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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용봉회합을 제패했다 (5)

"세 번째 시험은 내력 측정이네. 여기 이 내력측정구로 시험을 치를 것이네."

만박자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용봉들의 표정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용봉 모두 제 내력의 수준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명가 후예들의 각축장인 용봉회합에서도 독보적인 배경을 지닌 이들의 표정에 맺힌 것이 희(喜)요, 상대적으로 한미한 가문의 용봉들의 표정에 맺힌 것이 비(悲)라 하겠다.

용봉회합에 참여했다 함은, 모두 이립이 되기도 전에 절정지경에 오른 후기지수란 뜻이다.

말이 이립 미만이지, 약관 어름이 가장 많다. 이립에 다다른 나이로 용봉회합에서 경합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강호 무림의 인식 때문에 그렇다.

거의 모든 정종 무공이 열 살 이전에 단전을 만드는 것을 금기시하니, 이들 대부분은 단전을 생성하고 심공을 운용한 지 십 년 내외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갑자라는 단위의 내공을 손에 넣었다.

모두 한가락하는 가문의 후예들이니, 모두 제 나름의 고절한 심공을 익힌 까닭이라 하겠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여기 모든 이가 순수한 축기량으론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정종 무공이 개량되고 발전되었다 해도, 고작 십 년의 세월에 일 갑자를 훌쩍 상회하는 내력을 축기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역천의 마공을 익혔거나, 흡성요법과 같은 희대의 사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시점에서 용봉들이 지닌 내력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영약이라 할 것이다.

값진 영약을 두루 섭취한 이는 심후한 내력을 자랑할 것이오, 두루 영약을 섭렵하기 어려웠던 이는 상대적으로 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용봉이 지닌 배경의 힘과 지닌 바 내력이 비례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무를 펼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무공의 고하를 판단하기 위해 내력을 측정하는 것이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립 이전의 후기지수에게 내력의 양이란 가문의 능력에 비례하는 바, 그야말로 불합리의 표본이라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강호 무림이야말로 불합리한 세상의 증명인 것을.

여기서 한미한 가문이라 탄식하는 이조차, 누군가에게는 불합리의 대상인 것이 강호 무림의 생리인 것이다.

내력 측정이라는 세 번째 시험에 이르자, 많은 수의 용봉의 표정에는 체념이라는 이름의 담담함이 깃들었다.

그럼에도 세 번째 시험을 포기하는 용봉은 없었다.

혹시나. 만약에. 나는 다르지 않을까.

알고 있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희망을 거니, 무수히 많은 이가 도박에 중독되는 이유와 같다 할 것이다.

여하튼, 장광설의 결론은 이러하다.

두 번째 시험이 장비빨을 겨루는 시험이었다면, 세 번째 시험은 영약빨을 겨루는 시험이라 하겠다.

약선심결을 익히고, 공청석유와 주과라는 지고의 영약을 섭취한 나에게는 이 시험도 따 놓은 당상과 같다는 말이기도 하다.

* * *

"어찌하면 됩니까?"

궁금증이 인 후기지수 하나가 손을 들어 만박자에게 물었다.

내력측정구라는 기물은 살아생전 처음 보는 터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력측정구에 장심(掌心)을 대고 내력을 분출하면 될 것이네. 요령이 있다면, 검기를 발현하는 것과 같은 기전으로 수행해 보시게."

'요령'이라는 만박자의 말에 여러 용봉들의 귀가 솔깃했다.

축기한 내력의 양과, 발출할 수 있는 내력의 양은 사뭇 다른 까닭이다.

축기가 심법을 운공한 시간과 영약의 양이라면, 내력의 발출이란 깨달음, 혈맥의 강도와 순도, 무공의 특성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던가.

덤덤해졌던 용봉들의 표정에 다시금 결연한 의지가 들어섰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만박자가 싱긋 웃었다. 분명 만박자는 이를 노린 것이겠다.

"아미타불. 소승이 먼저 시험에 임해도 괜찮겠습니까?"

먼저 나선 이는 소림의 후기지수였다.

이번 용봉회합을 사문인 소림에서 주관함에도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차, 마침내 기회를 잡은 것이리라.

자연스레 저 후기지수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대력금강 운소.

정마대전이 일어날 시기에 그는 사대금강의 일좌로 든든하게 마교에 맞서는 정파의 기둥이 되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늠름하고 듬직한 모습으로 기억한다. 치기 어린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니, 그것이 성장이리라.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개방의 정보는, 저 친구가 어린 시절 사문의 큰 은혜를 입어 소림의 대환단을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운소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만박자에게 물었다.

"장력을 사용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운소가 내력측정구 앞에서 마보 자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많은 후기지수의 표정에 흥미가 동했다. 저 자세가 의미하는 바를 눈치챈 것이다.

모든 무공의 근간이라 불리는 마보지만, 그 마보를 기수식으로 하는 무공은 생각 외로 많지 않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소림 칠십이종 절예 중에서도 난해한 것으로 손에 꼽을 수 있는 절학.

"아미타-불!"

백보신권. 다른 이름으로 아라한신권이라 하겠다.

운소의 장심에서 거력이 분출되었다. 흡사 내력측정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 거센 기세였지만.

츠츠츳.

내력측정구는 마치 절정의 흡성요법을 운용하는 역천의 고수처럼 운소의 내력을 집어삼켰다.

"크으윽!"

마치 내력측정구와 내공대결을 펼친 것처럼 한참을 씨름하던 운소의 장심이 떨어진 것은 일곱 호흡이 흐른 후였다.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듯, 운소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奇事)가 벌어졌다.

우우웅.

내력측정구의 절반이 야명주처럼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훌륭하네. 자네, 대환단이라도 먹은 겐가?"

"아미타불."

운소가 얼른 표정을 숨기며 합장했다. 강호에서 제 비밀을 순순히 밝히는 무인은 없는 법이다.

만박자의 시선이 뭇 후기지수들을 향했다.

"시험은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네. 참 쉽지 않나?"

대환단의 공력에도 내력측정구는 고작 절반이라.

결코 만만치 않은 시험이라 하겠다.

* * *

"크아아악!"

시험장에 연신 후기지수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하하! 대단하군!"

만박자의 추임새와 함께였다.

내력측정구 시험을 마친 후기지수들이 탈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내력 측정을 한 것이 아니라, 내력을 강탈당한 모양새다.

"크아아악!"

또 한 명의 희생양이 등장하니.

"하하하하! 삼분지 일을 밝혔네! 자네도 대단하군!"

만박자가 또 기뻐했음이라.

이 장면을 보니, 그가 왜 기인이사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 인물인지 알겠다.

운소가 고작 절반을 밝혔다 생각한 후기지수들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운소 이후에 자신만만하게 등장한 후기지수들 중 누구도 삼분지 일 이상을 밝혀 낸 이가 없는 까닭이었다. 대환단이라는 무가지보(無價之寶) 단환의 효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단천가의 학. 나오시게."

마침내 단천학의 차례가 다가오자 뭇 후기지수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첫 시험과 둘째 시험에 괄목할 성과를 얻은 그였으니, 이 정도 관심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단천학이 고요한 걸음걸이로 내력측정구 앞에 섰다.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절차탁마하는 무인의 기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천학은 명문가의 후계답게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영약을 취해 왔다.

영약을 밥처럼 먹었다의 수준은 못 되어도, 보양식처럼 먹은 수준은 된다. 어머니 백여해의 재력과 능력 그리고 지극정성 덕분이라 할 것이다.

단천학이 조심스럽게 제 장심을 내력측정구에 가져다 댔다.

"크아아악!"

측정구에 손을 얹은 후기지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비명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으니.

"크아아아악!"

다른 후기지수들과 다르게 그의 비명은 쉽사리 끊이지 않았다는 점일 터다.

일곱 호흡을 버틴 운소를 훌쩍 넘어, 단천학은 열 호흡을 버텨 냈다.

"허억. 허억. 허억."

경신공 시험을 쳤을 때보다 더 가파르고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이다.

내력측정구가 빛났다.

삼분지 일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양이다. 현 단천가의 위치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모양새라 할 수 있다.

안휘를 주름잡는 명문무가라 하지만,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에 비견하자면 손색이 있는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박자의 표정에는 흡족함이 서려 있었다.

"훌륭하네."

운소 이후로 처음으로 대단하다가 아닌, 훌륭하다는 말이 나온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감사합니다."

단천학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다른 후기지수들보다 지친 기색임에도 그 고고한 자존심 탓인지 탈진하여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나를 담았다.

"낭인 이춘백, 나오시오."

"본인은 기권하겠습니다."

모든 용봉이 경악하는 가운데.

"흠. 그렇구만."

만박자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만박자라는 이름답게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연유인지, 그냥 무관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단천가의 명. 나오시오."

내 차례가 되었다.

* * *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첫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모두 석권한 나였으니, 그 관심도는 단천학 이상이다.

기실, 용봉회합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는 두 명의 인물이 단천가에서 나왔으니, 실로 가문의 홍복이라 할 것이다.

"후-"

긴장감은 없었다.

앞선 두 시험에서 월등한 성적을 쟁취했으니, 세 번째 시험에서 기준 미달만 아니라면 용의 별호는 따 놓은 당상이라 할 것이다.

기준이라 함은 절정 지경을 말하는 것이니, 사실상 이미 달성을 한 것이다.

하여 고민했다.

어디까지 보여 줄 것인가.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구태여 숨길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를 내보이고,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용봉회합에 참여한 것 아니겠는가.

내력측정구에 장심을 가져다 댔다.

찌릿한 느낌.

모든 용봉이 비명을 지른 것과는 다르게 그리 아프지 않았다.

"음?"

비명을 지르지 않는 내 모습을 만박자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단천심공을 일으켰다. 임독맥을 타고 내기가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통상 임독양맥이란 것은 조화경에 닿을 때 즈음에야 타동되는 것이지만, 일 단공 개체를 이룬 나는 예외라 할 것이다. 당연히 내력의 발출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츠츠츳.

내력측정구가 거칠게 나의 내력을 받아들였다.

쿠오오오.

그에 호응하듯, 나는 더 거세게 내력을 쏟아부었다. 단전 가득 충만하던 내기가 고갈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집중하느라 정확하게 세지는 못했지만, 대략 열 호흡 정도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나조차 예상치 못하던 일이 일어났다.

단전의 내력이 동나자 전신세맥에 잠들어 있던 공청석유의 기운들이 일어난 것이다.

츠츠츳.

쿠오오오.

내 내력과 내력측정구가 다시금 거세게 격돌했다.

장심을 떼지도 않았건만 내력측정구는 야명주처럼 환한 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만박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넘어 입을 쩍 하고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몇 호흡이나 지났을까.

쩌적.

내력측정구에 금이 가더니, 빛이 사라졌다.

"...."

후기지수들의 시험이 끝날 때마다 무언가 추임새를 넣던 만박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시험을 치는 와중이었으니, 변상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움직이려던 나를 만박자가 막았다.

"자네."

그리고 말을 잠시 고르더니.

"대체 뭔가?"

그의 질문이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

하지만.

"비밀입니다."

강호 무림에 제 비밀을 밝히는 무인이 어디 있던가.

주과의 힘을 입은 싱그러운 미소를 만박자에게 보내 주고는 나는 물러났다.

모든 후기지수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는 와중, 남궁탄만이 유일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단천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시선으로 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용봉.

한때 나의 우상이었던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내가, 장래의 천하제일인 단천명이다.

21화 용의 별호를 쟁취했다

세 가지 시험이 모두 끝났다.

"용봉들은 모두 모이시오."

소림의 방장 범각대사, 무당의 장문인 태청진인, 그리고 만박자가 함께 자리했다.

대표 격으로 배분이 가장 높은 범각대사가 나섰다.

"팽가의 진후, 소림의 운소, 남궁가의 탄, 단천가의 학 그리고."

범각대사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일석. 단천가의 명은 연단에 오르시오."

용봉이라 일컫는 강호의 후기지수들 중 단 다섯만이 용의 별호를 얻는다. 그들 사이에 위계나 순위는 없다. 그것이 전통이다.

헌데, 범각대사는 구태여 나를 일석이라 칭했다. 이견이 없다는 듯, 태청진인과 만박자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섯의 용이 연단에 섰다.

범각대사의 시선이 연단 위의 용들을 훑은 다음, 뭇 용들을 담았다.

"이들이 용의 별호를 얻을 후보들이오. 이의가 있는 자, 지금 말하시오."

"...!"

그의 선언과 동시에 장내에는 침묵과 동시에 긴장감이 서렸다.

앞서 말했듯, 공식적으로 용봉은 신법, 검격, 내력을 시험하여 뽑는다.

'공식적으로'라는 말이 붙는 까닭이 당연히 있다고 할 것이다.

손 한 번 섞지 않은 이가 시험의 성적이 좋다 하여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과연 모든 후기지수가 승복할 수 있겠는가.

시험이 아무리 엄정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다고 해도 불복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결국 무인인 까닭이라 하겠다.

용봉회합을 주최하는 이들이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안전 및 여러 이유로 대련과 비무를 제한한 그들이지만, 비무를 아예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사실도 안다.

무인은 결국 실전에서 저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기에 그렇다.

비무.

결코 장려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용봉회합에 비무는 빼놓을 수 없는 절차라 할 것이다.

모든 불만을 털고 가야만 진정한 인정이 있을 수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 비공식 절차를 거쳐야만, 진정한 용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아무도 이의가 없으시오?"

"...."

생각보다 이의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소림의 범각, 무당의 태청, 그리고 만박자. 그들이 선별한 후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쉬울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때.

"이의 있소!"

용맹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모든 용의 시선은 연단 위로 향했다.

이의를 제기한 이가 연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내 단천명이 일석이라는 사실을 인정 할 수 없으니, 그에게 비무를 신청하오!"

당당한 목소리로 그리 소리치는 이는, 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는 남궁탄이었다.

범각 대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단천가의 명. 비무에 동의하시오?"

"동의합니다."

나도 그를 한번 손 봐주고 싶었던 참이니, 기꺼운 일이라 할 것이다.

* * *

이례적인 비무가 성사되었다.

기실, 대부분의 이의 제기는 후보에 들지 못한 이들이 후보를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다.

헌데, 용의 후보로 지목당한 후기지수가 다른 용의 후보를 지목했으니.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무장의 중앙.

나와 남궁탄이 마주 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범각대사가 서 있었다.

"모두 알다시피 비무에 규칙은 없소. 또한, 비무 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물질적 손해에 대해서는 상대에게도, 주최측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오."

그리 말한 범각 대사가 나와 남궁탄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다만, 정도 무림의 동량답게 행하시오."

많은 뜻이 함의된 말이라 하겠다. 구태여 풀어 쓰자면, 암수를 사용하지 말 것, 노골적인 살초를 지양할 것 정도가 되겠다.

"예."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라는 이유로 내기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다른 제약을 가했다간, 그 또한 시시비비 거리가 된다는 것을 익히 경험으로 아는 까닭에 정립된 규칙이라 할 것이다.

