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미래에서 온 선물 (1)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다.
순간을 모면하거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임기응변 자체는 어찌어찌 해낼 수 있어도 전체적인 국면을 바라보는 시야는 부족하다. 전투로 치면 앞에서 말을 달리는 기사단장은 될 수 있어도, 뒤에서 군략을 지휘하는 장군은 될 수 없는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전 회차, 150회차의 기억을 뒤져 봐도 그렇다. 내가 있는 곳에서 판도가 뒤바뀌는 일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무력에 의한 것이지, 내가 귀신같은 군략을 짜내어 판도를 뒤바꾼 것은 아니다. 그런 능력은 내게 없지.
그러니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하나뿐이다.
대신하여 머리를 써 줄 사람.
전체적인 판세를 읽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줄 사람이야말로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겠지.
"저기, 레이 공자님."
영지를 떠나온 지 한 달째. 황도로 향하는 가도의 위.
"어, 왜."
"거의 도착한 것 같습니다."
"아, 그래?"
앞에서 카야와 함께 말을 몰고 있던 길리온의 말에 얼굴을 덮고 있던 [n회차 빙의자의 기억]을 치우고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눈앞,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황도의 높은 성벽.
"길기도 길었다."
영지를 떠나오고서도 한 달이나 걸렸던 여정을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손안에 놓인 빙의자의 기억을 바라보았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까.
'일단, 빙의자의 기억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n회차 빙의자의 기억].
앞으로 내 계획의 핵심이 될 이 물건은 단순히 빙의자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기능이 있었다. 개중에서도 대표적이고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검색 기능.
내가 보고자 하는 사건이나 지역을 생각하고 책을 펴면 그 부분이 책 위로 떠오른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하나하나 찾아봤던 것을 생각해 보면 말할 필요도 없이 내게 유용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뿐만이 아니지.'
처음에야 그 방대한 양에 질렸지만, 이 기억에는 대략적으로 벌어진 사건을 요약하는 기능도 있는 모양.
물론, 사소한 사건에서 파생되는 일이 많은 탓에 어지간해서는 요약해서 보는 것을 삼가고 있긴 하지만, 작금의 내게 있어서 아주 필요한 기능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 여행에서 얻은 모든 것에 비하면 작은 부분일 뿐이다.
내가 얻은 '진짜 소득'은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끼이익!
"벌써 도착했나?"
마차가 멈추는 것을 느끼고 n회차 기억을 집어넣은 뒤 말을 꺼내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임스가 창밖으로 목을 길게 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검문 줄입니다."
"검문 줄? 여기까지 이어져 있다고?"
"예.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지 않습니까?"
"하기야. 문화제는 평민들한테도 공개되는 거대 행사니까."
황립 아카데미 재학생의 반절은 황족과 왕족, 귀족들이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귀족들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평민이라도 제 재능과 실력을 입증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아카데미에 들어가 배움을 얻을 수 있다. 평민들이 상당수 재학생으로 있는 만큼 아카데미 문화제 역시 대중들에게 공개가 되어 있지.
인재 등용에 별생각이 없는 귀족들은 제 자식이나 형제가 잘 지내는가 보러 오는 것이 주목적이겠지만, 몰려오는 대다수 귀족은 이 문화제에서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쉽게 말하자면 문화제야말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자신을 무엇보다 드러낼 수 있는 행사라는 뜻이다.
그런 행사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참 걸리겠구만."
끝없이 늘어선 줄을 보고 한마디를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 행렬의 길이를 눈으로 잰 제임스가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했다. 곧바로 튀어나오는 제임스의 대답.
"검문 속도를 생각해 보면 한 시간은 걸리겠습니다."
"한 시간? 어림도 없을걸."
"예?"
"다른 때라면 한 시간이면 족했겠지만, 지금은 아닐 거라고."
지금이 어떤 때인가.
황도에 높은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 득시글거리고 있을 때다. 길을 걸으면 평소에는 보기도 힘든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고, 상계를 주름잡는 거상들도 대거 수도에 방문해 있을 시기.
"이 상황에서 이상한 놈 한둘 섞여들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
"그러면...."
"검문을 어지간히 빡세게 할 거라는 뜻이지. 우리 영지 검문 생각하면 아마 큰코다칠 거다."
못해도 네 시간. 길면 반나절이 지나도 검문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타국의 고위 귀족이거나 제국의 작위 귀족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작위 귀족이 아니니까,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이 말이지."
"...반나절."
"혹시 기대했냐? 어? 기대했어?"
"기대...했습니다...."
"캬학학."
오랜만에 저택에 들어가서 푹 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잠깐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버린 제임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앞에서 뒤돌아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고 웃는 카야.
"거기 샌님. 도련님 말대로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들어가서 뭐 할지나 구상해 두고 있어."
"이 무슨 무례한... 저는 공자님의 곁을 지킬 겁니다!"
"헉! 24시간 지키려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는데, 도련님?"
"안 될 말이지."
"예?"
"24시간 널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 나도 혼자 다녀야 할 곳이 좀 많아서."
대부분의 경우 제임스를 데리고 다니긴 하겠지만, 어디에든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훈련을 시키기에도 내 수준이 아직 그렇게 높지 않고.
"들어가서 며칠 정도는 휴가를 줄 수도 있어. 정말 카야 말대로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놓는 편이 좋을걸?"
"그, 그렇습니까...."
"물론, 수도에 가본 적 없는 촌놈 샌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저, 저는 샌님이 아닙니다!"
"촌놈은 맞고?"
"...."
"카야. 적당히 놀려라. 애 울겠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한 카야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도련님은 들어가면 뭐 할 생각이야? 아카데미가 개방될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있고."
"글쎄, 역시 사교회를 좀 알아봐야겠지."
"사교회?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사교회도 사교회 나름이지."
황도에 온 제 일 목표. 그건 내 '머리'를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것. 뼈대만 잡힌 내 계획에 살을 붙여 줄 사람을 찾는 것.
찾는다고는 말했지만, 애당초 이미 누가 내 머리를 대신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빙의자의 기억으로 세계 각국 천재들의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다고는 하나, 내가 알고 있는 한 내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귀족들이 구름같이 몰려온 황도에서조차도 쉬이 만나기 힘든 신분을 가진 사람이다. 만날 수 있는 루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높은 신분의 사람과 접촉하려면 역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사교회를 찾는 것밖에 없을 터.
'최종적으로는 애주연의 초대장을 받아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해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사람이 반드시 참가한다고 확답할 수 있는 사교회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한동안은 사교회 다니느라 바쁠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하. 사교회라?"
문득.
말하다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까딱였다. 듣는 순간 기묘한 불쾌감이 치솟아 오르는 목소리.
"이 목소리는...?"
뭐지.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어째 오랜만에 뵙는 것 같군? 지크 공자."
"...아."
생각났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둔중한 인상의 청년을 보면서 손뼉을 짝 쳤다. 분명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으니까.
"그 넙데데한 얼굴은 분명! 일 년 전에 깝치다가 나한테 팔이 부러진 테닉 자작가의 달룬!"
"가넷 자작가의 오론이다! 팔이 부러진 것은 이년 전이고!"
"아, 그랬나? 거 미안하네. 쓸모없는 이름은 잘 기억을 못 하는 편이라서."
"...아주 기고만장하군."
내 말에 인상을 구긴 테넷 자작가의 달룬인지 나발인지가 분노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다가 심호흡을 하면서 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곧이어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는 달룬.
"듣자 하니 재밌는 이야기가 들려서 와 보았다. 뭐 사교회를 간다던가."
"어, 그런데?"
"황도에 오는 것이 처음이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양이군. 이곳은 남부가 아니다."
"그런데?"
"네놈 같은 망나니가 사교회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
그래?
악의에 찬 비웃음을 지어 보이는 달룬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니까.
"가문의 이름에 힘입어 남부에서는 원한다면 사교회에 참석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황도다. 남부에서처럼 네놈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지크 가문의 이름값은 황도에 닿지 않고, 네놈의 그 오만방자한 태도는 황도에 널리 퍼져 있지! 그 어느 사교회도 네놈을 초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기껏 해 봐야 중심에 끼지 못한 하위 귀족들이 모이는 곳을 전전할 뿐."
흠.
악담을 퍼붓는 달룬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귀를 긁적였다. 악의가 가득 찼지만, 그 내용은 옳았으니까.
내 이름은 생각보다 제국에서 유명한 편이다.
예전에 다소 천재 취급을 받았던 것도 있고, 기대주 취급을 받다가 갑작스럽게 몰락한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었지. 가끔 다른 지역에서 귀족들이 찾아와도 내 이야기를 떠들며 수군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을 정도.
그런 마당이니 저 말이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당초 전 회차의 기억을 뒤져 보아도 다들 내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 어떤 것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건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사죄해라."
비열하게 쭉 찢어진 눈으로 나를 희번덕하게 노려본 달룬이 말을 이었다.
"내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내 팔을 부러트린 것을 사죄해라. 그날 내게 치욕을 준 것을 사죄하거라! 네놈이 성의를 보인다면 나 또한 아량을 베풀어 네게 사교회에 발들일 기회를 주도록 하지."
"그럴 권한은 되고?"
"우리 가넷 가문은 제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순도 높은 보석 광산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다.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오."
그러니까 돈을 처발라서 인맥을 쌓아 뒀다는 이야기 아닌가.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사죄하기만 한다면, 나는 넓은 아량으로 네놈의 사죄를 받아들이마. 후후."
"...."
"뭐 하는 것이냐? 당장 고개를 숙이지 않고. 황도의 사교계에 발조차 들이기 싫은 것이냐?"
흠, 사과라.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 안 되지."
"...뭐라?"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누가 짐승한테 사과를 하냐."
"뭐, 뭣."
나는 망나니고 앞뒤를 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패지는 않는다.
내 손에 한 번이라도 처맞은 놈들은 대부분 병신들이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이놈은 가장 질이 나쁜 부류지. 겨우 자기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었다는 이유로 하인에게 모진 매질을 가하다가 나한테 처맞은 놈이었으니까.
"네, 네놈...!"
볼살을 푸들거린 달룬이 나를 향해 삿대질하면서 이를 빠득 갈아붙였다. 곧바로 터져 나오는 노호성.
"네놈이 정녕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제국 사교회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만들겠다!"
"응. 해 봐."
"뭐라고?"
"해 보라고. 발도 못 붙이게."
내 손에 무엇이 있는가.
150번의 인생을 살아간 빙의자의 기억이다. 모든 인생을 제국에서 살아간 것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인생을 제국에서 보낸 빙의자의 기억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막대한 어드밴티지를 부여한다.
공작급 귀족이 작정하고 나를 묻으려고 해도, 이 기억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할 수 있을 마당인데, 자작급, 하물며 자작 본인도 아닌 그 아들 하나가 나를 묻겠다?
"대신 확실하게 해라."
"...!"
"사교회에서 만나면 너, 그대로 묻어 버릴 테니까."
이빨을 드러낸 내 모습에 새파랗게 질린 달룬이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가 문득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 이 오만방자한...!"
이윽고, 내 이야기에 분노를 어김없이 드러낸 달룬이 노호성을 토해 내려는 순간.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
갑작스럽게, 묵직한 존재감과 함께 그림자가 눈 앞을 가렸다.
"나는 황가 제3 수호기사단 부단장 그레이스 아르란이다. 그대는 지크가의 장남인 레이 지크가 맞는가?"
"허어억."
제3 수호기사단. 이황자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황가의 사냥개들.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물의 이름을 들은 달룬이 새하얗게 질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을 곁눈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으니.
"예. 뭐. 제가 맞긴 맞는데요."
"전달할 물건이 있어 찾아왔다."
"전달할 물건이라 하시면?"
"이것이다."
말과 함께 그레이스가 무언가를 내미는 것을 받고서 물건의 정체를 살폈다. 고급스럽게 밀봉된 편지지. 아무리 봐도 서신처럼 보이는 것.
"이건?"
"모레 열리는 사교회의 초대장이다. 애주가 연회의 초대장이지."
"예? 애주연?"
아니, 그 이름이 왜 여기서?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는 애주연의 초대를 받을 만한 신분이 아니고, 그런 나를 초대한다는 건 보통 높은 직위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혹시."
"무엇인가."
"저를 초대하시는 분이 이황자님이십니까?"
제3 수호기사단의 부단장을 한낱 전령으로 부려 먹을 수 있으며, 나를 애주연에 초대할 정도로 높은 직위를 가진 인물.
"그렇다."
"...허어업."
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달룬이 이제는 아예 하얗게 질려서 덜덜 떨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가는 그레이스 부단장.
"이황자님이 직접 초대하신 것이다. 반드시 참석할 수 있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격식 있는 자리다. 복색은 이곳에 가면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음. 이건 변수인데.
말과 함께 황도에서도 이름난 옷가게의 이름을 적어 주고 떠나는 그레이스를 보다가 팔짱을 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이황자가 나를?'
차라리 일황자였다면.
그렇다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때 할아범이 일황자의 검술 스승 역할을 한 적도 있다고 했으니, 그 인연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황자는 아무 접점이 없는데. 흠.
'일단, 가 보는 수밖에 없나.'
여기서 앉아 봤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리도 없고, 별수 없지. 몸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아."
상황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까지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입을 꾹 다문 채로 먼 산을 쳐다보고 있는 달룬의 모습.
"야. 마넷 자작가의 달룬."
"...가넷 자작가의 오론이다."
"사교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한다며?"
"...."
"이황자님한테 가서 나 초대하지 말라고 해 봐. 얼른."
우리한테 검문의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대충 반나절.
"해 보라니까?"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진 않겠네.
21화 미래에서 온 선물 (2)
황립 아카데미. 기사 학부 외진 곳의 개인 훈련장.
쾅!
"약합니다. 세게."
콰아앙!
"더 세게."
콰아아앙-!!!!!
"...후."
제 몸체만 한 방패를 들고 몸체가 인간의 두 배는 되는 마공학 골렘의 공격을 막아 내던 장신의 소녀가 팔뚝을 타고 흐르는 땀을 쳐 내면서 방패를 내렸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강철인데도 불구하고 우그러져 있는 철제 방패의 모습.
'이 방패도 슬슬 못 버티는 모양입니다.'
일주일이나 버텼으면 꽤 버텼는가.
