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황금팔의 검객 (4)
일순간 방 안이 환해졌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 빛에도 불구하고, 눈부심조차 느끼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마치 이 진귀한 보물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겠다는 듯 말이다.
"대단하군!"
"말도 안 되게 정교해… 이 구조를 봐."
"이건 기계의 범주를 넘어선 거잖아?"
호위병들의 감탄이 아니더라도, 이 드워프 왕의 황금팔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호위대장 쿠르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과묵하게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온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호위대장의 눈동자는 도무지 황금팔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때 베니엘이 입을 열었다.
"쿠르신, 지난 어리석음에 스스로 통탄할 뿐이다. 부디 이 팔과 함께 내 사과를 받아주게."
물론 호위대장과의 관계는 오리지널이 벌인 문제지만, 이제 그가 진짜 베니엘이었다. 그리고 그 업보 역시 이어받은 상태기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
한동안 호위대장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어왔다.
"도련님, 이전에 하셨던 제안은 유효한 겁니까?"
그건 바로 황금팔의 대가로 50년간 봉사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쿠르신은 완전히 자유를 되찾는다.
베니엘은 끄덕였다.
"정해진 기간 동안만 날 도와주면 된다. 이후에는 뭐든 뜻대로 하라고. 바라는 바가 있으면 도와줄 수도 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네가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도록 돕겠다."
그 대답과 함께 주변에 침묵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았다.
과연 호위대장 쿠르신이 과거의 원한에도 불구하고 그 직무를 받아들일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위병들은 저마다 심경이 복잡했다.
'너무 좋은 기회다. 대장님께서 거절하지 않았으면….'
'여기서 멈추기 너무 아까운 분이시다.'
'하지만 저 망나니 밑에서 다시? 아무리 달라진 것 같다지만….'
반면 베니엘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검을 다시 휘두르고 싶어 하는지를 알기에.
그렇게 짧고도 긴 시간이 흘렀고, 호위대장 쿠르신은 결정을 내렸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군요. 다시 검을 잡길 너무나 간절히 원해왔으니까요."
베니엘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고맙군. 쿠르신."
그와 함께 주변에 있던 호위병들이 축하의 인사를 쏟아냈다.
"대장님! 드디어! 축하드립니다!"
"잘 됐군요! 이제야 팔을!"
"그 멋진 검술을 다시 볼 수 있겠군요! 정말 잘 됐습니다."
다들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게, 호위대장 쿠르신은 그 능력과 인품 덕에 모두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이기적인 성품의 다크 엘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고 있었다.
"고맙다. 모두."
쿠르신은 모처럼 다시 웃고 있었다. 그는 베니엘은 보며 솔직히 말했다.
"정말로 구해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금까지 내가 했던 짓을 생각해 보면 그리 여기는 게 당연하겠지. 그것보다 장착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다."
"마침 아는 노움이 있습니다. 기계 공학에 일가견이 있지요."
"그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공임은 내가 감당하지."
"아닙니다. 그런 것까진…."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싶군. 복잡한 건이라 돈이 꽤나 나올 거다. 그러니 받도록."
"…감사합니다."
쿠르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니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럼 보중하라고. 조만간 다시 보기로 하지."
베니엘은 더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저들끼리 편하게 축하하게 두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난 아직 불편한 존재겠지.'
한데 곧장 과거의 호위병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 나왔다.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베니엘은 뒤를 돌아보자 그들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왔다.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설령 불만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선 안 됐던 것인데!"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전에 호위대장을 보러 갈 때 그들이 베니엘을 앞을 막아 섰던 걸 말하는 것이다. 그때 상당히 거친 태도였기에 오리지널이었다면 곧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한데 베니엘은 도리어 사과를 한 데다가 자기 말을 지켜 황금팔을 구해왔다. 이러니 모두 그를 달리 볼 수밖에 없었던 것.
베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간 나한테 존나게 괴롭힘 당하고도 잠깐 잘해줬다고 바로 사과하는 거냐? 줏대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아니, 그게...."
베니엘은 모두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됐다. 그것보다 같이 하지 않겠나?"
"뭘 말입니까?"
"오늘 기분이 좋아서 주점에 가고 싶은데 여기 옆에 있는 쥐새끼 밖에 데리고 갈 사람이 없네. 이놈 생긴 거만 봐도 술맛이 떨어진다니까?"
퀵포우는 바로 반발했다.
"종족 차별적 발언입니다! 찌익!"
종족 차별이야말로 지하 세계의 일상이다. 베니엘은 퀵포우의 항의를 무시하고는 전직 호위병들을 잡아끌었다.
"같은 다크 엘프랑 마셔야 아무래도 술이 잘 넘어갈 것 같단 말이다. 자, 가자고. 친구들."
이 제안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다크 엘프는 여기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곧 끄덕였다.
"저희가 영광입니다."
"호수에 소문이 자자한 도련님의 모험담을 듣고 싶군요."
"저는 비싼 술이 좋습니다!"
베니엘은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핫! 아, 물론이지. 원하는 대로 해. 지금 나는 부자니까!"
그날 흥겨운 술자리 이후, 다섯 명의 호위병들은 모두 베니엘의 곁으로 복귀했다.
***
원정 이후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한동안 몰아치던 사건에서 벗어난 채 내실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까?
베니엘은 우선 남작에게 받은 무인도인 카파신 섬에 그융크 병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아무도 머물지 않는 섬에 갑자기 인부와 자재가 밀려들어 시끌벅적해졌다.
공사 책임을 맡은 퀵포우가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인부들을 재촉했다. 그러다 베니엘을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뛰어와서 보고를 해왔다.
"찍찍! 병영의 크기는 백여 명을 수용하기 충분할 정도입니다. 주인님."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삼백 이상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몇 채 더 지어."
"네? 그융크 노예병은 고작 쉰 명인데요…?"
"따로 생각한 바가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베니엘은 이곳에 쉰 명의 병력만 배치할 생각은 없었다. 더 많은 병력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퀵포우는 더 묻지 않고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찍찍!"
병영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융크들의 거주지답게 호수의 물을 끌어 올 수 있게 지어졌고, 안에는 놈들이 휴식할 수 있게 돌로 만든 욕조가 많이 배치됐다.
베니엘은 남작성과 섬을 자주 오가며 진행 과정을 살폈다.
그러던 중, 호위대장 쿠르신에게서 소식이 당도했다.
"뭐라? 황금팔 작업이 끝났다는 건가?"
"네, 치안관님."
소식은 가져온 이는 다시 호위병에 합류한 바니카말. 그는 분대장 직을 맡고 있는 자였다.
"알겠어. 가보자고."
바니카말과 함께 가병들의 연무장으로 가보니 이미 호위대장 쿠르신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구경꾼들이 바글거렸다.
지켜보는 자들은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세상에! 저게 의수라고?"
"진짜 팔과 똑같은데?"
"마치 살로 만들어진 팔 같잖아?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기계인데?"
"드워프 왕의 솜씨가 대단하군!"
그때 베니엘이 도착한 걸 본 눈치 빠른 가병 하나가 슬쩍 운을 뗐다.
"저걸 구해온 도련님이 더 대단하지. 안 그래?"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크 엘프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흡…!'
'빠르군! 이 타이밍에 벌써?'
상황을 눈치챈 자들이 서로 질세라 아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드래곤을 무찌르고! 섀도우 위자드를 박살 낸 도련님이 아니신가!"
"가히 가문의 앞날이 밝구만!"
"아아, 나도 그분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아주 속이 뻔히 보이는 상습적인 찬양, 기습적인 숭배였다. 베니엘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켜봐라. 쿠르신을 만나보게."
가병들이 길을 길을 터주자 베니엘은 쿠르신에게 향했다.
"맘에 드나 보군?"
쿠르신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이 완고한 사내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떠오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네, 놀랍도록 잘 작동합니다. 더불어 근력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늘어났습니다."
당연한 얘기다. 저 드워프 왕의 황금팔은 힘 스탯을 대폭 추가해 주니까. 심지어 체력을 보충해주고, 생명력을 재생해주기도 한다. 가히 비보라 할 만했다.
"이런 근력이라면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영역까지 개척해 줄 것 같군요. 심지어 단단하기까지 해서 방어에도 유리합니다. 마치 건틀렛을 끼고 있는 것처럼 칼날을 막거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역시 검에 매료된 자답게 황금팔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전투 기술에 흥분한 기색이었다.
"앞으로 더욱 강해지겠군. 쿠르신."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도련님."
한창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인 그때, 갑자기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흥! 그래봐야 골렘 팔 같은 거 아닌가? 그딴 거로 너무 기대가 큰 거 같은데. 호호호홋!"
미성이긴 하지만 날카롭고 상대의 신경을 긁은 듯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버럭 화를 내며 닥치라고 하지 못했다. 오히려 용맹한 가병들이 사색이 됐다.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미치광이 대마법사인, 베니엘의 막내 고모 리리나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껏 생체 실험을 빌미로 저승으로 보내버린 가병이 한둘이 아니었다. 남작이 대노하지 않았다면 그런 실험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을 터였다.
리리나는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아름다운 금발을 한껏 흩날리며 나타났다.
"푸풋! 드워프 왕의 얘기는 고리타분한 옛 전설이나 다름없다고. 그런 거로 신기술을 이길 수 있겠어?"
막내 고모 리리나가 어쩐지 비웃는 듯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는 베니엘의 앞에 섰다.
손윗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딱밤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리리나 고모. 물론 고모께서 보시기엔 부족할지 모르지만...."
"됐어! 그것보다 한번 겨뤄볼래?"
아니, 다짜고짜 이 무슨 뚱딴지같은 제안이란 말인가?
겨루긴 뭐랑 겨룬다고?
베니엘이 미간을 좁히던 그때 리리나가 뒤쪽으로 손짓을 했다.
"이쪽! 이쪽으로!"
그와 함께 인파의 벽 너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의 등장만으로 가병들이 일제히 움찍하며 한 걸음씩 물러날 정도였다.
베니엘 역시 눈이 커지긴 마찬가지였다.
"드랄두…!"
이전에 베니엘과의 재판 결투에서 패해 사망한, 검은 요새의 사령관 드랄두가 기계 언데드화의 과정을 마치고 나타났던 것이다.
마치 영안실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와 언데드 특유의 섬뜩한 기운이 지켜보는 자들에게 절로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령관님 맞지…?"
"그, 그렇군. 한데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히이익!"
가병들은 아주 질겁했다.
비록 지저인들이 언데드가 익숙하다지만, 한때 마스터급이었던 자의 변모에 다들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효과적인 굴종을 위해 '기계화'를 거친 드랄두의 외형은 많이 변해 있었다.
코와 입 부분은 철가면처럼 쇠가 덮여 있었고, 눈 한쪽은 귀신과도 같은 붉은 빛의 의안이 자리했다.
또한 몸통의 반절은 기계였다. 상반신의 일부는 피부가 벗겨져 구릿빛 금속으로 만든 골격이 훤히 보였다.
한때 따뜻한 피가 흘렀던 동맥은 웬 고무관 같은 거로 대체돼 끈적이는 오일이 흘렀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관과 나사가 몸 곳곳에 꽂혀 있었다.
이제 그는 누가 봐도 명예로운 검객이 아니라 악몽에서 기어 나온 듯한 괴물과 같은 형체였다.
하지만 막내 고모 리리나는 이 흉측한 외형의 창작물이 몹시도 사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떠벌려댔다.
"보라고 봐! 이 멍청한 칼잡이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이 정도면 우리 오라버니께서도 혁신적인 기계화에 대해서 대폭 지원을 늘려주겠지! 꺄하핫!"
리리나는 가문의 검객들이 지나치게 야심만만하다 여겼고, 그냥 죽여서 기계 언데드로 바꿔버리자는 입장이었다.
남작은 그래서야 검객 본래의 힘을 못 끌어낸다고 반대했다. 이에 리리나는 자신의 창작물로 반박에 나선 것이었다.
그녀는 대뜸 호위대장 쿠르신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어때? 멍청한 조카야. 네가 구해온 황금팔이란 고철덩이와 내 세련된 기계 언데드가 서로 대결을 해보는 건?"
"뭐라고요?"
"농담하는 게 아니란다! 이 대결로 누가 더 우월한지, 어떤 방식이 정답인지 가리자는 거지!"
베니엘은 바로 거절했다.
"이미 황금팔에 작은 흠결도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굳이 불필요한 대결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에 리리나가 악동 같이 웃어댔다.
"크큭!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단다. 어차피 그 돌대가리에서 나오는 대답은 뻔하니까!"
"...아, 그러십니까?"
오리지널과 다르게 자신이 지략가라 여기는 베니엘은 그 얘기에 살짝 노기가 치밀었다.
리리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제안해왔다.
"물론 이런 승부에 대가가 있어야겠지! 그래야 너도 응할 생각이 들 거고."
"조건이 뭡니까?"
대가라는 말은 베니엘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71화
황금팔의 검객 (5)
'솔직히 대가만 확실하다면 이 뻔한 수작질에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뭣보다 리리나는 현재 자기 뜻대로 베니엘을 휘두르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베니엘은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변함없이 마법 말고는 서툴군요. 막내 고모. 크흐흐.'
하면 저쪽 뜻대로 놀아나는 척하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쳐줄 수도 있을 터.
베니엘은 거만하게 콧대를 세우고 있는 리리나의 태도가 기꺼웠다.
"일단 네가 졌을 때부터 이야기 하자고! 돌대가리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그렇게 될 테니까!"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패배 후에 네가 지불해야 되는 대가는 간단해! 해부대 위에서 나랑 둘이서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는 거지!"
세상에 그보다 끔찍한 일도 없을 거다.
리리나는 베니엘의 가슴팍을 열어 심장을 꺼낸 뒤, 그 안에 깃든 순순한 마력에 흥분해 헐떡댈 테니까. 베니엘은 조악한 마취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그 꼴을 봐야 하겠지.
'절대로 사절이다.'
베니엘의 머릿속에 과거 그 망할 해부대에 잡혀갔던 일이 떠올랐다. 오리지널의 기억이었으나 마치 자기가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당시 베니엘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는데, 저 미친 여자는 깔깔 웃으며 그 비명이 듣기 좋다고 했다.
뭔가 발전하고, 일이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라나? 다시는 그 같은 꼴을 다시 겪을 생각은 없었다.
"반대로 제가 이기면 뭘 얻습니까? 리리나 고모."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해주긴 해야겠네! 간단해. 해부대 위에 반대로 날 눕힐 수 있다고! 네가 원하는 차림으로 말이야. 하으응…?"
리리나는 어디서 배운 건지 묘한 콧소리를 냈다. 자기 딴에는 매혹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것 같았지만 상당히 어설프고 부자연스러웠다.
아니, 왜 그런 소리를 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뭣보다 베니엘은 리리나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저런 행동이 더욱 어처구니 없었다.
사실 리리나의 화려한 외모를 보면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원래 그녀는 샌님에 골방지기, 음침녀였다.
리리나가 마치 만개한 꽃처럼 피어난 건 대마법사로 일가를 이룬 이후.
그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달랐다.
당시 겉모습은 뭐랄까….
지구로 치면 국가고시에 번번이 낙방해 피폐해진 장수생 같다고 할까?
무슨 이불 같이 후줄근하고 냄새나는 로브를 걸치고는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채, 혼자 마법 수식만 중얼중얼거리고 다녔다.
심지어 잘 씻지도 않아서 냄새가 꾸리꾸리하고, 심지어 머리칼 사이에서 작은 버섯이 자란 일까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가히 환골탈태 수준.
어쩌면 지금 외모에 집착하는 건 당시 일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리리나의 검은 드레스에는 리본이 가득했고, 곳곳에 반짝이며 찰랑거리는 장신구가 매달려 있었다.
또한 보통의 다크 엘프에게선 볼 수 없는 화려한 금발은 모두의 눈길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그리고 리리나는 그런 시선을 한껏 즐기곤 했다.
하지만 오리지널의 기억을 그대로 이어받은 베니엘에겐 리리나는 여전히 그 당시의 음침녀로만 보였다.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사실 예전이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만 반응했고, 남이 뭘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 그것참, 별로군요."
이에 리리나는 당혹해했다.
