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화

"후우. 완벽해."

탁!

막사 안에서 마지막 전술을 점검하던 벨크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 순간.

벨크는 시선을 돌렸다.

드르륵.

막사의 겉문을 열었다.

사막의 공기가 시리도록 차다.

잠이 번쩍 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윽고 한숨을 푹 쉬고 서류를 내려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벨크의 용병대에 관한 전략 문서.

내일 벌어질 모든 경우의 수를 총망라했다.

마지막 원정이니만큼 더욱 철두철미할 수밖에.

그 결과물을 내려다본 벨크는 곧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출전은 익일 새벽.

시간이 좀 남았다.

하지만 이렇게 여유 부릴 때는 아니다.

언제 또 비상 전투 상황에 돌입할지 모른다.

자둘 수 있을 때 미리미리 자 두고 먹을 수 있을 때 적당히 먹어 두는 게 좋다.

그게 이곳 마경의 상식.

그렇게 막사를 나오려는 그때.

"아웅, 잘 잤다."

모닥불을 쬐며 꾸벅꾸벅 졸던 부관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얼굴을 구겼다.

한심한 녀석.

부관이란 놈이 지 상관이 업무에 치여 사는 데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괘씸한데, 눈을 꿈뻑이던 녀석이 헛소리를 시작했다.

"대장."

"뭐."

"마왕군 토벌에 성공하면 이제 뭘 할 생각이우? 스읍."

침을 닦으며 눈을 꿈뻑이는 부관의 실없는 소리에 벨크는 피식 웃었다.

괘씸한 건 둘째 치고, 참신한 개소리다.

벨크는 모닥불을 막대로 휘적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용병이 뭔 계획이 있냐. 그냥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고, 뒤지라면 뒤지는 게지."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왕 사냥에 참가한 유일한 용병왕이라는 작자의 배포가 그것밖에 안 되우?"

"용병왕?"

그 말에 벨크는 다시금 헛웃음을 켰다.

용병왕 벨크.

그의 위명은 용병계에서 전설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회의적이었다.

"지랄. 오러 유저도 아니고, 겨우 초급 마나 유저밖에 안 되는데, 용병왕이니 뭐니 우습다, 우스워. 우린 그냥 귀족 양반들의 도구에 불과해, 제린."

"헤에? 자기 비하가 심한 거 아녀? 대장처럼 강한 용병이 어딨다고 그러슈. 웬만한 오러 유저보다 더 전투경험도 많잖수. 그리고 대장, 그 뭐냐. 마검사 아녀유?"

"마검사?"

"그래. 마검사. 마법도 2서클이나 되고, 검도 초급이지만은 무려 마나 유저잖아. 그러면 그게 마검사지 뭐여."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부러운 눈빛을 쏟아 냈다.

당연했다.

용병이란 녀석들 자체가 워낙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왈패 집합소다.

검술은 기사들의 전유물이고, 마법은 마탑의 전유물.

도제식으로 비밀리에 전술되는 그들의 비전은 세외 인사들에게 경외와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심지어 마법은 마탑을 제외하면 그 익힐 수 있는 경로가 극히 제한적이다.

그것을 동시에 두 개나 통달한 벨크는 가히 용병왕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벨크는 피식 웃었다.

만족의 미소가 아니다.

비아냥과 자기 조롱이 한껏 담겼다.

"하. 제린. 지식과 경험이 모두 실력이 되진 않잖아. 그리고 마검사란 건 그저 검이나 마법이나 둘 다 어정쩡하게 익혀서 대성하지도 못했다는 방증이고 말이지. 나 같은 절름발이에 외팔이 검사는 그냥 용병대장이 맥시멈이지. 안 그래?"

"헤에!? 그런 거유?"

"그래. 네 녀석 계속 헛소리만 할 거면, 그냥 모닥불 옆에서 쳐 누워 자라."

이만하면 됐다 싶어 대화를 끊었다.

제린은 아닌 모양이다.

곧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흐흐흐. 내 모를 줄 아슈? 대장, 원래 귀족 출신이었다매? 마나 중독으로 코어가 부서졌지만 초급 마나 유저가 된 게 핏줄 때문이라던데, 맞수? 본명도 따로 있다던데."

제린의 말에 벨크는 처음으로 웃음을 잃었다.

모닥불의 온기마저 차갑게 가라앉을 정도의 반전.

"그 얘긴 어디서 들었지...?"

차가운 분노.

모닥불의 존재 따위는 잊을 만큼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벨크는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마나의 힘을 개방했다.

우우우우우우웅.

마나 유저의 힘.

비록 초급에 불과하고 제대로 된 마나 코어조차 없어 반푼이에 불과하지만, 일반 용병의 입장에선 절대적이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가.

용병왕 벨크.

마왕 원정군에 합류한 수십의 용병단 중 유일하게 혈전에서 살아남은 용병대의 대장.

지금은 용병왕이라는 이름을 용사에게 하사받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의 실력은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세만은 최상급 마나 유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한 살기와 함께 벨크의 마나가 제린의 목을 조른다.

"컥. 커억. 컥! 사, 살려... 대장, 자, 잘못."

"어디서 들었냔 말이다."

"크엑. 켁. 그, 그걸 모르는 애들이 용병대 안에서 누가 있다고... 그러는 거요. 젠장 할!"

"쳇."

그 말과 함께 벨크는 기세를 거두었다.

쿠웅.

제린이 긴장의 끈이 풀렸는지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엎드렸다.

"헤엑. 헥. 헤엑. 젠장 할.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어쨌든 대장도 다음을 생각해 두란 이 말이야."

"뭐가."

"노예조차 공을 세워서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고. 이번 토벌만 성공하면 황제 폐하도 큼지막한 봉토 하나랑 성을 하사하실지도 모르잖아."

"네 녀석 바람이 아니고?"

"크하하핫! 그럼 좋지. 그러면 난 대장의 기사가 될 테니까. 아녀?"

"훗. 그래. 그러면 좋겠네."

그런 실없는 소리와 함께 벨크는 다시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귀족이라.

이제는 잃어버린 그의 성. 그리고 명예.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잠시나마 아른거렸다.

그리고 과거부터 그의 삶을 옥죄어 온 그 시절의 절망과 후회까지 모두 다.

하지만 잡념은 거기까지.

"이제 개소린 거기까지 하고 얼른 자라. 연합군도 거의 전멸 상태고 이제 남은 건 우리 용병대뿐이니까. 아마 내일 선봉은 우리가 서야 할 거다."

"쳇. 알았슈. 그러면 기대하지. 우리의 고명하신 용병왕께서 이번엔 또 얼마나 큰 공을 세울지 말이야. 히히히힛."

그 말과 함께 제린은 서둘러 사라졌다.

실없는 자식.

하지만 영 실없는 소리는 아니다.

문제는....

"정말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지."

몰락한 가문에서 홀로 살아남은 벨크.

그는 특유의 독기와 생존 본능으로 불구의 몸으로 용병왕의 자리에 올랐다.

수많은 위기와 위험이 도사린 와중에 그를 살아남게 해 준 재능은 단 하나.

직감.

그 직감이라는 녀석이 지금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내일의 전투가.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착잡한 심정으로 벨크는 고개를 들어 막사 밖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달만이 은은한 빛을 내며 처량하게 떠 있을 뿐이었다.

* * *

와아아아아아아!

크억!

켁!

전장의 함성이 쩌렁쩌렁하다.

흙 바닥은 피와 체액을 머금어 진창이 된 지 오래.

이종족의 사체와 내장이 발에 수없이 차인다.

혈전.

말 그대로 최후의 전쟁답게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난전이다.

하지만 그 전투 와중에 벨크의 용병대는 평온을 유지했다.

아니, 평화롭게 후방에서 제국군들이 말 그대로 통째로 갈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사실에 신이 난 부관과 백인대장들이 입을 열었다.

"본대의 5할이 전멸이라는군요."

"제국군과 성군은 그나마 피해가 크진 않지만, 연합 왕국의 군사들은 9할이 첫 격전에서 나가떨어졌답니다."

"만약 우리가 본대에 합류했었으면 피해가 만만찮았겠는데요? 다행입니다."

연합군. 아니, 이제는 온전히 제국군이 된 그들은 벨크의 예상과 달리 용병대를 예비대로 편성했다.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벨크의 용병단만은 현재까지 눈곱만큼의 피해 없이 후방에서 쉬고 있었다.

용병단 모두 그 이유는 몰랐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두 웃음이 만발한다.

하지만 벨크는 굳은 얼굴로 전장을 주시했다.

'어째서?'

벨크의 상식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벨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제국의 황태자. 최소한의 사상자로 제국군을 온전히 돌려보내야 할 그가 용병대를 그냥 놀리는 건 말도 안 된다.'

용병대.

돈으로 고용해서 사지로 몰아넣는 대상이자 '물건들'.

잔혹하지만 그것이 현시대 용병의 가치였다.

고기 방패로 쓰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런데 그런 용병대를 보물단지마냥 예비대로 편성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국군과 다섯 연합 왕국의 군대들. 마지막으로 성국의 팔라딘까지.

마왕 토벌이라는 미명하에 절대 뭉칠 수 없는 여러 권력이 억지로 욱여넣듯 하나로 뭉쳤다.

그런 권력가들의 돈보다 소중한 병력들이 눈앞에서 갈려 나가고 있는데, 용병대를 아낀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데미안의 구겨진 얼굴과 함께 경험 많은 몇몇 노장도 그리 밝은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제린은 그럴 경험도 눈치도 없었다.

휘파람을 휘익 불며 말을 붙였다.

"대장. 뭐가 그리 심각해? 그래도 쉬면 좋은 거 아녀?"

"웃긴 개소리 하지 마라. 멍청한 녀석아."

벨크가 부관을 타박하며 이를 갈았다.

두근.

두근.

그의 타고난 생존 감각이 더욱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병력의 손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무식한 돌격으로 결말이 맺어졌다.

"꺄아아아아아악!"

마왕의 사천왕 중 하나.

음욕의 엘프 나다니엘이 사지가 찢겨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로써 마왕의 모든 사천왕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병사들이 쾌재를 불렀다.

"역시! 성녀님이셔! 신성력으로 음마를 찢어발기다니, 역시 타고난 성력이로구만."

"아아. 난 오늘부터 성국에 귀의하기로 했어."

부하 녀석들이 눈물까지 찔끔 짜며 성녀를 찬양한다.

"지랄!"

뻥!

"으악!"

그런 부하 녀석들의 엉덩이를 한 번 차 준 벨크는 혀를 찼다.

'성녀는 개뿔. 이틀 전에 밤이 외롭다고 내 침대로 찾아온 창녀구만.'

몰락 귀족 출신이지만 벨크의 외모는 나름 수려했다.

아니, 만약 한쪽 팔이 그대로 달려 있고, 한쪽 다리도 절지 않았다면 얼굴만으로 남작위쯤은 따낼 만큼 잘생겼다.

아마 얼굴의 이마부터 턱까지 양쪽으로 찢어진 엑스(X)자 흉터만 아니었으면 더욱 그랬을 터다.

그렇기에 때때로 벨크의 막사에 몰래 찾아오는 여자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틀 전은 일은 그로서도 꽤나 충격이었다.

창녀도 아니고 성녀라니.

어둠 속에서 나신으로 나타난 여성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벨크는 처음에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밤이라 흉터도 안 보이고 꽤나 곱상하군요.'

'그 얼굴. 그렇게 그냥 놀리는 건 너무 아까운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오늘 밤 쾌락에 젖어 보는 건 어떤가요?'

달아오른 몸으로 엉겨 붙던 성녀는 벨크가 완강히 거부하자 이를 갈며 막사 밖으로 도둑고양이처럼 뛰쳐나갔다.

저주의 말을 남기고.

'어차피 죽을 몸뚱이. 오늘 밤을 그냥 넘긴 걸 후회하게 해 주겠어.'

여자가 한 말 치곤.

아니, 성녀가 한 말치고는 꽤나 표독스러웠다.

그리고 그날 밤.

그동안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던 벨크의 상식이 하나둘씩 깨어졌다.

방금 죽은 사천왕.

음욕의 엘프든가, 음마의 엘프든가.

어쩌면 지금 그 엘프의 사지를 찢은 성녀가 더 음마일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성녀는 성스럽기는커녕 미친년이었다.

"꺄하하하하하! 이단의 살점! 이단의 뼈! 이단의 내장! 이히히히히힛!"

엘프의 잘린 팔을 휘저으며 춤을 춘다.

그 잘린 팔의 단면을 핥고는 히죽거린다.

괴이한 행동.

미친 듯이 웃는 성녀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라 광녀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섯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이 모두 제정신은 아니지.'

빛의 성녀 이사벨은 보는 바와 같이 이미 완전히 미쳐 버렸고, 환영의 마법사 이스테리안은 병사들과 고아들을 모아 인체 실험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것뿐이랴.

가장 중요한 용사 아벨은 무감정함을 넘어서 자신의 부츠에 흙탕물을 튀긴 소녀의 목을 친 전력이 있는 사이코패스다.

절대검제 루시안은 마검의 길을 들인다고 탈영병의 사지를 묶어 마검으로 난자했다.

마지막으로 온몸이 근육질인 천하무적 권왕 스테인. 그는 자양강장을 한답시고 웅담(熊膽)도 아닌 인담(人膽)을 섭식하는 기행을 내보였다.

'모두 미쳤군.'

아군조차 두려워할 만한 용사라니.

말도 안 되는 기행이건만, 그것을 문제 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은 난세.

온갖 기행과 협잡. 그리고 학살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지옥도의 세상이다.

무엇보다 결과가 중요시된 작금의 현실에서 그들의 힘은 일반인의 윤리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런 기이한 광기는 전염병처럼 병사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이단의 뼈를 씹어 먹자!"

"엘프는 성노로! 드워프는 공노로! 오크는 가축처럼 부려 먹으면 될 뿐이다!"

"여신 프레야를 부정하는 이종족들을 모조리 말살하자! 으하하하핫!"

광신.

그것이 군영 전체에 질병처럼 전염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염병의 원흉, 성녀 이사벨.

그 광신의 성녀가 천천히 벨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엘프의 절단된 팔을 이리저리 막대처럼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마계의 사천왕도 모두 갔군요. 드디어 용병대가 나설 때예요."

"출정입니까?"

이렇게 불안하게 뒤에서 대기하느니, 차라리 출정이 나았다.

하지만 그런 데미안의 물음에 성녀 이사벨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더욱 섬뜩할 정도.

"후후훗. 그럴 리가요. 지금부터 용병대 여러분들께 희소식을 전해 드리죠. 우리 성국의 법황 전하께서는 천한 것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했어요. 바로 '순교'를 크나큰 은혜를. 받아들이실 거죠?"

"뭐, 뭣!? 미친!"

그 말을 들은 벨크의 반응은 빨랐다.

스릉.

곧장 검을 빼어 들고, 불완전한 마나 소드를 구현했다.

우우우우웅.

푸른색의 검날이 형형하게 빛나며 형태를 갖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차앙!

겨우 초급 마나 유저의 힘.

검제가 나설 필요도 없이 성녀의 희미한 성력 앞에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휘두르기도 전에 검이 박살이 나며 유리처럼 깨졌다.

그녀가 초승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참. 이건 허락을 구한 게 아니라 통보입니다."

"이런, X-바...!"

벨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발밑에서 대형 마방진이 형성되었다.

우우우우우웅.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수백 명분의 마나가 요동치며, 혈선을 그으며 완성되었다.

실력은 2서클이지만, 지식만은 여느 5서클 마법사를 뛰어넘는 벨크다.

곧 그 피의 마법진으로 완성된 것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제물?"

"호오. 용케 알아보는군. 천것아. 그래 이건 작품이지. 마왕성 앞까지 용병을 아낀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설마...."

"그래. 너희를 제물로 대규모 마법을 완성할 거거든. 무려 7서클의 대마법이다."

환영의 마법사 이스테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마법을 완성했다.

이사벨이 신난 듯 속삭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했죠? 여기 용병대의 천것들을 제물로 마왕성 전체를 날려 버릴 마법진을 완성할 거예요. 여러분의 이름은 모두 성국의 명부에 적혀서 순교자로 남을 테니 걱정 마시고요, 데헷."

그녀의 상큼한 미소가 역겹다.

막아야 한다.

아니, 최소한 저항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젠장할.'

벨크는 겨우 초급 마나 유저.

마법은 2서클에 불과하다.

가진 지식과 경험은 많았지만, 어릴 적 앓은 마나중독으로 마나 하트와 마나 코어는 이미 재활 불가능 수준이다.

다섯 영웅을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순간.

벨크의 감각이 번쩍였다.

이윽고.

서걱!

섬뜩한 소리.

어디선가 나타난 검에 벨크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순간 볼 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러 소드를 구현한 검제 루시안의 뒷모습이.

'여, 여기까지인가.'

스르륵.

그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진다.

사선으로 이분된 그의 상체.

내장을 흩뿌리며 진창으로 떨어진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리다.

곧 시야가 아래로 향하며 자신의 발이 보였다.

그리고 시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점멸하며 완전히 검게 물들기 전.

벨크의 눈에 보인 것.

그것은 자신을 넘어서 후방의 용병대를 무자비하게 썰어 대는 절대검제 루시안.

그것을 지켜보며 신난 듯이 팔짝 뛰며 히히덕거리는 성녀 이자벨.

바닥을 적신 피를 재물 삼아 자신의 마법을 완성하는 환영의 마법사 이스테리안.

옆에 선 벨크의 부관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살점과 그 피를 취하는 권왕.

마지막으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용사 아벨이었다.

"살려 줘-! 커억!"

"같은 편이 같은 편을 죽이는 게 말이 되냐- 커억!"

