에서 보게 되니까!"

급기야 리리나는 베니엘에게 매달리듯 그를 껴안고는 뽀뽀를 퍼부어댔다.

"이런 뒤틀리고 변변찮은 그릇에 그토록 황홀한 마력이 담겨 있을 줄이야! 이 세상은 정말 좆같은 유머 감각으로 가득한 거 같아!"

"...."

"너는 오늘부터 내가 가장 아끼는 가족이야. 조카야."

리리나는 홍조가 가득한 흥분한 얼굴로 바짝 붙어왔다. 그녀의 숨결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사랑해. 미친 듯이 사랑해! 내 조카야. 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해부하고 싶을 정도로!"

베니엘은 공포를 느꼈다.

저 끈적끈적한 감정이 가족애와는 한참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더없이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니까.

마신의 마력에 리리나의 태도가 극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사람 취급 안 해주는 건 여전했다.

베니엘은 일단 리리나를 밀어냈다.

"그렇게 절 사랑하신다면 요새 사령관 건을 해결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 말에 리리나는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 이런!"

그녀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자기 감정에 괴로워하며 답했다.

"미, 미안해. 조카야. 하지만 그건 어려워."

"왜죠?"

"이미 나는 요새 사령관 드랄두를 신뢰하기 때문에 네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그를 더 조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어."

"그래서요?"

되묻는 베니엘의 태도에 리리나는 시무룩한 표정이 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뾰족한 귀도 눈에 띄게 아래로 처진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문과도 같아서 반드시 지켜져야 해. 괴롭지만… 나는 그걸 지킬 거란다. 미안...."

사실 베니엘은 이미 그녀가 그렇게 답할 걸 알고 있었다. 게임 지식 덕에 리리나에 관한 여러 설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기가 공언한 것에 구속되는 건 그녀의 마법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리리나를 압박하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이었다.

"하! 제 기대를 저버리시는군요."

"조카야!"

"조카라고도 부르지 마십시오. 조카 사랑이 참 변변치 않은데 말입니다. 쯧!"

매몰찬 태도가 이 정신이 불안정한 여자의 마음을 단번에 쥐고 흔들었다.

리리나는 갑자기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난 널 사랑해! 제발 내게 그런 차가운 시선을 보내지마!"

금발의 미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조카에게 매달렸다.

갑자기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졌다. 이런 완벽하고 정결한 마력의 소유자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대신 다른 걸 해줄게! 뭘 해줄까! 내게 부탁만 해!"

그 말에 베니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원하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였다.

그는 매달려오는 리리나를 달래며 부탁했다.

"이럴 때는 지하 세계의 전통적인 해결 방법이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고모."

"응? 그게 뭔데?"

"바로 재판 결투입니다. 승자가 자기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요."

재판 결투는 쉽게 말해 이기는 사람 말이 맞는다는 아주 편의주의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유용했고, 이것밖에 방법이 없을 때가 많았다.

양쪽 주장이 다 설득력이 있어서 어떻게 판결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냥 둘이 싸워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뭐, 재판 결투? 너 제정신이니? 상대는 마스터야. 넌 마력이 대단하긴 해도 진짜 마스터는 아니잖아?"

참으로 탁월한 안목이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드랄두까지 베니엘이 마스터에 올랐다고 여겼다.

한데 전혀 분야가 다른 마법사임에도 그녀는 베니엘의 경지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아마 이것은 코찔찔이 시절부터 남작의 경지를 봐왔기 때문인 듯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결투를 주관해 주시면 고모는 이득만 볼 수 있을 겁니다."

베니엘은 누가 이기든 마스터급 실험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패자는 어차피 리리나의 손아귀에 떨어질 테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리리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조카를 바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투에 지는 건 신경 쓰지 마! 고모가 평생 돌봐줄게. 하아악! 하악! 어차피 너 같은 건 가문에 없어도 된단다!"

이런 모습을 보자니 새삼 둘째 고모 아니엘이 그리웠다. 막내 고모에 비하면 아니엘은 선녀였으니까.

"그러면 제가 이기면 드랄두를 처리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할게."

"드랄두의 비리에는 다른 요새의 사령관들까지 얽혀 있습니다. 꽤나 복잡할 겁니다만."

평소에 리리나라면 절대 수락하지 않을 조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의욕이 넘쳐났다.

"상관없어! 절대로 할 테니까! 드랄두부터 다른 요새까지 다 뒤집어엎어 줄게. 물론 그렇다고 꼭 이길 필요는 없어!"

결국 리리나는 참지 못하고 주변에 소리쳤다.

"사안을 판단하기 위해 둘의 재판 결투를 진행하겠다!"

반론은 없었다.

누가 미치광이 7레벨 주문 사용자와 맞서고 싶겠는가?

