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

40화

뱀파이어 검객 (3)

다만 현재 아리아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호감도 체크라고 할까?

게임이었다면 구체적인 호감도 수치가 나오겠지만 여기선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베니엘은 일단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 보기로 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믿고 함께할 수 있지 않겠나?"

일단 정에 호소하는 거다.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힐 터. 중요한 건 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었을 때 아리아나의 반응이다. 무시해 버리거나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곧장 공격해 올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 반응에 따라 호감도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설마 진짜 공격하진 않겠지?'

불쾌하다고 바로 칼부터 휘두를 정도면 애초에 이번 계획은 시작부터 튼 거다. 베니엘은 나름 두근두근해 하며 아리아나의 반응을 관찰했다.

'일단 버럭 소리를 지를 확률이 가장 높은데….'

한데 의외로 아리아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다.

***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는 얘기지만 어릴 때 아리아나는 정말로 베니엘을 좋아했다.

아리아나는 인간으로 치면 대충 9살 정도 되는 시점에 나이트쉐이드 가문으로 왔는데, 당시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누가 봐도 가냘프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반면 베니엘은 나이보다 조숙했다. 그래 봐야 코흘리개란 점은 별반 차이 없었으나 아리아나가 보기에 자신보다 연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는 아직 아리아나가 가문의 양녀로 들어오기 전이었다. 무슨 일인가로 제도를 방문했던 남작이 아리아나를 무슨 길고양이처럼 주워들고는 돌아왔다.

목덜미를 쥐고 오더니 시종장에게 휙 내던지며 말했다.

"씻기고, 먹여라."

그게 다였다.

당시 아리아나는 꼬질꼬질하고 빼빼 말라 볼품없었지만 시종장은 그녀가 단번에 귀한 혈통임을 알아봤다.

왜 가주가 이 꼬맹이를 데려온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현명하게 묻지 않았다.

그 후로 아리아나는 더는 춥지도, 배고프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됐다.

하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돌봄이 필요한 작은 소녀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에서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았다.

물론 초반에는 가주가 데려온 아이니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 기웃거리는 인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려온 건지 안 좋은 소문이 따르자 금세 아리아나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저주받은 아이래."

"진짜?"

"그래. 저 꼬마 때문에 부모를 시작으로 가문 전체가 멸족했다지."

"무섭군…."

그 뒤로 아리아나는 줄곧 혼자였다. 친구는커녕 말벗도 없었다.

하인들은 그녀에게 식사를 던져주고는 마치 전염병에 걸린 자를 보듯 서둘러 사라졌다.

아리아나는 어두컴컴한 방 속에서 그렇게 홀로 외로움과 슬픔에 말라 비틀어져 갔다.

어느 순간 꼬마는 밥도 잘 안 먹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덜컥!

밥이 오는 시간도 아닌데 방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그리고는 몹시 개구쟁이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둘러 들어오더니 방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

아리아나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데 그 사내아이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문에 귀를 대고 밖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제발 나와보십시오! 이대론 저희가 다 경을 칩니다요!"

분명 저 애타는 소리는 하인들이 지금 문앞에 선 사내아이를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아이는 마치 소악마처럼 킥킥대며 웃을 뿐이었다.

"멍청한 놈들!"

잠시 뒤 하인들이 멀어지자 소년은 아리아나의 곁에 오더니 털썩 주저앉아서는 넉살 좋게 말을 걸어왔다.

"어쩐지 이 방으론 종놈들이 잘 안 오더라고. 킥킥."

"...."

"야, 너 빵 없냐? 배고프다."

아리아나는 가는 손가락으로 방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먹지도 않고 남겨둔 식사가 거기 고스란히 있었다.

베니엘은 그걸 발견하더니 배고픈 짐승처럼 마구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우걱우걱.

"너 왜 안 먹냐? 그러니까 조그맣지."

졸지에 식사를 빼앗기게 된 것이었지만 아리아나는 어쩐지 지금 상황이 싫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리아나와 베니엘의 첫 만남이었다.

***

짧은 사이 아리아나의 회상이 끝났다. 실제로 그녀의 감긴 눈이 다시 떠지는 데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작고 따뜻한 감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붙잡고 싶을 만큼 안타깝지만 결국 다 흘러간 일에 불과했다.

아리아나는 차갑게 되물었다.

"우리 사이? 칼이라도 뽑으라는 건가?"

말투는 거칠었지만 베니엘은 살짝 눈이 커졌다.

'뭐야? 생각보다 호감도가 높잖아?'

아리아나가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호감도가 오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베니엘은 내심 놀랐다.

'아니, 언제 호감도가 올라간 거지?'

얼마 전에 절연 이벤트도 간신히 피했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베니엘은 납득할 수 있었다.

'아… 최근의 일 때문에 그러는군.'

베니엘은 이번에 요새의 비리를 척결하고 후계자 복귀를 이뤄냈다. 분명 그 점에 아리아나의 호감도가 미묘하게 오른 것이리라.

'아리아나는 내가 반듯하게 행동할수록 좋아하니까.'

물론 여전히 낮은 수치 탓에 냉막하게 철벽을 치고 있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베니엘은 설득이 더 수월할 것 같았다.

그는 바로 딜을 제시했다.

"만약 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후계자 자리를 내놓겠다."

이 소리에 주변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설마 어렵게 되찾은 후계자 자리를 걸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 안에 뭐가 있긴 한 모양인데?"

"그래, 아무래도 확신을 갖고 움직인 것 같구만."

무뢰배 무리는 안색이 밝아졌고, 반면 고블린 농노들은 표정이 죽어갔다.

"드락, 뭔가 굴러가는 게 이상하다. 케르르!"

"쉿! 일단 경거망동하지 마라."

한데 제안을 받은 당사자인 아리아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후계자? 그딴 거로 내가 움직일 거라 여기는가? 애초에 널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베니엘은 저런 반응쯤이야 예상하고 있었기에 계속 설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네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맹세하마."

"흐음…?"

이건 아리아나도 혹했다.

자존심 강하고 반항적인 동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베니엘은 지금껏 그녀를 괴롭게 해왔지만 통제할 수 있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

아리아나의 침묵에서 베니엘은 그녀가 이 제안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느끼고는 더욱 밀어붙였다.

"너도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을 텐데? 이전에 이 부분에 대해 경고했지 않나?"

이미 베니엘은 은광으로 떠나기 전에 큰고모의 음모에 대해 알렸다. 아리아나는 분명 뒷조사를 해왔을 터.

아직 움직이지 않은 걸 보니 결정적인 단서를 잡진 못한 모양이나 무언가 구린 구석은 충분히 확인했을 것이다.

베니엘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여태 께름칙한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너는 아둔한 멍청이다. 아리아나."

"주둥이 닫아라. 베니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아리아나도 우시드라에게 무언가 혐의를 발견한 상태였다.

다만 베니엘의 짐작대로 당장 뭘 할 수준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녀는 베니엘과 다르게 절차와 질서를 존중한다. 이렇게 불한당 무리를 모아서 들이닥친다는 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라면 베니엘의 방법이 효과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리아나가 흔들리는 걸 발견한 베니엘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장 뒤에 있는 무장한 고블린들을 가리켰다.

"그걸 떠나서도 이미 농장이 반란을 일으킨 건 확실하다. 보고도 묵과하겠다는 건가?"

"...."

결국 아리아나는 이번만큼은 베니엘의 방법이 더 낫겠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에게 베니엘이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발토리스 저자가 날 죽여서라도 농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아무리 농장을 지키는 책임을 부여받았다지만 이상한 일이지 않나?"

이에 아리아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죽이려 했다고? 후계자인 너를?"

베니엘은 끄덕였다.

"정말이다. 여기 목격자가 넘쳐난다. 안 그런가?"

그 물음에 불한당들이 일제히 그렇다고 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죠."

"암만요. 참이고 말고요."

아리아나는 즉각 발토리스를 추궁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후계자를 죽이려 한 게 정말입니까?"

"...."

발토리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아리아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이건 중죄였다. 여러 입장 차이 때문에 베니엘의 농장 진입을 막는 거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임명받은 후계자를 죽이려 하다니?

아리아나가 서슬 퍼런 눈으로 명령을 내리려던 그때 발토리스가 움직였다.

카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서로 부딪쳤다. 발토리스가 베니엘을 기습한 것이었다.

주변에서 경악성이 터진다.

"저런 비열한!"

"역시 뱀파이어 놈들은!"

하지만 이미 그의 기질을 알고 있던 베니엘은 대비를 하고 있었고, 적시에 막아냈다.

베니엘은 마스터의 일격에 후들거리는 팔로도 썩은 미소를 지었다.

"비열한 새끼! 이럴 줄 알았다!"

이 상황에 아리아나가 빠르게 가병들에게 명령했다.

"농노들을 모두 제압하고 무기를 빼앗아라. 이후에 조사하겠다!"

"알겠습니다!"

가병들이 일제히 전투에 나섰다. 아리아나는 곧장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단은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것부터다.

딱!

아리아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이 바로 발동했다.

갑자기 발토리스의 한쪽 발이 딛고 있는 땅이 움푹 파인 것이다. 당연히 발토리스의 균형이 무너졌고 그 틈에 베니엘이 공격을 날렸다.

"크아아압!"

기합과 함께 심장의 마력을 프로스트바이트에 쏟아부어 공격했다. 이 일격에 발토리스는 간신히 검을 들어 막아냈다.

콰아앙!

요란한 소음과 함께 사방에 프로스트바이트가 일으킨 얼음 조각과냉기가 흩날렸다.

발토리스는 뒤로 길게 밀려났고, 아리아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때에 맞춰 빠르게 완성한 것이다.

"파묻어라!"

4레벨 주문인 '생매장'이 발동했다. 그와 함께 발토리스의 발밑에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발토리스는 뭘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물론 뱀파이어니 박쥐로 변해 날아오를 수 있겠지만, 아리아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동굴 천장에 있는 거대한 종유석을 가리켰다. 그러자 종유석의 연결부에 균열이 일더니 곧장 발토리스가 빠진 구멍으로 낙하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종유석이 떨어지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자욱하게 분진이 일어났다.

모두 싸우는 걸 멈출 정도였다. 이에 베니엘이 소리를 질러댔다.

"멍청한 놈들아! 계속 밀어붙여라! 만약 고블린 새끼들에게 얻어맞는 놈이 나온다면 금화는커녕 장비를 빼앗아서 장대에 매달아 버릴 테니 각오해라!"

이 불호령에 불한당 무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크아아아아! 밀어버려라!"

"고블린이 흩어지려 한다! 한쪽으로 몰아넣고 두들겨!"

이런 막돼먹은 무리가 늘 그렇지만 승기를 잡았을 때는 몇 배나 강해지기 마련이다. 다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는 우리 망나니가 사실 다 계획이 있었구나, 하고 여겼다.

하면 이럴 때 부지런히 움직여 전공을 세우고 금화를 한 개라도 더 받아내야 맞았다. 용병들은 이제까지와 다른 열의로 무기를 휘둘러댔다.

놈들이 폴암으로 힘껏 두들겨대자 고블린들은 비명을 지르며 한곳에 양 떼처럼 뭉쳤다.

쿠아아아아앙!

그때 구덩이에 박혀 있던 종유석이 폭발하며 위로 치솟았다.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위로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발토리스였다. 부서진 종유석이 마치 돌의 비처럼 사방에 내리며 갑옷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캉! 카앙! 캉!

베니엘은 칼을 든 채 낄낄 웃어댔다.

"아리아나. 설마 이 정도로 끝날 거라고 여겼던 건 아니지?"

아리아나는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럴 리가. 나는 너처럼 방심하지 않는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합을 맞춰볼까?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뱀파이어 놈도 못 쓰러뜨릴 거 없잖아?"

그 말에 아리아나는 베니엘과 둘이서 영지를 헤집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망나니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미소 대신 차갑게 대꾸했다.

"네놈은 나와 합격을 할 실력이 안 된다. 방해나 말도록."

베니엘은 어깨를 풀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련하시겠나?"

41화

뱀파이어 검객 (4)

아리아나는 남작의 기대를 한껏 받는 것답게 강자다.

검술이야 베니엘보다 좀 못하긴 해도 그녀는 무려 5레벨 주문 사용자.

즉, 마검사라는 거다. 마법과 검을 자유자재로 쓰니 사기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물론 다크 엘프는 종족 자체가 마력에 친화력이 높아 마검사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마검사들의 주문 능력은 보통 2~3레벨에 그친다. 높아 봐야 4레벨인데 그것도 정말로 드물었다.

한데 아리아나는 벌써 5레벨 주문을 능숙하게 썼고, 그 이상의 경지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성장하다가는 이게 마검사인지 대마법사인지 모를 지경이 될 정도였다.

'사기 캐릭터지. 사기 캐릭터.'

베니엘은 아리아나를 힐끔 보며 그리 생각했다. 사실 아리아나가 이렇게 규격을 넘어서는 강함을 가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 역시 게임에서 선택 가능한 주인공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남자 캐릭터를 하고 싶으면 베니엘, 여자 캐릭터를 하고 싶으면 아리아나를 고르는 것이다. 아무래도 주인공이니 남들보다 월등한 잠재력을 갖고 있을 수밖에.

실제로 지금 시점에선 베니엘보다 더 강했다.

"아리아나! 마법으로 보조해라!"

"시끄럽다!"

문제는 이런 스펙 좋은 둘이 감정 문제로 영 합이 안 맞는다는 것. 아까는 우연히 연계가 잘 맞아 떨어졌지만 막상 싸움에 들어가자 달랐다.

베니엘은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멍청한! 칼질은 내가 더 낫다고! 원거리 주문을 써서 틈을 벌려. 내가 베겠다!"

당연히 아리아나도 발끈했다.

"닥쳐라! 이 모지리 같은 것! 방어 마법을 걸어줄 테니 몸으로 버텨서 틈을 만들어라! 내가 마무리 하겠다!"

이 자존심 높은 남매는 서로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며, 상대를 조연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니 뭐가 맞으려고 해야 맞을 수가 없다.

공방이 이어질수록 손이 어긋나며 실수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기에 둘이 싸우면서도 효과적으로 발토리스를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내심 당황했다.

'설마 이다지도 안 맞을 줄이야!'

둘이 일으키는 불협화음은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이건 게임에선 체감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아리아나도 절절히 느끼는 듯 어느 틈부터는 연계고 뭐고 각자도생이 시작됐다.

베니엘은 악을 썼다.

"이 멍청한 년!"

가는 소리가 그러니 고운 소리가 돌아올 리가 없다.

"쓰레기 같은 새끼야!"

베니엘은 발토리스의 검을 튕겨내며 다시 외쳤다.

"일 제대로 안 해?"

아리아나는 베니엘이 자신의 주문에 휘말리든 말든 공격 마법을 썼다.

"누가 훈수를? 주문도 제대로 못 쓰는 빡대가리가!"

남매는 전투 중에도 서로를 향해 살벌하게 입을 놀렸다. 베니엘이야 원래 이런다지만 아리아나의 모습은 진정 의외였다. 싸우던 가병들이 술렁거릴 정도다. 지금만큼은 제국에서 이름 높은 쿨뷰티의 미녀는 없었다.

"차라리 혼자 싸우는 게 낫겠다!"

"누가 할 소리!"

하지만 역시 하나보단 둘이 나았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착실히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팔팔한 둘과 다르게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발토리스가 점점 지쳐갔기 때문이다.

하나 그는 노련한 검객. 지금 상대방의 합이 영 안 맞는다는 걸 이용해 꾀를 내기로 했다.

'누굴 노릴까?'

답은 간단했다. 바로 아리아나였다.

