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폐허 도시 (2)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는 쏜의 수정구는 적의 위치와 동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요긴한 물건이었다.
적의 방해로 도시 전체를 살필 수는 없었지만, 쏜은 가능한 부분을 틈나는 대로 꼼꼼하게 감시하곤 했다. 그러던 중 하수도 구역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음.... 대충 스물 정도? 재밌군요.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누굴까요? 후후후."
쏜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호기심과 흥미는 그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감정이었기에 당장 하수도로 방문객들을 살펴보러 가고 싶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이들이 나타난 구역이 도시의 중립지역이란 것. 현재 도시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세력은 많은 다툼 끝에 각자의 구역을 나눠 잠시 싸움을 멈춘 상태였다.
하여 중립지역에 무장한 병력을 파견하려면 상대 쪽과 협의가 필요했다. 당연히 이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일이 원만하게 흘러갈 리가 없다. 또 무슨 수작질이냐며 새로운 시비가 붙을 확률이 높았다.
'불행히도 손님맞이가 쉽진 않겠네요. 아쉬운 일이군요.'
게다가 저 방문객들의 정체도 별로 대단치 않아 보였다. 보나 마나 시궁창을 헤매는 쥐 인간 무리가 어디선가에서 기어들어 온 게 틀림없었다.
이 도시의 역사는 오래됐고, 그 탓에 하수도 구역은 대단히 복잡했다. 생각지도 못한 진입로로 새로운 녀석들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중 쥐 인간들은 마치 집의 어느 틈새로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퀴벌레처럼 귀찮고 짜증 나는 존재였다.
즉,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 있을 법한 일이란 것이었다. 쏜은 수정구에서 관심을 끄기로 했다.
'벌레들에게 관심 끄고 다시 업무나 봐야겠네요. 향긋한 차 한잔과 말이죠.'
마치 방사선이 담긴 것 같은, 푸른 광채가 흐르는 기묘한 차가 그의 목으로 꿀꺽꿀꺽 넘어갔다.
***
한동안 동굴 지대의 틈새를 나아간 베니엘과 일행은 하수도 지역에 도착했다. 오래된 벽돌로 만든 벽과 무너진 하수 시설로 음산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잠시 휴식."
일행을 멈춰 세운 베니엘은 고민에 들어갔다.
'누굴 먼저 만날까? 어느 세력과 접선할까?'
이제 도시 밑으로 잠입했으니 다양한 선택이 가능했다. 베니엘은 온갖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어떤 길을 택하냐에 따라 보상과 난이도가 달라진다.
'중요한 건 현재 내 실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는 거다.'
마그라스에겐 그융크족의 마법 지팡이를 빼앗는 걸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듯 말했으나, 그는 단순히 드래곤의 수족으로 움직일 생각 따윈 없었다.
"음...."
한동안 고민하며 계획을 점검한 베니엘은 섀도우 위자드와 접촉하는 걸 우선하기로 했다.
'그래, 셀바리스 쏜. 그놈을 이용하자.'
쏜이라 하면 이 도시로 파견 온 섀도우 위자드의 책임자다.
늘 자신의 수정구로 도시의 여러 구역을 편집증에 걸린 자처럼 감시하는지라 베니엘 일행의 진입도 이미 알아챘을 터이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다는 건, 우리를 잔챙이라 여기기 때문이겠지.'
하면 쏜이 반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놈이 강하다지만, 그렇다고 내 뜻대로 휘두를 수 없는 건 아니지. 킥킥.'
베니엘은 피식 웃으며 용병들에게 외쳤다.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용병들은 긴장감 가득한 얼굴이 됐다. 다들 온갖 전장을 구른 자들이지만 이런 폐허 도시의 지하 하수도에서의 싸움은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과 싸웁니까?"
용병 중 한 명이 물었다. 이에 베니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이 하수도의 터줏대감이 하나 있어. 놈을 몰아내고 우리가 여길 점거한다. 자, 가자."
용병들은 미지의 괴물에 두려움을 느꼈으나 앞서가는 베니엘의 뒷모습이 몹시도 든든했기에 곧 용기백배했다.
"좋아! 가자!"
"치안관님을 따라라!"
***
쏜은 서류를 처리하면서 수정구 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마치, 한창 업무 중에 폰으로 동영상을 슬쩍 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도시의 여러 동향을 살피던 중 쏜은 하수도로 들어온 잔챙이들이 어딘가로 향하는 걸 알게 됐다.
"호오…? 이거, 이거."
그건 쏜의 흥미를 끌었다.
놈들의 진입 방향이 매우 재밌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 방향이 하수도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이 사는 장소였다.
그 괴물은 지하 가장 최심부에 사는 괴종족인 '헤르즐락 나낙'이 만들고 버린 실험체 가운데 하나였다. 촉수와 이빨로 이뤄진 끔찍한 괴물로 어찌 탈출해서는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녀석이었다.
하수도에 워낙 콕 박혀 있는 데다가 큰 문제도 일으키지 않기도 해서 도시의 세 세력은 녀석을 무시하고 있었다. 사실 하수도 지역이 중립지대가 된 게 저 괴물이기도 했다.
한데 그놈을 향해 나아가다니? 쏜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이런. 자멸의 길로 가나요? 가엾게도.'
더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듯했다. 쥐 인간은 위험에 민감하고 생존력이 강하다고 하더니, 역시 비루한 종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쏜은 관심을 끄고는 서류 작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보람찬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든 쏜은 놀랄 만한 광경을 보았다.
'아니…? 이게 뭐지요?'
믿을 수 없게도 수정구에 비추던 그 터줏대감 괴물의 생명 반응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반면 괴물을 향해 몰려갔던 무리의 희생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 숫자 그대로이다. 쏜의 눈이 절로 커졌다. 그는 곧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보통 분들이 아니었군요? 이러면 저도 참을 수 없거든요. 어디 인사나 드려볼까요?'
쏜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건을 내리썼다. 섀도우 위자드는 외출할 때 정체를 감추고, 상대에게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해 그림자 마스크를 쓰지만 쏜은 그러지 않는다.
매사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 뒤 쏜은 마법 지팡이를 챙겨서 순간 이동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지하에선 순간 이동 주문이나 통신 주문이 몹시 제한적이다.
원체 지형 자체가 폐쇄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못 쓴다고 봐야 할 정도였는데, 쏜 정도의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짧은 거리는 그럭저럭 가능했다.
번쩍!
빛과 먼지가 공중에 흩날리더니 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영차! 영차!"
"당겨! 신호에 맞춰서 당기라고 멍청이들아!"
"영차! 영차!"
용병들이 쓰러뜨린 하수도의 괴물을 밧줄에 묶어 끌어내고 있었다. 촉수 가닥이 축 늘어진 괴물은 크고 무거웠지만 다행히 점액질로 질척질척한 놈이라 바닥에서 쉽게 미끄러졌다.
"멀리 갖다 버려. 시체에 온갖 괴물이 꼬일 테니까. 그 뒤에 이 일대를 정리한다!"
베니엘은 터줏대감 괴물이 살던 구역에 일종의 전진 기지를 설치할 생각이었다.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장소였지만 괴물 놈이 여기 머문 곳에는 이유가 있었다. 외부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고, 유사시에 탈출하기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이 하수도에 제일 명당이라 할 수 있지.'
베니엘은 도시 위에서 활동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하수도로 도망쳐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전진 기지는 중요했다.
"나머지 놈들은 주변을 청소하고 자재를 가져와. 방벽까지 세워야 한다. 한동안 여기서 머물 거야."
이건 용병이 아니라 무슨 잡부처럼 부려 먹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아까 베니엘이 싸우는 걸 눈앞에서 생생하게 봤기 때문이다.
검에서 새하얀 도깨비불을 일으키며 괴물을 썰어버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용병들은 눈치를 보며 소곤거렸다.
"마스터란 저렇게까지 강한가?"
"온몸에 소름이 돋은 게 아직도 안 풀리는군…. 보고도 못 믿겠어."
"덕분에 우리쪽은 한 명도 안 뒈졌잖아? 저런 괴물을 쓰러뜨리면서 인명 피해가 없다는 건 기적이다. 내 칼질을 오래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사실 싸우는 건 저 도련님이 다 했잖아. 우리는 뒤에서 석궁이나 쐈고."
다들 베니엘이 원래 강한 건 알았다. 버섯 농장에서 서열 7위 검객 발토리스와 싸우는 걸 봤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잘 싸우긴 했지만, 상대가 워낙 강해서 그런가 다소 위태로웠다. 누나인 아리아나와 합공을 했고.
한데 방금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으로 덩치 큰 괴물 놈을 조져 버린 것이다. 다들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더 강해졌어. 믿을 수 없군."
"저렇게 빨리 강해지는 게 가능한 건가?"
"몰라. 우리랑은 결이 다른 양반이니. 소위 말하는 불세출의 천재라는 거지."
"야, 너 어려운 말 쓴다?"
상황이 이러니 베니엘이 뭘 시켜도 다들 순순히 따랐다. 용병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퀵포우의 태도가 한층 충성스러워진 것이다.
"정말 대단한 무용이었습니다! 주인님! 찍찍!"
하도 굽실대느라 퀵포우는 허리가 굽을 정도였다. 그는 지금 흥분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끈을 제대로 잡았다! 이분은 반드시 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밑에서 호의호식하겠지! 찌지지직!'
퀵포우의 머릿속에는 이미 영광된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필요한 상황에 즉각 아첨하기 위해 베니엘을 계속 살폈다. 그러다 한 가지를 알게 됐다.
베니엘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지시를 내리면서도 어딘가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주인님,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으십니다? 찍찍."
"맞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찌익? 누구를?"
하지만 베니엘은 대답 대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고, 퀵포우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력의 응집으로 인한 빛이 앞쪽에서 선명하게 일어났다.
지이이잉!
빛의 입자가 한곳으로 응집하더니 그 순간 공간이 크게 출렁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웬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왔다. 놀란 용병들이 옮기던 자재를 내던지고 서둘러 무기를 들었다.
"웬놈이냐!"
"경계해! 달려들진 말고!"
빛이 가시자 상대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검은 로브에 마법 지팡이를 그는 누가 봐도 나 마법사요, 라고 외치는 듯한 존재였다.
그는 매우 잘생긴 쾌남자였고, 귀는 엘프 정도는 아니지만 뾰족한 편이었다. 안목이 있는 자라면 저것만 봐도 마법사가 하프 엘프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
나타난 마법사는 두 팔을 벌린 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 누추하고 궁박한 장소에 손님이 찾아오신 듯해서 인사를 드리러 왔답니다. 후후."
베니엘 저 마법사가 섀도우 위자드의 책임자인 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다. 게임에서 보던 것과 빼다 박았군. 게다가 묘하게 나긋나긋한 저 말투까지.'
쏜은 매사 그 태도가 정중하고 언제나 존대를 한다. 하나 그렇다고 그가 호인인 건 아니다.
쏜은 저 환한 미소가 무색할 정도로 지독스럽게 잔인하며 악랄한 존재였으니까. 뭣보다 일신의 실력이 압도적이었다.
베니엘은 재빨리 쏜의 실력을 가늠해 봤다.
'온몸에 가득한 마법 문신, 어둠의 로브 등 고가의 장비들. 그림자 갑옷과 공포의 눈 같은 각종 마법이 항시 부여된 상태....'
예상은 하고 왔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절망적이었다.
'마치 걸어다니는 마법의 요새 같군.'
저자는 홀로 여기 모든 이를 능히 상대할 실력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몇 분 안에 이쪽이 전멸할 터.
베니엘은 즉각 손을 올렸다.
"귀하신 분이다. 모두 무기를 거둬라."
그 말에 용병들이 머뭇머뭇 무기를 치웠다. 다들 불안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들 역시 상대가 범상치 않음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쏜은 베니엘을 비롯해 일행을 쓱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다시 올렸다.
"당신이 이 꼬질꼬질하고 냄새나는 집단의 책임자입니까? 다크 엘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요."
베니엘은 상대의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광기에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도 정중히 답했다.
"네, 마법사님. 높은 마학과 숭고한 목표를 추구하는 섀도우 위자드의 일원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런, 생각보다 안목이 있으시군요.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온 것인가요? 모두 솔직히 말해주세요.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다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답니다."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다. 문제는 저게 헛소리가 아니라는 게 더 무서웠다.
하나 베니엘은 공포를 느끼진 않았다.
'아니, 뭐… 애초에 분수도 모르고 쏜과 싸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만약 때려잡을 계획이었으면 지금 시점에 여기 안 왔지.'
쏜은 아직 예상조차 못 하고 있지만, 이쪽 도시에서의 일은 앞으로 몇 년을 더 끌게 된다. 그러니 게임으로 치면 레벨 업을 잔뜩 하고 와서 쏜을 직접 쓰러뜨려도 된다.
'하지만 꼭 싸우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으니 지금 온 거지.'
고레벨에나 도전 가능한 난이도의 임무를 빨리 끝내면 보상이 아주 달달한 법이다.
"네, 맞습니다. 그걸 위해서 먼저 보여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베니엘은 미리 준비한 걸 품에서 꺼냈다.
51화
폐허 도시 (3)
베니엘이 꺼낸 것은 광택이 도는 커다란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비늘 위에는 마그라스가 직접 자신의 발톱으로 새겨 넣은 그의 서명이 보였다.
쏜은 살짝 눈이 커졌다.
"호오, 이건?"
대번에 그게 진품이고, 저 서명이 드래곤의 문자란 것을 알아챈 것이다.
쏜은 피식 웃었다.
"이런, 마그라스 님의 사절이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분의 전권대사 같은 것이지요."
"그런가요? 하지만 체면도 모르고 열심히 내뺀 그분이 이곳에 아직 볼 일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마그라스가 이 조롱을 들었으면 분노로 기함했을 터다.
쏜은 이어서 말했다.
"무슨 용건으로 온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그냥 여러분을 쓸어버리는 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일 것 같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베니엘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비늘에는 드래곤의 마법이 걸려 있지요. 여기서 저희를 몰살시키면 대번에 마그라스 님께서 아시게 될 겁니다."
"오호라, 그런가요?"
"네, 솔직히 이후에는 많이 귀찮아지실 거라 생각합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비록 지금 마그라스가 세력도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나 그래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갑자기 미쳐 날뛰면 퇴치야 가능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터.
그렇게 되면 섀도우 위자드는 삼자 세력 구도에서 자동으로 탈락이다.
쏜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눈웃음을 지었다.
"이런, 제가 당신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소리군요. 영 내키지 않음에도 말입니다."
"그저 자비로움을 바랄 뿐입니다."
"후후, 좋습니다. 목숨을 궁구할 수단을 살뜰하게 마련해 오신 정성이 갸륵해서 잠깐 얘기는 들어드리지요. 어서 말해보세요. 그 늙은 드래곤의 제안이란 걸 말입니다."
아마 쏜은 일이 자기 뜻대로 안 풀리자 다소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말투가 묘하게 사나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니엘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정말 다크 엘프답지 않은 태도였다.
"너무 그렇게 각을 세우지 마시지요. 마그라스 님께서는 과거의 원한을 잊고 섀도우 위자드와 협력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베니엘은 그럴싸한 얘기를 만들어냈다.
마그라스의 복권을 도와준다면, 이후 그가 섀도우 위자드의 발굴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소리였다.
"마그라스 님께선 은퇴 후의 안락한 평온을 원합니다. 섀도우 위자드가 원하는 걸 찾아서 떠난다면 이룰 수 있는 작은 소망이지요. 어떻습니까?"
고려해 볼 만한 제안이었다.
"재밌군요.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쏜에겐 좀 더 괜찮은 방법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래곤의 원한이 그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선뜻 믿기도 어려웠다.
사실 베니엘은 그가 거절할 걸 알았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물론 겉으론 무척 아쉬워했지만.
"흐음… 그거 유감이군요. 하지만 저는 이 동맹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못 말리겠네요. 미련이 질척질척하게 남은 겁니까?"
"때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요.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려 보고 싶습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좋은 꼴은 못 볼 테니까요."
쏜은 조소를 흘렸다. 동시에 잠시 전 불쾌했던 기분이 풀렸다.
