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작은 구멍 (5)
"뭐, 뭐야?"
"누가 온 건데!"
구경꾼들의 목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무리의 뒤쪽부터 놀라서는 허둥대며 좌우로 갈라졌다.
"어어엇! 야! 큰일났다."
"빠져! 얼른 빠지라고!"
일부는 사색이 되어서는 옆에 사람을 밀어붙이며 도롯가로 바짝 붙으려 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그와 함께 패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니엘과 그 무리였다.
퀵포우와 홉고블린 삼형제, 복귀한 호위병들까지, 여기에 베니엘을 포함해 총 열 명이었다.
반면 테시아와 가병 쪽은 수가 세 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베니엘은 이런 숫자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합류한 강자인 드랄두와 쿠르신은 데려오지 않았다.
베니엘만 아니라 그 둘까지 있으면 현격한 힘의 차이 때문에 테시아 쪽에서 바로 꼬랑지를 내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비가 제대로 붙어야 한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야.'
비교적 적은 수를 끌고 온 것도 그 때문이다. 테시아가 숫자의 우위를 믿고는 어떻게든 버텨볼 만하단 판단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베니엘을 필두로 한 그의 패거리의 위세는 대단했다. 다들 허리에 칼을 차고,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걷는데, 구경꾼들이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처럼 갈라졌다.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무리의 선두에 선 베니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테시아에게 물었다. 자연스럽게 턱을 치켜든 게 말하는 게 귀족의 오만함이 절로 느껴졌다.
이 갑작스러운 출현에 테시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왜 안 그러겠는가? 옆에는 엉망이 된 엘렉카에가 흙투성이로 뒹굴고 있는데.
"닥쳐라!"
베니엘은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듯, 망토를 끌러서 옆에 있는 퀵포우에게 넘기고는 테시아를 힐난했다.
"감히 나이트쉐이드의 땅에서 가문의 일원을 이토록 비참하게 겁박하고 있다니? 입이 있으면 설명해 보시지? 과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만약 그녀가 빼어난 지략을 갖고 있었으면 지금 즉시 자신이 베니엘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을 터였다. 애초에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것부터 이상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테시아는 그런 계략과는 거리가 먼 육체파였다. 쉽게 말해 뇌세포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녀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자 변명을 내뱉는데 바빴다.
"도, 도련님! 우시드라 님의 명을 받아서 한 겁니다! 다소 과격해진 점이 있습니다만, 이 자는 어차피 가문에서 곧 사라질 것이니...."
안타깝게도 금세 말실수가 나왔다.
아무리 기정사실이라고 해도 대놓고 말해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있는 법. 이미 처분된 첫째 남편도 일단 대외적으론 순찰 임무 도중에 실종이었다.
한데 다들 듣고 있는 와중에 곧 사라질 인물이라 말한다? 아마 우시드라가 봤다면 이마를 짚었을 것이다.
테시아는 좋은 전사지만 말투가 매사 과격하고 거침이 없었기에 이런 실언을 하고 만 것이다.
당연히 베니엘은 기다렸다는 듯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래서 네년이 지금 누가 나이트쉐이드고, 누가 이제부터 나이트쉐이드가 아닌지 멋대로 판단하겠다는 건가?"
테시아는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더는 말로 떠들어 봐야 소용없다는 것. 저 망나니는 어째서인지 근자에 말재간이 좋아진 모양이니까.
그녀는 자기 주인의 권위에 의지해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도련님이라도 이 이상 나서시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자중하십시오! 지금 우시드라 님의 일을 방해하겠다는 겁니까?"
"뭐라?"
"집안 어른을 화나게 하는 건 좋지 않단 말입니다."
테시아는 이쯤에서 베니엘이 물러날 거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저 망나니 같은 놈이 과거부터 자신의 큰고모 우시드라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뭘 잘못 처먹었는지 이상하게 기세등등해진 것 같다면 그 근본은 어디 안 가는 법이지.'
한데 이게 웬걸?
망나니 놈이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구는 것이었다.
"큰고모께서 오판을 하셨다면 조카로서 바른 도리를 알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
"지금 뭐라고!"
이건 베니엘의 일생 처음으로 큰고모 우시드라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 셈이었다.
테시아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 거렸다. 하지만 금세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물든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우시드라의 권위가 손상된 일은 자기 자신의 모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감히 도련님! 방금의 그 발언! 철저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 베니엘은 더는 대화를 하고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더 말할 것도 없다! 쳐라! 고모부를 구해라!"
그 말과 함께 베니엘의 무리가 성난 맹수처럼 돌격했고, 금세 난투극이 벌어졌다.
퍼억! 퍽퍽!
테시아와 가병들도 맞고만 있을 순 없었기에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일단 자기들의 수가 한참 많으니 해볼 만하다고 여긴 것이다.
"도련님이 돌아버린 모양이다! 정신을 깨워드려라!"
양쪽 다 검을 뽑진 않고 주먹과 몽둥이로 싸움을 벌였다. 흉흉한 날붙이로 팔다리가 잘려서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서로 선은 지키는 것이다.
이 사태에 지켜보는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드문 볼거리가 생겼기에 거리를 두고는 이 패싸움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거 누가 이기려나?"
"그래, 이게 다크 엘프 가문다운 거지! 사실 그건 우리 영지는 내부적으로 너무 평화로웠어!"
"살벌한 집안 싸움! 역시 다크 엘프 가문이 다스리는 땅은 이래야지!"
싸움 구경을 하는 종족은 다양했다. 지하 드워프, 지하 노움, 동굴 고블린, 인간, 미노타우르스, 다크 엘프, 좀비, 리자드맨 등등.
온갖 부류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이 난장판을 지켜본다. 한데 그런 그들이 모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주목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베니엘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베니엘은 회초리 하나로 가병들을 쥐잡듯 잡는 신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가는 회초리에 불과한데 베니엘이 휘두를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가병들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역시 마스터인가!"
"최근에 도련님에 관한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군!"
"가히 독보적이구나!"
테시아가 이끄는 가병들의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꽤나 의욕적으로 달려들었었다. 싸움이 벌어진 게 당황스럽긴 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무명을 떨칠 기회였기 때문이다.
마스터인 베니엘에게 상대로 뭐라도 보여준다? 대번에 우시드라의 눈길을 끌 확률이 높았다. 테시아 밑에 있는 건 어차피 우시드라의 라인이란 소리였으니, 그건 출세의 보증 수표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지도 매질 앞에선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으아악!"
"카악!"
"끄으아악!"
가병들은 온몸이 박살나는 듯한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맞지 않으려고 베니엘의 근처에서 서둘러 몸을 뺐다.
이러니 제대로 싸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처음에는 꽤 분위기가 격렬했지만 이내 테시아 쪽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테시아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대로는 우시드라 님의 명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우시드라를 따르는 것을 생의 최대 기쁨으로 삼고 있는 테시아의 입장에 있어선, 그건 다시 없을 끔찍한 결과였다.
아니, 그걸로 끝이 아니다. 세 배나 많은 숫자를 가지고도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개망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상대 쪽에 마스터급 검객이 하나 있다고 해도 칼을 뽑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테시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고 급기야 선을 넘고 말았다.
"물러나십시오! 더 행패를 부리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사나운 외침과 함께 허리춤에서 진검을 뽑은 것이다. 당연히 지켜보던 자들을 기함했다.
"아악! 칼을!"
"어어엇!"
"헉! 뽑았다!"
이제는 단순히 알력 다툼을 넘어 칼부림이 나게 생긴 상황.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하나 그것과 별개로 구경하는 재밌는 더욱 커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심각한 거 아냐?"
"후계자인 도련님이 칼침이라도 맞는다면? 헉!"
하지만 더 놀랄 일은 바로 다음에 벌어졌다.
베니엘이 여전히 회초리를 든 채로 테시아에게 달려들었던 것. 지켜보는 자들인 비명을 질렀다.
"앗! 저대로?"
"허엇!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마스터급 검객이라도 버섯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가지고 어찌 진검을 상대하려는 건가 싶었다.
테시아가 잡병도 아니고 말이다. 그녀는 프로보스트 상급의 강력한 검객이었다.
테시아는 격노했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아무리 마스터라도 저딴 회초리를 들고 겨루겠다니! 기가 막힌 것도 정도가 있다.
테시아는 격노해서 달려들었다.
***
우시드라는 책상에 앉아 손가락을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엘렉카에가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 벌을 줘야 좋을지 부산히 궁리 중이었다.
'감히 장차 이 가문의 주인이 될 내게 대들어? 하찮은 사내 주제에?'
다크 엘프 가문에서 남자란 종놈이자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주제 파악을 못 하고 건방을 떨었으니 엄하게 징치해야 맞으리라. 그간 옛정이 있어서 처분을 미루고 있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똑. 똑. 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우시드라의 딸 페샤디아가 들어왔다.
"어머니, 찾으셨나요?"
"그래, 오늘 네 천박한 아비를 처리할 작정이다."
"!"
페샤디아는 화들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살짝 깨물어야 했다.
사실 그녀는 엘렉카에에게 차갑기만 하지만, 실제론 마음속에는 부친을 향한 동정심과 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비록 엘렉카에가 거짓말을 잘하고, 허풍이 세며, 실력이라곤 없는 한심한 남자라 지금껏 페샤디아를 여러 차례 실망시켜 왔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겐 누구보다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페샤디아는 진실된 감정은 일종의 애증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 다크 엘프 사회에서 하찮은 부친 따위에게 미련을 갖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페샤디아는 엄한 어머니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엘렉카에에게 날 선 태도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시드라는 혹여나 딸이 엘렉카에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지 않은지 아직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모든 걸 확실히 하기 위해 페샤디아를 부른 것이다.
우시드라는 책상 위로 섬뜩한 물건을 내밀었다.
"네가 엘렉카에를 직접 쳐라."
"이건…!"
기다란 가시가 박힌 채찍이었다. 이걸로 때리면 삽시간에 몸이 엉망진창이 돼 버리곤 만다. 열 대 이상 맞으면 그냥 죽은 목숨이라도 봐도 좋았다.
여태 감정을 잘 관리하던 페샤디아가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우시드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못하겠느냐? 나의 딸아."
마치 시험해보는 듯한 말투다. 네 행동에 따라 앞으로 딸이 아닐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기도 했다.
페샤디아는 큰 위협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시드라에게 자식은 자신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모친의 가장 큰 총애를 얻고 있긴 해도, 그 마음이 언제 다른 자식으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엘렉카에를 봐.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페샤디아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다크 엘프다운 삶을 위해서, 남아 있는 일말의 정을 모두 끊어내기로 했다.
'그래, 이건 하찮은 감정이다.'
동정심은 지하 세계에서 약점일 뿐이다. 페샤디아는 어릴 때부터 귀가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하겠어요. 제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어머니."
페샤디아가 가시 채찍을 단단히 붙잡자 그제야 우시드라의 표정이 만족스러워졌다.
"그래, 현명하구나."
이후 둘은 앞으로의 일을 논하며 엘렉카에를 기다렸다. 한데 이상하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몇 번이고 새로 내온 차가 식기를 반복하자 우시드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보다 늦는군?"
닉스포트의 환락가는 번화한 곳이지만 그리 넓은 구역은 아니다. 화끈한 성정의 테시아를 보냈으니 그곳을 뒤엎으면 금방 잡아 올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여태 감감무소식이니 우시드라는 무언가 찜찜함을 느꼈다.
"제가 나가볼까요? 어머니."
"음… 경거망동할 거 없다. 일단 조금 더 기다려...."
한데 그때 밖에 소란스러워지더니 가병이 급히 소식을 가져왔다.
"우시드라 님. 우시드… 허억! 헉!"
다급히 달려온 듯 숨을 헐떡이는 가병을 보며 우시드라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추태냐? 침착히 보고하도록."
"네, 네엣! 허억…, 헉! 죄송합니다. 긴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임무를 나갔던 테시아 님이 그 망나니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뭐라! 그래서?"
어쩐지 우시드라는 손아귀에 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안 그래도 요즘 그 망나니만 나오면 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절로 불길함을 느꼈다.
"현재 테시아 님은 그 망나니 놈의 인질로 붙잡혔습니다!"
"…!"
급기야 우시드라가 쥐고 있던 찻잔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속으로 열불이 치솟았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그 망나님 놈이 몸값이라도 요구하는 건가? 황당한 수준으로?"
보통 다크 엘프 가문에서 상대 진영의 인물을 붙잡으면 죽이지 않고 몸값을 받고 풀어준다. 거의 내전 수준의 심각한 상황이면야 다르겠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니 말이다.
우시드라는 아마 소식을 전하는 가병의 얼굴이 당황으로 가득 찬 게 망나니 베니엘 놈이 터무니없는 몸값을 요구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놈은 상식이 없고 욕심이 지나치지. 모처럼 인질을 잡았으니 선을 넘는 요구를 하려는 게야.'
하지만 그건 우시드라의 착각이었다. 소식을 전하러 온 가병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죽어가고 있는 건 더 심각한 이유가 있었다.
"망나니가 현재 대회의를 요청했습니다."
"뭐? 대회의?"
'대회의'라 하면 가주부터 시작해서 가문의 중진 모두가 모이는 자리다. 후계자라면 분명 그걸 요청할 권리가 있으나 쉽사리 꺼낼 건 아니다. 가주까지 움직이는 것이니 만약 허튼 수작을 했다가는 그날로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회의를 소집했다고?
"대체 왜?"
"망나니의 말로는 우시드라 님의 비리에 대해 고발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자세한 증거를 확보했고, 엘렉카에도 증인으로 나설 거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결국 참지 못하고 우시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내가 물렀구나! 엘렉카에라면 분명 이쪽의 이런저런 사정을 알고 있을 텐데! 좀 더 빨리 처리했어야 했어!'
우시드라의 긴 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래서 가주께서는? 가주께선 뭐라고 하시었나?"
"그것이 아직...."
"다, 다행이군. 그렇다면 대회의가 소집되기 전에 가주님을 찾아가서 내가...."
하지만 불행한 소식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법이다.
"우시드라 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다른 가병이 뛰어 들어와서는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가주께서 대회의의 소집령을 내리셨습니다. 사흘 뒤 이 시간에 흑요석 성탑에 출석하시라는 명령입니다!"
"아니, 벌써?"
그제야 우시드라는 알게 됐다.
이번에 베니엘이 아주 작정하고 나섰다는 것을.
81화
혼혈 마족 (1)
어두컴컴한 밀실 안.
검은 별이라 불리며 존숭받는 나르다리온 남작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흐음...."
밀실의 벽면에는 지금껏 그가 쓰러뜨려온 강적들에서 빼앗은 전리품이 마치 트로피처럼 자랑스럽게 장식돼 있었다.
그중에는 본가 시절부터 남작의 라이벌이자 베니엘이 익힌 네더블레이드의 창시자, 주르도의 검도 있었다.
문뜩 그 검과 눈이 마주친 남작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내게 굴복할 생각을 안 하다니…. 건방진 검 같으니라고.'
주르도가 쓰던 마검은 실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저 검은 지하 가장 깊은 곳에 사는 괴종족 '헤르즐락 나낙' 군주의 이빨을 금속과 섞어 만들어 냈다고 한다. 또한 검에는 괴종족의 힘이 깃들어 있는데 그 잘난 주르도조차 검의 능력을 반절도 끌어내지 못했었다.
남작은 주르도를 쓰러뜨리자마자 이 검부터 챙겼다.
문제는 마검이 남작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검은 거칠게 반항했고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하이 마스터에 이른 그의 실력으로도 말이다.
하지만 남작은 결국 시간 문제라고 믿었다.
'언젠가는 굴종하게 해주마.'
무언가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걸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는 남작에게 있어 저 마검은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남작의 신경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바로 주르도가 혹여나 검술서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잠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던 남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놈은 까막눈이다. 검술서를 만들었을 리가 없지. 따로 전인이 있는지는 수십 년간 조사했고.'
네더블레이드를 이어받은 거로 의심되는 자가 있으면 지체 없이 둘째 동생인 머리 수집가를 보내서 암살했다.
하니, 분명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악랄한 검법은 이제 사라졌으리라. 남작은 그렇게 매번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남작은 그 생각에 집착하는 대신 옆에 공손히 시립해 있는 시종장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는 표정이군."
시종장은 가문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외적으로도 노화가 확연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리는 곧았고 벨벳 조끼를 입고 한쪽 눈에 단안경을 낀 모습은 아주 절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검술 가문의 인물답게 시종장임에도 허리춤에 사이드소드 두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역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검객인 것이다.
"가주의 결정에 의문을 가진 점 죄송합니다."
시종장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말해보게. 자네라면 괜찮아. 뭐, 사실 무슨 말을 할지 알 만하다만."
시종장은 자신이 주제넘게 나서는 게 옳은지 잠시 고민했으나 곧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대회의는 당장 오늘 밤이라도 열 수 있습니다. 한데도 일부러 사흘 뒤로 미룬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아, 그거 말인가?"
"분명 수석비서관은 도련님을 습격할 겁니다."
수석비서관은 베니엘의 큰고모 우시드라를 말한다. 시종장은 최근 그 자질을 꽃피우고 있는 베니엘이 우시드라의 탐욕에 스러지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그게 가문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데도 남작은 남 일을 대하는 듯한 태도로 답했다.
"그래, 무언가 일어나겠지. 하지만 내 첫째 여동생은 재주가 좋은 아이니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을 거야."
"가주님."
"심증이야 남겠지만 그걸로 가족끼리 어쩌긴 힘들겠지."
심지어 남작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기까지 했다. 시종장은 심각한 표정이 됐다.
"도련님이 이길 확률은 낮습니다. 하면 도련님을 쳐내시려는 겁니까?"
"아니다. 그럴 작정이었으면 왜 다시 후계자로 세웠겠나?"
"하면 시험입니까?"
그 말에 남작은 낮게 웃어댔다.
