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클리셰 파괴범
프리드리히는 귀도와의 전쟁에서 화려하게 승리하고 수도로 귀환할 예정이다.
민중의 영웅, 구국의 용사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은 채 방심하고 있던 황족들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는 뜻이다.
'이건 정말 좋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슈퍼 루키에게 기존의 권력자들이 두들겨 맞는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게 되지 않나.
'그리고 그 흐름은 아주 치명적이야.'
이는 요제프와 1황녀 에베렛에게 몰려 있던 권력자들의 시선이 일순간 1황자 프리드리히에게 옮겨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훼방을 놓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로이스가 필요하다. 반드시. 그 이유는,
'알로이스가 군권을 일부나마 소유한 가문의 터전이자 요충지라서… 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마리아가 필요해. 지금의 내게는 쓸만한 기사가 없으니까.'
물론 귀도와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내가 힘을 되찾은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깽판도 치고 공적도 세우고 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전 회차에서의 상황과 달리 현재의 나는 전투에만 온전히 치중하는 것이 어려웠다.
전쟁 중 다른 분야에 손을 대는 것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참전 시 프리드리히와 기싸움을 해 지휘권을 뜯어낼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당장 이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외에는 없었으니.
'그와 치고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쁠 거야. 물론 요제프가 있기는 하지만....'
최고로 잘 나가고 있는 황자에게 '제대로 비상하기도 전인 버려진 황자를 견제하기 위해 궁 밖으로 나오십시오' 같은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나와 함께 싸워 줄 쓸만한 기사가 필요했다.
'르나르가 있기는 하지만, 르나르는 검증된 실력자가 아니다.'
그렇게 치면 베르트람을 꼬드겨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당장의 그는 공작가를 장악하는 데 집중하는 게 나았다.
짧은 전쟁에서 나름의 후광을 얻어 돌아온 마법사와 디트리히 공작가를 장악한 소공작.
둘 중 어느 쪽이 필요한가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다.
그러니 현재의 베르트람은 자신의 앞에 산재한 문제에 집중해줘야 했다.
그의 가치는 타고난 싸움꾼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므로.
'당장은 내버려 둔다. 베르트람이 사회성을 좀 배우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을 가는 시점에 영입하는 게 옳아.'
그런 생각을 하며 로브를 눌러쓴 나는 클루이 잡화점이라 쓰인 팻말이 달린 문을 천천히 열었다.
끼이익,
딸랑―
"손님이오?"
잡화점의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에 시선을 고개를 돌리며 잡화점 안을 둘러본다. 진열된 골동품들로부터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적당히 천장에 달려 있던 기괴한 모양의 모빌에 관심을 주는 척하자 나를 관찰하던 주인이 점차 흥미를 잃어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짧게 기지개를 켜고 낡아빠진 주전자를 기울이며 주인이 말했다.
"만지지만 마시오."
그 여상한 물음에, 물건에서 시선을 떼며 던지듯 물었다.
"유령이라도 나옵니까?"
순간 주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서늘한 기류가 공간을 천천히 물들인다.
조금 전보다 공격적인 태도로 나를 둘러본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죽은 자를 만나러 오셨소?"
나는 답했다.
"빛이 듭니까?"
나를 바라보는 잡화점 주인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사실 시야가 흐린 것에 더불어 주위가 어둡기까지 한 탓에 그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으나, 뻔뻔하게 그의 얼굴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바라보며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쯧, 짧게 혀를 찬 그가 던지듯 말했다.
"또 무슨 소문을 듣고 온 건지. 3층에 있다오."
"고맙습니다."
잡화점 주인의 손이 내저어졌다. 빨리 꺼지라는 신호였다.
적당히 어색한 미소를 보여 주며 걸음을 옮겼다. 이어지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좁은 복도를 가로지른다.
오래된 물건들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점차 사그라들며 마나의 농도가 점차 짙어졌다.
'그리고 2층.'
'통로'로 가는 문.
중첩된 마법을 두른 문을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마법을 부수는 순간 신호가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오래된 문 위에 손을 얹었다.
마법의 중심이 되는 원. 그 위로 손끝을 가져다 대며. 주사기 속의 약물을 주입하듯 미량의 마나를 흘려 넣는다.
화악―
백색의 빛이 퍼져 나가며 마법을 이루는 근간이자 마법사와 세계를 잇는 통로. 완벽한 형태의 원이 눈앞에 드러났다.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마나의 격동을 느끼며 나는 차분히 마법사의 '의지'를 살폈다.
이것은 만프레도 지하에 걸려 있던 허접한 마법과는 달랐다. 단순히 공격을 위해 일시적으로 응축한 에너지와도 달랐다.
보다 치밀하고 강력한 진짜였다.
'이리 꽁꽁 숨겨둘 만도 하지. 여긴 암시장의 입구니까.'
천천히 수식에 박혀 있는 '의지'를 열람하고 그를 되짚는다. 눈앞에 책 모양의 형상이 떠오르며 바람이 불었다.
후우욱.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힘의 흐름을 느끼며 손에 힘을 준다.
불꽃을 연상시키는 마나의 집약체가 허공을 휘돌았다.
화려한 다섯 개의 황금빛 원이 내 눈앞에 그려지며 반짝, 내 손 안에 한 자루 펜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 마나로 이루어진 '변칙'에 이름 모를 마법사가 걸어 놓은 마법의 '용도'에 반하는 의지를 박아 넣는다.
촤악!
팔이 뻗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손안의 펜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긁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책의 형상이 내 손을 기점으로 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그극―
거슬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룬어로 된 글씨가 황금빛 원을 타고 한 바퀴 돈 후, 백색의 수식 위에 덧그려진다.
[경보] 위에는 [해제]가,
[결합] 위에는 [분해]가,
[강화] 위에는 [약화]가,
[은폐] 위에는....
"…가시화."
그리고 남은 하나의 원에는 소리를 차단하고 싶다는 뜻을 채워 넣는다.
"여기까진… 됐고."
풍선에 공기를 불어넣듯 그 모든 '의지'들을 단숨에 밀어 넣자,
후우욱―
쩌엉!
쩌저저저적―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내게서 '용도'를 얻은 마나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격동하며 백색의 원 위를 누볐다.
그에 따라, 백색의 수식, 룬어가 점차 흐릿해지며 황금빛 마나가 작렬했다.
두 가지 의지가 충돌하며 공간이 밝게 빛났다.
화아아악!
쓰임을 다한 마나의 파편이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감전되기라도 한 듯 찌릿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져 오며 눈앞이 더더욱 흐려진다.
잠시간 자리에 멈춰 서 눈가를 문지르다가 힐끔 뒤를 살폈다.
아래층의 직원이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소리의 차단에도 성공한 듯싶었다.
'번거롭네.'
본래 허가를 받고 방문한 사람이라면 이런 요란한 방식으로 2층의 문을 해제할 필요가 없다.
제공받은 증표를 가져다 대기만 하면 문은 열리니까.
끼이익, 낡은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선다.
먼지 때문인지 간질간질한 코를 한차례 문지르고는 방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허름하지만 1층과 달리 어느 정도 정돈이 되어 있는 장소였다.
읽은 흔적이 있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장.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소파와 그 위에 얹어진 쿠션이 내 앞에 자리했다.
이 모든 것을 지나쳐 그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역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허접한 사다리가 나온다.
나는 그 사다리의 뒤에 위치한 벽을 잠시간 바라보다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장에 손을 얹은 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며 책의 순번을 세었다.
7번째,
76번째,
179번째.
그리고....
"217번째."
네 권의 책을 책장에서 빼내자,
끼이이익―
사다리 뒤편의 벽이 열리며 통로가 드러났다. 어둑한 통로 내부를 살핀다.
밀폐된 공간 특유의 묘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갑갑해져 오는 듯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 통로에 발을 들인 직후 자동으로 입구가 닫힌다.
'밀폐된 어두운 공간에, 눈도 잘 안 보이는 채로, 홀로....'
좀 싫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다. 예감이 안 좋았다.
잠시 고민하다 짧게 숨을 내쉬며 손을 펼쳐 보였다.
화악.
황금색의 작은 원이 내 손 위에 그려지며 밝게 빛났다.
'어차피 고칠 거니까. 그냥 편하고 말지 뭐.'
그렇게 빛을 마련하고 내부를 살피며 발을 내딛었다.
드르륵,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나며 입구가 닫혔다.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폐 속에 든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어쩐지 갑갑한 목을 만지작거리며 최대한 주변을 의식하려 애쓴다.
이곳이 어딘지, 어째서 이곳을 지나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되뇌며 발을 움직였다.
저벅, 저벅....
계속해서 울리던 소리는 십여 분이 지나서야 멈추었다.
"후우...."
통로의 끝에 자리한 벽을 마주 보며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쯤에 있었는데.'
잠시간 자리에 서 문의 주변을 살핀다.
빛이 제대로 드는 공간도 아니거니와 시야가 실시간으로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관찰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탐지한 끝에 나는 작게 홈이 파진 부분을 찾아냈다.
그곳에 파묻혀 있는 작은 보석에 마나를 흘려 넣는다.
드르르륵―
작지 않은 소리와 함께 벽에서 손잡이가 솟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잡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 열쇠는 마나를 담아서 내뱉는 말이니까.'
주문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을 되짚으며 입을 움직인다.
"[서른두 번째 지하에도 빛은 든다오]"
그 말을 끝으로,
치지직,
치직―
쿠르르르릉―
진동이 벽을 타고 전해져 왔다. 상당히 흐려진 내 시선에 손끝에서 점멸하는 빛과 서서히 열리는 문이 잡혔다.
쿵.
제법 큰 소리가 울린 직후, 문 너머의 공간에서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며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와 동시에 나선형으로 되어있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안을 내려다보고는 벽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간다. 저벅, 저벅.... 작은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렇게 10여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눈앞에 자리한 허름한 문을 마주하며 섰다.
잠시간 심호흡으로 속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문을 밀어젖힌다.
끼릭, 끼익―
불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밀려나며 제법 큰 공간이 나타났다.
031화 곰팡이 핀 식빵
그곳은 동굴 같기도 했고, 폐허가 된 건물 같기도 했다.
느릿하게 걸음을 떼고, 제법 넓은 공동을 가로지른다. 머지않아 음침한 거리와 그 거리에 대낮부터 퍼질러져 있는 사람들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불결한 연기를 가로지르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간다.
두어 명의 시선이 찰나 간 내게 와 닿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힐끔.
그들의 몰골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한량처럼 누워만 있는 꼴이 썩 위험해 보이진 않았으나 이들 또한 암시장 안에 있는 자들이었다. 엮여 봐야 좋을 것 없었다.
'그나마 이 근방은… 그렇게까지 위험한 구역은 아니지만.'
암시장 내부에도 나름의 구역이 있다.
이는 암시장의 규모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0구역.
약과 무기가 거래되는 1구역.
중범죄자들이 주로 머무는 위험지대 2구역.
사소하고 천박한 범죄가 들끓는 3구역.
힘없고 돈 없는 이들이 머무는 4구역.
그리고 이곳은 4구역이다. 그것도 아주 후미진 위치.
베르트람은 공방을 짓고 암거래를 진행하되, 그를 소위 말하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장소로 만들었다.
'귀족 자제가 대놓고 암시장에 드나드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으니.'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자 주위의 몇 명이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가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쉽게 말해 돈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를 스쳐 가며 눈가를 좁힌다. 갈 길이 멀었다. 저런 자들에게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과 동시에,
툭.
실수인 척 주머니 하나를 떨어트렸다.
"이, 이, 이이게 무슨 횡재...!"
"…청한 새끼가!"
"모, 모두 손대지마, 내 거, 내 거야...!"
짐을 옮기는 척 내게로 접근하던 두어 명의 사람이 헐레벌떡 그리로 몰려들었다.
"이런! 겨우 마련한 대금이...!"
직후 어설프게 허리춤을 더듬어 정말 실수로 주머니를 흘린 척을 해주자 주변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몇 명의 사람이 다툼에 가세했다.
'이걸로 됐고.'
다른 이들이 이상을 눈치채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놀렸다.
"이거 뭐야? 육포?"
"머, 먹을 거...."
"돈이 아니잖아! 이게 무슨...."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주변을 살핀다.
역시나. 내가 찾던 곳이었다.
바 데트니.
짧은 이름이 음각되어 있을 간판을 일별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선다.
적당히 넓은 실내에는 저들끼리 모여 도박을 즐기거나 술을 마시고 있는 손님들이 가득이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술 냄새와 기름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주변을 훑다 내가 찾던 자를 발견하고. 바 테이블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각종 술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 앞에 서 와인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와 그 근처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거기다,
'왼쪽의 하나까지 도합 네 명.'
소리라도 차단해야 할까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명백히 지켜보는 이가 있는 상황에 불법 마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척 불안한 기색을 흘리며 눈동자를 움직인다.
툭.
