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시작 (1)
"...으윽."
나는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에 정신이 들었다.
"어, 뭐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수많은 별들이 수놓아진 풍경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동안 넋 놓고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어?"
생각해 보니 이런 밤하늘은 내가 살던 서울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내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디찬 길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있었고, 어디서 맞기라도 했는지 몸 곳곳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도대체 뭐지?'
서서히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이곳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길옆엔 빌딩이 아니라 울창한 숲이 있었고, 내가 누워 있는 바닥 역시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자갈길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한 여성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찾았어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메이드 차림의 미인. 붉은색의 눈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이 미인을 알고 있었다.
"에, 에드나?"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 주셨네요."
에드나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나를 바라봤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길게 늘어진 백발이 살짝 흔들렸다.
"꿈인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에드나라는 인물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하던 게임인 <내 손안의 영웅>의 육성 캐릭터 중 하나였으니까.
게임 속의 일러스트에서 봤던 모습이 딱 저랬었다. 게임 속 콘텐츠를 모두 즐겼던 내가 그녀의 모습을 잊을 리가 없었다.
"도련님, 아직 술에서 안 깨신 건가요? 꿈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잠시만 내가 도련님이라니? 무슨 소리야?"
"네? 유클리드 베네딕 도련님이시잖아요. 이름도 잊으신 건가요."
"잠, 잠깐만. 내 이름이 뭐라고?"
"유클리드 베네딕 도련님입니다."
"하아."
나는 유클리드라는 이름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유클리드 베네딕. 게임 속에서도 특히나 신기한 특징을 가지고 있던 NPC. 최고의 능력을 갖췄음에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인물.
'내가 그 유클리드라고?'
그리고, 초반부 시나리오에서 맥없이 죽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 * *
<내 손안의 영웅>은 플레이어가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영웅을 키우는 게임이다. 흥미로운 게임 스토리, 개성 있는 캐릭터들로 인기를 끌었지만, 극악한 게임 난이도로 인해 평가는 좋지 못했다.
게임의 난이도가 어려웠던 까닭은 주인공이 키우는 학생 캐릭터에 있었다. 각각의 개성은 확실하지만 그만큼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는 인물들.
잘못된 선택지 하나로 키우던 캐릭터가 악당 진영에 투신하거나 주인공을 해치려 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게임에 푹 빠졌던 나는 공략을 작성하면서까지 게임 속 요소를 파고들었고, 결국 게임의 엔딩을 모두 보았다.
'어제가 마지막으로 남은 엔딩을 본 순간이었는데.'
게임 속 인물로 빙의할 줄이야.
"꿈이 아니구나."
이제 유클리드가 된 나는 에드나와 함께 공작가에 돌아왔다. 에드나의 뒤를 따라 걷는 와중에도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누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공작가 앞에 도착했을 땐 결국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부지와 저택. 화려한 장식과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는 저택 내부.
에드나가 안내한 내 방 역시 엄청나게 호화로웠다. 현실에서 내가 살았던 방보다 몇 배는 큰 너비에, 금색으로 도배가 된 유난스러운 침대까지.
돈이 많은 공작가다운 사치였다.
방에 들어온 나는 혼자서 생각할 것이 있으니 에드나에게 잠시 나가 달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에드나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내 부탁대로 방을 나가 줬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나는 황급히 거울을 찾았다. 유클리드가 된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거울에 나타난 얼굴은 일러스트에서 묘사된 유클리드의 모습 그대로였다.
새하얀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
"진짜잖아?"
아직도 게임 속 인물이 되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바뀐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냥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게임 속엔 유클리드 말고도 비참한 인생을 타고난 인물들이 많았다. 오히려 유클리드 정도면 나쁘지 않은 처지였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한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많은 재산도 있다.
이외에도 다른 장점을 댈 수도 있겠지만.
'이 인물이 단점도 엄청 많단 말이지.'
마법 공작가의 둘째 아들이면서 제국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아르센 아카데미에서 촉망받았던 인재였다.
탁월한 마법 이해 능력 덕분에 어릴 적부터 뛰어난 마법사가 될 거라고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렇지만 큰 문제점이 있었으니.
유클리드의 체질이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극단적으로 적은 마력량.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을 하고 수련을 할수록 마력량도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유클리드의 마력량은 아무리 수련을 해도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유클리드는 다른 학생과의 격차를 느끼게 되며 점차 망가지게 된다.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유클리드는 우울증을 앓고 술에 찌든 삶을 살게 된다.
잔뜩 술에 취해 땅바닥에 누워 있었던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은 유클리드가 무력감에 빠져 있는 시기인 듯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지."
앞으로 이어질 그의 미래 또한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유클리드는 마력량이 적어서 제대로 마법을 펼칠 수 없었지만, 단번에 마법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이론에 한해서는 천재라 말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공작은 아들의 방탕한 생활을 멈추기 위해 제국 아카데미의 교원 임용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힘을 쓴다.
해박한 이론 지식을 갖고 있는 유클리드는 임용 시험을 가뿐히 통과하고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일을 시작하게 된다.
망나니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줄 알았건만.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유클리드는 온갖 사건이 터지는 이 세계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였고, 결국 초반부 시나리오에서 사망하게 된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져 왔다.
"분명히 곧 있으면."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망나니나 다름없는 꼴이지만 유클리드는 곧 제국 3대 아카데미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게 된다.
그리고 세 곳 중 무조건 피해야 하는 곳은 아르센 아카데미. 그곳은 게임 속에서 유클리드가 가게 되는 곳으로 사실상 죽음이 확정적으로 정해진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카데미가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게임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임페리오 제국 전체에 위기가 닥치게 될 테니까.
제국의 어디라고 한들,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면 결국 종말로 치닫게 될 세계다. 예정된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변수는 오직 하나, 이 게임을 클리어 한 나뿐이다.
"마법은 사용할 수 있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손 위로 마법을 펼쳐 봤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만, 몸에 각인되어 있는 기억이 내 의지를 뒷받침했다.
점차 완성되어 가던 마법. 하지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전이 취소되어 버렸다.
'역시 불가능한가.'
유클리드가 가지고 있던 체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력량이 극도로 적은 이 몸으로는 초급 마법조차도 사용할 수 없었다.
'일단 이것부터 해결해야겠지.'
마력 부족은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곧 제국에서는 온갖 사건들이 터지게 될 테니까.
초반부의 죽음을 피해 다른 아카데미로 가게 된다 하더라도 내 몸을 지킬 최소한의 힘은 필요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공작가 내에서의 입지도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까지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단은 대충 적어 놔야겠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와 깃펜을 들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지금껏 해 왔던 게임 속 지식들을 하나하나 노트에 써 내려갔다.
게임 플레이를 쉽게 만들어 주는 뛰어난 성능의 아이템과 능력, 장비.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 실행한다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일단은 아카데미 배정부터 바꿔야겠지.'
먼저 확정된 죽음을 피해야 했다. 유클리드는 아직 아카데미 교수로 배정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다음 계획을 생각하는 도중.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이윽고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
"도련님, 계십니까."
"어."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들어와."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한 남성이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성.
공작가를 총괄하는 집사 알렌일 것이다. 알렌은 나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련님,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알았어. 준비하고 갈게."
마침 상황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과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으니까.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참이었으니, 저쪽에서 불러 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알겠습니다.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공작과의 첫 대면.
지금의 몰골로 갈 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바뀐 모습을 보여 줘야 해.'
이제부턴 망나니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망나니라서 상대방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보다 주변 인식과 평판이 떨어짐에 따른 단점이 너무나 컸다.
나는 옷장에서 옷을 골랐다. 화려한 장식들이 있는 옷은 제외하고 제일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적당히 세수를 하고 머리도 다듬었다.
사람은 외형만 깔끔하게 해도 이미지가 크게 바뀌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거울을 보면서 외형을 깔끔히 다듬고 나는 다음 계획을 생각했다. 공작을 만나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도련님, 준비되셨습니까."
"잠시만."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내가 제일 많이 플레이했던 아카데미로 가야 했다. 다행히 나는 게임 속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스토리를 읽었던 사람이었다.
"지금 가지."
내가 알고 있던 공작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망나니인 유클리드로도 설득할 수 있다.
2화. 시작 (2)
나는 집사 알렌을 따라서 공작의 업무실로 들어왔다. 공작의 업무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화려한 저택 내부와 달리 업무를 위한 책상 하나뿐인 삭막한 느낌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책상에 앉아 있는 한 사람.
유클리드와 닮은 하얀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진 중년 남성.
'저 사람이 공작인가.'
아르웬 베네딕 공작이다.
베네딕 가문은 제국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마법사 가문이다.
특히 현재 베네딕가의 가주이자 유클리드의 아버지인 아르웬 베네딕은 마법사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게임 속 메인 시나리오에선 자신의 핏줄이라도 능력이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무정한 인물로 표현되었지만.
캐릭터 정보를 잘 파헤쳐 보면 사실은 누구보다도 핏줄을 아끼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표현이 서투를 뿐, 망나니로 지내던 유클리드가 교사로서 살 수 있게 도움을 준 인물이니까.
"왔느냐."
직접 마주한 아르웬 공작은 그 기운부터가 남달랐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주변의 마력 밀도가 달라진다고 했던가.'
공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때문인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등과 이마에서는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었다.
아르웬 공작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주더니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었다.
'어?'
공작의 손짓에 공간을 가득 채웠던 마력이 사라졌고, 나는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음을 느꼈다.
아르웬 공작이 손을 쓴 게 분명하다.
나는 공작을 향해 공손한 태도로 말을 전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흠."
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취하지 않았구나, 차림새도 깔끔하고.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깨달은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일단 알았다. 그것보다 네게 온 제안이 있으니 확인해 봐라."
아르웬 공작은 편지 세 장을 내게 건넸다.
각각의 편지에는 게임 속에서 보았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카데미 문양.'
아카데미 교사 시험을 통과한 유클리드에게 교수 제안이 온 것이다.
나는 책상에 놓인 편지를 하나하나 열어 봤다.
첫 번째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편지다.
상위 귀족들의 배움터라고 할 수 있는 아르센 아카데미에서 온 것이다.
아르센 아카데미.
제국 남부의 도시 아덴에 있는 아카데미다. 힘이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의 학생들이 많고 시설이나 교육 수준 또한 다른 두 아카데미에 비해 높다.
하지만.
'여긴 절대 가면 안 되지.'
NPC인 유클리드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음표 문양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편지.
아마 동부에 위치한 도시 아틀란에 있는 네리안 아카데미에서 온 제안이다. 3대 아카데미라지만 게임상에서도 네리안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알 수 있는 정보라곤 게임 후반부쯤 악마의 침공으로 인해 아카데미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뿐.