"크흐흐흐…!"
진짜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니. 안타깝게도 본인은 그런 자상한 아비가 아니라서 말일세."
"하오면?"
"그저 가주답게 다투는 가족 간에 서로 해결할 기회를 주고자 할 뿐이야. 암, 그렇지."
남작은 만약 우시드라가 패배한다면, 그녀의 과중한 권한 일부를 더 빼앗고 한동안 칩거하게 할 셈이었다. 별다른 증거가 안 남는다고 해도 뻔히 우시드라가 손을 쓴 건 아는 이상 심리적으로 압박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슬슬 우리 여동생께서도 겸손을 다시 배울 때가 됐긴 했지.'
생각해 보면 직접적인 전투로 우시드라를 패배시킨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오늘날까지 충순(忠順)한 첫째 여동생이었으나 최근 슬슬 불온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남작은 이참에 기강을 다시 잡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반면 베니엘이 패배한다면, 남작은 자기 아들을 무인도에 건설하고 있는 그융크 병영에 아주 처박을 작정이었다.
큰고모의 분노도 피하고 한동안 자숙을 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러 가지 재갈을 물릴 속셈.
즉, 어느 쪽이나 남작에겐 이득이란 소리였다.
"누가 이기든 가주는 그저 지켜볼 뿐이지. 안 그런가?"
시종장은 남작의 심모원려를 이해하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자네가 보기에 수석비서관이 어떤 식으로 나올 것 같나?"
시종장은 짧게 생각하더니 답했다.
"흔적이 남지 않게 하려면 가문 내의 검객을 쓰지 않겠습니까?"
나이트쉐이드 가문에 있는 유력한 검객 중 반 이상은 사실 식객으로 머물고 있는 칼잡이들이다. 그래서 검객(劍客)이라 하는 것이다.
이들은 귀족 가문에서 숙식이나 편의를 제공받으며 수련에 힘쓰는 대신 그 집 주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자들로, 사실 지하에선 '칼팔이'란 멸칭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이트쉐이드의 검객 모두가 남작을 따르는 건 아니었다. 특히 최근에는 남작의 수완 좋은 첫째 여동생 때문에 그런 숫자가 더 늘어났다.
"그래, 수석비서관의 부탁이라면 움직일 작자들이 있으니 말일세."
"...."
잠시 침묵하던 시종장은 곧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께선 가문을 다스리시는 방법이 과거 용병 대장 시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지적에 나르다리온 남작은 껄껄 웃었다. 어두운 밀실 속에서 그의 새파란 안광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하하핫! 온당한 지적이군. 자네 눈앞에 있는 이 가주란 작자도 사실 본가에서 탈주한 뒤 노예 생활까지 한 근본 없는 이라 그럴 수밖에. 나이트쉐이드는 겉으로는 제국의 귀족 집안을 본떠 흉내 내고 있으나 실상 그냥 깡패 무리일 뿐이야. 이래서 근본이 중요한 거고."
"가주님."
"너무 책잡지 말게. 그 근본이 우리 집안에 없는 걸 어쩌겠나?"
남작은 더는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을 살짝 세워 보였다. 그러자 시종장이 공손히 읍했다.
"저는 가주님을 섬길 뿐입니다."
"좋네. 일단 녀석이 이 풍파를 이겨낼지 지켜보자고. 이 정도에 쓸려나가면 애초에 쓸 수도 없는 놈일 뿐이야."
남작은 새로운 명령장을 작성해서는 베니엘에게 보내도록 했다.
***
우시드라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치욕감에 떨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조카의 뺀질뺀질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 영악한 것이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드디어 발톱을 드러내는군!'
힘과 지위가 생기니 결국 그 천박한 본모습을 참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특히 최근에 연이은 성공과 강력한 검객들을 얻어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리라.
'아무래도 네게 교훈을 내려줘야겠구나.'
여기서 교훈이란 물리적인 계도를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열 받으니까 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
다만 아무리 다크 엘프 가문에서 다툼이 흔하다고 해도 맘대로 치고받고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가문 자체가 유지가 안 될 터.
그래서 필요한 게 명분이다.
내가 쟤를 때려도 되는 이유 말이다. 이 명분이 없이 멋대로 날뛰다가는 가문의 공적이 되거나 가주에게 징벌을 받게 된다.
'문제는 명분이 없다.'
우시드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베니엘의 행동에는 잘못이 없다. 어디까지나 모욕받는 가문의 구성원을 보고 나선 것에 불과하니까.
우시드라 역시 대외적으론 엘렉카에를 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멋대로 흥분한 테시아의 실수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테시아의 잘못이며 우시드라의 실책이 아닌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베니엘을 책 잡긴 어렵다.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상대는 후계자. 어지간한 명분으론 씨알도 안 먹혔다.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란다. 얘야.'
정면으로 칠 수 없다면 암습을 하면 됨. 그걸 위해선 자신은 모른 척하며 꼬리를 자를 사냥개가 필요했다.
베니엘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오래간 가문 내의 싸움에 대비해 온 우시드라에겐 그런 자가 여럿 있었다.
***
베니엘은 남작이 대회의를 사흘 뒤에 열겠다고 하자마자 그 본의를 알아챘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작자 같으니라고…. 쯧!'
일단 그는 즉각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이에 몰려온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전직 요새 사령관인 기계 언데드 드랄두.
-황금팔의 주인인 호위대장 쿠르신.
-약삭빠른 행보관 쥐새끼 퀵포우.
-언제 지하에 적응할 생각인지 아직도 순둥순둥한 올리비에, 그리고 사냥개 로나.
-최근 휘하의 용병들을 관리하는 부사관 역할을 하는 홉고블린 삼형제.
-졸첸에 있는 실라가 보낸 요원인 퀴아.
어느새 베니엘의 주위에 인재들이 바글바글해졌다. 커다란 탁자를 꽉 채운 그들을 보며 베니엘은 속으로 감개무량했다.
'오리지널 곁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지….'
물론 맹세 때문에 충성하는 쿠르신과 억지로 따르는 가병 무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누구도 자발적이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망나니의 곁에 있었던 것뿐.
'새삼 느끼는 거지만 오리지널 녀석은 외롭지 않았을까…?'
실상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편이 되어주는 이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무조건 둥가둥가 해주는 둘째 고모 아니엘이 없었다면 진작 더 망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현재 베니엘의 곁에는 유능한 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지금 얻은 인재들만이 아니라, 여러 빼어난 자들이 베니엘 옆에 있으면 명성과 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명성은 지난 폐허 도시의 원정 덕에 닉스포트와 드라카니아를 너머 에본플로우에 면한 수십 개의 도시로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 텐데, 그걸 위해선 일단 눈앞의 파도를 넘어야 했다.
"주목."
베니엘의 말에 왁자지껄하게 상황을 논의하던 간부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에게 베니엘은 단언했다.
"앞으로 사흘 동안 큰고모가 이쪽을 습격할 것이다."
대번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정말입니까?"
우려 섞인 쿠르신의 물음에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가주가 이 시간을 허락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명확한 일이지. 아마 큰고모가 직접 나서진 않을 거다. 그럴 명분이 없으니까."
"하면?"
"대신 잘 드는 칼을 쓸 게 뻔해. 만약 허를 찔린다면 우리쪽에서도 사망자가 여럿 나올 거다."
죽음을 이야기하자 다들 긴장감 어린 표정이 됐다. 오직 언데드인 드랄두만이 무표정했다. 이미 그에게 죽음은 일상이었으니까.
"저기… 찌익?"
모인 이들 중 가장 겁이 많은 퀵포우가 털이 송송한 자신의 앞발을 들며 제안해왔다.
"그냥 대회의날까지 남작님의 성에서 버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안이라면 우시드라라고 해도 감히 분란을 일으키지 못할 겁니다."
이에 베니엘이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퀵포우, 너는 아직도 남작님에 대해 잘 모르는군."
그러면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이건…?"
"명령장이다."
명령장에는 앞으로 사흘간 치안관으로서의 임무 수행에 힘쓰란 내용이었다. 영지의 경계를 순찰하란 소리였는데 구체적인 장소도 몇 곳 지정돼 있었다.
"모두 최근에 치안상 문제가 생긴 지역이 맞긴 하지. 몬스터가 나타난 곳도 있고, 이웃 영지와 분쟁이 벌어진 곳도 있다. 하지만 하필 이때 보내는 이유가 뭐겠나? 그런 으쓱한 장소로 말이야."
"이, 이런! 찌익!"
"남작님의 뜻은 명확하다. 앞으로 사흘 동안 큰고모와 무력으로 해결을 보란 소리지. 그리고 내가 승리해서 큰고모를 궁지로 몬 상황이 아니라면, 비리니 뭐니 하는 부분에 대해 들어주지도 않을 거다."
베니엘은 다소 씁쓸한 기분이 됐다. 결국 자신이나 큰고모나 둘 다 남작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신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 간교한 양반이 이번에 어느쪽 편을 들어줄지 이리저리 간을 보고 있겠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남작의 권위와 힘이 절대적이니 그가 정한 룰 안에서 싸우는 수밖에.
하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베니엘은 생각했다.
'아버지, 오늘은 큰고모와 싸우지만 내일은 누구와 싸울지 어찌 알겠습니까?'
82화
혼혈 마족 (2)
하지만 베니엘은 아직 이런 다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일단 아직은 충실하게 아버지 남작을 섬기는 후계자를 연기해야 했으니까.
힘이 약할 때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그게 다크 엘프다운 처제술이었다.
"주인님, 혹시 우시드라 쪽에서 어떤 검객을 동원할지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찌익?"
퀵포우의 질문에 좌중의 시선이 베니엘에게 쏠렸다.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있다. 내 생각에는 아마 서열 5위 검객인 조르카가 나설 거라고 본다."
'조르카'란 말에 듣고 있던 기계 언데드 드랄두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미 죽었는데, 한 번 더 죽겠군."
즉, 드랄두조차 비벼볼 생각을 못할 만한 강자란 소리다.
이런 비관적인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 호위대장 쿠르신조차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
그저 가문의 사정을 모르는 지상인 올리비에만이 그 잘생기고, 잘생긴 얼굴로 해맑게 물어왔다.
"대체 누군데 그럽니까? 베니엘 님. 분위기가 갑자기 영...."
아닌 게 아니라 간부진은 다들 심각한 얼굴이었다.
"조르카는 우리 가문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는 하프 타르나이다."
대답을 하는 베니엘의 표정이 안 좋았다. 조르카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면 마족 혼혈이란 말씀이시죠?"
"맞아. 위험천만한 성정을 가진 잔혹한 자다. 파괴적이며 모험을 즐기지."
쉽게 말해 도파민 중독자의 전형이다. 하필 그 도파민을 칼날이 목을 스쳐 지나가는 아슬아슬한 검투의 순간에서 찾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 칼솜씨가 아니었다면 진작 뒤져도 백 번은 넘게 뒤졌을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상대겠군요? 하지만 베니엘님께선 서열 7위인 뱀파이어 검객 발토리스도 쓰러뜨리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힘을 모아 대비하면...."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가문의 검객 서열 5위부턴 차원이 달라."
일단 그 조르카라는 이름의 하프 타르나이의 경지는 마스터 중급이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그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조르카는 다혈질이고, 사방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성난 화염 같은 작자다. 한데도 우리 가문으로 온 이래, 오래간 얌전히 수련에만 힘썼지. 아주 놈답지 않은 일이야.
이점을 고려해 볼 때, 그동안 얼마나 성취를 이뤘을지 알 수 없다. 만반의 대비를 위해선 독안룡 카바세호와 싸운다는 느낌으로 나서야 맞아."
듣던 호위대장 쿠르신이 놀라서 눈이 커졌다.
"그 정도입니까? 카바세호 님이라면 마스터 상급의 절대강자인데!"
독안룡 카바세호는 베니엘의 의붓누나 아리아나의 후원자로, 가문의 검객 서열 3위다. 현재 2위가 가문을 떠나 있는 탓에 실제로 가주 다음의 강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베니엘이 그 카바세호까지 언급하니 놀랄 수밖에.
베니엘은 허언이 아니라는 듯 끄덕였다.
"내 예상으론 아직 상급의 벽을 넘진 못했지만 같은 경지에선 적수가 없을 거다. 약간의 깨달음만 얻는다면 언제든 상급으로 나아가지 직전이라고 할까? 카바세호와는 한 끗 차이라고 봐야 한다."
좌중에서 탄식이 터졌다. 검객에 대해 잘 모르는 퀵포우는 기다란 수염을 혼자 손가락을 배배 꼬며 물었다.
"그렇게 강합니까?"
"그래, 칼질에 미친놈이다. 게다가 자기 혈통의 열등감까지 검으로 극복하려 하니 더욱 그렇지."
조르카는 놀랍게도 '인간'과 '타르나이'의 혼혈이다. 지저에서 가장 저급한 혈통과 가장 고귀한 혈통이 섞인 거다.
그는 타르나이 명가의 서자로, 이전부터 기행으로 유명했다.
"타르나이의 머리에는 뿔이 있다. 그 뿔은 권위와 힘의 상징이지. 세상 사람들은 타르나이의 마법이 그 뿔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다. 한데 그 작자는 뿔이 검술에 방해된다고 잘라버리기까지 했어."
"찌익! 아니, 그 귀한 걸? 나나 주지!"
검이란 건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휘두르는 동작이 많다. 당연히 머리에 큰 뿔이 있으면 동작에 큰 제한이 가해진다.
물론 대부분의 타르나이는 마법을 파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아니나, 이 기이한 타르나이 혼혈은 참지 못하고 자기 뿔을 잘라 버렸다.
당연히 이건 타르나이 사회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인간 혼혈의 서자라 손가락질 받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가문의 망신까지 시키자 결국 조르카는 추방됐다.
이후 검 한 자루에 의지해 광대한 지하 세계를 떠돌아 왔던 것이다.
"한데 주인님께선 어째서 그 마족 혼혈이 나설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찌익?"
베니엘은 간단하다는 듯 답했다.
"떠나기 위해서다. 이미 그 작자는 다시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 지 오래야. 그러니 이번에 우시드라의 부탁을 처리하고 빚을 털어내려 할 게 틀림없다."
***
베니엘의 예상은 틀림없었다.
몇 시간 뒤, 영지의 은밀한 동굴 지대에서 두 인물이 마주하고 있었다.
수석비서관이자 베니엘의 큰고모인 우시드라와 가문의 검객 서열 5위인 하프 타르나이 조르카였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타르나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에서 불길이 흘러나왔다.
"그래, 기꺼운 일이다. 이 몸은 일전에 네게 은혜를 입었다. 우시드라. 이제 그 은혜를 갚고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조르카의 눈빛은 희열로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오래간 참아왔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하프 타르나이는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이였다. 그는 고열로 타오르는 드워프의 용광로 같은 열기와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또한 역전의 용사기도 했다. 그의 붉은 피부 위로는 수많은 상흔이 어지러웠다.
조르카는 따로 갑옷을 입지 않고 훌륭한 망토만을 걸친 채 터질 듯한 근육으로 가득 찬 상반신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그의 눈은 마치 녹인 금처럼 반짝이는 선명한 색이었다. 그것은 금속의 빛으로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양손검이다. 그 검은 드래곤의 뼈대로 틀을 잡고 다크 엘프의 검은 철로 만든 거대한 검신을 갖고 있었다.
검의 이름은 '회오리바람'.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 파공음과 기세가 회오리바람을 보는 것만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우시드라는 차가운 말투로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네가 제국을 주유하길 바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을 해준다면 너는 내게 더 이상의 빚은 없다."
과거 조르카는 우시드라에게 목숨을 빚진 일이 있다. 격전으로 다 죽어가던 그를 구해준 게 우시드라였던 것. 이후 조르카는 몸을 회복하고 적을 피하기 위해 나이트쉐이드의 식객으로 머물게 됐다.
하지만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왜냐하면 은혜에는 은혜로, 원한에는 원한으로라는 철칙을 가진 조르카가 그걸 갚기 전에는 떠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몸이 쑤시고 다시 방랑하고 싶어도 조르카는 자신이 세운 삶의 원칙을 어기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마침내 우시드라가 무언가를 부탁해온 것이다.
다만 내용이 좀 의아했을 뿐.
조르카는 나무 밑동 같은, 자신의 뿔이 잘려나간 곳을 매만지며 물었다.
"의외로군? 나는 검은 별을 상대할 줄 알았는데 그 아들이라니?"
이 물음에 우시드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계획이 틀어졌다."
본래 그녀가 세운 계획은 외부적으로 용암강 너머의 오크 부족을 끌어들이고, 내부적으론 자신을 따르는 식객들을 이용해 반역하는 것.
하지만 그 단초 가운데 하나였던 버섯 농장의 반란이 제대로 시작도 되지 못하고 망해버렸기 때문에 계획은 무기한 연기였다.
우시드라의 머릿속에 그 버섯 농장의 일을 망친 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 그녀를 보며 조르카는 실실 비웃어댔다.
"네년의 조카가 아주 문제인가 보군? 이번에 목을 베어주면 되나?"
하지만 우시드라는 자신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었다.
"무리야. 이 습격에 대해 내 오라버니는 뻔히 알고 있을 거다.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후계자를 도모했다가는 뒷감당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주가 묵인할 수준이어야 해."
"너의 다크 엘프의 정치는 정말 짜증나고 복잡하군! 퉤엣!"
조르카는 인상을 찌푸리며 옆으로 침을 뱉었다.
치이익.
녹색을 띄는 강산성 침 때문에 근처의 석회질 암석이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내렸다.
"맞아. 우리 종족은 그렇지. 하지만 네가 할 일은 간단해. 나도 너 같은 모지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을 시키는지 알고 있다고."
"뭐라? 크하하핫!"
