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베이런의 여동생이 눈물범벅인 채로 애원했다.
"거, 거기 귀공자님! 콜록. 우, 우리 오빠 좀 살려 주세요. 어디 가서 제발 경비병을... 콜록."
양손이 구속된 앳된 소녀.
이제 겨우 열두 살은 넘었을까.
이제 막 소녀의 티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외모를 직접 확인하고.
베이런이 처한 상태를 확인한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됐다.
'협박과 강탈로 여동생을 창기로 팔아 치우려는 속셈이군.'
얼굴이 반반한 평민 여성. 그것도 힘없는 빈민 출신 미인의 삶이 얼마나 기구한지는 용병대에서 구르고 구르면서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베이런과 그 여동생이 겪게 될 일을.
하지만 뒷골목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문제는 그게 데미안의 영지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지.
'빌어먹을. 감히...!'
데미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패전 후의 영지에서 벌어질 만한 전쟁 범죄가 지금 그의 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카를로스 영지.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다.
과거와는 달리, 무조건 지켜야 하는 데미안의 영역.
데미안이 막 검을 뽑으려는 사이.
시시덕거리던 왈패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호오. 저기 애송이 녀석, 옷차림이 꽤 고급이잖아?"
녀석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데미안의 행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집사까지 대동한 거 보게? 진짜 어디 상단 도련님인 거 같은데?"
"헤헤헤. 멍청한 자식. 저 녀석 생긴 것 좀 봐. 흰 피부도 그렇고, 이목구비도 오밀조밀한 게 생긴 게 꼭 계집애 같잖아. 흐흐흐."
"아, 맞아. 저런 계집애같이 생긴 사내를 원하는 업소도 분명 있었지, 아마. 흐흐흐."
녀석들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그런 녀석들을 지켜보던 데미안이 대꾸했다.
저 여인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조차 팔아넘긴다는 말.
이 영지의 주인으로서 쉬이 넘길 수 없는 얘기다.
"카를로스 영지에서 인신매매를 한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는군. 인간을 사고파는 건, 대륙법으로 금지된 건 알고 있나?"
"헤에? 법? 법이라고? 진짜로 어디 도련님인가 보네. 크하하핫!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어리숙한 도련님! 여기 카를로스 남작령처럼 편하게 노예를 사고팔 수 있는 데가 어딨다고."
"히히히. 맞아, 맞아. 사실상 카를로스 영주도 허락한 일인데, 감히 네 녀석 같은 애송이가 법을 논해? 우습구나, 우스워."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말은 몰라도, 마지막 말은 꽤나 재미있는 말이다.
데미안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물었다.
"영주가 허락해?"
"그래. 무려, 이곳의 영주님도 덜덜 떠는 성안의 높으신 분이 우리의 뒷배란 그 말이지, 흐흐흐흐."
"세상에나 이곳의 소영주조차 두려워할 만한 뒷배라니.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데미안이 의뭉을 떨며 다시 묻자, 녀석들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당연하지! 이 영지의 주인은 겨우 십 대의 애송이 녀석이니까! 망나니에 또 겁은 엄청 많아서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X신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치안대도 다 우리랑 한통속이니 어디 가서 신고해 봤자 소용도 없어."
"알았으면 알아서 돈은 다 꺼내고 이쪽으로 오시지. 네 녀석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뻐해 줄 테니까."
황당한 것은 녀석들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지, 묻지도 않은 사실을 줄줄이 사탕으로 까발리고 있다는 점이다.
데미안은 홀로 조소했다.
"흐음... 역시, 그런 건가. 후후후."
데미안이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고, 그사이 성질 급한 왈패 하나가 외쳤다.
"어디서 처웃고 지랄이야! 모두 포위해!"
사사삭.
그 명령과 동시에 이미 제압된 베이런을 땅바닥에 팽개쳤다.
이미 녀석은 엉망이 된 지 오래.
잡은 물고기는 이제 관심 없다.
더 먹음직스러운 녀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곧 왈패 수십여 명이 데미안의 주위를 둘러쌌다.
"흐음?"
데미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의 가장 기본은 지형부터 파악하는 것이다.
불리한 지형이다.
이곳은 광장을 통하는 외길.
양옆은 높고 두꺼운 벽과 3층짜리 건물로 가로막혔고, 그 앞은 광장에 선 왈패들이 완전히 가로막았다.
남은 건 뒤밖에 없다.
데미안이 마치 싸울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자, 그레고리 집사장은 당황했다.
"소, 소영주님! 뭐 하십니까! 어서 영주성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오늘의 목적은 사태 파악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런 수십의 장정들이라니.
데미안 소영주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데미안은 여유로웠고, 그레고리만이 애타는 심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스릉.
집사장이 데미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호신용 검을 뽑았다.
"이만 물러가시죠, 도련님. 어차피 뒷골목의 일입니다. 크게 상관하실 바가 아니지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나?"
데미안이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며 물었다.
하지만 그레고리 집사장은 단호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앞 소년의 목숨보다 주인의 안위였으니까.
다시 한번 설득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요. 오늘 우선 돌아가시고, 후에 병사들을 파견하시지요. 중과부적입니다. 저 혼자 소영주님을 지키며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이 저 녀석들의 보스라면?"
"...! 설마, 한검회가 저 녀석들의 실질적인 보스라 그 말씀이십니까? 흐음...."
생각해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도출이었다.
애초에 전직 경비대장 제이슨이 이 패거리를 이끄는 것부터 이상했다.
하지만 한검회라면 가능한 일이다.
이곳의 치안들 담당하는 치안대장직을 맡는 기사의 묵인.
그 기사가 한검회의 소속이고, 제이슨이 그 비호를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소영주님은 검을 제대로 익히신 적이 없다. 아니, 이 정도 숫자면 웬만한 기사들도 상대할 수 없을 테지. 위험하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는 게 맞다.'
집사장이 기억하는 데미안은 약하디약한 소년이었다.
겁 많은 어린아이.
그것이 데미안의 담력이었다.
물론 최근에 꽤나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그것은 학문과 지식의 영역.
절대 이런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발소리가 더욱 많아지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시간을 끌면 퇴로조차 막혔다.
"숫자가 늘어나는군요. 이젠 거의 쉰을 넘겼습니다. 어서, 결단을."
2 대 50의 상황.
평소의 데미안이라면 진즉 오줌이라도 적셨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일반적인 소년이라도 마찬가지다.
왈패 수십을 앞에 두고 가슴을 펼 소년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집사장은 데미안이 겁에 질려 얼른 영주성으로 돌아가길 사정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집사장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데미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레고리 집사장. 뒤로 물러나야 할 건 자네야."
"예!? 그, 그게 무슨?"
"감히 내 영지에서 저런 짓이라니. 그것도 나를 저렇게 날것 그대로 모욕을 하다니. 저런 개소리를 듣고도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하나?"
"그, 그건!"
그레고리 집사장이 마저 묻기 전, 데미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했다.
"덤벼라, 애송이들."
"애송이? 지금 우리를 말한 거냐?"
"그래. 뒷골목에서 삥이나 뜯는 하류 인생들이 애송이가 아니면 뭐지?"
"이, 이익!?"
곧 참지 못한 왈패 하나가 데미안을 향해 단도를 빼어 들고 달려들었다.
징벌의 순간이 다가왔다.
다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것은 눈앞의 왈패들을 향한 징벌.
바로 데미안의 징벌이었다.
* * *
데미안은 웃었다.
즐거웠다.
감히 자신을 향해 시비를 걸다니.
이런 경우는 회귀 전으로 최소한 1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추억이다.
회귀 전, 데미안은 용병왕이었다.
용병왕.
말 그대로 모든 용병의 왕이라 불렸고, 그만큼 많은 경험과 공적을 쌓았다.
데미안의 위로는 수많은 마나 유저가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그보다 더욱 많은 수백 배의 일반 병사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 데미안을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공포에 젖은 눈빛이었다.
당연했다.
데미안 개인도 이미 초급이지만은 마나 유저였고.
무엇보다 그런 데미안의 뒤에는 수천의 용병들이 있었으니까.
그런 데미안에게 있어 이런 원초적이고도 단순무식한 도발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뭐랄까.
회귀한 실감이 나는 순간이랄까.
하지만 그런 기꺼움이 상대방들은 아니었나 보다.
"이 꼬맹이가 쪼개!? 벌게 벗겨서 볼기짝을 때려 주마!"
어느 단체나 성질 급한 다혈질은 있는 모양이다.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왈패 한 명이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파앗!
"조심하십쇼!"
그레고리가 다급히 외쳤다.
빠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기세는 좋지만, 기세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이런 뒷골목 싸움뿐이다.
데미안의 눈이 녀석의 발과 허리 중심을 순식간에 훑었다.
엉성한 스텝.
부족한 완력.
거기에 몸의 중심축이 과하게 상체로 쏠려 있다.
역시 길거리 출신답게 제대로 된 훈련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솜씨다.
전형적인 숫자만 믿고 덤비는 스타일.
데미안은 적의 스텝 하나만으로 녀석의 성향과 수준을 완전히 알아차렸다.
용병대에서 구르고 구른 경험이 모든 것을 말해 줬으니까.
오히려 일대일을 강조하는 이런 좁은 골목은 데미안과 같은 강자에게 있어 더욱 유리하다.
아니, 그걸 떠나.
데미안은 필살기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
데미안의 가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있었다.
