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20화

요새 사령관(3)

***

재판 결투가 시작됐다.

처음에 둘은 간을 보는 듯한 싸움이 이어갔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이 곱지 못한 만큼 점점 그 기세가 격렬해졌다.

"저는 도무지 도련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애써 분기를 꾹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드랄두가 베니엘을 힐난했다.

카앙―!

검신이 서로 교차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드랄두가 든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 때문에 충돌의 순간 사방으로 눈송이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아직 그는 마법검의 힘을 제대로 일으키고 있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건 서늘한 냉기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다고?"

"그렇습니다."

베니엘은 검을 수직으로 휘둘렀고 드랄두는 검을 세워 그것을 막아냈다.

캉!

둘은 서로를 밀며 바짝 붙었다. 검이 머리 위에서 교차하고 둘의 팔꿈치가 붙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베니엘이 낮게 웃었다.

"크흐흐, 미안하군. 그냥 성공을 위해 발판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야. 이번에 자네가 그 발판이 된 거고."

그와 함께 베니엘은 왼쪽 사선으로 빠져나가며 롱소드의 뒷날로 드랄두의 뒤통수를 노렸다.

성공하면 단번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드랄두는 예상했다는 듯 자신의 오른쪽 어깨 뒤로 검을 들어 올려 막았다.

쿠앙!

바짝 붙었던 둘이 다시 떨어졌다. 잠깐 사이 벌어졌던 교과서적인 공방전에 병사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우어아아아!"

"수준이 높아! 정말!"

"둘 다 장난 아니군. 저렇게 깔끔한 검술이라니!"

아직까진 둘 다 기세를 최고로 끌어올린 게 아니었기에 지켜보는 병사들도 지금 벌어지는 공방의 묘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 환호성이 컸다. 뭐든 알면 더 재밌는 법이다.

"발판이라.... 하하하."

잠시 거리가 벌어지자 드랄두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웃어댔다.

"확실히 괜찮은 발판이긴 하겠군요."

그가 보기에도 지금 구도가 아주 좋았다. 여기서 승리한다면 베니엘은 부패한 요새 사령관을 척결한 영웅으로 추앙받을 터. 이미 지켜보는 자들은 베니엘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베니엘! 베니엘!"

"베니엘! 베니엘!"

드랄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기가 막히군.'

설마 망나니에게 이런 식으로 이용당할 줄이야? 원래는 그가 베니엘을 손에 쥐고 써먹으려 했었다. 어울리지 않는 호인 흉내는 다 그 때문이었다.

'잘 구슬리면 분명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안 본 사이에 마치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면, 여태 발톱을 숨기고 있었거나.

'역시 나이트쉐이드 놈들은 하나 같이 음흉하군!'

전초전은 이쯤이면 됐다. 드랄두는 본격적으로 힘을 쓰리고 했다.

화르르르륵!

드랄두의 검이 하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펜테즈멀 블레이드였다.

지켜보던 이들이 경탄을 터뜨렸다.

"도깨비불이다!"

"진짜로 하려는 거군!"

드랄두가 일으킨 불길은 환상적이었다. 프로스트바이트가 뿌리는 눈송이와 도깨비불의 하얀 불길이 어우러지며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현란했다.

이에 베니엘 역시 도깨비불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그 불길의 크기나 기운이 드랄두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에 지켜보는 자들은 확신했다.

"역시 도련님도 마스터에 올랐구나!"

"저건 틀림없는 마스터다!"

사실 넘치는 마력 덕에 할 수 있는 편법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마스터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드랄두는 쓰게 웃었다.

"참으로 교활하시군요. 마스터의 경지를 여태 숨기고 의뭉을 떨고 있었다니."

"지하에선 누구나 비밀을 갖고 있지. 안 그런가?"

제법이긴 하지만 드랄두는 승리를 자신했다. 이미 십 년 전에 베니엘을 상대로 여유롭게 승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베니엘은 열정에 사로잡힌 애송이였고, 드랄두는 그런 자를 쉽게 농락할 재주가 있었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경제적인 동작으로 베니엘을 상대했었다. 최적화된 경로로 방어를 하면서 틈을 발견하는 즉시 반격에 나서는 식이었다.

솔직히 그때 베니엘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드랄두의 굳건한 방어와 진중함에 완패하고 말았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다크 엘프에게 십 년은 긴 기간이 아니다.

인간은 십 년간 수련 후 변화를 큰 발전이라 칭할지 모르지만, 오래 사는 다크 엘프는 검술의 완성을 좀 더 길고 멀리 본다.

그렇기에 겨우 십 년의 발전 따위는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 여겼다.

"선수를 양보할 테니 어디 와 보십시오!"

"사양하지 않겠다!"

베니엘은 곧장 달려들었다.

카아앙! 우우웅!

이번에는 단순히 금속의 충돌음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력이 얽혀서 진동하는 묵직한 소음이 뒤따랐다.

"이전과 같을 거라 여기면 후회할 거다."

베니엘의 얘기는 단순히 허세가 아니었다.

몇 차례 검을 부딪쳐 보자 드랄두의 안색이 빠르게 굳어갔다.

'아니? 잠깐!'

베니엘의 검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처럼 극한으로 최적화된 형태로 조금의 낭비도 없는 검격이 이어진 것이다.

드랄두는 간담이 써늘해졌다.

'말도 안 돼. 고작 십 년 만에 날 따라잡았다고?'

그는 도저히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베니엘의 검술은 자신과 대등한 경지였다.

'이건 뭔가 속임수가 있어. 이럴 순 없어!'

왜냐하면 드랄두가 검을 잡은 지도 벌써 이백여 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천재로 불렸던 자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고련으로 지금의 경지에 올라섰다.

한데 불과 십 년 전에 가지고 놀던 애송이가 지금 자신과 같은 높이에 와 있었던 것이다.

드랄두는 소름이 쫙 돋았다.

'이런 재능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아무리 남작의 자식이라지만….'

놀란 건 드랄두만이 아니다. 지켜보는 자들의 환호성이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검술의 공방전이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외감마저 느껴지는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캉! 캉! 깡!

그들이 보기에 베니엘과 드랄두의 검술은 지극히 위험해 보였다.

지나친 최적화로 당연히 해야 할 동작조차 배제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서 잠깐만 실수해도, 조금만 운이 없어도 피가 튀며 목이 잘릴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저런 게 가능한가?"

"글쎄, 우리가 결코 발을 딛지 못한 경지겠지...."

그나마 스콜라 어댑트급에 다다른 실력자들만이 둘의 결투에서 약간의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뭔가 대단해 보인다 여길 뿐 저 싸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속도 자체가 눈으로 따라가기 버거워졌다.

다만 모두가 한 가지 감정을 공유했다.

"아름답군."

"그래, 아름답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베니엘과 드랄두의 공방은 누구에게나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극한으로 단련된 같은 검법이 일정한 리듬과 간격을 만들어내며 서로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드랄두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이트쉐이드 놈들! 크아아아아!'

사령관 드랄두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을 싫어했다. 그들 집안에 가득한 엄청난 재능이 스스로 천재성을 가졌다고 여기는 자신의 능력을 초라하게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봉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검술가로 그 명성을 떨친 나르다리온 남작의 검예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충성의 대가로 <옵시디언 오버츄어>란 검법을 받았다. 지금 망나니가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이 검법을 더 먼저, 더 오래 익혔단 말이다!'

한데도 지금은 그 수준이 같았다. 이런 상황은 오래간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열등감을 갖고 있던 드랄두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결국 그의 마음은 흐트러졌고 검로가 어지러워져 갔다. 급기야 드랄두는 공방에서 밀려 뒤로 후퇴까지 했다. 그것은 마스터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만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제 드랄두의 눈동자는 증오로 새빨갛게 타올랐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그의 가슴팍에 질식할 정도로 들어찼다.

결국 그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마나 하트를 박살 내야겠군.'

더는 승패 따윈 상관없었다. 드랄두는 그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저 재능의 싹을 영원히 잘라내고 싶었다.

"아무래도 도련님께선 제 모든 걸 끌어내실 생각인 것 같군요."

드랄두는 깊게 심호흡하며 하얗게 불타고 있는 검을 손으로 쓸었다.

"사람들은 저보고 반푼이 마스터라고 합니다. 제가 의지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함을 욕보이는 말이지요."

베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실은 때론 쓴 법이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쓴맛을 제거하기 위해선 매일 정진할 뿐이었습니다."

"호오, 성과가 있었나 보군?"

순간 베니엘의 눈빛이 반짝였다. 뉘앙스를 보니 의지의 힘을 일깨웠다는 것 같다. 분명히 위험한 상황이지만 베니엘은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다.

자신의 엄청난 재능이면 그 의지란 걸 목도한 뒤 훔치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으니까.

'여기서 반드시 단서를 잡는다!'

드랄두는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련님은 의지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니엘은 솔직히 답했다.

"모른다. 나 역시 아직 마스터가 아니기에."

드랄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에는 베니엘이 마스터인줄 알았지만 검을 계속 맞대본 결과 그 역시 자신처럼 반푼이인 걸 깨달은 것이다.

"의지란...."

드랄두의 검신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색깔의 빛이 깃들어갔다. 일순간 펜테즈멀 블레이드도, 프로스트바이트의 냉기도 사라졌다. 오직 드랄두를 닮은 듯한 짙은 자주색이 광채만이 빛났다.

"단어 그대로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니엘 역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마나 하트에 있는 마신의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즉, 의지란 마스터급부터 넘쳐나게 되는 마력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수단이란 것입니다. 마스터는 단순히 마나 하트에 저장된 마력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마력을 끌어당기니 이전과는 다른 고유의 수단이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베니엘은 알 듯 말 듯한 개념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마력을 더 효과적으로 조형해… 자기 뜻을 이루는 방법이란 건가?"

드랄두는 살짝 눈이 커졌다.

"맞습니다. 과연 도련님께선 일세의 천재십니다. 이 부족한 자는 최근에 그 깨달음을 얻고 간신히 의지를 흉내 낼 수 있게 됐지요. 완벽하지 않습니다만, 이제 도련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피로해 보이겠습니다."

드랄두는 검의 손잡이를 자신의 왼쪽 옆구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앞으로 나간 어깨를 조금 틀어 전체적으로 비스듬하게 섰다. 당장이라도 찌르기를 하며 튀어 나갈 듯한 형세였다.

"남작께서 제게 검술의 찌르기를 가르쳐 줄 때 양피지에 점을 찍는 것처럼 하라고 하셨지요. 정확하고, 의도적이며, 문장을 끝내는 듯한 결단력을 가진 것처럼 말입니다. 자, 받아보십시오."

그다음 순간 드랄두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가공할 속도의 찌르기가 베니엘을 향해서 쏘아져 왔다.

팟!

한데 특이하게도 실체를 가진 드랄두의 검은 베니엘에게 닿지 않고 허공을 찌르는 데 그쳤다.

그 대신 그 검 끝을 닮은 자주색 에너지체 세 개가 각각의 방향에서 베니엘을 찔러 들어왔다.

이 찌르기는 의지의 발동이었고, 특이하게도 상대의 몸에 물리적 상처를 내진 않는다. 대신 몸 안에 자리 잡은 마나 하트를 직접 파괴하는 효용을 갖고 있었다.

베니엘은 자신을 향해 오는 세 개의 찌르기를 보며 탄식했다.

'아! 이게 의지인가!'

각각의 공격에서 드랄두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악의와 분노, 질투였다.

일순간 그의 감정이 의인화되어 선명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드랄두는 악의에 가득 차서, 분노하고, 질투하며 검을 내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점을 찍듯 노리는 바는 명확했다.

'내 마나 하트를 박살 내려고 하는 거군!'

이제야 베니엘은 알게 됐다.

왜 드랄두가 굳이 공격 전에 자신의 깨달음을 공유했는지 말이다.

저 찌르기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검객으로서의 생명을 끝내주마. 너는 결코 이 경지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깨달음만 얻고 다다를 수 없다면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일 터.

드랄두는 베니엘이 마나 하트가 파괴된 후에 스스로 괴로워하며 죽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검객이 다른 검객에 심을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독약과도 같았다.

'지독한 놈.'

하지만 베니엘 역시 이미 힘을 끌어올리는 식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마신의 마력을 써 이전에 지하 신전에서 오크들을 향해 사용했던 기술을 발동했다.

당시 베니엘은 가공할 마력을 집중해 검신에서 흘러넘치게 했다. 그리고 그걸 마치 검기를 흉내 내 앞으로 뿌렸다.

조악하고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베니엘은 그걸 다시 썼다.

부우우우웅!

검을 휘두르자 검에 응집돼 있던 막대한 마력이 앞으로 뿌려졌다. 그것은 허공에서 마치 유체와 같이 뿌려져 넓게 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쏘아져 온 의지의 힘이 급조한 그 방어막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일순간 마력의 충돌로 눈앞에서 빛이 번쩍였다.

베니엘과 드랄두는 각자 힘의 반동에 의해 뒤로 길게 밀려났다. 그 강력한 힘의 충돌에 지켜보던 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후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을 봤을 때, 베니엘은 허리를 구부리고는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크윽! 끄우어억!"

시뻘건 피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반면 드랄두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드랄두의 승리로 보였다. 베니엘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꼴이었으니까.

"결국 사령관의 승리인가…?"

"도련님도 꽤 했는데 말이지."

"크흠…. 아깝게 됐군."

한데 어째서인지 승자인 드랄두는 안색이 창백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베니엘은 입꼬리를 올리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어댔다.

"크흐흐… 크크큭. 크흐흣!"

피를 토해내면서도 웃는 게 기괴해 보였다. 하얀 이빨까지 피로 물든 그는 희열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어댔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랄두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마나 하트가 깨지지 않았다고…?"

설마 자신의 공격이 실패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드랄두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의지의 힘은 두 번 사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구명절초 같은 것이었으니까.

"크하하하핫!"

물론 웃고 있는 베니엘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드랄두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마나 하트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그 후로 속이 진탕 됐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마나 하트가 깨지진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드랄두, 크크크… 실패했군?"

유체처럼 펼친 방어막이 제 역할을 해줬다.

넘치는 악의에도 불구하고 드랄두의 힘은 방어막을 관통하느라 약해졌다.

이후 마나 하트를 때리긴 했지만 위력이 모자랐다. 게다가 베니엘의 마나 하트는 마신의 마력이 깃들어 있어 예상보다 훨씬 단단했다. 금이 가긴 했어도 결국 버텨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베니엘은 정말 즐겁다는 듯 허리를 펴고는 입가를 닦았다.

"고맙군. 그게 의지인가? 어떻게 하는지 대강 알 것 같군."

베니엘은 검을 앞으로 내밀고 선언했다.

"이번에는 내가 흉내 내 볼 테니 한번 확인해 보게. 사령관."

21화

요새 사령관(4)

그 선언에 드랄두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무엇을 안다고!"

드랄두는 마스터의 전유물인 의지의 힘을 깨닫기 위해 그간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왔다.

주변에서 자신을 향해 반푼이 마스터라고 쑥덕대는 소리 역시 모르지 않았다. 겉으론 그런 평에 대해 허허롭게 넘겼지만 속으로 얼마나 분개했는지는 그 자신만이 정확히 안다.

그렇기에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

진정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결국 고진감래라, 그의 노고는 보답받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비슷하게 의지를 발동할 수 있게 된 것.

이제 진정한 마스터로 가는 길이 열린 셈이다.

한데 저 애송이 놈이 지금 뭐라고?

자신의 의지를 견뎌낸 거로도 모자라 이젠 흉내 내겠다는 같잖은 소리를 한다. 드랄두의 눈깔이 뒤집히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도련님의 아둔함에 말이 안 나오는군요!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십시오!"

허세가 분명했다.

한데 놀랍게도 정말로 베니엘의 기세가 달라졌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어설프지만 뭔가 실체를 갖춰가는 게 느껴졌다.

지켜보고 있던 드랄두는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된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자의 여유로 기다리는 대신 곧장 앞으로 돌격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그는 현란하게 검을 휘둘러 베니엘의 집중을 방해했다.

캉! 카앙!

드랄두는 초조함을 애써 억누르며 외쳤다.

"될 것 같습니까? 이런 압박 속에서!"

확실히 그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간신히 흉내 내던 의지가 드랄두의 방해 때문에 삽시간에 흩어져 버린 것이다.

베니엘이 실패한 걸 알아챈 드랄두는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결국 천재로 불리는 베니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전투 속에서 의지를 발동하려면 '결의'란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천단만련 끝에 겨우 얻을 수 있는 것. 도련님께선 절대 해낼 수 없습니다!"

자신만만한 외침에 베니엘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결의란 또 무엇인가?

베니엘은 드랄두의 검을 받아내며 고민했지만 당장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베니엘은 걱정하지 않았다.

'길이란 찾으면 있는 법이지.'

일전에 야만 오크와 싸울 때처럼 방법을 몰라도 자신만의 묘리로 흉내 내면 그만이다.

카앙!

검을 크게 휘둘러 드랄두를 밀어내면서 베니엘은 재빨리 사고했다.

'방해를 받으면서도 의지를 발동할 만한 방법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방해받는 것 이상으로 의지를 고조하면 되겠단 생각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하던 베니엘은 아까 드랄두가 해왔던 공격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맞아. 저놈은 악의, 분노, 질투라는 감정을 사용해 세 갈래의 공격을 했었지.'