조르카는 송곳 같은 이빨을 잔뜩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시드라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냥 베니엘 근처에 있는 놈들을 다 죽여. 특히 놈의 새로운 검이 된 드랄두와 쿠르신을 처리해라. 놈이 두 검객을 얻고 나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으니까."
"아하! 그렇다면 어렵지 않지. 나는 살인을 좋아해. 특히 칼 든 자를 죽이는 걸 좋아하지. 그 뒤에 따로 할 일은 없나?"
우시드라는 작게 끄덕였다.
"그다음은 정치적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너 같은 무식한 칼잡이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하긴, 그래. 그건 네가 잘하는 일이지. 우시드라."
조르카는 호랑이의 것처럼 흉흉한 손톱이 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조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안타깝군. 우시드라."
"무슨 말이지?"
"그런 자질과 힘을 가졌음에도, 늘 비열하고 치사한 수작질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네 오라비 남작을 뛰어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크하하핫!"
당연히 우시드라는 발끈했다.
"닥쳐라. 알지도 못하면서!"
"네 젊은 시절부터 여전히 그대로인 건 그 성질머리밖에 없군. 얼마나 더 하찮아지는 건가? 우시드라."
"너는 그냥 시킨 일이나 해. 그리고 떠나. 이후에 우리는 엮일 일은 없을 테니."
"카하핫! 그것참 매정하시군. 하지만 깔끔해서 좋아. 하긴 그게 너희 비루한 귀쟁이들에게 몇 개 없는 장점이기도 하지. 늘 계산적인 거 말이야."
"시끄럽군. 이 살인마 새끼가."
실제로 조르카는 유명한 도살자였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살인이 꼭 나쁜 건 아니야. 살인은 각각의 행위마다 교훈을 주니까. 이번에 그 망나니라 불리는 도련님의 무리가 무엇을 가르쳐 줄지 기대되는군. 크흐흐흣!"
***
베니엘은 남작에게 받은 것처럼 순찰 임무를 위한 인원을 꾸렸다.
전투력이 없는 퀵포우나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올리비에는 제외했다. 물론 올리비에는 결연히 나섰다.
"저도 가겠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르텔 백작가의 이름을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베니엘은 그가 대견하기도 했으나 현실을 지적했다.
"너는 용력을 타고났지만 무예가 부족하다. 이 기회에 단련이나 하고 있어. 퀵포우의 호위를 부탁하지."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올리비에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 알겠습니다. 직접 참가는 못 하지만 전투의 승리를 빌겠습니다."
이에 베니엘은 킥킥 웃어댔다.
"고마운 말이긴 하나 여전히 어수룩하군. 올리비에."
"네?"
"전투의 승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정치적 승리지. 이번 싸움은 단순히 서열 5위 검객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하면…?"
"간단하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큰고모는 좌천. 나는 승진. 그게 목표다."
올리비에는 이 화두를 곱씹었다.
'맞아. 내 식견이 짧았어. 아무래도 다크 엘프의 방식에서 배울 게 많은걸?'
올리비에는 순진할지언정 어리석은 작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런 새로운 배움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베니엘은 자기도 모르게 이 순진한 지상 도련님의 사고방식을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대로 지저에서 몇 년 더 구르다가 지상으로 올라가면 르텔 백작가에 파란이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집 잘 보고 있으라고."
이번 순찰에는 철저히 전투병 위주로 구성했다.
-기계 언데드이자 마스터 드랄두.
-호위대장 쿠르신과 복귀한 다크 엘프 호위병 다섯.
-부사관 역인 홉고블린 삼 형제와 그들의 통제를 따르는 아홉 용병들.
이렇게 베니엘을 포함하면 총 20명이었다.
한데 이 인선에 불만을 제기하는 자가 있었다.
"아니, 저는 왜 안 데려가세요? 이대로라면 실라 님에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고요?"
바로 파견 온 인간 요원인 퀴아였다. 베니엘은 그녀의 실력을 알고 있었으나, 다크 엘프 특유의 얕잡아 보는 어투로 물었다.
"싸움을 할 줄은 아나?"
퀴아는 자존심이 긁힌 듯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어디 가서도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요. 특히 활을 잘 쏜답니다! 제가 활시위를 당기면 다들 깜짝 놀란다고요!"
"호오? 그래봐야 인간이지. 지금 엘프 앞에서 활 솜씨를 자랑하는 건가?"
"호호호! 그 잘나신 엘프들이 제 앞에서 활 대결로 여럿 지셨는데?"
이건 확실히 대단한 거다. 활로 엘프를 꺾는다니. 역시 제국 정보부 요원의 자질은 남달랐다.
하지만 베니엘은 이번에 퀴아를 다른 중요한 역할에 쓸 예정이었다.
"따로 부탁할 일이 있어. 이번 내 계획의 성패가 오로지 네게 달렸다. 퀴아."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이 부탁으로 인해 실라의 무리가 제국 정보부와 연관이 있다는 게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될 터였다.
베니엘은 그들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도와줄지 궁금했다.
'언제까지 정보부인 걸 모른 척하게 둘 수는 없지. 나중에 그 고귀하신 마족 황녀님과의 연결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지금부터 슬쩍 찔러보자고.'
83화
혼혈 마족 (3)
부탁이란 말에 퀴아는 콧대가 치솟아서는 으스댔다.
"흥! 또 미인계예요? 아, 진짜. 이놈의 미모는 쉴 날이 없네요."
옆에서 듣고 있던 퀵포우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녀석은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못생긴 게 날이 갈수록 지랄이 심해지는군. 찌익!"
"뭐어? 이 시궁창 냄새나는 털북숭이가!"
내버려두면 또 한참 말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서 베니엘이 제지했다.
"그만. 미인계는 아니다. 넌 엘렉카에 전담이야. 네가 다른 남자랑 놀아나는 꼴을 보면 엘렉카에 눈이 돌아갈걸?"
현재 엘렉카에는 베니엘의 진영에 합류해 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기도 했지만 퀴아의 존재가 컸다. 물론 엘렉카에는 그녀를 제도에서 온 아름다운 가인 플라비아로만 알고 있지만.
"아, 그렇긴 하겠네요."
"혹여나 해서 묻는다만 혹시 애인이 있나?"
"없는데요?"
"잘됐군. 그러면 엘렉카에에게 집중해."
"네에~."
냉큼 대답을 하면서도 자기는 좀 더 근사한 남자가 좋다고 투덜거린다.
"대단한 미남자가 아닌가? 불평이 심하군."
"아, 그건 그렇죠."
얼굴 하나로 큰 성공을 이룬 하찮은 남자가 아닌가. 존잘이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다크 엘프라 거의 늙지도 않고. 그래서인지 퀴아도 선선히 연인 놀음에 응하고 있었다.
아니, 그걸 넘어 가끔 그녀는 엘렉카에를 보고 묘한 표정으로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는 게 영 수상하기도 했다.
'설마, 저런 투덜거림도 일종의 연막인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요원이 실수할까 싶지만 남녀 간의 일이란 모르는 법. 게다가 이건 게임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부분이고.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베니엘은 용건을 꺼내놨다.
"카르멘의 오브를 세 개만 구해와라. 돈은 줄 테니까."
그 순간 퀴아가 멈칫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주목하고 있던 베니엘은 쉽게 알아챘다.
"호호, 무슨 소리실까? 카르, 카르… 뭐시기의 오브요?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알아야 구해오지요."
하지만 베니엘은 단호했다.
"구해오는 게 좋을 거다. 만약 못 구해온다면 너희는 바로 퇴출이야. 나이트쉐이드는 쓸모없는 자와는 상종하지 않는다."
"아이, 참. 그거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닐까요?"
퀴아는 둘이서 얘기하자는 듯 구석으로 손짓을 했다. 베니엘은 내켜하지 않자 실실 웃으면서 손목을 잡아끌더니 급기야 등까지 떠밀어댔다.
"자자, 저 같은 미녀랑 밀회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디 으쓱한 동굴 없나~?"
평범한 사내였다면 이게 너스레인 줄 알면서도 설렜을 거다. 하지만 베니엘은 이게 무슨 지랄이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만날 보는 게 지하에서도 절세미녀로 꼽히는 의붓누나 아리아나나 둘째 고모 아니엘이기 때문이다.
"슬슬 퀵포우가 옳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쯤 하도록. 어디까지 가려고?"
내심 기회가 되면 베니엘을 슬쩍 꼬드겨 볼까 하던 퀴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기 미모가 씨알도 안 먹히는 걸 알고는 그녀는 바로 포기하기로 했다.
'이 망나니 도련님. 눈 되게 높네.'
퀴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듣는 이가 없는지 살피더니 속삭이며 말해왔다.
"카르멘의 오브가 뭔지 아시는 건가요?"
"이거 참. 시골 영지의 도련님이라고 무시하냐?"
"그게 아니에요! 갑자기 언급하시니까 그렇죠!"
카르멘의 오브는 강력한 계약 마법이 담긴 마법 물품이다. 서로 한 가지 약속을 할 수 있는데, 노예 마법을 걸 수 없는 강자들에게도 유효했다. 이러니 당연히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카르멘의 오브가 단순히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님은 알지."
오브는 제국에서 통제하는 물건이었고 일부 허가받은 자들만 사용 가능했다. 제국 정보부는 그 허가 받은 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어머, 잘 알고 계시네요? 한데 왜 우리한테 내놓으라 그러시는 거예요?"
퀴아는 설마 제국 정보부인 걸 들켰나 싶어 안구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베니엘은 그 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진 않고 의뭉을 떨었다.
"너희가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제도 쪽에 끈이 있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부탁한 거다."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아, 그렇게 계속 모른척하던가. 그럼 그냥 버려야겠군."
베니엘이 버리겠다는 건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남작령의 제2도시인 졸첸에 어렵게 자리 잡은 제국 정보부의 잔당들은 싹 살림을 털리고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된다는 소리다.
황녀 파벌의 숙청과 함께 정보부가 풍비박산 나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퀴아다. 다시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가 되고 싶진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아니, 말을 왜 그렇게 박정하게 해요? 그래요. 뭐, 일단 그렇다 쳐! 한데 우리 도련님께선 어떻게 우리가 제도 쪽에 끈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요? 아니, 제가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졸첸에 둥지를 튼 그들은 이후 몇 번쯤 조심스럽게 제도에 연락한 적이 있다. 갖은 주의를 기울였는데 대체 어떻게?
베니엘은 여기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수단이 있는 건 너희만이 아니다. 알 생각하지 말도록."
"아, 진짜 곤란해도 너무 곤란한데."
퀴아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분명 이 망나니에겐 뭔가 있다. 이전에도 졸첸에서 암약하고 있는 조직원들의 리스트를 줄줄 외고 있었다지 않나.
이후 실라와 조직원들은 정보가 대체 어디에서 세는지 점검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서 당혹했던 일이 있다.
한데 이번에는 제도와의 끈을 지적하고 나섰다. 퀴아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어쩌면 우리가 정보부인 걸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라.'
하면 위험한가? 그 부분에 대해서 퀴아는 확신이 없었다. 물론 그림자 속에서 암약해야 하는 정보 요원의 신상이 드러난 것 자체가 위험한 건 맞다.
'하지만 이 망나니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지.'
사실 원하기만 하면 베니엘이 자신들을 진작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한데도 오히려 손을 잡고 후원도 해주고 있다.
게다가 퀴아가 보기에 베니엘이란 끈은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왜냐하면 이 망나니는 분명히 떡상할 거야!'
퀴아는 소문만 무성하던 망나니를 실제로 만나곤 내심 아주 높은 평가를 내린 상태였다.
'재능과 품성이 뛰어나다. 야심 또한 가득하고. 이런 자가 황녀님의 검이 되어준다면....'
게다가 나이트쉐이드는 남작가긴 하지만 실제 그 크기와 위세는 백작가에 준한다. 그러니 훗날 그가 가주가 된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분명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해 볼 만한 자였다. 퀴아는 결정했다.
"알겠어요. 실라와 논의해 볼게요."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엄청 비싼 건 알지요?"
"개당 일만 두크쯤 하는 것 같더군."
"어머나, 시세도 잘 아시네? 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진짜 너무 궁금해서 그래요."
"시끄럽다. 돈은 바로 보낼 테니까 당장 달려가. 시간이 별로 없어."
"와우, 바로 삼만 두크를 지르는 이 남자…! 반하겠는데요?"
"쓰읍!"
그 주접에 참다못한 베니엘이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퀴아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
얼마 뒤 스무 명으로 구성된 순찰대가 출발했다.
무리는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선두에 있는 다크 엘프와 후방에 있는 용병이다.
선두에선 베니엘을 중심으로 기계 언데드 드랄두, 호위대장 쿠르신, 그리고 복귀한 다섯 호위병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승용 도마뱀을 탔다. 이 생물은 지구에 사는 바실리스크 도마뱀을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였는데 크기는 말보다 조금 더 컸다.
녀석들은 평상시에는 네 발로 이동하다가 급하게 움직여야 할 때는 벌떡 일어나서 사람처럼 두 발로 뛰는 묘한 녀석들이다.
이런 점 역시 물 위를 달리는 거로 유명한 바실리스크 도마뱀을 닮았다.
뒤쪽의 용병들은 군막이나 식량, 각종 도구, 무기로 가득한 짐수레 두 대와 함께 도보로 따라오고 있었다. 짐수레는 덩치 좋은 사역용 도마뱀이 끌었는데, 순한 데다가 힘이 장사라 지하에서 인기 있는 종이었다.
"도련님."
선두 그룹에서 베니엘을 보좌하고 있던 호위대장 쿠르신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말해봐."
"도련님께서 현명하게도 이번 싸움 이후 정치적 안배까지 하고 계신다는 건 알겠습니다. 이 쿠르신은 도저히 따라할 수도 없는 영민함이십니다."
"뭔데 너답지 않게 아부를 해? 그냥 편히 말해."
"네, 알겠습니다. 결국 그런 부분은 조르카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제가 볼 때는 승산이 높지 않습니다. 설령 여기 전원이 덤빈다고 해도 말이죠."
꽤나 냉정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결코 틀린 말도 아니었다. 베니엘이 고개만 끄덕일 뿐 묵묵부답이자 쿠르신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해왔다.
"지금이라도 순찰대를 되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병환 등을 핑계로 대고 이번만큼은 피하면…."
"불가."
베니엘은 단호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어중간하게 할 거면 큰고모 비위나 맞췄지 이렇게 강하게 나가지도 않았다.
"이미 우리는 위험한 협로를 걷고 있다. 안전하게 잠시 쉴 곳은 없어."
"흠…, 하면 도련님을 아끼는 아니엘 님과 리리나 님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습니까? 두 분이라면 모른척하진 않을 겁니다."
확실히 두 고모 중 하나라도 끼어들면 아무리 조르카라고 해도 제압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해선 둘 다 나서지 않을 거야."
그들이 나서면 집안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다. 둘 다 쉽게 움직이지 않을 터. 결정적으로 그들 모두 이번 일로 베니엘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랬다.
'아니, 오히려 내가 패배하면 좋아할지도 모르지.'
아니엘과 리리나는 궁지에 몰린 베니엘이 자신에게 더 의지할 걸 기대할 게 틀림없다. 전자는 사랑을 원하고, 후자는 심장을 원하는 사소한 차이는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집착이란 점에선 별다른 게 없었으니까.
게다가 두 고모에게 기댔다가는 남작을 실망시키게 될 게 뻔하다. 결국 베니엘이 바라는 정치적 승리는 물 건너가게 된다.
베니엘은 이런 점을 설명해줬고 쿠르신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일이 쉽지 않군요."
한데 베니엘의 얘기는 끝이 아니었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내가 고모들에게 도와달라고 징징거리는 거야 문제가 있지만, 고모들을 이용하는 건 또 다른 얘기지."
"이용이요?"
"그래. 내가 고모들에게 매달리는 건 하책이다. 반면 내 계략에 고모들을 써먹는 건 상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쿠르신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역시 생각하신 바가 있으셨군요!"
베니엘은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래, 계책은 있다."
조르카에겐 안타까운 얘기지만, 베니엘은 괴물처럼 강한 그자와 정정당당하게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리리나는 베니엘이 밉다.
"내 걸작이… 흑흑. 내 드랄두가... 으앙!"
얼마 전 베니엘에게 공들인 기계 언데드 드랄두를 홀라당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가여운 리리나는 아직도 상심해서는 이불 속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나쁜 새끼! 용암강에 담가버려야 할 새끼! 끄아앙!"
베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게 어리고 순진한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주변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광기 그 자체였다.
이곳은 마치 공포물에 나오는 어두컴컴한 수술실을 떠올리게 했는데, 섬뜩한 녹색 마정석의 조명 아래 해체된 수많은 시체들이 줄줄이 벽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리리나에겐 언젠가 언데드화를 진행할 훌륭한 수집품들이자 작업물에 불과했지만.
이미 죽은 그 시체들은 여전히 살아서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침대 위의 리리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닥파닥!
방의 가운데 있는 어지러운 실험대 위에선, 누군가의 잘린 팔이 마력에 자극을 받아서 혼자 물 위에 나온 생선처럼 파닥파닥 뛰고 있었다.
얼마 전 무시하던 황금팔에 놀란 리리나가 어떻게든 그 의수를 따라 하기 위해 하던 실험의 잔재였다. 하지만 무계획하고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 다 그렇듯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아아아악! 다 싫어!"
리리나의 손에서 마법 광선이 쏘아지더니 탁자 위에서 혼자 날뛰던 팔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순식간에 숯처럼 변한 잘린 팔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베니엘! 베니엘! 이 못 돼 처먹은 놈! 이놈을 어떻게 하지?"
원래였다면 그 망나니를 당장 붙잡아 이 실험실로 데려와 밤새 실험을 빙자한 고문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건 불가능했다.
이미 베니엘의 몸 안에서 그 환상적인 마력을 봤으니까!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걸 본 이상 무슨 일을 당해도 베니엘을 무조건 미워하는 건 불가능했다.