그래, 이게 맞는 일이었다. 누구든 자신을 상대할 때는 이렇게 간청하며 애걸해야 옳았다.
"헛된 희망을 품는군요.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저희가 여기 하수도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혹시나 모를 일이잖습니까?"
"음...."
상대는 마그라스의 사절이니 너무 박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앞날이 어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동맹의 여지를 아예 없애버리기보단 여기 박아두고 감춰둔 패로 써야겠군요.'
생각지도 못한 급한 상황이 오면 그 늙은 드래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궁창이 좋다면 맘대로 하시지요. 관여하지 않을 테니."
결국 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사라져 버렸다.
팟!
빛이 번쩍이고 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지자 그제야 일대에 팽팽하던 긴장이 풀렸다.
"후우…."
베니엘 역시 청산유수였지만 자신보다 강자를 앞에 두고 있단 부담감 때문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일단 거주 허락을 받아냈군. 섀도우 위자드 한정이긴 해도 말이야."
이것만 해도 성과다. 이제 적어도 섀도우 위자드는 원정대가 여기 있는 걸 방해하진 않을 테니까.
쏜은 자존심이 강하고 체면을 중시한다. 흘러가듯 얘기했어도 자기 말을 지킬 터였다.
뭣보다 저 재앙 같은 쏜과 마주치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게 가장 컸다.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쏜은 성정이 괴팍하여 누군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태도가 단호한데 어찌 설득하시려고요? 주인님. 찍찍!"
옆에 있던 퀵포우가 우려를 제기했다.
하지만 베니엘의 얼굴에선 근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걱정 마라. 저놈은 결국 내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으니까."
"네에?"
"간단한 이치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그만이지."
퀵포우는 베니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경험이 말해줬다. 자기 주인이 뭔가 또 더러운 수작을 떠올렸다는 걸 말이다.
베니엘은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여기서 하염없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나? 응?"
애초에 이건 포석에 불과했다.
베니엘은 이제부터 적극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
복귀한 쏜은 베니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평소답지 않게 아무도 해치지 않고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그 다크 엘프의 교묘한 언변에 휘말렸던 것 같다.
마그라스의 사절이라 죽일 순 없겠지만, 불구로 만들거나 괴롭히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말이다.
'묘한 자였네요.'
별다른 손해는 없는데 어쩐지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쏜은 불쾌함보단 흥미가 더 피어올랐다. 하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중차대한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더는 그 다크 엘프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단 그융크족에게 사절을 보내야겠지요.'
쏜이 보기에 두꺼비 인간 그융크족은 힘만 센 천지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쓸모가 있었다.
쏜은 그융크족을 이용해 진정한 경쟁자인 도굴꾼 무리를 공격할 작정이었다.
놈들은 지하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도적 길드, 암살자 길드가 연합한 것들이라 섀도우 위자드 같은 강력한 범죄 조직에게도 위험한 경쟁 상대였다. 그러니 그융크족을 반드시 동맹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삼인 경쟁 체제에서 둘이 손을 잡으면 나머지 하나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도굴꾼 무리만 사라지고 나면, 아둔한 그융크를 구워삶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겠지요.'
이후에 도시는 섀도우 위자드의 통제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다만 배타적인 특성의 그융크족이 별로 협조적이지 않긴 했다.
하나 쏜에겐 그들을 온건히 설득할 수단이 있었다.
바로 마법 지팡이 건으로 협박할 작정이었다.
그융크족이 호수의 악몽이라 불리는 드래곤 마그라스의 최면으로 부터 벗어난 건 섀도우 위자드가 제공한 마법 지팡이 덕이다.
그 지팡이를 도로 회수해 가겠다고 압박해볼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소유권 자체를 완전히 넘겨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섀도우 위자드는 그융크족 주술사들에게 값비싼 마법 지팡이를 빌려줬다.
그융크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지팡이를 잃고 다시 지배될 처지가 되느니 이쪽 말을 따르겠지요? 아마 그융크도 그 정도 머리 굴림은 가능할 테니까.'
물론 진짜로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하나라도 회수했다가는 그융크족이 난리가 날 터인 데다가, 지금 도시 밖에서 원한에 불타고 있는 드래곤 마그라스를 귀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그라스가 귀환해야 한다면 하수도의 사절이랑 협상을 해서 이쪽 요구를 관철시킨 후여야겠지요. 그런 갑작스러운 경우가 아닌....'
물론 쏜은 그런 일어날 리 없는 가정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는 매사 자신만만한 사내였다.
'상황은 모두 제 통제 하에 있군요. 당연한 겁니다.'
그는 언젠가 스승의 뒤를 이어 섀도우 위자드의 수장이 될 인물이었으니까. 이런 도시에서 작은 일 따위 실패할 리가 없었다.
***
지하 전진 기지의 건설이 거의 끝나자 베니엘은 퀵포우를 불러 명했다.
"나는 홉고블린 삼 형제와 함께 위쪽을 정찰하고 오겠다. 애들 관리하고 있어. 좀 걸릴 거다."
"걱정 마십시오. 찍찍."
퀵포우는 자긴 안 데려간다는 게 기쁜 듯,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앞발을 비벼댔다.
베니엘은 원정대를 꾸릴 때 가져온 회복 포션과 마법 폭탄을 몇 개 챙겨서는 홉고블린 삼 형제와 하수도 위쪽으로 향했다.
"모두 기척을 죽이고 행동해라."
이 지시에 삼 형제 중 셋째인 잔크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치안관님. 저희가 원래부터 남의 집을 드나들며 필요한 걸 꺼내는 일에 잔뼈가 굵습니다. 케켁!"
천생 도적놈이었단 소리다.
베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자랑스럽군."
홉고블린 삼 형제는 노예 생활을 벗어난 탓에 살이 오르고 체구가 좋아졌다. 눈빛이 빛나고 행동도 기민한 게 이전에 광산에서 노역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이쪽으로, 모두 조용히 따라와라."
베니엘은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다. 그는 게임 속 기억을 바탕으로 그럭저럭 훌륭하고 외부로 향하는 출구를 찾아냈다. 현실의 지형은 훨씬 크고 복잡했지만 개괄적인 구조는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대기."
베니엘은 잠시 그들을 내버려두고는 근처에 있는 버섯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은은하게 발광하는 버섯의 봉우리 위에 올라선 베니엘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파악했다.
그가 원하는 건 그융크족의 거주 지역이었다.
'저기군.'
그융크들은 무너진 옛 신전 근처에 터를 잡고 있었기에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신전은 오래 전 지하에 신앙이 존재하던 시절부터 있던 건물로, 원래 어떤 신을 섬겼는지 이제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현재 그융크들은 저곳에 터를 잡고 이제는 응답하지 않는 그들의 신인 '축축한 진액의 여신'을 숭배하는 영광스러운 장소로 꾸며둔 상태였다.
목적지를 확인한 베니엘은 높은 버섯 나무에서 사뿐하게 뛰어내렸다. 건물 3층 높이었지만, 다크 엘프인 그에겐 아무 문제도 없었다.
"목적지를 발견했다.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치안관님."
넷은 조심스럽게 무너진 도시를 가로질렀다.
도시는 파괴된 정도가 심각했는데, 간신히 서 있는 기둥이나 외벽은 마치 묘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제대로 된 길은 없었고 발밑은 무너진 건물 더미로 들쭉날쭉했다.
신전으로 다가갈수록 오래된 시체가 많이 보였다. 이건 모두 도시를 둘러싸고 싸웠던 세력들의 잔재 같은 것이었다.
"부서진 병장기와 마법이 폭발한 흔적이 가득합니다. 치안관님."
첫째인 두크는 진중하게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운이 없는 놈들이군요. 케륵케륵."
둘째 기크는 자신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웃어댔다.
"...."
반면 셋 중 제일 겁이 많은 편인 막내 잔크는 홉고블린답지 않게 좀 움츠러들어서는 자기 형들 뒤로 숨어서 걸었다. 여차하면 형들을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의지였다.
"언덕 지대로 간다."
베니엘은 그융크의 신전이 내려다보이는 한 폐건물을 점찍었다. 신전을 감시하기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건물 안으로 진입하니 확실히 자리를 잘 찾아온 것 같았다.
"놈들을 감시하기 좋군."
베니엘인 망원경을 빼 들자 첫째 두크가 물어왔다.
"무얼 감시해야 합니까? 치안관님."
"다른 세력이 그융크족에게 뭔가 수작질을 벌이려 할 거다. 사절이 올 수도 있고, 병력이 몰려올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확인한 후에 행동 방침을 정한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케륵."
일행은 돌아가며 그융크족의 신전 앞을 감시했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지루한 일이었고, 홉고블린 놈들은 몸을 뒤틀어댔다.
심지어 베니엘이 이 감시가 며칠은 걸릴 수도 있다고 하자 모두 사색이 됐다.
"세상엔 싸움질보다 힘든 게 많이 있군요. 케르르…."
둘째 기크가 한숨을 내뱉자 베니엘은 끄덕였다.
"상대 머리에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로 일이 해결된다면 차라리 편한 거지."
"맞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더는 말을 안 할 테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케케켁!"
지루한 감시가 이어졌다. 한데 홉고블린 삼 형제에겐 다행스럽게도 반나절 정도 뒤에 무언가 나타났다.
마침 망원경을 들고 있던 첫째 두크가 쉬고 있던 베니엘을 불렀다.
"치안관님! 마법사로 보이는 무리가 보입니다!"
"그래?"
베니엘은 서둘러 창가로 가서 망원경을 넘겨받았다. 과연 두크의 말대로였다.
누가 봐도 나 마법사요, 라고 외치는 듯한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52화
폐허 도시 (4)
검은 로브에 마법 지팡이를 든 자들이었다.
'섀도우 위자드다.'
녀석들은 먼저 만난 쏜과 다르게 음산한 그림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섬뜩한 노란 눈빛만이 빛났다.
누가 봐도 귀신 같은 형상인데, 저게 섀도우 위저드의 시그니쳐 가운데 하나다. 얼굴을 일부러 마법적인 그림자로 가려 위압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놈들은 불길한 그림자 언데드를 하수인으로 부리기 때문에 만나는 이마다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번에도 과연 나타난 마법사 뒤로 그림자 언데드 넷이 따라붙어 있었다.
'나름 직책이 있는 자군. 하긴 사절로 온 모양이니….'
섀도우 위자드에서 중간 간부 정도는 되어야 저 그림자 언데드를 부린다. 하위직들은 그냥 용병 전사들을 데리고 다녔다.
아무튼, 저런 불길함을 형상화한 것 같은 섀도우 위자드의 사절이 도착하자 그융크들의 신전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그와왁! 그왁!
과아아악! 꽈악!
커다란 두꺼비 머리를 한 그융크들이 무기를 내밀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딱 봐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무슨 대화가 오가더니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이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의외로 안에 들어갔던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이 빨리 나왔다. 그들은 하나 같이 격앙된 듯한 태도로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무언가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반면 그융크들은 당혹한 기색으로 소란스러웠다.
곧이어 신전 안쪽에서 마법 지팡이를 든 그융크족의 주술사 몇이 나와서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을 달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은 매몰차게 떠났고, 그융크 주술사들은 황망하면서도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 모습을 관찰한 베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썩은 미소를 지었다.
'딱 원하는 상황이로군.'
보아하니 그융크들은 섀도우 위자드에게 압박을 받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사정인지 뻔했다.
'마법 지팡이를 가지고 이런저런 난처한 요구를 해댔겠지.'
그융크들은 에둘러 거절했을 테고 이에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들은 분노한 것이리라.
물론 대여라곤 하나 마법 지팡이가 그융크족에 손에 있는 이상 모르겠다,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갈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섀도우 위자드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를 테니 망설이는 것이리라.
베니엘은 이 기꺼운 상황을 이용할 셈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홉고블린 삼 형제를 불렀다.
"저기 주술사 놈들이 든 지팡이가 보이지? 아무래도 저걸 가져와야겠다."
홉고블린들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다가 첫째인 두크가 나서 말해왔다.
"보아하니 몹시 귀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케르르…."
누가 봐도 엄중히 지키고 있을 건 뻔한 일. 하지만 베니엘은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훔칠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꼭 진짜 훔치지 않아도 괜찮다."
"케륵? 그럼 왜…?"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머리 쓰는 건 너희 일이 아니니까. 이후 굴러가는 꼴을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다."
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기에 삼 형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
현재 도시의 그융크족의 수는 삼백여 명이고, 이들은 세 명의 주술사들이 이끌고 있었다.
각각 백 명씩 담담하고 있는 셈이다.
'그르파'는 그 세 명의 주술사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그라파는 근심에 빠진 채 자신의 휴식용 돌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부글부글.
반쯤 썩은 듯한 냄새가 풍기는 욕조의 물은 탁하고 끈적거리는 녹색이었다.
방의 조명은 어두컴컴했고, 둥근 돌 욕조의 주위로 빼곡하게 자라난 발광 이끼의 빛이 전부였다.
무덥고 습기로 가득 찬 내부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두꺼비 인간인 그융크족이 좋아할 만한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르파는 이 욕조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들이 간절하고 부르짖는 신인 '질척거리는 진액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곤 했다. 여신께선 응답하지 않은 지 오래됐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령이나 신비한 자연의 힘을 이용한 주술을 익혔다. 다만 그걸 신도들에겐 신성한 여신의 힘이라 속였지만 말이다.
이런 사정을 외부에선 다 알고 있어서 이 지도자들을 주술사라 불렀다.
하나 내부적으로 여전히 신과 신도를 잇는 고귀한 사제로 여겨졌다. 문제는 그런 사제라면, 여신의 현명함을 빌어 동족이 위기에 처한 이 상황에서 그럴듯한 대답을 내놔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큰일이다…. 마법사들이 지나치게 탐욕스럽다.'
그르파는 근처에 놓여 있는 신비한 마법 지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섀도우 위자드로부터 대여해 온 이 지팡이는 동족들이 잔혹한 압제자 드래곤 마그라스로부터 벗어나게 해줬다.
하지만 이제는 마법 지팡이를 제공해 준 섀도우 위자드가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유의 대가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동족의 희생이 클 거다… 받아들일 수 없다.'
섀도우 위자드는 분명 그융크족을 도굴꾼 무리와의 싸움에서 전면에 내세우려 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놈들이 자신들을 토사구팽할 걸 그르파는 모르지 않았다.
그는 주술사였다. 주술사란 무식한 동족과 다르게 깨우치고 깨어난 자였으니, 그 정도 통찰력은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법사와 적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
쉽게 해법을 찾지 못해 고민만 깊어가던 그때, 갑자기 건물 밖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쿠아아아앙!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실제로 방의 천장이 흔들리며 먼지가 요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또한 천장에 알처럼 매달려 있던 녹색 슬라임들이 일제히 욕조로 퐁당퐁당 떨어졌다.
"무슨 일이냐!"
그르파는 돌 욕조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서두르느라 하마터면 뒤로 벌러덩 나자빠질 뻔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마법 지팡이를 챙겼다.
"사제!"
그르파의 호위 무사인 '촘파롬파'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신의 축복을 상징하는 피부의 진액이 대부분 날아간 채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딱 봐도 화상이 심해 보였다.
하지만 그딴 건 상관없다는 듯 헐떡이며 보고했다.
"습격이다! 지팡이를 노리는 놈들이 쳐들어와서 싸움이 붙었다!"
"뭐라!"
그르파가 나가보자 밖은 난리가 나 있었다.
거주지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고, 사방으로 뛰는 동족들이 보였다. 날카로운 것에 베어 죽은 듯한 동족도 여럿이었다.
이 모습을 본 그르파는 진노했다.
"이런 악랄한 놈들이! 기어코!"
어떤 놈들이 했는지 뻔하다. 그르파의 머릿속에는 낮에 와서 패악질을 부리고 간 마법사 놈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거절했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을!'
물론 그가 좀 더 똑똑했다면 이 사건에 무언가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깨우친 자라도 그융크의 지력으로 거기까지 헤아리긴 무리였다.
"상황을 수습해라! 침입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그워어억!"
