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20

010화 확인 작업

그렇게 신변잡기적인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대부분의 내용은 근황 공유였다.

어떻게 지냈는지, 문제는 없는지. 이제는 괜찮은지 등등.

나는 적당히 아는 선에서 그 질문들에 대답하며 에디트가 기억하는 얌전한 동생을 연기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에디트의 녹색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본론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경청의 제스처를 취하자 에디트가 물었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고?

의도를 알아채기 어렵지 않은 말이었다.

에디트는 결점을 품게 된 막냇동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탓에 정도 이상 살갑게 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잘 해줬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의사를 존중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 역시 하르트만 가문의 사람이었다.

가문의 차기 주인으로서 그녀는 '가문에 해가 될' 행동을 경계했다.

그리고 가문의 돈을 빼먹으며 지내던 헨리를 수도 저택 꼭대기에 올려놓은 일은 그녀에게 괜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손끝으로 입가를 한 번 쓸고는 그 말에 답했다.

"그럼요. 다 성실하고 착합니다."

헨리는 월급값을 그야말로 최대로 하는 중이었다.

비록 그 원인이 사적인 원한에 있다 해도 이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에디트의 표정이 오묘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는 덧붙였다.

"횡령과 태업을 밥 먹듯이 저지르던 사람답지 않게요."

나 역시 그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데리고 온 것이라는 말을.

그것이 의외였던지 에디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나를 탐색하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을 맺었다.

"걱정 마세요. 레인과 합이 좋아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못 미덥다면 가주님의 사람인 레인을 믿으시라고.

그 말에 에디트는 잠시간 내 눈을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빈말인 것이 분명했으나, 굳이 정정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한 내 태도에 작게 헛웃음을 친 그녀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그럼요. 전 누님밖에 없어요."

웃음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렇게 잠시간 그녀가 막냇동생의 아부를 즐기게 놔두었다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내 본론을 꺼냈다.

"누님. 조만간 리산더 형님께서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에베렛 황녀님의 연회를 이유로."

그 말에 에디트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잠시간 나를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그렇기는 한데. 왜?

"괜히 고생스럽게 오실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찰나 간 정적이 흘렀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그려졌다.

그럴 만도 했다.

본래대로라면 연회 참석 등의 사교 활동은 수도 저택에 머무는 노버트의 일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노버트는 병적으로 외부인을 두려워했다.

사교 활동은커녕 외출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있거든 에디트나 리산더 중 시간이 남는 사람이 노버트를 대신해 참석해 주고는 했다.

그것은 그들의 동생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가문의 체면을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본래 노버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아직은 나서지 않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연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에디트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재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조급할 이유가 없어.

그 말에 부드러운 미소로 답한다.

이전의 노버트와는 다른, 무던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녀를 마주 본다.

그러한 행동이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알아들은 에디트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잠시 후 약간 너그러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가보거라.

"감사합니다."

이후로 몇 마디 말을 더 나누고 연락을 끝마쳤다.

'좀 극성이지만 역시나 에디트는 좋은 사람이야.'

하르트만, 그냥 보면 안 그래 보이는데 애들이 참 착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통신 마도구를 대충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무실을 벗어나며 생각을 이어간다.

에베렛 황녀의 연회.

중요한 이벤트다.

현재 황실의 뜨거운 감자는 당연하게도 황태자위를 두고 벌어지는 이권 다툼이다.

죽은 황후 소생, 버려진 황자.

1황자 프리드리히 폰 라인하르트.

2황비 소생,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사람.

2황자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

1황비 소생, 요제프와 호각을 다투는 사람.

1황녀 에베렛 클라인 라인하르트.

'손이 빠른 귀족들 위주로 각자의 위치가 재정립되는 중이지.'

물론 현재로서 주가 되는 것은 2황자 요제프와 1황녀 에베렛의 세력이다.

저택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택의 높은 천장,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가문의 시조를 그린 초상화.

그 아래 장식되어 있는 세검.

하르트만 선조들 중 누군가가 한때 사랑했기에 지금까지 관리는 되고 있으나, 지금은 이리 벽에 매달려 구경거리만 되고 있는 그 검.

무심코 그 물건을 감싼 틀을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피부를 스쳤다.

나의 황제였던 그 사람.

그를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현 황제는 장남인 프리드리히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죽은 황후를 사랑했던 황제는 그녀의 아들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귀족들과 후처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현실과 타협하여, 프리드리히를 내친다.

'물론 몰래 지원이야 해주지. 돈이든, 사람이든.'

그러니 온갖 귀족들의 표적인 그가 여태 살아남아 내 집에 첩자까지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눈을 피해 번 돈은 그들의 눈을 피해 사용해야 하는 법.

그는 제 한 목숨을 부지하고,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닦는 것까지는 성공하나....

'황자로서 받아 마땅할 대우를 누리며 지내지는 못한다.'

그랬다가는 황제의 편애를 귀족들에게 대놓고 보여주게 되니까.

귀족들의 압박을 못 견딘 황제가 그나마 제공하던 지원마저 끊어버리게 될 수 있으니.

'물론 독한 놈이니만큼, 이를 기회로 삼아 비밀스럽게 힘을 기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 생각하길 멈추고 틀에서 손을 떼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것이 남 걱정, 황족 걱정, 프리드리히 걱정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에게 찾아오는 첫 번째 행운.'

에베렛 황녀의 연회.

아니.

'1황비 피살 사건.'

2황자 요제프와 1황녀 에베렛의 사이가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 프리드리히가 반사 이익을 얻게 되는 그 사건.

과거를 회상하며 한쪽 입꼬리를 주욱 올렸다.

남이 봤을 때 야비하다 느낄만한 미소를 그리며 생각했다.

'내가 망쳐 주지.'

깽판.

나 그런 거 완전 잘해.

차분한 시선으로 검 끝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기척을 일별하자 고개를 숙인 제레미가 보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의 말에 긍정하며 제레미를 마주본다.

담담하고 여상한 태도.

하지만 제레미를 오랫동안 보아 온 나는 그 안에 든 의아함과 불안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짧은 정적을 뒤로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인다.

그에 제레미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계가 찰나 간 드러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충분히 긴장을 풀 여유를 제공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는데."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행운을 빼앗기 위하여.

물론 그 일은 헨리나 레인 역시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충성스러운 프리드리히의 심복, 제레미의 손을 꼭 빌리고 싶었다.

그편이 더 유쾌할 테니.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말을 이었다.

"들어 줄 거지?"

* * *

덜컹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간지럽혔다.

얇은 창 너머로 화려하게 빛나는 고딕풍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 마차의 내부를 바라보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노버트의 모습이 보였다.

창틀에 닿아 있던 리산더의 팔꿈치가 제 자리를 찾았다.

그의 표정이 오묘한 기색을 띠었다.

리산더 하르트만은 생각했다.

'확실히 뭔가 달라졌어.'

최근 리산더는 그의 손윗누이, 소백작 에디트의 호출을 받았다.

소백작의 집무실에 선 그에게 에디트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리산더. 나는 노버트를 말리지 않을 생각이야.'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로 오래간 저택에 칩거하며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해온 그들의 동생, 노버트 하르트만을 사교계에 내보이겠다는 것.

더 이상 그를 대신하여 행사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리산더의 감상은 이러했다.

'무슨 소리야? 답지 않게. 뭐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나?'

에디트가 무슨 생각으로 노버트를 믿어 보기로 결심한 것인지 솔직히 짐작이 어려웠다.

리산더가 아는 노버트는 여전히 부족한 동생이었다.

'몇 년을 은둔하던 놈을 갑자기 내보낸다고? 가문 망신이라도 시키면 어쩌려고?'

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 말은 노버트가 아니라 노버트를 믿기로 한 에디트를 욕보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제안을 했다.

'그 녀석도 밖으로 나올 때가 되기는 했지요. 하지만… 누님. 저는 걱정이 됩니다.'

'무엇이?'

'아시지 않습니까. 노버트는 사교계 초행입니다. 여러모로 낯설어 할 것이 분명합니다.'

'....'

'그러니 한 번은 가까이서 지켜보고 오겠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어느 정도는 노버트를 위해서, 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곳에서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일이라도 당했다가는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에디트 역시 그러한 부분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리산더의 동행을 허가했다.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리산더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여 그의 동생을 살폈다.

언제나와 같이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 자잘한 루비와 페리도트로 장식한 진녹색 의복.

정갈한 자세와 하르트만 백작을 닮은 수려한 외모.

그러나 당당한 태도와 여유로운 표정은 본디 그의 동생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동안 잃어버렸던 것이지.'

리산더의 눈가가 좁아졌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한 줄기 의문이 그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손끝이 두어 차례 마차 좌석을 짚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리산더는 본디 좀 모자란 동생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근래에 계속 떨어져 지내기도 했고, 노버트 역시 리산더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꼭 그만큼 소원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시선을 끌게 되어 있었고, 리산더는 오늘 처음으로 그의 동생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가 살면서 처음으로 노버트를 걱정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간 형 노릇을 한 적이 없어 묻기도 뭐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을 짧게 일별한 리산더는 제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동시에 목까지 차올라 있던 걱정 역시 주워 담았다. 어찌 되었건 괜한 말로 자리를 불편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그때 물어보지 뭐.

다만 한 자락, 남아있는 의구심이 리산더의 입을 움직였다.

마차에서 내린 리산더가 툭 던지듯 물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바닥에 발을 딛다 말고 리산더를 짧게 응시한 노버트가 반짝거리는 황궁의 건물을 눈에 담았다.

그에게는 익숙한 고딕풍의 건물 외벽을 살피며, 노버트가 말을 이었다.

"맛이 좋겠지요?"

"뭐?"

리산더의 물음과는 관련 없는 말이었다.

그가 물음을 건네기도 전, 마차에서 완전히 내린 노버트가 말을 맺었다.

"황궁의 와인 말입니다. 기대했거든요."

'…얘가 벌써 술맛을 알아버렸나?'

순간 당황한 리산더가 그를 응시했다.

"그야 그런데… 네가 와인을 좋아했던가?"

"술은 다 좋아합니다."

몰랐던 사실이었다.

리산더가 노버트와 완전히 서먹해진 것은 노버트가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이었다.

자연히 그는 노버트가 술을 먹기는 하는지,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가족 간에 비록 애틋하지는 못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건데.

리산더는 잠시간 노버트의 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노버트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걱정스러운 투의 말이 이어졌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그럼요."

"벌써 술 마실 생각에 신난 것 같은데."

"맛만 보겠습니다."

대화가 어설프게 끝을 맺었다.

분주히 움직이며 인원을 확인하는 황궁의 시종들을 지나치고, 각국의 보물들로 장식된 홀을 가로지른다.

힐끔, 녹색 눈동자가 그의 동생을 일별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마주 보는 얼굴이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색한 목소리가 말했다.

"돌아가면 나와도 한잔하자."

그 말에 노버트의 눈이 잠시간 크게 뜨였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좋지요."

"…먼저 들어가마. 둘러보고 와."

연회장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이 열렸다.

간만의 대화가 몹시 민망했는지 리산더의 발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노버트의 눈동자가 그런 리산더의 등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술 좋지.'

그의 한쪽 입꼬리가 찰나 간 당겨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샛노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그 스스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노버트의 입가를 울렸다.

"…마실 정신이 없겠지만."

011화 작전 변경

지금 시간은 오후 6시.

연회가 시작되기 한참 전이었다. 리산더 나름의 안배였다. 외부 활동에 익숙지 않은 동생이 인파가 몰리기 전 적응하길 바란 것이다.

좋은 일이었다.

물론 리산더의 바람과는 다른 의미로.

에피타이저를 대신하여 준비된 핑거 푸드들이 진열되어 있는 테이블.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들과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 다수.

연회장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다수의 기사들.

그 모든 것들을 살펴본 후 고개를 돌린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신기할 만도 하지.'

사지 멀쩡한 놈이 이 나이 먹고 사교계 초행인 경우는 드무니까.

그래도 노버트는 나름 사연이 있는 편이기는 했다.

''그 일', 그러니까, 가문의 배신자에게 납치를 당했다던가. 직후 마물 밥이 될 뻔했다던데.'

다행스럽게도 큰일은 없었으나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다면 그나마 상황이 괜찮았을 것이나,

'하르트만 백작 내외 성격상 겁에 질린 자식을 제대로 달랬을 리 없다.'

백작 부부는 바빴고, 자식을 엄하게 키우는 편이다.

마음을 다친 아들을 염려할 만큼 세심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머릿속에 다소 근엄한 인상의 붉은 머리 중년 남성이 떠오른다.

그 옆의 다부진 인상의 여성 역시 떠올랐다.

팔을 쓸어 보니 경직되어 있는 근육이 느껴졌다.

적당히 손목 언저리를 주무르며 문득 떠오른 과거를 천천히 회상했다.

처음 회귀한 직후.

2회차.

나라고 처음부터 현실과의 타협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날뛰던 시절이 있었다.

주군이라는 인간은 날 버렸고, 아끼던 시종은 알고 보니 놈의 첩자였다.

놈들 때문에 뒤졌는데 주신은 날 버린 주군을 따르라 명한다.

그리고 눈 떴더니 내가 17살이라니.

그간 내가 쌓아 온 모든 것들이 공중분해 되어 있는 상황이라니?