연습용으로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훈련에 따라오지 못한 방패를 보면서 소녀, 리나 지크가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털었다. 방패를 망가트린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손녀야. 방패는 무적이 아니다.
-....
-무릇 기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인간이 아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할아버님.
-네가 장차 상대해야 할 것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초인들이라는 뜻이다.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검으로 강철을 가르며 내디딘 한걸음으로 공간을 압축하는 자들.
기사들이란 그런 존재다. 지금 들고 있는 강철의 방패가 무적의 요새처럼 느껴지더라도 수준급의 기사들에게 있어 정직하게 세우는 방패는 언제든지 뚫어 낼 수 있는 종잇장에 가깝다. 단순히 그 강도만을 믿고 충격을 모두 정면에서 받아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
-네가 정녕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맞서지 않고 흘려내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
-방패에 너무 의존하지 마라. 네 장점이 절대적이라고 믿지 말고, 항상 의심하거라.
"후우."
방패가 이 모양이 된 이상 더 훈련을 이어 나가기도 힘들 터.
가문을 떠나기 전에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던 조부의 목소리를 되새기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 리나가 검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앉아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
"감사합니다. 클로에. 바쁘실 텐데."
클로에 덴버.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마공학자이자 리나의 하나뿐인 친구.
"뭘 이런 거 가지고."
"나중에 사례라도 하겠습니다."
"됐어. 친구 사이에 무슨 사례? 나도 전투 데이터가 쌓이니까 나쁘지 않은 걸... 그보다."
리나의 인사에 손뼉을 쳐 골렘을 휴면시킨 클로에가 헤헤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선 은근한 눈으로 리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훈련이 격하네? 리나. 뭔 일 있어?"
"없습니다."
"그거 알아? 리나는 거짓말할 때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는 거."
"...그게 진짜입니까?"
"아니, 거짓말이야. 하지만 잠깐 속은 거 보니까 뭔 일이 있긴 한가 보네?"
"...."
"뭐야, 무슨 일인데?"
재밌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계속 질문을 던지는 클로에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리나가 고개를 돌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곧 문화제 아닙니까."
"응. 알고 있는데?"
"문화제에 가족이 온다는 모양입니다."
"음, 뭐, 리나는 사랑받는 딸이니까. 당연히 오시겠지?"
방계도 없는 가문인 데다가 하나뿐인 딸이다. 다른 귀족들의 금지옥엽이 으레 그러하듯 리나 역시 가문에서 상당히 사랑받는 편 아니던가.
"누가 오시는데? 이안님? 자작님은 바쁘셔서 못 온다고 하셨잖아."
"원래라면 그럴 예정이었습니다만."
어제 당도했던 서신을 떠올린 리나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는 이는 이안이 아니었으니까.
"오라버니가 오신다는 모양입니다."
"와, 오라버니가 오신다니, 부럽... 어?"
잠시간.
리나의 오빠가 누구인지 생각하던 클로에의 눈이 굳었다가 혼란에 빠진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물음.
"오, 오라버니라면 혹시 그? 첫째 오빠 말하는 거 맞지?"
"첫째고 뭐고, 제게는 오빠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레이 공자님이 오신다고? 진짜로?"
제국 남부의 망나니. 몰락한 천재 레이 지크.
"대박!"
생각도 하지 못한 이름에 클로에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로에는 레이의 팬이었으니까.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럼!"
"대체 그 작자의 어디가...."
"시원하잖아!"
마치 전혀 뒷생각을 안 하는 것 같은 시원함. 상대가 누구든 일단 들이받고 보는 배짱!
귀족 사회의 대부분이 상식이 부족하다거나 분노 조절을 못 한다. 혹은 교양이 부족하다며 레이를 손가락질할 때, 몇몇 귀족 자제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대신해 주는 레이의 행동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클로에 역시 그런 귀족 자제 중 한 명이었고.
"공자님의 소식을 신문으로만 접해 온 지 어언 6년... 드디어 실물을 보게 되다니...!"
"기분 나쁩니다. 클로에."
"괜찮아. 원래 팬심이란 남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거니까. 그보다... 레이 공자님이 오는 거랑 훈련을 열심히 하는 거랑 뭔 상관이야? 흠씬 두들겨 패 주려고?"
"그런 것도 물론 있습니다만."
"있는 거구나."
"시기가 문제입니다... 문화제 아닙니까."
"문화제? 아."
모름지기 아카데미의 문화제엔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오는 법.
대부분은 아카데미 내에 있는 인재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오는 것이지만, 그중에서 일부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아카데미를 방문한다. 자신이 다닐 아카데미에 대해 예습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
"그 아이. 올해 문화제에 참석한다고 했었지...."
동부의 작은 검귀. 검의 사랑을 받는 아이.
다른 수식어로는, 남부의 천재를 몰락시킨 장본인.
"문화제 때 그 아이를 만날까 봐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는 거구나. 너까지 저 버리면 레이 공자님도 상심이 크실 테니까?"
"딱히 오라버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라버니가 바닥에 처박은 저희 자작가의 명예를 되찾아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그래. 겸사겸사 오라버니의 복수도 하고?"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없기는."
리나가 무슨 이유로 아카데미까지 와서 검술을 갈고닦는지 알고 있는 클로에가 씩 웃고서 리나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그러자 곧바로 클로에를 떼어 내는 리나.
"땀이 묻습니다. 저리 가십시오."
"난 괜찮은데."
"제가 싫습니다."
"네. 네."
떨어진 클로에를 보며 한숨을 내쉰 리나가 방패를 거치대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둘을 마주치게 하면 안 됩니다. 한번 졌다고 칼을 놓은 한심한 오라버니가 그 사람을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어떻게 하려고?"
"오라버니는 아마 절 바로 찾아올 겁니다. 그때 당부해야겠죠."
조용히 있다가 구경이나 좀 하고 떠나라. 문화제의 참가 행사에는 참여할 생각도 하지 말라.
"그게 잘될까?"
"잘되어야 할 겁니다."
안 되면 되게 만들겠다는 듯 철 방패를 들었다 놓은 리나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생각이 있으면 문화제 전에 한 번은 면회를 올 테니, 그때 이야기를 해 보면 되겠습니다."
"만약에 바로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
"오라버니는 수도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친구가 없는 레이는 바로 자신을 찾아올 터.
혹시 레이가 사교회라도 참석하게 된다면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겠지만, 그럴 확률은 없다. 그 망나니를 누가 사교회에 초대하겠는가.
"그 망종이 여기저기 나다니며 사고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편지로 이안이 당부한 대로 자신이 꼭 정신을 다잡고 레이를 단속하리라.
굳게 다짐한 리나가 방패를 들어 골렘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한편, 그 시각.
"히야. 옷이 날개네! 날개야! 잘 어울리십니다. 공자님!"
"날개는 됐고, 깎아 줍니까?"
"예?"
"이황자님 소개받고 왔는데, 좀 깎아 주시죠."
리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황도에 입성한 레이는 옷을 맞추고 있었다.
그 어느 사교회보다 파급력이 큰 사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 * *
황도에 도착하고 이틀째 되는 날. 황도를 도는 순회 마차의 내부.
"좀 어떠십니까?"
"된 것 같은데."
"앗, 여기 옷감이 구겨졌습니다!"
"제발 그만 좀... 아니,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예?"
내 복색을 점검하는 제임스의 호들갑에 학을 떼다가 문득 드는 기시감에 눈매를 좁혔다. 왠지 이런 광경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분명 어디서 본 장면인데... 모르겠다. 다 끝났냐?"
"마지막으로 점검을...."
"그만."
"끝났습니다."
"오래도 걸렸구만."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옷에 묻어있는 작은 먼지를 떼는 제임스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건물.
"...황궁, 이황자궁이라."
이번 애주연을 주최하는 장본인, 이황자 루이스 폰 지그하르트의 궁.
저기서 애주연이 벌어진단 말이지.
'영 미심쩍단 말이야.'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 헛웃음을 흘렸다. 애주연에 초대받고자 하는 목표는 이루었지만, 그게 과연 좋은 상황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으니까.
황도에 도착하고 나서 지난 이틀간.
나는 나를 애주연에 초대한 이황자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내가 상정하지 못한 변수였으니까.
어렴풋하게 기억이 남아 있는 150회차에서 이황자를 만난 기억은 없고, 그렇다고 현재에서 무슨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빙의자의 기억을 뒤져 보며 이황자의 의중을 추측하려고 해 보기도 했지만, 단순한 글줄로 이황자라는 인물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도 없는 노릇.
물론, 그렇다고 한들 아예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대략 이황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숨죽인 포식자.'
처음 이황자를 만난 빙의자는 그렇게 이황자를 표현했다. 별다른 적의를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굳게 만드는 기세를 가진 인물이라고.
심계가 깊고 철두철미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일황자가 깊은 인망으로 제국민들에게 전방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면, 반대로 이황자는 상인과 귀족등의 상류계층을 꽉 잡고 있었다. 말 그대로 황제의 바로 아래에 있는 권력자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인물.
'그냥 보고 싶어서 나를 불렀을 리는 없다.'
끝없이 효율적이며,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 자.
빙의자의 평가가 그랬고, 옛 주군의 평가가 그랬다. 이황자가 움직였다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이황자는 이유가 없이 움직이지 않는 자라고.
중요한 것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인데.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애당초 내가 만나고자 하는 인물은 이황자가 아니라 그 뒤에 있을 다른 인물이다. 이황자에게 필요 이상의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겠지.
"공자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제임스는 여기서 대기해. 애주연은 수행원 동행 금지야."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내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숙인 제임스가 다른 귀족들의 수행원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확인하고 별궁 안쪽의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 입구에서 지키고 서 있는 두 명의 기사.
"신원을 말씀해 주십시오."
"음. 지크 자작가의 레이 지크인데."
"자작가... 잠시 명단을 확인하겠습니다."
애주연에 자작가의 자제가 참석하는 것이 의외였던 모양인지 잠시 눈매를 좁힌 기사가 명단을 읽다가 내 이름을 발견하고서 한 걸음을 옆으로 비켜섰다. 곧바로 튀어나오는 응대.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자님."
"아뇨. 뭐."
"안으로 드시지요."
말과 동시에 닫혀 있던 정원 입구의 문을 활짝 연 기사가 나를 안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고 문을 지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묘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장난 아닌데.'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후작가의 영애고, 저쪽 나무에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백작가의 자제다. 그 뒤편에서 모여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자는 아예 제국의 후작과 백작이 아닌가.
내가 마당발이거나 무슨 안면이 있어서, 혹은 그들의 옷에 가문 명이 떡하니 쓰여 있어서 이렇게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당장 수도에서 인쇄되는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유명인들이 그만치도 많이 모여 있을 뿐.
'여기가, 애주연.'
내로라하는 제국의 권력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이는 사교의 장.
'쥐 죽은 듯이 있다가 가야겠군.'
이곳이라면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는 순간 사교계에서 그대로 묻힐 수도 있다. 그만한 파급력을 지닌 이들이 모인 곳이니까.
'뭐, 괜찮겠지.'
어차피 눈에 띌 생각은 없었으니까. 조용히 있다가 가는 수밖에.
이곳에서 취할 행동 가짐을 굳게 다짐하고 기사의 안내를 받아 조용히 내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자리에 서자 마자 갑작스럽게 외치는 기사.
"지크 자작가의 레이 공자님 입장하십니다!"
"...?"
이게 뭔.
파악하기도 전에 파바박 내게 꽂히는 시선을 보면서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순식간에 귓가를 파고드는 웅성거림.
-지크 자작가? 자작 가문의 영식이 이곳에 참석했다고?
-...레이라면, 그 망나니?
'음.'
아무래도.
'엿 됐군.'
조용히 있다가 가기는 그른 것 같은데.
22화 미래에서 온 선물 (3)
애주연.
온갖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이 사교회는 참석하는 인원이 꽤 되는 것에 비해 새로운 얼굴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애주연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은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들, 혹은 그 후계자들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이들에 한정하니까.
왕국을 전부 뒤져 보아도 그만한 신분을 가진 이들은 오백을 넘지 않고, 개중에서 사교회에 참석하는 이는 더 적다. 만일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엉덩이가 가벼운 이들은 곧바로 다가가 친분을 쌓으려 들 정도.
하지만.
그렇게 엉덩이가 가벼운 이들조차도 차마 예상하지 못한 작금의 상황에는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레이 공자님 입장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애주연에 입장한 이는 그들에게 있어 '친분을 쌓아도 좋을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
기사의 소개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주변을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자리에 앉는 레이를 보면서 구석에 앉아 있던 백작가의 영애 하나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레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영애.
"지크 자작가라면... 남부에 있는 가문 아닌가요?"
"맞아요. 검호 이안 님의 가문이죠."
"'부러지지 않는' 이안 님, 분명 존경할 만한 기사이긴 하시지만...."
부러지지 않는 이안.
그 본인이라면 이곳에 올 만한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과거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검호였고, 현재로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일 테니까.
그 아들인 지크 자작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지크 자작가는 비록 자작가지만, 거의 준 백작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성세를 누리고 있으니, 이런 자리에 참석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없겠지. 하지만.
"본인도 아닌데 애주연에?
레이는 어떤가?
"저분에 대해 아시는 분이 있나요?"
"저 알아요. 예전에 검술의 천재로 이름이 높았던...."
"아, 망가진 천재?"
"예. 4년 전 대련에 패배한 이후로는 검만 봐도 벌벌 떤다던데...."
4년 전만 해도 제국에서 모르는 이가 적을 정도로 유명했던 유망주는, 이제는 과거의 망령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그 입이 말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과거에 찬란한 재능을 보였던 천재가 얼마나 나락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얼마나 한심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
"도대체 누가 초대한 걸까요? 이런 사교회에 다닐 성격은 아니신 것 같은데."
"가서 물어볼까요?"
"거친 분이라고 하시던데... 다가가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덜컥!
"힉!"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다가 레이가 일어서자마자 움찔한 귀족 영애들이 눈알을 굴려 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다시금 자리에 앉아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레이의 모습.
'무, 무섭긴 한데....'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출중한 외모로 인해 그림이 된다.
"마,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볼까요? 저렇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불쌍하니까."
"헉... 용감하세요!"