"아니, 왜? 대마법사에 이른 내 마력, 궁금하지 않아? 원하는 만큼 이 육체를 파헤쳐볼 수 있을 텐데?"
"거절하겠습니다."
베니엘은 대마법사의 신체가 어떤 해부학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직접 메스를 들고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막내 고모와의 데이트란 그저 머리 아픈 소독약 냄새와 피의 끈적거림, 고통스러운 비명이 가득한 시간에 불과했으니까.
그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제가 승리한다면 드랄두를 넘겨주십시오."
"뭐라고!"
리리나가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자 드레스에 매달린 장신구가 일제히 짤랑거렸다.
베니엘에겐 드랄두가 꼭 필요했다. 나중에 있을 집안싸움만이 아니라도, 몇 달 안에 드래곤 마그라스를 사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을 굴복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강자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좋았다.
"흐으음…!"
리리나는 표정을 찡그렸다. 많은 공을 들인 드랄두를 대가로 내놓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반드시 베니엘과 이 시합을 성사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실 리리나가 공연히 와서 시비를 터는 건 아니다.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리리나는 가문의 감옥에 갇혀 있는 서열 9위 검객 발토리스를 두 번째 기계 언데드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버섯 농장에서 베니엘에게 패한 뒤 지하 감옥에 무기한 처박힌 신세. 리리나는 이자를 아예 기계 언데드로 만들어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남작은 난색을 보였다. 기계 언데드라는 아직 검증받지 못한 수법으로 멀쩡한 검객 하나를 날려먹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실제로 리리나의 수술대 위에서 저승길로 간 자들이 많았다.
그럴 바에는 우시드라의 주장처럼 충분히 벌을 주고 굴복시켜 다시 써먹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여 남작은 발토리스를 회유하자는 첫째 동생 우시드라의 주장과 아예 기계 언데드로 만들자는 막내 동생 리리나의 주장 사이에서 고민 중이었다.
그러니 리리나는 자신의 야심만만한 프로젝트를 계속하기 위해, 남작에게 첫 번째 작업물인 드랄두의 우수성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처지였다.
다만, 어떤 식으로 증명할지가 문제였는데 마침 좋은 게 나타났던 것이다.
베니엘은 속으로 갈등하고 있는 리리나를 보며 슬며시 물었다.
"왜 대답이 없으신지 모르겠군요. 설마 쫄은 건 아니죠?"
참고로 "쫄?"이라 묻는 건 리리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걸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여기고 쉽게 낚이곤 했다.
"하아? 뭐라고!"
"아니, 그렇잖습니까? 어차피 높은 확률로 승리할 거라 자신하면서도 선뜻 대답을 못 하니, 이 조카가 불측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과연 리리나는 간단히 넘어왔다.
"카핫…! 카하하핫! 요즘 좀 잘 나가더니 주둥이가 세졌다? 응? 예전에는 내 품에서 찍소리도 못 하고 쥐새끼마냥 파들파들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사랑하는 내 돌대가리 조카야?"
하지만 베니엘은 여유만만한 표정일 따름이다.
"하면 거래가 성립한 거로 여겨도 되겠습니까? 제가 지면 해부대에서 하룻밤. 고모가 지면 드랄두를 넘겨주는 것. 이 조건대로 받으시겠습니까?"
"좋아! 해보자고!"
리리나는 성대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면 이렇게 쉬울 수가!'
베니엘은 마법 실험의 부작용으로 중학생 정도의 외형을 한 리리나가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뭣보다 그녀는 좋은 거래 상대였다. 왜냐하면 자기 말은 절대로 지키는 성미 때문. 리리나에게 약속이란 마치 틀리면 안 되는 마법 주문처럼 신성한 것이었다.
마법을 발동하는 도중에 주문이 틀리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리리나는 약속을 어기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문제를 만들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대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드랄두는 충분히 차지할 수 있을 터.
'아이러니하게도 가문에서 가장 미친 여자가 가장 믿을 만하단 말이야.'
베니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이번 대결이 영지 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뭣보다 목격자가 많았다. 가병들은 흥분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걸 과장해서 떠들어댔고, 이 소문은 이웃 영지까지 퍼져나갈 정도였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주인인 나르다리온 남작도 대번에 관심을 보였다.
"호? 그런 대결이 벌어진다고? 재밌겠군. 나 역시 기계 언데드와 황금팔의 효용이 궁금하던 차였다."
둘 다 대단한 거 같긴 한데 실전에서 얼마나 쓸모 있을지가 미지수였는데, 마침 딱 붙는다고 한다. 남작 입장에서 기대감이 피어오를 수밖에.
"대결을 참관하겠다."
어느새 남작을 비롯해 수뇌부가 다 같이 구경하자는 흐름이 됐다. 여기에 더해 가병들 역시 몰려들 기세라 남작은 한 가지 결정을 추가했다.
"이참에 검투 대회를 열겠다. 슬슬 한판 벌일 때가 됐지."
나이트쉐이드는 검객을 우대한다. 오죽하면 기본적인 권력 서열 외에 검객 서열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 대회는 서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다. 당연히 가문의 검객들이 들썩였다.
"기회로군! 이번 기회에 서열을 올려 더 높은 검법을 받아내겠다."
"크흠…! 최근 빈객임에도 오래간 가문에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스스로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 대회가 열린다니 내 그간 창안한 기예를 선보이겠다."
"흥! 자네는 무위도식하는 게 눈치가 보여서 나서려는 거겠지! 서열 하나만 올려도 앞으로 삼십 년은 놀고먹을 테니까!"
"커흠! 사람 무슨 말을 그렇게!"
마침 시기도 적당했다.
지난 오크의 침공 이후 한동안 평화로웠던지라 다들 몸이 들썩이던 상황. 이럴 때 칼부림도 하고 피도 튀어줘야 야만적인 싸움꾼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법이다.
이 소식에 영지민까지 환호했다.
"남작께서 우리의 구경도 허하신다는군!"
"뭐야! 잘 됐군! 가자고!"
"마침 서열 순위의 변동을 맞추는 내기가 벌어질 거라네. 크게 한몫 잡을 기회야!"
"그래도 메인 이벤트는 황금팔과 기계 언데드의 대결이지! 나는 그게 기대돼 벌써부터 잠들 수가 없네."
"아니… 자네는 좀비라 잠을 안 자는 거 아닌가?"
나이트쉐이드 영지는 한바탕 축제 분위기에 돌입했다. 검투는 일주일 뒤로 예정됐고, 모두가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와 달리 베니엘과 황금팔의 주인 쿠르신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쉽지 않은 대결이 될 겁니다."
쿠르신의 말에 베니엘은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다. 막내 고모가 여러 가지로 허당이긴 해도 가진 재주만은 진짜니까. 분명 기계 언데드화 된 드랄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겠지."
"그나마 의지의 사용이 금지된 게 다행입니다."
마스터급과 프로보스트급의 대결이니 핸디캡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밸런스 조절을 위해 드랄두 쪽은 의지의 사용이 금지됐다. 만약 의지를 쓰면 드랄두의 낙승이 될 테니 성과를 검증한다는 의미가 없어질 터.
"맞아. 하나 그게 아니더라도 이쪽도 해볼 만하다. 황금팔이 예상외로 강력하니까."
드워프 왕의 황금팔은 가공할 완력을 제공해 준다. 거기에 더해 방어력 향상에도 탁월했다.
이미 황금팔이 얼마나 단단한지 몇 차례 실험이 있었다.
매우 특수한 합금으로 된 이 황금팔은 심지어 베니엘의 펜테즈멀 블레이드까지 막아냈다.
이 모습에 베니엘은 물론이고 쿠르신조차 경악했다. 만약 베니엘이 쿠르신을 쓰러뜨리고자 한다면 팔을 피해 다른 부분을 베어버려야 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더해 황금팔에는 비장의 기술이 숨겨져 있지. 그것만 있으면 승부는 해볼 만하다."
***
대결까지 일주일은 검투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베니엘은 직접 쿠르신의 지도에 나섰다.
"마침 좋은 기술을 알고 있다. 드랄두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거다."
드랄두는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혈통이나 영지의 고위직만 익힐 수 있는 A등급 검법 옵시디안 오버츄어를 전수받았다.
이 검법은 남작의 솜씨로 완성된 기예였기에 파훼하기란 몹시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베니엘에게 답이 있었다.
바로, 자칭 남작 나르다리온의 대적자이자 평생의 라이벌인 검객 주르도가 남긴 S등급 검법 네더 블레이드 때문이다.
과거 베니엘은 검은 요새의 창고에서 그의 값진 기예를 얻었다.
'물론 주르도의 기풍이 느껴지는 핵심 기술을 전수할 순 없지. 남작이 바로 알아챌 테니까. 하지만 몇 가지 잔재주만 전수해도 드랄두를 난처하게 만들긴 충분하다.'
베니엘에게 주르도는 삭힌 청어를 좋아했던 취향이 별난 검객 정도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는 본가부터 나르다리온 남작과 쌍벽을 이루던 자다.
그 장렬한 마지막 싸움 때는 영지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며칠 동안 쉬지도 않고 남작과 싸웠을 정도였다.
일세의 천재인 남작을 거기까지 몰아붙였다는 것만 봐도 주르도가 얼마나 대단한 자였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기예를 전수하겠다. 쿠르신. 너는 각별한 각오로 임하라."
"물론입니다. 도련님."
그렇게 바쁜 일주일이 지나가고.
마침내 검투 대회의 당일이 됐다.
72화
기계 언데드 (1)
검투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이미 만원이었다. 온갖 부류가 피가 튀는 이 짜릿한 구경거리를 찾아 몰려들었기에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좌판을 연 상인들이었다.
"자자, 소금으로 간을 한 왕귀뚜라미입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씹을 때마다 내장이 입에서 터집니다!"
"칠성장애 국수를 먹고 가십쇼! 진액이 아주 녹진합니다! 어제 늦게까지 술 잡수신 분께는 딱!"
"화끈하게 쏘는 곰팡이로 버무린 민달팽이 무침 맛보십시오! 끈적끈적, 입에 넣는 걸 멈출 수가 없어!"
내기를 위해 부산히 움직이는 도박꾼들도 많았다. 그들은 좌판에서 음식을 사 먹으면서도 연신 판돈 얘기를 해댔다.
"자자, 배당 알지? 군말 말고 돈부터 내."
"알았다고. 자신 없는 새끼들, 고자 같은 새끼들, 엄마 젖 더 먹을 새끼들은 얼른얼른 빠지고!"
그 근처에선 장의사 무리들이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오늘은 우리 식구들이 장사하기로 한 거 몰라? 썩 꺼지지?"
"아따, 이거 웃기네. 어찌 너그들만 입이여? 웃기지들 말아. 이 흉악한 거 빼들기 전에?"
각 장의사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이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서로 기 싸움이 한창이었다.
"이 양반아, 가는데 순서 없는데 그렇게 나대면 오늘 칼부림하는 검객들보다 먼저 뒤지는 수가 있어. 몸 안 사려?"
"아야? 간만에 네가 맞는 말을 해버리는구만! 그려, 처맞는 말!"
"뭐라고!"
"더 떠들어 보덜 그래? 그 주둥이는 안 조사지는 줄 아나? 응?"
지하 세계의 장의사란 지구로 치면 고속도로의 렉카랑 비슷했다.
일단 사람이 뒤지면 어디선가 득달같이 나타나서 자기들 관에 넣고 도망가는데, 소정의 비용을 지불해야 장례를 치를 수 있게 시체를 내어주는 놈들이었다.
지구의 상식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나, 이런 짓이 용인받을 수 있는 건 지저의 환경 때문이다. 이곳은 온갖 마법과 저주가 창궐하는 장소다 보니 시체는 자칫하면 언데드로 되살아나 버리는 수가 있었다.
비록 언데드가 도시에 섞여서 살고 있고, 삶의 또 다른 형태로 여기는 자도 없진 않지만 대부분 그들을 혐오했다.
편견 없이 언데드를 대하는 자는 드물다. 상대가 도저히 편견을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하거나, 아니면 생전부터 아는 사이여야 가능했다.
가뜩이나 인권 의식이란 게 없는 지하 세계다. 언데드는 말할 것도 없다. 힘없는 언데드란 물건 취급으로 가히 그 대접이 노예만도 못했다.
이러니 본인이 강자가 아니면 대부분 영면을 원했고, 재빨리 관에 시체를 집어넣고 마법적 처리를 해 언데드화를 막아내는 장의사들은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었다.
물론 득달같이 시체를 훔쳐 가서 거금을 요구하니 그 행태가 몹시도 짜증 나긴 했으나, 필요악이라고 할까?
이런 이유로 장의사들은 활개를 쳤다. 특히 오늘같이 시체가 많이 나올 날에는 더더욱 말이다.
이 다툼은 보다 못한 가병들이 나선 후에나 정리됐다.
"이보쇼들, 거까지만 하시기요!"
"아, 영주님께서 곧 오실 거라니까? 계속 이럴 겁니까?"
아닌 게 아니라, 특별히 마련된 좌대에는 나이트쉐이드의 혈족과 중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뒤 남작이 나타나자 영지민들의 환호성과 함께 검투 대회가 시작됐다.
"와아아아아! 드디어!"
"가라! 우어어어어!"
여기저기 불을 밝혀 사방이 환하게 밝았다. 그와 함께 흥분한 구경꾼들의 소란 탓에, 동굴의 벽면에 비추는 그림자가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곧 첫 번째 시합이 개시됐고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욕설과 고성이 아주 요란했다.
"너는 오늘 뒤졌다!"
"어림없는 소리! 칼끝이 떨리는데?"
한창 시합이 진행되는 이 와중에 베니엘과 호위대장 쿠르신은 안쪽의 대기실에서 이 소음을 듣고 있었다.
"사망자가 여럿 나오겠군요. 쯧…!"
쿠르신은 검투 시합이 불필요한 인명 손실이라 여겼기에 혀를 차고 있었다. 베니엘은 작게 끄덕였다.
"아마 벌써 경기장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을 거다. 생사결이 아니긴 하지만 진검을 들고 싸우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건 단순한 흥분으로 인한 우발적 사고일 수도 있고, 사전에 계획된 비열한 암습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패자는 죽음으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그때 짧은 비명이 밖에서 들려왔다. 곧 이어지는 쩌렁쩌렁한 환호성.
"우아아아!"
또 한 번 승패가 갈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가병들이 부상자를 질질 끌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상처에서 철철 쏟아지는 피 때문에 대기실 바닥에는 마치 붓으로 크게 획 하나를 그은 것 같이 됐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외과 의사는 환자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환자를 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근처의 여인에게 치근덕거렸다.
"부인, 그것보다 이따 같이 식사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저는 남편이 있는데...."
"그게 사랑에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허허!"
가병들은 의사의 그런 태도에 서로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그냥 대기실 구석에 부상자를 대충 던져뒀다.
쿠르신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가여운 자로군요. 혼자 쓸쓸하게 죽어가다니."
베니엘은 신랄한 어조로 대꾸했다.
"의식이 없으니 쓸쓸함을 느끼지 못할 거다. 괜히 오지랖 부릴 생각하지 마라. 쿠르신. 저자는 이미 틀렸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어찌나 죽음에 가깝게 다가갔던지, 저 육체가 데운 차보다도 빨리 식을 것만 같았다.
곧 장의사들이 고용한 심부름꾼겸 염탐꾼 꼬맹이가 그걸 발견하고는 희희낙락해서 제 주인에게 뛰어가자, 둘은 더는 부상자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쿠르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준비해라. 그리고 내가 가르쳐준 반격의 기예를 머릿속으로 되뇌도록."
"알겠습니다."
쿠르신은 노련한 검객이었으므로 베니엘은 잔소리는 거기까지 했다. 둘은 묵묵히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여러 시합이 계속 반복됐고,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베니엘의 지도를 받은 쿠르신의 차례가 됐다.
"입장하시랍니다. 호위대장님."
한 가병의 요청에 쿠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쿠르신이 앞장 섰고, 베니엘은 뒤따랐다. 이번에 베니엘은 마치 시합에 나가는 선수의 코치처럼 참가하게 됐다.
둘은 대기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발적인 환호성과 마주하게 됐다.
"와아아아아! 나왔다!"
"메인 이벤트다! 드디어 왔다고!"
"쿠르신 대장!"
