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10화 삼 수를 막아 냈다

단천가주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정실부인 백여해와 슬하에 둔 장남 단천학.

그리고 다른 배에서 태어났지만 백여해의 밑으로 입적시킨 나, 차남 단천명이다.

장남 단천학은 나와 두 살 터울이니, 올해로 약관에 이른 단천가의 기대주라 할 것이다.

어머니 백여해의 물심양면 지원 속에서 이른 나이에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입지를 다져 놓았으니, 그의 표정에는 항상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형님, 오랜만이오."

"그렇구나."

회귀를 한 후에 처음 마주한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부르셨소?"

"형제 사이에 꼭 용무가 있어야 부르더냐?"

"그랬었지 않소."

있어야 불렀다. 항상 그래 왔으니.

나는 적어도 그와 용무가 없이 마주 한 기억이 없다. 농담으로라도 살가운 형제라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이해는 한다.

그가 나를 꺼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와 같으리라.

여인 백여해에게 내 존재가 지우고 싶은 과거라면, 단천학에게 나는 불안정한 미래 정도 되시겠다.

하지만 명개의 삶까지 살아보고 돌아온 나는 안다.

내 잘못은 없다.

나는, 당당해도 되는 사람이다.

때문에 어깨를 활짝 펴고 말했다.

"얌전하게 불러도 형님을 보러 올 수 있으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시오."

그리 말하며 단천학의 뒤에 자리한 가솔에게 시선을 주었다.

분명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인간의 뺨이 벌겋게 부풀어 있다. 내가 이곳으로 걸음하기까지의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솔들에게도 신경을 좀 써 주고 말이오."

그리 말하며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러지."

단천학도 그런 나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외모가 준수하니, 미소 또한 싱그럽다.

항상 나를 떨떠름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서 그렇지 어머니 백여해 또한 소싯적 미모가 출중했던 여인이니, 그녀를 닮은 것이리라.

나를 있게 해 준 어머니를 원망할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단천학 외모가 부럽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엔 말이다.

"여백 당숙께 무공을 배우고 있다고?"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소."

내 형님이 나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는 처음 알았다.

여백 당숙에게 내가 무공을 배우는 것이 큰 비밀은 아니다만, 가문 내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도 아닌 까닭이다.

"삼장로께서 매우 언짢으신 것 같더구나."

"그랬소? 유감이오."

삼장로는 내 나이 여덟부터 열일곱까지 나를 수련시킨 이다.

그의 지도 아래 일류에 들었으니 스승이라 불러야 마땅하지만, 도저히 그리 부르고 싶지 않은 이라고 하겠다.

기실, 내가 어린 나이에 일류에 도달한 것은 타고난 근골과 오성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그는 나를 가르치는 데 무관심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보라.

일장로에게 사사받는 단천학이 나보다 삼장로의 의중을 더 잘 꿰고 있지 않은가.

아쉽지는 않다.

단천가의 장로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오롯이 형님의 편이라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으니.

"너, 설마 가주의 위에 관심이 생긴 것이냐?"

형님이 나를 떠보듯이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그가 오해하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소."

그 시절에는 단지 형님보다 못한 아우였기에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 또한 자격이 있는 자리 아니오?"

비록 사생아라도 말이다.

"하! 하하하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단천학이 파안대소를 했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연기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웃음이 뚝 멎음과 동시에.

"너 따위가?"

이리 물어왔다.

저 표정과 저 질문이 그의 본성임을 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그리 호인이 아닌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나를 비웃는 것을 이해한다.

지난 생의 나는 약관에 이르러서도 절정에 닿지 못했었다. 명개 시절에야 겨우 닿은 경지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내가 부족함이 아니라, 삼장로의 가르침 탓이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약관이 되기도 전에 절정에 올라, 후계자 경합 당시에는 스물둘의 나이로 완숙한 절정에 이른 단천학이다.

일장로를 스승으로 두고, 실질적으로 모든 장로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로선 내가 가소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저 자신만만함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실제로, 당시의 내가 단천학을 이기고 후계자 경합을 쟁취하는 것은 당랑거철과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지 않겠소?"

지금은 어떨까?

나 또한 벌써 절정지경에 발을 들인 지금 말이다.

"그걸 꼭 대보아야 아느냐?"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오. 그렇다면 대봐야 알겠지."

어깨를 으쓱해 주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비웃음이 불쾌감으로 변했다.

그가 어머니 백여해와 원로원을 등에 업고 있다면, 나는 여백 당숙과 호위대를 등에 업을 것이다.

"아직도 내가 코찔찔이 단천명으로 보이시오?"

그가 절정의 무위를 갖추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무위를 갖출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던 것과 사뭇 다른 내 모습에 단천학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 조만간 용봉회합이 있지 않소?"

용봉회합은 이립 이전에 절정지경에 입문한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위한 행사다. 삼 년에 한 번 열리는 그 행사가 바로 올해, 하남에서 열린다.

용봉회합에서 인정받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던 단천학의 위풍당당하던 자태를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절정에 들지 못했기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그 행사 말이다.

"네놈이 왜 관심을 갖느냐?"

형님이 애써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 나도 해당 사항이 있으니 관심이 가지 않겠소?"

올해는 다를 것이다.

"나도 절정에 들었으니 말이오."

용봉회합의 주역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 * *

"학 공자와 붙었다고?"

"그런 적 없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여백 당숙의 말을 받았다.

"가내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명 공자가 학 공자에게 선전포고를 했다고 말이야."

가문 내에 입이 싼 인간들이 즐비한 모양이다. 다만 틀린 사실을 정정해 줄 필요는 있겠다.

"선전포고가 아니라 이미 예견된 일 아니겠습니까?"

"흠."

단천가가 적자계승의 가풍을 유지해 온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 후계자 경합은 예견된 미래라 할 것이다.

"자신은 있나?"

그가 나를 가늠하듯 물었다.

"있습니다."

당당하게 답했다.

무수한 안배를 해 놓고 돌아온 지금이다. 고작 소가주 경합 따위에서 스러지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았는가.

다만, 무공에서 앞선다고 쉽사리 가주가 될 수 있다면 누가 이 고생을 하겠는가.

무림맹주도 그렇고 단천가주도 그렇다. 결국은 지지 세력이 필요한 법임을 안다.

"당숙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백 당숙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가늠할 차례다.

"명 공자가 내 삼 수를 막으면 그때 생각해 보지."

이는 그가 나에게 충분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오늘 생각하셔야 될 겁니다."

그리 말하며 검을 그러쥐었다. 내 당돌함에 그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뭐, 나쁘진 않군."

여백 당숙이 호응하듯 기수식을 취했다.

"나는 원래 학이 놈이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았거든."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찾은 이유다.

* * *

안휘성을 주름잡는 단천검가는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가문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자, 가주다.

단천가주는 가문의 구심점이자 하나의 축으로 가문을 지탱하는 존재라 할 것이다.

두 번째가 바로 단천검가의 장로들로 구성된 원로원이다.

강호에서 농담처럼 떠도는 격언이 바로 '늙었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라는 말이니, 원로원이야 말로 그 증명이라 할 것이다.

칼부림이 난무하는 강호 무림에서 늙을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가 비장의 한 수가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요, 더불어 대부분의 정종무공은 세월과 함께 그 화후를 더해 가기에 그렇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호위대다. 방여백이 호위대장으로 있는 바로 그 단천 호위대 말이다.

호위대는 가문 내 가장 많은 수의 무인들이 포섭되어 있는 조직이다.

특히 꼬장꼬장한 원로원의 장로들을 싫어하는 혈기왕성한 젊은 무인들이 모여 있는 단련의 장이라 할 것이다.

방여백이 단천가의 실질적 이인자라 평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단천가주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존재라서가 아니다.

그가 단천가 세 축 중 하나인 호위대의 대장인 것과 조화경에 달한 드높은 무공 덕이 더 크다 할 것이다.

단천가를 지탱하는 세 개의 축은 서로 견제하고 상생하며, 그로 인해 가문은 발전한다.

무가에 있어 가주의 위는 신성불가침이니,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원로원과 호위대는 항시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조직은 응당 그 수장의 성향을 따라가는 법이니.

원로원의 수장이자 장남 단천학의 스승인 일장로는 야심이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가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단천가의 안주인 백여해와 손을 잡고 단천학을 가주로 열심히 밀고 있는 중이다.

후일, 단천학을 가주로 세워 호위대에 빼앗긴 가주의 신임을 되찾고자 함이다.

반면 방여백은 가내 정치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는 무인의 본분은 수신, 정명한 마음가짐으로 무공을 단련하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학 공자가 직접 오라고 하시오.

-뭐요?

백여해와의 대화.

-도와주십시오, 당숙.

-학 공자는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데 내 도움이 왜 필요하시오?

-그것이....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일어나 보겠소.

그리고 장남 단천학과의 대화다.

저 두 일화는 가문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전설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 단천강이 여백 당숙을 곁에 두는 이유는 그의 이런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여백 당숙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단천가의 가주를 꿈꾼다면 말이다.

이미 형 단천학에게 완벽하게 기울어 있는 원로원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패인 까닭이다.

제일 쉬운 방법이야 가주의 눈에 드는 것이겠다만, 아버지는 절대 후계자 경합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내 그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다.

"자신만만해 보이니, 바로 시작하자꾸나."

단천가 제일의 완고한 검수가 말했다.

"오십시오."

평소와 다르게 그를 도발했다. 이 정도의 패기를 보여 주어야 그도 고민을 할 것 아닌가.

당연히 패기만으로는 안 된다. 그에 상응하는 실력을 선보여야 할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탓.

평소보다 경쾌한 발놀림으로 여백 당숙이 움직였다.

더 이상 나를 얕보지 않는 까닭인지, 지난 수련처럼 신법으로 내 시선을 따돌리려 들지 않는다.

그의 무공은 오롯이 검의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 심즉행(心卽行)이라 할 것이다.

들어본 적도 없는 약선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의지가 곧 내기의 순환이 되고, 내기의 순환으로 움직임을 빚어낸다.

챙! 챙! 챙!

순식간에 세 합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백 당숙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알지만,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고절한 초식들을 파훼하는 쾌감에 전율했다.

"찻!"

처음으로 그에게 검을 내질렀다.

착.

그에 호응하듯 당숙의 검이 내 검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화접목이다.

당황할 새도 없다. 이대로 두면 검을 놓치는 것을 알기에 재빨리 대응했다.

후웅!

검을 크게 휘둘렀음에도 그의 검이 여전히 내 검에 붙어 있다.

탓!

용천혈에 내기를 싣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따돌렸다 생각했거늘, 당숙은 여전히 검을 붙인 채 내 눈앞에 날아올라 있었다.

"저보다 상수(上手)를 상대로 양발을 허공에 띄우는 것은 위험하다. 알아 두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당!

다시 땅에 도착한 내 발이 그의 회축에 걸려 넘어졌다.

검수가 꼴사납게 검을 놓치는 것은 면했지만, 바닥에 나뒹굴어 버렸으니 별 차이가 없다 하겠다.

얼른 몸을 일으키자 그의 검은 이미 내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만족과 불만족. 그 사이의 감정을 느끼며 당숙에게 고개를 숙였다.

"훌륭하다."

그리 말한 여백 당숙이 제 검을 늘어뜨렸다.

"용봉회합에 다녀온 후에 단천검결의 후반부 수련에 들어가면 되겠구나."

그럼에도, 오늘은 만족하는 것이 맞겠다.

11화 내 편을 만들었다

고민을 했었다.

여백 당숙에게 공청석유 일 적을 내어줄까? 그렇다면 그가 내 편이 되지 않을까?

그는 이미 조화경에 달한 무인이니, 공청석유의 효용을 얼마나 볼지는 알 수 없으나 영약이란 다다익선 아니겠는가.

혹시 아는가.

공청석유가 조화경에서 정체되어 있는 그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지 말이다.

이 고민은 내가 회귀를 해 공청석유를 얻은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온 것이다.

"너는 왜 가주가 되고 싶으냐?"

여백 당숙이 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질문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음."

고민을 했다.

무어라 답해야 할까.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

아니면 정마대전을 막기 위해?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듣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회귀 이후 처음으로 내 깊숙한 본심을 들여다보았다.

사생아로 차별 받던 이곳에서 보란 듯이 떨치고 일어서고 싶은 마음? 없다면 거짓이리라.

단천가가 망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허망함을 막고 싶은 생각도 있다. 지난 생엔 가문을 훌쩍 떠나 버렸지만, 그 때문인지 내 마음속엔 항상 빈칸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내가 생각하는 성공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기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회귀를 예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리고 또.

복잡하고 무수한 생각들이 내 마음속을 떠다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모든 이유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회귀를 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잠자코 내 말을 듣던 여백 당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었다."

무언가 큰 시험을 넘은 듯, 긴장이 풀렸다. 그런 내 모습이 기특한지 여백 당숙이 한마디 더 보탰다.

"학 공자보단 낫구나."

이제는 알겠다.

그에게 공청석유를 줄까 말까 하는 고민은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직접 부딪치고 겪은 방여백은 공청석유 따위에 현혹되어 나를 가주로 밀어 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다.

공청석유 따위로 마음을 얻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의 마음을 얻는다면 훨씬 가치가 크다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이리 인사를 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명 공자."

물론 내 입지가 공고해지고 그와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면, 나는 그에게 공청석유 일 적을 선물할 것이다.

내가 만들어 갈 가문을 더욱 강건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천하제일인이 있다고 하여 그 가문이 천하제일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가문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인 까닭이겠다.

'당숙. 우리는 얼마나 가까워졌습니까?'

눈으로 그에게 질문을 했다.

당연히 답변은 없었다.

* * *

"가주님을 뵈러 왔네."

여인, 백여해의 뾰족한 목소리가 가주전의 입구에 울려 퍼졌다.

혹여 경을 칠까 싶어 가솔 하나가 재빠르게 답을 했다.

"안에 계십니다."

그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솔을 지나친 백여해는 가주전의 문을 벌컥 열었다.

"여보!"

백여해가 대뜸 단천강을 불렀다.

단천강이 조용히 눈짓을 하자, 가솔들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이 무슨 추태요?"

단천강이 조용히 백여해를 나무랐다.

사사로이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가솔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이리 행동하는 것은 백여해의 잘못이 분명했으니.

하지만 현재의 백여해는 그런 합리적인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명이가 학이와 같이 용봉회합에 참가 한다구요?"

대뜸 자신의 용건을 들이밀 따름이었다.