마지막으로 산맥 형태의 문양이 새겨진 편지.
북부 던전 도시 테일에 위치한 바윈 아카데미다.
평민과 용병, 이종족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로 던전 도시에 지어졌기 때문인지 호전적인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한 아카데미다. 그리고 이곳은.
'이 아카데미로 가야 해.'
내가 목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던전 도시에 세워진 데다가 종잡을 수 없는 학생들의 성향으로 인해 귀족들은 기피하는 아카데미라지만 나에겐 친숙한 곳이다.
제일 많이 플레이했던 아카데미이기도 하고, 힘을 길러야 하는 나로서는 숨겨진 장비와 능력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던전 도시 테일이 가장 좋은 행선지였다.
그리고 별종이라 불리는 학생들 사이에는 보석 같은 인재들도 숨어 있으니 최고의 선택지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르웬 공작의 허락인데.'
귀족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은 바윈 아카데미에 가기 위해선 우선 아르웬 공작을 설득해야 했다.
나는 편지를 놓고 다시 공작을 바라봤다.
"제안을 다 확인해 봤습니다."
"그래. 역시 아르센 아카데미로 가겠지? 그곳이 유망한 인재들도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니…."
"아니요. 공작님, 저는 바윈 아카데미로 가겠습니다."
"뭐라고?"
내 말을 들은 공작의 눈이 흔들렸다.
아마 아르웬 공작은 자신의 아들이 아르센 아카데미로 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공작가와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귀족으로 살아왔던 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일 테니까.
하지만 난 유클리드가 아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다."
공작의 말은 하나하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신중하게 답해야 한다. 말 하나만 잘못해도 바윈 아카데미로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긴장한 상태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최근까지 술을 마시며 방탕한 삶을 살았죠."
"그런데 그게 바윈 아카데미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마력이 없는 저는 삶의 밑바닥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어요.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며 알게 된 것도 있죠."
"음."
"아르센 아카데미 익숙한 환경이니 제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성장과는 거리가 멀어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싶습니다."
아르웬 공작은 흥미롭게 말을 듣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네가 그곳으로 간다면 어떤 성과를 보여 줄 수 있지? 바윈 아카데미에 간다는 것만으로 공작가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테지?"
"1년 안에 제 손으로 바윈 아카데미를 최고로 만들어서 명예를 회복하겠습니다."
나는 당당히 말하면서 생각했다.
'공작과의 관계는 아직까지는 유지해야 해.'
지금 나의 선택은 공작에게 실망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공작가라는 든든한 배경을 잃을 수는 없었다. 아르웬 베네딕의 아들이라는 입지는 바깥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니까.
"또 바윈 아카데미에서 마법사의 날인 '발푸르기스의 밤' 대회의 우승자를 배출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발푸르기스의 밤.
세 개의 아카데미가 한데 모여서 열리는 축제.
축제라지만 그 실상은 세 개의 아카데미가 서로 실력을 겨루는 대회다. 그리고 바윈 아카데미는 그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자를 배출한 적이 없었다.
"최근까지 망나니로 살아왔던 네가 말이냐?"
아르웬 공작은 내 대답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더욱 흥미로워졌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한번 믿어 주시죠."
"흠."
아르웬 공작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손으로 입가를 어루만지며 생각을 이어 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성공하지 못할 시, 공작가와의 연은 끝이다. 그래도 괜찮겠나?"
"네, 알고 있습니다."
"알겠다."
나는 속으로 크게 안심했다.
'휴, 다행히 성공했네.'
바윈 아카데미로 못 가면 다음 방법을 생각해야 했으니까.
"한 번 더 믿어 주겠다. 그럼 나가 봐라."
"잠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일단 바윈 아카데미로 간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다음 목적을 달성해야 할 차례였다.
"무슨 부탁이지?"
"하인 두 명을 데려가게 해 주세요."
"하인?"
전투 능력이 없는 상황이니 나를 지켜 줄 유능한 부하가 필요했다. 그리고 공작가의 하인들 중엔 출중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 둘 있었다.
"먼저 제 전속 메이드 에드나를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에드나는 전투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꼭 필요한 인재다.
"그래. 그 아이는 실력도 좋으니 괜찮겠지. 남은 한 명은 누구지?"
공작가에는 아르웬 공작도 파악하지 못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로 가문 내에서 무시를 당했던 인물.
"카인이라는 하인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 수인을? 왜지? 다른 하인들도 많을 텐데?"
"저는 그 아이면 됩니다."
"뭐, 알겠다. 카인 역시 준비가 되면 보내 주지."
"감사합니다."
나는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왔다.
* * *
"하아."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르웬 공작과의 대화에서 느낀 압박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입을 떼는 순간마다 긴장감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까.
아르웬 베네딕의 성향을 알지 못했다면 바윈 아카데미로 가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다음 문제를 해결할 순간이다.
절망적인 마력량과 저질스러운 체력, 유클리드를 절망하게 만들었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똑, 똑-
"도련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와."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에드나가 들어왔다.
에드나는 지쳐 주저앉아 있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에드나, 지금 내게 지급되는 델리가 어느 정도지?"
"지금 도련님께 책정된 돈은 3천 델리입니다."
"응?"
책정된 액수를 듣고 놀랐다.
평균적인 아르센 아카데미 교수의 월급이 1500 델리 정도라고 알고 있었으니. 나는 교수 월급의 두 배가 되는 돈을 달마다 받고 있는 셈이다.
"이것도 공작님께서 그간의 행적 때문에 금액을 줄이신 겁니다."
"이게?"
나는 그 말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 금액도 줄어든 거였다니, 그전에는 얼마나 받았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금액을 듣고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원래 사려던 걸 모두 구하고 나서도 넉넉하게 남을 금액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에드나를 바라봤다.
"에드나, 금액은 상관없으니. 내가 말한 것을 사 와 주면 좋겠어."
"어떤 걸 사 오면 될까요?"
"첫 번째로 에클리시아 꽃을 구해 와 줘."
"네? 뭐라고요?"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그리고 트롤의 피, 푸른 슬라임, 안식의 버섯도 구해 줘."
"도련님, 이 재료들은 전부 극독을 품고 있지 않나요?"
"일단 날 믿고 구해 와 줘. 최대한 많이. 그럴 수 있지?"
"일단은 알겠습니다."
에드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진 않았지만, 찝찝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후우."
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일단은 일을 맡기긴 했는데 에드나의 저 상태를 보니 걱정이 된다. 캐릭터 설정엔 유클리드를 굳게 믿는 사람이라 적혀 있었으니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에클리시아 꽃, 트롤의 피, 안식의 버섯, 푸른 슬라임.
모두 한순간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재료다. 하지만 내가 만들 아이템에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니까.
나는 아까 전 작성했던 노트를 펼쳐 봤다. 거기엔 한 가지 아이템이 적혀 있었다.
'이 아이템이라면 가능할 거야.'
게임을 할 당시에 나만이 알고 있던 히든 피스.
이것이라면 유클리드의 체질도 개선할 수 있다.
3화. 히든 피스
"언제 오려나...."
나는 의자에 앉아 에드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에드나가 나간 후 꼬박 하루를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다.
창밖엔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좀 늦네.'
괜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시간을 죽였다. 빙의를 했는데도 이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나 보다.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다.'
"도련님, 부탁하신 것들을 구해 왔습니다."
"들어와."
에드나가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가방에 들어 있던 재료를 탁자 위에 펼쳤다. 나는 에드나가 구해 온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먼저 아름다운 보라색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에클리시아 꽃.
은은한 보랏빛은 볼수록 사람들은 빠져들게 만든다.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매료의 꽃이라고 불리지만, 그 꽃잎은 사람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었다.
그다음은 갈색 액체가 담긴 열 개의 플라스크 병.
트롤의 피였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먹어선 안 되는 재료이지만, 그 특성상 연금술에선 자주 사용되는 재료였다.
밝은 빛깔을 품고 있는 것을 보니 상등품인 것이 분명했다.
다른 재료도 모두 잘 구해 왔다.
수면제 재료로 자주 활용되는 안식의 버섯과 작은 크기로 소분한 푸른 슬라임의 점액까지.
'제대로 가져왔네.'
어젯밤 에드나의 표정을 보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도련님, 이 재료들로 무엇을 하실 건가요?"
에드나는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음. 일단은 직접 보여 줄게."
"네?"
"아직 연금술 도구들 남아 있지?"
유클리드는 온갖 방법을 알아보며 자신의 체질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연금술 또한 유클리드가 찾았던 방법들 중 하나였다. 비전의 연금술 서적을 뒤지기도 하고 영약과 포션에 대한 실험을 숱하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그 시도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러니 공작가에는 아직 연금술 도구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네. 연금술은 포기하신 거 아니었나요?"
"마나량을 늘릴 방법을 찾았어."
"어떻게요?"
"어."
나는 난감해졌다.
에드나에게 게임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변명을 생각하던 중 머릿속에 떠오른 핑곗거리가 있었다.
"던전에서 가져온 문서에서 얻은 정보야. 해석을 하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됐어."
"그렇군요. 도련님은 던전을 많이 가셨으니."
마나를 잃기 전 유적지나 던전을 많이 돌아다녔던 인물이라 댈 수 있는 핑계였다.
"그래도 도련님이 포기 안 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에드나는 어딘가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 일단 에드나, 연금술 도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줘."
"알겠습니다. 도련님."
나는 에드나와 함께 방을 나갔다. 나가면서 바라본 그녀는 어젯밤보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연금술 도구가 있는 장소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있었다. 공작가의 부지가 큰 탓도 있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멀었다.
그리고.
"헉, 헉."
내 체력은 잠시 걷는 일조차도 버텨 내지 못했다. 선천적인 체질의 문제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술을 달고 살았던 몸이어서인지 체력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에드나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작가의 부지 끝에 위치한 별채. 얼마나 사용을 안 했는지 주변 잔디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에드나가 문을 열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윽.'
역시나 바깥의 모습처럼 내부 역시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퀴퀴한 먼지가 가득했고 이곳저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유클리드가 연금술을 포기하면서 건물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것 같다.
"잠시 불을 켜겠습니다."
에드나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불을 켜기 시작했다. 이내 캄캄했던 내부의 풍경이 밝혀졌다. 각종 연금술 도구와 관련 서적이 놓여 있어 마치 실험실처럼 생긴 장소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많이 쌓이긴 했지만.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한 물건을 발견했다.
'역시 있네.'
초승달과 별무늬가 그려진 검푸른 항아리.