준수한 레이의 외모에 홀린 백작 영애 하나가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발걸음이 닿기도 전에 레이의 머리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
"오랜만이군. 레이 지크."
"...헉!"
제국에 일곱밖에 존재하지 않는 후작 가문, 개중에서도 검술로 유명한 글라디오스 후작가의 후계자. 카리스트 글라디오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레이와 카리스트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즐기며 곧바로 입을 여는 카리스트.
"날 만나러 왔나?"
"...?"
"이야기는 들었다. 4년 전에 동부의 검귀에게 패배하고 검을 놓았다지. 그럼에도 검을 패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시 검을 잡을 생각이 들었던 것일 터."
실력이 가장 빨리 늘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자신과 동등한 상대, 혹은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몇 번이고 검을 겨루며 실력을 도야시키는 것이야말로 검사의 실력을 가장 빨리 키우는 방법이지 않겠는가.
"4년이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과거의 대적자에게 가르침을 구하러 오다니... 역시 파격적이군. 내 옛 라이벌다워."
"...."
"좋다. 그 의지를 높게 사마. 검을 뽑아라. 한 수 가르쳐 주마. 비록 지금은 격차가 벌어졌겠지만, 네 재능이라면 못해도 5년 안에는 그 격차를 어느 정도 좁힐 수 있을 터."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던 과거의 적수에게 설욕할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카리스트가 한 걸음을 물러서며 검을 뽑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음."
레이의 입이 열렸고, 레이의 목소리를 들은 카리스트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우리가 언제 상대가 된 적이 있었습니까?"
"...뭐라?"
"항상 저한테 탈탈 털리셨던 것 같은데요."
"...뭣."
잠시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의심하던 카리스트가 문득 그 의미를 이해하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끊기지 않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레이의 말.
"아니, 뭐 카리스트 공자님이 검술을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 정도면 뭐 괜찮은데...."
"...다, 닥쳐라."
"그래도 카리스트 공자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한 수레는 있는데, 굳이 카리스트 공자님을 찾으러 이 멀리까지 올 필요가 없지 않나...."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속을 박박 긁어 놓는 레이의 언동에 소리를 지른 카리스트가 검을 뽑아 레이를 가리켰다. 곧이어 터져 나오는 노호성.
"과거의 적수라 생각해 존중해 주려고 했다마는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네가 아직도 예전 대적자가 없던 시절의 천재인 줄 아느냐!"
"그야 뭐, 오래 놀긴 했죠?"
"4년이나 검에서 손을 놓았으면 그 실력은 말하지 않아도 퇴보했을 터!"
만에 하나 퇴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실력이 크게 늘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녕 내 검에 무릎을 꿇어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흠."
크게 호통을 치는 카리스트의 모습에 잠시 생각하던 레이가 느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대답.
"그럼, 한번 붙어 보실래요?"
"...뭐라?"
"제가 얼마나 퇴보했는지 말입니다. 4년쯤 쉬어도 공자님과는 해볼 만할 것 같아서."
"이... 오만방자한...!"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있겠는가.
레이의 느슨한 목소리에 격노한 카리스트가 장갑을 벗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목소리.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이번 기회에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고 말겠다!"
아무리 싸울 생각이 없던 이라도 이 정도로 얕보인다면 싸울 수밖에 없을 터.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카리스트가 벗은 장갑을 레이에게 던져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 손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이윽고, 카리스트의 손이 장갑을 던지기 위해 힘을 주는 순간.
"소란스럽군."
『정지』
카리스트의 몸이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우뚝 멈추었고.
동시에, 사교회에 위치한 모두가 상대를 확인하고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
"예를 거두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을 한 이황자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예를 물리게 하고 시선을 카리스트에게 고정했다. 이윽고 비틀린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게 내뱉어지는 목소리.
"카리스트 글라디오스. 이게 무슨 짓이지?"
"이건, 사정이...!"
"그 사정이라는 게 내 별궁 안에서 허가 없이 검을 뽑을 정도로 중요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기사는 사소한 감정으로 검을 뽑지 않는 법. 향후 주의하도록."
좌중을 내리누르는 중압감.
마치 존재 자체를 찍어누르는 듯 서늘한 이황자의 눈을 직시한 카리스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면서 눈을 피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레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이황자.
"네가 레이 지크인가."
"그렇습니다."
"술에는 조예가 있나?"
"예. 충분히."
"그렇다면 잘 초대했군. 따라오도록.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말과 함께 순식간에 레이를 데리고 별실로 사라지는 이황자의 모습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두가 깊은 숨을 토해 내었다.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초대자의 정체가 드러난 마당이었으니.
'누가 초대했나 했더니....'
'이황자님이 초대하셨다고?'
이황자는 결코 허투루 움직이는 일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레이를 구태여 이 애주연에 불렀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레이 지크에게 무언가 있다.'
상황을 짐작한 이들의 시선이 이황자와 레이의 그림자를 쫓아 시야를 고정했다.
절대로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을 별실의 문을 향해서.
* * *
150회차, 제국이 연패를 거듭해 영토의 사분지 일을 남겼을 시점.
나는 주군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지금 살아 있으면 가장 도움이 될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이야기.
-역시 '마녀' 아니겠습니까?
-음.
-아가룬 그 양반도 아직 살아 있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됐을 겁니다. 괴물이었으니까.
-....
-주군은 어떠십니까?
전방에서 나와 함께 싸웠던, 그리고 스러졌던 이들의 이름을 쭉 읊으며 그리움을 말하던 나와는 다르게 주군은 좀처럼 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어차피 가정에 불과한 것에 무엇을 그리 신경 쓰느냐고 핀잔을 주고는 했었지.
하지만 술을 마시는 내내 주군의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 시간이 지나 부하들이 모두 고주망태가 되었을 때 주군은 하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루이스 폰 지그하르트.
이황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 수완을 제국을 위해 사용했다면 제국은 적어도 멸망하는 속도를 반 이상 늦추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가정이라고.
주군은 내게 그렇게 말했었지.
"앉아라."
"예."
따라오는 동안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을 머리를 휘저어 흩어 낸 뒤 이황자의 권유에 따라 별실의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찬장을 따라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명주들의 모습.
"비싼 술이 많군요."
"술은 좋아하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군."
"알고 있지 않다면 초대하시지도 않았지 않겠습니까."
"...음."
뒷조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언급하는 내 모습에 부정하지 않고 눈썹을 꿈틀한 이황자가 찬장에 있는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빠르게 일어나 부드럽게 술병을 휘감는 마나.
『염동』
수준급의 마법.
"대단하십니다."
"쓸모없는 잔재주일 뿐."
상당히 매끄러운 마나의 수발에 감탄하면서 말을 내뱉자 이황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일축하며 무심하게 술병을 손으로 가져왔다. 곧이어 자연스럽게 열리는 코르크 마개.
"한잔 받지."
"예."
진한 향기가 글라스의 벽면을 타고 오른다.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더군."
"재미있는 일이라 하심은."
오랜 숙성을 거친 와인의 묵직한 향에 조용히 향을 즐기는 사이 내뱉은 이황자의 말에 조용히 시선을 올려 이황자에게 반문했다. 그러자 곧바로 말을 잇는 이황자.
"길리온. 너와 동행한 상단주의 이름이다."
"...."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나를 왜 불렀나 했더니, 그것 때문에 불렀던 건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사기꾼 길리온.
길리 상단의 행위가 사기라는 것을 명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이황자의 모습에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이라면 이야기는 간단했으니까.
"죄가 되지 않습니다."
"죄가 되지 않는다?"
"예."
"길리온이 사기꾼임을 모르는 건가?"
"압니다."
"한데, 죄가 되지 않는다?"
제국의 국법에 의하면 사기는 사기에 가담한 자도 동일한 처벌을 받을 터.
"예."
거기에 의거해 질문을 던지는 이황자의 모습에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길리온은 사기꾼이지만, 사기를 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
내 대답에 잠시 침묵을 지킨 이황자가 제 잔에 와인을 따르고 그 향을 음미하며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뒤 흘러나오는 한마디.
"재미있군."
툭 내뱉는 말과 동시에 이황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조금 더 들어 보고 싶을 정도로."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잔혹한 미소가.
23화 미래에서 온 선물 (4)
레이 지크는 써먹을 수 없다.
애주연에 도착하기 전, 여태까지의 기록을 읽는 동안 이황자는 그 사실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록상으로 살펴보았을 때 레이의 행보는 현실에 절망하고 망가진 망나니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
보고에 따르면 본성이 악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망가졌다면 써먹을 수 없다. 차라리 악하나 망가지지 않은 것이 써먹기엔 더 편할 터.
그렇기에 애주연에 참석하면서도 레이라는 인물에 대해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길리 상단과 무슨 커넥션이 있는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정도만 알아내려고 했을 뿐이다.
그래, 분명 그랬을 터인데.
"사기꾼 길리온은 사기를 치지 않았습니다."
그 판단이 옳다면, 지금 심장 어림을 잠식해 들어가는 이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기를 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사기꾼인데도 불구하고 사기는 치지 않았다...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순을 내 앞에서 입에 담고 있군. 날 현혹시키기 위함인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사기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뿐이지요."
"사기가 아니게 될 것이다?"
툭. 툭.
조용히 책상에 손가락을 두어 번 두드리며 상념에 잠긴 이황자가 앞에 앉아 있는 레이의 눈을 직시했다. 오면서 생각했던 '망가져 있는' 자의 눈빛과는 다르게 생생히 살아서 빛을 머금고 있는 레이의 눈빛.
'저건 망가진 자의 눈빛이 아니다.'
망가진 자들을 수도 없이 보았기에 알 수 있다. 그들의 눈은 항상 과거를 쫓는다는 것을.
과거에 벌어진 일에 묶여 망가진 이들은 더 이상 미래를 보지 못한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혹은 현실에조차 안주하지 못해 술로 인생을 잊으려 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뿐.
그러나 눈앞에 있는 레이의 눈빛은 어떠한가?
'확신이 있군.'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이 없다.
방금 말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 낸 것이 아니라면 레이는 이미 이 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두었다는 뜻이리라.
그건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자의 언동이다. 닥쳐올 봄을 대비해 굴 안에 웅크린 곰의 눈빛이요, 전장에 새벽녘의 빛이 비치기 전에 무기를 갈고 닦으며 전투에 대비하는 투사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보고는 잘못되었다.'
레이 지크는 망가지지 않았다.
혹은, 일어서는 것에 성공했다.
"자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길리 상단에 관한 건은...."
"됐다."
"예?"
"되었다고 말했다. 내막은 듣지 않겠다."
굳이 구질구질하게 내막을 들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레이가 길리 상단과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내 휘하에서 일하도록. 레이 지크."
이 자를 곁에 두는 것.
"...이황자님의 휘하, 말입니까?"
"혹여라도 순진한 척하지는 말라. 황도의 정치싸움이 얼마나 추잡스럽고 치열한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술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신 이황자가 말을 이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지크 자작가의 파벌이 이쪽에 속하게 되면 차후 형님이 황제가 되었을 때를 걱정하는 것이겠지."
"아니."
"하지만 괜찮다. 나는 형님과 황좌를 두고 다툴 생각은 없으니."
일황자가 황제가 된다면 자신은 지금처럼 정계와 상계를 꽉 쥐고 흔들며 자리를 유지하면 될 터.
그렇게 될 경우 이황자의 파벌에 섰던 인물들도 숙청당할 일은 없다. 이황자의 형인 일황자는 그런 성품을 가진 인물이 아니고, 그럴 이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
"다른 이들보다 더 우대해 준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 파벌에 들어온다면 훨씬 더 많고 확실한 기회를 받을 수 있겠지."
"말 좀."
"네가 무엇을 꾸미고 있던 그것이 반역이나 배신이 아닌 이상, 나는 네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러니 내 휘하로 들어...."
덜컹!
"저도 말 좀 해도 되겠습니까!"
속사포처럼 쏘아지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혀를 찬 이황자가 말해 보라는 듯 레이에게 턱짓했다. 무언으로 떨어진 이황자의 허가에 숨을 몰아쉬며 한숨을 돌리는 레이.
"일단 제안은 감사드립니다."
"일단? 마치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의미처럼 들리는데."
"저는 모시고자 하는 주군이 있습니다."
"황도로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시고자 하는 분이 있습니다."
"...모시고자 하는 분이라."
제국의 국민이 현 황제를 섬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황제를 섬기면서 그 아들인 자신을 섬기는 일 역시 상충되는 일은 아닐 터.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레이는 자신 말고 다른 황자를 지지하겠다는 뜻이 된다. 그 황자는 필시 일황자일 것이고.
"형님을 지지할 생각인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차후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을 지지하는 것은 부와 명예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이니까. 충직한 기사 가문의 자제인 레이가 거기에 관심을 보인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알고 있다.
레이의 저 눈은 명예 따위를 바라는 눈이 아니다. 기사도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고지식한 기사의 눈은 저런 느낌이 아닌 것이다.
비유하자면 짐승의 눈.
무언가를 끝없이 갈구하여, 그것을 절박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눈.
"너는 형님을 지지하지 못한다. 형님은 네 그 갈망을 이루어 줄 수 없으니까."
이루고자 한다면, 기회를 잡고자 한다면.
"내 밑으로 와라."
힘들더라도 밧줄이 매달려 있는 벽으로 향하라. 아무것도 없는 벽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 라고 하지 말고.
그런 의미를 담아 말을 내뱉은 이황자가 의자를 뒤로 젖히며 거만한 눈으로 레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맞습니다. 제가 모시고자 하는 분은 일황자님이 아니십니다."
"역시 그렇군."
"제가 모시고자 하는 사람은...."
잠시 뒤. 레이의 대답이 흘러나오는 순간.
"...다시 한번 말해 보라."
거만한 눈을 하던 이황자의 눈에 당혹과 적의가 깃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삼황자, 지니스 님을 모시고자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이가 모시기를 원한다는 이는.
이황자가 증오해 마지않는 막냇동생의 이름이었으니까.
* * *
모름지기 이황자의 철두철미한 성격은 황도를 넘어 제국 전체에 유명하지만, 그 이황자의 성격 중에서도 유별나게 많이 퍼져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하나다. 바로 제 동생을 끔찍스럽게도 싫어한다는 것이지.
