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처형식이 있고 난 후.
이른 저녁.
영주성 내 기사전용 연병장에서는 때아닌, 고성이 터져 나왔다.
데이비스 기사단장이었다.
"뭣!? 그놈들이 죽었다고? 누구한테! 누가 우리 애들을 죽였다는 거냐!"
"그, 그것이 소영주님께서 직접 재판을...."
"재판!? 그 망나니 녀석이 무슨 재판이란 말이냐! 겨우 천한 놈들 따위 때문에 병사들을 죽이는 영주가 어딨어! 병사들이야말로 영주의 힘이나 마찬가지건만!"
콰앙!
카를로스 영지의 치안과 병권을 책임지는 기사는 노성과 함께 발을 굴렀다.
"히익!"
소식을 전한 병사는 그들의 진노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병사를 지휘하는 자는 공식적으로 데미안 소영주이지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는 많지 않았다.
이미 몇몇 고참 병사들은 실질적으로 데이비스의 휘하에 있었고, 그 고참의 휘하 병사들은 이미 사병화되어 데이비스의 명에만 움직였다.
사실상 이번에 죽은 병사들은 소영주의 힘이 아니라 데이비스의 힘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제이슨이라니. 감히 내 동생을 그런 식으로 처리해?'
말도 안 된다.
제이슨.
데이비스의 배다른 형제.
데이비스가 제이슨과 같은 핏줄임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지만, 그것 따윈 알 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나 몰래 소영주가 야밤에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지. 심지어 제이슨이 죽은 건 타격이 크다. 사창가를 통해 한검회의 자금줄을 넉넉히 보급하던 녀석이건만, 녀석이 없으면 나중에 혁명을 이룰 때에 준비할 자금이 곤란해질 수 있겠어.'
한검회.
그들의 데이비스를 향한 충성심은 이미 하늘을 찌르는바.
그리고 그 충성은 금화와 미래에 보장된 신분에 근원한다.
특히나 자금 문제는 당자의 현실이었다.
자금난이 계속되는 그들의 충성심이 변심하고, 변절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면 끝이다.
아드득.
이가 갈렸다.
마음이 급했다.
최근 방탕한 소영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그의 절대적인 군권이 조금씩 흔들렸다.
위기였다.
군권.
데미안이 정식 영주로 취임하기까지 한정적으로 주어진 권한.
이 군권을 쥐고 있는 동안 데이비스는 미래를 도모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사창가의 자금줄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공교로운 타이밍에 그 사창가의 자금줄이 무너졌다.
심지어 자신의 손속이 되었던 병사들도 공교롭게 죽었고.
그리고 그 순간.
데이비스의 등에 한 줄기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소영주 그 녀석이 이걸 알고 제이슨 패거리를 소탕한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 죽은 병사들도 다 한검회 소속의 병사들인데....'
하지만 이내 데이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비밀결사대는 음지의 조직.
점조직 형태가 기본이었고, 그 자금줄과 회원이 누구인지 그를 제외하곤 정확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까지의 소영주의 행보는 모두 데이비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기사를 임명하다니. 그것도 길거리 부랑아를!'
모두가 잊고 있었지만, 기사의 임명권은 영주의 오롯한 권한이다.
심지어 길거리 부랑아를 기사로 임명하는 것도 원칙적으론 가능했다.
다만, 그런 경우가 없었을 뿐이지.
그런데 데미안이 베이런이란 애송이를 기사로 임명한 건, 그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치, 기사회에 누가 기사회의 주인이고 인사권을 쥐고 있는지.
그것을 일깨워 줄 요량인 것처럼.
데이비스의 권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곧, 서늘한 긴장감이 데이비스의 등에 스쳤다.
데이비스는 결심했다.
'내 건방진 소영주의 콧등을 직접 눌러 주리라. 그리고 예정된 시간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겠어.'
한 영지의 기사가 그의 주인에게 품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그때.
그가 황급히 소영주를 알현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쿠웅.
쿠웅.
그의 방문을 건방지게 두드리는 인기척이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헉!?"
"여기 있었군, 데이비스. 날 찾았다고 들었네만?"
방해꾼의 정체.
데미안이었다.
* * *
데미안을 마주한 데이비스는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소영주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아아아악!"
쿵!
쿵!
고성과 함께 빨라지는 걸음.
이번만은 단단히 따질 생각이다.
물론 따질 명분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까지 소영주.
그는 데이비스를 눈앞에 본 것만으로 오줌을 지릴 것처럼 벌벌 떨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솔직히 심했다.
재정관을 처형하고 베델 상단주에게 벌을 준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건 군부를 건드린 문제였으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데이비스는 정제되지 않은 살기를 있는 힘껏 발휘했다.
우우우우우웅.
그 기세가 주위의 공간을 장악한다.
그는 기사.
그것도 험지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며 실전을 거듭한 기사였다.
심지어 마나 유저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이 영지에서 '물리적으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기도가 예전과 달라졌기에 그가 직접적으로 내뿜는 기세는 애송이 소영주가 버틸 것이 아니었다.
소영주가 겁을 먹어 오줌이라도 지리게 만들 요량이었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군부 내에서 소영주의 입지는 바닥에 떨어질 터.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데이비스가 데미안의 앞에 다가간 순간.
'흐음!?'
순간 데이비스의 걸음이 급속도로 멈췄다.
그리고 당황했다.
'어, 언제 이렇게 달라졌지? 키도 조금 더 큰 거 같고, 눈빛도 달라졌잖아.'
놀라웠다.
겨우 방탕한 소년에 불과했던 소영주.
그의 주인은 그를 마주할 땐 항상 눈을 피하며 손을 떨던 애송이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선 데미안은 데이비스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고.
또한, 강렬한 살기를 내뿜으며 조용히 데이비스를 압박했다.
'마, 말도 안 돼.'
순간 숨이 멈춘 것은 데미안이 아닌 데이비스였다.
몬스터뿐만 아니라 사람조차 셀 수 없이 학살한 그였는데, 오히려 위축되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데미안의 앞에서 위축되는 것은 자신인지.
어째서 한 명의 강자를 보는 것같이 온몸이 절로 긴장되는지.
데이비스는 알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데미안이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날 찾았다고 들었는데, 왜 말이 없는가?"
"그, 그것이...."
어째서 기사단과 자경단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일을 벌였냐 따졌을 테지만.
그리고 함부로 영지 내에서 혈겁을 일으켰냐고 또 따졌을 테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데미안의 모습에 데이비스는 그저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사실 이 영지의 주인은 소영주였고, 그의 불만은 아무런 명분도 없었다.
"...."
말을 잊은 데이비스를 향해 데미안은 나직하게 경고했다.
"조심하게."
"예!?"
"내가 뭘 조심하라는지는 알 텐데. 자네의 방종한 태도도 언제까지 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
일방적인 경고다.
그것과 동시에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데미안은 고개를 획 돌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데이비스는 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달라졌단 말인가.'
데이비스는 불끈 쥔 두 주먹을 펴 보았다.
땀이 흥건했다.
그리고 확신과 함께 결심이 섰다.
데이비스.
이 영지를 먹어 치우려고 작정한 기사의 반란이 조금 더 빨라졌다.
'한검회를 소집해야겠어.'
힘의 균형추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전.
어서 역사의 날을 바로잡아야 했다.
* * *
데미안은 베이런을 공식적으로 자신의 기사로 선포했다.
기존 기사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누가 감히 이 영지의 주인이 된 나의 신성한 권리를 따진단 말인가!"
쿠웅!
데미안이 고성을 내지르며 검집 채로 대리석 바닥을 내리찍었다.
곧 주위는 잠잠해졌다.
반대는 없었다.
사실 반대도 웃기다.
월권이다.
영주가 자신의 기사를 서임하는 건 영주의 오롯한 권리.
반대는 있을지언정 그것은 하나의 의견과 이견일 뿐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 데이비스 기사단장이 가만히 묵인했다.
그는 기사회를 이끄는 수장이자 쓰러진 영주를 대신해 군권을 대리하는 자.
그의 침묵은 묵인이나 다름없었다.
"크흠...."
"킁!"
데이비스 기사단장의 눈치를 살피던 몇몇 기사들이 이내 잠잠히 목소리를 줄였다.
나머지 기사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한검회 소속의 기사는 데이비스 기사단장의 뜻에 따랐고.
한검회 소속이 아닌 기사는 그저 속으로 불만을 삼킬 뿐, 소영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데미안은 베이런을 영주성 안으로 들였다.
물론 엘리스도 함께였다.
성대한 행차는 아니었다.
조용했지만, 다만 지켜보는 이는 많았을 뿐.
영주성.
그리고 그 안의 내성.
넓고 넓은 카를로스 영지에서 영주성이 가지는 의미. 그것은 단순히 안정된 거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북쪽의 몬스터의 습격은 신경 쓰지 않아 안전을 보장받고.
거기에 최소한 카를로스 남작가의 중추를 맡고 있는 일원임을 방증한다.
빈민가인 존슨가의 환경과는 차원이 다른 곳.
카를로스 영지의 지배자와 함께 거처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굳게 닫혀 도개교를 주위로 해자가 뺑 둘러쌌다.
그 위로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데미안과 눈을 마주친 병사가 외쳤다.
"소영주님께서 오셨다!"
"성문을 열어라!"
드르르르르륵.
문지기가 외치자 웅장한 소리와 함께 도개교가 올라가고.
굳게 잠겨 있던 내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펼쳐진 영주성의 내부.
베이런과 엘리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오오오오오오!"
"우-와-아!"
아무리 낙후된 북부의 남작가라지만, 영주성은 영주성이다.
홍등가가 즐비한 존슨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법.
둘의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저희가 정말 이런 곳에 살아도 되는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털썩.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베이런이 다시 한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옛적 예식이나 고성의 모자이크 양식에서나 보던 그런 전통적인 기사의 서약이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그만! 다들 보는데, 뭐 하는 짓이냐."
"아닙니다. 제가 평생 보은하며,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베이런은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쿠웅!
난데없이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
데이비스의 살기에도 시큰둥했던 데미안은 이번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베, 베이런 지금 뭐, 뭐 하는 거냐?"
