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030

020화 내가 총으로 쐈는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하지마. 그냥 그러려니 하면 돼."

'그' 프리드리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200년 가까이 본 나조차도 가끔은 이해를 못 했는데 다른 사람이 뭐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빈 잔에 와인을 조금 따라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설명이 거창했지만, 명은 간단해. 나를 위해서...."

곧바로 입에 머금은 와인은 떫었다. 맛이 없었다. 이래서 헨리도 걸렀나?

약간 떨떠름한 시선으로 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제레미의 시선과 입을 관리해줬으면 싶다. 그게 다야."

"공자님께서는...."

곧바로 이어진 헨리의 말에 시선을 올렸다.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역시 표정 관리를 못해.

'레인에게 헨리를 제대로 좀 가르쳐 놓으라고 당부해야겠다. 일거리 던져줘야지.'

제레미의 눈을 피하려면 표정 관리가 필요할 테니.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들자 헨리가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물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오신 겁니까?"

의미를 알기 어려운 말이었다.

정확히는 알 것 같긴 한데 이게 맞나 싶었다.

'평소에 그런 음습한 생각만 하고 사냐는 소리지, 이거?'

기분이 묘했다.

물론 그런 생각만 하면서 살기는 하지만… 그러면 많이 이상한가?

고민하다 적당히 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어쩐지 찔리는 마음에 짧게 헛기침을 하고 작게 덧붙였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살려고 발악하다 보니 이리됐는걸."

헨리의 표정이 약간 멍해졌다. 어째선지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제가 알던 모습과 달라 실망한 걸까?

사실 헨리에게 이런 말을 한 게 처음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이제껏 나는 제레미의 입을 단속할 필요가 없었고, 자연히 헨리에게 이런 설명을 해줄 이유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가감 없는 진실인데.'

프리드리히 같은 놈 옆에서 살아남으려거든 이런 쪽으로 두뇌 회전이 빨라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일찍이 버려지거나 죽었다.

'…뭐, 결국에는 이렇게 됐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잔에 남아있는 술을 비우자 고민을 이어가던 헨리가 말했다.

"…제레미는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이 물음의 대답은 잠시 고민했다.

'헨리가 나를 꺼리면 어떡하지? 그럼 같이 일하기가 힘든데.'

하지만 속여넘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답을 주었다.

"때 되면 죽일 거야."

헨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는 복잡한 시선으로 제 그릇을 내려다보다, 밀어 두었던 와인잔을 쥐었다.

그리고는 약간 뜸을 들이다 단숨에 들이켰다. 붉은색의 액체가 순식간에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탁.

작은 소리가 나며 와인잔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제가 공자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거침없는 말에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수 초의 시간이 지나고. 나를 마주 본 헨리가 말했다.

"하지만… 따라 보겠습니다."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손끝으로 마도구를 두 차례 두드려 끄며 말했다.

"늘 고마워. 네가 있어서 참 의지가 돼."

그리고 마침....

"죄송합니다! 잭이 자꾸 멀리 가서… 데려왔어요."

한참 달렸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브랜틀리가 뛰어왔다. 신들린 타이밍이었다.

짧게 숨을 몰아쉰 브랜틀리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대부분의 음식이 식어 있었던 탓인지 순식간에 서글픈 얼굴이 되었다.

곧바로 디저트를 주문해 주자 좋지 않았던 표정은 바로 풀렸다.

뒤이어 잠시간 브랜틀리 선생의 디저트 맛 평론 시간이 있었다.

정말 쓸데라곤 하나도 없는 이야기라 재밌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손에 물을 따라 잭이 먹도록 해주며 브랜틀리가 물었다.

"노버트님, 그래서… 알로이스는 어떤 곳인가요?"

나는 쉽게 답을 줄 수 있었다.

"아주 좋은 곳이지."

알로이스는 정말 좋은 곳이 맞았다.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곳. 상업과 마도공학이 발달한 영지.

외국의 첩자가 난무하고, 누군가가 가족을 잃을 예정이었던 장소.

한마디로....

"기회의 땅이야."

* * *

10월 21일, 오전 7시 10분.

울리케 역사 안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열차가 제대로 운영되는 기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건축물 내에는 시범 운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주로 귀족가의 사용인들과 상인들―과 역 직원들, 간단한 음식을 팔기 위해 방문한 자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짐가방을 들고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자, 뚱뚱한 고양이를 든 브랜틀리가 내 뒤를 따랐다.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돼지 같은 동물을 쳐다보자, 고양이의 앙증맞은 얼굴에 게으른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놓고 왔어야 했어."

"몕."

먼길 떠나는데 고양이는 무슨 고양이인가? 당연히 놓고 오려 했다.

하지만 저놈의 털짐승이 브랜틀리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부 브랜틀리의 다리에 꽁꽁 감아서는....

'그렇다고 그걸 힘줘서 뜯을 수도 없고.'

장장 2시간에 걸쳐 회유와 설득, 협박을 골고루 시도했으나 저 짐승은 꺾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데려가겠다 설득하고 새벽에 도망가려 했으나 기어코 시간 맞춰 일어나 내 머리에 들러붙었다.

떼어 놓으려 하니 머리카락을 물고 잡아 뜯는데… 그게 정말 눈물 나게 아팠다.

'평소에는 오후 2시까지 퍼질러 자던 놈이....'

"저거 진짜 사람일지도 몰라."

내 말에 브랜틀리는 그저 웃어 보였고, 뚱뚱한 고양이는 하품을 쩍 했다. 황당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발을 움직여 17번 게이트로 향한다.

여섯 개의 기둥을 지나 승강장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며 마나 열차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다.

마나 열차.

그것은 현 황제, 고트프리트의 야심작이었다.

현 황제인 고트프리트 칼 라인하르트는 성군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렇게까지 멍청한 인사도 아니다.

그는 인접국인 귀도의 불온한 움직임을 어렵지 않게 잡아채었고, 좋지 않은 예감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귀도는 라인하르트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과거, 전쟁 시대의 패배의 치욕을 씻고자 한다.

두 번째.

귀도 출신인 3황비가 사망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황실은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사람이고, 병으로 죽은 거라 규명할 게 없었던 거지만.'

귀도의 입장에서 핑계 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대제국 스테파노의 협력을 얻어냈다.'

그런 이유로 라인하르트를 상대로도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테파노는 라인하르트 못지않은 대국이었으므로.

'…그래. 스테파노, 말이지.'

순간 떠오른 불쾌한 기억에 잠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손을 두어 차례 쥐었다 펴며 생산적인 생각으로 넘어간다.

'어쨌든 귀도가 스테파노의 전폭적인 지지나 동맹국의 위치를 얻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대제국에서 지원을 해준다는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눈치챈 고트프리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기회다.'

그는 이를 기회로 삼고자 한다.

다른 것이 아닌, 프리드리히를 복권시킬 찬스로.

현재의 그가 프리드리히를 상대로 간을 보고 있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후처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를 제대로 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프리드리히에게 명한다.

'마침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그에게, 기사들과 용병단을 이끌고 가. 다가올 귀도와의 전쟁에 나가 승리하라고.'

생각대로만 되면 황제의 입장에서는 명분이 생긴다.

전공을 세워 민중의 지지를 얻은 1황자를 더는 바깥으로 내돌릴 수 없다는 명분.

그를 황궁으로 불러들일 명분.

1황자 프리드리히를 자신이 벼린 칼날로서 과시하여, 귀족들을 견제할 명분.

'전쟁 대비하지, 아들 복권시키지, 귀족들 견제하지. 심지어 내 명을 따라서 네가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며, 프리드리히에게 생색도 낼 수 있으니.'

그야말로 꽃놀이패다.

그리고 그 시초가 바로 마나 열차였다.

'전쟁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물자의 순환이니까.'

고트프리트는 가진 쌈짓돈을 털어 현자의 도시에 쏟아붓는다.

그 돈을 보고 기어 나온 마탑, 마공탑, 연금탑의 샌님들은 황제에게 마나를 이용한, 튼튼하고 사람과 물자를 동시에 실을 수 있는 이동수단을 만들어 준다.

고트프리트는 관련한 권한을 프리드리히에게 일임한다.

전쟁 때 이용하라는 의미였다.

프리드리히가 이 열차에 탑승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열차는 오늘, 10월 21일 시범 운행 날....

"노버트."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조금 수척해진 르나르 알렉시스였다.

'지난번에 저택에서 보고 처음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르나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약간 거슬렸으나, 따로 잘 지냈냐 안부를 묻지는 않았다.

'잘 못 지냈겠지.'

사정을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할 테니, 일단은 모른 척해주는 편이 나았다.

"일찍 왔네."

"…그래. 못 올 뻔했지만...."

심경이 복잡한지 그가 말끝을 흐렸다. 복잡할 만도 했다.

아무리 르나르가 맹하대도 죽음의 위기를 겪고, 알아낸 사실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렴풋이 눈치 정도는 챘겠지.

제 형이 저를 노린다는 사실을.

잠시 뜸을 들이다, 눈가를 문지른 그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 주변을 경계하니 새삼… 많은 게 보이더군."

"그래?"

"응. 그리고 약속대로… 살아서 왔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 심란한 마음이 공기를 타고 내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잠시 후 르나르는 무리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

대답으로는 미소를 그려 주었다.

따로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르나르가 살아서 이 자리에 나온다면, 그리할 생각이었으므로.

짐가방을 챙기며 일행을 한 번 더 체크한다.

지금 말고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두 달 정도는 수도를 떠나 있을 예정이었다.

점검을 끝내고, 르나르를 보며 물었다.

"바로 가지. 짐은 제대로 챙겨 왔나?"

그 말에 르나르가 말없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짙은 갈색의 짐가방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동자를 굴려 가며 그의 차림을 쭉 스캔했다.

눈에 띄지 않는 복장.

허리의 장검.

기타 짐가방과 소지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총은 없어?"

르나르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챙겨야… 하나?"

그 말에 또 잠시간 르나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문이 막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혹시 소드 마스터야?"

"아니...?"

"그럼 갑자기 웬 마법사가 네게 달려들면 제때 서클을 파괴할 수 있나?"

물론 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못 하잖아?'

역시나 르나르의 고개는 좌우로 움직였다.

그래. 그러시겠지.

그런 놈이 이렇게 나오다니....

'젊음이 좋기는 좋아.'

자긴 평생 안 죽을 줄 아는 모습, 아주 호탕하다. 패기가 넘쳐 흘렀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첫 번째 가르침을 주어야 할 것 같다.

"르나르 알렉시스. 기사들이 왜 총을 쓰지 않는지 알아?"

"…총보다 검이 더 정확하고 빠르니까?"

"내가 딱 그런 말을 하던 검사를 알아."

과거에 스쳐 갔던 한 사람을 떠올리며 르나르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감상하며, 내 옆에 서 있던 브랜틀리를 슥 끌어와 앞에 세운다.

최대한 천천히 브랜틀리의 양쪽 귀를 꾹 눌러 막은 후 입을 움직였다.

"내가 총으로 쏴 죽였지."

"...."

"아, 걱정하지마."

범죄자였어.

021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나저나… 매번 어이가 없네. 우리 누님이 소드 마스터인데 누님보다 총알이 빨라."

"그...."

"어떤 놈이 유행시킨 말인지 모르겠지만, 들을 때마다 괴로워서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야."

"그래도 정확도는...."

지겹게 들은 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러니 검 쓰는 애들은 멍청하다는 소리가 자꾸 도는 것 아닌가.

브랜틀리의 귀에서 손을 떼며 팩트를 일러주었다.

"너희가 총을 못 쏘는 거야."

그 말에 르나르의 얼굴에 떨떠름함이 올라왔다.

전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브랜틀리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그에 나는 돈 몇 푼을 꺼내 브랜틀리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시범 운행일이라, 열차 안에서 음식을 팔지 모르겠네. 혹시 모르니 좀 사다 줄래?"

"아, 네! 어떤 걸로...."

"적당히 빵이랑 육포, 물… 그리고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사와."

"네!"

탁, 탁, 탁....

브랜틀리가 발소리를 내며 가게가 있던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르나르를 바라보았다.

누굴 혼낼 때는 따로 불러내서 하는 게 정석이다.

'그나저나, 걱정이 태산이네....'

당장 이번 알로이스 행만 해도 예정된 고난이 몇인가?

'그런데 저런 안일한 태도라니.'

흠… 작은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건 아니지만.'

내게는 무한 리세마라를 하며 어느 미친놈을 계속해서 황제로 만든 이력이 있었다.

이 정도로 포기하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았다.

"잘 듣고 기억해 둬.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래."

"첫 번째 이유는 '마나'. 탄환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아직 나오지 않았어."

"…왜? 마석이나 마정석을 쓰면 되지 않나?"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그래. 세공까지 하면 한 발에 1천 하르탄 정도 되겠네. 참 괜찮은 단가야. 군용으로 쓰기 딱이겠어."

1천 하르탄이면 평민 가정 기준 두 달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총 한 발을 쏘는 데 그 정도의 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돈이야 들이면 된다. 억지로 하면 안 될 것이야 없지.'

하지만 마석과 마정석을 가공하는 것은 고급 기술이다. 당연히 대량 생산이 힘들다.

르나르의 얼굴에 아차하는 감정이 스쳤다.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총으로는 마물을 상대할 수 없다."

"…마나를 못 담아서?"

"그래. 마물의 핵을 파괴하는 데는 반드시 마나가 필요하니까."

마물을 상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방법은 이것이다.

마물의 몸에 박힌 핵, 마석을 파괴하는 것.

이 과정에는 반드시 마나가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선 총은 쓸모가 없는 게 맞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몇 년 지나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어쨌든 간에.

브랜틀리에게 방향을 손짓으로 알려주고, 승강장 방향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지금 떠드는 소리는 딱히 중요한 내용도 아니니 움직이면서 해도 될 것 같았다.

"두 번째 이유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냥 고집이야."