"도련님! 베니엘 도련님!"
사방에 구경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베니엘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몰려왔을 줄이야! 우리 영지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다양한 종족들이 저마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등 난리였다. 수많은 말소리가 섞여서 도무지 다들 뭐라고 외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다들 어떻게든 가까이서 이 등장을 지켜보려고 목을 빼고 발꿈치를 세운 채 서로를 밀고 난리를 부렸다. 게다가 돈까지 많이 걸렸으니 그 열기가 오죽하랴.
"쿠르신 대장이 이긴다!"
"주둥이 여물어! 무조건 리리나 아가씨 쪽의 승리다!"
"네놈이나 닥쳐! 저 황금팔을 보라고!"
검은 갑옷을 입은 가병들이 흥분한 관객들을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이 좌우로 갈라 만든 좁은 길을 따라 베니엘과 쿠르신은 나아갔다.
둘의 반대편에선 막내 고모 리리나와 그녀의 기계 언데드 드랄두가 동시에 나타났다.
당연히 분위기는 더욱 끓어올랐다.
"당신에겐 승리를! 내겐 판돈을!"
"옳다! 옳은 말이다!"
이 모든 게 내려다보이는 훌륭한 단상 위에는 남작이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검은 별을 상징하는 커다란 휘장이 드리워져 영주의 위엄을 과시했다.
남작의 눈빛은 흥미진진해 보였다. 과연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그도 궁금했던 것이다.
이윽고 남작이 손을 들어 올리자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마치 공간 자체를 통제하는 듯한 힘이었다.
"들으라."
남작은 지배자다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가 경청했다.
"오늘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도달했다. 드워프 왕이 만든 옛 기술과 기계 언데드라는 새로운 기술 중 무엇이 더 빼어난지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검투란 뛰어난 문화가 있으니 이 답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진실된 것이란 강하며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작은 베니엘과 리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투사의 주인들이여. 승리가 모든 것의 대답이다! 나 나르다리온이 공증하니 오늘 패자는 승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이다. 자, 이제 검투를 시작하라!"
남작이 개시를 알리자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아아!"
"시작이다!"
"제발 이겨! 집까지 저당 잡혔다고! 가즈아아!"
베니엘은 말없이 쿠르신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쿠르신은 작게 끄덕이고는 시합장으로 나섰다.
곧 반대편에서도 기계 언데드 드랄두가 기괴하게 몸을 꺾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시체의 차가운 몸을 예열하는 중이라 등 뒤에서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치익! 칙!
드랄두의 뒤에 자리 잡은 고모 리리나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껏 비웃는 얼굴로 베니엘을 비웃어댔다.
"돌대가리 조카야! 저런 구닥다리 의수로 감히 내 걸작을 상대할 생각인 거니? 아아, 어쩌면 이리 순진할 정도로 멍청할까! 푸푸풋!"
한껏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대는 리리나의 모습에 베니엘은 침착하게 응수했다.
"고모께선 기계에는 정통하나 검술에는 무지합니다. 그것이 승패를 가를 것입니다."
이 말에 리리나는 곧장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놈의 검술! 검술! 검술! 우리 가문은 모두 그 하잘것없는 잡기에 정신이 나가 있지! 너조차 예외가 아니라니 나는 정말이지 슬프다고!"
나이트쉐이드를 번듯한 마법사 가문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리리나에게 검술 타령처럼 듣기 싫은 소리도 없었다.
리리나를 이를 갈며 사납게 외쳤다.
"드랄두! 가서 네 우수함을 보여줘! 기계는 감정이 없고, 언데드는 감정을 초월한다! 너는 무한한 인내와 내구도를 가졌다고!"
"…알겠습니다. 주인이시여."
드랄두는 끄덕이더니 안광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쿠르신 역시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았다.
이건 승자를 예측하기 어려운 싸움이었으나 대체로 드랄두의 승리를 점치는 자들이 많았다.
"아무리 의지를 금지했어도 마스터와 프로보스트의 싸움이오. 결과가 뻔하지 않소이까?"
"확실히 드랄두가 정배긴 하지. 하지만 그래서 내기란 재밌는 법."
"멍청하구려. 역배에 걸면 결국 패가망신 아니오?"
"흥! 두고 봐야 알일! 내일 길바닥에 나 앉아 구걸하는 게 누굴지 봅시다!"
이런 수많은 기대와 시선 속에서 곧장 격돌이 벌어졌다.
카앙! 캉! 캉!
요란한 불꽃과 함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싸움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양쪽 다 전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격전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죽이려고 작정한 거 아냐?"
"아니, 그래도 일단 시합이라 서로 눈치 좀 보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사망자가 나오면 어디까지나 우발적 사고거나 정당방위여야 했다. 지금처럼 대놓고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시합은 대단히 격했다.
아니, 누가 봐도 이건 시합이 아니라 생사결이었다.
"문외한이 봐도 알겠네. 이건 정말로 죽이려는 거야!"
"괘, 괜찮은 건가? 남작님께선…?"
한데 나르다리온 남작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면 문제없는 것이다.
시합은 계속됐다.
검을 든 쿠르신은 사납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 당신의 꼴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제가 안식을 안겨드리겠습니다!"
매사 차분한 그답지 않게 흥분한 기색이었다. 현재 그는 드랄두의 모습에 참담함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랬다. 하여 쿠르신은 진심으로 드랄두를 죽여서 구해줘야 한다고 믿었다.
"과거, 전장에서 당신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에 드랄두는 냉정히 대꾸했다.
"네 행동은 시합이란 범위를 넘어섰다. 나 역시 주인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같은 단계로 대응하겠다."
각자의 입장이 이러니 검투는 자연히 생사결이 될 수밖에.
카앙! 캉―!
현란하고 위험천만한 검격이 이어졌고, 지켜보던 자들은 이제 쿠르신이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계 언데드가 하나 더 탄생하는 거 아닌가?"
"이거 참…. 시합이 아니라 생사결로 가면 급의 차이를 뛰어넘기 더 힘들 텐데?"
한데 모두의 그런 예상과 다르게, 점점 의외의 결과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뭐야? 드랄두가 밀리잖아?"
"음? 뭐야!"
73화
기계 언데드 (2)
***
이런 상황을 나이트쉐이드의 혈족들 역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외로군. 드랄두가 밀리다니?"
"아직 적당히 간을 보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만?"
"크흠...."
이때 남작이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누가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보겠나?"
몰라서 던지는 질문은 아닐 터. 그도 그럴 게, 남작의 시선은 가문의 인물 중 젊은이들을 향해 있었다. 명백히 자질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태도였다.
나이트쉐이드의 초기에는 남작과 여동생 셋 정도밖에 없었지만 가문이 성세를 거듭할수록 여러 혈족이 합류했다. 현재는 꽤나 대가족인 된 상황으로, 그 규모가 어지간한 백작가 못지않았다.
거기에 더해 가신들의 자식 역시 앞으로 가문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싶어 했으니, 이들이 모두 미래의 동량이라 할 수 있었다.
가주인 남작의 입장에선 틈틈이 시험해 보고 옥석을 가리는 게 당연했다.
"...."
"...."
하지만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주변 어른들의 독촉 어린 눈빛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무래도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 검술 천재인 남작 앞에서 검투에 관해 논한다는 게 심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여기서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어….'
대부분 그런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만 봤다. 하지만 유난히 스스로 실력에 자신이 있고, 야심만만한 자가 하나 있었다.
바로 우시드라의 둘째딸 페샤디아였다.
"제가 답해보겠습니다. 가주님."
페샤디아는 어머니를 똑 빼닮아 아주 도도한 인상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으나 조금만 지나면 그 용모가 만개해 제국 여기저기 알려질 듯했다.
"호, 말해 보아라. 조카야."
남작은 기껍다는 듯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 문제는 신체의 유연함과 균형입니다. 저 기계 언데드의 육체는 드랄두가 가진 실력을 다 끌어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듣던 남작이 질문했다.
"하지만 몸의 구동은 제법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말이다. 리리나 역시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을 터."
"물론 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작은이모가 검객의 움직임에 대해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언뜻 구동이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나 싸우는 자를 위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지요."
맞는 지적이었다. 남작은 작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계속해 보거라."
이에 자신감을 얻은 페샤디아가 신이 나 더욱 설명했다.
"반면 저 황금팔은 놀랍도록 그 움직임이 훌륭합니다. 단순히 유연한 게 아니라, 가동하는 모든 게 검객을 위한 배려로 가득합니다. 특히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은 가히 놀랍습니다."
검술을 펼침에 있어 엄지손가락은 굉장히 중요하다. 롱소드의 뒷날 공격을 할 때, 엄지손가락으로 검의 면을 받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게 많다. 가령 보법을 밟을 때 앞꿈치에 힘을 주고 움직일지, 뒤꿈치에 힘을 주고 움직일지에 관한 문제 같은 것 말이다.
문외한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 모르나 검객에겐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만한 중대사안이었다.
당연히 기계를 만드는 자가 이런 디테일에 대해 알고,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리리나는 이 부분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남작은 페샤디아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끄덕였다.
"아주 잘 봤구나. 훌륭하다. 내가 보니 저 기물을 창시한 자는 필시 무예에 깊은 소양이 있던 게 틀림없다. 그 구동이 싸우는 방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야 당연하다. 황금팔을 만든 드워프 왕은 대단한 전사였으니까. 본인 역시 검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가주님."
남작의 칭찬에 페샤디아는 뿌듯한 얼굴이 됐다. 그녀의 고운 턱선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지켜보고 있던 우시드라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이 됐다.
하지만 남작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만 한심하고 부족한 답이기도 하군."
그 말과 함께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나이트쉐이드 가문에서 남작이 무언가를 질책한다는 건 죽음보다도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 저, 저기 그것이…."
당황한 페샤디아는 어버버, 거렸다. 남작은 그러거나 말거나 설명을 해줬다.
"지금 저 싸움을 보거라. 쿠르신이 계속 반격을 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그 기술 속에 섞여 있는 독특한 기풍을 읽을 수 없단 말인가?"
남작은 쿠르신의 검술에 호기심을 느꼈다.
'크고 굵직한 움직임이구나. 분명 우리 가문의 기예가 아니거늘… 언제 익힌 거지?'
분명 스스로 창안한 것은 아닐 터. 아무리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라곤 하나 아직 프로보스트에 불과한 호위대장이다.
몇 가지 독자적인 기술을 만들 수야 있겠지만 하나의 기풍을 확립하기인 무리였다. 그건 마스터라 불릴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만 허락된 영광이었다.
한데 지금 쿠르신이 펼치는 검법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검술을 상대로 상성상 우위를 발휘하고 있었으니 남작의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하지만 그는 경계심까진 느끼진 않았다.
'재밌긴 해도 그뿐이다.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군. 드랄두가 반쪽짜리 마스터라 그렇지 제대로 가문의 검법을 익힌 자라면 저리 쩔쩔매진 않겠어.'
베니엘이 미리 자신의 천재성을 이용해 네더 블레이드의 기술을 변형시키고, 열화시킨 전략은 아주 유효하게 먹혔다.
남작은 저 검술이 자신의 숙적이었던 주르도의 네더 블레이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엔 너무 하찮았으니까.
만약 그 검법의 잔재가 눈앞에 나타났다면 매사 수사자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남작이라도 가만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물론 네 답은 틀리지 않다. 조카야. 하지만 지금 호위대장의 검이 그려내는 새로운 기풍을 읽어내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쯧!"
남작이 가볍게 혀를 차자 페샤디아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한데 남작의 신랄함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네 검술이 조금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면 저걸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너는 역시 베니엘만 못하구나."
그 말에 페샤디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녀는 치욕감에 전신을 덜덜 떨어댔다.
"아윽...!"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우시드라가 옆에 있던 둘째 남편 엘렉카에를 팔꿈치로 찔렀다. 당장 뭐라도 해보라는 신호였다.
엘렉카에는 절대로 나서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껴들다가는 감히 가주에게 말참견을 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우시드라가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애써 용기를 쥐어짜내서 입을 열었다.
"가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제 부족한 딸자식의 적극성만은 평가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가주는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선선히 고개까지 끄덕였다.
"맞다. 적어도 네 딸이 여기 쭉정이들 중에선 제일 쓸모가 있겠구나."
그 평가에 모인 모두가 알게 됐다. 페샤디아의 대답이 남작은 완벽하게 만족시키진 못했으나, 그래로 여기 모인 젊은 세대 중에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을 말이다.
남작의 말에는 허언이 없었기에 차후 새로운 직위를 맡기거나, 중요한 임무를 내릴 일이 생긴다면 분명 여기 누구보다도 페샤디아를 고려하게 될 터였다.
그제야 죽어가던 페샤디아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가주님!"
"그래. 알겠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남작은 다시 검투로 시선을 돌렸고, 여기저기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들이 나왔다. 혹여나 다른 질문이 나올까 두려웠던 가문의 젊은이들이었다.
"페쉬…."
부친인 엘렉카에는 다행이라는 듯 딸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매정하게 그걸 쳐냈다.
탁!
경멸하는 부친으로부터 무언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모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면박을 줬다.
"더는 날 페쉬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페쉬'란 건 페샤디아의 아명이었다. 그 이름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으나 페샤디아는 도리어 질겁했다. 그녀는 고압적으로 축제가 벌어지는 곳의 밖을 가리켰다
"자기 일을 다 못한 자는 검투를 즐길 자격이 없어. 쓸데없이 어슬렁거리지 말고 가서 할 일이나 해."
원래부터 심했던 페샤디아의 짜증이 최근 더욱 커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엘렉카에가 베니엘에게 기연을 선사했던 신전 지대의 발굴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솔직히 엘렉카에는 억울했다. 그는 갈수록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개 같이 열심히 일했지만 무너진 신전 지대에는 파란 진액 버섯 말고는 없었다.
그게 엘렉카에의 잘못도 아님에도 도리어 무능하다고 비난받고 있었다. 지금 딸이 말하는 '할 일'이란 것도 그 아무것도 없는 신전을 마저 뒤지란 소리였다.
엘렉카에는 모두와 함께 검투를 즐기지 못하고 가망도 없는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데 비애감을 느꼈다. 그는 혹여나 아내인 우시드라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녀를 쳐다봤다.
하나 우시드라는 최근 총애하기 시작한 세 번째 남편을 품에 끼고 한껏 검투를 즐기고 있었다. 아까는 엘렉카에가 남작에게 밉보일지도 모를 일을 시키더니 이젠 눈길도 안 줬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세 번째 남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러자 엘렉카에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아, 알았다. 그리해 보마."
페샤디아는 대답도 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엘렉카에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천천히 검투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꼈다.
아니, 돕기는커녕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저 뒤쪽에서 들으라는 듯 소곤거리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완전히 버림받는 것도 금방이겠군요."
"호호, 꼴 좋네요. 우시드라 님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날뛰더니."
"애초에 얼굴 빼곤 별 볼 일 없는 자였으니 당연한 말로겠지요."
엘렉카에는 절로 이가 갈렸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되돌아가 저들에게 버럭 소리라도 지를 그런 용기는 없었다.
그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혹시 모르잖아? 다시 잘 찾아보면 정말로 그 신전의 폐허에서 뭔가 더 남아 있을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 검투장에서 엘렉카에 못지않게 절망감에 빠져 있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베니엘의 막내 고모인 리리나였다.
"하아? 말도 안 돼! 왜 밀리는 거야? 드랄두, 이 멍청한 새끼야! 쓸모없는 새끼! 동굴 벽에 슨 곰팡이 같은 새끼!"
분명 자신의 계산으로는 질 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상대인 쿠르신은 프로보스트급. 반면 드랄두는 반푼이라도 엄연히 마스터다.
거기에 더해 기계 언데드 특유의 강함까지 얻게 됐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금속으로 보강돼 내구도가 높은 신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 몸의 가동성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애초에 마법사인 그녀가 보기에 검술이란 보잘것없는 잡기(雜技). 사용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따른다 해도 어차피 큰 차이는 없을 터였다.
"대체 왜! 왜야!"
이대론 자신의 계획이 망가질 게 틀림없다.
"안 돼! 안 된다고!"
오늘 여기서 기계 언데드의 강력함을 선보여야 한다. 그리하여 남작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서열 7위 검객 발토리스의 개조를 허락받을 작정이었다.