베니엘에 대해 생각하면 독기가 절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또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런 리리나의 감정이 사랑은 아니었으나 결국 같은 작용을 한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아아…! 이 깨물어 버리고 싶은 새끼."
베니엘에 대해 생각하자 리리나는 어쩐지 몸이 뜨거워졌다. 그 마력을 다시 한번만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얼마 전에 당한 것도 있는데 고모 체면에 무작정 다시 다가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베니엘 그놈 옆에 붙어 있는 거 말이야….'
하나 그것은 인간관계에 서툰 리리나에겐 난제였다.
줄곧 구박이나 해오던 조카와 대체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상대는 돌대가리라 품위 있는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리리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악! 싫어, 이젠!"
점점 리리나의 히스테리가 심해지던 그때 누군가 찾아왔다.
"주인님."
그것은 작은 거미 인간이었다. 키는 30센티미터 정도로, 팔다리가 짧고 뚱뚱한 게 관점에 따라서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이 녀석은 리리나를 위해 사역하는 지하의 거미 요정 가운데 한 종류였다.
"응? 페페 왔니? 무슨 일이야?"
페페라 불린 이 거미 요정은 리리나에게 드물게 관대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기도 했다. 아끼는 애완동물인 셈이다.
"베니엘 도련님이 서신을 보내왔어요. 여기요. 받으세요."
거미는 몇 개의 앞발로 공손하게 서신을 내밀었다.
"정말?"
리리나는 얼른 그걸 낚아채서는 열어봤다. 그리고 그 얼굴이 곧 희열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이런 짓을 하자니? 그 돌대가리가 이런 내 맘에 쏙 드는 제안을 해오다니!"
리리나의 열병에 걸린 것처럼 뜨거워진 숨결과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84화
혼혈 마족 (4)
***
편지를 읽은 리리나는 즉각 베니엘을 찾아 나섰다.
"가자, 스핏파이어."
리리나의 명령에 마법 지팡이 '스핏파이어'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녀가 그 위로 비스듬히 앉자마자 지팡이가 비행을 시작했다.
쓔웅!
지하 세계에서 비행은 여러 가지로 재주가 필요한 일이다. 천장이 높은 곳에선 상관없으나, 어중간한 곳에선 길게 늘어진 종유석을 피해가며 날아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종유석의 숲에 들어가면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지하의 비행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리리나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지하 세계의 도로 역할을 하는, 공동과 공동 사이를 연결하는 어느 동굴에서 비행하다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너어, 이 새끼야! 내가 이쪽에 거미줄 치지 말라 했어? 안 했어?"
동굴의 박쥐나 여타 비행 생물체들이 잘 지나다니는 통로에 어떤 거대 거미가 거미줄을 잔뜩 쳐놓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속절없이 당하겠지만 리리나에겐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 그녀는 비행 중 불길을 쏘아 거미줄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러자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눈이 많은 거대 거미가 냉큼 사과를 해왔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요즘 이쪽으로 발길이 뜸하시기에...."
리리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야! 어르신이라고 하지 말라고!"
리리나는 일흔 살이 넘었으니 스무 살짜리 거대 거미 입장에선 어르신이 맞긴 하다. 다크 엘프치고는 어린 나이라 해도 말이다.
"시정하겠습니다!"
리리나의 분노를 느낀 거대 거미는 재빨리 사과하고는 천장의 빽빽한 종유석 지대로 쥐새끼처럼 숨어버렸다.
"쯧! 정말 이놈이나, 저놈이나!"
리리나를 혀를 찼지만 거대 거미를 쫓아가서 태워버리진 않았다. 저놈은 드물게 똑똑해서 하인으로 부리기 좋은 데다가, 영지에 터를 잡는 대가로 정기적으로 고급스러운 거미줄 뭉치를 상납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놈만이 아니다. 평범한 남작령보다 훨씬 광대한 나이트쉐이드 영지에는 이런 식으로 리리나에게 삥을 뜯기는 몬스터가 많았다.
다만 요즘 외유를 안 하고 기계 언데드에만 매달렸더니 놈들의 기강이 해이해진 듯했다.
"나중에 모두 집합시켜 정신 교육을 다시 해야겠어."
리리나는 그런 다짐을 하며 계속 비행했다. 한참을 날아간 그녀는 어느새 지열이 바글바글 끓어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평원 지대에 도착했다.
평원의 이름은 '드래곤의 발자국 평원'.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야만 오크와의 경계인 용암강이 나타난다.
몇 달 전, 침공해온 오크 부족들과 격전이 벌어져 오리지널 베니엘이 사망한 장소기도 하다.
리리나는 이 거대한 평원 위를 날며 열심히 무언가를 찾았다.
촤아아아아! 퍼어어엉!
가끔 산성 온천에서 간헐천이 폭발해서는 놀랄 정도로 높게 물기둥을 쏘아냈다.
하나 리리나는 익숙하다는 그 고열의 물줄기를 재주 좋게 피하며 날았다. 가끔 검은 리본을 잔뜩 붙인 자신의 예쁜 드레스에 물이 많이 튈 때면 인상을 찌푸리는 게 다였다.
그러길 한참.
마침내 리리나는 원하는 걸 발견했다.
"저기 있구나! 내 사랑하는 돌대가리! 얏호!"
바로 베니엘의 순찰대였다. 리리나는 빠르게 하강해서 도마뱀을 타고 있던 베니엘의 앞에 내려섰다.
베니엘은 이미 예상이나 하고 있단 태도로 자연스럽게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고모."
한데 리리나는 인사는 받지도 않고 대뜸 물어왔다.
"정말이야? 정말 할 거냐고!"
그 기세가 마치 베니엘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 것만 같았다. 기대감과 흥분으로 상기된 리리나를 보니, 여기서 아니라고 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베니엘은 순순히 끄덕였다.
"네, 물론입니다. 제가 어디 허튼소리나 하는 녀석입니까?"
리리나는 그건 사실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으나 당장 기쁨이 컸기에 일단 넘어갔다.
"좋아! 이 녀석, 네 돌대가리에서 이런 흐뭇한 제안이 튀어나오다니 나는 정말 놀랐다고!"
베니엘의 편지에는 그녀의 마음에 쏙 들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로 용암강 너머로 가서 실험체가 될 오크 전사를 같이 잡자는 내용.
사실 리리나는 이전부터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오크족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다크 엘프의 검객과 다른 전투 체계를 갖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마스터에 버금가게 강한 이들도 여럿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건 리리나의 흥미를 끌었고, 진작부터 그들을 기계 언데드로 만들고 싶어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문제는 오크와의 충돌을 우려한 남작이 이걸 제지했다는 것. 가뜩이나 야만 오크들과의 관계가 험악하다. 그런데 다크 엘프가 명예로운 전사를 잡아 그런 끔찍한 실험을 한다는 게 알려지면 전쟁이 다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대해 리리나는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란 입장이었으나 영지의 주인인 남작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뭣보다 그놈의 기계 언데드에 대해 여전히 미심쩍었고 말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베니엘이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이번 일에 관해서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질 테니 몰래 도강해서 오크를 습격하자는 얘기였다. 그야말로 망설이는 리리나의 등을 떠밀어주는 격이었다.
"리리나 고모. 도강 후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있는 부락의 위치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리리나는 마치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감격한 표정이 됐다. 어느새 볼은 귀엽게 홍조가 오른 상태.
"날 위해 이런 제안을 해준 거야?"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긴 하지요. 하나 어디까지나 순찰의 일환입니다. 순찰이라고 영지 안에서만 돌아다녀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적지형에서 움직이는 적극적인 순찰도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맞아! 옳은 얘기야!"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실적이 좀 필요해서 말입니다. 최근 이 평야에서 충돌이 잦다고 해서 왔는데 놈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뭐라도 좀 잡아가야 저도 위신이 서지요."
사실 그건 핑계였다. 베니엘이 굳이 도강을 하려는 건 조르카를 엿 먹이기 위해서니까.
"맞아! 맞아!"
리리나는 적극 동조하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포로가 된 오크가 자기는 용암강도 넘지 않았고 부락에 있다고 끌려왔다며 항변하면 어쩌게?"
이에 베니엘은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놈들이 그렇게 항변할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딴 야만족이 하는 말을 저희 같은 세련된 문명인이 믿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 맞는 말이네! 너 갑자기 왜 이리 똑똑해졌어? 고모는 감탄만 할 뿐이야! 생각하는 돌대가리!"
그대로 둘은 의기투합해서 용암강 너머의 오크 부락을 습격하기로 했다.
한데 이 결정에 극히 난처해진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대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베니엘을 손봐주기로 한 하프 타르나이 검객 조르카였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졸지에 강을 너머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
"뭐라고 했나? 놈이 용암강을 넘어갔다고? 진짜냐?"
우시드라가 붙여준 길잡이의 보고를 받은 조르카는 드물게 당황했다. 매사 호쾌하게 판단하는 그조차 지금은 난처한 얼굴로 뿔이 잘린 부분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아니, 나도 쫓아가야 하나?"
게다가 어째서인지 그 미치광이 대마법사 리리나가 자기 조카에게 철썩 달라붙었다고 한다.
"젠장! 일이 왜 꼬이지?"
원래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어릴 때부터 갈구던 베니엘 놈을 두들겨 패주고, 놈의 장난감을 도륙해주려 나선 행보였다.
한데 왜 이렇게 된 건가 싶다. 뭔가 일이 귀찮아진 것 같아 절로 인상이 구겨지고 입에선 불길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임무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이번 기회야말로 우시드라에게 은혜를 갚고 가문을 떠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에게 호언장담을 하고 길을 나선 상태. 실패하고 돌아간다면 얼굴을 들 수 없다. 아마 우시드라는 이 건을 꼬투리 잡아서 더 복잡하고 힘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할 게 뻔했다.
'어쩌면 이 음험한 가문의 다툼에 나까지 말려들어 갈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망나니의 수하 놈을 싹 썰어버리고 떠나는 게 맞았다.
결국 조르카는 베니엘을 따라가기로 했다.
"안내해라. 따라가겠다. 이 분노를 풀려면 더 사납게 칼을 휘둘러야겠어."
이에 우시드라가 붙여준 과묵한 다크 엘프 길잡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를 용암강으로 이끌었다.
***
어느새 베니엘의 일행은 용암강을 너머 야만 오크들의 지대로 들어갔다. 대번에 주변의 토양이 황량해졌다.
"어딜 습격할 생각이야?"
리리나의 물음에 베니엘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뾰족한 수정이란 부락입니다. 부락에는 전사가 오십 정도, 거기 딸린 가솔과 노예가 백오십입니다. 총 이백 마리가량이 기거하고 있지요."
"오, 그래?"
"거기 두령이 우리 쪽으로 치면 마스터에 준하는 강자입니다."
그 말에 리리나를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크는 원래 그렇게 강한가? 겨우 전사 오십을 이끄는 이가 마스터에 준할 정도로?"
"아닙니다. 놈들이 전사 종족인 건 맞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죠. 오크 입장에선 여기가 최전방인지라 대체로 우두머리가 강한 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보통 전방 부락의 우두머리는 프로보스트급 정도다. 그 뾰족한 수정 부락만 강자가 있는 것이다.
"아, 일부러 마스터급이 있는 부락으로 정했구나?"
"네, 그렇죠. 수가 많지만 해볼 만합니다. 어차피 전사는 오십여 명이고 나머지는 그냥 부락민들이니까요."
베니엘은 용암강 너머의 지형에 빠삭했다. 왜냐하면 이쪽에서 벌어지는 퀘스트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게임 지식을 현실에 써먹으려면 검증이 필요했기에 호위병들을 정찰로 파견해놨다.
아마 능력 있는 녀석들이니 잘해주리라.
"고모, 제안이 있습니다."
"뭔데?"
"부락을 습격하는 건 좋지만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음? 그냥 기습해서 다 때려 부순 뒤 포로를 잡아 오면 되는 거 아닐까?"
리리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너나 나나 둘째 언니처럼 마스터급이라도 몰래 모가지를 따올 수는 없잖아? 잔챙이도 아니고 나름 거물인데 잡으려고 하면 결국 큰 싸움이 벌어질 거야. 안 그래?"
"맞습니다."
"어차피 난동이 벌어질 거, 거하게 터뜨려 기선을 제압하고 진입하자고. 이 자식아."
베니엘은 선선히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데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후의 책임입니다."
"책임?"
"네, 기왕이면 일을 벌이는 거 저희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봐."
그제야 베니엘은 조르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뒤에 달라붙은 검객이 하나 있습니다. 조르카라고 식객이죠. 큰고모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정을 설명하자 리리나는 미간을 좁히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선을 그어왔다.
"아, 무슨 얘기인지 바로 알겠네. 미리 말해주지만 난 도와줄 생각은 없어. 네 목숨이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지."
리리나는 대번에 이번 싸움의 본질을 간파했다. 그녀의 관심을 온통 잡아끄는 베니엘의 심장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더 알 바 아니었다.
'뭐, 설령 돌대가리의 팔다리가 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지. 심장만 멀쩡하다면야. 후훗!'
오히려 그 무식한 칼싸움은 더 안 하게 될 테니 좋은 일이 아닐까, 리리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몸이 불편해지면 더욱 자신에게 의지할 터.
'그때 넌지시 기계화를 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봐야겠네. 푸풋!'
리리나는 절로 눈꼬리가 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표정을 다잡고 그런 속셈을 숨겼다.
"너 설마 조르카를 처리해 달라고 날 끌어들인 거니? 어림없는 소리. 이건 너와 큰언니 사이의 일이야. 알겠지?"
리리나는 주변에 있는 베니엘의 수하들을 쓱 한번 쳐다봤다. 아마 저들은 다 죽을 것이다. 리리나는 기계 언데드로 개조할 인재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고모의 입장은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건 다른 내용입니다. 일단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조르카와 뭔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겠지요?"
이 물음에 리리나는 칠색 팔색 했다.
"하아? 당연한 거 아니니! 내가 그런 쇠꼬챙이든 무식한 칼잡이랑 친하게 지낼까? 너 미쳤어? 칼 든 녀석은 다 최악이야. 너니까 상대해주는 거라고."
그녀의 말에서 검객에 대한 짙은 혐오가 느껴졌다.
"하면 다행입니다. 저는 그 조르카를 처치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결코 고모들 간의 사이가 난처해질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
"네, 아까도 말했듯, 어디까지나 이번 공격의 책임 소재에 관한 얘기입니다. 일은 우리가 벌이고 책임은 그자가 진다면 한결 부담 없지 않겠습니까?"
"음… 좋아. 자세히 말해봐. 내 책임을 남에게 떠미는 것보다 달콤한 게 없지. 개미 사탕보다 더 달다고."
리리나가 흥미를 보이자 베니엘은 작전을 설명했다.
긴 이야기였는데 간추리면 이랬다.
-고모의 마법을 이용해서 조르카로 위장한 뒤에 오크 부락에서 개판을 치자. 이후 분노한 오크 무리를 조르카에게 유도하자.
이런 얘기를 다 들은 리리나는 어쩐지 경악한 표정으로 베니엘을 쳐다봤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 이제 보니 소름 돋는 녀석이네? 와, 팔에 뭐 일어나는 거 봐."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너무 싫어."
"네, 어째서입니까?"
리리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꾸했다.
"너 같은 돌대가리가 그럴듯한 작전을 세웠다는 사실이 그냥 싫다고!"
대체 오리지널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베니엘은 고민했다.
저 편견을 깨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계획에 참여하시는 거죠?"
"좋아. 그래. 대신 이거 받아."
리리나는 괴이해 보이는 물약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내가 만든 특제 물약."
그 말에 베니엘은 바로 얼굴이 구겨졌다. 과거 그 특제 물약으로 죽을 뻔했던 오리지널의 기억이 엄습해 온 것이다.
"마음은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을…."
"아, 이번엔 다르다고! 네 신비하고 깨끗한 마력을 연구하며 만든 거거든. 일시적으로 잠재력을 폭발시켜 줄 거야. 여벌의 목숨이라 생각하고 넣어둬."
왜 주는 건가 했더니 이 성과가 맘에 들면 자기에게 심장을 연구하게 해달라는 아부성 선물이었다.
"뭐… 일단 감사합니다."
아무튼, 리리나는 베니엘의 계획에 참가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때쯤, 아무것도 모르는 조르카는 열심히 용암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85화
오크 부락 (1)
"오… 이거 아주 그럴싸하네요?"
베니엘은 리리나가 즉석해서 창조한 흑요석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런 감탄이 몹시도 흡족했는지 리리나는 턱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당연하지. 이것이야말로 마법의 신비. 너도 돌대가리만 아니었으면 그딴 쇠꼬챙이 대신 마법 지팡이를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현재 베니엘은 리리나의 주문에 의해서 타르나이로 변신한 상태. 리리나 정도의 대마법사면 이런 외형 변경 정도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겪으니 신기하기 짝이 없다.
"제가 정말 타르나이가 된 듯하군요."
현재 모습은 조르카를 흉내낸 것이다. 거대한 덩치와 붉은 피부, 머리에 밑둥만 남은 잘려나간 뿔까지 상당히 흡사하게 따라 했다.
다만 얼굴은 꽤 달랐는데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리리나가 조르카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 거기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정보를 기억해야 하는데? 하아?"
리리나는 여태 몇 번쯤 조르카와 마주쳤지만 검객 따위의 생김새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결국 대강 몽타쥬 그리는 것처럼 베니엘의 증언을 토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포악해 보이는 인상은 그대로긴 한데 조르카를 아는 자가 본다면 누구세요, 란 말부터 나올 다른 모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야만 오크들이 조르카의 면상을 어찌 알겠나?
중요한 건 뿔도 없고, 덩치 큰 타르나이 검객이 습격해 왔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이건 조르카의 소행으로 귀결될 터였다.
"자, 준비해라."