"도, 도망, 커억!"

비명이 벨크의 귀에 들려온다.

철푸덕.

진창 속에 처박힌 벨크의 육체가 비명을 지른다.

점멸하던 의식이 이제 완전한 어둠에 잠식된다.

죽음의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벨크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단어로 가득 찼다.

'복수. 복수하리라! 저 녀석들의 살점과 뼈를 씹으리라. 죽어도 죽지 않고, 구천에 영혼이 떠돌더라도 어떻게든 복수하리라!'

강한 의지와 함께 벨크의 마지막 의식이 끊기려는 찰나.

-훌륭하군.-

어디선가 머릿속을 강타하는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시작해 보게. 그러면 자네는 나보다 나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벨크의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죽음이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아득한 죽음 뒤.

아니 찰나 같은 죽음 뒤.

누군가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일어나세요, 도련님!"

번쩍 눈을 뜬 벨크는 두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멍한 얼굴을 한 벨크를 바라보는 시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오늘 베델 상회의 상단주가 찾아왔다고요!"

순간, 벨크는 고개를 갸웃댔다.

전장은 어디 가고 여긴 또 어디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베델 상회의 상단주? 그 개자식?"

잊을 수 없었다.

베델 상단주.

한때 한 지방을 호령했던 벨크의 영지를 한순간에 몰락시켰던 장본인.

그건 그 첫 번째 원수의 이름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첫 번째 원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려나.

벨크가 복수의 힘을 길렀을 당시.

그는 이미 객사한 이후였다.

만약 죽었던 베델 상단주가 다시 무덤에서 일어나거나, 아니면 벨크가 과거로 회귀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벨크는 눈앞의 시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순간 떠올랐다.

메이린.

그녀는 분명 벨크가 몰락한 영지를 버리고 도주할 때까지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시녀와 꼭 같은 얼굴이었다.

"메이린?"

"네! 도련님의 전속 시녀 메이린이에요! 이제 좀 술 좀 깨세요? 아무리 숙취가 심하다고 해도 어떻게 제 얼굴을 까먹을 수 있어요!"

"메이린.... 메이린이라. 네가 어떻게 지금 살아 있지?"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진짜! 어제 또 술을 얼마나 잡수신 건지, 참."

뭐라 잔소리를 해 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잠시 뒤.

짝!

짝!

짝!

벨크는 몇 번이고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양손이 온전한 것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왼발이 온전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에 흉터 하나 없는 게 꼭 40년 전의 내 모습 같군."

젊어진 얼굴.

아니, 젊다기보다는 어린 것에 가까운 외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관찰하던 벨크는 곧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온 것인가.'

그 생각과 함께 벨크는 씨익 웃었다.

"베델 상단주 그 녀석이 왔단 말이지, 메이린?"

"네, 도련님."

"후후후후후. 크하하하하핫!"

벨크는 광소를 터트렸다.

어떻게 과거로 돌아온 지는 몰랐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복수. 그 빌어먹을 녀석에게 복수할 기회가 돌아왔군.'

용병왕이기보다 미친개 벨크라 불렸던 그의 눈에 광기와 함께 비릿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이것은 기회였다.

"훌륭하군. 내 어서 간다고 기별하거라."

"네, 도련님!"

웬일로 순순히 밖으로 행차한다고 했기 때문일까.

방 밖을 나서는 메이린의 걸음이 활기차다.

그것을 지켜보며 벨크, 아니 데미안이란 본명을 되찾은 소영주는 씨익 웃었다.

복수.

그것은 언제나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2화

베델 상회의 상단주 베델.

그는 초조한 심정으로 영빈관을 한참을 어슬렁거렸다.

약속 시간은 벌써 1시간이나 넘었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베델은 영빈관의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집사장을 재촉했다.

"거기, 집사장! 공자님은 아직도 안 오신 게냐!?"

"예, 상단주님. 기침하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더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아. 해가 중천이건만, 오늘 약속을 잊으신 것도 아닐 텐데 아직까지 침실에 계셨다니. 크흠. 이거 너무하시구만, 그래."

탁.

탁.

탁.

베델은 불만스러운 듯, 연신 발을 굴렀다.

이곳은 영빈관.

카를로스 남작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

지금 베텔의 태도는 일개 평민에 불과한 상인의 태도로는 꽤나 건방졌다.

허나 고령의 집사장은 묵묵히 그의 짜증을 받아 내며 자리를 지켰다.

이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감정을 드러낼 만큼 그는 감정적이고, 어리숙하지 않았다.

집사장이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베델 상단주님. 노여움을 푸시지요."

원하던 말을 들었을까.

한 영지의 집사장이나 되는 인물이 굽신거리자, 베델 상단주는 곧 인위적인 노기를 풀었다.

"크흠. 알겠네. 내 침착히 기다리지. 다만 기억하게. 지금 이곳에서 갑이 누군지를! 내가 아니면 그 황무지 땅을 그 비싼 값에 사 줄 상인은 아무도 없을 테니! 이 영지에서 우리 상단에 진 채무를 갚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을 것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베델 상단주님. 곧 소영주님께서 행차하실 겁니다."

꾸벅.

짜증 한번 낼 만도 하건만.

이런 시골 변방 영지의 집사장치고는 수완이 좋았다.

베델 상단주는 곧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크흠. 커흠. 으흠."

베델은 기다리는 내내 연신 짜증스러운 헛기침을 난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고도로 가장된 연기였다.

사실 베델은 조금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재촉하는 내내 내심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후후후후훗.'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상단에 막대한 채무를 진 이 영지의 무지함.

그리고 이 중요한 계약에 앞서 늦은 시각까지 자고 있는 무능한 소영주의 존재까지 모두 다.

'아직까지 퍼질러 자는 걸 보니, 이놈의 소영주 녀석은 그 불모의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나 보군.'

베델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수전노였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고리대금업자에 돈을 위해서라면 온갖 불법적인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 철혈의 상인.

그가 바로 베델이었다.

그런 그가 황폐한 불모지를 불하받으려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이 영지가 품고 있는 아무도 모를 보물 때문이다.

예전 이 영지의 험지에서 보았던 한 원석을 떠올리며, 베델은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어서 트래쉬 스톤(Trash Stone)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머나먼 과거, 베델이 작은 상단의 행상이던 시절.

베델은 선대 영주의 명령에 토지 측량을 감독했고, 불모지라 불리는 '그 땅'의 광맥을 탐사하며 광분을 검사했다.

그렇게 발견한 건 검은 광물.

그것은 일명 트래쉬 스톤이라 불리는 쓰레기 광물이었다.

철광이나 구리를 기대했던 당대 영주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에는 베델조차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그 단단하기만 한 검은색 광물의 활용법을 몰랐지.'

'그 광석'의 가치를 알아보는 자가 없다.

그렇게 이 카를로스 영지의 대대적인 광맥 탐사는 막대한 빚만 지우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 마탑을 중심으로 광풍처럼 불어오는 '그 광석'의 수요.

검은 보석이라 불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사방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 변방의 영주는 현재 병석에 누웠다.

심지어 가신들은 그 보석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베델의 마음은 급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가 알아차리기 전에 트래쉬 스톤(Trash Stone)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 기회였다.

'어차피 선대 영주가 병석에 눕고 나서 엄청난 자금난을 겪고 있다고 하니, 당장 돈은 급할 테고. 그러면 결국 그 땅을 나한테 팔 수밖에 없겠지. 어차피 이자들은 농업 용도로도 못 쓰는 땅이니 아까울 것도 없다고 생각할 테고.'

베델은 피식 웃었다.

베델이 카를로스 남작가의 막대한 채권을 사들인 이유.

간단했다.

부채의 상환을 핑계의 그 황금 땅을 헐값에 불하받기 위함이다.

그리고 지금 그 계획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미 망나니 소영주 녀석은 반쯤은 넘어온 상태, 이제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블랙 다이아몬드. 그것만 중앙에 보급할 수 있으면, 왕국 전체를 아우르는 대상으로 거듭나는 건 현실이 되는 거지.'

중앙 진출.

수많은 인맥과 재력을 동원해야만 겨우 고위 귀족과 끈이 닿을 수 있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왕족과 연이 닿아야 대상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은 그저 검은색의 단단한 돌덩어리에 불과한 블랙 다이아몬드를 빨리 독점해야 했다.

'무조건 성공시켜야 한다.'

그의 야욕이 불타오르는 그때.

영빈관의 문이 활짝 열리고, 꼬장꼬장한 집사장 노인의 외침이 있었다.

"공자님이 납시십니다!"

드디어 망나니 공자가 왔구나!

이제 남은 것은 계약서에 서명하는 일뿐.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 변방의 남작가는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고, 반대로 자신은 중앙으로 진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 *

데미안이 영빈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반가운 것은 복수의 대상을 마주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옆을 지키는 한 사람이었다.

내내 침중한 표정을 유지했던 데미안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이게 누구야! 그레고리 경 아닌가!"

집사장 그레고리.

데미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최후의 인상보다 훨씬 정정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쳤을 때, 데미안은 과장을 보태서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가문의 충신.

그리고 영지의 혈겁 속에서 데미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최후까지 함께 했던 은인이자 충신 중의 충신이다.

그런 그가 데미안을 대신해 목숨을 잃었을 때, 얼마나 목 놓아 울었던가.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충신이었고, 또한 이 영지의 숨겨 둔 비수와 같은 자.

그를 잃었던 것은 영지의 전력 절반은 잃은 것과 다름없었다.

데미안의 후회 중 가장 큰 한 부분을 차지했던 자가 눈앞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런 데미안의 기쁨과 별개로 그레고리의 얼굴을 차갑게 가라앉았다.

책망의 눈빛이 은연중에 깔렸다.

숨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의적으로 드러냈다.

"오늘도 늦으셨군요."

데미안의 기쁨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사장은 엄중한 얼굴로 데미안을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이때의 집사장은 언제나 데미안에게 엄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 당연한 태도려나? 내가 오죽 망나니짓을 일삼았어야지.'

당시에는 집사장을 너무나 피하고 싶었다.

잔소리가 오죽 심했어야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데미안은 간신의 낯간지러운 감언보다 충신의 쓴소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데미안이 가만히 서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집사장은 더욱 닦달했다.

그의 잘생긴 콧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중요한 계약입니다, 공자님.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계약서에 서명할 일만 남았습니다."

"아, 내가 꽤 늦은 모양이군! 하하하! 미안하네, 미안해! 크하하하하!"

집사장의 재촉에도 데미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늘 뭔가 평소와 조금 다르시군요. 말투도 달라지시고 말입니다."

"그런가. 뭐,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인가 보지, 뭐. 크하하하하! 이거 그레고리 경을 다시 보니 너무 반갑구만!"

데미안은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집사장의 양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레고리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그리 반가우신 겁니까, 공자님. 어제저녁에도 분명 문안 인사를 드렸습니다만."

"아, 그게 어제였나. 나한테는 마치 40년은 된 것처럼 느껴지니, 그런 게야! 크하하하하!"

"후우... 됐으니,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상단주가 오래 기다렸습니다."

"크하하! 그래, 그래. 알겠네, 알겠어."

자리에 앉으니 마니.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동안 실랑이가 있었다.

계약을 앞두고,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가.

그 꼴을 지켜보던 베델은 와락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크흠!"

베델이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커험! 공자님! 인사는 거기까지 하시고, 일에 집중하시지요!"

"아, 미안하군. 미안해. 내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어. 반가운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데미안은 웃음을 지우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책상에 앉은 베델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데미안은 이 양반도 너무나 반가웠다.

이가 갈리도록.

아드득.

"자네도 오랜만에 보는군, 베델."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명 엊그제 걸게 한잔 걸치지 않았습니까, 하하. 아주 향락의 밤이었죠, 으흐흐흐."

"그랬던가. 재미있군. 내가 자네와 그리 친근한 사이였다니. 아주 재미있어."

방금 전까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데미안이건만.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그 눈빛이 매섭다.

뭐지 이건.

순간 베델은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 실없이 웃어 재끼던 애송이 녀석이 맞는 건가!?'

무엇보다 눈빛이 이상했다.

마치 저 눈동자 하나하나에 전신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랄까.

상단주 베델. 그는 나름대로 밑바닥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다.

사람을 보는 감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달라진 이 눈앞의 소영주의 변화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며칠 전까지는 어린 망나니에 불과했다.

어제도 분명 술에 취해서 계집질이나 하던 X신이었는데.

이상하다.

지금은 뭔가 노련한 노귀족과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베델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데미안은 베델 상단주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응시했다.

"...!"

저거구나.

저게 우리 영지 재정을 말아먹었던 원흉이구나.

데미안은 증오에 가까운 시선으로 계약서를 노려보았다.

데미안의 양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 우선 계약서부터 보지."

계약서를 확인하자는 데미안의 요청에 베델의 입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하하! 소영주님. 이미 카를로스 가의 재무관과 행정관이 모두 확인한 서류입니다. 소영주님의 직인만 있으면 모든 일이 끝날 겁니다."

"그래도 이런 중요한 계약을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순 없지 않은가."

"후후. 알겠습니다. 다만 너무나 전문적인 용어가 섞여 있기에, 소영주님께서 직접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요. 후후후."

베델 상단주는 이 어린 망나니 소영주가 기꺼웠다.

직접 계약서를 확인한다고?

귀족의 절반 이상이 문맹인 세상이다.

글 하나도 제대로 못 읽는 것이 귀족인데, 이 계약서를 읽을 수나 있을까.

전문적인 재무 용어와 회계 용어가 뒤섞였다.

심지어 일부러 세법까지 엮어서 한 번 더 꼬아 버렸다.

대영지의 행정 관료들도 계약 업무만은 손사래를 치며 세무사와 회계사를 대동한다.

심지어 카를로스 영지는 변방 중의 변방.

규모만 컸지, 행정력은 전형적인 시골 동네 영지 수준이다.

이곳의 제대로 된 세무, 회계사도 없을뿐더러 행정관들은 더더욱 전문 상업 용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겠지.

어린 영주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후후후. 뻔하군. 뻔해.'

분명 자신의 가신들 앞에서 괜히 있는 척이나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 정도 지적 허영심이야, 귀족들에게 흔하디흔한 것이었으니까.

펄럭.

펄럭.

제대로 읽는 것이 맞는지.

데미안은 속독하여 계약서를 빠르게 훑었다.

계약서의 세부 조항까지 모두 확인하며, 데미안은 결국 계약서를 그대로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은근한 무시와 함께 베델이 입을 열었다.

"다 읽으셨습니까, 소영주님?"

"음. 그래.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더군."

"호오. 신기하군요. 소영주님이 이 계약서의 내용을 그사이 다 파악하시다니. 역시 소문대로 놀라운 재능을 보이시는 분이시군요. 후후후. 참, 대단하십니다요."

은근한 빈정거림에 주위에 도열한 기사들이 발끈했다.

이런 모욕이라니.

아무리 몰락해 가는 가문이라지만, 감히 면전에서 그 주인인 소영주를 모욕했다.

천하에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흠!"

"허어!"

차마 칼을 뽑을 순 없었다.

소영주가 오기 전, 베델이 내뱉었던 말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누가 갑인지 을인지 알고 계신지요.-

베델의 그 말에 기사들도 차마 모욕을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미 몰락해 가는 영지를 위해 검을 뽑을 기사는 없었다.

그 어색함 분위기가 감도는 동안, 데미안은 내내 침착했다.

어설프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주위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덜덜 떨지도 않았다.

그저 계약서의 내용에 집중할 뿐.

잠시 뒤.

착!

계약서를 모두 확인한 데미안이 씨익 웃으며 그것을 베델 상단주 쪽으로 내밀었다.

"허어. 자네는 설마 내가 이 계약서의 숨겨진 내용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것 같구만."

"하하하.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뭐, 그러면 한 가지라도 계약 내용에 대해 말씀해 보시지요. 그 정도 영특함을 보여 주신다면 제 어여쁜 마음에 부채를 조금 더 탕감해 줄 수 있지요. 후후후후후."

"흐음. 그래. 우선 한 가지는 확실하군. 우리 카를로스 가문이 자네 상단에 진 부채가 상당하다는 것과 이 계약을 통해서 자금을 융통하지 않으면 내년 이맘때쯤에 영지 전체가 차압될 수도 있다는 것 말이야."

"네. 정확하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게 되었군."

"예!?"

"자네가 지금 우리 영지의 이 무가치한 불모지를 매입하기 위해 얼마나 무리를 했는지 말이야."

"그, 그게 무슨!?"

핵심을 짚은 데미안의 언사에 베델의 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덜덜 떨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베델이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확히 설명 좀 해 보시지요."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여기 계약서에 명시된 우리 영지의 차압금의 부채 만기일과 일시 상환금액이 조금 과한 구석이 있군. 인도 조건도 조금 과하고 말이야. 이러면 이거, 까놓고 얘기해서 부채 탕감이 아니라, 오히려 자네가 우리 영지의 '그 땅'을 헐값에 불하받으려는 게 아닌가, 이 말이야."

"...네!?"

베델의 두 눈이 커지며 넋을 잃었다.

아니, 도대체 이 어린놈의 망나니가 어디서 배웠는지 정확한 회계 용어를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계약서의 숨겨진 핵심을 이 단시간에 어떻게 짚어 냈는지도 의문이다.

그것은 다른 가신도 마찬가지였다.

외지인인 상단주 베델보다 1,000배는 소영주를 더 잘 아는 기사들은 떡하니 입이 벌어졌다.

'허어. 평소 글을 그리 멀리하시더니, 언제 저렇게 전문 용어까지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시는 거지!?'