그 강력한 뱀파이어 검객은 신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놈을 해부대에서 해체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 보면 기계 언데드의 기술도 한층 가열찬 발전을 하게 될 터.
한데 그 위대한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지게 생긴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리리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는 어릴 때부터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심한 결핍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그녀는 기분이 좋을 때는 엄지를 쪽쪽 빨고, 불안할 때는 엄지손톱을 물어뜯곤 했던 것이다. 지금은 손톱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리리나는 다시 소리쳤다.
"드랄두! 왜 몰아붙이지 못하는 거냐고! 이 재룟값도 못 하는 버러지야!"
그때 검투 중 상대를 간신히 밀어내고 짧은 여유가 생긴 드랄두가 답했다.
"가동성이 제한됨. 이대로 승리할 수 없음."
리리나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작했다.
"닥쳐! 닥치라고! 그깟 하잘것없는 기술 따위가 뭔데! 몸도 튼튼하고 지치지 않잖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 거야!"
리리나의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드랄두는 성실히 답했다.
"의지의 사용을 허가 바람. 그것으로 승리할 수 있음."
곧 다시 앞에서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격전이 벌어졌다.
캉! 카앙! 캉!
리리나는 고민에 빠졌다.
"의지? 의지라고…!"
분명히 의지의 사용은 규칙으로 금지돼 있다. 하지만 리리나는 고민했다.
패배가 나은가?
규칙을 어기는 게 나은가?
분명 이기면 장땡이란 말도 있다. 리리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혼자 미친 여자처럼 빠르게 중얼댔다. 자문자답하는 게, 마치 여럿이서 의논하는 걸 흉내내는 것 같았다.
"이, 일단 의지를 쓰고 오작동이라고 변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그래! 맞아!"
"그게 기계 언데드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아!"
"그렇겠지? 현명해! 이성적으로 판단하자고!"
"그래! 우리는 마법사니까! 아핫! 아하하핫!"
지하에서 약하다는 건 죄악이다. 그렇다면 비겁한 게 차라리 훨씬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74화
기계 언데드 (3)
하지만 리리나는 곧장 드랄두에게 의지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겁하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의지란 게 영 미심쩍었기 때문이다.
'기왕 하려면 확실히 해야 해. 무조건 이길 수 있도록 말이지! 그런데 그 의지 따위를 동원한다고 승리할 수 있는 건가?'
대마법사인 리리나의 시각에서 보자면 검객의 의지는 그 칼쟁이들에게서 유일하게 볼만한 부분이긴 했다. 놀랍게도 그 돌대가리들이 마력을 다루는 기술을 궁구해낸 결과니 말이다.
하나 그래 봐야 결국 마법이란 위대한 학문의 하위 호환이 아닌가?
'의지란 거, 검객의 뜻에 따라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지? 뭐, 그런 어설프고 불확실한 능력이 다 있담?'
게다가 검객은 의지에 대해 제대로 된 학문적 체계를 구축한 것도 아니다. 대화를 해봐도 마음을 칼날 같이 벼린다는 등 뜬구름 잡는 얘기만 했다.
이러니 리리나가 보기에 의지는 마법이라 불리는 위대한 정학(正學)과는 비교가 불가한 천박한 배움에 불과했다.
당연히 머뭇거릴 수밖에.
'아예 내가 드랄두 놈에게 마법을 걸어줄까?'
본인이 직접 나서면 가장 확실하긴 할 터다. 문제는 아무리 자신에게 너그럽게 생각하려 해도 그건 선을 많이 넘은 것 같단 사실. 매사 일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리리나지만, 그 정도까지 하기에는 저기 상석에 앉은 오라비 남작의 눈치가 보였다.
"끄응...."
리리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드랄두가 다시 외쳤다.
"빠른 결단을! 패배가 임박!"
리리나는 양쪽으로 땋은 금빛 머리칼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진짜!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난다고!"
아무래도 방법이 없었다. 승리를 위해서 그 어설프기 짝에 없는 의지란 것에 기대는 수밖에. 결국 리리나는 낮게 읊조리며 마법을 부렸다.
"드랄두, 기계로 만든 죽은 자이자 나의 권속이여. 여기 주인의 권리로 그대에 속박 하나를 푸노라. 이제 그 의지가 뜻을 갖게 되리라."
평소 경박한 리리나의 말투와 다른 고풍스러운 언어의 주문이었다. 그와 함께 효과가 즉각 나타났다.
"!"
철제 마스크 위로 흐리멍덩했던 드랄두의 눈빛이 일순간 번쩍였다. 제약이 풀려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여파로 드랄두는 맹목적으로 기계처럼 복종하는 대신 얼마간이나마 이지(理智)를 되찾게 됐다.
"빌어먹을…."
드랄두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삽시간에 자신의 현실을 파악한 것이다. 실로 기구한 인생이다 싶었다.
"정신이 드신 겁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일변한 드랄두를 보며 쿠르신이 외쳤다. 하지만 드랄두는 거기 제대로 대꾸해줄 수 없었다.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렸다고 해서 리리나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지금은 명령에 따라 쿠르신을 격파해야 할 뿐. 드랄두는 간신히 쿠르신에게 경고를 해주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의지에 대비하라. 쿠르신."
"아니, 그것은 금지된!"
"규칙에 얽매이는 검객은 승리할 수 없다. 잊었는가?"
그것은 언젠가 전장에서 드랄두가 쿠르신을 구해주고는 한 말이었다. 당시 쿠르신은 명예를 지켜 상대의 항복을 받아줬는데, 이후 포로의 암습 때문에 죽을 뻔했다.
사실 그게 암살을 위한 가짜 항복이었던 탓이다. 드랄두는 이때 쿠르신의 고지식함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기어코 의지를!"
다행히 쿠르신은 드랄두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물론 안다고 해도 그걸 받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크아아압!"
드랄두가 이를 악물며 의지를 발동했다. 제약이 풀리자 되살아난 세 가지 감정. 분노와 증오, 질투심을 기반으로 하는 자주색 에너지체 세 가닥이 쿠르신을 향해 쏘아졌다.
언젠가 베니엘의 마나 하트를 노렸던 그 기술이다. 그것은 화살보다 빠르게 나아가 쿠르신을 강타했다.
카아앙! 캉! 캉!
요란한 쇳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와 함께 불꽃이 튀며 쿠르신이 뒤로 뒹굴었다. 그 모습에 리리나가 희번덕 웃었다.
"이겼나! 곰팡이! 밥값을 한 거냐!"
하지만 쿠르신은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잔뜩 기대감에 들떠 있던 리리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하아? 어떻게…?"
방금 일어난 자주색 에너지체는 마법사인 리리나가 보기에도 제법 강력했다. 대강 3~4레벨 주문 수준은 되는 듯하니 프로보스트급 검객이 견디긴 어려울 터. 하나 쿠르신은 바닥을 구른 것 외에는 타격이 없는 듯했다.
곧 리리나는 어떻게 쿠르신이 의지를 막아낸 건지 알게 됐다.
"저 물건이...?"
놀랍게도 쿠르신은 드워프 왕의 황금팔을 동원해 의지를 막아낸 것이다.
첫발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해내고, 이어진 두 발은 검을 버린 채 양쪽 황금팔을 사용해 쳐냈다. 물론 그 충격에 뒤로 굴러가긴 했으나 그는 다치지 않았다.
치이이익.
충격 때문인지 황금팔에서 열기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리리나는 저 유물이 왜 전설적인 물건인지 절절히 알게 됐다.
"이런 개사기같은! 순전히 기물 탓이잖아! 비겁해!"
본인은 규칙을 어긴 주제에 상대가 템빨 좀 본다고 리리나는 길길이 날뛰며 비난을 해댔다.
하지만 지금 가장 난처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검투의 심판이었다. 쿼터스태프를 들고 검은 갑옷 위에 빨간 띠(Sash)를 두른 그는 두 검객 사이에 다급히 끼어들었다.
"멈춰!"
그 뒤 심판은 남작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눈으로 묻는 것이다.
"흐음...."
한데 남작은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턱을 쓰다듬을 뿐,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필시 계속 구경하겠다는 뜻.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속행!"
심판은 두 검객 사이로 내밀었던 쿼터스태프를 치우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다시 검투가 재개됐다.
무슨 상황인가 의아해하던 관객들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댔다.
"우와아아아아!"
뭔진 몰라도 싸움이 한층 격렬해지고 재밌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쿠르신이었다. 드랄두가 의지를 동원하니 삽시간에 전세가 역전돼 속수무책을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윽!"
삽시간에 몸에 혈선이 그어지자 쿠르신은 이를 악물었다. 물론 의지란 게 간단한 기술이 아닌지라 드랄두도 마구 난사할 순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언제 의지를 발동할지 알 수 없어 쿠르신은 자연히 위축됐다. 검을 휘두르면서도 계속 상대의 낌새를 살펴야 하니 싸움이 말려들어 갈 수밖에.
거기에 추가적인 문제가 있었다.
"쿠르신! 승리는 내가 가져가겠다!"
지성이 약간이나마 돌아온 탓에 드랄두의 움직임에 마스터의 풍모가 묻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기계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 노련한 검객답게 그 한 수, 한 수에 전술적인 고려가 깔리기 시작했다.
역시 검술에 있어서도 마스터인 드랄두가 한 수 위였다. 시시각각 쿠르신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리리나는 주먹을 휘두르며 웃어댔다.
"꺄하하핫! 그래! 그거지! 잘한다! 베어버리라고!"
설마 그깟 잡기 하나 허용해준다고 상황이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하지만 리리나는 그 부분에 대해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검객이란 부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이러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네!"
리리나는 다시 쾌활해져 깔깔댔다. 아마 그 예상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상대의 세컨드를 보고 있는 게 베니엘이란 점이었다.
어째서인지 베니엘은 자신의 투사인 쿠르신이 백척간두의 상황에 몰려 있음에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시그니쳐라 할 수 있는 썩은 미소였다.
'드디어 때가 왔군.'
애초에 베니엘은 사태가 이렇게 흘러갈 거라건 예상하고 있었다. 우기고, 떼쓰기 대왕인 게 막내 고모니 질 거 같으면 비열한 수작질을 할 게 뻔했다.
'막내 고모는 본인의 입으로 한 약속은 철썩 같이 지키지. 하지만 그 외에는 얄짤 없어.'
의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검투의 규칙일 따름이다. 리리나가 본인 입으로 드랄두가 의지를 쓰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멋대로 굴 건 뻔한 일.
리리나는 승리를 위해 자신이 비열하고 기발한 방식을 동원했다고 여겼으나 실상 베니엘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역시 마법 외에는 어설프다니까.'
아무래도 머리칼에서 버섯이 자라도록 공부만 열심히 하고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 해본 탓이다.
베니엘은 검투 중인 드랄두를 향해 소리쳤다.
"언젠가 말했다, 드랄두! 선택의 순간이 올 것이라고!"
이건 이전에 검은 요새에서 벌어졌던 베니엘과 드랄두의 재판 결투 후에 나눈 이야기를 말했다. 당시 드랄두는 쓰러지기 직전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 거냔 말이다.... 오로지… 재능이 전부기에… 나는 할 수 없는… 것인가?]
베니엘은 여기에 대해 이리 답했다.
[다시 깨어나면 너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내가 대답을 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드디어 그 순간이 오게 된 것이다.
"넘을 수 없는 재능의 벽, 거기에 대한 해답을 주겠다는 말이다! 드랄두!"
베니엘의 외침에 드랄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검투 중이란 것마저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쿠르신은 명예로운 자였기에 그런 드랄두를 공격하지 않고 거리를 뒀다. 누가 봐도 드랄두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선택…? 선택…, 순간…?"
갑자기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몸을 어색하게 움직여댄다. 마치 그 모습이 과부하가 걸려 이상하게 움직이는 로보트 같았다.
베니엘은 다시 외쳤다.
"의지를 되찾지 않았나! 그렇다면 너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 언데드가 아니다. 그러니 선택하라! 검술의 길로 갈 것인지, 그것을 포기하고 기계 언데드로서 굴종할 것인지!"
사실 베니엘이 이전에 드랄두에게 선택의 순간을 운운한 건 일종의 트리거를 심어둔 것이었다. 특정 상황에서 드랄두를 요동케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평상시의 드랄두였다면 그 트리거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기계 언데드를 향한 리리나의 지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한데 문제는 리리나가 승리에 갈급해서 드랄두에게 의지를 허용해주고 말았다는 것. 그 탓에 드랄두는 제한적이나마 이지와 마음을 되찾았다.
즉, 완벽하진 않지만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리리나 입장에선 말 잘 듣던 기계가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이는 셈.
"선택...! 검객… 검의 길…!"
드랄두는 점점 더 괴상해졌다. 갑자기 과열 증상을 보이는 듯 등 위에선 증기를 마구 뿜어대기까지 했다.
리리나는 당황해서는 허둥댔다.
"곰팡이! 이 곰팡이 같은 녀석! 당장 그 사고를 멈춰! 그보다 내 명령을 계속 수행해! 검투에 집중하란 말이야! 끄아악!"
하지만 드랄두는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이 모습에 베니엘은 킥킥거렸다.
"아무래도 막내 고모께서 검객의 가장 강력한 동기를 너무 무시한 것 같군요."
리리나가 조금만이라도 역지사지를 할 수 있었다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법사가 마법에 매료된 것처럼 검객도 검에 매료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리나는 남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철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니 베니엘의 말에 빼액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웃기네! 웃기시네! 그깟 말로 될 거 같아? 네 앞에 있는 건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언데드라고! 이 돌대가리 조카야!"
그럼에도 베니엘은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어댈 뿐이었다.
"통제란 건, 조건이 맞으면 결국 붕괴하기 마련입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신 겁니까? 고모? 하면 이 조카도 불측하게도… 고모를 감히 돌대가리라고밖에 부를 수 없겠군요. 크하하핫!"
리리나는 순간 안면을 따귀로 후려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뭐...?"
세상에!
살다 살다, 저 망나니 돌대가리에게 역으로 저딴 소리를 듣다니. 리리나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탯줄을 끊고 울음을 터뜨린 이래 오늘 같은 충격이 없었다고 확신했다.
"도도돌, 돌대가리...?"
마도제일의 초절정 미소녀이자, 현재 제국의 최연소 대마법사인 자신이 돌대가리라고?
결국 리리나는 이성이 완전히 박살 나고, 들끓던 감정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고는 빠르게 주문을 외워나갔다.
"통제력 강화! 다시 속박하라. 이제 너는 단순한 기계이며 언데드니 스스로 뜻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네 주인으로서 명한다!"
거기까지 말한 리리나는 흥분 때문에 더는 고풍스러운 주문을 내뱉지 못하고는 소리 질렀다.
"당장 눈앞의 적을 반으로 갈라서 죽여버리고―! 어서!"
하지만 드랄두는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75화
기계 언데드 (4)
***
드랄두는 리리나의 명령을 받고 검투의 상대방인 쿠르신을 반으로 쪼개버리기 위해 돌진했다.
그 기세가 실로 흉험한 데다가, 이지를 찾은 드랄두가 실력을 드러내고 있던 탓에 쿠르신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이걸 지켜보는 베니엘은 여유만만했다.
'실수한 겁니다. 막내 고모. 이번에 아주 제대로 실수했군요.'
사실 리리나가 크게 방심한 건 아니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가질 만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 언데드를 통제하기 위해 두 가지의 중요한 메커니즘이 작용하는데, 이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첫 번째는 자율성의 박탈이다. 기계 언데드는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안을 빼고는 대부분의 자율성을 빼앗기게 된다.
두 번째는 억압적인 통제 시스템의 설치이다. 이 시스템 덕에 기계 언데드는 자기 주인의 요구와 명령을 세상 무엇보다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메커니즘은 견고했고, 지금껏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의지의 경우는 다르지.'
베니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의지란 건 리리나가 비웃었던 것처럼 학문으로 정리되지 않은 영역이다. 왜냐하면 그건 검객 개인의 경험에 의해 제각각의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보기엔 난잡하게만 보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제각각인 만큼 그건 한 검객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즉, 검객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인 셈이다.
그리고 드랄두가 그걸 떠올린 이상. 기계 언데드로서의 통제력은 반쯤 망가진 거나 다름없었다.