베니엘의 명령에 그의 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일행은 '뾰족한 수정'이라 불리는 용암강 너머의 오크 부락 근처에 도착한 상태.
아까부터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며 부락의 불이 하나둘 꺼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크들이 잠들게 되면 몰래 내려가서 공격할 생각이다.
"슬슬 이동하자."
인내심 있게 기다리다 보니 부락의 불빛이 몇 개 안 남게 됐다. 베니엘이 앞장섰고, 나머지 호위병과 용병이 뒤따랐다.
애초에 많은 이들을 데려온 건 조르카와 싸우려던 게 아니라 이런 목적이었다. 부락을 공격하는 것이니만큼 이쪽도 충분한 인원이 있어야 했다.
오크 부락은 대부분 버섯 나무로 만든 엉성한 구조물이었다. 확실히 이들은 싸움은 잘해도 건축과는 영 인연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몇몇 중요한 건물에만 돌벽을 쌓아 올린 게 전부였다.
현재 대부분의 오크는 다 잠들어 있었고 몇몇 보초병만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희미한 빛의 발광 이끼 위로 오크 보초병의 시커먼 그림자가 언뜻언뜻 보였다.
베니엘은 다크 엘프 호위병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엘프 특유의 기민한 때문에 작은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무기가 보초병들을 노렸고, 억누른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놈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베니엘 일행은 부락 안으로 진입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맘대로 날뛸 수 있겠습니다. 치안관님. 케륵!"
어느새 품에서 역청이 가득 든 화염병을 꺼내든 홉고블린 삼형제가 사악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케케케켁!"
"케겍!"
"케륵! 케륵!"
저 안에 든 특수한 역청은 그 지독함 때문에 '홉고블린의 악의'라 불리는 유명한 것이다. 실제로 폐허 도시에서 그융크의 신전을 쑥대밭으로 만든 적이 있다. 그걸 다시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홉고블린 삼 형제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베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시작해."
그 말이 떨어지기 기다렸다는 듯 홉고블린 삼형제가 입구에 불을 붙인 병을 사방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 이름 높은 발화 물질은 야만 오크들의 조잡한 버섯 나무 건물을 만나자마자 큰 불길을 일으켰다.
화르륵!
삽시간에 연기가 치솟고 불길 탓에 주변이 시뻘건 빛이 가득 찼다. 그 빛은 습격에 나선 베니엘 일행의 그림자를 땅 밑으로 길게 늘어지게 했다.
사방이 매캐한 악취와 연기로 가득 차자 자고 있던 오크들이 반응했다. 각자 허둥대고 움집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크워어어어! 이게 대체!"
"크릉! 무슨 일이냐! 어엇?"
하지만 다크 엘프이 대답은 비정했다. 집 밖으로 나온 오크들이 호위병들의 석궁을 얻어맞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던 것.
와당탕!
볼트에 맞은 오크가 주변의 집기를 부수며 쓰러진 탓에 소음이 요란했다. 그와 함께 베니엘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허를 찔린 오크의 사냥에 나섰다.
"정리해라!"
"네!"
그 사이 타르나이 검객으로 변신한 베니엘은 미리 봐둔 오크 우두머리의 가옥으로 향했다.
시커먼 돌벽을 쌓아 올린 커다란 건물이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착해 보니 급하게 튀어나온 듯한 오크 우두머리가 흉흉하게 생긴 양손 도끼를 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크워어어어!"
전신이 흉한 화상 자국으로 가득한 놈은 그야말로 광분한 상태였다.
"감히 이딴 짓을 벌여! 네놈은 누구냐!"
과연 마스터급의 강함을 가진 우두머리라 그런지 현재 타르나이답게 겉모습이 흉흉한 베니엘을 보고도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다. 당장이라도 도끼를 달려와 이쪽으로 반으로 갈라버릴 기세였다.
"나는 조르카다. 오크."
이에 오크 우두머리는 살짝 눈이 커졌다.
"조르카! 그래, 들어본 적 있다. 그 악마의 둥지 나이트쉐이드에 머물고 있는 타르나이 검객! 네놈이었구나! 크워어어어어! 이 개 같은 나이트쉐이드 놈들! 이렇게 비열하게 기습을 해오다니! 놈을 죽여라!"
어느새 우두머리를 호위하기 위해 몰려든 전사에게 놈이 명했다. 그러자 보통 오크보다 덩치가 좋은 호위들이 고함을 지르며 돌격해 왔다.
총 넷이었다. 하나 그들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목숨을 잃었다.
부우웅! 붕!
베니엘이 반원형의 검기를 두 개 쏘아내서 달려드는 넷의 허리를 모두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서걱!
지켜보는 자들의 입이 벌어질 만한 깔끔한 절단이었다. 삽시간에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오크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바닥에 쓰러져 눈을 껌뻑이고 있을 정도였다.
베니엘은 그런 그들을 발로 밟으며 오크 우두머리를 도발했다.
"이딴 잡졸은 됐다. 직접 덤벼라. 이름 모를 전사여."
"나는 학살자 가르나프다! 이 이름을 기억해 둬라! 널 지옥의 악마에게 돌려보낼 전사니! 크워어어!"
학살자 가르나프의 화상 가득한 잿빛 피부는 터질 듯한 근육으로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무기인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들고 돌격해왔다.
베니엘은 곧장 검기를 다시 날렸다. 이렇게 연속적인 검기 사용은 마스터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나 그는 마신의 마력 덕에 어려움이 없었다.
부우웅!
초승달 모양의 빛나는 검기가 극속으로 공기를 가른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카앙!
도끼를 휘둘러 단번에 검기를 쳐내버린다. 공중에서 박살 난 검기가 사방으로 빛을 뿌리며 흩날렸다.
베니엘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한 실력자군!'
물론 그렇다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싸움에는 대마법사인 리리나 역시 참가했기 때문이다.
일단 베니엘은 오크 우두머리와 몇 번 검을 부딪힌 뒤 물러나서 외쳤다.
"우리 종족은 마법의 종사라 불린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알려주겠다!"
"삿된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구나! 타르나이! 크워어어!"
오크 우두머리는 마법 따윈 개의치 않고 용맹하게 돌격해왔다. 베니엘은 맞서서 검을 휘두르는 대신 외쳤다.
"휘감아라! 강철의 사슬이여!"
그 외침과 함께 갑자기 땅바닥에서 쇠사슬이 튀어나오더니 오크 우두머리의 몸을 휘감았다. 물론 오크 우두머리는 괴력을 발휘해 쇠사슬을 끊어버리긴 했으나 베니엘은 그 정도 틈이면 충분했다.
푸욱!
쏜살같이 나아가서는 검으로 오크 우두머리를 가슴팍을 찌른 뒤 빠진 것이다.
"크하핫! 이 몸의 마법이 어떤가!"
베니엘은 파안대소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리리나였다.
"뭐냐… 쟤?"
리리나는 마법 지팡이 스핏파이어를 타고 공중에서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 말을 맞춘 것처럼 베니엘의 외침과 함께 대신 마법을 써준 것이다.
그때 밑에서 베니엘이 다시 외쳤다.
"눈을 희롱할지어다! 안개여!"
대충 4레벨 주문 '안개의 베일'을 써달라는 소리였다. 리리나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그대로 따라줬다. 그러자 오크 우두머리의 시야가 안개 때문에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하는 수작마다 비열한!"
이번에도 베니엘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기어코 오크 우두머리의 팔을 하나 잘라냈다.
철푸덕.
피가 잔뜩 묻은 근육 덩어리 팔이 땅바닥을 굴렀다.
베니엘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것이 타르나이의 마법이다! 아둔한 오크여!"
리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새끼 너무 신 내는 거 아님?"
리리나가 도움을 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귀중한 실험체가 될 오크 우두머리를 최대한 멀쩡하게 사로잡기 위해서다.
상대도 강자. 그대로 싸우게 내버려 뒀다가는 격전이 벌어질 테니, 온전한 실험체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
팔 하나 날아가긴 했으나 그 정돈 괜찮았다. 리리나의 관점에서 어차피 언데드란 조립식이니까. 뭐 영 못 쓰겠으면 팔만 기계로 대체해도 된다.
거기에 더해 이번 습격자가 타르나이라는 확실한 연기를 위해서다.
타르나이라면 마법, 마법이라 하면 타르나이다. 그러니 저렇게 마법을 써대며 상대를 제압해야 맞지 않겠나?
아닌 게 아니라 주변의 오크들은 현재 외형이 변한 베니엘이 진짜 타르나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족장이 당했다!"
"부락이 끝장날 거야! 도망쳐!"
오크 중에는 의외로 도주하는 자들도 꽤나 많았다. 용맹한 오크가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부락에 있는 전사는 오십여 인.
나머지는 전사 계급이 아니었고 싸움질에 목숨 바칠 생각 따윈 없었다. 게다가 부락의 노예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자유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베니엘의 무리는 미리 상의한 대로 전사가 아닌 자들은 대부분 도망치게 놔뒀다.
전공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지는 데다가 누군가 이번 일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공포에 질린 도망자들은 다른 부락으로 찾아가서 타르나이가 찾아와 죽음을 뿌렸다고 격정에 차 떠들어 댈 테니까.
"명예로운 전사는 이딴 사술에 쓰러지지 않는다!"
오크 우두머리는 끝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그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격돌 때마다 교묘하게 끼어드는 리리나의 마법은 너무나 효과적이고 강력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프리즘 빛이 뿌려지며 시야를 빼앗거나, 발밑이 꺼지며 균형을 잃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오크 우두머니는 더 견딜 수 없었고 결국 베니엘의 검에 심장이 뚫린 채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쿠우웅!
거대한 덩치답게 육중한 소음과 함께 잔뜩 먼지를 일으키며 최후를 맞이했다. 그제야 허공 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있던 리리나가 천천히 지팡이를 타고 땅으로 내려왔다.
"끝났어?"
"네, 고모."
원래라면 꽤나 거칠었을 싸움이 리리나의 도움으로 일방적인 흐름으로 쉽게 끝났다. 베니엘은 거의 날로 먹은 기분이었다.
"자자, 어디 볼까? 이야, 이놈 덩치 좀 보게. 개조하려면 애 좀 먹겠는걸!"
앓는 소리를 해도 목소리가 상기된 게 잔뜩 신난 기색이었다. 베니엘은 그녀가 마법 지퍼에 오크 우두머리의 시체를 챙기게 내버려 두고는 놈의 가옥으로 들어갔다.
"윽, 더럽군."
들어가자마자 개판이었다. 오래간 배인 듯한 오크 특유의 체취가 안쪽에 그득했기에 베니엘은 코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크 우두머리의 가옥이니 뭔가 중요한 게 있을지 모르지.'
이런 부분은 게임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기대감을 갖고 주변을 헤집었다.
와당탕.
곰팡이가 잔뜩 끼고, 먹다 남은 음식이 올려져 있는 탁자를 밀어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벽면에 누런 천 위에 원시적인 그림이 가득한 휘장을 뜯어냈다.
"이러면 뭐라도 나오겠지."
안쪽에서는 쓰다 부러져서 던져둔 먹이, 언제 먹었던 건지 알 수 없는 짐승의 뼛조각, 정체불명의 털 뭉치, 미처 챙겨 입지 못했던 듯한 가죽 갑옷까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그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다크 엘프의 날카로운 감각은 중요해 보이는 걸 찾아냈다.
"문서? 아니, 편지인가? 이놈, 글을 읽을 줄 아는 오크였군!"
놀랍게도 죽은 우두머리는 깨어 있는 지식인 오크였던 모양이다. 안쪽에서 투박하게 녹여서 뭉친 황금 덩어리 몇 개와 함께 여러 개의 서찰을 찾아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그 서찰에는 오크의 호방하고 거친 문자가 가득했다.
다행히 베니엘은 오크 문자를 읽을 줄 알았다. 영지의 가장 큰 적이 야만 오크라 남작이 어릴 때부터 그들의 문자를 억지로 익히게 했던 탓이다.
"보자...."
한데 내용이 베니엘의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가죽 서찰에선 정체불명의 지린내가 났으나 그딴 건 신경도 못 쓸 정도였다.
안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랬다.
-악마의 둥지(나이트쉐이드 남작령을 말한다)에서 버섯 농장의 반란이 예정.
-반란 실패. 귀쟁이 협조자는 무능하다. 우리의 계획은 미뤄진다. 그때까지 전사를 조련하고 대기.
-족장 모임은 귀쟁이 협조자의 능력에 대해 의문. 그 암컷 귀쟁이는 가문 내의 알력에서 밀리고 있다고 한다.
-최근 귀쟁이의 도움 요청. 하지만 신중한 족장 회의는 거절. 관망하는 태도로 변함.
-새로운 협력자를 찾아야 하는지 부족장들 고민 중. 아니면 다른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베니엘은 이 서찰에서 말하는 귀쟁이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큰고모가 틀림없군.'
물론 서찰에는 우시드라라고 정확히 쓰여 있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협조자 귀쟁이라고 한 게 전부다.
대회의에서 내밀어봐야 우시드라는 재주 좋게 빠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입지를 조여 들어갈 간접적인 증거라 할 수 있었다.
'뭣보다 남작에게 보여주면 우시드라를 더욱 세게 견제하기 시작할 터. 아주 좋군. 좋다!'
기대도 안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귀중한 걸 얻게 된 셈이다.
86화
오크 부락 (2)
***
용암강 근처의 오크 부락들은 제법 뛰어난 연락망을 갖고 있었다.
분쟁 중인 다크 엘프들이 도강해서 습격해 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긴밀한 연락 체계는 필수였다.
물론 반대로 이쪽에서 약탈을 나갈 때도 많았다. 그러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지난번처럼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어딘가에서 일이 터지면 지원하러 우르르 몰려 가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뾰족한 수정 부락의 재앙은 금세 주변 부락으로 전파됐다.
"쿠어억? 뭐라고? 다크 엘프가 쳐들어와서 동포를 노예로 잡아갔다고! 이런 처죽일!"
"마을에 불까지 질렀다고 한다! 뭐라? 홉고블린까지 데려왔다고! 이런, 치가 떨린다!"
한데 도망자들은 가장 두려운 건 따로 있다고 했다. 바로 마법을 써서 우두머리를 쓰러뜨린 타르나이 검객에 관한 얘기였다.
"쿠르륵! 내가 봤다! 칼과 마법을 같이 써 우리 대장을 죽였다!"
"그렇게 강한 전사였는데 당해내질 못했다!"
타르나이란 말에 복수를 위해 사방의 부락에서 몰려든 오크 전사들은 당혹해했다.
"갑자기 타르나이가 왜 나오는 것이냐!"
"모른다? 착각 아닌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한다. 동포의 지능을 의심하지 마라!"
다들 그 타르나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우왕좌왕할 때 한 늙은 전사가 입을 열었다.
"누군지 알 것 같다."
모두가 늙은 전사를 주목했다. 그는 우두머리에 이를 정도로 강하진 않았지만 오래간 자신의 용맹을 증명해온 존경받는 전사였다. 그렇기에 그의 말에는 다른 부락의 우두머리들도 귀를 기울였다.
"오래 산 아타칸! 의견을 들려달라."
"아타칸, 우리가 듣겠다. 그대는 아는 게 있나 보군?"
'아타칸'이라 불리는 흰 수염 성성한 늙은 전사가 외눈을 반짝이며 끄덕였다.
"놈은 분명히 악마의 둥지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는 조르카야. 진정한 타르나이는 아니고, 혼혈이지."
"더 말해봐라!"
"과거 용암강을 너머 악마의 둥지를 멸하러 나섰을 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강한 전사다. 그와 무기를 맞댄 동포들은 모두 죽었다."
그 말은 오히려 호승심 넘치는 젊은 오크 전사들을 흥분시켰다.
"그렇게 강하다고!"
"대단하군! 하지만 내 도끼를 버틸 수 있을까!"
"어서 만나보고 싶군!"
아타칸은 이런 전사들에게 주의를 줬다.
"흥분하지 마라. 서두르는 마음은 전사에게 죽음을 줄 뿐이다. 조르카는 강적이다. 즉각 족장님께 알려야 해. 족장님과 친위대가 필요하다."
현명한 의견이었으나 여기 있는 전방 부락의 우두머리들은 듣질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젊고, 강하며 뭐라도 무훈을 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부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더 강한 적을 쓰러뜨리고 '전사의 기념비'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밖에 관심이 없었다.
"늙은 아타칸의 의견은 존중한다! 하지만 지금은 서두를 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동포가 학살당했다. 이런 때 참는 건 전사가 아니다."
"여기 모인 무리가 벌써 이백이 넘는다. 아무리 놈이 강해도 상대할 수 있다. 지금은 사냥의 시간이다!"
아타칸은 이들을 말릴 수 없음을 알고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사로서 우두머리들의 결정을 따르는 게 도리겠지."
유일한 제동 장치였던 아타칸마저 물러나자 더는 이 성난 무리를 말릴 건 없었다.
그때 덩치가 작은 오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찾았다! 놈을 찾았다!"
단번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그 조르카란 놈을 찾았다. 용암강 너머 큰이빨바위에 근처에서 다크 엘프 무리를 이끌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 근처의 지리라면 빠삭한 전사들이라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각 부락의 우두머리는 포효를 내질렀고, 자신을 따르는 수십여 명의 전사를 이끌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소식을 전한 키 작은 오크가 어느 부락에도 속하지 않은, 낯선 놈이란 걸 말이다.
유일하게 현명한 아타칸만이 위화감을 느껴 뒤를 돌아봤으나 이미 제보를 한 키 작은 오크는 온데간데없었다.
"으음…?"
하지만 이미 성난 파도처럼 몰려가는 오크 무리를 제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아타칸은 노파심을 접기로 했다.
'늙으니 걱정만 많아지는군. 우리는 무리를 이뤘고, 강하다. 조르카라고 해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겠지.'