콩알만 한 크기지만, 그 존재 자체로 한 인간의 격을 초월하게 하는 것.
바로 마나 코어다.
우우우우우우웅.
마나가 전신의 기맥을 타고 흐른다.
안력에 활기가 돋으며 더욱 감각이 세밀해진다.
녀석의 움직임이 더욱 느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오른손을 왼쪽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회귀 전, 수억 번은 반복했을 동작.
바로 발검의 자세다.
롱소드의 폼멜의 차가운 감각이 오른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스릉.
발검의 소리.
검이 검집에서 매끄럽게 빠져나오는 차가운 검성이 울렸다.
동시에.
서걱.
검이 살을 베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검격의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검은 마치 처음부터 검집에 있었던 것처럼 납검(納劍)되었다.
발검(拔劍)과 납검(納劍)가 한 번의 동작에 이루어지는 것.
실로 완벽한 발검술이다.
데미안의 발검은 마나 유저 사이에서도 귀신같이 빠르다는 평을 받았다.
그만큼 갈고 닦은 기술.
겨우 왈패들을 향해 사용할 기술은 아니지만, 초원의 사자는 한낱 생쥐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
"커억!"
그 검이 사선으로 그어지며 눈앞의 왈패를 완벽히 이 등분했다.
털썩.
단발마 비명과 함께 왈패가 내장을 흩뿌리며 쓰러졌다.
일검(一劍).
단 한 번의 검격.
그것만으로 눈앞의 한 인간의 살과 근육 그리고 내장과 뼈가 단숨에 반으로 갈라졌다.
아직 식지 않은 뜨끈한 피와 내장이 차가운 바닥을 적신다.
하지만 눈앞에 시체가 굴러다니지만, 데미안은 침착했다.
시체와 피는 익숙하다.
아니, 오히려 고향 같은 전장에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 자세 그대로였다. 검도 그대로 검집으로 돌아갔고, 데미안의 복장도 정갈하기 그지없다.
"어, 어어...!"
폭력에 익숙한 왈패들이라지만, 이 정도의 피와 살육은 익숙하지 않다.
달려들던 왈패들이 순간 몸이 멈췄다.
적막한 공포가 스멀스멀 감돈다.
그 꼴을 보던 제이슨이 황급히 외쳤다.
"젠장! X신들아. 너희들이 기사야? 무슨 일대일 결투를 하고 있어! 모조리 한꺼번에 덤비라고, 어서!"
그 말과 함께 포위한 왈패들이 한 번에 데미안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지형은 내 편이지."
데미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은 일자형 골목.
도망치기에는 불리하지만, 적들을 상대할 때는 눈앞의 두 명. 그리고 뒤의 두 명만 신경 쓰면 될 뿐이다.
그리고 등 뒤에는.
"후우. 뒤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레고리 집사장이 검을 치켜들며 데미안의 등에 자신의 등을 붙였다.
훌륭했다.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동료.
예전에는 참모장 제린 녀석이 항상 그 역할을 도맡았지만, 지금은 그레고리 집사장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데미안은 씨익 웃었다.
과거, 항상 데미안을 지키기만 했던 집사장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데미안이 집사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 묘한 만족감과 함께 데미안의 검이 다시 한번 발검했다.
스릉.
서걱.
단 일 초도 안 되는 순간.
다시 한번 눈앞의 왈패가 반으로 도륙 났다.
"대, 대장!"
"미, 미쳤습니다. 저 애송이 녀석 귀신들린 것처럼 검을 쓴다고요!"
"어떻게 좀 해 보시라고요, 젠장 할! 보이지도 않는데, 계속 애들이 반으로 갈라지잖아요!"
말도 안 되는 검술.
첫 번째는 몰라도 두 번째는 우연이 아니다.
실력.
눈앞 소년의 실력은 진정 놀라울 정도였다.
순간, 전직 경비대장이자 이 거리의 주인인 제이슨은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돼! 단둘일 뿐이다! 우린 오십 명이 넘고 쟤들은 단 두 명일 뿐이라고! 우리가 당하는 게 말이 되냐 이거야!"
그의 지저분한 턱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뒤늦게 깨달았다.
제이슨.
그는 이 거리의 주인이기 전에 한 명의 검사였고, 또한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실력자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데미안의 발검술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설마 했는데, 우연이 아니었다.
'발검과 참격, 그리고 납검이 한 번에 일어났다!'
그것은 한 번의 동작에 세 가지 동작을 압축한 실로 놀라운 검술이었다.
순간 그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하지만 더욱 놀랄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잠깐! 저 노인 설마!?"
익숙한 얼굴.
길거리 왈패들은 모르겠지만, 한때 내성에서 경비대장을 맡았던 제이슨이다.
그래서 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검을 들고 어린 소년의 등 뒤를 지키는 자가 누구인지.
"그, 그레고리 집사장!"
하얗게 질린 제이슨이 외쳤다.
눈앞의 노인이 정녕 그레고리 집사장이라면,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자의 정체는 너무나 확연한 것이었다.
"데미안. 데미안 소영주! 설마 눈앞의 애송이가 데미안 소영주였단 말인가!"
제이슨의 비명 같은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드디어 돼지 새끼가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군."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스릉!
서걱!
일검.
스릉!
서걱!
이검.
스릉!
서걱!
삼검.
사검.
오검.
"으, 으악!"
"사, 살려 줘!"
"도, 도망쳐! 젠장!"
섬뜩한 발검의 소리와 함께 비명이 이어졌다.
환락가의 핏빛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 거리의 주인, 제이슨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눈앞의 소년.
망나니 애송이라 불리는 소년은 괴물이었다.
11화
사십.
삼십구.
삼십팔.
삼십칠.
점차 줄어드는 수하들의 숫자.
그것을 지켜보던 제이슨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믿을 수 없었다.
'소, 소영주가, 그 멍청하고 아둔한 소영주가 저렇게 강하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제이슨.
그는 한때 경비대장으로 복무했기에 소영주와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본 데미안 소영주.
그는 무능했고, 무식했으며, 또한 게을렀다.
그 증거 중의 하나.
그는 귀족의 의무를 저버리고 검을 들기를 포기했던 자였다.
북부 영주의 가장 우선시되는 의무.
강자.
그리고 기사.
그는 그 두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는 애송이였다.
북부는 강자를 숭배한다.
그리고 귀족은 그 강자에 부합하는 자가 쟁취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북부의 귀족은 가전 비술의 형태로 가문의 검술을 학습했고, 스스로 강자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데미안이 검을 잡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뿐이랴.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개 훈련생과의 대련.
분명 연습이었지만 장렬히 패배한 사건은 북부 일대에 큰 파문을 일었다.
훈련병에게도 패하는 후계자라니.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은 북부다.
강자를 추종하는 상무적 기상이 두드러지는 북부의 전통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
귀족 같지 않은 귀족.
심지어 귀족이라는 신분의 가장 큰 증거인 검술조차 전수받지 못했다.
아니, 기사 수업조차 낙오해서 방 안에 틀어박힌 패배자였다.
분명 제이슨이 알고 있는 소영주의 그릇과 실력.
그것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제이슨은 데미안의 실력을 지켜보며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서걱.
서걱
"끄악!"
점차 다가오는 비명성.
그리고 절삭음.
섬뜩하다.
눈앞의 부하도 목이 달아나니, 생존의 본능이 번뜩인다.
남은 숫자는 이제 겨우 스물.
부하를 앞세워 뒤에 물러섰지만, 그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다!'
손발이 덜덜 떨렸고, 오줌이라도 지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해야 했다.
하지만 감히 나설 실력도 담력도 없었다.
그저 줄어 가는 수하들의 숫자만 확인하며 절망할 뿐.
제이슨이 애가 닳아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떠올린 전략.
방법은 몇 개 추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이대로 수하들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 하지만 이곳은 북부지대고 도망칠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도주한다면 고기 방패가 되어야 할 부하들도 일시에 도주할 터. 그 소란 속에서 가장 먼저 노려질 타깃은 제이슨이 분명했다.
두 번째는 간단했다. 지금이라도 수하들과 합심해서 소영주를 시해하는 것. 그리고 그 목을 이웃 영지인 고든 자작에게 바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요원한 일이었다.
애초에 데미안 소영주의 실력으로 보건대,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찰나.
데미안의 검격이 뚝 멈췄다.
"...!?"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껌뻑였다.
그것은 제이슨만이 아니었다.
"소, 소영주님?"
베이런.
여동생에게 부축받고 가까스로 서 있던 소년의 눈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 그를 향해 데미안이 자신의 검을 던졌다.
피잉!
촤르르르르.
갑자기 전투를 포기하다니.
그레고리 집사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무슨 짓이십니까, 소영주님! 검을 놓치시다니요. 어서 제 검을 받으시지요."
"아니. 아니지. 그럴 게 아니지."
"그게 무슨!?"
"이 전투는 내 것이 아니건만, 내가 주제가 넘었어. 내가 큰 실수를 범할 뻔했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직이 하던 데미안.
그는 곧 고개를 돌려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베이런.
데미안의 눈은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야수를 향했다.
데미안이 조언했다.
아니, 명령했다.
"검을 들어라, 소년."
갑작스럽게 검을 들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모두를 이해시킬 생각 따윈 없었다.
이해할 사람은 단 한 명이면 족했다.
데미안이 진중한 태도로 그 한 명에게 말했다.