***
드랄두는 기계 언데드의 통제 시스템이 계속 자신을 구속하려는 걸 느꼈다.
그게 어떤 원리의 마법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마치 머릿속에 고약한 기생충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생충의 위력은 대단해서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해도 금세 모든 게 흐리멍덩해지며, 주인의 명령대로 멋대로 움직이곤 했다.
마치 자신이, 자신이 아닌 느낌이랄까?
하나 지금은 달랐다. 드랄두는 스스로에 대해 기억해 낸 것이다.
'나는 기계 언데드 따위가 아니다! 나는 나보다 잘나고 재능 있는 검객을 향해 분노하고, 증오하고, 질투하던 자다.'
문제는 리리나의 통제 시스템에는 이 의지에 대비할 수단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여기에 대해 무지했고, 그 저력도 알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드랄두가 완벽히 주인의 통제에 저항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부분적인 반항은 가능해 보이는군.'
그래도 그 정도면, 자기 주인을 제대로 물 먹이기는 충분했다.
드랄두는 흡족해하며 리리나의 명령대로 쿠르신을 조각내기 위해 기꺼이 나섰다. 다만 그 과정에서 통제력을 벗어난 사소한 찐빠가 있는 정도는 괜찮을 터였다.
"받아보라! 이 일검을! 쿠르신!"
누가 봐도 마스터의 솜씨가 분명한, 저항할 수 없을 듯한 수직 베기에 쿠르신을 향해 떨어졌다.
그 베기는 간단한 것이지만 격의 차이를 느끼게 했다. 어떤 프로보스트급 검객이라도 좌절감에 빠질 만한 일격이었다.
쿠르신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그 찰나의 순간 무언가를 발견했다.
'!'
완벽해 보이는 일격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듯한 아주 작은 틈이었다.
'허점이 있다!'
쿠르신은 자신의 솜씨로 그걸 공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동시를 노린다!'
검술에서 '동시'라 하면 상대방이 공격하는 순간 나 역시 공격해 그것을 깨며 승리하는 걸 말한다. 권투의 크로스 카운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이는 검술의 기본이면서도 막상 실천하려면 가장 어려운 기술 가운데 하나였다.
실패는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쿠르신은 드랄두가 내려 베기를 하는 이 순간, 손목의 일부가 노출돼 있음을 깨달았다. 본래라면 반푼이라 불리는 드랄두라도 절대 하지 않을 실수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수였다.
쿠르신은 그 손목을 베어냄으로써 상대의 공격을 파훼하고 승리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걸 깨닫자마자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검은 피가 튀며 내려 베기를 시도하던 드랄두의 왼쪽 손목이 그대로 잘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지켜보던 자들이 놀라서 탄성을 터뜨렸다.
"우아아아아!"
"지금 저건!"
"마스터쪽이 당했어!"
왼팔의 하박 부분이 날아간 드랄두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 그 표정은 더없이 상쾌해 보였다. 심지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이딴 왼팔,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치워줘서 고맙군. 쿠르신."
드랄두의 왼팔은 반절 이상 기계화된 상태. 기계팔에는 이런저런 기능이 많았으나 검의 섬세함을 구현하진 못한다. 그러니 검객에겐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드랄두는 기계화가 되지 않은 오른팔만으로 롱소드를 쥐었다.
"이제 진짜로 해보자고."
드랄두는 사납게 웃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 둘의 격전이 벌어졌다.
카앙! 캉!
하지만 롱소드는 기본적으로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검이다. 필요에 따라 한손으로도 쓸 수 있지만, 그 묘용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다.
한손으로 쓰게 되면 좀 더 거리를 살릴 수 있으나 롱소드 특유의 뒷날 공격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드랄두 역시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쿠르신과 거리를 두고 싸우려 했다.
하나 쿠르신 역시 노련한 검객. 그는 사납게 외치며 상대에게 달라붙었다.
"물러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쿠르신은 즉각 드랄두와 검을 접촉하고는 힘껏 밀어붙였다. 당연히 드랄두는 상대가 안 됐다. 양손으로 미는 칼날을 한 손으로 버틸 수 없는 법이니까. 심지어 황금팔 때문에 근력 차이도 심했다.
결국 드랄두의 자세가 무너졌고, 그 순간 승패가 결정됐다.
서걱!
쿠르신의 검객이 드랄두의 남은 팔마저 잘라냈던 것이다.
허공으로 드랄두의 손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리리나를 머리를 쥐어뜯었다.
"안 돼! 이 망할 곰팡이! 꺄아악―!"
하나 양손을 잃은 드랄두의 얼굴에는 은은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결투의 규칙에 의하면 이제 자신의 리리나의 소유를 벗어나 베니엘의 것이 될 테니 말이다.
그때 심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멈춰! 쿠르신의 승리다!"
어느새 쿠르신의 검이 드랄두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켜보던 자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아아!"
"쿠르신이 이겼어! 이럴 수가!"
"마스터가 졌다! 그럼 배당이 대체 얼마야! 으아아아아!"
그중에 유난히 크게 기뻐하는 자가 하나 보였다. 그는 방방 뛰며 난리였다.
"집문서를 건 보람이 있구만! 크하하하핫! 내일 길바닥에 나앉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겠군!"
"세, 세상에… 살려만 주게!"
사방이 귀가 먹먹해지는 환호성으로 시끄러워지는 가운데 리리나가 참지 못하고 시합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이 곰팡이! 분명히 말했어! 적을 쪼개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진 거냐고? 이 빌어먹을 새끼! 당장 해체해 버릴까 보다! 너는 실험실에서 보자! 이 쓸모없는 것!"
흉흉하기 짝이 없는 협박에도 드랄두는 태연자약했다.
"아가씨, 당신은 더 이상 제 주인이 아닙니다."
"뭐…? 뭐라고...?"
"검투의 결과에 따라 어찌하기로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이런 썩을…! 그딴 걸 내가 받아들일 거 같아!"
그때 베니엘이 박수를 치며 끼어들었다.
짝짝짝.
"이거, 아주 훌륭한 검투였습니다. 지켜보면서 손바닥이 땀으로 촉촉해지더군요. 막내 고모의 기계 언데드, 과연 대단했습니다. 주인을 닮은 걸까요? 크하하핫!"
누가 봐도 돌려 까는 말이라 리리나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베니엘! 이 돌대가리 새끼! 절대로 이놈을 내어줄 수 없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리리나는 그녀답게 떼를 쓰고 있었다. 하나 이 역시 리리나의 성정을 잘 아는 베니엘은 예상하던 바다. 그래서 리리나에게 논쟁하는 대신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님, 남작님께서 공언해주신 약속임에도 막내 고모가 받아들이기 힘든 듯합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곧장 남작을 들먹이자 리리나가 화들짝 놀라서 움찔거렸다. 그리고 떨리는 눈동자로 남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라비, 이건 절대로...!"
하나 남작은 매정하고 절도 있게 손을 들어 막내 동생의 입을 막아버렸다. 단순히 제스쳐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의지와 함께 무형의 힘이 일어나 리리나의 말문을 틀어막은 것이다.
"읍! 으읍…!"
놀랍게도 대마법사의 경지인 리리나가 꼼짝도 못 하고 당한 것이다. 그녀는 뒤늦게 마법을 써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남작은 그 모습에 짓궂은 오라비처럼 낄낄거리더니 말했다.
"나는 내 사랑스러운 동생이 가주의 말은 절대적이라는 가문의 규칙을 어길 거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소 감정적인 아이니 저럴 뿐이다. 약속은 이행될 것이다. 치안관 베니엘."
남작이 선언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말대꾸를 하는 걸 포기한 듯 리리나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나 성미가 고약한 남작은 상심한 여동생을 위로하기는커녕 그 속을 더 뒤집었다.
"귀여운 막내야."
남작이 입을 봉한 걸 풀어주자 리리나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네… 오라버니."
이미 말투에 물기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푹 찌르면 터질 듯한 둑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남작은 그런 짓을 좋아하는 가학적인 자였다.
"꽤나 인상적이었다만 네 기계 언데는 아직 불완전하구나."
"그, 그것이…! 충분한 시간과 예산을 지원해 주신다면…!"
"아니, 지난번에 얘기했던 시설 투자 및 연구비 지원은 없던 얘기로 하겠다. 아무래도 더 진행하기엔 미비한 기술 같군. 마치 다 자라지도 못한 네 키처럼 말이다. 크크큭…!"
비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남작의 태도에 리리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드랄두가 슬그머니 다가가더니 결정타를 날렸다.
"기괴한 꼴이 됐지만 이런 삶이나마 이어가게 해주신 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가씨."
그 말과 함께 갖은 공을 들였던 드랄두가 매몰차게 등을 돌리자 리리나는 충격을 받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했다.
"으아아아앙! 으아앙―!"
역시 성년임에도 외모처럼 아이 같은 구석이 많은 그녀였다.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승패로 신난 구경꾼들은 아무도 리리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일대는 온통 환호성과 흥분으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리리나는 세상 외롭게 혼자 울었다.
***
검투가 끝나고 약속대로 기계 언데드 드랄두는 베니엘의 휘하로 합류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원한이 있었기에 그걸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증오스럽겠군? 드랄두."
베니엘은 술을 한잔 들이키며 물었다. 앞서 권했다가 상대가 언데드란 걸 깨닫고는 뻘쭘하게 팔을 회수했던 차였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제가 이 꼴이 된 건 도련님 때문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자신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네, 간단한 문제입니다. 제 실력이 부족했기에 이 꼴이 된 거겠지요. 그때 제가 승리했다면 도련님이 기계 언데드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베니엘은 그 미래를 상상해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모를 일이 아니라 꼭 그렇게 됐을 거다. 막내 고모가 날 가만뒀을 리가 없지. 세상에 이런 끔찍한…!"
"하지만 도련님은 승리하셨지요. 제가 더 오래 수련하고, 제가 더 많은 싸움을 겪었음에도 말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대답은 잔인했지만 베니엘은 담백하게 답했다.
"재능 때문이지."
드랄두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재능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 마지막 순간 도련님께선 말씀하겠습니다. 당신과 함께한다면 그 재능의 벽에 대한 답을 주시겠다고요."
"그랬다."
그 대답에 드랄두는 결심한 어투로 선언했다.
"만약 그게 허언이 아니고, 그 답을 주실 수 있다면 이 드랄두, 맹세하겠습니다. 과거의 앙금을 잊고 오직 도련님께 충성하겠다고요."
사실 드랄두는 기계 언데드니 의지의 사용을 금지하면 골렘처럼 부릴 수는 있다. 하나 그렇게 해선 그가 가진 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더불어 드랄두는 성장할 수도 없다. 언제까지나 지금의 수준에 머물 터. 휘하에 강력한 인재가 필요한 베니엘에겐 안 될 말이었다.
"나이트쉐이드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네게 재능의 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날 따라온다면 결코 닿을 수 없었던 경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드랄두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베니엘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에는 나이트쉐이드의 적자에게 주어진 큼직한 루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무릎 꿇고 입을 맞춰 내게 신종하겠다고 맹세하라. 네놈에게 재능의 벽을 부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76화
작은 구멍 (1)
드랄두는 베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는 베니엘이 내민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맹세했다.
"이제 제 검은 당신의 손짓을 따라 움직일 겁니다. 부디 이 어둠의 세계에서 제 봉사가 주군을 위한 작은 빛이나마 되길 소망합니다."
그 모습에 베니엘은 내심 감격했다. 마침내 검은 요새에서 칼부림을 했던 그 드랄두가 자신의 부하로 들어오게 된 것이니까.
'네임드 부하를 얻었다.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상당히 보람차군.'
이 뿌듯함은 분명 일이 차곡차곡 잘 진행되고 있는 데서 오는 게 틀림없었다.
"고맙다. 드랄두. 일어나도록. 앞으로 잘해보자고."
"제가 드릴 말씀이군요. 이제 이 미천한 자의 앞길은 오로지 도련님께 달렸을 뿐입니다."
"날 섬기기로 한 이상 충분한 배움을 베풀겠다."
"감사합니다. 인생사란 게 참으로 알 수 없군요. 언데드가 됐을 때 삶을 저주했습니다만… 이렇게 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다니요."
드랄두는 차라리 잘 됐다고 했다.
"돌아보면 지난 삶에 미혹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반푼이에 불과했던 건 검술보다 정치질이나 쾌락 같은 것에 더 신경 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는 오롯이 검이라는 하나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참으로 장하군. 드랄두."
이것으로 검투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 결과, 베니엘은 아주 잘 드는 칼 두 자루를 얻은 셈이었다.
하나는 호위대장 쿠르신이다.
그의 황금팔은 예상대로 아주 훌륭했고 앞으로 많은 역할을 해줄 터였다.
다른 하나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스터 드랄두. 반푼이라고 해도 휘하에 마스터급 검객이 들어온 건 굉장한 일이었다.
솔직히 나이트쉐이드 가문이 이상한 거지, 지방의 군소 남작가에는 전사장이 마스터에 못 미치는 곳도 흔했다. 그런데 베니엘은 벌써 마스터급 부하를 거둔 것이다.
'써먹을 곳이 많은 녀석들이다.'
베니엘은 몹시 흡족해져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다.
사실 그간 베니엘의 휘하에는 딱히 강력한 전사가 없는 게 문제였다. 수하는 제법 많지만 질이 부족하다고 할까?
홉고블린 삼 형제가 싸움을 잘하긴 해도 그래봐야 거리의 싸움꾼이자, 그런트에 불과했다.
올리비에 같은 경우는 그 근골이 영웅적인 풍모가 있으나 아직 애송이였고.
퀵포우는 내정용 인재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 탓에 뭔가 본격적으로 무력을 써야 하는 일이 있으면 베니엘이 몸소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한가락하는 데다가 키울 맛이 있는 검객이 둘이나 들어왔단 말이야.'
베니엘은 마치 지구에서 즐겨하던 삼국지 게임에서 무력이 높은 인재 여럿을 한꺼번에 영입했던 것과 비슷한 기쁨을 느꼈다.
'아무튼, 이제부터 더욱 활개 치고 다닐 수 있겠군. 손안에 잘 드는 칼이 여러 자루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지지. 크흐흐.'
베니엘은 속으로 음침하게 웃었다.
슬슬 큰모고와의 본격적인 대결 구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아예 이 기회에 먼저 움직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일단 그는 적의 약한 구석부터 노릴 생각이었다.
***
모처럼 실라 쪽에서 연락이 왔다.
실라는 제국 정보국 출신이란 걸 감추고 검은 요새에서 드랄두의 애인 노릇을 하던 여자다. 현재는 베니엘에게 이것저것을 기대하며 협력을 약속한 상태였다.
"음…, 사람을 하나 보내겠다 그건가."
실라의 전서를 읽어본 베니엘은 그걸 곧장 촛불로 태웠다.
사실 실라가 연락책 겸 하수인으로 쓰라고 정보국 요원을 하나 보내주기로 한 지는 좀 됐다. 문제는 베니엘이 그 사이 폐허 도시로 원정을 가버린 탓에 어쩌질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처리한 것이다.
다음날, 한 인물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인상이 시원시원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인간족 여자였다. 옅은 갈색 피부에 타오르는 듯한 적발의 조화가 좋았다.
"실라가 말한 게 너로군?"
"네, 인사드리겠어요. 전 퀴아 친트라라고 해요."
퀴아는 태도가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좋은 여자였다. 게다가 상당한 미녀다.
물론 드래곤킨마저 반하게 만드는 의붓누나 아리아나 같은 초현실적인 미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어딜 가도 눈길을 끌 만하달까?
오히려 취향에 따라선 여신 같은 자색(姿色)이 부담스러운 아리아나보단, 이쪽이 더 편안하고 정감 있어 좋은 자도 많은 듯했다.
퀴아는 매사 말투가 차갑고 표정이 딱딱한 아리아나와 다르게 훨씬 생동감 있었고, 친화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금세 베니엘에게 살갑게 굴었다.
"과연 실라가 말한 것처럼 근사한 분이시네요!"
재밌는 건 말을 할수록 조금씩 다가오다는 점이었다.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리 역시 말이다.
"뭐라 했는데?"
"얼굴만 뜯어 먹어도 곁에서 모실 가치가 넘친다나? 이렇게 멋진 분은 또 처음이네요."
