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20화. 실력 테스트

"오늘 수업도 이것으로 마치겠다. 다들 수고했다."

오늘로써 3주 차 수업이 끝났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으아아, 오늘도 못 맞혔어."

"맞힐 수 있는 거겠지?"

탄식에 비해서 오늘은 맞힐 수 있을 것 같은 학생들이 더러 보였다.

다음 주부터는 공을 맞히는 학생들이 나오겠지.

나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겉옷을 챙겨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음?"

연무장 밖에는 또 플랑 교수가 있었다.

저번 주부터 그녀는 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오셨군요."

"아! 유클리드 교수님, 수업은 잘 되셨나 봐요?"

플랑은 날 발견하고는 쪼르르 다가왔다.

"학생들의 탄식이 들려오던데 어지간히 어려운 수업인가 봐요?"

"엄살 아닐까요? 그렇게 어려운 수업은 아니거든요. 그나저나 플랑 교수님은 계속 기다리는 건 귀찮지는 않으신가요."

"수업도 비슷한 시간에 끝나고 같은 교수끼리 밥 먹으면 좋잖아요? 혹시...."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듯 힐끔 바라봤다.

"유클리드 교수님은 이런 거 불편하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기다리시는 게 마음에 쓰여서 그런 거죠."

"그러면 다행이네요. 얼른 가요."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전처럼 평민 교수진들이 한데 모여서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던 와중이었다.

한 교수가 내게 질문을 건넸다.

"유클리드 교수님, 신기한 수업을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마법 연구학을 담당하는 교수 클레아였다.

그녀는 생기발랄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그 뭐였더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윙 볼'이라던데? 도대체 그런 건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뭐, 아는 장인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윙 볼'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줄이야.

직접 이름을 짓진 않았지만, 저 이름은 나쁘지 않았다. 직관적이기도 하고, 간단해서 마음에 든다.

"장인이라고요? 그 장인, 저도 한 번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저도 물건을 만드는데 힘들어서...."

"기회가 된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게 무섭게 이번엔 플랑 교수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 윙 볼이란 걸로 신기한 수업을 한다던데 어떤 수업이에요?"

"간단한 과녁 맞히기입니다."

"네? 그것뿐이라고요?"

"네."

나는 칼로 고기를 자르고 입에 넣었다.

육즙이 사르륵 입에 퍼졌다.

역시 아카데미라 그런지 퀄리티가 나쁘지 않단 말이지.

"유클리드 교수님, 테스트 내용은 다 보셨죠?"

"네. 미리 배포된 서류로 확인했습니다."

테스트 내용은 알고 있는 대로 마물한테서 수정을 지키는 거였다.

서류에는 어떤 마물이라고 특정돼 있진 않지만, 나는 그 마물을 알고 있다.

'하급 마물 세렌이겠지.'

세렌은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게 특징인 마물이다. 그걸 알고 '윙 볼'이라는 걸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다.

마물도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상이라 학생들이 다칠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나만 알기 때문에 플랑 교수는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저희야 교양 과목이라 테스트를 신경 안 써도 괜찮지만, 유클리드 교수님은 필수 과목이잖아요. 귀족 교수들도 눈여겨보고 있다던데...."

아마도 과녁을 맞히는 수업만으로는 이번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 수업은 꼭 테스트에서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주변 교수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제 학생들이라면 가능합니다. 곧 결과로 보여 드리죠."

* * *

수업이 끝난 후 점심시간.

2학년 학생들이 모두 기진맥진 된 상태로 중앙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힘이 없어서 쉬고 싶었지만,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이번 테스트의 내용이 게시판에 붙였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힘겹게 중앙동에 도착해 1층 게시판에 걸린 테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1차 실력 테스트

내용: 제한 시간인 10분 이내에 공격해오는 마물에게서 수정을 지키기.

점수 정산 방법: 제한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마물을 처치하는 걸로 점수를 매긴다.]

"마물을 처치하는 거라고?"

몇몇 학생들은 패닉에 빠졌다.

2학년이라지만, 아직 학생들은 마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난 아직, 마물이랑 싸워 본 적 없다고...."

원래라면 2학년은 실전 마법 전투학에서 마물을 활용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클리드 교수가 마물을 활용한 수업을 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평민 학생 베네커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나, 나는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한다고."

학생들이 테스트에 목숨을 거는 건 이유가 있었다.

실전 마법 전투학에서 개인 평가를 올려야만, 발푸르기스의 밤의 학생으로 선별될 수 있었다.

왜 발푸르기스의 밤에 선별되고 싶은 걸까?

바로 선별되기만 해도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나갔다는 것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재였다는 사실과 다름이 없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선별된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도움이 되는 커다란 특혜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이렇게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거다.

베네커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유클리드 교수님의 수업이 정말 도움이 될까? 이러다간 통과조차도 못 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마물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학생들은 베네커의 말을 듣고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2학년 학생들이 그 말을 수긍하며 불안에 떨던 와중.

그때, 그들에게로 3학년 학생들이 다가왔다.

"뭐야? 머저리 2학년 놈들 아니야?"

3학년 학생의 더글이 바로 비아냥댔다.

2학년과 3학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3학년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이 많아 황금기라고 불렸지만, 2학년은 아니었다.

그걸 눈치챈 3학년들도 자연스럽게 2학년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 그 응어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뭐라고요?"

"뭐야? 한 대 치겠다? 어차피 제대로 점수도 못 받을 텐데."

하지만 더글은 주춤하지 않고, 계속 비웃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이 자식이...."

참다못한 베네커가 다가가려고 했지만, 셀린이 나서서 그를 제지했다.

"그만해. 반응해 봤자 손해니까."

"어, 뭐야? 셀린이잖아? 유급당한 기분이 어때?"

그 말을 듣고 셀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더글은 셀린과도 같은 귀족이었기에 일면식이 있었다.

안 그래도 마주치기 싫었던 사람 1순위였는데, 지금 마주치니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너...."

셀린이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더글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리며 나타났다.

"지금 무슨 상황이지?"

찰랑거리는 금발이 그가 누구인지 말해줬다.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끼워 주라."

더글의 뒤에서 이안 임페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왜 다들 말이 없어?"

"화, 황자님...."

3학년인 더글도 황자에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황족의 권위는 귀족이라도 섣불리 건들 수 없는 영역이었다.

"황자라니, 너 이름이 더글이었나? 미안한데 어딘 가문인진 모르겠다. 야 그리고 아카데미에선 신분은 중요하지 않잖아. 편하게 이안이라고 부르라고."

이안은 더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미소 지었다.

그럴수록 더글의 표정은 시시각각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더글 아까 뭐라고 했었지?"

"네, 네?"

"아, 맞다 맞아. 2학년이 머저리라고 했었잖아."

"...어."

이안은 웃으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말대로라면 나도 머저리네? 나도 유급했으니 맞는 말이야. 3황자는 머저리인 게 맞긴 하지."

"아, 아닙니다!"

"왜 존칭하고 그래. 아카데미에선 신분이 상관없잖아."

더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이안도 그걸 알았는지 계속 싱글벙글 웃으며 더글을 구경했다.

"표정 펴, 다 장난이니까. 2학년 애들과 이야기할 게 있으니,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지?"

"네, 네. 야, 가자."

그 말을 끝으로 3학년 무리와 더글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고, 2학년들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이안은 2학년 학생들과 게시판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테스트가 신경 쓰이는 거지?"

그는 아까와 다르게 웃는 표정이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아직 모르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유클리드 교수를 믿어 보는 게 어때?"

"왜, 그렇게 믿을...."

한 학생이 이안의 달라진 태도에 물으려는 순간.

"난 다음 일이 있어서 가 본다."

이안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2학년 학생들은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황자한테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셀린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정말 사람이 바뀌었잖아?'

첫 수업부터 도망친 황자였다.

유클리드 교수가 호언장담하고 나서 사람이 뒤바뀌었다.

두 번째 수업부터는 성실히 듣더니, 이제는 교수를 믿으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교수가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황자의 마음을 돌릴 정도의 힘을 가진 건가?

보면 볼수록 유클리드 교수는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셀린은 다시 게시판을 바라봤다.

'어찌 됐든 저 황자의 말대로야. 지금은 교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어.'

이제 정말 테스트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나는 개인 교수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할 게 왜 이리 많아."

실력 테스트까지 2주밖에 남지 않은 덕분일까?

책상에는 안전 수칙부터 각종 학생의 서류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른 실전 마법 전투학 교수들도 힘들어하는 걸 봤으니,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뭐, 괜찮겠지?"

다가올 실력 테스트는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제대로 수업에 임하고 있었고, 이 상태로라면 확실한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다.

서류를 정리하던 중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갑니다."

이안이 진이 다 빠진 얼굴을 하며 들어왔다.

"교수님이 하란 거 다 했어요. 이제 좀 쉬어도 되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엎드렸다.

"제대로 한 거지?"

"네, 네. 말한 대로 전부 돌아다녀서 처리했어요. 이제 움직일 힘도 없어요."

이안은 엎드린 채로 허공에 손을 저어 댔다.

오늘 그는 아카데미를 계속 뛰어다녔을 거다.

"교수님, 예언자는 아니죠? 어떻게 미리 상황을 예측하셨지."

내가 이안에게 명령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면서 불안해하는 C반의 학생들을 격려하는 거였다.

학생들은 테스트의 내용을 보고 불안해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같은 학생인 이안을 시킨 것이다.

결과가 어떨진 모르지만,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이 생기길 원해서 한 일이었다.

"수고했어. 그래도 순순히 따를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안 하면 강제로 하게 할 거잖아요."

"눈치가 참 빨라서 좋단 말이야."

나는 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이번 테스트만 잘 넘어간다면 제약은 풀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이안이 몸을 일으켜 날 바라봤다.

"정말이죠? 그나저나 이번 테스트 제대로 통과할 수는 있는 거예요?"

"가능하지, 그리고 거기에 네가 이번 시험에서 제일 눈에 띄게 될 거야."

"네?"

이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제가요?"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번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해 준다고."

"그거 빈말인 줄 알았는데...."

내 장담에도 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전 한 속성밖에 마법을 못 쓰잖아요. 정말 가능한 거 맞아요?"

"맞아. 이안, 오늘 오후에 시간이 있지?"

"어, 네."

이제 슬슬 이안을 가르칠 때다.

이날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있다.

"내가 직접 개인 교습을 해 줄게. 연무장으로 가자."

21화. 정령 마법 (1)

댕─ 댕─ 댕─.

아카데미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석양빛 하늘에 울려 퍼졌다.

중앙동에서 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왔다. 고된 수업으로 지칠 법도 했지만, 주말을 앞둔 설렘 때문인지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드디어 끝났네."

"너 내일 뭐 할 거야?"

"난 새로 생긴 마법 도구점에 가 보려고. 듣자 하니 희귀한 아이템도 있대."

내일이 주말이라 저마다의 계획을 나누는 소리로 복도가 웅성거렸다.

그때, 중앙동에서 눈에 띄는 붉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끌렸다.

"이제 뭐 하지...."

셀린 이리에드가 한숨과 함께 새빨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주변 학생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아카데미 수업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었고, 모두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서두르던 중이었다.

셀린은 습관처럼 연무장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2학년 여학생들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친근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셀린, 아카데미에 새로 생긴 카페 소문 들었어? 우리랑 같이 갈래?"

"어? 그, 그게...."

셀린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늘 그랬듯 오늘도 마법 연습만 생각했었지, 다른 계획은 없었다. 유클리드 교수가 낸 과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매일 연습에만 몰두한 탓에 학우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대로라면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셀린의 머릿속에서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한 여학생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저기 봐! 저분 유클리드 교수님 아니야?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은... 황자님 아니야?"

셀린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늘 당당한 걸음걸이의 유클리드 교수와 함께, 3황자 이안이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최근 달라진 이안의 태도가 궁금했던 셀린이었다.

유클리드 교수가 어떤 특별한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이안이 바뀐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셀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기대에 찬 표정의 여학생들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제안을 한 학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미안한데, 카페는 나중에 갈게. 갑자기 할 일이 생겼어."