"어디서 들었소?"

"그게 사실이냐구요!"

단천강이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예. 제가 추천했습니다."

어느새 자리한 방여백이 대신 답한 것이다.

"방 대장...."

예상치 못했던 이의 등장에 그녀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특히, 그가 단천명을 밀어준다는 사실에 심사가 뒤틀렸다 할 것이다.

-그 거래, 없었던 일로 하죠.

-갑자기 무슨 말이죠? 상인에게 신용은 생명 아니었나요?

-제 신용을 버려서라도 가지고 싶은 게 생겨서 말이에요.

왜 이 시점에 양수린 그 맹랑한 계집이 생각나는지는 모를 까닭이었다.

"이것이 그대의 뜻인가요?"

여하튼, 백여해는 오랜만에 그녀가 가문에서 가장 싫어하는 존재와 꺼림칙한 대화를 해야만 했다. 아들을 둔 어미의 결심이었다.

"그만두시오."

단천강이 조곤한 목소리로 백여해를 만류했지만, 백여해는 이를 들어먹지 않았다.

"방 대장. 그대의 뜻이냐고 그러하냐고 물었어요. 얼른 대답하지 못하겠어요?"

방여백이 입을 열고자 할 때였다.

쿠쿵.

가주전 내부에 사나운 기운이 일었다.

닿기만 하여도 살갗이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롭고 거센 기운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여해도 체감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만두라 하였소."

그 기운의 중심에 있던 단천강이 가주의 위엄으로 추상같이 명했다.

"당신...."

백여해가 놀란 눈을 했다.

혼인을 한 이후 단천강이 자신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이 처음인 까닭이었다.

특히, 단천명을 그녀의 아래로 입적시킨 이후엔 사소한 다툼에도 한 수 접어주던 단천강 아니었냐는 말이다.

"이 일에 대한 언급은 허용하지 않겠소. 내가 결정한 일이오."

그리 결론을 내린 단천강이 축객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일은 백여해의 실책이라 평해야 할 것이다.

가문 내에서, 호위대가 이공자 단천명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스멀스멀 퍼져 나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 * *

같은 날.

같은 가문.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는 형제지만 그 모양새는 사뭇 달랐다.

"도련님,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하하. 저만 믿으십시오.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오겠습니다."

백여해와 장로들, 그리고 가솔들이 장남 단천학을 둘러싸 배웅하고 있었다.

원로원에 배속된 몇몇 무인은 단천학을 용봉회합이 예정된 하남성 등봉현까지 수행하기 위해 같이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명문가의 이름에 걸맞은 행색이라 할 것이다.

그 옆에서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나 혼자 말이다.

그야말로 극적인 대비라 할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운지 연신 나를 힐끔거리는 가솔들이 몇 있었으나, 추상같은 백여해의 명이 두려워 차마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닌 척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가주님의 명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훌쩍 출발해 저런 흉한 꼴을 보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아버지의 의중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익숙한 인영.

"늦었다."

가문 내에서 백여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단천가의 호위대장이자 내 당숙 되시는 방여백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배웅도 해 주십니까?"

"뭐, 제자가 가는 길 정도는 지켜봐 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가 처음으로 나를 그리 언급했다. 무공을 배우는 입장이니, 특별할 것 없는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방여백의 시선이 형의 무리에 닿았다. 분명 저쪽에 훨씬 많은 이가 모여 있거늘, 그들이 모두 나와 여백 당숙을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안면 가득 화색을 띄고 있던 단천학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는 것이 통쾌하다.

"명 공자도 수행원이 좀 필요한가? 애들 좀 붙여 줄까?"

방여백의 힘이면 내게 수행원 몇을 붙여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이 또한 공부 아니겠습니까."

"역시, 학 공자보다 네가 낫구나."

단순히 여백 당숙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하남으로 가는 길까지, 남 몰래 챙길 것이 있으니. 홀로 움직여야 편한 까닭이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이가 있었으니.

"방 대장. 방금 무어라 말했나요?"

뾰족한 백여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살벌해지려는 찰나, 시기적절하게 가주 단천강이 등장했다.

그의 존재감이 어수선하던 단천가의 연무장에 침묵을 가져왔다.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은 백여해도 가주의 등장에는 도리가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가주 단천강의 무심한 시선이 우리 모두를 스윽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단천학에게 향했다가, 나를 향했다.

원로들을 향했다가, 여백 당숙에게 향했다.

그리곤 한마디.

"몸 성히 다녀오거라."

그것이 끝이었다.

가주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 양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아버지의 뜻이 조금 이해될 것도 같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경공을 펼쳐 내달렸다.

무리가 많은 단천학은 멀뚱히 그런 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손을 흔들어 주는 여백 당숙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 * *

명개 시절, 장장 오 년 이상을 영약에 대한 정보에만 집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든 명개 시절이든, 아니 어쩌면 고금을 통틀어 보아도 나만큼 영약의 자생처를 많이 암기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미 발견된 영약이 자라던 곳을 구태여 기억하는 이는 없는 까닭이다.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수풀이 무성하지만 그다지 높지 않은, 동네의 야산 둔덕 같은 곳을 살폈다.

"오, 있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다.

땅을 조금 파내자 녀석이 그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백년하수오.

지금 내게는 보양식 정도라 봐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안다.

이 녀석을 팔면 일가족이 일 년은 풍족히 먹고 남을 돈을 받아 낼 수 있기에 그렇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나 영약이 자란다는 상식과 다르게 시가지 주변에서 발견된 것이라 한동안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한동안 죄다 괭이와 삽을 들고 다녔다고.

이 백년하수오 때문에 유발된 다툼으로 조용하던 마을에서 마을 주민 몇몇이 명을 달리했으니, 중간에 가로챈다는 죄책감 따위는 없다. 어찌 보면 이 또한 누군가를 살린 선행이리라.

툭툭.

대충 하수오에 뭍은 흙을 털어 내고.

와그작.

백년하수오를 씹었다.

텁텁하면서도 청량한 약재의 맛이 인상적이다.

통상 영약을 섭취함에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고작 백년짜리 하수오라 해도 그렇다.

하지만 약선심결에 입공한 나에게 이는 의미가 없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미 공청석유로 터를 다져 놓은 데다, 공청석유조차 무리 없이 소화하는 약선심결의 효능은 어지간한 영약은 그냥 소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단공에 접어든 내가 조심스럽게 섭취해야 하는 건 공청석유 이상 되는 녀석들밖에 없는 것이다.

공청석유에 준하거나 그 이상의 영성을 지닌 영약은 손에 꼽을 정도다.

참고로, 용봉회합이 이루어지는 하남성 등봉현에 도착하기 전에 그런 녀석 하나를 구할 계획도 마련되어 있다.

삼 단공에 입문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자... 이번엔 그걸 챙길 차례인가."

명개 시절에 내 머릿속에 욱여넣은 정보들을 떠올렸다.

내 오성과 기억력이 뛰어난 것이야 자명한 사실이었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과정이라 하겠다.

이 근처에는 장보도의 표식지가 있다.

내 시선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가문에서 지급되는 보급 병장기인 철검이 매여 있다.

나쁜 검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썩 좋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녀석이다.

"이 참에 더 좋은 녀석으로 바꿔야지?"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명필이라 불릴 정도가 된다면 이미 훌륭한 붓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던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검수에게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좋은 검을 패용하는 것일 터다.

오늘, 훌륭한 검수에 한 발 다가가야겠다.

12화 천공(天工)의 유산

강호 무림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를 좋게 보자면 각양각색의 성취를 이룬 이들이 많다는 뜻이요, 나쁘게 보자면 이상한 놈들이 참으로 많다는 뜻이 된다.

통상, 강호에서 기연이라 칭할 만한 사건들의 절반은 이 기인이사라는 인간들로 인해 발생한다 할 것이다.

참고로 나머지 절반은 은거고인(隱居古人)이라는 군상들로 인해 발생하며, 극소수의 확률로 신비문파라는 녀석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쯤인데...."

지금 내가 발을 들인 곳은 계수(界首)라는 이름의 도시다.

다소 특이한 이름을 지닌 이 도시는 안휘성과 하남성의 접경지에 위치해 있다.

계수는 하남성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안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니,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그 계수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산등성이에 도달하니 마침내 낯익은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다."

지금 내가 찾은 곳은 강호 무림에 이름을 날린 기인이사가 남긴 잔재 중 하나다.

이전 세대를 풍미했던 명장(名匠)이자 기관진식의 달인, '천공(天工)'의 유산이 숨겨져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 * *

천공의 유산이 표시된 장보도가 강호 무림에 풀리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후다.

당시 내 나이 스물 하나로, 일결 매듭에 이르러 먹거리 동냥이라는 궂은일에서 벗어난 직후라 하겠다.

일결 방도로서의 첫 임무가 바로 강호를 진동시키는 천공의 유산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었기에, 이곳을 잊을 수가 없다.

이곳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천공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아귀다툼 속에서 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는 점 때문이다. 제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 만큼, 명장 천공의 무구는 무림일절이었던 까닭이다.

혈겁 수준의 사상자가 나온 이유는 또 있다.

앞서 말했듯, 천공은 기관진식에 있어 당대 제일을 다투던 기인이었던 까닭이다.

대다수는 천공이 숨겨 둔 기관진식에 당해 목숨을 잃었고, 저들끼리 경쟁을 하다 시비가 붙어 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생기니. 그 수가 백에 달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강호 무림의 진정한 참혹함을 목격했다.

사생아니 뭐니 하면서도 단천가라는 안온한 울타리에서 살아온 단천명이, 진정한 무림을 살아가는 개방의 거지 명개로 거듭난 시점이라 하겠다.

"그 꼴을 또 볼 필요는 없겠지."

내가 딱히 협객은 아니나, 일어날 것이 확정된 혈겁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다.

더불어 이곳에 나에게 꼭 필요한 무구가 잠들어 있기도 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라 할 것이다.

부스럭부스럭.

수풀을 걷어 내자 숨겨진 동혈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에 천공의 유산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동혈에 들어서면 온갖 기관진식이 나를 맞이할 것이다. 수십의 목숨을 앗아간 천공의 작품들 말이다.

"들어가 볼까."

개방의 철칙 중 하나는 장보도의 아귀다툼에는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것이 거지의 삶이니 장보도 표식지에 숨어 있는 보물을 차지해 무엇하겠느냐는 논리였지만, 나는 그것이 개방도를 사랑했던 선대의 안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회귀를 할 생각이 없었던 명개 또한 장보도 표식지 안을 둘러본 적은 없다. 천공의 유산으로 향하는 길목은 내게도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자신 있게 발을 들일 수 있는 연유가 있다.

턱.

"엉?"

무언가 밟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였다.

파파팟.

"에?"

피할 새도 없이 사각에서 날아온 비침(飛針)들이 내 몸으로 날아들었다.

팅팅팅.

"음."

하지만 그 비침들은 내 피부를 뚫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비침을 주워 보았다. 비침의 끝에 오묘한 색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명백한 악의라 할 것이다.

"이런 식이구나."

차라리 살기를 지닌 인간의 공격이라면 어떻게든 피했을 것을, 아무런 기운 없이 살초가 뿌려지니 피하기가 쉽지 않다.

유달리 많은 무인이 이곳에서 명을 달리한 이유라 할 것이다.

이 악랄한 천공의 유산을 돌파하고, 그 끝에 도달해 보물을 차지한 이는 소림의 나한승이었다.

-어떻게 그 기관진식들을 무사히 돌파했소?

-아미타불.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을 뿐 답을 하지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목각 같은 피부와 불쑥 솟은 태양혈.

그 나한승은 금강불괴를 이루어 도검불침에 이른 상승의 고수였던 것이다.

"이런 방식이면 쉽겠네."

그리도 나 또한.

약선심결 이 단공 금체에 이른 몸이라 하겠다.

* * *

"이거 진짜 순 미친놈 아니야?"

기인이사들이 기꺼워해 마지않는 칭찬이 내 입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천공이라는 미친 작자의 지독한 악의에 질려 버린 까닭이다.

혈흔 하나 없이 멀쩡한 몸이지만, 내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독비침으로 시작해 사각에서 찔러오는 창, 천장에서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 땅이 꺼지며 모습을 드러낸 수십의 검첨, 몸을 찢어발길 기세로 휘둘러지는 몸통만 한 대부(大斧) 등을 가까스로 피하거나 온몸으로 얻어맞으면서 천공의 유산을 돌파한 결과였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절정의 경지임에도 도검불침을 이루지 못했다면 열일곱 번 정도 죽었을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이겼소. 망할 영감."

천공이 진법의 달인이었다면 훨씬 힘들 뻔했다.

무극 일원 태극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칠성 팔괘 구궁 십전.

한 번에 발음하기도 힘든 저 복잡한 것들이 어우러진 신기는 나로서도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관진식은 결국 물리력의 영역인 바, 도검불침을 이룬 몸 덕분에 쉽지는 않았지만 능히 돌파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가 끝인가?"

나는 유산이 안배된 동혈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천장에 박힌 야명주의 빛을 오롯이 받고 있는 상서로운 검 하나가 몸통만 한 바위에 꽂혀 있었다.

저 검이다. 내가 이곳에 걸음한 이유 말이다.

검에 가까이 다가갔다.

혹여 마지막 회심의 기관진식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휴."

검에 손을 얹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스르릉.

분명 바위에 깊숙이 꽂혀 있는 검이었거늘, 검집에서 꺼내 듯 부드럽게 검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듦과 동시에, 나는 바위에 새겨진 천공의 전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의 실력이 어떠한가.

필체에 그의 고고한 자신감과 비대한 자아가 읽혔다.

'미친놈.'

천공의 유산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떠올랐다.

강호 무림에 천공의 유산에 관한 장보도가 뿌려지도록 안배한 것이 바로 천공 본인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개방에서 집요한 조사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자신의 유작(遺作)을 선보이기 위해 수십의 목숨을 앗아 갈 계획을 세운 사람이니, 아무리 기인이사라지만 좋게 보기는 힘들었다.

그의 검을 내가 얻은 참이니, 직접 답을 주어야겠다.

천공의 검을 휘리릭 휘두르자 검기를 싣지 않았음에도 바위가 썰리며 내가 원하는 글귀가 새겨졌다.

[不像样.]

불상양. 형편없다는 뜻이다.

명장에 기관진식의 달인이라 하겠지만, 당신은 인간으로선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인정할 것은 해야겠지.