퀴아는 은근슬쩍 몸을 붙여온다. 그러자 아찔한 향기가 코로 훅 풍겨왔다.
"아부가 지나치군. 떨어져라."
하나 베니엘은 단호하게 퀴아의 허리를 밀어냈다. 그 어림도 없다는 태도에 퀴아는 냉큼 물러났다.
"아, 네. 더우셨나? 호호, 제가 몸에 열이 좀 많아서…."
딱 봐도 일부러 한번 찔러본 모양. 정보부 요원답게 자기 미모를 살려 앞으로 섬길 자를 이리저리 재보는 게 틀림없었다.
베니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버릇이 고약하기는. 누가 제국 정보국 소속 아니랄까 봐.'
여기서 퀴아의 미모에 혹해 헬렐레하다가는 뼛속까지 털리게 된다. 저 싹싹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퀴아는 고도로 훈련된 요원이었으니까.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녀의 행동에는 여러 계산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걸 지적할 생각은 없지만….'
현재 실라와 요원들은 정보국 출신이란 비밀을 잘 숨기고 있다고 여긴다. 공연히 그걸 들쑤셔 동업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었다.
'뭐, 아직은 그렇지.'
언젠가 폭탄을 터트리듯 네놈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선언할 날이 오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필요한 인재가 왔기 때문이다.
사실 실라가 파견하는 요원은 랜덤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다른 녀석이 오면 퀴아를 내놓으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딱 본인이 온 거다.
베니엘은 대뜸 퀴아에게 물었다.
"혹시 미인계에 자신 있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퀴아는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대신 살며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미인계요? 몇 번이고 해봤지요. 아무래도 타고난 미모 덕에. 호호호."
"그래 보이는군."
"왜요? 제가 누굴 꼬셔야 할까요?"
"그래."
"그게 누굴까요?"
퀴아는 대번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베니엘은 한 인물을 떠올리며 설명해줬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어두컴컴한 밤 안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가여운 중년이지. 하나밖에 없는 딸은 늘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만 하고 아내는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
"아아~, 익숙한 부류네요. 가족 내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여기고 있겠죠?"
"맞아. 잘 아는군?"
베니엘의 물음에 퀴아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암거미를 연상하게 하는 위험천만한 미소였다.
"후후, 가장 상대하기 쉬운 먹잇감이거든요. 아주 이상적일 정도랄까? 그렇게 고립된 자는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줘도 금방 넘어오기 마련이랍니다."
퀴아는 어쩐지 군침이 도는 듯 자기도 모르게 살짝 혀로 입술을 핥았다.
***
우시드라의 둘째 남편이자 베니엘의 고모부인 엘렉카에는 신세 한탄에 빠져 있었다.
"이런 젠장할…! 이 버섯 냄새 가득한 곳에서 뭐가 있다고! 뭘 더 찾아내! 썩을! 어쩌다 내가 이 지경에!"
현재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베니일이 마신의 힘을 얻었던 신전 지대를 뒤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꽤나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던 일이다. 그 망나니도 여기서 뭘 얻었으니 어쩌면 자기도 한 건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여기며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자신의 처지도 나아지리라.
하나 그건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이 부서진 신전이 있는 곳에는 온몸에 질척질척 진액이 묻어나는 빌어먹을 파란 버섯밖에 없었으니까.
"이런 좆 같은 진짜!"
엘렉카에는 소리를 지르며 버섯 무더기를 걷어찼다. 그러다 끈적이는 버섯의 진액이 얼굴에 튀자 그만 이성을 잃고 날뛰어댔다.
"아아아악! 멀쩡한 게 하나도 없어! 내가 대체 뭘 잘못했고, 잘못 살았는데 세상이 이딴 식이야!"
지하 공동 안에서 엘렉카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자리 머리칼을 미친 듯이 쥐어뜯고 있었다.
곁에는 수색을 돕는 부하들도 있었는데 저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공감하며 동정하는 이도 있었고, 또 지랄이냐는 듯 지겨워하는 자도 보였다. 또 어떤 이는 저놈 오래 못 가겠다고 속으로 비웃었고, 또 어떤 이는 그냥 빨리 퇴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렉카에는 주먹을 쥐고 허공에 흔들어대며 계속 미치광이처럼 소리 질렀다.
"이런 상황이 내가 열심히 살아온 대가라고? 이게 맞냐! 으아아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가족이란 것들은 나를 투명 인간 취급이나 하고! 용기 내서 말을 걸면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경멸 어린 표정으로 보는 건 뭔데!"
이 한탄에 몇몇 중년 다크 엘프들은 십분 공감하는 듯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집안에서 자기 자리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성이 끈이 끊어진 엘렉카에의 한탄은 계속 이어졌다.
"나도 씨발! 인격체야! 왜 만날 똥 보듯 쳐다보냔 말이다! 뭐 내가 더러워? 매일 씻는다고! 아주 개씨부럴! 사람을 언데드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끄아아아악!"
급기야 엘렉카에는 늘 그렇듯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뭘 그렇게 쳐다봐! 쓸모없는 것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날 그냥 혼자 있게 내버려둬!"
마누라나 딸에겐 입도 벙긋 못 하면서 부하들 앞에서만 아주 여포가 따로 없었다. 정말 못난 남자의 전형이라 할 만한 자였다.
부하들은 되려 반색하며 서둘러 사라졌다. 더는 저 탄식을 듣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동을 빠져나가며 작게 속삭였다.
"저놈이 얼마나 더 갈지 내기할까?"
"뭔 내기까지나 해? 금방이겠구만."
"우시드라 님이 눈길도 안 준 지 오래라고. 낄낄낄. 꼴 좋다. 예전에 아주 설치고 다닐 때부터 재수가 없었어."
"원래 밑바닥 양아치 놈이었잖냐? 얼굴 하나로 우시드라 님의 총애를 얻어 한껏 날뛰던 거 생각해 보라고."
"키키키킥! 이번에 저놈도 실종된 첫째 남편처럼 사라질까?"
"아무래도 처분해 버리겠지. 계속 남아 있다가는 껄끄러울 테니까."
그 예상은 전혀 틀린 게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엘렉카에는 나락이 코앞이었다.
"아으윽! 큭…!"
그는 더 분노하는 것도 지쳐서는 근처에 바위에 멍하니 앉았다.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여기서 모든 게 끝났으면.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이제 슬슬 지긋지긋해졌다.
그렇게 그의 상념이 이어져 자신이 왜 태어났고, 왜 숨 쉬고 있는지에 대해까지 울적한 고찰을 해나갈 무렵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대놓고 접근한다는 기색을 풍기는 소리였다. 그리고 곧 그 발걸음은 고개 숙인 엘렉카에 앞에서 멈춰 섰다.
"혼자 처량하게 뭐하고 계십니까? 고모부."
베니엘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찾아온 탓에 엘렉카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너? 너어…?"
이내 엘렉카에의 표정이 굳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다만 겉으론 쌀쌀맞긴 해도 그리 적대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사실 엘렉카에는 최근 달라진 베니엘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물론 요즘 딸 페샤디아의 짜증이 부쩍 는 게 이 녀석 때문이긴 하나, 그에겐 동경심이 더 컸다.
한때 망나니라 불리며 경멸받았지만, 이제 베니엘은 검으로 훌륭한 성취를 이루고 폐허 도시에서의 성공적인 모험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였으니까.
그런 명예는 엘렉카에가 바라는 것이었으나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막연한 경외감을 품을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입장이 있었기에 베니엘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베니엘."
더 차가워진 엘렉카에의 음성에도 베니엘은 뻔뻔하게 답했다.
"고모부께서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뭐? 뭐라…?"
"후후,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다크 엘프의 가족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지독하기 짝이 없는 농담이었다. 당연히 엘렉카에는 화목이란 단어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날 여기서 암살하려고…!"
급하게 칼자루라도 잡으려는 듯 허둥댔는데, 귀찮다고 그가 풀어둔 칼을 저 멀리 있었다. 베니엘은 그쪽을 가리키고는 웃었다.
"가져다 드릴까요?"
엘렉카에는 뻘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크흠!"
"암살이라니, 농담도 심하십니다. 제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고모부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베니엘이 생각하기에 우시드라 진영의 가장 약한 부분은 바로 눈앞의 사내였다.
큰고모 우시드라는 이미 애정이 식어버린 둘째 남편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구축한 권력의 성체가 이 하잘것없는 자 때문에 무너지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래 둑의 붕괴도 작은 구멍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베니엘은 그런 구멍을 살살 파서 넓히는 데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내였다.
77화
작은 구멍 (2)
아무튼, 엘렉카에는 그런 베니엘의 말에 솔깃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탁이라고?"
베니엘은 재차 확인해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모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 말은 엘렉카에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렇게 누군가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과거 잘 나갔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향수를 느낄 정도였다.
그의 주변에 어떻게든 영지의 실세인 우시드라에게 청탁을 넣어보려 재물을 들고 기웃거리는 자들이 가득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다.
"크흠!"
엘렉카에는 헛기침을 하며 공연히 들뜨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요즘 한물간 지 오래다. 네가 할 부탁이란 게 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을 거다."
엘렉카에는 공연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베니엘이 자신에게 부탁을 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물론 베니엘은 그런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니요. 저는 고모부께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웃는 낯으로 옆자리에 슬쩍 앉는 베니엘을 보며 엘렉카에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좋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야...."
엘렉카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으나 이미 그의 긴 귀는 베니엘 쪽으로 쫑긋거리고 있었다. 마치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사실 제가 요즘 큰고모와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영 사나워져서 말이지요.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어릴 때부터 절 귀여워 해주신 분이었는데 말이지요."
뭐, 실제로 귀여워해 준 적은 없지만 지금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큰고모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모부께서 중재를 좀 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 제안에 엘렉카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정말인가?"
"물론이죠. 저는 큰고모님과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엘렉카에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파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는 무언가 중요한 일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요즘 자신의 차가운 아내가 이 망나니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건 사실이니까. 이런 자신이 뭔가 해냈다면 아내의 시선도 달라질지도 모른다.
'설령 그 남창 놈을 계속 끼고 돈다고 해도 날 쉽게 버리진 못하겠지.'
어차피 떠난 마음을 되찾는 건 어렵다는 걸 엘렉카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쓸모를 증명해서 둘째 남편의 지위라도 유지하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단번에 혹했으나 일단 한번 튕겼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한데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플 것 같군."
하나 베니엘은 이미 엘렉카에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 게다가 그가 뭘 원하는지 잘 알았다.
"저와 큰고모의 갈등을 중재해 주신다면 제가 앞으로 적극적으로 고모부의 편을 들겠습니다."
그야말로 솔깃한 얘기였다.
"흐음...!"
"제 자랑 같아서 민망합니다만, 근자에 저도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제법 강해지고 있지요.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큰고모가 고모부를 홀대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엘렉카에는 마치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건 썩은 동아줄이 아니다. 나락으로 떨어질 자신을 지탱해줄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기회였다.
엘렉카에는 더는 젠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이거다 싶었으니까.
"나쁜 얘기는 아니군."
그럼에도 체면이 있었기에 애써 무게를 잡으며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가족 간입니다. 제가 고모부께 나쁜 얘기를 가져왔겠습니까?"
"하지만 무턱대고 네 얘기를 믿기만은 어렵다. 기껏 중재에 나섰는데 모른 척하면 내 꼴이 어떻게 되겠나?"
"합리적인 의심이시군요. 하면 제 진심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베니엘은 마법 지퍼에서 묵직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보란 듯 열었다. 엘렉카에는 내용물을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오!"
상자 안에는 금과 보석이 휘황찬란했다. 거의 5천 두크나 되는 재화였기에 엘렉카에는 거기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마 내게 주는 건가?"
"네, 돈을 쌓아만 둬서 뭐하겠습니까? 가족을 위해 나눠 쓸 수 있다면 더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받아주시지요."
엘렉카에는 우시드라의 총애를 잃어버린 이후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있는 상태. 이 돈은 그의 정신을 빼놓기 충분했다. 이미 그의 동공은 지진이 일어난 듯 떨리고 있었다.
"크흐음! 이거 참!"
본래 엘렉카에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했다. 영지에서 제일 가는 실세라 할 수 있는 아내의 위세를 한껏 누렸던 것이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잘나가던 시절이 무색하게 최근에는 빚까진 진 상태.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면서 채무를 돌려막기로 버티고 있었다.
이 빚이란 게 어찌나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지, 엘렉카에는 잠을 자려고 누워도 무거운 돌이 가슴팍을 누르는 듯 답답했다.
한데 이 돈이면 일단 급한 불을 충분히 끌 수 있을 터. 살아날 구석이 보이기 시작하자 엘렉카에는 적극적으로 더는 튕길 생각조차 못 했다.
"흐흠! 고맙군. 그래, 가족인데 서로 돕지 못할 게 무엇이겠냐?"
"마음에 드시는 듯하니 다행이군요. 사실 이건 조그마한 성의에 불과합니다. 고모부께서 부족한 저를 잘 도와주신다면 더 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
돈을 더 준다는 말에 엘렉카에는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은 바쁘고, 빠르게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이 망나니 녀석과 함께한 자들도 크게 한몫 잡았다고 했지. 천한 일이나 하며 몽둥이나 휘두르는 용병 무리도 그 정도다. 한데 이건 가족 간의 도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아닌가! 훨씬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엘렉카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뭘 하면 되겠나? 베니엘."
한데 베니엘은 바로 용건을 꺼내놓진 않았다.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얘기를 어찌 이런 길바닥에서 하겠습니까? 제가 조만간 근사한 곳으로 모시지요."
풍류를 좋아하는 엘렉카에는 반색했다. 최근 쪼들려서 비싼 술을 못 먹어본 지도 오래다.
"오, 그거 좋군!"
"자,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곧 사람을 보내지요. 고모부."
사실 베니엘은 엘렉카에에게 진지하게 뭔가를 부탁할 생각 따윈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무능력한 사내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뭔가를 해낼 확률은 낮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저 엘렉카에가 스스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능력은 없고 의욕은 넘칠 테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게 틀림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베니엘은 엘렉카에게 이쪽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만들고자 했다.
하면 큰고모 우시드라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할 거고, 베니엘은 그걸 노릴 생각이었다.
***
돈이 생기자 엘렉카에의 생활은 달라졌다. 더는 곤궁하게 살지 않고 다시 씀씀이가 헤퍼졌다는 거다.
"하하하! 외상을 달아놨던 것 미안하군. 자, 받게나."
먼저 그는 단골 주점에서 외상을 청산했다. 그리고는 기분이 좋아져 안에 있는 술꾼들에게 크게 한 턱 쐈다.
"내가 살 테니 맘대로 드시라고! 크하하하!"
당연히 찬사가 뒤따랐다.
"와아아아아! 화끈하시구려!"
"역시 금화 군주! 금화의 군주가 돌아왔어!"
"오늘은 진탕 마셔보자!"
엘렉카에는 유흥을 즐기는데 진심이었고, 주당들은 그를 '금화 군주'라고 불렀다. 술에 취해 금화를 사방에 뿌려댔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금화 군주께선 한동안 어깨를 움츠리고 힘을 못 썼다. 그리고 다들 그가 끝났다고 여겼다. 한데 어째서인지 다시 전성기의 기세를 회복한 것이었다. 주당들은 술을 얻어먹으며 저들끼리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지? 저 양반 개털된 거 아니었나?"
"글쎄…? 나도 그렇게 알았는데?"
"이상하군. 우시드라 님의 총애를 다시 회복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이거, 이거. 그게 사실이라면 다시 알랑방귀 좀 뀌어야겠는데?"
돈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했다. 반짝이는 금화가 허공에 뿌려지자 한 사람의 평판이 하룻밤 만에 급격히 바뀌었다.
엘렉카에는 끈 떨어진 연 신세에서 다시금 유력 인사의 반열로 올라선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이 유쾌해서 껄껄 웃어댔다.
"그래, 이게 맞지. 원래 내 인생은 이래야 맞다고!"
며칠 뒤 베니엘쪽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엘렉카에 님, 베니엘 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다이스베인 주점에서 뵙고자 하시는데 괜찮겠습니까?"