작은 소리와 함께 바텐더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동시에 그녀의 눈치를 본 두 명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역시 장사 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텐더,
아니.
베르트람의 수족, 카멜라.
그녀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메뉴판을 뒤적인다.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대기하자 무심한 목소리가 물었다.
"약속을 잡고 방문한 것도 아닌 듯한데. 메뉴까지 마음에 안 드시나?"
익숙하고도 투박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에 나는 Des brecht, 딱 봐도 수상한 이름의 칵테일 바로 아래에 있는 평범한 메뉴를 손끝으로 쿡 찍었다.
사실 반쯤 감으로 때려 맞춘 위치인지라 정확히 짚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텐더의 태도에 찰나 간 묘한 기색이 물든 것으로 보아 제대로 고른 듯싶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세 차례 두드린다.
똑, 똑, 똑.
작은 소리가 끝맺어짐과 동시에,
챙그랑!
"세상에나, 죄송합니다! 어떡하지… 죄송해요!"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하고 말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얼른 치우겠...."
"아무리 싸구려래도 그렇지! 도대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소란이 발생하며 다른 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큰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심용으로 나온 탄산수를 홀짝인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 바텐더가 물었다.
"그걸 주문하시게? 보통은 잘 안 드시던데. 추천이라도 받았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요."
내 대답에 바텐더의 손이 등 뒤로 향했다. 내가 '새로운 거래처'가 되기 위해 왔음을 알아듣고 저들끼리 무언가 사인을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재미있는 도련님이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그에 나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티모시 하만. 작은 상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귀족이었나?"
"한때는요."
회귀 직후, 만들어 둔 위장 신분이었다.
이름, 티모시 하만. 수도의 작은 상단 '네이선'의 주인인 몰락 귀족.
주로 취급하는 품목은 사치품과 마도구. 그리고....
'연금술 포션까지. 물론 이건 내가 마실 거지만.'
두 손을 맞대고 자본주의 미소를 그려낸다. 돈을 좇는 자 특유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연기하며 바텐더의 형상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 행색을 재빠르게 스캔하길 완료한 그녀가 물었다.
"작은 상단에서 그런 것을 취급하시려고?"
여전히 미심쩍다는 태도.
그에 나는 입가에 그려진 미소의 농도를 올리고는 술이 담긴 잔 하나를 끌어와 내 앞에 놓았다.
'리큐르… 럼인가? 오랜만에 냄새 맡으니 좋네. 밍밍한 와인에 질려가던 참이었는데.'
그리 생각하며 손끝으로 잔의 테를 가벼이 덧그린다.
팅.
작은 소리와 함께 은화 하나가 럼이 든 잔 안으로 떨어졌다.
나를 관망하는 시선을 느끼며 말을 잇는다.
"상단의 규모가 작기는 합니다. 만든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거든요."
"...."
"하지만."
순간,
팍!
은화가 모습을 감추며 내가 그린 원에서 푸른 빛이 튀었다. 차가운 불꽃이 순식간에 피어오르며 시야가 훅 꺼졌다.
지금까지는 형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들어오는 빛을 잡아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눈이 제 기능 대부분을 상실한 것이다.
한계를 직감하고 손을 뗀다. 찰나 간 눈을 감았다 뜨며 울리는 머리를 진정시킨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잔을 앞으로 밀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푸른색 불꽃이 잔을 휘감으며 제 존재를 과시했다.
"규모가 전부는 아니지요."
"연금술에 조예가 있군."
"알기만 하는 정도입니다."
겸손한 대답이었으나 바텐더의 태도가 누그러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베르트람의 수족.
3클래스 연금술사 카멜라.
그녀는 연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금술을 아는 자들에게 후했다.
'물론 나는 연금술 문외한이지만 흉내 정도야 어렵지 않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답을 기다리자 잠시간 고민을 이어가던 카멜라가 물어 왔다.
"원하는 게 뭐야?"
나는 답했다.
"마나 포션. 있는 것 전부 주십시오."
"오?"
"또한 고정적인 공급을 원합니다."
"마나 포션은 효용이 적은 것은 물론 보통 가격이 아니야. 알고 말하는 거지?"
알고말고.
나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죽 잡아당겼다.
포션에 다량의 마나를 '저장'하는 기술은 상당히 고급 기술이다.
하나 그 기술은 취득이 어려운 반면 가성비가 나빴다.
'보통은… 특정 희귀병의 병세를 완화하는 데 쓰인다고 하지.'
혹은,
'마나 폭주를 일으킨 직후의 마법사나 마나 고갈이 심하게 이루어진 사람의 치료에 쓰이거나.'
하지만 이런 케이스는 잘 없다.
그렇기에 마나 포션은 연금술 물약 중에서도 계륵으로 유명했다.
다른 치료용 포션이나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해주는 포션. 섬광탄 대용으로 쓸 수 있는 포션 등에 비해 재료도 비싸고 만들기도 어려우며 찾는 사람도 적으니.
'하지만 내게는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벼운 투로 말했다.
"요즘 기가 허해서 말입니다. 제가 먹으려고요."
"말하기 싫으면 마. 우리야 돈만 벌면 그만이니."
어쩐지 질린 기색이었다. 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감 없는 진실인데 믿지를 않는다.
흑마법사들도 카멜라도 너무했다. 사회는 이리 차갑고 의심병자들이 넘쳐났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맥락에 맞는 거짓말을 주워섬겼다.
"괜찮은 공급처가 생겼습니다. 돈이 될 것 같아 와봤습니다."
"그래, 그래. 어느 귀족가 뒷문이라도 땄나 보지."
카멜라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적당히 납득한 것 같았다.
곧바로 가벼운 손짓으로 몇 명의 사람을 부른 그녀가 내 앞에 둔중한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쿵!
제법 큰 소리가 들려오며, 멀리서 직원과 진상이 내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티 나지 않게 주위를 한차례 탐지한 후 병의 개수를 세었다.
넷,
다섯.
스물....
'스물?'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약간의 당황이 머리를 스쳐 갔다. 카멜라가 물었다.
"충분한가?"
"제 예상보다 물량이 많군요."
"돈 부족해?"
"선금을 낼 정도는 있습니다만, 차액은 상단을 통하여 차후에 지불해야 할 듯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
'…뭐지?'
반사적으로 입이 딱 다물어졌다. 불쑥 의심이 치솟았다.
내게서 의심의 기색을 읽어낸 카멜라가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는데, 넌 돈 떼먹을 놈은 아닌 것 같거든."
"그렇다 치죠. 값은 어떻게 됩니까?"
"1만 하르탄."
'2만이 아니라, 1만.'
그녀의 말은 떠오른 의심에 제대로 불을 지폈다.
공방주, 그러니까 이 주점의 주인인 베르트람은 보통 까다로운 놈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는 특히나 더 그랬다.
사람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나조차 마주치기 꺼려져 피할 정도였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그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고, 꼭 그 상처만큼의 칼날을 품고 사는 자였다.
'그래서 위험할까 봐 르나르와 브랜틀리를 떼 놓고 온 건데....'
그런데 이렇게 쉽게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그의 수족이, 그의 물건을 이리 쉽게 내어 준다고?
'가품인가?'
차오른 의심을 꾹꾹 눌러 담은 태도로 카멜라와 술병 안에 담긴 포션들을 살핀다.
잠시 고민하다 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곧바로 코르크를 땄다. 병에서 흘러나온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카멜라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느끼며 병 안에 든 액체를 쭉 들이킨다.
고개가 젖혀지며 시큼하고 떫은 향이 식도를 타고 떠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다. 표정이 절로 짜게 식었다.
'…기억상으론 그래도 물 탄 석류식초 엇비슷한 맛이었던 것 같은데 이건 정말 식초 맛이네.'
하지만 그 효능만큼은 진짜였다.
어렴풋이 색으로만 물체의 구별이 가능했던 시야가 확 트였다.
병 안의 액체를 싹 다 때려 넣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천장의 타일 무늬는 물론 그 가장자리에 난 흠결까지도 선명히 보였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병이 테이블 위에 얹어지며 떨떠름한 감정이 짙어졌다.
트인 시야가 어색해 눈을 수차례 깜빡이며 회복까지 걸린 시간을 계산했다.
'대략 2분 정도.'
빠르다.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품질의 포션이라면 두 병을 마시고도 30분 정도는 지나야 효과가 드러났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2분?
"…이거, 진짜군요."
입가를 닦으며 병에 붙은 라벨과 카멜라를 번갈아 바라본다.
건조한 회갈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오르는 경계심을 가라앉히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최상품입니다. 적정가가 아닌 것 같으니 가격을 다시 살펴 주세요."
나는 양심이라면 먹고 죽으래도 없는 놈이었다.
남이 주는 호의는 그냥 받아먹는 게 미덕이라 생각하는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잘못 먹으면 탈 나. 베르트람의 뭘 믿고 덥석 받아?'
아무리 공짜 좋아하는 사람이래도 곰팡이 핀 식빵 무료 나눔은 사절인 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나 포션은 주문이 자주 들어오는 물건이 아니며 솔직히 이렇게까지 공들여 만들어 둘 이유도 없었다. 비싸고 쓸모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전량 구매를 말하자 카멜라는 무려 20병을, 그것도 최상품 최저가로 가져왔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무슨 수작이야?'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의심의 시선이 짙어져만 갔다.
032화 가치 증명
계속해서 불순한 감정을 눌러 담은 시선을 보내어도 카멜라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돈을 무진장 좋아하는 그녀가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태도였다.
카멜라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공방주님이 그리 받으라고 하시네."
나는 공방주, 베르트람의 의도를 구체화하기 위해 질문을 덧붙였다.
"모든 구매자들에게요?"
"글쎄. 일단 말씀하신 조건에 도련님은 해당이 돼."
"공방주는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 안 계셔. 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시지."
"제게 이런 값을 쳐 주라는 명은 언제 받으셨지요?"
내 물음에 카멜라의 표정이 변했다. 명백히 언짢아하는 기색이었다. 팔짱을 끼며 삐딱한 미소를 지어 보인 카멜라가 말했다.
"그걸 내가 말해줘야 하나?"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기야, 어찌 되었건 간에 이건 호의였다. 그것도 정말로 큰.
나에게는 그녀는 물론 그녀의 뒤에 선 사람을 추궁할 자격이 없었다. 날 구해준 사람의 보따리를 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 상황 자체가 내게 매우 큰 이득이기도 했다. 현재의 나는 포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러니 우선 한 발 물러난다.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차후 연락은 이쪽으로 주십시오."
바텐더가 건네는 종이에 티모시라는 이름 앞으로 사둔 건물의 주소를 써준 후, 금화 여덟 개를 건네었다. 대금의 8할이었다.
챙겨 온 여비와 요제프에게 받은 돈이면 대금을 몇 번이고 지불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베르트람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근시일내로 다시 만날 구실을 남겨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카멜라는 '이만큼 깎아 줬는데도 일시불이 아니라니, 뭐 이런 구두쇠가 다 있나'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상황이 이상하긴 한 모양이지.'
그렇게 구매한 포션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지체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어서 르나르와 브랜틀리가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들어가 쉬고 있었던 척을 해야 했다.
남아있던 탄산수로 입을 헹구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의 카멜라가 나를 노려보았다.
대략적으로 주변을 살피고, 손짓으로 가게 내부의 소란을 저지한 그녀가 물었다.
"바로 가려는 거지?"
"예. 실례했습니다."
위조 신분상의 사람을 연기하며 깍듯이 고개를 숙인다. 찰나 간 카멜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더 할 말이 있을까?
그녀가 본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눈동자를 굴려 가게 안 어느 한 위치를 일별한 카멜라가 말했다.
"…도련님, 몸조심해."
아주 의외의 말이었기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웬일로?'
제가 말하고도 적응이 되지 않는지 그녀가 멋쩍은 태도로 머리를 긁적였다.
또 조금 뜸을 들이다 고개를 숙여 머리를 내게 가까이한 카멜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공방주님은 참 괴팍한 사람이거든."
"...."
"잘못 걸리면 좋은 꼴 못 봐."
'역시 뭔가 있는 걸까?'
묘한 기분이었다. 현재 베르트람의 상태를 잘 아는 것이 아니기에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 파악이 힘들었다.
물론 카멜라는 고용주인 베르트람의 성깔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고, 이전 생의 나는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준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카멜라는 본래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건네며 고용주를 욕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연히 이 말 또한 단순한 푸념이라 보기 어려웠다.
'구매한 포션들 중에 독이나 다른 게 섞여 있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 내게 잘 해주라 한 걸까.'
그런데 베르트람이 나를 어찌 알고? 이번 생의 나는 별달리 한 일이 없는데.
'하지만....'
이어지던 몇 가지 가설들을 머릿속으로 집어넣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인다.
그에 따라 카멜라의 표정이 묘하게 떨떠름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나름대로 정보를 준 것은 고맙다. 하지만 휘둘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충고 감사합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만. 마음대로 해."
"걱정 마세요."