"눈앞의 적은 네 것이건만, 내가 그 복수를 먼저 가질 뻔했군. 북부의 전사여. 자네의 의무를 다할 텐가?"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한 명의 소년이기 전에 북부의 전사가 아니었던가?"
"...!"
그렇다.
홀로 수십의 장정을 상대로도 꺾이지 않았던 기세.
그 오기와 살기는 정녕 북부의 전사였다.
북부 전사의 숙명.
은혜는 더 큰 은혜로. 원한은 더더욱 큰 복수로 갚는 것.
그것이 바로 북부의 기사도다.
데미안이 복수의 열망에 타오르는 것도 어쩌면 북부인의 기질 때문일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북부의 전통이자 사내의 덕목.
데미안이 베이런이라는 시궁창의 소년에게 명한 것은 바로 북부의 기사도였다.
그 말에 의외의 인물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제이슨이었다.
그는 북부인이었기에 데미안의 말을 이해했다.
"설마 소영주님. 지금 명예 결투를 말하시는 겝니까?"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 결투.
그것은 중앙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부만의 복수전을 뜻한다.
당사자 외에는 그 어떤 자도 간섭할 수 없으며, 한 명과 한 명의 검사가 신분과 실력을 떠나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행위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명예 결투는 그 어떤 자의 방해도 없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지금은 북부에서도 거의 사장된 결투 형태. 데미안이 그 숨겨진 카드를 꺼냈다.
"크흐흐. 크하하하하! 정말이십니까? 크하하하핫!"
제이슨이 하늘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명예 결투는 너무나 귀족적이고, 또한 고상하여 오랜 삶을 살아온 노인조차 잊은 전통이었다.
그것을 여기서 꺼내 들다니.
우스웠다.
그리고 즐거웠다.
왜냐면 귀족적이란 말은 곧 강자에게 유리하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이슨은 자신했다.
그 강자가 자신이라고.
강함과 약함은 상대적인 것.
소영주의 앞에선 제이슨은 약자였지만.
그 대상이 베이런으로 바뀐다면?
글쎄.
베이런. 일개 소년에 불과한 빈약한 서생이다.
심지어 치명상에 가까운 찰과상과 자상은 그렇지 않아도 큰 격차를 더욱 벌려 놨다.
무시무시한 데미안의 난입이 없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거저먹기군. 겨우 저따위 소년과 검으로 승부를 내면 내 필승이다!'
제이슨이 조심히 물었다.
"소, 소영주님. 그렇다면 제가 이긴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의 목숨은 내가 취할 것이 아니다. 먼저 빚을 받아야 할 자는 바로, 눈앞의 소년이지. 만약 네가 이긴다면 결과에 승복하고 네 녀석을 방면해 주지."
"마, 맞습니다! 정녕 맞는 말씀이십니다!"
제이슨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데미안의 비위를 맞추었다.
'사, 살았다! 저 무시무시한 소영주가 검을 버렸어. 거기다가 내 목숨도 보장해 준 것과 다름이 없는 거야.'
이유가 어찌했든, 이것은 기회였다.
살 수 있는 기회.
당장 저 허약한 소년을 처리하고 도주의 기회를 노린다면.
아니, 그 전에 승리의 결과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명해 달라고 한다면.
들어줄 수밖에 없는 신성한 승부다.
제이슨의 눈에 생기가 샘솟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의 생기보다 더욱 큰 살기와 오기가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바로 미래의 검성이라 불릴 사내.
독검의 베이런이었다.
* * *
복수.
복수란 단어는 참으로 묘한 매력을 함유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자에게 잠시나마 생기를 돌게 만들며.
때로는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불가의 사건이 종종 발현되기도 한다.
베이런의 경우가 그러했다.
온몸은 피에 절었고, 근골도 꽤나 상한 게 분명했다.
오랜 시간 요양이 필요할 정도.
하지만 그런 베이런도 복수란 단어 하나에 죽은 눈동자에 활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그 활기는 곧 독기와 오기로 화(化)했으니, 그것이 바로 복수란 단어가 함유한 기묘한 힘이었다.
그 변화는 베이런도 난생처음 경험한 것.
본인조차 생소한 감정이었다.
다만 데미안은 처음부터 베이런이 그럴 것이라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회귀의 장점.
한 인물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결과를 내었는지를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복수라는 단어의 기묘한 힘은 데미안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데미안 또한 한때 복수에 미쳐 살았던 마귀였으니까.
"소년.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해야 할 일입니다, 쿨럭."
비틀거리며 제 자리에서 일어난 베이런의 눈에 태양보다 강렬한 의지가 깃들었다.
각혈로 인해 상의가 피로 물들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 순간.
데미안은 회귀 전의 베이런을 겹쳐 볼 수 있었다.
독기의 베이런.
검성 베이런이란 별명보다 독기의 베이런이란 말이 그에게는 더욱 걸맞았다.
비록 나이와 경험은 그때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그 인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의 베이런은 데미안이 알던 외팔 베이런과 똑같았다.
스릉.
베이런이 검을 들었다.
그 순간 응축된 살기가 갈무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피어올랐다.
재능은 역시 어디 가지 않는다.
평생 공부만 한 손이 정녕 맞는지, 본능적으로 정확한 파지법으로 검을 잡았다.
'훌륭하군.'
데미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초심자라고 볼 수 없을 재능.
역시 미래의 검성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데미안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방해꾼.
원래 데미안이 알고 있는 회귀 전의 역사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난입했다.
"너, 너무하세요! 소영주님!"
베이런을 부축했던 소녀.
병색이 완연하다고 하나 백금발에 앙증맞은 이목구비가 어둠 속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녀의 이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베이런의 하나뿐인 동생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비참한 죽음이 베이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는 사실조차.
그런 그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머금었다.
피비린내가 완연한 광장에서 외친 그녀의 목소리가 데미안에게 닿았다.
"넌?"
"여기 탈진해서 쓰러진 오라버니의 동생이자, 소영주님의 신민. 엘리스라고 하옵니다."
"흐음...!? 그래?"
데미안이 순간 그녀의 존재에 흥미를 가졌다.
그녀의 뛰어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귀족가의 예법.
겉으로만 보고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닌, 정확한 각도와 발재간이다.
'역시 평범한 신분은 아니라 이건가.'
세상은 난세고, 신분이 급변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고귀한 신분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어딘가의 난민으로 흘러가는 일도 별난 일이 아닌 시대다.
그런 몰락한 귀족은 유민이 되어 북부로 흘러들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곳까지 추적할 적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마, 베이런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데미안이 되물었다.
솔직히 지금의 그녀는.
방해꾼이었다.
"뭐가 너무하다는 거지?"
"지금 저희 오라버니 베이런은 검을 들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아니, 애초에 검을 한 번도 든 적 없는 서생 출신인데 전직 경비대장을 상대하라니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부디 다시 검을 잡으셔서, 이 영지의 법도와 정의를 실현하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정당한 재판권을 지닌 건 데미안이었고, 베이런의 상태는 정상은 아니었다.
골절만 없을 뿐이지, 제 발로 서 있는 것도 기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묵묵히 베이런을 향했다.
"오, 오빠!"
엘리스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불렀다.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몰락한 귀족이 아니었다.
한 명의 사내이자 기사.
북부의 전사였다.
"저는 북부의 전사가 되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 언제부터 검을 잡았다고 그런 환상에 빠져 있냐고!"
"환상!?"
순간.
베이런이 눈빛에 머금은 광기가 자신의 여동생을 향했다.
"광기가 아니다. 이분은 지금 내게 기회를 주시는 거다!"
"정신 차려!"
어여쁜 동생.
삭막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베이런이 가진 삶의 원동력.
그녀가 우수에 젖은 눈으로 베이런을 응시하며 양어깨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라는 듯 애원했다.
"됐어. 이제 그만하자. 북부인의 명예고, 뭐고 간에 무슨 결투고 무슨 복수야! 이제 소영주님께서 저놈들을 벌해 주시면 되는 거잖아. 내일 영지 재판에 넘기면 그동안 지은 극악한 죄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놈이야!"
솔직히.
엘리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괜찮다.
아니 최선이었다.
베이런이 직접 본 소영주.
소문과 달랐다.
눈앞의 소영주는 언뜻 보기에도 걸물 중의 걸물.
공명정대하고 용맹했으며, 그 누구보다 강한 전사 중의 전사다.
그가 제이슨을 어찌 처리할지는 분명해 보였다.
아마 내일 아침이 되기도 전에.
여기 있는 왈패들의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정의 구현일까?
그게 최선일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분노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자신을 모욕하고.
더 나아가 여동생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했고.
자신의 인생을 뒤틀어 버리려 했던 녀석.
아니, 이미 베이런이 알고 있다.
이미 자신의 동생과 같은 전철을 밟은 몇몇 여인은 흐르는 강에 몸을 투신한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들의 복수.
아니 그들은 중요하지 않다.
소영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베이런의 복수는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비록 이 눈앞의 고귀한 존재조차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복수.
잠시 고민하던 베이런은 결국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릉.
비틀거리며 애써 검을 잡은 베이런은 데미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쿨럭. 이, 이 아이가 아직 소영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몰라 소영주님께 실언을 한 겁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쿨럭. 컥."