"그래? ...아쉽네."

여학생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셀린은 죄책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말 미안해. 다음엔 내가 더 좋은 가게로 데려갈게. 약속할게!"

"그렇다면야, 꼭 지켜야 해?"

"당연하지."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셀린은 이안 황자와 유클리드 교수가 사라진 방향을 다시 바라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쪽이었나?"

그녀는 중얼거렸다.

분명 저쪽은 개인 연무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셀린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개인 연무장은 그 이름처럼 학생들 개인의 마법 연습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여러 겹의 보호 마법이 공간을 감싸고 있어, 초보자들도 안전하게 마법을 수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공기 중에 마력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마력이 충만한 이곳에서, 오늘은 이안을 가르치기 위해 연무장의 한 공간을 미리 신청해 두었다.

"이건 뭔가요?"

이안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검은색 돌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표면에서 푸른빛 마력이 희미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마강석이다. 들어 본 적은 있겠지?"

마강석은 마력이 흐르는 특별한 돌이었다. 그 안에 깃든 마력의 존재로 인해 돌의 강도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높았고, 그래서 일반적인 장비로는 제작할 수 없는 물건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그 특성 덕분에 마법을 실험하기에 완벽한 과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들어 본 적은 있죠. 근데 제가 궁금한 건... 왜 이렇게 큰 게 여기 있냐는 거예요."

이안의 의문은 당연했다.

내가 준비한 마강석의 크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바위는 이안의 키보다 세 배는 더 컸는데 일반적인 마법 연습에서 이 정도 크기의 마강석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이유가 있다.

"내가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네 목표가 바로 이 마강석을 부수는 거다."

"...네?"

이안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아니, 저걸 부수라고요?"

"그래. 일단은 저건 제쳐 두고, 먼저 마법부터 가르쳐 줄게."

사실 오늘 이안을 가르치기 위해 나는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그에게 알려 줄 마법이 기존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출이 상당했지.'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품에서 수정 하나를 꺼냈다.

"먼저 이거부터 시작하자."

수정을 내밀자 이안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건 뭐죠?"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수정은 초록빛과 푸른빛이 마치 춤을 추듯 어우러져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수정은 마치 작은 우주를 담고 있는 듯 신비로웠고,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건 정령석이다."

내 설명에 이안은 더욱 관심을 보였다.

정령석은 정령술사들이 정령의 힘을 결정화시켜 만들어 낸 귀중한 물건이었다.

정령의 순수한 힘이 담겨 있어 만지는 것만으로도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주로 정령과의 계약을 위해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였다.

다른 물건이 아닌 정령석을 준비한 이유는 이안이 정령 마법에 큰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바람 속성밖에 못 쓰는 이유도 정령과 연관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멋모르고 고위 정령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안은 불완전한 계약을 맺고 말았다.

고위 정령과의 계약은 정신에 부담을 주는 일이니 이안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정령 마법은 생각도 못하고 이상한 데 정신을 팔고 있는 거겠지.

그렇기에 이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정령 계약을 갱신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정령 마법과 정령 계약에 대한 서적을 읽고 연구해 왔다.

"갑자기 정령석이라고요?"

"일단, 네 상태에 대해 알려 줄게. 넌 지금 정령과 계약이 된 상태야."

"제가요?"

"그래. 문제는 그것이 불완전한 계약이라는 거야. 네가 정령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계약이 잘못 이루어져서지."

"정말 제가 정령과 계약했다고요? 믿을 수가 없는데...."

"아마 네 주변에 정령이 맴돌고 있을 거야. 지금은 네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니까. 그걸 가능하게 해야지."

이안의 주변에 정령이 있는 건 확인했다. 유토피아에서 둔에게 확인해 본 결과 정령의 존재가 느껴진다고 했다.

"정령이라니...."

이안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믿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을 때까지 정령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지한다 한들 정령과 계약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내기로 약속을 받아 내지 못했다면 둔과 계약할 수 없었을 테니까.

"믿지 못하는 거 같으니 일단 정령을 확인해 보자. 정령석에 손을 올려 봐."

이안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정령석에 손을 올렸다.

아직 그의 얼굴엔 의구심이 가득했지만, 날 믿어 보기로 한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주변의 기운에 집중해 봐. 정령석의 힘을 사용하면 정령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이안이 눈을 감고 정령석에 손을 올리자, 곧 정령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령석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이 이안의 몸을 감싸며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연무장 내부가 작은 태풍에 갇힌 듯했다.

한차례 불어닥친 거센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이안의 어깨에 내려앉은 한 마리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몸집이 큰 매였다.

그 형태조차 평범한 매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안의 눈처럼 매의 눈은 황금색으로 빛났고, 깃털 하나하나 정갈하게 다듬어진 것이 마치 황족과 같은 품위가 느껴졌다.

그 날개를 펼치면 연무장 절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렇게 뚜렷한 동물의 형체를 가진 정령이라니. 분명 고위 정령이 틀림없다.

"...교, 교수님?"

이안도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정령 계약에 있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계약은 당사자끼리의 일이니까.

나는 이안을 향해 외쳤다.

"그 정령이랑 다시 계약해!"

아마 정령은 이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터다.

고위 정령이 불완전한 계약을 진행할 정도로 이안에겐 충분한 재능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엔 바람이 이안과 매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마치 두 존재를 하나로 묶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이안은 눈앞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눈매를 가진 매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 말이다.

'어디서 이 느낌을 느낀 것 같은데.'

이 느낌은 어딘가 너무 친숙했다.

마치 제국에 살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날들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정령에게 다가갔다.

"너였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황성에 침입한 괴한에게 습격당했을 때, 이안의 앞에 나타나 그를 지켜 냈던 황금빛 날개의 매.

다급한 상황 속에서 이안은 이 정령과 서투른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네가 막아 준 거구나."

이안이 매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까까지 사나웠던 매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로 그의 손을 비비고 있었다.

"나와 다시 계약해 줄래?"

한참 동안 정령의 부드러운 깃털을 쓰다듬던 이안은 마침내 기억 속에서 떠오른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엘, 잊어서 미안해."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의 눈앞에 황금빛 글씨로 쓰인 스크롤이 나타났다.

이안은 곧바로 스크롤에 마력을 흘리며 계약문을 읊었다.

"나 이안 임페리오는 정령 엘을 종자로서 받아들인다."

정령 엘도 계약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크롤에서 빛나는 문자가 튀어나와 이안의 손등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이걸로 제대로 된 정상적인 계약이 완성된 것이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이안이 정령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이는 그의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를 휘감던 거센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보네."

이안이 정령과 계약을 맺는 것을 지켜보던 유클리드가 감탄하듯 말을 건넸다.

"계약은 잘 끝났나 봐?"

"네, 잘 끝났습니다."

이안의 곁에는 이제 바람의 고위 정령 에리엘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교수님 덕분에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게 됐어요."

"그래? 그건 다행이네. 이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어."

유클리드 교수가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어디 힘든 건 없지?"

"네.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살짝 어지럽네요."

"그건 고위 정령과 계약해서 그런 거야. 잠시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유클리드 교수가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이제 진짜 마법을 배워야지. 우리의 목표는 원래 마법이었으니까."

교수가 허공에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 냈다. 눈대중으로 봐도 상당히 어려운 수식이었다.

이안 역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마법을 공부했음에도, 처음 보는 마법 문자가 여럿 있었다.

그의 눈에 호기심과 도전 의식이 반짝였다.

"너에게 알려 줄 건 정령 마법이다."

유클리드의 말과 함께 어느새 몇 가지의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빛나는 선들이 얽히고설켜 아름다운 기하학적 패턴을 그려 냈다.

"이게 정령 마법이군요.... 교수님은 이런 것도 하실 줄 아셨어요?"

"널 위해서 공부해 왔지."

유클리드가 정령 마법을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는 게임 속 지식 때문이었다.

미래의 이안이 정령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유클리드 또한 정령 마법을 미리 공부해 왔던 것이었다.

"일단 이걸 먼저 익혀 볼래?"

유클리드가 오래되어 보이는 양피지 한 장을 이안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빛과 은빛 잉크로 그려진 선들이 종이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정령 마법의 마법진이었다.

"내가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너야. 나는 보조를 해 줄 테니 한번 해 봐."

"...알겠습니다."

이안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마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희미한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자, 날 믿어."

그런 이안을 보며 유클리드가 말했다.

22화. 정령 마법 (2)

어둠이 내리며 저녁이 찾아왔다.

개인 연무장 주변에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며 은은한 빛으로 어둠을 밀어냈다.

시간이 늦어 학생들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바빴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달리 한 여학생이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벌써 시간이...."

셀린 이리에드가 멍하니 개인 연무장 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교수님은 언제 나오시는 거야."

셀린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책을 천천히 덮었다. 유클리드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여섯 번을 다시 읽을 동안에도 유클리드와 이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이따금 개인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덕분에 그들이 아직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셀린은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마법 연습을 하는 건 눈치챘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안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돌아가자. 이제 시간이 너무 늦었어.'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는 생각에 셀린이 결심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개인 연무장의 문이 열리며 유클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셀린은 재빨리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왜 저러시지?'

멀리서 보고 있었지만, 유클리드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처음 개인 연무장에 들어갈 때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었다.

하지만 지금 바라본 유클리드의 얼굴은 창백했고, 피로가 심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걸음걸이도 불안정해 보였다.

유클리드는 힘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벽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했나? 힘드네...."

셀린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사용하신 거야?'

교수의 중얼거림 덕분에 셀린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다. 이안에게 새로운 마법을 가르친 게 아닐까?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들이 맴돌고 있었다.

"뭐야? 벌써 가신 건가?"

상념에 빠진 사이 고개를 드니 유클리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셀린은 교수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의자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개인 연무장 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클리드는 개인 연무장에서 나오며 문을 닫지 않았기에 아직 문은 열린 채였다.

셀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무장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살며시 안을 들여다봤다.

'저게 뭐야?'

그곳에는 엄청나게 큰 바윗돌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얼마나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중앙이 꿰뚫려 있었고, 곳곳에는 돌의 파편이 마치 꽃잎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 황폐한 공간 중앙에 이안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셀린은 황급히 이안에게 다가갔다.

주변의 처참한 광경에 그의 안위가 걱정됐다. 귀족으로서의 의무감과 개인적인 걱정이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황자님, 괘, 괜찮으세요?"

하지만 셀린의 걱정과는 달리, 이안의 목소리는 의외로 평온했다.

"뭐야, 셀린이잖아?"

이안의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난 괜찮아. 마력을 많이 사용해서 누워 있었을 뿐이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주변 상태가 너무 엉망인데요."

"저것들? 아, 마법 연습 때문에 그래."

이안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도 검은색 바위 하나가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셀린이 처음 마주한 돌보다는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처음 봤던 산산이 조각 난 돌과는 달리 이안이 가리킨 검은색 돌은 모서리만 부서져 있었다.

"아직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저 정도는 할 수 있었어. 아... 네가 말한 건 이게 아닌가?"

이안은 셀린의 시선을 따라가며 다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아쉽게도, 저건 내 힘으로 한 게 아니야."

셀린이 처음 들어왔을 때 본 산산조각이 난 돌이었다.

"그럼, 설마...."

이안의 말로 보아 저걸 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셀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저, 저걸 교수님이 했다고요?"

"그래."

이안이 헛웃음을 쳤다.

"교수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교수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새로운 마법을 배우지도 못했을 거야. 나는 아직 미숙해."

"도대체 어떤 마법인 거예요? 마강석을 저렇게 부술 정도라니."

셀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마법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이안도 그녀의 궁금증에 답해 주고 싶었지만, 유클리드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미안, 그건 지금은 말해 줄 수는 없어."

유클리드가 이번 개인 수업에 관해서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반파되어 버린 돌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었어.'

유클리드 교수의 도움으로 시전한 마법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전까진 정령 마법은 평범하고 지루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방금 전의 위력을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유클리드가 간 후 혼자서라도 마법을 재현해 보고 싶었지만, 아직 이안의 실력은 미숙했다.