분기탱천한 그르파가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만 신출귀몰한 침입자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모든 게 정리됐을 때 그르파는 다른 주술사들과 모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봤다!"
"끄웍! 끄웍! 맞다! 더는 얕보여선 안 된다!"
"우리는 약하지 않다!"
실제로 그융크들은 이 도시에서 약자가 아니었다. 숫자가 제일 많기도 했고. 그저 연이을 희생을 우려해 자중해왔을 뿐.
하나 이런 상황에서까지 참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융크 전체가 벌집을 쑤신 것처럼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자 그르파와 주술사들은 결단을 내렸다.
"이참에 마법사를 치운다!"
"지팡이의 완전한 소유! 그왁!"
"도굴꾼에게 연락한다! 동맹!"
그렇게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어제 들렀던 섀도우 위자드의 사절이 다시 찾아왔다.
그융크족을 재차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그르파는 눈을 빛내며 명령했다.
"이교도 놈! 마침 잘 왔다! 당장 두들겨 패서 붙잡아라!"
***
쏜은 오늘도 자신의 어두컴컴한 집무실에 앉아서 도시를 평정할 모략을 세우는데 열심이었다.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모습을 드러낸 이는 쏜의 부관 '토니아'였다.
토니아는 시체처럼 창백한 인상의 여성 마법사로, 눈두덩이는 시퍼렜으며 입술에는 피어싱이 몇 개나 박혀 있는 개성 넘치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또한, 머리는 산발에 몸 여기저기 마법적인 쓸모라곤 전혀 없는 멋을 위한 문신이 가득했다.
매사 정돈되고 단정한 추구하는 쏜에겐 영 보기 싫은 차림새였으나 실력은 확실했기에 곁에 두고 있었다.
"쏜 님."
"무슨 일인가요? 가져온 소식이 좋은 일이었으면 합니다만."
"죄송합니다. 제 낯빛처럼 우중충한 소식이네요."
"이런, 꽤 심하겠군요? 후후."
"...."
쏜은 농담을 했지만 이어진 소식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보고드린 그대로입니다. 그융크족이 사절로 보냈던 동지들을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심지어 전투 중에 이쪽 마법사 하나가 죽기까지 했습니다."
늘 웃는 낯이던 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어갔다.
"…뭔가 착오는 없습니까?"
"귀에 이상은 없으실 테니, 들으신 대로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융크족이 이젠 도굴꾼 무리와 동맹을 추진 중이라는 첩보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사업이 난처하게 됐습니다."
"대체 왜?"
"간밤에 습격 사건이 있었는데 우리쪽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답니다."
토니아는 파악해온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우리가 맞나요? 설마 누가 독단으로 그런 짓을? 전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 알아봤는데 우리쪽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굴꾼 무리가 중간에 이간질을 한 게 아닐까요?"
"흐음...."
확실히 합당한 추론이었다.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그융크와 연합해 섀도우 위자드를 압박할 수 있게 된 도굴꾼 무리가 아닌가.
하지만 쏜의 사고 방식은 그융크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이상하군요. 최근에 도굴꾼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데 말이지요.'
쏜은 수정구를 통해 도굴꾼 무리를 열심히 감시해왔다. 물론 상대도 마법적인 대비를 하느라 감시는 완벽하진 않았다. 그래도 전반적인 경향을 파악해 왔다고 믿었는데….
'설마 허를 찔린 걸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쏜의 얼굴에 한 다크 엘프가 떠올랐다.
잘생겼지만 어쩐지 뺀질뺀질한 인상의 젊은 다크 엘프 말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제야 상대의 이름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쏜은 오만함 때문에 자기보다 낮은 자에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자가…?"
쏜의 혼잣말에 부관 토니아가 반응했다.
"그자라 하심은?"
"아, 그게 말이지요."
쏜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그러자 토니아는 바로 역정부터 냈다.
"그런 곳에 혼자 가시다니요!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세상에! 이러니 제가 보좌를 못 한다고 윗선에 불려가 계속 깨지는 거라고요! 제발! 쏜 님!"
"아, 진정하게요. 위험한 곳은 아니었답니다. 후후."
"혼자 놀다 뒤진 놈들이 꼭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요."
"이런, 끔찍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뒤질 거면 제게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시체를 치워야 하니까."
"호? 장사라도 지내주시려는 겁니까?"
"무슨 소리시죠? 언데드로 살려서 써먹으려는 거지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쏜 님을 부하로 부릴 수 있다니."
자신에게 무례한 소리를 틱틱 던지는 부관을 보고도 쏜은 관대한 태도였다.
"…고맙지만 사양하지요. 죽은 뒤엔 새 일자리는 필요하지 않답니다."
이제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하자 좀 더 잔소리를 하려던 토니아는 혀를 차고는 방을 나갔다.
"쯧!"
그렇게 잔소리꾼이 사라지자 쏜은 사태를 고찰해 나갔다. 그리고는 한 가지 사실에 도달했다.
'이득을 본 건 도굴꾼 무리만이 아니겠군요.'
섀도우 위자드에 궁지에 몰리게 된 상황에 빛나는 건 바로 드래곤 마그라스의 진영이다.
'설마 동맹을 위해 이런 판을 벌인 건가요?'
아직은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건방지고, 괘씸하며, 재밌는 일이었다.
'이런, 분수를 좀 알려줘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선 화풀이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 섀도우 위자드의 처지가 난처하게 된 것은 사실이니까. 하면 일단 손을 잡은 뒤, 쓰고 버리면 될 일.
쏜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맞으면 그 자신감 넘치는 다크 엘프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요. 후후후.'
일단 쏜은 다크 엘프를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53화
황금팔 발굴 (1)
당연한 얘기지만 야밤에 그융크족의 신전에서 난동을 부린 건 베니엘과 홉고블린 삼 형제였다.
불과 넷에 불과했지만 미리 준비한 마법 폭탄을 던지며 벌인 기습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더불어 홉고블린들의 주특기인 역청을 이용한 방화도 효과 만점이었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성취감에 들떠 전진기지로 복귀했다. 베니엘은 홉고블린의 방화 솜씨를 극찬했다.
"네놈들이 쓰는 역청은 불이 정말 잘 붙더군."
이에 재주 좋은 셋째인 잔크가 자랑스러운 어깨를 펴며 답했다.
"저희 종족은 어딘가 멀쩡한 구조물이 있으면 불을 놓는 걸 최대 기쁨으로 여기고 있지요. 그래서 역청 다루는 방법도 다른 종족이 따를 수 없습니다. 케케켁!"
놈들의 역청은 일반적인 것과 차원이 달라 지하 세계에선 '홉고블린의 악의'라 불리며 유명했다.
그 덕에 신전은 금세 여기저기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적은 숫자에도 난장판을 버릴 수 있었던 건 그융크 전사들이 불 끄는 데 더 힘썼기 때문이다.
"자, 포상이다."
베니엘은 흡족해져서 품에서 제법 두둑한 은화 주머니를 던져줬다. 삼 형제는 입이 헤죽 벌어져 날카로운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요! 케케켁!"
이후 베니엘은 전진기지로 복귀하자 밤새 날뛴 탓에 피곤에 절어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찌뿌둥한 기분으로 일어나 목을 돌리며 있자니 퀵포우가 뭔가를 가지고 왔다.
"방금 어떤 마법사 무리가 와서 이걸 전달하고 갔습니다. 주인님께 전해달라더군요. 찍찍."
그건 흑요석으로 만든 원형의 거울이었다. 테두리에 마법 문제가 빼곡하게 새겨진 것만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통신 도구군. 알겠다."
지하에서 통신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이런 비싼 마도구를 쓰면 짧은 거리에서나마 연락이 가능했다.
베니엘이 영지에서만 쓰는 나이트쉐이드 혈족의 연락용 스크롤도 비슷한 원리였다.
흑요석 거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별안간 빛이 어렸다. 알아서 발동한 것이다. 이윽고 거울 속에서 쏜의 얼굴이 나타났다.
"물건을 받으셨나 보군요. 앞으로 정기적인 연락이 필요할 듯해서 말이지요. 후후."
"아, 그러시군요. 반가운 말씀이십니다."
"그것보다 통성명이나 할까요? 저는 쏜이라 합니다. 귀하께선 어찌 되시는지?"
당연한 얘기지만 실명을 댈 생각은 없었다.
"저는 사므엘이라 합니다. 쏜 님."
"사므엘이군요. 그 이름 기억해두지요."
어쩐지 말투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마치 지난밤에 벌인 일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나 쏜은 더 무언가 추궁하는 대신 제안을 해왔다.
"당신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봤답니다. 마그라스 님의 복귀를 전제로 동맹을 맺는 것 말이지요."
쏜은 운을 띄우면서 베니엘이 반색할 거라 여겼다. 지난 만남에서 반쯤 애걸했던 데다가, 아직 물증은 없지만 동맹을 위해 간밤의 일도 획책한 거로 보였으니까.
'자신이 이기고 있다고 여기겠지? 어리석은 젊은이의 짧은 사고가 다 그렇지요. 하지만 최후의 승리가 중요한 법.'
쏜은 일단 아직 실패라곤 모르는 것 같은 저 젊은 다크 엘프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 뼈아픈 법이지요.'
한데 베니엘은 쏜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태도를 보였다.
"아…? 아아.... 그 동맹 말씀이군요?"
뭔가 심드렁한 태도. 명백히 관심 없는 주제를 꺼낼 때 볼 법한 모습이었다.
쏜은 작은 당혹감을 느꼈다.
'뭐지?'
베니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남일 얘기하듯 말했다.
"그게 사정이 바뀌어서 말입니다. 굳이 동맹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하하."
"뭐라고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지팡이만 치우면 드래곤께서 복귀하실 텐데, 굳이 누군가에게 빚을 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당연히 허튼소리였다.
복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복귀 이후 도시의 정치적 관계다.
마그라스 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섀도우 위자드와의 동맹을 간청하더니, 사정이 바뀌자 안면몰수하고 너 하는 거에 따라 해줄 수도 있는데, 라고 나오는 것이었다.
쏜은 기가 막혔다.
"하!"
저 고약한 다크 엘프 놈이 저리 뻗대는 건, 동맹을 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분명 아니다. 작금의 섀도우 위자드의 처지가 급해질 걸 이용해 최대한 뽑아내려 저리 능글맞게 구는 것이다.
"꽤씸하군요. 후후."
베니엘은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너무 절 원망하지 마십시오. 다 윗선의 뜻이라…. 저 같은 잡졸이야 윗분 뜻 전하는 게 전부인지라. 하하하!"
쏜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베니엘은 곧장 드래곤을 팔아먹으며 책임을 미뤘다.
늘 웃는 낯이던 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심지어 이마에 살짝 힘줄이 돋아난 게 보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현재 그의 내면은 폭풍 같은 갈등 중이었기 때문이다.
'저 빌어먹을 놈을 당장이라도 갈아버리고 싶군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답도 없다. 드래곤 마그라스는 격노할 테고, 섀도우 위자드의 적은 더 늘어나게 된다.
쏜의 입장에선 절대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래, 이번 일을 실패할 수는 없지요.'
섀도우 위자드를 온전히 물려받기 위해선 그의 행보에 단 하나의 결점도 있어선 안 된다.
게다가 이번 건인 '아카드의 지도'를 발굴은 스승께서 직접 맡긴 일. 절대로 작은 실수라도 있어선 안 된다.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쏜이지만 위대한 스승 벡스가 한숨짓는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피가 차갑게 식었다.
"으득...."
작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벡스는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그래서 뭘 원하십니까?"
베니엘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쏜을 보는 게 재밌어서 좀 더 거들먹거렸다.
"글쎄요. 제가 뭘 원하는지 저도 잘.... 혹시 추천 가능하신가요?"
"...!"
순간 쏜은 이성의 끈이 끊어질 뻔했지만 훌륭한 자제력으로 이번에도 참아냈다. 추천받는다는 말이 왜 그렇게 열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쯤 하시지요. 후후."
베니엘은 그 후후, 라는 웃음소리에서 상대가 진짜 열받았다는 걸 깨닫고는 슬슬 용건을 꺼내놓기로 했다.
"다소 간의 도움을 주신다면 제가 마그라스 님을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뭐지요?"
베니엘은 미리 생각해 놨던 품목을 꺼냈다.
"일꾼 골렘은 좀 빌려주시지요."
일꾼 골렘이라 하면 이쪽 세계의 중장비 같은 존재였다. 키는 3미터가 넘고 엄청난 힘을 가졌다. 또한 팔에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공구를 부착할 수 있으니 그 용도가 무궁무진하다.
다만, 대단히 비싼 물건이란 게 문제. 나름대로 마도공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섀도우 위자드는 이번 발굴을 위해 일꾼 골렘을 다섯 개나 가져와 땅을 헤집고 있었다.
"두 개만 빌려주시면 마그라스 님께선 크게 만족하실 겁니다."
이전에 베니엘은 마그라스에게 일이 잘 되면 그융크의 노동력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그 탐욕스러운 드래곤과의 약속이 쉽게 이뤄지긴 어려운 법. 아마 일이 잘 끝나도 꽤나 짜증스러운 협상과 기싸움이 이어질 터였다. 그래서 가능한 독자적인 발굴 수단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쏜은 민감하게 되물어왔다.
"일꾼을 말입니까? 왜지요?"
애초에 고대의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아카드의 지도를 찾으러 여기 온 섀도우 위자드다.
다른 자들이 땅을 헤집는다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엘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저희야 마법사님들처럼 이 도시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건 아닙니다. 섀도우 위자드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단언하자면 저희가 그 경쟁 상대가 되진 않을 겁니다."
해명을 했지만 쏜의 표정은 쉽게 풀릴 줄 몰랐다. 그는 경고하듯 말해왔다.
"적절한 설명이 없다는 마그라스 님과의 관계가 아주 불편해질 것 같군요."
살벌한 얘기였다. 아주 불편해진다는 건, 마그라스가 발작하든 말든 당장 베니엘과 일당을 다 처죽이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다행히 베니엘에겐 미리 준비한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있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동맹 후에 저희 쪽이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간단합니다. 마법 지팡이를 훔쳐내 그융크가 섀도우 위자드를 적대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당연합니다. 그게 이쪽에서 바라는 바입니다."
"네, 그걸 위해서 일꾼 골렘을 빌려달라는 겁니다."
베니엘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현재 그융크는 자신은 전혀 알 수 없는(?) 모종의 습격으로 인해 경계심이 잔뜩 올라간 상태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지팡이를 훔치러 갈 수 없다는 것.
"하니, 하수도에서 그융크 신전의 지하로 뚫고 들어가려 합니다. 마그라스 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전에는 넓은 지하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꾼 골렘의 노동력이면 반드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놈들은 아래쪽에서의 침투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요."
그게 사실이라면 괜찮은 작전이었다. 쏜은 침음성을 흘렸다.
"크흠...."
괜찮은 계획 같은데 뭔가 찝찝한 이 예감은 뭘까? 쏜은 고민스러웠다. 이를 아는 듯 베니엘은 그를 채근했다.
"쏜 님, 제 쪽에서 지팡이를 처리해야 만사가 풀릴 것입니다. 기왕이면 서두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 제안에는 속셈이 있다. 애초에 베니엘이 노리는 드워프 왕의 황금팔이 그융크 신전의 지하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신전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일부는 방향을 살짝 틀어 황금팔 발굴에 투입한다.'
아마 이 계획은 높은 확률로 성공할 터였다. 왜냐하면 쏜이 아무리 현명해도 황금팔이란 유물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애초에 섀도우 위자드가 그것 때문에 도시에 온 것도 아니고.
베니엘은 자신만만했다.
'일단 황금팔만 확보하면 나도 이 세력 구도에서 더는 열 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확보한 뒤니, 이후에는 보너스 게임 같은 꿀잼 이벤트가 되는 것이다.
베니엘에겐 벌써 혼돈의 도가니탕을 만들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쏜도 그렇지만, 베니엘 역시 상대를 이용해 먹을 생각만 가득했다.
'자신이 이기고 있다고 여기겠지? 오만한 마법사의 사고방식이 다 그렇지.'