스릉.

남궁탄이 검을 빼들었다.

"오오."

후기지수들의 감탄을 유발하는 신병이기, 천공의 여덟 번째 검이라 할 것이다.

잠시 그의 검을 살피고 있으니.

"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나?"

남궁탄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거만하게 물었다.

저 친구, 아무래도 내가 백련정강을 깔끔하게 잘라 버린 사실을 잊은 듯하다.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무구 또한 무인의 실력 아니겠소."

스릉.

내 손에 들린 단천검은 천공의 유작이었으니, 내가 그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 하겠다.

"흥! 네놈의 실체를 까발려 주마!"

그리 말하며 남궁탄이 훌쩍 날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실체를 까발려 준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탓. 탓.

남궁탄의 신형이 절묘한 보법을 밟으며 내게 쇄도했다.

우우웅.

그의 검에 시리도록 푸른 검기가 맺혔다. 과연 명가 남궁의 직계답게, 나무랄 곳 없는 검기라 할 것이다.

다만.

남궁탄의 실력의 여백 당숙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손색이 많다는 사실과.

"받아 보거라!"

내 손에 들린 것이, 단천검이라는 정도의 중요한 사실이 있겠다.

우우웅.

단천검이 내기를 받아들였다.

과연 명장 천공의 검은 명불허전이었으니. 내가 가진 역량을 배가하듯, 극도로 정제된 검기가 단천검에 맺혔다.

그리고.

챙캉!

검과 검이 맞부딪혀서 날 수 없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장내는 경악에 휩싸였다.

내 단천검이 천공의 여덟 번째 검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과연, 기인이사 천공은 미친놈이었을지언정 허언을 일삼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다.

"이게 무슨...!"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남궁탄이 보였다.

망연자실한 그가 잊은 사실이 있었으니, 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범각 대사는 말했다. 정도 무림의 동량답게 행하라고 말이다.

칼을 잃은 무인에게 검기를 날릴 정도로 나는 매몰찬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

쐐액.

내 각법이 남궁탄의 얼굴을 향했다.

-사생아 놈이!

이런.

문득 지난날 그의 언행이 떠오르는 바람에 발길질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겠다.

콰작!

내 각법과 그의 안면이 만나니.

쿠당탕!

남궁탄의 신형이 연무장의 구석에 처박혔다.

목숨을 해할 정도가 아니라 판단했는지, 범각 대사가 중간에 막아 주지 않아 다행이라 할 것이다.

여하튼, 이 정도면 비무가 종료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담담한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제가 일석이라는 사실에 이의가 있으신 분, 있습니까?"

뭇 용들 중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 * *

물론 이후에도 대여섯 번의 비무를 더 치른 것 같다. 당연히 모두 이겨 냈다.

"후-"

비무를 모두 끝내고 숨을 돌리는 와중, 형님 단천학이 다가왔다. 그 또한 여러 격전을 이겨 낸 후이니, 지친 기색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머물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

예상치 못한 단천학의 말에 놀라 버렸다. 회귀를 한 이후, 이만큼 놀란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가 내게 시비를 걸기 위해 걸음했다 짐작한 까닭이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진실로 몰랐다.

"...형님도 축하하오."

"흥.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저가 먼저 축하를 건네 놓고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밉살맞은 모습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단천학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일이 없을 것이라 단언한 내 예상은 틀렸다.

나라는 변수가 생겼음에도, 그는 기어코 지난 생과 같이 용의 별호를 쟁취해 냈으니 말이다.

다만 그 영예가 지난 생과 같지는 못할 것이다.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내가 그보다 더 큰 성과를 이룬 까닭이다.

용봉회합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거지 놈들이 수백이니, 오늘의 일들은 머지않아 강호 무림 전체에 알려질 것이다.

단천학이 표정을 굳히고,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말거라. 네가 어떤 성과를 냈든, 가주의 자리는 내 것이 될 터이니."

그리 말한 단천학이 몸을 휙 돌려 멀어져 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용봉회합이라는 자리에서, 나는 단천학이라는 인물을 처음으로 제대로 대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증명하자, 그는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얕보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경쟁자로 대해 준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생에도 조금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천학의 말이 옳다.

아직 가주의 자리는 나보다 단천학에게 훨씬 가깝다 평할 것이다.

일신의 무공이 출중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주의 위를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용의 별호를 얻은 지금에야 나는 가까스로 단천학의 뒤꿈치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와 나는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여백 당숙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난 생 혈혈단신으로 가문을 나선 단천명과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면 되었다.

* * *

나뿐만 아니라 모든 용의 후보가 비무를 이겨 냈다. 기실, 앞선 세 시험이 영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이라 하겠다.

내게 패한 남궁탄조차 얼굴이 퉁퉁 붓고 천공의 검을 잃은 와중에도 다른 후기지수들을 이겨 냈으니, 그의 기량이 거짓은 아니라 할 것이다.

모든 비무가 마무리되었으니, 진정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그대들이 앞으로 강호 무림을 선두에서 이끌어 갈 동량들이오."

짧은 인사치레를 뒤로하고 범각대사가 물었다.

"단천가의 명. 무슨 별호를 원하는가?"

압도적인 성적을 얻는 내게 가장 먼저 기회가 찾아왔다.

무슨 별호를 얻을 것인가.

이는 내가 용봉회합에 오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는."

간절하게 가지고 싶었던 그것.

"단룡(斷龍)의 별호를 원합니다."

그것을 내가 가질 것이다.

단천학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미안하오, 형님.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오.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 * *

"명이, 축하하네. 아니, 이제 단룡이라 불러야 하나?"

"어색하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시오."

연단에서 내려오자 이춘백이 나를 반겼다.

그러고 보니 또 있었다. 여백 당숙 말고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친우가 말이다.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까닭인가, 이춘백이 용봉을 자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 더 아쉽게 느껴졌다.

"저 중 하나는 춘백 형의 자리였을 것이오."

"하하. 그게 뭐 중요하겠나. 나는 괜찮네."

세 번째 시험을 포기하면서 후회할 것 같다고 말했던 이춘백은 이미 없었다. 그새 마음의 정리가 완벽하게 된 듯, 이춘백은 후련해 보였다.

"그럼 다행이오."

본인이 괜찮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용의 별호를 얻은 이들과 봉의 별호를 얻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뭇 후기지수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안휘를 거점으로 두는 후기지수들의 분위기는 숫제 축제에 가까웠다. 가장 많은 용을 배출한 까닭이다.

"검룡 대협,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창룡 대협도 축하드립니다!"

"...예."

내 각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 바람에, 여전히 얼굴이 퉁퉁 부은 남궁탄이 답하는 모습도 모였다.

단천학의 별호는 검룡(劍龍)이 되었다. 내게 단룡(斷龍)의 별호를 빼앗긴 까닭이다.

그리고 지난 생 검룡(劍龍)의 별호를 가졌던 남궁탄은 창룡(蒼龍)이 되었다. 창천(蒼天)남궁의 첫 글자를 딴 것이리라.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내가 처음 회합장에 도착했을 때, 단천학과 함께였던 이들이다.

그들은 진즉 교분을 나눈 사이였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나는 진즉에 교분을 나눈 용봉이 없으니, 단룡의 별호를 득했음에도 나를 찾는 이는 없었다.

아, 아니다. 한 명이 있다.

"저 자리가 자네 자리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석이거늘."

이춘백이다.

"하하, 그게 뭐 중요하겠소? 나는 괜찮소."

"그럼 다행이네."

익숙한 대화가 화자만 바꾸어 다시 오갔다. 이춘백과 내가 마주보고 웃었다.

헌데, 분위기가 묘하다.

"저치들, 왜 계속 우리 쪽을 힐끔거리는 것이지?"

아닌 게 아니라, 저들이 은근히 우리를 신경 쓰는 것이 느껴진다. 그 단천학마저 말이다. 노골적으로 우리를 외면하는 남궁탄이 우리를 가장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겠다.

"내가 잘생긴 탓인가 보오."

"푸핫."

별 시답잖은 농담에도 면역이 없는 이춘백이 좋다.

단천가에서 떠나올 때가 떠올랐다.

가소들과 원로원 소속 수십의 배웅을 받던 단천학, 그리고 홀로 있던 내 옆에 여백 당숙이 와주었다. 그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단천학이 부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안휘 소속의 여러 후기지수들에게 축하받는 단천학이 있고, 내 옆에는 이춘백이 있다.

나는 단천학이 그리 부럽지 않게 되었다.

원래 소중한 것은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밟아 나가는 것 아니겠나.

"춘백 형, 고맙소."

"뭐가 말인가?"

"주루에서 춘백 형이 나를 구해 줬기에 내가 용이 되는 명예도 얻은 것 아니겠소?"

"푸핫. 명이 자네, 점점 더 웃겨지는구만."

"...춘백 형이 웃음의 역치 값이 낮은 것이오."

"무슨 소릴? 내, 웃음이 값비싼, 진중한 남자로 자라 왔음이네."

"푸핫!"

어느새 그의 웃음소리를 닮게 되었다.

"여튼 고맙소."

지금은 그에 대한 고마움을 이 정도로만 표현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제 헤어지겠구나."

이춘백이 아쉬운 듯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리고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답했다. 인과 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도 나도 장차 강호에 위명을 떨칠 면면들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서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 꼭 다시 만나세."

이춘백과 서로 손을 맞잡았다.

이거면 되었다.

22화 외롭지 않았다

단천가가 들썩였다.

가문의 장남과 차남이 모두 용의 별호를 얻은, 전 무림에 유례없는 쾌거를 이룬 까닭이었다.

이례적인 경사를 맞이한 단천가는 인근 마을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큰 잔치를 열었다.

온갖 재화가 가득 쌓인 단천가의 곳간이 활짝 열렸으니, 이날 단천가 반경 이십 리 안으로는 배를 곯는 이가 없어졌다. 명문가의 덕(德)은 베풂 속에서 공고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용봉회합이 개최된 근 삼백 년 이래 한 가문이나 문파에서 동세대에 두 명의 용을 배출한 경우는 없었으니, 이 잔치는 결코 유난이 아니라 할 것이다.

다만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가문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행사는 오롯이 여인 백여해의 주관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내 혼사 문제를 전적으로 어머니 백여해가 관장한 것과 같은 연유라 하겠다.

종두득두(種豆得豆)라 했으니, 강호의 여러 명숙들이 모인 그 자리는 필연적으로 단천학을 위한 것이 되었다.

"아들들을 이리 잘 키우시다니, 단천가의 교육법을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호호호, 과찬이세요."

여인, 백여해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병풍처럼 자리를 채우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어차피 대부분의 이목은 백여해와 단천학에게 가 있었으니, 빠져나오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행이면서도 슬픈 일이라 하겠다.

"흠."

오늘따라 황량한 처소에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 자연스레 내 걸음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근래에 단천가 내에서 가장 평안을 느낀 곳이 연무장인 까닭이다.

연무장의 중앙에 서서 단천검의 검파를 만지작거리길 잠시.

"여기서 혼자 뭐 하느냐?"

"당숙."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여백 당숙이 있었다.

"용봉회합을 제패했다지?"

"하하. 그리되었습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백여해가 주관하는 단천가의 만찬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이야기다.

방여백이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잘했다. 애썼구나."

그리 말하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

웃으며 감사하다고 너스레를 떨고 싶었으나, 어쩐 일인지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행동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에야 여백 당숙이 온전히 내 사람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 같다.

"기연이라도 얻은 것이냐?"

여백 당숙이 내게 물었다.

그의 질문은 합당했다. 그가 인지하는 나는, 오성과 재능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이리 단시일 내에 용봉 일석을 차지할 정도는 아닌 까닭이다.

강호 무림에서 부모 자식이 아닌 바에야 무공의 내력을 묻는 것은 큰 금기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만박자가 순순히 물러선 것도 그런 연유였다.

하지만 방여백, 아니, 여백 당숙은 내 스승이다.

옛 성현께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으니, 그에게도 자격이 있다 하겠다.

아니다. 오직 그에게만 내게 이리 물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예. 인연이 조금 닿았습니다."

여백 당숙에게 거짓을 고할 순 없었다. 다만, 모든 진실을 아직은 이야기할 수 없었을 뿐이다.

"가문의 홍복이구나."

애당초 강호 무림은 온갖 기인이사들과 기연이 난무하는 세상인 바, 여백 당숙은 구태여 더 캐묻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지속되었다. 이 침묵이 불편하지 않기에 좋다 할 것이다.

여백 당숙의 담백한 시선이 다시 나를 담는다.

"여전히 가주가 되고 싶으냐?"

언젠가 그가 내게 물었던 그 질문이다.

"예."

"그래. 그렇구나."

연유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새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내일부터 수련을 시작할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기연 따위에 의지해서는 내 수련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니, 각오 단단히 하거라."

"예."

나는 마침내 지난 생에는 허락을 득하지 못했던 단천검결의 후반부에 입문하게 되는 것이다.

"간다. 쉬거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당숙."

여백 당숙을 배웅해 주었다.

곧이어 내 발걸음도 처소를 향했다.

명개 시절, 항시 수많은 거지들과 함께했음에도 나는 항상 외로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이제는, 외롭지 않았다.

* * *

다들 여인 백여해의 눈치를 보느라 가내에서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 못했을 뿐, 용봉회합이 끝난 후 내 일상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게 다 저한테 온 것입니까?"

"그렇다는구나."

내 처소를 찾아온 여인 백여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받거라."

그녀가 내게 고풍스러워 보이는 종이를 여러 장을 건넸다.

그중 하나를 펼쳐 보았다.

명문가들 간의 겉치레가 가득한 미사여구를 걷어 내고 나서야 본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귀가의 '차남'과 비슷한 또래의 여식이 본가에 있으니, 정해 둔 짝이 없다면 혼인을 추진함이 어떠한지....]

어머니 백여해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종이들도 펼쳐 보았다.

십 년이 넘게 개방의 동냥밥을 먹은 가락이 있으니, 두터운 종이에 적힌 주요 정보들을 뽑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미사여구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내용들이라 하겠다.

중원 각지 명문가의 매파들이 나를 탐낸다는 기가 막힌 소식이었다. 단천가의 장남이 아닌, 차남을 콕 집어 말이다.

"혹시, 더 있습니까?"

"개중에 괜찮은 것들만 추린 것이다."

과연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라, 편지의 말미에 적힌 가문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쟁쟁한 위명을 자랑하는 곳들이었다.

산동의 석가장과 산동악가, 하북의 진주언가, 산서의 신창목가, 강서의 독고세가....

지역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명문가로 시작해서.

하북팽가, 사천당가, 황보세가 같은 중원 전체에 위명을 떨치는 오대세가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러한 백여해의 행실이 나를 위한 것은 아니라 짐작한다.

용의 별호를 얻은 차남을 한미한 가문에 장가를 보냈다간 그녀의 의도와 역량이 의심받을 테니, 이 또한 그녀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 이토록 많은 연통이 온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미 개방 거지 놈들에 의해 용봉회합에서 선보인 일석의 위명과 무용이 강호에 널리 퍼진 것이 첫 번째일 것이요.