'말도 안 돼. 자기 이름만 겨우 쓰시는 분이 언제 저렇게 글을 익히셨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기사들보다 더욱 놀란 자들이 있었다.

행정관료들이었다.

데미안의 양옆에 자리 잡은 재무관과 행정관은 경악을 넘어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이 그렇게 후계자 교육에 애를 썼지만, 글자 하나 제대로 익히지 않았던 데미안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런 소영주가 달라졌다.

아니, 완전 다른 사람 수준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경악.

경탄.

기겁.

경의.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몰아치는 와중에.

당사자인 베델이 곧 제정신을 차린 듯. 일그러진 얼굴 표정을 다 잡았다.

"물론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요건은 제가 토지를 불하받아 이 카를로스 영지의 부채를 탕감해 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모지 땅인 것 치고는 제가 값을 꽤 쳐 드리는 것인데 말이죠."

"그런가?"

"물론이죠! 오히려 이 계약은 제가 손해입니다. 어떻게든 카를로스 영지의 부채를 받아 내려고 쓸모없는 땅을 받아 가는 거니까요."

마치 엄청난 손해를 본다는 듯, 베델은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이놈의 무능한 소영주에게 휩쓸리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한 베델이 양손을 떨며, 애써 연기를 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어렸을 때는 오히려 이 눈앞의 수전노에게 감사 인사까지 여러 번 하며 굽신거렸지.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 계약서의 함축된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과거를 한 번 겪은 데미안은 이 계약의 함축된 의미를 수십 년간 곱씹은 지 오래니까.

베델과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친 데미안은 천천히 또박또박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하지 말게."

"예!?"

"유능한 상인인 자네가 손해 보는 이런 일 따위는 하지 말라 이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너무 말을 어렵게 했나? 난 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을 거란 그 말일세. 자네 상단에 진 부채는 내 다른 방식으로 탕감하도록 하지. 자네 또한 무리해서 손해 보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겠다는 말이야."

"...!"

데미안의 폭탄선언에 장중은 경악과 함께 침묵에 잠겼다.

3화

'마, 말도 안 돼!'

갑작스러운 계약 파기라니.

이 계약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베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계약서 한 번 훑어보고 그 속에 담긴 모든 저의와 음모를 알아냈다는 것인가.

독소 조항은 또 어떻고.

그것은 웬만한 전문가도 지닐 수 없는 혜안이었다.

실제로 이 영지의 재무관과 행정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아닌가.

이런 어린 망나니 따위가 알아차릴 순 없었다.

베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연이다. 분명 우연이야. 또 예전처럼 단순한 꼬맹이의 변덕질이겠지.'

베델은 광분하며 고성을 내질렀다.

"이런 식으로 계약을 파기할 순 없는 겁니다! 만약 이대로 계약이 파기되면 막대한 위약금을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아니, 애초에 위약금을 지불할 여유가 카를로스 영지에는 있는지요?"

베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 나머지 이제는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내내 여유로웠다.

"글쎄. 아직 계약서에 서명도 안 했는데, 무슨 계약을 파기했다는 건가. 자네와 우린 아직 아무런 계약도 하지 않았건만."

"하, 하지만 이미 구두로 그 불모지를 넘겨준다는 약속을... 저번 술자리에서.... 어제도 분명...."

"구두로? 허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혹시나 그 구두로 한 약속에도 내 인장이 찍혀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혹시 그런가?"

데미안이 어깨를 으쓱였고, 집사장이 서둘러 수완 좋게 대답했다.

상황은 이해하기 힘드나 분명 베델을 엿 먹일 좋은 기회인 건 분명했다.

"아닙니다. 소영주님."

"그래, 내가 알기로도 아니라고 알고 있네만."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럴 것처럼 말씀하시진 않았습니까."

"내가 그랬나? 내가 요새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말이지."

"...!"

데미안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황무지를 팔겠다는 건 허망한 공수표였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뿐더러.

독종이라 불린 그가 시치미를 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인은 아무쪼록 서류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내 자네가 꽤 유능한 줄 알았더니, 영 그런 것도 아니군."

"크읏."

받은 대로 그대로 돌려주는 데미안의 능수능란한 혓바닥에 베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데미안의 말이 맞았다.

계약이란 것은 실제로 양측의 서명과 함께 공증을 받아야 하는 것.

사실 지금까지 토지를 불하한다는 말만 오갔지, 실제로 계약의 효력이 발휘되려면 오늘 서명과 인장을 찍었어야 하는 것이다.

베델의 두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다시금 자신이 갑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면 카를로스 영지는 저희 상단에 진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있으십니까! 변제를 하려면 지금이라도 그 불모지를 제게 파셔야 할 텐데요!"

심지어 이 채권은 상공회에 완벽히 공증까지 받은 것.

발뺌하려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렇다고 베델은 생각했다.

하지만.

"허허. 우리 영지의 속사정까지 헤아려 주니 너무나 감사할 지경이지만, 그건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그건 어차피 내년까지 변제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내 그 돈은 이자까지 쳐서 한 푼 누락 없이 갚겠네."

"으. 으으...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지금 제가 아는 카를로스 영지의 재정 상태로는 영원히 불가능할 텐데요!"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어떤 또 눈먼 상인이 자네가 그토록 원하는 불모지에서 '검은 보석'을 캐내 줄지 말이야. 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말이야. 하하하."

데미안이 농담처럼 입을 놀렸고, 주위의 가신들조차 그것을 믿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베델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것처럼 동그래졌다.

"허억!?"

그제서야 베델은 데미안이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에 임하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검은 보석이라니.

설마 블랙 다이아몬드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제 갑은 베델 자신이 아니라, 이 눈앞의 어린 소영주였다.

그런 그를 보며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은 계약은 파기됐고, 우리 사이에 일은 없는 것이겠지. 그럼 잘 가시게나. 내 공사다망해 배웅은 하지 않겠네."

축객령.

그것과 함께 베델은 영빈관에서 나갔다.

쫓기듯이.

* * *

상단주 베델이 노성을 터트리며 영주성에서 물러났다.

이제 안달이 난 건, 베델이 아니었다.

바로 주위 가신들이었다.

"소, 소영주님! 저희는 그 막대한 빚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 땅입니다! 사 줄 사람도 없는데, 이 기회에 처분하심은 어떠십니까!"

"오히려 지금 베델 상단주가 저희에게 인심 좋은 거래를 하는 겁니다. 베델 상단주의 사람됨을 폄하하시면 안 됩니다."

카를로스 영주가 병환에 깊어 두문불출하는 사이.

영지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특히, 베델 상회에 진 채무는 내년이 상환 기일이기에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토지 불하가 실패한다면 정말 내년엔 영지 전체가 파산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사실을 모를 소영주도 아니건만.

그런 가신들의 핏발이 선 얘기를 듣고도 데미안은 내내 자리에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에는 데미안을 향해 다그치듯 압박하던 가신들이 점차 언성을 낮추더니.

이내 가만히 데미안의 행동을 주시했다.

침묵.

그것이 찾아오자 그제야 데미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끝났나?"

"예!?"

"감히 카를로스 영지의 소중한 보물을 헐값에 넘기려던 작자들의 헛소리가 다 끝났냐 이 말이야."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는 그저 충언을 위해서...."

"닥쳐랏!"

콰앙!

데미안이 진각을 밟으며 분기를 드러냈다.

"허엇!?"

"크흠!"

주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으며, 순식간에 대기가 고요해졌다.

신이 나서 거친 말을 쏟아 내던 가신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처음이었다.

그는 망나니였고, 소심한 애송이였다.

항상 가신들 앞에서도 쩔쩔매던 꼬맹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당당한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순간,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신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사실 데미안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당연했다.

데미안.

그는 더 이상 망나니가 아니었다.

병석에 누운 영주의 대리인이자, 이 영지의 실질적인 주인이었고. 과거에는 마나 유저의 경지에 이른 용병 대장이었다.

비록 지금은 마나 코어는 물론이거니와 마나 하트조차 하나 없는 얼간이였지만, 그의 권위는 이렇게 일개 가신들 따위에게 도전받을 것이 아니었다.

데미안의 주위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피 튀기는 전장에서 살아온 그의 살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막대한 살기가 유형화하듯 아지랑이 치며 대전을 장악했다.

"허억!?"

"컵!"

모든 용병들을 발아래 둔 용병대장.

수백의 병력으로 수천의 군대를 상대했고, 수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몬스터를 학살했던 전장의 신.

그가 바로 지금 어린 몸으로 회귀했다.

그의 영혼에 박힌 오랜 경험이 본능적으로 드러났다.

데미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잘 기억하거라. 이 영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죄, 죄송합니다."

"사죄드립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희가 건방졌습니다."

콰앙!

쾅!

부복하며, 기사들과 가신들이 무릎을 꿇었다.

권위.

그것은 망나니였던 어린 시절의 데미안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영지는 멸문하지 않았고, 그는 정당한 후계자이자 당대의 소영주이다.

가신들이 무릎을 꿇었고,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당연한 반응이어야지.'

과거 용병 시절처럼 밑바닥에서부터 정상까지 오를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사람 구실만 해도 그 말 한마디에 권위가 실릴 수 없는 소영주의 지위를 가졌으니까.

자신의 호통 한마디에 교통정리가 끝나자 데미안은 자조했다.

'미치겠군. 옛날엔 이거 한 번을 못 해서 질질 끌려다녔단 말이지.'

좌중을 휘어잡고, 모두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아 내며, 권위와 권한으로 신하들을 통솔하는 것.

이 광활한 영토의 주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다.

문제는 이것을 과거에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했고, 이 무능한 신하들에게 벌벌 떨었다는 것이다.

'옛날엔 이 호통 한 번을 못 쳐서 가신들이 중구난방으로 날뛰었지.'

따지고 보면 사실 가신들을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영주의 부재.

그리고 남겨진 막대한 부채는 가신들로서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상황에서 뭣 모르는 소영주는 망나니 질만 일삼으니, 이들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무능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데미안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집사장 그레고리.

노회한 그는 앙상한 체구였지만, 그 눈빛만은 세월을 잊어 여전히 매서웠다.

그가 데미안의 편에서 상황을 정리했다.

"소영주님. 보아하니, 베델 상단주가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맞습니까?"

"그래. 역시 집사장은 알아차렸군."

"예. 녀석은 내내 자신이 선의를 베푸는 것이라 누차 강조했지만, 사실 상인이라는 작자가 이득이 없는 곳에 꼬이지 않을 리 없지요.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가였는데, 아무래도 소영주님께서는 그게 뭔지 알아차리신 것 같군요."

집사장의 눈과 입이 호선을 그리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집사장이 공연히 고까웠던 베델의 옆에 바짝 붙어 시중을 들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숨겨진 음모가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목을 집중했던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레고리는 끝끝내 베델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소영주님께서는 계약서 한번 훑어본 것만으로도 그 음모를 알아차리시다니....'

언제 문자를 익히셨는지.

그리고 전문 회계 용어들까지 익히셨는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건 결과다.

문서와 수의 이치에 밝은 재무관과 행정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으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앞으로였다.

그리고 그레고리는 왠지 몰라도 이 달라진 소영주님이 그 답을 알고만 있을 것 같았다.

"여기 무능한 가신들은 도저히 그 계약서에 숨겨진 저의를 알지 못합니다. 혹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무능한 건 죄지만, 그 무지를 고치지 않으려는 건 더 큰 죄지. 내 직접 설명하지."

데미안의 모욕적인 발언에 가신들은 얼굴을 붉혔지만, 가까스로 그 분을 참아 냈다.

솔직히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양손을 모은 데미안이 허리를 굽히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불모지라 알려진 북쪽 산맥에 묻힌 보석이다."

"보석이라니. 이상하군요. 분명 수십 년 전에 이미 탐색을 끝낸 장소인데요."

"그래. 그때 당시에는 채산성이 영 나오지 않는 잡철들만 발견되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블랙 다이아몬드. 마나를 머금은 마석이 그곳에 잠들어 있으니까. 그 탐욕스러운 녀석도 눈이 돌아갈 수밖에"

"...! 브, 블랙 다이아몬드요!?"

가신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블랙 다이아몬드.

아무리 변방 중의 변방이라 불리는 카를로스 영지라 하더라도 세계를 격변시킬 만한 신자원의 소식을 못 들은 것은 아니다.

마력 용적량이 사파이어의 10배.

다이아몬드의 15배나 된다는 보석 중의 보석.

같은 무게의 금보다 수십 배는 더 비싸다는 광물이 이 변방 영지에 묻혀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저 욕심 많은 상단주 베델이 이렇게 음모를 꾸밀 것 같진 않았다.

곧 가신들은 데미안의 억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보물이 저희 영지에 있다는 겁니까?"

"그래. 그것도 추정 매장량 100톤 이상이지."

실제로 먼 미래에 얼간이 소영주가 100톤이나 매장된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을 헐값에 넘겼다는 소문이 주위에 돌았으니, 데미안은 그것만큼은 확신했다.

"허어. 어찌 그런 일이. 그래서 베델 녀석이 그렇게 그 불모지를 얻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쓴 것이군요."

그제야 뒤늦게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전노 중의 수전노라 알려진 베델이 손해 볼 짓을 할 리 없다는 건 재정관과 행정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재정적인 압박이 심한지라 못 본 척 넘어가려 했는데, 그것이 블랙 다이아몬드면 사정이 다르지 않겠는가.

이건 눈 뜨고 코 베일 뻔한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계약을 추진한 자들은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그 누구보다 재빠르게 행동한 이들이 있었다.

재정관과 행정관이었다.

쿠웅!

"저의 불충이옵니다! 이 목을 베어 주십시오!"

"소영주님! 제 무능을 벌하여 주십시오!"

재정관과 행정관은 땅에 머리를 박으며 몸을 떨었다.

그 누구보다 베델의 거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둘이었기에 그 죄가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 베델을 끌어들여 영지에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게 한 것이 이 둘이었고, 불모지를 헐값에 불하하자고 주장한 것도 재정관과 행정관이었다.

현재까지 베델과 내통을 의심할 만한 심증은 넘쳤다.

물증이 없을 뿐이지.

데미안은 낮은 목소리로 그 둘을 다그쳤다.

"너희 둘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최대한 영지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옵니다. 절대 다른 의도가 없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희가 어찌 베델 같은 자가 그런 사특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알고 있었겠습니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무능.

그것이 죄는 아니니까.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무릎까지 꿇으면 용서해 주실 거다. 우리가 없으면 이 영지는 돌아가지도 않을 테니까.'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소영주님은 심약하신 분. 아마 예전처럼 대충 용서를 받아들이시겠지.'

현재 카를로스는 기울어져 가는 해.

새로운 인재는 영입할 수도 없고, 몇 안 되는 가신들도 그저 전통에 따라 몇 대에 걸쳐 충성을 바친 자들이었다.

아마 성정이 유약한 데미안은 감봉 정도로 둘을 벌할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은 두 명도 그렇게 생각했다.

적당한 선에서 벌하고, 정당한 선에서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눈앞의 소영주는 그들이 알던 그 유약하고, 세상 모르는 망나니가 아니라는 점이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데미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실 데미안은 처음부터 이 둘의 처분을 염두에 두었다.

데미안은 미래를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영빈관에 자리 잡은 가신들이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카를로스 가문의 기둥을 자처한 행정관과 재무관이지만, 가문이 멸문할 때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데미안을 버린 것도 이 둘이었다.

데미안은 그 과거이자 미래를 잊지 않았다.

"스스로 죄를 인정하니, 처벌하기는 쉽겠군. 기사들은 이 둘을 끌고 가서 목을 베고, 성문에 효수하라."

"감사합, 아니 예!?"

"허, 허억. 그, 그게 무슨!?"

원래 이런 분이셨던가?

가신 그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데미안의 명령.

영빈관의 모든 가신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4화

"노, 농담이시지요. 소영주님."

"저희는 오랫동안 선대 영주님을 보필한 가신입니다. 저희한테 이러실 수 없습니다."

엎드린 그 둘의 태도.

처음과 달랐다.

설마하니 진짜 처벌이라도 하겠나 싶어 엎드린 것이지.

진짜 처벌해 달라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처벌을 떠나 목을 베어 효수한다니.

과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농담일 게 분명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데미안은 단호했다.

데미안의 얼굴에는 평소엔 찾아볼 수 없는 엄중함이 자리 잡았다.

'으음!'

순간 집사장 그레고리를 비롯한 몇몇 오래된 가신들의 눈에 잠시나마 이채가 서렸다.

신중함과 엄중함.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그 모든 특징이 잠시나마 십수 년 전의 과거를 떠오르게 했다.

이제는 병석에 누워 의식을 잃은 그들의 옛 주인을.

데미안은 조용히 그들을 압박했다.

"스스로 죽을죄를 지었다 실토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어서 죽으시게나."

"하, 하지만...!"

"저, 저희가 무능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말이 없었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재정관과 행정관.

데미안의 두 눈을 마주친 그들은 뒤늦게 온몸을 떨며 전율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눈앞의 소영주는 절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데미안의 입에 유려한 조소가 걸렸다.

회귀를 겪은 데미안.

그는 지금 눈앞의 두 역적이 역겨웠다.

"어리석군. '앞으로'라는 말은 필요 없어. 자네들의 자리는 과정보다는 결과로 증명하는 자리가 아닌가. 심지어 그 과정 또한 썩 깨끗하진 않을 거 같은데 말이지."

"예!?"

"얼마를 받았는가. 우리 영지를 침탈하려던 저 상인 놈에게 얼마를 받아 처먹고 우리 영지의 금싸라기 땅을 헐값에 불하하려 했냐, 그 말이다!"

"히익!"

"커억. 컥."

평생 검 한번 잡아 보지 못했던 재무관과 행정관이다.