"으허어엉. 소영주님! 아아! 소영주님! 소영주님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서! 으허엉."
쿵!
쿵!
쿵!
머리를 세 번이나 바닥에 찍었다.
그 모습이 뭐랄까.
너무나 기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검의 베이런이라는 고고한 기사를 알고 있던 데미안 입장에서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독검 베이런.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고고한 검사.
그 광오한 황제마저 베이런을 길들이기를 포기했었고, 잠시나마 낭객으로 거두는 게 한계였다.
그렇게 임시직으로 2군단장을 맡았던 그 독종.
황제의 명마저 무시했던 그 고고한 기사가 두 눈을 반짝이며 데미안을 응시했다.
그 과묵하고 표독했던 베이런이 이런 모습이라니.
회귀 전에도 광증에 걸린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광증인 것 같았다.
데미안은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 그만! 그만하거라 베이런."
"오, 오라버니. 그, 그만 해요! 남들이 보잖아요!"
"으허어어어어엉! 주군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서 우러러... 볼 수...."
요상한 노래를 곁들이더니, 이내....
쾅!
쾅!
쾅!
연이어 세 번을 머리를 찍었다.
이윽고 베이런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저번처럼 이마가 핏물로 물들진 않았다.
하지만 기괴한 건 마찬가지였다.
"...."
데미안이 말을 잃자, 조심스럽게 엘리스가 데미안의 옆으로 다가왔다.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 오, 오라버니께서 최근에 로망 소설에 빠져 있었던지라."
"스콰이어들에게 그 말도 안 되는 기사도 정신을 함양시킨다는 판타지 소설 말이냐?"
"네.... 아마 그걸 보고 저런 거 같긴 한데... 제, 제가 다 죄송하네요."
"...."
기사도에 미친 기사도 저러진 않는다.
기사와 영주의 관계는 사실 동맹이나 고용 관계와 같다.
무조건적인 충성은 사실상 소설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지의 가장 큰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그레고리도 기사가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한데. 예전에 황제의 기사가 됐을 때도 그의 명령에 시큰둥하면서 반응했던 게 베이런 아니었던가?'
그래서 극약 처방으로 가장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 베이런의 은인이 된 것인데.
그게 좀 과했던 모양이다.
'이건 무슨 충성을 넘어서서 뭔가 주인 만난 강아지 같은 느낌인데.'
만약 베이런이 수인족이었다면, 지금쯤 살랑살랑 꼬리라도 치고 있었을 거 같은데 반응.
'어쨌든 앞으로 부려 먹을 거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일이려나.'
따지고 보면 나쁠 건 없었다.
"후후후."
뭐든 베이런의 충심을 얻을 수 있으면 남는 장사다.
아니, 지금의 선의가 억만금의 가치가 있는 거다.
그리고 생각했다.
'베이런뿐만이 아니다. 마탑이나 용병, 몰락한 귀족들 쪽에서도 지금은 그리 좋게 대우받지 못하는 미래의 신성들이 잔뜩 산개해 있지.'
이건 기회였다.
저가 매수의 기회.
미래에 보물 중의 보물로 탈바꿈할 존재들은 작은 선의로 내 편으로 만들 기회!
"후후후! 후하하하하하!"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데미안이 베이런의 양어깨를 다잡았다.
"어서 일어나야지, 베이런. 내 충직한 기사여! 그래야 안으로 들어가지."
"옙! 주군의 명이시라면!"
순진한 녀석 같으니라고.
밝은 미소를 짓는 베이런을 지켜보며 데미안은 녀석이 9할 정도는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데미안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베이런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미래의 독검 베이런을!
때마침.
집사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
하지만 그런 표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소영주님."
"오, 집사장. 그나저나 베이런이랑 엘리스는 어디에 기거하면 되려나?"
"크흠! 비어 있는 내빈실이 있습니다. 아마 거기를 조금 손보면 될 것 같군요."
"내빈실이라...."
"지금으로선 그게 한계입니다, 소영주님... 기사들의 등쌀에 저 어린 소년이 못 버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내빈실.
임시로 거주하는 곳.
아무래도 데미안의 기사이기보다 손님의 자격으로 영주성에 들이는 모양새다.
하긴. 그레고리 집사장은 얼굴도 그렇고 베이런과 엘리스를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마 기존 기사들의 반발은 더욱 심하겠지.
그만큼 파격적인 인사니까.
"아...! 설마 제 존재가 소영주님께 누가 되는 것입니까?"
베이런이 조심스럽게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서야 실감한 것이다.
데미안이 얼마나 자신에게 대단한 편의와 신뢰를 보인 것인지.
집사장마저 조심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호의를 보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안다.
'풋. 겨우 마나도 각성 못 한 기사들의 등쌀에 못 버틴다고? 말도 안 되지. 그 독검의 베이런이 일개 기사들 사이에서 기도 못 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베이런이 녀석들 사이에서 못 버틴다고? 반대겠지. 녀석들이 베이런 사이에서 못 버틸 거다."
"흐음. 그렇습니까?"
집사장이 못 미더운 표정으로 베이런을 내려보았다.
아무리 대단해도, 일개 빈민가 소년에 불과한 자가 기사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다니.
그만한 체력과 정신력을 지녔다니.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데미안의 무조건적인 신뢰.
그리고 판단력.
그것을 믿을 뿐.
곧 집사장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이런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제 동생까지...!"
"당연히 내성에 같이 들 것이다."
"헉!"
"엘리스가 존슨가에 홀로 있으면 네가 맘 편히 날 보좌할 수 있을까 싶네만."
데미안은 베이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큰 쐐기를 박아야 했다.
베이런의 마지막 근심.
여동생 엘리스.
그 걱정마저 데미안이 책임진다면, 베이런의 충심은 9할이 아니라 10할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가지.
"그리고 집사장!"
"예, 소영주님!"
"어디서 용한 의원을 찾아보게나. 돌팔이 같은 녀석들 말고."
"흐음. 설마!? 존슨가에서 어디 다치셨습니까?"
"그럴 리가."
"그러면...."
"내가 아니라 저 아이가 필요한 것 같은데."
"흐음?"
모두의 시선이 데미안의 두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네?"
베이런의 여동생.
엘리스였다.
"여기 있는 동안 적절한 치료가 병행되어야겠지."
"하, 하지만 엘리스의 병은 불치병인 데다가 그 비용도 만만찮은데...."
"내가 내 기사를 위해 그것도 못 할 것 같은가, 베이런."
"...!"
순간, 망치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베이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었다.
베이런이 성안에 들면서 가장 기뻤던 것.
그것은 검을 들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내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녹봉을 받아 소중한 여동생의 병구완도 책임질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런데 그 걱정까지 염려한 데미안의 배려.
베이런으로서는 상상도 못 한 선물이었다.
주르륵.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감동에 젖은 사내의 눈물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주군! 평생! 평생 따르겠습니다, 크흡!"
다시금 베이런의 눈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전율과 감동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데미안은 황급히 외쳤다.
"자, 잠깐! 무릎 꿇지 마!"
"넵! 무릎을 꿇지 않고 머리만...."
"머리도 박지 마!"
"하, 하지만 제 하해와 같은 주군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게...."
"다 하지 마!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냥!"
"하지만 기사의 제1덕목은 충성이라고...."
"미친! 어떤 미친 기사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면서 충성을 바치나!"
"그, 그렇습니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는지, 베이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아니, 이게 그럴 만할 일인가?
데미안이 고뇌에 빠져 있는 동안.
슬그머니 엘리스가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했다.
'...오라버니 정신 개조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 그래. 부탁하지.'
한동안 베이런이 알고 있는 기사도와 명예를 엘리스가 교정시키는 동안.
긴 한숨을 내쉰 그레고리 집사장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저기, 소영주님.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집사장은 데미안에게 현실적인 문제를 상기시켰다.
"한검회의 이야기입니다."
"...!"
데미안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16화
한검회.
마나 유저인 데미안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는 반란 세력.
솔직히 데이비스 기사단장이야 당장이라도 족칠 수도 있었다.
데미안은 마나 유저였으니까.
이제야 겨우 마나를 감각하는 초입 언저리의 기사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
하지만.
'기존 기사들과 고참 병사들의 반발이 상당하겠지. 녀석이 한검회를 통해 역심을 품은 사실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 전에.
데미안은 기사회와 병사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당연했다.
데미안은 무능했으니까.
노력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기초적인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병사들의 얼굴조차 익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를 숙청한다면, 데미안에 대한 반발은 상당할 터.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정확한 파악이 안 된 상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기사회 내에 중립을 지키고 있는 다른 기사들도 인정할 만한 명분.
이럴 때 앞뒤 없는 급작스러운 행동은 금물이었다.
남은 기사들을 다독이며 같은 편으로 둬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집사장은 재미있는 소식을 전해 왔다.
"제이슨 녀석의 잔당을 처리하면서 한검회 녀석들의 꼬리가 잡혔습니다."
"호오? 꼬리라면?"
"소영주님의 판단이 맞았습니다. 존슨가의 사창가는 데이비스 녀석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었습니다. 그곳은 한검회의 자금줄이더군요."
말을 마친 집사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감히 전직 치안대 출신의 병사가 사창가를 운영하면서 반란의 끄나풀이 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데미안 입장에서는 글쎄.
뻔한 내용이었다
데미안의 반응이 심드렁하자 집사장이 화들짝 놀랐다.
"아,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괜히 야밤에 거길 급습했겠나."
"허어. 놀랍군요. 집사부 녀석들도 꽤나 심도 있게 감찰하면서 겨우 알아낸 사항인데. 그러면 혹시 명단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명단?"
그건 몰랐다.
데미안이 두 눈을 반짝였다.
그레고리의 입이 뒤늦게 싸악 찢어졌다.
"후후. 이건 모르셨나 보군요. 제이슨 녀석이 겉보기완 다르게 꼼꼼한 녀석이더군요."
"이중장부를 남겨 놨나?"
"데이비스에게 일정하게 흘러간 자금도 있고, 개별적으로 흘려보낸 자금도 있습니다. 일자와 금액 그리고 상납 장소까지 모두 상세합니다."