하면 분명 감정이란 게 의지를 고조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일 터.

베니엘은 고뇌했다. 그렇다면 망나니에게 어울리는 감정이란 무엇인가?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것은 지위가 높고 방탕한 자에게선 뗄 수 없는 악덕인 '오만'이다.

베니엘은 탁월한 천재다. 그리고 귀한 혈통이다. 그렇기에 분노와 질투보단 거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는 게 더 어울렸다.

단서를 발견하자 베니엘의 의지는 빠르게 고양됐다.

"건방지군. 네놈의 방해는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만이라는 확고한 기준선이 생긴 탓에 막연히 의지를 고양할 때와는 다르게 훨씬 빠르고 강하게 실체화가 이뤄졌다.

베니엘은 막연히 하던 방금과 다르게 훨씬 구체적으로 다시 마력을 조형해 나가고 있었다.

드랄두는 당황했다.

지금 계속 방해를 하고 있음에도 더는 베니엘이 흔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건 결의의 단계를 건너뛰어 버린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한 건지 드랄두는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격노했다.

"그렇게 쉽게 된다고? 나는 그걸 위해 인생을 바쳐왔다. 그런데 감히…!"

그는 더는 공대 따윈 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생생한 감정이 그대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불공평하다! 불공평해! 재능의 차이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니!"

드랄두는 절대로 베니엘이 의지를 구현하는 순간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드랄두는 여태 자제하고 있던 프로스트바이트의 힘을 발동했다.

지이이이잉!

5등급 마법검이 사용자의 마력을 받아 강력한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법검이 사방을 얼려버릴 것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갑자기 일대에 겨울이 온 것만 같았다. 실제로 드랄두가 선 곳으로 중심으로 지면에 얼음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지켜보던 자들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사령관이 마법검을!"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거 아닌가, 저건!"

드랄두는 체면이 있어 마법검의 전력을 쓰지 않았다. 템빨로 이겼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 오로지 눈앞의, 이치에 어긋나는 존재를 처단할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 세상은 재능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무시하는 그런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드랄두는 검을 들어 올리며 돌격했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꺾겠다! 그리고 그 참을 수 없는 불합리함을 제거하겠다!"

드랄두는 모든 힘을 쥐어 짜냈다.

만약 베니엘이 의지의 힘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신처럼 세월과 고통이란 대가를 지불해야 맞았다.

오로지 재능의 힘으로 과수원에서 사과 하나를 따듯 간단하게 갖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건 불공평한 일이었다.

"크아아아압!"

프로스트바이트를 들고 돌격하는 드랄두를 중심으로 얼음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지금 저 일격에 당하면 단순히 '동상(Frostbite)'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대로 꽁꽁 얼어붙은 얼음덩어리가 될 것만 같았다.

베니엘은 인상을 구겼다.

'감정만으론 부족하다.'

상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쪽도 뭔가 의지를 더 강화할 수단이 필요했다.

찰나의 순간 고심하던 그에게 한 가지 장면이 번뜩 떠올랐다.

바로 그의 의붓누나인 아리아나가 처음으로 마법을 발동하던 기억이다.

아리아나는 대개 모든 마법사가 그렇듯 마법을 발동할 때 적합한 마법 시약을 사용했다.

'이 망할 놈의 시커먼 감정이 될 때가 있군.'

베니엘의 뇌리에 그날의 장면이 선명한 건 의붓누나를 향한 열등감 때문이다. 자신은 마법에 재능이 없었음에도 의붓누나가 성공했기에 또렷이 기억했던 거다.

아무튼, 그게 단서가 되어줬다.

마법사가 시약을 쓰는 것처럼 무언가 보조적인 도구가 필요했다. 베니엘은 금세 적당한 걸 깨달았다.

'오만의 감정을 강화할 실체적인 상징….'

그건 바로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베니엘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황금으로 만든 그것은 가문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베니엘에겐 가문이란 짜증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긍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베니엘은 그것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나이트쉐이드의 적자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베니엘의 의지가 발동되며 물리적인 실체를 완성시켰다.

그것은 오만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불타는 방어막이었다.

왜 오만은 화염의 형태로 화할까?

그것은 오만이 이성과 현명함을 태워버리는 불꽃과도 같기 때문이다. 오만이 지나친다면 결국 그 주인마저 집어삼키고 활활 타오르지만, 통제할 수 있다면 그건 가장 강력한 감정 가운데 하나였다.

화르르륵!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장벽이 형성됐고 그 위로 드랄두의 검격이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불길과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프로스트바이트가 쏟아내는 동결의 힘은 베니엘을 집어삼키려 했지만 방벽의 끓는 기운이 그것을 분해해나갔다.

얼음은 순식간에 증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렸다. 그 과정에서 심대한 에너지가 소모됐지만 베니엘의 마나 하트에 자리 잡은 마신의 마력이 그걸 감당했다.

하나 이미 금이 간 마나 하트라 과부하는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 같았다.

"윽…!"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베니엘은 꼴은 드랄두에 비하면 멀쩡한 편이었다. 드랄두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으니까.

의지의 방벽에 막힌 탓에 프로스트바이트의 힘 상당 부분이 튕겨 나왔고, 그는 그걸 그대로 뒤집어써 버렸다.

이후에는 방벽이 만든 열기까지 그를 덮쳤다. 얼음과 불길의 힘을 이중으로 노출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였다.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드랄두의 공격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드랄두는 혼자 데미지를 뒤집어쓰고는 거의 선 채로 죽은 거만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어느새 프로스트바이트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더는 검의 주인이 마력을 공급해주지 못했기에 프로스트바이트는 마치 평범한 철검처럼 보였다.

베니엘이 일으킨 장막도 기능을 다하고 사라진 상태.

승패가 완전히 갈렸다.

드랄두는 검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서서는 베니엘에게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 거지?"

드랄두가 보기에 베니엘은 불가사의였다.

자신은 의지의 힘을 갖기 위해 수없이 고뇌하며 실패를 반복했다. 그리고 간신히 비효율적인 방법이나마 그 말단에 접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데 베니엘은 격전이 벌어지는 짧은 사이의 견식과 고찰만으로 의지에 도달했다.

심지어 드랄두가 보기에 베니엘은 나름 대로의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질투와 전율을 넘어 순수한 의문이 피어오를 뿐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 거냔 말이다.... 제발… 오로지… 재능이 전부기에… 나는 할 수 없는… 것인가?"

이에 베니엘은 어찌 답할지 고민했다.

사실 본래 그라면 그냥 티배깅이나 날렸을 거다. 그게 망나니다운 대답이기도 하고.

하지만 마지막까지 절절했던 드랄두의 감정이 베니엘의 생각을 바꿨다.

숨결이 끊어지려 하는 드랄두의 눈동자에는 길을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베니엘은 진지하게 답하기로 했다.

"다시 깨어나면 너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어떻게 선택하냐에 따라 내가 대답을 줄 수도 있겠지."

드랄두는 뭐라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

쿵―!

드랄두가 땅바닥에 엎어지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 승리에 대해 환호성 같은 건 없었다. 지켜보던 자들은 전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눈앞에서 벌어진 전투에 압도당한 상태.

분노한 드랄두의 처절한 공격과 기어코 그걸 패퇴시킨 베니엘의 실력에 다들 말문이 막혀버렸다.

감상은 많았지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건 대체...?"

많은 게 담긴 질문이었다. 그 누군가가 입에 담은 말에 리리나가 답했다.

"뭐긴 뭐야? 마스터란 거지. 너희 칼쟁이 놈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경지 말이다."

그제야 병사들은 환상에 홀린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아...!"

누군가가 먼저 자신의 칼을 뽑아 베니엘에게 경의를 표했다.

검객 대 검객으로서 존숭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뒤로 여러 병사들이 그를 따라 자기 칼을 뽑아 경의를 표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으로 온 병사들이 원하는 바는 명확하다. 돈도 돈이지만 바로 가문의 검술을 배우길 원해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경탄할 만한 검술을 보여준 자에 대해 존경의 염을 품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이 승리로 답 없던 망나니를 보던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쓰레기 같은 귀족 자제가 아닌,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자를 향한 경의가 모두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베니엘은 이 상황에서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 나 베니엘은 사령관 드랄두의 비리를 입증했다. 이에 따라 그를 향한 적합한 징계를 가문에 요청하겠다."

반대는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엘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새로운 사령관이 올 때까지 보급담당관 구른크를 임시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임시라지만 베니엘은 어떻게든 수를 써 그가 정식 사령관이 되게 수작질을 벌일 생각이다. 앞으로 자기 사람이 될 인재를 재빨리 쑤셔 넣은 것이다.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있던 미노타우르스 구른크의 베니엘을 보는 눈빛 자체가 변했다. 뼛속까지 전사인 그의 호의를 얻은 것이다.

구른크가 그 명령에 답했다.

"부족한 자에게 힘겨운 의무지만 이 구른크, 기꺼이 도련님의 뜻을 따르겠소!"

말하는 걸 보니 앞으로 잘 얘기해서 충분히 휘하로 들일 수 있어 보였다. 베니엘은 뿌듯했다.

'좋아. 다 생각대로 됐군.'

망나니의 평판도 개선하고 구른크의 호의도 산 것이다.

다만, 구른크를 임시 사령관으로 한다는 조치는 명백한 월권이었다. 베니엘에겐 어떤 직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결정할 막내 고모 리리나는 고개만 열심히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태도로 베니엘에게 말했다.

"우리 조카, 하고 싶은 거 다 해!"

22화

네더 블레이드 (1)

다음날.

검은 요새의 분위기는 매우 부산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드랄두가 쓰러진 이후 리리나의 명령에 의해 그를 따르는 간부진이 대대적으로 체포됐기 때문이다.

각종 비리와 횡령에 관한 혐의였다.

"나는 모르오! 죄가 없소이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드랄두 놈이 싸그리 다 해먹었단 말입니다!"

끌려가는 간부들은 악을 써댔다. 왜냐하면 이젠 그들이 구른크가 갇혀 있었던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들 중 죄 없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혐의가 있으면 모조리 잡아 가두는 게 이 지하의 방식이었다.

운 좋으면 결백이 밝혀지리라.

다만 병사들의 제보가 잇따르는 걸 보니 쉽진 않아 보였다.

"저 급양담당관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 봤습니다. 저자가 부식을 졸첸의 상인들에게 팔아먹는걸요!"

"맞습니다. 쓰레기를 걷어가는 민간인들과 짜고 빼돌리는 수법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지위가 낮기 때문에 평소에 자기들은 뭔가 못 해 먹어서 배알이 꼴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오자 옳구나 하고 떠들어댔다.

그들도 나름 꿍꿍이가 있었다.

"간부들이 사라지면 새로운 자리가 많이 생기겠지?"

"자네나 나나 한번 노려볼 만해. 흐흐흐, 언제까지 병사에 만족할 텐가?"

보통 장교는 귀족이, 부사관은 능력이 있거나 경력이 긴 평민이 맡곤 한다.

하지만 나이트쉐이드는 신생 가문. 영지 내에 나이트쉐이드의 혈족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귀족이 없다.

그렇기에 장교 자리조차 평민 가병들에게 기회가 있었다.

이게 바로 신생 가문으로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이점 중 하나기도 했다.

당연히 끌려가는 간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놈들! 어제까지 굽실거리던 것들이 감히!"

"허언입니다! 저 간악한 놈들이 허언을 해 무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간부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병사들은 그 행보에 거침이 없었다.

병사들은 포박한 간부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죄인은 입을 다물라! 가문의 존장께서 와 계시는데 망발이 지나치군!"

"여기 증인이 이렇게 많건만 어찌 변명을 하려 합니까?"

평소에는 충성스럽게 따르다가 윗선이 약해지면 바로 배신하고 칼부터 들이미는 게 정말 다크 엘프의 전형이었다.

베니엘은 기존의 간부들을 일소하고 요새에 자기 세력을 심어 넣고 싶었기에 그 체포 작전을 열렬히 지휘했다.

"다 잡아 처넣어라. 나는 이제 그들의 자리를 새롭고 충성스러운 자들로 채우고자 한다."

이 노골적인 암시에 병사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그와 함께 상황은 점점 확대돼 갔다.

이번 일에는 검은 요새뿐 아니라 다른 요새까지 광범위하게 얽혀 있다는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리리나는 결국 남작성에 지원을 요청했다.

다만 나이트쉐이드의 혈족끼리 연락 가능한 마법 스크롤은 글자 수에 제한이 있었기에 그녀의 전언은 앞뒤 다 잘라먹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베니엘과 요새 사령관 드랄두의 재판 결투가 진행됨.

드랄두 패사(敗死).

드랄두의 주도로 인근 요새까지 얽힌 광범위한 비리 혐의 발견. 빠르게 조사관 파견 요망.

***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수장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은 여느 때처럼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그는 남작성에 면해 있는 호수의 마력과 자신의 마력의 동화를 진행 중이었다.

이것은 하이 마스터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검객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상승의 무학이다.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기에 남작은 한번 동화를 진행하면 좀처럼 멈추는 일이 없었다.

한데 남작은 드물게 바깥 소식으로 관심을 돌렸다.

'재판 결투?'

집중이 깨지자 호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언제나 자신의 수행을 제일 중시하는 남작이기에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 정도로 막냇동생 리리나가 전해온 소식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일단 그는 바로 측근 하나를 조사관으로 파견했다.

"너는 서둘러 요새로 가서 수석 마법사를 만나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남작님."

보낸 이는 믿을 만한 자였다. 하루 정도 지나면 분명히 전후사정을 파악해서 올 터.

이번 일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망나니 놈이 어떻게 드랄두를 이긴 거지?'

아무리 드랄두가 반푼이 마스터라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다. 프로보스트에 불과한 베니엘이 상대할 수는 없는 적일 터.

한데 전언에는 분명 드랄두가 패사했다고 한다.

'그 말인즉, 진심으로 붙었다는 건데….'

만약 드랄두가 살아 있었다는 남작은 이번 결투를 조작으로 여겼을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드랄두가 져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었다.

설마 망나니 놈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실력으로 드랄두를 무찔렀단 말인가?

그것은 어쩐지 가슴 뛰는 가정이었지만, 이내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베니엘의 마나 하트에는 결함이 있었으니까. 그 문제는 남작이 아는 어떤 지식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

'놈은 마스터에 오를 수 없다.'

그리 부정하면서도 남작의 가슴 속에선 묘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왜냐하면 세상에 절대란 없기 때문이다.

"흐음...."

애써 합리성을 견지하려 해도 남작의 상념은 자꾸 베니엘이 반쪽짜리 마나 하트를 극복한 쪽으로 흘러갔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면 어찌해야 할까?'

남작은 어쩌면 베니엘이란 패의 용도가 바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남작이 보낸 조사관이 검은 요새에 도착했다.

조사관은 바로 리리나를 만나 자세한 사정을 듣고는 서둘러 남작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이후 남작은 리리나를 도울 가병과 감사관, 행정관 등을 대대적으로 파견했다.

결국 검은 요새를 포함해 인근 요새들까지 다 뒤집기로 한 것이다.

그와 함께 베니엘에겐 이번에는 딴 길로 새지 말고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전달됐다.

베니엘은 별로 달갑진 않았다.

'남작 놈, 날 징계하려는 건 아니겠지?'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이내 베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좀 제멋대로 굴긴 했어도 공을 세운 건 사실이니까. 비리 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면 오히려 상을 줘야 맞았다.

아무튼, 갈 때 가더라도 베니엘은 여기서 일 처리를 다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시킨 대로 했어. 마음에 들어?"

막내 고모 리리나는 베니엘의 요청대로 이번 사건을 전부 떠맡아줬다.

원래라면 귀찮아서 어떻게든 빠져나갔을 테지만 갑자기 사랑스러워진 조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나선 것이다.

그녀는 베니엘을 보며 계속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대신 네 심장을 잠깐만 꺼내 보면 안 될까? 아마 몹시 아름답겠지? 꺼내서 뽀뽀만 한 뒤에 도로 넣어줄게. 그리 많이 아프진 않을 거야!"

"...."

베니엘은 상대적 선녀인 둘째 고모 아니엘이 더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뽀뽀란 것도 무슨 고약한 마법을 걸겠단 소리였으니까.

이번 일 때문에 베니엘을 보는 리리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물론 그래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건 여전했다.

베니엘을 보는 시선이 돌덩어리같이 쓸모없는 놈에서 진귀한 다이아몬드로 바뀐 것뿐이다.

그래도 나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사방이 바쁜지라 그건 좀 곤란하겠습니다. 고모. 저는 임시 사령관을 만나 일 처리를 논해야겠군요."

다행히 리리나는 빠져나가는 베니엘을 붙잡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드랄두의 시체에 관심이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스터급 검객의 몸을 이리저리 맘대로 만질 수 있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오늘 데이트는 이 가여운 사령관이랑 해야겠네!"

리리나의 메스가 사령관의 흉부를 경쾌하게 가르기 시작했다.

***

베니엘은 검법을 얻기 위해 창고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그전에 임시 요새 사령관 구른크을 보고 가기로 했다.

그는 새로 얻은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를 허리에 차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군영을 가로질렀다.

이젠 그를 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은근한 멸시와 경멸이 사라지고 베니엘을 보며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베니엘은 턱을 치켜든 채로 거들먹거리며 걸었다. 그 몸짓이 은근히 프로스트바이트를 자랑하는 것 같았다.