먼저 싸움을 벌인 베니엘과 달리 아리아나는 발토리스의 기술에 대해 잘 모른다.

하면 허를 찌르기 충분할 터. 상황을 보던 발토리스는 능숙한 연기에 들어갔다.

"크윽…!"

발토리스는 일부러 베니엘의 공격을 힘겹게 받아낸 듯하며, 아리아나를 향해 틈을 드러내 보였다.

이를 아리아나는 놓치지 않았다. 즉각, 자신의 검에 마법을 걸며 달려든 것이다.

"빛이여!"

아리아나는 4레벨 주문 '광휘 부여'를 사용했다. 그러자 칼날이 태양을 머금은 듯 찬란하게 빛을 뿌렸다.

그야말로 뱀파이어에게 치명타를 날릴 주문을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다.

"!"

함정을 판 발토리스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아직 칼이 닿지도 않았는데 쏘아져 오는 빛에 피부가 타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얼마나 아프던지 일순간이나마 함정의 대상을 아리아나로 잡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 발토리스는 대경실색하며 아리아나의 공격을 막아냈다.

콰앙!

무슨 폭발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그의 블러드 블레이드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이대로라면 아리아나가 결국 발토리스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데 베니엘이 보니 그때 발토리스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가 무슨 기술을 발동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조심해, 멍청아!"

그 말과 함께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그림자 수십 개가 아리아나를 헤집었다.

카앙! 캉! 캉!

대부분 갑옷에 막혀 불꽃이 튀었지만 일부는 갑주의 틈새를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피가 흘렀지만 베니엘도 겪어봤던 것처럼 상처는 얕았다. 아리아나는 당연히 그걸 무시했다.

"이깟 거!"

문제는 뒤에 이어지는 흡혈이었다. 갑자기 발토리스의 블러드 블레이드가 상처를 통해 아리아나의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현기증에 기세를 올리던 아리아나가 휘청였다.

아무리 그녀가 대단한 인재라고 해도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하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가 흔들리자 검에 걸린 마법이 약화 됐다. 빛이 흐릿해져 갔는데, 반대로 흡혈을 한 블러드 블레이드는 더욱 강해졌다. 상성을 뒤집고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유감이군요. 아가씨."

검을 들며 속삭이는 발토리스의 모습에 아리아나는 순간 죽음을 느꼈다. 동시에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끝이라고?'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아리아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멍해진 아리아나의 의식 속에서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발토리스의 검도 천천히 떨어졌지만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데 저 옆에서 베니엘이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아리아나는 깨달았다.

'아! 처음부터 이걸 노렸구나!'

저 망나니는 자신과 공동 전선을 제안한 뒤로 줄곧 지금과 같은 상황만 엿봤을 것이다. 바로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는 이때를 말이다.

'저 녀석은 날 구하는 대신 발토리스를 베겠지.'

아마 베니엘에겐 다시 없는 결과이리라. 서열 7위의 검객을 쓰러뜨려 가문 내 입지를 올리고, 경쟁자인 누나도 제거할 수 있는….

한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신을 내다가 목숨을 잃고 베니엘에게 모든 걸 내주게 생겼다.

다시금 원망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잠깐이나마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게 어리석었다. 결국 저 녀석은 단 한 순간의 기회를 위해 자신을 미끼로 써먹은 것이었다.

'끝이야.'

아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놀랍게도 베니엘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오른팔로 아리아나를 감싸 안고 왼손에 든 검으로 발토리스의 일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양손으로 휘두르는 상대의 검을 한손으로 받는 건 쉽지 않은 일.

베니엘의 검을 대번에 밀렸고 그의 왼쪽 팔이 크게 베여 사방에 피를 뿌렸다.

촤아아아!

아리아나는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 망나니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분명 자신은 베니엘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피는 진짜였다.

베니엘의 피는 그녀의 하얀 볼까지 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피의 온기에 아리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너…? 왜…?"

베니엘은 대답 대신 아리아나를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왼손에 쥔 검을 오른손에 바꿔 쥔 뒤 발토리스를 베었다.

부웅!

그는 교묘하게 허리를 낮추며 상대의 다리를 노렸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격이었기에 발토리스는 풀쩍 뒤로 뛰어 피했다.

하지만 베니엘의 노림수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심장에 거의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 짜냈다. 과부하 때문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크윽!"

베니엘이 발동한 것은 바로 도깨비불을 수 미터 앞으로 뭉쳐서 불꽃처럼 뿌리는 기술.

검기를 쏘아내지 못했기에 궁여지책을 만든 방법이다. 일전에 무결자의 신전에서 오크들에게 썼던 이 기술은 여전히 유용했다.

화르르륵!

새하얀 도깨비불이 앞으로 뿌려지며 발토리스를 덮쳤다. 그는 상반신에 도깨비불을 뒤집어썼다.

"크아아아악!"

몸을 태우는 고통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이 도깨비불은 도트뎀으로 유명했다. 꺼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피해를 준다.

하지만 가장 열 받는 게 그게 아니었다.

"이런 조잡한 기술에!"

차라리 검기였으면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날아오는 느린 공격에 발토리스는 허를 찔렀다.

이건 마치 야구에서 강속구만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느린 볼을 던지면 타자가 반응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 틈에 베니엘은 소리쳤다.

"마법을 써! 5레벨 구속 주문!"

아리아나에겐 '혈액 구속'이라 불리는 강력한 5레벨 주문이 있다. 주문의 대상자를 단번에 굳어버리게 만드는데, 이것 때문에 베니엘이 그녀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만 이 기술은 혈액 구속이란 이름처럼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만 먹힌다. 뱀파이어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다.

"안 통해!"

"멍청아! 지금 저놈을 보라고! 피가 뿌려졌잖아!"

현재 발토리스는 베니엘이 쏟아낸 피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였다. 팔이 베일 때 단순히 근육만 갈린 게 아니라 위팔동맥까지 잘렸기 때문이다.

이후 마력을 이용해 잘린 동맥의 출혈을 막지 않았다면 벌써 베니엘은 쓰러졌을 거다.

아리아나는 베니엘의 지적에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저렇게 피를 뒤집어쓴 상태라면 제한적이나마 마법이 발동할지도 모른다. 이건 생각도 못 한 운용법이었다.

"…제대로 안 먹힐 거다."

이에 베니엘은 자신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할 수 있겠어?"

"알겠다."

"좋아!"

베니엘은 앞으로 달려갔다. 그와 함께 아리아나는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주문을 맹렬히 읊었다.

한창 마력을 운용해 도깨비불을 끄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던 발토리스가 칼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아리아나는 천재적인 솜씨로 주문을 완성한 상태였다.

"피를 묶는다!"

마법이 발동하자 발토리스의 몸에 묻어 있던 피가 보라색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물론 제대로 구속이 발동한 게 아니라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피부에 묻은 베니엘의 피가 그의 움직임을 조금 제한했을 뿐이다.

하지만 극속으로 움직이는 검객의 싸움에서 그 정도면 충분한 허점이었다.

"이런!"

부웅!

베니엘의 검이 빛을 뿌리자 발토리스의 한쪽 팔이 잘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도 같이 날아가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발토리스는 얼어붙어 버린 자신의 절단면을 보며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이 빌어먹을 애새끼들이! 크윽!"

설마, 설마 했는데 기어코 한쪽 팔이 베이는 굴욕을 겪고 만 것이다. 발토리스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도 싫었고.

하나 생존 본능이 그의 미련을 억눌렀다.

'젠장! 승기가 기울었다!'

발토리스는 이대로 나이트쉐이드 가문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후계자를 노리려 한 데다가 일까지 그르쳤으니 우시드라는 그를 버리려 할 터. 그는 즉각 공중으로 뛰어올라 변신했다.

퍼엉!

뱀파이어의 권능을 이용해 검은 연기의 돌풍이 된 그는 허공을 날아올랐다. 사방에서 날아온 박쥐들이 돌풍의 주위를 에워쌌다.

"이대로라면 놓쳐!"

베니엘의 외침에 아리아나가 부하들을 불렀다.

"궁수들! 마법 화살을 쏴라!"

발토리스는 도망치느라 후계자 둘과 거리가 벌어진 상태. 이제 맘껏 활질을 해도 됐다. 더군다나 고블린들이 거의 제압된 상태라 가병들이 나설 여력이 생겼다.

팅! 투웅! 퉁!

활시위가 튕기는 소리와 함께 마법을 머금은 화살들이 빛을 뿌리며 날아갔다. 마치 예광탄이 쏘아지는 것만 같았다.

매섭게 날아간 화살 상당수는 돌풍에 밀려 진로가 휘어졌지만 일부는 그대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역시 다크 엘프들이 쓰는 강궁은 위력이 남달랐던 것이다.

"크아악!"

돌풍 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와 함께 검은 연기로 된 돌풍이 흩어지며 그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추락했다.

비참하게 땅에 떨어져 구르는 그것은 등에 화살이 여러 대 꽂힌 발토리스였다. 그는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를 썼지만 계속 앞으로 쓰러졌다.

아리아나는 가병들에게 명했다.

"놈의 팔다리를 전부 자르고 구속해라!"

42화

농장 관리관 (1)

아리아나의 명에 가병들이 재빨리 움직여 쓰러진 발토리스를 포박했다.

일단 아리아나의 명대로 사지를 전부 절단한 뒤에 밧줄로 꽁꽁 묶어 버렸다. 지켜보는 자들 가운데 이를 잔인하다 여기는 이는 별로 없었다.

지하 세계의 감성이 그렇기도 하고, 상대가 뱀파이어라 나중에 다시 붙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었다면 피가 철철 흐르는 고어씬이었겠지만, 뱀파이어라 그런지 검고 썩은 피가 찔끔 흐르는 게 전부였다.

뭐랄까, 언데드를 다루는 마학이 발달한 이쪽 세계에선 어쩐지 놈들은 조립식이란 느낌이 있었다.

이어서 가병들은 발토리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려버렸다.

아무리 마스터라도 이런 처지가 되니까 그냥 하역장에 뒹구는 짐짝 같았다.

그렇게 마무리가 될 무렵 베니엘과 아리아나의 눈이 마주쳤다.

"으음...."

아리아나의 안면이 씰룩거리는 게 보기에 영 이상했다. 도무지 베니엘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방금 그건...."

베니엘은 차갑게 대꾸했다.

"착각하지 마라."

"...."

"피를 뿌려 네 마법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야."

아리아나는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아마 이전이라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최근의 베니엘을 변화를 보면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나는 내 성급함과 미숙함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걸 베니엘이 구해줬고.'

이건 가볍게 잊을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답을 하더라도, 지금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하나 아리아나의 그런 기특한 다짐은 금방 박살나고 말았다. 베니엘이 그녀의 어깨를 밀친 것이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움직여. 일단 농장부터 뒤지자. 놈들이 뭔가 은폐하려 할지도 모르니까. 하여간 둔해 터져서는. 쯧!"

혀를 차면서 앞장서 걷는 베니엘을 보며 아리아나는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역시 싫은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

닉스포트로 복귀하는 우시드라는 기분이 좋았다. 접경지 요새 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움직여서는 야만 오크들과의 얘기를 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회에서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이제 야만 오크의 2차 침공을 일으키는 건 기정사실.

'내부에서만 협조를 잘하면 승산이 있다.'

우시드라는 자신이 가문의 주인이 되는 게 예상보다 빠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렇게 돌아오던 우시드라는 뭔가 영지의 분위기가 이상한 걸 감지했다.

"음…?"

갑자기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풍겨왔다.

지하에서 시체 냄새야 늘 나는 것이지만 이건 규모가 달랐다. 한두 명 죽어서 날 수 있는 악취가 아니라고 할까?

잠시 뒤 도로를 따라 가로수처럼 교수대에 줄지어 매달려 있는 고블린 농노들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표정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녀의 일행들은 소리 죽여 경악했다.

매달린 고블린들의 시체는 동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피부는 멍과 먼지로 엉망이었고, 일부는 천장의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에 흠뻑 젖어서 번들거렸다.

고블린 농노들은 다들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는 듯한 얼굴로 죽어 있었기에 이 광경은 더욱 끔찍했다. 여기저기 사지가 뒤틀린 게, 처형되기 전에 다크 엘프 특유의 잔혹한 행위가 계속 이어졌음이 분명했다.

이건 보기만 해도 씁쓸하고 슬픈 광경이었지만 우시드라의 머릿속에는 작은 연민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것보다 자신의 음모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치켜떴을 뿐이다.

우시드라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때 저 앞에서 날렵한 도마뱀을 탄 다크 엘프 전령 하나가 달려왔다.

"우시드라 님! 복귀하셨군요!"

"무슨 일이냐?"

"남작님께서 찾으십니다. 곧장 흑요석 성탑으로 오시라는 명입니다."

"…알겠다."

전령이 그렇게 떠나자 일행 모두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

둘째 딸 페샤디아가 당혹한 얼굴로 우시드라를 불러왔다. 이에 우시드라는 냉막하게 답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하지만…!"

"바로 체포하러 오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모든 게 들통났다고 보긴 어렵다."

"아...."

"게다가 이 어미가 이번 일에 관해 빠져나갈 구멍을 몇 개나 파뒀음을 모르느냐?"

그 말에 페샤디아는 안심한 표정이 됐다. 음모에 있어 자기 어머니는 늘 일이 들켰을 때를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시드라에겐 언제나 핑계와 변명거리가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적들이 그녀를 단번에 쓰러뜨릴 수 없는 이유였다.

그녀는 딸을 훈계했다.

"너는 잊지 마라. 위기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돌파해야 한다는 걸."

일이 어디까지 흘러갔는지는 아직 파악이 안 됐다. 하나 늘 그렇듯 꼬리 자르기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물론 농장 관리자란 위치에 있었으니 어느 정도 책임은 져야 할 터였다.

'그래도 버섯 농장의 관리직만은 지켜내야 한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이번 일의 손해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면서 남작의 성으로 향했다.

***

우시드라 일행은 남작성의 가장 높은 장소인 흑요석 성탑에 도착했다.

성탑에는 남작을 비롯해 가문의 중진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아리아나와 최근에 후계자에 오른 베니엘 역시 자리했다.

"감찰에 고생했다. 자리에 앉아라."

남작은 성탑 위에 있는 거대한 탁자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어쩐지 평소보다 남작과 거리가 떨어진 자리였다.

하나 우시드라는 군말 없이 착석했다. 그러자 남작이 바로 물었다.

"오면서 대충 들었을 거다. 버섯 농장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진압했다."

우시드라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관리자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점 유감입니다."

나르다리온 남작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의당 그래야겠지."

"...."

"그것보다, 고블린들이 농노 주제에 제법 그럴 듯한 무구를 갖추고 있더군. 그중 상당수를 네가 제공했다고 하던데 어찌된 일이냐?"

그리 물어오는 남작의 눈빛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었다. 우시드라는 목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지만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놨다.

"최근 농장 주변에 도적떼가 들끓더군요. 이에 감찰을 나가면서 문제가 일어날까 싶어 고블린에게 무구를 지급했습니다. 물론 농장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습니다만, 충분한 숫자는 아니니까요."

실제로 피해 사례가 있었으니 그럴 듯한 얘기였다. 우시드라는 자기 변명에 사과를 덧붙였다.

"다만, 먼저 보고하지 않고 진행한 점 사죄드리겠습니다. 남작님."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관리자에게 그 정도 재량은 있어야 하는 법."

뭣보다 이번 봉기의 주역인 고블린 드락이 우시드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현재 드락은 엉망으로 얻어터진 채 포박돼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였다. 남작은 드락에게 형식적으로 물어봤다.

"미천한 것아. 너는 저런 배려를 이용해 반란을 획책한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 이 일을 지시했느냐?"