그렇게 오크 무리가 우르르 떠나자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키 작은 오크가 다시 나타났다.
오크의 면상이지만 이상하게 익숙하고 비열한 인상이었다.
"크크큭!"
특히 지금 웃는 모습을 본다면 누군가를 딱 떠올릴 만했다. 아마 아리아나였다면 바로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저 정도면 조르카도 뒤지는 거 아닌가? 놈이 아무리 강해도 숫자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지.'
그때 변신 마법이 풀리고 키 작은 오크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역시나 그 정체는 베니엘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이 모든 사달의 책임은 조르카가 일으킨 거로 밀어붙일 수 있겠어.'
지난 전쟁 이후 남작은 용암강 너머의 오크와의 충돌을 자제하도록 하고 있었다. 한데 우시드라가 암습을 사주한 조르카가 이 난리를 일으킨다?
당연히 남작은 격노할 터였다.
***
조르카의 애검 회오리바람이 그 이름 같은 회전을 일으키며 주변에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오크들을 조각냈다.
부우우웅!
그 모습이 마치 믹서기 안에 들어간 고깃덩이같이 보일 정도로 끔찍했다.
피와 살점, 길게 늘어진 내장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하프 타르나이인 조르카가 안광을 빛내며 우뚝 서 있었다.
그야말로 흉신악살.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다르게 조르카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백이 넘는 오크를 홀로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시드라가 붙여준 길잡이 다크 엘프들은 성난 오크의 파도에 진작 다 쓸려나간 상태. 오로지 조르카 혼자 저 그칠 줄 모르는 격랑에 저항하고 있었다.
야만 오크들은 동료가 육편이 돼 갈려 나가는 와중에도 전혀 포기할 줄 몰랐다.
"놈이 지쳤다! 더욱 몰아쳐라!"
"상처가 늘어나고 있어! 승리가 보인다! 크워어어어!"
각기 전사들을 이끄는 부락의 우두머리들은 더욱 휘하의 전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앞서 투입한 전사들을 막느라 조르카가 충분히 지치면, 그때 우두머리들이 나서 공을 세울 것이었다.
그걸 위해 그들은 더욱 전사들을 다그치고, 독려했다.
"저 마귀를 쓰러뜨리는 전사는 뾰족한 수정 부락의 새 우두머리로 삼아달라 족장께 청하겠다!"
"저자의 심장을 뜯어먹을 영광을 주마! 망설이지 마라!"
이들의 모습에 두려움이라곤 없는 조르카조차 질려버릴 정도였다.
아니, 애초에 지금 상황 자체가 의문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저 자신은 길잡이들의 안내를 받아 용암강을 건넜을 뿐이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나이트쉐이드의 망나니로, 딱히 이쪽 오크들과 충돌을 일으킬 생각도 없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이백이 넘는 오크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마치 조르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부락을 습격한 죄를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르카는 딱히 변명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때만큼은 억울함에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의 타고난 오만함 때문인지 말투가 오크를 자극하기 충분했을 뿐이다.
"이 비천한 야만족 새끼들이 왜 생사람을 잡는 것이냐!"
당연히 듣던 야만족은 분노로 돌아버렸다. 더 대화는 필요 없다는 게 모든 이의 판단이었다.
사실 이 대화도 마지막까지 이성을 다잡자고 주장한 아타칸의 요구였다. 그는 이 상황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조르카와 얘기해 보며 그 의문을 풀 단서를 찾아보자 했던 것이다.
오크 우두머리들은 대화를 하겠다는 아타칸에게 발끈했으나, 그 늙고 존경받는 전사가 하도 간청하기에 짧은 시간을 허락했던 것이다.
한데 그리 어렵사리 만든 대화의 기회는 조르카의 오만한 화답으로 박살 났다.
아타칸은 주름 가득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전사들은 더는 기다리지 않고 돌격했다. 그리고 이백이 넘는 성난 파도가 조르카와 일행을 덮쳤던 것이다.
"크아아아악! 이 야만족 녀석들이!"
조르카는 검뿐만 아니라 입으로 화염을 토하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싸웠다.
처음에 그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마스터 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신의 실력 탓에 겁대가리가 없어진 탓이다.
한데 숫자란 역시 압도적인 힘이었다.
조르카는 이백이란 수가 그렇게 많은 건지 난생처음 알게 됐다. 단순히 이백이 아니다. 그들 모두 치열하게 단련된 전사 이백인 것이다.
물론 조르카는 대단한 강자였기에 그 성난 물결에도 견뎌냈지만, 전신이 걸레짝처럼 변하는 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크아아아! 이 징글징글한 놈들!"
현재 그가 쓰러뜨린 오크 전사는 무려 팔십. 홀로 해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위용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조르카의 힘과 기력은 거의 다한 상태였다.
몇 번이고 강력한 의지를 일으켰기에, 더 뭔가 할 정신력도 없었다.
'큰일이군! 큰일이야!'
이대로라면 결국 오크 무리에게 쓰러지고 말 터. 조르카는 자신의 머리가 잘려서 오크들의 창에 꿰어진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죽을 수 없다! 이 몸은 큰일을 할 큰 사내! 가문으로 돌아가 원한을 갚아야 한다!"
어느새 오크가 던진 수많은 밧줄이 조르카를 휘감은 상태. 그야말로 칭칭 감긴 그를 수십 명의 오크가 잡아당긴다. 이대로는 쓰러지는 걸 넘어 거열형이라도 당할 것만 같았다.
"크아아악! 크으악!"
전신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조르카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생각했다.
'굴욕적이지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바로 도주다. 하지만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지하 세계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다.
-고귀한 타르나이는 물러나지 않는다.
즉, 타르나이에게 후퇴란 없다. 패배하면 죽거나 포로로 잡혀야지 등을 보인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비록 혼혈이긴 하나 스스로를 타르나이로 여기는 조르카에게 있어 도주란 큰 굴욕이었다.
'타르나이는 물러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에 이른 상황이 그에게 변명을 선사해줬다.
'이 몸은 잡종이 아닌가! 하면 지금은 그 수치스러운 혈통에 감사할 수밖에!'
잡종이라면 때론 부끄러운 선택도 할 수 있을 터. 잡종으로 태어나 가문에서 수많은 손가락질을 받아왔다. 하면 비루하게 목숨을 연명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조르카는 마지막으로 의지를 일으켰다.
"격노하라! 이 혈통에!"
자기 자신의 혈통에 대한 울분. 그 의지가 발동하며 조르카의 전신이 화염으로 둘러싸였다.
화르르르륵!
그와 함께 팔다리를 묶고 있는 밧줄이 잿더미가 돼 사라졌다.
조르카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채로 오크 포위망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황소처럼 돌격했다.
***
조르카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돼 야만의 땅 으쓱한 곳에 몸을 숨긴 채 헐떡거렸다.
앉아 있는 그의 주변으로 피웅덩이가 흥건하다. 또한 조르카의 몸에는 부러진 화살이 몇 개나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은 들떠 있었고 밝았다. 심지어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크하하핫! 크하하!"
조르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웃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무언가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죽음에 이를 뻔한 격전이 오래간 막혀 있던 마스터 상급이란 벽을 넘을 단서를 제공했던 것이다.
'뭔가 알 것 같다. 이대로 실마리를 잘 정리하기만 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 조르카는 인생사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암강을 건너자마자 봉변을 당해 죽을 뻔했다. 그런데 그 결과 이렇게 상급의 벽을 뚫을 가능성을 얻게 된 게 아닌가?
이제 우시드라의 부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더는 망나니 놈에 대해서도 생각나지 않았다.
조르카는 조용히 자신을 관조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실마리의 끈을 풀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묘하군. 지금 근처에서 흐르는 용암강과 깊은 연결이 느껴진다. 이게 특정 자연물의 힘을 뽑아내는 경지인 건가?'
한데 이런 중요한 순간이 방해 받았다.
저벅저벅.
대놓고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소리. 조르카는 무시하려 했다. 따돌린 오크 무리는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황야를 떠도는 야만족이나 몬스터 따윈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터.
"크르르릉…!"
호랑이의 울음 같은 낮은 경고음을 내뱉은 조르카는 다시 집중하려 했다. 지능이 조금이라도 있는 놈이라면 알아먹고 도망갔을 터.
그런데 어째서인지 발소리는 조르카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오크의 발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조르카는 정확히 자신이 예상하던 얼굴이 눈앞에서 뺀질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는 걸 보게 됐다.
그자는 아주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네왔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조르카 사범 아닌가? 응? 크흐흐흐."
망나니 베니엘이었다.
옆에는 기계 언데드 드랄두와 호위대장 쿠르신까지 대동했다. 그리고 뒤쪽에는 딱 봐도 살벌해 보이는 중석궁을 든 다섯 명의 다크 엘프 호위병까지 보인다.
그들의 배치는 그야말로 사냥감을 포위하는 형태였다.
조르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반가운 만남은 아닌데?"
이에 베니엘이 지구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답했다.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이런 소리가 있더라고."
"뭐냐? 망나니 놈아."
"선한 사람은 찾아오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고."
조르카는 삐뚤어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개 같은…! 정말이지 맞는 얘기가 아닐 수 없군."
그 순간 조르카는 애검 회오리바람을 휘둘렀고, 베니엘 역시 프로스트바이트의 힘을 일으켰다.
87화
오크 부락 (3)
베니엘의 펜테즈멀 블레이드와 조르카의 펜테즈멀 블레이드가 충돌하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그 충격파에 베니엘은 뒤로 길게 밀려났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역시 약해졌군! 약해져 있어! 조르카 사범!"
원래라면 베니엘은 검을 부딪힌 순간 엉망진창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을 굴러야 한다. 한데 지금은 뒤로 밀려난 게 전부였다. 심지어 베니엘의 펜테즈멀 블레이드는 꺼지지도 않았다.
둘 사이의 큰 격차를 생각해 볼 때 조르카의 상태를 알 만했다.
"오크들이 네게 꽤나 열렬한 환영 인사를 해준 모양이군. 크하하핫!"
두 팔을 벌리며 웃는 베니엘의 모습에 조르카는 이를 아드득 갈아댔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이 빌어먹을 망나니 놈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저 망나니가 누명을 씌운 것일 터. 안 그러면 갑자기 그 많은 오크가 달려들 리가 없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니, 어쩌면 그냥 당신이 오크에게 인기가 많았던 건지도 모르지."
"원하는 게 뭐냐! 망나니!"
조르카는 드물게 협상을 원했다. 불같은 성정으로 뭐든 박살 내는 그의 천품을 볼 때 이건 드문 일이었다. 그 정도로 부상이 심한 데다가 지금 갈무리해야 할 깨달음이 절실했던 것이다.
마스터 상급으로 갈 길이 보이고 있는데 이딴 난잡한 싸움으로 정신력을 낭비할 여력 따윈 없었다.
하지만 베니엘은 조르카가 도저히 내어줄 수 없는 걸 요구해왔다.
"당신의 머리를 원한다. 조르카. 박제해서 벽에 걸어두기엔 꽤 괜찮은 사냥감이니까."
그 순간 조르카의 눈길에서 화염이 일어났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그래도 옛정이 있어 네놈 목숨만은 살려두려 했거늘 감히!"
그 말에 베니엘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니, 아니지. 우리 사이에 무슨 옛정이 있다고? 그저 정치적인 이유로 나는 죽이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잖나? 오히려 옛일에 대해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군. 조르카 사범."
베니엘은 어린 시절 조르카에게 검을 배운 적이 있다. 말이 교습이었지 그건 학대였고, 베니엘에게 처절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솔직히 지금도 그의 팔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리지널이 남긴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조르카는 이걸 알아채고는 비아냥거렸다.
"조금 번듯해진 줄 알았더니 겁먹고 오줌이나 질질 싸던 애새끼의 모습이 여전하구나. 베니엘. 크크큭! 그만 지랄하고 이 어르신 앞에 와서 무릎이나 꿇도록. 특별히 용서해줄 테니."
오리지널이었다면 이런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트라우마에 굴복해 싸움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지금의 베니엘은 완전히 다른 존재. 조르카를 마주하자 저절로 두려움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그걸 제3자적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오늘 여기서 너를 죽이고 과거를 청산하겠다."
그 단호한 선언에 근처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호위대장 쿠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도련님께서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시군.'
그가 섬기는 이는 정말로 달라진 게 틀림없었다. 조르카라고 하면 겁부터 집어먹고 도망갈 궁리만 하던 모습은 이제 없었다.
'하면 전력으로 도련님을 지원할 뿐이다.'
쿠르신은 자신의 황금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조르카가 베니엘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네놈 모가지도 같이 따주겠다! 크아아압!"
하지만 이번에는 베니엘 혼자가 아니었다.
기계 언데드인 드랄두, 호위대장 쿠르신, 그리고 중석궁을 든 호위병 다섯까지 가세한 것이다.
여기서 조르카는 다시 한번 숫자 앞에 장사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이 비열한 놈들!"
조르카는 성난 호랑이처럼 날뛰었지만 베니엘은 모두를 노련하게 지휘했다.
"무리하지 말고 빠지면서 상대한다! 하나씩 해! 석궁을 든 녀석들은 거리를 충분히 벌리고!"
그건 상처 입은 호랑이를 점점 지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조르카가 대단해도 정면에서 베니엘, 드랄두, 쿠르신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데다가, 작은 틈이라도 생길 때마다 마치 묘기를 부리듯 석궁을 쏴대는 호위병들까지 당하긴 어려웠다. 어느새 그의 몸에 상처가 늘어만 갔다.
베니엘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한 공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지쳐있다. 예상대로 리리나가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
리리나는 진작 떠났다.
애초에 그녀는 이런 일에 직접 낄 생각도 없고, 확보한 오크 우두머리 시체로 어서 작업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르나이는 언데드로 만들지 못하기에 조르카에게 영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 외에 홉고블린 삼 형제와 자경대의 용병들은 포로로 잡은 오크들을 데리고 용암강을 건너간 상태.
즉, 여기서 조르카만 처리하면 모든 게 깔끔하게 끝나는 것이다.
"놈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밀어붙여라!"
베니엘은 승리를 자신했다. 그의 부하들 역시 승리를 자신했다.
아무리 봐도, 조르카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기 때문이다. 다들 신을 내며 조르카를 공격했다.
"석궁 맛 좀 봐라!"
"이렇게 굵은 볼트가 꽂히면 마스터라고 해도 힘을 못 써!"
"재장전해서 다음에 틈이 생기면 일제히 사격한다!"
한창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뭔가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묘해졌다. 일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궁을 쏘던 호위병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저 새끼 왜 안 죽지…?"
"그러게…?"
과연 그 말대로였다. 이미 조르카의 몸에는 중석궁이 쏘아낸 굵직한 볼트가 여러 개 박혀 있었다. 그뿐 아니다. 앞에서 투닥거리고 있는 삼 인의 검객, 베니엘과 드랄두, 쿠르신의 공격이 누적된 상황.
아무리 봐도 죽을 때가 꽤 지난 거 같은데 조르카는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타르나이가 끈질기긴 하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베니엘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여유를 가장했다.
"근성이 제법이군! 조르카 사범! 이렇게 버티다니 감탄했다! 하지만 얼마 안 남았다!"
주변에서 듣던 이들은 제발 그러길 바라며 끄덕였다.
하지만 싸움은 더 이어졌다.
챙! 채앵! 캉!
베니엘은 슬슬 칼을 너무 휘둘러서 팔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뒤쪽에서 석궁을 쏴대던 호위병들은 가져온 볼트가 다 떨어져 어색하게 서 있었다.
"...."
"...."
베니엘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다시 소리쳤다.
"과연 타르나이인가! 강인하군! 하지만 이제 곧 끝이다!"
베니엘은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렇게 확신이 안 서기는 처음이었다.
"하하핫! 하하...!"
공허하게 웃는 베니엘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안 뒤지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이 밀려왔다.
칼질을 멈추고 앞을 보니 조르카는 흰자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뭐랄까, 어느 순간부터 대답도 안 하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조르카의 심장에서 가공한 에너지가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여태 꺼질 듯 말 듯하던 그의 마나 하트가 갑자기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전방에서 드잡이질을 하던 삼 인의 검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대체 뭐야!"
"도련님… 저건!"
"두 번째 죽음이 오는 건가…?"
그제야 셋은 조르카가 보이는 이상 반응이 뭔지 알게 됐다. 지금 그는 전투 중에 무아지경에 빠져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스터 상급의 경지에 발을 디디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파로 수명이 다 된 전구처럼 점멸하던 그의 마나 하트가 새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베니엘은 욕이 절로 나왔다.
"이런 씨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이나 게임에서 주인공이 위기의 순간 깨달음을 얻어 일발 역전을 하는 건 많이 봤다. 그런데 지금은 빌런이 깨달음을 얻어 주인공 파티를 몰살시키기 직전이었다.
베니엘은 다급히 외쳤다.
"막아야 한다! 상급이 되면 절대로 못 이겨!"
아니, 왜 갑자기 상급이 되는 건가?
고민하던 베니엘은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들의 근처에 흐르고 있던 용암강 때문인 것 같았다.
마스터급 검객이 주변의, 자신의 근처의 환경에서 마력을 가져온다면, 하이 마스터부터는 그 능력이 좀 더 구체화 된다.
바로 특정한 자연물로부터 직접 힘을 받아내는 것이다.
나이트쉐이드의 수장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도 거대한 에본플로우 호수로부터 힘을 끌어낼 수 있다.
마스터는 기껏해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수십 미터, 수백 미터의 마력을 가져오는 것에 불과하다면, 하이 마스터는 대상을 특정해 엄청난 크기의 자연물로부터 마력을 뽑아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수준이 달랐는데, 하이 마스터 바로 직전인 마스터 상급부터는 이것을 제한적으로 흉내낼 수 있게 된다.
이 덕에 조르카에게 저 뒤에 용암강과 모종의 연결이 일어났던 게 틀림없다.