참으로 비슷한 놈들끼리 흑요석 거울을 바라보며 궁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약속 드리겠습니다. 일꾼 골렘을 이용해 다른 구역으로 파고들지 않겠습니다. 제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섀도우 위자드의 실력이면 골렘의 이동 경로 정도는 항시 파악할 수 있겠지요?"
"물론이지요. 어리석은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거참 다행입니다. 이쪽의 결백과 신의를 증명할 수 있다니."
볼일은 신전 근처에 있다. 다른 구역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물론 방향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핑계야 만들면 그만이다.
결국 쏜은 섀도우 위자드가 겪고 있는 현재의 어려움을 고려해 베니엘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지요. 마그라스의 사절인 사므엘."
"이야, 일이 잘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쏜 님."
쏜은 속으로 이제야 이 염병할 동맹이 체결됐다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흑요석 거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다크 엘프 놈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박살 내 버릴 정도로 얄밉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양쪽의 위험한 동맹이 시작됐다.
이것은 위태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최고의 성공이 이런 좁은 길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걸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잘 알았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베니엘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
얼마 뒤 하수도로 거대한 일꾼 골렘 두 기가 내려왔다.
원정대는 그 골렘의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워어어어! 덩치 좀 봐!"
"전투용 아닌가?"
"아니다. 손에 붙은 공구를 보라고. 작업용이 맞아."
"저걸로 내리찍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일꾼 골렘은 급할 때는 싸움에 투입할 수 있었으니까.
전투용이 아니라 둔하고 느린 게 단점이긴 해도 한 방치면 어지간한 놈들은 그냥 바로 저승행이었다.
"한데 생각보다 정숙하군?"
"그래, 예상보다 시끄럽지 않아. 의외야."
그도 그럴 게, 일꾼 골렘은 마력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치 디젤엔진처럼 소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면 전기차랑 비슷하다고 할까?
그 덕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땅을 파고 들어가기 적절했다.
"자, 일부는 전진 기지를 지킨다. 나머지는 날 따라 굴착 작업을 진행한다."
베니엘의 명령과 함께 일꾼 골렘의 드릴이 경쾌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54화
황금팔 발굴 (2)
***
확실히 일꾼 골렘은 쓸모 있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드릴로 앞의 흙과 암반을 뚫어가는데, 그 효율이 대단했다.
지켜보던 베니엘은 연신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광부 수십을 고용해도 며칠은 거릴 텐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놈들의 힘 역시 대단해서 부서진 거대한 바윗덩이를 무슨 돌멩이처럼 주워 옮겼다.
지켜보던 용병들도 혀를 내둘렀다.
"저게 적이 아니라 다행이구만. 저 힘에는 스티지안 오우거들도 못 당할 걸세."
"심지어 칼도 안 들어가고 화살도 튕겨낼 테니, 저걸 무슨 수로 이기나? 치안관님 아니면 아무도 상대 못 할걸?"
심지어 일꾼 골렘은 작업을 위해 다양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다. 굴착 과정에서 나는 먼지를 막기 위해 어깨 부분에 장착된 스프레이 노즐을 통해 물을 줄창 뿌려대기까지 했다.
다행히 근처에 하수도가 있어 물은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었다. 악취 나는 똥물이란 게 문제였지만.
촤아아아아!
발밑으로 토사와 섞인 하수도 물이 개천을 이뤄 흘러내렸다.
이후 굴착은 이틀간 더 이어졌다. 좀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정숙하게 하느라 그리 걸렸다.
콰아아앙!
어느 순간 굴의 앞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큰 구멍이 났는데 거기로부터 새로운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하수도의 물과 분진의 냄새로 골머리 썩던 일행은 절로 코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베니엘 역시 반색했다.
"도착했군!"
밖으로 나가보니 그곳은 분명 신전 아래에 위치한 천연 동굴 지대였다. 그융크들은 자기들의 거처 밑에 이런 지형이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이곳은 옛 신전에 거주하던 자들이 비상용 탈출로로 썼던 길로 보였다.
"축축하고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군요. 찍찍."
퀵포우 녀석은 주변을 둘러보며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확실히 일대가 지하치고도 음침하긴 하다. 심지어 주변에는 흔한 야광 버섯도 없어 암흑천지였다.
"확실히 좋은 느낌은 아니지. 그렇다고 쫄 거 없어. 애들 시켜 불을 밝히라고."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곧 퀵포우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명령하자 용병들이 하나둘 랜턴과 횃불을 켰다. 이 정도 암흑 속에선 지하에 적응한 종족들이라도 빛이 필요했다.
금세 주변이 밝아졌다.
동굴은 아주 오래된 장소였다. 뭐랄까 이곳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주둥이 같게도 느껴졌다.
시커먼 어둠만이 가득한 데다가 천장 위의 종유석과 바닥의 석순이 빼곡한 게 마치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 같았기 때문이다.
베니엘은 모두를 이끌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여기서부터 갈림길이군.'
이 자연 동굴 지대의 아래쪽으로 향하면 황금팔이 있는 구역으로 갈 수 있다. 위로 향하면 그융크의 신전이고.
'마음 같아선 황금팔부터 찾으러 가고 싶지만….'
하지만 제 맘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쏜은 일꾼 골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황금팔이 있는 구역이 여기서 멀진 않으나 명백히 신전과는 떨어져 있는 곳.
당연히 통신으로 제지하고 나설 것이다.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했다.
'물론 계책은 있다.'
다음 포석을 위해선 일단 그융크 신전으로 가서 소기의 성과를 이뤄야 한다.
"모두 이동한다."
베니엘은 일행을 동굴의 위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적당한 지형을 발견하고는 명령했다.
"여기 진지를 구축한다. 만약 적이 몰려오면 단번에 격퇴할 수 있을 정도로 신경 써야 한다."
베니엘은 단순히 진지 구축을 넘어 몇 가지를 더 지시했다. 그건 꽤나 번거로운 일거리였으나 이번 일의 성패가 달려 있는지라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였다.
"이거 용병이 아니라 일꾼으로 온 거 같군."
"아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목숨이 위태롭지도 않고."
"약속받은 보상도 상당하잖아. 닥치고 일해 좀."
용병들이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베니엘은 무시했다. 별로 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니까.
"퀵포우와 올리비에는 여기 남아서 진지를 지키고 있어. 삼 형제는 나와 함께 간다."
홉고블린 삼 형제는 전투도 잘하지만 이런저런 재주가 많아서 반드시 유용할 터. 특히 셋째는 탁월한 도둑이라 문을 따고 함정을 찾는 일의 명수였다.
"알겠습니다. 케륵!"
첫째 두크가 대표로 답해왔다.
베니엘은 그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위쪽으로 향했다. 주변은 자연 동굴이지만 인위적으로 길을 조성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시 과거의 탈출로가 확실한 듯했다.
"너희 셋 중에 막내가 독을 잘 쓰지?"
"네, 그렇습죠. 야, 잔크."
첫째의 손짓에 잔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독 중에 목욕 중인 사람을 중독시킬 만한 게 있나? 몰래 놈의 욕조 안에 풀어두는 거지."
"욕조라…."
"어느 정도 크기입니까?"
"폭이 2~3미터 정도 된다."
잔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 정도면 안에 찬 물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케켁! 독을 풀어서 목욕 중인 상대를 죽이는 건 어렵습니다. 지금 그 정도의 맹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술이나 음료 같은데 타는 거라면 간단합니다만."
"음, 죽이는 게 아니라면?"
"마비 정도라면 가능합니다. 완전히 굳어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는 아니겠지만요.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할 겁니다.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케륵!"
"시간은 아마 충분할 거야."
"그렇다면 해볼 만하군요."
"좋아. 그 독을 준비해 놔. 쓸 일이 있을 테니까."
협의를 마친 베니엘은 앞장서 걸어갔다. 홉고블린 삼 형제의 첫째와 둘째는 묵묵히 따라왔지만 수다스러운 셋째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그융크의 신전으로 통합니까? 케륵.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는데."
베니엘은 가타부타할 것 없이 동굴의 한쪽을 가리켰다.
"이걸 봐라."
그쪽 벽면에는 이끼와 어떤 식물의 뿌리로 보이는 게 잔뜩 덮여 있었다.
"그융크가 머무는 건물은 습도 유지를 위해 안을 이끼로 뒤덮지. 그러다 보니 이렇게 바깥쪽까지 이끼가 튀어나오곤 한다. 여길 뜯어."
"케륵! 그렇군요!"
홉고블린 삼 형제는 이끼에 달라붙어 그걸 열심히 뜯어냈다. 그러자 낡은 벽돌을 쌓아 올린 벽이 나타났다. 인공적인 구조물이 보인다는 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소리였다.
베니엘은 그걸 걷어찼다.
와르르르.
먼지가 일며 위태롭던 벽이 무너지며 안쪽으로 통로가 나타났다.
"원래 여긴 입구가 아니지만 시설이 낡아서 간단히 뚫고 들어갈 수 있지."
"케륵, 그렇군요! 치안관님의 안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안쪽은 과연 이끼로 가득한 데다가 덥고 습했다. 다만 이쪽은 그융크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아니었다. 아마 발길이 오래전에 끊긴 신전의 지하실 구역으로 보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걸었고, 가끔 정체 모를 찐득찐득한 진액 덩이를 밟고는 인상을 찌푸리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 뒤 그들은 이끼로 사방이 가득 찬 신전의 복도에 들어섰다. 이미 과거 이름 모를 신을 섬겼던 신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융크들의 편의에 맞춰 개조돼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치안관님."
"통로 옆의 배수로를 봐라. 이 녹색 물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간다."
과연 복도 옆에는 작은 배수로가 있어 오염된 녹색의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쉿, 앞에 그융크들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무언가 기괴한 음정의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케륵?"
첫째 두크가 그렇게 물으면서 뭔가 바람총 같은 걸 꺼내 들었다. 그러자 둘째와 셋째도 같은 걸 꺼냈다. 저 바람총으로 마비 효과가 있는 침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베니엘은 그거면 될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조심스럽게 노래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끔찍한 광경을 마주하게 됐다.
그융크 세 마리가 사람의 뼈와 살을 잘라서 만든 기괴한 여신의 신상에 절을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문제는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 희생자들이었다.
아마 최근에 잡혀 온 섀도우 위자드쪽의 마법사 같은데, 부패한 녹색 액체 속에서 익사한 채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죽은 그자의 얼굴을 보니 극렬한 고통을 겪은 듯 일그러진 상태였다.
그 앞에서 그융크들은 그들의 제사를 지내느라 열심이었다.
"가각! 기가각! 구가각!"
"그그각! 차르푸! 참!"
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이미 죽은 마법사의 시체를 녹색 물 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익사자를 조롱하며 다시 죽이는 것 같기도 했고, 그들의 기괴한 방법대로 물로 세례를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다른 종족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근처에 죽어 있는 이는 그 마법사만이 아니었다. 언제 잡아 온 건지 모르겠지만, 도시 밖에 사는 원시 종족들의 시체도 사방에 가득했다.
"역겹군. 케르르."
그건 홉고블린조차 인상을 찌푸릴 모습이었다.
베니엘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홉고블린 삼 형제가 동시에 독침을 발사했다.
푹! 푹! 푹!
몸에 침이 박히자 화들짝 놀란 그들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베니엘과 홉고블린 삼 형제를 발견하고는 대경실색해서 근처에 있던 무기를 들려고 했다.
휘청!
하지만 독기가 순식간에 들어 그들은 마치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엎어지는 것이었다.
"그왁! 그와아아!"
그융크들은 악을 쓰며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이내 그들은 셋 다 늘씬하게 뻗었다. 홉고블린들은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 놈들의 목을 따버렸다.
방금 전까지 다른 종족의 피 얼룩으로 흥건했던 제단 아래로 그들의 녹색의 질척한 피가 흘러내렸다.
"잘했다."
그렇게 셋을 해치운 이후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로 배관이 이어집니다. 치안관님."
"맞아. 잘 찾아왔다. 여기가 주술사의 방이야. 잠시 기다려라."
마력을 퍼뜨려 살피니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건물 전체를 스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감각이 민감한 이들에게 들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을 딸 수 있겠나?"
베니엘이 잠겨 있는 문을 가리키며 묻자 수준 높은 도둑놈인 막내 잔크가 끄덕였다.
"고블린 팔을 꺾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지요."
홉고블린들이 친족인 고블린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만한 표현이었다.
잔크는 도둑질 도구를 꺼내더니 금세 능숙하게 문을 열었다.
철컥!
안으로 들어가자 과연 돌로 된 커다란 욕조가 보였다. 욕조에는 녹색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가 그융크 주술사가 기도를 올리며, 피부의 진액을 보충하기 위해 쉬는 장소지."
"썩 좋아 보이는 곳은 아니군요."
이끼와 질척이는 슬라임, 썩은 물, 숨 막히는 습기와 더위에 홉고블린들은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그융크에게 안락한 곳은 다른 이들에겐 버거운 장소였다.
"잔말 말고 욕조에 말한 독을 풀어. 이후에 적당한 곳에 숨어서 기다린다."
"쓰읍…. 이 정도면 우리 형제가 가진 걸 다 풀어야겠군요. 치안관님, 이건 꽤나 비싸기 때문에… 케르르."
"이번 일 끝나면 크게 챙겨줄 테니가 시키는 대로나 해."
"알겠습니다요. 케케켁."
홉고블린 삼 형제는 무슨 가루약 같은 걸 욕조 물에 집어넣고는 근처에 있던 막대기 같은 걸 가져와 휘저었다.
분명 저것도 주술사의 귀한 지팡이일 텐데 무슨 수프를 휘젓는 국자처럼 쓰고 있었다.
"냄새가 나서 놈이 알아챌 확률은 없나?"
"이걸 보십쇼. 안 그래도 썩은 물인데 독이 좀 들어갔다고 들키겠습니까? 케켁."
"하긴, 그렇군…."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여기 들어가라 명령하셨으면 바로 하극상을 일으켰을 겁니다."
이 더럽고 정체 모를 물속은 그융크가 아니라면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물에서 익사했으니 붙잡힌 섀도우 위자드의 마법사의 명복을 빌 따름이었다.
"다 됐습니다. 효과가 하루는 갈 겁니다. 케켁!"
"이제 놈이 올 때까지 숨자."
다행히 방 안에는 숨을 곳이 많았다.
기괴한 여신상이나, 돌로 만든 제단 뒤도 괜찮았다. 방 한쪽 구석에 울창하게 자라 있는 넝쿨 쪽도 두 명은 몸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은 서로 나뉘어 방 안에 잠복했다.
그리고 얼마 뒤.
베니엘이 작게 외쳤다.
"쉿! 온다."
저 멀리서 이 방을 향해 오는 강력한 존재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55화
황금팔 발굴 (3)
딱 봐도 그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여유만만하던 홉고블린 삼 형제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베니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묵직한 게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강하구나…. 주술사 놈.'
분명 정면으로는 쉽게 승부를 결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적의 의표를 찌르는 일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당하는 입장에선 비열하다 하겠으나 베니엘에게 그건 자신보다 강한 자를 쓰러뜨리는 전사의 지혜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그융크 주술사 그르파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데 뭐라도 느낀 걸까? 그르파는 익숙한 자신의 방을 괜히 이리저리 살펴본다.
한데 그때 뒤따라온 호위 촘파롬파가 뭐라, 뭐라 보고를 해오자 그 위화감을 금방 잊고 말았다.
베니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촘파롬파가 물러가자 주술사 그르파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풀어버리고는 마법 지팡이만 들고 돌 욕조로 향했다.
'저거로군.'
베니엘의 눈동자가 시커먼 마법 지팡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게 드래곤 마그라스의 지배를 막아내는 물건이었다.
"으룸…, 으르파. 음파르."
주술사는 알 수 없는 그융크 언어를 중얼거리며 돌 욕조에 몸을 뉘었다.
베니엘은 희희낙락했다.
'됐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만 풀리겠나?
모든 걸 아는 것 같은 베니엘조차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주술사 그르파는 자신의 방에 지네를 여러 마리 기른다는 점이었다.
용도는 간식이었다.
