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30화

자경대원 모집 (1)

"네? 제가 남작령의 자경대원이라고요?"

갑자기 불려온 올리비에는 베니엘의 일방적인 통보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베니엘은 준엄하게 끄덕였다.

"그래, 한동안 지하에서 지내고 싶다며? 그렇다면 너도 뭔가 해야지. 설마 식객으로 지내며 놀고먹으려던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저도 염치가 있습니다."

대답과 다르게 어쩐지 뜨끔 하는 기색이다. 역시 귀족가 도련님이 그러면 그렇지.

"지하는 지상처럼 풍요롭지 못하다. 놈팡이 놈은 용서할 수 없어.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치안관이 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올리비에는 베니엘이 뭐라도 그럴 듯한 자리를 하나 얻은 줄 알고 저러는 거다.

하지만 베니엘은 혀를 찼다.

"쯧, 뭐 좋은 직책이라고."

이에 올리비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치안관이라면 치안을 관장하는 직책. 귀족으로서 명예로운 일이 아닙니까?"

"지상에서나 그러겠지. 지하에서 치안관은 남작의 하수인이자, 정치 깡패, 무뢰배 집단의 수괴에 불과하다."

애초에 치안관이 하는 게 한국의 경찰 같이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이 아니다. 남작을 위해 영민이 함부로 이탈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여타 불순한 것들을 족족 목매다는 게 임무였다.

무뢰배 집단을 이끌며 남작령에 속한 촌락의 기강을 잡는다고 할까?

"우리가 맡을 업무는 다양하지. 밀수품 단속을 겸해서 상인들에게 상납 좀 받고, 지역 사업체에서 보호비도 뜯고 말이야."

"그거 치안관이 아니라 그냥 깡패 같은데요?"

"뭐,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지."

이럼에도 남작이 치안관을 두는 건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치안관들은 남작에게 정기적인 상납을 하고, 일부 군사적인 업무도 담당했기 때문이다.

남작 입장에선 그들은 세금과 별로도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자 급할 때 요긴하게 써먹을 병력이었다.

가병에 비해 비루하긴 해도 매사 정예를 동원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평판이 안 좋은 직책이긴 했다.

이에 올리비에게 물었다.

"후계자라면서요? 평판을 생각하면 안 좋은 자리 같습니다만."

"그래, 보통 나이트쉐이드 혈족은 안 하지. 다만 나 같은 망나니는 더 내려갈 명성도 없으니 시키는 거고."

사실 베니엘이 순순히 치안관을 받아들인 건 우시드라 때문이다.

'아마 큰고모는 내가 한미하고 평도 안 좋은 직책을 얻었다고 좋아하고 있겠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게 뻔하다. 베니엘이 게임 지식을 아는 탓에 설마 버섯 농장을 노릴 거라곤 생각도 못 할 테니까.

물론 이런 사실은 굳이 올리비에에게 해줄 필요는 없었다.

대신 물었다.

"아무튼 자경단원이 되면 싸움도 해야 해. 활은 좀 쏠 줄 알고?"

원딜이 중요한 건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아뇨. 지상에선 엘프족 말고는 활을 잘 안 쏩니다. 인간은 주로 석궁을 썼는데, 이제는 화승총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지요."

"지하에는 화승총 같은 건 없다고. 그럼 석궁이라도 좀 사와. 칼이랑 방패, 갑옷도 마련하고."

배니엘은 품에서 은화와 금화를 꺼내 넉넉히 건네줬다.

"제가 이쪽 물가에 대해 잘은 모릅니다만, 좀 많은데요?"

"아, 지하에선 은과 금이 지상처럼 귀하지 않아서 그래. 뭐, 그걸 감안해도 많긴 하지."

사실 추가로 시킬 게 있어서 그렇다.

"탈란이란 노움 공예업자를 찾아가. 가서 배지를 발주하고 와. 30개 정도."

베니엘은 미리 그려둔 배지의 도안을 같이 줬다. 그것은 다리에 검은 든 박쥐로 베니엘의 상징물이었다.

"이 배지는 앞으로 베니엘 자경대의 마크다. 대원들에게 나눠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입고 가라."

베니엘이 자신의 옷장에서 망토 하나를 꺼내서 올리비에에게 던져줬다.

그건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벨벳 망토였다.

"이건 아무나 두를 수 있을 게 아니거든. 가게에 들리거든 이 몸이 보내서 왔다고 꼭 말해. 안 그러면 바로 후려쳐 먹으려고 할 테니까."

"아하, 그렇군요."

아마 올리비에는 높은 확률로 막대한 할인을 받게 될 터였다.

아무튼, 짙은 보라색의 망토를 두르니 올리비에는 영웅처럼 근사했다. 순딩이지만 외형은 끝내준다고 할까?

심지어 무결자의 신전에서 벌인 싸움으로 생긴 흉터가 더해져 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베니엘은 그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눈빛만 좀 사납게 만들면 될 텐데 말이야. 얘가 워낙 착하게 생겨서 말이지.'

베니엘의 판단으론 저런 친구는 자경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앞으로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베니엘 자경대에는 약삭빠르고 잔혹한 놈들이 필요했다.

'마침 적절한 후보가 하나 있지.'

베니엘은 책상에 앉아 은광의 늙은 관리관에서 편지를 써나갔다.

***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은광.

현재 이곳은 비난과 원망의 함성과 쩌든 땀 냄새, 어지럽게 움직이는 횃불의 메케한 연기로 아주 어지러웠다.

원래 이곳이 정신 사납고 냄새나는 장소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극성스러웠다. 그리고 그 혼돈의 중심에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제1감독관 퀵포우였다.

"저 쥐새끼를 잡아!"

"기다란 수염을 모두 뽑아버려!"

퀵포우를 둘러싼 이들은 여러 감독관들과 그들이 이끄는 노예였다. 모두 퀵포우를 붙잡기 위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노예 광산에서 제1감독관을 향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 일은 평소 퀵포우에게 알랑방귀를 뀌던 하급 감독관들의 주도로 일어났다.

"이 새끼! 평소에 혼자 존나게 해먹을 때는 좋았지!"

"저 쥐새끼만 없어도 좀 더 먹고살 만할 거다!"

감독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번 일을 벌였다. 반면 노예들은 그간 퀵포우에게 당한 울분이 컸다.

그들은 더불어 답답한 노예 생활의 응어리를 터뜨릴 기회가 오자 마구 날뛰어대고 있었다.

"저놈을 잡으면 앞으로 감독관들께서 배급을 늘려주신다고 했다!"

"그래! 저 쥐새끼가 비리를 저지른 탓에 빵이 부족했던 거야!"

퀵포우는 자신을 둘러싼 악의에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얻어맞아서 한쪽 눈이 퉁퉁 부었고, 땅바닥을 굴러 흙투성이였다.

하나 그럼에도 아직 사납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제자리로 안 돌아가!"

짜악―!

노예들을 본능적으로 섬뜩하게 만드는 퀵포우의 채찍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퀵포우는 오른손에는 채찍을, 왼손에는 단검을 들고 버티는 중이었다.

약간이라도 물렁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끝장이란 걸 알았기에 퀵포우는 악을 써댔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그래! 베니엘 도련님께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으실 거다!"

이에 감독관 중 하나인 다크 엘프가 나섰다. 이름은 '주라'로 본디 그는 가병 출신이지만 영락해서 노예 감독관을 하는 자였다.

"멍청한 소리 하는군! 이 쥐새끼야! 그 망나니나 널 도와줄 거 같아? 지난번에 제대로 털린 주제에!"

사실 퀵포우가 갑자기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건 베니엘의 일이 컸다.

베니엘이 퀵포우의 재산을 탈탈 털었다는 소문을 빠르게 광산에 퍼졌고, 이는 그가 베니엘의 라인이 아니라 먹잇감 정도였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이에 그간 퀵포우에게 불만이 많았던 다른 감독관들이 노예들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폭력 사태가 벌어지자 퀵포우의 부하들은 빠르게 그를 배신했다.

더는 자기 상관이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도 안 나오는 놈에게 붙어 있을 바에는 이후 재편된 광산의 권력 구도에 재빠르게 편승하는 게 좋았다.

"이만 포기하십시오. 대장. 아니, 전직 대장 나으리! 크흐흐흐!"

"저 쥐새끼가 아직 숨긴 재산이 제법 있다고 한다! 이번에 같이 나눠 먹자!"

"망설일 것 없어! 어서 잡으라고!"

퀵포우가 간신히 쥐어짜낸 마지막 위엄도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반역자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저놈을 잡는 놈에게 금화 다섯 개다!"

다크 엘픅 감독관 주라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모두가 우르르 달려들었다.

한데 그때 퀵포우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던졌다.

퍼어어엉!

그건 후추 버섯 폭탄이었다.

터지면 주변에 검은 포자 구름을 일으키는데 암흑 시야조차 효과적으로 차단해 준다.

동시에 후추를 떠올리게 하는 매운 냄새 덕에 후각으로 목표를 찾는 종족의 감각도 막아선다.

거기에 더해 지독한 기침과 눈물은 덤이다.

당장 죽는 소리가 나왔다.

"끄아아아악! 내 눈! 눈이!"

"물 좀 줘! 물!"

"아파! 아아아악!"

이어서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콜록! 콜록! 씨발! 저거 분명 소지가 금지된…!"

"쿠아아악! 쿨럭!"

퀵포우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쥐인간이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본류인 쥐새끼들처럼 네 발로 재빠르게 기어 포위자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가 향한 곳은 광산 관리관의 거처였다.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간 퀵포우는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찌이익! 찍! 관리관님! 큰일입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차를 느긋하게 마시고 있던 관리관이 졸린 눈을 뜨며 답했다.

"반란이라니? 그저 약간의 권력 다툼이 아닌가?"

"아, 아닙니다! 찍찍! 이대로는 광산의 질서가…!"

관리관은 피식 웃었다.

"질서야 내일이면 돌아오겠지. 저들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반기를 든 게 아니라 자네가 싫은 것뿐이니까."

"아니, 이렇게 되면 생산량에 차질이...!"

"그거야 감독관들이 저 어리석은 노예를 더 쥐어짜면 될 일이고. 생각해 보면 자네도 그런 방식으로 제1감독관에 오른 게 아니었던가?"

이 지적에 퀵포우는 일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실 이전의 제1감독관은 '궁크'라 불리던 강력한 스티지안 오우거였다.

지하 세계에서 힘이라 하면 스티지안 오우거였기에 궁크도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한데 그런 궁크를 꾀를 내 쫓아버린 게 퀵포우였으니 대답할 말이 궁할 수밖에.

참고로 궁크는 현재 은광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지도 못한 채 노역 중이었다.

언젠가 궁크가 돌아오는 날에 은광에 재앙이 일어날 거라는 전설이 존재할 정도였다.

관리관은 어버버거리는 퀵포우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그저 잡일을 맡을 자가 필요했던 것뿐이네. 그리고 그게 딱히 자네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일만 잘하면 아무라도 괜찮은 법이야."

그건 마치 사형 선고와 같아서 퀵포우는 아연실색해졌다. 그런 그를 보며 관리관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종놈이 용도를 다한 것 같구만."

이에 퀵포우가 발끈했다.

"저만큼 훌륭하게 광산을 돌볼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이 새끼가 누구 덕에 편하게 잠만 퍼잤는데)!"

관리관은 그런 퀵포우를 보며 낮게 웃어댔다.

"속으로 욕하는 게 다 들리는군."

"…솔직한 심경으론 대놓고 하고 싶습니다!"

"뭐, 그래도 상관없네."

퀵포우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질러버렸다.

"맨날 시체처럼 잤으면 이럴 때 한번 도와달란 말이다! 이 영감탱이야!"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쏘아보는 퀵포우의 모습에 관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모습이 훨씬 보기 좋구만. 자, 받게나."

관리관이 책상 위로 던진 건 편지였다.

퀵포우는 머뭇거리며 다가와 그걸 살폈다.

"이건 대체…?"

"자네 명줄이 좀 질긴 모양이야. 예상 외구만. 이번에 자네가 전에 광산 아래로 밀어버린 그 덩치 큰 오우거를 따라갈 줄 알았는데. 끌끌끌!"

그건 관리관에게 보내는 베니엘의 요청서로, 제1감독관 퀵포우를 데려가서 쓰고 싶단 얘기였다.

"도련님께선 다시 후계자가 되셨으니 이 광산의 늙은이에게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있으시지.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무시했겠지만 어쩔 수 없구만. 자, 어쩔 텐가?"

퀵포우는 순간 구원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그는 환희하는 표정으로 편지를 들어올렸다.

"광산을 떠나겠습니다! 도련님을 따라야지요! 찌익!"

관리관은 고개를 주억였다.

"뭐, 좋네. 대신 가기 전에 저 밖의 소요 사태 좀 해결하고 가게나. 슬슬 잘 시간인데 시끄러운 건 질색이거든."

거기까지 말한 늙은 감독관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파리를 쫓듯 손을 흔들었다.

이에 퀵포우는 용기백배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주변에는 감독관과 노예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퀵포우는 두렵지 않았다. 그의 손에 선명한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퀵포우는 일갈했다.

"야이, 좆같은 새끼들아! 대가리 박아!"

31화

자경대원 모집 (2)

반역자들은 쥐새끼의 성난 일갈에 모두 합죽이가 돼버렸다.

"뭐, 뭐지?"

"저 쥐새끼가 왜 저래?"

정황이 수상하긴 했다. 관리관의 거처에 들어갔던 퀵포우가 갑자기 기세등등해져서 나타났으니까.

분명 뭔가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눈치가 빠른 몇몇 감독관과 노예들은 주춤주춤거렸다. 이를 보며 퀵포우는 그의 작은 어깨를 태산같이 벌렸다.

"이걸 봐라! 이 비천한 것들아!"

그것은 베니엘의 편지였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존귀한 도련님께서 나를 치안감독 보좌로 임명하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파란을 일으켰다. 여기 모인 태반이 치안감독 보좌가 대체 무슨 직책인지 알지 못했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자리 같았으니까.

더군다나 나이트쉐이드라 하면 남작령의 절대적인 이름이었다. 아까까지 이성을 잃고 날뛰던 이들의 정신이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읽은 다크 엘프 감독관 주라가 나섰다.

"그분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망나니라 불리는 처지가 아니냐! 후계자도 아닌 이가 치안감독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주라는 한때 가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작가의 법도에 대해 제법 알고 있었다. 이처럼 뭔가 아는 자가 입을 열자 무리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맞다! 쥐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을!"

"너는 어차피 오늘 뒤지게 되어 있어! 까불지 말고 이리 와! 감히 후추 버섯탄을 던져?"

이에 퀵포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혼자 웃어댔다. 마치 그들의 반항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말이다.

"찌지직! 찌지지직!"

평소에 듣기 싫고 짜증 나던 쥐새끼의 웃음소리가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리 섬뜩할 수가 없었다. 모두 묘한 두려움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퀵포우는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결정타를 날렸다.

"도련님께선 다시 후계자가 되셨다! 이것은 남작님의 준엄한 명령이시다!"

이 선언은 파란을 일으켰다.

"후계자라고!"

"아니, 도련님이 다시?"

"이거 일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냥 망나니와 후계자인 망나니와는 천지 차이다.

모두 얼굴이 퍼레졌지만, 특히나 이번 일의 주동자인 다크 엘프 주라가 특히나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됐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되는…!"

그런 주라를 보며 퀵포우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감히 치안감독 보좌인 날 모함하려고 해!"

퀵포우의 번들번들한 눈빛이 모두를 훑었다.

"내 오늘 은광의 기강을 바로잡고! 너희 비렁뱅이들에게 예의와 도리를 설파하겠다!"

동시에 퀵포우는 자신만큼이나 약삭빠른 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 후회하고 반성하는 자는 당장 내 밑으로 오라! 힘깨나 쓰는 놈들은 도련님에게 데려가 주마!"