"…고집?"

"네가 말한 내용도 결국 결이 같지 않나. 말하는 바가 명확하잖아."

그 말에 르나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얼빠진 얼굴을 일별하고, 손끝으로 르나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총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 강한데. 그런 게 왜 필요해?"

"그, 그건...!"

"아니야?"

르나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잘 구운 새우 같은 색이 그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래도 수치심이 뭔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꼴을 가만히 바라보다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너를 포함한 기사들은 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아."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총을 거부한다는 소리는 달리 말하면 그 두 가지 이유를 제하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승강장에 들어서는 몇 명의 사람을 가만히 살피며 길을 찾는다.

열차를 점검하려는 듯 분주히 돌아다니는 역사 직원들의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다섯, 일곱, 열다섯....

'도합 셋.'

하지만 한 명은… 탑승은 안 하고.

유난히 익숙한 직원 몇 명의 얼굴을 뇌리에 박아 넣으며 생각했다.

사실 까내리기는 했지만, 총을 챙겨오지 않은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암살 시도 이전에는 평범한 삶을 살던 놈이 아닌가.

그런 디테일, 당연히 놓칠 수 있다.

하지만.

"르나르 알렉시스."

나직한 목소리로 르나르를 불렀다.

달아올랐던 얼굴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르나르가 나를 보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게 총이 아닌 검을 배우러 왔지."

"...."

"꼭 총을 사용하지는 않아도 좋아. 몰랐을 수도 있지. 너도 이런 일이 처음인데."

조금 전의 질책을 무색하게 만드는 말에 회백색 눈동자가 묘한 기색을 띠었다.

그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눈짓으로 그의 손을 가리켰다. 르나르는 잠시간 고민하다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잘칵.

작은 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진 은색의 권총이 그의 손에 올랐다.

물론 주머니에 든 탄환과 함께였다.

어쩐지 당황스럽다는 듯 그를 내려보고 있는 르나르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흑마법사들의 표적이 된 상태고, 내 앞에는 위험이 산재해 있어."

"...."

"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따라오기로 했고."

시선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차가운 어조로 덧붙인다.

"신중해야지."

위험에 뛰어든 이상 르나르는 지금보다 기민해져야 했다.

'사담이 길었지만.'

내가 이번에 가르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 지금보다 더 심력을 쏟으라는 것.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잡으라는 것.

"네 생은 한 번뿐이고, 죽으면 다 끝이야."

나와 상부상조하려면 일단 살아야 하니까.

말을 끝맺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그래, 고마워. 맛있겠네."

음식을 받아들며 브랜틀리에게 심부름 값으로 약간의 돈을 건네주었다.

브랜틀리의 눈에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어쩐지 깨달았다는 표정의 르나르를 지나쳐, 다시 승강장으로 향한다.

'제대로 전달이 되었나 모르겠네.'

사실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기에. 르나르의 깨달음은 내게 썩 와닿지 않았다. 그 깨달음을 준 사람이 나였음에도 그랬다.

당연했다.

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으니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이다.

르나르에게 필요한 말일 것 같아 해주기는 했으나, 솔직히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좀 웃겼다.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자살한 주제에 입바른 소리를 했어.'

당시에 구멍이 났던 머리통을 한차례 문지르고는 품에서 티켓을 꺼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르나르가 작게 말했다.

"…권총."

"음?"

감사 인사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르나르를 보았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지금이라도… 사, 올… 까...?"

의외의 말이었다.

"허."

헛웃음이 났다. 여러모로 웃긴 놈이었다.

그를 앞에 두고 피식거리고 싶은 것을 참아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가져. 제자가 된 기념으로 주는 거야."

"…너는?"

"하나 더 있어."

그 말을 끝으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역사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미리 구해 놓았던 티켓을 내민다. 흰 장갑을 낀 손이 티켓을 받았다.

잠시 후, 짙은 남색 모자를 손에 쥐며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C, A-12. 확인되셨습니다. 안내인이 바로 올 겁니다."

"고맙네."

감사의 의미로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발을 옮긴다.

열차는 긴 복도 같은 공간의 좌우로 객실이 꾸며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현대적인 기차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것 역시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쇠 냄새가 나는, 깔끔하게 꾸며진 기다란 공간을 살피며 움직인다.

머릿속에 한가한 생각이 날아다녔다.

'뭐 좀 먹고 잠이나 자 둬야지.'

나중에는 자고 싶어도 못 잘 테니.

그런 생각을 하며 안내인을 따라 걷는다.

기다란 홀을 가로지르며 객실을 찾는다.

A-9

A-10

A-11....

'A-11?'

그렇게 이동하던 내 시선이 A-11 객실의 창문 너머를 바라본 순간,

"왜 그래?"

"...."

얼음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몸이 굳었다.

기억하던 모습과 머리 색은 달랐지만 알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황족의 특징인 루비 같은 눈동자와 그를 감싸고 있는 순한 눈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10대 중후반의 소년.

제국에서 드물게 기품과 귀티를 패시브로 장착하고 다니는 그 사람.

2황자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문가에 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위압감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눈이 크게 뜨였다. 소름이 돋았다.

본래 요제프는 오늘 이 열차에 탑승하지 않는다.

또한, 이번 회차의 요제프와 나는 구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 있고, 나를 낯설어하지 않는다.

'…정말 미래가 뒤틀렸나? 혹은 직전 회차를, 12회차를 기억하고 있는 건가?'

나는 만프레도 극장에서 요제프의 운명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찬찬히 되짚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닌 것 같았다.

어색하게 손끝을 까딱이며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면… 일 났네. 요제프와 함께 회귀한 건 아니었으면 했는데.'

왜냐하면 12회차의 나는....

'요제프에게 친구인 척 접근했다가 뒤통수를 후려 깠으니까.'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아직 단정하기엔 이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요제프가 12회차를 온전히 기억한다면 이 자리에 왔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열차는 탈선된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다.

비슷한 미소를 지은 그와 내가 서로를 마주 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손끝을 심장께에 올려 약식으로 예를 표한 후 자리를 옮겼다.

탈선 5시간 전이었다.

* * *

12회차에 대해 회고해 보겠다.

'정확히는 반성이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12회차의 나는 시작부터 미쳐 있었다.

[세계의 중심으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 하라.]

11회차까지의 나는 이 신탁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11회차 때 원작 소설 고증을 빡세게 맞추며 일을 진행하던 중 프리드리히가 죽어버렸다.

사인은....

'자살.'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11회차의 끝자락을 기억한다.

싸늘한 시체가 된 놈의 멱살을 붙잡고, 멸망의 전조 증상을 보이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태양도,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세계.

나의 세계가 망가져 가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가 문제지?

그 생각은 질문이 되었다.

'…또 뭐가 문젠데, 대체 뭐가 문제야?'

'말해봐. 왜 멋대로 죽는데? 네가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건데!'

나는 그의 멱살을 마구 흔들어 대며 난리를 쳤고, 그러다 어느 순간 죽었다.

사인은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미쳐 날뛰다 자살했든, 세계의 멸망에 영향을 받아 죽었든… 지나가던 암살자가 내 목을 따버렸든 간에 이유가 있어 죽었겠지.

그리고 당연하게도 회귀했다.

눈을 뜨니 17세, 가을 초입이었다.

눈앞에는....

'공자님? 괜찮으신가요?'

'....'

세계를 구하지 않고 죽어버린 무책임한 주인공, 프리드리히의 첩자가 보였다.

나는 그를 찔렀다.

022화 덤앤 더머 앤 더미

눈앞의 사람을 찔렀다.

무엇으로 찔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1황자의 끄나풀과, 비명을 지르며 내 앞을 막아서는 사용인들뿐이었다.

이후 나는 광증이 돋았다는 이유로 저택에 갇혔고, 그 과정에서 장기적인 치료를 받게 되었다.

매주 나를 보기 위해 의사들과 신관들이 저택을 방문했다.

'약도 약이지만, 성력은 심신 안정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그 과정 중, 어느 신관의 말을 계기로 나는 신탁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주인공'이 세계를 사랑하여, 결국 구하게 만들어라.]

[이 세계의 주인공인 그가 행복해서, 현재의 삶에 만족하여 비로소 살아가고 싶게. 세계를, 인간을 사랑하여 구하고 싶게끔 만들라.]

…라는 신의 뜻을.

그 의지는 심히 폭력적이었다.

주신은 정말로 내게 프리드리히가 어떤 의미인지, 그동안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모두 알면서 그를 행복하게 만들라는 소리를 한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삽질하는 걸 구경만 했다는 소리 아닌가?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또 한 번 방황했지. 진절머리가 나서.'

하지만 이번 방황은 길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뭐 어쩔 텐가.

이제 와서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면 나의 삶을, 내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꼴을 또 봐야 한다.

2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견뎌 온 나의 삶 또한 그야말로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또 한 번 그 뜻을 받아들였고, 프리드리히를 구하여 그의 삶의 질을 높여 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회귀 초반 시점, '버려진 황자' 시절의 프리드리히는 1황비와 2황비, 귀족들이 보내오는 살수들에 의해 위험천만한 삶을 살아간다.

다음 날 일어나면 목이 떨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 지내 온 것이다.

이는 그의 행복권을 보장하는 일에 매우 큰 걸림돌이 되었기에, 나는 이러한 불안요소들을 발 빠르게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프리드리히가 겪게 되는 일부 고난에 무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소한 고난은… 어차피 안 뒤질 거 아니까 알아서 해결하라고 던져 놓았다 보니....'

이건 절대 내가 그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주인공 인생에 적당한 고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다.

마왕을 해치우러 가는 길에 슬라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99층 탑에 오르는데 무찌르며 경험치 뽑아 먹을 잡몹이 없으면 쓰나?

시련이 없는데 어떻게 시련을 딛고 성장하겠는가?

하지만 12회차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프리드리히가 행복해져야 했으니.

나는 그에게로 향하는 모든 고난의 난이도를 저하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그에게 살수를 보내는 이들의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를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2황비, 이냐스 라인하르트.'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그 아들인 요제프에게 접근해 친우가 되었고, 2황비에 관한 정보를 남몰래 빼돌렸으며....

이후 요제프와 2황비의 뒤통수를 후려 깠다.

'물론 그 과정이 있었기에 요제프의 인품을 알아보고, 이번 회차에 그를 주인공 후보로 꼽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맞습니다. 저희는 친우지요. 군신이 아니라.'

'전하께서는… 조금 더 신중하실 필요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당시의 내가 내뱉었던 망언을 떠올리며 침묵을 이어갔다.

이건 내가 정말 잘못한 게 맞았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양심 한 가닥이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나중에 꼭 보상하자. 일단은… 생산적인 생각을 해야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요제프가 12회차를 기억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사실 12회차에, 별궁에서 탈출해 자살하기 직전. 요제프에게 관련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황제가 되어 내 염원을 이루어줄 의사가 있는지. 그 하나 정도는 확인해둬야 했던 탓이다.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인 세상에서, 사실 황제 하기 싫은 놈을 두고 내가 하라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최소한의 기호도 조사를 했다. 그리고 원하던 답을 얻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요제프가 12회차를 기억한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까지 대충 다 아는 상태일 거라는 소리.'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나.

'이런 걸로 뒤통수 맞은 게 한두 번이야?'

쓸모없는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골이 아파 왔다.

이건 업보인가?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잘못 살아온 거지?

하지만 전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덜컹, 덜컹....

금속으로 된 열차의 조직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지금 고민해 봐야 해결책이 나오지도 않는 일이었다.

'나중에 요제프와 대화해보면 알게 되겠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르나르와 옆자리 브랜틀리의 표정에 약간의 안도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르나르의 입이 움직였다.

"…그리고 보니 알로이스에 왜 가는지도 모르네. 왜 하필 여기 탑승한 건지도 모르고."

그 질문에 나는 툭 던지듯 대답했다.

"요양. 열차 여행."

내 말에 회백색 눈동자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설명이 너무 성의 없었나. 작게 웃으며 생각했다. 왜긴 왜야.

'프리드리히와 성녀의 행방을 체크하고, 성녀가 이 장소에 오지 않을 경우 프리드리히의 목숨을 붙여 놓기 위해서지.'

본래대로라면 프리드리히는 오늘, 열차 사고를 유발하려 하는 세력과 전투를 벌인다.

아, 이 세력은 당연하게도 타리크다.

타리크는 대제국 스테파노의 황실과 커넥션이 있었으니까.

'귀도를 낀 전쟁을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 열차는 큰 방해물이니.'

하지만 아직 소드 마스터로 각성하기 전이었던 것은 물론, 열차 기물들을 신경 쓰며 싸워야 했던 프리드리히는 결국 타리크의 수작을 막지 못하고 탈선 사고에 휘말린다.

'그 탓에 중상을 입게 되지.'

그리고 이후 죽기 3초 전인 상태로 이름 모를 여인에게 구조되어, 성력으로 치료를 받는다.

프리드리히는 비록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운명을 느끼고 이후 그 사람을 수소문하게 된다.

여기서 그 여인이 바로 성녀다.

나는 이러한 이벤트가 본래대로 진행되는지를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그 과정에서 프리드리히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숨 정도는 붙여 주고.'

세계가 멸망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이는 요제프가 이 열차에 탑승함으로써 반 정도는 물 건너갔다.

'요제프의 목숨으로 도박을 할 수는 없다. 프리드리히면 몰라도 그가 죽거나 다쳐서는 안 돼.'

그러니 현재 내가 열차에 타서 이루려 하는 것은,

그리고 알로이스로 가는 이유는....

손끝으로 차창을 툭툭 건드리며 르나르를 바라보았다.

브랜틀리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쩍 하품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열차에 탄 이유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야."

"사고?"

그것도 예언인가?

회백색 눈동자가 그런 의미의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건 미래의 정보라기엔 애매했다.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손을 들어 목 언저리를 더듬는다. 통증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말을 이어간다.