이황자를 낳았던 현명한 황비 세프리는 이황자가 14살, 삼황자가 9살이 되던 해에 암살자에게 습격받은 삼황자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열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이황자.
성격 자체는 차가웠지만, 제 형이나 동생에게는 나름 살가운 모습을 보이던 이황자는 그때를 기점으로 삼황자를 멸시하기 시작했다. 형인 일황자나 황제가 삼황자를 감싸고 돌며 이황자를 꾸중할 때조차도 이황자는 결코 삼황자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
이황자의 어머니인 세프리 황비는 삼황자를 구하다가 죽었다.
이 황도에서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다. 결코 공식적으로 퍼지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짐작하고 있을 그 이야기.
그러니 이황자는 삼황자를 누구보다 멸시한다. 삼황자야말로 제 어미가 죽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모두에게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뭐라 했나?"
"저는 지니스 님을 모실 생각입니다."
잠시간의 침묵.
꽈아악!
내 이야기에 당혹으로 물들었던 이황자의 눈빛이 천천히 냉정을 되찾더니 다시금 분노로 물들었다.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힘을 주며 나를 노려보는 이황자.
"내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예. 대충은."
"그럼,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답을 들려줄지도 알고 있겠군."
"예."
"네가 그 머저리를 감싸려 든다면 나는 너를 적대할 것이다."
냉정을 되찾은 이황자가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형님이 말리든, 폐하께서 말리든 관계없다. 내 모든 것을 다해서 너를 적대할 것이다. 네 가문은 네 결정으로 인해 그 성세를 잃을 것이고, 너 역시 별다른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끝없이 제국의 변방을 전전하게 되겠지. 그래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나?"
"예."
"어째서지?"
"그러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는다? 내가?"
"예. 절대로."
세상의 모두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
-형님은 고결한 분이셨다.
이황자 루이스는 삼황자... 과거 내 주군이었던 이를 증오하는 것이 맞다.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그 이유가 과연 세간에 알려진 이유와 같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다.
"저는 삼황자님을 키울 생각입니다."
"키운다...?"
"예."
"그 버러지를, 키운다."
"보필해서 이황자님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게 만들 생각입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잠시 내 말에 침묵을 지키던 이황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의 적대자, 나아가 형님의 적대자로 그놈을 올려놓는다는 뜻이다. 양분된 후계 구도에 끼어들어 제국의 권력을 삼 등분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그것을 용납할 것 같나?"
"용납하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째서지?"
"이황자님께서 그걸 바라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
이황자는 주군을... 지니스를 싫어한다.
그 이유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해서는 아니다. 이황자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니스가 제 어미를 죽게 한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가 스스로 지니스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는 그 차이가 크지 않을지 몰라도 그 무엇보다 철두철미한 이황자에게 있어 그 차이는 크다. 그 일로 이황자는 지니스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
그저 이황자가 지니스를 혐오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는 형님께 상처를 주었다.
자신의 대적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하길 원하는 형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나를 지키고 돌아가신 황비님에 대한 모욕인 줄도 모르고.
해 보지도 않고, 그저 눈치를 보며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제가 모시고 싶은 건 삼황자님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패배감과 열등감에, 죄책감에 찌들어있는 삼황자님은 아닙니다."
"...."
"저는 이황자님 당신과도 눈높이를 맞추고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을 개화한 삼황자님을 모실 생각입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세상에 나보다 주군을 잘 아는 인간은 없다. 지니스 본인을 포함하더라도 그렇다. 나는 그 녀석의 친우였고, 형제였으며, 동시에 주군의 기사였고, 전우였으니까.
"휘하로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황자님을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
"제가 특별히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며 후퇴하지 않고 전선을 지키던, 결코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던 황족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경례한다.
"당신의 동생을 키워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겠습니다."
권력도, 명예도, 지위조차도.
모든 것을 잃고 패배를 인정하게 만들겠다.
"그게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먼 옛날, 당신이 내 주군에게 바랐던 것처럼.
24화 미래에서 온 선물 (5)
머나먼 기억. 아직 이황자가 완전히 자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하지도 못했을 때의 기억.
-루이스. 이 세상은 탄생부터 공평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세상이란다.
이황자의 어머니, 세프리 황비는 이황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세상이야말로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고.
황족과 귀족, 평민, 빈민, 어쩌면 노예.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신분이 정해진다. 계층 간의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 문은 지극히 좁다. 세상 사람들의 99.9%는 태어난 신분대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신분이 같다고 평등한 것도 아니다.
고귀한 신분인 귀족들이나 황족들 사이에서도 우열은 있고, 우열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진 재능이, 외모가, 재산이 다르다.
-공평이라는 말은 허상이야.
그 누구도, 그 어떤 제도도.
하물며 신조차도 이 세상을 통째로 멸망시키지 않는 이상 만인을 공평하게 만들 수 없다. 이 세상이야말로 불공평함의 온상이라고, 세계 자체가 원래 그런 구조로 되어 있노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한 세프리 황비는 이황자의 표정을 보며 말을 골랐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너머에 있었으니까.
-세상이 불공평하기에 우리는 더욱 공평해지려 노력해야만 한단다.
-어째서입니까?
-그것이 위에 선 자의 의무니까.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 권리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은 것.
그렇기에, 위에 선 자는 항상 제 어깨에 짊어진 책무를 느껴야만 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서.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낀다면, 책무가 자신을 부른다고 느낀다면 주저하지 말려무나.
-....
-잠시 도망쳐도 좋아. 사람은 강철이 아니니까. 꺾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자신의 책임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가르침을 내렸던 세프리 황비는 정말 자신의 말대로 스스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삼황자를 구하고 죽었다. 자신의 신념과 같게.
그러니 이황자는 그 죽음에 기꺼이 찬사를 보낼 수 있었다.
분명, 과거에는 그랬겠지.
삼황자, 지니스가 그 죽음으로 망가지기 전까지는.
"지니스를 키워 내 자리를 빼앗겠다...."
대담이 끝나고, 레이가 떠난 별실.
혼자 앉아서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말없이 찰랑이던 이황자가 조용히 글라스를 기울여 와인을 마시고서 입안에 남은 향을 느꼈다. 묵직하면서도 깊은 여운이 남는 와인의 향.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군.'
삼황자 지니스, 자신의 동생은 세프리 황비가 죽은 이후로 망가졌다.
어째서 망가졌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 때문에 황비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 죽음으로 인해 이황자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어머니처럼 믿고 따르던 황비가 눈앞에서 죽은 것에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 너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서는 안 된다. 황비의 죽음에 슬퍼할 수는 있어도, 거기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건 이황자에게 있어 어머니의 신념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진. 어머니가 구하고 싶어 했던 것은 총기가 넘치는 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일황자에게는 현왕의 재능이 있고, 정략과 통치에 능한 자신에게는 제왕의 재능이 있다. 모두 지니스가 가지지 못한 것.
그 두 분야에서 지니스는 결코 제 형들을 따라오지 못한다. 천년을 노력하더라도 같은 시간을 노력하는 이상 절대로 따라오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니스의 재능은 평화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태풍이 닥쳐온다면 모두가 무너지더라도 혼자서 꿋꿋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재능.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 항거할 수 없는 사태에 대비하는 재능.
군왕의 재능.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겨우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재능을 썩히고 있다. 개화시키지 않고 있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지니스를 위해 황비는 죽었다. 하지만 지니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고.
어찌 그 꼴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굳이 저를 도와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
-이건 제가 황자님께 드리는 선물이니까요.
"당돌하기 짝이 없군."
떠나기 전 레이가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린 이황자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서늘하게 손날을 타고 올라오는 탁자의 냉기.
"그런가, 선물인가."
레이의 말대로 동생을 키워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면, 그 동생의 눈에 총기를 되찾아 줄 수만 있다면.
그건 확실히 자신에게 있어 선물일 것이다. 그 끝에 결국 자신이 파멸하게 될지라도, 그 순간 어머니의 죽음은 보상받게 될 테니까. 그 신념은 의미가 있는 것이 될 테니까.
"레이 지크."
조금 더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별실 밖으로 나가 버린 레이 지크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눈을 감은 이황자가 조용히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놈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며.
* * *
...X되는 줄 알았다!
"어우, 흐어억."
별실에서 나오고 복도를 돈 뒤 이황자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무렵.
나는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이 사태 자체가 상정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와... 도박수였는데, 어떻게 됐네."
내가 가진 150회차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내가 150회차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 어릴 적을 추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
강렬한 기억은 드문드문 떠오르더라도 모든 기억이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최강의 검사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지금 바로 최강이 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
기억에 의존해서 모든 것을 헤쳐 나가서는 안 된다. 내 기억은 구멍이 송송 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자를 설득하는 데는 내 기억을 이용했다. 왜냐하면.
이황자는 절대로 낙점 찍은 인재를 놓치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이황자는 유능한 인간이지.'
이 제국에서 가장 황제에 가까운 황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대부분은 일황자를 꼽을 터.
그러나 말을 조금 바꿔 이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황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모든 인간은 주저 없이 이황자를 꼽는다. 아직 스물다섯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계와 정계의 태반을 장악하고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것이 이황자이기 때문.
그런 이황자가 나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사사건건 앞으로의 행보에 방해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도저히 뚫고 나갈 방법이 없다고 하진 않겠지만, 내 계획에 크나큰 지장이 생길 것은 틀림없는 일이겠지.
'여기서 떼어 내서 다행이다.'
뭐.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주군에게 들었던 것을 토대로 시선을 잘 떨어트렸으니, 한동안은 내게 무슨 수작질을 부려 오진 않겠지.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
'주군을 찾는 것.'
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2층 테라스에서 슬쩍 몸을 내밀고서 아래를 눈으로 싹 스캔했다. 이곳을 보아도, 저곳을 보아도 보이지 않는 주군의 모습.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본다면 분명 오래 걸리겠지만, 주군의 신분이 황자인 만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아마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 있거나, 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않거나, 필연적으로 두 가지 반응 중 하나가 나오는 것이 정상이겠지. 하지만.
'그런 곳은 없다.'
이곳을 둘러봐도 저곳을 둘러봐도 주군이 있을 만한 곳으로 추측되는 곳은 없다. 이황자가 별실에 있는 지금은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구태여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주군은 이곳에 없다는 것.
'생각을 바꿔야 해.'
생각해 보자.
내 기억 속의 주군은 애주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내게 몇 번이고 떠들곤 했다. 그걸 감안하면 주군이 애주연에 자주 참석했던 것은 틀림이 없을 터.
하지만 이 애주연에는 주군을 혐오하는 이황자가 거의 매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항상 참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군은 그 시선을 버티면서 애주연에 참석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주군은 이황자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황자의 눈앞에 띄지 않기 위해 도망치고 있으니까.
'주군은 이황자의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주연에는 자주 참석했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아마 하나다. 마법이든 무엇이든 이용해 타인으로 위장하여 이 애주연에 참석해 있다는 것.
'후보를 좁혀 볼까.'
일단, 작위를 가진 귀족 본인이거나 고위 귀족들의 자제는 제외해야 한다. 그들은 정략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는 만큼 주군에게 신분을 빌려줄 수 없으니.
아무리 위장한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들의 신분을 빌린다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점차 위화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말을 걸어올 만한 사람은 제외.
'같은 이유로 밖으로 많이 돌아다니고 활동적인 인물들도 제외해야겠지.'
위화감은 꼭 위장한 쪽이 잘한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주군에게 신분을 빌려준 이가 밖에서 다른 애주연의 사람들을 만나 말실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위화감이 될 것이고, 금방 정체가 들통나게 될 터.
'결과적으로 애주연 내든, 애주연 밖이든 사람들이 쉽게 말을 걸지 않으면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어야겠지.'
이 애주연에 있는 인물들은 전부 고위 귀족.
가문끼리 촘촘하게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이 애주연에서 내가 생각하는 조건에 맞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셋 정도.
개중에서 둘은 여성이니 제외하고, 나머지 한 명을 찾는다면....
'로흐센. 북부의 변경백인 아르키아 가문의 자제.'
그밖에 없으리라.
"실례합니다."
"예...? 아, 레이 공자!"
테라스에서 내려와 정원 입구 쪽에 서서 담소를 나누는 영애들에게 말을 걸자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는가 싶던 영애들이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주변을 둘러싸는 영애들.
"지크가의 공자님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나 했더니, 이황자님의 초대를 받고 오신 거였군요! 이런 자리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역시 이황자님과 친밀하신 관계이신 건가요?! 이황자님이 사람을 초대하는 일은 처음 보는지라...!"
"아뇨, 잠깐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그보다."
"아, 제 소개가 아직이었네요! 저는 로암 백작가의 미리네예요!"
"네. 반갑습니다. 미리네 영애. 그보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거라면 제가 안내해 드릴 수 있답니다! 저는 뭐니 뭐니 해도 매번 애주연에 참석하는 베테랑이니까요! 누구를 찾으시나요?"
"로흐센 공자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르키아가의."
"아, 로흐센 공자님...."
내 말에 잠시 말끝을 흐리며 생각하는가 싶던 미리네 영애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보통 연회장에는 계시지 않으세요."
"연회장에 있지 않다면?"
"별실이나 테라스에서 혼자 마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아, 마침 저기 계시네요."
말과 함께 별궁 3층에 위치한 테라스에서 난간에 몸을 지탱한 채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내를 가리킨 미리네 영애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조심하세요. 레이 공자님."
"뭘 조심해야 합니까?"
"모르세요? 로흐센 공자님의 가문인 아르키아 가문은...."
"그건 압니다."
저주받은 혈통.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괜찮습니다. 아르키아 가문의 피는 그렇게 위험한 게 아니니까요. 애당초 정말 위험했으면 황자님이 계신 이곳에 들여보냈겠습니까."
"하지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네 영애. 나중에 보답하겠습니다."
"앗, 네...."
빙긋 웃으며 말을 툭 자르자 내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숙인 미리네 영애가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서 몸을 돌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긴장감.
'이제 곧 주군을 만난다.'
한낱 망나니였던, 광인이었던 내게 세상을 위해 살아간다는 길을 제시해 준 남자. 그리고 앞으로 내 책사가 되어 줄 남자.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없지만, 내가 아는 주군이라면 금방 나를 믿고 내 머리가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빙의자의 기억도, 내 기억도 모두 공유한 뒤 힘을 합쳐 이 회차를 헤쳐 나가게 될 터.