분위기가 급변했다. 방금 전까지 반란을 일으켰던 무리가 급격히 퀵포우에게 들러붙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어리석어서 감히! 감독관님!"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발치에 조아립니다! 부디 그 수염 성성한 입으로 자비의 말씀을!"

이 상황에 퀵포우는 비열하게 웃어댔다. 그리고는 전향자들 중에 눈에 띄는 삼인조를 가리켰다.

"너희 삼 형제! 몽둥이를 들고 이리 오도록!"

퀵포우가 가리킨 이는 덩치 큰 홉고블린 삼 형제였다.

이들은 과거 영지에서 강도짓을 하던 녀석들로 성정이 거칠고 싸움을 잘했다. 퀵포우는 이놈들을 자신의 전위대로 써먹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네! 퀵포우 님!"

"우리 형제들이 퀵포우 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아까까지 퀵포우에게 욕을 내뱉던 놈들이 이제는 충성스러운 기사를 떠올리게 했다.

하나 퀵포우는 괘념치 않았다.

충성이란 무릇 그런 게 아니던가? 그는 이번 일의 주동자인 주라와 다른 감독관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놈들을 매우 쳐라! 내 오늘 날을 잡고 제대로 단도리를 칠 것이야!"

***

형세가 역전되자 그다음은 쉬웠다. 퀵포우는 자신에게 들러붙은 자들에게 명해서 반역을 일으킨 11명의 감독관들을 모조리 붙잡았다.

그 뒤 퀵포우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점을 말이다.

"이 미친놈들! 이렇게 많이 해 먹었다고? 찍찍!"

감독관들을 붙잡은 뒤 여러 밀고를 받아 그들의 비리를 파헤쳤다. 그러자 막대한 비리의 정황이 드러났던 것이다.

"기가 막히군!"

퀵포우는 감독관이란 놈들이 하나 같이 이런데, 어떻게 여태 광산이 굴러간 건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은, 감독관들이 우시드라를 비롯해 저마다 가문에 섬기는 이들에게 상납을 해왔다는 것.

남작 몰래 가문의 인물들이 그의 꿀통에 숟가락을 얹었던 셈이다. 이게 다 남작이 내정에 무관심하고 검술만 파니 벌어진 일이었다.

퀵포우의 정치적 감각은 이것이 매우 쓸모 있는 건수란 걸 알아챘다.

"모두 털어라! 모조리!"

그는 감독관들이 마련한 비자금을 비롯해 녀석들이 가문의 각 인물들과 연통했던 증좌를 긁어모았다.

재산은 무려 7만 두크에 달했고, 편지도 수십 장이 넘었다. 퀵포우는 이것들을 뇌물로 바칠 생각이었다.

"훌륭하군! 도련님께서 좋아하실 거다!"

이 정도 성의면 앞으로 창설될 베니엘 자경단에서 반드시 중용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쥐의 교활한 본능상 이 돈들을 자기 몫으로 빼돌리고 싶었으나, 노예 마법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바쳐 앞으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게 훨씬 낫단 판단이었다.

'망나니 놈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을 터. 이 정도 받아먹으면 날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퀵포우는 흐뭇한 얼굴로 짐수레에 재산을 잔뜩 실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이번 일의 주동자인 다크 엘프 주라를 과거 제1감독관이었던 궁크가 있는 은광 깊은 곳으로 던져 넣었다.

그곳은 승강기가 없이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궁크가 정기적으로 올려보내는 은광석을 대가로 식량을 내려주는 장소였다.

"이번에는 주라 놈도 같이 내려보내. 찍찍!"

"사, 살려주십시시시―십오!"

주라는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그는 거대한 오우거 궁크의 공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퀵포우는 잔인하게 웃었다.

"시끄럽다! 운이 좋으면 네놈을 먹지 않고 졸개로 쓸지도 모르지! 그럼 잘 가라!"

퀵포우는 몸소 권양기의 레버를 내렸다.

철컥!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승강기가 저 암흑천지의 광산 아래로 사라졌다.

"안 돼에에! 퀵포우 이놈!"

주라가 마지막에 절규를 내뱉어댔지만 퀵포우는 듣는 척도 안 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닉스포트로 가자! 은광 따위는 영원히 안녕이다!"

퀵포우는 짐수레와 함께 호위병, 그리고 경호원으로 삼은 홉고블린 삼 형제를 데리고 닉스포트로 향했다.

"도련님! 이 충신 퀵포우가 갑니다! 찌이익!"

쥐새끼는 밝은 앞날을 꿈꾸며 행복하게 웃었다.

***

일단 베니엘이 확보한 인재는 둘이었다.

올리비에와 퀵포우다.

하지만 자경대를 꾸리기엔 이들로는 부족하다. 특히나 둘 다 병사를 이끈다는 것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었으니까.

올리비에는 일전에 탐사대를 전멸시킨 경험이 있고, 퀵포우는 노예에게 채찍질이나 할 줄 아는 놈이다.

베니엘에겐 경험 많은 장교가 필요했다.

'마침 적합한 인물이 있긴 해.'

하지만 그 인물에게 가기 전에 처리할 게 있었다.

베니엘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축 늘어져서 냄새나는 인형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일전에 검은 요새의 창고에서 찾아낸 죽은 버섯 인간의 사체다. 반쯤 썩은 이 작은 사체는 베니엘이 보기에 아직 살릴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망나니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은 원예 도구를 잔뜩 준비했다.

이것들은 평소 원예에 소양이 있는 의붓누나 아리아나에게 빌려온 것이다.

갑자기 베니엘이 나타나 모종삽과 화분 같은 걸 달라고 하자 아리아나는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베니엘은 늘 그렇듯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는 아리아나의 원예실에서 필요한 걸 챙겨서 나와버렸다. 아리아나는 분노했지만 베니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이가 더 나빠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아리아나와의 호감도를 올릴 만한 귀한 화초를 구해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돈 주고도 못 살 희귀 화초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베니엘은 커다란 화분에 흙은 담고는 아리아나의 원예실에서 가져온 특수한 비료를 섞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그 이끼라 불리는 희귀한 이끼의 진액과 글루터 딱정벌레의 껍질을 간 가루, 또한 바인 나무라 불리는 지하 세계의 나무의 수액이었다.

이 셋을 조합해 열심히 섞은 뒤 버섯 인간을 파묻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베니엘은 귀한 황금 포자 일족의 사체를 안에 뉘었다.

"네게 행운이 따르길 바라지."

베니엘은 흙으로 버섯 인간을 덮으며 빌어줬다.

솔직히 확률은 반반이었다. 원래라면 삼 분의 일도 안 되겠지만, 베니엘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귀한 비료를 마구 쓴 덕이었다.

아마 일주일 안에 결과가 나올 터였다.

'제발 살아나라.'

이 황금 포자 씨족의 버섯 인간을 주워온 건 단순히 동정심 때문만이 아니다. 녀석이 깨어나기만 한다면 아주 큰 쓸모가 있을 것이다.

황금 포자 씨족은 버섯 인간들 사이에서 왕족으로 통한다. 그러니 버섯 농장 사건을 해결할 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또 장기적으로 베니엘이 추구하는 큰 계획을 위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거였다.

흙을 다 덮은 베니엘은 화분에 충분히 물을 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

현재 베니엘이 걷고 있는 곳은 나이트쉐이드 일족의 주거지와 다른 검박한 장소였다.

"하압!"

"핫―!"

주변에선 무기를 휘두르는 기합성이 들려온다. 이곳은 성내에서 가병이 머무는 곳이었다.

연무장과 함께 벽돌을 쌓아 만든 숙소 등이 보였다. 주변의 나무 거치대에는 연습용 무기들이 잔뜩 세워져 있었다.

베니엘은 애검인 프로스트바이트를 찬 채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헛, 망나니가?"

"쉿, 조용히 해. 경을 칠라."

"대체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베니엘의 출현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그간 평판이 평판인지라 호의적인 시선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성내의 소문은 빠르다. 베니엘이 다시 후계자가 된 걸 모두 아는지라 대놓고 무례하게 구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먼저 인사를 해왔다. 다들 권력 구도의 변화에 민감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베니엘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그를 가병들은 호기심 어리게 쳐다봤다.

최근 베니엘은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솔직히 이전에 야만 오크 족장에게 맞아 나가떨어졌을 때만 해도, 망나니가 그럼 그렇지란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후 베니엘이 보여준 행보는 매우 특이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노예 광산으로 노동 교화형을 가더니, 이후에는 검은 요새에서 사령관 드랄두와 재판 결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러니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갑자기 성취가 올랐다지?"

"뭐, 원래 강하긴 했잖아. 프로보스트였으니."

"아니,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게 문제지. 마스터 드랄두도 깼다는데?"

"거짓말 아냐?"

"구라가 아니다. 그 드랄두가 죽었다니까?"

"맙소사. 세상에…."

연무장 구석에서 무기를 정비하는 척하며 가병들이 소곤거리는 게 들려왔지만 베니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딜 가나 관심을 끄는 존재가 됐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가병들 중에서 유난히 사나운 얼굴로 베니엘을 노려보는 부류가 있었다.

"지금 저 망나니가 어디로 가는 거지?"

"설마 쿠르신 대장님의 숙소 쪽으로?"

"저 망할 새끼가 요양 중인 대장님에게 볼 일이 있는 거야?"

작게 말하고 있지만 다 들렸다. 그들이 이렇게 날 선 태도를 보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베니엘을 경호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두 베니엘에게 큰 원한을 갖고 있었다. 야만 오크와의 전투에서 공명심에 가득 찬 베니엘 때문에 그들 중 반절 이상이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베니엘은 호위병은 겨우 다섯. 그마저도 몸이 성하질 못한 상태였다.

결국 참다 참다 폭발해서는 남작에게 요청해 망나니의 호위를 그만뒀고, 결국 그 여파로 베니엘이 치안관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을 호위했던 인원 중에 유일하게 한 명, 그만두지 않은 이가 있다.

바로 호위대장이었던 '쿠르신'이란 자다. 쿠르신은 전도유망한 프로보스트급 검객으로, 남작의 기대를 한껏 받던 이였다.

향후 그가 가병을 이끄는 전사장 자리를 물려받을 거란 소문이 파다했었다.

인품이면 인품, 실력이면 실력,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인재였는데 지난번 야만 오크와의 전투에서 베니엘 때문에 중상을 입었다.

만용을 부리며 돌격하는 베니엘에게 쏟아진 적 주술사의 저주술을 막아내느라 양팔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향후 전사장까지 바라볼 수 있는 인재가 망나니 뒤치다꺼리하느라 자신의 미래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전투 후 이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망나니 베니엘은 자신의 호위대장이었던 쿠르신에게 여태 단 한마디의 사과나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저 쓸모가 있었다고 짧게 평했을 뿐.

한데 그런 망나니 놈이 갑자기 병석에 누워 있는 호위대장 쿠르신을 찾아온 것이다.

결국 주변이 시끄러워졌고, 이제는 베니엘을 저버린 호위병들이 우르르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하! 이제 와서? 대체 무슨 면목으로 나타나신 건지?"

"양팔을 잃은 검객이 대체 심경인지 알기나 합니까?"

좀처럼 하극상이 일어나지 않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기풍을 생각해 볼 때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정도로 호위병들이 대장을 존경하는 데다가 베니엘에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놓고 반기를 들고 나서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가병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저 친구들이 도련님을 막아섰다."

"허? 이전에 도련님의 호위병들이지?"

"뭐야? 싸움이 나려는 건가?"

베니엘은 이 상황이 다소 억울했다. 모든 게 자신이 아니라 오리지널이 벌여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새끼가 싸지른 똥이 끝이 없네.'

하지만 오리지널이 떠난 지 이미 오래고 이젠 그가 베니엘이다.

이 문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해결해야만 했다.

32화

자경대원 모집 (3)

사방의 시선이 모인 와중에 하극상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야 많았다. 귀족의 지위를 이용해 놈들을 위협해도 되고, 온건히 설득할 수도 있다.

아니면 망나니답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

아마 오리지널이었다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모두가 보는 와중에 자신을 망신 준 이 전직 호위병들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나는 그 망나니가 아니다.'

베니엘은 문뜩 주변을 둘러봤다. 온갖 표정의 가병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 다들 베니엘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막 도착한 듯한 의붓누나 아리아나까지 보였다. 얼굴에 흙이 좀 묻어 있고 모종삽과 이끼를 키우는 플라스크까지 들고 온 게 베니엘이 원예 도구를 훔쳐 간 것에 분노해 쫓아온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니엘은 자신을 막아선 자들에게 말했다.

"상당히 늦은 인사이다만, 이전 싸움에서 내 목숨을 지켜줘서 고맙다. 생명을 빚졌다. 이 은혜를 잊지 않지."

"!"

이에 막아선 자들이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설마 그 망나니 놈이 저렇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베니엘의 말에 놀라기는 주변에 있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망나니가 뭐라고 한 거야? 잘못 들은 거지?"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멍청아, 좀 조용히 말해. 다 들리겠어! 경을 친다고!"

하지만 지난 감정의 골은 깊었다. 솔직한 감사만으로 전직 호위병들의 마음을 움직일 순 없었다.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자가 나서서 따져왔다.

"말은 그럴싸하십니다! 하지만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태도를 바꾸는 게 어찌 귀족에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에 베니엘은 보상안을 제시했다.

"단순히 말로 끝낼 생각은 없다. 지난 전투에서 죽은 자들의 가족에게 3천 두크를 위로금으로 지급하겠다. 그것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갈음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3천 두크!"

상당한 거금이었기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가병의 대우가 좋다곤 해도 전사자에게 3천 두크나 위로금이 지급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전직 호위병의 노여움은 단순히 돈으로 달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흥! 그깟 금전에 우리가 마음을 돌릴 줄 아십니까? 도련님."

"음...."

"우리는 그저 사람 대접을 원했던 겁니다. 전투에서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아니, 애초에 당신은 우리 이름이나 기억하십니까?"

그 지적에 베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오리지널의 기억에 부하들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군… 지독해.'

오리지널은 정말로 그들을 도구 정도로만 여겼다. 얼굴이나 대강 외우고 필요할 때 써먹었던 게 전부.

'아무리 부하라지만, 저들도 한 사람의 생명이고 각자의 인생을 갖고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베니엘은 탄식했다. 그가 참담한 심경에 미간만 좁히고 있자 호위병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 보십시오! 그토록 많은 생명이 당신의 만용 때문에 죽어갔는데 어찌 한 명의 이름조차...."

"바니카말."

"…?"

"아드릴."

"…!"

이어서 베니엘은 앞을 막아선 나머지 셋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발키무, 네그라크, 오사키아."

설마 진짜로 이름을 댈 줄은 몰랐던지 전직 호위병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실 베니엘은 게임 지식 덕에 아는 거였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 스토리까지 꿰고 있었기에 더욱 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게임에 대해 설명할 순 없었으므로 적당한 핑계를 댔다.

"미안하다. 너희 말대로 지금까지 이름을 몰랐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

"...."

"하지만 이후에 조사했다. 당시 내 목숨을 구해준 자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이제야 알아봤던 점에 대해선 유감이다."

주변에 몰려든 자들은 모두 침묵했다. 이젠 작은 술렁거림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시선과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탓이다.

베니엘은 담담히 자기 말을 이어갔다.

"믿기 어렵겠지만 은광에서의 시간이 날 바꿨다. 이제야 너희 이름을 부르게 된 걸 안타깝게 생각한다."

"...."

"지난 일에 대해 지금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사과하겠다."

"이제 와서 그딴…!"

"나는 너희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도 않겠다."

"...."

"다만, 돌아온다면 이전과는 다른 대우를 약속하지. 내 배움을 너희에게 나눠주겠다. 너희가 바라는 대로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게 돕겠다. 또한 한 명의 전사이자 동지로서 여기겠다."