"원래도 열차에 관심이 많아서 한 번 타보려 했는데...."

울리케 역사에서 확인했던 면면들이 떠올랐다.

세 명.

"역사에서 열차 직원들 사이에 흑마법사가 숨어든 것을 봤다. 어쩐지 감이 안 좋아서."

"…그런 건 열차에 타기 전에 잡아냈으면 안 됐나?"

"글쎄? 나야 그들의 정체를 알지만...."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마나 열차는 황제 폐하의 숙원 사업이고, 오늘은 그 열차가 처음으로 가동되는 기념비적인 날이잖아."

"…확고한 근거 없이 운행을 중단하거나 사람을 빼진 않으시겠군."

"그래. 가진 바 자존심이 있으시니."

르나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동시에 브랜틀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흑마법사.

나와 브랜틀리의 공공의 적이자, 이곳에서도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것이 예정된 그들의 존재를 의식한 탓이었다.

그에 브랜틀리의 작은 어깨를 두드려 주며 덤덤한 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잡으면 돼."

"하지만...."

"브랜틀리."

잭의 이마를 살살 긁으며 말을 이었다.

"르나르가 좀 맹하기는 해도 소드 엑스퍼트 상급이야."

"…맹하다는 소리는 좀 빼줄래?"

"거기다 나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알고, 너는 마법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잖아."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그려 보이며 독려의 말을 건넸다.

우린 최고야.

할 수 있어.

그런 뉘앙스의 말.

'물론 개소리다.'

회귀자 특권 몇몇을 제외한다면, 본래 이 셋의 전력으로는 타리크의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버겁다.

그나마 르나르 정도만 쓸모 있는 전력이겠으나....

'지난번 황궁에서 꼼짝없이 당해 기절한 걸 보면, 실전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게 분명해.'

그런 사람에게 실제 전투에서 제 실력을 내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내게는 별도의 수단이 준비되어 있고,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기에. 최대한 희망적인 말을 건네었다.

"괜찮아. 무사할 수 있어.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일이니 뿌듯하기도 할 거고."

"...."

"알로이스로 가는 이유는, 당장은 말해줄 수 없지만...."

고민하는 척 입가를 더듬으며 말했다.

"걱정 마. 가서도 좋은 일을 할 거야."

물론 내게 좋은 일이지만.

사실 그게 바로 세계를 위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브랜틀리와 르나르의 얼굴에 어떤 결의가 깃들었다. 잭은… 졸고 있었지만 못생기고 귀여우니 괜찮다.

그 표정들이 하나같이 보기 나쁘지 않았기에 적당히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대비를 할 때가 됐다.

적당히 짐을 체크하고 외부를 주시하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그럼 저희는 뭘 하면 될까요?"

* * *

흑마법사 클로드.

통칭 셀레그린.

그는 최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성인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 아닌가요. 결국.'

그가 모시는 '마신의 여섯 번째 대리자'의 수하 중 하나. 오르페오의 경멸스러운 시선을 기억한다.

내리꽂히는 살기, 스산했던 방 안의 공기, 은은하게 퍼지던 혈향.

어느 것 하나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더 깊게 심장에 새겨지는 것은 수치심이었다.

오르페오는 본디 셀레그린과 같은 급이었다.

그가 이제껏 성인의 흔적을 찾지 못한 탓에 타리크 내에서 업신여겨지기 전의 이야기지만.

이세계 빙의 회귀자 김씨 청년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적 부진을 사유로 입사 동기에게 털리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셀레그린은 속으로 이를 갈며 대답했다.

'…맞, 습니다.'

023화 탕!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그는 말했다.

'하지만 성인은 아니라도… 엘누르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처리할 가치가...'

하지만 내밀어진 오르페오의 손이 그의 말을 막아섰다.

노골적인 적의, 보다는 선명해진 살기가 공간을 켜켜이 메운다.

숨이 막혀 왔다.

오르페오의 입이 열렸다.

'그에게 라인하르트 황궁을 습격하면서까지 처리할 가치가 있다는 뜻인가요?'

이 말에 셀레그린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셀레그린은 노버트 하르트만이 이번 대 성인임을 확신했다.

엘누르의 손이 닿았다는 증거인 금안에 더불어 성자들의 특징인 나쁘지 않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엘누르의 끄나풀인 신관 '리베인'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

이 사실을 확인한 셀레그린은 생각했다.

'이건 기회다.'

성인의 포획 및 살해 임무를 주로 맡았던 그는, 긴 시간 동안 성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그간의 부진을 만회할 기회가 아닐까? 판을 키워 보자!'

그는 성인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더불어, 노버트에게 동맹 관계인 '카지미르 백작'의 범행을 뒤집어씌우자는 제안을 했다.

성자를 잡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엘누르에게, 엘누르의 손이 닿은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에게 최대한의 불명예를 안겨주자는 의미였다.

성자에게 황족 살해 혐의라니.

그것도 신실하기로 유명한 라인하르트의 황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니?

얼마나 모독적이겠는가!

물론 라인하르트 황궁에 침입하는 것은 타리크로서도 작지는 않은 투자였다.

아주 큰 대가를 치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할 수준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이 건은 곧바로 승인되었다.

주신 엘누르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은 신의 힘을 약화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물론, 흑마법사들에게 있어 매우 인기 있는 유희였으므로.

그렇기에 그들은 계획을 세웠다.

노버트 하르트만을 밖으로 빼돌려 처리하고, 1황비가 죽으면 성자의 시체에 그 혐의를 씌우기로.

하지만 1황비가 죽기 전, 갑자기 카지미르 백작이 쓰러졌다.

1황비는 죽지 않았다.

성자로 추정되는 자를 처리하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확인 결과 그자는 정말로 성자가 아니었다.

북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분홍 머리, 금안의 성인.

선하고 희생적이며 방대한 신성력을 자랑한다는 신관 예레미아스가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서며 오르페오가 말했다.

'물론 엘누르의 손이 닿은 자라니, 심히 불결합니다. 치워야 할 존재가 맞지요. 하지만!'

'....'

'그렇다 해도 닭을 잡는 데 소를 잡는 칼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닭조차 잡지 못한 현 상황은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

'우리를 얼마나 더 우습게 만드실 셈인 겁니까!'

후욱,

사사사삭―

오르페오의 팔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온몸을 스쳐갔다.

입술을 깨물며 힘의 흐름을 버텨낸다. 그의 옷자락이 부분부분 잘려 흩날렸다.

천 자락의 끝에는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본인이 만족할 만큼 셀레그린을 훈계한 오르페오가 본론을 꺼냈다.

'북부에는 제가 가도록 하지요.'

'그 무슨...!'

셀레그린의 입장에서는 개빡치는 일이었다.

그간 성인을 찾기 위해 얼마나 돌아다녔던가.

그 얼마나 고생했던가?

이번 사고를 친 것도 결국에는 그러한 실적의 부진 탓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성인을 누가 찾아낸 것도 아니고 성인 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버티고 버틴 끝에 드디어 날로 먹을 수 있는 타이밍이 왔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걸 네가 주워 먹겠다고?'

울분을 담아 고함을 치고자 셀레그린이 입을 열었지만, 이 또한 오르페오의 미소에 가로막혔다.

오르페오가 저렇게 쪼갤 때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신의 대리자께서도 허가하셨답니다.'

그 말에, 셀레그린의 세계가 무너졌다.

승진으로 가는 탄탄대로 역시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이런 잡일이나 하고 있다니.'

마나 열차의 상징, 선로 모양의 배지를 내려다보며 셀레그린은 울분을 삼켰다.

이 일은 그야말로 잔업이었다.

그저 이 '마나 열차'라는 교통수단의 회로에 장난질을 해, 열차에 대한 라인하르트 귀족들의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다였다.

안 그래도 인구의 이동에 예민한 탓에 새로 생긴 교통수단을 반대할 준비를 하고 있던 라인하르트의 귀족들에게 '반대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

그 결과 선로를 놓는 것을 꺼리게 만들어, 귀도 및 스테파노, 타리크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하지만 전쟁을 위한 큰 그림이라고 해도, 이 사건 하나만으로는 임팩트가 없다는 점이 뼈아프다.'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내가 되고 싶지는 않은 일.

그는 그런 일을 행하기 위해 열차의 관리실로 향했다.

붉은색.

오르페오 그 야비한 놈의 머리 색.

그 썩을 가짜 성자의 색이 셀레그린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혈압이 올랐다.

"…셀린님."

작은 목소리가 그를 부르며 소심한 손이 그의 옷 끝을 잡았다.

셀레그린이 노버트와 대치한 당일, 유일하게 구해서 도망쳤던 흑마법사.

그와 함께 좌천당한 직속 후임자였다. 노버트가 발로 뭉개 셀레그린을 도발한 사람이기도 했다.

셀레그린은 속으로 짧게 숨을 내쉰 후 그를 돌아보았다.

심란했다. 정말이지 미치도록 심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티를 내는 것은 좋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의 앞에서는.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복잡한 표정을 그리며, 그가 속삭였다.

"이상합니다. A-D칸 객실의 인기척이 사라졌습니다."

'A에서 D까지 전부?'

그 말에 셀레그린 역시 기척을 세어 보았다. 확실히 줄었다.

하지만 인기척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복도를 서성이는 사람이....

'셋.'

개중 하나는 제법 실력 있는 자로 보였다.

경비를 맡은 직원인 모양이었다.

"…직원들은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예. 하지만 객실이...."

"목적을 잊지 마세요."

셀레그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은한 질책이 그의 시선에 깃들었다.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의 목표는 사고를 내는 것이지 학살이 아닙니다. 사상자는 없거나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고요."

"...."

"사소한 데 한눈팔지 말아요."

"…네."

사실이었다.

물론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오면 좋기야 했으나, 어디까지나 목적은 사고 그 자체에 있었다.

'겸사겸사 일 키워 보려다 망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해.'

그렇게 생각하며 셀레그린은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드르륵―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이런....'

직원이 이쪽으로 오는 모양이었다.

셀레그린은 발을 재촉했다.

들키기 전에 어서 관리실에 들어가 손을 써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굳이 그의 얼굴을 저자에게 각인시킬 이유가 없었기에, 셀레그린은 최대한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희미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오 미터.

삼 미터.

그리고 일 미터.

이상했다.

'…왜 이리 빠르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후임의 기척이 없다.

"이 무슨...!"

깜짝 놀라 뒤를 휙 돌아본 순간.

절컥.

작은 소리가 났다.

동그란 은빛 원이 보였다.

"안녕?"

타― 앙!

총소리가 울렸다.

* * *

"아아악!"

비명과 동시에 총알이 암흑이의 어깨를 꿰뚫었다.

쓰러져 있는 그의 후임의 어깨를 밟고 뒤로 도약하며 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암흑이의 혈압이 올라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화가 많네. 좀 다스려 보는 게 어떨까?"

"너, 너… 너!"

"아니면 내가 다스리는 방법을 좀 알려줘?"

쐐액―

쾅!

쾅!

콰앙―!

커다란 소음과 함께 검은 창들이 연달아 나를 뒤따랐다.

단단했던 열차 바닥에 구덩이가 생기며,

끼릭, 끼익....

덜커덩!

불길한 소리를 내며 공간이 흔들린다.

직후.

애애애애애앵―

커다란 경고음이 울린다.

여기저기서 발소리가 오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열차의 정차 준비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곧 있으면 경관들이 오겠지.'

어찌됐건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고, 현 황제 고트프리트는 만전을 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열차 안에도 무장 인력들이 탑승해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성공이다.'

사고를 막는다곤 했지만, 사실 내가 할 일은 사망자를 없애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이미 완수했다.

브랜틀리를 시켜 A-D칸의 모든 승객들을 후미로 이동하게 했고, 르나르를 시켜 경관들에게 총을 꺼내든 사람이 있다 거짓으로 이른 후 나를 쫓아오게 했다.

그리고 이 안으로 먼저 들어왔다.

'그러니 오늘의 사고를 내가 막게 되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고....'

막지 못한다고 해도 나와 르나르, 흑마법사, 경관들 외의 사람은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르나르한테는 여차하면 튀라고 해뒀고, 요제프와 프리드리히… 는 브랜틀리의 말을 들어줬을지 미지수지만.'

근처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걸 보니 어떻게 알아서 대피한 모양이었다.

그래.

너희가 열 살짜리 꼬마도 아닌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둘이 칼부림만 내지 마라. 제발. 형제 싸움은 명절에만 해.'

어쨌든 이렇게 되면 프리드리히와 성녀의 만남도 어그러진다.

프리드리히의 운명이 바뀌었으니 내가 성녀의 행방을 알아채는 것은 좀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가 다치지 않았으니. 성녀의 운명이 변하지 않았다면, 프리드리히와 만날 계기 자체가 사라질 테고....

성녀의 운명이 변했다면 애초에 여기 없었을 테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이 정도면 괜찮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암흑이가 내게 삿대질을 했다.

"가짜 성자!"

순간 당황했다.

"…가짜도 아니고, 성자도 아닌데."

왜 지들이 오해해 놓고 가짜래?

그런 의미를 담아 말했으나 놈은 새삼 내게 미안함을 느끼진 않은 모양이었다.

우드드득―!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양 객실의 문이 우그러졌다.

바로 뛰어올라 천장에 매달린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무슨 일이… 노버트!"

"이런! 괜찮으십니까!"

쾅! 쾅! 쾅!

둔탁한 주먹이 내가 있는 객실과 그다음 객실의 통로를 두드린다.

금속을 타고 날카로운 울림이 전해졌다.

'통로의 문이 함께 우그러졌군.'

지원을 요청하거나 도주할 길이 사라졌네.

이런 당황스러운 일이?

검은색의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어깨를 붙잡으며, 분에 찬 표정의 암흑이가 나를 노려보았다.

"후우...."

숨소리가 들려왔다.

심호흡을 하는 꼴을 보니 분을 삭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듯했다.

