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상사복 0에 수렴
나는 참 상사복이 없다.
사회에 뛰어든 이후로 늘 하던 생각이었다.
"아니지, 내가 말해 준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했잖아. 철수 씨 이거 실수하는 거라니까?"
아는 건 없는 주제에 훈수는 줄기차게 두는 사수였던 이 주임.
"그래서 김 대리, 이 건 상부에는 내가 보고한다? 내가 좀 도와줄게!"
부하 직원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게 일상이던 박 과장.
"내가 김 차장 자네가 있어서 참 좋아. 요즘 젊은 사람들과 달리 말이 잘 통해."
내 워라밸을 깨부순 것은 물론, 멋대로 나를 회식 자리 운전기사로 채택한 최 부장.
나의 직장 생활을 신나게 말아먹은 그들은 대부분의 직장인이 극도로 혐오하는 '꼰대'이자 최악의 상사들이었다.
하지만 휴가 때 뒤적거리던 웹소설, <미친 황자는 세계를 구한다>의 '노버트 하르트만'에 빙의된 후 모시게 된 상사에 비하면 그들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대의 쓸모가 무엇이지?'
'지금의 그대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 알지 않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비생산적인 생각들을 피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물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질러대었으나, 찰나의 통증보다 음습한 사념들이 더욱 두려웠기에 어떻게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멍한 시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늦은 시각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때가 됐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실내가 어두웠던 덕에 검게 물든 하늘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건물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평소보다 밝게 빛나는 고딕풍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며,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떠올린다.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는 끝났고, 기념할 만한 연례행사 역시 딱히 없었다.
그러니 내가 여기 처박히고 난 이후에 기획된 행사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하나뿐이었다.
손꼽아 기다려 왔던 오늘.
"…대관식."
내가 빙의된 소설의 주인공이자, 나의 주군인 그 남자.
1황자 프리드리히 폰 라인하르트의 대관식일 것이다. 일찍이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던 그는 항상 이맘때면 황제위에 올랐다.
현재.
대 제국 스테파노와의 전쟁을 끝마친 시점에.
기억 속 한마디 말이 또 한 번 머리를 스쳤다.
'그대는 이미 그들에게 패하지 않았나?'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순응이라도 하는 것이 옳아.'
"하, 씨발."
나름대로 참아보고자 했으나, 한마디 욕설이 입 밖으로 새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는다. 속에서 끊임없이 불길이 일었다. 이 장소에 구금된 이래로 단 하루도 꺼진 적 없던 불길이었다.
인정한다.
충심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의나 인간적인 호감 또한 없었다.
프리드리히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은 오히려 깊은 증오에 가까웠다.
그러니 새삼 버려진다 해도 크게 억울할 것이 없어야 옳았다.
하지만.
'따르지 못하겠다면 순응이라도 하는 것이 마땅해. 그렇지 않나, 노버트?'
'내 반드시, 그대의 죽음을 기억하지.'
그 일을 계기로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 떠오른 것은 제법 큰 문제였다.
다시금 반쯤 뜨인 눈동자가 반 바퀴 굴렀다.
기억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든다.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스스로의 속내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외면해 왔던 그간의 삶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동안 내가 어찌 살았던가?
계속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를 황태자로, 황제로 발돋움할 수 있게끔 도왔다.
친구를 필요로 하기에 친구가 되어주었고, 충복이 필요하다 하기에 되어주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제공했다.
그리하면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올까 싶어서 그랬다.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까워하지 않고 내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했다.
친우이자 충복, 동료. 그런 사람을.
나를.
'또 한 번 버렸다.'
이유는, 그래.
더는 쓸모가 없어서.
나름의 세력과 공신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 위협적이나,
'더는 그에게 유의미하지 않은 자를 살려 둘 이유가 없다… 는 거겠지.'
어차피 내게 받을 건 이미 다 받았으니까.
새삼스레 헛웃음이 났다. 일하다 다쳤는데 산재 처리도 안 해주고 해고라니. 이런 인간말종 새끼를 뭐하러 아득바득 따랐나 모르겠다.
진작에 포기했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술이 당겼다. 인생이 존나게 썼다.
아쉬운 대로 반쯤 찬 물잔을 기울이며 꺼진 벽난로를 멍하니 바라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뻔한 물음이었다.
이미 수차례 같은 답을 낸 질문이기도 했다.
'뭘 물어? 죽겠지.'
그리고 나서는.
그 죽음 이후에는....
방 안에는 거울이 없었으나, 직접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살벌하게 가라앉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모든 상념들이 자리를 비웠다.
이런 한심한 생각들은 오늘로 끝이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손안의 물잔을 내려다본다. 더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잔을 차분히 살펴보며 생각을 이어간다.
'경비 인력들은 중앙 홀에 밀집되어 있겠지.'
대관식이 있는 이 바쁜 날, 이 꼴이 된 나를 감시하는 일 따위에 많은 인원을 쓰진 않았을 터다.
'예법상 정식으로 대관이 진행되는 것은 21시.'
곧이다.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는다. 실처럼 가느다란 무형의 힘이 퍼져 나가며 건물 내의 인기척을 세었다.
근처에는 둘,
맨 아래층에 셋.
그리고....
''그' 역시 있다.'
그렇게 20여 분, 적당히 탐지가 끝나자 타이밍을 맞추어 테이블로 시선을 옮긴다.
곧이어 뻑뻑한 팔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던진다.
챙그랑!
물잔이 박살 나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인기척이 문가를 향하는 것을 느끼며 소파 앞의 테이블에 몸을 가져다 박았다.
쾅!
텅, 텅, 텅....
테이블이 넘어짐과 동시에 내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에 상처가 벌어진 것인지 등허리에서 끔찍한 고통이 일었으나, 입술을 꽉 깨물며 견뎠다.
끼이익―
이상을 감지한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덮고 있던 담요를 손에 쥐고는 그가 다가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십 오 미터,
오 미터,
그리고 열 걸음.
"경, 이게 무슨 일입니까!"
"몸을, 잘, 못… 가누었네. 콜록...."
"아니, 서 있는 것도 제대로 못 하시는 분이...."
하필 지금, 재수 없게.
방금 마리가 자리를 떴는데....
중얼거리듯 내뱉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는 시늉을 한다. 성치 못한 팔이 바닥을 헛돌고, 쿵. 작은 소리와 함께 상체가 다시금 쓰러졌다.
몸을 강타하는 극심한 통증에 비명이 절로 났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기사의 표정에 미량의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동정심.
그 찰나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거짓된 표정을 그린다.
숨을 가늘게 내쉬며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부탁을, 콜록, …하게 되어 유감이네만, 나를 조금, …도와주지 않겠어?"
"그건… 원칙상...."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 …일으켜 주기만 하면, …좋, 겠는데...."
이를 악물며 '하급자에게 이러한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도 치욕스러운 사람'을 연기한다.
기사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프리드리히의 성격상 경비를 서는 기사들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주지시켜 두었을 테니.
환자라고 해도 소드 마스터인 것은 물론, 각종 잡기를 익힌 자이니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절대로 쉬이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일어서는 것조차 홀로 하지 못해 바닥을 구르는 30대의 젊은 귀족.
주군을 위해 전장을 누비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나, 부상을 핑계로 버려진 비참한 신세의 검사.
그것이 기사가 보는 나일 터였다.
찰나 간의 고민 끝에 기사가 결단을 내렸다.
황실의 제복을 입은 그가 발소리를 죽이며 내게 다가왔다.
곧이어 그의 손이 깨진 유리 조각들을 쓸어 내게서 떨어뜨려 놓는다.
아직 완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은 것인지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다섯 걸음.
세 걸음.
그리고 한 걸음.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그가 몸을 굽혔다. 나를 들어올리기 위함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경, 잠시 제가 손을… 컥!"
쾅!
손에 쥐고 있던 천으로 순식간에 그의 목을 휘감은 뒤 바닥에 처박았다.
무리해서 힘을 준 탓에 전해지는 고통은 이를 악물어 참아내고, 부족한 힘은 마나를 동원해 보충했다.
"컥, 꺽...!"
기사가 거세게 저항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천을 비틀고, 그 사이를 몸으로 누르며 버텼다.
그렇게 몇 분 후, 축 늘어진 기사의 목에서 손을 떼고 그의 소지품을 살핀다.
장검 하나, 신분패, 사탕 두어 개와 장전이 된 권총.
개중 권총을 챙기고 기사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숨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계획대로 잘 된 셈이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고마워. 내 나중에 꼭 보답하지."
그리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수차례의 실패를 겪어야 했으나 그럼에도 해냈다.
힐끔 시선을 굴려 기사의 소지품이었던 검을 바라본다. 두꺼운 검신이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라기엔 무겁겠어. 못 들겠지.'
판단은 빨랐다.
왼 손목 언저리를 더듬어 흰색의 로단테와 헤일로가 그려진 부분에 손을 댄다.
화악,
찰나 간 하얀 빛이 퍼지고 길다란 세검이 눈앞에 나타났다.
턱.
저벅.
턱.
저벅.
저벅....
불규칙적인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세검을 지팡이 대신 짚은 사람이 걷는 소리였다.
그렇게 나는 텅 빈 복도를 가로지르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후.
타앙―!
제법 큰 소리가 별궁을 울렸다.
누군가의 머리통이 총알에 부딪혀 박살나는 소리였다.
* * *
그리고 그 총에 머리통을 직격으로 맞은 사람은,
"공자님,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
깽판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황과 대비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열일곱 살', '다회차 회귀자' 노버트 하르트만은 붉은색의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15분 전 권총으로 쐈던 머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어떤 예의 말아먹은 놈이 종으로 대가릴 후려친 것 같은 감각이었다.
'…피 냄새.'
제 손에 들린 검과 그 끝에 묻은 액체.
그리고 눈앞의 시종을 차례로 살핀 노버트가 말했다.
"아무리 비밀을 들켜 기분이 나쁘기로 소니, 내게 덤벼들다니. 애들이 참 싸가지가 없어."
"다치신 곳은...."
"제레미."
샛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집사장을 불러와."
* * *
'멍청했다.'
애꿎은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간 너무 멍청하게 살았다.
'그놈은 일반 쓰레기야. 애초에 재활용이 불가능했어.'
오래전 프리드리히로 인해 처음으로 죽음을 맞은 후.
나는 이 세계의 신, 주신 엘누르를 만나 두 마디 신탁을 전해 들었다.
[달 그림자가 지는구나.]
[세계의 중심으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 하라.]
시간을 두고 검증한 결과 두 마디의 신탁은 이렇게 해석되었다.
달의 뒷면이자 세계의 어둠을 자처하는 악마 숭배 단체, '타리크'의 세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인 '주인공'이 세계를, 인간을 사랑하여 결국 구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주신이라는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했다.
솔직히 엿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프로젝트를 말아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악마 숭배자들을 내버려 두면 세계가 멸망한다.
그리고 내 원한과 세계의 존망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리셋하며 여러 도전을 했다.
제국의 의장부터 뒷세계 조직 보스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유의미한 성과 또한 거두었다.
신에게 받아낸 몇 가지 기연과 회귀 지식으로 간간이 이득을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악마 숭배자 놈들을 잡아 족치고, 죽이고, 싸우고.
기본값이 하드 모드로 맞추어져 있는 주인공 인생에 가끔 이지 모드를 제공하고.
나한테도 없는 인류애를 찾아다가 퍼붓고. 돕고, 돕고, 돕고....
그리고,
버려지고,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버려지고.
'정말 괜한 짓이었지.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됐는데.'
그의 삶에 안온을 제공한 은인, 오래 알고 지낸 친구.
배신하지 않고 섬겨 온 신하.
동료.
그런 사람도 쉽게 버리는 자가 무슨 놈의 인류애고 박애인가. 대관절 뭔 놈의 사랑인가?
그런 놈이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나?
'프리드리히, 너는 '안 되는' 놈이야.'
그러니 새로운 시도를 해볼 것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너 같은 놈이라 안 된다면, 나는 주인공을 바꿔 보겠다.'
속으로 몇몇 후보를 셈해 보았다.
십 수 명의 얼굴들이 머릿속을 주르륵 스쳐갔다. 그중 한 명을 짚었다.
'2황자 요제프가 그나마 만만했지. 주인공이 될만한 싹도 조금은 보였고. 황족이니 황가의 보물도 사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인류애가 뭔지 아는 놈이니.'
검은 곱슬머리에 루비 같은 눈동자를 가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순한 눈매와 선한 미소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매우 닮아 있었기에, 내 머릿속에는 영 꼴 보기 싫은 얼굴이, 제국의 젊은 황제가 함께 떠올랐다.