짧게 고개를 까딱이며, 조금 전 그녀가 일별했던 위치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한시도 내게서 눈을 떼고 있지 않던 한 손님.
나를 주시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어떤 사람.
그를 한차례 살피고는 다시금 카멜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말했다.
"공방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제 성격이 더 나쁠 거라서."
"…뭐?"
"그가 저와 잘못 엮인다면...."
베르트람 디트리히. 그가 모종의 이유로 나와 반목하게 된다면.
그래서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 온다면.
"당신이 걱정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닙니다."
가감 없는 진실이었다.
어쩐지 멍한 표정의 카멜라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물러났다.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카멜라와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두어 명의 직원들이 문간에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들어올 때 거쳐 왔던 문이 다시금 열리며 바깥의 공기가 내 뺨을 스쳤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그자가 맞습니까?"
조금 전에 비하여 한결 건조해진 목소리가 카멜라의 입가를 데웠다.
그녀가 있던 방향을 주시하던 사람.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는 연금 공방의 주인.
디트리히 공작가의 장남, 베르트람 디트리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장갑에 감싸인 손이 가볍게 까딱였다.
찰나 간 푸른 눈동자를 반짝인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가만히 있었겠지?"
그 말에 카멜라의 얼굴이 미약하게나마 묘한 기색을 띄었다.
'역시… 뭔가 이상해.'
그녀의 주군. 베르트람 디트리히는 분명 티모시 하만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 관심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늘상 의뭉스러운 태도를 고수하는 그답지 않았다.
'거기다… 분명 티모시 하만이 처음이었지.'
베르트람은 여태껏 디트리히 공작 부부를 처분하는 것 외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인 이력이 없었다.
항상 그들의 일상을 보고받았고 그들을 향해 내뻗을 칼날을 벼리는 것에만 시간을 투자했다.
복수심.
그리고 증오심.
그 두 가지 감정을 품고서 공작 부부의 흠결을 찾아내는 데에만 신경을 쏟던 사람이 그였다.
공작성에 존재할 작은 틈 사이로 칼자루를 찔러 넣는 것만을 원하며 살아온 자가 그였다.
하지만 그런 베르트람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를 위해 연금술을 사용하고, 따로 편의를 봐준 것이다.
또한 짐작컨대....
'근래에 조사하기 시작하셨다는 '누군가' 또한 그 자일 확률이 높아.'
카멜라는 짧게 숨을 들이쉬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공기 대신 낯선 무언가가 폐 속에 들어차는 듯했다.
'불안해.'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가 티모시 하만에게 인간적인 호감 혹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다른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카멜라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 뒤틀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대상을 떠올리며....
'…저런 표정을 지을 리 없지 않나?'
힐끔. 곁눈질로 제 주군을 살핀 그녀가 입을 떼었다.
"…그리 신경이 쓰이시면 아는 척이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
"고작 몰락 귀족입니다. 공자님께서 나서셨다면...."
"내가."
흠칫.
짧은 말마디에 카멜라의 몸이 굳었다. 동시에 주변에 시립해 있던 직원들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태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서, 베르트람은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일견 다정하게 느껴졌으며 미소를 그린 베르트람의 얼굴은 보기에 상당히 좋았으나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었다.
베르트람이 미소를 지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소리 없이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려놓은 그가 말했다.
"네게 참견할 자격을 주었던가?"
명백한 질책의 말에 카멜라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공간에 적막이 흘러넘쳤다.
직원들은 물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객들마저 목소리를 죽이고 주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약간의 제스처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눈치 보게 만드는 존재.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베르트람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피 조만간 만나게 될 거야. 구태여 부산을 떨 이유는 없지."
"...."
"그건 지고 들어가는 거잖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카멜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긴장 탓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또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눈동자를 반 바퀴 굴린 그가 물었다.
"일은?"
조금 전의 실책을 만회할 기회였다.
계속해서 빠르게 뛰는 심장에 손을 얹고서 애써 입을 뗀 카멜라가 보고를 이어갔다.
"디트리히 본성 내부에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조만간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보다 빠르군."
"주군께서 전해주신 정보 덕입니다. 현재 1조가 비밀 통로에 잠입해 있습니다."
그 말에, 나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
천천히 누그러지는 기류에 편승하여. 공간에 소음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툭,
툭.
두 차례 더 손을 움직인 그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카멜라는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나 그녀의 젊은 주인이 조금 전 만난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도대체 그놈이 뭐길래?
작은 상단을 소유한 몰락 귀족이라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속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그래, 빠른 편이 좋지."
"...."
"그분께서는,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차가 없는 편이시니."
베르트람은 주어를 알 수 없는 말들을 이어갔다.
카멜라의 시선이 다시금 그를 살폈다.
호수를 닮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에게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비이성적인 태도였다.
짧은 침묵을 뒤로 하고, 그녀가 물었다.
"…시일은 언제로 할까요?"
그와 동시에 베르트람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시일, 시일이란 말이지. 그런 중얼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베르트람이 하나의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내일."
"...!"
"…을 기점으로, 3주 내로 공작저를 장악하고 곧바로 동부의 변경으로 가겠다."
그 말이 맺어짐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은 분명 대각선의 천장을 향하고 있었으나 어째선지 카멜라는 그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변명을 들을 거야."
나를 두고 그딴 짓거리를 한 당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들어보겠어."
카멜라로서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었으므로.
카멜라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을 주워섬겼다.
"주군의 뜻대로."
033화 젊은 놈이 말이야
'분명 베르트람이었다.'
브레히트에 잡아 둔 숙소 안.
요제프에게 받았던 '타리크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쓰인' 종이를 태우며 조금 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나는 포션을 얻기 위해 베르트람이 포션을 판매하는 장소로 들어갔고, 매우 저렴한 값에 물건을 구매했다. 그리고,
'날 주시하던 그를 봤지.'
그가 왜 여기 있었을까?
또한, 왜 나를 주시하고 있었을까?
여러 가설이 떠올랐지만 모두 탐탁지 않았다. 요제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기는 했으나....
'요제프에겐 적어도 짚이는 점 정도는 있었는데.'
베르트람과 관련해서는 전혀 짚이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12회차 후반의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그와 떨어져 있었다.
베르트람을 중앙에 밀어 넣은 직후 제국 스테파노와의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로는 연락이 잘되지 않았으니까.
"알 수가 없네. 도대체."
그렇다고 필요 이상 휘둘릴 생각은 없지만.
작게 중얼거리며 침대에 앉자,
"왜옥...."
이불 속에서 느릿하게 기어 나온 잭이 내 등에 박치기를 했다.
세게 친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들이민 채 힘을 주는 걸 보니 나름의 시위인가 싶었다. 내가 앉은 탓에 침대가 흔들려 깼나?
"내가 잠을 깨워서 열 받은 거야?"
"애우욱...."
"좀 참아. 종일 잤으면서."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따라오질 말았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주문해 두었던 음식으로 손을 가져간다.
잭에게 간식을 물려주고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으깬 감자, 겉면을 바삭하게 태운 돼지고기를 먹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방문이 열리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게...."
"노버트님, 깨어 계셨네요!"
"아오, 나는 안중에도 없지!"
"좀 드셨어요?"
"다 먹었어. 너희는?"
"…대충."
"공자님이 미트파이를 사주셨어요!"
르나르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가 시종을 흘겼다. 은근히 티격태격하는 꼴을 보니 그새 좀 친해진 것 같았다.
'그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랬지.'
노버트가 르나르보다 두 살은 더 어리다는 사실은 우선 묻어두기로 한다.
팔순 잔치 두 번 치르고도 여유 있을 나이에 10대 후반 핏덩이를 손윗사람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잘됐네. 즐거웠으면 됐어."
"아, 제가 할게요!"
적당히 손을 흔들어 주며 그릇을 한곳에 모으자 얼른 다가온 브랜틀리가 정리를 도왔다.
이후 침대 옆 협탁을 중앙에 두고 셋이 둘러앉아 짐 정리를 마무리하고 나니 두 시간 정도가 흐른 후였다.
잘 준비를 마치고 다시 모여 앉자 잭이 은근슬쩍 르나르의 잠옷에 달린 진주 장식에 관심을 보였다.
저를 장난감 정도로 보는 고양이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르나르가 입을 떼었다.
"시장이 생각보다 넓더라. 너는...."
르나르의 시선이 방안을 가볍게 훑었다.
내가 입고 있던 로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세탁을 맡겨 두었으니 알리바이가 있었다. 구태여 제 발이 저려 떠들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오래 걸린 거야?"
"…그래. 이것저것 사느라."
"재미있었겠네. 그간 두 사람 다 나다닐 기회가 잘 없었으니까."
"네. 그리고 브레히트는 처음이라 신기했어요. 공자님께서 이것저것 챙겨주시기도 했고."
"…보통이지."
그리 대단할 것 없는 답이었으나 르나르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기쁨이었다.
나름대로 형 노릇을 한 것이 뿌듯한 모양이었다. 그 꼴이 제법 하찮아서 웃겼다.
그에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이는,
"노버트님은 뭘 하고 계셨어요?"
브랜틀리의 물음에 저지되었다.
하지만 따로 꿀릴 것이 없었기에 당당히 말했다.
"잭과 놀아주고 있었지."
"웨우우웅...."
"생각보다 피곤하더라고."
그리 말하며 잭의 등을 쓸어내리자 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 '이게 자꾸 그짓말하네.'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분명 고양이인데 표정도 참 사람 같단 말이지.'
내 말을 들은 브랜틀리는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며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브랜틀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하지만 나는 베르트람을 만나고 온 사실도 내가 암시장에 출입했다는 사실도 공유할 생각이 없었기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어쩐지 조금 풀이 죽은 브랜틀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제게도 공유해 주세요."
"그래."
"말로만 그러시지 말고요."
"노력해 볼게."
그 성의 없는 대답은 여전히 브랜틀리와 르나르를 만족시키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별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두 사람 역시 머지않아 기운을 차렸다.
이어 그들을 자리에 모아두고서, 잔 세 개에 룸서비스로 받은 오렌지 주스를 따른 후 입을 열었다.
"나는 내일 미리 말한 대로 경매장에 갈 거야. 너희는...."
"같이 가."
"함께 가요."
'그렇게 말할 것 같긴 했는데....'
어쩔까?
고민이 되었으나 이를 티 내지 않고서 시선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시빌라의 심안'을 살 거야."
"구스타프 후작 본인이 오지 않을까?"
"후작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을 거다. 더 급한 일이 있잖아?"
그 말에 르나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후작은 1황비 시해 미수 사건으로 바쁠 것이다'라는 내 말의 진의를 알아들은 것이다.
이 사건에 르나르가 관여한 것은 없었다. 하나 큰 사건을 언급한 만큼 나름대로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별궁에 처박혀 있지 않았다면 르나르 역시 카지미르 백작이 쓰러지는 진풍경을 구경… 잠시만.'
근데 그래서 얘는 왜 거기 있었던 거지?
별궁은 특별히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도 아니다.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된다.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거긴 왜 갔어?"
"어, 어?"
"산책을 가기에 별궁은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잖아."
그 말에 르나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서 대체 왜 갔는데 그래?
그런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내자 잠시 후 제 머리를 벅벅 긁은 르나르가 체념 어린 투로 말했다.
"수, 술 먹고… 취해서 좀 돌아다니다가...."
"...."
젊은 놈이… 거 참.
옅은 질책을 담은 시선을 보내자 르나르의 얼굴이 민망함에 물드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머쓱한 감정이 일정 이상 차오르자 나에게도 공격이 돌아왔다.
"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 그러는 너는 왜 갔는데!"
답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직감상 흑마법사가 부르길래 대체 뭔 소리 하는지 들어나 보려고 따라갔다고 했다간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았다.
'놈들과 어쩌다 앙숙이 된 건지 썰도 좀 풀어야 할 테고.'
인자한 미소를 그리고 상큼한 주스가 든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을 돌렸다.
"그래. 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
"...."
날아드는 눈총이 좀 따가웠으나 무시했다.
하지만 대답을 피한 것과 별개로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다.
알로이스행에 동행하게 된 이상 브랜틀리나 르나르 역시 나의 사정에 대해 조금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도중에 타리크와 부딪힐 가능성이 있으니까.'
알로이스 지역과 접경국 오베론, 그리고 그 언저리에 주둔하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본래의 나는 이런 것을 설명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냥, 내가 한다면 하는 거지 토를 달아? 뒤지기 싫으면 따라라. 이렇게 가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이 둘은 내가 '길들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데는 아주 많은 방법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람을 '길들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잘 해주는 것이다.
잘 해주고, 원하는 것을 주고. 그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나를 아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
집사장 헨리나 이전 생의 베르트람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용한 방법이 이 방법이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내게 좋은 감정을 갖게 해 나를 거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나를 끔찍이 아끼거나 내 눈치를 필요 이상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손끝으로 입가를 더듬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두 번째 방법은 조금 더 쉽지만 매우 비인간적인 방법이다.