인생 환멸이 나, 한참 놀았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증오한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온갖 곳에 울분을 쏟아내며 망나니짓을 했던가. 보통 미친 게 아니었지.'

그리고 당연히 머리끝까지 열이 받은 백작 부부와 대면하게 되었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그때 하도 처맞았더니… 이후로는 얼굴만 떠올려도 소름이 돋아.'

회귀나 절망적인 상황에 익숙지 않던 시절의 기억이라 더 그랬다.

어째선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질 않더라. …당시에 하도 맞을 짓을 하고 다녀서 억울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후로 에디트나 리산더도 가문의 일이나 북부의 마물 토벌에 참여하면서 바빠졌으니.'

가문 내에서 노버트가 소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고마워."

지나가던 시종이 건네는 잔을 건네받는다.

민트 이파리를 띄운 물이 든 잔을 기울이자 청량감이 입안을 감돌았다.

'노력한 끝에 저택 내 사람들과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뿐.'

노버트는 귀족 사회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수도의 저택에 칩거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었다.

기척을 조금씩 줄여 가며 인적이 드문 방향으로 걸어간다. 다른 이들의 반경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사람을 찾는다.

'역시 아직 도착하지 않았군.'

가문의 위세가 대단할수록 이런 자리에는 늦게 도착하기 마련이었다.

본래라면 리산더나 노버트 역시 한참 뜸을 들이고 있었을 시점이니 달리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어쩐지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 시선에 암녹색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황궁의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한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예상과 다른 점이 나왔다.

눈동자를 반 바퀴 굴리며 생각했다.

'…계획을 좀 바꿔야겠는데.'

최대한 자연스레 그 시종을 스쳐 지나가며 주변을 탐색한다.

그리고 물건을 나르고 있지 않은, 하지만 황궁 소속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착용한 이를 찾았다.

기척을 내며 그에게 다가가자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중년인이 나를 마주 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하급 관리자 격의 시종이 분명했다.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본론을 꺼낸다.

"민망한 이야기네만, 내가 황궁 초행이라네. 길 안내는 누구에게 부탁하면 될까?"

그리 말하며 품에서 하나의 금화를 꺼내 건네자, 시종이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냉큼 그것을 받아 챙겼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귀한 분을 모시는 사람을 사사로이 빌리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군."

"과찬이십니다."

라벤더가 음각된 금 단추.

'1황녀의 사람.'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시선을 굴렸다.

어쩐지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중년인의 관록이 깃든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우선은 '황궁에 처음 와 본 도련님' 행세를 끝마쳐야 했다.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잇는다.

"우선은, 쉴 수 있는 곳을 먼저 봐 둘 수 있을까?"

* * *

"하르트만 공자? 그러니까, 1공자가 아니라 2공자?"

수군수군, 여럿의 목소리가 잔물결처럼 일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이들의 부채가 살랑거렸다.

하르트만 가문의 직계 중 가장 이름있는 것은 소백작인 에디트였다.

하지만 둘째 리산더와 셋째 노버트 또한 각각 다른 의미에서 유명했다.

리산더 하르트만은 발군의 마법적 성취와 사교적인 태도, 눈에 띄는 외모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반면 노버트 하르트만은....

"이제껏 사교계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죠? 외부 활동이 이번이 처음이라던가."

"도는 말은 많았지만… 사실 대부분 신빙성 없었죠."

"좀 이상한데요. 큰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그간 노버트 하르트만의 근황으로 알려진 것은 단 한 줄이었다.

저택에 칩거하며 가문의 일을 처리한다.

이 한 줄만으로는 하르트만 2공자를 향한 수많은 의문들 중 단 하나도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남 얘기를 좋아하는 귀족들은 남은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채우려 들었다.

몸이 약해 저택 밖을 다니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보통 망나니가 아니라 가둬 둔 것이라더라.

아니다. 광증이 있어 백작 내외가 외부로부터 격리한 것이라더라....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마주한 하르트만 2공자는 그런 괴소문들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자리를 빛내 주시면 좋겠군요."

"길베르트 소백작님께서 초대해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겠습니다."

"반가워, 하르트만 작은 공자. 나는 리산더의 친우인 리베라 알렉시스라고 하는데."

"반갑습니다. 노버트 하르트만입니다. 형님은 잠시...."

차림새는 눈에 띄면서도 정갈했으며 적절히 유행을 따랐다.

훤칠한 키와 가지런한 이목구비는 이목을 끌었고, 입 밖으로 내는 목소리는 경계심을 녹였다.

예법이나 내보이는 태도 역시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생각보다 멀쩡한데?'

'모난 사람으론 안 보여요.'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좀 궁금해졌어요.'

간만의 '특이점'에 호기심이 동한 귀족들은 이곳저곳에 모여 궁금증을 나누었다.

행동력 있는 이들은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르트만 2공자는 그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본 사람처럼 능숙한 태도로 맞아 주었다.

물론 이 호기심 어린 대화에 편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르트만 저택에 심어져 있던 세작 중 하나의 주인, 에반 구스타프 후작은 팔짱을 낀 채 노버트 하르트만을 바라보았다.

'이상해.'

독특하게도 하르트만 가문의 사람들은 정계에 관심을 보인 이력이 없었다.

의무와 권리를 양손에 거머쥔 가문, 제국을 수호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실을 보조하는 곳, 하르트만.

그 가문의 특수성을 고려한다 해도 이는 상당히 특이한 행보였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욕심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 아닌가?

눈앞에 가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갖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특이점'을 대대로 유지해 왔고, 실제로도 정계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행동했다.

놀랍게도.

하지만 당사자들의 뜻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후작을 포함한 대다수의 귀족들은 늘상 이런 생각을 해왔다.

'저들을 집어삼키기만 하면 나의 세력은, 우리 가문은 큰 권력을 누릴 수 있다.'

그렇기에 구스타프 후작은 세작을 하르트만에 밀어 넣는 일에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북부 진입은 쉽지 않았어. 보안이 철통이라.'

그런 이유로 눈을 돌리게 된 곳이 바로 하르트만 수도 저택이었다.

'접근이 쉬우면서도 나름대로 쓸만한 정보들이 오가는 곳이니.'

순진한 2공자는 세작을 믿었고, 나태한 사용인들은 그를 방치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한심한 인간들의 집합체.

하르트만 수도 저택은 그런 곳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연락이 끊어졌다.'

구스타프 후작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와인잔을 두어 차례 더듬었다.

예고 없이 발생한 정보의 차단과 갑작스러운 하르트만 공자의 사교계 입성.

보다 단단해진 하르트만 수도 저택의 보안.

대부분 곧잘 들어맞곤 했던 후작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노버트 하르트만은 극도로 유약한 성향을 보유한 소년이었다.

좋게 말하면 다정하고 인간적인,

나쁘게 말하면 겁 많고 숫기 없는.

'하지만 현재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알고 있던 정보와 다른 하르트만 공자의 모습이 그의 의심을 부추겼다.

여유로운 미소와 부드러운 말씨가 신경을 긁었다.

후작은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놓친 거지?'

그 순간.

'…눈이.'

마주쳤나?

황금빛 눈동자가 구스타프 후작을 향하고, 그의 눈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가볍게 목례한 노버트 하르트만은 이내 몇 번 입술을 뻐끔거리고는 곧바로 제게 말을 건 사람을 따라 연회장을 떠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 증거로 주변의 그 누구도 그의 이동에 큰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구스타프 후작.

그 한 명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방금...."

무슨 뜻이지?

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려 하는 순간.

챙그랑―!

"콜록...."

"백작?"

"수, 숨, 이… 쿨럭...."

꺽―

바로 오른쪽에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릿한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012화 네가 먹어

"…카지미르? 카지미르 백작!"

혈 향이 계속해서 공간을 물들였다.

이질적인 비릿한 냄새가 불안감과 함께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꾸라져 목을 부여잡고 있는 백작의 입에서 검붉은 색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와인과 꼭 같은 색이었다.

경악 어린 비명소리가 연회장을 울리기 직전, 큰 동작으로 팔을 내저은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독이다! 당장 두 분 전하의 안위를 확인하라!"

상황이 빠르게 흘러가며 불안한 기류가 흘렀다.

연회장 내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두 경거망동하지 말라!"

그러한 불안감은 잠시 후, 에베렛 클라인 라인하르트가 나서자 소강되었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1황녀는 명백한 라인하르트의 중심 중 하나였다.

쿵!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때려 귀족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그녀에게 한 시녀가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황녀의 얼굴 위로 찰나 간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으나 그녀는 이내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

이내 금사로 장식된 드레스가 바닥을 스치고, 연회장 중앙으로 나선 에베렛이 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움직였다.

"내가 준비한 연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 심히 유감스럽군."

"제국의...."

"인사는 되었네."

철컹, 철컹, 철컹―

불안한 쇳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연회장을 채웠다.

절도 있는 동작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창들이 교차했다.

황실의 기사들이었다.

한 번의 손짓으로 그들을 통솔한 1황녀가 근엄한 투로 말했다.

"지금부터 연회장을 봉쇄하겠네. 매우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하오나...!"

"제국의!"

뿌득.

작은 소리와 함께 그녀가 이를 갈았다.

그 분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반박의 말을 던지려던 귀족들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찰나의 정적을 뒤로 하고, 1황녀가 짓씹듯 말을 이었다.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해친 것은 물론, 내 어머니를 시해하길 시도한 자가 있다."

1황녀의 어머니, 1황비.

빅토리아 공작가의 실질적인 중심, 일리아스 얀 라인하르트.

그녀를 해치려 한 자가 있다!

충격적인 선언에 장내의 귀족들이 얼어붙었다.

이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끔찍할 정도로 불경한 사건이 터졌다.

황녀는 방금의 선언으로 '귀족들 또한 용의자로 취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혼란이 그들을 휘어잡았다.

하지만.

"진정하도록."

"각하."

"소란을 피울 이유가 없다."

2황비의 오른팔, 라비테른 후작이 가신들을 진정시켰다.

그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휘하의 사람들을 통솔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연회의 주축이 되는 이들은 이성을 유지했다.

황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국의 황족이 상해를 입을 뻔한 심각한 사건이다.

실제로 음독을 한 자 또한 있었다.

황녀의 대처는 어느 정도 타당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짜고짜 이리 무도하게… 건방진 것.'

그 타당함에 모든 귀족들이 납득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잔뜩 가라앉은 표정의 1황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충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길 바라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인사조차 받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상석의 1황비 역시 비틀거리며 자리를 떴다. 시녀들과 1황녀의 부축을 받은 채였다. 현 사태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두 명의 황족이 자리를 떠난 후.

갑작스러운 상황이 불러온 공포심, 불안감이 은은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부채가 계속해서 팔랑거렸다.

"세상에… 어찌 이런...."

"말도 안 돼요… 황궁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나요!"

"도대체 무슨 마가 껴서...."

소곤소곤소곤.

속닥속닥속닥.

작은 소리들이 이어졌다. 여러 의미를 담은 목소리들이 오갔다.

잠시 후, 소리 없이 다가온 1황녀의 시종이 후작의 옆에 섰다.

후작이 서둘러 눈짓하자 티 나지 않게 주변의 눈치를 살핀 시종이 후작에게 작은 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백작께서 쓰러지신 직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분 전하의 주변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리고, 1황비 전하의 잔에서 독이 나왔다는 건가?"

그 말에 시종은 찰나 간 난감한 기색을 보이더니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와인병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로 장치를 한 모양입니다."

"어찌 그런...."

후작의 얼굴에 노기가 들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번 연회를 준비한 것은 1황녀였다.

주최자의 안일함을 탓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주군 외에는 탓할 사람이 없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야.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괜한 후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였다.

'그리고....'

힐끔.

그의 시선이 시종을 떠나 쓰러져 있는 이에게로 향했다.

"끄흑...."

중년인이 피를 토하며 바르작대고 있는 모습은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후작과 같은 곳을 바라본 시종이 속삭였다.

"걱정 마십시오, 후작님. 신관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채운 대부분의 것은 백작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후작의 손이 어색하게 제 팔을 쓸었다.

보통이라면 안타까움과 공포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계산이 빠른 자라면 백작 혹은 1황녀를 두고 주판알을 튀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황녀의 최측근인 구스타프 후작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만일 백작이 쓰러지는 것보다 1황비 전하께서 음독하시는 것이 빨랐다면?'

소름이 끼쳤다.

'물론 현 상황도 좋지는 않다.'

1황녀가 주최한 연회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녀의 세력이 '불완전하다'는 증거가 된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중앙 정계에서 이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황위 다툼을 목전에 둔 상황이라 더 그렇다.

1황녀는 안 그래도 귀족들의 지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에, 이 많은 귀족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미움을 사는 리스크를 져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지금이 낫다.

'…백작이 먼저 쓰러진 덕에 황비 전하를 향한 가해 시도가 미수로 끝났어.'

구스타프 후작의 시선에 바닥에 번진 핏물이 잡힌다.

붉은색.

그리고 붉은색이 아주 잘 어울리던 한 사람.

그의 머릿속에는 하르트만 2공자가 남기고 간 메시지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

'행운은'

'제가'

'만들었답니다.'

"하."