원래 이러면 거만하다고 욕을 먹었겠지만, 이제는 그런 베니엘의 행동이 합당해 보였다.

병사들은 오히려 그 당당한 태도에 존경심까지 느꼈다.

베니엘은 이런 변화를 알아챘다.

'역시 명성작을 하길 잘했어. 사람 평판이 이래서 중요하다니까.'

똑같이 행동해도 주변의 평가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구른크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라."

"네, 도련님."

구른크의 집무실 근처를 지키던 병사 하나가 쏜살같이 안으로 튀어갔다.

베니엘은 허가 따위는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막 서류 더미를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노타우르스 구른크와 마주하게 됐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고생이 많군. 구른크."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업무에 파묻혀 있었다. 노안 때문에 안경까지 쓴 구른크는 전임 사령관이 퍼질러 놓은 똥을 치우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도련님께서 맡겨 주셨으니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어느새 구른크의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베니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변한 것이다.

"좋아. 어디 상황 좀 축약해서 보고해 봐. 너무 머리 아픈 건 말고."

베니엘은 다리를 책상 위에 척 하니 올리며 말했다.

"이웃 영지에 자리 잡은 엠버폴 가문과 다크스파이어 가문의 거동이 나날이 수상해지고 있습니다. 몇 차례 요새병들과 충돌이 있었는데 전임 사령관이 그쪽에 뇌물을 주고 무마한 것 같습니다."

"흐음...."

"이 일대 남작 가문을 중재하고 관리해야 할 드란실 공작가가 최근에 힘을 못 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니 드란실 공작이 병환으로 쓰러졌다고 했지."

"네, 후계자인 아들놈은 개차반으로 유명합니다."

그리 말해며 구른크는 은근슬쩍 베니엘의 눈치를 봤다. 이쪽도 같은 이유로 이름 높았으니까.

베니엘은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이쪽 망나니가 그래도 저쪽 망나니보단 나을 테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도련님께선 드란실 공자와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면 다행이고. 그건 그렇고, 상황이 안 좋네?"

"네, 이럴 때일수록 요새를 다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실을 다지는 데 힘쓰고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구른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번 일에 대해 인정하긴 하지만 후계 구도를 지지하는 등의 일에 검은 요새가 나서진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듣기에 따라 섭섭한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구른크는 덧붙였다.

"드랄두가 부패한 사령관이긴 했어도 실력만큼은 진짜였습니다. 그 강력한 전사를 잃었으니 검은 요새는 더욱 위태롭게 됐습니다."

사실 구른크도 약하지 않다. 얼굴 가득 문신이 가득한 그는 미노타우르스 특유의 문신 주술을 쓰는 강력한 전사다.

검객으로 치면 프로보스트급 정도의 힘을 지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지금 같이 혼란한 때에는 드랄두에 비해 무게감이 부족한 게 사실이긴 했다.

지금 구른크의 얼굴에 보이는 초조함은 그런 사실에 기인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느긋하게 말했다.

"수성은 개인의 무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마스터라고 해도 공격이 집중되면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하지. 요새를 지키는 일은 군기를 바로잡고, 보급품과 장비를 충실히 갖추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나는 자네가 잘할 수 있어. 구른크."

설마 망나니 베니엘이 이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에 구른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원래 그가 아는 망나니라면 정치적인 일에선 발을 빼겠다는 선언에 격분해야 정상이니까. 자기가 한 일을 한껏 과시하며 대가를 치를 걸 종용할 터였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검은 요새는 드랄두가 사령관이던 시절보다 더 위태롭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태 구른크는 근심하고 있었는데 저리 말해준다니.

'도련님께선 진정 달라지셨구나! 죽음의 문턱으로 갔다 온 경험이 변화를 만든 것인가?'

구른크는 베니엘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사실 이건 의도된 발언이었다. 베니엘은 구른크가 검은 요새를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구른크. 검은 요새는 요새로만 계속 있으면 된다. 자네의 소임을 다하길 바라겠네. 그거면 충분해."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은 말이다. 베니엘은 언젠가는 구른크를 자기 휘하에 둘 생각이었다.

"도련님. 하신 말씀에 참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구른크는 감동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 군인다운 일만 하면 된다는 얘기였으니까.

사실 이 정도로도 베니엘에겐 큰 이득이었다.

스토리상 드랄두는 장차 큰고모 우시드라의 파벌이 되니까. 그렇게 되면 드랄두는 우시드라를 위해 요새병을 전투에 동원하기까지 한다.

한데 베니엘이 드랄두를 쓰러뜨리고 구른크를 임시 사령관을 앉혀서 그런 반란의 싹을 미리 자른 것이다.

'속이 다 시원하군. 이게 바로 미리 근심거리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묘책이다. 크흐흐.'

긴장 관계인 큰고모 우시드라의 중요한 패를 하나 미리 망쳤다는 것에 베니엘은 크게 만족했다.

"좋아. 그러면 계속 수고하라고."

구른크에게 더 큰 호의를 산다는 목표를 달성한 베니엘은 이제 요새의 창고로 향했다.

'이 요새에서 가장 중요한 수확을 얻을 때가 왔군.'

23화

네더 블레이드 (2)

***

베니엘은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사실 검은 요새로 온 건 나르다리온 남작의 이클립스 녹턴에 맞먹는 검법을 얻기 위해서니까.

창고에 도착하자, 문 앞에는 미리 불러놓은 올리비에와 그의 애견 로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혼자 창고를 뒤지긴 무리라 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들어가자."

창고 앞은 리리나의 명으로 병사 여럿이 지키고 있었지만 베니엘에겐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 사실 베니엘은 이번 사건과 관련된 창고 안에 멋대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지만 다크 엘프의 지휘 체계는 직책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과 권력을 기준으로 작동한다. 베니엘은 드랄두를 이길 정도로 강자고, 수석 마법사인 리리나의 총애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요새에선 뭐든 할 수 있단 소리.

여기서 고지식하게 그를 막아설 다크 엘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있다고 해도 목이 날아가는 방식으로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도태 될 터. 아직 삶에 미련이 많은 병사들은 예의 바르게 물러났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고맙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창고는 오래된 군사 시설이 다 그렇듯 퀴퀴한 냄새가 났다. 오래된 먼지 특유의 냄새라고 할까?

안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베니엘이 향한 곳은 각종 무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베니엘이 찾는 S등급 검법이 있었다.

"흠, 이쪽인가…?"

순조롭게 목적지로 나아가던 베니엘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무구를 보관하는 구역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폭발성 버섯이잖아?"

지하 세계에서 버섯은 어디에든 있다.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자란다.

저 앞쪽, 둘이 지나가야 할 복도에 폭발성 버섯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붉은빛을 내며,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심장처럼 맥동했다.

드랄두가 아주 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닌 셈이다.

"위험합니까?"

올리비에의 물음에 베니엘은 끄덕였다.

"위험하지. 약간의 충격만 일으켜도 크게 부풀어 오른 뒤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거든."

"아니, 왜 버섯이 터집니까?"

올리비에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바람이 좀처럼 없는 지하에서 포자를 멀리 퍼뜨리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 폭발력에 뒤지는 놈들이 많다는 거야. 음, 다행히 길이 있네. 못 지나갈 정도는 아니다."

베니엘은 먼저 앞으로 나섰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아. 살짝 닿는 정도는 문제없다."

그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손가락 끝으로 폭발성 버섯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버섯이 마치 말미잘처럼 움츠러들었다. 당장이라도 버섯이 터질 것처럼 붉은빛이 선명해졌다.

"으악!"

올리비에가 식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로나는 그런 주인을 고기 방패 삼아서 얼른 숨었다.

한데 그들이 더 경악할 일이 곧 벌어졌다. 갑자기 베니엘이 폭발성 버섯의 틈바구니로 자기 몸을 밀어넣은 것이다.

마치 자살 희망자처럼 보였다.

"베니엘 님!"

한데 베니엘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만, 잠깐이면 돼."

사실 베니엘이 버섯 틈바구니에 몸을 밀어 넣은 건, 빛이 밝아졌을 때 그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해서다.

다크 엘프는 암흑 시야가 있긴 해도 빛이 있으면 더 잘 본다. 애초에 그들의 기원이 지상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베니엘이 찾아낸 건 작은 버섯 인간의 시체였다. 크기는 겨우 30센티미터 정도 밖에 안 됐다.

"그건…? 인간을 닮은 버섯이군요?"

"그래, 지하에선 흔한 종족이지."

버섯 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인간형 버섯 생명체다. 머리 부분에는 삿갓 같은 버섯 머리가 있고, 그 아래로 지금은 감겨 있지만 눈구멍도 존재했다. 다만 코와 입은 따로 없었다.

다리는 짜리몽땅하며, 손은 그 끝이 나무뿌리 같아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작은 생명체는 죽은 상태. 썩은 내가 심하진 않았지만 축 늘어진 게 마치 쓰레기장에 버려진 냄새나고 더러운 인형 같았다. 아직 형태가 뭉개질 정도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흐물흐물해져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

올리비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거 같은데 왜?"

한데 베니엘이 뜻밖의 얘기를 했다.

"잘하면 살릴 수 있어."

"네, 정말입니까?"

"그래, 버섯의 삶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지. 작은 포자 하나로 부활하기도 하니까."

다만 이미 죽은 지 좀 지나서 확률이 그렇게 높진 않아 보이진 않았다.

베니엘이 이 작은 버섯 인간을 살리려는 건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 죽은 이 녀석이 버섯 인간 중 특별한 존재기 때문이다.

'황금 포자 씨족이군.'

황금 포자 씨족은 버섯 인간 중에서도 특별히 존귀한 이들이다. 지금은 죽어서 색이 바래져 있지만, 원래 이들 머리의 버섯 삿갓은 황금색 광채로 찬란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로 범상치 않은 부류인데 이런 창고에 왜 죽어 있는 건가 싶다.

'대체 뭐지?'

게임에선 이 시점에 창고에 진입할 수 있으니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들어오면 그때는 이 폭발성 버섯도 황금 포자 씨족의 시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베니엘은 현실이기에 가능한 새로운 사건과 마주친 것이다.

'살려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황금 포자 씨족은 지하 세계에선 드물게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이들. 해가 될 건 없어 보였다.

'아마 높은 확률로 보답을 받을 수 있겠지.'

마침 풍부한 지식 덕에 성으로 돌아가면 버섯 인간 살리기에도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베니엘은 사체를 가죽 포대에 따로 챙겼다.

***

검술서가 있는 창고의 쓰레기 더미에 도착했다.

안에는 퀴퀴한 가죽, 오래된 기름, 녹슨 금속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엔 부러지고 망가진 무기와 갑옷, 각종 장구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 곳이었으니까.

녹여서 쓰거나 고쳐서 쓸지도 모르지만 손이 많이 가 언제 그런 일이 이뤄질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들이라 한쪽에 쌓다 보니 이런 쓰레기 언덕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쌓아 올린 겁니까…?"

올리비에는 경탄하는 듯 앞의 쓰레기를 쳐다봤다.

베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검은 요새의 역사와 같겠지. 수백 년은 됐다는 거야. 이 요새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여기 자리 잡기 훨씬 전부터 있던 곳이야."

"애초에 베니엘 님의 가문은 맨땅을 일군 건 아니군요?"

"당연하지. 누가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해? 약해진 자의 땅을 빼앗으면 훨씬 편리한데. 아버지께선 그런 방식을 좋아하시지."

이 땅에 있던 전대 가문은 제국의 신흥 귀족인 나이트쉐이드에 의해서 멸족했다. 사실 그건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아… 그나저나 엄청난 혼란이군요. 여기 어딘가에 검술서가 있다는 겁니까?"

"그래. 그래서 로나의 도움이 필요해."

"아무리 로나가 냄새를 잘 맡는다고 해도 이렇게 어지러운 환경에선 무리일 겁니다."

"아니, 가능할 거야. 찾는 게 꽤 독특한 냄새가 나거든."

베니엘이 찾고자 하는 건 도마뱀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었다.

"푸른 턱수염 도마뱀이라고 지하에서 사는 커다란 덩치의 가축이지. 보통 사역용으로 쓰는데 가죽으로 갑옷도 만들어. 질겨서 도검을 잘 막거든."

"오, 그러고 보니 광산에서 푸른색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를 본 것 같습니다."

"맞아. 그거. 아무튼, 그 갑옷이 오래되면 꽤 고약한 냄새가 나. 마치 썩힌 물고기 같다고 할까? 아마 로나가 찾을 수 있을걸."

마침 근처에 샘플이 될 만한 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갑옷에서 찢겨 나온 가죽 찰편(札片)이었다.

로나는 그 찰편의 냄새를 맡더니 빠르게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커엉! 컹! 컹!"

녀석 덕에 작업이 수월해졌다. 거기에 더해 인간 기중기 같은 괴력의 올리비에 역시 큰 도움이 됐다.

로나가 방향을 특정하면 이후 올리비에가 일대를 헤집었다. 베니엘은 구경만 해도 됐다.

금세 성과가 나왔다.

"하나 찾았습니다. 이 갑옷입니까?"

그것은 오래된 탓에 푸른색을 넘어 거의 검게 보이는 가죽 찰갑이었다.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만 내가 찾는 물건은 아니야."

"알겠습니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한데 대체 왜 이런 창고에 베니엘 님이 찾으시는 검술서가 있는 겁니까? 그런 대단한 물건이 있기에는 영 아닌 장소인데…."

"아, 심심한데 얘기나 해줄까?"

베니엘이 찾는 검법은 남작의 라이벌이 각고의 노력으로 창작한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본가에 있을 때 앙숙이 하나 있었지. 가문 내에서 전사장 자리를 놓고 다투던 경쟁자라고 할까? 가문에서도 둘 중 누가 최고인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하더라."

"오, 그래서요?"

"하지만 경쟁자의 생각과 다르게 아버지는 그 대결 구도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야. 이후 가문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아버지는 탈주했지."

당시 세 여동생도 함께 따라왔다. 큰고모인 우시드라만 성인이었고, 나머지 둘은 꼬맹이였다고.

아무튼 그렇게 탈주한 오빠와 세 자매는 갖은 고난을 겪었고 마침내 나이트쉐이드 가문을 세웠다.

"이후 황제의 권위를 빌려서 본가와 화해를 하지. 본가의 대모(大母)는 별로 내키지 않아 했지만 황제의 중재를 무시할 수 없었거든. 물론 나이트쉐이드 가문으로 부터 상당한 금전을 챙기기도 했고. 그 때문에 가문 전체에 내렸던 추살령을 철회한 거지."

"아, 왠지 그다음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것 같습니다. 추살령의 철회에 남작의 경쟁자였단 분이 격노한 거 아닙니까?"

"오, 너 소설책 같은 거 좀 많이 읽었구나? 맞아."

경쟁자였던 인물의 이름은 '주르도'.

주르도에겐 나르다리온 남작과의 경쟁이 그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둘은 어릴 때부터 최고의 자리를 놓고 다퉈왔다. 그렇기에 주르도는 나르다리온을 쓰러뜨리고 가문의 정점에 서는 순간을 인생의 가장 신성한 목표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나르다리온은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여동생들을 데리고 탈주했다. 이에 남겨진 주르도는 격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탈주 후 추살령이 떨어졌을 때 주르도는 가장 열심히 싸웠지. 하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 해. 문제는 그러던 중 가문의 대모가 추살령을 철회한 거야."

"그럼 더 싸울 수 없습니까? 개인적으로도?"

"물론이지. 다크 엘프 가문은 대모란 존재가 이끈다. 우리 종족은 모계 사회라고. 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모두 순종해야 하지. 그 때문에 주르도는 더는 아버지와 싸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양반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설마…?"

"그래, 그 설마다. 그 양반도 가문을 탈주한 거야. 하하하."

오래된 창고 안에서 베니엘의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만이 울렸다.

"아니, 그렇게 가문을 벗어나기 쉬운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다크 엘프가 자기 가문을 벗어나긴 극히 어려워. 대모는 거대한 암거미라고 생각하면 돼. 그 거미는 가문의 구성원 모두를 거미줄로 묶어둔 것처럼 관리하지."

실제로 나르다리온 남작도 탈주의 죄로 노예로 팔려 가고, 여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일까지 겪었다. 그 외에도 죽을 위기를 수도 없이 넘겼다.

이후 제국에 공을 세워 황제의 권위와 막대한 뇌물을 대가로 간신히 그 문제를 봉합한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지상의 가문과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러겠지. 여기 사는 놈들은 다들 독종이니까. 아무튼, 이번에는 주르도에게 추살령이 떨어졌지. 대모는 격분했거든. 가문의 최고 검객이 둘이나 탈주했으니 자신의 지도력이 의심받는다고 느꼈을 테지. 실제로 당시 본가가 상당히 술렁였다고 해."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지만 주르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이미 그 양반은 뒤가 없었거든. 추살령이 떨어지든 말든 그냥 우리 아버지인 나르다리온 남작과 마지막 승부를 벌일 생각뿐이었다고."

이후 주르도는 남작령으로 찾아와 나르다리온 남작을 습격했다.

"그건 결투라기보단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다. 남작령의 곳곳에서 쫓고 쫓기며 이틀 밤낮을 겨뤘다더군. 쉬고 싸우고, 쉬고 싸우고, 반복이었다지."