내 얼굴을 보니 화가 나는데, 평정심을 되찾지 못한 채로 흑마법을 썼다간 일이 날 것 같아 자제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빡치게 해줘야지.'

바닥에 내려선 직후,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가짜 성자라는 호칭. 이전 생과 달리 이런 잡무를 맡았다는 점. 내게 저렇게 적대감을 보이는 점.'

이것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새 성녀의 흔적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가 가짜라는 확신이 들었겠지.

자연히 나를 급습한 일로 겁나 까였을 거고, 그래서 이런 잡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힘을 되찾기 전이라, 아직 암흑이와 제대로 붙을 정도의 스펙이라기엔 살짝 부족하니까....

정면 승부는 힘들다.

'오케이, 상황 파악 완료.'

느릿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한 손을 가슴께에 얹으며, 내 최대의 재능이 무엇인지 상기한다.

나는 어지간한 건 다 평균 이상으로 했다.

모든 일에 다 재능이 있어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될 때까지 시도하는 근성 덕에 평균 이상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그래도 그 근성 하나는 확실히 내가 가진 재능이었지.'

하지만 그런 내게도 특별한 노력 없이도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하나 정도는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답은 간단했다.

웃는 얼굴로 사람 빡치게 하는 거.

'나 그런 거 완전 잘해.'

몸을 바로 세우며 자세를 다잡는다.

보는 사람이 아주, 아주, 아주 빈정이 상할 매우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말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성인도 못 찾고, 황궁 뒤지다 걸리고. 쪽 팔고, 동료 잃고...."

그렇게 지내다 잘못 걸려서.

"좌천당해보니 어때?"

한가하니 좋지?

콰아아아앙―!

커다란 소리가 열차를 후려쳤다.

공간이 요동쳤다.

끼이이익―

쇠로 된 기계가 무언가에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024화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덜컹, 덜컹, 덜컹....

끼이이익―

열차가 움직이며 나는 소음이 비교적 선명하게 들렸다.

바람이 시원했다.

…사실 좀 추웠다.

아니, 사실은 좀이 아니었다.

진짜 너무 추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에 담근 것 같았다.

열차의 가에 매달려 바람을 맞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추워서 뒤질 것 같은데 팔도 아파.'

이 날씨에 이러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서러웠다.

하지만 서러움과 별개로 등골이 매우 서늘했다. 개판이 된 내부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엿 될 뻔했어.'

암흑이는 폭주했다.

비단 나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성녀를 놓쳐 오랫동안 까였던 스트레스에, 내부적 힐난에 이어. 성자라 생각했던 내게 이기지 못한 것도 모자라....

'좌천 직후 상처를 찔렸으니, 뭐.'

그리고 이성을 잃은 좌천 직장인… 아니, 흑마법사는 저렇게 된다.

"아… 아악! 아아악!"

쾅!

콰가각!

비명과 함께 내부에서 마력이 요동쳤다.

이지를 잃은 흑마법사가 내뿜는 힘이 날아다니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나는 저놈을 피하기 위해 객실 창문을 통해 들어가, 그대로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며 창틀을 쥐었다.

요동치는 마력의 궤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다.

내가 팔과 열차 외벽을 강화한 채, 여기 매달려 선풍기 끝에 달린 종이 마냥 붙어 있는 현 상황.

한숨이 다 나왔다.

우드드득!

큰 소리와 함께 창 너머로 보이는 객실 내부가 또 한 번 우그러진다.

'이 열차 제법 튼튼한데.'

군용으로 사용될 것을 대비해 제작되었으니 당연했다.

외부 혹은 내부에서의 공격에 대한 대안도 어느 정도는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터져 나가려 한다.

'외벽까지 구부러졌네.'

르나르더러 튀라 하길 잘했다.

암흑이가 확실히 세긴 세다.

'멘탈이 약해서 내 상대는 못 되지만.'

어쨌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일은 더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매달려 충격에 열차가 뒤집히지 않게 약간의 수작을 부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대로 암흑이가 지쳐 쓰러질 때, 혹은 열차가 멈출 때까지 버티는 것이 목표다.

창틀을 쥔 손의 50센티 정도 위.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황금색의 원들을 일별한다.

나를 이루는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이어지며 의식이 아득해진다.

두통이 이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곧바로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된다.

"…인제 끝인가."

'도착하면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

그리고 그 순간.

감은 눈 너머로 빛이 번쩍였다.

절컥.

곧바로 눈을 뜨고 재빠르게 권총을 장전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구부러져 있는 기물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흐린 시야 너머로 무언가가 번쩍대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파편?

아니면 흑마법?

뭐지?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며 최대한 그것이 날아오는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어."

쐐액―

카아아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날붙이가 그것을 튕겨냈다.

"...."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어색하게 시야를 굴려 날붙이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이래서 방심하면 안 돼.'

그리고 지금 보니, 방금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될 부활의 주문을 입에 올려 버린 듯했다.

인제 끝인가.

다른 말로.

해치웠나?

'영화나 소설에서 볼 때는 왜 굳이 플래그 세우냐며 그렇게 욕했는데.'

남 말할 때가 아니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전 날아든 날붙이가 꽂힌 곳을 바라보았다.

'…단검.'

여전히 시야는 흐릿했으나 어쩐지 디자인이 참 익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끼이이이이익―

이후, 이어지던 소리가 드디어 끝이 나며 열차가 멈춰 섰다.

사력을 다한 암흑이의 인형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목표 달성이었다.

* * *

"그래서, 정말 괜찮으십니까?"

"…저기."

"네!"

"미안하지만 그 질문… 일곱 번째인데."

약간 지친 기색으로 답하자 경관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과하다 싶었는지 말을 멈춘 그는 웃으며 내 손에 들린 잔에 따듯한 꿀차를 채워 주었다.

참고로 이거 다섯 잔째다.

'아직 몸이 덜 녹아서 먹긴 먹는다만....'

솔직히 그만 줬으면 싶었다.

왜 자꾸 같은 차만 주는데?

'…몇 잔까지 마시는지 실험해 보는 중인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자, 그 또한 새삼 과했다 싶었던 것인지 경관이 말했다.

"그… 일행 중 공자님의 시종이라는 꼬마가 공자님께서 꿀차를 즐기신다고 하더군요."

"…아."

"계속 드시는 걸 보니 정말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침에 혼자 해장하던 거 브랜틀리한테 걸렸나?'

하지만 이 가설은 금세 기각되었다.

제레미가 알려줬겠지. 내가 아침마다 이걸 먹는다고.

'그래도 슬슬 물리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따듯한 잔으로 손을 데우고 있자, 경관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세 분께서 대처해주신 덕에, 흑마법사들을 제외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우리가 그랬지."

"그럼요! 특히나 공자님이 아주 대단하셨습니다. 그 악독한 흑마법사와 대치하시다니!"

"…그럼, 내가 그랬지."

이번에는 도저히 뒤집어씌울 사람이 없었다.

퇴로가 남아 있었다면 경관들 사이에 숨기라도 했을 텐데, 그게 일찍이 차단되어 버리는 바람에. 현재....

'용감한 시민상 받기 5초 전이다.'

물론 이 세계엔 용감한 시민상 같은 게 없다.

하지만 저러는 꼴을 보니, 없어도 만들어 줄 기세였다.

정말 뭐가 내려올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황궁에서의 흑마법사 처치 건으로 르나르가 훈장 수령 예정자로 등극했듯이.

'공무원이 호들갑을 떨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문제가 있다면,

'이 시점에 주목받으면 안 되는데.'

어색한 동작으로 몸을 감싼 담요를 조금 더 당기며 생각했다.

명예, 훈장, 작위, 보상....

다 좋다.

언젠가는 얻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또한 힘이 되는 것이고, 필요한 이력이니.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내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어긋난다.

'아니면 르나르를 앞세워 뭐라도 받을까? 받을 수 있는 걸 안 받는 것도 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경관이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과 관련하여 상이 내려질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군."

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적당히 답했다.

머리가 아프고, 피곤한 데다 힘들기까지 해서 대화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인내했다.

그렇게 십여 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드디어 때가 됐다.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던 경관이 안으로 돌아왔다.

어째선지 뻣뻣하게 굳은 그의 태도에서 원하던 소식이 전해졌음을 직감한 나는 태연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열차에 귀하신 분이 계셨지. 행방은 감히 묻지 못하겠으나, 휘말리지 않으셨는지 정도는 알고 싶은데."

"그게...."

"혹…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하셨을까 싶어...."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닌 것 잘 알았다.

만일 요제프가 흑마법에 휘말리기라도 했다면 내가 앉아 있는 장소는 취조실이 아니라 감옥이었을 것이다.

황족이 상해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물었다.

어떻게든 요제프에 대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을 확인한 지금, 작은 단서라도 얻어야 했다.

하지만 경관은 내 말에 마땅한 답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나를 보고 섰다.

왜 저러지?

그런 의문이 든 순간,

"…2황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잠시 나가 있을 테니, 대화 나누십시오."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눈이 저절로 크게 뜨였다.

'지금, 직접 왔다고?'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거나 따로 연락을 주는 게 아니라?

의문이 들고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제프 역시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체통조차 잊고 달려올 정도라면.

'…뭔가 눈치챘나?'

아니면 내게서 무언가를 느꼈을까?

그게 아니면 흑마법사들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

그조차 아니라면 정말로, 12회차를 기억하나?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나는 재빠르게 그 모든 의문들을 갈무리했다.

얻어야 할 정보가 많은 쪽은 반드시 을이 된다. 구태여 궁금한 티를 내 고지를 내어 줄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저쪽도 내게 용건이 있는 것 같으니까.'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추어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의 여유를 가장하며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다. 우아한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짧게 인사를 건네었다.

2황자,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

이번 생, 내가 일찍이 나의 주군으로 점 찍은 그 사람에게.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짧은 정적을 뒤로하고, 내 모습을 천천히 둘러본 그가 말했다.

"앉아 있어도 되는데."

상대의 손이 느릿하게 허공에 내저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드르륵거리는,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요제프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아닌 척 그를 살폈다.

전체적으로 격한 감정이 느껴지는 모습은 아니었다.

감정보다는 그의 태도가 더 와닿았다.

내게로 쏠린 시선, 무언가를 세고 있는 손끝. 옅은 긴장감. 명백히 나를 탐색하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가.

그래서 이상했다.

요제프는 소문과 다른 하르트만 작은 공자를 경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의로운 일을 해낸 귀족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행동거지 역시 위압적이거나 다정하다기보다는 그저, 우아했다. 별다른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약간의 정적을 뒤로 하고, 붉은색의 눈동자를 빛낸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초면이지?"

통성명조차 생략된 말,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는 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아직은 어려웠다.

표정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상황 파악이 빨랐겠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요제프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 짧은 말 마디에 담긴 의미가 마냥 곱지만은 않다는 것뿐이었다.

그랬기에, 최대한 신중한 태도로 정석적인 답을 건넨다.

"오늘 오전에 가볍게 인사를 드린 것을 제외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바로 알아보았군."

"태도에 스민 기품을 읽었습니다."

아부를 조금 버무려 둘러댄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미동조차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나의 시선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눈싸움을 끝낸 요제프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주 약간,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대화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본래 솔직한 성품을 타고난 그는 이런 의미 없는 기싸움을 싫어했다. 처음 보는 귀족과 드잡이를 하는 소모적인 상황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를 가만히 바라본 그가 말했다.

"그대도 짐작했겠지만, 내게는 시간이 얼마 없어. 돌려 말하고 싶지 않군."

"충분히 이해합니다."

"내가 왜 왔다고 생각하지?"

날아드는 시선이 서늘했다.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

쫄면 지는 거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 생각하며 운을 뗀다.

"깊으신 뜻을 제가 짐작하기가 어렵긴 합니다만...."

"그런데?"

"저 역시, 간결하고 솔직한 대화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각설하고, 네 입으로 말해.

나도 바쁘다.

그런 의미의 말에 허. 헛웃음을 닮은 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소리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요제프는 괜한 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그대는 소문과 참 다른 사람 같군."

"소문이란 타인이 내는 것이니까요. 제 실체가 못 됩니다."

"그것참 맞는 말이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요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곧이어 진중한 태도를 되찾은 요제프가 운을 떼었다.

"내가 말이야."

매우 느긋하면서도 초조하고, 또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머릿속에 굳어진 표정으로 그 앞의 테이블을 내려보고 있는 선한 인상인 남자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왜 나를 찾아온 거지?

지금의 그대는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답을 기다린다.

몸을 감싸던 한기나 머리를 울리던 두통은 어느새 의식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들려온 것은,

"꿈을 꿨다."

아주 의외의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런 생각을 애써 밀어 넣으며 뒷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꿈에서...."

또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탁, 작은 소리가 나게끔 테이블 위에 제 손을 얹으며.

요제프가 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대가 해를 입어."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를 구하다 크게 다쳐."

내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요제프의 손이 그의 입가를 더듬었다. 또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내게 말했다.

"처음 꾼 꿈에서, 나는 만프레도라는 극장 안에 있었다. 극장에 난 화재 때문에 위험을 마주했지."

다른 회차 때는 있었던 일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잠자코 뒷말을 기다리자, 용기를 얻은 그가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그곳을 조사해 봤다. 방화 마도구가 고장이 났다더군. 실제로 그곳에는 방화 및 테러 시도가 있었고."

내가 겪어서 안다. 사실이었다.

"두 번째 꿈에서는… 밤중에 들어온 암살자의 손에 죽을 뻔했어. 내 시종의 기지로 간신히 살아나지."

기억난다. 이즈음 요제프를 향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별일 없이 마무리될 것을 알았기에 내버려 두었지만.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며, 요제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또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제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린 요제프가 말했다.

"세 번째 꿈에서, 나는 어떤 운송 수단… 그래. 마나 열차에 올라탔고, 그곳에 암살자들이 들이닥쳤다."