'타르나이는 불과 친화적인 종족. 용암강과 상성이 좋다. 젠장….'
심중을 깊고 음흉한 남작이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검은 호수와 같다면, 타오르는 성정의 조르카는 용암강과 딱 맞는 것이다.
그 덕에 결국 꺼질 뻔했던 조르카의 심장은 용암강의 마력으로 다시 달궈졌고, 상급의 경지를 딛기 직전이었던 거다.
"합동으로 공격한다! 모든 힘을 끌어내!"
베니엘의 명령에 드랄두와 쿠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셋은 자신이 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 필살의 공격은 어느새 눈빛이 돌아온 조르카에 의해 대번에 저지됐다.
카아앙! 캉! 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조르카의 거대한 검이 모든 공격을 분쇄했다. 이전보다 훨씬 간단하게 말이다.
검객 셋은 놀라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지만 조르카는 이미 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크흐흐… 이게 상급의 경지인가...!"
조르카는 자신도 놀란 듯 스스로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때 호위대장 쿠르신이 베니엘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망치십시오. 저희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끌겠습니다."
베니엘은 너희나 도망쳐라, 어차피 조르카는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고 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변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고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니 이제 그는 베니엘조차 망설임 없이 베어버릴 터.
"호위대장의 말이 맞습니다. 승산이 없다고 봅니다."
기계 언데드 드랄두 역시 동조하며 베니엘의 앞쪽으로 나섰다. 그의 등 뒤로 증기가 더욱 격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마지막 일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끌어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뒤는 저희에게 맡기시지요."
"아쉽네요. 좀 더 달라진 도련님과 일하고 싶었는데."
"뭐, 여기까지인가…."
"제 여동생을 부탁드립니다."
"...."
호위병 다섯 역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는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부하들 모두가 베니엘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베니엘은 여기서 달아나는 게 합리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르카는 상급에 막 올라선 듯했지만 부상 등으로 인해 온전하지 못한 상태.
부하들이 시간을 끌어주면 용암강 너머로 충분히 도주할 수 있을 터.
"자, 어서 가십시오!"
호위대장 쿠르신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그런데 베니엘은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곧 결정했다.
"아니, 가지 않는다."
"도련님! 감정으로 판단할 때가 아닙니다!"
쿠르신 곁에 선 다른 호위병들도 덧붙였다.
"도련님답지 않게 왜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쓰고 버리는 거 잘하시잖습니까?"
"변한 것도 좋지만, 지금은 예전다운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베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무모하게 남겠다는 게 아니다. 성공 확률이 높지 않지만 방법이 하나 있다.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베니엘은 머릿속으로 주르도가 남긴 네더 블레이드의 기술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더 블레이드는 걸출한 S등급 검법인 만큼 현재 베니엘의 솜씨로도 따라하지 못할 기술이 많았다.
그중 마스터 중급은 되어야 시도해 볼 수 있는 기술인 '흑요석 깨기'를 떠올렸다.
'어쨌거나 조르카 역시 나이트쉐이드의 검객이다.'
본래 타르나이는 검술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조르카가 익힌 검법은 야만적이고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 정도로도 강자로 행세하기 충분했으나, 그의 기예가 나이트쉐이드 가문으로 와서 장족의 발전을 거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나이트쉐이드에서 식객으로 지내는 자들이 바라는 건 금도 지위도 아니고, 바로 검법이다.
조르카 역시 그것을 받았다.
'하면 네더 블레이드로 반드시 카운터칠 수 있을 것이다.'
주르도의 네더 블레이드는 태생 자체가 남작이 창안한 나이트쉐이드의 검법을 꺾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무리 상대가 상급이라고 해도 나이트쉐이드의 검법을 쓰는 이상, 네더 블레이드를 쓰면 반드시 한방 먹여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상급에 올라 심장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고 해도 걸레짝이 된 육체는 여전해. 카운터 한 번이면 쓰러뜨릴 수 있다.'
베니엘은 입술을 깨물며 모두에게 부탁했다.
"쉽지 않은 부탁을 하겠다. 조르카를 상대로 시간을 좀 끌어줘. 어떻게든 해볼 테니."
그 어떻게든을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마스터 중급에 올라서야 한다.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얘기다. 하지만 베니엘은 자신의 재능을 믿기로 했다.
'모두와 함께 살아남으려면 이 길밖에 없다.'
88화
오크 부락 (4)
***
베니엘의 눈앞에서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베니엘이 원하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 사이 베니엘은 리리나가 준 시커먼 액체로 가득한 약병을 꺼냈다.
'마치 죽음을 용액으로 만들어 담아둔 것 같군.'
베니엘은 오리지널의 기억 때문에 거부감을 느꼈으나 지금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마신의 마력에 대한 리리나의 집착과 그 천재성만큼은 진짜였다.
그렇다면 분명히 약효가 있을 거다. 분명 그녀의 말대로 일시적으로 잠재력을 올려줄 터.
물론 그렇게 올라간 잠재력을 이용해 마스터 중급에 닿는 건 베니엘의 재능에 달린 문제였다.
'할 수 있다. 이 녀석의 재능이면.'
더 망설일 시간도 없었기에 베니엘은 마개를 땄다.
퐁!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소리가 나며 뚜껑이 날아갔다. 그리고 마치 지옥의 유황 구덩이에서나 올라올 것 같은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단순히 역겨운 정도가 아니라 뭘 집어넣었는지, 냄새만 맡는데도 코안의 점막이 따끔거렸다.
'하, 씨발….'
속으로 욕을 내뱉은 베니엘은 그대로 물약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물약의 목 넘김은 최악이었는데 마치 썩은 달걀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어찌나 고약한지 목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며 몸이 본능적으로 약물을 거부할 중이었다.
"우욱! 욱!"
그럼에도 베니엘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기어코 다 삼켰다.
다음에 리리나를 만나면 막내 고모고 뭐건 간에 발로 걷어차 주겠다는 다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
약효가 빠르게 돌았다. 그러자 먼저 감각이 미친 듯이 예민해졌다.
이전에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진 것이다.
뺨에 흐르는 식은땀에 엉겨 붙는 황량한 토지의 흙먼지, 검객들이 싸우든 말든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땅바닥 벌레들이 움직이는 소리, 수백 미터 위쪽의 공동 천장에서 이 상황을 내려다보며 떠들어대는 거미들의 소곤거림까지 그 모든 게 한 번에 밀려들었다.
"윽…!"
베니엘은 혼란스러웠으나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았다. 약물의 효과로 갑자기 잠재력이 폭발한 탓에 겪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그런 예민해진 감각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손에 쥔 칼의 느낌이 달라졌던 것이다.
"이건…?"
똑같은 칼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베니엘은 자신이 깨달은 것에 전율했다.
'검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검객이 가진 의지의 연장이었군!'
이전까지 그에게 의지란 이랬다.
검이란 도구를 사용해서 '의지'란 힘을 마치 마법처럼 발동하는 것이다.
뭔가 파괴적인 힘을 쏘아내기도 하고, 불타는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한다.
이게 마스터 하급이 알고 있는 의지의 힘이다.
한데 마스터 중급부터는 훨씬 심오했다.
검 자체가 이미 발현된 의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급에선 할 수 없는 특별한 기예를 부릴 수 있었다.
내 검이 상대의 검과 부딪힌 순간, 의지의 힘으로 상대의 검법에 간섭하는 게 가능했다.
이를 테면, 상대의 검이 튕겨 나가게 하거나, 비틀어 검로를 벗어나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상시 발동 중인 의지인 검으로 교묘하게 상대의 검에 개입하는 것이다.
베니엘은 입을 살짝 벌렸다.
'이 부분은 게임에 안 나오는 건데!'
게임에선 마스터 중급에 오르면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명중률이나 회피율이 올라간다.
한데 왜 그런지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건데 말이야.'
결국 게임이란 즐기기 위해서 세계를 단순화해서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반면 현실은 훨씬 깊고 복잡한 것이었다.
아무튼, 정리하면 이랬다.
-발현계 의지: 실체를 갖고 발동하는 의지로 마스터 하급부터 사용 가능.
-간섭계 의지: 자신의 검과 맞닿은 상대의 검에 개입하는 의지로 마스터 중급부터 사용 가능.
베니엘은 그제서야 왜 네더 블레이드의 비기 가운데 하나인 '흑요석 베기'가 마스터 중급부터 사용 가능하다는 건지 알게 됐다.
상대의 검에 개입하는 의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전혀 그런 경지에 대해 몰랐으니, 네더 블레이드의 모든 기술을 익히기 위해 틈나는 대로 노력해왔지만 될 리가 없었던 거다.
동시에 베니엘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째서 조르카를 상대하는 게 수월했는지 알 것 같군.'
이미 조르카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그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던 게 틀림없다.
안 그랬다면 훨씬 위험할 뻔했다.
만약 그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이미 배드 엔딩이 떠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간계를 써서 오크 이백 마리를 먼저 밀어 넣은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어쨌든 빨리 끝내야겠군.'
지금 상태는 약빨로 얻은 깨달음이니 약 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결착을 봐야 한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베니엘이 깊은 상념 속에서 빠져나와 앞을 쳐다봤다. 그러자 조르카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끝났나 보군?"
어느새 베니엘의 부하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울컥, 울컥 피는 토하는 자도 있었고, 죽은 건지 미동도 없는 자도 있었다.
베니엘은 속이 쓰렸으나 지금은 거기 마음을 쓰고 있을 틈은 없었다. 오로지 모든 걸 담은 검으로 조르카를 쓰러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끝났다. 기다려 준 건가?"
조르카는 앞으로 걸어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범답게 학생의 깨달음을 지켜봐 줘야겠지. 뭔가 편법은 쓴 거 같긴 하다만. 크크큭."
베니엘은 조소를 머금었다.
"웃기는 소리. 딱 보니 목적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조르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눈치가 빨라. 어릴 때부터 이 어르신에게 처맞고 커서 그럴까? 네놈 말이 맞다. 베니엘. 이제 나는 상급이란 경지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담금질을 원한다."
그는 상급의 경지에 발을 디뎠지만 완벽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선 깨달음이란 발판이 무너져 도로 중급으로 내려앉을 수도 있는 상황.
이런 때에 가장 좋은 건 더 수준 높은 검객에게 배움을 얻거나, 강적과 위험천만한 대결로 깨달음을 시험해 보는 것뿐이다.
베니엘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해 달려든 자들의 기백은 훌륭했으나 조르카의 성에 차진 않았다.
하나 저 망나니라면 다를 터.
본래라면 모자란 건 마찬가지나 갑자기 풍기는 기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조르카는 껄껄 웃으며 주변의 모든 게 자신을 도와준다고 여기며 베니엘에게 말미를 줬던 거였다.
베니엘은 프로스트바이트를 앞으로 겨누며 조르카에게 걸어갔다.
"일검에 끝내자. 조르카. 어차피 서로 여유가 없는 상황일 텐데."
베니엘의 잠재력을 폭증시켰던 약빨은 빠르게 휘발되고 있었다. 대단한 효용을 가진 만큼 지속 시간이 짧은 것이다.
사정이 안 좋은 조르카 역시 마찬가지라 마스터 상급의 입구에 올라섰으나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원래 안 좋았는데 베니엘 일행의 공격 때문에 거의 걸레짝이 된 상황.
지금은 용암강의 마력 덕에 움직이곤 있으나 빨리 베니엘을 제압하고 응급처치에 들어가지 않으면 위험해질 게 뻔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크흐하핫."
조르카는 음침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때 이 어르신께 교습을 받던 네놈을 위해 최고의 기예를 보여주마."
"뭘 하려고 그리 입을 터시나?"
"아마 너는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이 어르신이 직계인 네놈조차 꿈꾸기만 했던 이클립스 녹턴의 요결을 일부나마 얻었다는 걸."
"뭐라!"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S등급 검법인 이클립스 녹턴은 검은 별 나르다리온 남작이 창안한 기예의 정수와도 같은 것.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익히고 있는 건 남작 본인과 얼마 전까지 유일한 후계자였던 베니엘의 의붓누나 아리아나뿐이다.
거기에 더해 검객 서열 3위인 독안룡 카바세호가 남작의 신임 탓에 요결 일부를 받았다는 소문 정도가 있었다.
한데 조르카가 어찌?
베니엘은 바로 부정했다.
"말도 안 된다. 나도 아직 못 익혔는데? 식객에게 허락된 건 옵시디안 오버츄어가 전부야."
물론 그 옵시디안 오버츄어도 아무에게나 알려주는 검법이 아니었다.
"허세를 부리고 있군. 조르카."
그런데 조르카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거짓이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우시드라가 내게 요결의 일부를 가져다줬지."
"…정말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후후, 너 같은 애송이 놈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다. 구구절절 떠들 시간도 없고. 어디 그럼 받아보거라."
그와 함께 조르카가 자세를 잡았다. 검의 손잡이를 가슴팍에 가까이 붙이고 허리를 낮추는 저 자세는 분명 이클립스 녹턴의 기본세 가운데 하나였다.
베니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익힌 것인가! 이클립스 녹턴을?'
물론 익혔다고 해도 그 편린만 얻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편린으로도 베니엘이 익힌 옵시디안 오버츄어를 박살 내기 충분하다는 것.
하나 그건 베니엘이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옵시디안 오버츄어만 익혔을 때 해당하는 얘기다.
베니엘은 흥분이 치밀었다.
'이건 다시 없을 기회다!'
언젠간 남작을 상대로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 그때 주르도의 네더 블레이드가 확실한 카운터가 되어줄지 미리 점검해 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베니엘은 이 대결이 기껍게 여겨졌다.
"좋다! 끝장을 보자! 조르카!"
"곧 죽을 놈이 목청은 좋구나! 크하하핫!"
조르카는 사납게 달려들어 이클립스 녹턴를 펼쳐왔다.
남작이 이 검법을 창안할 때 흑요석의 날카로움과 반짝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클립스 녹턴은 검법 자체가 매우 현란하고 빠르다.
"이 어른신의 검을 다 받아낼 수 없을 거다!"
조르카의 말처럼 베니엘의 몸에는 벌써 곳곳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침착하기만 하다.
'역시 예상대로의 검법이군.'
이클립스 녹턴의 특징은 짧은 팔로 베기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손을 길게 뻗은 베기가 아니라 비교적 팔목이 구부러진 채로 베는 동작이 많다는 거다.
당연히 검의 궤적은 짧아지고 위력도 약해지지만, 현란함과 속도는 증가한다. 그리고 이 이점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화려한 검법인 것이다.
다만 짧은 팔을 쓰다 보니 위력이 약해지는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베기 중간중간 찌르기를 섞어 보충하는 게 요지였다.
크게 휘두르지 않고 짧게, 짧게 치기 때문에 검 끝이 대체로 상대방을 향해 있기에 바로 찌르기로 연계할 수 있는 것이다.
"받아내지도 못하는 건가! 둔하고 한심하구나!"
조르카는 계속 기세를 올렸다. 반면 베니엘은 상처 입으면서도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익힌 네더 블레이드는 이클릅스 녹턴과 정반대의 검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바로 긴 팔로 크게 휘두르는 것. 이러면 속도와 변화무쌍함은 줄어 들지만 위력은 증가한다.
베니엘은 몸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면서도 주르도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짧고 반짝이며 변화하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무릇 검술이란 발을 넓게 디디며, 팔을 길게 뻗을 때 훌륭한 것이다.]
왜냐하면 긴 팔로 휘두르는 위력적인 검은 결국 짧은 팔로 휘두르는 검을 깨부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걸 위한 한순간의 짧은 타이밍을 잡는 게 극히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보통 검객은 현란하게 상대를 속이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대체로 그게 쉽고 잘 통하니까.
하지만 적의 검을 깨부술 그 찰나의 순간을 노릴 실력이 있다면, 이론상으론 네더 블레이드는 분명 이클립스 녹턴을 파훼할 수 있다.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실제로 이 기예의 창시자인 주르도도 남작에게 패사했으니.'
하지만 베니엘의 재능은 네더 블레이드의 창시자인 주르도조차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분명 그가 못했던 것도 성공할 수 있을 터.
베니엘은 검술서의 다음 요결을 떠올렸다.
[단순한 일격으로 현란함을 깨부순다. 하지만 그 일격을 위한 틈을 만드는 건 칼날이 아니라, 네 손으로 쥔 칼자루다.]
칼자루란 말에서 베니엘은 이클립스 녹턴의 어느 틈을 노려야 할지 직감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건만 그의 천재성이 답을 찾아낸 것이다.
'베기와 베기 사이에 이어지는 찌르기의 순간을 노린다.'
팟!
그때 짧은 베기가 베니엘의 어깨를 스쳤고, 피가 그의 뺨에 튀었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짧고 빨랐기에 베니엘은 다음 수인 찌르기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조르카의 검 끝이 베니엘의 심장을 노리며 찔러왔다. 마치 지금까지 공격은 이것을 위한 속임수였다는 것처럼 날카로운 찌르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예리해도 미리 예상하면 막지 못할 것도 없다. 베니엘은 칼자루를 들어 올리며, 크로스가드로 찔러오는 칼날을 밀어냈다.
카앙!
조르카가 이클립스 녹턴을 펼친 이후 처음으로 검의 흐름이 깨어졌다.
"!"
이제 베니엘의 머릿속은 검술서의 다음 구결로 향했다.
[강하게 딛으며 밀어붙여라. 현란함을 추구했던 상대는 잔걸음을 딛고 있으니 굳건한 그대의 발걸음을 당해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릴 것이다.]
검을 접촉한 채로 베니엘은 힘차게 발을 딛으며 조르카를 밀어붙였다. 그러자 과연 검술서의 내용처럼 덩치가 한참 큰 조르카가 어린아이처럼 밀려나기 시작했다.