거친 숨을 내쉬며 토혈하던 베이런은 곧 건방진 여동생을 변호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그녀는 전사가 아닌 일개 소녀일 뿐이니. 다시 한번 묻지. 북부 전사가 될 것인가! 거부한다면 내가 저 녀석을 처리할 터. 네 동생의 말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북부의 사내입니다. 저 간악한 제이슨에게 북부의 명예 결투를 신청합니다."
베이런이 가까스로 검을 들고 선언했다.
명예 결투의 선언.
이제 둘의 결투에 끼어들 수 있는 제삼자는 없다.
심지어 이 영지의 주인인 데미안조차도.
그것을 지켜본 제이슨은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어쭙잖은 연속극은 어차피 결말이 정해져 있었다.
저 베이런에게는 새드 엔딩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제이슨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자신에게 해피 엔딩이 정해졌을까 하는 점이다.
"만약 제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요, 소영주님."
"살고 싶은가."
"예. 빌어먹을 정도로 살고 싶습니다요."
"복수는 이제 베이런의 것. 내 손을 떠났다. 만약 네 녀석이 베이런을 쓰러트린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것이 결투 재판의 결말이지."
"그, 그렇다면 절 놔주신다는 말씀입니까요?"
"적어도 난 24시간 동안 네 녀석을 추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가. 받아들일 텐가?"
"후후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요. 이렇게 제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시다니, 으흐흐흐흐.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 녀석은 검 한번 안 잡아 본 애송이 문관 지망생 녀석입니다. 서생이란 말입니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만약 네 녀석이 이긴다면 고이 보내 주지. 그것이 그 누구고 침범할 수 없는 명예 결투의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이니."
"감사합니다, 흐흐. 아주 감사드립니다요, 나으리."
예상도 못 한 조건.
제이슨의 얼굴에 생존에 대한 거대한 욕망이 어른거렸다.
12화
제이슨은 모닝 스타를 들고 베이런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비웃었다.
'저 자세 좀 보게. 어설프기 그지없구만.'
베이런.
묘하게 강한 녀석이었지만 자세부터가 너무나 엉성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검 한번 잡은 적 없는 전형적인 초심자의 모습.
심지어 당장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이슨은 쾌재를 불렀다.
'다행이군. 방금 전 기세는 허세였을 뿐인가.'
잠시나마 긴장했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성을 내질렀다.
"크하하하하! 내 20년간 검을 잡으면서 네놈 같은 초보자는 처음 보는군. 당장 네 녀석을 반으로 으깨 주마."
이건 신이 주신, 아니 소영주가 준 기회였다.
그 말과 함께 제이슨은 검을 치켜들고, 골목의 끝으로 돌진했다.
두두두두두두두!
마치 마상 기사의 돌진.
육중한 육신이 그대로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순간, 데미안과 집사장의 얼굴이 이채를 띤다.
'나쁘지 않군.'
'제이슨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과연, 기사를 노릴 정도의 재능을 숨기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군.'
제이슨의 돌진을 지켜본 데미안의 솔직한 평가.
변경 영지에서 썩을 만한 실력은 아니다.
기사급.
검술을 제대로 배웠고 그 깊이도 나쁘지 않다.
아마 다른 영지에서라면, 그 인성이 어땠든 간에 중히 쓰일 만한 실력.
병사들 사이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재능이다.
그리고 저 기술.
익숙하다.
바로 데이비스 기사단장의 것이다.
확실해졌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저 정도 실력을 지닌 녀석이 겨우 뒷골목 패거리와 어울리고 있다고? 녀석이 한검회 소속이란 건 확실해졌군.'
녀석의 목적.
한검회의 자금줄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피식.
미소를 지은 데미안.
그리고 그런 데미안을 확인한 제이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일격으로 승부를 마무리 지으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가 외쳤다.
"죽어-라-앗!"
그의 돌진이 끝의 끝에 닿았다.
목표는 베이런.
이제 처음 검을 잡고 엉성한 자세를 한 소년이자, 이제 곧 진창에 내장을 쏟아 낼 불쌍한 소년이다.
후웅!
그런 소년을 반으로 가를 듯.
매서운 둔격이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
단순한 내려치기가 아니다.
돌진할 때의 운동 에너지가 점층된 일격.
무려 잭 헤임 지역의 리히테나워 유파의 검술이자 데이비스 기사단장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한검회의 증표였다.
제이슨은 승리를 자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히테나워 유파의 검술.
단순한 잡기 따위가 아니다.
제대로 된 비전검술.
이제는 멸문한 한 귀족가의 옛 비전이었다.
격투술과 검술이 접목된 것으로서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찍어 누른다.
특히나 지금 제이슨이 쓰는 내려치기는 폼탁(Vom Tag)이라 불리는 기술로서 힘으로 적을 내려찍는 전형적인 강검이었다.
그리고.
곰 같은 체형의 제이슨이 가장 자신할 만한 스킬이었고.
검술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하찮은 잡기술도 평민이 익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상이다.
검술.
그것은 귀족들의 전유물.
그 폐쇄성은 신분제의 상징과도 같았다.
지금 그 무시무시한 검술이 베이런을 향했다.
부상을 입은 체격 작은 베이런이 막아 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후우웅!
실제로 거친 바람과 함께 그의 검이 베이런의 작은 육신을 수직으로 가르려는 찰나.
"아아!"
베이런의 여동생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베이런의 죽음을 직감했다.
엘리스도 눈이 있다.
저 검술이 비범하다는 것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너무나 확연했다.
결국엔 자신 때문에 자신의 오라버니가 비참하게 죽는구나.
가문의 복수조차 못 하고 이렇게 사그라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이 광장에 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단둘만 빼고.
베이런.
그리고 데미안이었다.
부-우우욱!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후두둑.
내장이 길거리에 흩뿌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리는 비명성과 경악성.
"으, 으악!"
"젠장! 일격이다!"
순간 결투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몸이 굳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승부는 일검에 끝났다.
죽음보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오직 한 명의 걸음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뚜벅.
뚜벅.
데미안은 천천히 걸어갔다.
베이런의 여동생, 엘리스를 향해서.
그녀는 두 눈을 양손으로 가리고 울고 있었다.
"이봐, 건방진 소녀 씨."
"흑. 흐윽."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귀가 있었고 비명성을 들을 수 있었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모두 적셨다.
"너, 너무해요. 너무해! 우리 오빠가 죽었다고요. 흐윽. 그놈의 잘난 자존심 때문에! 사내들은 어째서!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서러웠다.
죄책감보다 더 큰 비애가 그녀의 전신을 옭아맸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보다, 그저 웃었다.
"무슨 헛소리야. 잘 보라고. 네 오빠가 동생을 위해 승리를 쟁취한 모습을."
"...예!?"
"네 오라비가 당당하게 북부의 전사가 된 모습을 봐 줘야 하지 않겠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지.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보았다.
"아, 아아!"
세로로 두 쪽이 되어 갈라진 시신.
그리고 그 아래로 흘러내린 내장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예상과 달랐다.
그 핏물에 적셔진 고깃덩어리.
그것은 그녀의 소중한 오빠가 아니었다.
언제나 고아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음담패설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던 사내.
그 끔찍한 남자가 한낱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신의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체구는 작았다.
하지만 그 눈에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한 강렬한 선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의지였다.
북부의 전사.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유약했던 서생 지망생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고.
당당한 북부의 전사만이 그 앞에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의무를 다했고, 유약한 소년은 진정한 북부의 전사가 되었다.
"오, 오빠!"
"...."
여동생의 부름에도 베이런은 우뚝 선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동생을 끌어안기는커녕.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는커녕.
그리고 생존의 즐거움을 즐기기는커녕.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이 든 롱소드를 향했다.
기묘한 눈빛.
그것은 살인을 경험한 자의 공포나 경이가 아니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표정.
그것은 베이런이 양손으로 잡은 롱소드를 향해 있었다.
데미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역시 누가 검에 미친 새끼가 아닐까 봐. 완전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이잖아.'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첫 살인.
그것에 검사의 인생이 결정된다.
두려움에 떤다면, 그는 앞으로 평생 검을 잡을 수 없고.
첫 살인을 하나의 양분으로 삼아 경험을 곱씹는다면, 그는 더욱 큰 검사로 성장할 터였다.
베이런은 후자였다.
이제 베이런은 복수를 떠나 다시는 검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칼맛을 봤으니까.
그 한 사내의 성장을 지켜보며 데미안이 선언했다.
"승자는 베이런! 패자는 제이슨인지 뭔지 저기 반으로 갈라진 쓰레기 자식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날.
회귀 전의 과거와 달리 훨씬 이른 시점에 외팔의 베이런이 검사로 거듭났다.
아니, 이젠 양팔이 온전한 독검의 베이런이 탄생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 하나.
길거리에서 반으로 쪼개져 객사한 제이슨이 원래의 역사보다 훨씬 일찍 죽었다는 사실이다.
'제이슨이 죽었구만. 그것도 무명의 신출내기 검사에게 말이지.'
데미안은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악인의 죽음이 기꺼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알고 있었다.
제이슨이 누구의 비호를 받고 이렇게 뒷골목의 왕으로 군림하는지.
그것은 바로 기사장 데이비스.
제이슨의 이복형제이자 영지의 군권을 쥔 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슨은 한검회의 소속이었고, 운영 자금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축 중에 하나.
'이제 그 녀석이 어떻게 나올까.'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막 뒤를 돌아 사라지려는 그때.
"잠깐!"
어디선가 데미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
살아남은 왈패들.
잠시 망설이던 녀석들이 곧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 저희도 명예 결투를 신청합니다!"