그 말에, 나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얼굴에 힘을 줘야 했다.

이 또한 기억에 있었다.

'12회차에서, 현재로부터 4년 후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그 암살자들은 프리드리히가 보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전 회차 때, 자신이 죽음의 위기를 겪은 순간들을 기억하게 된 걸까?'

그런 가설을 정립하는 순간.

그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네 번째 꿈에서, 그대가 나를 구하려다 칼에 베였다."

그와 동시에 견적이 나왔다. 무슨 사건인지 알 것 같았다.

025화 뵈는 게 없습니다

12회차, 1년 후 시점의 나는 요제프를 향한 암살 시도를 드라마틱하게 막아 준 것을 기점으로 그의 가장 친한 친우가 되었다.

펜팔 비슷한 것으로 요제프와 개인적인 친분을 이어가던 중 그가 죽음의 공포를 겪을 예정인 날짜에 방문하여 도움을 준 것이다.

완전 사기극은 아니었다.

요제프의 신임을 얻기 위해 쇼를 좀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작극은 절대 아니다.

암살 시도 자체는 요제프를 향한 외부의 수작이 맞았다. 실제로 암살자와 싸우다 칼에도 찔렸고.

'그런데 그걸 기억한단 말이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요제프는 12회차 때, 자신이 죽을 뻔했던 순간들을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떠올리고 있다.

'순차적… 인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아니, 사실 마나 열차 건을 제외하면 순차적인 게 맞아.'

계기는, 그래. 내 죽음을 목격한 것이라 쳐도 이유는 뭐지?

'아니다, 이를 깊이 고민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야.'

내 회귀나 예레미아스가 받는 신의 사랑, 가끔 발생하는 변화.

그런 것들은 이유가 없었다.

굳이 원인을 찾아봐야 주신 엘누르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혹은 세계의 법칙이라는 단어로 퉁쳐진다.

요제프에게 일어난 일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알아보긴 해야겠군. 가능한 한.'

짐짓 심각한 척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요제프가 말했다.

"열차에는 암살자가 들이닥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위험에 처할 뻔한 상황은 발생했지."

"그를 확인하고자 열차에 탑승하신 겁니까?"

"확신이 필요했거든."

그 말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꼴이 우스웠다.

르나르에게 가르쳐 준 것.

죽으면 다 끝이다.

스스로의 목을 제대로 붙여 놓고 다른 걸 생각해라.

그것을 나중에 이 사람에게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사는 놈들이 왜 이리 안일한지 모를 일이었다.

요제프가 테이블 위의 종이를 팔락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대가 나를 포함한 열차의 객들을 구해 주었지."

"…그건, 그렇군요."

"대략적인 검증이 끝났으니 앞으로는 이러한 꿈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해."

"미래를 훔쳐보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대비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잔을 들어 올려, 조금 식은 꿀차를 입에 흘려 넣는다. 이제는 살짝 물리는 달짝지근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진한 단맛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내가 그 '예지몽'에서 요제프를 대신해 해를 입었다 해도 그는 나와 관련이 없다.

예지몽이라 해도 꿈은 꿈이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막말로 내가 다치건 말건 요제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꿈속에서 저를 구한 것에 대한 보상을 주기 위해 온 것도 아닐 것이고.'

그런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내자 그가 내 앞에 종이 뭉치로 추정되는 물건을 내려놓았다.

팔락.

작은 소리와 함께 옅은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내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다섯 장 정도 되는 검은색의 글씨가 빽빽하게 쓰인, 조금 노랗게 바랜 종이.

그 물건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고 고개를 들어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한 번 읽어봐."

잠시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하.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말해."

그리고 말했다.

"제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 * *

"일이 잘 안 풀리신 겁니까?"

검은색의 마차가 을씨년스러운 거리에 멈추어 섰다.

제게 건네진 조심스러운 물음에 프리드리히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일이 잘 안 풀렸냐고?

싸늘한 목소리가 말했다.

"잘 풀린 일이 있기는 한가?"

검은 로브를 눌러쓴 황제의 심복이 고개를 조아렸다.

프리드리히는 예민하며 자비가 없는 성정을 지녔다. 알아서 사리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에, 심복은 검은 천 너머로 상대를 살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 피 묻은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

그 두 가지 특징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조각 같은 얼굴.

거기에는 그 어떤 표정도 그려져 있지 않았으며,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호재였다.

그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대체로 삶에 질린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으므로.

'좋은 일이 있으셨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늦은 시각, 브레히트의 하늘이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프리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붉은 머리에 노란 눈동자라면, 하르트만의 셋째인가."

심복의 눈이 커졌다. 프리드리히가 그에게 먼저 질문을 해오는 일은 드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 아는 바에 따르면 귀족 중에는 그 하나 외에는 없군요."

"숫기가 없고, 무능하며… 얌전하다던?"

"최근에 있었던 연회에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참석했다고는 합니다."

"다른 특이점은."

"연회 중 흑마법사와 대치하다 알렉시스 후작의 차남, 르나르 알렉시스에게 구해졌다고 하지요."

"르나르 알렉시스?"

"네. 최근 흑마법사 넷을 처치해 각광을 받은 귀족 자제 말입니다."

프리드리히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의 머릿속에 경관들 사이에서 고함을 치고 있던, 푸른 머리 멍청이가 떠올랐다.

악에 받쳐 노버트, 라는 세 글자를 계속해서 부르던 목소리 역시 떠오른다.

'…르나르 알렉시스가 아니야.'

프리드리히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똑똑.

작은 소리가 들리고, 객실 창 너머의 못생긴 짐승을 품에 안은 맹랑한 꼬마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잠시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저, 저기 앞에 총을 든 사람이 다니는 걸 봤어서! 지금 다들 이동 중이에요!'

프리드리히는 꼬마와 사람들을 따라 나가는 척만 하다가, 이후 경관들에게 섞여 그들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향했다.

상황을 파악해야 했기에 그랬다.

그는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왔고, 세상 대부분의 위협은 그를 위해 안배된 것이었으므로.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조사를 하러 간 것이다.

그렇게 열차의 머리에 가까이 간 그는, 계속해서 망가진 벽을 치고 있는 경관들과 그 너머 상황을 살펴보았다.

달리는 열차 안, 망가진 통로 문 너머에서 이름 모를 흑마법사가 날뛰고 있었다.

구겨진 문 너머의 저릿한 파동이 그가 어떤 존재인지 증명했다.

계속해서 날아다니는 사특한 기운이 신경을 자극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굉음이 머리를 후려쳤다.

벽 하나를 두고 마주한 것임에도, 한 줄기 이성이 그 추잡한 것에 좌지우지되었다.

'당일 날뛰던 흑마법사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문 너머의 사람. 붉은 머리의 그는 매우 여유롭게 상대와 대치했다.

자세한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상태로 말도 했다.

연극적인 태도로 도발까지 하는 듯한 꼴은 가관이었다. 정말 보통 정신 나간 놈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였다면 프리드리히는 그저 겁이 없는 놈이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냥 목숨을 내놓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라 객기다. 미친 척 나대는 것은 길거리 광인들조차 할 수 있는 짓이었으니.

'하지만 그자는 광인이 아니었다.'

직후, 프리드리히는 남몰래 사건이 일어난 열차를 확인했다.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발이 닿는 곳마다 파편이 밟혔다. 멀쩡한 물건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열차가 멈출 때까지 무사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는 다른 것들은 다 제쳐 두고 그 사람이 붙어 있던 창을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매달려 있던 부분의 외벽만 멀쩡하다.'

물론 아주 말끔하지는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인근은 과도하게 형체가 변하지도 않았고, 부품의 잔 상처도 적었다. 따로 강화해 방어한 것이다.

'더군다나....'

어째선지 길게 상처가 나 있던 선로.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남은, 열차 하단을 고정하는 부품.

결정적으로, 그의 근처에서 찰나 나타났다 사라졌던 원까지.

그 순간, 프리드리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상황 파악이 끝났다.

'제 주변을 마나로 강화한 것과 동시에… 열차의 하단을 마법으로 고정해 전복되지 않도록 한 거야.'

멀쩡해야 할 열차의 선로에 상흔이 남았으니 강화 혹은 경화.

그럼에도 열차가 성공적으로 멈추었으니 감속.

그 와중에 후미에 피해가 가지 않았으니 어쩌면… 방어까지.

동시에 세 개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것도 마력이 요동치는 살벌한 공간에서,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컨트롤이 수준급이다.'

그의 시선이 좁아졌다.

붉은색 눈동자가 흥미를 담아 반짝였다.

프리드리히는 알아보았다.

노버트 하르트만.

그자는 제국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마검사.'

소드 엑스퍼트 중급에 최소 3서클의 마법을 구사하는 마검사.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직후, 탄식 같은 말이 입가로 새었다.

"…자신이 있었던 거야."

그는 정말 이길 자신이 있어서 흑마법사와 대치한 것이다.

무작정 스스로가 이길 것이라 가정하고 덤벼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흑마법사와 자신의 전력을 제대로 알아보고, 적절한 방식을 택해 이길 싸움을 걸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직접 칼질을 하지 않고 도발과 기타 수작으로 흑마법사를 폭주시키고, 그 자신은 자리를 피했겠지.'

그편이 보다 안전하고, 정면 승부보다 승리할 확률이 높을 테니.

프리드리히의 시선이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하늘 끝자락에 매달린 노을이 시선을 끌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프리드리히는 생각했다.

마검사에, 흑마법사를 상대할 배짱이 있음에도 그 모든 힘을 세간에 공개하지 않은 신중한 자.

적절히 주제 파악이 되어 있고, 스스로와 적을 바로 볼 줄 아는 자.

그가 손에 넣기를 바라 마지않는 가문, 하르트만의 소속인 자.

'확실히....'

유용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아주 간만에, 호기심이 들고 일어난다.

호승심 역시 솟구쳤다. 은혜로우면서도 증오스러운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슨 일이신지요?"

하지만 지금은, 나의 사람들 앞이 아니니.

무감한 표정을 그려 보인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상한 투로 말했다.

"언제쯤 도착이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026화 놓칠 수 없다

요제프의 몸이 경직되었다. 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감돌았다.

비록 상세한 표정이나 태도를 볼 수는 없었으나, 기척을 통해 그의 당황이 전해져 왔다.

그에 따라 내 기분도 상당히 이상해졌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왜 내 눈이 안 보인다니까 요제프가 긴장하지?'

그런 의문을 가득 눌러 담은 시선을 보내자 약간의 시간을 두고 요제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

"까불면 나를…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뭐야. 무슨 소리야.

요제프는 분명 프리드리히에 비해 유순한 성향이다. 비교적 사람을 잘 믿고 인간적이며 상대를 위하는 법도 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황족으로 태어나 황자로 자란 사람이었다.

숨을 쉬는 것보다 스스로를 지키는 것에 더 치중하며 살아온 족속들 중 하나다.

'물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무모한 기질이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안전은 챙기지 않았나?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요제프의 호위들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태도를 다잡았다.

여기서 쓸데없이 대들어 좋지 못한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수하 될 사람은 그저 고분고분한 것이 미덕이었다.

제대로 읽히지 않는 종이 위 글씨들을 노려보며 입을 움직였다.

"평범하게, 글씨가 안 보입니다."

마법을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마나에 의지를 담을 때면 이렇게 감각이 먹통이 됐지.'

그나마 이번에는 대규모로 사용할 일이 없어 이 정도로 끝났지만, 다른 마법사들처럼 마법을 남발했다간 금세 벽돌이 된다.

시각, 청각, 후각을 포함한 대부분의 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상당히 곤란한 리스크였다.

'사실 이마저도 배부른 소리이기는 하지만.'

본래 마법과 오러, 두 가지 힘을 한 사람이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

물론 도전하는 사람은 많다. 여전히 있다.

오러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무적의 기사. 대충 듣기에도 참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그 멋진 칭호에 홀린 사람은 실제로도 아주 많았다.

문제는....

'그걸 시도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지.'

마법은 외부의 마나를 서클에 담아 '사용법'을 부여하여 마법사의 의지를 실현하는 힘이고, 오러는 외부의 마나를 체내로 받아들여 특정 형질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힘이다.

그런 둘을 동시에 사용하면 체내에서 두 가지 힘이 부딪히게 되는데, 보통 사람은 이 단계에서 죽는다.

마나 컨트롤에 재능이 있는 편이라면 죽지는 않으나, 내부가 망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가능했다.

죽지도 않았고, 심각한 내상 역시 입지 않았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머릿속에서 이 상태 이상에 관한 정보를 지워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온몸으로 스스로의 무해함을 어필하며 말을 잇는다.

"평소에도 안 보이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가끔 있는 일이고, 금방 괜찮아집니다."

경험상 감각이 완전히 맛이 갈 정도의 부작용이 아니라면, 사흘 내에 원래대로 돌아온다.

'거기다 약간의 준비물만 있다면 그 시간은 더 줄어들지.'

대화가 끝나면 바로 그 준비물을 얻으러 갈 것이다.

침묵을 유지하던 요제프가 나를 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근래 그대의 주변이 시끄러웠던 것을 알아."

무슨 뜻일까.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 우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숨길 것 없어. 황궁에서 있었던 일만 보아도 짐작 가능하니까."

"전하께서 신경 쓰실 가치가 없는 저급한 자들입니다. 저와 시비가 붙었을 뿐이고."

"그래. 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아."

"그렇습니까?"

"이건."

툭.

작은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함께 몇 장의 종이가 팔락거렸다.

"다수의 흑마법사들을 포함한 단체, 이름은 '타리크'."

"...."

"그들에 관한 자료다. 자세한 내용은 가져가서 회복되면 읽어봐. 처리는...."

"태우겠습니다."

"그래."

'타리크를 조사했다고.'

물론 지금 와서 그가 나를, 그리고 나를 노리는 타리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황궁에서의 일이 오죽 크게 났던가.