"!"

다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전직 호위병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배움을 나눠주겠다니.

가병들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바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가병들이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들어온 건 그 이름 높은 검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가병들마다 어떤 부서로 가는지, 어떤 이의 부하가 되는지에 따라 처지가 달라진다. 상승의 기술을 배우는 자도 있고, 어떤 이는 그냥 말단에서 하급 검법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가병들은 어떻게든 더 강력한 검법을 배울 수 있는 위치로 가길 끊임없이 바랐다.

한데 베니엘은 나르다리온 남작조차 공인한 검의 천재다. 그 솜씨 때문에 모두 그를 검귀라 불렀다.

게다가 최근 마나 하트라는 천형을 극복했다. 그러니 이 괴물이 앞으로 어떤 경지를 보여줄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검귀가 제대로 검법을 알려준다? 이건 단언컨대, 가병들에겐 돈으로 살 수도 없는 기회가 될 게 틀림없었다.

이 선언에 전직 호위병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베니엘은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생명의 빚은 잊지 않겠다. 고맙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 무례를 사과하겠다."

이 파격적인 행보에 모두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베니엘은 더는 막아서지 않는 전직 호위병들을 지나 목적지로 향했다.

아무래도 망나니가 일으키는 파란은 끝이 없어 보였다.

***

이번 사태에 가장 놀란 건 아마 아리아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기에 저토록 진지하게 사과한다는 게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귀신에라도 홀렸나?'

그녀는 자신의 귀한 비료를 훔쳐 간 것에 대해 따지겠다는 목적도 잊어버렸다.

원래는 왼손에 든 수정 플라스크로 대가리를 깨고, 오른손에 든 모종삽으로 죽을 때까지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뭐라 할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자신의 원예실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중이었다.

'진짜로 망나니 놈이 달라진 거야?'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리아나는 금세 부정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저놈이 뭔가 수작이 있어 태도를 바꾼 게 틀림없었다. 다만 그것만 해도 놀라워서 그 포악한 성정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복잡한 생각 속에서 원예실에 도착하자 뜻밖의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드란실 공자께서 보내셨습니다."

하녀가 꽃다발과 편지를 두고는 물러났다.

아리아나의 표정은 곧장 일그러졌다. 그녀는 귀한 난초 꽃으로 만들어진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편지는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정말 짜증 나네!'

드란실 공자는 몇 해 전부터 지속적으로 아리아나에게 추근거려 그녀를 귀찮게 하는 존재였다.

드란실 공작가의 차남인 그는 베니엘의 상위 호환이라고 할 정도의 망나니로, 공작가의 재앙으로 통했다.

드란실 공작가는 흔히 용인족이라 불리는 드래곤킨(Dragonkin)으로, 드래곤의 머리를 한 인간형 생명체의 가문이었다.

드래곤킨은 수가 적어서 그렇지, 지하에선 마족인 타르나이 못지않게 강력한 존재라 일대의 여러 가문이 드란실 공작가를 섬겼다.

신생 가문인 나이트쉐이드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런 정치적 이유로 아리아나는 그 호색하고 평판 나쁜 드란실 공자를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기에 해가 갈수록 그 분노가 더해가고 있었다.

'대체! 그 드래곤 대가리는 날 왜? 같은 드래곤 머리를 한 여자나 찾으러 갈 것이지!'

아리아나는 드래곤킨이 다크 엘프에게 구애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드란실 공자의 취향이 뒤틀린 건지, 아니면 지하 삼대 미녀로 통하는 아리아나의 미모가 종족의 벽조차 초월해 버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제는 이 사태가 해결될 기미는 보지 않고, 날이 갈수록 드란실 공자의 추파가 노골적이 돼 간다는 것.

주변에서 도와줄 이도 없었다. 남작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겐 정치적 입장이란 게 있었으니까.

그 외에 집안에는 적뿐이었다.

아리아나는 영민한 이다. 우시드라를 비롯해 가문의 어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리아나는 자신이 고립돼 있다는 느낌에 괴로워졌다.

한데 이럴 때 어째서인지 베니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지금의 베니엘이 아니라, 어린 시절 한 점의 티 없이 순수했던 모습이었다.

그 당시 베니엘은 아리아나에게 상냥했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해준 적까지 있었다.

그 꼬마 기사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아리아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지금에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다. 아리아나는 여태 손에 들고 있던 모종삽을 근처에 내려놓고 한숨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이미 그 시절의 베니엘은 없어.'

스스로 그리 부정하면서도 어째서인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까 본 베니엘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 어린 시절 그녀가 좋아했던 작지만 의젓했던 동생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리아나는 잠깐이지만 베니엘이 드란실 공자와의 문제에서 자신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머리칼이 잔뜩 헝클어질 정도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이 무슨 추한 미련이란 말인가? 이미 그 시절의 베니엘은 사라지고 없는 게 현실이거늘.

아리아나는 자신이 베니엘에게 받았던 상처를 되새겼다. 갑자기 가슴팍이 서늘해지고 속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녀는 이를 앙다물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야.'

뭣보다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게 맞았다. 남작 위를 물려받고,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더러운 손길로 떨쳐 낸다.

필요하면 드란실 공자를 죽여서라도 말이다. 아리아나는 위험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던 묘한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 보라색 꽃은 '라시드'라 불리는 데 꽃말은 '소리 없는 죽음'을 의미했다.

***

베니엘은 호위대장의 숙소로 향했다.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가자 초췌해 보이는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호위대장 쿠르신이었다.

"도련님."

남자는 베니엘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양팔이 없었기에 쉽지 않은 듯했다.

"누워있어."

베니엘은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허리 힘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평소 그의 성품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일 처리가 엄정했지만, 부하들에겐 따뜻한 인물이었다.

마치 삼국지의 조운이 떠오르는 듯한 자라고 할까?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흐렸고, 고통에 잠겨 있었다.

베니엘은 혀를 찼다.

'오리지널 따위에겐 과분한 자였다.'

현재 그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지하 세계에는 신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지상처럼 신성 마법으로 사라진 두 팔을 재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니 그의 검객으로서의 커리어는 끝장이 난 것이었다.

"몸은 좀 괜찮나?"

의례적인 물음에 쿠르신은 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회복 중입니다.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를 잃진 않은 태도지만 그의 눈동자는 베니엘을 보고 있지 않았다.

딱 봐도 얼마나 깊은 실의에 빠진 건지 알 만했다. 그저 타고난 절제력으로 간신히 광란을 벌이지 않고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베니엘은 그가 아까웠다.

'이대로 버릴 순 없는 인재지. 다행히 내가 해결책을 알고 있고.'

그는 곧장 본론을 꺼내놓았다.

"쿠르신, 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33화

자경대원 모집 (4)

베니엘의 얘기에 쿠르신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잠깐이지만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깊은 절망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제게 괴물의 팔이라도 달아주시려고 그러십니까?"

지하에는 신성력이 없는 대신 생체 실험이나 생물을 합성하는 마학이 발달했다. 그렇기에 불구가 된 전사에게 강한 괴물의 신체를 붙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듣자니 오랜 전설에 의하면 '가재발'이라는 유명한 좀비가 있었다지요. 팔 대신 거대 가재의 앞발을 달고 다니던 놈이었다고 합니다. 이 쿠르신도 그렇게 개조해 쓰시렵니까?"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으니 검객이라 할 수 없겠지. 나는 네게 기계 팔을 줄 생각이다."

이에 쿠르신이 공허하게 웃었다.

"허허허…. 절 조롱하러 오신 겁니까? 여전히 도련님다우시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골렘이나 쓰는 기계 팔로는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일으키지 못하는 걸 모르십니까? 알고도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맞는 얘기였다. 게다가 기계 팔로는 검술의 섬세함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물론 베니엘도 이점을 잘 알았다.

"보통의 기계 팔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드워프왕의 황금팔이라면 어떨까? 그건 특별한 물건이다."

"설마… 그 전설을 믿으시는 겁니까?"

지금은 멸망한 '크다쿰'이라는 지하 드워프 왕국이 있다.

지하는 보통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로 나뉘는데 크다쿰은 상층부에 자리 잡은 번영한 왕국이었다.

애초에 지저인이 세운 왕국이 아니라 지상의 드워프들이 땅 밑으로 파고 내려와 상층부에 건국했다. 이후 그들은 지상과 지하의 중개 무역으로 크게 성세를 이뤘다.

문제는 이게 지저인들의 질투를 샀던 것. 한 무리의 악마 숭배자들이 도시로 잠입했고, 지옥으로 통하는 차원 관문을 마구 열어버렸다. 이후 도시에는 악마들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게 이미 수백 년 전의 일이지만 크다쿰은 여전히 악마들의 점거하에 있었다.

"단순히 전설이 아니다. 크다쿰의 드워프왕은 정말로 전설적인 황금팔을 만들었지. 그 기계 팔은 일반적인 팔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무슨 수로 그 황금팔을 가지고 나옵니까? 분명 도시에 있을 텐데 악마와 싸우기로 하겠다는 겁니까?"

베니엘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악마의 도시가 된 크다쿰은 황제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수준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거기 가겠나?"

아직 베니엘은 그런 곳에 도전할 레벨이 아니다. 크다쿰에서의 모험은 게임 후반부에서나 펼쳐진다.

"하면 왜 황금팔을 언급하신 겁니까?"

"약 백여 년 전에 황금팔이 도시 밖으로 반출됐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지."

정보의 출처는 게임이다. 당연히 믿을 수 있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대도 마자드를 알겠지?"

마자드는 지하 제일의 도적으로 이름 높은 노움이다. 그가 훔치지 못하는 건 없다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들어는 봤습니다. 이미 고인이 됐다고 하던데요."

"뭐, 그것까진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백여 년 전에 그 마자드가 크다쿰을 다스리는 악마 백작을 속이고 그 황금팔을 빼냈다는 거다."

"흠...."

"현재 나는 그 황금팔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걸 얻을 수만 있다면 너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이건 매우 중요한 정보였지만 별로 믿기지 않는지 쿠르신의 태도는 심드렁했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말투로 덧붙였다.

"그런 게 없어도 저는 도련님을 섬길 겁니다."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맹세 때문에 그렇겠지."

호위병들이 베니엘을 모두 떠날 때 쿠르신이 남은 건 그가 했던 맹세 때문이다. 그는 모종의 사정으로 나르다리온 남작에게 베니엘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 맹세는 두 팔을 잃은 현재도 유효했다.

"알고 계시군요? 제게 아무 관심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내가 아주 멍청이는 아니다. 쿠르신. 그리고 그 맹세 때문에 결국 네가 내 사람이 아니라 남작님의 사람임도 알고 있지."

쿠르신의 맹세에는 기간이 있다. 때가 되면 그는 베니엘을 떠날 터였다. 베니엘은 그전에 이자를 완벽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인재지.'

충성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진정으로 믿을 만한 자인 데다가, 그는 하이 마스터에 오를 만한 자질을 가졌다.

드넓은 제국에서 하이 마스터가 스무 명 안팎임을 고려해 볼 때 쿠르신이 얼마나 귀중한 자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베니엘 도련님, 황금팔을 대가로 당신께 충성을 맹세하라는 겁니까?"

어이없다는 태도였다.

누구 때문에 두 팔을 잃었는데, 이제 와서 기계 팔을 줄 테니 섬기라고 하는 것으로 들릴 테니까.

이에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런 조건이 아니다."

"하오면?"

"기간을 정하겠다. 50년간 봉사해다오. 대신 널 반드시 하이 마스터의 경지를 보게 해주겠다."

50년이라면 다크 엘프에겐 길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베니엘이 쿠르신을 가르쳐 뽕을 뽑아먹긴 충분한 기간이었다.

뭣보다 하이 마스터의 경지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니. 쿠르신에겐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크흠...!"

"물론 이 제안을 거절하고 남작님께 돌아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남작님은 네 팔을 어떻게 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팔에 문제가 있는 네게 추가로 가르침을 내릴 일도 없겠지. 너도 알잖나? 내 아버지께서 사람을 그 활용도에 따라 얼마나 차별하는지?"

쿠르신도 이 지적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련님은 믿을 수 있다는 겁니까?"

"굳이 믿을 필요는 없다."

"네?"

"내가 황금팔을 가져오면 그때 충성을 맹세하면 되지 않겠나? 만약 가져오지 못한다면 내가 과거 늘 그랬듯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해."

이 정도면 손해 볼 건 없는 얘기였다. 쿠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어느 정도 협의가 되자 베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뒤쪽에서 쿠르신이 말해왔다.

"솔직히 저는 도련님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

"허황된 소리라고 생각하고요."

"그런가?"

"네, 다만 제가 이 얘기를 끝까지 들어드린 건 한 가지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베니엘이 아까 하극상을 벌인 그의 부하들을 관대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놈들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라면 다 베어버리셨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맞는 말이었다. 심지어 베니엘은 이제 후계자다. 가병이 후계자를 위협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베니엘이 직접 하기 싫었다면 근처에 있는 장교들에게 당장 놈들을 붙잡아 목을 매달라고 명령해도 그만이었다.

장교들은 순순히 따랐을 터.

하지만 베니엘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하고 기회를 줬다. 쿠르신은 그것만은 고맙게 생각했다. 베니엘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가 아니다."

그는 쿠르신과의 첫 단추를 잘 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긴 해도 이 정도면 매우 괜찮았다. 아마 게임이었으면 호감도 수치가 눈에 띄게 오른 상황이었을 터.

아직 깊은 감정의 골을 해결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화는 가능한 수준이 됐다고 할까? 어차피 영지 밖으로 모험을 떠나려면 우선 버섯 농장 건을 해결해야 하므로 쿠르신이 생각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었다.

"보중하라고. 시간 나면 또 들리지."

***

퀵포우가 도착했다. 그것도 엄청난 선물을 가지고 말이다. 베니엘은 이번만큼은 이 능력 있는 쥐새끼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 7만 두크나?"

"네, 찍찍! 소인이 주인님을 위해 힘을 좀 썼습니다요."

쥐새끼는 간사하게 앞발을 비벼댔다. 베니엘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물만이 아니라 여러 감독관들이 가문의 인물들과 내통한 증좌를 잔뜩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어!"

때가 오면 이 증거는 다양한 카드로 활용할 만했다.

"도움이 됐다니 이 미천한 자가 넘치는 기쁨을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베니엘은 즉각해서 퀵포우가 가져온 재산 중 1만 두크를 상으로 내렸다.

"받아."

"찌익―!"

퀵포우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아주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노예 마법에 걸렸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갖지 못한다. 오로지 주인의 허락한 것만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7만 두크나 수확하고도 고스란히 상납해야 했는데 그중 일부나마 돌려받은 것이었다.

1만 두크는 그가 왕년에 은광의 예산을 착복할 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엄청난 거금이었다. 더더구나 노예인 그의 처지를 생각해 볼 때 말이다.

"자애로운 주인님, 감사합니다! 찍찍!"

퀵포우는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자의 노예가 된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데 주인님, 제가 치안관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마침 상납도 하고 베니엘이 기분도 좋은 터라 퀵포우가 물었다. 이럴 때라면 근사한 자리가 하나 떨어지리라.

"너는 이제 행보관이다."

베니엘은 자신이 지구에 있을 때 봤던 직책을 꺼내놨다.

"네? 행보관이요? 그게 뭐지요?"

"정식 명칭은 행정보급관이지. 이제부터 치안대의 살림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예산을 관리하고 보급을 챙기는 건 퀵포우의 특기다. 도중에 치즈처럼 낼름낼름 빼먹는 고약한 버릇이 문제인데 이건 노예 마법 덕에 괜찮았다.

덕분에 그 능력만 쓸 수 있으니 퀵포우는 행보관에 제격이었다.