"오...."

"한데 주르도 이 양반이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에 자기 죽음을 예감했던 거야."

주르도가 창안한 검법은 확실히 남작의 이클립스 녹턴의 카운터였다.

하지만 이미 남작은 주르도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있던 상태였고 그는 패배를 직감했다. 한 수 위의 남작과 이 정도로 다툴 수 있었던 것도 검법의 묘용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터다.

"주르도는 따라온 부하 중 하나에게 자기 비전을 담은 검술서를 맡겨서 떠나보내지. 죽더라도 자신의 기예가 담긴 검법만큼은 본가로 보내고 싶었던 거다. 그 기술이 언젠가 남작을 쓰러뜨리길 바라면서."

결국, 이어진 싸움에서 주르도는 남작에게 패해 죽었다.

주르도를 따라온 병사들은 흩어져 도망쳤지만, 하필 운 나쁘게도 검술서를 갖고 있던 녀석이 검은 요새의 순찰병들에게 잡혀 죽은 것.

"그때 검술서는 죽은 부하의 망가진 무구와 함께 여기 버려졌다. 우리는 그걸 찾고자 하는 거야."

"그토록 귀중한 검술서면 노획한 자가 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검술서는 가죽 갑옷의 안감 쪽에 숨겨져 있어서 찾지 못했을 거다. 설령 발견했다고 해도 무식한 놈들이 뭔지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처박았을걸? 글도 못 읽는 놈이 태반인데?"

"하긴…."

여기서 올리비에는 궁금증이 일었다.

"남작령의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모릅니까?"

"그렇지."

"한데 베니엘 님께선 어찌…?"

이에 베니엘은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입술에 대 보였다.

"쉿. 때론 그냥 묻어두는 게 좋은 부분이 있는 법이야."

"아, 네. 죄송합니다."

올리비에는 황급히 사과했다. 베니엘의 말대로였다. 공연히 풀을 헤쳐 뱀이 놀라게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참으로 신비한 인물이군.'

단순히 지저인이라서 신비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 터였다. 올리비에는 베니엘이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앞에 있는 존재가 위대해 보이는 느낌까지 들었다. 올리비에는 앞으로 베니엘에 관한 사안은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저런 존재를 거슬렀다가는 무슨 횡액을 당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때 로나가 다시 짖어댔다.

컹! 커어엉! 컹!

새로운 가죽 갑옷을 찾은 모양이다.

올리비에는 무구들을 잔뜩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아래서 볼품없이 망가진 가죽 갑옷을 찾아냈다.

"이건 어떻습니까?"

올리비에의 물음에 베니엘은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갑옷을 살펴보다 방긋 웃었다. 갑옷 위에는 녹슬고 망가졌지만 본가의 가병이 쓰는 배지가 붙어 있었다.

"찾았군."

베니엘은 가죽 갑옷의 안감을 더듬어봤다. 책이 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것은 방탄복에 넣는 방탄판처럼 가죽 갑옷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갑옷을 뒤집어 보자 이미 겉면과 다른 가죽으로 만든 안감이 찢어져 검술서가 드러나 있었다. 여기 쓰레기를 대강 처박은 병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듯했다.

지하에선 버섯나무로 만든 종이가 구하기 쉬워서 책도 쌌다. 하니 병사들에게 이딴 건 그냥 불쏘시개에 불과했을 터. 관심이 없는 게 당연했다.

"자, 보자고."

베니엘은 책을 꺼내서 펼쳐봤다.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찾던 물건이 확실했다.

S등급 검법.

네더 블레이드(Nether Blade)였다.

24화

네더 블레이드 (3)

물론 이 검술서에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일종의 암호화가 되어 있기에 바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베니엘이 이것이 목표한 검술서란 걸 알아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게임이랑 똑같군.'

책을 펼쳐보자 검법 대신 동굴 청어의 수확량과 구매 내역 등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뒤쪽에는 바닷물로 지하 세계판 수르스트뢰밍을 만드는 법까지 보였다.

일종의 위장이었다.

검술서에 걸린 마법을 풀어야 이것 대신 원래 내용이 드러나게 된다.

옆에 있던 올리비에는 본의 아니게 책 내용을 일부 보게 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정말 검술서가 맞습니까? 물고기 그림이 보이는데…?"

"암호화된 거라서 그래."

"아하."

한데 올리비에는 검술 같은 것보다 다른 게 더 궁금한 모양이다.

"지하에도 바다가 있습니까?"

베니엘은 탄식했다.

"하아! 이런 무식한 지상인, 표면 인류 같으니라고! 당연히 지하에도 바다가 있지! 너 지금 지하 세계 무시하냐?"

덩치답지 않게 소심한 올리비에는 쩔쩔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하의 바다는 그 크기는 지상보다 작다. 가장 큰 지하의 바다도 지상에서 볼 수 있는 내해 정도다. 지구로 치면 카스피해 같은 게 이 지하에 여러 개 있었다.

그 지하 바다는 지상의 바다로 연결돼 있는데, 수생 종족에겐 상당히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여기 위장된 내용에 하필 삭힌 청어가 나오는 건 주르도가 그 음식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야."

올리비에는 대번에 찡그렸다. 그건 지상에도 있는 음식이었으니까. 참고로 귀족가의 저택에서 그 삭힌 청어 요리를 개봉하는 건 불법이었다.

베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삭힌 청어를 먹고 입에서 날 냄새를 생각하면, 설령 그 주르도란 양반이 살아 있어도 별로 만나고 싶진 않단 말이지. 어쩌면 아버지가 주르도를 계속 피한 건 입 냄새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 암호화를 풀 방법이 필요했다.

솔직히 쉽진 않았다. 이 검술서에 걸린 주문은 예상외로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했을 터.

하지만 지금 베니엘에겐 최근 매우 큰 호의를 보이는 마법 열쇠 따개가 있었다.

***

"응? 뭐라고? 이 책에 걸린 마법을 풀어달라고?"

손에 기괴한 해체 도구를 들고, 얼굴이 피범벅이 된 막내 고모 리리나가 다소 짜증스러운 어투로 물어왔다.

아무리 베니엘을 향한 태도가 변했다지만, 그녀의 타고난 날카로운 성정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피나 오물이 튀어도 괜찮을 실험용 가운 비슷한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리리나는 자기 작업이 방해받아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너 말이야. 마법사가 작업할 때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알겠어? 만약 우리 조카가 아니었다면 바로 터뜨려버렸을 거라고. 펑! 하고 말이야. 부푼 개구리 새끼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지?"

"죄송합니다. 고모. 부탁 좀 드릴게요."

"끄응… 알겠어. 대체 이게 뭔데? 음? 청어 삭히는 법? 우웩―!"

리리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책을 집어 던졌다. 하마터면 귀중한 책이 벽난로 안으로 쏙 들어갈 뻔했기에 베니엘은 놀라서 공중에서 그걸 잡아챘다.

"청어에 관한 책이 아니라 검술서입니다. 마법을 풀면 원래 내용이 드러나는 식이죠."

리리나는 대번에 경멸하는 표정이 됐다.

"으윽, 그딴 무지렁이나 보는 책을.... 쯧!"

그녀는 검술 명가라 불릴 나이트쉐이드의 구성원이면서도 검을 다루는 기술을 멸시하는 걸로 유명했다.

술만 마시면 자기가 앞으로 나이트쉐이드 가문을 마법 명가로 바꿀 거라고 떠들어대는데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니까 해주는 거야. 그래도 다음부터 이딴 부탁하지 말라고."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라선 리리나인 만큼 검술서의 보안 마법을 푸는 데 얼마 걸리진 않을 터. 그래도 꽤나 강력한 주문이 걸린 듯 그녀는 애를 쓰며 끙끙댔다.

"아, 시발. 이게 왜 이리 안 풀려? 으으윽…. 아! 됐다!"

고생한 것 때문일까? 리리나의 주둥이가 댓자는 튀어나왔다.

"아니, 대체 왜 이딴 쓰레기 책에 이런 고급 마법을 거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역시 칼만 들면 사람이 다 이상해지는 것 같다니까. 오라버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

"됐어. 이걸로 네 심장을 들여다볼 날이 좀 더 빨리 오길 바랄게. 이 돌대가리야."

리리나는 베니엘의 순수한 마력을 봤던 감동이 그새 좀 줄어든 듯 말투나 태도가 평상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선뜻 도움을 주는 건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고모, 제가 머리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베니엘아."

"네?"

"사람은 무지할수록 행복하다고 하더라. 그런 면에 있어선 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 거다."

리리나는 화사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마 이 정도로 악의가 가득한 웃음도 드물 것 같았다.

"...."

아무래도 오리지널 베니엘이 만들어둔 돌대가리 이미지는 개선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것 같았다.

나름대로 머리 쓰는 데 자신이 있었던 신(新) 베니엘은 반드시 그녀의 평가를 뒤집겠다고 다짐했다.

"아무튼, 이제 볼일 다 봤으면 꺼지라고."

이미 인내심이 바닥인 듯 리리나는 쌍심지를 켜고 손에 든 메스를 위협적으로 휘둘러댔다.

그런 그녀의 뒤쪽에 있는 수술대에선 드랄두가 완전히 해체된 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 이전 삶처럼 행복하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는 현재 리리나에 의해 기계화 및 언데드화가 진행 중이었다.

속칭 '기계 언데드'라는 것인데, 지하 세계에선 리리나만이 진행하고 있는 독보적인 연구였다. 그녀는 저 괴물로 생명체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고 난리였다.

'나중에 보자고, 드랄두. 뭐, 작업 과정에서 실패가 없다면 말이지.'

기계 언데드란 게 전인미답의 분야인 만큼 드랄두와 재회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베니엘은 그의 행운을 빌어주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

거처로 돌아온 베니엘은 검술서를 펼쳐봤다.

이제 내용은 정말로 검법에 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집중해서 초반부를 읽어갔다.

[이것은 우리가 예술이라 칭하는 기예로 적을 상해하고, 너에게 맞서려는 자를 분쇄하는 방법이다.

이 기예는 네더 블레이드라 불리며, 그 묘리가 지극히 날카로워 간단히 익혀도 다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사람을 하나 살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기예를 근본으로 한다.

대적을 응징하기 위해 나의 색이 물들긴 했으나 그대가 익히면 익힐수록 그 원리가 검의 아버지의 가르침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법(法)을 보라.]

베니엘은 서문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의 아버지라...."

검의 아버지라 하면 지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검객이다.

오죽하면 모든 검 쓰는 법이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며, 현재의 다양한 검법 자체가 그가 창안했던 기예의 파편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지저 검객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존재임은 확실하다.

게임에선 설정만 등장하고 실제 검의 아버지와 관련된 건 나오지 않는다. 제작팀의 얘기로는 너무 강해서 게임 밸런스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라나?

하지만 이곳은 현실.

플레이 가능한 것만 구현된 게임과 다르게 검의 아버지의 검법이나 그가 쓰던 검 등은 분명히 존재할 터.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게 틀림없었다.

'찾아내야겠군. 이거 재밌겠어.'

게임에선 볼 수 없었던 극강의 검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베니엘의 가슴이 뛰었다.

일단은 S등급의 훌륭한 검법을 얻은 걸로 만족해야겠지만 말이다.

베니엘은 네더 블레이드를 가능한 남작으로부터 숨길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안 좋게 보는데 본가에서부터 다퉈온 주르도의 검법을 익힌 걸 보면 격노할 테니까.

'언제가는 깜짝 놀라게 해줄 날이 오겠지.'

이제 가문으로 돌아갈 때였다. 당분간 마나 하트의 균열을 치유하고 차분히 새로 얻은 검법을 익히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실라를 불렀다.

"도련님."

실라의 태도는 더없이 공손했다. 원래 반쯤 협박에 의해 베니엘과 손을 잡게 됐지만, 재판 결투에서 그의 힘을 보자 생각이 바뀐 것이다.

제국 정보부 요원의 입장에서, 베니엘을 키워봐야겠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진짜 저 망나니가 나이트쉐이드의 후계자가 되게 만들어볼 셈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녀 전하의 든든한 가신 중에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겨우 남작 나부랭이가 무슨 힘을 쓰겠냐고 할 수 있지만, 실라는 더 멀리 보고 있었다.

지하 제국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다.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돼 곳곳에서 군벌이 일어나며, 기이한 종교가 창궐하는 중이다. 점점 제국의 혼란이 심화되는 이때라면 강자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실라는 베니엘이 결코 남작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래 보지 않았지만 이자의 기량은 남다르다. 결코 소문대로 단순한 망나니가 아니야.'

정보부 시절부터 많은 인물을 봐온 실라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그런 그녀에게 베니엘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실라. 일단 졸첸에서 확실히 자리 잡아. 그 후에 내 쪽에서도 힘을 써줄 테니까."

실라는 악수 대신 그의 손등에 키스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고운 머리칼이 앞으로 쏟아지며 베니엘의 손목을 간질였다.

"더없이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허락하신다면 저희 쪽 사람 하나를 도련님께 보내겠어요. 상당한 실력자니 도련님의 호위 겸 저희와 연락책으로 쓰실 수 있을 듯해요."

예상보다 훨씬 우호적인 실라의 태도에 베니엘은 살짝 눈이 커졌다. 휘하의 요원 하나, 하나가 귀중한 그녀 입장에선 베니엘에게 상당히 공을 들이는 셈이었다.

'뭐야. 생각보다 내가 마음에 들었나?'

아무래도 재판 결투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우리 가문이 좀 살벌해서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으니까. 그것보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이번 건은 제대로 대가를 지급하겠다."

"말씀하세요. 도련님."

"버섯 농장 좀 감시해봐."

나이트쉐이드 영지에는 지하 고블린 수백 명이 관리하는 버섯 농장이 있다.

버섯 농장은 영지의 중요한 식량 공급원 가운데 하나이다. 고블린들은 농노나 외거 노비처럼 남작에게 메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재산을 축적할 수도 없다. 광산의 노예보다야 훨씬 사정이 나았지만 죽을 때까지 남작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애초에 그 고블린들은 전쟁 포로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비교적 순종적으로 자기 일을 해왔지만 최근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베니엘의 큰고모 우시드라가 교묘하게 고블린들의 불만을 자극하며 선동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가 오면 우시드라는 고블린 농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버섯 농장 말인가요?"

"그래, 영 수상하단 말이다. 이대로 두면 사고 치는 건 시간 문제야."

베니엘의 게임 지식은 큰 도움이 됐지만 완벽하게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고블린 농노들이 얼마나 반란을 준비했는지, 언제 그들이 일어날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계속 감시를 할 필요가 있었다. 베니엘은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고블린 농노 중 특별히 신경 써 감시해야 할 자들을 알려줬다.

실라는 진지하게 베니엘의 얘기를 듣고는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실라는 이제 베니엘과의 관계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신용을 쌓기 위해 의뢰를 잘 처리해볼 생각이었다.

"좋아. 부탁하다. 이건 착수금이야."

베니엘은 남작성에 온 인물들이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드랄두의 비밀 금고를 털었다. 그곳에 있던 3만 두크나 되는 비자금을 날름 먹어치운 상태.

그중에서 1만 두크를 실라에게 내줬다. 큰돈이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이 정도면 인력을 충분히 쓸 수 있을 듯해요.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실라는 베니엘이 쪼잔하지 않고 의뢰에 충분히 투자할 줄 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내면에서 베니엘의 평가가 다시 올라갔다.

"그래, 그거면 됐어."

이후 베니엘은 고블린 농장에 관해 알고 있는 몇 가지를 더 실라에게 말해주고는 그녀와 작별했다.

***

"올리비에, 이제 가자."

"베니엘 님의 가문으로 말입니까?"

"그래. 널 손님으로 맞아주지."

"떨리는군요. 다크 엘프의 본거지로 간다니."

"후후, 긴장해라. 거긴 악의 구렁텅이니까."

베니엘은 올리비에, 로나와 함께 검은 요새를 빠져나왔다.

리리나에겐 따로 말하지 않았다. 드랄두와 노느라 바쁜 데다가 공연히 붙잡히면 귀찮기 때문이다.

'드랄두를 개조하는 작업이 끝나면 이번 일의 대가를 내놓으라 하겠지. 한동안 피해 다녀야겠다.'

한데 지하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구덩이를 피하려다 용암에 빠진다.

한 가지 위험을 피하려다 또 다른 위험과 마주한다는 간단한 속담이었다.

그리고 지금 베니엘의 경우가 그러했다. 느긋하게 남작성으로 향하던 중 저 앞에 지금 결코 마주칠 수 없는, 그리고 마주쳐서도 안 되는 존재가 있었다.

"뭐지, 헛게 보이네?"

베니엘은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봤다. 하지만 헛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좌우로 큰 버섯이 핀 동굴 통로 한가운데 스스로 발광하는 듯한 새하얀 존재가 오연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워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동시에 베니엘에겐 공포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다.

알비노란 특성 때문에 동족과 다른 새하얗기 짝이 없는 다크 엘프.

바로 베니엘의 둘째 고모 아니엘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는 듯한, 또 어떻게 보면 잔뜩 성이 나 찡그리는 듯한 기괴한 표정을 한 채 베니엘에게 인사해왔다.

"사랑하는 우리 조카. 안녕?"

25화

암사자 (1)

베니엘은 탄식했다.

'맙소사!'