"후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마 폐인 같은 모습이겠지.'
주군은 나와 같은 과거를 공유한다. 분명 한심하고 멍청한 모습으로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지.
'뭐, 본인이 요청한 거니까.'
필요하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 수밖에.
나는 그런 결심을 다지면서 걸음을 옮겨 테라스에 발을 디뎠고.
"실례합니다. 혹시 합석해도...."
테라스에 앉아있 는 청년을 보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눈매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음? 아, 얼마든지."
폐인이라더니.
...이 자식 왜 이렇게 멀쩡하지?
25화 미래에서 온 선물 (6)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쓰레기처럼 살았지.
과거 내 주군이었던 사내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물었을 때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쓰레기처럼 살았노라고.
-자네의 이야기를 풍문으로는 들었네만, 나는 그것보다 더 쓰레기처럼 살았다.
-어떻게 살았길래....
-패배감과 열등감에 찌들어 살았지. 남의 눈치나 보면서.
망나니 레이 지크가 바깥으로 나도는 타입의 쓰레기였다면, 지니스는 반대였다. 안에 틀어박히고, 두문불출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뭘 하는 게 두려웠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노라 말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쳐 아무도 믿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노라고 했지.
다른 곳보다 애주연에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이 애주연에서는 황자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술을 무더기로 마셔도 눈치 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만약 지니스가, 진이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애주연이야말로 반드시 나타날 곳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정녕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폐인이라더니, 저 새끼 왜 멀쩡하냐고.
"왜 그렇게 빤히 보시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아니, 뭐...."
앉아 있다가 말끝을 흐리며 눈앞에 있는 청년을 살펴보았다. 혹시 잘못 찾은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조건은 딱이긴 한데.'
로흐센 아르키아.
진이 위장 신분으로 쓰기에는 그만한 인물이 없다. 아르키아 가문은 진과 연결 고리가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위화감과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르키아 가문의 영식으로 위장하는 것이 가장 편할 터.
하지만 그건 그게 가장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눈앞에 있는 로흐센 아르키아가 사실 진이 아닐 수도 있는 노릇.
"로흐센 공자는 왜 여기 계십니까?"
"음?"
조금 떠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말을 슥 꺼내자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진(추정)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여러 가지라 하면?"
"첫째는 저들이 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그 시선을 받아 가면서까지 저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오."
"...."
"저들이 나를 경시한다고 하여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그렇기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구태여 스트레스까지 받아 가며 내게 불리한 전장에 가서 싸울 필요가 있겠소? 나는 인맥을 쌓고자 이곳에 온 것도 아니거늘."
...말하는 어투를 보니 진은 확실하군.
말과 함께 매끄러운 미소를 짓는 진의 모습에 내심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생각이 복잡해졌으니까.
'겉보기로만 봤을 때 녀석은 멀쩡하다.'
망나니. 폐인.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지금 술잔을 기울이며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저 여유를 즐기고 있는 귀공자의 모습이니까.
저 모습을 보고 열등감에 찌들어 있다, 패배감에 억눌려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건강을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것중에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정말 진은 지금 멀쩡한 상태인가?
150회차의 녀석은 내게 거짓말을 했을까? 과거 망나니였던 내게 공감하기 위해서?
'그럴 리가.'
녀석은 거짓된 경험으로 남을 속일 만한 놈이 못 된다.
지휘관의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표정에 감정이 잘 드러나던 녀석의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연기라고는 할 줄 모르던, 그저 정직하던 멍청한 녀석.
'애당초 이황자도 망나니 삼황자를 되돌려주겠다는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었지.'
지금의 여유는 어디까지나 표면에 불과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어떤 상태인지 모습을 드러낼 터.
"한 잔 주십시오."
"아, 좋소. 뭐로 드리면 되겠소?"
"공자와 주종은 맞추겠습니다."
"호."
생각을 정리하고 잔을 내밀자 기꺼운 표정으로 병을 든 진이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청록빛으로 물들어 잔을 반쯤 채우는 술.
"레냑이라는 술이오. 혹시 아시오?"
"방랑자들의 술."
"잘 아시는군. 이 중부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술인데."
"좋아합니다. 몇 번 마셔 보기도 했고요."
"그거참 별난 일이오. 하하. 쓰기만 하고 썩 좋은 술은 아니거늘."
방랑자들의 술 레냑.
어디서나 자라는 식생들을 섞어 만드는 이 술은 진의 말대로 썩 좋은 술은 아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쓴맛이 혀를 잠식하고 지워지지 않는 풀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맛없는 술.
비록 재료가 비싸거나 제작이 까다로운 건 아니지만, 그 맛과 향 때문에 즐기는 이가 극히 적다. 수요가 적으니 공급이 적고, 공급이 적으니 유통이 되지 않는 그런 술이라고 할까.
"술맛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 변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소."
고통을 고통으로 잊기 위해 마시는 술.
그런 술이기에 진과 나는 이 술을 좋아했다. 전장에서는 하루가 다르도록 함께 술잔을 나누었던 전우들이 죽어 나갔고, 이 맛없고 쓰디쓴 술을 마시면 죽어 간 전우의 넋을 달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크으으."
한 모금.
레냑을 입에 머금고 그 쓴맛을 즐기다가 목에 넘긴 진이 알싸한 감각에 신음을 흘리고서 잔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이어지는 말.
"사실 아까 처음 레이 공자가 말을 걸어왔을 때 꽤 놀랐소."
"그렇습니까?"
"그렇소. 언젠가 한 번쯤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 나와 처지가 비슷하다 싶어서."
"처지가 비슷하다?"
"별건 아니오. 그냥...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지."
씁쓸하게 잔을 찰랑인 진이 테라스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레이 공자는 재능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재능이 주어지지 않는 것. 정말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나는 말이오. 노력이라는 게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소."
부지런한 거북이, 느긋한 토끼.
동화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에게 그런 교훈을 남긴다. 노력하는 둔재는 노력하지 않는 천재를 이길 수 있노라고. 너도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노라고.
낙관적인 자들은 그 말에 현혹되어 꿈을 키운다. 삼십이 넘도록 오러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한 자가 기사가 되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간단한 연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마법사가 되기 위해 몇 년이고 책을 펼쳐 보는 이들.
"다 부질없는 짓이지."
피식 웃는 것으로 노력의 중요성을 모조리 부정해 버린 진이 말을 이었다.
"부지런한 거북이가 느긋한 토끼를 이길 수 있다. 그건 맞는 말일지도 모르오."
"...."
"하지만 세상을 살아 보니 달랐소. 토끼들은 느긋하지 않았소. 게으른 천재 같은 건 열에 하나 나올까 말까였지. 진짜 천재들은... 너무나도 부지런하더군."
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때 거북이는 토끼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태생부터 타고난 것이 다르니까. 똑같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거북이는 토끼보다 나아가는 속도가 훨씬 느리니까.
"기울일 수 있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소."
"...."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고, 그 시간을 최대로 활용한다면 결국 마지막 차이를 가르는 건 재능이지."
넘을 수 없는 벽.
"재능이야말로 그런 것이오. 선을 그어 놓고, 너는 절대로 이 선을 넘어올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오."
"...."
"내 말이 틀렸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 표정을 잠시 살핀 진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레이 공자를 만나 보고 싶었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오. 나도 벽을 느껴 본 사람이니까."
"벽, 이라."
"과거의 공자처럼 재능의 벽을 넘지 못해 걷는 것을 포기했소. 공자의 소식을 듣고 나와 비슷한 꼴이라고 생각해서 친밀감을 가지기도 했고. 하지만... 이젠 아닌 모양이군. 공자는 그 벽을 넘을 생각을 한 모양이니."
슬쩍 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바라본 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영원히 넘지 못할 벽을 향해 또다시 도약한다라...."
"...."
"그 처지에 공감하진 못하겠지만, 응원하겠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공자 같은 사람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니."
넘지 못할 벽을 향해 도약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보답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 다시 도전한다... 대단한 일이오."
기이한 눈.
마치 진리를 찾는 구도자를 보는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고서 레냑으로 입을 한 번 적셨다. 쓰게 입을 가득 메우는 레냑의 짙은 풀 내음.
열등감도, 패배자의 낯짝도 안으로 묻혀 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으니까.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니 알겠다. 진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까고 있네. 병신이."
"...뭐라고 하셨소?"
이 머저리는 멀쩡한 게 아니다.
"아주 염병을 한다고. 새끼야."
속이 멀쩡한 놈이 이렇게 찌질할 수는 없으니까.
"갑자기 무슨...."
"야."
쿠당탕!
갑작스러운 욕설과 함께 멱살을 잡자 당황한 진이 내 팔뚝을 잡으면서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진의 말.
"레이 공자. 취하신 모양이오. 이 무례는 잊을 테니 이쯤에서...."
"취하긴 지랄은."
"...."
"너 뭐 돼?"
"뭐요?"
"뭐 되냐고, 뭐 노력의 천재야? 네가 정말 끝까지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어?"
같은 노력을 기울이면 둔재는 천재를 이길 수 없다.
그건 맞는 말이다.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재능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불공평한 거니까.
천재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재능이 있는 이들은 부지런하기까지 하다. 이 세상이야말로 정말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지.
하지만.
"그건 걷고 걸어서 도달한 길의 끝에서나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얼마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린 너 같은 머저리가 아니라."
"...."
"몇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않고서 뭐? 노력을 했어? 따라잡을 수 없어?"
기가 차다. 스스로 얼마나 막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나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저 꼬라지가.
"나는... 노력했소."
"'네 딴에는' 그렇겠지.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아가면서 쓰레기 같은 노력을 했겠어. 고작 1년, 아니면 2년?"
"'딴에는'이 아니다...! 네가 뭘 아느냐!"
멱살을 잡은 내 손을 팍하고 뿌리친 진이 나를 노려보았다.
"내 앞에 서 있는 형제들을 넘기 위해 하루에 네 시간을 자면서 공부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정략을 공부하고, 스승을 초빙해서 사교술을 공부하고! 하지만 할 수 없었다!"
"...."
"무슨 짓을 해도, 얼마나 노력해도 결국 형제의 하위호환이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을 아느냐!"
인망은 일황자를 따라잡지 못하고, 정치는 이황자를 따라잡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가진바 재능의 차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정진해 왔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몇 년이고, 몇 년이고!"
"...."
"겨우 한 번 패배했다고 검을 놓은 네놈과는 다르다! 나는 수십 번을, 수백 번을 패배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왔단 말이다!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를 빠득 갈아붙인 진이 내 멱살을 쥐었다.
"재능의 차이는 좁힐 수 없다. '벽'에 수백 번 도전하고 깨지면서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너는 아직 한 번밖에 지지 않아서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지."
"...."
"네가 몇백 번을 도전해도 같다. 너는 작은 검귀에게 이길 수 없고, 나는 형제들에게 이길 수 없다. 그게 재능의 차이니까! 노력을 아무리 하더라도 좁힐 수 없는 차이니까! 그러니...!"
자격도 없는 주제에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
"나를 내버려 둬라...!"
분노로 충혈된 진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천천히 진의 팔뚝을 잡고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이어 내뱉은 내 말을 듣고서 눈을 크게 뜨는 진.
"이기면?"
"...뭐?"
"이기면 어떻게 할 거냐고. 새끼야."
"그게 대체 무슨...."
"나랑 내기 하나 하자고. 머저리."
여리여리하기 짝이 없는 팔뚝을 잡아떼고서 씩 웃고 말을 이었다.
"곧 있으면 황립 아카데미의 문화제가 열리지."
"...."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거기에 내 '벽'이 올 예정이다. 십종대회의 참가를 노리고 말이야."
4년 전 나를 패퇴시켰던 꼬마. 작은 검귀. 샤엘 키르나.
"그 녀석을 꺾고 네 이름을 외쳐 주지. 다음은 네 차례라고."
"...."
"꺾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대회의 정점에 오르겠어. 누구도 내 밑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주마. 그러니."
시상식에서 네 이름이 흘러나오면 너 역시 일어나야 한다.
"이건 내가 네게 하는 강요다.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그걸 어떻게!"
쿠당탕!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본 내 말에 눈을 부릅뜬 진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녀석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뒤로 돌아 버리는 나.
"나는 네가 둔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천재야. 아직 스스로 뭐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는 머저리일 뿐이지. 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둔재라고 생각한다면... 구경하러 와라."
"...무엇을."
"둔재가 천재를 이기는 방법."
조용히 웃고서 아직 남은 레냑을 입안에 들이붓고 말을 이었다.
"내가 벽을 넘는 방법을 보여 줄 테니까."
26화 혼약자 (1)
애주연이 끝났다.
"황자님. 이번 애주연은 어떠셨습니까?"
"...."
모두가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남아 술잔을 기울이다가 마차에 올라탄 진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제 호위, 황실기사 테로트를 보고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눈빛 저변에 기묘하게 일렁이는 무언가.
"테로트 경."
"예?"
"이 목걸이의 위장을 꿰뚫어 보려면 적어도 마탑주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정말 사실인가?"
"예."
"틀림없는가?"
"예. 틀림없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
섣불리 말할 것은 아니다.
제 심복을 자처하고 있는 테로트에게마저 방금 있었던 일을 함구한 진이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만큼 방금 있었던 일이 기이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접근한 거지?'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처럼 여겨지더라도 대제국의 황자인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에게는 제 의도를 숨기고 접근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건 진의 신분이 너무나도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낱 한량처럼 살아도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핏줄이기에 오히려 그런 진을 구슬려서 무언가를 해 보려고 접근하는 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
물론, 진은 그런 이들에게 휘둘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이런 몰락한 황자에게, 비관적이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다가올 만한 이들이 좋은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지 않던가.
하지만.
'레이 지크. 너는 대체 뭘 원하고 있었지?'
레이 지크는 어떤가.
'갑작스럽게 화를 내고, 나를 성토하고.'
멱살을 잡힌 순간 진은 레이가 정곡을 찔려서 화를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화를 낼 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실제로 눈을 바라보았을 때도 그랬다. 레이의 눈 안에 있는 건 분노였다. 마치 목도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바라보았을 때의 눈빛.