"살림을 담당한다니 그것참 괜찮은 직책이군요!"

물자 관리는 중요하다. 이것저것 떨어지는 것도 많고 끗발도 있다. 퀵포우는 마음에 들었다. 뭣보다 명칭 자체가 전투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게 좋았다.

퀵포우는 노예에게 일방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상황을 좋아할 뿐 기본적으로 폭력에는 반대였다.

"물론이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맡겨 주십시오!"

"한데 네 뒤에 있는 친구들은 누구지?"

퀵포우는 매우 험상궂게 생긴 홉고블린 삼 형제를 데리고 왔다. 못 먹어서 빼빼 마르긴 했지만 기골이 장대한 게 힘깨나 쓰게 생겼다.

'게임에선 못 보던 놈들인데?'

아무래도 게임은 현실 세계의 수많은 정보를 모두 구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들처럼 처음 보는 존재들도 마주하게 된다. 한눈에도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게 베니엘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제 개인 경호원으로 삼은 녀석들입니다. 자, 우리 주군이시다. 인사들 드려!"

이에 홉고블린 삼 형제가 나서 예를 갖춰왔다.

"안녕하십니까! 명예로운 도련님. 저희는 두크, 기크, 잔크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케르륵!"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켁!"

홉고블린들은 그들의 신경질적인 친족 고블린과 다르게, 덩치가 크고 매사 절도가 있었다.

고블린처럼 다방면으로 재주가 좋은 건 아니나 우직하고 싸움에 능한 게 특징이다.

"너희를 풍기는 기세가 제법이구나."

베니엘은 턱을 쓰다듬으며 두크, 기크, 잔크 삼 형제를 살펴봤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육체의 힘으로만 싸우는 그런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딱 봐도 어지간한 스콜라는 찜 쪄먹을 것 같았다. 베니엘은 '깃털검(Federschwert)'이라 불리는 연습용 철검을 들었다.

"너희 세 놈. 한꺼번에 덤벼봐라. 실력 좀 보자."

이에 삼 형제는 흥분한 표정이 됐다.

"영광입니다! 케게겍!"

"강자와 대결할 수 있다니!"

"저희야말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과정은 중요했다. 놈들의 실력도 점검하고 복종심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믿음과 신의가 없는 지저에서 충성심이란 어떻게 이끌어 내는가?

간단하다.

돈과 실력이다.

고용주가 정기적으로 금을 내리고, 말을 안 들으면 팔다리를 분질러 버릴 정도로 강하다는 걸 알려주면 된다. 하는 것에 따라 강도 놈도 기사다운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덤비면 됩니까?"

맏형인 두크가 물어왔다.

이에 베니엘은 단언했다.

"전력을 다해 덤벼라. 진검을 들고 모든 수단을 써봐. 그래봐야 이 몸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하진 못할 테니까."

이에 홉고블린 삼 형제는 자존심이 팍 상한 얼굴이 됐다.

"소인들도 나름 구른 가닥이 있습니다만…."

"맘대로 해라. 이 비천한 것. 대신 실력이 부족하면 쫓아낼 줄 알아."

베니엘은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오리지널이 남겨준 망나니의 시그니쳐 같은 미소였다.

이 미소의 효과는 탁월했다. 홉고블린 삼 형제는 울컥한 표정이 되더니 곧장 덤벼왔던 것이다.

"죽어! 이 귀쟁이 새끼야!"

34화

버섯 농장 (1)

홉고블린 삼 형제의 도전은 격렬했다.

그들은 단순히 무기를 휘두르는 것 외에 다양한 재주가 있었다. 교묘하게 암기를 던지거나 심지어 독까지 써댔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물의 활용이었다. 막내인 잔크가 재주 좋게 그물을 던져 베니엘의 움직임을 막으면 첫째 두크와 둘째 기크가 잽싸게 달려드는 식이었다.

확실히 단병접전에서 그물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이건 고대 로마의 검투사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다양한 병종의 검투사 중에 삼지창과 그물을 든 레티아리우스(Retiarius)들이 가장 승률이 높기로 유명했다.

이쪽 지하에선 홉고블린이 유독 그물을 즐겨 썼다. 하지만 마스터급을 목전에 둔 베니엘에겐 잔재주에 불과했다.

"충분히 잘 봤다."

검증이 끝나자 베니엘은 홉고블린 삼 형제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상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뭐? 죽어? 어디 더 지껄여 보시지!"

게다가 홉고블린이란 놈들은 평소에는 절도가 있다가도 흥분하면 급발진하는 게 종특이다. 여기서 제대로 기강을 잡아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골치 아플 터.

금세 주변에 피 묻은 이빨이 날아다녔지만 베니엘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끄아악!"

"비명만 지르지 말고 더 덤벼봐라!"

"안 그래도 그럴… 꾸엑!"

"내지르는 소리가 병사가 아니라 가축 같군! 이 돼지 새끼들아!"

뽀각!

급기야 베니엘이 뼈마디를 하나씩 부러뜨리기 시작하자 거친 홉고블린 삼 형제가 그제야 무기를 던지고 사정을 해왔다.

"더 하면 죽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도련님."

"저희가 도련님의 위엄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이미 셋은 피투성이였고, 베니엘은 그쯤 하기로 했다. 뭣보다 놈들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다.

'이놈들 셋이서 스콜라 어댑트 하나를 쓰러뜨리고도 남겠네. 그런트 주제에 제법이야.'

스콜라 어댑트라면 가병 중에서 십인 대장을 하는 자들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마나 하트를 이용해 필살의 일격도 날릴 수 있는 경지다.

한데도 베니엘은 이 셋이 스콜라 어댑트 하나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역시 홉고블린이군.'

지하 세계에서 홉고블린은 훌륭한 병사로 여겨진다. 어딜 가나 홉고블린이라면 좀 치는 놈들로 통했다.

"앞으로 내게 충성하라. 금전으로 보답하마."

베니엘이 자신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걸 알아채자 홉고블린 삼 형제는 이마를 땅에 대고 동시에 답했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대장님!"

"치안관님이라고 부르도록."

"네, 치안관님!"

이미 홉고블린 형제들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들은 강자를 존숭하며 따른다.

그래서인지 홉고블린 삼 형제는 단순한 돈주머니인 퀵포우랑 다르게 진심으로 베니엘에게 숙여왔다. 베니엘은 그들에게 품에서 무언가를 던져줬다.

짤랑.

금화 주머니였다.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술 좀 퍼마시고 와라."

이에 홉고블린 삼 형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팔이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데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긴 노예 생활을 하느라 돈을 만져본 지도 오래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돈이면 주점으로 가 술과 기름진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

은광에서 거지 같은 버섯죽과 말린 도마뱀으로 연명하던 그들은 벌써부터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참, 줄 게 한 개 더 있다."

베니엘은 품에서 배지 세 개를 던져줬다. 그것은 올리비에를 통해 발주했던 베니엘의 상징물이었다.

"이걸 달고 다녀라. 이제부터 너희는 이 베니엘 치안관을 따르는 자경대원이다. 누가 너희를 함부로 하지 못할 거란 말이다. 혹시나 시비를 거는 놈이 있으면 같이 몰려가서 흠씬 두들겨 패주자고. 알겠나?"

"우어어어어!"

소속감까지 느끼게 된 홉고블린들은 몹시 뿌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번듯한 직장인이 됐다는 기쁨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치안관님!"

"좋아. 참, 가서 술 좀 마시다가 싸움질 좀 하는 녀석들이 보이면 데려와. 쓸만한 녀석들은 자경대로 써야겠어."

이에 맏이인 두크가 가슴팍을 두들기며 자신했다.

"아, 그런 건 저희가 전문이죠. 쓸만한 녀석들로 골라오겠습니다."

이들은 일종의 모병관 역할도 맡게 된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케켁!"

홉고블린 삼 형제는 피가 잔뜩 섞인 침을 퉤 뱉으며 시내의 주점으로 뛰어갔다.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퀵포우가 상당히 부럽다는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께는 진정으로 복종하는군요. 제가 아무리 돈을 발라봐야 저들이 저런 눈빛으로 절 보진 않을 겁니다요. 찌지직...."

단순히 돈줄에 불과한 자신과 다르게 홉고블린들을 굴복시킨 베니엘이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베니엘은 딱히 그런 점을 자랑하진 않았다.

"사람마다 재주가 다른 거다. 나는 대신 너처럼 장부를 보고 물자를 관리하는 일을 할 줄 모르지. 앞으로 네 역할이 크다."

"말씀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위로에 퀵포우의 눈빛은 초롱초롱해졌다. 무언가 베니엘에 대한 충성심이 더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정말 이제는 이 망나니를 둘러싼 소문이 다 거짓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침착하고 기량이 출중하다.'

심지어 베니엘은 퀵포우의 불안 요소를 다독여 주기까지 했다.

"혹시나 저놈들이 네 지시를 안 들으면 말해. 조직에는 엄연히 상하 관계가 있는 법. 행보관이면 중요한 직책이니까."

"주, 주인님!"

퀵포우는 몰려오는 감동에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생경한 감각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껏 자신 같은 비천한 쥐새끼에게 이리 대해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니엘의 태도를 보니 일만 잘하면 단순한 노예로 부리지 않고 대우도 제대로 해줄 것 같다.

선뜻 던져준 1만 두크의 거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퀵포우는 베니엘의 밑에서 한번 제대로 일해보기로 다짐했다.

'주인님이 남작이 되는 데 공을 세운다면 이 퀵포우의 처지도 크게 달라질 터. 소망하던 대로 지위가 높은 다크 엘프에게도 명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그가 진정 원하는 성공이다. 자신을 얕잡아 보고 멸시하는 자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그들에게 되갚아 주고자 하는 소망이 삶의 원동력인 것이다.

베니엘의 곁에서라면 이룰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판단하에 그는 훨씬 적극적으로 나섰다.

"자경대원은 얼마나 확충하실 겁니까?"

"일단 백 명 정도."

"찌익? 그 정도나요! 유지비가 장난 아닐 겁니다.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인데…."

보통 치안관이 이끄는 자경대라 하면 열 명, 스무 명 정도다. 갑자기 백 명이라 하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베니엘은 선선히 끄덕였다.

"맞다. 애초에 항시 유지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임시 대원의 수야."

"…무언가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시군요?"

"그래. 최대한 은밀히 모아봐."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그 물음에 베니엘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큰고모가 성을 떠날 때까지."

***

얼마 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서열 2위인 우시드라가 정기적인 영지 순행을 위해 부하들과 함께 성을 떠났다.

목적은 경계 지역의 요새 점검이다. 이는 군사에 관한 일이니 마땅히 남작이 챙겨야 맞았지만, 칼에 빠진 그는 자신의 여동생 우시드라에게 이것마저 맡긴 상태였다.

우시드라는 두 번째 남편인 엘릭카에와 둘째 딸인 페샤디아, 그리고 삼십여 명의 정예 가병을 이끌고 움직였다.

이중 엘릭카에는 점점 우시드라의 눈 밖에 나고 있는지라, 이번 일에 뭔가 하기 위해서 사정사정해 끼어들었다.

우시드라는 엘릭카에게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살을 섞고 살아온 정도 있고 자신이 후계자로 미는 둘째 딸 페샤디아의 아비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일단 한 번 더 기회를 줘야겠군.'

다만 이번에 뭐라도 추태를 벌인다면 바로 내쳐버릴 생각이었다.

여정 중에 엘릭카에는 아내인 우시드라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어댔다. 그리고 어렵게 준비한 선물을 바쳤다.

"우시드라 님. 지난번에 단검을 잃어버려서 새 물건을 구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 마련해 왔습니다."

엘릭카에가 내민 것은 훌륭한 마법 단검으로 굉장히 화려하게 치장된 물건이었다.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장인의 솜씨로 정교한 무늬를 새겨 넣었다. 또한 각종 진귀한 보석을 박아 검집을 장식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게 마치 드래곤의 둥지에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시드라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천박하군."

우시드라의 눈에 지나치게 화려하고 현란한 새김 장식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고전적인, 옛 방식이었다.

"촌스럽고."

우시드라는 까다로운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이렇게 대놓고 화려한 물건이 아니라 절제되고, 그 속에서도 은은히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당연히 쉽지 않은 기준이었고, 이는 그녀의 높은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대는 나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내 취향을 모르는구나. 그냥 넣어두라."

우시드라가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엘릭카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는 황급히 구원을 청하듯 근처에 있던 딸을 쳐다봤다.

하지만 딸의 얼굴에는 어미와 비슷한 경멸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 정도도 제대로 못 하냐고 말하는 듯했다.

순간 엘릭카에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감정을 감춰야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저 둘의 도움이 없으면 자신은 가문에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젠장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의 마음속에는 시커먼 감정이 꾸물꾸물 자라나고 있었다.

***

우시드라와 일행은 처음에는 성실하게 경계지의 요새를 순시했다.

'가시 요새', '적색 요새', '그림자 요새' 등이 차례로 그녀의 점검을 받았다.

우시드라는 그야말로 정석대로 모든 걸 처리했기에 요새 사령관들은 그녀가 철저히 군사적 점검에만 힘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네 번째 요새로 가는 길에 일행은 예정된 진로를 벗어났다.

승용 도마뱀들은 도로를 벗어나자 잠시 버둥거렸지만 기수들이 고삐를 단단히 쥐자 곧 순종적으로 따랐다.

오늘은 지상에 보름달이 뜨는 밤.

이때는 지하에는 유난히 그 암흑이 평소보다 짙어지는 날이다.

이때를 틈타 일행은 은밀한 길로 나아갔다. 얼마 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천천히 흐르는 용암강의 줄기였다.

우시드라는 가병들에게 명령했다.

"도강을 준비해라. 하지만 먼저 주변을 신중히 살피도록. 우리가 강을 넘어가는 걸 알아채는 자가 있어선 안 된다."

"네, 알겠습니다."

이곳은 남작령의 동북쪽 국경이다. 이 용암강이야말로 제국과 야만의 경계를 가르는 가장 확실한 지표였다.

용암강 너머로는 제국에 속하지 않은 야만 오크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땅은 척박한 화산 대지였기에 자주 용암강 너머 나이트쉐이드의 영지를 기웃거렸다.

그럴 때면 남작은 대체로 그들을 달래는 유화책을 썼다. 하나 지난 전쟁처럼 그런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는 일도 흔했다. 그때면 대규모 토벌전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참 뒤에 가병들이 용암강에 버섯 나무로 만든 뗏목을 띄웠다. 당연히 버섯 나무 뗏목은 용암의 열기를 버틸 수 없지만, 특별한 주문이 그걸 일시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이 뗏목은 몹시 유용했는데 도강 후에 적당히 버려두면 마법의 효과가 끝난 뗏목이 저절로 불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강의 흔적을 지우기엔 딱이었다.

"넘어간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용암강을 건너갔다. 위험천만했지만 강줄기가 그리 넓지는 않았기에 가능했다.

강을 건너자 화산암이 뾰족뾰족 솟은 척박한 지형이 나타났다. 그런 바위 사이로 창날처럼 뾰족한 수정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한데 땅의 양분이 부족한지 남작령보다 야생 버섯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모두 낯선 땅의 분위기에 침묵하며 나아갔다. 그게 숨 막히는 듯 엘릭카에가 지껄였다.

"하하! 여긴 와도 와도 적응되지가 않는군."

이에 우시드라가 그를 노려봤고 이내 찔끔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간 그렇게 나아가자 바위에 둘러싸인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터에 수십여 명의 오크들이 먼저 와 있었다.

세 명의 오크 부족장과 그들을 따르는 야만 오크들이었다. 오크 부족장들은 우시드라를 보며 기다란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웃었다.

"왔군. 우리의 친구."

35화

버섯 농장 (2)

***

지하의 오크는 지상의 오크와 다른 점이 많다.