"호오.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증좌로군."
데미안이 두 눈을 반짝였다.
비밀 사조직인 만큼, 그 회원이 누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되는지.
그 사실을 알기 힘들었다.
심지어 회귀한 데미안도 그 주요 핵심 인물이 누구인지만 희미하게 알 뿐.
그런 의미에서 데미안은 그레고리의 수완에 내심 깜짝 놀랐다.
벌써부터 성과를 내다니.
그것도 비밀 사조직 조직원의 명단을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 명단이 한검회의 명단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만약의 일'이 발생했을 때 데이비스 녀석에게 찬동하는 건 분명하겠지."
"예. 몇몇 십인대장은 이미 한검회의 소속으로 판단되며, 그 휘하 병사들은 고참 십인대장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 상황입니다. 그 수는 마흔에 육박합니다. 거의 2할이나 다름없죠."
"흐음...."
그 말과 함께 집사장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쪽지를 데미안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데미안은 조용히 위아래를 훑으며 명단을 파악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다행이랄까.
데미안이 기억하는 반란.
그때 주동적으로 활동했던 자들의 명단과 거의 일치한다.
나머지 명단은 분명 데미안도 놓치고 있던 배신자들의 목록이겠지.
이걸로 확실해졌다.
누굴 처단하고, 누굴 품어야 할지.
적어도 가이드라인은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이랄까.
명단에 적힌 한검회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자들과 수괴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아직 많은 병사들이 회유되지 않은 상황이란 거겠지.'
데미안.
그는 배신자를 살려 둘 만큼 맹탕인 사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자까지 처리할 만큼 뻣뻣한 사내도 아니었다.
자신의 과욕 때문에 배신한 자.
살아남기 위해 배신한 자.
그 둘은 다른 법이니까.
후자는 갱생의 여지가 있고.
어쩌면 그런 선택을 강요하게 만든 주인의 책임이 오히려 더 컸다.
데미안의 눈이 그레고리 집사장을 향했다.
신뢰의 눈빛.
집사부의 규모가 확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세력으로 그레고리 집사장은 참모로서 훌륭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이 명단이 바로 그 증거.
역시.
그레고리 집사장을 중심으로 집사부를 키운 건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이 명단.
꽤나 유용했다.
데미안은 히죽 웃었다.
"다행이군."
"예!? 군단의 2할이나 데이비스 녀석에게 넘어간 게 다행이란 말씀이십니까?"
"겨우 2할뿐이다. 아직까지는 말이지."
정확히 2년 뒤.
고든 자작과 함께 데이비스 녀석이 영지를 노렸을 때 데미안을 지켰던 병력의 수.
기사는 셋이나 되었지만, 병사는 채 스물이 안 되었다.
'사실 스무 명도 대단한 거였지. 영지는 파산하고, 유일한 후계자는 검도 하나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등신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최소한 지금.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아직 백오십 명의 병사들은 데미안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다.
"적어도 마흔 명의 병사들만 솎아 내면 된다는 말 아닌가. 이 정도면 훌륭한 것이지."
그 말과 함께 데미안의 주위로 은은한 살기가 뒤덮었다.
"...!"
십 대의 소년이 자아낼 수 없는 기세.
그것은 이미 고령에 접어든 그레고리 집사장도 두려워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 순간 그레고리 집사장은 깨달았다.
소영주 데미안.
그는 그 병사들조차 살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의 주인은 상상 이상으로 성정이 잔혹한 사내였다.
"그럼, 이제 연병장으로 가지."
데미안은 그 말과 함께 연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레고리 집사장은 깜짝 놀랐다.
연병장.
그곳은 데미안이 침거한 이후 몇 년간 단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곳이었으니까.
* * *
"하압!"
"합!"
후웅!
훙!
검과 검이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고 끈적한 땀 냄새가 전해졌다.
영주성 내 연병장은 늦여름보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찼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사선 내려치기 100회 추가다!"
"옙, 마스터!"
데이비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그의 앞에 도열한 스콰이어의 숫자는 모두 넷.
하나같이 곰처럼 단단한 체구를 자랑했고, 그들의 뒤로 흙밭을 뒹구는 수십의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때는 훈련이 한창인 정오.
데미안은 연병장에 당도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데미안이 들어서자.
자신의 종자들을 훈련시키던 데이비스가 데미안과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데미안의 등장에 데이비스가 순간 당황하며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크흠!"
데이비스가 못마땅한 듯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으며 데미안의 앞에 섰다.
곧 고개를 반쯤 끄덕이며 대충이나마 데미안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쿠웅.
노기사 데이비스는 휘두르던 검을 위협적으로 내려놓으며, 데미안 앞에 우뚝 섰다.
위협적인 태도.
불만이 있는 건 알지만.
이건 뭐랄까.
이게 일개 가신이 영주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하늘을 찌르는 건방.
하지만 굳이 내색할 정도까진 아니다.
이런 일로 감정이 동요할 수준은 이제 아니니까.
용병대에서 수십 년 밑바닥부터 구른 경험이 그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데미안은 그런 그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훈련 중인가 보구만, 데이비스 경."
"예. 모두 영지의 앞날을 이끌 동량인지라, 누구랑 다르게 훈련을 게을리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어쭙잖은 비난에 데미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다.
거기다가 동량이라.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대들보라는 양반들이 영지에 가장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제일 먼저 꽁무니를 뺀 건가.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헛소리 중의 헛소리다.
그 시큰둥한 반응에 데이비스는 더욱 열이 뻗치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따졌다.
"존슨가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지요?"
"그래. 알고 있군, 자네."
"뭐, 큰일 하셨습니다. 다만 무슨 치졸한 수법을 쓰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존슨가의 혈겁 사태.
그 사건의 원흉은 데미안으로 점쳐지지만, 데이비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무려 수십이나 되는 사내들. 비록 양아치들에 제대로 된 훈련을 못 받은 자들이지만 그들 또한 북부의 사내들이다.
데미안 홀로 그들을 상대했고, 도륙을 냈다는 사실.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데미안의 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데이비스는 절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뭔가 음흉한 수법을 쓴 것이겠지. 예를 들면 독이라든가.'
독.
무력이 부족한 자가 다수의 강적을 상대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식.
그리고 북부의 사내가 사용하기에는 꽤나 치졸한 방식이기도 하다.
연막 형태의 독은 자칫 고수조차 어이없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바로 지금 같은 경우였다.
나름대로 전직 경비대장이자 꽤나 괜찮은 검술을 익힌 그의 동생이 당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것밖엔 없었다.
아드득.
이가 다시금 갈렸다.
그는 핏줄에 대해 중요히 생각하지만, 사실 사생아 형제 따위에 그런 끈적한 감정은 크지 않다.
문제는 그 죽어 버린 녀석이 보내던 상납금.
그것이 끊기자 대업을 위한 자금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데이비스에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소영주님. 기존 기사들의 허락 없이 이번에 새로운 기사를 들이셨다는데, 맞습니까?"
그의 말에 다른 기사들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들도 이번 사태에 대해 데미안에게 따져 묻지 않았지만, 불만이 상당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냉담했다.
"허락이라 재미있는 소리군. 내가 누구의 허락을 받고 기사를 서임해야 하나?"
"크흠.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기사 한 명을 받아들일 때는 실력 검증이라든가 신분이라든가 제대로 따져야 함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 어리지만 누구와 달리 아주 충직하고, 제대로 검을 쓰는 녀석이지. 신분도 내 보증하지."
"하하. 존슨가 출신 따위에게 신분을 보증한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말씀이로군요. 뭐 충직한 것은 모르겠고, 그 녀석이 제대로 검을 쓴다니. 소영주님께서 그런 안목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아십니까? 기사의 검과 일개 양아치들의 검은 차원이 다릅니다. 겉보기로는 그저 위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에는 깊이가 있는 법이니까요."
"깊이라. 자네는 그 깊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데이비스는 자신의 기세를 피워 올렸다.
우우우우웅.
마나.
비록 입문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는 이 영지에서 유일하게 마나의 시작점에 닿아 있는 입문 마나 유저였다.
미세하게 피어나는 마나와 함께 위협적으로 데미안을 압박했다.
고의로 데미안을 목전에서 살기와 마나로 압박하며 자신의 위세를 떨쳤다.
우우우우우웅.
과연.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예상처럼 데이비스는 이미 마나 유저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가 알고 있던 과거 그대로.
데미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구만."
"크하하! 그렇습니다. 이제 마나 유저 입문 단계입니다. 제가 이 영지의 마나 유저가 된 것입니다!"
"축하하네. 우리 영지 기사 중에서 첫 번째 마나 유저인 건가."
"그렇습니다. 후후후. 이 기사 데이비스가 이제 카를로스 영지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크하하하하!"
저 자신만만한 태도가 꽤나 거슬렸지만, 솔직히 축하할 일이긴 했다.
이런 시골 영지에 마나 유저나 되는 기사가 탄생한 건, 꽤나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마나 유저.
반복된 훈련과 실전. 그리고 타고난 재능이 더해져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체내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마나 코어라는 가상의 공간에 마나를 응축하고 그 힘을 빌려 쓰면 능히 맨손으로 철을 우그러뜨리고, 바위조차 갈라지게 하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스의 충심이 깊었다면, 데미안도 진심으로 기꺼웠을 터.
문제는 데이비스가 저 강력한 힘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영지를 배신한다.
순수하게 기뻐하기만 할 순 없었다.
저 검이 어딜 향하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랄까.
데이비스는 마나 유저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 수준이 조악했다.
곧 자신의 힘을 한계까지 사용한 데이비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흐음. 허억. 헉. 허억. 헤엑. 헥. 헤에에엑."
처음에 광오한 태도는 어디 가고,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잠깐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완전히 탈진해 버린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데이비스는 조심히 힘을 거뒀다.
겨우 입문의 수준이니 이렇게 기세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마나를 극도로 소비했다.
데미안은 데이비스의 수준을 평했다.