악착같이 해서야 겨우 마강석의 작은 모서리를 부술 수 있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셀린은 입술을 살짝 비죽이며 말했다.

"황자님은 언제 돌아가실 건가요? 이제 저녁인데."

이안이 다시 바닥에 엎어지듯 누웠다.

마력을 너무 쓴 탓에 걸을 힘도 없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땀방울이 이마를 적시고 있었다.

"난 좀 더 있다가 갈 거야. 일어날 힘도 없다고."

"그렇군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좀 기다려 주지 그래? 황자를 내버려 두고 갈 셈이야?"

이안의 장난스러운 말에 셀린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바쁜 일이 생겨서 말이죠. 그러면 황자님, 다음 수업에 봬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연무장을 나섰다.

"귀염성이 없네."

이안은 말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셀린이 말한 것처럼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마법을 연습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은은한 별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 유클리드 교수와 함께한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은 주머니를 뒤졌다. 유클리드 교수가 정령 마법에 대해서 적어 준 종이가 있었다.

그 종이에는 복잡한 마법진과 함께 세세한 설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안은 그 종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더 연습해야겠어."

이제 실력 테스트까지 단 2주.

이안은 그전까지 마법을 완성하기로 다짐했다.

* * *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안의 정령 마법을 보조하는 정도였지만, 고위 정령의 정령 마법은 상상 이상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어.'

고위 정령의 정령 마법의 힘을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하기엔 이안의 실력이 아직 미숙해 보였지만, 계속 연습한다면 정령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담긴 열정을 생각하면 분명 가능할 터였다. 악착같이 노력하던 녀석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저택에 도착했다.

"도련님,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에드나가 나를 반겼다.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당장 식사부터 할 수 있을까?"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나는 에드나를 뒤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자 옆에서 카인이 미리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인, 집사 생활은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아직 에드나 씨에게는 혼나고 있지만요. 아, 맞다."

카인이 뭔가 기억났는지, 품을 뒤지며 다가왔다.

"도련님, 공작가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가 품속에서 꺼낸 건 베네딕가의 문양이 박힌 편지였다.

"고마워."

나는 편지를 받아 펼쳐 봤다.

편지에 적힌 건 단순한 내용이었다. 곧 다가올 건국제 행사에 참여할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건국제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는 행사다. 당연히 베네딕 가문도 고위 귀족이니까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건국제에 가지 않기로 했다.

일단 건국제 때는 사람이 붐비기도 하고, 아직 유클리드의 인상이 귀족들 사이에서 썩 좋지 않았다.

내가 망나니라고 소문이 자자한 곳에 가 봤자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기 싫었던 이유가 있다.

'세리에 베네딕....'

유클리드의 누나이자 베네딕가의 장녀, 세리에 베네딕이 건국제에 참여한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세리에 베네딕.

차기 대마법사라고 평가받는 인물 중 한 명.

마법 실력이 뛰어난 건 물론이며 성품도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 대단한 누나이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마법에 관한 일이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마법 대련을 요구하는 건 물론이며, 어느 때에도 마법 연구를 쉬는 법이 없으니 그야말로 마법광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엮인다면 귀찮을 게 분명하단 말이지.'

유클리드도 과거 누나에게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니까.

그 생각을 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교수 일 때문에 못 간다고 전해 줘, 아니면 마법 연구하느라 바쁘다고 하던가."

지금은 건국제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

내게 당장 중요한 건 곧 다가올 실력 테스트다.

* * *

"연습을 잠시 멈추고 다들 모여 봐."

수업 시간이 끝나기 전, 나는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곧 다음 주면 실력 테스트 기간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윙 볼을 맞힌 네 명의 학생이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번 수업에서 세 학생 정도는 통과할 것이라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셀린 이리에드, 이안 임페리오, 그리고 아직은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에윈까지.

셋 다 실력이 출중한 학생들이었기에 실력의 상승이 가팔랐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마지막 학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베네커.'

베네커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서류에 적힌 대로라면 마력량도 부족하고, 아직 마법 실력도 서투른 학생이었다.

남들보다 확실히 뒤처지고 있었는데, 어느새부턴가 실력이 월등히 좋아지고 있었다.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베네커의 눈에는 결의와 자부심이 가득했다.

"다들 알겠지만, 다음 주부터는 실력 테스트 기간이 다가온다. 오리엔테이션 때 얘기한 것처럼 테스트를 상위로 통과한 학생들에겐 먼저 부여 마법을 전수해 주도록 하겠다."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다.

테스트를 상위로 통과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학생들이 밤마다 연무장에서 연습하는 건 알고 있었다. 교수로서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대비해 연무장의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몇몇 학생이 성공하긴 했지만, 아직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 말을 듣고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숙였다.

실력 테스트를 겨냥해서 만든 수업이지만, 아직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공을 맞히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했다.

목표와는 별개로 이 수업은 끝까지 도전한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제 그간의 노력을 체감할 시간이 왔다.

"다들 상심하지 마라, 원래 감을 익히려고 한 수업이니 괜찮다."

나는 윙 볼을 손에 들어 던졌다.

"매직 미사일로 이 윙 볼을 맞히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

윙 볼이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학생들의 시선도 윙 볼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가 공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너희들은 윙 볼의 속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거다."

그리고 품속에서 지팡이를 꺼내 마법을 사용했다. 커다란 화염구가 나타나 윙 볼을 격추했다. 불꽃이 튀며 공이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매직 미사일이 아닌, 다른 공격 마법을 사용하면 난이도가 현저히 낮아지지."

이 수업의 목표는 학생들이 윙 볼의 속도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 윙 볼을 꺼냈을 때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윙볼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이 시선으로나마 윙볼의 속도를 제대로 따라잡고 있다.

"테스트까지 단 1주가 남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매직 미사일 말고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

학생 한 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교수님, 그러면 이 수업을 한 이유가 없지 않나요? 그리고 매직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윙 볼을 맞히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말보다는 직접 느껴 봐야지 알 수 있을 거다. 아직 학생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체감을 못 한 상태니까.

"일단 해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 실제로 마법을 사용해 보고 경험해 봐. 그러면 자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겠지."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다. 그럼 다음 테스트 기간 때 보겠다."

23화. 정령학 교수

수업이 끝나고, 나는 이안과 함께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초봄의 따스한 햇살이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었다.

"교수님, 도대체 뭐 때문에 그래요?"

"일단 따라와."

이안의 장점은 고위 정령과의 교감과 정령 마법이었다.

하지만 정령 마법은 내게 연이 없는 영역이었다.

내가 둔과 계약했다고는 하지만 둔은 전투형 정령이 아닌 유틸리티형에 가까웠고, 그렇기에 특별한 정령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안을 제대로 가르치기엔 한계가 있었기에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다행히 플랑 교수의 도움으로 적임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찾는 분이 이곳에 계신 건가요?"

옆에서 걷던 이안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우리가 향하는 곳은 아카데미 외부 부지에 있는 울창한 숲이었다

정령학은 그 특성상 자연과 어우러져야만 더욱 쉽게 교감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정령학 교수들은 대부분 숲과 가까운 곳에서 수업을 진행한다.

'이름이 에스테란이었나?'

이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는 별로 비중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카데미 교수니 정령학에 대해선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얼마간 걸으니 에스테란 교수가 있다는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교수와 학생들이 수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 아래, 그들의 모습이 신비롭게 빛났다.

"아직 수업 중이신 것 같은데요?"

"조금 기다리자.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안과 나는 커다란 참나무에 등을 기대 시간을 때우며 에스테란이 수업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인상이 좋네.'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에스테란 교수의 선한 인상이 눈에 띄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연두색 머리카락과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주변의 정령들마저 끌어당기는 듯했다.

'아난타 총장의 아카데미라 그런가? 엘프가 많군.'

옆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귀, 길게 늘어트려 하나로 묶은 연둣빛 머리카락까지.

이 세계에 있는 엘프 남성의 특징과 판박이였다.

엘프 종족의 남성들은 여성처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다녔는데, 그들에게 머리카락은 생명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그들의 문화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생명의 일부를 잃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어느새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에스테란 교수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클리드 교수님이시죠?"

에스테란 교수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마치 오래된 나무가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플랑 교수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쪽이?"

에스테란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이안이 그 따뜻한 시선을 눈치채고 바른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이안 임페리오라고 합니다."

"흐음, 플랑 교수님께 전해 들은 바로는 정령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데 맞나요?"

"네, 이안이 정령 마법을 배우는 것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에스테란의 눈이 가늘어지며 이안을 자세히 훑어봤다.

"정말 고위 정령과 계약을 한 건가요?"

"그건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일단 여기 서서 얘기하기엔 그러니, 저쪽에 제 거처가 있습니다. 저기로 가시죠.

우리는 에스테란의 뒤를 따라 숲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착한 장소에는 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오두막 한 채가 우리를 반겼다.

오두막 주변으로는 다양한 색깔의 꽃과 약초들이 정성스레 가꾸어진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깔끔하고 정갈한 에스테란 교수의 외모와는 달리, 오두막 안은 예상외로 어질러진 모습이었다.

바닥은 널브러진 수많은 책들로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고, 작업대 위는 다양한 실험 도구들이 질서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하, 조금 방안이 지저분하죠?"

에스테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책을 밟지 않게 조심히 움직이며 안내받은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고위 정령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이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도 이해한 듯 눈을 감았다.

순간, 허공에 커다란 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엄 있는 모습에 에스테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정말 고위 정령과 계약하셨을 줄이야! 대단하군요."

"에스테란 교수님께선 정령 마법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정령학 교수이니 웬만한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안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실력 테스트 때까지만이라도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만, 일단 정령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해 드리죠."

에스테란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빛이 모여들더니 도마뱀 모습의 화염을 두른 정령이 나타났다.

샐러맨더라 불리는 이 정령은 탁자 위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제가 계약한 정령 친구입니다. 이제 계약한 지 10년은 넘었죠. 황자님도 그 정령과 계약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만,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정령 마법은 정령과의 친밀도나 유대감에 따라서 달라지거든요."

에스테란이 탁자에 놓인 촛대를 가리켰다.

"한 번 예시를 보여 드리죠."

그는 지팡이를 꺼내 촛대를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순간 붉은빛의 마법진이 생기며 그 중심에서 작은 화염이 나타났다.

"이 마법은 정령의 힘을 빌려서 사용하는 거예요."

촛농 위로 작은 불꽃이 살랑거리며 타올랐다.

"지금 마법은 정령의 힘을 한 30%쯤 빌려 온 거죠. 하지만 100% 이상을 사용한다면...."

그가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분명 아까와 같은 마법진이었다. 구조와 배열 모두 동일하니 다른 마법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구현된 마법은 방금 전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조금 전의 작은 불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불기둥이 촛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보시다시피, 위력 자체가 달라지죠. 그리고 이건 위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령마다 특성이 달라서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면 이안은 정령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니 많은 힘을 빌려 올 수 있겠군요."

"그렇긴 하지만 불완전한 계약이 있었다고 하니 조금씩 정령의 힘을 회복해야 할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강해지겠죠."

이안이 미래에 강력한 정령 마법을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에스테란 교수의 말대로라면 그 시간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뜻이다.

게임 때보다 더욱 빠르게 이안의 불완전한 계약을 해결했으니 말이다.

"원래라면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고위 정령을 보니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유클리드 교수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이안과 에스테란 교수를 번갈아 보며 품에서 조심스럽게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안을 가르치실 때, 이 마법을 집중적으로 교육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일단 이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에스테란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라서요."

"무슨 마법이길래...."

에스테란이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어보는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어 갔다.

놀람, 의문, 그리고 흥미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교수님, 이 마법만 연습시키라는 겁니까? 이렇게 강력한 마법을 배우는 건 이안에게 힘든 일일지도 모릅니다."

"네, 이안도 이걸 원할 겁니다."

이안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 의도를 파악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테란 교수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오후에 와 주세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안, 너는 오늘부터 열심히 노력해."

"네."