깊은 빡침이 머리를 강타했다. 가만히 있던 야마가 빙빙 돌았다.
'네가 황제라고 내가 못 꺾을 것 같나?'
이 주임도, 박 과장도 꺾었던 나다.
고속 승진으로 꺾어버리고 살살 갈구며 개같이 부려먹었다.
진상 상사의 탑 3층에 머물던 최 부장도 딱 2년만 더 한국 살이에 성공했다면 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자부한다.
'그러니까.'
까드드득―
불쾌한 소리가 나며 이빨이 마찰했다.
머릿속에는 한가지 다짐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나의 황제였던 개새끼.
타고 나길 세계의 중심이자 제국의 황족으로 난 그 자식.
프리드리히 폰 라인하르트.
'너도 내가 꺾는다.'
네가 뒤지게 싫어하는 네 이복동생을 이용해서 꺾어 준다.
세계의 모든 행운, 영광과 찬사, 행복.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사람은 네가 아니라 네 동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슬슬… 다 해치우고 쉬고 싶으니.'
이미 정년 이상 일했다. 퇴직 자격은 충분했다. 이제 쉴 여건만 만들면 된다.
어서 일을 다 끝내고 (주)신엘누르에서 퇴직할 것이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직장은 전망도 워라밸도 월급도 별로였으니까.
막말로 당장에야 세계 구원이라는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따르고 있다지만, 솔직히 주신 역시 싫었다.
지가 만든 세계의 존망을 왜 죄 없는 나한테 떠맡기는가? 좆망해도 싼 새끼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대신전을 장작으로 캠프파이어를 해주지. 너도 딱 기다려라, 개새끼야.'
어찌 되었건 간에,
"참 재미있는 일이야."
딱!
작지 않은 소리가 나고, 내 앞에 서 있던 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여유로운 미소를 그리며 떨고 있는 자를 쏘아보았다.
"감히 저택 내 첩자의 존재를 알고서도 방관하다니...."
우선은,
"그대는 분명, 목숨이 두 개 이상이겠지?"
집안 정리부터.
002화 집안 정리
오전까지만 해도 책 먼지 냄새만 나던 집무실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피가 튄 손을 대충 털고 천으로 검을 닦아낸다. 천 조각에 붉은색 액체가 묻어나며 짧은 한숨이 입가를 데웠다.
'새삼스럽지만 여긴 참 첩자가 많아. 매번 귀찮게.'
대귀족 가문의 숙명 비슷한 것이었다.
하르트만은 외부의 입장에서 참 먹을 게 많은 곳이었고, 오늘 처리한 이들은 그 사실의 증명이었다.
'어찌 됐든....'
오늘 처리한 사용인들은 차후 각각의 이유로 내게 해를 끼친다.
그러니 미안하진 않다.
또한 미래에 저지를 죄가 아니어도 저들을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가문에 기어들어온 세작을, 그들을 방치하는 변절자를 살려 두는 귀족도 있는가.
'그래도 부조금 정도는 챙겨 줘야겠지. 수중에 얼마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내려놓자 뒤늦게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회귀 직후에는 늘 이랬다.
사망 당시의 기억이 은은하게 묻어나며 밤낮으로 괴로웠다.
직전 회차의 끝에는 부상의 고통에 내내 시달렸던 터라 더 그랬다. 지금은 없는 상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가상의 통증이 이어졌다.
방 안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일별한 후 의자에 걸터앉는다.
계속해서 아파오는 등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있자 뒤늦게 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전담 시종인 제레미였다.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본다. 당황이라도 한 듯 덜덜거리고 있는 꼴이 보였다.
'저럴 만도 해.'
회귀는 내가 빙의 시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로 오늘 오전까지 이 몸의 주인은 한국산 빙의 회귀자 김철수가 아닌, '심약하고 유순한' '진짜' 노버트 하르트만이었다는 뜻이다.
제레미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여린 도련님과 대화하고, 그의 시중을 드는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주인이 다짜고짜 사람을 찔렀다?
가만있던 시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르던 새싹이 하루 만에 마약성 독초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공자님...."
"사설은 됐으니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지. 다른 사용인들은."
"…대부분 비번입니다."
"남아있는 이들은?"
"…괜한 말이 돌 것을 우려하여 근처로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네가?"
"부집사 레인 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잠시 망설이던 제레미가 말을 이었다.
"공자님을 걱정하셨습니다."
"빈말 말고."
"…백작님께서도 줄곧 눈여겨보던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첩자로 의심된다고."
"...."
"집사장님 역시 진작에 백작님의 눈 밖에 난지 오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있었으니...."
"대충 현 상황을 제가 다 파악하고 있으며, 아버지께 보고를 대신 해주겠다는 소리지?"
"…공자님께서 허락하신다면요."
부집사 레인.
늘 하는 생각이지만, 눈치가 제법이었다.
'하르트만 가문에서 내 행실 단속하라고 보낸 사람만 아니었다면 내가 잘 썼을 텐데.'
한 번을 온전한 내 사람이 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작에게 멋대로 쓸데없는 말을 전해, 내 미움을 살 정도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기에 두고 보았지만.
'내가 허락하면 이번에도 진실을 적당히 희석해 보고하겠지.'
그럴 것이다.
다짜고짜 작은 공자가 첩자들의 존재를 들췄느니, 찔렀느니 하는 소리를 해봤자 믿는 사람도 없을 테니.
진짜 노버트는 피나 폭력적인 장면만 보면 기절하는 겁쟁이였으니까.
'그래도 따로 얘기해 봐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굴렸다.
"누님께 연락해. 수도 저택에 새로운 집사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두신 사람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적당히 가문 내에 연줄이 있으면서, 빼 오기 쉬운.
그리고 다른 이의 손을 덜 탄 사람.
한 명밖에 없었다.
"헨리 마티스."
"…! 공자님, 그자는...."
"나태한 기회주의자. 버러지. 하르트만 영주성 총집사장의 아들이자 골칫덩이. 망나니."
"...."
"나도 알아."
적당히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제레미는 그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짧게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터덜터덜 걸어 문가로 향하자 제레미가 소리 없이 비켜섰다. 그의 시선이 힐끔힐끔 나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문제 있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제레미는 푸른 눈동자를 굴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인내심 있게 뒷말을 기다리자, 떨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그… 주제넘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공자님께서 상처를 받으셨을까 걱정됩니다."
다정한 말에 문득 헛웃음이 났다.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정말 웃겼다.
노버트 하르트만이라는 놈은 정말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기만을 당하고 살아온 것인지.
또, 이런 같잖은 소리로 그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은 왜 이런 놈뿐이었는지.
참 불쌍한 인생이다.
'딱히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만.'
작게 미소를 지은 후 푸른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그를 지나쳐 걸어간다.
시종이 내 뒤를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제레미."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네, 공자님."
짧은 답이 되돌아왔다.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백작님은 모르셔도 나는 알아."
네가 어떤 거짓을 말한다 해도.
네 삶과 과거가 얼마나 치밀하게 위조되었다 해도.
나는 안다.
"너라고 안 들킨 게 아니니 안심하지 마."
사아아―
시종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닿는 것 또한 느껴졌다.
제법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걱정을 연기하던 모습보다는 솔직해서 좋았다.
계속해서 그 시선을 외면하며 앞을 바라본다.
익숙한 복도를 가로질러, 내가 머무는 방으로 향한다.
제레미에 대한 정보를 몇 떠올린다.
제레미 스웨인.
'버려진 황자' 프리드리히 폰 라인하르트가 보낸 첩자.
'그래도 너는 당장 내게 검을 들고 달려들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고,'
차후에 쓰일 곳이 있어서.
당장 널 죽여 봤자, 네 주군이 어떻게든 또 다른 첩자를 보내올 것이 뻔해서.
"그냥 놔두는 게 아니라 두고 보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을 하니, 마니....
"그딴 장난질 다시는 하지 마."
"...."
"기분 나쁘거든."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재촉해 머무는 방의 문을 연다.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너무도 익숙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몹시 반가웠다.
"아."
짧게 목소리를 내고는 마지막으로 입을 움직인다. 잊을 뻔했다. 당부해 놓을 말이 있었다.
잠기려 하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말했다.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절대로 깨우지 마."
제발 나 좀 건드리지 마라.
쿵.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터벅터벅 걸어가, 내게서 가장 멀리 있는 창문 하나를 열어 두고 자리에 누웠다.
침대는 내가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푹신했다. 포근한 이불에 감싸여 눈을 감았다. 간만의 휴식이 달았다.
* * *
'…몇 시지.'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화려하지만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적은 별궁의 천장과는 차이가 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 3일, 그야말로 낙엽처럼 굴러다니며 잠만 잤다.
자다 일어나 다시 자고, 일어나는 척 앉았다가 또 잤다.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을 날린 스스로가 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는 새에 싹 사라졌다.
'시간 계산 없이 잠이 든 게 얼마 만이지....'
새삼스럽게 며칠 전까지 머물렀던 끔찍한 장소가 떠올랐다.
직전 생에 갇혀 있던 곳에는 시계가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옛 친우와의 정을 생각해 나를 지하감옥에 처박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해준 것은 아니었다.
시계도 없었고 장작이나 책, 사람도 없었다.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때를 잊지 않기 위해 늘 시간을 계산하며 지내야 했고, 서늘한 공간 속에서 홀로 버텨야 했다.
'생각하지 말자. 기분만 더러워져.'
짧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잘 들은 것인지 실내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협탁 위에 놓여 있는 꿀차 한 잔으로 보아 제레미가 다녀간 듯싶었다.
잔에 손끝을 대어 보니 아직 따듯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캐모마일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진짜 노버트가 좋아하던 향이었다.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이 짓을 하네.'
제레미 스웨인의 취미였다.
매 회차 그는 첩자임을 들키는 순간 이후로 항상 나의 취향과 비위를 완벽하게 맞추었다.
연한 색 액체가 담긴 찻잔을 바라보며 이 행동의 의미를 생각한다.
'조금만 더 오래 살게 해달라는 아부 반, 내가 이렇게 너를 잘 알고 있다는 협박이 반.'
현재 제레미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었다.
비단 찔러 죽일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내가 '뭔가를 눈치챈' 티를 낸다면, 프리드리히는 내가 아닌 제레미를 죽여 없앨 것이다.
'나를 처리하는 편이 그에게는 더 유리하겠지만… 내가 일을 당하면 하르트만에서 죽음의 진위를 따지고자 할 수 있으니까.'
현재 '버려진 황자' 신분으로 남몰래 칼을 갈고 있는 프리드리히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직 외부에 가시를 세울 때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상황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깜찍한 시위를 하는 거지.'
참 음습하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시중 받는 입장에서는 또 좋았다. 무슨 의도건 입속 혀처럼 구는 사용인만큼 편한 게 어디 있나.
'그래도 때 되면 죽일 거지만.'
따듯한 액체를 입에 흘려 넣고 옷을 갈아입었다.
채비를 하고 있으니 방문이 열렸다.
"푹 쉬셨습니까?"
"맞아. 피곤해서 조금 오래 잤네."
"…돕겠습니다."
"다 했어."
고개를 내저어 거절을 표하고 짙은 색의 장갑을 끼는 것을 끝으로 준비를 끝마친다.
지금은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정리는?"
"집무실이라면 정리했습니다. 말씀하신 새로운 집사장은 출발했다고 합니다."
"괜한 말은 안 돌고?"
"기존의 집사장은 전근 처리 예정이며, 나머지 역시 조용히 수습했습니다."
"빠르네. 에디트 누님이 도와주셨나."
이어지는 침묵.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에디트에게 뭐라 말하고 도움을 구했나 싶기는 했으나 묻지 않았다.
'적당히 꾸며 말했겠지. 불순한 모의를 하던 사용인들이 집사장을 죽였다. 그를 알게 된 누군가가 남은 이들을 처리했다. 뭐, 그렇게.'
제레미는 눈치가 좋으니까.
레인도 그렇게 말을 맞추게 해야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내친김에 처리자도 레인으로 할까.
'부집사를 설득할 당근이 좀 필요하겠어.'
"저녁에 레인과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전하겠습니다."
"그래. 나갔다 올 테니 찾지 마."
"수행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노골적인 시선이 쏘아져 왔다.
진짜 노버트는 외출 시 제레미를 대동하곤 했다.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서라면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기는 했다.
그리고, 현재의 제레미는 나와 어색한 티가 나서는 안 되었다.
레인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같이 가려고 용을 쓰는 게 보통이지.'
하지만 쉽게 그를 떼어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중앙 신전에 갈 거야. 죄를 지었으니, 주신 엘누르께 고해를 좀 하려고."
"...."