'겨우 이 정도라니. 한심할 정도로군. 내 마나 코어가 콩알만 한 수준이라면 데이비스는 쥐똥만 한 수준이야. 마왕 원정군의 말단 기사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회귀 전, 데미안 또한 마나 유저의 경지에 올랐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것은 마나 중독의 상태에서도 마나 유저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사선의 사선을 넘나들었던 경험.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단련과 오기까지. 그 모든 것을 극복한 용병왕 벨크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수십 년 동안 꽤나 많은 마나 유저를 보았고, 그의 기준은 이미 제국의 기준과 같았다.
심지어 초급 마나 유저의 수준으로 중급 이상의 기량을 냈던 데미안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눈앞의 데이비스 수준은 그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
하지만.
다른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오오오! 역시 데이비스 경이로군!"
"엄청난 존재감이야! 역시 마나 유저라 이건가!"
"허허허! 이 카를로스의 최고의 기사답구만!"
지켜보던 이들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그 작은 힘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연병장의 기사들은 데이비스를 향해 경의를 표했고.
스콰이어들은 짝사랑하는 처녀들을 본 것처럼 얼굴이 상기되었다.
병사들은 살아 있는 신이라도 보는 것 같은 경건한 태도다.
어쨌든. 아무리 내려치더라도 검을 잡은 이들에게 마나 유저란 그런 존재였다.
절대적인 경의를 보낼 그런 강자.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일 수밖에 없다.
주위 병사들과 스콰이어. 심지어 기사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며, 데이비스는 데미안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 과시가 너무 유치해서 한심할 정도였지만, 데미안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마나까지 피워 올리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크흠. 허억. 크헉. 허. 마, 마나 각성자를 눈앞에 두고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허억. 헉."
이게 말인가.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밖에.
이미 지금쯤 데이비스가 마나를 각성하게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의 좋지 않은 기억이 상기되었다.
데미안은 얼굴을 구겼다.
'그때 이 녀석은 겨우 입문 수준으로도 이곳 변방에서는 명성을 떨쳐서 여기저기 자랑질을 했지 아마.'
심지어 자신이 카를로스 영지에 남아 줄 테니, 자신에게 감사하라며 금전까지 요구하며 협박했으니.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원한이 깊게 배겼으니까.
데미안이 그러든 말든.
이제 자신의 힘을 과시할 대로 과시했다고 느낀 데이비스는 곧 어깨를 으쓱이며 본론을 꺼냈다.
"뭐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소영주님은 오랜만에 여기까지 오신 이유는 뭡니까?"
"내가 최근에 검에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검... 말입니까?"
데이비스가 두 눈을 좁히며 데미안을 위아래로 쏘아보았다.
검술은커녕 기초적인 체력 훈련조차 못 버티고 앓아누웠던 것이 소영주 아니었던가.
최근 존슨가의 혈겁도 사실은 외인의 힘을 빌렸다는 소문이 정설이었다.
데미안의 힘으로 그런 일을 벌였다고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검이라니.
데이비스는 황당했다.
아니, 지금에서라도 제정신을 차리면서 내실을 다지려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데미안의 말에 데이비스 기사단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고 싶네만."
"병사들 따위와 함께 말입니까? 저나 다른 기사에게 직접 사사한 게 아니라요?"
"그렇네만."
"그러면 검술 훈련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검술 훈련? 필요 없는데?"
"...!"
잠시간의 정적.
이윽고 데이비스는 파안대소하며 고성을 높였다.
"음!? 크하하하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이거, 얼마나 기초가 안 되면 병사들과 같이 훈련을 받겠다는 겁니까. 크흐흐, 이거 완전 실망입니다만!"
데이비스가 데미안을 향해 노골적으로 비웃었지만, 데미안은 달랐다.
'이런 반응이라니. 성공이군.'
전혀 경계하지 않는 태도에 데미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병사들과 밑바닥부터 함께하는 것.
그것은 데이비스의 군권을 가져오는 첫 단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신병 기수가 분명 230기였지, 아마?'
카를로스 영지 신입 병사 230기.
그건 데미안이 중부대륙에서 용병왕으로 맹활약을 펼칠 때.
북부에서 전설의 기수라 불린 대(大)전사들의 출신이었다.
17화
데미안이 용병왕 벨크로 활약하던 시절.
북부에는 전설이 하나 있었다.
전설의 기수.
이미 멸문당한 카를로스 영지의 특정 기수의 병사들은 괴물 같은 사내들만 모여 있었다고.
그들의 실력은 감히 독검 베이런과 견줄 수 있으니, 그때의 카를로스 영지는 수많은 영웅을 품고 있던 요람이었다고.
만약 카를로스 남작가가 그들만 제대로 육성했어도 북부의 맹주로 군림했을 거라고.
그게 바로 카를로스 230기 기수의 신병들이었다.
데미안이 당장 떠올린 명망 있는 검사만 해도 셋이나 된다.
삭풍의 제론.
논검기사 조엘.
강철검 바사다.
하나같이 대전쟁에서 자신의 명성을 날렸던 검객들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일반적인 영지에서 전 대륙에 이름을 떨칠 검사가 나오는 일은 수십 년에 한 번이나 있을까.
그런데 특정 영지.
그것도 특정 기수에서 그런 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카를로스 영지의 멸문은 어쩌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영지 병사로 한곳에서 아무런 인생 굴곡 없이 시간을 보냈다면.
그들이 명성을 떨칠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때는 난세.
그들은 카를로스 영지가 멸문되었을 때,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고.
혈풍을 피할 수 있었다.
시련은 영웅을 만든다고, 그렇게 그들은 용병이 되어 북부를 떠돌았으니 그것이 그들의 명성의 첫 시작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전설의 기수가 시작되는 때가 바로 지금.
데미안이 회귀한 지금 이 시점이었다.
"최근에 신병들을 모집해서 기초 체력 훈련이 시작했다고 알고 있네만?"
"후후후. 그렇습니다. 각 마을에서 근골 좋고 근성 있는 꼬맹이들을 추려서 영지 병사로 키우는 중이죠."
"내가 그들과 함께 훈련하고 숙식도 함께하려고 하네만."
"크하하하! 이거, 참. 검술 훈련도 아니고 겨우 체력 훈련을 함께한다니.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검술을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어디 가서 마나 유저 초입 기사의 검술을 배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됐네. 나는 우리 가문의 가전 검술이 있건만. 어찌 자네에게 가르침을 받겠나."
"후후후. 그래요, 그래.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만 나중에 무르시면 안 됩니다. 크하하핫!"
그 말과 함께 데이비스는 뭐가 기쁜지 허허허 웃었다.
그리고 데미안도 따라 웃었다.
전설의 기수.
그 세 명의 대전사가 명성을 날리기 전.
그들을 자신의 검으로 바꿀 기회였으니까.
먼 미래.
그들과 어떻게든 연이 닿고 싶어 억만금을 썼다는 상인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숙식하며 심복으로 삼을 기회가 넝쿨째로 굴러 온다고?
또한, 데미안은 알고 있다.
전우애.
그것은 신분을 초월한 그 무언가가 있는 단어였다.
함께 연병장에서 구르고.
함께 사선을 헤매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은원이 얽히고설킨다.
그 친밀도.
절대 낮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친밀도를 알아서 쌓을 기회가 찾아왔다.
'훌륭하군.'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 * *
데이비스는 도저히 데미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군. 무려 귀족이나 되는 작자가 병사들 따위와 연병장을 함께 뒹군다고? 이 녀석은 기사가 될 생각이 없는 건가?'
기사인 데이비스는 데미안이 하루아침 만에 지능이 떨어졌는지 의심했다.
북부의 귀족은 기본적으로 기사가 되어야 한다.
기사.
그들은 선택받은 전사들이자, 병사들과는 신분 자체가 다른 초인들이다.
그런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병사의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보통은 훌륭한 기사의 시종 노릇을 하는 스콰이어의 과정을 수료하거나.
때로는 외부의 기사를 초빙해 검술을 전수받는다.
무엇보다.
'검술은 귀족의 상징이지. 일개 병사들이 아무리 뛰어난 전과를 낸다고 해도 쉽게 검술을 배울 수도 얻을 수도 없어. 검술을 배웠느냐 아니냐에 따라 신분이 나뉘는 게 지금의 세상이니까.'
검술은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그 배움 자체가 신분이었다.
그리고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검술이 필수였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검술을 전수받고 스콰이어가 되어야 하는 게 정석이었다.
'기사까지 갈 것도 없이 일개 스콰이어도 홀로 병사 둘은 상대하는 법. 그런데 겨우 한다는 발상이 신병들과 함께 체력 훈련이라니. 역시 소영주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심지어 데미안은 귀족이었다.
스콰이어도 아니고, 일개 기사도 아닌 무려 이 영지의 주인이 될 귀족.
그런 데미안이 정식 기사가 되는 과정을 무시하고, 무려 병사들과 함께 연병장을 구른다니.
다른 귀족이 안다면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북부의 훈련은 거칠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신병들이 받는 기초 체력 훈련은 더럽고, 고되기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더러운 흙바닥과 진창에서 곤죽이 되도록 구르는 방식.
절대 귀족적이라고 할 수 없고 고참 병사들조차 그들과 같은 연병장을 쓰면 모욕적이라 받아들인다.
그것을 데미안이 스스로 자처하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지. 베이런도 이참에 나와 함께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을 걸세."
"그 애송이 녀석이 바로 이 녀석입니까?"
데이비스의 시선이 데미안의 옆을 향했다.
"크흠! 주군의 검! 기사 베이런이오!"
베이런은 가슴을 펴며 데이비스를 노려보았지만, 가슴을 부풀리는 어른스러운 가장은 오히려 더 우스울 뿐이었다.
"기사 베이런!? 풋! 재미있군."
데이비스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하는 키.
비쩍 골은 게 일반 병사보다 못한 체격 조건.
나이도 어리다.
무엇보다 신분도 비천했고.
"그래. 베이런 경은 어디 누구의 검을 전수받았는가?"
"크흠...! 소영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소만."
베이런은 반짝이는 눈으로 데미안을 응시했다.
베이런이 본 데미안의 경지.