일단 피부색이 훨씬 진한데, 개중에는 얼룩덜룩한 반점을 가진 개체가 많았다. 이건 마치 군인들의 위장 무늬 패턴처럼 바위 지역에서 그들의 숨겨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야만 오크들의 피부는 돌의 질감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질기기도 해서 어지간한 칼질로는 잘 갈라지지도 않았으니 이들은 과연 탁월한 싸움꾼이었다.

다크 엘프들은 탁월한 민첩성과 오래간 내려온 그들의 전투 기예, 그리고 몹시 빼어난 무구의 품질이 아니었다면 이들과 맞서지 못했을 것이었다.

"반갑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친구들이여."

우시드라는 도마뱀에서 내려 선선히 오크 부족장들에게 다가갔다.

용암강 너머에는 야만 오크 세 개 부족이 살아가고 있다.

가장 앞에 선 유난히 덩치 큰 오크들이 그들 부족의 족장들이었다. 각 족장들과 우시드라는 서로의 손목을 잡고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일단 존중을 표했지만 그리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왜냐하면 의기투합해서 일으킨 지난 전쟁이 재앙에 가까운 결과만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야만 오크 부족의 손해는 막대했다. 우시드라가 남몰래 많은 지원을 해줬지만 이는 피해 일부를 벌충할 뿐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족장 하나가 툭 내뱉었다.

"새로운 사업이 그럴싸해야 할 거야. 우시드라. 우리가 계속 친구로 남기 위해선 말이지."

그의 이름은 '불주먹 고라쉬'.

용암강 너머의 세 개의 부족 중 하나인 '재이빨 부족'을 이끄는 자였다. 지난 전쟁에서 죽은 족장을 이어 새로운 족장에 오른 이다.

그는 키가 껑충하게 크고 광대가 두드러지게 튀어나왔으며, 늘어진 머리칼은 마치 야생마의 갈기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전신에 가득한 화상 자국이다. 한쪽 눈꺼풀은 아예 눌어붙어 외눈이었으며, 코는 타서 사라졌는지 해골처럼 뻥 뚫려 있었다.

그 외에도 온몸에 독보적으로 화상이 가득했다. 마치 용암 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것만 같았다.

이는 재이빨 부족의 특성 때문이었다.

세 부족 중 가장 용감하고 사나운 재이빨 부족은 '불의 시련'이란 의식이 있었다.

말 그대로 불길에 몸을 맡기는 과정이었고, 그 때문에 몸에 화상이 많은 전사일수록 높은 대우를 받았다.

그만큼 고통을 이겨냈다는 증거였으니까. 당연히 가장 화상이 흉측한 자가 족장이 되곤 했다.

불주먹 고라쉬는 그 전형이었다. 일단은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저건 상당한 수준의 경고였다. 친구로 남지 못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우시드라를 찢어발기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우시드라는 그걸 알아들었지만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다. 너희는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제일 곤란한 상황이 무엇인지 아나? 바로 내부의 반란이다."

우시드라는 자신이 버섯 농장에서 벌이고 있는 계획을 설명했다.

"버섯 농장을 운용하는 고블린 지도층을 대부분 포섭했다. 너희가 용암강을 넘어 공격해 오면 동시에 호응할 것이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싸움이 벌어지면 성공 확률이 높아지겠지."

"흐음...."

"더군다나 버섯 농장은 영지의 중요한 식량 수급처다. 농장이 박살 나면 남작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결국 너희는 원하는 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시드라도 야만 오크들도 남작령을 완전히 끝장내는 게 목표는 아니었다. 그건 쉽지 않은 데다가 뒤에 이어질 문제가 많았다.

가령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주군인 드란실 공작가가 움직인다든가 하는 문제 말이다. 그럴 바에는 남작령 일부를 차지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화의를 맺는 게 나았다.

우시드라 역시 이 계획에 찬성이었다. 영토의 일부를 오크에게 넘겨주는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 전략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그들은 서로 힘을 합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적어도 지난번보단 낫다. 크르릉!"

또 다른 족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바위 던지기 엠버조'로 세 족장 중에서 가장 덩치가 컸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호박돌 부족' 전체가 다른 오크들보다 몸이 좋았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상어를 떠올리게 하는 톱날 같은 이빨을 가졌는데, 같은 오크를 잡아먹는 거로 유명한 부류였다.

그 탓에 오크들 사이에서 경원시되는데 시절이 시절인지라 드물게 다른 부족과 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식인종 부족을 꺼리는 것처럼, 다른 오크 부족은 호박돌의 족장과 전사들로부터 은근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문제는 남작이다! 남작이 있으면 아무리 내부에서 호응해도 전쟁에서 승리하긴 어렵다! 검은 별의 명성은 굳건해! 크르르릉!"

덩치 탓에 말하는 것도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우시드라는 그 지적을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대책이 있다."

"말해보라!"

"조만간 드란실 공작이 숨을 거둘 것이다. 이미 중병으로 드러누운 지 오래다. 우리 가문은 드란실 공작가의 기수 가문이니 장례식에 반드시 남작이 참석할 것이니 그때를 노린다."

드란실 공작가는 제국 서부의 패자다. 제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이때 막강한 군벌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하필 수장인 공작이 쓰러져 오늘, 내일 하는 중이다.

"남작이 과연 움직일까?"

"물론이다. 너희도 대족장이 죽으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나?"

"크릉! 그렇군. 이해했다."

오크 족장들은 이번 계획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내부에서 호응하는 데다가, 남작이 부재 시에 침공하는 거니까.

하지만 마지막 우려가 있었다. 세 번째 족장이 입을 열었다.

"결국 남작은 돌아올 것이다. 검은 별의 검을 어찌 꺾을 것인가? 수많은 피가 흐를 텐데. 재이빨 부족의 전대 족장도 분전했지만 남작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는 '왕뱀 부족'의 족장 '은빛 이빨 실스'였다.

왕뱀 부족은 특이하게 뱀의 꼬리를 가진 오크들이다. 심지어 눈도 뱀처럼 세로로 찢어져 있다.

또한, 혓바닥으로 공기 중의 냄새를 분석하거나 이빨에는 독을 품는 등 뱀의 특징을 가진 특이한 부족이었다.

이들의 기원에 대해선 스스로 창세신인 '위대한 뱀'의 축복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막상 지하의 현자들은 그들이 마족인 타르나이의 도주한 실험체들이라 여겼다.

실제로 타르나이는 온갖 생체 실험을 저지르는 거로 악명 높았기에 그럴듯한 얘기였다.

물론 당장 머리가 으깨지고 싶지 않다면 이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방법이 있다."

우시드라는 왕뱀 부족장 실스에게 답했다.

"가문에는 유능한 검객들이 많다. 그들은 남작을 존경하지만 동시에 어떻게든 꺾고 싶어 하지. 가문의 검객 서열 2위, 4위, 5위, 6위를 포섭했다. 그들이 동시에 공격하면 남작이라도 성치 못해."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남작도 결국 필멸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정도 전투 후에는 너덜너덜해져 있겠지. 숫자로 밀어붙여 마무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왜? 자신 없나?"

이에 족장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그럴 리가!"

"크르릉! 재밌겠군!"

"독니를 박아 내가 마무리하고 싶군."

분위기가 확 좋아졌다. 우시드라의 대책이 훌륭했고 일이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풀어진 족장들은 어깨에 힘을 풀고 다크 엘프 방문자들을 환대했다.

"일 얘기는 이 정도면 되었다! 모두 이리 오도록. 주연을 열겠다. 크흐흐흐!"

"모두 손님을 맞아라!"

"너희 다크 엘프는 말라깽이지만 술은 제법 마신다고 들었다. 어디 오늘 그 기량을 봐야겠다! 크르릉!"

긴장하고 있던 다크 엘프들도 표정이 환해져서는 금세 야만 오크들과 어우러졌다.

우시드라는 이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닉스포트에서 어슬렁거리는 왈패, 양아치, 용병, 범죄자 등이 한곳으로 몰려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망나니 도련님이 자기 일을 도와주면 많은 금화를 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들뜬 기대감이 물씬 풍겨왔다.

"전쟁 용병의 급료의 세 배를 준다며? 정말 맞아?"

"그래, 틀림없다니까? 나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안 믿겨서 말이야."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지? 존나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데."

"아, 병신 쫄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전쟁보다 위험할까?"

"흐흐, 그건 그래. 안 그래도 지난번 야만 오크와 싸우고 받은 급료가 떨어져서 궁했는데 잘 됐어."

"맞아, 나도 오크 놈들이 또 안 쳐들어오나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망나니가 도와주는구만. 크크큭!"

모이는 장소는 닉스포트 외곽의 한적한 공터였다. 한데 입구부터 중무장한 자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바로 올리비에와 홉고블린 삼 형제였다. 홉고블린 중 맏형인 두크가 올리비에를 타박했다.

"눈에 힘 빼지 말고!"

"흐읍!"

"그래, 부라리니까 좀 낫네. 눈알이 빠질 듯 힘을 주고 쳐다보란 말이다! 케륵."

올리비에의 순둥이 같은 눈빛은 인상을 쓰니 좀 사나워졌다. 거기에 영웅의 풍모를 갖긴 체격이 더해지자 껄렁거리며 왔던 불량배나 용병들이 슬그머니 올리비에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다.

"저놈 지상인 아냐?"

"맞아. 맞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뭐가 중한데?"

"저놈 팔뚝 좀 봐. 우리 정도는 단번에 허리를 접어버리겠는데?"

"히익! 야, 눈 마주치지 마라."

한데 모병 장소인 공터로 가기 전에 입구에서 심사가 벌어졌다.

올리비에를 뒤에 세워둔 홉고블린 삼 형제가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들을 입구컷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 왜 이리 장비가 부실해. 꺼져!"

"저놈 방패는 반쯤 부서져서 나뭇가루나 뿌리고 있네. 너도 같이 꺼져!"

"저 새끼는 창 자루가 왜 이리 짧아? 부러진 자루에 머리만 다시 붙였냐? 시발, 너희 셋 다 같이 꺼져!"

본디 실력 있는 용병이란 장비가 충실한 이를 말한다. 구르고 구른 이일수록 그간 번 돈으로 이것저것 마련하기 마련이니까.

반면 신참은 가진 게 궁했다. 홉고블린 삼 형제는 무장이 빈약한 이들을 박대하며 쫓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항의가 따랐다. 특히 그중 칼을 찬 인간족 하나가 특히 드셌다.

"거,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 내가 칼 솜씨 하나로 거리에서 이름이 높은...."

이에 홉고블린 삼 형제의 둘째인 기크가 물었다.

"그럼 칼부터 뽑아보라고."

기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녀석은 관찰력이 빼어나고 칼에 대해 잘 알았다. 뭔가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뭐? 무어라?"

순간 항의하던 양아치 놈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크는 그런 놈을 더욱 몰아붙였다.

"어서 뽑아보라고?"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린다. 이에 양아치는 결국 검을 뽑으려 했다.

"윽! 으윽!"

하지만 어째서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힘을 줘도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크는 노호성을 질렀다.

"병신 같은! 어떻게 관리했으면 칼이 잔뜩 녹슬어서 칼집에서 빠지지도 않나! 쓰레기 같은 놈!"

이건 검을 쓰는 자에게 있어 최고의 망신이었다. 습한 지저에선 종종 있는 일이었다.

"끄응! 끙!"

인간은 아직도 애를 쓰고 있었다. 주변에서 비웃음이 터졌고 더 봐줄 수 없던 기크가 놈의 뺨을 때려 쫓아냈다.

짜악!

"너 같은 빌어먹을 놈은 고용하지 않는다! 실력도 없으면서 무리에 껴서 한몫 잡아보려는 녀석들은 지금 바로 포기해라! 보수가 보수인만큼 한 사람 몫을 하는 자들만 받겠다!"

결국 많은 이들이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신 공터에 남은 자들은 눈빛이 형형하고 장비도 충실한 게 쓸만한 자들이 틀림없었다.

"이런, 계획보다 숫자가 적군."

아무래도 고르다 보니 계획한 백 명의 반절밖에 안 됐다. 퀵포우가 우려를 나타내자 옆에 있던 삼 형제의 막내 잔크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떨거지는 사라졌으니 도련님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행보관님."

"뭐, 그렇다면야. 아무튼, 준비가 됐으니 도련님을 불러오라고."

"네, 알겠습니다."

얼마 뒤 베니엘이 나타났다. 모인 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저자가 그 망나니?"

"훤칠하구만. 인상도 사나워 보이고."

"어째 소문이랑 다른데? 쭉정이 같은 놈이라 들었다만."

"풍기는 기운이 묵직하군. 크으…!"

베니엘은 공터가 잘 보이는 바위 위에서 모두를 내려보며 섰다. 모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집중했다.

한데 베니엘의 입에선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폭탄선언이 튀어나왔다.

"이번 일은 간단하다. 지금부터 날 따라 버섯 농장을 습격한다!"

이에 닳고 닳은 용병들조차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들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거길 왜? 거긴 니네 땅 아니냐?'

아무래도 망나니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36화

버섯 농장 (3)

***

베니엘은 금세 자신에게 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개소리였다. 무슨 핑계를 대도 남작의 아들이 자기 영지의 버섯 농장을 공격하는 게 수긍될 리가 있나.

하나 개소리에 개소리를 더하자 뭔가 점점 그럴듯해졌다. 결정적으로 세 배의 보수를 준다는 말에 모여든 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따르겠습니다!"

"우와아아아―!"

뭔지 잘 모르겠지만 버섯 농장을 공격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찜찜한 구석이 있긴 했으나 다들 망나니 놈이 알아서 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설령 일이 잘못되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면 된다. 그런 공감대가 불한당 무리 내에 형성됐다.

"좋다! 너희 기개가 드높구나. 다만 무작정 버섯 농장 놈들을 썰자는 게 아니다. 일단은 방패를 뒤로 매고 검은 검집 안에 두라. 몽둥이를 들고 간다!"

날붙이부터 들이밀지 않는 건 나름대로 선을 지키겠다는 소리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보다 온건하진 않을 터다.

왜냐하면 제국의 통계를 보면 살인 사건이란 칼보다 몽둥이로 훨씬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칼을 뽑는다는 건 생사를 결하겠다는 뜻이라 의외로 자주 벌어지진 않는다.

반면 몽둥이는 일상적으로 휘둘러대니 재수 없게 이마에 맞으면 그냥 골로 가는 거였다. 그래서 훨씬 많은 살인 사건이 둔기로 발생했다.

"가자! 좋아!"

"버섯 농장의 고블린 놈들 깜짝 놀라겠지!"

"도련님을 따르라!"

모두는 반짝이는 금화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금이 속삭이는 매혹이란 아무리 자제력 있는 자라도 무너뜨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부류. 이번 일로 벌어질 사태 따위를 걱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에서도 돈의 위력은 확실하군요."

올리비에는 상황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베니엘이 끄덕였다.

"어느 세계나 마찬가지지. 지하에서 금의 반짝임은 고고한 드래곤의 고개도 숙이게 만들 정도다. 어두운 동굴 아래 떨어져 있는 작은 금화의 빛깔이 덩치 큰 드래곤조차 고개를 숙여 살펴보게 만들지. 체면도 잊고 말이야."

총 오십여 명은 인원은 그대로 남작령의 버섯 농장으로 향했다. 아주 떠들썩한 행렬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베니엘의 판단에는 근거가 있었다. 최근 실라가 버섯 농장의 사정을 조사한 보고서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얼마 뒤 그들이 사라지자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다크 엘프 두 명이 몸을 일으켰다.

"저 미친 망나니가 뭘 하려는 거지? 아니, 대체 버섯 농장을 왜 습격해?"

"어서 아가씨에게 보고 드려야 한다. 일이 심상치 않아."

이들은 아리아나가 베니엘에게 붙인 세작이었다.