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것 역시 유사한 맥락이다. 신경이 쓰였을 테니 좀 파 봤을 수도 있지.

다만 걸리는 점은 이것이었다.

'황위 다툼을 앞둔 시점에 타리크에 손을 뻗는 것은 위험할 텐데?'

2황비가 동의한 사안일까? 그 야망 넘치는 사람이 이 시점에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고?

물론 요제프가 타리크에 손을 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는 제국의 황자고,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대 세력들을 처치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다.

당장 먹을 음식이 없는 사람이 세계 평화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보았는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자가 타인을 챙길 수 있겠는가?

요제프는 유력한 황태자 후보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권위는 아직 부족하다. 아직 외부의 적에게 칼을 빼어 들기에는 일렀다.

잠시간 몇 장의 종이를 내려다보며 고민을 거듭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물었다.

"자료는 그렇다 치고… 제게 이를 건네는 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묘한 감각이 피부를 스쳤다. 무거운 기류가 방 안에 가득 차고, 나를 지긋이 바라본 요제프가 입을 움직인다.

"노버트 하르트만."

나긋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가만히 그를 듣고 있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그가 말했다.

"그늘이 필요하지는 않나?"

이후 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짐과 동시에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갔다.

요제프를 살짝 비껴간 시선이 바닥을 굴렀다. 스스로의 표정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그가 내뱉는 말을 모두 들은 나는 생각했다.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제국의 2황자이자 2황비 이냐스의 아들. 외가인 미케일라 후작가를 등에 업고 있는, 황궁 내 실세 중 하나.

그가 꺼낸 말은 진심인가?

아니면 거짓으로 꾸며낸 것인가?

어느 쪽이건 간에....

'나로서는 손해가 아니다.'

온몸을 굳히는 긴장감,

아니.

주체하기 어려운 수준의 기쁨인가?

간만에 느껴지는 상세한 감정들을 천천히 돌아본 후, 요제프를 바라본다.

역시나, 이 사람은....

'쓸모가 있다.'

입가를 비집고 올라오는 웃음을 삼켜내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킨다. 평온을 연기하며 주변을 감지한다.

문간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둘.

창문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법사가 하나. 외에는 대부분의 사람을 다 물린 것처럼 보이나....

'하나가 더 있군.'

찰나 간 천장을 일별한다. 따로 근거는 없으나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만프레도에서 내 근처를 맴돌던 기척과 마나 열차에서 내게 날아오는 공격을 쳐냈던 익숙한 모양의 날붙이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2황자 전하."

짧은 부름에 요제프가 내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로 날아드는 바깥의 시선들,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말한다.

"전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안?"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요제프는 묘한 기색을 보였다. 내 제안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전 대화의 맥락상 이런 말이 나올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제국의 황족이라는, 이냐스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살아가던 그에게....

'귀족 자제가 내뱉는 '제안'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알 만해.'

하지만 내 제안은 그런 게 아니었다.

굳어 있던 요제프의 고개가 작게 까딱이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그려 보인다.

다섯 장 내외 자료의 내용과 요제프의 성정. 그리고 조금 전 그가 내게 한 말.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며 일어서 테이블 위에 손을 얹는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얇은 종이가 들썩였다.

요제프의 얼굴을, 어렴풋이 보이는 붉은 색 두 개의 원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입을 뗀다.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자들."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이며,

묻는다.

"제가 죽여 드릴까요?"

* * *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내던져진 물음에 요제프의 호위 메이너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스스로의 얼굴을 더듬어 표정이 굳어진 것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미숙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그 말에 메이너드는 물론 또 다른 수족의 표정마저 가라앉았다.

요제프의 선한 얼굴에 난감한 미소가 그려졌다.

"질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해도 좋아."

"어째서 그냥 두십니까?"

"무엇을 말이지?"

"전하께서는 하르트만 자제의 방종을 두고 보셨습니다."

그 말에 요제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방종? 그걸 방종이라 볼 수 있나?

요제프는 솔직한 대화를 원했고, 노버트 하르트만은 그 솔직한 대화에 응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의 심중을 눈치챈 요제프의 수족, 마법사 브누아 올리비르가 입을 열었다.

"과하게 너그러우셨다는 생각은 듭니다. 특히나 하르트만 2공자라면 그다지 대단한 구석이 없는 자니까요. 그리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르트만 가문이라면 제법 위세가 괜찮은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해도 그는 가문의 천덕꾸러기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요제프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르트만 가문은 일찍이 직계들 간의 '서열 정리'가 완료된 가문들 중 하나였다.

일찍이 첫째인 에디트 하르트만은 소백작이 되어 가문의 일을 승계할 준비를 하고 있고, 둘째인 리산더 하르트만은 다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며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셋째?

'이름이 나지도 않았고, 가진 바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 사교계 입성을 엊그제 마친 풋내기.'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인 요제프의 수족으로서 여러모로 격이 맞지 않았다.

이 이력에 검술에 대한 성취가 약간 더해진다 해도 그에게는 그런 것으로 상쇄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흑마법사들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그가 사특한 단체와 두 번의 마찰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불어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유추할 뿐.

또한 그것은 하르트만 공자의 잘못이 아니다.

범죄 단체의 표적이 됐다는 소리는 외려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그만큼 정의롭거나 그 단체에 해를 입힐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요제프는 현재 차기 황제의 자리를 두고 타인과 경쟁하는 입장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비록 최근의 사건으로 1황녀의 세력이 주춤했다고는 하나 그뿐이었다. 1황녀는 여전히 강력한 적이었다.

당연했다.

본디 금력(金力)을 손에 쥔 이들을 물리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법이었다.

황금이라는 재화에 뿌리를 둔 그들은 한 번의 타격으로 해치울 수 있는 적이 아니었으므로.

존재하는 모든 뿌리를 제거하고 그들이 양분 삼은 모든 것들을 갈취한 다음에야 비로소 '처리했다'고 치부할 수 있었으니.

그런 와중에 단점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귀족 자제를 수족으로 만들기 위해 2황자가 직접 걸음한다고?

이건 정말 과했다. 의문이 발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전하께서 겪고 계시는 '이상 현상'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건 말 그대로 '이상 현상'일 뿐이지. 공인된 예언이 아니니.'

느릿한 동작으로 제 입가를 더듬은 요제프가 물었다.

"하르트만 2공자에게 내가 직접 찾아가 제의를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지?"

027화 이것도 좋네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대들이 염려하는 점은 이해했어. 하지만 나는 조금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황궁에서 흑마법사와 대치한 사람이 알렉시스의 차남이 아닌 노버트 하르트만이라는 사실은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요제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며, 한 손이 그들의 말을 막아섰다.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와는 거리가 있는 표정에 브누아와 메이너드의 몸이 굳었다.

요제프는 분명 너그러운 주인이었으나, 그 역시 황족이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수하들을 온전히 납득시켜야 할 의무가 없었으므로.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질문을 허락한 것은 나이니, 설명해 주지. 현재 에반 구스타프가 노버트 하르트만을 찾고 있다."

"…제 세력이 입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1황비 전하의 시해 미수 사건에서 이목을 돌리기 위해...."

"맞습니다. 눈에 띄는 인물을 내세워 상황의 심각성을 호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지적이었다.

에반 구스타프. 그러니까 1황녀의 세력은 현재 난항을 겪고 있었다.

1황비 시해 미수 사건만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시의 사건은 귀족들 사이에서 일파만파 퍼져 나가며 그들의 세력의 범위를 줄이는 중이었다.

1황녀의 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녀가 사건의 해결 이유로 귀족들을 얼마나 무도하게 휘둘렀는지.

범인은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고 있는지.

사실 1황녀가 타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벌인 자작극은 아닌지.

'그런 '에베렛에게 불리한' 사실들이 소문의 형태로 퍼져 나가는 중이지.'

소문이라는 것은 본래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귀족 사회에 발을 걸치고 사는 이들이 소문을 무시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소문을 전하는 이들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어디에 베팅할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1황녀에게는 시해 미수 사건 이상으로 흥미로운 소식이 필요했다.

치부를 감추기 위해 새로운 이슈를 끌어오는 것은 제법 잘 먹히는 수법이었으므로.

그러니 만일 1황녀가 노버트 하르트만이 소문처럼 유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황궁에서 흑마법사들과 대치한 자가 노버트 하르트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귀족들의 시선을 돌리고자 그를 찾는다는 저들의 가설도 영 이상한 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이는 억측이다. 더 쉬운 길이 따로 있으니.'

요제프의 머릿속에 푸른 머리칼을 가진 청년의 얼굴과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요제프가 입을 움직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굳이 노버트 하르트만일 필요가 없지 않겠어?"

"그건...."

"르나르 알렉시스를 내세우는 편이 숨어 살던 노버트 하르트만을 끄집어내는 것보다 쉽지 않나."

메이너드와 브누아의 입이 다물렸다.

사실이었다. 편하기로 치면 이쪽이 훨씬 편했다.

물론 노버트 하르트만을 내세우는 쪽이 이슈는 될 것이다.

워낙에 알려진 사실이 크게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르나르 알렉시스 역시 잠시간 시선을 모을 용도로는 충분했다.

타이틀 역시 확실하다.

황궁에 침투한 간악한 흑마법사들을 상대한 젊은 영웅이라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더군다나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알렉시스의 차남은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성정이다.

영웅으로 치켜세워 주겠다고 구슬려 본다면 영입이 어찌 안 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알려진 사실도 없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노버트 하르트만보다는 르나르 알렉시스가 나았다.

'실제로 흑마법사를 해치운 것이 둘 중 어느 쪽이든, 이 가설대로라면 구스타프 후작이 원하는 것은 이목을 모을 '간판'이니까.'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당연히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르나르 알렉시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구스타프가 노버트 하르트만을 찾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득 든 생각에 눈가를 좁히고서, 요제프가 입을 움직였다.

"에베렛의 시종을 신문하니 하르트만 2공자가 길 안내를 부탁하기에 발코니와 여분의 방, 후원을 안내해 주었다고 했다고 하지."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라비테른 후작과 카지미르 백작을 스쳐 갔다고 한다."

그게 뭐?

의문이 어린 두 쌍의 시선이 요제프에게 닿았다. 요제프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지미르 백작은 술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불편한 사람이 주는 음식은 거절이 힘들지."

"…반면, 라비테른 후작은 술을 참 좋아하지요."

"그들을 스쳐 가던 중 하르트만 공자가 근처에 놓여 있던 잔에 입을 대더니, 제 입에는 술이 너무 쓰다며 음료를 한 잔 받았다더군."

"그럼...."

"백작이 힘겨워하는 걸 눈치채고 몰래 잔을 한 번 바꿔 준 모양이야."

"백작은 그걸 의심도 없이 받아먹었답니까?"

"황궁 시종이 음료를 가져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요제프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그의 고개가 가볍게 내저어졌다.

"말하는 것 못 봤나? 뱀이 따로 없어."

그 말에 메이너드와 브누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확실히 그랬다. 노버트 하르트만은 대단한 언변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놈의 혀가 보통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요제프와 노버트 사이에 오갔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말씀해 주신 대로 행한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나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소리로 받아들이면 되겠나?'

'제대로 된 신뢰를 형성하기까지 도움을 주고받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리하면 무엇이 좋지?'

'잘 모르는 자를 어설프게 품는 것만큼 위험한 게 어디 있습니까.'

'....'

'조만간 제 쓸모를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애매한 협력 관계는 원치 않는다.

마땅한 준비를 마친 후 정식으로 논의하도록 해라.

나를 들이겠다면 제대로 된 신뢰를 주고, 정식으로 들이라는 의미의 건방진 말.

그 말에 흥미를 느낀 요제프는 물었다.

'묻지. 어떻게 증명할 텐가?'

그에 묘한 시선을 보내며 노버트 하르트만은 답했다.

'악마 숭배 단체 '타리크' 중간 관리자의 목.'

그리고… 기회의 땅.

요제프가 황제가 되기 위해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 중 하나.

노버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작은 원을 그렸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린 노버트가 말했다.

'알로이스.'

노버트는 직설적인 어휘를 사용하되 정확히 요제프가 용인하는 만큼만 그를 긁었다.

제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제시했고 요제프의 필요를 정확히 집어냈다. 그것도 요제프의 기분을 크게 거스르지 않은 채로.

절대로 어지간한 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노버트라면 위화감 없이 백작의 입에 포도 주스를 밀어 넣는 것도 가능할 듯했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노버트 하르트만이 백작에게 먹인 음료에 독이라도 들었다는 소린가?

그의 언변과 그 음료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 생각을 담아 메이너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백작은 무사했잖습니까?"

"맞습니다. 연회장에서 마시고 있던 것도 음료가 아니었고...."

"독이 몸에 들어와 효과를 보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특히나 백작은 강골이니 아무리 빠르더라도 30분 이상은 걸릴 테지."

"그건… 그렇습니다."

"의심 가는 정황은 그뿐이야. 반드시 노버트 하르트만이 행한 일이 아니라도 그가 백작을 스쳐 지나갔을 시점에 반드시 '일'이 있었어."

그 말은 옳았다. 카지미르 백작은 건강한 편이었고, 그런 사람에게 독이 듣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노버트 하르트만이 음료를 건넨 시점과 백작이 음독을 한 시간이 시기상 맞아떨어진다.

브누아 올리비르가 입을 움직였다.

"노버트 하르트만이 백작에게 독이 든 음료를 먹였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심증일 뿐이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다만, 전하.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있을 텐데요. 특히나 구스타프 후작이 알 겁니다."

"맞아. 그렇겠지."

타당한 의문이었다.

제국의 권세를 잡은 이들 대부분은 독을 포함한 각종 위협에 익숙한 자들이 많다.

누군가는 카지미르 백작이 쓰러진 시기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백작의 음독 예상 시기에 스쳐 간 노버트에 대해 의심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 밖으로 쉬이 벗어났다.