"내 죄를 네 앞에서 떠들고 싶지 않네. 그렇다고 널 밖에 세워 두기도 싫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고해는 뭔 고해인가? 신전에 갈 것이긴 했지만 엘누르에게 죄를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고해를 핑계로 쓸 수는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제레미는 따라오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향하는 장소와 목적이 확실하고, 아무리 그라고 해도 중앙 신전 안까지 멋대로 숨어들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예상대로 제레미는 고개를 숙였다. 납득한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마차와 신전에 제헌할 재물이나 좀 준비해 둬. 값은… 1만 하르탄 정도로."
대답을 듣지 않고 아침을 먹기 위해서 이동했다.
3일을 굶었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003화 신관과의 미팅
수도 귀족들 전용 통로로 내부로 들어가, 마차에서 발을 뗀다.
마부에게 대기할 것을 명하고 땅에 내려선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돔 형태로 얹은 건물 앞.
라인하르트 중앙 신전 소속 치고는 소박한 복장의 여성이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신도님.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신지요?"
얼굴에 자본주의 미소가 떠올라 있는 모습이 매우 익숙했다.
가져온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생각해 두었던 답을 말한다.
"노버트 하르트만입니다. 리베인 상급 신관님을 뵈러 왔습니다."
"약속이 있으셨을까요?"
"신께서 허락하시는 시간에 뵙겠습니다."
그 말에 신관의 얼굴에 찰나 간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척 웃었다.
곧바로 미소를 되찾은 신관이 다른 신관을 시켜, 내가 내려놓은 상자를 들게 한 후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말씀 전하겠습니다. 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훤히 트인 화려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비는 시간에 맞춰 왔으니 30분 내로 면회가 잡히겠지.'
신전의 대기실에 앉아 리베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다.
리베인 상급 신관은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에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자, 곧고 다정한 성정으로 유명했다.
내 기억에도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없었다. 그녀는 대체로 그런 사람이 맞았다.
'비록 끝내주는 수전노지만.'
리베인은 정말이지, 심각한 수준의 수전노였다.
나도 한때 돈에 미쳐 살았었는데, 그때도 그녀만큼 미쳐 살지는 않았다.
'면회 한 번에 1만 하르탄이나 드는 걸 보면 견적이 나오지. 꿈이 금화에 깔려 압사당하는 거라던가.'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잠시간 자리를 비웠던 신관이 돌아왔다.
약간의 당혹감이 서린 표정이었다. 궁금할 만도 했다.
리베인 상급 신관은 시간이 비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대외적으로 그녀를 처음 만나는 내가 그 찰나의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었으니 신기했겠지.
하지만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의무는 없었다.
신관을 따라 리베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달하자, 엘누르의 상징물인 두 송이의 로단테를 감싸고 있는 헤일로가 새겨진 문이 보였다.
끼이익.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돌아서 있는 중년의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떨어지는 색색깔의 빛이 미사보로 덮인 그녀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가히 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안내를 해준 신관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녀는 내게 마주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내가 발을 들인 후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중년인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게는 당신의 고뇌가 보입니다. 속죄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 오셨습니까?"
목소리는 너른 공간을 따라 은은하게 울렸다.
잠시간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살피다, 가벼운 투로 답했다.
"아니요. 별로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걸음하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능청스러운 물음이 고까웠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뜬다.
모르는 척이라니.
기다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가져온 헌금 액수가 부족했나요?"
그 말에 그제야 중년인이 뒤를 돌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번 회차의 그녀는 나를 실제로 만나는 것이 처음이겠으나, 나는 이미 리베인을 수차례 만난 경험이 있었다.
내면을 꿰뚫는 듯한, 중년인의 관록이 깃든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신관 리베인. 그대는 예언자잖습니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정말로 다 알고 있었을 테니.
리베인이 집에 금화의 산을 만들 수 있게 해준 능력. 예언.
그녀는 엘누르의 예언자였다.
또한 미래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의 경계를 벗어난 통찰에도 능했다.
매 생마다 그녀를 만날 때면 리베인은 어렵지 않게 내게 있었던 일들 중 일부를 꿰뚫어 보고는 했다.
회귀자는 그녀에게도 이레귤러인지, 나에 관한 먼 미래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담담한 투로 말을 이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가 있습니다."
거침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래라면 회귀나 미래 지식, '열람 불가'인 정보를 전하는 것에는 대가가 필요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리베인의 앞에서는 말을 돌려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 역시 신의 손길이 닿은 사람 중 하나이니.
그리고 리베인의 앞에서 말을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그대는 세 달 뒤면 숨을 다하지요. 그래서 지금 왔습니다. 이후로는 시간이 맞지 않을 듯하여."
리베인은 세 달 뒤에 죽는다.
예언을 황족과 귀족들에게 사사로이 판매한 죄로 단명한다.
후환이 없다는 뜻이다.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신께서 내리신 권능을 함부로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부끄러움은 없어 보이는군요."
"제게 그런 것을 따지고자 오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남이 어찌 살든 솔직히 관심 없었다.
내게, 세계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되는 일이다. 괜히 한 번 덧붙여 봤을 뿐.
중년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생각해 왔던 질문을 꺼낸다.
앞으로의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칠,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어디로 가면 성녀 예레미아스를 만날 수 있습니까?"
성녀 예레미아스.
본래대로라면 그녀는 수개월 후 버려진 황자를 구하고, 그의 은인으로서 프리드리히의 왕도에 입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 내가 모실 주군은 그가 아니었다.
그러니 성녀의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그녀를 가로채어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았다.
성녀의 방대한 신성력은 프리드리히에게 큰 무기가 될 테니.
하지만.
'사실 이 질문으로 알고자 하는 정보는 이것이 아니다.'
성녀의 현 위치야 몰라도 그만이었다. B안이 있으니까.
그냥, 두 사람이 만날 예정인 장소에 가서 대기타면 된다.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회귀자다. 어지간한 건 다 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질문의 답변에 묻어나는 신의 태도. 그를 엿보는 것.'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양손을 꽉 말아 쥐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주신 엘누르가 나를 도울 의사가 있는가.'
신이 정한 주인공을 바꾸려 하는 내게, 도움을 줄 의향이 있기는 한가.
프리드리히가 본래 가졌어야 할 이권을 빼앗아 내게 줄 수 있는가.
'내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또, 당신의 뜻에 따라.
나를 죽인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운 주군을 몇 번이고 따른 나라는 사람의 결정이.
'당신에게 중요하기는 한가?'
당신이 사랑하는 세계의 주인공을 한 번쯤 버려도 괜찮을 만큼은, 지금의 나는 당신께 중요한가?
고개를 들어 중앙 신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전의 메인 홀처럼 색색깔의 빛이 내리쬐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둡지는 않았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신이 싫다. 증오스럽다.
단언컨대 이건 애증이 아니다. 그냥 진짜 존나 싫었다. 진심으로 엿 같았다.
나와 같은 목적을 위해 달려가는 존재의 지지를 받고 싶다, 같은 감성적인 이유도 아니었다.
다만 물어야 했다.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도 나를 버릴 건가?'
라고.
'…사실은, 어떨지 아직 확신이 없다.'
엘누르는 프리드리히가 어떤 놈인지, 놈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내게 그를 따르고 세계를 구하라는 신탁을 내렸다.
사정이 어찌 됐건 일의 실현 가능성이나 나의 절망보다 프리드리히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때의 엘누르는 그랬다.
시선을 내려 신관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신관 리베인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걸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나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미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엘누르의 뜻이 어떻든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의 반대편에 선 존재들 중, 엘누르가 포함될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괜한 기대를 버릴 것 아닌가.
또, 필요한 만큼의 각오를 사전에 챙길 수 있을 것 아닌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의연하려고 노력 중이기는 했으나, 솔직히 어려웠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미소를 띤 중년인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신관의 입을 통해 신의 뜻이 전해지며 내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혀 한참을, 정말 한참을 침묵하다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네?"
* * *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버려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악마 하나만으로도 벅차다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
주신까지 내게 등을 돌렸다면 이번 생의 난이도는 그야말로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내 편을 들어준 건 또 아니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다.
본래부터 큰 기대를 품지 않았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신관과의 대화가 끝난 후.
보상을 약속하고 성력으로 치료까지 받고 돌아온 나는, 부집사 레인과의 면담을 마친 후에 잠에 들었다.
다음날 맞은 아침은 상쾌했다.
치유의 힘은 확실히 심신 안정에도 도움이 되는 듯했다.
나는 간만에 머리가 울리지 않는 오전 시간을 나고, 샌드위치를 세 개나 해치운 후 일상을 보냈다.
진짜 노버트는 본래도 하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미래를 위한 빌드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오늘도 외출하십니까?"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제레미가, 허름한 여행자 차림으로 창문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내게 물었다.
내 일에 참견하는 꼴이 아니꼬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렸다.
"노크가 뭔지 모르면 좀 배우도록 해."
"밖으로 나가시는 거라면, 굳이 창문을 사용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시간도 이르고요."
그 말에 눈썹을 조금 들어 올리며 제레미를 보았다.
이래야 네가 안 따라올 테니까.
그런 의미를 담아 턱짓하자 제레미의 얼굴에 묘한 당황이 깃들었다.
"…그거, 몰래 나가시는 거였습니까?"
"시늉만 하면 됐지."
"아무리 그래도...."
"걸리면 너는 몰랐다고 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진 않을 거야, 레인도."
제레미가 신경 쓰는 것은 다른 이들의 눈이지 내 안위가 아니다.
최소한의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주었다. 이 이상은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제레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공자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다른 이들과 저의 차이점까지는 이해했습니다. 저는 그들만큼 멍청하지는 않았죠."
맞는 말이었다.
제레미는 다른 놈들처럼 섣불리 내게 달려들지 않았고, 집사장처럼 돈이나 개인의 판단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이상한 곳으로 튈 확률이 현저히 적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글쎄요. 그게 당신이 나를 살려 두실 이유가 될까요?"
등 뒤의 칼을 놓아둘 이유가 있을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제레미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떠보는 거네.'
지금의 제레미는 간접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제레미 본인뿐 아니라 그의 뒤에 선 사람에 대해서도 아느냐고.
느릿하게 입꼬리를 조금 더 당겨 올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뻔했다.
약간의 뜸을 들여, 그가 충분히 긴장할 시간을 준 후 입을 움직인다.
"제레미.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
"정말이야. 의미가 없잖아."
사실이었다. 나는 당장은 제레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는 죽일 테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창문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본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비교적 환하게 보였다. 그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느긋하게 입을 움직인다.
"너를 죽인다 해도, 네가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너를 죽임으로써 프리드리히의 경계를 살 뿐, 그의 시선 밖으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제레미의 어깨가 굳어졌다.
프리드리히의 존재를 의식한 내가 당장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은 섰으나, 내 심중을 가늠하지는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감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척, 다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낫지. 네가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너를 아니까."
"...."
"앞으로도 잘 부탁해."
짧은 기간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몰래 나가는 척'을 완성하기 위해,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밤바람이 시원해 기분이 좋았다.
예상대로 제레미는 따라오지 않았다.
004화 회귀자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만프레디 광장 인근, 용병들이 주로 다닌다는 펍.
나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시끌벅적한 공간에 들어서며 두 명의 사람을 찾았다.
'늘 여기서 뭉개고 있던데… 아, 저기 있군.'
적당히 내부를 둘러보자 12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들이 보였다.
보통의 모험가나 용병들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한 채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두 명의 사람이.
내가 안쪽으로 걸어가자 남은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점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어쩌지요? 지금 좌석이...."
"저쪽에 여유가 있어 보이네요. 합석하자는 제안을 전해주실 수 있나요?"
"아…! 그렇게까지...."
"술값을 낼 테니까요."
어색하게 거절하려 하는 직원에게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곧 수도를 떠나는데, 이 가게의 음식이 아주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전부터 너무 궁금했습니다."
점원의 표정이 확 피었다.
가게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주인이 좋은 사람인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점원이 나를 테이블로 안내하고, 테이블 위에 에일 한 잔을 추가로 가져다 놓았다.
예상대로 두 명의 주정뱅이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나를 반겨주었다.
"어! 웬 도련님이 왔어? 이런 데를 왔다고?"
"차림은 허름한데 돈은 또 많나 보네. 크~ 얼굴에 귀티 봐, 이거."
"외지인 같은데, 어쩌다 왔나?"
"수도에 기사단 입단 시험을 보러 왔거든요."
"어! 어! 우리 아들이랑 동기 아냐!"
던진 거짓말에 둘 중 한 사람이 놀랍도록 반색을 했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점원이 내온 구운 돼지고기와 에일을 삼켰다. 가격 대비 맛은 있다는 평을 내리며 천천히 잡생각에 빠져들었다.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제국의 2황자.