내가 가문의 차남인 것이 두 번째이리라.

[귀가의 차남을 저희 가문으로....]

하나같이 모든 연통에 포함된 내용들이다.

저희 가문으로.

시집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장가를 가는 것이다.

뭇 명문가들이 모두 혼인을 핑계로 나를 제 가문으로 들이려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장남과 차남의 차이다.

"어찌하겠느냐?"

백여해가 은근한 기대를 품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찌 보면, 저들과 백여해는 이해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중에서 네가 선택하거라."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은연중에 배제하는 그녀다.

열여덟의 단천명에게는 통할 수작질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어림도 없다 할 것이다.

"나는 가 보도록 하마."

용무가 끝난 백여해가 돌아가려 할 때였다.

"당신!"

소리를 버럭 지르며 들어오는 양수린과 백여해가 마주쳤다.

"어머, 안녕하세요?"

백여해의 존재를 확인하자 양수린이 얼른 태도를 고쳐 눈웃음을 치며 인사를 했다. 유능한 상인답게 그 처세가 신속하고 적확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사교성 있는 미소를 짓고 있는 양수린의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째릿.

"흥."

여인 백여해는 양수린을 노려보곤 휙 하니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둘 사이가 명백하게 금이 갔다 할 것이니, 나에겐 참으로 훈훈한 광경이라 평하겠다.

* * *

"그게 다 뭐예요?"

내 손에 들린 종이 뭉치로 양수린의 관심이 향했다.

"매파들이 보내 온 연서요."

담백하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어떻게 그런 걸 받을 수가 있죠?"

양수린의 표정엔 충격이 깃들었다. 흡사 바람을 피우는 서방을 목격이라도 한 모양새다.

"안 될 것은 무엇이오?"

그녀는 내 약혼녀 후보였지, 약혼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음이다.

"윽...."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양수린의 표정에 생기가 사라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분간 혼인 생각은 일절 없소."

조금 더 놀려 주어도 괜찮겠지만, 진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여하튼 그녀는 장차 내 행보에 큰 도움을 주어야 할 양가방의 예비 소방주 아니겠는가.

내 말에 희망을 얻은 까닭인지, 양수린의 표정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아왔다.

"이 년. 이 년만 기다려 주세요."

"뭐가 말이오?"

설마 아직도 약혼 이야기를 꺼내진 않을 것이고.

"투자해 주신 돈 말이에요. 이자까지 쳐서 갚도록 하겠어요."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돈을 갚는다는 것은 곧 그녀가 양가방의 재정권을 득한다는 것이며, 재정권을 득한다는 것은 소방주가 된다는 말이다.

지난 생엔 방금 말한 이 년에서 삼 년이 더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계획이 급물살을 탔다는 뜻이니, 내가 그녀에게 투자한 일만 냥이 충분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증명이리라.

"기대하고 있겠소."

그녀는 영민한 상인이니, 틀리는 법이 잘 없을 것이다.

* * *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다만, 약선은 참으로 특이하고 신기한 인물이다.

그는 태어날 적부터 남들과는 사뭇 다른 시선을 가진 인물이었다.

참고로,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태어날 적부터 백회가 활짝 열려 있던 까닭에, 약선은 소위 말하는 영성(靈性)이라는 것을 개화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라 했다.

그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안(靈眼)이라 부른다.

통상 신내림을 받고 박수(博數, 남자 무당)의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나, 약선은 무공에 뜻을 두었다. 무공에 뜻을 두어 심신을 수양하는 것이 신선의 위에 도달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 판단한 까닭이라 했다.

영성을 타고나 신내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였으니, 약선은 주체적인 인물이라 평할 것이다.

영약이란 통상 영성을 품는다.

지고나 절세라는 별칭이 붙은 녀석들은 대개 그렇다.

때문에 영안을 가진 약선에게 각종 천혜의 영약을 찾는 일은 여반장(如反掌)과 같았다고 했다.

이리 말하니 무당들이야말로 최고의 영약 사냥꾼이 될 것 같지만, 그러하진 않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영약에 서린 영성을 포착할 정도의 영안을 뜨고 태어나는 이가 무당들 중에서도 극도로 드문 것이 첫 번째 이유요.

그 정도의 영안을 타고난 이는 어린 시절 진즉에 신내림의 길을 걸어 속세의 물건을 탐하지 않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 하겠다.

약선의 행적은 그야말로 무림사를 통틀어 유례없는 희귀한 경우였던 것이다.

여하튼 신선의 길을 걷고자, 약선은 수많은 영약을 취했다.

제아무리 좋은 영약이라 하여도 그냥 먹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니, 약선은 영민한 오성을 바탕으로 신선으로 향하는 길을 안배했다. 그것이 곧 약선심결이다.

그야말로 약선이 제 생을 온전히 바쳐 만들어 낸 회심의 역작이라 평하리라.

그 약선심결은 총 육 단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 단공 개체(改體).

공청석유를 취해 신체의 내부를 변화시키고 신선의 터를 다진다. 노화순청(爐火純靑)이라 달리 부른다.

이 단공 금체(金體).

청린액에 몸을 담가 신선과 같이 무결한 육체를 만들어 낸다. 도검불침이란, 무결한 육체에서 파생된 부산물일 따름이라 하겠다.

신선의 몸임에도 인간의 그것과 육안으로는 차이가 없으니, 약선은 이를 달리 반박귀진(返璞歸眞)이라 일컬었다.

삼 단공 불침(不侵).

주과를 통한 정화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불침을 통해 사특한 것을 모두 몰아내고, 앞으로도 사특한 것이 몸을 침범하지 못하게 만들어 신선으로의 길을 유지하는 방편이라 할 것이다.

도검불침과 마찬가지로 만독불침 또한 부산물에 불과하다 약선은 말했다.

약선은 삼 단공 불침을 다른 말로 명경지로(明鏡之路)라 하였다.

여기까지를 제 몸을 다스리는 과정, 즉 수신(修身)이라 일컬었음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낸 경지다.

수신의 경지까지는 말 그대로 터를 다지는 것이기에 일신의 무공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약선의 첨언이었다.

삼 단공 효능으로 용봉회합을 제패한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약선의 눈높이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약선심결 사 단공은 증폭(增幅)이라 한다.

소위 말하는 만년(萬年)의 세월을 품은 영약을 취해야 하는 단계라 하겠다.

23화 이 년이 흘렀다

-만년의 세월을 품은 영약은 많으니라. 범상한 풀도 만년의 세월을 머금는다면 영성을 머금게 되는 것 아니겠느냐.

다만, 그렇기에 사 단공 증폭을 이룸에 있어 만년의 영약을 고를 때는 신중해야 할 것이니라.

약선은 만년의 이름을 단 녀석들 중 특색이 약한 녀석일수록 좋다고 일렀다.

기나긴 세월 동안 영약에 쌓인 내력과 영성을 모두 취하기 위해서는 영약의 성질이 평이할수록 원활한 까닭이라 하겠다.

-사 단공 증폭의 효능만 고려하자면 만년성형삼왕이 제일이라 할 것이니라.

하지만 애초에 성형삼왕 자체가 귀하고 드문 것인즉 만년의 세월을 머금은 성형삼왕을 찾고자 하는 것은 본 도에게 쉽지 않음이니.

본 도가 추천하는 만년의 영약 중 제일은 만년하수오이니라. 범상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고귀하다 할 것이니라.

하수오라는 흔하디흔한 녀석이 만년의 세월을 품어 진귀하게 되었으니, 사 단공으로 그만 한 것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때문에 진즉 결정해 두었다. 사 단공 증폭은 만년하수오로 입문하기로 말이다.

신선의 길을 걷는 자, 혹은 절대지경이라 부르는 무의 끝을 추구하는 이들이 강조하는 개념으로 정기신(精氣神)이 있다.

내가 신선지로에 심취하지 않아 깊이 있는 지식은 없지만, 아는 대로 말하자면 정(精)이 곧 육체요, 기(氣)는 내력, 신(神)은 곧 정신 혹은 의념이다.

삼 단공의 과정을 거쳐 정을 단련했으니, 사 단공 증폭은 기와 신을 굳건해진 정에 맞추는 단계라 하겠다.

만년하수오의 내력을 흡수해 터를 다진 단전에 가득 채우니 기가 충만해질 것이요, 만년의 영성을 약선심결로 취하니 신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사 단공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정기신의 합치가 만들어지니, 이를 곧 삼화취정(三花聚頂)이라 할 것이다.

무공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은 알 것인데, 삼화취정은 곧 조화경을 다르게 일컫는 말이다.

맞다.

사 단공을 이루면 진정한 상승 고수라 일컫는 조화경에 자연스레 발을 딛게 된다.

내 아버지 단천강이나 여백 당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통상의 무인들이 깨달음을 통해 정기신을 합치시켜 조화경에 오른다면, 약선심결은 정기신이 합치되었기에 자연스레 깨달음이 찾아오는 기전이다.

선후가 다를 뿐 결국 같은 것이다.

삼화취정에 이른 조화경.

약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한 몸 간신히 건사할 수준이 된 단계라 하겠다.

사 단공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제가(齊家)라 표현할 자격이 생기는 까닭이다.

빡!

여백 당숙의 목검이 내 어깨를 때렸다.

"큭."

여백 당숙과의 수련을 통해 도검불침에 이른 몸도 통증은 느낀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

잘 벼린 날붙이보다 조화경 고수의 내공이 실린 목검이 훨씬 아프다는 뜻이다.

"집중 안 하느냐?"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여백 당숙의 시선이 날카롭다.

"흠? 다른 생각을 할 정도로 내 수련이 만만하다는 말이렸다?"

"...아니요. 절대."

여백 당숙의 수련은 농담으로라도 '만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삼 단공을 이루었음에도 연신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내 가슴팍과, 일결개나 입을 법한 넝마 조각이 되어 버린 내 의복 상태가 그 증명이라 하겠다.

허락을 득할 때부터 알아보아야 했다. 여백 당숙의 수련은 지극히 실전을 기반으로 하는 방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얄미운 여백 당숙을 시선에 담았다. 신나 보인다. 특히 내게 한 방 먹일 때 유독 말이다. 지독한 인간이라 평하겠다.

스스로의 힘으로 조화경에 오른 괴물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수련을 해 나가는지 알아 가는 시간이라 할 것이다.

사 단공에 이르면 자연스레 조화경에 입문하게 됨에도 치열하게 수련하고 있는 까닭이 있다.

삼 단공을 이루긴 했다만,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다는 지점이 첫째다.

나는 명개 시절에조차 상승의 고수를 접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지금 여백 당숙과의 수련은 장차 천하제일인을 목표로 하는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지금 만년하수오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큰일은 아니다.

다행히 이 년 후에는 만년하수오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명개 시절 끝끝내 만년하수오를 획득한 자생처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만년하수오를 누가 발견해서 가지고 있는지는 정보를 입수한 까닭이다.

이 년 후, 나는 만년하수오를 취해 사 단공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소가주에 오를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제가(齊家)를 이루는 것이다.

빡!

여백 당숙의 목검이 머리통을 때렸다. 골이 띵하다.

"이놈아, 집중 안 하느냐?"

"죄송...."

빡!

"억!"

일단은 조금 더 강해져야겠다.

* * *

그토록 고대하던 시기가 찾아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드디어 내 나이가 약관에 닿은 것이다.

스무 살.

통상 강호무림에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시기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만들어진 시기라 하겠다.

후계자 경합이 있을 해이며.

후계자 경합에서 패한 내가 홀로 가문을 등진 해이다.

내가 회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해이며.

동시에 개방의 거지 명개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취풍개 그 영감은 잘 살고 있으려나.'

내 비록 이번 생에는 명개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 것이지만, 취풍개의 은혜는 잊지 않고 있다. 언제고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보답을 할 생각이다.

비록 그는 연유를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년.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일 테지만, 약관에 닿지도 못했던 후기지수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라 하겠다.

특히, 그 시간을 허투루 날리지 않고 밀도 있게 살아온 이에겐 충분히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이리라.

"후우-"

스릉 - 착.

단천가의 비전무공인 단천검결의 전 초식을 갈무리하며 납검했다.

약관의 단천명.

열여덟의 앳됨은 사라지고, 완연한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삼 단공을 이루기 위해 취한 주과의 효능이 지속된 덕인지, 이제는 선이 뚜렷한 미남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졌다.

외모, 무공, 대외적 평판.

지난 생 약관의 단천명과 지금 약관의 단천명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다른 사람이다.

여백 당숙의 수련과 함께 내 육체는 성장을 거듭했다. 왠지 모르게 서생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완연한 검수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할 것이다.

이는 사실 조금 우스운 이야기다. 절정지경의 무인이 수련을 통해 육체를 성장시키다니 말이다.

내 비록 일류를 넘어 절정에 닿았지만, 삼장로의 수련이 그만큼 형편없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를 조금 달리 보자면, 절정지경에 닿았음에도 수련을 통해 육체를 성장케 만든 여백 당숙은 미친... 아니, 훌륭한 스승이고 말이다.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물론 그 수련을 견뎌 낸 나 자신에게 더 큰 경의를 표할 것이다.

'시벌, 인생.'

진심으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하겠다. 명개 시절과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언제쯤 고를 것이냐? 너도 장가를 가야 하지 않겠느냐?

구태여 혼인 대신 장가라는 말을 사용하니, 백여해도 참 속이 투명한 여인이라 평하겠다.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룡의 별호를 쟁취한,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

안휘의 명문, 단천가의 차남이라는 준수한 배경.

그리고 미남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진 외모까지.

계속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매파를 통한 명문가들의 연서가 끊임없이 단천가로 날아들었다.

귀찮지도 않은지 여인 백여해는 달포마다 괜찮은 혼처를 추려 내게 가져다주었다.

그녀를 이리 자주 마주할 날이 올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남아가 스물이 되기 전에는 일가를 꾸려야 장차 멋진 가장으로 성장하지 않겠느냐.

-형님도 아직 혼인을 미뤄 두지 않았습니까?

-그것이야 학이는 가문을 책임져야 하니....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겠지요, 어머니.

그즈음인 것 같다.

여인 백여해가 나를 노골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한 시기가 말이다.

그리고 올해, 마침내 후계자 경합의 해가 밝아 버렸으니, 나를 다른 가문으로 치우는 것을 포기했는지 백여해는 더 이상 연서를 들고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저런 고된 일이 있었다면 좋은 일도 있는 법이라 하겠다.

"이젠 제법 봐 줄 만하구나."

이것이다.

"단천검결을 후반부까지 완벽하게 익혔으니, 이제 어디 가서 눈먼 칼에 맞아 죽지는 않겠다."

조화경의 고수, 방여백이 이리 평해 준 것이니. 그간 내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라.

"감사합니다."

나는 드디어 단천가의 진정한 검수가 된 것이다.

잠시 여백 당숙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제 하산합니까?"