에스테란 교수와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는 곧바로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콰아앙.

유클리드 저택의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위층으로 전해졌다.

저택의 지하는 유클리드가 마법을 연습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마련된 장소였다.

콰아앙.

마법으로 인한 강렬한 충격에 저택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저택을 관리하는 메이드 에드나는 불안한 듯 복도를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도련님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시길래, 저런 소리가 나는 거지?'

유클리드 도련님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지하로 향했다. 마법사가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지하에 내려간 유클리드가 벌써 며칠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식사도 거르고, 오로지 마법 연습에만 매진하는 모습이 에드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다행히 가끔 마력 포션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아 생존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잠은 제대로 주무시는 건가....'

에드나의 마음은 유클리드에 대한 걱정으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콰아앙.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충돌음에 에드나의 불안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녀가 지하실 문 앞을 서성이며 지금이라도 유클리드를 말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에드나! 지금 있어?"

갑자기 들려온 유클리드의 목소리에 에드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박함이 묻어 있었다.

에드나는 즉시 지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러나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에드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전쟁터처럼 엉망이 된 지하실.

강력한 마법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소재로 세워진 지하실의 벽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유클리드의 마법을 버티지 못한 것인지 지하실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었다.

에드나의 시선이 황급히 유클리드를 향했다.

그 역시 오랜 시간의 수련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 땀에 젖은 얼굴,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강렬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유클리드가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 별거 아니야. 마법 연습 때문에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도련님이 그러시다면야."

에드나가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도련님,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아, 마력이 다 떨어져서 말이야...."

유클리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쉬려고 하는데 방까지 부축해 줄 수 있을까?"

"...네?"

"미안, 더 이상 힘이 없어서 말이야. 손가락 하나도 안 움직이더라고."

"후우, 알겠습니다."

에드나는 한숨을 쉬며 불평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히야. 별일은 없어 보이시네.'

어제까지만 해도 강제로 지하실을 열까 고민했던 에드나였다.

그녀는 도련님을 믿고 기다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도련님, 오늘은 좀 쉬세요. 쉬고 나서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에드나가 조심스럽게 유클리드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지금 모습을 계속 두고 볼 수는 없겠어요."

"좀 꼴이 말이 아니긴 하지?"

유클리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연습으로 지친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 지금 난 교수잖아. 학생보다는 뒤처지면 안 돼."

"이 정도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유클리드가 자신의 지팡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 실력 테스트가 다가오잖아? 학생들을 지킬 힘은 가지고 싶어. 마력량도 늘리고 싶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노력 하나는 내 특기거든. 실력 테스트 전까지 연습하려고."

에드나는 유클리드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좌절했던 모습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이 이러는데 저도 놀고 있을 수는 없겠네요.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에드나."

유클리드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실력 테스트가 다가오는 날까지, 저택의 지하에서 유클리드는 계속해서 마법의 연습을 이어 갔다.

24화. 실력 테스트 (1)

실력 테스트 당일이 다가왔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2학년 학생들을 연무장에 모았다.

테스트에 나가는 순서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순서는 이렇게 간다."

나는 학생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종이를 건네줬다.

학생들의 순서는 실력의 편차를 생각해서 배치해 뒀다.

하지만 첫 순서와 마지막 순서에 누굴 세울지는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두 순서는 외부의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리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전반적인 마법의 실력은 셀린이 좋지만,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엔 이안이 좋단 말이지.'

처음 나가는 학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학생이었다.

시험을 마지막으로 치르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 학생이 학년을 대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고는 이안과 셀린을 바라봤다.

"셀린, 이안, 앞으로 나와라."

셀린과 이안이 내 앞에 섰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셀린, 네가 처음에 나간다. 그리고 이안, 네가 마지막이다."

셀린은 주눅이 든 표정이 되었고, 이안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도 실력이 좋지만, 내가 직접 가르친 이안이라면 더욱 좋은 반응을 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셀린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첫 순서도 중요하니까. 셀린, 널 믿겠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 넌 내가 말해 둔 거 알고 있지?"

"네."

"네가 잘해야지 2학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나는 품에서 띠 하나를 꺼냈다. 학년 대표임을 증명하는 완장이었다.

그리고 이안의 팔에 걸어 줬다.

"네가 이번에 2학년의 대표다."

만약을 대비하여 전이 마법을 걸어 둔 완장이다.

게임 속에선 항상 작은 소동이 일어났던 실력 테스트다. 시험장 곳곳을 살피며 위험 요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

'어찌 됐든 대비는 해야겠지.'

테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중앙동에서부터 들려왔다.

"자, 가자."

* * *

학생들과 멀어진 나는 교수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시험장이었다.

많은 교수진이 앉아 있었고, 외부인들도 대거 앉아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마탑의 사람으로 보인다.

미래의 마법사들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다.

나는 인파를 헤쳐서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그곳에는 실전 마법 전투학 교수진들이 하나씩 착석해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지금까지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던 1학년 담당 전투학 교수였다.

1학년 교수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인사를 해 왔다.

"아, 안녕하세요. 유클리드 교수님 맞으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1학년을 담당하는 힌츠라고 합니다."

힌츠 교수는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부유하게 살았는지, 입고 있는 옷의 때깔이 달랐다.

이름을 듣지 않았다면, 어딘가의 귀족 자제라고 생각했을 거다.

"반갑습니다. 힌츠 교수님."

나와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힌츠는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에 답했다.

신임 교수인 그는 학생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그는 낙오되는 학생이 없이, 마법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나저나. 유클리드 교수님의 수업 방식이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힌츠가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왔다.

조금 부담스럽네.

"그냥 평범한 수업이에요. 힌츠 선생님이야말로 수업을 잘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시던데."

"아닙니다. 학생들이 잘 따라 준 덕분이죠."

힌츠 교수는 칭찬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잠깐 대화를 나눈 것뿐이지만, 그가 얼마나 학생을 아끼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학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다른 교수들과 달랐다.

특히.

"이거 유클리드 교수 아닌가?"

저 달튼 교수 같은 부류와는 말이다.

"반갑습니다. 달튼 교수님."

"오늘 실력 테스트는 잘 준비했나 보군."

"네, 학생들이 잘 따라 줘서 말이죠."

"그런가? 뭐 좀 이따 보면 알겠지."

달튼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괜히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유클리드 교수님, 저분이 3학년 담당이시죠?"

"네, 달튼 그레이드 교수님이죠."

"그렇군요. 제가 인사할 땐 받아주시지도 않더군요."

아마도 힌츠 교수는 평민이라 무시한 거겠지.

이것만 봐도 달튼 교수와 힌츠 교수의 차이가 드러난다. 3학년 수업에서도 평민 학생과 귀족 학생을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요."

"유클리드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교수들이 앉는 자리에는 수정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실력 테스트는 시험장 내부에 설치된 포탈 안에서 진행되었다.

포탈에는 테스트를 위한 공간이 준비되고, 각 학년의 수준에 맞는 마물이 소환된다.

교수들의 자리에 놓인 수정구는 그런 포탈 안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비추는 아티팩트였다.

이윽고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달튼 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3학년 학생들이었다.

마법 수련을 하랴, 아이들을 가르치랴 바빠서 다른 학년들의 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연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바윈 아카데미를 이끄는 황금기라 불리는 3학년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출중하다고 들었다.

게임 속에서 보았던 인물들도 몇몇 볼 수 있지 않을까.

"실력 테스트를 시작하죠."

아난타 총장의 말을 끝으로 실력 테스트가 시작됐다.

처음 나온 학생은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특이하게도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저 학생 검을 찬 걸 보니 마검사인가 봐요. 아마 바벨 가문의 테레사일 거예요."

힌츠가 여학생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테레사 바벨.

바벨 가문은 한때 유명한 기사 가문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마법과 결합한 검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아마 내 만년필 지팡이처럼, 그녀는 저 검을 지팡이처럼 쓸 터였다.

테스트 시작과 함께, 테레사가 포탈로 진입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력 테스트의 기준은 학년에 따라 달랐다.

1학년과 2학년이 마법의 기초와 응용을 평가받는다면, 3학년은 그가 마법사로서 완성이 되었는지를 평가받았다.

그런 만큼 아카데미 3학년의 테스트는 난이도가 결코 낮지 않았다.

포탈에 들어간 테레사 바벨의 앞에 소환된 마물은 거대한 몸집을 가진 트롤이었다.

테레사는 게임에서도 상당히 성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임 속에 들어온 이후 그녀의 실력을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교수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주목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실력은 어떨까?'

테레사가 검을 뽑아 트롤과 마주했다.

거대한 트롤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녀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먼저 공격한 건 트롤이었다.

거대한 몸집을 토대로 날아드는 주먹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테레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뿐히 옆으로 움직여 트롤의 뒤를 점하고는 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푸른빛의 마법진이 트롤의 발밑에 나타났다.

마법진의 형태로 보아 얼음 마법.

트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테레사를 찾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테레사의 얼음 마법 때문에 트롤은 몸이 얼어붙어 버렸으니까.

그녀는 여유롭게 트롤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일격.

단번에 잘려 나간 트롤의 머리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역시 기사 가문다운 방법이군.'

트롤은 마법 방어력이 높은 개체다.

그렇기에 트롤을 상대하기 위해선 마법 방어력을 뚫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을 사용하던가, 아니면 물리 공격으로 처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테레사는 트롤의 마법 방어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얼음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몬스터의 목을 베어 넘길 수 있는 육체 능력도 있었다.

바벨 가문다운 처리방식이었다.

"역시 바벨 가문이네요. 실력 자체가 달라요."

"올해 3학년은 기대할 만하군."

"다른 학생들도 기대가 되네요."

교수진과 마탑주들이 그녀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테레사의 실력을 보고 감명을 받은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녀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테레사가 끝난 이후에도 3학년 학생들의 테스트가 계속 이어졌다.

다른 3학년 학생들의 실력도 훌륭했다.

테레사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들 자신만의 방법으로 트롤을 처치했다.

독 마법과 같은 상태 이상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트롤의 마법 내성을 꿰뚫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역시 황금기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달튼 교수도 멋으로 교수가 된 건 아니었다. 아무리 학생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한들, 그 재능을 꽃피우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3학년의 마지막 순서를 맡은 학생이 나왔다.

이번 3학년의 대표를 맡는 학생일 터다.

어쩐지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학생.

'셀린의 쌍둥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목표인 에단 이리에드.'

에단의 테스트는 시작하자마자 끝났다.

그는 강력한 화염 마법을 사용했다.

뱀의 형태로 뿜어져 나온 거대한 화염은 삽시간에 트롤을 삼켰고, 트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한 채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역시 3학년의 대표가 될 만한 실력이다.

주변에 있던 교수들과 마탑주들도 에단을 칭찬하기 바빴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달튼이 어깨를 으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다음은 2학년인가. 마음의 준비를 하려던 차였다.

"다음 학년의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 잠시 준비 시간을 갖겠습니다."

심사를 주관하던 마법사가 앞으로 나서 교수와 마탑주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준비 시간이라니?

이런 시간이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없다. 순서상으로는 3학년의 테스트가 끝난 후 바로 2학년의 테스트가 시작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테스트를 주관하던 마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유클리드 교수님, 힌츠 교수님.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요."

플랑 교수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2학년 테스트를 준비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말이죠. 1학년 테스트부터 시작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전 괜찮습니다."

힌츠 교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문제라니.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나 역시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전해 둘게요. 교수님들 감사해요."

플랑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나저나 테스트를 관리하는 사람이 플랑 교수였다니, 다방면으로 총장에게 굴려지는 듯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힌츠 교수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별거 아닐 겁니다. 사소한 문제겠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도 실력 테스트 에피소드는 항상 이런저런 사건들이 발생했으니까.

'미리 대비는 해 놨으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일단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테스트를 재개하겠습니다. 부득이한 문제로 이번엔 1학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학년의 테스트가 시작됐다.

학생들이 하나둘 시험장에 입장했다.

학생의 모습이 보이자 힌츠는 긴장한 듯 다리를 떨고 있었다.