그것은 이미 완성된 한 명의 검사의 경지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를 데이비스의 조소는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아아, 소영주님? 평생 검 한번 제대로 잡아 보신 적 없으신 이 소영주님 말인가?"
"그럴 리가! 홀로 다수의 적들을 상대하면서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셨건만!"
"그 헛소문을 믿는 건가? 푸하하하핫!"
"허, 헛소문이 아니다! 내가 직접 본 것이다!"
"푸핫! 크하하핫!"
베이런이 분개하며 데이비스에게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성을 냈다.
하지만 데미안이 곧 베이런을 한 손으로 막으며 제지했다.
"그래. 직접 서임한 기사이지만, 정식으로 스콰이어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 말이지.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속성으로 병사들 사이에서 배울 것을 배우려고 하네만."
"하!? 기사가 병사들 사이에서 배울 것이 있다니, 이것 참. 내가 평생을 기사로 살았지만, 이것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린 없군요!"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 상황이 즐거웠다.
'뭔가 좀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귀족이 스스로의 격을 낮추는 바보 중의 바보로구만.'
귀족은 귀족다워야 귀족이고, 남들이 우러러본다.
지금 데미안의 행동은 스스로 귀족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데미안의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어찌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기가 똥밭에 구르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정도.
곧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주가 미천한 신분임을 스스로 만인 앞에서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면 나로서도 이득이지. 게다가....'
비쩍 골은 소영주가 훈련을 버텨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오히려 일반 병사의 수준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병사들 앞에서 드러난다면. 그의 권위는 바닥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
데이비스는 빠르게 결심했다.
조금 더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게.
한 가지를 더 덧붙이기로.
"후후후.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당장 병사들의 훈련에 참가하시죠.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만."
"조건?"
"군령은 엄격한 법입니다. 모든 훈련은 차별 없이 동등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소영주님께서 군주로서 병사들 앞에서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면 사기가 땅으로 바닥 칠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스콰이어들이 받는 일대일 검술 지도도 아닌, 단순한 병사들의 체력 훈련입니다. 만약 기초적인 체력 훈련조차 부족해서 소영주님께서 낙오한다면 앞으로 이 연병장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약조할 수 있습니까?"
꽤나 가혹한 조건.
연병장에 발길을 들이지 말라는 말은 기사가 되지 말라는 말이고, 또한 정당한 이 영지의 영주가 될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일개 가신이 할 말은 아닐 만큼 모욕적인 언사.
리스크도 크고, 실패 확률도 크다.
'너무 과했나?'
이번만큼은 스스로가 과한 제안을 했는지 데이비스는 살짝 떨렸다.
데미안의 심정을 헤아린 것이 아니다.
혹시나 빈정이 상하거나 두려움에 잠겨 데미안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떡하지.
무리수를 던진 건가.
그런 걱정이 데이비스의 머릿속에 감돌았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오히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돼야 할 맛이 나지. 알겠네."
"예!?"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아니, 오히려 데미안은 거기에 더해 자신이 직접 조건을 걸었다.
"대신, 만약 내가 버틴다면 말이지. 얼마 뒤 추수절 때 함께 훈련한 신병들을 직접 지휘해서 추수절의 행사에 참가하고 싶네만."
"흐음...!"
나쁠 것 없는 제안이다.
애초에 소영주가 기초 체력 훈련을 통과할 수도 없고.
오히려 실전에서 바보짓을 하는 것도 데이비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혹여나 성공하더라도 글쎄.
신병들만으로 추수절의 행사에 참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개망신을 당하겠지.
다만.
'병아리나 다름없는 신병이라지만 병력의 지휘권을 일시적으로 양도해야 하는데 말이지. 그건 좀 곤란한데..., 흐음....'
병권은 데이비스가 가진 유일한 힘.
정당한 이 영지의 주인인 데미안을 지금처럼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데이비스가 조금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데미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겨우 신병 몇 가지고 그렇게 곤란하다면 뭐 자네에게 직접 기사 훈련을 받는 것도 괜찮은데 말이지. 물론 자네의 비전 검술을 전수받고 싶네만."
비전 검술.
그것은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가문의 비술.
데이비스는 자신의 검술에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다. 혹여나 자신의 검술로 소영주의 경지가 강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사람 잡는 법이니까.
"그, 그건... 흐음. 알겠습니다. 대신 나중에 다른 말 하시면 안 됩니다."
"자네야말로."
"풋. 그럴 리가요."
기사장 데이비스가 소영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밤. 훈련 교관에게 지금까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체력 훈련을 감행하라는 특명을 내릴 것을.
비릿한 미소를 지은 데이비스가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
"알겠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저를 위시한 기사단 내에서는 다시는 다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두 분 다 한 달 뒤에 있는 체력 검정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주 훌륭하군."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몸을 돌려 연병장 밖으로 나갔다.
점차 멀어져 가는 데이비스는 소영주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광소를 터트렸다.
"후후후. 흐흐흐. 으하하하하하!"
'성공이군. 성공이야. 이제 모두 앞에서 소영주를 개망신시키는 일만 남았구만.'
만족스러웠다.
내일.
최근 자신만만해진 소영주의 콧대가 예전처럼 꺾어질 것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실망감에 젖어 방 안에 칩거를 선언하고 다시금 향락가를 매일같이 찾아가겠지.
그러면 이 영지 내에서 데이비스의 입지는 더욱 올라가고, 어쩌면 더한 야망도 품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기대되는군. 기사단장 데이비스에서 남작 데이비스라. 크하하하하!'
오랫동안 품은 야망.
그 생각에 데이비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성공이군.'
데미안 또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나마 손에 쥔 군권을 허투루 사용할 생각 따윈 없었다.
* * *
다음 날.
같은 장소 연병장.
이곳에 모인 병사들과 조교들은 기초 체력 훈련 와중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데, 데미안 소영주님. 1등으로 안착했습니다!"
"베이런 기사님. 2등으로 안착했습니다!"
1등과 2등.
나란히 새로운 신입이 가져갔다.
데미안 소영주.
그리고 그의 기사 베이런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지옥 훈련을 1등으로 안착하셨다고?"
신병 훈련 교관이자, 데이비스 기사단장의 숨겨진 검. 데오니 교관은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파랗게 질려 버렸다.
* * *
기사들의 직속 수하인 오십인대장들이 잔뜩 독이 올랐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끙끙 앓아 대는 놈은 도대체 누구냐!"
"평소대로만, 해라! 평소대로!"
"어디서 잔꾀를 부려! 어서 안 뛰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데미안과 베이런이 두각을 나타내다니.
그들의 주인인 데이비스 기사단장이 알게 된다면 경을 칠 게 분명했다.
더욱 모질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든 간에 그 둘은 낙오되어야만 했다.
"한 바퀴 더 돈다, 실시!"
"악!"
평소보다 더한 독기.
고문 수준에 가깝게 병사들을 잔뜩 몰아세웠다.
병사들이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한숨을 내쉬며 병사들이 조교들을 노려보았다.
'제, 젠장! 도대체 저놈의 새끼는 오늘 왜 더 지랄이냐고!'
'평소대로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젠장! 거지 같구만.'
'아니 왜!? 소영주님이 계시면 더 편하게 굴려야 하는 거 아냐?'
처음 소영주가 자신들과 함께 훈련에 참가한다고 밝혔을 때.
병사들은 안도했다.
데미안 폰 카를로스.
이 영지의 군주가 될 자이자, 영주 대리를 맡은 정점의 존재다.
귀족이라는 초월적인 신분.
어린 스콰이어조차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게 바로 일반 병사들의 현실이다.
기사도 아닌 이 영지의 주인이라니. 너무나 까마득한 존재.
그래서 함부로 예단했다.
당분간의 훈련은 그저 요식 행위로 훈련이 자행될 거란 것을.
무엇보다.
소영주는 기사는커녕 일반 스콰이어보다 못한 반푼이 영주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저 한순간의 치기로 훈련에 참가한 것이 분명했다.
그 모자란 수준에 맞춰 오십인대장들도 감히 강압적인 훈련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새끼들아, 평소대로 해라! 평소대로!"
"낙오되는 새끼는 죽여 버린다, 알아!?"
"젠장할! 악을 써! 악을 쓰라고!"
평소대로는 지랄.
평소보다 배는 힘들었다.
오십인대장들은 그날부터 악마가 되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높은 훈련 강도.
마치 소영주님을 완전히 훈련에서 낙오시키려는 듯, 너무나 거칠었다.
그렇게 평소에는 듣도 보도 못한 훈련이 시작됐다.
피 나고 탈 난다는 육체훈련체조(Physical Training)의 8번째 자세.
그것을 12번이나 반복했을 때 병사들은 오십인대장이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훈련에 이골이 난 병사들도 견뎌 낼 수 없을 만큼으로 거셌다.
하지만 더욱 황당한 것은.
"훅! 훅! 훅!"
데미안의 호흡은 꽤나 안정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뿐이랴.
고참병들조차 힘에 겨워 발을 질질 끄는데, 강철 체력이라도 되는 듯 걸음도 안정적이다.
병사들의 눈이 커지며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마, 말도 안 돼."
"체력이라면 둘째 가라도 서러운 발로크 녀석도 온몸이 땀에 절었는데, 어째서?"
"저 정도면 웬만한 기사님들보다 체력이 좋은 거 아냐?"
훅!
훅!
하나둘씩 병사들을 가볍게 지나쳐 달리는 소영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결국, 선두는 소영주가 가져갔다.
뒤쫓는 병사들은 허탈했다.
"어, 어떻게 소영주님께서 버티시는 거지, 쿨럭."
"말도 안 돼. 나도 이렇게 죽을 거 같은데, 표정에 변화 하나 없으시잖아."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군! 같이 가시죠!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훅! 훅! 훅!"
더 이상한 녀석이 있었다.
베이런.
자격 미달의 기사라고 소문이 난 애송이 녀석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뛰는 자세나 속력만 봐도 재능 자체가 달랐다.
두두두두두두!
거구도 아니건만, 흙바닥을 박차고 달리는 기세는 기사의 돌진과 다름없었다.
가공할 만한 속도.
생긴 건 말라깽이에 서생에 불과했다.