물주인 베니엘이 찾는다는 말에 엘렉카에는 만사 제쳐두고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미 그는 집안 어른의 체면 따윈 없었다.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베니엘 앞에서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흔들 기세였다.
"물론이지! 지금 바로 가면 되나? 그래? 어서 가자고!"
'다이스베인'은 남작령의 중심지인 닉스포트에서 제일 가는 술집이다. 허영심에 가득 찬 엘렉카에게 생각하기에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하기엔 제격인 장소였다.
과연 가보니 주점의 화려한 입구에서 베니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부, 오셨습니까?"
베니엘은 깍듯한 자세로 엘레카에게 인사를 해왔다. 이에 엘렉카에는 크게 기뻐하며 어깨가 절로 벌어졌다.
"오! 기다리게 했군."
왜냐하면 주변에 지켜보는 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소곤거렸다.
"저거 보세요."
"음…?"
누가 봐도 요즘 남작령에서 제일 잘 나가는 베니엘이 엘렉카에를 저리 공손하게 대하는 건 이상했기 때문이다.
다크 엘프의 습성상 집안 어른이라고 저리 대해주진 않는다. 보통 그들이 어른을 존경하는 이유는 자신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한데 엘렉카에는 베니엘보다 강하지도 않았고, 집안에서 지위가 높지도 않았다. 즉, 아무렇게나 대해도 별 탈이 없는 존재란 소리인데 저 망나니가 왜 저리 각별하게 여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지? 엘렉카에 저 친구, 퇴물 아니었나?"
"그러기엔 망나니가 너무 깍듯한데? 뭐지?"
"흐음... 설마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건가?"
"그럴 가치도 없는 작자일 터인데?"
"흐음! 영 판단이 안 되는구려. 하지만 가볍게 넘길 문제도 아니오."
다이스베인은 최고급 주점인만큼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자들은 영지에서 한가락 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영지의 정치적 구도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베니엘은 마치 보란 듯 엘렉카에를 친근하게 대하며 그를 주점 안으로 이끌었다.
"가장 좋은 방을 잡아놨습니다. 제가 보여드릴 게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니, 껄껄껄. 대체 뭘 보여주려고 하기에."
엘렉카에는 잔뜩 우쭐해졌다. 마스터급 검객이자 남작령의 후계자인 베니엘이 자신을 이리 챙긴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들떠서는 턱을 치켜들고는 베니엘을 따라갔다. 마치 내가 아직도 이렇게 잘 나간다고 과시하듯 말이다.
당연히 이 일에 관한 소문은 영지 안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얼마 뒤, 한창 집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는 우시드라의 귀로 들어갈 만큼 말이다.
***
베니엘과 엘렉카에는 주점의 호화로운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자, 먼저 한잔 받으시지요."
베니엘은 최고급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접대할 자들을 부를까요?"
엘렉카에는 체면 때문에 일단 거절했다.
"크흠! 아내가 있으니 어찌 그러겠나?"
당연히 개소리였다. 다크 엘프의 사회에서 부부간의 정조 관념은 꽤나 옅은 편이니까. 우시드라는 말할 것도 없고, 엘렉카에도 그간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즐겨왔다. 물론 우시드라와 다르게 들키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호색한 작자라서 그런지 일단 거절하면서도 그 눈빛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베니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모른 척 답했다.
"하긴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고모부처럼 품위 있는 신사분께 술집 여자가 어울릴 리가 없는 일이지요."
"...그, 그렇고말고."
설마 저렇게 눈치 없고 야속한 대답을 들을 줄이야. 긍정하면서도 엘렉카에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베니엘은 그런 그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상대는 그의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박한 술집의 접대부가 아니라면 다르겠지요. 제가 아는 가인(歌人)이 하나 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몹시도 아름다운 여성인데…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엘렉카에의 동공이 커졌다.
"오, 그런가! 아름다운데 노래까지 한다고!"
흥분해서 몸을 반쯤 일으킨 그는 자기 꼴이 너무 꼴불견이라 느껴서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래도 이번에도 거절하면 베니엘이 진짜 아무도 안 부를까 싶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또 얘기가 다르지. 노래를 듣는 건 고상한 자들의 취미라 할 만하다. 게다가 너와 어울리는 이니 필시 범상치 않을 터. 얼굴이나 한번 보는 건 괜찮겠군."
미녀란 말에 좋아서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주제에 변명이 구구절절 길었다.
"알겠습니다."
베니엘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 조심스럽고도 우아한 몸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던 실라의 부하 퀴아였다. 하늘하늘하고 속이 비추는 거미 비단으로 몸을 감싼 그 모습은 과연 미인계 좀 해봤다는 여자답게 빼어났다.
곁에 아리아나나 아니엘 같은 경국지색만 보던 베니엘마저 작게 끄덕일 정도였다.
'제법이군. 히로인급에는 못 미쳐도 그 아래쪽에선 최상인가.'
아니나 다를까, 기대감에 목이 타서 그런가, 자작하고 있던 엘렉카에게 멍한 표정으로 잔이 넘치도록 술을 흘리고 있었다.
"저, 저분인가…?"
78화
작은 구멍 (3)
엘렉카에와 가인(歌人)의 눈이 마주쳤다.
그 투명할 정도로 맑은 눈동자.
평생 한 번 본 적이 없으나, 지상의 표면 인류들이 보고 살아간다는 하늘빛이 저럴까?
'아름답군…!'
엘렉카에는 자신의 혼이 마치 저 여자의 눈동자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고모부…?"
한창 얼빠져 그는 옆에서 살짝 건드리는 베니엘 덕에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크흠!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손님을 두고 멍하니 있다니…."
엘렉카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크 엘프식으로 인사했다. 가슴팍에 손을 얹고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인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재주 좋은 가인이라고 해도 지하에서 인간은 천대받는 종족. 천성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다크 엘프가 이러는 것만 봐도 어지간히 마음에 든 게 틀림없었다.
베니엘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생각보다 훨씬 일이 쉽겠어.'
곧이어 손님으로 찾아온 가인이 우아하게 답했다.
"반갑게 맞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소녀의 이름은 플라비아라고 해요."
'플라비아'로 화한 퀴아의 연기가 어찌나 그럴 듯하던지, 그녀의 정체를 아는 베니엘조차 일순간 헷갈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 여자가 원래부터 플라비아가 아닌가 하고.
"오, 플라비아. 어서 오시오."
엘렉카에가 헤벌쭉하고 있으니 당연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환담이 오고 갔고, 곧 플라비아가 노래를 불렀다. 스스로 노래에 자신이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누가 봐도 그녀를 가인으로 여길 정도였다.
엘렉카에는 박수와 함께 찬사를 보냈다.
"훌륭한 솜씨오. 베니엘, 대체 이런 분을 어디서 모셔온 건가?"
베니엘은 미리 준비한 핑계를 댔다.
"플라비아는 제도에서 서부로 유람을 온 가인입니다. 드란실 공작령의 수도에서 노래를 듣고 감격해서 제가 닉스포트로 초대했습니다. 한동안 여기서 머물 계획이랍니다."
당연히 엘렉카에는 반색했다.
"그것참, 잘 오셨소!"
이후 들뜬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베니엘은 슬쩍 빠져 있었고, 주로 엘렉카에와 플라비아가 떠들었다.
"제도는 어떻소? 이 궁박한 곳과 비교해 화려하겠지요?"
"제도의 성세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이 닉스포트도 나름의 정취가 있답니다. 후후."
플라비아는 몹시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 태도에 엘렉카에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마음속의 공허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건 결코 술과 도박으로도 채울 수 없는, 따뜻한 무언가였다. 그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이 마음속에서 작게… 가여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이건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눈앞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기 때문이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오늘 이 자리도, 그녀의 존재조차도.
뭣보다 제일 좋은 건, 아내와 대화할 때처럼 불안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시드라와의 대화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았다. 혹시나 말실수하지 않을까, 공연히 책을 잡히지 않을까 잔뜩 긴장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 눈앞의 여인은 달랐다. 아무 말이나 해도 꺄르르, 웃어줬다. 그리고 그의 말에 경청하며 공감해줬다.
이 느낌은 뭐랄까? 마치 주변의 공기마저 부드럽게 변한 것만 같았다.
문뜩 엘렉카에는 생각했다.
'아… 비로소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구나.'
늘 얼음처럼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아내가 한겨울이라면, 눈앞의 가인은 가히 살랑살랑 부드럽게 마음을 녹이는 봄이었다.
엘렉카에는 더 참지 못하고 사심을 잔뜩 담아 물었다.
"플라비아, 그대는 어떤 사내가 좋소이까?"
이상형이 뭐냐는 거다.
플라비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검지로 볼을 짚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는 강한 남자가 좋아요. 존경할 만하고 절 이끌어 주는 사람이요."
"그, 그렇소?"
"아무래도 지하에서 인간의 처지는 힘든 편이니까요. 가족을 지키고, 이끌어 주는 남자가 근사하게 느껴진답니다. 아무래도 다크 엘프분들과는 다르니까요."
너희는 모계 사회고, 남자는 별다른 힘도 없잖냐는 소리였다. 이에 엘렉카에가 서둘러 변명했다.
"다크 엘프라 해도 상황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오! 우리 가문만 해도 그렇잖소? 드물긴 하지만 남성이 가주 자리를 맡고 있소이다. 또한 여기 베니엘 역시 남자지만 후계자의 위치지."
엘렉카에는 본인의 당당함을 어필할 수 없으니 괜히 다른 이를 끌어들여 설명했다. 이에 플라비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엘렉카에 님도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어울리는 사내겠군요?"
엘렉카에는 스스로를 돌아봤다.
안타깝게도 절대로 아니었다.
하나 그는 자신의 바람을 담아 대답했다.
"무, 물론이요. 물론… 그렇소."
어쩐지 엘렉카에는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려왔다.
***
엘렉카에는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있어도 눈이 말똥말똥해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
계속 그 여자가 생각났다.
눈앞에 보이는 건 시커먼 천장이건만 절로 플라비아의 아리따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상상력이 마치 프로젝터처럼 검은 천장에 생생한 모습을 띄우고 있었다.
"아...."
플라비아가 노래하는 모습.
플라비아의 손짓이 자신의 몸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
플라비아가 웃는 모습.
플라비아가 잔을 잡느라 상체를 저도 모르게 가까이 붙였던 모습. 그리고 팔뚝에 닿던 말캉한 감격.
그 모든 게 달콤한 향기처럼 엘렉카에를 자극하고, 그의 피를 빠르게 돌게 했다.
'이 느낌은 뭐지? 갑자기 모든 게 어제와 달라진 것 같군. 언데드가 산 사람으로 돌아온다면 마치 이런 느낌일까?'
동시에 엘렉카에는 이전의 자신이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돌아보면 끔찍했다.
가족은 그를 경멸한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니 부하들은 충성심을 보이지 않고 수군댔다. 더는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엘렉카에는 당연히 이런 현실에 분노했다. 하나 문제는 이런 분노를 풀 곳이 어디에도 없었기에 그의 속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게 그를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만들고 있었다. 살아 숨 쉬지만 언데드나 다름없는 삶.
한데 그때 플라비아가 나타났고, 엘렉카에는 뜨거워지는 피와 함께 비로소 생을 느꼈다.
그는 자문했다.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플라비아가 물었던 것처럼 강하고, 이끌어 줄 만한 남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고민이 깊었으나 쉽사리 답을 낼 순 없었다.
***
다음날 아침.
우시드라가 그를 호출했다. 엘렉카에는 심장이 절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왜 부르는지 짐작이 가서였다.
'최근에 베니엘과 어울린 걸 추궁하려는 거겠지? 어떻게 벌써 알고는…!'
아내의 집무실을 향해 가는 엘렉카에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노릇.
집무실에 들어가자 과연 맹수처럼 무서운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셨는지요?"
엘렉카에가 물었지만 서류를 보는 우시드라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저 펜이 움직이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스걱스걱.
우시드라는 엘렉카에를 한참이나 뻘쭘하게 세워뒀다. 결국 엘렉카에게 살짝 몸을 꿈틀거리자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인내심이 부족하고 금방 산만해지는 건 여전하군."
"…죄송합니다. 우시드라 님."
"최근 내 조카와 꽤나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군?"
"가족끼리인데 만나서 술을 마시는 정도야...."
"그만."
우시드라는 검지를 세워 보였다. 그녀는 엘렉카에게 변명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얼음처럼 차갑게 찌르는 어투로 힐난했다.
"네놈이 뭘 하고 다니든지 관심 없다. 하지만 오해를 사지 않게 조심하라는 거다. 이 얼간이 같은 것아. 그 아둔한 머리로는 도저히 작은 분별조차 할 수 없는 건가?"
평소라면 엘렉카에는 여기서 빌빌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모습에 대해 얼마간 깨달은 후였다.
과거 젊은 시절 그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우시드라를 반하게 만든 자신감이나 대범함이 있었다. 그게 지금 약간이나마 돌아왔다.
"다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라고 매번 생각 없이만 사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언성이 커지는 둘째 남편의 태도에 우시드라는 그만 벙쩌버렸다.
"뭐...?"
하지만 엘렉카에의 반항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좀 마십쇼! 에이, 씨…!"
그 말과 함께 엘렉카에가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것이었다.
쾅!
우시드라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째 남편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늘 고분고분하던 존재가 갑자기 반항하자 뭐라 대꾸도 못 하고 그냥 보내버리고 말았다.
매사 똑 부러지는 그녀로선 드문 일이었다.
"감히...!"
뒤늦게 분노가 밀려와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둘째 남편은 사라진 뒤였다.
***
한편 밖으로 나가 복도를 성큼성큼 걷고 있는 엘렉카에는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심지어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우시드라의 무력은 그녀의 관리자로서의 면모에 가려 잘 부각되진 않으나, 실제론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이인자였다. 검과 마법 모두에 통달한 강자였기에 남작을 제외하곤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을 정도다.
한데 그런 강자 앞에서 대놓고 에이, 씨라고 말한 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목숨이 여러 개지 않은 이상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엘렉카에도 스스로 한 짓을 믿기 어려웠다.
'미쳤지. 내가 미쳤어!'
돌아도 단단히 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후회해도 늦었다. 엘렉카에는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베니엘과의 관계에서 공을 세워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다.
'당분간 집에 돌아오지 말아야겠군.'
혹여나 우시드라가 다시 호출할까 싶어, 엘렉카에는 남은 돈을 챙겨서는 탈출하듯 남작성을 떠났다.
***
며칠 뒤.
밀실에서 삼 인이 모여 있었다.
베니엘과 쥐 인간 퀵포우, 그리고 실라가 보낸 요원인 퀴아였다. 현재 퀴아는 제도에서 온 가인인 플라비아로 열연 중이었다.
베니엘이 물었다.
"엘렉카에랑은 어떻게 되고 있어?"
"그가 매일 절 찾아와요."
"완전히 빠진 건가?"
"제 경험에 의하면 네, 라고 답할 수 있겠네요."
베니엘은 끄덕였다.
"수완이 좋군."
"호호, 제가 원체 매력적인지라."
옆에 있던 퀵포우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찌이익….!"
그가 보기에 인간종은 털이 없어서 하나도 안 이쁘다. 퀵포우의 감각으론 스핑크스 고양이 같은 생긴 여자가 자화자찬을 하니 절로 찡그려지는 것이었다.
"주인님,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푼수가 따로 없군요. 이렇게 주둥이가 가벼운 자는 거짓말만 내뱉는 법입니다."
듣던 퀴아가 도끼눈이 됐다.
"쥐 인간! 말 좀 조심하지? 적어도 너보단 내가 백 배는 유능할 거 같은데?"
"찌이익! 뭐라? 주인님의 제일가는 시종은 나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것인지도 모를 계집이…!"
"아, 좀 닥쳐줄래? 입냄새 나니까? 입안에 무슨 하수도 시궁창이 있니?"
최근 베니엘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퀵포우와 퀴아의 상성이 영 좋지 않다는 것. 첫 만남부터 뭔가 긴장이 섞인 불편함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이젠 대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검지를 세워 보였다. 자기 큰고모랑 똑 닮은 버릇이었다.
"그만."
둘이 입을 닫자 베니엘이 퀵포우에게 물었다.
"엘렉카에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을 충분히 퍼뜨리고 있나?"