하지만 그 너머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친형제를 걱정하는 것과도 같은 그 진한 걱정은 어째서 묻어 나온단 말인가.
'구태여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밝힌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체는 어떻게 알았으며, 또 그건 왜 밝혔는가. 애당초 왜 접근해 왔고, 놈은 어째서 자신을 걱정하는가.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무엇이 목적인가.
"후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테로트의 물음에 무뚝뚝하게 답한 진이 조용히 턱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말.
"테로트 경."
"하문하십시오."
"레이 지크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레이 지크라면... 이안 님의 적통 말씀이십니까? 한때 천재로 유명했던."
"그래. 인장을 빌려주겠다. 왕실 정보부에 들러서 내게 허가된 정보는 싹 쓸어 오도록."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고, 어째서 무너졌는지.
황도에 올라온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자신의 위장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 능력은 얼마나 뛰어나고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모조리 밝혀야 한다.'
놈은 벽을 넘는 방법을 보여 주겠노라고 말했다. 자신도, 과거의 놈도 넘지 못했던 벽을.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벽은 넘기 어렵기에 벽이니까. 감히 예고하고 넘을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정녕 네가 벽을 넘는다면.'
그리하여 벽이라는 게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 진이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멀리에서, 시조의 성상이 보이고 있었다.
* * *
못 참았다.
"아... 으아아아!"
팡팡팡!
"크아아악!"
철컥!
"뭐야, 도련님! 무슨 일이야!"
수도에 위치한 지크가 저택.
침대에 누운 채로 베개를 주먹으로 패고 있자 소리에 깜짝 놀란 카야가 문짝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다가 내 모습을 바라보고 눈매를 좁혔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카야의 눈빛.
"도련님 뭐 해?"
"후회."
"굉장히 깜찍한 방식으로 후회를 하네. 도련님 이런 이미지 아니잖아."
"내가 뭐."
"망나니는 후회하려면 막 집기 같은 걸 때려 부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베개 때리고 이불이나 걷어차고 그래서야 되겠어?"
"아까운 집기를 왜 때려 부수냐.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이나 그런 짓을 하지."
"그건 그렇긴 해."
내 말에 피식 웃은 카야가 침대 옆에 슬쩍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별일 아니야. 누구한테 욕 한 바가지 시원하게 쏟아 주고 왔을 뿐이지."
"그건 정말 별일 아니네. 누구한테 했는데?"
"황자."
"음. 황자라고... 어? 누구?"
"삼황자.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끼에에엑!"
내 말을 듣자마자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바라본 것처럼 괴성을 지른 카야가 '황실모독죄! 연좌제!!!'라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황실 기사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물론 그럴 일은 없다. 내가 아는 진은 욕 한 번 먹었다고 자신의 가짜 신분을 드러내는 손해를 보는 머저리는 아니니까. 무언가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앞이 아니라 뒤에서 조치를 취할 터.
그러니 표면적인 제재 자체는 문제가 없다. 아니, 애당초 제재 자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없지만.
'대체 왜 급발진한 거지?'
그렇다고 해서 그게 괜찮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옆에서 보나, 내 스스로 보나 그건 갑작스러운 게 맞았으니까.
'예전 같은 모습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예전에는 망나니였다.
150회차에서 진은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망나니 레이 지크보다도 한심한 놈이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라는 놈이었노라고. 과거로 돌아가면 정신을 차리게 해 달라고.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각오도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나를 설득하려면 그런 모습으로는 안 돼. 씨팔. 노력으로 재능을 극복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줬어야지-!!!
'...아마 기억을 되찾기 전의 나 같은 낯짝을 하고 있어서겠지.'
기억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150회차의 나에 비해서 미숙함을 느끼는 것은 그 기억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뭐, 별수 없나."
저질러 버린 건 저질러 버린 거고, 계획 자체는 바뀌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다. 진에게 언약한 것.
십종제(十宗祭)에서의 우승을 목표로 삼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십종제. 황립 아카데미 문화제에서 개최하는 열 개의 대회.'
황립 아카데미의 문화제는 성대하고, 개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학생들과 외부인들이 합심해서 만들어 나가는 열 개의 대회인 십종제다.
마도, 체술, 통합전투, 마공학, 던전 탐색, 종합전술, 사냥, 상술, 난제해독, 기숙사 대항전까지.
가장 볼거리가 많이 나오는 이 열 가지 대회는 모토가 '외부인과 합심해서 만들어 내는 대회'인 만큼 외부인의 참가 역시 가능하다. 물론 당연히 대회마다 참가 조건이 있긴 하지만, 보편적으로 스물다섯 이하라면 모두 참가가 가능하지.
각 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하면 상패와 함께 괜찮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만약 한 명이 삼관왕 이상을 차지하면 제국의 황제가 직접 왕림하여 그 상패를 수여하기 때문에 영광을 얻기 위해 어마어마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 십종제다. 그런데 거기서 반 이상을 우승한다는 건 아카데미가 생기고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는 일.
애당초 출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든 대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빙의자의 미래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법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내가 마도학을 겨루는 대회에서 우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내가 이길 수 있는 대회만을 확실하게 이겨야 한다는 건데....
'체술과 통합전투는 괜찮아. 혼자 하는 거니까.'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나는 또래 중에선 상당히 강한 편이다.
4년 전에 샤엘에게 패배하기 전에는 내 나이 근처에서 내 검을 스무 번 이상 받아 내는 녀석이 없었을 정도다. 스물 근처까지 가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정도.
비록 검을 오래 잡지 않아서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감각도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기억을 찾고 오러를 각성하면서 내 무력은 다시 상위권으로 올라온 편이다. 십종제가 벌어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더 수련할 예정이니, 그 두 개는 아슬아슬하게 어떻게든 될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혼자 참가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다른 것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마공학, 이건 안 되고....'
'상술도 답 없지.'
'기숙사 대항전은 아예 참가자격이 안 돼. 기숙사 대항전에 참가할 수 있는 외부인은 아카데미 졸업생뿐이니까.'
마도. 마공학. 상술. 기숙사 대항전.
벌써 네 개가 날아갔다. 체술과 통합전투를 제외하면 남은 건 종합전술과 던전 탐색, 사냥, 난제해독.
이 중에서 하나를 제외한 세 개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
남아 있는 모든 대회가 '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믿음직한 팀원이 필요해.'
필요한 팀의 구성은 최소 둘. 최대 다섯 명 정도.
팀 합을 맞추어 볼 시간이 상당히 적다는 걸 생각하면 팀원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게 명확히 정해져 있다. 내가 혼자서 모두를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면 물론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데다가 무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대회도 있으니까.
'지금 급선무는 파티원을 구하는 거야.'
나. 리나. 그리고 추가로 세 명.
전위가 두 명이나 있으니 보조가 필요하다. 마법사나 마공학자, 사제도 있으면 좋을 테고, 카야같이 함정 해체나 색적에 뛰어난 레인저 계열도 한 명 있었으면 좋겠지. 카야가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카야는 목줄 역할로 바쁘니까.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 건 아니다.
유능한 팀원은 곧 유능한 인재라는 뜻이고, 아카데미에 오는 한 달간 미래에 잠재력을 발휘하는 아카데미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머릿속에 때려 박아 놓았다. 개중에서 조건에 맞는 녀석들이야 얼마든지 있지. 하지만.
그 녀석들을 어떻게 섭외해야 하는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그래.
애당초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마법 같은 건 없다. 팀원이 필요하다면 한 명씩 차근차근 섭외해 나가는 수밖에 없을 터.
"일단은, 마법사."
내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
-멍청아. 도망가라는 뜻이야.
작금의 수도에서 그런 사람이라면 한 명뿐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나와 친분이 있는 여자.
"노아 루미너스."
수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마탑, 광휘 마탑의 차기 마탑주이자 동시에 150회차에서 나를 도주시키고 최후의 요새와 함께 폭사해 버린 내 약혼녀.
"우선 너부터."
나는 한번 만나자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튿날 내게 초대장이 날아왔다.
광휘마탑주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이.
27화 혼약자 (2)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없어.
-누군가 이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너일 거야.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닌 것 같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바보야.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어서 도망가라는 뜻이야.
* * *
일반적인 파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 무엇일까.
혹자는 적을 막아 주는 전위가 없으면 전투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즉각적으로 상체를 치료해 주고 독을 해주해 줄 수 있는 사제가, 누군가는 함정과 경계, 색적 등 전투를 제외한 대부분을 수행할 수 있는 척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모두 빠져서는 안 되는 역할이니만큼 그 근거도 확실할 터.
그러나 정작 용병이나 트레져헌터, 모험가 파티를 보면 그들이 가장 원하고 우대하는 직종은 하나뿐이다. 데리고 다니기도 까다롭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간도 많지만, 그럼에도 유용한 직종. 마도학을 추구하는 자들.
일컫기를,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고 하여 마법사.
즉, 뛰어난 누군가를 파티에 영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가장 첫 번째는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여기가 광휘마탑입니까!"
황도의 내부. 마탑들이 즐비한 마학 지구.
"괴, 굉장합니다...!"
순환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마탑의 정경에 놀람을 감추지 못한 제임스가 촌뜨기티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말 그대로 목을 올려도 올려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탑의 모습.
"어떻게 이런... 안 무너지는 겁니까? 무슨 건축 기술을 이용했길래...."
"건축 기술이라기보단 마법기술이지."
"예?"
"저거, 한 층마다 다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고."
마탑은 돈이 많다. 개중에서도 뛰어난 마탑은 특히나 더 돈이 많고.
마탑의 높이가 곧 해당 마탑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 거기서 파생된다. 권위가 높고 뛰어난 마탑은 그만큼 돈이 많고, 돈이 많은 만큼 더 많은 마석을 들여 마탑을 지을 수 있기 마련이니.
광휘마탑은 현 황도에서 1, 2위를 다투는 마탑.
별격의 존재로 치부되는 '마법의 총애를 받는' 루렌실이 아니었다면 부동의 일위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을 것이 바로 광휘 마탑이다. 권위라는 게 한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닌 만큼 그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정점에 군림해 온 광휘 학파의 마탑은 점차 그 높이를 쌓아올려 왔고, 작금에 이르지.
고로 이 황도에서 광휘 마탑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건물은 없다.
감히 황제를 내려다볼 수 없기에 황실 쪽을 향한 창문은 만들지 않았지만, 미친 척을 한다면 황제조차도 내려다볼 수 있는 마탑이 광휘 마탑인 것이다.
"신기합니다...."
"그야 마법이니까."
입을 떡 벌리고 목이 부러져라 탑을 올려다보고 있는 제임스의 모습에 피식 웃고서 등을 툭 쳤다. 그러자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제임스.
"그러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촌티 그만 내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아, 예!"
내 말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서 접수대 앞에 줄을 서는 제임스를 보면서 팔짱을 끼고 그 뒤를 따랐다. 제임스는 아무 생각 없이 광휘마탑의 권위에 놀라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저 권위가 조금 다른 이야기로 들렸으니까.
'반드시 노아를 영입해야 하는데....'
노아 루미너스가 누구인가.
루미너스 백작가의 하나뿐인 금지옥엽이다. 비록 위로 오빠 하나가 있어 루미너스 백작가를 이을 후계자는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너스 백작가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
사실 그 정도라면 나도 별생각 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미너스 백작가가 비록 백작가고 우리 지크가가 자작가라고는 하지만, 숱하게 이름 있는 기사들을 배출해 낸 지크가는 다른 자작가들보다 한 급 정도 더 높은 취급을 받으니까. 백작가에 비해서 조금 급이 떨어질 수는 있어도 아예 꿀린다고 볼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거기에 광휘 마탑의 후계자라는 신분이 더해지면 어떨까?
'마탑의 탑주는 후작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수도에 마탑은 일곱 개뿐이고, 개중에서도 광휘 마탑은 수위를 다투는 마탑이다. 그 말은 제국의 공작이나 실권을 잡고 있는 소수의 후작과도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
급이 맞지 않는다.
'그 녀석이 급을 따져서 나를 거절할 성격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가령 노아의 스승인 광휘마탑주가 노아를 내 파티원으로 내어 줄까? 내 평판을 알면서도?
"공자님?"
"음?"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갑자기 귓가를 파고든 제임스의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앞장서서 줄을 서고 있다가 슬쩍 비켜서는 제임스.
"방문 목적을 밝히랍니다."
"아, 방문 목적."
벌써 사람이 다 빠졌나.
고개를 휘휘 저어 머릿속을 점거하고 있던 생각을 흩어 내고 앞으로 다가서자 우중충하게 접수대에 앉아있 던 마법사 하나가 피곤한 눈으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끊어져 갈 듯한 목소리.
"방문 목적을 밝혀 주십시오."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요."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약속은 되어 계신지."
"노아 루미너스를 보러 왔습니다. 약속은 되어 있을 겁니다. 레이 지크 이름으로."
"만나러 온 사람은 노아 루미너스. 이름은 레이 지크... 음?"
잠시 내 말을 받아 적는가 싶던 마법사가 문득 내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았는지 위로 시선을 올렸다가 내 모습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비웃는 느낌은 아닌 그런 웃음.
"당신이 그 레이 공자님이시군요."
"...저를 아십니까?"
"예. 뭐. 유명하지요. 특히 여기선 좀 많이 유명합니다."
"...."
"아마 당신 조부님보다 당신이 더 유명할 겁니다."
광휘마탑에서 할아범보다 유명하다고? 내가?
"그게 대체 무슨...."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뭐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요."
뭔가 재미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는 듯 나를 보면서 어울리지 않게 연신 싱글벙글 웃어 대는 마법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빠르게 서류를 정리해서 내게 방문증을 내어 주는 마법사.
"이 방문증 가지고 부유원판까지 가시면 대기하고 있는 마법사가 안내해 줄 겁니다."
"...."
찜찜한데. 묘하게 기분도 나쁘고.
"어서 가십시오."
별수 없나.
얼른 가 보라는 듯 훠이훠이 손짓하는 마법사를 보다가 금색 방문증을 받아들고서 제임스를 데리고 부유원판으로 향했다. 하지만 걷는 사이에도 계속 꽂히는 시선.
-후배님. 방금 봤나? 황금 방문증. 저 사람 탑주님 방문객인 모양인데.
-예. 확실히 봤지 말입니다.