그와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기반이 이미 있어서 접근 자체가 어렵지.'
죽은 황후 소생이라 세력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은 물론, 황궁 밖을 전전하며 살아온 1황자 프리드리히와는 경우가 다르다.
최고로 잘 나가는 2황비 소생인 요제프는 이미 어느 정도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중앙의 유력가라 하기에 2% 부족한 하르트만의 존재감 없는 2공자와 교류할 이유가 없어. 진입 장벽이 높다.'
만나는 것도 문제였고, 꾀어내는 것은 더 어려웠다.
게다가 그의 믿음을 얻는 것에서 끝이 나면 몰라, 요제프의 뒤에는 의심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2황비가 버티고 서 있다.
자칫했다간 도움을 주고도 욕만 먹고 끝날 수도 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 방법의 실행 가능성은 이미 검증까지 끝났다.
바로 우연을 가장해 2황자와 만나, 그의 친구가 되는 것.
이해관계가 아닌 인간관계를 파고드는 것.
하지만 그 방법은 이번에 사용하기에는 리스크가 좀....
"…있단 말이지."
"어?"
"아닙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하셨지요?"
"이거 봐. 청년이 듣기 재미가 없는가 보이. 자네 말솜씨가 별로인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들어봐! 그,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우리 아들놈이...."
'백색소음, 백색소음. 좀 시끄럽긴 한데.'
가성비 최악의 컨텐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넘기며, 마지막으로 오늘의 계획을 되새긴다.
그렇게 한참을 멍을 때리다, 어느 순간 주변을 살핀다.
광장의 시계가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이동해야 했다.
"이만 가봐야겠네요."
"아이, 봐봐! 재미가 없는 거라니까."
"전혀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땡그랑.
텁―
작은 소리와 함께 용병들의 시선이 각각 테이블, 손으로 향했다.
그들이 던져진 물건을 들어 올리자 황금색 금속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거 고, 고고, 골… 드?"
"금화 아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들의 시선을 흘려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 값입니다.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공돈 생기신 김에 좀 쉬시고."
'안 그러면 다음 주에 술 먹고 일 나갔다가 나란히 돌아가실 테니.'
괜한 말 같지만 안 들으면 큰일이 나는 조언을 남기고서.
그렇게 가게 바깥으로 이동하며 한 기사를 떠올렸다.
회귀 직전에 본, 황실 기사의 제복을 입은 평범한 외모의 기사. 나에게 목이 졸리고 권총을 제공한 그 사람.
내가 알기로, 저 둘 중 하나는 그의 가족이었다.
'빚은 갚았다.'
회귀를 했으니 사실 진 빚이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갚는 편이 마음 편했다.
나의 적을, 방해물을 처리하는 일에야 거리낌 없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편도 아니었다. 내가 무슨 성자도 아니고.
그러나 내게 도움을 주려 한 이를 배신한 것에는 마음이 쓰였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으니 값이라도 쳐주는 것이 옳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섭섭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별 것 아닌 행동으로 멋대로 남의 미래를 바꿔 놓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각임에도 여전히 밝은 광장의 풍경에 이어,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다.'
오늘의 목적지.
이제 이곳에서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
"…대극장 만프레도."
라인하르트 제국의 위대한 영웅 중 하나인 이졸데 오스왈드의 조각상이 놓인 이곳.
엘누르력 654년에 지어져 116년의 긴 세월을 버텨 온 건물.
황실 오페라단 출신 '빅타'가 단장으로 있는 <만테스>가 매주 공연을 하는 극장.
이 극장은 전소된다.
하필이면 오늘, 2황자 요제프가 비밀리에 방문한 날짜에.
* * *
만프레도 극장 사건.
이는 제국의 사고들을 기록한 서류를 뒤적이다 알게 된 사건이었다.
'대극장 만프레도에 화재가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사건이지.'
실상은 좀 다르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과거의 기억들을 정리하며 사람들 틈에서 발을 움직였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벽면, 나무로 이루어진 천장과 바닥.
각종 장식으로 꾸며진 기둥을 둘러본다.
두 줄로 시립해 관객들을 안내하던 직원들 중 한 명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하르트만 가문의 2공자를 알아본 듯싶었다.
'그럴 만도 해. 붉은 머리는 그렇다 쳐도 노란 눈동자는 드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걸었다.
"하르트만 가의 좌석, 비어 있겠지?"
"예. 바로 모시겠습니다."
"항상 고생이네."
자리에 앉아 팁과 감사 인사를 건넨다.
적당히 먹을 것을 주문한 후 오늘의 계획을 떠올린다.
'일단은 설치지 말고 내 존재 정도만 어필해 둔다.'
속도감도 좋지만 자연스러움도 놓칠 수 없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원한다면 지금은 인내할 때다.
생각해 봐라.
어느 날 극장에 몰래 놀러 나왔는데 건물에 불이 났다.
위기감을 느끼며 대피하고 있었는데, 웬 놈이 기적적으로 구해주었다.
정체를 알아봤더니 소심쟁이 아웃사이더로 유명한 귀족가 도련놈이란다.
또 알고 보니 그놈이 능력이 좋아서 이래저래 도움이 된다.
이러면 뭐, 갑자기 없던 염치가 솟아나 그놈을 가문의 은인으로 모시고 9첩반상을 차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겠나?
'아니. 보통 의심한다. 본인이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면 더 그렇지.'
이놈이 불낸 거 아냐?
따라갔다간 살해당하는 거 아냐?
의심스러워! 이상해! 수상해! 이 사기꾼!
그런 의심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오늘 만들 것은 요제프와의 인연이 아닌,
"…첫 번째 우연."
그렇게 중얼거리며 커튼을 걷었다.
기다리면 직원이 걷어줄 것을 알았지만 그냥 내가 하고 싶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좌석이 배치된 공간이 드러나며, 약간 어두웠던 박스석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그러자,
"실례합니다."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보낸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박스석 안으로 들어오는 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좌석 옆의 테이블에 은색 쟁반이 내려앉고, 허브차가 든 유리병과 핑거 푸드가 차려졌다.
그 하는 양을 쳐다보다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입을 움직인다.
"질문이 있는데."
"성의를 다해 답하겠습니다."
"이번 극이 정확히 뭐였지?"
그 물음에 직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즐거운 기색을 보였다.
직업적 만족도가 느껴지는 태도였다.
"제국의 위대한 영웅이신 이졸데 오스왈드의 사랑과 끝을 그린 '이졸데 오스왈드의 절망'으로, <만테스>가 공연할 예정입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이졸데의 절망이라… 그래도 장송곡 정도는 들을 수 있겠네. 100년 넘게 멀쩡하던 극장의 장례일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손사래를 친다.
이 이상의 정보는 불필요했다.
"답해줘서 고마워."
"넵. 이후에 더 궁금하신… 아...!"
"괜찮아. 이만 가 봐."
웬 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직원을 만류하며, 바닥에 붙은 털 달린 땅딸보를 집어 들었다.
애우웅....
힘없는 소리가 나며 복실하고 말랑한 것이 손에 잡혔다.
'기억이 난다.'
극장 근처에 사는 길고양이다.
간식이란 간식은 다 얻어먹는 주제에 제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남의 면상에 훅을 날리는 양심 없는 짐승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지? 보통 동물들은 재난 관련으로는 촉이 좋다던데. 얘는 그런 쪽으론 좀 둔한가? 아니, 잠깐.'
나는 이 고양이를 안다.
회귀 전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는 꼴을 확인한 바 있다.
그 말은 이 고양이가 오늘 만프레도에 들어왔음에도 화재로부터 살아남을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위기를 헤쳐나가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네. 아니면 운이 죽여주게 좋거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건 좋았다.
"그러면 오늘 나한테 네 운을 좀 나눠 주면 되겠다."
뒤로 넘어져도 대체로 코가 깨지는 인간에게 더 없이 좋은 부적이 될 듯했다.
어쩐지 만족스러운 기분 들어, 고양이의 등에 손을 얹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제법 괜찮았다.
그대로 커튼 근처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데려가 밥도 주고 이름도 지어 줄게."
어디 보자.
물에 불은 감자처럼 생겼으니, 이름은....
"점순이 어때?"
"앩!?"
"싫어? 그러면 유난히 큰 호박처럼 생겼으니 펌킨은 어때?"
"애우욱!"
'…그럼 아쉬운 대로 주키니? 근데 그건 어감이 좀 안 귀엽지 않나? 그럼 그냥 호박이?'
"더럽게 까탈스럽네."
"왜애애애액!"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양이가 난동을 피웠다. 취향 존중이 학습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존중 이전에 이름 A안, B안 다 귀엽지 않나?
이해가 안 되네. 진짜 잘 지었는데.
어쨌든 짜증을 꾹꾹 눌러 담은 울음소리와 파닥대는 솜방망이를 무시하며 시선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아마도....
고개를 돌려 7번 박스석을 살핀다.
커튼이 굳게 닫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좌석의 주인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약간 가늘어진 눈으로 푸른색의 커튼을 응시하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2층의 난간 너머로 1층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3층 역시도 만석인 것 같았다.
"흠...."
작은 소리가 입가를 데웠다.
만프레도와 관련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망 예정자 1명.
중상 예정자 8명.
경미한 부상 예정자 21명.
정확히 누가 될까?
그리고, 이번 회차에는 몇 명이 일을 당할까?
"랜덤 게임, 그거 한번 해보자."
우리의 운을 시험할 겸.
10여 분의 시간이 지나고, 공연의 막이 올랐다.
대형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며 부드러운 선율이 공간을 채웠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005화 인생 재밌네
"내 인생은 끝났어...."
"또 왜? 마리랑 싸웠어?"
"야야, 프러포즈 까이고 헤어졌단다."
"…잠시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뿐이야!"
만프레도 극장의 경호원 리한은 현재 몹시 우울했다.
근래에 운수가 영 좋지 않았다.
첫 번째로는 어떤 못된 놈이 극장의 마도구에 손을 댔다.
듣기로는 소방 마법 장치를 망가뜨렸다는데,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딱 그 하나만 건드렸다고 한다.
그를 이유로 경호 인력의 대다수가 다른 이들로 교체됐다.
도 넘은 꾸지람과 새 인력들의 '적응 기간'으로 인한 기존 인력들의 업무 과중은 덤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직원 식당의 주방장이 바뀌었다.
1하르탄의 돈으로 삶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던 주방장이 해고당하고 마른 빵과 간이 안 맞는 수프 외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고용됐다.
밥을 먹기 위해 출근하는 그로서는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 다른 걸 먹으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는가....
프러포즈를 통해 확인한 연인 마리의 내심 또한 그를 슬프게 했다.
'리한, 나는 당신을 몹시 사랑하지만… 아직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이해해 줄 거죠? 당신 역시 자유를 사랑하는 한 명의 사람이잖아요.'
자유고 뭐고 그대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다 내다 버릴 수 있다, 당장 나를 꽉 잡아 줬으면 좋겠다!
…라고 외치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싫다는데 어떻게 해… 결혼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하는 건데....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서 있자 쯧쯧쯧,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결혼하면 더 난리겠네. 아주 잡혀 살겠어."
"리한이 왜? 홀로 늙어 죽을 너보단 낫지. 지난번에 제인이 네 욕 잔뜩 하던데."
"전 애인 얘기는 선 넘었지. 그리고 그건 새로운 사랑을 위한 초석이었어!"
"초석이 무너져 있는데 다음 돌을 어디 세우게?"
"이 사람이!"
깔깔깔깔!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의 웃음소리가 귀를 관통한다.
원래도 찌그러진 가지 같던 리한의 얼굴이 이제는 딴 지 삼 일된 오이와 같은 형태로 구겨졌다.
지들만 재밌고, 다들 내 고통에 관심도 없고....
'아니, 됐다. 웃어라, 웃어.'
괜히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칸나, 뭐 해?"
"리한 선배님! 저기, 저 공자님 말인데요...."
"…귀족을 손가락질하면 안 돼."
"그게 아니라...."
"뭐 진상 부려?"
그런 일이 왕왕 있기는 했다.
그에게 일부 귀족들의 까탈스러움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익숙했다.
음료가 마음에 안 들면 쟁반을 엎고,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상급자 나오라며 드러눕는 게 그들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칸나의 뒤로 이동한다.
그제야 리한과 칸나의 존재를 상기한 다른 이들이 뭐야, 뭔데? 속삭이며 몰려들었다.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내려 묶은 귀공자가 폭신한 의자에 앉아 차갑게 식힌 허브차가 담긴 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편안한 자세로 영웅 이졸데의 사랑을 흉내 낸 아름다운 아리아를 감상하며....
'어라?'
'세상에....'