키우기도 쉬웠다. 이 방은 축축하고 습해 각종 벌레가 들끓었기에 냅둬도 지네는 잘 먹고 살았다. 그래서 가끔 눈에 띌 때 간식 먹듯 혀를 내밀어 잡아먹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지네는 그 특성상 좁고 어두운 곳에 숨는데 하필 그게 삼 형제 중 막내였던 잔크가 몸을 감춘 덩굴이었던 것. 지네들은 갑자기 나타난 잔크의 살덩이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끄악!"
새된 비명과 함께 잔크가 펄쩍 뛰어올랐다. 지네에게 물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은 당해본 자들만 아는 법. 그는 참으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베니엘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펄쩍 뛴 잔크의 허벅지와 엉덩이 등에 커다란 지네가 잔뜩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지네들은 지구의 갈라파고스 왕지네가 생각나게 하는 거대한 크기였다.
그 찰나의 순간 베니엘은 탄식했다.
'억까도 이런 억까가 있나!'
게임에는 그르파가 지네를 키우는 건 나오지 않는다. 베니엘은 이런 현실 세계의 디테일에 당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느긋하게 누워 있던 그융크 주술사 그르파가 반응했다.
"카마드! 카하!"
이미 그 순간 삼 형제 중 첫째와 둘째가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대단히 노련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한가락 하는 강자. 앞으로 내민 주술사의 지팡이에서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첫째와 둘째가 눈을 부여잡고는 쓰러지는 것이었다.
"케에에엑!"
"케르륵! 끄아아!"
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무래도 안구가 타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첫째 두크와 둘째 기크를 상대하느라 주술사가 베니엘을 놓친 것이었다. 그 틈에 베니엘은 섬전처럼 나아가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요란한 마력의 불꽃이 튀었다. 주술사의 몸에 항시 둘러져 있던 주술적 방어막이 발동한 것이다.
본래라면 그 방어막을 뚫진 못했을 것이다. 워낙 급해서 펜테즈멀 블레이드를 일으킬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장비빨인 법.
5등급 마법검 프로스트바이트의 힘이 알아서 그 방어 주술을 파괴해 버렸다.
파직! 파지지직!
순식간에 어깨 부분이 얼어붙자 주술사 그르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무슨 간악한!"
하지만 지하 공용어로 외치는 놈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또 한 번 정체불명의 주술을 부려 베니엘의 손에서 프로스트바이트를 날려버린 것이다.
번쩍!
충격파가 일더니 손아귀에 잡고 있던 프로스트바이트가 날아가 천장에 박혔다.
투캉!
베니엘 같은 성취가 빼어난 검객의 손에서 검을 놓치게 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 주술사는 간단히 해낸 것이다.
'역시 강하군!'
하지만 베니엘은 주춤거리긴커녕 그대로 달려들어 있는 힘껏 주술사의 머리를 돌 욕조의 물속에 박아버렸다.
"크아압!"
그나마 주술사가 그융크족 중에서도 덩치가 작은 편이라 가능했다. 갑자기 녹색 물에 처박힌 주술사는 그걸 들이마시게 됐다.
"그웨웩! 그웩!"
하지만 오래 짓누를 순 없었다. 그융크족의 피부를 덮고 있는, 여신의 축복인 진액 때문에 손이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바로 고개를 쳐든 주술사는 대노해서 소리쳤다.
"간악한 귀쟁이 놈!"
주술사는 이어서 바로 강력한 저주술을 발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휘청였다.
"그윽?"
마치 천지가 뒤집힌 것처럼 사방이 흔들리더니 몸을 좀처럼 가눌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가 발동한 저주술을 베니엘의 얼굴 옆으로 빗나갔다.
스팟! 콰아앙!
보라색 불빛이 환하게 튀었다. 저주술의 적중한 벽면이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걸 보니 얼마나 강력한 기술인지 알 만했다.
삼 형제의 막내인 잔크가 희색 완연하게 외쳤다.
"마비독이 먹힌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서 바로 효과가 나왔습니다! 케르르르!"
베니엘이 그를 얼굴부터 욕조에 박은 게 주요했던 것이다.
이 틈을 놓칠 수 없었다.
베니엘은 즉각 허리춤의 단검을 빼서 달려들어 주술사 그르파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푸욱!
움찔한 그르파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베니엘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크아압!"
베니엘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살을 갈라버리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푸슈슈우우우!
베니엘은 그대로 그르파의 지팡이를 빼앗아서는 그걸로 놈의 이마를 강타했다.
퍼억!
주술사 그라프는 그대로 돌 욕조 안에 쓰러져서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허억! 허억! 젠장! 빡세군!"
간신히 이겼다. 베니엘은 다시 저주가 작렬한 벽을 보며 하마터면 죽거나 불구가 됐을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데 그때 밖에서 우다다, 하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사제!"
바로 그르파의 호위인 촘파롬파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베니엘은 놀랄 정도의 점프력으로 뛰어오른 상태. 그는 천장의 검을 붙잡아 뽑고는 그대로 촘파롬파를 향해 내리그었다.
부욱!
예리한 칼날이 두개골을 가르더니 명치를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급기야 촘파롬파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초록색 피가 사방으로 쏟아지듯 튀었다.
촤아아아아!
베니엘은 얼굴에 그걸 뒤집어쓰고는 숨을 헐떡였다.
"이런 짓을 더 했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어…. 하악! 하아…!"
두 놈 다 강자였는데 기습의 묘리를 잘 살려 어찌 쓰러뜨렸다. 하지만 승리를 기뻐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소란이 인 탓인지 저 멀리서부터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눈이 타버린 홉고블린 삼 형제의 첫째와 둘째가 고통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케으으윽!"
"케륵! 케켁!"
베니엘은 눈이 멀쩡한 막내가 앞에 서고, 서로의 어깨를 붙잡은 채 걸으라고 명령했다.
"어서! 서둘러! 빠져나가지 못하면 아까 본 익사한 마법사 꼴이 될 거라고!"
넷은 조급하게 주술사의 방을 벗어났다. 당장 떠나야 했기에 뭔가 뒤져볼 틈도 없었다. 그저 주술사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던 마법 지팡이를 빼앗은 게 다다.
그들은 있는 힘껏 달렸다.
홀고블린 삼 형제는 우당탕 넘어지고 난리였지만, 이대로 뒤처지면 끝장이란 걸 알기에 까지고 다치는 건 상관 안 했다.
첫째 두크는 이런 와중에 사과까지 해왔다.
"케르륵!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해서! 지팡이 하나로 괜찮겠습니까?"
"실수는 무슨! 네 덕에 이길 수 있었는데. 그리고 하나면 충분하다."
애초에 모든 지팡이를 회수하긴 어려웠다. 그렇게까지 무리할 생각도 없었고.
한 개만 빼돌려도 베니엘의 뜻대로 일을 진행하기 충분했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그융크가 떼거리로 나타났다. 놈들은 베니엘과 삼 형제를 발견하고는 고성을 질러댔다.
"캄자크! 카카키! 쿠자드!"
"카르르른 훅카르카!"
뭐라 외치는데 딱히 그들 언어를 몰라도 알아들을 만했다. 거기 서라, 뼈와 살을 발라버리겠다, 뭐 그런 얘기일 터.
"먼저 형들을 이끌고 가라! 잔크!"
"치안관님! 안 됩니다!"
"바로 따라갈 거니까 걱정 말고!"
베니엘은 홉고블린 삼 형제가 어깨 옆으로 지나가자마자 펜데즈멀 블레이드를 규격보다 크게 일으켰다.
전에 검기를 쏘아낼 수 없어 야매로 만들었던 기술을 쓰려는 것이다. 이 결함이 많은 전투 기술은 여전히 써먹을 만했다.
심지어 베니엘은 이것에 '불꽃 뿌리기'란 기술명까지 붙여줬다.
화르르르륵!
몇 미터 앞으로 펜터즈멀 블레이드의 불꽃이 크게 뿌려졌다. 그러자 쫓아오던 그융크 전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오래 유지는 되지 않을 터. 베니엘은 다시 몸을 돌려서 달렸다. 그렇게 결국 동굴 지대까지 빠져나갔다.
앞에는 홉고블린 삼 형제가 기차놀이를 하듯 허둥대며 나아가고 있었고, 뒤에는 벽에 난 구멍에서 그융크 전사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베니엘은 소리쳤다.
"지금이다! 쏴라"
그와 함께 어둠 속에서 석궁의 볼트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눈깔이 뒤집혀 쫓아오던 그융크족 전사들을 덮쳤다.
푹! 푹! 푸욱!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융크족 전사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와아악! 그왁! 꽉!"
"꽈아아! 그왁꽉!"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미 만들어준 진지에서 수많은 불이 피어올랐다.
횃불과 랜턴 백여 개가 일제히 빛을 발한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훤해지자 그융크족 전사들은 크게 당혹했다. 마치 눈앞에 백 명이 넘는 적들이 있다는 판단을 하기 충분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빛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이것들은 베니엘이 출발하기 전에 지시한 허장성세였지만 말이다. 실제로 진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자들은 총 16명에 불과했다.
그때 마치 척탄병처럼 덩치가 큰 올리비에가 묵직한 무언가를 앞으로 투포환처럼 던졌다. 그건 귀중하고 비싼 마법 폭탄이었다.
데구르르르!
당황하던 그융크족 사이로 굴러간 그것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한 그융크의 상반신이 하반신과 이별해 허공으로 날아갔다. 주변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무슨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튕겨나갔다.
이어서 마법 폭탄이 몇 발 더 터지자 그융크들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그왁! 그왁! 그왁!"
"게게겍! 그왁!"
놈들은 완전히 무너졌고 급기야 다친 동료들까지 남겨두고는 빠져나왔던 구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완승이었다.
***
그융크 지도부는 대경실색했다.
남은 두 주술사는 동료의 죽음에 축축하게 젖은 피부를 파르르 떨어댔다.
"뭐라! 그르파가 죽었다고? 여신이시여!"
"심지어 그르파를 호위하던 명예로운 전사 촘파롬파가 반으로 갈라졌어? 그왁! 그왁!"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존재조차 몰랐던 신전 밑의 자연 동굴 쪽에 족히 백이 넘는 적병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
간신히 도망쳤던 그융크 십인대장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보고했다.
"완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군 많이 죽었다! 폭발! 다쳤다! 전사들!"
주술사를 제외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그융크족이었기에 이어진 다른 이의 보고도 산발적이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주술사들은 동족의 그런 난잡한 보고를 취합해 정보를 정리하는 데 익숙했다. 남은 주술사 둘은 신중히 논의를 이어갔다.
"적의 진지가 제대로 구축돼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걸 뚫기는 어렵다."
"동의한다. 게다가 이미 지팡이를 하나 빼앗긴 상태. 나머지 두 개는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한다."
결국 둘은 제대로 자리 잡은 적을 밀어내는 게 불가능에 가깝고, 승리해도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하면 우리도 입구 쪽을 막고 진지를 구축한다.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알겠다! 남은 지팡이는 절대 잃을 수 없다! 하나를 되찾기보단 두 개를 지킨다!"
그 결과 신전의 지하에서는 베니엘의 세력과 그융크족이 서로 거릴 둔 채 대치하는 묘한 형국이 지속됐다.
***
"...아무튼, 이렇게 된 겁니다."
베니엘은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통신구인 흑요석 거울을 통해 쏜에게 알려줬다.
"훌륭하군요. 하지만 어중간합니다."
쏜은 다소 불만을 드러냈다. 세 개 중 하나만 회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진 않았는데 애초에 처음부터 세 개를 다 되찾을 거라 여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 수라장을 뚫고 한 개나마 빼 온 게 용했다.
게다가 쏜은 그융크족이 그날 이후 소극적으로 변해 싸움에는 일절 나서지 않고 방어 위주로 작전을 바꾼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 덕에 그융크들과 함께 우리를 압박하던 도굴꾼 무리가 난처해졌지요. 후후후.'
이때를 노리고 도굴꾼 무리에게 대대적인 반격도 해봄 직하다.
베니엘 역시 상대가 이 결과에 나름대로 만족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설명이 끝나자마자 제안했다.
"일단 기존의 통로가 막혔습니다. 그융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대비하고 있으니 뚫고 들어가긴 불가능합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그래서 우회로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길은 찾는 자의 것입니다. 신전의 다른 부분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흐음...."
쏜은 잠시 생각하더니 일꾼 골렘을 우회로를 찾는 데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왜냐하면 베니엘의 무리가 계속 그융크를 압박할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뭐, 괜찮겠지요. 열심히 우회로를 찾아보십시오. 후후."
"알겠습니다. 특이사항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지요."
연락을 끊은 베니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회로란 핑계를 획득했다.
우회란 멀리 돌아간다는 뜻.
즉, 그융크 신전이 아니라 황금팔이 잠든 대도의 금고를 향해 파고들어가도 쏜이 의심하지 않을 거란 소리였다.
'됐어. 이제 본격적인 발굴 시작이다.'
56화
황금팔 발굴 (4)
***
폐허 도시는 한동안 세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최소한 겉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베니엘의 방문 이후 점점 모든 게 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더니 이제는 걷잡을 수 없게 변해갔다.
일단 그융크족이 방어태세에 들어가 신전에 웅크리자 섀도우 위자드는 이 틈을 이용해 도굴꾼 무리를 손봐주기로 했다.
"그 도굴꾼 무리는 언제나 눈엣가시였지요. 이번 기회에 큰 타격을 주는 게 좋겠군요. 후후."
쏜은 휘하의 마법사와 용병 부대에 전투태세를 준비하게 했다.
도굴꾼 무리 역시 이를 알아채고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그 빌어먹을 쏜이 드디어 돌아버린 모양이더군!"
"이대로 물러날 수 없지. 사실 그간 대치가 너무 길었어. 이번에 승부를 결하는 게 좋겠군!"
"옳소이다!"
단일 조직인 섀도우 위자드와 다르게 도굴꾼 무리는 여러 조직의 연합체다.
암살자 길드, 도적 길드, 고고학자, 밀수꾼, 용병, 드워프 기술자, 심지어 점쟁이까지….
모두 고대 유적이나 폐허의 깊은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재화와 유물에 매료된 이들이었다.
이런 체계 때문에 매번 의사 결정이 느린 문제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만장일치로 섀도우 위자드와의 전투를 결의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소!"
"맞다! 우리가 그간 여기 들인 공이 얼마인데!"
"각자 담당 구역을 정합시다! 그융크들이 이탈한 이상 격전이 예상되오. 이번에 다 끝내야 하오이다!"
그야말로 전투의 열기가 뜨거웠다.
한데 이 모든 분노와 분쟁을 터뜨린 주인공인 베니엘은 지하 깊은 곳에서 황금팔을 찾는데 삼매경이었다.
"이쪽이 아닌 것 같다! 이동한다! 새로운 지점을 찾아야겠군."
베니엘은 도시 위에서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에겐 황금팔과 막대한 양의 보물만이 중요했다.
쿵쿵!
일꾼 골렘들이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이동한다. 그 뒤로 흙투성이로 곡괭이와 삽을 든 용병들이 뒤따랐다. 일꾼 골렘이 있다지만 자질한 일거리는 그들이 맡아야 했다.
"세상에… 처음에 왜 이렇게나 곡괭이를 많이 챙기나 했다."
"칼을 휘두르러 온 줄 알았는데 삽질을 하러 왔었군."
투덜대는 소리가 나오곤 있었지만 다들 그래도 기운찼다. 보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현재 베니엘과 일행을 방해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뭣보다 쏜이 갑자기 나타나진 않을 테니까.'
지저에서 순간 이동이란 짧은 거리에서만, 그것도 자신이 방문한 장소만 가능했다.
쏜이 일전에 하수도에 뿅, 하고 나타났던 건 이전에 부하들과 그곳에 뭐가 있는지 탐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베니엘이 있는 곳은 쏜이 와보지 못한 곳. 그러니 일꾼 골렘으로 위치를 파악해도 갑자기 들이닥치진 못한다.
이런 사정 덕에 베니엘은 맘대로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기다! 흐음! 예감이 괜찮은걸?"