내 검 놀림에 따라 불상양 밑으로 글귀가 더해진다.

[但.]

단.

[劍秀.]

그럼에도 당신의 검이 최고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다시 한번 검을 살폈다.

오묘한 붉은색이 감도는 고고한 검날이 명검의 자태를 품고 있다.

그리고 검파(劍把)에 새겨진 검의 이름, 단천(斷天).

일찍이 자신이 만든 다른 검들조차 베어 버린다는 뜻으로, 천공 스스로 단천이라 이름 붙인 검이다.

단천검은 그야말로 천공의 최후이자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그 검의 이름이 우리 가문의 성씨와 같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하겠다.

검을 챙겼지만 끝이 아니다.

"야명주가 얼마나 비싼데."

명검 단천을 비추고 있던 야명주로 시선이 향했다.

주먹만 한 크기에 광량도 상당한 야명주니, 장원 한 채의 가격은 너끈히 넘을 것이다.

야명주를 뽑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댔다.

덜컥.

"음."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렸다. 이 짓도 자주 겪으니 익숙하다.

"젠장."

꽤 많은 광량을 뿜어내던 야명주의 불빛이 십분지 일로 약해졌다. 좋지 않은 징조다.

동혈에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느낌이다.

야명주의 광원이 약해지자 그제야 강한 빛에 가려져 있던 천장의 글귀가 읽혔다.

-이것은 짐작 못했겠지? 내 유작을 파훼한 그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라.

그에게 있어 진정한 유작은 단천검이 아니라, 이 비동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쿠구구구궁.

동혈이 불안하게 진동했다. 저 스스로 움직이는 각종 기관진식을 만든 인간이니, 이 동혈을 무너뜨리는 것조차 그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야명주에 다시 힘을 주었지만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뽑히지 않았다. 야명주를 얻으려다가 이곳에 매장당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 진짜 개같은 새끼."

기인이사 천공에게 극찬을 선사한 나는 야명주를 포기하고 재빠르게 동혈에서 대피했다. 다행히 압사는 면할 수 있었다.

* * *

일찍이 공청석유를 얻었던 하남의 천중산이 단천가에서 편도로 사흘거리다.

천중산은 하남성의 동남쪽에 위치해 안휘성에서 가까운 편이지만 하남성 등봉현의 숭산은 하남의 중심보다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니, 족히 닷새는 걸릴 거리라 하겠다.

물론 이는 일류 시절의 단천명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이야기다.

절정지경에 이른 데다 이 단공 금체를 이룬 나의 경신공은 이전보다 표홀했으며, 지치는 법이 잘 없었다.

덕분에 한나절 만에 안휘와 하남의 접경지인 계수에 도착해 단천검을 얻은 나였으니, 아직 시간은 여유롭다 할 것이다.

덕분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진로를 틀었다.

등봉현으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의 관도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이쪽인가?"

이번에 내가 목적지로 정해 둔 곳은 하남의 정남쪽, 호북과 하남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대산맥, 대별산이다.

그곳에서 나는 약선심결의 삼 단공에 입문할 것인즉, 용봉회합에서 내 앞에 설 수 있는 후기지수는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다.

* * *

강호 무림에서 죽음에 이르는 다양한 이유가 있으나, 가장 많은 경우는 병장기에 의한 신체 손상이라 할 것이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 하여 민초와 다를 것 없다.

병장기가 뱃속을 한번 휘젓고 나가거나,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킨다면 사망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통상 강호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무기가 검과 도였으니, 소위 '칼침 맞았다'라고 표현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칼침 다음의 사망 요인은 무엇이겠는가?

천수를 누리고 죽는 자연사였다면 좋겠으나, 비정강호는 그리 아름다운 곳이 되지 못한다.

정답은 바로 중독사다.

강호 무림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독물을 구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까닭이다.

당장에 극독인 청린액만 하여도 흑시의 초입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았는가.

고고한 구파의 도인들이나 명문세가의 무인들은 그 유명한 사천당가 정도를 제외하면 독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도의 무인을 제외한 대다수가 독을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거리를 스치며 보는 낭인이라던지, 정사지간의 무인, 악랄한 사파놈들은 물론 무자비한 마교놈들까지. 품속에 병장기와 함께 독 하나쯤은 품고 사는 것이 일상이라 할 것이다.

왜 갑자기 독을 이야기하냐면, 이번에 내가 대별산에서 이룰 삼 단공과 큰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일 단공으로 공청석유를 사용해 신체의 터를 다졌다. 개체(改體)다.

이 단공으로 청린액을 사용해 도검불침의 신체를 이루어 냈다. 금체(金體)라 부른다.

삼 단공의 이름은 불침(不侵).

강호를 살아가는 모두가 '불침'이라는 말을 들으면 전설로 회자되는 그 경지를 상기할 것이다.

맞다.

삼 단공 불침은, '만독불침' 할 때의 그 불침이다.

13화 삼 단공 불침(不侵)

주과(朱果).

신선의 과일이라 불리는 이 영약은 민가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다.

'사과를 닮은 열매가 사람 키만 한 나무에 단 하나만 열려 있다면, 그것이 곧 신선의 과일'이라는 민담을 모르는 이는 없다.

주과의 이야기가 여타의 전설과 다른 점이라면, 주과는 실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극히 드문 데다 매우 진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대부분의 인간은 평생을 걸쳐도 한 번을 볼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천혜(天惠).

강호 무림을 보살피는 하늘의 은혜가 있기에, 자연에서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영약이 생겨난다.

일찍이 내가 취한 공청석유를 제외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급으로 엮이는 영약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소위 '지고'나 '절세'라는 수식어가 붙는 녀석들 말이다.

만년화리의 내단, 만년설삼, 만년하수오, 만년지극혈보 등의 소위 만년이라 통칭되는 긴 세월 속에 그 영성을 더해 간 녀석들이 그렇다.

미타성수, 음양생사과, 자천감로수, 자령신과 등의 제 특색이 강력한 영약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 수많은 자연 영약 중, 가장 유명하고 비싼 영약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주과가 꼽힐 것이라 확신한다.

'고귀한'이 아니고 '비싼'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는 법이니, 주과가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영약이 된 까닭이 있다.

주과는 무공을 일절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 섭취할 수 있는 영약이다. '지고'나 '절세'라는 이름이 붙은 영약치고는 참으로 기이한 특색이라 할 것이다.

그 효용도 대단하다.

주과를 섭취한 이는 무병장수를 한다.

더불어 미용에 특효를 지닌다.

주과를 섭취한 이는 백옥 같은 피부를 얻고, 그와 더불어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변모한다.

노화 또한 대폭 늦어져 이순(耳順)에 이르러도 주름살이 생기지 않는다 알려져 있다.

기실, 주과가 이처럼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에는 미용과 노화 억제가 크게 한몫을 한 것이다.

때문에 주과는 영약으로서는 정말 드물게, 강호 무림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주로 소비된다.

바로 황궁과 관이다.

고관대작 혹은 그 부인과 여식들이 꿈에 바라 마지않는 영약이 바로 이 주과인 것이다.

응당 권력과 금력은 비례하는 법이니, 강호인들이 차마 치를 수 없는 값으로 고관대작들이 주과를 쓸어갔다.

예로부터 무병장수는 모든 권력자의 꿈이었으며, 아름다운 외모와 늙지 않는 것은 모든 여인의 꿈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쯤일 건데."

나는 그 주과를 찾으러 왔다. 돈으로만 값을 매긴다면, 공청석유의 열 배에 달한다는 그 녀석을 말이다.

팔면 떼돈을 벌겠지만, 이번엔 돈을 벌 수는 없을 것 같다. 주과는 단 하나의 열매만 맺는 것이 특징이기에 그렇다.

약선심결 삼 단공 불침(不侵).

주과를 취해 삼 단공에 들어설 것이다.

그런데.

"아, 왜 안 보이냐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대별산 깊숙한 산골짜기였다.

* * *

-독과 병은 무엇이 다른가? 통상 병에 걸린다는 것은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본 도는 깨달았음이다.

약선은 약간은 편집증적인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일 단공에서 천하제일에 닿을 수 있는 광활한 터를 다지고, 이 단공에 이르러 금강불괴에 도달하고서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긴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삼 단공을 이룸에 있어 목적을 둔 것은 불침(不侵)이었다.

-본 도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주과의 효능인 '무병'이니라.

모든 병을 이겨 낸다는 것은 곧 독을 이겨 낸다는 것과 그 기전이 같음이니, 역시나 본 도의 생각이 옳았음이다.

범인이 섭취해도 무병에 도달할 수 있는 주과를 무공을 익힌 무인이 섭취한다. 거기에 약선심결을 더하니, 진정한 의미의 불침이 완성된다 했다.

-불침은 완전무결해야 하느니라.

약선은 삼 단공을 명명함에 있어 일부러 만독불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만독'이라는 단어를 제외함으로써 불침에 무결성을 더한 것이다.

-다만, 연자여. 명심할지어다. 돈으로 주과는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니, 직접 찾아나서야 할 것인 즉.

주과를 발견한다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으니....

* * *

대별산은 지독히도 넓다. 하남과 호북을 가로지르는 거대 산맥의 중턱에 자리한 산이니 오죽하겠는가.

명개 시절 세세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막상 지금에 와서 이곳을 찾으니 주과를 바로 찾아낼 수는 없었다. 산이란 곳은 마땅한 표식지가 없어 그곳이 그곳처럼 보이는 까닭이었다.

차라리 눈으로 봉우리의 개수를 셀 수 있었던 천중산이 편했다.

다행인 점은, 주과는 붉은 열매의 형태를 가진 녀석이라는 점이다.

하수오와 같이 땅에 묻혀 있는 녀석이었다면 수년에 걸쳐서도 혼자서는 절대 찾지 못했으리라.

꼬박 한 나절을 경공을 펼치며 산속을 헤맨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찾았다!"

저 붉은색은 분명 주과다.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주과에 다가갔다. 고작 사람의 키와 비슷한 크기의 나무에 열린 주먹만 한 이 붉은 열매가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은 것이다.

"키이잇!"

그리고 약선의 예상대로, 주과를 지키는 수호신이 있었다.

-주과를 발견한다면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화혈독사(化血毒蛇)이니라.

화혈독사. 누구든 이 뱀에게 물리면 한 줌의 핏물이 된다 알려진, 극독을 지닌 영물이다.

강호 무림에 알려진 독사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녀석이다.

독에 조예가 깊은 사천당가나 오독문에서 보았다면 군침을 흘렸을 테지만, 나에겐 그렇게 매력적인 녀석은 아니라 하겠다.

화혈독사는 영물들 중 유독 주과를 사랑하는 녀석이었으니, 주과를 마치 제 알처럼 품는다고 알려져 있다.

"치이잇!"

화혈독사가 머리를 세우고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견제했다. 제 것을 뺏으려는 침략자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이 녀석, 사나운 것 보소."

내가 웃는 것도 잠시.

콰작.

"어?"

어느새 화혈독사가 내 팔을 물고 있었다. 여백 당숙의 신형조차 쫓게 된 내 안법이 전혀 따라붙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영물이라 할 것이다.

"치이잇!"

다만, 이 단공 금체를 이루어 금강불괴에 견주는 것이 내 신체 아닌가. 화혈독사의 독니가 내 피부를 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화혈독사가 애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치이익.

"윽."

불쾌한 소리와 함께 화혈독사의 송곳니가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화혈독사의 송곳니에서 뿜어져 나온 독이 금체에 이른 내 피부를 녹이고 뚫어 낸 것이다.

약선이 우려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도검불침을 이루어 냈다 하여도, 독에는 방비가 되지 않는 것이다. 피부를 통해서도 이 정도라면, 섭취를 했을 때 어찌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리라.

화혈독사의 독이 내 피를 타고 도는 것이 느껴진다.

"어우. 진짜 아프네."

물론, 내가 미쳤다거나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은 아니다.

-화혈독사를 발견하거든 물려라.

처음엔 이 무슨 미친 소린가 싶었다.

-미친 소리가 아닐지니, 연자는 본 도를 믿어 주기를 바라노라. 화혈독사에게 물린 후 주과를 취해 삼 단공에 이르면 더 완벽한 불침이 완성될 것이니라.

이어지는 말에 오해가 해소되었지만 말이다.

어쩌겠는가.

내가 약선을 믿어야지.

핑.

그 짧은 새 평형감각이 망가진 듯 머릿속이 어지럽다.

"와, 이거 까닥하면 진짜 죽겠는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뻔하고, 청린액에 빠져 죽을 뻔하고, 화혈독사에 물려 죽을 뻔하고.

약선심결. 참으로 익히기 쉽지 않은 무공이었다.

서걱.

단천검을 빼들어 화혈독사의 얼굴과 몸통을 분리했다. 내 몸에 독을 주입하는 것에 온 신경이 쏠린 녀석이었으니, 그 목을 베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혈독사의 비늘은 어지간한 검을 튕겨 낼 정도로 단단하다 알려져 있지만, 천공의 걸작을 이겨 낼 순 없었던 덕분이었다.

얼른 손을 뻗어 주과를 쥐고 베어 물었다.

와삭.

사과와 비슷한 식감에 맛이다. 아쉬운 지점은, 주과의 맛을 음미할 여유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털썩.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기를 잠시.

주과의 힘을 입은 약선심결이 화혈독사의 독조차 집어삼키며 내 몸을 대주천했다.

잠시 후, 백회에서 검은색 연기가 산화하여 흩어졌다. 화혈독사의 독이 오롯이 배출된 것이다.

일 단공 개체에 이어 이 단공 금체를. 그리고 마침내 삼 단공 불침을 이루어 냈다.

남들은 희대의 성취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시작이라 할 것이다.

약선은 삼 단공의 완성을 이리 평했다.

공청석유와 주과라는 희대의 영약들을 취해서 이제야 겨우 출발선에 섰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수신(修身)의 단계에 도달했으니, 이제 제가(齊家)로 나아가야 한다고 약선은 말했다.

다행이라면 사 단공의 완성이 곧 제가라 했으니, 그 길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겠다.

"이제 시작이다."

약선의 전언을 되새기듯 따라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출발선은 남들과 비교할 때 아득히 앞선 곳에 그어져 있으니.

용봉회합에서 나에 비견할 수 있는 후기지수는 없을 것이다.

똥폼을 잡고 있기도 잠시.

꼬르륵.

배가 고파왔다.