다만 이건 아리아나가 베니엘을 후계 구도의 경쟁자로 여겨 적극적인 공작을 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워낙 망나니 놈이 지금껏 사고를 많이 쳤던지라 또 무슨 짓을 할까, 하는 감시에 가까웠다.

사실 이전부터 계속해왔던 것으로, 베니엘이 은광으로 갔을 때 아리아나가 퀵포우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이런 성과로 이어졌다.

"서둘러.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알겠다."

감시자들은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버섯 농장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이것이다. 바로 버섯이 자라나는 부드럽고 축축한 흙. 용암강 너머에선 절대 볼 수 없었기에 야만 오크들은 이 땅을 탐냈다.

농장 여기저기에는 얕은 웅덩이가 많았는데, 이 수원(水源)은 버섯 농장의 필수였다. 버섯 농장을 관리하는 고블린 농노의 하루는 이 웅덩이에서 물을 퍼 날라 농장에 뿌리는 거로 시작된다.

"서둘러라! 오늘 할당량이 많다!"

"거기 손이 보이지? 맞고 싶냐? 케륵!"

농노들을 닦달하는 건 같은 고블린족의 감독관이었다. 그들은 동족을 쥐어짜는 대가로 안온함을 약속받은 이들이다.

온몸에 고생한 흔적이 가득한 동족들과 다르게 감독관들은 제법 때깔이 좋았다. 이들의 채찍질에는 자비가 없었다.

"물을 쏟는 녀석은 용서하지 않는다! 거기, 너!"

짜악!

"께으으으윽!"

매서운 채찍질에 고블린 농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것은 농장에서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동굴 고블린은 지상의 친족과 다르게 회색 피부를 가졌다. 땅 위의 고블린들이 그린스킨의 한 종류로 녹색 피부를 가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또한 어둠 속에서 잘 들을 수 있게 귀가 컸으며 키는 120센티미터 정도였다.

특이한 점으로는 눈꺼풀이 반투명해서 지하의 분진이나 각종 오염물질로부터 눈을 보호하면서도 어느 정도 앞을 볼 수 있었다. 천연적인 고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이는 동굴 고블린들을 광산이나 농장 등에서 최고의 일꾼 중 하나로 만들어줬다.

다만, 문제는 지저의 특성상 정당한 고용보다는 붙잡아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이 농장에 있는 수백 마리의 동굴 고블린들도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전리품이었다.

원래 이들은 근처의 황무지에 사는 몇 개의 작은 부족이었으나, 노예 사냥에 나선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의해 한꺼번에 붙잡혔다.

이후에는 부족별 구분도 없이 마구 얻어맞고 뒤섞여서 이곳 버섯 농장에 던져졌던 것이다.

그게 벌써 수십여 년 전으로, 이젠 동굴 고블린들은 자유가 뭔지 잊고는 충실한 농노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이빨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고 순종적이고 충실하게 버섯을 재배해 왔다.

한데 오늘은 뭔가 좀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와 다르게 고블린 농노의 눈빛이 사나운 데다가 행동도 눈에 띄게 굼떴기 때문이다.

마치 마음에 딴 곳에 가 있는 듯하달까?

"이놈들이 왜 이래? 케륵!"

정해진 작업량을 지키지 못하거나, 농노들에게 쓸데없는 자비를 베풀 경우 감독관은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 하여 그들은 인정사정없었다.

"서둘러라! 할 일이 태산...!"

한데 그 감독관은 미처 자기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몽둥이를 얻어맞고는 앞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머리 뒤가 함몰되고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게 누가 봐도 즉사였다. 곁에 있던 다른 감독관들은 경악했다.

"네, 네놈? 무슨 짓을!"

"저놈이 미쳤다! 어서 붙잡아!"

그때까지만 해도 감독관들은 이것을 웬 미친 종자의 공격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순종적으로 일하던 고블린 농노들이 저마다 농기구나 몽둥이를 든 채 감독관들을 둘러쌌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케케켁!"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감독관들은 두려움에 허세를 부렸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농노 고블린들은 괴성과 함께 마구잡이로 달려들었고, 삽시간에 그들을 도륙해버렸다.

감독관들의 숨이 끊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고블린 농노들은 그제야 탄성을 터뜨렸다.

"케르르르륵! 케륵!"

"복수! 복수 해냈다!"

번들거리는 피를 뒤집어쓴 고블린 농노들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조각난 감독관의 시체를 들고는 버섯 농장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이런 꼴이 버섯 농장 곳곳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

"드락! 감독관들을 차례로 정리하고 있다! 케켁!"

수하들의 보고에 드락이라 불리는 고블린이 준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빼빼 말랐지만 동지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고, 눈빛은 그 안에 불을 담은 듯 맹렬하고 사나웠다.

흔히 그는 '쇠발톱 드락'이라 불리는 자로 이번 농장 반란의 주역이자 고블린 농노들의 지도자기도 했다.

드락의 전신에는 수많은 흉터가 가득했는데 이것은 그를 행해 쏟아졌던 고문과 학대의 증거였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동지들을 일어날 기회를 잡아냈다.

"좋아. 어머니 버섯으로 간다."

"알겠다!"

드락의 명령에 십여 명의 고블린들이 따랐다. 놀랍게도 그들은 검과 창,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뭔가 좀 어설프고 잘 안 맞아 보기인 했으나 도저히 농노라고 믿을 수 없는 차림새였다.

분명 농노 신분에선 사 모을 수 없는 무구였기에 누군가 이들을 지원한 것 같았다.

"가자! 막는 놈은 모조리 쓰러뜨려!"

"드락의 앞길을 열어라! 케케케!"

압제에서 해방된 고블린들은 해방감에 날뛰었다.

곧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머니 버섯'이 있는 장소. 어머니 버섯은 높이 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이다.

왜 어머니라 불리냐면 이 거대한 버섯이 농장에 포자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농장 안에 있는 모든 식용버섯은 어머니 버섯의 자식인 셈이다.

어머니 버섯 주위에는 세 명의 버섯 인간들이 있었다. 걸어 다니는 버섯같이 생긴 이 종족은 어머니 버섯을 관리하고, 농장의 버섯 재배에 관해 조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농노인 고블린과 다르게 남작이 금을 주고 고용한 전문 인력이었다.

그들은 드락을 비롯한 고블린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에 그들이 뭘 하려는지도 알아채고는 어머니 버섯의 앞을 막아섰다.

[드락…! 지난번의 제안은... 분명히 거부했다!]

버섯 인간들의 목소리가 고블린들의 정신 속에서 낮고 깊게 울려 퍼졌다. 그들은 입이 없었기에 일종의 초능력을 이용해 의사를 전달했다.

드락은 고개를 저었다.

"마르고쿠. 우리가 뭘 들고 온 건지 안 보이나? 타협의 여지는 없다."

흉흉한 칼날은 분명 버섯 인간들의 살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 버섯이란 버섯 인간에게 신성한 존재. 무기의 위협 속에서도 마르고쿠라 불린 버섯 인간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둔한…! 너의 요구는 농장을 망치고... 어머니를 약하게 만들 뿐이다!]

드락이 원하는 건 정해진 양 이상의 포자를 어머니 버섯으로부터 수확하는 것.

문제는 그렇게 했다가는 향후 몇 년간 어머니 버섯은 포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버섯 농장의 경영은 나락으로 간다.

심지어 무리한 포자 수확으로 어머니 버섯이 폐사해 버릴 수도 있었으니 버섯 인간들이 극렬히 반대하는 건 당연했다.

"상관없다!"

어차피 반란을 일으킨 이상, 증오스러운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버섯 농장 따윈 앞으로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농장이 망하든 말든 최대한의 수확을 뽑아내서 어떻게든 반란 자금을 충당하는 게 우선이었다.

"버섯 인간들을 잡아 가둬라! 적당히 팔다리를 잘라도 되지만 죽이진 말도록!"

"알겠다! 드락! 케케켁!"

기세가 오른 고블린들이 맹수처럼 버섯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과연 그 처지에 따라 태도가 돌변하기론 지하 제일이라는 고블린다웠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말 잘 듣던 농노들이 지금은 흡사 배고픈 들개 무리처럼 사나웠다.

버섯 인간들은 특유의 초능력을 사용해 대항했으나 숫자에 밀려 어림도 없었다.

번쩍!

초능력이 발동하자 고블린 하나가 눈이 까뒤집으며 쓰러졌지만 그뿐이었다. 그 뒤로 더 많은 숫자가 우르르 달려들었으니까. 금세 버섯 인간들은 팔이 잘리고 제압돼 창고에 갇히게 됐다.

[드락…! 후회할 것이다!]

[남작의 분노를… 감당해라!]

[아둔하다! 성급하다!]

끌려가는 버섯 인간들의 말에도 드락은 귀를 후벼팔 뿐 신경 쓰지 않았다. 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시드라 님께서 뒤를 봐주시니 걱정할 것 없다. 드디어 우리 종족도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다!'

버섯 농장에는 다크 엘프 감독관들도 몇몇이 있다. 아예 고블린들에게만 맡겨둔 건 아닌 셈이다.

하나 그들 대부분이 우시드라의 끄나풀이라 지금 농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일부는 우시드라의 수족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바로 제압돼 버섯 인간과 마찬가지로 창고에 갇혔다.

외부에는 그들이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 것으로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버섯 농장은 닉스포트의 근교에 있지만 의외로 폐쇄적인 장소였다.

게다가 총책임자는 남작이 아니라 권력 서열 2위인 우시드라. 그녀의 묵인까지 있자, 나이트쉐이드 영지에선 여기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그 사이 고블린 농노들은 예정보다 빠르게 버섯을 수확하고 밀수꾼들에게 그걸 넘겨서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언제 결전의 날이냐? 드락."

부하의 물음에 드락은 얼마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듣자니 어제 우시드라 님께서 요새 지대로 순행을 나가셨다고 한다. 거기서 성과가 있을 테니 거사 일이 멀지 않았겠지. 케르르."

겉으로 보기에 버섯 농장은 아무 문제도 없고 평화로웠다. 내부 사정과 다르게 정기적으로 닉스포트를 향해 수확물을 실은 마차가 출발해곤 했다. 농장의 상황에 의구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드락과 반란자들이 우시드라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전혀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드락! 드락! 큰일이다!"

농장 외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녀석들이 혼비백산해서는 드락에게 달려왔다.

드락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

이에 달려온 이들이 숨넘어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마, 망나니다! 망나니가 왔다! 그것도 오십이 넘는 무장한 왈패들을 데리고 왔다고!"

37화

버섯 농장 (4)

순간 드락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케르륵!"

모든 일이 조화롭게, 순리에 따라 아름답게 진행되는 와중이었다. 한데 이때 거대한 똥덩어리인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망나니가 나타나다니?

드락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잘못 본 거 아니냐? 그냥 도적떼가 아닌가?"

차라리 도적떼면 낫다. 아무리 흉악한 도적떼라고 해도 망나니 베니엘보단 착할 테니까.

"틀림없다! 케케케켁! 영지에 살고 있는 자 중 누가 그 망나니 얼굴을 모르겠나!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부하들의 반론은 지당했다.

"대체 이게 무슨…!"

드락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이해하려 애썼다.

'오십여 명의 왈패들이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망나니가 그런 무뢰배 집단과 어울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망나니 베니엘은 심심하면 무리를 이뤄 영지의 촌락을 약탈하고, 야외에서 사냥을 하며 다녔다.

본인의 변명에 의하면 협객 활동이라고 했으나 누가 봐도 망나니 놈은 무언가를 빼앗는 일에 심취한 놈이었다.

참으로 어릴 때부터 치안관 꿈나무였던 셈이다.

다만 망나니는 버섯 농장으론 거의 오지 않았다. 여기선 버섯을 모아서 보낼 뿐 판매는 하지 않기에 돈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더불어 농노란 가난한 존재.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데다가 좀처럼 반항도 할 줄 모르는 고블린은 망나니에게 재미없는 상대였다.

'하면 대체 왜?'

설마 농장 안의 일을 알아차렸을 리는 없다. 드락은 열심히 고민해 봤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이에 주변에서 그를 재촉했다.

"드락! 서둘러 대책을 달라! 켁켁!"

"이대로면 농장에 들어와 버린다!"

이에 드락은 결단을 내렸다.

"안 되겠다! 다 무장하고 따라와! 망나니 놈을 일단 입구에서 막는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망나니에게 그간 벌인 일을 들키면 끝장이다.

"수는 우리가 훨씬 많아! 다들 나오라고 해! 상대는 고작 오십이다!"

고블린 농노는 삼백이 넘는다. 드락은 그 점을 강조하며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망나니는 존재만으로 농노들에게 공포의 디버프를 걸어대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가자! 내가 앞장서겠다!"

쇠발톱 드락이 앞서 달리자 그제야 고블린 농노들은 사기충천했다. 농장 안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며 저마다 일을 하던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대부분 몽둥이로 무장했지만 일부는 숨겨놨던 창칼을 꺼내 가지고 왔다. 수많은 고블린들이 농장의 입구로 가 보니, 과연 경계를 보던 녀석의 말대로 망나니가 무뢰배를 이끌고 와 있었다.

그 모습에 드락은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려온 놈들이 하나 같이 솜씨 좋은 녀석들로 보인다!'

이대로라면 이쪽 수가 많아도 쉽지 않아 보였다.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전투의 전문가와 농노 간의 실력 차이는 확연할 테니까.

드락은 일단 말로 해결해 봐야겠단 판단을 내렸다.

"도련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저희 농장은 냄새나는 버섯밖에 없습니다만."

하지만 베니엘은 드락을 무시하고는 앞으로 나서 주변을 둘러봤다.

"의아하군."

"이상하고."

"너희는 왜 무장을 하고 있지?"

그 물음에 고블린 농노들은 모두 드락을 쳐다봤다. 드락은 태연히 변명했다.

"요즘 도적떼가 창궐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케륵!"

베니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비천한 것아. 남작님의 은혜로 영지에는 평화뿐인데 무슨 소리지?"

남작은 운운하며 하는 압박에도 드락은 굴하지 않았다.

"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련님께선 어찌 농장에 무장한 병력과 함께 오셨습니까? 그런 일은 남작께서도 금하신 것입니다."

과연 한 무리의 지도자 역할을 할 그릇이었다. 고블린들은 드락이 그 악명 높은 망나니를 상대로 한치도 밀려나지 않는 모습에 희열마저 느꼈다.

심지어 저쪽이 남작을 운운하니 이쪽도 남작을 들먹여 역으로 압박까지 하고 있었다.

"과연 드락이다!"

"케케켁! 빼어난 우두머리!"

"드락만 믿으면 된다."

금세 우쭐해지는 고블린의 특성상 드락의 의연함에 다들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네놈 이름이 뭐지? 고블린."

"드락이라 합니다. 도련님."

"그래, 드락. 나는 얼마 전 영지의 치안관으로 임명됐다. 오늘은 치안관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온 것이다. 길을 비켜라."

여기에 대해서도 드락은 대꾸할 말이 있었다.

"버섯 농장의 총책임자는 우시드라 님이십니다. 아무리 치안관이라 해도 우시드라 님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무장한 채 안을 헤집을 수는 없습니다. 케르륵!"

"현재 큰고모님께선 영지 외곽을 시찰 중이시다. 어떻게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냐?"

"간단합니다. 하면 우시드라 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군요. 케륵."

명분과 규정에 의해 자신이 앞선다고 느낀 건지 드락은 어깨를 폈다. 이에 뒤에 도열한 고블린들의 기세가 사나워져 갔다. 기세가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드락이 수완이 좋은 자라고 해도 겨우 고블린 따위에게 말발로 질 베니엘이 아니었다.