"저희한테도 기회를 주십쇼! 대장의 복수! 그래, 복수할 기회를 주십쇼, 소영주님!"
그 말을 뱉은 왈패의 속셈.
간단하다.
명예 결투를 빙자해서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얕은 술수.
데미안이 옛 북부의 전통을 중시하며, 자신의 명예까지 걸며 보증했다.
비록 그 결과가 제이슨의 패배로 끝났지만, 중요한 건 아직 자신들에게 그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하나하나가 결투를 신청한다면 이미 지친 베이런이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어차피 베이런 저 애송이 녀석은 제이슨 대장을 상대하면서 지칠 대로 지쳤어!'
'앞에 한두 놈은 못 이길지 몰라도, 그다음 승부까지 베이런이 승리를 장담할 순 없겠지.'
'보아 아니 소영주는 정통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녀석이야. 명예 결투를 신청하면 거부할 명분은 없겠지!'
데미안은 녀석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간악한 녀석들.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집사장을 향해 말했다.
"집사장! 검을!"
"예!"
휘잉!
기다렸다는 듯, 집사장이 검을 던졌다.
착!
데미안은 검집째로 검을 받아들었다.
순간, 데미안의 주위로 가공할 만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기세가 달라졌다.
왈패들이 당황하며 입을 떨었다.
"소, 소영주님! 부디 자비를! 북부의 전통을 중시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도 공평한 처우를!"
"공평한 처우!?"
웃기는 소리.
데미안은 깊은 조소를 남긴 채,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우웅.
곧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번개처럼 적들을 쫓았다.
스릉.
서걱.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데미안을 만만하게 본 그들은 그 대가를 치렀다.
"으아악!"
"커억!?"
"크웨엑! 도, 도망쳐!"
"어, 어디로!?"
"젠장, 길이 막혔어!"
막다른 골목.
지금까지 수많은 아녀자와 무고한 이들을 궁지로 몰았던 그들의 영역.
이제 이 골목의 지형은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약점이었다.
달아날 길 없는 가로막힌 벽.
그곳에 달라붙어 바둥대는 녀석들은 벽을 타지도 못하고 절망에 젖었다.
그들을 향해 호쾌한 호선이 그려졌다.
철썩.
바닥이 피로 적셨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대지는 피와 내장으로 점철되었다.
오직 차가운 비명성만이 느껴지는 잔혹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집사장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흐음. 이런."
잔혹한 손속.
끔찍한 혈겁.
하지만 집사장은 데미안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집사장은 감정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데미안의 분노를 공감했다.
한 영지에 두 주인은 있을 수 없는 법.
이 거리도 온전히 소영주인 데미안의 것이었고, 이곳의 영지민들도 그러했다.
하지만.
감히 스스로 왕이라 참칭한 자.
그리고 그런 녀석의 명령을 받는 자들.
이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질이 좋지 않았다.
"내 소중한 영지민을 쥐어짜는 쓰레기들이지. 분리수거도 안 되는 개쓰레기들. 살려 둘 가치 따윈 없다."
명예 결투도 격에 맞는 자들이나 하는 것.
협박과 협잡을 일삼는 녀석들에게 명예 따윈 필요 없었다.
서걱!
데미안의 검이 더욱 매서워졌다.
은은한 분노가 들불처럼 번졌다.
이런 쓰레기들을 청소하지 못해서.
겨우 이런 놈들 때문에.
회귀 전에 카를로스 영지가 이 꼴이 난 거다.
물론 데미안 스스로가 그런 꼴을 당하게 한 일등 공신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쓰레기들의 존재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청소였다.
카를로스 영지를 좀먹는 쓰레기들의 청소.
얼마나 지났을까.
끔찍할 정도로 거리가 조용하다.
"대충 끝났네."
데미안은 지친 기색도 없었다.
그저 가벼운 숨 한번 내쉰 게 끝이다.
데미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이슨을 쓰러트린 베이런은 지칠 대로 지쳤는지 겨우 서서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부축은 받지 않았다.
역시나 타고난 독종답게 겨우 서 있으면서 여동생 엘리스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다.
마치 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참 대단한 오라버니다.
하지만.
지금 데미안의 눈에 들어온 건, 그런 오붓한 남매간의 정이 아니었다.
데미안을 응시하는 저 눈.
아니, 정확히는 데미안의 검을 좇아 응시했던 저 눈이다.
여동생의 눈을 감겼을지 몰라도, 자신은 두 눈 부릅뜨고 데미안을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신기에 가까운 검술을 어떻게든 머릿속에 담았다.
'이것 보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데미안은 황당한 나머지 웃음을 지었다.
이 순간.
자신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와중에.
베이런은 데미안의 검을 습득하고 있었다.
역시 검에 미친 놈답달까.
여유가 있으면, 녀석의 깨달음이 정돈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더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었으니.
"크흠. 어이. 정신 좀 차리지?"
"아!"
데미안의 헛기침 소리에 베이런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혈향이 진득한 풍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억!"
존슨가를 주름잡던 제이슨파 일당.
인근의 병사들도 함부로 체포하지 못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시산혈해가 되어 차가운 땅바닥에 누웠다.
온전한 시체는 단 하나도 없었고.
모두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단 한 명의 소년에 의해.
베이런은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히 데미안의 잔혹한 손속 때문만은 아니다.
'내 검보다. 아니 제이슨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한 검이었어!'
그는 이제 막 검을 처음 잡은 철부지 소년에 불과하지만.
망나니로 알려진 동 나이대의 소년에게서 그가 꿈꾸는 경지를 목도했다.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어린 검사는 데미안을 통해 그가 닿고 싶은 경지를 잠시나마 엿본 것이다.
펜만 잡던 손이 이제 검을 원했다.
그렇게 가지게 된 생각.
'눈앞의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
베이런의 가슴에 불같은 욕망이 타올랐다.
그의 심장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 뜨거워졌다.
거대한 욕망이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 옆에 서고 싶다!'
평생 붓만 잡았던 서생의 꿈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곧 차가운 현실이 눈앞에 부딪혔다.
"집사장. 이제 경비대에 연락하지."
"예,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그리고 이 녀석들의 악행을 조사할 조사관들을 따로 파견해야겠어."
"기사단을 통할까요?"
"아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순 없는 노릇이지. 모든 조사 권한은 집사부에 위임하겠다. 이제 그럴 만큼 세력도 커졌잖아?"
"후후,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이제 돌아가지."
데미안은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필하듯 노회한 집사가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 풍경이 이곳 뒷골목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고귀했다.
"아...!"
그 순간 베이런은 자신이 얼마나 큰 꿈을 꿨는지 깨달았다.
데미안 소영주.
그는 이 영지의 주인이었고, 일개 서생 지망생에 불과한 베이런은 상상도 하지 못할 높은 신분이었다.
그래 이게 당연했다.
애초에 제이슨을 양보한 것만으로도 베이런은 큰 은혜를 입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욕심.
멍하니 선 베이런을 향해 데미안이 말을 붙였다.
"베이런이라 했던가? 고생했군. 제이슨의 유해는 이제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불손한 녀석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거든."
"예...."
베이런은 이어질 말을 기대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스윽 주위를 둘러본 데미안은 손바닥을 몇 번 마주치더니 이내, 더 이상 일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의 연은 여기까지겠군. 오랜만에 제대로 된 북부의 전사를 보아 좋았다. 자네, 검을 잡고 정진하는 것도 괜찮겠어."
"조언... 감사합니다, 소영주님."
"조언 정도가 아니야. 진짜로 검을 잡아라. 이건 이 영지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사내로서 하는 조언이니 가슴에 새겨도 좋다."
"가, 감사합니다."
팡!
팡!
데미안이 베이런의 등을 몇 번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투벅.
투벅.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을 베이런은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언가 세찬 감정이 그의 가슴속에 소용돌이쳤다.
뭘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한 마음.
그리고 베이런은 곧 깨달았다.
이것은 아쉬움이란 감정이란 것.
바로 이대로 영영 데미안이란 훌륭한 사내를 볼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그런 아쉬움이었다.
곧 황급히 정신을 차린 베이런이 소리쳤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영주님!"
그 말과 함께 베이런은 황급히 데미안을 불렀다.
그리고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었군!'
먼저 손을 내민 사람.
그것은 데미안이 아닌 베이런이었다.
13화
뛰쳐나가는 베이런을 바라보던 엘리스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의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오빠! 미쳤어!?"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베이런.
자신의 오라버니는 유약하고 글을 사랑하는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학문을 탐독하고, 서책에 파묻혔을 때 빛나던 오라버니의 반짝이는 눈빛.
그것이 지금은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눈앞의 사내.
영지를 말아먹는 망나니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소년을 향해서.
그래서 불안했다.
'보통 소설 같은 데서 보면 처음 살인을 하면 충격에 빠져 며칠을 앓는다고 하는데, 저게 첫 살인을 한 사람의 눈빛이라고? 말도 안 돼!'
유약하기 그지없던 소년은 한 명의 전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전사의 눈은 더없이 반짝이며 한 사내를 쫓고 있다.
그래서 애원했다.
가지 말라고.
하지만.
타악!
그녀의 오라버니는 난생처음 그 손길을 거부했다.
아니, 뿌리쳤다.
"아!?"
처음 본 베이런의 모습에 엘리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순간.
소중한 여동생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지금의 베이런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
데미안.