만사불여튼튼을 주창하며 삼 단공을 안배한 약선이지만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약선심결의 대성에 이르러도 아사(餓死)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흠."

내가 베어 버린 화혈독사가 눈에 들어왔다.

"구워 먹어도 되지 않을까?"

개방의 거지에게 뱀 고기는 그야말로 특식이라 할 수 있다. 내 이제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지만, 그 맛을 어찌 모르겠는가.

대부분의 거지는 독사는 피하지만, 불침을 이루어 낸 나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맛있겠지?"

입에 침이 고였다.

타닥타닥.

화혈독사가 맛있게 익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화혈독사는 진짜 맛이 좋았다. 그냥 불에 구웠음에도 이제껏 먹어 온 여타 산해진미를 능가하는 풍미라 하겠다.

'세상에 못 먹는 음식은 없다. 다만, 단 한 번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주장하던 강호 어느 기인이사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틀렸다.

나는 여러 번 먹을 수 있다.

* * *

하남성 등봉현 숭산 아래의 작은 마을.

용봉회합장에 도착하기에 앞서 고급 주루에 들렀다.

단천검을 얻고 주과를 취하며 시간을 보냈음에도, 삼 단공에 이른 성취 덕분인지 경신공에 탄력이 붙어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까닭이었다.

여비를 두둑하게 받았기에 부담은 없었다.

"캬!"

주루에서 홀로 검남춘을 홀짝이며 백주의 위대함을 찬양하길 잠시.

웅성웅성.

주루에서 연신 나를 힐끔거리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주루의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들의 속삭임이 유독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연유를 알고 있다.

바로 나, 단천명의 외모 때문이라 하겠다.

외모란 것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분명 지금 이 외모는 나 단천명의 것이 맞다. 지금 당장 단천가로 돌아가면 여백 당숙이나 아버지가 나를 알아볼 것이라 확신한다.

헌데 섭취한 주과의 공능 덕인지,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그래, 차마 양심상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알게 모르게 이목구비가 조화로워지고, 피부가 백옥처럼 맑아졌다.

분명 그게 전부다. 확실하다.

헌데 그 변화로 말미암아 썩 잘생기지도, 썩 못나지도 않은 단천명이 아니라 수려한 미남 단천명이 탄생해 버렸다.

동경에 비친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놈 참 잘생겼구나'라고 생각해 버렸으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 하겠다.

여하튼, 회귀 전후를 통틀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중인들의 반응을 속으로 즐기며 홀로 술을 홀짝이길 잠시.

"저기, 소협. 합석 괜찮을까요?"

아름다운 미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여성이 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휘오화라 불리는 양수린과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는, 수려한 외모다.

주변을 둘러보니 고급 주루가 이미 만석이었다. 나 홀로 하나의 상을 차지하고 있기 조금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음."

잠시 고민하던 내 시선에 아름다운 여인의 뒤에서 뚱하니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 얼굴, 낯이 익었다.

"남궁 형 아니시오?"

저 치는 분명 안휘성 제일의 무가라 평가받는 무림 오대세가의 일좌, 남궁가의 장남 남궁탄이 분명했다. 그 또한 용봉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걸음한 것이리라.

"형장은 누군데 본인을 아시오?"

그가 미간을 구기며 나를 골똘히 바라보며 물었다.

"남궁 형, 기억 안 나시오? 나 단천가의 명이오."

으레 명문가들은 속내야 어떻든 어느 정도의 교분을 유지하기 마련이었으니, 안휘를 주름잡는 명문가인 남궁가와 단천가의 직계들이 안면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를 뚫어져라 보던 그가 말했다.

"단천명? 아, 그 사생아 말이오?"

그래. 안다.

명문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이들이 다소 예의 없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헌데, 남궁탄 저놈의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니 방금 발언이 결코 실언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겠다.

저놈, 나를 공격한 것이다.

출신 배경이라는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말이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소."

못 들은 척,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두 분, 편히 앉으시오."

"고맙소. 사생아라도 윗사람에 대한 예의는 배우셨구려."

남궁탄이 나를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런 무례를 참고 넘기기 위해 돌아온 세월이 아니다.

아무래도 저 새끼에게 큰 가르침을 선사해 주어야겠다.

14화 인연을 맺었다

'강호인명록 일천선'은 개방에서 보유하고 있는 보물 중 수위를 다투는 것이다.

강호의 각지에서 정보를 물어온 거지 놈들과 그것을 일일이 취합하고 정리해 책자로 만들어 낸 본타 거지 놈들의 피땀이 서린, 그야말로 개방 거지들의 총체라 할 만한 것이 바로 이 '강호인명록 일천선'인 것이다.

모든 개방도가 힘을 합쳐 만든 것이기에, 강호인명록 일천선은 모든 개방 거지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삼결 이상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문파의 보물을 모든 방도들과 공유하니, 그야말로 개방답다고 평할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강호인명록 일천선에는 아무나 등재되지 않는다. 강호 무림에서 중요도가 있는 이들을 엄선하는 과정을 거친다.

통상, 강호에서 인물의 중요도라 함은 무공의 수위에 달려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때문에 강호인명록 일천선에 든 인물들은 대다수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물의 중요도라는 것이 무공의 고하로만 결정되지 않는 것 또한 강호 무림이다.

해당 인물의 영향력, 명성, 배경, 금력 또한 인물의 중요도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덕분에 내 눈앞에서 실실 쪼개고 있는 저 남궁탄이라는 놈도 강호인명록 일천선에 기재될 수 있었다. 고작 절정지경에 불과함에도 말이다.

이유야 말해 무엇하랴.

그가 바로 강호 무림을 주름잡는 오대세가의 일좌, 남궁가의 장자인 까닭이다. 놈에겐 과분한 영광이라 하겠다.

하지만 모든 영광 뒤에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호인명록 일천선에 등재되었다는 영광 뒤에는, 개방 거지들에게 그의 비밀이 낱낱이 파헤쳐졌다는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명개 시절 강호인명록 일천선의 방대한 내용을 모두 암기한 몸이다.

맞다.

나는 남궁탄에 대한 비밀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비밀뿐만 아니라, 앞으로 가지게 될 비밀까지도 말이다.

너는, 나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 * *

"단천가의 명 공자께서는 아주 헌앙하시군요. 소녀, 개안을 했답니다."

내게 합석을 청한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으레 강호에서 인사차 오고 가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외모에 대한 칭찬은 낯설다. 주과의 힘 덕분이라 하겠다.

"소저께서도 아름다우시오."

"호호호, 감사해요."

마찬가지의 덕담을 건네주었다.

여인의 외모는 실로 아름다웠으니, 내 말에는 진심이 담길 수 있었다.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할 것이다.

남궁탄, 저 인간이 끼어들기 전까진 말이다.

"그래. 못 본 사이에 많이 번지르르해졌구나. 단천가는 사생아에 대한 대우도 나쁘지 않나 보다. 우리 남궁과는 사뭇 다르구나."

저기서 말을 끝맺었다면,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해 줄 것을.

"아, 가문이 근본이 없어서 그런가?"

피식 웃으며 덧댄 말은 명백히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새끼가?'

남궁탄 저놈은 지금 이곳이 호랑이의 아가리라는 사실도 모르고 나대고 있다고 평할 것이다.

모르면 맞으면서 배워야 한다. 강호 무림의 법도가 그러하다.

내 오늘 그에게 참된 교육을 선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겨났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소?"

무턱대고 나를 공격하는 남궁탄의 시선이 힐끔 제 옆에 착석한 여인을 향했다.

데면데면하게 안면만 있는 내게 그가 이토록 공격적인 연유를 짐작하겠다. 질투심 때문이리라.

"명 공자, 미안해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합석을 요청한 여인이 내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리곤 엄한 눈길로 남궁탄을 바라보며 꾸짖었다.

"탄 공. 이분께 사과하세요."

여인의 태도를 나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얼굴이 벌게진 남궁탄이 역정을 냈다.

"나보고 저 사생아 놈에게 사과하라고? 연 매의 부탁이라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소!"

그의 대답에 여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여인의 정체를 이제 알겠다.

남궁탄에게 연 매라 불린 그녀는 연세화였다.

연씨세가의 장녀로, 양수린과 같이 '안휘오화'라는 명성을 가진 여인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남궁탄과 혼약을 하게 될 여인이기도 하다.

남궁탄이라는 파락호를 만나 구설에 자주 오른 인물이다 보니, 개방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된 인물이라 기억에 남아 있다.

"제가 죄송해요. 소협께서는 기분을 풀어 주시길 간청하겠어요."

"연 매! 이러기요?"

남궁탄 저놈이 하는 모양새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지만, 내게 예를 갖춘 여인을 위해 이쯤에서 나서기로 했다.

"남궁 형."

"누가 네놈의 형이냐! 이 사생아 놈이!"

그놈의 사생아. 사생아.

이러다간 가문에서 들은 것보다 저놈의 입에서 더 많이 사생아라는 단어를 듣게 될 것 같다.

그의 비밀을 아는 입장에서 보자니, 역시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옛 성현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다 할 것이다.

"사생아라는 말을 계속하시는 것 보니, 남궁 형은 사생아를 참으로 좋아하시나 보오."

"뭐라?"

남궁탄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남궁 형께서는 직접 사생아를 만드셨소?"

내 말이 요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남궁탄의 얼굴에서 비릿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슨 소리냐?"

이놈아. 이미 늦었다.

"아이의 이름이 보자.... 그래, 백장삼이었지?"

남궁탄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이, 그래도 아이에게 남궁의 성씨 정도는 주지 그러셨소. 단천가는 그래도 나에게 단천이라는 성을 내리지 않았겠소."

받은 만큼 돌려준다.

"아, 가문이 근본이 없어서 그런가?"

주과의 힘을 입은 싱그러운 미소는 덤이라 할 것이다.

남궁탄이 딱 내 또래였을 혈기 방장한 시절, 그는 명문가의 직계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가문의 장자라는 권력을 이용해 남궁가의 시녀를 회임(懷妊)시킨 것이다.

장자의 명성에 흠이 갈까 싶어 남궁가에서는 이를 철저하게 은폐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어디 있겠나. 강호인명록 일천선에 다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가문의 장자가 시녀와 눈이 맞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개방도로 살다 보면 알게 되는 세상의 진실 중 하나다.

헌데 그렇다고 하여 그 일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남궁탄과 혼인을 약속한 연세화에게는 말이다.

연세화의 눈이 세모나게 변했다.

"탄 공,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추궁을 정면 돌파하는 대신, 남궁탄은 나를 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스릉.

"이놈! 증좌가 있느냐!"

그리 외친 남궁탄의 검첨이 나를 향했다.

"증좌도 없이 나를 모함했다면, 그 목이 온전히 붙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추상같이 말했지만, 참으로 가소롭다.

"남궁 형은 내가 사생아라는 증거가 있으시오?"

남궁탄에게 되물었다. 남궁탄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실에는 딱히 증거가 필요 없다네, 이 친구야.

* * *

이 이후에 어떤 대화가 이어지든 말로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이익!"

분노를 참지 못한 남궁탄이 내게 출수를 한 것이다.

"꺄아악!"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우리를 힐끔거리던 몇몇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비명과 다르게, 나는 담담하게 앉아 그의 검이 나를 향해 쏘아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도검불침을 이룬 까닭에, 검기조차 싣지 않은 그의 검이 두렵지 않은 까닭도 있기도 했거니와.

챙!

저 검을 대신 막아 줄 존재가 있음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그쯤 하시지요."

남궁탄의 검을 막은 사내가 정중하게 말했다.

부지불식간에 거리를 격하고 남궁탄의 검을 막아 냈으니, 그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겠다.

"네놈은 또 뭐냐!"

사내의 범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남궁탄도 섣부르게 재차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낭인(浪人)이오."

스스로를 낭인이라 소개하는 이에게서 오히려 명가의 품격이 느껴지니, 세상일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사내의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나는 이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용봉회합이 열리는 등봉현에 들렀기 때문인지, 장차 쟁쟁한 위명을 날릴 인물들을 직접 내 눈에 담으니 신기한 감정이 들었다.

"남궁 형."

남궁탄을 조금 더 혼내고 싶지만, 자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런 놈과 드잡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방금 막 생겨난 참이니 말이다.

"용봉회합에 참석하러 온 길에 다른 가문의 후기지수와 칼부림이라니, 아버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겠소."

"윽."

남궁탄이 찔끔했다.

그가 남궁가의 가주를 심각할 정도로 두려워한다는 사실 또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다.

왜 저런 개차반을 아들로 두었는지 이해 못 할 정도로, 남궁가주는 공명정대하고 엄격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으득.

남궁탄의 이가 거칠게 갈렸다.

"네놈. 두고 보자꾸나. 내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흑도의 왈패 두목이나 할 법한 대사를 던진 그가 휑하니 주루를 나서 버렸다.

눈치를 보던 연세화가 나를 힐끔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텁.

"잠시."

그녀를 붙잡았다.

내 그녀의 결혼 생활이 지독히 불행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를 친절히 대해 준 그녀를 위해 마지막 호의를 베풀었다.

"늦기 전에 정리하시오. 저놈, 그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그릇이 없는 놈이오."

그녀만 들리게 살짝 귓속말을 했다.

오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연세화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남궁탄을 쫓았다.

그녀를 더 잡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남궁탄의 검을 막아 준 이 사내와의 인연을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한 까닭이다.

"고맙소."

여전히 자리를 지키던 그에게 인사를 했다.

"별말씀을."

그의 담백한 성정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바다.

비각의 단원 시절, 스치듯 보았던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음식이 좀 많은데, 앉으시겠소?"

"사양하지 않겠소."

그와 합석을 했고, 일각 가량을 대화도 없이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캬."

"크."

검남춘을 나누어 마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원래 좋은 것은 나눠 먹을 때 그 맛이 배가되는 법이다.

그를 눈에 담았다.

"단천가의 차남인 단천명이오."

"이춘백이오. 말했다시피, 지나가던 낭인이오."

낭인(浪人) 이춘백.

후일, 낭왕(浪王)이라 불릴 절대고수다. 낭인이라는 배경에도 왕(王)의 별호를 얻었으니, 그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겠다.

후일, 정마대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이 정도겠으나, 나는 장막의 가려진 그의 정체를 조금 더 알고 있다.

낭왕 이춘백.

그의 진신 정체는 일인전승 신비문파의 전인(傳人)이었다.

그와 연을 맺을 수 있다면, 나로서도 여러모로 득이 많다 하겠다.