"정론이군.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지. 긴급한 범죄의 정황이 있다면 치안관은 책임자의 허락 없이 현장에 진입할 수 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케륵? 농장은 평화롭습니다. 범죄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드락의 변명에 베니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평화롭다라? 내가 듣던 것과는 다르군. 남작님께서 고용한 버섯 인간들이 감금되고, 여러 감독관들이 공격받은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다."

"헛소리입니다!"

"헛소리라 생각하면 당장 비켜서 너희의 결백을 증명하면 되지 않느냐?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내 백배사죄해서 너희 개인에게 각각 금화 10개씩 보상하겠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망나니가 재산을 털어가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보상하겠다니. 이 얼토당토않은 말에 드락조차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하나 그렇다고 정말 들여보낼 수는 없다. 드락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거사 일이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들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요한 건 우시드라의 반응이었다. 드락은 그걸 예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도마뱀 꼬리처럼 자르겠군!'

일이 틀어졌으니 우시드라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드락과 고블린들을 버릴 게 틀림없었다.

드락은 잘 알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쓰고 버리는 패라는 걸. 그 와중에 이익을 챙겨보려 했건만 갑자기 나타난 망나니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됐다.

"왜 대답이 없지?"

베니엘이 압박하듯 나서자, 드락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드락!"

"어떻게 해야 하나! 케르르!"

"망나니에게 대답해 줘라!"

주변에서 그를 부르는 동족의 목소리에 드락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곧 결단을 내렸다.

"모두 전투 준비! 최대한 버티겠다! 우시드라 님의 명령 없이는 물러나선 안 된다!"

안에서 벌인 짓이 들키면 어차피 끝장이다. 그럴 바에는 우시드라를 핑계를 대며 최대한 시간을 끄는 편이 나았다.

이삼일이라도 버틴다면 그사이 우시드라가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그때 어떻게 중재나 수습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겠군.'

자신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반란을 일으킨 죄로 동족이 몰살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우시드라는 늘 경제적인 관점에서 사고하는 존재였다. 버섯 재배에 숙련된 농부는 큰 재산이었다. 반란의 증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려 할 확률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 버티는 사이 아예 거사가 진행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일단은 최대한 희망을 갖고 싸워나가자는 게 드락의 결정이었다. 이에 그의 동족이 크게 호응했다.

"드락을 따르라!"

"준비한 방책을 들어 올려! 케케케!"

"장대! 장대를 가져와라!"

삼백이 넘는 고블린들이 일제히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버섯 농장의 주위에는 어설픈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그 뒤에 있던 고블린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건 버섯 나무로 만든 방벽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기다란 봉이나 창을 든 고블린들이 늘어섰다.

아예 처음부터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베니엘은 더 망설일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끌고 온 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공격하라! 가장 먼저 목재 방벽을 넘는 자에겐 금화 50개! 적의 수괴의 목을 자르는 자에겐 금화가 100개다!"

갑자기 소규모 군사작전이 돼버린 것에 무뢰배 일당은 당황했으나 금세 자세를 잡았다.

놈들 중에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가 여럿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싸움질이라면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수가 많다곤 해도 고블린 농노에 불과하니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금화는 내 거다!"

"가자! 우리도 움직여! 제일 먼저 방벽을 넘어야겠다!"

"고블린 놈들에게 솜씨 좀 보여주자! 크아아압!"

지저의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무뢰배들은 기세 좋게 앞으로 돌격해 나갔다.

이들 모두 고블린을 나약한 종족으로 여겼고, 흠씬 두들겨 패주고 돈을 벌 생각에 흥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비록 농노에 불과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대비를 하고 있었다.

피슝! 피슈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석궁의 볼트가 날아와 앞서 돌격하던 무뢰배 몇을 쓰러뜨렸던 것.

카앙!

일부는 갑옷에 막혀 불꽃을 내며 튕겨 나갔지만, 일부는 제대로 박혔다.

"끄아악!"

볼트를 맞은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자 그제야 모두 화들짝 놀랐다.

"석궁이다! 놈들이 석궁을 가졌어!"

"젠장! 방패! 방패 풀어!"

무뢰배들은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서둘러 가죽끈을 푼 뒤에 앞으로 내밀었다.

방패가 없는 자들은 재빨리 근처에 자라고 있는 버섯 나무 뒤로 숨었고, 어떤 이들은 허리춤밖에 안 오는 낮은 바위 뒤에 엎드리기도 했다. 다들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려 욕설을 내뱉어댔다.

"씨발! 어떤 새끼들이 고블린한테 석궁을 판 거야?"

"저 새끼들 처음부터 작정했구만!"

확실히 석궁은 활에 비해 다루기 쉽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들 들고 온 몽둥이는 내던지고 칼이나 기타 흉악한 무기를 뽑아 들었다.

"방금 날 맞춘 놈 대가리를 으깨버리겠어! 아아악!"

"야, 쟤 좀 어떻게 해봐. 저러다 한 대 더 맞겠는데?"

베니엘은 무뢰배 녀석들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모양 빠지게 피하지 않았다. 볼트가 날아오긴 했지만 검으로 여유롭게 쳐냈다.

캉! 캉!

그럴 때마다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과연 칼 솜씨만은 일절이구나!"

"아니, 저걸 어떻게 저리 쉽게 쳐내는 거야? 보이지도 않는데?"

베니엘은 그런 놈들에게 명했다.

"이쪽도 대응 사격을 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놈도 나서고! 일시에 쏟아붓고 저쪽이 흔들리면 돌격한다!"

확실히 효과적인 수법이었다.

그제야 무뢰배들은 정신을 차리고 석궁이니 활이니 하는 걸 쏘아댔다.

이쪽도 원거리 병기로 대응에 나서자 고블린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몇이 쓰러지자 바로 동요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저놈들도 나름 필사적인 건지 여기저기서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나왔지만 이어서 화염 폭발 마법이 작렬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콰아아아앙!

시뻘건 불줄기가 터지며 나무 방벽을 산산조각 냈다. 그걸로 부족해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을 육편으로 만들어 허공에 뿌려버렸다.

이 모습을 본 아군이 사기가 충천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베니엘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이다! 돌격하라!"

"와아아아아!"

무뢰배들이 무기를 꼬나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고블린쪽도 결사적이었다. 그들 역시 저마다 무기를 들고는 째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막아라! 더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 케르르르!"

"모조리 죽이고 여기 뜨자고! 케케케켁!"

가장 앞서 달리던 녀석이 고블린의 진영에 가 부딪쳤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난타전이 벌어졌다.

"죽어! 이 비루한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 덩치만 큰 놈! 다리 힘줄을 노려라! 둘러싸! 케켁!"

나무봉이 갑옷을 두들기는 둔탁한 소리, 쇠칼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 등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 혼란 속에서 베니엘은 프로스트바이트를 어깨에 걸치고는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백중지세로군.'

고블린이 여섯 배 이상 많았지만, 이쪽은 장비가 충실한 싸움꾼들이었기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이 숫자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고블린들이 불리해질 거다.

지금이야 다들 악착같이 덤벼들고 있어서 티가 안 나지만 슬슬 기운이 빠지기 시작하면 전투 기술의 차이를 절감하리라.

여기에 베니엘까지 가세한다면 전투는 완승으로 끝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가 기다리는 게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베니엘이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 포탄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소용돌이치는 검은 연기였다. 연기 주위로는 박쥐 떼가 징그럽게 달라붙어 비행하고 있었다.

슈우우우웅!

빠르게 날아온 그것은 곧 미사일처럼 지면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사방으로 어지럽게 박쥐 떼가 날아올랐다. 그 충격에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자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베니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화려한 등장이군."

연기가 가시자 그 가운데는 허리에 검은 차고 몸을 꼿꼿하게 세운 인물이 있었다.

다크 엘프라곤 믿을 수 없이 키가 큰 자였다. 뒷발꿈치는 붙이고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등장만으로 전장을 압도한 채 모두를 내려다보는 그의 정체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검객 서열 7위, 뱀파이어 검객 '발토리스'였다.

발토리스는 주변을 둘러보다 베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완벽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시드라 님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38화

뱀파이어 검객 (1)

가문의 서열 7위 검객 발토리스는 뱀파이어였다.

지상에선 집안에 언데드가 있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지하는 좀 사정이 다르다.

언데드를 혐오하는 정서야 비슷해도 그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용인하고 섞여 산다고 해야 할까?

도시를 걷는 좀비나 해골이 일꾼일 수도 있고, 또 뱀파이어가 어느 가문의 무사일 수도 있는 게 지하였다.

뭣보다 지하는 뱀파이어에 살기 좋은 장소였다. 뼛속 깊이 증오하는 태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속에서 안락함을 느꼈기에, 자신만의 세력을 이루거나 유력 가문의 가신으로 봉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니 가문에 뱀파이어가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드락을 비롯해 농장의 고블린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저게 대체 누구야?"

"뱀파이어? 언제부터 우리 농장에 있었던 거지? 케륵!"

"그러고 보니 최근 실종자들이 주기적으로 나왔다! 드락!"

뭔가 미심쩍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

드락은 발토리스를 보자마자 그가 우시드라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농장에 남겨둔 안배인 걸 알아챘다. 게다가 상대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서열 7위의 검객이다.

농장의 으슥한 곳에서 동지 몇이 사라진 일을 물어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따질 수 없는 건 고블린들이지 베니엘은 달랐다.

"지금 뭐라고 했나? 들어갈 수 없다고?"

"그렇다. 설령 그대라도 예외는 아니다."

발토리스는 허리를 추켜세운 채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키가 무척 크기 때문에 위압감이 대단했다.

일반적인 다크 엘프 남성의 키가 160센티미터대인 것에 반해 그는 무려 194센티미터였다.

남다른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지방의 다크 엘프는 피부가 갈색을 띠는데 그는 죽은 자인지라 석고처럼 창백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잘 묶어서 포니 테일로 넘겼고, 의복은 각이 잡힌 게 단정하기 그지없다. 이는 편집증적인 꼼꼼함을 가진 그의 성정을 보여줬다.

얼굴은 각진 편이고, 생전의 결투의 흔적으로 희미한 흉터가 몇 개나 그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은 노란색인 게 뱀과 같은 것이 교활하며 잔혹한 느낌을 줬다.

이런 자를 마주하면 누구라도 움츠러들 테지만 베니엘의 태도는 조금도 물러남이 없었다. 애초부터 발토리스의 출현을 상정하고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영지의 치안관이다. 농장에서 불법 행위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진입하려는 것이다. 비켜라."

이에 발토리스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걸 허락할 수 없단 것이다. 잘나신 도련님이여."

베니엘은 더 말하지 않고 프로스트바이트를 상대에게 겨눴다. 얼음처럼 예리한 칼날에서 서리가 흩날렸다.

"뭐, 그렇다면 검객답게 해결할 수밖에 없겠네."

여기서 우시드라의 안배인 발토리스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농장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상대는 드랄두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배기 마스터다. 기어코 베니엘이 겨루려 하자 발토리스는 처음으로 표정을 드러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분명 조소였다.

"훌륭한 검이 그대의 손에 있으니 어린아이의 장난감 같군."

"큰고모에게 놀아나는 사냥개 새끼가 잘도 지껄이네?"

"감히 마스터를 모욕하지 마라. 애송이. 소문과 다르게 네놈이 진정한 마스터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후훗, 검객이 아닌 걸어 다니는 시체를 처리하기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 지적은 냉정하고 무표정한 발토리스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언데드는 진정한 검객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나 하트나 마스터, 하이 마스터 등의 경지는 모두 산 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그렇다.

언데드인 뱀파이어가 되면 그 수준 높은 검학을 자신의 몸에 적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언데드 검객은 사마외도나 다름없다.

발토리스는 뱀파이어가 된 후, 부활이나 그림자 다루기, 흡혈 등의 강력한 권능을 얻었지만 검객으로서의 성장은 멈춰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더 강해지지 못하냐면 그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언데드로서 강해지는 것이지, 검객으로선 이미 진즉 끝난 셈. 그가 결국 서열 7위에서 멈춰 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베니엘은 그 점을 지적하며 검객이 아닌 걸어 다니는 시체라 칭했다.

가장 아픈 곳을 찔린 발토리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여태 좀처럼 흔들릴 기색도 없던 그의 건조한 표정 위에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흠...."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가득 찬다. 마스터의 노여움이 무형의 기세로 변해 일대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런트나 여타 무식한 고블린 농노조차 본능적으로 느낄 만한 것이었다.

격전을 벌이던 그들은 갑자기 밀려와 숨통을 조여오는 살기에 싸움을 멈추고 서로 물러났다.

갑자기 사방이 한겨울처럼 싸늘하게 식어갔다. 방금 전까지 피가 튀고 고성을 지르던 그 전투의 열기와 광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베니엘은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발토리스. 갑자기 얼굴 근육이 사후경직마냥 뻣뻣해진 게 방금 죽은 시체처럼 보이는군. 아, 생각해 보니 그러면 젊어진 건가? 하하핫!"

놀랍도록 조용해진 일대에 베니엘의 유쾌한 웃음만이 기이하게 울려 퍼졌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언데드에게 할 만한 저 최상급의 모욕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

꿈틀.

그때 발토리스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저건 딱 봐도 얼굴 근육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겉으로 보이는 바와 다르게 격노했다는 걸 베니엘은 알아챘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최선의 방어를 준비했다.

'온다.'

발토리스는 검을 뽑지 않은 채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마치 물속에 잉크를 뿌린 것처럼 사방으로 번져갔다.

근처에 있던 자들은 이 변화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멀어졌다.

"피해!"

"뱀파이어의 권능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검을 든 채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발토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 간 그림자가 갑자기 시커먼 창의 형태로 변화해 일제히 베니엘을 향해 찔러왔다.

그 그림자 창의 날 부분은 마치 흑요석 조각처럼 날카로워, 베니엘을 단번에 오체분시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나 베니엘은 이미 대비를 하고 한 손에 가문의 문장을 잡고 있던 상태. 그는 불안정하게나마 의지를 발동했다.

그것은 오만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불꽃의 방벽이었다.

화르르륵!

화염 방어벽은 그를 노리던 수십 개의 그림자 창날을 모두 막아냈다. 아니, 그걸로 그치지 않고 시커먼 창들을 모조리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찬탄을 터뜨렸다.

"세상에!"

"마스터다! 마스터의 힘이야! 도련님도 갖고 계신다!"

"역시 드랄두를 실력으로 이긴 게 맞구나!"

실제로 마스터는 아니지만 그들은 대부분 그런트. 안목이 없으니 의지를 발동하는 모습에 마스터라고 철석같이 믿는 게 당연했다.

반면 발토리스는 눈을 치켜떴다.

"괴이하군! 의지를 다루는 건가? 아직 분명히 마스터가 아닐 터인데."

그는 뱀 같은 눈길로 베니엘을 훑어봤다.

"너는 항상 이상했지."

"어떤 점이?"

"네놈의 성취나 발전은 곁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의문에 베니엘은 비릿하게 웃었다.

"크흐흐, 범부가 나 같은 천재를 보면 늘 하는 생각이겠지."

베니엘의 말에 발토리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한번 아픈 곳을 찔린 것이다.

그가 무리해가며 뱀파이어가 됐던 건 자기 재능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으니까.

그는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서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후계자 하나를 참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가문을 떠나 도망쳐야겠지만 말이야."

"해볼 수 있으면 해보던가. 시체야."

발토리스는 검에 힘을 일으켰다. 그러자 피처럼 끈적끈적한 기운이 검신을 뒤덮었다. 그것은 마치 끓는 물처럼 기포를 일으키며 계속 끓어올랐다.

이것은 블러드 블레이드. 펜테즈멀 블레이드의 또 다른 형태로, 뱀파이어만이 가능한 변형된 기예였다.

"각오하라."

짧게 말한 발토리스는 진심으로 베니엘의 목숨을 노려왔다. 베니엘 역시 곧장 도깨비불을 일으켜 맞섰다.