바로 재판 결투의 준비에 들어갔다.

***

회식장에 늘어서 있던 기다란 탁자가 모조리 치워지고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요새의 병력들은 그 가운데 마주 보고 선 두 명의 사내, 베니엘과 드랄두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크 엘프와 고용된 용병들로 구성된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스터급 검객 간의 대결인 건가?"

"이런 귀한 걸 구경할 수 있다니! 이것만으로 요새에 들어온 가치는 차고 넘친다."

"굉장한 싸움이 될 거야."

주변의 기대와 다르게 사실 둘의 싸움은 진정한 검술 마스터 간의 대결은 아니었다.

드랄두는 반푼이 마스터다.

마스터급 검객 특유의 '의지'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니엘의 경우는 마력량만 마스터로 실제 경지는 여전히 프로보스트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게 굉장한 싸움이 될 거란 점은 변함없었다.

뭔가 하자가 좀 있었지만 둘의 경지는 지하 세계에서도 강자로 행세하기 충분했으니까.

고로 이런 싸움은 쉽사리 볼 수 없는 것이고,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 돈을 내고라도 봐야 하는 종류였다.

당연히 요새의 전사들은 가슴이 두근반세근반 뛰어댔다.

베니엘과 드랄두는 각자 롱소드를 뽑아 든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도련님과 결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련했던 게 벌써 십 년 전인가요?"

드랄두는 이를 갈며 물었다. 그의 눈길에는 분노가 넘쳐났다. 그간 온갖 비위를 맞췄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 그쯤 됐지."

반면 베니엘은 담담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가 다른 방법이 아니라, 이 사태를 굳이 재판 결투로 끌고 온 건 이유가 있었다.

'이게 가장 큰 이득을 보는 방법이니까.'

먼저 마스터급 검객과의 전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선사해줄 터였다.

현재 베니엘은 반쪽짜리 마나 하트를 치유하고 검객으로서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는 마스터급 경지로 올라갈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중이다. 드랄두의와 싸움이 그걸 제공할 터였다.

드랄두가 비리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어서 별 볼 일 없는 자로 보이기도 하나, 실제로는 한 요새를 책임지고 있는 강자였다.

지금이야 알랑방귀를 뀌고 있지만 가면을 벗고 진심을 드러내면 늑대처럼 흉악한 성품의 소유자가 드랄두다.

오죽하면 스토리 진행에 따라 베니엘을 암살해 버리는 루트도 있을 정도였다.

'재판 결투의 장점은 그런 난적을 상대로 목숨을 잃을 위험도 적다는 거지.'

누가 잘못했는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싸우니만큼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면 보통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다.

물론 항복하면 엄청난 불명예였지만, 이미 그 평판이 바닥을 지나 지하실에 도달해 있는 베니엘에겐 별문제도 아니었다.

보신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베니엘에겐 이건 최고의 기회였다.

'이 몸은 검의 천재다. 분명 이 싸움으로 깨달음이 있을 터.'

두 번째 이유로는 지금 드랄두가 들고 있는 프로스트바이트였다.

재판 결투에서 승리한 자는 패자의 무구를 소유할 수 있는 규칙이 있다.

하니 이건 프로스트바이트를 합법적으로 먹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만약 단순히 증거를 모아서 드랄두를 실각시키는 식으로 가면, 프로스트바이트의 소유권을 빼앗지 못하거나 검술 미치광이이자 도검 수집가인 나르다리온 남작이 가져가 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앞으로 사골로 우려내야 할 5등급 마법검을 눈앞에서 빼앗기는 대참사였다.

하지만 재판 결투로 얻게 되면 아무리 남작이라도 이 소유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도 프로스트바이트를 쓰게 되면 놈의 전투력이 급상승하는 만큼 주의해야겠지.'

마지막 이유로는, 망나니 베니엘의 평판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간 오리지널 베니엘이 벌여놓은 패악질이 하도 심해 뭘 하려고 해도 매번 제약이 따른다. 앞으로 그런 페널티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주변의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잃을 게 없는 망나니라서 편한 점도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결국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또한 이 명성작이 좋은 게 보급담당관 구른크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노타우르스 구른크는 타고난 성정이 전사 그 자체다.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선 직접 무용을 보여 악적을 처단하는 게 최고였다.

여기서 드랄두를 척결하고 요새의 질서를 바로 세운다면, 과거의 원한에도 불구하고 구른크는 베니엘을 다시 보게 된다.

'즉, 인재 등용 성공이란 거지.'

이후에는 어떻게든 구른크를 요새 사령관으로 꽂아 넣으면 베니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것이다.

베니엘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좋아. 사령관. 한 수 청하지. 하지만 십 년 전처럼은 안 될 거야."

20화

요새 사령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