하르트만 공자에 대해 돌던 말 중, 적어도 하나 정도는 사실인 듯했다.

"…정신 나간 것."

오싹한 기운이 그의 주변을 떠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일리아스의 사망 원인은 음독이었다. 연회가 끝나고 3시간 후 쓰러졌다던가.'

나는 사건의 진범과 에베렛이 범인을 찾지 못한 이유를 나란히 떠올렸다.

상당히 인상 깊었던 사건이었기에 회상이 어렵지 않았다.

'당시 1황녀가 조사를 명한 카지미르 백작이 진범이었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으니 범인이 안 나오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황족의 소지품이나 그들을 위한 음식은 두 차례, 세 차례 확인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면 황녀는 당연히 주변을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백작을 믿었다.

'아니, 사실 알면서 외면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채는 게 보통이고.'

이해는 한다.

신뢰했던 이가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리고 뻔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하고 외부로 시선을 돌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 사실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바보가 될지언정 마음만큼은 편하지 않겠는가.

'나라면 일단 살려 두고 백작의 남은 세력을 모두 흡수한 뒤 암살했겠지만.'

그녀는 내가 아니니까.

어쨌든, 그 믿음의 결과로 끝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이후 기나긴 수사에 지친 황녀는 가장 마음 편한 형태로 이 사건을 이해해버린다.

금일 연회장의 경비를 도맡은 2황비와 그녀의 사람들이 제 세력을 줄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생각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1황녀의 세력과 2황자의 세력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고, 이는 두 세력의 축소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이 사건은 프리드리히에게 호재로 작용....

…할 예정이었다.

'그걸 내가 망쳤지.'

머릿속에 떠오른 옛 주군을 지우며, 생산적인 생각으로 넘어갔다.

조금 전의 상황을 보다 상세히 떠올린다.

내가 현장에서 진범을 밝혀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귀족 사회의 아웃사이더고 사교계 초행이다. 이곳에는 아직 나를 절대적으로 믿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봤다.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본래 세웠던 계획을 떠올린다.

'제레미를 통해 구한… 즉효가 도는 독을 좀 먹고 죽어가는 척할 예정이었다.'

1황비가 독을 먹기 전에 냅다 쓰러져 피라도 토해 주면 어떻게든 되겠거니 싶었다.

깜짝 놀란 1황비는 독을 먹지 않을 것이고, 1황비를 잃지 않은 1황녀는 보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겠지.

제 수족을 의심하는, 본래라면 하지 못했을 짓을 시도해 볼 확률도 높고.

더군다나 요양을 핑계로 한동안 자리를 비울 수도 있으니, 조만간 먼 길을 가야 하는 입장에선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암녹색의 머리칼, 검은 눈동자.

본래라면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

'미래가 바뀌었다. 내가 발이 묶여서는 안 됐어.'

그래서 좀 더 쉬운 길을 가기로 했다.

'심플하게 진범의 술에 독을 섞어 준 거지.'

풍미가 일품인 알로이스산 와인에 8:2 비율로 말아 주었으니 제법 맛이 좋았을 것이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

1황비 피살 사건은 미수에 그친다.

백작의 음독이 1황비의 방심을 무너뜨리게 될 테니까.

독의 후유증으로 비실거리게 된 백작은 사건의 수습을 주도할 수 없다.

그는 사건을 맡게 될 또 다른 황녀의 최측근, 구스타프 후작에게 발각되어 조용히 처리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상이 없다.

'오히려 걸리는 건 이쪽이지.'

인적이 드문 복도.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암녹색 머리칼의 시종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변수.'

타리크 소속의 흑마법사가 시종의 차림으로 황궁에 숨어들었다는 변수.

그 흑마법사가 하필 나를 '귀하신 분의 부름'이라는 거짓 아래 나를 불러내었다는 변수.

거기다 기척을 살핀 바에 따르면, 이 근방을 지키고 있던 기사 대부분이 자리를 떴거나 의식이 없는 듯했다.

명백한 함정이었다.

알고도 빠져 준 것이지만.

'무슨 생각일까?'

어떤 이유로 나를 불러냈지?

내게 볼일이 있나?

그렇다 해도 왜 하필 지금이지?

굳이 황궁을 무대로 한 이유는 뭘까?

이런저런 고민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응접실은 이 방향이 아니다만."

우뚝.

덤덤히 내뱉은 말에 앞서가던 이의 발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아아―

서늘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사람이 없는 복도를 감싼다.

시종, 아니. 흑마법사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마나를 닮은 무형의 힘이 가늘게 뻗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하게 달각거리는 창틀과 장식들을 일별한 후 말을 이었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내 형님이 찾으실 테니,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며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변에는 어느새, 로브로 모습을 감춘 다섯 명의 사람이 시립해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훑어본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내게 용건이 있나?"

013화 인성상 성자 불가능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흑마법사가 빙글 뒤를 돌았다.

큰 특징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이목구비, 시종 흉내에 어울리는 단정한 차림새, 저 여유로운 미소까지.

역시나 내가 아는 자가 맞았다.

"놀라지는 않으신 것 같군요."

"상당히 놀랐는데."

"맞춰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그러실 줄 알았으니까요."

그 말에 표정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왜 안 믿지? 드물게 놀랐는데. 미래가 바뀌어서.

'역시 의심병 환자야.'

좀 황당하다고 생각하며 팔짱을 꼈다.

암녹색 머리카락의 흑마법사가 나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거침없는 답에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살벌한 기운이 나를 옥죄려 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몇 분을 버티자 점차 사그라들었다.

검은색의 눈동자가 약간의 호기심을 담고 반짝였다. 그 시선을 온전히 마주하며 허리를 세웠다.

저벅.

발소리가 나며 그가 내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

5미터 정도 되었던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절반가량으로 줄었다.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나며 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의 입이 움직였다.

"황금빛 눈동자, 그리고 신의 손이 닿은 흔적. 선하고 유약한 성정이라는 정보...."

그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검은색 눈동자가 반 바퀴 굴렀다.

그리고 듣게 된 말은.

"엘누르의 성자입니까?"

'…뭐?'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이었다.

잠시간 멍하니 그를 응시하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본래대로라면 이 시점, 저 흑마법사는 성녀를 좇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계시'의 주인공인 성녀를 찾아 동분서주하던 중, 황금빛 눈동자를 가졌다는 한 보조 신관을 좇아 남부로 갔어야 할 시점이었다.

신의 대척점에 선 존재, 악마를 섬기는 타리크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저자가 모시는 '대리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는 성인(聖人)을 찾아 처리할 의무가 있었으니.

'그런데 내가 성자냐고 묻는다고?'

어째서?

차분하게 단서들을 조합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놀라긴 했으나, 새삼스럽게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만프레도에 요제프가 오지 않은 것을 보고서, 나는 이미 이번 회차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대략적인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이번 변수는 흑마법사가 아닌 성녀라는 거지?'

성녀 예레미아스의 이동 경로가, 운명이 바뀌었다.

이들이 내게 찾아온 일은 그로 인한 나비효과일 것이다.

'확인해야 할 것이 늘었다.'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오해를 풀어야 했다.

나는 성자가 아니었고 성인으로 오해받는 일이 매우 불쾌했다.

지금 누굴 엘누르의 충복으로 보는가?

과거, 최 부장의 충실한 따까리로 찍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간에.

과장된 제스처로 팔을 내저으며 눈살을 팍 찌푸린다. 다소 연극적인 투로 괜히 신경질을 낸다.

"뭐래냐? 꿈꿨어?"

황당하다는 투로 내뱉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흑마법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그 시선에서 묻어나오는 미약한 적의가 내 신경을 긁었다.

"꿈?"

"그래. 꿈!"

진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놈들은 아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듯 보였다.

암녹색 머리칼의 흑마법사… 기니까 암흑이로 하자.

암흑이의 표정이 매우 차갑게 식었다.

나를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 쳐다보는 꼴이 매우 아니꼬웠다.

'근데 이거 진짜 완전 진실인데.'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을 연기하며 작게 발을 굴렀다.

"허, 참… 성자? 내가?"

황당하다는 듯 과장되게 중얼거리며 말을 잇는다.

고개를 홱 돌리고 그들을 응시한다. 항변하듯 말을 잇는다.

"내가 억울해서 안 되겠네. 증거라도 보여 줘?"

당당히 말하며 속으로 팩트 체크를 한 번 했다.

나는 엘누르의 사도이기는 했으나, 성자는 아니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성인의 세 가지 조건.

1. 신성력을 각성해야 하며 성물의 사용자여야 한다.

2. 신을 대변할 수 있는, 우수한 인품을 보유해야 한다.

3. 남다른 희생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이 조건들 중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했다.

성물의 사용자가 아니며 인품도 그닥이다. 희생은 싫어한다.

삼진 오버로 성자 탈락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흑마법사 놈들은 내 말에 딱히 흥미가 돋지 않은 듯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모습을 드러낸 이상 내가 성자건 아니건 죽이고 돌아갈 생각이었을 테니.

역시나 성의가 실종된 태도를 보이며 나를 마주 보고는 입을 연다.

"그렇군요.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해서...."

유감입니다.

그렇게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 재빨리 마나를 끌어올렸다.

"…너!"

확―

그에 반응한 암흑이의 손이 빠른 속도로 내뻗어졌지만, 그보다 내 행동이 더 빨랐다.

내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찰나 간 요동치고,

화아악―

쩍―!

"꺽...!"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얀 빛이 작렬함과 동시에, 간발의 차로 방어에 성공한 암흑이를 제외한 모든 흑마법사들이 고꾸라졌다.

현재의 나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정도 반칙 정도는 해 줘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래 선빵 필승이란다. 방심한 너희 잘못이지.'

신물 엘리오르.

신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검이 내 손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공간에 널리 퍼져 있던 마력이 역행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무형의 힘들이 각자의 주인에게 돌아가 직격했다.

성자가 아니라고, 성물이 없다고 다가 아니었다. 내게도 무기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흑마법사가 상대라면 어지간해선 내가 이겨.'

자신감 있는 미소를 장전한다.

암흑이의 일그러진 표정을 마주하며, 과장된 동작으로―

"세상에, 여기 받침대가."

콰직!

재빠르게 도약해 흑마법사 중 하나의 머리를 밟았다.

물컹한 무언가가 눌리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검은색의 액체가 튀었다.

그에 곧바로 위로 뛰어올라, 벽을 디뎠다.

쩌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색의 힘이 터졌다.

재빠르게 암흑이를 일별하니 그새 얼굴에 검은색의 핏줄이 돋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공이네.'

흑마법사를 상대할 때 도발은 필수였다.

악마의 힘을 다룰 때 이성을 잃게 되면 흑마법사는 이지를 잃고, 악마의 먹이로 전락한다.

악마는 나약한 정신을 가진 인간을 자신의 계약자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공포를 아는 존재가 아닌, 공포를 만들어내는 존재에게만 자신의 힘을 허락하니까.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바닥을 딛는다.

곧바로 오른쪽으로 도약하자 내가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검은색, 원뿔 형태의 창이 날아들었다.

쾅!

콰앙―!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놈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때. 인성 보니 성자는 아니지?"

"…네놈!"

"그러게 왜 엄한 사람 붙잡고 난리인지!"

후우우욱―

불길한 힘이 모여들며 원을 이루었다. 검은색의 안개 같은 것이 암흑이의 몸을 휘감았다.

제대로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쩌저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요동쳤다.

거대한 두 개의 원, 악마와 그의 소통의 흔적.

그것을 바라보며 세검에 마나를 덧입혔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암흑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쐐액―

까가가가각!

날붙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어 돌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암흑이가 아닌, 별궁의 기둥에 일직선 형태의 상처가 났다.

눈가를 좁히고 그대로 그가 없는 방향으로 몸을 날리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 원을 완성한 그가 외쳤다.

"감히!"

우득.

우드드득.

계속해서 들려오는 불안한 소리들을 무시하고 암흑이에게 달려든다.

7초의 시간.

마법을 발동하기까지 걸리는 그 짧은 시간이 채 다 지나기 전 그에게 파고들었다.

"…무슨!"

내 행동에 당황한 암흑이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으나, 나는 알았다. 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저것을 허락하게 되면 이후로는 악마의 힘이 가득 찬 공간에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살핀다. 조건이 좋았다.

2미터.

짧은 거리에 서, 천장을 향해 뛰어올라 불길한 형체를 띈 원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다른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원의 중심을 향해 불길하게 회전하는 힘의 흐름을 느끼다,

쩌어어어어엉!

검으로 두 개의 원을 단숨에 꿰뚫는다.

신력과 마력의 격돌.

그로 인한 폭발의 여파로 인해 내 몸이 뒤로 튕겨져나갔다.

바람이 귓가를 스쳐가며,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큭...."

이를 꽉 깨물며 검을 붙잡았다.

까가가각, 카각!

불쾌한 소리와 함께 내 검이 바닥을 긁었다.

검 끝이 돌로 만들어진 바닥에 기다란 상흔을 남기며, 한계까지 힘을 준 팔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쩌적―

'됐다.'

거대한, 별궁의 기둥에 제대로 금이 갔다.

예상대로 별궁의 기둥은 검격에 이어 폭발의 여파를 견디지 못했다.

이상을 감지한 암흑이의 고개가 뒤를 돌았다.