드락은 우시드라를 힐끔 보더니 태연하게 답했다.

"지시한 자는 없습니다. 모든 게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

이제와서 우시드라를 물고 늘어져 봐야 별 소용없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일이 틀어진 게 우시드라 때문도 아닌 데다가, 드락은 사실 그녀와 직접 만나 명령은 받은 적도 없다. 우시드라는 사람을 시켜 교묘하게 지원해 왔을 따름이다.

설령 폭로를 한다고 해도 우시드라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며 발뺌할 게 뻔했다.

'뭣보다 내겐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하니, 자칫했다가는 나이트쉐이드 혈족에 대한 무고 혐의까지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하면 괘씸죄로 농노들은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터.

'그럴 바에는 일을 벌인 나와 수뇌부가 짊어지고 가는 게 맞겠지.'

이미 농노 중 일부가 본보기로 처형당하긴 했으나 아직 산목숨이 많았다. 숙련된 농부들이니 모두 죽이지는 않을 거란 게 드락의 판단이었다.

'뭣보다 남작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려면 우시드라가 곁에 있어야 한다.'

계산적인 우시드라와 다르게 남작은 기분파다. 고블린 농노가 괘씸하다고 모조리 죽이라고 당장 명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때 말릴 건 손익에 민감한 우시드라뿐이다.

우시드라 역시 드락의 이런 뜻을 바로 알아챘다. 따로 대화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드락만이 보이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뒷일은 책임져 주겠다는 뜻이었다.

"남작님의 보살핌도 모르고 저희가 반기를 일으켰으니… 마땅히 벌을 받겠습니다. 다만, 절 따른 무지렁이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농장에 유용할 것입니다."

드락은 이마를 땅에 대고 간청했다. 우시드라 역시 잽싸게 끼어들었다.

"저자는 용서할 수 없겠습니다만, 무식한 농노들에겐 관대한 처벌을 요청드립니다. 당장 이어갈 농사가 많습니다. 남작님."

"흐음.... 알겠다."

남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추가로 물었다.

"우시드라. 하면 마스터 발토리스를 농장에 둔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마찬가지입니다. 도적떼에 대비하게 한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후계자들과 그 정도로 심하게 충돌할 줄은 몰랐습니다."

남작은 바짝 수그린 우시드라의 태도가 맘에 들었다. 애초에 그는 우시드라를 쳐낼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쓸모가 넘치는 존재다. 사라져 버린다면 당장 영지의 경영에 차질이 생길 정도. 그래서 남작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집요하게 우시드라를 추궁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남작이 사건을 파헤치는 태도가 뭔가 형식적이기 그지없었다.

지켜보고 있던 베니엘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역시 큰고모는 한 번에 베어버릴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

뭣보다 가문 내 사건의 판결이 뭔가 엄격한 법의 원칙에 의해 진행되는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가주의 판단과 기분이다. 남작조차 어쩌기 힘든 증거가 차고 넘치지 않는 게 아닌 이상 우시드라의 위치는 아직 건재하리라.

그렇기에 베니엘이 노리는 건 처음부터 다른 것이었다. 그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 틈을 노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의붓누나 아리아나는 이것을 눈치채고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저 망나니 놈이 또 뭔가!'

제발 이번에는 자길 끌어들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한다면 대번에 끊어낼 생각이었다.

그때 남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몰랐다고 해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시드라."

남작은 여기서 최근 너무 많은 권력을 끌어 쥐고 있는 여동생의 힘을 빼놔야겠다고 판단했다.

'농장 관리직에선 물러나게 해야겠군.'

우시드라는 이런 오라비의 생각을 귀신같이 읽어냈다. 그래서 재빨리 나서려 했다.

'쉽지 않겠지만은 농장 관리직만은 지켜야 한다.'

먹을 것을 관리하는 위치는 어딜 막론하고 중차대하다. 우시드라는 그녀가 가진 많은 직함 중에 다른 것들을 여러 개 내놓고 남작을 만족시키기로 했다.

'손해를 보는 건 확정이야. 문제는 어디까지 손해를 보느냐지.'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운을 뗐다.

"물론입니다. 남작님. 이번 일로 과중한 책임을 느끼고...."

한데 그때 예상치 못하게 망나니 베니엘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남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모두의 시선이 베니엘에게 꽂혔다. 아리아나는 결국 저놈이 사고를 치는구나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냐? 발언해 보라."

원래 남작이라면 갑자기 끼어든 베니엘에게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번 반란을 제압한 결정적 공을 세웠기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뭐든 말해보라는 듯이. 뭣보다 요즘 달라지기 시작한 망나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됐다.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고 우시드라의 허를 찌를 내용이라면 기꺼이 받아줄 생각이었다.

"간언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일로 큰고모는 관리자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에 대한 대책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듣고 있던 우시드라는 눈을 치켜떴다.

'저 새끼가?'

대단히 괘씸하게도, 자기가 물러나는 게 기정사실이라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장 주둥이 다물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지은 죄가 있으니 나서질 못했다. 뭣보다 남작이 발언을 허락한 게 컸고.

"대책이라? 크크큭."

남작은 아들놈이 무슨 소리를 할지 벌써부터 흥미가 돋았다.

43화

농장 관리관 (2)

회의장 모두의 시선이 베니엘에게 쏠렸다.

여기 모인 이들은 하나 같이 가문의 중진들. 압박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텐데도 베니엘은 태연했다.

이전의 그였다면 애써 허세를 부리거나, 주목받았다는 데 기뻐서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차라도 한잔하는 것처럼 여유만만한 게, 가문의 중진들이 내뿜는 압박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남작은 그 모습에 내심 흐뭇해졌다.

'변하긴 했군. 그래, 내 자식이라면 그래야지.'

한데 그런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남작은 이어진 베니엘의 대답에 실망했고, 급기야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농장 관리관 자리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해 관리해 보겠습니다."

남작은 짜증이 피어올랐다.

'애송이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군.'

망나니 아들놈이 잘하는 건 싸움과 약탈이다. 지하 세계에선 그것만으로도 우두머리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지만 농장은 다르다.

베니엘이 지금껏 해본 적 없는 행정과 경영, 관리라는 분야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농노를 부리는 버섯 농장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년 농사 계획을 관리하고, 농노에게 식량을 지급하고, 수확물을 저장하고, 또 이것들을 분배하고 잉여 자원의 판로를 개척하는 일 등은 칼이나 휘두르던 놈이 곧장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작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한 번 더 참았다. 베니엘만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다. 보는 이들이 많은 이상 공을 세운 이를 박대해선 안 된다.

"네놈이 말이냐? 흐음, 공을 세운 건 안다만..., 다른 상이 좋을 것 같군."

남작은 늘 직설적인 화법을 즐기지만 이번만큼은 드물게도 네놈은 신뢰가 없어서 안 된다는 뜻을 돌려 말했다.

곁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우시드라는 은근히 조소를 머금었다.

'촌극이 따로 없구나.'

우시드라는 잠시 긴장했으나 자신이 관리관 자리를 빼앗길 일은 없다고 느꼈다.

'아니, 오히려 도움이 되겠어.'

베니엘 같은 막돼먹은 놈이 농장을 노린다는 걸 알게 된 남작이 오히려 자신이 일을 계속 맡게 해줄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남작도 우시드라도 예상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저 혼자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결론을 내리려던 남작이 한쪽 눈을 치켜떴다.

"음?"

"누나와 함께 하겠습니다."

"아리아나와?"

"네, 공동으로 농장을 경영해 보겠다는 소리입니다. 함께 책임지고 일을 완수하고자 하오니 남작님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근처에서 듣고 있던 아리아나는 눈이 살짝 커졌다.

'아니, 나는 왜?'

당장 아니라고 나서려 했으나 그때 베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베니엘이 시선으로 가만있으라는 듯 눈치를 줬다.

아리아나는 반발하려다 그만뒀다. 왜냐하면 목숨을 구해줬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지만 일단은 지켜보자.'

그사이 베니엘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농장의 경영은 아리아나가 전적으로 맡고, 자신의 농장의 보호와 경비, 농노의 관리를 책임지겠다고 한 것.

그는 꿇어앉아 있는 드락을 가리켰다.

"반항적인 농노들을 관리하는 데는 제 솜씨가 제격입니다. 남작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겐 친구가 많은데, 이번 일도 그자들이 미리 귀띔해줬습니다."

남작은 그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넌 네놈 같은 무리와 곧잘 어울리곤 하지. 그놈들은 술집과 도박판을 전전하니 듣는 소문도 많겠구나."

"하하, 부끄럽습니다. 아무튼, 제게 맡겨주시면 다시는 농장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흐음...."

남작은 그 제안이 솔깃했다.

뭣보다 망나니와 다르게 의붓딸 아리아나라면 믿을 수 있다. 게다가 아리아나는 성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 슬슬 중책을 맡겨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시드라 녀석을 견제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고.'

흔들리는 남작의 모습에 베니엘은 쐐기를 박아넣었다.

"저희는 남작님의 후계자입니다. 영지 경영 역시 앞으로 배워야 할 덕목이지요. 미숙합니다만, 둘이 함께 궁리해보며 해결하겠습니다."

애초에 아리아나를 끌어들인 건 단순히 싸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속 조치로 우시드라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선 그녀가 꼭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은 훌륭한 계책이었고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한데 너희 둘이 언제 화해한 것이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그 물음에 베니엘은 씨익 웃었다.

"원래 남매는 자라나면서 다투는 법입니다. 하나 어찌 가족 간에 앙금이 있겠습니까? 누나와 저는 서로 의지하며 아낄 따름입니다."

이 말에 우시드라의 둘째 딸 페샤디아가 다시 없는 역겨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됐다.

"!"

충격적인 건 당사자인 아리아나가 더했다. 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인 그녀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문의 어른들 앞에서 우리 사이 좋아요, 라고 외치는 남동생 때문에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반면 남작은 드물게 웃어 보였다.

"서로 화목하다니 좋은 일이다. 너희는 계속 그렇게 물과 물고기처럼 함께 지내도록 하라."

평소 남작이 가진 음험함을 고려해 봤을 때 의아한 말이긴 했다. 하나 남작은 진정으로 베니엘과 아리아나가 가까워지길 바랐다.

물론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된다는 까닭 때문은 아니다. 다크 엘프에게 가문은 투쟁의 장일 따름이니까. 그저 남작에겐 모종의 계획이 있었고, 그걸 위해서 둘이 가깝게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작은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이걸 두고 보고만 있을 우시드라가 아니었다. 지금 끼어들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임을 그녀는 잘 알았다.

"남작님. 농장의 경영은 중대한 일입니다."

남작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여동생의 태도에 살짝 짜증이 일었다.

"물론 알고 있다. 아리아나라면 믿음직하지 않겠느냐?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작은 실수도 하는 법이 없었지."

너는 실수했지 않느냐며, 은근히 비꼬는 오라비의 말에도 우시드라는 태연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저 역시 아리아나를 농장 관리관에 임명하겠다는 결정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시드라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의도적으로 베니엘의 이름을 빼놨다. 망나니 따위가 어찌 농장의 관리를 할 수 있겠냐는 듯이.

"하면? 다른 이유라도 있느냐?"

"네, 제가 오면서 듣자니 고블린 농노들의 반란 때 농장의 어머니 버섯에 문제가 생겼다더군요."

어머니 버섯은 농장에 포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게 망가지면 버섯 농장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자금 마련을 위해 포자를 무리하게 수집한 탓에 어머니 버섯의 상태가 안 좋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고사해 버릴 정도라고 하니 이는 엄중한 상황입니다."

"흐음...."

"자칫하면 어머니 버섯을 새로 구해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럴 때는 경험 많은 가문의 어른이 중임을 맡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버섯은 매우 값비싸다. 만약 기존에 있던 게 죽는다면 버섯 인간들의 마을로 가서 많은 금을 주고 새로 사야 한다.

이후 이 값나가는 물건을 빼앗으려는 강도 놈들이 끊이질 않을 테니 안전하게 영지로 가져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터. 누가 봐도 이런 일에 경험이 충분한 자가 맡아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버섯 농장은 다음 수확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남작님."

우시드라의 지적에 남작은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 기회에 녀석들에게 실무를 익히게 해보려 했는데, 다음을 기약해야 하나….'

아무래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한데 이때 베니엘이 다시 끼어들었다.

"이 문제를 저와 누나가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

"뭐라?"

남작의 반문에 베니엘은 확신을 갖고 다시 답했다.

"죽어가는 어머니 버섯을 살려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길 청합니다. 저희가 성공한다면 관리관 자리를 주고, 실패한다면 없던 얘기로 해도 그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어머니 버섯은 이대로 두면 고사할 확률이 높습니다."

아리아나는 이쯤 되자 울고 싶어졌다.

'아니, 무슨 수로 버섯을 살린다고?'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빠지기도 모양새가 애매했다.

처음부터 선을 딱 그었으면 모를까, 어려운 일 앞에서 내빼는 모양새였으니까.

"가능한가? 아들아. 너는 가주 앞에서 허언해선 안 된다."

남작의 엄중한 물음에 베니엘은 확언했다.

"물론입니다. 어찌 제가 가주를 기만하겠습니까?"

"실패한다면?"

"은광에 다시 가겠습니다."

남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어처구니없는 놈."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좋다. 한번 해보도록. 일주일을 주마. 그사이 변화가 없을 경우에 너는 은광에 갈 줄 알아라."

***

"미쳤어? 어?"

아리아나는 베니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베니엘은 가볍게 그걸 피했다.

"뭐가?"

"나는 왜 끌어들여?"

"아, 너도 이미 발을 담갔잖아. 남매가 일심동체인데 혼자 빠져나가려고?"

아리아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망나니 놈이 면전에서 욕을 내뱉던 게 얼마 전이다. 그런데 일심동체라니? 기가 막혔다.

"발을 담그긴 누가 담가? 농장 건은 어쩌다 말려든 것뿐이다."

"아니, 어머니 버섯을 살리는 거 말이야. 이미 네 지분이 상당하다고. 아리아나, 고맙게 생각한다."

"대체…?"

베니엘이 원래 엉뚱한 놈이긴 했지만 요즘은 더 이해할 수 없는 아리아나였다.

대체 자신이 어머니 버섯과 관련해 뭘 했다는 건가? 베니엘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뭔 소린가 싶지? 보면 안다. 일단 내 방으로 가자."

그 말에 아리아나는 팔을 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네 방…?"

베니엘의 방이라면 어릴 적 이후로는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장소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다. 그곳은 어린 아리아나가 냉정하게 거절당했던 곳이다.

마지막에 둘의 관계가 파탄 났을 때 꼬마 아리아나는 울면서 베니엘의 방문을 두들겨댔다.

하지만 베니엘은 끝끝내 외면했었다. 그런데 다시 방에 가자고?

아리아나는 옛 기억에 괴로움을 느꼈다.

"거절하지."

그녀는 화가 나고 분노해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가보겠다. 그리고 버섯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아리아나는 베니엘이 무신경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깡그리 잊고 대뜸 다시 친한 척하고 격의 없이 구는 게 열 받았다.

한데 역설적이게도 아리아나의 가슴 한구석에는 작은 희망과 기쁨이 자리했다. 그것은 마치 다 타버린 잿더미 사이에서 보이는 작은 불꽃과 같았다.

아리아나는 분노하며 그걸 밟아서 얼른 꺼버리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복잡한 표정이 된 아리아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근처에 있던 낡은 인형을 힘껏 끌어안았다.

'절대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제껏 베니엘에게 무언가 기대했을 때는 몇 배나 되는 상처로 되돌아왔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는 없다고 아리아나는 애써 생각했다.