"유클리드 교수님, 저희 학생들이 잘할 수 있을까요?"

"교수님이 가르친 학생들이니 잘할 겁니다."

힌츠 교수의 걱정과는 달리 1학년들의 테스트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2, 3학년들과 달리 마법을 시연하는 것이 끝이었기에 1학년들은 포탈에 들어가지 않고 시험장 안에서 자신들이 배운 마법을 선보였다.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힌츠 교수의 뛰어난 교육법 덕분인지 모든 학생들이 고루고루 괜찮은 실력을 보였다.

힌츠 교수 역시 그런 제자들이 대견했던 것인지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 2학년의 테스트가 시작될 차례였다.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인지 아까와 같은 휴식 시간은 없었다.

테스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2학년이라...."

"그 소문이 있었죠. 들러리 반이라고."

"3학년과 너무 대조된다고 하더라고요. 실력에서도, 태도에서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지금 세간에 알려져 있는 2학년들의 위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2학년들이 시험장으로 들어왔는데도, 교수와 마탑주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학년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도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사람이다.

"유클리드 교수, 곧 2학년의 테스트인데 괜찮나?"

달튼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 3학년들의 평가가 좋았는지, 입이 아주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 모습이 꽤 거북했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제 학생들이라면 잘할 거 같거든요."

"그런가? 하지만 학생들은 불안해하는 거 같은데 말이야."

달튼이 말한 것처럼 몇몇 학생들의 긴장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수들과 마탑주들 앞이라면 누구라도 긴장할 수 있는 법이죠."

"글쎄, 이번 2학년들의 평가가 어떤지는 알고 있을 텐데?"

달튼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대로 테스트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

가려진 손 사이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역시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그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일어서서 달튼을 마주했다.

"저희 학생 중 한 명이라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저는 교수직을 그만둬 드리죠."

25화. 실력 테스트 (2)

"뭐, 뭐라고?"

달튼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달튼이 계속해서 못마땅한 듯 내게 시비를 거는 데엔 예상되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이 자리가 달튼 교수의 친척이 들어올 자리였으니까.'

달튼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2학년 실전 마법 전투학 교수 자리에 자신의 친척을 임명하려고 했다.

원래라면 아난타 총장에게 시험을 치르게 할 셈이었지만, 내가 2학년 전투 마법학 교수가 되면서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교,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힌츠 교수가 다급히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던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힌츠 교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도 교수직을 그만두신다니. 너무 위험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내 말에 놀란 것인지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자신감이 있었다.

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온 학생이라면 무난하게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 거다.

"그 말 정말인가?"

"네, 저는 한 말은 지킵니다."

달튼이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그만큼 학생들을 믿는다는 거겠지?"

"뭐, 그렇죠."

"유클리드 교수만 그러면 불공평하지. 만약 2학년 학생들이 전부 통과하면 내 자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그러면...."

나는 달튼의 손을 바라봤다.

그곳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있었다.

"손에 끼고 계신 반지를 저에게 주시죠."

달튼이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이 반지 말하는 건가? 정말 이걸로 괜찮나?"

"네,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럼, 나야 좋지. 그런 걸로 알겠네. 말은 바꾸지 말라고."

"달튼 교수님이야말로 약속은 지키시길 바랍니다."

달튼 교수가 끼고 있는 반지.

어디에서나 볼 법한 흔한 쇠 반지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파르텐의 비고에서 얻은 반지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아이템이다.

그 능력은 무려 착용자의 마력 회복량을 크게 늘려 주는 것.

아이템의 효과를 모르는 달튼이야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할 테니 그저 신이 나 보였지만.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시험장을 바라봤다.

테스트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첫 번째 타자 셀린 이리에드가 포탈에 들어갔다.

* * *

셀린은 긴장한 마음을 바로잡고,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포탈 안으로 들어오니 색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숲?"

포탈을 넘어간 그녀의 눈앞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그녀가 있는 곳은 나무가 없는 둥근 공터였는데, 그 중앙에 커다란 녹색 수정 하나가 있었다.

"이게 내가 지켜야 하는 거구나."

이번 2학년 테스트의 내용.

[마물로부터 수정을 지켜라.]

커다란 녹색 수정은 얼핏 보면 단단해 보이지만, 마물의 공격을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삐이익.

이윽고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곧 마물이 소환됐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잘할 수 있겠지?"

유클리드 교수님은 지난주가 되어서야 '윙 볼'을 암짛는 데 매직 미사일이 아닌 학생들의 주력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면서 유클리드는 지난 수업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던 마법 컨트롤 수업의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때 한 번이라도 화염 마법을 연습해 볼 걸 그랬나?'

하지만 셀린은 마지막 수업까지도 자신의 주력인 화염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몇 번은 우연히 매직 미사일로 윙 볼을 맞힌 적이 있었지만, 온전한 그녀의 실력으로 성공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기가 통했던 것일까, 지난주 셀린은 매직 미사일을 완벽히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셀린이 앞을 바라봤다.

숲에서 서서히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공터에 모습을 드러낸 마물, 그것의 정체를 셀린은 알고 있었다.

"세렌...."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마물이다.

단단한 갑각을 지닌 풍뎅이처럼 생긴 마물로 인간을 공격하진 않지만, 광석을 갉아먹는 마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특징보다도 유명한 것은 녀석들의 유별날 정도로 빠른 비행 속도다. 그런 세렌이 한 마리도 아닌 무리를 지어 숲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꿀꺽.

셀린이 마른침을 삼켰다.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맞히는 것이라면 유클리드의 수업에서 몇 번이고 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실제 마물을 마주하게 되니, 그녀로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셀린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책에 적힌 바로는 분명 질풍처럼 움직이며 사람의 눈을 현혹한다고 했을 텐데...?

'잠깐, 어?'

마물이 날아오는 속도를 눈으로 쫓을 수 있었다.

셀린이 느끼기에는 녀석들의 움직임은 전혀 빠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상해진 건가?"

셀린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혼란을 겪던 중 어느새 세렌 무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셀린은 일단 상념을 떨쳐 내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지팡에서 붉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이리에드 가문이 자랑하는 화염 마법이었다.

'일단은 가볍게.'

처음 시전한 마법은 간단한 하급 화염 마법이었다.

'맞힐 수 있으려나?'

유클리드의 수업을 듣기 전의 셀린이었다면, 세렌을 맞히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셀린은 마법진이 펼쳐진 지팡이를 세렌 무리를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앙.

화염구는 완벽하게 세렌 무리에 명중했고, 마물들은 순식간에 화염 마법에 불타 사라져 버렸다.

"어, 어...?"

셀린도 순간 당황했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문득 교수가 수업 당시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이 수업을 제대로 듣는다면 곧 다가올 테스트에서 도움이 된다고 장담할 수 있다. 실력 또한 한층 더 좋아지겠지.

'그때 한 말이 이거였구나.'

세렌의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진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수업 때 마주했던 유클리드 교수의 극악무도한 윙 볼.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는 그 공에 비하면 세렌의 속도는 귀여울 정도였다.

그리고 방금 마법을 사용하며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좀 더 마력을 조절해서 사용해도 위력이 괜찮을 것 같다.

세렌을 처치하는 데 많은 마력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 애랑 같은 방식으로 가면 안 돼."

3학년인 자신의 쌍둥이 에단이 했던 방식.

그리고 이리에드 가문이 고집하던 방식.

제일 강력한 위력이야말로 최고의 마법이라는 아버님의 말씀.

언제나 섬세한 마법을 추구하던 셀린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녀가 다시 마법을 전개했다.

'마력 컨트롤을 더욱 섬세하게.'

마력을 마구잡이로 쓰던 평상시와 달리, 이번에는 마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한 것이다.

가느다란 화염의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셀린은 날아드는 세렌을 향해 마법을 쐈다.

그녀는 하급 화염 마법을 사용해 세렌 무리를 공격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명중률.

마치 다트를 하듯 화염의 창으로 마물을 꿰뚫었다.

* * *

셀린의 테스트가 끝나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2학년을 무시하던 교수와 마탑주들은 언제부턴가 셀린의 테스트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런 명중률이라니."

"2학년은 분명 들러리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소문과 다르게 저 학생은 실력이 상당하던데요?"

2학년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소문과는 다른 셀린의 활약에 흥미로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주변의 평가에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도로 잘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셀린이 엄청나게 노력을 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 실력이 향상되었을 줄은 몰랐다.

마치 명사수가 된 듯한 명중률이었으니까.

"저 학생도 장래가 기대가 되는군요."

"확실히, 이번 바윈 아카데미는 뭔가 다르네요."

마탑주들도 셀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좋은 평가가 이어지자 그들의 옆에 서 있던 달튼 교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달튼이 박수를 치며 말을 꺼냈다.

"이리에드가의 여식답네요."

달튼의 말을 듣고 그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이리에드 가문.

바로 전에 엄청난 실력을 보여 준 3학년 에단과 같은 가문이다.

그들이 이걸 잊을 리가 없다.

"어쩐지 실력이 뛰어나더니, 이유가 있었네요."

"2학년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 한 명은 있는 법이긴 하죠."

달튼의 말 한마디에 반응이 뒤바뀌었다.

역시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다. 저러면 2학년 중에서 셀린 이리에드만 유난히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겠지.

주변이 어수선하던 와중에 다음 학생이 포탈 안으로 진입했다.

그 학생은 심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달튼 교수는 그걸 보고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유클리드 교수, 벌써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데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불안하신가 보네요?"

"아니, 같은 동료 교수를 걱정하는 거지."

달튼은 아직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말을 걸고 오니 이제 슬슬 질릴 정도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어느새 플랑과 클레아 교수가 뒤편에 앉아 있었다.

하던 일을 끝마치고 온 것 같다.

"아무래도 섣부른 판단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르는 게 어때요."

둘 다 어느새 달튼과 내가 한 얘기를 들은 것 같다. 나는 그녀들의 뒤편에 있는 힌츠를 바라봤다.

"크흠."

그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저 사람이 말한 거군.

이제 슬슬 답하기도 귀찮다.

"교수님들도 같이 테스트를 지켜보시죠. 이제 다음 학생이 시작하니까요."

다시 테스트가 시작됐다.

주변 동료 교수들은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났다.

"뭐야?"

방금 불안해하던 학생도.

그다음 학생도.

그다음 다음 학생도.

2학년 학생들은 테스트를 가뿐히 통과했다.

셀린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준수한 실력을 갖추고 있던 것이다.

내 수업에서 마력 컨트롤 능력을 수련했던 2학년들은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하며 마물을 처치해 수정을 지켰고, 차례차례 테스트를 통과해나갔다.

또 한 명의 학생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고개를 돌려 달튼 교수를 바라봤다.

'표정이 자주 바뀌네.'

달튼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웃음은 전부 사라지고, 굳은 표정으로 테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달튼 교수님, 어디 아프신가 봅니다. 표정이 말이 아니신데 괜찮으신가요?"

"...하하, 괜찮다네. 그나저나 학생들을 잘 가르쳤군."

달튼이 애써 웃기 시작했다.

"제가 가르친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학생들이 잘 따라 준 덕분이죠."

"그렇단 말이지. 학생들 실력이 대단하군."

재밌네.

그의 표정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2학년의 테스트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고, 마지막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2학년을 대표하며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학생.

"뭐야, 저거 3황자 아니야?"

이안 임페리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3황자의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2학년이 지금 들러리라는 소리를 듣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3황자의 좋지 않은 행실은 특히나 2학년들에 대한 평가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걸 아카데미 모든 교수진은 다 알고 있었고, 달튼도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자네 악수를 뒀군."

"왜죠?"

"3황자가 무슨 소리를 듣는지는 알고 있을 텐데?"

"그건 다 예전 일이죠. 지금은 다릅니다."

"진정으로 3황자가 학년 대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달튼 교수의 표정은 아까와는 달랐다. 비웃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안은 그 고귀한 핏줄과는 별개로 마법 실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진 학생.

그런 학생을 마지막에 배치해 둔 내 의중이 궁금한 것 같다.