최근 막내 고모 리리나의 등쌀에 시달리느라 둘째 고모가 종종 생각났던 건 사실이다.

한데 진짜 보고 싶었냐면 그건 또 아니다. 베니엘이 생각하기에 고모들이란 멀리 있을수록 좋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반갑지 않은 거니?"

아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게 마치 런웨이의 모델처럼 근사하다.

하지만 베니엘에겐 그건 조여오는 죽음이자 공포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선택은 명확했다.

"네 이놈! 도플갱어!"

"응…?"

"감히 내가 존경하는 분의 외형을 가장해 나타나다니 어림없다!"

베니엘은 일단 현실을 부정해 보았지만 싸늘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아,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만약 내가 진짜 도플갱어면 네 배를 찢어서 내장을 쏟아버려도 괜찮겠지?"

베니엘은 즉각 자세를 바로 하고 양손을 공손히 모았다.

"하하하…, 고모. 이 조카가 농담 좀 했습니다."

이제 확실해졌다. 둘째 고모는 얼렁뚱땅 넘어가기에는 너무 화가 나 있단 사실이.

"이 고모는 실망했단다. 널 위해 오라버니에게 매달렸는데 그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베니엘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고, 고모…."

"이건 분명히 벌을 받아야 할 일이란다. 하지만 너무 낙심할 건 없어. 벌만 내릴 건 아니니까. 어느새 그렇게 커서 이 고모를 좌지우지하다니 정말 장하다니까? 상도 줄 생각이란다."

이에 베니엘이 일말의 희망을 담아 물었다.

"공과 과가 서로 상쇄하면 아무 일도 없겠군요?"

"후후후,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아니, 그런 일은 없어. 하나씩 해줄게. 벌도 상도. 아주 진득하게 말이야."

아니엘은 허리춤의 검을 뽑은 채 혀로 자기 입술을 요염하게 핥는다. 아주 포를 떠버리겠다는 태도였다.

횟집의 도마 위로 올라간 광어가 이렇게 무력한 심경일까?

베니엘은 일단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물었다.

"자유 도시로 간 것 아니었습니까?"

"아, 속을 뻔했지. 실제로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고."

"그런데요?"

"가다 보니 네 흔적이 안 보이더라? 그래서 되돌아와서 알게 됐지. 우리 조카가 이 고모 뒤통수를 쳤다는 걸. 후후."

"...."

"베니엘. 요새에서 아주 바쁘더구나? 인상적인 활약이었어."

언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 속에서 숨어 요새에서 베니엘이 벌이는 행동을 다 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상대와 실력 차가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혀 아니엘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아니엘은 압도적으로 강하다.

실제로 마스터급 중 상위권이라 할 검객 여럿이 저 여자의 칼날에 유명을 달리했다.

아니엘 역시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이레귤러함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덕에 나르다리온 남작은 주변에 엄청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설령 남작보다 더 강한 영주들조차 아니엘의 방문을 받을까 전전긍긍해 할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막을 방법이 없는 비대칭 전력인 셈이다.

베니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니엘이 내릴 '진득한 벌'이란 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버틸 만한 게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아니엘에 관한 설정을 모두 점검했다. 위기의 순간 그의 두뇌는 풀가동했고 마침내 적절한 해법을 도출해냈다.

'가능할 것 같군. 감격과 동정심의 2단 콤보가.'

이 모든 건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 정도에 이뤄졌다.

확실히 머리 쓰는 것이라면 지금의 베니엘은 오리지널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다.

물론 쉽진 않을 것 같았다. 실패할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이대로 무력하게 아니엘에게 굴복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터.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기개를 보이지 못하면 오리지널 베니엘처럼 아니엘에게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최근 계속 고모들에게 시달리고 있는지라 베니엘은 이 기회에 반전을 꾀하기로 했다.

"고모, 유감이지만 저는 그 벌이란 건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음?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다크 엘프다운 해결을 보자는 것이지요."

다크 엘프다운 해결법이란 간단하다. 이성적인 대화나 타협 같은 온건한 대책 대신, 무력이나 간계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베니엘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프로스트바이트의 힘 때문에 삽시간에 동굴의 온도가 몇 도나 내려간 듯 변했다.

아니엘은 쿡쿡 웃어댔다.

"그깟 마법검 하나 얻었다고 너무 기세등등한 거 아니니?"

"프로스트바이트의 힘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오로지 제 기예로 승부를 내고자 합니다."

아니엘은 그 대답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정말?"

"정말입니다."

"흐음...."

아니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얘가 뭘 믿고 이러지?'

그녀는 숨어서 재판 결투를 지켜봤다. 그렇기에 베니엘이 큰 성취를 이룬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보단 아직 한참 못 미친다.

'아냐, 나쁘지 않을지도….'

아무래도 생각이 짧은 조카가 자신의 성공에 너무 도취한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혈족의 도리로 따끔한 교훈을 내리는 게 좋을 듯했다.

'지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몸을 사리고, 상대와 자신의 우열을 잘 구분해야 하는 법이니까.'

물론 그 결과,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는 조카를 쥐고 흔들고자 하는 본인의 음습한 욕망에 대해선 고개를 돌렸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계도(啓導)여야 하니까.

"좋아. 우리 귀염둥이. 오랜만에 실력 좀 볼까?"

"오늘 이후로 귀염둥이란 말은 못 하게 해드리죠. 저는 이제 곧 성인입니다. 더는 고모 품에서 놀던 애새끼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까지 베니엘이 보여준 적 없는 단호한 태도에 아니엘은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엘은 조카를 향해 내리사랑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베니엘의 비겁함과 저열함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왜냐하면 베니엘은 포악한 성정임에도 불구하고 늘 아니엘에겐 꼬리를 말았기 때문이다.

조카 놈은 전형적인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스타일.

그렇기에 이렇게 자신에게 검을 뽑아 들고 나선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니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정말 해보게?"

그녀는 조카가 자신에게 칼을 들이미는 상황에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감격했다.

쿵. 쿵. 쿵.

심지어 심장이 거세게 뛰기까지 했다. 설마 저 변변찮은 녀석이 이리 의연하게 나올 줄이야.

베니엘은 확고한 의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고모와 제 실력 차를 생각하면 단순히 부딪히는 건 의미가 없지요. 고모가 무조건 승리하실 테니까요."

"그래서? 뭔가 제안이 있나 보구나?"

"네, 제가 고모의 이름 높은 찌르기를 막아보겠습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제 승리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설마, 아스피스 바이트를?"

'아스피스 바이트'는 아니엘이 수많은 이의 죽음을 바탕으로 만든 기술이다.

기술의 모티브인 아스피는 지저의 독사인데, 그 맹독 때문에 덩치 큰 스티지안 오우거(Stygian Ogre)도 피해 다닐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다.

'아스피스 바이트'는 그 독사의 이름을 딴 것처럼 일격에 누구든 쓰러뜨릴 수 있는 공격이었다.

애써 그 찌르기를 막아내려 하면 그 순간 그녀의 검이 뱀처럼 휘면서 상대의 방어를 타고 넘어온다.

이것은 그녀의 교묘한 검술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진짜로 검의 물성이 변해서 뱀처럼 휘감아오는 것이다.

아니엘이 마법과 검술을 결합해 완성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였다.

문제는 현재 베니엘이 익힌 A등급 검법 옵시디언 오버츄어로는 이것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니엘 역시 나이트쉐이드의 혈족으로 해당 검술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런 약점을 잘 알았다.

"힘겨울 텐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아니엘은 이미 베니엘의 제안을 반쯤 받아들인 상태.

'나쁘지 않아.'

아스피스 바이트는 그 마지막 순간 검끝이 독사의 이빨처럼 상대방에게 독을 주입한다.

아니엘은 평소 쓰던 맹독 대신 마비독을 쓸 생각이었다. 베니엘을 완전히 제압해서는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갖고 놀 속셈이다.

이런 결정에 이르자 아니엘은 혹시 베니엘이 도중에 겁을 집어먹고 그만둔다고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지금껏 봐온 조카의 졸렬한 모습이면 그러고도 남았다. 큰소리치고 형세가 불리해지면 즉각 말을 바꾸는 건 조카의 특기였으니까.

그래서 도발을 했다.

"헤에… 너 같은 꼬맹이가 가능할까?"

그것은 베니엘처럼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나이대의 남자에게 잘 먹히는 도발이었다. 아니엘은 그 시절의 남자가 무엇에 조급해하는지, 어떤 인정을 받고 싶은지 잘 알았다. 본가에서 애를 쓰던 오라버니를 곁에서 봐왔던 탓이다.

그녀는 나긋하게 웃었다.

"포기하고 고모 말 듣자? 응?"

베니엘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뻔한 수작이자 도발이군.'

한데 이성적인 판단과 다르게 그의 내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것은 몸에 남아 있던 오리지널 베니엘의 기억이자 감정이었다. 그것은 더는 애 취급당하기 싫다는 분노와 뒤틀린 반항심이었다.

베니엘은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검신 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얀 화염이 일렁였다.

"오늘 이후로 더는 나를 만만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엘!"

그 말에 아니엘은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조카를 사랑하지만, 조카가 자기 품을 떠나려 하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트쉐이드는 서열을 중시하는 가문이지. 너는 너무 방만하게 자란 듯하니 가풍에 대해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그 말과 함께 아니엘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베니엘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왔다.

"간다!"

지켜보던 베니엘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그 공격은 아름다웠고 이미 완성돼 있었다.

아마 본래 베니엘이었다면 이 순간 패배를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다르다.

최근 S등급 검술인 네더블레이드를 얻었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보며 자세히 익힐 시간은 부족했지만 이미 많은 영감을 얻은 상태였다.

그것은 더 고등한 검법답게 상식을 뛰어넘는 찌르기에 대해서도 조언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찰나의 순간 검술서의 요결(Zedel)을 떠올렸다.

[조급해하지 마라. 때론 나중에 치는 것을 배우라.]

그것은 후공의 묘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먼저 상대의 기술을 파악하고 대응하라는 것이다.

오리지널 베니엘이었으면 급한 성격 때문에 들어먹지도 않을 이론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겸허하게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요결을 떠올렸다.

[적의 공세에 접촉을 유지하라. 그 후에 일이 시작된다.]

베니엘은 검을 내밀어 그대로 실천했다.

카앙!

어둠 속에서 요란하게 불꽃이 튀며 베니엘의 검이 아니엘의 찌르기를 막아선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아니엘의 검의 갑자기 뱀처럼 베니엘의 검을 타고 넘어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그 명성대로 무시무시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베니엘은 당황하는 대신 요결의 다음을 곱씹었다.

[적이 빈틈을 파고들어 올 때 검을 맞댄 채 원을 그려라. 만약 그가 찌르기를 하고자 한다면 절대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라.]

베니엘은 그대로 따랐다.

[이것은 '작은 바퀴'란 기술이다. 그저 행하지 말고 의지를 동반하라.]

역시 네더블레이드는 S등급 검법답게 검술서를 읽는 자가 기본적으로 의지를 다룰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베니엘은 드랄두와의 결투 덕에 의지에 대해 감을 잡은 상태.

중요한 건 의지를 일으킬 '감정'과 '상징물'.

마침 베니엘에겐 극렬한 감정이 존재했다. 바로 과보호를 하는 고모를 향한 반항심이다.

다음은 상징물인데 마침 좋은 게 있었다. 5등급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였다.

이 새롭고 아름다운 검은 고모의 집착을 끊어내겠다는 상징으로 더없이 적합했다.

'다만 한 번 삼은 상징물은 바꿀 수 없다.'

즉, 앞으로도 프로스트바이트가 있어야 이 작은 바퀴란 기술은 발동 가능하다는 것.

'뭐,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상징물 같은 것 없이 의지를 발동할 경지에 오를 테고, 프로스트바이트는 그때까지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해줄 테니까.

베니엘은 의지 일으켜 작은 바퀴를 발동했다. 그러자 베니엘의 검과 아니엘의 검의 접촉면이 무형의 힘에 의해 찰싹 달라붙었다.

아니엘의 검은 나선형으로 휘어지며 방어를 돌파하려 했지만, 베니엘 역시 검으로 원을 그리며 집요하게 그 찌르기를 저지했다.

검의 접촉면이 달라붙어 있기에 베니엘은 아니엘에 비해 기술적으로 밀리면서도 방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베니엘은 상념은 요결의 후반부로 향했다.

[약함과 강함을 번갈아 가며 유지하라. 그것이 검의 예술을 지탱하는 방법이다.]

약함이란 적의 힘을 부드럽게 상쇄함을 말한다. 다만, 그것은 검의 기초적인 부분이고 작은 바퀴란 기술은 차원이 달랐다.

프로스트바이트의 검신이 아니엘의 찌르기가 발휘하는 에너지를 흡수해서 저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르르르르!

접촉면에서 검날이 갈려 나가며 불꽃이 요란하게 튄다. 마치 전기톱으로 쇠를 자르는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에너지를 빨아들인 프로스트바이트의 검신이 용광로의 쇳덩이처럼 주황색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반면 아니엘의 공격은 점점 약해져 갔다.

이제 베니엘은 강함을 발휘할 때임을 직감했다.

강함이란 힘에 의한 제압.

작은 바퀴란 기술에서 강함의 의미는 지금껏 저장한 상대의 힘을 일시에 쏟아내며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했다.

베니엘은 마치 힘차게 막대기로 뱀을 쫓듯 아니엘의 검을 털어버리며 저장한 힘을 폭발시켰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까앙―!

귀청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아니엘의 검이 분질러져 버린 것이다.

반 토막 난 검신은 쏜살같이 날아가 동굴의 굵직한 종유석을 박살 내고는 벽면에 깊숙이 박혔다. 아니엘은 반격에 대비해 즉각 물러났지만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상태.

"너… 지금?"

아니엘은 어지간히 놀랐는지 팔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공격이 저지된 거로도 모자라 검까지 부러질 줄이야?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물론 최선을 다한 찌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법 진심을 담은 공격이었다.

'검의 천재인 걸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엘의 자질은 수많은 강자를 상대했던 아니엘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니엘이 경악하고 있는 사이, 베니엘은 찢어질 것 같은 가슴팍의 통증을 이겨내며 요결의 마지막을 되새겼다.

[그대가 성공했다면 적을 부끄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나의 칭찬을 받으라. 젊은 검객이여.]

마치 검술을 창안한 주르도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베니엘은 네버블레이드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주르도가 삭힌 청어를 좋아했다고 괄시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제자가 스승님 덕에 해냈습니다.'

베니엘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느새 마음속 큰 스승으로 자리 잡은 주르도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베니엘이 기술의 여운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 아니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펴질 줄을 몰랐다.

"용감하구나. 베니엘. 정말로 나와 승부를 결하려는 것이니?"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제 조카가 자기 품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조카와의 관계가 지금처럼 일방적이지 않을 게 틀림없다.

그건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정하기도 싫었고.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진심을 담아야겠네."

아니엘은 진지했다.

하지만 베니엘은 둘째 고모의 기대보다 훨씬 비겁한 존재였다. 그는 애초에 승리를 위해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일으킨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다음 스텝을 위한 빌드업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의지의 기술도 얻으면 좋았고.

베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피를 토했다.

"크악!"

갑자기 조카가 각혈하자 아니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베, 베니엘?"

베니엘은 원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나 하트가… 젠장. 아쉽군요. 더 해보고 싶었는데…."

"너 설마 마나 하트에 문제가?"

아니엘은 재판 결투를 보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베니엘의 마나 하트에 균열이 생긴 건 알지 못했다.

그녀는 서둘러 쓰러지는 베니엘의 안고는 가슴팍을 더듬어봤다. 그리고 조카의 말대로 마나 하트의 균열을 발견했다.

"세상에!"

그녀는 급격한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이런 멍청한 년! 화가 난다고 다친 아이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아니엘의 마음은 삽시간에 약해졌다. 독기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조카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이 왜 베니엘을 몰아붙였던 건지 후회가 막심했다.

급기야 아니엘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흑흑, 베니엘. 이걸 어떻게 해. 미안해.... 미안해."

안타깝지만 아니엘은 몰랐다. 이것이야말로 베니엘이 깨달은 진정한 후공의 묘리임을. 동정심을 사는 작전은 너무나 잘 먹혀들어 갔다.

사실 마나 하트가 심하게 아프진 않았다. 마나 하트의 균열이란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긴 한데, 마신의 마력 덕인지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균열이 상당 부분 재생돼 일부러 과부하를 일으켜 피를 토하는 게 어려울 뻔했어. 후훗, 운이 좋군.'

아니엘은 꺼이꺼이 울며 베니엘을 꼭 안았다. 베니엘은 그녀의 모성애 넘치는 부드러운 품속에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막내 고모에 비하면 둘째 고모는 호구나 마찬가지지. 크크큭….'

26화

암사자 (2)

베니엘은 행복했다.

둘째 고모의 벌을 무마했을뿐더러, 새로운 기술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가 습득한 의지는 두 가지.

하나는 오만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화염 방벽'.

다른 하나는 반항심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바퀴'.

전자는 프로스트바이트의 얼음을 막았던 것처럼 마법 방어에 특화돼 있다.

반면 후자는 아니엘의 찌르기 같은 물리력에 특화된 것이다.

각각 마법과 물리를 담당할 강력한 방어기술을 얻은 셈이었다.

'이제 어지간해선 쓰러지지 않겠군.'