시선을 가라앉히며 찬찬히 과거를 되짚는다. 십 수 명의 얼굴과 함께 몇 개의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두 번째 방법. 그것은,
'내 머리카락 한 올만 봐도 벌벌 떨게 만드는 것.'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 두고 그 범위를 벗어날 때마다 몹시 잔인하게 구는 것.
감히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짓이기는 것.
한 자락 역심이 내 눈에 띄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려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가혹 행위를 결코 '어설프지 않게' 처리하는 것까지.
이 둘 중 하나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람은 내게 길들여진다.
내가 비교적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에게는 아직 둘 중 어느 쪽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브랜틀리는 미래의 천재 마도공학자로서 내가 점수를 따기 위해 주워 기르고 있는 인재다.
극장에서 그를 구해주기도 했고, 나름대로 잘해주고 있기는 하나 아직 계기가 좀 부족했다. 조금 더 극적으로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르나르는 나와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 이번에 처음으로 키워 보기로 한 검사인 데다....
'잘만 하면 리베라 대신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주시하고 있는 녀석이다.'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지만.
르나르를 거두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알렉시스라는 가문이 필요해서라는 이유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굳이 미래의 정보까지 알려줘 가며 영입하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선을 가라앉히고서, 르나르를 찬찬히 살펴본다.
검을 잡는 사람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나 비교적 솔직하고 순한 태도. 세상에 덜 찌든 사람 특유의 어수룩함이 느껴졌다.
그의 형인 리베라와는 달랐다.
머릿속에 르나르와 닮았으나 전혀 다른 분위기의 한 사람이 그려졌다.
리베라 알렉시스.
노버트의 형, 리산더 하르트만의 친구이자 알렉시스 후작가의 차기 주인.
12회차, 나와 함께했던 프리드리히의 수족들 중 하나.
그와 나는 그리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
과거 그와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추가로 떠올리며 미소를 그린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12회차의 놈이 프리드리히와 손을 잡고서 내 뒤통수를 아프게 후려치기 전까지는.'
034화 신과 악마와 삶의 이유
그 개 같은 면상들을 떠올리니 입맛이 떨어졌다.
한동안 멀쩡하던 허리가 다시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동시에 괜스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사실을 거쳐 가며 빠르게 소강되었다.
'다 없던 일이 된 지 오래야.'
나는 죽었고 그들에게는 이미 회귀라는 이름의 면죄부가 발행되었다.
아니.
사실 내 분노가 여전한 것과는 별개로 그건 죄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나부터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내게 뒤통수를 거하게 처맞았던 요씨 청년을 떠올리며 나는 잠시간 숙연하게 입을 다물었다.
'나도 참 죄가 많아.'
물론 그렇다고 놈들을 가만둘 건 아니지만.
…본론으로 돌아가서.
브랜틀리와 르나르는 나와 엮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내 명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입장은 아니었다.
물론 추후에는 그런 입장으로 만들어야 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 어느 정도의 정보 공유는 필요하다.'
또 브랜틀리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기도 했다.
적어도 브랜틀리는 나와 같은 존재를 적으로 두고 있기는 하니까. 우리의 적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는 줘야 할 것 아닌가.
'르나르를 거둘 거라면 그에게 흑마법사들과 맞설 의지가 있는지도 살펴봐야 하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대략적인 정보를 추려낸 후 입을 열었다.
"우선 배경 설명을 해줄게. 나는 오래전부터 '타리크'라는 단체를 쫓았다."
브랜틀리와 르나르 두 사람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둘은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집중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르나르의 옷에 달린 진주를 먹으려 하는 잭을 끌어와 품에 가두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다수의 흑마법사들을 보유한 범죄 단체야."
"…흑마법사들만?"
"그건 아니지만… 그들이 주류지. 그들은 대악마 '타리크'를 섬기고 있다. 그리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공간 주머니에서 소리 차단 마도구를 꺼내 발동시킨 후, 회귀를 거듭하며 알게 된 타리크에 대한 정보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다시금 입을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은 '타리크'를 신으로 만드는 거야."
흠칫.
두 사람의 몸이 굳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라인하르트의 사람들은 대부분 유일신으로서 주신 엘누르를 강경히 믿는다.
물론 경전 속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이들이나 별이 된 성인들을 인정하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취'로서 다루어진다.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악마 따위를 주신에 가져다 대다니? 발언만으로도 이단 심판 감이다.
만일 내 발언을 신관들이 들었다면 당장 나부터 악마가 들렸다며 타오르는 성화(聖火) 속에 처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신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거리낌 없이 입을 움직였다.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 주지. 신이 뭐라고 생각해?"
그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르나르가 입을 열었다.
"엘누르 성서에 따르면,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라고 하지."
엘누르의 성서에 나온 말.
'빛이 닿는 모든 곳에 그분의 눈이 있으며, 거대한 흐름의 원천 또한 그분이시다.'
낡은 구절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탁.
호텔 구석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가져와 내려놓았다.
'영웅 레반.'
라인하르트의 초대 황제인 프레이르 레반 라인하르트의 일생을 모티브로 쓰인 동화로, 3~5세 필독서다.
'모티브는 건국 신화지만 내용은 마왕 대 용사 클리셰를 답습한 평범한 책.'
"이 책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고 치자. 그렇다면 신이 뭐겠어?"
브랜틀리가 답했다.
"작가요."
"왜?"
"책의 내용을 모두 알고… 책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으니까?"
"맞아. 전자가 '전지', 후자가 '전능'이지. 그렇다면 작가를 제외한 다른 신은 누구겠어?"
두 사람이 점차 고민에 빠져들었다. 다른 신이 필요한가? 이미 세계를 만든 존재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르나르가 눈을 반짝였다. 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독자."
"왜?"
"작가와 마찬가지로 내용을 전부 알고… 귀족들 중에는 자신이 후원하는 문학도들의 글에 의견을 보태는 자들도 있다고 들어서."
이 말이 맞다.
조금 더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설에 댓글을 달거나, 작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글―세계―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작품의 방향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소리다.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맞아. 작가와 독자, 그러니까 '세계 밖의 존재'들이 바로 '신'이지."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만한 사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어쩐지 갈증이 나 남은 오렌지 주스를 입안에 모조리 털어 넣은 후 입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세계 밖 존재가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이 신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브랜틀리와 르나르의 얼굴에 묘한 깨달음이 스쳤다. 두 사람은 한차례 눈을 마주치더니, 르나르부터 입을 열었다.
"…이야기의 내용,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全知)."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全能)."
정답이다.
"그래. 전지전능(全知全能)."
목 언저리를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시 이 정보는 누설 가능한 영역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주인공을 돕지 않을 예정이니, 제약이 더 심할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이 정도는 누구든 유추 가능하겠지. 세계에 존재하는 단서도 충분하다. 애초에 미래 지식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덤덤히 말을 잇는다.
"신과 같아질 수 있지 않겠어?"
소설의 내용에 대해 모두 아는 것.
전지함.
그리고 소설의 중역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그 흐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
전능함.
그리고 이렇게 따지자면,
"악마는 이미 전능함을 보유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의 페이지를 넘어가게 하니까."
이 책, 영웅 레반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이렇다.
주인공 레반은 전능하다.
'왜?'
이 동화는 그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그의 행동은 이 세계를 이끌어 가니까.
마왕 히란 역시 전능하다.
'어째서?'
그가 존재함으로, 레반이 가야 하는 길. '이야기의 흐름'이 정해지니까.
또한 그 역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그러니 이 두 존재는 전능하다. 이 소설은 그런 세계고, 동시에… 내가 딛고 있는 세계 역시 그러하니까.'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브랜틀리와 달리 르나르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이해는 됐다. 독실하기로 이름난 라인하르트 제국의 귀족으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불경한 소리일 테니.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며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악마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내가 왜 그 고생을 했겠는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악마는 신이 될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왜냐고?
"악마가 신의 힘의 반작용으로 생겨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
르나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엘누르는 악마라는 존재를 이렇게 명명한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세계를 만들 때 생겨난 잔여물.
힘을 사용한 것에 대한 반작용.
그가 이 세계에 부여한 '당위성'에 대한 세계의 '반발'.
쉽게 말해, 악마는 신과 정확히 반대되는 존재다.
그리고.
"엘누르가 이 세계를 만들 때 불어넣은 의지는 총 세 개라고 하지."
하나, 사랑.
둘, 이해.
셋, 변화.
"그 반작용으로 생겨난 악마는 이 세 가지를 모른다. 악마는 신과 대칭되는 존재니까."
그래서 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이 세계를 불어넣을 때 만든 그 의지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모르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전지함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나?"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계속되는 불경 대잔치에 표정이 썩은 르나르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리던 브랜틀리가 설마 하는 투로 물었다.
"없, 애면...?"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맞아."
제대로 미친 소리에 경악하는 브랜틀리의 어깨를 적당히 두드려 주고 분노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있는 르나르를 살핀다.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가 얼마나 끔찍한 형태인지 역시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난....
'그 망한 세계에서 살아 본 적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손끝으로 입가를 더듬는다. 관련된 정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인간들의 삶을 지옥 속으로 밀어 넣어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여유가 없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
"절망 속에 주저앉혀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못하게 만든다."
희망을 짓밟고 끔찍한 환경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악마는 전지해지고, 완전해진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신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닿지 못했던 존재에게 도전하고....
나의 세계를 망가뜨린다.
"내 목표는 이들을 막는 거야."
세계를 반복해 살고, 살고, 살고, 살며 '알아간다'. 세계를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그 흐름을 읽고 이야기를 '이해한다'.
그리고 세계의 페이지를 움직이는 힘.
작가와 독자에 비유되는 이들. '세계 밖의 존재들'이 '세계를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에서 경유하는 존재.
'시점'의 주체인 '주인공'.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존재. 전능함을 보유한 마왕과 용사. 둘 중 '용사'의 편에 서서....
나의 '전지함'과 주인공의 '전능함'을 손에 쥐고서 '전능한' 존재에게 승리하는 것.
'요약하자면 그런 거지. 내 회귀 지식과 프리, 아니. 요제프가 얻게 될 주인공 버프. 두 가지 소스를 가지고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이유야. 그래서."
"...."
"나는 이들을 쫓아왔다."
* * *
"그런 이유로 마찰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야."
"...."
"나를 따라오게 되면 옆에서 봐야 할 일들이니 알아두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노버트의 노란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그 시선은 어쩐지 르나르 자신을 관찰하는 듯했다.
반응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기준을 세워 두고 시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 시선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기가 찼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황궁에서 놈들과 사이가 안 좋아서 한 판 하러 가셨다? 그것도 혼자?"
"…그런 셈이지?"
"이거 진짜 미친놈 아니야?"
이거 진짜 정신 나간 놈인가?
아무리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벌집을 포크로 쑤셨다는 소리 아닌가?
이는 노버트의 강함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무모했다.
왜 만약을 대비하지 않는 거지?
'막상 내게는 총 안 챙겼다고, 위험하다고 잔소리를 해대던 놈이.'
이상하게 그게 참 불편했다.
'아니, 사실 이상할 게 없는 이야기다.'
혼자서 황궁에 침입한 흑마법사와 대치한 사람.
열차 사고를 걱정하여 홀로 달려나간 사람.
세계에 위협이 되는 존재에게 덤벼들겠다는, 심지어는 그게 삶의 이유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신경 쓰이지 않으면 그게 어디 인간인가?
'이놈은 여벌의 목숨을 따로 들고 다니는 건가?'
르나르는 열차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불안한 소리를 내는 공간.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가는 불안감. 불쾌한 기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사람.
르나르는 그때 상당히 무서웠다.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랬다.
노버트의 '예언'을 들었을 때도 그랬고, 실제로 그 시기에 자신을 처리하려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도 그랬다.
그 사람이 항상 제게 다정하게 웃어 주던 형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야말로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이후에도 그랬다.
흑마법사가 있다는데 괜찮을까? 노버트가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대도 그 방법이 완전할까?
열차가 망가져서 다치면 어떡하지?
가문에서 기껏 살아왔는데 여기서 죽으면 어떡하나?
다 큰 놈이 겁이 많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었다.
대귀족 가문의 숙명을 두고 왜 유난이냐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겪어보는 죽음의 공포였다. 정말 살이 떨리도록 무서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나니 두려움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몹시 화가 났다.
르나르가 무서웠으면 다른 사람도 무서웠을 것이다.
브랜틀리도 무서웠을 것이고 노버트도 그랬을 확률이 높다.
적을 찌를 방법을 안다고 그 앞에 서는 게 두렵지 않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열차 문을 안 뜯었어.'
035화 나도 알아
사실 르나르 역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억지로 시도해 봤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차 문이 우그러졌다고 하지만 르나르는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검사였다.
노버트가 나오게끔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스스로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해서?
노버트가 수틀리면 도망가라고 말해 둬서?