참고로, 기연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친다는 '신비문파의 전인'인 이춘백은 내 저점매수 전략의 최우선 대상 중 하나였다.

개똥도 약에 쓸 일이 있다고, 남궁탄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 하겠다.

"왜 끼어드셨소? 남궁가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을 터인데."

이춘백에게 물었다.

강호에 수많은 협의지사가 있음을 안다.

낭인 이춘백 또한 소싯적에 협객으로 명성을 떨친 몸이니, 그의 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방금 상황은 흑도나 사파가 무구한 양민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기실 타인이 끼어들기엔 조금 애매했다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춘백은 망설임 없이 끼어들었기에, 궁금증이 동했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조금 엿듣게 되었소. 미안하오."

"괜찮소."

그가 미안해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컸던 탓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춘백이 입을 열었다.

"...나도 사생아요. 그냥, 그뿐이었소. 남궁가의 저치가 마음에 들지 않더군."

놀란 눈으로 이춘백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생아 출신이라는 것은 명개도 미처 모르던 정보였다.

"한잔하시겠소?"

"고맙소."

그에게 검남춘을 따라 주었다.

전략을 위해 그와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대면하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짠.

"캬."

"크."

검남춘의 맛에 감탄하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그와는, 진정 좋은 친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15화 용봉회합에 참석했다

세상 어느 곳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강호 무림이야말로 참으로 불합리한 세상이라 하겠다.

누군가는 평생을 절차탁마해도 닿을까 말까 하는 절정이라는 신기원에 누군가는 약관이 되기도 전에 닿는 곳이니 말이다.

간혹 뛰어난 오성과 근골을 타고나 이립 이전에 스스로의 힘으로 절정지경에 오르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는 표본으로 잡기 애매할 정도로 지독히 낮은 확률에 불과하다.

이립 이전의 어린 나이에 절정지경에 이른 대부분은 타고난 배경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루어지는 벌모세수(伐毛洗髓)의 기연을 얻고, 수많은 영약의 도움을 받는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상승 무공서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 길을 올바로 걸을 수 있도록 체계적인 수련을 받는다.

소위 용봉(龍鳳)이라 불리는 강호의 후기지수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명문 무가의 위세는 그렇게 대를 이어 유구하게 이어진다 할 것이다.

용봉회합에 참여할 자격을 득하기 위해서는 이립 이전에 절정에 닿아야 하는 바.

결국, 용봉회합은 강호 상층부를 살아가는 후기지수들의 모임인 것이다.

* * *

"단천검가의 단천명 님. 낭인 이춘백 님. 용봉회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소정의 인증 절차를 거친 후, 용봉회합을 책임지는 소림의 나한승이 나와 이춘백을 반겨 주었다.

단천가의 연무장을 뛰어넘는 거대한 전각 안에는 이미 수십에 달하는 강호의 후기지수들이 무리 지어 모여 있었다.

분명 아직 앳됨을 벗어던지지 못한 외양이거늘, 이들 모두가 절정고수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그들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강호 유수의 명문 문파나 무가의 출신이라는 점일 터다.

"춘백 형은 나와 있도록 합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춘백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동행을 하며 친해진 이춘백과는 어느새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명이 자네도 저기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내 자리로 가라는 듯, 그가 미련 없이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곳은 나와 그다지 인연이 없는 곳이오."

맞다.

기실 단천가의 직계라는 것은 허울일 뿐, 나 또한 이춘백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소위 강호 무림에서 말하는 금줄에 해당하는 출생이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생아라는 딱지로 인해, 나는 어린 시절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벌모세수의 기연을 선사받지 못했다.

여인, 백여해의 서슬 퍼런 눈초리 때문에 내게 영약이 제공되는 일 또한 없었다.

나를 체계적으로 수련시켜 주어야 할 스승은 내 진전과 성취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삼장로였다.

그럼에도 나는 열일곱의 나이에 일류에 닿았다.

그나마 금줄을 쥐고 태어난 덕분에 얻은, 단천검결 전반부라는 상승의 무공서와 내 타고난 오성과 근골 덕분이라 하겠다.

어쩌면 여인 백여해가 나를 그토록 경계한 이유는, 저 모든 지원이 없이도 내가 열일곱에 일류라는 성취를 이루어 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오니 이방인 같군."

잠자코 있던 이춘백이 말했다.

"동감이오."

그나마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는 이가 있어 다행이라는 듯, 이춘백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때.

"이제야 왔느냐?"

익숙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찍이 도착해 안휘성 출신의 유력 후기지수들과 교분을 나누던 단천학이었다. 안휘성의 명문가, 남궁의 자제인 남궁탄도 함께였다.

"먼저 오셨소?"

내 얼굴을 확인한 단천학이 흠칫했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뭐가 말이오?"

잠시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금세 연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단천학의 뒤에서 내 얼굴에 시선을 떼지 못하며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러 소저들 덕분이었다.

"단천가 사람들은 다 미남인가 봐."

"나는 학 공자보다 저기 명 공자가 더 멋진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멋있어졌다니?"

딴에는 소근거린 그 목소리들이 내 귀에 생생히 들렸다.

까득.

남궁탄이 이를 가는 소리도 함께였다.

용봉이기 이전에 혈기 방장한 청춘남녀였으니,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라 하겠다.

소저들의 응원에 힘입어 단천학에게 싱그러운 미소를 날려 주었다.

"형님은 그새 동생의 얼굴도 까먹으셨소?"

항상 그의 준수한 외모와 싱그러운 미소가 부럽던 나였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려 했던 단천학은 상황이 신통치 않자 다른 수를 찾아냈다.

"낭인과 어울리다니, 딱 네 수준에 맞는구나."

단천학이 노골적인 시선으로 낭인의 행색을 한 이춘백을 훑어보았다.

집을 떠나와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이전의 가식이 옅어지고, 타인을 얕보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형님."

단천학을 불렀다.

내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할 것이다.

"말본새가 그게 뭐요? 어느 집안에서 배워 먹은 말버릇이 그렇소?"

"풉."

"킥."

단천학의 뒤에서 억눌린 웃음이 여럿 터져 나왔다. 이들 모두 나와 단천학이 같은 집안임을 아는 까닭이다.

내 공격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단천학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오만방자하구나. 이곳엔 너를 지켜 줄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아, 새로운 사실을 배웠소. 가르침에 감사하오. 역시 형님이시오."

그리 말하며 단천학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주변에서 재차 웃음이 터졌다.

"하! 재밌구나."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게 혈육에게 칼을 빼들 수는 없는 법이니, 단천학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저 단천학이 한때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보였으니, 그때의 단천명도 참으로 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있다 가거라."

그리 말하며 단천학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도검불침에 이른 몸인지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명심하지요."

그리 답하는 나를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본 단천학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남궁탄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지만 모른 척했다.

저리 보니 남궁탄이 단천학의 부하라도 되는 것 같다.

가문의 위세는 남궁가가 단천가를 한 수 앞선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단천학의 수완도 보통은 아니라는 뜻이겠다.

다행인지, 남궁탄의 약혼자인 연세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좋은 선택을 했기를 빈다.

"형님도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조심하시오!"

큰소리로 단천학을 배웅해 주었다.

분명 들렸을 것이건만, 그는 듣지 못한 척하며 멀어져 갔다.

'명예라.'

용봉회합에 참여할 자격을 득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평 할 것이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강호의 유력 후기지수들을 통틀어 용봉(龍鳳)이라 부르지만, 진정한 용봉은 따로 있는 까닭이다. 응당 모든 일에는 천외천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당금의 정도 무림은 오룡오봉제를 택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이곳에 자리한 수십의 후기지수 중 다섯의 남자 후기지수만이 진정한 '용'의 별호를 받을 수 있고, 다섯의 여자 후기지수만이 '봉'의 별호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 용봉회합은 삼 년 후에 열릴 것이니, 그 동안은 그 열 명의 후기지수가 강호의 진정한 동량으로 인정받는다 하겠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대다수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자라온 이들이다. 대부분이 명문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났으며, 천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다.

이립 이전에 절정지경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니 말이다.

이들 중 남녀를 다섯씩 추려 최고의 열 명을 뽑으려니, 그 경쟁이 치열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회귀 이전의 삶.

단천학은 그 오룡의 일인이 되어 실로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용봉회합이 끝나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던 그의 당당한 표정이 생생하다. 용봉회합에서 그가 쟁취한 별호는 단룡(斷龍)이었다.

그는 가주의 길을 걷는 자였으니, 용의 별호를 얻은 후 가주의 자리에 성큼 다가선 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원래도 차이가 나던 나와 더 아득한 격차를 벌려 놓았다 평하겠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를 것이다.

내가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천학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천학이 가주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 * *

열에 불과한 참된 영광의 자리.

진정한 용봉을 어떤 방법으로 뽑을 것인가.

후기지수의 역량을 비교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야 당연히 비무나 대련이겠지만, 귀하신 몸들을 모셔다 놓고 대뜸 싸움질을 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은 투기장의 맹견이 아닌 까닭이다.

비무나 대련으로 모든 것을 갈음하지 못하는 이유야 많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절정에 이른 무인들이 치열하게 싸우다 보면 다리 하나둘쯤 날아가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명가의 자제를 모아 비무를 시키고, 팔이나 다리 한 짝을 날린 다음에 '그렇게 되었소. 유감이오'라고 말하고 회합을 끝낼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나.

이곳에 참여한 모두가 절정 고수다. 모두 칼질 한 번에 상대의 목숨을 앗아 갈 능력이 있는 이들이란 뜻이다.

무릇 경쟁이란 과열을 불러오기 마련이었으니.

절정에 다다른 혈기 방장한 고수들이 최선을 다해 대련을 하는데, 사고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는 것이 멍청하다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고절한 경지의 중재자가 있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중재자가 중간에 끼어들어서는, 결국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이가 나오기 마련인 까닭이다.

때문에 정도 무림에서는 수를 내었다.

무공에 있어 정수라 할 수 있는 신법, 검격, 내력을 겨루어 종합적으로 출중한 자를 뽑는 것이다.

기실, 저 셋이 뛰어난 무인이 실제 무공도 높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거의 없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용봉을 선정하는 방식은 그러했다.

"소승이 용봉 인증의 첫 시험을 주관하도록 하겠소이다."

당대 소림의 방장인 범각대사가 나섰으니, '공식적인' 판정에 불복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라 하겠다.

법명 높은 스님답게 멋들어진 백미백염에 인자한 인상을 품은 고승이 강호 무림의 후기지수들을 둘러보았다.

"첫 번째 시험을 내리겠소이다."

웅혼한 내력을 실은 그의 목소리가 오롯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첫 번째 시험은 신법이오. 소림의 산문 입구에 동자승이 하나 있을 것이오. 그 아이에게 암구호를 일러두었으니, 그것을 듣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되겠소."

혹여 모를 편법을 방지하는 안배까지 훌륭하다 할 것이다.

"보자.... 거리가 왕복으로 이백 리쯤 되니 반시진 정도면 충분하겠지?"

후기지수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이백 리를 반시진 안에 주파를 못 하는 이에게 본인은 용봉의 이름을 줄 생각이 없으니. 반시진 안에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시험관의 직권으로 첫 번째 시험을 영점 처리하도록 하겠소이다."

범각이 중얼거리듯 한 말이지만, 웅혼한 내력이 실린 그의 목소리는 모든 후기지수에게 전달되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영점을 받는다면, 용봉의 별호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외다."

저 혼자 껄껄 웃던 소림 방장 범각의 눈썹이 움직였다.

"출발하지 않고 뭣들 하시오? 시험은 이미 시작되었음이니."

우당탕.

범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제각기 경공술을 부리나케 펼치며 전각 밖으로 내달린 까닭이었다.

"껄껄껄."

그 모습이 기꺼운 듯 범각대사가 호탕하게 웃음 지었다.

하지만.

범각의 시선은 부지런히 달려 나가는 후기지수들이 아니라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후기지수들을 담고 있었다.

나와 이춘백을 말이다.

16화 용봉회합을 제패했다 (1)

약선은 말했다.

삼 단공 불침을 완성하였을 때, 비로소 시작이라고 말이다.

시작. 출발선에 섰다는 뜻이자,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다. 약선의 말을 빌리자면, 수신(修身)이다.

공청석유 십 적을 취하고, 순도 높은 청린액에 몸을 담갔으며, 신선의 과일이라는 주과를 먹은 몸에게 시작이라 말하다니. 약선은 확실히 정상이 아닌 양반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약선을 이해한다.

약선심결이라는 희대의 심결을 창안하고 당대의 천하제일을 다투던 인물이니, 그의 눈높이가 어찌 나 같은 범부과 같겠는가.

하여튼,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엄격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가 그어 놓은 시작선이 누군가의, 아니 대다수 무림인의 종착지보다도 훌쩍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안다.

강호의 기재라 불리는 저 용봉들 중에서도 절반은 약선이 말한 시작 지점에 닿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약선의 한마디에 의기소침하여 이미 내가 이룩한 것을 폄하하기엔, 명개 시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현재의 나는 단천검결의 전반부를 익혀 절정지경에 올랐으며, 약선심결의 삼 단공에 들어섰다.

장차 천하제일에 닿기 위함이며, 무림맹주가 되기 위함이다.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있을 정마대전을 막기 위함이라 하겠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끝만 보고 달리겠는가. 과정 또한 즐기는 자가 진정한 일류 아니겠는가.

과정을 즐기기 위해선 소소한 즐거움이 필요한 법이니, 나는 오늘 이곳에서 그 소소한 즐거움을 찾을 예정이다.

용봉회합을 평정할 것이다.

강호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찬사를 만끽하리라. 그러기 위한 삼 단공이라 할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도 이는 내게 이득이 될 것이 자명하다.

역대 무림맹주들 중 용봉회합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가 대다수라는 사실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하지 않던가.

그러니 결국, 이 또한 무림맹주에 다가서는 발판이라 하겠다.

* * *

용봉들로 북적이던 전각 내부는 이미 한산했다. 모든 이가 숭산의 산문을 향해 부리나케 내달린 결과였다.

약속이나 한 듯, 장내가 텅 빌 때까지 나와 이춘백은 움직이지 않았다.

"춘백 형. 수고하시오."

"자네도."

낭왕 시절, 이춘백의 신법은 능히 강호 일절로 불렸다. 그가 이번 시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둘 것임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겠다.

그가 지금 여유를 부리는 것은, 구태여 표현하자면 가진 자의 특권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니, 단천검가의 특색 덕분이라 하겠다.