이는 위와 같은 의심에 별다른 장작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쉽게 말해, 따로 수상한 점이 없거나 증거가 없었다는 소리.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집중적으로 봐야 하는 지점은 바로,

"몹시 의심스럽지만 지목되지 않았다. 그 점이 중요해."

요제프가 관심을 둔 것은 심증과 근거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심증이 존재함에도' 노버트 하르트만이 다른 이들의 의심을 자연스레 비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말했다.

"대놓고 수상하게 행동했으며 심증이 충분한데도 의심을 받지 않았고, 정황이 존재하는데도 증거인 독이 검출된 잔은 확인되지 않았다."

요제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브누아가 말을 이었다.

"그런 마당에 에반 구스타프가 노버트 하르트만을 은밀히 찾고 있군요. 그것도 비밀리에."

"그렇지."

"하르트만 공자를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해 소환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구태여 어렵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몹시 수상하네요."

"그래. 이건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의 법인을 찾는 행보라기엔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

"쉬운 길을 돌아서 간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지."

"라비테른 후작의 입김일까요?"

그 말에 요제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아니었다.

노버트와 라비테른 후작은 접점이 전혀 없을 뿐더러 그 두 사람 간에 거래가 있었다면 에반 구스타프가 굳이 비밀리에 노버트를 찾을 이유가 있겠는가?

'근거가 있든 없든 노버트 하르트만을 시해 미수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해 가둬 놓고, 라비테른 후작을 공격했겠지. 그편이 유리하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행동 자체가 여러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자꾸 쉬운 길을 어렵게 가고 있지 않나?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되지.'

1. 마나 열차 사건을 보고 짐작컨대, 노버트 하르트만은 흑마법사 황궁 침투 사건 해결의 주역으로 보인다.

2. 백작의 음독 시간대로 보건대 노버트 하르트만은 카지미르 백작에게 독을 먹인 범인으로 추정된다.

3.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의 조사관 에반 구스타프 후작이 노버트 하르트만을 은밀히 찾고 있다.

하지만 이는 '카지미르 백작 음독 사건'이나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의 범인을 찾으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나름의 심증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구스타프는 노버트 하르트만을 대놓고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4. 이 모든 흐름은 부자연스럽다. 그에게 뭔가 있다.

'그래, 이건 이상해.'

요제프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뭔가 있다. 1황녀에게 치명적일 무언가가.

2황자의 세력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경계한 황제와 자신의 입지를 걱정한 1황녀의 방해 탓에 요제프는 아직 정확한 진상에는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가설은 일부 사실이었다.

1황녀의 수족, 에반 구스타프 후작은 사건의 뒷조사를 하던 중 카지미르 백작이 흑마법과 연루된 정황을 확보했다.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의 진범이 백작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건의 진범'인 카지미르 백작에게 독을 먹인 것으로 추정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노버트를 불러내 입막음 혹은 거래를 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요제프가 이를 정확히 잡아낸다면 그에게는 큰 호재로 작용할 것이었다.

경쟁자의 치부를 손에 쥐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솔솔 풍기는 사건의 냄새를 맡으며, 요제프가 말을 이었다.

"뭐가 됐든 노버트 하르트만은 그 사건과 관련이 있어. 알아볼 가치가 충분해. 이는 1황녀를 한 번 찌를 구실이 되겠지."

그 말에 브누아와 메이너드의 표정이 아주 약간 누그러졌다.

누가 뭐래도 당장 요제프의 가장 강력한 적은 1황녀 에베렛이다.

그를 얻음으로써 1황녀의 세력에 타격을 줄 수만 있다면, 노버트 하르트만을 얻기 위해 품을 들이는 행동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본 요제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또 있어?

의문이 어린 두 쌍의 시선이 요제프에게 닿았다.

동시에 요제프의 머릿속에 노버트 하르트만의 샛노란 눈동자가 그려졌다.

서늘한 기운이 그의 목을 쓸어내리고, 이내 시선을 가라앉힌 요제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사실관계가 명확해지면 말해주지."

"...."

"그래도 이것 하나는 확실해. 그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지만...."

차기 황제의 자리를 두고 생겨난 각축장에서 내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줄 열쇠.

'알로이스를 가져오겠다고 했으니까.'

붉은색의 눈동자가 짧게 빛났다. 부드러운, 하지만 단호한 표정을 그려 보인 요제프가 말을 맺었다.

"내게는 그가 필요해."

* * *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번 회차, 요제프 칸 라인하르트와의 첫 대면. 내 감상은 이러했다.

'수확은 있었어.'

예상 그 이상으로 요제프에게 일어난 변화의 폭이 컸던 탓에 일이 꼬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회귀로 인해 발생한 정보의 격차가 내 무기인 만큼,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회귀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살아있는 것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실제로도 변한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귀자라도, 아니. 회귀자이기 때문에 나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나 또한 회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

그러니 요제프 또한 변한다.

아니, 변해야 한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끝에는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니까.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도 괜찮다.'

요제프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 보였다.

나는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028화 지은 죄가 있는 편

하지만 나는 머지않아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요제프에 대한 정보와 솔직한 감상평이 떠올라 머리가 아파온 탓이었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긴다. 긴 복도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

"…너무 물러."

냉철한 척은 하는데 잘 들어보면 보통 무른 게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요제프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내용을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보호해 줄 테니 내 밑으로 들어와라.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대충 눈치챘다.

'내가 쓸모 있다고 느꼈겠지.'

요제프는 '꿈'에서 나를 만난 일로 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서 흑마법사와 대치한 일에 나름의 감명을 받은 것도 같았다.

'거기다 타리크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내게 내민 것으로 보아....'

'흑마법사 황궁 침투 사건'과 '마나 열차 사건'을 근거로 내가 흑마법사들과 앙숙이라는 사실을 짐작한 것이다.

그러니 나를 손에 넣어 두려 한 것이다.

'현재 황궁의 뜨거운 감자는 1황비 시해 미수 사건과 흑마법사 침투 사건. 그 둘이니까.'

1황녀의 입장에서는 흑마법사 침투 사건에 무게가 실리기를, 요제프의 입장에서는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을 도마 위에 올리기를 원한다.

시해 미수 사건으로 시선이 쏠린다면 1황녀의 세력에게 불리한 소문이 보다 적극적으로 퍼질 것이다.

흑마법사 침투 사건에 시선이 쏠린다면 전자가 비교적 묻히는 것은 물론....

'외가의 군권을 바탕으로, 황궁 경비의 일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2황비와 요제프가 은근히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물론 후자의 경우에는 비난받을 위험성이 없다시피 하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질타를 2황비에게 한다?

'이건 황비가 아닌 황제에게 들어가는 딜이니까.'

황궁의 경비 인력 대부분이 2황비의 손안에 들어간 게 아니냐며 황제를 허수아비 취급하는 꼴이다.

하지만 말은 하기 나름이다.

나 같은 놈은 그런 걸로도 꼬투리를 잡고, 세상엔 가끔 나 같은 놈이 난다. 조심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니 알력다툼을 벌이는 것이고, 사건의 열쇠 중 하나인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문제가 없다. 오히려 훌륭한 판단이라 할만했다.

다만 내가 불만을 가진 것은 그 방식에 있었다.

만일 내가 위 내용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면 나는 상대의 약점을 잡아 왔을 것이다.

아니면 황궁에서 일을 벌인 것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클지를 들먹이며 협박한 다음, 내가 도울 수 있다고 살살 달랬겠지.

하지만 요제프는 '내 사람이 되겠는가?' 같은 어설픈 소리나 지껄였다. 그것도 나 같은 '증명되지 않은' 인력에게.

'그래, 수하된 입장에서는 기껍고 고맙지. 간만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참 좋다.'

하지만 을을 자처하는 그 태도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황제가 될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됐다.

갑질이 좋은 건 아니지만 때때로는 갑질도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사회라는 게 그렇다.

그렇기에.

'이 호구 자식. 다른 데서는 이렇게 못하게 고쳐 놔야지. 갈 길이 멀다.'

이것이 내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래지 않아 다시금 고개를 내저으며 요제프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내 주제에 그를 비난할 수는 없겠지. 저런 호구라서 고른 것이긴 하니까.'

12회차의 나를 각별하게 여겨 주었다는 점.

솔직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어 비교적 주무르기 쉽다는 점.

내게 뒤통수를 후려 맞고도 나름의 의리를 지켰으며, 여전히 인간을 믿었다는 점.

이런 조건을 들어 주군을 구해 놓고 무르다는 이유로 불평하는 것도 좀 웃긴 일이기는 했다.

더군다나....

'그에게 죄를 지은 것도 모자라,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나이니.'

나는 요제프를 기만한 것을, 그러한 시간들을 지나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프리드리히의 대안으로 요제프를 떠올리지 못했을 테니까.

'그랬다면 이번 회차에서도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가령....

'이번에는 어떻게 프리드리히의 비위를 맞춰야 할까.'

어떻게 해야 더는 버려지지 않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나의 세계를 구하게 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

가볍게 손을 털어내며 숨을 늘였다.

'뭐, 과거의 죄는 앞으로 잘해줘서 상계하면 되는 거고.'

그런 죄책감에 주저앉기에는 너무 멀리 왔으니까.

이미 과거는 증발했고, 내게는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지금 와서 내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

사락, 순간 스친 서늘한 감각에 느릿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어쩐지 갑갑한 느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리에 멈춰 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을 이어간다.

그래. 이상하다.

'이미 세 번쯤 죽여 본 상대에게 고작 그런 걸로 죄책감을 가질 리 없는데.'

나는 필요에 의해 요제프를 세 번 죽였다.

강제로 독을 먹이고,

목을 자르고,

그가 탄 마차를 절벽에서 미끄러트렸다.

내가 따로 손을 쓰지 않았을 때는 프리드리히가 그를 해쳤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방관했다.

'특별한 유감이 있어서는 아니다.'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만들려거든 2황비의 야망을 꺾어야 하는데, 그녀의 욕심은 그 아들이 살아있는 한 건재했으니까.

'직전 생이 특이 케이스였지. 보통 서른 전에 요절했는데 그때는 서른을 채웠으니.'

그러니 지금 와서 양심의 존재를 피력해 봐야 우스울 뿐이다.

"후...."

곧바로 숨을 내쉬고 최대한 생산적인 생각들을 떠올리며 벌컥 문을 연다.

경관들이 응접실 혹은 취조실로 사용하는 협소한 방 안. 나를 기다리고 있던 르나르와 브랜틀리가 동시에 문 쪽을 보았다.

"…노버트!"

"노버트님!"

"애욱."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내게 다가온다. 두 녀석이 일으키는 바람에 옷자락이 작게 팔락대는 것이 느껴졌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잭 역시 느릿느릿 내게 다가왔다. 발치까지 걸어온 잭을 안아 들자 곧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안 다쳤어? 무사해?"

"괜찮으세요? 다치진 않으셨어요?"

"왜옭...."

"경관들은 정신이 나간 거야? 사람을 쉬지도 못하게 붙들고!"

"맼."

"정말, 저는 너무 놀라서...."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질문을 쏟아내는 모습들을 보니 적잖이 불안했던 듯싶었다.

진정하라는 뜻을 담아 손을 들어 보이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괜찮아? 휘말리진 않았나 모르겠네."

그 말과 동시에 르나르의 태도가 험악해졌다. 왜 저래?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내자 어쩐지 으르는 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네가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마력에 노출된 사람이 누군데!"

나는 생각했다.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그럼 그런 거 말고 뭘 신경 쓰란 말인가?

하지만 굳이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을 주며 화제를 돌렸다.

"난 무사해. 대충 알잖아."

"알긴 뭘 알아? 전에도 그렇고 너 진짜...."

"멀쩡하다는 뜻이야. 괜히 힘 빼지 마."

르나르는 내 부족한 설명이 상당히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그 불만을 말로 하지는 않았다. 현명한 처사였다. 말해 봐야 안 들어줬을 테니.

이후에도 몇 분간 부산을 떨며 나의 안위를 확인한 후 브랜틀리가 물었다.

"대화는 잘 끝나셨어요?"

"그럭저럭. 적당히 묻기로 했어."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르나르가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사고로 나름 고생했는데 그게 묻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저러는지는 알겠지만 그렇다 해서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정 아쉬우면 네 앞으로 달아 줄게. 지난번 일까지 하면 훈장에 작위도 받을 수 있을걸."

그 말에 르나르의 태도에 짜증이 깃들었다. 나는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르나르가 바라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었지 알맹이 없는 공치사가 아니었다.

대화의 방향을 바꿔 보고자 일부러 한 말이지만 확실히 불쾌할 만했다.

르나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실망하지 마. 보상은 받아왔어."

그 말과 동시에, 내 손 끝에서 모 황제의 얼굴이 양각된 금화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요제프에게 받은 상이었다.

'원래는 이것도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쓸데없이 외부의 이목을 끌고 싶지도 요제프를 삥 뜯어 벌써부터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상은 필요 없으니 흑마법사와 대치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 정도만 묻어 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요제프는 기어코 내게 뭐라도 쥐여 주려 했다.

그에 당장 받아낼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돈을 요구했고, 금화로 가득 찬 주머니를 받았다.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좋은 게 좋은 거지.'

"말 나온 김에 좀 나눠 줄게."

"…달라는 소리 아니야."

"너희도 놀랐잖아. 보상도 같이 받아야지."

나는 르나르와 브랜틀리 두 사람에게 받은 돈의 3할씩을 억지로 쥐여 준 후, 금화 두 개를 입안에 감춘 잭의 이마를 꾹 눌렀다.

잭의 못생긴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요상한 소리가 났다.

"으에욹."

"…나중에 줄게. 나중에."

"웨웈...."

"…고기로 바꿔서 준다. 가는 길에 소고기 먹게 해준다."

퉤엑.

그제야 작은 소리와 함께 잭이 내 손에 금화를 뱉었다.