연금술을 쓰는 데 가장 필수적인 도구라 할 수 있었다. 연금술과 관련된 대부분의 작업은 이 항아리 하나만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준비된 재료를 가리키며 에드나에게 말했다.
"에드나, 나는 지금 마나가 없으니까. 내가 말하는 대로 해 줘."
내가 직접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처음 하는 작업인지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유클리드를 보조했던 에드나라면 더 능숙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네. 도련님."
에드나는 대답을 하며 탁자에 재료를 늘어놓았다.
지금부터는 집중을 해야 했다. 하나라도 순서를 틀리면 무용지물 아니, 아주 치명적인 독극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 아이템을 발견한 것도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치할 수 없었던 보스 몬스터를 없애기 위해 독을 조합하다 우연히 만들어진 아이템. 극독의 재료를 모아 만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성능의 포션이 탄생했다.
"먼저 트롤의 피 한 병을 항아리에 가득 채워 줘."
에드나가 플라스크 병을 열어 항아리 입구로 기울였다. 이윽고 밝게 빛나는 갈색 액체가 항아리에 들어간다.
"그다음. 에클리시아 꽃잎 한 장을 넣어 줘."
"꽃잎 하나만 넣으면 되는 건가요?"
"응. 꽃잎 하나면 돼."
그녀는 보랏빛의 꽃잎을 항아리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항아리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다음 푸른 슬라임을 그대로 넣어 주고, 안식의 버섯은 반으로 잘라서 넣어 줘."
슬라임과 반으로 갈라진 안식의 버섯도 항아리로 들어갔다. 아까보다 강렬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제부터 중요한 순간이다.
"에드나, 항아리에 마나를 주입해 주겠어?"
"네."
항아리 자체에도 재료를 조합하는 데 사용되는 마나 주입 술식이 새겨져 있지만, 이 조합법엔 기존의 술식으로 주입되는 양보다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마나량이 현저히 부족한 유클리드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일은 에드나가 적임자였다.
그녀는 마족 중에서도 특출나게 마나가 많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에드나가 항아리에 두 손을 댔다. 초승달 형태의 무늬가 서서히 바뀐다. 주입되는 마나량이 많아질수록 달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마나가 50% 정도 채워지면 초승달에서 상현달로. 100%가 된다면. 상현달에서 보름달이 된다. 달의 모양에 따라 항아리의 효율은 천차만별.
그리고 내가 목표하는 것은 100%.
보름달 모양이다.
"어느 정도로 마나를 넣으면 될까요?"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부탁해."
에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마나를 주입했다.
초승달 무늬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무늬가 보름달 모양으로 변했다.
"그만. 이제 뚜껑을 닫아 줘."
대답을 듣자마자 에드나가 항아리에서 손을 떼고, 뚜껑을 닫았다.
그 순간이었다.
"어, 어?"
항아리가 큰 소리를 내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드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했다.
계속 진동을 하던 항아리는 3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항아리에 다가갔다.
"도, 도련님 위험해요."
걱정하는 에드나를 뒤로하고 나는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됐다.'
항아리에는 밝은 푸른빛의 액체가 만들어져 있었다.
게임 제작자가 이스터에그로 만들어 놓은 아이템.
신들이 마시는 음료수 넥타르의 레플리카. 넥타 포션이다.
그 효과는 아주 단순하다.
바로 아이템을 사용한 자의 체내 마나량을 늘려 주는 것.
'이 아이템을 알고 난 뒤부턴 게임이 한결 쉬워졌지.'
게임 밸런스 문제로 인해 마나량을 높이는 아이템은 시나리오 후반부에서나 획득할 수 있었고, 그 수급조차 상당히 어려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 넥타 포션은 충분한 자본만 마련되어 있다면 게임 초반부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이다.
나는 탁자에 있는 컵에 포션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컵을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다시 한번 에드나가 나를 제지했다.
"도, 도련님 위험해요. 포션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되지도 않았잖아요!"
에드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조합법이 실패했다면? 내가 알던 게임 속 지식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게다가 넥타 포션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는 상당수가 극독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그 생각 때문에 잠시 손이 멈췄다.
생사가 걸린 문제다. 지금 죽으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하지만.
'아니, 날 믿어야 해.'
어차피 게임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도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이 선택을 믿어야만 했다.
"도, 도련님!"
에드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꿀꺽 소리와 함께 포션을 모두 삼켰다.
"응?"
신의 음료를 따라 한 모조품이라서 그런 걸까? 달콤한 과즙 음료의 맛이 느껴졌다. 슬라임 점액이 들어가서 지독하고 끈적한 맛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순간이었다.
"으, 윽."
머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커다란 바늘로 내 머리를 찌르는 듯한 느낌.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눈앞이 핑 돌았다.
'뭔가 잘못된 건가?'
분명 조합법은 틀리지 않았다.
만드는 과정까지 확실했을 터인데. 게임에선 보지 못했던 증상이 내게 나타나고 있다.
숨이 가빠 온다.
엄청난 속도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지던 순간이었다.
'이 느낌은 뭐지?'
몸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살면서 경험해 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심장에서 피어오른 그 기운은 혈관을 따라 흐르는 혈액처럼 내 몸을 흐르기 시작했다.
기운을 느끼고 나자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고통 또한 덜해졌다. 서서히 머리를 압박하던 고통이 사라졌고, 심장 박동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도, 도련님 괜찮으세요?"
에드나가 옆에서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응. 괜찮아."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아까보다 한층 몸에 활기가 돌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넥타 포션이 제대로 작용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일단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포션은 제대로 조합된 것 같은데.
"에드나 잠시 나한테서 떨어져."
나는 손을 펴고 정신을 집중했다. 물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까 느껴졌던 몸속의 기운이 움직인다. 그 기운이 점차 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에드나가 놀란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본 사람처럼.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마나량을 늘릴 수 없는 체질을 타고난 유클리드에겐 불가능했던 일.
'...됐다.'
내 손 위에 커다란 물방울이 떠올라 있었다.
4화. 도서관의 정령
내가 마법을 시전하는 데 성공하자 에드나는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도련님, 마력이 늘어나셨군요."
내 손 위에서 물방울이 요동쳤다. 마법이 제대로 발현되고 있었다. 포션 덕분에 마력량이 증가한 것이다.
'휴. 다행이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상황이긴 하다. 몸속의 마력을 회복했으니까. 더불어 나는 더욱더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제대로 통한다.'
이 세계에서 게임 속 지식은 통했다. 게임 속 이스터에그였던 이 포션이 구현되었다면,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게임 정보도 활용할 수 있겠지.
"도련님, 축하드려요."
에드나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항상 무표정이었던 그녀가 이런 표정을 보여 줄 수 있었을 줄이야.
"이게 다 에드나 덕분이야 고마워."
"아니에요. 도련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죠."
에드나에겐 빈말로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재료를 구하는 것도, 마력을 주입하는 것도, 에드나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그녀가 해 줘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에드나, 내 마력이 늘어난 건 확인했지?"
"네. 확실히 마법을 쓰신 걸 봤으니까요."
"그래서 이 포션을 더 만들고 싶은데 계속 도와줄 수 있지?"
"네. 무엇을 더 도와드릴까요. 도련님."
"고마워. 그러면."
마력을 증가시키는 포션을 먹긴 했지만 마력량이 극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초급 마법을 사용할 때도 피로감이 몰려왔으니까.
그래서 에드나가 아니, 에드나의 마력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마력이 부족하거든. 에드나는 아직 마력이 남아 있지?"
"아직은 여유롭긴 해요. 그런데 마력은 왜."
자신의 미래를 알았는지 에드나의 표정이 점차 창백해져 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에드나가 도와준다고 해서 다행이야. 우리 남은 재료 다 포션으로 만들자. 에드나 너만 믿고 있어."
"...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에드나를 바라봤고, 그녀는 다시 항아리 앞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 * *
밤부터 새벽까지 에드나와 포션을 만들었다. 마력량이 많은 에드나도 중간부터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만든 포션이 30개를 넘었다. 만약 에드나의 도움이 없이 나 혼자 했다면 30일이 넘게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후."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포션을 마셨다. 두 번째라 그런가, 처음과 같은 큰 고통은 없었다. 마력량도 처음 마셨을 때만큼 늘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가 있을 때까지는 계속 포션을 마실 생각이었다.
적당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에드나와 함께 공작가 내부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제 새벽에 혼자서 초급 마법을 연습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마법 지식이 너무 부족해.'
복잡한 술식이 필요하지 않은 초급 마법까지는 어떻게든 쓸 수 있었지만, 중급 마법부터는 사정이 달랐다.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다른 상위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도련님, 여기예요. 저는 들어갈 수 없으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았어."
베네딕 가문의 도서관.
가문의 자제들과 허락받은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 마법 명가의 도서관이기에 온갖 서적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와."
도서관의 내부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건물 전체에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책장과 허공을 떠다니는 책장.
공간 자체에 마법이 적용된 것인지 도서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이 막혀 있는데도 햇볕이 비치는 것처럼 밝은 공간이었다.
'이게 판타지지.'
그 환상적인 광경에 나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이거. 반가운 분이 오셨군요."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클리드 도련님이 다시 오시다니."
"어?"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니잖아?'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의 형체는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다른 점이라면 그의 몸을 구성하는 것이 피부가 아니고 종이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책들이 한데 엮여서 인간의 형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키 또한 인간보다 두세 배는 컸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야 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둔인가?"
"네. 도서관장을 맡은 정령인 둔이죠. 꼭 처음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차츰 기억이 났다. 분명 베네딕 도서관을 관리하는 정령이 있었다. 작중 게임에서도 몇 번 마주했었지만.
'저런 생김새는 아니었는데?'
내가 알고 있던 둔의 생김새와는 달랐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정령이 존재한다. 그리고 정령의 수만큼이나 그 종류 또한 다양했다.
4원소인 불, 물, 땅, 바람 정령은 기본이며 심지어 책, 접시, 금속에도 정령이 있었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이 게임을 플레이한 나도 모든 정령을 파악하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정령들은 보통 동물이나 식물의 형태를 하고 있을 텐데....
"그것보다 도련님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여기 못 올 이유가 있나?"
"벌써 잊으신 겁니까? 1년 전에 위층의 서재에서 난동을 피우셨지 않습니까."
둔은 핀잔을 주는 것처럼 이죽거리며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종이가 한층 더 짜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저 말에 바로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유클리드라면 분명 그런 행보를 보였을 것 같으니까.
게다가 저 무례한 태도를 보니 유클리드의 권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듯했다.