보법의 차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뒤늦게 조르카가 발의 넓이를 벌리려 했으나 두고 볼 베니엘이 아니다. 그는 뒤로 넘어지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이놈…!"
놀란 조르카가 급하게 아껴뒀던 기예를 발동했다.
바로 검을 접촉한 후 상대의 검에 개입할 수 있는 '간섭형 의지'를 쓴 것이다.
베니엘 일행에게 얻어맞을 때는 여력이 없어 쓰질 못했으나 상급에 오르고 간신히 몇 번 정도 사용할 기력을 찾았다.
'접촉면에 가공한 무게를 느끼게 해주마! 처음 당해볼 테니 꼼짝도 못 할 것이다! 이 빌어먹을 놈!'
조르카의 의지가 베니엘의 검에 깃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베니엘의 검은 수 톤에 이르는 하중을 받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여기서 베니엘은 끝장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간섭형 의지를 잠깐이나마 얻은 상태.
'나의 검은 나의 의지. 이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의지의 연장.'
베니엘 역시 간섭형 의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무게 증가는 무효화 돼버렸다.
"큭!"
마지막 수단까지 막혀버리자 조르카의 얼굴에 허탈함과 황망함이 밀려들었다. 이미 그는 베니엘에게 밀려 몸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크게 걷고, 강하게 치는 그건 분명 너희 가문의 기예가 아니다…. 대체 그건 무슨 검법이지?"
"알 것 없다. 저승에서 궁금해하도록. 이 잡종아."
베니엘이 그대로 다음 동작을 이어가려 하자 조르카는 마지막 발악에 나섰다.
"크아악! 당할 것 같나!"
조르카는 검을 거둬들인 뒤 베니엘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찌르기가 막히고 몸이 사정없이 뒤로 밀린 때부터 모든 동작이 베니엘의 통제 하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니 그것조차 베니엘의 상정 내였다.
베니엘은 네더 블레이드 '흑요석 깨기' 요결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정확한 순간에 흑요석을 깨라. 그것의 날카로움은 이제 결코 그대를 상해하지 못한다.]
그 말대로 이뤄졌다.
베니엘의 베기는 조르카의 베기를 그대로 박살 내며 찍어눌렀다.
심지어 조르카의 검이 훨씬 크게 무거운데도 그렇게 됐다.
카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이 넓은 조르카의 검 일부분이 깨어져 나가며 프로스트바이트가 내리그어졌다. 그리고 칼날이 정확히 조르카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퍼억!
순간 조르카가 흰자위를 드러내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타르나이가 대단해도 두개골이 깨지고 칼날이 뇌를 헤집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전기 신호가 셧다운 됐다.
쿠웅!
조르카의 거검이 땅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베니엘은 그걸로 그치지 않고 칼을 뽑아내 아직 멀뚱히 서 있는 조라크의 목을 쳤다.
서걱!
잘린 조르카의 머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침 그들은 격전을 벌이며 계속 이동했기에 어느새 용암강 근처까지 닿았던 상태였다.
허공을 날던 조르카의 머리가 용암강 속으로 빠졌다.
화르르륵!
잘린 머리가 불길과 함께 천천히 진득한 용암강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조르카의 거체가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대지 위로 쓰러졌다.
쿠웅!
베니엘은 그 피를 뒤집어쓰며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있다! 분명 네더 블레이드는 이클립스 녹턴을 깨부술 수 있어.'
89화
기특한 선물 (1)
조르카의 머리를 날려버린 베니엘은 곧장 부하들의 구조에 들어갔다.
"이런… 상태가 말이 아니군."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조르카와 짧은 시간 대적한 것만으로 개박살이 나 있었다.
서둘러 상급 포션을 먹이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사망자만 해도 셋이었다. 나머지 역시 상세가 좋지 않다.
"쿠르신, 괜찮나?"
"으윽… 버틸 만합니다. 그보다 조르카는?"
"목을 쳤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다른 녀석들을...."
"알겠다."
하마터면 쿠르신도 사망할 뻔했다. 그는 오로지 황금팔의 효능에 기대 살아남았다. 황금팔에는 재생 능력이 있는데, 게임으로 치면 라운드당 HP를 몇 정도 회복시켜주는 기능이다. 그 덕에 피투성이가 됐어도 살아남는 게 가능했던 것.
반면 기계 언데드 드랄두의 경우는 죽고 말았다. 아니, 이미 죽은 존재인 데다가 반쯤은 기계이니 가동이 정지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일검에 허리가 절단 나 버렸다. 하나 베니엘은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고모에게 살려달라고 해야겠군."
리리나가 만든 기계 언데드 드랄두는 생각보다 굉장한 존재다. 마치 리치처럼 별도의 '라이프 베슬'을 갖고 있어서, 그게 부서지지 않는 한 계속 부활한다.
이 라이프 베슬은 리치나 되는 고위 언데드나 되어야 갖는 것이니, 이것만 봐도 리리나가 드랄두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만하다.
현재 드랄두의 라이프 베슬은 리리나의 작업실에 있다.
'다시 가동하는 데 비용이 꽤 들겠지만, 그 정도면 싼 거다.'
반푼이라도 마스터급 검객이니 어떻게든 살려내야 했다. 아니, 그런 손익을 떠나서 자신을 위해 용감하게 물러나지 않았던 부하다. 모른 척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둘은 그렇다 쳐도…. 젠장...."
나머지 호위병들이 문제였다. 본래 이들의 역할은 중석궁으로 원거리에서 조르카를 괴롭히는 것. 조르카와 직접 붙으면 일초지적도 안 된다. 결국 사망자가 둘이나 나왔다.
발키무와 오사키아란 녀석들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더 빨리하지 못해서."
베니엘은 이 세계로 와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가슴이 타는 듯한 괴로움이었다.
"빌어먹을…."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자, 호위병들의 분대장인 바니카말이 위로해왔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선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끄셨으니까요…. 저 둘 역시 호위병으로서 책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바니카말은 부상 때문에 안색이 창백했다. 하지만 베니엘이 값비싼 상급 포션을 퍼부어준 덕에 그는 목숨을 건졌다. 나머지 호위병인 아드릴과 네그라크 역시 생존했다.
그들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쓰러진 동료 곁으로 모였다.
베니엘은 이들에게 물었다.
"아직 삶을 이어갈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 이들이 평소에 어떤 뜻을 갖고 있었나?"
삶을 이어갈 한 번의 기회라 함은 '언데드화'를 말한다. 베니엘은 죽은 두 호위병을 언데드로 살려내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발키무와 절친했던 아드릴이 답해왔다.
"발키무는 계속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비록 그게 저주받은 삶이라도 말이지요."
그 대답에 베니엘은 안도감을 느꼈다.
"알겠다. 고모에게 부탁해서 최고로 만들어 달라고 하지. 기계 언데드는 일반적인 좀비나 구울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니까. 비용은 모두 내가 부담하겠다."
드랄두만 봐도 라이프 베슬 덕에 몸이 두 동강이 났는데 부활 예정이다.
즉, 기계 언데드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 베니엘이 부하의 부활에 많은 돈을 쓰겠다는 소리였다.
이점에 대해 아드릴은 감사를 표했다.
"생전보다 훨씬 강해지겠군요. 아마 발키무도 기뻐할 겁니다."
"그렇게 받아 들여준다면 다행이고."
다음은 오사키아였다.
오사키아와는 네그라크가 친했다. 네그라크는 발이 빠른 녀석이라 베니엘의 전령 역을 하는 병사다.
"네 친구는 어떻지? 네그라크?"
한데 네그라크는 영 침통한 표정이었다.
"...녀석은 영면을 원했습니다. 도련님."
베니엘은 탄식했다.
"아...! 그런가."
동시에 그런 결정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언데드란 죽어서도 돌아다니는 저주받은 존재. 아무리 언데드란 존재가 익숙하다고 해도, 지저인들 중에는 그런 삶을 거부하는 이 역시 많았다.
"도련님,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녀석의 결정을 존중해 주십시오."
네그라크의 요청에 베니엘은 씁쓸한 얼굴로 끄덕였다.
"알겠다."
"허락하신다면 전송 의식을 하고 싶습니다만…. 마침 동료들이 모여 있으니까요."
"물론이다. 나도 참가하겠다."
전송 의식으로 약식으로 하는 장례식이다.
지저에선 사악한 기운이나 저주 때문에 망자가 언데드로 변해 버리는 일이 잦다. 그렇기에 약식 장례식으로 그걸 막는 것이다.
이건 장의사들만의 기술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전문적이고 잘하긴 해도, 일반인들도 절차만 수행하면 응급 처치 개념으로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이후 정식 장례식을 해야 언데드 부활을 완전히 막을 수 있지만 말이다.
"암석의 고요 속으로 영면하라, 형제여."
곧 그들은 지저인 누구라면 알고 있는 장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장 깊은 잠보다 깨어나지 않는 어둠. 편안한 어둠."
지하 세계에서 죽음 이후에는 어둠과 땅 밑의 암석으로 깃들어 잠든다는 전설이 있다. 신들이 없기에 그런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장송가도 그런 식이었다.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네그라크가 근처에서 형광색으로 빛나는 발광 이끼를 가져와 죽은 오사키아의 이마와 몸에 마법적인 기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의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끝이 났다. 베니엘은 짧게 명했다.
"둘을 닉스포트로 옮기겠다. 부상으로 힘들겠지만 적 지형에 있으니 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 채비해라."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움직이는 동안 호위대장 쿠르신이 와서 알려왔다.
"오사키아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르카를 막아서면서 여동생을 부탁한다고 말했지."
"남매의 사이가 꽤 괜찮았습니다. 우리 씨족답지 않게 말입니다."
"어떤 아인가?"
"당찬 녀석이지요. 무예도 뛰어납니다. 아직 어리지만 몇 해 안으로 가병으로 들어올 듯합니다. 다만, 무예보다 다른 점으로 유명합니다만...."
쿠르신은 어쩐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음? 뭔데 그러나?"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뭐, 알겠다. 내가 신경 써 줘야지. 이번 일이 끝나면 직접 찾아가겠다."
오사키아의 여동생은 게임에는 안 나오는 인물이다. 존재 자체가 없는 건 아니고 텍스트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인물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
베니엘은 도강 후 기다리고 있던 홉고블린 삼 형제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과 합류했다.
"포로가 총 몇이냐?"
"스물하나입니다. 치안관님! 케르르륵!"
홉고블린 삼 형제의 첫째인 두크가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홉고블린답지 않게 진중하고 과묵한 성품을 지녔는데, 지금만큼은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번에 큰 성공을 거뒀다고 여기는 듯했다.
옆에서는 둘째 기크와 셋째 잔크가 오크 포로들을 향해 채찍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짜악―!
짝!
그럴 때마다 오크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는데, 그건 오히려 홉고블린들의 가학적인 품성을 자극할 뿐이었다.
"이 덩치만 큰 짐승 새끼들! 근성이라곤 없어서! 케륵!"
"역시 너희 야만족은 우리 전사 종족인 홉고블린에게 못 미친다! 케케케켁!"
홉고블린은 훌륭한 전사이자 병사지만 오크에겐 자격지심이 있었다. 아무래도 덩치와 힘에서 밀리니 은근히 오크에게 괄시를 받는다고 할까? 그러니 이런 기회가 생기자 삼 형제는 잘 걸렸다는 듯 패악질이었다.
베니엘은 그런 분풀이는 아무래도 좋았다.
"남작님께 진상해야 하니 죽이지만 말도록."
"네! 물론입니다! 치안관님! 케켁! 그저 고기처럼 자근자근 다져서 얌전하고 순종적으로 만들 따름이지요. 케케케!"
베니엘은 야만 오크를 그들에게 맡기고 터벅터벅 걷는 도마뱀의 등 위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마스터 중급에 벌써 한 발 걸치게 된 것이다.
'이거 역대급 성장 속도 아닌가?'
스스로도 정말 놀랄 지경이다. 얼마 전에 마스터 하급에 올라섰다. 한데 벌써 중급을 슬금슬금 엿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약 기운이 사라져 일시적으로 폭증했던 잠재력은 본래대로 돌아왔지만, 그 간섭형 의지에 대한 깨달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돌아가서 시간을 들여 수련하면 완전히 얻을 수 있겠어. 내 재능이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간섭형 의지 하나로 완벽한 중급이 되는 건 아니다. 중급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5레벨 주문을 의지로 쳐내는 등의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게 간섭형 의지인데, 그것에 대해 깨달았으니 이미 중급의 관문을 활짝 열어젖힌 거나 다름없었다.
베니엘이 그런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닉스포트에 도착했다.
도시는 어느 때처럼 활기에 넘쳤는데 베니엘 일행을 보자마자 크게 혼란이 일었다.
"으아아앗!"
"저, 저게 뭐야! 야만 오크다! 오크들이야!"
"끄아아아아! 뭐라고!"
순간 좌판이 넘어지고 도망치는 자들까지 나왔다. 바닥에 발광 버섯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그걸 밟아서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부모들은 그런 애들을 챙겨 달아났다.
그 정도로 야만 오크족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곧 주민들은 오크들이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고, 심지어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란 걸 깨달았다.
"서, 설마? 포로인가!"
"도련님이! 도련님께서 오크를 잡아 오신 거야!"
"야만 오크가 줄줄이 묶였네!"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사람들은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또 전쟁이 일어나는 걸까요?"
"지난 전쟁 이후 오크 포로는 처음이네요."
그런 소란스러움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직 성질머리가 다 죽지 않은 야만 오크 하나가 소리를 냈다.
"크르르릉!"
이 모습에 길가에서 구경하던 주민들은 화들짝 놀랐으나 곧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걸 알고는 역정을 냈다. 그들은 오크들에게 썩은 버섯 같은 걸 집어 던졌다.
"이 냄새 나는 야만족이!"
"어딜 감히! 남작님의 도시에서!"
"죽어!"
사방에서 오크들을 향해 이것저것이 날아들었다. 용병들은 딱히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홉고블린 삼 형제는 한술 더 떠서 근처의 행인에서 들고 있던 채찍을 쥐여주기까지 했다.
"케륵! 직접 쳐라!"
행인은 덩치가 왜소하고 안색이 창백한 늙은 고블린이었다. 오래간 노역 일을 한 듯 손이 거칠하고 허리가 구부정했다.
원래 겁이 많고 나약한 자라 채찍을 받자마자 손을 덜덜 떨었다. 늘 맞기만 했지, 때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네엣? 네?"
심지어 저 덩치 크고 무서운 오크를 치라고? 그건 마치 사자나 호랑이에게 채찍질을 하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저는 괜찮...."
늙은 고블린이 거절하려 하자 홉고블린 삼 형제가 눈을 부라렸다.
"늙은이! 우리 호의를 거절하려는 거냐!"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고 눈을 부라리는 홉고블린 삼 형제의 모습에 늙은 고블린은 결국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눈앞의 홉고블린들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결국 늙은 고블린은 눈을 질끈 감고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짜아악―!
채찍질이 가해지자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래! 그렇지!"
"잘 한다! 더 쳐라!"
이에 평생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늙은 고블린은 묘한 표정이 됐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점차 설명하기 힘든 열기와 희열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는 노역으로 단련된 억센 힘으로 오크 포로들을 마구 내리쳤다.
짜아악! 짝! 짝!
그와 함께 환호성이 더 커졌다.
"와아아아!"
"죽여! 죽여 버려!"
늙은 고블린에게 채찍을 건넨 홉고블린 삼 형제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케륵케륵! 거봐, 할 수 있잖아!"
"오크 똥구녕 같은 늙은 놈! 그래, 이제야 좀 사내답군! 케케켁!"
"잘했다! 네놈, 할 일이 없으면 우리와 가자!"
즉석해서 노예 관리를 할 인력 하나가 합류했다. 늙은 고블린은 밝게 웃으며 채찍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저는 그르그르입니다!"
그 말에 홉고블린 삼 형제가 베니엘을 바라봤다. 그를 써도 되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맘대로 해라."
자경대에 사람이 부족하니 일손이 들어오는 걸 막을 이유는 없었다.
'삼 형제가 딱 찍은 걸 보니 뭔가 마음에 든 모양이군.'
베니엘은 그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슬슬 나타나야 하는데.'
이대로 남작성의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그전에 꼭 필요한 게 있었다.
'설마 못 구해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인파 속에서 여인 하나가 튀어나와 베니엘의 도마뱀 옆에 붙었다.
"치안관님."
실라가 보내준 요원인 퀴아였다. 눌러쓴 후드 아래로 그녀의 반짝이는 적발이 찰랑거렸다.
"구해왔나?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네놈들 조직에 큰 실망을 하게 될 거란 점은 꼭 말해두지."
그 말에 퀴아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 참~. 저희 그렇게 능력 없는 사람들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 구하기 힘들었다고요!"
"뭐, 구했다면 됐다. 내놔. 얼른."
"아니, 치안관님? 좀 더 절 칭찬해주신 뒤에…."
"다물어."
퀴아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품에서 마법 지퍼 하나를 넘겨줬다.
"주문하신 카르멘의 오브 세 개예요. 가격이 올라서 주신 3만 두크로도 부족했다고요. 저희 쪽 돈이 들었어요! 아, 속 쓰려라!"
"그만 투덜거려. 몇 배로 돌려줄 테니."
그렇게 약속하자 퀴아는 그제야 씨익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손으로 키스를 날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으음~ 쪽! 그럼 회의 끝난 뒤에 봐요. 단둘이 밀회면 더 좋고!"
"얼른 꺼져라."
마침 필요한 게 도착했다.
'이제 이번 일의 마지막 단계군.'
조르카와의 승리로 큰 보상을 얻었지만 일은 마무리가 중요한 법.
큰고모의 좌천을 위해 이제 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련님! 회의에 참석하시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매번 그렇듯 남작성에서 가병이 튀어나와 알려왔다.
베니엘은 끄덕였다.
"바로 참석하겠다고 전하라."
90화
기특한 선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