여백 당숙이 그답지 않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놈아. 언제까지 늙은 당숙을 부려 먹을 참이었더냐?"

항상 옳은 말만 하던 당숙이 웬일로 틀린 말을 했다.

이제 불혹을 갓 넘어선 그를 어찌 늙었다 하겠는가. 조화경에 이른 불혹은 그야말로 무인으로서 전성기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기 아니겠는가.

"이왕이면 평생이요."

"이놈이!"

이젠 여백 당숙과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의 힘을 업은 진심 덕분이라 하겠다.

그가 저리 핑계를 대는 연유를 안다. 원로원의 일장로가 작년에 형님 단천학의 스승 자리에서 물러난 것과 같은 이유라 하겠다.

후계자 경합이 임박했으니 가내 세력들은 후계자들로부터 한 발 물러서야 한다. 가주의 지엄한 명을 따르는 것이니, 예외는 없다.

기실, 지금까지 내 무공을 봐준 것도 여백 당숙이 고집을 부렸기에 가능했음을 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스승께 예를 갖추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래. 명 공자도 그간 수고했네."

여백 당숙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지옥 같다 생각했던 그와의 수련이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

내가 소가주가 된다면,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 * *

여백 당숙과의 수련도 끝났으니 단천가에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는 이제 없다.

오랜만에 가주전을 찾았다.

"강호행을 다녀오고자 합니다."

이것을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성인이 되었다 하나 가문의 식솔이니 가주의 윤허가 필수라 할 것이다. 매번 가출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갑자기 말이더냐?"

아버지 단천강이 내게 물었다.

"예."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의 참 의미를 깨닫는 요즘이다. 나른한 모양새로 앉아 있는 단천강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무인의 기세를 느끼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그조차 천하십대고수에는 그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 천하제일의 무게를 새삼 실감한다 할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강호행을 논하느냐?"

그가 이런 의문을 가질 법했다.

회귀 직후의 가출 사건과 용봉회합의 참여 이후, 나는 이 년간 가문 밖을 벗어나는 일이 잘 없었으니 말이다.

"형님도 작년에 강호행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작년. 방년 이십일 세의 검룡(劍龍) 단천학은 강호행을 나섰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내 강호행을 반기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 하겠다.

사건 사고가 난무하는 곳이 곧 강호 무림 아니겠는가.

둘 뿐인 후계자를 모두 가문 밖으로 내보냈다가 불의의 변이 생기면 가문으로선 감당치 못할 일인 까닭이다.

"저도 후계자 경합을 준비하기 위해 강호행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흠."

그가 고심하는 듯 보이지만, 설득하기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저도 두루 견식을 쌓아야 형평에 맞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구나."

형평을 입에 담자 단천강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좋은 아버지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훌륭한 가주라는 사실은 안다. 그는 공명정대한 인물이니 나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할 것이다.

24화 강호행을 나섰다

아버지 단천강은 한참을 침묵한 채 고민하는 듯 보였다. 내 강호행이 그가 이리 진지하게 고민할 사안인지는 미처 몰랐기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시간이 흐르니 이내 결론이 났다. 아버지 단천강이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칠 주야 이내로 학이가 돌아올 것이니, 명이 너는 그 이후에 강호행을 나섬이 어떠하냐?"

단천학이 곧 돌아온다는 사실은 나도 미처 모르던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칠 주야 정도면 충분히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라 하겠다.

"대신 두 달 안에 돌아와야 하느니라."

강호행을 떠남에 있어 시간의 제약을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단천강은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니, 연유가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두 달 후에 후계자 경합을 진행하겠다는 뜻을 내게 전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천강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가주전 밖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섬뜩.

지독한 살기. 동시에 날붙이가 내 등을 노리고 날아드는 기척을 느꼈다.

여백 당숙에게 지독하게 공격을 당하며 수련해 온 내가 아닌가.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용천혈에 맺힌 내기를 발판 삼아 몸을 재빠르게 돌렸다. 그 힘을 지지대 삼아 강하게 회축을 돌아 암기를 찼다.

후웅!

한데, 내 회축은 하릴없이 허공을 갈랐다.

"음?"

빗맞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내 등을 향해 날아오는 암기는 없었다.

"괜찮구나. 그 정도면 강호행을 다녀오기에 무리가 없겠다."

"아...."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날붙이가 날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단천강이 내게 살기를 쏘아 낸 것이었다.

의념을 이리 다루다니, 그가 조화경의 다음 걸음으로 내딛기까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몸 조심히 다녀오거라."

"...예."

그곳엔 아버지의 얼굴을 한 단천강이 있었다.

나는 지금에야 확실하게 강호행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어쩌면 기회가 없었을 뿐, 그는 좋은 아버지인지도 모르겠다.

* * *

칠 주야가 지났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오, 형님."

근 일 년 동안 강호행을 다녀온 단천학을 마주했다.

오랜 시간 강호행을 다녀온 그가 어머니 백여해나 스승인 일장로를 제쳐 두고 나를 먼저 찾은 까닭은 모르겠다.

그가 내 면면을 살폈다.

"많이 변했군."

"형님도 마찬가지요."

우리 둘은 그간 참으로 많이 변했다. 외모도, 마음도 말이다.

그와 내가 이리 대면해서 대화라는 것을 할 날이 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스물둘의 단천학.

그는 내게 있어 가장 인상 깊은 인물 중 하나라 할 것이다.

한데 내 기억 속의 그 단천학은 이제 없었다.

강호행 동안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철없던 명문가의 대공자는 사라지고 깊은 눈빛을 지닌 무인 하나가 자리해 있었다.

기실 강호행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단천학이 달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내 인생이 회귀를 기점으로 달라졌다면, 단천학의 인생은 용봉회합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다.

단순히 별호가 단룡에서 검룡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단천학이라는 사람 자체가 변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당장 그가 이번에 다녀온 강호행만 하여도 지난 생에는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단룡의 별호를 얻었던 단천학은 그 위명으로 가문 내에서 호의호식하며 즐겁게 지내다가 후계자 경합에서 나를 가볍게 압살하고 소가주가 되었다.

용의 별호를 얻을 수 있는 자질을 지닌 명가의 장남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나를 상대함에 있어 그는 노력의 필요성을 깨우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생의 단천학은 어떠한가.

용봉회합이 끝난 직후.

단천학은 스스로가 검룡이라는 별호를 쟁취한 강호 무림의 동량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내 그의 수련을 지켜 본 것은 아니다만, 이전보다 훨씬 가혹한 수련을 이어 간다는 소문이 가내에 파다했다.

가문 내에 여백 당숙 말고는 딱히 연고가 없는 내 귀에도 들려올 정도니,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돌연, 작년에 강호행을 선언하고 훌쩍 떠난 단천학이 돌아온 것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강호행을 떠난다고?"

"그렇소. 지금 나서려던 참이오."

잠시 생각에 잠긴 단천학.

"그럼 지금밖에 시간이 없겠구나."

스릉.

그리 말한 단천학이 제 검을 빼 들었다. 용봉회합 때 백련정강을 꿰뚫었던 그 검이다.

그의 난데없는 행동에 긴장을 하진 않았다.

그가 지금 나를 공격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다 믿는 것이 첫째요, 그의 심신에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우우웅.

단천학의 명검에 내력이 맺혔다. 푸르스름한 무형의 검이 날에 맺히니, 그것이 곧 절정지경의 증거인 검기다.

그리고....

사아아아아.

검기가 아롱지더니 가닥가닥 엮이기 시작했다. 검기 다발을 실타래처럼 엮어 더 강한 기검(氣劍)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곧 초절정의 증좌인 검사(劍絲)라 하겠다.

"잊지 마라. 가주의 자리는 내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초절정에 들었음을 내게 선포한 것이다.

제 용무가 끝난 단천학은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이런 면에선 한결같은 인간이다.

용봉회합 후 이 년.

성장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 년 동안의 치열한 수련과 일 년 동안의 강호행으로 단천가의 천재 단천학은 초절정에 닿은 것이다. 재능을 가진 무인이 뼈를 깎는 노력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터다.

이 또한 지난 생에는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내 강호행은 결코 유람이 아닌 까닭이다.

이 년이 흘렀다.

이는 곧 지금 만년하수오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는 뜻이라 하겠다.

이번 강호행에서 나는 약선심결 사 단공을 이루어 조화경에 발을 디딜 것이다.

'형님, 가주의 자리는 내 것이오.'

이번 생에는, 그리될 것이다.

* * *

강호행의 첫걸음.

우선적으로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개방의 눈조차 피할 수 있는 하오문의 안가(安家), 그곳에서 추혼탈명 마속을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예, 공자. 오랜만입니다."

이전과 같을 순 없는 법이다.

강호 무림에서 누구 하나 주시하지 않던 단천가의 사생아라면 모를까, 용의 별호를 얻은 후기지수가 당당히 하오문 안휘 지부인 화월루를 들락거릴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거지 놈들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니, 항시 조심하는 것이 옳겠다.

물끄러미.

마속의 시선이 나를 가늠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마속은 포기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헌앙해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였으리라. 이 단공 금체로 반박귀진을 이룬 내 무공을 가늠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내 담담함에 마속이 피식 웃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명 공자는 보면 볼수록 더 모르겠는 사람입니다. 제 인생에 공자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칭찬입니까?"

"정보꾼에게 모를 사람 소리를 들으셨으니 더 없는 칭찬으로 생각하셔도 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 년간 그와 꾸준히 관계를 쌓아 온 덕도 있거니와, 그가 나를 은인으로 여기는 까닭도 있다.

장래 하오문주의 오른팔이 될 마속의 신뢰를 얻은 것이니 훌륭한 수확이라 하겠다.

"마 대인도 좋아 보이십니다."

"저야 뭐, 다를 게 있겠습니까."

겸양을 섞어 답하지만, 마속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장장 이 년에 걸쳐서 공청석유를 완전히 제 것으로 녹여 낸 까닭이다.

원래도 초상승의 고수로 하오문을 대표할 그가 진즉 공청석유를 취해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으니, 스스로가 원한다면 강호 무림을 주름잡을 정도는 될 것이다.

오 년은 일찍 추혼탈명의 위명이 강호 무림에 울려 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반박귀진이 나처럼 완벽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마속의 경지를 편린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의 화후가 아버지 단천강과 비견할 만한 것 같다.

끼익.

안가의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왔다. 지금 이곳에 올 이는 한 명뿐이다.

"오랜만이네요, 명 공자."

"오랜만입니다, 소문주."

면사를 벗은 하오문의 소문주, 여월이다. 그녀가 내 앞에서 면사를 벗게 된 것 또한 그간의 큰 성과다.

안휘오화라 불리는 양수린에게 단련이 된 나야 혹하지 않지만, 그녀의 미모 또한 뭇 남성들을 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평하겠다.

여월이 자리에 앉았다.

"너무 격조한 것 아닌가요?"

"하오문의 소문주님과 단천가의 차남이 너무 자주 만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여월의 입이 삐죽했다.

"그런 것치고는 하오문을 너무 자주 이용하시던데요?"

"하하. 좋은 게 좋은 거지요."

신변잡기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여월의 질문과 함께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정보를 파실 거죠?"

여월의 표정에 기대감이 서렸다.

정보의 판매. 내가 지난 이 년간 이들과 관계를 맺어 온 방식이라 하겠다.

기실 내가 얻은 것은 금전이 아니라 여월과 마속의 신임이었으니 교분을 맺었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오문에는 두 종류의 고객이 있다.

하오문에 중요한 정보를 팔아 주는 고객 그리고 하오문이 지닌 정보를 사 주는 고객이다.

부가가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전자의 고객이 월등하니 그 대우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정확히는 몰라도 그중에서 나는 최상등급 고객이지 않을까 싶다.

당장 안휘 지부의 총괄책임이자 소문주인 여월이 직접 걸음하지 않았는가.

물론 내가 하오문에 판매하는 정보는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그 가치가 낮다는 뜻은 아님을 안다. 정보 가치의 상대성이라 하겠다.

"근래에 장보도 하나를 입수하셨을 겁니다."

내가 운을 떼자 여월과 마속이 집중하며 표정을 숨겼다.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함이리라. 능숙한 정보 상인의 처세다.

"아마도 절강성의 장흥이 그 표식지겠지요."

여기까지 말하자 여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거죠?"

이내 표정 관리를 포기한 그녀가 되물었다. 진위를 판별한 필요도 없이 내 정보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강성 장흥의 장보도.

이 시기쯤 돌기 시작하는 장보도다. 지금 시점이라면 하오문이나 개방 정도는 되어야 그 실마리를 추적할 수 있을 단계라 할 것이다.

이 장보도가 꽤 큰 혈사를 몰고 왔기에 내 기억에 선명하다.

하지만....

"그거 하지 마십시오. 손을 떼시는 게 좋습니다."

그 장보도는 거짓이다.

"명 공자."

아직은 다소 부족한 여월 대신 마속이 나섰다.

"내 그대를 신임합니다."

그간 우리가 쌓아 온 신의가 그리 얇지는 않다.

"하지만 장보도는 손쉽게 포기하기엔 너무 큰 귀물입니다. 알지 않습니까?"

맞다.

장보도가 혈사를 불러오는 이유. 제 목숨을 도외시할 만큼의 가치를 지닌 귀물이 그 안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장보도가 거짓이라는 증좌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아쉽지만 그런 건 내 수중에 없다.

이들과 신의 관계를 쌓아 왔다 하여, '제가 회귀를 하여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애초에 판매할 정보로 선정하지도 않았을 터다.

"그렇다면 장보도에는 발만 걸치시고, 무령궁(巫靈宮)을 한번 파 보십시오."

삼 년은 족히 더 흘러야 밝혀질 사실이다. 그 장보도가 사도맹 소속인 절강성의 패자, 무령궁의 수작질이었다는 진실 말이다.

사도맹 본단에조차 비밀로 하고 행한 일이니, 하오문이 모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하오문이 괜히 정보 문파로 천하제일을 다투는 곳이겠는가.

이 정도 정보의 파편만으로도 실체를 잡아 낼 수 있는 곳이 하오문이라 하겠다.

무령궁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속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같은 사도맹 소속이라 하여 모두 친한 것은 아닌 까닭이다.

"고맙습니다. 공자의 정보, 참고하겠습니다."

그간 내 정보로 득을 본 것들이 많으니 허투루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 여월이 천진한 모습으로 은근슬쩍 나를 떠본다.

"어떻게 얻은 정보인가요?"

"아실 만한 분이 그러십니다."

당연히 말려들지 않았다.

"쳇."

저런 연기에 속을 깜냥은 이미 명개가 일결을 달고 있을 시절에 지났음이다.

25화 오랜만이오

"본인이 먼저 정보를 넘겼으니, 이번엔 그쪽의 정보를 넘겨주시오."

여월이 소매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여기요."

"고맙소."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종이를 소매에 갈무리했다. 이 또한, 내가 여월과 마속을 신뢰한다는 비언어적 표현이라 하겠다.