둔은 종이로 된 손을 들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제쳐 두고 정말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마법 서적을 찾으러 왔다."
"도련님이 마법 서적이요? 마력도 없는 그 몸으로?"
"마력을 증가시킬 방법을 찾았다. 문제가 있나?"
"뭐 안 될 건 없죠. 제가 도와드릴까요?"
둔은 계속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이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넓은 곳에서 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으니까.
얄미운 녀석이지만 당장은 저 녀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도서관을 관리하는 녀석의 도움을 받으면 원하는 책을 찾기가 수월해질 거다.
"부탁하지."
둔은 내 말을 듣고. 책장 쪽으로 날아갔다. 녀석에게서 떨어져 나온 종이들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나도 둔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고위 마법 서적이 있는 2층 서재로 갈 줄 알았는데....
"뭐야, 왜 여기서 멈춰?"
"도련님이 지금 열람할 수 있는 곳은 이곳 1층뿐입니다."
멈춘 곳은 기초 서적밖에 없는 1층 서재였다.
눈대중으로 봐도 심화적인 내용이 담긴 책은 보이지 않았다. 기초 마법의 이해, 기초 마법의 이론.
아무리 봐도 원하는 책은 보이지 않았다.
고위 마법의 종류를 보고 싶어서 도서관을 왔더니. 정작 볼 수 있는 건 초급 난이도의 마법뿐이라니.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둔을 바라봤다.
"왜 1층밖에 둘러볼 수 없는 거지?"
"가주님의 명령이죠. 도련님에겐 제약 조건을 걸어 뒀습니다. 취한 상태로 도서관에 들어와 책을 찢고 정령과 하인에게 술병을 던지셨잖아요. 업보라 생각하시죠."
그 정도의 행패를 부렸었다니.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일단 물어보는데 그 제약 조건은 뭐지?"
"저기 보이십니까."
손 형태를 이룬 종이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엔 둥근 원 형태의 결계 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저 결계 마법을 파훼하는 것이 2층으로 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겹겹이 쌓인 투명한 막은 마치 벽처럼 견고해 보였다. 마법의 이름은 '마력 프로텍션'. 초급 마법으로는 부술 수 없는 결계 마법이다.
"그러니까. 저걸 파훼하면 된다고?"
"네, 도련님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요. 그냥 포기하시는 게 어때요?"
비아냥대는 둔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일단 1층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찬찬히 서재를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의 지식으론 결계를 부수긴 어려워.'
1층 서재라도 어떻게든 찾아보면 도움이 될 마법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대다수가 기초 서적이었지만, 다른 마법 서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류의 이해를 받지 못해 마법계에서 사장된 마법 서적이나 난해한 이론 서적도 있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한참을 둘러봐도 원하는 서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낡은 책이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유난히 낡아 있는 것도 흥미가 갔다. 하지만 더 흥미로웠던 것은 책등에 적혀 있는 낯선 이름이었다.
"이 마법은 뭐지?"
게임 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마법의 이름이었다.
'부여 마법?'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이런 마법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처음 보는 마법.
흥미가 생긴 나는 책을 펼쳐 봤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어?'
사실 어떠한 마법 서적을 읽는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유클리드가 원래 가지고 있던 특출난 재능의 수혜를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데.
'왜 이해가 되는 거야?
책에 적혀 있는 마법의 원리가 모두 이해되었다.
어떻게 마법을 써야 하는지,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마법의 근원 자체가 하나둘 머릿속에 들어왔다.
마법의 시전 속도를 빠르게 하는 법. 마법에 특성을 부여하는 법. 그 성질을 바꾸는 법까지.
나는 당장이라도 부여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유클리드의 능력인가?'
마력량을 늘릴 수 없는 최악의 체질에게 주어진 최고의 재능.
모든 마법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의 진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 마법은 바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지 저 결계를 부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만심이 아니다.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책을 덮고 그 결계 앞으로 걸어갔다.
"도련님? 벌써 도전하시려고요?"
둔은 내가 절대로 저 결계를 부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는지.
"그냥 포기하시죠. 마력이 없는 몸으로 도대체 뭘 한다고...."
나를 향한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굳이 대꾸하진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닐 테니.
그러니.
실력으로 보여 주는 게 편하다.
마침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둔. 너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네? 내기요?"
저 얄미운 정령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
"내가 저 결계를 부술 수 있을지, 없을지. 결계를 못 부수면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해 주지."
"뭐라고요?"
"대신. 내가 결계를 부수면 나랑 주종 계약을 하는 게 어때?"
둔은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곧 크게 웃기 시작했다. 종이들이 펄럭거리는 소리로 도서관이 소란스러워졌다.
"하하하. 정말입니까. 도련님? 그 말 지키셔야 할 겁니다. 정령과의 약속은 절대적이니까요."
"그래.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좋습니다. 저도 약속하지요."
둔의 답을 들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약속 꼭 지키라고."
5화. 부여 마법
둔은 도서관에서 태어난 정령이었다.
본디 정령은 태어난 장소에서 매여 있는 존재다. 서재의 책 사이에서 태어난 둔 또한 오랜 세월 동안 도서관에서 살아왔던 정령이었다.
하지만 정령들이 공간을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인간과의 계약. 주인을 찾아서 계약을 맺으면 둔도 도서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둔이 도서관장이 되기 전.
전임자들도 다 그렇게 하나둘 떠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둔은 도서관의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자신을 해방시켜 줄 주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것이. 유클리드 베네딕.
아르웬 베네딕 공작의 둘째 아들 촉망받는 인재.
둔은 유클리드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클리드는 공손했고 마법 지식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탁월한 마법 이해력까지 갖추고 있던 유클리드였기에 둔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혹시 그와 계약하면 이 도서관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둔도 유클리드가 도서관에 올 때마다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었다. 서적을 찾아 주는 것부터 마법 지식을 알려 주기까지.
하지만 그런 둔의 기대는 결국 꺾여 버렸다.
유클리드의 체질이 문제였다. 자신이 타고난 천형을 극복하지 못한 유클리드는 좌절했다. 그를 돕기 위해서 둔은 끝까지 노력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력량을 늘릴 방법을 찾지 못한 유클리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술에 빠져들게 된다.
그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클리드가 다시 도서관에 오지 않길 바랐는데.
유클리드가 다시 도서관에 왔다. 모든 걸 포기했었던 그가 다시 왔다.
'도대체 왜 다시 도서관에 온 거지?'
1년 만에 다시 만난 유클리드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모습은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술에 잔뜩 취해 공작가의 자제답지 않았던 경솔한 몸가짐.
2층 서재에서 행패를 부리고 책을 훼손하는 모습에 얼마나 실망했던지.
그렇기에 다시 찾아온 유클리드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의 그는 마력 때문에 좌절하기 전의 그 총명했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정갈한 몸가짐. 눈에는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또 기대하면 안 돼.'
유클리드의 모습을 보고 순간 기대를 품을 뻔했다. 하지만 그의 비참한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둔은 일부러 더 공격적으로 말했다.
차라리 기대를 품지 않기 위해. 그가 마법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못하게.
모진 말에 그가 마법을 포기하길 원했지만.
'둔. 너 나랑 내기 하나 할래?'
유클리드가 내기를 걸어 왔다.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만약 자신이 내기를 이기면 도서관 출입을 아예 못 하게 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기대해선 안 된다. 유클리드가 아닌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기에서 절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마법을 보기 전까지는.
* * *
둔과 대화가 끝난 후.
나는 결계를 바라봤다. 투명한 파란색 구가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중급 마법인 마력 프로텍션은 하급 마법만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부여 마법을 발견하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을 찾아서 다행이야.'
1층 서재에서 찾은 한 권의 책.
부여 마법.
누가 이 책을 작성했는지 모르겠다. 저자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알던 어떤 마법보다도 효과가 뛰어났다.
'이 마법은 미쳤어.'
게임에서도 이런 건 보지 못했다. 이 마법을 잘 활용한다면 적은 마력으로도 강력한 위력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한 마법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마법.
술식을 변형시켜 마법의 시전 시간을 단축하거나 마법이 쏘아지는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위력과 범위의 증폭까지. 충분한 마력과 복잡한 술식을 이해할 지성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가능했다.
'마법 원리를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 효과만큼이나 복잡한 술식 계산을 필요로 하는 마법이었다. 유클리드의 재능이 아니었으면 이해조차 할 수 없었겠지.
어찌 됐든 이 부여 마법 덕분에 나는 결계를 부술 방법을 찾아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결계를 겨냥했다.
하급 마법인 매직 미사일.
마법사들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기초 마법.
마력을 구의 형태로 모아 쏘아 내는 마법이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시켰다. 손가락 끝에 서서히 모인 마력이 둥근 구체를 만들어 낸다.
"뭐, 뭐야? 당신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텐데?"
둔은 내 마법을 보고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마력량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매직 미사일 정도로는 저 결계를 부술 수 없습니다."
둔은 당혹감을 애써 숨기며 내게 말을 건넸다.
저 말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매직 미사일의 위력은 기껏해야 새총을 쏘는 정도의 위력이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마법은 이제 시작이다.
손가락 끝에 최대한 마력을 모은다. 기존의 마법 술식에 새로운 술식이 더해진다. 매직 미사일이 한 점으로 압축된다. 테니스공 크기의 구체는 서서히 작아져 동전 크기가 됐다.
'여기서 하나 더.'
여기에다 한 번 더 부여 마법을 사용한다. 가속. 한 점에 모인 고밀도의 매직 미사일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력을 많이 쓰는 바람에 마법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벅찼다.
"도, 도련님."
둔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낀 모양이다.
꼬리를 내리고 나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내기는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책들은 도서관장의 특권을 사용해 열람을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마법을 거두시죠."
얼마나 당황했는지.
둔의 몸을 구성하던 종이와 책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둔, 정령과의 약속은 뭐라고 했더라?"
둔을 바라보며 최대한 미소를 지어 줬다.
나는 멈출 생각이 없다. 저 얄미운 정령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
"절, 절대적입니다."
"알면 다행이네."
검지 앞에 펼쳐진 작은 크기의 매직 미사일이다.
하지만 한 점으로 위력이 압축되고 엄청난 속도의 회전력이 더해진 덕분에 기존의 매직 미사일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나는 결계를 향해 마법을 쐈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손끝에서 매직 미사일이 날아갔다. 마법을 방출할 때의 충격으로 인해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핑 돌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미사일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봤다.
매직 미사일의 속도는 엄청났다.
손에서 쏘아져 나가자마자 쾅 하는 소리가 도서관 내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
결계가 부서진 것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둔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이다. 떨리는 목소리가 정령의 심정을 드러냈다.