'저건...!'
완전 뚱뚱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잖아!
"…엄청 행복해 보이네."
동의의 의미로 동료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드물게 매우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봐서는 세상 모든 여유를 다 가진 사람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칸나가 그를 살피고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뭔가 많이 변하신 것 같지 않아요?"
그 말에 리한을 포함한 동료들은 고민에 빠졌다.
하르트만 공자는 이렇게 종종 홀로 방문해 오페라를 감상하고 돌아가고는 했다.
오페라 극장을 사교의 장으로 사용하는 다른 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기억 속 하르트만 공자와 지금의 그의 차이점은 단 하나였다.
조금 더 여유 있어 보이고,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
"난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바뀐 것 같긴 하지만… 그냥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은 거 아닐까?"
"맞아. 저 공자라고 매번 죽상일 이유는 없잖아."
수군수군, 동료들은 서로에게 질문하며 저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수다가 끌리지 않았던 사람, 리한만큼은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칸나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없어야 …텐데."
'무슨 소리지?'
"칸나, 방금...."
그 말에 대해 물으려는 순간,
쩡―
쿠우웅!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고.
"으아아악! 아악!"
"사람이, 사람이! 아아악!"
"불이다! 불이 났어! 아아아악!"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굉음 직후 퍼진 붉은 색의 뜨거운 빛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건물 안에 열기가 넘쳐흘렀다.
'…뭐야? 폭격? 테러인가?'
"소방 마법! 마도구 당장 발동하겠습니다!"
"2조, 뭘 멍 때려! 일단 귀족분들 모두 모시고 나가야 한다!"
"외부에 연락해! 사람 불러!"
재빠른 이들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곳저곳에서 빛이 작열하며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몰아치는 더운 기운에 반사적으로 반 걸음 물러서자 큰 손이 어깨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리한, 정신 차려!"
"칸나 네가 저분 모시고 내려갈 수 있겠어?"
"물론이에요. 서두를게요!"
탁, 탁, 탁!
균일한 발소리가 울리며 모든 직원들이 재빠르게 복도를 내달렸다. 비상상황에는 속도가 생명이었다.
모든 인원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일, 스스로와 손님들의 안전에 온 신경을 쏟았다.
단 한 명.
리한만이 이런 의문을 가졌을 뿐이다.
'방금… 칸나도, 하르트만 공자도....'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는데?
'아니야,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지금 일이 났다는데!'
서늘한 감각을 애써 모른 척하며 리한은 몸을 돌렸다.
이 극장에 있는 모두에게, 부디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 * *
"재밌네."
본래라면 오페라든 육페라든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가수의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잘 들어왔다. 시끄럽다는 생각보다는 듣기 좋다는 감상이 앞섰다.
'노래 진짜 잘하네. 오늘 공연이 이 극장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라는 걸 직감이라도 한 걸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백발의 소프라노를 바라보다 문득, 7번 박스석에 시선을 두었다.
여전히 커튼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 정말 재밌어."
재미있었다. 그래, 이런 의외성이라도 있어야 세상 살 맛이 나지 않겠는가?
회귀자 인생에 찾아온 간만의 '의외'라서 틀어진 상황과 별개로 재미는 챙겼다.
도박하다가 말아먹은 기분이었다.
작게 웃으며 이성을 되찾았다. 헛생각은 사치였다.
'본래 불길이 치솟는 것은 당일 공연한 오페라의 7번째 아리아, 클라이맥스.'
그리고 지금 소프라노가 선보이고 있는 아리아는 '이졸데 오스왈드의 절망'에서 12번째 아리아를 맡고 있는 '오스왈드의 장례'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장송곡.
무엇이 바뀌었는가?
어떤 점이 변했고, 이번 회차는 이전의 회차들과 어떤 부분에서 다른가?
이상점을 파악해야 했다.
계속해서 눈을 움직였다. 한가지가 눈에 띄었다.
'다른 보안 장비들과 달리 소방 마도구만 신형이군.'
마석에 저장된 마나를 끌어 쓰는 기존의 마도구와 달리, 외부의 마나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형식의 마도구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에 따르면 오늘 소방 마도구는 가동되지 않는 것이 옳았다.
마도구가 손상되고 노후되어 필요한 만큼의 마나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화재를 미리 알고서 대비한 티가 났다.
'거기다....'
시선을 올려 3층의 좌석을 바라본다.
반대편 박스석에서, 소프라노를 내려다보고 있는 녹발의 여성이 시야에 잡혔다.
순간, 눈이 마주쳐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잠시 나를 유심히 보는 듯했으나 곧 웃으며 인사를 보내왔다.
역시나.
이 거리에서도 시선을 감지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맞았다.
'게스트께서도 계시고.'
대충 감이 왔다.
'이 자리에는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가 없다.'
해당 사실을 깨달은 순간.
쩡―
쿠우웅―!
폭발이 일었다.
푸른색의 빛이 작열하며 마나의 파도가 공간을 후려친다.
챙그랑!
천장에 매달려 있던 장식과 커다란 건물의 잔해들이 연달아 낙하하며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귓가로 날아와 꽂혔다.
"으아아악! 아악!"
"사람이, 사람이! 아아악!"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비명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툭 내뱉었다.
"심각하네."
누군가를, 이번 생에 따르기로 결정한 주군을 떠올린다.
7번 박스석에는 결국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다.
이번 이상점은 그였다.
나의 오랜 친우.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
왜 그가 변했을까?
직전 회차의 내가 뭔가 특이한 짓을 했나?
아니면 어떤 징조가 있었나?
의문들로 머릿속을 채우던 중,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신의 사랑을 받는 자가 내게 당부한 말이 있었다.
'조언이라… 조언은 어렵겠습니다만, 전언이 있으십니다.'
'주신의 손이 닿는 순간을 나누지 마시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군요.'
'내게 신의 손이 닿는 순간… 내가 죽을 때. 그래서 회귀가 이루어질 때.'
그간은 다른 사람 앞에서 죽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직전 회차의 나는....
'요제프의 앞에서 자살했다.'
요제프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권총으로 내 머리를 쏘았다. 이전의 회차들과 그 부분이 달랐다.
불타는 실내를 멍하니 바라본다.
상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렇다면 요제프는 어떻게 바뀌었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군가 내 죽음을 목격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들은 것은 아니었기에 파악이 어려웠다.
잠시간 고민하다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 봐야 알 수 없는 일이다.
궁금증은 요제프를 만난 뒤에 풀어도 늦지 않다. 전후사정보다 중요한 건 현 상황이다.
'팩트 체크를 해보자.'
요제프는 어떠한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는 아마도 나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변화를 겪은 그는 만프레도 화재 사건을 피해 갔다.
'그뿐이라면 그래도 괜찮았겠지만.'
높은 확률로 요제프일 누군가가 화재에 대비했다.
정황상 만프레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인 듯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지 않다.
입구 커튼 뒤의,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의 인기척을 의식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오늘 일은―
'사고가 아니라 방화니까.'
006화 이단자의 호박 토템
이전 회차에 화재의 원인으로 '알려진' 것은, 극장 직원 식당 주방장의 불 관리 실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방화였고, 방화범이 따로 존재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화재'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에 대비한 탓에, 방화 실패 각이 선 방화범이 테러범으로 진화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화재 자체가 아니니.'
예상에 따르면 방화범의 목표는 이 극장의 파멸과 '그 공간'의 쓰임에 대한 공론화다.
불이 안 되면 다음 스텝을 밟는 게 당연하다.
'후환은 남겨두는 게 아니지. 정말 화재를 막고 싶었다면 범인을 잡아 죽였어야 해.'
화재가 아니라 방화인 줄 몰랐을 수도, 쓸데없이 자비심이 치솟았을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가만히 있는 편이 결과가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어림잡아 20명은 더 다쳤겠네. 화재보단 폭발이 더 위험하니까.'
뭐,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걸어 나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열기로 가득 찬 공간이 성큼 가까워졌다.
'마법이 제때 작동했으니 불은 곧 꺼지겠군. 하지만 구조물에 금이 갔다.'
폭발의 여파로 약해진 천장이 매달린 장식에 계속해서 자극당하고 있었다.
크게 난 Z자 모양의 균열이 제법 위태로워 보였다.
이대로면 건물 천장의 파편과 장식물의 잔해가 관객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길어 봐야 2분.
재수가 없으면....
"30초."
쩌저적! 쩌적―
채앵―
불길한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맞은편, 3층에 있는 녹발의 여성.
요제프의 수족인 5서클의 마법사 브누아 올리비르.
그녀의 주변으로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만약을 대비한 것 같은데… 그래. 저 사람을 보낸 것 하나는 칭찬해 주지. 그나마 수습은 하겠어.'
티나지 않게 그녀를 바라보다 몸을 돌린다.
어찌 되었건 간에 사건 처리는 브누아가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태의 원인을 들쑤시러 가 볼까.'
어차피 본 목적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잘 보여야 할 요제프라는 놈이 오지 않았고 본래 하려던 일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니.
'나는 이참에 타리크한테 엿이나 먹이는 게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떼었다.
'처리하고 얼른 집에 가 술이나 먹… 잠깐.'
순간 든 당혹스러운 생각에 내 발이 다시 멈췄다.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지금 17세면… 와인은 몰라도 증류주는 못 사잖아?'
그러고 보니 매 회차마다 이 생각을 했다.
이런 썩을.
고손주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술 한 병을 못 사 먹다니....
'회귀자 진짜 불편하네. 제레미한테라도 술 좀 사오라고 말해야…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고등학생 일진도 아니고.
어쩔 수 없다. 와인으로 만족하자.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박스석과 복도를 나누는 커튼을 들어올린다.
계속해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폭발 직전까지 남아 있던 경비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발을 움직인다.
대부분 재빠르게 대피했는지 적당히 화려한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공간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건물의 끝에 닿았다.
'이쯤에 사용인이나 경비 인력이 비상시 드나드는 통로가… 있군.'
약간 녹이 슨 철문을 밀어젖히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문이 열렸다.
문 뒤에는 어둑한, 관리가 덜 된 듯한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만프레도의 층수는 3층부터 지하 1층까지 총 네 개.'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건물이 지어진 해가 654년이라는 점이다.
엘누르력 654년.
100년 하고도 십수 년 전.
'전쟁 시대.'
인접국인 귀도와의 전쟁이 있었던 때다.
그쯤에 지어진 건물의 대부분은 적들의 침공이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알려지지 않은 층'을 지었다.
'건물의 방공호 같은 개념이지.'
하지만 현재, 770년에 와서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대비할 만한 위협이 없다.
전쟁 시대의 종결 이후 지금까지 별달리 경계할만한 외부의 군사적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간.
다른 이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생긴 건물의 주인들은 그 공간을 어디에 쓸까?
만일을 위해 놓아둘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들이 그럴 리가 있나."
"매옭."
"시끄럽게 굴면 두고 간다."
찡얼거리는 털공에게 괜한 협박을 하며 발길을 옮긴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원형의 계단을 타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최대한 촉각을 곤두세운 채 사방을 둘러본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하지만 그것은 분명 마법의 흔적이었다.
"…그래. 이래야지."
계단의 끝.
녹이 슬기는 했으나 단단히 잠겨 있는 입구가 나왔다.
탐지한 바에 따르면 보안 및 경보 마도구의 보호를 받는 것 같았다.
'손잡이는 아니고… 경첩 부분이 마도구다. 문 전체에 강화 마법도 걸려 있군.'
그렇다면 대안이 있었다.
'부수면 된다.'
물론 오러를 날려 한 방에 처리할 수는 없다.
현재의 나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다.
회귀를 한다고 해서 100의 힘이 0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회귀 전의 힘을 온전히 되찾으려거든 어떤 장소에 방문해야 했고, 나는 아직 그곳에 가지 못했다.
'잘 쳐줘 봐야 소드 엑스퍼트 중급 정도.'
하지만 일반적인 소드 엑스퍼트와, 소드 마스터였던 엑스퍼트의 마나 컨트롤 능력에는 차이가 있는 게 당연했다.
품속의 고양이를 조금 당겨 안으며 마법의 구조를 보다 상세히 뜯어본다.
문에 걸린 강화 마법에 두 개의 마도구가 병렬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
이런 건 문 하나만 부수면 다 같이 부서진다. 제대로 부술 수 있기만 하다면.
적당히 계산이 선 후, 마나로 강화한 발을 들어 올리며 작게 말한다.
"발로 찰 거니까 조심해, 호박아."
"캬아악!"
"조용히 좀… 하고!"
쩌엉!
파지지지직―
쾅―!
작은 파동이 통로를 울렸다.