바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심연처럼 깊었고, 그 굳은 심계는 고목보다 단단했다.
그리고 그 검술.
푸른빛을 뿌리며 단숨에 수십을 도살한 그 실력.
그 압도적인 실력은 베이런의 가슴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부축하는 여동생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친 베이런은 황급히 데미안을 쫓았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목적도 모르겠다.
그저 몸이 먼저 나갔다.
애타게 엘리스가 불렀지만, 지금 베이런에게 중요한 건 여동생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소중한 동생.
평생을 동생을 지키기 위해 살기로 결심했지만.
지금 베이런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좇았다.
저벅.
저벅.
털썩.
다시 한번 쓰러졌다.
그의 여동생 엘리스가 부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
"오, 오빠!"
"이건 누구에게 도움받을 일이 아니다. 나 홀로 해야 할 일이니까!"
"...!"
독검의 베이런이라 불렀던 사내의 고집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온몸에 피멍이 들고, 얕은 자상과 심각한 열상이 전신을 뒤덮어도.
그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눈앞의 사내 앞에 서고 싶었다.
그것은 사내이자 한 명의 검사로서의 고집.
그 누구라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이런은 비틀거리면서 때론 넘어져도 자신의 힘만으로 데미안을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거기 기다려 주십시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뭔가 이대로 끝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는 저 높으신 분을 마주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무리했다.
이미 기력이 다했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힘겨웠고.
털썩.
몇 번이나 바닥에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베이런은 자신의 의지력만으로.
그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결국 데미안의 앞으로 나아갔다.
"허억. 헉. 허억."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3자가 보기엔 너무나 답답한 상황일지 모르지만.
데미안은 침착히 그런 베이런의 걸음을 기다려 줬다.
한참 뒤.
가까스로 데미안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이지, 더 할 말이 남아 있나?"
"그, 그게...."
막상 데미안 앞에 어렵게 섰지만 할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 여러 말이 맴돌았지만, 감히 내뱉을 수 없었다.
엄격한 신분의 차이.
데미안 소영주는 엄연히 이 영지의 절대자였고, 그는 그저 수많은 부락민 중의 하나였다.
"...."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곧 무언가 결심을 굳힌 베이런이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털썩.
"하해와 같은 은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감사 인사는 이미 받은 거로 아는데. 단순히 그것 때문에 내 시간을 잡아먹는 건가?"
데미안이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베이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 빚은 겨우 말 한마디로 청산될 것이 아닙니다."
"호오...?"
베이런이 경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자, 데미안은 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미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선의를.
그리고 무엇을 베풀었는지를.
"넌 나에게 세 가지를 빚졌다. 그게 뭔지 아느냐?"
"첫 번째로, 제 목숨과 같은 여동생을 구해 주신 것입니다."
정답이다.
실제 역사가 그랬으니까.
만약 데미안이 오늘 개입되지 않았다면?
베이런은 오늘 한쪽 팔을 잃고 외팔이가 될 운명이었고, 엘리스는 창기로 팔려 갔을 터.
비참한 미래의 재현이었다.
그 미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미 경험했으니까.
베이런은 그 광기가 골수에 미쳐 복수의 혈겁에 뛰어들었고, 대륙에서 한 손 안에 드는 검객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 개인으로서는 비극일 뿐이다.
데미안의 개입으로 그 비참한 사건을 되풀이되지 않았다.
데미안이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호오. 그리고 두 번째는?"
"제 목숨을 구해 주셨지요."
"그래. 거기다 네 녀석의 오른팔도 온전케 했고 말이지."
"감사합니다, 소영주님. 북부의 전사가 된 지금, 오른팔이 온전하다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데미안은 나머지 한 손가락도 접었다.
외팔이 검사 베이런.
천부적인 재능 덕분일까.
늦은 나이에 검을 잡은 베이런은 대륙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로 거듭났다.
하지만 베이런은 최고의 검사가 되진 못했다.
당대 최강은 대륙제일검이라 불렸던 검제.
그것은 베이런이 뛰어넘지 못한 벽이었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외팔이라는 한계.
찰나의 순간에 공방이 오가는 검격에서 한쪽 팔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자신의 실력의 5할 이상을 깎아 먹는 약점이다.
'당시에 그런 말이 있었지. 만약 베이런이 일찍 검을 잡고,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다면, 아니 그 전에 양팔이 온전했다면 검제 따위는 상대도 안 됐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베이런은 데미안 덕분에 그 암담한 미래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원래의 꿈대로 서생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데미안은 베이런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타오르는 눈빛.
그것은 서생의 눈빛이 아니었다.
전사.
무를 숭상하고 외길을 걷는 검사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불을 댕긴 건 다름 아닌 데미안 자신이었고.
그리고 데미안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빠졌지. 마지막 세 번째는?"
데미안의 매서운 눈빛이 베이런을 꿰뚫을 듯 집중됐다.
털썩.
베이런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베이런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제게 제이슨을 직접 처단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제 손으로 제이슨을 처단하지 못했다면, 저는 평생 후회의 길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어린 나이의 베이런.
아직 검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이미 그의 눈은 검을 좇고 있었다.
무엇보다 북부인의 기상과 독기는 선명하게 새겨졌다.
바로 명예 결투 덕분이다.
잠시간의 침묵.
어둠 속에서 굳어 있던 얼굴에 호선이 그어졌다.
데미안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후후후. 크하하하하하하!"
베이런에 대답에 데미안은 한참은 웃었다.
그래.
역시 이래야 베이런이지.
이놈은 이런 녀석이었다.
그 누구보다 은원에 집착했고.
특히나 원수는 무조건 자신의 손으로 갚아야 하는 그런 독종.
회귀 전, 용병대장이었던 데미안이 알고 있던 외팔이 검사 베이런.
그리고 지금의 어린 소년에 불과한 베이런.
외관은 너무나 달랐지만, 둘 다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월이 지나도, 시간 축이 어긋났어도.
상황은 조금 달라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근성.
그리고 독심.
그것이 느껴졌다.
운명의 분기점이 달라졌다.
베이런.
이제 그는 원래 역사보다 더욱 빨리.
그리고 더욱 강한 강자가 될 것이다.
한참을 웃던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 제이슨을 네놈 손에 맡긴 것은 네 녀석의 복수가 나보다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소영주님 정도나 되시는 실력으로 제이슨 녀석은 언제든지 처단하실 수 있었겠죠."
"그래. 나는 내 권위를 모욕하고, 내 영지를 더럽힌 녀석들을 단죄할 기회를 네 녀석에게 양보한 것이지. 친히."
"소영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분에 제가 그 원수의 배를 직접 가를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콰앙!
베이런은 머리까지 땅에 처박았다.
점입가경이다.
부복을 넘어선 오체투지.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이마가 땅바닥에 짓이겨지며 피가 흐른다.
그 진심은 데미안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아니, 넘칠 지경이었다.
내심 침착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베이런의 행동을 응시했지만.
데미안은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베이런. 이 자존심 강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감사를 표하다니.'
베이런 이자가 보통 작자던가.
회귀 전, 전장에서 온몸이 피에 젖을 정도로 활약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냉정한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그 과거는 달라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심지어 황제 앞에서도 뻗대던 양반이 바로 외팔이 검사 베이런이건만, 그 자존심 강하고 고고했던 검사가 지금 데미안의 앞에서 오체투지로 경의를 표현했다.
아니, 경의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충성을 맹세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강한 욕망에 타오르는 눈빛.
그것은 오롯이 데미안을 향했다.
그리고 데미안은 조용히 베이런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만약 그저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을 불러 세우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데미안의 예상이 맞았다.
베이런이 고백하듯 나직이 자신의 의지를 표했다.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제 목숨을 받아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베이런은 데미안에게 받은 검을 바쳤다.
충성의 맹약.
그것은 기사가 자신의 주인에게 행하는 서약이자 절대적인 복종의 표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베이런이 온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를 향해 데미안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받아들인다. 나의 첫 번째 기사. 베이런."
데미안은 피 묻은 롱소드를 소매로 닦고.
그것을 휘휘 저으며 베이런의 머리를 왕복했다.
기사의 충성 서약.
비록 약식이지만, 군신의 관계가 맺어졌다.
"죽음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미래의 검성이 감동 어린 시선으로 데미안에게 맹세했다.
데미안이 알고 있던 미래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존슨가 골목을 피로 잠식한 대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홍등가의 주민들은 애써 못 본 체하며 혀를 찼다.
"에잉, 쯧쯧. 내 저럴 줄 알았지, 뭐니."
"그렇게 행패를 부리더니. 결국, 영주성에서 나섰나 보네."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최근에 너무 설쳐 대더라니까."
홍등가의 레이디들은 바닥에 흩어진 내장 조각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살금살금 숙소로 이동했다.
그사이.
영주성에서 동원된 인부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지독한 피비린내.
그 냄새를 맡은 인부들은 곧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니미, 시X. 누가 아주 길거리에 정육점을 차려 놨네. 젠장할."
가죽 포대를 든 인부들은 곧 긴 한숨을 내쉬더니, 바닥에 흩어진 내장과 살점들을 주섬주섬 포대에 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등장에 흥미를 보인 몇몇 홍등가의 레이디들이 물었다.
"저기, 아저씨들."
"뭐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어젯밤 소동 뒷정리지."
"어젯밤 소동이요? 예전처럼 뒷골목 패거리를 일망타진이라도 한 건가요? 그러기에는 병사들도 귀띔 하나 안 줬는데."