나도 안간힘을 써서 주변에 있던 의자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은 마력을 끌어 쓴 까닭에 아직도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제대로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다.
'해냈다.'
마치 뚫을 수 없는 벽처럼 견고해 보였던 푸른색의 투명한 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나는 고개를 돌려 둔을 쳐다봤다. 이제 그동안의 수모를 갚아 줄 때였다.
"둔."
사람들이 제일 희열을 느끼던 순간이 어느 때인지 아는가?
게임에서 S급 아이템을 뽑았을 때?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을 때?
힘겨운 레이드에 성공했을 때?
다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특히 더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내기는 내가 이겼네?"
바로 날 무시하던 상대를 이기는 것만큼.
"내기 내용은 기억하지? 설마 정령이 잊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최고의 희열은 없다.
"...네. 도련님."
둔은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책과 종이가 서서히 붕괴되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인간 형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야. 아까와는 다르게 말이 공손해졌네?"
"...."
절대로 내기에서 질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나도 운 좋게 부여 마법의 존재를 알게 되지 못했더라면 내기를 걸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니까.
"너무 침울해하지 말라고."
망연자실해 있는 둔을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너무 침울해져서 나까지 울적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제 나와 계약을 하게 될 될 정령인데 멘탈 케어 정도는 해 줘야겠지.
"정령으로서의 대우는 해 줄게. 아까 날 무시했던 것도 없던 일로 쳐주지."
"네?"
"공작가의 자제가 그 정도 아량이 없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정말입니까?"
둔은 내 말을 듣자마자 목소리가 한층 상기됐다. 나도 미소 지으며 답해 줬다.
"당연하지."
물론 거짓말이다.
당장은 정령 계약이 중요하다. 저런 침울한 상태로 계약을 맺으면 안 좋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계약부터 하자고."
"알겠습니다."
둔이 허공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낡은 갈색 스크롤. 뒷면에는 책 무늬가 박혀 있었다. 아마도 저게 둔이 무슨 정령인지 나타내는 표식이다.
'원래라면 계약 전에 정령이 말해 주겠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약한 게 아니니.
어차피 둔이 무슨 정령인지는 알고 있었다. 책의 정령. 책의 정령은 쓰임새가 다방면으로 좋았다.
그래서 계약을 조건으로 내기를 건 거였다.
"스크롤에 먼저 도련님의 마력을 흘려 주세요."
나는 스크롤에 손을 올려 마력을 흘렸다.
다행히 계약할 정도의 마력은 남아 있었다. 스크롤이 점차 빛나기 시작한다.
"이제 저를 따라 계약문을 읊으시면 됩니다."
둔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간신히 입을 떼었다.
"정령 둔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유클리드 베네딕을 주인으로 섬긴다."
"나 유클리드 베네딕은 정령 둔을 종자로서 받아들인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크롤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스크롤에서 문자가 튀어나와 내 손목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정령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문신. 난 그 문신을 보고 미소 지었다.
"이걸로 계약은 끝입니다. 주인님."
"정말 끝난 거지?"
"네."
"그럼."
계약이 끝났으니 둔은 이제 날 거역할 수 없다.
그러니….
"일단 네 본 모습이나 드러내지 그래?"
"...."
이제야 기억이 난다.
진정한 둔의 모습이.
"이제 저의 주인이 되셨으니,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을 이루고 있던 책과 종이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감추어져 있던 정령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단안경을 쓰고 있는 갈색 다람쥐.
저런 녀석한테 비아냥을 들었다니.
살짝 자존심이 상하네.
"처음에는 왜 그런 형태를 하고 있던 거지?"
"본모습을 얕보는 녀석들이 많아서요."
"그렇긴 하겠네."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시니컬한 말투와 다르게 둔의 본 모습은 귀여운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둔, 일단 머리부터 박자."
"...에?"
"박아."
일단 주종관계부터 확실히 해야겠다.
책 정령은 앞으로 쓸 일이 많으니.
나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둔, 잘 부탁해."
6화. 파르텐의 비고 (1)
"원래 잘 마시지 않았는데. 홍차도 먹다 보니 맛있네."
나는 의자에 앉아 홍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다녀온 뒤로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도서관에 있는 마법 서적을 읽으며 마법 지식을 쌓았다.
'역시 매일 먹길 잘했네.'
넥타 포션도 빠지지 않고 마셨다.
극적인 효과는 없었지만, 꾸준히 마나량이 증가하고 있었다. 덕분에 초급마법사 정도의 마나는 갖추게 되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 정말 맛있다. 너도 홍차 마실래?"
"주, 주인님.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자신에게 저장되어 있던 책을 가져오느라 기력이 다 빠진 우리 다람쥐 정령은 탁자 위에 찹쌀떡처럼 엎어져 있었다.
마나를 아끼지 않고 능력을 사용해 책을 꺼내 주었으니 말이다. 책의 정령으로서 긴 세월을 도서관에서 살아왔던 둔은 자신이 비축하고 있는 책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어디에 있든 읽고 싶은 책을 바로 구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충성심은 또 얼마나 깊은지.
"둔 오늘도 마법 연습 좀 할까? 저녁까지 괜찮지?"
"저 이러다 죽습니다."
"무슨 소리야, 아직 마나는 충분하잖아."
수십 수백년을 도서관에 머무르는 책 정령인데, 고작 책 몇 권 꺼냈다고 지칠 리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 줬다.
"내일은 쉬려고 했는데... 오늘 조금만 더 고생하는 게 낫지 않겠어?"
"...네."
둔은 체념한 듯 대답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생각날 때마다 책을 달라 했으니 이해는 간다. 크게 부담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권의 책을 소환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인 모양이다. 오늘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만해야겠다.
그러게, 왜 까불어서 일을 키워.
"오늘은 하나만 꺼내 주면 그만할게."
"진짜입니까? 바로 당장 꺼내겠습니다."
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능력을 사용했다.
한 번 본 서적을 그대로 복사해 내는 능력이라,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나 다름없다.
나는 세 권의 마법 서적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이제 들어가서 쉬고 있어."
"네!"
둔은 쉬라는 말을 듣자마자 도망치듯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힘들었다는 건 알겠지만, 저렇게 기뻐할 정도인가.
조금의 서운함을 느끼며 나는 둔에게 건네받은 마법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막 첫 페이지가 넘어가려던 순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미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카인입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검은색 귀를 가진 수인이었다. 잔뜩 긴장한 기색의 늑대 수인, 카인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카인을 반겼다.
"잘 왔어, 카인."
"...네."
겁에 질린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왜 저렇게 긴장한 거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가?
'설마 나 때문인가?'
망나니가 변하고 있다지만, 이 저택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에드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수인은 망나니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부른 건지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어찌 됐든 이대로는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해 보인다.
우선 긴장을 풀어 줘야겠네.
"일단 차부터 마실래?"
나는 웃으며 잔에 차를 따라 카인에게 권유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긴장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카인이 차를 모두 마시고 나면 천천히 대화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도, 도련님."
카인은 내가 건넨 찻잔을 보고 더욱 공포에 떨며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부디 용서를!"
갑작스러운 카인의 행동 때문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냥 차나 마시자니까? 왜 그러는 거야?"
"지난번 다른 사용인이 도련님이 건넨 차를 마셨다고 지독한 식중독에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짓까지 저질렀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일어나."
카인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힐끔힐끔 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저 망나니가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지, 하는 표정이다.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너는 오늘부터 내 직속 하인이 될 거야. 괜찮지?"
"도련님의 시중을 들게 된 것은 영광이지만, 저보다 뛰어난 다른 하인들도 많을 텐데...."
긴장감이 옅어지진 않았지만, 동시에 어째서 자신을 택한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카인은 정말로 자신이 다른 이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도 지난 일주일 동안 정보를 수집하며 카인에 대해 얼핏 들은 것이 있었다.
'쓸모없는 수인.'
이 세계에서 차별을 받는 종족이기도 했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실수가 잦았다고 들었다.
공작가에서 쫓겨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얘기가 돌았을 정도니까.
하지만 내게 있어선 다른 누구보다 중요한 인재였다.
"아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너야, 카인. 다른 하인들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어 있던 카인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진 게 보였다.
딱히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에 카인의 능력은 필수였으니까.
"바로 갈 곳이 있으니까, 준비해 둬."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한결 표정이 풀린 카인이 목적지를 궁금해하며 물었다. 나 역시 미소를 지어 주며 답했다.
"던전을 공략하러 갈 거야."
"던전이요? 그러면 용병을 구할까요?"
던전에 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카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이 던전에 들어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내 계획은 다르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이미 용병을 고용하신 건가요?"
"던전엔 우리 둘만 들어갈 거야."
"...네?"
내 말을 들은 수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 갔다. 하얗게 질린 표정이 볼 만했다.
그런 카인에게 나는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카인, 잘해 보자 나는 너만 믿고 있어."
마법사가 필수로 가져야 하는 네 가지 아티팩트.
그중 하나가 베네딕 영지의 외곽, 글라딘 숲에 있다.
* * *
채비를 마친 나는 에드나, 카인과 함께 공작가를 나섰다.
원래는 카인만 대동할 예정이었지만, 에드나가 뜯어말려 어쩔 수 없었다.
걸어서 목적지로 향하던 우리는 풍요로운 영지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거리를 거니는 영지민들과 큰 목청으로 호객하는 상인들.
사람 냄새가 나는 풍경에 무심코 얼굴에 미소를 띄우던 찰나.
"저기 봐 유클리드 공자야."
"며칠 잠잠하더니 또 마을까지 내려온 거야?"
"눈 마주치지 마!"
"제발 여긴 오지 마라."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수군거리는 영지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영지민들의 험담보다도 더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뒤편에서 중얼거리는 한 사람.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를 뒤따르는 카인이 쉬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인은 축 처진 귀만큼이나 칙칙한 아우라를 풍겼다.
에드나는 카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카인의 옆에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었다.
"카인, 걱정하지 마. 도련님이라면 다 생각이 있을 거야."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얼마 전부터 많이 달라지셨거든."
두 사람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집중하면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심 에드나가 저렇게나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느꼈다.
"도련님을 믿어 봐. 너를 괴롭히려고 여기까지 데려오신 건 아니...시겠지?"
"...."
대화가 끝난 것 같아 나는 뒤를 돌아봤다.
에드나는 내게 다시 다가오고 있었고, 그 너머로 보이는 카인은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나는 에드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에드나, 고마워."
"네?"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갔다.
* * *
우리는 밤이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베네딕 영지 외곽 글라딘 숲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
무성한 나무들 사이 납작한 바윗돌이 제단처럼 놓여 있었다.