나는 그 궁금증에 답을 해 줬다.

"지켜보시죠. 오늘 3황자 이안에 대한 인식이 바뀔 겁니다."

그러면서 웃으며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26화. 실력 테스트 (3)

이안이 관중들 앞에 섰다.

그는 2학년들의 마지막 주자이며 대표였다.

모든 관중이 그를 보고 있었지만, 그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안이 황궁에서 살던 때에도 받곤 했던 시선이다.

이안의 목을 옥죄는 경멸 어린 시선.

그 시선에 숨이 막히던 순간에 유클리드 교수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이번 테스트에선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말.

유클리드의 근거가 없는 확신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안은 그의 말을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

이안이 포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 숲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펼쳐졌다. 그리고 바로 뒤편에는 이안이 지켜야 할 수정이 놓여 있었다.

이윽고 테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바람을 통해 마물들이 오는 게 느껴졌다. 앞선 테스트를 봤기 때문에 자신이 상대해야 할 마물이 세렌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세렌 무리가 수정까지 다가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이안이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유클리드 교수가 가르친 정령 마법을 떠올렸다.

이안은 아직 그 커다란 마강석을 깨진 못했다.

그는 매일 같이 연습을 했음에도, 아직 교수가 알려 준 마법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흉내는 낼 수 있었으니까.'

매일 같이 연습한 덕분에 교수가 보여준 마법을 조금이지만 깨우칠 수 있었다.

"끝까지 기다리라고 했었던가?"

유클리드 교수는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작전 하나를 말해줬었다.

무능한 3황자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 유클리드 교수는 이를 위해선 좀 더 극적인 장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안은 세렌 무리가 더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수정을 노리는 마물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이안의 시야에 들어왔다.

"엘."

매 한 마리가 나타나 이안의 어깨에 올라탔다.

"준비하자."

이안이 지팡이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 * *

연무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포탈 내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감에 찬 유클리드의 말을 듣고 3황자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두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탈로 들어온 이안은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 마물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있었다.

'유클리드 교수가 허세를 부린 건가?'

수정구를 통해 보이는 3황자는 꼭 테스트를 포기한 사람 같았다. 마물들이 숲을 빠져나오려 하는데도 손을 놓고 있는 듯한 모습.

그래서 달튼은 내기의 승자가 자신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선, 세렌 무리가 수정에 다가오기 전에 그 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교수, 황자님까지는 가르칠 수는 없었나 보군. 확실히 황자를 건들기는 어렵지. 이해한다네. 이건 내 승리일 것 같은데 괜찮나?"

달튼이 웃으며 비아냥댔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분명 유클리드도 당황하고 있겠지. 하지만 옆에 있던 유클리드의 반응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달튼 교수님."

유클리드 교수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너무 성급하시네요. 테스트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지금이라면 아까 했던 말들을 무마할 수 있다네."

"전 괜찮습니다."

"도대체 어떤 자신감으로...."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 저건!"

한 교수가 놀란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튼도 말을 멈추고 수정구를 들여다봤다.

'저게 뭐야?'

어느 새부턴가 커다란 매가 이안의 어깨에 타 있었다. 몇몇 눈치 빠른 교수들은 매의 형상을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정령이라고?'

달튼도 한때 정령학을 연구했던 인물이라 단번에 정령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도 뚜렷한 형체로 보아서 필시 고위 정령.

정령과 계약하는 것 자체로도 어려운 일인데 심지어 고위 정령이라니?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달튼 자신도 여러 번 정령 계약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엔 실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그래서 달튼은 정령과 계약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뜻밖의 장면에 놀라워하던 중 어느새 이안의 코앞까지 마물 무리가 다가온 것이 보였다.

수십 마리의 세렌이 날아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마법을 쓴다 한들, 세렌을 다 처치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 긴박한 와중에 이안이 마법을 전개했다.

허공에 커다란 연둣빛 마법진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선이 엉키고 얽혔고,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로 이루어진 마법진이었다.

교수진들이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저건 정령 마법 아닌가?"

"저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마법진이라니."

이안의 주변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며 그의 몸을 감쌌다.

소용돌이가 일며 피어난 먼지로 인해 이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와 마탑주들은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수정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바람이 걷히며,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의 손에는 바람으로 만든 거대한 활이 들려 있었다.

달튼 교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듯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튼 교수님, 괜찮으신가요?"

유클리드 교수가 싱글싱글 웃으며 달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안은 손에 들린 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둣빛을 발하는 활의 윤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아른거렸다.

"그래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

그는 엘의 힘을 빌려 정령 마법을 간신히 성공시켰다. 이 거대한 활은 엘의 정령 마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은 물 빠지듯 소모됐다.

"이러다간 금방 주저앉겠어."

이안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속전속결로 빠르게 상황을 종료해야 했다.

그는 마물들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 가득 검은 점들이 꿈틀거렸다.

"제법 많이도 모여들었군."

어느새 코앞까지 마물의 무리가 다가와 있었다. 바글거리는 곤충 마물들을 보니 그의 등줄기로 소름이 타고 올랐다.

이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날을 위해 그는 이 정령 마법만을 수없이 연습했다. 정령학 교수 에스테란의 도움을 받아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겨우 완성할 수 있었던 기술이었다.

주변의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이안의 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력이 형태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했고, 그 형태는 서서히 하나의 무기로 완성되어갔다.

마침내, 바람으로 이루어진 활이 이안의 손에 들렸다.

"활 쏘는 걸 취미로 삼길 잘했어."

이안이 화살도 없는 활의 시위를 당기자,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며 흔들렸다.

화살이 있다는 듯이 마물을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활시위 쪽에 바람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의 크기는 상식을 벗어났다. 활보다 훨씬 컸고, 그 존재감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자아냈다.

이안은 자신을 향해 새까맣게 밀려오는 세렌 무리를 차갑게 바라봤다. 다행히 마물들은 흩어지지 않고 무리를 지은 채로 날개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날아오고 있었다.

'저기다.'

이안은 방금 확인한 방향으로 활을 겨눴다.

피슈우웅!

그가 손을 놓는 순간, 커다란 바람의 화살이 번개같은 속도로 마물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바람의 화살은 엄청난 기세로 마물들의 중심부를 관통했다. 화살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강렬한 풍압이 일어났고, 주변의 마물들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주변의 나무들은 성냥개비처럼 꺾였고, 땅은 거대한 괭이로 파헤친 듯 깊게 갈라졌다.

그렇게 바글대던 세렌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안의 눈앞에 깔끔하게 정리된 숲이 펼쳐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사뿐히 내려왔다.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지만, 승리의 기쁨에 그런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엘의 존재가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완전히 사라졌다.

이안은 안간힘을 써서 흐트러진 표정을 가다듬었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손등으로 재빨리 훔쳤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시선 끝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었다.

지금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교수진들과 마탑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을지 상상하니 가슴이 설렜다. 놀란 표정? 아니면 감탄하는 모습?

이안은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안 임페리오, 이것으로 테스트를 마치겠습니다."

* * *

이안의 말이 끝나자 시험장에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 열심히 했네.'

이안이 지금까지 한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는 오전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개인 연무장과 에스테란 교수에게 가서 연습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에는 작은 크기의 마강석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이 숙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 테스트도 손쉽게 통과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한 교수가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1학년을 담당하는 힌츠 교수였다.

"정말 대단한 마법입니다. 2학년을 대표 할 만한 실력이 아닙니까?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거 같네요."

그는 그러면서 날 바라보며 윙크했다.

눈치 빠른 교수였다. 착한 사람이기도 하고, 힌츠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 박수를 쳤다.

"확실히 3학년과 견줄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 같습니다."

"2학년에게 들려오던 소문은 거짓이었나 보군요."

"이번 발푸르기스의 밤이 기대되네요."

아까까지 황자를 무시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에스테란 교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내가 나설 시간이다.

옆을 바라보니 달튼 교수의 얼굴이 심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손톱을 씹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런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니."

나와 한 내기보다는 이안의 정령 마법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달튼에게 말했다.

"달튼 교수님, 저희 황자님의 실력은 어떤가요?"

"...대단하더군요."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황자님의 실력을 알았을 땐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감격에 차오른 표정을 지었다.

"저런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니, 정말 전 교수로서 복 받은 것 같습니다."

달튼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져갔다.

더 이상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는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끝나긴 이르지.

"달튼 교수님, 저희 아까 했던 내기는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합니다. 여기, 받으시죠."

달튼 교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반지를 건네줬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분노를 참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황자님의 실력이 없었다면 위험했겠네요. 이야 정말로 간발의 차였습니다."

"...."

슬슬 그만둬야겠다.

더 이상 부추기면 그가 내 얼굴에 마법을 쏠 기세다.

얼른 반지를 받아 품에 넣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포탈 쪽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아직 이안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왜 안 나오는 거지? 마력이 고갈되서 탈진이라도 한 건가?'

테스트가 끝난 후 꽤 시간이 지났다.

이쯤이면 포탈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 순간이었다.

"뭐, 뭐야 저건!"

"저게 왜 나타난 거지?"

교수진들이 수정구를 보며 소리쳤다.

나도 곧바로 수정구를 바라봤다.

그곳엔 이안이 아직 멀뚱멀뚱 서 있었다.

이안은 포탈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직 포탈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수정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다.

'설마....'

실력 테스트 기간엔 언제나 다양하게 사건이 발생했었다.

사건의 내용은 대부분 클라리스 세력이 숨겨둔 아티팩트가 발동해 마물이 나타나는 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처해 놓긴 했지만.

'정말로 나타날 줄이야....'

나는 수정구를 조작해 이안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장소를 확인했다. 숲 너머의 마물이 나타나는 공간.

그곳엔 테스트가 이뤄지는 포탈에 나타나선 안 될 존재가 있었다.

테일 도시에는 광석이 풍부한 '글덴' 이라는 던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건 글덴 던전 최심부에 서식하는 '세렌'의 상위종이다.

광석을 먹고 자란 덕분에 엄청난 경도의 외골격을 자랑하는 마물.

'왜 세드렌이 여기 있는 거야?'

세드렌이 이안에게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27화. 테스트 중 나타난 보스 (1)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물 '세드렌' 때문에 시험장은 소란스러워졌다.

"저 마물이 왜 여기에...."

"이게 무슨 일이야. 상대는 황자라고!"

시험장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몰라서 패닉에 빠지고 있었다.

다들 발만 동동 구르던 도중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저, 저건 왜 저러는 거야!"

한 사람이 일어서서 포탈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푸른빛의 포탈은 어느새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포탈 주변에 마력이 시시각각 번개처럼 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다가가면 위험할 것 같았다.

아무도 나서지 않던 순간, 관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포탈에 다가갔다.

포탈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포탈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굳은 표정은 바뀌지 않았고, 관리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 마물을 처치해야만 포탈이 작동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포탈과 마물이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출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

"그게 무슨 말이야!"

연두색 로브를 입고 있던 연로한 마탑주가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야? 상대는 제국의 황자라고! 그리고 다시 없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다. 한시라도 빨리 방안을 찾아야지, 지금 포기할 때야?"

마탑주는 마치 황자가 자기 제자인 것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맞아! 황자를 빨리 구출해야지."

다른 마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안을 깎아내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황자를 구하라고 윽박을 지르고 있다니.

보아하니 마탑주들은 이안을 제자로 삼을 생각인 것 같다.

이안의 재능을 보면 누구나 탐 날만 하긴 하다.

그를 제자로 거두기만 해도 실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빨리 해결 방안을 마련하란 말이야!"

마탑주들은 계속해서 관리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일으킨 건 관리인이 아닌데 말이다.

그 순간 얼어붙을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잠시, 다들 조용히 하세요."

아난타 총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마탑주들을 바라봤다. 총장의 시선을 마주친 마탑주들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마탑주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선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이 자리엔 아난타에 필적할 정도의 마법사는 없었다.

총장이 관리인에게 다가갔다.

"지금 들은 바로는 우리가 직접 황자를 구출할 수 없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관리인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어쩔 수 없네요."