언제 전장의 살기를 느껴 보기나 했겠는가.

당장이라도 전신을 난도질할 만한 살기.

그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재무관이었다.

유약한 소영주가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는 이유.

단 하나밖에 없다.

자신의 부패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

적당히 작은 것을 토해 내고, 용서받는 일뿐.

사시나무 떨듯, 전율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 사실 베, 베델 상단주 그 녀석이 먼저 접근하긴 했습니다. 영지 개발과 부족한 자금줄을 대 준다고 하여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예 아무것도 안 받은 건 아닙니다. 겨우 500골드. 푼돈일 뿐입니다."

"마, 맞습니다. 저는 500골드도 아니고, 겨우 300골드뿐입니다. 사실 저희 영지에 접근하는 상단주 중에서 그 정도 뇌물을 바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거래를 트기 위한 최소한의 수수료죠. 그것에 정녕 그런 악심이 있는지는 짐작도 못 했습니다."

그들은 받은 돈의 액수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작은 성의 수준.

사실 제공받은 향락은 그것의 열 배는 넘었지만, 사실대로 실토할 바보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데미안도 그들이 받은 돈의 액수가 그리 크지 않음은 알고 있다.

겨우 500골드.

그리고 300골드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너무나 쉽게 자신이 받은 '성의'를 실토했다.

용서를 빌기 위해.

하지만 그러면 안 됐다.

'멍청한 것들.'

데미안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그 얼마 안 되는 푼돈에 영지를 완전히 넘어갈 뻔했다는 현실이다.

"내 차라리 10,000골드라도 받고 그 베델 놈과 손을 잡았으면 그러려니 했는데, 겨우 300골드라니. 그런 푼돈에 영지를 홀라당 넘길 뻔했다, 그 말인가!"

콰앙!

마나 하나 실리지 않은 진각이지만, 데미안의 분노와 진심이 담겼기에 단단한 대리석마저 쩍 하니 갈라졌다.

"허어!"

"흐음!?"

데미안의 무력이 그리 심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사들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조용히 상황을 묵시하던 기사들.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데미안이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이여. 너희들마저 이 소영주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소영주님!"

"어서 내 명을 집행하라! 이것은 이 영지의 정당한 주인의 명령이자, 이 영지를 위기에 빠트린 역적에 대한 처벌이느니라!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저 두 녀석의 집무실을 수색하라. 분명 베델 녀석과 내통한 증거가 있을 것이다. 겨우 500골드가 끝이 아닐 테니!"

"예, 알겠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잔뜩 기강이 잡힌 기사들의 어깨가 곤두섰다.

일벌백계.

무능도 죄임을 다시 한번 만천하에 알린 사건이었다.

두 무능한 죄인이 짐짝처럼 기사들에게 붙들려, 영빈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소영주님!"

"으아! 제발! 으아아아아아악!"

멀어지는 비명.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신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영주가 변했다.

망나니 소영주가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 사실이 뇌 내에 각인되는 사건이었다.

* * *

데미안은 영주관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의 침실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의 부친이 누워 있는 병석이었다.

"...."

잠들 듯이, 조용히 침실에 누워 있는 부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회귀한 사실이 실감이 났다.

갑작스럽게 병석에 누운 부친.

아버님을 대신해 영주직 대리를 강제로 맡게 되었다.

경쟁은 없었다.

데미안은 외아들이었으니까.

나름 정통성은 부족하지 않았다.

문제는 데미안 자체가 부족한 후계였다는 점이다.

한 영지를 이끈다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술에 취해 매일같이 망나니짓을 일삼았고. 결국엔 영지를 화끈하게 말아먹었다.

'베델은 시작일 뿐이었지. 모자란 영주 대리가 이끄는 이곳을 승냥이처럼 뜯어먹기 위해 온갖 놈들이 다가왔지.'

모든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가장 어려운 순간, 충신과 간신이 드러났다.

꿀처럼 달았던 간신들은 모두 항복과 타협을 권유했고, 충신은 끝까지 데미안의 곁에 남아 장렬히 전사했다.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다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도망자의 신분으로 용병으로 군영에 몸담았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자신의 나태와 무능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뼈를 깎는 일신의 노력으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되어 용병왕이 되었지만.

이미 모든 소중한 것들이 손아귀 안 모래처럼 흘러간 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아비가 병석에 누웠지만, 아직 살아 계셨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숨을 걸었던 집사장 그레고리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빌어먹을 다섯 녀석들도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할 터. 녀석들보다 더욱 빨리 세력을 이뤄야 한다.'

빛의 성녀 이사벨.

절대검제 루시안.

천하무적 권왕 스테로인.

환영의 마법사 이스테리안.

그리고 용사 아벨.

데미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영웅들.

마왕성을 앞두고 데미안을 제물 삼아 그들은 승리를 쟁취했다.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웬만한 권력으로는 부족하다.

빛의 성녀 이사벨은 성국이라는 국가 단위의 힘을 등에 업었다.

환영의 마법사 이스테리안은 무려 마탑이라는 제3세계 세력이 배경이다.

그리고 용사 아벨은 무려 황태자 신분이다. 제국이 바로 그의 뒷배.

용병의 신분을 떠나 애초에 일개 지방의 영주가 감히 맞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무기가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모조리 알고 있지. 특히나 역사적 분기점이 될 사건들은 모두 다.'

어째서 회귀하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이건 기회였다.

하늘이 준 기회.

신이 있다고 평생 믿어 본 적도 없었지만, 진정 신은 있었던 모양이다.

꽈악.

누워 있는 부친의 손을 잡았다.

데미안의 첫 번째 후회.

그것은 바로 이 눈앞의 부친을 그대로 방치한 불효였다.

부친의 전신을 마나로 훑었다.

아니, 훑으려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으음!?'

뒤늦게 데미안은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인지했다.

마나 스캔.

진맥을 위해 마나 코어에서 마나를 일으키려 했지만, 전신에 마나 한 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데미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 건가. 아직 마나를 각성하지 못했구나.'

그제서야 현 상태를 깨달았다.

지금의 데미안. 초급이나마 마나 유저의 경지였던 용병대장이 아니라, 십 대 중반 때의 유약한 소년이었다.

기맥조차 뚫지 못하고, 마나 하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빈약한 육체.

기사 수업조차 제대로 받지 않아 근골은 굳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두근.

두근.

데미안의 은근한 희열이 심장 속에서 용솟음쳤다.

감탄했다.

아니,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직 전신의 혈맥이 굳지 않았어! 심지어 마나 중독도 아니군.'

데미안의 입이 싸악 찢어졌다.

몰락 이후 데미안은 뒤늦게 검을 잡아 단련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오랫동안 검술을 게을리했다.

가문의 절기는 반쯤 잊은 지 오래였다.

온몸의 혈맥은 완전히 굳어 버려 마나 코어를 형성하는 데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심지어 데미안의 육신은 멸문의 과정 중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마나 중독에 이르렀다.

마나 중독.

자연기를 거부하고, 온몸의 마나가 진탕이 되는 극악의 상태.

결국, 실전과 훈련을 거듭한 끝에 뒤늦게 마나 코어를 형성했다.

허나 그것은 온전치 못했다.

모든 근맥은 뒤틀리고 메말랐고, 생명기를 잃었다.

너무 늦은 것이다.

반쪽짜리 마나 코어에 반쪽짜리 마나 하트.

검도 마법으로도 대성할 수 없는 몸이었다.

부단히 노력했지만, 조금이라도 벽을 넘으려고 하면 병든 육신이 그것을 거부했고.

결국 데미안은 무예가 아닌 마나 서클이라는 어중간한 마(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데미안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 이상의 실전을 겪었으며.

벨크라는 이름으로 용병왕의 지위에 올랐다.

'경험 하나는 내가 최고니까.'

최전선의 밑바닥에서 최고의 용병까지 올랐던 이유.

단 하나.

수많은 실전과 경험.

하나만 더하면 끊임없이 부단한 노력이랄까.

그럼에도 넘지 못했던 마지막 벽이 바로 초급 이상의 제대로 된 마나 유저의 경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회귀 전의 전성기 이상의 경지에 닿을 수도 있겠어.'

지금부터 마나 코어를 온전히 쌓아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 지금까지 축적된 실전 경험이 더해진다면?

어쩌면 천외천의 경지에 닿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너무 오반가?'

피식 웃었지만 나름 진지했다.

그가 알기에 데미안의 어릴 적 자질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희망을 품을 만했다.

데미안은 천천히 가부좌를 틀었다.

영주관 한가운데서 마나 코어를 단련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스운 꼴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실 이 영지 안에서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다.

처음 마나를 일깨울 때는 주위의 방해가 없었기에 이곳에 가장 적격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과거에 어렵사리 걸었던 길이기에 다시금 걷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곧 일각이 되기 전에 데미안의 배꼽 아래에서부터 희미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것이다.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그 기운이 데미안의 육신에 다시금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대기와 공명하며 그 기운이 곧 대지와 섞인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더욱더 진동하는 기운이 미묘하게 떨리며, 곧 데미안의 내부에 콩알만 한 마나 코어가 자리 잡았다.

'끝났다!'

데미안이 쾌재를 불렀다.

남들은 10년 넘게 단련을 해야 겨우 형성할 수 있는 마나 코어를 고작 잠깐의 명상으로 완성한 것이다.

물론 그 크기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 회귀 전에 작은 성과를 위해 5년 이상을 발버둥 친 것을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다.

'이미 걸어온 길을 다시 걷는 것뿐이니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데미안이 막 자리를 일어나려는 찰나.

방 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누구냐."

"집사장 그레고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예, 그럼."

집사장이었다.

그가 즉결 처분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영주관을 방문했다.

"어떻게 처리했지?"

"소영주님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녀석들이 아무래도 베델 상단주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진짜 배신이었다, 그 말인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발신 서류를 훑어보니 영주의 재정 상태와 행정 전반에 대한 기밀까지만 누출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것만 해도 당장 목을 베도 이상하지 않은 역적의 행동인 것이죠."

이미 예상하던 바다.

회귀 전.

오랜 세월 카를로스 가를 섬겼던 그 두 놈은 카를로스 가의 멸문과 동시에 베델의 밑으로 들어갔으니까.

이미 베델과 가신과의 접점은 확신에 가까웠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래. 그래서 처분은?"

"소영주님의 뜻이 곧 법입니다. 당장 대질하여 심문하고 성벽 밖에 목을 내걸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처분하도록."

"다만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재무관과 행정관은 오랫동안 재무부와 행정부를 이끈 관료들입니다. 그 수하 가신들의 반발이 상당할 것입니다."

"어이가 없군. 감히 이 영지의 정당한 주인인 내 판단이 그릇됐다고 생각한다 그 말인가?"

"은혜를 입은 것도 모르고 주인을 무는 개들이죠. 아주 불충한 녀석들입니다."

집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신 사죄했다.

솔직히 그레고리가 사죄할 필요는 없다.

데미안이 그만큼 가신들의 신뢰를 저버릴 정도로 망나니짓을 해 온 결과니까.

다만 앞으로도 이러면 곤란하다.

이 카를로스 남작가는 앞으로 몰아칠 대격변을 이겨 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모두 다.

데미안의 얼굴이 어린 나이답지 않게 진중해졌다.

"그러면 그 불충한 녀석들의 콧대를 한번 밟아 줄 필요가 있겠군."

"예!?"

"내일 영주 회의가 꽤 재미있겠어."

데미안은 자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유약한 망나니 소영주가 아니었으니까.

용병왕.

그것도 수천의 군세를 이끌었던 그의 회귀 전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데미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늦은 밤.

베델 상단 카를로스 지점의 본관에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않는 그곳 가장 중심부에 베델이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한 태도를 유지했던 그가 좌불안석 무엇이 불안한지 어둠 속에서 벌벌 떨었다.

그리고 짙은 암흑보다 더한 어둠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블랙 다이아몬드의 공급에 차질이 있을 거라, 그 말인가?"

"죄, 죄송합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면 차질 없이...."

"변명 따위는 필요 없다. 시간 내에 블랙 다이아몬드를 준비해라. 그것이 네가 살 유일한 길이니. 일이 잘못될 시, 위약금만으로 끝나진 않을 테니...."

차갑게 가라앉은 짐승의 목소리.

그리고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나.

"기억하라. 이건 마탑과의 계약임을. 앞으로 계속 지켜보겠다."

그 말과 함께 검은 로브를 두른 괴인이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남기고 스르르 몸을 숨겼다.

"히익!"

베델은 기겁했다.

이건 정상적인 마나가 아니었다.

흑마법이 분명했다.

베델은 새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렸다.

압도적인 공포가 그의 육신과 정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어, 어떻게든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을 개발해서 진상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

흑마법사와 관계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된다.

그전에 어서 계약을 이행해야 된다.

그 사실이 무겁게 베델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눈앞의 존재를 마주치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5화

영주회의.

매일 아침 모든 관료들과 가신들이 자신들의 영지 전반을 의논하는 공식적인 업무의 장이다.

카를로스 영지의 주요 정책을 심의하고 판단하는 최고 정책회의지만, 이것이 유명무실하게 된 지 벌써 몇 년이다.

소영주가 영주직을 대리한 이후, 제대로 된 회의가 진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데미안이 이 회담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터벅.

터벅.

영주관으로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수십의 무리들.

바로 행정부와 재정부 소속의 관료들이었다.

그 뒤를 몇몇의 무인이 동행했는데, 이들은 이 영지에 몇 안 되는 기사들이었다.

최북단에 위치한 카를로스 영지는 그 지리적 특성 때문에 몬스터의 침략이 잦은 편이었다.

그런 이유로 기사들의 발언권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소수의 사람들.

바로 집사장과 휘하 집사들이었다.

선대 영주가 온전했을 때.

집사들은 단순히 집안일을 돌보는 자들이 아니었다.

영지 전체를 아울러 관리하는 최측근 중의 최측근.

사실상 영주의 참모직이자 비서실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옛일에 불과하다.

현재 데미안의 권위가 약화된 탓에 그레고리 또한 발언권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문신들의 정점인 행정관과 재정관이 처형되고.

차석 행정관은 더 이상 집사장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다.

곧 평소와 다르게, 조용히 뒤따르는 집사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레고리 집사장. 그래서 공자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부채를 탕감할 방도는 있으신가?"

"글쎄요. 저도 확답은 못 받았습니다만."

"허어. 이거 큰일이군. 대책이 없구만, 대책이."

문관과 무관.

대대로 카를로스 가문을 섬겨 온 가신들이다.

그들은 데미안의 변모가 반갑기보다는 은근히 분노했다.

호탕하게 베델의 음모를 타파한 것은 훌륭하기 그지없었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막대한 부채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각 부처의 수장이 하루아침 만에 목이 잘려 성문 앞에 걸렸다.

그것은 업무적으로 큰 분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재정관과 재무관이 행정적인 심의와 보고만이 아닌 주요 정책을 '결정'한 지가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들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고, 파벌을 형성했다.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권한이 확대되자, 하나의 군벌을 형성했고 대립했다.

배는 하나이되 선장은 여럿인 곳.

그곳이 바로 이 카를로스 영지였다.

그들의 복잡했던 이해관계와 권력의 흐름이 소영주의 개입으로 훨씬 더 꼬여 버렸다.

다음 파벌의 주인이 누가 될지.

또한 파벌의 권력 판도가 어찌 될지.

묘한 공포감과 함께 불안감과 불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베델이 죽일 놈은 맞지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쫓아냈으면 안 됐습니다."

"예. 지금 영지의 재정은 파탄 날 지경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이라도 베델 그놈의 바짓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겨우 500골드와 300골드를 받았다고 행정관님과 재정관님을 처형하다니요. 이건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 두 가신이 얼마나 오래 카를로스 가를 섬겨 왔습니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레고리 집사장만은 가만히 입을 닫고 그들과 함께 걸었다.

차석 행정관은 은근한 태도로 그런 그레고리를 향해 이죽댔다.

"역시 집사장은 중립을 지키는군. 입이 무거워서 참 좋겠어. 응?"

"...."

역시 집사장은 그 어떤 의견도 표명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둔한 건지.

음흉한 건지.

아니면 주도면밀한 건지.

도저히 저 의도를 모르겠다.

그레고리를 향한 은근한 조롱과 함께 그들의 발걸음은 영주관의 끝에 닿았다.

"어차피 오늘도 술에 취해 영주회의가 끝날 때쯤에 나타나실 테지."

"나오시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참나. 소영주님께서 불참하신다면 오늘부터 누가 회의를 주관할까? 이미 목이 잘려 죽은 양반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고."

"쯥. 개판이구만, 개판이야."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언제나 공석으로 비워져 있던 상석.

오늘만은 주인을 만나 공간을 채웠다.

"모두 모였는가."

중저음의 가라앉은 목소리.

누구보다 가장 먼저 자리 잡은 데미안이 가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언제나 회의가 끝날 때쯤에 반쯤 술에 깨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그것이 지금까지 보아 온 소영주의 행동.

그런데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가신들은 반기다니.

영주가 가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기에 가신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오, 오셨습니까!"

"아니, 어찌 이리 일찍 오셨는지."

"허어.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제 너무 황망했던지라 업무가 밀려 있어서...."

여러 가지 변명을 들으며 데미안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성질머리 같으면 한바탕 고성이 터져 나오며 난동을 부리기 마련인데, 어쩐지 오늘은 차분하기 그지없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가신들의 생각은 한 가지로 압축되었다.

'뭔가 다르다. 소공자님이 진짜 달라지셨어.'

가신들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착석했다.

괜히 꾸물거리다가 시범타로 목이 잘릴 순 없으니까.

그 일사불란한 태도를 지켜보며 데미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대강 다 모인 것 같군. 그럼 업무 보고를 시작해 보게나."