이곳은, 이끼가 잔뜩 낀 네 개의 기둥과 중앙에 있는 새 모양의 석상 하나 외엔 달리 볼 것이 없는 유적지다.
그리고 풍화되긴 했지만, 제단의 바닥엔 흐릿하게 고대 마법진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도련님 여긴 무슨 일로?"
에드나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한때는 고대 마법진을 조사하기 위해 공작가에서도 수차례 조사를 해 왔던 곳이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탓에, 현재는 미신을 믿는 영지민들이나 가끔씩 기도를 하러 찾는 곳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게임 속에 들어온 뒤 나는 줄곧 보름달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달빛이 절묘하게 제단 위의 마법진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신기한 걸 보여 줄게."
나는 유적 중심에 있는 새 모양의 석상에 다가가, 마나를 담은 손으로 석상을 움직였다.
새의 고개를 들어 올려 두 눈이 달과 마주하게 했다.
그러자 새의 두 눈이 달빛을 머금고 서서히 푸른색으로 빛나더니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 역시 함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지금 무슨 일이."
카인과 에드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나는 계속해서 마나를 주입해 마법진에 저장된 술식을 가동했다.
끼릭, 끼리릭.
땅 아래에서 기계 장치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제단이 요동치더니 새의 석상이 향하고 있는 쪽으로 바닥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고대 마법사 파르텐이 대륙 곳곳에 자신의 아이템을 숨겨 놓은 장소.
바로 '파르텐의 비고'였다.
나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살펴봤다.
첫 번째 계단의 중앙에 책을 들고 있는 새의 문양이 새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대마법사 파르텐의 상징이다.
에드나와 카인도 다가와서 그 문양을 확인했다.
"도련님, 혹시 이곳은 파르텐의 비고인가요?"
"정말 그렇다면, 저같이 미천한 것이 들어가기에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 에드나와 그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당황한 카인.
식음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서는 카인에게 내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카인? 아까 한 말 들었잖아. 같이 들어가야지."
"제가요?"
"응, 너."
이곳은 고대 마법사 파르텐의 비고.
에드나가 강력한 마족이긴 했지만 아직 비고를 통과할 만큼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여기에선 카인이 필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카인의 '능력'이 필요했다.
"에드나, 미안한데 여기서 망을 봐 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나는 다시 카인을 바라봤다.
카인의 표정은 낮에 내가 차를 건넸을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다.
나는 빛 마법을 펼쳤다. 머리 위로 빛나는 구체가 떠올랐다.
그리고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인, 뭐해? 빨리 와."
카인도 잊지 않고 챙겼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곧 눈앞에 큰 동굴이 나타났으니까.
"엄청나게 크네요."
"잠깐 멈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려던 카인을 멈춰 세웠다.
자신의 아티팩트를 대륙 곳곳에 숨긴 괴짜답게 파르텐은 침입자를 괴롭히기 위한 장치도 꼼꼼하게 준비했다.
그 증거로.
'역시.'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둘러보니 미세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마법 트랩이 동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게임에서 이 마법 트랩 때문에 죽었던 적이 몇 번 이었던가.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카인을 바라봤다.
"카인, 내 앞에 서 볼래."
카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어?"
툭.
앞으로 카인을 떠밀었다.
"도, 도련님!"
카인의 외마디 비명이 동굴에 울려 퍼졌다.
7화. 파르텐의 비고 (2)
백색 늑대 부족.
수인족들 가운데서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고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부족이다. 카인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단아였다.
다른 부족원들과 달리 불길한 검은색 털을 타고난 아이.
자신을 낳았던 어미 또한 죽고 없었던 탓에 카인은 자라는 내내 부족원들에게 천대를 받았고, 결국 노예상의 손에 넘어가 공작가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같은 불행한 과거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카인에게 주목하는 것은 불행한 과거사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런 불행한 과거사를 가진 캐릭터들이 가지곤 하는 뛰어난 성능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일부 퀘스트에서만 한정적으로 쓸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그 뛰어난 효과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카인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마법 저항력이 높았다.
* * *
나는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지는 카인을 바라봤다.
카인은 정확히 트랩 마법이 있는 방향으로 넘어졌다. 트랩 마법은 사람을 감지하자마자 발동됐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도, 도련님! 살려...."
카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이어질 상황을 기다렸다.
"어? 뭐야?"
카인의 몸이 트랩 마법이 닿자마자 마법진에서 나타나는 빛이 사라졌다.
카인은 어리둥절한 상황에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그런 카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카인의 능력은 제대로 작용했다.
그의 몸은 남들보다 마법 저항력이 뛰어났다. 하급 마법 정도로는 그의 몸에 피해를 입힐 수 없을 정도다.
'내게도 저런 능력이 있었다면.'
카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저항력이 높은 덕분에 트랩 마법은 카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저 능력을 처음 보았을 땐 얼마나 탐을 냈었던가.
하지만 카인의 능력에도 문제점은 존재한다.
강력한 중급 마법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는 그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아직 육체적인 능력도 부족한 그에게는 도망칠 힘도 없다.
'그때만 생각하면 속이 쓰라리네.'
게임을 할 때, 나는 카인의 능력을 보고 어떻게 육성시킬지 두근거리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임 내에서도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카인은 전장으로 나아가지 않고 공작가로 돌아가게 되니까.
카인을 키울 수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리다.
'이젠 내 손에 있으니까.'
카인을 직속 하인으로 들인 지금이라면 내가 생각한 대로 카인을 성장시킬 수 있다.
육체적인 능력을 보완하기만 한다면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인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 카인.'
카인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간신히 미소를 거두고 카인에게 말했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카인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나는 차근차근 설명부터 해줬다.
"네게 숨겨진 능력이지."
"제게요?"
"너에겐 하급 마법으로는 데미지가 먹히지 않을 거야. 마법 저항력이 월등히 뛰어난 덕분이지. 그게 바로 네 능력이야 카인."
방금까지만 해도 두려움으로 흐릿했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쓸모없던 자신에게도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아니면 내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동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본 표정 중에 제일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 제 능력을 알아보시고 직속 하인이 될 것을 권유하신 건가요? 능력을 깨우치게 하려고 절 일부러 밀치신 거죠?"
그건 그냥 빨리 시험해 보고 싶어서....
아니, 이건 숨겨야겠지.
"당연하지. 난 네가 필요하다고 말했잖아."
"도련님...."
카인의 얼굴에는 감격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까처럼 미덥지 않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카인, 날 도와줄 거지?"
"네, 도련님!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자신감이 넘치는 카인의 모습에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이러면 걱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앞으로 돌격해."
"네?"
"걱정하지 마. 여긴 마법 트랩밖에 없으니까. 날 믿고 앞으로 쭉 달려!"
"어, 어. 알겠습니다!"
최고의 마법 해체 도구, 아니 카인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물론 정말로 무식하게 달려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는 시간도 있고, 급격하게 지쳐 가는 카인을 멈춰 세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줘야 했다.
그렇게 체력이 회복되었다 싶으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카인이 지나간 길을 조심스레 뒤따라갔다.
카인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트랩 마법이 발동됐다. 하지만 그에게는 생체기 하나 남길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동굴 엄청나게 깊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동굴은 더 깊었다.
수십 분은 걸은 것 같은데 끝이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게임에서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역시 현실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게 있으면 파르텐의 비고인 것이 확실하지."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동굴 곳곳에는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연두색 광물이 박혀 있었다.
세란 광석.
파르텐의 비고에는 꼭 이 광물이 존재했다.
빛나는 세란 광석은 파르텐의 비고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데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였다.
첫 번째 계단에 새겨진 문양이야 쉽게 베낄 수 있었지만, 세란 광석의 경우 대마법사 파르텐이 고유 마법을 써 반영구적으로 연녹빛을 품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도착하려나."
계속 걷다 보니 슬슬 다리가 아파져 왔다.
내 허약한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다.
체력 운동을 꾸준히 하긴 했지만, 고작 일주일 한 것으로 많은 것을 바꿀 순 없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다듬어 보려고 허리를 세우는 순간.
앞에서부터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쪽으로 와 보세요!"
들리는 소리로 보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나는 안간힘을 내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긴 통로의 끝에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카인도 지친 것인지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능력을 계속 사용했으니 이해할 만하다.
나는 카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힘들지 않았어? 고생했어, 카인."
"아닙니다. 은근히 재밌더라고요."
"하하, 그럼 다행이네."
카인과 대화를 나눈 다음에 주변을 둘러봤다.
세란 광석의 작은 빛에 의지해야 했던 통로와는 다르게 이 거대한 홀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밝은 빛은 공작가의 도서관에서 봤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홀 중앙에는 작은 제단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는 아티팩트. 하지만 나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주변을 살펴봤다.
'찾았다.'
파란 보석이 박힌 반지.
내가 찾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가 분명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인을 바라봤다. 또 한 번 카인의 힘을 빌릴 차례다.
"카인, 저 제단으로 가 주겠어?"
"네, 알겠습니다."
카인은 의심도 하지 않고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빛.
역시 제단으로 향하는 길에도 트랩이 깔려 있다. 마지막까지 순순히 아티팩트를 넘길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아티팩트를 코앞에 두고 죽은 적도 있었다고.'
제단 앞까지 깔려 있던 마법이 모두 파괴된 걸 확인한 나는 카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카인. 역시 널 데리고 오길 잘했어."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겁니다."
그러자 카인은 또한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마법을 해제하며 그새 지친 얼굴이 되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 기쁜 것인지 열기를 띠고 있는 얼굴이다.
이제 마법의 위험은 없었다.
나는 제단을 향해 걸어가 제단 위에 놓인 반지를 집었다.
"와아."
반지의 아름다운 외형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아쿠아마린처럼 빛나는 파란색 보석은 멀리서도 아름답게 빛났지만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더욱 신비로운 빛을 품고 있는 듯했다.
나는 반지를 왼쪽 검지에 끼웠다.
몸속의 마력이 빠르게 순환하는 게 느껴진다.
마력이 다니는 통로가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한층 마력 순환이 편안해졌다.
'성능은 확실하네.'
아이템의 이름은 '파르텐의 반지'.
마력 회복 속도를 증가시켜 주는 아이템이다. 아이템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세트 아이템이다.
당연히 나머지 아이템도 얻을 것이다.
"도련님, 전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일단 주변을 둘러보면서 다른 것이 있나 찾아봐."
단순히 아티팩트만 얻으려고 이 던전에 온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대마법사 파르텐의 비고가 아닌가. 사용된 마법 하나하나가 나에겐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카인에 의해 파괴된 마법의 잔재를 바라봤다.