"그거 찾느라 고생했어요."

"고생하시었소."

애초에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하오문이라면 능히 해낼 것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고마운 일이다.

"그 사람을 왜 찾는 거죠?"

"비밀이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정보이니, 굳이 이 이상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여월이 내게 건네준 정보와 내가 하오문에 건네준 정보 중 무엇이 훨씬 비싼 값어치를 지고 있는지 말이다.

"대가는...."

"이번 정보 값은 이것으로 갈음하겠소."

여월이 질문을 마치기 전에 내가 소매를 흔들며 선수를 쳤다.

"정말요?"

"충분하오."

내가 호인인 까닭이 아니다. 그리 갈음하여도 손해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지금 내가 여월과 마속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은 그들의 신뢰와 마음인 까닭이다.

"용무가 끝났으니 일어나 보겠소."

"잠시만요."

일어나려던 나를 여월이 만류했다.

"할 말이 남았소?"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든지, 여월이 제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올해 드려야 할 일만 냥, 말미를 조금만 더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공청석유의 판매 잔금 일만 냥을 더 받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첫 해에 양수린에게 일만 냥을 빌려주고 남은 일만 냥에 작년에 받은 일만 냥 해서 총 이만 냥을 쓰지도 않고 두었다 보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을 따름이다.

돈을 늦게 받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부분은....

"무슨 문제가 생겼소?"

이 부분이라 할 것이다.

"생각보다 대업이 원활하게는 풀리지 않다 보니, 자금 조달에 차질이 조금 있습니다."

마속이 여월을 대신해 답했다.

"차질이라."

생각을 정리했다.

여월이 하오문주가 된 것은 명개가 동냥밥을 먹은 지 오 년 즈음 되었을 때였다. 그때도 검비각이 아닌 여월이 문주의 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다들 놀랐었다. 검비각의 세력이 다소 앞섰던 까닭이다.

공청석유의 힘이 위대하다지만, 지금 단계에서 여월과 검비각의 차이를 뒤집을 정도는 되지 못했으리라.

"돈은 늦게 주어도 상관없소."

"고마워요."

여월이 반색했다. 상인만큼이나 신용을 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정보 상인 아니겠는가. 그녀 나름대로 큰 근심을 덜었으리라.

와중에 문득 든 생각은, 조금은 더 도움을 주어도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정보 중 나에게 가치가 없으면서도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정보 하나가 떠오른 까닭이다.

"사천성에 연고가 있으시오?"

"네? 갑자기 무슨?"

중원 무림을 기준으로 보자면, 안휘는 동쪽에 치우쳐 있고 사천은 서쪽에 치우쳐 있다.

중원인들의 인식에 청해, 서장, 신강은 새외라 할 것이니, 사천성은 중원의 서쪽 끝이라 해도 무방하다. 쉽게 말해, 무진장 멀다.

"있으시오? 없으시오?"

"중원에 저희 하오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답니다."

잘되었다.

그곳으로 걸음 할 일이 없어 포기한 기연이 사천성에 하나 잠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사천성과 서장의 접경에 백옥(白玉)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소."

내가 입을 열자 여월과 마속이 집중했다. 내가 전해 주는 정보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백옥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이백 리 정도를 가면 하수산(何首山)이라는 곳이 나올 것이오."

예로부터 하수오가 잘 자란다 하여 하수산이다.

"그 산을 샅샅이 뒤져 보시오."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거기에 뭐가 있죠?"

"백년 묵은 하수오 군락지가 있을 것이오. 그대에게 도움이 되겠지."

내가 이 정보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말해 준 이유는 서장과 중원을 오가는 상인에 의해 다음 달쯤 그 군락지가 발견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기 때문이다.

하수오 군락지. 양은 대략 백 뿌리쯤 된다고 알고 있다.

백년 묵은 하수오 백 뿌리는 단시간에는 절대 돈으로 구할 수 없다. 중원 무림에서 돈으로 영약을 사는 것 자체가 곧 기회인 까닭이다. 그 기회를 노리는 것이 어디 여월 하나만 있겠는가.

백 년 근 하수오를 여럿 확보할 수 있다면, 중견 고수들을 키워 단시간에 세를 불리기엔 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여월에겐 이미 마속이라는 초절의 고수가 있으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 뒤를 받쳐 줄 중견 고수들이라 생각한 까닭에 알려 준 정보다.

과연 내 짐작이 맞았는지, 여월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대체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아는 거죠?"

이번엔 은근한 떠보기라고 하기보단 감탄이 어린 질문이다.

하오문조차 확보하지 못한 정보들을 쥐고 있는 나였기에 여월이 항상 궁금해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하하."

하지만 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어 주었다.

본래도 강호 무림에는 신비와 기인이사가 난무하는 바, 결국 그녀는 제 상상 속으로 나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디, 정보의 빈자리는 상상과 추론으로 채워 나가는 법이다. 그녀의 상상력이,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누차 강조하지만, 나에 대한 정보는 극비로 부탁하오."

"당연하죠. 저를 믿으세요."

내 정보를 누설해서 그녀에게 일절 득이 될 것이 없다. 그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 정보를 숨겨 주는 이에 가깝다 할 것이다.

"대가는요?"

그리고 그녀가 마음에 쏙 드는 이유는 친우라는 이유로 무위도식을 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라 하겠다. 검비각이 아닌 여월을 선택한 내 안목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는가.

"친우로서 호의를 베푼 것이니 대가는 필요 없소."

가끔 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가 더 윤택한 관계를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안다.

여월은 하오문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무림맹주가 될 것이다.

정마대전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는 정사의 긴밀한 연결이 중요할 터이니, 그녀는 장차 내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한 투자이니 이득이라 할 것이다.

* * *

강호 무림에는 싸움이 더러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소들이 있다.

일 순위는 주막, 이 순위는 고급 주루, 삼 순위는 녹림도들이 떡하니 지키고 있는 산의 고갯길이다.

이는 오랜 세월 누적된 경험칙이 증명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라 할 것이다.

위 세 곳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는 점 정도가 되겠다.

"얼마요?"

"하루 묵으시는 데 은자 한 냥입니다. 음식값은 별도구요."

"여기 있소."

정처 없이 떠도는 낭인 이춘백.

지닌 바 재주가 많아 돈에 있어 큰 곤궁함을 느끼지 않는 그로서는 제 한 몸을 누이기 위해 고급 주루를 매번 들르는 것이 어찌 보면 필연이라 할 것이다.

주막에서 묵든 고급 주루에서 묵든 혹은 길 위에서 노숙을 하든.

어차피 싸움이 많이 나는 곳들이라면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고급 주루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 아니겠는가.

오랜 낭인 생활로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다만, 고급 주루의 특장점이 있다.

솜씨 좋은 숙수가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 준다는 점과 검남춘이 상시 구비되었다는 점일 터다. 주막의 탁주는 이춘백의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다.

"흠."

이춘백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춘백은 시비에 걸려 싸움을 한 기억이 없다. 강호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상인 까닭이다.

얕보이면 시비가 붙고, 싸움에 휘말리고, 탈탈 털리는 곳이 곧 강호 무림이지만, 반대로 보자면 얕보이지만 않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곳 또한 강호 무림이라 하겠다.

상시 검을 패용하고 있는 낭인의 행색을 한 이춘백이다. 인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니 구태여 그를 건드리는 이는 없었다.

그런 이춘백도 고급 주루에서 싸움에 휘말린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가 스스로 뛰어든 판이었지만 말이다.

'명이 녀석, 잘 지내는지 모르겠구나.'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준 친우는 그 녀석이 유일했다.

우당탕!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오늘도 평화로운 주루에서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평상시 모습 그대로라 할 것이다.

"목가가! 그러지 마세요."

"유매는 잠시 빠져 있으시오!"

이번 사태는 고급 주루에서 일어나는 다툼의 고정 단골이라 할 수 있는 치정 문제인 것 같다.

"이보시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저 여인을 바라본 적이 없소."

죽립을 눌러쓴 남자가 답했다.

'아이고.'

왜 시비가 걸렸는지 알겠다.

죽립 아래로 비치는 하관만 보아도 그가 미남이라는 사실을 알겠다. 다만, 좀 만만해 보인다. 서생 같은 느낌을 풍기는 이는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가장 좋은 먹잇감 아니겠는가.

"뭐라? 네놈은 지금 우리 유매가 매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죽립을 눌러쓴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저 여인, 내 취향이 아니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리 답했다.

"뭐라?"

대화의 양상이 흥미진진하다.

이춘백은 무료한 일상의 와중에 찾아온 치정극에 흥미가 동해 계속 구경했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목가가라 불린 남자가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내가 바로 신창목가의 방계인 목일훈이다!"

대부분의 파락호들이 깨갱 하고 도망가는 필살기라 하겠다.

하지만....

"아, 그러셨소?"

죽립을 쓴 남성은 심드렁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이익!"

챙!

저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꼈음인가, 목가의 방계 놈이 검을 빼 들었다.

통상 주루에서의 싸움이 주먹다짐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치정극은 급진적인 전개가 특색이라 할 것이다.

칼을 뽑아 든 무인이 무라도 썰지 않고 도로 집어넣으면 그것 또한 수치가 되는 곳이 저잣거리 아니겠는가.

"죽어라!"

목가의 방계 놈이 검을 휘둘렀다.

'이런.'

오랜만에 그 친우가 떠오른 탓인지, 아니면 저 죽립 남자의 목소리가 그 친우의 목소리와 비슷한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춘백은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그의 인생에 두 번째 오지랖이라 할 것이다.

이춘백의 신형이 검을 막기 위해 지척까지 치달았을 때.

척.

죽립을 쓴 남자의 손바닥이 이춘백의 얼굴을 가렸다.

'아뿔싸.'

함정인가?

반사적으로 발검을 하려던 이춘백이 멈칫했다. 상대의 손이 자신의 진로를 막았을 뿐, 공격의 의사가 일절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제야 여유를 가진 이춘백의 시선이 공간을 담았다.

"⋯⋯!"

그리고 다시 놀랐다.

죽립을 쓴 남자가 반대편 손의 검지와 중지를 사용해 목일훈의 검을 붙잡은 것을 본 탓이다.

이 남자, 고수다.

이춘백의 감상과 상관없이 죽립의 남자는 말을 이었다.

"신창목가의 방계 목일훈이."

근엄하게 그를 부르더니....

챙캉.

손가락의 힘만으로 목일훈의 검을 부숴 버렸다.

"무공 수련에 정진하시오. 아시겠소?"

"아, 알겠소."

잔뜩 주눅이 든 목일훈은 유매라는 여인을 챙겨 황급히 주루를 벗어났다.

남자가 죽립을 벗었다. 그의 시선이 이춘백을 향했다.

"춘백 형, 오랜만이오."

세월의 힘을 입어 다소 변했다지만, 알아보지 못할 수 없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 반갑네."

그리운 얼굴, 단천명이었다.

* * *

"춘백 형, 식사는 하셨소?"

"아직이네."

"나도 아직이오. 일단 뭐 좀 먹읍시다."

식사가 나왔다.

한 식경의 시간 동안 나와 이춘백은 별다른 대화가 없이 식사에만 전념했다.

이 년 만에 만났음에도 마치 어제도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꼴꼴꼴.

식사를 마치고 검남춘 한 잔을 그에게 건넸다.

"캬-"

"크-"

변함없는 모습에 서로가 마주 보고 웃었다.

"우연은 아닐 테고."

서두는 이춘백이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하는 친우에게 거짓부렁을 일삼아선 안 될 것이니 말이다.

"하오문의 힘을 좀 빌렸소."

"왜?"

"보고 싶어서 말이오."

"푸핫."

역시 이춘백은 웃음의 역치 값이 낮다. 명개 시절, 정보로만 접했던 그에게선 알 수 없었던 모습이다.

이춘백이 보고 싶기에 찾아온 것은 맞다.

"춘백 형."

그에게 재차 검남춘 한 잔을 건넸다.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시겠소?"

하지만 단순히 그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하오문까지 동원한 것은 아니다.

신뢰를 가지고 일을 도모할 사람이 필요했던 차, 이춘백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이춘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춘백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승낙했다.

"자네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네."

이춘백의 얼굴에 아이 같은 웃음이 맺혔다.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

26화 작전을 준비했다 (1)

내 일전에 약선이 범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라 언급한 적이 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승이자 은인과 같은 약선을 그리 평하는 게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만, 진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만년의 세월을 품은 영약은 많으니라. 범상한 풀도 만년의 세월을 머금는다면 영성을 머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때문에, 약선의 이 말 또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약선심결의 공능을 직접 실증했으므로 약선을 광인 취급 할 수는 없는 법이다만, 그의 모든 말을 믿어서도 옳지 않다.

만년의 영약이 많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상식의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여하튼.

드물디 드문 만년의 영약 중에서 그마나 종종 발견되는 영약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만년하수오를 떠올릴 것이다.

하수오라는 놈이 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중원의 도처에 자생하는 녀석이라 그러하다.

열 놈 중에 한 놈이 만년을 살아남는 것보다야, 만 놈 중에 한 놈이 만년을 살아남는 것이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기인 약선의 이야기가 옳은 지점도 있다.

오랜 세월을 머금은 영약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진귀해진다는 이야기 말이다.

영약이 묵은 세월이 곧 진기와 영성으로 화하여 무인에게 큰 힘을 안겨 주기에 그렇다.

하수오는 범상한 약재지만, 백 년만 묵어도 영약 취급에 천 년을 묵으면 상급 영약에 닿는다.

그런 까닭에, 만년하수오 정도 되는 녀석은 무가지보라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다만, 그것 아는가?

무가지보는 대대로 혈사나 패망의 원인이 되어 왔다는 사실 말이다.

-명개 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이번엔 무어냐?

-강서의 정가장이 하룻밤 사이에 멸문해 버렸답니다.

-정가장이? 나름 강서에서 콧방귀 좀 뀌던 양반들이 왜?

-우연히 금령과(金靈果)를 손에 넣었나봅니다. 헌데, 그 소문이 새어 나간 것이지요. 야밤에 악적들이 들이닥쳤답니다.

-쯧. 감당치 못할 귀물을 얻은 최후로구나.

금령과 또한 상급 영약이긴 하나, 만년의 영약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데도 명문 무가 하나를 지워 버리곤 하는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방도는 세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강한 힘을 지니면 된다.

다만,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영약을 구한 것인데, 영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힘을 지녀야 한다는 모순을 피할 수는 없겠다.

둘째는, 정가장처럼 어수룩하게 처리할 것이 아니라, 영약을 지녔다는 사실을 완전한 비밀에 부치는 것이다.

다만 개방도가 되어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은, 완전한 비밀이라는 것이 정말 어려운 과제라는 점이다.

마지막 방법은, 영약을 구하자마자 얼른 먹어치우는 것이다.

무인의 몸에 녹아든 영약을 꺼내는 방법은 흡성대법 정도를 제외하고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쉽지는 않다.