그렇게 데미안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꿀꺽.

미묘한 긴장감 속에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가신들 사이로 들려왔다.

* * *

오랜만의 영주 회의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후후. 어이가 없군."

데미안은 어제와는 딴판으로 달라진 가신들의 태도를 지켜보며 조소했다.

그 전에 보고서의 내용은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용병단을 운영할 때도 그 무식한 놈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수집된 데이터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오류가 있었고.

수치와 규격은 맞는지 아닌지 정확하지도 않다.

주먹구구식.

이런 놈들을 믿고 영지 운영을 맡겼으니 망하는 게 당연하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이거 완전 개판이다.

심지어 재무부 가신으로부터 확인한 업무 보고의 내용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지금 영지 내 차입금이 정확히 얼마인지 모른다는 그 말인가?"

"그, 그것이 모든 것을 재무부장이 독단적으로 처리했던 일이라. 저희로서도 대강 짐작만 할 뿐...."

회계와 재무의 영역.

작은 숫자 하나가 맞지 않아도, 그날은 관료 전체가 밤을 새는 날이 된다.

그런데 이건 수치가 틀린 수준이 아니라, 아예 회계 장부 자체가 없다.

한숨이 나왔다.

기본적인 대차대조표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개판이군. 아무리 그래도 차석이나 되는 양반이 영지 내 자본 흐름과 부채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다니. 그러면 실제로 네놈들이 지금까지 해 온 건, 그저 녹봉이나 축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주, 죽을죄를, 아, 아니지. 죽을죄만큼은 아니지만 큰 죄를 지었습니다!"

털썩.

재무부 가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었다.

평소라면 그저 사죄 한 번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지금 그들은 지금 소영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배신자의 효수.

비록 무지와 무능의 산물이라지만, 그럼에도 일벌백계의 행동은 모두의 마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렸다.

공포에 의한 지배.

그것은 데미안이 용병대장으로 군림하던 시절 자신의 수하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이것도 정상적인 지배의 방식은 아니다.

공포에 의한 지배는 더한 공포에 굴복하는 법이니까.

'예를 들면 황태자라든가, 5영웅이라든가 말이지.'

입맛이 썼다.

5영웅에게 죽음을 당한 과거가 떠올랐다.

그 공포에 전염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전멸한 부하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잠시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할 때.

소영주로서의 권위를 세운 데미안이 오른손을 들으며 말을 이었다.

"어서 일어나거라. 자네들은 그만한 책임을 질 자리에 있지 않다. 자네들의 일은 시킨 대로 그대로 집행하는 것. 책임은 윗선의 것이니, 시킨 자들이 제대로 시키지 않고 감독하지 않았다면 부덕은 이미 목이 매달린 그들의 것이라네."

"가, 감사합니다!"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무부의 관료는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이제 기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러면 군사 부문은 어떻지? 거기도 같이 개판인 건가?"

"크흠. 그렇게 개판은 아닙니다만, 공자님!"

"놀라운 자신감이군."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전형적인 기사다운 모습.

제3자가 언뜻 보기에는 보기 흡족할 자신감이지만.

데미안은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말해서 기사들과 병사들의 실력이 뛰어나기만 했어도, 회귀 전에 가문이 멸문당할 일은 없을 터였다.

심지어 충성심조차 뛰어나면 상관없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공수표를 던지는 기사를 바라보며 진한 조소와 함께 데미안은 손짓했다.

"뭐 자네들의 훈련 수준은 내 추후 파악해 보기로 하지."

"실망하시진 않을 겁니다."

"진짜 그랬으면 좋겠네. 어쨌든 알았어. 다음은 행정, 및 외무 부문인데, 말이지. 영지 수출입 부문은 어떻게 되나."

"그것은...."

데미안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제 다른 가신들을 향했다.

순간 그 매서운 기세에 가신들은 흠칫 놀랐다.

이윽고 차례대로 업무 보고가 있었다.

군역.

회계.

재무.

상업 등.

그 외에도 여러 부문의 세세한 내역을 보고받았다.

방대한 영역.

심지어 영지민의 교육 부문까지 세세하게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데미안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가신들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도대체 소영주님께서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시다니, 어째서!?'

'전문 행정 관료보다 심도 깊게 내역을 알고 계시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말이야!'

'영지민 교육까지는 또 왜 신경 쓰신단 말인가. 개돼지나 다름없는 무지렁이 녀석들인데!'

녀석들의 속마음이 읽히는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는 하나라도 이해하기 어려웠었는데, 수천의 용병단을 이끌면서 그는 재정과 행정에 관해서는 도가 튼 상태였다.

망나니 소영주가 아닌, 세상 풍파에서 구를 대로 구른 용병왕으로서 이 영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 눈앞에 가신이라고 자리 잡은 녀석들은 현재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이 작은 영지가 그 위기를 헤쳐 나갈지.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똥 덩어리들이었다.

'거기에 확정적으로 영지가 위태로울 때 뒤통수를 칠 놈들이지.'

그건 지난 과거가 증명해 준 예언이나 다름없다.

결국, 데미안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카를로스 남작가는 망망대해에서 가라앉는 배였다.

그것도 너무나 천천히 가라앉고 있어서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결국은 작은 풍파 하나에도 무너질 만한 난파선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파도는 절대 작지 않다.

북부에서 봉기하는 몬스터의 습격.

그리고 중앙 대륙의 가중되는 대혼란과 함께 제국의 발기와 마탑의 폭주 등.

데미안이 알고 있는 미래에 이 영지는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심지어 그 간악한 베델조차 데미안이 복수하기 전에 이미 죽었고.

"흐음...."

데미안은 이 영지의 주인이다.

영주는 의견을 내는 자가 아닌 결정을 하는 자.

그 명확한 사실을 몇 번의 질문과 지시로 가신들에게 각인시켰다.

지금 이 순간.

가신들은 당연히 그 관계를 받아들였다.

지금 그 변화를 알아차린 자도 거의 없었다.

그것을 주도한 데미안.

그리고 기껏해 봤자, 데미안의 옆에 서서 내내 입술을 씰룩거리는 그레고리가 전부려나.

어쨌든.

데미안은 가신들의 얘기를 모두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확실한 거 하나는 우리 부채의 대부분은 그 채권을 사들여 한곳으로 모아 놓은 베델 상단주가 가졌다는 거잖아."

"예. 맞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베델을 불러들여서 그 채무에 관해 협상하기만 하면 우리가 진 채무는 모두 없어지는 거고."

"아! 그, 그렇군요!"

병신같이 감탄사만 내뱉는 차석 재무관을 보며 데미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블랙 다이아몬드든 뭐든, 우리는 그걸 채굴한 장비나 인력들이 당장 없으니, 빚도 변제하지 못하고. 맞나?"

"정확하십니다. 아무리 대단한 보물을 숨겨 놓고 있더라도, 그걸 꺼내지 못하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베델 그 녀석이 아무리 사특한 놈이라도 우리는 채권자니까요. 내년 만기 때까지 도저히 그 빚을 갚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면 파산입니다."

"정말 갚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아니면 고든 자작에게 차입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고든 자작한테도 손을 빌려? 하하하."

"예. 예전부터 저희 카를로스 남작가와 정이 깊은 고든 자작이 막대한 차입금을 무이자로 빌려 준다고 말씀하셨죠. 그거라면 막대한 채무도 단숨에 상환할 수 있을 겁니다."

데미안은 재무부 관료들의 의견을 들으며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세상에 무조건적인 호의가 어디 있는가.

고든 자작가의 차입금은 독이다. 그것도 극독.

회귀 전에 그 누구보다 카를로스 영지의 금싸라기 같은 땅을 앞장서서 뺏어 갔던 녀석이 고든 자작이었다.

그때 진 막대한 빚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영지의 곳간이 그대로 털렸다.

지금 이 순진무구한 재무부 관료들의 행태에 역정이 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무엇보다 데미안은 이 베델의 뒷배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고든 자작.

그 녀석이었다.

"그게 재무부 관료들의 생각이냐?"

"예."

"알겠다. 모두 나가 봐."

"예!?"

"네놈들의 바보 같은 얘기만 들으니 머리가 다 어지럽군. 겨우 그따위 생각으로 영지를 운영했다니 아주 꼴도 보기 싫어."

데미안의 축객령에 가신들은 하나같이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예전 같으면 위아래를 모르고,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바로 어제 두 명의 가신이 성문에 목이 걸렸다.

그리고 재정립시킨 관계의 명확성.

데미안은 이 영지의 주인이자 절대자였다.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분하다는 듯 데미안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모두의 눈빛에 담긴 분노의 감정을 읽지 못할 만큼 지금의 데미안은 어수룩하지 않다.

"왜. 다들 내 말이 억울해?"

"그런 건 아닙니다만. 과연 재무부와 행정부 관료들의 계책 말고는 다른 방안이 있으십니까. 저희도 차마 답이 없기에 이런 결론을 낸 것입니다."

"하하하! 자기들 능력이 부족한지도 모르고 지금 고집을 부린다는 거지!?"

데미안의 입이 싸악 찢어졌다.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예전 성질머리 같아서는 하나하나를 자근자근 씹어 먹을 텐데, 지금 데미안은 예전의 용병왕이 아니다.

지금은 기반도 불안정한 변방 남작가의 소영주일 뿐이다.

"그래. 그러면 우리 내기라도 할까?"

"갑자기 무슨 내기를...."

"만약, 베델 상단주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우리 채무를 모조리 탕감시켜 준다면 어쩌겠는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 그대로야. 내 장담하지. 베델 상단주는 조만간 내 앞에 엎드려 자신의 잘못을 빌고, 지금까지 우리 영지에 빌려준 모든 돈을 탕감해 줄 거라, 그 말일세."

"...!"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재무부 및 행정부 각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넋을 잃었다.

베델 상단주.

고리대금을 일삼고, 자그마한 빚을 산더미처럼 부풀려 평민들을 노예로 전락시킨다는 악마적인 상인이 아닌가.

신보다 금을 좋아한다는 그가 미쳤다고 채무를 무효화할 리 없었다.

오히려 그 채무를 무기로 다시금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을 노릴 터였다.

'역시 소영주님은 속 빈 강정이었어. 세상사를 이렇게 모를 줄이야.'

재정부와 행정부 각료들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뭔가 달라진 줄 알았던 소영주건만. 아직도 어린애같이 천진난만하다.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그는 철혈의 상인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리 없죠."

"그러면 네놈은 거기에 걸어. 나는 베델 녀석이 제 발로 찾아와 내 바짓자락를 잡고, 그 엄청난 채무를 없던 일로 하자고 하는 거에 걸 테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저희 가신들은 1년 치 녹봉을 걸겠습니다. 대신 저희가 이기면 소영주님께서 저희 가신들을 향해 정식으로 사과하시죠."

"좋았어. 내 천 번이라도 사과할 테니. 이 내기 그대로 진행하지."

데미안은 사이한 웃음을 지었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글쎄다.

과거의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데미안은 이미 많은 미래 지식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지식 가운데는 베델 상단주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과욕을 부렸는지까지 모두 다.

"내 확언하지. 베델 상단주 그 멍청한 놈은 오늘 내로 이 영주관에 찾아올 것이야."

"두고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내기가 성립되었다.

한쪽은 이 영지의 주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걸었고.

또 한쪽은 1년 녹봉을 걸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집사 그레고리도 조금은 불안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주인인 데미안의 주장이 일견 그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 없던 신뢰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러던 그때.

영주관에서 멀리 떨어진, 입구에서부터 어린 하인 하나가 황급히 뛰어왔다.

"크, 큰일입니다! 모두 큰일 났습니다."

"무슨 소란이냐!"

한창 긴장감이 팽팽하게 도는 영주 회의 와중에 이런 소란이라니.

고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인은 그런 분위기 따위는 읽을 시간이 없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급보였기에.

"베, 베델 상단주가! 베델 상단주가 왔습니다!"

"뭐!? 그자가 왜 갑자기!"

"저기, 뭔가 다시 협의할 게 있다고 하던데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베델 상단주라니.

가신들의 두 눈이 커지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6화

데미안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는 카를로스 영지를 찾아올 것 같지 않던 베델.

그가 이른 아침부터 충혈된 눈으로 영주관을 방문했다.

멀찍이 창밖으로 도개교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베델이 보였다.

그를 바라보며 가신들은 혼란에 빠졌다.

'소영주님의 예견하신 대로 녀석이 찾아오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저놈이 미쳤다고 손해 볼 짓을 하러 왔을까.'

'우연이겠지. 설마 진짜 채무를 탕감시키려고 왔을 리가 없잖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때.

"크흠!"

집사장 그레고리가 헛기침했다.

모두 상념에서 깨어났다.

"손님을 맞이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손님? 글쎄. 집사장도 손님이라고 생각해?"

"글쎄요. '지금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까요?"

"예전처럼 국빈 대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성 뒷문으로 들여보내라."

"뒷문 말입니까?"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레고리였지만, 이번만은 깜짝 놀랐다.

성의 뒷문.

그것은 나귀나 짐꾼들이 통과하는 구멍 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초대받지 못한 자.

뒷문은 미천한 신분의 농노나 천민들만 지나다니는 길이다.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한 베델.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이 상당했다.

이 모욕.

절대 참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순간, 그레고리 집사장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떨렸다.

"괜찮겠습니까?"

"물론."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하루 만에 카를로스 영지의 향방을 결정할 국빈 대우에서 천민 대우로 격이 떨어졌다.

그 뒤바뀐 대우.

집사장뿐만 아니라,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가신들과 기사들 모두 두 눈을 번쩍 뜨며 경악했다.

"아, 참. 굳이 영빈관을 거칠 필요는 없겠지. 티 타임도 필요 없고. 이곳으로 곧장 데려오도록.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까 말이야."

"예, 소영주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집사장 그레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와중,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원수처럼 대하라 이 말씀이시군.'

언제나 선을 넘었던 베델.

그런 그를 어찌 괴롭힐지 생각하던 그레고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곧 베델과 마주쳤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도개교를 통과할 때, 자기가 영주라도 되는 듯 위풍당당하던 베델이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내내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안절부절못하며 주위 눈치를 보는 것이 꼭 봄날 망아지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윽고.

베델은 그레고리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렸다.

반가운 듯 손은 흔들었다.

"오오! 집사장! 이거 반갑구만. 그래. 소영주님은 안에 계신가?"

"지금 영주관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회의 중이라. 그러면 가신들이 모두 모여 있겠군. 다행이군, 다행이야. 내가 때를 잘 골라 왔군. 그래. 모두 영빈관으로 집합시키게."

"뭣!?"

그레고리의 얼굴이 순간 붉게 물들었다.

감히 상인 나부랭이 따위가 한 영지의 가신들을 당연하다는 듯 시종처럼 오라 가라 하다니.

심지어 영주도 아닌 자가 가신들을 '집합'시키란다.

그가 카를로스의 이름을 얼마나 아래로 보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대목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순간 들끓었다.

그레고리는 냉랭한 눈빛으로 베델을 아래로 깔았다.

"집합이라?"

"그래. 예전처럼 말이야."

"불허한다."

"뭣!?"

"못 들었나? 불허한다 했네만."

갑작스러운 하대.

그리고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베델을 눈 아래로 깔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레고리는 장신의 사내였다.

베델은 배만 부른 키 작고 살만 찐 땅딸보.

거기에 태도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 자, 자네 말이 짧네만?"

"짧은 건 일개 상인에 불과한 네 녀석일 텐데."

"...허, 허!? 지금 뭐라고?"

"잘 듣지 않았는가. 일개 상인이라고."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태도.

그리고 분위기.

순간 베델은 말을 잊었다.

"무슨 일로 온 건지 몰라도 솔직히 환영하는 입장은 아닌데 말이지."

"무, 물론 내 어느 정도 감안은 했다만은 이건 조금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베델의 말.

하대가 약간의 존대로 바뀌었다.

"그런가?"

"내 좋은 소식을 가져왔으니까 그렇소. 부디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오."

"흐음...!"

무신경하게 그레고리는 베델의 말을 무시했다.

이윽고.

"그래. 따라오게."

천천히 앞장서던 그레고리는 도개교가 내려온 성문에서 방향을 틀었다.

"여긴!?"

성문이 아니었다.

바로 옆의 작은 문.

나귀나 겨우 지날 만한 쪽문이다.

"들어가도록."

"가, 감히! 북부의 대상이라 불리는 날, 이 쪽문으로 들어가란 말인가!"

"싫으면 이대로 되돌아가도 되네만."

"...!"

차갑게 가라앉은 집사장의 태도에 베델은 순간 천불이 났다.

한때는 자신을 환영한답시고 팡파르까지 울렸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급한 것은 자신.

애써 분기를 잠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 예전처럼 호기롭게 갑질을 하기에 상황이 좋진 않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베델이 집사장을 달랬다.

높임말로.

"하하. 모두 다 오해입니다. 내 그 황무지가 그런 가치 있는 땅인 줄 알았겠습니까."

"아무것도 몰랐다 라.... 재미있는 말이로군."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소영주님과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채무 관계에 대해서도 조정할 일도 있고, 양쪽 모두 만족할 만한 것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소영주님 앞에서 직접 말해도 되겠습니까?"

공손한 태도로 그레고리를 향해 베델을 향해 허락을 구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지만, 그레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래. 어쨌든 자세한 내용은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예이. 그러면 성문으로...."

"아니, 그래도 어쨌든 자네는 여기 쪽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야. 그것이 이 영지의 정당한 주인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이니."

"...! 알겠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시지요. 어쨌든 간에 이 영지의 막대한 채권은 저에게 있다는 것을 말이죠. 나중에 제가 가져온 소식을 알리면 이 태도를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아드득.