내 발에 직격으로 맞은 문이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반동으로 몸에 전해진 충격에 잠시간 멈춰 서 있다가 적당히 추스른 후 문의 잔해를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지는 광경에 무심코 한마디 말이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불쾌한 기운이 묻어나는 아주 더러운 시설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천들과 반쯤 썩어 있는 음식물. 사람이 머물렀던 것이 확실하나 절대로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환경.
그러한 장소를 살펴보며 품속의 고양이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는다.
내 왼 손목에 그려진 하얀 로단테를 긁으며 놀던 고양이가 몸을 웅크렸다.
공간을 둘러보던 중, 유달리 눈에 띄는 검은 색의 테이블과 마호가니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는 쌓여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뭐가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나마 주목할만한 것은....
'핏자국, 그리고 그 흔적에 깃든 마력.'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불쾌하네."
내 기억상 '알려지지 않은 층'의 주 사용처는 암시장이었다. 음침하게 이런 지하에서 장물과 약물, 각종 불온한 것들을 거래하는 것이다.
건물들끼리 지하를 터 제법 큰 공간을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그 경우엔 높은 확률로 인신매매나 이종족 노예 거래 또한 이루어졌다. 물론 모두 불법이다.
대륙의 암시장 중 제일인 '샤카르' 만큼 크거나 위험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암시장은 암시장이었다.
'하지만 만프레도는 위에 해당이 없다.'
이 장소는 '공급'을 위해 쓰였다.
그리고 전 방화범이자 현 테러범. 폭발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를 보고 있던 경비원.
그녀가 있었으니, 이는....
'타리크의 짓이야.'
용병 칼룸, 가명 칸나.
그녀는 이전 회차, 나의 수족들 중 하나로 타리크를 가장 열렬히 쫓았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칼룸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 바로 타리크였으므로.
타리크는, 그리고 타리크 소속의 흑마법사들은 악마의 먹이가 되는 '혼란'과 '공포', '절망'을 얻기 위해 각종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
칼룸은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과거에도 이 층의 불온한 사용과 타리크에 대한 일들을 공론화하고 싶어 불을 냈다고 했던가. 불이 나면 건물을 조사하게 될 테니.'
아무리 경관에게 찔러도 알려지지 않은 층의 감사를 원치 않는 귀족들 선에서 막혔다면서.
'암시장 주 고객은 귀족들이니까. …겸사겸사, 귀족인 관객들에게 엿도 좀 먹이고 싶었던 것 같고.'
귀족들이 엿을 먹기는 했다. 다친 사람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정작 공론화는 어려울 듯싶었다.
'운수가 나빴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어.'
어쩔 수 없다.
아주 예상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아쉬운 마음에 괜히 품속의 털공을 문지르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운 좀 빌려 달라 했는데 영 효험이 없어."
"애우우욱!"
"하긴 원래 그런 미신 안 믿었으니까. 엘누르가 그러는데, 우상 숭배는 이단이래."
"왥...."
기운 빠진 울음소리를 들으며 밖을 향해 발을 움직인다.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면 제때 빠져나가기라도 해야 했다.
여기서 뭉개다 경관들이 들이닥치면 뒤집어쓰기 딱 좋았다.
그렇게 단념하고 몸을 돌리는데.
바스락.
톡… 투둑....
귀를 간지럽히는 작은 소음에 나는 재빠르게 마나를 끌어올리고 주먹을 말아 쥐며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누, 누… 누구세요...?"
그 목소리와 함께 드러난 인영을 보자, 나는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야 했다.
약간 꼬질한 황금빛의 머리카락, 호수를 닮은 푸른색 눈동자.
어쩐지 조금 여우 같은 인상의 곱상한 소년.
내가 아는 얼굴.
뒤로 넘어져도 대체로 코가 깨지는 인간에게 찾아온 간만의 행운이었다.
심장에 차오른 기쁨, 꼭 그만큼의 위엄이 품 안의 뚱뚱한 고양이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
엘누르, 그게 누구지?
'내 호박은… 세상 모든 행운의 주인이며, 신이다.'
* * *
브랜틀리.
천재 마도공학자.
마도공학자들의 마공탑.
마법사들의 마탑.
연금술사들의 연금탑.
그 모든 지식의 보고를 아우르는 '현자의 도시'의 젊은 지도자. 브랜틀리.
비록 단 한 번도 가까이 지내본 적은 없으나, 나 못지않게 타리크를 증오하는 것만은 분명했던 사람.
'귀도의 부랑민 출신으로, 그곳의 거리를 떠돌다 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라인하르트에 있었던 적이 있었나.
그리고… 이런 일을 겪어 타리크를 증오하게 된 것이었을까?
'뭐가 어찌 되었건 손에 넣었다는 사실 정도는 만족스럽지. 안 긁은 복권을 주운 셈이니.'
저택으로 향하는 좁은 삯마차 안.
내 맞은편에 앉아 광장에서 산 빵과 닭꼬치를 먹고 있는 10대 초반의 소년을 살펴본다.
간만에 주어진 정상적인 식사가 기꺼운지 음식들을 공격적으로 해치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러다 체해 남의 마차에 토라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 물을 건네주자 냉큼 받는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가 남이 준 음식을 먹다니.
'…아직 여러모로 감이 잡히지 않지만.'
머리가 어느 정도 식고 나니 보이는 의문점이 여럿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자 음식을 밀어 넣기를 멈춘 브랜틀리가 당황해 말했다.
"왜, 콜록, 왜요… 머, 먹는 거 처음 봐요?!"
"음."
무릎 위에 앉은 뚱뚱한 털뭉치를 당겨 안고, 손에 든 병의 입구를 입가로 가져가며 느릿하게 입을 연다.
"그냥, 내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
"그게 무슨...."
"그도 딱 너처럼 예의가 없었거든. 은혜도 모르고."
"...."
"마저 먹어. 나는 생각할 게 많네."
어째서 브랜틀리가 여기 있을까?
이번 회차의 변화는 정확히 무엇일까?
리베인 신관의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속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과 별개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리 오래 살았는데도 내가 모르는 게 참 많아. 재미있게도.'
그렇게 병에 있던 액체를 반 정도 비우자 주어진 음식을 다 먹은 브랜틀리가 내 눈치를 보았다.
어느 정도 배가 차니 이성이 돌아온 모양인지 한결 공손해진 태도였다.
힐끗힐끗 보내오는 시선이 신경 쓰여 시선을 주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 은...."
"노버트."
"…네, 노버트님."
그리고,
"…당신은 그들과 한패인가요?"
황당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007화 유감이지만 그건 아님
지금 그러니까, 나더러 타리크 소속이냐고 묻는 거지?
감히? 내게? 놈들을 산 채로 회 떠버리기 위해 칼 갈며 사는 나를?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구해 달라 그리 애원해 놓고 이제 와서 나를 의심해?"
"저를 꺼내주시긴 했지만, 저는 아직 노버트님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
하기야 그런 곳에서 나오기 위해서, 그리고 경관들에게 잡혀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살려만 주시면 감사하겠다, 제 은인이 되어 달라. 데려가 주셔서 감사하다. 다 빈말이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엎드려 빌길래 꺼내 줬더니 먹는 모습 좀 봤다고 짜증내고, 다 먹고 나서부턴 나를 추궁한다, 라....
'감정 상태가 휙휙 바뀌네. 아직 불안정한가? 뭐, 그런 일을 겪었으니....'
내가 불편하고, 무섭고 의심스러운가 봐.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그를 응시했다.
브랜틀리는 내 시선에 잠시 움찔했으나, 얼른 허리를 펴고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내가 아닌 내 품의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입을 움직인다.
"알려주지. 다만 이 하나는 기억해."
이해와 별개로 앞으로를 위해 반드시 알려주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브랜틀리가 쭈뼛쭈뼛 다시 시선을 올렸다.
그 시선을 마주 보며 담담히 말한다.
"난 네게 설명할 의무가 없어."
이건 호의의 영역이라고.
그저, 미래의 천재 마도공학자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말을 해줄 뿐.
나는 본래 이런 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한 뜻을 전하자 브랜틀리가 살짝 기가 죽는 것이 보였다.
그런 심경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척 넘기며 넌지시 말을 이었다.
"너를, 그러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을 가둔 자들이 누군지 알아?"
잠시간 망설이다, 브랜틀리가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노예상인 것 같았어요. 그곳은 인간 창고… 였던 것 같고요. 저는 거리를 떠돌다 그곳으로 잡혀 들어갔었어요."
"그래?"
더 말해 보라는 듯 되묻자 브랜틀리의 눈가에 붉은 기가 돌았다.
잠시 후, 소년은 성공적으로 울음을 참아내고 말을 이었다.
"그들은… 간혹 저희 중 일부를 데리고 나갔고, 한 번 불려 나간 사람들은, 클로에 아주머니나 로빈 아저씨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것만으로 노예상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저희를 재고라고 불렀거든요. 그곳의 사람들이."
"그래도 용케 극장에 남았네."
"…제가, 제가… 수, 숨어 있기도 했고… 부랑자 출신이라… 경관들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된 건지 대충 감이 왔다.
테러는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화재 진압과 건물의 조사 역시 빠르게 이루어졌다.
짧은 시간 내에 시설의 자료들을 수습해야 하는 마당에 숨어 있는 어린애 하나까지 찾을 새가 없었겠지.
더군다나 브랜틀리는 외국의 부랑자 출신이니, 경관들의 인격적인 대우나 사건의 증인으로서의 출석 역시 기대하기 어려웠다.
후환이 되지 못한다는 뜻.
'놔둬도 알아서 죽겠거니 싶어 다른 이들만 챙겨 도망쳤다는 소리지.'
어느 정도는 행운이었다. 그 덕에 브랜틀리라도 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주 나쁜 놈들이네."
적당히 맞장구를 치자 소년의 눈동자에 눈물과 분노가 동시에 흘러넘쳤다. 물론 분노의 대상은 내가 아닌 그들이었다.
그가 분노할 시간을 충분히 준 후, 어색하게 손안의 병을 가볍게 한 바퀴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매매상은 아니야."
"…네?"
"비슷하지만 달라. 그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거든. 오랫동안 그들을 쫓아온 나는 알아."
브랜틀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푸른색의 눈동자가 최대로 커졌다.
그 시선을 외면하며, 병 속의 액체를 조금 더 입안으로 밀어 넣은 후 말을 이었다.
"절망이나 공포심, 끝없는 부정한 감정들."
"…네?"
"그런 것들을 뽑아낼 뒤탈 없는 인간들을 사거나, 잡아들이는 놈들이지."
"…네?!"
"아마 잡혀간 이들은 팔리지 않을 거야. 팔려가는 것 이상의 고통을 겪을 뿐."
일순 소년의 숨이 멎었다.
잠시 후, 그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와 죄책감,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그의 얼굴에 흘러넘쳤다.
"왜… 왜 그런 짓을...."
"그들은 그런 짓을 하면 강해져. 그들의 숭배 대상인 악마는 그런 감정들을 먹고 자란다."
그러니 잡혀간 사람들은 감금당해 고문당하거나,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도륙당하거나, 인체 실험 혹은 흑마법의 제물이 되거나....
뭐, 그런 일들을 겪을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혼란'과 '공포', '절망'을 자아내기 위해서.
혹은 인공 마물이나 그 외 끔찍한 전력을 얻기 위해.
'그 행위에 쓰일 인간들을 구하고, 타리크의 본부로 전송하는 과정이 '공급'이지.'
입안에 남은 포도의 향이 유난히 떫었다.
남은 병을 한 차례 더 기울인 후 숨을 내쉬었다.
브랜틀리의 얼굴을 바라본다.
절박한, 그리고 절망에 절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어.'
사실 억지로 행한다면 마지막에 잡혀간 몇 명 정도는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 몇 명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브랜틀리는 타리크를 격렬히 증오해야 한다. 찰나의 구원으로 만족해서는 안 돼.'
그래야 진심으로 내 편에 설 테니.
'네가 나와 같은 목표를 갖고 살아가게 될 테니까.'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할 수 있는 것'에는 나 스스로와 타인은 물론 스스로의 인간성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분노.
나의 삶을 망친 이들을 향한 격한 분노.
그것이 브랜틀리의 심장에 온전히 자리잡기를 바라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와 함께 갇혀 있던 그들이 때때로 네게 잘해줬어?"
"...."
"친절을 베풀고 이름을 알려 주었으려나."
"...."
"잊기 힘든 얼굴이었겠네."
스스로가 보통 개새끼가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두 번째 병을 땄다.
덜 익은 포도의 향이 물씬 났다. 알코올 향이 쨍하게 올라왔다.
'죄책감은 없어.'
유감이지만 그런 개짓거리를 한 것은 내가 아닌 타리크였다. 이건 내 죄가 아니다.