"글쎄. 우리라고 뭐 자세한 걸 알겠냐. 우리야 그냥 시킨 대로 하는 거지."
"에이. 설마 영주성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저씨들을 보낸 건 아닐 거 아녜요. 응!? 좀 알려 줘 봐요."
홍등가 레이디들이 가슴까지 살짝 드러내며 간살스럽게 아양을 떨었다.
인부들도 남자들인지라 어여쁜 레이디들이 친한 척을 하니, 못 이기는 척 자신이 아는 걸 읊조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집사장님께서 직접 이곳 청소를 지시했으니, 아마 영주성에서 직접 나선 거 같긴 한데 이상한 일이지?"
"잉!? 뭐가 이상한데요."
"분명 어젯밤에 기사단이나 병사들은 아무런 출동 지시도 못 받았단 말이지."
"아니, 그러면 제이슨 패거리는 누가 다 박살을 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아무도 모른다 이 말이지. 그거참 신기하지?"
"호오. 혹시 소영주님이 직접 나선 게 아닐까요? 어젯밤 여기 골목길에서 소영주님을 언뜻 봤다는 아이가 있었는데."
"에엑!? 소영주님이 여기에 직접 나섰다고? 설마! 얼마나 겁이 많으신 분인데."
믿을 수 없다는 듯. 인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반응을 본 레이디들도 곧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히힛."
"하하! 그거참 말도 안 되는 소리구만. 어디 검 한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다는 소영주님이 여길 혼자 휩쓸고 다녔겠나."
"그쵸!? 어젯밤에 술이나 안 드셨으면 다행인 거죠, 뭐."
소영주가 망나니에 갱생 불가라는 건. 이미 이 영지 안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검보다는 난봉에 더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는 사실은 여기 홍등가의 여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하나 없었다.
그런 소영주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이곳에 행차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농담 삼아 속삭였던 그들의 말에 진실이 담겨 있었다는 것은.
그날 아침.
같은 시간 영주성 안.
또 다른 진실을 캐내기 위해 데미안의 침실을 찾은 자가 있었다.
"소영주님. 검을 배우신 적이 없는데, 그 유려한 검술과 마나 소드라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레고리 집사장이었다.
14화
그레고리 집사장의 언동.
언뜻 보면 무례할 정도로 당돌했다.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누구보다 데미안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바로 그레고리 집사장이었다.
요 며칠의 변화.
뛰어난 계략과 상재로 베델 녀석을 몰락시킨 것.
그것은 어찌어찌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밤의 소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한 실력이라니.
검술.
그것은 귀족의 상징이자 데미안이 포기했던 자신의 권리였다.
그것은 단 하루 이틀 만에 쌓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보았다.
데미안의 검격과 은은하게 이어지는 빛의 호선을.
그것은....
그것은 마나였다.
비록 온전하지 않았지만, 은은한 달빛과 함께 공명하던 한 줄기의 푸른 빛줄기를 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마나.
그리고 마나 소드.
평생 검에 뜻을 두고 외길만 걷는 자들도 감히 닿지 못하는 신기의 경지.
그것이 바로 마나 소드다.
마나 소드는 그 존재만으로 전사들의 경외와 함께 추앙을 받는다.
건방지고 불충한 데이비스 기사단장이 모두의 존중을 받는 이유.
그리고 충심 강한 기사들도 그런 그를 묵인하는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그가 이 영지에서 유일하게 마나 유저가 될 가능성을 지닌 재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
데미안은 그것의 가능성을 언뜻 엿보였다.
아니, 실제로 은은한 빛으로 왈패들을 난자하며 거리를 피로 물들였다.
집사장은 합리적인 자였다.
그렇기에 어젯밤 데미안이 보인 이적은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혹시나 꿈일까 생각했지만, 꿈도 아니었다.
지극한 현실.
그래서 그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인 데미안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당당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침소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카를로스의 주인인 내가 검을 익힌 게 죄가 되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를로스의 주인이라면 기사 중의 기사가 됨이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 집사장 양반은 이리 뿔이 나셨을까?"
"...너무, 너무 이상적으로 변하셨으니까요. 천재적인 지략과 더불어 천재적인 무력이라니. 그것도 마나를 감응하시다니. 그건,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니까요."
북부는 전사를 원한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강인한 전사.
선대 영주 또한 영주이기 전에 한 명의 기사로 명성을 떨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소영주님께선 검 한번 제대로 익힌 적 없지 않습니까. 비전 검술조차 포기하고 방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제의 모든 상황은 객관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했다.
정확히 외관은 그대로이지만, 내면의 모든 면이.
그래. 그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만.
때론 작은 계기 하나가 인생을 송두리째 변모시키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검의 영역은 다르지 않은가.'
데미안의 손은 검을 몰랐다.
굳은살은커녕 여인의 손처럼 부드러웠고.
카를로스 가문의 비기조차 완전히 익히지 못했다.
다른 이는 숨어서 가전의 비기를 익혔다고 오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레고리 집사장은 알고 있다.
데미안의 24시간을 밀착하여 함께했기에 더욱 그렇다.
데미안은 하루도 허투루 사용한 적 없다.
물론 노는데.
적어도 육체와 검술 단련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소영주님의 수준은 스콰이어는커녕 일반 병사보다 못한 수준인 게 정상이다.'
분명 그것이 정상일 터인데.
전날 밤.
그레고리는 데미안의 검을 보았다.
기사 수업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던 소영주이건만.
그날 데미안은 이미 어엿한 한 명의 검사 그 이상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검이 붉은 선을 그리며 일렁였고.
그 칼날의 끝이 지나갈 때마다.
스물에 가까운 왈패들이 도륙 났다.
그것도 손속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영지의 주인 된 소영주 입장에서 그들은 절대 용서하지 못할 악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직접 실행하는 능력은 또 다른 문제다.
그날 그레고리가 본 데미안의 검술은 이미 완숙한 경지에 이른 노인의 것.
심지어 은은한 마나가 칼끝에 걸렸으니, 그레고리는 두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집사장은 굳은 얼굴로 재촉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정녕 제가 알던 소영주님이 맞습니까? 저를 이해시켜 주십시오."
그레고리는 진지했다.
그는 카를로스 가문에 충심을 바친 자.
실제로 회귀 전에 카를로스 가문을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한 충신이었다.
그의 의심은 충성심이 아닌, 데미안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었다.
집사장의 눈에 짙게 깔린 의심과 의혹.
후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긴 날숨을 내쉰 데미안은 곧 결심을 굳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집사장이다.
비록 그가 회귀 전에 자신을 위한 충심이 아닌.
카를로스 가문에 대한 충심으로 초개와 같이 몸을 던졌다지만.
은인은 은인이다.
심지어 생명의 은인이다.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데미안 또한 처음과 달리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의심스럽고 당황스럽겠지. 망나니에 불과했던 내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됐으면."
"예. 저는 솔직히 도플갱어나, 흑마술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최근 영지에 정체 모를 흑마법사 한 명이 몰래 들어왔다는 소식도 있었으니까요."
"그래. 그리고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건 이미 알 테고."
그레고리 집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특한 기운은커녕, 오히려 영혼이 더 맑아지신 것 같군요. 분명, 지금의 소영주님은 제가 알던 소영주님이 맞으십니다."
물론이다.
그레고리 집사장도 모종의 조사를 걸쳐 확인했다.
지금 이 눈앞의 소년은 그가 알던 소영주인 건 확실했다.
문제는 그렇기에 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
"소영주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와서 왜 이렇게 변하신 겁니까. 이미 이 영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하고 있습니다. 왜 하실 수 있다면 진작 이렇게 변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에서야 다시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레고리 집사장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그리고 그레고리의 감정은 더욱 격렬해졌다.
"왜 늙은 이 사람이 희망이란 걸 품게 만드시는 겁니까!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린 지금에서야!"
그레고리 집사장이 지금 원하는 건 설명이었다.
데미안의 이 뜻밖의 면모에 관한 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인지.
앞으로 카를로스 영지를 어떻게 할 건지.
그리고 희망을 품어도 되는 것인지!
어젯밤.
데미안이 존슨가의 향락가를 향한 날.
그레고리는 오랜만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또다시 망나니로 돌아가신 것인가.'
베델 상단의 마수를 물리치고.
날뛰던 문신들을 일순에 소탕한 것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희망을 품었지만.
그 희망만큼 더욱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하지만 곧 그 절망감이 다시 희망으로 바뀌었다.
데미안이 사창가로 향한 이유.
값싼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징벌.
바로 이 영지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걸음을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데미안을 조금씩 믿어 가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포기와 절망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두근.
두근.
그의 가슴은 마치 젊은 시절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다시 데미안이 예전으로 돌아갔을 때.
더 큰 절망감이 덮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그리고 무엇보다 데미안이 지금부터 할 일은 그레고리 집사장으로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한검회.
지금 데미안은 군권의 중심에 한 가지 파문을 던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 재능이 상당하더군요."
"그래. 베이런이 전직 경비대장 녀석을 해치운 건 우연이 아니지."
"하지만 출신이 천합니다. 기사들이 항명할 겁니다."
"반발? 정확히 얘기하지 그래. 기사회의 기사들이 아니라, 한검회의 기사들이겠지. 기사회 녀석들은 반발은 할지언정 항명하지는 않으니까."