베니엘은 다시 파고들 지점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헛물을 켰다. 하지만 그가 무식하고 대책 없이 아무 곳이나 들쑤신 건 아니다.
그는 게임 지식을 바탕으로, 다크 엘프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을 동원해 동굴의 원래 환경과 미묘하게 다른 벽면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르르르르!
일꾼 골렘의 드릴이 다시 열심히 돌아간다. 그 주위로 용병들이 달라붙어 열심히 삽질을 해댔다.
확실히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베니엘은 마력을 퍼뜨려 해당 부분을 스캔해 보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다! 틀림없어!"
근처에서 작업 지시를 내리고 있던 행보관 퀵포우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냥 아직 벽을 뚫고 있을 뿐인뎁쇼? 찌익?"
"벽의 갈라진 틈새로 마력이 새어 나오는 게 감지됐다. 안에 마법 기구 같은 게 있단 소리지."
베니엘의 확언에 작업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대략 두 시간 뒤, 마침내 새로운 구역을 발견하게 됐다.
우르르르!
쿠웅!
동굴의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 인공적인 구조물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막대한 규모의 보물이 쌓여 있었다.
긴 세월 간 유지되는 마법적인 조명 아래 온갖 재화들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게 마치 드래곤의 둥지라도 발견한 듯했다.
다들 까무러치듯 놀랐다.
"세상에! 이건!"
"금덩이다! 보물이야!"
"이 정도면 성이라도 사겠군!"
"성만이 아니야. 작위도 사겠어."
분명 여긴 그 전설적인 노움 대도(大盜) 마자드의 보물 창고가 틀림없었다.
베니엘은 해죽 웃었다.
"결국 찾았군. 크크큭."
대도 마자드는 수많은 보물을 훔쳤는데, 그것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저 곳곳에 이런 보물 창고를 만들었다고 한다.
베니엘은 그중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자, 보자."
베니엘은 선반과 주변 상자, 바닥에 쌓여 있는 보물을 무시하고는 안으로 향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황금팔이었으니까.
뒤에선 신경이 날카로워진 퀵포우가 용병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제자리에서 대기해! 찌익―! 만약 몰래 보물을 훔치는 새끼가 나오면 바로 대가리를 으깨주겠다!"
이 정도 보물이면 고용주고 뭐고 눈이 돌아갈 만했다. 하나 힘 앞에선 탐욕도 수그러드는 법.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베니엘을 제외하더라도 홉고블린 삼 형제와 올리비에만으로도 용병들은 어쩌질 못했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가만히 있겠습니다요."
"그저 모험이 잘 끝나고 성과금을 좀 두둑하게 챙겨주시면야...."
주변을 뒤지며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베니엘은 소리쳤다.
"안 그래도 넉넉히 챙겨줄 생각이었다. 일단 들어와서 상자부터 챙겨.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건 가죽 포대에 담고."
아무래도 좀 옮기면서 찾아야 황금팔이 보일 것 같았다.
용병들은 희희낙락해서는 우르르 몰려와서는 보물을 옮겼다.
"이거 대박이군! 여기서 부스러기만 받아도 팔자를 고치겠어."
"암, 이 정도니 우리 몫도 제법 만만치 않을 걸세."
"세상에 여길 어떻게 찾은 거지?"
베니엘은 슬쩍 용병들을 살펴봤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작은 금제 장신구 같은 걸 몰래 챙겨 넣고 있었다.
눈썰미가 빼어난 퀵포우가 그걸 보더니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주인님, 찌익."
퀵포우 얼른 고자질하러 달려왔지만 베니엘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거 없다. 저놈들은 돌아가는 길에 돌을 매달아서 호수에다 던져버릴 테니까."
"아! 그런 깊은 뜻이! 찌지직!"
녀석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웃어댔다. 그리고는 고약한 표정으로 몰래 금을 훔치는 자들을 모른 척했다.
"서둘러 챙겨라! 찌익!"
사실 베니엘이 저런 도둑질을 방관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이들 중 비교적 충실한 자를 자경대원으로 받을 예정인데, 손버릇이 나쁜 녀석들은 거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호수에 던지기 전에 탈탈 털어서 회수할 테니....'
이 창고에 있는 보물의 가치는 대강 봐도 30만 두크는 넘어 보였다.
엄청난 수확이었다.
베니엘은 평생 이 정도의 재화를 만져본 적도 없었다. 그는 이제 부자였다.
남작가의 적통인 베니엘도 그럴진대 길바닥에 굴러온 용병들은 오죽하겠나? 다들 보물에 홀려 마치 꿈에 취한 듯 몽롱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듯 이 돈으로 무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물이 치워지다 보니, 드디어 베니엘이 원하는 걸 발견했다.
"여기 있군!"
마침내 이번 원정의 목표인 황금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랄까, 황금빛이긴 한데, 금과 청동의 합금 같은 묘한 색이었다. 또한 그 정밀한 구조를 보니 과연 호위대장의 진짜 팔을 대신하기 충분해 보였다.
'아니, 이건 진짜 팔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겠군.'
황금팔을 달 수 있으니 오히려 호재라고 할까? 호위대장은 강화 시술을 받는 셈이었다.
'이걸로 주요 목표는 이뤘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원정에서 확보한 황금팔과 이 막대한 보물을 안전하게 빼돌리는 것이다. 아무리 보물이 많아도 가지고 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
다행히 도시 밖으로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동굴 자체가 과거 신전에서 안배한 탈출로이기 때문이다.
이 길을 통하면 도시 안의 세 세력의 시선을 피해서 내빼는 게 가능했다.
'문제는 마그라스지.'
도시 밖으로 나가도 배를 부르는 와중에 반드시 드래곤 마그라스와 마주치게 될 테니까.
놈은 의뭉스럽다. 지금은 둥지에서 게으름이나 부리고 있는 척하고 있으나 섬에 정박한 배가 얘기도 없이 움직이면 반드시 몰래 따라붙을 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마그라스가 유유히 사라지는 베니엘의 일행 따위는 쫓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모두 보물을 옮기기 편하게 정리해서는 여기에 대기한다."
"주인님께선? 찌익?"
"마그라스를 만나고 오겠다."
"하면 그융크와의 접전을 벌였던 진지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 그곳이 빈 상태입니다. 그융크가 내려오면 여기까지 들이칠지도 모릅니다요. 찌직."
"걱정할 것 없다. 놈들은 완전히 겁먹어서 못 내려온다. 매복이 두려울 테니까."
그융크의 특성상 입구를 틀어막고 어떻게든 남은 거라도 지키려고 악을 쓸 터. 놈들의 난입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
베니엘은 빠르게 길을 되짚어 드래곤 마그라스에게 향했다.
굴착했던 통로를 달려, 하수도를 지나, 마그라스가 지내고 있는 수중 동굴에 닿았다.
늙은 드래곤의 거체가 축축한 동굴에 한껏 늘어져 있었다.
"호수의 신사시여!"
베니엘은 그가 좋아하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러자 마그라스의 기다란 목이 벌떡 위로 솟구쳤다.
"다크 엘프! 크르릉!"
마그라스는 베니엘의 손에 들려 있는 섀도우 위자드의 지팡이를 보더니 눈을 치켜떴다.
"지팡이를 가져왔군!"
"네, 한 개를 회수했습니다."
"어서 내놔라! 이 몸에게! 그냥 던져라!"
베니엘이 지팡이를 던지자 마그라스는 솜씨 좋게 그걸 주둥이로 낚아채 와그작, 거리며 씹어먹었다.
파직! 파지직!
지팡이가 박살 나며 안에 내장된 마력이 스파크처럼 사방으로 튀었고, 그 때문에 드래곤의 주둥이가 반짝이가 묻은 것처럼 빛났다.
"크르르릉! 허기가 좀 가시는군!"
지켜보던 베니엘은 드래곤이란 놈들은 별걸 다 처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저 종족은 그랬다.
물고기나 해초 같은 유기물뿐만 아니라 보석이나 광물 같은 무기물도 먹어치운다. 심지어 마력이 잔뜩 담긴 마법 물품 역시 별미로 삼으니 참으로 괴식가라 할 만했다.
"어르신, 이제 도시로 돌아갈 때입니다."
"크르릉? 아직 부족하지 않으냐? 지팡이는 두 개 더 남아 있다."
"이제 삼분의 일은 지배가 가능하단 소리입니다. 그놈들을 부리면 나머지도 빼앗기는 간단합니다. 게다가 섀도우 위자드가 어르신을 돕기로 했습니다."
"크르릉! 설명해 보라."
베니엘은 쏜과 나눴던 얘기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러자 마그라스는 대번에 흥미를 드러냈다.
"나쁘지 않군. 그 시커먼 마법쟁이들이 지원해주면 내 모든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겠어."
딱 봐도 가능성이 보이자 몸이 달아오른 듯 마그라스는 거체를 들썩였다.
베니엘은 그를 충동질했다.
"언제까지 이런 후락한 곳에 계실 겁니까? 이런 장소는 어르신 같은 훌륭한 신사분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은근히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고도 책임은 지지 않기 위해 베니엘은 교묘히 선택을 미뤘다.
"다만 이 미천한 자가 이 중대한 결정에 대해 더는 왈가왈부하는 건 맞지 않겠지요. 하지만 몸소 나서시기로 했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결국 자극을 받은 마그라스는 거구를 일으켰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망설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겠지! 도시로 당장 진격하겠다! 네놈도 따라라!"
"물론입니다!"
그 말과 함께 마그라스는 도시로 향하기 위해 호수의 물속으로 사라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베니엘은 따라가지 않았다.
'크흐흐, 내가 빠져나갈 동안 시간을 잘 끌어주길 바란다. 늙은 도마뱀아.'
베니엘은 빠르게 달려 보물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좋아! 곧 도시에서 사달이 날 테니까 이 틈에 빠져나간다!"
57화
황금팔 발굴 (5)
***
호수의 수면 위로 굉음과 함께 솟구친 마그라스는 폐허 도시를 향해 갔다.
네 발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 길쭉한 몸체 때문에 마치 뱀이 꾸물꾸물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사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했다.
"어리석은 족속아! 너희의 정당한 주인이 다시 그 권리를 찾으러 갈 것이다! 크워어어어어!"
드래곤의 포효는 그야말로 천지를 울렸고, 도시에 있던 모든 자들이 그걸 들었다.
우르르릉! 콰앙!
마그라스는 걸리는 모든 걸 박살 내며 도시로 달음박질쳤다. 그야말로 그는 기어오는 죽음이자 공포 그 자체였다.
신전 안에 있던 그융크족은 일제히 공포로 얼어붙었다. 심지어 그들을 영도해야 할 주술사들조차 딱딱하게 굳어 푸른 눈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짐승이 다시 오고 있다…!"
이에 호위 무사들이 애걸복걸했다.
"정신 차려라! 사제!"
"사제! 여신의 인도를!"
그제야 남은 주술사 둘은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고 섀도우 위자드에게 받은 마법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아직 두 개가 남았다!"
"그래, 이게 있다면 우리는 대항할 수 있다! 전투를 준비하라! 동포들이여!"
별로 용기백배할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그융크 전사들은 항전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으니까.
다만, 문제는 재앙이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와아아아앙!
콰앙―!
순간 신전의 천장부가 뜯어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무언가가 이 건물을 뜯어내려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종말이다! 종말의 짐승!"
"여신! 여신! 구해달라!"
"그왁! 그오와악!"
그융크들은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뛰어댔다.
하지만 야속한 그들의 여신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진동에 휩쓸려 신전 곳곳에 있는 여신상들이 와장창 쓰러질 뿐이었다. 그건 마치 그융크족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쿠아아앙!
다시 건물이 지진인 난 것처럼 요동쳤다. 그리고 그융크족의 비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주술사들은 몸소 나서지 못하고 소리만 질러댔다.
"가서 싸워라! 물리쳐라!"
"여신이 함께할 것이다!"
두 주술사는 앞장서 모두를 이끌어야 함은 자명한 일. 하지만 베니엘에게 당한 그르파와 달리 나머지 둘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제대로 마법 지팡이의 힘을 쓰지 못한 대가는 가혹했다.
신전의 통로로 눈깔이 뒤집힌 그융크들이 마치 좀비처럼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르르르르! 크파!"
"그르르르르! 그라!"
완전히 눈빛이 변한 걸 보니 마그누스에게 지배당한 게 틀림없었다.
두 주술사들은 발작하듯 명령을 내렸다.
"호위들은 막아라!"
"막아! 우리를 보호해!"
주술사의 호위는 최정예. 마그라스가 당도한 이 와중에도 신전의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서 주술사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거로 보이는 동족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게 됐다.
"물러나라! 무례한!"
"주술사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이놈들!"
안타깝게도 그런 노력은 아무 소용 없었다. 몰려드는 인파 앞에선 갈고 닦은 무예조차 속절없이 밀릴 뿐이었다.
그때.
요란한 충격과 함께 근처의 천장과 벽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가 일었으나 건물 밖의 바람이 그것을 밀어낸다.
그리고 주술사들은 마주하게 됐다.
뚫린 건물 너머로 자신들을 보는 저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잔혹한 눈동자를.
마그라스는 헤죽 웃었다.
"여기에 다 숨어 있었구나. 비루한 것들! 크르르릉!"
그 모습에 주술사들조차 하반신에 힘이 풀려 소변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
마그라스가 난입한 이후 도시는 난장판이 됐다. 이대로라면 저 늙은 드래곤이 그융크들을 대부분 집어삼키는 건 시간문제일 듯했다.
도굴꾼 무리로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이미 그들은 신중한 첩보 활동으로 마그라스가 섀도우 위자드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막아라! 막아야 한다!"
"그융크를 돕는다! 이렇게 된 이상 총력전이다!"
마침 마그라스가 등 뒤에 볏을 펼친 채 최면 광선을 발하고 있었다.
도굴꾼 무리는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쿠우웅! 콰아앙!
마법과 각종 발사체가 마그라스를 때리자 드래곤 볏을 접은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미물들이 방해를 해!"
하나 드래곤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 저 무리를 다 당할 수 없는 법. 마그라스는 포효했다.
"검은 옷 입은 마법사들이여! 약속을 지켜 나를 도와라! 크르르릉!"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쏜은 앞으로 나서 손짓을 했다.
"후후, 저 도굴꾼 무리에게 교훈을 가르쳐 줍시다. 물론 이후에는 저 무도하고 추한 짐승에게도 분수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요."
쏜은 드래곤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생각 따윈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마그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를 이용해 먹은 뒤 상황을 봐서 쓸어버려야겠군! 저 두 무리가 서로 싸우다 너덜너덜해지면 어렵지 않다!'
그렇게 폐허 도시의 전투는 모두의 파멸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한편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베니엘은 호숫가에서 보물 상자들을 늘어놓은 채, 신호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 신호기는 마법의 파장을 발동하는 것으로, 배의 선장에게 어디로 데리러 와야 할지 알려주는 용도였다.
다행히 곧 짧은 신호가 되돌아오며 상대가 연락을 받았음을 알게 됐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솔직히 통로를 따라 도시 밖 호숫가로 엄청난 양의 보물을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뭣보다 쏜의 위치 탐지 때문에 일꾼 골렘을 두고 와야했기에 그랬다(같은 이유 때문에 연락용 흑요석 거울도 버려두고 왔다).
결국 진이 빠질 때까지 몇 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엄청난 소음이 터지고 있는 저 도시 쪽 일에 휘말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베니엘은 도시 위로 폭죽처럼 터지는 빛을 보며 시시덕거렸다.
"그래, 신나게 싸워라. 서로 참은 것도 많을 텐데."
아마 저 싸움은 길게 이어질 터. 그사이에 내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호수의 어둠을 가르고 다크 엘프 특유의 날렵하고 긴 함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선장!"
베니엘의 외침에 선장이 선수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련님을 두고 가면 남작께서 절 용서하시겠습니까? 아니, 근데 그게 다 뭡니까!"
선장은 호숫가에 쌓여 있는 보물 상자와 가죽 포대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배의 선원들이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정도의 보물이라고!"
"저런 건 여태 본 적이 없어."
"설마 저치들, 마그라스의 둥지를 털어온 건가?"