***

아리아나가 가버린 것에 베니엘은 애석해졌다. 그는 자기 방에 돌아와 탄식했다.

"이걸 좀 봐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얼마나 계획적인 남자인지 알지."

베니엘의 방 안의 큰 화분에서 한 버섯 인간이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이전에 검은 요새의 창고에서 찾아낸 황금 포자 일족이다. 기어코 되살려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베니엘이 괜히 아리아나의 지분이 크다고 한 게 아니다.

이 황금 포자 일족의 소생에 있어 아리아나에게서 훔쳐 온 값비싼 영양재와 비료가 큰 역할을 했으니까.

"흐흐흐, 아리아나와 함께하니 모든 게 순조롭군."

베니엘은 다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리지널에게 있어 의붓누나란 존재는 재앙이자 증오의 대상이었겠지만, 그에게 있어선 복덩이 그 자체였다.

전투면 전투, 농장 경영이면 경영, 아주 써먹을 구석이 다분했다.

'아무튼, 이번 건을 성공시켜 우시드라를 약화시킨다.'

베니엘은 멀리 볼 줄 알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우시드라의 점점 갉아먹은 뒤에, 완벽히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44화

농장 관리관 (3)

***

되살아 난 버섯 인간의 모습은 마치 동충하초를 떠올리게 했다.

화분의 흙에 묻혀 있는 원래 몸을 기반으로 새로운 육체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몸은 원래 몸보다 작아졌지만 형태는 완벽하고 깨끗했다. 다만 아직 의식을 찾지는 못해서, 버섯 인간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안 했다.

그대로 이틀을 기다리자 버섯 인간이 완전히 깨어났다.

[…?]

녀석은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그러다 베니엘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실제로는 괜찮았는데, 아직 발이 흙 아래로 뻗어 나가 원래 몸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었다.

베니엘은 해칠 의사가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적이 아니다. 내가 널 구했다."

조그마한 버섯 인간은 베니엘의 말을 순순히 믿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아갔다.

베니엘은 내심 흡족했다.

'영민한 녀석이군.'

어차피 자신이 흥분해 봐야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막말로 베니엘이 적이라 해도 지금 뭘 할 수 있겠는가?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베니엘은 버섯 인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말을 꺼냈다.

"소통을 위해 포자를 뿜는다면 받아들이겠다."

[...!]

이 제안에 버섯 인간은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버섯 인간은 입이 없기 때문에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으로 대화한다.

이게 버섯 인간들끼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종족에겐 안 통한다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섯 인간은 텔레파시 포자라는 걸 내뿜어 상대가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걸 들이마시게 되면 뇌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돼 텔레파시가 가능해지기 때문.

문제는 버섯 인간의 포자는 원체 종류가 다양해서 그중에는 타종족에게 득이 되는 것도 많지만, 해가 되는 것도 많다는 것.

즉, 이 문제는 상호신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텔레파시 포자를 주는 척하며 독이나 기생 포자를 전달하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생 포자 같은 걸 잘못 받아들이면 그날로 버섯 인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버섯 인간과 텔레파시 포자를 교환했다는 건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였다.

한데 베니엘은 처음 보는 버섯 인간에게 먼저 포자를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 ...? …?]

버섯 인간이 뭔가 웅웅거리며 의사 표시를 하는데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정황상 갑작스러운 포자 요구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듯했다.

물론 베니엘도 대책 없이 그런 건 아니다.

상대는 황금 포자 일족. 버섯 인간 중에 왕족이며, 지하에서 드물게 명예를 아는 고귀한 존재들이다. 은인으로 보이는 자에게 텔레파시 포자 대신에 흉수를 쓸 리가 없다.

'설령 써도 안 통한다.'

베니엘은 나름대로 마스터에 준하는 실력자다. 마스터부턴 버섯 인간의 포자 공격은 잘 안 통한다. 나이 많은 버섯의 강력한 포자 정도만이 위협적인 뿐이다.

반면 눈앞의 버섯은 키가 2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원래 30센티미터였으나 부활 과정에서 크기가 더 줄어든 어린 버섯이다.

통할 리가 없다.

"네 일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다. 가능하겠나?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할 텐데 말이야."

[...! …!]

버섯 인간은 뭐라, 뭐라 손짓을 한다. 긍정의 표시였다. 곧 버섯 인간은 삿갓 같이 생긴 버섯 머리 부분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가루를 내뿜었다.

후우욱.

베니엘은 그걸 자연스럽게 코로 빨아들였다. 그러자 눈앞이 반짝이며 머리에 따끔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심지어 현기증까지 일었다.

포자의 능력으로 뇌에서 초능력을 관장하는 에테르 피질이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 생경한 감각이군."

다만 많이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지는 감각도 아니었다. 마치 진화의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고대의 원초적인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다크 엘프가 마법에 집중하며 초능력을 잃어버렸으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찌르르.

뇌에 전기가 따끔하게 흐르며 이전에 멈춰 있던 부분이 다시 작동하는 것만 같았다.

베니엘은 미소를 지었다.

"좋군. 아주 좋아."

사실 황금 포자 일족의 포자는 단순히 소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것은 초능력 각성제의 역할도 갖고 있었던 것.

이 때문에 초능력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이 천금을 주고라도 얻고 싶어하는 기회기도 했다.

베니엘은 소통을 핑계로 이를 날로 먹은 것이다. 뭣보다 상대가 어린 버섯이라 이런 손익에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황금 포자 일족의 어른들은 이 기회를 대단히 비싸게 판다. 그들이 고귀한 씨족인 것과 별개로 장사는 또 장사니까.

'새로운 능력이 생겼군.'

앞으로 단련해야겠지만 초능력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마법으로 치면 1레벨 주문 이전에 캐스팅도 간단하고 장난처럼 부릴 수 있는 0레벨 주문에 입문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미가 있었다. 찰나의 판단으로 생사가 갈리는 검투에서 작은 장난질로도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각성의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버섯 인간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던 것.

[삐엑! 킨쿠 삐엑!]

버섯 인간의 언어로 삐엑은 감사란 뜻이다. 킨쿠는 무언가를 강조하는 말이고.

즉, 감사! 압도적 감사! 라고 말하는 셈.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됐다니 기쁘군."

그제야 버섯 인간은 다크 엘프의 언어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듬더듬 말해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 나를 어떻게 구했어? 나는 알고 싶다.]

머리 위에 연이어 물음표를 띄우는 버섯 인간에게 베니엘은 설명해줬다.

"요새의 창고에서 널 찾아냈다. 폭발성 버섯의 틈바구니에서 죽어 있더군."

그 뒤 찾아낸 사체를 화분에 심어 살려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역시 은인이 맞다. 감사를. 압도적 감사를!]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한데 어째서 요새의 창고에 있었던 거야?"

[갑자기 붙잡혔다. 나는 끌려갔다…. 하지만 반항했고, 창고에서 저항했다. 버섯을 피워 버텼지만 기력이 다했다.]

대강 사정을 알 만했다.

아마 드랄두나 그의 순찰대가 비싼 인질이라 여겨 이 버섯 인간을 붙잡은 모양이다. 이후 탈출한 녀석이 폭발성 버섯을 피워내며 버티자 건드리질 못한 거고.

그것보다 궁금증이 일었다.

황금 포자 일족이라면 버섯 인간 중에서도 존귀한 씨족. 그런 이가 왜 이런 변경 영지에서 떠돌다 붙잡혔단 말인가?

베니엘은 그걸 물었다. 그러자 버섯 인간은 대답을 하려다 멈칫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키에엠... 키엠….]

"왜 그래?"

[문제를 인식했다.]

"뭔데?"

[내겐 기억이 없다. 나는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떠도는지 알지 못한다.]

이 말에 베니엘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베니엘이 이 세계로 오기 전에 즐겼던 게임 <다크 엘프 군주로 살아가는 법>에는 DLC 소식이 몇 개 있었다.

아무래도 인기 있는 게임이니만큼 DLC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버섯의 왕자>. 기억을 잃어버린 버섯 왕자와 엮이는 게 주요한 스토리였다.

'이거 너무 비슷한데?'

DLC를 경험하지 못하고 왔기에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눈앞의 버섯은 그 추가 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닐까?

'이렇게 황금 포자 일족의 어린 씨족을 만나는 게 흔한 일도 아니고....'

만약 이 친구가 정말 버섯의 왕자가 맞다면, 베니엘은 대박이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하 제일의 부(富)는 버섯 인간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떠나야 한다.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한 모험을 시행한다…. 물론 전제가 존재. 네가 날 노예로 부리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려 섞인 텔레파시에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 없다."

베니엘의 단언에 버섯 인간은 미심쩍어하는 기색이었다.

[참인가…? 너는 탐욕스러움의 대명사인 다크 엘프다. 믿기 어렵다.]

"믿든 말든 사실이다. 우리 종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날 판단하지 마라."

버섯 인간은 부르르 몸을 떨어댔다.

[이런 고결한 귀쟁이가 존재하다니! 어려움의 연속. 믿음!]

당연한 얘기지만 베니엘은 고결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렵게 살린 버섯 인간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건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지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버섯 인간의 최대 도시인 '푼구스 알키토이'다.

그곳은 제국을 다스리는 마족 황제조차 함부로 못 하는 장소였다.

지하에서 버섯이란 필수 불가결하다. 그리고 지하의 모든 버섯이 살아가는 데는 푼구스 알키토이의 존재 자체가 필수였다. 왜냐하면 그 도시 자체가 하나의 초월적으로 거대한 버섯 덩어리기 때문이다.

즉, 푼구스 알키토이는 지하 전체의 어머니 버섯인 셈이다. 그 버섯은 버섯 인간들에게 현세에 강림한 신으로 숭배되는데, 수만 종의 버섯 포자가 그 거대 버섯에서 모두 생산하니 신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 버섯 도시가 망하면 지하의 풍요로움도 같이 끝난다. 그야말로 지저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푼구스 알키토이는 지하에서 제일가는 부를 가진 장소였다. 물론 그렇다고 버섯 인간들이 사치를 하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약 이 녀석이 버섯 왕자가 맞다면 접근이 엄격히 제한된 푼구스 알키토이로 들어갈 수 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간 공상으로 끝났던 플레이도 모두 가능해질 터였다. 베니엘은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으로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버섯 인간은 이점을 금세 알아챘다.

[시커먼 탐욕! 은인의 속은 검은 구덩이. 나를 이용할 속셈…!]

이건 텔레파시의 약점이었다. 단순히 생각만 교환되는 걸 넘어 서로의 감정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된다.

아무래도 꿈에 부풀었던 베니엘의 심상을 민감하게 느낀 모양이다. 베니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다크 엘프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널 풀어주겠다는 건 진심이야."

[…삐엑. 이해함. 다크 엘프치고 그 정도면 선하다. 너는 너희 종족 중 특별한 부류. 협력할 수 있다.]

"너랑 잘 지내고 싶은 건 사실이거든."

[진심… 확인!]

앞으로 이 버섯 인간의 자아 찾기 여행을 도와주고, 녀석의 신뢰를 얻는 건 차차 할 일이다. 일단은 처리할 게 있었다.

"우선 널 구해준 답례를 받고 싶다. 괜찮나? 널 소생시키는 데 많은 돈을 썼다고."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수행!]

베니엘은 버섯 농장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고블린 농노들이 무리하게 포자를 수확한 탓에, 농장의 어머니 버섯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

"어머니 버섯을 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버섯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내 힘이면 가능…! 해주겠다!]

"좋아. 널 살린 보람이 있군. 바로 보러 가자고."

베니엘은 작은 버섯 인간을 품에 안았다. 나란히 걷다가는 밟아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것보다 이름이 뭐야?"

그의 물음에 버섯 인간은 작은 어깨를 최대한 펼치고 대단히 자랑스럽다는 듯 답해왔다.

[풍기Funghi.]

베니엘은 그 이름이 맘에 들었다.

"간단해서 잊어버리진 않겠네. 풍기."

[물론이다. 이걸 잊으면 사람의 지능이 아니다.]

***

어머니 버섯은 농장에서 가장 큰 버섯이다.

높이면 5미터가 넘어갔고, 온갖 색의 발광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화려한 빛을 잃은 채, 누가 봐도 음울해 보이는 탁한 보라색만 약하게 뿜어낼 뿐이었다.

버섯의 머리 부분은 칙칙하고 갈라졌고, 일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면에 떨어져 있었다.

또한 생명력이 약동하던 버섯의 몸체는 말리 비틀어진 상태. 갈라진 틈새로는 수액이 조금 흘러나왔고, 거기에는 온갖 벌레들이 우글거렸다.

그 앞에는 다크 엘프 가병 몇이 지키고 있었다. 아리아나의 병사들이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아리아나의 가병들은 이제껏 베니엘을 무시해 왔지만, 최근 태도가 달라졌다.

지난번 싸움을 모두 봤기 때문이다. 그때 분명 베니엘은 아리아나를 구해줬다. 눈으로 그걸 보고도 베니엘에게 건방진 태도를 고집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 자신들이 존숭하는 주군을 구해줬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태도였다.

"어, 그래. 아리아나는?"

"근처에 계십니다. 불러올까요?"

"부탁 좀 하지. 어머니 버섯을 어떻게 살리는지 보여준다고 전해줘."

45화

황금팔 원정대 (1)

남작의 집무실.

나르다리온 남작과 그의 여동생 우시드라가 마주앉아 있었다. 남작은 모처럼 우시드라가 가져온 서류를 처리하고 중으로, 방 안에는 그가 펜을 끄적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한동안 업무에 매진하던 남작이 펜을 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수석비서관."

우시드라의 공식적인 직함은 수석비서관이다.

실제로 하는 일은 최고행정관이나 다름없었지만, 남작의 권위가 살아있는 한 그리 불릴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의 직함은 그녀가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결국 남작의 보좌역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네, 남작님."

"발토리스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서열 7위 검객 발토리스는 완전히 제압돼 현재 남작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

"현재 팔다리가 떨어진 채로 포박돼 있습니다. 이대로 두시지요."

"그래?"

"네, 감히 후계자를 살해하려 했으니 편안한 죽음을 줘선 안 됩니다. 긴 세월 동안 피의 갈증에 시달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뱀파이어는 피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 그런 존재에게 피를 못 먹게 하면 어떻게 되겠나?

그야말로 미쳐버리는 거다. 어찌 그걸 표현하기도 힘든데, 아사자가 겪을 법한 배고픔에 마약의 금단 증세까지 추가되는 막대한 고통이라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언데드라 쉽게 죽지도 못한 채 이 고통을 긴 시간 동안 겪어야 한다는 것. 하여 모든 뱀파이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피의 갈증에 시달리는 일이었다. 그러니 우시드라는 최고의 형벌을 제안한 셈이다.

물론 그녀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꺼내쓸 수 있어.'

모반의 날이 오면 발토리스를 해방해서 성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었다.

아마 발토리스는 피의 갈증 때문에 구해주는 것만으로도 영혼이라도 바치려 할 것이다. 하면 이전보다 발토리스를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을 터였다.

우시드라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음… 나쁘지 않군."

남작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가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대해 물어왔다.

"수석비서관, 혹시 기계 언데드라고 아나?"

"네…?"

"셋째가 하는 연구 말이야. 말 그대로 기계화된 언데드에 관한 것이지."

"…특이한 발상이군요."

"그래, 하지만 훌륭한 발상이다. 그건 언데드의 나쁜 부분을 제거해 기계로 대체하는 게 핵심이거든? 쓸데없는 사고나 의지 같은 것을 거세하고 오직 주인에게 충성하는 하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 그렇군요…."

우시드라는 살짝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는 척했지만 그녀는 셋째가 연구하는 기계 언데드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건 언데드의 몸과 특질을 그대로 살린 지능형 골렘을 만든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골렘은 절대 복종한다.