"...! 알고 계셨습니까?"
한검회라는 말을 꺼내자 그레고리 집사장의 두 눈은 동그래졌다.
그럴 수밖에.
이 영지에서 한검회를 아는 자는 많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극도로 비밀리에 형성된 군부의 사조직이었다.
현재로서는 막연하게 그 이름과 조직의 목적만 알 뿐.
그 소속원이라든가 숫자는 알 수 없었다.
그레고리 집사장도 최근에서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
"그, 그걸 어떻게."
"나도 나 나름대로 정보원이 있다네."
"그, 그런...! 역시, 지금까지 생존을 위해 무능을 가장하신 것이었군요...!"
그레고리 집사장이 나직하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심연처럼 깊은 절망에서 희미한 희망으로.
그 표정을 보면서 데미안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사실 회귀 전에 영지가 멸망할 때 즈음에야 한검회와 그 주동자들 몇몇 정체를 알게 된 거긴 한데, 이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때론 진실보다 거짓이 나은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고, 데미안은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한검회의 존재는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누가 얼마만큼 그 사조직에 포함된 건지 의문일 뿐이지. 그것을 알아내기 전까진 경거망동할 순 없지 않겠나."
한검회의 정확한 정체와 소속원들은 회귀한 데미안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그 신중함이 그레고리 집사장에게는 꽤나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하, 역시! 소영주님이십니다! 설마 저까지 속일 정도의 연기라니! 크하하하하!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었어요."
"...그래."
하지만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도 아직입니다. 한검회들이 기사들과 병사들의 여론을 여전히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니, 실질적인 지휘권을 쥐고 있습니다."
지휘권.
그것은 오롯이 데미안이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랜 시간 무능했던 데미안의 명령을 따를 기사와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현재 한검회 소속의 사조직이 인사와 주요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 마수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는 지금의 데미안은 모른다.
"만약. 소영주님이 마나 유저라는 사실을 데이비스 기사단장이 알게 된다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해하려고 하겠지. 녀석은 역심을 품고 있으니까."
"...예. 하지만 솔직히 지금 군부는 데이비스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지라 홀로 수백을 상대하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절망적인 상황이지. 내부에서는 내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가 있고, 외부에는 내 영지를 노리는 늑대들이 가득하지. 완전히 녀석을 제압할 힘이 없다면 오히려 내가 먹힐 수도 있겠지."
"힘을 숨기셔야 합니다. 녀석을 압도할 만한 힘이 생길 때까지.... 그리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레고리 집사장의 조언.
틀리지 않았다.
차츰차츰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거짓으로 약함을 가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의태(擬態).
약자가 강자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 강자가 약자를 흉내 내야 한다는 조언.
비참하지만 굉장히 현실적인 조언이다.
하지만.
"후후후. 크하하하하하!"
데미안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돌변했다.
순간 얼굴을 굳힌 데미안은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데미안 폰 카를로스. 이 영지의 정당한 주인이지. 내가 이 영지에서 하지 못할 일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러하면 내 권위가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검이 약한가?"
"...그 누구보다 강하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데미안은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우우우우웅.
체내의 마나와 대기의 마나가 함께 공명하며 소용돌이쳤다.
이것이 바로 데미안이 익힌 검술의 힘.
회귀 전 황제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무의 극의.
만약 데미안이 온전한 신체 능력을 지녔었다면, 무극의 경지에 이르렀을 비의다.
물론 온전치는 않았다.
아직 데미안의 육신은 무르익지 못했고.
이제 막 작은 마나 코어를 형성했을 뿐이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평균을 아득히 상회한다.
한 명의 영주로서 그리고 한 명의 기사로서도.
비록 마나 유저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지만.
데미안은 이제 막 약관에 들어설 나이니까.
스물이 되지도 않은 나이에 자신의 체내에 마나를 담는 자는 많지 않았다.
굳어 있던 얼굴의 집사장의 두 눈이 커지고, 곧 얼이 빠진 듯 쩍 하니 입을 벌린다.
단순히 왈패들을 썰어 버릴 때의 마나가 아니었다.
비록 무르익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완숙한 수준의 마나가 데미안을 감돌고 있었다.
"언제. 도대체 언제 그런 경지에 이르신 겁니까."
"당황스럽고, 의심스러운 것 안다. 그만큼 이전에 나에게 실망했기에 또 한 번 희망을 품기에 많이 지쳤겠지."
하지만.
"이제는 기대해도 좋다. 네 기대에 부응하마. 이제 내 목표는 하나다. 영지의 부흥 그리고 카를로스 영지를 물어뜯으려는 승냥이들에게 내 검을 쑤셔 넣어 주는 것이지."
광오한 선포.
스물도 되지 않은 소년이 뱉기에는 너무나 오만한 야심.
그러나 그레고리는 자신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떨림을 느꼈다.
"자네가 충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선대 영주님. 내 아버님과 카를로스 가문인 것은 안다. 하지만 기다려라. 내 자네의 충심이 내게 향할 수 있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그 결과를 증명할 테니."
예전의 데미안이 아니다.
철부지 망나니에 겁 많던 소년은 이제 그레고리 앞에 없었다.
그의 앞에 선 것은 당당한 군주.
그것도 회귀 전에는 수천의 용병단을 이끌고.
황제의 오른편에 섰던 용병왕 벨크였다.
"세력은 지금부터라도 만들면 되는 법이지."
"그, 그게 가능합니까?"
"물론이지."
그 말과 함께 데미안은 씨익 웃었다.
용병대의 말단부터 시작해서 용병왕까지 불렸던 사나이.
그런 데미안에게는 너무나 쉬운 법이었다.
* * *
해가 중천에 뜰 무렵.
특유의 붉은 등 때문에 낮보다 밤이 더 활기찬 존슨가에 오랜만에 인파가 몰렸다.
휘잉!
휭!
처형식.
죄인의 목을 베는 집행인의 참수검이 춤을 추듯 공기를 가른다.
그곳에 사지가 포박된 채, 무릎이 꿇린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들은 당장이라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저 저희는 전직 경비대장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랬습니다!"
"저흰 그저 푼돈이나 좀 벌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존슨가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자들은 왈패들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제이슨의 세력을 용인해 온 치안대 또한 같은 한패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망해 가는 영지라도 이 정도까지 썩기는 쉽지 않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저희는 영지 기사님의 심복들입니다.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들의 뒷배는 무려 영지의 실질적인 군권을 쥔 기사들.
한검회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었다.
그들을 건드리는 건, 한검회를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다.
가신이라 불린 그들이 버티고 서있었기에 이토록 월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
병약하고 나약한 소영주를 대신해 북방의 경계를 지키는 기사들.
기사들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고.
그 휘하 병사들조차 자신의 구역에서는 마치 왕과 같은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더욱 황당한 건.
병사들 사이에 꿇린 한 노년의 남성이었다.
"저, 저는 그저 영주님의 명을 받들어 고아원을 성심성의껏 운영했을 뿐입니다!"
존슨가에 위치한 영주 직할 고아원.
그곳의 원장 또한 죄인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뻔뻔한 면상을 바라보며 데미안이 되물었다.
"성심성의껏?"
"예. 정말 제 영혼을 갈아 넣어 진심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폈습니다, 소영주님!"
이거 양심을 어디다 박아 넣었는지.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이 꽤나 애처로웠지만.
전후 사정을 다 아는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가증스러운 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데미안의 눈이 사자처럼 안광이 빛났다.
"그 진심이란 게, 여자아이들은 홍등가에 팔아 치우고 남자아이들은 노예로 팔아 치운 것이냐!?"
"예...!? 그, 그걸 어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던 데미안이었기에 집사부를 통해 모든 증좌를 모을 수 있었다.
캐면 캘수록 아주, 고구마같이 주렁주렁 나왔다.
단순히 베이런을 수하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선 발걸음이었건만.
전수 조사를 통해 파악된 현실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대규모 인신매매.
그것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영주성 안마당에서.
예전에 회귀 전에는 왜 이것을 몰랐을까.
이놈의 영지는 썩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이 대대적인 스캔들의 끈을 쫓아 올라가다 보니, 전직 경비대장을 거쳐.
영지의 몇 없는 기사까지 연이 닿았다.
물론 기사들은 그저 수하들의 잘못을 묵인한 것뿐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죄의 심도가 이토록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옆을 지키던 집사장이 호통쳤다.
"닥쳐라! 감히 죄인 주제에 무슨 변명이란 말이냐. 오늘 소영주님께서는 네놈들의 악죄를 처단하고, 영지의 기강을 다질 것이다!"
"히이익!"
"제, 제발!"
"으아아아아아악!"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데미안이 손짓을 하고.
스르릉.
집행인의 칼날이 다섯 병사의 목을 갈랐다.
푸확!
뎅그렁!
존슨가를 주름잡던 병사들.
거기에 고아원의 아이들을 사창가로 팔아 치우던 고아원장까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윽고 터져 나온 함성.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카를로스 영지 백성들의 함성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처형장의 인근.
불 꺼진 홍등가에서는 여러 여인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있었다.
"아아...."
"흑, 흐윽."
"저 개자식들. 나쁜 새끼들. 흑."
"됐어. 이제 다 끝났어."
"그래. 이제 된 거야. 소영주님께서 모두의 복수를 해 주신 거야."
존슨가의 고아원.
그곳에서 팔려 오듯 홍등가에 자리 잡은 여인들은 오늘.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