검을 주로 사용하니 남궁과 마찬가지로 검가(劍家)라 불리나, 두 가문은 다소 차이가 있다.

제왕검을 추구하는 남궁은 표홀한 신법보다 강맹한 검격의 도를 추구하는 가문이라 하겠다.

그들의 묵직한 신법은 능히 태산을 누르지만, 바람을 타기엔 다소 무겁다.

하지만 단천가의 검은 이름 그대로 단천(斷天), 하늘을 베는 것에 도(道)를 둔 가문이다.

하늘을 베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에 닿아야 하는 바, 단천가는 가볍고 표홀한 신법을 장기로 삼아 왔다.

답운보(踏雲步).

단천가의 비전 신법으로, 구름을 거니는 걸음이라 한다. 기실, 여백 당숙의 표홀함도 이 답운보에서 파생되었음을 알고 있다.

단천(斷天)을 위한 답운(踏雲)이니, 선조의 유지가 이어진 결과라 하겠다.

내가 비각의 단원으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 또한 부족하나마 이 답운보를 익힌 덕분이었다.

그 유명한 곤륜의 운룡대팔식이나 개방의 취팔선보와 비견되는 절세의 신법이니, 첫 시험에 임하는 데 있어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천심공을 운용했다.

영약을 흡수할 상황이 아니니 구태여 약선심결을 얹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전신세맥에 녹아 있는 공청석유의 잔재들이 운공을 증폭시켰다.

타동된 임독양맥을 통해 가파르게 내기가 순환한다.

약선심결의 삼 단공을 이루었음에도 지금 내 경지는 절정이다.

절정을 검기(劍氣), 초절정을 검사(劍絲), 조화경을 검강(劍罡)으로 갈음하는 현 무림의 체계를 생각하면 이는 틀리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무공의 경지라는 것이 어디 그리 무 자르듯 썩둑 잘리겠는가.

적어도 먼 거리를 내달리는 신법에 있어 지금 내 성취는 초절정 고수를 넘어 능히 조화경의 고수들과도 비견할 만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공청석유와 약선심결의 효용 덕분이라 하겠다.

구우웅.

의념에 호응하듯 내력이 용천혈에 모여들었다.

"나중에 봅시다!"

팽-

내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여백 당숙이 내게 보여 주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경공을 펼쳐 전각을 벗어나려 할 때, 범각대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내 모습이 기꺼운 듯 활짝 웃어 주었다.

초절에 닿은 고수들의 심상은 여전히 헤아리기 어려웠다.

"나중에 봄세."

이춘백이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이춘백의 신형도 표홀히 사라졌다.

* * *

명개가 비각의 단원이었던 시절.

먼 거리를 내달리는 것은 그야말로 일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첩보 부대는 파발(擺撥)의 역할 또한 수행하기에, 전장과 전장 사이를 경신공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인 까닭이다.

일각의 차이로 수백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 속에서, 경신공을 펼치던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라 할 것이니, 그 간절함과 다급함 속에서 내 답운보는 깎이고 제련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배우게 된 것이 바로 내력과 체력의 분배다. 그리고 그 경험과 기억은, 여전히 나 단천명에게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지만 저 용봉들은 나와 다르다.

유구한 역사를 답습했다 해도, 결국 그 무공을 행하고 있는 것은 경험이 일천한 후기지수들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저 용봉들 중, 일각 이상의 시간을 전력을 다해 경공술을 운용해 본 이가 몇이나 있을까?

기실,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평화의 시대를 살아온 명문가의 후기지수들에겐 심법을 운용하고 초식을 연마하기에도 버거운 시간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용봉들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저들이 전력으로 경신공을 펼칠 수 있는 한계치인 것이다.

아등바등 경신공을 펼치고 있지만 그 속도는 확연히 느려졌으며, 호흡이 가쁘고 다리가 무거워 보인다. 실로 경(輕)공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하겠다.

소림방장 범각이 제시한 반시진에서 사분지 일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반시진 안에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저들은 이제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나고 폐가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리라.

'예상대로군.'

이백 리와 반시진을 제시했을 때부터 예상했다.

이 시험, 애초에 빠르게 내달리는 시험이 아니었다.

체력과 내력의 안배, 그리고 끈기와 근성을 보는 시험인 것이다.

시험 시작을 알렸을 때, 내가 구태여 저들의 틈바귀에 섞여 부리나케 달려 나가지 않은 연유이기도 했다.

적절하게 체력을 분배하느라 최속의 경신공을 펼치지 않았음에도 그들과 내 속도 차이는 현격했으니.

쌩.

수많은 후기지수가 내 등 뒤로 사라졌다.

일각이 지났음에도 빠르게 쏘아지는 내 신형을 허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후기지수들의 시선을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용봉회합에 모인 후기지수들 중 절반 이상을 제친 것 같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절반은 여전히 제 속도를 유지하며 잘 달려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강호 무림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고 할 것이다.

정마대전의 미래를 아는 나로선 이를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변의 배경이 끊임없이 변했다. 드문드문 앞서가던 용봉들이 내게 추월당했다.

나에게 억지로 따라붙으려다 제 호흡을 놓치는 후기지수도 있었고, 나를 무시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후기지수도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 중 누구도 나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 생의 단천명이 선망하고 질시하던 용봉들이, 나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나는 내 오판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음.'

문제라면 문제고 아니라면 아닌 것인데..., 피로감이 하나도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비각의 단원 시절을 생각하고 체력과 내력을 안배했기에 생긴 문제였다.

약선심결이 삼 단공에 이른 효능 덕분이다.

세맥에 녹아 있는 공청석유가 내기의 운용을 원활히 돕는다면, 주과의 효능으로 말미암아 몸에 쌓인 피로가 즉각 해독되고 있는 것 느껴졌다.

약선이 구태여 '만독불침'이 아닌 '불침'이라 명명한 연유를 확실히 알겠다.

불침은, 말 그대로 내 몸이 최상의 상태에 이르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막아 주는 것이다.

"더 빠르게 달려도 되겠는데?"

나는 반시진의 질주를 상정하고 경공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이미 일각을 넘게 달렸고, 대략 팔십 리 정도를 주파했다.

지금 상태를 봐선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치달아도 이백 리를 주파하는데 무리가 없다.

'아직 안 보이는군.'

대부분의 후기지수를 제쳤음에도 여전히 단천학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생, 용의 별호를 쟁취한 그였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쌔앵.

최고 속력으로 경신공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빠르게 변하던 풍경은 온전히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왜곡되었다.

반환점을 돌기 전에, 선두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 * *

범각대사가 내린 시험이 일각 하고도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시점.

단천학과 남궁탄은 선두 무리에서 달리고 있었다.

기실, 절정지경이라 하여 모두 같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이들이었다.

운룡대팔식, 곤륜의 태하.

취팔선보, 개방의 구호개.

암향표, 화산의 청강.

구전환영보, 아미의 여하신니 등.

모두 신법에 있어 강호 일절이라 불리는 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이들 모두 지친 기색을 숨기고 태연하게 경신공을 펼치고 있지만, 모두가 알았다.

처음과 달리 선두 무리 전체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절정에 달한 답운보를 펼치는 단천학은 구태여 튀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르며 체력을 안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 리를 더 달려 나가자 저 멀리 숭산 소림의 산문이 보였다. 마침내 반환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단천학이 고개를 돌리자 남궁탄이 시선에 들어왔다.

남궁탄은 더 이상 표정을 유지할 여력도 없는지,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호흡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남궁은 표홀한 신법을 장기로 삼는 가문이 아니었으니, 지금까지 선두 무리와 함께 달린 것만 해도 용하다 할 것이다.

"문제, 없네."

남궁탄이 짐짓 태연한 척 답했으나 그 호흡의 흐트러짐까지 숨길 순 없었다.

그때였다.

"여기 계셨소?"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단천명이었다.

분명 한참 뒤에서 허덕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말이다.

심지어 그 단천명이 쌩쌩한 기색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남궁탄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표정이었다.

"이런, 설마 벌써 지치셨소?"

단천명이 남궁탄에게 그리 물었다.

남궁탄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리라.

"흥. 지치지, 않았다!"

남궁탄이 태연한 척 외쳤지만, 단천학의 눈에도 영 아니올시다라 하겠다.

단천학의 시선이 제 이복동생을 담았다.

저토록 평온한 표정이라니.

단천학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7화 용봉회합을 제패했다 (2)

단천명과 선두 무리는 약 오 리의 거리를 함께 달렸다.

선두 무리에 합류한 새로운 인물이다. 대다수의 용봉은 단천명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신공을 펼치는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이 연신 단천명을 힐끔거렸다.

마찬가지로, 단천명 또한 그런 용봉들을 관찰하듯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 단천명이 피식 웃었다.

"먼저 가겠소. 고생들 하시오."

그 말과 동시에 단천명의 신형이 사라졌다. 극상의 경신공으로 먼 거리를 훌쩍 앞서간 까닭이었다.

쌩.

단천명은 순식간에 선두 무리의 모두를 추월하고 제일 앞을 내달렸다. 지금까지 일부러 보조를 맞춰 달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이전과 비견되지 않는 속도였다.

"...!"

단천명에게 추월당한 선두의 용봉들이 부리나케 제 속도를 높였으나, 단천명의 등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허."

"이런...."

이들 모두 진즉에 지쳐 있었던 까닭이었다.

"치잇!"

단천학과 남궁탄만이 단천명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단천명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허억. 허억."

제 역량을 넘어, 분노를 동력 삼아 무리하게 내달리던 남궁탄은 순식간에 체력이 고갈되었다. 안배에 실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고고한 자존심이 저 사생아 놈에게 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는 법이다.

"허억. 허억."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단천명은 잡히지 않았다. 점점 더 벌어지던 거리는 이윽고 시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

그 단천명의 뒤를 바짝 쫓으며 함께 사라져 버린 단천학이 괜시리 야속했다.

"허억. 허억"

홀로 남은 남궁탄의 거친 호흡만이 거칠게 허공을 울렸다.

두두두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선두를 내달리던 무리도 재빠르게 남궁탄을 추월했다.

체력 안배에 실패하는 바람에 경신공의 속도가 굼벵이처럼 느려져 버린 탓이었다.

"씨발... 허억."

그럼에도 남궁탄은 제 발을 멈추지 않았다.

명문 남궁의 자존심 때문이었으며, 자신을 물 먹이고 조소를 날리며 사라진 단천명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자존심과 분노를 동력삼아 남궁탄은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극에 이른 분노는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된다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될 것이며, 누군가는 극도로 냉정하고 차분해진다.

남궁탄은 자신이 후자의 성향을 지녔음을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거친 호흡과 다르게 차갑게 식은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남궁탄은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아직 기회는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반환점을 돌아, 단천가의 사생아 녀석은 돌아올 것이다.

"후-"

남궁탄의 걸음이 느려졌다.

자연스럽게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포기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선두 무리에서 뒤떨어졌을 뿐, 그는 여전히 꽤나 앞선 축이었다.

한 식경이 한참 남았음에도 반환점을 눈에 담았으니, 반시진 이내에 주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다.

그 얄미운 면상을 일그러뜨릴 수 있는 방도가 말이다. 차가워진 분노를 갈무리 하며 남궁탄은 기회를 노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를 향해 빠르게 내달려 오는 인영이 눈에 담겼다.

단천명이다. 그가 반환점을 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단천학마저 따돌렸는지,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잘된 일이다.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할 까닭이라 하겠다.

남궁탄과 단천명이 서로를 마주보고 달리니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자신을 지나치는 순간, 단천명의 싱긋 웃는 표정이 보였다. 저것은 명백히 자신을 비웃은 것이리라.

둘이 교차하는 순간.

남궁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의 손이 재빠르게 품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공명정대한 남궁가에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무구, 암기(暗器)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팟!

사전에 대비하고 있던 일이다. 망설임 없이 뿌린 암기가 쾌속하게 날았다.

목표는 단천명의 비복근(腓腹筋)이다.

비복근이 살짝만 상해도 경신공은커녕 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남궁탄은 잘 알고 있었다.

무리하게 경신공을 펼치다 비복근이 상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으니, 어지간한 확증이 아니고서야 그를 추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팅!

단천명의 비복근에 닿은 암기가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엥?"

남궁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해소할 수 없는 의문은 저도 모르게 남궁탄의 걸음이 멈추게 만들었다.

그렇게 남궁탄은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단천명은 이미 저만치 멀리 내달려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단천학이 멈춰 있는 남궁탄을 향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쳤다.

그 단천학의 뒤를 쫓는 것은 낭인의 행색을 한 사람이었다.

* * *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지만, 단천학은 근래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놈은 분명 그의 동생 단천명이 맞았다. 비록 친하진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지붕에서 살아 온 동생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는 우둔하지 않았다.

그런데 달라졌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분명 달라졌다.

그래.

처음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단천가에서였다.

항상 주눅 들어 있던 놈이 꼿꼿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감히 그의 앞에서 가주의 위에 뜻이 있다 선언했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단천명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절정지경에 든 자신감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막 절정에 든 후기지수가 세상에서 저 자신이 제일인 줄 아는 우를 범하는 것은 그도 익히 겪고 지나 온 일 아니던가.

헌데 용봉회합에 오니 또 달라졌다.

이번에도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놈의 외모와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뜯어보면 분명 그가 알던 단천명이 분명할진데, 이상하게 놈의 외모가 썩 근사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뭇 강호의 소저들이 자신을 향해 볼을 붉히는 일이야 흔했다만, 그의 동생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랬었다.

헌데, 소저들이 놈과 자신을 비교하며 누가 우위네 떠드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천학은 단천명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정확하게는 관심이 없었다.

동생의 무공을 봐준 적도, 함께 수련한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장로들이 항상 단천명의 무재를 평가 절하하고, 그의 무재를 극찬했으니. 본인이 훨씬 우위에 있다고 확신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확신도 흔들리고 있었다.

선두를 내달리는 단천명 놈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단천명 저놈은 내력이 화수분처럼 솟아나기라도 하는지 여유로운 기색 가득이었다.

연유를 생각하니,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단천가에서 가장 답운보에 능숙한 이가 바로 여백 당숙이었으니, 그에게 무언가 큰 가르침을 내려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어머니를 설득해서라도 방여백을 편으로 끌어들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괜찮다. 지금이라도 방여백의 가치를 깨달았으니, 늦지 않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저놈이 예상외로 날랜 것은 인정한다만, 검격과 내력은 단시일의 요행으로 벌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영약을 밥 먹듯 취해 온 자신과 가문에서 천대받고 자라온 단천명이 같을 순 없지 않겠는가.