보물의 양을 보면 드래곤의 둥지를 털었다고 해도 믿을 만했다. 하지만 그 늙은 드래곤의 둥지는 쓰레기와 썩어가는 해초밖에 없었다.
"선장! 이 짐을 옮기게 도와주게. 도시가 난리 난 걸 보면 알겠지만 얼른 여길 떠야 해."
"알겠습니다! 얘들아, 움직여라!"
곧 호숫가에 배가 대지고 선원들이 우르르 내려 보물을 나르는 걸 도왔다. 그 작업은 놀랄 정도로 신속했다.
빠르게 옮길수록 베니엘이 보너스를 주기로 한 데다가 도시에서 터지는 굉음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을 처리했고, 곧장 돛을 펴고는 호숫가를 떠났다. 실로 전광석화였다.
"선장, 최대 속도로. 중간에 그 호수의 늙은 드래곤이 따라오면 곤란하다."
"아니, 설마 진짜 드래곤의 둥지라도 턴 겁니까?"
"그럴 리가. 애초에 그게 사실이면 우린 도망도 못 가. 둥지가 털린 드래곤이라면 세상 끝까지 쫓아올 테니까."
"하긴 그렇겠지요? 저… 도련님만 믿겠습니다?"
진짜 둥지를 턴 거면 책임지라는 소리였다. 베니엘은 피식 웃으며 선장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내 목숨도 하나긴 마찬가지다."
***
배는 빠르게 폐허 도시에서 멀어졌다. 솔직히 이제는 안정권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다들 환호성을 터뜨리며 싱글벙글 웃어댔다.
"이거 진짜 평생 얘기할 모험담이군! 저기서 살아오다니."
"이봐, 아무도 우리 얘기를 믿지 않을걸? 드래곤과 마법사를 속이고 보물을 빼돌렸다는 걸?"
술을 나누며 흥분해 떠드는 용병과 대체 무슨 얘기인지 들어보려 몰려든 선원들로 갑판 위는 시끄러웠다.
한데 정작 이번 일의 주인공인 베니엘은 혼자 미간을 좁힌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원래라면 여기서 퀘스트 종료다.'
애초에 폐허 도시에 있는 놈들의 수준은 베니엘이 토벌하기 어렵다. 그러니 황금팔과 보물만 싹 빼서 튄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에겐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아카드의 지도. 그게 뭘까?'
아카드의 지도란 섀도우 위자드가 간절히 찾고 있는 유물이다. 수많은 게임 지식을 갖고 있는 베니엘조차 아카드의 지도의 정체에 대해선 모른다.
왜냐하면 게임에서 그 아이템은 단순히 퀘스트용으로 아무런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섀도우 위자드와 협상을 하거나, 돈을 받고 팔거나 하는 식으로 활용될 뿐이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잖아?'
게임처럼 퀘스트 진행을 위해 제한이 가해진 세상이 아니란 거다.
그렇다면 섀도우 위자드가 간절히 찾고자 하는 아카드의 지도에는 무언가 심대한 비밀이 있을 터.
베니엘은 욕심이 피어올랐다.
안 그래도 이곳에 와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기로 작정하지 않았는가?
'섀도우 위자드에게 순순히 넘기긴 아쉬운데….'
물론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게 가장 안전하긴 하다. 하지만 베니엘의 마음속에서 매번 승리하는 건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타고난 천품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저 도시의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섀도우 위자드를 패퇴시키고 아카드의 지도를 빼앗기 위한 방법을 구상해 나갔다.
'음…, 어떻게 될 거 같기도 하고.'
짧은 사이 욕망이 그에게 많은 영감을 하사했고 결국 베니엘은 길을 찾아냈다. 그렇게 상념이 끝나자 베니엘은 비릿하게, 그리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좋아. 재밌겠어. 크흐흐."
물론 그 전에 정리할 게 있었다. 베니엘은 퀵포우에게 지시했다.
"보물을 빼돌린 놈들을 모두 호수에 던져라."
"안 그래도 언제 명령하실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찌익―! 케케켁!"
퀵포우는 신이 나서 손버릇이 나쁜 녀석들을 색출했다.
"너! 그리고 너!"
"아, 아니! 행보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목받은 이들은 황급히 변명했으나 쥐의 눈썰미는 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내 발가벗겨 탈탈 털자 빼돌린 금붙이가 쏟아졌다.
베니엘은 조소를 머금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어련히 챙겨줬을 텐데 욕심이 과했군."
"사, 살려주십시오! 치안관님!"
"저놈들을 밧줄로 묶어. 그리고 돌을 매달아서 내던져라."
나머지 용병들(상대적으로 조금 빼돌린 놈들)은 혹시나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즉각 동료들을 묶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호수에 집어 던졌다.
풍덩! 풍덩!
이후 수면 위로 기포가 잔뜩 올라오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이렇게 호수를 무덤으로 삼게 된 이가 다섯.
남은 용병은 이제 아홉이었다.
베니엘은 공포에 질린 그들을 보며 끄덕였다.
"너희는 정직한 자들이니 내 자경대원으로 받고 싶군. 어떤가?"
당연히 거절할 정도로 간담이 큰 녀석은 없었다.
모두 살려만 달라는 듯 감읍하며 베니엘이 내민 자경대 배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품 안에서 사소한 실수가 있었다며 빼돌린 금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 정말 오해입니다!"
"아, 이게 왜 주머니로 굴러들어왔지? 돌려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아무것도 빼돌리지 않은 자가 있을 거란 기대도 안 했다. 다만 적당히 선을 지키는 자들을 찾고자 했을 뿐.
베니엘은 두 팔을 벌려 그들의 합류를 환영해줬다.
"네놈들은 안 던질 테니 걱정 말라고."
그렇게 일 처리를 한 뒤 베니엘은 선장을 찾아갔다.
"배의 진로를 바꾼다."
"네? 닉스포트로 돌아가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신지?"
"드라카니아로 간다."
"네? 거긴!"
'드라카니아'라면 에본플로우 호수에 면한 도시 중에 가장 크고 부유한 장소다.
그도 그럴 게, 드라카니아는 이 일대의 군벌이자 패자인 드란실 공작령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선장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로 물었다.
"아니, 대체 드라카니아로 가서 뭘 하시게요?"
"간단하다. 무도한 자들이 기거하는 도시를 정벌할 군대를 꾸리겠다."
즉, 군대를 꾸려서 폐허 도시를 다시 공략하겠다는 것.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너덜너덜해졌을 테니, 숫자로 밀어붙여 끝장을 보겠다는 심보였다.
그 군대라는 말에 선장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얻은 보물을 전비로 써서 군대를 꾸리시려고요?"
아마 그 엄청난 재물이면 충분히 가능할 터.
한데 베니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미쳤어? 그 귀한 돈을 쓰게?"
"하면 어찌…? 군대란 게 공짜로 모입니까?"
이에 베니엘은 킥킥 웃을 따름이었다.
"다 방법이 있다고."
58화
2차 원정대 (1)
드라카니아.
제국 서부의 패자인 드란실 공작가의 중심지로 에본플로우 호수에 면한 수많은 도시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인구는 무려 2만 5천여 명으로 지하 세계에선 보기 드문 대도시기도 했다.
이 도시가 부유한 이유는 간단하다.
에본플로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국 서부 무역의 거점이자, 제국 중심과 제국 서부를 연결하는 절묘한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도시로는 막대한 부가 모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선실로 찾아와 알리는 선장의 말에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으...."
습기 가득한 쌀쌀한 날씨가 그를 맞아줬다. 베니엘의 긴 귀가 파르르 떨리며 치렁치렁한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춥네."
물안개 가득한 풍경을 게슴츠레하게 보니, 과연 저 앞에 웅크린 드래곤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도시가 흐릿하게 보였다.
곧 배를 유도하기 위한 불빛이 비치고,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려왔다.
깡깡깡! 깡!
얼마간 더 다가가자 도시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마치 드래곤의 척추뼈를 늘어놓은 것 같은 기다랗고 뾰족한 검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였다.
"드라카니아로군!"
게임 그래픽으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모습에 베니엘은 나직이 감탄했다. 일전에 닉스포트를 처음 봤을 때도 감탄했는데, 지금은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위용에 그저 입을 벌릴 따름이었다.
도시의 항구는 이른 아침임에도 아주 번잡했다. 각종 소음과 함께 생선 비린내와 역청이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불을 밝히고 무언가를 태우기 위해 항구 곳곳에 역청 통이 놓여 있던 까닭이다.
사방에는 부지런한 노동자가 가득했고, 편리한 무급 노동자인 노예는 그 이상으로 많았다.
짜악! 짝―!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는 채찍 소리와 노예의 서글픈 울부짖음은 그야말로 지하 세계다운 모습이었다.
"배를 댄다! 하선 준비!"
선장의 명령에 선원들은 원숭이처럼 배를 뛰어다니며 부지런히 준비에 들어갔다.
곧 하선이 시작됐다.
퀵포우는 하선용 널빤지를 밟고 무거운 보물 상자를 옮기는 일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만약 금화 하나라도 흘리는 놈이 있으면 저기 배의 돛대에 목매달아 주마! 찌이익!"
베니엘은 느긋하게 근처에 있던 화물용 상자에 앉아서, 올리비에가 가져다준 쌉싸름한 버섯차를 마시며 그 꼴을 바라봤다.
"차는 제법인데 장소가 별로로군."
근처에는 훈제하는 생선의 고약한 냄새 때문인지 파리가 얼굴 근처로 날아다녔다. 베니엘은 인상을 찡그리고 손을 휘젓고는 먹던 차를 근처에 부어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손뼉을 두 번 쳤다.
짝짝!
"바로 움직인다! 이 정신 사나운 부둣가에 조금만 더 있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지겠어."
용병들은 껄껄 웃으면서 보물 상자를 들고 따랐다. 손이 부족했기에 운반에 선원들도 여럿 써먹었다.
그들의 행렬은 근처에 있던 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저거 뭐지? 뭔가 한탕 해온 거 같은데?"
"어디 가문이야? 문장을 보니 나이트쉐이드로군. 이런…!"
"아, 검은 별 남작의 가문? 그렇다면 저 귀족 자제분은?"
"윽! 설마 그 망나니?"
베니엘이 소문의 망나니란 결론에 이르자 모두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저 망나니의 성미를 건드리면 여기서 바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으면 남작가의 자제 주제에 공작령의 수도에서 맘대로 칼질을 할 수 있냐고 하겠지만 베니엘은 가능했다.
그가 바로 공작가의 유력한 후계자인 드란실 공자의 친우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저에서 귀족은 사람 몇 베어 죽인다고 해도 좀처럼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하물며 차기 공작이라 불리는 자가 싸고도니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났다고 봐도 됐다.
한데 그런 무법자가 칼질로 사람을 살상하고 재물을 빼앗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말 다 한 거다.
근처에 있던 자들은 슬금슬금 물러났고, 복잡하기 그지없던 항구 지역이 갑자기 모세가 파도를 가른 것처럼 벌어졌다.
베니엘은 어이가 없었다.
'나참…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이런 취급은 오리지널이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인데, 편리하긴 해도 뭔가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 하나 붙잡고 해명할 수도 없으니 그저 턱을 치켜들고 걸어갈 뿐이다.
"잔크. 너는 두 형을 데리고 바로 병원으로 가보도록."
베니엘은 치료비를 건네주며 지시했다. 홉고블린 삼 형제의 첫째와 둘째는 주술사와의 싸움으로 안구가 타버린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케륵!"
잔크가 두 형을 데리고 사라지자 베니엘은 일행과 함께 상업 지구로 향했다.
보물을 금화로 바꾸기 위해서다.
이 도시가 교역의 중심지인 만큼 상인들은 엄청난 성세를 이뤘다. 그래서 상업 지구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공용 상관의 경우 그 화려함 때문에 '상인들의 궁전'이라 불릴 정도였다.
천장에 돔이 있고, 벽면에는 이름난 예술가를 초빙해 그린 사치스러운 벽화가 가득했다.
베니엘은 공용 상관으로 들어가 보석과 귀금속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봐라."
베니엘의 모습에 상인들이 굽실거렸다. 딱 봐도 한가락하게 생긴 데다가 귀족이며, 검은 갑옷에는 피 얼룩이 가득했다.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누가 함부로 굴겠나.
게다가 그들은 곧 베니엘이 나이트쉐이드란 걸 알아보고는 더욱 허리가 굽었다.
"혹시 베니엘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맞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 위명을 익히 들었습니다."
이에 베니엘은 잔혹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들은 위명대로라면 오늘 만남이 썩 반갑지 않아야 할 텐데?"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웃는 그 미소에 상인들은 움찔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구르고 구른 자들. 이내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웃었다.
"용맹하고 명예로운 분이라 들었습니다. 아마 오늘 만남도 저희에게 행운을 선사할 것 같군요."
"글쎄, 그건 너희가 얼마나 정직하게 구냐에 달렸겠지. 여기 물건 중 보석과 장신구를 매각하고 싶다. 쏟아라!"
용병들이 가죽 포대를 뒤집거나 상자를 발로 차서 밀었다. 그러자 안에서 금은보화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차르르르르!
순간 소음으로 가득하던 상관 내부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막대한 재화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보기에도 눈이 휘둥그레질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괜찮은 수확이 있었다. 금화와 은화는 내버려두고 나머지 보석과 장신구를 팔고 싶군."
"아, 알겠습니다!"
딱 봐도 모두 상등품이었다. 이걸 매입해 제도(帝都)로 유통하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을 듯했다. 상인들은 눈이 돌아갔다.
곧 상인과 고용인, 베니엘의 용병까지 가세해 쏟아진 보물에서 금과 은만 골라내기 시작했다. 온갖 보물이 섞여 있어 이걸 분류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상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 양을 단번에 매입하는 건 어렵습니다."
베니엘은 시니컬하게 답했다.
"그러면 다른 상회를 불러오던가. 혼자 먹겠다고 배 터지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곧 여러 상단이 달려들었다. 도시 안으로 이 엄청난 보물에 대한 소문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베니엘은 퀵포우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다.
"가서 마법 지퍼 하나를 사와. 용량이 큰 걸로."
마법 지퍼라 하면 판타지에 흔히 나오는 아공간 주머니 비슷한 물건이다.
이쪽 세계는 기술이 발달해 지퍼가 지구에 비해 훨씬 빨리 발명됐다. 거기에 마법을 결합한 게 마법 지퍼다.
사용법은 간단한데 허공에서 지퍼를 당기면 그 안에 무언가 넣을 수 있는 아공간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베니엘이 마법 지퍼를 사오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널브러진 장신구와 보석 중에서 특별히 대단한 가치를 지닌 건 매각하지 않고 따로 챙기려 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어떤 물건이 명품인지 전문가 못지않은 시각을 자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게임을 하면서 어떤 게 제일 비싸게 팔리는지만 찾아댔기 때문이다.
"이거랑… 이거. 음, 이것도 장난 아니군."
베니엘이 바닥에서 무슨 항구에 버려진 생선을 줍듯 명품을 따로 챙기자 안목 있는 상인들이 몹시 아쉬워했다.
"앗! 그, 그건! 저희에게 맡겨주지시요."
베니엘은 단번에 그 요청을 거절했다.
"어림없는 소리."
"아니, 그게 저희가 최고의 가격으로 매입을…."
상인은 수작을 부렸지만 베니엘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그는 상인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건 루멘 스톤이랑 블러드 크리스탈이다. 이건 어비셜 펄이고. 후려치지 않고 제값에 감당할 수는 있고?"
"으… 그게...."
"이런 특별한 명품은 여기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제국의 수도로 가서 높으신 타르나이 귀족님들께 넘겨야지. 그 수집욕 넘치는 분들은 엄청난 가격을 쳐주실 걸?"
상인도 그러려고 했기에 반박하려 할 수 없었다.
드라카니아가 번화한 곳이긴 하나 그 영광이 어찌 제도에 비할 수 있을까?
본디 가장 고귀한 건 제국의 중심지로 가야 하는 법이었다. 설령 나라가 아주 제대로 망조가 든 지금도 그곳은 흥청망청하였다.