'이 마법은 공작가 도서관에도 없었단 말이지.'
현재까지도 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파르텐의 고유 마법. 워낙에 괴짜인 데다가 신출귀몰한 모습을 보였던 탓에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나는 트랩 마법의 잔재에 손을 펼쳐 마법을 사용했다.
'메모라이즈' 마법.
마법의 술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간단한 효과의 마법.
하지만 완벽한 이해가 수반되어야만 저장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메모라이즈 마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사는 드문 편이었다.
하지만.
'나한텐 쉬운 일이지.'
메모라이즈를 사용함과 동시에 트랩 마법의 술식과 이론이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이런 방식이구나.'
술식에 따른 결과를 계산해 보니 새삼 굉장히 흉악한 마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카인이 아니었다면 뼈도 못 추리고 죽었겠어.
3분 정도 지났을까, 트랩 마법의 해석이 전부 끝났다.
나는 마법을 멈추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력을 많이 써서 살짝 어지러웠지만,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았다.
반지에 이어 파르텐의 마법이라니. 엄청난 보상을 얻게 됐다. 이제 공작가로 돌아가면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카인은 어디에 간 거지?"
* * *
생전 처음 들어오는 던전이었던 까닭에 카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러는 도중에도 숨겨져 있던 트랩 마법이 발동되긴 했지만, 카인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홀의 빛이 닿지 않는 막다른 곳, 유클리드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위치까지 와버렸다.
'이런 눈에 안 보이면 도련님께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데.'
큰 은혜를 입긴 했지만, 유클리드 도련님이 가진 망나니로서의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카인이 뒤로 돌아 나가기 위해 무심코 벽을 짚었는데.
갑자기 벽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신기루처럼 일렁이며 사라졌다.
"어, 어?"
그리고 이어지는 카인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
카인이 손을 짚었던 곳엔 아까까진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통로가 나 있었다.
"도, 도련님!"
다시 한번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카인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유클리드를 불렀다.
8화. 파르텐의 비고 (3)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었다고?'
나는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상황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이 게임을 하면서 파르텐의 비고에서 숨겨진 통로를 찾은 적은 없었다.
항상 제단이 있는 방이 던전의 끝에 있었고 그 외에 히든 피스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게임이 현실로 바뀐 탓일까?
나는 황급히 카인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갑자기 벽이 부서지더니 새로운 길이 생겼습니다...."
카인은 손으로 부서진 벽을 가리켰다. 가리킨 곳에는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균열이 있었다.
'정말로 길이 있잖아?'
사람 두 명이 통과할 정도의 길이 있었다.
길은 너무 어두운 탓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카인을 쳐다봤다.
'카인을 데리고 오길 정말 잘했어.'
카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돌아갔을 것이다.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 같네.
"도련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저는 도련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목소리로 카인은 답했다. 소심했던 카인의 성격이 점차 바뀌고 있었다.
나는 길을 다시 바라봤다.
도대체 뭐가 있을지 감이 잡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게이머인 내 직감이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리스크를 감수할수록 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카인, 가 보자."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 * *
카인은 나보다 앞서 나갔다.
아마도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 같다.
"윽."
이 어두운 공간은 공기가 탁했다.
아까와 다르게 세란 광석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여긴 파르텐이 만든 길이 아닌가?'
지금 이곳은 세란 광석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트랩 마법조차도 없으니 말이다.
"도련님 괜찮습니까?"
내가 계속 헛기침을 한 탓에 카인이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카인은 탁한 공기에 별다른 반응이 없어 보였다.
확실히 수인의 육체는 성능이 다른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
"끝이 보입니다."
카인의 말과 함께 어두운 길의 끝이 보였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탁 트인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게 뭐야?"
탁 트인 공간에는 커다란 석상 두 개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검과 갑옷을 갖추고 있는 두 석상은 그 사이에 놓인 아티팩트를 지키고 있었다.
압도적인 자태에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리가 나온 입구에서 단서를 얻었다.
입구 위쪽에는 세란 광석과 파르텐의 문양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 장소를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말로만 들었던 파르텐이 숨겨 둔 장소인가?'
파르텐의 비고를 찾을 당시 얻을 정보였다.
비고에는 파르텐이 숨겨진 장소를 하나 더 안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나도 그 소문을 듣고는 비고를 한참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그래서 헛된 소문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카인 덕분에 얻은 기연인 것 같다.
중앙에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무슨 아이템이지?'
멀리서 본 바로는 불길한 세 개의 빨간색 보석이 있는 팔찌로 보였다.
팔찌를 자세히 보기 위해 나는 제단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니, 이 아이템이 여기 있다고?"
팔찌의 정체를 알고 나니 감탄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무슨 일 생기셨나요?"
"아, 아니야. 잠시만."
분명히 기억난다.
세 개의 빨간 보석이 있는 팔찌.
특히 보석에 박혀 있는 눈동자 문양이 특이해서 알고 있다.
게임 중후반부에서나 얻을 수 있는 아티팩트.
보스를 처치하면 극악의 확률로 나타났던 장비이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아이템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순간 카인이 석상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련님! 저 석상 살아 있는 거 같습니다."
"거짓말 아니야? 헛것을 본 거겠지."
"저랑 눈이 마주쳤어요. 분명히 봤습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카인의 말에 나도 석상을 바라봤다.
나는 카인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올리자마자 석상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살아 있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뒤따르는 시선.
다행히 시선만 움직일 뿐, 들고 있는 검을 빼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저 팔찌를 건드리면 움직이는 건가?'
보아하니 석상은 골렘류 몬스터다.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위 몬스터인 골렘을 쓰러뜨리긴 힘들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이템을 포기하겠지만.
'저걸 포기할 수는 없지.'
저 팔찌가 내가 생각한 아티팩트가 맞는다면 확실한 도움이 된다.
위험을 감수해서도 얻을 만한 물건이다.
나는 석상을 바라보며 계획을 세웠다.
먼저 카인을 불러 손으로 입구 방향을 가리켰다.
"카인, 일단 너는 먼저 탈출해서 반지가 있던 홀에서 대기해."
"네? 도련님을 두고 혼자서 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 카인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골렘은 중심핵을 파괴해야 쓰러트릴 수 있는 몬스터인데 카인의 나약한 육체로는 골렘의 중심핵에 다가가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지금은 도움보다 걸림돌이 되겠지.
카인은 아직도 걱정스러운지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믿음을 주기 위해 손에 마법을 펼쳤다.
"카인 날 믿어. 이번엔 내가 알아서 할게."
카인은 여기까지 오는 데 도움이 많이 됐으니.
이번엔 내가 나설 차례다.
* * *
마법사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골렘은 지능이란 것이 없는 일종의 기계라 할 수 있었다.
움직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연산이 처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격을 하는 동작 역시 몹시 느리다.
다만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장점이 존재한다.
웬만한 공격은 모두 튕겨 내는 뛰어난 방어력, 그리고 적을 짓이겨 버리는 압도적인 공격력.
지금의 내 상태로 석상의 공격에 맞섰다간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파르텐의 비고에서 얻은 트랩 마법을 양옆 골렘 주변에 설치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지금 내 마력량으론 한계가 있다.
설치한 마법 역시 내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마력 소모량이 적은 마법이다.
하급 마법 바인드.
마법에서 소환된 나무뿌리가 적을 묶는다.
마력을 더 많이 쓴다면 더 두껍고 질긴 뿌리를 소환해 골렘의 몸체를 모두 묶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방의 중앙으로 걸어가 팔찌를 집었다.
팔찌에 손을 대는 순간.
드드득.
두 개의 석상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상들은 빼든 검을 나에게 겨눴다.
나는 그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도망치지 않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두 석상이 내가 있는 쪽으로 발을 떼기까지.
"삼, 이, 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이 발동된다.
석상의 발밑에서부터 식물의 뿌리가 튀어나오고, 막 발걸음을 떼던 석상들은 무게 중심이 흐트러져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석상들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무릎을 굽히며 쓰러졌다.
그 충격에 바인드 마법은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역시 골렘의 무게를 감당하진 못하네.'
석상들은 무릎을 굽힌 채로 나를 향해 검을 찔렀다.
바로 다음 마법이 발동된다.
부여 마법으로 중첩시킨 바인드 마법.
이거라면 내 마력량으로도 두 석상의 팔 한쪽을 붙드는 정도는 가능하다.
쓰러진 두 석상이 완전히 속박되어 멈춰 섰다.
나는 석상을 번갈아 바라봤다.
"골렘 공략법은 게임과 다를 게 없네. 돌이니까 어쩔 수 없나."
현실이 된 지금도 유적을 지키는 골렘의 공격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적의 보존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정도의 단순한 동작만이 설정된 만큼 간단한 마법 몇 가지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쾅, 쾅!
석상들은 넝쿨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위험하다, 위험해."
진동으로 천장에서 돌 부스러지기가 떨어진다.
나는 팔찌를 가지고 입구로 걸어갔다.
'이제 시간이네.'
고개를 돌려 석상을 바라봤다.
석상의 붉은 눈빛이 따라온다.
나는 그 석상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템은 잘 가져간다."
홀의 입구에 남은 마력을 쥐어짜 마법을 사용했다.
입구 쪽에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통로가 막혀간다.
나는 돌무더기 너머로 골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카인이 기다리고 있다.
* * *
홀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카인은 내가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얼굴이 활짝 폈다.
"도련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봐, 날 믿으라고 했지?"
나는 카인에게 가져온 팔찌를 보여 줬다.
이 정도면 주인으로서의 체면은 세웠겠지.
"나가기 전에 잠시만, 일단 떨어져 줘."
"알겠습니다."
카인이 내게 멀찍이 떨어졌다.
'분명히 진품이라는 증거가 있을 텐데.'
나는 멀리서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리고 팔찌 뒤편에 조그맣게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모래시계를 묶고 있는 뱀의 형상.
확실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아티팩트다.
이름은 '라플라스의 팔찌'.
세 개의 보석에 저장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저장된 마법은 별도의 연산 없이 즉시 사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저장되어 있는 마법이다.
상급 공격 마법 두 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상급 고위 회복 마법.
소모된 체력을 최대로 회복시키고, 독과 저주 같은 상태 이상 역시 해제한다.
게임에서는 강력한 보스의 손에 들어가 게임 난이도를 높인 아티팩트였는데 지금 얻을 줄이야.
확인을 마친 나는 카인을 불렀다.
"카인, 이제 나가자."
비고를 나오는 중에도 카인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도련님,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리던데 괜찮으신가요?"