나는 애초에 선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혹은 '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같은 가정 따위에 마음을 소모하기에는 너무 지쳐버렸다.
하지만 인간 된 도리가 있기는 하니까.
"그들이 평안히 죽었기를 기도하자."
그렇다고, 다가올 행복에 겨워 지금의 기분을 잊지는 말기를.
소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끅끅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술은 아직 남아있었고, 저택까지 가는 길이 멀었다.
* * *
브랜틀리는 저택의 시종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 신분과 앞으로 내가 갈 길에 대해 들은 그는 나를 타리크에 함께 맞설 동료로 인식했고, 나는 자비를 베푸는 척 그를 고용해 주었다.
며칠간 날을 세우며 불안해하던 그는, 1주일 정도 편안하고 풍족한 환경에 머물며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웠니?"
"빠른… 건가요?"
"그럼! 보통 책장 정리하는 법만 배우는 데 한세월 걸리는데!"
"어린데 일도 잘하고! 너무 귀여워!"
'야무지고, 저택에서 제일 어리니 눈이 갈 만도 하지.'
어찌 되었건 간에 이리 잘 지내니 보기가 참 좋았다.
이대로 잘 커서 나의 타리크 척살에 도움이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더 잘해줘라. 돈 많이 줄 테니 맛있는 것도 맨날 사주고 칭찬 감옥에 가둬버려.'
제대로 정 붙여, 아주.
하르트만이 너무 좋아서 날 배신하지 못하게 해.
그런 생각을 하며 일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소리 없이 다가온 남자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를 상대하기 귀찮은 마음이 앞서 그 시선을 모르는 척을 하자, 은근슬쩍 고개를 숙인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세요. 도련님도 습득이 빠르시고, 더 귀여우세요."
"...."
"세상에나, 이런 차가운 눈빛이라니! 흑흑...."
"레인."
차분하게 이름을 부르자 냅다 깝치던 부집사 레인이 재빠르게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움직였다.
"뭐 하러 왔지?"
"새로운 귀염둥이의 출현에, 우리 작은 도련님이 외로우실까...."
시간이 아까워 그 말을 끊었다.
"다음 경고는 없어."
"소백작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공자님의 안부를 물으셨어요."
그 말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레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물었다.
"왜?"
"공자님께서 연락을 받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그렇다 해도 제레미가 아니라 네게?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곧 사그라들었다.
다른 소식도 전할 게 있으셨겠지. 겸사겸사 내 안부도 물으신 거고.
"내가 다시 연락 드릴게."
"남매간 사이가 좋으시니 저도 기쁩니다."
레인은 그리 말하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기분이 별로였다.
'…비꼬는 건가?'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며 말없이 축객령을 내리지만 레인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를 의식해 고개를 들자 은근한 미소를 지은 레인이 입을 열었다.
"오후에 새로운 집사장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제가 알기로 아주 나태한 자라 하던데."
"맞아."
"어찌할까요?"
그리 물으며 지어 보이는 미소는 성의가 없었다.
웃고 있기는 하나, 은은히 묻어나는 적대감을 감추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 봐라.'
그 표정을 마주하며,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레인은 개인이 아닌 하르트만 '가문'에 충성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백작을 따르지만 백작만을 따르지는 않았고, 노버트를 살폈으나 가문 입장에서 '기준 미달'인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 가문의 수치에 가까웠던 내가 '가문의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철이 든' 행동을 해 약간의 기대감을 품게 된 직후, 다시 '기준 미달'의 인력을 들이니 불만스러운 것이겠지.
노버트는 이미 '기준 미달'인 이전 집사장을 컨트롤하는 것에 실패한 바 있으니.
내가 헨리를 온전히 길들이고,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건 진짜 노버트고. 내 얘기는 아니다.'
헨리 같은 사람을 길들이는 방법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부터 군대, 심지어 이국의 인사들까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루던 나였다.
게으른 집사 하나 정도야 껌이었다.
곧바로 나의 계획과 요구사항을 전달하자, 레인의 표정이 점차 당황에 물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어색하게 몸을 바로 세운 후 고개를 숙였다.
한결 절도 있어진 태도였다.
"…우선, 그간의 무례에 용서를 구합니다."
"갑자기?"
"공자님과 절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왜? 나도 아무한테나 이러지는 않는데."
"그 점이 두렵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몇 분쯤 그렇게 웃다,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넌 참 눈치가 좋아."
008화 사람을 다루는 법 (1)
헨리 마티스.
그는 주어진 모든 것들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적당히 돈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고위 귀족을 모시는 나름대로 괜찮은 집안.
우쭐대며 살기는 어려워도 주눅들 이유는 없는 위치. 다 좋았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미쳤느냐! 네가 어찌 이리 방만하게 굴어!"
"호들갑은… 리산더 공자님께서도 용서해 주셨잖아요?"
"그분의 자비를 당연히 여기는 그 태도가 잘못이라는 게다!"
"아, 그 좀… 수고비 삼아 조금 챙긴 것 가지고...."
"이 녀석이 진짜! 백작가에 충성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왜 몰라!"
"와악!"
하르트만이었다.
그의 아버지, 하르트만 영주성 총집사장의 손에서부터 날아오는 책을 피하며 헨리는 생각했다.
솔직히 헨리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맞다.
가문에서 대대로 섬겨온 분들.
우리가 주눅 들지 않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제국의 귀족으로서 존경받아 마땅할 '의무'를 짊어진 자들.
근데, 그래서… 뭐?
뭐 어쩌라고?
마티스 자작가가 하르트만 백작가의 가신이기에 신세가 핀 것은 사실이다.
우리 집안의 선조가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따지자면 그것은 다 집안의 일이고, 과거의 일이 아닌가? 내 얘기 아니잖아?
'그리고 보통 이 정도 '장난질'은 다 한다고. 과민이야, 진짜.'
헨리를 제외하고도 '장난질'을 하는 사람은 많았다.
영주성 본성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곳은 모든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공간이며, 목숨 바쳐 하르트만을 섬기는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저택의 사용인들이나 외곽에 근무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티 나게는 아니겠지.
하지만 지급된 의복의 단추를 틈틈이 팔아 치우는 사람에서부터, 요리 후 남은 소금이나 기름을 몰래 '처분하는' 요리사까지.
그는 대부분의 '소소한 장난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충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아버렸다. 바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더라, 그거.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자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따르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아니잖아?
근데 난 왜 그래야 하는데?
'그렇다고 여기 뭐, 특별히 내게 잘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뭘 잘하려 노력할 이유가 있나?
아니, 하다못해 강요나 하지 마시던가.
내 인생 내가 살겠다는데 아버지가 자꾸 그러시니 내가 더 이러는 거 아냐.
본질적인 의문과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자, 어느새 마음을 추스른 그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새 5년은 늙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장갑을 낀 손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수도에 가서는… 제발 그러지 말 거라. 그곳에는 네가 총책임자로 가는 거야."
"수도요? 제가요?"
"…어제 저녁에 서류로 전달했을 텐데."
"안 읽었, 악!"
빡!
커다란 소리와 함께 책 하나가 헨리의 머리통에 직격했다.
과장된 손짓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호들갑을 떨자 귓가에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그는 두 시간가량 총집사장의 잔소리를 듣다, 에디트 소백작에게 호출받아 '수도 저택의 총집사장이 전근을 가게 되어 네가 가야겠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후. 곧바로 짐을 챙겨 영주성을 떴다.
비상식적으로 급박한 일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의 배려도 받지 못하고 따라야 했다.
소백작의 강권이 있었던 탓이었다.
귓가에 잔잔하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너무도 낯설었다.
아버지가 하르트만 영주성의 총집사장이었던 탓에 살면서 하르트만령 밖으로 나간 일이 드물었다.
그렇기에 언젠가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며칠째 보는 풍경, 스쳐 가는 나무들과 풀숲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수도 저택의 총집사장 자리가 빈 건 알겠다. 하지만 어째서 내가 가게 됐을까?
'좌천이겠지.'
수도 저택에 머무는 사람, 하르트만 2공자에 대해서는 대충 알았다.
영지에서의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수도로 떠난 하르트만 가문의 막내.
하르트만 백작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으며,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어찌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해진 자.
하르트만 가문의 골칫덩이.
만난 적도 있기는 했다. 그를 잘 아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래. 그런 사람을 모시라고 보내는 거니까. 좌천 맞겠지.'
솔직히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대충대충 사는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좋은 점이 더 많을지도.
'수도 저택은 영주성보다야 여유가 있는 편이니까.'
아, 거기다 내가 총집사장이라며.
눈치 볼 사람도 없는 것 아냐?
'…좋은데? 거기 사는 도련님은 소심쟁이라 잔소리도 못할 테니!'
애초에 아버지의 강요로 들어갔을 뿐, 영주성에 큰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스스로의 평안이 중요했다. 그러니 남들 하는 만큼만 일하고, 딱 남들만큼만 나쁘게 살아온 것이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불만도 없는 사람.
그렇기에 나태하고, 찰나의 유혹에 약하며. 충성심이라고는 먹고 죽으래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헨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수도 저택으로 발을 들였다.
붉은색 지붕을 얹은 5층 정도의 타운하우스.
하르트만 수도 저택을 보면서도 그가 한 생각은 아래가 전부였다.
'이야, 크네. 청소하기 힘들겠다.'
그는 그만큼이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안일한 마음은 하르트만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은 마차가 저택의 입구에 들어선 직후 박살나게 된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오후 8시.
마차에서 내린 헨리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도 황당했던 탓이었다.
전해 듣기로 그는 이 저택의 총집사장이 되기 위해 왔다.
그리고 그 말은, 하르트만 가문의 직계인 노버트 하르트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의 아랫사람이라는 소리다.
다른 가신들 또한 근무하는 하르트만 영주성에서보다 높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마중을 나와 있는 것은 한 명의 쬐끄만 소년과 한 마리 고양이가 전부였다.
심지어 저 버릇없는 털짐승은 그를 보며 하품을 쩍쩍해대고 있었다. 팔자 좋게도!
금발의 소년은 그 물음에 잠시간 쭈뼛거리더니,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일렀다.
"안녕하세요, 저택의 사용인인 브랜틀리라고 해요. 헨리 마티스 총집사장님… 이시죠?"
"맞아, 반가워. 그런데 너만 나왔어?"
"그게… 나오자고 말씀은 드렸는데...."
"그런데?"
"마침 노버트님이 호출하셔서...."
"…다 같이 공자님께 불려간 거야?"
이 인간이 지금 나 물 먹이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소년이 팔을 내저으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뇨, 제레미님만 그래요! 노버트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요. 약을 챙겨드리러 가셨어요."
"나머지는?"
"나머지 분들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어색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조곤조곤 일렀다.
"…반 정도는 부집사님께 불려 가셨고, 남은 반은… 개인적으로 일이 있으시다고 하세요."
"음. 그래?"
"그, 그래도 안내는 제가 해드릴 수 있어요! 오늘 할 일 끝나서!"
"…그래? 고마워. 그러면 네게 부탁할게."
한 걸음 다가가 부들부들한 금발을 마구 쓰다듬으며 헨리는 생각했다.
이거 텃세네.
어쩌냐? 생각보다 힘들겠는데?
그리고 그 직감은 정확히 맞아들었다.
* * *
힘들다.
너무 힘들다.
"아, 죄송합니다. 남아있는 음식이 이것뿐이라...."
"괜찮습니다… 하하...."
비록 '남아있는 음식'이 없는 관계로 그의 식사가 마른 빵과 식은 수프로 통일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괜찮았다.
일단 먹을 수는 있지 않은가.
'첫날엔… 늦게 와서 남은 게 없다며 이상한 콩죽 같은 걸 줬잖아....'
뭐지? 진짜 왜 이러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마티스가 장남인데? 하르트만 가문의 가신인데?
나는 이곳의 총책임자고 우리 아버지는 영주성 총집사장인데?
'…설마 내가 횡령하다 좌천된 거 소문났나?'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에 앉았다.
통상적인 점심시간보다 늦게 온 것은 맞았기에, 실내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괜히 울적한 기분이 된 그는 퍽퍽한 마른 빵을 씹었다. 이런 썩을, 심지어 밀도 아니라 호밀로 만든 음식이라 더 딱딱했다.
서러운 심정을 속으로 삼키며 그는 근 14일간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비통함이 심장을 가득 채웠다.
'이 저택의 텃세는 정말 최악이야....'
저택의 주인이 까탈스러운 것은 분명 아니었다.
노버트 하르트만은 너그러운 편이 맞았다.
붉은색의 긴 머리, 순한 황금빛 눈을 가진 그 도련님은 큰소리 한 번을 내는 법이 없었다.