'이런… 기계화를 해버리면 일이 틀어지는데.'

굳이 살려서 나중에 쓰려는 계획 자체가 삐걱거리게 되는 것이다. 우시드라는 일단 남작의 결정을 바꾸려 했다.

"제가 듣자니 기계 언데드는 아직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그럴 바에는 피의 갈증으로 굴복시킨 뒤에 노예 마법을 거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예 마법은 강자에겐 걸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발토리스가 나락으로 떨어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흠...."

잠시 고민하던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란 신비롭지만 그만큼 까다로워서 어떤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일이다. 마법 주문이란 판관이 법조문을 해석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변수가 많다. 하물며 발토리스 같은 강자라면 후에 어떤 식으로든 노예 마법을 벗어날 확률이 높다. 그럴 바에는 기계가 더 확실하지."

남작의 뜻은 확고부동했다. 더 설득할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우시드라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셋째를 설득해야 하나? 녀석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설득만 할 수 있다면 지금 제작 중인 드랄두와 이후 만들 발토리스까지 전력으로 동원할 수 있다.

하나 셋째 리리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다. 갑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음모를 회의 자리에서 폭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통통 뛰는 존재인 것이다.

진중한 성품의 우시드라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안 되겠군.'

우시드라는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이상하게 최근 되는 일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계획은 차곡차곡 진행 중이었다. 그 계획에는 짜임새가 있었고, 그녀는 다가올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미심쩍어졌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건가?'

고민해 봐도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베니엘의 뺀들뺀들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시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무슨 생각을 하나?"

"아, 죄송합니다. 남작님."

"그것보다 전령이 오는군."

남작은 항시 마력을 퍼뜨려 성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전령이 온 것을 바로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에 전령이 도착해서 소식을 전해왔다.

"도련님이 농장의 어머니 버섯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남작은 흥미를 감추지 못했다.

"오, 정말인가? 어떻게?"

"처음 보는 버섯 인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보고에 남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어머니 버섯을 살리려면 장로급의 버섯 인간의 힘이 필요할 텐데, 그놈이 언제 그런 인맥을? 재밌군. 쿡쿡."

반면 우시드라의 안색은 새카맣게 죽어갔다.

'설마 어머니 버섯을 살리는 데 성공할 줄이야…!'

버섯 농장의 관리만은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할 말이 없었다. 남작은 그런 여동생을 보며 남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전령을 내보내고는 서류를 하나 작성했다.

쓱쓱.

남작의 펜이 경쾌하게 움직이더니 곧 직인까지 쿵, 찍어 버린다. 그건 베니엘과 아리아나를 버섯 농장의 공동 관리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명령서였다. 남작은 그걸 우시드라에게 주더니 굳이 직접 전달하라고 했다.

"수석비서관, 가서 둘을 축하해주고 명령서를 전달하도록. 내가 기대하겠다고 전하라."

"...알겠습니다."

우시드라는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며 남작의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모른 척하던 남작은 여동생이 떠나자 킥킥거렸다.

"멀었군. 아직 멀었어."

***

우시드라는 명령서를 아리아나에게 전달했다. 어쩐지 베니엘 녀석은 꼴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리아나라면 좀 낫겠지 싶었던 거다.

"축하한다. 남작님의 명령서다. 책임감을 갖고 맡아다오."

아리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수석비서관님."

지그시 눈을 감으며 명령서를 받는 아리아나의 모습에 우시드라는 시커먼 감정에 사로잡혔다.

같은 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시드라도 젊어서부터 그 미모로 이름 높았다.

한데도 지하 삼대 미녀로 통하는 아리아나 앞에선 초라해지기만 했다.

'망나니 놈도, 입양아 년도, 둘 다 짜증 나긴 마찬가지로군.'

우시드라는 남매가 쌍으로 증오스러웠다. 동시에 그런 자격 미달의 존재가 자신과 오라비가 젊어서부터 피땀으로 일군 가문을 넘겨받을 거란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안 될 말이지. 이런 근본 없는 계집이 가문을 잇는 건. 그 망종 같은 망나니는 더더욱 그렇고.'

우시드라는 어떻게든 자신이 가문을 차지한 뒤에, 둘째 딸인 페샤디아를 후계자로 삼아야겠단 생각이 더더욱 강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던 우시드라는 넌지시 물었다.

"요즘 남동생과 사이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더구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명령서를 든 아리아나가 흠칫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럴 리가요?"

늘 침착하고 차분한 아리아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 정도로 베니엘이란 주제는 그녀에게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리아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망나니와 사이가 좋아질 일은 단연코 없습니다. 오해입니다. 수석비서관님."

"아, 그렇니?"

우시드라는 아리아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표정이 흔들리네.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단 소리지.'

그건 평생을 음모와 모략에서 산 사람이 할 만한 오해였다. 사실 아리아나는 뭔가 부끄러움에 당황한 것뿐이었지만, 우시드라는 감추는 음모가 있다고 여겼다.

'벌써 같이 뭔가 꾸민다고? 이거 예상보다 둘의 사이가 훨씬 좋을지도 모르겠어.'

생각보다 상황이 어려웠다. 이럴 때 무리하면 일이 실패하기 마련이다. 일단은 관망하면서 둘 사이의 틈을 찾아보는 게 최선으로 보였다. 뭔가 구실이 생긴다면 이간계를 써볼 작정이었다.

'망나니 녀석, 어느 틈에 이렇게 아리아나를 휘어잡은 거지?'

우시드라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

나이트쉐이드 남작령에 소문이 하나 돌았다. 바로 망나니 베니엘이 무언가 장대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들었어? 망나니가 사람을 모아서 어딘가를 칠 거래."

"뭐? 드디어 그 개망종이 또 약탈에 나서는 건가? 정신 못 차렸네."

"아니, 이번에는 우리 영지가 아니라 다른 땅에 쳐들어간다더군. 이제야 좀 철이 든 거지."

"오, 그러면야...?"

말썽쟁이 도련님이 더는 자기 집에서 깽판 치지 않고 다른 영지로 가 수확해오겠다는 소리였다. 영지민들은 모두 이를 장하게 여겼다.

반면 이 소식을 들은 다크 스파이어, 엠버폴 같은 이웃 영지에선 비상이 걸렸다.

"뭐라고! 망나니가 군사를 모아서 들이친다고? 이런 미친!"

"대비해야 합니다! 어서! 듣자니 그 망나니 놈이 얼마나 잔혹한지 마족들도 치를 떤다더군요."

"어떤데?"

"사람을 모조리 죽여서 해골을 줄줄이 허리띠에 매달아 장식한다더군요. 또 자기 마차는 희생자들의 창자로 장식한다고 하고요."

명백히 과장된 소문이었다. 베니엘에겐 그런 악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들려왔던 망나니의 악명을 생각해 볼 때 다들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주변 영지에선 급하게 자경대를 동원하고, 전투에 나설 용병을 고용하는 등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소문의 주인공 베니엘은 남의 영지를 쳐들어갈 생각 따윈 없었다.

그가 원정을 준비하는 건 사실이지만 겨우 스무 명이 좀 넘는 소규모 그룹을 꾸리고 있었다.

"퀵포우. 배를 타고 에본플로우의 물길로 나아갈 예정이다. 식량을 넉넉히 준비해."

"넷! 알겠습니다요. 찍찍."

베니엘은 이전에 호위 대장에게 약속했던 드워프 왕의 황금팔을 찾으러 떠날 생각이었다.

'지금이 딱이지.'

큰고모가 큰 타격을 받고 움츠러든 상황이라 영지 외부로 나가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버섯 농장의 관리가 있긴 하지만 이미 아리아나에게 모두 떠넘겨 버린 지 오래다.

애초에 베니엘은 진지하게 버섯 농장을 경영할 생각 따윈 없었다. 착실한 의붓누나가 알아서 잘할 거라 여겼던 거다. 아리아나가 원하든 원치 않든 베니엘은 그녀를 자기 계획을 위한 유능한 인재로 써먹을 작정이었다.

"한데 목적지가 어딥니까? 주인님."

선착장에서 타고 갈 배를 살펴보던 베니엘은 근처에 있던 상자에 한쪽 발을 올리더니 답했다.

"폐허 도시. 마카디아드."

마카디아드란 말에 퀵포우는 놀란 듯 꼬리가 쭈뼛 섰다.

"아니, 거긴 진작 망한 다크 엘프 도시가 아닙니까요?"

"그렇지."

"소인이 듣자니… 도시가 망한 뒤로 그 폐허 안에 온갖 괴물과 유령, 범죄자, 도망자, 도굴꾼이 들끓은 위험한 장소라 하던뎁쇼…?"

이 물음에 베니엘은 씩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가려는 거야."

***

원정 준비가 차곡차곡 이뤄졌다. 베니엘은 이 과정을 직접 감독했다.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 성공적인 원정을 위해선 장비가 제일 중요하다."

황금팔을 얻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장차 하이 마스터가 될 인재인 호위 대장의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오리지널이 싸질렀던 똥을 치우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두 팔을 잃은 호위 대장을 위해 황금팔을 구해오면 베니엘에게 적대적이었던 가병들의 마음이 돌아설 계기기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 하나 평판을 바꿔가야지.'

앞으로의 대계를 위해선 유능한 인재가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를 모집하려면 평판이 중요했다.

삼국지 같은 것만 봐도 명망 있는 군주에게 인재가 몰리지 않나.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망나니 같은 짓을 하면 결국 비슷한 부류만 옆에 똥파리처럼 꼬이는 법이다. 실제로 오리지널 베니엘은 그런 양아치들과 어울리며 사방에서 난동을 피워댔다.

'달라지기 위해선 평판 관리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베니엘에게 이번 원정은 중요했다.

원정을 위해선 많은 게 필요했다. 각종 무기, 금화는 기본이고, 각종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마법 두루마리나 물약, 텐트나 침낭 같은 숙영 장비, 즉석에서 식량을 조달할 낚시 도구 같은 것도 필수였다.

"숙영지를 보호할 함정들도 필요해. 맘 같아선 숙영지에 임시로 방책을 설치하고 싶지만 그래선 짐이 너무 늘어날 테니...."

한참 퀵포우를 닦달해 원정 준비를 하던 그때 가문에서 전령이 왔다.

"도련님!"

"음? 무슨 일이지."

"남작님께서 찾으십니다."

갑자기 왜 부르는 걸까?

아마, 원정을 막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남작은 자식들의 행보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알겠다. 바로 가도록 하지."

46화

황금팔 원정대 (2)

***

남작은 집무실이 아니라 개인 연무장으로 베니엘을 호출했다.

"왔군."

지하에 마련된 남작의 전용 연무장에서 그는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베니엘은 그 모습에 반색했다.

'뭐야? 한 수 가르쳐 주려는 건가?'

갑자기 개 패듯 패겠다고 부를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남작은 그 음흉한 심계가 어떻든 간에 의외로 상식인이다. 개성이 강한 나이트쉐이드 집안에선 특히나 더 그랬다.

다짜고짜 불러서 가르침이라고 두들겨 패는 성정은 아닌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분위기가 괜찮았기에 베니엘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분히 아부성이었다.

"그래, 원행을 떠난다고 들었다."

"네, 찾고자 하는 물건이 있어서."

"뭐가 됐든, 성과를 얻기 바라겠다. 내가 오늘 부른 것은 떠나기 전에 의지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서다."

베니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의지를 발동하기 위한 결의의 단계가 뭔지 궁금하던 차였다.

베니엘은 제한적으로 의지를 발동할 수 있지만 다분히 야매에 가까운 방법이다. 의지를 위해 상징물이 필요한데, 이 상징물을 잃어버리면 발동을 못 할 정도로 약점이 컸다.

하지만 여기서 제대로만 배우면 그런 제약도 없어지는 데다가 진정한 마스터에 오를 단서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웬 떡이냐.'

사실 남작이 먼저 가르침을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래도 최근 베니엘의 행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큰고모 우시드라를 견제하고 의붓누나 아리아나와 밀착하는 건 남작이 베니엘에게 바라는 바였으니까.

"감사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좋다. 네가 제한적이나마 의지를 다뤘다고 알고 있다. 어떤 형태로, 어떻게 한 건지 말해봐라."

베니엘은 자신의 방법을 설명했다. 의지를 발동하기 위해 감정에 의존해 상징물을 동원했단 것을 말이다.

듣던 남작은 크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아직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답을 찾아 행하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니, 너는 과연 검술의 영재다. 아니, 그 말로는 부족할 재능을 갖고 있다. 감정을 활용하는 건 정답이었다. 더 높은 경지에선 의지를 발동함에 있어 감정마저 초월해 버리지만 적어도 마스터급에선 아니지."

발동 자체는 합격이라 했다. 다만 상징물에 의존하는 대신 좀 더 세련된 방법이 있다고 했다.

이에 베니엘이 물었다.

"그게 혹시 결의의 단계입니까?"

"맞다. 어디서 들은 것이냐?"

"드랄두가 말했습니다. 제 의지가 불완전하다고요."

"맞다. 결의의 단계를 수행할 수 있다면 상징물 같은 편법은 필요없어진다."

남작은 '결의'란 집중된 의지가 외부의 압력에 흩어지지 않게 하는 단계라 했다.

"어떻게 흩어지지 않게 하느냐? 간단하다. 널 중심으로 의지의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아...!"

베니엘은 바로 알아들었다.

'공간이었나!'

그는 드넓은 지저 전체에서 가장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다. 그 단서 하나만으로도 이제껏 고민하던 모든 문제가 빠르게 풀리기 시작했다.

남작은 추가로 뭐라, 뭐라 설명하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안 들어도 상관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미 베니엘은 심상은 한 단계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장 성과를 이뤄냈다.

'결의의 단계가 뭔지 감을 잡았다. 앞으로 상징물 따윈 필요 없어.'

거추장스러운 상징물 없이 의지를 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베니엘은 이런 성취를 남작 앞에서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진중한 태도로 들으며 난색을 표할 따름이었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선 엄격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남작은 떠보듯 물어왔다.

"바로 쓸 수는 없겠나?"

"죄송합니다. 제 자질이 그 정도는 아닌지라…."

"어쩔 수 없구나."

남작은 다소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 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작이 베니엘의 재능을 경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성공하면 남작을 자극할 뿐이지.'

실제로 남작은 결의의 단계를 익히는 데 석 달이 넘게 걸렸다. 물론 이것도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른 것이다. 재능 있는 이라고 해도 몇 년이 걸리며, 범부라면 수십 년 노력이 필요했다.

한데 곧장 해낸다? 남작은 겉으로야 감탄하고 칭찬하겠지만 앞으로 가르침에 인색해질 게 틀림없었다.

베니엘은 그런 의중을 훤히 꿰뚫어 봤다.

'갑자기 가르침을 주는 걸 보니 날 우시드라 파벌의 대항마로 키우려는 속셈인 것 같은데….'

하면 앞으로도 간간이 가르침을 던져줄 터였다.

'그것만 받아먹어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괜히 경계심을 살 필요는 없는 일이야. 크흐흐.'

베니엘은 속으로 음침하게 웃으면서도 겉으론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결의의 단계를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남작은 어쩐지 다소 여유로워진 기색으로 끄덕였다.

"모험은 성장을 동반하지. 성과가 있길 바란다."

물론 성과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남작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점.

아직 남작은 자신의 강대한 힘 때문에 눈앞의 도전자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

며칠 뒤, 베니엘의 황금팔 원정대가 빌린 배를 타고 닉스포트의 항구를 출발했다.

배는 30미터나 될 정도로 컸는데, 인간의 범선과 비슷하지만 훨씬 날렵한 형태였다.