"네, 걱정 마십시오. 찍찍. 휘하에 용병 놈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술집에 가서 겁나게 떠드는 겁니다. 그놈들이 있는 말, 없는 말 다 퍼뜨리고 있습니다요. 찌이익!"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큰고모가 망신스럽겠지. 자기 남자도 간수 못 한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
다크 엘프 사회에서 여자는 마음껏 바람을 펴도 별 문제가 안 된다. 바람이 아니라 남편을 몇이나 둘 수도 있었다.
반면 남자는 바람을 피다 들키면 경을 친다. 물론 다크 엘프 특유의 음란함 때문에 다 몰래, 몰래 간통을 하곤 하지만 이게 걸리면 큰 문제였다.
세간에서 아내를 향해 남편 관리도 못 하는 얼간이라 흉을 보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엘렉카에게 플라비아에게 빠져서 주변의 시선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매일 그녀를 찾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엘렉카에게 집에 들어가지 않은 지도 며칠이나 됐다고 한다. 결국 큰고모가 사람을 보낼 거야. 나는 그걸 노릴 거고."
듣던 퀵포우가 우려를 표했다.
"주인님의 계획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베니엘의 계략이 성공하면 큰고모 우시드라와는 본격적인 적대 관계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퀵포우는 이점에 근심하고 있었다.
"이빨을 드러낼 거면 좀 더 세력을 모은 뒤에...."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라고 왜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지금이 적기야.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어차피 늦는다."
"그렇습니까?"
"그래, 나는 이미 큰고모가 보기에 거슬릴 정도로 커버렸다. 이쪽에서 가만히 있어도 내버려 둘 작자가 절대로 아니야. 어떻게든 날 두들기려 할 테니, 차라리 먼저 나서는 게 나아."
뒤이어 베니엘은 선언했다.
"이미 평화 같지도 않던 평화의 시절은 지나갔다. 본격적인 가문 내 전쟁의 시간이 온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79화
작은 구멍 (4)
베니엘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로 나가는 데는 추가적인 이유가 있었다.
엘렉카에 본인도 모르지만, 그는 나중에 우시드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베니엘은 지금부터 큰고모와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엘렉카에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결국 엘렉카에는 처분된다.'
그렇게 되면 베니엘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대로 손만 빨고 있을 생각은 없다."
베니엘의 다짐에 결국 퀵포우와 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를 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기 올 때 목숨을 걸고 최대한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거든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여기 쥐새끼보단 제가 나을 거랍니다. 후후."
"찌이익―! 듣자 듣자 하니까!"
성난 퀵포우가 발톱을 세웠다. 그러자 퀴아가 근처에 있던 쟁반을 집어 들었다.
"어허! 쥐새끼가 까불어?"
그때 호위병 '네그라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복귀한 다섯 호위병 가운데 하나인 네그라크는 발이 빨라서 주로 전령으로 써먹는 중이다.
"도련님! 말씀하신 대로 우시드라 쪽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이 소식에 퀵포우와 퀴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싸우던 게 무색하게 동시에 베니엘을 쳐다봤다.
앉아서 턱을 괴고 있던 베니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애들 다 집합시켜."
그는 퀴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작전은 알겠지? 부탁하지."
퀴아는 야릇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물론이지요. 걱정 마세요."
***
우시드라는 충실한 수족인 '테사이'란 여전사를 호출했다.
테사이는 우시드라의 열렬한 추종자로, 무예가 뛰어나고 성정이 거칠어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하는 자였다.
"찾으셨습니까!"
체격이 건장하고, 얼굴선이 굵은 호방한 인상의 여전사가 씩씩하게 나타났다. 튼튼해 보이는 갑옷 여기저기 난 상처만 봐도 이자가 얼마나 거친 전장을 누벼왔는지 알 만했다.
"왔군. 시킬 일이 있다."
테사이는 가슴팍에 손을 얹고는 믿음직하게 끄덕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우시드라 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가 있다면 즉각 처리하겠습니다."
"고맙군. 시내로 나가서 내 천박한 남편을 붙잡아 오도록."
이 명령에 테사이는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잔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드디어! 그 양아치 같은 놈을 처리하시기로 한 겁니까!"
우시드라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끄덕였다.
"그래, 더는 놈의 방종한 소문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리고 슬슬 끝낼 때가 됐기도 하고…."
테사이는 반색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전 이제야 놈을 처리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좀 더 빨리 해결했어도 됐을 겁니다. 그 근본 없는 쓰레기 같은...!"
"됐다. 그건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앗!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발언이었습니다!"
테사이는 갑자기 자기 뺨을 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짜악! 짝!
우시드라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됐다. 그쯤 하도록."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 대만 더 때려서 마저 반성을…!"
짝! 짜악! 짝!
기어코 뺨을 다 때린 모습에 우시드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이가 없군."
"하핫! 다 됐습니다!"
사실 테사이는 과거부터 엘렉카에를 증오해 왔다. 동시에 그런 변변찮고 얼굴만 잘난 작자가 감히 우시드라 님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테사이는 오래전부터 우시드라를 진심으로 흠모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시드라의 옆자리에는 진정 어울리는 건 그런 하찮은 사내놈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몇 번이나 열렬한 구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시드라에게 번번이 퇴짜를 맞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테사이는 엘렉카에를 연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최근에 플라비아라 불리는 비천한 인간 계집과 어울리고 있다고 한다. 유흥가 쪽으로 가서 찾아보도록. 발견하면 사정 보지 말고 바로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테사이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치는 자세로 경례하고는, 요란하게 갑옷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휘하의 가병을 호출해서는 시내로 향했다.
"이 빌어먹을 놈! 네놈의 운도 이제 끝이다. 하하핫."
테사이는 아주 신이 났다. 이제 더는 우시드라가 엘렉카에를 감싸지 않을 테니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리라.
"이놈을 치우기만 하면 드디어 우시드라 님도 날 봐주시겠지."
비록 세 번째 남편이 들어오긴 했으나 테사이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셋째 남편은 딱 봐도 오래갈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 우시드라는 금세 질리리라.
하면 이제 남은 자신뿐이다.
'본래 진정한 사랑은 여자들끼리만 가능한 법이지. 우시드라 님도 곧 깨달으실걸?'
이런 동기와 이전부터 품어왔던 증오 때문에 테사이는 필요 이상으로 의욕이 가득 차올랐다. 의욕이 차올랐다는 건 행동이 과격해진다는 의미였다.
유흥가에 도착한 그녀는 매서운 말투로 명령했다.
"샅샅이 뒤져라! 만약 그 빌어먹을 놈을 놓친다면 내가 직접 매질해 주마. 어디 채찍을 쉰 대쯤 맞고도 네놈들 등짝이 멀쩡한지 보겠단 말이다!"
테사이는 잔혹한 지휘관이었기에 가병들은 화들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사납던지, 사람을 데리러 온 게 아니라 무슨 첩자라도 색출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와장창!
"엘렉카에를 찾고 있다! 알고 있는 자는 어서 답해라!"
"이쪽에서 어슬렁거린다고 들었다!"
"너! 거기 수상한데 아는 거 없나!"
다짜고짜 행패를 부려대는 가병을 보고도 주당들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도시에서 놈들의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뭔가 더 절박해 보이는 게 주둥이를 잘못 놀렸다간 경을 칠 분위기였다.
그때 술을 마시고 있던 동굴 고블린 하나가 겁에 질려서는 답했다.
"저, 저쪽! 노예 경매소로 향하는 골목에서 봤습니다요. 케륵."
그 말에 주점에 들어와 탁자를 뒤엎던 가병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래? 좋아! 가자!"
가병들이 사라지자 동굴 고블린의 친구인 푸른색 피부의 지하 노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자네, 그게 맞나? 아까 거기서 못 봤는데?"
이에 동굴 고블린이 서둘러 짐을 챙기며 인상을 썼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케륵. 멍청한 놈. 하마터면 밀수품이 들킬 뻔했잖아. 빨리 빠져나가자고."
이들은 판매가 금지된 중독성 환각 버섯을 가져온 밀수꾼들이었다. 최근 나이트쉐이드 영지가 성세를 이루면서 이런 무리가 많아졌다.
그렇게 밀수꾼 고블린 놈이 아무렇게나 던진 골목으로 향한 가병 무리. 그리고 운 좋게 마침 그곳에서 한창 데이트 중인 엘렉카에와 플라비아를 발견했다.
밀수꾼이 아무렇게나 찍은 게 맞아떨어진 꼴인데, 어차피 유흥가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치는 건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여기다! 여기 있다!"
"테사이 님께 보고해!"
무슨 적이라도 찾은 듯한 태도였다. 엘렉카에는 저들이 우시드라가 보내서 온 자들임을 직감했다.
'큰일이군! 플라비아라도 빼돌려야 한다!'
인간 나부랭이인 플라비아가 다크 엘프 가문에 잡혀가면 모진 고초를 겪을 건 자명한 일. 잔혹한 아내인 우시드라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죽음보다 끔찍한 꼴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서 뒤로 빠져나가시오. 여긴 내가 막아볼 테니."
하지만 플라비아 요지부동이었다.
"저들이 심상치 않아요. 당신만 두고 갈 순 없어요."
"아이, 그래서 그런 것이오. 어서 떠나시오!"
엘렉카에는 조급함에 발만 동동굴렀다. 하나 플라시아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신만 두고 어찌요!"
이미 며칠 사이에 반쯤 연인이 된 둘이었다. 그렇게 떠나라고 하는 자와 혼자는 못 가겠다는 자가 서로 옥신각신했다. 그 사이에 테사이가 도착해 버렸다. 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박수를 쳐댔다.
"이거 완전히 발라드에 나오는 순애가 따로 없군. 크크큭. 뒤늦게 진정한 사랑이라도 찾은 건가? 엘렉카에?"
이 소리에 엘렉카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년! 나도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사람이다. 가병이나 이끄는 주제에 언사가 무례하구나!"
테시아는 그 말을 듣고 잔뜩 비아냥거렸다.
"가문의 사람이었겠지. 아마 조만간 아니게 될 텐데, 내가 맘에도 없는 존중을 보여야 할까? 우시드라 님께서 부르신다. 잔말 말고 따라와라."
평소 엘렉카에였으면 얌전히 따랐을 거다. 괜히 뻗대봐야 좋은 꼴 보기 힘듦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옆에는 반한 여자가 지켜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꼬리를 말 수는 없는 일.
그는 용기를 쥐어짜 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내가 알아서 돌아갈 테니 물러가도록 해라."
이 말은 들은 테시아는 열이 뻗쳤다.
"뭐라? 하…! 씨발, 진짜. 주변에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일단은 좋게, 좋게 데려가려 했더니…."
이렇게 나온다면 성질대로 손을 봐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구경꾼이 많은 게 문제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골목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자들이 잔뜩이요, 건물의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이도 많았다.
"워…? 무슨 일이래? 누가 죽었나?"
"글쎄, 누가 죽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금화 군주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아, 드디어 저 양반도 처분되는 건가?"
"그래, 오래 버티긴 했지."
"아쉽네. 이제 술은 누가 사주나?"
다들 사정을 짐작하고 소곤댔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엘렉카에는 자기 말처럼 나이트쉐이드 가문의 사람이긴 하다.
테시아는 그 껄렁껄렁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보는 동안은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이트쉐이드의 명예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더 성질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오지? 응? 네놈의 그 귀여운 창부도 함께 말이야. 내가 친절하게 성의 감옥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이 협박에 놀란 플라시아가 엘렉카에의 옷깃만 잡는다. 이런 상황에선 그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시팔! 누가 안 따라간다더냐! 보자, 보자 하니까 집안 종놈 주제에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
엘렉카에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자 테시아도 잠깐 놀라 움찔했다. 하나 이후 분노가 밀려왔고, 결국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이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 새끼가 뭐라고? 너는 이미 가문 사람이 아니다. 이런 좆 같은 새끼! 그래도 얌전히 데려가려고 하니까, 뭐? 이 쓰레기 같은 게 우시드라 님을 망신 주더니 이제 명령도 안 들어먹으려고 해! 너는 더 안 되겠다!"
성난 테시아가 콧김을 내뿜으며 다가와 건틀렛을 낀 주먹으로 엘렉카에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퍼억! 퍽! 퍽!
당연히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꾸엑! 케에엑!"
삽시간에 엘렉카에의 피 묻은 이빨이 허공을 옥수수 강냉이처럼 날아갔다.
엘렉카에는 어떻게든 반항하려 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원래부터 대단찮은 전사였던 데다가 우시드라의 눈에 띄어 권세를 얻은 뒤에는 단련을 멈춘 까닭이다.
반면 테시아는 우시드라 진영에서도 행동대장으로 통하는 강자. 당연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거의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졌다.
그녀는 가병들에게 소리쳤다.
"멍청히 있지 말고 저 인간 년을 붙잡아!"
"알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엘렉카에는 우르르 몰려가는 가병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안 된다! 이놈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발길질뿐. 엘렉카에는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 쓰러졌다. 결국 플라비아도 금방 붙잡혔다.
"놔! 놓으라고요! 엘렉카에 님!"
애처로운 그 목소리에 엘렉카에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퉁퉁 부은 눈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엘렉카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원통하구나! 너무나 원통해.'
분명 얼마 전에 그는 플라시아에게 자신은 일반적인 다크 엘프 남성과 다른, 여자를 이끌어 줄 만한 자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런 것이다.
쓰레기 취급이나 받으며 마음에 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얼간이가 따로 없다.
그는 피눈물이 절로 흘렀다.
'결국 이게 다... 내가 못난 탓. 지금껏 잘못 살아온 결과다....'
한때는 그도 강자가 되고 싶어 열심히 단련하던 시절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만큼 순수했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괴로운 단련을 외면하고, 다른 방법으로 성공할 길이 없나 꾀를 부려왔다. 그 결과가 자신의 얼굴과 근거 없는 자신감을 살려 우시드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엘렉카에는 그 결과에 아주 흡족했다.
멍청하게 검만 휘두르는 동기들보다 훨씬 빠르고 영리하게 성공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후 그는 가문의 이인자인 우시드라의 남편으로서의 복락을 누렸다.
이전에 그를 무시하던 놈들을 아내의 권세를 빌려 밟아줬고, 갖은 사치를 벌였다. 우시드라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그런 방종을 모두 이해해줬다.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모두 신기루만 같았다. 우시드라의 총애가 끊긴 것만으로 지금 같은 굴욕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야, 이 새끼 지금 우는 거냐?"
"크하하하! 다 큰 새끼가 존나 웃기네."
"질질 짜는 거 봐라!"
심지어 젊은 가병들은 그의 꼴을 보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
이 고통 속에서 엘렉카에는 간절히 생각했다.
'아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런 어리석은 판단은 하지 않았을 텐데!'
결국 느리고 어려운 길로 보여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선 무력을 갖추는 게 정답이었던 것이다.
'만약 내게 힘이 있었다면 오늘 같은 꼴을 결코 겪지 않았을 터!'
급기야 엘렉카에와 플라비아는 골목에서 끌려 나와 어느새 구름떼처럼 몰려든 구경꾼들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게 됐다.
테시아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봐라! 감히 섬겨야 할 아내를 망신 준 어리석은 다크 엘프의 말로가 무엇인지!"
흥분한 테시아는 급기야 엘렉카에의 머리채를 손으로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그의 연인인 플라비아의 옷을 찢어 반라로 만든 채 채찍질을 해댔다. 삽시간의 플라비아의 아름다운 피부 위에 혈선이 그어졌다.
"꺄아아악!"
테시아는 가학적인 다크 엘프답게 비명을 듣고는 더욱 좋아했다.
"더 울부짖어 봐라. 이 창부 년이! 너도 네 한심한 서방과 함께 지옥을 보여주마!"
이런 상황에서 무력하기만 한 엘렉카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누가…! 제발 누가 나를 좀 도와주시오!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내 모든 걸 바치겠다!"
테시아는 그 말에 미친 듯이 폭소했다.
"크하하하하! 이런 멍청한! 너무 아둔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는구나! 너 같은 비루한 새끼를 도와줄 자는 이 지하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데 그걸 반박이나 하는 것처럼 답이 돌아왔다.
"그 말 지켜야 할 겁니다. 고모부."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소음 속에서도 명확하게 들렸다.
놀란 모두가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80화
작은 구멍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