이렇게 둬도 그가 무사할 거라 생각해서?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실제로 마주한 흑마법사가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그 안에 노버트가 있는데도 소리만 지르며 멍청하게 굴었다.
그 사실이 부끄러운 동시에 화가 났다.
그래, 노버트가 제게 허명을 씌웠다.
맞다.
이 허명이 긍정적인 방향이건 아니건 간에 이건 그가 르나르 자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었다.
그의 편의를 위해 르나르를 이용한 일이었으니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노버트는 그 대가로 르나르 자신을 그 명성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더불어 자질을 시험하겠다며 한 짓은 자신에게 도사린 위협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노버트는 그랬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처럼 굴지 않았다.
왜?
'내 목숨이 아까워서.'
그랬는데 와서 처음으로 한다는 소리가 휘말리지는 않았냐고?
'노버트는 나와 달라. 반대로 행동해.'
무슨 생각이었을까?
르나르는 자신의 입장을 역산해 보았다.
르나르는 제 목숨이 아까워 노버트를 돕지 않았다.
하지만 노버트는 안 그랬다. 왜일까?
'설마 목숨이 안 아까워서?'
물론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노버트 스스로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기에 벌인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르나르에게 노버트가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말은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르나르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탓하고 싶었다.
정말 민망하게도 너는 뭐 다르냐고,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몇 마디 말이 되었다.
"네가 뭐라고 그런 위험한 놈들을 쫓아다녀, 그것도 혼자서?"
"...."
감정 상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건조한 시선이 르나르에게 닿았다.
그 묘한 표정이 질책처럼 느껴졌기에 르나르는 또 한 번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든 같이 갔어야지!"
"…르나르?"
"가만 보니 진짜, 무서운 줄 모르고… 너 진짜 제정신 아니야."
"르나르 알렉시스."
저를 빤히 응시하는 시선을 흘려넘기며 르나르는 말을 이었다. 조금 흥분한 상태였기에 말을 멈추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리하여 그는 노버트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고,
"지나왔으니 편히 말하는 거지, 그러다 진짜 잘못되면...."
"너."
서늘한 목소리는 결국 그의 귓가에 닿았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져 시선을 내려 보자 르나르는 자신의 손이 노버트의 팔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괜한 화풀이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그리하여 서둘러 손을 내리기 위해 몸을 뒤로 뺐으나,
"억...!"
그 행동은 노버트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저지되었다.
서늘한 금빛 눈동자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보인 노버트가 입을 뗐다.
"르나르 알렉시스."
덤덤한, 그러나 소름끼치도록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수년 내로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면 믿을 수 있나?"
한 문장,
"황궁 시종 중에 흑마법사가 섞여 있고 그가 나를 노린다고 하면 믿었을 건가?"
또 한 문장.
"알려진 정보 하나 없던 내가 황궁에 침투한 범죄 단체에게 위협받고 있다고, 구해달라고 말했다면 믿었을까?"
또 한 문장을 이루었다.
고저가 전혀 없는 목소리에 르나르의 숨이 일시적으로 멎었다.
본능적인 공포심에 몸이 굳는 반면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노버트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그런데 내게 무슨 도움을 바라라는 거지? 어떤 상황인지 다 말해줘도 못 믿으면서."
"그… 래도 대비 정도는 하는… 편이...."
"내가 말하면 도와줬을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가 더는 입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겨울날 호수에 빠지기라도 한 듯 몸이 얼어붙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노버트가 말을 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약해 빠진 황궁 시종이?"
아니면,
"별궁에 처박혀 잠이나 자고 있던 기사가?"
그조차 아니라면....
"설마."
르나르 자신을 보며 다정하게 웃어 보인 그가 말을 맺었다.
"대단한 의리를 자랑하는 네가?"
그리고 르나르는....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툭.
작은 소리와 함께 노버트의 손이 르나르의 옷깃에서 떨어졌다.
툭, 툭, 적당히 제 손이 닿았던 자리를 털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그가 말했다.
"말은 참 쉽게 해. 하기사, 혓바닥 놀리는 데는 값이 안 들지 않나."
"...."
"항상 지껄이는 데만 재능이 있어, 다들. 좀 다른 능력도 키워 보지. 가령...."
톡.
작은 소리와 함께 노버트의 손가락이 르나르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이어,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낸 노버트가 쐐기를 박았다.
"항상 놓고 다니는 정의감을 챙길 정신머리라던가."
르나르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르나르의 태도를, 상태를 살피는 시선이었다.
노버트는 오늘 몇 가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르나르가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깡이 되는지.
그들을 대략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론 르나르에 대한 검증 이력이 전무한 만큼 더 알아가야 할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천천히 알아봐도 되었다. 알로이스 행이 끝이 아니지 않은가?
'그랬기에 불의나 흑마법에 대한 거부감 여부 정도만 확인하려 했건만....'
예상 외로 르나르가 급발진한 덕에 말이 세게 나갔다. 답지 않은 실수였다.
'예민한 부분을 찔려서… 어린 애한테 너무 하긴 했어.'
말했으면 도와줬을 것이다. 말을 안 해줘서 그런 거다.
괜히 위험한 일에 왜 뛰어드냐.
너 자신을 챙겨라. 다 그러는데 너는 왜 안 그러냐.
재미와 감동은 물론 쓸모조차 없는 질책들에 질려버린 탓일까. 그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났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나?
나는 뭐 멍청해서 이러고 사는 줄 아는가?
'나도 알아.'
도움 청할 줄 알고, 받을 줄 안다.
놀랍게도 그는 제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뭐. 나더러 좀 사리라고?'
정말 그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내가 엄살이 얼마나 심했는데.'
빙의 직후에 감기 한 번 걸리면 3일은 침대에서 안 나가려 들었던 사람이 그였다.
눈이 피로하다는 핑계를 대며 해야 하는 일들도 대체로 떠넘기며 살던 사람이 김철수였다.
몸?
얼마든지 아낄 줄 안다.
그런데 왜 안 그러겠나?
'안 믿어 주고, 안 도와주잖아.'
말로 하는 걱정은 그리도 해대면서 실질적으로 해주는 게 없으니까.
아무도 도와주질 않아서.
내가 손을 안 대면 저 사특한 것들이 자꾸 내 세계를 망가트리니까.
그래서 억지로 했다. 그렇게 지나온 지금이다.
'그런데 감히....'
입가가 잘게 떨렸다. 괜한 화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표정을 구기지 않기가 참 힘들었다.
'…어쨌든, 거부감 하나는 확실히 확인했네. 가진바 용기는 좀, 아니.'
르나르의 심성에 D 정도의 성적을 매기려던 노버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나마 나은 점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최소한 못되지는 않아. 이 하나만큼은 정말 괜찮다.'
르나르는 그에게 반박하며 난동을 피우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착했다.
부끄러움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그럭저럭 좋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다루기 어렵다. 하지만 르나르는 그걸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르나르는 어찌 보면 또 한 번 스스로를 증명한 셈이었다.
"후...."
짧게 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다독인 노버트가 시선을 돌렸다.
잭을 끌어와 품에 안은 채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브랜틀리가 보였다.
주스 먹다 웬 봉변인가? 연장자로서 참 민망했다.
"눈치를 보게 했네. 미안해."
"아니에요...."
브랜틀리가 어색한 행동으로 노버트의 잔에 주스를 조금 더 따라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정말로 난감해졌다. 감정적으로 군 것이 제법 창피했다.
그렇게 주스 한 잔을 더 마신 노버트는 빠르게 머리를 식히고 르나르를 살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역시 온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래, 정말 괜히 욱했다.
변명은 의미가 없다. 화풀이를 한 게 사실이니까.
어찌 되었건 끝을 맺어 놔야 했다. 하려던 말이 더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되겠지.'
숨을 가볍게 내쉰 노버트가 말을 이었다.
"르나르. 내가 말이 심했어. 사과할게."
하지만,
"쓸데없이 감정적이었네. 머리 좀 식히고 나서 다시...."
"미안하다. 내가… 비겁했어."
그런 노버트의 시도는 르나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의외의 말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황금빛 눈동자가 르나르를 빤히 보았다.
여전히 남아있는 공포심. 껄끄러움. 수치심.
수많은 감정들이 잔재한 얼굴에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분명 죄책감이었다.
제게 향하는 일이 드물던 감정이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죄스러워하는 사람은, 그것도 이런 이유로 미안함을 느낀 자는 이제껏 별로 없었으므로.
그 사실을 떠올리니 상당히 무안해졌다.
이 낯간지러운 기분이 참 별로였다. 손끝이 곱아드는 옛날 영화 한 장면을 본 기분이었다. 이 무슨 오그라드는 상황인가?
"…그럴 수도 있지. 신경 쓰지 마. 그간 이래저래 놀랐을 텐데."
"변명하고 싶지 않아."
아, 이런.
'참 겸연쩍네.'
노버트는 지금만큼은 르나르를 앞에 두고 떠드는 것보다 프리드리히나 제레미를 상대하는 일이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나마나 방긋방긋 쪼개며 그의 뒤통수나 노릴 테니 대충 물어뜯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그의 생각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르나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르나르의 머릿속에 일전의 사건들이 스쳐 갔다.
황궁에서의 일.
가문에서의 일.
열차에서의 일.
늘어놓고 보면 가짓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하나같이 큰 사건들이었다. 인생을 뒤흔들기에는 무리라도 작은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거쳐 온 지금.
르나르는 비로소 자신이 '제대로 된' 변화의 계기를 마주했음을 깨달았다.
오늘의 그는 알았다.
이대로면 원하던 삶을 못 얻을지도 모른다.
바라는 만큼 강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쉽게 도망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강해지겠어?'
두렵다고 도망치는 사람의 손에 도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르나르는 가지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니 변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다짐을 했다.
저 사람을 쫓아가며 원하는 만큼 강해지자.
그리고, 앞으로는....
'비겁해지지 말자.'
그런 의지를 마음속에 품고서.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한쪽은 어색한 기류가 불편해서, 다른 한쪽은 새삼스러운 다짐을 되새기느라.
하나는 두 도련놈들의 눈치를 보고 남은 하나는 관심을 가진 바가 없어서.
그렇게 각자 다른 이유로 침묵을 유지하며 세 사람과 한 마리의 동물은 놀랍도록 조용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경매장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036화 준법 국민 탈락
'아침....'
잠에서 막 깬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무늬의 천장이 보였다.
동시에 이른 시간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친다. 일어날 때가 됐다.
짧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자리의 고양이가 이불 위를 반 바퀴 굴렀다.
온몸을 짓누르던 무게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 돼지 같은 고양이가 기어이 날 매트리스로 썼군....'
어쩐지 자는 내내 심장이 갑갑하더라니.
어린 놈에게 감정적으로 퍼부은 일에 가책이라도 느껴서 그런가 했더니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염치 있는 편은 아니지.'
르나르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다.
다섯 살 조카의 말에 진지하게 욱해 설교를 한 모양새이니.
'뭘 해주기도 전에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찝찝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새벽 사이 증발했다.
애초에 그 정도 일은 내 몇 없는 양심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방 안에 불을 밝히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자, 오래지 않아 르나르와 브랜틀리 또한 조금씩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그 꼴을 구경하고자 고개를 돌리니,
"으으...."
"...."
귀족 하나는 이불을 차며 앓는 소리를 내고 시종 하나는 베개를 안고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나란히 잠이 덜 깬 얼굴로 흐느적거리는 꼴이 제법 웃겼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 모두 자리에 앉는 것에 성공했다.
한 마리 고양이는 아직이었지만 이 네발짐승은 일정의 이행에 딱히 기여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나는 두 명의 사람을 재촉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르나르가 물었다.
"…경매는 저녁부터 시작이잖아. 뭐가 그리 급해?"
대충 들었을 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대충 들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 대책 없는 청년에게 물었다.
"경매장 입장권 있어?"
"없지만… 어차피 예약석을 구하기엔 늦었잖아. 그냥 가서 사면 되지."
"일반석은 진작 마감됐는데."
"그거야 뭐...."
르나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도대체 이걸 왜 묻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이 반응이 영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극장, 경매장 등 사치스러운 환경은 대체로 귀족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업이 부흥하며 상인들이 은근히 치고 올라오는 형세이기는 하나 아직 상류 문화의 점유율에 있어 귀족들의 입김은 절대적이었으므로.
'상인들 역시 초기 투자금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귀족가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달리 말하자면 마도구 거래 시장의 큰손인 알렉시스 후작가의 사람. 즉 르나르 알렉시스에게 이런 공간은 항상 열려 있었다는 뜻과 같았다.
하지만 말이지....
'알렉시스 가문과 불편한 상황일 텐데.'
현재 알렉시스 후작가의 중심은 후작 부부를 제외한다면 소후작인 리베라 알렉시스다.
그리고 그는 현재 동생인 르나르를 잡아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 나 여기 있소, 하는 소문을 내는 행동이 과연 좋을까?
물론 리베라의 성향상 르나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기야 하다마는....