그 애송이 녀석이 선두의 병사들을 모조리 지나쳤다.
이윽고 허탈감에 빠진 병사들.
털썩.
얼이 빠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 소영주님은 그렇다 치고, 저 옆의 꼬맹이 기사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버티는 거냐고, 젠장할!"
"우웩, 우웨에에에엑!"
"저놈도 괴물. 괴물이야."
당연히 데미안에 대한 병사들의 평가는 본능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우웨에에엑. 쿨럭. 저, 전에는 몰랐는데, 우리 소영주님. 대단하시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야. 생각해 보면 존슨가 출신의 문관 주제에 저 정도 기량으로 성장했으면 뭔가 소영주님만의 비법이 있지 않을까?"
"맞아, 맞아. 뭔가 카를로스 가문의 비전이라든가.... 그런 게 있을 수 있어."
"말도 안 돼. 데이비스 기사단장님한테도 가문의 비전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데 그걸 저 미천한 녀석한테?"
"소문은 역시 헛소문이었던 건가?"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첫날과 달리 데미안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더 이상 적대적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함께 똥물을 맞아도 동료애가 생긴다는데, 함께 진창에서 뒹굴며 피 나고 악 소리가 난 지가 오래였다.
소영주라고 해도 동료애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달라진 그들의 눈빛을 가장 먼저 체감한 자.
그것은 바로 데미안과 베이런이었다.
은근한 무시가 감돌던 그들의 시선에 처음으로 경외와 감탄. 그리고 존경의 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데미안의 첫 단추는 성공적이었다.
18화
훈련 교관들은 식은땀에 등 뒤가 축축해졌다.
아니, 온몸에 오한이 든 것만 같았다.
훈련병들의 반응.
예사롭지 않았다.
'녀, 녀석들의 눈빛이 달라졌어.'
'병사들이 소영주님에게 조금씩 감화되고 있어!'
'위기다. 이 훈련으로 소영주의 무능함을 드러내야 했는데, 오히려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기회가 되고 말았어!'
움켜쥔 주먹을 펴 보았다.
그들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관들의 숨겨진 정체.
한검회.
신병 훈련소에 모인 교관들의 소속은 모두 한검회였다.
이들이 품은 이 훈련의 진정한 목적.
간단했다.
괜찮은 재목들을 미리 선별해 한검회에 끌어들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은밀히 소영주를 배제하며, 병사들 사이에서 고립시키는 것.
그런데 병사들의 반응이 예년과 달랐다.
아니, 이상했다.
하나가 되어 똘똘 뭉치다니.
무엇보다 소영주에 대한 존경과 경외 그리고 충성심이라니.
그것은 그레고리 기사단장도 불가능한 업적이었다.
공포에 의한 지배.
그것이 지금까지 병사들을 통솔하는 가장 효율적인 훈육이었다.
이러면 안 됐다.
아니, 있을 수 없었다.
'데이비스 기사단장님이 말씀하셨지. 약속된 때보다 조금 더 <그날>이 더 가까울 수 있다고.'
만약 반란의 때가 왔을 때 이 훈련병들이 소영주에게 충심을 보인다면?
이 훈련병들의 창끝이 향할 곳.
소영주가 아니라 데이비스 기사단장과 자신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드득.
들불처럼 번지는 그들의 감정을 읽은 교관은 이를 갈았다.
수석훈련 교관 데오니.
그는 일개 교관이나 고참 병사가 아니었다.
데이비스에게 직접 검술을 전수받는 한검회의 실세.
교관들은 황급히 황급히 데오니를 찾았다.
"훈련을 중단시킬까요?"
"흐음...."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씨익.
이내 악마같이 웃었다.
'그래.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의 입술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쪽 방면에서는 1류였다.
한창 졸리고 힘들고 배고픈 훈련병들을 조련하는 방법.
쉽다.
분란이 없으면 만들면 될 뿐.
그는 꾀 많은 사내였고, 이미 이쪽 방면에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선착순 훈련을 시작한다."
"아...!"
교관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해한 것이다.
데오니 교관의 의도.
그 사악한 수법을.
"훈련병들이 지들이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야. 짐승으로 만들어라."
"밥을 굶겨서 말입니까?"
"그래. 딱 성적순으로 절반만 밥을 먹여.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게 만들면 될 뿐이지. 그리고...."
"후후후. 갈등을 조성하게 되면 되겠군요."
"그래, 정답이다."
방향성이 결정됐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데오니 교관이 목청을 돋우며 소리쳤다.
"연병장 끝까지 달려라! 선착순이다!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저녁을 배식하겠다! 늦은 놈들은 저녁밥은 없을 줄 알아라!"
"오늘 석식은 이긴 놈이 진 놈 걸 빼앗아 다 처먹는 거고, 진 놈은 쫄쫄 굶는 거다! 알겠냐!"
"제한 시간은 10분. 넘으면 선착순이고 뭐고 다 굶는 줄 알아라!"
훈련병들의 훈훈한 분위기가 일순 돌변했다.
순식간에 훈련병들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녁밥.
모름지기 군인들은 항상 배고픈 법이다.
특히나 척박하기로 유명한 북부에서는 더더욱.
심지어.
오늘은 특식이 준비되었다.
특별히 미지근한 맥주 한 잔도 포함된 특식이 제공된다.
"선착순으로 도착한 훌륭한 녀석들은 나머지 패배자 모지리 녀석들의 특식을 몰아줄 것이다! 알겠나!"
"...!"
고기와 맥주.
그것은 훈련병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약.
제대로 된 식사는 저녁에만 배급된다.
무조건 달려야 하는 순간이다.
"서, 석식!?"
"절반 등수 안에 들면 평소보다 2배나 먹을 수 있다고?"
"젠장, 지면 아무것도 못 먹고 쫄쫄 굶는다는 거 아냐!"
"그것뿐이야!? 지면 내 껄 다 이긴 녀석들한테 몰아줘야 된다고!"
데미안에 대한 충성심?
우정?
의리?
순간, 병사들의 눈에 동료애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두 눈이 벌게져서 그들은 주위를 살폈다.
동료가 아니었다.
경쟁자였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기량을 지닌 데미안과 베이런에 대한 눈빛이 달라졌다.
존경과 경외보다는 질시와 시기로.
그 둘은 이제 그 누구보다 강력한 경쟁자였다.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이내.
파앗!
팟!
파앗!
두두두두두두!
"밥! 밥!"
"젠장! 등수 안에 들어야 밥을 먹는다고!"
"달려, 젠장!"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베이런은 황망한 표정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 이런...!"
베이런이 탄식을 터트렸다.
"바, 방금까지 분명 분위기가 엄청 훈훈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된 상황.
데오니 교관이 사특한 웃음을 지으며 재촉했다.
"기사님. 소영주님과 함께 어서 달리셔야지요. 저녁밥을 굶으실 생각이십니까?"
"이익! 이런 치사한! 먹는 거 가지고 이러다니!"
"허허. 베이런 기사님. 이것도 훈련의 일환입니다만."
"젠장!"
베이런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데오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름만 기사인 녀석일 뿐이지.'
그는 무려 데이비스의 검술을 익힌 몸.
검술은커녕 체력만 좋은 애송이 기사 따위야 전혀 무섭지도 않았다.
"아니면 병사들을 위해 오늘 저녁을 굶으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물론 그러면 꼴등을 하시겠지만. 그것도 최종 성적에 포함되겠군요."
진퇴양난.
만약 1위로 결승선에 들면 성적과 석식을 얻을 테지만.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는 힘들었다.
애초에 군심을 얻는다는 데미안의 목표가 희석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질 수는 없었다.
이 모든 성적이 최종 성적에 반영되는 법이니까.
패배보다는 승리가 낫다.
비록 불완전한 승리라도.
데미안이 잠시 데오니를 응시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영악하군."
"칭찬 감사합니다."
감상은 여기까지.
데미안도 상황을 직시하고 우선 몸을 옮겼다.
어찌 됐든 훈련은 훈련이었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 따윈 없었다.
파앗!
전광석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헉...!"
"마, 말도 안 돼!"
이미 마나를 개통한 육체다.
단순한 체력 훈련은 훈련병 따위에게 뒤질 수가 없는 노릇.
데미안은 물론이거니와 베이런도 황급히 데미안의 뒤를 쫓았다.
휙!
휙!
휙!
늦은 출발이었지만, 순식간에 여러 훈련병을 제쳤다.
"쳇!"
"이런!"
병사들의 마음에 선망과 충성심 대신 기묘한 질투심이 자리 잡았다.
"아니, 애초에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소영주님이랑 베이런 기사님은 매일 먹는 게 고기랑 맥주 아냐?"
"나도 배 터지게 먹고 싶다고!"
"불공평해!"
불평 어린 그들의 원망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데미안이 한 명, 한 명을 제칠 때마다 훈련병들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실력 행사였지만, 그들 마음에 자리 잡을 불만에 마음이 언짢다.
'이러면 곤란한데.'
아쉬웠다.
겨우 얻은 신병들의 마음.
이렇게 놓치게 되다니.
'다 잡은 고기를 놓쳤군.'
이번 체력 훈련을 참가한 의도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순간.
"으악!"
맨 뒤.
가장 후열에 뒤처진 훈련병 하나의 비명 소리였다.
예전 같으면 몰라도 낙오된 훈련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을 도왔다가 괜히 석식을 못 먹는다면 낭패였으니까.
오히려.
"후훗."
"하하핫! X신 새끼!"
이 경쟁에 매몰된 훈련병들은 자신의 경쟁자 하나가 사라진 것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음!?"
넘어진 신병.
그 훈련병의 얼굴을 확인한 데미안은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 저 녀석은?'
언제나 살아날 구멍은 있었다.
* * *
꽁지가 빠지게 달려 나가는 데미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데오니 교관.
연단에 선 그는 황급히 저녁밥을 위해 달리는 훈련병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공이군.'
이제 시작이었다.
낙오한 훈련병은 마음속 깊숙이 억하심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니, 경쟁에 뒤처져 저녁밥을 굶게 될 훈련병들은 이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을 것이다.