베니엘은 특별히 유능한 선장과 선원들을 고용해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팔십여 명에 이르렀다.

반면 원정대 자체는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베니엘, 퀵포우, 올리비에와 사냥개 로나, 홉고블린 삼 형제, 전에 고용했던 용병 중 다시 추린 열다섯 명이 전부였다.

촤아아아아.

배가 에본플로우라 불리는 거대한 호수를 가로질렀다. 시커멓고 광택이 나는 호수의 물은 마치 흑요석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수많은 민물 해파리 떼가 이동하며 장관을 이뤘다.

그 위를 지나가자니 마치 별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이 광경에 감동한 건 지구에서 온 베니엘 뿐이고, 나머지는 이 모든 게 일상이라 관심도 없었다. 저 해파리는 먹지도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저마다 모여 장비를 손질하거나 선상에서 놀음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자자, 돌려라. 돌려~."

"꾼들은 다들 받으시고."

"뒈질 놈은 벌써 각 나오죠?"

베니엘 곁에는 퀵포우와 올비리에, 홉고블린 삼 형제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원정대의 간부진이었다.

베니엘은 행선지에 대해 알리기 위해 이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마카디아드에게 대해 설명해줄 테니 듣도록."

원래 그곳은 이 근처에서 콧방귀 좀 끼던 한 다크 엘프 가문의 도시였다.

"페인샤란 가문이었지."

듣던 퀵포우가 물었다.

"한데 왜 망했습니까요? 찍찍."

"간단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거든."

페인샤 남작가는 이 일대의 다른 남작가를 여럿 규합해 제국에 대항해 봉기했다.

이를 지금도 '남작들의 전쟁'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꽤나 승승장구했는데 결국 밀려든 제국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도시 역시 그때 파괴됐다.

"페인샤 가문이 좀 성급하긴 했어. 수십 년 전이 아니라 지금쯤 반란을 일으켰으면 성공했을 텐데."

베니엘은 그들에 대해 그렇게 평했다. 확실히 그럴 듯한 얘기였다. 왜냐하면 지금 제국은 그야말로 망국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작들의 전쟁은 시기를 잘못 탔다. 수십 년 전에도 제국은 휘청이고 있었지만 요즘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나이트쉐이드 가문만 해도 지역 군벌인 드란실 공작가에 공납을 바칠 뿐, 제국 황실에는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정도다. 제국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쪼그라든 상태다.

베니엘은 망한 페인샤 가문의 성급함을 비웃었다.

"하여간 다크 엘프 놈들은 멍청해서 문제라니까. 이놈들은 타르나이만 없으면 지들이 지하를 지배했을 거라고 한다니까? 나, 참!"

베니엘의 말에 듣던 이들이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다들 눈으로 넌 다크 엘프 아니냐고 묻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는 지구에서의 경험 때문에 이따금씩 다크 엘프를 제3자적 입장에서 바라보곤 했다.

"아무튼, 도시의 내력이야 그렇고. 중요한 건 지금이지. 현재 망한 도시에는 세 개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도굴꾼 무리. 이들은 여러 개의 도적 길드와 암살자 길드가 합쳐진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섀도우 위자드'라 불리는 지하 세계 전국구의 범죄 조직.

마지막 하나는 두꺼비 인간인 그융크족이다. 이들은 셋 중 수가 가장 많았다.

"도시의 폐허는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리 잡고 있다. 다들 중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서로 싸우는 중이다."

이를 들은 퀵포우가 긴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주인님. 그렇다면 도시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일 텐데, 이 정도 인원으로 진입하겠다는 겁니까요? 찍찍? 분명 그들이 반겨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정확한 얘기였다. 세 집단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망한 도시에 자리 잡은 상태.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에 항시 세력 다툼을 벌이곤 하지만 이들이 똘똘 뭉칠 때가 하나 있다.

바로 외부의 세력이 나타났을 경우다. 이때만큼은 셋이 연합해 외부 세력을 쫓아낸다.

도시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게 누구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셋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게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이점을 설명해줬다.

"아마 우리가 진입하면 놈들이 힘을 합쳐서 산 채로 불태워버릴걸?"

그러자 듣던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퀵포우는 손을 슬쩍 들며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자살을 원하시면 제 노예 마법이나 좀 풀어주고 가시지요. 찍찍. 뭔가 대책이 있으신 거겠죠?"

여기서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선상 반란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다.

"물론 있다. 걱정하지 앉아도 된다."

다행히 베니엘에겐 계획이 있었고, 산 채로 시커먼 호수에 던져지지 않아도 됐다.

"그게 뭡니까?"

"채근하지 말도록. 하루 뒤면 알게 될 테니까. 우리가 괜히 배편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고."

폐허 도시 마카디아드는 호수의 물길을 통해 갈 수 있다. 닉스포트처럼 호수에 바로 면해 있는 건 아니고, 호수에서 뻗어나간 지류 끝에 위치해 있다.

베니엘은 그 물길을 통해 마카디아드로 들어가고자 했다.

정확히 하루가 지나자 그 지류에 다다랐다. 퀵포우는 주변을 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여기 너무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주변은 음산한 물안개가 껴 있었고,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틀림없이 저 안개 너머에 한 맺힌 귀신이 떠다니는 게 틀림없었다.

용병들은 벌써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위험한 곳이군."

"마음 단단히 먹어라."

"이런 곳에서 정신줄 놓으면 끝이다."

긴장감에 그들은 입을 앙다물고 주변으로 눈을 굴릴 뿐이었다. 그때 배의 선장이 다가와 베니엘에게 물었다.

"지류로 진입합니까?"

이 선장은 도시가 멀쩡하던 시절부터 배를 몰던 베테랑이다. 과거 마카디아드로 몇 번이나 방문했던 자라 금화를 많이 주고 고용했다.

한데 그런 그도 을씨년스럽게 변한 주변의 환경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니, 잠시 앞에서 대기한다. 닻을 내려라."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에 선장은 어쩐지 안도한 기색이었다.

"물살이 거의 없습니다. 닻을 내릴 필요까지는…."

"내리라면 내려. 배가 박살 나는 꼴을 보기 싫으면."

선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배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애송이 놈이 헛수고를 시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이 망나니가 최근 무명(武名)을 떨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선장은 얌전히 따랐다.

"닻을 내려라!"

두 척의 소형 선박에서 닻이 내려갔다.

풍덩!

큼직한 닻이 빠르게 시커먼 호수 아래로 사라졌다.

촤르르르르!

베니엘은 선수 근처에 서서 일대를 바라봤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어쩐지 기대감이 느껴지는 주인의 목소리에 퀵포우는 더 불안해졌다. 함께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이 망나니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대체 뭘 기다리십니까? 주인님."

이에 베니엘이 짧게 답했다.

"호수의 수룡."

퀵포우는 여기에 대해 네? 라고 반문하지 못했다.

그 순간 호수의 수면이 폭발하듯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47화

황금팔 원정대 (3)

탁월한 동체 시력을 가진 베니엘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생생하게 보였다.

흑요석 같이 매끄럽던 호수의 표면이 출렁인다 싶더니, 순간 격렬하게 박살 나며 그 위로 물기둥이 치솟았던 것이다.

촤아아아아!

동시에 몸길이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호수의 드래곤이 튀어나왔다. 그 여파로 배가 요란하게 출렁였고, 하늘에선 소나기처럼 호수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

당연히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런 씨발!"

"저거 뭐야!"

"으아아악! 빠질 거 같아!"

용병들이 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이처럼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배니엘은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배가 요동치든 말든 평지에 있는 것만 같으니 실로 놀라운 균형감이었다.

그때 베니엘의 옆으로 퀵포우가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찌이익! 찍찍!"

이대로 두면 호수에 빠질 것 같았기에 베니엘은 퀵포우의 수염을 붙잡아 구해줬다.

"찌이익! 아프잖아! 새끼야!"

"구해줘도 지랄이냐?"

"찌익―? 아!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품에 안은 건 뭐냐?"

퀵포우의 품에는 큼지막한 메기가 하나 안겨 있었다. 아마 호수의 물이 쏟아질 때 같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아마 경황이 없는 와중에 아무거나 붙잡은 것 같다. 배의 갑판에는 파닥파닥 뛰는 물고기들이 여러 마리 보였다.

"저녁으로 쓰면 될 것 같습니다요. 찍찍."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건 베니엘과 퀵포우뿐이었다. 모두 잔뜩 얼어붙어서는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우린 다 뒤졌다."

용병들은 낮게 신음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호수에서 솟아올라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래곤의 눈은 창백한 푸른 빛이었다. 마치 그건 귀신처럼 모두를 훑어댔다.

체형은 날렵했고 날개는 없었다. 대신 겨드랑이에는 지느러미가 나 있었다. 또 등에는 마치 돛새치 같은 돛이 보였다.

비늘은 광택이 났는데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파란색이었다. 다만 빛의 각도에 따라 녹색이나 보라색을 띄기도 했다.

안개 속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타난 호수의 드래곤은 장엄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고, 동시에 숨 막힐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선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탄식했다.

"우린 모두 죽었소! 저 검푸른 드래곤은 틀림없이 호수의 악몽인 마그라스 알타투요! 수십 년 동안 사라졌다고 들었거늘!"

선장의 식견은 정확했다. 나타는 호수 드래곤의 정체는 그의 말대로 '마그라스 알타투'. 에본플로우 호수에서 악명을 떨쳤던 약탈자였다.

지하 세계의 호수에는 온갖 위험이 가득하지만 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배의 재물을 빼앗는 욕심 많은 드래곤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마그라스는 그중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친 악적으로, 지저의 영주들이 몇 번이나 토벌하려 했지만 실패한 존재였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행적이 묘연해져 모두가 안도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수십여 년간 지속됐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호수의 드래곤은 선장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외쳤다.

"그래, 나는 호수의 악몽이며, 이곳의 전설이다! 하지만 지금은 해조류나 처먹는 처지에 불과하지! 크아아악! 퉤!"

그와 함께 마그라스가 입에 물고 있던 시커먼 무언가를 내뱉었다.

그건 시커먼 덩어리였다.

마치 슬라임 덩이처럼 날아온 그것은 공중에서 몇 개로 나뉘어 배의 여기저기에 차진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철푸덕!

철퍽!

"뭐야!"

"공격인가!"

놀란 사람들이 살펴보니 그건 드래곤의 타액이 범벅된 씹다가 만 호수의 민물 해조류였다. 사방에 악취가 진동했다. 가장 최악은 멀뚱히 서 있다가 그 덩어리 중 하나에 직격당한 선원이었다.

"아악! 살려줘!"

타액과 씹은 해조류의 덩어리가 만드는 끈적함에 그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끈끈이 덫에 붙잡힌 시궁쥐 같았다. 구해주려고 해도 악취 때문에 다들 슬금슬금 멀어질 뿐이었다.

만약 이게 공격이라면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이 비위 상하는 악취 덩어리에 모두의 사기가 급락했으니까.

덩어리의 일부는 파편화돼 사방으로 튀어 용병들의 장비 여기저기에 묻었다. 누군가 자기 투구 위에서 길쭉하게 흘러내리는 해조류를 보며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우웩―! 우에에엑"!

"끄윽! 새로 산 장비가!"

토악질 하는 자도 여럿이었다.

호수의 드래곤 마그라스는 그 꼴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이 몸은 더는 이딴 거로 연명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기부를 좀 받겠다. 당장 가진 걸 모두 내놔라. 이 비루한 새끼들아! 크워어어어!"

드래곤이 포효하자 사람들은 벌벌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침착하게 상대를 응시하고 있는 건 베니엘뿐이었다.

그는 마그라스를 살펴봤다.

'늙었군. 많이 늙은 드래곤이다.'

드래곤의 덩치와 위세 때문에 바로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마그라스에게선 숨길 수 없는 노화의 흔적이 가득했다.

광택이 도는 비늘이란 것도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탁하고 색을 잃었으며 여기저기 빠져서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이빨도 인제 보니 듬성듬성해서 빠져서 없어진 이가 많았다. 눈도 자세히 보면 한쪽은 백내장 증세가 역력해서 탁했고, 겨드랑이의 지느러미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또한 드래곤의 턱도 별로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화로 잇몸이 함몰돼 턱 모양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틀니를 한 노인이 턱의 변형으로 합죽이처럼 입을 다문 꼴이었다.

다만 이런 꼴을 쩌렁쩌렁한 포효와 거대한 덩치로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드래곤은 늙을수록 강해진다는 얘기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가면 점점 약해져 죽어가기 시작했다.

뭐든 끝이 있는 법이니까.

베니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대로군.'

애초에 마그라스가 수십여 년간 모습을 감췄던 이유는 은퇴 때문이다.

한데 요즘 다시 나타난 건, 은퇴 후 자리 잡았던 안락한 요양원에서 쫓겨났기 때문. 갈 곳 없는 노인네가 덩치만 믿고 젊은 시절처럼 노상 강도 일을 재개한 것이다.

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베니엘은 드래곤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

그는 검을 뽑아 펜테즈멀 블레이드, 도깨비불을 일으켰다.

화르륵!

베니엘의 검신에서 새하얀 불길이 타올랐다. 그 화려한 모습에 드래곤이 눈에 띄게 움찔한다. 실제로 마그라스는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마스터잖아! 오늘 일진이 사납더라니!'

마스터의 펜테즈멀 블레이드는 늙고 약해진 그의 비늘을 뚫고 피해를 주기 충분했다. 아니, 꼭 펜테즈멀 블레이드가 아니라도, 날카로운 무기면 비늘이 떨어진 살가죽에는 위험천만하다.

이제 중늙은이가 돼 투쟁심이라곤 별로 없는 마그라스는 심적 갈등에 사로잡혔다.

'저거 맞으면 아플 텐데... 그냥 집에 갈까?'

하지만 여기서 내뺀다면 마그라스가 이제 별거 아니라는 소문이 돌 터. 앞으로 이 구역에서 장사하는 데 지장이 생길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는 살림살이가 궁해진 지 꽤 오래됐다. 오늘 한밑천 잡지 못하면 당분간은 계속 해초나 뜯으며 지내야 할 터.

심지어 마그라스는 빚쟁이였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추심꾼들에게 시달리고 있는지라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채무 관계에선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이런 절박함 때문에 그는 눈앞에서 일렁이는 저 도깨비불을 보고도 분노의 일갈을 터뜨렸다.

"감히! 귀쟁이 꼬마 따위가 드래곤에게 그깟 이쑤시개를 들이미는 것이냐! 크워어어어!"

이쪽 업계에서 지속 가능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선 가오가 중요한 법. 마그라스는 등허리에 힘을 줬다. 그의 등에는 마치 돛새치의 돛을 닮은 게 있었는데, 평소에는 뒤로 누운 상태다.

하지만 힘을 주자 돛이 기립해 펼쳐졌다. 그 모습이 마치 백악기의 공룡, 스피노사우루스를 떠올리게 했다. 특이한 점은 그 돛이 기기묘묘한 색으로 자체 발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지켜본 배의 선장이 비명을 질렀다.

"최면 광선이다! 보면 안 돼!"

이 외침에 다들 대경실색해서는 고개를 숙였다.

"호수의 드래곤이 사람을 현혹한다는데 사실이었나!"

"쳐다보지 마!"

"숙이라고! 말 좀 들어!"

난리가 난 와중에도 베니엘만은 침착했다. 저게 허세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저 최면 광선은 강력하긴 하다. 다만 지능이 어느 정도 높으면 안 통하는 게 약점이랄까?

두꺼비 인간인 그융크 같은 저지능 종족이나 호수의 동물들에겐 효과 만점이지만 인간이나 다크 엘프만 돼도 안 먹힌다. 그러니 저건 알록달록한 생체 발광쇼에 불과했다.