'굳이 거슬릴 필요가 없을 텐데.'
지금은 죽은 듯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이득이었다.
하지만 굳이 르나르의 아픈 곳을 찌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다른 핑계를 입에 올렸다.
"우리가 도망자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행선지를 알리고 다닐 이유는 없잖아. 좀 더 신중하고 싶은데."
"그런가."
르나르의 얼굴에 납득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흑마법사들에게 찍힌 상황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르나르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우선."
표를 구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개중 가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안건을 떠올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잭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식사부터 하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지금 아침 먹으라고 4시 반에 기상시킨 거야?"
잠이 부족했던 르씨 청년의 작은 반항은 무시했다.
이후 적당히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근처에서 사온 음식들을 뒤적거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브레히트의 경매장.
엘누르력 668년, 암시장 '리론'의 옛 주인 '세라피마'의 뿌리.
이 공간은 현재 양지의 거래를 주로 진행하고 있으나, 뒷세계와 양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름있는 귀족 가문의 사람이 이러한 장소에 방문할 때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었다.
첫 번째. 스스로를 드러내지 말 것.
두 번째. 반드시 감정사와 동행할 것.
세 번째. 암거래 방식을 숙지해 둘 것.
우선 첫 번째의 경우 이미 반 정도는 물 건너갔다.
요제프의 도움을 받아 마나 열차에서의 사건이 적당히 묻히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완벽히 정보가 차단되었을 것이라 기대하긴 어려웠다.
당시 승객들 대부분은 마나 열차라는 새로운 교통, 운송 수단이 궁금했던 귀족들이 보낸 시종들이었으니까.
'황자의 이름 아래에 단순 입막음이야 가능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 모두가 입을 닫았을 리는 만무해.'
황족의 권위는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귀족가의 사용인 대부분은 외부의 어떤 존재보다도 자신의 주인을 우선으로 두는 것을 미덕으로 친다.
'그렇기에 내 존재가 아닌 내가 사건에 엮여 있다는 사실만 숨겨 달라 한 것이지만.'
분명히 한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나나 브랜틀리에 대한 정보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고, 르나르 역시 제 형인 리베라의 수작 탓에 존재감이 옅었다.
약간의 노력만 추가한다면 크게 곤란한 상황까지는 오지 않을 듯싶었다.
그리고 남은 두 가지는....
'내가 있으니 괜찮다.'
장물 혹은 밀수 품목의 감정과 거래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전 회차 중 암시장 '샤카르'에 머물던 때를 떠올린다.
인접국과의 접경지 지하에 위치한 대륙 최고 규모의 암시장, 샤카르.
힘의 논리를 온갖 것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머무는 자리.
그곳은 타리크의 거점이 되는 장소 중 하나였고, 나는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샤카르에 섞여 들어갔다.
이후 나는 뒷세계에 작용하는 논리와 세력들의 대략적인 규모를 포함한 다양한 것들을 체득하게 되었다.
밀거래에 대한 경험은 내가 그곳에서 배운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리론과 이어진 경매장은 처음이지만 괜찮겠지.'
리론은 샤카르보다 작은 물이다. 내가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브레히트 경매장이나 리론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도 내 자신감에 손을 보탰다.
'오히려 문제는....'
힐끔.
시선을 굴리니 야채 수프를 떠먹고 있는 두 사람과 한 동물이 보였다.
아침부터 먹는 풀이 썩 달갑지 않은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르나르와 음식이 입에 맞는지 신이 난 브랜틀리. 그리고 그 옆에서 닭고기를 야금야금 먹고 있는 잭.
하나같이 긴장감이라고는 먹고 죽으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런 녀석들을 암거래에 끌어들여도 괜찮을까?'
물론 암거래가 나쁜 일이라는 이유로 권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저들의 결백함을 지켜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다만....
'얘네 아직 좀 허술하지 않나.'
토마토 주스가 반 정도 담겨 있는 잔을 기울인다.
입안에 맴도는 묘하게 짭짤한 향을 즐기며 생각을 이어간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제법 위험했다. 수틀리면 창부터 날리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베르트람보다는 덜 위험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멀쩡한 인간이라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나 혼자 만난다면야 괜찮겠지. 저 둘을 이 언저리에 버려두고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내게는 좋았다.
객관적인 판단하에 두 사람을 수식하는 단어를 살펴보자면 좀 뻣뻣한 덤과 미래가 보장된 더미였다. 달고 가는 것부터가 손해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조차도 공유하지 못하는 상대라면 적과 다를 게 뭔가? 동료라 부를 수 없지 않나?
'역시 정면돌파는 무리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도 없지는 않지. 리스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안전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시선을 가라앉히며 손을 내린다. 탁, 작은 소리와 함께 빈 잔이 탁자 위에 놓였다.
브랜틀리와 르나르의 주의가 내게 집중되며 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맴돌았다. 두 쌍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구른다.
내게 집중한 두 사람을 살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던지듯 물었다.
"내가 지금 중범죄를 저지르러 갈 건데, 혹시 신고할 사람?"
그리고 르나르와 또 싸웠다.
* * *
마석을 깎아 만든 십이면체 형태의 조명이 빛을 발했다.
녹색과 옅은 금색, 붉은색이 조화롭게 빛나며 조각들로 꾸며진 주변을 물들인다.
건물 3층의 난간 앞에 서, 화려함이 극에 달한 경매장의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시선을 굴렸다.
머릿속에 오늘의 계획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심안, 그래. 시빌라의 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도구를 얻을 예정이었다.
심안은 마나의 '인지'를 돕는 마도구로 마법사들에게 있어 귀물로 취급되는 물건이었다.
이는 대마법사 시빌라 사후 아카데미 '빈프리트'에 기증되어 관리되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구스타프 후작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다음 소유주는 내가 될 거지만.'
마나의 '인지'를 돕는다는 말을 풀어 보면 이런 뜻이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 들어가는 사용자의 의지. 쉽게 말해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
'나 같은 반쪽짜리 마법사에게는 절실한 효능이지.'
그것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전투 중 감각이 맛이 갈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멀쩡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전 생에는 구스타프 후작이 장물을 되찾기까지 기다렸다가 강탈했던가. 참 편했는데.'
이번에는 마법이 급해서 이리 되었지만.
그리 생각하며 허리를 편다. 그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르나르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3층에 선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느슨한 태도로 서 있던 르나르가 내게 반 걸음 다가왔다.
"왜?"
"그냥. 몸이 굳어서."
"그러냐?"
태도가 영 삐딱한 것이 상당히 불손했으나 나는 굳이 비난하지 않았다.
종일 르나르가 마음고생이 많았다.
르나르는 보통의 귀족들 이상으로 법을 준수하며 살아왔다.
그의 형인 리베라는 르나르를 가문의 일에서 배제하고자 했고, 그 결과 그는 가문의 어두운 면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왔다.
'그러한 사정의 연장선으로 사교계로부터 외면받기도 했으니....'
그가 귀족 사회의 이면에 대해 무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깝지 않은 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켕기는 점'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리고 나는 그런 그에게,
다량의 미허가 마도구 사용.
위장 신분의 이용.
뒷세계 길드 접선 및 의뢰.
암표 거래.
…와 같은 범법 행위의 공범이 되게끔 했다.
037화 브레히트 경매장 (1)
'그 정도면 내가 고까울 이유로 충분해. 저 정도 반항은 봐줘야지.'
이 정도면 합격점이었다. 죽어도 못한다며 드러눕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몇 분간 얼굴을 굳힌 채 난간 너머를 바라보던 르나르가 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심안인지 뭔지가 나오는 건 확실한 거 맞지?"
묘하게 삐딱한 자세의 르나르가 와인이 든 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새벽 동안의 고생을 어떤 식으로든 보답받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그거 없기만 해봐, 으르는 것도 같았다.
기억상으로는 확실했다. 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확언해두지 않은 것이다.
그에 어색한 미소를 그려 보이며 손짓으로 웨이터에게 간단한 먹을거리를 부탁했다. 입에 뭐라도 물려 놓아야 닥칠 것 아닌가.
내 뜻을 알아본 르나르의 입이 짜증스레 열렸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입을 뗀 직후 주변에 어둠이 깔렸다.
탕,
탕,
탕!
제법 큰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빛이 내렸다. 동시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나는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르나르에게 '일단은 조용히' 라는 사인을 날렸다. 타이밍이 좋았다.
르나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반응을 마주한 진행자가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사위를 살폈다.
딱 거슬리지 않을 만큼만 노골적인 시선으로 2층 귀빈석의 인원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그는 다갈색 무대의 중앙에 당당히 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브레히트의 자랑! 브레히트 최고의 즐길 거리! 경매에 참여해 주신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철 지난 멘트를 떠들었다.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
와아아아아!
일반석의 사람들로 꽉 채워진 1층에서 커다란 함성이 귓전을 때렸다.
경매장이라는 컨텐츠가 낯선 사람들의 흥분감과 기대감이 훅 끼쳐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한 시선으로 1층의 무대를 내려다보는 2층의 인사들이나, 적당한 흥미를 품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3층의 사람들과 비교되는 태도였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난간 아래를 내려 보는 브랜틀리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하나 보네."
진행자는 한참 동안이나 이 경매장의 역사를,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를 떠들다 경매의 진행에 들어갔다.
기다리는 바가 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객관적으로 경매는 지루했다.
하지만 업무 시간 이후 방구석에 처박혀 마법서를 보거나 훈련용 목각인형을 패며 살아오던 두 명의 방콕 전문가에게는 제법 즐거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훌륭한 입담을 곁들인 현장감 있는 설명이 이어지거나 마도구의 동작 시연이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의 입가에서 작은 탄성이 새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구경하며 내가 원하는 물건이 도마 위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치지직....
찌직....
계속해서 희미한 소리의 형태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신호가 느껴졌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더 간절한 사람일수록 을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시작부터 지고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지난 후에서야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행자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고 그의 입이 내가 바라던 멘트를 내뱉었다.
"이번 물건은, 아마도 많은 분들이 기대하신 물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에 시선을 가라앉히자,
드르륵―
두 명의 사람이 후미에 진열되어 있던 물건을 앞으로 끌어온다.
브레히트의 상징, 두 개의 마차 바퀴가 그려진 자색 천이 스르륵 밀려 내려가며 그 아래에 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원이 눈에 띄었다.
딱히 미감을 자극하지는 못하는 형태의 두 개의 깃털 모양이 음각된 안경.
그 익숙하고 투박한 형태의 물건을 바라보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당연하게도 내가 그러건 말건 흥이 잔뜩 오른 진행자는 높은 텐션으로 말을 이어갔다.
"2개의 대륙을 가로지른 위대한 탐험가의 이름을 모두 아시겠지요?"
수백 명의 시선이 모여들며 관중석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사람들의 주의가 모였음을 확인한 진행자가 연극적인 태도로 손을 내뻗었다.
"서른두 개의 수로를 정복하고, 대양을 가로질러! 저 너머의 섬, 아틀란에 라인하르트의 깃발을 꽂은 위대한 탐험가이자 모험가!"
'서른두 개의 수로.'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곧이어 진행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모험가 클러브, 그의 여행을 함께 한 물건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진보라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무대의 앞을 향해 걸어 나왔다.
마도구가 전시될 때마다 시연을 진행했던 인사였다.
사람들이 충분히 제게 주목할 만한 위치에 도달한 마법사와 진행자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사인이 떨어진 직후, 자신감 있는 미소를 그린 마법사의 손끝에서 푸른 빛이 발산된다.
그리고,
화악!
지름이 3미터 정도 되는 네 개의 원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4서클, 중위.'
세계와 마법사 간의 소통 창구가 열렸다.
완벽한 형태의 원을 중심으로 마나가 튀었다.
빛 가루가 허공에 흩날리는 화려한 연출에 브랜틀리의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었다.
손으로 르나르와 브랜틀리를 저지해 그들이 난간에 과하게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한 후, 3층까지 은은하게 밀려오는 마나의 파동을 느끼며 시선을 집중한다.
그와 동시에.
톡―
마법사의 손끝이 물건에 닿으며,
후우욱―!
3미터 내외로 보였던 원의 지름이 1미터 내외로 훅 줄어들었다.
"…허!"
멀지 않은 자리에 서 있던 경매장의 고객 중 몇몇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변에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를 내보이면서도 수군거리는 말소리에 집중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런 물건이 있다니."
"마탑에서 만든 물건일까요?"
"눈치가 그리 없소? 클러브가 마법 한다는 소리 들어 봤나."
"쉿."
1층을 내려다보고 있던 몇몇 이들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탐욕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서클이란 마법사가 만든 '용도'에 세계에 존재하는 '마나'를 입혀 마법을 행하는 과정이었다.
마법사가 세계와의 소통 창구인 완벽한 원을 만들고, 그 원을 따라 세계에 존재하는 마나를 순환시킨다.
그리고 그 순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마나는 마법사의 '의지'를 따라 구체화되며 자신의 용도를 깨닫는다.