늘상 웃으며 부드러운 투로 말을 건넸고, 그가 처음 왔을 때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돕자. 뭐 그런 말을 해주었다.
문제는 사용인들이었다.
식사는 식거나 오래된 것만 주고, 묻는 말에는 모른다는 답이 주로 돌아온다.
헨리가 시키는 일은 꼭 본래보다 10분씩 늦게 한다.
뭘 하면 뭘 한다고 난리, 뭘 안 하면 뭘 안 한다고 수군수군.
숨을 쉬면 숨을 쉰다고 속닥속닥....
그러다 그가 실수라도 하면 모든 이들이 싫은 티를 있는 대로 내고 부집사에게 일러바친다.
그러면 부집사는 그 뱀 같은 녹색 눈으로 헨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한다.
'적응이 힘드신 것은 알겠지만… 서로 맞춰 가는 과정이니 조금만 더 노력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데....
땡그랑!
커다란 소리와 함께 수저가 내던져졌다. 식은 수프 한 방울이 식탁 위에 튀었다.
가만히 있던 야마가 존나게 돌았다.
'씨이이이이이발!'
지금 이거 자기가 여기 총집사장 자리 못 받았다고 나한테 지랄하는 거 맞지?
일부러 저러는 거지?
적반하장으로 성질을 내며 머리를 붙잡고 있자, 식당 안으로 들어오려던 두어 명의 사용인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왜 나와?"
"그… 나가서 먹자. 오후에 여유 있잖아."
"어, 그래? 그럼 나는 스튜."
"좋아, 나는 햄 먹을래!"
그 목소리들을 배경으로 소리 없는 절규를 한차례 발사하고 나자, 뒤늦게 떠오르는 것은 아련한 감정이었다.
눈가가 절로 촉촉해졌다. 별안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집이 너무 그리워....'
영주성에서 그냥, 얌전히 살걸.
나대지 말고 시키는 일 제대로 할걸.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하지 말고, 놓여 있는 탄탄대로 잘 밟을걸.
그런 생각을 하며 멍을 때리고 있자,
"왥."
챙그랑!
그새 다가온 하르트만 공자의 돼지 같은 고양이가 그의 밥그릇을 엎었다. 남은 식은 수프가 못 먹는 음식으로 화했다.
헨리의 신세가 배로 처량해졌다.
이제 나는 밥도 없어....
'그만둘까. 그럼 절연당하나… 아니면 아버지께 다신 게으름 안 피울 테니 데려가 달라 빌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제기랄, 빌어먹게도 귀여웠다. 당장 주무르고 싶었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고양이의 등을 쓸기 위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고양이는 재빠르게 바닥으로 튀어 내려가 입구로 향했다.
총총 걸어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손이 그 뚱뚱한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브랜틀리일까.
'…얘도 이 시간에 밥을 먹나, 어린데. 제때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헨리?"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의아한 표정의 그가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뚱뚱한 고양이를 품에 안은 그 사람.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저택의 주인.
"지금 식사해?"
009화 사람을 다루는 법 (2)
"일이 많아?"
"…네?"
"식사를 늦게 하고 있길래. 일이 좀 많나 싶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고기를 잔뜩 넣은 스튜를 먹던 헨리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잠시간 그릇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서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좀… 적응이 힘드네요."
풀이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낙하산 #프로횡령러 #젊은놈 #좌천 콤보를 달고 온 직원에게 사회가 얼마나 싸늘해질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귀찮아서 모든 일을 보고받지는 않았으나, 안 봐도 뻔했다. 사회생활 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심과는 달리,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는 내 몫의 샌드위치를 조금 밀어주었다.
"좀 더 먹어. 나는 이따 차를 마실 거라서."
"괜찮...."
"잭이 네 그릇을 엎어 유감이기도 하고."
수차례의 컨펌 끝에 고양이의 이름은 잭 오 랜턴으로 정해졌다.
김점순. 김호박. 김펌킨… 그 모든 귀여운 이름들을 모두 거부한 이 고양이는 결국 잘린 호박 대가리가 되기를 택했다.
아무리 이 세계에 할로윈이 없다지만, 그래도 잭 오 랜턴 좀 별로 아닌가?
직역하면 병사 O. 유리등이란 소리잖아.
'하지만 뭐, 지가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주스 잔과 샌드위치를 밀어준다.
이번에는 헨리 역시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개미 목소리로 전하고는, 느릿느릿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물잔을 기울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한참 식사를 하던 헨리가 조심스레 서두를 꺼냈다.
"…제가 여러모로, 책잡힐 만한 사람이라, 불편이 많네요."
'나왔다. 퇴사 고민하는 신입사원 멘트.'
물론 착한, 그러나 미숙할 뿐인 신입사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그 경우라면 진심으로 공감하는 척이라도 해줬겠지. 그게 인생 선배로서의 도리니까.
하지만 이건 본가에서 책잡힐 짓을 하다 내게 불려온 한심한 낙하산 놈이 하는 소리였다.
'그러게 잘 좀 하지 새끼야. 그랬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생겼어도 내가 막아 주었을 것이다. 저택 내 분위기는 무난하게 유지되는 편이 좋았으므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당장은 그의 외로움을 이용해야 했기에, 미소를 그리며 '고민 상담하는 팀장님'을 연기한다.
남은 물을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고,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그래? 나는 네가 오고 그다지 불편을 못 느꼈는데...."
일단 이 멘트 한 번 깔아 기를 살려주고,
"다들 내 앞에서는 친절한 편이고… 사이가 좋아서...."
내 앞으로도 까임 방지 권리를 한 번 깔아 준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티를 내면 신뢰를 받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고는 헨리와 얼굴을 마주한다.
그간의 서러움, 울분. 억울함… 그 모든 감정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표정이 보였다.
영 미숙한 표정 관리가 마음에 차지 않았으나 뭐, 괜찮겠지.
'늘 그렇듯, 가르쳐 주면 잘 배울 테니까.'
망설이듯 약간의 뜸을 들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그려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리는 직격타.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고자질 프리패스 티켓 증정.
그 말에, 헨리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식당의 바깥, 저 멀리서 은은히 느껴지던 시선이 황당함에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무서운 인간...."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무시했다.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살짝 느릿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선 나한테 말해 봐.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게."
* * *
"무서운 인간...."
저도 모르게 불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인은 10여 일 전, 노버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저택의 서재에서 노버트 하르트만은 헨리 마티스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레인에게 말했다.
'헨리는 사실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아. 게으르고 마인드가 썩어빠졌을 뿐. 눈썰미가 좋고 일 처리가 확실하지.'
그러한 하르트만 공자의 말에 레인은 내심 짜증이 났다. 아직도 무른 소리를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점이 있으면 뭐해? 단점이 장점을 다 가리는데.
'그 능력을 가문을 위해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 말에, 노버트가 덤덤히 말했다.
'쓰게 만들면 돼.'
'어떻게요?'
부드러운, 다정한 미소가 노버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보니, 뒷얘기가 너무도 예상이 가서 또 한 번 혈압이 오르려 했다.
예전처럼 잘해주면 내 진심을 알아줄 거다. 뭐 그런 소리를 하겠지.
'그래도 요즘 좀 달라지셨나 했는데, 이 사람도 참 발전이 없어.'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는 레인의 예상을 그야말로 박살냈다.
'도의적으로 허락 가능한 선에서, 텃세를 최대치로 부려줬으면 싶군.'
'…예?'
'식사는 식거나 마른 것만 주고, 시키는 일은 5분씩 늦게 해. 굴러온 돌 불편하다는 기색을 의도적으로 매일매일 흘려.'
'…예?'
'실수하면 싫은 티 있는 대로 내고 사사건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아. 숨 한 번 쉬는 것도 남 눈치를 보게 만들도록.'
예?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전과 다를 바 없는 따듯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10대 후반의 소년이 보였다.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사용인들은 헨리가 싫을 거야. 낙하산… 인맥으로 저택의 총책임자가 됐으니.'
그 말은 맞았다. 따로 수작을 부리지 않아도 총집사장은 고생 확정이었다.
출세에는 영 욕심이 없는 레인만 해도 새로 온다는 윗사람이 탐탁잖은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그러니 헨리에 대한 소문을 흘리고 바람만 좀 불어넣어도 사용인들이 알아서 불탈 거다.'
'그래도 도의적으로 좀....'
툭.
노버트의 손끝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작은 소리가 났다.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횡령 2회, 청탁 관련 뇌물 수수 4회, 부족한 언행으로 내 누님과 형님께 건방도 떨었고. 우수한 가신인 마티스 가문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깎았다.'
'....'
'닥치고 개같이 굴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숨 한 번 쉬는 것도 허락받고 쉬게 하겠습니다.'
그 말에 노버트의 미소에 만족감이 깃들었다.
서류 옆에 놓아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노버트가 말했다.
'제대로 해줘. 겸사겸사 경고도 좀 하려고.'
그리 말하며 커피를 입에 머금는 모습이 아주 여유로웠다.
뭔 소리야?
그리 생각하며 하르트만 공자를 살펴본다.
노버트는 레인의 의복에 달린 사용인 배지를 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레인은 깨달았다.
내가 그간 참 잘해줘서… 너희도 좋은 시간이 길었잖아.
본보기로 좀 조질 때가 됐지?
라는 의미를.
틀린 것은 없었다. 하르트만 수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나태해져 있었다.
고용인이 너그럽고 해야 하는 일이 적으니 사용인들은 절로 느슨해졌다. 그러니 첩자 따위가 돌아다닐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남은 의문이 여럿이었기에 레인은 입을 움직였다.
'그런데, 괴롭히기만 해서는… 공자님이 길들이시기 힘들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우는 소리 들어주면서 상냥한 주인인 척할 거라서.'
그렇게 말하고는 맑게 웃는다.
제 나이다운, 상큼한 미소였다. 하지만 뒷말은 절대 상큼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그를 편애할 거야. 그러면 내가 좋아서 환장하겠지. 그런 녀석들은 사사로운 호의에 맥을 못 추거든.'
'....'
'이후로는 나를 향한 호감을 이용해 천천히 내 입맛대로 물들이면 돼. 간단하잖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그런 마음을 담아 노버트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진짜 많은데, 할 말이 없었다. 효과가 있기는 할 터였다. 방식 자체는 단순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매우 경제적이다.
이 방식이라면 분명 헨리 마티스를 길들일 수 있을 것이고, '텃세에 대한 보복'을 가하는 헨리를 통해 그간 나태했던 사용인들을 다스릴 수 있다.
너무도 효율적이었다.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레인은 마지막 의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해봐.'
'그럼에도 집사장이 적응에 성공하거나, 공자님의 계획을 알아차린다면요?'
'문제 있나?'
명쾌한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사람을 다루고 알아보는 능력을 내게 입증한 거지.'
'....'
'그 능력으로 사용인들을 잘 통솔할 테니, 나는 유능한 사람을 고용한 셈이 된다.'
이 사람 원래 이랬나?
그리 생각하며 입을 벌리고 있자,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노버트가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아.'
'공자님 진심 무서워요.'
'나도 알아.'
"우리 공자님… 왜 저리 되셨나...."
속으로 치를 떨며 레인은 자리를 피했다.
다가올 난리에 대비해야 했다.
'하르트만 공자에게든, 열 받아 날뛰는 집사장에게든. 책잡히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어느 쪽이든 솔직히 좀 무서웠다.
하르트만 수도 저택의 기강이 비로소 똑바로 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나의 편애를 등에 업은 헨리는 저택 내부의 부정을 이 잡듯이 잡아냈다.
내 감시가 있어 사사로이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잘못을 꾸며내지는 못했으나, 정도 이상 세세한 감찰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성실한 태도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였다.
아주 좋았다.
이제 좀 다들 일하는 티가 났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일은 헨리가 다 하고 쾌적한 저택의 환경은 내가 누린다는 점이다.
'참 좋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앞을 보았다.
나는 지금....
"정말 괜찮습니다. 저 겁 많은 거 아시지 않나요?"
-....
"테러는 좀 놀랐지만… 오히려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 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
"네. 눈 뜨고 보니 상황이 다 정리되어 있어서...."
가식을 떨고 있었다.
태블릿, 아니 통신 마도구 너머에 비친 에디트, 하르트만 소백작을 바라보며 나는 짐짓 가증스러운 연기를 했다.
브랜틀리를 데려오게 된 건으로 만프레도 극장 사고 당일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들킨 탓에, 멀쩡한 꼴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화면 너머의 그녀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너는 좀 많이 심약한 편이지.
그녀는 내 말을 믿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걱정시켜 드렸네요."
-그래.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앞으로는 제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010화 확인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