아난타 총장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일단 제가 강제로 마법을 부숴서 들어가겠습니다."

"잠, 잠시만요!"

마탑주 중 한 명이 총장 앞에 나섰다.

"뭐죠?"

"너무 섣부른 판단인 것 같습니다."

마탑주가 손으로 포탈 쪽을 가리켰다.

"총장님, 지금 포탈의 마력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강제로 마법을 부순다면, 포탈 안쪽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잘못하면 학생이 영영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어요."

그의 얼굴엔 진중함이 느껴졌다.

아까 관리인을 질책하던 마탑주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마탑주와는 다르게 진정으로 황자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인정하듯, 다른 교수들도 앞서서 총장을 막아섰다.

"총장님, 저분의 말이 맞습니다. 다른 방안이 필요합니다."

"위급한 상황인 건 맞습니다만, 그럴수록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아난타 총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주변을 쓰윽 훑어보더니, 지팡이를 다시 거뒀다.

"그럼, 지금 방안이 있나요? 이러다간 황자님 아니, 학생의 목숨이 위험한데요."

"...."

어느 사람도 제대로 된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이라 해결책을 찾을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학생을 구출해 오겠습니다."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아까 관리인을 질책하던 마탑주, 아카데미 교수진, 그리고 아난타 총장까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총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말이죠?"

다른 사람들의 얼굴엔 의구심이 가득했지만, 아난타만큼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할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준비를 해뒀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수정구를 가리켰다.

"이안의 팔에 채워진 완장에 미리 마법을 준비했습니다."

"어떤 마법이죠?"

"전이 마법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같이 갈 수 있나요?"

"아쉽게도, 저만 갈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난타 총장도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보냈다. 나 혼자서 가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의외의 사람이 나서서 총장에게 말했다.

"총장님, 유클리드 교수님을 한번 믿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까부터 시비를 걸었던 달튼 교수였다.

"유클리드 교수도 바윈 아카데미의 교수입니다. 아카데미 교수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실력은 보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죠."

달튼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를 한번 믿어 보시죠."

"달튼 교수님의 말도 일리가 있군요."

그의 설득에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나는 의외의 상황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이 날 도와주는 거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 도와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 거다.

일단은 지금 상황은 좋으니 두고 봐야겠다.

대화가 끝나자 달튼 교수는 마치 할 일을 끝마친 사람처럼 웃으며 돌아갔다.

속내를 참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유클리드 교수님."

아난타 총장이 내게 다가왔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뒤를 바라봤다.

그곳엔 힌츠, 플랑, 클레아가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플랑 교수에게 다가갔다.

"플랑 교수님."

"네."

"가지고 있는 마력 회복 포션 있으신가요?"

"어, 어? 네 있습니다."

플랑이 포션을 꺼내 보여줬다.

총 5개의 포션.

이 정도면 충분한 양이다.

"그 포션 5개 전부 주실 수 있을까요. 나중에 갚겠습니다."

"아니에요. 이안을 구출하는데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쓰세요."

그녀는 웃으면서 포션을 모두 건네줬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마쳤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발동했다.

"그럼, 이만."

* * *

이안은 누워서 포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탈출 포탈이 나오긴커녕, 징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색깔은 왜 바뀐 거야?"

그리고 그가 지키고 있던 수정의 색이 붉게 바뀌어 있었다.

불길한 붉은색 수정은 볼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숲 방향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땅이 크게 울렸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이안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이안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분명 숲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그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바람을 느꼈다.

바람을 통해 무언가 느껴졌다.

'이상한데.'

정말 이상했다.

분명히 이안은 세렌을 다 처치했었다. 제대로 확인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건 새롭게 나타난 다수의 세렌이었고, 세렌이 아닌 무언가 엄청나게 큰 것이 같이 오고 있었다.

숲쪽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였다.

"윽."

이안이 순간적으로 몸을 던져 피했다.

갑자기 뒤에서 느껴진 기척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그곳엔.

"이게 왜 아직 있어?"

새롭게 나타난 세렌이 이안을 공격해 왔다.

키에엑.

이안은 가까스로 옆으로 몸을 던져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바람 마법을 사용했다.

날카로운 바람을 맞은 세렌이 두 동강으로 갈라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안이 갈라진 세렌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안이 알고 있던 '세렌'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인간보단 광석에게 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세렌은 이상하게도 눈 색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뒤에 있는 수정과 비슷했다.

"이것도 테스트인 건가?"

이안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테스트는 분명 끝났을 터다.

다른 학생들처럼 자신도 시험장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 텐데.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앞선 학생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세렌이 계속해서 이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지금 잘못되고 있다는 걸.

세렌이 계속해서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렌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미친 듯이 이안을 몰아쳤다.

이안이 마법을 사용해 새롭게 나타난 세렌을 처치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억, 헉...."

테스트를 위해서 사용했던 정령 마법.

그 마법이 마력을 너무 먹은 탓에 체내의 마력이 끝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이안은 뛰어다닐 힘도 없었다.

마력탈진의 증세가 나타났고, 그 증거로 눈앞의 시야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이안이 안간힘을 써서 숲을 바라봤다.

아직 수많은 세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이 테스트를 끝마치면 더 이상 형제들에게 무시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인 아버지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황자이지만 주변 사람에게 무시 받고, 당하고만 산 삶이었다. 이제야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밝은 미래만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하잖아."

이안은 눈앞의 광경에 좌절했다.

커다란 마물이 그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단단한 외골격으로 감싸져 있었고, 장수풍뎅이처럼 뿔이 달려 있었다.

책에서만 봤던 던전 최심부에서 서식하는 마물.

그 마물은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고, 주변 숲은 바스러졌다.

거대한 곤충 마물인 일명 '세드렌'.

던전 최심부에 사는 세드렌은 광석을 먹고 자란다. 특징은 먹은 광석이 쌓여서 외골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특징 때문에 세드렌의 외골격은 엄청난 경도를 자랑한다.

그리고 그 세드렌이 이안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이겨...."

이안은 자기 객관화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써도 저 마물을 처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저 세드렌은 앞선 세렌과는 체급이 달랐다.

이안은 체념한 듯이 팔을 바라봤다. 교수님이 걸어 주신 2학년 대표임을 뜻하는 완장이었다.

"교수님에겐 고맙다고 말도 못 했는데."

유클리드 교수가 아니었다면 테스트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통과한들 이런 마법을 쓰진 못했겠지.'

이 정도 경지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거고, 정령이었던 엘도 영영 보지 못했을 거다.

그렇기에 이안은 테스트가 끝난 후 유클리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했었다.

"아직."

이안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 죽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끝까지 발악이라도 할 셈이었다.

"다시 한번 정령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걸 사용한다고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한 방이라도 먹여 주고 싶었다.

이안이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마법을 사용하려는 그때였다.

팔에 묶인 띠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나타난 건.

"그만."

유클리드 교수였다.

"그 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마라. 너 그러다 죽는다."

"교, 교수님?"

유클리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안, 지금까지 잘 버텼다. 내가 할 테니까 넌 쉬고 있어."

28화. 테스트 중 나타난 보스 (2)

유클리드 교수가 사라지고 난 후, 시험장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교수진들과 마탑주들도 한참을 서 있다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돌아가자마자 일제히 수정구 속 상황에 집중했다.

유클리드 교수는 베일에 가려진 사람이었다. 망나니라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가 어린 시절에는 마법 실력이 출중하였다고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 일이라 지금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모두가 유클리드 교수의 실력에 대해 궁금해했다. 도대체 어떤 능력으로 3황자를 저렇게 성장시킬 수 있었던 걸까?

교수들과 마탑주들은 모두 유클리드 교수의 실력을 알고 싶어 했다.

이윽고 수정구에 유클리드 교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호기롭게 웃으며 이안을 마물로부터 보호했다.

다가오는 세드렌과 세렌의 군세 앞에서도 유클리드 교수는 태연히 마법을 사용했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허공에 말을 걸었고, 나타난 건 다람쥐처럼 생긴 정령이었다.

"역시 저 교수도 정령을 가지고 있었군!"

조금 전 이안의 정령을 보고 복에 겨워 울었던 정령학 교수가 소리쳤다. 그는 이미 유클리드 교수가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저래서 이안을 저렇게 가르칠 수 있었던 거군.'

달튼 교수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클리드 교수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다람쥐는 이안의 정령과 비슷하게 상당히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유클리드 교수의 정령도 고위 정령일 것이었다.

유클리드 교수가 지팡이를 꺼냈다.

소문으로만 듣던 만년필 모양의 지팡이였다. 교수진들은 소문을 알고 있었기에 신기하게 바라봤지만, 처음 본 마탑주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유클리드 교수가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뭐지? 갑자기 왜 이래?"

모든 수정구의 영상이 끊겼다. 시험장 중앙에서 송출되던 영상도 끊어졌다. 그러자 곳곳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제일 짜증이 난 사람이 있었다.

아난타 총장이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연결된 마법이 끊어진 것 같네요."

그녀는 수정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옆에 있던 관리인이 겁을 먹은 것인지 덜덜 떨며 말했다.

"아마, 마물의 마력 때문인 것 같아요. 포탈이 마물 때문에 고장이 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죠. 상대는 최심부에 속해 있는 마물이니.... 총장님, 괜찮을까요?"

"지금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유클리드 교수님을 믿어야죠."

총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유클리드 교수님이라면 해내실 거예요."

* * *

"교수님...?"

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 내가 수정구의 마력을 끊은 것 때문일 거다.

"이유가 있어서 수정구의 마력을 끊었어."

밖은 이제 이곳 상황을 볼 수 없다.

내가 수정구의 마력을 이유 없이 끊은 건 아니었다.

일단 내 실력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괜히 새로운 마법을 보여 줬다간 학구열에 미친 교수들과 마탑주들에게 시달리게 될지도 몰랐다.

특히 아난타 총장과 달튼 교수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내부의 적이 있어.'

이 사건은 내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바윈 아카데미를 들어올 땐 무조건 결계를 통과해야 한다. 지금 들어와 있는 마탑주들조차도 검사를 받고 들어온 거니까.

게다가 결계는 대마법사인 아난타가 직접 설치한 거다. 클라리스가 손쉽게 결계를 통과해서 들어왔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아마도 관리인 중 한 명일 것 같은데.'

이번 실력 테스트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범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내 실력을 함부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실력을 숨기려고, 나는 그리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그렇군요."

이안이 고개를 돌려 내 주변을 훑어봤다.

"그런데 교수님, 혼자 오신 건가요?"

"응, 그런데 왜?"

"...네? 아니, 저 마물 안 보이세요? 교수님이라도 위험하다고요!"

이안이 다가오는 세드렌을 가리켰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인지 이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교수님이 강한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상대는 던전 최심부에 서식하는 마물... 이길 리가 없잖아요."

"알고 있어.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전이 마법으로는 한 사람밖에 움직일 수 없어서 내가 직접 온 거야."

"그러면 역시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이안이 안간힘을 내서 일어서려고 했다.

"아니."

나는 품속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이안에게 던졌다.

"허튼짓하지 말고, 일단 그거 마시고 마력을 회복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이안이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널 담당하는 교수인 날 믿어."

고개를 돌려 세드렌을 바라봤다.

어느새 마물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세렌의 상위종인 '세드렌'이다.

세드렌은 장수풍뎅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공략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강력한 마법으로 마물의 핵을 꿰뚫으면 된다.

말로 들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세드렌을 처치하는 건 쉬운 건 아니었다. 저 마물의 외골격은 상당히 단단하니까.

하위종인 '세렌'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다.

그렇다고 내가 질 것 같진 않았다.

"둔, 다시 들어가 있어."

다람쥐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둔을 소환한 이유는 이안의 정령 마법을 내가 가르칠 수 있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둔의 힘이 필요 없었다.

"이안, 어느 정도 회복됐어?"

"이 정도면 마법을 다시 사용해도 될 것 같아요."

이안의 답변에 안도하며 그에게 마력 회복 포션의 반을 건넸다. 푸른빛을 띠는 액체가 병 안에서 출렁거렸다. 지금이 바로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세드렌의 강력한 외골격을 뚫으려면 완벽한 협공이 필수였다.