마법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서클의 지름은 짧을수록 좋지. 효율이 좋다는 소리니까.'
마법의 스케일이 크다면 당연히 지름이 길어지기야 한다.
하지만 같은 위력을 낸다면 서클의 지름이 짧은 쪽이 더 능숙한 마법사였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마나에 '의지'를 부여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저 물건은 이를 가능하게 했다. 그 어떤 마법사라도 탐낼 만한 효용이었다.
예비 고객들의 기대감 어린 시선을 캐치한 진행자가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를 보낸 그가 말했다.
"클러브의 안경, 200골드! 입찰 받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저거야."
두 사람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잠시간 눈썹을 찡그리던 르나르가 물었다.
"…시빌라의 심안이라며?"
"일단은."
시빌라의 심안과 비슷했다. 약간의 눈속임용 공정을 거친 것 같기는 했으나 생김새부터 기능까지 '얼추' 맞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떠올린 나는 깨달았다.
저 물건을 알아보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가 몇 있었다.
손끝으로 입가를 가볍게 쓸어내린 후 입을 움직였다.
"암거래 방식이야."
"아직 추가 경매가 열리기 전인데?"
"브레히트는 암시장의 물건을 판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경매장이지."
더 말해 보라는 듯, 르나르가 고개를 까딱였다.
브랜틀리 역시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잭을 내게서 받아 안으며 대화에 집중했다.
"법치국가인 라인하르트에서 대놓고 그런 짓을 하긴 쉽지 않아."
"거물이 엮여 있거나 뇌물로 들어가는 돈이 상당하겠네."
"맞아. 그러면 추가 경매만으로는 재미가 좀 덜하지 않겠어?"
평균적으로 경매에 올리는 물건은 15개 내외다. 그리고 그 말은, 그 '추가 경매'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 또한 15명 언저리라는 뜻이 된다.
'물론 그들은 모두 충분한 구매력을 보유하고 있겠지. 이미 경매에서 물건을 하나 이상 낙찰받은 사람들이니.'
하지만 인원이 적다는 것은 많은 물건을 다루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또한 그들은 이미 하나 이상의 물건을 샀다. 경우에 따라 일부 인원의 지갑이 비어 있을 확률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브레히트 입장에서 보자.
기껏 돈 들여서 암거래의 기반을 만들고, 경매 환경도 조성해 놨다.
그런데 소규모 추가 경매에서 보는 재미로 만족해야 한다고?
그런 거지 같은 경우가 어디 있나?
"그래서 좀 더 재미를 보고자 암거래를 하는 거야."
"암거래 물품을 구분할 방법이 있나요?"
"시작가를 봐."
"200골드."
그게 왜?
그런 의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이 시작가의 한 가지 특징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낙찰된 물건들의 최종 거래가는 이러했다.
13만 2천 하르탄.
21만 하르탄.
11만 하르탄.
'그리고 시작가, 200골드.'
힌트를 주고자 한마디 말을 덧붙인다.
"단위에 집중해."
직후 르나르의 얼굴에 뭔가 알아차렸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르나르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확인한 후 질문을 던졌다.
"하르탄 주화에 비해 금화, 은화가 나은 게 뭘까?"
"자금 흐름이 잘 잡히지 않으니 탈세와 세탁, 유통이 쉬워. 값이야 쳐 준다지만 구 주화잖아."
"잘 알고 있네."
르나르의 얼굴에 약간의 만족감이 스쳤다. 확실히 표정 관리 솜씨가 별로였다.
'저것도 나중에 가르쳐야겠어.'
어쨌건 간에 정답이다.
하르탄 주화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 시대 이후다.
그 말은 대부분의 화폐가 국가의 감시망 아래에서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더러운 돈이 오가는 암거래에 이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요제프가 하르탄 주화가 아닌 금화를 준 이유도 이것이었다.
'브레히트에 머물 것을 눈치채고서 편히 쓰라고 준 게 분명해.'
그리고 무엇보다,
''저' 시빌라의 심안이 암거래 물품이라는 증거는 더 있지.'
038화 브레히트 경매장 (2)
"1천 골드! 더 없으십니까?"
올라가는 낙찰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진행자를 내려다보며 던지듯 묻는다.
"거기다 브레히트의 암시장은 뒷세계에서 '서른두 번째 지하'로 불린다. 아까 진행자가 뭐라고 했지?"
무언가를 지목하는 듯한 물음에, 브랜틀리가 성실하게 답했다.
"클러브가 서른두 개의 수로를 정복했다. 그렇게 말했어요."
"맞아. 하지만 모험가 클러브가 정복한 수로는 일흔두 개야. 일부 역사적 논박이 있는 것들을 감안하더라도 서른두 개는 턱없이 모자라는 수지."
르나르의 입이 열렸다.
"은어구나."
이 또한 정답이다.
동의의 의미를 담아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 주자 르나르의 어깨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암거래 물품은 단위를 골드로 잡아 이름을 다르게 붙여 판매하고 설명에 암시장의 이름이 되는 숫자를 포함하나 보네."
"기억해 둬. 다른 암시장에도 적용되는 은어인 만큼 살면서 또 쓸 일이 있을 거야."
고위 귀족으로 살다 보면 뒷세계와 통하는 일은 종종 발생한다.
암살 의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장물 혹은 밀거래 품목을 손에 넣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이런 '불리한 이력이 남지 않는' 거래 방법을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거지.'
같은 물건을 얻어도 흔적을 남기는 사람과 남기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큰 법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르나르의 표정이 다소 심각해졌다.
손끝으로 3층의 난간을 더듬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다 아는 사실인가?"
그에 나는 잠시간 대답 여부를 고민했다.
어째 계속 잔소리만 하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르나르 역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움직였다.
"돈 좀 만져 봤다 하면 보통 알지. 특히나 대형 상단을 보유한 가문에서는 다 가르쳐 줘. 가문의 어두운 면을 알아야 하거든."
나는 딱 여기까지만 언급하고 말을 맺었다. 르나르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 기류로 느껴졌다.
그렇게 르나르가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볼 시간을 제공하자 옆에 있던 브랜틀리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깃들었다.
무관심한 태도로 졸고 있는 잭을 한 번, 고민에 빠진 르나르를 한 번 쳐다본 브랜틀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경매에 참여하진 않으시는 건가요? 가격이 많이 높아졌는데...."
납득 가능한 의문이었다.
입찰가가 200골드에서 1천 300골드까지 뛴 지금까지 내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의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시큰둥한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려던 찰나,
찌직―
계속해서 내 신경을 거스르던 소리가 끊어졌다.
5미터 남짓의 거리에서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가짜 같아서."
"뭐?"
"실제 효능이 내가 알던 것과 차이가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노골적으로 나를 살피던 이의 기척이 희미해졌다.
의미는 확실했다.
'따라오라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 확인할 것이 남아있었기에,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보다 궁금하지 않아? 이 다음에 뭐가 나올지."
나를 부르고 있는 사람.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눈동자를 굴린다.
묘한 억울함에 무언가 항의를 하려던 르나르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느끼며 던지듯 말한다.
"저것보단 다른 것에 관심이 가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심안의 가품 따위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경매 대상 품목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카탈로그에 있었던 물건도, 그렇지 않았던 물건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 오늘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째서 저 물건의 순번이 앞으로 밀렸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빌라의 심안은 추가 경매까지는 못 가도 지금보다는 늦은 타이밍에 등판했다.
그리고 당연한 상식이지만 값어치가 높은 물건일수록 경매의 후미에 오른다.
시빌라는 위대한 마법사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문장이다.
대륙의 긴 역사를 통틀어 이제껏 8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여섯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물건을 앞 차례로 밀어버렸다면 분명 더 값어치 있는 물건이 준비되었다는 소리일 터.
나는 그게 궁금했다.
'본래대로라면 오늘 그렇게까지 좋은 물건은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그런 내 내심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인가.
진행자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체 무엇이 들어왔기에 저렇게까지 분위기를 잡나.
그런 생각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드르르르륵―
드르륵―
제법 큰 소리와 함께 하나의 진열장이 무대 중앙에 위치했다.
이어,
화려한 천이 걷어지고....
'…어?'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서늘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3층의 난간을 쥐었다. 힘이 들어간 것인지 따각, 손 아래에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정말로 저게 여기 있다고?
이해가 되지 않아 난간 아래로 고개를 뻗어 물건을 자세히 보았다.
성석과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나비의 형상이 시선을 끌었다. 밤을 형상화하기라도 한 듯 실에 꿰인 새까만 진주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확실했다.
절제된 아름다움은 물론 미감을 자극하는 화려함 역시 갖춘 묵주.
내가 아는 물건이 조명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노, 도련님…! 손에...!"
"아."
나를 살피려는 브랜틀리를 저지하고 나뭇조각이 달라붙은 손을 털어낸다.
작은 소리와 함께 난간의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직후 내게 다가오는 경매장의 직원에게 은화 두어 개를 던질 즈음에야 겨우 여유로운 미소를 내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내보이는 태도와 별개로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이건 정말 예상외였다.
'설마하니 내가 여기서 이걸 보게 될 줄이야.'
기가 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지루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새로운 경험이란 귀했으므로.
'물론 그 귀한 경험이 이런 도발을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요제프나 베르트람의 경우와는 달랐다. '예정된' 운명을 사는 것이 당연한 자가 제 길을 벗어난 경우가 아니었다.
'잘 생각해. 그대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저 물품의 주인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스테파노.'
가라앉은 시선으로 화려한 천 위에 놓인 물건을, 난간에 반쯤 걸쳐 그 물건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차례로 살핀 후 몸을 돌린다.
당황한 티가 나는 르나르의 얼굴을 마주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다.
"르나르."
"어?"
검지를 뻗어 판매되고 있는 물건을 가리킨다. 갖은 의문들이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이 보였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평온을 가장하며 입을 움직였다.
"저 묵주, 어떤 새끼가 사 가는지 확인해."
"…어?"
예상 외의 적나라한 말에 르나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기에 르나르를 지나쳐 걸었다. 내 눈치를 본 브랜틀리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 잠시만. 지금 어디 가는데?"
어설프게 내 뒤를 쫓으며 르나르가 물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고 설명은 천천히 해도 된다.
르나르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시 묻지는 않았다.
비록 미심쩍은 시선으로 내 뒤통수를 째려보기는 했지만....
'말을 잘 듣는 편이긴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살핀다.
도넛 모양의 홀의 가장자리에 달린 기다란 복도의 끝.
유일하게 열린 창문 아래로 사라지는 천 자락을 발견하고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길게 이어지던 공간을 가로질러 창틀을 붙잡고서 아래를 바라본다.
창문에서 15미터 남짓 되는 위치에 들어선 고딕 양식의 건물과 낡은 테라스가 시야에 들어찼다.
이대로 떨어졌다면 위치는....
'맞은편 건물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떨어지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니....
"…골목."
…으로 오라는 거지.
경매장 뒤편의 좁고 더러운 골목.
암시장에 입성하기는커녕 그 입구조차 찾지 못한 이들이 기거하는 눅눅하고 불쾌한 장소.
그리고 그 위를 소리 없이 내달리는 한 사람.
'역시.'
"도련님…! 창문은 왜...."
잭을 르나르에게 맡기고 달려오는 브랜틀리를 바라본다.
르나르의 불만을 잠재우려거든 브랜틀리를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알려 줘야 하는 정보가 있었다.
'타이밍도 나쁘지 않고 마침 좋은 물건도 들어왔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뗐다.
"따로 방도가 없네. 무서우면 소리나 질러. 꽉 잡고."
"네, 네? 그 무슨, 으억!"
턱.
곧바로 열 몇 살 난 소년을 어깨에 들쳐 메고 창틀에 발을 얹었다.
늦은 시간의 공기가 코끝을 스치며 어둑한 거리를 내려 본다. 자그마한 황금빛 원 두 개가 허공에 반짝였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빛무리에 놀란 브랜틀리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마침 베르트람이 총알도 넣어 줬으니.'
소리를 지르건 뭘 하건 그냥 마법으로 차단하면 된다.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며 지금 상황에 필요한 두 가지를 짚어낸다.
'하나는 [감속], 남은 하나는 [은폐].'
그 모든 필요를 구체화하고 마법사의 '의지'를 따라 작은 원을 이룬 마나에 덧씌운다.
화악―!
화려하게 빛나던 두 개의 마나의 응집체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근처에 얇은 막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창밖으로 몸을 날리자,
훅―
"으아아아악! 아아악!"
몸이 아래로 꺼지는 감각에 브랜틀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 어...?"
그러나 그의 고함은 떨어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느리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점차 잦아들었다.
반응이 상당히 웃겼으나 순간 드는 생각에 나는 간신히 무표정을 그렸다.
'나잇값 못하는 거지. 조카 울리는 걸 즐기는 삼촌도 아니고.'
짧은 헛기침으로 민망한 마음을 다잡고서 마나를 순환시킨다.