이를 갈며 베델이 허리를 굽히며 쪽문을 통과했다.

그것을 지켜보며 집사장 그레고리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희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온갖 수모를 안겨 주었던 베델에게 사소한 복수를 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상했다.

분명 소영주님의 호언장담은 궤변에 불과할 터인데.

어쩐지 그의 소영주의 말 그대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진짜 갑은 베델이 아닌 마치 데미안 소영주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희이이이이이이익!"

털썩.

쪽문을 지난 베델이 비명을 내지르며 진창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베델이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집사장을 향해 물었다.

"저, 저건!"

"아, 자네 성 밖에 있어서 소식을 못 들었군. 자네와 특히 친했던 두 가신들이라네. 불미스러운 일과 연관되어 효수되었다네."

그레고리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

베델은 장대에 걸린 두 시신과 마주쳤다.

"자네도 조심하게."

"뭐, 뭐가 말입니까."

"예전의 소영주님이 아니시니까."

차갑게 대꾸하는 그레고리의 말에 베델은 전신을 떨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레고리 집사장은 씨익 웃었다.

하찮은 복수감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베델을 쪽문으로 들여보내라고 명령했는지,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그러셨군.'

쪽문.

이쪽은 효수된 두 가신의 모가지가 가장 잘 보이는 길이다.

진창 속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덜덜 떠는 베델.

그는 이제 제대로 된 협상은커녕, 새롭게 변모한 소영주님의 눈치를 살피게 바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협상의 이점을 이끌어 내시다니, 참으로 훌륭한 전략이시군.'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서로가 선 위치가 달라졌다.

베델에게 모욕감을 준 이득 따윈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그레고리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한 번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훌륭했다.

* * *

효수된 목들을 못 본 척 눈을 아래로 깔고 황급히 길을 지났다.

베델이 이를 갈았다.

'젠장. 그 유약한 소영주놈이 진짜 가신들의 목을 벤 건가!? 이거 쉽지 않겠군.'

그 불미스러운 일이란 것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베델은 애가 탔다.

열심히 바람잡이 역할을 해 줘야 할 중신들이 잔혹하게 처형됐다.

'어제 전서구가 오지 않았던 게 그런 것인가.'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가 불안한 것은 단순히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가 무산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

이미 블랙 다이아몬드를 공급을 확신하여 여러 업체와 공급 계약을 마쳤다는 점 때문이다.

'젠장. 채굴 장비를 대여하고, 관련 인원을 포섭하느라 영혼까지 끌어모아 돈을 빌렸는데, 정작 광산을 얻질 못하면 그대로 파산이라고.'

영끌족은 파산이라지만, 그것이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공급 계약 상대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마탑.

심지어 상대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는 흑마법사들이다.

애초에 그들과 거래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게 중요하지 않다.

목숨이 달렸다.

그들을 상대로 약속을 어긴다면 단순한 위약금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속된 황무지를 얻어야 할 터였다.

'아니. 최소한 이제 그 토지는 포기하더라도, 채굴권이라도 따내야 해.'

절망적인 상황.

그래도 베델은 자신 있었다.

짜악!

짝!

베델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 볼을 후려쳤다.

'젠장 흔들리지 말자. 어떻게든 이 영지에서 뜯어먹을 수 있는 건 다 뜯어먹고 귀족 지위를 얻어 나르는 거야.'

위기는 언제나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런 변방의 작은 영지 따위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자근자근 구워삶으면 될 뿐.

베델은 지금 이 작은 영지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결국 원점은 막대한 채무다.

블랙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있으면 뭐 하나.

그걸 채굴할 기술력과 자본이 없는데.

그 약점을 공략하면 이런 영지쯤이야 떡 먹기보다 쉽다.

지금 손해 본 만큼, 나중에 더 뜯어내면 된다.

'중요한 건 채굴권이니까. 이익 배당률만 조정하고, 나중에 장부만 좀 손보면 완벽하게 내가 독식할 수 있지.'

어차피 이 자그마한 시골 변방 영지는 자신이 지닌 보물을 지킬 지략도, 무력도 없는 쓰레기들.

처음과 달리 그의 걸음에 자신감이 더해졌다.

터벅.

터벅.

그렇게 평정을 되찾은 베델이 영주관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가라앉은 눈빛의 가신들과 빈약한 체구의 소영주가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소영주님. 제가 카를로스 영지의 모든 부채를 탕감하는 조건으로 훌륭한 사업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만!"

위풍당당한 태도로 대전이 떠나가라는 듯 외쳤다.

이제 폭발적인 환호성이 들려야 할 터.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가신들이 믿을 수 없는 눈을 한 건 분명한데, 그 대상이 달랐다.

베델이 아닌, 이 영지의 주인.

데미안에게 향했다.

"...!"

"...!?"

"...! 진짜, 진짜잖아!"

"소영주님의 말씀이 사실이었어!"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뭐지?

이 분위기는?

이런 말도 안 되고 좋은 소식을 전했는데, 왜 분위기가 이리 묘하지.

갑자기 냉랭해진 회담장의 분위기를 보며, 베델은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런 베델과 몇몇 가신들을 두루 바라보며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내기는 내가 이겼군."

* * *

"하하하하하하!"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소견을 밝힌 베델. 그를 바라보며 데미안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얼이 빠진 가신들을 조소했다.

"다들 이제 손가락만 빨게 생겼네. 어떻게 하냐. 후후후후."

데미안의 웃음과 함께 가신들은 움찔 놀라며 열변을 토했다.

"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베델 상단주! 당신 미친 거요!?"

"뜬금없이 모든 부채를 탕감한다니. 너무 말도 안 되는 말 아니요."

베델은 황당했다.

아니, 부채를 없던 거로 해 주겠다는데,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아니, 당신들 내 편이오 아니면 소영주님 편이요. 갑자기 이게 무슨...."

예상치 못한 가신들의 행동에 더욱 넋이 나간 건 베델이었다.

그런 베델의 입을 가로막으며, 데미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부채를 탕감해 준다고 치고, 조건이 뭐지?"

데미안이 재촉하며 묻자.

베델은 전날과 달리, 공손히 예법을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우선 제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저 좋은 뜻으로 그 불모지를 불하받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그곳에 블랙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걸 어제 영주님께서 알려 주신 거니까요."

"크하하! 그래. 그렇다고 치지. 그래서 조건이 뭐냐. 채무를 그저 공짜로 탕감해 주겠다는 건 아니겠고."

"소영주님. 아무리 대단한 보물상자가 집에 있더라도, 자물쇠를 열지 못하면 내용물을 꺼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마침 우연히 소인의 곁에 고도의 채굴 장비와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소영주님의 광산과 제 재력이 있으면, 블랙 다이아몬드라는 보물 상자를 언제든지 열 수 있는 법이지요."

"호오. 틀린 말은 아니군. 안 그래도 우리도 그걸 채굴할 방법이 없었거든."

데미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블랙 다이아몬드.

일명 마정석이라 불리는 이 차세대 이동식 마나 저장 장치의 수요는 향후 지금의 몇십 배나 상승할 게 분명했다.

문제는 지금 카를로스 영지에서는 그것을 채굴할 기술이 전무하다는 건데.

비록 베델이 천하의 개새끼인 건 분명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거기에 지금 막대한 채무 또한 일시에 변제해 준다고 하니, 더 잴 것도 없다.

베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후후. 이제 조금 구미가 당기십니까. 과거의 사소한 원한은 잊고, 어서 대업을 향해 나아가시지요."

악마의 속삭임.

베델 또한 자신의 거래가 틀림없이 성사될 것은 확신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

"예!?"

"괜찮다 이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블랙 다이아몬드를 캐실 수 있게 한다니까요. 솔직히 제가 아니면 그 엄청난 부채는 어떻게 갚으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내년이라고요!"

"그래, 내년이지. 참으로 다행이야."

데미안도 충분히 알고 있다.

이 눈앞의 수전노에게 갚아야 할 부채는 당장 내년이 만기 상환이란 걸.

하지만 데미안은 확신한다.

"우린 내년인데 넌 아니잖아. 만약 블랙 다이아몬드를 당장 채굴하지 못하면, 네 녀석이 내년까지 살아 있을까?"

"예!?"

"어제 얘기했지. 네놈, 주제넘게 무리했다고. 그냥 허언이 아니야."

데미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이 블랙 다이아몬드를 채굴하기 위한 장비와 전문 인력을 어디서 대출받고, 어디에 공급하기로 한 지 알고 있거든. 심지어 만기일이 언제인지까지 모두 다."

완전히 얼어붙은 베델을 향해 데미안이 쐐기를 박았다.

"네놈은 블랙 다이아몬드 공급 계약을 이미 마쳤겠지? 위약금은 계약금의 10배일 테고. 그리고 채굴 장비는 고리대금으로 빌려서 구매했고, 그 대출금 만기일은 올해 12월이고 말이야. 틀려?"

"그, 그걸 어떻게!?"

베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씨익.

데미안은 악마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과거를 한 번 겪으면서 베델이 무슨 짓을 벌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우습게 카를로스 영지를 얕봤는지.

이 미친놈은 공급 계획부터 채산성 검사까지 이미 마친 후였다.

자신이 가져가지 못할 가능성 자체는 상정하지 않았던 거다.

그 과욕이 지금 부메랑이 되어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만약 내가 네놈한테 채굴권을 안 넘겨 주면 어떻게 될까. 제때 블랙 다이아몬드를 '그 사람'에게 공급하지 못하고, 고리대금에 짓눌려 당장 죽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네놈일 거 같은데?"

"허억!?"

베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떻게 자신의 모든 사정을 이리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분명 <그 사람>이라고 강조해서 얘기했지. 설마 내가 흑마법사랑 관계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거 아냐?'

무서웠다.

흑마법사와 관계를 맺는 것.

제국법으로도 불법이지만, 무엇보다 성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흑마법사라면 증오하다 못해 세상에 존재조차 지워 버리고 싶어 하는 존재, 마탑.

마탑의 마법사들 또한 공공의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냐, 아냐. 그냥 잘못 말한 걸지도 몰라.'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자네도 꽤나 급했나 보구만. 설마 <그 사람>이랑 관계를 맺다니. 욕심이 과했어."

"히익!"

저 정도까지 말하다니.

분명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진짜 갑은 베델이 아니었다.

데미안.

황무지라 불리는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는 데미안이 갑이었다.

"영끌족의 최후는 파산이라는 말 아나 모르겠어. 네 녀석의 레버리지 영끌 투자는 망했네만."

데미안의 말이 공허하게 대전에 감돌았다.

7화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자신감 넘치던 베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데미안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

베델은 솔직히 지금 누구보다 사정이 급했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하루하루 고리대금 이자만 쌓여 갔다.

흑마법사들은 매일 같이 찾아와 언제쯤 블랙 다이아몬드를 만져 볼 수 있냐 닦달이다.

생사의 위기.

심지어 막대한 위약금은 덤이었다.

일이 잘되어 갈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계획이 틀어지니 모든 리스크는 베델의 것이었다.

"블랙 다이아몬드를 채굴하지 못하면 당장 올해 하순도 넘기지 못하고 네놈이 먼저 죽을 거 같은데. 채무자에게든, 아니면 그 의문의 납품계약자에게든 말이야."

"주, 죽긴 누가 죽는단 말씀이십니까!"

"와, 이것 보게. 아직 언성을 높이는 걸 보니 정신 못 차렸나 보네. 됐어, 나가."

"예!?"

"나가라고. 계약 안 한다고. 당장 꺼져!"

콰앙!

엄연한 축객령이었다.

전에는 분에 차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베델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반쯤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며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채, 채무는...! 제가 가진 이 영지의 채권은 어떻게 하시려고...."

"약속한 채무는 내년에 모조리 갚을 테니까, 꺼지라고. 채굴권은 딴 놈한테 헐값에라도 줘서 네놈 빚은 다 갚을 테니까."

축객령.

믿었던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당장 제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장? 당연히 못 하겠지."

"그러니까요!"

"그런데 채권 만기의 대부분은 내년이잖아. 틀려?"

"트, 틀린 건 아닌데."

"참 다행이야. 내년이라니! 우리 입장에서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부채는 없어지는 거 아냐? 갚아야 할 빚도 내년에 네놈이 살아 있어야지 갚는 거지, 죽으면 어찌 되려나?"

"제가 죽는다고 채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채권을 딴 놈한테 팔면...!"

"아니, 대관절 우리 같은 아무것도 없는 영지의 채권을 도대체 누가 사냐 이 말이지. 똥값 아냐? 불량 채권이잖아. 까놓고 얘기해서 네놈이 그냥 뒤지면 끝이잖아. 아니면 우리 채무만 기다리고 내년까지 채굴 장비만 사 놓고 놀리던가."

"이, 이익! 이이이이이익!"

데미안이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베델은 현기증에 휘청이며 거품을 물었다.

이미 구입한 채굴 장비를 다시 팔아 봤자, 늘어난 이자는 감당도 할 수 없었다.

'파산이다. 이대로라면 파산이야. 아니, 파산 이전에 흑마법사들한테 잔혹하게 살해될 거야.'

털썩.

사태를 깨달은 베델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갑질이고 나발이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채굴권?

그것도 살아 있어야지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누구보다 악착같이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빨아들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어떻게 약탈당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소영주님. 소영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만약 제가 채굴권을 받지 못하고, 블랙 다이아몬드를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저는 이대로 죽은 목숨입니다. 아니, 그 전에 채굴 장비를 사느라 진 빚에 허덕이며 죽을 겁니다. 일 년 이자가 5할이라고요."

모든 걸 내려놓았다.

지금은 개처럼 빌어야 할 때였다.

그래도 베델의 마음속에는 작게나마 희망이 있었다.

어차피 어리고 유약한 망나니 소영주다.

이렇게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싹싹 빌면 못 이기는 척 자비를 베풀겠지.

'우선 지금은 어떻게든 넘기고, 나중에 모조리 빼앗아 주마. 으드득.'

오히려 이 시련으로 전의를 다지는 베델이었다.

하지만 베델은 몰랐다.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소영주는 예전의 대책 없이 유약하던 망나니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수십 년 동안 살았던 정체는 용병왕 벨크.

전쟁터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

부서진 마나코어와 마나하트를 극복하고 마나 유저의 경지에 기어코 발을 들인 독종이었다.

"채굴권을 네 녀석과 독점 계약하지. 다만 조건이 있다."

"무, 무슨 조건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채굴되는 블랙 다이아몬드의 비율은 9 대 1. 물론 9할은 내 소유다. 불만 있으면 꺼지든가."

"예!?"

채굴량의 9할이나 가져간다니.

막대한 대출까지 일으킨 베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 정도는 그저 납품 계약자의 요구를 딱 맞출 정도의 수량밖에... 아차!"

베델의 실언에 데미안은 씨익 웃었다.

"그래. 딱 그 정도의 양이지. 네 녀석이 죽지 않고 삶을 연명하며 열심히 일개미처럼 내 블랙 다이아몬드를 채굴할 정도의 양 말이지."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싫으면 당장 여기서 박차고 나가든가.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이익!"

당장이라도 일어나 침을 뱉고 이 영지를 떠나고 싶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갑질이다.

자신의 갑질과는 차원이 다른 원초적이고 극악무도한 갑질.

하지만 진짜 황당한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조차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데미안에게 모든 약점이 쥔 베델은 그대로 까무러쳤다.

보글보글.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진짜 파산이다.

이제 그의 눈앞에는 파산밖에 남지 않았다.

손발이 벌벌 떨리는 그의 앞에 데미안이 섰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휘청이며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책상 앞에 섰다.

그리고 보았다.

이미 이렇게 일이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준비된 계약서.

아니, 이 미친 소영주 놈은 계약서마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베델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빛은 너무나 화사해서 마치 봄날의 햇빛 같은 구석이 있었다.

"자 여기 펜을 들고 어서 사인하게. 나중에 딴소리할 수 있으니까 인장도 찍고 말이야."

"아, 아아악! 아아아악!"

까무러치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렇지도 앉지도 못하고.

버둥대기만 할 뿐.

그때.

똑똑.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군가 불청객이 찾아왔다.

쩍 하니 입을 벌리며 감탄하던 가신들이 순간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사나운 소리와 함께 경고성을 터트렸다.

"누구요. 지금은 중요한 계약 중이니, 외부인은 돌아가시오."

"그 계약 때문에 고든 지부 공인상공회에서 찾아왔습니다. 소영주님께서 공증이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공증!?"

끼이익.

황급히 가신이 문을 열었다.

영주관의 문밖에는 기다렸다는 듯, 중년인이 서 있었다.

"중요한 계약이 있다 하여,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공증이 필요하다던데, 맞습니까?"

"에엑!?"

왕국 공인 상공회의소 고든 지부.

왕국의 주관하에 지역 상공인들이 모임으로서 상공업자 간의 분쟁 조정과 계약의 공증 업무를 담당하는 길드 중 하나다.

베델은 상공회의 길드원이었고, 공증받은 계약은 그 누구라도 어길 수 없는 법.

계약의 철저를 위해 데미안이 미리 부른 것이다.

가신들은 까무러치듯 놀랐다.

"아니, 공증인까지 부르셨습니까?"

"나중에 딴소리할 수 있으니, 공증 절차도 확실하게 밟아야지. 내 직접 공증인을 요청하였다네."

"아니 제가 지금 올 걸 어떻게 아시고 이 시간에 공증인을 부르셨습니까. 잘못하면 공증인이 헛걸음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왠지 자네가 이즈음에 찾아만 올 거 같았거든. 그래서 미리 불렀지."

"그게 말이 됩니까!?"

"지금 와서 보니 말이 되지 않는가."