지고의 영약을 냉큼 삼켰다가는 경지를 뚫고 상승의 고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약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주화입마에 빠질 확률이 더 높은 까닭에 그렇다.

영약을 그냥 날름 먹는다고 먹는 족족 무공이 상승할 리가 없지 않는가.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니 약선심결이 신공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여하튼.

만년하수오 같은 영약을 가지게 되는 것이 생각보다 골치 아픈 문제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특히, 그것을 지킬 힘도 없고, 비밀을 유지하지도 못했으며, 섭취할 능력도 없는 이들에겐 더더욱 말이다.

돈을 받고 팔아 버리는 방법 또한 있겠지만, 만년하수오쯤 되는 영약을 덜컥 살 재력가를 물색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내가 노리는 녀석들이 처한 상황이 딱 이와 같다.

"그러니까 명이 자네가 지금 하는 말은, 영약을 강탈하자는 것인가?"

황당한 얼굴을 한 이춘백이 내게 되물었다.

신뢰가 와장창 무너질 말이었음에도 그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럼에도 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소. 바로 그것이오."

"자네가 뭐가 부족해서 말인가?"

부족한 것이야 많다만, 구태여 하소연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 전에 오해를 풀고 갈 필요가 있겠다.

"뒤탈은 없을 것이오."

"살인멸구라도 할 참인가?"

"에이, 설마 그러겠소."

내 정도 명가 단천가의 후예로서, 귀물을 취하기 위해 살인멸구를 생각하는 무뢰배로 오인받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안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다.

"그 녀석들, 마교의 간자요."

"...!"

마교, 그리고 간자.

그 이름에 이춘백의 호흡이 멎으며 눈이 크게 떠졌다.

아, 한 가지는 정정을 해야 옳겠다.

어쩔 수 없이 살인은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멸구를 위한 살인은 아닐 것이다.

.

.

.

꼭 '만년'이나 '지고'라는 명칭을 달지 않았더라도, 영약은 대개 무가지보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곧 무공인데, 그 성취를 올릴 귀물을 돈 받고 파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렇다.

수요가 공급을 아득하게 앞서면 가격 형성이 어려운 것은 필연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다양한 사정으로 영약을 돈으로 파는 이들이 있긴 하다.

무공과 연이 일절 없는 약초꾼이 영약을 캐냈다거나, 당장의 무공보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의 경우도 있는 법이라 그렇다.

그 중에 한 부류를 꼽자면, 마교도를 꼽을 수 있겠다.

"춘백 형. 그것 아시오?"

"무얼 말인가?"

"마교도는 영약을 섭취할 수 없소."

"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섭취는 할 수 있다만 효용이 없다 보아야겠지."

정마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지금, 마교와 마공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기에 대부분의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다.

"명이. 사람이 영약을 먹으면 그 기운을 작게나마 흡수하는 것은 상식이네."

"하지만 그들은 역천(逆天)이지 않소?"

"호오...."

내 말이 옳다 여겼는지, 이춘백이 반박을 하지 않았다.

내 말은 진실이다.

마교도들은 속성으로 발전하는 역천의 심공을 운용한다.

그들이 겪는 가장 큰 부작용을 대개는 광증 같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가장 큰 부작용은 영약의 효용이 극단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에 있다.

영약을 먹어도 효용이 없으니, 종국에는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다.

내력이야 역천의 심공으로 빠르게 쌓는다지만, 영성을 개화할 방도가 줄어드니 삼화취정에는 이르기 힘든 것이다.

"영약을 파는 놈들 모두가 마교의 간자라 할 수 없으나, 영약을 돈으로 바꾸려는 놈들 중에 마교도들이 있는 것 또한 진실이지."

여하튼.

마교도들에게 영약은 무용하니, 천산산맥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영약은 마교의 간자들을 통해 중원에 유통된다.

이번에 내가 찾아 나선 만년하수오는 그중에 하나라 할 수 있겠다.

"확실한가?"

"이번 녀석들은 마교의 간자가 확실하오."

"그 녀석들 어디 있나? 안내하게."

이춘백의 관심은 영약이 아니라 마교의 간자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서 명개 시절 우연히 보았던 낭왕의 잔재가 설핏 보였다.

역시, 그를 찾아오기를 잘한 것 같다.

* * *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교의 간자를 색출하기는 쉽지 않다.

'나 간자입네.' 하는 놈들은 진즉에 모두 칼침을 맞아 죽었고, 저 자신을 철저하게 숨길 수 있는 이들만이 중원 무림에 남아 활동을 지속하는 까닭이다.

한 가지 방편을 들자면, 맥문을 통해 내기를 주입해 보면 된다.

운공 경로의 편린만 살펴도 역천(逆天)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기에 그렇다.

하지만 비인부전을 기반으로 하는 강호 무림의 문화에서, 상대의 맥문을 잡는게 쉬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당신이 마교도로 의심되니 맥문을 잡아 보도록 하겠소.

-뭣이?

-손을 이리 줘 보시오.

-나를 모욕한 네놈에게 생사결을 신청하는 바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되는 광경 아니겠는가.

무제한 생사결을 즐기는 무공광이 아니라면, 절대 권장할 수 없는 방편인 것이다.

때문에 마교의 간자를 판별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기실 미래에 일어날 정마대전의 초창기에 무림맹이 휘청인 것도 이 간자들의 맹활약 때문이 아니던가.

중견 문파 하나가 통째로 마교의 간자 소굴이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일거에 소탕이 가능한 까닭에 그렇다.

진짜 문제는 각 문파에 스며든 마교의 고위계 간자들이라 해야 옳겠다.

어린 시절 같이 입문해 동문수학하고 늘그막의 나이에 장로에 도달한 인물이 사실은 마교도였다는 사실을 어찌 추측하겠는가, 이 말이다.

듣기로, 천마신교 특유의 천마에 대한 광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하였다.

"그냥 다 죽여 버리면 안 되나?"

이춘백이 담백하게 말했다.

그 담백함 속에 살기가 섞여 있음을 모르지 않겠다.

정마대전 시절, 낭왕 이춘백의 검에 스러진 마교도의 주검이 수천이니. 그 기질을 지금도 지니고 있는 것이리라.

기실 그가 명맥을 이은 신비문파도 천마신교의 준동을 막기 위해 존재해 온 것이라 알고 있으니 사필귀정이라 평할 수 있겠다.

저 자신을 알리지 않던 낭인 이춘백이 정마대전이 일어나자 낭왕으로 떨치고 일어선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순 없다.

"그들이 혹여나 마교도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자네가 마교의 간자라고 했지 않나."

"그렇소."

"그럼 마교의 간자가 맞겠지."

그가 내게 이토록 확고한 신뢰를 보내는 까닭은 모르겠다.

아니다. 조금은 알겠다. 나 또한 그를 진심으로 신뢰하니 말이다.

"그냥은 안 되오. 증좌가 필요하오. 절차라는 게 있지 않겠소."

"...그것은 자네 말이 옳겠군."

이춘백은 낭인이다.

낭인의 신분을 구태여 따지자면 정사지간이라 할 것이나, 이춘백은 그 중에서 정(正)의 방향으로 기울어 있는 무인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정마대전 시절 무림맹에 투신을 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이춘백이니, 살계를 열기 전에 꼼꼼히 확인을 하자는 내 말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경우는 그들이 마교도라는 것을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으니 조금은 다른 연유에 기반한 이야기였다.

이춘백과 마교의 간자를 소탕한 후, 이 사안은 무림맹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어찌 잡았는가?

-마교의 간자인 것 같아 모조리 죽였소.

-그 사실은 어찌 알고?

-그냥 그럴 것 같았소.

-....

영민한 내 두뇌로 앞날을 내다보건대, 절대 훌륭한 방편이라 볼 수는 없는 일이겠다.

명확한 물증을 확보하지 않고 거사를 치른다면 분명 향후 내 행보에 불이익을 끼칠 우려가 있을 터다.

하지만 달리 생각을 해 보자.

그들이 마교의 간자인 것을 밝힌 후 잡을 수 있다면, 이는 내 행보에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다. 무림맹주에 한 걸음 다가서는 발판이 되리라.

만년하수오도 얻고, 명성도 얻을 것이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겠다.

"놈들이 마교의 간자라는 증좌를 잡을 방법이 있나? 내 알기로 놈들은 실로 교활하여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알고 있네."

이춘백이 물었다.

마교의 간자를 하루라도 빨리 처단하고 싶어 하는 그의 열망을 알겠다.

"생각해 둔 방도가 있소."

당연히 나에겐 방법이 있다.

이미 명개 시절 계획을 세워 두지 않았던가.

상대방이 마교도인 것을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실 맥문을 잡아 보는 방법이 아니다.

육안으로도 쉽사리 확인할 방도가 있기에 그렇다.

"다만, 연기가 좀 필요할 것 같소."

그것은 바로 그 녀석들이 마공을 사용하는 현장을 포착하는 것이다.

27화 작전을 준비했다 (2)

명개 시절, 내가 가장 공을 들인 정보는 바로 사 단공의 입문에 관한 것이다.

이유인즉 만년하수오 때문으로, 다른 영약들과 달리 유독 이 녀석이 말썽을 부린 탓이다.

명개가 취풍개의 도움으로 약선심결을 취한 것이 딱 이립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의 미래이다. 그리고 그 해는, 정마대전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기실 공청석유나 주과가 운이 좋았던 경우다.

회귀를 대비해 자생처를 확보해 둔 그 영약들이 때마침 약선심결의 일 단공과 삼 단공의 재료였으니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 정보 속에 이 세상의 모든 영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나는 명개가 된 이후에 발견된 영약들의 입수 인물들과 자생처 등을 철저히 조사했을 뿐이니 말이다.

아쉽지만, 그 속에 만년하수오가 없었을 뿐.

만년의 영약이 강호에 출현하는 빈도를 생각하면, 사실 여상한 일이다.

-만년하수오면 그래도 하나쯤은....

하지만 그럼에도.

그나마 가장 공급이 많은 만년의 영약이 만년하수오 아니던가.

약선심결의 모든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든 나는 그때부터 만년하수오를 적극 수소문했다.

이왕이면 다른 만년의 영약이 아닌, 약선이 추천한 만년하수오로 사 단공에 입공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찾았다. 만년하수오.

개방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마침내 만년하수오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산서의 흑수문이 만년하수오를 발견, 이를 팔아 충당한 자금으로 중견 문파로 급격히 성장....]

시기를 살폈다.

-십 년 전이네.

대략 내가 후계자 경합으로 단천가를 등지기 두 달 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내 정보망을 벗어났던 녀석인 것이다.

이번 생 후계자 경합이 두 달 남았으니 바로 지금 즈음이란 뜻이다.

아쉽게도 다른 만년하수오에 대한 정보를 더 찾을 순 없었다. 천년도 아닌 만년의 영약이 발견된 소식이 그리 자주 들려올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미 십 년도 더 된 정보라 이 이상의 추적은 힘들었다. 자생처를 알아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조사를 거기서 접었다. 치열한 정마대전 와중, 산서의 흑수문까지 가서 정보를 캐기엔 여력이 모자랐다.

회귀 후 공청석유를 사용해서 흑수문과 거래를 시도는 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만에 하나 불발이 되더라도 대체재가 있는 까닭도 있었다.

사 단공에 입공함에 있어 만년하수오만은 못하겠지만, 만년설령초라든가 만년지극혈보, 만년설삼에 대한 정보는 이미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명개, 그 소식 들었는가?

정마대전이 한창이던 와중 비각의 동료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이번엔 무엇인가?

생사를 오가는 와중 자신이 접한 정보를 나누는 것이 비각 단원들의 유일한 유희였으니, 이는 일상이었다 하겠다.

-흑수문도 전체가 마교의 간자였다는구만. 그들이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산서 무림 전체가 큰 낭패를 보았다고 하네.

-흑수문?

-그렇다는군.

흑수문.

내 그 이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나.

그들이 마교도라면 나에게는 만년하수오를 마음 편히 취할 당위성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늘이 내게 온전한 사 단공을 안배해 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 * *

개방도가 되면 여러 가지 훈련을 받게 된다.

먹거리 동냥을 잘 얻을 수 있는 구걸의 철학으로 시작해서 요긴한 정보를 귀동냥하는 정보원의 철학까지.

게으를 것 같은 거지 놈들은 사실 누구보다 잘 훈련된 요원이다. 적어도 본타 놈들은 그렇다.

그중에도 개방에서 가장 강조하며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사람을 보는 안목이다.

정보라는 것 자체가 사람으로부터 구하는 것이며, 강호 무림에서 중요한 정보는 대개 사람에 관한 것이기에 그렇다.

안목이란 여러 의미로 두루 쓰이지만, 개방의 안목은 보통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에 훈련의 방점이 찍혀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개방 정보의 특성상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보는 유통 과정에서 변질되고, 의미 없는 정보로 변질되는 까닭이다.

서두가 길었는데, 나 또한 다년간의 훈련을 통해 충분히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여하튼 그러한 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약관의 단천명은 매우 준수한 미남이다. 주과의 효능이든 뭐든, 이제는 내 외모 아니겠는가.

많은 이들은 뭇 여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 외모만으로 충분치 않다 하겠지만, 기실 출중한 외모만 있으면 뭇 여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명이 자네, 그렇게 입고 다닐 것이라고?"

"부러우시오? 춘백 형도 한 벌 사겠소?"

"...아니. 나는 괜찮네."

"필요하면 말하시오. 돈이야 넉넉하니."

"내 몸에 손댈 생각 하지 말게. 용서치 않을 것이야."

내 모습에 이춘백이 학을 떼며 말했다.

상시 낭인의 모습을 고집하는 그였으니, 지금 내 모습은 그와 대척점에 서 있다 하겠다.

동경을 바라보았다.

기존에 입던 편한 무복을 벗어 던지고, 품이 넓고 고급스러운 재질의 비단옷을 사 입었다.

머리에 기름을 묻혀 깔끔하게 빗고, 얼굴에는 여인들이나 하는 분칠로 생기를 더했다. 원래도 좋은 피부에 빛이 나는 것 같다.

동경 속의 남자는 화화공자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음이라.

십 년 동냥밥을 먹은 내 객관적인 안목에도 그리 보이니, 여인들에게 인기 만점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괜찮지 않소?"

"괜찮지 않네."

혹여 자신도 분장을 시킬까 저어한 이춘백이 얼른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흠."

이리 보니 기생오라비가 따로 없긴 하다. 목가의 방계 놈이 했던 말에 틀림은 없었던 것 같다.

"거 너무 질색하지 마시오. 대업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지 않소."

"...나에게 시키지 않아 주어서 고맙네."

동경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정돈하고 최종으로 점검했다.

'고놈, 잘생겼구나.'

동경 속의 미남, 기생오라비 단천명이 이번 계획의 핵심이다.

이번 작전의 이름을 미남계라 부를 것이니,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해 보고 싶었던 계책이다.

한 번 죽음을 경험하긴 했다만, 지금에라도 꿈을 이루니 충분히 기꺼운 일이었다.

* * *

"언제까지 이리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나?"