훌륭한 방어기술은 여벌의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베니엘은 앞으로 이 위험천만한 지저를 헤쳐나갈 든든한 밑천이 생겼다는 사실에 흡족했다.

다만 문제가 없진 않았다.

'아직은 의지의 발동이 불완전하다.'

드랄두가 얘기했던 결의의 단계가 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결의가 뭔지 모른다면 앞으로 낭패를 볼 게 뻔하다.

애초에 드랄두는 반푼이였고, 아니엘은 상대가 조카라 손속에 사정을 뒀다. 나중에 다른 진짜배기의 공격을 받는다면 의지를 발동하다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내키진 않지만 복귀하면 남작에게 물어봐야 하나? 세운 공이 있으니 아예 무시하진 않을 거 같은데 말이야.'

이것도 다 경지가 올랐기에 가능한 고민이었다.

'아무튼, 일단은 기절한 척하다가 상황 봐서 깨어나야지.'

***

이후 적당한 타이밍에 깨어나려 했던 베니엘은 진짜로 기절해 버렸다.

마나 하트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던 데다가, 일이 잘 풀려서 긴장이 탁 풀린 게 컸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잘 꾸며진 천막 안이었다.

"음...?"

"아, 일어났어?"

몸을 일으키자 새하얀 다크 엘프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보라색 벨벳 쿠션이 가득했다.

아니엘이었다.

"여긴 어딥니까?"

"아, 그게 말이야."

얘기를 들어보니 아니엘이 부하들과 함께 검은 요새 근처에 세운 숙영지였다.

"저기, 괜찮아? 베니엘?"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엘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드물게 고분고분하다고 할까?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집착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머뭇거리고만 있을 뿐,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강렬하게 베니엘을 쏘아보고 중이다.

평소와 다르게 혼란과 후회가 추가된 탓인지 그 눈빛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강렬했다.

하지만 아니엘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엘은 몸을 불안하게 꼬아댔고, 식은땀까지 흘렸다.

"베니엘…? 뭐라고 말 좀 해줘."

그녀는 갑옷을 벗고 간소한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땀 때문에 천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농염한 몸매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미간은 살짝 좁힌 채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어떻게 보면 금단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그녀의 정신 속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이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내키는 대로 베니엘을 대하려는 마음과 어떻게든 그것을 억누르려는 죄책감 사이의 갈등 말이다.

베니엘은 그것을 보면서 지구에서 본 무언가를 떠올렸다.

'마치 서커스의 암사자 같군.'

서커스에선 맹수를 조련하는 묘기를 보여준다. 그때 사자들은 조련사의 채찍질에 성을 내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결국은 조련사에게 굴복해 지정된 자리로 올라가서 얌전히 기다리곤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맹수라 그런지 쉽게는 가지 않는다. 어떻게든 불만을 표현하고 으르렁댄 후에야 말을 듣는다.

지금 아니엘이 모습이 그 암사자를 똑 닮아 있었다. 그러니 저런 절제력은 오래 가지 않을 게 뻔했다.

'서커스에서도 사고가 일어나곤 하지.'

게다가 다크 엘프란 뻔뻔한 존재다. 그 점에 있어선 베니엘의 둘째 고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좀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미안함은 아침 이슬처럼 증발해서 사라져서는, 조련사의 통제를 벗어난 사자처럼 굴 터. 틈이 보이면 바로 공격하고 잡아먹으려 할 게 뻔하다.

베니엘은 고민했다.

'다시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목줄을 채워놓을 필요가 있겠어.'

현재 상황은 베니엘에겐 다시 없을 기회였다.

다크 엘프란 종족은 패배하면 복종심이 생긴다. 남작이 저마다 개성 강한 세 여동생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 건 직접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도 비슷한 맥락이다. 진짜 제대로 붙은 건 아니긴 해도, 아픈 애를 구박했다는 부채감 때문에 아니엘은 심리적으로 수그리고 있는 상황이다.

'대신 빠르게 사라질 감정이라 재빨리 이용해야 한다.'

마침 아니엘이 무릎걸음으로 사랑하는 조카에게 다가오려 했다. 베니엘은 손을 들어 단호히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 그리고는 아니엘을 힐난했다.

"아무리 제가 장난을 좀 쳤다고 해서, 마나 하트를 깨버리려 하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

아니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녀가 베니엘의 마나 하트를 망가뜨리려 한 적은 없다. 과부하를 일으킨 건 베니엘 본인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교묘하게 그녀의 죄책감을 이용하고 있었다.

"미안해. 이번에는 내가 심했어."

아니엘은 솔직히 사과했다.

마나 하트가 깨지면 검객으로서는 끝장이다. 평생의 단련이 날아가고 그토록 경멸했던 그런트가 돼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가 많았다. 아니엘은 하마터면 조카의 미래를 망칠 뻔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미안."

사과를 받았지만 베니엘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어찌 될 인물도 아니었고.

"고모도 아시겠지만, 제 마나 하트는 오래간 반쪽짜리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완전해졌지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아, 그렇지."

"아무튼, 제가 어렵게 마나 하트의 장애를 극복했는데, 그걸 고모가 망가뜨리려 했다고 남작님께 보고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아니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무리 그녀가 천방지축이긴 해도 남작을 무서워하는 건 사실이다.

평소에 남작에게 떼를 써대는 것도 다 자신에게 허용된 한도를 알기 때문이다. 아니엘은 남작의 인내심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줄타기의 명수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남작의 분노는 아니엘에게도 두려운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두려움이 없었다면 나이트쉐이드 가문은 유지도 안 됐을 터.

"아니, 사과했잖아! 오라버니에게 보고라니? 한 번만 봐줘."

아니엘이 사정을 해왔다. 그럼에도 베니엘은 단호했다.

"저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니엘이 인상을 찌푸려졌다.

"너무한 거 아냐?"

대번에 말투가 칼날처럼 차가워졌다. 마치 성난 사자가 으르렁대는 것만 같았다.

베니엘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어렵게 얻은 이 일시적인 우위는 포기하는 건 너무나 아까운 짓이었으니까.

"애초에 난 네 마나 하트에 문제가 있던 건 몰랐다고."

그새 미안함이 조금 가셨는지 아니엘이 사실관계를 따져왔다. 이에 베니엘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럼 남작님께 그렇게 변명해 보시던가요. 뭐라 답하실지 기대가 됩니다만."

"으으...."

아니엘은 고개를 살짝 들고는 베니엘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분노였다.

그 감정은 언제라도 지금의 자제력과 죄책감을 박살 내 버릴 기세였다. 베니엘은 뒷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서커스의 조련사들은 매번 이런 심경으로 쇼에 나가는 건지도 모르겠군.'

언제든 눈앞의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상대는 강하다.

반면 이쪽은 그저 채찍으로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이다. 만약 진짜로 싸우면 어떤 결과만이 남을지는 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련사들은 채찍을 사납게 쳐대며 맹수들을 윽박지른다.

물러나선 안 되는 상황이니까. 만약 실패한다면 조련사는 우습게 보이게 되고, 맹수들은 더 이상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자칫하면 베니엘도 그런 처지에 빠질 것이다.

'어떻게든 굴복시켜야 해.'

서로 눈싸움이 이어지던 중 다행히 아니엘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 조카가 용서해줄까?"

그 모습이 남작이란 매서운 채찍을 피하고 싶어 하는 암사자 같았다.

'좋아. 한발 물러났군.'

이다음에 이어질 게 바로 '타겟 훈련'이다.

흔히 서커스에서 사자가 자기 자리로 가서 앉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제 아니엘은 벌을 피하기 위해 베니엘이 지정한 자리로 가야만 한다.

여기서 베니엘이 지정한 자리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떠나도록 하는 것. 조카를 힘들게 할수록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걸 각인시켜야만 했다.

베니엘은 손가락으로 천막 바깥을 가리켰다.

"원래 임무가 있지 않습니까? 자유 도시 에란 샤라드로 가시지요. 가서 가문의 일을 하란 말입니다."

아니엘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떻게든 남작의 명령을 미루면서까지 같이 있는데, 조카는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베니엘 그건…."

하지만 베니엘은 단호했다.

"가세요."

잠시 누그러졌던 아니엘의 눈동자가 다시 이글이글 타오른다.

"고모가 그리 잘해줬는데, 태도가 너무 건방진 거 아니니?"

"...."

하지만 베니엘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 방식이 실패하면 앞으로 암담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크 엘프의 관계에선 서로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아니엘의 사랑이란 것도 베니엘에게 집착하고, 구속하고, 제멋대로 인형처럼 갖고 놀려는 것이니까.

애초에 다크 엘프의 삶을 기존의 인간적 감각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지저에서 적응하고 다크 엘프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인간의 도덕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아니엘을 상대로는 이게 몹시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앞으로의 전개에 따라서 존재 자체가 빛인 후원자가 되거나 아니면 역대급 발암 캐릭터로 날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극과 극. 이 모든 건 주인공인 베니엘에게 달려 있었다.

"아, 진짜. 베니엘. 사랑하는 조카야. 이건 너무해. 이번에는 고모가 실수하긴 했는데... 흑흑."

노려보는 게 안 통하니까 이번에 아니엘은 훌쩍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흔들리기 쉽다. 원체 아니엘이 아름다워서 그렇다. 그런 그녀가 가련하게 눈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에 대개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옥으로 가는 방법이다.'

저 눈물은 연기 반, 진심 반이다.

슬프긴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흔하게 과장된다. 아니엘은 다크 엘프답게 남을 속이는 게 일상화된 존재였다.

"흑흑....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한데 지금 베니엘은 알고도 동요하고 있었다.

면전에서 실물을 마주하는 건, 게임 속 그래픽으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저 가증스러운 태도가 연기라는 걸 아는데도 안타까운 감정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이겨냈다. 진짜로 아니엘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지금 흔들려선 안 됐으니까.

"떠나. 아니엘."

협상의 여지조차 없다는 그 태도에 아니엘은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낮게 웃었다.

"후후훗...."

그건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건조한 웃음이었다. 평소처럼 그녀가 호들갑을 떨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흡사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을 정도였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다 벗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베니엘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아니엘의 태도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고개를 든 그녀는 여느 때처럼 웃는 표정이었다.

"울었더니 목소리가 좀 갈라졌네. 알았어. 우리 조카가 그렇게 말한다면 자유 도시로 가야겠다."

"...."

"우리 조카, 고모가 일을 제대로 안 해서 남작님께 혼날까 봐 걱정된 거구나? 호호."

발랄하고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평소 그대로다. 베니엘도 기꺼이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물론입니다. 고모."

베니엘은 담담한 그런 겉모습과 다르게 속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아니엘의 가면이 벌써 벗겨진다고?'

방금처럼 아니엘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하고, 이후 진정한 호의를 얻는 건 몹시 어렵다. 보통 다들 통상적인 이벤트로 마감하게 된다.

그게 아닌, 아니엘의 히든 이벤트 루트로 가려면 어떻게든 저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그리고 진짜 아니엘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럴 가치는 차고 넘친다.'

다만 가면을 벗기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잠깐이지만 벌써 드러났다. 게임으로 치면 아직 초반부에 불과함에도 말이다.

'이거 진행 상황이 완전 역대급인데?'

가진 지식에 더해 게임적인 제약이 없어지니 지금 베니엘은 유례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원래 아니엘의 본모습이 살짝이라도 드러나게 하려면 빨라도 게임 중반부인데 말이야.'

베니엘은 이 기세를 타고 더욱 과감히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아예 게임 중반부에 해당하는 시점에 아니엘의 히든 이벤트를 발동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후반부 보스들이 출현할 시점에 나나 동료들이 말도 안 되게 강해져 있지 않을까?'

게임에선 놈들 때문에 죽도록 고생했다. 한데 현실 세계에선 오히려 그 고약한 것들을 역으로 능욕해줄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재밌군. 역시 현실이 훨씬 재밌어.'

***

아니엘은 자유 도시로 향하기로 하고는 부하들에게 숙영지를 정리하게 했다.

이에 다크 엘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천막을 철거하고, 거대 거미에 안장을 올렸다.

구석에 앉아 있는 아니엘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드물게 긴 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남작의 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베니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압박만 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지.'

원래 채찍 다음에는 당근이 필요한 법이다. 베니엘은 툭 던지듯 말했다.

"다음에 드란실 공작령의 도마뱀 시장에 같이 가시겠습니까?"

지하 세계에서 거대 도마뱀은 탈 것으로 많이 활용된다. 특히 종에 따라 벽면이나 천장에 달라붙을 수 있어 길이 없는 지역에서 매우 요긴했다.

"응? 정말?"

"네, 쓸만한 도마뱀을 하나 장만하려는데 제가 영 안목이 없어서 말입니다. 고모가 골라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당연히 괜찮지!"

아니엘은 반색했다. 미묘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니, 아예 내가 하나 사줄게. 어때?"

"괜찮습니다. 나중에 무슨 요구를 하려고...."

"에이, 설마 그럴까."

사실 이건 다른 의도가 있었다.

도마뱀은 부차적인 문제고, 더 중요한 건, 아니엘과의 다음 이벤트 때문이었다.

'해당 이벤트를 거쳐야 아니엘과의 관계가 더욱 강화된다.'

원래 지금 시점에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살짝 가면이 벗겨진 걸 보니 가능해 보였다.

'마신의 마력도 게임 속에서보다 훨씬 빨리 얻었는데, 아니엘 이벤트라고 안 될 건 없지.'

성공만 하면 이후에는 아니엘과의 관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게 된다. 목 막히는 고구마 덩어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빛인 캐릭터로.

"아무튼, 나중에 뵙겠습니다. 자유 도시에 잘 다녀오십시오."

베니엘은 올리비에, 로나와 함께 남작의 성으로 향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27화

돌아온 망나니 (1)

항구 도시 닉스포트.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의 수도 역할을 하는 중심지이다.

남작령은 이 닉스포트를 제외하면 두 개의 소도시와 몇 개의 촌락이 전부였기에, 남작성을 비롯한 모든 핵심 시설이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는 호수에 면했고, 인구는 4,500명 정도로 지저에선 제법 규모가 컸다.

호수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에본플로우(Ebonflow)'라 불렸다. 이 호수는 길이만 25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게 호수의 폭이 좁고 길쭉한데, 그 생김새가 복잡해서 마치 나무뿌리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런 탓에 에본플로우는 수많은 지점과 여러 영지를 연결하는 수로 역할을 했고, 호수 변에는 수십여 개의 도시들이 번영했다.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의 닉스포트도 그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닉스포트는 특히나 입지가 좋아 남작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가장 번성하는 건 노예무역이었다. 닉스포트의 항구에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사방에서 잡아들인 노예를 사기 위해 온 상인들로 바글거렸다.

한데 그런 노예 상인들의 눈에 띄는 존재가 나타났다.

"저 인간 좀 특이하지 않소?"

탐욕스럽게 생긴 지하 드워프 노예상이 손가락으로 인간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리자드맨 노예상이 혀를 낼름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디 씨족이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과 다르게 피부가 새하얗구려. 남작가의 아니엘 아가씨처럼 백색증인가?"

지저의 인간은 대체로 갈색 피부를 갖고 있기에 하얀 피부는 그들 눈에 특이해 보였다.

옆에 있던 지하 드워프 노예상이 파이프로 연기를 거하게 뿜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 멍청한 도마뱀 대가리 같으니라고! 머리칼이 제대로 갈색이지 않소? 백색증이면 머리까지 하얗게 변한다오."

"아! 알겠구려. 저건 지상인이 틀림없소이다. 표면 인류 말이오."

둘의 대화에 근처에 있던 다른 노예상까지 끼어들었다.

"아? 지상인입니까? 희귀한 존재군요. 그건 그렇고 용모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오래간만에 보는 최고 수준의 상품입니다."

"동의합니다. 저 족속이 얼마나 할지 궁금합니다. 제도의 권력자들에게 팔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듯한데...."

노예 상인들의 입방아에 오른 건 바로 올리비에였다.

마치 걸어 다니는 다비드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아름다움은 여러 종족의 들쑥날쑥한 미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곧 노예상들은 로나를 데리고 있는 올리비에에게 다가갔다.

"자네 주인이 누군가?"

"어디에서 왔지?"

"얼마에 팔려 왔어?"

우르르 몰려와서 몸을 더듬고 저마다 감평을 늘어놓는 노예상을 보며 올리비에는 당황했다.

"아, 아니. 잠시만요…!"

로나가 사납게 짖은 뒤에야 노예상들이 떨어졌는데 올리비에는 주인을 묻는 말에 자기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뒤처진 베니엘이 있었다.

"이야, 이거 그래픽으로만 보던 건데 직접 보니까 대박이네!"

베니엘은 닉스포트의 실물에 퍽이나 감격한 듯했다. 사방을 둘러보는 눈빛이 별처럼 반짝반짝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발견한 노예상들은 대경실색했다.

"커헉!"

"끄아아아!"

"마, 망나니!"

제자리에서 펄쩍 뛰는 놈까지 나오는 게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베니엘은 닉스포트를 방문하는 노예상이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일종의 재난이라고 할까?

노예상과 마주치면 시비를 건 다음에 두들겨 패고 금화를 빼앗기 일쑤였다. 베니엘은 노예상들이 큰돈을 들고 다닌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횡액이었다.

"고개 깔고 눈을 마주치지 마시오."

"다들 서둘러 빠져나갑시다."