"그, 그런!"

예언자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베델의 입장에서는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공증인의 입회 절차에 따라 계약이 완료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베델이라지만, 공증된 계약을 어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상인으로서의 일생이 끝나는 것이고, 어디서 제대로 된 거래조차 트지 못한다.

공증이란 바로 그런 것.

심지어 계약 불이행의 범위가 달랐다.

상공회의소.

그들과 척을 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 대륙에서 경제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공증을 선 그들의 추적은 대륙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벼랑 끝까지 몰린 베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소, 소영주님. 소인 아무리 돈을 목적으로 하는 상인이라지만, 그 정도 신의가 없진 않습니다. 굳이 큰돈을 들여서 공증 과정을 마칠 필요가 있을지요. 수수료가 상당하다고 하던데...."

"아니. 넌 충분히 그럴 놈이야. 내 장담하지. 공증 없으면 넌 나중에 할당량을 1할에서 2할로 늘리고, 나중엔 3할로도 늘리겠지."

"허어!? 절 뭐로 보시고."

"뭐로 보긴. 개쓰레기로 보지."

이건 완전 이 계약을 못 박으려는 의지였다.

이리저리 나중에 빠져나갈 구석을 찾던 베델은 모든 전의를 잃었다.

반대로 데미안은 절대 이 눈앞의 녀석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마음 같아선 공증인만이 아니라, 신관까지 불러서 여신에게 맹세하고 계약을 확정하려 했었다.

그만큼 베델이 얼마나 쓰레기고 수전노인지 경험해 봐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얼마나 유능한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남의 편이면 악마지만, 내 편으로 두면 꽤 유능한 녀석이지. 앞으로 노예처럼 매일 부려 먹어 주마.'

이런 황무지에 블랙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낸 것만 해도.

베델이 유능하다는 방증이다.

"그러면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다."

공증인은 외눈 안경을 치켜들고, 천천히 계약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계약서를 필사하고 다시금 양 당사자의 서명과 인감을 증명받았다.

"왕국상공회의 공증을 마쳤습니다. 이제 이 계약은 양 당사자의 합의가 없으면, 절대 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 제 인장까지 찍겠습니다."

터엉!

모든 절차가 끝났다.

공증인의 서명과 인감까지 계약서의 양면에 박혔고.

그것을 끝으로 베델은 영주관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흐윽. 흑. 난 망했어. 망했다고. 으허엉."

"자네같이 유능한 상인이 왜 망했다고 그러는가. 블랙 다이아몬드 1할만 해도 엄청난 수익일 텐데 말이야."

"아니, 그 많은 인건비와 이자를 어찌 1할의 블랙 다이아몬드로 감당을 합니까!"

"아까의 자신감은 어디 가고 왜 갑자기 약한 소리인가. 자네처럼 유능한 상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이이이익!"

이게 비꼬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베델은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진심이었다.

블랙 다이아몬드 광산의 채굴량을 상정해 보면, 1할이나 되는 양도 엄청날 거다.

억만장자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1할로 광산 인부들과 광맥 전문가들의 인건비를 충당해야 했고, 또 그 신비로운 납품 계약자들에게 적절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거지.

거기에 채굴 장비 이자도 갚아야 했고.

법정 이자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고리대금이었다.

1할이 아니라, 2할이나 되어도 손해였다.

내심 돈에 있어서는 악마와 다름없다고 자신하는 베델이었지만, 진정한 악마가 눈앞에 있었다.

그 악마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라면 내 믿고 채굴권을 맡길 수 있지. 30년 전에 황무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누구보다도 그곳 지형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채굴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오죽하면 일반적인 영주는 채굴권을 전문 업자에게 배분해 주고 일을 시켜 먹겠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손해를 안 보는 것이 이 시대의 영주인데, 이익을 나누면서까지 채굴을 시키는 건 이유가 있는 거다.

이거 상당히 힘들고 어렵다.

그런 점에서 베델은 훌륭한 일꾼이자, 사업가였고, 또한 채굴업자였다.

실제로 데미안이 알고 있던 과거의 베델은 상상 이상의 성과를 내며 블랙 다이아몬드를 긁어모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영지의 곳곳에 숨겨진 광산을 찾아내 부를 축적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그 누구보다 황무지 땅의 개척자로 어울릴 자는 베델이란 사실이.

실제로 너무 능력이 뛰어나 공적이 되어 이 영지는 주위 영주들의 침입에 의해 전장이 되었다.

문제는 베델이 없는 광산의 채산성이 예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

뒤에서야 이 영지를 차치한 군주는 한탄했다.

베델만은 죽이지 말았어야 함을.

그런 과거 선현의 잘못.

데미안은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악덕상인 베델은 데미안 전용 노예가 되었다.

베델은 이제 죽을 때까지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야 할 터.

이것만큼 제대로 된 복수는 없으리라.

모든 상황이 끝났다.

바닥에 계집처럼 털썩 주저앉은 베델을 향해 데미안은 허리를 굽히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부지런한 동업자 양반."

"어헝. 으허어어엉."

블랙 다이아몬드를 발판 삼아.

대륙 제일의 상인을 꿈꾼 베델의 야망이 산산조각이 난 순간이었다.

* * *

영주관의 소동이 끝난 후.

데미안은 조용히 선영주의 침실로 돌아왔다.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는 아비를 보며 데미안은 그의 왼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첫 번째 복수에 성공했습니다. 아버님."

"...."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복수는 생각보다 달콤했고, 원수의 몰락은 필벌이었다.

회귀 전.

데미안이 용병대장으로 활약을 할 무렵.

복수를 할 만한 힘을 얻었지만, 이미 베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데미안은 베델이 평생을 일군 상단을 기름 한 방울 안 날 때까지 짤 것이고,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것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전과 달리 눈앞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아비를 어떻게든 되살릴 것이다.

그 방법은 모르겠지만 포기란 없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우우우우우웅.

데미안은 다시 한번 가부좌를 틀고, 자신의 마나를 운공했다.

마나 코어를 시작으로 전신의 기감이 발달하며 곧 독맥에서부터 백회까지 미세한 기운이 옮겨 가다, 결국 전신의 혈맥이 관통하여 마나 코어로 되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주천을 완성한 것이다.

데미안은 깊은 날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우."

순간 긴장이 풀리며, 데미안의 정신이 맑게 고조됐다.

그리고 미세하게 향상된 자신의 마나량을 느꼈다.

데미안은 쾌재를 불렀다.

"이거 예전이랑은 완전히 딴 판인데."

솔직한 심정으로 깜짝 놀랄 정도다.

데미안이 지금 지니고 있는 마나 훈련법은 고대의 것.

황야를 헤매며 우연히 얻은 기연 중의 기연이었다.

그 덕분에 용병왕의 지위에 올랐고, 마나코어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부서진 마나 코어의 한계 때문일까.

예전에는 수십 번을 반복해도 눈곱만큼의 마나량도 늘지 않았다.

지금은 단 한 번만으로 회귀 전의 1년 단위의 성과를 달성했다.

'역시 과거와 달리 마나 코어가 폐(廢)하기 전에 이 신공을 유용했기 때문인가.'

거기에 완전히 근골이 굳기 전인 것도 분명한 이유일 터였다.

어느 이유인지는 몰라도 호신호인 건 분명했다.

사실 데미안은 자신의 이 신공이 여느 가문의 무예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내력은 알지 못한다.

그저 다른 마나 훈련법과는 궤를 달리하고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다는 게 전부다.

심지어 가문의 비전과도 차원이 달랐다.

대륙에 만연한 마나 코어 단련법은 외부의 기운을 마나 코어에 조금씩 축적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신공이라 불린 놈은 조금 달랐다.

운기라는 과정을 통해, 마나를 순환하고 일주천을 통해 내부의 힘을 자체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일련의 과정이 의식을 잃은 자신의 아비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우우우우우웅.

일주천을 끝내고 데미안의 마나 코어가 조금은 더 성장했을 때.

데미안의 마나가 조금씩 자신의 아비의 깨진 마나 코어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기현상이 일어났다.

부들부들.

"어!? 아, 아버님!"

데미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이지만, 보았다.

방금 영영 움직이지 못할 것 같던 아비의 손가락이 잠깐이지만은 움직였다.

"희망은 있다."

잘못되었던 과거를 바로잡을 희망.

데미안은 선영주의 손을 다시 한번 부여잡고 다짐했다.

이번엔 이 희망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그것을 위해서는 이제 차근차근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했다.

'군권. 군권을 되찾아야 한다.'

데미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번엔 군권이었다.

8화

집사장은 오랜만에 서류에 파묻혀 업무에 집중했다.

그의 자그마한 사무실 안에 놓인 책상 위를 정체 모를 수많은 서류가 산처럼 쌓였다.

일견 버틀러라는 직종을 잘 모르는 자들은 집사를 시중과 동일 선상에 놓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집사는 자신의 주인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참모이자, 영지의 대소사를 아우르는 최정점의 관리직.

실제로는 행정과 재정에 관해서 두루 영향력을 끼치는 영주의 비서실장이란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고리는 꽤나 유능한 집사장이었다.

웬만한 행정 업무는 영주를 대신할 수 있을 식견이 있었고, 수십 년을 선대 영주의 곁을 지키며 보필한 경험이 있었다.

실제로 십여 년 전, 영주가 갑작스레 병마에 쓰러진 동안.

그레고리 집사장은 몇 년간 영주직을 대리했다.

그동안 영지민들은 영주의 부재를 알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미 아련한 옛 기억이다.

이후 소영주가 정식으로 영주의 권한을 대리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으니까.

유약했던 당시 데미안은 그레고리 집사장의 충언을 멀리했고, 간신들을 가까이했다.

매일 술에 취해 국정을 멀리했고, 잔소리 심한 충신들을 한직으로 내쳤다.

필연적으로 간신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재정이 파탄 나기 시작했다.

이후 집사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망나니 소영주 데미안이 달라졌다.

베델 상단주를 몰아낸 후.

본격적으로 데미안이 업무 전선에 복귀했고, 업무 분장을 재편성했다.

집사부의 권위가 과거로 회귀한 건 그때부터였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가 큰 맥을 짚어 방향성을 제시하면, 집사장의 휘하 사단이 협업하여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일사천리였다.

심지어 데미안이 모든 업무를 관장할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최종 결재 권한이었고, 그사이 실무업무는 담당자와 집사장이 총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극도의 효율성을 가져왔다.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모든 부문의 업무가 일원화되었다.

그레고리는 예전에 그러했던 대로 활기 있게 밀려 있던 업무를 빠른 속도로 처리했다.

팔랑.

팔랑.

"다됐군. 이제 소영주님의 결재만 맡으면 되겠어."

재정부와 행정부의 가신들이 기안한 문서를 모두 정리했을 때 즈음.

끼이익.

집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노크 하나 없이 이곳에 들어올 인물은 단 한 명.

데미안뿐이었다.

"오셨습니까, 소영주님."

황급히 그레고리 집사장이 산처럼 쌓인 서류 사이에서 일어났다.

"억."

순간, 자리에 선 그가 휘청였다.

아마 한동안 서류의 산 사이에 파묻혀 있었으리라.

과도한 업무량이다.

그는 중년을 넘어서 노인에 가까워지는 사내였다.

데미안이 측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요즘 많이 바쁜 것 같군."

"덕분입니다. 그동안 행정부와 재정부 녀석들이 뺏어 간 업무와 권한을 다시 찾아왔으니,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관은 거의 다 끝났겠고, 행정 매뉴얼도 개편하고 있는가?"

"예. 거기에 더해서 결재 양식부터 해서 신규 관료들의 교육 요강까지 새로 짜는 중입니다."

"반발은 없는가?"

"있을 리가요. 예산권에 승진 추천 권한까지 제가 쥐고 있습니다. 불만은 있어도 제 앞에서 그걸 드러낼 멍청이들은 없겠죠."

"완벽하군. 근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내가 괜히 업무만 던져 준 것 같구만."

"얼마 전까진 잔심부름만 하는 게 끝이었는데, 이제 권한과 책임까지 늘어나 버렸군요. 후후후... 일이 많긴 많습니다."

"그래. 그래서 싫은가?"

"그럴 리가요. 마음만은 10년은 젊어진 기분입니다."

기안한 서류를 결재하는 권한.

번거로운 일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집사장이 거느린 집사부 집단의 권력이 커지는 행위다.

그리고 그 권력은 예전 재정관과 행정관이 지닌 것을 합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권력.

웬만한 영주라면 그것을 한곳으로 몰지 않는다.

두려우니까.

영주는 자신의 권력이 조금이라도 위태로운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

하지만.

데미안은 효율성과 시스템을 강조하며 그 모든 권한 대부분을 그레고리에게 위임했다.

실로 놀라운 결단력이었다.

"내 자네에게 이 막대한 권한을 주는 이유는 단 하나네."

"무엇입니까?"

"자네는 내 믿을 수 있으니까."

"...!"

"이 영지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네. 그리고 그중에 하나가 바로 자네이고 말이야."

"소영주님. 저를 믿으시는 것도 좋지만, 제가 혹여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럴 리가."

"예!?"

"자네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자네가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

그레고리 집사장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번쩍 뜨였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권한과 권력.

이건 같은 배에서 난 형제에게도 주지 못할 힘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정말 집사장이 그러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회귀한 덕분이다.

회귀라는 기적 덕분에 가장 이득을 본 것 중의 하나.

바로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데미안의 공백 동안 엉망이 된 영지의 여러 권력의 추.

그것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했다.

영주의 손발이라 할 수 있는 집사부의 강화는 곧 데미안의 권력이 강해지는 과정을 포함한다.

무엇보다 그레고리 집사장은 회귀 전에 데미안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졌다.

이것은 그 보상임과 동시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이라는 소리다.

'믿을 수 있는 수하를 가까이 두는 게 리더에게는 축복과 다름없지. 내가 신경 쓸 일은 반절 이상 줄어들고, 나는 그만큼 내가 성장하고 훈련할 시간을 얻는 거니까.'

데미안은 큰 맥만 잡아 주고, 훈련에 매진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그레고리 집사장은 가치 있었고, 미래를 알고 있기에 데미안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를 그레고리 집사장은 잠시나마 멍하니 데미안의 얼굴을 응시했다.

"...."

데미안의 말에 울림이 있었을까.

그레고리 집사장의 얼굴은 당혹감과 함께 뭐라 말 못 할 은은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감동의 표정이었다.

며칠 동안 벌어진 일련의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근원은 바로 소영주가 가신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슬픈 현실이었다.

그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던 그레고리 집사장은 곧 그런 소영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것임에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틀렸다.

데미안.

그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지녔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수 있는 혜안을 지녔다.

두근.

두근.

그의 가슴에 세차게 뛰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그런 두근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미안은 쐐기를 박았다.

"자네는 내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는 가신이라네. 내 자네를 믿고 내 권력의 큰 부분을 이양할 것이니 부디 최선을 다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레고리가 피곤함을 떨쳐 내려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은 후 씨익 웃었다.

부하 직원으로서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사를 만나는 건, 축복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그의 의욕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데미안이 되찾지 못한 권력 한 조각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기사 녀석들입니다."

그레고리가 진지한 얼굴로 토로했다.

데미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데이비스 녀석이 기사단장이던가?"

"예. 3대째 카를로스 남작령의 기사로서 봉토를 받아 섬기고 있습니다. 문제는 요즘 들어 북부 마물 토벌에 꽤나 소극적인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래. 그리고 내가 알기로 사적으로 병사들을 유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

그레고리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무례한 데이비스가 기사의 본분을 잊고 병력을 사적으로 빼돌린다는 사실.

영지의 일이라면 빠삭한 집사장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것을 데미안이 단번에 알아채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내 그레고리는 동그랗게 뜬 눈을 한 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시군요. 그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서 세상과 벽을 쌓기만 한 게 아니셨어요."

영지의 모든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데미안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상세한 내용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이어 가기 쉬웠다.

"참담하지만, 소영주님께서 파악하신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병권이 사적으로 유용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요."

"그리고 그걸 막을 실질적인 수단이 없다는 것도 말이지."

"예.... 지금 기사단과 병단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불충스럽게도 그들 중에 얼마나 소영주님께 충성을 바치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병권 없는 영주라. 망하기 딱 좋은 상황이로군."

집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병권.

그것은 한 지방의 영주가 영주일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이자 힘의 근원이었다.

그 병권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자신의 의무를 방관하는 행위. 분명 대역죄에 참수형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런 데이비스를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명분은 충분한데, 문제는 병부에 내 직속 수하가 아무도 없다는 것인가?"

"예. 솔직히 말하면 데이비스 녀석이 소영주님의 직속 수하이지만, 이미 녀석은 병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만약 다른 기사들이 동시에 딴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을 제지할 기사와 병사들이 얼마나 될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워낙 군부는 폐쇄성이 짙은 집단이라...."

그레고리 집사장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당연했다.

이 영지의 주인 앞에서 반란이란 말을 쉽게 입에 담을 순 없으니까.

그 불쾌한 얘기를 데미안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영지가 무너지기 직전, 데이비스 녀석은 반란을 일삼았지. 심지어 내 편을 들었던 기사들을 가장 먼저 척살했고. 카를로스 영지가 외적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건 그 여파 때문이었어.'

데이비스 기사장.

이 영지의 병권을 쥐고 있는 그는 반란의 씨앗이다.

"내 부덕이다."

데미안이 자신의 잘못을 다시금 뼈아프게 인정했다.

그 모습에 그레고리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인정하시는 것입니까?"

"물론이지. 내가 개판이라 그렇게 된 건데, 인정 안 할 것도 뭐가 있나. 애초에 내가 그들을 잘 통제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들이지."