이 경쟁을 발생시킨 교관들을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니까.
승자들.
저녁밥을 독식한 그들을 향해 분노를 쏘아 낼 것이고, 또한 그 대상 중에는 분명 소영주도 있으리라.
'계급 감정과 편 가르기만큼 내부를 분란시키기 좋은 방법이 없지.'
정치란 게 이렇다.
지역 감정.
계급 감정.
때론 성별 감정까지 끌어들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갈등을 유발하고 저들끼리 투덕거리며 싸우게 만들면 된다.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내일은 뭐로 서로를 분란시키고 감정을 소모시킬까 생각하던 그때.
우당탕탕!
털썩!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넘어졌다.
"으악!"
이윽고 비명 소리와 함께.
우드득!
모두의 귀에 선명하도록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넘어진 소년의 오른쪽 발목에서 난 소리였다.
보지 않아도 소리만으로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끔찍한 부상.
분명 인대가 찢어지거나 심하면 끊어질 정도의 부상이 분명했다.
'저 녀석은 나가리군.'
하지만 달리던 병사들은 오히려 동료의 아픔에 동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X신 같은 놈. 경쟁자 한 명이 사라졌네.'
'저놈은 오늘 저녁이 없겠군.'
'잘됐군, 잘됐어. 하하하하!'
병사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유일하게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한 사람이 있었다.
"...!"
가장 먼저 선두에서 달렸던 자.
그가 곧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파앗!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인 듯, 재빠르게 한 소년이 역주행을 했다.
그리고 그 소년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 손을 잡고 일어나!"
선명한 음성.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
데미안이었다.
그가 소중한 석식을 포기하고, 쓰러진 병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 말도 안 돼! 겨우 말단 병사를 위해 저런 선의를 보이신다고?"
교관들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망나니 소영주.
그가 달라졌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 * *
용병왕 벨크.
감히 용병에게 왕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그는 수많은 용병들의 정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
그는 명장이고 용장이기도 했지만, 덕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리고 미숙한 훈련병들이라도 그들도 사내다.
사내라면 때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를 선망하기 마련.
그리고 데미안은 자신의 부하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에 자신 있었다.
그것은 경험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
털썩!
"으악!"
넘어지고 다친 병사를 발견한 순간.
곧장 역주행을 감행했다.
파앗!
"헉!?"
주위에 경쟁하고 비웃던 훈련병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그들을 제치고 데미안은 맨 후미로 미친 듯이 달렸다.
휙!
휙!
휙!
1등에서 2등으로.
2등에서 3등으로.
하나둘씩 순위자들을 지나쳤다.
스스로 꼴찌를 감행했다.
같은 훈련병들은 믿을 수 없었다.
"어, 어째서?"
하지만 데미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1등?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특식?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니다.
등수?
데이비스와 한 내기가 있었지만, 글쎄.
최소한 지금까지의 점수를 합산해서 평균점을 내면 상위권은 되리라.
아니, 그 전에.
지금 벌어지는 뒤틀린 경쟁심.
마음에 안 들었다.
'전우가 같은 전우를 비웃는 상황이라니.'
언제나 등을 서로 맞대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 주는 것.
그게 바로 전우였다.
'임무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전우를 포기할 수도 있지. 그게 전쟁이니까. 하지만 내 이득을 위해 전우를 포기하는 건 쓰레기다.'
모두를 향해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때론 같은 의미를 지닌 말 한마디가 반발심을 부를 수 있었지만.
그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깊은 울림을 줄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
이건 기회였다.
병사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
'저 낙오된 병사의 마음을 얻을 기회지.'
심지어 쓰러진 신병은 이미 알고 있는 녀석이다.
신병 조엘.
지금은 유약하고 비리비리하지만, 먼 훗날 북부의 전설이 되는 녀석.
논검기사 조엘이라고 하면 20년 뒤에 대륙에서 모르는 검사가 없었다.
그런 전설이 지금 겨우 다리를 접질려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그것도 비참하게.
기회였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기회.
파앗!
다른 이가 본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만큼 재빠른 선택이었다.
19화
"으으으윽."
거품을 물고 쓰러진 조엘.
데미안이 기억하는 것보다 앳되고 어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우선 녀석의 상태였다.
오랜 세월 용병으로 근무하면 기초적인 응급 처치는 할 수 있는 법.
녀석의 오른 발목을 관찰했다.
'심각하군.'
발목은 기이한 형태로 꺾였고, 벌써부터 발목 주위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아마 치료하려면 1달 이상은 요양해야 할 터.
아니.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않으면 다리를 영구적으로 절기 쉬웠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논검기사 조엘.
검의 이론과 이치. 검의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지식을 지녔지만, 선천적으로 허약한 신체. 특히나 한쪽 발을 절었기에 최상급 기사가 되지 못한 비운의 기사.
그가 바로 논검기사 조엘이었다.
'이상하군. 분명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애초에 이 요상한 석식 경쟁 자체가 데미안이 아니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경쟁이었다.
하지만 곧 이유를 깨달았다.
이건 재발이었다.
"예전에 발목을 크게 접질린 적이 있나?"
"끄응... 네, 그, 그렇습니다."
"흐음. 오래전에 다친 상처를 방치해서 재발한 경우군."
"헉...? 크, 큰일인가요?"
"큰일이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영구적으로 발을 절게 될 거다. 그 말은 제대로 된 병사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녀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솔직한 진단이다.
"인대. 특히나 발목 같은 경우는 한번 상하면 다음에 다시 같은 부위가 문제를 일으키기 쉽지. 특히나 제대로 된 치료와 재활을 받지 못하면 더 그렇고.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하다."
녀석이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가 돈이 없어서...."
"그래. 하루 날품팔이하는 신세에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먹고살기도 힘들 테고, 훈련병이 된 이후부터는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까."
"끄응."
정답이었다.
다만, 의외였다.
귀족이신 소영주님은 어떻게 일반 소시민의 애환과 사정을 이리 잘 아실까.
하지만 데미안은 나름대로 심각했다.
"큰일이군."
아마.
조엘은 앞으로 남보다 느리게 뛰고. 쉽게 지칠 터였다.
심지어 하체 중심이 어긋났다.
오랫동안 남모르게 한쪽 발이 불편했다는 증거다.
이러면 휘두르는 검과 창에도 힘이 제대로 실릴 수가 없다.
즉. 이번의 부상으로 일개 병사로서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남은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아아악."
녀석이 통증에 몸을 비틀었다.
그렇다.
지금의 체력 시험조차 당연히 낙오였다.
마지막 시험이건만.
여기서 나가떨어진다면 꽤나 치명적이었다.
"으흑. 으흐흑. 어허어어엉."
조엘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내가 병사가 못 되면 우리 집안은... 돈 벌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 어허어허헉."
"...!?"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는 녀석의 꼴을 보자니.
뭐랄까.
황당했다.
미래에 데미안이 알고 있던 논검기사.
베이런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과묵하고 진중한 사내.
그 가진 지식의 넓이는 일개 기사라 할 수 없었고.
그 폭넓은 사고와 함께 검술에 대한 이치는 극에 달했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 데미안의 눈앞에는 유약하고 허약한 훈련병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 유약했다고?'
알고 있는 그 녀석이 맞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성격은 분명 아닌데, 이목구비는 분명 그 녀석이었다.
하긴.
원래 기사이기보다는 검술을 창안하고, 재정립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는 면에서는 학자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그러니 논검기사란 이명이 붙었겠지.
세상 풍파 속에서 살다 보니 오죽 여러 일이 있었을까.
유약한 성격이 강제로 교정되기에 충분한 혼란의 시기였으리라.
데미안이 그런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그를 마주한 조엘은 통증마저 잊고 데미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모든 상황을 떠나서.
조금씩 눈앞의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나가던 데미안이 뒤돌아 오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소영주님이 여기에? 분명 가장 앞서 계시지 않았나요?"
쓰러진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녁 특식에 광증마저 보였던 훈련병들이 충격에 빠져 멍하니 멈춰 섰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체력 훈련은 모든 것을 순위화하고, 자질이 부족한 자는 탈락하여 쫓겨나는 방식.
애초에 그들은 서로 경쟁자였으면 경쟁자였지, 동료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경쟁자를 도와주는 기행.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역주행이라니.
제 살 깎아 먹기였다.
데미안이 뜀박질을 멈추고 역주행한 이유.
병사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다행인 줄 알아라."
"으흑, 어허엉. 예에!?"
"날 만났으니까. 내가 웬만한 의원보다 낫거든."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와그작.
목검을 부숴 부목을 만들었다.
이윽고, 허리춤에서 붕대를 꺼냈다.
깨끗한 게 꽤나 잘 관리된 의료용품이었다.
손이 바빠졌다.
휘익!
휙!
촤라라라락!
임시로 부목을 만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스윽.
데미안은 가슴 품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유리병에 담긴 액체.
루비같이 붉다.
한눈에 봐도 값나갈 거 같은 물건이었다.
"상비약이다."
"상비약이요?"
"그래. 가문의 특제 약품이지. 나도 이거 하나밖에 없어."
"헉!"
화들짝 놀랐다.
당연했다.
조엘이 괜히 다친 곳을 지금까지 방치하다가 이 사달이 났겠는가.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의술은 물론이거니와 약품을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에나 가깝다.
기회도 없을 뿐더러 값도 굉장히 비싸기 때문이다.
돌팔이 같은 약초꾼들도 떼돈을 버는 시대다.
무려 귀족이 쓰는 상비약이라니.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문의 비전이 담긴 약품이란다.
놀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데미안 입장에서는 별거 없었다.
'우리 같은 한미한 영지 따위에 비전 같은 게 있을 리가. 내가 직접 만든 거지.'
지금의 시대에는 없는 제조법.
무려 대전쟁 시대에 상비약으로 보급되던 만능약.
용병왕 베르딕트가 직접 창안하고 보급한 [기초약품제조법]이다.
일명 무적의 [빨간약]이라 불린 녀석이다.
멍이 들어도 바르고. 자상이 나도 바르고, 복통이 나도 배에 바르고.
진통 효과도 있다.
소독 효과도 있고.