"정말 괜찮다니까?"
"그래도. 몸 상태가...."
시끄럽긴 했지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져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몸 상태보다는 다른 것이 문제지.
유적에서 빠져나오며 돌가루를 온통 뒤집어쓴 탓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빨리 가서 씻고 싶다.'
밖을 나오니 어둡던 하늘이 서서히 파래지고 서서히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비고에 들어갔으니 꼬박 반나절을 지하에 있었다.
통로 앞을 지키고 있던 에드나가 나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왔다.
"도련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시간이 오래 걸리길래 무슨 일이 생기신 줄 알았어요."
"괜찮아. 아무런 일도 없었어."
"그러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몸 상태가...."
에드나는 내 몸을 흘깃 살펴보더니 이내 짧게 웃었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 같네요."
"빨리 돌아가서 씻어야겠어, 돌아가자 에드나, 카인."
"네, 알겠습니다."
처음에 계획했던 파르텐의 반지만이 아니라, 생각지 못했던 수확도 획득했다.
공작가의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윈 아카데미로 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9화. 암약하는 세력
"허억, 허억."
시야가 어지럽다. 다리가 미칠 듯이 후들거린다. 벌써 몸은 만신창이. 그런데도 난 멈출 수 없었다.
눈앞의 악마가 웃으며 날 노리고 있었으니.
"도련님, 아직 괜찮으시죠? 한 번 더 갈게요."
에드나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화염구 세 개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긴급히 쉴드 마법을 펼쳤다. 눈앞에 생긴 방어막이 날아오는 화염구를 막아 내며 사라졌다.
"에, 에드나. 잠시 타임, 타임!"
"하나 더 갈게요!"
다시 한번 화염구가 날아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제 마력을 쓸 힘도 없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화염구가 내가 있었던 자리로 떨어졌다. 엄청난 위력으로 인해 수련장을 감싸던 쉴드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기겁하며 에드나를 바라봤다.
"에드나, 내가 뭐 잘못한 거 아니지?"
에드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보통 아닌가요?"
"아니, 절대 아니야."
2주일간 나는 에드나와 계속해서 대련했다.
혼자서 마법을 연습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고 실력을 늘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둔을 닦달하며 마법 지식을 쌓았고, 파르텐의 비고에서 아티팩트도 얻었다.
에드나와 대련을 해도 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격차가 심하다고?'
에드나와 상대 전적은 10 대 5.
당연히 내가 5다.
처음 에드나와 대련할 당시에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졌다. 그래도 처음으로 대련해서 이겼을 땐 어느 정도 에드나의 수준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도대체 마력량이 얼마나 큰 거야.'
지금까진 봐줬던 거라는 듯이, 에드나는 마법을 쉴 새 없이 뽑아냈다. 나는 그 공격을 막아 내는 데 급급했다.
"하아, 이제 쉬자 너무 힘들어."
나는 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마법 대련이라기보다 체력 훈련을 한 느낌이다.
"도련님, 여기 물 드시죠."
에드나는 어느새 물병과 컵을 가져와 건넸다.
도대체 체력이 얼마나 좋은 걸까?
새삼 그녀가 마족이라는 게 실감이 된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물을 건네받았다.
"에드나, 고마워."
"이제 곧 아카데미로 가실 날이군요."
"그러네."
내일이면 공작가를 떠나 바윈 아카데미로 출발한다.
앞으로의 사건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준비는 할 만큼 했어.'
필요한 아이템도 얻었고, 든든한 동료도 생겼다.
마침 연무장 한편에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욱, 후욱."
내 직속 하인이 된 수인 카인이었다.
카인은 상의를 벗은 채 체력 훈련을 하고 있었다.
"카인, 열심히 하네."
"이게 다 도련님 덕분이죠."
나는 카인을 2주 동안 훈련 시켰다.
마법 저항력이 높은 카인인 만큼 육체적인 능력을 키우는 게 좋았다.
마법도 쓰면 좋겠지만, 그의 마법 실력은 영 꽝이었다.
그래서 건네준 것이 권법서였다.
기본적으로 뛰어난 육체 능력을 타고난 수인인 만큼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드나는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카인은 볼수록 성장 속도가 놀랍네요. 2주 만에 이렇게 성장하다니."
실제로 카인은 근육이 빠르게 붙었다.
처음 봤을 때의 왜소했던 카인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수인이라 그런가?"
"저도 수인의 육체 성장이 빠르단 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종족 특성인 건가?
나도 모르는 사실을 알았다.
"그나저나 도련님, 요즘 곳곳에서 사건이 터지고 있어요."
"그래, 나도 들었어."
메인 스토리의 시작이 가까워짐에 따라 세계관의 메인 빌런인 반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족가의 몰살이나, 도시 내에서 벌어진 약탈 등 좋지 않은 소식이 제국 전역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베네딕 영지도 안심할 순 없어.'
이럴 때야말로 더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나와 카인을 바라봤다.
"이제 아카데미로 갈 준비를 하자."
"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나는 옷가지를 챙겨, 아르웬 공작을 찾았다.
본가를 떠나 긴 시간을 외지에 가는 일인 만큼 공작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기 위해서였다.
이는 단순히 부자간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공작가의 식솔로 치러야 하는 관례이기도 했다.
"너를 수행할 용병도 고용했으니 잘 가거라."
"공작님, 다녀오겠습니다."
애초에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던 탓에 공작과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로 가는 마차와 용병까지 준비한 것을 보니 알게 모르게 나를 위해 신경을 써 준 모양이었다.
집무실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는 저택을 나갔다.
저택 앞에는 베네딕 가문의 상징인 파란색 매가 그려진 마차가 있었다.
검은색과 파란색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마차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차 옆에는 에드나와 카인, 그리고 공작이 고용했다는 용병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에드나가 두 용병을 가리키며 내게 소개했다.
"도련님, 이번에 호위를 맡게 된 용병들이라고 합니다."
용병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베네딕 공작가는 영지 내에는 따로 호위 기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따금 먼 길을 나설 때 이렇게 용병들을 고용한다.
나는 눈으로 용병들을 훑어봤다.
두 사람 모두 허리춤에 검을 매고 있었고, 목에는 중위급 용병임을 뜻하는 은색 패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적당하고 좋네.'
황금패 이상의 고위급 용병들은 자신만의 에고가 강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중위급 정도면 어느 정도의 경력도 가지고 있고, 전투 능력 또한 빠지지 않는다 말할 수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건네받은 용병들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공작가의 공자가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출발하시죠."
* * *
번쩍거리는 외관과 달리 마차의 탑승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제대로 정비가 된 길이었지만, 산길을 몇 번이고 지나야 했던 탓에 허리가 아팠다.
"이것도 다 읽었네."
나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마법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것 외엔 마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와아아!"
반면 옆에 있는 둔은 바깥으로 떨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창문 밖으로 몸을 쑥 빼고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평생을 도서관에서 살아온 정령이었던 만큼, 저런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제 질릴 때가 되지 않았나.
"둔, 바깥은 어때?"
"정말 좋아요!"
마치 강아지가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둔이 자신의 짧은 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 도착하는 거지.'
다른 두 아카데미와 달리 바윈 아카데미는 포탈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도시 내에 가득한 던전들 때문이었다.
각각의 던전이 농밀한 마력을 품고 있어 포탈의 좌표가 왜곡되는 일이 잦다고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멀잖아.'
이제 야영하는 것도 지친다.
넘어선 산만 네 개는 되는 것 같은데.
"둔,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지?"
"392년 2월 29일입니다."
나는 날짜를 듣고 소파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메인 스토리의 시작일로부터 3일이 지났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가는 여정인지라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제국의 중심분인 아덴에서는 이미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잠이든 날 깨운 건 에드나의 목소리였다.
"도련님,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겠습니다."
에드나의 말을 듣고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어둑해진 주변을 바라봤다. 해가 떠 있을 땐 질릴 정도로 가득했던 초록이 모두 어둠에 잠겨 버렸다.
가끔 주변을 서성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뛰어난 마법사와 은패의 용병은 괜찮은 전력이지만, 어둠이 내린 산은 안심할 수가 없는 장소였다.
"도련님, 이곳에 앉으시죠."
카인과 에드나는 모두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와 식탁을 설치했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육즙이 꽉 찬 소시지와 돼지고기, 신선한 채소와 과일까지.
밖에서 먹는 것 치곤 참 호화스러운 음식이다.
"카인, 용병들도 잘 챙겨 줬지?"
용병들에게도 가져온 음식들을 나눠 주었다.
말린 육포로 식사를 때우는 것이 안쓰러워 우리가 먹을 음식을 나눠 주고 있었다.
"네! 빠지지 않고 챙겼습니다."
에드나와 같이 붙어 다녀서인지 하인으로서도 많이 성장한 카인이었다.
이따금 혼나는 모습도 보곤 했는데, 잘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저녁을 다 먹었을 때쯤 용병 한 명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공자님, 오늘 저녁도 맛있었습니다."
"저 말고, 저 친구들한테 감사함을 전해 주시죠. 요리를 준비한 건 다 저 친구들이니까요."
그러자 용병들은 카인과 에드나가 있는 방향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카인과 에드나 역시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참에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혹시 최근에 마을에서 이상한 사건이 벌어진 적이 없었나요?"
공작가에 계속 머물러 있던 나보다는 용병이 바깥에서 일어나는 이상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도적들이 늘어났습니다. 살인 사건도 많아졌죠."
"사실 저희도 의뢰를 제안받은 게 있었는데, 영 찝찝해서 거절했습니다."
"왜죠?"
"의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거든요. 범죄와 관련된 의뢰는 받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용병과 직접 만나 길드를 거치지 않고 의뢰를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게다가 요즘 용병들 사이에서 나도는 표식도 있었던지라…."
"혹시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문양의 표식을 말하시는 건가요?"
"네, 바로 그겁니다!"
나는 용병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세 개의 뿔을 가진 염소는 내가 아는 한 집단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제국 최대의 적, 반란군 클라리스'
역시나 이 시기부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목적이 귀족들인 이상 나 또한 안심하고 지낼 수 없게 됐다.
"공자님, 그런데 그건 어떻게."
피잉.
말을 멈춘 용병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용병의 가슴팍엔 무언가에 꿰뚫린 것처럼 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도 마법, 그는 반응할 새도 없이 죽은 거다.
"공자님, 도, 도망치세요!"
남아 있던 용병이 빠르게 칼을 꺼내 들었지만, 어둑한 숲속에 숨어 있는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또 한 번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던 용병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무너졌다.
전투 병력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제서야 적들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0화. 던전 도시 테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