"공연히 관심을 끌면 경을 칠 터!"

"어서! 어서!"

노예상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사라졌다. 베니엘이 주변의 광경에 관심이 팔린 게 다행이었다.

그들은 잠시 뒤에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망나니 놈이 다시 나타났구려."

"매번 마음 졸이느니 차라리 다른 도시로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여기만큼 돈벌이가 되는 곳이 없소. 노예들의 종류도 다양하고. 게다가 위험이란 어디나 있잖소이까?"

"하긴 그렇습니다만…."

"참, 소문을 들으셨소?"

각자 식은땀을 닦던 와중 노예상 하나가 들려온 소식을 하나 꺼냈다.

"저 망나니가 검은 요새의 사령관을 담궈버렸답니다."

"세상에? 뭐라고? 드랄두 말이오?"

"네, 이름이 꽤 알려진 자이지요."

"대단하군. 역시 저 망나니가 싸움 솜씨만은 일품이오. 설마 드랄두까지 해치워 버리다니."

"대체 왜 그랬다오?"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화제를 꺼낸 노예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자랑 검을 빼앗기 위해서라는군요.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요새 사령관의 애인과 마법검을 가로챘다는 말이 돌아요."

듣던 이들은 경악했다.

"세상에! 이런 흉참한!"

"이제는 우리 같은 상인들 삥 뜯는 거로는 만족 못 하겠단 건가?"

이 노예상들은 여러 지역에서 온 온 이들이다. 제도에서 온 자도 있었고, 공작령, 백작령, 자유 도시 등 그 출신이 다양했다.

망나니 베니엘에 관한 소문은 상당히 자극적인 것이었기에 이제 이들의 입을 통해 지하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될 터였다.

소문이 늘 그렇듯 몇 배의 과장을 더해서 말이다.

"다음 목표는 이웃 영지들을 약탈하는 것이라고 하더이다."

"맙소사. 이제 제국이 나날이 시끄러워지니까 저 망나니까지 거병하는구려."

"우리야 나쁘지 않소. 노예가 많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베니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악명을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후 누구 귀에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베니엘이 남작성에 도착하자 늙은 시종장이 맞아줬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시종장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다크 엘프치고는 드문 외형이었다.

다크 엘프가 긴 세월 동안 젊음을 유지해서라기보단, 노화가 올 정도로 오래 살지 못하고 대부분 죽어 나자빠지기 때문이다.

혹독한 지하 세계의 환경에 더해 다크 엘프 가문 특유의 위험천만한 음모 때문에 천수를 누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시종장의 나이는 무려 400세가 넘었고, 그래서인지 남작을 포함해 가문 모두가 시종장을 존중해줬다.

"한데 옆에 있는 인간은 누굽니까?"

"아, 올리비에라고 내 동료다. 거처를 마련해줘."

이에 시종장의 새하얀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 이 망나니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를 노예나 하인으로만 취급한다. 한데 동료라니? 심지어 비천한 인간종이 아닌가?

'최근 들려오기 시작한 소문처럼 이 망나니가 정말 변했단 말인가?'

시종장은 신비함마저 느꼈다.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남작님께서 찾으십니다. 바로 가보시지요."

"그래? 의복을 갈아입고 이따 찾아뵈려고 했는데?"

"마침 성의 옥상에서 회의 중이십니다. 바로 그쪽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베니엘은 올리비에와 헤어진 뒤 바로 성의 옥상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높았기에 마법으로 작동하는 나무 승강기를 타고 올랐다. 옥상에 도착하자 영지에 면한 거대한 호수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변은 다크 엘프 특유의 뾰족뾰족한 성가퀴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었고, 발리스타나 투석기 같은 장비가 가득했다. 적이 공격해 오면 남작성이야말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도련님, 이쪽입니다."

가병 하나가 튀어나와 안내를 맡았다.

"남작님께선 흑요석 성탑 쪽에 계십니다."

"알겠다. 따라올 것 없어."

성탑은 성벽의 중간중간 솟아 있는 방어용 탑들을 말한다. 중세 성을 보면 둥글고 튀어나와 있는 기둥 같은 것이다.

나르다리온 남작은 성의 성탑 중 가장 중요한 곳에 흑요석 타일을 붙여 장식해놨다.

그곳이 에본플로우 호수를 여행하는 자들이 남작의 성을 바라볼 때 가장 잘 보이는 성탑이기 때문이었다.

베니엘은 오리지널의 기억에 의존해 익숙하게 흑요석 성탑을 찾아갔다.

곧 성탑의 외부를 반짝이는 흑요석으로 장식한 상당히 사치스러운 성탑이 나타났다. 베니엘은 성탑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위쪽에선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베니엘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올라가기 싫다.'

오리지널이 남긴 기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적대적인 가문의 구성원과 마주하는 건 그에게 아주 짜증 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베니엘은 새삼 오리지널에 대한 작은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워낙 거지 같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베니엘의 성격도 그렇게 된 게 아닐까?'

뭐,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베니엘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오리지널의 감정을 억눌렀다.

'나는 더 이상 멍청한 망나니 따위가 아니다.'

설령 저 위에 있는 남작과 가문의 식솔들이 아무리 위험천만한 존재라 해도 이제 그에겐 이용하고, 정복해야 할 수단에 불과했다.

"최근 공물의 양이 줄었습니다. 그러니 갈색 노움 부족을 습격하는 게 어떨까요?"

"저도 동의합니다. 노예 수급이 계획만 못 합니다. 놈들을 처리하면 충분히 메꾸고도 남...."

성탑 위의 공간에 마련된 회의장에서 떠들던 인사들이 베니엘의 출현에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베니엘에게 향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이 있었다.

하이 마스터이자,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가주이며, 베니엘의 친부인 존재. 그를 중심으로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왼쪽에는 큰고모 우시드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페샤디아', 그리고 우시드라의 두 번째 남편인 '엘릭카에'가 있었다.

반대편인 남작의 오른쪽에는 베니엘의 의붓누나인 아리아나와 그녀의 후원자이자 가문의 전사장인 '카바세호'가 보였다.

그 외에도 가문의 요직을 맡고 있는 몇몇 다크 엘프들 더 있었다.

베니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내 편이 하나도 없구나. 이러니 오리지널의 기억이 거부감을 일으키지.'

사실 베니엘은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다. 더는 극성스러운 고모들에게 시달라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둘째 고모는 자유 도시로 떠났고, 셋째 고모는 드랄두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건 그 귀찮은 고모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됐다.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느낌이군.'

가문이란 베니엘에게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선언했듯 더는 고모 품의 애새끼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가문에서의 입지를 위해선 지금의 난관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베니엘은 태연자약하게 남작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남작은 자신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미소 지었다.

"왔구나. 아들아."

주변에서 지켜보는 자들은 이제 이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귀를 쫑긋했다.

아무래도 요새 사령관 드랄두를 처리해 버린 건을 가지고 말이 나올 테니까.

비록 베니엘 덕에 검은 요새를 비롯해 주변에 다른 요새들까지 엮인 비리를 파헤칠 수 있었다곤 하나, 유능한 요새 사령관 드랄두가 죽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비리 혐의라곤 하나 마스터급 검객을 요새 사령관으로 삼기는 쉽지 않은 일. 유능한 인재를 처리해 버린 셈이니 남작이 이를 문제 삼을 수 있었다.

옆에 있던 베니엘의 큰고모 우시드라는 남작이 이 문제를 꺼내면 교묘히 끼어들어 베니엘의 공보다 과가 더 크다고 주장할 생각이었다.

'내 딸들이 이 가문을 물려받게 하기 위해선 넌 사라져 줘야 한다. 베니엘.'

우시드라는 자신의 두 딸이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야심을 감춘 상태.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후계자는 아리아나였다.

하나 우시드라가 보기엔 수양딸인 아리아나보다 친아들 베니엘이 훨씬 위험한 존재였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베니엘이 후계 구도에서 탈락하고 남작에게 괄시만 받는 것 같다지만, 자신의 오라비를 잘 아는 우시드라의 생각은 달랐다.

'아들이 성에 안 차서 벼랑 끝으로 미는 거겠지.'

마치 검을 만들기 위해 쇠를 두들기듯 남작은 베니엘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그 단련의 와중에 쇠가 뚝 부러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비정한 다크 엘프의 세계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을 솎아내는 건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우시드라가 보기에 남작은 아들이 뭔가 해내길 바라고 있었다.

'절대로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야.'

실제로 드랄두 때문인지 남작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눈빛으로 베니엘을 쳐다보는 중이다. 그것은 흥미와 기대로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우시드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오크 족장에게 죽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아직 베니엘의 성과를 깎아내릴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요새의 비리를 일소했지만, 지금의 대대적인 감찰 때문에 경계지의 방어가 소홀해진 건 사실이다.

우시드라에겐 적대적인 이웃인 '다크 스파이어' 남작령과 비밀스러운 연줄이 있었다.

뇌물을 주고 다크 스파이어 가문의 군대가 움직이게만 한다면, 베니엘이 요새 전력을 약화시킨 문제를 부각할 수 있을 터.

결국 남작은 이번 사태에 대해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을 내릴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한 우시드라는 때가 되면 즉각 끼어들려고 했다.

한데 나르다리온 남작은 예상 밖의 얘기를 했다.

애초에 요새 사령관 드랄두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재밌군. 아들아. 네 비루하고 비천한 반쪽짜리 마나 하트가 고쳐졌구나?"

역시 하이 마스터답게 베니엘의 변화를 단번에 알아챘다. 이에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이 됐다.

사실 베니엘과 드랄두의 재판 결투에 대해 남작성의 인사들 사이에선 그간 설왕설래가 많았다.

프로보스트가 마스터를 이긴 것이니까.

이에 대해 베니엘이 뭔가 사특한 수를 썼다.

아니면, 드랄두가 역시 반푼이라 전력이 시원찮았다.

엄청난 행운이 겹친 우연에 불과하다, 등등.

저마다 의견이 다양했다.

물론 그중에는 베니엘이 자신의 천형을 극복하고 마스터에 오른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별로 인정받는 얘기는 아니었다.

한데 하이 마스터인 나르다리온 남작이 공언한 것이다.

베니엘이 반쪽짜리 마나 하트를 극복했다고.

모두 베니엘을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대답해 보거라."

남작의 물음에 베니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솔직히 말해선 안 된다. 마신의 마력이라는 건 가능한 숨겨둔 패어야 하니까. 특히 여긴 남작뿐만 아니라 가문의 구성원들 다수가 있다.

이런 장소에서 자기 밑천을 훤하게 까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는 남작의 분노를 살 게 틀림없다.

'남작을 속이는 건 극히 어렵다. 저자는 강자답게 비범하고 통찰력을 가진 존재다.'

이에 베니엘은 적합한 방침을 정했다. 가능한 사실대로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기는 방식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답변을 정리한 뒤에 입을 열었다.

"어찌 된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작님."

28화

돌아온 망나니 (2)

남작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베니엘은 마신의 마력을 얻은 경위에 관해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은광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너진 통로를 파고 들어가던 중 새로운 지역이 나타난 것입니다."

"새로운 지역이라고?"

"네, 푸른 버섯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공동이었는데, 한가운데 언덕에 오래된 건물이 있었습니다."

주변이 조용했다.

대관절, 이 망나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귀를 기울이느라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는 호기심에 그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까진 진실이다. 그리고 이건 중요했다.

먼저 진실을 던진다면 청자들은 이어지는 조작된 이야기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생기니까.

즉, 이제부터는 거짓말을 할 타이밍이란 소리였다.

"건물이라고? 언제 적 건물이더냐?"

남작의 물음에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기원을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타르나이가 세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타르나이'라고 하면 지하 세계의 마족을 말하는 고유한 호칭이다.

사실 마족이란 말보다 타르나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타르나이라? 무언가 마법적인 시설이었나?"

남작은 대번에 저리 물었다.

그도 그럴 게, 타르나이는 지하 세계에서 '마법의 종사'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지하 세계는 지상보다 마력이 풍부하고 짙다. 또한 신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다.

그렇기에 지상보다 훨씬 마학이 발달했는데, 그 최선두에 있는 게 바로 마족인 타르나이였다.

괜히 타르나이가 제국을 세워 지하 세계를 통치하는 게 아니었다. 강력한 다크 엘프조차 타르나이의 세계에선 2등 신민에 불과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타르나이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마법을 연상케했다.

"네, 아주 오래된 마족의 건물이었습니다."

"특이하군. 네가 기연을 만났구나."

일단 베니엘은 자신의 거짓말이 잘 먹히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가 숨겨진 지역에서 만난 건 타르나이의 고대 유적이 아니라, 마신 무결자의 신전이었지만 말이다.

베니엘은 고의로 그것을 감췄다.

기연의 급을 낮춰버렸다고 할까?

게다가 마법의 종사로 불리는 타르나이가 남긴 신비한 힘이라면, 마나 하트의 장애 같은 걸 치유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게 어디까지나 지저의 상식선에서 납득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

'반면 마신의 마력은 차원이 다른 얘기지.'

그것은 그야말로 신의 힘.

단순히 강해지는 걸 넘어 지저의 운명을 바꿀 가능성을 갖게 됨을 말했다.

지금도 아들의 검재를 속으로 질시하고 있는 나르다리온 남작이 그 사실마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수단 방법을 가르지 않고 빼앗으려 들겠지.'

스스로 위대하질 수만 있다면, 자식의 목숨 따윈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작은 그것이 부모로서의 정당한 수확이자 권리로 여길 게 뻔했다.

"네, 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건물 안에는 마력이 뭉친 듯한 에너지의 구체가 있었는데, 저는 본능적으로 그것에 이끌렸습니다. 구체에 손을 뻗자 제 몸으로 흡수되더군요. 이후 한참을 기절했다 깨어나니 마나 하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남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재밌군. 하긴 이 지하에는 온갖 괴이와 보물이 잠들어 있다. 그런 만남이 한 번쯤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의외로 남작은 선선히 받아들였는데 사실 그가 젊은 시절 기연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밀한 얘기였고 가문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남작 역시 자기 밑천을 숨기는데 열심이었던 거다.

하지만 모두가 베니엘의 얘기를 선뜻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큰고모 우시드라가 바로 의문을 나타냈다.

"한 번쯤 일어날 만한 일이지만, 흔한 일은 아닙니다. 가주님."

우시드라는 베니엘을 향해 추궁하듯 물어왔다.

"너는 가주께 진실만을 고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고모님."

베니엘은 큰고모에게만은 깍듯하게 '님'이라 붙였다.

둘째 고모와 셋째 고모가 극성스러운 누나 느낌이라면 이쪽은 리얼 고모였다. 실제로 베니엘과도 나이 차이가 꽤 난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전설적인 일화인 남작의 본가 탈출 때, 둘째와 셋째가 코흘리개였던 반면 첫째 우시드라는 이미 성년이었다.

게다가 우시드라는 인간으로 치면 영락없이 20대 초반으로만 보이는 둘째, 셋째와 외형적으로도 차이가 났다.

그녀는 성숙하고 농익은 느낌이었고, 삼국지의 조조가 보면 좋아할 만한 미부인을 떠올리게 했다.

"스스로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느냐?"

우시드라는 명백히 베니엘을 곤궁에 처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물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여유로웠다.

"당연한 일입니다."

베니엘은 자신이 은광 어느 부분에서 기연을 발견했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제 말대로 찾아본다면 반드시 다시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에 회의장에 있던 몇몇 이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특히 우시드라의 둘째 딸 페샤디아 같은 경우는 대놓고 탐욕스러운 얼굴이 됐다.

왜냐하면 망나니의 마나 하트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정도의 기연이 있던 위치라면 추가적인 탐사로 무언가 더 드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저 아둔하고 성격 급한 망나니가 해당 지역을 제대로 뒤져봤을 리가 없다. 하니 어쩌면 이번 건은 더 큰 발견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

우시드라의 두 번째 남편인 엘릭카에가 딸의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나섰다.

"남작님. 베니엘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영지에 그런 시설이 있다면 조사해 보는 게 도리에 맞겠습니다. 허가해 주신다면 제가 가병을 이끌고 가 자세히 탐사한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에 남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탐욕을 모르지 않아서다.

하나 일단은 작게 끄덕였다.

허가는 아니었지만 긍정적인 몸짓이긴 했다. 이에 엘릭카에는 자신의 딸 페샤디아를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딸의 칭찬을 바라는 듯한 태도였다.

남작은 그런 그에게 바로 대답하는 대신 베니엘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에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두 베니엘에게로 향했다. 기연을 발견한 자니까 그리 물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오라비와 오랜 세월 함께한 우시드라만이 남작의 태도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절대 무시하는 자의 의견 따위를 묻는 성격이 아닌데....'

원래라면 남작은 베니엘의 의사 따윈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야 맞았다.

한데 이번에는 의견을 묻고 있었다. 이건 분명 남작이 베니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

뭔가 안 좋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우시드라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저 망나니가 탐욕을 드러내 일을 망쳐주길 바랄 수밖에.'

저 망나니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길 극도로 싫어하는 놈이니까. 모처럼 남작의 태도도 관대해 보이니 금방 본성을 드러낼 터. 하면 남작은 기분이 상할 게 틀림없었다.

'여태 그래왔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하지만 이어진 베니엘의 대답은 우시드라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저는 가문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베니엘은 끝마무리까지 아주 노련했다.