허공에 떠오른 하나의 황금빛 원이 내 주변을 비추었다. 은은한 빛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거리의 모습이 드러난다.
별다른 위험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앞선 사람이 향했던 방향으로 달려가자 세 갈래의 길이 나왔다.
이 골목에 들어선 것은 처음이었으나 방향을 통해 대략적인 경로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하나는 베랑 스트리트의 초입, 하나는 또 다른 암시장의 입구. 남은 하나는....
'건물들과 벽으로 둘러싸인 막다른 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높다란 벽으로 막힌 길로 들어서며, 나는 베르트람에게서 사 온 포션 중 한 병을 따 입에 머금었다.
시큼한 향의 포션이 조금씩 식도로 넘어감에 따라 흐리게 변해가던 시야가 다시금 또렷해졌다.
동시에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들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찬찬히 사위를 살피며 오늘 만날 사람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다.
만프레도에서부터 나를 관찰해 왔고, 마나 열차에서 내게로 날아오는 일격을 막아준 사람.
브레히트의 경무청 천장에 숨어들어 요제프와의 대화에 참관하며 내 목적을 살핀 사람.
또한 내 예상이 맞다면 '진짜' 시빌라의 심안을 가지고 있을 사람.
가명 '칸나'.
아가피야 출신 '이방인' 용병 칼룸.
039화 칼룸 (1)
아가피야는 엘누르력 721년 라인하르트에 합병된 사막 왕국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한 왕국이 다른 왕궁에 편입되는 과정은 여러 잡음을 야기한다. 특히나 그 '합병'의 과정이 과격한 편이었다면 더더욱.
그리고 아가피야가 라인하르트에 합병된 원인은 패전이었다.
이후 아가피야 출신의 사람들은 라인하르트의 국민으로 인정받기는 하였으나 '이방인'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다양한 곤란을 겪으며 살아왔다.
칼룸은 그러한 환경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이방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오던 자였다.
'물론 타리크에 의해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가족과 이웃들이 행방불명 되고, 그 사건을 라인하르트 출신 경관이 묻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이후 칼룸은 용병 일을 전전하며 뒷세계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정보를 모으고 취합함에 있어 전무후무할 정도의 재능이 있었고, 칼룸은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으며 타리크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벼렸다.
이전 회차들의 나는 양지의 일을 할 때면 의뢰인이자 뒷배로서, 음지의 일을 할 때면 칼룸의 동업자이자 파트너로서 교류했다.
'샤카르를 관리할 때도 칼룸과 함께였지. 직전 생에서는 내 그림자가 되어 도움을 주었고.'
쉽게 말하자면....
나는 칼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녀는,
'약해 빠진 놈과는 협력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나는....
'내구도가 쓸만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직후, 하얀색의 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길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전면의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곧바로 마나로 이루어진 두 개의 창을 구성한다. 바닥에서부터 쏘아져 올라오던 빛의 창과 내가 날려 보낸 두 개의 창이 격돌했다.
쩌어엉―!
커다란 소리가 주변을 울렸으나 밖으로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허공에 나타난 황금빛 원에 박힌 내 의지가 이 공간의 '거슬리는 점'을 외부로부터 유리시킨 탓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벽을 디딘 발에 마나를 둘렀다.
"노, 노버트 님...!"
당황한 브랜틀리가 나를 불렀으나, 아직 입안에 포션이 남아있었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적당히 등을 한차례 두드려 주고는,
쾅!
까가가각―
나를 쫓아 날아드는 백색의 창을 피하며 주변을 살핀다.
'칼룸은 '잊힌' 장소들을 많이 알았지.'
칼룸의 재능 중 하나였다.
그녀는 특유의 관찰력과 탐색 능력으로 사람들이 쉽게 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수많은 장소들을 모았다.
대단히 특별한 것들은 아니었다.
어느 저택의 천장 틈, 잊힌 건물의 지하.
골목에 위치한 작은 벙커.
건축가의 실수로 생겨난 텅 빈 지하실이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통로'.'
들쥐와 다를 바 없는 능력.
그 하나만 가지고서야 어떠한 가치도 없는 능력.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대륙 암시장의 정보를 틀어쥐었다.
'어떻게?'
간단하다.
'그 모든 '잊혀진' 장소들이 그녀를 수많은 정보가 있는 길로 인도해 주었으니까.'
모든 비밀은 반드시 한 번, '비밀이 만들어지는 순간'에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에 묶여 있는 이상 대부분의 이들은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을 물리는 것이야 가능하겠지. 좀 더 신중히 한다면 녹음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나 마도구 역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벽을 피할 수 있는가?
천장은?
지하와 바닥은?
그녀는 그 모든 장소를 공략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하나둘씩 모았고, 그 결과 정보에 있어 우위를 점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이리로 인도했다는 건....'
까가가가각―!
카앙!
벽과 바닥에 상흔을 남기며 깨어지는 마나의 응집체들을, 그것들이 이동한 경로를 살피며 나는 그녀의 의도를 셈해 보았다.
'칼룸은 나를 죽일 의도가 확실하게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칼룸이 과거의 일과 '알려지지 않은 층'의 공론화에 수차례 실패한 일로 라인하르트인, 그것도 귀족들을 싫어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 타이틀을 달고 있는 집단에 대한 혐오였지 개개인에 대한 악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일관되게 타리크에 반하는 태도를 보였고, 만프레도 사건 이후로 그녀는 내 행보를 관찰해왔다.
그녀가 아는 '라인하르트인 귀족'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그러니 칼룸이 내게 감정을 품고 있다면 오히려 호의일 것이다. 설사 호의가 아니더라도 호기심 정도는 된다.
그렇다면,
'이 위협에는 반드시 끝이 있을 거야.'
쩌엉―!
마나의 순환과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난 원형의 방패와 백색의 창이 격돌했다.
힘의 파동이 한차례 공기를 훑고 지나가며 눈부신 빛이 퍼져 나갔다.
마나와 사람의 의지가 함께 순환하는 길. 서클에 깃든 힘이 이전보다 빠르게 돌며 은은한 무게감이 전해져 왔다.
흐려지는 시야에 눈살을 찌푸리며 상황을 파악해본다.
마법에 있어 이 시점의 칼룸과 나의 성취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이 공격, 충분히 박살낼 수 있다.
'리타이어가 빨라서 문제지… 공격력 자체가 부족하진 않아.'
베르트람이 챙겨준 귀한 포션을 낭비하거나 사흘쯤 벽돌의 생에 대해 알아보기를 각오한다면 잠시나마 무적이 될 수 있다.
고작 이런 일에 그런 각오를 할 수 없고, 감각이 맛이 간 이후의 나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게다가,
'지금은 칼룸과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과거의 동료라 해도 당장 내 패를 까는 건 부담스럽다.'
마검사라는 사실을 괜히 숨긴 게 아니다.
마법을 사용하면 감각이 먹통이 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상은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엑스퍼트 중급에 3개 이상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버 밸런스였다.
'패널티'로부터 자유로운 마검사는 없다시피 했고, 오러를 사용할 수 있으면서 2서클 이상의 마법을 능숙하게 구사한 마검사로는 역사상 내가 유일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 포지션은 이렇게 된다.
어리고 가문으로부터 외면받은 사람이며,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비켜난 귀족 자제이자 작위를 못 받는 차남.
유약한 성정을 가졌다는....
'제국 유일의 마검사.'
부려먹을 사람으로 가성비가 끝내줬다.
가진 힘을 모조리 들키면 높은 확률로 영장이 날아올 거라는 소리다.
'보나 마나 황제가 지 첫째 아들 밑으로 보내겠지. 아니면 한참 견제받다가 변경으로 쫓겨나거나....'
외에도 암울한 미래가 몇 그려졌다. 그건 곤란했다.
'그리고 칼룸은 브랜틀리나 르나르와 입장이 달라.'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서 달려가는 사람이지, 빚을 진 사람도 내가 없으면 곤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눈에 띄는 면모를 들키는 것은 그 자체로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아직은 그랬다.
그러니까, 요는....
'무리하게 보여주지 않는 선에서, 칼룸이 마련해 놓은 살 구멍을 캐치한다.'
이건 그런 시험이었다.
쩡!
쩌엉―!
또다시 날아온 두 개의 창이 황금빛 원과 격돌했다.
몸이 뒤로 밀려나며 마력으로 강화한 다리가 아려 왔다.
세계를 떠도는 마나를 다루는 행위인 마법과 달리, 체내의 마나와 오러는 신체의 한계에 구속받았다.
회귀자 버프를 받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신이 준 기연을 까고 힘을 되찾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터였다.
헛웃음이 났다.
'딱 공격력만 좋은 잡캐 신세잖아? 보스 만나고 5분간 폭딜 넣고 뒤지는!'
그러나 실없는 생각과 별개로 사람을 든 채 무리하게 움직인 몸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 이상 오래 끄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생각했다.
'일단 파훼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아는 내 실력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마법이야.'
그렇다면 마법의 해제인가?
'아니, 그 또한 아니다.'
검사로서 몇 단계.
마법사로서 몇 단계.
오러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지.
몇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고, 얼마나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는지.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중요하다. 명성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명성이 그 사람의 강함을 증명해 주는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야. 종합적으로 봐야지.'
그러니 칼룸은 나의 '마법사로서의 성취'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 터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나는 주변의 기물을 살폈다.
제법 강한 충격이 있음에도 바닥과 세 개의 벽에 남은 상흔들을 제외하면 피해가 없다시피 했다.
마법의 강도를 조정한 걸까?
'하지만 일부 마법을 제외하면 인첸트 된 마법은 수정이 어려워.'
그러니 마도구와 스크롤의 안전한 유통이 가능한 것이다. 외부의 수작질로 변질시키기가 어려우니.
'칼룸의 서클을 살펴보면....'
[응집], [강화], [가시화], [발출], [추적], [보관]
이렇게 무식하게 마법을 중첩을 사용했음에도 건물에 큰 피해를 주지 않을 방법.
따로 손을 대지 않고도 마법이 '알아서 적당히' 가동되도록 하는 법.
답은 나왔다.
'범위다.'
마법의 발동 범위를 정확히 벽과 바닥이 살짝 파일 정도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정보를 조합해 봤을 때, 최종적인 해답은....
'칼룸의 아지트를 찾아, 그리로 탈출한다.'
쩡!
커다란 소리가 또 한 번 울리는 것과 동시에 입안의 포션을 모조리 삼킨 후 외쳤다.
"브랜틀리!"
"네, 네엑!"
"눈에 보이는 통로 있었어? 아니면 지하 벙커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특이한 거!"
내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면 분명 티를 내놨을 것이다.
'이게 정답이야' 라고 외치는 지점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저, 저기!"
"어디?"
"왼쪽 붉은 벽돌 건물 4층! 창이 이상해요! 문 형태의 나무로 막혀 있어요! 파, 파이프도 이상하게 꺾여 있고요!"
정답이었다.
심장의 마나를 있는 대로 쥐어짜 신체를 강화하고, 곧바로 건물 방향으로 뛰어올랐다.
붉은 벽돌 건물까지는 대략 60미터가량의 거리가 있었다. 빠르게 도약하며 거리를 좁힌다.
쾅!
콰앙―!
내게로 날아들던 창이 뒤에서 계속해서 큰 소리를 내었다. 앞으로....
55미터.
쾅―!
또 한 번 굉음이 울렸으나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30미터.
15미터.
그리고,
'5미터!'
화악―!
쩌어어어엉!
"노버트님! 마, 마법이...."
"…괜, 찮아."
커다란 소리가 터지며 동시에 황금빛 원이 박살났다.
[응집], [방어], [강화] 세 가지 의지를 엮은 마법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마나의 파편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핑 돌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저걸 처맞는 게 더 손해다.
그렇게 생각하며 중간중간 꺾여 있는, 파이프가 돌출된 곳을 딛기 위해 뛰어올랐다.
서늘한 바람이 계속해서 뺨을 스쳐 지나가며 몸이 높이, 더 높이 도약했다.
곧바로 다다른 2층,
두 개의 파이프를 딛고 도달한 3층.
3층의 난간을 타고 몸을 날려 도착한,
'4층!'
콰아아앙―!
내지른 일격에 나무로 된 문이 안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곧바로 건물 안으로 몸을 던져 넣자 브랜틀리와 내 몸이 바닥에 부딪혔다.
이를 악물어 온몸을 강타한 통증을 참아낸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한쪽 다리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동시에, 브랜틀리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윽… 콜록, 네. 좀 부딪, 혀서...."
먼지투성이가 된 브랜틀리를 챙기며 사위를 탐색한다.
한 가지 사실이 뇌리에 박혔다.
'굉음이 멎었다.'
그렇다는 건?
눈에 힘을 주어 초점을 잡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황갈색 바닥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앞을 응시한다.
허름한 테이블과 두 개의 소파. 비어 있는 하나의 책장이 진열된 공간.
그 앞에 로브에 싸여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040화 칼룸 (2)