베니엘은 이런 점을 알렸다.

"멍청한 것들아! 두꺼비 대가리 정도가 아님 소용없다! 자기 머리가 두꺼비 수준이란 놈은 이해하마! 아니라면 호들갑 좀 그만 떨어라!"

그제야 용병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등허리의 돛으로 열심히 빛을 번쩍이는 호수의 드래곤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저 빛을 아무리 쳐다봐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

"…음? 별거 없는데?"

누군가의 말이 모두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악몽이라 불리는 마그라스가 뭔가 듣던 거랑 달랐다. 이에 용병들의 주둥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저놈 허당 아냐? 아니면 가짜 마그라스거나."

"보니까 상당히 늙었는데? 이빨도 몇 개 없잖아."

"야, 배에 있는 발리스타를 막 쏘면 어떻게 해볼 만한 거 아니냐?"

마그라스에겐 불행한 전개였다. 드래곤으로서의 그의 위엄은 파도에 쓰러지는 모래성처럼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이대론 안 된다!'

폐업 위기에 이 가여운 개인사업자는 심장이 쫄려왔다. 벌써부터 쫓아오는 빚쟁이들의 얼굴이 선하다.

당장 뭐라도 해야 했다. 마그라스는 돛을 접고는 몸을 크게 움직여 파도를 일으켰다.

"드래곤의 분노를 받아보아라!"

출러렁!

갑자기 파도가 일어나며 배를 덮쳐왔다.

촤아아아아!

마그라스의 목표는 배를 뒤집는 게 아니다. 안타깝지만 다 늙은 그의 힘으로는 자신보다도 더 큰 배를 전복시키긴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늙은 만큼 영리했다. 파도로 배를 밀어내, 근처에 있는 암초에 충돌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순식간에 세웠던 것이다.

그건 꽤나 훌륭한 작전이었다.

다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베니엘이 미리 선장에게 돛을 내려두게 했던 탓이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 늙은 드래곤아!'

배가 마구 흔들리긴 했으나 결국 그뿐이었다. 돛은 배가 밀려나지 않게 튼튼하게 지탱했고, 마그라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베니엘은 태연하게 드래곤에게 물었다.

"다 했나? 노인장."

"...."

마그라스는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해라면 전투 밖에 없었다. 아마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다.

직접 배를 뒤집기 위해 육탄전을 벌이며 몸을 부딪쳐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짐과 승객을 잔뜩 실은 배는 드래곤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

물론 마그라스도 한 덩치한다. 그의 몸무게는 무려 20톤. 백악기 최강의 포식자였던 티라노사우루스의 두 배나 되는 몸무게다.

하지만 배는 30미터 길이에 무게만 100톤이 넘었다. 체급 차이는 아득하니 마그라스는 직접 들이대기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뭣보다 요즘 늙어서 기운이 달리는 게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나이도 잊고 지나가는 배에 몸체를 부딪친 적이 있다. 그 때문에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고, 한동안 호수 바닥에서 앓아누워 있어야 했다.

당연히 그 기간 동안의 매출 0원. 신장개업한 사장의 눈에 피눈물이 날 만한 일이었다.

'아직 뼈가 다 안 붙었다.'

심지어 이번 배는 지난 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아까 수면 위로 올라올 때도 하마터면 배의 바닥에 머리를 부딪칠 뻔하고 질겁했었다.

역시 육탄전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왜 대답이 없지? 노인장?"

베니엘이 재차 물으며 하얗게 불타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그라스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저거 좀 곤란해….'

몸에 하얀 불이 옮겨붙는데 잘 꺼지지도 않고 계속 고통을 준다. 어지간해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도 마그라스에겐 아직 허세를 부릴 게 남아 있었다. 그는 얼마 안 남은, 부스러기 같은 위엄을 최대한 발휘해 소리쳤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이 몸에게 대항해? 드래곤의 브레스를 뿜어 네놈과 배를 통째로 얼려버리겠다!"

이 말에 기세가 올랐던 용병과 선원들이 다시 겁먹은 얼굴이 됐다.

"맞아! 드래곤 브레스!"

"그걸 토하면 다 같이 죽는다고!"

"이런 젠장!"

동요하는 그 모습에 마그라스는 다시 뿌듯해졌고, 안도했다.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 브레스인가? 크크크. 미물들이 겁을 집어먹었구나.'

하나 사실 마그라스는 드래곤 브레스를 토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못 했던 건 아니다. 한때 그는 자신의 악명만큼 강력한 냉기 브레스로 유명했다. 그가 숨결을 내뱉으면 호수와 지나가던 배가 통째로 얼어붙어 버리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환으로 심하게 폐병을 앓고 난 뒤에는 예전처럼 브레스를 토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공갈협박이었던 셈.

"선택하라! 미물들아!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목숨을 보장받을지! 아니면 영혼까지 얼어붙을 죽음을 맞이할지!"

실감 나는 협박을 위해 마그라스는 입가로 냉기를 잔뜩 흘려냈다. 이 정도를 위해서도 꽤나 애를 써야 했지만 말이다.

아마 그의 이런 연기는 평소라면 아주 잘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베니엘이 마그라스의 비밀이라면 모조리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48화

황금팔 원정대 (4)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는 구조는 의외로 간단했다.

드래곤의 큼직한 폐 사이에는 큼직한 주머니가 하나 있다. 이 안에는 공기와 닿으면 극렬한 냉기나 화염 반응을 일으키는 액체가 가득 차 있었고, 이걸 폐의 공기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문제는 마그라스가 겪었던 폐병. 병으로 폐가 약해지자 숨결로 이 액체를 밀어내기는커녕, 역류하는 증세가 벌어졌다. 쉽게 말해 폐에 물이 찬다는 소리.

이것은 격통을 동반했다.

더불어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마그라스는 젊은 시절부터 자랑으로 삼던 냉기 브레스를 토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됐다.

베니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면전에서 지적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더는 브레스를 토할 수 없게 됐다는 건, 마그라스의 역린이었기 때문이다.

'시비 걸려고 온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협상이지.'

왜냐하면 이 늙은 드래곤은 폐허 도시 마카디아드 공략의 중요한 열쇠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드래곤이 쫓겨난 안락한 요양원이 그 폐허 도시였다. 은퇴한 마그라스는 두꺼비 인간인 그융크족의 섬김을 받는 폐허의 지배자로 지내왔었기 때문이다.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거대한 폐허 속에서 그융크족을 친위대로 삼아 유유자적하는 말년은 꽤나 그럴듯한 노후였다.

하지만 지하 최고의 범죄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섀도우 위자드'가 나타나면서 일이 꼬이게 됐다.

마그라스가 반항적이고 호전적인 그융크족을 다스린 방법은 간단한 것이었는데, 바로 등 뒤에 돛의 발광으로 인한 최면이다.

집단 최면의 효과로 그융크족은 호수의 드래곤 마그라스를 자신들의 신으로 여기게 됐고, 절대적인 충성을 보여왔던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세력 구도에 끼어들고자 했던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은 이를 간단하게 해결해 버렸다.

최면 효과를 막아주는 마법 지팡이들을 그융크족의 주술사들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그융크의 주술사들이 지팡이를 들자 더는 마그라스의 꼼수가 먹히지 않았다.

이후 그융크들이 난을 일으켰고, 마그라스는 혼비백산해서 도시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일련의 이유로, 현재 그는 예전의 안락한 삶과 위세를 다시 회복하고 싶어한다.

'즉, 원하는 게 있다면 협상이 가능하단 소리지.'

베니엘은 아직도 허세를 부리고 있는 마그라스에게 제안했다.

"물론 당신이 강력한 브레스를 토해 우리를 얼려버릴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서로 거래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협상의 여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마그라스는 속으로 반색했다.

'이놈 봐라?'

이 늙은 드래곤의 경험상 칼을 든 놈들은 하나 같이 무식한 놈들이었다. 드래곤을 죽인다는 명예에 눈이 멀어서는 작은 꼬챙이 하나들고 눈이 벌게져서는 달려드는 부류였던 것이다.

한데 눈앞의 다크 엘프는 달라 보였다. 뭔가 유들유들하고 또 능글능글해 보이는 게, 어째 자신과 동류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상황을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을 터. 늙고 지친 마그라스에겐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거래라?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잠깐 시간을 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커험!"

큰 양보를 하는 듯한 마그라스의 태도에 베니엘은 자연스럽게 아첨을 했다.

"과연 젊은 시절부터 호수의 신사로 불리는 마그라스 님이십니다. 저 같은 소인배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그라스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왜냐하면 그는 오래전부터 '신사'라는 별명을 몹시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비록 거친 놈들을 상대하며 통행세를 받는 일을 하긴 했어도 자신의 고상한 품격과 변치 않는 기품을 생각해 보면 신사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여 늘 스스로 신사라 자칭하며 남들도 그렇게 불러주길 바랐는데, 누가 그걸 반기겠는가?

특히 마그라스의 패악질에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희생자들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딱히 누가 선선히 먼저 신사라 불러주는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베니엘이 비위를 맞춰준 것이었다.

마그라스는 금세 흡족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하나 같이 무도하고 예의가 없다 들었다만 꼭 그렇지도 않군."

"좋게 봐주시니 이 하찮은 자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자, 입에 발린 말은 그 정도면 되었다. 이제 용건을 꺼내 보도록."

마그라스는 어느 정도 기대감을 느꼈다. 한데 막상 베니엘의 얘기는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제가 폐허의 그융크들이 다시 본분을 깨닫고 어르신을 섬기도록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뭐라! 그게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사실 저도 이 폐허 도시에 용건이 있어 온 것입니다. 이미 전후사정을 상세히 알아보고 왔지요. 저 간악한 섀도우 위자드 놈들이 사술을 버린 걸 모르지 않습니다."

"크르르르릉!"

마그라스는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치는 듯 으르렁거렸다. 망가졌지만 여전히 큰 그의 폐 때문에 드래곤의 가슴팍 근처의 물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가능하단 말인가! 다크 엘프의 검객이여?"

기대감 때문인지 어느새 호칭도 변한 상황. 베니엘은 자신감 넘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놈들이 분수를 모르고 어르신의 훈도(薰陶)를 벗어난 것은 그 교활한 마법사 무리가 선물한 지팡이 때문이지 않습니까? 제가 몰래 도시로 들어가서 그걸 빼앗아 버린다면, 어르신께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법 그럴듯한 말이구나!"

확실히 이 다크 엘프는 이용할 만해 보였다.

칼 다루는 솜씨가 제법인 듯 보이니, 자신과 다르게 그융크 주술사들의 마법 지팡이를 몰래 빼앗을 수 있을 터.

'쓸만한 녀석이 나타났군. 이 몸은 그융크와 마법사 놈들 전체가 경계하고 있기에 도시로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니....'

물론 마그라스는 드래곤답게 강하다. 하지만 그는 혼자고, 다굴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그가 막무가내로 도시로 재진입하려 할 경우, 수백 명의 드래곤 레이드 파티가 결성될 테니, 늙고 병약해진 몸으로 당해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 그는 도시 밖에서 해초로 연명하며 자신의 왕좌를 되찾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베니엘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치를 떨며 분을 삭히는 나날이 끝날 걸로 보였고, 마그라스는 베니엘의 얘기에 쉽게 현혹됐다.

"어르신, 제가 마법 지팡이를 빼앗으면 모든 그융크가 어르신을 따르겠지요. 이후에 나머지 두 집단, 마법사와 도굴꾼 무리를 쫓아내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나 마그라스는 어느 정도 머리가 굴러가는 인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계획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궁지에 몰리면 놈들이 서로 손을 잡고 대항할지 모른다. 하면 이 몸이 전투에 끼어든다고 해도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 될 터인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두 무리는 물과 불의 관계니 서로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제가 반드시 이간질할 수 있습니다."

"크르르릉...."

그럴싸한 얘기에 마그라스는 무척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체크할 부분이 있었다.

"하면 거래의 대가로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간단합니다. 도시 안에 감춰져 있는 보물을 하나 갖고 싶습니다. 다만 그 보물을 발굴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 이번 일이 끝나면 그융크족을 인부로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황금팔을 얻기 위해선 어떻게든 인력이 필요했다. 힘이 센 그융크족이 가장 적당했는데, 어떤 식으로 그들의 힘을 빌릴지는 그 방법이 다양했다.

베니엘은 드래곤과의 거래를 통해서 인력을 동원하려는 것 같았다.

한데 마그라스의 태도가 갑자기 뾰족해졌다.

"보물이라? 네놈, 감히 이 몸의 영토에 있는 보물을 노리고 온 것이더냐! 크르르릉!"

누가 드래곤 아니라고 할까 봐, 그는 보물이란 말에 신경질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마그라스는 폐허의 어디에 보물이 묻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랬다.

그는 드래곤다운 보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장차 발굴될 모든 게 자신의 소유라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냈다.

"너 같은 쥐새끼에게 내 정당한 재산을 나눠줄 바에는 거래는 없는 거로 하겠다! 크워어어어!"

확실히 보물에 관해서라면 드래곤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현재 마그라스는 곤궁한 상황이고, 누가 봐도 베니엘과 손을 잡는 게 유리했다. 그럼에도 본 적도 없는 보물이란 허상에 사로잡혀서 일을 그르치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노쇠한 몸임에도 다시 투기를 일으키며 한판 제대로 붙어볼 기세였다.

베니엘은 보이지도 않는 보물이 드래곤을 움직이는 모습에 감탄했다.

'놀랍구나! 탐욕이 그에게 잠시나마 젊음을 돌려줬구나.'

하나 그렇다고 보고만 있어선 곤란한 노릇. 자칫하면 저 드래곤이 자기 폐가 더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 냉기 브레스를 토해낼지도 모른다.

'안 될 말이지. 내가 드래곤 브레스를 칼로 갈라 버릴 수 있다는 하이 마스터의 경지도 아니고 말이야.'

하이 마스터가 되기 전까진 지하 세계의 강자들인 드래곤 앞에선 몸을 사리는 게 맞았다. 아무리 늙고 이빨 빠진 드래곤이라고 해도 말이다. 베니엘은 마그라스를 살살 달랬다.

"제가 어찌 어르신의 보물을 탐하겠습니까? 그저 어르신께는 필요 없는 작은 도구 하나를 원할 뿐입니다."

"크르르르릉...."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서야 마그라스는 다소 진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분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듯 사나운 눈빛으로 베니엘을 쏘아보고 있었다.

"작은 도구라?"

"네, 제가 원하는 건 황금팔이란 것입니다."

"뭐라! 황금!"

황금이란 말에 늙은 드래곤이 다시 발작할 기미를 보였다. 그 반짝이는 것은 지상에서보다 이곳 지하에서 훨씬 흔하지만, 드래곤이 사족을 못 쓴다는 점은 동일했다.

"아아, 진정하시지요. 금빛을 띠기에 이름만 황금팔일 뿐 실제로 황금을 쓰지 않은 물건입니다."

"크르릉?"

"그것은 저희 같은 인간류 종족이 두 팔을 잃었을 때 착용하는 기계 의수입니다. 정교한 장치지요. 하지만 어르신께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랍니다. 저는 그것 하나만 가져가면 족합니다."

물론 베니엘은 그 말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다. 황금팔 말고 추가적인 보물을 챙기지 않으면 이번 원정은 적자이기 때문이다.

배와 선원을 빌린 비용에 용병 고용비까지 하면 거금이 소모됐다. 하여 베니엘은 잭팟을 터뜨려 그 수십 배나 따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번 원정은 단순히 황금팔이란 물건 하나가 목적이 아니었다. 부하를 아낀다는 평판과 더불어 앞으로 세력을 구성할 막대한 비용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도시 안에 잠들어 있는 유산은 베니엘의 행보에 큰 도움을 줄 터였다.