심지어 오염된 식수에서 넣어 먹으면 오염도 중화된다.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다.
돌팔이 의무관이 하는 농담 같은 전설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이상하게 효용이 좋았다.
만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약초들과 독초를 적확한 비율로 섞어서 만들면 될 뿐.
아직 이 세상에는 없는 조합법이었다.
'혹시나 싶어 미리 만들어 놨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다행이었다.
이런 식으로 훈련병, 그것도 미래에 논검기사라 불릴 영웅을 향해 쓰게 될 줄이야.
스윽.
스윽.
빨간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처음에는 비전약이라는 말에 호들갑을 떨던 녀석도.
"아, 아아. 통증이. 통증이 멎었어요."
"즉효성이거든. 그러니 비전약이 아니겠냐."
"이렇게 귀한 걸 겨우 훈련병인 저 따위에게...."
녀석이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조용히 해. 아직 치료는 안 끝났으니까."
곧 목검을 부러뜨려 만든 부목을 붕대로 칭칭 감았다.
그 손길이 꽤나 숙련된 모양새였다.
이윽고.
"일어날 수 있겠나?"
"하, 한번 일어나 보겠습니다."
곧 녀석이 끙끙대며 일어났다.
하지만 걸을 순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그 말과 함께 데미안은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데미안은 쓰러진 병사를 부축했다.
이윽고 데미안이 뱉은 말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조엘이라 했던가?"
"쿠, 쿨럭. 소영주님.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쿨럭!"
"당연히 알지. 내 소중한 병사이자 함께 같은 기수를 수료하는 동료가 아닌가. 전우지, 전우."
"도, 동료요!? 제가 소영주님의 동료라굽쇼!?"
"그래, 당연하지! 동기끼리는 신분이고 뭐고 뭐가 중요해! 이 연병장에서는 그저 동기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인 친우이잖아!"
"제, 제가 소영주님의 친우라니...! 어떻게 그런...."
순간 조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믿을 수 없었다.
기사들, 아니 스콰이어들만 되어도 어떠한가.
병사들을 벌레처럼 여기며, 개보다 못하게 부려 먹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눈앞의 소영주는 달랐다.
한 명의 사람.
그래 한 명의 사람으로 병사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격려해 주었다.
심지어 비전약이라니.
조엘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제가 감히 어찌 소영주님의 동료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낙오된 처지에...."
"낙오되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믿어. 네 정도의 독기와 근성이라면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해질 수 있다고. 그리고...."
데미안은 말을 더했다.
"당연히 넌 내 동료지. 같은 기수 훈련병끼리 동료가 아니면 뭐냐고. 이 연병장에 있는 순간, 우리는 같은 올빼미 훈련병일 뿐이야."
낙오자에 불과한 조엘을 격려하며 스스로를 동료라 칭하며 조엘의 용기를 돋웠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은 곧 결정을 내렸다.
"낙오는 없다. 내가 널 업고 가겠어."
"그, 그만하십시오! 저까지 업고 가다가 같이 낙오되시면 오늘 저녁 배식은 없습니다! 추가 훈련까지 받으셔야 합니다!"
조엘은 알고 있다.
데미안이 훈련을 받는 동안, 병사들과 같은 식사를 하고 있고. 또한, 취침도 병사 막사에서 함께한다는 사실을.
매일 평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귀한 요리를 먹던 귀족이 아니던가.
분명 누구보다 특식을 원할 게 분명했다.
조엘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살피자, 교관 하나가 보였다.
데오니 교관.
타칭 악마라고 불리는 그가 부들부들 떨며 조엘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이내 소영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훈련 교관 데오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저 녀석을 업고 달리면 자동으로 꼴찌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겨우 낙오 직전의 훈련병 하나를 위해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대로 패자가 되실 겁니까?"
다시금 녀석이 경고했다.
"데이비스 기사단장님과 약조한 것은 수석으로 체력 훈련을 수료하는 것이었을 텐데요. 만약 지금 꼴등으로 들어간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저 웃었다.
"크하하하하!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한 끼 정도는 굶을 수 있지 않겠나?"
"그게 무슨... 옥체가 상하실 게 분명한데.... 그리고 비록 훈련병 몇밖에 되지 않지만, 녀석들에 대한 군권도 포함된 내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소중한 동료를 포기하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사실 그냥 동료도 아니었다.
논검기사 조엘.
녀석은 말 그대로 귀족들이나 기사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검술]을 스스로 창안해 낼 수 있는 재능을 지닌 녀석이었다.
회귀 전.
혹자는 그런 말을 했다.
만약 논검기사 조엘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으면, 아니. 논검기사 조엘이 마음만 먹으면 떠돌이 용병과 프래랜서 기사들만으로 기사단을 수십 개나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제대로 된 검술만 배울 수 있다면, 목숨마저 버리는 게 현재의 검사들이다.
검술.
그것은 신분의 상징이자, 기사와 귀족의 상징과도 같았으니까.
평민 따위는 평생 보기도 익히기도 힘든 그런 보물이었다.
그런데 이 조엘 녀석은 그런 걸 자기 스스로 수십 개나 창안했다.
괴물.
녀석은 허약해도 검술 방면으로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지금 만약.
이 체력 시험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논검기사의 마음을 얻는다면.
더한 것도 포기할 수 있었다.
순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비록 조엘은 낙제생에 언제 탈락할지 모르는 유약한 신병일 뿐이지만, 이 녀석은 내 동료지. 만약 내 그따위 명예나 별것 아닌 실익 때문에 녀석의 부상을 모른 척해야 한다면, 백 번도 만 번도 포기할 것이야!"
마치 모두가 들으란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드넓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물론.
데미안의 목소리는 조엘만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모든 신병이 듣고 남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조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니.
감동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성공이군.'
데미안은 마음속으로 수백 번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논검기사, 아니. 논검기사가 만들어 낼 수십 가지의 불세출의 검술은 데미안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나머지 훈련병들도.
* * *
주위에 수많은 훈련병이 멍하니 데미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승부를 포기하고 역주행한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귀중한 약품을 아낌없이 처방하다니.
심지어.
함께한답시고 부축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데미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달리던 훈련병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린 동료이자 전우잖아. 널 포기할 순 없어.
"...."
경쟁에 심취되었던 훈련병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자 교관들이 닦달했다.
"안 달려!?"
"이 미친놈들이! 아예 단체로 저녁밥은 안 먹을 생각이야!?"
"옆의 놈들은 경쟁자다! 제껴! 저 녀석들이 밥을 먹게 되면 네가 못 먹게 되는 거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장 옆에 있는 녀석들을 이겨 먹으라고!"
그들을 재촉하는 교관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동안.
데미안은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했다.
녀석을 부축했다.
여유롭게 말했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그래도 꼴등은 할 수 없지.'
솔직히.
중위권만 해도 지금까지의 점수가 최상위권이라 평균으로 따지면 글쎄.
최소한 5위 안에는 든다.
상위권으로 비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내기에는 패배해서 최소한 추수절 원정은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데이비스의 무리한 내기 정도는 어찌어찌 무효화시킬 순 있겠지.
사실.
기사회에서 가만히 있을 내기가 아니었다.
아직 데이비스는 기사회를 완전히 한검회로 끌어들이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나름 대로의 방안이 있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최선을 다해서 뛰자!'
목표지를 향해.
질주밖에 없다.
'변칙이지만, 마나를 운용할 수밖에.'
데미안은 아직 본신의 깨달음과 육체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 마나를 운용하지 않았다.
반쪽짜리 마나 유저.
그것이 지금의 데미안이었다.
그래서 체력 훈련을 하는 동안은 마나 사용을 자제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우우우웅.
은은한 마나가 데미안의 마나 코어에서 흘러 폐와 심장을 관통한다.
곧 근력이 탄력적으로 반응한다.
파앗!
달렸다.
"후욱. 훅. 후욱. 훅."
거친 호흡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꽤나 안정적이었다.
순간 먼 곳에서 점차 자신에게 가까져 오는 것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인가. 낙오한 병사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마음이시로군."
"우리를 그저 고기 방패 따위로 여기시는 게 아니라 같은 동료라고 하시다니...."
이번을 제외하더라도 데미안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훌륭한 리더십.
모나지 않은 성격에 자기 일을 미루는 법도 없었다.
심지어 당번을 피하지도 않았고 설거지도 미루지도 않았다.
숙영할 때는 또 어땠던가.
홀로 5인용 텐트를 세울 때 너무나 숙련된 솜씨를 보였다.
마치 몇십 년이라도 막사 생활을 해 본 것 같은 경험과 연륜이 느껴졌다.
그 귀족적이고 잘생긴 외모만 아니면, 어디 베테랑 용병 출신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훌륭하시군."
"저런 분이 우리를 이끄시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텐데."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더욱 닦달하며 개처럼 굴리는 십인대장보다.
그리고 마치 자신들은 상관없는 일이라며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스콰이어보다.
아니, 자신들을 고기 방패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기사보다 훨씬 더.
직접 살을 부딪치며 겪어 본 데미안은 그들이 진정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는 대인이었다.
데미안에 대한 병사들의 평판이 점차 달라졌다.
데미안 소영주.
그는 정녕 완벽에 가까운 그들의 주군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조엘을 업고 뛰는 데미안.
고개 숙인 그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하다는 것을.
'으하하하핫! 최소한 이번 훈련 과정에서 논검기사 조엘을 얻는다면 그걸로도 남는 장사인 거지! 크하하하핫!'
터벅.
터벅.
조엘을 들쳐 업고 결승선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처음에는 달렸지만, 조엘의 몸을 상하게 할 순 없지.
녀석은 미래에 뛰어난 검사가 될 터였으니까.
'이제 결승선이군.'
연병장을 따라 이어진 둔덕.
그 위로 결승선이 보였다.
점차 깃발이 능선 사이로 휘날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광경이 드러났다.
"음!?"
"아!?"
데미안은 물론이거니와 그 등에 업힌 조엘도 탄성을 터트렸다.
결승선.
그 앞에 양옆으로 도열한 군단.
바로 신병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녀석들이.
결승선에 들어가지 않고 데미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