외골격을 뚫는다 해도 그 안의 핵을 파괴해야만 보스를 처치할 수 있다. 그러려면 외골격을 관통하고 핵까지 도달할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다행히 이안은 그런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내가 도움을 준다면 더욱 강력해질 터였다.

"이안, 정령 마법을 다시 사용해 보자. 먼저 마법을 만들어 볼래?"

"알겠습니다."

이안이 천천히 마력을 모으자 그의 손에 바람으로 이루어진 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옆에서 또 다른 마법을 시전했다.

아난타 총장의 시험에서 사용했던 마법. 중급 정령을 물리쳤던 내 첫 번째 오리지널 마법이었다.

서로 다른 성질의 마법을 융합해 하나로 만들어낸다. 마력이 요동치며 내 지팡이 끝에서 새로운 마법이 태동했다.

검은 불꽃, '흑염'이 내 눈앞에서 섬뜩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 상태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 화살을 만들어봐. 내가 마력 보조해줄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마력을 보조했다. 천천히 바람의 활에 화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화살에 한 가지를 더 부여한다.

바로 이 검은 불꽃.

'흑염'이라 불리는 검은 불꽃이 서서히 화살에 스며들어 갔다. 마치 잉크가 물에 퍼지듯, 검은 기운이 화살 전체를 감싸 안았다.

바람과 불은 본래 상성이 좋다.

바람은 불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더 활활 타오르게 한다. 우리는 그 원리를 이용해 둘을 합치기로 했다.

원래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마법이 하나로 융합되어 갔다.

불길한 기운을 띠는 검은 화살이 이안의 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위험해 보였다.

"...교수님, 이건."

"이제 한번 해 보자. 너의 마법이라면 가능할 거야."

"정말 괜찮을까요?"

"날 믿어. 내가 어딜 공격해야 할지 알려 줄게. 그곳을 노려."

나는 이안의 어깨를 다정하게 쥐며 용기를 북돋웠다. 그의 긴장된 근육이 내 손 아래서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세드렌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세드렌의 약점은 저 거대한 턱의 밑 부분에 있었다.

미세하게 튀어나온 골격, 마치 거인의 얼굴에 난 잔주름 같은 곳.

그곳이 바로 핵으로 일직선으로 직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그 장소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 저 작게 튀어나온 곳 보여?"

"저 작은 거 말인가요?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어렴풋이 보여요."

"바로 그곳을 노리면 돼."

사람의 눈으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위치.

그 위치를 맞추기란 원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야만 이 위험천만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이안이 그걸 해낼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원래 활에 관해서도 뛰어난 재능이 있고, 엘이라는 고위 정령의 힘까지 빌릴 수 있는 그라면 말이다.

이안이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모든 것은 이안의 손에 달려 있었다. 원래라면 이 모든 것들을 내가 해도 됐겠지만, 이 경험은 분명 이안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안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침착하게 세드렌을 응시하며 활시위를 놓았다.

검은 화염의 화살이 섬광처럼 세드렌을 향해 날아갔다. 그 방향은 정확히 턱 밑의 미세한 틈새를 겨냥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법과 세드렌의 골격이 충돌했다. 그 소리는 천둥이 내리치듯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법에 부딪힌 세드렌의 골격은 한순간 저항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시간.

미세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더니, 이내 금이 가면서 세드렌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키에에엑─.

검은 화살은 세드렌의 골격을 관통하고, 핵까지 돌진하며 정확히 꿰뚫었다. 핵이 파괴된 세드렌은 버티지 못하고 거대한 나무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세드렌이 쓰러지자, 마치 연쇄반응처럼 하위종인 세렌들도 하늘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꽃잎이 휘날리는 것처럼 곤충 마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교수님, 저희가 해냈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흥분과 기쁨이 느껴졌다. 이안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정말 해치울 줄이야...."

나는 손을 덜덜 떨며 마력 회복 포션을 입에 털어 넣었다. 포션의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서서히 기력을 되찾는 느낌이 들었다.

"다 너 덕분이지. 잘했어, 이안."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마물이 처치됐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수정을 바라봤다.

마물이 처치됐으므로 자연스럽게 수정의 색이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곧 있으면 탈출 포탈이 나타날 거다.

탈출하자마자 경기장에서 무수한 질문 세례가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심한 주목은 사양이다.

주목받으면 자연스럽게 내 평가가 올라가겠지만,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 제약도 생긴다.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주목받고 싶었다.

그래서 한 가지 생각난 게 있다.

"곧 포탈이 나타날 거야. 하지만 나가기 전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29화. 테스트 종료

사건이 일단락되고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주변을 보며 안전한 걸 확인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력 포션을 먹었는데도 아직 몸이 떨렸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이안에게 호기롭게 얘기했지만, 숨 좀 고르고 다시 말해야 할 것 같다.

"많이 힘드신 것 같네요."

이안이 날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얼굴이 매우 창백하신데 교수님, 괜찮으세요?"

"뭐, 아직까진 괜찮아."

애써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생각 외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앞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아직은 해야 할 게 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 뭔가요?"

"포탈에 나가면 내가 사용한 마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줘."

"네?"

이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일단 내 말을 들어 봐."

이안과 힘을 합쳐 세드렌을 처치했지만, 내 실력을 아직 세간에 드러내긴 싫었다.

이런 실력이 알려지면 주목도가 상당히 높아져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제약이 생긴다.

그렇기에 주목은 적당히 받고 싶었다.

"세드렌을 처치했을 때 사용했던 마법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싶어. 나는 실력을 아직 드러내기 싫어. 그래서 비밀로 해 줄 수 있을까?"

"그걸로 괜찮으신 건가요? 그러다간 제가 더 주목받을 텐데요?"

"괜찮아. 어차피 세드렌을 같이 처치한 건 맞잖아?"

이안이 조금 더 주목을 받겠지만, 어차피 같이 처치한 거라 문제가 없을 거다.

아카데미에서 내 평판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거고, 이안도 마찬가지다.

나의 목적은 그저 어떤 마법을 사용해서 처치했는지, 그 점만 숨기고 싶을 뿐이다.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난 잠시만 둘러보고 올게."

이안을 잠시 제쳐두고, 나는 세드렌이 소멸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이제 숲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일자로 뻥 뚫린 길이 나타났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세드렌을 처치하면 얻을 수 있는 아이템 때문이었다.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도 마물은 여전히 마정석을 떨어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개의 마정석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붉은색 수정과 푸른빛 수정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뚜렷한 광채와 진한 색채로 보아 몇 개는 상급 마정석임이 분명했다.

"둔, 아직 있지?"

졸린 목소리와 함께 둔이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네, 무슨 일인가요?"

내가 세드렌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는 동안 둔은 편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을 생각하지 않는 정령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마정석들 다 챙기고, 다시 들어가."

둔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정석을 손에 쥐더니 다시 사라졌다. 이제 여기서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나는 다시 이안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 오셨군요."

"그래, 이제 돌아가야지. 아마 밖으로 나가면 우리에게 질문 세례가 들어올 거야. 긴장해 둬."

"알겠습니다."

"아 참."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오늘 수고했어."

대화를 나누던 중 주변 수정에서 갑자기 강한 마력 파동이 느껴졌다. 파란 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공중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마 탈출 포탈이 생성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나가자."

* * *

나는 이안과 함께 포탈을 빠져나와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포탈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봐 봐, 저기 나왔어!"

교수진들과 마탑주들이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개미 떼처럼 우르르 몰려왔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유클리드 교수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수많은 인파의 질문 세례가 몰아쳤다.

"자, 잠시만요."

내가 제지하려 해도 질문 세례는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이안도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찰나였다.

"그만! 일단 조용히 해 주세요.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지 않나요?"

아난타 총장이 나서자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주변은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졌다.

아난타 총장이 천천히, 하지만 위엄 있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유클리드 교수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난타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하자 괜스레 긴장된다.

아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그녀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오는 것 같다.

역시 대마법사라서 그런 건가?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정구에서 보다시피 세드렌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세드렌의 단단한 외골격을 알고 계실 겁니다. 교수님들도 혼자서 쉽게 상대하긴 어려우시겠죠."

몇몇 교수진들이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렌은 최심부의 강력한 마물이다.

강력한 공격 마법을 구사하는 교수진은 혼자 상대할 수 있겠지만, 쉽사리 해치우긴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예전에 던전을 탐사하면서 세드렌의 약점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약점을 공략해 저는 이안과 함께 공격해 세드렌을 해치운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잠시 시험장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 쏠려 있었다.

"저 황자와 같이 처치했단 말이지?"

"생각보다 아니, 더 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군요."

몇몇은 흥미롭다는 듯 이안을 바라봤고.

"아니, 망나니라 불리던 저 황자가 했다니...."

"교수가 치켜세우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특히 마탑주들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누구라도 이안의 재능을 탐하고 있을 것이다.

실적을 위해서건, 마법 연구를 위해서건.

아까 감격해하던 정령학 교수 에스테란도 먹잇감을 노리듯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안의 재능은 역시 놀라웠습니다. 제 도움이 있었다고 하지만 세드렌을 처치했으니까요."

"역시."

"재능이 떨어진다는 건 속임수였나 봅니다."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늦게 알게 될 줄이야!"

주변에서 이안을 칭찬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이안은 무능한 3황자가 아닌, 실력을 감춰온 뛰어난 황자로 인식될 것이다.

그때 이안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교수님, 이렇게 치켜세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도 지금 기분 좋잖아?"

"뭐, 그렇긴 하네요."

이안은 주변의 반응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날이 오다니. 고마워요, 교수님."

"그래."

이안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처음 봤을 때 와는 정반대다.

그때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어도 눈은 차갑게 웃음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접었겠지.'

바윈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이 일은 순식간에 퍼져 나갈 것이다.

3황자의 실력이 입증되었으니 형제들도 이안을 함부로 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안의 마음가짐도 달라졌을 터.

"유클리드 교수님."

아난타 총장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총장의 모습에 놀란 듯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니에요. 곧 건국제가 다가오시는 거 아시죠?"

건국제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내게도 공작가에서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니까.

"제가 이안 황자를 모시고 제국으로 가야 하거든요. 혹시라도 황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건국제에서 황제 폐하를 뵙기 민망했을 거예요."

그녀가 내 손을 꾹 잡았다.

"이번에 교수에게 큰 빚을 졌어요."

뭔가 부끄럽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들어본 지가 언제였을까?

사실 난 늘 나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었다. 이안을 구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이런 따뜻한 보답으로 돌아오다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오히려 가슴 한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유클리드 교수, 다시 봤다네."

달튼 교수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가장 크게 변한 사람을 꼽자면 단연 달튼이었다. 그는 분명 나에게 잇속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저러는 것이겠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태도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아까 날 도와준 걸 생각하면 앞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교수님, 믿고 있었습니다."

힌츠 교수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평소 알고 지냈던 동료 교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나를 걱정해 주었다.

그들의 진심 어린 관심에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정말이지 아카데미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네요."

총장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직 학생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내 총장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험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지금 모든 학년의 실력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조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죠."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총장에게 쏠렸다.

"실력 테스트 도중 돌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유클리드 교수님과 이안 학생 덕분에 무사히 해결되었어요."

총장이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지팡이 끝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고, 그것이 밤하늘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되어 터져 나갔다.

형형색색의 불빛에 학생들의 얼굴에 탄성이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위기를 넘긴 유클리드 교수님과 이안 학생에게 박수 부탁드립니다."

시험장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교수진과 마탑주들도 열렬히 손뼉을 쳤다.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나는 옆에 있는 이안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이안, 기분이 어때?"

"어릴 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이안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날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교수님은 어떠세요?"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은 것 같아."

오늘 하루, 우여곡절 끝에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처음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뭘 해도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세계가 현실처럼 느껴졌다.

"이것으로 이번 실력 테스트를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길면서도 짧았던 실력 테스트의 하루가 막을 내렸다.

30화. 테레사 바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