"…! 이...!"

하지만 이미 늦었다.

충격을 받은 기둥에는 이미 큰 상처가 났고, 그로 인해....

잔해들이,

쏟아진다.

쩌저적―

쿠우우우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기둥의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 * *

'도망쳤나....'

먼지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둑, 툭, 작은 소리와 함께 돌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아파 왔다.

정확히는 골이 울렸다.

'요제프는 변했고, 성녀는 운명을 비껴갔고. 흑마법사들에게 찍혔는데 나는 아직 회귀 초반이고.'

"후...."

한숨이 절로 났다.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된 거 그냥 한 번 더 죽을까?'

다음 회차는 멀쩡할 수도 있잖아.

잠시간 그런 몹쓸 생각이 들었으나 그만두었다.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버릇을 들이면 장기적으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깨지고 갈라진 꼴이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쓰러진 흑마법사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서 나온 검은 액체에 독이 들어있던 약병을 던져넣는다.

치이익,

작은 소리와 함께 병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걸로 증거인멸까지… 됐고.'

"별궁은… 인테리어를 다시 해야겠네."

눈가를 좁히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되씹는다.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장이 높지만 방한 처리가 되어 있지 않고, 사람이 다니기는 하나 관리되고 있지는 않은 이 건물.

이는 직전 생의 내가 프리드리히에게 버려진 이후로 갇혀 있었던 장소였다.

나는 이곳에 갇혀 과거를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시간을 죽였다.

나를 버린 주군을 원망하고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한심한 생각들에 매몰되어 있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영원히 갇혀 이리 한심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나 같은 실패자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최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데 막상, 이리 개판이 된 꼴을 보니까....

눈을 한차례 감았다가 떴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너무 좋아.'

사실 정말로 터트려버리고 싶었는데 명분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

기왕이면 이리 망가진 김에 폭삭 무너뜨리고 새로 지었으면 싶다. 이런 마가 낀 장소는 그냥 놔두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킨다.

조금 후면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아무리 이곳이 인적이 드문 장소라 해도 결국 황궁 내였다.

"흠...."

작은 소리를 내며 주변을 탐색한다.

근방에 있는 자들 중 아직 정신을 차린 이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한 10분 뒤에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심약하고 다정한 성정의 귀족 자제.

별 볼 일 없는 10대 소년.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사람.

그런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상황을 벗어나려거든 어떻게 해야 할까?

'약간 어색하긴 할 테지만… 어쩔 수 없네.'

그냥 다른 놈들 옆에 누워, 나도 기절했던 척해야겠다.

'누가 관련해서 물어보면 그냥 잡아떼야지.'

간단한 방법이었다.

연기력만 받쳐 준다면 효과적일 것 역시 분명했다.

의심의 시선을 조금 받게 되기는 하겠으나,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당장 그런 것을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정 안 되면 리산더 앞에서 읍소하지 뭐. 가문에 연락해 난장 피워 주겠지.'

원래 상급자나 손윗사람의 역할이 그런 것이다.

나 대신 지랄해주는 거.

툭, 투둑.

돌가루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조심조심, 흔적을 남기지 않고 앞으로 걸어간다.

건물의 파편들을 스쳐 지나가, 몇 없는 온기를 찾아낸다.

끼익―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화려한 방 안에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과....

"으으윽...."

'뭐야. 얘 왜 여기 있어?'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동시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치솟았다.

'이거....'

생각보다 잘 풀리겠는데?

014화 저는 억울한데요!

르나르 알렉시스는 딱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타인이 보기에도 그랬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한 것은 물론, 마탑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재이며 각종 업무 처리 능력과 사교성까지도 훌륭한 장남.

그리고 그에 비하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차남.

여기서 그가 맡고 있는 역할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 '별 볼 일 없는' 르나르는 오늘도.

"리베라 공자의 동생분이셨군요. 제가 식견이 얕아 알아 뵙지 못했네요."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한참을 저와 대화를 나누었으나, 알렉시스 후작가에 차남이 있다는 사실조차 지금에야 상기한 사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잠시간 기대했던 상대.

그녀에게 그린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르나르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존재감이 좀 없지요."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연스레 화제를 바꾼다. 상대를 민망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훌륭한 화법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속에서 차오르는 약간의 억울함과 분함, 실망감.

그런 것들을 모조리 눌러 담으며 듣기 좋은 말로 상대를 포장해 준다.

그렇게 몇 마디의 대화가 추가로 오가고, 대화를 나누던 영애가 자리를 뜬 후에야 르나르는 몸을 돌렸다.

완전히 뒤를 돈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피로감이 급격히 몰려왔다.

본래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 그였기에 이런 상황이 더욱 불편했다.

발걸음을 떼자마자 조금 전에 마셨던 와인의 떫은 포도 향이 훅 올라오며 취기가 돌았다.

"...."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본다.

그 스스로를 주시하고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르나르는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작은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회장 안의 사람들, 공간을 꾸미고 있는 각종 장식들과 물건들.

잘 차려진 음식들과 비치되어 있는 여러 가지 구경거리들.

그 모든 것들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 시점이 되어서야, 그는 멈춰 서 숨을 내쉬었다.

멍한 시선이 주변을 살피고, 회백색 눈동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이 밝았다.

은은한 빛을 가만히 마주 보며, 르나르는 제 과거를 되짚었다.

크게 부족할 것 없는 삶이었다.

사실, 부족함을 넘어서 때때로는 그에게 과분하기도 했다.

대대로 우수한 마법사들을 배출해온 유서 깊은 명문가, 알렉시스 후작가라는 배경.

그다지 화목하지는 않지만 크게 저를 배척하는 것도 아닌 가정환경.

그보다 매우 잘난 탓에 항상 비교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랑스러운 형.

좋았다.

정말 좋은데....

이렇게 가끔 갑갑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르나르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지금껏 그를 스쳐 간 많은 인연들. 르나르가 아닌 리베라의 동생을, 그가 아닌 알렉시스 가문의 사람을 보던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새삼스레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열심히 했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하나뿐인 형을 미워하고 싶지도, 그에 비에 못난 스스로를 증오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노력했다.

지루한 수업을 듣고 또 들었고, 수도 없이 책을 읽어 교양을 쌓았다.

없는 재능을 끌어모아 검사가 되어, 소드 엑스퍼트 상급에 올랐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교 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리베라가 아닌 르나르를 봐줄 사람을 찾기 위해 그리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을 다른 이들은 대체로 몰라주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리고....

'서운하게.'

미간을 좁히다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나는 네가 필요한 일에만 심력을 썼으면 좋겠구나.'

'네가 괜한 오기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거야.'

'르나르라고? 리베라가 아니라?'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차례 더 숨을 깊이 내쉬려는 때, 문득 주변이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술김에 산책하듯 걷다 보니 예상외로 멀리 와버린 모양이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짧은 한숨이 입가를 데웠다.

술 먹고 이런 곳을 돌아다니다니. 누가 봤다면 유령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영 감이 좋지 않았다. 더 있어 봐야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다시금 몸을 돌렸고....

"억...."

쿵.

노버트가 오기 전, 주변을 정리하던 흑마법사에 의해 정신을 잃고 방 안에 처박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대는 내 은인입니다, 알렉시스 공자!"

'이, 이… 이 새끼 뭔데?'

누명을 썼다.

바로 '황궁에 침입한 흑마법사 넷을 처리하고 하르트만 2공자를 구해냈다'는 누명을.

* * *

[빠른 시일 내로 한 번 봤으면 싶군.]

찢어진 종이에 성의 없이 휘갈겨 쓴 한 줄의 문장을 내려다보며, 나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구스타프 후작이 진실에 다가갔나 보네.'

카지미르 백작이 어떤 놈인지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의 진범에게 독을 먹인 것으로 추정되는 내가 궁금해졌겠지.

물론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분명 카지미르 백작에게 독을 먹인 사람이 나라는 메시지를 구스타프 후작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저택에 함부로 첩자를 심은 그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지, 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편지지와 만년필을 꺼내 답장을 쓴다.

만년필의 펜 촉이 종이 위에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답장은 미사여구 예절 다 떼고 보면 이런 뜻이었다.

[이번에 흑마법사 만나고 많이 놀라서 한동안 요양 감. 이렇게 심약한 나를 이 타이밍에 굳이 부르면 넌 감정이 없는 양철 나무꾼임.]

완벽한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구스타프 후작님께 전해줄래?"

"공식 서한으로 보낼까요?"

"아니, 개인적인 걸로."

"알겠습니다."

내 편지를 받고서 밖으로 나가는 제레미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린다.

소란했던 연회의 뒤처리가 마무리된 것은 사건이 있고 이틀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급한 불은 전체적으로 껐다.

1황비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의 진범이 잡혔다.

조사를 맡은 구스타프 후작은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의 범인으로 카지미르 백작을 지목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구스타프 후작과 카지미르 백작은 둘 모두 1황녀의 사람이니까.'

모든 일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위 사실을 다른 파벌의 귀족들이 알게 되거든 1황녀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게 되니까.

자신의 세력조차 온전히 통솔하지 못하는 1황녀가 황제의 자질이 있겠냐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

그리고 이는 비단 1황녀 혼자만의 치욕이 아니었다.

그러니 백작은 '사건의 숨겨진 진범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처리된다.

가만히 시선을 내려, 책상 위 놓인 신문에 쓰인 글씨를 바라보았다.

[알렉시스의 별, 사특한 무리와 정면으로 승부하다.]

[황궁, 아직도 안전한 곳인가?]

[유망한 귀족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

'…어찌 되었든 해결됐으니.'

나는 요양 핑계를 잘 써먹으면서, 들러야 할 곳에 들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내려놓는다.

툭, 데구르륵―

작은 소리와 함께 내 손에 들려 있던 펜이 굴렀다.

수차례 회전하던 만년필은 책상의 반절 정도를 이동해 녹색 잉크병에 부딪혀 멈춰 섰다.

녹색.

문득 근래의 리산더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얘기하거라.'

'…당분간은 수도 근처에 머물 테니 그리 알고.'

'어머니, 아버지께도 안부 전해. 걱정하고 계신다.'

내가 흑마법사와 마주쳤다는 소식에 놀란 듯싶었다.

툭, 툭.

손끝으로 책상을 약하게 두드린다.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르나르 알렉시스에게 뒤집어씌웠다.

소드 엑스퍼트 중급에 불과한 내가 그들을 모조리 상대했다는 말을 다른 이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통상적으로 소드 엑스퍼트 중급이라면 4서클 마법사와 붙어도 재수 없으면 진다.

그런데 뭐? 흑마법사 넷을 검거?

되려 흑마법사들의 끄나풀 중 하나로 의심이나 안 받으면 다행 아닌가.

하지만 르나르는 소드 엑스퍼트 상급인 것은 물론, 지금의 나보다 대외적인 이미지도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닌 르나르를 간판으로 내세웠다.

아싸가 힘을 숨김.

보다는

수재, 천재로 각성하다.

이 계열이 더 납득 가지 않겠는가?

물론 르나르의 반박이 있었지만....

'기절한 탓에 기억이 날아간 녀석이 정황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거기다 그는 술을 마셨고 나는 안 마셨다.

사람들이 내 말을 더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절절한 감정을 연기하며 내뱉었던 대사들을 돌아보며 은은히 미소를 짓는다.

'저는…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르나르 공자가 그들과 맞서 주셨어요.'

'내가...?'

'취하셨는지 조금, 상태가 이상해 보이긴 하셨지만… 그럼에도 아주 용감하셨습니다.'

'…내가?'

'아,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불편하신가요…? 죄송합니다, 사교계 초행이라 관련한 예절을 잘....'

'…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연기에 재능이 있다.

막판에는 르나르 본인마저 스스로를 취권만렙 은둔고수 정도로 오해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 다 했다.

'물론 술 다 깨고 나서는 황당함에 머리를 쳤겠지만.'

일단 상황만 벗어나면 장땡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내가 직접적으로 흑마법사와의 전투에 나섰다는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리산더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살뜰하게 챙기고, 괜히 안 하던 간섭을 하려 들었다.

'하기야, 진짜 노버트가 흑마법사와 마주쳤다면,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테니.'

리산더는 에디트보다야 무심한 편이다.

하지만 제 동생이 잘못되는 것을 바랄 정도로 못되지도 못했다.

남에게 관심 없고 쌀쌀맞은 인간들 중에선 제법 괜찮은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

짧게 숨을 내쉬고 책상 위의 펜을 들어 올린 후 천으로 펜촉을 닦았다.

짙은 색의 잉크가 천을 물들이고, 만년필의 촉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리산더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간섭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리스크 역시 감당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거부했다.

나는 고마움을 이유로 그런 것을 감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외줄타기를 하는 나로서는 그가 가져올 변수가 매우 두려웠다.

그러한 걱정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보다 그게 더 꺼려졌다.

시선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지.'

언제나와 같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입가를 손끝으로 쓸어본다.

살짝 굳어져 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래도 하르트만, 겉으로 보기엔 안 그래 보이는데 애들이 참 착했다.

015화 죽여버릴까 겁난다

문밖, 저 멀리서 제레미의 기척이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내가 '요양'을 떠나기로 한 장소. 알로이스로 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당히 말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내가 알로이스로 가야 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마리아 알로이스.