비록 첫 번째 시험에서는 졌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은 다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화를 삭였다.

마침내 출발했던 전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진즉에 도착한 단천명이 그의 시선에 담겼다.

일 등은 단천명이다.

그리고 나는 이 등이다.

분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나쁘지 않다.

경신공으로 강호 제일을 자랑하는 곤륜이나 개방의 후기지수들을 제쳤으니, 충분히 괄목할 만한 성과라 할 것이다.

단천학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쌩.

무언가 빠른 것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언뜻 시선에 들어온 그것이 낯익다. 그가 깔보았던 낭인의 지저분한 옷자락이다.

"춘백 형, 오시었소?"

단천명이 도착한 이에게 말을 걸었다.

"명이 자네, 빠르더군."

"하하. 달음박질은 어릴 적부터 자신 있었지요."

이백 리를 쉬지 않고 주파했음에도 그들은 산보라도 다녀온 양 평온한 기색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후우-"

목적지에 도착한 단천학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온한 척을 하고 싶지만, 목구멍에서 나는 피 맛과 폐를 쥐어짜는 호흡이 그의 신색을 흐트러뜨렸다.

'젠장.'

나한승이 순위를 기록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 단천명.

이. 이춘백.

삼. 단천학.

단천학은, 삼 등이 되었다.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단천명의 시선이 껄끄러웠다.

* * *

이춘백은 원래 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문의 스승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이유로 그가 용봉회합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던 까닭이다.

처음으로 스승의 뜻을 꺾고 참여한 용봉회합이니, 구태여 이곳에서 제 역량을 뽐내느라 스승의 걱정을 배가할 생각은 없었음이다.

다만,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들이 모여든다는 용봉회합에서 그 스스로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 또한 혈기 방장한 나이 아니던가.

헌데 단천명을 만나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자신과 같이 사생아라는 멍에를 쓰고 태어난 동료였다.

자유롭게 경신공을 펼치는 단천명을 보니, 조금은 보조를 맞추고 싶어졌을 따름이었다.

다만 생각보다 단천명의 경신공이 우월한 까닭에, 그의 보조를 맞추다 보니 이춘백도 덩달아 선두 무리를 추월해 버렸다.

'이쯤만 할까.'

삼 등도 충분히 눈에 띄었다 할 것이다.

조금 앞서 달리는 이 등이 보였다.

저놈이 누군지 안다. 제 동생을 사생아라는 이유로 깔보던 못난 형이었다.

그 녀석의 모습에서 과거에 자신을 깔보던 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 등이나, 삼 등이나.'

이춘백은 도착지가 코앞에 보이는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전속의 경신공을 전개했다.

쌩.

순식간에 이 등이 되었다.

오랜만에 마음이 맞은 동생을 위한 선물이라 할 것이다.

단천학의 낭패한 시선이 이춘백의 시선에 담겼다.

만족스러웠다.

* * *

"껄껄껄. 여기까지구려. 인원이 생각보다 많으니, 본인은 흡족하오이다."

정확하게 반시진이 지나자 범각대사가 말했다.

전각 안에는 숨을 몰아쉬며 널브러져 있는 후기지수들이 한가득이었다. 대략 출발 인원의 삼분지 이 정도였다. 그 속에는 남궁탄도 있었다.

"흠. 일각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할까?"

호흡을 가다듬기 바쁘니, 대답을 하는 후기지수는 없었다.

일각이 더 흘렀다.

포기하거나 낙오한 후기지수는 없었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절정지경에 도달했음을 증명하듯, 모든 후기지수가 반환점을 돌아 온 것이다.

가쁜 숨소리가 전각 안을 가득 채웠다.

대련이나 비무가 없으니 만만하게 생각했던 후기지수들은 모두 생각을 고쳐먹었다.

용봉회합의 시험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포기한 이가 없다니. 참으로 정도 무림의 미래가 밝다 하겠소. 영점 처리는 없었던 일로 하겠소이다."

한껏 유쾌해진 범각대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일 등은 발표해야겠지?"

그리 말한 범각대사가 뚜벅뚜벅 걸었다.

그의 앞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단천명이 있었다.

단천명의 손을 잡은 범각대사가 훌쩍 날아오르자 둘은 어느새 연단 위에 서 있었다.

후기지수들과는 비교조차 불허하는 고절한 경신공이었다.

"일 등은 단천가의 차남, 명이오."

그리 말한 범각대사가 단천명의 손을 잡고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기록은 딱 한 식경이구려."

모두의 시선에 경탄과 질시가 담겼다.

연단에 올라섰기에, 단천명은 한때 선망했던 용봉들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단천명과 단천학의 시선이 얽혔다.

단천명으로선,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18화 용봉회합을 제패했다 (3)

훌륭한 병장기의 소지 여부는 무인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는가?

한때 강호 무림을 강타했던 논쟁의 주제라 하겠다.

-그깟 신외지물에 의지해서는 결단코 상승의 경지를 밟지 못할 것이오.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많은 강자가 훌륭한 병장기를 무인의 실력에 포함시키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다.

신외지물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이니, 진정한 무인의 강함은 본신의 무력에서 나온다는 주장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결국 무공이란 스스로의 몸을 단련하여 펼쳐 내는 것이니 말이다.

그 주장에 큰 힘을 실어 주는 논거도 있다.

-병장기의 효용을 이야기하는 것부터가 그대는 상승의 고수가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외다.

바로 무공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검기의 존재 때문이다.

강호 무림에서 상승의 고수란 최소 절정지경 이상을 일컬음이니, 검기를 활용하는 그들은 병장기의 질을 따질 계제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독보적인 명장 몇몇의 신물을 제외하고는, 검기의 힘을 견딜 수 있는 무구는 매우 드물다 할 것이다.

대부분의 병장기는 검기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강호의 통설이자 상식이다.

은자 한 냥짜리의 조악한 검을 든 은둔고수가 검기를 일으켜 금자 열 냥짜리 악당의 검을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이 길거리 연희패들의 주요 연극 내용 중 하나였으니 오죽하랴.

그야말로 강호 무림의 위대한 인간 찬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통칭하여 '순수파'라 부른다.

하지만 이 주제가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대척 세력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법이다.

그 대척 세력이 곧 '실리파'다.

-염병. 칼침 맞고 뒈지고 난 다음에 내 실력이 더 좋은데 저 새끼 무기가 더 좋아서 졌소! 라고 주장할 거냐?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심산에 틀어박혀서 칼만 휘두르는 놈들이라 그런가, 현실감이 없나?

-크흠.

조화경을 넘어 현경에 이른 초상승 고수의 말이었으니, 꽤나 묵직하게 강호를 강타한 말이라 하겠다.

낭설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초고수의 주장이라 알려진 말이었으나, 이는 무림맹의 첩보부대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라 하겠다.

개방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던 나는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다.

당대의 무림맹주.

그가 돌연 은퇴를 선언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마대전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거라 회자되던 초상승의 고수.

파황(破皇) 염기하.

그가 저 발언의 주인공 되시겠다.

왜 정도 무림의 구심점인 무림맹주가 천마신교의 수괴나 가질 법한 파(破)라는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역사 속 비밀로 남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논쟁과 사상투쟁이 그러하듯,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각자의 입장과 정의가 있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동시에, 강호 무림이란 원래 힘 있는 자의 주장이 곧 진실로 관철되는 곳 아니던가.

무림맹주가 '실리파'의 선봉에 섰으니, 적어도 작금의 정도 무림은 대大실리파의 시대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용봉회합도 그 거대한 흐름을 빗겨 나갈 순 없는 법이라 하겠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장삼이 썩 잘 어울리는 노도사가 등장했다.

"본 도가 바로 두 번째 시험을 주관하게 된 무당의 태청이외다."

범각대사에 이어 두 번째 시험을 책임질 인물이다.

무당의 태청진인이라 함은, 소림 방장 범각대사에 비견할 만한 존재다. 그가 곧 남존무당의 당대 장문인이니 말이다.

"두 번째 시험은 검격을 시험할 것이오. 모두 알다시피, 무구는 자신의 것을 사용하되 내공과 검기의 사용은 금할 것이외다."

자신의 무구를 사용한다는 말에 여럿 후기지수들의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대실리파의 시대.

진정한 용봉을 가리는 두 번째 시험은, 소위 말하는 장비빨을 세울 수 있는 시험이라 하겠다.

* * *

검격 시험이란 말 그대로 검에 담긴 힘을 가늠하는 시험이다.

검기를 제한하는 까닭은 다음 시험에 내력을 시험하는 단계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검기의 파괴력은 대개 내력의 양에 비례하는 법이니, 내력이 많은 자가 두 시험 모두에서 손쉽게 높은 점수를 차지하는 불합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여기 이것에 검격을 시험하면 될 것이외다."

태청진인이 가리킨 곳에는 두꺼운 철 뭉치가 놓여 있었다.

"한 자(尺) 두께의 백련정강 뭉치외다."

백련정강이라 함은, 최상급 무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강철이다. 그 단단함은 검기로도 쉽게 베어 낼 수 없다 알려져 있다.

"흠집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외다. 아, 자를 수 있다면 더 좋겠구만."

그리 말한 태청이 재밌는 농이라도 들은 듯 혼자 웃었다.

용봉회합이 시작된 이후로, 백련정강 뭉치를 통째로 베어 낸 이가 아무도 없음에 그렇다.

"첫 번째 시험 성적의 역순으로 진행할 것이니, 차례를 맞춰서 나오시오."

태청진인의 선언과 함께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내 순서가 마지막이니, 만족스럽다.

그것이 주인공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 * *

내공과 검기의 사용이 제한된 검격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무구의 질이라 이야기할 것이고 누군가는 지닌 바 용력이라 말할 것이며 누군가는 검격의 속도라 말할 것이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만, 딱 일류 수준의 답이라 할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절정지경에 오른 고수라면, 다른 답을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

내력만 많이 쌓고 검기만 죽죽 뽑아내면 절정지경인가? 일견 타당해 보이는 말이다만, 정답이라 할 수는 없다.

검기란 스스로가 쌓아 올린 무공의 총화라 봄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검기를 뽑아내기에 강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강해졌기에 검기가 허락된 것이라는 뜻이라 하겠다.

검기를 발현하기 위해 모두들 저마다의 무공을 수련한다.

무공의 형을 익히고 식을 단련한다. 그것을 체화하니, 이를 초식이라 부른다.

무공의 원리를 이해하고 내 몸에 적용하니, 이를 묘리라 부른다.

기실, 무공의 정수는 이 초식과 묘리라 할 것이다. 검기가 곧 무공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때문에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묘리라 하겠다.

내공과 검기를 제한하는 이번 시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묘리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무당의 개파 조사인 삼봉진인께서 중히 다루신 묘리이니, 이번 시험의 주관을 태청진인이 하는 연유 또한 이것이리라.

"처음은 팽가의 진후요."

"크하하! 내가 이 시험만을 기다렸소이다!"

태청진인의 호명에 거구의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팽가라 함은 남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하북의 명문가다.

그는 실로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다. 어깨가 내 머리통보다 큰 느낌이다. 저 덩치를 보아하니, 그가 왜 신법 시험에서 말석을 차지했는지 알겠다.

하지만 동시에, 저 몸집을 가지고도 이백 리를 주파했다는 뜻이니, 그가 무공을 허투루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알겠다.

"후우우-"

팽진후가 백련정강 앞에서 기수식을 취했다.

과연 절정의 도객이라, 흠잡을 곳 없는 오호단문도의 기수식이다.

그의 손에 들린 도가 영롱하다. 그 또한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명문가의 자손이니, 훌륭한 무구를 챙겨 온 것이겠다.

"차아아압!"

팽진후가 망설임 없이 백련정강을 내려쳤다. 사량발천근의 묘리고 나발이고, 그냥 무지막지한 용력으로 내려치는 모양새다.

꾸우웅!

하지만 그 결과에 모든 용봉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크하하하!"

팽진후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의 도 밑에는 우그러진 백련정강이 있었다.

음.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 힘이 충분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량발천근 시험... 아니었을지도.

* * *

시험은 계속해서 진행되었으나, 첫 순서로 나선 팽진후만큼의 위용을 보인 이는 없었다.

쩡!

"크윽."

검기의 사용이 제한되니 후기지수들의 본 실력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누군가는 백련정강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고, 누군가는 손톱만 한 실금을 냈으며.

"오오."

누군가는 날의 끝을 백련정강에 박아 넣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백련정강에 검을 박아 넣은 그들의 면면이 화려했으며, 그들의 무구가 귀물로 보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챙강!

제 무구를 깨드려 먹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크흠."

그런 이들은 태청진인의 눈치를 보며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으로 되겠느냐?"

차례를 기다리는 내게 단천학이 다가왔다. 신법 시험 이후 나를 본체만체하더니, 갑자기 자신감이 솟아난 모양새다.

그의 시선이 내 검파를 향했다.

"가문에서 내려준 검은 어쩌고 그런 후진 검을 들고 왔느냐."

천공의 비동에서 얻은 단천검의 날은 여전히 날카로웠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한 검파가 다소 낡아 있었다. 그가 갑자기 자신감이 솟아난 연유를 알겠다.

스릉.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단천학이 제 검을 꺼내 들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검날이 인상적이다. 내 부족한 식견에도 명검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정도였다.

"자고로 검이란 이런 것을 말함이지."

그의 어머니, 백여해가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얻어 준 신물이리라.

"아, 너는 이런 것을 구할 수 없었겠구나?"

제 할 말이 끝난 듯 웃음을 터트리며 단천학이 유유히 멀어졌다.

"명 공자는 참 좋은 형을 두었군."

말수가 적은 이춘백의 한마디가 나를 웃게 했다.

맞다.

나에게는 그런 지원이 없었다.

아버지 단천강은 그야말로 순수파의 선봉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용봉회합을 위해 명검을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단천학이 비웃던 내 검의 낡은 손잡이를 쥐었다.

손에 착 감기는 이 감각에 마음이 평안해진다.

"예. 동생을 빛나게 해 주니, 참 좋은 형님이지요."

단천학은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비웃던 이 검의 위용을 말이다.

천공이야말로 그 몇 없는 독보적인 명장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인물이었으니.

이 시험은 그야말로 나를 위한 무대라 하겠다.