카아아앙!

날카로운 검의 충돌음이 주변을 울렸다. 상대는 강력했지만 단순히 검의 기예만 놓고 보면 베니엘도 밀리지 않았다. 그는 희대의 천재라 불릴 만했으니까.

캉! 카앙! 캉!

검이 충돌할 때마다 도깨비불의 불꽃과 블러드 블레이드의 끓는 듯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 공방에서 발토리스는 감탄하며 동시에 분노했다. 단순히 검의 기술만으로는 자신이 좀처럼 베니엘을 제압할 수 없다는 점에 말이다.

결국 그는 뱀파이어의 힘을 동원했다.

팟! 스팟!

격전의 와중에 작은 그림자 칼날이 마치 면도날처럼 베니엘의 몸을 베었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베니엘의 두툼한 벨벳 의복을 베고 단숨에 살갗까지 갈랐다.

금세 베니엘은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게 됐다. 하지만 그게 힘든 기색은 아니었다. 치명타라고 할 만한 일격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블러드 블레이드의 힘이 베니엘의 상처에서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베니엘의 상처에서 피가 빨려 나가 발토리스의 검신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럴수록 블러드 블레이드의 힘은 더욱 강화돼 갔다. 반면 피를 잃어버리고 있는 베니엘은 현기증을 느꼈고.

"아주 거지 같은 기술이군!"

베니엘은 블러드 블레이드의 공능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당하자 욕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칼이 적을 흡혈하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승부를 결하겠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까?

발토리스는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렸다.

단번에 베니엘을 쓰러뜨리겠다는 기세가 느껴졌다. 단순한 내려 베기를 하겠다는 자세였지만, 그의 검은 내려오면서 천변만화를 일으키며 베니엘의 숨통을 노릴 터.

흡혈로 약해진 베니엘이 받아내긴 쉽지 않아 보였다. 지켜보던 자들 긴장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번에 결판이 나겠는데?"

"결판이 아니라 우리 망나니가 결딴이 나겠다. 도망칠 준비해."

그와 함께 발토리스의 일검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그의 공격은 베니엘을 산산조각 내지 못했다.

베니엘이 두 번째 의지인 작은 바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회전하는 프로스트바이트가 내려 베는 발토리스의 검을 접촉해 붙잡았다. 그와 함께 블러드 블레이드가 가진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대로 반사해냈다.

카아앙!

짧고 강렬한 소음과 함께 검을 든 발토리스가 뒤로 길게 밀려났다.

그는 전율했다.

"이 무슨...!"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오는 데다가 어느새 블러드 블레이드가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끈적하고 끓어오르는 피가 검신에 더 머금어지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발토리스는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눈으로 보고, 직접 당했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대체 무슨 기술이냐! 네놈이 의지를 이 정도나 다룬다고?"

어느새 발토리스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열등감과 질시, 부러움, 분노 등이 뒤섞인 그의 얼굴은 어느 누구보다 풍부한 표정으로 혼란스러웠다. 도저히 언데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뭘, 이 정도 가지고 호들갑을 떠나? 후후후."

베니엘은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안색이 창백하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역시 제대로 된 마스터는 다른 건가.'

이전에 생각하기론 서열 7위까진 해볼 만하다 여겼는데 결코 쉽게 넘을 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발토리스도 그걸 느낀 듯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대단하긴 하다만 넌 여기까지다. 나이트쉐이드의 핏줄이여."

그는 기어코 이 자리에서 베니엘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이제 더는 우시드라의 명령이나 가문에서 앞으로 위치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결코 갖지 못한 찬란한 재능을 가진 저 젊고 어린 검객을 무참히 짓밟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뱀파이어가 가진 진정한 기예를 보여주지."

하지만 베니엘 역시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가 가진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쪽은 장비빨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마."

39화

뱀파이어 검객 (2)

발토리스는 남다른 안목이 있는 자였기에 프로스트바이트를 알아봤다.

"5등급 마법검이군. 확실히… 그 정도면 이런 싸움의 향방을 바꿀 힘을 갖고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꺼리는 기색은 없었다.

"검은 훌륭하다만 네놈의 한계는 명확하구나. 베니엘."

"그래 보이나?"

"당연하다. 그 상태로 고위력의 마법검을 다룬다면 금세 뻗어버린다. 5등급 마법검은 위력이 강한 만큼 빨아들이는 마력도 막대한 법이다."

발토리스는 베니엘은 비웃었다.

"크흐흐, 어리석은 녀석. 마스터들이 왜 고등급의 마법검을 함부로 들지 않는 줄 아느냐? 그 마법검이 소모하는 마력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이 몸은 언데드다. 얼음과 냉기란 게 산 자들처럼 치명적이지 않단 말이다. 빛을 일으키는 검이었다면 모를까."

물론 베니엘도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다. 고인물 출신인 그는 마법검의 운용에 있어선 발토리스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았다. 그럼에도 이러는 건 심장에 있는 마신의 마력을 믿기 때문.

일반적인 마력과 차원이 다른 그 고순도의 마력이면 충분히 지금처럼 지친 상황에서도 프로스트바이트의 동력을 대고도 남는다.

'단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신의 힘이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지.'

베니엘은 여차하면 드랄두가 했던 것처럼 냉기의 폭풍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한데 그는 이상하게 이때쯤 해서 자꾸 뒤를 힐끔힐끔 보기 시작했다. 싸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게, 결전을 앞둔 자의 태도로는 영 이상한 모습이었다.

이에 발토리스는 미간을 좁혔다.

'뭐지? 고도의 속임수인가?'

처음엔 의아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맞았다. 뒤를 보는 척하다가 자신이 달려들면 마법검의 힘을 발동하려는 게 틀림없다.

발토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비열한 놈!'

하지만 저 속임수를 알면서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5등급 마법검이란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별 소용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어느 정도 허세에 가까웠다.

언데드가 냉기에 내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무적인 것도 아니다. 얼어붙은 손과 팔은 허망하게 부러져 나갈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자칫 팔을 잃으면 망나니 놈에게 손쉽게 당할 수 있다.'

게다가 딴 곳을 보는 척하며 공격하려 하다니 생각하는 게 어찌 저리 졸렬하고 야비한지 기가 막힐 정도였다.

한데 사실 베니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자꾸 뒤를 보는 건, 그가 무언가를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지?'

베니엘이 믿는 구석 없이 이 위험한 싸움을 벌인 건 아니다. 솔직히 발토리스와의 전투는 미지수였다.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에 앞날을 맡기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내가 승부사도 아니고 말이야.'

당연히 확신을 갖고 움직일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판을 준비했는데….'

문제는 그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영 올 기미가 없었다는 것. 영화 같은데 보면 위기의 순간 구원군이 딱 나타난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적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론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시간이 어긋나는 법이다. 베니엘은 약간이나마 초조해졌고, 더욱 뒤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에 발토리스는 눈이 커졌다.

'이놈이 이제 대놓고 날 낚으려 하는구나!'

악랄한 놈인 줄은 알았으나 명예로운 검객의 싸움에서 설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함정을 파다니.

발토리스는 치가 다 떨렸다.

물론 사실 베니엘은 기다리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여태 그가 쌓은 비열한 명성은 발토리스의 오해를 만들기 충분했다.

그 때문에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당연히 지켜보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뭔가 뜨거운 싸움이 될 거라 여겼는데 둘이 멀뚱하게 서 있기만 했다.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져만 간다.

이에 다들 의문을 품고 한 사람에게 시선을 향했다. 바로 여기 왈패 무리 중 최고수로 통하는 용병이었다.

그는 스콜라 어댑트의 경지에 이른 자니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실력자였다.

"저 두 분이 왜 저러는 거지?"

"자네는 뭘 알고 있나?"

"우리에게 설명 좀 해주게."

사실 스콜라 어댑트에 이른 용병도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용병계에서 중요한 건 가오. 앞으로 계속 스콜라 어댑트라고 거들먹거리기 위해선 뭐라도 답해야 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한때 훌륭한 소설가가 되길 꿈꿨던 그는 자신의 창의력을 믿고 막 질렀다.

"어리석은 것들! 눈이 있으면서도 보질 못하는구나. 실로 버섯 옹이구멍이나 마찬가지다!"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 기선을 제압한 그는 자신의 망상을 펼쳐놨다.

"아둔한 것들아. 저건 고수들 간의 엄정한 수싸움이다."

"오, 그런가?"

"너희는 절대 모르겠지만 지금 저 두 사람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미 둘은 몇 번이고 죽길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경지인 것이다."

이에 찬탄이 터졌다.

"과연! 이제야 헤아렸네!"

"내가 오늘 개안을 하는구먼! 새로운 지평을 알게 되다니!"

"조언에 감사하오. 껄껄껄."

다들 역시 가오가 있었기에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묻지 못했다. 분위기를 봐서 대강 끄덕이는 게 전부. 당연히 멀리서 이 소리를 듣던 베니엘은 당황했다.

'어? 아닌데?'

기다리는 녀석이 도무지 올 생각을 안 해서 계속 산만해져 있는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시간이 끌리고 있으니 좋긴 하지만….'

그때 다시 용병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한데 도련님이 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거지?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건가?"

베니엘은 뜨끔했다. 물론 그게 플랜 B는 아니었지만 아예 그런 생각이 없진 않았으니까.

하나 다행히 이번에도 스콜라 어댑트가 해냈다.

"멍청아! 저건 시선 처리다. 저 정도 경지에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기술을 읽힐 수가 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계속 피하는 거야."

"아아…! 그렇구나!"

꿈보다 해몽이었지만, 이번에도 주변에선 다들 납득했다. 이 얘기를 훔쳐 듣던 베니엘은 그제야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게 됐다.

왜 발토리스가 쉽사리 덤벼들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저놈! 뭔가 오해하고 있구나!'

계속 뒤를 보는 게 사실은 페이크라고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이해를 얻고 보니 상대가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베니엘은 뒤를 보는 척하다가 살짝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발토리스가 움찔하고 놀라서는 뒤로 펄쩍 뛰며 빠지는 게 아닌가?

이에 베니엘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아쉽군."

사실 뭐가 아쉬운지 베니엘 본인도 잘 몰랐지만 마치 노림수가 실패한 것처럼 굴었다.

이에 발토리스가 인상을 구겼다.

"이놈!"

현재 발토리스의 머릿속은 엉킨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평소 명쾌하기만 했던 뇌 내 전투 알고리즘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 간악한!'

발토리스는 베니엘의 함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뭐, 사실 당연한 거다. 있지도 않은 함정을 찾아 파훼하려 하니 그 같은 마스터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그는 이 싸움에서 잃어버릴 게 많았다.

'놈은 이상한 경지긴 해도 일단은 프로보스트다. 마스터인 내가 저놈에게 지면 사실상 검객으로서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발토리스는 각오를 하고 나섰다.

"이 간사한 놈! 이렇게 된 이상 정정당당하게 네놈의 함정을 파훼하고 승리를 쟁취하겠다!"

상남자다운 시원한 일갈이었다.

"음? 뭔 소리?"

"크윽! 철면피 같으니라고! 과연 한 점의 수치도 모르는 게 너답구나. 후후,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나도 할 맛이 나지!"

급기야 발토리스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낮췄다.

베니엘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런 젠장. 결국 싸워야겠군.'

그우우우웅!

프로스트바이트의 힘이 사납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뒤쪽이 수선스러워지며 많은 이들이 몰려오는 소음이 들려왔다.

'설마 온 건가!'

베니엘은 앞을 경계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자 삼십여 명의 가병을 이끌고 달려오는 의붓누나 아리아나가 보였다.

베니엘은 대번에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좋아, 계획대로다.'

***

잠시, 얼마 전.

그러니까 베니엘이 자칭 빼어난 연설로 몰려든 오십여 명의 불한당 무리의 사기를 앙양한 뒤였다.

베니엘 자경대의 명예로운 행보관 퀵포우가 은밀히 다가와 알려왔다.

"주인님, 숨어서 엿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뭐야? 그래?"

베니엘은 태연하게 대화를 하는 척하며 마력을 퍼뜨려봤다. 그러자 바위 뒤에 숨어 있는 다크 엘프 두 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말이네. 조언 고맙다. 퀵포우."

쥐 인간의 감각은 매우 예민해서 근처의 위협을 쉽게 감지한다. 더군다나 퀵포우는 자신의 감각을 열심히 단련한 자였다. 아무리 다크 엘프 세작이 노련해도 쥐 인간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붙잡아 올까요? 삼 형제에게 시키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 척해라. 생각하는 바가 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딱 보니까 세작들은 아리아나의 끄나풀이었다.

'놈들이 내가 버섯 농장을 공격하려는 걸 보고하겠군.'

하면 아리아나는 반드시 끼어들어 제지하려 할 것이다. 그녀는 올곧은 성품의 소유자다. 영지에서 이런 분란이 일어나는 걸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써먹을 수 있단 말이야.'

본인 딴에는 분란을 수습하러 오는 거겠지만 오히려 베니엘은 자기 편을 들게 만들 셈이었다.

***

"이게 다 무슨 짓이냐! 모두 무기를 버려라!"

가병들을 이끌고 온 아리아나는 분기탱천해서 소리를 쳐댔다. 그녀의 사나운 기세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리아나는 베니엘을 꾸짖었다.

"이곳은 영지의 중요한 장소다. 한데 이런 불한당 무리를 이끌고 난입해? 네놈 제정신이냐!"

이에 용병들은 움찔했다. 아리아나의 태도를 보니 자신들도 처벌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몇몇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려 했지만 금방 저지됐다. 가병들이 눈을 부라리며 막아선 것이다. 가병들은 정예했기 때문에 이들 무리가 쉽게 당할 자들이 아니었다.

아리아나는 이번에는 고블린 농노들을 호통쳤다.

"너희는 어째서 무장을 하고 있지! 병사처럼 구는 게 설마 반란을 일으킨 건가!"

이에 고블린 농노들은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어떤 놈들은 아무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서둘러 날붙이를 뒤로 숨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리아나가 추궁한 건 발토리아였다.

"당신은 왜 이곳에서 싸움질을 하고 있습니까? 발토리스."

발토리스는 정중하게 답했다.

"우시드라 님의 명을 받고 농장을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아가씨."

베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저 싸가지 없는 새끼가 똑같은 후계자인데 나한테는 반말이고 아리아나에겐 존대로….'

발토리스는 오히려 이 상황이 기껍다는 듯 나섰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도련님께서 광증이 도지셨는지 난동을 부리더군요. 부디 원활한 수습을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아리아나가 여기 대답을 하려 하자 베니엘은 즉각 끼어들었다.

"아니, 아리아나! 너는 나와 함께 버섯 농장을 조사해야 한다!"

"뭐라?"

베니엘은 즉각 버섯 농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의점을 설명했다.

버섯 인간들과 우시드라의 파벌이 아닌 다크 엘프들이 붙잡혀 있다는 것과 고블린들이 전비 마련을 위해 어머니 버섯으로부터 무리하게 포자를 채취하고 있단 소리였다. 이에 드락을 비롯한 고블린들은 당혹해 소곤거렸다.

"저놈이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케르르륵! 모르겠다!"

"우리 중에 첩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비밀이 샜다! 다 끝장이야!"

그들 입장에선 그리 생각할 법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혐의점을 제시한 베니엘이 다시 요구했다.

"아리아나, 함께해다오!"

이에 아리아나는 싸늘하게 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보단 이 자리에서 네놈을 체포하는 게 사리에 맞을 것 같다만."

"이건 영지를 위한 일이니까."

간단하지만 중대한 대의명분 앞에 아리아나는 잠시 합죽이가 됐다.

"...."

하나 그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놈을 어찌 믿고?"

그녀의 말투에서 단단한 마음의 장벽이 느껴졌다.

하지만 베니엘은 아리아나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40화

뱀파이어 검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