-오늘 탑주님 방문객이면... 한 명밖에 없지 않나?
-레이 공자님이 오신다고 하던데요.
-그 대단한?
-예. 그 대단한....
제임스와 내가 지나갈 때마다 마법사들이 내 목에 걸려 있는 방문증을 보고 계속해서 수근거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커져 가는 수군거림.
...대체 뭔데?
"공자님...."
"왜."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저희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연이네. 나도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던 참이거든."
제임스의 말에 응답하면서 시선을 슥 돌리자 내 시선을 받은 마법사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의 기분 탓은 아닌 느낌.
"공자님의 악명이 여기에도 퍼진 걸까요?"
"상사한테 악명이라고? 제임스 요즘 살 만한가 보네."
"하지만 사실이잖습니까. 온 제국에 망나니로 유명하신데요."
"그건 그렇지. 뭐, 여기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은 그런 느낌은 아니긴 한데...."
모르겠다. 한 명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노아라도 만나서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일단 올라가자고."
"예."
부유원판에 다가가 방문증을 제시하자마자 황금 방문증을 확인하고 흠칫 놀란 마법사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부유원판을 조작했다. 이윽고 꼭대기층 까지 수직으로 상승하는 부유원판.
우우웅!
"접수처에서 기별을 넣었을 테니 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 예."
노아가 아니라 탑주가 기다린다고?
부유원판이 멈추고 우리가 내리자 빠르게 말을 내뱉은 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사라지는 마법사.
똑똑똑!
잠시 그 모습을 위에서 내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뭐든 닥쳐 봐야 알 수 있을 듯싶었으니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열려 있으니."
늙수그레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천천히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 앞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넓은 공간 저 멀리에서 빛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익숙한 노인의 모습.
나는 노인을 알고 있다. 얼굴을 알지 못해도 기세가 노인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다.
대기를 채우는 묵직한 마나. 그 이상으로 어깨를 내리누르는 강자 특유의 알 수 없는 위압감.
이 사람이야말로 제국 마법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
광휘마탑주.
"레이 지크입니다."
손 한 번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노인이다. 할아범과는 다르게 노아의 스승인 이상 망나니로 유명한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도 않을 터.
"자네가."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는 나직하게 말을 내뱉는 광휘마탑주의 입에 집중했고.
"노아의."
다음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혼을 나눈 반려이자 한 손에 흑염룡을 기르고 있으며 사실 삼천 년을 살아와 과거와 미래를 모두 꿰뚫는 대현자인가?"
"...뭐요?"
이건 또 뭔 개소리야.
* * *
마법사는 다른 말로 '준비하는 자'라고 불린다.
이는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쌓아 온 경험을 토대로 즉각적인 대응을 생각하는 기사들과는 다르게 캐스팅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마법사는 먼저 많은 상황을 상정해 두고 대응해야만 하니까.
고위 마법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생각은 깊어지고, 상정하는 상황은 많아진다. 우스갯소리로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면 앞으로 펼쳐질 만 가지 상황에 전부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렇기에 광휘마탑주는 레이를 앞에 둔 지금 깊이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팔에 흑염룡을 기르지 않는다고?"
"흑염룡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을 눈앞에서 회피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삼천 년을 살지도 않았고."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모두 꿰뚫는 대현자도 아니고?"
"도대체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흠."
다행이다.
눈앞의 청년, 레이를 바라보며 수염을 쓸어내린 광휘마탑주, 아르데 그로프트가 깊이 안도했다. 레이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정했던 최악의 가정을 회피한 상황.
"그렇지. 열아홉이면 사춘기가 전부 지났을 나이지...."
"애당초 그 이야기를 정말 믿으신 겁니까?"
"설마. 정상인이라면 그 이야기를 믿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왜...."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자네가 정상인인지."
아르데의 수제자, 노아 루미너스는 천재다. 광휘 마탑 내부에서는 그 재능을 쫓아갈 이가 없을 정도의 천재.
외모는 준수하고, 성격도 선한 데다가 재능까지 뛰어나다. 어쩌면 미래에 마탑주의 자리를 맡을 수도 있는 만큼 아르데에게는 예뻐 보이기만 하는 제자.
하지만 그런 제자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건 사춘기의 열병을 너무 오랫동안 앓고 있다는 것.
쉽게 말해서, 망상벽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방금 말한 건 내 제자가 자네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일세."
"노아가? 저에 대해서?"
"내 제자가 그 아이 말고 더 있겠는가?"
인상을 구긴 아르데가 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성격도 좋고, 재능도 뛰어나고, 마법도 열심히 배우는 착한 아이지만 그게 문제일세. 허황된 이야기를 진실처럼 떠들고 다닌다는 것."
"...."
"솔직하게 말하겠네. 그 아이는 좀... 아픈 아이 취급을 받고 있네. 본인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원래라면.
그저 사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조금 꼴불견이긴 하지만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내 제자에게는 친구가 없지."
"...."
"친구가 없으니 사회성이 좋아질 일도 없고, 사회성이 좋아지질 않으니 그놈의 망상병이 나아지지를 않아.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도 낯을 가리고, 공자 같은 또래 소년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네."
이대로 가면 스물이 지나고, 서른이 지나고, 마흔이 지나도 똑같을 터.
아무리 마법사 중에 괴팍한 자가 많고 그걸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정도 용인받는다고는 해도, 그걸 계속 유지하게 놔둘 수는 없다. 망나니로 유명한 레이 지크를 주저하지 않고 탑에 불러들인 것도 그것 때문.
"자네는 여러모로 거침이 없는 성격이라고 들었네. 남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는 그런 망종이라고 들었네."
"아뇨. 그 정도는 아닌데요. 유언비어 퍼트리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백작가의 후계자인 데다가 광휘마탑주인 자신의 제자 신분을 가지고 있는 노아를 때리지는 않을 터.
"내 제자와 파티를 맺고 싶다고 했지?"
"예... 뭐."
"그렇다면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네."
잠시 침묵한 아르데가 조용히 깍지끼고 분위기를 잡다가 묵직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제자를...."
"...."
"'시련'에 갇힌 내 제자를 꺼내 와 주게."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28화 혼약자 (3)
이제는 구현할 수 없는 옛 고대 마법의 잔재 중에서는 신기한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시키는 '관문'이라든가, 아니면 일정 권역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섞어 버리는 '부서진 시간'. 대륙 어디에 있든 대상을 지켜볼 수 있는 '아르고스의 눈' 같은 것이 있지.
그 원리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강력한 것이 고대 마법.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많은 학자와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수많은 시간 동안 연구를 반복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시련'.
황도 인근에 위치한, 스스로에게 시련을 부여할 수 있는 고대 마법의 사원이다.
"'시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는가?"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난이도에 맞게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한계를 보여 주고, 그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고."
"맞네. 스스로 생각하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시련이지. 바로 그 부분이 문제일세."
"...."
"그 아이는 자신의 현 상황에 비해 스스로 생각하는 한계가 너무나도 높아."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상상하고 단정 짓는다.
가령 농사짓는 농민 중에서 소와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 이는 있더라도, 용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그렇게 떠들 수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안 된다'라는 것을 알며 사리곤 할 터.
'시련'은 그런 한계를 보여 주고 넘어서라고 종용한다. 배고픔도,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넘어설 때까지.
하지만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한계점 자체가 높다면?
"그 아이의 시련을 상상할 수는 없겠네만, 그 아이의 평소 언동을 생각해 보면... 아마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겠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을 정도로."
"예...."
"중요한 건 이것일세. 시련은 한번 통과하거나 실패한 자는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시련을 같이 받는 것도 가능하지만, 서로 인연이 없으면 한 시련으로 엮이지 않는다.
인연이 있더라도 한번 시련을 받은 자는 다시 시련에 도전할 수 없다. 한마디로 여태껏 '시련'에 도전하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노아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인데.
"...그런 사람이 없네."
"예?"
"나는 이미 어릴 적에 시련을 통과했고, 다른 사람을 찾자니 그 아이가 친구가 없어서...."
"아."
그러니까, 사회성이 모자라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없다?
"위험한 건 아니니, 이대로 놔둬도 문제는 없겠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일세."
시련 안에서는 몇 번을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어차피 환상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시련이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련은 깰 때까지 사람을 잡아 놓으니까.
평균 반년.
끝까지 시련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그 이상으로도 안에 잡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게 되면 당연히 십종제 참가는 물 건너간 셈이고.
"그 아이가 들어간 지 한 달이 넘었네. 만약 들어간 기간을 넘어서 더 체류하게 된다면 자네도 곤란하겠지."
"...."
"어떤가. 받아들이겠는가?"
선택지가 없다. 노아 이외의 마법사를 구하려고 해도 지금 당장 떠오르는 인재가 없으니.
물론 중요한 건 하나다. 노아가 생각하는 한계점을 내가 돌파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하지만....
"뭐, 까짓거 해 보죠."
자신은 있다. 노아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해 봤자....
겪어 보지도 않은 세계의 끝을 상상할 수는 없을 테니까.
"잘되었군. 자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걸세. '시련'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나나 혹은 백작급 고위 인사의 추천서를 받아야만...."
"아, 저는 조부님께 추천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안 님이 있었군."
우리 할아범은 백작급 이상의 고위 인사는 아니지만, 제국을 대표했던 기사 중 하나다. 후학 양성을 위해서 추천서를 다섯 장 정도 발급받을 수 있을 터.
"어쨌든 좋은 기회가 될 걸세. 굳이 좋은 추천장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건 맞는 말이다.
아르데의 말에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직 채 해소되지 않은 의문.
"그런데 왜 하필 접니까?"
"...? 말하지 않았는가. 들어갈 수 있는 건 인연이 닿은 사람뿐이고, 그 아이는 인연이...."
"아니, 뭐 그건 압니다. 다만 아시지 않습니까. 함께 받는 시련의 맹점."
시련을 함께 받는다는 건 둘 모두의 한계를 경험한다는 뜻.
"제가 들어가는 순간 난이도는 치솟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평판을 생각해 보면 나를 신뢰할 이유가 없는데.
합당한 내 의문에 피식 웃은 아르데가 탁자 위에 깍지낀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내 제자는 허황되고 과장을 좋아하지만, 아예 없는 일을 있다고 하진 않아."
"...."
"나는 여론보다 내 제자의 눈을 믿을 뿐이네."
그런가.
"해 보겠습니다."
"좋네. 출발은 내일 곧바로 하도록 하지. 내가 도와줄 게 있는가?"
"아뇨."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무운을 비네."
말을 마치고 나가 보라는 듯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아르데를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시련'이라...."
마침 잘됐네.
거기도 볼일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음산하게 웃으십니까?"
"아무것도."
내 표정을 보면서 슬쩍 한 걸음 물러서는 제임스를 보고 손을 흔든 뒤 내려가는 부유원판에 발을 얹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아주 재미있는 생각.
* * *
레이와 만난 뒤로도 삼황자, 진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황자궁에서 두문불출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갔다. 사교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가끔 정체를 숨긴 채 거리 밖으로 나갈 뿐.
물론,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진은 그날의 기억을 아주 인상 깊게 간직하고 있었고, 그 강렬한 경험이 무엇에서 발로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진을 보필하는 황실 기사 테로트는 요즘 들어 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자가 지시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
"황자님의 상태는 어떤가."
"평소와 같으십니다. 오전부터 쭉 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계십니다."
"그런가."
시비의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인 황실 기사 테로트가 손에 쥔 문서를 잠시 의식하다가 서재의 문을 손등으로 퉁퉁 두드려 기별을 넣었다. 곧이어 뭔가 툭툭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들어오게.
"들어가겠습니다."
끼익!
품목을 가리지 않는 각종 서적의 산.
테로트가 서재의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눈매를 좁혔다.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전부 쳐 놓고 그저 중독자처럼 책을 읽고 있는 진의 모습이 눈에 띄었으니까.
"황자님. 이렇게 환기도 하지 않고 계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네. 알고서 행하지 않은 것이지."
"황자님이 직접 행하지 않으셔도 되니 시비의 출입만이라도 허해 주십...."
"한량인 나와는 다르게 테로트 경은 바쁠 텐데, 설교나 하자고 찾아온 건가?"
자신의 말을 뚝 자르고 묻는 진의 모습에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알아챈 테로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가져온 보고서를 들어 올리는 테로트.
"명하신 대로 레이 지크에 대해 정보가 들어와서 가져왔습니다."
"정보?"
"예.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보고 올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레이 지크가 황실 관리부에 '시련'의 사용을 요청했습니다."
"'시련'의...."
무슨 행보인가.
잠시 그 의미를 생각한 진이 지금 '시련'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의 의도가 손에 잡힐 듯 뻔하게 보였으니까.
"지금 '시련'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마, 노아 루미너스였던가? 광휘마탑주의 수제자."
"그렇습니다."
"십종제에서 우승하겠다고 선언하고 갑자기 시련으로 간다는 건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겠군. 혼자서는 정점에 오를 수 없으니, 동료를 구하겠다는 심산인가...."
레이 지크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행동하리라 예상하긴 했다. 그동안 정보로 받아 본 레이 지크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협소한 것이었으니.
전위에 동생인 리나 지크. 마법사로는 혼약자인 노아 루미너스. 척후에는 동행한 황금광 카야.
그 셋이 그나마 협소한 레이 지크의 인간관계로 얻을 수 있는 유능한 파티원 후보다. 그중 하나인 노아를 영입하러 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터.
하지만....
"아깝군."
"예?"
"'시련'을 단순히 파티원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니, 아깝다는 뜻이다."
'시련'이 무엇인가.
그건 극복할 수 있는 한계선의 시련을 내려주고, 그것을 극복했을 때 그 고난의 정도에 따라 대상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를 내려 주는 것이다.
때로는 재능. 때로는 무기. 때로는 조언.
극복한 고난의 난이도에 따라 보상은 점점 더 커지고 중요해지니만큼, 들어가는 이들은 모두 고난을 상당히 올리고 들어간다. 당장 노아 루미너스가 들어간 것도 '상급 시련'이지 않던가.
"경은 '시련'의 평균 극복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래 걸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중급 시련은 한 달, 상급 시련은 반년이다. 물론 평균일 뿐이야. 그것보다 훨씬 더 늦게 나오는 사람도 존재하지. 중도 포기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노아의 시련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시련에 들어간다는 건 합동 시련에 임하겠다는 뜻.