"그 정도면 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융크들의 노동력과 함께 말입니다."

"크르릉...."

마그라스는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에겐 쓸모없는 의수 하나와 따로 돈이 들지 않는 그융크의 노동력이란 점이 맘에 들었다.

결국 그는 선심을 쓰듯 선언했다.

"좋다. 그 정도라면 관대한 마음으로 허하지 못할 것도 없지."

이 순간 베니엘을 제외하고 배 위에 올라타 있는 모두가 속으로 마그라스를 욕했다.

'저런 탐욕스러운 놈!'

'돼지 새끼 같은 욕심이 소문과 다름이 없구나! 물돼지라 불리는 별명이 진짜인가 보다.'

동시에 베니엘이 손해 보는 거래를 했다고 여겼다. 배의 선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맹하나 거래에는 머저리로군. 쯧쯧.'

그렇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 조언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계약대로 그와 용병의 배편을 제공하고 돈을 받으면 그만일 터.

반면 올리비에나 퀵포우 같이 베니엘은 근처에서 봐왔던 이들의 생각만은 달랐다.

둘은 아직 베니엘과 함께한 지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이 다크 엘프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들이 아는 한 베니엘은 손해 볼 일을 할 자가 아니었다.

그저 뭔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여기고 묵묵히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실로 자비로운 말씀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하면 저희가 서로 손을 잡은 거로 여겨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협상이 통하자 마그라스는 당장이라도 공격하려고 하던 태도를 풀었다. 그러자 배 안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베니엘은 마그라스에게 부탁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안에서 세 세력이 저마다 밖을 경계하고 있으니 이대로는 저희 일행이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크릉! 귀찮게 하는군. 그딴 건 너희가 재주껏 알아서 해야 하는 게 아니더냐?"

"부탁드립니다. 어디 샛길이라도 아는 바가 없으십니까? 적의 시선을 피해 도시 안으로 들어갈 길이 필요합니다."

사실 마그라스는 도시로 몰래 들어갈 통로를 알고 있다. 본인은 그게 통로인지 몰라서 그렇지. 베니엘은 심술을 부리려는 마그라스를 살살 달랬다.

"저희가 어르신의 지혜가 아니면 어디 의지하겠습니까?"

"크르르릉! 귀찮은!"

그래도 그는 아부가 잘 먹히는 타입이었다. 잠시 성질 고약한 노인네의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맞다. 너희 같은 쥐새끼라면 통과할 법한 틈새가 하나 있다!"

49화

폐허 도시 (1)

그 말에 베니엘은 반색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뭐…, 알겠다. 크릉!"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으나 마그라스는 설명에 들어갔다.

"호수 아래 버려진 수중 동굴이 있다. 누추하고, 미끌거리며, 축축한 장소지만 현재 이 몸의 거처로 삼고 있지."

"오, 그러시군요."

베니엘은 평소답지 않게 싹싹하게 추임새를 넣었다. 누나를 향해 틱틱 쏘아붙이던 평소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동굴 한쪽 구석에 갈라진 틈새가 있는데 항상 그쪽에서 구린내가 나더군. 아마 어딘가로 연결된 것 같은데… 너희 같은 작은 녀석들이라면 그 틈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겠지."

이것이야말로 베니엘이 바라는 대답이었다. 이 구린내가 나는 틈은 폐허 도시인 마카디아드의 하수도와 연결돼 있어서 그랬다.

그 오래된 길을 따라가면 도시 아래의 하수도 지역으로 잠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진입로 확보라는 과제가 마그라스와 거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좋군요. 그쪽으로 진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와 부하들을 어르신의 둥지로 데려다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니엘의 물음에 마그라스는 짜증을 벌컥 냈다.

"위치를 알려줄 테니 네놈들이 알아서 와라! 크르르릉! 내가 무슨 탈것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확실히 드래곤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얘기였다.

"저희 인간류는 대체로 수영에 서툽니다. 물 위에 떠서 느리게 나아가는 게 고작이지요. 어르신의 둥지면 물밑에 있을 텐데 장비를 갖추고 거기까지 잠수해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건 네놈들 사정이지! 알아서 방법을 찾으란 말이다!"

마그라스의 태도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베니엘은 잠시만 가까이 와달라는 손짓을 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귀 좀…."

"쯧! 귀찮게 하는구나!"

하지만 무슨 소리를 할지 호기심이 동한 듯 마그라스는 거대한 머리를 배 근처로 가까이 갖다 댔다. 당연히 뒤에서 보고 있던 자들은 놀라서 우르르 물러났다.

베니엘은 가까이 온 마그라스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이건 어르신께 득이 될 겁니다. 제가 데려온 용병들은 실력이 있지만 그 근본이 불한당들입니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언제든 내빼려 할 테지요. 원래 돈으로 고용한 칼잡이 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크르르릉...."

마그라스는 긍정의 의미로 낮게 울부짖었다. 그 반응에 베니엘은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니 잠수같이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이대로 돌아가 버리려 할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놈들을 지하 동굴에 데려다 놓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때부터는 이번 일에서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습니다. 남은 건 오로지 도시로 들어가는 길뿐이니 제깟 놈들이 어쩌겠습니까?"

베니엘의 말을 듣고 있던 마그라스는 눈이 번쩍 뜨였다.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닌가?

마치 놈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 같아서 그 제안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교활한 다크 엘프 놈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럴듯하군. 크르르르릉!"

마그라스는 다시 머리를 위로 올리며 웃어댔다. 흡사 거대한 앰프 스피커가 눈앞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다크 엘프의 검객이여!"

심지어 마그라스는 베니엘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를 지켜보던 자들은 하나 같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모르겠는데?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단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었다. 마그라스는 아주 넉넉한 태도로 베니엘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지혜롭고 영특하니 너는 앞으로 크게 될 준재라 할 수 있겠다. 크르르릉!"

포악한 마그라스가 칭찬까지 하자 지켜보던 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대체 베니엘이 짧은 사이에 어떻게 저 악랄한 드래곤의 환심을 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마그라스가 이런 태도가 된 건 다른 속내가 있어서였다.

'이 귀쟁이 놈을 부하로 삼으면 편리하겠어.'

그는 이전의 위치로 돌아가도 그융크족을 좀 더 확고하게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놈들은 주술사 무리를 중심으로 언제든 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한데 이 교활하고 강한 다크 엘프라면 자기 대신 놈들을 잘 관리해줄 것 같았다.

물론 그래봐야 베니엘의 지혜와 무력이 자신보다 한참 아래일 테니 밑에 둔다고 근심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괜찮은 종놈이 하나 굴러들어왔구나!'

마그라스는 반쯤 썩고 빠진 흉악한 이빨을 한껏 드러내 보였다. 지켜보는 이들이 기절할 만큼 무서운 표정이었지만 나름대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당연히 베니엘은 마그라스의 그런 속셈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욕심 많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나중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면 기절초풍할 거다.'

지금은 겉보기에 마그라스가 철저한 갑으로 보였다.

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는 의외로 쉽게 역전되는 법이었다.

***

"배를 가까운 섬에 대고 기다리도록. 나중에 필요할 때 신호탄을 쏘겠다."

베니엘의 요구에 배의 선장은 선선히 응했다.

기다리는 날이 길어질수록 보수가 커지는 데다가, 이 근처는 늙은 드래곤의 영토라 별다른 위협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마그라스였는데 그는 배가 여기에 머무는 것을 흔쾌히 허락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신호탄을 터뜨리시면 떠나실 준비가 됐다고 여기겠습니다."

선장과 얘기를 나눈 베니엘은 드래곤의 둥지로 떠날 무리 앞에 섰다. 퀵포우와 올리비에, 홉고블린 삼형제, 거기에 더해 용병이 열다섯 명이었다.

모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왜 아니겠는가? 악명 높은 호수의 드래곤 위에 올라타서 수중 동굴로 향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는 자는 없었다.

마그라스가 근처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갑자기 집이 생각나는 겁쟁이가 있다면 이 몸의 간식거리로 삼아주마."

이런 상황이니 겁 많은 퀵포우조차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베니엘은 모두에게 '깊은 숨 이끼'를 나눠줬다.

"모두 입에 가득 물도록. 잠수가 길진 않겠지만 이게 없으면 버틸 수 없을 거다."

이 옅은 파란색의 이끼는 특이하게도 입에 물고 있으면 짧은 시간 동안 수중에서 숨을 쉬게 해준다. 단 몇 분 만에 물속에서 생과 사가 오가는 땅의 종족들에겐 매우 요긴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용병들은 알아서 볼이 터지도록 한가득 이끼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이끼의 녹진한 푸른 액체가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이걸 문다고 수중 호흡 자체가 썩 편한 건 아닌지라 다들 각오를 한 표정이다.

"좋아, 올라타라."

베니엘과 부하들이 달라붙자 마그라스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몸을 흔들진 않았다. 대신 잠수함처럼 천천히 물 밑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부글부글부글!

이끼를 문 자들의 입에서 거품이 연이어 피어올랐다.

호수 안은 마치 빛나는 밤바다 속처럼 완전히 별천지였다. 무척이나 볼만한 광경이었지만 다들 긴장해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유유히 나아가는 드래곤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놈의 비늘이나 가시 등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손이 미끄러졌는지 용병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부그으으으!"

당황했는지 입에 물고 있던 깊은 숨 이끼를 토해내고는 버둥거렸다.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갑자기 숨도 쉴 수 없게 된 데다가 물을 잔뜩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공포는 오래가지 않았다. 호수의 깊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나타난 거대한 물고기가, 마치 붕어가 먹이를 먹는 것처럼 가볍게 녀석을 꿀꺽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눈이 여섯 개인 가물치를 닮은 그 거대한 물고기는 만족했는지 그대로 사라졌다.

모두 망연히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끼어든 자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저 첫 번째 희생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사이 마그라스의 수중 동굴에 도착했다.

다행히 안쪽은 공기로 가득 찬 넓고 긴 공간이 있었다.

"푸아아아!"

"우웩! 최악이군!"

"콜록! 콜록!"

물 밖으로 나오자 모두 입에 문 이끼를 뱉어내며 기침을 해댔다. 마그라스는 귀찮다는 듯 몸을 털었다.

"빨리 내려라!"

그 때문에 여기저기 비명이 터지며 모두 굴러떨어졌다.

"으아악!"

"커억! 팔이!"

베니엘이나 몇몇 실력자만이 흔들림 없이 가뿐하게 땅에 착지했다.

"부상자를 수습하도록."

드래곤의 몸에서 굴러떨어지느라 다친 이가 몇 나왔다. 팔을 부러진 자가 하나고 나머진 다행히 경미했다. 이어서 다들 불을 밝혀 주변을 살폈다.

모두 지하의 종족답게 어둠 속을 볼 수 있지만, 그 거리는 짧은 편이다. 20~30미터만 넘어가도 그들의 눈에는 암흑만이 도사릴 뿐이다.

더 멀리, 제대로 보기 위해선 지하 종족들에게도 빛은 필수였다.

"아...!"

"놀랍군…. 이런 장소가 있었나!"

횃불이나 랜턴, 혹은 마법 도구에 주변을 밝히던 용병들이 호수 아래의 동굴의 모습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동굴 천장에 튀어나와 있는 수많은 마정석 결정체가 발하는 빛 때문에 주변은 몹시 아름다웠다.

다만, 입주민이 영 더러운 놈이었던 게 문제랄까? 주변에는 거대한 물고기의 뼈다귀에 끈적하게 쌓여 있는 해초류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가 무슨 바다도 아닌데, 거대한 갯강구 같은 벌레떼가 무수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모습에 마그라스는 한탄사를 터뜨렸다.

"보아라. 다크 엘프. 이 후락한 곳이 한때 이름 높았던 신사의 마지막 거처이니!"

"어찌 이곳이 마지막 거처겠습니까? 저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시지요."

"네놈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군. 보아라. 저곳이 이 몸이 말한 틈새다."

과연 마그라스의 말대로 동굴의 틈새에서 녹색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건 분명 베니엘이 알고 있는, 도시의 하수도 지대로 통하는 길이 틀림없었다.

드래곤에겐 무리지만 베니엘 무리라면 너끈하게 통과할 만한 틈새였다.

'내가 알고 있던 그 길이 맞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된다. 그전에 베니엘은 마그라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마그라스 님. 가서 일을 처리하려면 제가 당신의 대리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르르르릉! 무슨 소린지 알겠다.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아무도 네놈 이야기를 듣지 않겠지."

"영명하십니다. 제게 필요한 징표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좋다.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성과를 내지 못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마그라스는 자신의 비늘 하나를 떼어내더니 발톱으로 그 위에 용의 문자를 적었다. 그리고 간단한 마법을 걸어 베니엘에게 건네줬다.

"받아라."

"감사합니다."

"다크 엘프, 이제 바로 떠나도록 하라. 내 인내심은 깊지 않으니…."

베니엘은 일행에게 명령을 내렸다.

"좋아. 움직인다!"

용병 무리는 군말 없이 따랐다. 아무도 여기서 이따끔씩 자신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거대한 드래곤과 더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뜩 마그라스가 물었다.

"팔을 다친 놈이랑 그 외 몇 놈만 두고 가지 그러느냐?"

말하면서 드래곤의 턱에서 침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그제야 베니엘은 마그라스가 일부러 몸을 털어 일행을 떨어뜨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가 막히군! 실력이 없는 놈을 솎아내서 잡아먹으려고 했던 건가!'

이 늙은 드래곤은 아둔한 편이지만 자기 관심사에선 비상하게 머리가 굴러가는 듯했다. 베니엘은 앞으로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가뜩이나 인원이 적어서…. 안쪽에 적들이 수백 명이 도사리고 있는 걸 아시잖습니까?"

"크르르릉…. 어쩔 수 없지. 알겠다. 하지만 크게 다친 자가 나오거든 이쪽으로 보내도록."

여전히 미련이 남는 듯 마그라스의 눈빛이 여기저기를 끈적하게 훑고 지나가자 용병들은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융크 주술사들이 든 마법 지팡이를 빼앗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좋다! 이후에는 그융크 놈들이 모두 복속할 테니 도시로 복귀할 기회가 오겠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실수가 없게 하라. 다크 엘프."

"이를 말입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베니엘은 앞장서 틈새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금세 그들은 보이지 않게 됐다.

***

섀도우 위자드는 지하 세계 전역에 이름을 떨친 강력한 범죄 조직이다. 이름처럼 조직의 주축은 사악한 마법사들로 그들은 온갖 범죄에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의 목표는 단순히 부귀영화 따위가 아니라, 어떤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

다만 그 궁극적 목표가 뭔지는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이라, 지저인들에게 그들은 무언가 광신적으로 행하는 위험천만한 마법사 집단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이 섀도우 위자드는 현재 폐허 도시에 존재하는 세 개의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도시로 온 섀도우 위자드의 책임자는 '셀바리스 쏜'이라 불리는 젊은 천재 마법사였다.

그는 날씬하고 우아한 체격을 가진 하프 엘프로, 조직 내에서 전도유망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게, 쏜은 조직의 신성한 수장이자, 지하 삼대 마법사로 불리는 '말라카르 벡스'의 수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젊은 마법사지만 조직의 요직에 올랐고, 이번 발굴 건처럼 중요한 일도 맡게 됐다.

현재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거대한 수정구를 바라보며 도시의 동향을 감시 중이었다.

그러던 중 쏜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호오? 뭐지요? 하수도 쪽에서 새로운 생명 반응이 나타났군요?'

50화

폐허 도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