알로이스 가문의 장녀.

그녀는 미래의 소드 마스터로, 이전 생에서 나의 수족이었던 자였다.

마리아에 대한 정보와 알로이스 령의 전경을 나란히 떠올린다.

인접국, 오베론과의 국경을 수호하는 위대한 가문들 중 하나인 알로이스, 알로이스 자작가.

미래를 위해 내가 얻어 두어야 하는 가문.

'그리고....'

자연스레 눈가가 굳어졌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문지른다.

뇌리를 스쳐간 불쾌한 기억 탓에 머리가 울렸다. 이전 생에 다쳤던 허리가 괜히 아파 오는 듯했다.

기분이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곤란하네.'

마리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다소 막무가내인 성격을 제외하면 아주 유능하고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몸을 다친 이유 역시 그녀와는 관련이 없었다.

애초에 당시의 상처 대부분은 전쟁 중 얻은 부상이거나, 나의 무능으로 인해 얻게 된 것이 많았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알로이스로 가는 길에 프리드리히와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미래에 대륙의 금화가 굴러가는 길이 되는 교통 및 운송 수단, '마나 열차'.

나는 그 열차의 시범 운행에 참여하여 알로이스로 갈 예정이다.

그리고 이 열차는 프리드리히와 성녀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였다.

본래 프리드리히는 이 열차의 시범 운행에 참여한 날, 지나가던 성녀와 마주치게 되니까.

나는 이 열차에 탑승하여 정말로 성녀의 운명이 바뀌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바뀌었는지, 프리드리히와 그녀가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체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

짧게 숨을 내쉬며 천장을 노려본다. 익숙한 무늬가 시야에 잡혔다.

얼음물에 머리를 담근 듯한 감각이 스쳤다.

프리드리히와 마주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증오를 품고도 100년 넘게 봐 온 얼굴이다. 새삼 두려울 리 없지 않은가?

다만 우려되는 것은....

'욱해서 죽여버리면 어떡하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힘을 과하게 준 탓에 손등의 힘줄이 불거졌다. 아릿한 통증이 손가락의 뼈대를 훑었다.

현재의, '완성되기 전' 프리드리히의 목을 그어버리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지금만 해도 반나절의 시간만 있으면 가능했다. 찾아낸 다음, 죽인다. 그걸로 끝이었다. 거창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적어도 내게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므로.

그리고, 바로 그게 문제였다.

실수인 척 그 목을 비틀어버리기가 너무 쉽다는 사실.

'물론 이 시점에 프리드리히를 처리하면 일이 간단해지기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프리드리히가 죽은 이후의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중심을 잃은 세계는 멸망에 가까워진다.'

신의 눈동자이자 의지.

그 전능함을 증명하는 존재.

주인공.

나는 프리드리히를 꺾을 것이다. 그 목적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손을 쓰려거든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자리를 메꾸고 다른 '주인공'을 들이밀 시간이.

내 주군이 될 사람을 파악하고 그를 프리드리히 못지않은 존재로 키워낼 시간이.

'…감정에 휘둘리다니. 골방에 박혀 있다 뇌가 굳었나.'

그런 생각과 반성을 되뇌고 있을 시점이었다.

똑똑.

작은 소리가 들려오며 주의가 문 쪽으로 쏠렸다.

적당히 기척을 하자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그에게 어떤 소식을 전해 들은 후, 나는 한쪽 눈썹을 불만스럽게 들어 올렸다.

"…뭐라고?"

* * *

하르트만 저택의 응접실, 기다란 소파 위에 나를 포함해 두 명의 사람이 마주 앉았다.

툭, 툭.

작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공간을 울린다.

무거운 침묵이 공기 중을 떠돌며 분위기를 굳힌다.

응접실 내에 시립해 있던 두 명의 시종이 시선을 교환하다 자리를 떴다. 천적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 신속한 움직임인 동시에, 딱 내가 원하던 빠릿빠릿한 태도였다.

내 눈치를 살핀 불청객의 어깨가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회백색 눈동자는 움츠러든 어깨와는 반대되는 뜻을 담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이빨 또한 그와 비슷한 의견을 보내오고 있었다.

'르나르라는 말이지.'

느긋하게 시선을 옮기며 그를 훑어 내려갔다.

회백색 눈동자와 짙은 남색의 머리칼을 가진 훤칠한 미남.

알렉시스 후작을 닮은 훤칠한 키와 후작 부인을 닮은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찰나 간 뜸을 들이다,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는."

"연락은 분명...."

"아까 뭐라고 하셨지요?"

그의 말을 끊고 들어온 물음에, 결연한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주먹을 꼭 말아 쥔 르나르 알렉시스가 단호히 말을 맺었다.

"내게 가르침을 주었으면 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였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 드러눕겠다는 내심이 엿보이는 태도였다.

그 증거로 그의 발은 필요 이상으로 저택의 바닥에 꼭 붙어 있었고, 그가 말아 쥔 주먹은 소파를 꾹 누르고 있었다.

스스로의 표정이 점차 오묘해지는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번 회차는 여러 의미에서 이레귤러다.'

내가 '본래 가야 했던 길'에서 탈선했고, 성녀의 운명이 바뀌었다.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요제프 역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 듯했다.

'변화 자체는 그러려니 했어.'

어느 정도는 예상하기도 했다.

당장 저부터가 신에게 반항 중인 마당에 순리나 운명을 따지기가 어려웠다.

이번 회차는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달라져야 하기도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주군을 갈아치우기로 했는데 걷는 길이 그대로라면 그건 그것대로 엿 같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바라지도 않았고… 예상도 못 했는데?'

누명을 씌웠더니,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는 놈이 찾아왔다.

손으로 내 팔을 쓸어내리며, 계속해서 고민을 이어갔다.

내 어떤 부분에서 배울 점을 찾은 거지?

'역시 연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빤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왜?"

그렇게 묻자, 르나르의 얼굴에 찰나 간 망설이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러한 기색을 지워내고 말을 이었다.

"너지? 흑마법사들을 처리한 사람."

놀라거나 동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기까지는 유추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모르면 멍청한 것이다.

애초에 찔리는 게 없는 사람이 뭐하러 그에게 그런 프레임을 씌우는가.

르나르는 그런 나를 가만히 마주 보다, 입안이 마르는지 내어 준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저러다 입천장이라도 데는 건 아닐까 싶었으나 다행히 무사한 듯 보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잔뜩 긴장한 듯한 표정의 그가 다시금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입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당일, 네게는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힘이 있었다는 거잖아."

"글쎄요.

"나도."

르나르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눈동자는 어떤 열망을 품고 있는 듯도 했고 장사치의 욕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열기 어린 시선을 온전히 마주하며 눈가를 좁히자 그가 말했다.

"너처럼 만들어주길 바라. 너만큼 강해지고 싶어."

공간에 정적이 흘러넘쳤다.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간이 걸렸다.

어느 정도 판단이 서고 난 후 입을 열었다.

"저는 좋은 선생이 못 됩니다만."

"그건 내가 판단해."

"당시의 상황을 보지 못하셨잖습니까."

"안 보면 모르나?"

내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실력을 유추할 수 있는 지점이 있기는 했다.

일단 네 명의 흑마법사를 홀로 상대했다는 것부터가 보통은 아니었다.

평균적으로 4명의, 그 정도 되는 마법사를 상대하려거든 동급의 다섯 명 이상의 검사가 필요했다.

'나야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일이 편했지만....'

이걸 르나르가 알 방법은 없으니까.

또한, 공간에 남아 있는 흔적과 흑마법사들의 모습을 보면, 내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몰라도 어떤 공격을 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알아보았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영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 나니 아주 조금, 흥미가 돋긴 했다. 소위 말해 '볼 줄 아는' 놈에게 가는 흥미였다.

하지만 나의 태도에 드러난 떨떠름함의 농도는 5% 짙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사제관계를 맺으려 드는 사람이 있다니. 보통 별종이 아니었다.

당신 좀 치는 것 같은데 제자로 받아 줬으면 싶다. 라는 소리 아닌가 결국.

그리고 그런 나의 태도 변화를 불쾌감의 표출 혹은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르나르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다지 불쾌한 건 아니지만 거절은 맞았기에 달리 정정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가르쳐 주지 못하겠다면?"

"그러면...."

그의 눈동자가 투지를 품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서 어떤 의지가 느껴진 탓에, 나는 헛웃음을 치며 물었다.

"황궁에서의 일을 알리겠다, 같은 협박이라도 하시려고?"

르나르의 어깨가 굳었다.

설마 진짜인가?

한쪽 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르나르가 아닌 나를 믿은 이유가 뭐겠는가.

당연하게도 내가 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뒤늦게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고, 하르트만 공자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보았다.

'제법 깜찍하게 구네.'

하지만 웃음과 별개로 나의 태도는 점차 더 삐딱해졌다. 이까짓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 바빴다.

적당히 다그쳐서 쫓아내야겠다.

"됐고."

괜히 까불다 다치지 말고 돌아가세요.

그런 무례한 대사를 날리려 하던 순간이었다.

"신전에 알리겠어."

그 말을 끝으로 찰나 간의 정적이 공간을 맴돌았다.

시선이 맞부딪히고, 이내 딱, 제법 큰 소리와 함께 손끝이 탁자를 때렸다.

동시에 문 바깥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달칵―

문고리가 움직이는 작은 소리를 끝으로 그나마 근처를 맴돌던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다부진 표정을 그린 르나르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며 한 손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다시 말해 보겠어?"

016화 내가 한 번 실험해 본다

되묻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어쩐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문가에서 들려온 작은 소리 또한 르나르의 긴장에 일조했다.

신전에 관한 말이 나오자마자 노버트 하르트만은 응접실의 문을 잠그고 사람을 물렸다.

위압적인 기세를 내보이며 태도를 바꾸었다.

'켕기는 게 있다는 것의 증명인 동시에, 그를 묻기 위해서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신호.'

날아드는 은은한 살기가 머릿속의 경종을 울렸다.

르나르의 발끝이 잘게 떨렸다.

바닥의 붉은 색 카펫이 그의 발아래에서 작게 들썩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르나르는 사실 상당히 쫄았다.

'건드렸다, 기어코 건드렸어.'

단신으로 흑마법사 넷의 머리를 깨버린―것으로 추정되는―놈을 건드렸다.

물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노버트가 하르트만이듯, 르나르 역시 알렉시스였다.

하지만 역시 벌집을 쑤신 것 같다는 생각은 가시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어느 정도 정답이었다.

실제로 노버트는 이미 현 상황에 대한 예상부터, 여차하면 르나르를 어느 산에 묻어야 하는지까지 대부분의 계획을 정립해둔 상태였다.

샛노란 눈동자, 저를 꿰뚫기라도 할 듯 바라보는 서느런 시선. 진심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미소.

"...."

그를 마주한 르나르의 손이 제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연회 때 일어난 사건은 르나르가 마땅한 변명이나 설명을 꺼내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전보다 그를 대함에 있어 신중을 기하는 사용인들, 그들의 시선 기저에 깔린 약간의 경외감.

아들의, 동생의 의로운 행동을 자랑스러워하는 가족들의 격려.

뛰어난 리베라의 동생이라는 위치에서 온전히 벗어나, 르나르라는 사람 자체를 바라봐주는 시선들.

그것은 비록 거짓에 의해 얻게 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르나르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허명이, 그의 실력이 거짓의 영역에 영영 남아서는 안 되었다.

거짓에는 유효기한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 네가 필요한 거야. 소드 엑스퍼트 중급의 경지로 흑마법사 넷을 처리해버린 네가.'

내가 바라던 '변화'를 일으킨 사람.

르나르의 주먹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끝에 아릿한 통증이 이어지고, 르나르가 입을 열었다.

"네 덕에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가문의 기대를 손에 넣었어."

"...."

"그러니 그것을 현실로, 정말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오해로 인해 빚어진 예외 상황이 아니라.

찰나 간 스쳐 가는 짧은 봄이 아니라.

언제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온전한 나의 것.

르나르는 그것을 원했다.

그리고 르나르 자신뿐만 아니라....

"너도 그러길 원하잖아."

세간을 대상으로 힘을 숨기고 있는 사람.

노버트 하르트만.

그 역시도 자신이 의심받지 않기를, 르나르가 그의 거짓말을 완성시켜 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하여 본인은 주목받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저를 보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는 상대를 노려보며, 르나르가 제 생각을 내뱉었다.

내 가설이 맞다면, 그대는 정체를 숨긴....

"엘누르의 성자니까."

"쿨럭!"

'어?'

콜록, 콜록콜록!

제법 큰 소리와 함께 노버트가 찻잔을 입가에서 떼었다. 수차례 기침을 한 그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허...."

노버트는 멍하니 제 손에 들린 찻잔과 축축해진 옷을 차례로 살펴보고는 귓가를 두드렸다.

르나르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빙글 돌려 보인다.

행동의 의미는 명백했다.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너 미쳤냐?

르나르의 얼굴에 순식간에 당황이 깃들었다.

'…이게 아니야?'

하지만 노버트는 그런 르나르의 상태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성자, 내가 성자? 진짜 다 미쳤나, 왜 다 나보고 성자래?"

헛웃음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입가를 닦은 후, 고개를 내저은 노버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성자가 아니야. 성력이 없거든."