결국 상인은 포기했다.
"하하… 박학하시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베니엘은 날카로운 안목으로 12개의 장신구와 7개의 특별한 보석을 선별했다. 그리고 곧 돌아온 퀵포우에게 마법 지퍼를 받아 이것들을 챙겼다.
호위대장에게 줄 황금팔도 마법 지퍼에 넣었다. 역시 정말 중요한 거라면 직접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최선이었다.
이후 매각 작업은 하루가 꼬박 걸렸다.
하지만 보람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게, 보석과 장신구를 매각한 후의 금액은 베니엘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려 35만 두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명품은 팔지 않고 따로 빼놨음에도 말이다.
베니엘은 실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즐겁다!'
많은 돈 덕에 사는 게 즐거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
돈을 벌었으니 바로 포상이 이어졌다.
베니엘은 호수로 던져지지 않은 양심적인(?) 용병들에게 각각 2천 두크의 성공 보수를 지급했다.
용병들은 고액을 손에 쥐게 되자 그야말로 입이 찢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몇 년치 수익을 한꺼번에! 대박이다!"
"크아아아아! 이 돈으로 뭘 해야 하는 건가! 참을 수 없는 충동!"
그 외에 홉고블린 삼 형제와 올리비에에겐 각각 4천 두크씩, 퀵포우에겐 6천 두크를 지급했다.
더불어 삼 형제 중 첫째, 둘째의 안구는 이미 망가져서 마법 의안을 이식해야 했기에 이 비용을 내주기로 했다.
의안에 총 2만 두크가 소요됐고, 홉고블린들은 감격해 어쩔 줄 몰라했다.
"눈이 망가졌으니 내버리셔도 할 말이 없는데 치료비까지! 케르르...."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봅니다! 치안관님!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케케케...."
첫째와 둘째가 숨죽여 말하는 게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베니엘은 폼을 잡고 그들이 좋아할 말한 말을 해줬다.
"나는 내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당연히 홉고블린 삼 형제가 폭풍 감동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치안관님!"
"근심은 잊고 치료에만 힘써."
베니엘은 올리비에에게도 마법 의안을 권유했지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멀쩡한 눈알을 뽑는 게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하… 저는 다음에."
"뭐, 맘대로 해라. 어둠 속에서 제대로 못 보는 게 괜찮다면."
이후 베니엘은 도시의 은행으로 향했다. 돈 때문에 한껏 고양된 용병 무리가 베니엘을 철통같이 호위했다.
은행에 도착한 베니엘은 나머지 금액 29만 두크를 모조리 예금했다.
"크엇! 이, 이런 거액을!"
은행장이 눈이 뒤집혀서는 베니엘을 맞아줬다. 그는 별실로 베니엘을 모시고는 온갖 알랑방귀를 뀌어댔다.
"완벽하게 관리하겠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앞으로 VIP로 등록해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단 것이었다. 베니엘은 거만하게 끄덕였다.
"믿겠네."
제국의 은행 시스템은 정교하다. 지구로 치면 블록체인과 흡사한 걸 마법으로 구현했기에 걱정할 필요 없었다.
이 은행이 무너지는 때가 제국 멸망의 날이라고 할까?
'뱅크런 시점을 알고 있으니 그전까진 맘 놓고 보관할 수 있지.'
베니엘은 속으로 지금껏 모은 자신의 재산을 셈해봤다.
'보자….'
얼추 47만 두크가 넘어갔다.
지구의 돈으로 환산하면 200억이 넘는 거금이었다.
이 망나니는 단기간에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셈이다.
하지만 이것도 시작에 불과했다.
59화
2차 원정대 (2)
***
망나니 베니엘이 원정으로 초대박을 쳤다.
이 소문은 드라카니아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뭣보다 상인 회관과 은행에서 그 막대한 부를 직접 목격한 자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들었소이까? 그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말종 놈 성공기를?"
"암요, 이것 참… 뭐라 해야 할지. 그토록 행실이 지저분한 자도 행운을 거머쥐는구려."
"허허, 세상 참… 불공평합니다. 우리 같은 정직한 자들은 배를 곯는데."
특히 이 소문에 가장 열광하고 질시에 빠진 건 도시의 하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용병대에서 일하거나, 다른 귀족의 수하로 있거나, 아니면 도심지 외곽에 그냥저냥 먹고살 작은 농장을 가진 자, 허울만 남은 몰락 귀족까지….
신분 자체가 진짜 고상하고 높으신 분들에게 한참 못 미쳐서 무언가 삶에 반전이 필요한 자들이었다.
하여 저들끼리 시끄러운 주점에 모여 뭔가 돈 될 거리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 좋아하는 무리로, 이번에는 단연코 베니엘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아예 무리를 모아 놈을 습격하는 게 어떻소?"
이런 하류 인생들은 귀족이라도 범죄에 반쯤 발을 걸치고 있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귀족 노릇을 내던지고 강도로 돌변하기도 했다.
"뒷감당이 되겠소? 그 유명한 검은 별의 자식인데."
"버린 자식이라 들었소."
"이런! 소문에 느리구만. 다시 후계자로 삼은 거 모르오? 설령 버린 자식이라고 해도 남작가의 체면 때문에 검은 별은 참지 않을 것이오."
"크흠...."
"심지어 드란실 공자의 친우가 아니오이까? 어쩌시려고?"
"끄응! 역시 망나니는 망나니와 통한다는 건가."
사실 여기 모인 귀족들은 모두 습격 따윈 어림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논의가 이어지는 건 그 거금이 탐나기 때문이다.
그때 새로운 귀족이 주점에 들어와서는 무리에 끼었다.
"내 여기 모인 경들께 인사 드리오! 항만에서 감독관을 하는 주삭이라 하오."
그는 지하에서 대체로 괄시받는 인간족 하급 관리였다. 그래서 대부분 그를 무시했다. 몇몇만이 그저 눈인사를 해줬을 뿐이다.
"어딜 주제도 모르고…."
하류에도 하류의 급이 있기 마련이다. 다크 엘프 하급 귀족 하나가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곧 모두가 항만의 하급 관리가 가져온 소식에 주목했다.
"나이트쉐이드의 망나니가 새로운 원정대를 모집한다는군요. 들으셨소이까?"
"뭐라…?"
"이번 원정에서 큰 수확을 거둔 곳은 폐허 도시 마카나이드라고 하더군. 한데 망나니 말로는 급히 몸을 빼느라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많다고 했소."
"오오! 더 말해보시오."
보물이란 말에 귀족들은 목을 쭉 빼고 귀를 들이밀었다.
"망나니 말로는 남은 보물이 가져온 것보다 많다고 했소. 그래서 새로 사람을 꾸려서 폐허 도시를 칠 거라더군."
"아니, 정말인가!"
황금에 대한 탐욕으로 모두의 눈빛이 화르르 타올랐다.
"정말이오. 그리고 망나니가 이번 2차 출정에 함께할 자들을 모집한다더군."
"용병 고용인가?"
"아니오. 동등하게 원정대에 참가할 자들을 찾고 있다고 했소. 대신 망나니가 합류하는 자들에게 뱃삯을 대신 내주겠다더군. 무리를 이뤄 오면 환영하겠다고 했소이다."
삽시간에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하급 귀족들은 연초 때문에 너구리굴로 변한 주점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좋은 거 같소? 아니면 나쁜 건가? 고용이 아니라 동업자라 하니…."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소이까? 보수가 보장되진 않지만 뭔가 발견하면 이쪽 몫을 제대로 주장할 수 있겠지."
"그쪽 말씀이 맞소이다. 부하로 가는 게 아니라 동업자라고. 이번에 망나니 휘하의 용병들이 큰돈을 벌었는데 각각 2천 두크씩이라더군. 그 비루한 놈들은 그걸로 만족한 모양이지만, 귀족의 푸른 피를 가진 우리는 다르지 않소?"
그 질문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박자를 맞춰 술잔으로 탁자를 두들겨댔다.
쿵쿵쿵!
"옳다! 옳아!"
"거, 말 한번 잘했소이다!"
질문을 던진 귀족 하나가 다시 말했다.
"반면 이번에 그 망나니는 혼자 30만 두크를 넘게 벌었다고 하오. 이게 고용주와 품삯을 받는 자의 차이오."
"세상에! 어마어마하군!"
"우리는 귀족이니 그 망나니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원정에 참가한다면 대박을 노려볼 수 있지 않겠소?"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소식을 가져왔던 항만의 하급 관리가 끼어들었다.
"도시에는 원래 자리 잡은 세력이 있는데, 저들끼리 싸우느라 지리멸렬하고 있다고 했소. 이런 상황이니 그 망나니가 사람을 모아 일거에 들이쳐 섬멸하려 한다고 하오."
"오, 그럴싸하군!"
"심지어 각자의 몫은 인정하고 노획품에 대해 건들지 않겠다고 하더군."
"어떻게 합류할 수 있는가?"
"지금 항만에서 참가자의 서명을 받고 있소. 우리 같이 휘하에 병졸을 거느린 푸른 피만이 아니라 천한 용병들까지 몰리더군. 어느 정도 인원이 차면 안 받다고 했소."
"뭐라!"
이 말에 주점 안의 하급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항만으로 뛰어갔다.
***
현재 도시에서 벌어진 화제를 주목한 건 용병이나 하급 귀족만이 아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공작의 성채인 '잠든 드래곤의 둥지'에 거주하는 가장 고귀한 핏줄들도 역시 반응했다.
특히 가장 열렬하게 나선 이는 바로 병석에 드러누운 공작의 후계자인 드란실 공자.
그는 덩치 큰 드래곤 인간(Dragonkin)으로, 이족 보행하는 드래곤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한 자로 공작가의 근심이자 망나니로 통했다. 여러 가지로 볼 때 베니엘의 상위 호환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망나니는 망나니끼리 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거칠고 호방한 성격의 귀족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베니엘을 몹시도 좋아했던 것이다.
"뭐라! 베니엘 그 친구가 그런 짓을 벌이고 있다고! 당장 가보자! 크르르릉!"
드란실 공자가 움직이자 그와 같은 드래곤킨으로 구성된 도시의 최정예가 따랐다.
그들은 '반짝이는 비늘 근위대'라 불리는 드래곤킨 정예병으로, 이 제국 서부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는 평을 듣는 무리였다.
커다란 덩치와 위압적인 뿔, 화려한 갑옷과 용족 특유의 광택 나는 비늘 때문에 이들은 겉모습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할 만했다.
드란실 공작을 시작으로 성의 난간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일제히 날개를 펴 항구 쪽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마치 폭탄처럼 항구 지역에 떨어졌다.
쿠우웅! 쿵! 쿵!
갑옷 입은 묵직한 드래곤킨들이 착륙하자 사방이 크게 울렸다. 그 위엄과 악명에 근처에 있던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날 정도였다.
드란실 공자는 그딴 조무래기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베니엘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막 몰려온 자들의 서명을 받고 있었다.
"베니엘 이 친구야! 왜 날 부르지 않았나! 도시에 왔으면서도 본 공자부터 찾지 않으니 서운함에 이루 말할 수 없구만!"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서명을 하던 자들이 질려서는 모두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자와는 다르게 베니엘만은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린 채 드란실 공자를 맞았다.
"아하하하! 제가 판을 벌이면 공자께서 어련히 나타나실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뭐라! 크하하하! 역시 그랬군."
영웅호걸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어 재낀 드란실 공자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한몫 잡았다며? 2차 원정에 본 공자도 합류하겠다! 그런 재밌는 일은 같이 해야지! 안 그런가?"
드란실 공자의 참가에 베니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공자. 함께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원래 지하 세계에서 무장한 자들을 동원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했다. 특히 군대는 끊임없이 금화를 갈아버리는 기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베니엘은 군대를 모으면서 돈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보물을 처리할 때 사방에 과시했다. 도시가 떠들썩해지도록 말이다.
이후 뱃삯과 동업자라는 알량한 명분으로 수많은 지원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드란실 공자의 참가는 그야말로 화룡점정. 이 원정은 세간에서 더욱 큰 관심을 끌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아아아아!"
"공자님! 드란실에 영광을!"
드란실 공자가 개망나니건 말건 간에 대단한 무력의 소유자다. 또한 제국 서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근위대를 이끌고 있다.
도시에서 전투가 예정돼 있는 이상 드란실 공자의 참가는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환호성을 보내주자 명예에 쉽게 취하는 젊은이인 드란실 공자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잔뜩 고양돼 소리쳤다.
"그대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본 공자의 참가로 이번 원정은 승리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성정과 별개로 드란실 공자는 타고난 위엄을 가진 이였다. 그런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외치자 일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드란실 가문 만세!"
"승리를! 이번 원정에 행운을!"
베니엘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거 수만 두크는 될 뱃삯을 내가 내지 않아도 되겠군.'
비록 뱃삯이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거에 비해 싸긴 해도, 이 많은 인원을 옮기려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새로운 배가 여러 척 더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 지출을 떠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은 날로 먹을수록 좋지. 돈을 써야 한다면 내 지갑이 아니라 남의 지갑에서 나가게 하는 게 최고다.'
베니엘은 잠시 목을 다듬고는 모두의 앞에 나섰다.
"잠시만 이 원정을 기획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여기 우리의 훌륭하신 드란실 공자님에 대한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모두가 베니엘을 주목했다. 드란실 공자도 고개를 끄덕여 베니엘의 연설을 허락해줬다.
"말해보게. 내 친구."
"감사합니다. 공자님."
베니엘은 근처에 하역장 박스 위에 올라가 모두의 앞에 섰다. 그리고 외쳤다.
"명예로운 신사요, 친구인 그대들에게 고합니다! 이제 곧 우리는 황금과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여정에 떠날 것입니다. 그대들은 모두 자신의 서명으로 이점을 확실시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이 모험은 분명 대단한 명예를 약속할 것이지만, 분명 그 위험도 만만치 않습니다. 폐허 도시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악명 높은 섀도우 위자드와 암살자, 도적으로 구성된 도굴꾼 무리, 사악한 두꺼비 인간인 그융크족들입니다."
이 말에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는 두렵지 않다!"
그러자 청자들이 일제히 호응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두렵지 않다!"
"가자! 내 검이 울고 있다!"
베니엘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물론 제가 여러분들의 무용과 그 가슴속 뜨겁게 타오르는 용기를 모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겁쟁이가 있었다면 저는 서명조차 못 하게 쫓아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고난 섞인 영광의 여정일수록 확실하고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
여기까지 얘기하자 사람들은 베니엘이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건지 알게 됐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드란실 공자에게 향했다. 그러자 드란실 공자는 이 명예에 입에 헤벌쭉 벌어졌다.
"크흐흐흐…."
그는 흘러나오는 웃음과 설레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베니엘이 자신의 머리 위에 씌워줄 감투를 최고의 인내심으로 기다렸다.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에 베니엘은 흡족해하며 외쳤다.
"하여 저는 지금 여러분께 진심을 가득 담아, 우리의 여정이 역사에 전설로 남도록 기원하며, 열렬히 부탁드립니다!
여기 고대 드래곤의 핏줄을 계승한 위대한 드란실 가문의 후계자분께서 이번 원정대 대장 자리를 맡아주시길 말입니다!
여러분! 부디 하나의 마음으로 추대해 주십시오! 드란실 가문의 적통이자, 가장 명예로운 기사이며, 위대한 혈통을 가진 그분께!"
"와아아아아아―!"
항구 근처에 터질 것 같은 환호성을 뒤덮였다. 그리고 인파는 한목소리로 연호했다.
"드란실! 드란실! 드란실!"
"드란실! 드란실―!"
이 영광에 드란실 공자는 파안대소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고 빼지 않는 성격답게 요청을 수락했다.
"너희의 요청과 내 친우의 부탁을 받아들이겠다!"
다시 한번 거대한 환호가 터졌다.
"우워아아아아―!"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베니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왜냐하면 원정대에 참가하고자 하는 자들이 서명한 서류에는 배를 빌리는 비용을 원정대장이 내게 돼 있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모으고, 이 재앙을 도시에 투척하기까지 모두 공짜라니.'
역시 인생은 즐거웠다.
60화
2차 원정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