"무언가 가문에 도움이 될 게 더 발견된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게 가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듣고 있던 엘릭카에가 순간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탐사를 핑계로 무언가 발견하면 몰래 챙기려 했는데 베니엘이 선수를 친 것이다.

물론 저런다고 몰래 빼돌리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상당한 부담을 지게 된다. 남작의 것에 손대는 게 되어버리니까.

남작은 베니엘의 제안을 재깍 수용했다.

"그것 참 고마운 얘기로군. 크큭."

이에 우시드라의 둘째 딸 페샤디아 자신의 친부인 엘릭카에를 노려봤다.

공연히 나서 일을 망쳤다는 힐난이었다.

이에 엘릭카에는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전전긍긍했다. 모처럼 딸에게 점수를 따려다가 망해버렸다.

이처럼 장성한 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다크 엘프 남성의 서글픈 운명이기도 했다.

우시드라에게 세 번째 남편이 생기면서 그를 향한 관심이 최근 급격히 줄어들어 불안한 상황이다.

이런 때 딸마저 등을 돌리면 가문에서 그의 자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른 척 이 상황이 지켜보고 있는 남작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제법이구나. 아들아. 날 향한 아첨과 큰고모 파벌을 향한 견제까지 동시에 넣다니.'

사실 베니엘이 가서 맘대로 뒤져보라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가봐야 추가적인 수확이 없는 데다가 마신의 신전은 무너져 가루가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전을 장식하고 있던 무결자의 신상 또한 바스러진 걸 직접 봤다.

'가봐야 파란 진액 버섯이나 잔뜩 캐겠지. 뭐, 고생해서 용돈벌이나 하겠다면 안 말린다.'

비밀을 들킬 일이 없었기에 베니엘은 여유로웠다.

그런 그를 보던 남작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로 와보도록."

이에 베니엘은 다시 긴장했다.

'설마 마나 하트에 직접 손을 대고 뭔가 확인해 보려는 건가?'

분명 남작은 마신의 마력에 대해서 모른다. 하지만 베니엘은 켕기는 게 있었기에 속으로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네, 남작님."

마른침을 살짝 삼키며 남작의 곁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남작은 베니엘의 몸을 자세히 조사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대신 성탑 바깥으로 보이는 광활한 광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본플로우를 봐라. 아들아."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지하 호수는 장엄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주변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남작성 꼭대기에서 극히 일부만이 보였다.

"광활하군요."

"그래, 한데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저쪽의 지류를 보거라."

호수의 주변에는 마치 나무뿌리 같은 가는 지류가 많았다. 그중 남작이 가리킨 지류는 입구 부분이 버섯 나무와 바위, 온갖 쓰레기로 막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류로는 새로운 물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해서는 부패하고 아주 탁해 보였다.

"저곳 지류의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네, 그융크족이 아닙니까?"

'그융크'라 하면 흔히 두꺼비 인간이라 불리는 아인종이다. 두꺼비와 물고기의 특징을 골고루 가진 이족보행하는 양서류 인간을 떠올리면 된다.

"맞다. 그융크 놈들은 자신들을 향한 위협 때문에 아예 거주지인 지류를 막고 스스로 가둬버렸다. 저 지류는 육상으로 접근이 제한되기 때문에 입구만 막으면 밖에서 함부로 범할 수 없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건 말할 수도 없는 어리석음이지."

남작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두꺼비 인간 그융크들을 향한 경멸을 드러냈다.

다크 엘프가 다른 종족을 향한 경멸과 멸시를 보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으나 베니엘은 속으로 좀 어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 그융크들이 자기 땅에 숨어버린 건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노예사냥 때문이었으니까.

원래 저들은 호수를 오가며 살던 자유로운 씨족이었으나,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이 땅에 온 이후 포탄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로 들어간 것처럼 저 지류에 처박혀 버렸다.

'안 그러면 잡혀서 팔려 가는데 별수 있나.'

베니엘은 그융크족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너는 저들의 고립된 삶을 보며 무엇을 느끼느냐?"

이에 베니엘은 동정심과는 별개로 냉정한 의견을 말했다.

"단기적으론 안전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고립된 곳에서 죽어갈 겁니다. 안쪽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들이 고립된 게 우리 가문의 역사와 거의 같습니다. 잘 버티곤 있다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겠지요."

베니엘의 의견에 남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이 맞다. 아들아. 그리고 이전의 네 삶이 그랬다."

"...."

"너는 반쪽짜리였기 때문에 저기 지류에 갇힌 짐승들처럼 한계를 가진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잔인한 얘기였다. 동시에 남작이 평소에 자기 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남작은 이제 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너는 이제 스스로 천형을 극복하고 광대한 호수로 나왔다. 즉,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니엘은 아직 남작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일단 감사를 표했다.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남작님."

늘 냉소와 비난만 보이던 남작이 무언가 좋은 말을 해주는 건 드물었으니 말이다.

한데 남작은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다.

"베니엘. 후계자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베니엘은 고민하다 답했다.

"음… 신중하게 선별된 개인이, 혈통의 권리에 근거해, 엄격한 평가를 거친 후에 가문의 수장 자리를 계승을 준비하는...."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좀 똑똑해지더니 학자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는구나. 어렵게 여길 것 없다. 간단하다. 후계자란 도전자다!"

"도전자입니까?"

"그래, 가문을 계승하기 위해 가주인 이 몸에게 도전할 권리가 주어진 자. 그게 바로 후계자다."

"!"

이제야 베니엘은 상황이 이해됐다. 남작이 왜 가문의 중진이 모인 자리에서 다 들으라는 듯 구구절절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

남작은 드물게 베니엘을 격려하듯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했지 않았으냐? 너는 광대한 호수로 나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즉, 도전자가 됐다는 거다."

이쯤되자 우시드라를 포함해 대부분이 다 남작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 반발도 하기 전에 남작이 선언했다.

"모두 듣도록. 오늘부로 베니엘을 다시 가문의 후계자 중 하나로 삼겠다. 이제 나의 딸 아리아나는 베니엘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베니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 때문에 남작에게 무언가 보상을 받을 줄은 알았다. 한데 설마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이야?

가문의 중진이 모인 자리에서 망나니의 후계자 복귀가 이루어진 것이다.

속으로 환호하던 베니엘은 그때 문뜩 우시드라와 눈이 마주쳤다.

베니엘은 곧장 눈웃음을 지어줬다.

29화

돌아온 망나니 (3)

우시드라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당장 남작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러야 했다.

'안 돼. 가주의 선언이다.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어.'

현재 그녀는 남작을 향해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다.

남작은 건재하고 그녀의 모략은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다. 하니 결정적인 때가 올 때까지 가문과 오라비에게 충실한 여동생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저 망나니 놈이 다시 후계자가 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 한담?'

한데 그때 아리아나의 뒤에 있는 카바세호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전사장인 그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당장이라도 나서 가주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것만 같았다.

'잘됐군.'

우시드라는 직접 반대하는 대신 은근슬쩍 카바세호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오크처럼 덩치가 큰 카바세호가 콧김을 뿜으며 나섰다.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가주님,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결정 같습니다!"

이에 남작은 그런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느긋하게 답했다.

"그런가?"

"물론입니다! 저 망나니 새끼가 다시 후계자라니요? 성급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대놓고 반대하고 나섰음에도 남작은 기분 나쁜 표정이라곤 없었다.

전사장 카바세호는 계속 자기 의견을 말했다.

"비록 공이 있다곤 하나 저 망나니의 지난 행실을 보십시오. 모두가 치를 떨 정도입니다. 한데 이제 다시 후계자로 세운다면 잘못된 선례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 보게."

"반면 우리 아리아나 님은 다릅니다. 가문의 정한 원칙과 가주의 뜻에 대한 모범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토록 확고하고 훌륭한 후계자가 있음에도 이미 진작 탈락한 저 떨거지를 다시 경쟁 구도에 참여시키는 건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합니다!"

역시 카바세호는 화끈한 남자였다.

남작의 친아들인 베니엘을 면전에서 까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카바세호가 가문 내에서 그 정도로 존중받는 자인 데다가,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신생 가문답게 엄격한 예절이 없는 게 컸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과연 카바세호라고 할까?

본신의 엄청난 실력답게 행동이 거침없었다.

그는 늙은 외눈 검객, 혹은 독안룡(獨眼龍) 카바세호라고 불리는데, 남작이 자기 세력이 없는 아리아나를 위해 후견인으로 붙여준 이였다.

그 뒤로는 카바세호는 철저히 아리아나를 향한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단지 개인에 불과하지만 마스터 상위급의 강자라 그의 태도는 가문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베니엘은 내심 혀를 찼다.

'사실 남작가의 전사장 따위나 하고 있을 수준이 아니긴 하지. 저런 자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쉽지 않단 말이야.'

실제로 나르다리온 남작이 독안룡 카바세호를 무척 아끼는 거로 유명하다.

이건 소문에 불과하지만, 가문의 최상승 검예인 이클립스 녹턴의 몇 가지 요결을 비밀리에 전수받았다는 말도 있었다.

현재 베니엘의 실력으로 저 독안룡을 상대하긴 어림도 없었다.

한편 줄곧 기회만 보고 있던 우시드라는 아주 기꺼웠다.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자연스러울지 궁리하던 그때 의외로 베니엘의 의붓누나 아리아나가 나섰다.

"됐어. 카바세호. 그쯤 해둬."

"아니? 아가씨!"

카바세호가 하나 밖에 없는 주름진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리아나의 태도는 확고했다.

"가주님의 뜻에 따를 뿐이다. 이견은 필요 없다."

이에 카바세호가 불편한 표정을 참지 못했다.

"크흐으음...!"

대신 괜히 베니엘을 노려봤다.

하지만 베니엘은 여유롭게 그의 눈빛을 받아냈다. 이에 카바세호가 희한한 걸 봤다는 표정이 됐다.

왜냐하면 이전이라면 베니엘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을 테니 말이다.

베니엘은 그야말로 선택적 망나니.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전형이다. 그렇기에 카바세호 같이 대놓고 면박을 주는 강자에겐 힘을 못 썼다.

한데 그런 베니엘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러니 카바세호의 눈빛에 이채가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애송이 놈, 과연 성취가 있긴 했다는 건가!'

나이트쉐이드 가문은 검가답게 검객의 서열이 따로 존재했다(참고로 이건 가문의 권력 서열과는 별개의 것이다).

시합이나 각종 공훈을 종합해 발표하는데, 이 서열에 따라 의전이나 포상이 존재했다.

참고로 독안룡 카바세호는 검객 서열 3위의 강자.

반면 베니엘은 검객 서열 12위였다.

물론 이건 마신의 마력을 얻기 전에 평가받은 것이다. 그래도 그 당시 베니엘 정도라고 해도 작은 귀족가에선 전사장을 맡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한데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기이할 정도로 강자가 넘쳐났기 때문에 서열 12위에 불과했다.

이건 그 정도로 나르다리온 남작의 검술을 흠모에 사방에서 모여든 절세 검객들이 가문 내에 많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요새 사령관 드랄두도 그런 이 가운데 하나였고.

베니엘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가 11위겠군. 드랄두 놈을 보내줬으니. 크흐흐.'

실질적인 순위는 아마 더 높으리라.

베니엘은 가문 내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위쪽을 차례로 깨고 올라갈 필요를 느꼈다. 서열에 따라 대우가 확 달라지니까 말이다.

'저 독안룡 놈이 대놓고 남작의 자식인 내게 막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베니엘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대놓고 카바세호에게 말했다.

"당신 자리를 언젠가 받아가지."

이에 독안룡 카바세호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뭐라?"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작을 제외한 회의에 참석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

곧 카바세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도련님. 안 본 사이에 기개가 넘치는 사내가 되셨구려. 하지만 이 카바세호. 말뿐인 자는 싫어하오만."

그건 주제 파악이나 하나는 경고였다. 한데도 베니엘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설마 말뿐이겠나?"

"...."

결국 카바세호가 아리아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님, 도련님께서 새로운 성취가 자신감이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미천한 자가 조금 시험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라. 카바세호. 다만 회의장에선 칼을 뽑는 건 금지다."

"물론입니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카바세호가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섰다.

실로 기골이 장대하다.

누가 이걸 다크 엘프로 여기겠는가? 귀가 긴 돌연변이 오크로 보지.

"어디 한번 보겠습니다!"

독안룡 카바세호는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우우우웅―!

마스터의 경지부터는 주변에서 마력을 뽑아내서 사용하는 게 가능해진다. 단순히 몸 안에 마력을 저장해 쓰는 프로보트스급에선 당해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카바세호는 마스터 중 상위권이니 그 솜씨가 가히 일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서도 대번에 반응이 일어났다.

"으윽! 이 정도라니!"

가장 먼저 우시드라의 둘째 남편인 엘렉카에가 반응했다. 그도 나름 단련한 전사지만 이 자리에선 가장 약한 존재다.

순식간에 다리가 휘청이며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앞에 있는 탁자를 붙잡고는 간신히 버텼다.

그런 부친을 우시드라의 둘째 딸인 페샤디아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여유가 없었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페샤디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사장의 실력은 생각 이상이야!'

어릴 때부터 우시드라의 과보호를 받으며 온갖 귀한 약재를 섭취해온 페샤디아다. 최근 그 성취도 나날이 오르고 있어 자신감이 넘쳐났는데 전사장의 위력에 그만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뭣보다 지금 상황은 전사장이 그녀를 향해 직접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근처에서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데도 속이 메스껍고 현기증이 나서 입을 다물고 간신히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가주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페샤디아에겐 위안거리가 있었다. 자신과 다르게 베니엘은 전사장의 마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흥, 망나니 놈. 오줌이나 지리고 있겠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베니엘을 본 페샤디아는 곧 찢어질 듯 눈이 커졌다.

"!"

이 상황 속에서도 베니엘이 아주 여유롭게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품까지 한다.

"후아암."

페샤디아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도 싶었다.

'둘이 짜고 연극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검술과 마력에 관해서라면 진지한 남작이 그런 광대놀음을 허용할 리가 없다.

게다가 페샤디아의 안목으로 봐도 기세를 일으킨 엄청난 마력이 저 망나니 놈에 집중되고 있었다.

하면 당연히 견디지 못하고 경기를 일으켜야 맞을 텐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베니엘은 여유로웠다.

"다 하셨나?"

이럴 수밖에 없는 게 그의 몸 안에는 마신의 마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바세호가 쓰는 자연의 마력은 풍요롭긴 하지만 투박한 것이다. 반면 마신의 마력은 모든 마력의 본류이자, 정제되고 정제된 순수한 힘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카바세호가 사용하는 마력량이 훨씬 크다지만 서로 그 힘은 비등비등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카바세호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는 잠시 뒤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드래곤의 자식은 역시 드래곤인 건가…."

그는 남작에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섣불리 판단한 건 오히려 저인 것 같습니다. 남작님께선 이미 도련님의 솜씨를 알아보셨군요. 제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남작은 미소를 지은 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처음부터 이리될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다.

카바세호는 뒤로 물러나다가 베니엘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도련님, 그 솜씨를 인정하겠소이다. 언젠가 도전해 오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이에 베니엘은 기쁨을 느꼈다.

여태 자신을 향해 경멸감만을 표현한 전사장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그는 베니엘이 자기 말은 지킬 실력이 있다고 여긴 것 같았다.

"고맙군. 전사장."

이렇게까지 되자 우시드라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쩔 수 없다.'

이런 때에 나서봐야 추해질 뿐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남작이 선언했다.

"베니엘을 후계자로 삼는 데 더는 이의가 없는 거로 알겠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한다."

***

베니엘은 회의 후에 한 가지 선물을 더 받았다.

바로 영지의 치안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나름대로 후계자가 됐는데 무직이면 영 보기 안 좋기 때문이었다.

사실 남작이 치안관 자리를 준 건 이유가 있었다.

더는 베니엘을 따르겠다는 가병이 없어서였다. 그간 망나니를 보필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던 가병들은 지난번 오크 족장과의 전투에서 마침내 폭발했다.

그때 베니엘의 공명심 때문에 호위대장이 중상을 입고, 가병 여럿이 죽었다.

이에 베니엘이 은광으로 간 틈에 모두 더는 못하겠다고 나선 것.

사실 남작의 힘이면 억지로 계속 베니엘을 보좌하게 시킬 수야 있지만, 그도 그건 원하지 않았다. 아들놈의 망나니짓에 공들여 훈련시킨 가병이 상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치안관 자리를 줬다.

왜냐하면 치안관이란 직책은 자체적으로 자경대란 건 꾸려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가병은 더는 지원해주지 못하니 알아서 너랑 어울리는 왈패들을 모아서 다니란 소리였다.

남작 입장에선 후계자에게 적당한 직책도 던져주고, 가병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하겠다.

하지만 베니엘은 기꺼웠다.

'오히려 좋은데?'

가병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남작의 사람이다. 곁에 두면 감시나 할 게 뻔한 일. 반면 자경대를 꾸리면 자신의 사람들로 채울 수 있다.

'마침 돈도 충분하고 말이지.'

자경대란 이름하에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끌어들여 세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베니엘은 근처에 있는 여러 강자와 그들을 고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따로 있었다.

'치안관이 됐으니 합법적으로 버섯 농장을 들쑤실 수 있게 됐군.'

벌써부터 큰고모 우시드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30화

자경대원 모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