* * *

"남궁가의 탄. 나오시오."

남궁탄의 차례가 왔다. 반시진 근처에야 가까스로 도착한 그였으니, 중간 정도의 순번이 지난 것이다.

"크흠."

콧김을 흥 하고 뿜은 그가 제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소위 말하는 어깨빵이라는 것인데, 저자에서 이를 행했다간 십중팔구 칼부림이 일어나는 몰상식한 행위다.

어깨빵을 치고 지나친 그가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 모양새를 보니 고의라는 사실을 잘 알겠다.

시험 중에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법이니, 그냥 넘어가 주었다.

스릉.

"오오오."

남궁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검을 빼들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것은 천공의 여덟 번째 검 아니오?"

장내의 많은 이가 남궁탄의 검을 알아본 까닭이다.

이미 진즉에 명검을 패용하고 시험에 임한 후기지수들은 많았지만, 지금 등장한 검은 그 격이 달랐다.

남궁가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명장 천공의 여덟 번째 검. 그것은 진정 신병이기라 칭할 수 있는 무구인 까닭이었다.

"후우우-"

백련정강 앞에서 남궁탄이 기수식을 취했다.

남궁에서 가장 유명한 창궁무애검법이 아니다.

제왕검형.

남궁의 차기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그 절세의 무공이, 형으로나마 이곳에 등장했다.

벌써 제왕검형에 입문하다니, 저 모지리 파락호 녀석이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진심이라는 뜻이다.

"흐읍!"

나무랄 데 없는 초식과 사량발천근의 묘리가 그의 검 끝에서 펼쳐졌다.

카가각!

시험을 시작한 이후,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태청진인의 흡족한 표정도 처음이다.

남궁탄의 검은, 한 자 두께의 백련정강을 절반이나 파고들어 있었다.

스릉- 착-

납검을 마무리한 남궁탄이 시선이 다시 내게 향했다.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였다.

초를 쳐서 미안하다만, 조금 가소롭게 보였다.

19화 용봉회합을 제패했다 (4)

신법과 검격은 별개의 영역이다.

신법이 빠른 자가 검격은 약할 수 있으며, 신법이 느린 자도 검격은 강할 수 있으니, 둘 사이에 큰 상관관계는 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큰 범주에서 보자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 둘 다 결국 한 명의 무인이 갈고닦는 무공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그렇다.

고강한 자는 대개 신법도 빼어나고 검격도 강맹하다는 뜻이다.

첫 시험의 중간 지점이었던 남궁탄을 지나자 후기지수들의 검격이 조금씩 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쩡!

더 이상 검을 부러뜨리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제 나름의 묘리를 활용하여 백련정강을 두드렸다는 뜻이다. 신법에서 수위권을 차지한 연유를 증명하는 자리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팽진후만큼 백련정강을 우그러뜨린 이는 없었으며, 남궁탄만큼 백련정강을 베어 낸 이도 없었다.

"단천가의 학. 나오시오."

"예."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단천학의 차례가 되었다.

나를 한껏 의식하던 남궁탄과는 다르게,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단천학이 백련정강을 마주섰다.

스릉.

천공의 여덟 번째 검이라는 남궁탄의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백 단위의 금자와 인맥을 고루 갖추어야만 구할 수 있을 명검이 자태를 뽐냈다.

"후우우-"

집중하는 단천학의 기세가 날카롭다.

약관의 그는, 완연한 절정 고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합!"

단천학의 검이 발출되었다.

그의 검은 여느 후기지수들과 달랐다.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활용한 베기가 아니라, 쾌와 척(刺)의 묘리를 더한 찌르기인 까닭이다.

찌르기야말로 검을 온전히 활용하는 방편 중 하나라 할 것이나, 지금껏 이를 행한 후기지수는 없었다.

정육면체 형태의, 한 자 두께를 넘는 백련정강을 상대로 찌르기를 행할 배포를 지닌 후기지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단천학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으니, 적어도 자신의 무공에 대한 확신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라 하겠다.

그리고.

쩌-엉!

그의 시도는 큰 성과를 냈다.

단천학의 검이 한 자의 백련정강을 그대로 관통한 것이다.

검첨이 약간 상했기에 완벽하다 할 순 없었으나, 시험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가 최고의 성과를 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훌륭하오."

태청진인이 처음으로 시험에 임한 후기지수를 칭찬하며 그 사실을 증명했다.

단천학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나를 향했다.

여태까지의 비틀린 미소와는 다르게, 왠지 내게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이라 할 것이다.

"형님답군."

처음으로,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말을 입에 담았다.

* * *

장내의 모든 후기지수가 생각할 것이다.

두 번째 시험에서 단천학이 독보적인 위용을 보이며 시험을 마감할 것이라고 말이다.

직접 백련정강을 두드려 본 입장에서 그것을 온전히 꿰뚫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릴 것이다.

후에 낭왕이라 불릴 신비문파의 전인 이춘백이 남았으며,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다.

"낭인 이춘백, 나오시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가문명에 이름만 소개되는 여타의 용봉들과 다르게 그가 낭인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가 첫 시험에서 이 등을 차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춘백이 백련정강 앞에 섰다.

스팟.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그의 검이 발출되었다.

서걱.

"...!"

흡사 나무토막이 잘리는 듯한 깔끔한 소리.

이춘백의 검이 백련정강의 귀퉁이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잘라 냈다.

"호오."

그 모습을 태청진인이 흥미로워했다.

백련정강의 중앙부를 두드린 후기지수들과 사뭇 다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후기지수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발상의 전환이라 감탄했으며, 누군가는 반칙이 아니냐며 숨죽여 속삭였다.

하지만 판단은 주관자인 태청진인이 하는 것이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는 이춘백에게 태청진인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단천가의 명. 나오시오."

드디어, 내 차례다.

* * *

천공의 비동에서 획득한 검, 단천의 검파를 손에 쉬었다. 낡은 검파의 포근한 감촉이 긴장감을 해소해 주었다.

스스로 만들어온 검조차 모두 베어 버린다는 뜻에서 단천(斷天)이라 이름 붙인 천공의 마지막 검이자, 유작이다.

천공의 포부가 진실이라면, 저 남궁탄 녀석이 든 천공의 여덟 번째 검조차 베어 버릴 명검 중의 명검이라는 뜻이다.

스릉.

단천검을 빼어들자 묘하게 붉은 기가 도는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슨 검이냐? 사생아 놈답구나."

남궁탄이 비아냥댔으나, 태청진인의 시선이 향하자 찔끔하며 얼른 제 입을 봉했다.

"후우우-"

초식은 단천검결 전반부, 단천낙뢰로 낙점이다. 상단세로 내려치는 이 초식은 단순한 만큼 힘을 집중하기엔 최고니 말이다.

기실, 단천검결의 전반부밖에 익히지 못한 내게 다른 선택지가 몇 없는 까닭도 있다.

묘리는 누차 이야기했던 사량발천근이다.

아무리 예리한 검을 쓴다 해도 순수한 완력으로 한 자 두께의 백련정강을 베어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은 천공의 유작인 단천검이다.

명검조차 베어 버릴 검중지왕이라 할 것이니.

집중력이 고조된다.

시간이 느려지고, 주변에는 오롯이 나와 백련정강만이 남았다.

결국 훌륭한 검격이란 초식과 묘리와 검의 조화 속에 있음을 안다.

"흡!"

서걱.

절제된 소리에 깔끔한 감촉이라 할 것이다.

내 검은 백련정강이 아니라 두부를 자르듯, 거침없이 공간을 갈랐다.

"...!"

장내를 소리 없는 경악이 지배했다. 그 태청진인마저 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 앞에는 동경처럼 반듯한 절삭면을 가진 두 개의 백련정강이 자리했다.

호흡을 가다듬자 남궁탄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턱이 빠질까 걱정될 정도로.

스릉- 착-

장내의 침묵을 단천검의 부드러운 납검 소리가 깨뜨렸다.

"여기까지입니다."

이날, 나는 용봉회합 최초로 전설을 만들어 냈다.

* * *

두 번째 시험이 끝나고 잠시 찾아온 휴식시간, 주변을 아우르는 공기가 달라졌다.

원래도 나와 이춘백을 향해 다가오는 이는 없었고, 지금도 없었지만 무언가 다르다.

주변의 모든 후기지수가 나와 이춘백을 의식하는 것이 느껴진다.

시기하고 견제하듯 나를 살피는 용들의 시선이 그러하고, 힐끔힐끔 얼굴을 붉히며 내 얼굴을 살피는 뭇 봉들의 시선이 그러하다.

굳이 따지자면, 봉들의 시선이 더 불편하다 할 것이다.

저러한 유형의 시선이 영 생경한 까닭이다.

물론, 이를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 평온을 가장했다.

그런 걸 신경 쓰는 티가 나면 너무 없어 보이지 않겠나.

"명이 자네, 강하더군. 이렇게 강한 줄 알았다면 그때 도와주지 않아도 될 걸 그랬네."

장내에 유일하게, 내게 질시가 섞이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춘백이 농을 건네 왔다.

"그랬다면 지금 일 등은 춘백 형일 테지요."

"푸핫."

내가 농으로 받아칠 줄 예상치 못했는지 이춘백이 웃었다. 사내답고 선이 굵은 그지만, 웃는 모습은 아이와 같았다.

"다음 시험만 잘 보면 춘백 형도 나도 용의 별호를 얻을 것 같소."

앞선 두 시험에서 우리 둘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헌데, 이춘백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네."

"...."

왠지 씁쓸해 보이는 그의 미소에 섣부르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잠시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춘백 형, 후회하지 않겠소?"

무려 용봉의 명예다. 손에 들어온 것을 놓기엔 결코 작지 않다 평하리라.

"후회할 것 같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다네."

"...그렇군."

내 답에 이춘백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춘백 정도 되는 고수가 용봉의 별호를 얻지 못했던 연유를 알겠다.

이춘백은 내가 모른다 생각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마도 그가 신비문파의 전인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으리라.

기실, 그가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리라.

약선심결을 얻기 전, 신비문파의 전인이 되고자 백방 소문을 구하고 다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 * *

"다들 푹 쉬셨는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 또한 강호인명록 일천선의 최상단에 위치한 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 제일의 지낭이라 불리는 신기자와 어깨를 견주는 이.

세상만사에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만박자라 불리는 기인이 바로 그였다.

"본인이 세 번째 시험을 책임지게 되었네. 만박자라고 하네."

참고로, 그는 기인이사 명단 중에서도 최상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라 하겠다. 대단한 쪽으로라기보단, 이상하다는 쪽으로 말이다.

천공이 명장이자 기관진식의 달인이라면, 그는 본인 스스로를 사뭇 다르게 정의했으니.

"본인의 발명품을 소개하겠네."

스스로를 '발명가'라는 괴상한 단어로 일컫는 괴짜라 하겠다.

짝짝.

만박자가 박수를 두 번 치자 장정 둘이서 낑낑대며 몸통만 한 구체를 들고나왔다.

"내력측정구라고 하네."

만박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에 불신이 서렸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그의 주된 발명품이 벽력탄류와 암기류였으니, 그와 척을 져서는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 * *

내력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측정을 위해선 단위를 알아야 하는 바, 이를 위해선 배경지식이 조금 필요하다.

무인들은 통상 내력의 단위를 갑자(甲子)라 일컫는다.

그 명칭에는 연원이 있다.

무공이 온전히 체계를 갖추기 전, 신선들의 양생술로 그 모양새를 갖추어 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천(天)과 지(地)에 두루 퍼져 있는 기운을 사람(人)이 취하니, 이를 곧 무(武)의 근본인 삼재(三才)라 했다.

무명(無名)의 대사가 삼재를 근본으로 하여 심법, 보법, 검법, 도법, 권법 등을 창안하니 이것이 곧 무공의 원형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통상 저잣거리 무공이라 칭하는 그 삼재무공이 맞다.

삼재심법으로 육십(甲子) 년을 끊임없이 운공하면 단전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내공이 쌓이는데, 통상 이를 일 갑자라 부른다.

천지의 기운은 세상에 균등하게 퍼져 있기에 기교가 섞이지 않은 삼재심법은 그 누가 운공하더라도 비슷한 축기량을 보였으니, 척도로 삼기에 이만한 것이 없었다 하겠다.

그리고 일 갑자에 이른 무인들 중,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검기라는 것을 발현했으니 이를 절정 고수라 칭했다.

당연히 이는 족히 천 년은 넘게 지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니, 작금의 심법 체계와는 다소 상이하다 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삼재심법으로 육십 년 간 축기만 하고 있겠나.

그럼에도 균등한 기준으로서 갑자라는 단위는 여전히 무림에 남았다.

여튼, 그 갑자 단위의 내력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운공을 통해 자신을 관조하면 스스로는 자신의 내력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스스로만 아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참고로, 명문무가의 비전심공인 단천심공을 꾸준히 운공한 나는 열일곱에 일 갑자에 닿았다. 괜히 명문의 비전이 아니라 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내력을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상승의 고수가 맥문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의 진기를 주입해 상대의 몸을 관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인이 행하는 운공의 경로라던가 심공의 핵심 구결이 읽힐 위험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가 있다.

상승의 무공이란 그야말로 비인부전인 바, 아무리 무림맹의 공인을 받은 이가 행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무공이 읽힐 것을 감수할 무인은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간 용봉회합에서는 내력시험을 위해 마지막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내공 대결이다.

두 무인이 서로 손을 맞잡고 내공 대결을 벌이면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문제는 있었으니.

상승의 고수가 중재한다 하더라도 경쟁이 과열되어 패자의 경맥이 뒤틀리거나 내부가 진탕되는 문제는 항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경합을 행하는 대상이 혈기 방장한 후기지수들인 까닭이라 하겠다.

하여튼 내력 측정 시험은 항상 용봉회합의 문젯거리였으니, 와중에 만박자가 처음으로 내력측정구라는 새로운 기물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방법이다.

나는 안다.

만박자가 만들어 낸 내력측정구가 추후 강호 명숙들에게 두루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하튼, 처음 보는 기물에 수군거리는 여러 용봉들을 뒤로하고 단천학이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내가 이길 것이다."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나를 경멸하는 투가 아닌 선의의 경쟁자를 대하는 느낌이라 하겠다.

"힘내시오."

그리 답해 주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는 듯, 단천학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읽혔다.

형님. 나는 공청석유에 주과를 취한 몸이라오.

차마 이렇게 말해 줄 순 없었다.

20화 용봉회합을 제패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