"하지만 흑마법사들을...."

"그들을 상대하는 법을 알아. 그게 다야."

"그래도...."

"애초에, 흑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성자뿐이었다면 제국은 이미 그것들이 지배했겠지."

안 그래?

질문이 던져짐과 동시에 르나르의 얼굴에 약간의 낭패감이 드리웠다.

나름대로 괜찮은 무기라 생각했건만 오발이었다.

노버트의 시선이 르나르를 스쳐 가고, 이내 웃음을 터트린 그가 말했다.

"그래도 사고의 흐름은 대충 이해했어."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는 존재, 흑마법사가 노릴 만한 대상이자 그들의 천적.

4명의 흑마법사를 해치울 능력이 있는 자.

'거기다 대신전에 내려왔다는 '성인'을 지목했다는 신탁까지.'

하지만 노버트가 모든 공을 제게 넘긴 것으로 보아, 신전과 마찰이 있어 정체를 숨기는 중이다....

'그러니 신전에 알리겠다 협박하면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인데.'

잘못 짚었다.

성자도 아니고 그런 일도 없다.

'뭘 알고 하는 소리인가 하고 긴장했더니만....'

바람 빠지는 소리가 그의 입가를 맴돌았다.

어느새 매무새를 가다듬은 노버트가 말했다.

"어쨌든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점은 나쁘지 않네."

르나르는 이로써 노버트에게 그의 시야가 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네가 한 일을 폭로하겠다! 증거는 없지만 아무튼!

…이라는 헛소리를 하지 않음으로써.

'2% 부족하지만 원하는 것과 자신을 도울 시에 얻게 될 이득도 제시했고.'

노버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르나르의 말이 맞기는 했다. 당장의 그는 세간의 관심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르나르가 제대로 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주는 편이 좋았다.

사람들이 노버트에게 다른 힘이 있다 의심할 수 없도록.

'하지만 곤란한데....'

본래 노버트는 제 사람을 만드는 일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인 편이기는 했다.

당황스러운 마음과 별개로 그리 나쁜 상황도 아니었다. 본래부터 스스로를 증명한 이들에 대해 관대한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르나르 알렉시스에게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샛노란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머금었다.

어떠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노버트는 생각했다.

'실험을 해 볼까?'

르나르 알렉시스.

네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지.

운명을 거스르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인지.

그 스스로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네가 입증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노버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작위적이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마주하며 르나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노버트의 입이 열렸다.

"르나르 알렉시스."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과 동시에 르나르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노버트는 말을 이었다.

"마탑과의 연을 자랑하는 가문, 알렉시스의 유일한 오점이라지."

"...."

"같잖은 명성을 얻고 싶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정하다니...."

"...."

"잘난 형에게 가려, 열등감에 찌들어 살아가는 철없는 귀족가 도련님다워. 꼴이 우습네."

잔인한 말이었다.

르나르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노골적인 말에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수백 가지 반박의 말이 떠올랐으나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오가며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노버트의 손끝이 소파에 닿으며 툭, 툭, 작은 소리를 냈다.

샛노란 눈동자가 빙글 돌았다.

짧았던 침묵이 깨어지며, 그가 말했다.

"내게 도움을 받으면 변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

"넌 내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회백색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도를 넘은 힐난의 말에 순간적인 두려움도 잊고, 르나르가 살벌한 기세를 흘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며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며 들끓어 올랐다.

수치심.

분노.

반발심.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모든 감정들은 한마디의 말이 되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단정하지?"

날이 선 물음이 귓가에 닿는 것과 동시에, 노버트는 눈을 감았다.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다가올 폭탄에 대비한다.

어떻게 단정하냐고?

"나니까 단정하지."

"네가 뭔데?"

"르나르 알렉시스."

여전히 서늘하지만 담담한 어조.

그 평이한 목소리에 르나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감각으로 느끼며,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좋아. 각오가 됐다.'

노버트가 눈을 떴다.

당혹스러움과 분노, 그 언저리의 감정을 품은 얼굴을. 그리고....

"너."

얼어붙은 회백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인 노버트가 말했다.

"다음 주에 암살당해."

쿵―

챙그랑!

테이블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상체가 소파의 등받이에 깊숙이 파묻혔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트!"

내용의 식별이 힘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컥...."

비릿한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 * *

'자격 없는' 자에게 다가올 미래를 누설해, 운명을 뒤흔든 대가가 내리꽂혔다.

찌릿한 통증이 몸을 관통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며 세상이 멈추었다. 진한 혈 향이 끼쳐 오며, 온갖 것이 다 거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핏물 때문에 목이 너무 비려....'

전어를 다섯 마리쯤 잘라다 목구멍에 쑤셔 넣은 것 같았다. 뜨겁고 비리고 아주 난리다. 적응이 힘들었다.

"헉, 허억...."

"무슨 일이야! 정신 차려!"

"헉...."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숨을 끊어 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저택의 천장, 응접실 탁자, 긴 소파. 누군가에게 부딪혀 넘어진 테이블과 바로 앞에서 렉 걸린 채 내 어깨를 붙들고 있는 불청객.

그 모든 것을 차례로 살피고 나서야 입안까지 차오른 뜨거운 액체를 삼켜내고 더듬더듬 손을 뻗는다.

그 행동의 목적을 알아챈 르나르가 내 손에 어디선가 가져온 잔을 쥐여주었다.

손안의 잔을 잠시간 멍하니 내려다보다 다 식은 액체를 쭉 들이켰다.

미지근한 액체와 함께 비릿한 향이 점차 사라져갔다.

회복은 빨랐다.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어찌어찌 통증이 가시기 시작했다.

그새 식은땀이 난 목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예상보다 처벌의 강도가 약했다.

'이 정보는 '중요한' 축에 속하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번 회차에선 유출 초범이라서? 혹은 둘 다거나.'

어쨌든 간에.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진정하는 것에 성공한 후 르나르를 올려다본다.

"너, 이게 무슨...."

놀랐는지 제대로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적당히 손을 내저은 후,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자 다시 쭈뼛쭈뼛 걸어가 앉는 꼴이 제법 웃겼다.

"괜찮...."

"더, 말, 콜록… 하고 싶지 않네."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허리를 펴고 정면을 바라본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최대한 숨을 고르는 것에 집중하며 르나르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다.

르나르 알렉시스.

알렉시스 후작의 차남.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에 '불운한 사고'로 사망할 예정인 사람.

"…믿건 말건 마음대로 해. 네 자유야."

르나르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였다.

내 말을 믿고 다가올 불행에 어떻게든 대비한다면 본래 운명보다 오래 살 것이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절대적인 이득이었다.

그리고 믿지 않고 넘긴다면....

'순리대로 제명에 죽는 거니까.'

어느 쪽이건 간에 억울할 것 없는 셈이다.

017화 가지고 싶다며?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르나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농담이 아니라는 게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얼떨떨한 감정을 품고 있던 회백색의 눈동자가 점차 깊어지는 것이 순차적으로 느껴졌다.

짧게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고는, 품속 수첩을 한 장 찢는다. 그 위에 글씨를 쓰며 말을 이었다.

"나는 곧 알로이스로 간다. 새로 생겼다는 운송 수단, 마나 열차의 시범 운행에 참여해서."

"…그래서?"

"그날까지 무사히 살아남아,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면."

네가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임을 내게 증명한다면.

혹은 이 터무니없는 예언을,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는 사람임을 내게 알려준다면.

"더 강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네 요구도 무리가 아니게 될 수 있겠지."

"...."

"그때는… 콜록, 검을 가르쳐 줄게. 물론 대가는 받겠지만. 이게 내 조건이다."

그렇게 말하며 약속 시간과 장소가 쓰인 종이를 건넸다.

르나르는 글씨가 쓰인 종이를 받아 들었다. 영 복잡한 표정이 볼만했다.

이어진 침묵을 뒤로 하고,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 르나르가 말했다.

"예언자라서 흑마법사들이 널 노렸나."

'그건 아닌데.'

하지만 딱히 뭘 설명할 방도가 없었기에 대충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죽을 운명이었나?"

끝이 갈라진 목소리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를 보았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새 현실감이 든 모양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그를 바라보자, 르나르가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너 곧 죽는다, 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잠깐이겠지.'

사실은 특별히 놀라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대귀족가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그 과정 중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그게 보통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내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해도 내 말이 진짜라는 보장은 또 없었다.

다만,

다가오는 한순간.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 찰나.

'그때는 좀 무섭겠네.'

예정된 미래를 그리며 시선을 가라앉혔다.

'너는 절망할까?'

성큼 다가온 죽음을 두려워할까?

네게 박한 운명을 원망할까?

겁에 질려 움츠러들거나 인생에 환멸을 느끼지는 않을까?

특히나 네 암살을 의뢰한 사람은....

'네가 그리도 자랑스러워하는 네 형, 리베라인데.'

수재인 동생을 제 그림자 아래 묶어 두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마침내 처분을 결심한 그 사람인데.

네가 살아남는다면 그 잔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텐데.

다시금 르나르를 관찰한다.

여전히 떨리는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꼴이 나름대로 애처로웠다.

안타깝지만 사실 이는 르나르 스스로가 이겨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내게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

찰나의 절망에 주저앉는 사람은 내게 필요치 않으니.

그리고 나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 없으므로.

하지만.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으로 입가를 닦아낸 후, 그를 불렀다.

"르나르 알렉시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나를 보았다. 옅은 긴장이 스민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생각 중이지? 사실 나는 죽을 운명이었나, 그게 옳은가. 다 그렇게 정해져 있었나."

"...."

"가치 없는 고민에 시간을 쓰지 마. 그게 운명이면 네가 뭘 어쩔 거야?"

르나르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네가 어쩔 수 없는 부분 말고, 네 영역에 있는 것들을 고민해야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은 후였기에 무리 없이 설 수 있었다.

목 근처를 한차례 손으로 쓸어내린 후, 회백색 눈동자를 마주 본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르나르. 내가 알려준 죽음이 성큼 다가왔을 때."

그래서 짙은 공포심이 너를 덮칠 때.

혹은, 삶에 대한 환멸감이 치솟는 순간에.

"이 하나를 떠올려."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손끝으로 르나르를 가리켰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얼굴만 아는 귀족 자제에게 부탁까지 해가면서도 얻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격하게 흔들리는 회백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꼬리를 조금 더 당겼다.

"모두 이겨내고 나면, 너는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거야."

물론 이겨내지 못한다면 순리를 따라 관짝에 포장되어 6피트 아래로 꺼져야겠지만....

'괜찮아. 죽고 나면 남는 거 없어.'

죽었는데 뭔 억울함이고 아쉬움인가? 다 의미 없다.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그의 어깨를 다독인다.

어리고 만만한 귀족 청년이 괜한 결의에 차는 것이 보였다.

이 귀족 청년이 오랫동안 그 결의를 잊지 않기를 바라며, 쐐기를 박는다.

"기다릴게. 무사히 만나자."

* * *

"그럼 이번 여행에 그 공자님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천진한 물음에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시선을 내리자 잭을 안은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브랜틀리가 보였다.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있다면 그렇겠지."

"그 공자님께 무슨 일이 생기나요?"

"글쎄?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은...."

잠시간 고민을 이어가다 툭 내뱉는다.

"믿음직한 시종이 주인에게 수면제를 먹일 때도, 침실에 암살자가 들어올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로 죽는 사람은 실제로도 아주 많다.

"괜찮아. 그래도 네겐 별일 없을 거야."

"저보다는 공자님이 걱정돼요."

"르나르가 신경 쓰여?"

"아니요. 노버트님이요."

"내 걱정은 굳이 안 해도 괜찮은데."

웃으며 잭의 이마를 쓰다듬자 이 건방진 고양이가 꼬리로 내 팔을 쳤다.

동시에 브랜틀리의 얼굴에 불만이 떠올랐다. 모습을 짧게 일별하고 헛웃음을 친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참 많다.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걱정하는 건 네 자유야. 마음대로 해."

하지만 브랜틀리의 표정은 풀리질 않았다.

까탈스럽기는.

'이런 녀석이 어쩌다 그런 또라이로 큰 걸까....'

브랜틀리 세자르.

내가 기억하는 그는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성격파탄자.'

1회차, 현자의 도시와 협업할 일이 있어 사절단과 동행했을 때를 떠올린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마련해둔 숙소에서 적당히 쉬며 여독을 풀던 그때.

내가 머물던 방 창문이 박살 났다.

방에서 술을 먹고 있던 나는 난데없이 유리가루를 뒤집어썼고, 안주로 준비한 햄은 못 먹는 음식이 되었다.

황망하게 한 입 밖에 못 먹은 햄을 쳐다보고 있자 내 햄의 원수가 창문 턱을 밟고 선 채 말했다.

'너야? 내 허락도 없이 대리자의 꼬리에 손을 댄 게?'

순간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물론 그와 별개로 상황은 대충 이해했다.

현자의 도시 인근에 주둔하던 타리크의 끄나풀을 처리한 것에 대해 따져 묻는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자기가 죽일 건데 네가 뭐라고 선빵을 쳤냐… 는 항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 대해 몰랐던 당시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뭐지? 그놈과 한팬가?