이춘백이 물었다.

마교 간자의 존재를 언급한 이후, 이춘백은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처단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 보였다.

"춘백 형, 모름지기 정보 수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소?"

"내가 어떻게 알겠나?"

이춘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 만하다. 실전 무투파인 그에게 정보 수집의 정수를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바로 시간이라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게 왜?"

내게 되물었다. 아직 내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느긋하게 좀 기다리라는 말이오."

"그 소리였군."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춘백이 앞에 놓인 탁주를 홀짝였다.

"윽."

그러곤 이내 내려놓았다. 입에 영 맞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저기 저 고급 주루에라도 가면 안 되겠나? 꼭 주막이어야 하는가?"

"주막이 좋소."

"어휴."

한숨을 내쉰 이춘백이 다시 탁주를 홀짝이더니....

"윽."

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저리 싫으면 그냥 먹지 않으면 될 것을,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흑수문 근방에 있는 주막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칠 주야가 흘렀다.

고급 주루가 아닌 주막에 자리를 잡은 연유가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자네, 그거 들었는가?"

"우라질 인생...."

"요새 흑수문이...."

"내가 왕년에는!"

"이보게, 용일이. 요즘 재미있는 이야기 좀 없는가?"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귀에 담고, 분석하고, 분류했다.

밀폐된 고급 주루보다는 개방된 주막에서 훨씬 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즉 훨씬 다양한 정보를 귀동냥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주막이야말로 진정한 정보의 보고인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거적때기를 입고 얼굴에 흙을 좀 묻혔다면, 사흘 안에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을 자신이 있다. 지금 모습으론 정보 수집에 한계가 있었던 까닭에 칠 주야나 걸린 것이다.

그렇다고 개방도 흉내를 낼 순 없는 법.

개방의 엄중한 감시망을 생각할 때, 개방도가 아닌 내가 거지 흉내를 내며 정보를 모았다간 크게 경을 치를 수 있는 까닭이다.

홀짝.

"윽."

칠 주야가 흘렀다는 뜻은 그만큼의 시간 동안 이춘백이 탁주와 씨름을 했다는 뜻이며....

"이제 되었소. 갑시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대강 모두 모았다는 뜻도 된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이춘백이 반색했다.

"이제 놈들을 처단하러 가는가?"

"아직이오.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소."

실망한 표정도 잠시, 지루한 주막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했는지 이춘백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목적지에 도착을 하자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여기는 대체 왜?"

그의 시선에 비친 것은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개방의 허름한 움막이었다.

"따라오시오."

"진짜 가는 건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를 두고 성큼 개방의 움막으로 발을 들였다. 그립진 않았지만,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개방의 호걸분들, 반갑소. 본인은 이제 막 강호에 초출한 안휘 단천가의 차남, 명이라 하오."

움막에 널브러져 있던 거지들이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디 거지들이란 배타적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인생의 한 굴곡에서 아픔을 겪은 이들이 개방에 투신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다.

하지만 나는 동냥밥 십 년 차의 명개 아닌가. 그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이다.

"개방의 호걸분들과 이것을 나누기 위해 찾아왔는데, 어떠시오?"

내 손에는 김이 폴폴 나는 삶은 닭 세 마리와 탁주 한 동이가 들려 있었으니.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소. 단룡께서는 얼른 들어오시오!"

역시나, 저 게으르고 비루해 보이는 이들은 나를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개방의 저력이다.

"고맙소이다!"

나는 개방도들의 열렬한 환영과 함께 움막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시진이 흘렀다.

"그대는 개방의 형제요! 내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꼭 다시 오시오. 개방은 형제를 잊지 않음이니!"

형제가 된 개방도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거리로 나서니,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자네, 명문가의 직계 아니었나?"

"사생아지요."

"단천가는 사생아를 거지 소굴에서 키우나? 어찌 그리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켰던 이춘백이 물었다.

그 또한 길바닥에서 자주 잠을 청하는 낭인이라 하나, 개방의 거지들과는 그 생활 양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숙련된 낭인조차 어려운 것을, 명문가의 직계인 내가 동냥밥을 냉큼 입에 털어 넣고 싸구려 탁주도 꿀떡 마시니 그에겐 불가해한 광경이었으리라.

"비밀이오."

신뢰하는 친우에게 거짓부렁을 일삼지 않겠지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릇 모두에게 비밀 하나쯤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명이 자네는 망해도 걱정이 없겠구만. 개방에 가서도 어디 한자리를 차지할 것 같으니."

"내 생각도 그렇소."

내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개방도들 덕분에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은 까닭이다.

28화 작전을 준비했다 (3)

흑수문은 산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중소방파다.

중소(中小)방파라 통칭하지만, 구태여 따지고 들자면 소(小)방파라 부르는 것이 옳을, 한미한 문파.

구태여 계열을 따지자면 정사지간(正邪之間)이라 할 것이나, 통상 대놓고 사파를 표방하는 군상들처럼 민초들에게 패악질을 일삼지는 않았으니, 산서의 민초들은 흑수문을 정파라 인식하고 있는 정도다.

그 흑수문은 세간에는 절대로 알릴 수 없는 비밀을 하나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이 마교도에 의해 세워진 문파라는 사실이다.

천마신교 사 위계(四位階)의 간자가 산서에 터를 잡고 흑수문을 개파했으니, 그는 마한성이라는 인물이었다.

사 위계 간자의 핵심 목표는 중원의 민초들 속에 녹아드는 것인 바, 성공적으로 산서에 터를 잡은 간자 마한성은 개파를 선택한 것이다.

그 마한성이 현재 흑수문의 소문주인 마유한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즉 고조부 되는 분이다.

사 대를 걸쳤으니, 흑수문이 산서에 터를 잡은 지 대략 백 년이 흘렀다는 뜻이었다.

백 년. 한 문파가 터를 잡고 그 기간을 보낸다면 유서 깊다고 말하기엔 부족할지 몰라도, 터줏대감이라 부르기엔 손색없는 세월이다.

흑수문의 개파조사 마한성은 유능하고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일평생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마교의 간자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마한성은 그 유능함만큼이나 천마신교에 있어서도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천마라는 존재 자체가 그에겐 곧 신앙이자 모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산서에 터를 잡고 흑수문을 세운 마한성은 산서에 자리 잡은 한미한 가문의 여식과 혼인을 했다.

당연히 제 아들에게 마공을 연성시키고, 그를 천마신교의 교도로 만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 것이다.

마한성의 아들은 다시 그의 아들에게, 그 아들은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마공을 연성시키고 천마신교의 교도로 만들었다.

마교도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중원 무림에 숨어들어 있으니, 이들 모두를 마교의 간자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리라.

결국, 대를 물림하여 현재 흑수문의 소문주 마유한 또한 철이 들기도 전인 어린 시절에 마공을 연성하고 천마신교의 교도가 되었다.

다만 흑수문의 개파조사 마한성과 현재의 소문주 마유한이 같은 마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유한 또한 어린 시절부터 천마신교의 교리를 배우고 마공을 연성하고 있지만, 천산산맥이나 위대한 천마는 털끝조차 보지 못한 반쪽짜리 교도인 까닭이다.

천마신교에 대한 성심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마유한은 스스로를 마교의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으니, 이 또한 신앙의 위대함이다.

"아들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마유한의 아버지. 현 흑수문주 마철구의 표정엔 기꺼움이 가득했다.

"기회라니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마유한은 처음 보는 아비의 밝은 모습이 생경할 따름이었다.

"본 교에서 드디어 지령이 내려왔구나. 역시나 본 교는 우리를 잊지 않았음이야."

"본 교에서요?"

감격에 젖은 마철구와 다르게 마유한의 표정은 덤덤했다. 기실 본 교라는 존재는 약관을 넘어선 그의 생에 접점이 없다시피 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 마유한의 감상과 상관없이 기꺼움에 취한 아버지 마철구가 고급스러운 함에 담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을 보거라."

"이게 무업니까?"

견식이 풍부하지 못한 마유한은 그 귀물을 단번에 알아보진 못했다.

"만년하수오다."

"...!"

다만 아무리 견식이 낮다 하여도 그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우둔하진 않았다. 일순, 마유한의 시선에 탐욕이 서렸다.

"본 교에서 우리 흑수문에 이것을 내렸느니라."

"오오...."

사그라졌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일지도 모를 천마신교에 대한 경외심이 마유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이걸 이제 어찌하면 되는 겁니까?"

이리 물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마유한의 얼굴을 물들였다.

흑수문과 천마신교의 미래를 위해, 소문주인 자신에게 저 만년하수오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하지만....

"팔아야지."

아버지 마철구의 대답에 마유한의 김이 팍 새 버렸다.

그런 마유한의 기색을 읽지 못할 마철구가 아니었다.

"하하, 녀석아. 실망했느냐?"

"아닙니다."

마유한의 말과 표정이 따로 놀았다.

"아들아, 나라고 이것을 너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익히 일러두지 않았느냐. 마공을 익힌 이에게 영약은 효용이 없다는 것을."

"아...."

마공을 익혔지만, 제대로 사용해 본 적도 없는 마유한은 그제야 아버지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비록 이 귀물을 너에게 먹이진 못하겠지만, 이것은 모두 네 것이 될 것이다."

마철구가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만년하수오를 판매한 돈이면 본 문은 바로 중견 문파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겠군요."

"너는 흑수문을 이을 것인즉, 이 모든 것은 네 것이 되지 않겠느냐?"

"아버지...!"

마유한의 표정에 재차 기대감이 서렸다.

고강한 무인도 좋지만, 산서를 주름잡는 명문 중견 방파 흑수문의 후계자라는 자리도 나쁘지 않은 까닭이었다.

소문파의 소문주.

소소문주라 불리던 설움을 털고, 중견 문파 후계자의 위상을 갖추리라.

마유한의 눈빛에 희망이 차올랐다.

* * *

"앵란아! 거기 있느냐!"

불콰하게 취한 마유한이 기루를 찾았다.

앵란이라 함은, 산서에서 알아주는 예인(藝人)으로 그 미모는 산서오미와 견줄 수 있다 알려진 청기였다.

더불어 근 삼 년에 걸쳐 마유한이 지극한 공을 들였음에도 관심 한 톨 주지 않던 도도한 여인이 바로 그 앵란이다.

문파의 후계자라 하나, 소문파에 불과한 흑수문의 마유한은 언감생심 앵란을 강제로 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의 마유한은 사뭇 달랐으니.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이는 불콰하게 오른 취기를 이용한 만용이 아니라, 조만간 중견 방파의 후계자가 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앵란아! 어디 있느냐고 내가 묻지 않느냐!"

"마 공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비켜라!"

기루의 사용인이 마유한을 막아섰으나, 마유한은 이를 뿌리치고 안으로 걸음 했다.

중견 방파 후계자를 일개 기루의 사용인이 막아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앵란아!"

기루란 것이 그리 넓지 않으니, 조금 더 걸음 하자 마유한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앵란이를 제 눈을 담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앵란이가 외간 남자와 담소를 나누며, 그는 평생을 보지 못한 발그레한 미소를 띠고 있는 까닭이었다.

"호호호. 명 공자, 왜 이렇게 웃긴가요?"

"뭐가 웃기오? 본인은 진지하오만?"

"호호호. 웃겨."

소소문주 마유한은 저 모습을 보곤 물러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마유한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중견문파의 후계자로 올라설 인물인 까닭이다.

쿵!

정색을 한 마유한이 내공을 실어 진각을 밟자 기루가 울렸다. 그제야 앵란의 시선이 마유한을 향했다.

"앵란아, 뭐냐? 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새끼는?"

"마 공자, 이게 무슨 짓인가요?"

앵란이 따지려 들자 그 남자가 앵란을 막아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가 뭐라고 나의 앵란이를 보호하려 든단 말인가!

"넌 뭐냐?"

마유한이 거칠게 물었다.

"나 말이오?"

짜증 나게 잘생긴 그놈이 답했다.

"지나가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새끼오만?"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너, 밖으로 따라 나와라."

마유한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본때를 보여 줄 참이었다.

* * *

"마 공자! 이게 무슨 행패인가요?"

성난 앵란이 마유한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어? 음, 그게."

만년하수오의 용기를 얻었다 하나, 고작 반나절밖에 되지 않은 일이었다.

마유한의 본성은 여전했으니, 앵란의 추상같은 호통에 마유한이 찔끔했다.

"미, 미안하구나, 앵란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유한이 앵란에게 사과했다.

"란매, 나는 괜찮소."

"명 공자, 미안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앵란의 관심은 사과를 하는 마유한이 아닌, 명 공자라 불린 저놈에게 쏠려 있었다.

으득.

곧바로 마유한의 얼굴에 다시 분노가 깃들었다.

저 기생오라비의 입에서 나온 '란매'라는, 자신도 사용해 보지 못한 호칭.

지극히 사랑하는 앵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는 저 말.

불콰하게 오른 취기.

중견 문파의 후계자로 올라설 자신에 대한 확신.

"이익!"

이 모든 것들이 뒤엉켜 마유한의 눈빛에는 거만한 분노가 자리 잡았다.

"이년이!"

갈피를 잃은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마유한은 결국 선을 넘어 버렸다.

"꺄악!"

마유한의 손바닥이 앵란의 뺨을 향해 빠르게 치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턱.

기생오라비 놈이 앵란의 앞을 막아서더니 마유한의 손목을 턱 하고 낚아챈 것이다.

그제야 마유한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대체 이게 무언가.

"당신...!"

앵란의 저 표독스러운 눈빛은 무어란 말인가.

중견 문파의 후계자로 올라설 자신을 향해, 이제는 구애의 눈빛을 보내야 할 앵란이 왜 저런 눈빛을 하느냔 말이다.

마유한의 시선이 자신을 막아선 기생오라비에게 향했다.

저놈이다. 저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나보고 기생오라비라 그러더니, 당신은 여인에게 손찌검이나 하는 파락호였소?"

화화공자 같은 면상만큼이나 말솜씨도 번드르르한 놈이다.

"따라 나오시오. 내 당신에게 강호의 쓴맛을 보여 주겠소."

비실해 보이는 녀석이 여인의 앞이라고 위세를 떠는 꼬락서니가 짜증 나기 그지없었다.

다만 이는 마유한도 원하던 바였으니.

"오냐. 좋다."

놈에게 인생의 매운 맛을 알려 줄 참이었다.

그렇게 기루 밖으로 나가려던 차, 앵란이 기생오라비에게 말을 걸었다.

"명 공자, 조심하세요. 저 남자, 무인이에요."

"하하. 란매,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무공은 한가락 익힌 몸이니."

으득.

마유한의 생각이 바뀌었다.

저놈, 죽여 버릴 것이다.

* * *

"저곳이 어떠시오?"

마유한에게 물었다.

내가 가리킨 곳은 인적이 전혀 없는 골목 안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미리 확인해 둔 곳이다.

"좋다."