고양이의 침에 젖어 축축해진 금화를 손수건으로 닦자 르나르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사람 아닌가 몰라."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상당히 공감 가는 감상이었다.

직후 나는 모든 일행을 방 안으로 밀어 넣어 자리에 앉혔다.

경관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전달한 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선은 브레히트에서 이틀 머물 거야."

"알로이스로 바로 가는 게 아니고?"

"빠른 이동이 힘들어졌으니까."

"그건… 그렇네."

열차가 그 꼴이 났으니 마차나 말, 장거리 포털의 이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포털은 사용 허가가 나기까지 오래 걸리는 터라,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허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마차나 말로 이동하는 것이 더 빨랐다.

"필요한 걸 좀 사와. 노숙이 불가피한 지점도 있을 것 같으니까."

현재 열차가 멈춰 선 브레히트는 수도에서 알로이스까지의 여정에서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가는데 사흘 이상 걸린다는 소리다.

'물론 열차가 무사했다면 내일 오전에 도착했겠지만.'

어차피 안 될 것을 알았다.

막말로 내가 사고를 예방하거나 완벽하게 막았다고 해도 정시에 도착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역에 흑마법사가 출몰했는데 열차가 정상 운영될 리가 있나.

그렇기에 나와 브랜틀리의 짐은 3일 치에 맞춰져 있었으나 르나르의 경우는 달랐다.

문이 있는 방향으로 가볍게 눈짓하며 말을 던졌다.

"근처에 시장이 있어. 브랜틀리와 같이 다녀오도록 해."

"너는?"

"좀 쉬고 싶네. 숙소에 있을게."

"…정말 괜찮은 거 맞나?"

"피곤할 뿐이야. 오늘만 쉬고 내일은 브레히트의 자랑을 구경하러 갈 거고."

"경매장인가."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보고 가면 좋잖아."

부드럽게 웃으며 품속에 있던 종이를 꺼내 보인다.

카탈로그 형식의 종이에는 이번 경매에 나오는 물품의 소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레발딘의 루비 목걸이,

성 클레멘타인의 수기.

영웅 이졸데의 소장품....

하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종이를 르나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번 경매 막바지에 '시빌라의 심안'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 말에 르나르가 어색하게 굳었다. 떨떠름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게 뭔지 모르는 브랜틀리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조곤조곤 질문을 던졌다.

"심안이요?"

"세계와의 소통, 그러니까. 마나의 '인지'에 도움을 주는 마도구야."

"시빌라라면, 대마법사 시빌라인가요?"

"맞아. 어디에서 봤어?"

"'마나의 4차 형질 변환에 대하여'를 쓴 사람이잖아요."

"똑똑하네. 그 사람이야. 대마법사 시빌라가 만든 마도구거든."

태연한 나의 반응에 르나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르나르가 말했다.

"그거, 장물이잖아?"

029화 암시장에 가면

브랜틀리의 입이 합 다물렸다. 당황한 푸른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내 입은 여전히 뚫려 있었다.

"문제 있어?"

내 알 바냐?

하지만 이런 내심과 별개로 약간의 변명을 해 둘 필요가 있었으므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여긴 브레히트인데."

내 말에 르나르의 태도에 떨떠름함이 한 겹 추가로 둘러졌다.

브레히트 경매장.

그곳은 바로 당일 판매된 물건을 낙찰받는 데 성공한 사람에 한하여 추가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그리고 이 추가 경매에 나오는 물건의 출처는....

'암시장이지.'

브레히트 경매장이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반 손님들은 대규모 경매를 즐기고 돌아간다.

돈 있는 이들은 '특별한' 물건을 관람할 기회를 제공받는다.

경매장의 '알려지지 않은 층'에서.

'물론 심안이 판매될 장소는 그 '추가 경매'가 아니고, 암거래가 추가 경매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얼추 맥락에 맞는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리자, 르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스타프 후작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걸로 아는데."

"뭐 어때. 내가 훔친 것도 아니고."

"…이런 곳에 자주 오나?"

"이번이 초행인데."

"…일단은, 알겠어."

용인을 의미하는 말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동시에 르나르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눌러 쥐는 소리가 났다. 묘한 언짢음이 묻어났다.

나는 르나르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후작과 사이가 좋지 않거든."

"…왜?"

"그가 내게 작은 잘못을 했는데...."

손끝으로 내 입매를 덧그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거기다 아주 사소한 보복을 해서 말이지."

"…보복?"

"그냥."

대단한 건 아니었다.

내 집에 첩자를 심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주군이 주최한 연회에서 사람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스릴 넘치는 경험을 하게 해줬을 뿐.

'그리고 그를 해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는 증거를 남기지 않았지.'

소름이 좀 돋았을 것이다. 사흘 정도는 잠이 안 왔을 터.

하지만 여기까지 떠올리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진짜 별거 아니네.'

놀라기야 했겠지만… 따지자면 받은 이득이 더 크잖아?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했던 1황비를 살려줬으니.

생각보다 내가 순한 맛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정도야."

"그래?"

"그럼."

그렇게 말하며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였다.

르나르는 잠시간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후작의 물건이 털리건 말건 그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당연히 알 바 아니다.

그렇게 십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를 찾아온 두어 명의 경관과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섰다.

북적이는 브레히트 광장의 거리를 가로지르며 근처에 잡아 둔 숙소로 이동했다.

혼자서 가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으나,

"피곤하다며. 가는 동안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게."

"같이 간다고 딱히 네가 도움이 되지는...."

"...."

"...."

"와. 혼자 가기 무섭네. 좀 지켜줄래?"

르나르는 물론 브랜틀리까지도 불만스러운 기색이라 어쩔 수 없었다.

분명 하나는 제자고 하나는 시종일 텐데, 이러는 걸 보면 아주 상전들이 따로 없다. 비위 맞추기 한 번 더럽게 힘들었다.

그렇게 호텔에 짐을 푼 후 두 사람을 내보내고 뚱뚱한 고양이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애우웅...."

호박색의 고양이는 나를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대더니 이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글동글하게 몸을 말고 세상 게으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꼴이 황당했다.

"자고 있으려고?"

"웨욱...."

"그래. 어디 가지 말고. 배고프면… 음."

임시 캔따개를 고용해주고 가야겠네.

호텔 로비에서 보았던 몇 명의 직원들을 떠올리고는 잭의 이마를 쓸었다.

물 끓는 소리 비슷한 것이 잭의 옹졸한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다녀올게."

그렇게 게으른 고양이를 멋대로 만지작대다, 내가 먹을 육포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호텔 로비의 사람에게 잭의 밥을 챙겨 달라는 부탁을 한 후, 이전에 구해 두었던 마도구로 눈 색과 머리 색을 바꾼 나는 직원이 잡아 준 삯마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쇼?"

"베랑 스트리트 32. 그리로 가주세요."

"베랑? 그, 거긴 좀… 구석진 곳인디...."

"부탁드려요. 약속에 늦었거든요."

적당히 미안한 기색을 보여주자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제....

'눈을 고치러 갈 시간이다.'

* * *

덜컹, 덜컹....

삯마차가 흔들리며 나는 불쾌한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고르게 정리된 길 위를 거니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

적당히 북적거리는 가게들을 차례로 둘러보곤 머리를 돌렸다.

'베랑 스트리트… 32, 71.'

내가 얻을 물건과 방문할 장소에 대한 정보를 차례로 되새겨 본다.

상실된 감각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은 총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마나를 이용해 감각기능을 강화하는 것.

왜, 판타지 소설 보면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일정 경지에 오른 마법사나 검사가 마나를 자신의 신체 기관에 집중하여 그 기능을 강화하는 것.

나 역시도 그런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지간히 회복이 급하지 않은 이상 득보다 실이 더 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그랬다.

'마법을 써서 감각기능이 상실된 걸 해소하겠다고 마나를 끌어 쓰다니.'

딱 봐도 해결책이 못 되지 않나.

더군다나 잘못했다가는 이후에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기간이 배가 되기까지 한다.

'남발했다가 두 달까지 벽돌로 살아 봤지.'

앞도 안 보이고, 소리도 안 들렸다.

냄새도 나지 않았으며, 무엇에 닿아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음식의 맛 또한 나지 않았다.

무려 두 달 동안이나.

'…하.'

당시를 떠올리니 습관처럼 갑갑한 느낌이 들어 옷을 고정하고 있던 매듭을 느슨히 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기에 짧게 숨을 내쉬며 차창에 이마를 대었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다. 실상 방법이라 할 만한 건 이게 다지만.'

여기서, 그 두 번째 방법.

'마나 포션.'

마나 포션을 섭취하면 감각이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이 또한 정확한 원인은 알지 못하지만 검증은 된 해결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도 구하기 쉽지 않지.'

시고 떫고 밍밍한 포션의 맛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현재, 제국에서 제대로 된 연금술사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상등품의 포션을 제조할 수 있는 자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과거 전쟁 시대에 공을 세웠던 연금술사가 모종의 이유로 처형된 이후로 연금술, 특히나 연금술로 제조한 물약에 대한 인식이 나락으로 떨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

어두운 갈색의 긴 머리칼,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

르나르보다는 훤칠하고 프리드리히보다는 왜소한, 단정한 외모의 미남자를 머릿속에 그리자 자연스레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베르트람 디트리히.

그는 전 디트리히 공작부인의 유일한 아들로 후처인 현 공작부인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가문 밖으로 내쫓긴 디트리히 공작가의 장남이다.

'관련된 스토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지금 따질 건 아니고.'

톡, 톡.

손끝이 차창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가 났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조심해서 다니쇼. 요즘 흉흉하니까는… 그리 혼자 다니면 좋지 않어."

"염려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어색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걱정의 말을 건네는 마부에게 적당히 대답한 후 거리로 들어선다.

흩어져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내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들을 자연스레 흘려넘기며 나를 주시하고 있는 이들을 살폈다.

깡마른 이들이 절반이었고 남은 절반은 외형만으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싸맨 것으로 보아 아프거나 뒤가 구린 자들로 보였다.

'베랑 스트리트. 그것도 32 구역이라면 빈민가니까.'

약간의 기대감, 조금의 적대감. 상당한 불온함이 담긴 기척들을 스쳐 가며 계속해서 베르트람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아는 그에 대한 정보는 아주 많았으나,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가 6서클 마법사이자, 상등품의 포션을 제작할 수 있는 연금술사라는 사실과....

'이전 생에 그를 개처럼 부려먹었던 나는 그가 포션을 어디에 보관하고,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 안다는 사실.'

매 회차, 나는 가문에서 쫓겨나 생고생을 하고 있는 그를 주워다 구슬렸다. 내게 충성에 이어 목숨까지 바치게 만들었다.

그 과정은 아주 쉬웠다.

사람을 다루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길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쥐여 주는 것이고, 그가 원하는 것은 제법 값싼 것이었으니.

베르트람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그만의 공간을 원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 주는 누군가 역시 원했다.

나는 그에게 그 두 가지를 모두 주었다.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은 공간을 내어주었고 안전을 보장했다.

다섯 번 난리 치면 여섯 번 용서했다. 실수에 너그러웠으며 항상 그의 의견을 물었다.

공작가의 실권을 되찾는 것에 도움을 주면서도 티 나게 생색을 내지 않았다.

딱 1년.

그 짓을 1년 정도 하고 난 후, 공작가의 실권을 되찾는 것을 목전에 둔 베르트람이 내게 물었다.

'공작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디트리히 공작가의 장남을 구슬려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냐고.

답은 뻔했다.

뭘 물어? 당연하지.

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가 중 하나를 얻기 위해서 품을 들였다.

7서클 마법사이자 6클래스 연금술사에게 투자한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바라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얘기하거나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를 향한 호의가 목적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배신감을 불러올 수 있었고 호의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제공했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거짓이니까.

나는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에게 답해 주었다.

'맞아. 처음에는 그랬지.'

우선 긍정을 통해 진실성을 높여 준 후,

'…하지만 그대를 신경 쓰는 것 역시 사실이야.'

약간의 양념을 친 뒤.

'나도 가문의 내놓은 자식이다 보니… 음, 여러모로 마음이 쓰이더군.'

적절한 당위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말을 건네었다.

눈치를 보는 척 그를 살피자 어쩐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 보였다. 이전의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불안한 시선을 보내다, 허탈한 듯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가문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리 마음 쓰지 마. 그대에게 신경 쓴 건 내 욕심이 맞아.'

이후로는 게임 끝이었다.

그는 내게 그야말로 모든 것을 주었고, 나는 개중 내가 필요한 도움들을 골라 받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의 정보는 내가 그에게 받은 '도움' 중 하나였다.

"다 왔군."

녹이 슨 파이프로 둘러싸인 71번 건물.

암적색 벽돌을 쌓아 세운 을씨년스럽고 불길한 장소. 익숙한 풍경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이 시점에 베르트람의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체로 성격이 더러웠는데, 이 시점의 그는 그러한 단점이 특히나 두드러졌으니.

조금 더 기다리며 그가 사회성이라는 것을 학습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내 행선지가 알로이스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내게는 마법이 필요했다. 마법을 사용하고도 멀쩡한 눈과 귀, 코를 포함한 몸 역시 필요했다.

나는 반드시 알로이스를 얻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으므로.

'조만간 알로이스 자작가에 날아들 비보를 막아야 하니까.'

또한 그 대가로 알로이스를 얻어야 한다.

왜?

'마리아를 영입한 후, 이어질 귀도와의 전쟁에 끼어들어야 한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예견된 전쟁은 셋이다.

하나. 프리드리히가 복권되는 계기. 귀도와의 전쟁.

둘. 접경국인 오베론과의 접전.

셋. 대제국 스테파노와의 전면승부.

물론 셋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내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 첫 번째, 귀도와의 전쟁이다.

왜냐고?

머릿속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선명한 한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는 생각을 마무리 짓는다. 답은 뻔했다.

'프리드리히의 입지를 줄여야 해.'

030화 클리셰 파괴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