그렇다면 난이도에 따른 가중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십종제를 준비하려면 일주일 내에는 반드시 파티원을 모아야 하니, 레이는 아마 최하급 시련을 받고 노아를 끌어내는 데 집중할 터.
"짧은 시간 내에 사람을 데리고 나오려면 난이도를 낮게 설정하는 수밖에 없겠지. 다른 건 너무 불확실하니까."
'시련'은 어렵지만, 그 보상은 충분히 달다. 그 누구나 '시련'을 사용하고 싶어 하기에 황실에서 관리하여 허가받은 이들만 사용할 수 있게 해 놓은 것도 그런 연유고.
"그런 기회를 단순히 파티원을 구하는 데 소모한다니...."
십종제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너무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닌가.
"안타까워."
실로 아깝다. 어째서 그런 짓을.
그렇게 생각한 진은 조용히 옆에 놓인 식은 찻잔을 기울였고.
"최...상급입니다."
테로트의 다음 말이 이어지는 순간, 입안에 있던 차를 주르륵 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최상급으로 진입했습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제정신인가?
저도 모르게 그런 의문을 품은 진이 황급히 테로트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받아서 읽어 보았다. 정말 '최상급 진입'이라고 적혀 있는 보고서.
"...미친놈이군."
최상급 난이도가 어떤 난이도인가?
제국 역사상에서도 돌파한 자가 거의 없는 극악 난이도의 시련이다. 최근에 그 시련을 돌파한 이가 그 아가룬밖에 없을 정도.
돌파율 1% 미만의 극악 난이도. 매 순간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돌파할 수 있는 관문.
그것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심지어 앞서서 시련을 받고 있는 노아는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해야 깰 수 있는 상급 난이도를 진행 중이다.
그 두 개가 합쳐지면 어떻게 되는가?
"노아 루미너스가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고, 레이 지크는 한계를 넘어야만 깰 수 있다...."
하나도 달성하기 힘든 걸, 두 개나 달성하겠다고. 그것도 동시에.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마치, 뒤를 생각하지 않는 정신병자의 소행이 아닌가.
저도 모르게 보고서를 읽으며 피식 웃다가 문득 자신의 표정을 자각하고 빠르게 얼굴을 굳힌 진이 고개를 젓다가 문득 테로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건 뭔가?"
"그... 그것이."
"뭔데 그러나?"
"초대장입니다."
"초대장?"
"예."
흔하디흔한 초대장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들고 있는가.
"줘 보게."
테로트는 총명한 기사다. 아무것도 아닌 초대장을 저렇게 들고 있지 않을 터.
머뭇거리는 테로트의 손에서 초대장을 빼앗은 진이 밀봉을 뜯고 초대장의 내용을 읽어 내리다가 멍을 때렸다.
레이 지크가 보낸 초대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련' 파티원 구함. 너만 오면 풀파티.
삼황자.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할 것도 없을 텐데, 구경이나 오십쇼.
당신도 이 시련에 참가하라고.
29화 타임어택 (1)
-흠? '시련' 말이냐?
-흐하하하! 그러고 보니 애송이 너는 '시련'을 통과해 본 적이 없었지. 제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시련'에 들어갈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
-'시련'은 한계다.
-하급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확인하고, 중급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며, 상급에서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해내게 하지.
-최상급은 어떻냐고?
-스스로 해낼 수 없는 것을 해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느냐? 흠.
-간단하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는 순간, 너는 실패할 테니까.
* * *
'시련'의 허가는 아르데가 장담한 대로 금방 떨어졌다.
"그, 도련님?"
"왜?"
"정말 최상급으로 할 거야?"
"그런데."
황도의 외진 곳. '시련'이 이루어지는 사원 앞.
"끄응...."
오랜만에 길리온이 집에 틀어박혀 있는 덕에 할 일이 사라져 나를 따라온 카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마치 제정신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야.
"...알고 있는 거지? 최상급 시련은...."
"실패율이 높지."
"...그래."
'시련'의 최대 기간 제한은 1년.
비록 그 안에서는 죽지 않는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이 넘도록 '시련'을 돌파하지 못하면 '시련'은 시련 대상자를 그냥 밖으로 쫓아내 버리고 출입 금지를 때려 버린다. 쉽게 말해서 시련을 실패했다고 판정하는 것.
하급이나 중급, 상급까지는 그래도 실패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
하급은 10퍼센트. 중급은 30퍼센트. 상급은 한 70퍼센트 정도 실패한다던가. 재능 있는 이들은 당연히 오랜 시간 고련할 것을 생각하고 상급에 도전하고는 하고, 정 시간이 없으면 중급이나 하급에 들어가곤 하지.
하지만 최상급의 실패율은?
"99%."
"...."
"여태까지 최상급 시련을 돌파한 사람이 열 명도 되지 않지. 도전한 사람은 천명 가까이 되는데 말이야."
최상급 시련을 돌파한다는 건 제국이 떠들썩해질 만한 이야기.
물론, 실제로 떠들썩해지진 않는다. 제국의 인재 유출에 관한 관심은 지대해서, 누가 어떤 시련을 돌파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완수하는 순간 이 소식은 반드시 황실의 고위층에게 들어가겠지. 그 정도의 업적이야."
"...그 정도로 세우기 힘든 업적이면 지금 도전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하는 거지. 시간도 많지 않고...."
"아니. 그러니까 최상급이어야 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는 상황.
그렇기에 최상급이다. 내가 가장 약할 지금이야말로 내 '한계'가 가장 낮을 때이니까.
적어도 이다음의 '한계'를 부수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자신은 있는 거지?"
"내가 언제 승산 없는 내기를 한 적이 있었나?"
"...그건 그렇긴 한데."
잠시 못 미더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카야가 한숨을 푹 내쉬다가 손을 저었다. 이어지는 말.
"어차피 말려 봤자 들을 생각도 없겠지. 도련님이니까."
"말이 잘 통해서 좋아."
실없는 말에 카야가 피식 실소를 터트리는 것을 보고 '시련'의 마법진 위로 올라 입을 열었다. 들어가기 전에 해 둬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카야."
"응?"
"내가 들어가면 아마 머지않아서 사람이 한 명 올 거다."
"누구?"
"있어. 허우대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우중충하게 다니는 놈."
지니스 폰 지그하르트. 내 악우.
'성격 자체는 다르지 않았지.'
사람은 변하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놈이 아무리 패배감에 절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보여 주겠다'라고 말한 이상 녀석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을 테니까. '시련'의 중도 포기가 불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놈이 오면 한마디만 전해 줘. 생각하기 전에 먼저 저지르고 보라고."
"...그거면 되는 거야?"
"어."
그거면 차고 넘친다. 지금의 놈은 패배자지만, 멍청이는 아니니까.
"들어간다."
"빨리 나와. 알겠지만, 길리온이 요즘 울상이야. 자기가 썩은 동아줄을 붙잡은 것 같다고...."
"오래 안 걸려. 길어 봤자 일주일이다."
일주일.
그 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그 후로도 성공할 수 없다. 얻을 수 없는 보상을 위해 고련하는 것보다 차라리 포기하고 빠르게 다른 이들을 찾는 것이 나을 터.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내고 나올 테니까.
우우우웅!
내 말과 함께 옆에 있던 황실 소속의 마법사가 조용히 '시련'을 작동시켰다. 동시에 허공을 수놓는 마법 문자들.
['시련'을 기동....]
[시련을 부여받는 자를 탐색하는 중....]
기기괴괴하면서 신비로운 형광이 형형색색으로 물들며 사위를 두른다. 인류가 해석할 수 없는 신비가 나를 인도하기 위해 몸체에 달라붙고, 이윽고 형상을 이룬다. 그리고.
[탐색 완료.]
[난이도 확인 완료. 최상급.]
[전송.]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무렵.
-와아아아아아-!!!!
"...."
나는 내가 낯익은 장소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 이런 구조인가."
악을 내지르면서 창을 내지르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습격하는 몬스터 떼.
퍽 익숙한 광경이다. 그 처참함도, 광기도 모조리 기억 속에 있는 광경이다.
전장. 150회차의 내가 평생을 보낸 장소.
"목표는... 저거겠군."
누가 보아도 자신이 목표라는 듯 아군 진영과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수정탑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뒤 칼을 뽑았다. 대강의 상황 파악은 끝났으니까.
"시련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인가."
첫 번째로 이 몬스터들의 공세를 저지할 것. 그래서 아군의 수정탑이 부서지지 않도록 할 것.
두 번째는, 저 군세를 뚫고 상대의 수정탑을 부술 것.
"간단해서 좋네."
간결한 과제지만, 나 혼자 해낼 수는 없는 과제다. 최우선시해야 할 건 이 전장에서 노아 루미너스를 찾는 것일 터.
"원래라면 이런 전장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긴 하지만... 뭐."
생각은 있다.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지.
뽑은 검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의 편린을 보면서 나는 빙긋 웃었다. 살 떨리는 전장의 공기.
처음 겪는 실전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생에서는.
* * *
'시련'이 부여하는 관문은 본디 사람마다 다르게 나온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사용해서 돌파할 수 있는 시련이 나오고, 군을 다스리는 군사에게는 마찬가지로 군대를 지휘해야만 깰 수 있는 시련이 나오기 마련.
검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싸우지 않는 자들... 연기자, 바드, 심지어는 도둑에게까지 각자 상황에 맞는 시련이 부여되지.
그건 '시련'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심상을 읽어 한계를 구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느끼는 자신의 한계선을 구현하고, 그걸 돌파해야만 깰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련'이랄까.
같은 난이도라도 사람마다 난이도의 차이는 있다.
그것이 단순한 체감인지, 아니면 실지(實地)인지는 알 수 없다. 서로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신에게나 가능한 법이니까. 그러나.
적어도 지금 시련을 받고 있는 노아 루미너스는 자신이 받고 있는 이 시련이 다른 누구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은 언제입니까. 마법사님-!!!"
"자, 잠깐 기다리거라!"
...그렇게 자신이 특별하다고 세뇌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포기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으아아악-!!!"
비명.
'저건 환상이다. 저건 환상이니라....'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인간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을 흠칫 떤 노아가 맹렬히 고개를 저으며 시련의 실체에 대해 되뇌었다. 한 달 동안 몇 번이나 같은 광경을 보았지만, 적응되지 않는 마음.
'환영인 걸 아는데도...!'
시련에 처음 진입하고 전장임을 알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이 우후죽순 죽어 나간다고 하나 환영이었으니까.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정녕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시련에 진입하고 채 반나절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난무하는 피와 살. 코끝을 절여 버릴 듯 풍겨오는 철의 냄새. 귀를 먹먹하게 하는 함성.
환상은, 환상임을 알아도 너무나 실제와 비슷했다.
익숙지 않은 광경에 이틀 내내 토했고,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된 시점은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렇게 3주가 흘러 지금.
종군 마법사가 된 노아는 군세를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물러서거라!"
바로 이렇게.
"[폭발하는 광휘]!"
주언이 전장을 꿰뚫는다. 단순한 두 어절의 주언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 네 줄기의 광원이 되고, 두 번 깜빡였을 때 다시 네 개로 나뉘어 열여섯의 빛살로 화했다.
다시 한번의 깜빡임.
마치 잘 교련된 기사단이 뻗어 낸 검과 같이 정렬한 빛살이 제각기 방향을 정해 몬스터의 중앙을 타격했다. 일견 거룩해 보이는 빛이 폭사하며 수십의 몬스터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실로 경천동지할 위력.
그러나.
"줄지... 않았구나."
그건 이 전장에서 지극히 국소적인 부분일 뿐이다.
전장을 점유하고 있는 양군의 군세는 못 해도 수천이 넘었으니까.
"젠장! 방어선이 밀린다! 목숨을 걸고 지켜... 크아아악!"
촤아악!
-케르르르르르-!!!!
"[일루의 수호]!"
이름을 알 수 없는 몬스터가 사마귀 같은 앞발을 휘둘러 선임 병사 하나를 찢어발기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주언을 외운 노아가 다시금 마나를 끌어 올려 마법을 폭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는 전황.
'이번에도...!'
인간의 군세가 밀린다. 몇 번이나 봐 왔던 광경.
가진바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아직 대마법사의 편린조차 되지 못한 노아는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없다. 몇 번이나 밀리고, 수호탑을 파괴당하고, 포위당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다시 새로 시작할 뿐.
하지만.
'저번과 같아서는 안 된다.'
조금 더. 조금이라도 더.
발전하지 않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오늘 100명을 살리고 200마리를 해치웠다면, 내일은 101명을 살리고 201마리를 해치워야만 한다. 꾸준하게 성장하는 것만이 이 시련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흐으으읍...."
들이쉬는 호흡에 마나가 깃들고, 내쉬는 숨결에 마법이 깃든다.
거력을 담고 덜덜 떨리는 노아의 손짓이 가까스로 궤적을 긋는다. 이윽고 하나의 손짓이 수인을, 수인이 법진을, 법진이 이적을 그려 내었다.
여태껏 시도해 보지 못했던 마법. 상궤를 벗어난 위력을 보이고 있어 '대'라는 수식어가 붙는 마법.
다른 공용 마법들과는 다르게 그런 마법은 마법 명에 개발한 마법사의 이름이 붙는다. 하나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상급 마법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마법.
"[밀라의 망치]...!"
처음이다.
"돼, 됐다...!"
이곳에 도달한 지 한 달. 마법사 인생으로는 근 10년.
그 오랜 기간 만에 처음으로 성공한 대마법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돈 노아가 적군에 마법을 처박기 위해 손짓했다. 그리고.
"가라! 망치! 본 공녀의 힘을 똑똑히 적군에게 보여라!"
이윽고 허공에서 생성된 거대한 거신의 망치가 적군에 처박힐 무렵.
[아군의 수호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장을 초기화합니다.]
"...아?"
허망하게 사라지는 망치와 전장을 보며 뇌를 정지시킨 노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제 찾았네. 어디 있었나 했더니, 거기 있었구만?"
묘하게 익숙한 흑발의 사내가 아군 수호탑에 검을 들고 올라와 있었다.
"역시 모르겠으면 재부팅이 답이지."
아주 쾌활한 미소를 머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