그리 답한 마유한이 경신공을 사용해 훌쩍 날아올랐다. 자신의 무공을 뽐내는 것 같다.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겉멋에만 치중한 그 조악함에 웃음이 나려 했으나 참았다.

마유한보다 조금 더 조악하지만 유려해 보이는 경신공을 연기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명명하자면 화화공자보법 정도가 되겠다.

내 지금은 얕보일 필요가 있는 상황이니, 이 정도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유한과 대치했다.

"지금이라도 란매에게 무릎 꿇고 사죄를 하겠다고 약조를 하면 내 당신을 용서하리다."

당연히 이는 마유한의 성질을 더 긁기 위한 포석이다.

"이놈!"

과연 훌륭한 격장지계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시간을 줄여 주는 법이니, 마유한이 검을 뽑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다만 한 문파의 소문주라는 녀석이 저리 조악한 몸놀림을 선보이다니, 한숨이 나올 일이다.

자세를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이춘백에게 말한 그 연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카강!

"윽."

가까스로 막기.

휙!

"차합!"

허술한 찌르기.

후웅!

"헙!"

아슬아슬하게 피하기.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경합이라 평할 싸움이 펼쳐졌다.

남들이 보기엔 진심으로 보이겠으나, 최선을 다한 반편이 연기가 내 손끝에서 피어났다.

엉성해 보이는 무공은 화화공자의 차림새와 썩 잘 어울려 위화감을 없애 주었다.

챙! 챙! 챙!

그렇게 백중세의 공방은 순식간에 백여 합을 지나갔다.

29화 함께하니 두렵지 않았다

"허억. 허억."

절세의 고수들을 이야기할 때 한 호흡에 열 합을 주고받았다느니, 능히 한 시진을 쉬지 않고 싸웠다느니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절세의 무위에 이른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일 뿐이다.

내공의 힘을 빌린다 하여도 전투라는 것은 체력을 급속도로 갉아먹기에 그렇다.

"허억. 허억."

특히 마유한처럼 실전 경험이 부족한 후기지수들에게 그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진심으로 헐떡이는 마유한을 흉내 내며 똑같이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호흡이 길어질수록 그의 표정에 분노가 짙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우리 란매에게, 사과하시겠소?"

이 정도 대사면 충분하지 싶다.

분노와 조급함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이다. 특히 배포가 작은 이들이 유독 그렇다.

내 계획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내 그의 성정과 배경을 모두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는가.

마유한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을 섭외해 두었으니,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네놈, 죽여 주마."

과연.

마유한은 내가 유도한 그대로 행해 주었다.

그의 전신에서 검은 증기가 일렁인 것이다. 명백한 마공의 발현 징조였다.

"춘백 형, 보시었소?"

"그래. 자네 말이 맞는군."

서늘한 이춘백의 목소리가 공간을 점했다.

"뭣?"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에 놀란 마유한이 두리번거렸으나 그는 이춘백의 신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척 없이 나타난 이춘백이 완벽하게 마유한의 뒤를 점한 까닭이었다.

턱.

"컥."

내 분투가 무색하게 이춘백은 마유한을 손쉽게 제압했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마유한의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흡사 어미 고양이에게 뒷덜미를 물린 새끼 고양이처럼 두 발이 땅에서 떠 버린 마유한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이춘백이 마유한의 등 뒤 명문혈에 남아 있는 손을 대었다.

"크윽."

이는 손목의 맥문을 잡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도 거친 확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생명문이라 불리는 명문혈은 맥문보다 단전에 훨씬 가까이 있는 까닭이다.

이미 마공의 발현을 확인했으니 이춘백의 행실에는 거침이 없어진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역시 맞군."

이춘백의 선고가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마유한이 아닌 나를 향했다.

"죽여도 되겠나?"

그 질문에 답하듯 마유한이 거칠게 버둥거렸으나 이춘백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이진 마시오. 무림맹에 넘깁시다."

무림맹이라는 말에 마유한의 안색이 창백해지기도 잠시.

퍽.

뒷덜미를 강타하는 이춘백의 일격에 그는 혼절했다.

털썩.

짐짝을 부리듯 이춘백이 마유한을 바닥에 내던졌다.

마도인에 한해서 그는 참으로 자비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제 어찌하면 되겠나?"

화화공자 분장에 질색하던 이춘백은 이제 없었다. 내 계획을 따라 큰 성과를 낸 참이니 말이다.

"일단 개방으로 갑시다."

"그러지."

물론 그 계획은 이제 시작이다.

* * *

"개방의 호걸분들, 잘 부탁드립니다."

"형제의 일 아니오. 단룡께서는 우리만 믿으시오."

개방의 거지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마유한을 넘겼다. 산서의 터줏대감인 흑수문의 소문주가 마공을 익혔다는 소식이니, 개방의 거지들이 기함한 것은 정해진 결과였다.

"자오개야, 지급(至急)이다. 얼른 무림맹 산서 지부로 향하거라."

"예!"

개방의 거지들이 허술해 보여도 그들의 경신공은 능히 강호 일절이라 불리는 절기였으니. 이 소식은 곧바로 무림맹 산서 지부로 전달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고, 개방도들은 성과를 얻었다.

더불어 개방을 통해 마교도를 색출, 제압한 나와 이춘백의 위명이 강호에 알려질 것이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방편이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만년하수오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는 점 정도다.

물론 문제는 없다.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라 이춘백과 함께이니 말이다.

자오개가 산서 지부에 도착해 무림맹의 병력을 끌고 오는 것보다 빠르게 흑수문을 정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러니 개방에 먼저 들른 것 아니겠는가.

"춘백 형."

"왜 그러나?"

"지금 경지가 어찌 되시오?"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무림에서 타인의 경지를 묻는 것이 무례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 정도 질문은 편히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확신이다.

"검사(劍絲)를 펼칠 정도는 되네."

그의 경지가 절정지경을 넘어 초절정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겸양을 미덕으로 하는 그의 성격을 생각할 때, 그에게 조화경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겠다. 역시 신비문파의 전인이다.

"자네는?"

"뭐, 나도 비슷하오."

약선심결의 힘을 입은 여백 당숙의 담금질에 나도 얼마 전에 초절정에 발을 디딘 상태였다.

"춘백 형, 우리 둘이서 거하게 한판 벌여 보지 않겠소?"

그 질문에 이춘백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나야 좋지."

마교도의 존재를 알고도 칠 주야를 참아 온 그였으니, 지금 저 질문이 진심으로 기꺼운 것이렸다.

"갑시다. 공을 세우러."

우리는 초절에 달한 경신공을 펼쳐 이동했다.

목적지는, 흑수문이다.

* * *

문파란 곧 집단을 의미한다.

대개 힘이란 결집에서 나오는 법이니 문파가 개인보다 강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온갖 신비와 기인이사가 난무하는 곳이 바로 강호 무림 아니던가.

강호 무림에서는 집단보다 강한 개인, 상식을 깨뜨리는 존재들이 더러 존재한다.

기실 문파라 통칭했지만 모든 문파가 같을 순 없는 법이다.

온갖 괴력난신이 숨어 있는 구파일방과 같은 대문파가 있는 반면, 절정 고수를 문파 최고의 자랑으로 생각하는 소문파도 존재한다.

자로 잰 듯이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대개 절정 고수 여럿을 확보하면 소문파라 불리고, 초절정 고수가 생겨나면 중소문파, 초절정 고수 여럿이나 조화경의 고수를 포섭하면 중견 문파라 칭한다.

절정 고수조차 확보하지 못한 집단은 대개 스스로를 문파라 칭하지 않고 방(幇)이나 패(牌) 따위의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우리 둘이서 괜찮겠나?"

흑수문의 초입에서 이춘백이 내게 물었다.

"충분할 것이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십 년 후, 정마대전 당시의 흑수문은 산서를 대표하는 중견 문파로 성장해 있다. 만년하수오를 팔아 치운 돈과 정마대전을 안배한 마교의 은밀한 지원 덕분이다.

품속의 비수에 조화경의 고수와 초절정의 고수가 여럿이었으니 산서 무림의 낭패가 납득이 된다.

당연히 그런 중견 문파를 나와 이춘백 둘이서 대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흑수문이 위세를 갖춘 것은 만년하수오를 팔아 치운 이후가 아니던가. 지금의 흑수문은 산서에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는 한미한 소문파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물론 조화경도 아닌 초절정의 고수가 한 문파를 오롯이 대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에 초절정의 고수가 없다 하여도 다수와의 정면 대결은 많은 변수를 동반하는 까닭이다.

거기에 더해 마교의 간자답게 숨겨 놓은 저력이라도 있다면, 나 혼자서는 낭패를 볼 확률이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춘백을 시선에 담았다.

하나와 둘은 다르다.

구태여 따지자면 둘 또한 집단 아니던가. 이는 곧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니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갑시다."

"그러지."

이춘백과 함께 흑수문으로 걸음 했다.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그와 나의 걸음은 더없이 평온하고 당당했다.

개방의 움막으로 들어가던 이춘백의 어정쩡한 걸음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이쪽을 훨씬 편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또한 알겠다.

* * *

"누구십니까?"

흑수문의 정문을 지키는 위사가 내게 물었다.

화화공자의 하늘거리는 장삼을 벗어 던졌다 하나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무복 또한 비싼 값을 자랑하는 단천가의 것이었으니. 위사의 행실이 공손해지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를 모른다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위사를 향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연히 내가 그를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구도가 형성되었다.

"내가 바로 단천가의 차남, 단천명이다. 기억하도록."

오만한 표정에 독선적인 말투. 그야말로 무례하고 거침없는 명가 후예의 표본이었다.

명개의 삶을 경험하기 전의 내 모습에 조금의 과장만 덧대면 되는 모습이니 그 연기가 어렵지 않았다.

"선약을 하셨습니까?"

"내가 그런 걸 해야 하나?"

원래 타 문파를 방문함에 있어 선약을 하는 것은 필수이자 상식이다. 그런 상식이 있음에도 도리어 위사가 거듭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위사의 공손한 질문에도....

"너 따위가 나를 막아설 자격이 있느냐?"

나는 조소를 날리며 그를 스쳐 대문을 들어섰다.

"아...."

나를 막으려던 위사의 손이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하릴없이 허공을 배회했다.

척 보아도 명가의 자손임이 분명한 나를 건드렸다간 어떤 경을 치게 될지 짐작조차 어려운 까닭이다.

위사를 지나친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흑수문의 심부로 향했다. 전전긍긍하며 내 뒤를 따르는 위사를 무시하며 말이다.

지금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흑수문이 아닌 내 행실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의도된 연기다.

객이 문파를 방문하는 모든 절차를 지켜서야 제 시간에 목적한 바를 끝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절차적 편리함만을 추구하고자 함은 아니었으니.

마교의 간자들에게 혹시 모를 생각할 여유와 대비할 시간을 빼앗기 위한 것이니, 내 무례함은 불가항력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솔직한 마음을 더하자면, 마교의 간자들에게 예의를 차릴 마음이 전혀 없는 까닭도 있긴 하다.

"자네는 참 모를 사람이구만."

하오문의 마속에게 자주 듣던 그 말을 이춘백이 했다.

"비밀은 무인을 더 고강하게 만드는 법이지요."

그런 이춘백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이해한다. 개방도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던 단천명과 오만한 명가의 후예 단천명을 한나절 안에 동시에 목격한다면 나라도 혼란이 올 것 같으니 말이다.

고개를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흑수문 안을 활보하니 그 누구도 나와 이춘백을 막지 않았다.

"여긴가?"

"그런 것 같네."

얼마 지나지 않아 흑수문의 가장 큰 전각 앞에 걸음이 닿았다.

전각의 규모만 보더라도 저곳이 흑수문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진즉에 생각해 둔 바를 행했다.

용천혈 가득 넘치는 내력을 그러모으고....

꾸우웅!

강력한 진각을 밟아 사방을 울렸다.

무공의 예비 동작으로서의 진각이 아니라 진각 자체를 목표로 했다 보니 그 위력이 남달랐다. 흡사 만근추(萬斤錘)를 시전한 듯 발아래가 움푹 파이며 전각이 흔들렸다.

"무슨 일이냐!"

과연 효과적인 행동이었으니, 소란에 놀란 흑수문도들이 병장기를 그러쥐고는 순식간에 전각 앞으로 모여들었다.

저력이 부족하다 하여 문파의 틀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니, 흑수도문들의 면면은 숙련된 검수와 같았다.

"본인은 단천가의 차남, 명이오."

내 말에 수장급으로 보이는 이가 나섰다.

"단천가의 차남이라면, 단룡 아니시오? 이 무슨 행패요?"

과연 용봉의 별호는 명불허전이라. 면식이 없는 그가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

대뜸 본론을 들이밀었다.

"마교의 간자를 하나 잡았소."

곧바로 신색을 회복했으나 그가 순간적으로 흠칫한 것을 내 안목이 놓치지 않았다. 일단 저놈은 연관이 있다고 봐야겠다.

"한데 그 간자 말이오."

일부러 말을 늘였으나 중간에 어떤 잡음도 섞여 들지 않았다. 장내가 오롯이 나의 행실에 집중된 탓이다.

"정체를 알아보니 흑수문의 소문주 마유한이더군. 해명할 것 있소?"

우리를 막아선 흑수문도들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동시에 그들의 살기가 폭증했다.

"아, 답은 들은 셈 치겠소."

이로써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문주의 직계들뿐만 아니라 이곳에 자리한 흑수문도 전원이 마교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더 있나?"

수장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은 없소만?"

거짓을 말했다. 구태여 이들에게 진실을 알릴 연유가 어디 있겠는가.

"잘했군. 고맙네."

나직한 그의 한마디.

그 의미를 장내 모두가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살인멸구를 결심한 것이다.

살인멸구를 하면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니 내가 어떤 인물이든 상관이 없음이라.

"기어이 그 선택을 하시겠소?"

내 얼굴에 서린 웃음이 진해졌다.

동시에 흑수문도 전원이 기수식을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춘백이 옆에 있어 힘이 난 탓인가. 왠지 허세를 조금 더 부리고 싶어졌다.

"마교의 간자들을 처단하러 온 강호 초출, 단천명이오."

포권을 취하며 그리 말했다.

통상 강호 초출의 업적이라 해 봐야 하급 녹림도 토벌 정도니, 마교 간자 소탕이라는 위업이 눈앞인 상황에서 이 정도는 그리 큰 허세도 아니다.

내 시선이 이춘백을 향했다.

"춘백 형도 자기소개를 해야 하지 않소?"

"...꼭 해야 하는가?"

"이왕이면 흥은 맞추는 것이 좋지 않겠소?"

스릉.

고개를 절래 젓던 이춘백이 제 검을 뽑아 들었다.

"낭인 이춘백이다."

이춘백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쳐라!"

흑수문도들이 우리를 향해 쇄도했다.

"갑시다."

"그러지."

탓.

이춘백과 나는 흑수문도들을 향해 뛰어올랐다.

긴박한 와중이라 정확하게 확인한 것은 아닌데, 그와 나의 얼굴에 미소가 맺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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