"허어. 허허허. 정녕. 정녕 달라지셨군요."

그레고리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자신의 실책과 과오를 언급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니.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성군의 많은 자질 중 하나였다.

잠시 감격에 겨워 몸을 떨던 그레고리가 정신을 되찾았다.

"군권을 되찾는 건 말이지, 재무관과 행정관의 목을 매단 것과는 달리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일세. 특히나 그들은 한검회라는 조직으로 똘똘 뭉쳐 있으니까 말이야."

"한검회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듣습니다만."

"지들끼리 밀어주고, 당겨 주고. 소수 기사들이 그들만의 사조직을 만들어 군부의 머리 꼭대기를 독점하고 있다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어찌 군부 내에 비밀 사조직이...!"

그레고리 집사장도 그것만은 몰랐다는 듯,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먁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검회의 소속 기사들은 그 회의 수장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꼴이 아닌가.

충성의 방향성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리고 순간 깜짝 놀랐다.

'비밀 사조직의 특성상 분명, 그 존재 자체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텐데, 소영주님께서는 어떻게?'

도저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만약 회귀 전의 지식이 없었다면 끝까지 알아차릴 수 없었으리라.

그 존재를 데미안이 알게 된 것은 가까운 미래.

그 음지의 존재들이 양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쿠데타였다.

그것은 일부 군부 세력이 개입한 것으로서 데이비스 기사가 주도한 한검회의 반란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이 썩어 빠진 영지에는 그보다 더 썩어 빠진 군부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감히 영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그들이 충의를 어기고 검을 들어 영주성을 포위했다.

그나마 충심이 있는 자는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요직에 남은 것은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한검회뿐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가장 중요한 군권을 획득하는 과정에는 한검회의 해체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데미안은 알고 있다.

"녀석들을 군부에서 몰아내는 방법이 있지."

"무, 무엇입니까? 솔직히 군부를 개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라...."

"일시에 일망타진하는 방법. 그리고 천천히 녀석들의 약점을 공략해서 세력을 약화하고 결속을 약화시키는 방식이지. 하지만 무엇보다...."

씨익 웃은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그 두 가지를 섞어서 하는 게 중요하지."

그가 강렬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하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그럼 우선, 자네와 함께 잃어버린 군권을 되찾을 첫걸음을 함께 가야겠군. 녀석의 약점을 노려야겠어."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 그러면, 기사 단련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레고리가 서류를 내팽개치고 먼저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 그레고리를 만류하며 데미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지. 그레고리."

"예!?"

"녀석의 약점은 병부가 위치한 연병장이 아니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존슨가로 가지. 그곳이 바로 녀석의 약점이다."

데미안의 말에 순간 그레고리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신 줄 알았더니 다시 병이 도지셨나!? 며칠 뜸하시더니 다시 그곳에 발걸음을 하신다다니....'

사창가.

그곳은 얼마 전까지 데미안이 매일같이 드나들던 타락한 장소였다.

9화

"오빠! 여기야, 여기!"

"오늘 물 좋아요! 신입이 왔다고요!"

"꺄르르르."

늦은 밤.

정오에 진창을 가득 채웠던 악취가 채 가시기도 전.

존슨가는 코가 아릴 정도의 분내와 함께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홍등의 불이 하나둘씩 피어오르고.

거리의 주점은 하나둘씩 문을 열었다.

어둠이 조금씩 자리를 차지하는 골목의 한구석.

그곳에 여러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덩치가 다른 소년들의 배는 될 만한 중년인이 있었다,

바로 이 골목의 주인.

폭군 제이슨이었다.

산적 같은 콧수염의 제이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소년을 구석으로 몰았다.

"베이런. 네 녀석. 오늘도 이렇게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냐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네 녀석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을 테니."

"크하하하! 네 녀석이 빚을 갚아!? 어림없는 소리지. 그 말만 지금 4달이나 넘은 거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군."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제이슨은 자신의 애병을 바닥에 처박았다.

쿠웅!

웬만한 소년보다 더 큰 모닝스타.

그것이 제이슨의 완력에 힘입어 돌바닥을 뚫고, 진동했다.

주위에 가만히 도열한 패거리들은 조용히 전율했다.

매일같이 보는 완력이라지만 볼 때마다 경탄할 수밖에 없다.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베이런이라 불린 소년은 겁에 질리기보다, 가만히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혐오였다.

마치 길거리의 더러운 들개를 봤을 때나 보는 그런 혐오의 시선.

'이, 이게!?'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도발적인 그 기세에 제이슨은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예전부터 이 눈앞의 소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제이슨은 이 거리의 주인이었다.

정확히는 이 거리 사창가의 주인.

카를로스 영지가 카를로스 가문의 것이라지만, 이 거리 안에서만은 영주 부럽지 않은 권력을 누렸다.

그의 말 한마디가 이곳의 법이었고.

주민들은 자신의 발아래 조아렸다.

전직 경비대장이라는 출신.

이전부터 구역의 치안을 담당했었기에 이곳 속사정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은퇴와 동시에 경비대라는 연줄을 동원하여 이 골목의 주먹패를 모조리 쓸어버렸고.

심지어 그의 뒷배는 이 영지의 주인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

그 덕분에 제이슨은 쉽사리 이 골목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왕이었다.

이 거리의 왕.

모든 이들이 감히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는 폭군.

하지만 이놈만은 예외였다.

감히 고아원 시설 출신 주제에 이 눈앞의 애송이 녀석은 언제나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심지어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건방진 자식.'

그는 내내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던 찰나.

이 재수 없는 소년, 베이런의 약점을 잡을 기회가 생겼다.

갑작스레 병을 얻은 여동생.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는 녀석이지만 꼴에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은 목숨보다 아꼈다.

베이런이 아무리 날을 세우고, 똑똑한 척 다 해도 동생의 병 앞에서는 무력했다.

제이슨은 병을 치료할 방도를 찾던 녀석에게 쓰레기 같은 약초를 비싼 값에 팔아 치웠고.

그걸로 또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었다.

지금이야 좀도둑질로 이자나 겨우 갚고 있겠지만, 어차피 고리대금은 이미 원금을 아득히 초월했다.

일개 고아원 소년 따위가 갚을 수준이 아니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제이슨은 두 가지 점에서 만족했다.

하나는 막대한 빚을 핑계로 이 고개 뻣뻣한 녀석을 자신의 발아래 둘 수 있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의외로 미색이 고운 이 재수 없는 녀석의 동생을 오늘 밤, 자신의 몸 아래 둘 기회를 얻었다는 걸.

"흐흐흐흐흐흐."

탐욕이 가득 찬 눈빛.

제이슨은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확신했다.

이미 제이슨이 이 거리를 휘어잡고서부터는 고아원도 주먹 왈패와 홍등가의 여인들을 공급하는 주요 루트였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제이슨은 자신의 왈패들을 앞세웠다.

한 명의 소년을 수십 명의 사내들이 둘러싸 포위했다.

그 앞에서 제이슨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고민거리를 하나 줄여주겠다는 내 정성을 어찌 이리 왜곡하는지...."

"고아원장이 직접 내 여동생을 맡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게 싫으면 이자부터 갚든가. 크하하하핫!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이 빈곤한 뒷골목에서 다 자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문관을 지망하는 병약한 소년이지만 그도 한 소녀를 책임지는 사내였다.

참을 수 없는 모욕에 소년은 더욱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동생을 모욕하지 마라. 네 녀석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입에 올린 아이가 아니다!"

비록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소년이지만, 그 기운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이야아아아아아압!"

거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고성을 내지르며 베이런이 뛰었다.

아니, 날았다.

파앙!

순간, 공기가 갈라지며 파공음이 들렸다.

압도적인 속도.

소년의 기세가 아니었다.

"헉!"

순간 제이슨은 당황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이런, 미친!"

그가 재빠르게 바닥에 처박힌 모닝스타를 들었다.

비록 최근에는 게으름을 피웠다지만.

그는 이 거리의 치안을 담당했던 경비대장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병사들 사이에서 수위권에 들 정도의 무력을 자랑했고. 지금도 웬만한 장정들에 뒤지지 않는 체격이었다.

그런데 순간.

베이런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좇지 못했다.

퍽!

베이런의 맨주먹이 제이슨의 복무에 가격했다.

순간, 아찔한 충격이 몰아쳤다.

"커억. 컥!"

울컥. 저녁에 먹었던 음식들이 위장 위로 솟구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무시무시한 괴력.

이게 정말 이제 갓 소년티를 벗어난 아이의 힘인가.

괴물이나 다름없다.

만약 주먹이 아니라 그 손에 단검이라도 들려 있었다면, 그대로 즉살되었을 터다.

"이이익!"

순간 제이슨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그것이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

"이, 이게, 감히! 주제에 자존심만 살아서! 모두 뭐 해! 밟아 버려! 오늘은 아주 다리를 분질러 버리라고! 그리고 이놈 동생 녀석을 여기로 당장 끌고 와! 오늘이라도 당장 창기로 팔아 버리겠어!

"크아아아아악! 죽인다! 죽여 버린다!"

베이런이 발악하듯 발버둥 쳤지만.

중과부적이다.

이미 십여 명의 왈패들은 베이런을 완전히 포위했고.

그에 비해 베이런은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왈패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방금 찰나의 순간이지만 보았다.

녀석이 보통이 아님을.

"잡아! 잡으라고!"

"꼬맹이라고 만만하게 보지 마!

"베어 허그(Bear Hug)를 해! 아예 잡아서 눕히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미친, 꼬맹이 녀석이 이게 무슨 괴력이야!"

차라리 단검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몰라도 지금 베이런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쿠웅!

결국

"끄아아아아악!"

절규 어린 비명과 함께 내내 발버둥 쳤다.

왈패들의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흐른다.

"제, 젠장. 뭔 놈의 힘이!"

"괜히 힘쓰게 하지 말라고!"

소년에 불과한 베이런의 발악에 순간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왈패들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이게, 죽었어. 새끼가!"

"야! 다들 조져 버려!"

"다시는 대장님한테 못 달려들게 아예 한쪽 팔을 잘라 버리라고!"

그 말이 시작이었다.

퍼억!

퍽!

퍼억!

소년은 인상 사나운 덩치들에게 둘러싸여 말 그대로 피떡이 되도록 처맞았다.

베이런은 당장이라도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아찔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점차 희미해져 간다.

"크윽. 아, 안 돼. 동생. 내 동생만은...."

그는 절규했다.

힘겨운 고아원 생활을 버텨 낼 수 있었던 건 그의 어깨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동생.

부모는 진즉에 몬스터 때문에 잃었고, 남은 것은 어린 혈육뿐이다.

그녀만을 지켜 주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는데.

그 지켜야 할 동생은 병에 허덕였고,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의 손에 이끌려 험한 꼴을 볼 것만 같다.

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고아원장에게 탄원을 해 보고.

존슨가의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들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 녀석들은 한패였다.

심지어 고아원장까지 모두 다.

베이런은 얼마 전.

고아원장과 제이슨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 하나가 시설로 들어왔습니다. 미색이 고와 보이니 나중에 자라면 비싸게 사 주시지요.

-알았네, 알았어. 자네도 참. 누가 보면 고아원장이 아니라 매음굴 사장인 줄 알겠어.

-하하. 농담도 참. 그런데 문제는 없겠지요? 여기 시설 운용 자금은 영주님의 지갑에서 나오는지라. 영주님이 알게 되시면....

-날 뭐로 보는가. 내가 전직 치안대장 출신이야. 그 점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내 명령 하나면 여기 치안대나 병사들은 설설 기어. 알려질 일도 없고, 알려져도 내가 다 무마할 수 있네. 어차피 허수아비 같은 애송이가 영주 대리로 있는 망해 가는 영지 아닌가. 이 영지가 망하기 전에 우린 꿀만 따면 되는 일이지.

-암요. 헤헤. 세상에 이런 노다지가 어디 있나 싶습니다.

잊고 싶은 기억.

이 말도 안 되는 범죄를 눈앞에서 목도했지만.

베이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감과 함께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젠장. 이 영지는 썩었어. 도대체 이 영지의 주인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주성을 찾아가려 했지만.

문전박대였다.

절망.

칠흑보다 더욱 어두운 절망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절대 일어나면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오, 오빠!"

"에, 엘리스! 네가 어떻게 여길."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창백한 소녀.

고아원에서 얌전히 있어야 할 그의 여동생이 이 험한 곳까지 끌려온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이슨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하하하! 고아원이라고 안전할 줄 알았냐. 어차피 이 거리는 내가 왕이라고. 내가 그 모자란 영주 놈보다 더 이곳의 주인에 걸맞은 놈이라고! 크하하하하하!"

"아, 안 돼."

주르륵.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앞에서 몬스터가 어미와 아비를 갈가리 찢을 때조차 흘리지 않았던 눈물.

그 참고 참았던 인고의 증거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우냐!? 울어!? 크하하하하! 이 독종 놈이 드디어 우는구나! 크하하하하하!"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동생이 끌려가는 모습.

그것을 지켜보며 베이런은 난생처음 기도했다.

'신이 있다면 지금 나타나 줘라. 지금 네가 나타나 준다면, 내 평생 내 몸과 마음을 바치마. 제발! 신이시여! 제발!'

신 따위는 믿지도 않았던 베이런조차 신을 찾게 할 만한 절망.

데미안이 회귀하기 전.

그때에는 신이 그의 처절한 기도를 무시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늦은 시각.

이 거리의 규칙을 아는 자들이라면 얼씬도 거리지 않을 골목 어귀에 두 인영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뭐야. 이건 또 뭔 개지랄들이야."

때마침, 밤거리를 지나던 데미안이 두 눈을 번쩍였다.

곧, 그 옆의 선 그레고리 집사장이 왈패들의 얼굴을 스캔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온 것 같습니다. 전직 경비대장 제이슨이라는 녀석입니다."

"그래. 저 녀석도 한검회의 멤버 중 하나지. 그리고 한검회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아주 간덩이가 붓긴 했네. 감히 내 영지 안에서 불법으로 무력집단을 결성하다니."

"흐음. 이놈들 어떻게 처리할까요, 소영주님?"

이거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그것도 적시에.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바로 녀석들에게 포박된 한 소년이었다.

'저 녀석 뭔가 얼굴이 익숙한데?'

눈앞의 소년.

뭔가 낯이 익었다.

'잠깐!? 설마?'

데미안은 순간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베, 베이런? 검성 베이런?'

상상도 못한 녀석이 여기에 있었다.

* * *

처음 왈패들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솔직히 꽤나 당혹스러웠다.

이 영지가 썩어 가고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데미안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뭐야. 저런 삼류 왈패들이 대놓고 설치고 있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아냐, 아냐. 혼잣말이다, 혼잣말. 다 내 업보다."

그레고리가 죄송한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욕해 봤자 어차피 제 얼굴에 침 뱉기.

이렇게 개판이 난 가장 큰 이유는 데미안 자신에게 있었으니.

그렇기에 더욱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은 얼굴을 구겼다.

'치안에 꽤나 공백이 있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까지였나?'

영지 내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어둠 중 하나.

존슨가.

북쪽에 도박장이 있다면, 이곳에는 사창가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통치를 자행하는 영주라도 이 어둠을 완전히 걷어 낼 수 없는 법.

황도조차 가장 음지인 곳에서는 매음이 일어나니 탓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정도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이곳이 카를로스 영지의 중심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주성 인근의 규모 있는 마을 어귀였다.

물론 환락가니 뭐니, 홍등가니 뭐니. 거리의 질은 조금 떨어질 수 있어도, 대놓고 깡패들이 활보하고 다니다니.

영지의 질서가 무너져도 진즉에 무너진 상황이다.

'한검회의 자금줄을 터는 수준이 아니잖아. 이건 차악이 아니라 극악이다.'

한검회의 자금줄.

바로 환락가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밝혀지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것의 극초기 단계.

이제 막 하위 조직원을 통해 불법적으로 자금을 모아 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순 없다.

이 사창가의 검은돈을 통해 한검회는 몇 년 만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모았고, 그것을 통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이군.'

회귀 전에는 보고서를 통해서만 들었던 내용.

실제로 보니 더욱 악랄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건 또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왠지 저기 누워서 한창 밟히고 있는 놈.

얼굴이 익숙하다.

'아니, 베이런이잖아. 이놈은 여기서 이런 놈들한테 왜 처맞고 있는 거냐.'

외팔 검사 베이런.

한때 함께 전장을 날뛰었던 동료랄까.

아니, 데미안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를 이루었던 검성(劍聖)이자 연합군의 제2군단장이었다.

한때는 검제 이상이라고도 평가받았지만, 외팔이라는 한계.

그 때문에 언제나 본인의 재능과 실력보다 저평가받았던 고수다.

그 독종 녀석이 지금 왈패들한테 당해서 땅바닥을 구르고 있다니.

회귀 전의 명성을 떠올려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심지어 데미안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른팔 근맥이 당장 끊길 판이니.

말 다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뇌리가 번뜩였다.

'잠깐, 오른팔!?'

그 순간.

데미안의 사고가 정지했다.

'아니, 잠깐만. 오른손이 아직 멀쩡하다고?'

데미안은 두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했다.

진짜였다.

지금 보니 외검술로 명성이 자자했던 베이런의 양팔이 성히 달려 있다.

어째서?

어떻게?

아니, 그런 것인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지금이 바로 베이런의 인생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말수가 없었던 베이런은 어린 시절 자신의 여동생을 잃고, 자신의 팔마저 잃었던 무력했던 과거를 저주했다.

그땐 왜 그러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베이런은 오늘 이곳에서 한쪽 팔이 잘릴 운명인 것이다.

'운이 좋군.'

베이런에게도 그렇고.

데미안에게도 모두 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