그리고 그때의 나는 비교적 젊고 패기 넘쳤기에 머릿속에 든 생각을 다 말로 했다.

'네 친구였냐? 복수하게?'

그때 살면서 처음으로 총에 맞아 봤다.

'타리크의 ㅌ만 나와도 발작하는 녀석한테 놈들과 한패냐고 물었으니....'

눈알이 뒤집혀서 덤벼들더라.

제압하고 패고 찔러서 반 죽여 놨음에도 끝까지 악착같이 달려들기에 피할 재간이 없었다.

이후로는 그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타리크에 대항하는 일에만 부분적으로 협업했다.

브랜틀리는 가까이 지내기 싫은 놈이었지만 확실히 유능했다.

'그랬던 놈이 지금은 날 쫓아오며 내가 걱정된다 떠들다니....'

마공탑에서 구를 때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어 그렇게 변했을까.

'어쨌든 줍길 정말 잘했어.'

이게 다 호박이 덕이다.

사람 여럿 살린 거야, 이거.

"그나저나,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토르벤 구역의 장인 길드. 사고 싶은 게 있거든."

각종 약재들과 잡동사니를 사고파는 사람들을 지나쳐 무기를 판매하는 가게로 향한다.

알로이스로 향하기 전, 사야 할 것이 있었다.

"다 사신 거 아니에요?"

그 말대로 내 손에는 각종 물건이 담긴 아공간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사람을 시켜 사 오게 하거나 저택으로 배달해달라 할 수도 있었으나 그냥 내가 하고 싶었다.

'불법 마도구를 남한테 사 오라고 하기도 좀 그랬고.'

그렇게 구매한 튀지 않는 옷, 약초, 미허가 마도구....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 남았어. 그리고 놀러 나온 김에 저녁도 먹고 들어가려고."

그렇게 말하며 제법 큰 건물 앞에 섰다.

세 마리 독수리를 형상화한 인장이 부조로 새겨진 건물.

장인 길드 '아널드'에서 제작한 물건을 취급하는 무기점이었다.

딸랑―

작은 소리와 함께 건물의 문이 열렸다.

쇠 냄새가 내 코를 스치며, 각종 무구가 진열되어 있는 장소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근처에 시립해 있던 두어 명의 직원이 시선을 교환하다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나를 알아본 듯싶었다.

"반갑습니다. 1층의 룸으로 모실까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이 무기점의 특성을 떠올렸다.

이름 있는 대장장이들을 보유한 길드 아널드, 이 길드는 한때 두 가지 가치를 두고 고민했다.

'상업성인가, 혹은 전문성인가?'

돈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황족, 귀족들에게 물건을 제작해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범함을 거부했고, 그렇기에 더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돈 드는 물건을 원했다.

그렇게 제작된 물건들은 귀족들 간의 결투나 가벼운 전투,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대장장이고, 아널드에서 주로 만드는 것은 무기다.'

그들은 이름 있는 기사가 자신들의 검을 사용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기는 무기로서 그 효능을 인정받을 때서야 가치가 있는 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장인의 고집, 뭐 그런 거.

'하지만 그것만으론 돈 벌기 힘들지. 기사들한테 돈이 어디 있어?'

고위 귀족가 소속이거나 황실 기사쯤 되면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기에 돈이 아쉬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은 극소수였다. 충분한 물량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건물이 생겨났다.'

길드 '아널드'에서는 귀족을 상대하고 좋은 값을 받아내는 일은 상단 '아르놀트'에게 맡겼고, 기사들을 상대하는 일은 저들이 진행했다.

1층은 아널드에서 상단 아르놀트에 떼 준 물건들을 진열해둔, 귀족들을 위한 공간.

2층은 아널드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기사들을 위한 공간.

3층은....

'기사인데 돈까지 많은 놈들을 위한 VIP 룸.'

이전 생의 나는 주로 3층에 출입하거나, 따로 사람을 불렀다.

훗날 프리드리히의 검을 만들게 되는 대장장이 '메일런'에게 의뢰를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현재의 그는 3층에 없지. 아직 이름이 나기 전이니까.'

"2층으로 갈게. 하지만 앉을 자리가 있으면 좋겠어. 여러 물건을 한 번에 보고 싶어서."

순간 직원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이 떠올랐다.

당연했다. 2층의 서비스는 그야말로 엉망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상인들이 아니라 대장장이들이 운영하니까.'

콧대 높은 일부 대장장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무기가 아닌 장식품처럼 취급하는 귀족들에게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서비스의 질은 저하되었다.

귀족들을 위한 물건들이 아니기에 따로 출장 의뢰 역시 받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에 모멸감을 느꼈다.

이에 직원은 잠시 망설였으나 따로 말을 얹지는 않았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브랜틀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간다.

약간 퀴퀴한, 철 냄새와 먼지 냄새가 배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나는....

"그 무슨 무례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잠시간 직원으로 보이는 이와 다투고 있는 이를 바라보다, 그 이름을 불렀다.

"헨리."

"언사를, …공자님?"

농성을 벌이고 있던 헨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018화 작당모의

"무슨 일이야? 네가 직접 와서는."

놀란 척 물었다.

아니, 사실 약간 놀라기는 했다.

헨리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정확히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

"댁이 집사 양반 주인이오?"

"그렇네만."

"자꾸 무슨, 장식품을 달라지 않소? 심지어 그걸 들고 방문을 하라고? 다른 곳으로 가시라니까!"

"그게 왜 장식품입니까?"

"귀족님네 허리에 달려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구경에나 쓰이면 그게 장식품이지!"

그래도 고위 귀족은 무서운지 내가 아닌 헨리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치는 중년인과, 그 뒤에서 사색이 된 채 덜덜거리고 있는 젊은 장인이 보였다.

동시에 헨리의 혈압이 오르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상황 파악이 끝났다.

'내가 조만간 호위 하나 없이 알로이스로 간다니까… 내게 멀쩡한 무기를 들려 보내려 한 모양이네.'

이후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길드, 아널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1층의 물건은 무기로서 기능이 별로라 마음에 차지 않고, 거래 이력이 없어 3층의 사람을 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게 직접 와서 뭘 사라, 이리 말하기도 곤란해서 2층의 장인들을 설득해 내 앞에 데려오려 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눈치챈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처 능력은 낙제점이네.'

행동 하나하나가 품위가 없었다. 이 농성 자체가 망신이었다.

아무리 초임이라 서툴다 해도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애초에 하르트만 가의 사람이 고작 무기를 얻기 위해 이리 애쓰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고.'

물론 아널드의 무구는 대단하고, 그 뒤에는 탄탄한 고객층이 있기는 했다.

헨리가 고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세상에 길드가 아널드 하나뿐인가?

'레인은 왜 이 꼴을 두고 본 거지?'

헨리는 눈썰미가 좋고 일 처리가 확실하지만 사람을 대함에 있어 무던함이 부족했다.

기본적인 눈치는 있었으나 유연한 사고와 응대에 미숙하다.

나는 그를 보완하기 위해 항상 레인을 붙여 두었으나....

오늘의 사달은 발생하고야 말았다.

…뭐, 그래.

레인도 언제나 완벽할 순 없겠지.

'그래도 들어가면 너희는 죽었다.'

하지만 내 가문 사람을 다른 사람 앞에서 나무랄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지?"

"…장인 이반이오."

"그래, 이반. 우선 내 사람의 무례에 사과를 표하지. 그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겠어."

내 말에 헨리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배신감 어린 얼굴을 보지 못한 척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 생각했는지, 약간 표정을 푼 상태로 멋쩍게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큼, 알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묻고 싶군. 그대의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중년인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귀족 나리가 아니오?"

내 눈가가 좁아졌다.

헨리도 헨리지만 이 자도 참 장사의 기본이 안 됐다. 장인이라고 땅 파먹고 사는 게 아닌데 뭐 이런가?

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나를 귀족으로 대한다면 귀족이 될 것이고, 손님으로 대한다면 손님이 되겠지."

"뭐...."

"나는 귀족인가, 손님인가?"

중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무던한 투로 쐐기를 박았다.

"그대가 보기에 지금 나와 내 사람은 손님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그...."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내 옆에서 눈치를 보던 브랜틀리가 어색하게 옷자락을 당겨 헨리를 내 뒤로 끌어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서둘러 뛰어온 아르놀트의 중간 관리자가 장인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당장 사장 나와!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려온 점장 같은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바로…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잔뜩 굳어 있던 젊은 장인이 중년인을 끌어가고, 앉을 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인들이 물건을 가지러 간 사이 헨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신경 쓰이시게 해드려...."

"앞으로 배울 점이 많겠어."

단호한 말에 헨리의 기가 순식간에 죽었다.

이 유리멘탈을 어쩌면 좋지.

속으로 이마를 짚었으나 기죽어 있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말을 이었다.

"…길드 아널드는 콧대가 높고 까다롭지만 훌륭한 솜씨를 자랑하지."

어쨌든 칭찬할 구석이 하나는 있었으니까.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 유일한 칭찬할 점을 입에 올렸다.

"그래도 내게 좋은 물건을 구해주기 위해 애썼나 보네. 정말 고마워."

솔직한 치하의 말에 헨리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적당히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브랜틀리에게 잭을 받아 안았다.

"맭...."

순간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다.

"완전 돼지...."

제법 무거웠다. 그새 살이 찐 모양이었다.

"애오옭!"

열이 받았는지 꼬리로 내 팔을 탁탁 때리는 꼴이 건방졌다.

그 꼴을 무시하고 보들보들한 잭의 등을 쓸어내리며 계획을 세웠다.

'일단 들어가서 레인을 털고, 레인을 시켜 헨리를 털어야지.'

중고 신입 키우기 한 번 더럽게 어렵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어느 순간 몇 명의 사람이 나와 물건들을 내밀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검들과 물결무늬가 세공된 총을 포함한 다양한 무기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모욕하려는 거구나.'

이딴 걸 가져오다니.

웃음이 났다. 역시 세상 쉽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역시 좋군."

* * *

"고생했어. 내, 그대들의 친절을 기억하지."

내 말에 브랜틀리와 헨리가 시선을 교환했다.

고개를 숙여 나를 배웅하는 점원들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내온 게 일흔세 번째로 내온 거니까.'

사실 엄청난 진상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물건을 보고 싶다 했을 때 아널드의 장인들은 하나같이 하급품만을 내왔다.

모두 미세하게 이가 나가 있거나 마감이 조잡한 물건들이었다.

그게 아니면 장식용이라 예쁘기만 하고 쓸모가 없거나.

몇 번을 다시 내왔으나 나온 것은 이전의 물건들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앵무새처럼 두 문장을 반복했다.

'아널드 길드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는 물건들이군.'

'이게 전부인가?'

그 짓을 한 열 몇 번 하고 나니 점차 내오는 물건들의 퀄리티가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내 눈에 차지 않는 등급이었기에 비슷한 짓을 반복했다.

네 시간쯤 그러고 있으니 그제야 내가 원하던 물건이 나왔다.

나는 그제야 몇 가지를 구매하고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내가 구매한 무기를 제작한 대장장이, 메일런을 지명해 부른 다음 두어 개의 무기 제작을 추가로 의뢰하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넘었다.

'겸사겸사 메일런에게 스카우트 제의도 했고.'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대로 거리로 나와 식당으로 들어갔다.

따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헨리와 브랜틀리도 동석해 음식을 주문했다.

적절히 간을 해 구운 양고기, 버섯과 아스파라거스를 볶은 요리, 뜨끈한 스튜를 먹으며 근황을 나누었다.

대체로 헨리와 브랜틀리가 일상과 보고사항을 떠들고, 나는 무릎에 앉은 잭에게 간이 안 된 고기를 먹이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지만.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둘의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갈 즈음, 입을 열었다.

내 본론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브랜틀리를 데리고 나왔고, 바깥에서 헨리와 마주치고자 했다.

'저택에서는 듣는 귀가 많으니까.'

주변에 듣는 이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우선 브랜틀리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브랜틀리. 이번 알로이스 행에 제레미 대신 네가 함께 가줬으면 좋겠어."

"제… 제가요?"

"알로이스는 마도공학이 발전한 도시로도 유명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 말에 브랜틀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모를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알았다.

글을 읽는 법과 쓰는 법을 익힌 후. 근래의 브랜틀리는 남는 시간마다 내 서재의 책, 그것도 마도공학과 관련된 책들을 살폈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감히 가문의 재산을 함부로 이용했다며 경을 쳤겠으나, 내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적성 찾아가는 거지.'

사실 어떻게 흥미를 붙여 주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기에 알아서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공자님, 저는...."

"부담 갖지 마. 서로 도움을 주며 지내기로 했잖아."

우리는 같은 적을 둔 동료잖아....

아니야?

뭐 그런 시선을 보내주자 잠시 후 브랜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는 나름의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제레미 대신이긴 하지만, 따로 내 시중을 들 필요는 없으니 긴장할 것 없어."

"그래도 떠나기 전에 제레미님께 보통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볼게요."

아니, 걔 요새 아무것도 안 하는데.

기껏해야 아침마다 차 타오기? 내 뒤 따라다니기? 가끔 심부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괜히 더 말하기 귀찮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대로 해."

그렇게 말한 순간.

"잭!"

"왜오오옭!"

탁.

작은 소리와 함께 잭이 내 품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바닥을 딛은 고양이가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스쳐갔고, 브랜틀리가 반사적으로 고양이의 뒤를 따라갔다.

'한 번씩 되게 눈치가 좋네. 혹시 사람인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헨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헨리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조금 전 잔소리의 여파가 슬슬 가시는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모습을 보고. 물잔을 들어 올리며 툭 던지듯 말했다.

"헨리. 내가 알로이스에 다녀오는 동안 티 나지 않게 제레미를 주시해."

"…제레미요? 레인이 아니라?"

그래, 너 레인 싫어하는 거 잘 알겠다.

헛웃음을 삼키며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는 주변을 살핀다.

아무도 우리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작은 원 형태의 물건을 꺼낸다.

손끝에 마나를 집중해 그 물건에 주입한다.

실처럼 가느다란 형태의 마나가 퍼져 나가며 소리를 차단했다.

헨리의 시선이 잠시 그 물건에 닿았으나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훌륭한 집사의 자세였다.

턱을 괴는 척 입가를 가려 주변에서 입 모양을 가늠할 수 없게 하고는 말을 이었다.

"1황자, 프리드리히 폰 라인하르트. 그가 보낸 첩자다."

그 말에 헨리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1황자. 버려진 황자.

생사조차 불분명하다는 그 황자.

그런 사람의 첩자?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인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음식을 잘라 입에 넣으며 말한다.

"헨리. 나를 믿지?"

약간의 정적 후, 헨리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간 나는 헨리에게 최대한 잘해줬다. 그가 원할 만한, '이상적인 고용주'의 모습을 흉내 내며 신뢰 관계를 쌓았다.

그에 따라 헨리 역시 많이 바뀌었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충성스러운 사용인의 태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대답이 바로 그 증거지.'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말을 이어갔다.

"가문에는 알리지 마. 레인을 포함한 저택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어째서입니까?"

"어차피 제레미를 처리해 봐야 다음 사람이 올 거야."

"관리를 철저히 하면...."

그 말에 순간 헛웃음이 샜다.

프리드리히를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피식, 작은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헨리의 표정이 굳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막을 수 없어."

"…저를 포함한, 저택 내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그 말도 맞았다.

요즘 좀 나아졌다고 해도, 과거의 나태함이. 태만한 태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헨리."

"…네."

"독이 든 음료 같은 걸 나눠 먹은 탓에, 사용인 3할 정도가 죽는다면 어떨까."

그 말에 헨리의 입이 벌어졌다.

당혹감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당황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나는 덤덤히 가설을 이어갔다.

"본가에 관리인을 요청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잘한 일손들은 결국 수도에서 구하게 될 거야."

"...."

"그 일손들 사이에 사람을 심는 게 어려운 일일까?"

019화 그건 나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답이 뻔한 문제였던 탓이다.

쉬울 것이다.

제레미만 해도 성공적으로 이 가문의 잠입했다.

심지어 그를 차출한 사람은 진짜 노버트나 헨리 같은 허술한 인사도 아니었다.

그 하르트만 백작이었고, 소백작이었다.

이는 제레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속일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가 반문했다.

"…사람을 들이지 않으면 되는 일입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사람을 들이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지."

하르트만 수도 저택은 크게 사람 손을 타는 장소가 아니었다.

딱히 손님이 자주 오는 편도 아니었고, 나 역시 남의 손을 자주 빌리는 타입은 아니니까.

머무는 사람이 줄어든다 해도 괜찮기는 했다.

이미 근무하고 있는 사람을 외부에서 매수하는 일이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면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는 일이고.

"하지만 결국 인력은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외부의 손을 빌려야 할 순간이 와."

이 경우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헨리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가 그만큼 치밀할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분명치 않은 그 황자가 그리 대단할까.

뭐 그런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사람이야."

공간에 정적이 흘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헨리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이해했습니다. 공자님은 제레미를 쫓아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입을 관리하고 싶으신 거군요."

"맞아."

"하지만… 그분께서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요?"

타당한 의문이었다.

본래 귀족가에 첩자를 심어 놓는 행위는 흔했다.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 정보는 돈이 되고 무기가 되니까.

하지만 가뜩이나 '버려진 황자'로 불리며 고생하고 있는 그가, 하르트만 가문에 첩자를 심기 위해 그리 과격한 행동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하겠지.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너도 알겠지만, 하르트만 가문에는 군권과 면책권이 있다."

그 말에 헨리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쳤다.

면책권.

하르트만 가문이 고작 백작가임에도 다른 가문들에 비해 먹음직스러운 파이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

아주 오래전, 프레이르 레반 라인하르트를 포함한 11명의 영웅은 대륙을 어지럽히는 미친 드래곤을 처단했다.

드래곤과 라르트 왕국 간의, 긴 시간 동안 이어지던 전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들은 주변 왕국들을 흡수하여 제국을 세웠고, 제국의 이름을 라인하르트로 지었다.

'그 제국이 바로 이 나라지.'

제국의 출발은 퍽 순탄한 듯 보였다.

하지만 건국이란 절대로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여러 문제 또한 산재해 있었다.

개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부의 마물에 관한 일이었다.

'영웅들이 드래곤을 처치한 장소. 북부에서 강력한 마물들이 다량 솟구쳤다.'

당시 목숨을 잃은 드래곤 히람은 사특한 힘에 물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미쳤고, 그렇기에 죽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몸이 품고 있던 다량의 마력이 땅과 그 주변 마물들에게 깃들었다.

제국의 북부는 그렇게 지옥으로 변한다.

'이후로도 드래곤의 무덤에서는 계속해서 마물들이 솟구쳤고, 황제는 선택해야 했다.'

누군가는 북부로 가, 저 사특한 것들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로 선택된 것이 하르트만 가문의 초대인 사무엘 하르트만이지.'

사무엘은 주기적인 마물 토벌 및 북부의 관리를 조건으로 세 가지 요구사항을 들이밀었고, 황실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요구사항 중 하나가 바로 면책권이다.

그 내용은 바로,

'하르트만 가문의 직계는 반역죄로부터 자유롭다.'

먼 훗날, 막강한 군대를 손에 쥔 하르트만 가문을 고깝게 여기는 황제가 나올 것을 대비한 조항이었다.

헌신의 대가로 절대적인 신뢰를 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보다 똑똑한 양반이야.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걸 안 거지.'

물론 제한은 있었다.

황족의 승인이 있어야 하며, 면책권은 한 세대에 한 번만 사용 가능했다.

직계라면 다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당대 하르트만 가주의 허가를 받은 자만이 그 권리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가에 비하면 매우 파격적인 조건임이 분명했다.

외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하르트만을 노리는 이유였다.

'물론 그 면책권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사로이 사용된 일이 없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이제껏 그래왔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헨리의 얼굴을 살핀다.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프리드리히가 면책권을 노린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만약의 상황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황위를 찬탈할 의사가 있다, 는 의미.'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너무 생략했다.

프리드리히의 심중을 이해하려거든 알아야 하는 정보가 더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황제는 1황자를 아껴. 하지만 그 애정은 불완전해."

"버려졌다고는 하지만, 그분께서 정말 살아 계신다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총애의 증명이 아니냐고?"

"…보통 그분과 같은 상황이면, 죽는 편이 자연스러우니까요. 주변에서 가만히 놔둘 리 없으니."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실제로 황제의 도움 덕에 여태 살아있다. 그의 지원 덕에 제 세력을 구축하며 칼을 갈고 있다. 다 맞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지 않지."

그가 황제를 100% 신뢰할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헨리. 어떤 사람이 있어."

달칵.

작은 소리가 나도록 와인잔을 테이블 중앙에 놓고 술을 따랐다.

붉은색의 와인이 반원형의 보울에 가득 들어찼다.

새콤한 포도향을 느끼며 말을 이어간다.

"그 사람은 네게 돈을 주고, 지원을 줘. 때때로 관심을 표현하기도 해."

"...."

"그 덕에 넌 최소한의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어. 그건 사실이야."

그래, 황제의 지원이 프리드리히에게 매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자비가 없다면 살아있을 수 없는 입장도 맞았다.

하지만,

"하지만 넌 그에게 받는 관심을 세간에 내보일 수는 없다."

들키면 빼앗기니까.

"그가 주는 지원이 어느 순간 끊어져도 항의 한 번 못 해."

원래부터 남에게 받은 것이니까.

본래부터 나의 것이 아니니.

"그렇기에 항상 비참한, 끔찍한 삶을 살아가야 해."

다른 이들에게 괄시당하며, 차오르는 수치심을 견뎌내며.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비루한 인생이니.

3할 정도 채워진 잔을 헨리의 앞으로 밀어주며 손을 내밀어 보인다. 그는 어쩐지 심란한 표정으로 붉은색의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는 고작 그 정도의 성의를 온전히 믿을 수 있어? 그에게 네 목숨을 맡길 수 있나?"

정적이 흘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잔을 옆으로 밀어서 치운 헨리가 답했다.

"폐하께서는 그분을 상대로도 간을 보시는 중인가 봅니다."

정답이었다.

"황제는 철저한 갑의 입장을 원해. 평생 귀족들에게 치이며 산 것에 대한 울분… 뭐, 그런 거겠지."

후처들의 눈치를 보는 중이라 제대로 품지 못한다?

그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런 게 대수였을까?

'무엇을 내놓더라도 프리드리히를 품었겠지.'

하지만 황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애매했다.

프리드리히의 목숨을 붙여 줄 정도는 되지만, 제 것을 다 걸고 도박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그는 제가 선택한 후계자가 순종적이기를 원한다. 프리드리히가 철저한 을의 입장으로 황좌를 이어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1황자에게 하르트만이 필요한 거야.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여차하면 제 아버지의 목도 따버리고 황좌를 얻기 위하여.

그 '과정'의 초석이 될 '면책권'과 '군권'을 얻기 위해. 혹은....

'그게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하지만 여전히 헨리의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에 질문을 허가하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이자, 헨리가 물었다.

"이런 말은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렇게 치면 굳이 저택에 사람을 심을 이유가 있을까요?"

"왜?"

"수도 저택에는...."

헨리가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뒷말을 이어주었다.

"중요한 정보나 사람이 오가지 않는다고?"

헨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듣기에 따라 나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말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잉여인 건 팩트인데.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생각해. 중요한 건 아니라도, 다른 건 있잖아."

"어떤...."

"헨리. 하르트만 가문의 허점… 그러니까, 취약점이 무엇이라 생각해?"

헨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쉽사리 답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브랜틀리와 잭이 돌아올 것 같았기에 더 기다리지 않고 답을 말했다.

"쉽잖아."

"…네?"

"하르트만의 유일한 오점이자 약점. 그러나 적어도 차기 하르트만 백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비교적 보안이 허술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자. 나약하고, 멍청하며 한심하고....

쉬운 것.

그럼에도 하르트만 소속인 존재.

헨리의 얼굴에 설마하는 표정이 스쳐 갔다.

그에 화답하듯, 손끝으로 내 턱을 짚으며 말했다.

"그건 나야."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보이며 무던한 투로 뒤를 이었다.

"날 죽이고 그걸 모종의 이유로 황제가 벌인 일로 위장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하르트만 가문의 사람들은 대대로 평생을 마물 토벌이라는 의무를 지고 살아가며, 제국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늘 업무에 치여 지냈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다. 많은 기사와 병사들을 잃고 가신들을 떠나보냈다.

삭막한 환경 탓에 부부는 애틋함을, 가족들은 화목을 모른 채 살아왔다.

심지어 이번 대에서는 아들이, 막냇동생이 마물 밥이 될 뻔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제대로 된 대처조차 하지 못했다.

바빠서.

혹은 힘들어서.

감정적으로 너무 지쳐서....

그런데 그런 내가 죽는다.

'그래, 인정해. 하르트만 백작 부부는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감정이 메마른 지 오래니까.

'그들은 이미 수많은 이들을 보냈고, 동료, 부하, 친구들의 죽음을 겪어 왔다.'

그런 그들에게 나 하나 죽는 게 무어 대수일까?

하지만 그것은 현세대뿐.

'차기 백작인 누님이 그저 가만히 계실까?'

장담한다.

아닐 것이다.

'그녀는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엔 황실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진다. 일시적으로 현 황제에게 분노해 그를 도울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악수야."

"...."

"차기 황제 되는 입장에서 좋지만은 않을 테니, 실행할 가능성 자체는 높지 않지."

그러나 B안도 있다. 심지어 A안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었다.

손끝으로 테이블 위에 오망성을 그리며 물었다.

"만약 내가 금기를 어기게 된다면 어떨까?"

"무슨...."

"가령 내 방에서 흑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를 1황자의 수하가 목격한다면?"

꼭 흑마법이 아니어도 괜찮다.

사특한 약물이나 불법적인 물건 같은 것도 상관없다.

'뭐든 간에 가문의 치부로 올릴 수 있을 만한 건이면 되지.'

헨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마주하며 테이블에서 손을 떼었다. 웃음기를 지우며 헨리를 마주 보았다.

"헨리. 그에게는 날 이용할 수백 가지 방법이 있고, 내가 어떤 놈인지는 상관이 없어."

그래, 정말로 상관이 없다.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한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중요한 건, 나 또한 하르트만이라는 거야."

020화 내가 총으로 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